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 요족과 만나다
위기에 처한 장소천은 막장에게서 받은 부적지 한 장을 요수에게 쏘아 보냈다.
쐐애액!
부적지는 괴황지로 만들어졌지만 영기로 감싸 검처럼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부적지가 입 속으로 들어오자 요수는 혀로 그것을 감싸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바로 그때.
번쩍!
소뢰부가 폭발하며 요수의 혀와 목구멍에 구멍을 뚫고 입 속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끄아아악!
소뢰부에 당한 요수는 하늘이 떠나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뒹굴었다.
그사이에 늪 위로 올라왔던 장소천의 손에서 부적지 한 장이 다시 날아갔다.
번쩍!
츠츠츠츠츠.
장소천의 눈앞.
악어처럼 생긴 요수 한 마리가 온몸을 떨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장소천을 노리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던 요수였다.
늪 위로 올라왔지만 위험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장소천의 뒤를 수십 마리의 요수들이 따라왔다.
챙강!
설상가상으로 청은검조차 두 조각이 나고 말았다.
놀란 장소천은 건곤대 속에서 붉은색 과일 한 개를 꺼내 뒤쪽으로 던졌다.
휘익.
붉은색 과일이 늪 위로 떨어지자 그를 따라왔던 요수 절반이 과일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움을 벌였다.
다른 한 개를 던지자 거기서 또 반이 줄어들었고.
그렇게 늪을 완전히 빠져나온 장소천은 한적한 곳으로 가서 황정단을 먹고 소모된 영기를 보충했다.
터벅터벅.
지친 표정으로 귀혈곡으로 걸어가던 장소천은 어디선가 폭포 소리가 들려오자 갑자기 몸에 힘이 솟구쳤다.
휘이이익!
운월신법을 펼친 장소천은 일단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반각도 안 돼 커다란 폭포를 발견했다.
높이가 삼십여 장도 넘는 폭포수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요수나 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장소천은 용소(龍沼) 가장자리에서 몸에 묻은 진흙과 더러운 이물을 씻어냈다.
푸푸푸.
머리를 감고 얼굴까지 씻어내자 이제야 살 것 같았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깨끗하게 정화된 느낌이었다.
그때였다.
폭포수 속에서 희미하게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그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귀혈곡과 가까운 곳이었다.
싸우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동료일 가능성도 있기에, 장소천은 폭포 뒤쪽으로 헤엄쳐 갔다.
폭포 뒤에는 의외로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을 통해 절벽을 타고 올라간 장소천은 오래지 않아 바위 틈새에 숨겨져 있는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건곤대에서 부러진 청은검을 꺼낸 장소천은 검날에 영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몸을 웅크리며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동굴은 갈수록 넓어졌다.
그러다가 확 트인 공간을 발견했는데 그곳에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 한 명이 흉악하게 생긴 요괴와 싸우고 있었다.
요괴는 이장 반 크기에 머리가 두 개나 달려 있었다.
늑대와 호랑이를 닮은 머리에 다리는 두 개이고 팔은 네 개.
손에는 자신의 덩치에 어울릴 정도로 커다란 도와 무거운 철추를 들고 있었다.
쐐애애액! 붕, 붕!
요괴의 병기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종유석이 부러져 바닥에 떨어지고 석주와 동굴 바닥도 산산이 조각났다.
그에 반해 소녀는 두 자밖에 안 되는 작은 연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몸이 유연하고 동작이 빨라 요괴의 공격을 잘도 피해 다녔다.
허억! 헉! 헉!
그래도 지쳤는지 갈수록 동작이 느려지고 있었다.
요괴도 마찬가지.
소녀의 연검에 당해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저 몸으로 어떻게 무거운 병장기를 휘두를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후와와왕!
호랑이를 닮은 요괴의 머리가 동부가 떠나갈 듯한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고는 방어를 도외시한 채 소녀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위에서 덮쳐버렸다.
팔 하나쯤은 내주겠다는 각오.
깜짝 놀란 소녀는 연검을 풍차처럼 휘둘렀다.
그리고 몸을 눕힌 채 뒤로 날아갔다.
이에 요괴는 소녀가 물러나는 방향으로 철추를 던져 천장에 달린 종유석을 모두 부러뜨렸다.
우직끈. 뚜둑.
와르르르르.
불시에 퇴로가 막힌 소녀는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꽃처럼 붉은 입술을 앙다물며 얼마 남지 않은 요력을 전부 연검에 불어넣었다.
일순.
소녀의 검 끝에서 붉은색 검기가 비단 자락처럼 풀려나갔다.
그것은 요괴의 팔 하나를 자르고 호랑이 머리의 목조차 깊숙하게 갈라냈다.
하지만 요괴를 완전히 죽인 것은 아니었다.
호랑이를 닮은 요괴의 머리가 반쯤 잘려 목에서 대롱거리는데도 요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눈에서 잔인한 흉광을 발한 늑대 머리는 거대한 도로 소녀를 한칼에 내리쳤다.
아악!
자기도 모르게 소녀는 비명을 내질렀다.
도저히 피하지 못할 것을 직감한 것이다.
바로 그때.
번쩍!
어디선가 부적 한 장이 날아와 늑대 요괴의 머리를 터트렸다.
소뢰부에 늑대 머리가 통째로 날아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굴이 터지면서 두 눈은 멀고 안면이 피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끄아아악!
휘두르던 도조차 놓고 늑대 머리는 비명을 토해냈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소녀가 아니었다.
남은 기력을 전부 끌어 모아 늑대의 머리를 잘라냈다.
주춤주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요괴가 쿠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허억! 헉!
거친 숨소리를 내던 소녀가 고개를 돌려 석주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소녀가 바라보았던 석주 뒤에서 장소천이 빠져나왔다.
소녀의 수련 경지가 자신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게 된 장소천은 겸손하게 자신이 나서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우연히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때마침 불운을 겪고 계시기에 작은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저는 이만 밖으로 나갈 터이니 하시던 일을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장소천이 포권지례를 한 후 물러나려고 하자 소녀의 눈에서 이채가 반짝였다.
“잠깐!”
소녀의 입에서 인간의 말이 흘러나오자 장소천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요족.
감춘다고 감췄지만 그녀의 엉덩이 뒤에는 꼬리 세 개가 튀어나와 있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지요?”
“이곳 천리협곡은 금지구역으로 선포되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네. 자네는 약초를 캐러 온 것인가?”
소녀의 말에 장소천은 아직도 자신이 어깨에 망태기를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영락없는 약초꾼 행색이었다.
“맞습니다. 약초를 캐러 왔다가 폭포에서 잠시 쉬는데 싸우는 소리가 들려 호기심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이제 그만 약초를 채취하러 가야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약초를 찾고 있는가?”
“아무 약초라도 괜찮습니다. 약초꾼이 약초 종류를 가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자네 말이 맞네. 저 아래로 내려가면 귀하고 오래된 영초가 몇 뿌리 있을 것이네.”
소녀가 손가락으로 동굴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그런데도 장소천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안에 귀하고 오래된 영초가 자생하고 있다면 푸른색 광채가 입구 쪽으로 흘러나올 터….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뭘 하는가? 이것은 나의 성의이니…. 아하! 자네가 나의 말을 믿지 않는 모양이군.”
“귀하고 오래된 영초가 있는데 왜 직접 채취하지 않으셨는지요?”
“영초가 금제진 속에 들어 있었네. 해진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는 저놈이 나를 쫓아왔고….”
소녀가 턱으로 죽은 요괴를 가리켰다.
요괴에게 쫓겨 영초를 캘 겨를이 없었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장소천이 움직이지 않자 소녀가 또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연기사이네. 영초 따위는 사실 별 흥미가 없네.”
“연기사요?”
“그래. 이곳 천리협곡에 연기재료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 삼 일 전에 들어왔네. 그런데 소문과는 달리 쓸 만한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더군. 물건은 못 찾고 요괴를 만나 몸만 상하고 갈 것 같네.”
연기사라는 말에 장소천의 눈썹이 위로 들려졌다.
그녀가 연기사라면 자신이 발견한 돌덩이의 정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돌덩이를 꺼내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인간이나 요족이나, 가끔은 탐욕 때문에 죽고, 탐욕 때문에 살생을 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보다도 소녀는 마음이 선량했다.
“오늘 처음 만났으니 나를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네. 그래도 나를 살려준 값을 치르고 싶으니 따라오게!”
망설이던 장소천은 결국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의 경지에 자신을 공격하려면 굳이 밑으로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
꼬리가 세 개인 적호.
도행이 수백 년에 이르렀다는 증거였다.
소녀를 따라 동굴 아래로 내려간 장소천은 영초가 어디 있는지 주위를 훑어보았다.
하지만 소녀가 말한 영초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 영초가 금제진 속에 들어 있다고…. 거의 해진한 줄로 알았는데, 아니었군.”
피리릿!
소녀가 건곤대에서 진법 깃발을 꺼내 금제진 속으로 던졌다.
직후.
금제진 안에서 붉은 기운이 크게 번져 나와 소녀가 던진 깃발을 공격했다.
그런데 소녀가 던진 깃발도 만만치 않았다.
우우우웅.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자주색 광채를 퍼트리더니 붉은색 기운과 어우러져 싸우기 시작했다.
자주색 기운이 밀리는 듯싶자 소녀의 아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팟팟팟!
소녀의 손에서 또다시 진법 깃발들이 날아갔다.
그것들은 자주색 안개가 되어 용과 범처럼 날뛰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붉은색 기운은 뒤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제야 영초에서 초록색 광채가 흘러나왔다.
이전에 구엽선지초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더 진한 광채였다.
“지금이네. 빨리 영초를 채취하게!”
소녀의 외침에 장소천은 재빨리 영초밭으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십여 그루에 달하는 영초를 전부 캐서 그의 망태기에 담았다.
장소천이 영초밭을 물러난 순간.
우우우웅.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든 것처럼 진법 깃발들이 울음을 토해냈다.
이에 소녀는 손을 저어 그녀가 던진 깃발을 전부 회수했다.
장소천이 망태기를 소녀 앞에 내어놓자 그녀는 또다시 손을 저었다.
“그것들은 모두 자네 것이네. 나의 목숨을 구해준 대가라고 생각하게.”
“저는 그저 부적 한 장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대가치고는 너무 과합니다.”
장소천이 혼자서 다 가질 수 없다고 말하자 소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장소천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나는 요족인 적호족의 공주이네. 그런데도 나의 목숨값으로 과하다는 말인가?”
“아무리 공주님이라고 하셔도 이것은 너무….”
장소천이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망태기에 들어 있는 영초는 모두 세 종류였다.
천봉백작화 세 뿌리와 용설초 일곱 뿌리.
나머지 하나는 장소천이 이름조차 모르는 것이었다.
문제는 세 종류의 약초가 모두 수령이 천 년을 넘었다는 것이었다.
그중 몇 뿌리는 이천 년에 육박했고….
“나는 연기사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영초가 아무리 귀해도 연기재료에 비할 바는 아니네. 나는 적호족의 대공주인 은단비이네. 자네 이름은 어떻게 되는가?”
“저는 극천문의 제자인 장소천이라고 합니다.”
“나는 요족이고 자네는 인간이니 다음에 만나면 우리는 필경 싸우게 될 것이네. 그래도 자네를 만나면 한 번쯤은 목숨을 구해주지.”
“고맙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 수 있겠는지요?”
“부탁? 생긴 것은 그렇지 않은데 조금 뻔뻔하군. 마지막으로 그 부탁까지 들어주지. 무슨 부탁인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너무 큰 은혜를 입었기에 장소천은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늪에서 발견한 돌덩어리였다.
그것이 가치가 있는 물건이라면 일부라도 건네줘서 자신의 과도한 이익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
장소천이 그녀에게 내민 것은 손톱보다 작은 조각이었다.
그런데.
작은 돌멩이를 본 소녀가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얼굴이 붉어지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장소천에게 물었다.
“이… 이것을 어디에서 발견한 것인가? 혹시 이것 말고 더 가진 것은 없는가?”
“물건의 이름부터 알 수는 없을까요?”
“이것은 은정(銀晶)이라고 하네. 천지이보로서 가치를 산정할 수 없이 귀한 연기재료이지. 이것을 조금만 섞어도 법기와 법보의 위력이 높아진다네.”
장소천이 생각하기에 은정이 아무리 귀해도 그가 얻은 영초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건곤대에서 주먹만 한 덩어리를 꺼내 내미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그나마 귀하다니 다행이네요. 오늘 늪지대에서 우연히 발견한 보물입니다. 제 목숨까지 살려주신다고 하니 이것은 선물로 드릴게요.”
“이 귀한 것을 내게 선물로 주겠다고?”
장소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단비는 넋이라도 나간 표정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건곤대에서 검 하나를 꺼내 장소천에게 건네주었다.
“자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방금 나한테 준 은정은 값을 산정할 수 없이 귀한 천지이보이네. 그러니 이것이라도 받게.”
“검이네요?”
“상고시대의 유적지에서 발견한 혼원신검(混元神劍)이네. 이 검은 사악하고 요사스러운 것과는 상극의 기운을 담고 있다네. 내가 배운 검술과는 상성이 맞지 않아서 가지고만 다녔는데 마침내 제 주인을 만나게 된 것 같군.”
사양해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검을 보는 순간 마치 영혼이라도 이어진 듯 손이 저절로 나갔기 때문이다.
스르릉.
검을 뽑아 검날을 살펴본 장소천의 눈에 기광이 번쩍였다.
검날에 문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 세 글자가 사조께서 주신 검법서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제11화 : 혼원신검(混元神劍)
“은 수사! 이 검을 혼원신검이라고 하셨는데 검날에 새겨진 문자를 보고 부르신 것입니까?”
“상고시대의 글자를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본 족에 옛 문자를 잘 아시는 분이 한 분 계시네. 그분께서 해석하셨네.”
“혹시 그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자네가? 왜? 상고시대의 술법서라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을 가지고 뭔 고민을 하고 있는가? 내가 그분에게 부탁해서 문자를 해석하는 책자를 한 부 만들어 전달해 주겠네. 이제 고민이 풀렸는가?”
“그게 가능합니까?”
“어려울 것은 또 무엇인가? 참! 자네가 살고 있는 봉우리는 어디인가?”
“현귀봉입니다.”
“그럼 더욱 간단하겠군. 수일 내로 책자를 전달해 줄 터이니 기대하게.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헤어지세.”
“공주님께 오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나 또한 만족스러운 거래였네. 장 수사! 그럼 나중에 보세.”
그 말을 끝으로 은단비의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은단비가 동부 밖으로 나가자 장소천은 혼원신검을 뽑아 소요검법을 펼쳐보았다.
그런데 너무 만족스러웠다.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듯 손에 착 달라붙어 장소천이 원하는 대로 검과 마음이 함께했다.
서걱!
천장으로 뛰어오른 장소천이 혼원신검을 떨쳐 종유석 하나를 잘라냈다.
영기를 싣지도 않았건만….
종유석은 유리면처럼 매끈하게 잘려 동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에 고무된 장소천은 몇 번이고 소요검법을 펼쳤다.
그러다가 떠날 시간이 임박한 것을 감지하고 그제야 검을 거둔 후 동부를 빠져나갔다.
휘이이익!
운월신법을 펼쳐 귀혈곡으로 간 장소천은 뜻밖의 상황을 목도하고 말았다.
끼에에엑!
까르르르르.
수천 구의 악귀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동료와 백초각의 고수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악귀는 종류가 다양했다.
인간의 모습을 한 것도 있었고 요수나 허깨비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푸욱!
사마귀를 닮은 악귀 한 마리가 백초각의 고수에게 달려들더니 그의 정수리에 날카로운 발톱을 박아 넣었다.
끄으윽.
백초각의 고수가 비틀거리자 천지사방에서 악귀들이 그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그를 바닥으로 쓰러트리고 눈을 뽑고 살을 파먹기 시작했다.
서걱!
죽어가던 고수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영기가 실리지 않았는지 검날은 악귀들의 몸을 허망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허깨비인 양….
그의 검에 베인 악귀들은 까르르 웃으며 그의 정기를 앞을 다투어 뽑아먹었다.
사각사각.
어떤 악귀는 뼈조차 갉아먹었다.
이를 본 화운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진 조원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품속에서 파란색 구슬을 꺼내 하늘로 던졌다.
번쩍!
하늘로 올라간 구슬에서 신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에 닿은 악귀들은 형체조차 없이 소멸되었고, 덕분에 땅에 쓰러져 죽은 고수는 시체나마 보존할 수 있었다.
비틀비틀.
악귀들과 싸우느라 영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법기를 운용했던 화운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비틀거렸다.
신식으로 살펴보니 영기와 법력은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화운은 남은 영기를 전부 긁어모아 구슬에 불어넣었다.
백초각의 제자 한 명이 또다시 위험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현귀봉의 제자 한 명이 악귀 사이로 뛰어들더니 위험에 빠진 백초각의 제자를 구해낸 것이다.
기이한 것은 그의 검술.
현귀봉의 제자가 지금 펼치고 있는 검법은 극천문의 기초 검술인 소요검법이었다.
그런데도 그 제자는 초식 하나에 악귀 한 마리씩을 소멸시키고 있었다.
‘소요검법이 저토록 현묘한 검법이었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도 소요검법을 능숙하게 펼쳐낼 수 있지만 저런 신기는 발휘할 수 없었다.
쒜에에에엑!
서걱!
장소천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화운은 검술 말고도 주목해야 할 것이 또 있음을 발견했다.
장소천의 검이 나아가는 곳에는 반드시 악귀가 있었다.
검이 악귀를 쫓는 것이 아니라, 악귀가 움직일 방향을 미리 예측하여 선제적으로 공격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빠르고 변화막측한 악귀라도 그의 일검을 피해낼 수가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악귀들의 반응이었다.
검이 휘둘러지면 다른 악귀들까지도 소스라치게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모이면 또 한 마리를 소멸시켰고….
끄아악!
게다가 신법조차 현묘하니 그 제자의 주위에는 악귀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덕분에 화운은 제자들을 모아 전열을 정비할 수가 있었다.
타핫!
그제야 현귀봉의 어린 제자는 자신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백초각에 소속된 고수들은 일시적으로 파탄을 드러내며 희생자까지 발생한 반면 현귀봉 측은 아직까지 아무런 희생도 없었다.
채약당주인 투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하나처럼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연신기 고수인 투곤은 기이한 법기를 하나 지니고 있었다.
요사한 것을 물리치는 방울이었다.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들려오자 악귀들의 움직임이 급격히 느려졌다.
곽무진과 한여옥의 영기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세 사람은 수없이 많은 악귀들을 처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오늘 가장 많은 악귀를 죽인 것은 상관천세였다.
그가 화 속성 신통을 발휘하여 만들어낸 불 뱀은 덩치가 오 장여로 불어나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귀신들을 잡아먹었다.
귀신들에게는 지옥의 사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의외인 것은 막장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경지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그가 만든 소뢰부에 운명을 달리한 악귀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번쩍!
츠츠츠츠츠.
막장이 소뢰부를 던지면 아무리 흉악한 악귀라도 순식간에 온몸에 불이 붙어 사그라졌다.
그런 상태에서 혼원신검을 든 장소천까지 가세하자 현귀봉 제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제는 오히려 악귀들을 쫓아다니며 인간을 공격한 죄과를 묻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현귀봉과 백초각 제자들이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악귀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삐이이익!
그렇게 악귀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어디선가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직후.
휘파람 소리를 들은 귀신들이 썰물처럼 귀혈곡을 빠져나갔다.
* * *
장소천이 또다시 영초를 채취했다는 소문이 극천문을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무려 천 년이 넘은 영초.
그것도 연신기 수사의 경지를 높여줄 수 있는 천룡단의 주재료인 용설초였다.
장소천이 상납한 영초를 받은 무극진인은 영초에 대한 정보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했다.
하지만 단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소문이 극천문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다음 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천약전주가 무극전으로 찾아와서 영초를 나눠줄 것을 부탁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무극진인이 그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천약전주는 이번에 장문진인을 데리고 왔다.
그래도 무극진인이 뜻을 꺾지 않자 길게 탄식을 한 천약전주가 아쉬운 모습으로 그에게 사정을 했다.
“이렇게 찾아와서 손을 벌리는 것이 염치없는 행동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네. 그래도 간절히 부탁하네. 한 뿌리라도 안 되겠는가?”
“한 뿌리? 천년 묵은 용설초가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지금 몰라서 묻는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나도 잘 알고 있네. 그러니까 이렇게 사정하는 것 아닌가? 자네가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을 것이네.”
“흥! 나를 천약전에서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러시오. 내가 현귀봉에 자리 잡은 뒤로는 영단 지원조차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으셨소.”
“다 내 잘못이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도 모함을 당한 것이었네.”
털썩.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약전주가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한참 동안 내려다본 무극진인은 길게 장탄식을 했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천약전주를 일으켜 세웠다.
“그깟 영초가 무어라고 나에게 무릎을 굽히는 것이오. 영초가 그렇게 절실했단 말이오?”
“절실하다 뿐인가? 천 년이 넘은 용설초라고 들었네. 그것으로 천룡단을 연단하면, 꿈에 그리던 중품 삼급의 경지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네. 그렇게 되면 본 문의 영광은 물론이고, 연신기 수사 두세 명은 수련 경지를 올릴 수 있을 것이네.”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맙네.”
회의실로 천약전주와 장문진인을 들인 무극진인은 도동을 불러 차를 내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영초를 넘겨주는 대가를 협의했는데 그동안 맺힌 것이 많았는지 무극진인은 많은 것을 요구했다.
천약전이 가지고 있는 단방을 전부 공개하고 문파에서 보물로 지정한 단로 세 개를 넘겨달라는 조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상납하던 영단의 수를 줄이고, 현귀봉에서 조제한 영단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는 권리까지 요구했다.
물론 두 사람은 펄쩍 뛰었다.
하지만 무극진인이 영초 두 뿌리를 내놓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천오백 년 된 영초를 꺼내자 고개를 격렬하게 끄덕였다.
굴복할 수밖에 없는 조건인 것이다.
“문 장로! 이 정도면 나는 확실하게 연단사 중품 삼급으로 승급할 자신이 있네. 그렇게 만들어진 영단으로 연신기 제자들의 역량을 높이면 본 문의 위세도 한층 높아질 터이고 말이네. 자네가 통 크게 양보한 덕분이니 나중에라도 이 은혜는 잊지 않겠네.”
“장문진인의 얼굴을 봐서 양보해 주는 것이니 그리 아시오. 극천문이 잘되어야 나도 설 자리가 있을 것 같아서 대승적인 견지에서 결단을 내린 것뿐이오. 이 영초를 캐다 준 제자가 나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시오?”
“뭐라고 하던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자연스러우니 사부님께서 먼저 많은 것을 채워 넣으시라고 하였소.”
“생각이 깊은 제자이군. 이름이 누구인가?”
“저번에 구엽선지초를 채취했던 장소천이라는 제자이오. 복록이 무궁하여 영초 운이 무척 좋은 모양이오.”
“그런 것 같군. 이번에는 그에게 무엇을 주기로 했는가?”
“나에게 연단을 배우고 싶다고 하더이다.”
“안 들어줄 수가 없겠군. 그를 적전제자(嫡傳弟子)로 들일 생각인가?”
“그럴 생각이오.”
“채약은 어떻게 하고?”
“그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할 생각이오. 채약도 하고 싶다면 보내주고…. 영단의 기본은 채약이지 않습니까?”
무극진인의 말에 천약전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천리협곡으로 채약을 떠난 것은 현귀봉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천약전의 제자들은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이 파견되었다.
그런데 현귀봉은 천고의 영초를 무더기로 채취한 반면, 천약전은 인명 손실만 나고 말았다.
단순히 운이 없어서일까?
아니었다.
그동안 천약전은 채약보다는 법제나 연단을 중요시했었다.
그 결과.
오늘처럼 한때 제자였던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한 것이다.
돌아가면 백초각의 인원을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약전주는 장문진인과 함께 무극전을 나섰다.
* * *
그 시간.
장소천은 조장이 연단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천리협곡에서 채취한 백련초의 뿌리 덕분에 조장은 이제 약재 걱정 없이 연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장 사제! 사부님께 연단을 배우게 되었다는 말이 사실이냐?”
“네. 사부님께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영원히 채약당 일조 소속입니다. 조장님이 채약을 하러 가시면, 그때는 저도 따라가려고 합니다.”
“사부님께서 허락해 주실까?”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 제 성적이 워낙 발군이었지 않습니까?”
“하긴. 너만큼 많은 영초를 채취했던 제자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 네가 연단실에만 처박혀 있는 것은 우리 현귀봉, 아니 극천문 전체의 손실이다.”
“조장님도 큰 손해이고요.”
“네 말이 맞다. 사부님에게 가면 처음에는 약재를 관리하는 것부터 배울 것이다. 연기기 사성이 되기 전에는 연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영기 발현은 연기기 삼성만 되어도 가능하지만 화 속성 기운을 자유롭게 다루려면 사성은 되어야 하니까요.”
”그렇지. 그래도 소천이 네가 화 속성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다면 화 속성 기운을 가진 요수나 땅속의 지화(地火)를 이용해야 하는데 그건 너무 불편하거든. 그런데 숙소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당분간은 지금 있는 숙소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저도 그게 편하거든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 네가 어디에 있든 너는 우리 채약당의 일조 조원이다. 힘든 일이 있으면 말만 해라. 우리가 도와줄 터이니….”
“말만 들어도 힘이 나네요. 참, 이제 불량품은 가지고 가지 않으려고요. 이번에 공헌점수와 영석을 많이 받았으니 그 돈으로 조장님께서 만든 황정단을 사 먹으면 되니까요. 싸게 주실 거죠?”
“물론이다. 이제는 내 실력이 많이 늘었으니 약효는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장담했건만….
오늘도 곽무진이 조제한 것은 반정단이었다.
제12화 : 본격적으로 연단을 배우다
다음 날 아침.
무극진인은 장소천을 불렀다.
“사부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그래. 잘 잤다. 아침부터 너를 부른 이유는 상의할 것이 있어서이다.”
“저하고요?”
“그래. 네가 이번에 채취한 영초 몇 뿌리를 시중에 팔았으면 한다. 그 돈으로 연단실을 확장하고 무극전 앞에 약초밭도 조성할 생각이다. 괜찮겠느냐?”
“사부님! 영초를 채취하는 데 공로가 있다고는 하지만 저는 아직 어립니다. 수련 경지도 많이 부족하고요. 이런 대사는 당주님들과 상의하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저는 사부님의 결정에 무조건 따르겠습니다.”
“네 나이가 어린 것은 사실이지만 현귀봉에 공헌한 정도를 감안하면 네 의견은 충분히 존중받을 만하다. 정말로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저는 사부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오니 영초도 사부님 뜻대로 하십시오. 연단술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제자는 큰 행운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고맙구나. 너를 제자로 둔 것이야말로 나에게 큰 행운이다. 앞으로는 네게 나의 진전을 모두 물려줄 것이니 그리 알거라.”
“제게요?”
고개를 끄덕인 무극진인은 현귀봉에 있는 제자를 전부 소집했다.
그러더니 장소천을 적전제자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원래 현귀봉에는 적전제자라는 제도가 없었다.
모두 똑같이 내문제자였는데 오늘 갑자기 장소천이 적전제자라고 공표한 것이다.
장소천조차 어안이 벙벙했는데 다른 제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사부의 말에 반박하는 제자는 없었다.
무소불위.
무극진인은 현귀봉에서 그런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사부님! 적전제자가 되면 사부님의 비기를 물려받는 것 말고 어떤 좋은 점이 있는지요?”
채약당의 막장이 사부에게 물었다.
“적전제자라고 특별한 혜택은 없다. 현귀봉에 있는 건물은 어디든지 출입이 가능하고 필요시 채약당과 법포당에 가서 일도 배울 수 있다. 그뿐이다.”
“사형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도 있습니까?”
“부탁이라면 몰라도 그런 권한은 없다.”
“알겠습니다.”
막장의 질문이 끝나자 안도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사부에게 비기를 배운다는 것 말고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돌려보낸 무극진인은 장소천에게 할 일을 지시했다.
장소천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서고 정리.
그리고 법포당에 가서 약재를 관리하는 요령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수선계에 발을 디딘 이상 수련 경지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말씀이었다.
* * *
밤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장소천은 기이한 느낌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자 희미하게 누군가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리가 두 개인 여자.
적호족의 나이 어린 여우 한 마리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소천이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여우의 눈이 커졌다.
“혹시 내가 보이니?”
장소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뒷걸음질을 쳤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로 내가 보이는 것 맞니?”
훌쩍!
재주를 넘은 여인이 장소천의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장소천의 시선도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여우의 두 눈.
어린 소녀의 미간이었다.
“내 환술은 우리 호족에서도 알아주건만…. 너 신안통이라도 익혔니?”
이번에는 장소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적호족의 은단비 공주가 보낸 것 맞지?”
“응.”
“상고 문자를 해석하는 책자는 어디에 있어?”
“저기.”
장소천의 질문에 요족 소녀는 손가락으로 장소천의 방구석에 놓인 탁자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 못 보던 책자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몸을 일으켜 탁자로 걸어간 장소천이 책자를 들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그가 원하던 책자임을 확인했다.
“공주님께 내가 감사해하더라고 전해 줄래? 진짜로 고마워하더라고….”
“그렇게 할게.”
“나는 장소천이라고 한다. 네 이름은 뭐지?”
“소소. 공주님의 시녀야.”
“그렇구나. 여기까지 오느라고 수고했다. 누추한 곳이라서 대접할 것도 없네.”
“괜찮아. 나는 이만 가 볼게.”
“그래.”
휘익.
재주를 한 번 넘었는데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소소가 사라지자 장소천은 마치 꿈을 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손에 들린 책자를 보면 절대로 꿈은 아니었다.
원하던 해석서를 얻었지만 장소천은 마냥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소소는 요족.
그런 그녀가 자신의 숙소까지 들어온 것을 보면 사문의 방호 능력이 얼마나 허술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에 그녀가 살수였다면….
장소천의 등줄기로 차가운 한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하루빨리 강해져야겠다고 결심을 굳히며 장소천은 방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소소가 준 책자를 참고하여 사조에게서 얻은 상고시대의 검법서를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해석이 어려웠다.
검법서의 제목이 용비봉무결(龍飛鳳舞訣)이라는 것을 알아내는 데에만 한참이 걸렸을 정도였다.
며칠이 지나자 무극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연단실을 확장하느라 대규모 공사에 돌입한 것이다.
무극전과 조금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약초밭이 만들어졌고 건물을 개보수하는 인력들이 들어와서 낮과 밤으로 시끄럽게 작업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 장소천은 서고에서 약초와 연단에 관한 책자들을 정독했다.
아니, 정독하려고 했다.
그런데 보름도 안 돼 서고에 있는 책자 삼백여 권이 그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통째로 암기된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암기력에 장소천은 눈을 감고 아무 책이나 빼어 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무지하게 똑똑해졌다는 것만 확인하고 다음 날부터는 법포당으로 가서 약재를 관리하는 방법을 배웠다.
약재는 크게 동물성, 식물성, 광물성으로 나눌 수가 있었다.
형태로 구분하면 고체나 액체, 기체.
그것들을 분류하고 약효가 소실되지 않도록 만들어 보관하는 것이 약재 관리의 핵심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썩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찌고 훈연하고 건조하고 말려서 빻기까지 하였다.
그다음에는 연단하기 쉽도록 소분하여 보관하는 것이 법포당에서 하는 일이었다.
법포당에서 일을 배우면서도 장소천은 곽무진이 연단하는 것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서고에 있는 연단비술서에서 보았다고 우겨 연단로 중심까지 열전달을 시키는 비법을 전수하여 주었다.
그리고 무기질이 적게 용해되어 있는 물을 추천하여 반응케 했다.
그 결과.
영단의 약효가 크게 높아져서 이제는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도 오히려 품질이 좋았다.
이능으로 영단의 약효를 확인한 장소천은 바로 황정단 수십 알을 구매했다.
그리고 운기조식을 하기 전에 매일 한 알씩 복용한 결과.
연단실 확장 공사가 끝날 즈음에는 마침내 연기기 삼성 중기에 오를 수가 있었다.
연기기 삼성 중기가 되면 멀리 떨어진 적이라도 검영이나 광채로 공격이 가능했다.
이는 연단로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었다.
화 속성 영기로 단로를 데울 때 단로 중심부까지도 열기를 전달할 수가 있었다.
연단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무극진인은 장소천을 불러 이제부터는 연단실을 네가 관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법포당에서 넘어온 약재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도동을 불러 물을 떠오라고 지시했다.
그걸 본 장소천이 무극진인에게 말했다.
“사부님! 연단에 사용되는 물이 어떤 것인지 저도 가서 보고 싶습니다.”
“그러거라.”
장소천이 서고에 있는 연단비술서를 읽은 것은 무극진인도 알고 있었다.
그러라고 서고 정리를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벌써 연단에 사용되는 물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니….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무극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제! 네 이름은 뭐니?”
“저는 공세천이라고 합니다. 앞으로는 공 사제라고 불러 주십시오.”
“그래. 알았다. 그런데 왜 지하로 내려가지?”
“이곳에 암반수가 있거든요. 사부님께서는 이 물로만 연단을 하십니다.”
“그렇구나. 저곳이니?”
“네. 사부님 말씀으로는 이곳 암반수는 물이 깨끗하고 오염이 적어 연단을 하기에는 최고의 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사형께서도 나중에 연단을 하실 때에는 이 물을 사용하십시오.”
“하하하! 그것은 내가 알아서 하마.”
공 사제가 채수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소천은 웅덩이 아래에 이끼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육안으로 살펴보면 웅덩이에 고인 물은 맑고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이능을 사용하여 살펴보니 예상대로 문제가 많았다.
물속에 무기질이 적지 않게 용해되어 있었다.
눈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으로써는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화학을 몰랐다.
그러니 물속에 석회나 아연, 망간 등의 중금속이 녹아 있다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물을 채수하여 가져다주자 무극진인은 적당량의 물을 단로에 부었다.
그리고 화 속성 영기로 단로를 가열하고는 몇 가지 약재를 그 안에 집어넣었다.
신식으로 단로 안을 살펴보는데 확실히 무극진인은 연단에 능숙했다.
약재가 필요한 시점.
정확히 그 순간을 포착하여 약재를 단로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발열이 시작되었다.
단로에 들어 있던 물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약재에 있던 약 성분들이 빠져나와 급속도로 반응이 촉진되었다.
그런데도 사부는 단로의 뚜껑을 열지 않았다.
지금 뚜껑을 열면 내용물이 단로 밖으로 넘쳐흐를 우려가 있어서였다.
대신에 영기를 불어넣어 계면 아래로 압력을 가하고 부채를 흔들어 단로를 식혔다.
그렇게 일차 발열이 끝나자 단로는 꽤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했다.
그렇다고 반응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신식으로 연단로 안을 살펴보던 무극진인은 또다시 몇 가지 약재를 단로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반각 후.
또다시 이차 발열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단로 내부 온도가 무극진인이 예상한 것을 훨씬 상회하였고, 그 와중에 일부 재료가 먼저 반응하여 단로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가까스로 연단을 마무리한 무극진인이 단로 뚜껑을 열었는데 표정이 좋지 못했다.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한 모양이었다.
“방금 연단한 것은 연신기 수사의 경지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강신단이었다. 하지만 실패한 것 같구나.”
“아쉽군요. 단로는 제가 청소해 놓겠습니다.”
“그렇게 해라. 다음 연단은 며칠 쉬었다가 할 생각이다.”
“알겠습니다.”
무극진인이 연단실을 나가자 장소천은 단로의 뚜껑을 열고 안에 엉겨 붙어 있는 영액을 나무 주걱으로 긁어냈다.
그러면서 엉겨진 영액이 전혀 쓸모가 없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액은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반응이 완결된 영액도 국부적으로 조금씩은 남아 있었다.
그것들을 골라 한데 뭉치자 작은 영단 하나가 만들어졌다.
강신단이었다.
영단을 품속으로 집어넣은 장소천은 단로를 깨끗하게 청소한 후 자신의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강신단을 꺼내 살펴보더니 가부좌를 틀고 영단을 바로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으적으적.
꿀꺽!
영단을 씹어 삼킨 장소천은 곧바로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그러자 배 속이 뜨거워지면서 엄청난 영기가 그의 사지백해로 퍼져 나갔다.
강신단은 연신기 수사를 위해 조제한 영단으로 원래라면 연기기 수사는 복용할 수 없었다.
그 안에 담긴 영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장소천이 먹은 강신단은 약효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크기도 작아 장소천은 어렵지 않게 기운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탁탁!
운기조식을 마친 장소천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단전 부위를 두드렸다.
배 속이 듬직했다.
씨익!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장소천은 건곤대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호리병에 그려진 절세 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하얀 여우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래도 장소천은 호리병을 흔들고 기울이고 두드려 보았다.
입구에 영기도 불어넣고 손가락을 깨물어 호리병 안에 핏방울도 떨어뜨렸다.
하지만 별무소용이었다.
실망한 장소천은 호리병을 건곤대에 넣고 이번에는 혼원신검을 꺼냈다.
사조께서 주신 용비봉무결은 며칠 전에 해석이 끝났다.
그 결과 어지럽게 표기되어 있는 흐름과 문양을 어디에서 끊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용비봉무결의 초식은 모두 삼십육 개였다.
하지만 냉정하게 분류하면 전식 십팔 초식과 중식 십이 초식, 그리고 후식 여섯 초식으로 나누어야 했다.
그런데 인간의 무공이 아니었다.
전식은 신수인 용과 봉황처럼 신위를 지닌 존재만이 펼쳐낼 수 있었다.
그것도 하늘을 날아다니며 펼쳐내는 것이라서 그동안 장소천이 흉내를 내지 못했던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었다.
중식 십이 초식은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을 수 있는 위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마지막에 적혀 있는 초식보다는 나았다.
용비봉무결에 적혀 있는 마지막 여섯 개 초식은 시공간을 제압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제13화 : 심상치 않은 조짐
며칠 후 극천문에 희소식이 전해졌다.
천약전주가 연단사 중품 삼급에 올랐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식을 듣고 장소천은 무극진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사부님! 사부님께서도 연단사 중품 일급이시니 다음 해에는 이급 시험을 응시해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무극진인이 점잖게 그를 꾸짖었다.
“소천아! 헛된 명예에 집착하지 말고 오로지 실력을 쌓는 데 집중해라. 급수가 높다고 실력 있는 연단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력이 높아지면 자연히 급수는 따라오게 되어 있다.”
“사부님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연단사 시험에 응시하여 품계를 높였던 이유는 장문진인에게 나의 실력을 알려 연단을 위한 약재를 조금이라도 더 지급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활이 궁핍하지 않으니 품계보다는 실력을 올리는 것이 급선무이다. 내 말 이해하겠느냐?”
“물론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수련 경지를 올리는 데 매진해라. 연기기 사성에 오르면 네게도 단로 하나를 내어 주마.”
“감사합니다.”
무극진인의 말에 고무된 장소천은 연단과 수련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약초를 구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천리협곡이 폐쇄되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하늘에서 저주가 내려 약초가 모두 시들어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떠돌았다.
약초값은 가파르게 상승하였고, 사부님께서 연단하고 있는 강신단의 재료도 마침내 바닥을 드러냈다.
* * *
헉! 헉!
채약을 따라나섰다가 요수에게 쫓기게 된 장소천은 혼원신검을 든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전에는 이 산에 약초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초록색 광채가 있는 곳을 찾아 희귀한 영초 세 뿌리는 채취했다.
하지만 그뿐.
강신단은 물론이고 황정단을 만드는 약초조차 한 뿌리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때.
캬오옹!
날카로운 비음을 내며 고양이 요수 한 마리가 날아와 앞발로 장소천의 눈을 공격했다.
츠팟!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혼원신검을 앞으로 뻗었는데 고양이 요수는 앞발로 검을 들어 올리며 그 밑으로 머리를 불쑥 디밀었다.
서걱!
그러다가 발과 머리가 한꺼번에 잘리며 죽어 땅 밑으로 떨어졌다.
혼원신검이 이토록 예리한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고양이 요수를 죽이자 멀리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그에게로 날아왔다.
지금까지 장소천을 추적했던 거대 요수.
기다란 쇠사슬 끝에 달린 두 개의 철추로 하마터면 장소천을 죽일 뻔했던 괴물이었다.
하지만 거대 요수도 몸이 멀쩡하지는 않았다.
소뢰부에 당했는지 팔 하나가 불에 타 덜렁거리고 있었으며 위력적인 철추도 이제는 한 개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듯 장소천을 추적했던 것이다.
후와와왕!
장소천에게 다가온 거대 요수는 거친 포효를 터트렸다.
그리고 허공으로 뛰어올라 장소천에게 긴 쇠사슬을 날려 보냈다.
촤르르르륵.
쇠사슬이 풀려 나가며 장소천이 움직일 공간을 촘촘하게 가로막아 폐쇄시켰고 사슬 끝에 달린 철추는 장소천의 심장을 향해 유성처럼 쇄도했다.
타핫!
위기에 처했는데도 장소천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신선이 소요하듯 발끝을 들어 쇠사슬 위에 올라타고는 활공하듯 허공을 천천히 미끄러졌다.
그러면서 몸을 젖혀 철추를 피해냈다.
서걱!
혼원신검이 움직이자 철추를 묶은 쇠사슬이 힘없이 잘려 나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거대 요수는 쇠사슬을 나선형으로 흔들어 그 안에 장소천을 가두려고 했다.
하지만 장소천의 이능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았다.
쇠사슬이 허공을 채 봉쇄하기도 전에 중요 구역을 미리 선점하여 사슬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결국 쇠사슬은 얽히고설켜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기를 잃은 요수는 커다란 입을 벌려 흉측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이에 장소천은 막장에게서 받은 소뢰부 두 장을 연속으로 날려 보냈다.
쐐애애액!
번쩍!
그중 한 장이 운 좋게 요수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끄아아악!
피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요수를 뒤로하고 장소천은 운월신법을 펼쳐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동료들이 있는 곳도 그다지 안전하지는 않았다.
바닥을 보니 죽은 요수의 사체와 피가 가득했다.
그리고 멀리서 요수 무리가 뛰어오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들보다도 장소천이 먼저 비행 법기에 올라탔다.
“출발한다!”
조장인 곽무진의 외침에 상관천세와 한여옥이 비행 법기를 조작해 하늘로 띄워 올렸다.
캬아옹!
날랜 요수 한 마리가 비행 법기 가까이 뛰어올랐다.
하지만.
서걱.
조장이 대도를 휘두르자 요수는 두 쪽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휴우! 뭐 좀 캤냐?”
자리에 앉은 곽무진이 조원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다들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소천만이 조심스레 건곤대를 열었다.
그리고 칠백 년이 넘은 천향선초 세 그루를 꺼냈다.
“우연히 천향선초를 발견하여 채취했는데 다른 약초는 한 그루도 보지 못했어요. 어떻게 하죠?”
장소천은 걱정이 되어 물었지만 천향선초를 본 곽무진은 지옥에서 보살이라도 만난 듯 안색이 밝아졌다.
“와아! 역시 우리 소천이는 다르구나. 이거면 됐다.”
“강신단을 만들 약재는 하나도 채취하지 못했잖아요? 그것을 구하려고 이 멀리까지 왔는데….”
“소천아! 걱정하지 마라. 이 영초만 있으면 강신단의 약재도 구하고 황정단을 만들 약재도 원하는 만큼 구할 수가 있다. 천향선초가 얼마나 귀한 영초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어떻게 하시려고요?”
“어떻게 하긴. 바꿔야지. 부조장! 여기서 약종에 있는 시장이 가장 가깝지?”
“약종도 괜찮지만 태허곡이 조금 더 좋지 않을까요? 요즘 그곳이 시세를 잘 쳐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러면 태허곡으로 가야지. 시장에 아는 사람 있지?”
“물론이죠.”
그렇게 태허곡으로 간 곽무진은 천향선초 세 그루를 경매에 내놓았다.
천향선초는 연신기 수사는 물론이고 연허기 수사의 영단을 만드는 데도 특효가 있었다.
경매에 천향선초가 나왔다는 소문은 태허곡을 발칵 뒤집었다.
그날 밤 진행된 경매장에는 태허곡의 연단사들이 대거 참석하였고….
곽무진은 수수료를 제하고도 중품 영석 이백삼십 개를 챙길 수가 있었다.
중품 영석 이백삼십 개는 하품 영석으로 이만 삼천 개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돈인 것이다.
여관으로 돌아온 곽무진은 중품 영석 백이십 개를 장소천에게 건네주었다.
영초를 채취한 공로였다.
그러고는 남은 영석으로 전부 약초를 구매하겠다고 말했다.
“조장! 중품 영석 백열 개면 엄청나게 큰돈입니다. 그것으로 약초를 전부 구매하겠다고요?”
“오늘 내가 시장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은 아직 약초 대란이 일어난 줄을 모르고 있는 것 같더라. 조금만 지나면 이곳도 약재값이 오를 것이니 그 전에 최대한 많이 구매하여 현귀봉으로 가지고 가자.”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한 사매하고 저는 시장으로 가서 약재를 닥치는 대로 구매하겠습니다. 강신단과 황정단을 만들 약재는 특별히 더 구매하고요.”
“그럼 나는 비행 법기를 정비해야겠다. 오다가 보니 손 볼 곳이 적지 않더구나. 장 사제와 막 사제는 그동안 시장 구경이나 하고 오거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제가 영초를 발견했다고 해도 저한테만 이렇게 많은 영석을 주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십 개씩 똑같이 나누어 갖고 나머지 이십 개는 약재를 사는 데 보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후회하지 않겠느냐?”
“그럼요. 중품 영석 이십 개라니…. 제 평생 이렇게 큰돈은 처음입니다.”
“좋다. 대신에 약초를 살 돈은 백열 개로 충분하니, 이십 개씩 나누어 갖고 장 사제는 사십 개를 갖는 것으로 하자. 다들 불만 없지?”
“전혀 불만 없습니다.”
조원들의 의견이 일치하자 곽무진은 영석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조원들에게 모일 장소와 시간을 알려준 후 유명한 연기대사를 찾아갔다.
손상된 비행 법기를 수리하기 위해서였다.
* * *
“막장아! 너는 어디로 가고 싶다고 했지?”
“부적을 사러 갈 거다.”
“같이 가 줄까?”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너는 연단을 좋아하니 약재상이나 둘러보고 와라. 한 시진 후에 이 앞에서 만나자.”
“그래. 알았다.”
막장과 헤어진 장소천은 약재상으로 가려다가 발길을 틀었다.
이곳은 극천문에 있는 시장보다 규모가 몇 배나 컸다.
그가 보지 못했던 신기한 물건들이 꽤 많이 나와 있었다.
견문을 넓히려고 오래된 골동품들을 구경하던 장소천의 눈이 갑자기 크게 벌어졌다.
시장 끝자락에 있는 오래된 가게에서 눈부신 청광이 흘러나오고 있어서였다.
가게로 걸어간 장소천은 의외라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그럴듯한 보물이 있을 줄로 알았건만 청광을 뿜어내고 있는 것은 정방형으로 생긴 돌이었다.
특이한 것은 돌의 색이 검다는 것.
그것 말고는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주인장! 저것도 파는 것이오?”
장소천이 손가락으로 네모난 돌을 가리키자 순진해 보이던 주인의 눈에 영악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요. 저것은 복을 물어다 주는 신비한 돌로 제가 영석을 다섯 개나 주고 구입한 것입니다. 하지만 손님께는 특별히 영석 세 개만 받고 팔겠습니다.”
“그렇게 많이 깎아 주어도 괜찮겠소?”
“물론입니다. 대신에 너무 싸게 주었다고 사람들이 나무랄 수도 있으니 여기서 저것을 구입했다고는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겠소.”
그렇게 네모난 돌을 장소천에게 판 주인은 수지를 맞았다는 듯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그러면서 철없는 귀공자라며 장소천을 속으로 비웃었다.
자신이 방금 엄청난 손해를 본 줄도 모르고서….
그곳을 거쳐 약재상으로 간 장소천은 황정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재들을 대거 구입했다.
일 년 동안 황정단만 만들어도 충분할 정도의 양이었다.
약재상을 나와 한참을 걸어간 장소천은 막장과 만나기로 한 장소에서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막장이 나타났는데 왠지 흥분한 기색이었다.
“왜 그래? 뭔 일 있었냐?”
장소천의 질문에 대답도 않고 씨익 웃음만 짓던 막장은 멀리 조장이 보이자 그제야 사실을 털어놨다.
“소천아! 방금 시장에서 내가 뭘 샀는지 아냐?”
장소천이 고개를 흔들자 막장이 입술을 쭈욱 찢고는 자신의 활약상을 떠들기 시작했다.
부적을 파는 상점 중에 오늘 폐업을 하는 곳이 있었다고 했다.
장소천 덕분에 영석을 넘치도록 가지고 있던 막장은 주인에게 물건을 싸게 주면 대량으로 구매하겠다고 뜻을 전했다.
주인이 좋다고 해서 물건을 구입했는데….
그가 나가려고 하자 주인이 쭈뼛거리며 그의 소매를 잡았다고 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주인이 막장의 귀에 속삭였다.
‘좋은 물건이 있다고….’
뭔가 대박의 기운을 느낀 막장은 점잖게 이런 허름한 가게에, 그것도 장사가 안 돼 폐업을 하는 가게에 무슨 좋은 물건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없어 나가 봐야 된다고 말하자 주인이 오히려 안달하더니 가게 안으로 뛰어 들어가 책자 한 권을 들고 왔다.
별 관심도 없다는 듯이 책자를 떠들어본 막장은 살이 떨리고 피가 끓었다고….
부신경(符神經).
그 안에는 부적에 관한 모든 것이 수록되어 있었다.
안에 수록된 부적의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
그래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막장은 주인에게 넌지시 가격을 물었다.
주인도 이 책의 가치를 어렴풋이 알고는 있는 듯싶었다.
처음에는 높은 가격을 불렀지만 막장이 대폭 후려쳤고….
결국에는 중품 영석 열두 개를 주고 책자를 가져올 수 있었다.
“휴우! 지금도 살이 떨린다. 그리고 고맙다.”
“뭐가?”
“네가 영석을 양보해 주지 않았다면 이 책을 살 수 없었을 것 아니냐? 하마터면 천고의 기연을 눈앞에서 놓칠 뻔했다.”
“천고의 기연? 그 정도냐?”
“그 정도로도 표현이 모자란다. 이 책을 다 익히면 태현국 최고의 고수도 내 앞에서 벌벌 떨게 될 것이다.”
“고수가 다 죽었는가 보다. 어쨌든 마음에 드는 책을 얻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좋냐?”
“얼마나 좋은지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린다. 헤헤헤.”
조금 덜떨어진 사람처럼 웃어 보인 막장은 보무도 당당하게 곽무진에게 다가갔다.
그러더니.
“조장님! 오늘 날씨가 좋습니다.”
“날씨가 좋다고? 조금 있으면 비가 올 것 같은데.”
“그… 그런가요? 비가 오면 좋잖아요. 우리는 구름 위로 날아서 가면 되고….”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곽무진은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시장에서 안 좋은 것이라도 먹였냐는 표정이었다.
“오늘 막장이 기분이 좋은가 봐요. 어! 저기 사형하고 사저가 오는데요.”
“그렇구나. 비행 법기도 수리를 끝냈으니 바로 출발할 수 있겠다.”
“다행이네요.”
비행 법기를 타고 가는 동안에 정말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관천세는 구름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오랜만에 비를 맞으며 가자고 했다.
영취산으로 가면서 한여옥에게 들었는데 약초는 순조롭게 구매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자꾸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피식!
장소천이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한 사저의 손가락에 못 보던 반지 하나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14화 : 현천무극심법
약초를 구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조만간에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고….
호국성에 요족들이 쳐들어와서 전시 상황에 돌입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그런데도 현귀봉은 평안했다.
장소천 덕분에 재화와 약초가 넉넉했기 때문이다.
불안한 분위기에서도 현귀봉의 제자들은 무극진인의 지도하에 각자 할 일을 하며 경지를 올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장소천은 마침내 연기기 사성에 이르렀다.
이렇게 빠른 시간에 그가 연기기 사성에 오른 이유는 영근속성이 네 개로 많아진 덕분이었다.
영근속성이 많으면 운기조식을 하거나 영단 복용 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영기를 흡수할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경지 향상 속도가 빠른 것이다.
그 밖에.
곽무진이 만든 황정단과 사부님이 연단을 하고 남은 찌꺼기도 그의 경지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장소천이 연기기 사성에 이르자 무극진인은 그에게 단로 하나를 맡기고 연단을 하여도 좋다고 말했다.
그 결과.
보름도 안 되어 장소천은 거의 완벽한 황정단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채약당 일조 조원들에게 보급하자 막장도 짧은 순간 연기기 삼성 중기에 이르렀고….
경지가 좀처럼 오르지 않아서 고민했던 곽무진도 기적처럼 연기기 십성 후기에 이르렀다.
장소천이 조제한 황정단이 신묘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현귀봉에 퍼져 나갔다.
하지만 장소천은 쉽사리 영단을 풀지 않았다.
오직 채약당 일조 조원들에게만 아낌없이 공급하고 나머지는 차곡차곡 건곤대에 보관했다.
법포당과 채약당의 다른 조에서도 요구가 빗발쳤지만 장소천은 일절 무시했다.
어느 날 무극진인이 장소천에게 물었다.
“소천아! 그동안 황정단을 꽤 많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네가 만든 것은 약효가 뛰어나서 인기가 많은 것 같은데 왜 팔지 않는 것이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 원하신다면 전부 사부님께 바치겠습니다.”
“내게 주겠다고?”
“그렇습니다. 이제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터이니 사부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사제지간의 정이 더욱 돈독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너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사부님의 신뢰입니다. 저는 그것으로 족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소천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곳 이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지 향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보호와 상승의 공법서가 중요했는데 그것을 한꺼번에 줄 수 있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사부님이 유일했다.
그래서 잠시 수를 냈던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무극진인에게도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이처럼 어수선한 시국에 돈을 주고도 구하지 못할 영단을 구해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그를 향한 제자들의 존경심은 더욱 두터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부님! 전쟁이 일어나면 금궁에서 영단을 차출할 수도 있는데 그 전에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장소천이 무극진인에게 커다란 목함을 내밀자 무극진인은 사양하지 않고 영단을 받았다.
영단을 건곤대로 넣은 무극진인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가 무언가 큰 결심이라도 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건곤대에서 책자 한 권을 꺼내 장소천에게 건네주었다.
표지에 현천무극심법이라고 쓰인 공법서였다.
“원래는 조금 더 지켜본 후 주려고 했는데 네 성품을 보니 지금 주어도 괜찮을 것 같구나. 너는 나의 적전제자이니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오늘부터 수련하고 누구에게도 전해 주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장담하건대 우리 극천문에 있는 공법서 중에서 그것에 비견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수련하기 바란다.”
“사부님께서 실망하실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믿겠다.”
무극진인의 처소에서 물러 나온 장소천은 쾌재를 불렀다.
그가 익힌 공법 중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천지원기를 단전으로 끌어들이는 영기선법이었다.
그런데 이런 상승의 심법서를 얻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숙소로 돌아온 장소천은 현천무극심법서를 펼쳐보고 나서야 사부님께서 이 심법서를 극찬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영기선법처럼 보통의 심법서는 호흡할 때 자신이 내뱉었던 천지원기까지도 함께 들이마셨다.
자신의 영근속성에 부합되는 기운이 이미 사라진 천지원기.
그것까지도 들이켜서 효율이 저하될 수밖에 없었는데 현천무극심법은 영기가 없는 기운을 먼 곳으로 보내 운기조식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가 있었다.
게다가 구결에는 천지원기 속에 담긴 영기를 짧은 시간 단전으로 끌어들이는 비법마저 담겨 있었다.
상승공법도 배우고, 사부님의 신뢰도 얻고….
게다가 사부님께 황정단을 하사받은 제자들이 그것을 장소천이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의 명성까지도 한꺼번에 높아지는 것이다.
일석 삼조.
자신이 원하던 것을 다 얻게 된 장소천은 한동안 운기조식에만 집중했다.
그사이 무극진인은 제자들에게 장소천이 만든 황정단을 나누어 주었고….
그것을 먹고 경지 상승을 이룬 제자가 무려 두 명이나 나왔다.
* * *
요족과의 전쟁이 벌어진 것은 장소천이 연기기 사성 후기에 이르렀을 때였다.
전쟁이 벌어지자 극천문은 즉시 전시 상황으로 체제를 변화시켰고….
무력대인 금검대와 청검대를 호국성으로 급파했다.
초기에는 싸움이 엄청 격렬했다.
수백, 수천의 인간족 수사와 요족이 천리협곡에서 충돌하여 양쪽 모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럼에도 이차, 삼차 연속으로 대량의 희생자를 만들어내더니….
어느 순간부터 국지전으로 변하였다.
전쟁이 생각보다 길어질 것으로 보이자 장문진인은 무극진인에게 영단을 만들어 전방의 수사들을 지원하도록 요청했다.
현귀봉의 수사들이 전투보다는 연단에 특화된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무극진인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이곳에 있으면 그나마 죽을 확률이 적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금궁에서 요구하는 수량을 맞출 수가 없었던 무극진인은 곽무진과 장소천에게도 영단을 만들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연단에 필요한 약재를 구입하게 했다.
일부 수사들은 법포당에서 약재를 관리하고….
막장처럼 경지가 낮은 제자들은 심부름을 하거나 경지 향상에 힘쓰도록 독려했다.
그렇게 반년이 지났다.
장소천과 곽무진의 연단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황정단을 만드는 장소천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정단보다 약효가 강한 것으로 알려진 진청단을 만들던 곽무진도 불량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무극전에서 연단을 하느라 밤을 새운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장소천은 가급적 잠은 숙소에서 자려고 노력했다.
숙소에 와야만 마음 놓고 현천무극심법을 운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정단은 현천무극심법을 운기하기 전에 복용했다.
심법이 영단에서 흘러나오는 영기까지도 하단전으로 축적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황정단을 손에 든 장소천이 운기조식을 하지 않고 갑자기 건곤대를 열었다.
그리고 호리병을 바라보더니 주둥이 부위에 영단을 집어넣었다.
또르르.
영단이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자 장소천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던 호리병이 처음으로 반응한 것이다.
탁, 탁.
그런데 호리병 속으로 들어갔던 영단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병을 기울여도 보고, 밑바닥을 두드려도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이익!
화가 난 장소천은 건곤대에서 황정단 한 알을 또 꺼냈다.
그리고 호리병으로 집어넣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번에는 영단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낑. 낑.
몇 번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장소천은 영단을 그냥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영단을 잘근잘근 씹은 후 목구멍으로 삼켰다.
에휴!
나직이 한탄을 한 장소천은 호리병을 건곤대에 집어넣고 현천무극심법을 운기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운기조식이 잘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었다.
그날 새벽.
현귀봉 언저리에서 짙은 어둠이 두 쪽으로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불길한 그림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악하고 요괴로운 이들은 하늘로 날아올라 유령처럼 무극전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츠팟!
어둠 속에서 광채가 불꽃처럼 일어나더니 무극전 주위를 환하게 밝혔다.
그와 동시에,
땡땡땡땡땡.
외적이 침입했다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사방에서 수사들이 쏟아져 나와 침입자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상관천세와 막장이 몇 달 전에 밤을 새우며 설치했던 경보 설비가 발동한 것이다.
외적이 침입했다는 종소리가 들리자 장소천은 혼원신검을 뽑아 들고 숙소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막장이 부적으로 만든 광채가 떠 있는 무극전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채앵! 챙!
콰드드드. 퍼엉!
칼과 검이 난무하고 거대한 도끼가 살과 뼈를 내리찍었다.
그리고 화염이 적의 머리를 불태우고 뇌전이 어둠을 하얗게 불살랐다.
장소천이 무극전에 도착했을 때에는 현귀봉의 제자 두 명이 요족에게 희생된 다음이었다.
오늘 저녁 현귀봉을 기습한 요족은 구요국 아홉 개 종족 중의 하나인 흑봉족.
요족 중에서도 신통력과 세력이 최상위권에 속하는 무서운 자들이었다.
특히나 이들은 공간 신통에 능했는데 구요국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날아와 기습할 수 있었던 것도 순식간에 수만 리를 이동할 수 있는 전송 신통 덕분이었다.
쐐애애애액!
곽무진의 거도가 요염하게 생긴 요족 여인의 목을 날카롭게 잘라냈다.
하지만 허상이었다.
마치 공간 틈새로 빠져나간 것처럼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나타난 요족 여인은 뱀처럼 날카로운 검 끝으로 곽무진의 심장을 찔렀다.
까앙!
그곳에는 상관천세의 검이 기다리고 있었다.
검 끝이 가로막히고 거대한 불 뱀이 머리를 물어오자 요족 여인은 두 팔을 날개처럼 펼쳐 수 장 밖으로 물러났다.
피릿! 핏!
그런데 그곳에도 적이 있었다.
수백 개의 암기가 그녀가 숨을 공간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발견한 요족 여인은 잠시 당황했다.
그래도 침착하게 신식을 발휘하여 상대적으로 안전한 저계 수사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번쩍!
츠츠츠츠츠.
저계 수사의 손이 허공을 가르자 그의 손끝에서 뇌전 몇 가닥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파란색 불길이 구름처럼 일어나더니 그녀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았다.
경악한 요족 여인은 허공을 찢고 이면 공간으로 도망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뇌전이 먼저였다.
화르르르르.
크으으윽!
뇌전에 직격당한 상태에서 염화부를 뒤집어쓴 요족 여인의 눈에서 새파란 귀화가 피어 나왔다.
기이한 부적술로 자신의 가슴을 뚫고 얼굴까지 태워버린 저계 수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다.
온몸이 불타는 와중에도 요족 여인은 막장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을 높이 쳐들어 막장의 머리를 부수려는 순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저계 수사 한 녀석이 그녀의 얼굴을 공격해 왔다.
장소천이었다.
머리를 틀어 혼원신검을 피한 요족 여인은 공간을 건너뛰어 장소천을 먼저 공격했다.
그런데.
푸욱.
피했던 검날이 그녀의 심장 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슴이 검에 꿰뚫린 요족 여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피했는데….
서걱!
여인의 심장에 박힌 혼원신검을 뽑은 장소천은 검을 기울여 요족 여인의 머리를 잘라냈다.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
요족 여인에게 헛된 꿈을 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화르르르르.
죽은 요족 여인은 불에 탔지만 지옥과도 같은 불길에도 멀쩡한 부분이 있었다.
그녀의 허리춤에 걸린 건곤대였다.
타악!
혼원신검을 깊게 찔러 넣어 그녀의 건곤대를 탈취한 장소천은 아무런 생각 없이 그것을 자신의 건곤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적수를 찾아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채약당 일조 조원들에게 협공을 당해 죽은 요족 여인은 흑봉족에서 꽤나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죽자 요족들은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원수를 갚겠다고 날뛰다가 또다시 요족 한 명이 희생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요족 두 명이 죽자 남은 요족들은 깜짝 놀라 무극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최고 고수 두 명이 그곳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도 아비규환이었다.
콰광!
쿠르르르릉.
굉음이 울리고 건물이 부서지더니 무극전으로 들어갔던 흑봉종의 최고 고수가 시체 하나를 들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 순간.
무극전 안에서 투명한 광채 하나가 하늘로 쏘아져 올라갔다.
가히 섬전 같은 속도.
놀란 흑봉족의 고수는 공간을 전이시켜 자신의 몸을 이동시켰다.
푸홧!
그런데도 그의 어깨는 터져 나가고 말았다.
“후퇴하라!”
기겁한 요족이 봉우리 아래로 도망치자 수하들은 허둥대며 그를 따라갔다.
“멈춰라!”
제자들이 추적하려고 하자 무극진인이 그들을 만류했다.
“아악!”
“사부님!”
무극진인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입고 있는 옷은 피에 젖었고, 가슴은 길게 갈라져서 붉은 피가 뭉클거리며 빠져나오고 있었다.
요족 한 명을 죽이고서 얻은 상처였다.
사부의 상처가 심한 것을 발견한 제자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날아와 그를 보호했다.
“괜찮다. 요족들은 모두 물러났으니…. 내 상처도 그리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두 당주는 상처 입은 제자들을 속히 치료하고 피해 상황을 파악하여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채약당주인 투곤과 법포당주인 조휴가 공손히 대답했다.
그들도 온몸이 피투성이였는데 특히나 투곤은 발 하나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제15화 : 운보혜(雲步鞋)
요족의 침입으로 현귀봉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제자 세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으며 무극전에 새로 지은 연단실도 부서지고 말았다.
다행히 단로는 무사했지만 법포당에 있던 약재도 상당량이 불에 타서 훼손되었다.
제자들을 회의실로 불러 모은 무극진인은 앞으로의 행보를 의논했다.
이곳도 안전하지 않으니 차라리 호국성으로 들어가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었다.
“사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적들이 전송 신통을 펼쳐 후방을 교란하려고 마음먹은 이상 이곳 현귀봉도 안전한 구역은 아닙니다. 어차피 연단실도 부서졌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습니다.”
“맞습니다. 호국성에는 연허기 고수조차 계시니 차라리 그곳이 더 안전합니다.”
“너희들 의견이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이 호국성으로 가자. 다행히 호국성에는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전각이 있으니 거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장문진인께서 허락하실까요?”
“우리의 피해 상황을 알리면 허락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금궁으로 가서 장문진인께 허락을 득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사이에 각자의 세간을 정리해라. 약초나 약재는 반드시 챙기고 나머지 물건은 중요한 것만 선별하여 건곤대에 넣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소천이는 무극전 안에 있는 책자와 단로, 기타 약재들을 챙겨 놓아라. 나머지는 금궁에 다녀와서 내가 챙길 것이니 건드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부님.”
이어서 채약당주와 법포당주에게도 따로 지시를 내린 무극진인은 대붕처럼 하늘을 날아올라 장문진인이 계신 금궁으로 갔다.
장문진인과의 협상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세력만 남겨놓고 모두 호국성으로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현귀봉이 선발대로 움직이면 이후의 행보가 훨씬 수월했기 때문이다.
장문진인의 성원에 힘입어 이주는 별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휘스스스스.
비행 법기를 타고 호국성 외곽에 있는 커다란 전각으로 들어간 무극진인은 제자들의 거처를 일일이 지정하여 주었다.
그러고는 중앙에 있는 커다란 건물에 무극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무극전 안에 연단로를 설치하고 약재 정리까지 마치자 무극진인은 제자들에게 수고했다며 잠시 쉴 것을 명령했다.
숙소 앞에서 장소천이 막장에게 물었다.
“막장아! 사부님이 요족 고수를 마지막에 공격했던 무기가 뭔지 아냐?”
“왜! 부럽냐?”
“그건 아니고…. 나는 사부님께 그렇게 위력적인 무기가 있는지는 몰랐다. 그것도 법기냐?”
“법기가 아니고 법보다. 너는 법기하고 법보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
“글쎄. 법기는 만드는 것도 쉽고 만들어진 것을 사용하는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연기기 수사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럼 법보는?”
“법보는 천지이보로만 만들 수 있고, 형태를 만든 다음에 자신의 영대에 넣고 오랫동안 의념을 불어넣어 혼연일체를 이루어야 한다고 들었다.”
“맞다. 그래서 법보는 위력적이고, 그것을 만들려면 아무리 못해도 연신기 경지에는 올라야 한다. 사부님이 만든 법보는 이름이 투월환(投月環)이다.”
“와아! 그것만 있으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겠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고 하더라. 법보를 펼치면 법력이 과도하게 소진되어 연신기 경지에서는 몇 번 펼쳐내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럼 연허기는?”
“연허기 고수는 연신기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존재이다. 법력도 천양지차이니 그들이라면 아마 수백 번이라도 펼쳐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냐?”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격차가 더 클 것이다.”
“휴우! 법보는 고사하고 괜찮은 법기라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장소천과 앉아 있던 막장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부적이나 만들러 가야겠다. 좋은 것 만들면 몇 개 보내줄게.”
“그래라.”
막장에게 손을 흔들고 장소천도 자신의 숙소로 들어갔다.
막장과 붙어 있는 방이었다.
딸깍!
방으로 들어간 장소천은 문을 걸어 잠그고 요족 여인이 가지고 있던 건곤대를 개봉했다.
입구를 열고 신식으로 내용을 살피던 장소천의 미간이 자기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여인의 화장용품과 장신구.
옷과 거울 같은 물건만 잔뜩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흠흠.
심지어 속옷도 가득했다.
흑봉족이라고 하여서 공간비술이라도 하나 나올까 은근히 기대했는데….
괜히 헛물만 켠 것이다.
“뭐지? 이런 것들만 들어 있고 진짜 보물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고? 와이, 씨! 하다못해 영석 쪼가리라도 들어 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짜증이 난 장소천은 자신에게 죽은 요족 여인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한눈에 봐도 신분이 높아 보이는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영석이나 보물이 하나도 없다니….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장소천은 요족 여인의 건곤대를 뒤집어 물건을 전부 바닥에 쏟아냈다.
그리고 쓸모없는 물건들을 다시 건곤대로 집어넣었다.
그렇게 검사를 하고 보니 남은 것은 단 한 개밖에 없었다.
청동으로 된 거울.
뒷면에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날아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거울이었다.
“이건 뭐지? 혹시, 법기인가?”
장소천이 청동 거울을 들어 안으로 법력을 불어넣었다.
이것이 법기라면 당연히 반응을 할 것이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청동 거울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영기를 불어넣어도 마찬가지.
자신이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한참을 생각하던 장소천은 일부 법기는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낙인을 찍어 놓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낙인을 지우기 전에는 사용할 수 없다는….
‘그런데 낙인은 어떻게 지우지….’
고민하던 장소천은 청동 거울을 새로운 건곤대에 집어넣고 술법에 조예가 깊은 상관천세를 찾아갔다.
“네가 웬일이냐?”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뭔데?”
“이번에 요족들이 저희 현귀봉에 쳐들어왔었잖아요,”
“그랬지.”
“그때 제가 요족 여인의 건곤대 하나를 얻었거든요.”
“그랬어?”
“네. 그런데 안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겨우 하나 건진 것이 이 거울인데, 법기인지 확인 좀 해 주세요.”
“법기?”
장소천이 건곤대에서 청동 거울을 꺼내 상관천세에게 건네주었다.
이에 상관천세는 거울을 받아 한참 동안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장소천에게 건네줬다.
“법기는 아니다.”
“안에 낙인을 찍어 놓은 것은 아닐까요?”
“법기도 아니고 법보도 아닌데 무슨 낙인이냐? 이것 말고 다른 것은 없었느냐?”
“거울을 빼면 쓸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심지어 영석 쪼가리 하나 들어 있지 않더라고요.”
“확실히 기이하구나. 그래도 저것이 법기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냥 평범한 거울일 가능성도 높겠네요?”
“그것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부조장님! 법기를 사려면 어디로 가야 해요?”
“왜? 하나 장만하려고?”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내일 나와 같이 연기가로 가보자. 이곳 호국성에는 태현국에서 내로라하는 종문들이 많이 와 있다. 그래서 보물이나 천지이보, 영단, 법기를 만들어 파는 곳이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 영석은 많이 있느냐?”
“전에 천향선초를 채취했을 때 조장님이 주신 돈이 남아 있어요. 중품 영석 사십 개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다음 날 아침.
상관천세와 같이 연기가로 간 장소천은 법기를 만들어 파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희귀한 연기재료를 사고파는 가게가 가장 많았고 연기재료를 가져오면 그것으로 법기를 만들어 주겠다는 곳도 꽤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법기를 파는 곳은 채 열 곳도 되지 않았다.
괜찮은 법기가 전시되어 있는 곳은 그나마 세 곳.
그중에서 가장 큰 상점은 현판에 천보각이라고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이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나이 어린 소녀가 나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천보각은 공격용 법기나 방어용 법기는 물론이고 신통력이 부여된 법기까지도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렴하게 판다는 말이 사실인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사 가신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저희 가게는 반품도 가능합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시고 두루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소녀의 말에 장소천이 물었다.
“다 설명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시간이 너무 소요될 것 같으니 중품 영석 사십 개 가치가 있는 법기만 보여주시오.”
“중품 영석 사십 개요?”
소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중품 영석 사십 개면 최상품은 아니더라도 꽤 좋은 법기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공격용 법기부터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파산부라는 법기로, 법력으로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안에 영기를 주입하면 강철을 두부처럼 잘라낼 수가 있습니다. 또한….”
공격용 법기의 설명이 끝나자 소녀는 두 사람을 방어용 법기가 전시되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통력이 부여되었다는 법기를 보여주었는데 중간에 장소천의 발이 멈추어졌다.
그걸 본 상관천세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 운보혜(雲步鞋)라는 신발이 마음에 드는 것이냐?”
“부조장님도 설명을 들으셨지 않습니까? 이 법기는 법력 소모가 거의 없을뿐더러 순간적으로 공격 속도를 높여 줄 수가 있습니다. 기습을 하기에도 적합하고, 도망을 칠 때도 유용할 것 같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괜찮은 법기인 것 같구나. 그렇다면 그것으로 결정하자.”
“알겠습니다.”
물건을 파는 소녀에게 물어보니 가격은 중품 영석으로 서른여덟 개였다.
“손님! 정말 잘 고르신 것입니다. 그 법기는 흔한 것이 아니라서 어디 가서 구경하기 쉽지 않은 물건입니다. 수화불침이고 잘 닳지도 않을뿐더러, 신발을 신으면 크기는 알아서 조절이 됩니다.”
“내가 법기는 처음이라서 그런데 법기를 사용하는 방법 좀 자세히 가르쳐 주시지요. 법기에 낙인을 찍고 지우는 것을 포함해서요.”
“그것은 사용설명서에 다 기재되어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 사용설명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그래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든 법기는 법력을 주입하면 이름과 간단한 조작법이 표시됩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장소천이 영석을 건네주자 소녀는 법기와 작은 책자 한 권을 건네주었다.
책자는 사용설명서였는데 운보혜를 사용하고 관리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었다.
천보각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다시 그들의 거처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중에 상관천세가 장소천에게 물었다.
“비싸지?”
“그러게요. 신발 하나를 산 것뿐인데 가진 영석이 전부 날아가 버렸어요. 이제는 다 합쳐봐야 중품 영석 세 개도 안 될 것 같아요.”
“그것도 적은 돈은 아니다. 대부분의 연기기 수사들은 그만한 돈조차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제가 오늘 엄청나게 많은 돈을 써 버린 셈이네요.”
“헛된 곳에 돈을 쓴 것은 아니지 않으냐? 그 법기가 너의 목숨을 구해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렇겠죠?”
“물론이다. 오후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냐?”
“사부님께 가보려고요. 이제 막 이사를 온 것이라 할 일이 많을 것 같거든요.”
“그래라 그럼.”
“오늘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장소천의 인사에 손을 흔들어준 상관천세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고마운 사형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던 장소천도 곧바로 무극전으로 달려갔다.
사부와 곽 조장은 한창 연단을 하고 있었다.
도동인 공세천을 만난 장소천은 사부님께서 연단 시 어떤 물을 사용했는지 물어보았다.
“직접 가서 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그러자.”
공세천이 장소천을 데려가서 보여준 물은 전각 뒤편의 바윗돌 틈새에서 솟구치는 용천수였다.
다행히 물속에 석회 성분은 없었으며 전반적으로 현귀봉에서 사용했던 암반수보다는 품질이 양호한 편이었다.
“물이 좋아 보이는구나. 앞으로는 나도 이 물로 연단을 해야겠다.”
“제가 떠다 드릴까요?”
“하하하! 됐다. 내가 연단할 것은 직접 채수할 것이니 나까지 신경 쓸 것은 없다.”
“알겠습니다.”
다시 연단실로 돌아온 장소천은 사부가 연단 중인 모습을 조금 지켜보다가 자신의 단로가 있는 곳으로 건너왔다.
그리고 황정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연단사는 영단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법.
좋은 영단을 많이 만들면 사문에 보탬이 되고 자신의 실력도 향상시킬 수가 있으니 한시라도 연단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제16화 : 잠적
늦은 밤.
연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장소천은 오늘 구입한 운보혜와 함께 사용설명서를 꺼냈다.
사용설명서를 모두 암기한 장소천은 운보혜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처음 가져보는 법기여서일까?
아니면 거금을 들여 구입한 때문인지 법기에 대한 장소천의 애착은 남달랐다.
크기와 무게, 그리고 외양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더니 조심스럽게 법기를 발에 착용했다.
그냥 보기에는 운보혜의 크기가 컸다.
하지만 신발을 신자 장소천의 발에 딱 맞게 조여졌다.
기분 좋은 착용감에 장소천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신은 김에 효과를 확인해 보자. 법력이 얼마만큼 소모되는지도 살펴보고….”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수련실로 가야 했다.
츠팟!
수련실에서 소요검법을 펼치던 장소천의 신형이 순간적으로 빨라졌다.
잠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빨라졌는데도 몸이 제대로 반응한다는 사실.
전광석화같이 뻗어 나간 장소천의 검에서 세 가닥 검영이 흘러나왔다.
연기기 사성 후기에 오른 후.
장소천은 검기를 검 밖으로 쏘아 보낼 수가 있었다.
탄강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장소천의 검에서 흘러나온 검영도 검 그림자에 그치지 않고 유형의 실체를 지니고 있었다.
츠팟!
몸을 휘돌며 허공으로 뛰어오른 장소천은 허공의 한 점을 찍고 순간적으로 방향을 틀어 적을 역습했다.
“이럴 수가….”
장소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운보혜에 영기를 극한으로 몰아넣었더니 허공을 딛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조차 가능했다.
그의 수련 경지로는 실현 불가능한 이능.
그것을 법기가 가능케 해준 것이다.
“허허!”
운보혜를 신고 소요검법을 펼치다 보니 더 이상 소요검법은 기본검법이 아니었다.
상승 검법.
그것도 상대의 의표를 번번이 벗어나는 괴이하고 난해한 검법이었다.
운보혜의 착용 효과에 크게 만족한 장소천은 이번에는 법력 소모에 초점을 맞춰 관찰하였다.
그런데 이 또한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다른 법기도 법력 소모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들었는데 운보혜는 소진되는지 아예 느끼지도 못할 정도였다.
‘내친김에 신법도 펼쳐보자. 이 정도라면 못해도 삼 할은 빨라졌을 것이다.’
수련장을 나가면 그 앞에 꽤 넓은 공터가 있었다.
달 밝은 밤.
달빛을 지르밟으며 운월신법을 펼쳤던 장소천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정말로 속도가 삼 할 정도는 빨라진 것 같았다.
그 순간.
장소천은 운보혜를 사면서 지급했던 영석이 전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대박인 것이다.
경지가 높아지면 속도는 더욱 빨라질 터.
진즉에 사지 못한 것이 차라리 후회될 정도였다.
수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장소천은 다시 한번 청동 거울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법기의 사용설명서를 읽어가며 다각도로 분석한 결과.
거울은 법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허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거울을 건곤대에 던져 놓은 장소천은 한동안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서야 운기조식을 하고 잠이 들었다.
* * *
한 달 정도 연단을 계속했던 장소천은 서서히 다른 영단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재능을 황정단 하나에만 묶어 둘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언을 구했는데 사부님은 장소천에게 단방 세 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무엇을 만들 것인지는 직접 고민해 보라고 말씀하셨다.
사부님이 전해준 단방은.
혼백을 맑게 해주는 신혼단과 경지 향상에 도움을 주는 기신단 그리고 잠력을 폭발시켜 순간적으로 괴력을 발산케 하는 폭혈단이었다.
단방을 보니 기신단은 지금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신혼단은 일부 약재가 부족했다.
폭혈단의 주재료인 혈마초는 구경조차 한 적이 없고….
그래도 사부님께서 단방을 전해준 것을 보면 아예 구할 수 없는 약재는 아닐 것이었다.
그래서 연단가로 달려갔더니 역시나 부족했던 재료들이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다만 폭혈단의 약재는 너무 희귀했다.
게다가 일부 부족한 약재가 있어 잘해야 서너 번 밖에 연단을 시도하지 못할 듯싶었다.
그래도 구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장소천은 무극전으로 돌아와 사부님께 사실을 알렸다.
“세 가지 영단에 모두 관심이 있다니 어디 한번 만들어 보거라. 그런데 폭혈단은 만들더라도 함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 그 약은 후유증이 심해 남용하면 몸이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에게 약속하고 자신의 연단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온 장소천은 그나마 만들기 쉬울 것으로 예상되는 기신단부터 도전했다.
기신단은 황정단과 강신단 중간 정도의 효과.
지금 곽 조장이 연단하고 있는 진청단과 유사한 정도의 영단이었다.
그런데도 장소천에게 기신단을 추천한 것은 최근 진청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재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
특히나 주재료의 수급 상태가 매우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에 반해 기신단의 단방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약재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약재의 종류가 많고 연단 조건이 까다로울 뿐이었다.
물론 장소천은 자신이 있었지만….
연단을 하기 전에 장소천은 그동안의 경험을 살려 연단비방서를 작성했다.
불량률을 줄이고 약효를 증가시키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그 안에는 약재 투입 시간과 가열시간, 그리고 예상되는 발열량과 그것을 억제하는 방법까지 적어놓았다.
그렇게 연단을 한 결과.
처음에는 연단 도중에 단로 뚜껑을 열어야 했다.
예상보다 발열이 심해 압력을 미처 제어하지 못한 것이다.
두 번째는 단로를 냉각하느라 약재를 제시간에 투입하지 못하여 실패했고.
세 번째는 끝까지 연단을 마무리하기는 하였으나 약재 한 종류가 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해 미반응이 발생되고 말았다.
휴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장소천은 심기일전하여 네 번째 연단에 도전했다.
그 결과.
마침내 그가 원했던 기신단을 다섯 개나 만들었다.
이능으로 약효를 확인한 결과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평균 이상은 되는 듯싶었다.
기신단을 만드는 데 성공한 장소천은 이후 신혼단 조제에 착수했다.
신혼단은 기신단보다 만드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재료도 기괴하고 연단 조건도 훨씬 까다로웠다.
그런데도 장소천은 단 세 번 만에 연단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폭혈단 연단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약재가 다 소진될 때까지 장소천이 얻은 영단은 단 한 개.
그것도 미반응된 불량품에서 양호한 부분을 추출하여 영단화시킨 것이었다.
그날 이후 장소천은 기신단과 신혼단을 번갈아 가며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장인 곽무진이 만들던 진청단의 주재료가 동이 나고 말았다.
이에 상관천세와 한여옥은 비행 법기를 타고 약재를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오른 것이다.
결국 조장은 연단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장소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약재를 사러 연단가로 나갔던 장소천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며칠 사이 약재 가격이 두 배로 오른 것이다.
이유는 한동안 잠잠했던 요족과의 전투가 다시 재개되었다는 것.
그리고 후방에 있던 약재 저장고가 요족의 기습으로 불타 사라졌다고 했다.
이대로라면 약재 부족으로 더 이상은 연단이 불가능할 터.
수중에 있는 영석을 탈탈 턴 장소천은 그것으로 시장에 있는 약재들을 전부 긁어왔다.
다행히 그중에는 폭혈단을 만드는 재료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열흘 후.
곽무진의 제안으로 채약당 일조 조원들은 생활관으로 집결했다.
그 자리에서 곽무진은 조원들에게 진청단 세 개씩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
그 뒤를 따라나선 장소천은 각자에게 기신단 다섯 개와 신혼단 두 개 그리고 폭혈단 한 개씩을 전해 주었다.
“소천아! 이것은 다 뭐냐?”
조장인 곽무진이 묻자 장소천은 영단의 이름과 효과를 설명하여 주었다.
특히나 폭혈단은 죽음의 위기에 처하기 전에는 절대로 복용하지 말 것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이걸 전부 다 네가 만들었다는 말이냐?”
“네. 하지만 더 이상은 만들 수가 없습니다. 조장님도 아시겠지만 연단가에 있는 약재가 모두 품절되었거든요.”
“뭐야! 그럼 이제는 돈이 있어도 영단을 사 먹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막장이 장소천을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 며칠 안으로 영단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를 거야. 그러니까 가지고 있는 영단은 정말로 아껴가면서 복용해야 해.”
“아! 큰일이다.”
“뭐가 그렇게 큰일이라는 것이냐?”
상관천세가 묻자 막장은 속에 담았던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아시겠지만 저는 영근속성이 적잖아요. 그나마 영단으로 부족한 부분을 만회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그 기회조차 날아가 버린 것 같아요.”
“전쟁으로 부적값도 크게 올랐다며? 그러면 그 돈으로 영단을 사 먹으면 되잖아. 그것도 안 되면 영초를 직접 채취해서 소천이에게 가져다줘도 되고….”
“아! 그러면 되겠네요. 소천아! 약재만 가져다주면 영단은 만들어 줄 수 있지?”
“물론이다.”
“하하하!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이 채약당 일조에 들어온 일인 것 같아요. 잠시만요.”
이번에는 막장이 일어나서 조원들에게 소뢰부와 염화부를 세 장씩 나누어 주었다.
장소천에게는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다섯 장씩.
게다가 이상하게 생긴 부적도 한 장 더 얹어주었다.
[마지막 것은 최근에 만든 비행부이다. 한 번밖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유용하게 쓰일 날이 있을 것이다.]
[고맙다. 잘 쓰마.]
[당연히 그래야지. 히히.]
징그러운 미소를 보인 막장이 자리로 돌아가자 곽무진이 조원들에게 최근의 동향을 설명했다.
“지금까지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이제 시장에 쓸 만한 약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되면 연단술사인 사부님과 우리는 소용이 없게 될 터이고, 결국에는 전쟁터로 끌려 나갈 가능성이 높다.”
“나가서 싸우면 되잖아요?”
“그래야지. 하지만 그 전에 우리의 전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충분히 벌어야 하고….”
“혹시 천리협곡으로 채약을 가자는 말씀입니까?”
눈치 빠른 상관천세의 질문에 곽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라며 반박하려던 상관천세가 조장의 눈빛을 보고는 조용히 말을 삼켰다.
조원들을 사지로 내몰 조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채약을 위해 이곳저곳 마구 돌아다니자는 말은 아니다. 전에 소천이가 영초를 채취했다는 곳 기억하지?”
“귀혈곡이요?”
“폭포?”
“맞다. 그 동굴로 들어가서 몇 개월 만이라도 무공을 수련하려고 한다. 제자들이 채약을 떠나서 실종되었다고 하면 사부님을 닦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와아! 조장님! 잔머리도 기발하시네요?”
“이놈아! 굵은 머리가 더 많다.”
“그런가요?”
“사부님께는 내가 말씀드릴 것이다. 소천아!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이곳에는 사부님을 도와드릴 분이 많아서 제가 없더라도 큰 불편은 없을 것입니다. 저도 조장님을 따라가겠습니다.”
“알겠다. 그래도 너는 적전제자이니 가기 전에 사부님을 뵙고 가거라.”
“저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알겠다. 그러면 내일 새벽에 떠나는 것으로 알고 다들 준비해라. 비밀 유지하고.”
“알겠습니다.”
생활관 밖으로 나갔던 조장은 반 시진 만에 돌아왔다.
조금은 지친 듯한 표정.
그래도 설득은 잘되었다고 말했다.
조원들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온 장소천은 한참이 지나서야 무극진인을 찾아갔다.
“천리협곡을 가는 이유는 무진이에게 들었다. 너도 함께 떠나려는 것이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 다녀오너라. 내가 항상 강조한 말이 있다. 수선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느냐?”
“수련 경지를 높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선(善)이라고….”
“방금 그 말을 절대로 잊지 말거라. 알았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그리고 이것은 제자의 성의입니다.”
“무엇이냐?”
“제자가 틈틈이 만들어 놓은 영단입니다.”
“어디 보자.”
장소천이 올린 목함을 열어본 무극진인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목함 안에는 황정단과 기신단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게다가 신혼단 열 개에 폭혈단 두 개까지….
상부에서 독촉을 하더라도 이 정도 영단만 있으면 일이 년 정도는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제17화 : 다시 천리협곡으로
어스름을 뚫고 하늘로 날아오른 묵귀선은 은밀하게 구름 속으로 몸을 숨겼다.
구름 속에서 곽무진이 장소천에게 말했다.
“사부님이 단로를 들고 가라고 하실 줄은 진정 몰랐구나.”
“지금은 전시 상황이니 모든 일에 만전을 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일이라며 법포당에 있는 기본 약재도 챙겨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 극천문에 전해 내려오는 단방 사본도 한 부 건네주셨는데 장소천은 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사부께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했기 때문이다.
“기본 약재를?”
“네. 그래서 충분히 챙겨 가지고 왔습니다.”
“하하하! 잘했다. 사부님 말씀대로 가지고 있다 보면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다. 어. 적이다! 다들 전투 대형으로 포진해라!”
곽무진이 바짝 긴장하여 소리쳤다.
전투 대형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었다.
상관천세는 비행 법기를 조종해야 했기에 싸움에 나설 수가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머지 네 사람이 적과 싸워 배를 사수해야 하는 것이다.
보통 선수는 조장, 선미는 한여옥이 맡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나머지 두 사람이 중앙 좌우를 맡는 포진세였다.
하지만 적이 한 명이거나 한 방향으로 몰려오면 굳이 세를 분산시킬 필요가 없었다.
적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몰려가서 총력전을 펼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애매했다.
놈들의 목표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야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교묘하게 침투하여 묵귀선을 파괴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배만 파괴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여반장이었기 때문이다.
공중의 싸움에 이골이 난 그들과는 달리 채약당 일조 조원들은 이러한 싸움 방식에 서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먼 거리에서 적을 상대하는 장거리 살상 무기가 없었다.
커다란 도끼를 든 요족 한 명이 인간들의 공격을 피해 배 밑으로 파고들었다.
콰앙! 쾅! 쾅!
그러고는 도끼로 배 밑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비행 법기인 묵귀선은 배 하단에 철판을 덧대 방어력을 높인 구조였다.
하지만 흉맹한 요족의 도끼질에 배 밑바닥이 쩌억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기우뚱.
배가 기울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막아낸 상관천세는 조종간을 들어 올려 묵귀선을 거꾸로 뒤집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배 하부에 있는 요족을 시야 안으로 끄집어내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지금 묵귀선을 공격하고 있는 자들은 구요국의 아홉 개 종족 중의 하나인 창응족이었다.
비행 솜씨로는 요족 최고의 종족.
게다가 탐색조인 이들의 비행 실력은 더욱더 뛰어났다.
상관천세가 배를 아무리 현란하게 조종해도 놈을 시야로 끌어 올리지는 못하였다.
바로 그때.
“부조장님! 조종간을 저에게 넘기고 적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어떨까요?”
장소천이 상관천세에게 달려와 역할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운전할 수 있겠느냐?”
“그냥 조종간만 꽉 잡고 있으려고요.”
“그렇게 해라. 부탁한다.”
조종간을 장소천에게 맡긴 상관천세는 조원들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대신에 배 밑바닥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도끼질을 하고 있는 요족이 있는 곳으로 갔다.
방금 전에 경험한 바에 따르면 적들의 비행 실력이 워낙 뛰어나서 비행 법기를 능수능란하게 움직여 봐야 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장거리 공격 능력이 없는 장 사제가 조종을 맡고 술법에 능한 자신은 공격에 가담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시기적절한 상황 판단과 전술 채택.
그리고 과감하게 자신에게 달려와서 역할을 바꾸자고 말한 장소천을 떠올리니, 이제는 자신에게 배울 점이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았다.
파아앗!
배 밑바닥에 항아리만 한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한 상관천세는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식으로 적의 위치를 발견하자마자 구멍 속으로 거대한 불 뱀 한 마리를 쏘아 보냈다.
콰앙!
수차례의 도끼질로 배 밑창을 거의 박살 냈던 요족 전사는 이번이 마지막 일격이라고 생각하며 도끼로 묵귀선의 용골을 내리찍었다.
그런데 도끼가 용골에 닿기도 전에 거대한 불 뱀 한 마리가 나타나 그를 공격했다.
서걱!
놀란 요족 전사는 도끼로 뱀의 머리를 잘라냈다.
그런데 잘린 머리 부위까지 뱀으로 변해 두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가까스로 불 뱀의 공격을 피한 요족 전사는 그가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묵귀선 안으로 파고들었다.
적의 심장부로 난입하여 단숨에 혈류를 끊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츠파앗!
묵귀선 안으로 파고드는 데 성공한 요족 전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미소는 길지 않았다.
번쩍!
츠츠츠츠.
뇌전 한 가닥이 그의 얼굴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쿠와왕!
그 이후로 날아온 것은 염화부였다.
뇌전에 얼굴이 날아간 요족은 파란색 염화로 둘러싸여 길길이 날뛰었다.
서걱!
그러다가 상관천세가 휘두른 검격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요족 전사를 죽인 상관천세는 놈의 건곤대를 회수한 후 위쪽으로 뛰어올라 나머지 두 요족을 공격했다.
기우뚱!
배가 한쪽으로 기울자 조종간을 잡은 장소천의 손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의 팔뚝에는 푸른색 힘줄이 돋아났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히죽.
그런데도 장소천의 입가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지금까지는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었는데 드디어 태세 전환의 시발점이 마련된 때문이다.
조원들 중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단연 곽무진이었다.
하지만 조장은 결정적인 단점을 지니고 있었다.
단거리 공격에만 강할 뿐 먼 곳에 있는 적을 공격할 무기가 없었다.
한여옥도 마찬가지.
그녀는 암기도 많고 그중에는 꽤 먼 거리에 있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나 두꺼운 깃털로 온몸을 감싼 창응족 요수를 타격할 수 있는 암기는 몇 개 없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요족이 배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눈을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막장도 똑같았다.
그가 가진 부적은 대부분 근접거리 용이었다.
경지가 높아지면 멀리까지 날려 보낼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의 경지로는 무리였다.
그런 이유로 불리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장거리 공격 능력을 보유한 상관천세가 가세하자 전세가 서서히 뒤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대장을 잃은 요족들은 광분하며 달려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저돌적인 자는 투창 능력을 보유한 요족이었다.
피리릿!
기이하게도 그가 가진 투창은 공격 후에 놈의 손으로 다시 회귀했다.
투창이 법기인 것을 감지한 곽무진은 집중적으로 놈을 견제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투창에 의한 피해가 없었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놈은 점점 더 비행 법기 가까이 다가왔다.
투창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은 실수였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상관천세는 투창을 날리는 요족에게 불 뱀을 날려 보냈다.
거대한 화망이 날아오자 기겁한 요족은 뱀의 머리 쪽으로 투창을 내던졌다.
쐐애애액!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투창은 불 뱀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런데….
투창에 머리가 꿰뚫리고도 불 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요족에게 날아왔다.
그러고는 육 장이나 되는 거대한 몸통으로 요족을 칭칭 감아 도망치지 못하게 압박했다.
화르르르르.
지옥의 염화 같은 뜨거운 불길에 둘러싸인 요족 고수는 투창을 회수한 후 화염을 뚫고 뒤로 도망치려고 했다.
이에 상관천세는 불 뱀을 부려 요족을 배 가까이 끌어들였고 ….
장소천도 조종간을 돌려 비행 법기를 요족 옆에 들이댔다.
요족이 근접거리에 이르자 가장 먼저 한여옥의 암기가 놈의 깃털을 뚫고 들어갔다.
연이어 뇌전이 몇 차례 번뜩이더니….
마지막으로 청룡언월도를 닮은 거도가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연이어 고수들이 죽어 나가자 사기를 잃은 요족 한 명은 꽁지가 빠지라고 도망쳤다.
죽은 요족의 건곤대와 투창을 챙긴 곽무진이 장소천에게 조종간을 넘겨받은 상관천세에게 물었다.
“부조장! 귀혈곡은 아직 멀었는가?”
“이제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곳이 장 사제가 말한 폭포입니다.”
“그러면 내려가지.”
“알겠습니다. 비행 법기의 상태가 좋지 못해 험악하게 착지할 수도 있으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내려갑니다.”
부조장의 말이 끝나는 순간 묵귀선이 땅으로 처박히듯 고꾸라졌다.
이 정도면 다소 험악한 것이 아니라 거의 추락하는 수준이었다.
다행인지 묵귀선은 땅으로 처박히지 않았다.
땅을 피해 물 위로 떨어진 것이다.
차앗!
배가 용소에 떨어지기 직전에 다섯 개의 신형이 일제히 하늘로 솟구쳤다.
덕분에 조원들은 무사했지만 묵귀선은 상태가 처참했다.
수리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친 사람이 없어 다행이다. 비행 법기는 다시 사면 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장은 조금 서운한 모양이었다.
오랜 세월 그와 함께 한 비행 법기였기 때문이다.
“소천아! 지금부터는 네가 길을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모두들 저를 따라오세요.”
조장의 명령에 물속으로 들어간 장소천은 일행을 폭포 뒤에 있는 공터로 인도했다.
그리고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라가 작은 동굴로 들어갔다.
답답했던 동굴은 금세 넓어졌는데 그곳에 커다란 요괴의 사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죽은 지 꽤 되었는지 사체는 뼈만 남아 있었다.
요괴의 사체를 지나친 장소천은 전에 영초를 캤던 동부로 들어갔다.
다행히 이곳은 변한 것이 없었다.
“잠깐!”
곽무진이 긴장된 기색으로 일행에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청룡언월도처럼 생긴 커다란 도를 들고 조심스럽게 동굴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장소천이 전음으로 막장에게 물었다.
[막장아!]
[왜?]
[조장님이 들고 계신 무기 이름이 뭔지 아냐?]
[단천무극도를 말하는 거냐?]
[어. 그거…. 고맙다.]
[뭘….]
두 사람의 전음과는 상관없이 일조 조원들은 동부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선객을 발견했다.
요족이었다.
쉬이이익!
요족을 발견한 곽무진은 지체 없이 달려들어 단천무극도로 요족의 목을 내리쳤다.
“소소잖아. 안 돼요!”
그때 장소천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방금 조장이 공격했던 소녀가 자신에게 용비봉무결을 전해준 소소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곽무진의 단천무극도는 무겁기 이를 데 없는 중병기였다.
기호지세.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이미 휘둘러진 검로를 쉽사리 바꿀 수는 없었다.
그나마 도에 담긴 힘을 약간이나마 거두었는데 그 순간 귀에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채앵!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도를 쥔 손바닥으로 엄청난 충격량이 전해졌다.
버들가지처럼 연약해 보였던 요족 소녀가 무시할 수 없는 고수였던 것이다.
파바박!
낭창낭창한 연검으로 곽무진의 단천무극도를 막아냈던 소소의 몸이 허공중에서 일곱 번이나 회전했다.
그리고 회전력을 빌려 성성이처럼 생긴 인간의 목에 바람구멍을 뚫으려는데….
“소소. 멈추어라!”
어디선가 들려온 낮은 소성.
그 한마디에 소소는 풀잠자리처럼 몸을 날려 주인의 곁으로 돌아갔다.
“소천아! 아는 사람이냐?”
“네. 전에 요족한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바로 저분이세요.”
장소천이 뒷짐을 지고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은단비를 가리키며 말했다.
“은 수사! 오랜만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로 왔는가?”
“아, 이분들은 함께 채약을 다니는 동료들입니다. 비행 법기를 타고 가다가 이 근처에서 기습을 당해 몸을 숨기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오래 머물 것인가?”
“그것은 아직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상황을 보고 움직이려고 합니다.”
“알겠네. 그런데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되지 못하네. 머지않아 탐랑족이 쳐들어올 것이네.”
“…참고하겠습니다.”
요족인 은단비의 말에 조원들은 절망에 빠졌다.
탐랑족은 구요국에 있는 아홉 개 요족 중에서 가장 흉악한 종족으로 작금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이곳의 정체가 발각된 것이 사실이라면 동부에 머물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화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8화 : 신력을 수련하는 구결을 얻다
“조장님! 어떻게 할까요?”
상관천세가 곽무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기는? 탐랑족이 쳐들어올 것이 확실하다면…. 그 전에 이곳 동부를 빠져나가야지.”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지 않습니까?”
“…….”
“비행 법기도 없고요.”
“나도 알아. 그래도 방법을 찾아보자.”
“알겠습니다. 그런데 적호족의 공주라는 저 여자는 믿어도 될까요?”
상관천세가 멀리서 장소천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은단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가 장소천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요족.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부조장! 우리가 믿는 것은 요족 여인이 아니라 장소천이지 않는가? 이곳의 일은 소천이에게 맡기고 우리는 체력이나 회복하세.”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상관천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시간.
장소천이 이곳으로 오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자 은단비가 그에게 물었다.
“비행 법기를 타고 오다가 요족에게 기습을 당했다고?”
“등 뒤에 날개가 달린 요족인데 온몸이 깃털로 뒤덮이고 비행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자들이었습니다. 흉맹하면서도 머리가 좋아…. 상대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창응족과 싸운 모양이군. 놈들은 다 죽였는가?”
“한 명은 놓쳤습니다.”
“이런….”
“왜 그러십니까?”
“놈들의 추적술은 사냥개에 비견될 만하네. 몇 시진 내로 추적조가 이곳으로 올 수도 있네.”
“그럼 큰일이지 않습니까?”
“큰일까지는 아니라네.”
“그것이 무슨….”
“잘 생각해 보게. 그들이 무서운 것은 하늘에 있을 때이네. 놈들이 주제 파악을 하지 못하고 이 좁은 동부로 들어온다면…. 그야말로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이나 진배없지.”
“그렇군요. 그런데 공주님은 이곳에 무슨 일이신지요? 아직도 연기재료를 찾고 계십니까?”
“이번에는 영초 때문에 왔네.”
“영초요?”
“동생의 몸이 좋지 못하네. 그래서 적호족의 비방인 성신제백단(成神制魄丹)을 만들려고 하는데 영초가 한 가지 부족하다고 하더군. 그것을 찾으러 왔네.”
“그렇군요. 혹시 영초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영초를? 아차! 자네가 채약사라고 했지. 혹시 이런 영초를 본 적이 있는가?”
은단비가 영초를 그린 그림을 장소천에게 보여주었다.
그림을 본 장소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은단비가 보여준 영초는 환혼초라 불리는 영초로 인족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영초였다.
“이 영초는 너무 희귀하여 저도 딱 한 번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생태상 음기가 강하고 귀기가 흐르는 구역. 그것도 지하 깊숙한 곳에서 자라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곳 귀혈곡에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한 달여를 탐색했는데도 찾지 못했네.”
“영초뿐만이 아닙니다. 영취산에 있는 약초도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것은 영족(英族) 소행이네.”
“약초가 사라진 이유가 요족 때문이라는 말씀입니까?”
“영족은 구요국에 있는 요족 중의 하나로 전형적인 약소 부족이네. 영수대에 수만 마리의 곤충들을 넣고 다니면서 꿀을 채집하거나 적의 공격을 방어하곤 했네.”
“그런데요?”
“누군가 영족에게 비방을 전수해 준 모양이네. 곤충들에게 약초를 뜯어먹게 한 다음에 그 기운을 흡수하는 비법 말이네. 듣자 하니 지금은 세력이 많이 커졌다고 하더군.”
“그래서 약초가 모두 사라졌던 것이군요. 영족이 열 명만 몰려와도 수십만 마리의 곤충이 산속에 있는 약초를 찾아 탐할 텐데…. 정말로 두렵고 무서운 일이네요. 그런데 왜 영초는 남아 있는 것입니까?”
“영초는 기운이 강해서 곤충들이 먹을 수 없다고 들었네.”
“그렇다고는 해도 큰일입니다. 영취산에 있던 약초가 모두 사라져서 저희 인족 채약사들은 다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이제는 연단조차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약초가 많이 필요한가 보군?”
“아직도 약초가 남아 있는 곳이 있습니까?”
“물론이네. 영족이 아무리 대범해도 그들은 소수 종족에 불과하네. 영취산은 인족과 공동으로 관리하는 구역이라서 마음 놓고 탐할 수 있겠지만 다른 요족 구역은 가당키나 하겠는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약초를 구할 방도가 없겠습니까?”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약초만 구해주신다면 아무리 비싼 가격이라도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영석은 우리도 충분하네. 약초를 사려면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가지고 와야 할 것이네.”
“그 말씀은…?”
“우리 적호족이 혹해 달려들 물건 말일세.”
“…….”
고민하던 장소천이 건곤대에서 영단 한 개를 꺼내 은단비에게 보여주었다.
“이 약은 신혼단으로 혼백을 맑게 해주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혼단! 특이한 이름이군.”
처음에 영단을 본 은단비는 두 눈에 화색을 띠었다.
하지만 손톱만큼 떼어 먹어보더니 약간 실망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이 약도 동생에게 어느 정도 효험은 있을 것 같네. 하지만 병세가 깊어지는 것을 늦출 수 있을 뿐, 성신제백단처럼 병세를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을 것 같네.”
“그나마 효험이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시니 다행입니다.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신 약재가 있는지요?”
“많은 양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네.”
“그러면 우선 이것이라도 약재로 바꾸어 줄 수 있습니까?”
장소천이 건곤대를 두드려 영단 스무 개를 꺼냈다.
그가 가진 신혼단 전부였다.
“한 개만 가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잠시만 기다리게.”
허리춤에서 건곤대 한 개를 풀어낸 은단비는 잠시 고민하더니 통째로 장소천에게 건네주었다.
“원래는 영단의 가치를 따져 조금만 나누어 주려고 했네. 하지만 옛정이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받게. 이것이 내가 가진 약초 전부이네.”
“고맙습니다.”
은단비가 준 건곤대를 열고 신식으로 안을 살펴본 장소천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건곤대 안에 든 약초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수십 배는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진청단과 강신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장소천이 은단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환혼초의 행방을 알게 되면 내게 알려주게. 그런데 저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은단비가 곽무진을 바라보며 물었다.
운기조식에서 깨어난 곽무진이 벽 앞에서 손바닥을 펼친 채 힘을 쓰고 있었다.
* * *
장소천이 만들어준 기신단을 복용하고 운기조식을 한 곽무진은 짧은 순간 잃었던 기력을 모두 회복했다.
그래서 요족에게 빼앗은 건곤대를 열었는데 뜻밖에도 법기 한 점이 들어 있었다.
멸혼궁(滅魂弓).
거창한 이름을 가진 법기는 손바닥 두 개 크기밖에 되지 않았다.
화살도 한 자 크기가 안 돼 보이고….
자신이 사용하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한 곽무진은 활과 화살을 전부 한여옥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곽무진 자신은 요족을 죽이고서 얻은 회선창을 연습했다.
회선창은 파괴력이 높을뿐더러 자동 회귀라는 놀라운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핫!”
가공할 힘으로 회선창을 내던졌던 곽무진이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죽인 요족은 창을 뿌리치고 손바닥을 펴면 법기가 곧바로 회수되었다.
그런데 그가 회선창을 던지면 돌아오는 시간이 왠지 모르게 지체되는 느낌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곽무진은 먼저 법기를 몸에 숙련시키는 데 주력했다.
쉐에에엑!
곽무진은 칠 척 거한.
그가 영기를 주입하여 던져낸 회선창은 암벽 속으로 이 장여나 파고들었다.
부르르르르.
손바닥을 펴고 법력을 도인하자 회선창은 한참이 지나서야 벽면에서 빠져나왔다.
그나마 빠져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데 옆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법기를 이리 줘 보게.”
누군가 싶어 눈을 돌리자 적호족의 공주였다.
원래라면 넘겨주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옆에 있는 장소천의 눈빛을 본 후 곽무진은 순순히 회선창을 넘겨주었다.
“창응족이 사용하는 법기에는 요족의 표증이 찍혀 있네. 낙인이나 금제가 아니라서 사용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표증을 지우지 않으면 제 위력을 낼 수가 없네.”
은단비가 창을 들고 검인하자 투창에서 눈부신 적광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기분 나쁜 기운이 연기처럼 빠져나왔다.
표증을 지운 것이다.
직후.
우우우우웅.
창이 울부짖는가 싶더니 적광이 말끔하게 걷혔다.
휘익!
척!
은단비가 던져 준 회선창을 손에 쥔 곽무진은 법기가 손에 차악 감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 좋은 느낌을 살려 투창을 내던지자.
쉐에에에엑!
회선창이 암벽 속으로 삼 장 깊이까지 파고들었다.
촤악!
그리고 손바닥을 펼쳤을 뿐인데….
회선창은 어느새 곽무진의 손아귀로 돌아와 있었다.
만족한 듯 곽무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왜 이러는 겐가?”
기분 삼아 회선창의 표증을 지워 주었던 은단비 앞으로 상관천세와 한여옥이 요족의 건곤대에서 찾아낸 법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란히 서 있었다.
“선자! 저희 것도 부탁드립니다.”
“저도요.”
어이없는 상황에 은단비가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장소천도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은 수사님! 도와주시는 김에 저분들의 법기도 부탁드립니다.”
“참나. 인간들이 뻔뻔하기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단비는 상관천세가 내민 칠채선(七彩扇)과 한여옥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활을 집어 들고 있었다.
저녁 무렵.
장소천은 다시 은단비를 찾아갔다.
“무슨 일인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
“나는 요족이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님처럼 생각되는군요.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가 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싱거운 소리 하지 말고 묻고 싶은 것이나 질문하게.”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장소천이 건곤대에서 청동 거울을 꺼내 은단비에게 보여주었다.
“최근 저희 극천문에 흑봉족 수사들이 쳐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얻은 물건인데 아무리 살펴보아도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흑봉족이 확실한가?”
“워낙에 유명한 종족이지 않습니까? 전송 신통으로 후방까지 단숨에 넘어온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자네를 만나니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이 적지 않군그래. 그건 그렇고. 자네는 이것이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저는 특이하게 생긴 공간지보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당연히 있어야 할 물건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주의 깊게 살펴보았는데 법기나 법보는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사문의 존장에게 여쭤보지 그랬는가?”
“저 앞에 계신 분들 중의 한 분에게 여쭈어보았는데 그분도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셨습니다.”
“사문에 연허기 고수도 있지 않은가?”
“그분들께는 여쭈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있는가?”
“그렇게 되면 저 혼자 독차지하지는 못할 것 같았습니다.”
“꽤나 솔직하군. 맞네. 저것은 공간지보이네.”
“혹시 여는 방법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불가하네. 이건 같은 요족에게도 함부로 전수하지 않는 비결이기 때문이네.”
“수련 비결입니까?”
“꽤나 집요하군. 정성을 생각해서 조금만 알려주겠네. 공간지보를 사용하려면 신력을 수련해야 하네. 신력이 몸에 쌓이면 저절로 신위가 발현되지.”
신위라는 말에 장소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용비봉무결을 펼쳐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신위였기 때문이다.
“신력이라는 것이 공간지보를 운용하는 데 사용되는 것만은 아닌 모양이군요.”
“세상에 신비한 것은 다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네. 영단의 약효를 높이는 데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욱 욕심이 나는군요. 방금 말씀하신 비결을 이것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장소천이 건곤대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은정을 꺼내 은단비에게 건네주었다.
은정을 본 은단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장소천이 자신에게 준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만한 크기의 은정을 더 남겨두었을 줄이야….
이 정도면 적호족의 전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가 있었다.
장로뿐만이 아니라 고계 수사들의 법기나 법보까지도 개선시킬 수 있는 양이었다.
그렇다고 신력을 수련하는 비결을 섣불리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것은 요족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
“은 수사님! 부족하시면 말씀하시지요?”
“은정이 더 있다는 말인가?”
“물론입니다.”
장소천이 건곤대에서 은정 하나를 더 꺼냈다.
그러고도 은단비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이제는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은정 중에서 큰 것을 꺼냈다.
그것까지 은단비에게 건네주자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19화 : 탈출
“방금 자네가 나에게 준 은정이 얼마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줄 알고는 있는가?”
장소천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저는 채약사입니다. 연기재료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이제는 저도 작은 것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그것도 드릴까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네. 한 가지 다짐할 것이 있네. 이 수련서를 자네만 익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전수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는가?”
“천지신명께 맹세하겠습니다.”
“그럼 맹세부터 하게.”
“알겠습니다.”
장소천이 긴 문장을 읊어 천지신명께 맹세하자 은단비의 눈빛이 조금 풀어졌다.
그리고 장소천에게 심오한 구결 하나를 알려주었는데 놀랍게도 법력을 대체하는 비결이었다.
“이 비결은 너무 심오하여 혼자서는 절대로 익힐 수가 없네. 완벽하게 배우려면 몇 달 동안은 나를 따라다녀야 한다는 의미이지. 괜찮겠는가?”
“몇 년이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어찌 한가롭게 강해지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래도 허락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은단비에게 양해를 구한 장소천은 곽무진에게 가서 건곤대 하나를 내밀었다.
“조장님! 제가 은 수사에게 들었는데 요족 구역에는 아직도 약초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은 수사가 준 건곤대인데 이 안에 약초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이 귀한 약초를 왜 우리에게 준다는 말이냐?”
“제가 그녀를 도와 영초 한 가지를 찾아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그녀와 함께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협박을 받은 것이냐?”
곽무진의 눈에서 싸늘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협박을 받은 것이라면 은인이고 뭐고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그녀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더 이상은 묻지 마시고 그녀와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가면 무사히 살아서 돌아올 자신은 있느냐?”
“물론입니다.”
“좋다. 남자가 그 정도 기백은 있어야지. 조원들에게는 내가 잘 말해놓을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너라.”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내가 널 믿지 않으면 누가 널 믿어주겠느냐?”
“그러게요.”
히죽 웃은 장소천은 다시 은단비에게로 갔다.
“이야기는 잘 끝났는가?”
“네.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소소 낭자는 어디로 갔습니까?”
“적들의 행적을 탐색 중이네.”
“아, 동부에 갇혀 계신데도 여유가 있어 의아해하였는데 외부에 조력자가 있었군요.”
“창응족이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자네들을 쫓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긴 모양일세. 탐랑족은 이삼 일 후에나 움직일 모양이고…. 오늘 밤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군.”
“그럼 오늘부터 신력을 수련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알겠네. 오늘은 처음이니 기본적인 것만 가르쳐주지. 자네는 연기기 몇 성인가?”
“저는 사성 후기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자네가 연기기 사성 후기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가?”
“신식을 펼치면 수행 경지가 어렴풋이 느껴집니다. 다만 원리나 작동 방법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영기나 법력, 의식을 파악하지 않고도 경지가 감지된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설명하여 주겠네. 신식으로 다른 사람이나 자신의 수행 경지를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신식이 원신이나 원영의 신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네. 그것을 뭇사람의 수행 경지와 비교하여 이 정도면 몇 성일 것이다,라고 판정하는 것이지.”
“결국 신격을 파악하는 것이로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판정 기준은 되지 못하네. 내 수행 경지는 어떨 것 같은가?”
“그것이 확실치가 않습니다. 저희 사부님에 비견될 정도로 강한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어느 정도라고는 판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요족이기 때문이네. 그렇다고 해도 기본은 변함이 없네. 감지되는 신격으로 그자의 경지를 파악하면 큰 실수는 없을 것이네.”
“그렇군요. 요족의 수련 경지는 어떻게 나누어지는지요?”
“우리는 인요급, 지요급, 천요급으로 나누어지네. 지요급은 인간으로 치면 연신기나 연허기 중간쯤 될 것이네.”
“은 수사님은 지요급 고수입니까?”
“나는 지요급 초기의 경지이네.”
“그럼 소소 낭자는?”
“그녀는 아직 인요급이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샌 것 같군. 자네는 신식으로 영대를 본 적이 있는가?”
“영대를요?”
“그래. 영대에 있는 원신을 본 적이 있는지 묻는 걸세.”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한번 시도해 보게.”
“알겠습니다.”
은단비의 말에 장소천은 신식을 자신의 영대로 투영시켰다.
영대는 혼백이 사는 것으로 알려진 가상의 공간.
위치를 특정하고 있던 장소천은 오래지 않아 영대를 찾아냈다.
그리고 신식으로 살펴 자신의 원신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존재도 발견했다.
인간의 혼백은 원래 형체가 없는 덩어리였다.
하지만 천지원기 속에 담긴 신기를 끌어들여 법력을 얻으면 인간처럼 형상을 갖추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신이었다.
물론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직은 사지조차 불분명한….
안개나 구름처럼 모호한 존재였다.
“자네의 수련 경지가 높지 않으니 아직은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것이네. 수련 경지가 올라 법력이 높아지면 조금씩 인간의 형상을 갖추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연허기 경지에 이르면 원영으로 탈바꿈할 것이네.”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법력 때문입니까?”
“맞네. 법력은 천지원기 속에 들어 있는 신기를 혼백이 연화하여 화생시킨 기운이네. 법력이 높아져야만 경지 향상이 가능하고….”
“말씀대로라면 신력을 수련하면 경지 향상 속도가 그만큼 느려지겠네요.”
“이해가 빠르군. 몸속으로 들어오는 신기는 유한한데 그것을 신력으로 돌리면 법력은 당연히 느리게 축적될 수밖에…. 그래도 상관없겠는가?”
은단비의 말에 장소천은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선자의 가장 큰 목표는 경지 향상이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이나 뛰어난 법기라도 경지 향상이 주는 이점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그처럼 중요한 것이 경지 향상인데 과연 그것을 늦출 만한 효용이 신력에 있는 것인지….
신중히 고민하던 장소천은 은단비에게 자신의 뜻을 확고히 전했다.
“그렇더라도 신력을 수련하겠습니다. 영단의 약효를 높일 수도 있고, 세상에 신비한 것은 다 거기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수련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습니다.”
“잘 생각했네. 장담하건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네.”
장소천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확인한 은단비는 처음에는 천지원기 속에 포함된 신기를 감지하는 것부터 가르쳤다.
신기는 하늘에 있는 천지원기뿐만 아니라 영단이나 영초, 심지어는 영액 속에도 들어 있었다.
하단전으로 들어간 신기는 영기와 분리되어 영대 속으로 흡수되는데 그것을 감지하는 것이 수련의 시작이었다.
그다음에는 법력으로 화생되지 못하도록 일부를 분리하고, 그것을 신력으로 응축시켜 원신의 머리 뒤에 후광처럼 응축시키는 것이 수련의 과정.
마지막으로 그렇게 축적된 신력을 운용하여 신통을 부리는 것이 수련의 완성이었다.
첫째 날이라 가볍게 신기를 감지하는 것만 배우려고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수련을 시작한 지 한 시진도 안 되어 장소천이 신기를 감지해 버린 것이다.
너무나 빠른 진전에 당황했지만 은단비는 침착하게 위기를 모면했다.
“장 수사! 신기를 감지하는 것은 신력 수련의 가장 기본이네. 기초가 가장 중요한 것이니 지금부터는 흐름을 역으로 추적하여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게. 그리고 오늘 수련은 이것으로 마치겠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나는 먼저 가서 한숨 자겠네. 자네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한 후 자리에 들게.”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소천은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말았다.
영대 속으로 들어온 신기를 살피다가 경락을 따라 도는 신기를 확인하고 그러다가 하단전, 결국에는 허공중에 떠도는 신기까지 보게 된 때문이다.
그런 장소천의 모습에 은단비는 너무 무리하지 말 것을 조언했다.
그리고 성과를 확인하더니 이번에는 영대로 들어온 신기의 일부를 법력으로 화생하지 못하도록 분리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것도 아주 조금씩….
장소천에게 어려운 임무를 준 은단비는 소소를 불러 무언가를 명령했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반나절 만에 나타났는데 무척이나 지친 표정이었다.
맥없이 걷던 은단비는 장소천의 시선을 느끼고는 그에게로 걸어왔다.
“신기를 나누는 작업은 해 보았는가?”
“그렇습니다.”
“어떻던가?”
은단비가 원하는 답은 ‘무척 어렵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지만 자꾸 하다 보니 의념하는 대로 잘 따라와 주었습니다. 오후부터는 양을 조금씩 늘렸는데 역시나 큰 문제가 없었고요.”
“정말인가?”
은단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신기란 놈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인 결과.
놀랍게도 장소천이 거짓말한 것은 아니었다.
은단비가 장소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네, 사람인가?”
“그러면…. 요족일까요?”
“뭐라고? 호호호호!”
어이가 없는지 그냥 웃어버린 은단비는 장소천에게 신기를 분리시키는 수련을 계속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운기조식을 하면서도 가능한지 시험해 보라고 말했다.
그날 밤.
장소천이 막장과 서로가 가진 영단과 부적을 교환하는 중에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채앵!
으윽!
검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 소리.
적이 쳐들어온 것을 감지한 곽무진은 장소천을 제외한 조원들을 소집하여 전투 대형을 유지토록 했다.
그리고 동부 입구로 가려는데 은단비가 앞길을 막았다.
“잠깐만 기다리게. 자네가 갈 곳은 이쪽 방향이 아니네.”
“그건 무슨 말이오?”
“조금만 기다려 보면 알 것이네.”
은단비가 기다리라고 한 이후에도 비명 소리는 끊임없이 들려왔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쳤는데….
휘리릭!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돌며 소소가 은단비의 앞에 날아내렸다.
“공주님! 창응족 수사들이 인간들을 쫓아 동굴로 들어왔습니다. 몇 놈은 죽였는데, 얼마나 왔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상관없다. 어차피 떠나려고 했는데, 시간이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다. 얼음 굴로 갈 것이다. 앞에서 길을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소소가 방향을 바꿔 동부 안쪽으로 들어가자 인간들은 영문을 몰라 은단비를 바라보았다.
이에 은단비가 장소천에게 말했다.
“장 수사! 창응족 놈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면 폭포 근처에는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을 것이네. 우리는 동부 안쪽에 있는 얼음 굴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야 하네.”
“동부 안쪽에 다른 통로가 있습니까?”
“금제진으로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더군. 오늘 아침에 동굴 끝까지 갔다가 왔는데 다행히 큰 위험은 없었네.”
은단비의 말에 장소천이 곽무진을 바라보자 조장도 얼음 굴 쪽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행이 동부 끝까지 왔지만 은단비가 말한 얼음 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은단비의 손이 흔들리면서 진법 깃발들이 벽면으로 파고들자 붉은색 기운이 일렁이며 흐릿하게 굴 같은 것이 드러났다.
직후.
깃발 속에서 자주색 광채가 흘러나와 동굴을 가렸던 기운을 몰아냈다.
그러자 동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모두 얼음 굴로 들어가게!”
은단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소소를 선두로 일행은 모두 굴속으로 몸을 날렸다.
제일 마지막에 빠져나온 은단비의 손에는 진법 깃발들이 들려 있었다.
동굴은 갈수록 차가워졌다.
두꺼운 고드름이 종유석처럼 달리고 바닥도 얼음으로 뒤덮여 미끄럽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어둡고 지형도 험난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는데 파란색 귀화까지 나타나 분위기를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그냥 평범한 귀화이니 겁먹을 것 없다.”
상관천세가 막장을 다독이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갑자기 귀화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 많은 귀화가 어디서 다 나타났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콰아앙!
바로 그때 거대한 폭음 소리가 들려오며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동굴이 흔들렸다.
얼음 굴 입구가 파괴되는 소리였다.
적도들이 얼음 굴 안으로 진입한 것을 감지한 장소천 일행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빨리했다.
하지만 적들이 추적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제20화 : 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