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20화 선업을 쌓아라

중원은 약자에게 가혹하다.

인면수심의 사파놈들은 허구한 날 양민을 갈취했고 위선적인 정파 놈들은 보호비 명목으로 수입의 일부분을 뜯어갔다.

약하면 눈뜨고 코 베어 가는 곳, 강호무림(江湖武林).

그래서 하오문의 초기 창립 의의는 밑바닥 인생끼리 뭉쳐 서로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힘을 모아 기득권의 수탈을 막고 자신들의 권익을 증진하려 했던 하오문도들.

수완이 뛰어났던 초대 문주 덕택인지 하오문은 정보 가공 및 판매에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방에 뒤처지지 않는 비밀스런 정보 조직으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모종의 이유로 어떤 고수들의 협력까지 얻게 되자,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세를 확장해 나간 하오문.

하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었다.

서로를 보호한다는 초창기의 의의는 어디 가고, 어느새 이익에만 눈이 멀어 그들이 경계해 왔던 기득권 세력처럼 변해 버린 하오문.

이권을 놓고 분타끼리 혈쟁(血爭)을 벌이거나, 설립 취지를 잊고 같은 하류층의 고혈을 빠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하오문도끼리 피가 흐르고 심각한 분쟁이 계속되자 2대 문주 홍각잔이 결국 칼을 빼 들고 나섰다.

그가 외친 것은 원점으로의 회귀.

초대 문주의 취지를 되살리자는 게 홍각잔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도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인간은 한번 돈맛을 보면 이전으로 돌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탐욕이란 마귀는 사람의 정신을 흩트려 놓는다. 돈이 썩어나는 부호조차도 한 푼이라도 더 긁어모으려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간단히 말해 애초에 없었으면 모를까, 줬다 뺏으면 더 난리나는 게 사람이라는 뜻.

그렇게 문주의 일방적인 결정에 문도들의 불만이 쌓여갔고, 누군가의 선동으로 정변이 일어난 날, 2대 문주는 그렇게 ‘전대’ 문주가 되어 버렸다.

“그 덕에 내가 하오문주가 될 수 있었긴 한데 말이야.”

홍각잔이 사용했던 오동나무 책상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보는 새로운 문주 흑진조.

이 집무실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왔던가.

일반 하오문도가 발버둥 쳐서 올라갈 수 있는 곳은 결국 부문주가 끝이었다.

그래서 문주 일가의 발을 개처럼 열심히 핥았었지.

홍각잔은 물론이고 세상 모든 지식을 꿰었다고 알려진 그 재수 없는 자식새끼도 열심히 말이다.

그리고 잠자코 때를 기다리다, 결국 문주 일가 ‘대부분’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

부와 권력, 하오문의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다만 그런 성공적인 찬탈 과정에도 딱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흑진조 문주님, 혹시나 해서 묻지만……. 하오문의 직인(職印)은 잘 보관하고 계시죠?”

바로 대대로 내려오는 하오문의 신물(神物)이자, 문주의 상징인 직인을 애새끼 하나가 들고 튀었다는 것.

흑진조는 직인에 대해 물어온 홍화루의 루주이자 신비각의 각주, 일혜향을 말없이 쳐다봤다.

“물론이네.”

“그렇다면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문파에 있어 무척 중요한 물건인지라.”

“중요하지.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엄중하게 보관 중이라네.”

무림에서 쓸모도 많고 가진 자산도 많은데 힘이 약하다? 그러면 곧바로 잡아먹히고 만다. 그게 이빨 빠진 호랑이의 말로지.

그래서 무림인이든 무림 문파든 자립이 성립하려면 남들이 쉽사리 건들지 못할 일신의 무력을 갖춰야 하는 법.

하오문은 그게 상령(上靈)과 하령(下靈)이라는 신비 고수들이었다.

초대 문주와의 알 수 없는 약조로 인해, 직인을 들고 가면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는 기이한 존재들.

반대로 직인이 없으면 무슨 수를 써도 부릴 수 없는 인간들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불안하기도 했다. 만약 도망친 그 애새끼가 어떻게든 둘을 찾아내 복수해달란 부탁이라도 하는 날에는…….

“그런가요. 하오문 내에서 직인의 소재를 확인할 수가 없다는 기묘한 소문이 돌아서… 한번 확인해봤어요.”

무언가 냄새를 맡은 여우처럼 눈매를 휘며 말하는 일혜향.

지금 이게 흑진조가 처한 상황이었다. 단단하지 않고 무르기만 한 그의 지반.

주변엔 ‘저 새끼가 문주인데 나라고 못 될까?’라는 생각을 품은 놈들만 한가득.

그래서 삼국시대에 정통성을 부여했던 옥새 같은 그 직인이 누구보다 필요했던 것인데.

“아, 소문 하니까 나도 최근에 재밌는 얘기를 들어서 말이야……. 자네, 숨겨둔 애가 있다더군?”

백년묵은 여우처럼 굴던 일혜향의 얼굴 표정이 순식간에 와락 구겨졌다.

“그건 왠 거지 꼬맹이들이 지어낸 날조……!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역린을 건드린 것처럼 펄쩍 뛰는 모습.

“흠, 날조가 맞나? 최근 무영각주와 보내는 시간이 상당히 늘었던데?”

비밀스런 정보를 취급하는 점조직 특성상, 각주끼리의 친밀한 관계는 금지되어 있었다.

적발될 시 그 직위를 내려놔야 할 정도.

“……뭔가를 오해하신 듯합니다. 아무튼 직인이 무사하다니 저는 이만 퇴실해 보겠습니다.”

당황한 발걸음으로 재빨리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홍화루의 루주.

다행히 화제를 돌려 어떻게든 고비를 넘긴 듯했다. 어떤 의미에선 이것이 바로 정보의 힘이 아닐까.

하지만 신물을 보여 주지 않는 한 그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질 것이다.

고로 어떻게 해서든 전대 문주가 지녔었던 그 직인을 찾아내야만 했다.

“어딨는 거냐, 그 애새끼…….”

한번 읽은 것은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하오문의 후계 수업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끝내어 하오문의 지낭이라 불렸었던 신동.

하지만 결국엔 강호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에 불과했다.

그러니 금방 찾을 거라 여기고 사람을 여기저기 풀어놨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그 작은 몸으로 분명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인데.

달그락, 달그락.

흑진조는 전대 문주를 찔렀던 단도를 책상 위에서 만지작거렸다.

한때는 진조 아저씨라 불리며 살가운 척을 했으나, 어떠한 경우에도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게 그의 철칙.

“얼른 아버지 뒤를 따라가야지 이것아.”

전대 문주의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그는 단도를 쥔 채 서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보육원 꼬맹이들에겐 어떤 특징이 있다.

가족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으니 서로에게 강력한 유대감을 지닌다는 것.

그래서 같은 보육원 꼬맹이가 어디서 처맞고 돌아온다? 그럼 그날로 전쟁이었다.

내 주도하에 모두가 눈을 까뒤집고 뛰쳐나갔었지.

“엄백 이 시벌놈이!”

물론 거지굴에서 만난 꼬맹이들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가 한동안 먹이고 키운 애들이었다.

거기에 지금은 살아 움직이는 선업 보따리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엄백 놈이 난입해서 깽판을 치고 있었다.

나는 분노의 콧김을 ‘쒸익쒸익’ 내뿜으며 익숙한 골목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발끝으로 내공을 발출해 선풍보를 펼치자 쭉쭉 뻗어 나가는 신형.

얻어맞으면서 배운 보람이 있다. 자전거에 탄 것처럼 주변 풍경이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콧속을 찌르는 퀴퀴한 냄새. 주정뱅이들이 여기저기 쏟아놓고 말라붙은 토사물.

치안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사회의 그늘진 구역.

“아악!”

“이 씨발 엄백 새끼야! 여긴 우리 구역이라고!”

거기서 덩치 크고 힘센 거지들이, 자기보다 작고 약한 거지들을 힘으로 탄압하고 있었다.

“방 빼라고 애새끼들아!”

“또 근처에서 구걸질을 해? 아주 뒤지려고 환장을 했지!”

우리 애들이 흙바닥을 뒹굴고 악을 쓰며 달려들지만, 어른에 가까운 체구를 가진 엄백 패거리에 일방적으로 밀리는 모습.

용두방주 황걸개 가라사대, 애새끼는 애새끼끼리, 어른은 어른끼리 맞붙는 게 거지의 도리라 했거늘.

다 큰놈들이 우르르 몰려와 애를 패고 있어?

강호의 도리……. 아니, 거지의 도리가 땅에 떨어진 순간이었다.

“이런 호로새끼들이-!”

나는 심후한 3년 내공을 바탕으로 우렁찬 포효를 터트렸다.

불청객의 난입과 귀청 떨어지는 고함에 우뚝 멈춰 버린 애들끼리의 패싸움.

“씨발, 넌 또 뭐 하는 새끼야?”

짜증 섞인 질문이 날아들었다. 내 정체를 캐묻는 엄백 패거리.

그에 대한 답은 내 얼굴을 알아본 우리쪽 꼬맹이들이 대신해줬다.

“……어? 변태 노인한테 잡혀갔던 대장이다!”

“어떻게 돌아온 거지? 도망쳐 나온 건가?”

“아무튼 대장 왔으니까……. 너희들은 이제 뒤졌어!”

그래, 내가 거지굴로 돌아왔노라.

아이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몸의 등장만으로 확 반전되는 전장의 분위기.

“곱상한 얼굴에 대장……? 네가 그 유명한 단무진이란 새끼냐?”

잔뜩 성난 목소리였다. 눈앞에 배가 툭 튀어나오고 뱀 문신을 새겨넣은 덩치 큰 폭력배가 보였다.

“그러는 넌 좆같이 생긴 걸 보니 엄백이란 놈이구나?”

지구였으면 문신돼지육수란 말이 절로 나왔을 비주얼.

엄백 왕초는 내 도발에 발끈했는지 이쪽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시벌놈이……. 넌 특별히 내가 사지를 분질러주마.”

그런 이후에 곱상한 얼굴까지 작살내서 어떤 음적놈에게 팔아넘기겠단다.

“근데 형님, 무림인이 양민 애새끼를 병신 만들어도 되는 겁니까?”

엄백 패거리 중 한 놈이 그렇게 물었다.

예전에 두 삼급 표사가 수치스러워 했던 점에서 알 수 있듯, 무림인이 양민과 싸우는 건 나려타곤 수준으로 가오가 상하는 일.

“흐흐, 알 게 뭐야. 어차피 이 새끼들, 전부 병신 돼서 말도 제대로 못 하게 될 텐데.”

하지만 엄백은 그런 걸 개의치 않는 녀석이었다.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뱃살을 출렁이며 모조리 작살내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초롱이.

“와라.”

나는 성운심법으로 끌어 올린 내력을 온몸으로 퍼트렸다. 세차게 박동하며 전신 세맥으로 뻗는 정순하면서도 강맹한 기운.

“재껴!”

눈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달려드는 엄백과 그 패거리들이 보였다.

불쌍한 고아 꼬맹이들을 도와주긴커녕, 뜯어먹지 못해 안달 난 인간 언저리 놈들.

나는 두 다리를 땅에 꼿꼿이 박아 넣고 피나도록 두들겨 맞으면서 배운 백결신권의 자세를 취해봤다.

“후우.”

단죄의 시간이다.

***

자기 또래의 소년과 머리 하나가 더 큰 청년들의 싸움.

오칠은 처음엔 헛것을 보는가 싶었다.

퍽!

“끅!”

빡!

“악!”

지학의 나이에도 닿지 못한 어린 소년.

한데 힘을 실은 손짓과 발짓이 교차되자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것은 오히려 엄백 패거리 쪽이었다.

발끝으로 땅을 박차자 빗살처럼 쏘아지는 단무진의 신형.

작지만 야무진 주먹이 엄백 패거리의 안면을 ‘뻐억’ 후려쳤다.

코뼈가 주저앉으며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거지 하나.

“시발! 뭐야 이 애새끼는!”

“뭔 놈의 움직임이……!”

당혹성이 잔뜩 담긴 외침. 어른처럼 덩치가 큰 거지 하나가 쥐고 있던 몽둥이를 거칠게 휘둘렀다.

그러자 피하긴커녕 과감하게 파고들어 손잡이 부분을 어깨로 툭 밀어내면서 오른손으로 섬전 같은 주먹을 날리는 단무진.

“꺽!”

몽동이 거지의 턱주가리가 거칠게 돌아갔다.

그렇게 또 한 명의 거지가 짧은 신음과 함께 풀썩 허물어지는 모습.

단무진은 가히 물찬제비 같은 움직임을 보여 줬다.

주먹이 경쾌하게 바람을 가르고 두 다리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퍽! 퍽! 퍼억!

위에서 주먹을 뿌리는가 하면 어느새 쑥 내려가 바닥을 휩쓰는 발길질. 넘어진 적의 등을 도약판처럼 타고 넘어 경쾌하게 꽂아 넣는 각법.

“3초식! 선환각(旋環角)!”

풍차처럼 이어지는 연격이었다. 그 쉴 새 없는 주먹질과 발길질 세례에 정신을 못 차리고 나가떨어져 나가는 거지들.

주먹과 살이 맞부딪히는 파육음이 날 때마다 어김없이 덤벼들던 거지 하나가 비명을 질러댔다.

파파팍!

어깨를 때린다 싶으면 무릎을, 무릎이다 싶으면 어느새 또 전광석화처럼 발차기를 뻗어오는 모습.

두 다리가 미끄러지듯 전장을 질주하고 두 팔이 끊임없는 연격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코앞에서 직관한 오칠과 아이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예전에는 무식하게 힘과 맷집으로만 밀어붙였다면 지금은 움직임이 완전히 달라졌다.

최소한의 힘과 동작으로 적의 공격을 흘리고 송곳처럼 반격기를 꽂아 넣는 싸움법.

아이들은 이런 걸 길거리에서 ‘어떤 존재들’이 싸울 때 목격한 바가 있었다.

“……무공이구나!”

오칠이 탄성을 내질렀다.

손발이 닿기만 해도 뻥뻥 떨어져 나가는 엄백 패거리들. 주먹을 뻗은 거리가 짧은데도 공기가 터지고 가죽북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자신들의 주먹질과 별다른 과정이 없는데도 결과는 천지차이. 그렇다면 분명 내공의 개입이 있었다는 뜻이겠지.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고 돌아온 걸까. 아이들은 입을 ‘헤에’ 벌린 채 그 싸움을 지켜봤다.

“비겁한 새끼! 무림인이 거지 싸움에 끼어들다니!”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엄백이란 놈이 이건 도리에 맞지 않는다는 듯 고성을 바락바락 질러댔다.

“옘병, 그게 너가 할 소리냐 이 십새가!”

이에 지지 않고 으르렁 외쳐대는 단무진. 내공이 실린 그 고함에 엄백 쪽 거지들이 움찔거리며 몸을 떨어댔다.

덩치는 작아도 품고 있는 기세는 산군(山君)의 그것이었다.

“안 되겠다! 엄백, 넌 좀 처맞자!”

저 새끼를 줘패라고 주먹이 울고 있다.

단무진이 귀신 같은 보법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자 화들짝 놀라 주먹을 뿌리는 엄백.

어설프게나마 무공을 배웠는지 제법 힘이 실렸지만, 황 노야한테서 하도 처맞아서 그럴까. 단무진은 그 공격이 한심할 정도로 느리게 느껴졌다.

탁, 탁!

뻗어오는 손목을 잡아 비틀고 빈틈이 드러난 안면에 박아넣는 정권 한 방.

“컥!”

놈의 고개가 실핏줄 같은 코피를 뿜으며 뒤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피와 분노로 얼룩진 녀석의 얼굴 표정. 살기 섞인 성인의 주먹질이 단무진의 정수리 쪽으로 내려왔다.

하도 처맞아서 익숙한 투로. 단무진은 고개를 까딱 젖혀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다음 허릿심을 실어 주먹을 포탄처럼 쏘아 올렸다.

불쑥 솟아오른 그 공격에 엄백이 ‘헙!’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방어해 보지만 뱀처럼 기이하게 궤도를 바꾸며 턱을 후려치는 단무진의 주먹질.

빠각!

“끅?!”

주둥이가 딱! 닫히며 엄백의 두 발이 네 치(寸)가량 붕 떴다.

기묘한 움직임. 이것이 바로 백결신권의 4초식. 선환권.

황걸개에게 수십 번쯤 직접 처맞으며 터득한 기술이었다.

천살성의 내구성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뇌가 흔들려 멍청이가 됐을 정도.

“끄륵.”

엄백이 쌍코피를 분수처럼 터트리며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따르던 쫄따구들 앞으로 털썩 쓰러지는 모습.

쿵.

계속 무게를 잡길래 얼마나 강한가 했더니, 널리고 널린 삼류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저걸로도 양민 꼬맹이들 사이에선 공포의 존재로 군림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 엄백 왕초가……!”

가장 덩치고 크고 무리를 공포로 군림해 온 존재가 그리 허무하게 쓰러지자 패거리는 충격이 컸다.

완전히 꺾여 버린 엄백 패거리의 기세.

“히익!”

싸늘하게 노려보는 단무진과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 정도.

그렇게 엄백이 십초지적도 되지 못하고 쓰러지자 덩치도 한참 작은 꼬마에게 쫄아서 엄백 패거리는 알아서 와해되기 시작했다.

“으아아!”

“뭐 저런 괴물 같은 애새끼가!”

“튀, 튀어!”

언제나와 같이 도망치는 것 하나는 정말이지 재빨랐다. 썰물 빠지듯 골목을 내달려 사라지는 엄백 패거리.

“이것들, 또 놔두고 튀네.”

그리고 동료 안 챙기고 튀는 것도 역시나 동일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버림받은 엄백이란 왕초 녀석.

그러게 평소에 인덕을 쌓았어야지. 이쪽은 늙은 고수가 튀어나와도 애들이 달려와 줬는데 말이다.

“와! 봤지? 대장 오면 이긴다니까!”

“우와아아!”

눈두덩이 시퍼런 채로 환호성을 내지르는 무진 패거리의 꼬맹이들.

승리의 함성이 북경 한구석 거지굴에 울려 퍼졌다.

“대장!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잽싸게 달려와 어깨를 덥썩 잡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오칠이.

“많은 일이 있었지.”

설명하기가 실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말하면 믿기는 할까.

“대장, 역시 그거 무공이지?”

“어떻게 그렇게 강해진 거야? 비결이 뭔데?”

돌아온 영웅의 귀환에 연거푸 질문을 던져대는 아이들.

“선업을 쌓거라.”

묻기에 답해줬을 뿐인데, 그 득도한 것 같은 기묘한 대답에 아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갸웃거렸다.

“선업? 착한 짓?”

“당장 먹을 것도 없는데 뭔 소리야 그게.”

“대장 좀 이상해졌어.”

그러게 말이다.

뭘 가진 게 있어야 남에게 베풀 수도 있는 법이지. 역시 나를 따르던 애들이라 그런지 똑똑하다.

그런 생각을 해보는 단무진이었다.

“야, 근데 일홍이는?”

한 명이 보이질 않았다. 표사들에게 들었던 것처럼.

“저놈이 이상한 흑도 놈한테 팔아재꼈어.”

오칠이 쓰러진 엄백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왜?”

이 구역에서 쫓아내면 쫓아냈지, 잡아갈 건 또 뭐란 말인가.

“몰라, 반반한 애들만 잡아가는 것 같던데?”

어깨를 으쓱이며, 지금 보니 대장도 끌려갈 만한 얼굴이라 말을 덧붙이는 오칠이었다.

“염병.”

뭘까. 걔들도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꽃거지의 쓸모를 알아본 걸까?

아니면 진짜 얼굴이 반반해서 음적한테 팔아치운 건가?

뭐 아무튼 좋다. 붙잡혀 갔으면 다시 데려오면 될 일.

“좋아, 금방 데려오마.”

부모도 없이 길거리를 전전하며 구걸을 해왔는데, 이젠 몹쓸 음적한테 잡혀갔단다.

정말이지 불쌍한 놈이다. 그리고 이런 놈을 구해내면 선업이 얼마나 쌓일까.

“대장, 근데 걔가 어딨는 줄 알고?”

잡혀간 것만 봐온 오칠이의 질문이었다.

“데려가줬다는 놈이 여기 있잖아.”

나는 손아귀에 내력을 담아 곤히 기절해 있던 엄백의 뺨따구를 내리쳤다.

짝!

황걸개가 매번 이마빡에 날리던 딱밤의 원리를 어설프게나마 흉내 낸 따귀였다.

“커, 커헉. 끄, 이게 무, 무슨…….”

곤히 자다가 물벼락을 끼얹은 사람처럼 기겁하며 일어나는 엄백.

이거 효과 좋네.

“야, 안내 좀 해주라. 그 잡혀 간 애한테.”

나는 녀석의 눈앞에 주먹을 들이밀며 그렇게 말했다.

일어나 보니 자신을 버리고 모조리 도망가 버린 부하들.

“……그, 그래.”

녀석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

온 세상이 암흑천지다.

일홍은 순간 자신이 죽은 건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아까 엄백 놈들한테 끌려오다 처맞은 곳들이 아직도 욱신거렸으니까.

아마 천 따위로 눈을 가린 것이겠지.

일홍은 몸을 애벌레처럼 꿈틀거려 봤다. 그러자 양팔과 다리가 밧줄 같은 것에 묶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정돈 쉽게 풀 수 있지.’

평범한 아이라면 여기서 절망했겠으나, 일홍은 하오문의 모든 교육을 흡수해낸 비범한 꼬마.

툭.

곧바로 양손의 팔꿈치를 몸통에 바짝 붙였다. 그리고 앞으로 두 팔을 쭉 뻗자, 밧줄 사이로 틈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빠르게 비벼 한 손을 스르륵 빼냈다. 마지막으로 시야를 가리던 안대까지 제거.

“어라.”

허름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이곳에 붙잡혀 온 건 자신뿐만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일홍처럼 꽁꽁 묶인 채 창고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서른 명쯤의 아이들.

다들 비슷한 공통점이 있었다. 작은 체구에 나이대가 자신과 비슷했으며, 피부가 희고 고생 안 해 본 듯한 태가 난다는 것.

마치 누군가를 찾기 위해 비슷한 거리의 애들을 무작위로 납치한 듯한 풍경이었다.

“설마 이거…….”

자연스레 일홍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저들이 사람까지 풀어 미친 듯이 찾고 있는 누군가는 아마도.

“……난가?”

엿됐다라는 예감이 들었다.

21화 저점 투자

냉기와 적막함이 감도는 창고.

사람은 시각이 차단되면 자연스레 청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안대로 까맣게 가려진 세상. 손발이 꽉 묶인 채 납치당한 상황. 험상궂은 어른들 목소리.

유일하게 안대를 푼 일홍의 눈엔 아이들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게 보였다.

한 명이 흐느끼기 시작하자 곧바로 전염되어 울음보를 터트리는 아이들.

“아씨, 아가리 안 닥쳐?”

대머리가 인상적인 흑도인 하나가 당장 그치라는 듯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 험악한 목소리에 흐느낌을 뚝 그치는 아이들. 하지만 몸의 떨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형님, 소지품 다 수거해서 큰형님한테 보냈습니다.”

젊은 흑도인 하나가 애들 주머니를 하나하나 다 털었다며 대머리 흑도인에게 보고를 올려왔다.

“뭐 좀 있디?”

“개털이던데요. 저기 귀티 나는 꼬맹이 빼고는 잡동사니뿐이었습니다.”

“귀티? 뒤탈 없는 애만 잡아 오라니까.”

“그래서 거지굴 애들만 잡아 왔잖습니까. 근데 큰형님은 왜 이런 걸 모아오라고 한 걸까요?”

“난들 아나. 거지새끼들이 뭐 중요한 거라도 훔쳤나 보지.”

거지들의 수입원 중 하나가 소매치기다. 가끔 값진 것을 훔치는 일도 있다.

그리고 이 대화를 듣다가 황급히 자신의 품을 뒤져보는 일홍.

그리고 곧 속주머니가 허전한 것을 깨닫고 만다.

‘……없어!’

아무래도 기절하고 납치당한 사이에 수거해 간 모양.

아버지의 유품이자 하오문을 되찾게 해줄 유일한 물건, 하오문주의 직인을 이토록 어이없게 털리게 되다니.

일홍은 스스로의 무력함과 한심함에 치를 떨어댔다.

한때 하오문의 지낭(知囊)이라 불렸으면 뭣하나, 결국엔 삼류 파락호에게도 맥없이 당하는 힘없는 꼬맹이에 불과한데.

“근데 단무진이란 놈은 못 잡아 온 거냐? 걔도 피부가 허옇고 거지 같지 않은 태가 난다며?”

“아, 그놈이라면 다른 변태가 먼저 잡아갔답니다.”

유령처럼 보법을 밟는 늙은 남색가에 대해 설명하는 젊은 흑도인.

“허, 범천음적(犯天陰賊)이라 불리는 큰형님 같은 인간이 북경에 또 있을 줄이야.”

남자에겐 재앙 같은 일이군. 대머리는 세상 말세라는 듯 혀를 쯧쯧 찼다.

“항상 궁금했던 건데, 큰형님 별호는 어쩌다가 그따위로 된 겁니까?”

보통은 펼치는 무공이나 행적 따위로 붙는 게 무림의 별호였다.

“온 천하를 범하겠다는 미명하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탐하시거든. 그 여파지.”

“…….”

보통 또라이가 아닌 모양이다.

우두머리의 그런 취향을 모르고 입단했는지 표정이 핼쑥해지는 젊은 흑도인.

“아무튼 이제 애들 수레에 실어서 큰형님한테 데려가봐라.”

“갑자기 속이 안 좋아서……. 형님이 다녀와 주시면 안 됩니까?”

“……이 새끼가 어디서 수작질을. 나도 그 인간 무서워 새꺄.”

대머리는 엄살 부리지 말고 얼른 수레에 실으라는 듯 바닥에 깔린 아이들을 발로 툭툭 쳤다.

그렇게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수레에 하나둘씩 실리는 아이들.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대머리는 문뜩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일홍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

둘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정적.

당황한 일홍이 놀란 숨을 들이켜며 황급히 안대를 다시 써보지만.

“새꺄, 다 들켰어.”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낭패라는 표정으로 두 눈을 질끈 감는 일홍.

“……얼씨구, 손발의 밧줄도 다 풀었네? 너 뭐 하는 새끼야?”

꽁꽁 묶어놨는데 무슨 수를 쓴 건지 다 풀려 있었다.

좀 전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꼴을 보아, 빈틈을 봐서 도망이라도 치려 했던 모양.

대머리는 본보기 삼아 반쯤 조져놓을 생각에 발걸음을 저벅저벅 옮겼다.

그런데 그 순간.

“단무진 브리칭─!”

허름한 창고의 문이 ‘와장창!’ 요란스럽게 박살 났다.

뿌옇게 피어오른 입구의 연기. 그 사이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꼬맹이 한 놈.

“……이 새낀 또 뭐야!”

그 갑작스러운 난입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젊은 흑도인과 대머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깜짝 놀란 얼굴로 대신해주는 일홍.

“대, 대자앙?!”

잡혀 갔던 대장의 화려한 금의환향이었다.

***

이후에 펼쳐진 일은 일홍의 눈을 의심케 했다.

“이 미친놈이, 광해파 구역을 혼자서 쳐들어와?”

“……제정신이 아닌 애새끼군.”

흑도인들마저 놀란 애새끼의 정신 나간 패기.

아이들이 동물처럼 묶인 납치 현장을 목격한 단무진은 굳은 얼굴로 짧게 입을 열었다.

“정신 나간 건 너희들 쪽이고.”

소년의 두 발이 유령처럼 미끄러져 나아갔다.

오른팔과 왼 다리가 흐릿해지더니 두 번의 파열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퍽! 퍽!

“컥!”

대머리의 턱을 거칠게 돌려버리고 젊은 흑도인의 복부에 송곳처럼 찔러 들어가는 발끝.

큼직한 어른들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차가운 창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기습적인 선공에 제대로 된 반격도 못 하고 나가떨어진 모습.

그 광경에 놀라 달려든 나머지 흑도인들도 뭐라 손써 볼 새가 없이 볼따구가 터져 나가떨어졌다.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그 광경에 일홍은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와.”

무영각의 무인들이 가끔씩 보여 주던 신묘한 움직임 같았다.

특히 귀신처럼 미끄러지는 좀 전의 보법은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는데.

“아, 그 변태 늙은이의……!”

일홍이 깨달았다는 듯 소리쳤다.

제자가 되어 무공을 정식으로 사사 받기라도 한 걸까.

일홍이 봤을 때 그 늙은 무인은 최소 일류, 그만한 고수는 아무에게나 가르침을 베풀지 않을 텐데, 어떻게 구워삶은 거지?

거기다 지금 보니 그동안 잘 먹었는지 덩치도 커졌고 얼굴에도 생기가 가득한 단무진. 옷차림도 누가 입혀 준 건지는 몰라도 제법 상등품이었다.

“……대장, 설마하니 그 늙은이 마음에 들어버린 거예요?”

그렇게 씻고 꾸며서 훤칠해지자 남궁세가나 모용세가 같은 곳의 도련님이라 해도 믿어질 지경.

“너도 그 헛소리냐.”

단무진은 그 말이 너무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쳤다.

마음에 들기는, 허구한 날 수틀리면 죽이겠다고 협박이나 받는 처지인데.

거기에 수련을 빙자한 폭력이 매일같이 가해졌다.

아직도 욱신거리는 정수리를 문지르며 일홍에게 남은 한 손을 척 내미는 단무진.

“가, 감사해요.”

먼지투성이의 일홍이 그 손을 붙잡고 번쩍 일어섰다.

“피멍 봐라. 옹골차게도 팼네.”

엄백 패거리와 싸우느라, 그리고 납치에 저항하느라 일홍의 몸엔 투쟁의 흔적이 가득했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어 주더니 이 나이 때의 애들은 원래 코피도 터져보면서 크는 거라며 씩 웃는 단무진.

“대장, 근데 어쩌다 광해파 창고까지 오게 된 거예요?”

어중이떠중이 거지 패거리도 아니고. 무려 흑도 조직의 구역이다. 어지간히 배짱이 크지 않고선 대부분 발끝조차 들이지 않는 곳인데.

“어쩌다 왔긴. 너 데리러 왔지. 너도 그때 달려와 줬잖아?”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단무진이었다.

밖에서 나름 유복한 삶을 쟁취해낸 듯한데도, 자신을 구하고자 다시금 이 더러운 뒷골목에 발을 담그다니.

보통은 거지 생활을 청산하게 되면 잘 엮이려고 하지도 않는다. 행여 구걸해올까 싶어 외면하기 바쁘지.

이전에 구걸금을 공평하게 나눌 때부터 느낀 거지만,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기이한 사람이었다.

“이야, 이게 다 얼마치 선업이냐?”

그리고 꽁돈을 주운 듯한 표정으로 납치당한 아이들의 포박을 하나하나 풀어주고 있는 단무진.

구해 준 보상을 바라기도 힘든 길거리 거지들이다. 그런데도 저리 실실 웃고 있다니.

보면 볼수록 묘한 사람이었다.

“자자, 너희들 소굴로 돌아가. 다신 이런 흑도 놈들과 엮이지 말고.”

믿기지 않는 맷집과 괴력, 거기에 이젠 범상치 않은 무공까지 배워온 소년.

거기에 이런 뒷골목에선 보기 드문 올곧은 인성까지.

“그, 그대로 팔려 가는 줄 알았어요.”

“누군지 모를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름은 단무진, 직업은 해결사란다. 주변에 소문 좀 퍼트려주고.”

그런 모습을 보며 일홍은 고민에 빠졌다.

가족처럼 여기던 이의 배신으로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기로 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홍조차도 ‘딱 한 번만 더 믿어볼까?’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사람.

“알겠습니다 낭인 형님!”

“낭인 아니고 해결사.”

나중에 상단에서 독립할 그때를 위해 소문 좀 잘 퍼트려 달라고 영업하는 단무진.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랬다.

어쩌면…… 그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구해봐도 되지 않을까?

“…….”

그런 갈등이 끝없이 이어지는지, 단무진을 바라보는 일홍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

살았다는 얼굴로 하나둘씩 창고를 빠져나가는 꼬맹이들.

묘하게 귀티가 나는 소년이 포권지례와 함께 감사를 전해왔다.

“그 옷의 문양은 분명 은성상단……! 감사합니다 소협, 이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은화란 누님이 입혀준 무명옷, 지금 보니 은성상단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보고 내 소속을 추측한 모양.

“어, 뭐. 그래라.”

살다 보니 소협(少俠) 소리도 다 들어보는군.

나는 막대한 선업과 그로 인한 내공 증진을 기대하며 북경 각지에서 잡아 온 아이들을 전부 풀어줬다.

노리던 녀석이 따로 있던 건지, 납치당한 애들은 피부가 희고 체구가 비슷했으며 무언가 사연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하지만 고아 중에 그런 거 없는 녀석이 어딨다고.

거기에 제깟 것들이 아무리 사연을 가졌다 한들, 눈앞의 이 꼬맹이만 한 놈이 또 있을까 싶었다.

“……어, 그러니까 네가 숙청당한 하오문주의 유일한 자식이라고?”

갑작스러운 고백.

나는 옆머리를 긁적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같이 한솥밥 먹던 애가 사실은 신비 문파의 중요 인물이라니?

술주정에 허구한 날 딱밤을 날리던 거지 늙은이가 알고 보니 개방의 방주였던 것만큼 충격이었다.

아무래도 흑도들이 거지굴을 털었던 이유가 얘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던 모양.

“……네. 맞아요.”

큰 비밀이었는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일홍.

그러고 보면 이 꼬맹이, 패거리 시절에도 수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긴 했다.

엄백이 흑도와 이어진 사실이나, 관아에 드나드는 포쾌를 단번에 알아보거나, 사향(麝香)을 밀수 중인 오가장의 뒷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등.

꼬맹이치곤 믿기 힘든 정보력을 지니고 있었다.

고아가 된 사정은 굳이 캐묻지 않는다는 단무진 룰에 의거해 눈감아 주고 있었을 뿐, 범상치 않은 과거가 있을 거라 추측은 하고 있었다만.

‘근데 그게 하오문일 줄이야.’

무협지 보면 개방에 이어 정보를 주고 파는 넘버투쯤으로 묘사되던데.

모용청진의 지식에도 하오문에 관련된 건 별로 없었다. 그 정도로 비밀이 많은 조직이란 뜻.

“대장, 아까 사무소를 차릴 거라 그랬죠? 낭인처럼 의뢰를 받아서 해결해주는…….”

“낭인 아니라 해결사라고.”

“어차피 하는 일은 비슷하잖아요.”

물론 낭인의 일감도 전부 가로채 올 거다. 수요의 폭은 넓을수록 좋으니까.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지구에 차렸던 흥신소 사무실을 이곳에서도 다시 한번 일궈내 볼 생각이었다.

돈만 주면 뭐든 해결해 주는 이 훌륭한 서비스에 중원인들도 얼른 눈을 뜨기를.

“아무튼 대장을 해결사로 고용하고 싶어요.”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의뢰를 맡기고 싶다 말해오는 일홍.

남자애치곤 길게 뻗은 속눈썹, 그 안에 박힌 커다란 눈망울엔 알 수 없는 간절함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아까 말한 그 도장을 찾기 위해서? 상하 뭐시기를 부릴 수 있는?”

“……상령과 하령이요. 그 직인은 아버지의 유품이자, 흑진조에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에요.”

초대 문주와의 약조로 인해 직인의 소유자는 세 번의 소원을 빌 수 있고, 이제 딱 한 번 남았다고 한다.

일홍은 그걸로 배신자를 숙청하고 하오문주로서 복권을 노리는 듯했다.

“그래서 범천 뭐시기란 놈이 가져간 직인을 되찾고, 상령, 하령이란 고수들도 찾아달라?”

“네, 그게 부탁드릴 의뢰 내용이에요.”

뭐 잃은 물건이나 실종자 수색이 흥신소의 주요 업무긴 한데 말이다.

나는 정신이 서서히 드는지 ‘끄응’거리며 일어나는 대머리와 흑도 조직원을 다시 퍽! 잠재우며 되물었다.

“아니 근데, 고용한다고 해도……. 해결사란 게 공짜로 움직이는 족속은 아니거든.”

이번은 비상 상황이라 예외였지만, 보통은 일한 만큼 값을 받았다.

돈을 받지 않으면 프로가 아니라 그냥 심부름꾼에 불과하니까.

그간 ‘뭐 이딴 거에 돈을 받아?’라며 내 노력과 시간을 폄하하는 인간들과 수없이 싸워온 나다.

해결사로서 양보할 수 없는 신념. 액수가 작아도 좋으니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만 했다.

“돈이라면 하오문이 엄청 벌고 있긴 하거든요. 일단 문주로 복권하는 데만 성공한다면 얼마든지…….”

하오문의 막대한 수입은 나도 은화란에게 들어서 안다.

지하 경제의 사업을 여러 개 굴리고 있으며, 밀양잠으로도 엄청난 금전을 긁어모으고 있다지.

“하지만 지금 넌 한 푼도 없잖아.”

“그, 그쵸.”

과거의 배경이 어쨌건 지금은 땡전 한 푼 없는 거지 신세.

그 슬픈 진실에 금세 쭈굴거리는 일홍. 가난이란 게 이처럼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대신 신비 고수들을 찾아낼 때까지…… 제가 대장 옆에서 해결사 일을 도와드릴게요!”

그리고 녀석은 당장의 돈 대신 다른 대가를 제시해왔다.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일홍을 바라봤다.

“전 아는 게 많아요. 머리가 좋은 건 아니지만, 기억력과 지식 흡수가 남달라서 하오문의 지낭이라고도 불렸어요. 그러니 분명 대장의 일에도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 변장법과 인피면구(人皮面具) 제작 기술, 각 문파, 세가의 구린 뒷사정이나 현상금 걸린 죄인들이 숨어 든 위치 등등.

일홍은 자신의 유능함과 필요성에 대해 피력해왔다.

확실히 저 지식으로 몇 차례 도움받은 적이 있었지. 길거리에서 구걸할 때 말이다. 답안지를 펴놓고 목표를 물색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지구의 흥신소에서도 보조원을 몇 명 굴린 적이 있었다.

제법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능력이 출중한 애들을 찾아냈고. 나중가서는 걔들 덕분에 사무실이 굴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일홍. 명주실을 뽑기 전, 누에고치를 삶는 이유는?”

그러나 이 몸은 원체 의심이 많아서 말이다.

아까 아는 게 많다 그랬었지. 나는 시험 삼아 밀양잠과 관련된 질문을 하나 던져봤다.

“……누에가 고치를 찢고 나와 상품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고, 양잿물에 명막(明膜)을 녹여 실에 광택이 돌게 하기 위함이에요.”

뭐야, 진짜 다 아네.

후자의 경우엔 말하지 않은 양잿물의 존재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여기에 각 문파, 세가의 정보까지 소상히 꿰고 있다고?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무림 백과사전 같은 아이로군.

“대장,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면 그 직인이 필요해요. 도와주시면……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두 눈에 그렁그렁 맺힌 절실함. 가진 건 쥐뿔도 없는 꼬맹이. 내 도움이 없으면 유일한 기회마저도 곧 사라져 버릴 처지다.

“은혜를 갚는다라.”

일홍. 이 아이가 정말 모든 역경을 딛고 하오문주로 등극할 수 있을까?

확실히 우량주는 아니다. 하지만 원장님이 이르길, 투자는 원래 저점에서 하는 거라 그랬었지.

밑바닥에 큰돈을 부어야 고점을 찍었을 때의 수익도 배로 뛰는 법.

나는 현재의 거지 일홍이 아니라, 하오문주로 등극한 미래의 일홍 모습을 한번 그려봤다.

“떡상인가.”

정보는 곧 돈이다. 흥신소를 운영한 나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중원 곳곳에 정보망을 깔아둔 하오문을 강력한 뒷배로 삼을 수 있게 된다니.

“떡상…… 뭐요?”

거기에 의뢰금이 확실치도 않은데도 도와준다? 이건 내 기준에서 엄청난 선행이었다.

고로 막대한 양의 선업이 쌓일 것도 거의 확실시.

“좋다, 이 몸이 그 직인이란 것을 되찾아주마.”

계산이 얼추 끝났다.

나는 일홍의 현재가 아닌 미래에 판돈을 걸어보겠다. 이른바 초저점투자란 것이다.

“저, 정말요? 제가 지금 드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자 사실 부탁하면서도 가능성이 낮다 여겼는지 휘둥그레진 눈으로 대답하는 일홍.

“무얼, 나중에 갚으면 되지. 따따블로.”

“따따블……. 대장은 맨날 못 알아 들을 소리를 하시네요.”

“적응해. 앞으로 함께 일할 사이니.”

앞으로 함께 일할 거란 발언.

그 뜻을 인식한 일홍이 무척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아세요? 저 더 이상 사람 안 믿기로 결심했었거든요.”

“그러냐.”

패거리 시절에도, ‘헤헤’ 웃으면서도 속을 감추는 게 은근 보였었지.

제 딴에는 숨긴다고 했겠지만, 꼬맹이가 연기를 해봐야 얼마나 잘하겠나. 다 티가 났다.

일가족이 몰살당한 일로 인간 불신이라도 걸렸던 모양.

“근데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믿어보려고요.”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해왔다.

무언가 희망을 되찾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니 고놈 참 잘생겼단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미소년이란 타이틀이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미모.

“그럼 거래 성사의 의미로.”

나는 일홍에게 오른손을 척 내밀었다.

그러자 자신은 이미 일어섰다며, 의아한 얼굴로 이게 뭐냐고 묻는 일홍.

“악수. 서로를 믿는단 뜻이자, 거래 성사의 의식이지.”

일홍은 그 말을 듣자마자 내 손을 덥석 양손으로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거래 성사예요! 저도 대장만 믿을게요!”

“오냐.”

은화란 이후로 한동안 의뢰가 없을 줄 알았는데, 금세 또 다른 일감이 생겼다.

단무진 흥신소의 기념비적인 두 번째 의뢰인.

미래를 위한 포석이자, 흥신소에 쓸 만한 꼬붕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에헤헤.”

22화 살업(殺業)

북경의 오수(汚水)가 흘러 모이는 저잣거리의 외진 곳.

골목의 입구를 지키던 험상궂은 흑도인이 날 보며 놀라 물었다.

“뭐야? 누구야 넌?”

“이런 놈.”

자기소개를 겸한 문답무용의 발차기.

가슴팍을 걷어차인 놈이 축구공처럼 뻥 날아가 데굴데굴 굴렀다.

“뭐여 이 새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어?”

이번엔 허름한 가옥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의 험악한 물음.

“이렇게 새끼야.”

퍽!

이번에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백결신권에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는 문지기.

와장창!

묵직한 놈의 몸뚱어리가 날아들자 얄팍한 가옥의 나무 문이 요란하게 박살 났다.

나무가 쪼개지고 집기가 박살 나는 소음.

“좀 아플 것 같아요.”

“때린 내 다리는 얼마나 더 아프겠니.”

아동 납치범들의 고통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나는 일홍의 말에 짧게 대꾸하고 박살 난 입구를 가만히 쳐다봤다.

“썅! 뭐야!”

“어떤 새끼가 감히!”

그러자 벌집을 건드린 것처럼 안에서 우르르 뛰쳐나오는 광해파 놈들.

덩치 크고 험상궂은 파락호들이 순식간에 문앞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자기들 가슴팍에도 안 오는 꼬맹이 둘을 발견하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짓는 녀석들.

“뭐여 이 씨벌 애새끼들은?”

“야, 이거 너희들이 이랬냐?”

한 흑도인이 너덜거리는 문을 가리키며 물어왔다.

“……대장. 이건 너무 많지 않아요?”

흑도인들의 숫자가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는지 내 팔을 툭툭 치며 걱정스레 묻는 일홍.

“뭔 놈들인진 몰라도, 둘 다 쌍판이 반반하니 비싸게 팔리겠네.”

“감히 광해파 앞에서 객기를 부려?”

“지옥을 보여 주마. 애새끼들아.”

저게 다 큰 어른이 애한테 할 소린가 싶었다.

포위하듯 슬금슬금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하는 흑도인들.

압도적인 머릿수 차이. 하지만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공간은 한정적이고 동시에 공격할 수 있는 숫자는 기껏해야 여덟 정도뿐이다.

그리고 제자를 사랑으로 두들겨 패시는 참스승, 황걸개는 말씀하셨다.

넌 그 개 같은 성격 덕에 포위당할 일이 잦을 테니, 8방위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 낼 줄 알아야 한다고 말이다.

즉, 다구리 파훼법을 사사해 주신 것.

“대장, 왜 갑자기 말이 없어요……. 설마 지는 거예요?”

불안함이 한가득 담긴 일홍의 물음.

“이겨.”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짧게 선언했다.

그러자 ‘와하하!’하고 비웃음을 터트리는 광해파 흑도인들.

“이 새끼가 이긴다네?”

“허, 뭐 이런 개또라이 애새끼가.”

“향냄새 맡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눈앞의 건방진 애새끼를 조져 버리겠다는 선명한 살기가 느껴졌다.

평범한 애였다면 몸이 잔뜩 위축됐겠지만 천살성인 나는 오히려 물 만난 물고기가 된 느낌이었다.

일대에 피어오른 시뻘건 살기. 그 덩어리들이 어디로 살초를 뻗어올지 미리 점지해 주는 듯했다.

간만에 유혈사태가 벌어질 듯하자 어느새 내 피부 위로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붉은 기운.

“오냐, 아주 팔다리를 분질러 주겠……. 컥!”

선방필승.

말보다 빠른 행동이었다. 주둥이를 놀려 대던 맨 앞의 놈이 가슴팍을 처맞고 뻥 날아갔다.

“이, 이 십새가!”

“죽여 버려!”

잔뜩 흥분해서 무질서하게 뒤엉킨 채 달려오는 흑도들.

나는 양 다리를 지면에 박아넣고 백결신권의 자세를 취했다.

절정의 고수에게 쉴 새 없이 처맞고, 피멍 가득했던 수련의 나날들.

그 결실을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와라, 이 개새끼들아.”

***

언젠가 황걸개가 이런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개방도들의 본거지, 개봉(开封)에선 매년 복날이 될 때마다 울려 퍼지는 특유의 매질 소리가 있다고.

사람을 물거나 죽인 것들을 타구봉(打狗棒)으로 때려잡는 행사란다.

그리고 그때의 소리가 아주 찰지다나 뭐라나.

빡-!

“꽥!”

내공이 실린 주먹이 적의 뺨따구를 터트리는 소리.

가옥의 앞마당에서 흡사 개 때려잡는 소리가 연달아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퍽!

“악!”

격동하는 단전. 전신 세맥(細脈)을 타고 팔다리로 뻗어 나가는 사 년 내공.

온몸에서 돌도 쪼갤 듯한 힘이 느껴졌다. 사고가 가속되는 느낌. 사방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들어오는 적들의 살기.

눈과 머리가 빈틈을 찾고 반응했고, 몸이 그 틈을 파고들어 적들에게 주먹을 흩뿌렸다.

“……이 새끼 무공을! 컥!”

한 줄기의 섬광처럼 뻗어 나간 주먹. 허릿심이 실린 일격이 꽂히자 강냉이를 후두둑 털어내며 나가떨어지는 깡마른 흑도 하나.

마치 합을 맞춘 쿵푸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투지와 전의를 감출 줄도 모른 채 머릿수만 믿고 덤벼드는 초짜들.

사방에서 주먹과 다리가 날아들었다. 파열음이 들리고 코피가 터져 나왔으며, 누군가의 팔이 부러지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씹! 이 쥐방울만 한 새끼가!”

뭔가 묘했다. 벼락처럼 뻗어오던 황걸개의 주먹질을 상대하다, 이런 파락호와 손을 섞어보니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탁! 탁!

날아드는 팔다리를 쳐내거나 흘리고, 역으로 주먹을 꽂아 넣는다. 나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적을 상대로 물러섬 없이 때리고 부수고 박살 내며 나아갔다.

그 와중에 투로를 읽었음에도 반응속도가 따라가질 못해 몇 대 처맞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 대장!”

그냥 아픈 대로 공격을 씹고 반격기를 넣어 줬다. 이는 배때지에 칼이 들어와도 살아남는 천살성이기에 펼칠 수 있는 상남자식 싸움법.

“팔환권(八環拳)!”

내공을 담아 유성처럼 날아가 적 가슴팍에 동시에 꽂히는 주먹 두 개. 맞은 놈이 붕떠서 날아가 뒤에 있던 일행을 볼링핀처럼 와르르 쓰러트렸다.

빠각!

코뼈를 으스러트리고 의식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육초식 선환각.

총탄이 빗발치듯 온 사방에서 주먹질이 날아들었지만, 그 속도도 아픔도 황걸개와 비교하면 한참을 못 미쳤다.

그 우직한 투로와 어설픈 몸짓에 쳐내면서도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처질 지경.

공격이 모조리 읽혔다. 그래서 크지 않은 상처만 허락한 채 쉴 새 없이 적을 때려눕힐 수 있었다.

그렇게 뼈와 살을 분쇄하며 열 명 넘게 작살을 내버리자 꼬맹이를 상대로 흔들리기 시작하는 적들.

“씨발! 뭔 애새끼의 움직임이 저래……!”

“어디 유명 문파에서 보낸 놈인가?”

“설마 이번 납치 건 때문에?”

저지른 짓이 워낙 많다 보니 저들끼리 오해하고 있는 모습.

하긴 이 나이에 이런 성취의 무인을 키워 내려면 영약과 비전 무공을 퍼부어 주는 명문 정파 세력밖에 없긴 하지.

그리고 그런 곳에선 가끔 신진 고수의 업적 쌓기나 강호 데뷔를 위해 이렇게 흑도방파를 박살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저 귀신처럼 미끄러지는 보법을 보라고! 저게 어떻게 길거리에서 배운 보법이야!”

“이런 염병! 이래서 아무 의뢰나 받지 말자고 했던 건데.”

꼬맹이 한 명에게 조직원 열댓 명이 순식간에 꼬꾸라진 상황.

이 비상식적인 결과에 저들은 나를 대문파에서 키워 낸 신진 고수쯤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확실히 명문 세가 출신이긴 하지. 비록 배운 거 없이 배신만 당한 뒤 버려졌지만 말이다.

“싯팔! 나라도 살고 보자!”

“……야! 어디 가!”

그렇게 오해는 오해를 낳기 시작했고, 전의를 상실한 적진에선 걷잡을 수 없는 붕괴의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탈주하는 몇 명의 흑도인들.

“미쳤어?! 도망친 거 알려지면 큰형님한테 뒤진다고 새끼들아!”

“그리고 애새끼한테 졌단 소문이 퍼져도 어디 가서 흑도 짓 못 해먹어!”

분열에 당황한 흑도인 몇 명이 돌아오라며 그리 외쳐댔다.

“염병! 턱이 작살 나도 흑도 짓 못 해먹는 건 똑같잖아!”

좀 전에 선환각을 처맞아 턱이 덜렁거리는 흑도를 가리키며 자리를 황급히 벗어나는 한 녀석.

그 말이 제법 설득력이 있었는지 얼마 안 남은 흑도인들 사이에서도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서로를 잠시 말없이 쳐다보는 모습.

“에이 시발!”

“나도 몰라!”

그렇게 한 놈의 도주는 곧 둘이나 셋으로 번졌고, 이젠 ‘에라 모르겠다!’ 식이 되어 단체로 꽁무니를 빼기 시작했다.

애초에 투철한 충성심 따윈 없는 놈들이라 와해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썰물 빠지듯 텅 비게 된 가옥의 입구.

“헉헉…….”

나는 허세를 부리느라 참았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끝없이 몰려오는 적과 사방에서 날아오던 공격. 황걸개에게 대응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한 고초를 겪었겠지.

배운 대로 흘려야 되는 건 흘리고, 맞아야 하는 건 맞아 주며 반격을 가해 확실하게 끝장냈다.

전신의 힘을 끌어내 수십 번가량 질풍처럼 휘둘러 댄 주먹과 발길질. 갈비뼈를 으스러트리고 코뼈를 주저앉혔으며 팔다리를 분질러 줬다.

물론 꼬맹이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으니 그 대가도 있었다.

8할 이상 날아가 버린 내공. 내 든든했던 4년 내공이 가뭄을 맞은 저수지처럼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후, 선업을 더 쌓아야겠군.”

수명 연장의 꿈과 내공 증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방법.

선업을 쌓아 성운심법의 공능을 강화하고 흉성을 위축시켜 그 힘을 야금야금 훔쳐 내는 것이다.

“……대장, 괜찮아요? 아까 제법 맞는 것 같던데. 부상도 제법 생긴 것 같고.”

옆에서 거들겠답시고 들이댔다가 같이 몇 대 맞은 일홍이 멍든 부위를 문지르며 물어왔다.

“이 정도면 그냥 긁힌 거야.”

“저기, 손가락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는데요…….”

나는 날아오는 몽둥이를 쳐내느라 꺾여 버린 손가락을 다시 ‘뚜둑’ 원상복귀 시켰다.

그 상남자 무브먼트에 질렸다는 표정을 짓는 일홍.

“이것들 솜주먹이네. 왜 별로 안 아프냐.”

이건 진심이었다. 몽둥이가 어깨를 내려쳤는데 황걸개의 주먹보다 덜 아프더라.

그 거지 늙은이는 그냥 꿀밤만 날려도 골통이 빠개지는 통증이 오던데 말이다. 대체 주먹질에 무슨 묘리를 실었길래.

“……어떻게 하면 대장처럼 세질 수 있어요?”

흑도방파를 혼자서 쓸어 버린 전설을 목격한 일홍이의 질문.

“고기만두를 많이 먹으렴.”

나는 무명옷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며 말했다.

성장기에 올바른 영양 공급은 필수다. 얘도 기왕 곱상하게 태어났는데 쑥쑥 잘 커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박살 난 가옥의 입구로 당당하게 진입했는데.

빡!

웬 몽둥이가 내 안면을 정통으로 때려왔다.

얼떨결에 때린 것인지 일말의 투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일격.

“왜, 왜 안 죽어! 이 돌대가리 새끼!”

아무래도 좀 전에 우르르 튀어나오지 않고 숨어 있던 놈이 하나 있었던 모양이다.

거 듣는 돌대가리 기분 나쁘게. 나는 곧바로 장법을 날려 놈의 턱주가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버렸다.

강냉이를 후두둑 뱉으며 주저앉는 흑도놈.

“……대장, 안 아파요?”

“겁나 아프지.”

이마로 흐르는 실핏줄. 하도 맞아서 둔감해진 거지 통각이 없다는 건 아니니까. 몽둥이로 있는 힘껏 내리치면 아플 수밖에.

“대장도 사람이구나.”

“그럼 요괴겠니.”

지구에선 이야기 속에서나 등장하는 존재들.

하지만 이곳은 무공과 영물이 존재하는 곳이니, 그것들도 어딘가엔 실존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맞은 부위를 시큰하게 문지르며 문 앞의 거적대기를 치우고 내부로 진입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오는 가옥 안의 풍경.

“뭐야 이건…….”

범죄자 잡듯 꽁꽁 묶였거나 노예처럼 발이 묶여 단체로 쪼그려 있는 아이들.

평소에도 틈틈이 인신매매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거지만 잡아 놨던 창고와는 다르게 대놓고 부유한 차림의 꼬맹이들도 보였다. 협박해서 돈이라도 뜯어내려던 걸까.

“강호의 도리가 진짜 땅에 떨어졌군.”

무협이 무엇인가. 무(武)와 협(俠)이다.

하지만 이 세계엔 무는 널렸어도 협이 없는 쓰레기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사람의 얼굴을 한 개새끼들. 내 손에 타구봉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군.

“저, 저기 누구세요?”

“저희 좀 제발 도와주세요!”

선업 보따리…… 아니, 불쌍한 꼬맹이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잡혀 온 이후로 고역이었는지 볼살이 쏙 들어간 모습.

“있어봐. 풀어줄 테니까.”

요즘 돈도 안 받고 착한 짓을 많이 하는 느낌이다.

아마 나답지 않은 일이라 선업도 팍팍 쌓이겠지. 이게 다 내공과 수명으로 돌아오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아,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소협의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손발의 포박을 뚝뚝 끊어 주자 넙쭉 감사 인사를 박아오는 아이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스스로를 소개했다.

“어떤 문제라도 반드시 해결해 주는 해결사 단무진이란다. 소문 좀 내주렴.”

일단 존재를 알아야 영업이든 장사든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난 일단 이름 알리기에 집중하기로 했다.

반드시 그 이름을 널리 퍼트리겠다고 대답한 뒤, 허름한 가옥을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아이들.

구해낸 숫자가 저만큼 많으니 홍보 효과는 톡톡히 누리겠군.

그렇게 북경 전역에 내 이름이 퍼지는 것을 기대하며 흐뭇한 얼굴로 문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육중한 발걸음 소리.

산적처럼 생긴 거한 하나가 가옥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다.

“어럽쇼?”

맨 먼저 골목에 널브러진 흑도인들의 모습에 한 번 갸웃하고, 입구 주변에서 기절한 놈들의 모습에 두 번 갸웃거리는 모습.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태를 벌인 듯 정문에 당당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헛웃음을 흘리는 거한.

“애들 소지품 챙기러 돌아왔더니, 집이 개판이네? 어이 꼬마야, 네 짓이냐?”

산적처럼 호피 무늬 장포를 허리에 칭칭 감은 남자였다.

덩치에 걸맞게 큼직한 칼을 차고 있었으며, 거기에 우락부락 단련된 육체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모습.

거한의 특징을 알아본 일홍이 내 팔을 툭툭 치며 정체를 말해 줬다.

“대장, 그 사람이에요! 범천음적!”

아무래도 이곳 광해파의 우두머리가 등장하신 모양.

“반반한 쌍판이 마음에 들긴 하는데……. 집 안을 이 꼴로 만들었으니 체면 때문에라도 살려 줄 순 없지.”

범천음적이라 불린 거한이 장포에 끼워져 있던 칼집에 손을 가져갔다.

스르릉.

길고 날카로운 날붙이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소리.

저런 날붙이 앞에선 내 맷집도 별 의미가 없다. 호신강기를 두르지 않는 이상 베이고 찔리는 순간 핏물이 퍽 터져 나오겠지.

“흐, 대신 얼굴만 오려 내서 팔아 주마. 이것도 나름 수요가 있거든.”

큰돈이 굴러들어 오겠다며 혀로 입술을 할짝이는 범천음적.

칼을 들자 심상치 않은 기도가 풍겼다. 잔챙이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살기를 내뿜어 내는 범천음적.

시뻘건 살기가 금세 집안을 가득 채웠다. 잠자던 천살성이 번쩍 깨어나 격렬하게 반응해 댈 지경.

게다가 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연기처럼 뿜어지는 살기 말고도, 녀석의 몸 안에 자리 잡은 시커멓고 불길한 덩어리가 말이다.

선업으로 빚어진 내 단전 속 기운과 정반대의 그것.

황걸개에게 저런 현상에 대해 들어 본 것 같기도 했다.

정의가 아닌, 악의(惡意)를 품고 계속해서 사람을 죽여 대면 저러한 살업(殺業)이 쌓인다고 그랬었지.

더불어 경고했었다. 내 안에서 저러한 것이 보이면 그 즉시 내 목을 베겠다고.

“일홍아, 쟤 정확히 뭐 하던 놈이냐?”

폭사되는 살기에 몸을 떨면서도 정보를 끄집어 내는 일홍.

“어, 범천음적은 돈을 위해서라면 납치,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여러 차례 간살(强殺)한 전적도 있는, 뭐랄까…… 아주 그 유명한…….”

“씹새끼?”

“네, 그거요.”

일홍이 내 단어 선택에 바로 맞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씨부럴?”

그리고 애새끼 둘이 만담하듯 자신을 까 내리자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욕설을 내뱉는 범천음적.

“오냐, 차라리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주마. 이 애새끼들아.”

더 짙고 농밀한 살기가 폭사 됐다.

녀석이 칼을 앞세운 채 성큼성큼 걸어오자, 그 무게에 목재 바닥이 삐걱삐걱 비명을 질러댔다.

“……대장, 칼 든 무림인 상대해 본 적 있으시죠?”

그 기세가 심상치 않자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일홍.

“오늘 해봐야지.”

“…….”

뭐든 처음이 있는 법이다.

어차피 진퇴로는 저 녀석이 틀어막고 있는 데다, 일홍이 경공을 할 줄 모르니 도주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싸울 뿐. 애초에 그런 숙명을 부여받은 몸뚱어리가 아니던가.

나는 내공을 운용하며 백결신권의 자세를 취해봤다.

살업이 저만큼 쌓인 개쓰레기니까, 조져 버리면 막대한 선업을 얻어 낼 수 있겠지.

“와라, 십새끼야.”

무림에 발을 들인 이상 칼부림은 각오한 바다.

나는 들어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여 보았다.

23화 지구식 싸움법

맨손의 꼬맹이가 칼 든 무림인에게 덤비라고 손가락을 까딱여 대고 있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그 맹랑한 도발에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짓는 범천음적.

“반반한 쌍판에 그 싸가지……. 너 혹시 저잣거리에서 상인들 털어먹던 그 미친 거지냐?”

미친 거지라니. 내 소문이 그런 식으로 퍼져 있었단 말인가.

상인놈들이 먼저 지독하게 굴길래, 똑같이 굴어 줬을 뿐인데.

“나도 하나만 묻자.”

내 역질문에 한쪽 눈썹을 꿈틀이는 범천음적.

“뭐, 저승 가는 노잣돈 삼아 대답해 주마.”

녀석은 피딱지가 묻은 칼날을 혀로 핥으며 음산하게 대답했다.

“여기 부유한 애들은 돈 뜯어내려고 납치했다 쳐도, 창고의 거지들은 왜 납치한 건데?”

사실 일홍에게 들어서 이유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입구에서 흑도 수십을 때려눕히느라 아직 숨이 완전히 안 돌아와서 말이다. 말 걸어온 김에 시간을 좀 끌어 볼 생각이었다.

“하오문 봉기에서 살아남은 혈족 하나가 무슨 신물을 훔쳐 달아났다고 해서 말이야……. 흠, 그러고 보니 딱 너희 나이대군. 거지 같지 않은 태가 나는 것도 그렇고.”

산적처럼 생긴 놈이 가늘어진 눈매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무언가를 고민하는지 까끌거리는 턱수염을 몇차례 쓸어내리는 모습.

“특히 네놈 옆의 애새끼는……. 하오문에게 들었던 것과 매우 흡사하군. 딱 한 가지 특성만 제외하고 말이야.”

놈의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이 닿자 옆에 있던 일홍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무슨 특징을 말하는 건가 싶어 쳐다보자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는 일홍.

“잡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군. 네 녀석은 멱을 따고 저놈은 변장했을지도 모르니 한번 끌고 가봐야겠다.”

놈이 칼날을 곧추세웠다. 다시금 스멀거리는 찐득한 살기.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기력과 숨이 적당히 돌아왔다. 입을 주절댄 보람이 있군.

“그래서, 수작질은 끝났냐? 숨은 돌아왔고?”

눈치채고 있었나 보다. 애새끼 상대로 자신이 질 리는 없다는 자신감의 발로일까.

“얼굴은 포를 떠서 비싸게 팔아야 하니까, 뒤질 때 너무 찡그리지는 말고.”

저게 다 큰 어른이 애를 상대로 할 말인가 싶었다.

쿵. 쿵.

육중한 발걸음. 놈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다시금 비명을 질러 대는 낡은 목재 바닥.

산적처럼 생긴 놈이 큼직한 칼과 누런 이를 번쩍이며 다가왔다.

“원래는 단번에 목을 베지만, 아가리를 놀려 댔으니 먼저 복부를 따서 내장을 쏟게 해주마.”

참으로 원시적이고 야만스러운 시대가 아닌가.

일홍은 내가 불리하다고 여겼는지 흑도들이 떨구고 간 몽둥이를 집어 들고 내 옆에 바짝 붙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애가 무슨 객기람.

나는 아서라는 듯 손을 휘젓고는 범천음적에게 몇 걸음 마주 걸어 나갔다.

“그다음 심장을 파내주지. 광해파를 건드린 놈들의 말로를 모두가 알 수 있게 말이야.”

애새끼한테 처발려선 조직의 가오가 안 사는 모양.

악의 가득한 살심을 품었는지, 응어리진 녀석의 살업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런 칼이 배를 뚫고 내장을 쑤셔오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아냐? 응?”

공포에 떠는 내 표정이라도 보고 싶었던 걸까. 씩 웃으며 살벌한 말을 늘여놓는 범천음적.

하지만 이딴 수작질에 쫄아 버릴 내가 아니다. 하물며 이 몸은.

“알지 십새야. 이미 두 번이나 쑤셔졌거든.”

놀랍게도 칼침을 두 번이나 맞고 높은 절벽에서도 살아남은 독종.

“뭐? 근데 어떻게 살아 있…….”

문답무용. 나는 녀석이 갸웃거리는 틈을 타 발끝에 모은 내공을 격발했다.

“뒤졋!”

파앗!

***

기습과 함께 시작된 혈투는 일다경(一茶頃) 넘게 계속됐다.

상대는 음적이긴 해도 별호까지 얻은 이류(二流)무인.

거기에 더불어 큰 키와 기다란 칼까지 쥐자 리치 차이로 접근하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서걱!

날붙이가 살을 베는 소리. 예리한 살기가 몸을 긋고 지나갔다. 조금만 방심해도 시야에 혈선이 그어지는 상황.

쉭! 쉭!

시뻘건 궤적이 이리저리 궤도를 비틀며 연거푸 쏘아졌다. 이전에 싸웠던 삼류 무인들의 궤적이 옅은 가랑비라면.

일류를 목전에 둔 무인이 쏟아내는 것은 그야말로 억척스럽게 쏟아지는 장대비.

쉭-! 쉭-!

무언가 번뜩이면 핏물이 한 차례 솟았다. 천살성의 보조 없이는 육안으로 따라잡기도 힘든 쾌검.

이 녀석, 몸은 곰처럼 육중한데 동작은 제법 날렵하다.

스걱!

오른쪽 귓불이 날아가고 핏물이 바닥으로 팍 튀었다.

“윽!”

기이한 각도로 꺾여와 팔등을 가르고 지나가는 칼날. 피에 흠뿍 젖은 칼끝이 햇빛에 반짝였다.

혈조를 타고 땅으로 흘러내리는 나의 붉은 피.

분명 놈이 휘두르고자 하는 곳, 살심이 뻗는 방향까지 전부 눈에 보였다. 하지만 보인다고 해도 몸으로 대응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

무공에 입문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았다.

무(武)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천살성의 재능과 백결신권만 믿고 덤벼들었다가, 오늘 피지컬이 딸린다는 것을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쉭-!

날카로운 파공성. 턱을 당겨 목젖을 노려온 칼날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냈다.

물론 이쪽도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스승이 가르쳐준 기기묘묘한 선풍보를 펼쳐 기습적으로 적의 품에 파고들어 보기도 하고.

생채기를 허락하고 뼈를 취한단 식으로 저돌적으로 주먹과 발을 휘둘러 본 결과 어쩌다 한두 대쯤은.

빡!

“큭!”

놈의 가슴팍이나 면상에 꽂아 넣을 수도 있었다.

물론 스치기만 해도 핏물이 쏟아지는 칼침과 비교하면 저조한 결과였지만 말이다.

“헉, 헉.”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어둑한 가옥.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는 두 남자.

범천음적은 좀 전에 꽂힌 주먹질에 쌍코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은 피하면서 과일 껍질을 까듯 서로를 깎아 내고 있는 상황.

내가 요리조리 피하면서 끝까지 버텨 대고 싸움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이를 으드득 가는 범천음적.

“……너 뭐 하는 새끼야. 왜 지치질 않지?”

녀석이 무척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내공은 얼마 안 남았지만,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놈의 체력은 좀처럼 꺼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평범한 무인인 저쪽이 살짝 더 지친 듯한 모습.

“좀 뒤지란 말이다!”

칼날이 번뜩였다. 판매용이니 얼굴은 건드리지 않겠다더니, 어느새 목을 노리고 섬뜩하게 칼질을 해오는 모습.

황급히 고개를 젖혀 치명상은 피했다. 대신 볼을 저미고 지나가는 칼날.

나는 시야에 핏방울이 ‘팍!’ 튀어 오르는 걸 느끼며 그대로 선풍보를 펼쳤다.

미끄러지듯 파고드는 신형. 나는 녀석의 명치에 선풍각을 찔러넣었다.

“컥! 이 개새……!”

거친 숨을 토해내며 칼자루를 황급히 회수하는 범천음적. 나는 허리를 비틀어 원심력을 끌어모은 뒤 녀석의 턱을 주먹으로 돌려 버렸다.

빠각!

묵직한 손맛. 제대로 들어갔다. 그 증거로 만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는 광해파의 우두머리.

나는 마무리를 짓기 위해 그대로 뛰어들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게 강렬한 경고를 날려오는 천살성.

쉬익-!

몸과 고개를 당기자 예리한 칼날이 코끝을 스치고 하늘로 솟구쳤다.

자칫했으면 턱부터 정수리까지 반으로 쪼개질 뻔한 상황. 저놈 또한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방식으로 함정을 파고 있었나 보다.

뭣 모르고 들어갔으면 그대로 이승을 하직했겠군.

“씨발 너 정체가 뭐야. 방금 그거 어떻게 피했어?”

서로의 실력이야 일다경 정도 겨뤄 봐서 잘 안다.

조금 전 공격을 내심 완벽했다고 생각했는지 범천음적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헉, 헉. 존나 느리니까 피했지…….”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다.

귀에 들리는 것은 사투를 벌인 이들의 거친 숨소리뿐.

온몸이 쓰리고 아리다. 거기에 축축하기까지 했다. 땀이 아니라 내가 흘린 핏물로 말이다.

저쪽은 피로가 축적됐다면, 이쪽은 계속해서 상처가 누적된 셈. 치명상은 아니더라도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했다.

데미지가 쌓이고 또 쌓인 여파인지 사지말단이 아까부터 말을 제대로 안 들었다. 벌벌 떨리고 있는 손끝과 발끝.

천살성 특유의 맷집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목이 날아간 건 이쪽이었겠지.

거기에 내공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힘들게 모은 4년 내공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후우, 후우.”

이게 길거리의 삼류 파락호가 아닌, 칼을 휘두르는 진짜배기 무림인인가.

맨주먹으로 상대하자니 고역스럽기 그지없다. 손에 권강(拳罡)을 두르지 않는 이상 칼날에 닿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싸움.

“어이, 미친개.”

숨을 고르다 말고 칼날 너머에서 죽일 듯 노려보며 말을 거는 범천음적.

거 듣는 미친놈 기분 나쁘게 진짜.

“왜? 음적 새끼야.”

한결같은 내 싸가지에 놈의 이마로 굵은 혈관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예상외로 필사적으로 분전하자 생각이 바뀐 모양.

내장을 쏟니 뭐니 했던 녀석이 갑자기 노선을 선회해 주둥이를 털어오기 시작했다.

“대가리 식히고 잘 생각해봐라.”

꼬맹이나 납치해대는 놈이 이성적으로 잘 생각해 보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 아닌가.

“이대로 가면 우리 둘 중 하나는 확실하게 뒤질 거다.”

“그래, 네가 새끼야.”

“……야이 씨발, 들으라고.”

어떠한 위협이 닥쳐도 내 주둥이는 침몰하지 않는다.

이는 손수 두들겨 패며 내 아기리를 닥치게 하려 했던 개방 방주가 직접 인정한 사항이다.

“저놈만 두고 가라. 그럼 넌 그냥 살려 보내 주마.”

뭉툭한 검지로 몽둥이를 꽉 안아 든 일홍이를 가리키는 범천음적.

놈은 ‘어때?’라는 눈빛으로 나와 눈을 지그시 마주쳐 왔다.

일홍은 싸우다 말고 자신이 언급되자 화들짝 놀라 나와 음적 놈을 번갈아 쳐다봤다.

“잘 생각해 등신아,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우리 애들이 돌아올 거다. 반면에 넌? 피 많이 흘린 것 같던데 얼마나 더 서 있을 수 있을까?”

“…….”

확실히 어질어질하긴 했다.

복부를 찔리고 급류에 휩쓸렸을 때처럼, 목숨이 경각에 달했을 때만 보이는 예의 그 안개가 전신을 또 휘감고 있었다.

“……대장, 아니죠?”

일전에 크나큰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범천음적의 제안에 극도로 불안해하는 일홍의 모습.

동그란 두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야, 일홍.”

“예, 예?”

머릿속에서 최악의 상황이라도 떠올리고 있는 모양.

일홍은 울상이 되어 내 뒷말을 기다렸다.

“있다가 배 빵구나면, 그거나 잘 틀어막아 줘라.”

“……?”

영문 모를 소리에 어벙한 표정을 짓는 일홍.

츠츠츠-

전신을 감싼 흉성의 기운이 아까보다 훨씬 짙어졌다.

천살성이 아니었으면 진짜 쓰러지고도 남을 상황이었나 보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섰다는 뜻.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상태에 돌입하면 난 두려움이 싹 가셨다. 지고하신 흉성이 이 몸이 죽지 않도록 기를 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하여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단전 속 내공을 모조리 박박 긁었다. 혈맥을 따라 세차게 뻗어 나가는 정순한 내공.

나는 아주 가늘고 긴 호흡을 들이켜며 백결신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어리석은 새끼, 저딴 거지 때문에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해?”

내 투지를 읽었는지 칼날을 다시 들이대는 범천음적.

저딴 거지가 아니다, 내 두 번째 의뢰인이다. 초저점에 투자한 미래의 블루칩이다.

그리고 내겐 아직, 천살성만이 할 수 있는 무식한 싸움 방식이 하나 존재했다.

목만 날아가지 않으면 흉성이 어떻게든 날 살려 낼 테니까.

친누나에게 배때지를 찔려 터득하게 된 싸움법. 나는 지면을 박차고 황소 같은 돌진을 감행했다.

“쑤셔봐 새끼야!”

***

푸확!

칼날이 단무진의 어깻죽지를 썰고 지나갔다.

“악! 시발!”

제법 깊게 베였는지 천장과 벽을 후두둑 적시는 붉은 핏물.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저 좆만한 애새끼는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소문대로 완전히 미친 개새끼였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칼날이 번뜩여도 눈썹조차 움찔거리지 않는다.

마치 목숨을 도외시한 듯한 그 돌진에 경악하는 범천음적.

거기다 착각이 아니라면 저 애새끼, 자신의 사혈도법(死血刀法)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칼날이 향할 곳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움직임. 마치 이 도법의 초식과 무리(武理)를 훔쳐낸 양 자연스럽게 말이다.

“이 괴물 같은 새끼!”

오늘이 첫 싸움인데, 그동안 수천 합을 겨룬 듯한 경험을 받았다.

분명 처음 칼을 섞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는데, 범천음적은 녀석이 품은 어마어마한 무재(武才)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아마 몇 년 후에 만났다면 맥없이 당해 버리는 건 녀석이 아니라 자신이 됐을 터.

서걱!

“큭!”

하지만 운이 없었다. 아무리 재능을 품었다고 한들, 개화하기 전에 꺾어 버리면 끝이니까.

녀석은 이미 온몸에 상처가 가득했으며 흘린 피도 너무 많았다.

정신이 혼미한지 계속되는 칼질과 주먹질 사이에서 녀석은 결국 큰 빈틈을 노출하고 말았다.

쉭-

머리 위로 흘려낸 허초(虛招)에 넘어가 배를 노출한 채로 상단을 방어하는 모습.

예고한 대로 내장을 쏟게 해주지. 범천음적은 쾌재를 부르며 기다렸다는 듯 녀석의 복부에 칼을 깊숙이 쑤셔 박았다.

푹!

날카로운 쇠붙이가 고기를 찔러 들어가는 소음. 복부를 전부 관통하고 들어가 등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시뻘건 칼끝.

빼도 박도 못할 치명타였는지 단무진은 몸이 우뚝 굳은 채 피를 한 움큼이나 울컥 토해냈다.

“꺄악! 안 돼-!”

거참 계집애 같은 비명이네.

흐릿해진 단무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이었다.

“병신 애새끼! 그러게 보내 준다고 했을 때 그냥 갔어야지!”

성가시게 굴던 모기를 마침내 때려잡은 사람처럼, 범천음적은 득의양양한 비웃음을 한껏 터트리며 말했다.

고통을 주기 위함인지 쑤셔 넣은 칼자루를 양손으로 쥐고 좌우로 비틀어 버리는 녀석.

“끄으윽!”

“흐흐, 느껴지냐? 내가 말한 게 이거다. 내장이 씹창나는 고통!”

왜인지 여기 무림 놈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인 녀석이 없다.

배 안이 불덩이로 지져지고 있는 듯한 끔찍한 감각.

하지만 단무진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씩 웃더니 칼자루와 범천음적의 두 손을 콱 움켜잡았다.

생사의 갈림길. 목숨이 경각에 달하자 믿기 힘든 괴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천살성의 신체.

“뭐, 뭐야! 놔 이 새끼야!”

단무진의 미소를 보고 뭔가 잘못됐다 싶었는지 황급히 몸을 빼려 하는 범천음적.

하지만 늦어도 한참 늦었다.

쩌억-

괴력으로 양손을 쭉 당기자 칼날이 쑥 들어가며 범천음적의 쌍판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짧은 팔다리, 쏟아지는 칼질로 인해 제대로 닿기조차 힘들었던 그 얼굴이 완전 무방비 상태로 말이다.

“네, 네놈도 때릴 손이 없잖아! 등신이!”

서로 양팔이 묶인 신세. 전신을 헤집은 상처에 시뻘건 혈인(血人)을 눈앞에 둔 범천음적이 질겁한 목소리로 외쳐 댔다.

하지만 사람을 때리는 도구는 손발뿐만이 아니지.

어쩌면 오늘을 위해 황걸개가 그토록 마빡을 때려 댄 걸지도.

단무진은 고개를 한껏 뒤로 당겼다가 그럴듯한 초식명과 함께 범천음적 면상에 박치기를 갈겼다.

“철두공(鐵頭攻)!”

빠악-!

두개골과 두개골의 부딪힘. 그야말로 골통(骨痛)을 뒤흔드는 일격.

“커헉!”

범천음적이 쌍코피를 더 거칠게 뿜었다. 크나큰 충격에 칼자루를 놓치고 쓰러질 듯 말 듯 뒤로 휘청휘청 물러나는 모습.

이번엔 함정이 아닐 거다. 괴물 같은 맷집을 가진 단무진도 방금 의식이 잠시 날아갔다 돌아왔을 정도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마무리해야만 한다.

하지만 완전히 바닥난 내공, 기다란 칼이 꽂히고 무리한 박치기를 감행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뚱어리.

“비, 비겁한 새끼가…….”

까뒤집혔던 범천음적의 두 눈이 그새 돌아오는 듯했다.

무림에선 나려타곤(懶驢打滾)이나 물어뜯고 머리로 공격하는 행위가 무척 부끄러운 짓이라 그랬었나.

하지만 단무진은 지구 출신. 이기는 게 장땡. 그딴 무림인의 규율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짓도 할 수 있다.

“낭심난무(囊心亂舞)!”

퍼억!

단무진은 그럴듯한 초식명과 함께 범천음적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뭉특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듯한 심상치 않은 감각.

“끄르르르륵……!”

박치기 공격도 버티던 범천음적이 기어코 쓰러졌다. 그것도 눈깔을 뒤집고 거품을 잔뜩 문 채로 말이다.

“느껴지냐? 고간이 씹창나는 고통이.”

쿵. 쓰러지는 소음.

내공도, 체력도 없는 상황에서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 수.

“이게 바로 하늘사랑 보육원식 싸움법이다…….”

단무진은 쓰러진 범천음적 앞에 서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것이 그가 지구에서도 17 대 1의 뚝방 전설을 찍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24화 그렇게 됐습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손가락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

그저 지독한 오기로 꼿꼿이 서 있을 뿐.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가 두 눈을 적신 덕에 온 세상이 핏빛처럼 붉었다.

“해치웠나……?”

족보도 자비도 없는 초식, 낭심난무.

뽕알이 터지고도 일어날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난 해선 안 될 그 주문도 당당하게 읊어봤다.

그런데 내가 탈(脫)인간인 무림인의 내구성을 너무 얕봤나 보다.

“끄으으…….”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꿈틀꿈틀 일어나려 애쓰는 범천음적.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무림인의 고환은 무쇠로 만들어졌단 말인가.

이건 좀 위험하다. 정신을 차리기 전에 뭐라도 손을 써야 하는데 이쪽은 한 걸음 떼기도 힘든 상황.

그런데 그때였다.

퍽!

들고 있던 몽둥이로 범천음적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일홍.

애벌레처럼 꿈틀대던 녀석의 움직임이 그걸로 뚝 굳었다.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는 가슴팍.

숨통을 끊은 듯한 장면이었다.

“……진짜 해치웠나?”

아무래도 막타를 뺏긴 듯했다. 하지만 겸허히 넘어가기로 했다. 뭐 경험치가 오르는 것도 아니니까.

“주, 죽었나 봐요. 숨을 안 쉬어요. 어쩌죠?”

몽둥이를 내려놓은 일홍이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왔다.

목소리와 더불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고 있는 녀석의 몽둥이.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 상황이긴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도 저런 꼬맹이에겐 역시 충격이 컸겠지.

나는 흐릿해져가는 정신을 다잡으며 일홍을 진정시키려 했다. 얼마나 놀랐을까 저 어린 것이.

“조, 좀 더 캐묻고 죽였어야 했는데.”

“…….”

그닥 놀라지는 않았던 모양.

역시 무림이야. 알량한 현대인의 상식으론 뭐 하나 쉽사리 예측할 수가 없는 곳.

사람들이 죽음에 그럭저럭 익숙하다. 특히 쟤는 무림 문파 출신이라 그런지 더더욱 그런 듯했다.

“끙.”

아무튼 위기가 완전히 해소되자 긴장이 싹 가시고 지독한 탈력감이 몸을 덮쳐오기 시작했다.

다시 흐릿해지는 의식. 술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는 몸뚱어리.

“대장, 괜찮아요?”

일홍이 무척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어왔다.

“괜찮아, 이 정도로는 안 죽어.”

흥신소 일이란 게, 기본적으로 셀프 영업을 겸한 프리랜서다.

유약하거나 일 못하는 게 드러나면 곧바로 일감이 끊기는 구조라, 저도 모르게 의뢰인 앞에서 가오잡고 허세 부리는 게 버릇이 됐다.

“그냥 긁힌 상처야.”

“……그치만 칼이 배를 완전히 관통했는데요?”

어처구니없다는 일홍의 표정.

뭐 한두 번 찔려 본 것도 아니고.

거기다 흉성이 지금처럼 불타오르고 있는 이상 이 몸은 엔간해선 죽지를 않는…….

푸슉.

“어?”

복부에서 다시금 뿜어지는 핏물. 피부 위로 피어오르던 붉은 기운이 어느새 옅어져 있었다.

목이 베일 위기가 해소되자, 초주검 상황에서도 몸을 움직이게 해주던 그 기이한 힘을 어느새 거둬간 흉성.

“이건 진짜 죽을지도…….”

머릿속이 빙빙 돈다. 그리고 세상이 기울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기울고 있는 건 내 시야.

“어, 대장? 대장! 정신 차려요! 안 돼!”

깜짝 놀라 달려오는 일홍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내 의식은 새까맣게 점멸됐다.

쿵.

***

고약한 약재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은성상단의 의방.

새하얀 침상에서 한 소년이 드르렁 코를 골며 누워 있었다.

“…사람 식겁하게 해놓고, 태평하게 잘도 자네요.”

잠꼬대하듯 몸을 뒤척이는 소년을 바라보며 침상 근처에서 볼멘소리를 하는 일홍.

처음엔 ‘어? 나 죽을지도?’ 같은 섬뜩한 소리를 하며 피를 울컥 쏟길래 진짜 죽는 줄로만 알았다.

깜짝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범천음적 주머니에서 금창약(金瘡藥)을 찾아냈기에 망정이지.

그리고 오는 길에 씹어서 펴 바르면 특유의 점도로 지혈도 해주는 약초가 있길래 그것도 펴바른 다음 이곳 의원까지 끌고 온 참이었다.

물론 혼자서 업고 오기엔 무거워서 오칠이네의 도움도 받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숨을 붙여 이곳까지 데려왔던 일홍.

“끄응.”

어느새 정신을 차린 건지 단무진이 눈을 뜨는 듯했다.

그리고 내뱉는 첫마디가.

“……거봐. 안 죽지?”

일홍은 어이없다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죽을 뻔했잖아요. 웬 객기람.”

“하지만 안 죽었잖아?”

“간신히 숨은 붙었지만요……. 상처가 깊어서 적어도 반년 이상은 요양을 해야……. 어?”

말하다 말고 심각했던 상처들이 어느새 아물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두 눈을 부릅뜨는 일홍.

자잘한 피멍은 남아 있지만, 칼에 베였던 치명상들은 대부분 자국만 남기고 치유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대장, 대체 저, 정체가 뭐예요……?”

일홍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체가 뭐긴, 한솥밥 먹던 동네 거지지.”

아직은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

하기야 그도 일홍의 신분을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캐묻지 않았으니까.

“타고난 괴력과 맷집, 기이할 정도로 빠른 무공 습득 능력까지…….”

“내가 좀 잘나긴 했어.”

“혹시 말로만 들었던 천무지체(天武肢體) 막 그런 거예요?”

“그건 아닌데.”

어깨를 으쓱이며 부정하는 단무진.

일홍은 후계자 시절에 공부했던 태극지체(太極肢體), 극음지체(極陰肢體) 같은 특이체질들을 모조리 늘여놔 봤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아니라고 하며, 화제를 돌리는 눈앞의 소년.

“그래서, 하오문주의 직인은 챙겼고?”

그걸 회수하기 위해 그토록 피를 흘리며 싸워 댄 것이 아니던가.

고개를 끄덕인 일홍은 속주머니에 고이 숨겨 둔 그것을 꺼내 단무진에게 보여 줬다.

“이게 그 하오문의 신물이냐? 내 눈엔 그냥 나무로 만든 막도장 같은데.”

“……그야, 초대 문주님 시절엔 하오문이 무척 가난했거든요.”

그 설명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단무진.

흙수저 연합이랬지 초창기엔.

지금은 정보 조직 원탑으로 잘나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막대한 돈과 이권 때문에 분열이 생긴 것이 현재의 하오문이기도 했다.

“끙, 물 좀 줘봐.”

죽다 살아나서 그런지 목이 무척 타다.

누은 자세에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보는 단무진.

“끄으읍…… 으어어…….”

그러자 온몸에서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당장 죽을 상처만 없을 뿐이지 몸 상태는 그야말로 최악을 달리는 상황.

“일홍아, 나 좀 당겨봐라.”

일홍은 자신 때문에 저렇게 된 것을 잘 알기에 군말 없이 단무진의 수발을 들어줬다.

침상 위에서 금방이라도 죽을 듯한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키는 단무진.

“아이고 죽겠다, 죽겠어. 의뢰 두 번 받았다간 골로 가겠네.”

“…….”

“뭐 해? 물.”

일홍은 아파 죽으려 하는 그에게 말없이 물잔을 건네줬다.

벌컥벌컥 들이켜는 단무진.

“대장.”

“왜.”

단무진은 손등으로 입가를 슥 훔치며 대답했다.

“중간에 그 칼잡이가 도망칠 기회를 줬잖아요.”

“어, 그랬지.”

단무진은 온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한가득이었고, 상대는 그런 꼬마의 맷집과 독기에 질려 있던 상황.

“그때 왜 도망 안 갔어요?”

당시 상황은 누가 봐도 단무진이 불리했었다. 막대한 보수금을 받은 낭인들도 그 상황이 되면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단무진은 승기를 장담하기 힘든 그 상황에서, 오히려 저돌적으로 뛰어들었었다.

왜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걸어준 거냐고 묻는 일홍.

“뭐 의뢰인을 두고 튀라고? 그딴 쪽팔린 짓 했다가는 다신 의뢰 못 받아. 용납 못 할 일이지.”

“그치만 어차피 아무도 모르잖아요. 거기 안에서만의 일인데.”

어차피 자신이 잡혀가면 그 일을 말할 사람은 없다.

범천음적 또한 꼬맹이와 사투를 벌였다는 게 쪽팔려서라도 언급하지 않을 거고 말이다.

“내가 알잖아.”

스스로 가슴팍을 툭툭 치며 말하는 단무진.

그건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란다.

“…….”

그 대답에 일홍은 먹먹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사람도 있구나.’

음모와 배신, 내부 분쟁으로 가득한 하오문 생활을 해와서 그런 걸까.

일홍에게 그가 마치 별세계의 인간처럼 보였다.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일홍은 이때 확신했다.

‘믿자, 전적으로.’

눈앞의 사람은 가족인 척 굴다가 위기의 순간에 배신하는 어떤 인물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오히려 평소엔 짓궂다가 위기의 순간에 기꺼이 몸을 던져 주는 사람.

“대장, 이 목숨 빚은 언젠간 꼭…… 갚을게요.”

일홍은 무언가를 다짐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며 그렇게 말했다.

“오냐, 하오문주 되어서 꼭 갚아라. 약속이다.”

그 빚을 진 채무자 같은 자세에 훌륭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단무진.

“네, 그럴게요. 근데 그러려면 먼저 상령과 하령을 찾아야 해요.”

“그 신비 고수들? 얼마나 고수길래 등장하는 순간 판도가 뒤집힌다는 거야?”

“저는 문헌에 적힌 활약상을 보고 최소 화경(化境)이라고 추정하고 있어요.”

화경의 고수.

삼화취정, 오기조원을 이룩해 검강을 자유로이 뽑아 쓸 수 있는 그 인간 흉기들을 말하는 것인가.

참고로 단무진도 황걸개를 그쯤의 고수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긴 했다. 본인이 정확하게 경지를 대답해 주진 않지만 말이다.

“무림에서 고수란 건 그런 의미죠. 특히 화경의 고수는 더더욱.”

“그렇긴 하지.”

은성상단만 봐도 그렇다.

정체불명의 괴인 한 명 덕택에 천하십대상단이 휘둘리고 있지 않은가.

“단서가 없으니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장기 의뢰인가.”

의뢰 보수금은 보통 일의 난이도와 걸리는 시간에 따라 차등으로 청구되곤 했다.

“그렇죠. 대신 찾는 동안 제가 해결사 일을 도와드릴게요.”

저번에 말했던 그 도움 말인가. 대답을 유보했었지.

“음.”

“저 할 줄 아는 거 많아요. 아는 것도 많고요. 특히 수배범들 특징 다 외고 있어요. 저 할 줄 아는 거 많아서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그때는 의뢰를 위해 말했다면, 지금은 뭔가 옆에 붙어 있고 싶어서 말하는 듯했다.

“내 충실한 사이드킥이 되고 싶다. 뭐 그런 거냐?”

“사이드 뭐요……? 아무튼 칼 맞는 거까지 감수하고 절 도와주셨으니, 저도 그 정도까진 감수해 볼게요.”

그건 사실 선업을 쌓으려고 그런 부분도 있긴 한데.

뭐 아무튼 이 야만스러운 무림에서 믿을 수 있는 충성스러운 부하가 생긴다는 건 좋은 일이지.

“오냐, 내 옆에 딱 붙어 다녀.”

“네, 대장.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말고, 잘하렴.”

결국 결과가 전부다 이 일은.

“네, 열심히 그리고 잘해볼게요.”

싹싹한 얼굴로 그리 답하는 일홍. 하나보단 둘일 때 사무실이 잘 굴러가는 법.

아무튼 단무진 흥신소에 충성스러운 보조가 정식으로 합류한 날이었다.

***

“쯧쯧, 고놈 엉망진창으로 처맞고 왔구나. 거지들이랑 붙은 거냐?”

연무장 단상 위에 누워서 무척 한심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는 황걸개.

“처맞고 오긴 누가 처맞고 와요.”

“그럼 그 피멍들은 뭔데? 상승의 권법과 신법을 가르쳐 놨더니, 고작 거지 패싸움에서 처맞고 와?”

그는 멍으로 얼룩덜룩한 내 몸을 가리키며 쯧쯧 혀를 차면서 술을 들이켰다.

“거지가 아니라, 흑도 패거리하고 싸우고 왔는데요, 노야. 특히 그 범천음적 뭐시기라는 놈.”

“……뭐? 범천음적?”

아는 별호였나 보다. 마시던 술을 우뚝 멈출 정도로 놀란 듯했다.

단상에서 호다닥 내려와 내 상처를 되짚어 보는 황걸개.

“네가 그 쓰레기랑 싸웠다고? 칼질이 제법 매서웠을 텐데,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냐?”

키운 지 얼마 안 된 제자(?) 녀석이 벌써부터 칼 든 이류 무인을 꺾어 버렸으니, 그의 입에서 질문이 다다다 쏟아졌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정말 많은 일과 우여곡절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뭐, 그렇게 됐습니다.”

그냥 들이받았고 이겼다. 박치기에 낭심 걷어차기. 추잡한 수까지 다 써가며 말이다.

“허, 참나. 웃긴 놈일세.”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렇게 답하자 헛웃음을 흘리는 황걸개.

“애초에 왜 그런 위험한 놈과 엮인 것이더냐? 아는 거지 애들만 데려온다더니.”

그 질문에 나는 총총 걸음으로 나를 뒤따라온 일홍이를 가리켰다.

“얘 구한다고 싸웠죠.”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온 늙은이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그때 골목에서 싸우던 일을 떠올리고 기겁하는 일홍.

“앗, 저 사람은 그때의 변태 늙…….”

따악!

일홍이의 정수리에 벼락같은 딱밤이 내리쳤다.

‘악!’ 소리와 함께 바닥을 나뒹구는 일홍.

저거 좀 많이 아프긴 하지.

“고놈 참 곱상한 놈이구나. 얘가 뭐라고 흑도 패거리 전체와 그런 흉악한 놈까지 상대해?”

황걸개의 눈빛은 네놈이 단순히 선업만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단 듯한 느낌이 서려 있었다.

은근히 사람 속을 잘 들여다 본다니까 저 늙은이.

“얘가 북경 지부 변고에서 살아남은 하오문주의 유일한 아들이랍니다.”

어떤가. 이 정도면 무리해서라도 베팅해 볼 만하지 않은가.

자기 세가에 버림받고, 걸핏하면 죽이겠다 드는 노인을 근처에 둔 쥐뿔도 없는 거지가.

떡상하려면 무언가를 확실하게 걸어야지. 특히 저점일 때 말이다.

그런데 내 설명을 듣고서 무척이나 해괴한 표정을 짓는 황걸개.

“이놈아, 그거 확실한 정보 맞어?”

“왜요? 뭐 문제 있어요?”

그러고 보니 황걸개도 정보 단체인 개방의 우두머리 아닌가. 하오문주에 대해 제법 알고 있겠군.

“이놈아 내가 알기로 하오문주는…….”

“문주는?”

“슬하에 딸 하나밖에 없는 걸로 아는데?”

이게 대체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일까.

나는 고개를 홱 돌려 일홍을 쳐다봤다.

“아, 그게요…….”

그러자 옷 속에 넣어놨던 솜뭉치를 말없이 툭툭 빼는 일홍.

체형 교정용이었는지 호리호리한 체형이 드러났다. 어쩐지 들었을 때 체구에 비해 무척 가볍더라니.

거기에 더 충격적인 것은.

찌이익-

일홍이 자기 얼굴 가죽을 뜯어냈단 점이었다.

그 기괴한 장면에 내가 ‘히익!’ 소리를 내고 있자.

“인피면구다, 뇬석아.”

옆에서 피식 웃으며 설명하는 황걸개.

그리고 모든 작업을 끝내자 눈앞엔 오똑한 콧날과 똘망똘망한 눈망울, 짧게 땋은 꽁지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한 명 서 있었다.

“이게 뭔…….”

사람이 당황하면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던가.

해명을 요구하는 내 강렬한 눈빛에 어색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는 그……. 아니, 그녀.

“뭐어-”

할 말이 궁색한지 연분홍색 입술이 연식 들썩거렸다.

“그렇게 됐습니다…….”

25화 선행의 연쇄작용

탁탁 주판알 튕기는 소리, 무언가 휘갈겨지는 화선지. 수북이 쌓인 결재지까지.

은성상단의 집무실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표행 준비는요?”

“거의 끝나갑니다.”

은성상단을 정상화하고자 머리를 싸매고 고심 중인 상주와 진 총관.

은화란이 부채로 갸름한 턱을 툭툭 두들기며 이어서 물었다.

“양잠업은 어떻게 돼가나요.”

“무진이 덕분에 순항 중입니다. 이제 비단 공정만 제 자리를 잡으면 될 듯싶습니다.”

정말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금결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안정적으로 고치를 생산하기 시작한 잠실.

“그에 대한 전주들의 반응은요?”

“그게, 아직은 두고 보자는 분위깁니다. 양잠업에서 우여곡절이 너무 많았고, 표행 성공 여부도 불확실하니 그런 듯합니다.”

비단 사업이 안착해 실질적으로 돈을 뽑아내기 시작하고, 표행까지 성공해야 현금을 다시 흘려넣을 생각인 모양.

망해 버리면 채권 회수도 쉬운 일이 아니니 말이다.

덕분에 현재 은성상단은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굴러가고 있었다.

“신뢰가 없네요, 신뢰가.”

“그치들이 원래 그렇잖습니까. 그리고 여기엔 금야도 공자가 흘린 악의적인 소문 영향도 있을 겁니다.”

저번의 축객령 이후, 만금전장은 전주들을 향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문을 흘리고 있었다.

이에 부채를 부러질 듯 꽉 움켜쥐는 은화란.

추접 공자 얘기만 나오면 마음속에 천불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상주였을 적엔 이런 경우에도 사람들이 믿어 줬었잖아요? 저딴 악의적 소문에 휘둘리지도 않고.”

중견에 불과했던 은성상단을 뛰어난 사업 안목과 식견으로 천하십대상단 자리에 올려놨던 춘휘거상.

그분이 상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새로운 사업 얘기만 꺼내도 너도나도 투자하겠다고 사람들이 달려들었을 정도.

“하아, 새파란 애송이가 상주 자리에 앉은 데다, 몇 번의 실패까지 있었으니. 역시 신용이 가지 않는 걸까요?”

은화란은 너무나도 확연한 그 온도차에 속상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잃어버린 신뢰는 되찾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그녀의 사업 수완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진 총관, 아버지였다면 이런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셨을까요?”

그래서 그녀는 물었다. 날 때부터 자신을 챙겨왔으며, 춘휘거상을 가장 오래 모신 진 총관에게.

“그분이라면 자신을 불신하거나 탐탁지 않아 하는 사람에게도 오히려 과한 은혜를 입혀 자기 사람으로 만드셨을 겁니다.”

상즉인(商卽人) 인즉상(人卽商).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이윤이란 문구를 그대로 실천하신 대단하신 분.

“저로선 감히 따라 하기도 쉽지 않네요. 이윤보다 신용을 먼저 챙긴다니.”

상인으로서 내리기 힘든 결단이다. 특히 비상시국이라 머릿속에 셈법이 가득한 은화란은 더더욱.

“따라하기 힘들기에, 그분이 춘휘거상이라 불리며 존경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돈을 움직이는 주체도, 거래를 결정짓는 존재도 결국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품으면 장사 또한 틀어짐 없이 이치에 맞게 흘러간다는 게 진 총관의 이야기였다.

“저는 언젠가 은화란 상주님도 이런 인망을 쌓아 이름만으로도 신용을 얻는 거상(巨商)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진 총관의 눈빛.

은화란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슬쩍 돌렸다.

이게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뱁새의 심정일까. 이 자리에 서보니 아버지와의 격차가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노력은 해볼게요.”

복잡한 머릿속을 달래려 마른 찻잎이 우러난 찻잔을 들어 올리는 그녀.

씁쓸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이중적인 의미로 말이다.

드륵.

달콤한 주전부리를 찾아 서랍을 여는 가느다란 손.

그러나 몇 차례 휘적거렸음에도 걸려드는 것이 없다.

“아, 맞다. 무진이가 다 먹었었지…….”

제 스승을 닮은 건지 그 아이의 식탐은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

거기에 시비들도 다시 채우는 것을 깜빡한 모양이다.

“참, 그러고 보니……. 무진이가 돌아왔다죠? 저번에 언급한 애들을 데리고 말이에요.”

거지 시절의 군식구라 그랬던가.

“예, 안 그래도 일감을 주선해 주고 오는 길입니다. 그 녀석이 데려온 애들답게 다들 똘똘한 구석이 있더군요.”

특히 오칠이란 아이는 범상치 않은 독기를 지녔다며, 잘 키워서 표사로 만들어보자고 말하는 진 총관이었다.

“그리고 무진이 몸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어요.”

“예, 원래부터 마찰이 있던 거지 패거리와 싸우고 돌아온 것 같습니다.”

상대 패거리엔 덩치 큰 놈들도 많고, 머릿수도 세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단다.

“저런, 그 정도 차이면 무공을 익혔어도 쉽지 않죠. 지고 돌아온 걸까요?”

“본인 말로는 이겼답니다. 그 패거리를 꺾고, 연결되어 있던 광해파도 박살 내고, 범천음적이라는 이류무인까지 격파했다고 주장하던데…….”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다 싶은지 말꼬리를 흐리는 진 총관.

“후후, 한창 자신의 무용담을 부풀리고 싶을 나이잖아요. 이해해 주자고요.”

은화란 또한 재밌다는 듯 눈매를 씰룩이며 그렇게 말했다.

이겼다는 건 기껏해야 거지 패거리를 때려눕힌 정도겠지.

물론 그것만 해도 나이를 생각하면 대단한 업적임은 틀림없지만 말이다.

“그 아이에게 제 전속 의관을 보내 주세요. 그래도 많이 다쳤다니 걱정이네요.”

“상주님, 워낙 튼튼한 녀석이라 그냥 평범한 의관을 보내셔도 될 텐데요.”

“하나뿐인 제 의동생이잖아요.”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오라버니도 의절하고, 집안에서 유일하게 허물없이 대할 수 있는 소년.

“허, 그런 편의까지……. 알겠습니다.”

참 복 받은 소석이란 생각을 떠올리는 진 총관.

한데 그가 의관을 부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드르륵, 탁.

“은화란 상주 계시오?”

방문인은 기품이 흐르는 비단옷을 입었으며, 새치가 희끗희끗한 정갈한 중년 남자였다.

기별도 넣지 않은 막무가내식 방문이었는지 하인 둘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외치며 다급히 뒤따라오고 있었다.

“상주님, 저 분은 하북전장(河北錢莊)의 전주 강호채입니다.”

그리고 얼굴을 알아본 진 총관이 은화란의 귓가에 중년인의 정체를 속삭여줬다.

너무나도 예상 밖의 손님이라, 놀라움이 깃드는 은화란의 표정.

“강호채 전주님, 여기엔 대체 무슨 일로……?”

하북전장은 북경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는 전장이며, 얼마 전 은성상단의 자금 융통을 거절했던 곳이기도 했다.

거기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흥분해 있는 모습.

영문을 모르겠다. 그의 방문이 길(吉)인지, 아니면 흉(凶)인지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차라도 한잔 들면서 가쁜 숨을 돌리심이 어떠신지요.”

은화란은 녹빛이 감도는 찻잔을 스르륵 건네며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본인도 침착한 상태라 아니란 것에 동의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가라앉히는 중년인.

그리고 잠시 후, 찻잔을 모두 비우고 마음까지 추스른 강호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은화란 상주, 내겐 못난 아들이 하나 있소.”

집무실에 널브러진 결재지와 자금 융통의 흔적들을 힐끗거리며 하는 소리였다.

“아드님, 말씀이신가요.”

때아닌 혈육 언급. 은화란의 말끝이 살짝 흐려졌다.

설마, 만금전장에서 탐욕스런 혼담을 밀어붙였던 것처럼, 여인이 홀로 지탱 중인 상단을 노리고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까.

“그 나이에 벌써 헛바람이 차서, 허름한 옷차림으로 걸핏하면 몰래 가출을 일삼는 어처구니없는 녀석이기도 하오.”

한데 그런 것치곤 자신의 앞에서 제 아들을 혹독하게 깎아내리고 있었다.

제 아비가 외출 금지령을 내리자, 거지로 위장하여 탈출, 밖으로 나가 일탈을 즐긴다니.

이에 점점 더 의아해지는 은화란의 머릿속.

“하지만 하나뿐인 내 소중한 아들이오.”

“……그렇군요.”

뭐 어쩌란 말인가.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은화란은 수많은 식솔을 책임진 상주답게 인내심을 발휘해 참아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들어주는 그녀.

“그 아이가 얼마 전 실종 됐소. 낭인을 풀어도 찾을 수가 없자 불길한 상상이 치솟던 나날이었지.”

북경의 뒷골목에선 흉흉한 일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납치나 강도, 살인 등이 빈번하게 일어나며 사람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도 잦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대체 왜 은성상단까지 와서?

“그런데 걱정이 무색하게 얼마 전 멀쩡하게 돌아오더구려. 듣기로는 흑도에게 납치당했던 것을 은성상단의 옷을 입은 소협이 구해줬다던데…….”

흑도에게 납치됐고, 최근에 풀려났고, 은성상단의 옷을 입은 아이가 활약했다라.

은화란은 머릿속에서 어떤 조각들이 짜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전주님, 그 흑도들이 혹시…… 광해파였나요?”

은화란의 질문에 눈을 부릅뜨더니 무릎을 탁 내리치는 하북전장의 전주.

“……역시 그대들이 보낸 사람이었군! 정말 고맙소, 하마터면 하나뿐인 아들놈을 그 흑도 놈들에게 잃어버릴 뻔했소.”

그는 은화란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고맙단 소리도 연거푸 뱉어댔다.

이에 어리둥절한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감사 인사를 받는 은화란.

세상에, 그냥 어린아이의 치기 어린 무용담이라 생각했건만.

정말로 혼자서 흑도방파와 이류무인을 쓰러트렸단 말인가?

“아들이 그러더군. 상대는 어른에 숫자도 많았지만 그 소협은 결코 굴하지 않고 피투성이가 되어 가면서도 싸워 냈다고.”

아주 그냥 협객가에 나올 법한 기백과 용맹함.

은화란은 멍한 얼굴로 말을 받으며 고개만 끄덕여 댔다.

“어찌나 멋있었던 것인지, 자신도 그 소협처럼 되고 싶다며 개과천선까지 다짐하지 뭐요? 허헛, 그대들 덕에 아들까지 갱생시키는구려.”

계속되는 의동생을 향한 전주의 간증.

듣고 있던 은화란은 아무래도 오해를 풀어야겠다 싶어 손을 흔들며 나섰다.

“전주님,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으신…….”

그때, 정신 차리라는 듯 은화란의 팔을 쿡쿡 찌르는 손길.

옆을 돌아보자 진 총관이 서 있었다.

그는 소리 없이 입만 움직여 이미 벌어진 일이니 눈 딱 감고 숟가락을 얹자 말해 왔다.

그리고 그 보상을 녀석에게도 나누면 되지 않겠냐고.

상단만 바라보는 수많은 식솔을 생각해 이 기회를 놓치지 말란다.

“……무재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총표두를 목적으로 키우고 있던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됐든 도움이 되었다니 무척 기쁩니다. 전주님.”

“과연, 차기 총표두감으로 찍어 둔 녀석이었나. 이제야 그 무용이 이해가 가오.”

표국에서 아주 어릴 때부터 무공을 수련 시켜 온 아이로 착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강호채.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오면서 들은 건데, 은성상단도 이번에 갈 곳 없는 고아 열셋을 일감까지 주면서 거둬들였다지? 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꼿꼿한 의기(義氣)를 자랑하던 춘휘거상이 생각날 정도였소.”

그것도 단무진이 거지 시절의 애들을 챙기겠답시고 데려온 것이었다.

한 번이라도 자기 사람이 됐던 인물에겐 제법 애착을 가진 듯했던 그 녀석.

“그쯤 되니 어려울 때 해온 부탁을, 신용 부족을 이유로 일언지하에 내쳤던 내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더군.”

“아.”

무언가 바뀌어 가는 분위기.

사막에서 갈증에 시달리듯 자금난에 허덕이던 은화란은 그 심상치 않은 말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지. 내 과오를 청산하고 아들을 구해 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도, 이전에 해온 자금 융통을 들어주고 싶소만.”

“……!”

은화란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딜 가도 안 된다며 뻥뻥 차이기 일쑤였는데, 북경 십대 상단이 제발로 걸어 들어와 자금을 빌려주겠단다.

“네, 네! 부디!”

은화란은 행여 눈앞의 인물이 마음을 돌릴까 싶어 두 손을 꽉 잡으며 외쳤다.

상상도 못한 곳에서 단무진이 데려온 행운의 굴레. 사막 한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느낌이다.

‘무진아! 넌 대체……!’

그냥 풀어놨을 뿐인데도 이런 행운을 불러오다니.

아무래도 자신은 복덩이가 아니라, 싯누렇게 반짝이는 금괴 그 자체를 주운 모양이다.

***

은성상단의 부자재 창고.

표물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 잡동사니를 모아 둔 이 창고에서 나는 어떤 꼬맹이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잡일인데도, 생각보다 열심히하네.”

이것저것 닦고 쓸고 쌓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꼬맹이들.

“원래부터 대장을 닮아 끈기 하나는 알아주던 애들이잖아요.”

옆에서 지켜보던 일홍이 의견을 더했다.

삶은 전투이자 생존이라는 내 정신교육을 받아 독기 충만한 놈들이 되긴 했었지.

“오칠이 쟨 열심히 해서 표사가 될 거래요. 그때 훔쳤던 삼급표사들의 전낭 무게가 인상적이었나 봐요.”

몸은 좀 힘들지만, 그래도 안정적인 직장이다.

여기서 좀 더 먹고 찌워서 크면 쟁자수, 그리고 무공에 재능이 있으면 표사까지.

확실히 이전처럼 미래가 불투명하진 않다.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상방이 뚫린 셈이다.

거기에 엄청난 꽌시를 둔 나라는 존재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제 걱정은 없겠군.

나는 대신 시선을 돌려 옆에서 이것저것 조잘거리는 일홍을 쳐다봤다.

“……왜요?”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자 살짝 쑥스러운 얼굴로 내 시선을 스윽 피하는 그녀.

“아니, 신기하다 싶어서.”

남자로 변장했을 때도 뭔가 이쁘장하다 싶었는데, 변장까지 풀고 나니까 말이 안 됐다.

한 삼 년만 지나도 길거리의 사람들이 한번씩은 뒤돌아 볼 그런 미인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었다.

“야, 근데 목소리는 어떻게 숨긴 거냐?”

그냥 변성기가 오지 않은 거라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묘하게 중성적이었다.

그러자 품속에서 꼬챙이처럼 생긴 약초를 꺼내드는 일홍.

“이걸 즙을 내서 복용하면 목이 붓거든요. 그럼 목소리가 변조되서 속일 때 좋죠.”

체형 교정에서 인피면구와 목소리까지. 그야말로 배운 사람의 전문적인 변장이었다.

“넌 참 모르는 게 없구나.”

“뭐든지 아는 건 아니에요. 아는 것만 알아요.”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대사로군.

아무튼 옆에 끼고 다니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듯한 녀석이다.

“근데 일홍아, 너 진짜 이름은 뭐냐?”

“……홍금이요.”

무슨 달달한 사과 품종 같은 이름이었다.

“뭐 예쁜 이름이네.”

“헤헤, 정말요?”

별생각 없이 말한 건데 왜 저리 손가락을 베베 꼬아대는 건지.

그 이상 현상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저돌적인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동생!”

“컥.”

고라니에 치인 듯한 충격. 다만 은은한 연꽃 코끝을 간질였다.

어떤 미친 사람인가 싶어 쳐다보자 생글생글 웃고 있는 은화란 상주의 반달 같은 얼굴이 보였다.

“하나뿐인 내 동생, 여깄었구나!”

“……누나, 갑자기 왜 이러세요.”

저번에도 느꼈지만, 여전히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신체 접촉이었다.

진짜 이 몸을 꼬맹이로 보는 건지 뭔지.

“어, 저분은 은성상단의 상주인데…….”

일홍은 정보에 밝은 녀석답게 천하 십대 상단의 상주를 알아본 모양이다.

휘둥그레진 두 눈.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진 입.

“왜 대장더러 동생이라고……?”

마치 막장 드라마에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여주들의 눈빛이었다.

***

달이 밝다.

북두성군(北斗星君), 남두성군(南斗星君). 별자리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만 같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 깃털이 내려앉는다면 그 소리마저 들릴 듯한 정적.

단전에선 방금 먹은 영약의 기운이 황소처럼 날뛰고 있었다.

‘……!’

영문을 모르겠지만 내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며 은화란 상주가 억지로 내 주머니에 찔러 준 것.

영험한 산맥에서 자연의 기운을 사십 년이나 흡수한 하수오라 그런지 기운이 아주 세찼다.

‘성령회일체하며…… 수천기파세하니…….’

망설이면 효능만 떨어질 뿐이다. 잡념을 떨치며 의식을 잠재운다. 그저 스스로를 끝없이 관조(觀照)하며 통찰(洞察)했다.

칼까지 맞아가며 쌓아온 선업이다. 거기에 연 수는 짧아도 자연지기가 풍부한 영약이다.

그 두 개의 기운이 성운심법의 공능에 막대한 힘을 더하고 있었다.

쿵-

몸이 들썩이는 충격. 잔뜩 약화된 흉성을 자비없이 두들기는 일격.

흉성의 움직임이 멈췄다. 신성한 별의 기운이 흉성 겉부분의 힘을 아주 조금씩 훔쳐내기 시작했다.

놈에게는 아주 티끝만 한 양이겠지만, 한 사람에겐 어마어마한 공력.

‘만고를 꿰는 것은 곧은 심념(心念)뿐이랴…….’

금새 정신을 되찾은 천살성이 머릿속 침입자를 찢어발기려는 듯 붉은 기운을 뿜어냈다.

츠츠츳-!

황걸개는 절대로 저것에 붙잡히지 말라 그랬다. 하여 나는 곧바로 별의 기운을 단전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회수하는 와중에 나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고 말았다.

‘……응?’

시뻘건 태양처럼 타오르던 흉성 본체에.

쩌적-

아주 미세하긴 하지만 실금이 가는 장면을 말이다.

26화 절벽 위에 남은 사람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친 건 모자람만 못하단 뜻이다.

이 말을 지금 왜 하느냐.

그것과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츠츠츳-

칼까지 맞아가며 쌓은 선업(善業), 태산의 정기를 백 년이나 흡수한 하수오까지.

성운심법의 기세는 가히 파죽지세였으며, 약화된 흉성을 쉴 새 없이 두들기고 기운을 훔쳐댔다.

그러다가 발생한 이상 현상.

쩌적-

시뻘겋게 타오르는 흉성 표면에 가느다란 실금이 그어졌다.

나는 그 길로 운기조식을 멈추고 곧바로 황걸개에게 달려가 이 놀라운 사실을 고했다.

“뭐 실금? 오줌을 지렸다고?”

고주망태가 되어 언제나처럼 헛소리부터 내뱉는 황걸개.

“아니, 흉성에 금이 갔다고요.”

나는 내 정수리를 콕 찌르며 말했다. 심심하면 딱밤이 날아들던 그 부위 말이다.

“으잉, 그게 말이 돼?”

“안 되니까 묻는 거잖아요.”

이쪽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자 술병을 내려놓고 내 머리통에 손을 갖다 대는 황걸개.

“흐음…….”

성운심법을 운용 중인지 퍼렇게 일렁이는 두 눈.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심각하게 굳어지는 표정.

“뭐 좀 알겠어요?”

“모르겠는데?”

가끔 보면 이 인간 정말 쓸모가 없다.

뭔가 알아낸 듯한 분위기를 잔뜩 풍기더니.

“다만 한 가지 추측이 세워지긴 하는구나, 성운심법에 이런 공능이 있었을 줄이야…….”

취기를 내공으로 날렸는지 그의 눈빛은 어느새 진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이게 무슨 현상이라는 거지.

“최근 상당한 선업을 쌓았고, 그걸 바탕으로 흉성을 연달아 타격하자 표면에 실금이 갔다는 거지?”

“예, 그렇죠”

피를 철철 쏟으며 일홍을 도왔고, 납치당한 애들을 구했으며, 갈 곳 없는 고아들에게 일자리까지 주선해줬다.

요 며칠 사이, 내게 구해진 사람만 해도 그 숫자가 서른을 넘어가는 상황.

“커다란 바위도 낙숫물에 구멍 뚫리는 법, 이 작은 흠집을 더 크게 키워나갈 수만 있다면…….”

“있다면?”

턱수염을 쓸어내리던 황걸개가 조용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네놈은 천살성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나는 놀라 눈을 크게 움켜 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머릿속 시한폭탄을 제거할 수 있단 뜻인가.

“……진짜 흉성을 깨트릴 수 있는 거예요?”

“그것이 이 심법을 전수해준 분의 뜻이 맞다면 말이지.”

거참, 된다는 거야 안 된다는 거야.

정체 모를 신비 도인의 의중에 달린 일이라니.

“아무튼 선업을 더 쌓거라. 약화된 흉성을 끊임없이 격(擊)하고 기운을 훔쳐 나가는 게야.”

커다란 제방의 붕괴도 실금 하나로부터 시작된다나 뭐라나.

천살성에게 삼켜지기 싫으면 쉬지 않고 선업을 쌓으라는 그의 조언이었다.

“그게 쌓고 싶다고 쌓을 수 있는 겁니까? 먼저 그럴 만한 사건이나 일감이 있어야죠.”

“이놈아, 그러니까 협객 노릇을 해보래도?”

그 돈도 안 되고 고생만 오지게 할 것 같은 짓거리 말인가.

“그때도 말했지만 전 일을 하면 그에 걸맞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도 남의 노력을 값싸게 후려치려는 놈이 얼마나 많은데.

일홍이도 복권 시에 그만한 보상을 나눠주기로 해서 내 의뢰인이 된 거였다.

“그럼 뭐, 낭인이라도 되겠단 말이냐?”

그것도 일종의 해결사긴 하지.

가진 명성이 없어 날 찾는 사람이 없으니, 일단은 그걸로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네, 똑같은 일을 해도 그쪽은 돈을 두둑이 받잖습니까.”

“쯧쯧, 세속적인 놈이로고.”

내 대답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황걸개.

“속세에 발 딛고 사는 놈이 세속적이지 그럼. 노야가 뱃가죽이 들러붙을 정도로 굶주려 봤어요?”

따악!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자 정수리를 후려갈기는 딱밤.

“노부도 거지 출신이다, 요 맹랑한 것아.”

가히 섬전 같은 기습이었다.

“이 싯팔!”

“흘흘, 고놈 처맞기만 하면 위아래가 없어지는구나.”

골통이 찌르르 울리는 것이 맞을 때마다 지능이 떨어지는 느낌.

황걸개는 발끈하는 내 모습에 자기 손은 약손이라며 실실 웃어댔다.

“딱밤 한 방에 자지러지는 녀석을, 어떤 인간이 돈을 주고 낭인으로 고용할까?”

“이게 그냥 딱밤입니까? 예? 그리고 누가 고용하긴요. 칼을 든 이류무인도 쓰러트린 접니다.”

별호를 가진 무인을 해치웠다. 의뢰인 한둘 정도는 찾아낼 수 있겠지.

설사 나이 때문에 일감이 없다 해도 친한 누님의 꽌시를 이용하면 될 일.

“이류무인? 배에 칼 꽂아서 간신히 이긴 그 개싸움 말이더냐?”

“이기면 장땡이지 뭐. 그리고 성운심법의 공능 덕에 상당한 성취도 이뤄냈거든요.”

이번엔 단순히 내공만 증진된 것이 아니다.

천살성은 목숨을 건 혈투에서 배움이 가장 빠르단 말이 사실이었는지, 백결신권과 선풍보, 성운심법 모두 큰 진전이 있었다.

“내공이 좀 모였다 한들,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무용지물과 다를 바 없거늘.”

“그럼, 무용지물인지 아닌지 직접 한번 확인해보시렵니까?”

굳게 움켜쥔 주먹, 한 보 성큼 전진하는 오른발. 나는 백결신권의 자세를 취하며 황걸개를 도발해봤다.

좀 전에도 말했듯 천살성은 목숨이 오락가락해야만 성취 속도가 배가 되는 법.

“이 노부를 도발해? 어지간히 미친놈이로고.”

“모르셨습니까? 천살성은 원래 미친놈들입니다.”

나 정도면 양호하게 미친 거지.

그리고 이번의 눈부신 성취로 깨달았다. 죽기 직전까지 실컷 처맞더라도, 무공이 늘면 결국엔 내 이득이라는 것을.

“제자, 오늘 기사멸조의 죄를 범해보겠습니다.”

제 스승을 향한 능멸 선언.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흘리는 황걸개.

“또 지랄 똥을 싸는구나.”

그는 내공만 손에 넣으면 매번 이런다고 ‘쯧쯧’ 혀를 차댔다.

“평소에 실컷 먼저 때리셨으니, 이번엔 제가 선공을 취하겠습니다.”

콩알만 한 내공은 어느새 메추리알만 하게 늘어나 있었다.

거기에 더욱 민감해진 살기와 투기, 목숨을 각오한다면 골목에서 금나수를 쳐냈듯 저 늙은 너구리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

“뭐 맡겨놓은 것처럼 발칙하게 구는군. 오냐, 어디 한번 와보거라.”

발랑까진 내 요구에 재밌다는 듯 씩 웃는 황걸개.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등골이 저릿해지는 투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갑니다!”

내 성취와 한계를 동시에 확인할 기회.

나는 전신 세맥으로 뻗는 세찬 내공을 느끼며 지면을 발끝으로 박찼다.

타앗-

***

다향(茶香)이 은은하게 어린 은성상단의 집무실.

은화란은 용정차를 들어 올리다 말고 귀신처럼 솟은 손님에 눈썹을 흠칫 떨었다.

“누나.”

상단 내에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은 한 명뿐.

“무진이니?”

고개를 돌리자 상단에 홍복을 물어다 줬던 그 소년이 씩 웃으며 서 있었다.

황 노야의 귀신같은 보법을 훌륭히 체득해낸 모양. 언제 이렇게 다가왔는지도 모를 지경이다.

“근데 얼굴이 대체 왜 그러니?”

은화란은 시퍼렇게 멍이 든 단무진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누군가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듯 온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

“어떤 괴팍한 노인네랑 싸워서요.”

괴팍한 노인네라. 아마도 황 노야를 말하는 것이겠지.

일전에 수련하는 장면을 엿본 적이 있었다. 어찌나 살벌하게 치고받던지.

“누나가 금창약이라도 발라줄까?”

“됐어요, 침 바르면 나아요.”

손등으로 코피 자국을 슥 훔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단무진.

많이 욱신거릴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꾹 참는 점이 사내아이답다고 할까.

그 씩씩함에 은화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대장! 좀 천천히 좀 가요……!”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단무진을 쫓아오는 꽁지머리의 아이 하나.

“앗! 은화란 상주님을 뵈어요.”

별생각 없이 따라오다가 여기가 상주 집무실이란 걸 깨닫고 깜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 저 나이 또래 아이는 자신을 봤을 때 저렇게 어려워해야 정상인데.

“누나. 저 이거 먹어도 되죠?”

무진이는 정말 특이했다. 만난 지 넉 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진짜 친누나를 대하는 듯한 능청스러움.

“오, 이거 맛있는데, 일홍이 너도 먹어 봐.”

킁킁거리면서 달콤한 당과를 찾아내더니 자연스럽게 입에 쏙 넣는 모습.

보면 볼수록 누군가를 참 닮았단 말이지.

“대장……. 근데 상주님 걸 맘대로 먹어도 돼요?”

얇고 가느다란 목소리. 요즘 무진이와 줄곧 붙어 다니는 꼬마였다.

수련도 가끔 같이한다지? 황 노야께서 제자로 거두신 걸까. 아니면 몇 수 가르쳐 주시려는 걸까.

사람의 가치를 재는 은화란의 눈빛이 일홍에게 잠시 머물렀다.

“저번에 누나가 맘대로 먹어도 된댔어.”

“그러니까 왜 대장한테 저런 대단하신 누님이 있는 거냐고요…….”

처음엔 먼지투성이라 잘 몰랐는데, 깨끗이 씻긴 다음 입히고 꾸며주니 완연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것도 만개하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미래가 무척 기대되는 재목.

“어쩌다 보니.”

먹느라 설명하기 귀찮은지 짧게 대답하는 무진이었다.

일단 입에 넣고 보는 건 거지 시절의 습관인 걸까.

“그래서 용건이 뭐니? 무진아.”

은화란은 용정차를 차분하게 들이켜며 그렇게 물었다.

입안에 도는 그윽한 풍미와 차향.

저번과 같은 차를 마셨음에도 씁쓸함이 적게 느껴지는 건 자금 문제가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겠지.

그것 또한 말린 감을 우물거리고 있는 저 아이 덕분이었다.

“누나, 북경 낭인회(浪人會)라고 알아요?”

“물론, 거기 회주(會主)하고도 잘 아는 사이지. 표행 인원이 구멍 나면 항상 들르는 곳인걸.”

은화란의 설명에 단무진은 잘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표행 때마다 찾는다니. 대충 야가다 발주처와 인력소장 같은 관계인가 보군.

“그럼, 소개 좀 해줄 수 있어요 누나?”

단무진의 요구에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은화란.

“당연히 해줄 수야 있지만……. 낭인이라도 되려고?”

“일단은요.”

“남의 의뢰 수행하는 게 무척 쉽지 않은 일이라 들었는데.”

“아시다시피 제가 능력이 좀 출중하잖아요. 괜찮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그 능력 덕에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던 은성상단이 아닌가.

“그런 거라면 표국에서 일해보는 게 어떻겠니? 누나가 팍팍 밀어줄게.”

두 눈을 반짝이며 하는 제안.

높은 직위까지 약속하며 꼬드겨 봤지만 단무진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건 제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생각해볼게요.”

괜찮은 직장이지만 표물 옮기고 장사하면서 언제 선업을 쌓겠나.

그는 마음만 받겠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무튼 낭인회, 소개받을 수 있을까요?”

아쉽다는 얼굴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은화란.

“이 은성패를 들고 찾아가렴. 내 소개로 왔다고 하면 편의를 봐주실 거야.”

단무진은 작고 둥그런 금속패를 건네받아 품 안에 넣었다.

홀몸으로 찾아갔다면 ‘어딜 애새끼가!’라면서 쫓아냈겠지. 과거 북경에서 일자리를 구했을 때처럼.

하지만 지금 그에겐 천하십대상단의 상주라는 든든한 뒷배가 존재했다.

이게 바로 돈으로도 사기 힘들다는 꽌시의 힘.

“고마워요, 누나.”

“무얼, 언제든 말하렴.”

찻잔을 내려놓은 은화란은 습관처럼 단 것에 손을 뻗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달달한 주전부리를 그새 다 작살내놓은 단무진.

싸움을 막 끝낸 천살성의 육체가 엄청난 열량을 탐했기 때문이지만.

그걸 모르는 은화란과 일홍은 그저 질린 눈으로 단무진을 바라볼 뿐이었다.

“보면 볼수록 황 노야를 닮았단 말이지.”

자신도 모르게 툭 내뱉은 말.

“아니, 어찌 그런 모욕을?”

자신은 그런 상거지가 아니라며 단호히 부정하는 단무진이었다.

저 대사조차도 스승을 빼다 닮은 모습.

“후훗.”

서로 미워하면서도 닮은, 흥미로운 사제관계다.

은화란은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한동안 재밌다는 듯 웃어댔다.

***

갸름한 얼굴, 백설처럼 흰 피부, 질끈 동여맨 말총머리.

누군가를 애도하듯 슬픔에 찬 얼굴을 한 미인이 피 묻은 검을 어딘가에 겨누고 있었다.

“컥, 어째서 냉화옥녀가 여기에……!”

검끝이 뭐라 외치는 마두의 목을 자비없이 그었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핏물. 마을 하나를 통째로 학살한 마두가 ‘끄르륵’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다가 절명했다.

뜨듯한 피가 온몸을 적셨음에도 고고함을 유지하는 여인의 모습은 냉화옥녀 그 자체.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내 동생이…….”

인간의 악업이 극에 달하면, 하늘이 노하여 천살성을 내려보낸다고 하였다.

모용청혜는 무고한 양민을 수없이 죽여온 마두를 경멸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런 놈들만 없었으면.

“……아니, 가장 악독한 것은 동생을 제 손으로 벤 나인가.”

악인에 대한 분노로 유지되던 이성은 금세 물밀 듯한 죄악감으로 흐려졌다.

검을 쥔 손이 연신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모습.

“냉화옥녀, 잠시 쉬었다가 움직이는 건 어떻소? 이러다간 그대가 먼저 지쳐 쓰러지겠구려.”

무림맹, 멸마대(滅魔隊)의 대주는 명백히 무리 중인 모용청혜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대주, 다음 마두는 어디에 있나요?”

“냉화옥녀…….”

말이 통하질 않는다. 앞뒤 꽉꽉 막힌 그 모습에 진한 한숨을 내쉬는 대주.

모용청혜는 기다란 검을 납검하고 뒤돌아서서 말했다.

“제겐 쉴 자격이 없어요.”

여름을 지나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느 가을.

그녀는 아직도 비바람이 내리치던 어느 절벽 위에 서 있었다.

27화 미수금 회수

한적한 오후.

나와 일홍은 번화가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북경낭인회(北京浪人會)가 멋들어진 서체로 휘갈겨진 현판.

명필가가 성심을 다해 써 내려간 게 분명한지 한 획마다 망설임 없는 심력이 담겨 있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는 문.

낡은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여러 종류의 사람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부탁하려 찾아온 의뢰인들, 그리고 그것을 수주하러 까마귀 떼처럼 모여든 낭인들.

알싸한 술 냄새와 수십 자루의 칼들이 뿜어내는 쇳내가 여기까지 진동했다.

“북경 지부는 을(乙)급 패를 지닌 낭인들이 많네요.”

낭인회 건물 내부를 둘러보던 일홍의 한마디였다.

거리로 나오기 위해 또다시 인피면구로 남장을 해온 그녀.

하오문의 눈과 귀는 어디에나 있다나 뭐라나.

“을급 패?”

“네, 낭인들의 등급은 몸에 지닌 갑을병정(甲乙丙丁)패로 구분하거든요.”

갑과 을은 금은으로 되어 있어 구분이 쉽고, 병은 쇠, 정은 나무패로 되어 있단다.

과연, 움직이는 무림 백과사전.

“대장, 저 사람이 회주 같아요.”

일홍이 허공을 쿡쿡 찔렀다. 손끝을 따라가자 새치가 희끗하고 얼굴에 기다란 흉터가 난 중년인이 보였다.

허리춤의 대도(大刀). 산전수전 다 겪은 듯한 노장의 분위기. 아마도 은퇴한 낭인이리라. 필시 과거에 이름을 날렸었겠지.

그렇게 모은 돈으로 이런 큼직한 건물을 차린 것이겠고.

“나도 언젠간 이런 사무실 차릴 수 있으려나.”

북경 한복판에 ‘단무진 흥신소’란 현판을 대문짝만 하게 내걸고 싶었다.

의뢰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그런 흥신소.

“그럼 먼저 명성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요? 차려놔도 손님이 안 오면 말짱 황이잖아요.”

옆에서 일홍이 현실적인 조언을 묵직하게 날려왔다.

맞는 말이다. 의뢰인이 알아서 찾아올 만큼 해결사로서의 능력과 명성을 갖춰야겠지.

“이름 빨리 날리는 법……. 뭐 없나?”

“별호를 지닌 현상범이나, 유명한 마두를 잡아내면 될걸요. 호사가들은 신진 고수의 등장에 열광하니까.”

그래, 그게 무림의 생리지. 쓰러진 이의 명성은 곧 쓰러트린 이의 것이 된다.

예전에 학교 다닐 적에도 누가 짱을 쓰러트렸다고 하면 그 소문이 순식간에 반마다 쫙 퍼지곤 했었다.

“얼씨구, 이 핏덩이들은 뭐여?”

이야기를 끝내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우리 모습에 흉터를 꿈틀거리며 중얼거리는 중년인.

그의 한마디에 저들끼리 떠들던 주변 낭인들 또한 낯선 소년들(?)에게 흥미를 보였다.

“뭐 하는 꼬맹이들이야?”

“거참 곱상하네. 재수 없게시리.”

“의뢰라도 하러 왔냐? 우리 몸값 비싸니까 헛짓거리하지 말고 그냥 가라.”

껄렁대는 태도로 주둥이를 놀려대는 험상궂은 아재들.

일홍이 조금 쫄았는지 내 뒤로 슬쩍 숨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은화란이 건네준 은성패를 그들 앞에 척 내밀어봤다.

“저건 또 뭐여?”

풋내기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급수가 높고 문자를 읽을 줄 아는 낭인들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건…… 은성패잖아?”

“은성상단에서 보냈나 본데?”

은성상단은 산하에 표국을 두고, 표행에 나설 때마다 낭인을 여럿 고용하는 우량 고용주였다.

즉, 낭인들에게 있어 잘 보여야 하는 물주라는 뜻.

“크흠.”

“실례했군.”

몰려왔던 낭인들이 알아서 주둥이를 여물고 사라졌다.

그리고 재밌다는 듯 다가와 말을 걸어오는 북경 지부의 회주.

“은화란 상주한테 얘기는 들었다. 실력 좋은 꼬맹이가 온다고 말이야. 범천음적을 때려잡았다지?”

얼마 전에 쓰러졌다던 범천음적이 언급되자 몇몇 낭인들이 상당히 의외라는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이류 수준이기는 해도 칼을 독사처럼 잘 다루던 흑도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니던가.

“감운이다. 소싯적엔 거패도(擧敗刀)란 별호로 불렸었지. 상주와 친한 듯하니 감 어르신이라 불러도 좋다.”

스스로를 감운이라 소개하며 굳은살 가득한 손을 척 내밀어오는 중년인.

“단무진입니다. 감 어르신.”

그런데 손을 쥐자 무지막지한 힘이 손아귀를 옥죄어 왔다.

맞잡은 손에서 불끈 솟는 힘줄. 손목이 절로 뻐근해지는 악수였다.

내가 눈 하나 꿈쩍 않고 버텨내자 제법이라는 표정으로 손을 거두는 감운.

“전 일홍이에요.”

내 등 뒤에서 얼굴을 쏙 내민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

감운은 자국이 깊게 난 손을 탁탁 털며 나를 쳐다봤다.

“그래서, 낭인회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싶다고?”

그는 미리 준비해 둔 건지 품에서 정(丁)급 나무패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예. 적성에 맞고, 필요한 일이어서요.”

황걸개가 이르길 선업의 기준은 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는 돈 주는 쩐주가 엔간하면 옳다고 느끼는 편향적인 인간이다.

고로 내게는 돈을 벌고, 내공도 늘리고, 흉성도 약화시킬 수 있는 이 일타삼피의 직업이 필요했다.

“상주의 부탁이니 이름을 올려 줄 순 있지. 허나, 낭인이 된다고 해서 모두가 의뢰를 중개 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낭인의 숫자는 많은데, 의뢰는 한정적이란다.

턱짓으로 일감이 없이 하염없이 술이나 빨고 있는 주변 낭인을 가리키는 감운.

그는 은화란이 부탁한 건 명부에 이름을 올리는 것까지라며, 의뢰는 자신의 영역이니 허투루 내줄 수가 없다고 말해왔다.

“왜냐면 이 몸의 신용이 달려 있거든. 중개해 준 낭인이 거하게 삽질이라도 해봐라, 그럼 어느 의뢰인이 다시 나를 믿고 의뢰를 맡겨줄까?”

“뭐…… 딴 데 찾아가는 게 정상이죠.”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건지 대충 감이 왔다.

해결사는 신용이 중요하다. 민감하고 중요한 일들을 맡겨오기 때문에, 악소문이 한번 나면 일감이 후두둑 떨어져 나간다.

“고로 네 녀석이 낭인 노릇에 소질이 있는 놈인지 확인을 좀 해야겠다.”

그 말과 함께 돌돌 말린 종이 하나를 내 앞으로 툭 던지는 감운.

“이게 뭡니까?”

펼쳐보니 복잡한 문구들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몇 날 몇 시에 누가 누구로부터 얼마를 빌렸으며 이자는 얼마고 언제까지 갚겠다는 등등.

“차용증(借用證)이다. 돈을 빌리고 오리발 내미는 악질적인 놈이 하나 있다. 가서 떼인 돈을 받아와라.”

빌린 액수는 금전 스무 닢. 거지 입장에선 물론이고, 사업하는 사람들 기준에서도 적지 않은 액수였다.

빌려준 사람은 북경에서 책방을 하는 상인이고, 빌려 간 놈 또한 근처 상인인데, 원금은커녕 이자 한 푼조차도 갚지 않고 있단다.

현재 장사가 무척 잘되고 있음에도 말이다.

“어디로 가서 받아내면 되는데요?”

“남문 근처에서 포목점을 하는 장건이라는 상인을 아나?”

“남문 근처 포목점이라면…… 장씨 할배?”

주름지고 욕심보 가득한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근처에 거지가 어른거리기만 해도 매출 떨어진다며 몽둥이를 들고 쫓아왔던 지독한 노인네.

상대가 어린 꼬맹이라도 가차없이 몽둥이를 휘둘러 왔다지.

“그 인간 친척 중에 포쾌가 있어 차용증으로 읍소해도 소용이 없다더군. 추심이 무척 어려워 의뢰인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이다.”

가끔 있지. 빌려준 사람이 전전긍긍하고 채무자는 배째라 식으로 나오는 이런 막장 채무 상황 말이다.

체면이나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최소한의 상환 의지를 보이거나, 눈곱만한 이자라도 갚곤 하는데.

장사가 잘되면서도 갚지 않는다니. 보통 악질이 아니다 싶었다.

“나원참. 회주, 헛짓거리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대화를 듣고 있다가 한마디씩 던지는 주변 낭인들.

“분위기 험악해지면 곧바로 포쾌가 달려와서 손도 못 쓰는 곳인데.”

“이미 낭인 두 놈이 시도했다가 곤욕만 치르고 빠져나오기도 했고요.”

“저런 꼬맹이들이 회수에 성공할 리가 없잖습니까?”

구르고 구른 자신들도 실패했는데 저런 애가 어떻게 성공하겠냐며, 사방에서 냉소적인 발언이 쏟아졌다.

이에 손을 들어 올려 모두의 입을 다물게 하는 감운.

“나도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는 흉터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미수금 회수라는 게 워낙 험악해서 애한테 맡길 일은 아니지.

“그러니 전액을 회수하란 소리는 안 하마. 강짜를 부리던 지랄을 한던 한 푼이라도 뜯어내 봐라. 그럼 인정하고 이 패를 건네주겠다.”

이 몸의 독기와 깡다구를 보겠다는 거군.

그런 거라면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낮잠이나 한숨 때리고 계시죠. 얼마 안 걸릴 겁니다.”

나는 차용증을 휙 낚아채며 그렇게 말했다.

그 두둑한 자신감 표출에 곳곳에서 감탄과 비웃음을 동시에 터트리는 낭인들.

“고놈 맹랑한 녀석일세.”

“보나마나 질질 짜면서 돌아오겠구만.”

“낄낄,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그래, 한번 두고 봐라.

해결사 시절엔 밥먹듯이 해왔던 미수금 회수 업무.

나는 들어왔던 문을 다시 ‘끼익’ 열고 거리로 두 발을 내디뎠다.

***

“진짜 회수할 수 있을까요? 척 봐도 돈 없다고 뻗댈 것 같은데.”

북경 남문으로 향하는 길.

내 뒤를 졸졸졸 따라오던 일홍이 걱정스런 얼굴로 한마디 했다.

“대부 업계엔 이런 말이 있어.”

“뭔데요.”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

물론 이번 채무자는 마른오징어보단 배때지에 물이 가득 찬 복어에 가까운 존재지만 말이다.

“와, 방금 대사 진짜 악당 같았어요.”

“어허, 뭐래. 나쁜 놈은 화장실 갈 때랑 나올 때가 다른 그놈이지. 믿고 빌려준 책방 아저씨가 무슨 죄가 있다고.”

사고방식 자체가 다른 거다. 돈을 빌리면 보통 변제가 최우선인데, 이런 인간은 쌩돈 뜯긴다고 생각해버린다.

“하긴…….”

“그리고 그 인간 돈 많아. 비단을 주력으로 취급하는 포목점 주인장이잖아?”

거기다 무슨 비결인지 비단을 다른 포목점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팔아 장사도 무척 잘되고 있는 가게이기도 했다.

“아, 진짜요?”

“그래, 너 몽둥이 휘두르던 장건 할배 기억 안 나?”

“모르죠, 저 그때 가출 중이었잖아요.”

“참, 맞다.”

탈주 닌자 상태였었지. 어쩐지 대화의 핀트가 안 맞는다 했다.

“……근데 잠깐만요. 이름이 장건이라고요? 그리고 포목점을 운영하고 비단을 값싸게 팔고요?”

“맞는데, 왜?”

길 가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일홍.

그리고 뭔가가 떠올랐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내 어깨를 찰싹찰싹 두들겨왔다.

“저! 저! 기억났어요!”

“그러니까 뭐가 인마.”

“하오문은 밀양잠을 하잖아요.”

“그렇지.”

황실의 손을 거치지 않은 탈세 비단으로 폭리를 취한다고 들었다.

참 부러운 놈들이 아닌가.

“여기 북경 지부에서도 판매처를 찾아 비단을 공급 중이었는데……. 그걸 정리해 둔 장부에서 장건이란 이름을 본 것 같아요.”

“……뭐? 진짜로?”

“네, 진짜로요.”

제법 확신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일홍.

그러고 보니 얘는 북경 지부를 승계받기 위해 하오문 후계자 수업을 하고 있었다고 했었지.

“그게 사실이라면…… 일이 쉽게 풀리겠는데?”

황실을 거치지 않은 비단을 취급할 경우 중형이다.

어쩐지 그 욕심보 그득한 늙은이가 마진을 포기하고 비단 원단을 싼값에 판다고 했다.

하오문에 선을 대고 있었을 줄이야.

“어쩌면 전액 다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잘했어, 역시 내 부하야.”

“헤헤.”

내가 잘했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들기자 히죽히죽 웃는 일홍이었다.

“좋아, 복어 배를 가르러 가보실까.”

채권자 대리인이 되어 다시 찾아가는 거지 시절의 악연.

발걸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

목조와 석재로 이루어진 복층 건물.

입구 근처 매대에는 형형색색의 무명과 삼베 옷감이 가지런히 전시되어 있었다.

소문대로 장사가 제법 잘되는 모양. 적지 않은 숫자의 손님이 계속해서 정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차용증을 보여 주면서 장건이란 사람 나오라고 해볼까요?”

입구를 지키는 하인을 보더니 무척 순진한 소리를 해오는 일홍.

“그렇게 부르면 나오겠냐.”

채권자의 부름에 성실하게 응하는 악성 채무자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럼 어떡해요?”

“알아서 튀어나오게 만들어야지.”

나는 그렇게 말한 뒤, 숨을 아주 크게 들이켰다.

폐부를 풍선처럼 팽팽하게 채우는 공기.

“장거어언! 이 씨발 노인네야 돈 갚아아아아─!”

사자후 같은 고함이 온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뭇가지에 앉아있던 새들이 푸드덕하고 날아오를 정도.

그리고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우렁찼는지 손님들 또한 화들짝 놀라 포목점을 빠져나왔다.

“어떤 개호로 새끼야!”

그러자 ‘벌컥!’ 하고 열리는 정문. 장씨 할배가 성난 콧김을 씨익씨익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화가 났는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른 얼굴.

“봤지?”

“이야, 기가 막히네요.”

옆에서 일홍의 극찬이 날아들었다.

28화 아주 잘 아는 그 이름

우당탕탕.

누군가가 계단까지 구르며 뛰쳐나오는 소리.

벌게진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온 장씨 할배는 나와 일홍을 발견하고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그때 그 거지새끼!”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

날 알아보자마자 와락 구겨지는 그의 얼굴.

“장씨 할배, 돈 빌렸으면 갚아야지. 왜 오리발이야.”

나는 눈앞에서 차용증을 펄럭펄럭 흔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수염을 파르르 떨면서 내게 삿대질하는 장씨 할배.

“이런 고얀 놈이……. 그 차용증은 또 어디서 구했더냐!”

거지가 나타났단 소리에 하인 두 명이 평소처럼 가게에서 몽둥이를 들고 달려 나왔다.

“뭐 이거? 감운 회주한테서 받아온 건데?”

“……뭣이, 네놈 설마 낭인이라도 된 것이냐?”

거지로 알았던 꼬맹이 입에서 낭인회 회주가 언급되자 흠칫하며 되묻는 할배.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였다. 그러자 귀에 대고 뭐라 속닥거리는 일홍.

“아직 정식 낭인 아니시잖아요.”

“하지만 저 인간은 그걸 모르지.”

어차피 이번 의뢰를 성공하면 정식 낭인 아닌가.

미래의 신분을 땡겨쓰는 셈 치자고.

“아무튼 원금이라도 돌려달라는 게 의뢰인의 요구야. 장씨 할배.”

“……건방진 놈. 이건 나와 왕 형, 둘만의 일이다. 괜한 참견하지 말고 꺼져라.”

남들 일에 개입해서 먹고사는 낭인에게 참견하지 말라니.

마치 참새보고 방앗간 지나치라는 격이 아닌가.

“둘만의 일이라는 분이 친척인 포쾌는 왜 끌어들이셨나?”

이자 한 푼조차 지급하지 않으면서, 관리에게 읍소하려는 의뢰인을 계속해서 방해했다지.

거기에 권력을 앞세워 낭인도 여럿 두들겨 패서 쫓아내고 말이다.

“…….”

반박할 말이 없는지 입을 꾹 다물고 이쪽을 노려보는 장씨 할배.

그는 조용히 뒤쪽에 선 하인 둘과 눈빛 교환을 했다.

뭔가 불안한 조짐.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지면 화를 낸다지.

“오늘은 둘뿐이군? 마침 잘됐어. 저 성가신 녀석들, 팔다리 하나씩 분질러 놔라.”

거봐라. 예상을 한 치도 벗어나질 않는다니까.

하여간 무림놈들, 말이 안 통하면 무조건 폭력이다.

“괜히 저항하면 팔 한쪽 더 부러진다.”

“얌전히 처맞아라!”

되도않는 개소리를 하며 몽둥이를 휘둘러오는 하인 둘.

부웅!

나는 허리를 꺾어 첫 번째 공격을 피해냈다. 그런 다음 내력이 실린 장법을 복부에 꽂아 넣었다.

“꺽!”

가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일장(丈) 가까이 튕겨 날아가는 하인 하나.

두 번째 공격도 귀신같은 보법으로 반보 파고들어 동작을 차단한 다음, 턱주가리에 주먹을 꽂아 넣어줬다.

퍽!

기합성을 내지르다 딱! 다물어지는 주둥이.

듬직했던 하인 두 명이 맥을 못 추고 연달아 쓰러졌다.

전부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범상치 않은 내 몸짓과 절도 있는 동작에 두 눈을 부릅뜨는 장씨 할배.

“네놈…… 어디서 그런 무공을 배워온 것이냐……?”

동네 거지들과 드잡이질하던 이전의 내가 아니다.

이 몸은 이제 7년 내공을 품은 어엿한 무림인이라는 말씀.

“예나 지금이나 손버릇 고약한 할배네. 어떻게 애들 팔다리 분지를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옳소옳소.”

옆에서 일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왔다.

내가 양어깨를 우두둑 풀면서 다가가자 움찔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나는 장씨 할배.

“다, 다가오지 마라.”

“싫은데.”

황걸개한테 배웠다. 명령은 강자만의 권리다.

한 걸음, 두 걸음. 그간 쌓아온 업보가 많다 보니, 내가 가까워질수록 핼쑥해지는 할배의 얼굴.

“무림인이 양민 상대로 패악질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은 게냐!”

참 낯짝도 두꺼운 양반이다.

“돈 떼먹고 오리발 내민 건 안 부끄럽고?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맞아요, 그 돈으로 건물도 이렇게 확장했으면서 이자 한 푼 안 갚는다니, 너무 졸렬해요.”

나와 일홍이 돌아가면서 꼽을 주자 장씨 할배는 누런 이를 까드득 갈아댔다.

“에잇 닥쳐라! 사업하다 보면 상환이 밀릴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면박을 주고 낭인을 고용해……? 이젠 열받아서라도 못 주겠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아득바득 우겨대는 장씨 할배. 저게 진짜 패악질이란 거다.

“거참 감탄고토(甘呑苦吐) 같은 인간일세. 같잖은 소리 그만하고 돈이나 갚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인간의 전형.

“너 같은 쓰레기 낭인한테 줄 돈은 한 푼도 없다!”

“진짜 맞아야 정신 차릴 늙은이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내게 하려고 했던 것처럼, 똑같이 팔다리 하나 분질러 주면 정신 차리겠지.

“흥, 털끝 하나라도 건드려봐라. 내 친척 포쾌가 네 녀석들을 흠씬 두들겨 팬 다음, 북경 땅에 발도 못 들이게 만들 테니!”

한데 내가 오징어를 쥐어짜려고 들자 추포 권력을 앞세우며 엄포를 놓는 장씨 할배였다.

인맥도 빽도 없는 낭인들을 좌절케 만든 그것. 하지만 나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그럼 관아의 포쾌한테 그것도 보고할 건가?”

“뭘 보고한단 말이냐?”

“밀양잠.”

아무도 몰라야 할 비밀이 내 입에서 언급되자 침에 찔린 것처럼 움찔하는 장씨 할배.

“무, 무슨 헛소리냐.”

뻔뻔하기 그지없는 그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비단 원단을 값싸게 팔아치운다던데. 너 같은 인간이 이익까지 포기하며 그럴 리가 없잖아. 안 그래?”

“……허, 뭔 소린가 했더니. 근거도 없이 생사람을 잡으려 드는군. 역시 들개 같은 것들과 말을 섞는 게 아니었어.”

더는 못 어울려 주겠다며 다급히 자리를 벗어나려 하는 장씨 할배.

그런데 일홍의 말 몇 마디가 분주하던 그의 두 발을 우뚝 멈춰 세웠다.

“홍화루의 루주 일혜향.”

각기춤을 추듯 삐걱거리며 이쪽을 돌아보는 할배.

일홍이 내 옆에서 씩 웃으며 말했다.

“비단을 공급받는 접선책 맞죠? 다 알고 왔어요.”

여기 서 있는 두 꼬맹이는 흔한 범부가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지독한 무언가지.

“그, 그걸 네 녀석들이 어떻게…….”

하오문 접선책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자 겁에 질려 말을 더듬는 장씨 할배.

지식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금(錦) 탈세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폭리까지 취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지.

“그건 알 거 없고. 결정이나 해. 잘나신 친척과 함께 극형에 처해질지, 아니면 내 의뢰인한테 돈 갚고 목숨이라도 건질지 말이야.”

은화란을 통해 고발하면 실적에 목마른 고위 관리들이 칼춤을 추러 내려오겠지.

협박은 이렇게 하는 거다.

“……가, 갚겠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현찰이 부족하니 시간을 더…….”

“아이, 싯팔. 내 알바야 그게? 당신도 내 의뢰인의 사정 개무시했잖아.”

이미 타인의 믿음을 한 번 배신한 놈이 아닌가.

저놈 주둥이에서 나오는 말은 조금도 신용할 수 없었다.

“지랄 말고 뒤지기 싫으면 어떻게서든 돈 땡겨와. 쌓아둔 비단을 팔든, 저 으리으리한 건물을 담보 잡아서든!”

미수금 회수의 핵심은 목청과 기세다.

철면피 놈들이 딴생각을 못 하도록 강하게 몰아쳐야 한다.

“와, 대장 잘한다. 진짜 못난 악덕 사채업자 같아요.”

박진감 넘치는 내 으름장에 악랄하다며 찬사를 늘여놓는 일홍이.

맥락상 일 잘한다는 뜻이겠지? 알아서 걸러 들으련다.

“자, 어떻게 할 거야? 돈 낼래? 아님 뒤질래?

스스로 초래한 재앙.

“허, 허억.”

시종일관 뻔뻔했던 장씨 할배의 얼굴이 급속도로 창백해지는 게 눈에 보였다.

어찌할 바를 몰라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달그락달그락 부딪히는 윗니와 아랫니.

“나, 나는…….”

그의 입이 마침내 어떠한 말을 내뱉었다.

***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한 시각.

떼인 돈 받으러 갔던 소년들이 낭인회 문을 벌컥 열고 돌아왔다.

이에 화주를 홀짝이다 말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낭인들.

“떼인 돈 받으러 간 것치곤 상태가 너무 멀쩡한데?”

“드러눕고 소리 지르고, 지랄발광을 해도 받아낼까 말까인데…….”

보통은 꺼지라며 오물 세례를 받고 오거나, 온몸에 시퍼런 멍을 달고 돌아오는 혹독한 의뢰였다.

“그냥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온 건가?”

“그러면 그렇지. 우리도 해결 못 한 의뢰를 저 꼬맹이들이 어떻게 해내겠어.”

실망과 안도가 공존하는 낭인들의 중얼거림.

좀 고생해 보라고 보냈던 회주 감운도 애들이 너무 멀쩡하게 돌아오자 기대를 슬며시 접을 무렵.

쿵.

단무진이란 소년이 탁자 위에 묵직한 전낭을 내려놨다.

전낭의 끈을 풀자 ‘차르륵’ 쏟아지는 샛노란 금전과 은전.

낭인들의 눈이 절로 휘둥그레지는 장면이었다.

“……뭐야, 진짜로 수금해왔다고?”

“말도 안 돼.”

충격에 입을 벌린 채 한동안 다물지 못하는 사람들.

“금전 스물다섯 닢. 그리고 이자로 받아온 은전 스무 닢입니다.”

“대단하죠? 우리 대장이 이 정도예요.”

잘생긴 소년은 이거 보라는 듯 전낭을 위아래로 던지고 놀았고, 곱상한 소년은 그 옆에서 배시시 웃어댔다.

이에 하던 일을 멈추고 그들에게 저벅저벅 다가가는 감운.

“어떻게 해낸 거냐?”

은전이라도 몇 닢 받아오면 끈기를 인정하고 낭인패를 건네주려 했었다.

한데 전액을 다 받아오다니. 거기에 이자까지 한 푼도 빠짐없이 말이다.

“윽박질렀죠.”

“안 윽박질러 본 녀석이 없다. 한데도 매번 쫓겨나기 바빴지.”

황도 북경에서 관아와 척을 질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추방당하거나 뇌옥에 갇히게 되면 골치 아프다. 당장 생계에 타격이 온다.

“그 관아가 이번엔 제 편이 되어서 말입니다.”

“……?”

감운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말을 던져오는 단무진.

“일홍이 덕이 컸습니다. 자세한 건 영업 비밀이고요.”

중요한 건 성공 여부 아니냐며, 자신의 밑천을 허투루 흘리지 않는 소년이었다.

은화란 상주가 실력 하나는 믿을 만하다길래 솔직히 반신반의했건만.

“허참.”

아무래도 재밌는 녀석이 흘러들어온 모양이다.

흉터를 긁적이던 감운은 어느새 흥미롭다는 눈을 하고 있었다.

***

내가 돈을 회수해왔단 소식에 곧바로 근처 책방에서 이곳까지 내달려온 의뢰인.

“이렇게 어린 꼬마가……. 정녕 그 지독한 놈한테서 돈을 회수했단 말입니까?”

처음엔 우락부락한 낭인들도 못 해낸 일을 내가 해냈다는 것에 의심을 품었었다.

하지만 주변 낭인들의 반응과 거듭되는 회주 감운의 증언에 그는 곧 농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영영 못 받을 줄 알았는데, 네 덕분에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

“앞으론 친해도 돈거래는 하지 마세요. 괜히 돈도 잃고 친구도 잃습니다.”

깔끔한 거절이 오히려 관계를 더 오래 맺어가는 비결이다.

안 빌려주면 잠깐 기분 상하고 말지만, 빌려줬다가 돈 떼이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법.

“그 말이 참으로 맞다. 당하고 나서야 깨닫는다니……. 어린데도 네가 나보다 인생 선배 같구나.”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리던 책방 주인은.

“내가 요구한 건 원금뿐이니, 이자는 너 가지거라.”

은전이 스무 닢이나 들은 전낭을 내 품에 안겨주고 떠났다.

“고맙다 얘야, 큰 도움이 되었어.”

훈훈한 감사 인사까지 남기고서 말이다.

장씨 할배, 이렇게 좋은 사람을 등쳐먹다니.

“뭔가 좋은 일 한 것 같은 느낌이네요, 대장.”

그러게 말이다.

오랜만에 감사 인사라 그런지 단전 부근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그리고 나는 이제 이것이 무슨 느낌인지 알지. 성운심법의 공능이 선업에 반응하는 현상이었다.

의뢰인의 기쁨은 곧 나의 기쁨. 이건 또 몇 년짜리 내공이 될 선업이려나.

“좀 전에 같이 돈 뜯을 땐 악당이 된 느낌이었는데 말이죠.”

“어허, 적법한 채권추심이었어.”

악인을 해치우고 의뢰인을 구했으니, 내 기준에서 이보다 더한 ‘착한 짓’은 없다.

거기에 나쁘지 않은 수입까지 얻었으니, 첫 낭인 의뢰치고는 마수걸이가 좋군.

“단무진, 받거라.”

그때, 무언가가 새겨진 나무패를 휙 던지는 회주 감운.

갑을병정. 그중에서 가장 낮은 정(丁)이 음각된 낭인패였다.

하지만 뭐 이런 건 의뢰를 계속하다 보면 자연스레 승급되는 거니까.

“너도 받거라. 네 덕이 컸다며.”

그리고 좀전의 내 말을 언급하며 일홍에게도 낭인패를 던져주는 감운이었다.

“와, 진짜요? 감사합니다!”

기뻤는지 낭인패를 꼭 쥐고 함박꽃 같은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남자로 역용하고 있음에도 순간 시선이 빨려 들어가는 그런 미소였다.

“저야 고맙긴 한데, 괜찮아요?”

안 그래도 낙하산 취급이었는데, 원플원으로 뿌리면 살짝 반발을 사지 않을까 싶었다.

“은전 한 닢만 뜯어와도 준다고 했던 낭인패다. 한데 원금까지 통째로 받아왔으니……. 너희 둘은 최소한 낭인 두 명분은 하는 셈이지.”

먼저 실패했던 낭인 서너 명을 언급하며 문제없다 말해오는 감운이었다.

“아니, 포쾌가 튀어나오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천자가 기거하는 황도에서 관과 척을 질 수도 없고.”

술을 들이켜다 말고 뜨끔해서 변명하듯 중얼거리는 낭인들.

“시끄럽다. 낭인은 결과로써 말하는 법. 그것도 모르는 놈들이 이 업을 해나가겠다고?”

쓸모없는 놈들만 주둥이가 긴 법이라며 투덜거림을 순식간에 일축시키는 감운이었다.

이 북경 지부에서 의뢰를 틀어쥔 건 결국 그였던 터라, 조용히 궁시렁거리기만 하는 낭인들.

“아무튼 감 어르신의 인정을 받았으니, 앞으론 의뢰도 빵빵하게 나오는 거겠죠?”

“나오다마다. 좋은 의뢰는 실력 있는 낭인이 채가는 게 맞지.”

노력한 보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꽌시에 더불어 자격까지 증명한 우리 둘을 상당히 좋게 봐주고 있는 듯한 모습.

“그럼, 범천음적 비슷한 수준의 음적이나 마두 때려잡는 의뢰도 있어요?”

일홍이 해준 조언을 토대로, 나는 그들의 악명을 흡수하여 명성을 쌓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별호가 생겨 일거리가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달려야지. 내 생명 연장의 꿈을 위하여.

“흠,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아니, 말이 앞뒤가 다르신데요.”

나는 눈앞의 회주를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실력 있는 낭인이 좋은 의뢰 채가는 게 맞다며.

“그게 아니라, 요즘 마두나 음적 놈들이 죄다 하북에서 도망치거나 숨는 중이라서 말이다.”

하루가 바쁘게 이름을 떨쳐야 할 이 시기에, 기이한 비보를 전해오는 감운.

“아니, 왜요?”

대부분 종적을 감췄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치안이 안 좋은 시대라, 하루만 지나도 재충전 되는 게 저런 나쁜놈들 아니었나.

“검기를 폭풍처럼 뿌리는 어떤 여협(女俠)이 무서운 기세로 마두들을 베어내고 있거든. 그래서 씨가 말랐지.”

이건 또 뭔.

이놈의 무림은 참 순탄하게 풀리는 일이 없다.

“그 여협이 대체 누군데요?”

나는 원망 어린 목소리로 쉬운 길을 돌아가게 만드는 여협의 정체를 캐물어봤다.

“너 혹시 냉화옥녀란 별호를 들어봤냐?”

“…….”

한데 그러면 안 됐던 모양이다.

29화 아는 얼굴

“반응이 왜 그래? 혹시 아는 사이야?”

애증 어린 별호에 내가 흠칫거리자 의아한 얼굴로 물어오는 감운.

“아뇨,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단호하게 답했다.

필요하다면 아들도 비정하게 잘라내는 가주와 그 선봉장 누님이 아니신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내 안의 모용청진은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전 알아요! 모용세가의 자랑이자 무림맹 오봉(五鳳)으로 꼽히신 분이잖아요!”

반면 일홍이는 관심이 넘쳐흐르는 모양.

잘 아는 수준을 넘어 동경하는 여류 무인이라며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베어낸 마두 숫자만 일백이 넘는다죠, 그리고 전광석화(電光石火)와도 같은 건곤파섬검까지!”

검끝으로 벼락같은 궤적을 긋는다며, 흥분해서 그녀의 검법을 칭송하는 일홍.

직접 당해봐서 안다. 쩔긴 하더라 저 검법.

자신의 동생을 향한 칼질이 어찌나 매섭던지.

“아무튼 굉장히 유명한 고수인데, 대장이 아예 모른다는 게 좀 놀랍네요.”

“그러게 말이다…….”

듣고 있자니 입맛이 썼다.

호부호자(姉) 못 하게 된 홍길동의 심정이 이러할까.

“대장, 강호에서 개죽음당하기 싫으면 유명인들 별호나 특징 정도는 외워둬야 해요.”

내 무식이 걱정스러운 듯한 일홍의 조언이었다.

하지만 이쪽은 유년 시절, 의도적으로 무림과 격리되어 살아와서 말이다.

“괜찮아, 나한텐 네가 있잖아. 여차할 때마다 알려 주면 되겠네.”

거기에 지금은 낮엔 이렇게 일하고 밤엔 수련을 빙자한 구타에 시달리는 주경야독(晝耕夜讀) 신세였다.

중원놈들 신상 명세 외우고 있을 틈이 없다는 뜻. 방심하면 곧바로 황걸개의 주먹과 발이 날아오니까.

“아이참, 그러다 제가 없어지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안 없어지면 되지. 옆에 평생 붙어 있어 그럼.”

수호전에서도 그랬다. 영웅은 공부 따윈 안 한다고.

나는 무력, 쟤는 지식. 부족한 부분은 서로가 보완해 주면 되지. 원래 사업은 적재적소가 중요한 법이다.

“그래요, 옆에 평생 붙어……. 아니, 잠깐만요. 무슨 뜻으로 말한 거죠 그거.”

말하다 말고 눈을 크게 끔뻑이며 되묻는 일홍.

“말 그대로의 의미다만.”

훌륭한 해결사 옆엔 뛰어난 사이드킥이 있기 마련이다.

능력 좋은 부하는 다른 흥신소에서 채가기 전에 미리미리 침 발라 놔야지.

“차, 참나. 저는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가지 않거든요?”

“얘가 뭔 소리래.”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말을 절며 내 시선을 홱 피하는 일홍.

가끔 이렇게 이상한 짓을 하지만, 하오문 후계자 출신에 암기력도 경이로워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녀석이었다.

“…너희들 뭐 하냐?”

그리고 남자애 둘이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자 기괴한 것을 본 표정으로 질문을 던져오는 감운 회주.

나는 괜한 오해가 생길까 싶어 미리 차단했다.

“오해십니다.”

“그러니까 뭐가 인마.”

“아무튼요.”

생각해 보니 인피면구를 까지 않는 이상 해명할 방법이 없네. 그냥 오해한 채로 놔두기로 했다.

“이상한 녀석들 같으니……. 어쨌든 그 냉화옥녀 덕분에 당분간 현상금 의뢰는 없다고 봐도 된다.”

현상금 사냥을 원한다면 그 여협이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기다리라 말하는 감운이었다.

하여간 고수란 것들은, 범부들 입장에선 살아 있는 자연재해나 마찬가지군.

“그럼 다른 의뢰는 없습니까?”

“의욕이 넘쳐서 좋군. 당연히 있지.”

방금 의뢰를 끝냈음에도 곧바로 다음 의뢰를 찾는 내 자세에 훌륭하다고 말해오는 중년인.

“오가장의 오 대인이라고 아느냐?”

모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인간 우드위키 일홍이 존재했지.

“오가장이라면 인삼 무역으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소속 무인도 많을 텐데, 어째서 낭인을 찾으시는 건지.”

“마누라가 바람난 것 같다더군. 그래서 불륜 현장에 잠복했다가 상간남을 두들겨 패줄 낭인이 필요한 모양이야.”

확실히 자신의 부하에게 맡기기엔 쪽팔린 일이다.

“아이잇, 그런 의뢰는 안 합니다.”

나는 질색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내가 저것 때문에 칼침 맞고 죽었단 말이다.

입이 떡 벌어지는 보수금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앞으로 치정 의뢰는 사절이었다.

“인석아, 상간남 두들겨 패는 게 왜? 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의뢰라 일부러 골라줬더니.”

내 대답에 좀전의 패기는 어디 갔냐며 혀를 끌끌 차는 감운.

“아니, 그건 좀. 상주님 얼굴을 봐서라도 다른 의뢰로 부탁드립니다.”

“거참, 미수금은 지독하게 뜯어내던 녀석이 말이야……. 그럼 이건 어떠냐?”

그가 의뢰지를 슥 내밀었다.

저잣거리의 어떤 인간을 두들겨 패달라는 내용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보수는 은전 세 닢.

“뭐 나쁜 놈이에요?”

“잡화를 파는 양민이고, 원한 관계라더군.”

그럼 그냥 폭력 사주잖아. 돈 받고 꼬맹이 패러 왔던 삼급 표사들 같은 짓을 하라는 거다.

그래도 내가 급이 있지. 이류무인이 양민을 팬다니, 선업이 쌓이긴커녕 악업이 쌓일 것 같은 느낌.

“딴 거 없어요?”

“어허, 이놈 입맛이 참……. 이게 마지막인 줄 알아라.”

자기가 가진 의뢰가 넘치는 줄 아냐며.

툴툴대면서 마지막 의뢰지를 툭 던지는 감운.

“실종자를 찾아달라는 의뢰다. 이런 건 보통 보수가 짠 데다 의뢰인은 절박하고 시간과 노동도 많이 빨려 들어가서 낭인들이 기피한다만.”

대신 선업과 내공은 왕창 쌓이겠지.

딱 내가 찾던 종류의 의뢰 아닌가.

“그걸로 하십시다.”

나는 의뢰지를 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게 더 마음에 든다고? 거참 희한한 놈일세.”

일반 낭인들과는 다른 내 반응에 헛웃음을 흘리는 감운.

“대장이 좀 이상한 사람이긴 해요.”

지금껏 날 쭉 지켜봐 왔던 일홍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상한 사람이라니, 천살성이 대가리에 박히고도 나처럼 정상적인 사람이 또 어딨다고.

“고생 좀 할 거다. 사람 패거나 돈 뜯는 건 노력을 들이면 된다지만, 추색꾼 일은 힘만 들고 언제 찾아낸단 기약이 없거든.”

“괜찮습니다, 그런 건 익숙해서요.”

그런 내 대답에 ‘너 같은 꼬맹이가 왜 익숙한 건데?’라는 눈빛을 보내오는 감운.

흥신소 외뢰 중에 2할이 저런 실종자 수색이었다. 주력으로 밀던 업무 중 하나라는 말씀.

다만 이 중원은 땅덩이가 너무 넓긴 한데.

“그래서 실종자가 누군데요?”

“의뢰인의 아들, 이립(而立)에 들어섰고 실종된 지는 몇 달 됐다더군.”

몇 달 됐다라. 생환 골든타임은 이미 한참 지난 의뢰로군.

하지만 뭐 사라진 지 몇 년 지난 사람도 찾아낸 적이 있는 나다.

“자세한 건 의뢰인에게 듣거라. 실종됐다던 근처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작은 단서라도 더듬어 나가면 뭐라도 나오겠지.

그리고 의뢰인을 위한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선행으로 분류될 터.

“그럼 이번에도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 믿어보마.”

‘흐흐’ 웃으며 저번에 내가 뱉었던 호언장담을 다시금 언급하는 회주.

내가 또 믿음에 호응하는 남자긴 하지.

“아, 그럼요. 후딱 해치우고 돌아오겠습니다.”

설령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

북경에서 남쪽으로 백 리를 걸으면 백양촌이라는 마을이 하나 나온다.

작은 하천과 전답(田畓)을 끼고 있으며, 수렵이나 축산, 벌목 같은 1차 산업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

그리고 의뢰인과 합류하기로 한 장소이기도 했다.

“헥헥, 이건 말도 안 돼요. 분명히 ‘근처’ 마을이랬잖아요.”

백 리(里). 현대로 치면 마라톤 풀코스에 가까운 거리.

중원 땅이 워낙 넓다 보니 ‘근처’라는 말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이틀에 걸친 강행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숨을 헐떡이는 일홍.

“대장, 천천히 좀 가면 안 돼요?”

“빨리 와. 나는 풀뿌리 뜯고 벌레 씹으면서도 보름 넘게 걸었었어.”

“……말이 돼요 그게?”

“말이 되더라고 그게.”

강물에 휩쓸려 먼 거리를 순식간에 이동하고 장시간의 도보 이동까지.

모용세가의 추적을 피하려 몸이 부서져라 걸었었다.

“그리고 황 노야한테 보법 안 배웠어? 걷는 법만 바꿔도 한결 수월해질 텐데.”

“가르침을 받긴 했지만……. 그 움직임을 어떻게 몇 주 만에 체득하고 따라 해요?”

그 양반 발재간이 기기묘묘하긴 하지.

그런데 말이다.

“난 되던데?”

“…….”

일주일도 안 걸렸단 내 증언에 일홍의 입이 오리처럼 삐쭉 튀어나왔다.

이론과 암기엔 빠삭해도 몸으로 체득하는 일은 영 느린 모양이군.

“대체 비법이 뭐예요?”

“죽기 직전까지 처맞으면 돼.”

인간은 궁지에 몰렸을 때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는 법이다.

천살성인 내 경우엔 타인의 살의가 눈에 보이거나, 주먹질의 궤적이 예측되며, 눈앞에서 본 무공을 어렴풋이 따라할 수 있는 식이었지.

“수련하는 거 몇 번 봤는데……. 보통 그렇게 처맞으면 죽거든요.”

피가 흐르고 뭔가가 부서지는 내 수련 방식을 목격했었는지 질린 얼굴로 말해오는 일홍.

“괜찮아, 안 죽어.”

아마도 말이지.

나는 남자들의 유언 1순위 발언을 내뱉으며 백양촌을 향한 발걸음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다리 아프다며 업어달라는 일홍이의 징징거림이 일다경쯤 계속됐을 무렵.

나는 길 건너편에서 지팡이를 짚은 채 다가오는 초로의 노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장, 저 사람 우릴 기다렸던 것 같은데요.”

최근 힘든 일을 겪었는지 수심에 잠긴 얼굴과 짙은 눈그늘.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있던 그는 우릴 발견하고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지팡이를 툭툭 짚으며 다가오는 노인.

“자네들은…… 감운 회주가 보낸 낭인들인가?”

늙수그레한 목소리로 우리의 정체를 물어왔다.

내 앳된 얼굴에 한참이나 머무는 시선.

“전 단무진이고, 얜 일홍입니다.”

나는 혹시 못 믿을까 싶어 낭인패를 들이밀며 우리를 소개했다.

두 눈을 끔뻑이며 나무패를 확인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

“천유강일세, 늙은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어 걱정이었는데, 이렇게 와주어서 고맙구먼.”

힘에 부쳐 포기해야 하나 싶었는데, 낭인이 둘이나 찾아와 든든하다며 우리 손을 덥썩 잡아오는 노인이었다.

희한하네. 나는 좀 더 역정을 낼 줄 알았는데.

중요한 아들의 일이 아닌가. 전문가를 불렀는데 중딩쯤 되는 꼬맹이들이 찾아온다? 나라면 회주 욕을 걸쭉하게 내뱉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렇게 쉽게 넘어가주다니.

“대장대장.”

그때, 내 팔을 툭툭 건드려 오는 일홍.

고개를 돌려보니 일홍이 노인을 쳐다보며 자신의 얼굴 가죽을 툭툭 쳐보였다.

그러더니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나만 보이게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해오는 그녀.

‘인. 피. 면. 구.’

나는 흠칫 놀라 노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겉보기엔 그냥 주름지고 검버섯이 핀 노인의 낯짝.

하지만 인피면구 제작자는 코앞에서 보니 뭔가 어색한 점이 보였던 모양이다.

“아니, 왜 그러는가……?”

이쪽이 지그시 쳐다보자 무슨 일이냐는 듯 능청스럽게 되묻는 노인.

나는 무슨 수작인지 파악하기 위해 곧바로 성운심법을 운용해 상대의 기감을 확인해봤다.

범천음적에게 복부를 쑤셔진 이후 더욱 강해진 이 주제 파악 역량.

개인적으로는 위기 감지 레이더, 혹은 천살안(天殺眼)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살의를 감지하는 것을 넘어, 더 근본적인 악의까지도 감지할 수 있게 된 이 능력.

천살성은 죽고 죽이는 위기 속에 강해진다던 황걸개의 말이 사실이었나.

나는 제한적 시한부를 대가로 얻은 이 능력을 십분 발휘해 노인의 기운을 면밀히 확인해봤다.

“음?”

그런데 이상한 감각이 뇌리를 간지럽혀 댔다. 살의나 악의도 아닌, 묘한 익숙함.

이건 일찍이 느껴본 적이 있는 기운이었다.

생존에 민감한 내 안의 천살성이 본능적으로 기억해 둔 ‘강자’의 기운.

‘언제 느껴봤더라 이걸…….’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뽕나무밭, 청색 관복 아저씨, 그리고 신비의 면사 여인까지.

빠르게 달려오는 나를 기선제압하기 위함인지 한껏 폭사되었던 그 위압적인 기운.

나는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그 이름을 조심스레 불러봤다.

“혹시 고자 아저씨?”

그러자 인자했던 노인의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리는 자칭 천유강.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애새끼가.”

그는 굽었던 허리를 쫙 펴고 얼굴 가죽을 스르륵 떼어냈다.

오.

30화 저 그냥 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