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저 그냥 갈게요
무슨 스파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찌직’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오는 인피면구.
인상을 팍 찡그린 중년 아저씨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때 뽕밭에서 마주쳤던 환관 아저씨였다.
“여전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녀석이로다.”
짙은 노기가 어린 눈빛. 그는 저번에 봤을 때처럼 흉포한 기세를 일으켜 나를 압박해왔다.
포식자와 마주친 것처럼 뻣뻣하게 굳는 신체, 어깨 위로 무거운 돌덩이가 내려앉은 느낌이다.
생명의 위협을 느꼈는지. 어느새 흘러나와 당장 저놈을 죽이라며 야단법석을 떨어대는 붉은 기운까지.
“큼, 말이 헛나왔습니다.”
기억을 불러오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 저장하기를 고자 아저씨로 해놨던 모양.
단어의 임팩트가 워낙에 커서 말이다.
당시 잠실에 트집을 잡던 환관들이 기겁하며 부르던 이름이 따로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뭐였더라, 천수…… 천수경?”
“천수공이다. 이 붕어 같은 것아.”
몹시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대답하는 천수공.
아, 그래.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면사 여인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상대적으로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말았군.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요 쥐방울만 한 놈을 그냥…….”
치켜 올라가는 쌍심지,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는 주먹.
정수리를 내려치기 직전 황걸개의 표정이 딱 저러했다.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황급히 예의를 차린 말투로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천수공, 이런 데서 뭐 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러자 나와 일홍을 잠시 번갈아 보더니 냉막한 표정으로 역질문을 던져오는 천수공.
“너야말로 뭐 하는 거냐. 낭인을 불렀는데 왜 너희들이 오지?”
좀 전에 낭인패를 보여 줬는데도 저런 질문이라니.
“왜겠습니까. 저희가 그 낭인이니까 그런 거죠.”
“허참, 북경 낭인회가 너희 같은 꼬맹이에게 패를 발급했다고? 믿을 수가 있어야지.”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라 중얼거리며 혀를 쯧쯧 차는 천수공.
해결사 노릇에 실력만 있으면 됐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못 믿을 건 또 뭡니까. 능력이야 충분합니다. 당장 그쪽 분들도 잠실에서 제 덕을 보셔놓고서는.”
황궁에 칩거하던 도화공주가 왜 위험을 감수하고 잠실까지 찾아왔겠나.
손을 잡은 상단이 위기에 처하자, 황족의 권위를 앞세워서라도 망한 양잠업을 통과시키려 했음이 뻔하다.
환관들의 엄청난 반발을 무릅쓰고서 말이지.
하지만 내 덕분에 억지 부릴 필요조차 없게 되었잖는가.
“흥! 그깟 양잠 문제 한번 해결했다고 기고만장하기는.”
하지만 순순히 인정하지 않고 코웃음을 치는 천수공이었다.
거참 고자 소리 한번 했다고 빡빡하게 굴기는.
아, 생각해보니 여러 번 했던 것 같기도.
뭐 아무튼 지금은 낭인으로 왔으니 의뢰에나 집중하자.
“근데 천수공, 환관인데 아들도 계셨습니까?”
의뢰 내용이 실종된 아들을 찾는 거였지 아마.
환관의 자식이라. 고자가 되기 전에 만들어 놓은 걸까?
나와 일홍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의 하반신을 향해 내려갔다.
“눈깔 올려라. 뒤진다.”
“커흠.”
말에 살기가 감돌아서 곧바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로 의뢰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천수공.
“아들을 의뢰 때문에 지어낸 얘기고, 내가 진짜로 찾는 것은 이 근처에서 행적이 끊겼다던 잠양사다.”
“……!”
그 황실에서 보냈는데 실종됐다던 잠양사 말인가.
은화란 누님의 입에서 몇 번이고 원망스레 언급되었던 그 사람.
그걸 여기서 또 듣게 되다니,
“금결은 이미 다 통과했는데, 이제 와서 찾아봐야 뭐 하게요?”
죽은 자식 부랄 만지기도 아니고. 황실의 높으신 분이 몸소 나서야 될 정도의 일인가 싶었다.
“잠양사의 시체를 찾아내고, 관련 증거가 남아 있으면 흉수까지 엮어서 써먹어 볼 생각이다.”
아교를 덧발라 인피면구를 치덕치덕 다시 붙이면서 하는 소리.
2황자 쪽이 수작 부린 게 분명하니, 그를 압박할 정쟁 수단을 찾으러 왔다는 게 천수공의 설명이었다.
“시체를 찾아낸다니. 이미 죽었을 거라 확신하시는 말투네요.”
실종자 찾는 의뢰인은 보통 살아 있길 바라던데 말이다. 지금 같은 경우에도 살아 있는 게 더 도움이 될 테고.
“당연하지. 황실 암투에 휩쓸려 실종된 인물은 9할 정도가 시체로 발견되거든.”
살벌하네 진짜.
저쪽 동네는 어째 무림보다 더 사망률이 높은 듯한 느낌.
“저 그냥 갈게요.”
오랜 해결사의 감이 속삭였다. 이건 의뢰고 뭐고 그냥 튀는 게 낫다고.
‘수고하십쇼’라고 말한 뒤 도망치려 하는데 갑자기 바람 같은 발짓으로 내 앞에서 불쑥 나타나는 천수공.
“맨얼굴까지 봐놓고 가긴 어딜 가? 어림도 없다 이것아.”
못 봤다면 모를까, 인피면구를 벗고 정체를 알게 된 이상 끝까지 어울려줘야겠다고 말하는 천수공이었다.
내공을 끌어올렸는지 푸른 안광을 번뜩이는 두 눈.
“에이, 싯팔.”
이래서 고수와 엮이기가 싫은 거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주 다 제멋대로 아닌가.
아니꼬워서라도 하루빨리 선업을 쌓아 고수가 되든가 해야지.
“애초에 저희가 필요하긴 해요? 실종 장소도 이미 다 아는 것 같은데.”
저번에 검기 서린 칼질로 환관들 혼을 쏙 빼놓는 장면을 목격했었다.
그런 경지의 고수가 왜 무력도 애매한 정급 낭인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자, 받거라.”
그러자 근처 나무에 세워놨던 길쭉한 무언가를 휙 던지는 천수공.
단단한 생나무 자루에 넓은 쇠판을 끼워 만든 도구였다.
“이게 뭐죠? 살포나 가래 같은 농기구인가요?”
처음 보는 물건인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만지작거리는 일홍.
반면 나는 2년간 짬밥 덕분인지 본능적으로 저것의 용도를 이해해버렸다.
무언가를 퍼담아 끝도 없이 파내기 위한 도구.
“이곳저곳을 뒤져야 할 텐데, 내가 이 나이 먹고 삽질하리? 그리고 찾아내도 시체를 옮겨야 할 것 아니냐, 그러니 낭인들이 필요하지.”
한마디로 사고 나도 뒤탈이 없는 데다 적당하게 부려 먹을 짐꾼 겸 일꾼이 필요했던 거군.
“……부하 환관들 있으시잖아요. 그 사람들 쓰세요.”
“그놈들은 지금 어떤 일 때문에 바쁘다. 그리고 난 단독행동이 편하거든. 시선도 별로 안 끌고.”
황걸개도 그렇고, 일당백이 가능한 고수들은 왜 그리 독고다이를 좋아하는지.
“삽이나 들어라, 가자꾸나.”
덕분에 무림에서도 때아닌 삽질을 하게 되었잖는가.
“에휴, 텄다 텄어.”
황실과 관련된 시체 수색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눈 딱 감고 치정 의뢰나 받는 건데.
돌아가면 회주한테 단단히 따져봐야겠군.
나는 땅에 꽂아둔 삽을 쑥 뽑아 올렸다.
***
익숙한 삽자루의 질감을 느끼며 백양촌으로 향하는 길.
“그런데 말이다.”
앞장서서 저벅저벅 걸어가던 천수공이 대뜸 말을 걸어왔다.
“이 얼굴이 인피면구인 건 어떻게 알아챈 거냐?”
도화공주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데다, 이것저것 비밀이 많은 양반이다.
자신의 위장이 들킨 것인 무척 거슬리는 모양.
“……이제 와서요?”
“어떤 건방진 애새끼가, 역린을 건드리는 통에 말할 새가 없었지.”
“아하.”
나는 즉시 입을 꾹 다물었다.
앞으론 실수하지 않고 꼬박꼬박 천수공 아저씨라고 불러 드려야겠군.
“아무튼 이 몸의 변용(變容)을 어떻게 알아낸 것이지? 어서 말해라.”
이것 참, 천살안 덕에 눈치챌 수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처함에 옆머리만 벅벅 긁고 있는데 갑자기 나 대신 나서주는 일홍.
“제가 얼굴의 이질감을 눈치채고 대장에게 신호를 주었어요.”
“음? 네 녀석이……? 어떻게 말이냐.”
면식이 있던 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소년이 눈치챘다고 말하자 의외라는 눈빛으로 되물어오는 천수공이었다.
“돈피(豚皮)로 제작된 인피면구는 아무리 만듦새가 정교해도 소재의 한계로 주름에서 미세한 이질감이 남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눈치챌 수 있었어요.”
그 말에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섬세하게 더듬어보는 천수공.
“흥, 다음엔 사람 가죽으로 만들어야겠군.”
거참 살벌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시네.
그는 뜨악하는 내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홍의 얼굴을 계속 뚫어질 듯 노려봤다.
“돈피와 이질감이라. 허나 이런 지식이 있다 한들, 직접 보고 눈치채는 것은 다른 영역일 텐데?”
“알량하기는 하나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나…… 실제로 면구를 여러 번 제작도 해봤어요.”
이론뿐만이 아니라 실무까지 겸했음을 알리는 일홍.
지켜보던 천수공의 두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리고 돈피라 할지라도 역용술을 익혀 틈과 틈 사이를 메꿔준다면 굳이 인피(人皮)를 사용할 필요가 없으세요, 천수공.”
“……호오, 흥미로운 녀석이군.”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 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는 천수공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만한 지식과 기술이라니…… 제법이구나.”
“과찬이세요.”
“저딴 버릇없는 놈 옆에 있긴 아까워.”
“아니, 천수공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나는 억울하다는 듯 따지고 들었으나 곧바로 묵살되었다.
“살문, 하오문, 혹은 사도련인가? 뭐 무림 일은 중요치 않으니……. 얘야, 정체를 묻지 않을 테니 우리 조직에서 일해보지 않겠더냐?”
그리고 내 눈앞에서 당당하게 인재 강탈을 시도하는 고자 아저씨였다.
내 의뢰인이자 소중한 부하를 채가려 하다니, 이런 상도의 없는 인간을 봤나.
“얜 제가 먼저 찜했거든요. 눈독 들이지 마시죠!”
나는 일홍의 등을 내 쪽으로 확 잡아당기며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응잇’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순순히 내게 끌려오는 일홍.
이직 제안이 제법 혹했던 걸까, 녀석의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설마 궁중 암투라는 마경(魔境)으로 걸어 들어갈 셈인가.
“야, 흔들리면 안 돼. 저기 가면 너 고자된다.”
그러자 내게 안긴 채 목덜미를 붉게 물들이던 일홍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 대장, 나 원래 없는데…….”
아, 맞다. 그랬지 참.
매일 남자로 변장한 얼굴만 보다 보니까 가끔 까먹곤 했다.
“허.”
그리고 등 뒤에선 안 보이는 일홍의 표정을 정면에서 보더니 갑자기 뭔가를 납득한 표정을 짓는 천수공.
“과연, 그런 취향이었나……. 그렇다면 더 이상 권유해도 소용이 없겠군.”
오묘한 표정으로 혼자 수긍하고 제안을 철회하는 천수공이었다.
아니, 대체 뭘 봤길래.
“저기…… 제안은 감사드리지만, 전 역시 대장이랑 있고 싶어요.”
이거 봐라. 역시 누구랑 다르게 의리가 있다니까.
배때지에 칼빵 맞으며 구한 보람이 있었다.
“보셨습니까? 어딜 의리를 시험하고 예? 남의 부하 탐내는 거 아닙니다.”
남이 저점매수 해놓은 종목에 무슨 짓이냐. 감히 상회 입찰을 시도하다니.
“흥, 언제 탐냈다고. 그냥 너 같은 놈 옆에서 썩힐 바엔 도화공주님 곁에 두는 게 낫다 싶어서 해본 소리지.”
“어허, 썩히다니. 말씀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닙니다.”
썩히다니, 나는 그녀를 언젠가 하오문 문주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난 그런 문주의 일급 꽌시로서 인프라와 정보력을 함께 누리는 거고.
“시건방진 녀석 같으니, 공주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손을 봐줬을 건데.”
“아, 도화공주님이 저 좋게 봐주고 계시는구나? 정보 감사드립니다.”
고귀하신 그녀의 비호가 있는 한, 저 아저씨에게 얻어맞을 일은 없는 모양이다.
좋은 걸 알게 되었군.
“우쭐해하지 마라.”
“우쭐 안 했습니다. 기뻐한 거지.”
“그게 우쭐거린 거다.”
“아니, 어째서.”
그렇게 헤드헌팅을 막아내고, 나를 아니꼬워하는 환관 아재와 투닥거리며 걷기를 한 식경.
저 멀리 작고 한적한 마을 하나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축을 가두기 위함인지 허리까지 오는 목책을 둘러놨으며, 작은 밭과 하천을 끼고 있는 목가적인 시골 풍경.
저곳이 아마 우리가 찾던 백양촌이라는 곳이지 않나 싶었다. 잠양사의 행적이 끊겼다던 장소.
‘음?’
그런데 마을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라 딱 집어 뭐라 말할 순 없지만, 이상하게 찝찝하고 불쾌한 그런 느낌.
“누, 누구십니까?”
낯선 방문인에 어느새 모여 수군거리는 주민들.
외지인 소식이 닿았는지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이 우리 앞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직 보부상 방문할 시기가 아닌데…… 무슨 일로 오신 백양촌을 찾으신 건지요?”
그러면서 우리 차림을 슥 훑는 촌장이었다.
봇짐도 없고 지게도 없고,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우릴 번갈아 쳐다봤다.
“저희는 아들을 찾고 있습니다.”
얼굴 주름을 한껏 오므리며 아들을 잃어버린 슬픈 노인 연기를 시작하는 천수공.
“그런데 수소문해보니 이 마을 근처에서 행적이 묘연해졌단 이야기가 있어서…….”
몇 달 넘도록 소식이 없어 속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며, 눈물까지 살짝 머금는 그 모습에 나와 일홍은 서로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말인데 촌장님, 목격자가 있나 주민들에게 여쭤보고 마을 주변을 수색해봐도 되겠습니까……?”
“아이고, 물론입니다. 사해가 동도라는데, 그런 사정이라면 어쩔 수 없지요.”
구구절절한 사연 설명이 끝나자 자신도 그만한 나이대의 자식이 있다며, 안타깝단 표정으로 말을 잇는 촌장.
“그리고 마을 근처를 지나다 실종됐다니, 저희로서도 무슨 일인지 찜찜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협조해야지요.”
방문 의도를 알게 되어 긴장이 풀린 것일까.
당연히 도와주겠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저벅저벅 우리에게 다가오는 촌장이었다.
그 순간, 피부 위로 치솟아 바르르 떨어대는 붉은 기운.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 사람의 살의(殺意)를 감지하는 천살안이 느닷없이 날뛰어댔다.
“……!”
아무리 고도의 훈련으로 살기를 감춘다 해도, 천살성 앞에선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는 법.
이거 아무래도 연기를 하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
살영문의 살수, 귀완도(鬼玩刀).
그는 혹시나 싶어 깔아둔 덫에 목표물이 걸려들자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그는 끝없는 훈련 끝에 살기를 완전히 지울 수 있게 됐으며, 절정 고수도 몇 번이나 암살해낸 일급(一級) 살수!
그리고 그가 이번에 노리는 상대는 3황녀의 수족이라 알려진 천수공이란 환관이었다.
최근 모종의 경로로 그가 황궁에 귀환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돈다는 첩보를 접한 참.
그렇다면 노리는 것이 한정되어 있기에 미끼를 솔솔 뿌려 놓았건만.
‘이토록 간단하게 걸려들 줄이야.’
노인의 외견을 하고 있는 귀완도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제 발로 함정으로 걸어들어오고 있는 목표물.
어쩌면 고수들이 으레 그러하듯, 일신의 무력을 믿고 함정이라도 다 처부수겠단 생각으로 들이대는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귀완도는 그런 오만하고 안일한 고수들을 몇 차례나 암살해내 보였다.
‘조금만 더 가까이…….’
그는 품속의 원통형 암기를 손에 꽈악 쥐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스치기만 해도 죽음에 이르는 혈독(血毒). 그리고 그것이 발라진 쇠침이 수십 발씩 장전된 살영문의 비전암기.
지근거리에서 터트리면 절정고수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당해버린다.
설사 피해낸다 하더라도 곧바로 두 자루의 단도가 춤을 추는 살겁난무(殺劫亂舞)가 이어졌고, 지금까지 이 연계에서 살아남은 무인이 없었다.
‘두 걸음만 더…….’
다만 이러한 살초가 제대로 들어가려면 거리를 최대한으로 좁혀야만 했는데…….
“고자 아저씨! 저 새끼가 아저씨 죽이려고 하는데요오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어이없는 불청객이 나타났다.
‘이런 십……!’
31화 재활용 가능
소리장도(笑裏藏刀)란 말이 있다.
인자한 얼굴 뒤에 감춰진 섬뜩한 칼날.
나는 어물쩍 다가오던 촌장을 가리키며 ‘빼액!’ 소리를 질렀다.
저 새끼가 우릴 다 죽이려 한다고.
“……?”
그러자 뭔 개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천수공.
반면 촌장은 낭패라는 얼굴로 재빨리 움직였다.
“죽엇!”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소낙비처럼 뿜어져 나오는 뾰족한 것들.
살기 섞인 쇠침들이 시야 한가득 붉은 궤적들을 그려냈다.
따다다다당-!
허공에서 불똥이 수십 번 튀겼다. 번개처럼 출수해 쇠침을 모조리 쳐낸 천수공.
섬전 같은 칼질이었다. 검광을 번뜩이며 찰나간에 공기를 수십 번 가른 칼날.
“와, 쌉고수.”
입이 떡 벌어지는 쾌검술에 난 탄성을 터트렸다.
저 아저씨, 환관인데도 칼질이 예술의 경지에 다다랐네.
대체 정체가 뭐지. 무협지에서 가끔 보이는 동창(東廠)이라도 되시는 걸까?
“앞으론 적당히 까불어야지.”
나는 뒤이어 휘둘러진 단검도 손쉽게 쳐내는 천수공을 보며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공주님 비호를 믿고 좀 안일하긴 했지.
“……안 까분단 선택지는 없는 거예요?”
멍한 얼굴로 싸움을 지켜보다 한마디 툭 내뱉는 일홍.
“그거 쉽지 않음.”
사나이 단원준, 어릴 때부터 고아를 비웃는 놈들과 싸우면서 자라왔다.
무시와 면박에 움츠러들면 괴롭힘만 심해진단 걸 깨달았기에 일찌감치 패도(霸道)의 길을 걸어온 나다.
아, 물론 돈 주는 의뢰인 앞에선 어느 정도 자제가 가능하다만.
“육호(六號), 칠호(七號)! 빨리… 가세해라!”
힘에 부친 중년 살수의 목소리.
백양촌 주민으로 위장하고 있던 살수 두 놈이 추가로 튀어나와 암기와 단도를 휘둘러댔다.
차차창-!
날붙이가 정신없이 붙었다가 쇠불꽃을 튀기며 떨어지는 소리.
살수 셋이 동시에 쏘아져 오자 천수공의 신형이 돌연 솟구쳤다. 육호란 살수의 어깨를 밟고 한 바퀴 빙글 도는 모습.
쉭-!
와중에 푸른 검기의 궤적이 두어 번 그어졌다. 실핏줄이 일며 살수의 귓불과 손가락 몇 개가 날아갔다.
하지만 신음조차 내지 않는다. 핏발이 선 눈으로 다시금 합격을 시도하는 살수들.
붉은 궤적이 허공에서 정신없이 얽히고설켰다. 눈으로 좇기도 힘든 고수들의 움직임이었다.
3 대 1의 싸움이 됐음에도 밀리지 않고 호각을 유지해내고 있는 천수공.
“대장, 저희도 가세할까요?”
“아서라, 새우등 터질라.”
고래 싸움에 새우가 끼어드는 거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주제를 알아야 명줄을 오래 붙잡고 사는 법.
하지만 이런 충고가 무색하게도, 오늘 이곳엔 앞만 보고 사는 하루살이들이 넘쳐나는 듯했다.
“염병,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살영문의 살수라며? 한몫 단단히 챙겨준대서 찾아왔더니…….”
“저 망할 애새끼가 산통을 다 깨버렸잖아!”
“젠장, 이럴 거면 산채를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나머지 주민들.
정확히는, 피 묻은 날붙이와 몽둥이를 꺼내든 채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가짜 백양촌 주민들.
녀석들에게선 고약한 악취가 풍겼다. 화학적인 냄새가 아니라 ‘악의’를 품고 살업을 쌓아온 이들 특유의 악취였다.
마치 취미로 남녀를 간살해온 범천음적 같은 냄새.
“……처음부터 마을 주민은 한 명도 없었던 모양이네요.”
“그러게.”
입구에서 묘한 불쾌함을 느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긴 했었지.
마을 주민으로 위장시키기 위해 주변에서 도적이나 산적, 살인마들을 긁어모은 듯했다.
그래도 전원 살수가 아니었단 점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진짜 백양촌 주민들은 어떻게 된 걸까요.”
“다 죽었겠지, 저놈들한테.”
내 안의 천살성과 뜻 모를 뒤숭숭함이 그리 속삭이고 있었다.
빌어먹을 무림. 하여간 정이 안 가는 동네다.
사람 목숨이 개미 목숨만도 못하군.
“씨발, 이 고생을 했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어.”
“이번 건 성공하면 금 한 덩이를 준댔잖아.”
“나눠 가질 머릿수가 주는 것도 나쁘지는…….”
어딜 가나 인생 끝자락에 선 놈들은 존재하는 법이다.
인생은 한탕이라는 생각이 공포를 이겼는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녀석들의 눈.
느껴지는 기감은 잘 쳐줘도 삼류에 불과했지만, 팽팽하게 접전 중인 저 싸움에 저만한 머릿수가 투입되면 어떻게 될지 또 모를 노릇이다.
“곱상한 새끼군. 또 한 번 예쁘장한 비명을 듣겠어.”
누군가의 피가 묻은 단도로 이쪽을 가리키며 히죽 웃는 선두의 살인마.
지껄이는 꼴을 보아, 지금껏 수많은 악업을 쌓아왔겠지.
“일홍아, 저런 쓰레기들의 머리통을 터트리는 건, 착한 짓이 맞겠지?”
“……아마도요?”
“아마도는 무슨, 착한 짓 맞아.”
내 가슴이 그리 외치고 있었으니까.
선업 중에서도 선업에 해당하는 일 되시겠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금수 새끼들, 얌전히 이 몸의 내공이 되어라.
‘성성일리…… 천지체영예…….’
성운심법을 운용하자 정심한 항마의 내력이 전신 세맥을 세차게 내달렸다.
적의 살기에 반응해 피부 위로 피어올랐다가 ‘끼엑!’ 거리며 단숨에 흩어지는 붉은 기운.
나는 허연 안광을 터트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차차창!
등 뒤에서 세찬 기파를 터트리며 칼과 살기를 섞고 있는 네 명의 고수.
그리고 눈앞에서 누런 이를 씨익 드러내며 달려오고 있는 십수 명의 삼류들.
고수는 고수끼리, 그리고 하수는 하수끼리 싸울 때 가장 모양새가 좋은 법이다.
고로.
“2부 리그 개막이다, 새끼들아.”
타앗-!
나는 발끝으로 지면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
“제 발로 죽으러 오는구나! 멍청한 애새끼가!”
항상 이런 식이다.
날 상대하는 놈들은 외견만 보고 다들 저렇게 방심을 하곤 했다.
애와 노인을 조심하라는 무림의 격언도 잊어먹은 걸까.
타탁!
이젠 제법 자연스러워진 내력의 수발. 나는 녀석의 코앞에서 선풍보를 펼쳐 신형을 꺼트렸다.
놈의 박도가 텅 빈 허공을 ‘부웅!’ 긋고 지나갔다.
분명 날 보고 휘둘렀는데, 손에 걸리는 감각이 없자 놀라 눈을 치켜뜨는 녀석.
난 그사이 등 뒤를 점해 백결신권의 묘리가 실린 일권(一拳)을 힘껏 찔러넣었다.
퍼억!
“끅!”
등뼈 으스러지는 소리. 단숨에 무력화된 녀석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그리고 뒤에서 얼 타던 놈에게도 풍차처럼 회전하여 허릿심이 실린 일각(一角)을 꽂아 넣어줬다.
빡-!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함몰되는 안면. 놈은 피와 강냉이를 흩뿌리며 저 멀리 튕겨져 나갔다.
“이런 십!”
그리고 다음은 2보 떨어진 곳에서 놀래고 있는 떡대 한 놈.
나는 보법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녀석의 광활한 복부에 묵직한 장법을 꽂아 넣었다.
“우웨에엑!”
떡대는 오늘 점심 내용물을 모조리 확인시켜주며 흙먼지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한줄기의 돌풍처럼, 물 흐르듯이 수행된 3연격.
황걸개가 입맛대로 개조한 백결신권은 이처럼 권, 각, 지, 장법을 쉬지 않고 뿌려대는 종합 인마살상 기술로 발전해 있었다.
“니미럴, 저 새끼도 고수였잖아……!”
“빌어먹을!”
내가 방심을 틈타 ‘어어’하는 사이에 세 놈이나 때려눕혀 버리자 크게 동요하는 살인마 무리.
나보고 무려 고수란다. 황걸개한테 죽도록 처맞으면서 수련한 보람이 있군.
괜시리 어깨가 들썩이고 그랬다.
“쫄지 마 시발! 그래 봐야 애새끼 하나야!”
“그래! 한꺼번에 덮치면 제까짓 게 어쩌겠어!”
어떤 골목에서 많이 들어봤던 대사였다.
그리고 아까부터 묘한 간질거림이 느껴지는 단전.
쓰레기 셋을 해치워 선업이 쌓인 게 분명하다. 이건 또 얼마치 내공일까.
다음 운기행공이 기대되는군.
“덮쳐!”
“우오오오!”
날붙이와 몽둥이를 앞세운 채 한꺼번에 달려드는 적들.
애 하나 죽이자고 어른들이 저렇게 힘을 합치는 꼴이라니.
“중원의 쓰레기들! 모조리 내공으로 재활용해주마……!”
나는 그에 지지 않고 벽력같은 고함을 마주 지르며 뛰쳐나갔다.
“뭔 개소리냐!”
“뒤졋!”
눈을 어지럽히는 십수 개의 붉은 궤적들. 사방에서 날카롭고 길쭉한 무기들이 바람을 갈라댔다.
코앞으로 짓쳐오는 몽둥이와 칼날들. 나는 아까 천수공이 부린 발재간을 따라 펼쳐봤다.
내공을 모아 바닥을 ‘탁!’ 걷어차자 불쑥 솟는 신형. 아래에서 목표를 잃은 병장기끼리 얽히고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큭, 이 병신들이!”
“뭐 하는 짓이야!”
합격진이라는 게 오늘 모인 어중이떠중이가 쉽사리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저들의 움직임이 엉켜진 틈을 타, 공중에서 어깨와 머리통을 작살 내고 다녔다.
퍼퍼퍽-!
내력을 실은 발뒤꿈치가 어깨를 내리찍고, 몸을 비틀어 원심력을 끌어온 선환각이 옆통수를 후려 갈긴다.
그리고 아래에서 나를 쫓아 손을 뻗어오는 녀석에겐 체중을 실은 드롭킥을 꽂아 넣어 줬다.
가슴뼈가 부러졌는지 컥컥대면서 지면에 다시 처박히는 녀석.
나는 때린 반발력을 이용해 허공에서 빙글 한바퀴 돌아서 포위를 빠져나왔다.
온몸의 탄력을 쥐어짠 기이한 움직임. 이 모든 게 황걸개의 주먹질을 피하려 그간 몸부림쳐온 결과물이다.
“저 쥐새끼 같은 것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때린 뒤 손아귀를 스르륵 빠져나가자 적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분통.
“잘한다! 역시 무진 대장이야!”
반면 일홍이 쪽에선 순식간에 네다섯을 쓰러트린 내 활약에 찬사를 터트려왔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다시금 달려드는 살인마 무리들.
‘딱 좋군.’
나는 누군가가 떨어트린 길쭉한 몽둥이를 말없이 들어 올렸다.
적당한 그립감과 무게, 그리고 길이.
나는 이걸로 암기를 쳐내던 천수공의 묘기를 따라 펼쳐봤다.
따다다다닥-!
쇠와 나무가 퉁기는 소리. 뒤로 물러나면서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몽둥이로 연거푸 쳐내고 걷어냈다.
사방에서 날 죽이고자 달려드는 상황. 그 위기감에 내 몸은 표사들의 무공을 훔쳐 배웠을 때처럼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따닥! 서걱!
그러나 한 번 보고 따라 한 것의 한계일까. 가끔 방어를 뚫고 들어와 살을 저미고 가는 날붙이들.
하지만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것은 원래 이 몸의 특기였다.
칼을 휘두르느라 생긴 빈틈, 그 사이를 파고들어 공격해온 놈의 안면을 ‘빡!’ 내리쳐줬다.
“컥!”
천살성의 괴력, 내력이 실린 내리치기. 남의 몸을 쑤셔댔던 녀석의 면상이 흉물스럽게 박살나는 순간이었다.
따닥! 퍼억!
둔탁한 파열음. 이번엔 서로의 몽둥이가 각자의 머리통을 시원하게 후려쳤다.
다만 이쪽은 사기적인 맷집과 핵꿀밤으로 단련된 머리통을 가진 터라, 깨져나가는 건 상대 쪽뿐이었다.
“도, 돌머리 새끼가……. 끄륵.”
믿기지 않는 내구성에 경악하며 기절하는 녀석. 틀린 말은 아닌데 뭔가 기분이 더럽다.
“대장은 머리도 돌처럼 튼튼하다! 진짜 멋있다!”
그리고 등 뒤에서 계속되는 일홍이의 음성 버프가 있었다.
따닥! 따다다닥!
걷어내고, 빗겨치고, 휘감아 튕겨내고, 가끔 겁없이 파고드는 놈은 머리통을 쪼개주는 등.
몽둥이가 사방팔방 신들린 듯 휘둘러졌다.
미래시라도 보는 듯 붉은색으로 물들어 오는 적들의 공격 경로.
거기에 어깨너머로 훔쳐낸 천수공의 묘리까지 더해지자, 나는 몽둥이 하나로 적진 사이를 종횡무진 휘저을 수 있게 됐다.
“씨발! 한꺼번에 덤벼도 안 되잖아!”
“어떤 새끼가 한 번에 덮치자고 한 거야!”
“저 애새끼, 설마 일류에 도달한 건 아니겠지……?”
말하고서 흠칫 놀라더니 눈알을 바삐 굴려대는 살인마들.
고수의 무학을 훔쳐내 하수들을 쫄게 만들었다.
사실 적진에 고수가 있었다면 금세 눈치챌 근본 없는 몽둥이질이었지만 말이다.
“……염병, 이러면 완전 망한 건데.”
눈에 띄게 떨어진 적들의 사기.
적들이 주춤거린다. 서로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물러나려는 낌새를 보였다.
나는 그 징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새끼들이, 어딜 내빼려고!”
귀한 내공 보따리가 발이 달려 도망간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곧바로 선풍보를 펼쳐 적들 한복판으로 짓쳐 들었다.
이 대담한 돌격에 반응하듯 곳곳에서 뻗어오는 흉기들.
난 맞을 만한 건 맞아 주고 대신 적들의 머리통을 취하기로 했다.
빠바박-!
골통 쪼개지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동시에 잘했다는 듯 단전을 간질이는 선업의 기운.
“내공 한 줌 추가!”
돈 몇 푼 때문에 마을 주민을 학살한 악질적인 놈들이다.
머리통을 후려칠 때마다 뭔가가 쌓이니, 이래서 선협의 선인들이 사람을 갈아 마시는구나 싶었다.
“시발! 오, 오지 마, 이 새끼야!”
한 놈도 놓치지 않겠다는, 내 귀기 어린 몽둥이질에 기겁하며 소리치는 살인마들.
“싫다!”
나는 짓쳐오는 칼날들을 스치거나 피해내며 놈들을 하나둘씩 확실하게 작살냈다.
정신없이 그어지는 붉은 궤적.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지는 적들.
그렇게 살인마 집단이 꼬맹이 하나에게 괴멸 직전까지 내몰린 순간.
등 뒤에서 겁에 질린 일홍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 대장.”
슬쩍 돌아보자 피투성이로 서 있는 중년인 하나.
일홍의 하얀 목엔 날붙이가 드리워져 있었다.
혹시 이럴까 봐 다 두들겨 패면서 나아갔던 건데.
살생을 피하려 힘을 뺐다 보니 처맞은 놈 하나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 버린 모양.
“모, 몽둥이 내려놔!”
나는 녀석의 요구에 피 묻은 몽둥이를 툭 내려놨다.
어차피 팰 놈은 거의 다 팼고. 난 원래 권법가다. 의미없는 짓이라는 뜻.
“너 이 새끼, 잔뜩 까불어 줬겠다……. 움직이는 순간 이 애새끼 멱도 따일 줄 알아라.”
일홍의 목에 작게 상처를 내며 협박하는 녀석.
몽둥이질에서 살아남은 몇몇 놈들도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는 듯 킬킬거리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주 그냥 죽여달라고 빌게 만들어……. 끅!”
그런데, 인질범의 얼굴 한가운데를 ‘푹!’ 뚫고 나오는 칼끝.
털썩.
놈이 피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허무하게 바닥에 쓰러졌다.
“…….”
모두가 멍해진 가운데, 피 묻은 칼을 회수해 스윽 닦는 중년 아저씨 하나.
“흥, 욕봤다. 뭐 낭인 자격은 있구나.”
어느새 살수 셋을 해치운 천수공이 우릴 바라보며 썩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32화 어쩌다 황실 꽌시
천수공이 나서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흥건한 피와 머리 없이 나뒹구는 수많은 시체들.
특히 살수들의 얼굴은 죽기 직전 뭘 봤는지 경악감이 어려 있었다.
“고전하시더니, 어느새 후딱 해치우셨네요?”
살수들의 출신을 알아보기 위해 뜸을 들였던 걸까.
목이 날아간 촌장의 앞섬에다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있는 천수공.
“강호를 주유하려면 숨겨진 한 수 정도는 있어야지.”
무림인의 생존 필수소양, 실력의 3할은 감춘다. 뭐 그런 건가.
저번에 환관들 협박하면서 서슬 퍼런 검기를 피워올리길래 대충 절정의 무인이겠거니 싶었는데.
“혹시 초절정이거나 화경이세요?”
“알 것 없다 이것아.”
코웃음을 치며 닦아낸 칼을 스르륵, 착. 납도 하는 천수공이었다.
얼추 그 부근인가 보네. 절정이었으면 맞수였던 셋을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을 리 없지.
‘초절정 이상의 무인이라.’
초절정만 되어도 무인 두셋을 능히 상대할 수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중견 문파도 홀로 멸문시킬 수 있는 중원의 전술 병기가 된다.
사람 한 명이 그만한 위력을 낼 수 있다니, 이류인 내 입장에선 그야말로 아득한 경지다.
이 양반 대체 황궁에서의 정체가 뭐길래.
“그래서, 넌 대체 뭐 하는 놈이냐?”
“예? 단무진이란 놈인데요.”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을 선수 치는 천수공.
“저놈들은 최소 일급 살수였다. 살기를 완벽하게 통제했지. 그런데 네 녀석은 보자마자 정체를 눈치채더군?”
아까 누가 봐도 인자해보였던 촌장더러 미친 살인마라고 외쳐댄 건을 말하는 걸까.
“저도 숨겨둔 한 수가 있어서요.”
아무리 숨기고자 하여도 소용없다. 이 몸은 실낱같은 살의(殺意)마저도 간파해내는 천살안이 있으니.
다만 이걸 설명했다간 무림공적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 난 좀 전에 들었던 회피성 문구를 되풀이하며 얼버무렸다.
그러자 바늘처럼 가늘어지는 천수공의 눈매.
“흠, 게다가 너. 아까 내가 펼친 무공을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던 것 같던데…….”
경지가 높으니 싸우면서 한눈팔 여유도 있었나 보다.
“그냥 흉내만 내본 겁니다.”
“그런 것치곤 발짓과 몽둥이질에 묘리가 제법 담겨 있어서 말이야.”
이것도 목숨이 위태로울 때 알아서 학습해 버리는 천살성의 패시브 같은 거라, 설명하기가 곤란했다.
“……그럼 숨겨둔 두 수가 있었던 걸로.”
“하.”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리는 천수공이었다.
그러더니 턱을 긁적이며 말없이 나를 위아래로 진득하게 훑어보는 모습.
고자 아저씨의 저런 강렬한 눈빛이라니.
“……왜요.”
괜시리 불안해져 먼저 입을 열었다.
“범상치 않은 무재(武才)에, 살기를 이토록 민감하게 느끼는 체질이라.”
무언가를 골똘히 고심하는 느낌.
그런데 천수공의 표정과 저 태도, 얼마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듯했다.
범상치 않은 기술과 지식에 혹해 일홍을 쏙 빼가려 할 때 딱 저런 느낌이었다.
“너 이름이 단무진이라 그랬었지?”
“예, 그런데요.”
“혹시 환관이 되어 도화공주님을 모셔볼 생각은 없느냐?”
때아닌 황궁 스카웃 제의였다.
문제는 직함이 환관이란 점이었지만.
“낭인으로 고용되는 건 괜찮은데, 환관은 좀…….”
“왜? 배부르고 등 따습게 살 수 있는 데다, 내 휘하로 들어오면 마음에 안 드는 놈들 추포하고 족치면서 살 수도 있는데.”
사람 족친단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보니, 이 양반 아무래도 관리들도 벌벌 떤다는 동창이 확실한가 보다.
그리고 내 살기 감지 능력을 잘 키워 암살로부터 공주님을 지킬 인간 카나리아로 써먹고 싶은 듯했다.
“하지만 환관 되려면 그거 잘라야 하잖아요.”
“흥, 대의(大義) 앞에선 작은 살 조각일 뿐.”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제 건 작지 않은데요.”
“…….”
내 발언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천수공. 그러다가 이내 ‘이런 미친놈을 봤나?’란 눈빛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옆에서 멍해진 얼굴로 내 얼굴과 하반신을 슬쩍 번갈아 쳐다보는 일홍.
주변의 반응이 미묘하군. 하지만 난 잘못된 사실을 정정해 줬을 뿐.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음이다.
“허……. 방금 내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해라. 공주님 곁에 뒀다간 경을 칠 녀석이로고.”
견적을 재보니 제어가 안 되겠다 싶어 손을 확 털어 버리는 천수공이었다.
“예, 뭐. 저도 생각 없어서.”
그렇게 난 소름 돋는 스카웃 제의를 물리쳤다. 아무리 출세를 원해도 환관은 좀 아니지.
그깟 권력을 위해 내 자신감의 원천을 잘라내야 한다니.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고 둘 다 쟁취해내 보이겠다.
“그런데요. 아무튼 고용하려 했다는 건, 제 실력을 완전히 인정하셨단 소리죠?”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애새끼가 무슨 낭인질이냐면서 실컷 디스를 하더니만 말이다. 이젠 자기 휘하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니.
“흥, 기고만장하지 마라, 그저 썩 나쁘지는 않았단 거지.”
몇 번 실언을 한 놈이라 진짜 맘에 안 드는데, 어쩔 수 없이 인정해 주는 모습이었다.
내게 있어 극찬이나 마찬가지인 반응.
저런 초고수한테 인정받다니, 그동안 피땀 흘리고 처맞아가며 수련해온 보람이 있군.
“그럼, 이제 이거 들고 삽질이나 하거라.”
허름한 삽 두 개를 툭 던지는 천수공.
“아, 맞다 시발.”
성취감에 젖어 까먹고 있었는데, 삽질하러 불려 온 거였지 우리.
자기가 하긴 귀찮다고 적당한 낭인을 데려와 짬처리를 시키겠다니.
“저 부근이 묘하게 땅이 무르군. 해지기 전에 파놔라. 안 그럼 보수 깎는다.”
칭찬을 들었다고 해서 할 일이 줄어들진 않는다.
기껏 올라온 입꼬리가 확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에휴.”
***
푹푹. 스륵.
땅바닥에 움푹 들어갔다가 흙을 잔뜩 퍼내는 삽날.
사람 묻기 좋은 평평하고 무른 땅 위에서 반나절 넘게 삽질이 계속됐다.
“대장, 정신 나갈 것 같아요…….”
“괜찮아, 안 나가. 삽질이나 해.”
사람의 정신은 생각보다 튼튼하다.
제설 작전에 투입되어 온종일 삽질만 해봤던 내가 보장한다.
툭.
“어?”
그러다 삽끝이 시체를 발견했다.
파내보니 찾고 있던 잠양사는 아니고, 원래 이곳에 살던 백양촌 주민으로 추정되는 시체였다.
시신의 숫자는 대략 스물. 구덩이를 크게 파서 한꺼번에 파묻은 모양.
사람 찾는 일 하면서 시체 제법 봤다고 자부했건만, 마을 하나가 통째로 묻힌 광경은 내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십새들, 다 처죽이는 게 정답이었네.”
물론 ‘살인멸구!’를 외치면서 한 놈만 남기고 죄다 목을 날린 건 천수공이었지만.
이쪽도 나름 저놈들의 뼈를 부수고 거죽을 터트리면서 끔찍한 고통을 줬단 말씀.
“오.”
그리고 잘 두들겨 팼단 생각이 절로 들자, 단전에 맺힌 기운도 더욱 크게 간질거려 댔다.
선업의 기준이 나라더니, 마음가짐만으로도 이렇게 바뀌는 건가.
앞으로는 악즉참(惡卽斬)의 정신으로 악인을 더욱 열심히 두들겨 패고 다녀야겠군.
물론 그 악인의 기준은 나의 아니꼬움으로 결정될 것이다.
“대장, 이 시신은 옷차림이 좀 다른데요?”
갓 배치받은 신병처럼 땀 뻘뻘 흘리며 열심히 삽질하던 일홍이 구덩이 근처에서 또 뭔가를 발견해냈다.
확실히 거적때기만 걸친 마을 주민들과는 조금 느낌이 다른 듯한데.
“흠, 아무래도 찾던 사람 같군. 실종됐다던 그 잠양사 말이다.”
천수공이 품속에서 누군가의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를 꺼내 들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결국 황실에서 보냈다던 잠양사는 권력 암투에 휘말려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건가.
“역시나. 몸에 난 자상이 살수들의 단도와 일치하는군. 거기에 칠공독(七空毒)을 바른 건가? 이상하게 부패가 느리군.”
아무렇지도 않게 시체를 더듬거리며 검시(檢屍)하는 천수공.
살수들은 스쳐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해 날붙이에 극독을 바르고 다니는 모양이다.
절벽에서 짓이겨져도 살아남은 천살성의 육체지만 독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닿지 않게 조심해야겠군.
“사용하는 독과 무공, 칼질을 보면…… 살영문 아니면 귀영문이겠군. 일단 흔적들을 더 자세히 살펴 뒤를 파봐야겠어. 이거 바빠지겠구먼.”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머지 살수들을 세심하게 살펴보는 천수공.
거기에 더불어 잡몹 살인마들까지 문신이나 눈에 띄는 특징이 없는지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론 살려서 기절시킨 놈을 깨워서 고문을……. 아니, 심문을 진행하겠지.
“일홍아, 우린 이 억울한 사람들이나 묻어주자.”
나는 그러는 사이 마을 주민들을 양지바른 곳에다 묻어줬다.
갑자기 착해진 건 아니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면 괜히 꿈자리가 사나워질 것 같아서 그렇다.
저 살인마 놈들 시신이야 짐승한테 알아서 뜯어먹히라지.
“거참,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는군.”
그렇게 계속된 삽질. 출발할 땐 분명 이른 아침이었는데, 어느새 태양이 산등성이에 살짝 걸쳐져 있었다.
심문이 끝났는지 손을 탁탁 털며 다가온 천수공이 우리가 하는 짓을 보고 피식 웃어댔다.
“희한한 놈일세. 그래 봐야 누가 알아준다고?”
그게 성운심법이 알아주더라고.
처음엔 찝찝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는데, 묻어줄수록 단전에서 간질거림이 늘어났다.
이는 곧 흉성에게서 뜯어낼 수 있는 내공의 양도 늘었다는 뜻.
벌써부터 다음 운기행공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대장이 원래 이래요. 좀 이상하죠.”
삽을 내려놓고 허리를 찌뿌둥하게 펴더니, 익숙해졌다는 듯이 말하는 일홍.
사실 원래는 안 이렇다. 지금껏 세상을 극한의 이득충으로 살아온 나다. 여기선 착한 짓에 보상이 뒤따르니 열심히 하는 거지.
이전 삶에서도 이런 게 있었으면 원장 속 안 썩이고 착하게 컸을 텐데.
이건 날 보듬지 못한 세상이 나빴던 걸로 하자.
“천수공, 이곳에서의 일은 다 끝나신 겁니까?”
나는 온몸에 묻은 흙먼지를 탁탁 털면서 물었다.
낭인회 숙소로 돌아가면 바로 목욕부터 조져야겠군.
“그래, 실마리를 찾았다. 파고들다 보면 2황자를 압박할 좋은 패가 나올 듯하군.”
고생한 만큼 소득이 있었나 보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 천수공.
“그럼, 의뢰가 끝났으니 주실 게 있으실 텐데 말입니다.”
정산의 시간. 나는 상인처럼 두 손을 슥슥 비비면서 그렇게 말했다.
일을 했으면 그날의 일당 또한 주어져야 하는 법.
특히 상대는 자식 잃어버린 노인네가 아니라, 부유한 조정의 벼슬아치가 아니던가.
“그리고 이게 은전 세 닢짜리 일이 아님은 알고 계시죠?”
그냥 삽질만 하면 된다더니, 갑자기 살수가 튀어나오고, 삼류 놈들을 십수 명이나 때려눕혀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흥, 허섭스레기들 몇 놈 팼다고 유세 떨기는.”
아니, 근데 이 아저씨가 진짜.
나는 제대로 된 보수를 받겠다는 듯 눈에 힘을 빡 주고 그의 앞에 섰다.
옛날에 노가다 뛸 때도 삥당치는 소장에게 미사일 드롭킥을 날렸던 나다.
도화공주는 좋은 사람 같더니 주변 인물들의 인성이 영 되먹지 못한…….
그때, 금전 한 닢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천수공.
“받아라.”
싯누렇게 번쩍이는 금전이 포물선을 그리며 내 손바닥 위로 툭하고 안착했다.
보는 이의 눈동자도 황금색으로 물드는 영롱한 빛깔.
“아이고오, 사장님 뭐 이런 걸 다.”
뭐야, 훌륭한 인성과 성품을 갖춘 분이셨잖아?
순간의 욱함을 참지 못해 저런 분을 욕할 뻔했던 자신을 반성한다.
내가 금전을 거머쥐자 옆에서 같이 헤실거리는 일홍이.
이 정도면 겪은 위기치곤 너무 과하진 않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는지 천살성이 파고드는 일도 없었다.
“와, 거지 시절엔 은전 한 닢도 얻기 힘들었는데.”
일홍은 옛 생각이 났는지 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공을 배우고 낭인이 되자 이런 은빛, 금빛을 자주 보게 되는 것 같군.
이래서 어른들이 항상 기술을 배우라고 말하고 다녔던 걸까?
“반은 입막음 비용이다. 너는 오늘 불쌍한 노인네 자식을 찾아줬을 뿐, 살수고 뭐고 전혀 모르는 일인 게다. 알겠느냐?”
“예이예이,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재수 없다. 원래 말투로 되돌려라.”
“물론입니다.”
역시 높으신 분들은 씀씀이가 다르다니까. 이래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거다.
나중에 가서도 큰 거 한탕 땡기려면 황실과의 꽌시는 필수.
“그럼 먼저 가봐라. 나는 아직 뒤처리할 게 남았으니.”
더 찾을 흔적이나 증거가 남은 걸까.
“예, 가보겠습……. 아참, 공주님에게도 이번처럼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언제든 불러달라고 전해주십쇼.”
현대였다면 입소문 좀 내달라고 명함이라도 뿌렸을 건데, 아쉽게도 가진 게 없었다.
“건방지기는, 저번에도 말했듯이 그분 곁엔 이미 인재가 많다.”
그래, 그땐 동창이 있으니 너 같은 건 필요 없다고 그랬었지.
하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 더 찔러본다.
“알지요. 안부 인사라 생각하고 말이라도 좀 전해주십쇼.”
“흥, 생각해보마.”
그렇게 말하더니 마을 방향으로 뒤돌아가는 천수공.
여지를 남겨두는 걸 보아, 츤츤거리면서도 왠지 전달은 잘 해줄 느낌이다.
아님 말고기.
“숙소로 가자 일홍아.”
“와, 드디어!”
33화 별을 품은 소년
기이하고도 신비한 느낌이었다.
선업이란 불가해(不可解)한 기운이 흉성을 두들겨 별의 부스러기를 훔쳐내고.
이것을 내공으로 환원하여 전신으로 퍼트리는 감각.
파사(破邪), 항마(降魔)의 성질을 띤 기운이 몸 안을 가득 채우며 흉성의 붉은 기운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츠츠츠-
피부 위로 희끄무레하게 피어오른 새하얀 일렁임.
아직 작고 옅었지만, 그 안의 반짝임은.
피부 위로 희끄무레하게 피어오른 새하얀 일렁임.
아직 미숙하고 옅었지만, 그 반짝임은 어두운 밤하늘에 송송 박힌 별빛의 그것이었다.
“흐읍…….”
거북이처럼 긴 호흡. 성운심법을 운용해 경맥에 퍼져있던 기운들을 모조리 단전으로 끌어당겼다.
물레가 얇은 실을 휘감듯, 미세하게 휘감기며 양감을 더하는 내공의 가닥들.
그리고 단전에 맺히는 이전보다 더 크고 선명한 내공.
“후우…….”
임독양맥을 한 바퀴 돌리는 소주천(小周天)까지 끝내자 나는 온몸에 힘이 흘러넘침을 느꼈다.
무공 입문 반년(半年), 구년(九年) 내공 입성.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을 향해 또 한 걸음 내디딘 것인가.
“이것이 재능……? 세상이 하찮군.”
“또 지랄한다.”
따악!
정수리에 번갯불 같은 딱밤이 작렬했다.
“아악 싯팔!”
두개골을 찌르르 울리는 격통. 나는 머리를 감싼 채 연무장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왜 자꾸 흉성이 깃든 백회혈 쪽만 갈겨대는 건지.
“대장, 공벌레 같아요.”
그런 내 모습이 웃겼는지 땀 흘리며 수련하다 말고 옆에서 키득대는 일홍.
타인의 고통을 보고 웃는다니, 내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거늘.
“망할 늙은이! 이러다 머리통에 금가면 책임질 거요!”
나는 땅을 벌떡 짚고 일어나 항의했다.
맞은 부위가 아직도 쪼개질 듯 아프다. 이러다 윗부분에만 탈모 오는 거 아니야?
“괜찮다, 너 같은 놈은 그런 걸로 안 죽으니.”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호리병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황걸개.
죽지만 않으면 문제없다는 건가. 남의 정수리가 오목해지건 말건 간에 말이다.
“그래서, 내공이 얼마나 모였길래 또 꼴값을 떨고 있었던 게냐?”
운기조식 내내 호법을 서줬던 황걸개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어왔다.
내 무림 출도의 수확물이 궁금한 모양. 나는 일홍이가 못 듣게 귓속말로 작게 대답했다.
“낭인 단무진, 이제 구 년 내공의 소유자입니다.”
이 몸은 현재 눈부신 성장을 구가 중이다.
의뢰만 한 건만 더 잘 받으면 십 년 내공도 거뜬할 기세였다.
“……뭣이?”
볼 때마다 내공이 늘어나는 그 성장 속도에 놀랐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는 황걸개.
그는 곧바로 자세한 설명을 요구해왔다.
“대체 밖에서 뭘 하고 싸돌아다닌 거냐.”
무얼 하고 다녔기는.
“착한 짓이요.”
“좀 더 소상히.”
나는 일홍과 밖에서 겪었던 일들을 무용담처럼 늘어놨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미묘해지는 황걸개의 표정.
“그러니까 저잣거리에서 양민을 두들겨 팬 다음 돈을 받아냈다고?”
“예, 비슷하죠.”
“그거…… 착한 짓이 맞긴 하더냐?”
물론이다. 장씨 할배는 남의 돈을 계획적으로 떼먹으려 한 악성 채무자였으니까.
“나쁜 놈을 응징하고 피해자를 구제했으니, 이게 노야가 말한 협행(俠行)과 다를 바가 무어란 말입니까?”
의뢰인은 원금을 돌려받아 기뻐했고, 나와 감운 회주는 이자와 수수료를 두둑이 챙겨갈 수 있었다.
한 놈을 족쳐 여럿이 유익하니 이는 공리적으로도 옳은 일이 아니던가?
“이놈아, 진심이냐……? 아니, 진심이니까 선업이 쌓이고 내공도 늘었겠군.”
스스로 착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게 선업이다.
본인이 설명해준 이야기다 보니 마지못해 납득하는 황걸개.
“떼잉, 그래도 그렇지 이놈아, 양민을 패다니? 자고로 협행이란 것은 말이다…….”
아니, 납득 못 했나 보다. 자신한테 배운 무공으로 양민과 푸닥거린 게 거슬렸던 모양.
귀찮은 일장 연설이 시작될 느낌이다. 나는 입을 다물게 할 뭔가를 짐보따리에서 슥 꺼내 들었다.
“의뢰금으로 사 온 선물입니다.”
고급스럽게 반질거리는 술병. 마개를 통해 풍기는 깊은 주향(酒香). 사천의 명주라는 검남춘(劍南春)이었다.
“사사로운 이익에 흔들려선……. 허엇!”
엄한 얼굴로 꾸짖다가 그윽한 술향기에 저도 모르게 술병을 콱 움켜쥐는 황걸개.
사천의 명주는 어느새 그의 품속으로 쏙 빨려 들어가 있었다.
“으잉, 이게 왜 여기에?”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는지 본인도 어리둥절한 목소리.
술 창고가 텅 빈 상태에서, 간만에 명주 향기를 맡자 몸이 주체가 안 됐던 모양이군.
“가르쳐 주신 무공으로 돈을 벌었기에, 노야 드시라고 한 병 사 와봤습니다.”
인간관계는 기름칠의 연속이라 했다.
사람 사이는 이런저런 이유로 마모되기 마련이니 윤활 작업이 필수지.
특히 내 목숨줄 쥐고 무공까지 가르쳐 주는 양반이라면 더욱 매끄럽게 유지해야 하지 않겠나.
“허헛, 이런 될성부른 녀석을 봤나. 실로 가르친 보람이 있구나!”
언제 혼냈냐는 듯 헤벌쭉한 얼굴이 되어 안줏거리와 술잔을 찾는 황걸개.
금주가 풀린 주정뱅이를 보는 느낌이었다.
신풍진인으로 불리고 싶다는 양반이 왜 저리 술독에 빠져 사는 건지.
“허, 이렇게 좋은 술에 안주가 없다니. 어쩔 수 없지…….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해보거라.”
내 무림 초행 이야기를 안주 삼아 질겅이면서 술잔을 기울일 모양이다.
검남춘의 술병 마개를 ‘뚝’ 따는 황걸개.
“흘흘.”
달큰하게 발효된 곡물의 향이 코끝을 간질이는지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댔다.
“그다음 의뢰는 뭐, 실종된 아들 찾아 달라는 의뢰였는데요.”
잔 위에서 찰랑이는 투명한 액체를 호로록 들이켜는 황걸개.
깊은 풍미와 목구멍이 타들어가는 듯한 도수에 그는 ‘크으!’ 감탄사를 내뱉었다.
“좋구나, 좋아. 흘흘……. 그래서, 아들은 찾아줬고?”
또 한잔 들이켜면서 묻는 황걸개.
“그게, 알고 보니 마을은 살수로 가득한 함정이었고, 우릴 데려간 노인도 3황녀를 모시는 황궁의 동창이더라고요.”
“푸흐흡-!”
아까운 검남춘이 연무장 바닥에 뿜어졌다.
황걸개가 사례가 걸린 듯 끅끅거리며 다급히 이쪽을 바라봤다.
“……끅, 이놈아! 내가 수련 때마다 말했잖느냐. 그 음험한 황실 놈들과 엮이지 말라고!”
확실히 그런 말을 몇 번 하긴 했다만.
누가 들으면 엮이고 싶어서 엮인 줄 알겠네.
“황 노야, 저희도 속은 거예요. 글쎄, 인피면구까지 쓰고 왔더라니까요?”
옆에서 듣고 있던 일홍이가 내 억울함을 대신 풀어줬다.
“거참, 의뢰를 받아도 하필 동창과 엮이냐.”
“뭘 그렇게까지. 이미 양잠 건에서도 얽혔었는데요.”
“그거야 스치듯 엮인 거고……. 아무튼 자중해라. 황실놈들은 원체 변덕이 심해 깊이 엮이면 골치가 아프니.”
마치 겪어봐서 안다는 듯이 충고하는 황걸개.
그러고 보니 북경은 황제 명으로 개방도가 출입 불가라지?
그래서 사람들이 마음 놓고 거지를 멸시하고 핍박하는 등, 구걸해 먹기 아주 더러운 곳이었는데.
“혹시 황실과 무슨 일 있으셨어요?”
“후.”
내 질문에 말없이 60도가 넘는 백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들이켜는 황걸개였다.
저 독한 술을 취기도 안 날리고 위장에 퍼붓다니.
“……그 좀생이 같은 홍락제놈.”
대뜸 황제 욕이 튀어나오네.
보통 중원인들은 하늘에서 내린 천자랍시고 언급조차 꺼리던데.
역시 저 양반도 나 못지않게 막 나가는 면이 있다니까.
“황제랑 뭐 아는 사이세요?”
“알다마다. 노부의 술친구이자 기우(棋友:바둑친구)였으니.”
“…….”
이번엔 내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거지와 황제가 친구라니, 무슨 동화에서나 볼 법한 내용이군.
잠행을 나온 황제와 어쩌다 보니 친해지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황걸개.
“근데 왜 이렇게 된 거죠? 황도 출입 금지라니.”
“그놈의 바둑 때문에 말이다.”
둘이서 술 퍼먹다가 바둑 얘기가 나왔단다.
서로 자기 기력(棋力)이 세니 뭐니 하다가, 한판 붙게 됐다는 이야기.
평소 바둑을 도인의 덕목이라 여겨온 황걸개는 자신만만하게 승부를 받았다는데.
“서른 판을 내리 질 줄은 몰랐지. 황제 놈이 만날 때마다 그걸로 놀려대더군. 역시 허풍진인이 맞았다면서 말이야.”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화가 나는지 구겨진 얼굴로 말을 잇는 황걸개였다.
“그래서 타심통(他心通)을 발휘해 1승을 취해버렸지. 다행히도 노부는 상단전이 조금 열렸거든.”
“…….”
아니, 뭔 바둑에 저런 것까지 써먹는단 말인가.
거기다 상단전이 조금이라도 열렸다면 분명 화경을 넘어섰단 뜻일 텐데……?
“흘흘, 그러자 황제놈이 분한 얼굴로 다시 한판 붙자면서 길길이 날뛰더군.”
“그래서 어쩌셨는데요?”
“뭘 어쩌긴, 바둑 개못한다고 못 박은 다음 승부 안 받고 튀었지.”
그렇게 황제를 영원히 패자로 남겨두었다고 자랑스레 말하는 황걸개였다.
세상에, ‘너 개못하잖아’를 황제 상대로 시전하는 정신 나간 인간이 있었을 줄이야.
“그리고 얼마 뒤에 개방도 출입을 금하는 황명이 떨어지더군. 쯧쯧, 좀생이 황제 같으니…….”
그렇게 된 일이었나.
바둑 하나를 두고 한 방파와 국가의 수장들이 이리도 유치해지다니.
정말이지 가슴이 옹졸해지는군.
“잠깐만요. 그럼 우리가 거지 시절에 개고생한 것도 어느 정도는 노야 탓이라는 거네요?”
평범하게 구걸하자 비웃더라, 그래서 바짓가랑이까지 붙잡아야 했다.
참고로 개방 분타가 있는 곳에선 대놓고 거지를 비웃지 못한다. 그랬다간 빡친 개방도들이 떼거지로 몰려가 깽판을 놓으니.
“커흠, 그게 그렇게 되나?”
멋쩍은 얼굴로 내가 선물한 검남춘을 홀짝 들이켜는 황걸개.
진상을 듣고 나니 어이없을 따름이군.
나는 시선에 한심함을 담아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큼, 왜 노부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더냐.”
왜긴, 한심하니까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그놈의 바둑 한판 때문에 지금 몇 사람이 고생했는데.
하여간 누가 허풍진인 아니랄까 봐.
“어허, 어른을 그런 눈으로 보는 거 아니다…….”
하지 말라면 더 해줘야지.
나는 두 눈에 한심함을 한껏 담아 그를 지그시 노려봐줬다.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해서.
“하지 말래도!”
따악!
“악!”
결국 딱밤을 한 대 더 얻어맞고 말았다.
“가끔 보면 대장은 매를 버는 것 같아요.”
일홍이의 한심하다는 눈빛이 날아드는, 어느 겨울 초입이었다.
***
석판이 촘촘하게 깔린 은성상단의 연무장.
황걸개는 수련에 들어간 단무진을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펑! 퍼엉!
송곳처럼 공기를 꿰뚫는 두 주먹. 파도가 밀어닥치는 듯한 장법.
기기묘묘하게 교차되던 두 다리가 용천혈로 내공을 뿜어 미끄러지듯 쏘아졌다.
온몸에 실린 가속도, 발끝에서부터 쥐어 짜낸 회전력, 내공을 뿜어 펼쳐내는 백결신권의 십초식, 걸신철권(乞神鐵拳).
퍼어어엉!
공기가 압착됐다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황걸개의 귓가를 간질였다.
일류 무인도 제대로 맞았다간 뼈도 못 추릴 듯한 일격.
사뿐히 땅에 내려앉은 단무진이 다시금 미끄러지듯 보법을 펼쳐댔다.
제법 자연스러워진 권법과 보법의 연계. 선풍보의 경지가 벌써 2성에 도달해버렸나.
“허참, 얼마 전만 해도 동작에 군더더기가 가득하더니.”
실전 몇 번 겪었다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바뀔 줄이야.
거기에 별의 기운을 훔쳐 양생한 9년 내공이 더해지자 모든 동작에서 무시할 수 없는 강맹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게 무공을 배운 지 반년 만에 이뤄낸 성취.
“과연 천살성이란 건가.”
이런 성장세를 볼 때마다 잠깐씩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자신이 숙명의 극복을 돕는 것이 아니라, 최악의 살인귀 탄생을 돕고 있는 거라면?
“흠, 아니지. 그럴 놈은 아니야.”
황걸개는 제자 비스름한 것이 선물해 준 검남춘을 말없이 들이켰다.
한 번 믿기로 한 거, 끝까지 믿어보기로 했다.
아무도 챙기지 않던 꼬마 거지들을 자진해서 거둬다가 대가도 없이 먹여 살린 녀석이 아니던가.
거기에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는 듯 자신에게 별을 다스리는 심법을 전수해준 신비 도인 일월까지.
어쩌면 이 모든 게 옥경산(玉京山) 꼭대기에서 지켜보시는 그분의 안배일지도.
“그렇다면 원시천존이시여, 별을 쫓는 이들에게서 저 꼬맹이를 지금처럼 감춰주소서.”
오늘도 밤하늘에 알알이 박혀있는 108개의 흉성들.
무림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절세의 고수나, 희대의 마두들도 알고 보면 자미성이라거나 천강성, 파군성 등 흉성을 타고난 인물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러한 별내림이 출현하면 밤하늘에서 흉성이 밝은 빛을 드러내기 마련이건만.
“마치 죽어 버린 별 같지 아니한가.”
활동을 멈추고 거무죽죽하게 빛을 잃은 천살성.
언제 봐도 참 기이한 현상이었다.
단무진 저놈 안의 흉성 또한 활동을 멈추고 가사(假死)에 빠진 듯했었지.
다만, 예전에 멋모르고 들여봤다가 느낀 건데, 느리긴 해도 모종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듯했다.
그렇기에 황걸개는 좀처럼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황 노야, 저 검법 좀 알려주십쇼.”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 편하게 말을 걸어오는 단무진.
“이놈아, 검법은 갑자기 왜?”
“환관 아저씨 칼질을 따라 해봤는데, 제가 뭔갈 휘두르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단무진은 입으로 ‘슉슉’ 소리를 내며 당시의 싸움을 흉내 냈다.
“일없다.”
황걸개는 단호히 고개를 흔들었다.
피와 내장을 보면 흉성이 반응하고 살심이 솟을 텐데, 그걸 억누를 성운심법의 내력이 아직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 타구봉법 같은 거라도 좀.”
“이놈아, 일없대도.”
검보단 낫지만 그래도 무기 들고 설치다가 살기가 짙어질까 걱정이었다.
그리고 뭐 맡겨놓은 것처럼 얘기해서 괜스레 부아가 치밀기도 했고 말이다.
“아니, 노야. 일홍이한텐 이것저것 다 가르쳐 주고 있으시면서.”
“그야 쟤는 너처럼 흉악한 놈이 아니니까. 그리고 가족처럼 여기던 이에게 배신당한 불쌍한 아이가 아니더냐. 노부라도 좀 챙겨줘야지.”
용두방주 시절, 하오문주와 안면을 튼 적이 있다. 초대 문주의 정신을 이어받으려 하는 올곧은 남자였지.
만약 이곳에 개방 분타가 있었다면, 거지가 된 저 아이를 진작에 거두어 보살폈을 것인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저도 완전 불쌍한데요. 가족한테 찔리고 부모한테 버림받아 사실상 천애 고아가 된 셈인데.”
“흘흘, 노부는 버려질 부모조차 없었다, 이놈아.”
“하씨, 진짜.”
저놈이 답답해하는 걸 보면 왜 이리 마음이 고소한 걸까.
옅게 미소 지으며 아직도 정신 수양이 부족하단 생각을 떠올리는 황걸개였다.
“정말 궁하다면, 기초적인 봉법 정도는 가르쳐줄 수도 있지.”
오척 정도 되는 봉만 들어도 주먹질과는 차원이 다른 거리를 장악할 수 있다.
잘만 익힌다면 손발의 연장으로서 검법 못지않은 위력을 낼 수도 있지.
“오, 정말로요?”
“대신 조건이 있다.”
이럴 줄 알았다며 금세 입을 삐죽거리는 단무진.
“단전에 십오 년 내공을 먼저 쌓거라. 그리하면 내 가르침을 베풀어주지.”
일전에 황걸개는 녀석의 내부에서 원귀들을 고문하고 있던 어떤 끔찍한 존재를 보았다.
뭔진 몰라도, 저런 것이 세상으로 나와선 안 된다. 그리고 이를 막으려면 결국 선업을 쌓고 스스로를 지킬 항마의 내공이 필요한 법.
“십오 년이요? 흠, 빨리 성취 갈무리하고 다음 의뢰 찾아야겠네.”
그래, 저 녀석은 한시바삐 움직여 줘야겠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저흰 이제 흐름에 올라탔거든요.”
자신감을 표출하며 같은 정급 낭인 일홍의 어깨를 턱 내리치는 단무진.
“응핫.”
일홍이 요상한 소리를 냈다.
꾀죄죄한 시절을 같이 보내 자신도 모르게 편한 남동생 정도로 여기고 있는 것인지.
뭐 아무튼, 선행에 대한 기준이 느슨한 녀석이니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은근 기대를 걸어보는 황걸개였다.
***
북경에서 멀지 않은 숲.
나와 일홍은 새 의뢰를 받고서 여행길에 오른 참이다.
산속에서 무슨 약재(藥材)를 찾는다며, 손을 보태는 의뢰라던데.
의뢰인 중에 한 명이 젊은 여자란다.
아무래도 의방의 의녀거나, 아버지의 약초를 찾는 효심 깊은 자식 정도가 아닐까 하고 지레짐작 해봤다.
하지만 현장에 가서 맞닥뜨린 의뢰인은 예상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
“하아? 뭐야 이 꼬맹이들은?”
녹색 무복, 붉은 기가 감도는 도도한 눈꼬리, 단련된 손끝과 옷 속에 뭔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나보다 키가 작은 여인.
“뭐? 내가 약초를 찾아? 이건 좀 웃기네. 내가 찾는 건 한 방울로도 백 명을 능히 죽일 극독(劇毒)이거든?”
또다시 험난한 의뢰가 될 것 같은 이 느낌.
“……감운 회주, 진짜 자꾸 이러실 겁니까?”
이 양반, 그렇게 안 봤는데 의뢰픽이 진짜 똥촉이다.
34화 사천에서 온 여인
낭인회 북경 지부.
일 있는 낭인은 전부 나갔고 한량 같은 놈들만 남아 싸구려 탁주를 퍼마시는 곳.
기다란 흉터가 인상적인 중년인이 반짝이는 은전 한 닢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기묘하단 말이지. 분명 흉터가 욱신거렸었는데.”
은전의 정체는 신입 낭인 둘이 주고 간 의뢰 중개료.
불길했던 그의 직감과는 다르게 녀석들은 두 번째 의뢰도 간단하게 해결하고 돌아왔다.
혹시나 싶어 의뢰 도중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자 잠시 멈칫하더니 ‘아무 일도 없었소……!’라고 외치던 단무진이란 소년.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인가…….”
감운은 시큰거리는 얼굴의 흉터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비 내리기 전에 관절 쑤시는 노인들처럼, 무언가 불길한 징조를 느끼면 이상하게 욱신거려왔던 그의 큼직한 흉터.
제법 적중률이 높았던 터라 낭인으로서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데.
“쯧, 아무래도 늙으니 감이 떨어진 모양이군. 그 녀석들에겐 잘된 일인가?”
저번과 마찬가지로 의뢰를 보내놓고 나서야 뒤늦게 욱신거리기 시작한 흉터였다.
하지만 저번 의뢰를 멀쩡히 해결하고 돌아온 걸 보면 이런 걱정도 이제 기우란 거겠지.
다른 말로는 불운이 피해간다 알려진 거패도 감운도 이제 한물가버렸단 소리.
“클클, 끗발 떨어지기 전에 은퇴하길 잘했구먼.”
그러니 불길하다는 듯 욱신거리는 이 통증도 분명 착오일 것이다.
아마 이번 건도 별일 없이 돌아오겠지.
감운은 안심하며 여타 낭인들처럼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술맛 좋고.”
***
눈앞에 키는 작지만 무시 못 할 존재감을 뿌리는 소녀가 서 있었다.
백지장처럼 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눈매, 오뚝한 콧날과 석류알처럼 붉은 입술.
그녀는 암녹색으로 물든 뾰족한 손톱으로 우릴 가리켜왔다.
“능삼, 내가 낭인 부르랬지 언제 애새끼를 부르랬어.”
실망이 진하게 배인 말투로 누군가를 꾸짖는 모습.
그러자 수풀 사이로 망태기를 둘러멘 남자 한 명이 걸어 나와 대꾸했다.
“허리춤의 낭인패를 보아 낭인이 맞는 것 같습니다만.”
“……응? 진짜로? 이딴 꼬맹이들이?”
소녀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우리를 위아래로 훑었다.
거참 각박한 세상이군.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애들을 배려해 주진 못할망정.
“지도 비슷한 꼬맹이면서.”
내 투덜거림을 들었는지 두 눈에 쌍심지를 켜는 그녀.
“하? 꽃다운 십팔 세 여인에게 뭐가 어째?”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아무리 무림에 기인이사가 많다지만 저런 얼굴과 키로 성인임을 주장하다니?
“크흠, 당여혜 아가씨는 어릴 때 독을 잘못 먹어서 이렇게 됐을 뿐, 방년 십팔 세 여인이 맞으십니다.”
내가 반신반의한 얼굴로 서 있자, 앞으로 나서 오해를 풀어주는 능삼이란 아재.
거참 어떻게 되먹은 집안이길래 애한테 보약이 아니라 독약을 먹인단 말인가.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일홍이가 돌연 새된 비명을 질렀다.
“당여혜라면……. 설마 독조산혈(毒爪産血) 당여혜?!”
이제보니 별호도 있는 모양이다. 휘둥그레진 일홍이의 눈.
“흥, 그래도 한 놈은 보는 눈이 있는 모양이네.”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 주자 당여혜란 여인은 콧대가 우쭐해진 듯했다.
꼬맹이 소리에 구겨졌던 얼굴을 살짝 펴는 그녀.
“일홍아, 그게 누군데.”
“아이참, 별호 외워두라니까요, 사천당문의 둘째 여식이자 무호채 녹림도 수십을 한 줌의 혈수로 만들었다는 조법(爪法)과 독공(毒功)의 고수를 말하는 거잖아요.”
무림에 고수가 깨알같이 많은데 그걸 어찌 다 머리에 담아두나.
그래도 사천당문만큼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무협지 같은 데서 몇 번 봤거든.
독공을 주로 쓰며 혈족과 은원관계를 중시하는 데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싸가지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렇구나, 저게 다 큰 어른이었어.”
무림 혹은 인체의 신비라고 할까.
보이는 걸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니 낭인분들, 좀 전과 같은 발언은 곤란합니다. 아가씨는 아닌 척하지만 실은 꼬맹이 같은 외견을 엄청 신경 쓰고 계시거든요.”
아가씨께서 가장 긁히는 부분이라며 조심해달라 말해오는 능삼.
“……이 시발!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때론 과한 배려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는 법이다.
속마음이 까발려진 당여혜가 귀를 붉힌 채 능삼의 등을 발로 퍽퍽 찼다.
“억, 아픕니다, 아가씨.”
“닥쳐! 너 같은 놈은 좀 아파도 돼! 이 쓸모없는 몸종이!”
중년인 학대의 현장이었다.
다만 별호를 가진 고수가 세심하게 힘 조절을 하는 걸 보아 그냥 허물없는 사이인 모양.
“옛날엔 이런 되바라진 말을 하는 분이 아니셨는데, 독 때문에 괴팍해지셔서 이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이 능삼은 걱정이 큽니다, 아가씨.”
“지랄! 마음에 있는 소리니까 주둥이 좀 닥치라고!”
저건 독 때문에 괴팍해진 게 아니라 그냥 싸가지가 없는 게 아닐런지?
주변에서 애 취급하면서 놀려대니 삐뚤어진 거지 뭐.
“끄응, 아무튼 저는 아가씨를 날 때부터 모셔 온 몸종 능삼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단무진입니다.”
“일홍이라 불러주세요.”
우리는 그와 포권을 나눴다. 어째 이쪽이 더 이야기하기 편한 느낌이다.
“그래서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약재를 찾기 위함이라고 회주에게 들었다만, 느닷없이 극독을 찾는다니.
“아까 들었잖아? 독물(毒物) 찾으러 왔다고. 귓구멍 막혔어?”
거 골수에 독이 찼나. 말하는 싹퉁바가지 하고는.
극독을 찾을 거면 운남의 정글이나 뒤져대란 말이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난리인지.
“여기 산맥에 특이한 버섯 종류가 자라고 있을 거거든.”
이유는 모르겠지만 꽤나 확신하는 말투였다.
채집물을 담는 망태기를 우리 쪽으로 툭 던지며 말을 잇는 당여혜.
“버섯의 이름은 흑송능(黑松膿). 뿔처럼 솟은 버섯이야, 새까맣고, 겉에는 진물이 흐르고 있지.”
색깔만 빼면 묘사가 꼭 건드리기만 해도 생사를 헤맨다던 붉은사슴뿔버섯을 듣는 것만 같군.
혹시 있을지 모를 가문의 추적을 피하는 길에, 배가 너무 고파 이것저것 집어먹었지만, 저렇게 대놓고 수상한 버섯만큼은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
황천으로 가는 지름길이니까.
“확실해요? 북경 근처에서 그렇게 생긴 버섯은 못 봤는데.”
“어, 거의 확실해. 혈야저(血野豬)가 몇 달 전, 요 근방에서 출몰했단 소식을 들었으니까.”
그녀가 설명하길, 혈야저란 독초나 독충, 독버섯 같은 독물을 먹으면서 자란 시뻘겋고 괴물 같은 멧돼지를 말한단다.
배를 갈라보면 높을 확률이 독단(毒丹)이 들어 있을 정도니, 사실상 영수(靈獸)에 가깝다는 존재.
“놈이 흑송능을 엄청 밝히거든. 그러니 머무른 곳을 알면 흑송능의 위치도 대략 알 수 있다는 거지.”
훈련된 돼지를 풀어 값비싼 송로버섯을 찾아내는 원리 같은 건가.
“근데 독버섯 줍다가 그 혈야저란 놈과 마주치면 어떻게 합니까?”
영수와 드잡이질이라니, 신입 낭인이 맡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선업도 별로 안 쌓일 것 같은데.
“그럴 일 없어. 놈은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거든. 지금쯤 떠나고도 남았지.”
이것저것 다 뜯어먹은 다음 쿨하게 다음 장소를 찾아 방랑하는 녀석이란다.
그리고 덩치가 큰 대신 느리니까 경공으로 튀면 된다나.
일홍이와 자신의 몸종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말이로군.
“그것보단 버섯 캐다가 들짐승, 산적 마주칠 거나 걱정해. 자칭 낭인이니까 그 정도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겠지?”
“예예.”
저번 의뢰에서 산적이나 비적 같은 놈들 수십이나 때려눕힌 나다.
“그럼 빨리 망태기 들고 능삼한테 붙어서 손이나 보태. 오늘 할 일 많으니까.”
그렇게 때아닌 버섯 찾기 의뢰가 시작됐다.
겸사겸사 독초나 독충의 생김새도 말해 주며 채집할 수 있으면 채집하라고 말해주는 당여혜.
개수나 마리당 돈을 짭짤하게 쳐주겠단다.
“아, 참고로 흑송농은 발견해도 만지지 마라? 그거 건드리면 독을 뿜거든.”
진짜 그냥 집에 가버리고 싶은 의뢰였다.
이번에 돌아간다면 내 반드시 회주의 똥촉을 지적하고 말리라.
***
전생에선 해결사 노릇을 하며 정말이지 별별 일을 다 겪어 봤었다.
밤을 새는 잠복수사에 시체 찾는다고 호수에 다이빙도 해보고, 제조 회사에 위장취업을 한다든가 일회용 문신으로 무서운 삼촌인 척 일진들을 혼내준 적도 있고.
어쩔 땐 탐정 같기도 했고, 어쩔 땐 뭐 이런 개 같은 잡부가 다 있나 싶은 기분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중원에서 낭인질을 하면서 그 기분을 똑같이 한번 느껴보고 있었다.
“때아닌 산나물 채집인가. 별짓을 다 해보네.”
그래도 일신의 무력을 지닌 정급 낭인인데 말이다.
명문세가 사람들 앞에선 그냥 부려 먹기 편하고 신경 안 써도 되는 잡부쯤 되는 듯했다.
이 일에 입문할 때만 해도 매번 피 냄새로 가득한 그런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는데.
채집하느라 허리가 뻐근한 것만 빼면 모든 게 평화로운 듯했다.
“그 죽순 같은 거 말고 옆에 있는 게 독초라고. 멍청아.”
아까부터 입이 걸은 저 당가 여인 하나만 제외하면 말이다.
누구는 땅꾼처럼 이곳저곳 쑤셔보고 채집에 열중인데, 뒷짐 진채로 터벅터벅 따라오면서 이러쿵저러쿵 지적질만 해대고 있는 이번 의뢰주.
나는 독초를 한 움큼 따서 망태기에 집어넣으며 일홍의 어깨를 툭툭 쳐봤다.
“일홍아, 저 인간 무공 세냐?”
“예, 엄청 세요. 내력을 외부로 발현 가능한 경지에, 저 암녹색 손톱 보이시죠? 저게 칠지독(七指毒)인데 스치기만 해도 피를 토하면서 죽는대요.”
하, 시발.
깝치지 말아야지.
나는 성질을 죽인 채 잠자코 나물이나 버섯 같은 것을 뽑아다가 망태기에 집어넣었다.
성실하게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수북하게 채워진 모습.
“어, 대장. 이거 표고버섯 아니에요?”
거지 출신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을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반응하는 성질이 있다.
다 살아남기 위한 버릇이다.
“그거? 표고는 아닌데 먹을 수는 있는 거야. 한때 내 주식량이었어.”
옅은 갈색에 느타리버섯과도 비슷하게 생긴 녀석.
쫄쫄 굶주리며 북경으로 향하던 길에, 한 줄기 빛이 되어준 귀중한 영양분이다.
이것과 이름 모를 열매를 따 먹고 강물을 퍼마시면서 발걸음을 이어 나갔었지.
“바깥엔 먹을 게 의외로 참 많네요.”
하오문주의 딸이자 도시 소녀 일홍이가 사뭇 놀란 얼굴로 그렇게 말해왔다.
“그치?”
돈이 없으면 사막이나 다름없는 도시와는 다르게 산속에는 먹을 만한 자연 채집물이 많긴 했다.
대신 이제 호랑이, 곰 같은 산짐승이 존재했고, 사람을 수렵하는 산적, 비적 같은 놈들도 똑같이 많아서 문제였지.
아무튼 발견한 김에 몇 개 따가서 먹을까?
“야, 미쳤어? 그거 독버섯이야. 내려놔.”
그런데 평범하게 생긴 버섯을 뚝뚝 따고 있자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당여혜.
“……이거 먹어도 되는 버섯인데요?”
“뭔 개소리야. 그거 화경(火鏡)버섯이잖아. 사약에도 들어가는 재료라고.”
그녀는 다량 복용 시 사지와 내장이 마비된다며 내가 쥔 버섯을 툭 쳐서 떨어트렸다.
아니, 세상에. 내가 식용인 줄 알고 꾸역꾸역 처먹어왔던 게 실은 독버섯이었다고?
어쩐지 삼킬 때마다 붉은 기운 같은 게 눈앞에서 아른거리더라니.
그땐 그 기운이 뭔지도 잘 몰랐고, 복통도 없었던 터라 개꿀을 외치면서 냅다 퍼먹었었는데.
“아까 뒤에서 들었는데, 이 버섯을 얼마만큼 먹었다고?”
“어, 당시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인 상황이라, 보이는 족족 다 뜯어먹었는데요?”
눈에 보이는 대로, 손에 잡히는 대로. 뭘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터라 나무껍질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다 입에 욱여넣었었다.
“……미쳤네, 너 대체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그러게 말이다.
사약의 재료를 마구 퍼먹고도 멀쩡하다니. 나 좀 대단할지도.
“역시 대장이에요. 뱃속에 걸신이 있는 게 분명해.”
“일홍아, 칭찬 맞지?”
아무래도 머릿속에 기생한 천살성, 그게 날 살린 듯했다.
내가 죽으면 자기도 수백 년 동안 다음 천살성을 손만 빨면서 기다려야 하거든.
그래서인지 이 육신의 죽음을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느낌.
동시에 의식의 강탈 또한 호시탐탐 노리면서 말이다.
“허, 너 되게 신기하네……. 아무렇지도 않았다니.”
그리고 갑자기 옆통수를 지져대는 강렬한 시선.
독공의 영향인지 녹빛이 감도는 두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너 혹시 다른 의뢰 안 해볼래? 간단한 건데, 가끔씩 내가 만든 독을 먹고 그 느낌을 말해주면 돼.”
“아뇨. 괜찮습니다”
생글거리면서 심상치 않은 제안을 해오는 당여혜.
무언가 재밌고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듯한 눈빛이었다.
“보수는 두둑이 줄게. 부족함 없도록.”
“필요 없습니다.”
“아깐 독버섯을 캐먹을 정도로 궁핍하다더니?”
“이제부터 그냥 가난하게 살려고요.”
이 미개한 중원에서 임상시험을 하라고?
그것도 사람을 거리낌 없이 한 줌의 혈수로 만드는 당문 여고수의 개인적인 독 임상시험?
아무리 천살성이라도 이건 얼씬도 해선 안 될 부류였다.
“걱정 마, 독조산혈의 이름이 있지, 죽이지는 않아. 이 누나만 믿으라니까?”
“일 없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다인가. 그녀처럼 나도 무슨 부작용을 겪게 될지 모르는 일인데.
“되게 비싸게 구네. 닳는 것도 아닌데.”
볼을 긁적이며 궁시렁대는 그녀.
그러니까 닳는다고 이 인간아.
나는 양팔로 내 몸을 감싼 채 나보다 한참 작은 그녀로부터 한걸음씩 물러났다.
“……가씨! 당여혜 아가씨!”
그때, 초목을 뚫고 들려오는 어떤 목소리, 그리고 다부진 발소리.
“뭐야, 무슨 일이야?”
“헉헉, 흑송농이 자생 중인 곳을 찾았습니다. 어서 가시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당여혜의 충실한 몸종이자 나의 구원자인 능삼이었다.
“칫, 알았다고.”
35화 붉은 멧돼지
산과 산 사이, 움푹 팬 그늘진 골짜기.
뿔처럼 생긴 검은 버섯들이 여기저기 우후죽순처럼 솟아 있었다.
“뭐야, 예상보다 더 많잖아?”
횡재했단 얼굴로 버섯 자생지를 바라보는 당여혜.
한 송이만 있어도 천 가지 독에 쓸 수 있다는 게 흑송능인데, 그걸 열 송이 넘게 발견하다니.
그것도 탐욕스러운 혈야저가 지나간 뒤에도 말이다.
“이 정도면 다른 곳은 둘러볼 필요도 없겠군요, 아가씨.”
능삼이 망태기를 털썩 내려놓으며 잘됐다는 듯 말했다.
“능삼, 봤지? 역시 깊은 뜻을 품은 이에겐 천운이 따르는 법이라니까.”
“오라버니 엿 먹이겠다는 게 어째서 깊은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아씨,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대도.”
사천당문에도 여러 속사정이 있는 모양.
나는 간질거리는 귀를 긁적이며 흑송능이란 것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살펴봤다.
검은색 진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모습. 주변 식물이 싹 다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주기적으로 독 포자 같은 걸 뿜는다던데, 그 영향인 걸까.
아무튼 건드리면 다 뒤질 거라는 경고를 온몸으로 연출하고 있는 불길한 버섯.
“저거 진짜 뜯게요? 흉악하게 생겼는데.”
나는 불안이 싹튼 얼굴로 물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불발탄을 마주한 기분이다.
“멍청한 소리 마. 우리가 왜 이곳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는 기어이 건드릴 모양.
“건드리면 독 뿜는다면서요.”
“괜찮아, 다루는 법을 아니까. 나 독조산혈 당여혜야.”
당여혜는 가슴을 툭툭 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꼭 등신 짓하기 직전에 ‘괜찮아, 안 죽어’ 하는 느낌이라 더 불안해지는데.
“능삼 아저씨, 저분 이전에도 흑송능을 다뤄본 적이?”
“아마 이번이 처음이시지요.”
이런 싯팔 근자감이었나.
나는 능삼의 설명을 듣자마자 일홍이를 데리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자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터트리는 당여혜.
“하, 얘 표정 봐라? 독물(毒物) 같은 건 날 때부터 다뤄왔거든? 이 몸이 이깟 버섯 하나에 쓰러질까?”
같잖다는 목소리였다. 동시에 독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자부심 같은 것도 느껴졌다.
“그냥 기다란 도구로 멀리서 뜯으면 안 돼요?”
“겁나냐? 이런 건 두 손으로 세심하게 안 다루면 가치가 확 떨어지거든?”
피식 웃으면서 내 불길함을 무시한 채 버섯으로 향하는 당여혜.
그녀는 기세를 일으키더니 곧 양손에 희끄무레한 수기(手氣)를 둘렀다.
“와, 대장, 보세요. 저게 녹림도를 한 줌의 혈수로 만든 맹옥조(猛玉爪)에요.”
옆에서 지켜보던 일홍이의 살벌한 설명.
손을 맹금류의 부리처럼 날카롭게 오므리더니 버섯 근처로 팍! 꽂아 넣는 모습.
벽옥처럼 하얀 손이 딱딱한 지면을 두부처럼 가르며 파고 들어갔다.
“와, 고수는 손으로도 삽질을 하네.”
무림에선 노인과 아이를 조심하라 했던가, 그 격언에 깊이 공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골목에서 마주친 술 취한 늙은이는 알고 보니 개방 방주고, 의뢰 때문에 만난 건방진 꼬맹이는 당문의 여고수라니.
하여간 살벌한 곳이다, 중원무림은.
푹. 푹.
그녀의 손이 버섯 주변을 연신 찌르고 파냈다. 버섯을 건드리지 않은 채 흙째로 들어 올릴 생각인 모양.
“봤지? 다 계획이 있거든. 독물에 관해선 나만큼 잘 아는 년이……. 어?”
그때, 가장 들려선 안 될 단어가 들렸다.
흙 속에서 뭔가 건드렸는지 어느새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표정.
“아씹, 설마 실뿌리 있는 종류…….”
푸쉬익!
흥송능이 바싹 쪼그라들며 검은색 연기를 뿜어냈다.
‘꺼윽!’ 소리를 내며 풀썩 쓰러지는 당여혜.
“아가씨이이!”
능삼이 깜짝 놀라 튀어 나갔고 나는 당황한 일홍이 옆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왠지 이렇게 될 거 같더라.
“돌겠네, 진짜.”
***
불의의 일격과 함께 말라비틀어진 흑송능.
능삼은 품에서 꺼낸 해독단을 황급히 당여혜 입에 흘려 넣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쿨럭, 싯팔…… 방심했어. 천하의 독조산혈이 이런 실수를…….”
피 섞인 기침을 연신 토해내며 해독단을 질겅질겅 씹는 그녀.
바닥엔 시커멓게 죽은 독혈이 흥건했다.
“…….”
그러다 시원찮게 쳐다보는 내 시선을 읽었는지 이쪽을 홱 돌아보는 당여혜.
“……뭐, 왜. 어쩌라고 왜 그런 눈깔로 날 쳐다봐?”
아무 소리 안 했는데 혼자 찔려서 지랄이다.
하여간 독 퍼먹는 족속답게 성깔도 까칠하군.
“오해세요, 우리 대장 눈깔은 원래 이래요.”
어떤 고수 앞에서든 눈깔을 꼿꼿이 치켜뜬다며 나를 비호해주는 일홍이었다.
근데 비호가 맞나 저거.
“아가씨, 호흡을 가라앉히시고 천천히 독을 몰아내십시오. 그러다 기혈 뒤틀리십니다.”
“끄응, 완전히 몰아내려면 반각(半刻)은 걸리겠어.”
“그만 입 여시고, 회복에 전념하십시오.”
회복을 돕기 위함인지 그녀의 등 뒤에 털썩 앉아 혈도 몇 곳을 쿡쿡 찔러대는 능삼.
나와 일홍은 독초가 가득한 망태기와 봇짐을 바닥에 내려놨다.
아까 뭔가 불안하다 싶었는데, 멀찍이 물러나 있길 잘했군.
수많은 의뢰인을 겪으며 터득한 위기 탐지 능력이다.
“일홍아 봤느냐? 이 몸의 선견지명을.”
“이번엔 뭐…… 인정해드릴게요.”
그래도 독을 다루는 무인답게 중독을 침착하게 처리해내고 있는 당여혜의 모습.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어 우린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봤다.
부스럭, 빠득.
그런데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수풀과 가지 꺾이는 소리.
“……?”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짐승 한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적토마처럼 붉게 물든 털과 우뚝 솟은 어금니, 오금이 절로 떨려오는 흉포한 안광까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거대 살인 멧돼지가 흑송능 자생지에 발을 들인 우리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대장, 엿 된 것 같은데요.”
마른침을 삼키며 현 상황을 정확히 분석하는 일홍.
저쪽의 위기를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불길이 이쪽까지 옮겨붙어 버렸다.
“아니, 싯팔! 혈야저 여기 없을 거라며!”
당여혜를 향한 원망의 목소리.
이게 어딜 봐서 하류 낭인이 맡을 만한 의뢰란 말인가.
인생에 무슨 마(魔)가 낀 것 같군. 혹시 이것도 내 안에 깃든 불길한 흉성 때문일까.
“뀌에엑-!”
정신이 번쩍 드는 괴성이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거대 괴수가 땅을 박찼다.
엄청난 속도로 짓쳐 드는 검붉은 그림자. 나는 즉시 일홍이의 가슴팍을 걷어차 혈야저의 공격을 피해냈다.
“일홍……! 튀어!”
손자병법에도 답이 없으면 튀는 게 맞다고 적혀 있다.
나는 일홍에게 뛰라고 외친 뒤 독초가 잔뜩 든 망태기를 짊어졌다.
아직 경공이 능숙하지 못한 일홍이를 구하기 위함이다.
크킁크킁.
독 냄새를 쫓아온 게 맞는지 커다란 콧구멍을 연신 벌렁거리는 혈야저.
거친 숨을 내뿜는 녀석과 두 눈이 마주쳤다.
빳빳한 털과 두꺼운 가죽, 주먹을 꽂아 넣어도 별 타격이 없을 듯한 거대한 몸뚱어리까지.
영화에서나 볼법한 괴물 멧돼지다. 무슨 중형 자동차 한 대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놈을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상대해야 한다니.
“야, 꼬맹이! 독 몰아낼 테니까 어떻게든 반각만 버텨 봐!”
멀리서 당여혜가 속 편한 소리를 외쳐왔다.
오는 길에 혈야저가 튀어나와도 자기가 상대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내더니.
정작 무력이 필요한 순간이 오자 혼자 꼬꾸라져 있는 어처구니없는 여무인.
“염병, 그게 쉽겠냐고!”
“뀌엑!”
콧김을 내뿜던 혈야저가 다시 한번 땅을 박찼다. 한 줄기의 돌풍처럼 치닫는 육중한 돌진.
나는 발끝의 내공을 격발해 몸을 튕긴 뒤 땅 위를 굴렀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공격. 놈의 빳빳한 털에 긁혀 피부에 상처가 났다.
쿵!
내 등 뒤에 있던 주목나무를 큼직한 어금니로 들이받는 소리.
엄청난 충격에 나무가 휘청이더니 이내 허리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꺾였다. 후드득 하고 온 사방에 비산하는 나뭇잎.
저기에 제대로 치였다간 뼈도 못 추리겠군.
“뀌익!”
놈은 헛방질 했단 생각에 어금니를 뽑고 재빨리 뒤돌았다.
예로부터 시뻘건 놈은 세배 빠르다더니, 덩치에 비해 무척이나 민첩한 움직임.
“존나 못생긴 새끼.”
누린내 나는 숨이 훅훅 여기까지 전해져왔다.
누렇고 찐득한 이빨을 쩍 드러내며 괴성을 지르는 혈야저.
“뀌에에엑-!”
저번보다 더 속도가 실린 돌진이었다. 압도적인 체구와 속도로 눈 깜짝할 새에 코앞까지 치달아 있는 녀석.
“헉!”
투로나 살기를 읽을 새도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예측했다는 듯 땅을 한 번 더 박차서 경로를 뒤트는 혈야저.
피할 길이 없다. 눈앞에 삐쭉 솟은 멧돼지의 어금니가 보였다.
“이런 십.”
퍼억-!
망치가 고깃덩어리를 후려친 듯한 소리가 났다. 다름 아닌 내 몸에서.
부웅-
온몸에 가해진 묵직한 충격.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십 척 가까이 튕겨 나갔다.
시야가 데굴데굴 정신없이 굴렀다. 갈비뼈가 거의 다 으스러졌는지 숨쉬기도 쉽지 않았다.
“끅, 시발거…….”
***
시체처럼 바닥을 나뒹구는 단무진의 모습.
“안 돼! 대장……!”
일홍은 여자애 같은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다음 목표를 정해진 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혈야저.
놈은 안광을 피워 올리며 금방이라도 뛰어들 듯 제자리에서 바닥을 긁어댔다.
“뀌익!”
그 힘이 어찌나 셌던지 발굽이 오갈 때마다 움푹 패이는 땅바닥.
“아가씨, 해독은 아직입니까?!”
“좀 더…… 큭, 시간이 필요해……!”
몸 안에 독을 품은 채로 내력을 끌어올렸다간 자칫 기혈이 뒤틀리고 폐인이 되는 수가 있었다.
그래서 촌각의 시간이라도 벌었으면 좋겠는데, 눈앞의 괴수는 콧김을 내뿜으며 지금도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때, 혈야저의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소년의 목소리.
“끄어어, 이 찢어 죽일 삼겹살 새끼가……! 감히 사람을 쳐?”
반쯤 죽었다고 여겼던 단무진이 어느새 몸을 일으킨 채 검붉은 멧돼지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쟤는 무슨 맷집이…….”
놀라서 동그랗게 변한 당여혜의 두 눈.
좀 전의 돌진은 자신이 맞았어도 생사를 장담하기 힘든 것이었는데, 어찌 된 연유인지 저 소년은 다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외공도 익히지 않은 정급 낭인이 어떻게?”
“아가씨,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좋으니까……!”
등뒤의 능삼이 힘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간신히 일어난 단무진 또한 의식만 멀쩡할 뿐이지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듯했다.
“뀌엑!”
이번엔 확실하게 끝내 주겠다는 듯 콧김을 내뿜는 혈야저.
“거기 너! 쿨럭, 내 품에 있는 암기 꺼내서 저놈 쏴버려!”
당여혜는 독혈을 한 번 더 게워낸 뒤, 일홍이라는 곱상한 꼬맹이를 다급히 불렀다.
“네? 이걸 어떻게?”
당문의 기술력이 담긴 원통형 장치를 쥐고서 어찌할지를 물어오는 일홍.
“뒷부분의 고리를 잡아당겨!”
일홍은 설명대로 혈야저를 조준한 뒤 뒷부분의 고리를 강하게 잡아당겼다.
펑-!
그러자 폭발음과 함께 쏘아지는 길쭉한 무언가.
“꿰에엑!”
멀지 않은 곳에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
시야가 온통 붉었다.
안압이 터져서가 아니라 생명의 위기에 천살성이 발작해대고 있기 때문이었다.
펑-!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 퍼진 폭음.
뾰족한 비침 열 개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와 혈야저 머리통을 쑤셔댔다.
푸푸푹!
“꿰엑!”
개중 하나는 눈알 근처에 박혀 버린지라 발작하듯 날뛰는 곰만 한 녀석.
이쪽은 조금 전 충격으로 온몸이 아작난 것 같은데, 겨우 비침 몇 개 꽂혔다고 저 엄살이라니.
“끄읍. 끄으.”
그사이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처럼 붉은 기운에 의해 ‘우드득’ 맞춰지는 팔뼈.
언제 겪어도 끔찍한 통증과 소리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손아귀.
“넌 이제 뒤졌다, 십새야.”
난 팔뼈가 맞춰진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놈에게 뛰어들었다.
“뀌익?!”
온몸이 욱신거려도 정신만큼은 복수심으로 또렷한 느낌.
나는 녀석의 등위에 로데오하듯 올라타 눈알 근처에 꽂힌 비침을 뽑아냈다.
그리고 빗나갔던 비침을 힘이 실린 손길로 다시 한번 정확하게 꽂아넣어줬다.
“꿰에에엑-!”
그러자 산맥이 떠나가라 괴성을 지르며 지랄발광을 시작하는 혈야저.
나는 한 손으로 놈의 질기고 빳빳한 털을 고삐처럼 움켜쥐었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는.
푹! 푹! 푹!
“뒤져 이 새끼야!”
그나마 공격이 통하는 눈알을 집요하게 찔러댔다.
날카로운 비침 끝이 푹하고 들어올 때마다 벼락 맞은 듯 온몸을 사정없이 흔드는 녀석.
“뀌익! 꿰이이익!”
또다시 멱따는 소리가 산맥에 울려 퍼졌다.
피칠갑을 한 인간과 멧돼지의 처절한 사투. 놈은 어떻게서든 나를 떨어트릴 생각인지 허리를 미친 듯이 퉁겨댔다.
하지만 내가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자 결국 근처 바위에다 머리를 냅다 들이받아 버리는 녀석.
“큭!”
나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뒤통수부터 떨어졌는지 빙빙 도는 시야. 그리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혈향.
“꿰에엑!”
분노한 혈야저가 한쪽 눈으로 피를 뚝뚝 흘리며 달려왔다.
내 숨통을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끝장낼 기세. 하지만 몸이 더는 움직이질 않았다.
그렇게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려는 찰나.
“야, 꼬맹이. 고생했어.”
앳된 목소리, 귀기 어린 안광.
수기가 맺힌 다섯 손가락이 맹금류의 부리처럼 혈아저의 정수리를 뚫고 들어갔다.
푸욱!
36화 수상한 그림꾼
암녹색 손톱이 살과 가죽, 뼈를 뚫고 혈야저의 머리통을 헤집었다.
하얀 손목을 타고 흐르는 뇌수. 부들부들 떨다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하는 시뻘건 멧돼지.
“와, 무슨.”
그 단단했던 머리통이 단 한 수에 두부처럼 으깨지다니.
나는 눈앞의 조막만 한 여인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훗, 이제야 이 몸의 위대함을 알아본 눈빛인데? 마음에 들어.”
그러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우쭐거리는 당여혜.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던데, 왜 내 주변엔 저런 성격 나쁜 고수들만 꼬이는 건지.
어쩌면 살업에 절여진 인간만을 끌어당기는, 천살성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애송이, 너도 용케 반각을 버텼으니, 이 독조산혈 당여혜가 특별히 인정해 줄게.”
칭찬을 저렇게 거만하게 할 수도 있는 거였군.
들어도 전혀 기쁘지가 않다니, 저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이해해 주십쇼, 아가씨가 남을 칭찬해 본 경험이 별로 없으셔서……. 사실 저 정도면 거의 극찬에 가까운 표현입니다.”
그리고 옆으로 다가와 모시는 분의 발언에 주석을 달아 주는 능삼.
실로 프로 몸종다운 움직임이었다.
“하아? 누가 누굴 극찬했다는 거야, 어이없네.”
홍옥처럼 붉은 눈꼬리를 치켜올리며 틱틱대는 당여혜.
“아까는 저 애송이가 자기 목숨을 구했다면서 감탄하셔놓고선.”
“그건 그냥 독 기운에 헛소리를……. 아, 자꾸 짜증 나게 엉터리 독심술 들이밀래?!”
앞에선 거만 떨더니 뒤에선 그런 기특한 소리를 했단 말인가.
“엉터리라니요. 아가씨의 순수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이 능삼은 압니다. 좀 전에 하신 칭찬이 마음에서 우러난 진심이란 것을……!”
옹알이 시절부터 모셔 왔다며 자신감을 드러내는 사천당문의 몸종.
“아, 쫌! 닥치라고!”
당여혜의 조막만 한 주먹이 넓찍한 능삼의 등짝에 날아들었다.
퍽퍽퍽!
“아픕니다, 아가씨.”
“뒤져! 아주 뒤지라고 새꺄!”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데, 키가 안 맞아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능삼처럼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일홍이.
“대장, 몸은 괜찮아요? 아까 살벌하게 치이시던데.”
“괜찮아, 이 정도로는 안 죽어.”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역시 얘밖에 없나 보다.
“가끔 보면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칼에 찔렸을 때도 그렇고……. 어쩜 이리 튼튼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몸 여기저기를 툭툭 건드려보는 그녀.
“아파 인마. 안 그래도 온몸이 욱신거리는데.”
“앗, 죄송요.”
통증은 날 것 그대로였다. 다만 내구성만큼은 일홍의 말대로 외공을 극한으로 단련한 수준.
이건 내 안에 인간을 살인 병기로 만드는 어떤 별이 깃들어서 그런 거겠지.
“아까 너였지? 눈깔 근처에 비침 꽂은 거.”
“네, 제가 쐈어요.”
“잘 쏘더라. 덕분에 살았다.”
“에이, 저희가 대장 덕분에 산 거죠.”
내 앞에서 배시시 웃는 곱상한 미소년.
때 빼고 광내니 그냥 아주 뭘 해도 자연스럽게 화보가 되는 미모였다.
그리고 우리가 실실거리는 사이, 투닥거림이 끝났는지 수기를 두른 손날로 혈야저의 배때지를 ‘푹’ 쑤셔 버리는 당여혜.
푸줏간처럼 뜨거운 내장이 푸드덕하고 쏟아졌다.
“우욱.”
그 잔혹한 손속에 웃다 말고 헛구역질하는 일홍이.
하여간 야만적이기 그지없는 시대다.
“아잇 진짜. 어딨는 거야? 분명 이 부근에…….”
무언가를 기대하는 목소리. 안광을 번뜩이며 살점을 헤집더니 마침내 호두알만 한 뭔가를 꺼내 드는 당여혜.
“찾았다! 능삼 이거 봐! 혈야저의 독단이야!”
그녀의 얼굴이 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환해졌다.
독기를 한껏 머금은 검붉은 독단을 번쩍 치켜드는 당여혜.
“세상에, 이런 천운이……. 아가씨, 이걸로 혈옥단(血鈺團)을 제조하면 독공 수련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흥, 물론이지! 이걸로 그 간악한 오라버니도 재껴 버릴 거야!”
능삼 또한 횡재했다는 표정이었다.
티격태격 다투던 좀 전의 모습은 어디 가고 시시덕거리며 한껏 기뻐하는 둘.
“아, 근데 이거 혈옥단은 못 만들 것 같아. 한번 꺼내면 금방 물러져서 지금 여기서 복용해야 해.”
단약으로 만들고 싶었으면 산 채로 혈야저를 포획해 사천까지 끌고 갔어야 했다고 말하는 당여혜였다.
“하지만 아가씨, 정제하지 않고 생으로 복용하면 독 기운이 미쳐 날뛸 텐데요. 자칫하면 큰 내상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버릴 순 없잖아? 어떻게 얻은 건데……. 천천히 중화하면서 내력으로 잘 융화시켜 봐야지.”
독단의 기운을 잘 다스리고 녹여서 어떻게든 자신의 것으로 삼겠다고 말해 보이는 그녀.
“그럼 정양을 위해서라도, 이곳 하북에서 잠시 발이 묶이게 되겠군요. 조용히 수련할 장소를 수배해 보겠습니다.”
앞으로 어찌할 바를 놔두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당여혜와 능삼.
반면 내 시선은 검붉은 독기가 스멀거리는 독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몸에서 내단(內丹)이 나오다니, 엄청 오래 살아온 영수였나 봐요, 대장.”
“……어쩐지 존나 아프더라, 시발.”
일홍이의 소곤거림에 나는 짧게 탄식했다.
아직도 삭신이 쑤시는 느낌. 황걸개와의 수련으로 이제 엔간한 고통은 다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신입 의뢰에 저딴 괴물이 튀어나오고. 감운 회주도 일 처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한 번이면 우연이지만 세 번이면 수작질이라 그랬다.
돌아가는 즉시 쳐들어가서 따지고 말리라.
다음에 의뢰 안 준다고 하면 은화란 누님 꽌시라도 쓰지 뭐.
“아무튼 의뢰인분들, 이제 정산하시죠. 바쁘니까 나머지 일은 우리 가고 난 다음 알아서 상의하시고.”
의뢰했던 약재 채집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아니, 흑송능을 열 개나 발견하고 독단까지 획득했으니 완료 조건은 아득히 넘어선 셈이지.
그러니 원래의 보수금, 철전 스무 닢으론 도저히 수지타산이 안 맞고, 최소한 은전 열 닢은 받아야 할 듯싶은데.
“흥, 그래 애송이. 너도 고생하긴 했지. 능삼, 쟤들 돈 좀 쥐어서 보내.”
당문은 은원(恩怨)을 확실하게 갚는다고 말하며 몸종에게 손짓하는 당여혜였다.
“사실 고생 수준이 아니라, 손도 발도 못 쓰던 아가씨를 살리셨죠. 해독도 안 끝났는데 혈야저가 그대로 돌진해 왔으면 아마…….”
“시발, 나도 알거든? 그러니까 돈이라도 많이 쥐어서 보내라는 거잖아. 이 똥멍청아.”
참 솔직하지 못한 분이라고 중얼거리며 품속의 전낭을 더듬는 능삼.
그런데 그의 얼굴이 돌연 굳었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똥 싸다 끊고 나온 사람처럼.”
명문세가의 따님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날것의 화법.
“아가씨, 저희 돈이 거의 다 떨어진 것 같습니다.”
“……뭐?”
그 충격적인 발언에 기고만장하던 당여혜의 얼굴도 덩달아 굳어졌다.
홀쭉해진 그의 전낭을 덧없이 만져보는 그녀.
“아니, 어째서야?”
“아가씨께서 온 김에 북경의 산해진미를 모두 맛보겠다면서 이곳저곳 쏘다니지 않았습니까? 여기 물가가 얼마나 살벌한데……. 남아날 리가 없지요.”
범인은 귀하게 자라 돈을 물처럼 써온 당여혜였던 모양.
아무튼 그래서, 열심히 일한 내 품삯을 떼먹겠다는 건가 지금?
나는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사무실 운영할 때도 그랬지만, 돈 내면 손님이고, 못 내면 손놈인 법이다.
“하아, 어쩔 수 없지. 이거 받아.”
한숨을 푹 쉬며 품속에서 납작하고 구릿빛의 뭔가를 꺼내는 당여혜.
“이게 뭔데요?”
대답은 옆에 있던 일홍에게서 나왔다.
“당문의 혈족이 은혜를 입었을 때 베푼다는 보은패(報恩牌)네요. 빛깔을 보아 금은동 중에 동(銅)패겠구요.”
내공이 서린 손톱으로 자신의 이름을 동패에 슥슥 써넣는 당여혜.
“야, 너. 감사한 줄 알고 받으라고.”
그녀는 선심 썼다는 표정으로 쥐고 있던 것을 냅다 던졌다.
잡아채 보니 생각보다 더 얇고 볼품없는 느낌.
내가 손님 없을 때 읽었던 무협지에선 이런 거 없었는데.
“일홍아, 이거 돈이 될까?”
“글쎄요, 가장 낮은 동패니까……. 활용하기 나름 아닐까요?”
활용하기 나름이라,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말이로군.
이걸 가지고 큰 부탁을 하자니 등급이 너무 낮고, 하찮을 것을 부탁하기엔 너무 아깝고.
계륵을 눈앞에 둔 승상이 된 기분이었다.
어떤 괴팍한 환관은 비적들 좀 때려눕혔다고 번쩍이는 금전 한 닢을 튕기던데.
“후, 부족하지만 봐 드리는 겁니다.”
나는 시원찮다는 얼굴로 중얼거리고 보은패를 품에 슥 집어넣었다.
그러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 당여혜.
“와, 이게 처돌았나? 야! 너 그거 돈이 있어도 쉽게 못 구하는……!”
“어허, 아가씨. 단 공자는 제 몸 바쳐 혈야저를 틀어막어 준 은인 아닙니까? 부디 참으시지요!”
“아는데 저놈 진짜 열받잖아! 나보다 싸가지 없는 놈은 처음이야! 딱 한 대만 칠게!”
“뭔 소리십니까! 아가씨가 치면 큰일 납니다!”
내가 사천당문의 보은패를 받자 내 호칭을 한 단계 올려 주는 몸종 능삼이었다.
짐승처럼 날뛰는 당문의 둘째 여식을 조련사처럼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
“고수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대장밖에 없을 거예요.”
근처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일홍의 한마디였다.
“내가 좀 솔직하게 살고 있긴 해.”
“딱히 칭찬은 아니거든요.”
한번 죽어본 데다가, 대가리에 이상한 별이 박히고 시한부 판정까지 받자 더는 남 눈치 보느라 끙끙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보상이 부족하다는 건 진심으로 한 소리가 아니시죠? 그래도 당문의 보은패인데.”
“아니, 완전 진심인데?”
죽어라 치이고 굴렀는데, 이딴 동패 쪼가리라니 보상이 너무 적지 않나.
그리고 개같이 진심이었기에 양심의 저울이 지금껏 선행으로 기울고, 내공도 그리 폭발적으로 늘어난 거였다.
지켜보던 황걸개의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말이지.
“황 노야와의 수련…….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런 내 눈빛을 읽고 다사다난한 미래를 직감했는지 한숨을 푹 내쉬는 일홍이.
아무튼 평범할 줄 알았던 약재 채집이 우여곡절 끝에 보상까지 받고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아직도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는 짤막한 여인을 뒤로한 채 산을 내려왔다.
***
칼을 찬 낭인들이 숱하게 드나드는 북경 낭인회.
오전이라 한산해야 할 이 건물에 때아닌 소란이 일었다.
방금 전 불평불만을 우렁찬 목소리로 쏟아내고 나간 소년 하나 때문이었다.
다들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혼자만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말없이 흉터를 긁적이는 회주 감운.
그의 얼굴 표정은 어째 기분이 나쁘기보단 약간 싱숭생숭해 보이기도 했다.
“허참, 내가 아직 감이 죽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군.”
알고 보니 의뢰인은 무림인인 데다, 또 혈야저란 괴물이 튀어나와 겨우 살아남았다고 억울함을 토로하던 소년 두 명.
이제 다 늙어서 불길함을 감지하는 끗발이 떨어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래, 이 거패도 감운의 촉이 쉽게 죽을 리가 없지. 아암.”
나이를 먹어 발동만 좀 느려졌을 뿐이지, 능력 자체는 여전한 듯했다.
다만 그렇다면, 단무진과 일홍이라는 소년들은 그 수라를 두 번이나 헤치고 살아남았다는 건데.
“그건 좀 기이하구먼. 흉터가 욱신거릴 때면 항상 누군가 피를 보곤 했었는데 말이야.”
은성상단의 상주가 정말 뛰어난 아이라고 칭찬하길래 뭔가 싶었는데.
어려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숨겨 둔 한 수가 있었던 모양.
“북경지부에 될성부른 떡잎이 굴러온 건가. 허헛.”
감운은 씩 웃으며 알싸한 탁주를 연거푸 들이켰다.
그리고 그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어수룩해 보이는 젊은이.
덩치도 왜소하고 눈 밑도 시커먼 것이 낭인은 아니고 의뢰를 발주하러 온 의뢰인인 듯했다.
“여기에 괜찮은 낭인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봐라.
“물론일세, 이곳 낭인들은 전부 지불받은 것 이상으로 열심히 뛰는 친구들이지.”
탁주를 채운 술잔을 슥 넘기며 무슨 일로 찾아온 거냐고 물어보는 감운.
“아, 저는 북경 일대에서 그림으로 먹고사는 능진삼이라고 합니다.”
아직 화백이라 불릴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한 그림꾼에 불과하단 말을 덧붙이는 청년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산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릴 것들을 두 눈에 담고 싶은데, 홀로 산을 타는 것은 위험하다 들어서 말입니다.”
“이를 말인가. 사람 피 맛을 본 들짐승에, 산적도 가끔 있고 삐끗하면 추락하는 비탈길까지. 여러모로 칼 찬 조력자가 있는 편이 낫지.”
“……아, 예.”
별거 없는 호위 의뢰인가. 김이 살짝 새는 순간.
하지만 개인적인 흥미는 있었다.
“그런데 뭘 주로 그리는가? 나도 이 분야엔 꽤 소양이 있어서, 이름 있는 화백 산수화를 몇 점 사뒀거든.”
지금은 화백이 요절해서 가격이 더 올라가 버린 그림들이었다.
어떤 모임의 높으신 분에게 추천받아 구입했던 건데, 지금 생각해도 잘 투자했단 생각뿐이다.
“아, 저는 그게…….”
“그게?”
“털이 수북한 짐승을 주로 그립니다.”
“……으음? 보통은 풍경화나 인물화, 웅장한 자연을 한 폭에 담은 산수화 같은 것을 그리지 않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것을 찾으니까.”
이름난 화백이 심혈을 기울여 그려낸 한 폭의 산수화는 그 값어치가 금덩이를 넘어선다.
거기에 고명한 도인이 찾아와 시까지 한 수 읊어 주면 그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게 되지.
“그래도 저는…… 보드라운 털과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짐승이 좋습니다. 설사 돈이 안 되더라도 말입니다.”
“…….”
약간 과하다 싶은 짐승 애호에 감운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뭐 의뢰인이 좋다는데 중개인이 어쩌겠나.
다만 이걸 누구한테 맡길까 싶어 고민이었다.
낭인들은 보통 보수금이 넉넉하고 자신의 이름값을 드높일 수 있는 의뢰를 선호해서 말이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 불리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 고놈이 있었군.”
최근 위험한 의뢰에 질렸다면서, 제발 ‘안전’한 의뢰를 중개해달라 했던 신입 낭인들.
이번엔 흉터도 별 반응이 없고 하니까.
“거, 아무나 은성상단에 가서 단무진이란 애 좀 불러와 봐라.”
녀석의 다음 의뢰가 정해진 듯했다.
37화 두 발로 걷는 것
낭인의 아침은 쟁자수보다 이르다.
아니, 이르다 못해 별빛이 반짝이는 꼭두새벽부터 시작된다.
전부 별의 기운을 축기하는 성운심법의 수련을 위해서다.
부스럭.
몸을 일으키자 침상이 삐거덕거리고 구멍이 숭숭 난 모포가 흘러내렸다.
찬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삼급 표사 숙소. 쟁자수 숙소보단 낫지만 여전히 현대의 침상과 비교하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참고로 은화란 상주는 더 좋은 숙소를 주겠다고 그랬지만, 빚지는 게 싫어 내가 거부했다.
전부 원활한 내공 수급과 생명 연장의 꿈을 위해서다.
이미 돈 한 푼 안 내고 머무르고 있는데, 여기에 비싼 숙소까지 제공받으면 왠지 모를 부채 의식이 생겨날 것 같았거든.
그렇게 되면 나중에 그녀를 돕는 일이 있어도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닌, 빚을 갚았단 생각이 먼저 들어 버릴 거다.
그럼 자연스레 선업도 쌓이지 않겠지.
“하여간 나란 놈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타인의 호의를 코웃음 치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철면피였다면 인생이 한결 편했을 텐데.
나는 당장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먼 미래를 기약하기로 했다.
드르렁- 커어어-
우렁차게 코를 고는 양조와 양위를 뒤로하고 문을 나서자, 온몸을 감싸는 찬 공기와 달빛.
모두가 잠든 시각에 옷을 챙겨입고 홀로 밖을 걷고 있으니 약간 초번초를 서는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좀 버틸 만할지도.”
공해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 투명하게 내리쬐는 성스러운 별의 기운.
연무장에 황걸개가 보이지 않는다. 또 어디선가 술을 퍼먹고 드러누운 모양.
가끔 있는 일이기에, 나는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성운심법의 구결을 속으로 읊었다.
얼마 전 목숨 걸고 구해 낸 당문의 둘째 여식. 그 대가로 한때 전신의 뼈가 으스러졌더랬지.
‘성성일리…… 천지체영예…….’
선업을 잔뜩 쌓은 상태에서 성운심법을 운용하자, 흉성의 붉은 그것과는 다른 새하얀 기운이 전신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출발하여 회음혈을 거쳐 백회혈까지 거침없이 진격하는 신비스런 기운.
물리적인 실체는 없으나 뚜렷한 존재감을 지닌 그것이 심상 속에서 공성추와 같은 모습으로 흉성을 두들겼다.
쿵-!
충격에 세 치 정도 튀어 오르는 몸뚱어리.
나는 흉성 속의 섬뜩한 존재가 반응하기 전에 별의 부스러기를 훔쳐 항마의 기운으로 똘똘 뭉쳐진 하단전으로 달아났다.
성운심법을 전력으로 운용하자, 흉악함을 잃으면서 차츰 내력으로 융해되는 흉성의 기운.
“후우.”
마지막 한 올까지 단전으로 흡수되자 나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진한 한숨을 토해 냈다.
단전 속에 또렷하게 맺혀 별처럼 빛나는 기운.
“나도 이제 십 년 내공의 소유자……!”
좁쌀만 하던 것이 콩알만 해지더니 한층 더 몸집을 불려 이제 호두알만 한 크기가 되어 버렸다.
전신으로 고루 퍼져 뜨겁게 용솟음치는 열화와 같은 기운.
피가 들끓는다. 그 괴물 같은 멧돼지 앞에 몸을 내던진 보람이 있었군.
“만인적(萬人敵), 관장지용(關張之勇), 천하무쌍(天下無雙). 전부 이 몸을 두고 하는 말 일지니……!”
강자존 약쟈멸의 세상에 보란 듯이 외치는 포효.
이 심법과 흉성이 있는 한 선업은 곧 힘이다. 지구에선 느껴보지 못한 그 논리가 나를 전율케 했다.
그렇게 스스로의 강함에 선함에 한껏 취해 있었는데, 문뜩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또 지랄하고 있다.”
고개를 돌려보니 황걸개가 미친놈 보듯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 귀신같은 양반, 어느새 또 내 뒤를 소리 소문 없이 점한 것이지?
“오해십니다.”
“오해는 염병.”
거참 까칠한 노인네다.
팔짱을 낀 채 나를 훑다가 뭔갈 알아챘다는 표정을 짓는 황걸개.
“내공이 왜 그리 빨리 느나 했더니, 이놈 생각보다 더 중증의 자아도취였구만.”
그래서 별거 아닌 선행으로도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을 거라며, 내공의 증진 비결을 중얼거리는 노인네였다.
“노야, 자아도취라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말이 안 되긴. 멧돼지놈 주의 몇 번 끌었다고 그만한 내공을 얻는 게 말이 되더냐?”
어젯밤 내가 묘사했던 활약을 한껏 내려치는 황걸개.
“멧돼지가 아니라 곰만 한 영수였거든요? 그리고 내단까지 나왔는데 보수 철전 스무 닢에 퉁쳐줬으니, 나름 큰 희생과 양보를 한 셈이죠.”
이 튼튼한 몸뚱어리가 돌진 한 방에 반으로 접힐 뻔했단 말이다.
그러니 이전에 나였다면 아득바득 맷값을 받아 냈었을 것이다. 은전도 아니고 철전 스무 닢이라니,
“이놈아, 대신 사천당문의 동패를 얻었잖느냐.”
“돈 안 되는 현물은 취급 안 합니다. 그게 제 신조인지라.”
지구의 어떤 나라는 닭고기로 전투기도 사고 그러던데, 나는 그런 거 용납 못 한다.
단무진 해결사 사무소는 캐시 온니란 말씀.
“허참, 이 골치 아픈 녀석을 어찌해야 할꼬.”
자기애로 똘똘 뭉친 점이나, 자신에게 따박따박 대드는 모습에 한 대 쥐어패고 싶다는 듯 주먹을 꼬나쥐는 황걸개.
나는 혹여 정수리로 날아올까 목을 자라처럼 오목하게 집어넣었다.
“하는 꼴을 보면 제 잇속만 밝히는 모리배 그 자체인데‥…. 결과적으로는 헐값에 사람을 돕고 선행을 베풀고 있는 셈이니 이것 참…….”
복잡하다는 얼굴로 혀를 차는 노인이었다.
“노야,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이유야 어찌 됐든 협(俠)을 실천하고 사람을 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의도가 좀 세속에 찌들었으면 어떤가.
가는 곳마다 살겁을 일으켜야 할 천살성이 내공 때문이기는 해도 사람을 돕고 선행을 베풀고 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좋은 일이지.
“흠……. 뭐, 첫술에 배부르려 하는 것도 욕심이긴 하지.”
말이 그럴듯했는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황걸개.
하지만 눈매가 삐뚜름한 것이 언제나처럼 좀 더 지켜보겠단 눈빛이었다.
나원, 언제쯤 저 감시의 시선을 벗어날 수 있을런지.
“아무튼 노야, 저 이제 십 년 내공인데. 뭐 없어요?”
“뭐 없지, 이놈아. 십오 년 치는 모아오라니까?”
그전에 뒤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었다.
뭔 놈의 의뢰가 이렇게 흉흉한 것만 걸려대는지.
다음 의뢰는 제발 칼질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쯧쯧, 뭐 뜯어낼 생각일랑 말고, 진시가 됐으니 일홍이나 깨워오거라. 걘 아직도 배울 게 많아.”
그러고 보니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머나먼 산등성이에서 조금씩 고개를 치켜드는 붉은빛.
흉성의 기운을 훔치는 데 심취해서 몰랐는데, 운기조식하는 동안 시간이 훅 지나갔던 모양.
“저도 배울 거 많은데요. 왜 요즘 걔만 챙겨주시는지.”
누구는 무식하게 쥐어터져 가며 무공을 수련하는데, 누구는 오자마자 벌모세수, 진기도인으로 경헐을 쫙 뚫고 명문세가 같은 수련을 받는다니.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게 대놓고 차별하는 거다.
특히 성장기의 애들한테 그러면, 마 그땐 나도 금쪽이 같은 애로 거듭나는 거야.
“이놈아, 걔는 가정사가 좀 딱하잖느냐.”
“씨이, 제 가정사도 딱하고 불쌍한데요.”
“넌 착하고 올곧은 걔랑 달리 싸가지가 없어서 별로 안 불쌍하단다.”
“…….”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 발언에 내 말문이 막혔다.
이런 금쪽이를 양산하는 늙은이 같으니.
“도인이라면서 인성이 좀…….”
딱-!
벼락같은 딱밤으로 응징하는 황걸개.
눈앞에 별이 보이고 쌍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아오, 시팔!”
“흘흘, 헛소리 그만하고 일홍이나 데려오거라.”
주먹이 운다 진짜. 하지만 무림에선 약한 놈이 참아야지 별수 있겠나.
나는 구시렁거리며 일홍이를 깨우기 위해 작은 헛간 같은 곳에 들렀다.
남자들이랑 재우기도 뭣하고, 여자 숙소에 넣자니 설명하기가 곤란한지라 이런 곳에서 홀로 자고 있는 녀석.
그래도 바람은 안 새서 내 숙소보단 좀 따듯해 보였다.
벌컥.
“일홍, 이제 일어나야……. 음?”
그런데 깨우기도 전에 이미 일어나 있는 일홍이.
아니, 잠을 아예 안 잤던 건지 두 눈이 퀭해져 있었다.
금속으로 된 복잡한 원통형 장치를 밤새 분해하여 방 안에 나열해 둔 모습.
“……야, 이거 설마 그건 아니지?”
그런데 무척 낯이 익다. 비침이 딱 들어갈 구멍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사출 장치.
내가 미심쩍다는 듯 쳐다보자 도면을 그리다 말고 몸을 움찔 떠는 그녀.
“앗, 훔친 거 아니에요! 그, 그냥 어쩌다 보니 손에 들어왔을 뿐이라고요!”
황걸개피셜 모범생인 그녀가 도둑질을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
햇볕이 정수리를 뜨듯하게 지지는 정오.
감운 회주로부터 또 다른 일감이 들어왔다.
이번엔 절대 칼질할 일 없는 의뢰라길래 받아들여 의뢰인을 만나보러 가는 길이었다.
“대장은 지금 오해를 하고 계세요.”
그리고 아까부터 옆에서 조잘조잘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일홍이.
“그럼, 다 오해지, 오해야.”
내가 다 이해한단 얼굴로 대꾸하자 답답한 듯 제 가슴을 두들기는 그녀였다.
“이건 제가 훔친 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뭐, 당여혜가 가문의 독문 병기를 외부인에게 선물이라도 해줬단 말인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냐, 잘했어. 안 그래도 보수가 형편없었거든. 제 몫은 자기가 챙겨야지.”
당문의 여식을 구하고 독단까지 갖다 바쳤는데, 대가로 암기 하나면 싼 편이지 뭘.
그런데 내 칭찬에 얼굴을 더욱 일그러트리는 일홍.
“아잇참, 진짜 아니에요. 그냥 주머니에 넣어놓은 걸 깜빡한 채로 산을 내려왔을 뿐이라고요……!”
억울하다는 목소리.
절도품이 아니라 유실물, 내지 습득물이었다는 게 일홍이의 주장이었다.
흠,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군.
마지막으로 봤을 때, 당여혜와 능삼 둘 다 독단에 정신이 팔려 헬렐레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보은패를 던져 준 뒤로는 우리가 내려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었지.
“그럼 왜 부품 단위로 분해하고 있었던 건데?”
“앗, 그건 그냥 돌려주기 전에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그만…….”
듣자 하니 인피면구와 각종 제작 기술을 전수한 하오문 야장들이 이쪽 분야의 최고봉으로 항상 당문을 꼽았단다.
그래서 실물을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분석에 나서고 말았다고 털어놓는 일홍이었다.
“……그래 뭐, 믿어줄게.”
탐구심으로 가득한 저 공순이 같은 눈빛을 보아, 아마도 사실이겠지.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어느새 꺼내든 당문 암기를 품속에 다시 집어넣는 일홍.
“근데 용케 다시 원상태로 조립했네?”
방 안에 펼쳐놓은 오밀조밀한 부품만 해도 수십 개는 되어 보이던데.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니까요. 기억을 더듬으면 쉬운 일이에요.”
그런 거였나. 난 부품이 그리 많지도 않은 총기 분해도 몇 번이나 버벅대면서 했는데 말이다.
“다만 아무리 분석해도 한 가지는 알 수가 없었어요.”
“무슨 한 가지?”
“비침을 발사시킨 원리요.”
암기에 송송 난 구멍들을 툭 치며 말해오는 일홍.
“킁킁.”
나는 암기에 대고 코를 몇 번 훌쩍여봤다.
사출 장치의 발사 원리라. 그거야 장력과 탄성을 이용한 게 아니라면 남은 건 하나뿐이지.
“흑약(黑藥)을 쓴 것 같은데?”
장치 구멍에 시커먼 탄매도 남아 있고 말이다.
“흑약이라 함은……. 설마 벽력탄에 들어가는 검은 가루를 말하는 건가요?”
얘가 화약을 제법 잘 알고 있네. 정보를 감추려 드는 이 시대에선 그것만으로도 참 용한 일이었다.
“보면 볼수록 참 아는 게 많아, 일홍이.”
“……헤헤.”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는 일홍.
“그런데 당문에서 흑약을 쓰다니, 무림에선 황실의 허가를 받은 벽력문 말고는 다 불법일 텐데요.”
“안 걸리면 되지. 그리고 암기에 당한 놈들은 거의 다 뒤졌을 테니, 자동적으로 비밀도 지켜졌을 테고.”
“……그건 그렇겠네요.”
하여간 구성원들 성깔도 그렇고, 무지막지한 곳이군 사천당문.
그렇게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접선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먹물 냄새를 풀풀 풍기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청년 한 명.
다가가서 우리가 의뢰받고 찾아온 낭인임을 알리자 그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니, 너희 같은 꼬맹이들이? 정말로?”
이제 이 소리도 좀 지겹군.
여기 사람들은 낭인이라고 하면 일단 체구가 크고 수염이 듬성듬성 난 산적 같은 이미지를 먼저 떠올려서 말이다.
그래서 매번 이렇게 정급 낭인패를 꺼내 들어 증명해야만 하는 신세였다.
“허어, 정말이군. 여류 낭인은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소년 낭인이라니…….”
매번 겪는 통과 의례를 거쳤으니 이제 일 이야기를 해볼 시간.
“그래서 산 깊숙한 곳에 들어가신다고 들었는데, 뭣 때문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이번 의뢰는 딱히 문제 될 것이 없는 안전한 의뢰라 그랬었지.
한 번만 더 믿어보겠다, 회주 감운.
“산에 오르는 이유? 이것들 때문이지.”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품에서 꺼내 우리 앞에 들이밀었다.
쥐, 소, 호랑이, 토끼 같은 십이지(十二支)는 기본에 여기 사람들이 잘 안 그리는 흰 털과 검은털의 웅묘(熊猫)까지 정성스레 그려놓은 모습.
다 잘 그리긴 한 것 같은데, 산수화나 인물화, 풍속화 같은 건 없고 죄다 짐승뿐이었다.
거기다 그림체에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수상함.
“난…… 이런 짐승들이 너무나도 좋거든. 그래서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영감을 얻고자 감운 회주에게 의뢰를 부탁했었지.”
“……아하, 그러시구나.”
감운 회주 이 양반 진짜.
그가 또 이상한 의뢰를 우리에게 짬처리 해왔다.
***
산이란 것은 깊게 들어갈수록 골도 깊은 법이다.
특히 인간의 손길이 아예 닿지 않은 원시림 같은 곳은 백 보 전진하기도 애를 먹기 일쑤.
거기다 짐승에 관한 이번 의뢰인의 집착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좀처럼 일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자 나는 꾀를 하나 냈다.
“의뢰인분, 짐승이 좋다고 그러셨죠?”
“그래, 매번 상처만 주는 사람들보다 말 못 하는 짐승이 더 각별한 법이지.”
“…….”
이 인간도 참 중증이군.
아무튼 뭐 의뢰 내용은 결국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싶다는 것 아닌가?
“그럼 혹시, 두 발로 걷는 네발짐승을 그려 본 적이 있으세요?”
“……!?”
38화 미래를 위한 포석들
화백이 되지 못한 그림꾼.
그 가련한 청년의 이름은 능진삼이었다.
어릴 때 붓을 쥐고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화백이 되겠노라 천명했지만, 이제 와선 팔리지도 않는 그림만 그려 대는 신세.
고뇌 속에서 몸부림치다, 산 중의 동물을 직접 보면 영감이라도 떠오를까 싶어 낭인을 고용해 산에 오른 참이었다.
하지만 풀을 뜯는 산토끼와 그것을 포식하는 늑대를 코앞에서 보아도 기발한 번뜩임은 없었다.
그런 발버둥에도 소득이 없자, 자신은 결국 한미한 그림쟁이에 불과했나 싶어 자괴감에 빠지려는 찰나.
“의뢰인분, 붓하고 먹물통 좀 줘보세요.”
계속되는 무의미한 산행에 지친 소년 낭인이 대뜸 붓과 종이를 달라 말해왔다.
먹물에 붓을 찍으며 못 얻은 그 번뜩임을 자신이 줄 테니, 더는 산을 오르지 말자고 제안해오는 소년 낭인.
쌈박질이나 해대는 낭인이 붓질에 대해 뭘 알겠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니 능진삼은 잠자코 지켜보기로 했다.
슥. 슥. 스윽.
그런데 의외로 막힘없이 그림을 그려나가는 소년.
붓질은 어색했지만 그려지는 결과물은 제법 그럴듯해서 능진삼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그 뭐냐, 중딩 미술 시간에 배운 선 원근법이란 건데요.”
그림에 잔뜩 몰두하여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는 소년 낭인.
이윽고 화선지의 그림이 거의 완성되자 능진삼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허, 짐승의 굴곡과 털을…… 이렇게 표현해낸다고?”
듣도 보도 못한 기묘한 묘사법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그림꾼 청년.
붓질 실력은 어설펐으나, 생동감 넘치는 이 화풍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화선지 속 짐승이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만 같은 느낌.
거기에 더불어 또 하나 기괴한 것이 있었으니…….
“뭣이, 짐승이 사람처럼 입고 두 발로 걷는다고? 이런 발칙한…….”
관아의 포쾌 복장을 입은 토끼와 이를 능글맞은 표정으로 따라다니는 주황색 여우.
그 외양이 얼핏 동물 같으면서도 표정과 보행에서 사람의 영역을 넘나드니, 능진삼은 절로 요상한 기분이 들고 마는 것이었다.
하물며 눈과 입 같은 이목구비도 사람의 그것이라 표정이 술술 읽히기 시작하자 헛웃음을 짓는 능진삼.
“어찌 짐승을 사람과 같은 영역에 놓을 수 있단……. 허어억!”
아끼고 좋아했지만, 사람과 동격으로 취급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될 이유는 또 뭐란 말인가?
사고의 틀을 산산이 깨부수자 그를 막던 벽이 무너져 내린다. 머릿속에 그토록 바라던 번뜩임이 내리친 순간.
“부, 붓! 붓과 종이를 돌려줘!”
드디어 그의 창작혼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붓끝을 놀리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은 이 기분.
스윽, 슥슥-!
이제야 바라던 걸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막힘없이 일필휘지로 이어지는 붓질.
장차 그를 북경제일 금수 화백으로 만들어 줄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이 시대 동양화에는 특유의 분위기와 정취가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명절날 할머니집 장롱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그윽한 정취라고 해야 되나.
눈으로 본 듯한 사실적인 묘사보단 화백의 정신성을 강조한 기운생동(氣韻生動)한 묘사가 일반적이었지.
그래서 그림을 보면 다 손으로 눌러놓은 듯한 평면적인 화풍이었다.
스윽. 스윽.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그려지고 있는 그림은 무언가가 사뭇 달랐다.
깨달음을 얻은 무인처럼 두 시진 내내 붓과 물아일체가 되어 그림만 그려대고 있는 능진삼.
산새조차 노래하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누군가가 붓질하는 소리만이 고요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뭔가… 뭔가 이상한 게 완성되고 있어요, 대장.”
붓끝이 하반신을 그려 나가기 시작하자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마디 하는 일홍이.
역시 똑똑한 애라니까. 사물을 파악하는 눈이 아주 뛰어나군.
“금수에게 어찌 저런 발칙한 하반신이……. 기분이 이상해요. 혹시 요괴를 그리고 있는 건가요?”
“아냐, 저건 짐승이 맞아.”
어쩌면 짐승을 가장 숭하게 그리는 기법.
동서양이 적당히 어우러진 그림체, 그리고 붓과 먹물로 완성되는 고대 중원의 혼종 퍼리 되시겠다.
“으음, 으으음!”
슥슥, 스윽.
내가 그린 어설픈 짐승 그림을 참고하며 자신만의 예술로 승화시켜 나가고 있는 의뢰인.
“근데 대장, 그림도 그릴 줄 아셨나요?”
저번에 당문의 암기를 분해하고 종이에 도면화하다가 내게 딱 걸렸던 일홍이가 그리 물어왔다.
이곳에서 서예와 그림이란 것은 있는 집안 자식의 소양인지라, 제법 의외라는 얼굴.
“뭐, 어릴 때 이것저것 배우긴 했지.”
전에도 말했듯 나는 보육원에서 용돈을 받지 못했다. 몇 번 사고를 친 덕에 말이다.
그래서 나의 빛과 소금인 당근나라에서 용돈을 알아서 수급했어야 했는데.
당시 초딩이었던 내 눈에 띈 게 ‘그림 그려드려요’란 손품 팔이 게시물이었다.
허접한 그림체로 개, 고양이를 그려 오백 원, 천 원을 받아먹고 있길래 나도 곧바로 뛰어들었었지.
이상하게 못 그릴수록 사람들이 좋아하더라.
그러다 나중엔 보육원의 오타쿠 형에게 제대로 그림을 배워 건당 만 원씩 쏠쏠하게 벌어보기도 했었다.
“역시, 그럴 것 같더라니. 가끔 튀어 나오는 박식한 부분도 그렇고, 좋은 집안에서 곱게 자라온 티가 났어요.”
얼굴에서도 묘한 귀티가 느껴져 진작에 눈치챘었다고 말해오는 일홍이.
“어라, 내가…… 곱게 자라왔었나……?”
갑자기 슬픈 기억들이 뇌리를 지나갔다.
가문의 일원들에게 재액(災厄) 취급당하고, 혈육에게 두 번이나 버림받은 데다 배때지에 칼침까지 맞았던 쓰라린 순간들.
떠올리니 또 서러움이 복받치는군. 왜 내 인생은 2막이 열려도 가시밭길만 가득한 건지.
나는 쨍한 햇빛 속에 모습을 감춘 하늘의 별들을 원망스레 올려다봤다.
“…완성됐다! 내 인생 최대의 역작이!”
그사이 그림을 완성하여 흥분한 상태로 폴짝폴짝 뛰고 있는 그림꾼 청년.
그는 자신이 그려 낸 것을 우리 앞에 보란 듯이 펼쳐냈다.
늠름한 기품의 호랑이가 순한 눈망울의 암사슴과 불건전하게 눈빛을 교환하고 있는 장면.
“대장? 이, 이게 대체……. 무슨 그림인……?”
발칙함을 넘어 불경함마저 느껴지는 한 폭의 수인화였다.
그림이라곤 산수화, 풍속화 정도만 아는 고지식한 일홍이는 당연히 벙쪄서 말을 잇지 못했고.
“오, 붓으로 그런 것도 괜찮은데?”
반면에 이런 걸로 돈을 벌어봤던 나는 살짝 감탄을 터트렸다.
저 굴곡진 표현법과 짐승들의 요망함을 보라.
예시로 삼을 밑그림 하나 보여 줬을 뿐인데, 중원에선 거의 볼 수 없었던 사물의 입체감은 물론, 당근나라에서 페이가 가장 셌던 그림체를 충실히 구현해 낸 모습.
“어, 어때? 혼신을 다해 그려봤는데.”
“가히 문일지십(聞一知十)의 붓질이십니다. 재능이 있으시네요,”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안다.
마치 황걸개의 무공 수련을 쭉쭉 흡수하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나는 선대 짐승 짤쟁이로서 순수하게 그의 그림 실력을 칭찬해 줬다.
“흠흠, 그 정도는 아닌데 말이지.”
“에이, 그 정도이신데요. 뭘.”
“그, 그런가? 크흠흠!”
짐승으로 의기투합하는 청년과 소년. 반면 옆의 소녀는 아까부터 어이없다는 눈으로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대장, 이게…… 돈이 된다고요?”
어떤 게임 회사 직원 같은 대사를 날리는군.
“그으럼.”
쟤는 모르겠지. 수요자만 찾아내면 잠재력이 어마어마한 시장이다. 아마 돈다발을 들고 와서 더 그려달라고 할걸?
세상은 넓고 다양한 취향이 존재하는 법.
그리고 이는 부호들도 매한가지니, 은화란의 꽌시 네트워크나 경매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하면 높은 확률로 소득이 있을 거라 여겼다.
뭐 아니면 새로운 그림 기법만으로도 이런데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그림을 눈여겨 봐주겠지.
나는 이런 생각과 계획을 능진삼에게 말해줬다.
“그, 그렇게까지 해준다고? 그냥 산만 같이 타달라는 의뢰였을 뿐인데?”
일개 낭인인 줄 알았던 내 입에서 상주가 언급되자 흠칫 놀라는 모습.
눈앞에서 보석 같은 재능을 발견했는데, 어찌 이대로 썩힐 수가 있겠나.
“나중에 화백으로 유명해지면, 그때 이 낭만적인 해결사에 대한 이야기나 팍팍 퍼트려 주십쇼.”
“……아아, 퍼트리다마다! 내 아주 그림으로도 수십 장 그려서 널리 알리겠어!”
능진삼은 감격에 흠뻑 젖은 얼굴로 고맙단 말을 연신 반복했다.
요즘 따라 나답지 않게 미래를 베팅해서 당장 돈도 안 되는 짓을 많이 하는군.
그 덕분인지 단전 쪽에서 예의 그 간질거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말 다시 태어난 기분이야……. 내가 널 스승이라고 불러도 될까?”
그동안 아무도 자신을 이끌어 주지 못했다며, 한참 어린 나에게 제자를 자처해오는 청년.
“물론이죠.”
“……고마워! 단 스승!”
기쁜 얼굴로 무인처럼 포권 해오는 능진삼이었다.
“그럼, 제자님. 더는 가르쳐줄 게 없으니 이제 하산합시다.”
애초에 산을 타는 게 귀찮아서 붓과 화선지를 빌렸던 것이 아니던가.
“그, 그럴까?”
“예, 그럼요.”
짐승에 대한 삿된 애정은 산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두고 봐 단 스승! 내가 스승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퍼트릴 테니까!”
짐승 외길을 걸어온 의뢰인이 오늘 배운 화풍을 중원 곳곳에 퍼트리겠다고 자신 있게 천명해왔다.
벌써부터 번뇌 가득한 이 유행에 고통받는 일반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하군.
어쩌면 난 선업 욕심과 귀찮음에 동서양의 그림이 혼합된 끔찍한 무언가를 만들어 낸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뭐, 내 알빠인가?
이쪽도 갑자기 중원에 내던져져 개고생만 해온 입장인데.
‘장하다 능진삼, 그림 업계를 짐승 털로 물들여버리렴.’
고객 만족도 오백 퍼센트. 다시 찾는 친절과 감동.
또 한 건 완벽하게 해결해냈다.
나는 흡족한 얼굴을 짓고서 일홍과 함께 산에서 내려갔다.
***
의뢰의 성공을 번화가에 자리잡은 낭인회에 보고하고 돌아오는 길.
옆에서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홍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포식 관계인 호랑이와 사슴이 애정(愛情)을 나눈다니, 자연계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하오문의 계승자로 삼라만상의 정보를 다 접한 일홍이도 난생처음 보는 장르에 제법 충격이 컸던 모양.
“하지만 붓과 화선지의 세계에선 가능하지. 아니 그러한가?”
“…….”
불가능을 가능으로 끌어내는 것이 바로 창작의 힘이다.
심상 속에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이를 구현하는 것.
“……이것저것 배우셨다는 게, 설마 다 저런 느낌인 건가요?”
아니, 이게 나를 뭐로 보고.
내가 배운 것 중 저런 느낌인 건 절반밖에 안 된단 말이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중개료를 내고 남은 돈을 전낭에 쏙 집어넣으며 짧게 대답했다.
이번 의뢰에선 대략 은전 두 닢과 철전 세 닢 정도를 벌었군.
원래는 철전 열 닢짜리 의뢰였는데, 제자 능진삼이 감당키 어려운 은혜를 입었다면서 자신의 전낭에 있던 돈을 모두 주고 떠났다.
“말년에 이리 훌륭한 제자를 얻는군.”
황걸개는 절대 내뱉지 않았던 그 말.
내가 대신 내뱉어 주고 전낭을 품속 깊은 곳에 꽂아 넣었다.
참고로 매번 똥 같은 의뢰만 주선해주는 회주 감운에겐 이 사실을 속이고 원래 보수의 2할인 철전 두 닢만 떼주고 오는 길이다.
원래 이 업계가 서로 적당히 후려치면서 먹고사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수입에 콧노래를 부르며 북경 번화가를 걷고 있었는데.
“……어?”
놀라는 소리와 함께 발을 우뚝 멈추는 일홍이.
“왜? 만두가게라도 찾았냐? 돈도 들어왔으니 몇 개 사줄 수는 있는데.”
그런데 표정을 보니 만두가게를 발견한 정도가 아니었다. 휘둥그레 떠졌다가 이내 가늘어지는 그녀의 눈매.
일홍이의 시선은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마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데, 이런 반응이라면 뭐 하오문과 관련된 사람이라도 발견한 건가.
“……대장.”
“어, 왜.”
“이런 부탁, 염치없는 거 알지만……. 혹시 돈을 빌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돈 빌려달라는 말인 건 또 어떻게 알고.
“흠.”
하지만 한 푼, 한 푼이 소중한 거지 시절을 겪어 돈의 가치를 제대로 알며, 또 허튼소리 한번 하지 않던 쟤가 빌려달라고 하니.
나는 내 사람 보는 눈과 저 녀석의 영민함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저러는 걸 보니 필시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얼마 필요한데?”
“……진짜 빌려주시게요? 묻지도 않고?”
평소 내가 돈을 격하게 탐하는 모습을 자주 봐왔던 터라,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되묻는 일홍이.
“빌려달라며 이것아.”
나는 전낭 속에서 은화란에게 받은 금전 한 닢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는 일홍이.
“이, 이렇게 큰돈을…….”
“팔 떨어진다, 받아라.”
하오문 시절엔 많이 봤겠지만, 밑바닥으로 추락해 돈이 귀해진 이후론 한번도 보지 못한 게 금일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내가 내민 금전을 조심스레 받아들였다.
“이 은혜는 제가 어떻게든 갚을게요.”
그래, 갚아야지. 그러려고 저점 매수한 것이 아니겠나.
이왕 투자를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봐야 하는 법. 그러니 이건 물타기 정도로 생각해 두자고.
“그래서 저 마부가 누군데, 돈까지 줬으니 말해 줄 순 있지?”
“네, 흑점(黑店)의 일원이에요. 하오문과 관계가 깊은…… 뭐든지 사고 팔 수 있는 세력이죠.”
밀무역자, 장물아비와 도둑들, 노예상인 등등. 온갖 사람과 오만 물건이 다 모여 못 구하는 것이 없다는 게 바로 흑점이라고 설명하는 일홍이.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인피면구를 여미고 체구를 바꾸기 위해 옷 사이에 솜을 채우고 있었다.
“구할 게 있는 거지?”
“네, 필요한 게 있어요.”
“그래, 가봐 그럼.”
한번 믿기로 했으면 끝까지 믿어 주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큰돈을 맡겼음에도 별 질문도 하지 않고 보내 주자 살짝 멍해졌다가 이내 숙여 보이고 뒤도는 일홍이.
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전낭을 꺼내 남은 돈을 세어봤다.
“전낭이 좀 가볍군.”
보육원 시절은 물론, 이곳에서 거지 시절까지 겪으며 돈에 대한 집착이 더욱 강해진 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돈이 사라진 만큼 마음도 좀 허전해진 듯했다.
“……음?”
한데, 이를 보상해 주겠다는 듯 단전에서 느껴지는 묘한 간질거림.
아니, 간질거림이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운과 응어리가 몸속에 자리잡은 듯한 무어라 형용하기가 힘든 감각이었다.
이거 약간 돈을 내공으로 치환해 버린 듯한 모양새군.
생각해 보면 고수가 돈을 강탈해도 관청에 고발조차 못 하는 이런 강자존의 세상에서 돈이 중하겠는가, 아니면 내공이 중하겠는가.
“운이 좋군.”
선행에 보상이 뒤따르니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지.
나는 그런 결론을 내리고 좀 전의 행동을 자화자찬해봤다.
“아주 착해 이 몸.”
***
겨울이 가고 생명과 새싹이 움트는 봄이 찾아왔다.
그리고 한층 더 성숙해진 상주 은화란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때가 왔어요. 상단이 정상화됐으니, 이번에는 은성표국이 기지개를 켤 시간이에요.”
표국의 명예를 두 번이나 뭉갰던 낭아봉 괴인. 그로 인해 남은 신용을 박박 긁어모아야 했던 이번 행렬.
은화란과 표국의 명줄을 건 일생일대의 표행이 지금 북경에서 시작되려 했다.
39화 은화란 일생일대의 표행
24절기 중의 춘분(春分).
만물이 잠에서 깨어나고 밤보다 낮이 길어지는 시기.
어느덧 완연한 봄이 되었고, 연무장에서 땀을 훔치던 소년, 소녀도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었다.
별빛 아래에서 주먹질과 발길질을 교환하며 수련 중인 선남선녀.
처음에 데려온 이후로 반년 동안 잘 먹이고 잘 재웠더니 비 온 뒤 죽순처럼 키가 무럭무럭 자랐다.
이 나이대의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더니, 어느새 청년의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한 소년과 숙녀의 태가 나기 시작한 소녀.
“흡! 헛!”
“핫! 히얏!”
특히 소녀, 일홍이는 한밤의 수련이라 남장도 풀고 있었기에 더더욱 여상스러운 느낌이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제 또래 소녀가 미모를 활짝 만개하건 말건 빈틈이 보이자 곧바로 정수리에 딱밤을 꽂아 넣는 무자비한 소년, 단무진.
따악!
“윽! 이거 아픈데요!”
“그러라고 때렸다만.”
옆에서 지켜보던 황걸개는 어디서 많이 보던 딱밤이다 싶었다.
손끝에 담긴 극쾌(極快)의 묘리. 이 시건방진 놈이 어느새 자신의 무리(武理)를 반쯤 훔쳐낸 모양이다.
“아프니까 청춘……. 아니, 아파야 다신 수비 실수를 안 하지.”
그리고 일전에 자신이 내뱉었던 조언까지 똑같이 따라하는 모습.
참으로 괘씸한 놈이 아닌가. 황걸개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솟아올랐다.
“이씨!”
이를 꽉 깨물고 분한 얼굴로 다시 달려드는 일홍.
그녀는 황걸개가 특별히 손봐준 걸심권(乞心拳)을 전력으로 펼쳐냈다.
바닥을 팍 파고드는 오른발과 호선(弧線)을 그리며 망치처럼 떨어져 내리는 왼 주먹.
하지만 단무진의 두 다리가 흐릿해지고 양손이 올가미처럼 뻗어오자 흰 손목이 붙잡혀 우뚝 멈추고 만 일홍이었다.
“허, 이 육시럴할 놈이.”
그리고 황걸개는 또 한 번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이것 또한 수련이 고달파 도망치는 녀석을 붙잡을 때 썼던 개방의 금나수, 동추수(銅錘手)였다.
선풍보와의 연계 수련도 틈틈이 해놨는지 물 흐르듯 동작이 이어진 모습.
“……대장,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그 신묘한 움직임에 손목이 봉해진 일홍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스윽하고 빡하면 돼.”
“스윽 빡? 그게 뭐예요?”
“스윽빡은 스윽빡이지.”
저놈도 죽기 직전까지 처맞다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익힌 거라 입으로는 설명이 힘든 듯했다.
무공을 초식부터 시작해서 체계적으로 다지는 무인들과는 다르게, 저 녀석은 목숨이 간당간당한 수련법이 무척 효과적이라서 말이다.
“치이, 따라잡으려고 열심히 수련했는데, 갈수록 차이가 벌어지네요.”
수련 기간 자체는 몇 달 차이 안 날 텐데, 재능의 차이가 너무 크다고 투덜거리는 일홍이.
하지만 황걸개가 보기엔 그녀도 차곡차곡 수련을 쌓아 나간다면 충분히 고수 소리 들을 만한 자질이 있었다.
눈앞의 저놈이 너무 규격을 넘어서는 괴물이라 그렇지.
“야, 재능이 넘치긴. 겨울이 지났는데도 15년 내공, 성운심법 3성, 무엇 하나 달성하지 못한 놈인데 내가.”
일홍의 투덜거림에 단무진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대답했다.
저건 아마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 것이다.
머릿속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벽력탄 같은 것을 품고 있으니, 아무리 성취를 이뤄도 불안하며 스스로 부족하다 여기게 되는 것이다.
반면 그 사실을 모르는 일홍이는 자신을 기만하는 거라 여겨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댔다.
“와, 방금 건 좀 재수 없었어요.”
“…….”
말하고 보니 좀 찔렸는지 입을 꾹 다무는 단무진.
그러다가 방심하는 순간 흉성에게 잡아먹히는, 대가 있는 재능이란 것이 떠올랐는지 억울하단 표정으로 헛소리를 내뱉으려는 기색이 보였다.
“근데 생각해보니 나도 좀 억울……. 꽥!”
이를 차단하기 위해 냅다 정수리를 후려갈긴 황걸개.
녀석이 목이 비틀린 오리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갓 잡힌 숭어처럼 통통 튀어 오르며 고통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모습.
역시 때리는 맛이 있는 놈이다.
“아! 쫌! 아프다고요!”
“흘흘, 그러라고 때렸다 이것아.”
황걸개는 피식 웃으며 좀 전에 녀석이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줬다.
골이 쪼개지는 줄 알았다며 엄살을 떨어대는 단무진.
“히히, 맞아요. 아파야 실력이 는다면서요.”
일홍이가 기가 살아서 쌤통이라는 듯 입술을 샐쭉거렸다.
단무진은 할 말이 없는지 ‘끙’ 소리를 내며 맞은 부위만 연신 문질러 댔다.
“이놈아.”
“아, 왜요.”
잔뜩 심통이 난 얼굴.
개봉의 본타에선 자신이 말 한마디 하면 천 명이 넘는 거지가 껌뻑 죽었는데.
정수리 한 대 맞았다고 눈깔을 저따위로 뜨다니. 하여간 싹퉁바가지가 없는 녀석이다.
“내일 은성표국이 표행에 나서는 건 알고 있더냐?”
은성의 깃발을 내걸고 표행에 나설 때마다 깽판을 쳐온 정체불명의 괴인.
상주 은화란은 땅에 떨어진 신뢰를 복구하고자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이번 표행을 준비한 듯했다.
남은 신뢰를 박박 긁어모은 이번 표행마저 실패해 버리면 은성표국은 정말 끝장일 테니까.
“예, 알죠. 은화란 누나의 운명을 건 일생일대의 표행, 너만 오면 고.”
“……?”
저놈은 가끔 저렇게 못 알아들을 소리를 한다.
머리에 미친 별이 박힌 놈이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황걸개였다.
“아무튼 노부도 그 표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아마 두어 달간 먼 길을 다녀오게 되겠지.”
그동안의 묵은 일감을 한 번에 처리하는 표행인 만큼, 먼 거리를 움직이고 많은 곳을 들른다고 했었다.
“흐, 뭐 잘 다녀오십쇼.”
겨울 내내 쥐어 터지며 수련만 해왔다 보니, 그가 한동안 먼 길을 떠나게 될 거란 이야기에 무척 반색하는 단무진이었다.
“어째 표정이 좋아 보이는구나.”
“에이, 그럴 리가요.”
아니라고 하면서도 히죽히죽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꼴이 참으로 우스웠다.
마냥 남 일이라고만 생각한 모양이지.
“너도 가는 거다. 이놈아.”
“……예?”
녀석이 웃음이 뚝 멈췄다.
혹독한 수련에서 드디어 벗어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자 다시 딱딱하게 굳어가는 얼굴.
앞에서 보고 있자니 제법 재밌는 볼거리였다.
“이런 미친. 제가 왜요? 이젠 표국의 쟁자수도 아닌데?”
“대신 낭인이 되었잖느냐. 상주 은화란이 네 녀석을 흔쾌히 고용해 주기로 하셨다.”
“아니, 그러니까 고용해달라고 한 기억이 없는데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런 적 없다고 외쳐대는 녀석.
“그야 없겠지. 내가 대신 고용해달라고 말했으니.”
사람은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문이 턱 막히는 법이다.
단무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황걸개를 노려봤다.
“이런 빌어먹을! 이건 횡포요, 왜 그쪽이 나서고 난린데!”
언젠 사제지간 사이도 아니라고 그랬으면서 이 무슨 폭거냐고 항의해오는 모습.
“흘흘, 너같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놈을 몇 달이나 방치할 줄 알았더냐? 까불지 말고 노부를 따라오거라.”
무림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저놈은 자신의 시야가 닿는 곳에 있어야만 했다.
적어도 일정 경지를 이뤄 흉성을 억누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풀어줄 생각이 없었다.
“이 망할 늙은이가!”
원하는 대로 안 풀리자 또 제 성격이 나오기 시작한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
고생은 지금 하는 수련으로도 충분하다며 갖은 불만을 터트려왔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대도 황걸개가 눈 하나 꿈쩍 않자, 어느 순간 입을 다물더니 눈알을 요리조리 굴려대는 모습.
곁눈질로 뒤쪽을 슬그머니 훑는 것이, 옛날에도 한 번 본 적이 있는 장면이었다.
이 다음 튀어나오는 대사가 분명.
“……삼십육계!”
그래, 저거였었지.
놈은 내력을 끌어올리더니 선풍보를 펼쳐 냅다 뛰기 시작했다.
다급한 몸짓으로 필사의 도주를 감행하는 모습.
“쯧쯧,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거늘.”
고작 2성의 선풍보로 자신을 뿌리치려 하다니. 용기가 지나치면 만용이 되는 법이다.
타앗!
용천혈이 막대한 내력을 뿜었다. 물 찬 제비처럼 연무장 위를 질주하는 황걸개.
그 속도가 가히 빛살 같아 신형이 길쭉해지다 못해 유령처럼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표홀한 움직임으로 헐레벌떡 도망치던 단무진의 코앞에서 불쑥 솟는 노인.
“헛!”
허나 이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단무진은 왼발로 마찰을 일으켜 제동하고 오른발을 탄력 있게 뻗어 몸을 반 바퀴 회전시켰다.
그렇게 뻗어오는 손아귀를 간발의 차로 피하며 다시 질주를 이어 나가는 모습.
깜짝 놀라 구수한 욕을 쏟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름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런 썅! 안 간다고! 쫓아오지 말라고!”
발을 놀리며 다급히 외쳐대는 녀석.
새파란 애송이 주제에 강호의 대선배에게 아주 못 하는 말이 없군.
“지랄 그만 떨고 따라오거라.”
놈은 운이 좋아 동추수를 피한 줄 알겠지, 하지만 실제로는 황걸개가 적당히 손대중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천살성은 공격의 궤적을 읽을 수 있다지만, 알아도 몸이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손을 뻗으면 될 일.
쉭- 타탁!
금세 옆으로 따라붙는 황걸개. 달리는 와중에도 네 개의 팔이 허공에서 어지럽게 교환되었다.
시야를 옭아매는 궤적 속에서 불쑥 튀어나와 팔을 뱀처럼 휘감는 황걸개의 손.
툭!
“윽!”
마혈이 짚여 균형을 잃은 녀석은 달리던 속도 그대로 수십 바퀴를 데굴데굴 굴렀다.
뿌옇게 이는 흙먼지. 혹여 점혈을 떨쳐낼까 싶어 내력을 평소보다 다섯 배 넘게 주입했다.
아마 저번처럼 온몸이 빳빳하게 굳는 감각에 눈알만 핑핑 돌려대고 있겠지.
“이놈, 갈수록 지랄병이 느는구나.”
황걸개는 한탄하듯 한마디 했다.
단전은 이미 항마의 기운이 가득한 데다, 두 눈엔 약간이지만 순수한 정광이 흘러나오는 걸 봐선, 그냥 저놈 성격이 원래 저랬던 모양.
“끅, 윽. 시팔! 이게 누구 때문인데……! 수련이랍시고 줘패는데 성격이 멀쩡하면 그게 미친놈이지……!”
그런데 먼지 속에서 걸쭉한 욕설이 날아들었다.
“이놈아, 또 어떻게 점혈을 풀어 낸 것이냐.”
분명 마혈과 함께 아혈도 짚었을 진데, 어느새 또 점혈이 풀려 주둥이를 털어대고 있는 녀석.
내력을 몇 배로 불어넣어도 소용이 없다. 대체 무슨 원리로 점혈을 밀어낸 것이지?
진기를 흘려 넣어 저놈 몸을 구석구석 살피면 원리를 알 것 같기도 한데, 그 흉한 존재와 마주칠까 싶어 그만두기로 했다.
“후욱, 포기해, 늙은이! 아무리 점혈을 찔러도 나는 절대 굴하지 않……. 꽥!”
결국 뒷목을 내리쳐 놈을 물리적으로 기절시켜야만 했다.
눈깔을 까뒤집더니 고개를 툭 떨구는 단무진. 그냥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나.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을꼬.”
하도 두들겨 맞아서 그런지 이제 깝치다 처맞는 건 무서워하지도 않는다.
황걸개 또한 거지로서 온갖 수난을 겪어왔지만, 이놈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한 독종이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머릿속에 흉성을 품고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까.
“일홍아, 이놈 데려가서 표행용 짐수레에 태우거라.”
축 늘어진 단무진을 들어 올려 일홍에게 건네주는 황걸개.
“……넵.”
그녀는 침을 꿀떡 삼키며 대답했다.
세상에 저만큼 살벌한 사제지간이 또 있을까.
무공을 배우더라도 절대 저 사이에는 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는 일홍이었다.
***
눈을 뜨니 낯선 하늘이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다니, 내 마지막 기억은 분명 한밤중의 수련이었는데 말이다.
“대장, 정신이 들어요?”
살랑거리는 꽁지 머리. 예쁘장한 미소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인피면구를 썼음에도 저 미모를 다 가리기엔 역부족이로군.
그리고 그녀의 등 뒤에선 수백 명의 인부와 쟁자수들이 분주하게 장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잽싸게 움직엿! 이 굼벵이 자식들!”
“표물에 흠집이라도 내봐라! 전부 너희들 돈으로 물어내야 한다!”
곧 출발하는 표행에 만전을 기하려는 모습이었다.
수레에 표물과 짐을 쑤셔 넣는 쟁자수들과 병장기와 개인 군장, 각종 보존 식량을 점검하는 표사들.
일선에선 표두와 장궤들이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니며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이거 보면 볼수록 군 시절의 전준태가 떠오르는 광경.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화스트페이스’와 ‘발령권자 은화란’을 복명복창할 듯한 삭막한 분위기였다.
“시발, 이 기분을 또 느껴야 한다니.”
나는 수레 위에서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이래서 가기 싫다고 발악을 해댔던 건데.
“일홍, 그래서 뭐 얼마나 걷는다고?”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돌아오는 기한만 알아뒀었다.
벌써부터 발바닥에 물집이 잡힐 것 같은 이 꾸릿한 기분은 뭘까.
“대략 이천 리(里)를 걷는다는데요?”
“…….”
나는 속으로 쌍욕을 삼켰다.
지구의 특전사 아저씨들도 너무 힘들어서 2년에 한 번 정도 걷는 게 천리행군인데.
아무리 땅덩이가 넓어도 그렇지, 이쪽은 거기에 두 배를 걷겠단다.
물론 중간중간 마을에 들러 쉬기는 하겠지만, 어쨌든 고생길인 것만은 확실.
“흠.”
나는 무릎을 살짝 세워 몸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도망치면 황 노야가 중원 끝까지 쫓겠대요.”
“흐으음…….”
세웠던 무릎을 다시 내렸다.
절대 저 말이 쫄려서 그런 것은 아니다.
“누가 튄대? 그냥 무릎이 뻐근했을 뿐이야.”
“네에, 네에.”
퍽이나 그렇겠다는 듯 피식거리는 일홍이.
저 소리를 듣고 보니 주변 사람들이 완전군장처럼 봇짐을 바리바리 짊어진 이유를 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걷고 그만큼 걸리니 필요하다 싶은 건 전부 챙겨가는 거다.
어딜 가도 편의점 하나는 박혀 있는 현대와는 다르게 이곳에선 행군 도중에 뭘 구하기가 무척 힘들 테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너도 이것저것 많이 챙겼네?”
그녀는 이번 표행 행렬에 끼어든 행상인들 못지않게 짐이 많았다.
둘러매는 커다란 등짐에 허리의 요대에 걸쳐놓은 작은 보따리 서너 개까지.
“이것저것 챙길 게 많았거든요. 흑점에서 사온 것도 있고.”
아, 그 없는 게 없다던 어둠의 만물상 말인가.
그동안 낭인 노릇을 하면서 돈이 생기는 족족 흑점에 달려가더니, 생각보다 거기서 가져온 게 많은 모양.
심지어 뭘 사려는 건지 나한테 돈도 몇 번 더 빌려 갔었지. 무척 면목 없다는 얼굴로 말이다.
“이제 와서 묻는 거다만. 흑점에서 뭘 구하느라 그렇게 돈이 들어갔던 건데?”
빌려준 금전 한 닢은 물론이요, 은전도 십수 닢 투자된 것 같은데.
물론 똑 부러지는 애라 허튼짓은 안 할 것 같지만, 계속 저러니 궁금하긴 했다.
“훗, 대부분 이것 때문에 돈이 들어갔었죠.”
그러자 그녀는 살짝 웃으며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앞에 들이밀었다.
무언가의 정체는 바로 사람의 얼굴을 본떠 만든 하오문의 비밀스런 변장 도구.
“짜잔, 무진 대장을 위한 인피면구랍니다.”
내 얼굴 형태에 맞춘 전용 변장 도구가 그녀의 손에 들려 찰랑거리고 있었다.
“아니, 내 걸 만들고 있었다고?”
“네, 저번에 이런 거 하나 가지고 싶다고 말씀하셨었잖아요.”
매번 아침마다 소녀가 소년으로 감쪽같이 변하는 걸 보고 혼자 중얼거린 거였는데.
그걸 캐치해서 이런 선물을 몰래 준비하고 있었다니.
약간 자식한테 용돈을 줬더니 그걸로 부모 선물을 사 온 느낌이었다.
“이런 될성부른 녀석을 봤나.”
“흐헤헤.”
내가 만족스럽다는 듯 칭찬하자 뿌듯한 얼굴로 배시시 웃는 일홍이.
이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투자한 보람이 있었군. 금전 한 닢이 전혀 아깝지 않은 선물이었다.
“오오.”
거죽을 얼굴 위에 갖다만 대도 안면에 착 달라붙는 게 느껴졌다. 범용이 아니라 오직 나만을 위해 깎아진 게 느껴질 정도.
여기에 전용 아교를 덧바른다면 더욱 깜쪽같아 지겠군.
“근데 일홍아.”
“네?”
“거죽이 굉장히 섬세한데, 내 얼굴 모양은 어떻게 알고 준비한 거냐?”
이런 건 코앞에서 대놓고 얼굴을 뜯어봐야 알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가끔 쟤가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경우가 몇 번 있기는 했었다만.
“대장은 새벽 수련하고 나면 매번 기절하듯 잠들잖아요.”
“그건 그렇지.”
수련을 빙자한 구타가 온몸에 가해지는 데다가, 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도록 혹사를 당하니까 말이다.
물론 그 덕에 무공의 성취는 폭발적이었다.
“그래서 잠들었을 때마다 찾아가서 얼굴 관찰을…….”
“……뭐라고?”
그러니까 내가 의식이 없을 때 찾아와서 이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일홍이라도 이건 약간 소름이 돋는데.
“오,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그냥 몰래 인피면구 선물하려고 그런 거였으니까요.”
내가 뜨악한 얼굴로 묻자 귀끝을 살짝 붉힌 채 순수한 의도였음을 해명하는 일홍이.
“그렇지? 그런 거지……?”
“그럼요, 물론이죠!”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쟤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그런 걸로 해두자.
아니면 좀…… 무서워질 것 같으니까 말이다.
40화 지루할 틈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