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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 환생(還生)

‘기현아! 이 잔이 마지막 잔이다.’

얼굴이 초췌한 중년인이 애증의 눈으로 소주잔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바라보니 투명한 술 속에는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처럼 맑게 태어나서 뜨겁게 살았었다.

나노공학자.

그의 동료와 후배들이 그에게 붙여준 호칭이었다.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하여 연구소장까지 되었으니 사회적으로는 출세한 셈이었다.

하지만 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일주일 전 병원에서 받게 된 통보.

길어야 한 달.

그것이 그의 남은 수명이었다.

투욱.

잔을 들어 한 입에 털어 넣은 박기현은 텅 빈 소주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동안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왔건만 건강을 잃자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

텅 빈 이 소주잔처럼 남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허무.

죽음.

머리가 어지러워진 박기현은 자기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죽으면 환생한다던데 그 말이 사실일까?’

피식!

웃음을 지은 박기현은 다시 태어나는 곳은 지구가 아니라 이계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 년의 수명이 끝인 인간이 아니라….

천년만년 살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나고 싶었다.

쿠웅!

술상에 머리를 박은 박기현은 신기한 꿈을 꾸었다.

환생하여 하늘을 날아다니는 꿈이었다.

* * *

“어휴! 머리야.”

잠에서 깨어난 박기현은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고통에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었다.

송곳으로 뇌를 후벼 파는 극통.

너무 고통스러워서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박기현은 입술을 깨물면서 참았다.

옆집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으득. 으드득.

죄 없는 이만 부서져라 악무는데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필름이라도 끊어진 것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우우웅.

암전된 세상이 조금씩 다시 밝아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신은 멍했다.

내 이름이 뭐였지?

박기현?

장소천?

갑자기 이름이 헷갈렸다.

자신은 분명히 박기현이었다.

그런데 장소천이라는 아이의 기억이 머릿속으로 끼어들어 와서 뒤죽박죽으로 뒤섞였다.

장소천!

연기기 이성.

영취산에 있는 극천문의 내문제자.

그리고 수련 공법과 약초에 대한 잡다한 지식까지….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내가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으윽!

몸을 일으키려던 박기현은 자신의 몸이 정상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리 한쪽이 부러졌는지 나무로 고정되어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어!”

갑자기 그의 머릿속으로 삼 일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장소천의 기억이었다.

장소천은 그날 약초를 구하려고 산속을 헤매다가 하얀 여우 한 마리가 절벽에 붙어 있는 바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바위 틈새로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그냥 바위 속으로 녹아들었다.

너무 기이하여 계속 지켜보았는데 그 후로 여우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슬금슬금.

바위로 다가간 장소천은 옆구리에 차고 있는 건곤대를 손바닥으로 투욱 두드렸다.

건곤대는 손바닥 두 개 크기의 주머니였다.

술법이 걸려 있어 많은 물건을 자유롭게 넣고 꺼낼 수가 있었다.

건곤대에서 청은검을 꺼낸 장소천은 검 끝으로 바위를 찔러보았다.

까앙!

환술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바위였다.

까앙! 까앙!

그래도 기이하여 여우가 들어간 부위를 계속 찔러보았던 장소천은 바위가 쇠처럼 단단하다는 것만 확인했다.

“분명히 바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는데….”

오기가 생긴 장소천은 청은검에 영기를 실어 바위를 힘껏 내리쳤다.

서걱!

철컥!

바위가 날카롭게 베어지며 뭔가가 걸리는 느낌이 왔다.

영기가 실린 검으로도 베어내지 못할 무엇이 바위 속에 있는 것이다.

“뭐지?”

장소천이 청은검에 영기를 가득 싣고 다시 한번 휘두른 결과.

와르르르르.

절벽이 무너지며 장소천을 덮쳤다.

으악!

커다란 바위에 다리를 깔린 장소천은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에 근처에 있던 조장이 득달같이 달려왔고….

장소천을 구해 이곳 의료실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으음.”

황당한 기억에 고개를 흔들었던 박기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이곳이 지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누워 있는 방의 구조나 건축양식은 사극에서나 봤음직한 것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과 옷도 현대의 물건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장소천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황당한 기억들은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추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술을 먹으면서 중얼거린 것처럼 내가 이계에 환생이라도 한 것일까?’

스윽.

손을 들었던 박기현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매일 보던 자신의 거친 손이 아니었다.

갑자기 박기현의 손이 분주해졌다.

이불을 들춰 이곳저곳을 만져보고 두드려보고, 탈모가 심각했던 머리를 더듬던 박기현의 손이 아래로 투욱 떨어졌다.

환생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있던 박기현은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구에서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독신주의자라 결혼도 하지 않았고 평생 연구만 하며 재미없는 삶을 살았다.

게다가 병에 걸려 곧 있으면 죽을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수명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이계로 떨어졌지만 열다섯 어린 나이로 환생했으니 건강관리만 잘하면 앞으로 칠십 년 정도는 더 살 수 있었다.

장소천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박기현은 진지하게 소천의 기억을 반추했다.

“어!”

장소천의 기억을 훑어보던 박기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속해 있는 극천문의 장문진인은 연신기 후기 경지로 연세가 사백 세가 넘었고….

태상장로는 연허기 고수로 무려 구백 살이나 되었다.

그런데도 정정했다.

“불로불사?”

만약에 장소천의 기억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엄청난 기회를 잡게 된 셈이었다.

천년만년 살면 좋겠다고 말했던 소원이 꿈만은 아닌 것이다.

장소천의 기억을 보면 지금 자신의 경지는 연기기, 연신기, 연허기, 화신기로 이어지는 수련 단계의 가장 밑바닥인 연기기였다.

연기기 경지는 일성부터 시작이었다.

일성에서 이성으로.

다시 삼성으로 승급을 하다가 마지막 십이성이 되면 연신기로 승단할 수 있었다.

각 단계마다 초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지니 연기기 경지는 정확히 서른여섯 개 층인 것이다.

장소천의 수련 경지는 이성 초기.

연기기 경지에서도 거의 최하층이었다.

그렇다고 실망만 할 것도 아닌 것이 수련 경지는 노력만 하면 언제든지 올릴 수가 있었다.

‘이건 반칙인데…. 누가 보더라도 장소천으로 사는 것이 더 낫잖아.’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앞으로는 장소천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박기현은 자신의 기억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박기현의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였다.

‘기현아! 미안하지만 네 기억은 오늘부터 잊어야겠다. 나는 이제부터 장소천이다. 연기기 이성 초기인 극천문의 장소천!’

이곳에서 적응하려면 누군가의 기억 하나는 봉인시켜야 했다.

다중인격으로 살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박기현의 기억을 덮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래도….

박기현을 나노공학자로 만들어준 화학적 지식까지 봉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박기현의 지식이 연단술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누운 채로 장소천의 기억을 떠올려 보니 이곳의 삶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나마 좋은 사부와 동료들이 있어 장소천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소천아! 몸은 괜찮으냐?”

조금 누워 있으니 얼굴이 성성이처럼 생긴 거한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채약당의 일조 조장인 곽무진이었다.

그 뒤로 잘생긴 부조장이 들어왔고 얼음처럼 싸늘한 미녀도 한 명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자는 덩치가 큰 젊은이로 이름은 막장이었다.

막장은 누워 있는 장소천이 못마땅했는지 입술을 한쪽으로 비틀었다.

“막내 주제에 팔자가 아주 늘어졌구나. 사형들은 목숨을 걸고 채약을 하러 다니는데…. 혼자 누워 있으니 좋냐?”

찰싹!

막장의 말이 끝나자 누군가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후려쳤다.

한 사저였다.

“아악! 한 사저! 왜 만날 저만 때리고 그래요?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때렸다. 냄새나니까, 더러운 주둥이는 멀리 치워라!”

“이익!”

화를 내며 대들려던 막장이 사저인 한여옥의 눈빛을 보더니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화르르르.

한여옥의 눈에서 싸늘한 냉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위험한 징조였다.

“에이….”

결국 막장은 소심하게 불만을 토하는 것으로 반란을 마무리 짓고 한쪽으로 물러났다.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이 더 이상은 대화에 참여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장소천은 머리맡으로 다가온 조장을 바라보았다.

조장은 연기기 십성의 경지로 의술에도 조예가 뛰어났다.

장소천이 다리에 금이 간 것을 확인한 후 환부에 약을 바르고 나무로 고정해 준 사람도 바로 그였다.

“조장님! 막장이 말한 것처럼 누워만 있었더니 좀이 쑤셔서 안 되겠어요. 몸도 다 나은 것 같으니 내일부터는 저도 약초를 채집하러 갈게요.”

장소천의 말에 곽무진은 이불을 걷고 환부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뼈에 금이 갔던 부위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으윽!

장소천의 이마가 찌푸려지자 곽무진은 냉정하게 평가를 내렸다.

“내일은 안 되고…. 모레는 가능할 것도 같다. 그때쯤에나 채약에 합류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모레는 어디로 갈 예정인가요? 혹시 정해진 곳이 있나요?”

“왜?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느냐?”

곽무진이 피식 웃으며 장소천에게 물었다.

장소천은 수련 경지는 낮지만 감이 좋아 그의 말을 듣고 후회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단점은, 자신의 주장을 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정해진 곳이 없다면 제가 다쳤던 흑룡애에 다시 가는 것은 어떨까 해서요. 뭔가 좋은 느낌이 들거든요.”

“그래? 우리 막내가 원한다면 그리로 가야지. 조금 먼데, 괜찮겠지?”

곽무진이 조원들을 바라보자 다들 불만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보다는 신기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소심한 성격이었던 장소천이 주도적으로 나서 채약지를 선정했기 때문이다.

부조장인 상관천세도 그렇게 느낀 사람 중의 하나였다.

“장 사제! 아프고 나서 왠지 성격이 밝아진 것 같다. 보기가 좋구나.”

“하하하! 누워 있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생각해 봤는데 예전의 제 성격이 좋지만은 않더라고요. 그래서 바꾸려고요.”

“어떻게?”

“주변 사람들을 보고 좋은 점은 배우려고요.”

“나한테도 배울 것이 있을까?”

“부조장님에게서 배울 점이 가장 많아요. 깊게 생각하고 신중하시잖아요. 생각이 정해지면 과감하게 행동하시고….”

“장 사제!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방금 네가 말한 성격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야. 특히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데….”

“있을 수도 있잖아요.”

장소천이 침상 끝에 있는 한여옥을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내 얼굴은 왜 보는데….”

한여옥이 당황한 얼굴로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슬쩍 상관천세를 바라보았다.

“한 사저님에게도 배울 점이 있어서요.”

“뭐, 뭐를?”

“한 사저님은 의리가 있잖아요. 집중력도 대단하시고….”

“의리? 나에게 그런 것이 있다고?”

“네. 그것도 아주 많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한여옥의 표정에 약간 홍조가 깃든 것도 같았다.

한여옥은 얼음 마녀라 불릴 정도로 성격이 냉막했다.

그런데도 장소천은 잘 챙겨주었다.

어렸을 때 죽은 자신의 동생을 닮았다는 이유였다.

“나한테는 배울 게 없냐?”

갑자기 성성이처럼 생긴 얼굴이 장소천 앞으로 쑤욱 다가왔다.

“조장님은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부탁? 뭔데?”

“따분해서 그러는데 돌아가시면 약초 책 한 권만 빌려다 주세요. 두꺼운 것으로요.”

“책을?”

“네. 책은 조장님이 아니면 대여해 주지 않잖아요. 깨끗하게 본 후 다시 돌려드릴게요.”

“허허! 부조장 말대로 아프고 나더니 네가 전혀 딴사람이 된 듯싶구나. 걱정 마라. 그리고 쉬는 동안에 영기선법을 열심히 운기해라. 법력이 상처 치료에 좋은 것은 알고 있을 것 아니냐?”

영기선법은 극천문의 제자들이 수련하는 호흡법으로 사문에서 가장 중시하는 공법서였다.

장소천은 세 살 때부터 익혔는데 지금도 하루 두 시진은 반드시 운기조식을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만 나가 보마. 편히 쉬어라.”

“사제! 다음에 봐.”

“네. 사저께서도 살펴가세요.”

“간다.”

“그래 잘 가라.”

그렇게 인사를 하고 떠난 막장은 반 시진도 안 되어 다시 의료실로 들어왔다.

조장이 약초 책을 가져다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탁!

막장이 그의 머리맡에 책을 내려놓자 장소천이 그에게 물었다.

“야! 너는 왜 그렇게 매사에 불만이냐? 내가 반말을 하는 것이 기분 나빠서 그러냐?”

“뭐라고?”

“그럼 오늘부터 존대해 줄까? 네가 나이도 세 살 더 많고 경지도 높잖아.”

“연기기 경지에서는 한두 단계 경지가 높아도 그냥 친구처럼 지내도 된다. 그런데 너는 같은 연기기 이성이고 입문조차 빠른데 내가 왜 존대받기를 원하겠냐?”

“그러면 왜 그리 불퉁거리는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냐?”

“그런 것 아니다.”

“그것도 아니라고? 그러면 이유가 뭐냐?”

휴우!

막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자신이 한심스러워서 그런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삼영근체인데 나는 속성이 두 개밖에 없잖아. 이영근이 뭐냐! 이영근이….”

“야! 나도 영근속성이 목화(木火) 두 개밖에 없다. 그래도 너는 수 속성이라도 가지고 있어서 이성 후기까지 빠르게 올랐잖아. 나는 성장에 도움도 안 되는 화 속성이 끼어 있어서 아직도 연기기 이성 초기에 머물러 있다.”

“너는 억울하지도 않냐? 한 사저는 나보다 세 살밖에 많지 않은데 벌써 연기기 오성의 경지이다.”

“한 사저는 사영근체이잖아. 사영근체가 어디 흔하냐? 우리 현귀봉을 통틀어도 단 두 명밖에 없다. 사부인 무극진인을 빼면 한 사저가 유일하고….”

“…….”

“그러니 너도 자격지심을 가질 필요 없다. 못 들었냐? 우리 극천문을 세운 조사께서도 이영근체였다는 사실을….”

“솔직히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이영근체가 어떻게 화신기 경지까지 올라갔다는 말인지….”

“설마 없는 말을 지어서 후세에 전했겠냐? 조사님을 봐서 알겠지만, 우리도 노력하면 화신기 경지까지는 올라갈 수 있다. 그러니 힘내자!”

“아침부터 속이 답답했는데 네 말을 들으니 그나마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모레 채약할 때 보자.”

“그래.”

막장이 가고 난 후 장소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막장이 하소연한 내용으로 장소천도 고민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 극천문에 입문하여 잠룡각에 들어가서 십 년 동안 수련했지만 그의 경지는 아직도 연기기 이성 초기였다.

다른 아이들은 연기기 삼성이나 사성.

심지어 오성으로 졸업한 동기도 있었다.

물론 나이는 장소천이 가장 어렸다.

그렇다고 그것이 위로가 될 수는 없었다.

자기가 그들의 나이가 돼도, 여전히 연기기 이성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생각하자. 이영근체로 극천문에 들어왔으니 어찌 보면 나는 행운아이다. 바뀌지도 않는 영근속성을 탓하지 말고 부지런히 책이나 읽자. 그것만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을 위로한 장소천은 두꺼운 약초 책을 들어 처음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예전에는 몇 장만 봐도 졸렸는데 지금은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장소천이 약초의 생김새만 대충 본 것은 아니었다.

약초의 특성과 효능, 그리고 이용 방법까지 자세히 보는데도 그러했다.

‘내가 천재라도 된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장소천도 박기현도 둘 다 천재는 아니었다.

‘그럼 뭐지? 기억력이 두 개로 합쳐져서 이상반응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똑똑해졌다고?’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지 장소천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책 읽는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이러다가 갑자기 예전의 머리로 회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장소천은 꼬박 밤을 새우고 말았다.

제2화 : 신기한 호리병을 얻다

타악!

장소천이 책을 덮은 것은 새벽이 다 되어서였다.

자신이 이 두꺼운 책을 다 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는지 장소천은 책자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책자의 내용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말이 돼! 내 머리가 이렇게 좋았다고?’

믿기지 않았는지 장소천은 두꺼운 약초 책을 아무 데나 넘겨보았다.

장소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다 아는 내용이었다.

너무 좋아 침상에서 구르려던 장소천은 다친 다리를 생각해서 구르는 것은 자제했다.

대신에 두 손으로 침상을 마구 두드렸다.

한참 후.

책자를 머리맡에 놓아둔 장소천은 기지개를 켠 후 침상에 누웠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말똥말똥.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벌떡.

갑자기 몸을 일으킨 장소천은 또다시 약초 책을 펼쳐보았다.

역시나 그의 기억 속에 모두 담겨 있었다.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은 장소천은 책자를 옆에 놓고 누운 채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이곳 영취산은 이름난 명산이었다.

천지원기가 농후하여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하면 한꺼번에 많은 영기를 받아들일 수가 있었다.

후으읍!

장소천이 숨을 들이켜자 허공중의 천지원기가 그의 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꺼번에 토해져 나왔다.

천천히 호흡을 고른 장소천은 영기선법의 구결대로 콧속으로 천지원기를 끌어들였다.

서두르지 않고 면면부절하게….

그렇게 가슴으로 들어온 천지원기를 아래쪽으로 밀어 넣으며 자신의 영근속성에 맞는 영기가 단전으로 들어가길 의념했다.

장소천의 영근속성은 목화(木火).

천지원기에 속한 영기 중에서 두 가지 기운은 단전으로 들어가고 나머지 세 가지 기운과 기타 기운은 날숨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분명히 그것이 정상인데….

“어!”

운기조식을 하다 말고 장소천이 갑자기 숨을 멈추었다.

뭔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후와!

숨을 크게 내쉬어 마음을 진정시킨 장소천은 또다시 영기선법을 운용했다.

그의 콧속으로 천지원기가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을 단전이 있는 부위로 밀어 넣으며 의념을 발한 결과….

놀랍게도 목수화토(木水火土) 네 가지 기운이 그의 단전 속으로 빨려 들어 왔다.

사영근체.

자고 일어났더니 영근속성이 바뀌어 있는 것이다.

장소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호흡도 잊고 멍하니 누워 있었다.

영근속성도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아니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자기처럼 영혼이 뒤바뀌지 않는다면 절대로….

휴우!

이것도 영혼이 뒤바뀌면서 발생한 현상인 듯싶었다.

장소천의 영근속성은 목화 이영근체.

그의 몸을 차지한 박기현의 영혼이 수 속성과 토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같은 기적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

“…….”

뭔가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흥분되어 몸이 떨려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사영근체로 변한 사실은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이것이 밝혀지면 극천문은 아마 난리가 날 것이었다.

극천문에 가입하는 문도들은 의무적으로 영근속성을 검사하게 되어 있었다.

검사 방법은 간단했다.

영근속성을 판별하는 감영주(感靈珠)에 손을 얹으면 다섯 가지 색상 중 해당되는 색상에 불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은 수도자의 이름과 함께 극천문의 도록에 기록되고….

문파가 세워진 지 수만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수정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런데 장소천이 사영근체로 변한 것이 밝혀진다면….

품성이 좋지 않은 장로라면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그를 납치하여 고문하고 뇌를 해부하려고 할지도 몰랐다.

으스스스스.

갑자기 몸에 한기가 든 장소천은 자신이 사영근체라는 사실을 숨겨야겠다고 결심했다.

입조심.

자랑도 근절.

겸손. 겸손. 겸손.

마음을 굳힌 장소천은 누워서 운기조식을 계속했다.

조장인 곽무진이 말한 것처럼 법력이 늘면 다리의 상처가 빨리 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 * *

이른 아침.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장소천은 다리에서 상처를 묶고 있는 천을 벗겨냈다.

그리고 침상 밑으로 내려가서 조심스럽게 발을 떼었는데 생각보다 상태가 양호했다.

의료실 밖으로 나간 장소천은 조금 빠르게 걸어보았다.

그러다가 살짝 뛰었는데 역시나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폴짝!

하늘로 뛰어올랐다가 착지했던 장소천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채약에 참가해도 될 것 같아서였다.

다시 의료실로 들어간 장소천은 침상을 정리하고 조장이 빌려다 준 책자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생활관으로 걸어갔다.

장소천은 현귀봉에 거주하는 무극진인의 삼십여 제자 중 한 명이었다.

조금 더 상세하게는 채약당 소속인 삼 개 조에서 첫 번째 조에 속한 막내였다.

조원들의 숙소는 한 군데에 모여 있었는데 그 중심부에 생활관이 있었다.

끼이익!

생활관의 문을 열고 들어간 장소천은 일단 조장에게 책부터 반납했다.

“잘 봤느냐?”

장소천에게 약초 책을 건네받은 곽무진은 그것을 자신의 관물대로 던져놓았다.

반납은 채약을 다녀와서 해도 되기 때문이다.

“조장님 덕분에 이틀 동안 따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출발은 언제 하는 것입니까?”

“이각 후. 문제없겠느냐?”

“전혀요.”

장소천이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대답했다.

“그 정도면 되었다.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장소천은 자신의 관물대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앞에 있는 평상에 걸터앉아 건곤대 속의 물건들을 확인했다.

건곤대는 수사들이 사용하는 작은 주머니로 그 안에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저장할 수 있었다.

작아도 반 장 크기.

큰 것은 하늘과 땅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다고 해서 이름이 건곤대였다.

청은검과 벽곡단.

그리고 채집한 약초를 담을 망태기와 호미, 귀한 약초를 채취했을 때 보관할 목갑까지 꼼꼼하게 살핀 장소천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건곤대를 닫았다.

옆에 있던 막장이 물었다.

“몸은 좀 어떠냐?”

“너무 좋아서 문제이다. 막장아! 이번 달 목표는 어떻게 됐냐?”

“위태위태하다. 잘못하면 이번 달에는 우리 조가 꼴등을 할 가능성이 높다.”

“오늘은 약초를 많이 채취해야겠구나.”

“아무거나 마구 채집해서는 안 된다. 삼조에서 며칠 전에 대박을 터트렸다. 태상장로가 원했던 칠채붕란화를 구했다는 소문이다.”

“칠채붕란화! 그것은 영초 아니냐?”

두꺼운 약초 책을 달달 외운 덕분에 장소천의 약초 지식은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칠채붕란화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그것의 형상과 특징 그리고 약효와 가치까지 머릿속에 일목요연하게 떠올랐다.

“영초 맞다.”

“몇 년 된 것인지도 물어보았냐?”

“수령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래도 근래 들어 최고의 성과이다.”

“삼조 조장의 어깨에 힘 좀 들어갔겠는데?”

“말도 마라. 요 며칠 어깨가 하늘로 올라가서 내려올 줄을 모르더라. 우리는 언제나 그런 영초를 캘 수 있을지….”

“걱정 마라. 오늘 캘 테니까?”

“누가? 네가?”

“그럼 나 말고 우리 일조에 운 좋은 사람이 누가 있는데? 어젯밤에 내가 무슨 꿈을 꾼 줄 아냐? 아마도 들으면 깜짝 놀랄 것이다.”

“네 꿈 따위는 관심이 하나도 없다.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다.

생활관 안으로 한여옥이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막장이 말했다.

채약당이 위치하고 있는 현귀봉에서 흑룡애까지는 삼 일도 더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조장인 곽무진은 시간을 단축시킬 비장의 법기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비행 법기였다.

비행 법기는 거북이 형태로 이름이 묵귀선이었다.

장소천까지 다섯 명이 올라타자 묵귀선은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영석을 동력원으로 삼아 흑룡애가 있는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묵귀선의 운전은 부조장인 상관천세가 했다.

처음에는 조금 천천히 날아가던 비행 법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졌다.

높이도 구름과 바짝 붙을 정도로 높아졌다.

두 시진 정도를 날아가자 앞에서 새 떼가 날아왔다.

크기가 일 장이나 되는 커다란 새였다.

새 떼와 부딪칠 것을 우려한 조장이 묵귀선의 선수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건곤대에서 청룡언월도처럼 생긴 긴 칼을 꺼내 좌우로 휘둘렀다.

도신에 어린 푸른색 영기를 본 새 떼들이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도 도기(刀氣)가 위험한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크하하하하!”

고개를 쳐들고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곽무진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 후로 이각 정도를 더 날아가서야 묵귀선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었다.

지면과 가까워지고 속도가 느려지자 장소천도 이곳의 지형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그가 전에 온 적이 있던 장소.

하얀 여우가 바위 속으로 스며들고….

그 비밀을 파헤치려고 검을 휘두르다가 절벽이 무너지면서 다리를 다쳤던 바로 그 흑룡애였다.

처억!

묵귀선이 바닥에 착지하자 조원들은 모두 배에서 내려왔다.

스스스스스.

묵귀선을 법력으로 축소시켜 건곤대로 집어넣은 곽무진이 조원들을 둘러보았다.

“세 시진 후에 여기에서 다시 만난다. 질문 있나?”

“없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채약을 시작한다. 다들 행운을 빈다. 가라!”

곽무진의 말이 끝나자 조원들은 천지사방으로 뛰쳐나갔다.

약초를 한 뿌리라도 더 채취하기 위해. 영역이 겹치지 않도록 각자 흩어진 것이다.

건곤대에서 망태기를 꺼내 어깨에 건 장소천은 이상한 바위를 발견했던 장소로 곧장 달려갔다.

그곳은 여기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장소천은 그가 다쳤었던 장소를 귀신처럼 찾아냈다.

머리가 총명해진 덕분이었다.

“어! 이곳이 분명한데?”

장소천이 기이하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가 다쳤던 장소임을 확인하였고, 절벽이 무너진 흔적도 찾아냈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찾던 바위만 보이지 않았다.

실망한 장소천은 청은검에 영기를 담아 흙을 파헤쳤다.

바위가 흙에 파묻혔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쉽지 않았다.

연기기 삼성에 올랐다면 검기로 흙을 폭사시켜 땅을 뒤집어버릴 수도 있을 터인데 아쉽게도 그는 연기기 이성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이 장소천은 검을 곧추세워 땅속을 찌르고 다녔다.

푸욱. 푹!

있을 만한 장소는 다 찌르고 다녔지만 바위는 발견되지 않았다.

열받은 장소천은 청은검에 영기를 주입했다.

그리고 분풀이라도 하듯 땅속을 수차례나 갈라냈다.

그런데.

꿰에엑!

흙 속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오며 시커먼 토저(土猪)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땅속 깊은 곳에 산다는 흙돼지였다.

땅속에서 거대한 흙돼지가 뛰쳐나오자 장소천은 하늘로 몸을 솟구치며 주위를 경계했다.

다행히 토저는 한 마리밖에 없는 듯싶었다.

운이 없는 토저였을까?

장소천이 분풀이로 휘두른 검에 토저는 정수리가 깊숙이 갈라져 피를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씨익! 씩!

저 정도 상처라면 쓰러지거나 달아나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도 토저는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며 장소천에게 광분하여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을 본 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흉수가 장소천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쉬이잇!

서걱!

장소천은 침착하게 소요검법을 펼쳐냈다.

토저는 요수가 아닌 짐승.

제아무리 흉악하고 저돌적이어도 한낱 짐승인 토저가 극천문의 현묘한 검술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결국 시간이 지나자 토저의 상처는 점점 늘어났고….

털썩!

과도하게 피를 흘린 토저는 앞발 두 개를 땅바닥에 꿇고 말았다.

옆으로 나동그라진 토저는 살려달라는 눈빛으로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소천의 검은 용서가 없었다.

푸욱!

청은검을 토저의 심장에 깊숙이 박아 넣은 장소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꾸웨엑!

검이 심장에 박혔는데도 토저는 바로 죽지 않았다.

그 상태로 몸부림을 치더니 땅을 일 장이나 파헤치고 나서야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빼꼼.

그 밑에서 검은색 바위를 발견한 장소천은 청은검을 들고 뛰어내려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반각 후.

땀을 뻘뻘 흘리며 땅속에 파묻힌 바위를 들어낸 장소천은 청은검에 영기를 주입하여 바위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철컥!

그러다가 예의 그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검이 막히자 장소천은 검을 앞으로 잡아 뺐다.

그리고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깎아낸 결과….

그 안에서 옥으로 된 작은 호리병 하나를 발견했다.

바위 속에 옥으로 된 호리병이 들어 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수도계에서는 기이한 일이 다반사였기에 장소천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쑤욱.

바위 속에서 호리병을 끄집어낸 장소천은 병 표면에 새겨진 그림을 보고 아미를 찌푸렸다.

호리병에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약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 옆에는 하얀색 여우 한 마리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때 그 여우였다.

번쩍!

눈을 뜬 여우가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아홉 개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다가 여인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기분 좋다는 듯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호리병은 뚜껑이 없었다.

그래도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 수도 있었기에 장소천은 호리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출렁, 출렁.

병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오자 장소천은 손바닥을 펴고 그 위에 호리병을 기울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탁탁.

입구를 손바닥에 부딪혀도 마찬가지….

황당하다는 생각에 장소천은 호리병을 높이 쳐들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호리병 표면에 그려져 있던 절세 미녀가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장소천 쪽으로 기울였다.

또르르르르.

그러자 호리병 안에서 황금빛 영액 두 방울이 흘러나와 장소천의 눈으로 들어갔다.

피할 겨를이 없었다.

황금빛 영액이 눈 속으로 들어가자 장소천은 깜짝 놀라 두 눈을 깜박였다.

그러면서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했는데 눈앞이 흐려지고 사물이 흐릿해졌다.

이러다가 실명이라도 하는 것이 아닌지 은근히 걱정하는데 다행히 시간이 지나자 시력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

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다.

게다가.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장소천이 서 있는 곳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초록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나오고 있었다.

우측에서는 파란색 기운이 희미하게 보이고….

전에 볼 수 없는 현상.

이상하여 소매로 눈을 비볐지만 일시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저게 뭐지?”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서걱! 서걱!

장소천은 청은검을 휘둘러 바위에 남아 있는 호리병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냈다.

그리고 절세 미녀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는데 그녀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3화 : 채약(採藥)

두근두근.

여인의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리자 장소천은 호리병을 급하게 건곤대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그가 전에 발견했던 약초 군락지로 걸음을 옮겼다.

장소천은 전에 이곳에서 약초밭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하필이면 그때 하얀 여우가 나타나서 약초를 캐지도 못하고 불상사를 당하고 말았지만….

그의 기억대로라면 약초의 종류와 수가 꽤 많았던 것 같았다.

장소천이 이곳으로 오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막장에게 허풍을 떤 것도 실상은 그런 이유가 숨어 있었다.

“어!”

약초 군락지로 가던 장소천은 이곳에서도 초록색 기운이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런데 너무 희미하여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설마 눈에 보이는 초록색 광채가 약초의 기운은 아니겠지? 만약에 사실이라면 대박일 텐데….”

쓸데없는 상상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은 장소천은 갑자기 걸음을 빨리했다.

그리고 눈앞에 드러난 약초 군락지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여래향, 팔비초, 석문동, 녹수화….

귀한 약초들이 무더기로 널려 있었다.

어깨에 걸친 망태기를 내려놓은 장소천은 그 안에서 호미를 꺼내 채약을 시작했다.

채약은 신중을 기해야 했다.

약초마다 약으로 사용하는 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팔비초와 녹수화는 잎과 꽃.

석문동은 씨와 뿌리가 약재로 사용되었다.

대신에 여래향은 어느 한 군데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뿌리까지 캐서 보물처럼 받들어 모셔가야 했다.

거의 반 시진.

군락지에 있는 약초를 모두 캐낸 장소천은 고되다는 듯 주먹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천기를 살펴보았다.

조원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장소천은 초록색 기운이 피어올랐던 곳으로 가 보기로 결심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잘하면 시간 안에 갔다 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서두르자.’

조원들을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장소천은 잠령각에서 배운 운월신법을 펼쳐냈다.

휘이익!

장소천이 운월신법을 펼치자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여유가 넘쳐흐르는 것을 보면 구결처럼 구름에 달 가듯이 가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운월신법을 펼쳐 초록색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으로 달려간 장소천은 난감하다는 듯이 절벽을 바라보았다.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이 단애절벽의 중턱이었기 때문이다.

절벽은 가파르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장소천은 위험을 감수해 보기로 결심했다.

푸욱!

영기를 운기하여 몸을 가볍게 한 장소천은 청은검으로 암벽을 찔러가며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잉!

절벽 아래에서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고정시킨 장소천은 두 손을 당겨 절벽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리고 바람이 약해질 때를 기다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푸욱! 퍼서억!

청은검을 박아 넣은 암벽이 부서지면서 한때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장소천은 무사히 목표한 지점까지 내려왔다.

‘이런 곳에도 동굴이 있네?’

절벽을 내려가다 보니 작은 암반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하부에는 푹 파인 구멍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 안에 영초가 한 뿌리 자라고 있었다.

구엽선지초(九葉仙芝草).

이것은 태상장로가 공헌점수까지 내걸고 수배한 영초로 칠채붕란화보다도 훨씬 더 귀한 영초였다.

게다가 수령도 상당했다.

푸욱!

발밑에 청은검을 박아 넣은 장소천은 뿌리가 한 올이라도 상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 영초를 채취했다.

영초의 뿌리가 흙 속에서 빠져나오자 초록색 광채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영초를 목갑에 담아 건곤대로 집어넣은 장소천은 그가 보았던 광채가 영초에서 기인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누르며 절벽 위로 올라간 장소천은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 열심히 달려가도 정해진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파란색 기운이 흘러나왔던 곳을 확인하지 않고 떠나려니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가도 늦는 건 마찬가지인데…. 에이, 모르겠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장소천은 파란색 기운이 보였던 곳으로 전력을 다해 뛰어갔다.

조장에게 혼이 날 것은 불을 보듯 뻔했지만 그때는 구엽선지초 핑계를 대기로 작정했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운월신법을 펼쳐 구름에 달 가듯이 달려간 장소천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전경을 바라보았다.

장소천의 눈앞에는 십수만 년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괴목의 그루터기가 솟아 있었다.

나무는 넝쿨식물들에 뒤덮여 있었는데 놀랍게도 파란색 기운은 죽은 나무 속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지?”

나무 속에 영초가 들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속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장소천은 청은검을 꺼내 나무 속을 파내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

아니 조금 손해겠지만, 이참에 파란색 광채의 정체를 파헤쳐 보기로 마음을 먹은 것이다.

죽은 지 수백 년도 넘었는지 나무는 쉽게 부서졌다.

그런데도 너무 거대하여 장소천은 거의 한 시진이 지나서야 괴목의 중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와와와!”

장소천이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파란색 광채를 뿜어내고 있는 목령주였다.

장소천은 전에 한 번 목령주를 본 적이 있었다.

문파의 원로 고수에게 심부름을 갔다가 우연히 구경했는데 손톱보다 작은 것인데도 엄청나게 소중히 다뤘던 기억이 났다.

“이렇게 큰 목령주가 있다니? 이 정도 크기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터인데….”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목령주를 집어 든 장소천은 건곤대 속에서 옥갑을 꺼내 그 안에 구슬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호리병과 같이 건곤대의 구석진 곳에 은밀하게 보관했다.

목령주의 효능은 장소천도 알고 있었다.

목령주를 땅속에 묻으면 근방에 있는 영초가 속성으로 자라고 약효도 높아진다고 했다.

그래서 영초를 재배하는 수사들은 천금을 주고서라도 구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목령주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너무 희귀하고….

시장에 나오자마자 누군가가 쓸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고계 수사들이 참여하는 경매장에는 가끔씩 출현한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장소천이 그것을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파란색 광채가 가리키는 곳에서 보물을 발견한 장소천은 이번에야말로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신법을 펼쳤다.

약속 시간을 한참이나 넘겼기에 지금쯤 그를 찾는다고 난리가 났을 것이었다.

그런데.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가니 갑자기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신법을 멈춘 장소천은 바위 뒤로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장면을 목격했다.

조장과 부조장 그리고 한 사저까지.

세 사람이 힘을 합쳐 소처럼 생긴 요수 한 마리를 합격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요수는 크기가 삼장이 넘었는데 이마에는 시커먼 뿔이 달리고 피부가 무쇠처럼 단단했다.

게다가 동작도 빨라 세 사람이 고전하고 있었다.

슬금슬금.

장소천은 자리를 이동하여 구석진 곳에 숨어 싸움을 구경하고 있는 막장에게 접근했다.

“어떻게 된 일이냐?”

“나도 몰라. 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세 사람이 달려왔다. 요수는 그 뒤를 따라왔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싸우고 있는 것이냐?”

“맞아. 그래도 조금만 더 버티면 싸움이 끝날 것 같다. 봐라! 요수가 이제는 완전히 지쳤다.”

“조장님도 많이 지쳤잖아.”

장소천의 말처럼 요수와 싸우고 있는 곽무진의 동작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합공을 도모했지만 사실상 요수와 싸운 것은 곽무진과 상관천세였다.

그중에 곽무진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는데 청룡언월도처럼 생긴 긴 칼을 들고 거대한 요수를 사정없이 몰아치고 있었다.

서걱!

마침내 곽무진의 거도가 요수의 목을 베어냈다.

쿨럭쿨럭.

깊숙이 베였는지 요수의 목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됐다!”

그걸 본 막장이 벌떡 일어나더니 주먹을 들고 하늘을 올려 쳤다.

결정타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는 요수의 끈질긴 생명력을 모르고서 한 행동이었다.

움머어!

흉포하게 울부짖은 요수가 곽무진과 상관천세에게 시커먼 독무를 뿜어냈다.

그러고는 펄쩍 뛰어 세 사람의 공세를 빠져나오더니 갑자기 막장과 장소천이 있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어! 요수가 이쪽으로 온다. 소천아! 도망쳐라!”

장소천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친 막장이 검을 빼 들어 소천의 앞을 막아섰다.

그나마 경지가 조금 높다고 장소천을 지키려 한 것이다.

“바보야! 너도 피해야지.”

그걸 본 장소천은 도망칠 수가 없었다.

의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살리겠다고 요수의 앞을 막아선 막장을 남겨놓고 혼자서 도망칠 수는 없었다.

“이 바보들이…. 피해!”

그걸 본 한여옥이 미친년처럼 날아와서 손에 든 암기를 요수에게 날려 보냈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머리를 묶어 고정시킨 비녀까지 뽑아 요수에게 내던졌다.

쒜에에엑!

푸욱!

다행히 이번 공격은 헛되지 않았다.

한여옥이 날려 보낸 비녀는 요수의 뒤통수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비틀.

비녀를 맞고 요수가 비틀거리자 한여옥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녀의 손에는 봉황비도 두 자루가 들려 있었는데 이것은 근접전에 사용하는 무기였다.

저처럼 흉악한 요수와 싸울 때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바로 그때.

그녀의 머리 위에서 상관천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매! 요수는 나와 조장에게 맡기고 사매는 사제들을 지켜줘!”

“알았어요.”

믿음직한 사형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한여옥도 정신을 차렸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요수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가 없음을 인지한 것이다.

연기기 칠성의 경지인 상관천세는 일조에서 법술이 가장 뛰어났다.

특히나 화 속성 신통이 뛰어났는데 화기로 불 뱀을 만들어서 상대를 공격할 수 있었다.

상관천세가 손을 내뻗자 그의 장심에서 불 뱀 한 마리가 튀어나와 소처럼 생긴 요수를 사납게 공격했다.

화르르르르.

형체가 없는 불 뱀은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장소천과 막장이 위험한 것을 감지한 상관천세는 화기를 극한으로 운용했고….

거대한 화망(火蟒)이 요수의 몸을 칭칭 휘감으며 입을 벌려 살을 물어뜯고 뼈를 불태웠다.

치직. 치지직.

살 타는 냄새가 가득하고 검은 연기까지 피어올랐지만 장소천과 막장에게 달려들던 요수는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한여옥이 두 사람을 보호하려고 달려가자 흉악한 입을 쩌억 벌리고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기어코 두 사람을 죽이려는 것이다.

“막장아! 옆으로 피해!”

요수가 눈앞으로 다가오자 장소천은 들고 있던 검을 놈에게 내던졌다.

그러면서 막장에게 달려들어 그를 밀치고 바닥으로 굴러 요수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뒤늦게 달려왔던 한여옥은 봉황비도까지 요수에게 던졌고….

그중 한 자루가 요수의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움머어어!

거칠게 포효한 요수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세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펄쩍 뛰어 세 사람을 덮치려는 순간.

쉐에에엑!

푸른색 영기를 머금은 거대한 도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요수의 정수리로 파고들었다.

부들부들.

곽무진의 공격에 당한 요수는 죽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화르르르르.

그사이에도 화망은 요수의 몸을 불태웠고….

털썩.

마침내 요수는 땅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휴우!

불 뱀을 거둬 장심으로 흡수한 상관천세가 위험했다는 듯이 나머지 네 사람을 돌아보았다.

서걱!

요수의 정수리에서 거도를 뽑아낸 조장은 칼을 휘둘러 놈의 목을 베어냈다.

그러고는 눈에 박힌 봉황비도를 뽑아 한여옥에게 돌려주었다.

저벅, 저벅.

그걸 보고 있던 상관천세는 건곤대에서 검을 꺼내 요수의 뒤통수를 갈랐다.

그리고 안에서 비녀를 찾아 자신의 옷으로 닦고는 한여옥에게 돌려줘도 되는지를 고심했다.

타악!

상관천세에게 다가온 한여옥이 그의 손에 들린 비녀를 채듯이 빼앗았다.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유품이에요. 찾아줘서 고마워요.”

“그… 그래? 나는 몰랐어.”

“당연히 그랬겠죠.”

목소리는 냉담했지만 왠지 모르게 수줍고 따듯한 감성이 담겨 있었다.

청은검을 주워 건곤대로 집어넣은 장소천은 막장에게 한마디를 했다.

“네가 나를 위해서 앞을 막아선 것은 알고 있다. 고맙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상황을 봐 가면서 행동해라. 하마터면 나까지 죽을 뻔했으니까.”

“아까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알고 있다. 어쨌든 고마웠다.”

상황이 정리되자 곽무진은 요수의 뿔을 자르고 독낭까지 거둬 그의 건곤대로 집어넣었다.

그것들도 훌륭한 약재였다.

자리를 옮겨 평평한 장소로 간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장이 한여옥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매! 다 캤어?”

“그럼요. 몇 년 만에 찾아온 절호의 기회인데요.”

“한번 보자.”

곽무진의 말이 끝나자 한여옥이 건곤대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우와!”

그걸 본 장소천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영지화삼(靈芝化蔘).

그것도 삼백 년도 넘은 것이 다섯 뿌리나 있었다.

제4화 : 경지 향상

영지화삼을 본 막장의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그도 알고 있었다.

영지화삼은 독성이 없어 생으로 복용이 가능하고.

저만한 크기라면 승단도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꿀꺽!

어디선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삼을 처음 발견한 것은 한 사매였다. 그런데 흉악한 요수인 독각철우가 지키고 있어 나와 부조장을 불렀고, 우리 두 사람이 요수를 유인하여 싸우는 동안 사매는 영지화삼을 채약했다. 그 후의 일은 다들 보아서 알 것이고….”

“…….”

다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대신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조장인 곽무진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목숨을 걸고 구한 것이다. 그러니 상납하지 말고 우리가 먹자!”

“와아!”

막장이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 말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조장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영지화삼을 캐느라고 다른 약초를 전혀 채취하지 못했다. 이것을 다 먹으면, 이번 달에는 우리 일조가 꼴등을 할 것이다.”

“조장! 약초 몇 뿌리 더 캔다고 칠채붕란화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이번 달은 그냥 꼴등을 합시다.”

“그래요. 우리가 언제까지 일등만 할 수는 없잖아요. 솔직히 영지화삼 한두 뿌리 가지고는 삼조를 이길 수가 없어요. 수령이 백칠십 년인 칠채붕란화를 어떻게 이기겠어요.”

상관천세와 한여옥이 연달아 나서자 알겠다는 듯이 곽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때.

뒤쪽에 있던 장소천이 돌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요. 이길 수 있어요. 이번에도 일등은 저희 일조가 할 거예요.”

“뭐라고?”

무슨 소리냐는 듯이 네 사람이 일제히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소천이 씨익 웃더니 건곤대에서 목갑 하나를 꺼냈다.

“뭐냐?”

옆에 있던 막장이 물었다.

“내가 그랬잖아. 어젯밤에 끝내주는 꿈을 꿨다고…. 아마도 내 운이 하늘에 닿은 모양이다.”

장소천이 조금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오늘 장소천의 운은 하늘을 꿰뚫을 정도였다.

기이한 호리병을 얻었고, 약초와 보물이 있는 곳을 볼 수 있게 되었으며,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목령주까지….

평생의 운이 오늘 하루 다 몰려온 것 같았다.

“뭔데 그래?”

한여옥이 목갑을 앞으로 당겨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굳은 듯 몸을 멈추었다.

“한 사저! 뭐가 들었기에 그런 표정이야?”

목갑 안을 훔쳐보았던 곽무진도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구엽선지초! 그것도 팔백 년이 넘은 것이다.”

“팔백 년이요?”

조장과 한여옥이 놀라고 있는 사이 장소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팔백 년이 아니라 정확히 구백삼십 년이 된 것입니다.’

호리병에 그려진 절세 미녀가 영액으로 눈을 씻어준 후 장소천은 보물을 선별하는 능력도 갖게 되었다.

영초를 보는 순간 수령과 효능이 눈에 보는 듯이 그려졌다.

“이러면 영지화삼이 없어도 일등은 저희 것이네요.”

“이 정도면 공헌점수도 받을 수 있다. 내가 채약당에 들어와서 본 것 중에서 최고의 영약이다. 사부님도 엄청 좋아하실 것이다.”

공헌점수는 문파에 큰 공헌을 하였을 때 받는 점수로 이것을 이용하여 비급이나 물건을 구매할 수가 있었다.

어떤 비급은 공헌점수로만 살 수가 있어서 실제로는 영석보다 더 귀중했다.

“수고했다고 며칠 쉬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소천이가 복덩이로구나. 소천아! 도대체 이런 보물을 어떻게 구한 것이냐?”

“뭐라도 먹고 얘기하면 안 될까요? 갑자기 배가 고파서….”

“그럴까?”

곽무진이 영지화삼 중에서 가장 큰 것을 골라 장소천에게 주었다.

그다음에는 한여옥.

다음부터는 서열순으로 크기를 정해 한 뿌리씩 던져주었다.

막장에게 준 것도 크기가 작은 것은 아니었다.

장소천에게 준 것만 크고 나머지는 비슷한 크기였다.

“먹자.”

조장의 말이 끝나자 장소천은 영지화삼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그런데 누군가는 벌써 삼을 씹어 삼키고 있었다.

막장이었다.

구엽선지초보다는 못하지만 영지화삼도 가치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귀한 영약이었다.

장소천도 이만한 영약은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다.

화르르르.

영지화삼을 먹고 반각이나 되었을까….

배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파도처럼 흘러나와 장소천의 전신으로 파고들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기분.

실제로 그의 하단전으로 들어오는 영기의 양도 급작스럽게 증가되었다.

그 기운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장소천은 운기조식에 집중했다.

그러다가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영지화삼은 과연 영약이었다.

영지화삼을 먹고 운기를 끝낸 막장은 자신의 경지가 연기기 삼성으로 올라간 것을 발견했다.

경지가 한 단계 올라간 것이다.

오성 후기였던 한여옥도 육성으로 올라갔고 칠성 초기였던 상관천세는 중기로 올라갔다.

다만 곽무진은 십성 중기 그대로였다.

경지가 높을수록 영약의 효과가 덜한 것이다.

슬쩍.

장소천을 바라보니 아직도 운기조식 중이었다.

그런데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운공삼매경이라도 든 듯한 표정이었다.

뭔가 이변이 발생한 것을 감지한 조원들은 운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 물러났다.

반 시진 후.

장소천이 일행에게 다가왔는데 연기기 삼성 초기의 경지였다.

“뭐, 뭐냐? 너 혼자 영약을 다 먹었냐?”

“내가 제일 큰 것을 먹었잖아. 수련 경지도 가장 낮았고….”

“와아!”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막장도 더 이상은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조장인 곽무진은 경지가 오르지 않아서였다.

그런데도 곽무진은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우리 소천이가 드디어 연기기 삼성이 되었구나.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희만 경지가 높아져서 어떻게 하지요?”

“어쩌긴. 다행이지.”

“다행이라고요?”

“그래. 나까지 경지가 높아졌다면 우리가 단체로 영약을 훔쳐 먹었다고 다른 조에서 분명히 들고일어날 것이다. 내가 안 오르면 수군거리는데 그칠 것이고…. 게다가 우리에게는 구엽선지초가 있지 않으냐? 공헌점수를 받으면 그것으로 영단을 사 먹으면 된다.”

“그러세요. 조장님께서 경지를 높이셔야 저희도 마음 놓고 채약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건 걱정 마라. 이제 그만 현귀봉으로 돌아가자. 가기 전에 약초는 다 꺼내놓고.”

채약이 끝나면 조원들은 자기가 캔 약초를 전부 조장에게 넘겨주는 것이 관례였다.

조장은 그것을 건곤대에 담아 한꺼번에 채약당에 상납하였고….

그런데 장소천이 꺼내놓는 약초의 양이 끝이 없었다.

이 정도라면 구엽선지초가 없더라도 꼴등은 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 있냐?”

“그게 끝입니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다 캐 온 것이냐? 여래향도 열 뿌리나 있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도와주시는 것 같아요. 저보고 오래 살라고….”

“그랬나 보다. 고생했다.”

“조장님도요.”

어두운 밤.

비행 법기에 올라타고 하늘을 날아가던 채약당 일조 조원들은 저마다 상념에 잠겨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처한 상황도 다르고 수련 경지도 다르지만 그들의 꿈은 단 한 가지였다.

수련 경지를 높여 신선이 되는 것.

장소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꿈꾸었던 불로불사.

그것을 이루려면 수련 경지를 높여 신선이 되는 방법밖에 없었다.

* * *

일행이 현귀봉에 도착한 것은 늦은 밤이었다.

아무리 늦어도 복귀 신고는 해야 하므로 곽무진은 채약당주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인원은 생활관으로 들어갔는데 반각도 안 되어 전신부가 날아왔다.

모두 무극전에 있는 회의실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서두르라는 말이 있었기에 조원들은 한달음에 무극전으로 달려갔다.

무극전으로 들어가려면 금제진을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조원 모두 옥패를 지니고 있었기에 아무런 제지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회의실로 들어간 일행은 먼저 와 계신 사부님께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이어서 당주님께 인사하고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조 조장과 삼조 조장에게는 간단하게 묵례만 했다.

거창하게 채약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삼 개 조까지 편성하여 운영하고 있지만 여기 있는 사람 모두는 무극진인의 제자였다.

그리고 극천문의 문도이기도 했다.

제자들을 본 무극진인은 먼저 그들의 공로를 치하하여 주었다.

“어서들 오너라. 밤이 늦었지만 너희들의 성과가 지대하여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두 수고했더구나. 다들 자리에 앉아라.”

“알겠습니다.”

조원들이 곽무진의 옆 자리에 앉는데 다른 조장들의 눈이 반짝였다.

특히나 삼조 조장인 호도광은 노골적으로 신식을 펼쳐 조원들의 경지를 훑어보았다.

경지 향상을 눈치챈 것이다.

“당주! 상자 뚜껑을 열게.”

“알겠습니다.”

무극진인의 지시에 채약당주인 투곤은 앞에 있는 옥갑의 뚜껑을 열었다.

장소천이 영초를 담은 것은 나무로 된 상자였는데….

어느 순간 고급스러운 옥갑으로 대체되어 있었다.

딸칵.

뚜껑이 열리자 두 조장은 목을 길게 늘여 상자 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약초를 채취했기에 이렇게 늦은 밤에 회의를 개최하는지 의아해서였다.

하지만 상자 안에 든 영초를 보는 순간 그들의 의구심은 단숨에 날아가 버렸다.

“이것은 구엽선지초 아닙니까? 수… 수령이 칠백 년도 넘은 것 같습니다.”

“구백 년이다.”

삼조 조장의 말을 무극진인이 정정하여 주었다.

무극진인은 연신기 후기 경지의 수도자이지만 중품 일급이라는 연단사의 품계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말이 잘못될 리가 없었다.

“사부님! 이것을 일조에서 채취하였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 야심한 밤에 왜 너희들을 불렀겠느냐? 너희들을 함께 부른 이유는 안목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렇군요.”

같은 제자이지만 각 조의 조장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실적에 따라 위상도 변하고 사부께서 내려주는 하사품이 달랐기 때문이다.

“곽 조장!”

“네. 사부님!”

“이것을 흑룡애에서 구했다고?”

“네. 저기 앉아 있는 장 사제가 목숨을 걸고 천 길 낭떠러지를 타고 내려가서 구한 것입니다.”

“그렇군. 소천아!”

“네. 사부님.”

“그동안 경지 향상이 더뎌 걱정이 많았는데 어느새 삼성이 되었구나. 네 나이에 그 정도면 많이 느린 것도 아니다. 열심히 정진하여 선업을 달성하도록 해라.”

“사부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영초를 채취했던 과정을 자세히 말해 보아라. 낭떠러지에 있는 영초를 어떻게 발견한 것이냐?”

“오늘 제가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약초 군락지를 발견하여 약초를 채취한 후 뭐라도 더 캘까 싶어 돌아다니다가 기이한 냄새를 맡았습니다. 귀한 약초라도 있는가 싶어 냄새의 근원을 추적했는데 흔적이 낭떠러지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험한 낭떠러지 아래로 내려갔다는 말이냐?”

“채약당의 제자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네 말이 맞지만…. 수고 많았다. 투 당주!”

“네. 사부님.”

“내일 아침까지 채약당 일조 조원들에게 공헌점수를 얼마씩 주는 것이 좋을지 계획하여 가져오게. 직책과 공헌도에 따라 배분하고 소천이는 특별히 우대하여 산정하게.”

“알겠습니다.”

채약당주에게 지시를 내린 무극진인의 시선이 조원들에게로 돌아갔다.

“공헌점수와는 별도로 영석도 하사하겠다. 조장과 부조장 그리고 장소천은 스무 개씩 주고 나머지 두 사람은 열 개씩 줄 터이니 앞으로도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기 바란다.”

“고맙습니다.”

곽무진을 비롯한 일조 조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부님께 감사를 드렸다.

최근 현귀봉의 재정이 열악한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정도 보상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번에 채취한 영초가 그만큼 귀하다는 반증이었다.

보름 동안은 채약을 나가지 말고 편히 쉬라는 말에 조원들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일조 조원들이 영석을 챙기고 무극전을 나서는데 삼조 조장인 호도광이 곽무진에게 시비를 걸었다.

호도광은 연기기 십이성의 경지로 싸움에 능하고 진법을 해진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다만 호전적이며 질시가 심한 단점이 있었다.

“곽 조장! 가만 보니 자네만 수행이 그대로이군. 조원들이 자네 몰래 영단이라도 주워 먹은 모양일세.”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영석이 많이 생겨서 주워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아! 삼조는 돈이 없어서 계속 주워 먹어야 되겠네요. 남는 영석이 있는데 몇 개 빌려드릴까요?”

“건방지기 이를 데 없군. 자네 조가 앞으로도 계속 일등을 할 것 같은가?”

호도광이 사납게 노려보았지만 곽무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피식.

짧게 웃고는 크게 대답했다.

“아무리 못해도 삼조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얘들아! 그렇지 않냐?”

“맞습니다.”

일조 조원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그중에서도 장소천의 목소리가 제일 큰 것 같았다.

기분 좋게 생활관으로 돌아온 조원들은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숙소라고 해봐야 바로 옆이지만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운 모양이었다.

이럴 때는 부조장의 결단력이 필요했다.

“조장! 오늘 기분도 좋은데 한잔 어떻습니까? 내일부터는 채약을 떠날 일도 없잖습니까?”

“술은?”

“삼 년 전에 땅속에 묻어 놓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쯤이면 맛있게 숙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그럼요. 술과 안주는 저희들이 준비할 터이니 사형은 앉아만 계십시오. 오늘 삼조 조장에게 목소리를 높이신 것…. 정말 속이 시원했습니다.”

“괜찮을까?”

“그럼요. 조장님 뒤에는 우리들이 있으니 앞으로도 기죽지 마시고 하고 싶은 말 마음껏 하십시오. 솔직히 우리들이 삼조에게 꿇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맞다. 우리는 일조이고 그들은 삼조에 불과한데 내가 너무 과민 반응을 한 것 같다. 호 사형의 경지가 높아 조금 걱정스럽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의 경지를 따라잡고 말 것이다.”

“입문 일자가 아닌 수련 경지로 위아래가 나뉘는 것은 우리 극천문만의 관행이 아니라 수선계의 오랜 전통입니다. 저희들이 열심히 보좌하여 드리면 머지않아 곽 사형이 호 사형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하하! 그 말을 들으니 술이 무지 당기는군. 부조장! 빨리 가서 술을 가져오게.”

“알겠습니다.”

상관천세가 조원들을 불러 각자 할 일을 정해 주었다.

한여옥과 장소천은 술자리를 준비하고 막장은 주방으로 가서 안주를 챙겨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땅에 묻어 놓았던 술병을 가져왔는데 상 위에 못 보던 술이 놓여 있었다.

“어! 이것은 무슨 술이야?”

“한 사저께서 가져오신 과일주예요. 냄새가 엄청 좋아요.”

“그래. 우리 사매는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술도 잘 담그는 모양이군. 술맛이 기대되는데….

상관천세의 말에 한여옥이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붉어진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제5화 : 복록(福祿)

“건배!”

술잔을 부딪친 조장이 장소천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소천의 주량이 는 것처럼 보여 서였다.

“소천아! 괜찮으냐?”

“이 잔까지만 마시려고요.”

“어. 그래…,”

그렇다는데 잔을 뺏을 수는 없었다.

쭈욱.

시원하게 술을 들이켠 장소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빈 잔을 바라보았다.

환생하기 전에는 말술이었는데 이 녀석의 몸은 술이 너무 약했다.

다섯 잔밖에 먹지 않았는데도 벌써부터 취기가 올라왔다.

아무래도 특훈을 시켜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장소천은 술잔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조원들이 술을 먹으면서 가장 많이 한 이야기는 단연코 구엽선지초였다.

그다음에는 사부님께서 공헌점수를 얼마나 주실 것인지….

그러다가 갑자기 화제가 경지 향상으로 넘어갔다.

오늘 일어난 기적 같은 일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서였다.

선배들의 말을 듣고 있던 막장이 곽무진에게 물었다.

“조장님! 한 가지 여쭤볼 것이 있는데요?”

“뭐가 궁금하느냐?”

“고계 수사는 경지를 한 단계 올리는데 수십, 수백 년이 걸리잖아요.”

“그렇지.”

“우리 사부님은 언제 연신기 후기가 되신 거예요?”

“그것이 왜 궁금하냐?”

“오늘 사부님을 보는데 조금 안돼 보이시더라고요. 다른 장로님들이 계시는 봉우리는 천지이보가 숨겨져 있는 곳도 있고 귀한 광석이나 영수, 심지어는 영석이 묻혀 있는 곳도 있잖아요. 그런데 이곳 현귀봉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사부님은 영단을 조제하시지 않느냐? 우리 제자들이 약초를 캐고 약재도 준비하여 주고 말이다.”

“그러니 더 문제이죠. 영단을 만들 줄 아시는 분이 사부님 혼자밖에 없잖아요.”

“그것이 뭐가 문제인데?”

“영단을 만들어 문파에 상납하고 나면 남는 것도 별로 없을 것 아니에요. 그것으로 제자들을 먹이고 입히고 수련까지 시켜야 하니…. 돈이 쪼들릴 수밖에요. 그러니 이번처럼 귀한 영초가 생겨도 사부님 자신의 경지를 높이는 데 사용할 생각을 못 하시는 거잖아요?”

“듣고 보니 네 말이 맞구나. 그런데 연단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구나. 재능이 없는 자가 연단을 하면 열에 한 번도 성공시키기 어려운데 우리처럼 팍팍한 살림에 그 비용을 어떻게 다 감당할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사부님도 혼자 만드는 것이고….”

“그러면 영원히 발전이 없잖아요. 제 생각에는 비용이 많이 들어도 연단을 할 줄 아는 제자를 키우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왜? 연단에 관심이라도 있느냐?”

“아니요. 저는 그런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구나. 내가 알고 있기로 사부님께서 연신기 경지로 올라가신 지 올해로 구십삼 년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사부님은 연세가 아직 이백구십 세밖에 안 되었다. 연신기의 평균 수명이 오백 살이니 그 전에는 연허기로 올라가실 수 있을 게다.”

“연허기는 평균 수명이 일천 살이니 그렇게만 되면 정말 여한이 없겠네요.”

“맞다. 하지만 원영을 만드는 것이 정말로 쉽지 않다고 하더구나. 우리 극천문만 봐도 연신기 후기 고수들은 열두 분이나 계신데 연허기 경지는 단 두 분밖에 없지 않으냐?”

“원영단 같은 지보(至寶)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제자들 중에서 능력 있는 자가 배출되어 원영단을 만들 수 있게 되든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장소천이 조금 졸린 눈으로 물었다.

“원영단? 그것만 있으면 연허기로 바로 승단할 수 있는 거야?”

“야! 이 세상에 그런 영단이 어디 있겠냐? 그냥 확률을 높여준다는 말이지.”

“그럼 두 개를 먹으면?”

“두 개? 그러면 말이 달라지지. 세 개라면 무조건 승단할 수 있을 것이고….”

“와아! 그런 건 누가 만들어? 금련봉에 계시는 천약전주님은 만들 수 있으시려나?”

“그것이 가능했다면 그분께서 진즉에 연허기 경지로 오르셨겠지. 내가 알고 있기로 원영단은 상품 이급의 연단사만이 만들 수 있다.”

“상품 이급? 천약전주님은 연단사 품계가 어떻게 되시는데?”

“중품 이급. 삼급이 되면 마의 장벽이라는 상품 일급의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고, 거기서 다시 한 단계를 올라가야 상품 이급이다. 그러니 원영단은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구나. 그런데 상품 이급 이상의 연단사가 우리 태현국에 있을까?”

“아니, 없어.”

“진짜?”

“그래. 백 년 전에 돌아가신 태고종의 의성(醫聖) 이후로는 원영단을 만들 수 있는 수사가 한 분도 안 계시다고 들었다.”

“아함! 그렇구나. 막장아! 너 내일 할 것 있냐?

장소천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졸린 모양이었다.

“아니.”

“그럼 나하고 시장에나 놀러가자.”

“사고 싶은 물건이라도 있냐?”

“그냥 구경이나 하려고….”

“네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사고 싶은 물건이 생각났다. 피곤한가 본데 먼저 들어가서 자라. 아침에 생활관에서 보자.”

“아니,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갈게. 의리가 있지. 취했다고 혼자 들어가서 자면 되겠냐? 그것도 막내가….”

박기현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생활을 삼십 년이나 한 장소천이 먼저 들어가라는 막장의 말을 들을 리가 만무했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함께 각자의 숙소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장소천은 말끔히 차려입고 생활관으로 갔다.

그런데 상관천세 혼자밖에 없었다.

“어디 놀러 가냐?”

“시장에 가서 구경 좀 하려고요.”

“혼자서?”

“막장이랑 같이요. 그런데 조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어제저녁에 조장은 술을 고래처럼 마셨다.

그러더니 숙소에 가지 않고 생활관에서 자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보이지 않아서 물어본 것이다.

“아침 일찍 사부님이 불러서 무극전으로 갔다. 장로회의에 참석할 모양이다.”

“장로회의요?”

“우리가 구백 년 넘은 구엽선지초를 채취했다는 소문이 밤새 극천문을 뜨겁게 달궈놓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채취 경위라도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겠네요.”

때마침 막장이 생활관 안으로 들어왔다.

세면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왔지만 장소천과 함께 서 있으니 백로 옆에 까마귀 한 마리를 데려다 놓은 것 같았다.

덩치 큰 까마귀였다.

막장이 상관천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시장에 가면 구경 잘하고 와라. 막 사제는 사고 싶은 것이라도 있느냐?”

“저는 호신용 부적을 몇 장 사려고요.”

“부적?”

“어제 독각철우가 눈앞으로 달려오는데 정말로 섬뜩하더라고요. 오래 살려면 제 몸은 제가 지켜야죠.”

“잘 생각했다. 수련 경지를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공도 열심히 수련해야 한다. 살다 보면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지 않느냐?”

“명심하겠습니다.”

더 있으면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두 사람은 황급히 생활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신법을 발휘하여 시장으로 달려갔다.

* * *

사부님의 만리거를 타고 하늘을 날아가던 곽무진은 불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장로회의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장로회의에는 장문진인을 포함하여 아홉 개 봉우리의 주인과 천약전주 그리고 극천문의 무력집단인 금검대주와, 요족들이 사는 구요국과의 경계인 호국성을 지키는 군위장이 참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장로회의가 개최되는 청허전에 도착해 보니 의외의 인물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태상장로인 광음 사조였다.

사부인 무극진인의 옆에 앉은 곽무진은 숨조차 쉴 수 없는 압박감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애써 어깨를 폈다.

어제 조원들이 자신들을 믿고 어디 가서 기죽지 말라고 한 말이 불현 듯 떠올라서였다.

회의는 장문진인이 주관했는데 처음에는 호국성을 수성하는 군위장에게 최근의 상황을 물었다.

이에 군위장은 최근 요족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구요국에 걸출한 효웅이 한 명 출현했습니다. 탐랑족의 요인인데 욕심이 많고 호전적이라 주변 요족들을 공격하여 세력을 급작스레 넓히고 있는 중입니다.”

“그자들이 천리협곡을 넘어올 것이라는 말입니까?”

“첩자들을 파견했는데 아직은 그런 기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놈들의 추이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잘하셨습니다. 탐랑족이 구요국을 통일하는 것도 문제지만 놈들이 종족 간의 전쟁에서 패해 요성을 넘어오는 것도 큰일입니다. 필요하면 첩자들의 수를 늘리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 안건은 현귀봉의 무극진인께서 채취한 구엽선지초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영초부터 보여드리겠습니다.”

현귀봉에서 구백 년도 넘은 구엽선지초를 채취했다는 소문은 모두들 알고 있었다.

밤새 전신부가 수백 차례나 오고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옥갑이 열리고 구엽선지초가 모습을 드러내자 다들 신기하다는 듯이 영초를 바라보았다.

“오! 이것이 구엽선지초이군요. 저는 평생 처음 보는 것입니다.”

“저도 백오십 년 전에 보고 처음 봅니다. 그때 본 것은 삼백 년 수령의 것이었는데…. 구백 년 수령이라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정말로 영험하게 생겼네요.”

다들 한마디씩 하는데 장문진인이 좌중을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무극진인 옆에 있는 곽무진을 바라보았다.

이에 곽무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엽선지초를 채취한 경위를 설명했다.

장소천이 말한 그대로였다.

곽무진의 말이 끝나자 이번에는 장문진인이 일어났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가 오늘 장로회의를 개최한 목적은 현귀봉에서 채취한 구엽선지초 때문입니다. 앞서 들어보셨겠지만 지금 우리 극천문의 대외 상황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초로는 두 분 태상장로님을 위한 영단을 조제하려고 합니다.”

구엽선지초 정도나 되는 영초로 저계 수사들의 영단을 만드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요족과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저계 수사 천 명보다도 고계 수사 한 명이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막말로 연허기 후기 고수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종문의 위상은 수직 상승했을 것이었다.

지금처럼 두 번째 서열의 문파가 아닌, 선검문이나 태고종과 같은 최상위 종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것이었다.

요족들이 쳐들어오는 것도 이렇게 걱정하지 않을 것이고….

장문진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마침 구엽선지초를 사용하여 연허기 고수의 수련 경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단방이 천약전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함께 들어가는 영초나 약재도 무리하면 구할 수 있을 터이고…. 문제는 연단입니다.”

“천약전주께서는 영단을 조제할 자신이 없으신 게요?”

장로 한 명이 천약전주에게 물었다.

천계봉에 있는 팔황진인이었다.

“팔황진인께서는 연허기 고수가 복용할 수 있는 영단은 연단사 품계로 상품 일급이 되어야만 조제 가능하다는 것을 모르시는 것입니까? 저는 이제 중품 이급입니다.”

“단방이 있는데 못 만들 것도 없지 않소이까?”

“실패할 확률이 극히 높으니 하는 말 아닙니까? 열에 아홉은 실패할 터인데, 팔황진인께서 후과를 책임지실 것입니까?”

“허허! 누가 책임진다고 했습니까? 그럼 어떻게 하시려는 것인지요?”

팔황진인의 고개가 장문진인에게 돌아갔다.

그러자 장문진인도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상석에 앉아 있는 광음 사숙을 바라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광음이 눈을 떴는데 신광이 번뜩였다.

“장문진인! 나머지 약재는 구할 자신이 있는 것인가?”

“문제없습니다. 허령단을 조제하는 데 필요한 약재들이 하나같이 귀하고 비싼 것들이지만 주재인 구엽선지초가 준비되었으니 나머지 약재들은 충분히 구할 수 있습니다.”

“허령단은 어디에서 연단할 생각인가?”

“태현국에서 허령단을 연단할 수 있는 곳은 아직까지는 태고종 한 곳밖에 없습니다.”

“영단을 조제해 달라고 의뢰하면 비싼 값을 요구하겠군?”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문파에 남은 영석을 모두 끌어 모으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허령단을 만들어서 두 분 태상장로님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게 의뢰하면 성공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그것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회의를 열기 전에 천약전주에게 물었는데 그래도 삼 할 정도는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삼 할이라고?”

“그것도 많이 잡은 수치입니다. 백 년 전에 돌아가신 의성이라면 오 할 까지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영단을 얻지 못할 수도 있겠군?”

“다행히 구엽선지초가 크고 실해서 몇 번은 연단을 시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성패를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군. 알겠네. 그렇게 추진하게. 그리고 무극진인!”

“네. 사숙님!”

“자네 제자들이 구엽선지초를 채취했다고 들었네. 그들에게 보상은 충분히 해주었는가?”

“영초를 채취한 제자들에게 공헌점수와 영석으로 보상하였습니다. 다만 저희 현귀봉의 재정 상태가 열악하여 많이 주지는 못했습니다.”

“얼마나 주었는가?”

광음 사숙이 묻자 무극진인은 그가 주려고 한 공헌점수와 이미 내렸던 영석의 개수를 말해주었다.

“그것 가지고 되겠는가? 내가 공헌점수를 줄 터이니 영초를 채취한 조원들에게 추가로 나누어 주게. 영초를 직접 채취한 제자에게는 특별히 더 얹어주고….”

“사숙님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왜 고마워할 일인가? 안 되겠네. 회의가 끝나면 나랑 같이 움직이세.”

“네에?”

무극진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현귀봉을 차지한 후 광음 사숙은 한 번도 현귀봉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 온다면 첫 번째 방문이었다.

영광?

그보다는 부담감이 더 컸다.

장로회의가 끝나자 광음 사숙은 정말로 무극진인을 따라나섰다.

무극진인이 극구 만류하자 광음이 그를 노려보았다.

“문 장로! 현귀봉에 내가 봐서는 안 될 것이라도 숨겨 놓았는가?”

무극진인의 이름은 문극현이었다.

그래서인지 광음 사숙은 가끔씩 문 장로라고 불렀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혹시 내가 준 공헌점수를 제자들에게 주지 않고 떼어먹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 휴우! 알겠습니다. 그럼 사숙님을 현귀봉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허허!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없네. 이번에 구엽선지초를 채취했다는 제자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그러는 것이니까. 얼마나 큰 복록(福祿)을 갖추었기에 그런 귀한 영초를 채취할 수 있었는지….”

“사숙님께서는 그 아이가 다시 영초를 채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시는군요.”

“이 세상에 우연은 없네. 우연을 가장한 필연만이 있을 뿐이지…. 아마도 한 번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곽 조장! 현귀봉에 도착하는 대로 장소천을 무극전으로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 * *

광음 사조를 태운 만리거가 무극전에 도착하자 곽무진은 생활관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장소천은 숙소에도, 생활관에도 없었다.

부조장에게서 장소천이 시장에 놀러갔다는 말을 들은 곽무진은 비행 법기를 꺼내 곧바로 시장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소천은 시장 한가운데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상대는 천약전의 백초각에 있는 연기기 사성의 제자 탁비.

채앵! 챙!

위험하게도 두 사람은 진검으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막장이 백초각의 제자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있었다.

그나마 이쪽은 주먹으로 싸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소천아! 위험하니 뒤로 물러서라!”

비행 법기에서 뛰어내린 곽무진은 일단 싸움을 말리려고 시도했다.

장소천은 이제 막 연기기 삼성에 올랐기에 탁비를 당해낼 리 없을 터.

어떻게든 싸움을 말려야 했다.

터억!

그런데 그의 발길을 막는 무리가 있었다.

백초각의 일조 부조장인 고각과 그의 조원들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당장에 싸움을 멈추라고 하시오. 저러다가 소천이 다치기라도 하면 고 사형이 책임지실 것이오?”

“책임? 저계 수사 한 명이 싸우다가 다쳤는데 내가 왜 책임을 진다는 말이냐?”

“당신이 지금 나를 막고 있지 않소?”

“내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느냐? 나는 모르는 일이다.”

“뭐라고!”

조급한 마음에 하늘로 뛰어올랐는데 고각도 하늘로 날아올라 그를 막았다.

하늘에서 바라보니 싸움의 양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생각보다 장소천이 잘 싸우고 있었다.

장소천이 펼치고 있는 것은 극천문의 기본검법인 소요검법.

그런데도 연기기 사성의 고수인 탁비와 싸우면서 뒤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제6화 : 천리협곡에서 채약할 권리를 얻다

시장에 간 막장과 장소천은 처음에는 둘이 함께 움직였다.

그러다가 막장은 부적을 사러 갔고 장소천은 약재상으로 가서 약초를 구경했다.

약초를 구경하면서 장소천은 자신이 얻게 된 이능이 대단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어떤 약초든지 간에 한 번 보면 수령과 효능을 알 수 있었다.

약재도 마찬가지였다.

바짝 말려 가루로 만든 것인데 그 약재의 성분과 효능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장소천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약재상을 돌아다녔다.

“어! 저게 뭐지?”

오래된 약재상 앞에서 장소천은 기이한 영초 한 뿌리를 발견했다.

난초처럼 생긴 영초였다.

특이하게도 줄기에 은색 선이 그어져 있고 금색 꽃 한 송이가 새초롬하게 피어 있었다.

하지만 생긴 것은 보잘 것 없었다.

잎이 말라비틀어진 것을 보면 주인도 이것이 귀한 것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주인과 협상하여 영석 한 개를 주고 화분까지 구입한 장소천은 막장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장소천이 들고 있는 화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때문에 연기기 사성의 고수와 시비가 붙게 되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백초각의 제자였다.

“이봐! 영석 두 개를 줄 터이니 그 물건을 내게 넘겨라!”

장소천은 점잖게 그의 요구를 거절했다.

“팔지 않겠다. 영석 두 개가 아니라 열 개라도 마찬가지이다.”

“뭐라고! 방금 네가 영석 한 개를 주고 구입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는데 영석 열 개를 주어도 팔지 않겠다는 말이냐?”

“물건을 받고 값을 치렀으니 이 물건은 이제부터 나의 것이다. 그런 내가 팔지 않겠다는데 웬 시비냐?”

“시비? 네놈이 시비를 당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가 보구나. 당장에 그 화분을 내놓지 않으면 시비보다 더한 모욕을 당할 것이다.”

“한낮에 강도 짓이라니 누굴 믿고 그리 방자하느냐? 나는 현귀봉에 있는 무극진인의 제자이다.”

“현귀봉? 그것이 어쨌다는 말이냐? 나는 금련봉에 있는 천약전 백초각 소속의 탁비이다. 내 명성을 들은 적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난초를 내놓거라.”

말이 끝나자마자 탁비가 검을 뽑아 장소천을 겨누었다.

명성과 위압으로 굴복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장소천은 위압에 굴복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차앙!

화분을 건곤대로 집어넣은 장소천은 청은검을 뽑아 소요검법의 기수식을 펼쳤다.

“백초각에 너같이 막돼먹은 자가 있을 줄은 정녕 몰랐구나. 훗날 사부님을 통해 정식으로 항의하겠다.”

“항의하겠다고? 그런다고 우리 천약전이 눈이라도 깜짝할 줄 알았느냐? 안 되겠다. 일단은 건방진 네놈의 기부터 꺾어놔야 할 듯싶구나.”

쉬이잇!

탁비라는 자는 말할 수 없이 무례했다.

천약전 소속이라는 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지 장소천의 물건을 강탈하려고 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검을 뽑아 휘둘렀다.

문제는 그를 싸고도는 세력.

언제부터인가 한 무리가 나타나서 장소천과 탁비의 싸움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러다가 막장이 달려오자 고수 한 명이 나와 막장을 구타하기 시작했고….

분노한 장소천은 전력을 다해 탁비의 검에 대항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탁비의 검술이 형편없었다.

탁비가 펼치는 검술은 소요검법보다 한 단계 높은 상승 검법.

그런데도 검로가 눈에 환히 드러났다.

투욱.

탁비의 검이 나아올 방향을 예측한 장소천은 뒤에 있는 발을 반 발자국 옆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몸을 틀며 검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허억!”

장소천의 검이 갑자기 눈앞으로 다가오자 탁비는 기겁하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비룡번신의 수법으로 몸을 뒤집으며 허공에서 검을 흔들어 서너 개의 검영을 만들었다.

실체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검영.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장소천을 노려보았던 탁비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스윽.

장소천이 달그림자처럼 모호하게 사라졌다가 불쑥 눈앞으로 나타난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이 펼친 검영을 완벽하게 파해하면서….

서걱!

급히 몸을 피했으나 옷자락이 길게 갈라지고 말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그런데도 탁비는 물러서지 않았다.

“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사술을 펼치는 것이냐? 네 녀석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얼굴이 붉어진 탁비는 사생결단의 자세로 사납게 장소천에게 달려들었다.

두 눈에는 살기까지 담겨 있었다.

그사이 땅에 쓰러졌던 막장이 갑자기 부적을 날려 방심한 상대를 쓰러트렸다.

그러고는 한데 뒤엉켜 개싸움을 시작했다.

* * *

백초각의 고수들이 그를 가로막자 곽무진은 뒤로 물러나 전신부를 날렸다.

그리고 장소천이 싸우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각에게 마지막으로 조언을 했다.

“고 사형!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것이오. 후과는 백초각에 그치지 않을 것이니 지금이라도 저 미친놈을 당장 끌어내시오.”

“곽무진! 네놈이 아직도 주제 파악을 하지 못했는가 보구나. 우리 천약전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 줄 모르느냐? 막말로 너희 현귀봉의 제자 한 명을 죽여도 며칠만 반성하는 척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풀려날 것이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개소리냐?”

“개소리? 네놈도 한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탁비 이놈! 녀석을 쓰러트리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아가씨가 화분을 뺏어오라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

아가씨라는 말에 곽무진의 시선이 고각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문제의 여자가 서 있었다.

천약전주의 금지옥엽인 능연화.

얼굴은 꽃처럼 아름답지만 사납고 욕심이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녀가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되었지만 정확한 사정은 곽무진도 알 수 없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천의 안위.

눈앞에 연기기 십이성인 고각과 그의 조원들이 두껍게 진을 치고 있었지만 곽무진은 건곤대를 두드려 청룡언월도처럼 생긴 병기를 꺼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그것이 곽무진이 그의 조원을 괴롭히는 적도들을 대하는 자세였다.

타핫!

하늘로 뛰어오른 곽무진의 도가 허공을 가르자 고각도 거대한 철추를 들어 그의 공격을 차단했다.

그리고 조원들과 한 몸이 되어 곽무진을 협공하려는 순간….

“멈추어라!”

하늘 끝 쪽에서 나직한 울림이 들려왔다.

쿠웅!

철퇴로 가슴을 두드리는 충격에 고각은 뒤뚱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울컥!

땅에 엎드려 핏물을 토해낸 고각이 고개를 들자.

철썩!

손바닥 하나가 날아와 고각의 뺨을 쳐서 그를 뒤로 날려버렸다.

“크으으으. 사… 사조님!”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던 고각은 눈앞에 나타난 사람을 본 후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퍼억!

고각을 지키려고 달려왔던 제자 한 놈도 발로 차서 날려버린 광음은 멀리 있는 탁비에게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장소천을 공격하던 탁비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가 땅에 패대기쳐졌다.

휘이익!

처억.

그제야 현장에 도착한 무극진인은 어떻게 된 일인지 곽무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광음 사조가 먼저였다.

“문 장로! 장문진인과 천약전주를 지금 당장 이곳으로 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사태가 심각함을 눈치챈 무극진인은 전신부를 날려 광음 사숙의 뜻을 두 사람에게 알렸다.

곧이어 장문진인이 도착했고.

천약전주도 핏기가 없는 얼굴로 현장에 당도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것을 확인한 광음 사조는 고각을 보며 분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현귀봉의 일 조장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한 자라도 다르게 말한다면 사조를 능멸한 죄로 간주하여 엄하게 처벌하겠다.”

사조를 능멸한 죄로 처벌한다는 말에 고각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저 기분 좀 내본 것인데 일이 이렇게 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능연화는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덜덜덜덜.

갑자기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곽무진이 말한 것처럼 후과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고 사조를 능멸할 수는 없었다.

결국 고각은 자신이 한 말을 한 마디도 빼지 못하고 고스란히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천약전주는 고개를 숙여 광음 사숙에게 사과했다.

제자들의 교육을 잘못한 죄를 빈 것이다.

그리고 고각과 탁비에게 무극진인과 채약당 일조 조원들에게 사과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탁비가 반항했다.

“사조님! 천약전은 극천문의 기둥으로 저희는 큰 자부심을 가지고 지금껏 일해 왔습니다. 그에 반해 현귀봉은 문파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종문에 상납하는 영단도 적고 개개인의 역량도 많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왜 저희가 저들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탁비의 말에 천약전주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성난 천약전주가 탁비의 머리에 일장을 가하려는 찰나.

광음 사숙의 손이 천약전주를 말렸다.

“네 말을 듣고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드는구나? 천약전 제자들의 능력이 우수하다고 말했는데 너도 천약전의 제자이니 네 능력도 뛰어나겠구나?”

“물론입니다.”

“그런데 네가 누구보다 낫다는 말이냐? 곽무진 조장이냐? 아니면 이제 막 채약당에 들어온 장소천을 능가한다는 말이냐?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으니, 누구와 대결하고 싶은지 손가락으로 가리켜라.”

이번에는 탁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현귀봉에 있는 곽무진 조장은 그보다 수련 경지가 한참이나 높았다.

채약이나 약재를 감별하는 능력도 훨씬 뛰어날 것이었다.

당연히 장소천을 지목하여야 하는데 손가락이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부끄러워서였다.

이를 지켜보던 천약전주도 시뻘겋던 얼굴이 검게 변해 있었다.

이제 그가 기대하는 것은 탁비에게 남은 한 가닥 양심이었다.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곽무진을 지목하여야 했다.

그런데.

부르르르.

탁비가 가리킨 것은 장소천이었다.

울컥.

결국 천약전주도 피를 토하고 말았다.

피식.

실소를 지은 광음 사조가 탁비에게 물었다.

“네가 그럴 줄 알았다. 그렇다면 네 능력이 장소천보다 뛰어나다는 말이냐?”

“저런 자에게 무슨 능력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백초각에서도 알아주는 인재입니다.”

“백초각에서? 어쨌든 네 안목이 더 높다는 말이구나. 저 아이가 이번에 구엽선지초를 채취했다는 말은 듣지 못한 것이냐?”

“그것은 순전히 운입니다. 제가 갔어도 그 영초를 채취했을 것입니다.”

“좋다. 그러면 누구의 실력이 더 뛰어난지 이 자리에서 직접 시험해 보겠다. 지금부터 시간을 반각 주겠다. 나를 중심으로 방원 백 장 안에 있는 약재 중에서 가장 값진 물건을 골라오너라.”

“알겠습니다.”

휘이익!

광음 사조의 말이 끝나자마자 탁비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방원 백 장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

신식으로 오 장여를 살필 수 있는 탁비에게는 특히나 좁은 공간이었다.

허공을 몇 차례 왕복한 탁비는 오래지 않아 물건 하나를 집어 자리로 돌아왔다.

그에 반해 장소천은 서두르지 않았다.

반각의 시간을 꽉 채워서 시장을 둘러보고는 마지막에 작은 약재 한 가지를 사 가지고 돌아왔다.

“물건을 앞에 내놓거라.”

광음 사조의 말에 탁비는 자신 있게 물건을 내놓았다.

탁비가 내려놓은 물건은 귀한 약초로 시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가격은 영석 아홉 개 가치.

약초 중에서는 최상급 물건이었다.

그에 비해 장소천이 사 온 물건은 썩은 도라지처럼 상품 가치가 전혀 없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얼마를 주고 산 것이냐?”

“하품 영석으로 한 개를 주었습니다.”

“그 물건이 영석 한 개의 가치가 있어 보였느냐?”

“아닙니다.”

장소천이 부인하자 탁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가 보기에도 영석 한 개의 가치조차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소천의 말에 탁비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이 물건은 중품 영석 한 개의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약효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속히 찌고 건조시켜야만 합니다.”

“사실인가?”

광음 사숙이 무극진인과 천약전주에게 동시에 물었다.

두 사람 모두 약재를 감별하는 데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극진인이 먼저 대답했다.

“이번 대결은 장소천의 승리입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이 약재는 중품 영석 한 개, 하품 영석으로는 백 개의 가치가 있습니다.”

“저것은?”

“저것은 하품 영석 일곱 개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도난품이라 그만한 가치도 없지만요.”

“도난품? 듣고 보니 그 말도 맞군. 천약전주! 자네 의견은 어떤가?”

광음 사숙의 질문에 천약전주는 말없이 탁비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탁비에게 다가가 귀싸대기를 연달아 갈겼다.

“아악! 사부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내가 왜 네놈의 사부이냐? 그리고 능력도 없는 놈이 설치기는 왜 이리 설치고 다니느냐? 나는 너 같은 놈을 제자로 둔 적이 없다.”

퍼억!

손바닥으로 탁비의 뒤통수를 후려친 천약전주는 지금 당장 장소천에게 사과하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탁비는 핑계를 댔다.

“제가 왜 사과를 해야 하는데요. 이번 일은 사부의 영애이신 연화 소저가 먼저…. 아악!”

옆에 있던 고각이 탁비의 무릎을 세게 걷어찼다.

이에 탁비는 무릎을 잡고 펄쩍펄쩍 뛰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사부의 영애를 걸고넘어지려고 하는데, 천약전주가 먼저 선수를 쳤다.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우리 천약전의 망신을 그만큼 시켰으면 됐지, 이제는 내 말도 안 듣겠다는 것이냐? 당장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천약전주가 불같이 화를 내자 그제야 탁비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주위에 자신의 편이 한 사람도 없었다.

백초각의 부조장마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탁비는 마지못해 장소천에게 사과했다.

“내가 네 물건을 뺏으려고 했던 것은 잘못한 것이 맞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내 뜻이 아니라….”

“네 이놈! 그것이 사과하는 자세이냐? 무릎을 꿇고 진실하게 사과해라!”

놀란 탁비는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겁에 질려 장소천에게 사과를 했다.

“장 사제! 내가 잘못했네. 부디 나를 용서해 주게.”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이오?”

“자네를 얕잡아보고 물건을 강탈하려고 했네. 무기를 꺼내 협박한 것도 내 잘못이고…. 말도 조금 심하게 했네. 제발 용서해 주게.”

분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장소천은 탁비를 용서해 주기로 결심했다.

그가 지은 죄과는 그의 사부가 모두 치를 것이기 때문이다.

“알겠소. 다음부터는 약자라고 너무 무시하지 마시오.”

“알겠네.”

탁비의 말이 끝나자 광음이 천약전주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천약전주가 무극진인에게 오늘 벌어진 일을 사과하고 영석으로 배상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극진인은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영석은 되었소. 대신 저희 제자들도 천리협곡에서 채약할 수 있게 해 주시오.”

“천리협곡? 그곳에 요족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가?”

“알고 있소이다.”

“그런데도 천리협곡에서 채약을 하겠다면 나도 굳이 말리지는 않겠네. 하지만 위험하다는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으면 하네.”

천리협곡은 인족과 요족 사이에 있는 구역으로 종족 간에 불가침협정을 맺은 곳이었다.

인요 양측에서 출입을 자제하자 오래된 약초가 많아졌고….

지금은 약초 채집을 위한 최소한의 인력만 암암리에 출입을 허용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마주쳐서 싸움을 벌인 적도 많았다.

기회와 위험이 상존하는 구역.

이제는 그곳을 현귀봉과 나누게 된 것이다.

“천약전주께서 승낙하셨으니 이제부터는 현귀봉의 제자들도 천리협곡에서 채약을 해도 됩니다. 천약전주! 제 말이 맞습니까?”

장문진인이 묻자 천약전주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사나운 눈빛으로 탁비를 노려보았다.

장문진인의 중재하에 협상이 마무리되자 광음은 무극진인과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현귀봉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퍼억!

광음 사숙이 보이지 않자 천약전주는 다시 한번 탁비의 배를 걷어찼다.

그리고 고각에게 지시하여 탁비를 호국성으로 보내 순찰조에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천약전주의 말을 들은 탁비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곳에서 근무하다가 요족에게 죽은 자들이 적지 않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제7화 : 연단(練丹)

무극전으로 돌아온 광음은 무극진인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헌점수를 나누어 주었다.

그러더니 장소천에게 건곤대 하나를 던져 주었다.

뜻밖의 선물에 장소천이 어리둥절해하자 광음 사조가 허허 웃으며 의미를 설명하여 주었다.

“예전에 수선계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얻은 것이다. 앞으로 영초를 많이 채취하라는 의미로 주는 것이니 잘 사용하기 바란다.”

“사조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드릴 것이…. 아!”

무언가 기억난 듯 장소천이 자신의 건곤대를 두드려 시장에서 샀던 화분을 꺼냈다.

그러고는 화분을 사조님께 드렸다.

“무엇이냐?”

“오늘 우연히 시장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름은 모르지만 자태가 빼어나고 향기도 은은한 것이 군자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내게 선물로 주는 것이냐?”

“사조님께 어울리는 듯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좋구나.”

“사숙님! 제가 잠시 그 화분을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광음 사조가 화분을 건곤대로 거두려는데 옆에서 무극진인이 나섰다.

“왜! 자네도 이 화분이 욕심이 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화분에 심어진 영초를 구경하려고 합니다.”

“영초? 이것이 영초라는 말인가?”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군자난이라고 불리는 귀한 난초입니다. 옆에 두고 수련하면 마음을 맑고 청정하게 하여 능히 심마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오래 사는지는 저도 몰랐습니다.”

“얼마나 오래된 것이기에 그러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거의 육백 년은 된 것 같습니다. 이 정도면 영초 중에서도 상품의 것입니다.”

“그 정도인가? 오늘 현귀봉에 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군. 장소천!”

“네. 사조님!”

“이것은 얼마를 주고 산 것이냐?”

“하품 영석 한 개를 주고 구입했습니다.”

“하품 영석?”

“그렇습니다.”

장소천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광음 사조가 건곤대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것은 상고시대의 비경에서 발견한 검법서이다. 아쉽게도 상고시대의 문자로 기록되어 수백 년 동안 해석하지 못했는데, 너는 복이 많아서 뜻밖의 기연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하품 영석 한 개의 가치는 있는 물건이다.”

“감사합니다.”

문자를 해석하지 못했다지만 무려 상고시대의 비경에서 얻은 공법서였다.

그런 곳에 남겨 두었다는 것만 보아도 검법서가 평범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소천이 책자를 소중하게 건곤대에 집어넣자 광음 사조는 마지막으로 무극진인에게 한마디를 했다.

“천리협곡에서 채약할 권리를 얻어내다니 자네 수완도 대단하군. 어쨌든 축하하네.”

“사숙님 덕분입니다.”

“아니네. 이곳 현귀봉은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아 좋은 일이 계속해서 생길 것만 같군. 심심하면 자주 놀러 오겠네.”

“언제든지 오십시오. 두 손 모아 환영하겠습니다.”

“그 말, 후회할지 모르네.”

광음 사조가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자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휘스스스스.

사조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지더니 가뭇없이 사라졌다.

신기한 둔술이었다.

광음이 떠나자 무극진인은 사숙께서 전해준 공헌점수까지 포함하여 일조 조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공헌점수 일점은 하품 영석 한 개의 가치와 같거나 이를 상회했다.

영석으로는 살 수 없는 공법까지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소천이 기대한 것은 이십에서 삼십 점.

그런데 뜻밖에도 그가 받은 공헌점수는 백삼십 점이었다.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보상이었다.

막장은 자기도 삼십 점이나 받았다고 자랑했는데 장소천은 차마 자기의 점수를 밝히지 못했다.

그저 조금 더 받았다고 얼버무리고 사부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을 뿐이었다.

[네 덕분에 현귀봉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 게다가 호국성 너머에 있는 천리협곡에서 채약할 수 있는 기회조차 얻었기에 통 크게 보상하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지는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사부의 전음에 답한 장소천은 공헌점수가 담긴 옥패를 건곤대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건곤대도 두 개였다.

떠나기 전에 장소천은 시장에서 구한 약재를 사부님에게 드렸다.

자신은 필요가 없으니 사부님께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면서 무극진인은 영석 오십 개를 주고 약재를 구입했다.

사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생활관으로 돌아온 조원들은 한두 명씩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로 돌아온 장소천은 방문부터 걸어 잠갔다.

그리고 광음 사조께서 주신 건곤대를 꺼내 영기로 입구를 열고 신식으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연기기 삼성에 오르자 장소천의 신식 범위도 꽤나 넓어져서 이제는 삼 장까지 볼 수 있었다.

신식이란 영대에 있는 원신(元神)이 화생시킨 법력을 사용하여 사물을 바라보는 능력이었다.

이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을 감지하거나 타인의 수행 경지를 파악할 수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연단 도중에 단로 내부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감지할 수가 있었다.

연단사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능력인 것이다.

다만 신식도 만능은 아니었다.

유감스럽게도 영수대나 건곤대.

그리고 살아 있는 존재는 신식으로 꿰뚫어 볼 수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신식은 신통력이 아니었다.

장소천이 얻은 이능처럼 영초나 보물이 내뿜는 광채를 볼 수가 없고, 영초나 약재의 수령과 효능을 알아내고, 상대와 싸울 때 동작을 느리게 볼 수도 없었다.

신식으로 건곤대를 바라본 장소천은 너무 기뻐 펄쩍 뛸 것만 같았다.

장소천이 현재 가지고 있는 건곤대는 채약당에서 지급한 보급품이었다.

가로세로 반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아 그동안 불편이 많았는데 광음 사조가 준 건곤대는 장소천의 숙소도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가로세로 각기 삼 장.

기존의 건곤대보다 이백 배나 큰 것이다.

건곤대가 크다는 것은 건곤대의 품질이 좋다는 말과 동일했다.

수화불침.

그런 기능까지도 지닐 수가 있기에 장소천은 원래의 건곤대 속에 들어 있던 물건을 꺼내 전부 새 건곤대에 담았다.

물건은 몇 개 없었다.

절세 미녀와 여우가 그려져 있는 신비한 호리병과 목령주가 든 옥갑.

그리고 공헌점수가 담긴 옥패와 광음 사조에게서 받은 검법서, 청은검과 하품 영석 칠십여 개를 제외하면 벽곡단과 채약을 하는 데 필요한 물품이 전부였다.

물건을 전부 옮겨 담은 장소천은 건곤대에서 신비한 호리병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병을 흔들어 보고 기울여도 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출렁, 출렁.

호리병 속에 무언가 들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호리병을 기울여 탈탈 털어내도 아무것도 쏟아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가소로웠는지 눈을 감고 있던 하얀 여우가 한쪽 눈을 살짝 떴다.

그러고는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절세 미녀는 여전히 미소만 짓고 있을 뿐….

결국, 제풀에 지친 장소천은 호리병을 건곤대 속에 집어넣고 말았다.

호리병 다음에 장소천이 꺼낸 것은 광음 사조에게서 받은 검법서였다.

이 검법서는 이상했다.

보통의 검법서라면 검식을 펼치는 모습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야 하는데 알 수 없는 구결만 가득하고 기이한 문양과 흐름이 빽빽하게 표기되어 있었다.

그나마 가끔씩 검이 그려져 있어서 검법서라고 추정할 뿐….

문양이나 흐름만 봐서는 초식이 몇 개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삼 일 동안 운기조식을 하고 이름도 모르는 검법을 흉내 냈던 장소천은 조장인 곽무진이 숙소에 처박혀 나오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된다며 생사를 확인해 보라는 부조장의 말에 장소천은 조장의 숙소로 찾아갔다.

끼이이익!

문은 열려 있었다.

조장의 방은 장소천의 방보다 컸다.

게다가 뒤쪽으로 따로 수련실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곽무진은 그 안에서 연단을 하고 있었다.

“뭐 하세요?”

“보면 모르겠냐?”

“구경해도 돼요?”

“마음대로….”

장소천도 잠령각에 다닐 때 연단술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소질도, 재미도 없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무척 흥미로웠다.

그가 환생하기 전.

삼십 년 동안 반응기에 매달려 제품을 합성하고 품질을 분석했던 경험 때문인 듯싶었다.

‘어!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곽무진이 연단을 하는 것을 지켜보던 장소천의 아미가 몇 번이나 찌푸려졌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만행을 조장이 몇 번이나 저지르고 있어서였다.

그렇다고 지적하기에도 뭐해서 장소천은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보았다.

연단이 거의 끝날 즈음.

피시식.

단로 안에 들어 있던 약재가 불에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깜짝 놀란 조장이 뚜껑을 열고 안에 물을 부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까운 약재가 시커먼 재로 변해 물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휴우!

한숨을 내쉰 조장이 장소천을 바라보며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부조장이, 찾아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살펴보고 오라고 했어요. 지금 살아 있는 것 맞죠?”

“아니. 죽어가고 있다고 전해라.”

“그렇게 전할게요. 그런데 지금 어떤 영단을 만들고 있어요?”

“황정단이라고 연기기 수사들에게 좋은 단약이다. 이것을 먹고 운기조식을 하면 경지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다 실패하셨네요?”

“아니, 한 번은 성공했다.”

그러면서 단약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장소천이 보아도 뭔가 조잡해 보였다.

먹어도 수행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그것이 황정단이에요?”

“아, 아니…. 황정단은 아니고. 그보다는 약효가 떨어지니 반정단이라고 불러야 맞을 듯싶다.”

“효과는요?”

“원래의 삼 할 정도….”

“그렇다면 반정단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네요. 그냥 버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픈 가슴을 너무 후벼 파지 마라.”

“네. 연단은 이제 그만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나는 애초 포기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다.”

“조장님은 왠지 그러실 것 같아요. 조금 더 구경해도 되죠?”

“마음대로 해라.”

이번에 장소천은 황정단을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구경할 수 있었다.

단로를 청소하고 물을 부어 끓인 다음에 순서에 따라 약재를 넣었는데, 가끔씩 손바닥으로 열기를 불어넣어 단로를 가열하고 부채로 냉각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용물이 끈적이면 연단을 멈추었는데 반고체 상태로 변한 약액을 꺼내서 둥글게 뭉쳐놓은 것이 바로 단약이었다.

물론 이번에도 실패였다.

“왜 실패했지? 이번에는 감이 무척 좋았는데….”

‘감으로 했으니까 실패했죠.’

목구멍 밖으로 이 말이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장소천은 애써 자제했다.

그리고 신식으로 연단로 속을 바라보다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태우지 않았네요. 몸에 좋은 것이니 물처럼 쭈욱 마셔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요?”

“단약을 물처럼 마시라고?”

“안 될 것도 없잖아요? 어차피 배 속으로 들어가면 똑같을 것인데….”

장소천이 보기에 단로 속에 든 액체는 약효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반응도 미진했고 가열하면서 약 성분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순물도 많았다.

그래도 성공한 적이 있다면서 보여주었던 단약보다는 이것이 더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하하하!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무릇 단약이란 이 세상처럼 둥글고 완전한 형태의 환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우리 몸속의 영액인 타액과 함께 골고루 씹어 먹어야만 한다. 영단 속에 우주의 이치가 들어 있는데 어떻게 물처럼 마실 수 있겠느냐?”

“버릴 것이면 저한테 주세요.”

“저딴 것을 어디에 쓰려고?”

“황정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재를 보면 부선화, 백련초의 뿌리, 영지, 황청수액…. 하나같이 귀하고 비싼 것들이잖아요.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요. 가져다가 연구 좀 해보려고요.”

“알았다.”

곽무진이 연단로를 기울여 안에 든 액체를 커다란 호리병에 담아 주었다.

찰랑, 찰랑.

장소천이 곽무진의 방을 나서며 앞으로도 이런 불량품이 나오면 모아서 다 자신에게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약초값이라며 탁자 위에 영석 한 개를 올려놓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제8화 : 소뢰부(小雷符)

부조장은 생활관에 없었다.

그래도 지나가는 길에 한 사저를 만나 그에게 조장이 단약을 만드느라 바쁘다는 말을 전해주었다.

자신에게 조장의 소식을 왜 알려주는지 영문을 몰라 하는 한 사저를 뒤로하고 장소천은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종이 한 장을 꺼내 조장이 연단했던 방법을 그대로 적어 보았다.

다음에는 단방에 사용되는 약재들의 효용과 역할을 분석하였는데 그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약재와 약재가 만나 독성을 중화하고 원래의 기능을 강화하거나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약재는 반응에서 촉매 역할만 할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약효도 없었다.

그래도 끈질기게 분석한 결과 장소천은 약재들의 역할과 효과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쪼르르르.

장소천이 호리병 속에 든 약액을 작은 그릇에 부었다.

그리고 두 눈으로 살펴보니 구성 성분과 반응 진척도까지 알 수 있었다.

어떤 단계에서 어느 정도의 열을 얼마나 오랫동안 가해주어야 하는지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유추한 것이 반드시 맞다고는 할 수 없었다.

반응에 사용된 물과 기압.

그리고 연단실의 온도와 습도까지….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인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장소천은 그릇에 따랐던 약액을 다시 호리병에 담았다.

그러고는 생활관 옆에 붙어 있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솥단지 속에 부었다.

화르르르.

솥단지 위에 커다란 돌멩이를 올려놓은 장소천은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센불로 졸이기 시작했다.

반 시진 후.

장소천이 솥을 열자 약액이 바닥에 바짝 눌어붙어 있었다.

그것을 주걱으로 긁어모아 둥글게 뭉치자 그럴듯한 환단이 세 개나 만들어졌다.

조장이 보여주었던 것보다 효과가 좋은….

그렇지만 자랑하거나 판매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이었다.

솥을 씻고 주방을 정리한 장소천이 이번에 향한 곳은 막장의 숙소였다.

“뭐 하냐?”

“그냥. 할 일도 없고 해서…. 부적을 그리고 있었다.”

“부적?”

놀랍다는 듯이 장소천이 막장의 방을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니 막장의 방은 괴황지로 가득했다.

거의가 실패작들….

그래도 영기를 머금은 것이 몇 장은 보였다.

타악!

붓에 경면주사를 찍어 경건한 자세로 부적을 그리던 막장이 소리 나게 붓을 내려놓았다.

“전에 시장에서 싸우면서 깨달은 것인데 부적만큼 좋은 공격 수단은 없는 것 같더라. 나보다 훨씬 강한 놈인데도 부적 한 방에 나가떨어지더라고. 부적이 한 장만 더 있었다면 놈을 제압하고 너를 도와줄 수도 있었는데….”

“야! 그날 네가 잘 싸워준 덕분에 나도 용기를 내서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거다. 그놈들이 우리에게 덤빈 이유가 뭔지 아냐?”

“자기들이 강하다고 생각했겠지.”

“맞아. 그러니 우리도 이 약을 먹고 빨리 수련 경지를 높이자.”

“뭔데?”

“경지를 높여주는 영단.”

“진짜?”

“그럼 가짜겠냐?”

스윽!

장소천이 막장에게 황정단 두 개를 내밀었다.

영근속성이 부족한 막장에게 더 많은 환단을 준 것이다.

“먹어도 되지?”

“그럼. 그것도 공짜다.”

공짜라는 말에 막장은 황정단 두 개를 날름 집어 갔다.

“하루에 한 알씩만 먹어라!”

문밖으로 나갔던 장소천이 다시 머리를 안으로 디밀었다.

“부적을 완성하면 나도 몇 장 줄 거지?”

“당연하지.”

씨익!

웃음을 지은 장소천은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황정단을 먹고 운기조식을 한 결과 단전이 조금 묵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삼 일 후에 장소천은 또다시 조장을 찾아갔다.

“왔냐?”

“오늘도 연단 중이세요?”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끝을 봐야지.”

“약재값은 다 어떻게 충당하세요?”

“저번에 많이 벌었잖아. 공헌점수도 있고….”

“그 돈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이제 거의 다 떨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조장의 방 한쪽에는 불량품이 꽤 많이 놓여 있었다.

불에 타서 완전히 못 쓰게 된 것을 제외하면 연단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하신 거예요?”

“무슨 소리? 저기를 봐라.”

조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과연 영단처럼 생긴 황정단 세 알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여전히 약효는 부족했다.

“실력이 많이 느셨네요.”

“아직은 성공률이 일 할도 안 된다. 그래도 차츰 나아지고는 있다.”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장소천이 보기에는 지금 만들어진 것도 전부 불량품이었다.

반정단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그보다도 약효가 조금 더 떨어졌다.

“만들어진 황정단은 시장에 내다 팔 생각이다. 그것으로 다시 약재를 사서 연단을 하고….”

“그러면 약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그랬으면 좋을 것 같지만 지금은 벌어들이는 것보다도 쓰는 돈이 훨씬 많다.”

“불량품은 제가 사 갈게요. 그러면 조장님께서 조금 더 버티실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하면 나야 좋지만….”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것도 제가 다 사 갈게요. 저번처럼 한 병에 영석 한 개로요.”

“너무 비싸게 사 가는 것 아니냐?”

“몰라서 그러시는가 본데 저 부자거든요. 그런데 불량품의 상태가 예전보다는 좋아진 것 같아요.”

“그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조금만 지나면 불량품보다는 정품을 더 많이 생산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연단하는 거 구경해도 되죠?”

“지금도 하고 있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번에 장소천은 더 오랫동안 연단을 지켜봤다.

그러면서 조장의 실력이 늘었음을 확연히 알게 되었다.

조장뿐만이 아니었다.

오늘 연단 과정을 지켜본 덕분에 장소천은 연단에 사용된 약재들의 역할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약재를 투입해야 할 시점을 정확히 알 수 있었고 열을 가하거나 온도를 내려야 할 시간까지 특정할 수 있었다.

연단을 두 번 지켜보면서, 장소천은 황정단의 약효를 늘릴 방법을 궁구했다.

그 결과.

연단에 사용된 약재 한 가지가 잘못 처리되었고, 순수하지 못한 물을 사용하였으며 저온 반응시간이 짧고 적절하지 않은 시점에 증기 배출구를 열고 닫은 것을 확인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열전달 속도.

조장이 열양지기로 불어넣은 열기가 단로 가장자리만 뜨겁게 달구고 안쪽까지 골고루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미반응이 나오는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세밀하게 따지면 이것 말고도 고쳐야 할 점이 열 가지는 더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구경할게요. 다음에 다시 와도 되죠?”

“물론이다.”

조장에게 꾸벅 인사를 한 장소천은 불량 제품을 모두 들고 방문을 나섰다.

탁자 위에는 영석 다섯 개를 올려놓았다.

주방에 와서 약을 졸이던 장소천은 조장에게서 얻어온 약재 몇 가지를 솥단지 안에 넣었다.

미반응된 약액을 추가로 반응시키기 위해서였다.

화력이 좋은 장작으로 불의 크기를 최대로 키운 장소천은 주걱으로 솥을 저어줬다.

그러다가 반응이 완료된 것을 확인하고는 아궁이에 있는 장작을 전부 밖으로 꺼냈다.

치이익!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찬물을 붓자 뜨겁던 솥은 빠른 속도로 식었다.

솥단지 반응이 완료된 후.

장소천이 뚜껑을 열자 안에서 진한 약향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약효가 한층 높아진 덩어리를 주걱으로 긁어모으자 환단이 무려 열여섯 개나 만들어졌다.

조장이 정품이라고 말한 황정단보다 약효가 더 뛰어난 것이었다.

“이걸 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던 장소천은 부적을 그리느라 온몸이 경면주사로 물든 막장에게 찾아가서 이번에는 환단 세 개를 전해주었다.

“이번에도 공짜냐?”

“아니, 빚. 나중에 부적으로 갚아라.”

“아직 한 장도 성공시키지 못했는데…. 진짜로 나중에 갚아도 되는 거지?”

“물론이지.”

“그럼 공짜나 마찬가지네. 고맙다.”

막장은 덥석 황정단을 채트렸다.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퍼먹을 막장이었다.

“저번에 준 영단은 다 먹었지?”

“응. 그런데 효과가 끝내 주더라. 이렇게 좋은 영단을 도대체 어디에서 구했냐? 시장에서 샀냐?”

“뭐…. 뭐 그런 셈이지. 그런데 이번 것은 저번보다 약효가 더 좋을 것이다. 먹다가 놀라지나 말아라.”

“진짜?”

“속고만 살았냐? 어쨌든 빚 갚으려면 부적 열심히 만들고….”

“그래야겠다. 지금이라도 몇 장 줄까?”

“대충 만든 것 말고. 그런데 무슨 부적이기에 방 안이 이렇게 엉망이냐? 집기도 다 불에 타고….”

“흐흐흐. 소뢰부(小雷符)라고 무려 뇌전을 불러내는 부적이다. 기대해도 좋다.”

“뇌전을 불러낸다고?”

“그래. 이제 성공도 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데 뭐?”

“혹시 돈 좀 빌려줄 수 있냐? 부적을 만드는 것이 이렇게 돈이 많이 들어가는 줄은 진짜 몰랐다.”

“이번에 영석 많이 받았잖아?”

“다 썼다. 공헌점수도 이제 별로 없고….”

“어떻게 갚으려고?”

“소뢰부를 만들면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려고 한다. 숙달되면 쓰는 것보다는 많이 벌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 조장과 생각하는 것이 똑같았다.

그렇다고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워서 장소천은 피 같은 영석 열 개를 빌려주고 말았다.

‘투자. 그래 이것은 투자이다.’

이렇게 되뇌면서….

숙소로 돌아온 장소천은 황정단을 하루에 한 개씩 먹으면서 며칠 동안 운기조식을 했다.

영근속성이 네 개로 늘어난 덕분인지 그의 단전은 황정단에 들어 있는 영기를 쑥쑥 잘도 뽑아먹었다.

그러다 보니 단전은 몰라보게 커졌고 운용할 수 있는 영기도 부쩍 늘어났다.

공력이 높아진 장소천은 조원들이 사용하는 수련실에 가서 운월신법과 소요검법을 연습했다.

그러면서 간간이 사조께서 주신 검법서에 그려진 초식도 흉내 냈다.

그것을 본 상관천세가 큰 소리로 웃었다.

초식이 엉성한 것이 사람이 아닌 짐승, 그것도 하늘을 나는 요수가 펼쳐내면 어울릴 것 같다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늘을 나는 요수가 검을 들고 싸울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도 속는 셈치고 흉내를 내보았다.

“어!”

이상했다.

인간처럼 팔이 두 개가 달린 독수리가 하늘을 날면서 검식을 펼친다고 생각하자 초식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제약이 없어졌다고나 할까?

우우우우웅.

검식이 자유로워지자 영기를 잔뜩 머금은 청은검은 창공으로 날아올라 용틀임을 했다.

용이 포효하고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허공을 잔인하게 찢어 갈겼다.

검식이 걷잡을 수 없이 변화하자 장소천은 의식을 풀고 그냥 초식에 몸을 맡겼다.

섣불리 제어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솔직히, 초식을 어디서 끊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헉! 헉! 허어어억!

기력이 소진되었는지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지만 장소천의 얼굴에는 희열이 가득했다.

검법을 흉내 낸 것에 불과한데도 검에 대한 깨달음이 한층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소요검법을 훨씬 잘 펼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과연.

호흡을 가다듬고 소요검법을 펼친 결과 초식은 한결 유려하고 검 끝은 날카로워졌다.

그에게 검법을 전수해 주신 검사부와 비견될 만한 움직임이었다.

장소천이 사조께서 주신 검법을 흉내 낼 적에는, 상관천세는 별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사문의 검법인 소요검법을 능숙하게 펼쳐내자 깜짝 놀란 표정으로 수련조차 멈추고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제의 검술이 언제 이렇게 발전했지? 저 정도면 연기기 오성과 붙어도 밀리지 않겠구나.’

급기야 상관천세는 장소천에게 비무를 제안했다.

“저하고요?”

“그래. 대신 소요검법만 사용해서…. 어때?”

“부조장님이 도와주면 저는 고맙지요. 시작할까요?”

“들어와라!”

상관천세가 자신의 수련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던 장소천은 사양하지 않고 방금의 깨달음을 검초에 실어 그를 공격했다.

그러다가 밀리면 방어 초식으로 대응하고, 안정되면 다시 공세로 변화시켰는데 싸우다 보니 상대의 검로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의 동작이 느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피릿!

장소천의 청은검이 공간을 꿰뚫고 눈앞으로 날아오자 상관천세는 기겁하며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청은검은 또다시 그를 가로막고 있었다.

정확히.

그가 갈 방향을 미리 선점하여 검 끝을 들이밀고 있었다.

피하지 못할 것을 감지한 상관천세는 봉인해 두었던 영기를 풀고 검 끝으로 장소천의 검 면을 내리쳤다.

빙글.

놀랍게도 장소천의 검이 반 바퀴 휘돌더니 그의 검 끝을 피해냈다.

하지만.

휘리리리릭.

나선형으로 회전한 상관천세의 검세에 말려 장소천의 검은 끝내 한쪽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사이에 거리를 벌린 상관천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너, 뭐냐?”

“뭐가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너 천재냐?”

“아닌데요.”

“그런데 어떻게…. 한 번만 더해볼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번째 결투도 양상이 똑같았다.

장소천이 신기한 능력을 발휘하자 상관천세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영기를 해제하고서야 가까스로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결국.

결투에서 깨달음을 더 많이 얻게 된 것은 부조장인 상관천세였다.

검을 내려놓고 가부좌를 한 상관천세는 명상에 돌입하더니 깨어날 줄을 몰랐다.

제9화 : 천리협곡으로 들어가다

부조장이 명상수련에 돌입하자 장소천은 어쩔 수 없이 수련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조장에게 갔는데 의외로 방 안이 깨끗했다.

“연단은 안 하세요?”

“약재가 다 떨어졌다.”

“어떤 것이요?”

“며칠 전에 시장에 갔는데 백련초 뿌리가 다 떨어졌다고 한다. 보관하던 것이 다 썩었다고…. 하필이면 본문에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연단을 쉬는 중이다.”

“그러셨군요. 정품 단약은 좀 만드셨어요?”

“다행히 마지막에 몇 개 만들었다. 그중 반절은 시장에 팔았고….”

“가격은 잘 받으셨는지 모르겠네요?”

“한 개에 영석 열 개. 다행히 손해는 보지 않은 것 같다.”

“와아! 축하드립니다.”

“축하받을 정도는 아니고…. 필요하면 저것도 가져가라. 이번에는 공짜이다.”

장소천이 바라보니 구석에 잘못 만들어진 약액 두 병이 놓여 있었다.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로 휴일이 끝났네요.”

“그래 내일은 아침 일찍 산행을 떠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저녁 무렵에 생활관에서 들려주마.”

“알겠습니다. 참! 저번에 제가 다쳤을 때 조장님 장점은 나중에 말해주겠다고 한 말 기억하세요?”

“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더냐?”

“아니요. 제가 장점을 말하면 조장님이 부끄러워하실 것 같아서요. 조장님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근성이 있어요. 그리고 생각이 넓고 자유로우며 무척 인간적이세요. 한마디로 대기만성의 그릇이지요.”

“좋은 말이냐?”

“제가 꼭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로요. 공짜라고 하시니까, 저것은 제가 가지고 갈게요.”

“그래. 조금 이따가 생활관에서 보자.”

“네.”

조장의 숙소에서 나온 장소천은 곧바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황정단을 여덟 개나 만들었다.

이제 장소천의 건곤대에는 반정단에 가까운 황정단이 열일곱 개나 들어 있었다.

일조 생활관.

조원들이 다 모이자 곽무진은 목갑을 하나씩 선물했다.

목갑을 처음으로 받은 상관천세가 물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내가 직접 만든 황정단이다.”

“황정단이요? 이거 엄청 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장님께서 직접 연단을 하셨다니…. 혹시 이거 독약 아닙니까?”

“먹기 싫으면 내놓아라.”

“어이쿠! 아닙니다. 조장님께서 주신 것이니 독약이라고 해도 고맙게 잘 먹어야지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한 사매도.”

“그리고 막 사제와 장 사제도 하나씩….”

“잘 먹겠습니다.”

조장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도 장소천은 미안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은 막장에게 몇 개 준 것을 빼고는 혼자서 다 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조장은 아낌없이 나눠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은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영혼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들통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더 큰 것으로 보답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그나마 미안한 마음이 덜해졌다.

조원들에게 영단을 나누어준 곽무진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첫 번째로 만든 영단이니 너희들을 먼저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먹어라.”

“고맙습니다.”

“그리고 내일 산행이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내일 우리가 갈 곳은 호국성 너머에 있는 천리협곡이다. 채약을 하다가 요족과 마주칠 수도 있으니 병장기도 챙겨야 한다. 참고로, 내일 산행은 당주님도 참석할 것이다.”

“당주님이오?”

“그래. 천리협곡을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요족 말고도 사나운 요수와 괴물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려는 것이다.”

천리협곡이라는 말에 기대와 걱정이 상존했었던 조원들은 연신기 고수인 당주님이 함께한다는 소리에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당주님이 보호해 주신다면 마음 놓고 채약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리협곡에서 위험한 상황을 맞닥트릴 수도 있으니 무장을 단단히 하라는 말을 끝으로 조장은 해산을 명령했다.

장소천이 숙소 쪽으로 걸어가는데 막장이 부적 세 장을 건네주었다.

“소뢰부인데 오늘 아침에야 겨우 완성했다. 부적을 사용하는 방법은 잠룡각에서 배웠지?”

“그럼. 그런데 위력은 어느 정도이냐?”

“보름 전에 흑룡애에서 보았던 독각철우 기억하냐?”

“응.”

“소뢰부 세 장이면, 기절시킬 수 있을 거다.”

“죽이지는 못하고?”

“그게 쉽겠냐? 조장하고 부조장, 그리고 한 사저까지 합공해서 겨우 죽인 놈인데….”

“네 말이 맞다. 고맙다.”

“고맙기는…. 네가 준 영단값에 비하면 아직도 한참 모자란다. 나중에 몇 장 더 그려 줄게.”

“사양하지는 않으마. 그런데 부적은 만들만 하냐?”

“아니.”

장소천의 말에 막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패할 확률도 무척 많고, 법력과 의식이 과도하게 소모되어 몇 장만 그리고 나면 몸이 추욱 늘어진다. 그야말로 수명을 갈아 넣는 기분이다.”

“휴우! 쉬운 일이 없구나.”

“세상일이 다 그렇지 뭐. 내일 아침에 보자.”

“잠깐만!”

“왜?”

“이것 가져가라. 어디 가서 내가 줬다고는 하지 말고…. 들키면 그냥 공헌점수로 샀다고 말해라.”

장소천이 준 목갑을 열어본 막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목갑 속에 황정단 세 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막 퍼 줘도 되는 거냐?”

“공짜는 아니다. 나중에 소뢰부로 갚아라!”

“…고맙다.”

“들어가라.”

“그래.”

* * *

다음 날 아침.

채약당의 당주인 투곤은 연신기 고수답게 크고 빠른 비행 법기를 가지고 있었다.

배에 날개가 달린 형태.

그런데 날아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조장이 가진 묵귀선보다 두 배는 빠른 것처럼 보였다.

“막장아! 이런 거 하나 사려면 영석이 얼마나 필요할까?”

“그냥 꿈 깨라. 저번에 시장에 갔을 때 물어봤는데 나뭇조각처럼 생긴 것도 하품 영석 삼백 개를 달라고 하더라. 이 정도면 오만 개는 줘야 할 거다.”

“오만 개? 엄청 비싸네.”

“법기잖아.”

부러운 눈빛으로 비행 법기를 바라보던 장소천이 머리를 흔들었다.

비행 법기를 가동하는 것은 영석.

그러니 지금은 공짜로 줘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더 싼 것은 없데?”

“있기는 있어. 그런데 내구도가 많이 떨어지고 운행할 때 영석 소모량이 엄청나게 많다고 하더라고.”

“에휴! 그냥 뛰어다녀야겠다.”

“경지를 높여 검선처럼 검을 타고 날아다니면 되잖아. 물론 그러려면 연기기 십성은 되어야겠지만….”

“연기기 십성? 차라리 그게 더 빠르겠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돈을 벌어서 영단부터 구입하자. 우리 같은 저계 수사들은 황정단 백 개 정도만 먹어도 경지 향상이 가능할 것이다.”

“운기조식은 포기했냐?”

“그럴 리가. 그래도 영단 쪽이 훨씬 빠르잖아.”

“깨달음이나 그런 것은?”

“그것은 고계 수사들 얘기고….”

“…….”

그런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호국성이 눈앞에 들어왔다.

호국성은 천리협곡을 사이에 두고 인족 경계에 지어진 거대한 성이었다.

요족 경계에 세워진 성의 이름은 요성.

그사이에 방충(防衝) 구역으로 남겨진 공간이 천리협곡인데 너비는 좁아도 길이는 수만 리에 이르렀다.

원래는 침입 금지구역.

하지만 그 안에 널린 천지이보와 약초 때문에 지금은 거의 통제구역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호국성에 들려 군위장에게 인사를 하던 일행은 뜻밖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천약전의 백초각에서도 사람을 보냈다는 말이었다.

잠시 후.

군위장의 방으로 백초각의 제자들이 들어왔는데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시장에서 마찰이 있었던 일조였다.

파파팟!

곽무진과 백초각의 일조 부조장인 고각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각기 채약당과 백초각의 조장과 부조장.

우연찮게도 둘 다 모두 일조였다.

그러니 이번 채약에 자존심이 걸려 있는 것이다.

상대보다 더 많은 약초를 채취하겠다고 독 오른 독사처럼 잔뜩 벼르고 있는 두 사람과는 달리 채약당주와 백초각의 화운 사이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백초각의 일조 조장인 화운은 연신기 고수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채약당주를 바라보는 눈길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진 투곤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화운! 오래간만이오.”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아요. 그리고 가급적 우리와 떨어져서 채약을 하기 바랄게요. 무슨 말인지 알 것이라고 생각해요.”

휘익!

투곤에게 얼음처럼 싸늘하게 쏘아붙인 화운 조장은 군위장에게 가볍게 보고한 후 천리협곡 안으로 사라졌다.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장소천이 전음으로 막장에게 물었다.

[왜 그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던 사이였냐?]

[한때는 부부였다고 들었다.]

[허억!]

장소천이 안쓰럽다는 듯이 투곤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끔씩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 후.

군위장에게 보고를 마친 일행은 마침내 천리협곡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현귀봉의 이름을 걸고 처음으로 입곡 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일행이 목표한 곳은 귀혈곡.

수만 년 전에 그곳에서 인족과 요족이 전쟁을 벌여 무수한 생령이 묻혔다는 장소였다.

오랜 세월 채약사들의 발끝이 머물지 않았기 때문인지 귀혈곡까지 가는 동안에도 귀한 약초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일행은 한 번도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목표한 귀혈곡에 가면 더 많은 약초들을 채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길을 가던 도중에 장소천의 눈빛이 크게 한 번 흔들렸다.

파란색 광채.

그것도 선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귀혈곡에 도착한 조원들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했다.

약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약초나 캘 수는 없었다.

비싸고 귀한 약초.

그것들만 골라 건곤대를 채워야 했다.

당주가 참석했지만 명령권자는 조장이었다.

“세 시진 후에 이곳에서 다시 모인다. 질문이 있는 사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지금부터 채약을 시작한다. 위험한 일이 닥치면 신호구를 터트려라. 가자!”

곽무진의 말이 끝나자 일조 조원들과 투곤까지도 숲속으로 흩어졌다.

그들의 어깨 위에는 어느새 망태기가 걸려 있었다.

휘이익!

연기기 삼성으로 올라가고 황정단을 꾸준히 먹은 덕택에 장소천의 운월신법은 장족의 발전을 하였다.

신법을 펼치면 발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파란색 광채가 궁금했던 장소천은 망설임 없이 왔던 길로 뒤돌아갔다.

그러다가 이번에 조장이 황정단을 만들려다, 약재를 구하지 못해 연단을 중지했었던 백련초 군락지를 발견했다.

와우!

환호성을 지른 장소천은 주저 없이 뿌리를 채취했다.

사조님이 주신 건곤대는 광활할 정도로 커서 이 정도 양으로는 표시조차 나지 않았다.

그래도 장소천은 수령이 오래된 것만 골라 적당히 채취했다.

약초를 캐고 다시 신법을 펼친 장소천은 거의 이각이 지나서야 광채가 흘러나오는 곳에 도착했다.

그런데 낭패였다.

광채가 흘러나오는 장소는 커다란 늪이었는데 근방에 악어처럼 생긴 커다란 요수들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멀어 신식조차 불가능한 상황.

늪 속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것을 차지하려면 요수들을 물리쳐야만 했다.

쩌어억!

요수 한 마리가 입을 벌렸는데 그 모습이 흉포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리면 즉사.

가죽은 또 얼마나 두껍고 단단한지 청은검으로 찌르면 검날이 튕겨 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리 고민해도 놈들을 쫓아내고 보물을 쟁취할 자신이 없던 장소천은 미련을 버리고 늪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귀혈곡으로 뒤돌아가다가 뜻밖의 광경을 구경하게 되었다.

첨벙.

악어 요수는 보물 근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요수 한 마리가 늪 근처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했다.

이 정도면 포기할 만도 하건만 요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나무 위에 달린 붉은색 과일을 노려보고는 허공으로 뛰어도 보고 포악한 송곳니로 줄기를 깨물기도 하였다.

쿠웅!

그러다가 길쭉한 꼬리로 나무를 후려쳤는데 그 충격으로 과일 하나가 아래로 떨어졌다.

첨벙.

과일이 늪에 가라앉기도 전에 요수는 몸을 던져 과일을 물었다.

꿀꺽!

그러고는 몇 번 씹지도 않고 삼켜버렸다.

과일을 먹은 요수는 어슬렁거리며 다른 곳으로 기어갔다.

요수가 완전히 사라지자 장소천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붉은색 과일을 따서 일부는 건곤대로 넣고 일부는 망태기에 담았다.

휘이익!

다시 보물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 장소천은 바람이 부는 방향을 살펴 잘 익은 과일 하나를 늪 위로 던졌다.

그러자.

보물 주위에 있던 요수들이 냄새를 맡고는 미친 듯이 과일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첨벙, 첨벙.

그러고는 격렬하게 싸우며 과일 쟁탈전을 벌였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며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가장 사납고 커다란 요수가 과일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과일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과일 냄새가 맡아지자 요수들은 또다시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몇 개의 과일을 일렬로 던져놓았던 장소천은 마지막 장소에는 망태기에 남은 과일을 전부 쏟아버렸다.

그리고 운월신법을 펼쳐 보물이 있는 곳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장소천의 수련 경지는 연기기 삼성 초기.

그가 신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거리는 채 삼 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광채가 흘러나오는 곳에 도착하고도 보물의 실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늪 속에 숨어 있는 요수가 없다는 것.

첨벙.

망설임 없이 장소천은 늪 속으로 잠수해 들어갔다.

진흙처럼 끈적한 이물이 그를 가로막았지만 장소천은 손에 영기를 담아 헤엄치듯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십 장이나 들어왔을까?

땅속 깊은 곳에 커다란 돌멩이 몇 개가 발견되었다.

평범한 외양.

장소천같이 보물에서 흘러나오는 광채를 알아보는 눈이 없다면 신식에 걸리더라도 외면했을 것 같았다.

크기는 제각각이었다.

수박 크기 하나와 주먹보다 조금 큰 것 한 개.

그 옆에 손톱만큼 작은 것도 몇 조각 떨어져 있었다.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은 정체를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그것들이 파란색 광채를 뿜어낸 것을 확인한 이상 일단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우씨.”

그런데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주먹 크기밖에 안 되는 것을 드는 데도 단전에서 영기를 뽑아 올려야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다시 내려놓을 수는 없는 노릇.

영기로 건곤대를 연 장소천은 손에 든 돌멩이를 축소시켜 그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수박만 한 것도 낑낑거리고 들어 올려 가까스로 건곤대 속에 집어넣었다.

건곤대가 좋은 점은 물건을 넣고 뺄 때 크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게도 마찬가지.

아무리 무거운 물건이라도 건곤대 안으로 들어가면 가볍게 들고 다닐 수가 있었다.

작은 조각조차도 건곤대 속에 집어넣은 장소천은 전력을 다해 상부로 헤엄쳐 올라갔다.

그러다가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거대한 요수 한 마리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그를 향해 헤엄쳐 오고 있어서였다.

제10화 : 요족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