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절벽에서 떨어지다
나는 잘나가는 해결사였다.
실종자 수색이나 채권 추심, 산업 스파이 색출과 불륜 조사 등등.
남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에 제법 소질이 있었고, 감사와 더불어 상당한 보수까지 챙길 수 있었기에 이 일을 천직(天職)이라 여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배때기를 쑤시고 들어온 식칼.
불륜 채증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찌른 이유는 형편없다. 내 증거 때문에 재판에서 졌기 때문이란다.
이래서 치정(癡情) 의뢰는 가려 받아야 했던 건데, 막대한 보수의 유혹을 이기지 못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끝을 맺는 듯했던 내 인생.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초연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갑자기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격통이 휘몰아쳤다.
통증은 살아 있는 자들의 전유물.
혹시 아직 죽지 않은 걸까? 눈을 뜨면 막 병원 천장이 보인다거나?
나는 그런 기대를 품고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말도 안 돼, 기를 격발했는데 어찌 살아 있는 것이냐?”
어깨를 세차게 두들기는 빗줄기.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우르르 쾅쾅 내리치고 있는 벼락.
새까만 흑발에 흰 피부, 온몸이 흠뻑 젖은 여인이 경악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동양풍 장검을 움켜쥔 채로.
“이 뭔 개같은…….”
머릿속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발 디딘 곳은 드높은 산맥의 봉우리.
등 뒤엔 깎아지른 절벽이 존재했으며 그 아래에선 굽이치는 강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칼빵이 난 복부와 질질 새고 있는 시뻘건 핏물.
“천지신명이시여, 소녀에게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비통한 목소리. 무언가 사연이 있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여인.
자세히 보니 터무니없는 미인이다.
흑진주처럼 반질거리는 눈동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단정하게 묶은 말총머리와 새하얀 목덜미까지.
“미안하다 청진아, 죽어서도 이 누이를 용서치 말거라.”
그리고 그 미인은 나를 청진기 같은 이름으로 불러대고 있었다.
이 몸은 만능 해결사 단원준일 텐데, 그 청진이란 놈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 홍수처럼 밀려드는 누군가의 기억.
“억!”
나고 자란 모용세가, 이성을 좀먹는 흉성(凶星), 거스를 수 없는 별의 숙명까지.
곧이어 내가 누군지, 그녀가 누군지, 또 왜 이런 푸닥거리를 하고 있는지도 전부 기억났다.
이곳은 칼 한 자루로 바위를 쪼개고 바다를 가르는 초인들의 세상, 강호무림(江湖武林).
그리고 이 몸은 모용세가의 막내 공자 모용청진이었다.
“청혜…… 청혜 누나?”
그리고 눈앞의 여인은 내 친누이인 모용청혜.
“중원의 혈겁을 막고, 모용세가가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뿐이다.”
그런 친누이가 왜 저런 비정한 소리를 해대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곧장 떠올랐다.
‘천살성(天殺星)’
가문을 멸족시킬 화근(禍根). 그것이 모용세가 내에서 나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인간이 쌓은 악업(惡業)이 극에 달했을 때, 하늘이 이를 벌하고자 천살성을 내려보낸다던가.
그 일례로 백 년 전, 무차별 살육으로 중원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물들였던 전대 천살성.
저벅.
일말의 망설임마저 떨쳐낸 듯 모용청혜가 비장한 얼굴로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치켜든 검날에서 이번엔 확실히 끝내겠다는 예리한 살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자, 잠깐만! 누나! 정지!”
나는 누이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건곤파섬검(乾坤破閃劍)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다.
아무리 살인을 위해 타고난 근골(筋骨)과 무재(武才)를 지녔다지만, 무쇠도 두부처럼 써는 검기 다발 앞에선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신세.
투둑.
거기다 잊고 있었는데 이쪽은 허겁지겁 쫓기느라 벼랑을 등지고 있었다.
지면이 끝나는 부분을 밟자 투두둑. 떨어지며 위태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돌조각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게다가 이대로는 또다시 칼 맞는 분위기였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입을 털어봤다.
“저기 청혜 누나? 나 이제 완전 제정신이거든? 그러니 그 흉흉한 것 좀 내려놓고 말 좀 하자…… 응?”
하나로 섞여든 기억.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모용청진의 말투.
“……정말 질리지도 않는구나.”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어째 생각한 것과는 좀 달랐다.
화만 더 돋운 듯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무는 모용청혜.
“뱀처럼 간악한 흉성이로다. 또 동생의 입을 빌려 나를 농락할 셈이더냐!”
역효과였던 모양이다.
짐작컨대, 이 몸을 차지한 흉성이 이미 여러 번 모용청진을 흉내 냈던 모양.
“이런 십……. 나 흉성 아니야! 이번엔 진짜 제정신 차렸다고! 나야 나! 청혜 누나!”
덕분에 이쪽은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무슨 지랄을 해놓은 건지 아무리 설득해 봐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녀의 눈에 나는 이미 피에 굶주린 살인귀이자, 작금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세 치 혀를 놀리는 비열한 흉성일 뿐인 듯했다.
“끝까지 우롱을……! 허나 이젠 통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사라지거라 흉성!”
사형선고를 내리는 듯한 일갈. 검날에 쳐다만 봐도 베일 듯한 첨예한 기운이 스멀스멀 맺혔다.
저것이 바로 심후한 내력을 지닌 고수만이 펼칠 수 있다던 검기(劍氣).
츠츠츠-
그녀가 번개마저도 갈라 낸다는 모용세가의 비전 검법, 건곤파섬검의 자세를 취했다.
“아, 염병.”
그녀의 두 눈에 담긴 굳은 의지.
아무래도 멀쩡히 살아 나가는 건 글러 보였다.
투두둑.
반걸음 물러나자 경사면을 따라 또 구르는 돌멩이들.
지금 등 뒤에 도사린 것은 끝이 보이질 않는 절벽과 야생마처럼 날뛰는 급류였다.
저기에 뛰어들면 뼛조각이라도 건질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 멀뚱히 서 있어도 검기에 갈가리 찢겨 나가는 건 매한가지.
“선택지가 뭐 이러냐.”
마치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인생 같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또 찔려 죽을 바에는 차라리 스스로 내 갈 길을 택하련다.
한데 막상 뛰려고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니 뭔가 좀 억울했다.
일찍이 지구에서도 고아였건만, 다시 눈을 뜬 이곳에서조차 나는 가족에게 버려진단 말인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청혜 누나는…… 내 얘길 전혀 들어주질 않네.”
원망과 실망이 뒤엉킨 그 한마디에 동작이 뚝 굳어버린 모용청혜.
천살성인 게 밝혀지기 전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동생처럼 여기더니.
“씨이-”
나는 두 눈 딱 감고 무저갱 같은 곳으로 몸을 내던졌다.
끝나지 않는 추락이 날 맞이했다.
“브아아알-!”
***
중원에는 수백 년간 한결같은 위세와 영향력을 행사해 온 다섯 개의 뿌리 깊은 명가(名家)가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요녕성의 무림을 일통하고 북방의 패자로 군림한 모용세가(慕容世家)였다.
“그 아이는 고통 없이 보내줬느냐.”
하얀 목련꽃이 흐드러지게 핀 고즈넉한 장원.
모용가의 가주, 모용천(慕容泉)은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벼루에 먹을 갈며 그리 질문했다.
“…….”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
모용청혜는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차가운 얼굴. 섬전(閃電)같은 쾌검으로 하북의 마두를 베고 다녔기에, 호사가들로부터 냉화옥녀(冷花玉女)라는 별호를 얻어낸 장녀.
하지만 알고 보면 제 가족에겐 무르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특히나 자신을 의지하고 따르던 막내를 유난히 아끼던 그녀였기에, 모용천의 시선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제가 미숙하여 그 아이에게 고통을 주고 말았습니다.”
침묵 끝에 힘겹게 입을 뗀 모용청혜. 그녀는 자신의 주먹을 으스러지라 움켜쥐었다.
거대한 고목을 일검에 쪼개는 무인도 정(情) 앞에선 흔들리고 마는 법.
찰나의 망설임으로 목을 날리지 못했고, 그로 인해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동생.
사람을 풀었지만 급류에 휩쓸려 시체조차 건져주지 못했다.
“정녕…… 정녕 이랬어야만 했던 것입니까?”
일련의 보고를 끝내더니, 고개를 푹 숙인 채 침통한 목소리로 되묻는 모용청혜.
그 질문에 모용천의 붓질이 잠시 멈췄다.
“이래야만 했다.”
썩은 가지를 제때 쳐내지 않으면 뿌리까지 전부 썩는 법이다.
수많은 식솔과 혈족을 책임지는 수장으로써 결단을 내려야만 했던 부분.
전대 천살성은 각성한 지 십 년도 안 되어 경이로운 성취를 이루더니 제 가문부터 멸문지화 시키고 강호를 피로 물들였다고 한다.
살(殺)에 미친 악귀 그 자체. 모용의 성을 물려받은 이가 그런 혈겁을 일으켜선 안 된다.
게다가 이미 천살성의 등장을 점친 세력들이 있다. 모용세가가 스스로 아픈 손가락을 끊어내지 않았다면 그들이 움직였을 터.
“허나 아버님, 마지막엔…… 실로 제정신을 되찾은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절벽에서 대체 뭘 본 건지, 가주라는 호칭도 잊은 채 그에게 뭔가 달랐다고 호소하는 모용청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청진이가 돌아온 것인데도 몰라주고 칼을 휘두른 것이라면…….”
목소리가 자책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이 아이에게 마무리를 부탁한 건 혹시 실수였을까.
모용천은 짧게 혀를 차고서 대꾸했다.
“또 흉성에게 속을 셈이냐. 설사 회광반조(廻光返照)하듯 잠시 깨어났다 하여도 금세 살의에 휩쓸릴 운명.”
그래 봐야 찰나이리라. 인간의 정신이 어찌 하늘의 무게를 견디겠는가. 더 고통스러운 이별이 될 뿐이다.
화선지 위로 붓을 마저 휘갈기는 모용천의 손길.
시체를 건지지 못한 건 아쉬우나, 그 높이에서 살아남는 건 절정 고수인 청혜에게도 불가능한 일. 하물며 배에 그런 상처를 입었음에야.
“하늘도 참 무심하시지.”
왜 하필 그 아이란 말인가.
갖은 술법과 약재를 써봐도 나날이 강해지기만 하던 광증.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란 발버둥 쳐도 이처럼 거역할 수 없는 것.
손수 써 내려간 연통이 완성되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알알이 밝히는 별들. 그중 흉하게 빛나던 별 하나가 졌음을 알리는 그런 연통이었다
***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세찬 물살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대자연의 폭력. 미욱한 부평초처럼 강줄기를 따라 떠내려갔다.
어푸어푸 산소의 소중함도 깨닫고, 돌부리에 이리저리 치여 몸이 아작나는 경험도 해봤다.
끊어질 듯 말 듯, 끈질기게 이어진 목숨. 하류로 와서 물살이 약해지자 나는 강변을 좀비처럼 기어 올라갔다.
철퍽철퍽.
콧속에 스며드는 젖은 흙냄새. 발 디딜 곳이 있다는 게 이토록 위안이 될 줄이야.
“허억.”
다만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살았단 생각에 긴장이 탁 풀리자 맹렬하게 엄습해오는 통증. 너무 아파서 수 초간 입도 뻥긋 못 할 지경이었다.
무협지에선 절벽에서 떨어진 주인공을 위해 절세 기연이 딱 준비되어 있던데.
이 몸은 그런 스타터팩 없이 온몸에 골절과 피멍, 타박상만 가득한 상황.
“좆…… 같네……!”
영문을 모르겠고 서러운 데다 아파서 악! 소리를 질러봤다.
통증은 살아 있음의 증거. 질척한 강변에서 한 소년이 갓 잡힌 고등어처럼 퍼덕거려 댔다.
그러다가 불현듯 떠오른 의문.
‘…어떻게 산 거지 근데?’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높이였다. 거기에 입만 열면 숨도 못 쉬게 강물이 쏟아졌고, 바위에도 으깨지다시피 부딪혀 댔는데 아직 숨이 붙어 있다니.
나는 처절했던 그 생존의 순간들을 차근차근 되짚어봤다.
그러자 기연(奇緣)까진 아니라도 기이(奇異)한 일이 벌어지긴 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숨통이 끊어지려 할 때마다 화악 솟구쳐 날 되살렸던 정체불명의 기운.
츠츠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온다고.
내가 죽을 것처럼 빌빌거리고 있자 예의 그 시뻘건 안개가 또다시 몸에서 스르륵 빠져나왔다.
넝마처럼 너덜너덜해진 몸뚱어리를 순식간에 우두둑, 우둑, 고쳐놓는 모습.
“…….”
그러더니 내 이마를 쿡쿡 찔러본다.
마치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아보는 것처럼. 이 몸의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듯이.
그러다 뭔가 잘 안되는지, 갸우뚱거리다가 몸 안으로 다시 스르륵 기어들어 왔다.
빈사 상태에서 헛것을 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
“…시발, 저건 또 뭔데.”
내 안에 기이한 것이 살고 있다.
아주 흉(凶)하고 소름 돋는 무언가가.
혹시 저것이 누이가 말한 천살성의 기운인 걸까.
“하아.”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축축한 흙바닥에 철퍽 드러누웠다.
심란한 내 맘을 모르는지 어느새 먹구름이 걷히고 청명한 날씨를 드러낸 하늘.
“천살성에, 중원 무림이라니.”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기억에 의하면 이곳은 아마 중원 땅에서도 하북(河北)이라 불리는 지역.
급류에 휩쓸려 철새보다 빠르게 움직여댔으니 확실치는 않지만 말이다.
“…그리고 지금의 난 대체 뭐지?”
어쩌면 인간 본질에 던지는 자아성찰적 질문.
중원무림 모용청진과 현대지구 단원준의 기억이 이리저리 뒤엉켜 있었다.
빨강과 노랑을 섞으면 주황이라는 색이 나오듯, 아마 둘을 적당히 합친 무언가가 된 게 아닌가 싶었다.
“하, 아무리 사람 인생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지만…….”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약육강식에, 수틀리면 혈족끼리도 찌르는 헬무림에서 눈을 뜨게 될 줄이야.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 상황에 헛웃음을 흘려봤다.
꼬르륵.
그리고 제 주인이 동요하건 말건 밥 달라고 아우성치는 배꼽.
몸을 무리하게 수복해낸 대가일까. 뱃가죽이 아주 등에 쩍 달라붙어 있었다.
“끄응.”
지구나 중원이나 쫄쫄 굶주리는 이 감각은 똑같군.
나는 그 생동감 넘치는 오장육부의 꿈틀거림에 상념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기로 했다.
그래, 왜 이렇게 된 건지 백날 고민해봤자, 어차피 제대로 된 답은 나오지도 않겠지.
그렇다면 남은 일은 현재 상황을 인정하고, 살아남을 방도를 찾는 것뿐.
빠른 현실 순응과 곰벌레 같은 생존력이 몇 안 되는 내 장점이 아니던가.
꼬르륵-!
그러니 일단 생존에만 집중하자.
지금의 나는 먹을 것도 없는 데다, 나고 자란 가문에게 쫓기고 있는 상황.
아마 지금쯤 놈들은 내 시체를 찾으려 온 계곡을 헤집고 있겠지.
무림으로 넘어와 처음으로 생긴 가족이, 친족살해도 서슴지 않는 싸이코패스 집단이라니, 순간 마음이 꺾일 뻔했다.
하지만 이미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서 그럴까. 좌절할 법도 하건만, 묘하게도 오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어떤 철학자가 그랬었지.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두고 봐,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나는 지나가던 메뚜기를 휙 낚아채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이 몸은 이미 칼에 두 번이나 찔렸으며 절벽과 급류에서도 살아남은 바이니.
으적.
이제 웬만한 불행으론 내 정신을 무너뜨릴 수 없음이다.
2화 집 나간 탕아
옛말에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난 사람이 북적이다 못해 미어 터지는 하북 최대의 도시, 북경(北京)에 몸을 숨기기로 했다.
싯누런 황룡이 꿈틀대며 승천 중인 거대한 성문. 그곳을 지나자 광활한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야, 바글바글하네.”
널찍한 대로가 인파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좌우로 길게 늘어선 노점상, 흥정과 호객으로 시끌벅적한 저잣거리, 뜨내기 손님들과 봇짐을 짊어진 보부상, 허리에 칼을 찬 무림인들까지.
중원 곳곳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모습.
“건물도 으리으리하고.”
황제가 기거하는 황도(皇都)라 그런 걸까. 호화스러운 저택과 높이 솟은 전각이 곧잘 보였다.
전체적으로 부유함이 느껴지는 도시.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취직이든 동냥질이든 돈 많은 곳에서 하는 편이 백번 낫지.
“오길 잘했어.”
이름 모를 열매와 풀뿌리를 씹어 삼키며 보름 밤낮을 걸어온 보람이 있었다.
명문 세가에서 곱게 자란 13살 꼬맹이는 진작에 질질 짜면서 주저앉았을 고된 여정이었지만, 이 몸은 악과 깡으로 해내었다.
꼬르륵.
근처 노점에서 닭꼬치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는 게 보였다.
고기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위장이 요동치며 먹을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몸은 땡전 한 푼 없는 신세.
“입에 풀칠하려면 뭐라도 해야겠는데.”
막노동이라도 좋다.
오면서 확인한 건데, 천살성이 깃든 이 몸뚱어리는 괴물 같은 맷집과 괴력을 자랑했다.
그러니 일할 의지만 충분하면 먹고살 걱정은 없겠지.
나는 적당한 가게가 보이면 맨땅에 헤딩하듯 냅다 들이대 봤다.
“뭐? 너 같은 거지에게 일자리를?”
“아오, 냄새야. 손님 떨어지잖아.”
“저리 안 꺼져?!”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허드렛일이라도 좋으니 뭐든 시켜만 달라고 하자 어김없이 돌아오는 문전박대.
다들 듣도 보도 못한 거지 잡놈은 고용하지 않으신단다.
인맥을 거치지 않으면 외지인에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차가운 중원 사회였다.
어쩐지 길거리에 빌어먹는 놈들이 많더라니.
“염병할 꽌시.”
이렇게 된 이상 구걸로 계획 변경이다.
돈을 꼭 일해서만 벌라는 법이 있나. 뭐가 됐든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음 됐지.
나는 길가의 부유한 행인들을 쳐다봤다. 특히 기아와 굶주림이 만연한 이런 시대에서 살집이 통통하게 오른 인간들.
어릴 적에도 이런 식의 앵벌이로 주머니를 채웠었다. 당시 보육원이 용돈을 한 푼도 안 줘서 말이다.
그래서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손을 벌려 봤었다.
어린아이의 구걸에 안타깝다는 듯 기꺼이 지갑을 열던 사람들. 심지어 불쌍하다며 눈물까지 글썽이던 사람도 있었다.
이런 걸 두고 땅 짚고 헤엄치기라 한다지.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돈 벌 방법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그때 깨닫게 됐었다.
물론 그러다가 보육원 원장에게 들켜서 실컷 혼나고, 다른 돈 벌 방도를 찾아야 했지만 말이다.
“저 염소수염 상인이 좋겠군.”
은은한 광택의 무늬 비단옷. 누에를 기르고 비단실을 뽑아 짜낸 사치스러운 의류다.
저런 걸 입은 사람이 겨우 철전 몇 닢에 쩨쩨하게 굴지는 않겠지.
“나으리, 이대로는 굶어 죽을 것 같습니다요! 제발 한 푼만 줍쇼!”
나는 호다닥 달려가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봤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선 볼 수 없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을 지닌 존재.
작고 삐쩍 마른 아이가 바짝 엎드려 구걸해 오면 매몰차게 내치기가 쉽지 않다.
“그럼 굶어 뒤지렴.”
“…….”
정말 쉽지 않다 이 세상.
제 동생을 칼로 쑤시는 누이도 그렇고, 짐승만도 못한 것들이 아주 도처에 널려 있었다.
피식.
인류애를 상실한 내 멍한 표정에 비릿한 웃음을 날리고 뒤도는 염소수염 상인.
그 모습에 내 안의 뭔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금수(禽獸)만도 못한 놈이, 감히 거지를 도발해?
그것도 굶어 죽게 생겨 눈에 뵈는 게 없는 나 같은 놈을? 넌 오늘 뒤졌다.
“나으리이이이!”
지면을 ‘탁탁!’ 박차는 발끝. 나는 상인의 널찍한 등짝을 성난 고라니처럼 들이받았다.
“컥!”
난데없이 가해진 묵직한 충격에 신음성을 터트리는 상인.
나는 도망치지 못하게 상인의 바짓가랑이를 두 손으로 콱 움켜잡고 불타는 눈으로 외쳤다.
“한 푼만 줍쇼오오!”
“……이런 미친 애새끼를 봤나!”
상인 놈은 독기 가득한 내 눈빛을 읽고 질겁한 표정을 지어 댔다.
하지만 그럼에도 힘으로 날 뿌리치려고만 하지 전낭 쪽으론 움직이지도 않는 손.
그래, 측은지심이 메말라 버린 세계라 그거지?
그렇다면 그에 맞춘 방법이 또 있는 법이다.
나는 곁눈질로 주변을 살펴봤다. 대로 한가운데서 작은 놈이 다 큰 어른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으니 여기저기서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딱 좋군. 나는 상인을 향해 한 차례 씩 웃은 뒤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협박을 시전했다.
“아빠! 나 버리지 마아아 - !”
노점상 거리를 내달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 심상치 않은 내용에 길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이에 입을 떡 벌리고 나를 쳐다보는 염소수염 상인 녀석.
“뭐, 뭔 개소리냐! 난 너 같은 자식 없어!”
이 시대 사람들은 체면(미엔즈)을 중시하는 문화가 있다고 그랬다.
그리고 이는 사실이었는지 ‘나으리’ 하고 빌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던 놈이 극도로 당황한 얼굴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의 막장 가정사는 언제나 관심과 이목을 끄는 법.
때아닌 소란에 주변 행인들이 웅성거리면서 하나둘씩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놔라, 이 거지새끼가……! 동네 사람들! 이놈 말 믿지 마시오! 아주 미친 꼬맹이니!”
상인은 날더러 사기꾼이라 외쳐 대며 어떻게든 나를 떨쳐 내려 발악을 해 댔다.
하지만 하늘이 사람을 때려잡으라고 내려준 괴력을 한낱 범부(凡夫)가 어찌 이겨 내겠나.
나는 피가 안 통할 정도로 다리를 더 꽉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외쳤다.
“아빠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그러니까 제발!”
“이, 이런 육시럴할 새끼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서럽게 울부짖는 꼬마 아이.
누가 봐도 제 부모로부터 버려지는 자식이다.
사람들의 날 선 도끼눈이 상인을 향해 모여들었다.
“거지가 아니라 자기 애였어?”
“백주대낮에 자식을 버리다니.”
“쯧, 인간 말종이 따로 없구먼.”
조심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쓰레기가 되고 마는 게 중원 사회.
“……아니 미친! 난 억울하다니까! 아직 혼인도 안 했는데 무슨!”
상인은 분통이 터지는지 양팔을 붕붕 휘두르며 해명했다.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기만 했다.
졸지에 쌍놈으로 몰리게 된 상인. 가늘게 삐져나온 그의 염소수염이 연신 파들파들 떨려 댔다.
“이 처죽일 새끼가! 빨리 사실대로 털어놔라! 내가 왜 네 애비냐!”
“흑흑! 내가 전부 잘못했어! 이젠 말 잘 들을게!”
“이익…… 이 새끼가 또!”
거리 한복판의 촌극. 수군거림은 점점 크기를 더해 갔다.
상인을 향해 쏟아지는 비난과 따가운 눈총.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여론을 뒤집기가 힘들어 보였다.
“염병! 알겠으니까 제발 좀 놓으란 말이다아아!”
이를 인지했는지 이제는 애걸복걸해오기 시작하는 상인 녀석. 하나 어찌 맨입으로 이 사회적체면말살 포박술을 풀겠나.
이윽고 실랑이가 계속되며 염소수염을 알아보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그러자 더 이상의 푸닥거리는 손해라고 판단했는지 다급히 전낭을 꺼내 드는 상인.
“……지독한 새끼! 이거나 처먹고 떨어져!”
그는 뭔가를 한 웅큼 집어 바닥에 차르륵 흩뿌렸다.
햇빛을 반사하며 바닥을 데굴데굴 나뒹구는 묵빛 철전들.
기다리던 수확의 순간이었다.
“헤헤, 대인 복 받으실 겁니다!”
혹여 누가 주울세라,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떨어진 철전을 양손으로 박박 긁어모았다.
이것이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구걸신공.
그러곤 곧바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자리를 호다닥 벗어났다.
“음, 제법 묵직하군.”
작은 손을 꽉 채우는 철전(鐵錢) 열 닢.
이것이 중원의 화폐다. 그리 많진 않았지만, 아껴 쓰면 사나흘 정돈 배에 기름칠할 순 있는 액수.
역시 얼굴에 철판을 까니 먹고살 길이 열리는군.
철전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아까 침샘을 자극햇던 노릇노릇한 닭꼬치가 떠올랐다.
그걸로 이곳에서의 첫 수입을 기념해 볼까.
그런데 노점상의 위치를 떠올리며 발걸음을 옮기려는 그 순간, 우르르 몰려와 내 앞길을 막아서는 일련의 꼬맹이들.
누더기 같은 옷과 땟국물이 질질 흐르는 꼴을 보아 근처에서 빌어먹는 거지들인 듯했다.
“……형님, 괜찮을까요? 아까 보니 보통 미친놈이 아니던데.”
“괜찮아, 성깔만 있지 덩치는 작잖아.”
날 두고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녀석들. 뭐 하는 애들인진 몰라도 좀 전의 내 구걸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
“야.”
개중 덩치가 가장 큰 까까머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 크다고 해 봐야 현대로 치면 중3 정도밖에 안 돼 보였지만 말이다.
“넌 뭐 하는 개뼉다귀냐?”
“나? 단무진이라는 개뻑다귀인데.”
방금 지은 이름이다. 호적에서 파였으니 청진에서 무(無)진으로. 그리고 내 원래 성씨를 덧붙여 단무진이다.
잠깐, 짓고 보니 뭔가 단무지 같은 이름이군.
“그래, 단무진. 너 여기가 우리 구역이라는 건 알고 구걸질이냐?”
하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콧김을 씩씩 내뱉으며 땅바닥을 발로 쿵쿵 찍어대는 덩치.
“하여간 요즘 거지들은 상도의가 없어요. 너 어디서 굴러먹던 놈이야?”
여기선 거지끼리도 나와바리 개념이 있는 모양이다.
몰래 하는 것도 아니고 대로변에서 대놓고 구걸했다며 격분하는 거지 녀석.
“그래서 뭐 어쩌라고. 좀 떼달라고?”
치고받으면 당연히 내가 이긴다. 이쪽은 사람을 때려 죽이는 데 최적화된 천살성이니까.
하지만 다 큰 어른이 애를 쥐어패서 어디다 쓰겠나. 그것도 비슷한 처지의 거지 꼬맹이들을 상대로 말이다.
고로 협상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온정을 베풀 여지도 있었다.
“떼기는 무슨, 등신이 처돌았나? 다 토해 내야……. 컥!”
개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나가고 말았다.
‘퍽!’ 가죽북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저만치 부웅 날아가는 덩치.
이 몸이 간만에 자비를 베풀려 했건만, 아주 상도의가 없는 놈이로군.
“마, 말도 안 돼.”
“오칠이 형님이 한 방에…….”
놈을 뒤따라왔던 꼬맹이들이 새파랗게 질려 그렇게 중얼거려 댔다.
저만한 덩치가 이리 맥없이 당해 버릴 줄은 몰랐던 모양.
숫제 괴물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왜? 너희들도 덤비게?”
흙바닥에 처박혀 아직도 두 다리를 파르르 떨어대고 있는 덩치.
꼬맹이들은 덤비겠냐는 내 질문에 황급히 도리질을 쳤다.
“그럼, 여긴 이제 내 구역이다?”
“…….”
우두머리를 쓰러트린 데다 부하들의 항복도 받아 냈다.
이곳은 무림, 힘이 곧 규칙인 곳.
사람을 공처럼 뻥 날려 버리는 장면에, 반론을 펼칠 간 큰 녀석은 없었다.
***
해 뜨는 곳에 그늘이 있듯, 화려한 북경에도 뒷골목은 존재했다.
벌레 먹은 나무 기둥에 간신히 비만 피할 거적때기를 씌워 놓은 은신처.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우격다짐 다음 날, 스스로를 오칠이라 소개한 덩치가 머리를 납작 조아리며 합류를 요청해 왔다.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내 괴력과 능숙한 구걸질에서 무언가를 느낀 모양.
“지랄, 내가 왜 네 형님인데.”
“힘세고 돈 잘 벌면 형님이죠.”
뭐, 틀린 말은 아니군.
비록 거지일지언정 세상 돌아가는 방식을 아는 놈이었다.
“그런 걸 아는 놈이 왜 남의 구걸금을 탐내고 그래?”
“먹여 살려야 할 입이 있어서……. 면목 없습니다, 형님.”
녀석의 뒤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엉거주춤 서 있는 네 명의 꼬맹이.
먹여 살린 것치곤 오칠 본인을 포함해 하나같이 꾀죄죄하고 삐쩍 마른 상태였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게 바로 저런 걸 두고 말하나 싶을 정도.
“구걸이 잘 안되냐?”
“쉽지 않습니다, 형님.”
근처에 도박장도 많고, 고리대금업 하는 전장(錢莊)도 있어서 돈이 전부 그곳으로 빨려 들어간단다.
“거기다 그 염소수염처럼 거지를 공개적으로 비웃는 놈들도 많아서요.”
도박장에 매번 털리고, 삶도 팍팍한데 마침 건드려도 뒤탈 없는 놈들이 어슬렁거리니 멸시하고 조롱하는 분위기가 정착해 버린 모양.
한마디로 구걸질 해 먹기에 최악인 장소였다.
이런 약해 빠진 꼬맹이들이 어떻게 이 구역을 손에 넣었나 싶었는데, 다른 거지들이 버리고 간 곳을 그냥 주워 먹은 거였군.
“그런 상황에서 형님이 가장 지독한 그 염소수염 새끼를 털어먹으신 겁니다.”
대단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꼬맹이들.
그 싸가지 상인, 여기 거지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했던 모양이다. 나도 구걸질 하면서 느꼈는데 보통 놈이 아니다 싶었었지.
그런데 듣다 보니 좀 거슬리는 게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야, 형님 소리는 빼자.”
“왜요?”
그야 깡패 같잖아.
우리가 무슨 흑도 조직도 아니고.
“대장이라 불러.”
보육원 시절, 애들에게 불리던 호칭이었다.
나는 오갈 곳 없는 이 꼬맹이들을 부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구역을 먹어도 관리하려면 최소한의 머릿수가 필요한 법이니까.
쫄따구 느낌으로 써먹으면 되겠지.
“예, 무진 대장.”
저 호칭을 듣고 있자니 뭔가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났다.
“근데 애들은 이게 다고?”
오칠이까지 다섯, 나까지 포함하면 여섯.
“원래는 일홍이라고……. 한 놈 더 있었는데요.”
“근데?”
“이대론 굶어 뒤질 것 같다며 튀었습니다.”
참다못해 탈주한 모양. 그리고 그럴 만해 보였다.
애들 깡마른 꼴을 봐라. 거지가 구걸을 못 해내고 있으니, 이대론 굶어 죽겠구나 싶었겠지.
“대체 어떻게 해야 대장처럼 돈을 뜯을 수 있는 겁니까.”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오칠.
어떻게 했긴. 그저 상대가 좆같이 나오니 똑같이 굴어 줬을 뿐이다.
비웃는 놈들 앞에서 동정심을 유발해 봐야 의미가 없지.
“그야 간단하다. 얼굴에 철판을 깔아라.”
“이미 깔았는뎁쇼.”
“더 깔아.”
어설프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살아남으려면 목숨 걸고 덤벼들어야 한다.
원래 잃을 게 없는 놈들이 더 무서운 법. 반면에 저들은 체면부터 시작해서 잃을 게 너무 많지.
“구걸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라 생각해라.”
해묵은 정신 무장론. 하지만 가진 게 그것뿐이니 필요했다.
아무도 거지를 챙겨 주지 않는다. 길거리에 굶어 쓰러져도 냉소만 날아들 뿐.
그러니 살기 위해선 지금의 방식을 바꿔야만 했다.
***
오칠은 구걸에 영 소질이 없는 거지였다.
그리고 무진과 마주쳤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저거 미친놈이네’였다.
하필 북경에서 가장 지독한 상인에게 들러붙어 있던 녀석.
모두가 실패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광견처럼 지독하게 물고 늘어지더니, 기어이 돈을 뜯어내고야 말았다.
그 지독한 수전노(守錢奴)가 완전 질려서 스스로 전낭을 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칠은 그때 느꼈다. 저런 놈과 함께 다니면 적어도 굶어 죽진 않겠구나라고.
그리고 그건 아주 정확한 판단이었다.
“나으리이이!”
인파가 붐비는 저잣거리의 대로. 그리고 대외적 평판과 신용에 민감한 상인들.
“이, 이것들이 단체로 돌았나! 어서 놓아라!”
“나으리! 그냥 가시면 저희는 굶어 죽습니다요!”
무진 대장이 말했다. 혼자는 약하지만 뭉치면 강하다고.
수많은 이들이 보는 가운데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대성통곡을 터트리는 어린 꼬맹이들.
아이 서너 명이 저잣거리가 떠나가라 ‘빼액!’ 울어 대니 시선이 안 쏠릴 수가 없다.
아주 온 동네의 구경거리가 된 상인.
결국 양다리가 전부 붙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그는 치를 떨며 반강제적인 적선을 베풀 수밖에 없었다.
“이 바닥에서 일한 지 십 년이지만, 너희들처럼 독한 놈들은 처음 본다!”
철전 몇 닢을 신경질적으로 던지는 상인.
“나으리, 딸린 입이 많은데 조금만 더…….”
“에잇, 질긴 놈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걸 바가지에 철전이 몇개 더 들어왔다.
상인에겐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거지들에겐 엿새를 굶주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그런 액수였다.
“대장! 이거 봐!”
“철전이 이만큼이나 모였어!”
하루 종일 구걸해서 겨우 한 푼 얻을까 했던 그들로서는 결코 겪어 보지 못한 수입.
박을 쪼개 만든 바가지가 상당히 묵직해지자 모두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무진의 지휘 아래 더욱 대담해진 꼬맹이들. 그들의 구걸은 이제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평소 가게에 얼씬도 말라며 몽둥이를 휘둘러 온 포목점 장씨도.
“장 할배, 손자 버릴 거야?”
“이런 고얀 놈들을 봤나…….”
심심풀이로 거지들을 걷어차던 모 기루의 루주(樓主)도.
“엄마.”
“……어머, 이 거지들이 뭐래!”
잃을 것 없는 놈들의 작은 반란을 피해 갈 순 없었다.
매정한 도산검림에서 미취학아동으로 살아남으려면 뭐든 다 해야 하는 법.
사해가 동도라 하였던가. 우린 온 천하가 잃어버린 부모이자 친지였으며 또 형제였다.
물론 그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대장! 오늘도 바가지 꽉 찼어!”
“빨리 돌아가서 이걸로 밥 해먹자!”
무진 패거리는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그리고 잘 먹고 잘 산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비슷한 처지의 꼬맹이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매정하게 내치면 갈 곳도 없고 굶어 죽는 게 확정인지라 하나둘씩 받다 보니 어느새 여덟으로 불어난 머릿수.
조직의 체급이 커지고 먹여 살릴 입도 늘었으니, 구걸 영역도 야금야금 넓혀 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잇, 기분이다! 오늘은 갈저탕에 고기도 한 덩이 담가 보자!”
갈저탕(褐猪湯). 풀뿌리와 오래 묵은 쌀, 버려지는 고기 부위를 한데 담아 끓인 요리였다.
평소엔 고깃국임을 주장하는 멀건 피죽에 가까웠으나, 오늘은 제대로 된 고기를 씹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오!”
“고기다! 고기! 고기!”
성장기엔 단백질을 보충해 줘야 덩치도 쑥쑥 크는 법이다.
도축업자를 찾아가 고기 한 덩이를 받아온 아이들은 신난 발걸음으로 거지굴에 들어섰다.
그런데 누더기를 덮어 놓은 그들만의 보금자리에 초대받지 않은 선객이 있었다.
퍽! 퍽!
가늘고 애처로운 비명. 낯선 거지 무리에게 둘러싸여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고 있는 어떤 꼬맹이.
“악! 난 단무진 아니라고……! 윽!”
기묘한 일이었다. 왜 저 이름이 저기서 튀어나오는 거지.
단무진은 오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물었다.
“저기 맞고 있는 애 누구냐?”
“일홍이 같은데요.”
“아, 그 탈주했다는 놈?”
오칠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억! 윽! 헉, 잠깐! 얼굴은 안 돼!”
아무래도 집 나간 탕아가 돌아온 듯했다.
3화 촉법소년
“이 새끼들이, 남의 집에서 뭔 짓거리야?”
무슨 상황이건 간에 이곳은 비와 외풍을 막아 주는 우리의 소중한 보금자리.
낯선 놈들이 제 맘대로 들쑤시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으르렁거리면서 나서자, 그제야 어리둥절한 얼굴로 쥐어패던 꼬마와 나를 번갈아 보는 낯선 거지들.
“뭐야, 이놈 진짜로 단무진 아니었어?”
“그치만 얼굴 곱상하고 피부 허연 놈이라고 들었는데.”
“야, 그건 저기 서 있는 놈도 똑같잖아.”
거지 놈이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몸이 돼서 얻은 장점 중 하나가 반반한 얼굴이긴 하지. 미래가 제법 기대되는 재목이었다.
“흑흑, 그러니까 나 아니라고요…….”
억울함에 사무친 목소리로 항의하는 일홍이란 꼬마 아이.
엄한 놈을 멍석말이했던 거지 놈들이 침을 퉤, 뱉고선 슬금슬금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머릿수는 대략 열 명. 덩치도 우리보다 컸다. 지구로 치자면 대략 고딩 정도.
“네가 요즘 말 많은 그 단무진이냐?”
“우리 왕초 허락도 없이 근처에서 구걸질 했다며?”
“한번 밟아 줄 때가 됐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깡패 흉내나 내기는.
나는 갈저탕 재료를 들고 온 애들에게 물러나라 손짓한 후 앞으로 저벅저벅 나섰다.
보아하니 내가 어떤 놈인지 아직 잘 모르는 모양.
그냥 돈 좀 만진다는 소문만 듣고 온 거겠지.
“일단 그 반반한 쌍판을 묵사발……. 컥!”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이 공기를 갈랐다. ‘퍽’ 하는 둔탁한 타격음. 녀석은 강냉이를 토해 내며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선방필승(先榜必勝)의 묘리.
“너 이 씹새가……! 끅!”
뒤따라 달려오는 거지 놈도 가슴팍을 걷어차 줬다. 그대로 튕겨 날아가 바닥을 와당탕 구르는 녀석.
손과 발에 파괴적인 붉은 기운이 스멀거렸다.
“구, 구봉이가 날아갔어!”
“이런 놈이란 얘긴 없었잖아!”
순식간에 두 명이 나가떨어지자 당황한 기색으로 술렁이는 거지들.
“한꺼번에 와라.”
나는 놈들을 향해 덤비라는 듯 손가락을 까닥여 보였다.
마침 천살성을 품은 이 몸의 성능과 내구력이 궁금했던 바이니.
“씨벌! 한 번에 달려들어!”
“조져 버려!”
그 한계를 오늘 한번 시험해 봐야겠다.
***
“……이 괴물 같은 새끼!”
반각(半刻)이 지난 후.
판잣집 근처에 거지 다섯이 쓰러져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서 있는 놈들도 시퍼렇게 멍이 들거나 입술이 터져 있는 등 멀쩡하진 않은 모습.
“뭔 놈의 애새끼가 맷집이!”
“와, 왕초를 데려와야 해!”
“너 이 새끼! 나중에 두고 보자……!”
애들 싸움은 곧 기세 싸움이다.
내가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가 순식간에 다섯을 때려눕히자 겁을 집어먹은 녀석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줄행랑을 쳤다.
대단히 일방적으로 끝나 버린 쌈박질.
아쉽다. 뭔가 더 때리고 싶다. 나는 스멀거리는 붉은 안개를 보며 문뜩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이러다 모용청진처럼 광인이 되는 건 아니겠지? 조금 자제하기로 했다.
“…대단하세요 대협, 저 골치 아픈 놈들을 단숨에 때려눕히시다니요!”
그런데 흙바닥에서 고개를 번쩍 치켜든 탈주 닌자 녀석이 갑작스레 이 몸의 기개를 칭송해 왔다.
아까 나로 오인받아 먼지 나도록 처맞던데, 입터는 걸 보니 의외로 상태는 나쁘지 않았던 모양.
“적진에 뛰어드는 용맹과 괴력, 흡사 초패왕 항우를 보는 듯했습니다! 오늘 이 일홍이 개안(開眼)을 하는군요!”
혓바닥에 기름을 칠한 듯 아부가 아주 청산유수다.
그리고 코앞에서 보니 침입자 놈들이 오해한 이유를 알 법도 했다.
흙먼지도 가리지 못한 뚜렷한 옥안(玉顔). 체구도 호리호리한 것이 꼭 기생오라비 같은 녀석이었다.
이 동네에 꽃거지는 나뿐인 줄 알았는데.
“탈주했다더니, 왜 돌아왔냐?”
일홍이라 그랬었지. 내 질문에 잠시 입을 다물더니, ‘헤헤’ 웃으면서 옆머리를 벅벅 긁는 모습.
“그게, 밖은 더 고생이더라고요. 저 같은 꼬맹이는 받아 주는 곳도 없는 데다, 얼굴이 재수 없다고 때리질 않나…….”
못 해먹겠다고 뛰쳐나갔다가 더 심한 고초를 겪고 돌아온 듯했다.
그야 다른 패거리는 덩치 크고 싸움 잘하는 애들만 골라 받으니까 말이다.
반면 이쪽은 나라는 인간 흉기가 생겨 그럴 필요가 없게 됐지.
“흠.”
근데 이 녀석, 다시 봐도 참 잘생기긴 했다. 나이가 차고 살집이 붙으면 아낙네들 여럿 울릴 상이다.
그때가 되면 길을 걸으며 눈웃음만 쳐도 적선이 쏟아지겠지. 이건 투자할 가치가 있을지도.
“무진 대장이라 불러라.”
나는 녀석이 잡고 일어날 수 있게 손을 뻗어 주며 그렇게 말했다.
“아, 그 소문의……! 어쩐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기백이 보인다 했습니다. 구걸뿐만이 아니라 무공에도 소질이 있으셨던 거군요!”
온갖 미사여구에 문자까지 섞어 쓰는 것이, 거지답지 않은 아첨 실력이었다.
“적당히 하고.”
“넵.”
내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번쩍 일어서는 일홍.
그런데 이 녀석,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볍다.
“야, 너 남자 맞지?”
중성적인 목소리야 변성기가 오지 않았다 쳐도, 길게 뻗은 속눈썹과 발그스레한 입술은 뭔가 묘하다 싶었다.
“…그럼요, 어딜 봐도 사내대장부 아닙니까.”
“근데 왜 이리 가벼워?”
“못 먹어서 그래요.”
앙상한 손가락을 펼쳐 보이는 녀석.
누더기옷이 펑퍼짐해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깡말랐던 모양이다.
역시 고아들은 먹고살기 팍팍한 시대로군.
“대장, 그래서 이것들은 어쩐답니까?”
오칠이 내게 덤볐다가 기절한 거지들을 발로 툭툭 차며 물었다.
아까 그놈들, 쓰러진 애들을 수습하지도 않고 그냥 가더라.
뭐 거지끼리의 조직력이 보통 그 정도지.
“애초에 뭐 하는 놈들이었는데?”
기절시키기 전에 한번 물어볼걸.
자기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오칠.
“아, 걔들. 엄백 왕초가 보낸 애들이에요.”
그런데 질문에 대한 답은 일홍에게서 튀어나왔다.
보아하니 뭔갈 아는 모양. 나는 좀 더 설명해 보라는 듯 턱짓했다.
“계륵이라 여겨 버렸던 이 구역이 다시 탐이 났나 봐요. 이게 다 철전을 마구 긁어모은 대장의 구걸 수완 덕분이죠.”
돈 좀 벌었단 얘기를 들은 모양. 구역을 먹거나 우리 패거리를 두들겨 패서 수금이라도 걷을 목적이었나 보다.
실로 상도의가 없는 새끼들이군. 뜯어먹을 게 없어 같은 거지를 뜯어먹다니.
“엄백이라, 웃긴 새끼일세.”
아까 튀었던 놈들, 나보고 두고 보자 그랬었지.
그런 말 하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다지만, 좀 귀찮아질 여지는 있어 보였다.
“근처에서 가장 세력이 큰 거지 패거리예요. 머릿수도 많고 최근엔 또 흑도(黑道)방파와도 선이 닿은 듯했어요.”
흑도라 함은 분명 살인이나 도둑질, 약탈과 패악질로 먹고사는 깡패 같은 집단.
그런 곳과 손을 잡았다니. 엄백이란 놈은 단순한 가출팸을 넘어 본격적인 조직범죄를 꿈꾸는 모양이다.
“너 이런 쪽 정보, 제법 잘 안다?”
“…어쩌다 주워들은 게 많아서요.”
그게 어쩌다 주워들을 수 있는 거였나.
나는 쓰러진 애들을 쿡쿡 찔러대고 있는 오칠이에게 물었다.
“야, 넌 왜 이런 거 모르냐?”
“전 그냥 먹고살기도 바빴습니다, 대장.”
“그래, 그랬겠지…….”
조직은 무력만으로는 꾸려 나갈 수 없다. 이 바닥 생리를 잘 알며 머리가 빠릿하게 돌아가는 놈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홍이란 녀석은 이상할 정도로 아는 게 많은 듯했다.
뭔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느낌, 물론 고아 중에 그런 게 없는 애가 어딨겠냐만.
“일홍, 너도 와서 갈저탕 한 그릇 해라.”
나는 꼬맹이들이 어지럽혀진 집구석을 뒤져 허름한 냄비를 꺼내는 걸 보며 그렇게 말했다.
“엑, 그거 그냥 쓴맛나는 풀죽 아니에요?”
“단무진표 갈저탕은 달라.”
나는 푸줏간에서 사 온 큼직한 고기 한 덩이를 가리켰다.
때마침 불을 피운 냄비에다 고기를 풍덩 담그는 한 꼬마.
“헉, 그걸 먼저 말씀하시지. 잘 먹겠습니다!”
일홍은 먹이를 발견한 강아지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뛰어갔다.
잠시 후 배급이 시작되자 누가 뺏을세라 제 몫의 고기 조각을 건져내는 모습.
뜨거울 텐데도 왕창 입에 넣은 뒤 감격한 얼굴로 우물거렸다.
“흑흑, 너흐 마히허효.”
입천장이 다 데인 모양.
뭔가 재밌는 녀석이다.
무진 패거리에 쓸 만한 식구가 하나 추가되는 날이었다.
***
오늘도 어김없이 시끌벅적한 남문 저잣거리.
나는 지나가던 비단옷 상인을 가리켰다.
“일홍, 저놈은 어때?”
“허리띠의 표식을 보세요. 만금전장 사람이에요.”
고리대금업 놈들은 위험하지. 나도 채권추심을 해봐서 안다. 체면이고 뭐고 없는 놈들이다.
나는 납득한 얼굴로 그 옆의 사람을 가리켰다.
“저 배불뚝이는?”
“관아를 드나드는 포쾌(捕快)예요. 뒤탈이 날 수 있어요.”
관의 인간에게 원한을 사면 골치 아프다. 특히 추포(追捕) 권한이 있으면 더더욱.
예전이라면 멋모르고 이 지뢰를 밟아 곤욕을 겪었겠지.
하지만 우리 조직엔 이제 지낭(智囊)이 있었다.
“저기의 덥수룩한 놈은?”
“낭인이에요. 칼은 없지만 주먹의 굳은살을 보니 권사네요.”
낭인(浪人). 이 시대의 해결사들.
더러운 꼴, 험한 꼴, 산전수전 다 겪은 놈들이라 구걸에도 눈 하나 꿈쩍 않겠지.
만만한 놈들을 고를 방법이 생겼는데 굳이 들이댈 이유가 없다.
“저 옆에 있는 멀대는 어때? 털어도 될까?”
“오가장의 장사치네요. 만만하고 탈 없을 것 같아요. 최근엔 사향(麝香) 밀수로 주머니도 제법 두둑할걸요?”
좋아, 많이 뜯어낼 수 있겠군.
근데 얘는 어떻게 밀수범들 뒷사정까지 훤히 꿰고 있는 걸까.
아마 물어봐도 입을 꾹 닫겠지. 내가 천살성 얘기를 타인에게 꺼낼 수 없듯이.
그렇다면 잠자코 써먹으면 될 일이다.
나는 먹잇감을 포착하고 슬금슬금 모여든 애들을 향해 손짓했다.
“가자, 촉법소년들아.”
오늘도 베풀 줄 모르는 배부른 돼지들을 턴다.
그저 하루 더 살아남기 위해.
“촉법이 뭐야?”
“몰라, 대장 맨날 이상한 소리 하잖아.”
“돈이나 벌자고.”
못 알아들을 소리 한다고 구시렁대면서 거리를 좁히는 꼬맹이들.
앵벌이의 시간이었다.
“어르시이인-!”
***
졸부의 곳간을 털어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는 이를 의적(義賊)이라 한다.
그리고 나도 살찐 부호들을 털어, 아사 직전의 고아들을 구해냈으니 어느 의미로는 비슷한 부류가 아닐까.
공리주의적 부의 재분배. 일종의 무림 활빈당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군.
“대장, 이거 봐요! 은전이에요, 은전!”
다사다난했던 구걸 행보.
일홍이가 바가지에서 유난히 반짝거리는 은빛 동전 한 닢을 집어 들었다.
‘홍락제’라는 황제가 발행한 은전(銀錢)이었다.
공교육으로 중국 역사를 어느 정도 꿰고 있는 나로서는 ‘누구세요?’란 말이 절로 나오는 인물이었지만.
내공이나 검기 같은 것이 존재하고 흉성을 품는 사람도 있으니 모르는 황제쯤은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너희들…… 이거 문제없는 돈 맞지?”
밀수범을 털고 제법 큰 돈을 얻었으니, 꿀꿀이 죽 말고 제대로 된 걸 먹고자 찾아온 만둣집.
털보 주인장이 미심쩍은 눈으로 꾀죄죄한 우리 거지들을 한 차례 훑었다.
“정당하게 번 돈이에요”
적어도 누군가의 눈물이나, 피가 묻어 있진 않다.
다른 거지들은 배수질(소매치기)은 기본에 강도질도 서슴없이 한다던데.
우리 패거리에선 그런 일은 일절 금지였다.
안 그래도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게 고아거든. 한번 일탈하기 시작하면 인생 꼬라박는 거 순식간이다.
“만두 나왔다!”
“와아!”
찜틀에 얹혀 허연 김을 모락모락 내뿜고 있는 촉촉한 만두들.
밀떡에 가까운 만터우(饅頭)도 아니고 육즙이 꽉 찬 고기만두였다.
입을 헤 벌린 채 침을 질질 흘리는 꼬맹이들.
그런데 이 좋은 순간에, 고춧가루를 뿌리려 쳐들어오는 놈들이 있었다.
“대자아앙-!”
숨을 헐떡이는 목소리.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왔다.
등 뒤에 성난 엄백 패거리를 열댓 명씩 달고 오는 오칠이의 모습이 보였다.
“저깄다! 저 희멀건 새끼가 단무진이야!”
아는 녀석이었다. 저번에 내 반반한 면상을 묵사발 내겠다고 덤볐다가 자기 얼굴이 박살 난 거지 놈이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하필 만두가 나오자마자 시비질이라니.
“어떡할 거야? 안 사 먹을 거면 이거 치우고.”
털보 주인장이 엮이기 싫다는 얼굴로 말해왔다.
“걱정 마시오, 이 만두가 식기 전에 돌아올 테니.”
나는 우두둑. 몸을 풀고 호기롭게 전면에 나섰다.
일전에 혼자서 열 명을 때려눕혔으니, 열댓 명도 문제없음이다.
“뭐 얼마 안 되네요, 다 때려눕히죠!”
내 생각에 동의하는지 기세등등하게 나서는 일홍과 아이들.
특히 일홍은 멍석말이의 앙금이 남았는지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모퉁이를 돌아 또 한차례 쏟아지는 엄백 패거리.
“내가 말했었지! 두고 보자고!”
적들의 머릿수가 순식간에 서른으로 불어났다. 엄백이란 왕초놈이 아주 작정하고 패거리를 박박 긁어온 모양.
그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일홍이 말없이 내 팔을 툭툭 건드려 왔다.
“튈까요?”
좀전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금방이라도 탈주할 듯 몸을 이미 반쯤 비튼 일홍.
하지만 어디로 튄단 말인가. 여기서 물러나면 이제 구걸할 곳도 없다.
“한꺼번에 와라, 만두 식는다.”
고로 두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덤비라고 외쳤다.
구걸권(求乞權)을 걸고 벌어지는 두 집단의 나름 치열한 격돌.
남쪽 저잣거리의 주인을 가를 시간이 도래했다.
“와아!”
***
지구에선 아무리 무도를 수련했다고 한들, 같은 인간 두셋도 당해내기 힘들다.
하지만 기(氣)와 무공, 천살성 같은 특수한 체질이 실존하는 이곳에선 어떨까?
퍽!
“악!”
짝!
“끅!”
주먹이 뻗는 곳마다 터져 나오는 파열음과 신음.
전장에선 선봉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나는 적들 사이로 몸을 던져 주먹과 발을 쉴 새 없이 사방으로 뿌려댔다.
그동안 무공과 격리된 삶을 살아왔음에도, 때가 되자 사람은 이렇게 패는 거라는 듯 저절로 움직이는 신체.
피할 궤적이 보이고 때려야 할 곳으로 주먹이 움직이는, 실로 기이한 감각이었다.
“이런 씨발!”
“누가 저 애새끼 좀 족쳐봐!”
뻗어오는 적의 주먹을 휘감아 쳐내고 반격 삼아 가슴팍을 퍽! 때려줬다.
팔꿈치와 무릎을 잡아 비틀고 오금을 탁 건드리자 ‘악!’ 소리를 내며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
복부를 걷어차여 등이 굽어진 놈을 뜀틀처럼 타고 넘었다. 양발을 힘차게 뻗어 다가오던 두 놈의 가슴팍을 ‘빡’ 후려쳐줬다.
‘뭔가 보인다.’
시야에 붉은 선이 어지럽게 그어졌다. 적들이 잔뜩 품은 살기(殺氣). 그 벌겋게 일렁이는 것들이 어디로 뻗어 나갈지 전부 보였다.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감각. 아마도 내 안의 천살성과 연관이 있으리라.
“한꺼번에 덮치라고!”
물론 그러한 궤적을 읽어도 주먹이 사방에서 빗발치니 처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발생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급류에 휩쓸려 부딪혔던 돌부리가, 배를 쑤시고 들어왔던 칼끝이 이거보다 훨씬 더 아팠다.
“간지럽다 새끼들아-!”
쩌렁쩌렁한 고함. 앞에서 달려오던 놈을 앞발로 힘껏 걷어찼다.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났다.
“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아가 자기 패거리의 진형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모습.
팔다리가 엉켜 쓰러진 적들 사이에서 믿을 수 없단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뭔 애새끼가 힘이……!”
“맷집은 또 왜 이리 단단해!”
싸움이란 기세다.
나는 흐름을 타고 기세를 실어 놈들을 하나하나 때려눕혀 나갔다. 퍽퍽툭툭! 곳곳에서 비명과 타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내가 전장을 종횡무진 휘젓자, 놈들의 눈에서 점차 투기가 옅어지고 공포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빡!
“끅!”
등을 노리고 달려들던 놈의 턱을 걷어차 줬다. 강제로 입이 딱! 닫히고 눈을 까뒤집은 채 쓰러지는 녀석.
등 뒤에서 시뻘건 살의가 일렁이는데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등에도 눈이 달린 듯한 그 장면에 겁을 먹고 덤벼들지 못하는 엄백 패거리들.
“…괴물 같은 새끼!”
슬금슬금 물러나는 거지들.
급기야 몇몇 놈은 승산이 없다고 여겼는지 황급히 탈주하는 모습까지 보여줬다.
“푸하하! 엄백 새끼들, 허겁지겁 도망치는 꼴 봐라!”
“역시 무진 대장이야!”
승기가 완전히 기우는 듯한 광경.
우리 쪽 꼬맹이들이 퉁퉁 부은 얼굴로 환호성을 질러왔다.
반면 한 놈에게 기가 완전히 눌려 버린 엄백 쪽 패거리들은 질린 얼굴로 비난을 쏟아냈다.
“무공! 이런 건 분명 무공이잖아!”
“애들 싸움에 무림인이 튀어나와?”
“부끄럽지도 않냐! 이 비겁한 새끼들!”
패배한 개들이 물러나면서 왈왈 짖어댔다. 저게 세 배가 넘는 숫자로 덤볐던 놈들이 할 말이란 말인가? 추하기 그지없군.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벅벅 후벼파며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싸움에 비겁이 어딨나. 알보병 앞에 중기병이 튀어나오는 게 전장이다!”
전쟁은 원래 불합리의 극치라는 말씀. 가끔 애들 싸움에 천살성 튀어나오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나는 그 냉엄한 현실을 놈들에게 설파해줬다.
그렇게 승리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우락부락한 그림자들.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어 그림자의 주인공들을 살펴봤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저 꼴을 보아…….”
“네가 단무진이라는 녀석이렷다?”
나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어른들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수련으로 다져진 몸. 척 봐도 ‘나 무인이오’ 하는 부류들.
근처 표국에서 나온 사람들인가? 하지만 나를 찾을 이유가 없을 텐데.
“요즘 상인들 사이에서 네 얘기가 자주 나와.”
“아주 악질적인 놈이라던데?”
일부 상인들 사이에서 문제아로 찍힌 듯한 내 이름. 그래도 그렇지, 진짜배기 무인이 찾아올 일인가 이게?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군.
“갈(喝)! 어찌 무림인이 애들 싸움에 관여하는가!”
우리 꼬맹이들은 똘똘 뭉쳐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인들을 노려봤다. 번듯한 직장도 가진 놈들이 폭력 사주를 받고 애들을 패러 와?
본인들도 쪽팔리는 건 아는지 내 일갈에 뒷머리를 벅벅 긁어대는 모습.
“야, 근데 네가 아까 말하지 않았냐?”
“전장은 불공평한 거라며? 그럼 애들 싸움에 무림인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
…염병, 내가 내뱉은 말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대장, 이번엔 진짜 튀죠.”
무림에선 최약체로 여겨지는 삼류무인이라 할지라도 어린아이에겐 천재지변이나 다름없는 존재.
“그러니까 어디로 인마.”
나는 탈주 닌자 녀석의 손길을 뿌리치고 무인들 앞에 섰다.
어딜 가든 굴러온 돌을 반길 장소가 어디 있을까.
“너무 원망 마라, 그 염소수염 상인한텐 빚진 게 있어서…….”
뒤에서 저들을 부린 존재를 알게 됐다.
그 지독한 염소수염 새끼, 애한테 철전 몇 닢 뿌린 게 분해서 삼류무인까지 고용하다니.
“이 추악한 어른 놈들.”
나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하는 무인들.
“…크흠, 뭐 추악할 것까지야.”
그런데 아까 다구리를 너무 처맞아서 그런지, 예의 그 시뻘건 안개가 또 몸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준 수상한 기운.
“덤벼, 삼류!”
가슴어림으로 치켜든 두 주먹. 나는 그럴듯한 기수식을 취하며 덤비라고 외쳤다.
아무래도 만두는 한참 식은 채로 먹게 될 모양이다.
***
북경 은성상단(殷盛商團)
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천하 십대 상단을 논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이름.
드넓은 중원 곳곳에 지부와 소속 상인을 두었으며 상계(商界)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해 온 거목 같은 상단이었다.
하지만 길어도 권불백년(權不百年)이라고 했던가.
모종의 사건으로 상주(商主) 은진청이 돌연사한 이후부터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산하로 둔 은성표국의 연달은 표행 실패, 거기에 상단이 거금을 들여 밀어붙인 양잠(養蠶) 사업의 무산 위기까지.
은성상단은 늪에 잠기듯 서서히 침몰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막고자 발버둥을 치는 이도 있었으니.
아버지 은진청으로부터 물려받은 상재(商才), 그리고 빼어난 미모 덕에 북경 삼화(三花)로 꼽히는 여인.
“그러니까 지금…….”
상주 은화란은 눈앞의 삼급 표사들을 몹시 어이없단 눈으로 흘기며 말했다.
“애한테 얻어맞고 돌아왔다는 거죠?”
4화 아이와 노인을 조심해야
은성표국의 표사가 웬 꼬맹이한테 쥐어 터졌다는 괴소문.
“크흠.”
“상주님, 그것이…….”
은화란의 추궁에 표사들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농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진짜인 모양이다.
상주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은화란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큰 어른이, 그것도 엄격한 입단 시험을 통과한 삼급 표사가.
고작 어린애한테?
“그 꼬마애, 혹시 허리에 매듭이 있던가요?”
개방의 거지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행색이 초라해도 무공을 배운 이들이니.
다만 그들은 모종의 사건으로 황도 출입이 금지되었을 것인데.
“아뇨, 무림인은 아니었습니다.”
“내력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날짐승처럼 싸우더군요.”
두 표사, 양조와 양위가 주먹 모양으로 부어오른 뺨과, 걷어차인 엉덩이를 매만지며 그렇게 말했다.
무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양민이라는 증언.
“그럼 왜 맞고 오신 거죠……?”
은화란의 그 표정은 마치 ‘너희들은 무림인이잖아’라고 따져 묻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없는지 그녀의 날 선 도끼눈을 슬며시 피하는 양조와 양위.
그 모습에 상주 은화란은 쥐고 있던 부채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하아, 안 그래도 비단 사업이 좌초 중이라 골치 아파 죽겠는데.”
창문 너머 뽕나무밭을 바라보며 얕은 탄식을 흘리는 그녀.
미인의 한숨은 나라를 기울게 한다던가. 표사들은 순간 시름에 잠긴 은화란도 참으로 아름답단 생각을 떠올렸다.
본인들이 처한 상황도 잠시 잊고서 말이다.
“뭘 실실 웃나요? 둘 다 감봉이에요.”
“헉.”
“그럴 수가.”
헤실거리던 표사들의 얼굴이 금세 흙빛으로 변했다.
안 그래도 짜디짠 급료인데, 한동안 그것마저 반 토막 난다니.
“상주님, 집에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없으시잖아요. 근신 추가예요.”
“크윽.”
통하지 않았다. 다 꿰고 있을 줄이야.
양조와 양위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궜다.
“거지 상대로 그런 추태를 부려 놓고……. 이만하면 다행인 줄 아세요.”
사실 감봉으로 끝날 일은 아니었다. 표국의 명예를 실추시켰으니 본격적인 징계가 있어야 함이 옳지만.
최근 표행이 없어 벌이가 부족해지자 벌인 일이 아닌가. 며칠 쉬게 만드는 선에서 멈추기로 했다.
“끌끌, 재밌는 얘기가 들리는구나.”
그런데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돌연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불쑥 솟더니, 흥미로운 얼굴로 탁주가 찰랑이는 호리병을 들이켜는 초로의 노인.
“웬 거지 꼬맹이한테 처맞고 돌아왔다고?”
낡고 헤진 도포(道袍)에 코를 찌르는 술 지린내. 얼핏 흔한 주정뱅이로 보였으나, 그의 등장에 모두가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 노야를 뵙습니다.”
전대 상주 은진청이 영문 모를 돌연사를 당하자, 어느 날 상단을 불현듯 찾아온 정체불명의 도인(道人).
그는 신선을 따라 한답시고 어중간하게 기른 수염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도를 닦는 사람은 화기(火氣)가 닿은 음식을 피해야 한다던데, 오늘 중식으로 나온 동파육을 잡수신 건지 입가에 번들거리는 돼지기름.
“한데 노야, 여긴 어쩐 일로?”
은화란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엉터리 말코 도사 같지만, 실은 저래 봬도 검기(劍氣)를 발산할 줄 아는 고수.
상단이 위기에 처하자, 돌아가신 아버지와 약조한 것이 있다며 조력을 자청해 온 고마운 의인(義人)이셨다.
“이 늙은이는 됐고, 아까 그놈 얘기나 더 해보아라.”
그리고 그는 표사들을 때려눕힌 꼬마 거지에게 무척 흥미를 느낀 듯했다.
손을 휘적거리며 이야기의 속행을 요구하는 황 노야.
“그래요, 마저 해보세요.”
은화란 또한 궁금했는지 양손에 턱을 괸 채 그러라고 하였다.
이에 저잣거리에서 벌어졌던 싸움을 우물쭈물 늘어놓는 두 표사.
“보통 놈이 아니었습니다.”
“쥐방울만 한 놈이 엄청난 괴력을 휘두르지 뭡니까?”
믿기 힘들지만 성난 황소와 드잡이질하는 줄 알았단다. 당시의 상황을 역동적인 손짓, 발짓으로 묘사하는 양조와 양위였다.
아무리 처맞아도 강시처럼 벌떡 일어서서 다시 덤벼들던 거지 꼬맹이.
그래도 처음엔 무공을 배웠으니 안 맞고 때리는 식으로 우위를 점했는데, 어느 순간 살기가 폭사 되더니 놈의 움직임이 달라졌단다.
“그때부턴 아주 광견처럼 달려들더군요.”
“어찌나 식겁했는지……. 주먹질도 갑자기 매서워져 피하는 게 무척 고역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두 대씩 타격을 허용하며 전황이 기울기 시작하더니, 마지막에 가서 나가떨어진 것은 자신들이 됐다며 황당함을 토로하는 표사들이었다.
“혹시 외공(外功)을 단련한 거 아닐까요?”
상주의 물음에 그건 아니라는 듯 표사들이 동시에 고개를 흔들었다.
“단련의 흔적이 없는 왜소한 체격이었습니다, 상주님.”
외공은 수련 특성상 겉으로 티가 나기 마련.
하지만 녀석은 피부도 말랑하고, 고생이라곤 눈곱만큼도 안 해 본 귀공자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한껏 방심했었던 양조와 양위.
“끄응.”
맞은 곳이 아직도 시큰거리는지 표사들은 연신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얼씨구?”
한데 상주실의 주전부리를 말도 없이 주섬주섬 집어 먹던 황 노야가 돌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러더니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양조의 주둥이를 콱 움켜잡는 황 노야.
“……읍, 노야?”
“이놈아, 그놈 무공 안 배웠다며?”
“예, 진짭니다.”
두 표사는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아무래도 거짓은 아닌 모양.
“혹시 녀석을 상대할 때, 팔벽권(八劈拳)을 펼친 것이냐?”
“예? 노야께서 그걸 어떻게 아신…….”
표사가 의아한 얼굴로 대답했다.
어떻게 알긴.
“너희들 뺨에 난 손자국. 그거 팔벽권의 흔적이거든.”
“……?!”
구부렸던 무릎을 피며 등 근육을 당겨 후려치는 웅요(熊腰)의 초식. 어설프고 서투르지만 볼따구에 난 건 분명 팔벽권의 종적이었다.
예전에 은진청이 수련하는 걸 봤었으니, 황 노야는 제법 확신했다.
“……허참, 이놈 봐라? 그 짧은 시간에 무공을 훔쳐 냈단 말이더냐.”
그는 상흔을 살피다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주먹질이 거듭될수록 흉내를 넘어 어렴풋이 묘리(妙理)까지 답습한 게 보였다.
팔벽권은 표사들이 배우는 기초적인 무공이기는 하나, 그래도 문외한이 쉽게 따라 할 만한 것은 아닐 텐데.
하물며 저잣거리를 전전하는 거지 꼬맹이가 말이지.
“끌끌…….”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손과 발을 섞으며, 그리고 온몸으로 두들겨 맞으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모양.
범상치 않은 무재(武才)가 느껴졌다. 가끔 이렇게 타고나는 놈들이 있지.
“어딨냐 그놈.”
황 노야는 씨익 웃으며 꼬맹이의 소재지를 캐물었다.
그러자 남문 근처에 둥지를 틀었을 거라며, 상인들에게 들었던 정보를 전해 주는 표사들.
“황 노야, 그냥 저희가 사람을 보내 데려올 테니……. 앗.”
이만한 일에 저만한 고수가 움직이는 건 아니다 싶어 수하를 부르려던 은화란.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 황 노야는 이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도인.
“아버지는 대체 어디서 저런 분과 인연을…….”
자리에 다시 앉은 은화란은 머쓱함에 볼만 긁어 댔다.
***
단무진은 표사들이 흘리고 간 전낭 두 개를 움켜쥔 채 물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전낭입니다!”
승자는 전리품을 취한다. 이는 당연한 권리이자 무림의 상식.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고기만두를 먹을 수 있습니다!”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꼬마들이 헤실헤실 웃으며 외쳤다.
먼발치에서 침만 삼키면서 구경해야 했으며, 어떤 패거리의 방해로 끝내 먹지 못한 고기만두가 생각난 모양.
“갈 - !”
하지만 삼류무인을 둘이나 두들겨 눕히시고 걸신(乞神)으로 등극한 단무진은 어림도 없다는 듯 외쳤다.
“꿈이 작다! 무릇 사내라면 야망을 크게 가져야 하는 법! 오늘은 인당 만두 하나에……. 동파육까지 먹을 것이다!”
“우와아 - !”
달짝지근한 양념에 오랫동안 푹 고아서, 입에 넣자마자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린다는 그 전설의 동파육.
이제껏 누려 본 적 없는 극상의 사치였다. 당연히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
“단무진! 단무진! 단무진!”
단무진 패거리는 벅찬 얼굴로 환호했다. 잔뜩 달아올라 대장의 이름을 쉴 새 없이 연호하였다.
단무진이 한마디 할 때마다 잔칫날처럼 들썩이는 거지굴.
“와, 무슨…….”
탈주했다가 뒤늦게 합류한 일홍은 그 떠들썩한 광경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보통 거지 패거리는 이렇지 않다.
그냥 힘센 왕초가 자신보다 약한 애들을 착취하는 구조지, 이렇게 얻은 것들을 공평하게 나눠 주지도 않았다.
“좀 이상한 사람이네요.”
그것이 단무진을 향한 일홍의 짤막한 평가.
보통 자그만 권력이라도 쥐면 그걸 휘두르기 바쁜 게 사람 아니던가.
그로 인해 큰 횡액(橫厄)을 당했던 일홍은 단무진이 괴상한 별종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뭐라 했더라.”
왜 가진 것도 없는 고아끼리 물어뜯냐며, 그럴 바엔 힘을 합쳐 부자를 털어먹자고 외치던 단무진.
진정한 낙수효과는 자본가의 배를 째는 데서 시작된다나 뭐라나.
영문 모를 소리였다. 다만 사회의 하류층끼리 뭉치자는 이야기엔 일홍도 제법 찬동하는 바였다.
일전에 일홍이 속했던 곳도 그런 사상을 기초로 설립된 곳이니.
“아버지가 말씀해 주신 초대 문주님이 저런 느낌이셨으려나.”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일홍.
아무튼 이러한 기행 덕분인지 아이들의 충성심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으며.
여기로 오면 배곯지 않는단 소문이 퍼졌는지 최근 입단 희망자도 퍽 늘어난 상황이었다.
“가자! 객잔 문을 박차고 당당하게 요리를 주문하는 거다!”
어느덧 전낭의 무게만큼 자신감도 한껏 불은 단무진.
원래 사람은 지갑이 묵직할수록 어깨가 펴지고 목청도 커지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 있게 객잔을 향해 진격을 외쳐 댔다.
“대장! 근데 객잔주가 쫓아내지 않을까?”
가게에 더러운 거지가 오는 것을 반길 객주가 어딨겠냐만.
“한 놈이 가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열 놈이나 몰려가면? 그때도 감히 몽둥이를 들 수 있을까?”
숫자는 곧 힘이자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
평소 거지를 더럽다며 내쫓던 가게 주인들도 이번엔 순순히 요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 뭉치면 우린 강해!”
“모두 어깨 걸어!”
“누가 우리를 매질할쏘냐!”
단무진의 말을 따르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걸 학습한 꼬맹이들.
녀석들은 기쁜 함성을 지르며 벌 떼처럼 우르르 일어섰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멀건 피죽 대신 객잔에서 제대로 된 동파육을 먹는 날이 올 줄.
“……이게 얼마 만의 진미(珍味)야.”
숙수가 정성껏 차려 주는 요리.
일홍은 어느새 그들과 같이 살짝 들떠 버린 자신을 발견했다.
단무진의 말과 행동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는 듯했다. 거기에 더불어 삼류 무인 둘을 쓰러트린 무력까지 확인됐으니.
“머무르면서 좀 친해져 둘까?”
어중간한 곳에 빌붙어 있을 바엔, 저 인간 옆에 붙어 있는 게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잘하면 앞으로의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일홍의 눈매가 고양이처럼 샐쭉 휘어졌다.
“안 오고 뭐 해?”
그런데 생각에 잠긴 일홍의 어깨를 턱 내리치는 단무진.
“응핫.”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기묘한 소리를 내고 만 일홍이었다.
“이상한 소리 내지 말고 따라와. 너도 싸웠으니 먹을 자격 있어.”
그러나 눈치채지 못한 듯,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는 얼굴로 아이들과 함께 객잔으로 향하는 단무진.
“……들키는 줄 알았네.”
목소리가 개미처럼 기어들어 갔다.
십년감수한 느낌. 단무진의 무덤덤함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일홍이었다.
***
손자병법 모공(謀攻)편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적에 대한 적개심을 구축하고, 탈취한 재물을 포상으로 지급하라.
그리하면 군의 전의(戰意)가 하늘을 찌를 것이라고.
“고기만두! 동파육!”
“흩어지면 약하지만, 뭉치면 강하다!”
“와아!”
그리고 병법서의 내용은 실로 사실이었다.
사기 백배한 함성을 내지르며 골목길을 씩씩하게 나아가는 꼬맹이들.
여러모로 질풍노도의 보육원 시절이 생각나는 광경이었다.
그때도 이렇게 고아 건드리는 놈들과 한바탕 싸운 뒤, 매점에 맛있는 걸 사 먹으러 갔었지.
“대장, 전낭에 얼마 들었습니까?”
옆으로 들러붙어 눈을 반짝이며 묻는 오칠이.
“철전 서른. 은전 넷.”
“이야, 표국에 취직하면 돈을 많이 벌긴 하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이만큼 모으려면 몇 주에 걸쳐 필사적으로 구걸을 해야 하는데.
저들에겐 이게 평범한 주급이겠지. 이것이 삼류긴 해도 기(氣)의 존재를 자각하고 무공을 배운 이들의 몸값인가.
구걸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간극. 역시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벌어도 이긴 건 결국 대장이었네요.”
“글쎄, 정식으로 무공을 수련한 놈들이라 그런지, 다르긴 하더라.”
하마터면 질 뻔했었다.
힘 좋고 몸이 튼튼하면 뭐 하나. 요리조리 샥샥 피해 대서 제대로 때릴 수가 없던데.
그런데 계속 달려들어, 숨넘어가기 직전까지 처맞다 보니 내 안의 천살성이 각성했고, 이후로는 상황이 반전됐다.
이성을 반쯤 집어삼킨 살심. 손끝에 파괴적인 기운이 서리더니, 주먹 뻗는 속도가 곱절로 빨라졌다.
그러더니 무질서하던 주먹질에도 체계적인 형의(形意)와 묘리가 실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흠씬 두들겨 팼던 그 표사들의 몸짓처럼 말이다.
츠츠츠-
그리고 제 말 하니까 또 꾸물꾸물 기어 나오는 천살성.
놈은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꼬마들을 매달고 가는 나를 쿡쿡 찔러 댔다.
기껏 살려 놨더니 골목대장 노릇이나 하고 있냐며 분노하는 듯한 느낌.
‘알았으니 좀 들어가라.’
표사들을 이겨 다행이긴 했지만, 이성이 점차 살심으로 잠식당하는 그 느낌은 아직도 소름이었다.
그 부작용인지 아직도 가끔 욱할 때가 있는 걸 보면, 슬슬 위험하단 생각이 들었다.
쿡쿡쿡!
그런데 돌연 경기를 일으키더니, 어딘가를 다급하게 가리키는 붉은 기운.
“대장, 웬 늙은이가 접근해 옵니다만.”
오칠이가 가리킨 맞은편 골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게 보였다.
찰박. 찰박.
거지 못지않게 허름한 옷차림. 술이 들었는지 허리춤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호리병.
우리가 둥지를 튼 이곳은 더럽고 오물 냄새가 심해 평소 아무도 접근하지 않는 곳일 텐데.
“대장, 저딴 노인네는 그냥 저희 선에서 쫓아내겠습니다.”
최근의 연승으로 자신감을 얻은 오칠이가 기세 좋게 나서려고 했지만, 나는 일단 멈춰 세워 봤다.
“겉모습만 보고 방심하지 마라. 너의 나쁜 버릇이다.”
그 뭐냐. 무협지 보면 노인과 아이를 가장 조심하라 그러지 않던가.
혹시 모르니 힘을 쓰기 전에 주둥이로 내쫓아봐야겠다.
“노인네, 길을 잘못 든 거 같소. 이만 돌아가시오.”
나는 나가라는 듯 골목 밖으로 손을 팔랑거렸다.
하지만 그런 내 축객령에도 오히려 히죽 웃으며 수염을 쓸어내리는 노인.
“끌끌, 표사들 말대로 상판대기가 곱긴 하군. 네가 무진이라는 녀석이렷다?”
이런 염병, 이 노인네 뭔데 내 이름을 알지.
아무래도 그 표사들과 한패인 모양이다.
“아그들아, 포위섬멸진!”
5화 천둥벌거숭이
단무진이라는 녀석의 한마디에 꼬맹이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포위섬멸진이란 거창한 이름을 대길래 뭔가 했더니, 그냥 적을 둥글게 둘러싸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는 노인.
“무진 대장을 지키자!”
“오오!”
일련의 승리로 자신감이 붙은 꼬마들이 투지를 다져 왔다.
잘 먹이고 잘 재웠는지, 거지치고는 살집도 제법 있고 눈에도 생기가 돌았다.
부하의 상태를 보면 수장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상인들의 악담과는 다르게 단무진이란 녀석은 썩 괜찮은 놈인 듯했다.
“긴말 안 하오. 다치기 전에 그냥 가시오.”
겁을 줘서 자신을 쫓아낼 셈인지 무게를 잔뜩 잡은 채 아이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단무진.
실제로 보니 들었던 것보다 더 맹랑한 꼬마였다.
“흘흘, 정말로 무공을 익히진 않았군.”
태양혈이 밋밋했다. 내공도 감지되지 않았으며 우락부락한 외공의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힘이 황소처럼 세다고?
“이놈아, 맥 한 번만 짚게 해다오.”
“싫소, 노인네.”
참고로 부탁이 아니었다.
노인은 앞으로 슥 파고들어 손을 몇 번 휘저었다. 그러자 ‘어어?’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어 대는 아이들.
야심 찬 포위섬멸진이 허무하게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그 기기묘묘(奇奇妙妙)한 보법과 손짓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고, 고수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진짜배기 강호인의 등장. 단무진 패거리는 곧바로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젠장, 삼십육계!”
재빨리 뭐라 외치는 단무진. 아이들은 미리 약속해 둔 듯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나 경공을 익힌 무인 상대로는 아무 의미 없는 짓.
노인의 발끝이 지면을 박찼다. 단무진의 어깻죽지를 향해 번개처럼 출수 되는 오른손.
탁!
그런데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애들 상대라 아무리 힘을 뺐다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손길을 쳐 낸 단무진.
“……방금, 어떻게 한 것이냐?”
노인은 점짓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꼬마 놈도 무의식적에 한 짓이었는지 눈을 휘둥그레 뜬 모습.
“위험이 느껴지면 저도 모르게 몸이…… 아니, 노인네 정체가 뭐요!”
순식간에 다가와 날벼락처럼 뻗어온 손길에 소름이라도 돋은 것일까.
기겁한 녀석은 노인이 잠시 생각에 빠진 틈을 타 재차 몸을 내뺐다.
“허.”
사람들이 몰린 대로를 향해 필사적으로 내달리는 모습.
어린 것이 참 기운도 좋지. 노인은 보법을 밟아 순식간에 놈의 코앞으로 쇄도했다.
도망치던 방향에서 노인이 귀신처럼 솟자 새된 소리를 터트리는 단무진.
“워메 시팔!”
욕이 이상하게 구수하다 싶었지만, 아무튼 노인은 손끝에 기를 담아 마혈(痲穴)과 아혈(啞穴)을 두들겼다.
투둑!
점혈은 난생처음인지,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기괴한 경험에 눈알이 팽팽하게 돌아가는 녀석.
노인은 근골을 살피기 위해 경문혈(京門穴)부터 시작해서 가슴과 어깨, 사타구니와 팔다리를 세심하게 주물럭거려 봤다.
“……읍읍!”
그러한 손길에 뭐라 외치고 싶은지 단무진이라는 꼬마의 주둥이가 달싹거렸다.
상인들이 이르길 공갈(恐喝)이 주특기라던가. 입을 봉해 놓길 잘했군.
“그러니 말로 할 때 들을 것이지. 끌끌.”
그럼 손목 한번 짚고 끝났을 것인데.
혀를 찬 노인은 단무진의 맥을 짚고 내기를 흘려보냈다. 타인의 기가 기혈을 타고 흐르는 생소한 감각에 움찔 몸서리치는 녀석.
한데 독맥(督脈)을 따라 백회혈(百會穴)에 도달하고 내부를 들여다본 순간, 노인은 전신의 털이 바늘처럼 곤두서는 걸 느꼈다.
‘……!’
텅 비어 있어야 할 상단전에 소름 돋는 뭔가가 있었다.
시뻘건 피를 뚝뚝 흘리며 그를 마주 노려보고 있는 수십 쌍의 눈동자들.
녀석의 몸속에선 온 세상을 부수고 찢어발길 살심(殺心)의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피가 강을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뒤덮인 지옥도. 그곳에 붙잡혀 피눈물을 흘리며 끊임없이 절규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원귀들.
그리고 그들을 속박하고 있던 끔찍한 ‘무언가’가 침입자의 존재를 인식하려는 찰나.
“……헙!”
노인은 황급히 단무진에게서 손을 뗐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 눈 한번 깜빡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노인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끔찍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술에서 확 깬 노인. 아니, 자칭 도인은 휘몰아치던 살심의 정체를 간파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건 무골(武骨)을 타고났다거나 무학에 재능이 있다없다의 수준이 아니었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자리. 그중 가장 섬뜩하게 빛난다는 붉은 흉성(凶星).
“천살(天殺)……!”
혹자가 말하길, 하늘이 노(怒)했을 때 나타나는 천재지변(天災地變) 같은 존재라 하였다.
백 년 전, 중원에 등장하여 혈겁을 일으킨 그 존재가 하필 자신의 눈앞에 버젓이 나타나다니.
“너, 너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냐?”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천살의 업을 부여받은 이들은 보통 10세를 전후로 이성을 차츰 잃다가 완전한 살인귀로 거듭나곤 했다.
하지만 이놈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였다.
몸 안에 그런 끔찍한 것을 품고도 저리 또렷하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니.
“거 싯팔, 남의 몸 좀 그만 더듬으시오. 이 변태 늙은이가.”
아니, 완전 정상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툭툭 두들겨 점혈을 풀어 주자 놈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
“다가오지 마시오, 노인네.”
만두 먹으러 가는 길에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굳어 있던 팔다리가 다시 움직이자 황급히 대로로 물러나며 오지 말라고 소리쳤다.
“싫다, 이놈아.”
하지만 내 외침에도 ‘네가 어쩔 건데?’라는 식으로 응수하며 저벅저벅 걸어오는 노인.
범상치 않은 고수다. 귀신처럼 미끄러지던 움직임을 보아 아마 도주도 불가능하겠지.
“동네 사람들! 살려 주세요! 웬 변태 늙은이가 애들 팬다아아!”
하여 나는 사람이 구름처럼 몰린 대로로 뛰쳐나가 살려달라 외쳐 댔다.
사해가 동도라지 않나. 어린아이가 울며불며 살려달라 외치면 시선이라도 쏠리는 게 정상인데.
하지만 오늘은 다들 반응이 이상했다.
“……왜 눈을 피해?”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 그 누구도 눈을 마주치려 하질 않았다. 관계되기 싫다는 듯 재빨리 내 앞을 지나치는 사람들.
“기이한 보법에 점혈까지 펼친 것을 보았는데, 끼어드는 정신 나간 놈이 있겠느냐. 끌끌.”
그 광경에 뒷짐을 진 노인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단 한 명도?
무협지처럼 협객이랍시고 튀어나오는 놈도 없단 말인가.
이렇게 소리를 질렀으면 하다못해 포쾌라도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 뛰어올 법도 한데.
“하.”
이게 무림이라는 거겠지. 약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곳.
반대로 말하면 강자는 무엇이든 행할 수 있는 그런 세계.
“원하는 게 뭐요. 내 몸?”
“……너는 노부를 진정 음적(陰賊)으로 아는 것이냐.”
현실을 받아들인 내 대답에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노인이었다.
그럼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몸을 더듬어 댄 이유가 뭔데.
“천살성을 품었더냐?”
그가 별내림을 받았냐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아까 내 몸에 이상한 기운을 흘려 넣다 말고 깜짝 놀라 펄쩍 뛰더니, 그런 거였나.
“노인네.”
“황 노야라고 부르거라.”
“황 노인네. 혹시 그쪽도 날 찌르러 왔소? 그 연놈들 사주를 받고?”
내 친누이, 모용청혜가 못다 한 마무리를 하라고 말이다.
생각해 보니 저만한 고수가 뭣하러 나 같은 꼬맹이를 찾았겠는가.
일부러 이 먼 곳까지 와서 거지 틈에 섞여 살았는데, 진짜 지독하다 싶었다.
“뭔 소리인고. 나는 내 의지로 왔느니라.”
한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
자신을 황 노야라 소개한 노인은 백회혈이 있는 내 정수리를 툭툭 건드리더니 이어 질문했다.
“그보다 아깐 경황이 없어 못 들었다만. 대답하거라, 어째서 미치지 않았더냐?”
고수 앞에서도 까부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긴 한데, 천살성 특유의 광증이 안 느껴진다며 나를 추궁해 오는 황 노야.
“염병, 난들 아오. 그걸 알았으면 배때지에 구멍도 안 뚫렸겠지.”
물론 그 이유를 알아냈다고 해도 모용세가에서 믿어 줄지는 미지수지만 말이다.
그간 모용청진이 반쯤 미쳐서 해온 짓거리가 많다 보니 말이 통하질 않더라.
“참으로 기이하도다. 그 나이면 미쳐도 단단히 미쳐 있어야 할진대, 혹시 사람 쑤시고 싶지 않든? 머릿속에서 이상한 속삭임이 들려온다거나…….”
“거 일단 눈앞의 노인네를 쑤시라고 지금 속삭이는 것 같기는 하오.”
방금 저 노인에게 ‘인지’당한 흉악한 기운이 아까부터 죽여 버리자고 몸을 콕콕 찔러 대는 통에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욱하고 튀어나오는 말투.
“근데 왜 안 쑤시는데?”
“내가 그러기 싫으니깐?”
피에 미친 마두(魔頭)도 아니고, 내가 왜 백주 대낮에 이성을 잃고 혈투를 벌여야 한단 말인가.
그것도 저만한 고수를 상대로. 계란으로 바위를 쳐도 유분수지.
“허어, 이성을 유지한 천살성이라니. 이걸 정녕 믿어야 한단 말이냐.”
백 년이란 시간이 사람들의 경계심을 차츰 누그러뜨렸으나, 그래도 중원엔 아직 흉성들의 번뜩임을 경계하는 이들이 많았다.
말없이 이쪽을 내려다보며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하는 노인네.
저 눈빛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참초제근(斬草除根)을 외치던 가주 모용천의 눈이 딱 저러했다.
아무래도 나중에 큰 재앙이 될 것 같으니, 지금 죽일까 말까 고민 중인 모양.
“……염병, 난 제정신이오.”
차라리 버릇을 고쳐 주러 온 표사들이 나았다. 내가 그 절벽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또다시 목이 날아갈 위기라니.
노인은 내 항변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여간 무림 놈들은 말이 통하질 않는다니까. 인간 불신이 만연한 세상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 변태 늙은이!”
“우리 대장을 놔줘!”
저 멀리서 일홍과 오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전에 살려달라는 내 절박한 외침을 들었던 모양.
붙잡힌 대장을 구하고자 꼬맹이들이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모용세가 놈들보다 훨씬 의리 있는 녀석들이다.
“허, 아이들이 천살성을 구하러 뛰어온다니?”
어른들도 고수의 행사가 무서워서 외면하는데 말이다.
‘대장!’을 외치면서 달려오는 꼬마들의 모습에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는 노인.
고심이 깊어지는지 그의 미간에 자그만 골이 패였다.
“……일단 자리를 옮기자. 노부도 생각을 좀 해야 하니.”
어린 거지들과 푸닥거리를 하긴 싫었는지 그는 내 멱살을 들어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동의한 적도 없는, 당당한 납치 선언이었다.
“싫소! 이거 놓으시오!”
“부탁으로 들렸더냐?”
그는 선택권은 강자에게만 있는 거라며, 자유를 향해 발버둥 치는 내게 또다시 점혈을 날렸다.
“시발 또 이거야…….”
목석처럼 뻣뻣해지는 팔다리.
곧이어 온 세상이 까맣게 물들었다.
***
상단과 표국은 신용과 약속 위에서 굴러간다.
특히 표국 쪽은 남의 비싼 표물을 도맡아 운송하는 업무이기에 일이 잘못되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배상은 배상대로 토해 내야 하며, 세간의 신용까지 잃어버리니 타격을 두 배로 입는 것이다.
그리고 은성표국은 그 중요한 표행을 최근 두 번이나 말아먹은 실패한 상태였다.
전부 낭아봉을 휘두르는 한 미친 괴인 때문이었다.
그들이 표행에 나설 때마다, 산속에서 튀어나와 벼락같은 일격으로 표물을 박살 내 버리는 괴인.
무공이 어찌나 고강한지 일급 표사들도 맥을 못 추고 쓸려 나가기 일쑤였다.
덕분에 표국으로 들어오는 일감도 뚝 끊기게 됐다.
그렇게 자금이 메마르자 진 총관은 발을 동동 굴러 댔고, 쟁자수와 표사들은 표행에 나서지 못해 굶어 죽겠다며 아우성이었다.
“그 빌어먹을 낭아봉, 대체 뭐 하는 놈이죠?”
이처럼 고수 하나에 울고 웃는 것이 이 바닥 강호무림이다. 그리하여 상단들은 저마다 실력 있는 무인을 빈객으로 모시려 동분서주하는 상황.
물론 은성상단도 거기에 발맞춰 여러 인재들을 포섭해 뒀었다.
하지만 거목 같던 아버지가 급사하고, 새롭게 밀던 양잠업 사업이 위기에 처한 데다, 자금난 소문에, 경험도 일천한 애송이가 상주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까지 퍼지자.
그간 쌓아 놨던 인맥들이 망조가 들었다면서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리더라.
“호심호보(好心好報)하면 결초함환(結草啣環)이라더니. 다 개소리였죠.”
방년(芳年). 즉 이십 세.
한창 사회의 냉혹함과 더러움을 깨달을 나이.
은화란은 햇빛인지 아니면 은근한 분노 덕인지 얼굴이 확 달아오르자 부채를 ‘차륵’ 펼쳐 세차게 팔랑였다.
“그나마 황 노야가 와주셔서, 표행 쪽은 어찌저찌 기회가 생길 것 같지만요.”
한동안 은성의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그게 언제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은혜를 모르는 짐승이 한가득한 이 세상에서, 어찌나 고마운 분이신지.
다만 상단의 일부 인원들이 그분의 기행과 소란에 좀 시달리고 있긴 했다.
고급스러운 빈객당을 제공했는데도 굳이 돌바닥이나 기왓장 위에서 잠들다 시비들에게 발견되는 점이나.
알 수 없는 고성방가를 흥얼거리고, 황궁이 있는 방향으로 천자(天子)의 흉을 본다던가.
막대한 식탐으로 상주 전담 숙수의 허리를 휘게 만들고, 창고에서 술을 수십 병씩 슬쩍하는 등등.
“……비범한 구석이 있으시단 말이죠.”
딱히 재물을 탐하는 건 아닌 듯했는데,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집념이 대단하셨다.
하지만 가진바 무공이 대단하니 그 정도 흠은 덮어 줄 수 있는 법.
원래 일정 경지에 다다른 고수들은 어느 정도 괴팍한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음음.”
고개를 주억거리며 둥글고 흰 얼굴에 부채질을 살랑이는 은화란.
그런데 장원 입구에서 느닷없이 소란이 발생했다.
“놔! 이거 놓으시오 노인네!”
황 노야의 어깨에 짐짝처럼 매달려 소리를 꽥꽥 지르고 있는 꼬마 아이.
그 해괴한 장면에 표행을 준비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문으로 쏠렸다.
“이놈이…… 언제 또 아혈이 풀린 것이냐?”
황당한 얼굴로 묻는 황 노야.
“그쪽이 늙어서 약발이 떨어졌나 보지! 이거나 놓으시오!”
특이 체질 덕분일까. 어느새 주둥이의 봉인이 풀려 아동 납치범이 여기 있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꼬마였다.
다시 견정혈이나 입동혈, 아문혈 같은 온몸의 아혈들을 툭툭 눌러보는 황 노야.
“헉, 변태 노인네가 몸 더듬는다! 동네 사람들 이거 보쇼!”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을 봤나.”
마혈마저도 풀리고 있는 것인지 녀석은 어깨 위에서 갓 잡힌 생선처럼 펄떡대며 발악을 멈추지 않았다.
저놈의 주둥이를 어떻게 닥치게 할 방법이 없을까 황 노야가 고민에 빠진 사이.
“황 노야? 이건 대체…….”
누군가 굉장히 당황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바로 은화란 상주였다.
6화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냐.
낯선 여인의 목소리는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자 손을 휘젓더니 별일 아니란 식으로 넘어가려 하는 노인.
“길 가다 주운 놈이다. 신경 쓰지 말거라.”
“정확히는 길 가다 납치당한 놈이지! 말은 똑바로 하시오!”
나는 곧바로 노인의 헛소리를 정정해 줬다. 그러자 미간에 내천자(川)를 그리며 이쪽을 돌아보는 노인.
따악!
이마빡에 딱밤이 날아들었다. 어찌나 아픈지 입만 떡 벌어진 채 한동안 말이 안 나왔다.
손가락 하나에 골통이 뒤흔들리다니.
“시발, 아파!”
“좀 닥치거라.”
주둥이를 닫기 위해 또 한 번 아혈을 짚는 노인. 하지만 내 눈에는 시뻘겋게 일렁이는 기운이 점혈을 몰래 방해하는 게 보였다.
“이건 자유와 생존을 향한 발버둥이오. 절대 멈출 수 없지!”
나는 어깨 위에서 애벌레처럼 몸을 비틀며 그리 외쳤다.
“안 닥치면 지금 죽이겠다.”
“…….”
애를 죽이겠단 말을 이리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사회라니.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절대 쫄아서가 아니다.
“노야, 어린아이를 죽인다니요?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고 계신 건가요?”
그런데 옥구슬 굴러가는 목소리로 나를 두둔하고 나서는 여인.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본 듯한 보기 드문 상식인이었다.
나는 빳빳해진 목을 어떻게든 움직여 목소리의 주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감탄성.
‘와.’
마음씨 못지않게 얼굴도 고왔다. 백옥 같은 피부에 수려한 이목구비. 오뚝한 코와 도톰한 입술로 화룡점정을 찍는 미인.
거기에 흑진주처럼 광택이 돌며 황금색 수실이 수놓아진 저 비단옷을 보라. 범상치 않은 재력이 느껴졌다.
매번 꼬질꼬질한 중원인들만 봐오다가 이리 한껏 꾸민 미인을 보게 되자 눈이 절로 탁 트이는 느낌.
“노인네, 이분 성함이?”
나는 턱으로 노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물었다.
“……은화란 상주다. 은진청 고놈의 뒤를 이어받아 상단을 운영하고 있지. 한데 입을 다물라고 했을 텐데?”
못마땅한 눈으로 이쪽을 흘기는 노인.
하지만 은화란 상주 앞이라 그런지 살초를 뿌리는 일은 없었다.
“전 단무진이라 합니다, 예쁜 누님.”
젊은 나이에 벌써 이만한 장원과 사업체를 물려받았다니.
친해져 둬야겠다. 나는 눈앞의 백두혈통에게 친밀한 인사를 건넸다.
“그, 그래.”
어린아이 특유의 격의 없는 인사에 떨떠름해하는 모습.
당혹스러운가 보다.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만남이 이어지다 보면 어느새 누나, 동생 하는 사이로 발전을…….
“잠깐만, 무진이라 그랬니? 네가 그 꼬마라고?”
그런데 내 이름을 곱씹던 그녀가 돌연 놀란 눈치로 물었다.
그 꼬마라니? 마치 나란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투가 아닌가.
뭔 일인가 싶어 볼을 긁적이고 있는데, 표행 준비가 한창인 곳에서 대뜸 아는 얼굴이 발견됐다.
“어! 그때 추한 어른 놈들!”
내 삿대질에 딸꾹질이라도 하듯 흠칫하는 두 삼급 표사.
그제야 여기가 어떤 상단인지 곳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둥근 달이 떠오른 밤.
황 노야는 풀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에 알알이 박힌 별들을 올려다봤다.
어둠이 내려앉자 저마다 존재감을 드러낸 별자리들. 칠원성군(七元星君)도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그리고 세상을 어지럽힌 존재들이 봉인됐다는 108개의 흉성.
개중 가장 불길하게 타오르던 천살성이 그 빛을 잃고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그럼 이놈은 대체 뭐란 말이냐.”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좀 더 명쾌하게 만들기 위해, 황 노야는 창고에서 슬쩍해 온 소흥주(紹興酒)를 한 병 더 들이켰다.
“크으.”
어찌나 고민이 길었는지 그의 주변은 이미 빈 술병이 열 개나 넘게 널브러져 있었다.
육포를 안주 삼아 질겅이며 하루 내내 술판을 벌인 듯한 흔적.
“말술이네, 말술이야.”
꽁꽁 묶인 거지 꼬마가 옆에서 질렸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여간 겁도 없는 놈 같으니.
뽕-
황 노야는 알딸딸해진 얼굴로 술을 한 병 더 땄다. 은은하게 코를 적시는 과일향.
보통 한두 병쯤에 해결되는데, 이 정도면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긴 고민을 하고 있는 듯했다.
참고로 첫 번째는 도가에 귀의하겠다며 어떤 방파(幇派)를 버리고 나온 일이었다.
황도 북경으로 오면서 숨겼던 허리춤의 매듭을 슬며시 꺼내 보는 황 노야.
“왜 그 거지들을 먹여 살린 것이더냐?”
그를 계속 고뇌케 한 의문이었다. 그 힘없는 꼬마들을 도와서 무슨 이득이 있다고.
“먹여 살리긴, 상부상조한 것이오.”
그러니까 북경 거지 중에 지금껏 그런 놈이 없었다니까. 권악징선(勸惡懲善)의 악순환에 빠져 서로를 착취하기 바빴었지.
하다못해 거지의 도의(道義)를 바로 세워 줄 개방 분타(分舵) 하나만 있었어도.
“네놈이 거기서 제일 셌잖아. 다른 왕초처럼 상납금을 걷었으면 구걸할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그 질문에 단무진이란 녀석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졸부를 털면 털었지. 그 삐쩍 마른 애들을? 나는 금수가 아니오. 노인네.”
“……흠.”
자신은 매정한 그곳 상인들과는 다르게 측은지심을 가진 인간이란다.
황 노야는 들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정녕 천살성의 입에서 나올 소리란 말인가.
그 대답을 듣고 긴 침묵에 빠지는 황 노야. 정적을 깨는 것은 희끗한 수염을 쓸어내리는 소리뿐이었다.
‘원시천존(元始天尊)이시여. 노부가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대답이 없을 줄 알지만, 그래도 그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악인은 참(斬)해야만 한다. 특히 인두겁을 뒤집어쓴 무시무시한 살인귀는 더더욱.
하지만 이 아이는 뭔가.
스스로 지은 죄가 하나도 없다.
거기에 살업(殺業)은커녕 갈 곳 없는 어린 거지들을 구제해 주며 선업(善業)을 쌓았다.
그런 녀석을 참초제근 하는 것이 정녕 세상을 위한 길이란 말인가?
“끙, 머리를 좀 더 맑게 해야겠구나…….”
그는 습관처럼 술병의 목 부분을 움켜잡았다.
끝없는 장고가 이어지자 옆에서 한숨을 푹 내쉬며 한마디 하는 단무진.
“옘병, 나도 한잔 주시오.”
“……미쳤느냐.”
“미치긴, 이쪽도 지금 죽을지 살지 몰라 속이 탄단 말이오.”
인생에 바람 잘 날이 없다며, 술로 쓰린 속을 달래고 싶단다.
아무래도 이쪽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아챈 모양.
“살려달란 소리라도 해보지 그러더냐.”
“뭐라 설득하든 소용없는 거 이제 다 아오. 당신네 족속들은 천살성이라면 일단 사형 낙인을 찍고 보잖소? 해명할 기회도 없이 말이지.”
그 사실을 어느 절벽에서 뼈저리게 느꼈다고 중얼거리는 단무진이었다.
“…….”
그러한가.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낙인(烙印).
만약 그동안 세간의 속박을 초월한 누군가가.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황 노야는 말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오늘따라 백광에 휩싸인 일곱 개의 별.
그리고 그의 단전에 자리 잡은 신비스런 별들의 기운.
이것은 우연(偶然)인가.
아니면 인과에 따른 필연(必然)인가?
“술이 안 되면 남은 육포라도 주던가.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더만.”
그간 무슨 일을 겪어온 것인지, 반쯤 체념하고 될 대로 되란 식으로 구는 꼬마 녀석.
서늘한 밤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고민 끝에 마음을 정한 황 노야는 시선을 다시 내렸다.
“너는 살 것이다.”
“……헛.”
그러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던 단무진과 눈이 마주쳤다.
들켰음을 깨닫자 손을 스르륵 거두는 모습. 꽁꽁 묶어 뒀던 포박도 어느새 반쯤 풀어낸 듯했다.
“험험, 그런 거면 미리 말을 해주시지.”
“……이놈아, 언제 밧줄을 푼 것이냐?”
“변변찮은 직업상 잡기(雜技)일 뿐이오.”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녀석은 다시 포박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허.”
뭔 놈의 꼬맹이가 밧줄 푸는 법도 안단 말인가. 대체 정체가 뭐길래.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헛웃음.
벌써부터 자신의 결정이 후회되기 시작한 황 노야였다.
***
아무래도 당장 죽지는 않을 모양이다.
노인의 표정이 딱 죽일 듯 혼내려다 마음이 약해져 매를 내려놓은 보육원 원장의 그것이었다.
“휴, 일단 살았나.”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의 한숨.
아까 꼬맹이들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마음이 바뀐 듯했다.
세를 불리고 구역을 관리하기 위해 쫄따구를 먹여 살렸을 뿐인데, 그게 내 목숨을 구하다니. 인생이란 모를 일이다.
“노부는 일이 있어 얼마간 이 상단에 머물러야 한다.”
무언가 생각이 많은지 뒷짐을 진 채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는 황 노야.
이제야 저 노인네의 납치극에서 풀려나는 건가.
“그러니 너도 여기에 머무를 준비를 하거라.”
염병,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다.
자유를 향한 길은 아직 멀기만 하군.
“착각하지 말거라. 아직 완전히 경계를 푼 것이 아니니.”
이런 내 생각을 다 꿰고 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 황 노야였다.
“아무런 조치도 없이 천살성이 활보하게 놔둘 줄 알았느냐? 노부가 네 녀석을 한동안 지켜볼 것이니라.”
감시받는 인생이라니. 또 내가 저지른 적도 없는 과거의 과오로 말이다.
“아니, 내 정신은 멀쩡하다니까.”
나는 그가 남긴 육포를 질겅이며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멀쩡은……. 너는 네 몸 안에 잠들어 있는 ‘그것’을 정녕 느끼지 못했단 말이냐?”
그런데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내 백회혈 부근을 가리키는 황 노야.
또다시 언급당하자 내 눈에만 보이는 예의 새빨간 안개가 피부 위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 안에 뭐가 있단 말이오?”
이 양반이 무섭게 왜 그래.
이런 시뻘건 안개 말고도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흠칫 떨며 내 몸을 더듬어봤다. 말랑말랑한 피부밖에는 안 느껴진다만.
“모르는 모양이군. 최근 들어 욱하는 일이 잦거나 말투가 거칠어지지 않든?”
“아니, 어떻게 아셨소.”
신통방통하군. 나는 무릎을 탁 내리치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원래도 말투가 좀 거칠긴 했지만, 그래도 나 죽이겠다는 사람 앞에서 대범하게 굴 정도는 아니었지.
“모르는 사이, 천천히 잠식당하고 있던 것이다. 네 안의 흉성에게.”
아무래도 저 양반이 내 안에서 뭔갈 보긴 봤나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성격이 바뀌고 있었다니. 굉장히 기분이 찝찝하고 그랬다.
“그러니 본 노부가 그것을 억누를 방도를 알려 주도록 하마.”
그래도 막을 방법을 알려 준다고 하니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비록 폭력, 추행, 납치 전과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 우리는 이제 스승과 제자 같은 것이오?”
“아니, 죽을 놈과 죽일 놈의 관계 정도로 해두자꾸나.”
“…….”
차갑다 차가워.
내 안의 천살성이 원하는 대로 제어될 거란 보장이 없으니 거리를 두려는 게 느껴졌다.
아무튼 저 노인 사정에 이끌려 한동안 이곳에 매여 살게 될 모양.
그래도 차디찬 길바닥 생활보다는 좀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거대한 장원과 고풍스럽게 우뚝 솟은 전각들을 이리저리 살피며 물었다.
“뭐 숙식 같은 것도 제공해주는 거요?”
“이 노부도 돌바닥에서 잠들건만, 숙식이 어째?”
아니, 무공도 고강한 양반이 왜 거지처럼 살고 있단 말인가.
나는 눈앞의 괴짜 노인네를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뭐 은화란 상주에게 언질은 해놓을 테니……. 밥벌이는 알아서 해결해보도록 하거라.”
목숨도 건졌고, 살심(殺心)을 억누를 방법도 배워갈 녀석이 참 바라는 것도 많다고 구시렁대는 황 노야.
“오, 꽌시!”
나는 환한 얼굴로 외쳤다. 드디어 나도 중원의 인적 네트워크라는 꽌시를 이용해 볼 수 있는 건가.
먹고살 수 있는 일자리라는 게 이토록 귀한 줄 몰랐었다. 모든 것이 척박하고 각박한 시대.
“감사하오, 대협.”
나는 길거리 무인들이 취하던 포권 자세를 어설프게 흉내 내봤다.
“……그건 포권이 아니라 공수례다 이놈아.”
거기다 주먹을 반대로 쥐어서 애도를 표하는 자세가 됐단다.
뭐 뜻만 통하면 됐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
은화란은 용정차를 들이켜다 말고 귀신처럼 솟은 손님에 눈썹을 흠칫 떨었다.
“그 꼬맹이 취직 좀 시켜주거라.”
진 총관과 차를 마시며 위기에 봉착한 누에 사업을 어떻게 되살릴지 논의하고 있었는데, 돌연 일자리 청탁이 들어왔다.
상단 내에서 그녀에게 이토록 거리낌 없이 말을 걸어오는 이는 단 한 명뿐.
아, 생각해보니 최근에 누님이라고 부른 맹랑한 꼬마가 하나 더 있긴 했다.
“……황 노야, 취직이라니요?”
놀란 속을 차로 달래며 묻는 질문.
“며칠 후에 쟁자수 뽑는 자리가 있지 않더냐? 그놈한테 허드렛일 좀 시키고 먹이고 재우란 얘기지.”
그놈이라 함은 노야께서 죽인다면서 질질 끌고 온 그 거지 꼬마가 분명해 보였다.
“허나 노야, 내정자는 곤란합니다. 은성의 시험은 돌아가신 아버지의 약조대로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그럼 공정하게 시험 보게 해.”
거절하면 어찌 반응할지 걱정했는데, ‘다른 놈들 허탈하게 만들 수는 없지’라며 의외로 쉽사리 납득해 주는 황 노야였다.
하지만 천하 십대 상단에 들어가는 은성의 시험은 힘겹기로 유명한데.
“그 아이가 통과할 수 있을까요? 어른들도 버거워하는데.”
“한번 직접 보거라.”
황 노야는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씩 웃으며 말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시험 당일.
쟁자수를 선발하는 연무장에서 상주 은화란은 놀라운 것을 보게 됐다.
“우오오!”
“세상에, 저 쪼그만 것이……!”
“힘이 아주 장사구먼!”
자신을 누님이라 부른 그 발칙한 꼬마가 묵직한 쌀 포대를 무려 여섯 개나 들어 올리는 광경이었다.
7화 거지들의 대화
쌀 포대 하나의 무게가 대략 칠 관(貫)이다.
건장한 성인 남성도 세 개 정도 들면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수준.
저번 시험을 최우수로 통과한 쟁자수가 쌀 포대 네 개를 들었었다.
그 정도만 해도 사람들은 대단하다며 놀람을 금치 못했었지.
장 표두조차도 저놈은 표사로 키워보자고 호들갑을 떨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읏차.”
웬 꼬마가 쌀 포대 여섯 개를 동시에 들어 올려 버렸다.
자기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쌀 포대를 가느다란 두 팔로 지탱하는 모습.
시험을 받던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연무장 근처의 구경꾼들도 입을 떡 벌렸다.
“이야.”
“저만한 몸에 어찌 저런 힘이?”
“무공을 배운 건가?”
모르는 사람은 저게 내공의 힘이라 오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표사들의 얘기를 들었던 은화란은 그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저건 타고난 용력(勇力). 이른바 원석이라는 종류였다.
“상주님, 방금 보셨습니까?”
그런데 무진이라는 소년의 대활약에 흥분한 이들이 또 있었다.
바로 소년에게 흠씬 얻어맞고 돌아온 표사, 양조와 양위였다.
“저 무식한 괴력 좀 보십쇼.”
“저희가 괜히 진 게 아니라니까요?”
이때다 싶어 튀어나와 한마디씩 거드는 모습.
아마 억울함을 피력하여 감봉을 어떻게든 낮추고자 하는 목적도 있으리라.
둘을 잠시 어이없는 눈으로 흘긴 은화란은, 이내 연무장에 우뚝 선 소년을 바라봤다.
오기 전에 세신이라도 한 건지 거지 시절의 땟국물을 걷어낸 모습.
시험관에게 건네받은 손수건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자 섬세한 턱선과 옥석 같은 얼굴이 드러났다.
이에 몰려든 구경꾼들 사이에서 탄성을 흘리는 여인들.
“어머, 어머.”
“나쁘지 않을지도…….”
“아직 어리긴 하지만요.”
심심해서 나왔다가 좋은 것을 봤다며 재잘거리는 모습이다. 개중엔 상인들의 부인도 있어 은화란은 참 주책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뭐 이대로 잘 크면 여자 여럿 울릴 것 같다는 것엔 그녀도 동의하는 바였지만.
“황 노야가 신기한 아이를 주워 오셨네요.”
어린 나이에도 저만한 용력. 무공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삼류 무인 둘을 쓰러트린 무재까지.
거기다 분명 일자리와 숙식까지 챙겨달라 그러셨지.
“설마 제자로 들이시려는 건가……?”
죽인다 뭐다 하더니. 결국, 이곳에 머무는 동안 저 아이를 제대로 키우시려는 모양.
방금 그녀의 안에서 저 소년의 취급 등급이 올라갔다.
“단무진이라 그랬나요? 눈여겨봐야겠네요.”
일단 부탁받은 대로 허드렛일을 시키면서 말이다.
흥미롭다는 듯 부채로 손바닥을 탁탁 내리치는 은화란.
사람과 물건의 가치를 재는 어느 상인의 시선이, 한동안 어떤 소년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
쟁자수의 아침은 이르다.
새벽이 밝아오는 진시(辰時) 초입부터 기상하여 무거운 표물을 쉴 새 없이 나르기 시작한다.
특별한 기술 없이 해가 질 때까지 짐만 옮기는, 야가다로 치면 일종의 곰방 포지션 되시겠다.
“저런 꼬맹이가 쟁자수 일을 한다고?”
은성표국은 두 번의 실패를 딛고 세 번째 표행을 준비 중이었다.
주요 업무는 북경을 순회하며 표물을 전달받아 상단으로 옮기는 일.
땀이 비 오듯 쏟아질 정도로 정말 열심히 일했다. 어렵사리 얻어낸 직업이 아니던가.
“허참, 세상에.”
“쪼그마한 게 천하장사구먼.”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실적으로 증명해냈다.
그러자 한 명의 쟁자수로 인정해 주기 시작한 표국 사람들.
그런데 인정받은 건 좋은데, 어리다고 사정 봐주는 거 없이 똑같은 업무량을 배정하는 건 별로였다.
덕분에 오랜만에 야가다 하는 느낌으로 몸을 주구장창 갈아 넣어야만 했다.
어딘가에 짱박혀 쉴라치면 십장 같은 놈(장궤)이 귀신같이 튀어나와 일하라고 소리치더라.
“이 빌어먹을, 쟁자수.”
무협지 보면 길 가다 산적 만나서 몰살당하는 삼류 엑스트라 같던데.
직접 발을 담가 보니, 이 직업도 나름의 애환과 고생이 있었다.
“빨리 이름을 날려서…… 낭인이나 해결사가 되든가 해야지.”
계속되는 육체노동. 산업시대 아동 노동자가 된 기분이다.
그렇게 술시(戌時)가 되어 해가 떨어지자 업무 종료를 외치는 표두.
전등이 없는 세상의 장점이다. 나는 곧바로 집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들어 갔다.
사실 집이라 말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삼급 표사와 쟁자수를 위한 숙소인지라 외풍과 비를 막아 주는 정도가 다였다.
얼기설기 쌓인 짚 위에다 넝마를 깔고 하룻밤을 지내는 정도.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잠들진 못했다.
한밤중이 되면 스르륵 기어나와 황 노야와 함께 별빛 아래에서 이상한 구절을 외어야 했거든.
그리고 이 짓을 보름쯤 반복한 결과.
“시발! 이렇겐 못 살겠소!”
나는 정신을 반쯤 놓아 버렸다.
***
혈육에게 두 번이나 버려진 신세.
그래도 비빌 빽이 새로 생겼으니, 이제 인생 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뭔가.
“흘흘, 처음엔 그리 좋아하더니?”
싯누런 이를 드러내며 코앞에서 실실 웃고 있는 황 노야.
“일자리 생긴 건 좋지만…… 잠은 자게 해줘야 할 거 아니오!”
솔직히 말해 일 자체는 빡셌지만 그래도 어찌저찌 해나갈 만했다.
가끔 하늘이 노래지고, 시야가 둘로 나눠지긴 해도 죽지만 않으면 될 일이지.
하지만 이놈의 수면권이 문제였다. 하루 세 시간만 자고 풀 노동이라니? 이건 거의 고문이 아닌가.
“그래서 일러준 구결들은 다 외었더냐?”
“그 뜬구름 잡는 헛소리들 말이오?”
어떤 은거 기인의 정수가 담긴 심법(心法)의 구결이란다.
내 치솟는 살심을 억누를 수 있다며 주입식 교육을 해온 황 노야.
“그래, 이놈아.”
구결을 까먹을 때마다 골통을 뒤흔드는 딱밤이 날아드니 안 외울 수가 없더라.
성령회일체星聆懷溢體(창공의 별을 품어 온 세상을 밝히니)
수천기파세隨天起把世(만물이 하늘의 이치대로 흘러가리라)
수처작주개진隨處作主皆眞(그리하면 천하가 안정되고 스스로를 자유케 하리니)
이게 구결의 초반부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막연하게만 다가오는 내용.
여기에 담긴 요체(要諦)를 풀이하고 오의(奧義)를 체득해야 그 무공을 진정으로 배웠다고 할 수 있다나 뭐라나.
무공이란 게 각 문파의 밑천이나 마찬가지이다 보니, 이중삼중으로 보안을 해놓는 일이 수두룩 하다고 했다.
이래서 스승이란 존재가 불가결한 것이겠지.
“어느 정도 외우긴 했소만, 그래서 이게 뭐 하는 심법의 구결이오?”
생장염장을 다스리니 뭐니, 북두성군과 칠원성군은 또 뭐고, 구결을 읊어갈수록 왜 이리 도 닦는 느낌이 풀풀 나는 건지.
여기가 중원 무림만 아니었으면 ‘그딴 거 안 믿어요’를 외치고 진작에 튀었을 텐데 말이다.
“이놈아, 혹시 신풍진인(新風道人)이란 별호를 들어봤느냐?”
심법의 정체를 물었더니 대뜸 이상한 별호 하나를 던지는 황 노야.
그런데 아는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강호 경험이 미숙한 모용청진도 한 번쯤 들어본 그런 별호.
“근데 그거 허풍(虛風)진인이 맞지 않소? 도인을 자처하며 중원 곳곳에서 온갖 기행을 벌인 망아지 같은 놈이라던데.”
간만에 아는 무림 지식이 나와서 조금 떠들어봤다. 그런데 표정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황 노야.
“그게 나다.”
“…….”
이 시발.
이놈의 인생은 지뢰를 밟아도 아주 대전차지뢰로 밟는구나.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황급히 수습에 나서봤다.
“크흠, 무지몽매한 몇몇 범부(凡夫)들이 깨우친 도인의 행동을 기행으로 봤던 모양이오…….”
“이미 늦었다, 이놈아.”
그래, 염병 늦었구나.
나는 사태 악화를 막고자 합죽이처럼 입을 꾹 닫았다.
그러자 피식 헛웃음을 흘리더니 말없이 수염을 쓸어내리는 황 노야.
“노부의 이름은 황걸개라 한다. 한때 개방(丐幇)의 일원이었지.”
그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낡은 도포를 툭툭 털며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수치곤 묘하게 거지티가 난다 싶었는데, 그런 거였나.
“참고로 그때 당시엔 제법 잘나가는 개방도였다.”
이 사이에 낀 오징어 건더기를 뽑아내며 하는 소리.
“그러던 어느 날, 벽을 넘고자 발버둥 치다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고 말았지.”
벽이라면 무인들이 어느 경지에 이르러 겪는다는 ‘깨달음의 벽’을 말하는 걸까.
잘못하면 심마(心魔)가 찾아와 가끔은 미치기도 한다던 그것.
“칠공에서 피를 토했다.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건가 싶었는데…… 눈앞에 신비스런 선풍도골의 도인이 나타났었지.”
황 노야는 그것을 인생에 몇 안 되는 ‘기연’이라 설명했다.
도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그 위기를 발판 삼아 더 높은 경지를 이룩하게 됐다고.
“그 일 이후, 노부 또한 도(道)를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고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자 개방을 박차고 나왔었다.”
하지만 거지 놈이 갑자기 도인 행세를 한들, 잘 될 리가 있겠냐며. 세간에 퍼진 허풍진인의 기행은 그런 맥락에서 벌어진 것이라 하였다.
처음엔 ‘도’라는 것이 무공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여, 여러 도가 계열 문파들을 쳐들어가 무공을 내놓으라 했다나 뭐라나.
“근데 그런 식으로 문파를 나와서 다른 무공 익히고 다니면 사지근맥 짤리고 그러지 않소?”
무협지 보면 ‘저놈이 문파 밑천을 들고 날랐다!’라면서 파문이다 뭐다 단전을 폐하고 난리 치는 거 있지 않나.
이곳 무림놈들은 이런 규율을 매우 엄격히 여기는 듯했으니까.
“당연히 짤리지.”
“……그쪽은 멀쩡해 보이오만?”
“그야 노부는 개방의 용두방주(龍頭幇主)니까. 감히 자르겠다고 나서는 놈이 없더라고.”
그는 허리띠에 새겨진 아홉 개의 매듭을 슬며시 보여 줬다.
“…….”
이런 미친, 조직의 우두머리가 지금 자기 방파를 버리고 튀었다는 얘기인가 그럼?
나는 눈앞의 황 노야를 경악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무튼 네가 외운 구결은, 그때 노부를 심마에서 건져줬던 신묘한 도가의 내공심법이니라.”
그제서야 본론으로 들어가는 황 노야……. 아니, 구파일방의 용두방주 황걸개.
“그런 거였습니까?”
나는 살짝 내리깐 말투로 말했다.
“……말이 반듯해졌군?”
“제가 원래 좀 예의가 바릅니다.”
황걸개는 같잖다는 듯 웃었다.
그나저나 그 정도의 인물이 직접 내공심법을 하사해 주겠다니.
이거 설마 기연인 걸까? 마침내 나도 물 위를 달리거나 검 하나로 태산을 가르는 그 신비의 기운을 단전에 쌓을 수 있게 되는 건가.
내공이 받쳐주지 않는 무공은 무술(武術)에 불과한 법. 초식에 맞춰 내공을 발출하면 같은 주먹질이라도 바위를 부술 수 있는 것이다.
“저 밤하늘의 별들이 보이느냐?”
그런데 심법을 설명해 주겠다더니 갑자기 어둑어둑한 하늘을 가리키는 황걸개.
나는 그 손끝을 따라 별무리를 훑었다. 지상의 존재들을 고고하게 굽어보는 수많은 별들.
참 많기도 하지.
“노부를 구해 준 그 신비 도인은 별의 힘을 품고자 수련하는 분이셨다.”
중원 무림에 미친놈이 많다더니, 손에 닿지도 않는 걸 품겠다는 사람도 있군.
그 장황한 이야기에 순간 코웃음을 칠 뻔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 별을 품은 당사자란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이런 시발.
“지금부터 배울 무공의 이름은 성운심법(星隕心法).”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었다. 담긴 뜻을 모르기에 내 감상은 딱 그 정도.
나는 살짝 기대한 얼굴로 이어질 황걸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걸 제대로 익히지 못할 경우, 넌 죽게 된다.”
“…….”
기분이 급격하게 다운됐다.
기연은 무슨 염병, 참 죽을 일도 많다.
“아, 착하게 살겠다니까, 왜 자꾸 죽인다는 건데요?”
“이놈아, 내가 아니라…….”
내 머리를 또 쿡쿡 찌르는 황걸개.
“네 안의 천살성에게 집어삼켜진단 뜻이다.”
또다시 언급되자 기분이 안 좋다는 듯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붉은 안개.
“보름간 널 지켜보았다. 느리긴 하나 흉성이 조금씩 힘을 되찾고 있더군. 이대로 방치하면 네 의식은 결국 잠식당할 것이다. 너란 존재의 죽음이자, 천살성의 부활이지.”
때아닌 시한부 선언이었다.
인생 난이도가 진짜 왜 이러나. 나는 별들이 송송 박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시천존, 태상노군, 무량수불 시팔.
이 몸을 버리시나이까.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
그래도 아주 죽으라는 법은 또 없나 보다.
잠도 안 재우고 고생을 시키긴 하지만, 내게 살길을 열어주는 황걸개였다.
“뭡니까 그게.”
“바로 성운심법의 공능이다. 별빛을 받으며 양생한 기(氣)에는 신비롭고 성스러운 기운이 담겨 마(魔)를 물리치는 성질이 있지.”
그러니 살고자 한다면 그러한 항마(降魔)의 기운을 몸에 잔뜩 담아두라 조언하는 황걸개.
그는 구름 사이, 차갑게 내리쬐는 별빛 아래에서 선기(善氣) 가득한 내력을 짙게 피워올렸다.
그 심후한 항마의 기운에 아까 불려 나온 붉은 안개가 도망치듯 몸 안으로 스르륵 숨어들었다.
“오.”
입술을 비집고 나온 탄성. 저것이 바로 성운심법의 공능인가.
마기(魔氣)나 살기 가득한 천살성에겐 상극의 기운이라 그거지? 이런 정순한 선기를 내 몸에 잔뜩 쌓는다니.
생명 연장의 꿈이 비로소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거기에 더불어 살업(殺業)을 멀리하고 선업(善業)을 쌓아 천살성이 더 이상 자라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선업을 쌓으라 그건가.
그러고 보니 뒷골목에서 거지 꼬맹이들을 도울 때마다 천살성의 기운이 무슨 짓이냐는 듯 나를 쿡쿡 찔러댄 적이 있었다.
불만스럽게 굴어댄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거군.
“그렇게 하면 천살성에 먹히지 않고 살 수 있는 겁니까?”
“아마도. 허나 쉽지는 않을 게다.”
성운심법을 수련해 정신을 보호하고, 선업을 쌓아 천살성을 약화시킨다라.
“쉽지 않아도 해봐야죠.”
“그렇지, 못 해내면 내 손에 먼저 죽을 테니까.”
거참 듣는 사람 섬짓해지게 진짜. 왜 자꾸 죽인다 만다야.
“근데 선업의 기준이 뭔데요?”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베푸는 선행. 의도가 불순한데도 순수한 선업이라 볼 수 있을까.
불도(佛徒)의 누군가는 풀을 밟는 것조차 악업이라 하였다. 선과 악은 서있는 입장에 따라 쉽사리 뒤바뀌기 마련.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가린단 말인가.
“스스로의 양심(良心)이지.”
의외로 딱 잘라 말하는 황걸개였다.
“제 양심이요?”
“천살성을 품은 것도, 심법을 담게 될 그릇도 너다. 당연히 기준점 또한 너일 터.”
닿을 수조차 없는 드높은 별이, 그리고 신성한 별빛을 품은 기운이, 어찌 한낱 인간들이 정한 법치와 도덕에 휘둘리겠는가.
다 내게 들러붙은 것이니, 그걸 정하는 잣대 또한 나라는 황걸개의 발언.
하지만 이 방식엔 심각한 허점이 하나 존재했는데.
“만약 제가 아주 개악질 새끼였으면 어쨌으려고요?”
살인이나 강도짓 같은 악행에도 죄책감을 못 느끼는 그런 양심에 털난 놈 말이다.
“그랬다면 그 뒷골목에서 넌 목과 몸이 분리됐겠지.”
황걸개는 씩 웃더니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살벌하네 진짜.
“하지만 개방을 대신해 갈 곳 없는 고아들을 챙겨준 네 녀석이 그런 쓰레기는 아니겠지. 아니 그러하더냐?”
아, 오칠이와 일홍. 그리고 꼬맹이들.
마지막에 가서는 자기들이 알아서 상인들 팔다리를 붙잡아 구걸금을 벌어오더라.
벌어온 돈은 전부 공평하게 나누는 구조라, 이대로 좀만 더 키우면 자동사냥 돌리는 느낌으로 꿀 빨 수 있겠단 생각이 들긴 했는데.
뭐 그것도 내가 구걸 방법을 가르치고 타 패거리의 시비를 막아 준 덕분 아니겠는가.
“……이놈아, 선의에서 한 거 맞지?”
내 표정이 오묘했는지 미간을 모으며 재차 묻는 황걸개.
“아, 그럼요.”
혼란한 세상이다. 유연한 도덕적 잣대를 가진 자만이 선행과 금전적 이득을 동시에 취할 수 있을지니.
내 양심은 적당히 둥글둥글한 편이었다.
“좋다, 그럼 지금부터 성운심법의 요체와 오의를 전수할 터이니, 경건한 마음으로 세이공청(洗耳恭聽)하거라.”
평소의 주정뱅이 같은 얼굴은 어디가고, 진중한 표정에 목소리를 깔고 수련의 시작을 알려오는 황걸개.
“근데 심법 말고 다른 무공은 안 가르쳐 주십니까?”
무인들이 내공을 미친 듯이 모으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써먹기 위함이다.
한데 내공 심법만 딱 배우면 이건 뭐, 창고에 돈만 쌓아두고 한 푼도 쓰지 않는 꼴이 아닌가.
“아서라, 천살성에게 어찌 살인비기를 가르칠까?”
그럴 수가. 신뢰를 줬다고 생각했건만.
역시 이놈의 무림은 믿음이 부족한 세상이었다.
“이 성운심법만 하여도 더없을 기연이니, 불평 그만하고 전수에 앞서 절이나 올려보거라.”
그렇게 말하고선 바닥을 툭툭 건드리는 황걸개.
“무슨 절이요?”
“구배지례(九拜之禮) 말이다. 그것도 모르느냐?”
황걸개는 예와 도리를 표하는 아홉 가지 절 방식이라 설명했다.
원래는 한 번만 해도 되지만, 이 성운심법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 전부 한 번씩 해 보라는 말.
“흘흘, 어서 해보거라.”
까짓거 돈 드는 것도 아니고 해줄 수는 있지.
나는 세뱃돈을 타는 느낌으로 이마를 바닥에 쿵 박았다가 일어서봤다.
“끄응.”
그런데 고된 쟁자수 일로 두 다리가 쉼 없이 후들거렸다.
장궤놈들, 힘이 세니까 그만큼 또 굴리더라. 돈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나댈수록 일감만 많아지는 좆소식 운영이었다.
이놈의 쟁자수를 나중에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끄으읍.”
일어서자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신음. 역시 단순 반복 육체노동은 영혼을 갉아먹는 직종이다.
그래도 소싯적엔 해결사니, 자칭 탐정이니 하면서 나름 인텔리한 일을 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해결사 일이라면 곤란한 사람을 도우면서 선업도 같이 쌓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의 감사와 더불어 돈까지 챙길 수 있고,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닌가.
괜히 천직으로 삼았던 게 아니다.
“인간의 의지가 어찌 억만 겁을 쌓아온 별의 무게를 견딜까마는, 그래도 너는 해내야만 한다.”
내가 절하고 있자 덕담인지 악담인지 헷갈리는 말을 던지는 황걸개.
“해내지 못하면 노부가 목숨을 거둘 테니까. 행여 가르쳐 준 무공으로 삿된 길에 들어서도 친히 참해주마.”
저놈의 죽이겠다는 소리만 한 열 번쯤 들은 것 같다.
“에이…… 이쯤 합시다.”
나는 절할 맛이 싹 사라져서 두 번만 하다가 그만뒀다.
그러자 나의 이배지례(二拜之禮)에 어이없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는 노인.
“뭐야, 왜 멈추느냐?”
무슨 상갓집도 아니고, 그는 왜 두 번만 하다가 멈추냐며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정식 사제지간도 아니고, 무공도 제대로 안 가르쳐주는 데다, 자꾸 죽인다고만 하는 사람한테 대가리를 아홉 번이나 박기가 좀…….”
내게도 감정이란 게 있다.
이런 식으로 내 감정을 짓밟으면 마, 그때는 나도 예절을 모르는 불한당이 되는 거야.
“이놈아, 찝찝하니까 한 번만 더 해 그럼.”
“싫습니다.”
아무래도 예(例)와 면(面)에 민감한 시대다 보니 황걸개는 이런 게 상상 이상으로 찝찝했나 보다.
“……뭐 보법까진 알려줄 수도 있고.”
그 정도는 괜찮겠지라고 중얼거리는 황걸개.
그 귀신처럼 솟던 보법 말인가?
나는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넙죽 절했다.
“절 받으십쇼.”
8화 심봤다
은성상단의 상주실은 검소하면서도 은근한 기품이 흐르는 장소였다.
이는 실용성을 중시하는 전대 상주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아버지의 흔적이 가득한 자단나무 책상을 말없이 쓸어보는 은화란.
“상주님, 만금전장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주름진 손이 서신 한 장을 슥 내밀어왔다. 상단의 내정을 책임지는 진 총관이었다.
만금전장(萬金錢莊). 북경 일대에서 돈을 가장 크게 굴리는 집단.
주로 하는 짓은 대부업과 수신(受信)업이다.
즉, 돈으로 돈을 버는 놈들.
“무슨 내용일 것 같나요?”
은화란은 부채로 서신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신의 없기로 유명한 놈들이니, 아마 자금줄을 끊겠다는 소리 아닐런지요.”
부디 그것만은 아니길. 그녀는 총관의 예상이 틀렸기를 바라며 서신을 개봉해봤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고.
서신의 내용은 대출의 만기 연장이 더는 불가능함을 알리는 통보였다.
이에 붉은 입술을 잘근 깨무는 은화란.
“……족집게 같으시네요.”
“별말씀을요.”
참 사람 속도 모르고.
“이럴 땐 좀 틀리셔도 되는데 말이죠.”
“허허…….”
잘 나갈 땐 가장 먼저 찾아와 미소 짓고, 어려울 땐 누구보다 빠르게 등을 돌리는 게 대부업자라던가.
역시 돈놀이하는 놈들답다. 의리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다.
“만금전장이 이렇게 나오면, 다른 곳도 줄줄이 연장을 거부해오겠네요.”
낭패라는 표정으로 서신을 와락 구기는 은화란.
원래라면 정기적으로 연장되어야 할 대출이다.
그렇게 전장은 이자를 받아먹고, 상단은 이를 지렛대로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여 서로 득을 보는 구조였다.
하지만 최근 상단이 몇 번 휘청였고, 거기에 자금경색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기 시작했다.
상인들의 구설수 덕에 돈이 빠져나가며 없던 자금경색이 정말로 찾아온 격이다.
춘휘거상(春暉巨商)이라 불리신 아버지가 멀쩡하셨을 땐 상상도 할 수 없던 일.
“악의적이라 해명한들, 소용없겠지요. 그들을 설득하려면 차라리 상단이 직면한 문제들을 하나라도 더 해결하는 편이 낫습니다.”
진 총관이 쌓아온 연륜으로 지혜를 더했다.
숫자로 세상을 보는 놈들이다. 양잠과 표행 문제를 해결해, 말보단 실적으로 전주(錢主)들의 마음을 돌리자는 의견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 여겼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은화란.
“하지만 표행 쪽은 황 노야가 도와주신다 쳐도……. 양잠 사업 쪽이 문제네요.”
힘겹게 황실에서 따내 온 잠사업(蠶絲業)은 지금 퇴출의 위기였다.
몹시 우려된다는 얼굴로 말을 잇는 그녀.
“가장 큰 문제는 이 일로 황실의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단 점이에요.”
비단은 예로부터 황실의 주요 무역 수단이었다.
잘 만들어진 비단 한 필은 그 가격이 금(金)에 필적했기에 기술 유출을 막고자 사업 자격을 엄격하게 관리해왔다.
생산의 모든 과정이 비밀이며, 양잠과 관련된 건 무엇 하나 허투루 알려진 게 없을 정도.
그래서 새로운 상단이 사업권을 가져가면, 누에치기와 비단 생산을 문제없이 해내는지 확인하는 금결(錦抉) 과정을 거쳐야만 했는데.
“벌레 키우는 게 이리 힘들지 누가 알았겠나요.”
은성상단의 누에들은 이미 몇 차례 떼죽음을 당해 사업에 영 진척이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몇 달 후에 조정의 관리가 검증을 위해 찾아오는데도 말이다.
“진 총관, 그 사람은 아직 못 찾았나요?”
“추색꾼을 고용하여 찾고는 있지만,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오리무중입니다.”
물론 은성상단도 억울한 점은 있었다. 누에치기에서 가장 중요한 잠양사(蠶養使)가 도착하질 않고 있었으니.
조정에선 분명히 보냈다고 했는데 말이다.
“끙.”
지친 신음을 흘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은화란.
이 사업권을 따오려고 뽕나무 재배와 시설 투자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대로는 전부 손실 처리될 판이다.
“대체 어디 간 건가요. 위에서 보냈다는 그 사람은.”
요즘 들어 부쩍 한숨이 느는 것 같단 생각을 떠올리는 그녀.
생각해보니 일 년 전 아버지가 황실에서 양잠 사업권을 따온 이후부터, 이런 불운이 기이하게도 연달아 찾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은화란은 한번 생각해봤다. 혹시 일련의 일들이 불운이 아니라, 누군가의 악의적 공작이라면?
그렇다면 악의적인 소문이 퍼져 자금줄이 막힌 것도, 낭아봉 괴인이 표행을 때려 부순 것과 잠양사가 실종된 일도 어느 정도 설명이 되었다.
물론 그것을 입증할 물증은 현재로선 없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양잠 사업권을 따내고자 접촉하셨던 게 도화공주(桃花公主)셨죠 아마.”
10대 상단 말석에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려면 부가가치가 큰 사업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그래서 동분서주 끝에 한 공주와 접촉했고, 비단 생산 권리를 손에 넣고자 어떠한 밀약까지 맺었다고 들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무슨 황실 암투에 휘말리기라도 한 걸까요…….”
황실과의 관계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유지하란 말이 있다.
너무 멀어지면 그 온기가 닿지 못해 서서히 얼어 죽을 것이고, 너무 가까워지면 궁중 암투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수가 있으니.
하지만 의도치 않게 이미 발을 깊숙이 담가버렸다면 그땐 어찌해야 하는가. 은화란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질렀다.
“진 총관, 황실 쪽 사람에게 다시 한번 연통을 넣어주세요.”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연통이었다. 허나 황실과 관리들은 이쪽이 사업에 떨어지든 말든 아쉬울 게 없으므로 미적거리는 상황.
“그러겠습니다만, 그치들의 불친절함을 아실 테니 너무 기대는 마십시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아버지가 열과 성을 다해 이끌어온 상단을 자신의 대에서 폭삭 주저앉힐 순 없으니.
“양잠 건은 어쩔 수 없으니, 표행 준비라도 속도를 내야겠어요.”
두 번의 큰 실패가 있었지만 백 년의 저력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아직도 믿어주고 표물을 맡겨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다.
다만 일말의 불안감은 있었다. 황 노야가 정말 그 낭아봉 괴인을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
“총표두를 채근해보겠습니다. 쟁자수들이 반쯤 죽어 나가겠지만요.”
진 총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일자리와 상단의 명운이 걸렸으니, 조금 더 고생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참, 그 꼬마 쟁자수는 어떤가요? 업무에 잘 적응하고 하던가요?”
쟁자수라고 하니 기억났다. 요즘 상단에서 많은 이목을 끌고 있는 소년.
진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걱정이 많았는데, 이런 노동에 타고난 녀석 같더군요. 남들 두세 배만큼 일하지 뭡니까?”
“……놀랍네요.”
건장한 성인 남성도 버거워하는 게 쟁자수 일이다.
하지만 노야가 데려온 아이답게 심상치 않은 적응력을 보여 주고 있는 모양.
“기특한 소년입니다. 따로 상여금이라도 챙겨주시는 건?”
“저도 그러고 싶지만, 황 노야의 당부가 있어서요. 중요한 수련 중이니, 탐욕을 자극해선 안 된다나?”
탐욕은 모든 죄악의 ‘싹’이자 악으로 갈래를 뻗는 지름길이라 그랬었다.
“자신과 같은 청빈(淸貧)한 도인으로 키우실 생각이신가 봅니다. 그분은.”
그만한 무위를 가졌음에도 재산도, 집도 없이 항상 허름한 차림으로 세상을 주유하는 도인.
“솔직히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건 청빈보다는 궁상…… 같기는 한데, 그분의 의지가 확고하시니 어쩔 수 없죠.”
무림에서 사제지간은 마치 부모 자식과도 같은 관계. 타인이 섣불리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그럼 상여금은 유보하고 그냥 지켜보는 걸로 하겠습니다.”
“네, 좀 더 챙겨주고 싶지만, 어쩔 수 없네요.”
손에 쥐어질 뻔했다가 스르륵 빠져나간 상여금.
나중에 누군가가 알게 되면 피눈물을 흘릴 그런 대화였다.
***
내공(內功)이 무엇이냐.
바로 대자연의 기를 호흡으로 정제하여 단전(丹田)에 갈무리해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내공심법은? 이 축기(築氣)를 보다 효율적으로 행하는 방법을 말했다.
달을 벗 삼아 수련하고 내리쬐는 별빛을 자신의 힘으로 취한다는 성운심법.
심오하고 비밀스러운 수련을 기대하며 숙소를 나섰는데, 연무장에 도착하자 나를 기다린 것은 때아닌 유격 훈련이었다.
“뛰어라, 이것아!”
“헉, 헉!”
달밤의 뜀뛰기. 입에선 단내가 올라오고 온몸에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호리병을 든 채 쫓아오는 괴인.
“흘흘, 칠십 먹은 노부보다 느려서 되겠느냐!”
조금이라도 느려진다 싶으면 어김없이 호리병 딱밤이 날아들었다.
술병 밑동이 뒤통수를 딱 때리자 무슨 묘리를 실었는지 골통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
거기에 숨이 벅차 퍼질러지면, 그때부턴 근력 운동이 시작됐다.
황걸개를 등에 태운 채 팔굽혀펴기를 한다든가, 장딴지가 딴딴해질 정도로 쪼그려 뛰기를 반복했다.
“……빌어먹을!”
상상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무협지 속 신비스러운 수련 장면은 어디 가고, 왜 군대에 재입대한 느낌이 난단 말인가.
저기 앞에서 노려보는 황걸개의 눈빛은 마치 ‘9번 올빼미 놀러 왔습니까!’를 외치는 조교를 연상케 했다.
“헉, 이딴 거 말고! 헉, 심법 좀 알려달라니까요!”
신체를 강화해 주는 내공이 있어야 이런 무지막지한 훈련도 견뎌 낼 것 아닌가.
무인을 무인답게 만들어 주는 그 원동력 말이다. 거 되게 비싸게 구네!
“이딴 거? 네가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나. 연무장 열 바퀴 추가.”
“아오, 싯팔!”
낮에는 구결을 외우면서 정신없이 쟁자수 일을, 밤에는 군살을 쥐어 짜내는 수련의 연속이었다.
전력으로 뛰거나 오리처럼 구부려 걸었고, 근처 야산을 오르내리고 감사의 정권 찌르기 오백 번을 실천하는 등.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천살성의 육신마저도 한계에 내몰려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온몸이 삐걱거리는 듯한 감각.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이다.”
육신은 정신을 담는 그릇.
그 그릇 모양에 따라 정신의 형태도 바뀌기에 이런 기초 단련이 중요하단다.
특히 내 안에는 무시무시한 것이 똬리를 틀었으니 더더욱 그렇다나?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 헉헉거리는 내 모습에 썩 흡족한 얼굴로 탁주를 들이켜는 황걸개.
“날 속였어…… 내공 모으는 법을 가르쳐준다더니!”
나는 투명 의자에 앉은 듯한 마보(馬步) 자세로 항변했다.
무협지 보면 다들 차분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氣)의 존재부터 깨우치던데.
나는 왜 죽자고 몸만 조지고 있는 건지. 이래서야 기를 느낄 수나 있겠나.
“흘흘, 그래서 지금 축기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더냐?”
“한밤중에 죽어라 달리는 게…… 어딜 봐서 내공 수련이란 건데요!”
그러자 황걸개가 곳간에서 슬쩍해 온 안주를 질겅이다 말고 대답했다.
“이놈아, 너한텐 이게 내공 수련 맞아.”
“……왜요?”
“성운심법은 좌공(坐功)과 동공(動功) 둘 다 되거든.”
동공의 동은 움직일 동(動)이다. 즉 움직임을 행하며 호흡 단련과 심상 단련을 병행한다는 뜻.
한마디로 편한 수련은 없다는 소리였다.
“다행이지? 둘 다 쓸 수 있는 절세의 심법이라?”
“……시발.”
“어허, 반응이 왜 이래? 연병장 열 바퀴 추가!”
“시바아아알!”
껄껄 웃으며 발바닥에 불나도록 뛰라고 외쳐대는 황걸개였다.
“헉, 헉!”
달리면서도 심법의 구결과 전수해 준 묘리를 외우란다.
아무래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해주는 그 내공이란 것을 손에 넣으려면 매번 이렇게 연무장을 땀으로 적셔야 되는 모양.
세상만사 참 쉬운 일이 없다.
이건 초등학교에 다닐 적, 저놈은 애비애미가 없는 놈이란 욕을 들었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다.
“진짜 뒤지겠네…….”
“안 뒤진다, 이놈아!”
그리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세상은 차갑고 독한 곳이니 그에 못지않은 악바리 정신으로 살아보자 한 것이.
나는 표사들의 수련 흔적이 가득한 연무장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턱까지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그 위를 전력으로 뛰었다.
각오를 다지듯, 야밤의 장원을 고함으로 뒤흔들면서 말이다.
“유격자신-! 한계극복-!”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내 독기 서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실실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황걸개.
풀벌레가 슬피 우는 가을이었다.
***
“잠시 휴식한다!”
야밤의 수련이 끝나고 다시 쟁자수 업무.
대장궤가 잠시 쉬자고 외쳤다.
자기 덩치만 한 등짐을 짊어지고 있던 쟁자수들이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털썩 주저앉았다.
나 또한 등짐을 침대 삼아 길거리에 잠시 누웠다.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하늘이 노랗다. 뱅글뱅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유격이 끝나자마자 행군에 뛰어든 느낌이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어찌나 힘에 부치는지 대낮인데도 번쩍이는 별이 보일 지경.
게다가 휴식 때마다 추진되는 밥도 개떡 같았다.
무슨 똥국 같은 것에 푸성귀 몇 쪼가리와 군내나는 곡식을 뭉친 주먹밥이 다였다.
“이 시발 밥경찰 놈들.”
이딴 걸 먹고 어떻게 일하라니. 부족하거나 꼬우면 쟁자수 봉급으로 사 먹으라 그거겠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천살성의 신체는 연비가 매우 나빴다. 괴물 같은 맷집과 힘을 지닌 만큼, 처먹어야 되는 열량도 어마어마했다.
그걸 다 사비로 해결하려면 답이 안 나오는 수준.
“뜨끈한 소면 한 그릇…… 어디 없나?”
꼬르륵.
먹어도 먹어도 부족하다.
그러고 보니 고기만두나 동파육 같은 미식(美食)을 즐길 기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사먹으러 가는 길에 납치당해 결국엔 한 점도 먹지 못했었지.
근데 일홍이와 애들을 두고 온 게 좀 마음에 걸리는군. 생각해보면 걔들 덕에 내 목이 아직 붙어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황걸개가 천살성을 억누르기 전엔 자유행동은 꿈도 꾸지 말라 했으니 볼 길이 없다.
휙.
작고 빠른 뭔가가 앞을 지나가자 자동적으로 낚아채는 내 손.
손을 펼쳐보니 큰 날개에 보드라워 보이는 곤충이 있었다.
“뭐야, 메뚜기가 아니네.”
구워 먹으면 자연의 간식.
힘들 때마다 나타나 주던 그 녀석이 아니었다.
“누에나방인가 이거?”
털이 누리끼리한 것이, 아무래도 멧누에나방 종류로 보였다.
오랜만에 보니 좀 귀엽군. 옛날에 이걸 길러서 용돈도 제법 벌어 봤었다.
삶고 난 누에고치 속의 번데기도 무척 별미였지.
정말이지 버릴 게 없는 곤충. 천충(天蟲)이라는 말이 실로 어울리는 녀석이다.
파다닥.
생명의 위기를 느꼈는지 다급히 도망치는 누에나방.
“……아쉽다.”
나는 멀어지는 날갯짓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는데. 그냥 꿀떡 삼킬걸.
“휴식 종료! 다시 움직여!”
쟁자수들이 늘어지는 듯하자 손뼉을 짝짝 치면서 다시금 일으키는 장궤놈들.
나는 근면성실한 노가다 김씨에 빙의하여 지친 몸을 일으켰다.
“이번 건 비영상회의 표물이다! 어려운 와중에도 다시금 일감을 줬으니, 흠집 하나 내지 말도록!”
일개미의 삶이 이런 건가 싶었다. 상회와 상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표물을 옮기는 나날들.
지구였으면 두돈반으로 슥 옮길 짐들을, 여기선 모조리 인력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허억.”
돌연 현기증이 찾아오며 꼿꼿하던 허리가 한 차례 구부러졌다.
절벽과 급류에서도 살아남은 내가 이리 흔들릴 줄이야.
살인적인 노동 강도였다.
휴일 따윈 없는 주 7일 근무. 해가 지는 그 순간까지 쉼없이 일을 시킨다.
거기에 열심히 일하는 놈에겐 상여금을 준다는 대장궤 말에 넘어가 남들 두세 배만큼 일했는데, 어쩐 일인지 여태껏 소식이 없다.
대장궤놈. 날 속인 거니?
“저 녀석, 뭐라 중얼거리는데?”
“냅둬, 원래 처음 오면 다 저래.”
신참들이 으레 겪는 과정이라며 어깨를 으쓱이는 고참 쟁자수들.
솔직히 처음엔 좀 얕봤었는데. 알고 보니 다들 깡마른 실전 압축 근육의 소유자들이었다.
순간적인 근력은 나보다 딸릴지언정 지구력만큼은 인정할 만했다.
“사, 살고 싶어.”
무릎이 점점 마음과 함께 꺾였다.
야밤의 수련에 더해 쉴 새 없는 노동까지 더해지니 정말 죽을 맛이다. 온몸의 기력이 탈곡되는 느낌.
주마등인지 뭔지, 예의 그 시뻘건 안개도 한 번 정도 그림자를 비춘 듯했다.
표물의 무게는 가히 완전군장 수준. 고수가 되면 오백근(斤)에 달하는 쇳덩어리도 어렵지 않게 들어 올린다던데.
그 내공이란 것만 손에 넣었으면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당장 삼류 무인만 해도 움직임이 한결 다르지 않던가.
‘성령회일체(星聆懷溢體)하며…… 수천기파세(隨天起把世)하니…….’
인간의 배움은 절실함이 깊을수록 그 속도가 배가 되는 법.
나는 지금 내공이 필요했다. 그냥 강해지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등의 막연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그 내공이 필요했다.
‘만고를 꿰는 것은 곧은 심념(心念)뿐이랴…….’
그래서 생존을 위해 구결을 읊었다.
그 소리 없이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모습에 혀를 차는 주변인들.
“저 녀석, 드디어 맛이 갔군.”
“밤마다 무슨 수련도 한다던데? 잠도 못 자고.”
“쟁자수 일도 하면서? 미칠 만하네.”
쟁자수들이 불쌍하다는 듯 한마디씩 던지고 갔다.
원래부터 맛이 간 천살성에게 미칠 만하다니. 상당히 우스운 말이었다.
‘탐욕의 불이 치성이며 허공을 측량하고 바람을 맬 수 없으니.’
나는 도인인가, 무인인가. 등짐을 맨 채 필사적으로 외우면서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어느 시점에 도달하니 몸은 알아서 자동으로 걷고, 머리는 따로 분리되어 구결을 외는 지경에 다다랐다.
정신과 신체가 표리된 느낌. 이는 마치 행군을 걸을 때 겪는 유체이탈 현상과도 비슷했다.
‘성성일리…… 천지체영예…….’
이것이 황걸개가 말하던 영육(靈肉)의 분리라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싼 ‘기’를 인식하기 위해선 육체를 잊고 정신만 또렷해야 한다고 말했었지.
“……어?”
그렇게 걷다가 문뜩, 발이 무척 가벼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꺾였던 무릎도 어느새 펴졌고 온몸에 알 수 없는 힘이 뻗어 나가는 걸 느꼈다.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는 불가해한 현상. 소름이 쫙 돋았다.
“어어?”
배꼽 세 치(寸) 아래의 단전. 그곳에 자리 잡은 작디작은 응어리.
좁쌀만 하지만 반딧불처럼 또렷했다. 마(魔)를 물리치는 정순한 공력(攻力). 흉악한 천살성의 기운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느낌.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이렇게 외쳤다.
“심봤……! 아니, 내공 봤다!”
9화 살기 위한 경주
깨우치고 나니 온 세상이 기로 충만했다.
육신에서 정신을 탈각시키자 그제야 느낄 수 있었던 대자연의 이치.
맹인으로 살다 앞을 보게 된 느낌이 이러할까.
나는 이 깨달음을 알리고자 곧바로 황걸개에게 달려갔다.
“커허어어…….”
그러자 대낮인데도 ‘드르렁’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나뒹구는 술병들. 뜯다 만 닭다리와 여러 안주도 좀 보였다.
“황 노야.”
또 혼자 술판을 벌이다 길거리에서 잠든 느낌.
이 인간은 그냥 먹고 싸고 자고 아주 지 맘대로 사는구나.
누군 하늘이 노래지도록 개고생을 하고 왔는데 말이다.
“어이, 늙은이.”
나는 호칭을 은근슬쩍 격하하며 발끝을 툭툭 건드려 봤다. 그럼에도 침을 질질 흘리며 깨어날 줄을 모르는 황걸개.
그러다 시야에 새하얀 만두가 눈에 들어왔다. 속도 없고 찬 공기에 딱딱하게 굳었지만 저게 어디냐.
나는 침을 꼴칵 삼키며 슬쩍 손을 뻗어봤다.
탁!
그러자 감았던 눈을 번쩍 뜨며 내 손을 후려치는 황걸개.
“어딜 이놈이!”
누가 상거지 아니랄까 봐, 먹는 거엔 얄짤이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쯧’ 혀를 차고 손을 다시 거뒀다.
입가에 흐른 침을 손등으로 훔치며 일어나는 황걸개. 딱딱한 돌바닥에 자다 일어났으니 꼴이 말이 아니다.
“술 좀 그만 퍼마셔요.”
그 말을 하자마자 소흥주가 찰랑이는 술병을 주워드는 황걸개.
“헛, 이게 술로 보이느냐? 물이니라. 좀 묘한 맛이 나고 흥이 돋는 물이지.”
골목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도 저런 주정뱅이 같은 모습이었지 아마.
일정 경지에 오른 고수들은 취기를 내공으로 날려 버릴 수 있다던데, 일부러 알딸딸함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도인 아니에요? 도 안 닦아요?”
“흘흘, 원시천존은 이 호리병 안에 있느니라.”
웃기지도 않는다 정말. 난 코웃음을 쳤다.
“농이 아니다, 한 스무 병쯤 마시면 진짜 뵐 수 있어.”
그야 사경을 헤맬 테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도를 좇는다는 인간이 어째 천살성보다 더 정줄을 놓고 사는 것 같군.
“아무튼 내공 깨우치는 데 성공했어요. 이거 보시라고요.”
좁쌀만 한 내공임에도 구결을 따라 운기조식을 하자 온몸에 활력이 돌았다.
이러한 체력에 보법이나 신법까지 배워 두면 쟁자수 일이 얼마나 편해지겠는가.
“호오.”
황걸개가 술이 살짝 깬 얼굴로 내 단전 부근에 손을 갖다 댔다.
저번처럼 몸에 내력을 흘리진 않았지만. 모종의 방법으로 양을 재고 있는 건지 희끗한 눈썹이 연신 꿈틀거렸다.
“아니, 이건……!”
“이건?”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지 부릅뜬 두 눈.
“내공이 너무 작은데?”
“…….”
그야 방금 깨우쳤으니까.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나는 보복의 의미로 굴러다니던 만두 하나를 슬쩍 품에 넣었다.
“그럼 빠르게 쌓는 법 좀 알려 주시던가.”
내 물음에 또 다른 술병의 꼭지를 따며 ‘빨리 쌓는 법이라…….’라고 중얼거리는 황걸개.
“그야 간단하지. 명문세가가 하듯이 벌모세수(伐毛洗髓)로 탁기를 몰아내고 진기도인(眞氣導引)으로 경혈을 뚫은 다음 값비싼 영약을 아낌없이 투여하면 된다.”
한마디로 집안의 빵빵한 지원을 받고 돈지랄을 해대면 된다는 이야기.
참고로 이 몸도 명문세가 출신이었다. 망할 놈의 별내림만 아니었으면 전부 내 것이 될 수도 있었는데.
새삼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아직 기회의 문이 완전히 닫힌 건 아니지.
내게도 길을 알려 주고 이끌어 줄 스승 ‘비슷한 게’ 있지 않은가.
“노야, 어디 꿍쳐놓은 영약이나 내단 같은 거 없어요?”
“없다. 영약이나 영물의 내단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아느냐? 웃긴 놈이로고.”
사실 영약 쪽은 물어보면서도 별 기대 안 했다. 척 봐도 쥐뿔도 없어 보이는 거지 노인네였으니까.
“그럼 벌모세수나 진기도인 그런 거 한 번만 해주시면 안 돼요?”
이전에 뒷골목에서 가능하다는 걸 이미 확인했었지.
무림에서 내공은 곧 강함의 척도.
지름길을 알려 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고개를 땅에 박아 줄 용의가 있다.
“안 해, 이놈아. 손도 대기 싫다.”
그런데 어림도 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는 황걸개.
이 인간이 진짜, 구배지례까지 받아놓고는.
“왜요?”
“무서우니까!”
접때 내 안에서 끔찍한 뭔가를 봤다며 내 백회혈을 슥 가리키는 황걸개였다.
아니, 당신이 그러면 당사자인 난 얼마나 더 무섭겠냐고.
언제 뚫고 나올지 모를 에일리언 한 마리를 가슴에 품고 사는 느낌이었다.
“자꾸 겁주지 마세요.”
“이놈아, 겁은 내가 먹었다니까?”
“아니, 진짜.”
목구멍까지 솟구친 육두문자를 간신히 눌러 넣었다.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더니, 그때 골목에서 있었던 얘기를 해주는 황걸개.
“노부도 성운심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것’과 마주쳤을 때 상단전에 극심한 타격을 입었겠지.”
자신 정도니까 심적 타격에 그쳤지, 다른 이였다면 그대로 주화입마에 빠졌을 거란다.
뭘 본 건지는 몰라도 또 한 번 ‘인식’ 당할까 봐 언급조차 꺼리는 모습.
아마 천살성과 관련된 무언가겠지.
“그럼 다른 방법 없어요? 성운심법의 축기 속도가 흉성의 부활 속도보다 느리면 잠식당해서 죽는 거잖아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이쪽은 목숨이 걸린 상황인데 말이다.
“흠, 사실 한 가지 지름길이 있긴 한데……. 이론적으로만 가능하고 시도된 적이 없어 말하기가 뭣하구먼.”
무언가 확신이 안 서는지 말끝을 흐리는 황걸개.
“그냥 말씀해 주십쇼.”
내 재촉에 그는 이쪽을 지그시 바라봤다.
고심이 되는지 한참이나 수염을 쓸어내리는 모습.
“성운심법은 결국 별의 기운을 양생하여……. 제 힘으로 삼는 심법이 아니더냐.”
그렇다고 들었다.
대자연의 기운도 양생하지만, 역시 가장 효율이 좋은 건 희미한 별빛 아래에서 수련할 때였다.
“그리고 네 안에는 별(星)이 하나 들어 있지 않더냐……? 살심으로 똘똘 뭉친 불길한 녀석이긴 하지만.”
“……!”
정수리를 툭툭 건드리는 황걸개.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무릎을 탁 내리쳤다.
그래, 나는 멀리서 별의 힘을 찾아 헤맬 필요가 없었지.
남아도는 천살성(星)의 기운을 성운심법으로 정화하여 내 힘으로 삼아 버리면 되는 거다.
“근데 황 노야, 이게 정말로 가능할까요?”
만약 성공한다면, 몸 안에 영약을 달고 사는 것과 다름없다.
이른바 전화위복이라는 거지.
“그거야 별을 품은 네 녀석이 해보고 알려 줘야지.”
내가 실험대라 그건가.
하긴 나처럼 흉성을 품은 놈이 어디 흔한 것도 아니고.
“……근데 이 흉성, 흡수는커녕 꿈쩍도 안 하는데요?”
진짜 되나 싶어서 좁쌀만 한 내력으로 백회혈을 툭툭 건드려 보고 있는데 말이다.
바윗덩어리를 두들긴 것처럼 일말의 미동도 없었다.
“그러니까 먼저 막대한 선업을 쌓아 흉성을 약화시키라고, 이것아.”
막대한 선업이라니. 말은 참 쉽게 하는군.
이쪽은 해질 때까지 일하고 야밤에도 무공 수련을 하느라 그럴 짬조차 나지 않는단 말이다.
“선업을 쌓고 싶어도 말이죠. 그럴 기회가 어디 발이 달려 알아서 찾아와준답니까?”
곤궁에 처한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선업을 쌓든가 말든가 할 것 아닌가.
내 투덜거림에 짧게 혀를 차는 황걸개.
“쯧, 협객이 되어 명성이라도 날려보던가. 그럼 도와달란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지 않겠느냐?”
협객(俠客). 무협지에서나 보던 그 낭만 넘치는 족속들 말인가.
내가 뒷골목에서 처맞고 있을 땐 단 한 번도 나타나질 않던데.
“노야, 근데 그건 돈이 안 되잖아요.”
내게 먹고 사는 문제는 천살성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리고 사람이 뭔가 일을 해줬으면 응당 보상이 따라와야 정상 아닌가.
“흘흘, 그럼 협객처럼 구는 낭인 노릇이라도 해보던가.”
낭인이라, 그 무림의 해결사들 말인가.
곤란한 사람을 도와 선업도 쌓고 돈도 벌 수 있으니, 썩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다만 여기 낭인들은 용병처럼 사람 쑤시는 의뢰를 주로 받던데.
나는 해결사 경험을 되살려 미수금 회수나 미아 수색, 불륜 추적 등등 하찮은 일감도 가리지 않고 받을 생각이었다.
의뢰 범위는 넓을수록 좋은 법이니까.
“해결사 노릇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들러붙는 직업이라니. 이 정도면 천직(天職)이란 말이 아깝지 않다.
“해결사? 돈 받고 문제를 해결해줘? 그게 낭인이랑 뭐가 다르다고.”
“하는 일이 좀 다르거든요.”
뭐든지 돈만 주면 다 해결해 주는 이 서비스에 언젠간 중원인들도 호응하는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나만의 흥신소 사무실도 다시 세워 보이겠다.
“그래, 열심히 선업 쌓아보거라. 노부도 어떻게 될지 궁금하니.”
흥미롭단 표정으로 소흥주를 벌컥 들이켜고 있는 황걸개.
이쪽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데, 볼 때마다 참 속 편해 보이는 노인네다.
“예, 어떻게든 해볼 겁니다. 안일하게 굴다 광증이 도지면 노야께선 거침없이 제 머리통을 날리실 거 아닙니까?”
열심히가 아니라 필사적으로.
그것이 우리 흥신소의 모토였다.
“흠, 머리통을 날린다라…….”
그런데 내 볼멘소리를 듣더니 턱을 괴고 잠시 생각에 빠지는 황걸개.
그래도 몇 주간 부대꼈다고 정이 좀 붙은 걸까? 꽤 길게 고민해주네.
“주먹이 좋으냐, 타구봉이 좋으냐?”
“…….”
염병 진짜.
어림도 없었던 모양이다.
***
은성상단의 새로운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장소, 잠실(蠶室).
원래라면 누에가 뽕잎 먹는 소리로 가득해야 할 이곳은 현재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갖은 수를 다 써봤지만 이번에도 역시…….”
누에들이 또 떼로 죽었다. 나무틀 안에서 절반 넘게 뻣뻣하게 굳은 곤충들.
외피에는 고름과 검은 반점들이 도드라져 있었다.
휑한 정수리를 드러내며 냅다 머리를 박는 잠실의 관리자.
“…일어나세요, 책임을 묻진 않겠습니다.”
온갖 독물을 연구하는 사천당가도 아니고, 인간이 곤충에 대해 뭘 알겠나. 특히 누에는 황실에서 싸고도는 곤충인데.
잠양사 없이 길러보려 했건만, 그야말로 손을 더듬어 암흑을 헤쳐 나가는 꼴이었다.
“진 총관, 하오문에선 뭐라던가요?”
비단은 돈이 된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말이다.
하지만 나라의 인가(認可)가 필요했고 부과되는 세금도 심히 무거웠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밀양잠(密養蠶)이다. 주로 하오문 같은 곳에서 시도하는 행위.
추적이 힘든 점조직에다 야장이나 직공, 재단사 같은 생산직들이 모인 집단이니 딱이었다.
그렇게 탈세 양잠으로 돈을 긁어모은 그 암중 세력에게 도움을 청했었던 은화란.
이 사실이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거스르긴 하겠으나, 이젠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니다.
거기에 누에치는 법만 배우겠다는데 뭐 어쩌겠나. 잠양사도 보내지 않았으면서 딴지 걸게 못 됐다.
“그것이 문을 두드려 보긴 했으나…….”
“했으나?”
“북경 지부가 박살 나 있더군요. 무언가 변고(變故)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필 이럴 때!”
아무래도 원시천존께서 은(殷)가를 저버리기로 결정하신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일이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가 없다.
부채를 부러져라 움켜쥐며 발을 동동 구르는 은화란.
“그리고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 하였다. 불운한 일은 느닷없이 연달아 찾아오는 법이다.
진 총관은 황금두꺼비 인장이 찍힌 또 다른 서신을 꺼내 들었다.
“만금전장에서 상환일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담보를 회수하겠단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
본격적으로 채무를 추심해 오겠단 소리.
백 년간 뿌리를 박아온 은성상단을 상대로 돈이 떼일 것처럼 굴어오다니.
은화란은 굴욕적이란 얼굴로 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그런데 빚을 한 번에 탕감할 수 있는 묘한 제안도 함께해오더군요.”
“……어떤 제안이죠?”
그녀는 귀를 쫑긋거리더니 반신반의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지독하다 소문난 만금전장이 쉽사리 채무를 포기할 리가 없을 텐데.
“만금전장 넷째 공자와의 혼담입니다. 데릴사위로 데려가 주면 가족으로 묶이는 셈이니 모든 채무를 탕감해 주겠다고 합니다.”
빠직.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부채가 기어이 부러졌다.
기가 찬다는 얼굴로 입을 여는 은화란.
“얕보이고 있나 보네요. 구린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이런 제안이나 받고. 안 그런가요?”
“예, 아무래도.”
여인 혼자 고군분투 중인 상단에 불쑥 혼담을 제안해 오다니, 그것도 상당한 채무를 첨병 삼아서 말이다.
만금전장의 전주(錢主) 금황도. 영악하며 탐욕스럽기로 유명한 인물.
이런 인간은 앞에선 웃어도 뒤로는 흉계(凶計)를 꾸민다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매번 경계하곤 하셨다.
분명 이 혼담 제안에도 꺼림칙한 속내가 있을 터.
거기다 만금전장의 넷째 공자라면 분명…….
“허구한 날 기루에 드나든다던 그 난봉꾼 아닌가요?”
미색이 곱다 싶으면 물불 안 가리고 품는다고 하여 호사가들 사이에서 추접공자(醜接公子)로 불린다는 남자.
무림인이 아님에도 별호가 붙은 인간이다. 노여움에 치켜 올라가는 그녀의 눈매.
“어이가 없네.”
맷돌의 손잡이가 발이 달려 도망간 기분이다.
노름질과 주색으로 집안을 거덜 낼 뻔하다가, 의절당해 쫓겨난 은양곤 오라버니가 생각날 정도였다.
금황도 슬하에 장가를 가지 않은 아들은 그 넷째뿐이니, 이번 기회에 이렇게라도 써 먹어보려는 모양.
“상주님, 거절하는 건 좋지만, 다음 만기 때 지불할 대금이 없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추접공자와 정략혼을 맺으라고요?”
은화란의 목소리가 살짝 뾰족해졌음을 느끼고 달래듯이 응수하는 진 총관.
“아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생로(生路)를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물론 그게 가장 좋은 방향이긴 했다.
하지만 ‘어떻게?’라는 의문이 곧바로 뒤따라왔다.
“생로, 살아날 길이라…….”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아버지는 이럴 때면 산책을 나서곤 하셨었다.
“하아, 머리를 좀 식히고 올게요.”
은화란은 잠실 문을 나서며 그렇게 말했다.
***
표사들의 수련 흔적이 한가득한 연무장.
“지금부터 노부가 발 쓰는 법을 알려 주마.”
별빛으로 빚어진 내공이 단전에 들어서자 황걸개가 그리 말해왔다.
약속한 대로 귀신처럼 미끄러지고 불쑥 솟던 그 발재간을 알려 준다는 것이었다.
“잘 보거라. 경신법이란 것은 이렇게 펼치는 것이니.”
그리 말하며 왼발을 슥 내미는 황걸개. 앞꿈치가 꿈틀거린 순간 그의 모습이 귀신처럼 훅 꺼졌다.
바람 스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불쑥 솟는 인형(人形).
“워메.”
한 줄기의 바람 같은 움직임이었다. 내가 저 수법에 손도 못 쓰고 당했지.
파앗-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왼편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노인. 그 모습을 좇으려 시선을 돌리자 이번에는 그가 오른편에서 불쑥 솟았다.
공간을 접어 달리듯 표홀한 신법. 눈을 부릅뜨고 있음에도 안력(眼力)이 황걸개를 좇지 못하고 있었다.
파파팟-
이번엔 드넓은 연무장을 질풍처럼 내달리는 모습. 발끝이 땅을 스치듯 박차자 황걸개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일 리(里)가 넘는 거리를 찰나 간에 주파하여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내 앞에 우뚝 서는 황걸개.
그가 고속으로 몰고 온 돌풍에 내 옷과 머리카락이 뒤로 확 밀려났다.
그만한 경신법을 펼쳤음에도 숨도 차지 않은 모습.
“어땠느냐?”
낡고 헤진 도포 밑단을 툭툭 털면서 그리 물었다.
맨날 주정뱅이처럼 굴어서 잊고 있었는데, 이 양반 사실 엄청난 고수였지.
“쩔었습니다.”
“……쩔어? 대체 그게 뭔 소리냐?”
“끝내줬다는 뜻입니다.”
나는 양손의 엄지를 들어 쌍따봉을 날려줬다.
그 의미 모를 짓에 하여간 정상은 아닌 놈이라며 혀를 쯧쯧 차는 황걸개.
“노부가 방금 펼친 건 선풍보(旋風步)란 것이다.”
“오오, 선풍보.”
보법과 경신법을 겸하는 무공이란다.
오결(五結) 제자 이상만 익힐 수 있는 선풍신법(旋風身法)을 자신이 손봐서 다시 창안한 것이라 했다.
대종사의 자질도 있으셨구만.
“먼저 발 딛는 법을 가르쳐주마.”
“예, 새겨듣겠습니다!”
이제 나도 그 변화무쌍하며 기기묘묘(奇奇妙妙)하던 선풍보를 익힐 수 있는 건가.
이것만 있으면 적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아수라장을 만들 수 있겠지.
한줄기의 돌풍이 되는 것이다.
“먼저 서른다섯 개의 진퇴로(進退路)와 내력이 흘러갈 스무 개의 혈도를 머릿속에 때려 박아야 한다.”
무림에 와서도 주입식 교육은 피해 갈 수 없군.
그런데 수련을 시작하겠다면서 술병을 몽둥이처럼 집어 드는 황걸개.
“노야, 술병은 왜?”
“이게 도움이 될 거다.”
“…….”
다행히 말랑말랑한 모용청진의 뇌와 공교육으로 단련된 암기력으로 정수리가 오목해지는 현상은 피할 수 있었다.
초식에 담긴 오의(奧義)는 파악하지 못했어도, 형의(形儀)는 그럭저럭 태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별일 없이 끝나게 된 이론 교육.
“오성(悟性)이 트여 있군.”
황걸개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제법 똘똘하다는 걸 저렇게 표현하는 모양.
“그럼, 이제 실전을 해보자꾸나.”
그는 술병을 품에 집어넣더니 다부진 주먹을 보란 듯이 들어 올렸다.
“노야, 어째서 주먹을?”
“그야 천살성은 생명의 위협을 느낄 때 가장 빠르게 학습하니까.”
살아남기 위해 본능적으로 그러는 거란다.
그러고 보니 표사들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팔벽권을 훔쳐 배웠던 일이 기억났다.
인간은 필요에 의해 학습할 때 속도가 가장 빠르긴 하지.
“그래도 이건 좀.”
딱밤만 맞아도 골통이 빠개질 듯한데, 저 큼직한 주먹에 처맞으면 얼마나 아프겠는가.
심지어 이 몸은 맷집이 너무 튼튼해 엄살도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이 ‘허풍진인’이 손수 가르침을 내릴 터이니, 살고 싶으면 지금까지 배운 것을 활용해 도망쳐보도록.”
아무래도 저번에 했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
에이, 텄다 텄어. 이건 뭔 짓을 해도 처맞는 각이다.
“자아, 그럼 달리거라-!”
배움의 깊이는 절박함에 따라 달라지는 법.
그렇게 살고자 하는 이의 무공 훈련이 시작되었다.
10화 개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