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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개판이네

황걸개의 수련은 단순하면서도 무척 효과적이었다.

그는 초식을 펼침에 있어 허초(虛招)에도 살기를 실을 수 있는 자.

천살성을 품은 이 몸뚱어리는 요격 레이더가 켜진 것처럼 살초(殺招)라 느낀 주먹질에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공기를 찢는 파공성, 어렴풋이 읽히는 투로, 자신도 모르게 살고자 움직이는 몸짓과 발짓,

“……맞아 죽는 줄 알았네.”

한참의 푸닥거리 끝에 그 무자비한 주먹질 세례에서 달아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이만하면 됐다 생각하고 그쪽에서 놓아 준 것이겠지만.

“아이고, 아파라.”

온몸이 멍석말이 당한 듯 욱신거렸다. 특히 마지막에 맞았던 어깻죽지는 유독 아리고 쓰렸다.

살초가 아니었을 뿐이지 두들겨 팼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기에 이곳저곳 혹과 멍울이 잡혔다.

때리면서 혈도와 기맥을 격타(擊打)해 활성화해 놨다고 황걸개가 그러던데, 아마 소주천을 돌리면 전보다 기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질 거란다.

하여간 병 주고 약 주는 양반이로군.

“이제 들어가라 살성아.”

나는 투기에 반응해 시뻘겋게 피어오른 안개를 향해 그리 말했다.

하지만 호시탐탐 이 몸을 빼앗으려 드는 발칙한 놈인데, 내 명령을 들을 턱이 있나.

‘성령회일체, 수천기파세, 이는 마(魔)를 물리치는 강건함의 발로이리라…….’

구결을 외며 성운심법을 운용하자 그제야 짜증내듯 몸 안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천살의 기운.

항마의 기운을 품은 내공이라 그런지 효과가 좋긴 하다.

천살성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면 뭔 수를 써서라도 더 많이 확보해 둬야겠지.

“……그래서 여긴 어딘데?”

정신을 차려보니 아담한 크기의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곳이었다.

톱니 모양 잎과 보라색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나무들.

아무래도 은성상단의 재배지로 흘러 들어온 모양.

“아, 이거 뽕나무구나?”

가까이서 보자 생김새가 눈에 익었다. 보랏빛으로 잘 익은 열매들은 오디였던 모양.

마침 배고팠던 차라, 열매를 한 움큼 쥐어 오독오독 깨물어 먹었다.

“은성상단에서 양잠업을 하나 보네.”

거대한 뽕밭의 규모와 수확되지 않아 여물은 오디를 보자 그런 결론이 도출됐다.

흔한 경험은 아니지만, 이쪽도 예전에 누에를 길러봐서 말이다.

“옛날 생각 나는구만.”

코흘리개 시절, 보육원 원장님이 누에 사육 세트를 사 오신 적이 있다.

그 유치원에서 올바른 인성을 함양하겠답시고 반 단위로 햄스터를 기르는 것처럼.

원장님 또한 문제아가 많은(특히 내가 그랬다) 보육원에 훈기를 불어넣고 싶었던 모양.

냄새나 짖음 걱정도 없고 가격도 만만한 누에 세트를 쿠펑에서 골라온 것이었다.

그렇게 꼬물거리는 골드실크 품종의 사육 담당은 내가 되었지.

처음엔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녀석이 뽕잎을 갉아 먹고 영롱한 금빛 고치를 만들자 생각이 좀 달라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 고치가 값비싼 비단의 재료란다.

당시 나는 용돈이 부족해, 푸키몬 빵을 당근나라에서 되팔이하거나 줄 대신 서주기, 애완동물 대리 산책, 간단한 그림을 그려주는 등.

일을 해결하고 감사와 돈을 받는, 앵벌이의 참맛을 깨달아 가고 있었는데, 그 싯누런 고치를 보자 무언가 촉이 오고야 말았다.

일반인들은 접해보기도 힘든 비단의 천연 원재료, 희소성이 넘치고 황금빛이라 무언가 신비해 보이는 외양까지.

삼천 원쯤에 판다고 글을 올리자 몇몇 사람이 호기심에 사 가더라.

억지로 해야 하는 일이 돈벌이 수단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사료값이야 어차피 원장이 대주니까. 나는 돈만 긁어내면 되는 쌉이득 구조.

그럴듯한 포장지를 구해와서 운수대통, 시험합격, 사업번창 같은 마케팅까지 곁들이자 나중에 가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장사가 되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사육장을 확장하고, 보육원 애들을 몇 명 고용해 본격적으로 팔아보려는 찰나.

“거기서 딱 걸려 버릴 줄이야.”

갑자기 씀씀이가 늘어난 것을 기이하게 여긴 원장에게 발각당해 실크공장(?)이 폐쇄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수포로 돌아간 내 누에 제국의 꿈.

“가슴 아픈 일이었지.”

그래도 수요 있는 곳에 돈 벌 기회도 있다는 진리를 어린 나이에 깨우친 경험이기도 했다.

이는 훌륭한 해결사의 밑거름이 되었지.

오독. 오도독.

오랜만에 달짝지근한 오디를 씹자 새록새록 떠오르는 지구의 추억들.

그런데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뽕나무의 풀잎 사이로 희고 둥근 얼굴이 불쑥 솟았다.

“어?”

“어머.”

눈이 마주치자 서로 동시에 놀랐다.

곱게 접은 부채와 연꽃이 금실로 수놓아진 비단옷의 여인.

그녀는 ‘네가 왜 여기에?’라는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은화란 누님?”

여인의 정체는 은성 가문의 백두혈통, 영앤리치 은화란 상주 누님이셨다.

아무래도 사색에 잠겨 이 뽕나무밭을 산책하고 있었던 모양.

“그 누님이라는 칭호는 참……. 끙, 아니다.”

거리감이 전무한 그 호칭에 흠칫하는 은화란이었다.

뭐라 따질까 고민하다가, 아직 어린 데다 황 노야의 제자니 그냥 넘어가 주는 느낌.

촉법, 꽌시 실드 든든하군.

“단무진이라 그랬니?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 들어온 거니?”

장원 내에서도 외진 지역에 있는 재배지라, 은화란의 눈은 의아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게, 정신없이 쫓기다 보니 이곳이더라고요.”

등 뒤에선 살기 등등한 주먹질이 쏟아지고, 천살성은 그에 반응해 미쳐 날뛰는 데다가, 선풍보까지 펼쳐야 되니 정신을 차릴 새가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니? 장원 내에서 쫓겨? 대체 어떤 이가 그런 짓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일까 싶어 걱정스레 묻는 은화란.

“있어요. 애 패는 거 좋아하는 노인네가.”

나는 벌겋게 부은 뺨과 혹이 난 정수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참 옴팡지게도 팼네. 허풍진인이란 말을 꾹꾹 담아두고 있었을 줄이야.

“……?”

그 대답에 더욱 아리송해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은화란.

방금 내가 말한 게 차마 황걸개라고는 상상도 못 하는 모습이었다.

이미지 관리를 잘했구나. 다른 사람들에겐 여전히 신비 도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모양.

같이 부대껴 보니 거지도 그런 상거지가 없던데.

“상단에서 널 괴롭히는 인간이라도 있는 거니? 그렇다면 이름을 말하렴.”

느닷없이 굴러온 돌이니 박힌 돌에게 따돌림이라도 당한다고 생각한 모양.

하지만 난 쟁자수들과 사이가 좋았다. 남들 두 배, 세 배만큼 표물을 옮겨 주니 말이다.

“음, 그게요.”

진실을 말해 스승에 대한 신비감을 깨트리긴 뭣하고.

수련에 관해 설명하기도 애매해서 적당히 둘러대자 대화가 어색하게 뚝 끊기게 됐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바도 없고, 그녀 또한 자신을 누님이라 부르는 꼬맹이와의 대화가 익숙지 않은지 대화거리를 못 찾고 있는 모습.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덴 역시 스몰 토크지.

날씨가 어떻니, 하는 일이 어떻니 하면서 물어보고 또 공감해 주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다. 흥신소를 운영하면서 얻은 사교 스킬.

“누님, 양잠업 하시나 봐요?”

나는 가볍게 화두를 던졌다.

“……뭐?”

“뽕밭 규모를 보니, 누에고치 주기마다 비단이 오십 필쯤 나오겠네요. 이야.”

돈 많이 벌겠네. 이 시대의 양잠업은 그 뭐냐, 돈을 갈퀴로 쓸어 담는 기술집약 산업이니까.

그런데 질문을 받은 은화란의 반응이 무척 요상했다.

무언가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

“네가 그런 걸 어떻게……?”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은화란이 뚝딱거리고 있었다.

***

이 세상은 돈이 있어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다.

날고 긴다는 무림인도 결국 먹고 싸고 입어야만 하는 존재들.

폭력으로 그것을 성취한단 점에서, 어찌 보면 그 누구보다 욕망에 사로잡힌 놈들이기도 했다.

‘차풍사선(借風使船)에 전가통신(錢可通神)이라.’

그러한 내용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휘갈겨놓은 글귀를 방 한편에 걸어놓은 만금전장의 전주실.

욕심보 마냥 턱살이 축 늘어진 중년인이 무언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바위를 깎아 만든 책상을 손끝으로 툭툭. 두들기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 누렇게 번쩍이는 말발굽 모양의 금원보(金元寶)와 수려한 금동향로.

서역에서 건너온 오색찬란한 보석과 장식품이 사방을 한가득 장식했음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무언가를 탐하는 그런 표정.

“이달의 상납금입니다, 금황도 전주님.”

만금전장의 주 수입원 중 하나는 돈 놓고 돈을 먹는 고리대금업이다.

염소수염이 돋보이는 만금전장의 총관이 누군가의 고혈(膏血)이 잔뜩 담겨 있는 금궤를 쿵, 내려놓았다.

그 무게가 실로 육중했고, 제법 훌륭하지 않냐는 표정으로 가느다란 수염의 끝부분을 당겨대는 총관.

허나 금황도는 눈앞에서 샛노란 금붙이들이 반짝이고 있음에도 불만족스럽단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창고에 산처럼 쌓인 이런 재화가 아니었기에.

“은화란, 고년은 우리 제안에 어떻게 반응하더냐.”

금황도의 꿈은 좀 더 원대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대들보가 휘청이기 시작한 은성상단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

그리하여 고리대금업만이 아닌, 전국적인 유통망과 상행, 표행 능력도 거머쥐어 북경 최대의 상계 세력으로 거듭나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허나 그동안은 저들끼리 끈끈하게 붙어먹은 상인들의 때문에 좀처럼 진입이 쉽지 않아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은성상단이 그야말로 금(錦)과 금(金)을 낳는다고 알려진 양잠사업에 눈독을 들였고.

이를 매우 고깝게 여긴 황실의 누군가가 자신들의 손을 잡아 준 덕에 일이 어부지리로 쉽게 풀리게 된 상황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하더군요.”

그만한 미색을 지녔으면서도 추문에 휩쓸리지 않고 정숙을 유지하던 여인이다.

본래라면 추잡한 소문의 넷째 공자 따윈 진작에 내쳤을 것이나,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것 자체가 은성상단의 상황이 여의찮다는 증거.

“시간이라도 끌어볼 셈인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아마 누에 치는 법과 양잠업을 진두지휘해 줄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벌써 2주가 지났다. 거기다 목 빠지게 기다리는 잠양사는 끝내 도착하지 않을 예정.

그 사실을 모종의 세력에게 들어 혼자만 알고 있기에 금황도를 턱살을 쓸어내리며 고소를 터트렸다.

요즘 상단을 살려내려고 이곳저곳 동분서주하고 있다던데, 그 모습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흰 나비가 날개를 파닥이는 모습 같지 아니한가.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 법.”

은진청. 그 불의를 참지 않는 꼿꼿한 노인장이 골로 갔으니, 이제 풍전등화에 빠진 은성상단이 살아날 길은 없다.

남은 건 아버지가 쓰러져 전후 사정도 모른 채 상주 자리를 물려받은 반반한 계집 하나뿐.

황실이 비단 사업권마저 회수해가면 녀석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그때가 되면 더욱 가혹한 조건으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터.

그렇게 야금야금 상단을 좀먹어 들어가다가, 어느 날 고년이 제 아비를 따라 풀썩 쓰러지면 은성상단은 그걸로 끝.

상단은 넷째 녀석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리하면 만금(萬金)은 북경을 휘어잡는 거대한 집단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고.

‘어리석은 은진청 놈, 네가 화를 부른 것이다.’

능력 하나는 인정할 만했다. 하늘의 별따기라 알려진 그 양잠 사업권을 기어이 따낼 줄이야.

하지만 과한 욕심은 으레 독이 되는 법.

녀석은 일의 성사를 위해 황궁의 도화공주와 손을 맞잡았고, 이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지신 분들이 많았다.

그 공주에게 금력(金力)이 가세하는 걸 경계한 것이다.

파견된 잠양사가 실종 처리 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

은(殷)가 녀석들은 아마 영문도 모른 채 발만 동동 구르다가 이대로 침몰하겠지.

“은진청, 고놈이 멀쩡했다면 어떻게든 살려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자신과 다르게 북경 상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인망도 두터운 인물.

하지만 지금 은성이라는 배를 조타하는 건 경험도 일천하며 새파랗게 젊은 여인이었다.

100년 묵은 거목이라 하더라도 아래에서 도끼질이 계속되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법이지.

“다시 한번 혼담 서신을 보내거라. 이번엔 제 처지를 깨달을 수 있는 문장을 듬뿍 담아서 말이다.”

“예, 금황도 전주님.”

고리대금의 악명으로 인해 인면수심의 수전노나 돈금(豚金)이라 불리는 등,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은 이제 곧,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하북의 상권을 휘어잡으리라.

***

누에가 먹고, 자고, 싸는 곳을 잠실이라 부른다.

누에 잠(蠶)에 집 실(室). 한국의 그 잠실동과도 한자가 똑같았다.

그야 옛날엔 거기가 양잠업의 총본산이었으니까. 아주 오래되지는 않은 이야기다.

그러다 화학 공업이 발달하고 인조비단(人絹)이 등장하면서 누에 사업은 자연스레 사양길에 들어섰었지.

그런 연유로 내가 만든 진짜배기 황금 고치가 사람들에게 무척 낯설면서도 희귀하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무진아, 직접 살펴보니 어떠니?”

그리고 오늘, 오디를 훔쳐 먹다가 난데없이 끌려오게 된 은성상단의 잠실.

처음엔 이 금수저녀가 돈을 긁어모으는 자기 사업체를 자랑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절대로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 개판이네.”

11화 첫 고갱님

갑자기 누에를 칠 줄 아냐고 묻더라.

그래서 칠 줄 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 손을 냅다 잡아 이끈 은화란.

“저 꼬맹이는 누구여?”

“상주님이 손수 데려오던데?”

“혹시 쟁자수 시험 통과했다는 걔 아니냐?”

상단의 최중요 사업체인 잠실.

난데없는 꼬마의 방문에 이곳 인부들도 떨떠름한 듯했다.

하지만 입가에 아직 오디즙이 남아 있는 나보다 더 얼떨떨할까.

“누에를 길러봤다고 했지? 농이 아니라 참으로.”

“예, 그렇긴 한데요.”

나는 전체적으로 어수선한 시설 내부를 살피며 그리 대답했다.

근데 이곳은 누에 사육장인데도 뽕잎 사각거리는 소리가 별로 들리질 않았다.

“그럼, 여기 누에들을 한번 살펴봐 줄 수 있겠니? 뭐가 문제인지 알아내야 하거든.”

천하 십대 상단의 상주가 13살 꼬마의 손을 붙잡으며 그런 부탁을 해왔다.

그녀의 얼굴에선 뭐랄까.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절박한 이의 분위기가 풍겼다.

“뭐 살펴보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라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딱 십 분만 살펴도 알아챌 수 있는 이곳의 막장 상황.

“……개판인데?”

그래, 개판이었다.

누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모아놓고 길러보라 하면 딱 이런 상황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었다.

“공방장. 누에씨의 부화는 어떻게 됐나요?”

“……면목이 없습니다. 반절만 살려내는 데 그쳤습니다.”

부화장을 가리키는 잠실 공방장의 손길.

누에가 가장 연약한 상태로 태어나는 곳인데, 채광량이나 풍량, 습도까지 뭣하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창문을 통해 직사광선이 그대로 내리쬐는 것을 보고 나는 이마를 탁 쳤다.

누에는 어둡고 좁은 곳으로 들어가 고치를 짓고, 나와서 알을 낳는다.

왜 그러겠는가. 자식을 최대한 많이 살려서 부화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놈의 공방장은 양기(陽氣)를 쬐어주기 위함이라며 뙤약볕이 내리쬐는 곳에 부화장을 차려놨다.

이것이 어이없음 1스택.

“에휴, 똥을 아주 푸짐하게……. 뽕잎 갈아줘야겠네.”

인부 하나가 신선한 뽕잎을 제공하겠답시고 고개를 치켜든 누에들을 잎에서 강제로 뜯어냈다.

누에들이 저러는 건 뽕잎에 몸을 고정해 허물을 탈피하기 위함인데, 저렇게 되면 사실상 죽여 버린 셈이다.

뽀득-

고로 저것이 2스택.

“공방장님, 이 죽은 것들은 어떻게 할까요?”

인부 한 명이 누에가 우수수 말라죽은 누에틀을 들어 올렸다.

물렁해진 표피와 검은 반점들. 증세를 보아 아마 고름병이나 무름병으로 정도로 추정됐다.

확실한 건 누에와 잠구류가 세균에 오염됐으니, 닿았던 모든 설비를 소독하거나 갈아치워야 한다는 것.

“어쩌긴, 누에는 태워 버리고 누에틀은 양지바른 곳에 말렸다가 다시 쓰자고.”

하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미생물 개념이 없다 보니 이렇게 문제 된 것만 태우는 정도였다.

이래서 주기적으로 누에가 수십 마리씩 뭉텅이로 몰살당하는 거겠지.

음기(陰氣)를 지운답시고 얼떨결에 누에틀을 자외선 살균한 게 그나마 다행인 일일까.

아무튼 이것이 3스택.

총합 평가. 답 없음.

“무진아, 어땠니? 뭐가 문제인지 알 것 같니?”

“…….”

나는 은화란 상주의 질문에 어디부터 짚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설치된 잠구류나 시설 수준을 보면 어느 정도 기반은 갖춰진 듯한데, 왜 누에 치는 기술만 이따위란 말인가.

마치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들 같았다.

후두둑.

그리고 아까 죽은 누에 버리는 데 썼던 바구니로 갓 부화한 1령 누에를 옮기는 인부.

잔류 병균이 저런 식으로 옮았구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말았다.

“아- 진짜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닌데.”

그런데 목소리가 컸나 보다.

순간 인부들의 작업이 우뚝 멈췄다.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어럽쇼.

***

황걸개는 말라비틀어진 만두를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퍼석하고 군내 나는 것이 쥐뿔도 없던 일결(一結) 시절이 생각나는 맛이었다.

쭈왑쭈왑.

“흘흘, 감히 노부의 안주를 훔치려 들어?”

단무진 그놈이 품에 슬쩍 넣은 것을 눈치채고 다시금 훔쳐냈다.

날아오는 주먹질을 피하느라 주머니가 털린 것도 몰랐겠지.

역시 갓 쪄낸 만두보다, 몰래 훔쳐낸 만두가 천하일미(天下一味)인 법.

“좀 더 두들겨 줬어야 하는 건데.”

만두를 꿀떡 삼킨 황걸개는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력이 실린 주먹질로 혈도와 경락을 두들겨 막힌 혈을 타통하고 신체의 잠재력을 이끌어 내려 했는데.

이 괘씸한 녀석이 아파 뒤지겠다며 자신의 섬세한 손길을 피해 버렸다.

“좀 세게 팼기로서니, 그래도 다 지를 위한 것인데, 쯧쯧.”

등짝을 ‘짜악-!’ 후려칠 때마다 갓 잡힌 생선처럼 펄떡펄떡 뛰더라.

거기에 초식에 살기를 섞여 자극하자, 내부의 천살성이 마구 날뛰는 장면도 볼 수 있었다.

그때 골목에서, 자신의 금나수(擒拿手)를 본능적으로 쳐냈던 일이 재현된 것이다.

아무리 손에 힘을 뺐다지만, 얼마 전에는 무공조차 모르던 녀석이 아닌가.

생존의 위기라 느꼈는지, 이론만 쑤셔 넣은 경신법도 어설프게나마 펼치는 모습에 황걸개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마치 무공을 위해 태어났다 알려진 전설의 천무지체(天武肢體)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녀석의 신체는 삼재(三才), 오행(五行), 태극(太極)을 조화롭게 품긴커녕, 살심만 그득하지만 말이지.”

그러니 자신이 본 것은 보다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천살성이 무공을 흡수하는 과정이었으리라.

무서울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 이 또한 하늘이 내린 무재(武才)라는 거겠지.

비록 그 의도와 저의는 한참 다르겠지만 말이다.

“만약 이러한 재능을 올바른 일에 쓰이도록 교정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살귀가 되라는 별의 숙명을 거스르고, 맑고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던 아이.

만에 하나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데 성공하면, 이는 곧 정도무림의 홍복(洪福)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론 실패하면 이제껏 없던 최악의 살인귀를 손수 육성해 낸 꼴이 되고 말이다.

고로 비기인물교(非其人勿敎). 죽일 놈인지, 살릴 놈인지 끝없이 검증해야만 했다.

“으잉? 갑자기 어깨 무거운데……?”

생각이 많아지니 괜시리 그랬다.

그래서 다시 생각을 줄이고자 창고에서 슬쩍해 온 소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혀와 식도를 화끈하게 태우는 독한 술기운. 황걸개는 크어, 소리와 함께 술병을 내려놨다.

“흘흘, 생각해 보면 이 또한 필연일 수도……. 그분의 말대로 말이지.”

주화입마로 기혈이 뒤틀리고 내력이 폭주하여 눈과 코, 귀로 피를 쏟아내고 있을 무렵.

자멸을 목전에 둔 그의 앞에 산책하듯 밤하늘을 걸어 내려온 도사가 한 명 있었다.

눈처럼 흰 백의에 탐스러운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선풍도골의 도인.

그는 심마에 패배해 온몸의 혈도가 부풀어 오른 자신을 딱하게 여기더니, 어떤 심법의 구결을 읊어 주었다.

별빛을 몸 안에 담을 수 있는 공전절후의 심법. 필시 오랜 깨달음과 심득(心得)이 녹아 있을 요체.

허나 그는 눈앞의 사람을 구하고자 망설임조차 없었다.

모든 것에 초연한 듯한 그 모습.

초면인 자신에게 이런 걸 베풀어도 되냐고 묻자, 도인은 천지만물에 우연은 없으며, 이 또한 원시천존의 안배라 그랬었지.

어딘가로 이어질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 뒤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그분.

그러니 별의 기운을 다스리는 자신에게, 흉성을 품은 아이가 온 것도 어쩌면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

“끌끌.”

목을 탁치고 알싸하게 내려가는 소흥주.

녀석이 돌아오면 추궁과혈(推宮過穴)을 마저 해줘야겠다.

이번엔 화풀이식이 아니라, 제법 살살해 줄 생각이다.

맷집도 튼튼하고 하니, 저번엔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감정이 실렸었다.

“근데 이 녀석, 어디로 내뺐길래 좀처럼 돌아오질 않는 거냐.”

오늘은 성운심법을 수련할 차례인데 말이다.

이대론 못 살겠다고 뛰쳐나가더니, 슬슬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또 어디 가서 사고 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몇 주간 데리고 다니면서 깨달았다. 이거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녀석이다.

거기다 그 특유의 말투가 가끔 사람 복장을 뒤집어 놓곤 했다.

“뭐…… 별일은 없겠지.”

걱정해 봐야 별 소용없는 짓이고.

배고프다 싶으면 뭔갈 슬쩍하러 기어들어 오겠지.

해서 황걸개는 마시던 소흥주나 마저 들이켜기로 했다.

“크어.”

***

남들에게 이래라저래라하기 좋아하는 부류들이 있다.

세간에서는 이를 훈수충(訓手蟲)이라 한다.

안 그래도 일이 더럽게 안 풀리는데, 누가 와서 이게 잘못됐니, 저걸 실수했니 그러면 빡치는 법이다.

설사 그게 맞는 말이고, 앞서 해봤던 자의 충고라 할지라도 말이다.

“네깟 꼬맹이가 뭘 안다고……!”

“새파랗게 어린놈이 어른들한테 어디서 지적질을!”

안 그래도 누에가 자꾸 죽어 상주 볼 낯이 없고, 스스로가 비참해 죽겠는데, 듣도 보도 못한 잡놈이 참견까지 해대니 관리자와 인부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러댔다.

그리고 이러한 성토와 반발은 결국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이게 쉬워 보여?”

“네가 누에를 양식해 봤어? 어?!”

“답답하면 네가 직접 길러보던가!”

인부와 기술자들은 훈수충에 대한 반격기 ‘꼬우면 네가 해보던가!’를 시전했다.

그리고 그거야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양잠 정보야 검색 한 번에 전문자료까지 주르륵 나오는 현대에서 실컷 읽어봤고, 이를 토대로 실제로 키워보기도 했으니.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그럼 저랑 내기하실래요?”

어른들의 으름장에도 내가 꼬리를 말지 않고 강하게 나서자 흠칫하는 잠실의 인부들.

내 당당한 태도에서 무언가 있다는 것을 느낀 걸까. 갑자기 저들의 말수가 줄어들었다.

“얘아, 너 정말 누에를 칠 줄 아는 거니?”

그리고 이러한 신경전을 가만히 지켜보던 은화란이 돌연 그렇게 물어왔다.

“네, 칠 줄 알아요.”

“많은 이의 생계가 걸린 일이야. 아무리 노야의 제자라도 농으로 한 소리면 큰 벌이 내려질 수도 있어.”

상단의 운명이 걸린 중대 사항이었기에, 확신을 원하는지 나름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

나는 증명을 위해 잠구류 사이의 말라비틀어진 누에 하나를 꺼내며 대답했다.

“이상하게 누에들이 3령 시기에 떼로 죽지 않던가요? 허물을 벗지 못한 상태로요.”

탈피 중인 누에를 뜯어내던 걸 봤거든.

이건 무름병 같은 병충해(病蟲害)와는 다르다. 지식의 부족으로 일어난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그걸 어떻게…….”

정답을 맞혔는지 그녀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리고 덩달아 당황하며 입을 여는 인부들.

“그, 그냥 때려 맞힌 게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누에는 어느 구간에서건 우수수 죽습니다. 우연일 수도…….”

걸핏하면 우수수 죽는다니, 참 웃기고도 슬픈 발언이었다.

전장에서도 4할이 죽으면 전멸 판정을 받는데, 여긴 매번 8할 이상을 죽여대니.

아는 게 없으니 훈수와 조언을 구분 못 할 만도 하다.

그저 이런 꼬맹이에게 상단의 중대사를 맡겨선 안 된단 생각뿐이겠지.

하지만 다행히도 그걸 결정하는 건 저들이 아니었다.

“누님, 아까 인부들 얘기를 들어보니, 조정의 관리가 곧 잠실을 검증하러 온다면서요?”

금결인지 뭔지, 통과 못 하면 막대한 손실과 함께 사업이 통째로 백지화되고 말이다.

“……그렇지.”

눈 밑에 얇게 드리워진 다크서클이 그녀가 짊어진 부담감을 짐작하게 해줬다.

“이대론 답 없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면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요? 멱살 잡고 살려 볼 테니, 전권을 주시죠.”

어차피 막막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누에에 대해 안다고 말하자, 혹시나 싶어 나를 붙잡아 온 것이겠고.

그렇다면 그 마지막 지푸라기가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팍팍 밀어주란 말이다.

“밑져봐야 본전이라…….”

그 대사가 그녀의 마음을 뒤흔든 듯했다. 부채로 얇은 턱을 톡톡 두들기는 은화란.

“아까 내기라 그랬었지? 내용이 뭐니?”

내기. 양자가 무언가를 걸고 승부하는 것.

난 제법 자신이 있었다. 일단 저 정신 나간 직사광선만 막아도 누에씨의 부화율이 두 배로 오를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상대가 거지 출신의 정체 모를 꼬마니, 그럴듯한 담보가 필요한 것이겠지.

나 또한 그 대가로서 거대 상단 상주에게 무언가를 뜯어 낼 수 있을 테고 말이다.

“상주님. 설마 저 쟁자수 꼬맹이 말을 믿으시려는 겁니까?”

“갑자기 와서 시비나 걸어댄 녀석을…… 저희보다 더요?”

인부들의 반발이 있었다.

저들이 양잠이 지금껏 성과가 있었다면 그녀도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

“스승님께 한동안 빈객으로 있어 달라 부탁해볼게요. 여기서 몇 년은 더 수련하고 싶다고.”

“……!”

낭아봉 괴인의 일로 표국이 망할 뻔했던 은화란은 고수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은 상태였다.

하지만 황걸개는 얼마나 더 머물러 줄지도 모르고, 무소유의 현신 같은 사람이나 금은보화, 권력으로도 잡아 둘 수 없는 바람 같은 존재.

그런 상황에서 부모자식과도 같은 사제지간의 소년이 부탁해본다고 하니 그녀도 귀가 솔깃했으리라.

“가능하니?”

“그럼요.”

물론 불가능했다.

대외적으로만 그렇게 알려졌을 뿐이지, 내가 천살성에게 삼켜지면 지체없이 목을 날릴 사이였다.

하지만 저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

그저 타고난 무재를 알아본 황 노야가 나를 제자로 거둔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 내가 이 누에 문제를 해결해 버리면 아무 문제 없는 거니까.

윈-윈 할 수 있는 상황이다.

“너 또한 분명 바라는 것이 있을 테지. 안 그러니?”

양잠이든, 표행이든 결과에 따라 적어도 하나는 확실히 살릴 수 있단 판단이 섰나 보다.

그녀는 내 요구사항을 물어왔다.

“성공하면 누님이 생각할 때 걸맞다 싶은 보상을 주세요.”

즉, 보수는 오마카세로 받겠단 뜻.

이것도 흥신소 일을 하면서 배운 나름의 협상 기술이었다.

그녀는 어딜 가도 대접받는 검기상인(劒氣傷人)의 고수임에도, 한 푼도 받지 않고 도와주는 황걸개에게 약간의 부채 의식을 지닌 듯했었지.

전대 상주에게 무슨 빚을 졌다고 하지만 그게 뭔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제자인 내가 그 마음의 짐 부분을 대신 받아 주겠다는 것이다.

약간 뇌물과 비슷한 원리지. 본인이 한사코 거절할 시, 자녀나 부인에게 불쑥 줘버리는 거다.

물론 그 양반은 내가 받든 안 받든 쥐뿔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좋아, 무슨 뜻인지 알았어.”

다행히도 예비 의뢰인이 의미를 알아들으신 모양이다.

나는 양손을 싹싹 비비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권을 줄 테니, 5령 누에 생존율을 7할까지 끌어올려 보렴.”

드디어!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등고자비(登高自卑)에 마부위침(磨斧爲針)이라. 다시 한번 천직을 되찾는 순간인 듯했다.

타인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감사와 돈을 받는, 해결사 일의 시작.

“해낼 수 있겠지?”

“아, 믿어만 주십쇼! 고갱님!”

고객만족 최우선. 다시 찾는 친절과 봉사.

단무진 흥신소의 기념비적인 첫 고객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12화 실마리

상주 은화란이 전폭적인 지지 아래, 나는 잠실의 전권을 쥐게 되었다.

어제만 해도 허리가 부서져라 표물을 나르던 일개 쟁자수였는데 말이다.

그리고 권한을 얻자마자 가장 먼저 실시한 것은 부화장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었다.

“인석아! 자라나는 새싹에게 따듯한 양기는 필수란 말이다!”

그러자 공방장이 노발대발 따지고 나섰다. 햇볕을 쫴야만 병과 음기를 몰아내고 올바르게 생장(生長)할 수 있단다.

하지만 누에는 광합성을 하는 식물이 아니었다.

거기에 사람도 땡볕에서 교장 선생님 훈화를 한 시간쯤 듣다 보면 정수리가 뜨끈해 미칠 지경인데, 피부층도 얇은 이 미물은 어떻겠는가.

“은화란 누님.”

하지만 그걸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건 귀찮은 과정이기에, 나는 그냥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기로 했다.

“공방장, 어차피 지금 방식으론 잘 안됐잖아요. 그러니 한 번만 믿어보죠. 저 아이는 뭔갈 아는 듯하니.”

상단 최고 권력자를 등에 업으니 든든하기 그지없군.

툴툴거리던 중년의 공방장이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물론 뭔갈 아는 게 아니었다면 그때 가서라도…….”

잘 가다가 왜 마지막에 말꼬리를 흐리는 건데. 듣는 사람 무섭게끔.

상단의 명운이 걸렸으니, 허풍이었다면 큰일로 번질 거란 눈빛이 일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 몸은 쫄지 않는다.

상남자 단무진의 방식은 설득보단 행동을 통한 증명이었으니까.

지금껏 그렇게 의뢰인의 신뢰를 얻어왔다. 고로 전진 또 전진일 뿐이다.

“그래서, 그다음은 뭐니?”

은화란의 질문에 나는 누에똥과 뽕잎이 수북이 쌓인 누에틀을 가리켰다.

“일단 잠똥갈이부터 다시 배웁시다.”

병충해를 대비하기에 앞서 인재(人災)부터 막는다. 나는 3령 누에가 벗어낸 허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뽕잎에 몸을 고정해 탈피하는 누에의 습성을 알리고, 강제로 떼어내면 어떻게 질식해 죽는지도 상세히 설명해 줬다.

“그럼, 뽕잎을 갈 때마다 누에들이 우수수 죽던 게…….”

“우리 때문에 그런 거였다고?”

정답이다, 누에술사.

자신들의 잘못을 추론하는 능력이 뛰어나군.

“그리고 누에틀에 물 먹인 유지(油紙)를 깔아 습도 조절을 해주고, 창문의 개방 시간을 조절해 채광량도 관리하셔야 합니다.”

튼튼한 산누에나방도 아니고, 양식용 누에는 개복치 그 자체다.

생존 능력을 대부분 잃었기에 인간의 세심한 손길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누에가 번성할 적정 습도, 환풍, 채광에 대해 상세하게 일러줬다.

한때 돈방석을 꿈꾸며 열심히 찾아봤던 정보들.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미친 듯이 파고드는 게 내 불치병이다.

해결사가 돼서도 그렇게 파고들다가 배때지에 칼침까지 맞지 않았었나.

뭐 아무튼.

“무진아, 그다음은?”

작은 꼬마가 잠실에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아직 맞는 길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은화란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다음 행보에 대해 물어왔다.

황실 관리의 방문이 몇 달 남지 않아 마음이 초조한 모양.

일단 씨누에 절반을 몰살시킨 직사광선을 걷어내고, 습도, 채광 관리와 제대로 된 잠똥갈기를 전파했으니.

이것만 해도 누에의 생존율이 대략 5할쯤 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했던 7할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막아야만 할 악순환이 하나 있지.

“누에가 살아남으려면 그걸 만지는 손이 청결해야 합니다. 그러니 물과 비조(肥皂)를 준비해 주세요.”

나는 굳은살 투성이에 시커먼 때가 잔뜩 낀 이 시대 인부들의 손을 잡아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아마 이 손으로 똥도 닦고 밥도 먹겠지. 청결하지 않은 손은 병균 전파의 근원지다.

“비조? 그 명문가 여식들이 쓰는 세안 도구?”

“그게 누에치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비조란 조개껍질을 태운 재에다 쥐엄나무 열매를 으깨 넣고, 기름(돼지이자)과 함께 굳혀 만든 이 시대의 비누였다.

사람 먹을 기름도 부족하다 보니, 자연히 이런 미용 상품은 사치품에 속했고 가격도 제법 상당했다.

돈이 제법 드는 조언에, 그래도 되겠냐는 듯 상주에게 몰리는 눈동자들.

“판매용으로 매입해 둔 향(香)비조가 좀 있으니, 그걸 활용토록 하죠.”

다행히 상주는 팍팍 밀어주기로 결정한 모양.

의아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지만 무시했다.

지구에선 초등학교에서도 배우는 내용이다. 물은 수용성 세균을, 비누는 지용성 세균을 쓸어낸다.

“그리고 잠구류를 소독하기 위함이니 독한 술이 많이 필요해요. 이것도 징발해 주셨음 하네요.”

알코올이 유의미한 소독 효과를 지니려면 도수가 최소 45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탁주, 소흥주 같은 양조주는 효모의 한계로 인해 도수가 20을 넘기 힘들었다.

고로 나는 이를 펄펄 증류시켜 도수를 높인 주정(酒精)을 정제할 생각이었다.

편의점 맥주로 50도짜리 증류주를 만들었던 어느 동영상 스트리머처럼 말이다.

그렇게 누에와 닿는 모든 것들을 소독해 버리면, 더는 몰살당하는 일 없이 누에 생존율이 비약적으로 뛰게 되겠지.

어쩌면 약속된 7할을 넘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진아, 그것들 대부분은 표물이라 수레에 실어놨고, 나머지는 황 노야 드시라고 남겨놓은 건데…….”

“그 양반은 이번 기회에 술 좀 끊어야 해요.”

이건 진심이었다.

퍼마시면서 취기도 날리지 않더라. 조만간 진짜 원시천존 뭐시기 곁으로 갈 수도 있다.

“상주님, 저 이상한 소리들을 믿으시는 겁니까?”

조심스레 반발해 보는 인부들.

은화란은 자신감이 깃든 내 눈을 찬찬히 바라보더니 이내 작게 한숨 지었다.

“일단 이 아이 말대로 진행하죠.”

그녀의 말 몇 마디에 반발은 묵살됐다.

역시 이 상단의 무소불위 권력. 칼을 뽑으면 뭐라도 한번 썰고 들어오는 여장부 스타일이다.

“창고에 가서 술을 모조리 꺼내 오세요.”

든든하다 은(殷)두혈통.

나는 불도저 같은 독재자를 향해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만세. 만세. 만세.

***

황걸개는 차가운 돌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뺨은 바닥 모양대로 굳어 있었고, 머리는 봉두난발이었다.

“으음, 고놈은 아직인가…….”

왜 안 오나 싶어 진 총관을 붙잡고 알아보니, 은화란 상주가 붙잡아 갔단다.

나중에 사람을 보내 잠시만 쓰고 돌려주겠단 전언을 전해왔다.

그래서 심법 수련을 해야 하니, 밤에는 돌려달란 답변을 보냈던 참이었다.

“벌써 해 떴구먼.”

취기가 전부 가시기 전에 해장술이나 퍼마셔야겠다.

“딱 한 잔…… 한 병만 더 마셨으면 이번에도 원시천존이 보일 뻔도 했는디…….”

어슬렁어슬렁 술 쩐내를 풀풀 풍기며 은성상단의 창고로 향하는 황걸개.

노인은 휘청휘청, 무너질 듯 안 무너지는 신묘하고도 기묘한 걸음걸이를 선보였다.

마치 개방의 취권(醉拳)을 보는 듯한 움직임.

“……또 오셨소?”

창고지기는 이곳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황걸개가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받은 명이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창고문을 활짝 열었다.

“흐흐, 흘흘.”

알딸딸한 기분. 황걸개는 출출한 배를 움켜잡고 객잔에 들어선 식객처럼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그래, 푹 묵힌 여아홍(女兒紅) 딱 좋겠……. 으음?”

그리고 황걸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됐다.

가지각색의 술로 가득해야 할 창고가 텅 비어 있었다.

“이게, 당췌…… 머선?”

소흥주는커녕 값싼 탁주마저도 싹쓸이된 청천벽력 같은 광경.

그렇다고 밖에서 사 오자니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다.

“아니, 왜, 우째서.”

즉, 오늘 하루는 술 없이 말짱한 정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뜻.

어느 제자의 조언이 만들어 낸 광경에 황걸개의 의식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그 냉혹한 현실에 점점 가시기 시작하는 취기.

“허어, 으어어…….”

현실을 부정하려는 이의 괴상한 신음이었다.

오늘 황걸개의 세상이 무너졌다.

***

단무진의 잠실 리빌딩 사업.

즉, 단킨지 컨설팅이 시작된 지 약 한 달.

어느 정도 성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누에가 언제 이렇게…….”

“바글바글해진 거지?”

사각사각.

누에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가 온 잠실에 그득했다.

내 조언에 따라 잠구류를 재조정하고, 소독을 진행하고, 뽕잎을 갈아주자 급격히 줄어든 누에의 폐사율.

이는 곧 누에 숫자의 폭발적인 증식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잘못 키우고 있긴 했구먼…….”

“저 꼬맹이, 아주 잠양사가 따로 없어.”

“대체 뭐 하는 아이길래.”

중간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조언의 효과가 눈에 띄게 드러나자 주변의 시선도 많이 누그러진 것이 느껴졌다.

이제 은화란의 명이 없더라도 내 말에 재깍재깍 움직여 줄 정도.

자기들 일자리도 걸렸다 보니 다들 성실하고 배우는 것도 빨랐다.

그래, 이들도 하면 되는 사람들이었어. 그저 관련 지식이 부족했을 뿐.

여기선 대부분의 정보가 알음알음 구전(口傳)으로 전해지니까 말이다. 국가가 감추려 들면 알 도리가 없지.

새삼 ‘딸칵’ 한 번이면 정보가 줄줄 나오는 지구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훈풍을 탄 듯 쾌속하게 진행된 양잠업.

“오오, 누에들이 움직인다.”

“알아서 저 꼬마가 만든 섶에 들어가는구먼. 신기한데.”

씨누에를 손가락 굵기만 한 5령 누에까지 키워 내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누렇게 ‘익은 누에’ 상태가 되어 내가 고안한 회전섶으로 쏙쏙 들어가는 누에들.

섶의 형태와 크기가 알맞았는지, 몸을 올린 누에들이 곧바로 몸을 둥글게 말고 실을 뿜어내 새하얀 고치를 짓기 시작했다.

“오오, 이렇게나 많이 살려 냈다니.”

첫 번째 섶이 거의 다 차오른 모습에 한 인부가 감탄을 터트렸다. 이전에는 보기 힘든 수율이었던 모양.

“누님, 이제 여유가 생겼으니 생사도 한번 뽑아보죠?”

부화용 누에의 숫자는 이미 충분히 확보했다.

아니, 차고 넘쳤지. 이전에는 5령 누에 생존율이 바닥을 쳐서 명맥을 유지하기도 벅찼으니까.

하지만 이젠 완전히 사정이 달라졌지.

해서 나는 인부들의 의욕 고취를 위해 그런 제안을 던져봤다. 사람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 눈으로 보여 줘야 성취감이 생기는 법이거든.

“한번 해보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은화란.

상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동안 실이 뽑히질 않아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했던 잠실 내 방직공(紡織工)들이 황급히 내 쪽으로 달려왔다.

“실 뽑는 도구는 준비됐네, 공자.”

“제발 성공해 주게.”

이곳 잠실의 기술자들.

실이 나와야만 옷감을 짤 수 있는 직업 특성상, 항상 하는 일 없이 봉급만 챙기는 것 같아 죄스러워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해결해 줄 듯하자 오늘 두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공자는 무슨, 단무진이라 불러주십쇼.”

내가 실이 둘둘 말린 고치를 몇 개 집어 준비된 소도구 앞으로 걸어가자, 곳곳에서 쏟아지는 기대 어린 시선들.

물레와 명주 가락 같은 수속(收束) 도구가 다 마련되어 있었다. 정말 누에만 문제였던 모양.

하긴 생명체를 기르는 건 농사와도 같아서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니.

“일단 고치에서 첫 끈을 찾아내야 해요.”

나는 먼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나는 양잿물에 누에고치들을 동동 띄웠다.

이러면 고치를 감싼 끈끈한 세리신이 융해되어 보다 쉽게 실을 풀어낼 수 있으며, 안에 있던 피브로인이 세상으로 드러나 빛을 굴절해 줬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아는 그 비단 특유의 은은한 광택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오오, 색이 변했어.”

“정말로 상주님의 옷과 비슷하게 반짝이는구먼.”

그 우아한 광택에 인부들이 한 차례 감탄을 흘렸다.

높으신 분들만 입고 다니는 비단옷의 원재료를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 신기할 만도 하다.

그렇게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지식 하나를 풀어낸 나는 이어서 작은 싸리비 같은 것으로 고치를 콕콕 찔렀다.

열댓 번 찌르자 까끌까끌한 싸리비 끝에 뭔가가 미세하게 걸리는 느낌.

물 양동이 위로 싸리비를 들어 올리자 하얗고 매끄러우며 기다란 뭔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진아, 설마 그거…….”

내 어깨를 덥석 짚으며 놀란 얼굴로 묻는 은화란 상주.

어려운 일의 해결책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실마리’를 찾았다고 한다.

“찾았다, 실마리.”

위기에 봉착한 이 은성상단을 되살릴 단초.

그 첫 끈이 싸리비에 수줍게 걸려 나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13화 도화공주

은화란의 아버지는 항상 그런 말을 하셨다.

상유인(商留人), 인유상(人留商).

장사란 결국 사람을 남기는 것이니, 눈앞의 이윤보단 될성부른 인재를 좇으라고.

수많은 상인의 존경을 받는 거상(巨商)이 친히 남긴 말.

갑작스러운 별세 이후, 자금난에 시달리느라 솔직히 잘 와닿진 않았는데, 이제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참 특이한 애야.”

부채로 입가를 툭툭 두들기며 어른들 사이에서 진두지휘 중인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녀.

유능한 꼬마 아이 하나가 삐걱거리던 사업 하나를 거의 정상 궤도에 올려놨다. 활기를 띤 채 순항하고 있는 양잠업.

덕분에 은성상단도 숨통이 약간 트이게 됐다. 아직 표행 문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래서 아버지도 재능 있는 인재를 거두라 하신 거겠지.”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은화란.

그런데 그 혼잣말을 받아치는 이가 있었다.

“상주님, 저 아인 거두시면 안 됩니다.”

요즘 자금 융통 때문에 바쁘게 돌아다니는 진 총관이었다.

“어째서죠?”

“황 노야가 이미 거둔 제자니까요. 저희가 가로채면 그야말로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으음.”

욕심이 앞섰던 은화란은 납득했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못 먹는 감 쳐다보듯 소년을 지그시 응시하는 그녀.

“그래도 좀 아쉽네요, 잘 키워서 다음 총표두 자리에 앉히면 딱일 것 같은데.”

지학(15살)의 나이도 안 된 것이 사람 부리는 게 썩 능숙하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사람들의 신뢰를 얻어내고,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칭찬을 통해 작업자의 능률을 이끌어 내고 있는 소년.

게다가 가진바 용력도 대단하고, 무에 대한 재능도 노야 덕에 검증이 끝난 참이다.

그야말로 준비된 미래의 총표두감이 아닌가.

“방직공 아저씨들, 이것도 받아 가세요.”

싸리비로 찾아낸 실마리를 능숙한 손길로 명주 가락에 휙휙 감아 방직공들에게 전해 주는 단무진.

“오, 고맙네. 공자.”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켜 옷감을 짜내던 방직공들이 환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 갔다.

그리고 은화란과 진 총관은 그 장면을 서로 말없이 지켜봤다.

부채로 입가를 슥 가리며 그동안 해왔던 추측을 늘어놓는 은화란.

“역시……. 밀양잠을 해오던 하오문의 아이겠죠?”

“예,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러한 양잠 지식을 설명할 수 있는 건 그 조직뿐이었다.

하오문(下五門), 가장 낮은 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문파,

양지(陽地)에 은성상단 같은 곳들이 있다면, 음지(陰地)에는 그들이 존재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 북경 지부가 박살 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로 인해 발을 동동 굴렀던 적도 있었더랬지.

어쩐지 자기 제자의 정체를 묻지 말라던 황 노야. 아다리가 딱딱 맞아떨어지긴 했다.

하오문은 개방과 더불어 정보, 첩보의 용광로라던데.

모래사장에서 반짝이는 진주알을 발견해 낸 느낌이 이러할까.

더욱 흥미가 동한 얼굴로 무진을 바라보는 은화란.

“역시 데려오죠.”

“안 됩니다. 정신 차리십시오.”

“끙.”

혹시 저질러 버릴지도 모르니 딱 부러지게 말하는 진 총관이었다.

“전대 상주님은 항상 지은보은(知恩報恩)이라 하였습니다.”

“알아요. 딸인걸요.”

아버지께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씀이다.

무보수로 도와주겠다는 사람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아쉽단 얼굴로 부채를 차르륵 접는 은화란이었다.

“그래서 진 총관, 바쁘실 텐데 잠실엔 무슨 일로?”

간단한 보고라면 사람을 보내면 되는데 말이다.

그가 직접 찾아왔다는 건, 무언가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다는 뜻.

그리고 이는 정답이었다. 진 총관은 황금 두꺼비가 찍힌 서신 하나를 스윽 내밀었다.

“또인가요?”

“또입니다.”

질리지도 않나 정말.

지끈거리는 이마를 문지르며 서신을 받아 드는 은화란.

“그런데 이번엔 내용이 좀 다르더군요.”

“오, 어떻게 다르던가요?”

“넷째 공자를 직접 보낼 테니,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

집요한 인간이다. 혼담을 에둘러 거절하자 보란 듯이 얼굴 앞으로 들이밀어 버린다.

마치 같잖은 시간 끌기는 통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래도 진심으로 은성상단을 어떻게 해보려는 모양.

은화란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

“헛! 합! 흡!”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오후.

나는 잠실 밖에서 선풍보 수련에 몰두하고 있었다.

안에서 하니까 먼지 난다고 쫓겨났던 탓이다.

착, 스륵, 탁.

보법과 신법을 오가는 기묘한 발놀림. 황걸개가 밤마다 수련 진척을 확인하고 부족하면 번갯불 같은 꿀밤을 날려 댄다.

고로 이건 살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핫!”

추궁 뭐시기로 얻어 터진 탓에 내공의 운용이 좀 더 세밀해졌다. 얼마 안 되는 좁쌀만 한 내공을 몇 번이나 잘라 쓸 수 있을 정도.

촤악!

발끝에 내공을 모아 땅을 박차자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그와 동시에 훅 밀려나는 흙먼지.

인부들 말대로 밖에서 수련하길 잘했군.

“아이, 애새끼가. 먼지 날리잖아.”

그런데 멀리서 짜증 섞인 쌍욕이 날아들었다.

저벅저벅 걸어와 비단옷의 앞섬을 괜시리 툭툭 터는 사내.

거리가 멀어 먼지가 닿지도 않았는데 저리 시비였다.

“내가 이 사천 비단옷을 어떻게 구했는데 진짜……. 먼지 한 톨이라도 묻었으면 넌 죽은 목숨이다.”

허여멀건 안면에 느끼한 눈썹을 지닌 제비족 같은 남자였다.

“금야도 공자님, 오늘은 꽃놀이 패를 쥔 좋은 날 아닙니까? 애새끼가 피운 소란 정도는 그냥 봐주시지요.”

뒤따르던 시종이 그를 말리고 나섰다.

근데 이놈들, 듣는 새끼 기분 나쁘게 자꾸 애새끼래.

“너 이 새끼, 운 좋은 줄 알아라……. 그리고 이런 핏덩이가 왜 이 중요 사업체 앞에 있는 거냐?”

“여기서 일하는 인부들 자식이라던가, 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근처에서 돌보는 것이겠지요.”

“쯧, 황실의 사업인데, 보안이 물러터졌군. 여물지 못한 계집년이 어울리지도 않게 상주 노릇을 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인가.”

“그러게 말입니다, 정에 이끌려 공사도 구분 못 하는 꼴이군요.”

“듣기로는 내 혼담도 거절했다지? 그 얼굴만 산 시건방진 년이…….”

웃긴 놈들이다. 갑자기 와서는 둘이서 북치고 장구치고 아주 지랄이었다.

그때, 외부의 소란이 들렸는지 드르륵 열리는 잠실 문.

금빛 비녀와 올려묶은 흑발, 연꽃처럼 청초한 비단옷의 미인이 잠실을 걸어 나왔다.

“금야도 공자? 분명 방문을 거절한다고 답신을 보냈을 텐데요.”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 잠시 넋을 잃었던 금야도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거절을 거절했소. 그대가 은화란 상주요?”

“그렇습니다만.”

“허,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 북경 삼화라는 소문이 거짓되지 않았구려. 이 금야도, 봄꽃이 핀 듯한 그대의 아름다움에 실로 탄복하였소.”

목소리를 깔고 개폼을 잡아가며 은화란의 미모를 점잖게 칭찬하는 금야도.

그 모습은 마치 학문을 갈고닦은 유생이 시를 한 수 읊는 것과도 같았다.

방금 놈의 민낯을 봤던 나로선 어처구니가 없는 장면.

“아깐 얼굴만 산 시건방진 년이라면서요.”

그 불쑥 튀어나온 말 한마디에 능글맞게 진행되던 금야도의 끼부림이 뚝 멈췄다.

공기쯤으로 취급했던 서민 꼬맹이가 높으신 분들 대화에 뛰어들리라곤 생각도 못 했던 모양.

“무, 무슨 개소리를.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단 말이냐.”

“좀 전에 제가 똑똑히 들었는데요.”

나는 무언갈 똑똑히 봤다고 주장하는 그 특유의 표정을 따라 해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누가 봐도 ‘아, 이놈 뭔갈 들었구나’ 하는 느낌이 났다.

“……노옴! 어른들 대화하는데 어디서 농짓거리를!”

금야도의 얼굴이 당황으로 뒤덮였다. 옆에 있던 시종을 황급히 쳐다보는 모습.

이 애새끼의 주둥이를 어떻게든 해보라는 눈빛이다.

“따라와라! 어느 인부 자식인지는 몰라도, 어른 공경하는 법을 알려 주마!”

붙잡아서 멀리 끌고 가려는 듯 양손을 펼쳐 덮쳐오는 시종.

나는 선풍보를 밟아 그 안일한 잡기 공격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그러자 텅 빈 허공을 움켜잡으며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시종이었다.

“……평범한 애새끼가 아니구나!”

그 야단스러운 소리에 뭔 일인가 싶어 잠실에서 ‘우르르’ 몰려 나오는 은성 측 사람들.

“금야도 공자, 이게 무슨 소리인가요? 얼굴만 산 건방진 년이라니요?”

은화란이 날선 도끼눈을 쏘아 보냈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눈빛으로 쪼개 버릴 듯한 기세.

“당연히 헛소리요……! 그대가 한 상단의 상주라면, 사리 분별 못하는 꼬맹이와 본 공자 중에서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알리라 믿소!”

뭣도 없는 꼬맹이와 만금전장의 공자인 자신을 번갈아 가리키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금야도.

그는 아직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고 믿는 듯했다.

“한 상단의 상주요? 아깐 여물지 못한 계집이 어울리지도 않게 상주 노릇을 한다고 비꼬시더니.”

“이 찢어 죽일 애새끼가 진짜-!!”

단무진표 고춧가루의 성능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

결국 금야도가 폭발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체면도 잊고 내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자 우리 사이로 부채를 찔러넣으며 뾰족한 목소리로 외치는 여인.

“금야도 공자! 애를 상대로 무슨 짓을, 당장 멈추세요!”

예상 못 한 난입에 금야도는 어쩔 수 없이 분노의 진격을 멈춰야만 했다.

“은화란 상주, 설마 저 꼬질꼬질한 꼬마 말을 믿는 거요!”

그 누구도 만금전장의 넷째 공자를 이리 취급하지 않았다며 역정을 내는 금야도.

한낱 꼬마 때문에 자신을 이리 대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당연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믿고 말고요. 이 아이는 저희 상단의 핵심 인력입니다.”

우린 일종의 꽌시거든.

이미 날 믿고 잠실의 전권까지 넘겨준 적이 있을 정도다.

그 사정을 모르는 저 인간은 지금 이게 도통 이해가 안 되겠지만 말이다.

“공자, 본 상단은 현재 황실의 시험을 앞두고 있어 무척 바쁩니다. 그러니 추태 그만 부리고 이만 돌아가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어조는 정중했으나 축객령을 내리는 은화란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를 향했던 일련의 모욕들, 그것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표정.

“잠양사가 오질 않았을 테니, 그대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금야도가 잠양사의 실종을 언급하자 은화란의 눈썹이 일순 꿈틀거렸다.

금야도는 후회하지 않겠냐는 듯 한번 더 되물었다.

“이 몸을 이리 취급해도 되겠소? 나중에 아쉬운 소리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부분 또한 저희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부외자’ 분께선 더는 간섭 마시지요.”

혼담을 포함해 관계를 딱 잘라 내는 발언이었다.

“흥, 뭐 알겠소. 어떻게 되는지 두고 봅시다.”

그러한 모습에서 더는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는지 이죽거리며 뒤도는 금야도.

상단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그 둘이 출구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쭉 이어졌다.

“……뭐, 이걸로 만금전장과는 완전히 돌아선 것이군요, 상주님.”

그리고 어느새 다가와 말을 걸고 있는 중년의 총관.

“어차피 이렇게 거절할 계획이었잖아요, 확실한 명분이 생겨 수고를 덜었네요.”

“뭐, 그렇긴 합니다만.”

진 총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에겐 저런 것보다 더 믿어 볼 만한 게 있으니까요.”

“……확실히 그건 그렇지요.”

그런 대화를 나누더니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지그시.

계속해서 바라보는, 부담스러운 눈빛.

“…….”

뭔 말이라도 하던가.

마침 해가 지고 있던 터라, 난 수련을 핑계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앗.”

***

와장창창-!

“그 개쌍년이!”

느끼한 눈썹의 사내가 집무실의 집기를 화풀이 삼아 박살 내고 있었다.

값비싼 보산(博山)유리 장식품도, 고가의 장신구도 그의 손에 걸리면 모조리 와장창행.

그렇게 한참을 부수다가 어느 순간 분기가 가라앉았는지 책상에 두 팔을 올려놓고 숨을 몰아쉬는 사내였다.

“……화는 좀 풀리셨습니까, 공자님.”

시종이 물잔을 갖다 바치며 그렇게 물었다.

보통은 이 상태로 두 시진가량을 더 박살 내야 화가 가라앉던데, 오늘은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흐, 흐흐.”

그러더니 급기야 웃기 시작하는 금야도.

시종은 그걸 보면서 이 인간이 드디어 미쳤나, 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공자님, 실례가 아니라면 무엇이 그리 웃기신지요?”

그 질문에 마셨던 물잔을 탁 내려놓는 금야도.

“그야 웃기지, 나는 저것들의 미래가 보이니까.”

저 말을 듣고 시종은 상단전을 뚫고 천안통(天眼通)이라도 열리셨나 생각했다.

은화란과 은성상단의 미래가 보인다니.

“은성은 금결에 실패한다. 누에를 얼마나 많이 길렀든, 비단을 수십 필 뽑아냈든 소용없다.”

꽤나 확신하는 목소리였다. 그렇다면 분명 근거가 있을 터.

“왜냐면 금결을 진행하는 관리가 그분의 사람이거든. 아무것도 모른 채 황실의 어둠에 발을 들이다니.”

물론 뒤처지면 사라지는 이 상계에서 살아남고자, 어느 정도 각오하고 발을 들였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춘휘거상 은진청 상주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돌연사했고, 남은 것은 애송이나 다름없는 그년뿐.

“그러니 두고 보자고…….”

그때가 오면 엉엉 울면서 빌게 만들어 주지. 상단을 살리고자 하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다.

이번에 뱉었던 말들을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되겠지.

“그 시건방진 꼬맹이도 잡아 족치고 말이야.”

그리고 직접 가서 두 눈으로 확인했던 은성상단의 물류와 머릿수, 영향력.

그것들도 전부 손에 넣어야겠지.

괴소문으로 신용을 그렇게 깎아내렸는데도, 수레에 표물이 수북이 쌓여 천하로 뻗어 나갈 준비를 끝마치고 있더라.

금야도는 아버지 금황도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단을 손에 넣으라고 한 이유를 얼핏 알 것 같기도 했다.

전장(錢場)이 그저 고여 있는 호수라면 상단은 강물처럼 흐르는 물줄기.

만금의 금권(金權)과 은성의 상권(商圈)을 모두 지닐 수 있다면 더는 북경 상계에서 대적자가 없음이다.

“계집질한다고 이 나이까지 홀몸이었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어릴 적부터 기루를 들쑤시고 다니느라, 자리를 잡은 집안의 형님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사업체도 물려받지 못했는데.

역시 사람 앞일은 모르는 법이라고.

“으흐흐.”

그런 연유로, 상단에서 받은 모욕들을 참아 넘길 수 있게 된 금야도였다.

***

청색 관복을 입은 한 남자가 작약꽃이 흐드러지게 핀 정원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공주궁의 시비들이 허리를 구부리며 이급주사 ‘천수공’을 뵌다며 정중한 인사를 올려왔다.

“도화공주(桃花公主)님은 어디에 있으시더냐.”

천수공은 드넓은 공주궁을 지키는 문지기 무사를 하나 붙잡고 물었다.

이에 그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 무사.

“공주님께선 내실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는 걸로 압니다만, 무슨 일로?”

“내 급히 그분을 봬야겠다. 문을 열거라.”

황도 북경은 의심마귀가 판을 치는 복마전 같은 곳이다.

무인들은 제 무력으로 자신을 지킨다지만, 그러지 못하는 환관들은 권모술수와 흉계로서 자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렇기에 정보의 촉수를 최대한 멀리 뻗고 많은 것을 들으려 하는 이들.

그리고 오늘 천수공도 그러한 불길한 정보 하나를 접하고 빠르게 달려온 길이었다.

황궁의 더러운 암투로부터 고귀한 분을 지키기 위해.

“아무리 천수공님이라도 사전에 기별도 없이 이러시면…….”

“급한 일이다. 공주께서도 이해하실 게다.”

“……예, 알겠습니다.”

도화공주가 몹시 아끼는 환관이다. 마찰을 빚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문지기는 문을 막고 있던 창대를 거둬들였다.

그러자 평소의 체면도 잊고 내실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천수공.

“내 은진청이 쓰러졌을 때부터 이상하단 생각은 들었거늘.”

그의 나이가 육순을 넘었다. 지병일 수도 있다기에 긴가민가했었는데, 돌아가는 꼴을 보니 그도 황족들의 술수에 놀아난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도화공주님이 몸소 나서 양잠 사업권의 허가를 돕고 거래를 트자마자 쓰러진다니, 참으로 시기가 미묘하지 않은가.

거기에 끝내 도착하지 않았다던 잠양사.

공주님의 세력 확장을 막고 수족을 묶어놓으려는 조정의 누군가가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다.

“공주님, 이급주사 천수공이옵니다. 급한 일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방문하였사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내실의 문을 두드린 천수공은 고개를 수그리며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것인지 짧은 침묵을 유지하는 문 너머.

“허(許)하노라.”

여리지만 기품이 깃든 목소리.

벌컥.

천수공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엔 은은한 다향(茶香)이 한가득 번져 있었다.

찻잔에 찻잎 하나를 둥둥 띄운 채 다도를 즐기고 있는 고귀한 자태의 여인.

사천에서 짜낸 비단옷이 햇살에 광택을 반짝였으나, 오색찬란한 빛깔조차도 제 주인의 아름다움을 가릴 순 없었다.

언제 봐도 넋을 잃게 되는 희고 고운 옥안(玉顔). 한 나라를 기울게 한다던 경국지색(傾國之色)이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도화공주님을 뵙습니다.”

속에서 요동치는 쓸데없는 잡념을 누르고자 시선과 고개를 푹 조아리는 천수공.

“그래, 천수공. 무슨 일로 본녀를 이리 급하게 찾았더냐?”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며 공주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졌다.

예의에서 몹시 벗어난 기습적인 방문이나, 탓하지 아니한다. 필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해 주었기에.

이처럼 어질고 지혜로운 성품을 지녔기에 여인임에도 천수공이 따르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이 이렇게 방문한 이유에는…….”

하지만 그런 그녀를 둘러싼 이 황궁은 의심암귀와 끝없는 악의가 꽃피는 곳.

그녀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암막 속에서 손과 발을 더럽혀야 했으며, 항상 이를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것이 바로 천수공이었다.

“공주님과 은성상단을 노린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하였기 때문이옵니다.”

비수가 날아들었다는 소식에 찻잔을 휘젓다 말고 뚝 멈추는 백옥 같은 섬섬옥수(纖纖玉手).

작약꽃 같은 공주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피어났다.

14화 기묘한 외출

어제 오후, 상단에 작은 폭풍이 지나갔다.

‘금야도’라는 이름의 폭풍이었다.

물리적인 피해는 없다시피 했지만.

그 폭풍이 내뱉은 말은 누군가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남긴 듯했다.

“……너도 내가 상주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자단나무 책상 위로 데구르르 굴러가는 술잔 하나.

킁킁 냄새를 맡아보니 소독에 쓰는 주정을 담은 듯했다.

이거 도수 엄청 높을 텐데, 사람이 마셔도 괜찮나?

“무진아, 왜 말이 없어.”

평소 술을 입에도 안 대던 사람이, 하필 냅다 들이켠 게 독하기로 유명한 주정이라니.

상주실에 고독하게 앉아 ‘술 한잔 마셨습니다.’를 연출하고 있는 은화란.

“저 그냥 가면 안 될까요?”

“안 돼.”

결국 그녀의 술주정 상대가 되고 말았다.

평소 차분하고 예리한 모습을 보여 주던 그녀도 알콜 폭격이 이어지자 약간은 흐트러진 모습.

나는 이렇게 된 거 배나 채우잔 느낌으로 털썩 앉아 안주를 흡입해 나갔다.

오, 이거 뭐야. 당과(糖菓)도 있었네?

“나도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우려 노력하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게 어디 쉽겠니.”

당과란 과일을 꿀에 푹 담가 삼투압 효과로 보존성을 높인 과정류(菓飣類) 식품이었다.

그리고 꿀에 절인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이런 시대에선 돈이 제법 드는 주전부리다.

무협지에선 개나 소나 쪽쪽 빨고 있던데 말이다.

“듣고 있니?”

“예예, 그럼요.”

예전에 잠시 회사에 위장취업 했던 적이 있다. 흥신소로 산업 스파이 색출 의뢰가 들어와서 말이다.

그때 술주정하는 상사 대응법을 익혔었지.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표두나 각주들은 별로 알아주는 것 같지도 않고…….”

“음음, 알아주지 않았구나.”

그냥 상대방의 말끝만 따라 해주면 된다.

소주 2병쯤 들어가면 어차피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표물 모이는 속도도 예전 같지 않은 데다, 이상한 소문에 전장들이 대출을 끊자 상인들은 사정도 모른 채 내 탓만 해오는 거 있지.”

“그렇구나, 누님 탓만 해왔군요.”

당과를 입에 쏙 넣으며 계속되는 추임새.

“거기다 표행이 늦어지는 것도 만전을 기하기 위함인데, 표사들은 당장 표행 수당이 부족하다며 구시렁거리질 않나……. 이러니 내가 안 답답하겠어?”

“그러게요, 많이 답답하셨겠네요.”

나는 둥근 달을 닮은 월병도 한입 깨물었다. 역시 전용 숙수가 있어서 그런지 맛이 좋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니까 혹시 내가 운영을 잘못하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도 들더라.”

“그런 생각도 드셨구나.”

그간 쌓인 게 많았는데 금야도의 한마디에 버튼이 눌린 듯했다. 나는 돌돌 말린 오징어 다리도 한쪽 뜯었다.

“……너, 내 이야기 제대로 안 듣고 있지?”

아뿔싸, 생각보다 덜 취했던 모양. 그걸 알아채 버리다니.

날 보는 은화란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신데, 결국 순리대로 하나씩 풀어 나가면 될 일 아닙니까.”

흰 피부 덕에 도드라진 눈그늘. 안 봐도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겠지.

“……그게 쉽니?”

“어려울 건 또 뭡니까.”

상주(商主)라는 높은 직책과 수많은 부하를 거느렸지만, 결국 20대 초반의 나이. 지구였으면 딱 사회초년생일 시기다.

양어깨에 얹힌 책임이 막중한 데다, 다들 그녀가 어떻게든 해줄 거라 믿고 있으니 약한 소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러니 속병이 걸릴 만도 해 보였다.

“우선 양잠업 통과부터 해결하시죠. 그 결과를 토대로 전장들을 설득해 대출을 해결하고, 추가로 들어온 자금으로 표사와 낭인을 더 고용해 표행도 성공시키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등고자비(登高自卑)라 하였다. 일이 꼬였으면 순서를 정해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 되는 법.

나는 설탕에 절인 오디를 토도독 깨물어 삼켰다. 이 또한 미미(美味)로군.

“넌 뭔가…… 꼬맹이인데도 말을 신기하게 잘하네.”

술기운으로 살짝 멍해진 은화란이 그렇게 중얼거려왔다.

신기한 생물을 쳐다보는 표정.

“양잠업부터 해결이라……. 그러고 보니 그와 관련해서 무척 미심쩍은 일이 있었지.”

“무슨 일이요?”

“조정에서 보낸 잠양사가 실종됐다는 건 저번에 들었지?”

물론이다. 그래서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나 같은 놈한테 잠실의 전권을 맡긴 것 아니었나.

“그래서 추색꾼을 고용해 잠양사의 흔적을 찾아봤거든? 그런데 그들이 말하길 아예 출발한 흔적이 없는 것 같다더라…….”

이건 또 묘한 소리로군.

황실이 사업권을 내준 상단을 상대로 수작질을 부린다라.

“혹시 기름칠이 부족했어요?”

“……애가 못하는 말이 없네.”

꽌시는 중대사항이다. 중원에서 사업하려면 적절한 뇌물은 필수지.

“아무튼 엄청 수상하단 생각 안 드니?”

“예, 구린 냄새가 풍기긴 하네요.”

하지만 이런 기초적인 것을 상주인 그녀가 모를 리는 없고, 배후에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이래서 국책 사업은 신중하게 따와야 하는 것인데.

“벌써부터 이 꼴인데, 검증 당일엔 얼마나 꼬투리를 잡아 올지 상상도 안 돼.”

그러게 말이다. 부당한 처우가 있어도 어디 하소연할 곳조차 없겠지.

공명정대 따윈 바랄 수도 없는 시대다.

“그래서 진 총관과 대화 끝에 꼬투리 잡을 여지를 아예 주지 말잔 결론이 나왔어. 찍소리도 못하게 완벽하게 준비해 놓는 거지……. 어때, 도와줄 수 있지?”

대화의 흐름에서 무언가 불길한 징조가 느껴졌다.

그래, 이건 초과근무의 냄새로군.

“이미 돕고 있는데요.”

“그럼 조금만 더 도와줘, 누에 생존율을 어떻게든 9할까지 끌어 올려 주렴.”

술주정 때문에 불렀나 싶었더니, 사실은 크런치(Crunch) 요구를 할 속셈이었던 모양.

이런 무서운 여자를 봤나.

이 장소를 빠져나가야겠다.

“역시 저 그냥 갈게요.”

“안 된다니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은화란이 내 팔을 콱 움켜잡았다.

들어올 땐 네 맘이지만 나갈 땐 아니라는 눈빛이었다.

“부탁할게, 무진아.”

못 남자라면 가슴이 들끓을 미인의 간절한 부탁.

하지만 이 단무진, 업력 십 년의 해결사. 사람을 싸게 부리려는 의뢰인의 수작엔 이미 닳고 닳았지.

“저번에 말한 보상, 그거 두 배로 쳐줄게.”

“…….”

근로기준법도 없는 이런 세상에서, 시간 외 수당을 제대로 쳐주는 고용주라니. 그것도 따블로다가.

나는 말없이 턱을 긁었다. 맨들맨들한 소년의 피부가 느껴졌다.

그간 지켜봐서 아는데 빈말을 하는 여인은 아니었다. 뭐가 됐든 더 챙겨주긴 하겠지.

“할 수 있겠니?”

페이가 오르면 얘기가 달라진다.

언제 또 알거지 신세가 될지 모르니 벌 수 있을 때 벌어놔야 하는 법.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고갱님.”

고로 고민은 길지 않았다.

잠실에 트집거리 하나 없을지어다.

***

달빛이 내리쬐는 연무장.

“그러니까 네가 잠실의 중요 인물이 되었다고?”

황걸개는 마른오징어를 질겅이며 그렇게 물었다.

술이 떨어져 간만에 말짱한 정신.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사바세계는 여전히 번뇌와 고통으로 가득해 보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수련에 늦을 수도 있다?”

술이 고프다. 무애행(無碍行)을 행하는 고승들처럼 ‘걸림이 없음’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 했건만.

흐릿했던 이지(理智)가 첨예함을 되찾자 원시천존이 왠지 멀게만 느껴졌다. 마지막에 딱 한 병만 더 마셨으면 뭔가를 느낄 것도 같았는데.

“네, 상주님이 간곡히 부탁해와서요.”

“허, 너한테 사람 죽이는 거 말고 뭔 재주가 있다고?”

“벌레를 좀 잘 기릅니다.”

실로 괴상한 소리였다 독충을 기르는 사천당가도 아니고.

“아무튼 한동안 늦을 거예요. 선풍보는 힘들어도, 성운심법은 틈틈이 수련해 볼게요.”

“이놈아, 누구 마음대로? 노부는 아직 허락한 적 없다.”

끌려가서 잡일이나 하나 했더니, 사업의 중추가 되었단다.

황걸개는 이걸 믿어야 하나 싶어 미심쩍은 눈으로 소년을 쳐다봤다.

그때, 소년의 품에서 술향이 화악 풍기는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 코를 뻥 뚫어 버리는 술 내음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황걸개.

“주정이란 겁니다. 아마 이거 두 병이면 진짜 원시천존을 뵐 수 있을 겁니다.”

……꿀꺽

비자발적 금주의 영향인지 두 눈이 술병에 딱 고정되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저도 모르게 슬금슬금 뻗어가는 오른손.

“크흠흠, 얼른 줘보거라.”

기름칠 좀 할 줄 아는 녀석이군.

황걸개는 슬쩍 받아 뚜껑을 따봤다. 고놈 냄새도 독한 것이 취하기 딱 좋아 보인다.

“그럼, 이만.”

그 말과 함께 뒤도는 단무진.

그는 황걸개가 헤벌쭉해진 틈을 타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등 뒤로 날아드는 황걸개의 예리한 질문.

“무엇을 받기로 했느냐.”

저 맹랑한 놈이 맨입에 저리 열심히 일할 리는 없고, 은화란 상주가 무언가를 약속한 모양.

급한 나머지 자신과의 약속도 잊고 말이다.

“아직 몰라요, 뭐가 됐든 쟁자수 봉급보단 낫겠죠.”

쟁자수 기본급으론 입에 풀칠도 빠듯하다.

그 점을 설명하자 못마땅한 얼굴로 수염을 쓸어내리는 황걸개.

“흉성은 네 녀석이 흔들리는 순간을 노리고 있을 게다.”

자신을 괴롭힌 심마가 그러했듯, 작은 틈이라도 기를 쓰고 파고들려 하겠지.

삼독(三毒)에 해당하는 탐욕은 그 마중물이 될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

“그러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고, 흉성에게 대항할 항마의 내공을 쌓거라.”

저 녀석이 살길은 그것뿐이니. 많은 재물을 쥐게 되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며 다시 한번 충고하는 황걸개였다.

“저도 살고 싶어 열심히는 하는데요, 이거 내공 쌓이는 속도가 너무 느려요. 절세 심법 맞아요?”

“…….”

아는 만큼만 보인다고. 소년의 의심에 황걸개는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러니까 선한 업적을 쌓아 부족한 내공을 증진하란 말이다.”

천살성은 살업(殺業)을 쌓을 때 힘을 얻고, 선업(善業)을 쌓았을 때 힘을 잃는다.

그렇게 천살성을 위축시킬 방법과, 별의 기운을 훔칠 수 있는 심법까지 시사해줬거늘.

“답답한 놈 같으니, 쯧쯧.”

황걸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술병의 투명한 액체를 벌컥 들이켰다.

“푸헉!”

그리고 마시던 것을 도로 뱉어내야만 했다.

혓바닥과 입천장이 불에 닿은 것처럼 얼얼했다. 이건 대체 뭐 하는 술이지.

“아, 그거 좀 독해요.”

마시고 나서야 피식거리며 말해 주는 단무진이었다.

저게 지구에선 방송인들이 ‘도전’을 외치고 마시는 도수였다.

은화란이 어떻게 마신 건지 기이할 지경.

“아무튼 선한 업보를 쌓으란 건 알겠는데요. 쉽지가 않아요. 먹고살기도 바쁘고.”

착한 짓도 그럴 기회가 와야 할 수 있는 법이다.

거기에 어디까지가 선업이고 악업인지, 기준도 애매모호하니 투덜거림이 절로 튀어나올 수밖에.

“기회야 찾고자 하면 찾아지는 것이고, 기준이야 확고한 잣대를 지니면 되는 법.”

선문답 같은 소리를 하며 술병을 찰랑찰랑 흔들어 보는 황걸개.

인생이란 게 원래 그렇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지.

그러다가 깨달음도 얻는 것이고.

“아무튼 눈앞의 이익에 흔들리지 말고, 먼 미래를 내다보거라. 그리하면 더욱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음이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였다.

저 아이가 진정 삿된 길로 빠지지 않고 흉성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잠자코 두고 봐야 될 일이다.

“솔직히 뭔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하여간 요즘 젊은 무인들이란.

어른이 인생에 대해 충고를 해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식이다.

“그럼 가보거라. 상주가 필요하다니 어쩔 수 없지.”

“예, 수련은 틈틈이 계속해볼게요.”

냅다 인사를 박고 떠나려 하는 단무진.

“참, 그리고.”

그런데 황걸개의 목소리가 또 발길을 붙잡았다.

아직 훈계가 남아 있나 싶어 고개를 뒤트는 소년.

“이 주정이란 거……. 몇 병 더 가져와보거라.”

황걸개는 허여멀건 술병을 툭툭 건드리며 그리 말했다.

닿는 곳마다 천불이 일어나는 기묘한 술이었다.

“……그러다 죽어요, 황 노야.”

“괜찮아, 안 죽어.”

손사래를 치며 가져오기나 하라는 황걸개.

저게 남자들이 가장 많이 뱉은 유언이라는 건 알까.

눈앞의 술 때문에 먼 미래를 못 보는 건 과연 누구인지.

단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좌우로 늘어선 노점상, 각양각색의 물건과 상인들의 호객으로 떠들썩한 북경의 대로.

황궁의 문을 나선 청색 관복의 남자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부턴 원래의 신분을 잊고 오가장의 넷째 따님이 되신 겁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묘령의 여인에게 넷째 공녀란 신분을 주입시키는 남자.

그 신신당부에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신구나 옷차림도 조금 유복한 집안 수준으로 맞춰 놓은 상태.

“천수공, 말로만 듣던 미복잠행(微服潛行)에 나서는 것 같구나.”

외부의 위협으로 황궁에 갇혀 지내다, 간만의 외출에 흥미를 느낀 듯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은 관복 남자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공녀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여기선 제 말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황궁 밖에선 어떤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

그래서 가급적 혼자서 나서고 싶었지만, 저쪽에도 황족이 개입했다면 권위로 찍어 누를 수 있는 것은 눈앞의 여인뿐.

“물론이니라, 천수공.”

“청공(淸恭)입니다. 그리 부르기로 약속하셨잖습니까.”

“그래, 청공.”

부디 무사무탈(無事無頉)한 외출이 되기를.

남자는 그런 기도를 속으로 올리며 어느 상단을 향해 발걸음을 떼었다.

15화 기묘한 방문객

인간은 사치재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남들과는 다른 우월한 나’라는 감각을 즐겼다.

그리고 비단옷은 중원의 대표적인 사치재 중 하나.

넝마나 누더기 같은 옷이 즐비한 길거리에서 홀로 오색찬란한 비단옷을 입는다 생각해보라.

부러움과 질시 섞인 시선을 받게 되겠지. 사람들의 대접도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금의환향(錦衣還鄕)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살던 곳에선 공업화로 옷이란 게 싸구려가 되었지만, 이곳에선 여전히 자신의 신분과 권세를 과시할 수단이었던 것.

고로 부호들은 이 견직물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양잠업은 자연히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이 되었다. 마치 현대의 반도체 산업처럼 말이다.

그리고 반도체 웨이퍼가 하찮은 모래 알갱이(규소)에서 시작되듯, 이 비단 또한 누에라는 벌레를 기초로 돌아가는 산업.

“아저씨들.”

고로 누에의 관리가 곧 사업의 향방을 가르는 셈이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잠실에서 커다란 어른들을 한데 불러 모은 한 꼬마애.

그게 바로 나였다.

“이 귀여운 누에들, 9할까지 살려내 봅시다.”

위에서 떨어진 지상명령(至上命令).

“에에엥?”

인부들이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무리한 요구를 받았을 때의 생리적 반응은 어느 세상이나 동일한가 보군.

“더불어 비단옷까지 한 벌.”

승기를 굳히려면 한 방이 필요한 법. 고치의 물량만 받쳐 준다면 시도해 볼 만했다.

“으이잉?”

이번엔 공방의 방직공들이 낸 소리였다. 일감 없다고 미안해하더니, 이젠 일감에 파묻히게 생겼군.

“대신 보수는 기존의 3배.”

“……에엑?”

마지막은 은화란의 놀란 헛숨이었다.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이야기였던 터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습.

어딜 당근도 없이 채찍만으로 사람을 부리려고. 그런 좋소식 운영, 내가 허락할 수 없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고, 사후 허락이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봉급 따따블 이벤트.

성공하지 못하면 자기들 직업이 날아가는 데다가, 보수까지 확실히 쳐준다고 하니 의욕 고취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밤낮없이 달려들어 누에 생존율이 원래의 약속인 7할을 넘어 8할까지 도달했을 정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비단옷 쪽도 힘을 비축해 온 공방 직원들에 의해 쾌속의 진전이 있었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들 분발해라!”

어느새 은화란처럼 눈에 시커먼 그늘을 달고 있는 방직공들.

명주짜기는 크게 세 가지 과정으로 구분할 수 있다.

고치에서 찾아낸 실마리를 물레에 돌려 실타래로 만드는 ‘실써기’와 그렇게 만들어진 생사(生絲)를 도투마리에 감아 베틀에 올리는 ‘날실걸기’.

마지막으로 베틀에 얹은 생사를 앞뒤로 밀고 당겨 개구(開口)시키면 우리가 아는 그 비단이 만들어진다.

“뭐 해? 날실을 걸었으면 어서 베틀을 움직이란 말이야.”

“이 사람아, 씨실을 쫀쫀하게 쳐줘야 명주가 감기지! 이래서 방직공 노릇 하겠어?”

양잿물을 거쳐 하얗고 매끄러워진 ‘누인실’이 여러 도구에 맞물려 바삐 움직여 댔다.

점점 몸집을 불려 가는 새하얗고 기다란 실. 합을 맞추며 저마다의 역할을 열심히 소화해 내고 있는 기술자들.

휘리릭.

나는 고치에서 찾아낸 실마리를 곧바로 물레에 감아 주르륵 당겨 뽑아 냈다.

실이 워낙 가늘어 보통은 몇 분간 헤매기 마련인데, 이젠 눈감고도 할 수 있을 듯한 기분.

“진짜 끝도 없이 뽑히네.”

돌돌 회전하는 물레를 보며 중얼거렸다.

누에가 칭칭 감아놓은 저 고치에서 1,300미터가량의 실이 뽑힌다고 한다.

비단옷 한 벌에 비단 다섯 필(疋) 분량이 들어가니, 기한에 맞추려면 상당히 빠듯할지도 모르겠군.

“피곤하겠지만 힘내주세요. 여러분의 일자리가 걸린 일이기도 합니다.”

공밀레, 누밀레, 사람을 갈아 넣는다. 발매가 한 달 남은 게임사처럼 크런치 모드에 들어간 우리 잠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자 이번엔 노력의 결실이 의복(衣服)의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은성의 차기 핵심 사업, 비단옷이 완성된 것이다.

“오오.”

창문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 탐스럽고 보드라운 광택이 자르르 흐르는 비단의 표면.

그 고급스러움을 목격한 사람들이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누님, 근데 좀 작지 않아요? 애나 입을 법한 크기인데.”

옷의 치수가 좀 작긴 했다. 성인이 입기엔 뭣하고 중학생 정도나 입어볼 법한 사이즈.

“그야 기한이 부족했으니까…….”

사실 명주가 만족할 만큼 나오질 않았었지. 고로 옷으로 만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네가 한번 입어보렴, 무진아.”

모두의 노력과 시간이 녹아든 그 비단옷을 내게 선뜻 건네는 은화란.

소매에 팔을 집어넣자 미끄러지듯 스르륵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까끌거리고 빳빳한 무명옷과는 질감부터가 달랐다. 애기궁둥이마냥 보드라웠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래로 옷에서 이런 감각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이야.”

“때깔이 사는구먼.”

“옷걸이가 좋으니 역시…….”

내가 아동복 모델처럼 이리저리 자세를 취하자 곳곳에서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인간들이, 옷이 잘 만들어졌으니 옷걸이도 돋보이는 것이야!”

작품에 자부심을 담은 방직공들이 사람이 아니라 옷을 보라며 한소리해댔다.

하지만 여전히 폼을 재고 있는 내 모습에 고정된 시선들.

“고놈 참 잘생기긴 했단 말이지.”

“갑자기 인생이 불공평하게 느껴지는데?”

인생이 불공평하기는. 이 아재들, 내가 지금껏 무슨 고생을 해왔는지도 모르고.

“제법 태가 나는구나. 마치 귀공자 같아.”

흐뭇한 얼굴로 살피던 은화란의 한마디였다.

모용청진이 명문세가의 귀공자 출신이긴 했지.

“누님, 이런 옷은 얼마 할까요?”

나는 비단옷의 팔 깃을 펄럭이며 물어봤다. 잉어의 지느러미처럼 부드럽게 낭창거리는 모습.

“글세, 좀 작아도 비단이 3필이나 들어갔으니, 요만한 금 정도는 줘야겠지.”

손가락 세 개로 필요한 금의 크기를 가늠해 주는 은화란.

역시 금(錦) 생산은 금(金)을 긁어모으는 사업인 듯했다.

이래서 아무나 들이대지 못하게 조정에서 자격을 관리하는 것이겠지.

“아무튼 이 정도면 준비 만전이네요. 꼬투리 잡기도 힘들겠죠.”

그녀가 부탁했던 바를 다 이뤄 낸 것 같았다.

9할에 가까운 생존율과 직접 짜낸 비단옷 한 벌까지.

“……그래, 이 정도면 사업권을 준 황실도 인정할 수밖에 없겠지.”

조정에서 보냈다는 관리들 또한 눈에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통과를 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지간히 악의를 품은 게 아닌 이상은.

“네게 잠실을 맡긴 게 정답이었네.”

내 덕에 어깨의 짐을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는 표정. 퀴퀴한 눈그늘은 어디 가고 그녀의 두눈에 어렴풋이 희망이란 게 보이기 시작했다.

“별말씀을.”

나는 비단옷을 입을 채 고개를 슥 수그려 보았다.

단무진 흥신소의 첫 고객이시니, 차후 손님 영업을 위해서라도 확실히 해야지.

“앞으로도 종종 애용해주시길.”

보수만 확실하면 뭐든 해결해 준다.

그것이 지구에서도 지켜지던 철칙이었다.

***

새장 속의 새가 둥지를 벗어났다.

날 수는 있을까 불안하기 마련.

“공녀님, 제 곁을 한 걸음도 떠나선 안 되십니다. 시선 끄는 짓도 매한가집니다.”

은성상단으로 향하는 길.

인파가 북적이는 저잣거리에 들어서자, 청색 관복의 남자가 면사 여인에게 귀가 닳도록 신신당부했다.

황궁 내에선 이보다 더 믿음직할 수가 없지만, 밖으로 나오자 저도 모르게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이에 볼멘소리로 화답하는 면사 여인.

“물론이다, 청공. 그대는 날 푼수로 아는군. 본녀는 황궁 밖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노라.”

“……과연.”

잠시 믿어볼까 하였다. 하지만 그 단언은 일각(一刻)도 가지 못했다.

“청공, 저것을 보라. 사람이 불을 뿜고 있노라.”

오 년 만의 외출. 중추절(中秋節) 축제 전야에 들어선 북경. 그녀는 시선을 단박에 빼앗기고 말았다.

알록달록하며 눈을 다채롭게 현혹하는 것들이 온 사방에 널린 상황.

평민 사이로 섞여 들었다는 사실에 살짝 들뜬 것 같기도 했다.

“청공, 이 반짝거리고 딱딱한 것은 무엇이냐?”

면사 여인은 붉은 열매가 알알이 꿰인 막대를 들어 올렸다.

“당호로(糖葫蘆)입니다. 사탕(砂糖)을 얇게 입힌 간식이지요.”

깨물더니 바삭거리는 식감에 조금 놀란다.

“청공, 이것을 보아라. 나무를 어찌 이리 잘 깎을까. 귀엽구나.”

좌판엔 옥으로 된 공예품과 반짝이는 장신구도 있었지만, 황궁에서 질리도록 본 탓에 그녀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아기자기한 목재의 모양새에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 분명하다며 목수의 솜씨를 칭찬하는 그녀.

“그건 이제…… 골패(骨牌)입니다. 도박 도구지요.”

“…….”

말없이 내려놓는 면사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행은 은성상단의 정문을 넘어서도 계속되었다.

표물을 가리키며 궁금한 듯 묻는 면사 여인.

“청공, 수레에 실린 저 항아리는 무엇이더냐?”

“향을 맡아보아 술항아리인 듯싶습니다.”

“그럼 근처에 널브러진 거지 노인은?”

“거기에 취한 주정뱅이겠지요.”

참다못해 표물을 건드리다니, 간이 부은 주정뱅이다 싶었다.

“청공, 묘한 나무들이 많구나. 혹시 뭔지 아느냐?”

“뽕나무입니다. 대규모로 조성된 것을 보니, 찾고 있던 잠실이 이 근처에 있을 듯합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돌아다니다 보니 뽕나무밭을 발견하게 되었다.

잠양사가 없으니 잠실 상태는 최악이겠으나, 적어도 이곳만큼은 조경사들이 완벽하게 꾸며놓은 듯했다.

타타탁!

그리고 빽빽한 나무 사이를 자유로이 달리며 수련 중인 한 소년.

“저 아이는?”

“무공을 익힌 아이군요.”

관복 남자는 미끄러지듯 질주하는 모습과 발끝에서 뿜어지는 내공을 보고 확신했다.

이에 자신의 기운을 피워올려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

그 기감을 느낀 것인지 제법 똘똘하게 생긴 소년이 우뚝 멈춰 섰다.

“꼬마야, 잠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출임 엄금 구역을 제집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다. 혹시 뭔갈 아나 싶어 던진 질문.

“예, 알아요.”

이에 소년은 그렇다고 대답한 후 그들을 지나쳐 달렸다.

“…….”

고정관념을 탈피한 그 대답에 잠시 멍해졌다가 정신을 되찾는 남자.

그는 곧바로 소년을 뒤쫓아 보법을 밟았다. 그야말로 폭풍 같은 속도였다.

“워메 시벌!”

사람이 눈앞에서 불쑥 나타나자 경기를 일으키는 소년.

“……안내를 해주란 뜻이었다.”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격의 차이.

소년은 얼른 안내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손자병법에 이르길, 전략적 후퇴는 불명예가 아니라 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던 청색 관복의 남자.

엮이지 않는 게 좋다 싶어 냅다 도망치려 했는데, 애석하게도 곧바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잠실엔 무슨 일로?”

내 질문에 슬쩍 내려다보는 남자.

“부외자가 알 것 없다.”

부외자라니. 난 그 누구보다 양잠업과 관련 있는 사람이란 말이다.

하여간 코흘리개 같은 이 외관이 문제다.

힐끗.

그런데 등 뒤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걸음걸이를 선보이고 있던 여인.

면사 너머로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시선 돌려라.”

그리고 내가 뒤돌아 바라볼 때마다 안력을 담아 노려보는 남자.

저 여인이 대체 누구길래 저리 감싸고 도는 거지.

“요 앞입니다.”

보안을 위해 쳐둔 담벽 모퉁이를 돌자 큼직하게 지은 잠실이 나왔다.

그런데 입구로 다가가자 좀 친해졌던 인부 한 명이 호들갑을 떨며 달려오는 게 아닌가.

“무진! 무진아!”

양팔을 흔들며 다급한 모습.

“왜요, 장 아저씨?”

“빨리 좀 와보거라! 잠실에 난리가 났다!”

난리가 났다니. 설마 검증을 일주일 앞둔 지금, 또 돌림병이라도 돈 것인가.

“누에가 죽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그…… 조정에서 사람이 왔어! 문을 까고 우르르!”

통보했던 기한까진 아직 조금 남았을 텐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나는 인부의 손짓을 따라 잠실로 빠르게 달려갔다.

그리고 등 뒤에 면사 여인과 남자가 곧바로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문을 벌컥! 열자 눈에 들어오는 잠실 내부.

와장창창!

“네년이 사기를 친 것이지! 그렇지 않고선 설명이 안 된다!”

“……상의감 왕진공! 잠양사가 오지 않은 저희 사정을 아시면서 어찌 그런 소리를!”

“그러니깐 이 상황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잠실이 개판으로 변해 있었다.

또 한 번 말이다.

16화 황제의 피붙이

환관이란 제 몸에서 가장 소중한 부위를 잘라 낸 이들.

그 대가로 천자(天子)를 가장 가까이서 모시며, 황실의 대소사를 관장할 수 있게 된 권력가들이기도 했다.

황실 환관들이 속해 있는 24개의 아문(衙門).

개중 천자의 의복과 비단 산업을 전담하는 상의감(尙衣監) 왕진공은 현재 누군가의 지시로 은성상단에 방문한 참이었다.

그리고 그가 받은 명은 실로 단순했다.

서열은 3황녀, 봉호(封號)는 도화공주(公主). 그녀의 파벌에 가담한 상단 하나를 박살 내라는 것.

뭣도 없으면서 감히 황실의 암투 속에 발을 들이밀다니.

그것도 황태자가 독살로 쓰러져서 혼란스런 이 시국에 말이다.

“오호홍, 은(殷)씨 가문이랬나요.”

무언가가 잘려 나간 이의 여상스러운 말투.

천하에서 열 손가락에 꼽는 상단이고, 창고에 금은보화가 가득하면 뭣하나.

결국엔 고위 관직 하나 배출해 내지 못한 가문.

황실의 끈을 잡고자 발버둥 치다가, 높으신 분의 진노를 사게 된 장사치일 뿐이었다.

“게다가 하필 도화공주의 끈을 잡다니, 어리석기 그지없지요.”

일련의 과감한 행보로 적이 많으신 분이다.

다른 황자, 황녀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지 않는가.

하물며 금전을 갈퀴로 긁어모은다는 양잠업까지 따내 가겠다니.

언어도단.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한데 왕진공, 만약 그 장사치들이 양잠에 성공해 버렸으면 어찌합니까?”

“듣자 하니 은성상단도 이것저것 필사적으로 시도해 본 모양입니다만…….”

그야말로 절벽에서 지푸라기 붙잡듯이 말이다.

여러 상단에 도움을 청하거나, 장사 밑천인 누에치기 지식을 팔아달라 제안도 해보고, 제법 동분서주 했다는 소문.

그래서 왕진공을 뒤따르던 부하 환관들이 살짝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이에 코웃음을 치며 그럴 리 없다는 듯 입을 여는 왕진공.

“그래서 잠양사를 치웠잖아요? 오홍홍.”

거기에 잠실을 차린 이들에겐, 행여 그 지식을 누설하지 말도록 엄포를 놓았다.

황실의 지식을 함부로 다뤘다간 극형을 면할 수 없다고 말하자 ‘깨갱’거리던 상단들.

왕진공은 그때 생각이 나 입을 가린 채 킬킬 웃어 보였다.

덕분에 아무런 정보 없이, 장님처럼 어둠 속을 하나하나 더듬어 가게 된 은성상단.

발을 내딛는 족족 우여곡절과 실패의 파도가 덮쳐왔겠지. 제 시간에 가능할 리가 없었다.

“오, 그러면 보나마나 잠실은 아수라장 그 자체겠군요!”

“양잠에 성공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겠습니다, 왕진공!”

“바로 그거지요! 오호홍.”

그런 것이다. 양식용 누에란 까다롭기 그지없는 곤충.

땅에 뿌리내린 농작물은 비바람도 버텨 내고 억세기라도 하지.

이놈의 조막만 한 곤충들은 찬바람만 들어와도 단체로 폐사하기 일쑤였다.

“과연, 2황자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

“은성 놈들, 공주 하나만 믿고 우리에겐 일말의 성의도 보이질 않는다니!”

“그런 불한당 같은 무리가 양잠업을 따내 가선 안 되지요. 암요!”

약간 옆길로 새는 의견이 있었지만, 아무튼 황자님의 명을 수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저들이 잠양사를 보내지 않은 것과 약속된 방문 기한을 어긴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겠지만 뭐 어쩌겠는가.

제깟 놈들이 천자를 받들어 모시는 황실 관리들에게 무슨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거기에 이쪽은 뒷배에 2황자가 계시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3황녀에게 붙은 은성상단을 이번 검증으로 보란 듯이 뭉갠다면 황자님도 무척 흡족해하시겠지.

어쩌면 자신을 크게 써주실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감청 고소원이던 태감(太監) 직위에 오를 수 있을지도!

“오호홍!”

왕진공은 간드러지게 웃었다.

자고로 한단지보(邯鄲之步)라 하였다. 분수에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하면 이렇게 횡액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은성상단 새 상주의 미모가 그토록 빼어나다지. 하지만 환관인 자신에겐 무의미한 것.

그 고운 얼굴에서 눈물을 쏙 뽑아내 보리라.

“이리 오너라!”

그런 기대에 부푼 왕진공은 비릿한 표정으로 잠실의 문을 힘차게 열어 젖혔다.

벌컥!

“상의감 왕진공! 은성상단의 양잠업 자격을 감찰하러 왔노라-!”

엉망진창일 것을 확신한 의기양양한 외침이었다.

아직 기한이 한 주 정도 남았기에 이러한 기습적인 방문에 무척 당황한 듯한 은성의 인부들.

환관들은 그러한 잠실에 점령군처럼 우르르 발을 내디뎠다.

“흥, 입구부터 아주 엉망이구나! 이 왕진공이 지금부터 잘못된 것을 하나하나 지적해……. 응?”

그렇게 희열에 젖어 잠실을 까내리려고 손가락을 뻗었는데, 이게 웬걸.

“아니, 이거 생각보다…….”

“너무 잘 되어 있는데요?”

누에틀마다 누에가 바글거리고, 물레는 쉴 새 없이 생사를 뽑아 내고 있는 데다가, 윤기 나는 비단옷까지 보란 듯이 한 벌 완성되어 있는 모습.

마땅히 까내릴 것이 없다. 믿기 힘들지만 완숙기에 들어선 타 잠실만큼이나 안정적인 운영을 보여 주고 있었다. 지금 당장 금결 통과를 외쳐도 될 정도.

상의감의 환관들이 ‘이걸 어쩌죠?’라는 눈빛으로 왕진공을 말없이 쳐다봤다.

“…….”

짧은 고민.

예상과 다른 상황에 이마로 흐르는 땀 한 줄기.

“에잇, 지적할 게 없으면 요령껏 만들어 내면 될 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그는 단순무식한 답을 내놓았다.

“오, 과연!”

“그런 교토삼굴(狡兎三窟) 같은 꾀가!”

말도 안 되는 억지. 얼굴에 철판을 깐듯한 뻔뻔함.

“네 이년! 이 잠실은 하나부터 열까지 아주 문제투성이로구나!”

듣는 은화란의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남자의 간드러진 목소리.

거기에 역한 냄새가 나는 분칠과 음험한 표정이 드러난 얼굴.

뭐하는 놈들인가 싶어 입구에 멍하니 서 있자, 인부 아저씨가 조정에서 나온 환관이라 설명해 줬다.

“아, 그 고자놈들이요?”

역사책에서 볼 땐 불쌍하다 싶었는데, 눈앞에서 패악질 부리는 꼴을 보니 그 감정이 싹 가시는군.

“크흠!”

그런데 내 고자 소리에 움찔하며 반응하는 청색 관복의 남자.

돌아보니 내 뒤통수를 후벼팔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흥, 한참 부족하구나!”

“겨우 이 정도 수율로 목을 그리 꼿꼿이 세운 것이더냐!”

“근처의 비영상회는 누에틀이 넘쳐날 정도로 누에가 바글바글했거늘!”

합이라도 맞춘 건지 은화란을 돌아가면서 주둥이로 패는 환관들.

후한을 몰락시켰던 십상시(十常侍)가 딱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야 저희는 이제 막 양잠업을 시작한 처지니까……!”

“시끄럽다! 그리고 이 고약하고 지저분은 잠실은 뭐냐! 청소조차 하지 않는 것이냐!”

왕진공이란 환관은 현대인의 기준으로도 깨끗한 이 장소를 두고 더럽다 외쳐 댔다.

이 상태로는 양잠업을 믿고 맡길 수 없다며 강짜를 부리는 모습.

“말도 안 되는 트집이세요! 이 잠실의 청결함은 상주인 제가 보장할 수 있어요!”

매일같이 쓸고 닦고 소독까지 해댄 덕에, 이곳은 닭강정을 만드는 어떤 가게처럼 깔끔했다.

“그럼, 이 손가락에 묻은 먼지는 무엇이냐!”

왕진공이란 환관이 창문틀을 뽀드득 훑더니 이거 보라는 듯 더러워진 손가락을 내밀었다.

무슨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었다.

“내창문이 아니라 외창문을 훑으셨잖습니까? 바깥엔 흙이 있는데 당연히 묻을 수밖에요!”

“쯧, 입만 살아서는. 다른 잠실들은 이런 것까지 다 관리해 냈단 말이다.”

별것도 아닌 걸로 꼬투리를 잡으며 이곳 잠실과 인부들을 연신 깎아내리는 왕진공.

오늘을 위해 모두가 밤낮없이 일했건만, 검증을 실행하는 주체들이 이렇게 대놓고 야료를 부려올 줄이야.

“왕진공, 잠양사가 오지 않았는데도 여기까지 해냈어요. 그 점을 감안해 주진 못하실망정……!”

“흥, 그래서 문제라는 게다! 길러 줄 사람이 오질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까지 길러 낸 것이지? 수상하기 그지없구나, 어디 소상히 설명해봐라!”

황실의 도움 없이도 자립해냈단 부분을 어필하자, 격려는커녕 어떻게 해낸 거냐고 추궁만 쏟아지는 기가 막힌 상황.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옆에서 듣는 나도 빡이 칠 정도니, 은화란은 지금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겠지.

“이 망할 고자 새끼들이.”

흠칫.

내 혼잣말에 또다시 움찔거리는 청색 관복의 남자.

그러니까 왜 그러냐고.

“어떻게 길러냈긴……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겠단 각오로, 숱한 시행착오와 시련 끝에 이룩해 낸 성과입니다.”

이를 악물며 하는 대답. 부당함에 대한 분노. 목소리에서 응어리진 감정이 배어 나왔다.

치망순역지(齒亡脣亦支)를 피력하는 은화란. 하지만 비단 산업 전반을 관리하는 왕진공은 코웃음으로 화답했다.

“흥, 네가 누에를 길러봤다면, 이게 잇몸으로 될 일이 아니란 걸 알 텐데? 특히 이 회전섶과 물먹인 유지는…….”

그는 누에들이 알알이 고치를 튼 회전섶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그리고 물 먹인 유지(油紙)가 깔린 누에틀을, 세안용으로 구비해 둔 비조를 수상하다며 쿡쿡 찔렀다.

“실토하거라. 이 누에와 고치들, 어느 상단에서 빌려온 것이지?”

“……예?”

급기야 그는 은성상단이 이룬 성과 자체를 부정하려 들었다.

이번 금결을 어떻게든 통과하기 위해, 금력을 써서 잘 돌아가는 것처럼 연출한 게 아니냐고 묻는 왕진공.

은화란은 당연히 억울하다는 듯 방방 뛰었다.

“오해이십니다! 어떤 정신 나간 상단이 황궁의 지식과 비기를 외부로 유출한단 말입니까!”

“내 말이 그 말이다! 그 정신 나간 상단이 어딘지 대란 말이다! 그 이후에 너희 상단도 경을 칠 테니!”

“그런……!”

처음부터 유죄로 확정 짓고 죄를 추궁하는 모습이었다.

막수유(莫須有)를 연상케 하는 그 발언에 치를 떠는 그녀.

끝까지 납득할 수 없다며 항변하자, 왕진공은 잠실의 부화장을 가리키며 이어서 말했다.

“그럼 내 물으마. 누에알을 왜 저런 식으로 개어놨지? 너희가 시행착오 끝에 알아낸 거라면 그 이유를 알고 있을 터.”

동글동글한 누에알이 차곡차곡 질서 있게 쌓여 있는 부화장.

그 기습적인 질문에 은화란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이에 그거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웃는 왕진공과 환관들.

‘도와주렴.’

부채로 입가를 슥 가린 은화란이 복화술처럼 내게만 보이게 도움을 청해 왔다.

언제는 누에만 길러 주면 된다더니.

“그건 제가 압니다.”

손을 들며 나서자 좌중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설명한답시고 어린애가 튀어나오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하는 환관들.

“허, 은성상단도 갈 데까지 갔군.”

“쯧쯧, 이런 중요한 자리에 저딴 꼬맹이를…….”

하지만 그 웃음도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개어놓은 이유는 알 속의 누에가 진액(津液)을 토해 껍질을 녹이고 나오는 데 용이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내가 눈 하나 까딱 않고 큰 목소리로 의견을 개진하자 빈정거림을 멈추는 환관들.

“이때, 부화 중인 누에는 머리가 무언가에 부딪히면 다시 움츠러드는 성질이 있고, 이것이 반복되면 기운이 다해 죽거나, 부화율이 급락하기에 이렇게 차곡차곡 쌓아 부화시키는 것이지요.”

쉽사리 접하기 힘든 전문 지식(우드위키를 정독)의 나열에 입을 꾹 다무는 환관들.

그들은 곧바로 상의감 왕진공을 쳐다봤다. 이쪽의 전문가니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보란 시선이었다.

하지만 저 답에서 지적할 게 있을 리가. 왕진공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번째 질문을 던져왔다.

“그럼 고치를 뜨거운 물에 담구는 이유는?”

“첫 번째 이유는 누에를 삶아 상품이 훼손되는 걸 막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비단실을 녹여 윤기를 내고 1가닥으로 분리되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누에가 고치를 찢고 나오는 순간 상품성은 대폭 하락한다.

그래서 삶아서 비단으로 만들지, 아니면 살려서 부화용으로 삼을지 선별을 해야만 했다.

“으음.”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자 신음성을 흘리는 왕진공.

나는 부정행위 없이 이 잠실이 밑바닥부터 여기까지 올라왔음을 증명해 냈다.

그들은 과연 순순히 납득하고 양잠업을 허락해 줄까.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냐?”

방향을 선회하는 듯한 왕진공의 물음.

“쪼만한 것이 왜 이리 잘 알지? 수상하군.”

“어디서 밀양잠하는 애라도 데려온 게냐!”

그러면 그렇지.

잠실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저런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짐승들과 대화를 하려고 했다니, 허탈해질 따름이었다.

“여전히 추하구나, 왕진공.”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중년인의 목소리.

청색 관복을 입은 남자가 대담하게도 상의감 왕진공을 대놓고 씹으면서 앞으로 나섰다.

“넌 뭐 하는 새끼길래……. 천수공?”

그리고 그럴 만한 자신이 있었던 모양.

꼴을 보아하니 내가 데려왔던 저 아저씨도 황궁에서 한자리 하는 사람인 듯했다.

아무래도 환관인 것 같은데, 그래서 좀 전에 움찔움찔 거리던 거였군.

미안한 짓을 해버렸다.

“황실의 금결 과정은 생산성이 뛰어난 상단을 선별하여 양잠업을 맡기기 위함일 텐데, 네 녀석의 알량한 권력을 휘두르는 무대가 아니라 말이다.”

그는 부당하고 불공평한 이 검증을 전면에서 지적하고 나섰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도 권력자가 붙은 모양.

“천수공! 네 녀석이 아무리 날뛴들 바뀔 것은 없다. 이 몸은 오늘 ‘검증을 보다 확실히 하라!’는 황족분의 명을 받고 내려온 참이니까!”

자신의 뒷배에 황족이 있음을 넌지시 알리며 간섭 말라고 선포하는 왕진공.

아무래도 이거 상당히 높으신 분들까지 엮인 일이었나 보다.

그냥 꽌시가 부족했거나, 다른 상단의 견제 정도로 생각했건만.

“왕진공, 누구의 사주를 받았더냐?”

그리고 등 뒤에서 또다시 들려오는 젊은 여인의 음성.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흥, 네년은 또 뭐냐!”

뒷배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왕진공.

그런데 ‘네년’ 소리에 천수공이란 남자가 흉신악살 같은 표정을 짓더니 대뜸 칼을 빼어 들었다.

스릉!

“왕진공-! 네 녀석이 정녕 정신을 놓은 게냐!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그 격렬한 반응에 ‘이게 미쳤나?’란 표정으로 천수공을 바라보는 환관들.

면사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고함을 치고 있는 천수공의 어깨를 살며시 툭 건들였다.

그러자 고개를 깊숙이 푹 숙이며 옆으로 비켜나는 청색 관복의 남자.

이윽고 면사 여인은 얼떨떨한 표정인 환관들에게만 면사를 살짝 걷어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면사가 다시 내려가자 분칠보다 더 새하얗게 질린 왕진공과 환관들의 얼굴.

그들이 황망하게 내뱉은 단어는 잠실을 경악으로 몰고 가기에 충분했다.

“도, 도화공주님……?”

“……!!”

***

전제군주정의 루이 14세가 이런 말을 했다.

“짐이 곧 국가다.”

오금이 지리는 말이었다. 사람 하나가 곧 국가라니.

그리고 비슷한 장소가 또 있었다. 바로 황제를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 하여 천자(天子)라 부르는 중원이었다.

“제, 제가 녀, 년이라고 부른 것은 실로 엄청난 오해가……!”

“왕진공, 그 입을 닥치거라.”

그리고 난 그날 목격하게 되었다.

전제군주정 나라에서 황제의 딸이 가지는 무소불위의 힘을……. 그리고 권력을!

17화 처세술의 오의

도화공주는 좌중을 느릿하게 한번 훑었다.

백지장처럼 질린 환관들, 어리둥절한 은화란과 인부들, 그리고 이 상황을 흥미진진하게 관찰하는 소년까지.

천수공의 칼끝이 ‘네년’이라 짖어 댄 환관 목젖 바로 아래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도 시퍼런 검기를 피워 올린 채.

“고, 공주님 같은 누추한 분이 왜 이런 귀한 곳에……?”

갑작스런 등장에 충격이 컸는지 또다시 말실수를 범하는 왕진공.

공주는 거기에 답하지 않고 잠실을 찬찬히 살펴봤다.

예상과 다르게 훌륭했다. 잠양사도 없이 누에를 이만큼이나 길러 낼 줄이야.

오기 전엔 필시 망했을 거라 여겼다. 뭣하면 억지로라도 검증을 통과시키고자 황족인 자신이 몸소 행차한 것인데.

‘그럴 필요조차 없어졌구나.’

누가 이것을 보고 신생 잠실이라 생각하겠는가. 짧은 기간에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룩했다. 대체 어떻게 해낸 건지 의문일 지경.

도화공주는 젊은 여자 상주를 슬쩍 쳐다봤다. 과연 호부견녀(虎父犬女)는 없다는 걸까.

춘휘거상과의 약속을 지키러 온 게 정답이었다.

“왕진공! 네놈의 사죄가 아직 들리지 않는구나! 당장 그 불경한 주둥이를 땅에 박지 못할까!”

질문에 앞서 해야 할 게 있지 않냐며 서슬퍼런 안광을 피워 올리는 천수공.

그는 굽혀지지 않는 목을 모조리 따주겠다며 진득한 살기를 폭출시켰다.

“주,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공주님!”

황족 모독은 극형이다. 몰랐다고 한들 그 죄가 비껴가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기에 꼿꼿했던 목을 넙죽 조아리며 용서를 구걸하는 환관들.

원래라면 막무가내식 금결 통과로 반발을 사는 건 공주 쪽이 될 예정이었는데.

생각보다 잠실이 훌륭했고, 왕진공의 입이 경솔했던 탓에 명분과 약점을 동시에 틀어쥐게 됐다.

즉, 칼자루는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뜻.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응?”

“히익!”

이번 기회에 목을 날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으름장을 놓는 천수공.

도화공주는 그 장면을 보며 옅게 웃음을 지었다.

***

순식간에 뒤바뀐 전황.

도화공주께서 무대를 뒤집어 놓으셨다.

“저, 저흰 그저 2황자님의 명으로 어쩔 수 없이……!”

“절대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게 아니었습니다!”

“공주님, 부디 목숨만은……!”

황궁의 문고리 권력들이 서로 살려달라며 바닥에 머리를 쿵쿵 박아댔다.

몇 마디 말도 없이, 그저 등장만으로도 불리했던 상황을 일거에 뒤집은 여인.

저게 황제의 피붙이가 가지는 권력인가.

“말해라, 2황자가 도화공주님을 모욕하라고 시키더냐!”

“헉, 절대로 그렇지는…….”

“그렇다면 네 녀석이 자의로 공주님을 ‘네년’이라 모욕했단 말이더냐?”

“그, 그것도 오해이십니다!”

거기에 망나니처럼 날뛰는 천수공이란 중년인.

이때다 싶었는지 뿌옇게 검기가 맺힌 칼을 이리저리 들이대며 환관들의 혼을 쏙 빼놓고 있었다.

“……무진아, 대체 어디서 저런 사람들을 데려온 거니?”

어느새 단무진 옆으로 슥 다가온 은화란 상주의 질문.

그녀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게요.”

뭔가 좀 범상치 않은 인간들이다 싶어 슥 지나치려 했던 건데, 설마 환관과 공주였을 줄이야.

단무진은 자신의 촉이 아직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허투루 먹은 해결사 짬밥이 아니라니까.

“누님, 또 제 덕에 살았죠?”

“……넌 그냥 오겠다는 사람 안내해 준 것뿐이잖니.”

은근슬쩍 내 공으로 만들려 했더니.

오늘 하루 온갖 고초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상인의 예리함을 유지하고 계신 은화란 상주님이셨다.

“근데 너 뭐 하니……?”

“이거요? 갑자기 발이 간지러워서.”

눈앞의 고자 아저씨가 천살성 앞에서 살기를 폭사하는 바람에 말이다.

흉성이 몸 안에서 마구 날뛰고 있었다. 이 상황에 가부좌를 틀 순 없으니 급한 대로 동공을 펼쳐 녀석을 잠재우는 중이었다.

츠츠츠-

불만스러운 태도로 다시 잠드는 천살성.

“상의감 왕진공은 듣거라.”

침묵 끝에 도화공주가 입을 열었다.

면사 너머에서 가녀리지만 기품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잠업 선별은 전적으로 상의감의 일이지만, 오늘 본녀가 직접 그 과정을 목도한 바, 심히 공정치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이에 동감하는지 옆에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화란 상주.

주먹까지 불끈 쥔 것이, 아까 쏟아지는 악의를 견뎌 내면서 쌓인 게 많았나 보다.

“잠양사 없이도 이토록 훌륭하게 누에를 길러 낸 잠실이거늘. 공정하게 심사했을 시, 통과시키는 것이 상식적으로 옳을 터.”

대체 어떻게 성공해 낸 것인지 여러 의문점이 있긴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결과다.

그리고 그 결과가 무척이나 빼어난 상황이었다.

“하, 하오나…….”

승기가 완전히 이쪽으로 기울었다. 밑천이 다 털린 환관들의 마지막 저항.

“하오나?”

심기가 거슬렸는지 공주의 말끝이 삐죽 휘었다. 그것만으로도 심히 움찔거리는 환관들.

“천수공, 황족 모욕에 대한 처벌은?”

“즉참(卽斬)이옵니다. 공주님.”

정녕 뒤지고 싶은 거냐며 천수공의 눈이 부리부리해졌다. 간신히 칼집에 들어갔던 칼이 반쯤 움푹 솟아올랐다.

명이 떨어지는 순간 환관들의 목을 그대로 일직선으로 그을 기세였다.

“신중히 생각하라, 환관들이여.”

그렇게 천수공을 이용해 좌중을 공포로 몰아넣은 다음, 뒤편에서 현명한 선택을 종용하는 도화공주.

“여기서 목이 날아간들, 이 일을 사주한 오라버니가 신경이나 쓸까? 명령에 실패한 데다 황족까지 모욕한 그대들을?

“…….”

무척 현실적으로 와닿는 의견.

은성상단을 보란 듯이 뭉개 태감으로 출세하겠단 계획이었는데, 이젠 목숨 보전조차 위태로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크흑!”

이에 침음성을 흘리며 고개를 툭 떨구는 왕진공.

황녀궁에서 은인자중했던 도화공주가 직접 이곳까지 행차하실 줄이야.

그녀 말대로 2황자는 ‘쯧쯧’ 혀를 찬 후에 무능했던 환관들의 존재를 금세 잊어버리시겠지.

한마디로 버텨봐야 개죽음이라는 뜻.

“상의감 왕진공, 도화공주님의 충고를…… 삼가 받들겠습니다…….”

왕진공은 뾰족한 가시를 삼키듯 말했다. 근처에서 ‘이제 끝났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는 환관들.

“라고 말함은?”

빠져나갈 구멍을 주지 않는다. 철두철미한 분이시다.

결국 왕진공은 잠실 관계자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야망과 출세에 종지부를 찍는 그 한마디를 내뱉어야 했다.

“은성상단의 금결은…… 통과(通過)입니다.”

마지못한 사업 승인. 은성상단을 박살 내고 오라 들었건만 역으로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그리고 그러한 선언에 반색한 얼굴로 벌떡 일어서는 잠실 인부들.

“오오!”

“사업권을 따냈다……!”

“드디어, 드디어어어!”

그간의 철야로 거뭇해진 눈두덩이.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생이 보답받았단 생각에 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러댔다.

이로써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된 은성상단이었다.

“됐어, 됐다고 무진아!”

그 치솟는 기쁨에 옆에 있던 단무진을 와락 안아 버리는 은화란.

숨이 막혔고, 부드러웠으며, 은은한 연꽃 향기가 풍겼다.

평범한 꼬마애라 생각했는지 거리낌이 없는 신체 접촉.

그런데 은화란에 이어 또 한 차례 덥석 덮쳐오는 이들이 있었다.

“고맙다, 이 녀석!”

“네 덕에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됐어!”

“처음에 무시한 건 사과하마, 넌 잠실의 영웅이야……!”

껄껄 웃으며 대견하다는 듯 단무진을 돌아가면서 껴안는 잠실의 아재들.

철야로 숙성된 쉰 냄새와 수북한 가슴털이 안면을 찔러댔다.

“……아, 제발.”

콧속을 파고드는 퀴퀴한 악취.

한여름이었다.

***

권력은 더 큰 권력 앞에 뭉개지는 법.

도화공주의 등장으로 못돼먹은 고자들이 굽신거리며 물러났다.

덕분에 완전히 축제 분위기로 변한 잠실.

나는 소란 속에서 도화공주라고 불린 면사 여인을 슥 쳐다봤다.

“내 춘휘거상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나, 직접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구나. 은화란 상주여.”

춘휘거상, 전대 상주와의 친분을 언급하는 공주.

“…황송합니다, 공주님.”

은화란 상주가 고맙고도 송구한 이야기라며 자세를 낮췄다.

현재 이 잠실에서 가장 입김이 센 두 여인의 대화였다.

“이런 곳까지 직접 행차해 주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왕진공도 예상 못 했다.

거취에 무척이나 신중하던 그녀가 이렇게 불쑥 솟을 줄은.

“어찌 안 오겠느냐. 춘휘거상의 죽음이 무척 석연찮다고 들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본녀에게도 적잖은 책임이 있음이야.”

물론 그 춘휘거상은 황실의 어둠을 각오하고 뛰어든 것이었지만 말이다. 황녀의 대의(大義)에 이끌려서.

하지만 그 딸은 제 의사와 상관없이 휘말린 격이니, 노리는 적이 많음에도 직접 행차한 거라 설명해 주는 도화공주였다.

“……아버지는 항상 은(恩)을 입으면, 마땅히 갚으라 그러셨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은성을 도와주신 이 은혜, 결초보은(結草報恩)의 자세로 갚아 나가겠습니다.”

바라 마지않던 대답이었는지 면사가 살랑이도록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그러니 향후 금전과 관련해 도움이 필요하실 경우, 저를 불러주십시오. 공주님.”

“고마운 말이구나. 내 기억해두마.”

불미스러운 일로 끊어질 뻔했던 황권과 금력의 고리가 다시금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황녀도 아마 이걸 노리고 직접 발걸음 한 것이겠지.

은화란도 황실 사업에 발을 들인 이상, 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 싶어 3황녀의 비호 아래 들어간 것이겠고.

그렇게 서로의 이해관계를 정리하며, 양잠 사업권 이후의 이야기를 논하는 두 여인.

그러던 공주가 돌연 이렇게 물어왔다.

“그래서, 비결이 뭐였느냐?”

잠양사 없이도 잠실을 단기간에 부흥해낸 비결이 계속 궁금했던 모양.

이에 은화란은 내 쪽을 슥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 덕분입니다.”

놀랐는지 살짝 들어지는 면사 여인의 고개.

“……놀랍구나, 어쩐지 아까 그 어려운 질문을 척척 답해내더라니.”

높으신 분께서 내 활약상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가슴을 당당하게 펴봤다.

“한데 양잠 지식은 황실에서도 극소수만 아는 것인데, 저 아이는 대체 정체가……?”

정체를 묻는 말에 나는 다시 가슴을 오므려 넣었다.

현대 지구에서 날아온 놈이라고 설명할 순 없으니까.

“그것이, 저 아이의 출신은 황 노야꼐서 비밀로 해달라고 하셔서…….”

황 노야는 상단을 도와주는 무림 고수고, 저 아이는 그 제자이다. 고로 무림의 일이니 그냥 넘어가 주지 않겠냐는 은화란의 부탁.

“황족 앞에서 정체를 숨기는 게 매우 불경한 짓이란 걸 알고 있더냐, 상주여.”

“그것이…….”

황족 앞에선 관무불가침도 다 헛소리다. 침음을 흘리는 은화란.

“허나 오늘은 그대를 만난 좋은 날이고, 좀 전의 활약으로 공이 과를 상쇄했으므로 내 너그러이 넘어가도록 하마, 이름 모를 아이야.”

면사 너머의 근엄한 시선이 나를 향하는 듯했다.

솔직히 지식의 출저를 캐물으면 어떻게 대답할지 막막했는데, 은화란 상주 덕에 위기를 모면한 듯했다.

절로 흘러나오는 안도의 한숨.

아무튼 껄끄럽던 문제가 해결됐으니,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실 권력자인 도화공주에게 스스로를 어필해봤다.

“제 이름은 단무진입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이름 모를 아이로 남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분이신데.

“그리고 오늘 보셨듯 재주가 제법 많습니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저 또한 가감 없이 불러주십시오.”

지구에서도 권력가들, 즉 금뱃지 단 인간들의 의뢰는 일단 금액 단위부터 달랐다.

상대 후보자에 대한 추문이나, 약점을 캐오면 고액의 보수금이 몇천씩 턱턱 들어왔단 말이다.

고로 이때다 싶어 잘난 얼굴을 각인시켜 봤다.

“하! 가소롭구나. 공주님껜 동창(東廠)이 존재하거늘, 네깟 것이 어찌!”

그러자 고자 아저씨 천수공이 코웃음을 치며 내 접근을 차단하고 나섰다.

근데 금의위(錦衣衛)는 따로 언급 안 하시네 이 아저씨.

“당돌하구나, 허나 밉지 않은 마음이 드니 어찌 된 일일까?”

새하얀 면사 뒤에서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최소 절정 무인의 제자이며, 벌레 기르는 재주가 있는 소년.

“본녀에게 도움을 주겠다니……. 참으로 기특하지 아니한가. 그래, 기억해두지.”

내 진지한 영업 시도가 어린아이의 치기 정도로 취급된 듯했다.

하지만 첫술부터 배부를 순 없다고,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게임으로 치면 최후반에 만날 거물급 인물을 이벤트 덕에 초반에 만난 격이니.

내 이름을 기억시켰다는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지.

“난 밉다 이놈아. 그러니 나도 널 기억해두마. 다른 의미로다가…….”

고자 아저씨의 의미심장한 선언.

저 양반과의 만남은 길인지 흉인지 구분이 안 갔다.

“상주여, 그럼, 본녀는 이만 떠나도록 하마. 신분이 노출됐으니 오래 있어서 좋은 꼴 볼일이 없노라.”

그리고 전대 상주와의 약속 승계와 양자 간의 교통정리가 끝났는지 빠른 이별을 고하는 도화공주.

그녀는 세세한 것은 사람을 보내 조율할 테니 이만 자리를 파(破)하겠다고 알려왔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뒤숭숭한 일이라도 찾아오는 걸까. 어쩐지 황녀궁을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더니.

황족이란 신분도 참 여러모로 힘든 일이 많겠구나 싶었다.

“그럼, 언젠간 또 보자꾸나. 상주여. 그리고 거기의 소년도.”

면사를 살랑이며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도화공주.

그리고 그녀의 뒤를 천수공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 신묘한 움직임과 발재간을 보아 저 양반도 범상치 않은 고수인 듯싶었다.

“근데 면사 안쪽은 결국 한 번도 못 봤네.”

얼굴이 곧 신분패란 말이 있다. 면사를 찰나간 들어 올렸음에도 존안을 한눈에 알아보고 납작 엎드렸던 환관들.

“그러게, 소문으로는 황궁에서 제일가는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 하시던데.”

호사가들이 북경 삼화로 꼽는 또 다른 분이시란다. 나는 은화란의 설명에 아쉬움이 배가 되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아름다우신 거예요? 누님보다 더?”

내가 지금까지 본 북경 삼화는 단 한 명뿐이라서 말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것 아니겠니?”

평소엔 사람을 꽃에 비유하는 그 칭호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더니.

역시 미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의 외견에 크나큰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그러면 그 점을 활용해 줘야지.

“누님이 훨씬 더 예쁘실 겁니다.”

“흥, 면사 안을 보지도 못했으면서……. 뭐, 말은 고맙구나.”

황녀는 멀고 은화란은 가깝다.

아닌 척하면서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은지 입가가 씰룩거리는 은화란.

이것이 바로 무진류 처세술의 오의(奧義)였다.

***

의뢰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정산이 시작된다.

이는 지구와 마찬가지로 중원에서도 바뀌지 않는 쩐의 법칙.

그리고 검증 통과를 자축하는 짧은 연회가 끝나고, 적막이 내려앉은 은성상단의 상주실.

“이거면 되겠니?”

은화란이 대뜸 싯누렇게 번쩍이는 금원보(金元寶) 하나를 책상 위에 ‘턱’하고 올려놨다.

“……!”

엄지발가락 두 마디만 한 소(小)금원보였지만. 저것만으로도 내 쟁자수 봉급 십수 년 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나는 놀란 나머지 바짝 얼어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이만한 금덩이를 받아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지구에서도 무척 귀한 것 아닌가. 저게 대체 몇 돈이지?

“……그래, 이걸론 부족한 거구나?”

그런데 내 반응을 곡해한 것인지 싯누런 것을 또 하나 더 ‘턱’ 내려놓는 은화란.

“……!!”

내 입이 찢어질 듯 떡 벌어지고 말았다.

18화 두 배의 이득

“무진이 녀석, 지금쯤 흔들리고 있겠구먼.”

낡고 헤진 도포. 개기름으로 떡진 머리.

무일푼 거렁뱅이 노인이 수레에 실린 술 항아리를 부둥켜안은 채 중얼거렸다.

탐욕은 불도에서 규정한 십악(十惡)이자 심마로 이어지는 뿌리.

특히 돈에 달라붙은 사특한 기운은 예로부터 피를 불렀고 수많은 인간을 죽여왔다.

아무리 똑똑한 인간도 돈 앞에선 이지가 흐려지며 내면의 욕망이 자극되지.

그리고 흉성은 막대한 보상으로 느슨해진 단무진의 마음을 파고들 터.

“악귀가 손짓할 때, 녀석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런지.”

갑자기 큰돈을 벌게 되면 사람이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숨겨져 있던 본성이 드러나는 거다.

그래서 상주 은화란이 금전적 보상을 하고자 녀석을 불렀음에도 특별히 막아 세우진 않은 황걸개였다.

성운심법 수련엔 독이 될 수도 있지만, 녀석의 그릇을 알아볼 좋은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일종의 시험이 되겠군.”

거지들은 하나같이 돈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코앞에 싯누런 황금을 턱 내려놓으면 과연 몇이나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 눈이 훼까닥 돌아가겠지.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그렇게 천살성에게 빌미를 주겠고.

하지만 그럼에도 단무진이 그것을 극복해내길 내심 바라는 황걸개였다.

하늘이 내린 숙명에 저항하려면 그만한 의지와 정신력을 갖춰야 하는 법.

벌컥벌컥.

소홍주를 한 바가지 떠 말없이 들이켜는 황걸개.

녀석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당랑재후(螳螂在後)의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텐데.

“떼잉 쯧, 고놈 때문에 걱정이 날로 느는구나.”

술을 연거푸 퍼마셔도 번민과 걱정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하여 그는 저마다의 색으로 반짝이는 밤하늘의 흉성들을 말없이 올려다봤다.

개중 가장 불길하게 빛나는 천살성을 한참이나 응시하는 노인이었다.

***

샛노란 소(小) 금원보 두덩이.

그것들이 내뿜는 금빛 광채에 일순 의식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저 메추리알만 한 것들이 내 쟁자수 봉급의 수십 년 치다.

쟁자수 기본급이 쥐꼬리만 하단 걸 감안해도 일반 서민이 좀처럼 만져보기 힘든 금액임은 분명했다.

‘내가 지구에서 누에고치를 팔아 얼마를 벌었더라?’

약 십만 원 정도를 벌었었다.

보육원 꼬맹이에겐 크나큰 돈이었지. 매점에서 과자 파티도 벌일 수 있는 금액이다.

근데 여기선?

딸깍해서 얻은 정보로 순금 덩어리를 손에 넣어 버렸다.

이 정도면 지구에서도 상당한 금액. 쟁자수 꼬맹이가 쥐고 있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위험한 돈이었다.

나는 오만 잡생각이 다 들어 상주 은화란을 슥 쳐다봤다. 이거 받아도 되나?

“사양하지 마렴. 은성은 반드시 받은 은혜를 갚는단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눈웃음을 지어 보이는 은화란 상주.

진짜 주는 건가 보다. 은성상단은 지금 자금난이라 한 푼이라도 아쉬울 텐데, 그건 자신들 사정이고 대가는 지불되어야 한단 뚝심 있는 자세였다.

그렇다면 나야 사양 않고.

“크흠. 뭐 이런 걸 다…….”

나는 헤벌쭉해진 얼굴로 손을 덥썩 가져갔다.

손끝에 금덩이가 닿자마자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듯했다. 작지만 묵직한 질감. 그래, 이게 해결사지.

큰돈이 생기자 어깨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이 돈으로 뭐부터 해볼까? 일단 몽둥이를 휘둘러 온 장씨네 포목점을 찾아가 여봐라는 듯이 으스대보자.

그런 다음 거지를 무시해 온 루주에게 돈 싸다구를 날린 다음 북경의 온갖 산해진미까지 맛보는 거다.

“흐흐.”

돈 버는 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다니.

철전 한 닢에 울고 웃던 거지 시절이, 그리고 꼭두새벽부터 고생해 온 쟁자수 시절이 한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 돈만 있으면 한동안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 수 있겠지.

역시 세상은 돈이 있고 볼 일이다. 없다가 있으니 이렇게 기분이 좋다.

그렇게 반짝이는 금원보를 품속에 넣으려는 순간.

갑자기 단전에서 쥐어짜이는 고통이 밀려왔다.

“윽!”

전신을 내달리는 엄청난 격통. 황금으로 흐릿해졌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무언가를 경고하듯 미친 듯이 요동치는 좁쌀만 한 항마의 내공.

그 덕인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확 깼고, 그 직후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게 됐다.

‘이게 뭔…….’

찐득하고 흉흉한 핏빛 안개가 어느새 상주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금덩이를 집어 들도록 내 팔을 잡아당기고 있는 천살성의 기운.

전신에서 붉은 것들이 스멀거렸다.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앞두고 혀를 날름거리듯이.

‘이런 십.’

모골이 송연한 장면. 눈앞의 황금에 눈이 멀어 이걸 보지 못했다니.

저 녀석이 나에게 수작질을 부리고 있었다. 성운심법이 일깨워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천살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한 발짝 내디뎠겠지.

최근 성운심법 수련으로 잠시 잠잠해졌나 싶었더니, 여전히 내 정신이 타락하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모양.

정말 지독하고 끈질긴 녀석이다. 거기에 떨쳐낼 수도 없는 신세.

그런 내 처지를 새삼 자각하자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탐욕이 싹 가시는 걸 느꼈다.

그래, 이성을 잃고 살인귀가 되면 금은보화가 다 무슨 소용이랴.

“누님.”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하였다. 손에 쥐고 있지 않으면 시험을 들지도, 유혹에 당하지도 않는 법.

천살성의 농간에 넘어갈 순 없지. 놈의 수작질을 원천 차단해 버리겠다.

“감사하지만 이건 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금원보를 다시 그녀 쪽으로 스륵 밀면서 그렇게 말했다.

일단 살고 봐야지.

“……뭐? 진심이니?”

커다란 눈을 흠칫 뜨며 정말 의외라는 듯 되묻는 은화란.

“예, 상단 사정이 좋지 않다면서요. 추심까지 당하시던데……. 보태 쓰세요.”

천살성의 부활은 곧 나라는 인격의 죽음. 덥석 삼키기엔 아직은 성운심법의 성취가 부족했다.

눈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군. 언젠가는 흉성의 수작질도 이겨낼 항마의 내력을 손에 넣고 말리라.

“너는 정말 그걸로 괜찮은 거니?”

이런 경우는 생각도 못 했는지 얼굴에 놀란 표정이 역력한 흑발의 미인.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누님. 대신 고기만두나 왕창 주세요.”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갓 쪄낸 놈으로 아주 왕창 말이다.

결국 못 먹었던 동파육도 이번 기회에 배 터지도록 먹어봐야지.

“참, 그리고 저 같은 꼬맹이들, 상단에서 더 고용해 줄 수 있어요?”

동파육 하니까 생각이 났다.

이건 내 개인의 이득을 바라는 소원은 아니니 천살성이 파고들 여지가 없겠지.

나를 대장이라 부르며 따라오던 꼬맹이들을 이번 기회에 데려와야겠다.

“…….”

그런데 내 부탁을 듣고서 무언가 멍한 표정인 은화란.

거지 출신의 쟁자수가 오지랖을 부려 대니 어이가 털리기라도 한 걸까.

“……꼬마가 몇 명인데?”

“한 열 명쯤 돼요.”

그녀라면 적절한 일자리를 주선해 줄 것이다.

아무 대가도 없이 퍼주기만 하면 자생 능력을 상실하는 법이니, 적당히 일을 시키고 대가를 줌이 옳다.

그러자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던 부채를 차르륵, 접는 은화란.

드러난 그녀의 입가에는 기특하다는 미소가 한가득 걸려 있었다.

***

견금여석(見金如石)이란 말이 있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단 뜻으로, 재물보다 의리를 앞세운다는 뜻이었다.

거상의 딸로서, 그리고 상단의 후계자로서 수많은 인간군상을 두 눈으로 봐온 은화란.

그럼에도 저 말을 실천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

황금의 가치를 모르고 거절한 순 있다. 어디 중원 벽지의 꼬마라면 그럴 수도 있는 노릇이지.

하지만 이 아이는 금원보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보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았던가.

허나 그럼에도 상단의 상황을 고려하여 양보를 해온 것이다. 이걸로 낭인을 더 고용하고 표행에 보태 쓰라고 말이다.

이 무슨 득도한 고승 같은 배려심인지. 이렇게 어린데도.

물질적인 것에서 초연한 황 노야의 수련 방식. 솔직히 어린아이가 따라가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아이라면 다를지도 모르겠다. 노야께서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셨군.

“누님, 아까부터 말이 없으신데 괜찮아요?”

평생을 이해타산과 인맥, 셈법으로만 살아왔건만.

은화란 황 노야의 제자이기에, 그리고 쓸 만한 양잠 지식을 가지고 있기에 친밀하게 대해줬던 스스로가 살짝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이제부턴 누나라고 부르렴.”

은화란은 접은 부채로 볼을 툭툭 치며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이해득실 상관없이 순수하게 친해져도 될 그런 아이를 만나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넵, 누나.”

영특하고 싹싹하며 재능 있는 아이다. 호의가 담긴 미소를 빙그레 지어 보이는 은화란.

그녀는 서랍을 열어 사탕에 절인 당과를 하나 건네줬다.

“오, 개꿀.”

가끔 튀어나오는 못 알아들을 소리.

굶주리던 시절이 있었다보니 먹는 건 항상 거절하지 않고 곧바로 입에 넣고 보는 소년이었다.

어느새 쟁자수 검증 때의 부인들 같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화란.

“이것도 먹으렴, 무진아.”

먹는 게 복스러워 자신 몫의 주전부리도 넘겨줬다. 쭈왑쭈왑 잘도 먹어 대는 단무진.

저번에도 말했듯이 은성상단은 받은 은원을 반드시 갚는다.

스승을 따라 물질적인 보상은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면 무형적인 도움을 듬뿍 주면 될 일.

마침 그녀에겐 가족이 없었다. 절연한 오라버니 한 명뿐.

허나 오늘 친하게 지낼 동생이 생긴 듯했다. 든든한 뒷배도 되어주면서 말이다.

“후후.”

양손에 턱을 괸 채로 단무진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여인.

어떤 공자는 만금을 준다 해도 못 얻은 은화란의 호감을 자신도 모르게 손에 넣은 단무진이었다.

***

어슴푸레한 새벽. 저 멀리 밤하늘을 발그스름하게 밝힌 보름달이 떠오른 광경.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나는 느려진 호흡을 내뱉었다.

인체를 소우주로 여기고, 천체(天體)를 한 바퀴 돈다고 하여 소주천(小周天)이라고 불리는 의식.

“후우-”

일전에 황걸개가 그랬었지. 선업의 기준은 오롯이 본인에게 달렸다고.

그리고 나는 오늘 곤궁에 처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몰락 직전이던 양잠업을 멱살 잡고 끌어 올린 데다, 수많은 일자리도 함께 구해냈다.

거기에 은화란이 제시한 금덩이까지 양보하고 돌아온 상황.

수전노(守錢奴)인 내게 있어 이 이상의 선행은 없을 지경이다.

고로 나는 지금 하려는 짓에 제법 자신이 있었다.

‘성광여래불(盛光如來佛)오시고, 일광월광양(日光月光兩) 다스릴지니…….’

밤하늘을 촘촘히 밝히고 있는 북두성군(北斗星君)과 남두성군(南斗星君).

성운심법의 공능은 별의 기운을 정순한 내력으로 환원(變換)하는 것.

평소엔 잔잔한 시냇물처럼 흐르던 진기가, 오늘은 막대한 선업을 추진력으로 세찬 강줄기처럼 기경팔맥을 내달리고 있었다.

츠츠츠-!

그러한 진격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시뻘겋게 피어오르며 잔뜩 경계하는 천살성의 기운.

이윽고 응집된 진기는 정수리의 백회혈까지 치달았다.

쿵─!

그리고 힘차게 치솟아 백회혈의 ‘무언가’를 충격했다. 잠시 움찔하고 튀어 오른 몸뚱어리.

머릿속에 자리 잡은 흉성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이전처럼 단단하지가 않다. 선업의 영향인지 겉 부분이 약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움츠러든 그 흉성을 또 한 차례 공성추처럼 때리는 성운심법의 공력.

쿵─!

몸이 또 한 차례 들썩였다. 테두리에서 잘게 떨어져 나오는 흉성의 편린.

그리고 놀랍게도 성운심법의 공력은 이를 모조리 흡수하여 제 기운으로 만들어 버렸다.

정말로 별의 힘을 훔치는 데 성공해 버린 것이다.

츠츠츳-!

그 기가 막힌 현상에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마구 날뛰는 천살성의 기운.

그 모습이 마치 재물을 도둑질당한 졸부가 날뛰는 것 같아 퍽 웃겼다.

그러나 훔쳐 낸 별의 기운은 이미 갈무리되어 단전 속으로 들어온 상태.

“헙!”

실이 물레에 휘감기듯 진기의 가닥들이 단전 안에서 점점 크기를 불려 가는 게 느껴졌다.

실시간으로 늘어나고 있는 성운심법의 정순한 공력.

천살성 또한 티끌만 한 별의 기운을 빼앗긴 것에 분노하며 내 피부를 미친 듯이 쿡쿡 찔러댔다.

이후로는 황걸개가 가르쳐준 구결을 외우며 축기를 계속해 나갔다.

‘성령회일체하며…… 수천기파세하니…… 만고를 꿰는 것은 곧은 심념(心念)뿐이랴.’

그렇게 식은땀이 온몸을 가득 적시고, 새벽과 아침을 구분 짓기 힘든 동틀녘이 될 무렵.

마침내 소주천을 끝낸 나는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좀 더 길고 중후해진 숨결. 확장된 감각. 괴력이 솟아나는 손끝과 발끝.

나는 호법을 서주던 황걸개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에 상당히 놀란 듯한 눈치.

“……허, 이게 되네?”

일련의 과정을 끝내자 좁쌀만 하던 내공이 이제 완두콩만 한 크기로 불어나 있었다.

펑! 펑!

시험 삼아 주먹을 뻗자 공기를 터트리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초식도 없이 그저 내공만 쏘아 보냈을 뿐인데도 이전과는 움직임부터가 한결 달랐다.

“마치 영약을 복용한 것 같군.”

복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말이다.

온몸에 힘이 돌았다. 충만한 자연지기가 느껴졌다. 어찌 보면 기연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상황.

나를 삼키려 드는 흉성의 힘을 역으로 뺏어와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니. 그야말로 두 배의 쌉이득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네 녀석이 절세심법 맞냐고 의심했던 성운심법의 힘이니라.”

황걸개가 이제야 깨닫겠냐며 ‘흘흘’ 웃으며 그렇게 설명해 줬다.

그리고 아까 내 몸으로 모여들던 내력의 양을 어림짐작하고 대충 삼년치 정도의 내공이 모였을 거라 덧붙이는 황걸개.

“이것이…… 내 힘이란 말인가?”

나는 돌멩이도 부술 듯한 손아귀 힘을 느끼며 두 주먹을 꽈악 쥐어봤다.

예전에는 몇 번 사용하는 순간 순식간에 메말라 버렸던 내공인데, 지금은 발끝으로 내공을 발하고, 주먹을 뻗어봐도 여유가 넘쳤다.

“후후후.”

평범한 무인들이 삼 년에 걸쳐 꼬박꼬박 토납해야 모이는 이 힘을 나는 단 하루 만에 이뤄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격(隔)의 차이.

밑바닥에서 신음하던 거지 꼬맹이가 드디어 이 강자존의 세상에서 우뚝 서는가.

금덩이를 포기한 대가로 막대한 힘을 손에 넣은 나는 오연한 눈빛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힘에 한껏 취한 내 모습에 옆에서 어이없다는 듯 비웃음을 터트리는 황걸개.

“무엇이 웃기지…… 늙은이?”

따악!

호리병 밑동이 정수리 부분을 내리찍었다.

“악, 시발!”

골통이 파고드는 통증에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콩알만 한 내공으로 거만해진 소년의 거드름을 순식간에 날려 버린 한 수.

“아주 지랄 똥을 싸는구나.”

황걸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19화 선업 보따리

지금 단무진을 바라보고 있는 황걸개의 심정은 실로 복잡했다.

여러 말들이 떠올랐지만 짧게 축약하자면.

‘이게 된다고……?’

아무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길.

그조차도 가능성이 희박하다 여겼던 일을, 이 꼬맹이는 덜컥 성공시켜 버렸다.

흉성의 기운을 훔쳐 자신의 내공으로 양생해 버린 것.

“허.”

성운심법의 약발이 잘 안 먹힌다길래, 이론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를 혹시나 싶어 흘려준 것뿐인데.

그 무시무시한 천살성을 상대로 배수질을 해내다니.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도인이시여, 당신은 설마 이것까지 안배하고……?’

세상일에 우연은 없고, 오직 필연만이 존재한다던 그분.

별빛과 함께 내려온 도인이셨다. 알고 있는 것이라곤 ‘일월’이라는 이름 두 글자뿐.

펑! 펑!

손에 넣은 내공이 만족스러운지 내력을 담아 주먹질을 뻗고 있는 단무진.

저게 무려 삼 년치 내공이다.

이 과정을 열 번 반복하면 무려 삼십 년 내공이 쌓인단 뜻이 아닌가? 가히 기연이나 마찬가지군.

그리고 이렇게까지 내공이 모이게 된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성운심법은 선업을 행하기 위해 얼마나 ‘감내’했냐에 따라 공능이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이 녀석, 어지간히도 돈이 좋았던 모양이군.’

금원보를 포기하기 위한 눈물겨운 고뇌가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그 돈에 대한 집착이 전화위복이 되어 저만한 내공으로 돌아온 것이겠고.

“흘흘.”

하여간 희한한 녀석이다.

철전 한 닢에도 눈에 불을 켜더니, 그 금쪼가리는 어떻게 포기했을꼬.

거기다 거지 시절의 부하들을 수렁에서 건져달라 했다지?

지엄한 황명이 두려워 차마 돕지 못했던 그 거지 꼬마들을 말이다.

이것도 전부 은화란 상주와의 대화에서 전해 들은 것들이었다.

저 녀석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얘기하는 내내 목소리에 호의가 가득하던 그녀.

그 영향인지 단무진을 쳐다보는 황걸개의 눈도 어느새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이놈아.”

“왜요?”

‘나락쓸기’라는 초식명을 외치며 듣도 보도 못한 발동작을 펼치고 있는 녀석.

“은화란 상주가 너를 동생이라 부르던데, 어찌 된 맥락이더냐.”

황걸개는 순간 은화란에게 집 나간 오라버니 말고도 숨겨 둔 동생이 있나 싶었다.

“아, 그거요? 어쩌다 보니 누나, 동생 하기로 했어요.”

그럴 리가 있나. 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여인이다.

전대 상주도 모든 관계를 셈법으로 따져 묻는 은화란의 특성을 제법 걱정한 적이 있을 정도.

아무래도 주급도 시원찮은 쟁자수가 상단 사정을 헤아려주고, 거지 시절의 애들까지 챙기려 드는 게 무척이나 기특했던 것이겠지.

“흘흘, 금을 포기해 내공과 생명 연장, 상주의 신임까지 취한 것이더냐?”

하나를 포기해 셋을 얻었으니 그야말로 일석삼조다.

특히 천하 십대 상주의 신임은 금 쪼가리 몇 개보다 더 값진 것이지.

“근데 노야, 제가 만약 그 금덩이를 챙겼으면 어쩌려고 하셨어요?”

증대된 신체 능력으로 ‘붕권’이라는 괴상한 주먹질을 해대던 단무진이 느닷없이 그렇게 물어왔다.

평소 탐욕을 멀리하라 했던 황걸개다. 한데 막대한 보수금을 챙기러 가게 놔둔 점에서 무언가 의아했던 모양.

“어쩌긴, 중원에서 힘없는 놈이 큰돈을 가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려 주기 위해 두들겨 팬 다음 뺏을 생각이었다만?”

번개처럼 출수되어 단무진 얼굴 앞에서 멈추는 주먹. 그리고 나머지 손으로 뭔가를 휙 훔치는 시늉을 해보였다.

일전에 군내 나는 만두를 빼앗았던 그 손짓.

“이야, 이거 완전…….”

질색한 표정으로 뒷말을 삼키는 녀석.

악랄한 마두를 눈앞에 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노부를 쓰레기로 보는 듯한 눈빛이구나.”

황걸개의 물음에 놀라 두 눈을 움찔뜨는 단무진.

“아니, 고수가 되면 그런 것도 압니까?”

퍽!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죄로 이마빡에 딱밤이 작렬했다.

“아악!”

머리통을 부여잡고 연무장 바닥을 나뒹구는 녀석.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 모습을 안주 삼아 황걸개는 탁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흘흘, 여전히 싸가지없는 놈이로고.”

기특하다가도 동시에 발칙스럽기 그지없는 놈.

얼굴을 찌푸린 채 다시 일어난 단무진이 옷의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입을 열었다.

“끙, 뭐 보태 주셨습니까? 몸에 미친별 품고 이 정도면 정상이지 뭘.”

천살성의 영향이 아니었어도, 저놈은 원래부터 미친놈이 아니었을까. 황걸개는 그런 생각을 떠올려봤다.

“그리고 아무리 힘이 세도 약한 놈들 돈 뺏는 건 쓰레기 맞잖아요?”

곧 죽어도 할 말은 하겠다는 저 태도를 보라.

“맞는 말이지만, 중원에서 그런 말을 면전에서 내뱉으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무언가를 주장하고 관철하려면 그에 따른 무력이 받쳐줘야 한다.

약자의 백 마디 말보다 고수의 칼질 한 번이 더 가치를 지니는 곳.

그리고 저놈은 아무리 봐도 제명에 살기는 글러 보였다.

“그러니 노부가 네놈에게 그 힘을 전수해주마.”

긴 수염을 쓸어내리며,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내뱉는 황걸개.

아까 봤던 그 무근본 주먹질과 발길질, 거기에 어설프게 훔쳐 배운 팔벽권까지.

성운심법의 전승자가 저런 허접한 몸짓이라니, 황걸개를 살려줬던 도인이 어딘가에서 한탄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엥, 진짜요?”

“그래, 그 흐느적거리는 몸짓 멈추고, 지금부턴 노부가 가르쳐주는 권법을 수련해보거라.”

용두방주가 심득이 담긴 무공을 직접 사사해주겠다는데 밍밍한 반응을 보이는 단무진.

본타의 개방도들이었다면 지금쯤 감격한 얼굴로 넙죽 절을 올려왔을 텐데 말이다.

정말 자신을 술주정뱅이 노인쯤으로 보고 있는 걸까.

황걸개는 그 격차에 짧게 실소를 지어 보였다.

“근데 저번엔 사람 패는 기술 안 가르쳐 줄 거라면서요? 혹여 살심을 자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네 녀석도 제 몸을 지킬 호신기 하나 정도는 익혀놔야겠지.”

일부러 시험에 들게 놔두었고, 녀석은 보란 듯이 그걸 통과해 보였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한 보상이 주어져야 인지상정.

“이놈아, 소화도(小化刀)를 아느냐?”

어쩌면 녀석은 은화란 상주에 이어 자신의 신임도 얻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 뭐냐……. 의관들이 사람 살갗 쨀 때 쓰는 칼이요?”

“그래, 같은 날붙이도 의관 손에 들리면 사람을 살리는 도구가 되는 법. 너 또한 노부의 가르침을 그리 사용해야 할 것이야.”

협(俠)을 행하며 사람을 구하는 천살성이라니.

말하면서도 이게 맞나 싶어 헛웃음을 지어보이는 황걸개였다.

하지만 이왕 가기로 한 길.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하겠지.

“예, 뭐. 배워서 좋은데 쓰긴 할 건데요…….”

흔치 않은 배움의 기회다.

하지만 선풍보를 수련할 때가 생각난 건지 한껏 불안해진 얼굴로 말을 잇는 단무진.

“가르치는 방식이 또 죽기 직전까지 줘패는 건 아니겠죠……?”

살심에 반응하는 천살성에게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수련 방법이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일취월장의 성장 속도를 보였었던 녀석.

“흘흘.”

황걸개는 그저 씩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설명이 되었는지 급속도로 핼쑥해지는 단무진의 표정.

“……아, 염병.”

놈이 선풍보를 펼쳐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려 했다.

그 맹렬한 거부 반응에 재밌다는 듯 더욱 진해지는 황걸개의 미소.

황걸개는 뒤돌아 도망치려는 단무진의 정수리를 호리병으로 내리찍었다.

따악!

“아잇 싯팔! 그만 때리라고! 이러다 지능 내려가면 책임질 거야?!”

청아한 타격음. 갓 잡힌 생선처럼 땅 위에서 펄떡대며 거세게 항의해 오는 무진.

“이미 낮아보인다 이놈아.”

선풍보를 사사한 사람 앞에서 선풍보로 도망치려 하다니. 우스운 놈이다.

그리고 뭐라고 해야 할지, 마치 복날에 개를 패는 듯한 이 찰진 손맛.

“그럼 지금부터 노부가 백결신권(百結神拳)을 전수해주마.”

때리는 맛이……. 아니, 가르치는 맛이 있는 녀석이었다.

***

중원에는 정보를 수집하고 가공하여 판매하는 단체가 여럿 존재했다.

그중에 가장 신비하다 알려진 것이 바로 하오문(下五門)이다.

개방이 걸의(乞義)에 기반한 정파 집단이라면, 하오문은 일상 깊숙이 스며든 점소이, 백정, 마부, 기녀 같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유기적인 조직체였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하오문이 듣는단 얘기가 있을 정도로.

무림인들은 하찮게 여기는 그들 앞에선 저도 모르게 느슨해져, 안일하게 입을 놀리곤 했다.

지루한 마차에서의 대화나, 객잔에서 술김에 떠든 내용이라거나, 베갯머리에서 속삭여 댄 대화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정보들도 짜집고 취합하다 보면 누군가에겐 무시 못 할 중요한 정보로 탈바꿈되는 법.

그렇게 하류층이 모였을지라도 집단으로써 막대한 부를 이룩해 온 하오문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런 하오문에 크나큰 변고가 발생했다.

바로 수장을 갈아치우고자 하는 반란이었다.

덕분에 하오문은 그날 아랫사람을 진심으로 아끼는 문주 홍각잔(弘殼棧)을 잃게 되었다.

누군가는 소중한 아버지를 잃었고 말이다.

“흑진조(黑診鳥)…….”

아직 변성기가 오지 않은 목소리.

한 꼬마가 좀 전의 싸움으로 틀어진 인피면구를 고쳐쓰며 으르렁거렸다.

골목 한구석에서 원수의 이름을 조용히 뇌까리는 일홍.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가족처럼 여겼던 그 인간이 뒤통수를 때려올 줄이야.

덕분에 일홍은 거지들 틈바구니에 섞여 몸을 숨기는 처지가 되었다.

놈의 손에 넘어간 하오문이 점차 검게 물드는 것을 외부에서 무력하게 지켜만 보면서 말이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추적을 피해 몸을 의탁한 이 거지 세력마저도 이제 와르르 무너질 위기에 처해 버렸다.

그야말로 궁지에 내몰린 신세.

“오칠이 형, 대장 소식은 아직이야?”

“어, 북경 거리에서 본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데.”

까진 팔꿈치를 천 조각으로 덧대며 대답하는 오칠.

땅으로 꺼진 건지, 하늘로 솟은 건지.

제법 잘난 얼굴이라 소식이 들릴 만도 한데 말이다.

“좋은 대장이었는데. 하필 그 색마 노인네가 나타나서…….”

행색은 초라한 노인이었지만, 까고 보니 엄청난 고수였었다.

최소 일류 이상. 하오문에서 수많은 정보를 접해 온 일홍은 그 신묘한 보법을 보자마자 격의 차이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대장이 사라지면 엄백 패거리에 대항할 수단이 없기에, 오칠과 함께 목숨 걸고 덤벼들었던 일홍.

“하지만 뭐 이렇게 됐네.”

싸우면서 고래고래 변태 노인네라 소리쳐댔으니, 어딘가에 붙잡혀서 엄한 짓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하필 걸려도 재수 없게 남색가 무인에게 걸리다니. 무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잠시 합장하며 애도를 표해보는 일홍.

“야, 대장 안 죽었거든?”

그걸 보던 오칠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래, 순백지신을 잃었을 뿐이겠지.”

그 나잇대까지 살아남은 무림인들은 한두 번씩 심마를 겪어봐서 그런지 정신 나간 사람이 많다 그랬다.

나는 절대 그런 꼴이 되지 않아야지.

속으로 나지막이 다짐해보는 일홍이었다.

“일홍이 형, 오칠이 형, 큰일 났어.”

“집에 먹을 게 다 떨어졌는데?”

“철전도 없어 이제.”

그런데 제 코가 석자라고. 단무진이 사라진 이곳의 사정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아마도 풍전등화의 형국이라는 표현이 옳으리라.

“형들, 어쩌지?”

“끙, 구걸하러 대로에 나가면 또 엄백 패거리가 시비 걸 것 같은데.”

무진 대장이 사라지고 얼마 동안은 조심스레 간을 보더니, 최근 들어서 사라졌단 확신이 생겼는지 본격적으로 시비를 걸어오던 엄백 패거리.

덕분에 꼬마 거지들은 패잔병처럼 구역을 야금야금 잃어왔다.

이제 와선 이 골목 막다른 길에 내몰린 셈이다. 이러다간 예전처럼 구걸도 못 하고 말라 죽게 될지도 모를 지경.

“배고파, 형아…….”

예전과 다르게 갈저탕에 고기 한 점 없다.

퀴퀴한 푸성귀만 가득 담긴 냄비. 이건 갈저탕이 아니라 그냥 풀죽이라 불러도 무색함이 없었다.

꼬르륵. 꼬맹이들이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말해왔다.

뭐라도 해야만 한다. 그나마 연장자인 오칠과 일홍은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일홍, 뭐라도 해보자.”

“응. 그래야지.”

쟁취하고 싶으면 투쟁해야만 한다.

가만히 앉아 자비심에 구걸해 봤자 돌아오는 건 비웃음뿐.

살고 싶다면 뭐든지 다하며 발버둥치라는 것이 바로 단무진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니 그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때다. 처맞고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일홍과 오칠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

한때 저잣거리 상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꼬맹이 거지 집단.

무진 없는 무진 패거리가 다시금 나아갈 때가 도래했다.

뭔가 일을 벌일 때마다 대장이 항상 해온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가자, 촉법소년들아.”

***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출발했지만, 선업을 쌓은 덕분에 상당한 내공이 모이고, 거기에 권법 수련까지 하게 된 지도 몇 주가 지났다.

그리고 이는 4년 내공으로 세상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내 자신감을 박살 내기에도 충분했던 시간이다.

“강하다는 건…… 뭘까?”

나는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려봤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나 할 법한 제법 멋진 대사.

다만 이제 내 얼굴은 울퉁불퉁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어 있단 게 다른 점이었다.

보기에 좀 추하다는 뜻.

“언젠간 그 늙은이 면상에 꼭 한 방 꽂아 넣는다 내가.”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그렇게 다짐해봤다.

이 수모와 분노를 되돌려주고 말겠다. 수련 중에 되돌려주면 패륜이 아니라 반격이겠지.

다만 그러려면 더 많은 내공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보법을 밟으며 오십 초만 펼쳐도 내공이 바로 곤두박질치는 수준이었다.

황걸개가 말하기를 ‘3년짜리’의 한계라 그랬었지.

으득.

어떻게 모은 공력인데 겨우 삼 년따리라고 비웃다니.

내공, 더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선업을 쌓아야만 하지.

그런데 때마침 그런 선한 업을 쌓을 만한 구실이 있었다.

바로 내 뒤를 쫄쫄 따라오던 그 고아 꼬맹이들.

구해 주고 재워 주고 먹여 주면 그만한 선업이 또 어딨겠나. 살아 움직이는 선업 셔틀이나 마찬가지다.

“끄응.”

나는 부어오른 볼을 문지르며 축기를 끝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법 근육이 붙은 듯한 몸뚱어리.

분하지만 황 노야의 수련법은 효과가 확실하긴 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다 보니 그의 움직임이 본능적으로 몸에 익어 습득이 빠르긴 하더라.

그 덕분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천살성인 이 몸의 단독 외출을 인정해 준 황 노야.

저번 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데다 무공도 제법 쌓이자 어디 가서 처맞진 않겠다며 떨어진 허가였었다.

“그럼 애들한테 가볼까?”

마침 내 주머니에는 반짝이는 금전도 한 닢 있었다.

이번에 그냥 꽌시도 아니고 ‘누나 동생’하는 숑디(兄弟) 사이로 등극한 은화란이 챙겨준 여비였다.

나는 사장님 이러시면 곤란하다고 거절하려 했는데, 누나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라며 그냥 슥 집어넣더라.

다행히 항마의 내공이 어느 정도 쌓인 데다, 강권하는 식이어서 그런지 천살성이 날뛸 여지는 없는 것 같더라.

그래서 그냥 먹었다.

“개이득.”

거기다 아끼는 동생이 쟁자수 옷이나 입는 꼴은 못 본다며 괜찮은 품질의 무명옷까지 받았었지.

두고두고 이런 걸 챙겨줄 느낌이던데, 지금 와서 보니 오히려 금덩이를 거절한 게 잘한 짓일지도 모르겠다.

“애들이 내 모습을 보면 놀라겠군.”

금의환향이란 말이 있다. 비단옷을 입고 돌아왔단 뜻으로 이곳에선 그야말로 성공의 증거.

하지만 난 무명옷이니 대충 은의환향쯤으로 치자.

“흐흐.”

그렇게 일홍과 오칠이를 놀래켜 줄 생각을 하며 씰룩씰룩 상단의 정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익숙한 얼굴 둘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럽쇼?”

“네 녀석은……. 그 황소 같은 꼬맹이?”

저잣거리에서 염소수염의 의뢰를 받아 나를 두들겨 팼던 두 명의 표사.

양조와 양위라고 했었나.

“아저씨들,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나는 실눈을 뜨며 그렇게 물었다.

그땐 보잘것없는 거지 상꼬맹이었지만, 지금은 황 노야의 제자로 알려진 데다 양잠업을 구해낸 몸.

두 표사가 헛기침을 하며 황급히 내 시선을 피했다.

“크흠.”

“그 뭐냐, 상인들이 어떻게 해달라고 성토를 해대서.”

분명 그런 이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염소수염 상인 얘기도 나왔었고.

내가 말없이 지그시 쳐다보자 뒷목을 긁적이며 결국 먼저 수그리는 표사들.

“……그, 미안하게 됐다.”

자기들도 그 일로 감봉과 근신을 받았단다.

뭐 이쪽도 공갈치면서 상인들의 원망을 쌓긴 했었지.

넓은 아량으로 봐줄 수는 있었다. 왜냐면 그때 결국 두들겨 패고 이긴 건 나였으니까.

“그런데 어디 가려고? 쟁자수 업무도 없는 것 같은데.”

“제 패거리 꼬맹이들 데려오려고요. 상주님한테 허락받았거든요.”

내가 아니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을 애들이다.

원래 고아란 게 그렇지. 우리 패거리는 그 고아 중에서도 약자에 해당했고 말이다.

그런데 내 발언에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곤란하단 표정을 짓는 두 표사.

“그런 거라면 빨리 가봐야겠는데?”

“……왜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

“저잣거리 상인한테 들었는데, 걔들 엄백 패거리한테 작살났다던데?”

“그리고 그 반반한 애……. 일홍이랬나? 걔는 무슨 음적한테 잡혀 갔다 그러고 말이야.”

듣고 있자니 어이가 가출해 버릴 듯한 내용.

“그게 뭔 십…….”

누군가가 내 선업 보따리를 박살 내려 하고 있었다.

20화 선업을 쌓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