30화- 예상치 못한(3)
이고 크리사는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홀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은 채 고고히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짓거리냐고 물었습니다.”
그들 사이의 긴장감에 박차를 가한 건 한껏 사나워진 톨린의 목소리였다.
“이쪽 마부가 많이 다친 것 같구나. 급하게 치료를 해야겠는데.”
또 시작이군.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큰 형님 때문에 톨린의 이마엔 핏줄이 하나 돋았다.
“얼른 저택으로 데려가야겠군요. 저희 쪽 기사들이 데려가 줄 겁니다.”
어차피 그 이상의 답변을 받진 못할 거란 판단에 톨린은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몸을 돌렸다.
이고가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알 순 없었다.
톨린이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 중 하나가 이렇게 의도적으로 사고를 냈다면 그건 결코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지금은 소공작을 안전한 곳에 모시는 것이 먼저였다.
“지금 가버리는 건 현명하지 못할 텐데. 넌 이제 조심해야 할 게 많지 않느냐.”
네놈이나 조심하라는 상소리가 목까지 차올랐지만, 톨린은 어쨌든 동생으로서의 품위와 정도를 잃지 않고 조용히 마차로 향했다.
“다음에는 이번처럼 운 좋게 살지 못할 수도 있잖아. 혼자 남은 소공작님은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할 텐데.”
하지만 그의 담담하지만 위협적인 언사에 톨린은 걸음을 멈춰야 했다.
“형이라고 봐 주는데도 정도가 있어. 누굴 건드리는 건지는 알고 그렇게 건방을 떠는 건가?”
이고 크리사는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 톨린의 뒤에 선 잭과 자신을 찢어죽일 기세로 바라보는 톨린을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그렇게 곤두세울 거 없다. 정말로 순수한 걱정이니까.”
그의 차분한 대답에 톨린은 조금 뒤에 떨어져 있는 소공작의 마차를 슬쩍 바라봤다.
여전히 기사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큰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곳에 더 오래 둘 생각도 없었지만.
“네놈이 마부가 없어 직접 마차를 몰아가든, 아니면 기어서 돌아가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다시 한번 소공작님을 빌미로 내 발목을 잡았다간 그냥은 넘어가지 않을 거야.”
위협적으로 말하는 톨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이고는 입을 열었다.
“넌 역시 우리 가문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톨린.”
뜬금없는 말에 톨린의 미간이 더 좁아졌다.
언젠가는 저 말이 상처가 됐던 시절도 있었다.
어떻게든 저 사이에 끼려고 아등바등하든 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 빌어먹을 놈의 가문 같은 건 더 이상 관심도 없어. 지난번 도움을 가지고 피더스 가문이 그쪽에게 어떤 희생 같은 것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래, 그때도 넌 우릴 도왔지.”
그래, 지금은 아주 가슴에 피가 날 정도로 후회하고 있다 이 개자식아. 하는 톨린의 눈빛을 읽지 못할 그가 아니었지만 이고는 그저 찬찬히 톨릴의 얼굴을 뜯어 봤다.
“그러니까 내 말은.”
이고 크리사는 잠시 뜸을 들이다 그들의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톨린은 딴소리를 하는 큰형에게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내 막냇동생은 잔정이 많아 일을 그르친다는 뜻이지.”
“……젠장.”
고저 없는 목소리에 톨린은 작게 욕을 뇌까렸다.
사람의 직감이란 건 기묘해서, 일상의 뒤틀림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만드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잭, 가서 소공작님의 마차를 보호해라.”
톨린은 급히 잭을 향해 명령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색이 되어 돌아온 잭의 대답에 입술을 꾹 물어야 했다.
“소공작님이 보이시질 않습니다……!”
이고 크리사는 눈썹을 조금 움찔했을 뿐 여전히 표정 없이 서 있었다.
뻑!
톨린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그 타격을 그대로 맞은 이고 크리사는 칼을 꺼내려 드는 호위에게 무표정하게 손을 들어 그럴 필요 없다는 의사를 밝혔다.
톨린은 마찬가지로 검을 빼 드는 잭을 말리지 않고 손목을 털었다.
썩 익숙하지 않은 주먹질이었는지 몇 번 손목을 움직인 그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다시 침착하게 잭에게 명령했다.
“근처 골목 구석구석으로 병사들을 보내라. 소공작님의 마차 주변을 호위하던 녀석들은 빼고. 한 놈도 빼놓지 말고 포박해.”
“예.”
급하게 자리를 떠나는 잭에게서 눈을 돌린 톨린은 다시 이고를 노려봤다.
“황실에서 시킨 건가? 또 백작님을 구금하기라도 했나 보지?”
“증거도 없이 사람을 몰아가면 안 되지.”
이고는 살짝 터진 입가를 쓸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침착하구나. 형님 목이라도 베겠다고 설칠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공작님의 옷자락 하나라도 상했다면 얼굴이 아예 갈린 후에 그렇게 될 테니 걱정하지 마.”
톨린의 말에도 이고는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저 덤덤함이 이젠 더 이상 두렵지 않은 톨린은 화를 삭이듯 다시 물었다.
“소공작님을 어떻게 한 거냐.”
“글쎄. 사람을 풀어서 찾는 게 나한테 묻는 것보단 빠를 텐데.”
그 무책임한 대답에 톨린의 눈에서 다시 불길이 일었다.
그는 이를 갈며 말을 씹어 뱉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이 건은 정식으로 항의할 거야. 가문 대 가문으로. 아버지를 지키려다 크리사를 멸문시키고 싶은 게 아니면 제대로 대답해.”
이고는 잠시 뜸을 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크리사 가문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을 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고 크리사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부쩍 말라 보이는 막냇동생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무슨 놀이를 하는 건지, 무슨 명령을 받아서 저렇게 움직이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톨린에게는 더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
톨린은 이고의 의미심장한 말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톨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이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이고 크리사가 보였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소공작을 주시해라.”
그 말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톨린에겐 우선해야 할 그의 주인이 있었다.
***
소공작, 플린 피더스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꼬질한 아이가 걱정되어 달리고 달렸다.
들어올 때는 몰랐는데, 꽤 안쪽으로 들어오기도 했고 아이들을 쫓아오느라 주변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탓에 몇 번 길을 잃기도 해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아이가 갑자기 쓰러지는 것을 보고 아연하여 달려온 소공작이었다.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불안감이 몰려왔다.
톨린과 페일, 그리고 잭이 보고 싶었다.
얼른 도움을 청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하니 길을 찾는 게 더 어려워졌다.
플린은 주저앉아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피더스 가문의 후계자는 언제 어디서든 함부로 눈물을 보이면 안 된다고 배워왔기 때문에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아무도 없을 때는 괜찮지 않을까?
방 안에 있을 땐 몰래 몇 번 운 적도 있는데.
이런 약한 마음이 들려고 할 때였다.
쿵!
오른쪽 모퉁이 끝의 샛길에서 무언가 육중한 것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공작은 조심스레 소리가 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쩌면 도움을 청할 수 있겠다는 순진한 생각에서였다.
“이보게, 거기 누구 있는가? 혹시, 욱!”
소공작의 말은 눈 앞에 갑자기 나타난 장애물에 부닥치며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소공작은 눈을 들어올렸다.
남자……인 것 같았다.
검은색 로브를 감싸고 있어 알아보긴 어려웠지만.
“미안하네. 내가 정신이 없었네.”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서 느껴지는 생소함 앞에서도 소공작은 차분히 말했다.
“…….”
상대는 소공작만큼 예의 바른 인사는 아닌 것 같았지만.
“으윽.”
남자의 뒤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의 눈동자가 자신도 모르게 남자의 뒤쪽으로 향했다.
얼핏 사람이 보인 것 같았지만 끝까지 보진 못했다.
눈 앞의 남자가 완전히 그의 시야를 막았기 때문이었다.
“길을 잃었습니까?”
의아해하는 소공작에게 남자가 말을 걸었다.
보기보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며 아이는 입을 열었다.
“아, 그렇네. 실례가 안 된다면 길을 좀 가르쳐 줄 수 있겠나?”
정중한 물음에 소공작을 빤히 바라보(는 것 같)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았다.
로브가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어 확신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는 손가락을 들어 한눈에 보기에도 고양이나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나 다닐 수 있을 법한 작은 샛길을 가리켰다.
……혹시 로브 자락 때문에 시야가 흐린 건가? 아니면 머리가 조금 불편한 사람인가?
잠시 실례되는 생각을 했지만 소공작은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했다.
“음, 저곳은 내가 온 길이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목적지를 말한 적도 없는 것 같고. 하는 뒷말을 삼킨 소공작은 아직도 팔을 내리지 않고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저쪽이 맞습니다. 가장 안전하고.”
남자는 무덤덤하게, 하지만 강건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시 살펴본다고 개구멍처럼 보이는 길이 멀쩡해지진 않았다.
소공작은 어색하게 걸음을 뒤로 옮겼다.
“다시 생각해보니 여기가 아니라 반대편에서 길을 잃었던 것 같군. 어쨌든 고마웠네.”
남자는 소공작을 가로막거나 붙잡은 건 아니었다.
“꽁지머리를 한 귀족 사내가 저쪽에서 소공작님을 급하게 찾고 있었습니다. 이런 후미진 골목에서 남자가 찾을 법한 귀족 아이는 한 명뿐인 듯한데.”
담담한 목소리가 노련하게 소공작을 불러 세웠을 뿐.
자신도 모르게 제자리에 선 소공작은 남자를 바라봤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와 남자의 로브 자락이 펄럭거렸다.
소공작의 눈에 그 사이로 흩날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들어왔다.
남자는 그게 거슬렸는지 다시 로브 모자를 꾹 당겨썼기 때문에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눈에 익다고 소공작은 생각했다.
아이는 눈을 조금 찡그렸다.
“자네, 혹시 피더스 공작가에서 일하는 사람인가? 눈에 익군?”
얼굴은 안 보이지만.
“…….”
남자는 잠시 대답 없이 서 있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름을 가르쳐 줄 수 있나?”
소공작이 겁 없이 한 발짝 다가가자 남자는 재빨리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이 영 수상쩍어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였다.
“소공작님……!”
예상치 못한 도움을 준 낯선 이의 말대로, 샛길의 건너편에서 플린이 그렇게 듣고 싶어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톨린이었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아니, 틀림없이 광인의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소공작은 의심했던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도와준 것이 고맙기도 하여 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
하지만 골목엔 어느새 소공작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소공작은 그 상황이 이상했지만 시간을 끌다가는 톨린을 놓칠 것만 같아 재빨리 샛길로 뛰어들었다.
소공작이 떠난 자리엔 검은 깃털 하나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31화- 낌새(1)
툭.
남자는 어깨에 닿는 날카로운 검의 감촉에 움찔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미친듯이 사죄의 말을 중얼거리는 남자의 눈을 가린 천은 남자가 흘린 피와 눈물에 젖어 있었다.
이미 너덜해질 대로 너덜해진 남자였지만, 남자의 어깨를 누른 상대는 그건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거칠게 그를 쓰러뜨렸다.
“윽!”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는 남자를 쓰러뜨린 인물에게 손짓했다.
바들바들 떠는 남자의 눈을 가리던 천이 벗겨졌다.
눈을 가리던 장애물이 사라졌는데도 남자는 눈을 뜨지 못했다.
눈 앞의 상대를 보는 순간 정말로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될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어린애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는데 왜 기회가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낭랑한 목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울렸다.
처음으로 고용주의 목소리를 듣게 된 남자였지만 기뻐할 여유는 없었다.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의문 가득한 목소리에 남자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비벼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웃은 목소리의 주인은 다시 남자를 쓰러뜨려 밟고 있는 이에게 손짓했다.
검이 바닥을 긋는 소리에 남자가 발작하듯 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방해가 있었습니다!! 계획과는 달랐습니다.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방해?”
고용주의 흥미 섞인 목소리에 희망을 얻었는지 남자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네, 네! 갑자기 골목에서 그, 그게 나타났습니다.”
뭐가 나타난 거냐는 듯 고용주는 고개를 기울였다.
“곰이요……!!!”
“…….”
수도의 중심에서 야생의 곰이 출현해 소리 없이 사라졌다는 헛소리를 남자는 하고 있었다.
남자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상대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지만,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남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아주 큰 곰이었습니다. 골목길에서 갑자기 나타나선 저를 공격했습크아악!!!”
남자의 마지막 말은 비명소리에 막혀 이어지지 못했다.
남자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들을 필요 없다고 판단한 이들은 남자에게 칼을 박아 넣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활짝 열린 눈꺼풀 사이로 자신의 마지막엔 관심 없다는 듯 딴청을 피우는 이의 물결치듯 빛나는 아름다운 금발이 보였다.
황족인가.
죽음의 고통보다 놀라운 경이와 존경에, 찰나의 순간 남자의 눈에서 모든 괴로움이 사라졌다.
그게 남자의 마지막이었다.
태양 같은 금빛이 채 각막에 새겨지기도 전에 그의 숨이 끊어졌다.
남자의 숨이 멈추는 것을 느낀 이는 남자의 몸에서 칼을 뽑아냈다.
“약쟁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죄송합니다.”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남자를 죽인 이가 고개를 숙였다.
“됐다.”
귀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인 남자의 고용주는 방 안의 어둠 속에서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이에게 눈길을 돌렸다.
“저 쓰레기가 말한 방해에 자네도 들어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크리사 공자?”
짙은 감색 눈동자를 내리깐 크리사 백작가의 장남, 이고 크리사는 조용히 무릎을 굽혔다.
그 순종적인 모습에 금발의 포식자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자네가 이리도 가족 사랑이 지극한 걸 세상 사람들은 알까 몰라.”
***
“소공작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나요? 누군가 끌고 나갔던 건가요? 어떤 자식입니까! 이 톨린이 기필코 쉽게 숨을 거두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소공작을 이리저리 도려보며 톨린이 정신없이 내뱉었다.
“톨린, 난 괜찮아.”
플린은 차마 자신의 발로 나가서 혼자 길을 잃었다가 도움을 받아 나오게 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워 우선 톨린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누가 끌고 간 게 아니라 나 혼자 나갔던 거고.”
거짓말은 못해 얼른 덧붙이긴 했지만.
그에 톨린의 얼굴에 약간의 배신감과 안도, 큰 경악이 서렸지만 소공작이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인지라 금방 표정을 갈무리했다.
한숨을 내쉬는 톨린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소공작은 그가 진정한 듯 보이자 얼른 손을 잡아 끌었다.
“톨린, 잘못한 것도 알고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네. 그래도 지금은 날 따라와야 하네. 골목 안에 아이가 쓰러져 있어. 아무래도 내가 놀라게 해서 기절한 것 같은데 일어나질 않아.”
숨도 쉬지 않고 내뱉는 아이의 상태에 톨린 역시 심상치 않음을 깨달았는지 금방 정신을 차렸다.
“잭, 소공작님이 나오신 골목길을 수색해라. 쓰러진 아이가 있을 거다. 근처의 신전으로 데려간다.”
“곁에 다른 아이가 지키고 있을 거다. 내 옷을 주고 왔으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둘 다 옷이 믿을 수 없게 얇고 무척 말랐어. 서둘러라, 내가 안내하마.”
“소공작님!”
톨린은 그의 말을 듣고 다시 골목길로 뛰어들려는 소공작을 급하게 불러 세웠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잭과 기사들이 아이를 찾을 겁니다.”
톨린의 말에 소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에서 길을 헤매서 시간이 꽤 지났다. 내가 대충이라도 위치를 알아. 함께 가면 분명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네.”
그 단호한 모습에 톨린은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굳이 이고 크리사와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꺼내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굳이 가실 필요 없습니다. 기사들은 발이 충분히 빠릅니다. 안전하게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톨린.”
소공작을 설득시키려는 톨린의 말을 가로막은 플린의 작은 손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난 어리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조금은 알아. 아버지의 아들인 내가 그 아이들을 죽게 놔두면 안 된다는 것도.”
소공작의 말에 톨린의 눈이 커졌다.
아직 티나스 의식도 거치지 않은 어린아이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톨린은 말을 잊지 못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톨린을 보며 소공작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가 걱정되면 당연히 톨린과 잭이 같이 가야지.”
의젓하게 웃으며 자신의 팔을 끄는 소공작의 작은 힘에도 톨린은 맥없이 끌려갔다.
아이의 작은 뒤통수가 무정한 전 상관의 뒤통수와 겹쳐 보여 톨린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의 떠나간 상관 못지않게 미래의 상관 역시 그를 혹사시킬 것을 톨린은 예감했다.
오늘부터 공부는 적당히 하시라고 해야겠군.
톨린은 끌려가며 공작가에 돌아가면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해져 버린 소공작의 학습 시간을 줄이고 놀이 시간을 대폭 늘려야겠다고 마음먹으며 걸음을 옮겼다.
***
결론적으로 골목길에선 소공작의 겉옷을 덮고 있는 아이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소공작이 아이들을 발견했다는 장소를 찾아가는 동안 몇몇 아이들을 마주치긴 했지만 전부 소공작이 말한 것보다는 나이대가 있었다.
“톨린, 작은 아이가 큰 아이를 세야라고 불렀어. 그게 이름일 거야. 신전에서는 태어난 아이들의 이름과 나이를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네.”
곁에서 아이의 말을 듣고 있던 잭은 그런 소공작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이번 마차 사고는 크리사 가문과 피더스 가문 사이에 큰 파장을 가져올 것이 틀림없었다.
하필 소공작님과 함께 나선 일정에서 벌어진 마차 사고, 사고를 낸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크리사 가의 장남, 때 맞춰 소공작님의 마차를 비웠던 호위병들.
오늘 있었던 일은 틀림없이 소공작을 노린 고의적인 사고였다.
저택의 감옥에 구금된 호위병들에게는 과격한 취조를 빙자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공작님을 노린 배후를 밝히기 위해 톨린은 무슨 짓이든 할 테니까.
어린 아이들이라도 그 칼날을 피할 순 없을 터였다.
아이들 덕분에 화를 피한 건지, 아이들이 소공작님을 유인한 것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톨린이 거리의 부랑아들을 소공작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의적으로 대해주지 않을 것을 잭은 알고 있었다.
아마 소공작이 말한 방식보다 거친 방법으로 아이들을 찾아 앉혀 놓고 심문부터 하겠지.
그래도 소공작은 아직 어린 아이였다.
의식조차 맞지 않은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은 어느 정도 지켜줄 필요가 있다고 잭은 생각했고, 이제까지 톨린 역시 이에 수긍해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에게는 당장 신전에 양해를 구하겠다고 할 것이었다.
“그럴 필요 없답니다, 소공작님.”
잭은 예상과 다른 톨린의 대답에 자기도 모르게 톨린을 바라봤다.
소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응?”
“어린 아이들인지라 당장 소공작님의 코트부터 팔려고 할 겁니다. 단순한 아이들이라면 옷가게에 팔겠지만 집이 없는 아이들인 만큼 암거래상에게 팔 확률이 높으니, 사람을 보내 뒤져보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장물을 취급하는 치들을 알아보라고 시키겠습니다.”
잭은 그게 애한테 할 소리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충동이었다.
아고니 피더스 공작님이 세상을 떠난(것으로 알게 된) 후 톨린이 무슨 일을 해도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데 이의가 없던 잭이었기에 참기 매우 어려웠지만 어떻게든 삼켜냈다.
소공작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 그래도 되는 건가? 불법적인 일은 아니고?”
그런 소공작에게 톨린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소공작님, 돈과 권력, 그리고 능력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쌓아 두는 것입니다. 소공작님은 그 아이들이 걱정되시고 빨리 찾았으면 하시죠?”
“그렇네.”
고개를 끄덕이는 소공작에게 톨린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편법은 사용하셔도 됩니다. 역량이 되는 데까지는요.”
톨린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함께 듣고 있던 잭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지금이라도 멱살을 잡아야 하나 고민하는 잭을 신경도 쓰지 않고 톨린은 덧붙였다.
“단, 다른 사람이 다치지 않는 선에서, 통제가능한 상황까지만.”
아직은. 이라는 뒷말이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드는 잭이었다.
톨린이 이번엔 자신의 마차에 소공작을 보내는 것을 보고 있던 잭은, 톨린과 둘이 남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야 말았다.
“……톨린님, 조심스럽지만 소공작님께는 다르게 말씀드렸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잭은 내뱉어 놓고도 톨린이 날카롭게 대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톨린은 가만히 말했다.
“잭, 소공작님은 전대 공작님을 정말 많이 닮으셨어.”
“…….”
톨린이 좀처럼 입에 담지 않던 아고니 피더스 공작의 이야기에 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네나 나나 곧게 뻗었던 사람이 꺾이는 게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직접 봤지.”
피더스 공작의 사형을 함께 목격했던 잭은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오늘 내가 본 소공작님은 공작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분이셨어. 그렇다면 우리가 소공작님이 가끔은 구겨지거나 휘는 방법을 가르쳐드리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나.”
잭은 이번에도 역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고니 피더스가 얼마나 허무하게 사라졌는지는 그 역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작고 의젓한 그의 주인의 끝 역시 그렇길 바랄 리 없었다.
“그리고 아이들을 빨리 찾아야 한다는 건 과장이 아니기도 하고.”
톨린이 미간을 구겼다.
“크리사 백작가의 뒤를 캐는 것보다 급하게 처리해야 돼.”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잭의 표정을 한 번 본 톨린이, 소공작이 헤맸던 골목길의 입구로 시선을 던졌다.
“잭, 오늘 하루 본 가장 어린 아이가 몇 살로 보였나?”
“예? 그야…….”
대답하려던 잭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안 그래도 나이보다 왜소한 거리의 부랑아들 중 소공작보다 작은 아이가 없었다.
“누군가의 커다란 뜻이 뭔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정말 위험할 수도 있겠어.”
톨린의 심각한 표정에 잭은 마른 침을 삼켰다.
***
다음 날, 크리사 백작가의 장남이 수도의 쉼터 사업과 관련되어 뇌물을 바친 것이 발각되어 수감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2화- 낌새(2)
피더스 공작가에 새벽부터 손님이 찾아들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서신 하나 없이 도착한 푸른 머리의 방문자는 곧바로 가주 대리, 톨린을 찾았다.
그 익숙한 무례함에 고용인들은 별말 없이 톨린의 명령대로 손님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몰랐는데 우리 집안은 절차라는 걸 모르는 모양입니다.”
찌푸려진 미간을 문지르며 손님을 맞이하는 톨린에게 크리사 가의 차남, 파알 크리사가 대답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날카로워졌구나.”
바로 얼마 전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말을 하던 무심한 누군가가 떠오르는 파알의 말투에 톨린은 가만히 책상에 손을 올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큰 형님이 황실과 연결되어 있던 걸요.”
“글쎄.”
“그놈의 글쎄.”
다시 시작된 모호한 대답에 울컥한 톨린은 가볍게 비아냥거렸다.
그 모습에 파알은 작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지금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크리사 가문이 황가에 밉보인 거라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 겁니다.”
톨린이 빨개진 눈으로 그런 작은형을 노려봤다.
꼭 그를 향한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황실에 대한 분개이기도 했다.
뇌물수수라니 말도 안 되는 죄명이었다.
귀족 중에 황실에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공물을 바치지 않는 가문이 없었다.
굳이 갖다 바치지 않더라도 황실에서 빼먹는 것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뇌물이라는 단어가 무색하기도 했고.
크리사 가문의 장남이 그런 죄명으로 잡혀갔다는 소식에, 피더스 가문의 몰락이라는 주제로 한 번 뜨거워졌다 식은 귀족 사회가 다시 가십으로 들끓었다.
백작 가문이지만 오랜 기간 청렴의 상징으로 빛나던 크리사 가문이었다.
사람들은 깨끗한 것이 더럽혀지는 것에 열광한다.
톨린은 피더스 공작가의 가주 대리를 맡으며 이를 뼈저리게 느꼈고.
파알은 여전히 무감하게 톨린을 바라봤다.
뭘 보냐는 듯 눈썹을 들어올리는 톨린에 파알이 입을 열었다.
“왜 묻지 않느냐?”
“뭘 말입니까.”
“지난번 마차 사고 말이다. 형님이 한 번 휘젓고 가셨을 텐데.”
그 말에 톨린이 인상을 찡그렸다.
“제가 진짜 사리 분별도 못하는 코찔찔이로 보이십니까? 큰형님이 죽일 의도가 없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날은 순간 눈이 돌아가 한 대 치긴 했지만.
소공작을 찾고 여유를 되찾고 나자 하나둘 이상한 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톨린이었다.
이고가 정말 마음먹고 덤볐다면 수도 중앙에서 직접 일을 벌였을 리가.
“소공작님을 정말 납치하려고 했는지 아닌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요.”
톨린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작은형을 한 번 바라보고 말을 계속했다.
“이렇게 물어보시는 걸 보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요.”
“그래, 넌 겁은 많아도 눈치는 빠른 아이였으니까.”
쓸데없는 어렸을 적 이야기를 꺼내는 파알에 톨린은 손을 휘휘 저었다.
“옛 추억이나 들먹이자고 오신 건 아닐 거 아닙니까. 상황이 어떻습니까? 피더스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애꿎은 사람을 한 대 쳤다는 생각이 반, 황가에서 보이는 기묘한 움직임을 알아보겠다는 마음 반으로 건넨 도움의 손길은 파알의 단호한 대답에 가로막혔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한 표정의 톨린에게 파알은 고요히 말했다.
“크리사 가문은 걱정할 거 없다. 이제 와서 니가 나설 필요 없어.”
파알이 무심한 대답에 톨린은 머리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큰형님과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하긴, 제가 크리사 가문에서 달아난 부외자이긴 하지요.”
딱히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상대를 원망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듯 말하는 톨린에게, 파알 역시 그의 말을 지적하거나 고치지 않았다.
톨린은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뭡니까? 큰형님은 지난번의 마차 사고와 관련있는 겁니까? 사고가 난 마차라면 아직 그대로 보존해 놨으니 내어드릴 수도 있습니다.”
냉정을 되찾은 톨린을 가만히 바라보던 파알은 입을 열었다.
“전해줄 것이 있어서 왔다.”
잠시 코트 가슴팍의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는 편지봉투보다 작은 투박한 종이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톨린은 이를 바로 집어 들지 않고 물었다.
“이게 뭡니까?”
“글쎄.”
“주는 사람이 모르면 대체 누가 안다는 겁니까.”
꾹꾹 누르듯 말하는 톨린에게 파알은 작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마 형님만 아시겠지.”
“큰형님이 저에게 전하라고 하신 겁니까?”
“글쎄.”
놀라서 묻는 톨린을 놀리듯 파알은 다시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다.
“여기서 끌려 나가실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습니까?”
그 반 협박과 같은 말에 파알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릴 적 우리가 놀던 저택 뒤편의 나무를 기억하느냐?”
또 갑자기 시작된 옛 이야기에 톨린의 표정이 와그작 구겨졌다.
“……예, 기억합니다.”
함께 놀던 기억은 아니지만.
삼 형제가 휴식시간이면 자주 들렀던 호수 근처의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가 그려졌다.
유약하고 빈약한 막내 동생은 오르지 못하는 나무를 척척 오르는 형들을 아래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차마 올려 달라고도 못하고 뒤돌았던 어리석은 아이도 함께.
그닥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기 때문에 톨린은 절로 구겨지는 미간을 문질렀다.
“나무 밑동 아래에 묻혀 있었다.”
“그걸로 저한테 남긴 건지는 어떻게 아신다는 겁니까.”
큰형님이 비밀스럽게 묻어뒀던 사적인 물품이면 어쩌려고.
“글.”
“아닙니다. 대답은 필요 없습니다. 용건은 이게 답니까?”
자신의 복장이 터질 것을 염려한 톨린이 또 글쎄라는 열 받는 단어나 내뱉을 그의 말을 막았다.
톨린이 짜증을 낼 힘도 잃은 듯 말하자 파알은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보마.”
“마중하지 않겠습니다.”
차가운 말투에 파알은 고개를 조금 끄덕이곤 그대로 응접실을 나섰다.
톨린은 크기에 비해 묵직한 봉투를 집어들어 한참을 바라봤다.
응접실의 불빛이 스민 봉투 안으로 열쇠 모양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
“…….”
“…….”
안나와 외양만 귀여운 다람쥐 녀석은 7황자의 집무실 앞에서 벌써 몇 분째 대치 중이었다.
“자, 이거 줄 테니까 이리로 오자. 이번엔 깨물면 안 돼.”
안나는 손바닥에 놓인 잣 몇 알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첫 만남에서 보기보다 날카로운 이빨에 손을 물린 안나는 그 이후에도 녀석에게 몇 번이나 손을 물리며 상대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통감했다.
저 작은 것이 언젠가는 큰 일을 낼 것만 같은 촉을 느낀 것도 동시였다.
뽀르르 다니는 것이 퍽 귀여운 모양새였지만, 이미 피를 본 경험이 있는 안나는 속지 않았다.
겁 없는 작은 짐승이지만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아 안나는 녀석을 더욱 경계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안나는 목격하고 만 것이다.
저 작은 녀석이 7황자님의 비밀스러운 집무실에 조심스레 들어가려는 장면을.
낡아빠진 궁인지라 문의 경첩 아래에 생긴 작은 금이 있던 자리엔 어느새 작은 구멍이 생겨 있었다.
문을 아예 바꿀 정도의 것은 아니니 그딴 것에 돈을 쓰지 말라고 호통을 치던 몇 달 전의 세인이 떠올라 안나는 그 뻔뻔한 얼굴을 원망했다.
그래도 아예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분명 저 난폭한 다람쥐가 어떻게 한 것이 틀림없다고 안나는 확신했다.
뭐가 됐든 작은 짐승이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은 막아야 했다.
7황자가 그의 개인 영역에 누군가를 들이는 것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7황자궁에서 일하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안에 감추고 싶은 뭔가를 숨겨 뒀을 수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안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사용인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간 목숨이 달아난다.
안나는 7황자가 전처럼 기분에 따라 사람을 죽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는 사람에게 유한 이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침실에 환복을 도우러 갔던 하인들은, 7황자가 다음에 침실 주변을 서성이다 들키면 손발이 제 몸에 붙어있지 못하게 해주겠다며 자신들을 내쫓았다고 모두 주의하라고 떠들었다.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순 있겠지만 가만두지 않겠다는 그 뜻만큼은 부풀림 없는 그대로일 것이었다.
난폭한 다람쥐가 집무실에 들어가 얌전히 구경이나 하다 나올 것 같지도 않았거니와, 산짐승이 안으로 들어가게 뒀다는 걸 들키면 저 녀석의 목숨은 물론 이 시간대에 일을 하던 고용인들도 화를 면치 못할 것이 자명했다.
다람쥐와 란의 기묘한 관계를 모르는 안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제발. 이리 와. 부엌에서 남은 걸 슬쩍 한 건데 그냥 너 줄게. 주머니에 훨씬 많다? 그것도 다 줄게. 응?”
안나의 간절한 소곤거림에 다람쥐는 코를 벌름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난 몇 분째 그랬듯이 안나를 가만히 바라볼 뿐 좀처럼 걸음을 옮기질 않았다.
“너 사실 그냥 짐승이 아닌 거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인내심이 좋을 리가 없…….”
힘 빠진 안나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안나는 재빨리 일어서 오른쪽 계단으로 귀를 기울였다.
꽤나 묵직한 발걸음 소리였다.
지금은 호위병들이 교대할 시간이라 올 사람이 없을 텐데?
다른 무엇보다 소리에 놀란 다람쥐가 집무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릴 것만 같아 겁이 나, 안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냥 지금이라도 튀어야 하나?
나중에 7황자님이 노하시면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 떼야 하는 건가?
당황한 안나의 판단보다 계단을 올라오는 이의 걸음이 훨씬 빨랐다.
“뭐야? 오늘은 하녀 하나만 지키고 있는 건가?”
붉은 빛이 강하게 도는 금발, 7황자보다 커다란 키와 몸집.
8황자, 셀로스 아바란이었다.
7황자궁의 대부분의 하녀들이 그렇듯 7황자가 아닌 진짜 황족을 보는 건 안나 역시 처음이었다.
거대한 몸집에 사람 같지 않은 수려한 얼굴, 야트막한 금발.
틀림없는 황족이었다.
평범한 사람은 황족을 보면 그 자태에 절로 무릎을 꿇게 된다고 말로만 들어왔던 올해 13살이 된 어린 안나는 존경과 경이보다는 공포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실 티끌만 한 마니스를 가진 셀로스는 다른 황족에 비해 내뿜는 기운이 작았지만, 그저 황족을 만났다는 충격만으로도 안나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파, 파파파파파파팔팔 황자님을 뵙습니다.”
주저앉은 와중에도 겨우 예의를 차린 안나를 셀로스는 벌레 보듯 흘겨본 뒤 걸음을 옮겼다.
그는 손을 크게 들어 세게 집무실 문을 두들기려는 자세를 취했다가 왜인지 움찔 하고는 손을 내려 작게 노크하려는 자세를 취했다.
막아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긴 했으나 안나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입을 열면 그가 정말로 벌레 짓이기듯 자신을 해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안나가 잠시 망각하고 있던 것이 있는데, 이 공간엔 지금 인간보다 겁 없고 난폭한 짐승 한 마리가 함께 있다는 것이었다.
“악!”
짧은 단말마와 함께 셀로스 아바란은 오른쪽 손가락을 쥐고 문에서 물러섰다.
그의 손가락을 깨문 범인은 그 사이 재빨리 남자의 손에서 내려와 숨었다.
하필이면 안나의 앞치마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왔다는 게 문제였지만.
33화- 용기와 미련 사이(1)
셀로스는 노기 가득한 얼굴로 안나에게 명령했다.
“거기 너, 당장 그 쥐새끼를 이리 가져와.”
안나는 당장 앞치마를 벗어 던져서라도 다람쥐를 8황자에게 바쳐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니면 분노한 8황자가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도.
하지만 공포로 머리가 절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지난 기간 동안 먹이를 주며 쌓은 다람쥐와의 정이 강했던 건지 안나는 어느새 생각과는 영 다른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 그그그그그 소소소소송구하지만 7황자 저하께서 무척이나 아끼는 아아아아아아아이인지라…….”
안 그래도 개미만 한 목소리였지만 안쓰러울 정도로 떠는 바람에 드릴 수 없다는 뒷말을 채 잇지도 못했다.
하지만 곧 안나의 떨림은 멎을 수 있었다.
불을 뿜을 듯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8황자의 눈과 마주한 순간 안나는 심장이 굳어버리는 기분과 함께 떨림도, 숨도 멈춰야 했으니까.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한 거냐?”
겨우 하녀 주제에 기껏 다람쥐도 바치지 않겠다는 그녀의 말에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셀로스는 짓씹듯 안나에게 물었지만, 그녀가 대답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뭐라고 했냐고 묻잖아!”
호통소리에 안나는 겨우 멈췄던 숨을 내쉬며 생리적으로 나오는 울음도 함께 토해냈다.
“윽, 흐윽.”
드디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대로 죽는 거구나.
다람쥐 목숨 살리려다가 이렇게 죽는 거구나.
왜 멍청하게 황족의 말을 거슬렀을까?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으면 가족들에게 목숨값이 가긴 할까?
오래 전에 7황자님이 죽인 하인의 고향으로 보내야 할 돈을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내리고 나머지 금액을 챙기던 세인의 탐욕스러운 얼굴이 아른거렸다.
요즘엔 조용히 박혀 있으니 꽤 많은 돈이 고향으로 보내지겠지.
그래도 그건 안심이야.
위압적으로 다가오는 8황자를 바라보며 안나는 조금이라도 공포를 줄여 보기 위해 눈을 꾹 감았다.
“넌 방문 예절이라는 걸 언제쯤 배울 예정이냐?”
그 순간, 조금 거칠어지긴 했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안나는 번쩍 눈을 떴다.
이제는 금발 머리보다 훨씬 더 안정이 되는 검은 머리를 눈에 담으며 아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야! 왜 기절하고 난리야? 어? 내가 때리길 했어, 뭘 했어!”
셀로스 아바란은 힘 없이 쓰러져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는 안나에게 성질을 냈다.
평범한 사람이 자신을 보고 기절하는 게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닌 모양이지.
“젠장, 저딴 건 신경 쓸 게 아니지.”
개념 없는 닭벼슬 놈은 손사레를 치더니 쓰러진 안나에게서 시선을 돌려 곧바로 내게 말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별로 없어 보이는데.”
“무슨 헛소리야.”
“…….”
말없이 저를 보는 내게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녀석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그러고는 내 눈치를 슬쩍 본 셀로스는 내가 여전히 대답이 없자 눈알을 한 번 굴리더니 인상을 팍 쓰곤 말을 이었다.
“형……님?”
마지막 음절은 거의 씹어 뱉듯 내뱉긴 했지만.
아쉽지만 이것도 딱히 내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이렇게 가다간 하루 종일 걸리겠군.
난 팔짱을 풀고 쓰러져 있는 안나를 턱으로 가리켰다.
“니가 기절시킨 하녀, 들고 들어와. 조심히.”
“뭐? 내가 왜? 저기다 두면 나중에 알아서들 치울 텐데.”
셀로스는 정말로 자신이 그래야 할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퍽이나 그러겠다.
일손이 늘 부족한 7황자궁이다.
이 돌바닥에 기절한 어린아이를 눕혀 두면 언제 사람이 올 줄 알고.
“이제부터 언제 어디서든 닭대가리 자식이라고 불리고 싶은 게 아니면 그냥 데리고 들어와.”
납득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데도 녀석은 그간의 경험으로 내가 더 이상 설명을 이어가지 않을 것을 깨달았는지 툴툴거리며 안나에게 다가갔다.
그 덩치 큰 머저리의 뒤통수에서 눈을 뗀 난 방 안으로 몸을 돌렸다.
***
정말 급한 볼일이 있긴 했던 건지, 녀석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비교적 얌전한 손길로 안나를 들고 들어왔다.
어디까지나 비교적 얌전하다는 것이었지, 결코 부드러운 동작은 아니었기에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진 안나의 팔다리는 힘없이 흔들렸다.
저런데도 깨지 못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충격이었던 모양이지.
“거기 눕혀 놔.”
셀로스는 내가 턱으로 가리킨 낡은 소파 위에 안나를 던져 놓으려다, 내 눈치를 다시 한번 살피고는 그래도 사람처럼은 내려놨다.
아이의 숨을 확인하고 눈꺼풀을 뒤집어 보는 날 녀석은 불만스럽게 바라보며 옷을 털어냈다.
“골탕을 먹이려면 차라리 다른 방법을 쓰시죠. 이런 기분 더러운 짓 시키지 말고.”
닭대가리는 아직도 내가 뭐 때문에 녀석에게 안나를 들고 오라고 시킨 것인지 모르는 듯했다.
아직 15살도 안 된 아이를 겁줘서 기절시켜 놓고서는 바닥에 버려두려고 한 것까지, 녀석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상일 테지.
그러다 나중에 후회할 텐데.
한 치 앞을 모르는 녀석에게서 시선을 돌려 안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쨌든 이 아이 덕분에,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셀로스가 텅 빈 방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도 했으니까.
다행히 의식을 잃은 것 외에는 별다른 외상이 없어 보였다.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친 것 같지도 않고.
은근히 운이 좋단 말이지.
까 뒤집었던 눈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그때까지 뻘쭘히 서 있던 녀석에게 한쪽 문을 가리켰다.
“따라와.”
***
집무실 한쪽에 자리한 작은 방은 문이 두꺼운 대신 매우 좁아, 성인 남자 두 명이 앉아있을 만한 공간은 없는 그런 곳이었다.
애초에 의자가 하나밖에 없기도 하고.
“뭐야, 꼭 이런 데서 말해야…… 합니까?”
당연한 듯 하나 있는 의자에 내가 앉자, 녀석이 좁은 방을 둘러보며 불평을 했다.
“니가 기절시킨 아이이니, 안정을 취할 수 있게 그 정도는 배려해 줘야지.”
내 단호한 대답에 녀석의 표정이 와그작 구겨졌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저 혼자 기절한 겁니다.”
그 대답에 내가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겁먹어서 기절하기 직전인 거 모르지 않았잖아.”
“…….”
녀석은 내 말에 동의는 하지만 그게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난 한숨을 마저 쉬고 다시 물었다.
“됐다. 무슨 일로 온 거냐?”
“여기서 이렇게 서서 말합니까?”
“서 있기 싫으면 걸어서 나가면 된다.”
“……빌어먹을.”
선생님에게 혼나는 학생처럼 서서 대화해야 한다는 사실에 치욕스러워하면서도 녀석은 문을 박차고 나가진 않았다.
정말 급한 일이 일어나긴 한 것 같았다.
이 시기에 이 녀석에게 벌어질 특별한 일은 원래 없을 텐데?
아니면 또 원작이 빨라지기라도 한 건가?
“무슨 일이냐니까?”
“…….”
막상 돗자리를 깔아 주자 셀로스는 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내리깔 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찾아온 기세와 맞지 않는 소심한 모습에 내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자, 녀석은 다시 한번 움찔하더니 입을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이러다간 날 새겠군.
“왜 그러냐, 자는데 유령이라도 나와서 무서워진 거냐?”
부러 반응하기 편하도록 비아냥을 들려주자 녀석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장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이냐며 덤벼들 줄 알았던 셀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녀석의 얼굴에는 약간의 수치와 공포가 떠올라 있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뭐야, 진짜였어?
***
그냥 던져본 말이 들어맞자 이쪽도 퍽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유령이 나와서 잠을 못 잔다는 건가?”
다시 한번 확인차 묻는 내 말에 셀로스의 얼굴이 서서히 달아오르는 것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17살에 유령이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다고 찾아오는 건 조금 면 팔릴 만도 하지, 그래.
이 세계에선 두려움과 수치심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짚고 넘어갈 건 확실히 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난 단호히 말했다.
“여기선 못 재워준다.”
“누가 재워 달래!!! ……요.”
셀로스는 내 놀림에 드디어 녀석다운 짜증을 내뱉었다.
“도움을 구할 상대를 잘못 찾았다는 건 알 테고.”
“젠장, 그건 나도 알아요.”
내가 무표정하게 바라보자 8황자 역시 그걸 모르지는 않는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난 혹시, 그, 형, 님도 같은 걸 겪는 건가 해서요.”
내용만 보면 형님을 걱정해마지않는 눈물나는 동생의 심려의 말이었지만 그런 물렁한 의미가 아니라는 걸 녀석도, 나도 알고 있었다.
이곳은 책 속의 세계.
종교관에도 역시 작가가 설정한 설정값들이 있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아바란 제국의 건국까지 올라가봐야 한다.
***
태초의 시에라 아바란은 불안정한 신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대단한 반신은 신비한 힘과 지혜로 혼란하던 대륙을 평정하고 평화를 불러왔다고 한다.
시에라 아바란이 다스리는 100년간 제국은 역사에 다시없을 호황을 누리며 발전했다.
시에라 대제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는, 민간에서는 여러 형태로 나뉘기도 하지만 신전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한결같다.
햇살이 아름다운 낮에 완전한 신이 된 시에라가 가족들 앞에서 햇살을 타고 걸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그렇게 원래의 하늘 세상으로 돌아간 시에라는 완전해진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세 개의 달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선한 자들만이 갈 수 있는 테리툼.
아바란 제국의 사람들은 모두 죽어서 이곳에서 안식을 얻고 싶어한다.
황가에 절대적 순종을 맹세하는 이유 중 하나를 차지한다.
이곳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죽어서 호디에라는 곳에 갈 수밖에 없으니까.
말 그대로 죽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곳이다.
시에라가 테리툼을 만들고 남은 삿된 것들과 온갖 더러운 마물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호디에에서 인간은 죽어도 안식을 찾지 못하고 찢기고 쫓기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이 세 개의 달 중 다른 하나다.
그럼 테리툼에도 호디에에도 가지 않는 이들은 무엇일까?
신전에서는 이들을 도망자라고 칭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유령.
어떤 이유에서든 시에라 아바란이 다스리는 세계로 가지 못한 이들을 다시 보내는 것 역시 신전의 역할이기도 하다.
여기서 저 셀로스 아바란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제국에 남아 시에라의 힘을 물려받은 핏줄들이 지금의 황족이다.
긴 시간 그것을 명목으로 다른 이들을 짓밟으면서도 존경받는 삶을 살아온 이들이고.
원칙대로라면 그런 아바란 가문의 사람들에게 유령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제껏 평범한 유령이 아바란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사례는 찾을 수 없기도 하고.
있었어도 혼자 삭였을지는 알 바 아니지만.
셀로스 아바란은 처음 자신이 유령을 보게 되었을 때 공포에 떨었을 거다.
보아하니 유령 자체도 무서워했던 건 맞는 것 같았지만, 무엇보다 두려운 건 도움을 청할 상대가 아예 없다는 것이었을 테니까.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잘못되면 황족이 어떻게 유령에게 시달리느냐는 말이 나올 것이고, 자칫 잘못했다간 마니스가 티끌만큼 있는 황자라서 유령이 붙게 되었다는 말이 나올까 무서웠을 것이다.
이제껏 열심히 숨겨온 비밀이 드러날 텐데 누구한테 그걸 밝힐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떠올랐겠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 마니스가 티끌만큼도 없는 7황자, 란 아바란이.
34화- 용기와 미련 사이(2)
“미안하지만 이 형님은 유령한테 시달린 적은 없다.”
내 무심한 대답에 말에 셀로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난 그 모습을 보며 턱을 쓸었다.
원작 다크 헤더에서 그런 존재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기엔 등장하지 않는데.
뭐가 됐든 이런 내 머릿속의 생각을 셀로스에게 가르쳐줄 필요는 없었다.
난 별일 아니라는 듯 빠르게 말했다.
“능력이랑은 상관없는 일 같으니 그냥 둬라. 딱히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냥 두라니.”
녀석은 기껏 한다는 충고가 그딴 거냐는 듯 성난 얼굴로 날 째려봤다.
“유령이란 게 대부분 그리운 가족을 찾아오거나 원한을 갚고 싶어서 머무는 것 아니냐. 황족 중에 아직 가까운 이가 죽진 않았으니 그리운 가족일 리는 없고.”
“그건…… 그렇죠.”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에게 그것 보라는 눈짓을 해 주며 등을 뒤로 당겼다.
“원한을 갚으려고 하는 거라면, 네놈의 평소 행실을 돌아봤을 때 좀 당해줘도 된다고 난 생각한다.”
“쉽게 말하지 마시죠. 매일 새벽에 찾아온단 말입니다.”
“애초에 그게 유령은 맞는 거냐? 그냥 일하는 사람을 잘못 본 건 아니고?”
내 심드렁한 반응에 녀석이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문 앞을 서성이다가 복도 끝에서 갑자기 사라져요. 흔적도 없이. 그렇다고 본 사람도 없어. 다들 그 시간엔 아무도 없었대. 그런데 이게 어떻게 사람이야!!”
녀석이 점점 흥분하며 잠을 자지 못해 핏발이 선 눈을 번뜩였다.
새벽에 출현해서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라…….
출현 시기와 위치까지 알았으니 이제 더 녀석을 약 올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난 빙긋이 웃으며 그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유령이라고 해도 앞서 말했듯 할 수 있는 것도 따로 없고 할 필요도 없지. 다행히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할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더 이상 열을 내봤자 내 태도가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을 알았는지 녀석의 기세가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조금은 착한 일이라도 하는 게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자, 그런 의미에서.”
난 닫혀있던 덧문을 활짝 열었다.
소파엔 여전히 기절해 정신을 못 차리고 누워있는 안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저 아이를 의무실에 데려다 줘라. 네 얼굴을 보면 또 경기를 일으킬 테니 깨지 않게 조심해서.”
갑작스러운 제안에 셀로스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뭐?! 요?! 내가 왜 그래야 돼?! 요?!”
왜긴 왜야.
내가 도와주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7황자에 대한 이미지에 금이 가니까 그렇지.
셀로스 아바란이 자신이 저지른 일은 스스로 책임지길 바라는 마음도 조금은 있고.
다시 어색한 존댓말을 한바탕 쏟아 놓으려고 입을 벌리는 녀석의 말을 가로채며 난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좋은 일이라도 해보라고. 유령이 감동을 받아 떠날지도 모르잖아.”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녀석이 날 바라봤다.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다만 난 동시에 뻔뻔했다.
“아니면 가서 하인들한테 옮겨 달라고 부탁하든가. 친절하고 매너있게.”
“내가 왜 부탁을 해요? 그냥 명령하면 되는데! 요!”
흥분한 녀석이 또 엉터리 존대를 구사하기 시작했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그럼 착한 일이 아니잖아.”
내가 인정하지 않을 건데 니가 어쩔 거냐는 뉘앙스를 알아차린 녀석이 이를 뿌득 갈았다.
“깨우지 않게 조용히 가라.”
“젠장, 이딴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안나를 들어 올리는 셀로스의 뒤통수에 대고 말하자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난 빠르게 문을 닫았다.
오늘은 밤이 아주 길어질 예정이었으니까.
***
셀로스 아바란은 란의 생각보다는 정중히, 평균적인 인간보다는 무신경하게 안나를 의무실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깨지 않게 조심하라는 7황자의 경고를 의식한 것도 맞았지만, 자존심을 굽히고 이 빌어먹을 성에 찾아온 자신에 대한 자책 때문에 힘이 조금 빠진 탓이 컸다.
너무 밤을 많이 새서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지.
또 이 재수없는 7황자궁에 찾아온 건 자신에게 남은 두 가지 선택지 중에 가장 조용히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두 가지라고 해 봤자 누구에게 털어놓느냐의 차이일 뿐이었지만.
솔직히 둘 다 때려죽인대도 싫었지만, 7황자에게 오면 적어도 일이 커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7황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개자식이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비밀을 지키고 있는 걸 보면 입은 무거워 보였으니까.
유령에 시달리는 황족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고, 앞으로도 들어볼 일 없는 한심한 상태를 누군가에게 들키면 다들 자신을 의심할 것이었다.
-능력도 없는 한심한 황자.
셀로스는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은 착각에 안나의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지금까지 7황자에게 몰렸던 경멸의 시선이 자신에게 옮겨올지도 몰랐다.
그것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감정인지 셀로스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찮은 녀석과 같은 처지라니.
참을 수 없었다.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7황자라면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다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황족의 이름만 얻은 그 반푼이라면 어쩌면 같은 상황을 겪지 않았을까.
마니스가 부족한 황족이라서 이렇게 유령이 나를 괴롭힐 수 있는 거라면 그 자식도 시달릴 수 있는 거잖아.
나보다 결여된 그 녀석이라면 더 불행할 테니까.
게다가 매번 잘난 듯이 지껄이는 그 뻔뻔한 낯짝의 주인이라면, 어쩌면 같은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행동했을 것만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이 샘솟았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후한 평가였지만 그냥 그랬다.
그 반푼이 놈이라면 어쩐지 유령이 나타나도 콧방귀 한 번 뀌고는 상대를 내쫓을 것만 같았다.
그런 의식의 흐름이 셀로스를 7황자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얻은 것이라고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와 이 짐짝이었다.
셀로스는 팔에 대롱대롱 매달린 하녀를 흘끗 바라봤다.
좀 어리지만 특별할 것 없는 하녀 나부랭이.
그 쥐새끼한테 물렸을 때는 열이 받았고, 이 건방진 것이 그걸 감추기까지 하니까 벌을 주려고 했던 것도 맞았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잖아?
셀로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뭘 그렇게 화내는 거야?
저처럼 능력 없이 빌빌거리는 놈들이라 동질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자존심이 상해 티내진 않았지만, 7황자가 무덤덤함과는 다른 냉랭한 반응을 보였을 때 셀로스는 꽤나 당황했었다.
문을 열고 나온 7황자의 시선이 주저앉아 있는 꼬맹이를 한 번 훑었을 때 전에 없이 차가워지는 걸 보고 왜 가슴이 뜨끈했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8황자 스스로는 결코 인정하지 않겠지만, 평소와는 다른 란의 분위기에 철딱서니 없는 셀로스는 마음 한쪽이 쫄아들어 마치 형에게 혼나는 작은 동생이라도 된 것처럼 내내 긴장된 상태로 7황자와 마주했었다.
꽤 모욕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 짐덩이를 순순히 들고 나온 이유기도 했고.
이 녀석을 더 함부로 대하면 이번에는 7황자가 저를 정말로 닭대가리보다 못한 것을 보듯이 볼 것 같았다.
“이봐, 아무도 없나?”
어느새 의무실에 도착한 8황자는 문을 열어재끼고 주치의를 불렀다.
“예, 무슨 일, 허억!!! 파파파파팔 황자님을……!”
느긋하게 나오던 늙다리 의사는 8황자를 보자마자 안 그래도 할딱할딱 넘어갈 것 같던 숨이 끊어질 듯 말을 더듬어댔다.
또 시작된 파파파파팔황자 타령에 질린 셀로스는 됐다며 손을 대충 휘적거렸다.
의사는 송구해서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가슴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밭았다.
여기서 일하는 놈들은 다 왜 이 모양이야?
적은 돈을 받으면서 7황자의 지랄맞은 성격을 견디고 남은 건 늙거나 돈이 없어 갈 곳은 없고 겁 많은 사람들뿐이라는 걸 모르는 8황자는 인상을 구겼다.
안 그래도 거지같은 곳이 더 싫어졌다.
셀로스는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안나를 겨우 청결만 유지해둔 것 같은 작은 침대에 내려 놓았다.
“기절했으니까 알아서 해라.”
7황자가 시킨 것도 의무실에 데려다 놓는 것까지였으니 이 정도 했으면 됐겠지.
명령을 내린 그는 미련없이 뒤돌아 나갔다.
이제 다시는 이 성에 발길을 주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
“사, 살펴 가십시오, 저하.”
늙은 의사는 굽은 허리가 바닥에 닿을 듯이 인사했지만 8황자는 그 모습을 보지도 않았다.
그가 나가고 발걸음 소리도 그를 따라 완전히 사라질 때쯤이었다.
“허억!!!”
안나가 참았던 숨을 몰아 쉬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심장이 약한 늙은 의사는 오늘로 두 번째 찾아온 기절할 뻔한 위기를 견뎌내야 했다.
“아이구야, 깜짝이야!!”
“헉, 헉! 황자 저하께서는 완전히 가신 거죠?”
“그, 그런 것 같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냐?”
“저, 살아있는 것 맞죠?”
의사는 하얗게 질리긴 했지만 다행히 숨은 붙어있는 안나를 안쓰럽게 바라봤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무서운 황궁에서 어린 것이 기절한 척 들려 와야 할 상황이 좋은 일은 아닐 것이라고 나이든 그는 짐작했다.
평소에도 오래 살려면 쓸데없는 호기심은 버려야 한다는 데서 안나와 의견이 잘 맞던 의사는 별말 없이 아이에게 소금이 조금 섞인 따뜻한 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물컵을 받아든 안나는 아직도 현실감이 들지 않는 방금 전 일을 회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나가 정신을 차린 건 란이 셀로스에게 안나를 깨지 않게 조심히 들고 가라고 명령하던 때쯤이었다.
하지만 눈을 떴다간 무서운 8황자님을 보고 소리를 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꿋꿋이 기절한 척 숨을 죽이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중간에 목덜미를 쥐는 셀로스 황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을 때는 잔기침을 참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다행히 그는 그녀에 대한 노여움은 잊었는지 이곳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자리를 떴고.
안나는 그저 그것에 감사했다.
하마터면 다람쥐 한 마리 구해보겠다고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렇게 아끼고 아껴온 목숨인데 이렇게 허망하게 잃을 순 없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의 황자를 떠올리고 다시 한번 부르르 떨었다.
지금까지는 7황자님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고 믿어왔던 안나였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자신을 벌레 보듯 바라보며 다가오는 셀로스는 정말 자신을 밟아 짓누를 것만 같았으니까.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는 다짐했다.
붉은 머리 털끝만 봐도 꽁무니 빠지게 달아나자고.
불행히도 아이의 이런 견고한 다짐이 어그러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
찌르르-
자정의 고요함을 수식하는 귀뚜라미 소리가 울렸다.
“찍!”
울리다가 멈췄다.
순식간에 통통한 귀뚜라미를 잡아챈 다람쥐는 어디부터 녀석을 먹을지 가늠하듯 이리저리 불쌍한 곤충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거 줄 테니까 그건 그냥 놔줘.”
출발하기 전에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 난 주머니에서 윤기 도는 도토리를 꺼내 녀석에게 건넸다.
다람쥐는 곤충보다는 도토리를 좋아하는지 얼른 버둥거리던 귀뚜라미를 놓아주고 도토리를 볼에 집어넣었다.
“그래, 많이 먹어라. 오늘은 긴 밤이 될 테니까.”
바람이 찼다.
8황자가 거처하는 성은 내가 지내는 곳과 거리가 꽤 된다.
역시 이럴 땐 가장 익숙한 녀석으로 변하는 게 좋지.
난 검은 날개를 펼치며 창 밖으로 날아올랐다.
35화- 용기와 미련 사이(3)
셀로스 아바란은 가벼운 차림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검을 품에 끌어안고 문가에 쭈그려 앉아 열쇠구멍에 눈을 붙이고 있었다.
황자치고는 초라한 모양새였지만 셀로스는 지금 그딴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오늘도였다.
오늘도 거대한 그림자가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저 흐느적거리는 인형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소리도 없는 그것은 곧 침실 방문 앞을 서성이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버리겠지.
아니, 어쩌면 오늘에야말로 안으로 들어올지도.
7황자놈은 어차피 물리적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 가만히 두라고 속 편한 소리나 해댔지만, 그게 됐으면 처음부터 발 뻗고 숙면을 취했을 거다.
다시 떠오르는 열 받는 얼굴에 셀로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미지의 존재가 들어올 듯 말 듯 문 앞을 지키다 가는데 어떻게 편하게 잘 수 있을까.
신전의 사제도 그들을 돌려보낼 땐 기껏해야 시에라 대제에게 기도를 드리는 게 다라고 했다.
도망자들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신실한 기도면 된다고.
개소리다.
눈 앞에서 저것을 보고 기도나 올리라니, 왜 그딴 걸 해결 방법이랍시고 내놓는지 셀로스는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칼로 베든가 몽둥이로 패는 방법을 강구했어야지, 멍청한 사제 놈들.
셀로스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스스로가 신의 종족 자체라고 배운 그가 사제들이 몇 년에 걸쳐 키우는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시늉이라도 해보겠다고 남 모르게 기도를 올려 보기도 했지만 정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유령은 여전히 방 앞을 서성였고 셀로스는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샜다.
셀로스가 죄 없는 사제들을 원망하느라 잠시 한눈을 판 사이, 검은 그림자는 그가 기대 앉아 있는 문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헉!”
셀로스는 숨을 삼켰다.
작은 열쇠 구멍으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으로 상대는 문 앞에 서 있었다.
온통 검은 천으로 감싼 그것의 낡고 흐릿해 보이는 옷자락이 함께 흔들렸다.
식은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눈을 따갑게 했지만 셀로스는 눈 하나 깜짝 할 수 없었다.
제발 그대로 지나가라.
그냥 지나가.
매일 그랬던 것처럼 복도로 사라지라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오래 있는 거야, 젠장!
시에라 아바란은 혈족에게 야박한 신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속으로 욕을 뇌까리던 셀로스의 눈에 검은 그림자의 팔로 보이는 것이 서서히 들어 올려지는 것이 느리게 들어왔으니까.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에 셀로스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부디 잘못 본 것이길 바랐지만, 잔인한 소리가 그의 방 안을 울렸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악몽도 착시도 아닌 현실이었다.
끔찍한 현실.
철그렁.
셀로스는 혹시 몰라 끌어안고 있던 검을 놓치고 주춤주춤 뒤로 기어갔다.
유령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무엇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녀석은 저 문을 열 것이고 자신을 해칠 것이 분명했다.
죽음이 눈 앞까지 다가오자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황족이 죽으면 시에라 아바란의 곁에서 그의 일을 돕게 된다고 배웠다.
하지만 자신처럼 황족 비스무리한 애매한 존재는 가서도 찬밥 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그럴 바에야 나야말로 유령이 되어 그런 헛소리를 퍼뜨린 놈들을 죽이고 다녀야지.
공포로 이성이 마비되는 와중에도 나쁜 생각을 하며 셀로스는 눈을 꾹 감았다.
점점 문고리 소리가 거칠어지고 있었다.
“까악--.”
그 순간이었다.
고요하던 복도에 커다란 까마귀 울음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미친듯이 들리던 금속과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 역시 멈췄다.
대신 희미한 날갯짓 소리와 가벼운 천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8황자는 겨우 눈을 떠 아직 닫혀 있는 문을 바라봤다.
몇 번의 푸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서서히 멎었다.
힘이 풀린 다리를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이미 바깥이 고요해진 후였다.
셀로스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끌고 조용히 문가로 다가갔다.
열쇠 구멍으로 바라본 복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했다.
긴장으로 꽉 쥐고 있던 손을 겨우 편 그는 살며시 잠금을 풀고 복도로 나섰다.
고요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악몽이 지나간 복도엔 상쾌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셀로스는 방금 전의 일이 아직까지 믿기지 않아 조심스레 복도를 둘러봤다.
그리고 문 앞에 놓인 작고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해 허리를 숙였다.
그는 그것을 조심히 집어들었다.
“……?”
그건…… 작고 빛나는 도토리였다.
***
유령 같은 게 정말 존재할까?
예전엔 꽤 무서워했던 것도 같다.
모두가 잠든 새벽쯤이 되면 그것이 찾아올까 두려워 방 안의 불을 켜 놓고 얇은 이불로 온몸을 감싼 채 바들바들 떨어야 했던 기억이 남아있는 걸 보면.
하지만 그 존재의 유무마저 고민하지 않게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장 다음 달 전기세가 걱정되어서라도 난 더 이상 불을 켜고 잠들지 못했고, 다달이 나오는 전기값을 아껴야 했으니까.
환한 방 안에서 이불을 감싸고 덜덜 떠는 것이나 어두운 방 안에서 덜덜 떠는 것이나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그 무엇도 깊은 밤, 날 덮치러 오지는 않았다.
그렇게 난 유령 같은 것보다는 전기세 고지서가 더 무섭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아 갔다.
어른이 되어 직장을 구하고, 바쁜 일상을 보내게 되면서부터는 머릿속에서 아예 지워버릴 정도로 무덤덤해졌고.
뭐, 결론적으로 내가 아는 유령이라고는 다크 헤더 속의 인물들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저건 확실히 책 속의 그들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내가 아는 유령 중엔 저렇게 지저분한 검은 천을 둘둘 감고 다니는 인물은 없었다.
저건 좀 소름 끼치네.
“찍.”
내 옆에 자리잡은 작은 녀석도 내 속마음에 동의하는지 작게 소리를 냈다.
8황자가 펄쩍 뛸 만하군.
난 성의 복도에 작게 나 있는 창문의 창가에 앉아, 8황자의 침실 입구 앞에서 흐느적거리는 사람 형태의 검은 천 덩어리를 보며 생각했다.
녀석이 옳았다.
저건 사람을 해칠 만한 존재가 맞았다.
유령은커녕 사람처럼도 보이지 않는 저것은 완전한 실체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소설 속 묘사되는 유령은 걷기는 고사하고 뭘 집지도 못한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그런데 저놈은 멀쩡히 두 손으로 문고리도 거칠게 흔들고 있지 않은가.
8황자놈은 도대체 뭘 보고 유령이라는 생각을 한 거야?
지금쯤 바닥에 주저앉아 바지라도 적시지 않았을까 의심되는 녀석을 탓하는 건 뒤로 미뤄야 했다.
원작 속의 유령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더 복잡해졌으니까.
저 녀석은 뭐지?
이미 시간이 미묘하게 뒤틀린 소설 속 세계다.
소설에서 언급되지 않은 8황자의 과거 속에 잠들어 있던 트라우마의 유발장치인 걸까?
나보다는 오래 사는 녀석이지만 8황자 역시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좀 더 비중이 큰 인물이라면 삶의 고저를 차지하는 부분뿐만 아니라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몇 가지 더 풀어줬겠지만, 녀석이나 나나 책에서 그런 세세한 언급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원래 일어났어야 하는 일인 걸까, 아니면 이 세계의 비틀린 시간축이 만들어낸 또 다른 사건인 걸까.
솔직히 그렇게 큰 사건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고 왔는데.
“윽.”
그 순간이었다.
고민하는 내 귓가에 가느다란 울음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온 것은.
안에서 어지간히도 떨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낮에 본 하얗게 질린 낯빛이, 셀로스가 얼마나 저것을 무서워하는지 증명할 정도였으니까.
결정을 내린 난 양 날개를 펼쳐 들었다.
저게 뭐가 됐든 정체를 알아둘 필요는 있다는 방향으로.
8황자의 말에 따르면 특정 시간이 되면 달아나는 모양인 데다, 실체를 모르는 무언가가 황실을 돌아다니는 건 내게 유리한 조건은 아니니까.
“까악--”
내 울음소리에 거칠게 문고리를 철컥거리던 무언가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서서히 이쪽을 향해 고개로 보이는 것을 돌렸다.
동시에 옆에 앉아있던 다람쥐가 지금 뭐하자는 거냐는 듯 날 바라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눈으로 욕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기 전에 같이 올 거냐고 물어봤잖아.
***
넝마 괴물은 보기와는 다르게 이성이라는 게 있는 건지, 창가에 겨우 까마귀 한 마리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난 다시 한번 울음소리를 내고는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그리고 괴생물체의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녀석은 이쪽을 향해 팔을 휘적휘적 흔들었다.
느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잡힐 정도도 아닌 속도였다.
난 휘적이는 팔을 피해 약간 고도를 낮춰 날았다.
이렇게 겁 없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건 녀석이 별다른 능력도 없이 휘청거리기만 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녀석의 크기가 한몫했다.
좀 크긴 했지만 인간 같지 않은 크기도 아니었으니까.
이쪽은 곰으로도 변할 수 있는 형편인지라 어렵지 않게 가까이 다가가 녀석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냥 넝마 조각이 아니었다.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의 방향에 맞춰 흔들리는 천 조각 속에는 분명한 뼈대가 있었다.
안에 인간이 있다면 단순히 정신병자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른 게 나오면 몬스터가 되겠지.
얼굴(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걸린 검은 천이 펄럭거렸다.
저걸 어떻게 하면 안이 보일 것도 같은데.
‘좀 더 큰 날개가 필요하겠군.’
마침 오늘은 숲에서 근사한 독수리를 만난 날이었다.
단전에 모인 따뜻한 기운이 곧 날개 끝까지 퍼져 나갔다.
검은 발톱은 더 날카롭고 거대하게, 검은 날개는 더 넓고 힘있게 변했다.
이거 기분 괜찮은데?
잔뜩 힘이 들어간 독수리의 날갯짓은 까마귀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때마침 복도의 창문으로 조금 강한 가을 바람이 들이쳤다.
두 바람이 동시에 얽히며 녀석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넝마 조각이 크게 흔들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해골도, 괴물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얼굴이었지만 누구인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감색 머리칼과 익숙한 이목구비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으니까.
감옥에 있을 이고 크리사가 왜 여기 있는 거지?
***
마차 사건 이후로 한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톨린은 소공작의 외출을 최대한 자제시키는 중이었다.
게다가 공작저를 오가는 소공작의 가정교사 역시 수가 줄어, 소공작의 입장에서는 이유도 모른 채 남아도는 자유시간을 주체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톨린과 페일은 편하게 쉬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 된다고 했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원래부터 노는데 취미가 없던 소공작은 곤란하기만 했다.
가정부나 유모는 시간을 자유롭게 사용하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려고 하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톨린 님이 되도록 다른 걸 해보시길 권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럼 또 소공작은 머뭇거리며 장난감들을 쥐다가 얼마 안 가 내려놓아야 했다.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 봤자 재미가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침실에 혼자 있는 게 편할 정도였다.
바로 지금처럼.
창가의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의 손에는 낡고 작은 나무조각이 들려 있었다.
골목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미처 돌려주지 못한 분실물이었다.
아이들은 아직 찾지 못했다.
페일에게 가끔 물었지만 그저 톨린이 열심히 찾고 있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원래도 바빠서 잠도 못 자는 톨린을 알았기 때문에 도와줄 일이 있냐고 물어도 페일은 대견하다는 얼굴로 충분히 잘하고 계시다고 말할 뿐이었고.
기분이 좋으면서도 답답했다.
이럴 땐 꼭 윤기 나고 까만 친구가 말을 들어주곤 했는데.
소공작은 꽤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는 그의 작은 친구가 그리워 괜히 창가를 서성였다.
“어?”
오늘은 소공작에게 행운의 날임에 틀림없었다.
저 멀리서 거짓말처럼 그의 친구가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까망아!”
반가운 마음에 소공작은 체통도 잃고 달려가 창문을 열어젖혔다.
격한 환대와 오랜만에 듣는 적응 안 되는 이름에 잠시 움찔한 까마귀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소공작은 신이 난 상태였다.
“그동안 왜 이렇게 안 왔어? 너 주려고 모아 놓은 호두가 많이 쌓였어.”
간만에 활기를 되찾은 소공작은 답지 않게 부산을 떨며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챙겨 왔다.
상자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쌓여 있는 호두를 보며 타칭 까망이는 소공작 모르게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소공작은 모르겠지만 그의 친구는 견과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36화- 개입
“지난번에 상단에 다녀오는 길엔 마차 사고가 났었어. 톨린 말로는 어떤 정신 빠진 인간이 실수로 들이박았다는데.”
톨린이 기사들의 입 단속을 단단히 시킨 건지, 소공작은 지난 마차 사고가 정말 단순한 접촉사고였던 것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세야라는 아이가 쓰러지는 바람에 내가 얼른 톨린을 부르러 갔거든. 근데 다시 왔더니 둘 다 사라져 있었어. 골목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던 것 같아.”
소공작은 또박또박하고 나름 정연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았다.
중간중간 나에게 주겠다고 늘어놓은 호두를 주워 먹기도 하면서.
다른 동물이랑 이렇게 음식을 나눠 먹으면 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걸 언젠가는 다른 어른이 가르쳐줘야 할 텐데.
“아, 그리고 골목길에서 친절한 아저씨도 만났어. 길을 안내해 주더라고.”
순식간에 친절한 아저씨가 되었다.
10년을 회춘한 후로 아저씨 소리는 오랜만에 듣는지라, 미묘한 심경에 잠시 호두 먹는 척하는 걸 멈추고 녀석을 바라봤다.
아이는 내가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 같아 신이 난 모양이었다.
“처음엔 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음엔 무조건 사람을 의심하지 말아야지.”
그래 보이더라.
개구멍 같은 골목길을 가리킬 때 녀석의 얼굴에 드러났던 혼란과 불신이 떠올랐다.
그래도 이 나이에 낯선 사람은 의심하고 보는 건 현명한 태도였기에, 난 지금을 고수하라는 의미로 약하게 두 번 아이의 팔을 쪼았다.
간지럽다는 듯 웃은 소공작은 드디어 내가 모르는 얘기를 꺼냈다.
“톨린 말로는 아이들을 찾으려면 보석상이나 암거래상에서 장물을 뒤져보는 게 빠를 거라고 했어. 거기부터 찾아볼 거라고. 그런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네.”
그놈은 애한테 뭔 소리를 한 거야?
톨린의 은밀한 행보와 상황을 알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어린 꼬맹이한테 별 소리를 다한 톨린의 뒤통수를 조금 쪼아 줘야 하는 건가 고민이 됐다.
그런 날 두고 아이는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있잖아……, 사실 톨린이 그렇게 열심히 날 찾으러 와줘서 되게 좋았어. 그동안 톨린이랑 잘 못 만났었는데. 가끔은 배운 대로 행동하지 않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소공작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주인공이 올 때까진 자제해달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꼬맹이가 저렇게 웃으니 그저 당분간은 감시를 소홀하지 않아야겠다고 혼자 생각할 수밖에.
녀석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것처럼 된) 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소공작은 계속해서 그간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금은 좀 조용히 해야지. 톨린의 형님이 찾아오셨었다는데 그날 이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이거든.”
톨린의 첫째 형님은 감옥에 간 걸로 되어 있으니 찾아온 건 둘째 형님이었겠지.
난 검은 눈동자를 빛냈다.
이 부분에서 원작과의 간극이 발생했을 것이다.
원래 톨린의 첫째 형님이 찾아오는 건 원작이 시작되고 훨씬 후였으니까.
그러니까, 소공작은 죽고 피더스 공작마저 사라진 후에.
완전히 망가져 독기만 남은 톨린에게 그는 아버지를 도와달라고 찾아온다.
원작에서 톨린은 그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한다.
그렇게 크리사 가문은 톨린에게서 완전히 뒤돌아서게 되고.
소공작을 살리고, 피더스 공작을 원작보다 조금 이르게 주인공에게 날려보내면서 생길 변화들을 각오하긴 했지만 이고 크리사는 생각지 못한 변수였다.
그가 톨린을 찾아갈 수는 있겠다고 예상했었다.
이후에 원작과 달라진 톨린의 행동이나 이고 크리사의 구금도 허용범위 내였는데…….
그런데 왜, 2황자에게 충성을 맹세했어야 할 이고 크리사가 1황녀의 손에 떨어져서 인형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
1황녀, 멘틸 아바란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한다.
오랜 기간 서서히 세뇌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 속에 자라난 잡초 같은 지배와 감응해 살아간다.
하지만 단기간에 여러 세뇌를 받은 사람은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종이인형처럼 몸을 가누지 못한다.
지난 밤, 이고 크리사가 그랬듯이.
이고 크리사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얼굴이 드러나자마자 마치 전원이 나간 로봇처럼 모든 동작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그때까지 보여줬던 흐느적거리는 몸짓과는 비교할 수 없게 빠른 몸놀림으로 복도 끝으로 달려나갔다.
“찍!”
그 기괴한 모습에 몸을 숨기고 있던 다람쥐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지만, 이고 크리사를 쫓아 빠르게 방향을 전환하느라 따로 챙겨주지는 못했다.
8황자는 복도 끝에 다다르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고 했었다.
복도 끝에 무슨 장치가 있는 건진 모르지만 적어도 상대가 어떻게 사라지는 건지는 확인하기 위해 날갯짓에 힘을 실었다.
안타깝게도 이고 크리사가 톨린과 닮은 것은 얼굴뿐인 모양이었다.
비교적 호리호리해서 날아오던 돌도 못 피하던 그와는 다르게 인간 같지 않은 속도로 달려갈 수 있던 걸 보면.
날개를 열심히 퍼덕일 때마다 둘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벽과 내 사이의 거리 역시 좁아지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박을 것 같은데?
본능적으로 속도를 줄인 나와 달리 이고 크리사는 의식이 없어서인지 벽에 박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8황자의 말대로 그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진 복도에는 새벽 공기를 타고 내려온 달빛만이 남아 있었다.
***
이고 크리사의 재판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점에서 왜 그를 다른 데도 아닌 8황자궁에 그렇게 보낸 거지?
많이 짓궂긴 하지만 그냥 겁이나 주고 놀리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할 만큼 1황녀는 멍청하진 않다.
왜 갑자기 엑스트라의 인생에 그녀가 개입하기 시작한 걸까.
아니면 생략된 원작의 조각인 걸까.
“까망아?”
호두도 쪼지 않은 채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소공작이 조심스레 내 날개를 건드렸다.
-별거 아니다.
“까악.”
“넌 가끔 정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아. 비둘기들은 말을 걸어도 도망가기 바쁘던데.”
말을 걸어 본 거냐.
보통의 비둘기는 가까이 다가가도 친구가 되기는커녕 병만 걸릴 수 있으니 이상한 짓 하지 말라는 말은 톨린이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다가도, 어린애한테 암거래상 이야기나 꺼내는 인간을 과연 믿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이 서로 맞부딪쳤다.
“오늘은 나 먼저 가 봐야겠다. 놀이 시간에 아예 놀지 않으면 유모가 걱정하거든.”
소공작은 다시 한번 내 날개를 쓰다듬고는 급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음에 또 와야 해.”
녀석은 친절하게도 창문을 조금 열어 두고 방을 나섰다.
평소라면 망설임없이 창 밖을 나섰겠지만 오늘은 좀 다른 길을 걸어볼까 했다.
집 안을 돌아다녀도 눈에 안 띌 만한 동물이 뭐가 있을까.
***
톨린은 굳은 얼굴로 페일이 보고하는 내용을 듣고 있었다.
“전부 죽었다고?”
“……네.”
페일은 무섭게 굳는 톨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두 갑작스러운 발작을 일으키더니 숨을 거뒀습니다. 어떻게 해 볼 겨를이 없었다고 합니다.”
“독살인가?”
“아니요, 어떤 독도 아닙니다. 그저 호흡곤란을 호소하더니 그대로 죽어버렸습니다.”
톨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확실해?”
“예, 피도 깨끗했고, 자살의 징후도 없었다고 합니다.”
침통하게 말하는 페일을 앞에 두고 톨린은 생각에 잠겼다.
소공작님의 마차를 호위하던 이들이었다.
사고 당시 소공작이 마차를 빠져나가는 걸 눈치채지 못한 건 이들이 마차의 호위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소공작이 그 덕분에 목숨을 구한 거라면 누군가가 마차를 덮칠 계획에 함께했던 것이고, 마차 밖으로 유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소공작을 빼돌리는 계획에 가담했을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살려둘 생각은 없었지만, 배후를 밝히기도 전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일 생각도 없었다.
애당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사건이었다.
잡혀 들어온 기사들은 변변한 반항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도망치려는 시도 한 번 없이 순순히 잡혀 들어오는 걸 보고, 믿을 만한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경계하고 있던 톨린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저택 내부에서, 그것도 한꺼번에 모두 죽다니.
독살이나 자결이 아닌 호흡곤란으로 죽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잭은 상심이 크겠군.”
“별말은 없었지만 상심이 큰 것 같았습니다. 개중엔 잭의 밑에서 오랫동안 함께한 이들도 있던 모양이라…….”
오늘 톨린의 명령을 받아 은밀하게 공작가를 나서던 그의 까칠한 얼굴이 떠올라 페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톨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잡힌 기사들은 계급의 고하에 관계없이 신입부터 고참병까지 다양했던 것이다.
새로 기사 서임을 끝낸 놈들이야 그렇다 치고, 더 큰 위험 앞에서도 피더스 가문을 섬겼던 이들까지 갑자기 왜?
애초에 처음부터 소공작을 노렸던 건가?
다른 모든 기회를 놓치고 왜 하필 지금?
피더스 공작가가 흔들리던 순간에도 함께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던 동료가 의심할 여지 없는 배신에 가담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한 잭은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표현하지 못할 씁쓸함을 안고 갈 기사단장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당장 그를 배려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머리도 식힐 겸 밖으로 내보내긴 했지만 다른 의도가 없던 것도 아니라 톨린은 입맛이 썼다.
“기사단 전원의 뒤를 조사해라. 수상한 움직임은 없었는지, 누구를 만나진 않았는지 알아봐. ……잭을 포함해서.”
“……네.”
이런 상황에서 공작가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페일 역시 이를 이해하는지라 별다른 말 없이 톨린의 집무실을 나섰다.
페일이 나간 문이 닫히자마자 톨린은 한숨을 토하며 머리를 감쌌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감히 피더스 공작가의 내부에 사람을 심어 이런 짓까지 벌일 수 있는 이는 하나였다.
황가.
하지만 왜?
-소공작을 주시해라.
주의를 주듯 말하던 무뚝뚝한 이고 크리사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정말 소공작님이 목적인 건가?
이고 크리사는 그걸 막아주려 한 거고?
그럴 이유가 뭐라고?
만약 정말로 소공작님이 그들의 목표였다면,
공작님만 아니라 소공작님에게도 손을 뻗을 생각인 거라면.
무언가 톨린의 안에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
저쪽은 원작과 썩 다르지 않은 수순이군.
박쥐로 변한 덕분에 어렵지 않게 지붕과 집무실의 천장 사이에 자리를 잡은 난, 들려오는 톨린과 페일의 대화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천장의 작은 틈으로 들려오는 은밀한 대화들의 내용은 내게 확신을 줬다.
원작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어쨌든 톨린 역시 이 사고가 황실의 누군가가 벌인 일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거고, 남은 소공작과 공작가를 지키기 위해 칼을 들 것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소설 속에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원작의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문제는 계속되는 다른 인물의 개입이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호흡곤란으로 인한 죽음은 원작에서 1황녀가 즐겨 쓰는 암살 방식이다
37화- 판자촌의 미친 개
“후…….”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을 내쉰 잭은 그에 맞춰 둔해진 다리를 억지로 옮겼다.
톨린의 명령을 받아 수도의 부랑아들이 모여 사는 단지로 조사를 나온 그였다.
동료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변절자를 향한 배신감.
동시에 드는 양가감정이 잭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잡힌 이들 중엔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며 등을 맡기고 싸우던 전우들도 있었다.
그 모든 시간들이 그를 슬프게 했지만, 동시에 그것들이 전부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면 치가 떨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를 당황하게 한 것은 감옥에 갇혔던 이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은 순순히 스스로가 소공작의 마차를 호위하던 진형을 풀고 자리를 이탈했다고 인정했다.
5명 전원.
그들은 평온한 얼굴로 스스로가 그런 일을 했음을 시인했다.
배후에 대해서 물었을 때 역시 아는 것이 없다고 했고.
어떤 압박에도 마치 정해진 답을 늘어놓는 것처럼 입을 모았다.
결국은 고문을 시작해야 한다는 톨린의 단호한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5명은 한날 한시에 같은 증세로 세상을 떠났다.
잭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고.
또 가슴 속에 차오르는 답답함에 잭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렇게 임무를 받아 나온 게 잘된 일인 것 같기도 했다.
다른 데 집중하며 잠시 객관적으로 생각을 정리할 기회가 되겠지.
잭은 다시 술렁이려는 마음을 털어내며 곧 쓰러질 듯한 판자집으로 다가갔다.
길가에 자리를 잡은 듯 보이던 거지에게 물었을 때 그가 어린아이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해준 파란 지붕의 집이었다.
칠이 거의 다 벗겨져 파란색이라고는 손 두 뼘만큼 남긴 했지만 어쨌든.
잭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똑똑.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번 몇 번이나 기워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문을 부수지 않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다시 문을 두들겼다.
똑똑똑.
“……나, ……일지도 몰라.”
어른의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운 희미한 인기척과 작은 목소리가 문 너머로 타고 넘어왔다.
잭은 재차 문을 두들기려 들어올렸던 손을 내리고 문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댔다.
다시 정적이 찾아왔지만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작은 아이가 있다는 것을.
보통 잭과 같은 나잇대의 남성이라면 어린아이들을 어려워할 수 있었지만, 다행히 그는 최근까지 소공작의 주변에서 아이를 호위하며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었다.
어렵지 않게 아이들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며 잭은 아이들이 겁먹지 않게 하기 위해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이 낡고 위험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거야.”
잭의 차분한 말에도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잭은 아직 겁을 먹었나 싶어 두 손을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도와주러 온 어른이니 겁먹지 않아도 돼.”
여기서 잭이 간과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그의 외양이었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검은 로브를 걸치고 온 커다란 남자의 위압은 겨우 손 좀 들어올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방금 매일 마주하는 어린아이라고 치부한 소공작님은 피더스 가의 소공작이기 때문에 그를 봐도 겁을 먹거나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지 못했다.
두 번째는…….
“이 무뢰한아!!! 멍청이!!! 도둑놈!!!”
이 주변에는 무뢰한보다 무뢰한 같은 아이가 산다는 것이었다.
“아니, 진정해라!”
잭은 열심히 날아오는 작지 않은 크기의 돌을 피하며 대답을 하려 노력했지만, 불시의 공격이 생각보다 매서워 당황하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기다려, 갑자기 왜 그러는 거냐. 괴롭히려고 온 게 아니야.”
완전히 냉정을 되찾은 잭이 침착하게 멀리서 짱돌을 쥐고 흔드는 아이에게 말했다.
바짝 마른 팔을 어떻게 저렇게 힘차게 흔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나도 안 들리거든! 여기까지 와서 지껄여 보든가!!”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거친 언사에 잭은 인상을 찌푸렸다.
고개를 저으며 아이를 무시하고 다시 문으로 몸을 돌린 잭의 뒤통수로 이번엔 정말 무시할 수 없는 크기의 돌이 날아왔다.
이번엔 맞았으면 정말 죽었겠는데?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친 돌의 크기를 보며 잭은 경악했다.
저렇게 마른 주제에 이런 짱돌을 던질 힘이 어디서 솟은 거야.
당황하는 잭을 향해 아이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늙다리는 못 잡겠지?! 판자촌에 구걸이나 하러 오는 거렁뱅이놈아!!!”
안 그래도 나이를 신경 쓰고 있던 그의 귀에 박힌 늙다리 소리에 잭은 울컥해서 발을 옮겼다.
저 녀석은 뭔데 저렇게 미친 듯이 덤비는 거야?
상대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미친개, 통칭 미친개 세야로 불린다.
한동안 고뇌로 꽉 막혔던 잭의 정신 머리를 비워주고 다른 종류의 갑갑함을 채워줄 꼬마였다.
***
“휴.”
잭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힘든 추격이었지.
정말 아슬아슬했어.
……거의 잡을 뻔했는데.
잭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막다른 골목길에 서 있는 자신에게 자조해 웃었다.
꼬맹이 하나 못 잡다니, 어디 가서 피더스 가문의 기사단장이라고 이름도 못 댈 수치였다.
아이가 날쌔긴 했지만 못 잡을 속도는 아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잡을 듯하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다시 잡을 듯하면 눈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몇 번 반복되었다.
처음엔 그냥 잡아서 주의를 주고, 이 구역에 사는 듯한 아이와 친해져 이 주변 지리를 좀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추적이 계속되기도 했고, 아이가 예상보다 잘 달리기도 해서인지 자기도 모르게 진지하게 아이를 쫓고 말았다.
물론 중간중간 녀석이 자신을 향해 내뱉는 ‘늙다리’나 ‘노친네’ 혹은 ‘털보 자식’ 같은 단어에 약이 조금 올랐던 것도 맞긴 했지만.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골목의 막다른 곳이었고, 아이는 사라져 있었다.
잭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의 중앙에 자리하던 태양이 어느새 기울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달린 거야?
반나절 가까이 달리는 동안 거추장스러운 로브는 벗어서 등허리에 묶은 지 오래였고, 온몸에서 나온 땀이 식으며 달라붙은 옷은 소금기까지 베어 있었다.
돌아가면 톨린에게 보고할 것이 걱정이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돌아왔습니다, 톨린 님.
톨린 님의 예상대로였어요.
아주 어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린아이가 남아있다는 곳으로 가 봤는데요, 거기서 웬 꼬맹이랑 술래잡기를 하다가 놓쳐버리고 밤이 되어 돌아왔답니다.
……이번에야말로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공작가를 떠나게 될지도 몰랐다.
전부 그 막돼먹은 꼬맹이 덕분이었다.
잭은 다음에 그 괘씸한 녀석을 잡으면 꿀밤을 잔뜩 먹이겠다고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
책에 빙의한 뒤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여러 등장인물들을 만났고 책 속의 장면들을 눈 앞에서 보는 귀중한 경험도 했다.
지금까지 별의별 것들을 봐 왔지만 여기서 나가도 저 꼴은 기억에 길이길이 남지 않을까.
7황자궁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셀로스 아바란이라니.
공작가에서 돌아오는 길에 눈에 들어온 빨간 존재감에 방향을 틀어 성의 입구에 있는 나무에 자리를 잡은 난, 오만상을 찌푸리고 성 문 앞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는 8황자놈을 바라봤다.
녀석은 답지 않게 내 집무실 창문을 바라봤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머리를 감싸 쥐며 돌아왔다.
바쁘기도 하군.
다신 찾아오지 않을 기세로 돌아섰던 녀석이 저렇게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어젯밤의 소동에서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었다.
달리 말할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다른 형제자매들한테는 언제 자신의 비밀을 들킬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만으로도 바쁘고, 그나마 도와줄 수 있을 만한 사람한테 가려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할 것이었다.
어쨌든 8황자궁에는 나도 볼일이 있던지라 난 녀석을 맞이하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
“어제 내 성에 왔습니까?”
지난 만남보다는 익숙해졌는지 더듬지 않으며 존댓말을 구사하는 8황자는 퍽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 나이에 벌써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라면 형님이 좀 슬플 것 같구나. 어제 내 성에 온 건 너였을 텐데.”
“…….”
내 평온한 대답에 녀석이 눈을 좁히며 날 바라봤다.
하지만 곧 무표정한 내 얼굴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거 확인하러 온 거냐? 어젯밤 꿈 속엔 유령이 아니라 형님이라도 나왔나 보지?”
“그럴 리가 없잖아!! 요!”
“그럼 뭐냐? 그렇게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울컥해서 날 째려보던 녀석은 내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슴 안쪽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놓았다.
제법 소중하게 꺼내는 모양새가 진지해 조금 우스웠지만, 여기서 비웃었다가는 녀석이 입을 완전히 다물 것 같아 괜히 성질을 긁진 않았다.
“어제도 그 유령이 찾아왔는데, 물리적 위해는 못 가할 거라는 ‘누군가’의 말과는 다르게 문을 열고 들어오려고 했습니다.”
녀석은 그 ‘누군가’를 강조하며 날 한 번 째려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까마귀 소리와 함께 녀석이 사라졌고요. 근데 남은 자리에…….”
셀로스가 주섬주섬 주머니에 든 것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이게 있었습니다.”
그건…… 작고 빛나는 도토리였다.
***
그 갈색의 열매를 사이에 두고 8황자와 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찍?”
그걸 깬 건 어느새 다가와서는 도토리를 발견하고 탁상 위로 고개를 빼꼼 내민, 아마도 저 당황스러운 열매의 원래 주인이었다.
정말 도움되는군.
어젯밤에 많이 놀란 것 같더니, 소리를 지르느라 볼주머니에 저장해 놨던 도토리 하나를 토해내고 온 모양이었다.
이고 크리사를 쫓느라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지만.
어쨌든 이걸 가지고 녀석이 뭔가를 알 것 같진 않았기에 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도토리구나?”
녀석은 스스로 생각해도 조심스레 꺼내 놓은 것이 작은 도토리라는 사실이 퍽 수치스러웠는지 내 물음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을에 도토리가 그렇게 보기 드문 것은 아닐 텐데.”
“마침 형……니이임 방 앞에서 다람쥐를 발견하기도 했었고,”
녀석이 도토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다람쥐를 경계하며 말을 이었다.
“황궁 내에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은 이곳밖에 없고요.”
녀석은 내 집무실 창 밖으로 보이는 오래된 상수리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맞는 말이었다.
조경 따위는 신경 쓸 여력이 없는 7황자궁에서는 다른 곳처럼 제국 각지에서 나는 아름다운 나무를 가져와 꾸미지 않는다.
늙은 정원사 한 명이 겨우 지저분하지 않을 정도로 정리나 하는 정도지.
황실의 어느 곳에서도 흔해빠진 상수리나무 따위를 키우진 않는다.
아마 여기 있는 것도 키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자란 걸 귀찮아서 둔 것이 아닐까.
그걸 여러 사람에게 물어물어 여기까지 찾아왔을 8황자는 여전히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 참 타당한 생각이구나.”
녀석은 내 대답에 정말이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런데 상수리나무는 여기밖에 없어도 도토리는 황궁의 모든 창고에 있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거냐?”
온갖 귀한 것들이 진상되는 황실 창고에 초라한 도토리를 많이 쌓아 두진 않을 테니 상수리나무가 바로 옆에 있는 이곳만큼 많진 않겠지만.
8황자는 표정을 팍 구겼다.
“알고 있습니다.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만 보려고 온 겁니다.”
하긴, 그렇기도 하겠지.
나한테 상담한 바로 그날 밤에 안 그래도 두려워하던 존재가 사실 자신을 건드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뭐라도 붙잡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 하잘 것 없는 도토리마저도 고이고이 간직해서 온 거고.
“이놈 좀 어떻게 해봐요.”
금방이라도 도토리에 달려들 것만 같은 다람쥐가 못마땅했는지 녀석이 급하게 열매를 도로 주머니에 싸 넣었다.
다람쥐와 도토리라…….
“그러고 보니 떠오르는 게 있다.”
셀로스의 눈에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38화- 속임수가 맞는(1)
셀로스의 눈이 약간의 의심과 큰 희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동쪽의 어느 나라에서는 유령을 쫓을 때 동물을 쓴다고 하더구나.”
“동쪽의 나라라면…….”
8황자는 잠시 기억을 떠올리듯 미간을 찌푸리다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가 말하는 동쪽의 나라가 어딜 말하는 지 깨달았겠지.
녀석이 첫 만남에서 모욕했던 란 아바란의 어머니가 온 나라라는 걸.
8황자도 그 날의 패악을 떠올렸는지 내 눈치를 슬쩍 살폈다.
불편해하는 녀석을 편하게 해줄 생각은 없었기에 난 그것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중 다람쥐는 특히 작고 민첩해, 살아있지 않은 것을 겁내지 않는다고 들었다.”
“정말?! 이요?”
8황자가 급하게 물었다.
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동쪽의 나라에서 유령을 어떻게 해치우는지 내가 알 게 뭔가.
애초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8황자놈은 1황녀처럼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사 조사해 보고 그런 건 없었다고 나중에 따진다고 해도 어렸을 적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잡아떼면 될 일이었다.
다시 한번 어디 계신지 모를 란 아바란의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과의 인사를 올렸다.
아무리 셀로스라도 뜬금없이 다람쥐가 유령을 쫓는다는 내 말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운지, 녀석이 얼굴을 찡그리며 책상 위의 다람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말 저런 게 유령을 쫓는다고요?”
“그래, 동쪽의 나라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그게 아니면 내가 뭐하러 이런 곳에서 다람쥐를 키우겠어.”
“하긴…….”
내 말에 조금은 납득이 갔는지 녀석은 표정을 풀었다.
아직 완전히 의심의 빛을 지우진 못했지만.
그러다 갑자기 떠올랐는지 눈이 세모꼴로 변한 8황자가 나에게 따졌다.
“아니, 그럼 어제는 왜 안 말해줬어?! 요?!”
“방 문까지 열고 들어오는 놈인 줄은 몰랐지.”
내 뻔뻔한 대답에 셀로스의 눈꼬리가 다시 하늘로 치솟았지만 난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부터 저 녀석을 보내주도록 하마. 유령을 쫓아줄 수 있겠지. 어쩌면 어젯밤 널 도와준 게 이 녀석일지도 모르지 않느냐.”
“찍?! 찍찍!”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건지 다람쥐 녀석이 놀라 날뛰기 시작했지만, 그 모습이 8황자의 눈에는 다르게 비친 모양이었다.
“확실히 용맹해 보이긴 하네요.”
“그렇지?”
“적어도 까마귀랑 관련이 있을 줄 알았는데.”
쓸데없는 구석에선 기억력이 좋은 녀석이었다.
“그래서, 필요한 거냐, 아니냐? 필요 없다면 이만 가보면 된다.”
내가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하자 8황자가 급하게 날 붙잡았다.
“아니, 필요해요. 일단 오늘 밤에 아무도 모르게 좀 보내주시죠.”
한 번 물린 경험이 있어서인지 녀석은 꺼림칙하다는 시선을 던지며 나에게 부탁했다.
“감사 인사는?”
내 요구에 녀석이 날 다시 부라려봤지만 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녀석이 눈을 꾹 감고 말을 씹어 뱉었다.
“감사……합니이다아.”
“그리고?”
“형……니이임.”
“그래, 형니이임이 오늘 밤에 사람을 보내마.”
내 대답에 녀석은 벌떡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그 치기어린 뒷모습에 난 비죽이 웃었다.
“찍! 뀍!”
화가 단단히 났는지 날뛰는 녀석이 남아있었지만.
“걱정 마라. 널 보내진 않아.”
여기 다람쥐로 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으니까.
***
징은 발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갔다.
촛불에 일렁이는 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장로나 라텔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용히 지내는 그였지만, 지난날의 해괴한 경험은 도저히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로가 책을 건넸을 때, 징은 분명 압박감을 느꼈다.
마치 생명줄이 틀어잡힌 것만 같은 공포감과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소리,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은 죄책감.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감각들이었다.
처음 수도의 거리에서 너덜너덜해진 아이의 시체를 마주했을 때, 그때도 징은 한동안 이런 불편함 감각에 시달려야 했으니까.
문제는, 도대체 왜 고작 종이책을 눈 앞에 두고 그가 똑같은 것을 느껴야 했냐는 점이었다.
왜 난 겨우 종이 뭉치 앞에서 인생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만 같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걸까.
의문이 계속될수록 한시라도 빨리 그곳으로 가봐야 한다는 의무감이 그를 재촉했다.
결국 징은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새벽에 몰래 지하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어릴 때도 새벽에 몰래 침실을 나올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징은 늦은 반항기라도 겪는 것 같은 스스로가 우스워 피식 웃으면서도 지하로 내려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다른 문은 낡고 버석했다.
별도의 잠금장치도 없는 볼품없는 문.
누구라도 드나들 수 있다는 말을 증명하는 듯한 허술함에, 그는 잠시 손을 쥐었다가 펴곤 그대로 문고리를 돌렸다.
***
“콜록.”
기세 좋게 들어온 것에 비해 멋없는 기침이 튀어나왔다.
문을 연 충격 때문인지 안에는 잘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지난번부터 생각한 거지만 정말 어지간히 청소를 안 하는군.
징은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달라진 점은 없었다.
여전히 작고, 지저분하고, 정신 사나운 서고였다.
평범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서고.
여기 있는 모든 게 아미카의 서적들이란 말이지.
하지만 자신을 에워싼 책들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자각하자마자 다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왔다.
머릿속에서 다시금 경보음이 울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미카의 서적을 보는 것은 배반이다. 배반은 곧 반역. 반역은 곧 사형.
“사형…….”
멍하니 중얼거린 징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어코 그의 손에서 너덜너덜한 책이 떨어져 내렸다.
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책이 떨어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이런 시간에 여기까지 오다니, 학구열이 남다르십니다.”
그렇다고 누군가의 비아냥 소리가 더 낫다는 건 아니었지만.
***
서고의 어둠 안에서 금안이 반짝 빛났다.
“서고에 들어올 땐 장로님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라텔은 아직도 헐떡거리느라 고개를 들지 못하는 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딱딱한 내용이었지만 징을 나무라는 어투는 아니었다.
“이거, 이거 도대체 뭐야? 읽는 사람이 정신이 나가도록 이상한 장치라도 되어 있는 건가? 읽는 사람은 다들 이렇게…….”
“어땠지?”
문가 옆의 책장이 만들어낸 그림자에선 또 다른 금안이 지그시 징을 주시하고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거지?
아무리 정신을 놓고 있었다고 해도 지척에 다가오는 사제를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놀라는 동안, 장로는 긴 수염을 나풀거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라텔에게서 책을 받아들어 펼쳤다.
“어때, 세상의 규율이라도 어기는 것 같던가?”
누런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마치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 같았다.
징은 스스로가 우스워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움찔거리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 모습에 노인은 수염이 올라가도록 미소 지었다.
“그래도 용케 여기까지 올 생각을 다 했군. 열어 볼 용기까지 가졌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래도 열어보진 못했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노인은 징의 사나운 눈 앞에서도 마치 고양이가 아양 떠는 것이라도 보는 듯 여유로웠다.
반면 징은 점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는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무슨 짓을 했다기보다는, 무슨 짓을 당한 그쪽을 좀 자극한 것뿐이지.”
“예전부터 빙빙 돌려 말하는 그 버릇을 고쳐주고 싶었지.”
위협적으로 다가가는 징의 팔을 라텔이 붙잡았다.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만…….”
라텔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쿵!
골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져 버렸으니까.
“……다리가 다 나은 줄은 몰랐군.”
“여러가지로 모르는 점이 많을 거요.”
장로는 조금 놀란 눈으로 징의 손에 순식간에 눕혀진 라텔과, 그가 노렸던 징의 오른쪽 다리를 응시했다.
무리 없이 돌아간 오른 발목은 정신을 잃은 청년의 오른 다리를 압박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연기였던 거지?”
“별로 중요하진 않을 텐데.”
스릉.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아까부터 묻고 있고.”
장로는 라텔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검을 빼들어 그의 목을 겨누는 징의 모습에 두 손을 들어 항복의 의사를 밝혔다.
“어디 아픈 게 아니야. 우리가 뭘 한 것도 아니지.”
차분히 말하는 장로를 징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봤다.
“그저, 자네가 홀린 것뿐이네.”
“방금 말한 것 같은데. 그렇게 빙글빙글 돌려 말하는 게 습관이라면 나이 불문하고 고쳐줄 용의가 있어.”
흠 하고 징과 라텔을 번갈아보던 노인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있소, 징?”
“그건 또 무슨 개소리요.”
“이제까지 믿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뒤집히는 것 같은 감각, 어제까지 상식이었던 것들이 더 이상 상식이 아니게 되는 그런 경험.”
“그런 적 없…….”
또 시작된 철학자 같은 언변에 얼굴을 찡그리던 징의 말이 서서히 멈췄다.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군.”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짜증나서라도 그딴 것은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징의 머리에는 이미 퍼뜩 떠오른 과거가 있었다.
서재에서 책을 펼쳐 볼 때의 불안감, 미친 듯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그리고 그려지는 피투성이 아이의 얼굴.
“그건, 그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소. 그건 그냥…….”
더듬더듬 말을 잇는 징은 불안정해 보였다.
실제로도 그의 머릿속은 떠오르는 과거와 더 이상 깊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자아가 싸우고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끓는 것 같았다.
장로는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징, 이건 아직 이른 문제요.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하지.”
오랜 시간이라는 소리에 징은 내렸던 고개가 움찔 떨렸다.
복잡하던 머릿속에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나도 참 바보 같기도 하지.”
웃음 섞인 자조와 함께 고개를 든 징의 눈은 빨갛게 충혈된 채였지만 흐릿하진 않았다.
“날 여기서 내보내 주시오. 지금 당장.”
그에겐 처음부터 한 가지 목적 밖에 없었다.
이곳을 탈출해 플린과 톨린에게 돌아가는 것.
저치가 무슨 짓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몰라도, 자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느슨했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자 검이 다시 위협적으로 라텔의 목을 겨눴다.
“보기보다 극단적인 편이군, 징. 난 신의 대리로서 당신을 시험해야 할 책임이 있소.”
장로의 한숨 섞인 대답에 징은 픽 웃었다.
“내가 제국에서 신이라는 이들을 좀 만나봤는데 말이지, 그네들은 사실 사자 같은 건 필요 없더군. 우리한텐 별로 관심도 없거든.”
냉소적인 그의 대답이 아미카를 모시는 신의 대리 역할을 하는 장로를 어느 정도 자극했다고 생각했다.
그가 옳았다.
징이 예상한 방향과는 다른 식인 것 같긴 했지만.
노인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온화한 웃음만 보여주던 그의 시원한 웃음이었다.
“그 정도면 괜찮을 것도 같고.”
징은 어이가 없어져서 되물었다.
“뭐요?”
“이제부터 그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뜻이지.”
그게 무슨……. 당황한 징은 입을 채 열지 못했다.
장로가 손 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그에게서는 태양만큼이나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 무리가 징과 라텔을 감쌌다.
“이런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는 징의 흐려진 시야 사이로 아직까지 활짝 웃고 있는 장로의 입이 보였다.
“그 아이의 이름은 라텔, 라텔 로에라네. 먹는 건 주는 대로 먹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당신 미쳤소?!!”
“냉정하구먼.”
징은 이 상황에서도 헛소리를 늘어놓는 장로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이는 아마 닿지 않았을 것이었다.
징은 상대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억울한 심정에 고성을 멈추지 않았다.
내 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몰라 걱정돼 죽을 지경인데 무슨 놈의 아이냐고.
39화- 속임수가 맞는(2)
소란을 듣고 달려온 렌은 휘몰아치는 먼지 폭풍 가운데에서 수염을 흩날리고 있는 장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을 건 뭔가?”
걱정스러운 렌의 물음에 장로는 차분히 대답했다.
“이방인이 정말 황실에서 보낸 자일 수도 있습니다.”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렌을 보며 늙은 장로는 말없이 빙긋 웃었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태연한 모습에 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세월 모셔왔지만 이번만큼은 장로님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평소엔 조금이라도 이해를 했다는 듯이 말하는구먼?”
“라텔은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아이입니다. 한참을 갈고 닦아야 할 아이를 그치의 손에 맡기는 건…….”
말을 잇지 못하는 렌의 어깨를 두드리며 장로는 입을 열었다.
“검을 벼리려면 대장간에 가야 하는 걸세. 기술자가 아닌 우리가 아무리 두드려도 검은 무뎌질 뿐이야. 자칫 잘못하다간 명검이 밭을 가는 가래가 되어버릴 수도 있네.”
“그럼 그 노인이 그 엄청난 기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장로는 이번에도 대답 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입장에선 하나 남은 기술자라고 해 봤자 걱정이 많은 렌의 근심만 더해줄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장로는 말을 삼켰다.
더불어 그들에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도.
***
안나는 작은 케이지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하며 걸음을 옮겼다.
7황자궁이 아닌 곳은 처음 와보는 아이는, 느슨하지 않은 각 잡힌 분위기에 경직된 자신의 몸이 케이지를 떨어뜨리지 않기를 바라며 힘을 줘 걸어야 했다.
안나는 앞서 자신을 이끄는 하녀를 흘끗 바라봤다.
같은 하녀복을 입고 있는데도 7황자궁의 동료 언니들과는 너무도 달랐다.
8황자궁에 조용히 뭔가를 전해 주면 된다는 명령을 받은 그녀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 필요는 없기를 바라며 케이지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
황자님께서 입이 무거운 고용인 한 명을 부른다는 소리에 떠밀려 오게 된 안나였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중 가장 어린 안나는 이런 일에 자주 불려가곤 했으니까.
눈치껏 빠지기 위해서는 그녀는 남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번만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8황자가 찾아왔던 날 기절한 안나는 맡은 일을 다 하지 못했고, 누군가는 원래 자신이 할 일보다 많은 일을 해야 했다.
‘안나가 요즘 한가했으니까 가야 하지 않겠어?’
7황자의 부름에 그녀를 떠미는 동료들에게 안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가피한 태만이 빌미가 되어 이번 일에 불려오게 된 것에 대해서 안나는 불만은 없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너그럽진 않았지만 나쁜 사람도 아니었으므로.
노동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그녀는 불만이 없었다.
불안만 있을 뿐.
덜덜 떨리는 손을 꾹 쥔 채 7황자의 집무실에 들어간 안나는 순간 구겨졌다가 돌아오는 란 아바란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거기에 기가 죽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 안나에게 황자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 경비가 교대할 시간에 집무실로 들러라. 책상 위에 케이지가 있을 거다. 그걸 들고 뒷문으로 나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따라가면 된다. 물건을 옮기고 나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
안나는 큰일에 얽힐 것만 같아 덜덜 떨면서 황자와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하지만 고용인으로서 충실한 안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그…… 다른 사람들은 제가 뭘 하는 걸로 알면 될까요?
안나의 물음에 황자가 그녀의 정수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다람쥐 먹이 주는 일을 네가 완전히 맡게 됐다고 해라. 마침 매 시간마다 먹이 주는 게 귀찮아지기도 했으니까.
그런 것 치고는 주머니에 매번 도토리를 한 움큼씩 들고 다니시는 것 같던데.
안나는 생각했지만, 입을 다물 때를 아는 아이였기 때문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물음에 대한 답에 조금 웃음이 섞여 있었던 것도 같았다.
***
밤이 깊어 착실히 집무실로 갔을 때 탁상 위에 올려진 케이지엔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안나는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지만 천을 걷어볼 만큼 용기가 있진 않았기 때문에 조심히 그것을 들어 걸음을 옮겼다.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는 안나와 같은 하녀복을 입고 있는 여자였다.
훨씬 성숙하고 훨씬 무뚝뚝하고 훨씬 조용하긴 했지만.
그녀는 말없이 앞장섰고 안나 역시 말없이 따랐다.
하지만 그녀가 8황자궁으로 걸음을 옮기자 덜덜 떨리는 손을 멈출 수 없었다.
안나는 설마 지난 사건으로 8황자의 분노를 산 자신을 보낸 건가 싶어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가, 이내 자신이 그저 무작위로 뽑힌 하녀들 중 한 명이라는 걸 상기하고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이것만 그냥 전달하고 나가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그런 거야.
앞서가는 하녀는 안나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3층으로 가는 계단으로 아이를 안내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가지 못한다. 올라가서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계단에서 세 번째로 떨어진 문을 3번 노크하거라. 안에서 8황자님이 나오시면 그걸 전해드리고 다시 내려오면 된다. 네가 일하는 곳과는 다르니 그 무엇도 건드려서는 안 돼.”
안나는 너무 긴장하고 있던 나머지 여자가 말을 할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깜짝 놀라 대답은 하지 못하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숙이고 계단 앞에 섰고 안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방 문 앞에 다다른 아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두 눈을 꾹 감고 방 문을 세 번 두드렸다.
똑.똑.똑.
이것만 얼른 전해드리고 가면 되는 거야, 어차피 8황자님은 내 얼굴 같은 건 기억도 못 하실 테니까!
고개 푹 수그리고 전해드리면 내가 누군지도 모르시겠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자기 암시는 오래가지 않았다.
쾅.
“왜 이렇게 늦어!”
다소 거칠게 문이 열리고 안에서 큰 볼멘소리(안나에게는 고함으로 느껴질)와 함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8황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케이지를 바라보다 그것을 들고 있는 안나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익, 이걸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또 말을 씹은 안나가 케이지를 내밀었다.
8황자의 눈썹이 팍 구겨졌다.
그가 무언가를 떠올리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너…….”
딸꾹.
자기 암시 같은 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시 본 8황자는 여전히 거대했고 여전히 공포스러웠다.
심지어 자신을 알아본 것 같았다.
최소 매타작, 최대 죽음이겠구나.
공포로 딸꾹질을 시작한 안나의 다리가 풀리기 직전의 순간이었다.
“찍!”
작은 철창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이 걷히며 갈색의 작은 털뭉치가 빠르게 튀어나왔다.
그리곤 그대로 8황자의 어깨를 치고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앗, 이 자식! 거기 안 서?!”
그 저돌적인 움직임에 셀로스 아바란의 시선이 안나를 놓고 방 안으로 향했다.
“이런 젠장, 넌 빨리 꺼져.”
8황자는 안나에게 대충 중얼거리며 짜증스럽게 등을 돌렸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안나는 삐걱거리며 케이지를 방 안쪽에 밀어 넣고 급하게 문을 닫았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걸어 나왔다.
하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다시 7황자궁으로 돌아가며 안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심박수가 원래대로 돌아오자 아이가 방금 전 두 눈으로 본 것이 제대로 머리에 입력되기 시작했다.
8황자의 방 안으로 튀어 들어갔던 것.
그거 분명 다람쥐였지?
왜 7황자님이 기르던 다람쥐가 8황자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거지?
안나는 답을 내지 않은 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안나에게는 혼란뿐인 밤이었다.
***
지금쯤 도착했겠지.
안나를 내보내니 셀로스의 방엔 평온이 찾아왔다.
날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셀로스 아바란은 내가 얌전해지자 침대에 앉아 날 째려보고 있었다.
난 창가에 서서 바깥의 풍경을 살폈다.
다람쥐로 변하는 바람에 시야가 많이 낮아졌지만 7황자궁과는 다른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들쭉날쭉하고 휑한 7황자궁과는 다르게 착실히 계산된 갖가지 나무와 풀들의 조형이 만들어낸 풍경을 높이 뜬 세 개의 달이 은은히 빛내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황후궁 역시 7황자궁과는 달리 조경을 신경 쓴 것이 보이는 부분이었다.
이 평화로운 공간을 망치러 온 입장에서 보자면 참 안타까운 풍경이었다.
8황자궁으로의 잠입은 모든 게 계획대로였고 순조로웠다.
안나의 등장은 조금 예상치 못한 것이긴 했지만.
나름 억누르려 노력한 것이었겠지만 달달 떨리는 진동이 케이지로 전해져 다람쥐가 된 내 몸까지 떨릴 정도였다.
앞으로 몇 번 더 날 옮겨줘야 할지도 모르는데 야단났군.
“젠장, 빌어먹을 놈의 다람쥐. 주인을 닮아서 말도 더럽게 안 듣는군.”
잡념을 깨운 건 내가 또 도망칠까 걱정한 듯한 셀로스 아바란의 중얼거림이었다.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구만.
내가 녀석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녀석은 움찔했고, 곧 스스로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인상을 팍 썼다.
“짜증나는 7황자놈, 정말 효과가 있어야 할 거다. 넌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날 보호해, 알겠어?”
거만하게 나에게 삿대질을 하는 8황자를 보자니 도와줄 마음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원래도 도와줄 목적은 이번 일의 목표에 십 퍼센트도 차지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기분이 나빴다.
그나저나 이 자식, 혼자 있을 때는 날 7황자놈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
다음에 사람 대 사람으로 보면 형님 소리를 10번 반복하게 해 주겠다고 다짐했다.
철컥.
그 순간, 걸어 잠근 방 문 손잡이를 그러쥐는 소리가 들려왔다.
셀로스 아바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의미 없는 칼을 품에 꼭 안으며 침대 헤드에 등을 붙였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미친 듯이 손잡이를 덜컥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야,야! 얼른 가서 막아 봐. 얼른!”
8황자의 공포에 질린 시끄러운 재촉도 함께였지만.
난 빠르게 문으로 다가갔다.
열쇠 구멍으로 바라본 바깥에는 오늘도 그가 있었다.
넝마 조각을 걸친 이고 크리사가.
다행이다.
지난 만남으로 더 이상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했는데.
“어어어?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못 들어오게 막아준다며!”
당황한 셀로스가 내게 다그쳤다.
내가 언제?
살아있지 않은 것들을 쫓아줄지도 모른다고 했지.
8황자의 경악에 찬 비명을 뒤로하고 난 잠겨 있던 문 손잡이의 잠금을 뒷발로 차 풀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이 경우엔 호랑이를 집에 초대한 거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문이 열리고 이고 크리사가 안으로 서서히 들어섰다.
얼핏 셀로스 아바란이 기절하며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40화- 진심이라고 꼭 통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