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 위기
탐랑족은 기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야수화로 변신이 가능한 것이다.
늑대 인간.
덩치도 커지고 빨라지며 흉포함은 곰도 찢어 죽일 정도였다.
게다가 신통조차 부릴 수가 있으니 요족 중에서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족이 드물었다.
크와와와왕!
늑대처럼 네 발로 뛰어오른 탐랑족은 눈앞을 석주가 가로막자 앞발을 기이한 속도로 휘둘렀다.
서걱!
그러자 한 아름은 될 듯한 석주가 칼날처럼 잘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쿠웅!
석주가 날카로운 파편으로 부서져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런데 하늘을 날아가는 늑대 인간의 속도는 파편보다 훨씬 빨랐다.
가공할 속도로 어둠 속을 질주한 늑대 인간은 앞에 소소가 나타나자 커다란 입을 쩌억 벌렸다.
그리고 거대한 앞발로 소소의 머리를 후려치면서 그녀의 몸뚱이에 더러운 송곳니를 들이댔다.
츠팟!
늑대 인간의 흉포함에 기가 질릴 만도 하건만 소소는 아니었다.
허리춤에서 연검을 빼어 든 소소는 버들가지 같은 허리를 틀며 순식간에 자리를 일곱 번이나 이동했다.
그러면서 회초리처럼 가는 검을 휘둘러 늑대 인간의 전신을 피로 물들였다.
푸욱!
검 끝이 번쩍이자 늑대 인간의 눈동자 하나가 검은 먹물을 뿜어내며 터져 나갔다.
크와왕!
분노한 늑대 인간이 뾰족한 송곳니로 소소의 하얀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실상이 아니었다.
퍼석.
물거품처럼 터져 나간 것은 소소의 환영이었다.
피리리릿!
그사이 소소의 검(劍)은 늑대 인간의 얼굴을 열십자로 그어놓았다.
크르르르르.
사납던 늑대 인간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후퇴는 아니었다.
크아앙!
요력으로 덩치를 더욱 키운 늑대 인간이 가공할 속도로 덮쳐들며 곰 발바닥처럼 생긴 발로 소소의 머리를 후려쳤다.
소소가 몸을 피하려는 찰나.
번쩍!
칼날처럼 날카롭고 뾰족한 발톱이 적광을 머금고 튀어나와 소소의 전신을 날카롭게 찢어 갈겼다.
푸스스스스.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소소의 몸이 반대 방향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그곳에는 늑대 인간의 거대한 송곳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덥석!
소소의 머리를 한입에 삼켜버린 늑대 인간이 머리를 문 채로 몸을 흔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환영이었다.
물거품처럼 터져 나가는 소소의 환영 사이로 붉은 피가 뭉클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늑대 인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이었다.
크르르르.
비틀거리면서도 늑대 인간은 살기를 줄이지 않았다.
두 눈에서 붉은색 적광을 발하며 한 발 한 발 소소에게 접근했다.
장소천에게도 늑대 인간 한 명이 달려들었다.
주위를 살필 겨를도 없이 장소천은 소뢰부부터 날려 보냈다.
번쩍!
츠츠츠츠츠.
소뢰부는 뇌전을 방출하는 부적.
그 위력은 요수들을 꼼짝 못 하게 할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늑대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부적이 날아오자 늑대 인간은 술법으로 발톱 그림자를 날려 보냈다.
소뢰부와 늑대 인간의 발톱 그림자가 부딪치자 허공중에 뇌전이 일고 적광이 번졌다.
하지만 장소천과 늑대 인간은 충격에 개의치 않고 허공중에서 검과 팔을 부딪쳤다.
혼원신검과 부딪친 늑대 인간의 팔 하나가 허공중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장소천도 멀쩡하지 않았다.
가공할 늑대 인간의 힘에, 가슴에 큰 충격을 받고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났다.
단 일합.
장소천의 입술 밖으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꿀꺽.
넘어오는 핏물을 다시 삼키며 장소천은 가급적 정면충돌은 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츠팟!
팔 하나가 잘렸지만 늑대 인간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흉악스럽게 장소천에게 달려들었다.
크와왕!
커다란 주둥이로 허리를 물어오자 장소천은 법기인 운보혜의 효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려 혼원신검으로 늑대 인간의 배에 커다란 상처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허공으로 뛰어올라 얼굴에 열십자를 그려내더니 허공을 찍고 몸을 반대쪽으로 이동하여 늑대 인간의 목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륵그륵.
목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늑대 인간은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적광이 번쩍이는 눈으로 장소천을 노려보더니 순간 이동하듯 몸을 날려 장소천의 좌우를 동시에 공격했다.
언제 휘둘렀는지 늑대 인간의 발톱 그림자가 장소천의 목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채앵!
그 순간 이능이 발휘되었다.
발톱 그림자가 느려진 것이다.
혼원신검으로 발톱 그림자를 쳐서 튕겨냈던 장소천은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였다.
발톱 그림자에 담긴 신력이 너무 강해서였다.
검을 뿌려 남은 잔력을 털어낸 장소천은 늑대 인간의 주둥이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것을 보고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능을 발휘했는데도 놈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놓친 것이다.
그만큼 늑대 인간의 동작은 빨랐다.
츠팟!
몸을 눕혀 바닥과 바짝 맞닿은 상태에서 장소천은 발끝을 세워 땅을 박찼다.
그러면서 커다랗게 벌린 늑대 인간의 주둥이로 소뢰부 한 장을 날려 보냈다.
번쩍!
츠츠츠츠.
늑대 인간도 발톱 그림자를 날렸지만 이번에는 한발 늦고 말았다.
늑대 인간의 입 속으로 들어간 소뢰부는 폭발하며 뇌전을 발산했고….
끄아아악!
늑대 인간은 비명을 지르면서 신형을 멈추었다.
절호의 기회.
뒤로 젖혀졌던 장소천의 몸이 다시 앞으로 기울어졌다.
츠팟!
그리고 폭발하듯 앞으로 뛰쳐나가며 혼원신검으로 늑대 인간의 목을 잘라냈다.
서걱.
목이 잘리는 순간.
푸우우우!
늑대 인간은 장소천의 몸에 시뻘건 피를 뿜어냈다.
그리고 비틀거리다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가까스로 늑대 인간 한 마리를 처치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상황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은단비는 거대한 은빛 늑대와 싸우느라 누구를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고 채약당 일조 조원들도 늑대 인간 세 마리와 생사의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나마 그들은 새로 얻은 법기가 있어 밀리지는 않고 있었다.
문제는 늑대 인간들의 추적조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
타핫!
몸을 날려 소소와 싸우고 있던 늑대 인간을 기습 공격한 장소천은 온몸이 불타고 있는 요족에게 소뢰부 한 장을 추가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바닥을 굴러 혼원신검으로 늑대 인간의 발목 한 개를 잘라냈다.
푸욱!
비틀거리는 늑대 인간의 심장으로 소소의 연검이 파고들었다.
그런데도 늑대 인간은 죽지 않았다.
염화부에 직격되어 온몸이 불타는 와중에 뇌전에 맞고 심장이 뚫렸는데도 두 손을 뻗어 소소의 얼굴을 움켜쥐려고 하였다.
그 순간.
서걱!
장소천의 혼원신검이 등 뒤에서 늑대 인간의 목을 잘라냈다.
쿠웅!
목이 잘리자 그제야 늑대 인간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비틀거리던 늑대 인간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소소는 지친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그리고 장소천과 함께 은단비에게 달려갔다.
은단비와 싸우고 있는 은빛 늑대는 덩치부터 거대했다.
장소천과 싸웠던 회색 늑대의 두 배는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은빛으로 빛나는 장창을 손에 들었는데 창술이 경지에 이르러 천하의 은단비가 쩔쩔맬 정도였다.
부웅. 붕. 붕.
은빛 늑대의 힘은 엄청나게 강했다.
창대로 바닥을 내리쳤는데 땅이 일 장여나 뒤집혔고, 은단비의 연검에서 비단 자락처럼 풀려나간 붉은색 강기도 창끝이 흔들리자 갈기갈기 찢겨 빛으로 산화했다.
스쳐도 중상.
그럼에도 장소천과 소소는 자신의 특기를 발휘하여 은빛 늑대의 정신을 끊임없이 분산시켰다.
분노한 은빛 늑대가 소뢰부를 날리는 장소천에게 은빛 창영을 날려 보냈다.
긴장하고 있던 장소천은 허공을 찍고 연속으로 두 번이나 몸을 뒤집었다.
그러고도 창영을 완전히 회피하지 못하여 혼원신검으로 일부 남은 잔력을 받아쳐야 했다.
결국.
창영은 무사히 벗어났지만 장소천은 피를 흘리며 뒤로 일곱 걸음이나 물러났다.
상대가 안 되는 것이다.
으윽!
검은 피를 토해낸 장소천은 건곤대를 두드려 폭혈단 한 개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입 속으로 폭혈단을 넣고 씹어 삼켰다.
그 순간.
광포한 진기가 장소천의 사지백해에서 일어나 그의 전신 경락을 빠르게 내달렸다.
사성 후기였던 경지는 일순간에 육성 언저리까지 올라갔고 이능도 한 단계 진보하여 은빛 늑대가 휘두르는 창끝에 달린 붉은색 수실까지도 선명하게 보였다.
츠팟!
몸을 날려 은빛 늑대의 창영 사이로 뛰어든 장소천은 혼원신검을 뻗어 창이 나아갈 창로(槍路)를 선점했다.
그리고 물고기가 폭포수를 거슬러 올라가듯이 날카로운 예기를 내뿜어 가공할 기세로 날아오는 창날의 흐름을 끊고 기세까지 감소시켰다.
흠칫!
깜짝 놀란 은빛 늑대는 창극을 회전시켜 장소천의 혼원신검을 떨쳐냈다.
그러면서 몸을 휘돌며 팔꿈치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는데 장소천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뜨금.
그와 함께 허리 어림이 따끔했다.
영악한 놈.
놈이 자세를 낮추면서 허리를 가른 것이다.
가공할 장소천의 반사 신경에 은빛 늑대는 역시나 몸을 낮추며 은빛 창영으로 장소천을 뒤덮었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붉은색 도화 꽃잎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춥고 어두운 얼음 굴속에 도화 꽃이라니….
장소천을 공격하던 은빛 늑대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적호족의 비전 신통인 도화만리(桃花萬里).
그것은 은단비의 지금 경지로는 결코 펼쳐낼 수 없는 신통이었다.
그런데….
하늘 위에서 강림하는 죽음의 꽃잎들을 보면 저것이 도화만리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훨훨.
바람결에 흩날리던 꽃잎 하나가 은빛 늑대의 옷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꽃잎은 너무나 가벼웠다.
그런데도 아무런 저항 없이 옷을 녹이더니 짙은 도화 향을 내뿜으며 피부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비명을 지르던 은빛 늑대의 이마로 꽃잎 하나가 날아와 붙었다.
기겁한 은빛 늑대는 창날을 거꾸로 돌려 이마 속으로 파고드는 꽃잎을 살과 함께 깊숙이 파내 버렸다.
그러고는 왔던 길로 급히 도망쳤다.
은빛 늑대가 도망가자 채약당의 일조 조원들과 싸우던 회색 늑대들도 함께 줄행랑을 놓았다.
비틀비틀.
무리하게 공력을 운용하여 종족의 비전 신통을 펼쳐냈던 은단비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쓰러진 장소천에게 다가갔다.
꿈틀.
그런데 땅에 쓰러졌던 장소천이 꿈틀거리더니 스스로의 힘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영단 한 알을 집어삼켰다.
“걸을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장소천이 이마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몸속이 텅 빈 듯 허했기 때문이다.
걷는 것조차 힘들 지경.
다행히 기신단의 힘이 천천히 사지백해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채약당 일조 조원들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다들 크고 작은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상관천세는 잘생긴 얼굴에 긴 상처 자국이 나 있었다.
상처가 깊은 것이 흉이 될 듯싶었다.
은단비가 연검으로 길 하나를 가리켰다.
“자네들은 저쪽으로 가게. 고목을 통해 밖으로 나가면 흰 봉우리가 보일 것이네. 그쪽이 호국성 방향이네.”
“알겠소이다. 선자께서도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소천아!”
“네. 조장님.”
“이 약초는 소중하게 잘 사용하도록 하마. 하려는 일이 끝나면 곧장 극천문으로 돌아와라!”
장소천이 준 건곤대를 들어 보인 곽무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사제를 바라보았다.
이에 장소천은 예전처럼 밝은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조만간 뵙게 될 것입니다. 잘들 가세요.”
서로 안부를 묻고 손을 흔들다가 어느 순간 일조 조원들은 은단비가 알려준 길로 달려갔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인간들이 사라지자 소소는 그들이 움직인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은단비를 부축하여 다른 쪽 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우우웅!
오래 가지도 못했는데 등 뒤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안 되겠다. 이쪽 방향으로 가자.”
마음이 급해진 은단비는 점점 더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허억! 헉!
기신단 덕분에 이제는 조금씩 뛰는 것도 가능해진 장소천은 혈폭단의 부작용이 예상보다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적을 만나면 꼼짝없이 목숨을 내줘야 할 듯싶었다.
어!
은단비의 발걸음에 맞추어 조금씩 속도를 높이던 장소천은 갑자기 주위에 귀화가 많아진 것을 깨달았다.
음풍도 슬슬 불어왔다.
귀기 어린 분위기에 주위를 둘러보던 장소천은 저 멀리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초록색 광채를 발견했다.
귀화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광채.
영초였다.
제21화 : 비약(飛躍)
“은 수사님! 저쪽으로 갑시다.”
“장 수사! 그쪽에는 길도 없는데 왜 그리로 가자는 것인가?”
“저쪽에서 영초 냄새가 진하게 풍겨옵니다.”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 자네가 우리 요족보다도 후각이 더 발달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 채약사의 감입니다. 갑시다.”
장소천이 먼저 몸을 날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은단비와 소소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리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천 길 낭떠러지도 있고.
음풍이 칼날처럼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구역도 있었다.
심지어 인간과 요수의 두개골이 수천 개나 쌓인 언덕까지 지나야 했다.
“장 수사! 이건 미친 짓이네. 돌아가세.”
“다 왔습니다. 이 계곡만 넘으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계곡이었다.
계곡에는 귀화가 응축되어 신기를 얻은 귀물들이 귀곡성을 토해내며 유령처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아우우우웅.
늑대 울음소리가 더욱 가까워진 것을 발견한 은단비는 이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쩔 수 없군. 돌파하세.”
“그렇다면 저를 따라오십시오. 안전한 길로 모시겠습니다.”
은단비에게 큰소리를 친 장소천은 이능을 발휘하여 귀기가 약한 곳을 골라 계곡을 건너갔다.
그들이 계곡을 건너자 바로 뒤에 늑대 인간들이 나타났다.
은빛 늑대가 세 마리.
그리고 회색 늑대도 십여 구에 이르렀다.
“갑시다.”
크게 소리친 장소천이 초록색 광채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멈춰라!”
그들을 따라 몸을 날렸던 늑대 인간들은 곧바로 귀물들의 저항에 직면했다.
히히히히히히.
붉은 혀를 무릎까지 늘어뜨린 귀신 한 구가 몸을 길게 늘여 은빛 늑대의 몸을 포박했다.
늑대가 창날을 휘둘러 귀기를 흩트렸지만 귀물은 징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긴 혀를 늑대 인간의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몸속의 정기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으적.
늑대 인간이 귀물의 혀를 깨물어 두 토막을 냈다.
하지만 잘린 혀에서 길쭉한 촉수가 빠져나와 더 빠른 속도로 정기를 빨아먹기 시작했다.
끄으으윽!
두 눈을 까뒤집고 옆을 돌아본 은빛 늑대의 눈에 절망감이 어렸다.
협곡을 무사히 빠져나간 늑대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환혼초다!”
계곡을 넘어 작은 언덕을 오르자 아래에 약초밭이 펼쳐져 있었다.
약초밭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하지만 은단비의 눈에는 커다란 환혼초만 들어왔다.
“은 수사님! 시간이 없으니 환혼초만 몇 뿌리 캐고 바로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네.”
그렇더라도 어떻게 환혼초만 채취하겠는가?
욕심껏 영초들을 채취한 장소천과 두 요인은 다시 길을 재촉하여 약초밭을 빠져나갔다.
가다 보니 늑대들의 울부짖음과 섬뜩한 비명이 함께 들려왔다.
그 소리를 채찍질 삼아 그들은 없는 힘까지 끌어내어 앞으로 내달렸다.
아우우웅.
한참을 가다 보니 또다시 등 뒤에서 늑대들이 따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다. 바로 앞이 출구이니 마지막 힘을 내라.”
뛰어가다가 뒤를 살짝 돌아보았던 장소천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은빛 늑대 두 마리가 바로 뒤에서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한 마리는 발 하나가 없었고 나머지 한 마리는 머리가 목 위에서 대롱거렸다.
그런데도 은빛 창을 휘두르며 잘도 따라오고 있었다.
쒜에에엑!
목이 대롱거리던 놈이 들고 있던 창을 장소천에게 던졌다.
그런데 흔들거리는 머리로 조종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창은 장소천을 한참이나 벗어난 자리에 처박히고 말았다.
“됐다.”
얼음 굴에서 빠져나온 은단비가 건곤대에서 비행 법기를 꺼내 활짝 펼쳤다.
그것을 하늘로 띄워 보내고는 소소와 함께 비행 법기에 올라탔다.
“장소천! 뛰어!”
뒤에서 따라오던 장소천은 남아 있는 영기를 전부 운보혜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힘껏 도약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비행 법기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힘이 약간 부족했는지?
장소천의 손이 비행 법기의 난간에서 미끄러졌다.
바로 그때.
터억.
소소가 손을 내밀어 장소천의 팔목을 붙잡았다.
풀쩍!
일행을 따라왔던 은빛 늑대 한 마리도 허공 높이 도약했다.
놈의 도약력은 굉장했다.
이대로라면 비행 법기에 무사히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은단비의 손이 번쩍이자 그녀의 연검에서 붉은색 강기가 비단 자락처럼 풀려나갔다.
강기를 무시할 수 없었던 은빛 늑대는 허공중에서 몸을 잠시 주춤거렸고….
그사이에 비행 법기는 은빛 늑대에게서 한발 멀어졌다.
그런데도 은빛 늑대는 공격을 포기하지 않았다.
허공을 발로 박차 하늘로 솟아오르더니 기어코 난간에 매달린 장소천의 바짓단을 잡아당겼다.
으헉!
장소천과 소소의 몸이 비행 법기에서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안 돼!”
은단비의 비명 소리와 함께 장소천의 손에서 뇌전이 터져 나갔다.
소뢰부였다.
번쩍!
츠츠츠츠.
소뢰부가 얼굴에서 터지자 은빛 늑대는 장소천의 바짓단을 놓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 위로는 장소천과 소소가 한데 엉켜 떨어져 내리고 있었고….
이대로 바닥으로 떨어지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장소천의 손이 번뜩이자 손바닥에서 노란색 종이 한 장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순식간에 몸집을 키우더니 빙글 돌아 장소천과 소소를 태우고 비행 법기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막장이 준 비행부였다.
퍼석!
하늘에서 떨어졌던 은빛 늑대는 머리가 박살이 나서 죽고 말았다.
처억!
그에 반해 장소천과 소소는 무사히 비행 법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화르르르르.
자신의 소임을 다한 비행부는 밝은 광채를 발하며 안개처럼 사그라졌다.
그것을 본 장소천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친구에 대한 고마움이 담긴 미소였다.
비행은 무척 순조로웠다
은단비가 소유한 비행 법기는 거대한 범선.
돛을 활짝 펼치자 새조차 따라오지 못할 속도로 빠르게 하늘을 날아갔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내달리자 전방에 범선 몇 척이 마중을 나왔다.
적호족의 순찰선이었다.
* * *
적호족은 구요국에서 최고의 성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방대한 환술 신통과 진법을 설치하고 해진하는 실력. 게다가 연기술까지 발달하여 타 종족에서 어린 수사들을 보내 가르침을 구할 정도였다.
다만 최근에는 탐랑족이나 다른 세력에 비해 영향력이 점점 저하되는 추세였다.
인족과의 전쟁에 적극 호응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처억!
비행 법기에서 내린 은단비는 장소천의 거처를 정해주며 소소에게 그를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왕비인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
이웃 부족인 소요족에서 은정을 나눠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공자님! 이 방은 궁궐에 귀한 손님이 오셨을 때만 내어드리는 귀빈실이에요. 공주님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것이니 마음 놓고 이용하세요.”
“이 넓은 방을 나 혼자 사용하라는 말이오?”
“이 전각에는 수련실과 연단실까지 구비되어 있어요. 정 답답하시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궁궐 구경이라도 시켜드릴게요.”
“낭자를 부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여야 하오?”
“문 옆에 작은 종이 있어요. 그것을 울리면 돼요.”
“알겠소. 그러면 오늘은 수련실과 연단실부터 구경시켜 주시오.”
“그러면 저를 따라오세요.”
소소를 따라 전각을 구경하던 장소천은 화려함에 넋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귀빈실이어서 그런지 보이는 모든 것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다행히 장소천은 현대 생활에서 본 것이 있어 입은 다물 수가 있었다.
“이곳은 약재실이에요. 부족한 재료는 주문 즉시 채워놓을 것이니 언제라도 말씀만 하세요.”
“그것참 고마운 말씀이오. 이 정도면 낭자를 부를 일도 없을 것 같소. 나는 당분간 수련실에 있을 것이니 일이 있으면 그리로 와서 찾기 바라오.”
“알겠어요.”
소소가 물러나자 장소천은 수련실로 들어가서 신식으로 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수련장 중앙에서 가부좌를 한 후 사부님께서 전수해 주신 현천무극심법을 운기했다.
운기를 하다 보니 무언가 허전했다.
생각해 보니 운기 전에 복용했던 영단을 오늘은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렸다.
탁탁.
건곤대를 두드렸지만 남아 있는 황정단과 기신단은 하나도 없었다.
귀혈곡의 동부를 떠나면서 막장과 부적으로 전부 맞바꾼 때문이다.
쩌업.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은 영단 없이 운기조식을 하여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호리병이 그의 황정단을 꿀꺽하던 광경이었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장소천은 호리병을 꺼냈다.
그리고 병에 그려진 그림을 보았는데 오늘은 하얀 여우가 잠에서 깨어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홉 개의 꼬리를 활짝 펼치더니 꼬리 하나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흥!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꼬리를 살살 흔드는 거지? 날도둑 같으니라고….’
여우를 살짝 흘겨본 장소천이 병을 기울여 밑면을 탁탁 두들겼다.
그런데.
또르르르르.
호리병 입구에서 영단 하나가 굴러떨어졌다.
황정단이었다.
영단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잽싸게 채트린 장소천은 방금 여우에게 욕한 것을 취소했다.
도둑놈은 아니었다.
병에 그려진 절세 미녀에게 고맙다고 미소를 지어 보인 장소천은 호리병을 다시 건곤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능을 발해 황정단을 바라본 후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가 호리병에 넣었던 황정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황정단은 이렇게 순수하고 약효가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황정단은 불순물이 하나도 없을뿐더러 약효는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가히 극품의 영약.
아니, 천품에 가까울 듯싶었다.
놀라웠지만 그렇다고 먹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폭혈단을 먹은 후유증으로 과다하게 빠져나갔던 진기 때문에 지금 장소천의 육신은 새로운 기운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꿀꺽.
호리병에서 꺼낸 황정단을 먹고 운기조식을 시작한 장소천은 영단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영기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맑고 깨끗한 영기는 하단전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경락을 타고 전신을 치닫더니 작은 세맥을 관통하며 그의 사지백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경락과 경맥을 넓히고는 급기야 하단전까지 팽창시켰다.
하단전이 커지고 경맥도 넓어지면서 장소천의 영기 보관 능력은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그런데도 영단에서 흘러나오는 영기의 양은 줄지 않았다.
장소천이 폭혈단의 후유증을 완전히 치료하고 영기와 법력의 양을 지속적으로 늘리자 사성 후기였던 경지는 순식간에 오성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중기를 거쳐 후기에 이르더니….
퍼석.
연기기 육성에 이르러서야 영기는 조금씩 안정화되었다.
가히 비약적인 경지 향상.
그런 성과를 이루고도 장소천은 운기조식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무아의 경지.
그 청정한 도의 경계에서 한없이 자유롭게 노닐다가 거의 이틀이 지나서야 운기조식에서 깨어났다.
“으흠.”
운기조식을 마친 장소천은 자신의 경지를 가늠할 여유조차 없었다.
몸에서 흘러나오는 썩은 냄새에 코를 붙잡고 바로 목욕탕으로 달려갔다.
쏴아아아아!
벅벅!
거의 반 시진 이상을 물과 씨름하고서야 장소천은 코를 후벼 파는 냄새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장소천은 그제야 자신의 경지 향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연기기 육성 중기.
이 정도 경지 향상 속도는 극천문에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영근속성이 사영근체인 한여옥은 말할 것도 없고 천영근체인 무천 사조마저 이렇게 빨리 경지를 높이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자신을 보면 다들 괴물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을 듯….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마냥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수선계에서 경지 향상은 ‘절대 선’이라고….
장소천은 여유롭게 하루를 즐겼다.
그리고 다음 날.
조금은 느긋하게 신력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하며 법력으로 화할 신기를 떼어놓는 훈련을 하던 장소천은 마음먹은 대로 신기가 움직이자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경지가 오르기 전에 비해 신기를 다루는 것이 훨씬 수월해진 것이다.
연기기 오성의 경지에 오르면 의식을 나누어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할 수가 있었다.
육성은 의식 사용이 더욱 능숙해지고….
그 덕분인지 신기를 다루는 것이 훨씬 능숙해진 장소천은 더 이상의 신기 수련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장소천은 혼원신검을 들고 소요검법을 펼쳤다.
그러다가 검법도 크게 향상된 것을 발견했다.
제22화 : 현천복지(玄天福地)
수련을 마치고 정실로 돌아온 장소천은 소소를 불러 은단비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알겠어요. 그런데 경지가 오르신 것 같네요. 축하드려요.”
“감사하오.”
짧게 포권지례를 한 장소천은 의자에 앉아 소소가 가져다준 차를 마셨다.
잠시 후.
은단비가 그의 방으로 들어왔는데 방 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녀의 미모가 불빛보다 밝은 것이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어깨 위.
사람 손바닥만 한 요정이 작은 지팡이를 들고 앉아 있었다.
“장 수사! 그동안 바쁜 일이 많아 격조했던 듯싶네. 주인 된 입장으로 사과하겠네.”
“아닙니다. 동생분 병환은 차도가 있습니까?”
“장 수사 덕분에 환혼초를 구해서 무사히 영단을 조제하였네. 오늘 아침에야 복용시켰으니 결과는 조금 더 지켜보아야 알 듯싶네. 다행히 차도는 있어 보이네.”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때 은단비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요정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하늘거리는 옷에 투명한 두 쌍의 날개.
그런데도 왠지 위엄이 있어 보였다.
“언니! 이분이 언니가 말한 인간이야? 은정을 구해서 언니에게 주었다는….”
“맞아. 장 수사! 소개하겠네. 이분은 소요족의 공주인 엄지이네. 엄지 공주라고 불러도 될 것이네.”
“엄지 공주이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극천문의 수사인 장소천이라고 합니다.”
장소천이 엄지 공주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몸은 작지만 엄지 공주의 수행은 장소천보다 한참이나 높았다.
은단비와 버금갈 듯싶었다.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인족이라고 해서 이상하게 생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영준하시네요.”
“엄지 공주님도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호호호! 고마워요. 그런데 은정 같은 천고의 지보를 어떻게 발견하신 거예요. 보물을 찾는 비결이라도 있나요?”
엄지 공주의 질문에 장소천은 뜨끔했다.
그래도 표정 관리를 하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제가 운이 무척 좋은 모양입니다. 오늘 이렇게 아름다운 엄지 공주님을 본 것도 제 운이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고요.”
“호호호! 말을 무척 재미있게 하시는 분이군요. 다음에도 그런 보물을 발견하면 그때는 저와 거래해요. 저희 소요족도 지닌 재보가 많으니까요.”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동생! 이제 볼일은 다 끝난 거야. 나는 여기 장 수사와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는데….”
“히잉! 나도 같이 있고 싶은데…. 장 수사! 나중에 제가 이곳으로 놀러 와도 될까요?”
“네가 왜?”
은단비가 견제하듯 묻자 엄지 공주가 배시시 웃었다.
“나도 장 수사와 개인적으로 만나고 싶거든…. 언니 흉도 보고 말이야.”
“마음대로 해.”
“분명히 허락했다. 맞지?”
“그래.”
“알았어. 그러면 나는 이만 물러갈게. 장 수사! 다음에 봐요.”
“네. 언제든지 찾아오십시오.”
소소를 불러 엄지 공주를 부탁한 은단비는 우선 장소천에게 사과했다.
“허락도 없이 친우를 데리고 와서 미안하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내서 그런지 내 일에 관심이 무척 많다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무척 착하신 분인 듯싶습니다.”
“호호호! 화가 나면 엄청 무섭다네. 그건 그렇고, 며칠 못 보았는데 그사이에 경지가 높아졌군. 축하하네.”
“배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공주님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신력 때문인가?”
“그렇습니다. 이제는 신기를 신력으로 전환시키는 비결을 배웠으면 합니다.”
“신기를 나누는 일은 자신이 생긴 모양이군. 함께 수련실로 가세.”
수련실에 도착한 은단비는 장소천의 실력을 검증해 보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신기를 신력으로 전환시키는 비결을 가르쳤는데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해서였다.
“절대로 조급해해서는 안 되네. 비결대로 행하되 결과에는 너무 연연해하지 말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네. 하다 보면 조금씩 느는 것이지….”
은단비의 말에 장소천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알려준 비결대로 신기를 신력으로 전환시켰는데 너무 순조롭게 신력이 만들어졌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전환율이 낮지도 않았다.
신력으로 전환되는 비율이 너무 높아서 차라리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렇다고 하는 일을 멈추고 사실을 밝히기도 뭣해서 장소천은 계속 신기를 신력으로 전환시켰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력은 원신의 머리 뒤쪽에 후광의 형태로 축적되네. 신력이 쌓인 원신은 신위를 발현하여 신통을 부릴 수가 있으니 성취가 느리더라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게.”
마음속으로 알겠다고 대답한 장소천은 현천무극심법을 운기하면서 점점 더 많은 신기를 신력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다 보니 법력으로 화생되는 양이 줄어들었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은단비에게 신력을 만드는 비법을 배운 장소천은 그날부터 수행에만 몰두했다.
거의 석 달.
침식조차 잊을 정도로 신력에만 집중하자 전환율이 서서히 높아졌다.
결국에는 영대로 들어오는 신기를 전부 신력으로 전환하는 것까지도 성공하였다.
신식으로 영대를 바라본 장소천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연기기 육성으로 경지가 높아지자 장소천의 원신은 덩치도 커지고 형체도 점점 인간을 닮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사지도 멀쩡하고 얼굴에 눈과 코, 입까지도 형성되어 있었다.
물론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다.
그래도 멀리서 보면 완전한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런 원신의 머리 뒤쪽.
그곳에 희미하게 원광 하나가 떠 있었다.
은단비가 말했던 후광.
마침내 신력이 쌓여 형체를 이룬 것이다.
이제는 신력을 사용해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장소천은 건곤대를 두드려 청동 거울을 꺼냈다.
흑봉족 요인의 건곤대에서 얻은 거울.
뒷면에 봉황이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을 날아가는 도안이 그려진 거울이었다.
두근두근.
처음으로 신력을 사용하는 데 따른 묘한 기대감.
후읍.
길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 장소천은 은단비가 가르친 비결대로 신력을 거울 속으로 주입시켰다.
그러자.
영기나 법력을 불어넣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거울이 낮게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청동빛 광채를 뿜어내고는 자신의 속살을 장소천에게 수줍게 드러냈다.
은단비가 말했던 것처럼 청동 거울은 공간지보가 맞았다.
내부 공간도 엄청나게 넓어서 광음 사조가 준 건곤대보다 수십 배는 넓었다.
하지만 그뿐.
영석과 연기재료는 조금 들어 있었지만 그가 원했던 공간을 다루는 비법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하긴, 그것이 어떤 공법서인데….
마음을 비운 장소천은 청동 거울을 다시 건곤대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태허곡의 시장에서 우연히 구입했던 정방형의 돌을 꺼냈다.
검은색 돌은 그의 이능이 찾아준 보물이었다.
하지만 그 쓰임새를 알지 못해 건곤대에 넣고만 있었는데 혹시나 싶어 신력을 주입시켜 보려는 것이다.
장소천이 검은색 돌 속으로 신력을 주입하자 역시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력에 반응하는 것을 보니 이것도 선천지보가 분명했다.
장소천이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신력으로 운용이 가능한 것은 공간지보만이 아니었다.
시간, 공간, 예언.
이것은 수련계의 삼대 지존공법인데, 이 세 가지 공법과 천지이보 중에서 보물이 스스로의 존재를 자각하여 기이한 신통력을 갖게 된 것들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 있었다.
바로 선천지보였다.
선천지보는 신력으로만 운용이 가능했다.
은단비가 세상에 신비한 것은 다 거기서 파생되었다고 한 말이 거짓은 아닌 것이다.
츠팟!
신력을 주입하자 검은색 광채와 함께 정방형의 돌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예상했던 것처럼 이것도 공간지보였다.
그런데 청동 거울처럼 작은 석실이 아니었다.
광활한 대지.
내부 공간이 수십 리는 될 듯한 별유천지가 작은 돌 속에 숨어 있었다.
게다가 이 돌은 기이한 이능까지 발휘했다.
휘이이이잉.
장소천이 의념하자 그의 모습이 공간지보 속으로 전송되었다.
공간 속에서 장소천은 신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의념하는 대로 몸이 이동하여 순식간에 공간의 끝에서 끝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공간 내부에 생기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산천초목.
살아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없었다.
휘스스스스.
그래도 바람은 불어오고 하늘에는 천지원기가 유유히 흘러 다니고 있었다.
“흐음.”
공간을 떠돌던 장소천이 처음으로 생명체의 흔적을 포착했다.
공간 정중앙에 나무 하나가 서 있었다.
장소천의 키보다 세 배 정도 크기인데 아쉽게도 말라죽은 듯싶었다.
잎은 없었다.
그래도 줄기나 가지가 나무의 형상은 유지하고 있었다.
나무 옆에 도착한 장소천의 눈에 기광이 번쩍였다.
그의 이능이 나무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수령-백이십만 년.]
[효능-만물에 영기를 부여하여 영성을 높여준다.]
간단한 정보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작지 않았다.
그의 이능이 지금까지 정보를 전해준 것은 모두 살아 있는 약초나 영초에 한해서였다.
그 말은 지금 장소천의 눈앞에 서 있는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아직도 죽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백이십만 년을 살고도 죽지 않았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자신이 얻은 이능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던 장소천은 그냥 정보를 믿기로 했다.
그렇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뀌는 것이 있었다.
나무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그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그리고 솔직히 욕심도 났다.
만물에 영기를 부여하고 영성을 높여주는 나무가 살아난다면 그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무를 두고 돌아서려던 장소천은 몇 번이나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휴우!
나직이 한숨을 내쉰 장소천은 건곤대에서 목령주를 꺼내 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목령주의 효능 중의 하나는 근방에 있는 나무나 영초에게 생명의 근원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
이것이 죽어가는 나무를 살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장소천은 발길을 돌려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뚝.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굽혔는데 나무 아래에 있는 흙이 평범치 않았기 때문이다.
곤약토(坤藥土).
이는 귀한 나무나 영초를 심을 때 사용하는 희귀한 흙으로 돈이 있어도 살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이곳에 영초를 심으면 생장이 촉진되고 약효도 훨씬 높아질 수 있었다.
갑자기 장소천의 얼굴이 밝아졌다.
공간지보를 얻었지만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약초밭을 만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곤약토가 깔린 구역은 아주 넓지는 않았다.
가로세로 열 장의 넓이.
그래도 이 정도 넓이면 약초 수천 그루는 심을 수가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장소천은 공간지보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다가 검은색 돌의 이름을 현천복지(玄天福地)라고 부르기로 했다.
나무의 이름은 세계수.
청동 거울은 고경(古鏡)이라 이름 지었다.
* * *
현천복지를 발견한 장소천은 소소에게 황정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초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을 곤약토가 깔린 부위에 심었더니 약초는 하루가 다르게 생장했다.
발육하여 개체수까지 늘어나자 장소천은 소소를 불러 궁궐 구경을 시켜달라고 말했다.
“그 말이 왜 안 나오나 했어요. 그동안 심심하셨지요?”
“그래도 수련은 열심히 했소. 공주님 동생의 병환은 어찌 되었소?”
“다 나으셨어요. 지금은 예전처럼 건강하게 뛰어다니세요.”
“잘됐구려. 은단비 공주님은 지금도 바쁘시오?”
“그럼요. 지금은 엄지 공주님과 함께 소요족에 가 계셔요. 소요족에서 은정을 사용하여 기상천외한 신기(神器)를 만들었거든요.”
“신기가 뭐요?”
“그것은 저도 잘 몰라요. 하지만 엄청난 위력의 병장기라고 들었어요.”
소요족 사람들이 엄청난 위력의 병장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장소천은 조금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요정처럼 작은 그들이 무거운 병장기를 휘두르는 모습.
과연 그 효과가 어떨지는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얼굴 보기가 힘들다 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군. 궁궐이 무척 아름답구려.”
“그런 말을 자주 들어요. 우리 적호족의 예술 감각은 구요국에서 최고거든요.”
“낭자의 말이 맞는 것 같소. 그런데 시장은 어디에 있는 것이오?”
“그것들은 모두 궁궐 밖에 있어요. 왜요? 시장을 구경하고 싶으신 거예요?”
“기왕에 이곳까지 왔으니 시장도 구경하고 적호족의 문물도 살펴봐야 하지 않겠소.”
“장 공자님의 말씀이 지당해요. 시장 구경을 할 수는 있어요. 대신에 호위 무사 한 명을 대동하고 다니셔야 해요. 궁궐 밖은 조금 위험하거든요.”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하겠소. 언제부터 가능하오?”
“급하셨나 보네요. 내일은 어때요?”
“좋죠.”
장소천이 호쾌하게 대답했다.
제23화 : 성단(聖丹)을 연단하다
시장 구경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장소천은 적하라고 불리는 호위 무사와 함께 시장을 돌아다니며 적호족의 문물을 구경했다.
그러다가 이곳 적호족은 연단을 할 때 약초와 요수의 내단을 함께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때마침 장소천이 들어간 약초 가게의 주인도 연단을 할 줄 안다고 했다.
이에 장소천이 물었다.
“연단을 할 때 요수의 내단은 왜 사용하는 것이오?”
“구하기 쉽고 약효도 높기 때문이네.”
“그렇더라도 요수의 내단은 성분이 일정치 않고 불순물도 많아서 정품을 만들기 무척 어려울 듯싶은데…. 내 말이 틀렸소?”
“자네 말이 맞네. 그래서 영단마다 품질 편차가 심하고 순도가 높은 것은 가격이 엄청나게 비싸네. 그래도 없어서 못 살 정도이지.”
“그런데 약초 가격은 왜 이리 낮은 것이오?”
“약초를 가져가도 좋은 영단을 만들 수가 없으니 상대적으로 가격이 낮은 것이네. 가격도 싼데, 몇 뿌리 사겠는가?”
“그럽시다. 수령이 오래된 것으로 주시오.”
건곤대에서 영석을 꺼낸 장소천은 살아 있는 약초를 대량으로 구매했다.
현천복지에 심기 위해서였다.
그중에는 황정단이나 기신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약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약초를 산 장소천은 호위 무사와 함께 연기 상점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난하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시장 입구에 있는 가게에서 경지 향상에 좋다는 영단 몇 알을 구매했다.
그리고 거처로 돌아와서 자세하게 살펴보았는데 의외로 약효는 높았다.
대신에 비린내가 나고 영단마다 품질 편차가 심했다.
시장에서 사온 약초를 현천복지에 심은 장소천은 오랜만에 단로를 꺼내 연단을 시작했다.
그가 만들려는 것은 기신단.
이미 숱하게 만들었던 단약이라서 그런지 연단은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불량률이 크게 감소했는데 그 이유는 경지가 향상되어 신식으로 정밀한 분석이 가능하게 된 데 있었다.
전에 할 수 없었던 반응완료 시점조정.
현대적인 용어로 분자량 분포나 잔류 모노머의 함량을 조절하여 적당한 시점에 반응을 끝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신단을 호리병 속에 넣었는데 당황스럽게도 호리병은 영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이렇지?’
이번에 만들어진 기신단은 황정단에 비해 약효가 떨어지지 않았다.
순도는 조금 떨어지는 것 같지만…?
‘설마 순도가 문제인가?’
원인을 알 수 없었던 장소천은 연단에 사용되는 물부터 다시 한번 검토했다.
그리고 불순물을 없애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 전보다 조금 나은 기신단이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호리병은 영단을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장소천은 더 나은 기신단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연단을 시도했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품질 좋은 기신단이 백 개도 넘게 만들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장소천은 자신의 연단 실력이 정체된 것을 발견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
고민을 거듭하던 장소천은 언젠가 은 수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상에 신비한 것은 다 신력으로부터 시작이 되고. 영단의 약효를 높이는 데도 도움을 준다는 그 말….’
앉아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운 장소천은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영단의 약효를 높이려면 신력을 언제 어떻게 주입하여야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노공학자인 그에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반응 계획.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 제품 개발을 하면서 숱하게 시도했던 방법대로 계획을 세워 검증만 하면 될 것이었다.
연단 과정을 분석하여 열 단계로 나눈 장소천은 약재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단계별로 신력을 투입하는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다.
그리고 열 번의 연단 결과.
약재에 신력을 투입하는 방법과 연단 후반부에 약액을 응고시키면서 신력을 투입하는 것이 효과가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장소천은 또 한 번의 연단을 실시했다.
약재를 준비할 때 신력을 투입하고, 약액을 응고시키면서 또 한 번 신력을 투입시킨 것이다.
그 결과.
이렇게 두 번의 신력을 투입하면 영단의 약효가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하지만 장소천은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신력을 발현하여 연단하면 약효를 극대화시킬 수 있지만….
아쉽게도 신력이 너무 과도하게 소모되는 단점이 있었다.
원신의 머리 뒤에 어린 후광이 희미해진 것을 발견한 장소천은 충격에 빠졌다.
그가 경지 향상에 필요한 법력까지 포기하며 몇 달 동안 힘들게 축적시켰던 신력이 절반도 남지 않은 것이다.
경각심을 느낀 장소천은 그 후로는 연단 시 신력 사용을 최대한 자제했다.
신력을 주입하는 연단은 운기조식으로 줄어든 양을 보충한 이후에만 시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호기심이 생긴 장소천은 신력을 발현시켜 만든 영단 중에서 순도가 가장 좋은 기신단을 선별하여 호리병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또르르르르.
거짓말처럼 영단이 호리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 장소천은 십 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한 달 후.
소소를 부른 장소천은 그녀에게 기신단 열 개가 든 병 하나를 내밀었다.
장소천이 적호족에 와서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은 소소였다.
처음에는 경계도 하고 낯설어도 하더니만 이제는 스스럼없이 장소천을 대했다.
“낭자! 그동안 부족한 약재를 준비해 주셔서 정말 고마웠소. 이것은 나의 성의이오.”
“성의요?”
“그렇소. 경지 향상에 도움이 되는 영약이니 운기조식하기 전에 한 알씩 드시면 좋을 것이오.”
“호호호! 원래는 이런 것을 받으면 안 되는데…. 공자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특별히 받을게요.”
장소천이 준 것이 경지 향상을 돕는 영단임을 확인한 소소는 조금은 부담이 된다는 표정으로 약병을 받았다.
장소천은 은단비의 귀빈.
손님에게 선물을 받는 것이라서 조금은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굳이 준다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게다가 성의라고 하니….
영단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서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약병을 받아 챙겼다.
그것이 장차 어떤 풍파를 일으킬지도 모르면서….
“정성을 들여 만든 것이니 다른 사람은 주지 말고 혼자만 드시구려.”
“저 혼자만 먹을 테니 그것은 걱정하지 마세요. 참! 요즘은 가고 싶은 곳 없으세요?”
“뭐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는 것 같소.”
“그러면 저와 함께 경매장이나 가 보시죠. 우리 적호족은 물자가 풍부해서 가끔씩 깜짝 놀랄 만한 보물이 출현하거든요.”
“하하하! 알겠소. 시간이 나면 연락 주시구려.”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 소소는 다음 날부터 장소천의 방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하루, 이틀.
무려 보름이 되어서야 나타났는데 올 때는 은단비와 함께였다.
“하하하! 오늘은 공주님도 함께 오셨구려. 아침 일찍부터 무슨 일이신지요?”
장소천의 말에 은단비가 탁자 위에 병 하나를 올려놓았는데 보름 전에 그가 소소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장 수사! 이 병 기억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제가 소소 낭자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소소가 이 안에 든 영단을 먹고 경지가 무려 두 단계나 상승되었네.”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소소 낭자! 경지 향상을 축하드립니다.”
“네. 고… 고마워요. 공자님! 그런데 저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요? 전설 속의 성단이라도 되는 것인가요?”
“하하하! 그런 것이 있으면 제가 먹지 왜 소소 낭자에게 주었겠습니까? 저 약이 낭자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었던 듯싶습니다. 낭자의 운이 좋은 것이지요.”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이번에는 은단비가 물었다.
그러자 장소천이 소소에게 물었다.
“소소 낭자! 전에 드셨던 영단이 있으면 한번 보여주실 수 있는지요?”
“물론이에요.”
은단비의 눈치를 살핀 소소가 품속에서 병 하나를 꺼내더니 영단 한 개를 장소천에게 내밀었다.
냄새를 맡아보니 희미하게 비린내가 맡아졌다.
불순물도 적지 않고….
약효는 강할지 모르지만 이런 것을 오래 먹는다면 몸에 만성이 되어 약의 효과가 점점 저하될 것이었다.
나중에는 거의 효과를 보지 못할 수도 있고….
“낭자께서 드셨던 영단도 약효는 뛰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약효는 이미 낭자의 몸에 많이 축적되어 있기에 더 드셔도 효과가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드린 영단은 전에 없던 것이라서 특효를 발휘한 것이지요.”
“특효를 발휘할 수 있다니? 그것이 성단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혹시 내 것도 한 병 만들어 줄 수 있는가?”
“공주님 것을요?”
“약재는 얼마든지 제공해 주겠네. 영단이 완성되면 값도 후하게 지불해 줄 것이고….”
“시간이 조금 필요할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좀 늦어도 상관없네.”
“그렇다면 한번 만들어 보겠습니다. 약재는 여기 소소 낭자에게 부탁해도 되는지요?”
“그렇게 하게.”
장소천이 생각한 영단은 사부님께서 연신기 수사들의 경지를 향상시킬 목적으로 만든 강신단이었다.
사부께서 연단하시는 것을 워낙에 많이 본 터라 영단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은단비에게 효험이 있을지는 그도 자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력 소모도 걱정이 되고….
그래서 장소천은 딱 몇 번만 연단을 하기로 결심했다.
* * *
기신단의 효과가 생각보다 뛰어난 것을 알게 된 장소천은 그 후로도 꾸준히 연단을 계속했다.
자신도 먹고.
남은 영단은 시장에 팔아서 약재나 영초를 구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틈틈이 용비봉무결을 수련했는데 전반 십팔 초식은 실전에 적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깨달음이 높아졌다.
다만 뭔가 아쉬웠는데….
좀처럼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신력을 발현시켜 만들어낸 영단은 확실히 효과가 뛰어났다.
그것을 꾸준히 복용한 장소천은 어느 날 연기기 육성 후기에 오르게 되었다.
탁, 탁.
육성 후기에 오른 장소천은 건곤대에서 호리병을 꺼내 병 하부를 두드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기신단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익!
괜히 죄 없는 여우만 노려보았던 장소천은 호리병을 다시 건곤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소소에게 부탁하여 적호족에서만 자라는 약초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장소천의 현천복지에는 꽤 많은 종류의 약초가 심겨 있었다.
황정단과 기신단을 만드는 약초는 물론이고 강신단에 사용되는 약초나 영초까지도 빠진 것이 없었다.
은단비와의 약속을 상기한 장소천은 마침내 강신단 연단을 시도했다.
물론 신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결과는 실패.
언젠가 사부님이 했던 실수처럼 이차 발열 시 온도 제어에 실패했던 것이다.
실패한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해 보니 원인은 자신의 수련 경지가 낮은 데 있었다.
황정단이나 기신단은 조제 조건이 까다롭지 않은 데 반해 연신기 수사들을 위한 강신단은 온도나 압력, 불순물 제어가 무척 까다로웠던 것이다.
실패 원인을 추론했던 장소천은 그날 이후로 강신단은 연단하지 않았다.
대신에 화 속성 영기를 운용하여 단로의 온도를 균일하게 올리는 방법과 발열을 효과적으로 제어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소를 따라서 경매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생각지도 못했던 공법서를 발견했다.
“자, 이 책은 과거 연단대사로 이름이 높았던 약수의선이 수련했던 공법서입니다. 연단 시 단로의 온도를 제어하는 비법이 담겨 있는데, 아쉽게도 책자가 훼손되어 후반부만 남아 있습니다. 경매 시작가는 중품 영석 다섯 개부터 시작합니다.”
경매사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책자를 사려는 사람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적호족은 연단보다는 연기를 중시했고….
무엇보다 책자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지켜보던 장소천이 소소에게 속삭였다.
“낭자! 저 책을 사려고 하는데 방법을 알려주시오.”
“책자가 훼손되었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냥 한번 훑어보려는 것이니 염려하지 마시오.”
“그렇다면 알겠어요.”
소소가 거래패를 들자 경매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중품 영석 다섯 개에 책자를 사시겠다는 분이 나왔습니다. 더 높은 가격에 사실 분은 없습니까?”
사방을 둘러봐도 더 이상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자 경매사는 실망한 목소리로 낙찰을 선언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곱 개.”
어디선가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곱 개라는 말에 장소천을 돌아본 소소가 귀여운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그러고는 대차게 가격을 올렸다.
“여덟 개.”
그러자 나른한 목소리가 바로 뒤따라왔다.
“열 개.”
갑자기 가격이 급등하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훼손된 연단 공법서를 중품 영석 열 개나 주고 사다니 미쳤다는 목소리였다.
소소가 장소천을 바라보니 장소천은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담담하게 웃고는 가격을 올리라는 듯 턱을 위로 치켜들었다.
이익!
단숨에 상대의 기세를 꺾어야 했다.
주먹을 불끈 쥔 소소는 거래패를 높이 쳐들었다.
“열다섯 개.
“스무 개.”
“서른 개.”
소소가 미친년처럼 가격을 높여 부르자 갑자기 상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불안해진 소소는 상대가 빨리 사십 개를 외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면 자신은 경매를 포기하고 장소천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약수의선의 공법서가 경매에 나왔는데 아쉽게도 준비한 영석이 조금 부족하군요. 공법서는 소저한테 양보하겠소이다.”
나른한 목소리가 경매 포기를 선언했다.
경악한 소소는 그제야 사태 파악에 나섰다.
자기가.
언제나 침착하고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던 그녀가….
저런 쓰레기 같은 책자를 중품 영석 삼십 개를 주고 구입한 것이다.
제24화 : 비천신기(飛天神器)
‘아… 안 되는데….’
미안한 마음에 장소천을 보았는데 그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낭자! 수고하셨소이다.”
“호… 혹시. 영석은 부족하지 않으셔요. 부족하면 제가 보태 드릴게요.”
양심상 도저히 장소천에게 돈을 다 지불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소소는 자신의 쌈짓돈을 내놓으려고 작정했다.
중품 영석 삼십 개.
그 정도면 공주의 시녀인 그녀에게도 매우 큰 돈이었던 것이다.
“영석은 충분하니 걱정하지 마시오. 경매란 것이 생각보다 재미있구려.”
“너무 비싼 가격에 책자를 산 것 같은데…. 공자님! 미안해요.”
소소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장소천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책자의 가치가 그보다 높을 가능성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려. 나는 가능성에 투자를 한 것이라서 설령 결과가 조금 실망스러워도 낭자를 원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경매 주최 측에서 책자를 가지고 그들의 자리로 들어왔다.
이에 장소천은 흑봉족 여인의 공간지보에 들어 있던 영석을 건네주고 책자를 받아 자신의 건곤대에 넣었다.
흑봉족 여인이 부자였는지?
아직도 그의 건곤대에는 꽤 많은 영석이 남아 있었다.
다만, 더 이상 경매에 참여할 정도는 아니었다.
흥미로운 책자도 구입했겠다.
이제는 일어나도 될 것 같은데 소소는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을 반짝이는 것이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는 표정이었다.
“뭐, 기다리시는 물건이라도 있는 것이오?”
“네. 사실, 공자님과 이번 경매에 참석한 것도 그 물건 때문이에요.”
“무슨 물건인데 그러시오?”
“제가 물건 하나를 경매에 올렸거든요. 조금만 기다리면 나올 거예요.”
물건을 사는 것도 아니고 팔겠다니….
장소천도 흥미가 생겨 느긋하게 경매에 출현한 물건들을 구경했다.
예쁜 장신구.
귀한 연기재료.
희귀한 영초.
지금 장소천의 재력으로는 살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값비싼 법기.
심지어 유명한 수련공법서까지도 경매에 출현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그러다가.
뜻밖의 물건이 경매에 올라왔다.
“자 이번 물건은 인요급 수련자의 경지를 올려줄 수 있는 성단입니다. 가격은 중품 영석 이십 개부터 시작합니다.”
영단 세 알이 든 병을 꺼낸 경매사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병을 본 장소천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소소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그녀에게 준 영단이었던 것이다.
씨익.
기분 좋게 미소를 지은 소소가 장소천에게 전음을 보냈다.
[제가 먹고 남은 영단이에요. 공자님께서 선물한 것인데 허락도 받지 않고 경매에 올려서 죄송해요.]
[이미 선물한 이상 저 영단의 소유권은 소소 낭자이오. 나는 그렇게 쪼잔한 남자는 아니라오.]
[고마워요. 제가 사실 큰돈이 필요하거든요. 소요족에서 만든 법기 중에서 정말로 갖고 싶은 것이 있어서….]
[소요족? 엄지 공주가 사는 곳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네. 요족 중에서는 그들의 술법이 최고예요. 법기도 기상천외한 것이 많고요.]
[그렇다면 영단이 비싼 가격에 팔려야 할 것인데…. 걱정이 되는군요. 영단도 세 개밖에 없지 않소.]
[걱정하지 마세요. 공주님이 품질을 보증하셨으니까요. 아마도 높은 가격에 낙찰이 될 거예요.]
소소가 장담한 것처럼 성단이라는 말에 요족들의 반응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그것이 성단이라는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말이오?”
덩치가 커다란 요족 하나가 경매장이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성단은 극품의 영단.
전설에나 등장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경매사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것은 은단비 공주님께서 직접 작성한 품질 보증서이오. 눈이 나쁜 분들을 위해서 확대하여 보여주겠소.”
경매사가 종이에 법력을 불어넣자 종이의 크기가 수백 배로 확대되었다.
경매장에 들어찬 요족들이 공주님의 이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크기였다.
푸시시시시.
경매사가 종이의 크기를 줄이기도 전에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성단이 궁궐에서 흘러나왔다는 말씀이오?”
“맞소이다. 공주님의 측근 중 한 분이 이 성단을 먹고 순식간에 경지를 두 단계나 올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소. 이는 성단이 아니면 불가능한 효험이오.”
경매사의 말이 끝나자 이곳저곳에서 가격을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중품 영석 이십 개에서 시작한 가격이 순식간에 칠십 개로 치솟았다.
거기서도 멈추지 않고 계속 늘어나더니 마침내 상품 영석 한 개와 중품 영석 삼십 개라는 믿을 수 없는 가격에 영단이 낙찰되었다.
물건을 경매에 내놓았던 소소마저 놀라워했을 정도로 비싼 가격이었다.
경매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소소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님께서 만드신 영단이 이렇게 좋은 가격을 받을 줄은 저도 몰랐어요. 이 정도면 법기를 사고도 남을 가격이에요.”
“잘됐구려. 그런데 경매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어려울 것 없어요. 제가 내일이라도 공자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귀빈용 거래패를 마련해 드릴게요. 그것만 있으면 경매장에 가서 물건을 마음대로 사고팔 수 있어요.”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소.”
“사고 싶은 물건이라도 있는지요?”
“그것이 아니라 영단을 팔고 싶어서 그렇소. 영석을 모아 놓아야 필요할 때 물건을 살 수 있지 않겠소?”
“호호호! 그런 일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제가 좋은 가격을 받아 드릴게요.”
“그래도 괜찮겠소?”
“공자님 덕분에 수련 경지도 늘고 원하던 법기까지도 구할 수 있게 되었어요. 제 은인이신데 이런 일쯤은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앞으로도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하하하! 낭자의 말을 들으니 천군만마라도 얻은 기분이구려. 정말 고맙소.”
“아니에요.”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거처로 돌아온 장소천은 경매장에서 구한 공법서를 들여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요족의 유명한 연단대사인 약수의선이 수련했던 공법서로 연단 시 단로의 온도를 제어하는 비결이 담겨 있다는 경매사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책자에는 오행 영기 중 화 속성 영기로 단로를 가열하는 점화 결과 수 속성 영기, 그것도 빙 속성 영기로 단로를 냉각하는 현빙결(玄氷訣)이라는 구결이 적혀 있었다.
아쉽게도 점화결은 태반이 유실되었는데 현빙결은 구결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영기로 단로를 냉각시킬 수 있다고?
자신은 왜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 반성하면서, 수련 구결을 살피던 장소천의 눈에 실망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빙결을 익히려면 수 속성 영근지체이어야 하고….
빙섬(氷蟾)이라고 불리는 희한한 두꺼비.
그것도 백 년 이상 된 것을 잡아 냉기를 지속적으로 흡수하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빙섬?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영물이었다.
휴우!
한숨을 내쉰 장소천은 공법서를 건곤대에 집어넣고 연단실로 가서 기신단을 조제했다.
그리고 삼 일에 한 번씩.
소소에게 영단을 경매장에서 팔도록 시켰다.
그 결과.
“낭자! 상품 영석 두 개라니…. 정말로 이 가격에 영단이 팔렸다는 말이오?”
“그럼요. 우리가 거래하는 경매장에 최근 난리가 났어요. 성단을 판매한다는 소문이 퍼져서 경매가 없는 날에도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어요. 경매가 진행되는 날에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다니까요.”
“허어. 조금 당황스럽구려.”
“성단을 먹고 경지 상승을 이루지 못한 자가 그동안 한 명도 없었다는 소문이에요. 심지어 어떤 수사는 한 알을 먹고도 경지가 높아졌다고 해요. 그러니 다들 아우성이지요. 장 공자님! 성단을 파는 양을 조금 늘릴까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궁궐 안에만 있었더니 돈이 있어도 쓸 용도를 찾지 못하겠소.”
신력 소모도 무시할 수는 없었지만 굳이 소소에게 그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사고 싶은 물건도 없는지요?”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서 말이오.”
“말씀만 하세요. 제가 사다 드릴 테니까요.”
“정말이오?”
“그럼요. 저는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할 물건이 있다는 소리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럼 이것도 가능하오?”
장소천이 경매장에서 얻은 공법서를 꺼내 그 안에 그려진 빙섬을 소소에게 보여주었다.
“빙섬. 그것도 백 년이 넘은 영물이라….”
“어렵겠지요.”
“그럴 리가요.”
소소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구할 수 있다는 말이오?”
“당연하지요. 이 세상에 없는 물건이 아니라면, 돈으로 구하지 못할 것은 없어요. 비싸도 상관이 없나요?”
“낭자께서도 아시겠지만 이제 나는 꽤나 부자이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이 없으니 구해만 주시오.”
“그렇다면 걱정 마세요. 제 이름을 걸고 빙섬이라는 영물을 구해 드릴 테니까요.”
소소가 결연한 얼굴로 나가자 장소천은 진즉에 그녀에게 부탁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적호족은 구요국에서 최상위의 세력.
그런 세력의 최정상에 위치한 은단비의 시녀라면 사실상 구하지 못할 물건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한 달 후.
실제로 소소는 백 년 이상 된 빙섬을 수십 마리나 가지고 왔다.
뛸 듯이 기뻐한 장소천은 즉시 공법을 연마했고….
석 달 만에 현빙결을 대성한 장소천은 마침내 강신단 조제에도 성공했다.
그것도 신력까지 불어넣은 영단을….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기신단에 비해 강신단은 신력 소모가 더욱 극심했다.
결국 장소천은 보름에 한 번씩만 강신단을 조제했고….
두 달이 지나서야 열두 개의 강신단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장소천은 그것을 병에 담았다.
병 하나에 강신단 세 개씩.
그렇게 병 네 개를 마련한 장소천은 다음 날 은단비를 만나고 싶다고 소소에게 말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은단비는 혼자가 아니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던 엄지 공주까지 장소천의 방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그동안 연단을 하느라고 무척 바쁘다고 들었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무료한 김에 연단을 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고 하던데. 장 수사! 성수신의가 누구인지 혹시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성단은?”
“그건 알고 있습니다.”
“성단을 만든 연단사의 명호가 바로 성수신의라네. 적호족에 신의가 탄생했다고 다들 난리던데…. 자네는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군.”
“누가 뭐라고 불리는지는 그리 관심이 없습니다. 공주님! 최근 인족 상황은 알고 계시는지요?”
“극천문 말인가?”
“네.”
“반달 전에 호국성이 함락되었네. 그 과정에서 인족 수사들도 많이 죽었는데…. 다행히 극천문은 태상장로 한 명이 연허기 중기 수사가 된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성을 탈출할 수 있었다고 들었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은 수사님! 이것은 예전에 약속드린 영단입니다.”
“내 것인가?”
“지요급 고수가 복용할 수 있는 영단입니다.”
지요급 고수의 영단이라는 말에 은단비 옆에 있던 엄지 공주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장소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영단은요?”
“예?”
“제 영단은 어디에 있냐고요?”
“죄송하지만 공주님께 드릴 영단은 없습니다. 은 수사에게는 비싼 돈을 받고 판매하기로 미리 약조한 바가 있습니다. 영단을 만들 약재도 모두 은 수사께서 제공한 것이고요.”
“저도 영단을 공짜로 달라는 말은 아니에요. 아주, 아주 비싼 값을 쳐 드릴 테니 저한테도 영단을 파세요.”
엄지 공주가 강짜를 부리자 은단비가 나섰다.
“동생! 눈치를 챘겠지만 이분은 성수신의라고 불리는 연단사이네. 예의를 갖추어서, 나중에라도 만들어 달라고 정중히 부탁을 드리는 것이 도리이네.”
“이잉! 안 돼요. 아까 극천문을 언급할 때 안타까워하는 표정 못 보셨어요? 조만간에 인족 구역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저는 성단을 영원히 얻지 못할 것이에요.”
엄지 공주의 말에 은단비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장소천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인족 구역으로 갈 생각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녀의 눈빛을 읽은 장소천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방금 엄지 공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극천문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사부님과 사형들이 보고 싶기도 하고요.”
“장 수사! 자네 사부님과 사형들의 안위는 우리가 알아봐 줄 수 있네. 그러니 조금 더 머물다가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죄송합니다. 호국성이 무너져서 그분들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는데 저 혼자 한가롭게 이곳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자네 혼자 그 먼 길을 어떻게 가겠다는 말인가? 자네는 비행 법기도 없지 않은가?”
비행 법기가 없다는 말에 갑자기 엄지 공주가 장소천 앞으로 나섰다.
“장 수사! 혹시 비행 법기가 필요하시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장 수사라면 저희 소요족의 자랑인 비천신기라도 빌려드릴 수가 있어요.”
엄지 공주의 말에 장소천은 전에 소소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소요족의 술법은 구요국 최고이고 그들의 법기는 기상천외한 것이 많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말이 소요족에서 은정을 사용하여 신기(神器)를 만들었다는 구절이었다.
제25화 : 귀환(歸還).
비천신기라는 말에 장소천의 고개가 엄지 공주에게 돌아갔다.
“공주님! 혹시 그 비천신기라는 것이 은정을 가미하여 만든 것입니까?”
“그 사실은 일급 기밀인데…. 누구에게 들은 말인가요?”
“그냥 짐작한 것입니다. 공주님께서 적호족에 이렇게 자주 방문하시는 것이…. 혹시나 은정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요.”
“아주 예리하시군요. 맞아요. 비천신기는 은정을 넣어 만든 투명한 날개예요. 날개를 착용하고 법력을 투입하면 하늘을 날 수 있는데 속도가 빨라서 어떤 요족도 따라오지 못할 것이에요.”
“비행 법기로도 쫓아갈 수 없습니까?”
“물론이죠. 크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가 있어서 장 수사도 착용할 수 있어요.”
“은정을 넣어 쉽게 부서지지도 않겠군요.”
“당연하죠. 게다가 저희 소요족의 술법 체계가 가미되어 의념만으로도 장착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많이 만들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유일한 단점이죠. 이제까지 만들어진 것이 고작 세 대에 불과해요.”
“그것을 제게 빌려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장 수사에 한해서요. 비천신기가 아무리 신묘해도 그것은 결국 신외지물에 불과해요.”
“경지가 높아지면 착용 효과가 높아진다고 이해하면 되는지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성단을 포기하겠어요.”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요.”
“비천신기라는 것을 저에게 파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해요. 비천신기는 저희 종족의 전략자산이거든요.”
“제가 몇 달 전에 누군가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분이 제게 말하기를 이 세상에 돈으로 사지 못할 물건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잘못 알고 계신 듯하군요. 성단이 귀하고 값비싼 것은 인정해요. 저도 미치도록 갖고 싶으니까요. 하지만 비천신기에 비하면 가치가 많이 떨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에요.”
말이 끝나는 순간 엄지 공주가 건곤대를 두드려 비천신기를 꺼냈다.
비천신기는 투명한 한 쌍의 날개였다.
법력으로 날개의 길이와 크기를 조종할 수 있음은 물론 강도가 높아서 상대의 법기까지 막아낼 수 있다고 했다.
“한번 착용해 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아직은 사용이 불편할 것이니 제가 입혀 드릴게요.”
“부탁드립니다.”
엄지 공주가 손을 들어 올리자 비천신기의 크기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그러더니 장소천의 등 뒤에 달라붙었는데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그만한 기능을 낼 수 있다면….
신기라는 이름이 전혀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이름이 부족한 듯싶었다.
“직접 착용해 보시니까 어때요? 성단으로는 살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시지요?”
비천신기를 장소천의 등에서 벗겨낸 엄지 공주의 질문에 이번에는 장소천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어떻게 하던 저는 이 물건을 갖고 말겠습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파십시오.”
어떻게 된 것이 이번에는 장소천이 강짜를 부렸다.
은단비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 정도로 장소천은 비천신기가 마음에 들었다.
엄지 공주가 비천신기를 건곤대로 집어넣으려고 하자 장소천은 황급히 그녀를 말렸다.
그러더니 옆방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그래 봐야 소용이 없어요. 이 물건은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옆방에 갔다 왔는데 그사이 그녀의 입장은 완벽히 돌변해 있었다.
은단비가 놀라 엄지 공주에게 물었다.
“동생! 정말로 비천신기를 팔기로 한 거야. 소요족에서 전략자산으로 선정한 물건을 인족에게 판다고?”
“언니! 저는 소요족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비천신기가 중요해도, 그것을 상회할 조건이 있더라고요.”
“그러면 비천신기를 팔기로 한 거야?”
“벌써 넘겨 드렸어요.”
“벌써?”
“네. 그러니 더 이상은 궁금해하지 마세요. 언니도 장 수사가 요족 구역을 무사히 빠져나가기를 바라시잖아요. 그러려면 솔직히 비천신기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그건 그렇지만….”
은단비가 아쉬워하며 돌아보자 장소천이 그녀에게 포권지례를 했다.
“은 수사님! 수사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에게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면 앞으로도 말씀만 하십시오. 성의껏 도와드릴 것입니다.”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인족 구역으로 넘어가기 전에 약재를 대량으로 구입하려고 하는데 공주님께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소소에게 말하면 그녀가 도와줄 것이네.”
“감사합니다.”
장소천이 은단비와 엄지 공주에게 다시 한번 인사를 드렸다.
그날 이후 장소천은 엄청난 수량의 약초와 약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비용은 경매장에서 나오는 영석으로 충당했는데 마지막 날에는 강신단 세 알을 경매장에 내놓았다.
성수신의가 지요급 수사가 복용할 수 있는 성단을 내놓았다는 소문은 경매 전날부터 적호족을 떨쳐 울렸고….
수많은 고계 수사들이 경쟁한 끝에 상품 영석 열두 개로 낙찰되었다.
그것을 복용한 고계 수사가 삼 일 만에 경지 향상을 이루었다는 소문이 다시 한번 적호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그 소문을 들은 고계 수사들이 경매장으로 쳐들어가서 성수신의가 만든 성단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 시각.
장소천은 은단비의 비행 법기를 타고 적호족을 떠나고 있었다.
“은 수사님! 몇 개 안 되지만 이것은 저의 성의입니다. 공주님께서 아끼시는 분들에게 선물로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성단이군. 염치가 없지만 받겠네.”
“그리고 경지 향상을 축하드립니다.”
“자네 덕분이네. 성단의 효험이 이렇게 뛰어날 줄 알았더라면 자네에게 좀 더 잘해 줄 것을 그랬네.”
“충분히 잘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소소 낭자!”
“네. 공자님.”
“마지막까지 저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낭자의 영단은 제가 책임지겠으니 언제라도 찾아오십시오.”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장 수사님! 저는요?”
은단비의 어깨에 있던 엄지 공주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천신기를 착용한 그녀는 움직임이 신비할 정도로 기민했다.
있는 듯, 없는 듯.
하늘로 날아오를 때는 잠영만이 보였다.
“공주님은 제 고객 명부 가장 앞자리에 기록되어 있으니 영단을 사실 수 있는 권리를 우선시하여 드리겠습니다.”
“호호호! 저는 그 정도로 만족해요. 조만간에 찾아갈 터이니 기다리세요.”
“알겠습니다.”
장소천이 준 영단을 먹고 엄지 공주도 경지가 한 단계 향상되어 있었다.
그러니 거래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크게 기뻐했다.
그녀의 건곤대 속.
그 안에는 장소천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은정이 들어 있었다.
그 정도면 몇 개의 비천신기를 만들 수 있었다.
웅웅웅웅.
비행 법기가 적호족의 경계를 지나자 장소천은 그를 배웅해 주었던 여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포권지례를 했다.
츠팟!
그러더니 비천신기를 등 뒤에 장착하고는 빛이 되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쒜에에에엑!
비천신기를 착용하고 하늘로 날아오른 장소천은 한 마리 독수리가 되었다.
창응족의 수사들과는 비교조차 안 될 속도.
구름을 뚫고 창공 끝으로 올라간 장소천은 시선을 내려 대지를 굽어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을 머릿속에 그려보고는 날개를 활짝 펴고 활강을 시작했다.
콰두두두두.
순식간에 빨라진 그의 신형이 공기를 찢어 갈기며 유성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다가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더니 날개를 부드럽게 저으며 허공중에서 우뚝 정지했다.
쉬이이잇!
갑자기 지상에서 화살 하나가 날아왔다.
가공할 빠르기.
틱.
하지만 장소천이 날개로 내려치자 화살은 두 쪽으로 부러지며 힘없이 밑으로 떨어졌다.
훨훨.
날개를 저어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오른 장소천은 순식간에 구름 위까지 올라갔다.
그러고는 구름 속에 숨어서 호국성이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삼 일 후.
구름 아래로 요족들의 비행 법기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
배 안에 타고 있는 요족들의 수만 무려 백여 명에 육박할 정도였다.
비행선 밖에는 비행 요족인 창응족 수사들이 날아다니며 순찰을 돌고 있고….
눈빛이 날카로운 고계 요족 한 명은 선수에서 전방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비행선 위로 지나가는 구름 속에 장소천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능 덕분에 장소천은 구름 밖의 전경을 환히 바라볼 수 있었다.
비행 법기의 크기와 형상은 물론, 그 위에 타고 있는 요족들의 움직임까지 환히 보였다.
비행 법기에 탄 요족들은 대부분 고계 수사였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이 발각되기 않기를 염원했건만 오늘은 일진이 그리 좋지 못했다.
“웬 놈이냐!”
비행 법기 안에 있던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붉은 털의 괴수.
수탉처럼 생긴 요족이 눈을 빛내더니 하늘로 뛰어오르며 손에 든 창을 장소천에게 던졌다.
쉬리리리릿!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금빛 창은 생김새부터 심상치 않았다.
찰칵, 찰칵.
뾰족한 창극 옆으로 길쭉한 날개가 돋아나더니 갑자기 날아오는 속도가 빨라졌다.
정체가 발각된 것을 감지한 장소천은 즉시 구름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창공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금빛 창은 여전히 장소천을 따라왔다.
빙글.
장소천이 허공에서 선회하자 금빛 창도 장소천을 따라 돌았다.
법기.
그것도 고계 수사들이 사용하는 상품의 법기가 분명했다.
쿠쿠쿠쿠쿠.
멀리서 비행 법기가 구름을 뚫고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창응족 수사 두 명은 벌써 가까이 다가왔고….
그런데도 장소천은 허공중에서 계속 원을 그렸다.
그러다가 법기의 꼬리가 드러난 순간.
덥석!
금빛 창의 창대를 부여잡고 하늘 위쪽으로 힘차게 날개를 저었다.
부르르르르.
법기가 미친 듯이 요동쳤지만 장소천은 창대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전력을 기울여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장소천이 비행 법기에서 멀리 떨어지자 금빛 창은 조금씩 요동을 멈추었다.
대신 엄청난 한기가 장소천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도저히 비행이 불가능한 상황.
그런데도 장소천은 극한의 한계를 뚫고 계속 위로 솟구쳐 올랐다.
으윽!
너무 높이 올라가자 숨이 막혔다.
그제야 장소천은 몸을 선회하여 비행 법기의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직후.
쒜에에에엑!
가공할 속도로 장소천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비행 법기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속도.
날개를 접고 구름 아래로 떨어져 내린 장소천은 금세 요족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쫓아라! 저놈이 나의 금륜법창을 훔쳐 갔다.”
수탉처럼 생긴 요족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구름 아래로 사라져버린 장소천은 좀처럼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제26화 : 연의결(練意訣)
금륜법창을 건곤대로 집어넣은 장소천은 비행 속도를 최대로 높여 호국성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장소천이 날카로운 암벽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괴악산을 지나갈 때였다.
“으음?”
장소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구름이 자욱하게 깔려 있는 괴악산의 산봉우리에서 짐승의 사나운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날개를 활짝 편 익룡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놈들이 괴악산의 주인들이구나.”
장소천이 나직이 중얼거리는데 거대한 익룡들이 그를 향해 일제히 몸을 솟구쳤다.
크카카카카!
익룡의 부리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익룡의 울음소리에는 듣는 이의 의식을 흩어버리는 효능이 있었다.
게다가 익룡은 합격술에도 능했다.
그래서 아무리 사납고 흉포한 요수라도 괴악산의 익룡들에게 포위되면 죽음을 피할 수가 없었다.
놈들이 이곳 괴악산을 수만 년 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 놈들이 지금 장소천을 먹잇감으로 노리고 달려들고 있었다.
서걱!
부드럽게 선회하다가 갑자기 신형을 솟구친 장소천이 혼원신검으로 거대한 익룡의 목을 그었다.
카아아아!
장소천의 검을 보고도 익룡은 몸을 피하지 않았다.
하계 수사의 검격 따위는 익룡의 강철처럼 단단하고 질긴 피부에 상처조차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르르륵.
장소천이 혼원신검으로 내려치자 익룡의 목이 쩌억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렸다.
분노한 익룡은 죽음을 불사하고 장소천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날개로 장소천이 날아갈 방향을 가로막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허공을 사납게 할퀴었다.
하지만 장소천은 이미 그들의 포위망 밖에 있었다.
가공할 속도로 허공을 선회하더니 익룡의 부리를 피해 놈의 등허리에 착지했다.
꾸워어억!
엄청난 충격에 요수가 비명을 지르는 사이 장소천은 요수의 머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혼원신검을 역수로 쥐고 놈의 정수리를 단번에 내리찍었다.
츠팟!
붉은 피가 화산처럼 터져 나왔지만 장소천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투명한 날개를 활짝 펼쳐 또다시 죽음의 비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종횡무진하며 익룡들을 사냥하던 장소천은 자신의 검법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을 발견했다.
특히나 용비봉무결의 성취가 크게 높아졌는데 이유는 다름 아닌 비천신기였다.
용비봉무결은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펼치는 검법인데 그동안은 날개가 없어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림없는 수작!”
익룡 세 마리가 합공을 시도하자 장소천은 날개를 활짝 펼치며 좌우로 바람을 갈랐다.
그러다가 날개를 접고 수직으로 떨어지더니 기어코 익룡 한 마리의 날개를 찢어버렸다.
카아아아아!
혼원신검에 날개가 잘린 익룡은 빙글빙글 돌며 땅 아래로 떨어졌다.
그사이에 하늘로 솟구쳐 오른 장소천은 혼원신검에 영기를 가득 주입했다.
그리고 정면에서 달려드는 익룡에게 푸른색 탄강을 흩뿌렸다.
“죽어라!”
혼원신검에서 푸른색 검광이 튀어나오자 깜짝 놀란 익룡은 머리를 아래로 숙였다.
그러면서 거대한 발톱을 내밀었지만 그때는 이미 장소천의 검이 두꺼운 익룡의 목을 가르고 있었다.
서걱!
머리가 떨어져 나간 익룡은 울부짖지도 못했다.
허공에 붉은 피를 흩뿌리며 동료들에게 공포를 전염시킬 뿐이었다.
마지막 남은 익룡이 멀찍이 물러나자 장소천은 혼원신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냈다.
“괴악산의 지배자라고 명성이 자자하더니 실제보다는 많이 과장된 듯싶구나. 아니면 내가 많이 성장한 것이던지….”
장소천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적호족에 가기 전에 비하면 그가 많이 강해진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익룡들을 물리치고 여유롭게 하늘을 활공하던 장소천은 갑자기 목이 따가운 느낌을 들었다.
“뭐지? 적이라도 나타났나?”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장소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크카카카카!
엄청나게 큰 익룡.
날개 길이만 십 장이 넘는 거대한 익룡이 흉악한 울부짖음을 토해내며 장소천에게 날아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장소천은 비천신기를 펼쳐 황급히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데 거대 익룡은 장소천보다도 속도가 빨랐다.
비천신기를 극한으로 운용해도 달아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압도적인 빠르기였다.
어디서 이런 괴물이 나타난 것일까?
죽을힘을 다해 날아가던 장소천은 앞에 커다란 절벽이 나타나자 몸을 수직으로 꺾었다.
그러면서 거대 익룡을 바라보니 놈은 비행술조차 능했다.
절벽을 여유롭게 타고 오르며 자신의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품속에 손을 넣은 장소천이 소뢰부를 꺼냈다.
번쩍!
츠츠츠츠츠.
장소천이 소뢰부를 터트렸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정도 충격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소뢰부에 이어 염화부까지도 아무런 효과가 없자 장소천은 정말로 당황했다.
놈을 대적할 방법이 없어서였다.
그때, 절벽의 갈라진 틈새가 장소천의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다.”
장소천이 속도를 높였다.
쉬이이이익!
날개를 활짝 펼친 장소천은 몸을 옆으로 뉘어 갈라진 틈새로 파고들었다.
꽈과과광!
덩치가 커서 절벽 틈새로 들어오지 못한 거대 익룡이 강철같은 발톱으로 암벽을 무너뜨렸다.
그렇다고 절벽 틈새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크카카카카!
이에 거대 익룡은 하늘에 떠 있는 수하들을 불러 장소천을 뒤쫓게 했다.
하지만 그들로는 장소천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서걱! 서걱!
억지로 좁은 틈새로 들어간 익룡들은 장소천의 혼원신검에 당해 하나둘씩 사체로 화했다.
수하들을 불러낸 거대 익룡은 하늘을 바라보며 흉포하게 포효를 터트렸다.
그러고는 수하들에게 장소천이 절벽 틈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끔 감시하도록 명령했다.
쉬이익!
더 이상 비행할 수 없을 정도로 절벽 틈새가 좁아지자 장소천은 날개를 거두고 바위에 내려섰다.
“하아! 괴악산에 저런 괴물 같은 존재가 있을 줄이야. 어쨌든 놈의 손아귀를 빠져나오기는 했는데 앞으로가 문제로구나.”
장소천이 바위 틈새로 하늘을 바라보니 거대 익룡과 그의 수하들이 주변을 계속 선회하고 있었다.
밖으로 나갔다가는 곧바로 위험에 처할 것이 분명했다.
“음. 일단은 조금 쉬고 보자.”
마땅한 대책이 없었던 장소천은 몸을 쉴 곳을 찾아 틈새 사이로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니 틈새는 다시 넓어졌다.
그 아래쪽으로.
광대한 동부가 보였다.
절벽 속에 이런 공간이 있다니….
자연의 위대함에 고개를 숙인 장소천은 시력을 강화하여 동부의 광장을 바라보았다.
광장은 조금 어두웠지만 있을 것은 다 있었다.
관목처럼 작은 나무와 기화이초.
물웅덩이와 돌로 만든 건물까지 보였다.
건물.
그 안에 무엇이 살고 있는지는 장소천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밑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거꾸로 틈새를 기어 올라간 장소천은 혼원신검으로 바위를 잘라 평평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기신단 한 알을 꺼내 먹으려다 복잡한 심정으로 영단을 바라보았다.
“신력을 투입시켜 만든 영단은 영험한 것이 확실하다. 이것으로 다른 사람의 수련 경지는 많이 높여 주었는데…. 정작 나의 경지는 정체되었구나.”
장소천이 이렇게 느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성단을 만들기 위해서 장소천은 영대로 유입되는 신기를 법력으로 화생시키는 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경지 향상은 도외시하고 성단을 만드는 데 시간과 진기를 소진시킨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법력을 쌓았다면 경지가 지금보다 더 높아질 수도 있을 터인데….”
조금은 후회되는 마음으로 장소천은 손에 든 기신단을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현천무극심법을 운기하여 신기를 모두 법력으로 화생시켰다.
운기조식을 끝낸 장소천은 바위 틈새로 기어 올라가 익룡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러다가 실망을 하고 내려와서, 틈새 아래에 있는 광장을 바라보았다.
광장에는 토끼처럼 작은 동물들이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하지만 요수는 보이지 않았다.
돌로 된 건물은 여전히 적막하고….
“…….”
한참 동안 지켜보던 장소천은 건곤대를 두드려 호리병을 꺼냈다.
어!
그런데 이상했다.
기신단을 삼키고도 오랫동안 꼼짝달싹 안 하더니 오늘은 여우가 아홉 개의 꼬리를 활짝 펼치고 있었다.
자신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여우를 보며 장소천은 호리병을 아래로 기울였다.
또르르르르.
입구에서 기신단이 떨어지자 장소천은 감개가 무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병에 그려진 절세 미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장소천은 눈을 크게 떴다.
역시나.
이번 것도 불순물이 사라지고 약효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극품 영단.
성단이라고 소문난 자신의 영단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약효였다.
꿀꺽.
호리병을 건곤대로 집어넣은 장소천은 망설이지 않고 기신단을 복용했다.
그리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는데, 영단에서 정순한 영기가 폭풍우처럼 흘러나왔다.
맑고 깨끗한 영기는 장소천의 하단전과 경락을 넓히고 온몸을 세수하여 환골탈태시켰다.
우둑. 우두둑.
뼈가 새롭게 바뀌고 피부가 쩌억 갈라지더니 아기처럼 고운 피부가 생겨났다.
그리고 오장육부가 튼튼해지고 신경과 힘줄이 더욱 강하게 변화되었다.
새로 태어난 것처럼 몸이 연화되었지만 영단에서 흘러나오는 영기는 좀처럼 줄어들 줄을 몰랐다.
육성 후기였던 장소천의 경지를 단숨에 팔성 초기까지 올리고서야 영기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운기조식을 마친 장소천은 이번에도 자신의 코를 움켜쥐었다.
“우윽! 지독한 냄새다.”
장소천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몸을 씻을 곳이 없었다.
난처해하던 장소천은 바위 틈새로 다시 한번 광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비천신기를 장착한 후 광장 아래로 뛰어내렸다.
풍덩.
물웅덩이로 들어간 장소천은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러면서 건물을 바라보았는데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건물인가?”
조심스럽게 물 밖으로 나온 장소천은 화 속성 영기로 젖은 옷을 말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지를 살펴보았다.
자신의 경지가 연기기 팔성 초기에 이른 것을 발견한 장소천은 기적과도 같은 호리병의 이능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장소천이 연기기 팔성 초기에 이른 것은 전적으로 호리병 덕분이었다.
호리병에 있는 절세 미녀가 눈에 영액을 부어 이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평범한 영단을 극품으로 만들어 이처럼 말로 안 되는 속도로 경지 향상을 이루게 된 것이다.
연기기 칠성은 의식이 원만의 단계에 이르러 영기로 원하는 형체를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팔성은 영기로 만든 형체에 의념을 불어넣어 스스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고….
이는 연단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이제 장소천은 단로 속으로 영기를 불어넣어 원하는 흐름을 만들어낼 수가 있었다.
영액을 저어 주거나 국부적으로 가열, 혹은 냉각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경지가 향상되었으니 검법이나 비행 능력까지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앞에 보이는 건물.
그 안에 어떤 존재가 머무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저벅, 저벅.
긴장한 채 건물 앞으로 걸어간 장소천은 먼저 신식으로 내부를 살펴보았다.
이제 그의 신식 범위는 열두 장으로 넓어져 있었다.
건물 안쪽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거리.
“어!”
건물 내부를 살펴보던 장소천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건물 안에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는데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끼이익!
방문을 잡아당기자 문은 쉽게 열렸다.
방 안은 단출했다.
연단로 한 개와 침상에 놓인 책자 두 권이 비품의 전부였다.
노인이 죽은 것을 확인한 장소천은 침상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흠칫 놀랐는데, 노인은 다리 하나가 없었다.
연단로가 있는 것을 보면 노인은 연단사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연단을 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장소천은 먼저 노인에게 양해를 구했다.
“고인의 청정을 방해하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노인에게 포권지례를 한 장소천은 책자를 집어 내용을 살펴보았다.
단약서일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그의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한 권은 연의결(練意訣).
나머지 한 권은 노인의 소회를 적은 신변잡기로 제목조차 없었다.
장소천은 먼저 신변잡기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신변잡기 속에 놀라운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노인의 정체는 상품 이급의 연단술사인 태고종의 의성(醫聖).
범천기라는 이름을 가진 연허기 고수였다.
백 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분이 이곳에 있는 것이 의아했지만 장소천은 책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에 연단 비법이나 단방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거꾸로 연단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이러했다.
[나는 평생 단약을 만들어 다른 사람들을 도왔지만 뒤돌아보니 그건 시간 낭비였다.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내가 도와주었던 자들이 아닌 나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위해 연단을 할 시간에 너 자신의 경지 향상에 힘써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은 많지 않지만 자신의 연단 실력이 높아지면 단약을 요구하는 사람은 계속 늘어날 것이었다.
그들을 위해 단약을 만들다 보면 자신의 경지 향상은 늦춰질 수밖에 없을 터이고….
결국에는 의성처럼 비참한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단약으로 인한 경지 향상은 한계가 있다. 극품 영단처럼 순수한 것이 아니라면 몸에 독으로 작용하여 심경을 어지럽히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을 옥죌 것이다. 그러니 가급적이면 수련과 깨달음에 의지하여 경지를 높여야 한다.]
이 또한 맞는 말이었다.
요족의 소소가 그랬던 것처럼 유사한 영단을 계속 먹게 되면 만성이 되어 약효를 얻지 못할 터이고….
그 원망이 자칫 영단을 만들어준 자신에게 쏠릴 수도 있었다.
의성의 글은 계속 이어졌다.
[그러니 가급적 연단은 자제하고, 어쩔 수 없이 연단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영단이 아니라 몸과 마음을 연단하고, 그 후에는 하늘을 연단하여야 한다.]
현기 어린 말이었다.
특히나 영단이 아닌 몸을 연단하여야 한다는 구절….
말속에 담긴 현묘지도가 어렴풋이나마 장소천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완전히는 아니었다.
[이를 위하여 연자에게 연의결을 남긴다. 연의결은 의식을 강화할 수 있는 수련서로 그 가치와 효용이 무궁무진하다. 다만 전결(前訣)에 불과한 것이 조금 아쉬울 따름이다.]
의성의 글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제27화 : 현귀봉으로 돌아오다
결국 의성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 연단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지를 높이는 데 깨달음에 의지하라는 것.
처참하게 잘린 그의 다리를 보니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변잡기와 단로는 왜 남겨 놓았을까?’
이 또한 엄격히 말하면 자신이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행위였다.
마지막 남은 미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장소천은 단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연단로의 이름은 곤천화로(坤天化爐)였다.
그런데 생김새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단로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은 용의 형상이고.
단로 표면에는 선녀들이 구름 속에서 연단을 하는 모습이 고풍스럽게 양각되어 있었다.
단로를 건곤대로 넣으려면 먼저 법력으로 축소시켜야 했다.
곤천화로.
단로의 이름을 되새기며 법력으로 축소시키던 장소천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안에 뭔가 들어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단로를 열어보니 안에 맑고 푸른 옥갑 하나가 들어 있었다.
“뭐지?”
옥갑을 열어본 장소천의 눈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옥갑 속에는 금색으로 빛나는 영단이 세 알 들어 있었는데 그 밑에 영단의 이름과 단방이 적혀 있었다.
“원영단.”
영단의 이름을 본 장소천은 손을 들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역시나!
장소천이 짐작한 것처럼 단로에 들어 있는 것은 연신기 고수를 연허기로 올려준다는 원영단이었다.
옥갑을 들어 소중하게 품속에 간직한 장소천은 곤천화로를 축소시켜 그의 건곤대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다리가 잘린 이유는 원영단 때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그가 영단과 단방을 속세에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본 장소천은 왠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상외로 노인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얼굴이 아닌….
원망도 후회도 없는 미소 한 가닥이 노인의 입가에 잔잔하게 머물고 있었다.
피식.
그 모습을 본 장소천도 미소 한 가닥을 입가에 머금었다.
뭔가 마음이 복잡했는데, 아침 햇살에 어둠이 사라지듯 순식간에 정리된 것이다.
휘적휘적.
노인 옆으로 걸어간 장소천이 이번에는 연의결이라는 책자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책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열흘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도 장소천의 시선은 여전히 연의결 일장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읽고 있는 연의결은 전부 삼 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책자를 읽는 것조차 이렇게 힘이 들다니….
한 달이 다 되어서야 장소천은 연의결 일장을 완독할 수 있었다.
휴우!
심연 속에서 빠져나오기라도 한 듯 장소천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책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고 궁리해야지 시간에 쫓겨 읽으면 진의를 파악할 수 없다. 나머지 부분은 좀 더 여유로운 시간에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머리를 흔든 장소천은 책자를 건곤대에 집어넣었다.
이계로 환생한 후 장소천은 천재적인 두뇌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책자에 담긴 내용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연의결은 의식을 강화하는 수련서.
그것을 익히려면 먼저 원신부터 알아야 했다.
책을 통해 그나마 원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자위하며 장소천은 마지막으로 의성에게 포권지례를 했다.
그리고 비천신기를 활짝 펴고 자신이 들어왔던 입구로 날아올랐다.
* * *
“지독한 놈들.”
절벽 틈새로 하늘을 바라본 장소천은 깍깍거리는 익룡들을 바라보며 낮게 혀를 찼다.
그가 절벽으로 들어간 지 한 달도 넘었건만 익룡들은 아직도 하늘에서 틈새를 감시하고 있었다.
절벽 속으로 들어가서 경지를 향상시킨 장소천은 눈앞에 보이는 익룡들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보았던 거대 익룡은 지금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거대한 덩치와 흉포한 위세….
자신이 연신기 경지에 오른다면 모를까?
그 전에 싸운다면 백전백패였다.
그러니 놈에게 발각되지 않고 괴악산을 빠져나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주륵, 주륵.
하늘에 검은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장대 같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에 장소천은 쾌재를 불렀다.
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괴악산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늘이 도와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녘.
시커먼 구름에 별빛조차 가려져서 세상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츠팟!
어둠을 뚫고 인영 하나가 조용히 날아올랐다.
장소천이었다.
비천신기를 착용했지만 장소천의 비행 고도는 그렇게 높지 않았다.
지면과 바짝 붙어서 최대한 은밀하게 괴악산을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그런데 거대 익룡은 생각보다 영악했다.
놈은 이 산의 절대자로, 수하들을 땅 밑에도 치밀하게 배치시켜 놓았다.
그 결과.
후루루루룽.
장소천이 지나는 곳마다 요수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정체가 발각된 것을 감지한 장소천은 하늘로 날아올라 시커먼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능으로 방향을 살피며 전력을 다해 호국성 방향으로 날아갔다.
크카카카카!
놈이었다.
거대 익룡은 시커먼 구름 속에서 잘도 장소천을 찾아냈다.
위기를 느낀 장소천은 비천신기를 극한으로 운용했다.
그렇게 속도를 높였는데도 둘 사이의 간극은 시간이 갈수록 가까워졌다.
삼백 장 거리가 순식간에 십 장으로 좁혀졌다.
이러다가는 익룡에게 잡혀 처참하게 죽을 수도 있었다.
크카카카카!
그것을 알고 있는지 거대 익룡은 흉악하게 울부짖었다.
그러고는 강철을 종잇장처럼 찢어 갈길 수 있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장소천의 등허리를 낚아챘다.
휘이익!
장소천의 몸이 갑자기 수직으로 낙하했다.
옷이 찢겨지고 등줄기에서 피가 튀었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아니었다.
가소롭다는 듯이 거대 익룡은 날개로 장소천을 내리쳤다.
쐐애액!
이능으로 궤적을 확인하여 가까스로 공세를 벗어난 장소천은 허공에서 몸을 급선회했다.
그리고 흉악한 거대 익룡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씨이익!
거대 익룡이 싸움은 이미 끝났다는 표정으로 부리를 벌려 장소천을 삼키려는 찰나.
휘이익!
장소천의 손에서 금빛 창 하나가 날아갔다.
괴악산으로 오기 전에 수탉처럼 생긴 고계 요족에게서 탈취했던 금륜법창이었다.
금륜법창의 사용법은 아직 완전히 익히지 못했다.
그것이 상품의 법기이고.
이렇게 단발성으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이것저것 가릴 처지는 아니었다.
찰칵, 찰칵.
장소천이 날린 금륜법창의 창날 뒤로 길고 날카로운 날개가 펼쳐졌다.
그것은 금륜법창의 속도를 불가사의할 정도로 증가시켰고….
콰아아악!
거대 익룡이 눈꺼풀을 채 오므리기도 전에 놈의 눈동자 속으로 박혀 들었다.
꾸에에엑!
불시에 기습을 당한 거대 익룡은 하늘이 떠나갈 듯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 두 발로 눈에 박힌 법기를 뽑았는데 창끝에 시뻘건 눈동자가 함께 딸려 나왔다.
장소천의 행방을 찾아 두리번거렸던 거대 익룡은 머리끝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순간적으로 외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장소천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발에 들린 법기를 우그러트린 거대 익룡은 날개를 펄럭이며 구름 아래로 내려갔다.
크카카카카!
그러고는 괴악산의 모든 익룡을 불러내 장소천을 끝까지 추적할 것을 명령했다.
* * *
쐐애애애액!
거대 익룡에게 당한 등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지만 장소천은 죽을힘을 다해 비천신기를 운용했다.
다행히 거대 익룡 말고는 그보다 빠른 비행체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장소천은 무사히 괴악산을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괴악산을 벗어난 장소천은 이름 모를 협곡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작은 동굴을 찾아 다친 상처를 치료했다.
상처는 쉽게 낫지 않았다.
그래도 보름 정도가 지나자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몸을 치료하던 장소천은 자신의 육체가 너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신용 법기도 구하고 연체술도 익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장소천은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비천신기를 활짝 펼친 채 날아가던 장소천은 하늘 높은 곳에서 우연히 그가 가는 방향과 일치하는 기류를 발견했다.
이런 좋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장소천이 기류에 편승하여 날갯짓을 하자 그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을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다.
그렇게 호국성을 거쳐서….
마침내 장소천은 현귀봉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멀리 현귀봉이 보이자 장소천은 부드럽게 아래로 활공했다.
그리고 봉우리 아래 착지한 후 비천신기를 거두었다.
휘이익!
운월신법을 펼쳐 산을 올라가던 장소천은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자 속도를 더욱 높였다.
연기기 팔성에 이르러서인지 그의 운월신법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게다가 운보혜까지 신었기에 오래지 않아 장소천은 생활관이 있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예전에 있었던 숙소와 생활관이 사라지고 없었다.
불에 탄 것인지….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설마….”
불안한 마음에 무극전까지 단숨에 달려간 장소천은 갑자기 마음이 따스해져 왔다.
예전에 있었던 무극전은 완전히 파괴되고 없었다.
하지만 그 폐허 위에 작은 건물이 수십 채나 지어져 있었다.
그중의 하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사람을 보니 오랜 친구 막장이었다.
“막장아!”
장소천이 큰 소리로 막장을 불렀다.
장소천을 본 막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천아! 살아 있었구나.”
“그래. 살아 있었다.”
장소천이 막장에게로 달려갔다.
바로 그 순간.
막장이 나왔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채약당의 일조 조원들이었다.
“소천아!”
“하하하! 이놈! 무사했구나.”
“조장님! 저 소천입니다.”
장소천이 곽무진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곽무진이 장소천의 손을 잡아주었다.
“소천아! 걱정 많이 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저도 걱정 많이 했어요. 다들 무사하신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에요.”
“그래. 어! 그런데 경지가 언제 이렇게 높아졌느냐?”
장소천의 수련 경지를 확인한 곽무진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상관천세와 한여옥도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장소천과 헤어진 지 삼 년도 안 되었는데 그사이 사성 후기였던 경지가 팔성 초기로 높아져 있었다.
스무 살에 연기기 팔성 초기라니….
이는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른 수련 속도였다.
그동안 채약당 일조 조원들도 꽤나 빠른 속도로 경지를 향상시켜 왔다.
조장인 곽무진은 십성에서 벗어나 십일성에 올라갔고 상관천세는 팔성 중기, 사영근체인 한여옥은 팔성 초기의 경지였다.
다만 막장은 아직도 사성 초기였다.
“소천아! 앞으로는 사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냐?”
막장의 얼굴이 갑자기 침울하게 변했다.
장소천이 살아 돌아온 것은 기뻤지만 자신과의 경지 차이가 너무 벌어지자 자격지심이 생긴 것이다.
“야! 친구 사이에 무슨 사형이냐? 앞으로도 계속 소천이라고 불러라.”
“그래도 될까?”
“그럼. 경지에 상관없이 너는 영원히 내 친구이다.”
“허! 소천아! 그럼 우리는 너를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
상관천세가 난처하다는 듯이 장소천에게 물었다.
그와 장소천은 이제 같은 연기기 팔성의 경지였다.
당연히 친구처럼 지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막장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이에 장소천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부조장님은 한 사저님을 뭐라고 부르세요?”
“한 사매라고 부른다. 습관이 돼서 잘 고쳐지지 않더구나.”
“한 사저님!”
“응.”
“부조장님이 사저를 사매라고 부르는 데 불만은 없으세요?”
“전혀.”
한여옥이 뺨을 살짝 물들이며 대답했다.
표정을 보니 영원히 그의 사매이고 싶은 듯싶었다.
“그렇군요. 그러면 부조장님과 한 사저님은 예전처럼 저를 장 사제라고 부르세요. 저도 불만이 전혀 없으니까요.”
“그러면 다른 문도들이 너를 깔보지 않겠느냐?”
“그런 놈들은 곧바로 응징을 해야지요.”
조원들의 대화를 듣던 조장은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
이렇게 쉽게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수련 경지로 위아래를 결정하는 것은 수선계의 오래된 관행이었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사는 사람마다 영근속성과 자질이 판이하여 수행 속도에 큰 차이가 있었다.
수련 경지가 높아지면 사문에서 중책을 맡게 될 터.
그런데도 입문 시기가 조금 빠르다는 이유로 경지가 낮은 일반제자에게 계속 존칭을 해야 한다면 문파가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다.
특히나 수선자는 수천 년을 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입문 시간은 거의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상고시대 이전부터 수련 경지로 상하를 정하도록 관습화되었던 것이다.
그처럼 중요한 사안이기에….
이렇게 말 몇 마디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호칭 문제는 조금 더 지켜본 후에 결정하자. 장 사제는 먼저 사부님부터 뵙고 오너라. 막장아! 네가 길을 안내해 줘라.”
“네. 조장님.”
사부님에게 가면서 장소천은 막장에게 이곳의 사정을 들었다.
장소천이 요족 구역으로 가기 전에 무극진인의 제자는 거의 삼십여 명에 육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이 줄어서 이십 명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채약당의 이조와 삼조는 하나로 통합되었고….
법포당의 인원도 대폭 감소되었다.
막장이 안내해 준 사부님의 거처도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것을 보면 현재 극천문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사부님! 저 소천입니다. 요족 구역에서 약재들을 구해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누구라고?”
문이 벌컥 열리고 무극진인이 장소천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런데 조금 초췌한 모습이었다.
“사부님! 절 받으십시오.”
오랜만에 뵙는 사부.
장소천은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사부님께 큰절을 올렸다.
무극진인이 장소천에게 와서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이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방으로 들어가자.”
“네, 사부님.”
장소천과 무극진인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막장은 포권지례를 한 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갔다.
“앉아라.”
장소천을 의자에 앉게 한 무극진인은 다관을 들어 직접 차 한 잔을 따라주었다.
장소천이 그동안의 경과를 말하려고 하자 무극진인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먼저 차부터 마셔라.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으냐?”
“알겠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사부님을 바라보니 여전히 연신기 후기의 경지였다.
그런데 눈빛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에 현기가 담긴 것이다.
제28화 : 뇌겁(雷劫)
사부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척 많았다.
그런데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부님! 요족 구역에 가서 약초와 약재를 많이 얻어왔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괴악산에서 태고종의 수사였던 의성(醫聖)의 유해를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남기신 것입니다.”
장소천은 약재가 든 건곤대와 원영단이 든 옥갑을 사부에게 전해주었다.
건곤대를 살펴본 무극진인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옥갑을 열었는데….
두 손을 부르르 떨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부님! 옥갑에 든 원영단은 제자가 사부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장소천의 말에 무극진인은 그윽한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전에 광음 사숙께서 너의 복록이 대단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나의 복록도 만만치 않구나.”
“사부님께서 연허기 경지에 오르시면 극천문의 위상도 한 단계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말이 맞다. 무천 사숙께서 연허기 중기로 승단하신 지금 나까지 연허기 경지에 오르면 우리 극천문은 성세가 크게 오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요족들도 감히 극천문을 경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그러고 보니 무천 사숙께서 연허기 중기로 오르신 것도 네 덕분이구나. 네가 채취한 구엽선지초가 아니었으면 어떻게 허령단을 조제할 수가 있었겠느냐?”
“그것도 그렇지만 무천 사조님의 연이 하늘에 닿은 모양입니다. 함께 허령단을 드신 광음 사조님은 승단에 실패하셨지 않습니까?”
“네 말도 맞지만 그것은 영근속성 차이가 클 것이다. 무천 사숙님은 우리 극천문에서 유일한 천영근체이다. 똑같은 영단을 복용해도 효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 그렇게 보면 너의 성취는 정말로 경이적이구나.”
무극진인은 장소천이 아직도 이영근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가 체감하는 장소천의 경지 향상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런데도 의심하지 않은 이유는….
장소천이 태고종의 수사였던 의성(醫聖)의 유해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원영단까지 가지고 있던 의성이라면….
연기기 고수에게 기적을 선사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제 운이 좋은 것 같습니다.”
“성품도 훌륭하다. 너 같은 제자를 둔 사부는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을 것이다.”
“사부님께 그런 소리를 들으니 낯이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저는 먼저 일조 생활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원영단이 세 개나 있지 않으냐? 가서 채약당주와 법포당주를 불러오너라.”
“알겠습니다.”
무극전의 경계를 강화할 속셈임을 알아차린 장소천은 곽무진에게 돌아가 사부님의 뜻을 알렸다.
이에 곽무진은 두 당주에게 사부님의 뜻을 전했고, 며칠 동안 현귀봉은 적막에 휩싸였다.
무극진인이 폐관에 들어간 지 보름 후.
갑자기 현귀봉으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현귀봉뿐만이 아니었다.
영취산 전역이 검은 구름에 휩싸이더니 거대한 흑운이 현귀봉 방향으로 내달려 현귀봉을 첩첩이 둘러싸기 시작했다.
우르르르릉.
츠츠츠츠츠.
구름 속에서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다가 갑자기 뇌전 한 가닥이 백마처럼 내달렸다.
그러다가 하얗게 부서져 존재감을 사그라트렸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수십.
수백 마리의 뇌전이 구름 속에서 일렁이며 아래로 치닫더니 거대한 뇌성을 뱉어냈다.
우르르르릉.
꽈과과광.
“뇌겁이다! 뇌겁이 강림한다.”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영취산에 있던 수사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뇌겁이 강림하는 곳이 어디인지 목을 길게 빼고 바라보았다.
“현귀봉이다. 현귀봉에 뇌겁이 내려오고 있다.”
“현귀봉! 그러면 무극진인!”
”와아! 현귀봉에 계신 무극진인이 연허기 경지에 도전하고 계신다.”
“정말이냐? 가 보자.”
극천문의 수사들이 너나없이 현귀봉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극천문에 또 한 번의 경사가 벌어지려는 모양이었다.
장문진인은 물론이고 천약전주와 두 분의 태상장로까지도 공중으로 날아올라 멀리 현귀봉 방향을 바라보았다.
우르르르릉.
꽈과과광!
하늘에서 거대한 뇌전이 현귀봉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무극전 상부.
원영단을 먹고 허공에 둥실 떠 있는 무극진인을 향해서였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뇌전을 몸으로 받아냈던 무극진인이었다.
하지만 뇌전은 시간이 갈수록 더 강하고 위력적인 것이 떨어져 내렸다.
이에 무극진인도 법보인 투월환으로 뇌전을 방어했다.
번쩍!
파아아앗!
투월환과 부딪친 뇌전에서 눈부신 뇌기가 흘러나와 무극전의 건물을 무너뜨렸다.
그것도 부족하여 뇌전 일부는 무극진인의 전신을 시커멓게 불태웠다.
그런데도 무극진인은 극한의 인내심으로 참고 견뎌냈다.
오히려 뇌기를 받아들여 새롭게 생성되는 원영에 힘을 보태주었다.
막장과 함께 뇌겁을 지켜보던 장소천이 말했다.
“와아! 대단하다. 저것이 뇌겁이냐?”
“음. 뇌겁은 필멸자인 인간이 하늘의 도리를 어기고 수명을 거스르는 데 따른 하늘의 징벌이라고 한다. 연신기와 연허기, 화신기 고수가 되려면 반드시 뇌겁을 거쳐야 한다.”
“왜 뇌전을 피하지 않지?”
“뇌겁으로 강림하는 뇌전에는 특수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것을 몸속으로 받아들여야만 원영이 완전해지고 천도에 가까워진다고 들었다.”
“어쩔 수가 없겠구나. 잘 견뎌내실까?”
“그럴 거야. 사부님은 의지가 강하시잖아.”
“의지?”
“뭐, 의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쨌든 경지를 올리려는 의지가 강하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것이다.”
“맞아. 사부님은 이겨내실 거야.”
“그럼.”
두 제자의 열렬한 응원 덕분이었는지 무극진인은 마지막 뇌전까지도 잘 견뎌냈다.
몸은 처참하고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극진인의 입가에는 한 줄기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뇌겁이 끝나자.
하늘에 떠 있던 흑운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천지원기가 비처럼 내려와 무극진인의 몸을 뒤덮었다.
신묘한 광채가 무극진인의 몸을 뒤덮고 삼 일 밤낮을 빛나더니….
마침내 무극진인만 남겨놓고 사라져 버렸다.
“연허기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무극진인! 극천문의 태상장로가 된 것을 축하하네.”
“극천문에 연허기 고수가 또 한 명 출현했구려. 축하드리는 바입니다.”
극천문에 있는 모든 문도들이 무극진인의 연허기 승단을 축하해 주었다.
심지어 뇌겁을 보고 달려온 타 문파의 고수들도 적지 않았다.
연허기 고수가 되어 태상장로라 불리게 되었지만 무극진인은 현귀봉에서 거처를 옮기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이에 장문진인은 무극진인의 뜻을 받들어 현귀봉에 새로운 건물을 증축키로 했다.
그리고 임시 거처를 금궁과 가까운 금련봉에 마련했다.
금련봉에는 영단을 조제하는 천약전과 법기를 만드는 연기각이 위치하고 있었다.
게다가 무력대인 금검대와 청검대도 있었다.
무극진인이 연허기 경지에 오르자 주위에서 채약당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예전처럼 무시하기는커녕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자들까지 있었다.
연허기 고수가 되자 무극진인의 위상은 수직 상승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던 장로들조차 무극진인을 보면 고개를 조아렸고, 지급되는 물품도 최상급으로 대체되었다.
금련봉에 있는 채약당 일조 조원들의 숙소와 생활관도 예전에 비할 바 없이 크고 깨끗했다.
그 안에서 장소천이 조원들에게 목갑을 내밀었다.
“선물이라고?”
“네. 요족 구역에 가서 아주 특별한 비법을 거쳐 제작한 영단입니다.”
“다른 영단과는 다르다는 말이냐?”
“복용하시면 바로 효과를 체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정된 수량밖에 없으니 아껴서 드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 영단이라니…. 고맙구나.”
다들 고맙다며 한마디씩 하였지만 효과는 그렇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영지화삼(靈芝化蔘) 같은 천고의 영약이라면 모를까?
기신단 몇 알로는 그들의 경지에 유효한 효과를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특별한 비법을 거쳤다고 하더라도….
막장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받은 것이 황정단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조금은 실망한 눈빛이었다.
“내 것은 왜 황정단이냐?”
“너는 연기기 사성이잖아. 네 수준에 딱 맞는 영단이다.”
“다른 것으로 바꿔주면 안 되냐? 그동안 많이 먹어봤는데…. 황정단은 내 몸에 잘 안 맞는 것 같더라.”
“몸에 맞고 안 맞고는 일단 먹어보고 나서 말해라. 너는 특별히 몇 개 더 넣었다.”
예전에 요족 구역에 있을 때 만든 것이라서 장소천은 인심을 후하게 썼다.
신력이 가미된 황정단.
이미 자신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뭐 공짜라고 하니 고맙게 받겠다. 시간 되면 너도 내 방으로 와라. 너에게 줄 선물이 있다.”
“선물?”
“그것을 보면 아마도 놀라서 펄쩍 뛸 것이다.”
“알겠다.”
장소천이 피식 웃는데 성질 급한 막장이 황정단 한 알을 바로 입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러다가 경지 향상 조짐이라도 느꼈는지 놀란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심상치 않은 조짐에 놀란 조원들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장소천이 준 목갑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황급히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생활관으로 돌아온 조원들을 보니 다들 경지가 올라 있었다.
십일성 초기였던 조장은 중기로 향상되었고 부조장도 팔성 후기에 달해 있었다.
사영근체인 한여옥의 상승세가 가장 두드러졌다.
팔성 초기였던 경지가 후기로 높아져서 이제는 부조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막장도 마찬가지.
이영근체로 경지 향상이 무척이나 더뎠던 막장이었다.
그런데 사성초기였던 경지가 단숨에 사성 후기로 올라 있었다.
더군다나 그의 품속에는 아직도 먹지 않은 황정단이 남아 있었다.
잘하면 꿈에 그리던 오성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막장아! 너는 밤새 이곳에서 운기조식을 한 것이냐?”
“배 속에서 영기가 끊임없이 올라와서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조장님은 십일성 중기가 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소천이가 준 영단이 영험하기는 영험한 모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영지화삼보다도 더 신통한 것 같더라.”
“그러게요. 그 당시에는 조장님만 경지가 올라가지 않았었는데…. 다행히 지금은 모두가 경지 향상을 이루었네요. 누가 이유를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죠?”
“절대로 소천이가 준 영단을 먹고 경지가 높아졌다고 말하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소천이가 난처해질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추궁하면요?”
“그때는 사부님 핑계를 대라. 태상장로이신 사부님께서 영단을 하사하셨다고 말하면 아무도 채근하지 못할 것이다.”
“큭큭큭. 조장님은 정말로 잔머리가 잘 돌아가세요.”
“어허! 굵은 머리가 더 많다니까.”
“한번 세어 볼까요?”
“뭐라고! 허허허!”
“조장님! 사부님께서 연단에 필요한 약재를 천약전에 많이 넘기셨다고 들었는데, 소문이 사실인가요?”
“사실이다.”
“지금처럼 약재가 품귀현상을 빚고 있는데 사부님은 그 많은 약재를 다 어디에서 구하셨대요. 정말로 연허기 경지가 되면 없던 능력이 생기는가 봐요.”
“왜? 아까워서 그러냐?”
“그게 아니라…. 그것도 다 돈이잖아요.”
“그럼 그 많은 약재로 영단을 누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냐? 참고로 사부님이 태상장로가 되신 덕분에 우리 현귀봉은 더 이상 영단을 상납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와우! 사부님도 조장님 못지않게 머리가 좋으시네요. 하계 수사들에게 줄 영단은 천약전의 연단사들을 이용하여 만들고…. 사부님과 조장은 고계 수사들이 복용할 단약 연구에 매진하겠다는 뜻이잖아요.”
“그것도 잔머리처럼 보이느냐?”
“아니요. 심모원려 한 계획이죠. 봉황의 뜻을 어찌 잡새가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요.”
“조금 기분 나쁘게 들리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영단이 넘쳐나면 우리 극천문의 전력은 높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채약당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죠? 영단을 상납할 의무가 사라졌으니 할 일이 없잖아요.”
“할 일이 없기는…. 고계 수사들이 복용할 영단을 연구하려면 예전보다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영초라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당연하지. 그리고 태상장로이신 사부님의 명성에 걸맞도록 우리도 실력을 높여야만 한다. 어디서 맞고 다녀서는 안 되지 않느냐?”
“그 말이 맞네요. 하지만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왜?”
“저는 제 한 몸 지킬 자신이 있거든요.”
경지도 가장 낮으면서 막장은 뻔뻔하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제29화 : 오행천비록(五行天秘錄)을 수련하다
상관천세와 한여옥은 장소천에게 무척 미안해했다.
해준 것도 별로 없는데 너무 큰 은혜를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이에 장소천이 말했다.
“부조장님과 한 사저께서 예전에 베풀어 주신 은혜를 제가 갚은 것뿐이에요. 같은 조원인데 좋은 것이 생기면 함께 나눠야지요. 두 분도 그러실 거잖아요?”
“물론이다.”
“나도.”
“그러면 됐어요. 부조장님은 나중에 제 검술 수련 좀 도와주세요.”
“하하하! 그러면 되겠구나. 법술도 가르쳐줄까?”
“법술이요?”
“그래. 다 가르쳐 줄 수는 없고…. 기초적인 것이라도 몇 가지 가르쳐주마.”
장소천이 부담을 가질까 봐 돌려 말했지만 장소천은 부조장이 가르침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제가 부조장님 숙소로 찾아갈게요. 그래도 되죠?”
“당연하지.”
“장 사제! 암기술도 가르쳐줄까?”
한여옥의 말에 장소천은 두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너무 바빠서 그것까지 배우면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요. 한 사저님의 절예는 나중에 배울게요.”
“그래 알았어.”
두 사람이 자리로 돌아가자 막장이 은밀하게 눈짓을 보냈다.
생활관 밖으로 나가자는 말이었다.
“왜?”
“허험. 너한테 내 비장의 무기를 보여주려고. 따라와 봐!”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막장은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그러더니 장소천을 자신의 숙소로 데리고 가서 석 장의 부적을 내밀었다.
“이것이 놀라서 펄쩍 뛸 비장의 무기이냐?”
“너 없는 동안에 내가 드디어 뇌전부를 완성했다. 위력은 독각철우도 한 방에 죽일 정도다.”
“뇌전부라고?”
장소천이 조금은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부적 또한 제작자의 법력과 의식이 가미된 것.
현재 막장의 경지라면 이런 위력적인 부적을 만들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생명을 갈아 넣은 것이니 아껴서 써라. 염화부도 몇 장 더 줄까?”
장소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막장은 염화부를 무려 열 장이나 챙겨주었다.
그러더니 품속에서 하얀색 부적을 두 장 꺼냈다.
“뭔데 그렇게 아까워하냐?”
“은신부인데…. 아직 두 장밖에 만들지 못했다.”
“어떻게 사용하는 것인데?”
“몸에 붙이고 법력을 주입하면 한 시진 동안은 다른 사람들이 너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기척은?”
“그것까지는 감출 수 없다. 원래는 한 장만 주려고 했는데…. 기분이다. 두 장 다 가져라.”
“고맙다.”
예전에 장소천은 막장이 준 비행부 때문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맙다는 말에는 진정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네가 준 황정단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중에 기신단도 만들어 줄 것이지?”
“뭐? 하하하하!”
막장의 말에 장소천이 크게 웃었다.
“너 하는 것 봐서….”
말을 하고 보니 자신이 너무한 것 같았다.
이에 장소천은 건곤대를 두드려 얼마 남지 않은 기신단 중에서 세 개를 꺼냈다.
“기신단이다. 지금은 먹지 말고, 연기기 육성이 되면 그때 복용해라.”
“크흐흐흐. 알겠다. 진짜 고맙다.”
“외상이니, 나중에 부적으로 갚아라.”
“걱정 마라. 내가 고수가 되면 너도 내 덕을 크게 볼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하하하! 알겠다. 나, 간다.”
“그래.”
장소천이 밖으로 나가자 막장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품속에서 남은 황정단을 꺼냈다.
경지가 높아지면 지금보다 위력이 더 높은 부적을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니 부지런히 영단을 먹고 경지를 높여야 했다.
숙소로 돌아온 장소천은 머릿속으로 연의결의 구결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연의결은 머릿속으로 구결을 떠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한 자, 한 자.
힘겹게 단어들을 떠올렸던 장소천은 앞 구절부터 내용을 조금씩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의식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았다.
생령이 생각하고 기억하는 근원은 혼백에 있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외부에 영향을 끼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혼백 바깥에 생각을 의념으로 변화시키는 의식을 머무르게 한 것이다.
의식에 생각이 깃들면 의념으로 변화되고, 이것으로 법력이나 영기까지도 조절할 수 있었다.
법력이나 영기는 신식으로 볼 수가 있지만 의식은 형체가 없고 신식으로도 관찰할 수 없었다.
게다가 수련 경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수사는 연기기인데도 불구하고 연신기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장소천이 생각하기에는 막장이 그런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경지보다도 몇 배나 위력적인 부적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었다.
이처럼 느낄 수도 보이지도 않는 의식을 강화하려면 특수한 수행을 하여야 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의식 속으로 끊임없이 생각을 밀어 넣는 방법이었다.
다만 잡생각은 불필요했다.
천지법칙을 궁구하거나 궁극의 진리를 파헤치는 것처럼 일관되고 깊이 있는 생각이어야만 했다.
그러다가 깨우침을 얻으면 의식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수련이 어려울 것 같았지만 장소천은 조장인 곽무진에게 배운 것이 있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근성이었다.
* * *
연의결을 수련하다 보니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러다 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조금 더 궁구하면서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혼백.
인간의 몸에서 혼백을 떼어내면 그건 시체나 다름이 없었다.
그렇다고 혼백을 인간의 근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혼백도 시간이 지나면 분리되어 혼령은 하늘로 올라 윤회하고 백은 지상으로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이 사는 목적은 혼령에 담긴 도근을 양성하는 데 있었다.
도근이 깊어지면 혼령은 신격을 지니게 되고, 다시 태어나 수련을 해도 세상의 이치를 더 빨리 깨우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법력이나 의식은 혼령을 배양하는 양식이었다.
도근은 혼령이 앉아 있는 연화대이고….
수련을 통해 자신의 주체성을 파악한 장소천은 육신과 백이 지닌 역할을 조금 더 심도 있게 궁구했다.
그러면서 육신의 중요성을 체감했는데, 육신이 사라지면 아무리 잘난 혼백이라도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도근을 높일 수단도 없고….
백도 마찬가지였다.
죽으면 허무하게 흩어져 버릴 존재이지만 백은 그 사람이 생전에 가진 기억과 수련상의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이 있어야만 조금 더 빠른 수련이 가능한 것이다.
연의결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 셈이었다.
삶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소천은 깊은 허기를 느꼈다.
실제로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다.
심력을 다 소모했는지 머릿속이 멍하고 허한 느낌이었다.
연의결 수행을 마친 장소천은 곧바로 현천무극심법을 수련했다.
의성의 권고가 있었지만 장소천은 신력을 축적하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법력만큼 신력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무분별하게 신력을 낭비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최대한 사용을 자제하고 축적시켜 원신이 신위를 발현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
그렇게 되면 용비봉무결의 전반 십팔 초식이 제 위력을 드러낼 터….
비천신기로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혼원신검으로 용비봉무결을 펼치면 자신보다 경지가 높은 수사도 능히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현귀봉으로 돌아오니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다음 날에는 부조장인 상관천세와 함께 하루 종일 검술을 수련했다.
그리고 술법을 배웠는데 당연히 화 속성 비술이었다.
“그러니까, 영기로 형상을 만들어서 의념을 심어주라는 말씀이세요?”
“맞아. 대신 정신이 흐트러지면 안 돼. 그렇게 되면 화신(化身)이 흩어질 수도 있으니까.”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으세요?”
“물론이지. 화신을 잘 다루려면 의식을 두 개로 나누어야 해. 연기기 팔성이 되었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야.”
“그다음은요?”
“영기로 만든 화신에게 확고한 의념을 심어 적을 공격하도록 만들어야 해. 새로운 명령을 내려도 되고….”
“쉬운 일이 아니네요.”
“그래도 너라면 잘할 수 있을 거다. 연단을 하면서 화 속성 영기를 다루는 데는 도가 텄을 테니까.”
“한번 해볼게요.”
상관천세의 격려에 장소천은 화 속성 영기를 밖으로 흘려보내 용 한 마리를 만들었다.
장소천이 뱀이 아닌 용을 만든 것은 용비봉무결을 수련하면서 용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서였다.
커다란 화룡.
입을 벌리면 금세라도 불을 토할 것 같은 화룡이 허공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일단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화룡에게 의념을 주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의식을 두 개로 나누는 것조차 성공했건만 의념은 쉽사리 주입되지 않았다.
그때 상관천세가 책 한 권을 톡 던져주었다.
“쉽지 않지? 먼저 이 책을 읽어봐라. 오행천비록(五行天秘錄)이라고 사문의 비법서이다.”
“사문의 비법서를 이렇게 막 보여주셔도 돼요?”
“아니, 안 돼!”
“그런데요.”
“그러니까 빨리 보고 돌려줘. 그때까지는 눈을 감고 있을 테니까.”
못 말리는 사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장소천은 책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보았다.
책에는 화 속성 술법만 나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행의 술법 전부가 나와 있었다.
책자의 내용을 전부 외워버린 장소천은 술법서를 상관천세에게 돌려주었다.
“벌써 다 읽은 거냐?”
“네. 그런데 화신에 의념을 심는 것은 나중에 해야 할 것 같아요.”
“왜?”
“그냥 아무렇게나 하면 안 되겠더라고요.”
“하하하! 대충 본 줄 알았더니 다행히 그것은 아닌가 보구나. 맞다. 어떤 의념을 심어줄 것인지 머릿속에서 구체화시키는 것이 먼저이다. 화신에 의념을 심는 것은 그다음이고….”
“그러면 오늘은 검술 연습이나 더 할까요? 술법은 숙소에 가서 연습할게요.”
“싫다. 너와 싸워서 한 번도 이기지 못했는데 무슨 낯으로 대련을 계속하겠느냐? 차라리 그 시간에 숙소에 가서 운기조식이나 한 번 더 하련다.”
“이렇게 빨리 수련을 끝내신다고요? 수상한데요?”
“뭐가?”
“혹시 누구를 만나러 가시는 것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 사저가 한 번도 오지 않으셨네요.”
“험. 험. 바쁜 일이 있는가 보지. 장 사제! 나 먼저 간다.”
도망치듯 수련실을 빠져나가는 부조장을 보며 장소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이 한 사저의 생일이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숙소에 돌아온 장소천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벼루를 갈아 그 위에 붓 두 개를 나란히 올려놓았다.
의식을 두 개로 분리시킨 장소천은 오른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왼손으로는 글씨를 썼다.
그러다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왼손으로는 무공을 시전했다.
연기기 팔성 경지에 올라서인지 의식을 분리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동시에 두 가지.
어떤 고수는 몇 가지조차 가능하다고 들었다.
영기로 화신을 만드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
숙소에서 집중하여 형상을 만들자 수련실에서 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화룡이 만들어졌다.
모습을 바꾸고 형상과 크기까지 조절했던 장소천은 동시에 화신을 두 마리 만들었다.
그러고는 화신끼리 싸움을 시켰다.
한참 동안 싸움을 구경하던 장소천은 그것들을 하나로 합체시켰다.
그리고 장심으로 빨아들여 하단전으로 보냈다.
오행천비록에서 가장 큰 난관은 화신에게 심어줄 의념을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수련실에서 할 때는 그것이 잘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행천비록의 구결대로 생각을 의식에 담아 구체화시키자 장소천이 원하는 형태의 용이 만들어졌다.
사납기만 한 용은 아니었다.
허공을 자유자재로 날아다니고 입에서 불을 뿜고 술법까지 부리는 무시무시한 용이었다.
허!
의념이 구체화되자 장소천은 하단전에서 용 한 마리를 불러냈다.
그리고 영기로 만들어진 용의 머리에 의념을 심었다.
그 결과.
후와와와왕!
영기로 만들어진 화룡이 생혼이라도 깃든 것처럼 번쩍 눈을 뜨며 허공을 사납게 유린하기 시작했다.
화르르르르르.
불을 뿜고 허공에 발톱 그림자까지 쏘아대는 신묘한 화룡이었다.
화 속성 술법이 단숨에 성공하자 장소천은 수 속성 술법을 펼쳐냈다.
이번에 만들어낸 화신은 작은 백마였다.
이히히히힝.
이마에 커다란 뿔까지 달린 백마는 의념이 깃들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물방울을 튕기며 장소천 주위를 날아다녔다.
목 속성과 토 속성 술법도 펼쳐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장소천은 그것까지 펼쳐내지는 않았다.
용과 백마로 화 속성 화신과 수 속성 화신을 만들었지만 다른 속성의 화신은 조금 더 신중히 생각해 보고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제30화 : 극품 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