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

40화 지루할 틈이 없어

은화란의 아버지, 춘휘거상은 시류를 읽는 능력이 뛰어나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는 분이셨다.

그리고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은성상단이 자리를 잡자마자 곧바로 표국(鏢局)이라는 신사업을 밀어붙이신 그분.

처음엔 반대도 많았더란다.

산적과 칼질하는 일은 표국한테 맡기고, 우린 뒤에서 주판알만 튕기면 되는데 왜 굳이 나서서 위험을 자처하냐고 말이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확신에 찬 얼굴로 이렇게 말했었다.

‘물류야말로 상행의 꽃이다.’

상단과 표국은 상호보완적 존재라 한데 묶으면 큰 선순환을 일으킬 거라며, 반대를 무릅쓰고 뚝심 있게 사업을 펼쳐 나가셨다.

기존 표국들의 반발이라는 진통 과정이 있었지만, 특유의 사업 수완과 사람을 품는 인망으로 마침내 은성표국이라는 굴러온 돌을 박힌 돌로 만들어 버리신 그분.

그렇게 더 먼 데까지 길을 뚫을 수 있게 되자, 은성의 영향력도 자연히 하북을 넘어 드넓은 하남까지 아우르게 되었고.

은성상단도 이를 발판으로 급속하게 성장하여 천하십대상단 말석에 이름을 새기기에 이른다.

“후, 드디어 이 날이 왔군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늘날.

아버지가 남겨주신 두 유산 중, 은성표국이 운명의 기로에 서 있는 시점.

은화란은 장원 입구에 도열한 쟁자수와 표사들을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봤다.

쩌렁쩌렁한 목청으로 이번 표행의 중요성을 한껏 강조 중인 총표두 나맹달.

실패하면 직장이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단 말에 사람들이 흠칫 굳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스르릉.

그리고 침체된 분위기 속에서 난입하여 총표두의 칼을 말없이 슥 빌리는 초로의 노인.

사전에 합의된 일은 아니었는지 나름 일류무인인 총표두가 허리춤의 빈 칼집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노부는 오악 중의 으뜸, 태산(泰山)에서 도를 닦다 하산한 신풍진인이라 한다!”

도인의 상징인 기다란 수염을 길게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신통방통한 진인(眞人)이라 소개하는 황 노야.

하지만 신풍진인이란 듣도 보도 못한 도명(道名)에 사람들의 반응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신풍진인? 누구 들어본 사람 있어?”

“비슷한 이름의 허풍진인은 몇 번 들어봤다만…….”

“나 저 사람 지붕 위에서 자는 거 본 적 있어.”

다들 고수 영입 소식은 들었지만, 거지처럼 추레한 노인이 그 고수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일부 표사들 빼고는 별다른 호응 없이 웅성거리기만 하는 사람들.

이에 황 노야는 눈을 삐뚜름하게 뜨더니 훔친 칼을 번쩍 들어 올렸다.

츠츠츳-!

그가 내공을 주입하자 수직으로 세운 칼날에서 시퍼런 도기가 삼 척 이상 치솟았다.

모두의 감각을 휘젓는 날카로운 예기(銳氣). 좌중의 의문을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압도적인 무력 시연이었다.

장원 내부는 물론 외부의 구경꾼들도 입을 떡 벌리며 경악하는 모습.

그러한 모습이 퍽 만족스러웠는지 한차례 씩 웃은 황 노야가 기세를 몰아 이렇게 외쳤다.

“은화란 상주가 근래의 습격을 염려하여 본 노부를 초빙하였으니……. 오늘부터 그 어떤 악적도 은성의 표행을 침범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모두의 고막을 세차게 두들겼다.

심후한 내공을 짐작케 하는 엄청난 울림.

“우오오……!”

“태산에서 온 신비고수! 신풍진인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낭아봉 그까짓 놈, 덤비라고 그래!”

“북경삼화 은화란 상주님 만세!”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이런 세상에서 고수가 우리 편인 것만큼 든든한 일이 또 없다.

도기를 삼척 넘게 발출(發出)할 수 있는 고수가 자신들과 함께한다고 하자 사기백배한 함성을 내지르는 표국 사람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화란은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슬며시 미소 지었다.

출정에 앞서 사기를 한번 북돋아 달랬는데, 저런 식으로 끌어올려 주실 줄이야.

예로부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폭력이 난무하는 이 무림에선 백마디 말보다 더 효과적인 게 단 한번의 실력행사였다.

덕분에 낭아봉 괴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낸 표사와 쟁자수들.

이곳에 모인 모두가 선풍진인이란 도명을 열성적으로 소리쳤다.

낭인들 틈에서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곱상한 청년 한 명을 제외하곤 말이다.

“풉.”

은화란은 황급히 입을 가렸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고생이 싫어서 표행엔 참여 안 할 거라더니, 기어이 황 노야가 끌고 와버린 모양.

정수리에 뽈록하게 튀어나온 혹이 그녀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이번 표행, 운이 따르겠어.”

저 아이가 있으면 왜인지 행운이 따르는 듯했다.

번뜩이는 지혜로 상단을 구해 낸 저 아이가 부디 표국도 살려 내 주기를.

“은화란 상주님!”

밑에선 총표두 나맹달이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준비됐으니, 이제 출발해도 되겠냐는 그의 눈빛.

“출표를 허락합니다!”

은화란은 출정 방향으로 부채를 힘차게 뻗으며 외쳤다.

이에 그녀의 뜻을 호쾌한 외침으로 모두에게 전달하는 나맹달.

“가자, 간만의 표행이다 이것들아!”

그러자 그동안 웅크리고만 있었던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듯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표행이다!”

“이게 얼마 만이냐!”

동시에 움직이는 수십 대의 수레. 길게 이어지는 짐꾼들의 행렬.

사람들이 자신감이 흐르는 얼굴로 하나둘씩 장원 문을 나선다.

부디 저들의 앞길에 무운이 따르기를.

떠나는 표사와 낭인, 그리고 단무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무사 귀환을 빌어보는 은화란이었다.

***

표국에서 출발한 행렬이 북경 성문을 벗어나며 본격적인 표행이 시작되었다.

장장 두 달에 걸쳐 이천 리를 넘게 걷는 지루하고 따분한 행군.

“염병, 이 짓을 또 하네.”

이 세상에서도 행군이라니. 어떤 드라마의 말년병장처럼 머리를 쥐어짜고 싶어졌다.

그래도 그때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보법과 경공을 아우르는 선풍보를 2성까지 익혔다는 것.

무게 중심을 살짝 앞으로, 엄지발가락에 힘을 싣고 용천혈로 미약한 내력을 발출해 앞으로 쑥쑥 나아간다.

옆에서 따라오는 일홍이도 황걸개에게 배운 보법을 밟아 신체의 부담을 줄이고 있는 모습.

이런 것도 없이 투입되었다면 정말 죽을 맛이었겠군.

옛날에 표물을 옮기던 시절처럼 하늘이 노래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낭인들 사이에서 독특한 발놀림을 펼치고 있자, 근처에서 날 보며 수군거리는 쟁자수들.

“저 녀석, 쟁자수로 일하던 걔 아닌가? 근데 이제 낭인이라고?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자네도 소식이 느리군. 저 녀석 신풍진인 눈에 들어 제자가 됐다잖아.”

“그 기세로 낭인패도 쉽게 땄다더군. 참나, 부럽기 그지없는 녀석이야.”

“인생 폈구먼. 부럽다, 부러워.”

듣고 있자니 귀가 간지럽다.

인생이 폈다니, 들으면서도 어이가 없는 발언이었다.

어느 날 흉성이 발작이라도 하면, 곧바로 목이 날아가는 처지인 걸 저들은 알까?

“에휴, 내 인생.”

저 늙은이가 표행으로 멀리 간단 얘기를 들었을 땐 해방될 생각에 기분이 무척 좋았었는데 말이다.

속이 짜증으로 부글거렸다. 그래서 일홍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봤다.

“일홍아, 식수 남은 거 있냐.”

“아뇨, 오면서 다 마셨는데요.”

그녀는 텅 빈 가죽으로 된 물주머니를 들어 올려 보였다.

“이런 폐급 후임 같으니, 선임을 위해 마실 물은 남겨놔야지.”

“또 못 알아들을 소리를……. 저기 중간에 합류하는 사람들한테 부탁해보시던가요.”

그녀는 근처 안양현이란 마을에서 합류해오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해왔다.

이 시대에서 산이란 것은 관군의 힘이 닿지 않는 무법지대 같은 것이라서 말이다.

곳곳에 맹수와 산적이 득실대니 이렇게 안전하게 묻혀 갈 수 있는 대규모 표행은 무척 귀한 것이라 할 만했다.

그렇기에 경로만 맞아떨어진다면 소정의 동행비를 내고 표국의 깃발 아래에 모여들곤 했던 북경 주변 사람들.

즉, 우리는 배차 횟수가 엄청나게 긴 이 시대의 안전 버스 같은 것이었다.

“흠.”

식수로 삼을 깨끗한 하천이 나오려면 아직 멀었으니, 가서 물 동냥이라도 해볼까.

나는 그녀의 조언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는데.

“대장, 대장.”

무언가를 본 듯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일홍이.

“또 왜?”

“대장, 아까 합류한 사람들 중에 웬 여자애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데요?”

나는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봤다.

그러자 진짜 설명대로 웬 땅꼬마가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정확히 우릴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것도 경공을 펼친 듯 무척 빠른 속도로 말이다.

“야!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깔을 확 치켜뜨며 욕을 갈겨대는 꼬맹이.

카랑카랑하고 싹수없어 보이는 것이 어디서 꼭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다.

저 작달막한 여인은 왜 내게 화가 나 있는 걸까.

“너 이씨 일루와! 감히 그 귀한 병기를 훔쳐?!”

분노를 원동력으로 금세 좁혀진 거리. 동시에 그녀의 흰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귀밑으로 떨어지는 똑단발과 날카로운 눈매, 연지를 덧바른 듯 붉게 타오르는 눈꼬리까지.

“아, 그때 그 당문 싸가지?”

당여혜였던가 이름이.

“하? 죽여 버린다 이 씹새가!”

앗,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실수였다.

평소 그런 식으로 기억했다 보니 반사적으로 내뱉어 버렸군.

나는 오해라는 듯 양손을 흔들며 분위기 수습에 나서봤다.

“크흠, 아무튼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셨어요?”

“잘 못 지냈지! 쥐새끼 같은 너희 둘 때문에!”

물론 쥐뿔도 효과는 없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손톱의 암녹색이 진해지고 기도가 정돈된 걸로 봐선 수련의 성과는 있었던 모양.

그리고 아까부터 소리를 떽떽 질러대는 건 깜빡하고 회수하지 못한 당문의 원통형 암기 때문이겠지.

스윽.

그리고 찔리는 게 있는지라 내 등 뒤에 숨어 얼굴만 쏙 내미는 일홍이.

“에이, 누가 훔쳐 갔답니까? 그냥 돌려주는 걸 깜빡한 거지.”

따지고 보면 그녀도 혈야저의 독단에 정신이 팔려 회수를 깜빡했던 거 아닌가.

그러니 쌍방과실이지. 뒷목 잡고서 누가 더 잘못했니 따질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납득이 되질 않는지 뾰족한 눈빛으로 우릴 지그시 쳐다보는 그녀.

“흥.”

아까 이천 리 내내 지루하고 따분한 행군이 될 거라 말했던가.

전면 취소다 그 발언.

이 독기 가득한 여인과 동행하면 그럴 새가 없을 테니 말이다.

“……아하하.”

***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

멸마대 부대주의 의복을 입은 여인이 수배범 가슴팍에 꽂아 넣은 검을 거칠게 회수했다.

“끄윽-”

숨이 꺼지는 짧은 비명과 팍 튀어 오르는 핏물.

얼굴에 새빨간 점이 다닥다닥 찍혔지만, 미모의 여인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겨울 내내 쉬지 않고 악인을 죽여 대 호사가들로부터 얼음꽃이란 별호 대신 악살신녀(惡殺神女)란 살벌한 별호를 얻게 된 모용청혜.

후두둑.

그녀는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땅바닥에 흩뿌렸다.

아무리 악인을 죽여도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이 채워지지 않는 느낌.

“끄응.”

그리고 멸마대의 대주, 적운엽은 이미 자신의 실력을 넘어 버린 부대주를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절정 초입에 든 마두를 백여 초 만에 제압해 버릴 줄이야.

이렇게 될까 봐 저번에 은근히 대주 자리를 제안했던 것인데.

대주가 되면 부하 관리에 무림맹 회의, 서류 작업 등등, 그 시간에 악인 하나를 더 때려잡겠다며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렇게 자신보다 무공이 세고 가문도 더 빵빵한 그녀를 부하로 거느리게 된 멸마대 대주.

그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옆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작년에 저 여자가 찾아온 이후로 계속 끌려다니는 느낌.

“대주님, 그래서 다음 마두는 어디죠?”

또 쉴 생각 안 하고 다음 상대부터 찾아다니는 저 꼴을 보라.

“이 근방엔 이제 없소.”

“……어째서죠?”

“악살신녀, 그대가 다 베어 버렸기 때문이지.”

그녀의 악명이 이미 하북에 진동하고 있었다.

덕분에 죽일 놈들이 죄다 달아나서 최소 백 리 내에선 악적의 씨가 말랐다고 해도 될 정도다.

“그럼 이제 어쩌죠?”

“…….”

이제 어쩌긴, 업무를 잘 수행했다고 자축한 다음 무림맹으로 돌아가서 쉬어야지.

하지만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듯한 미녀의 표정을 보자 저도 모르게 다음 목표를 내뱉고 마는 적운엽이었다.

“그 뭣이냐, 멀지 않은 곳에 낭아봉을 들고 표국을 습격해 악명을 떨친 괴인이 하나 있긴 하오…….”

“가시죠.”

얼굴에 도는 생기. 지체 없이 대답하고 몸을 날리는 모용청혜.

어느 방향인지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멀리서 얼른 가자는 듯 재촉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적운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밖에 없었다.

41화 표행길

키는 작지만 두 눈에 시퍼런 독기를 품은 여인이 있었다.

겨울 동안 키가 쑥쑥 큰 나를 부리부리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당여혜.

아까부터 우리를 도둑 취급하며 방방 뛰고 으르렁대는데, 그 꼴이 흡사 성난 치와와를 보는 듯했다.

“거참, 귓구멍이 막혔나. 훔친 게 아니라, 돌려주는 걸 잊은 거라니까요.”

“새꺄,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같나. 한쪽은 고의성이 없는데.

굳이 말하자면 점유물 이탈 정도로 퉁칠 수는 있겠군.

“그쪽도 독단에 정신이 팔려 회수를 깜빡했었잖아요. 쌍방과실로 하십시다.”

“뭔 쌍방과실이야. 당문의 귀중한 독문 병기를 훔쳐 가 놓고서는!”

“거 훔치지 않았대도 그러네.”

“아앙? 그러면 중간에 알아서 돌려주러 찾아왔었어야지.”

“어디 짱박혀서 수련하는 줄 알고요? 온 산맥을 다 뒤지란 말입니까? 오히려 그쪽이 찾아왔었어야죠.”

이쪽은 겨우내 어디 도망간 적도 없이 은성상단에서 주야장천 수련만 해댔었다.

일전에 낭인회에 은성패를 들이민 적이 있어 내가 그곳에 머무르고 있단 사실은 모두가 아는 것이었고 말이다.

“시발, 그땐 독단을 소화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었거든?”

“내 알 바임?”

“이 새끼 말투 진짜 열받네!”

그 버럭 내지르는 고함에 등 뒤에 숨어 있던 일홍이가 움찔했다.

사실 얘가 저도 모르게 들고 온 거라, 나는 뭐 찔리는 것도 없지.

“당여혜 아가씨!”

제 주인의 상징과도 같은 앙칼진 목소리에 황급히 달려온 능삼 아저씨.

그는 우리에게 오랜만이라는 듯 눈인사를 건넨 뒤 발작하려는 제 주인을 황급히 말려댔다.

역시 누구완 다르게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능삼 아저씨라니까.

“후우, 아무튼 너희들. 이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 줄 알아? 당문의 암기가 잠시나마 남의 손에 들려 반출된 거야 지금.”

진정한 당여혜가 이젠 차분하게 우리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녀가 각 잡고 따지려는 찰나, 근처에서 들려오는 늙수그레한 목소리.

“끌끌, 이건 또 무슨 소란이더냐?”

대낮부터 술 쩐내 풍기는 노인이 우리 사이로 불쑥 걸어왔다.

“아씨, 늙은이는 또 뭐야? 지금 중요한 대화 중인 거 안 보이는…….”

단순 취객이라 생각해 꺼지라고 외치다가 얼굴을 확인하곤 돌처럼 굳는 당여혜.

말문이 턱 막히고 암녹색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림 말학 당여혜가 정도무림의 대선배를 뵙습니다.”

조금 전의 실언을 떠올린 듯 황급히 허리를 숙여 예를 다한 포권지레를 올리는 그녀.

개방의 용두방주와 면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으잉? 뭔 소리냐? 대선배라니. 노부는 얼마 전 태산에서 하산한 선풍도골의 도인, 신풍진인이다만.”

“…….”

그러자 예상치 못한 반응으로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는 황걸개.

당여혜는 오랜만에 뵌 정파의 큰 어르신이 씨알도 안 먹힐 컨셉을 밀고 있자 땀을 삐질 흘렸다.

“소녀가 눈이 어두워 사람을 착각했나 보네요. 신풍… 진인님.”

“그럼그럼, 이제라도 삐었던 눈이 고쳐졌으니 다행이로구나.”

거지들의 우두머리가 되도 않는 도인 노릇이라니.

아마 저 여자도 속으로는 무척 황당해하고 있겠지. 지나가던 걸신이 웃을 일이다.

“그래서 신풍진인 님, 어쩐 연유로 이러한 곳에 계시는 건지…….”

왜 갑자기 여기서 나타나냔 질문에 능청스러운 얼굴로 대답하는 황걸개.

“발길 닿는 곳이라 들렀지. 천하에 노부가 못 갈 곳이 어디 있더냐?”

저건 실로 맞는 말이었다.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자기 방파마저 휙 내팽개치고 바람처럼 홀연히 사라지는 인간이 아니던가.

“단 공자, 저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그리고 보기 드문 제 주인의 공손한 태도에 놀라 소곤거리며 묻는 몸종 능삼.

“자기가 도인인 줄 아는 정신 나간 늙은이요.”

나 또한 모기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답해줬다.

퍽!

그러자 술병이 날아와 내 안면을 타격했다.

하여간 뭔 놈의 도사가 애 패는 데 이리 거리낌이 없는 건지.

아무리 봐도 저 인간은 사짜 도사가 맞았다.

“한데, 아까 얘기를 들어보니 아이들과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로구나?”

그 말에 숙였던 고개를 바짝 쳐들고 따져대는 당여혜.

“신풍진인 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이 새끼들이 글쎄……!”

“허, 이 새끼드을? 노부가 무공을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말이 심하구나.”

“헙, 방주……. 아니, 진인님의 제자셨어요……?”

놀란 눈으로 빠르게 우리 둘을 훑는 당여혜.

‘늙은이는 뭐야’에 이은 또 한 번의 말실수. 엿됐다란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무는 그녀였다.

“단무진, 인석아. 네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봐라.”

“어음, 그러니까 말이죠.”

사실 좀 전에 내가 강하게 나간 것도 근처에 있을 저 양반이 어떻게든 해줄 거란 믿음 때문이었다.

물론 나를 아껴서는 아니고, 내 등 뒤에 매미처럼 착 달라붙은 하오문주의 딸, 일홍이를 가엽게 여겨서겠지만.

“…뭐, 그래서 그렇게 된 겁니다.”

저번에 혈야저와 맞서 싸운 것만 얘기했지, 어쩌다 보니 챙겨온 암기 이야기는 쏙 빼먹었던 터라 보충 설명을 해줬다.

그러자 내 등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민 일홍을 지그시 쳐다보는 황걸개.

“일홍아.”

“…네, 황 노야.”

인피면구로 미모를 가린 소년이 불안한 듯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훔치려 했던 건 아니지?”

“예, 물론이에요.”

“그래, 수련 열심히 하자.”

허무하리만큼 싱겁게 끝난 추궁.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대화를 지켜보던 당여혜는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일홍에게 암기를 건네받아 원주인에게 슥 돌려주는 황걸개.

“엥? 아니, 이걸로 끝……? 진심으로요?”

진짜 이렇게 넘어갈 거냐는 표정. 붉게 화장된 그녀의 눈꼬리가 연신 씰룩였다.

하지만 뭐 어쩌겠나, 구파일방의 한 석을 차지한 높으신 분께서 이번 일을 뭉개겠다는데.

당문의 둘째 여식은 깨갱할 수밖에.

“훔친 것도 아니었고, 물건도 돌려받았는데. 뭐가 문제더냐?”

“아니, 그래도 당문의 암기가 부외자 손에 들려 나갔는데요.”

“흘흘,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그럴 수도 있지. 큰 죄를 지은 것처럼 호들갑이구나.”

“…작은 죄는 아니죠!”

어차피 암기 따위, 당문 창고에 수두룩 빽빽 하잖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황걸개.

“그게 노부를 늙은이라 부르고 꺼지라고 한 것만큼 큰 죄더냐?”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네요.”

“그럼 됐군.”

할 말이 없어진 그녀가 입을 오리처럼 삐쭉 내밀었다.

지은 죄가 있는데 뭐 어쩌겠는가. 온 중원 거지들의 적이 되고 싶지 않으면 물러날 수밖에.

아니면 저쪽도 사천당문의 우두머리를 데려오던가.

“그럼,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어요.”

녹색 무복 속에 원통형 암기를 쑥 집어넣는 당여혜.

그녀는 나와 일홍을 잠깐 쳐다보더니 ‘칫’ 소리를 내며 능삼과 함께 물러났다.

그리고 내 뒤통수를 슬그머니 쳐다보는 황걸개.

“이놈아, 바쁘니까 사고 그만치고 다니거라.”

“제가 친 거 아닌데요.”

“노부가 표행 내내 지켜볼 것이야.”

“진짜 나 아니라니까.”

황걸개는 끝까지 믿어 주지 않은 채 할 일이 있다며 우리를 떠났다.

이거 약간 억울하군. 나라고 해서 항상 사고만 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한숨 돌렸네요, 대장.”

표행길에서 저 여자와 마주칠 줄이야. 예상치 못한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느낌이었다.

“근데 너 암기 뺏겨도 괜찮냐? 매일 밤 연구하고 만지작거리더니.”

밤새서 분해, 조립하고 흑점에도 들락거리더니만, 녀석의 표정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괜찮아요, 유비무환이라고, 이럴 날이 올 줄 알았거든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준비한 무언가를 슬쩍 꺼내는 일홍.

근데 손에 들린 물건의 모양새가 어째 당문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조잡하고 볼품없지만 흑약과 비침이 장전될 구멍에 격발 고리까지 얼추 갖춘 모습.

“흑점의 야장들을 고용해, 이미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 놨죠.”

그녀는 원본보단 성능이 부족해도, 불의의 일격을 가하기엔 충분한 암기 장치를 내게 자랑스레 소개해왔다.

참나, 이걸 준비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일홍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투자한 금전과 은전으로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들어왔던 모양.

나는 어릴 때 용돈이 생기면 탕진하기 바빴는데 말이다.

“혹시 설계가 새어 나갈까 봐, 여러 야장에게 작업을 파편화시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요.”

원본은 주인에게 돌려주었지만, 그 도면과 설계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전부 복제된 듯했다.

물리적인 물건이 아니라 지식을 훔쳐 버린 셈이지.

살짝 좀 쫄리긴 하는데, 뒷감당은 얘를 아끼는 용두방주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뭐.

“역시 일홍이야. 꼼꼼하고 치밀해.”

“헤헤.”

내 칭찬에 배시시 웃으며 기뻐하는 일홍이.

나는 그 과실만 취하기로 했다. 뭐든 챙길 수 있을 때 챙겨두는 게 낫지.

강호에선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이른바 유비무환이라는 녀석이다.

***

표행이라 쓰고 행군이라 읽는 고난의 여정이 계속됐다.

가도 가도 숲과 산만 나오는 지루한 나날들.

발이 나를 밀어주는 건지, 아니면 내가 발에 얹혀 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걷고 또 걸었다.

원래라면 수레에 짐짝처럼 얹혀갈 생각이었는데 말이다.

황걸개에게 붙잡혀 한 보 한 보, 보법 수련을 한다 생각하고 움직이라 해서 영락없이 뚜벅이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내력을 운용하여 세심하게 걷기를 일주일째.

불편한 요소가 하나 더 생겨났다.

“끙, 왜 저런대.”

황걸개의 제자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한 아담한 여인 하나.

잘 때도 쉴 때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말을 걸면 기분이 안 좋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는 모습.

진짜 뭐 어쩌란 건지. 나보다 고수라서 어떻게 떼어낼 수도 없고.

“대장, 드세요.”

정오에 이르니 식사 추진이 이루어졌다.

푸석푸석한 쌀밥이 뭉친 주먹밥과 말린 북어 반쪽, 그리고 푸성귀 몇 쪼가리를 내게 건네주는 일홍.

갈 길이 바쁘니 걸으면서 먹으란다. 이거 직원 복지가 영 엉망이군.

밥경찰 그 자체인 메뉴지만 이럴 땐 거지 생활했던 게 좀 도움이 됐다.

다른 낭인들은 똥 씹은 표정이었지만 나와 일홍은 군말 없이 우걱우걱 밥을 씹어 삼켰다.

그런데 잠자코 먹고 있자니 밥에서 이상한 쇠 맛이 나는 게 아니겠는가.

“음?”

거기다 옛날에 뭣 모르고 버섯을 삼켰을 때처럼 천살성이 움찔하고 반응했다.

그땐 그냥 혓바닥이 시원해서 신기하다 했었는데, 알고 보니 독버섯을 먹었던 거였지.

그리고 지금, 이전보다 더 질척해진 누군가의 시선.

“저기요, 혹시 제 밥에 뭐 탔어요?”

나는 당여혜를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응.”

이년이 범인이었나 싯팔.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 저리 당당하지?

“너 진짜 신기하다. 내 특제 제조약인데 아무렇지도 않네.”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녀.

이래서 사천당문 사람들과 엮이지 말란 말이 있는 걸까.

제 호기심을 충족하려 남의 밥에다 이상한 걸 타다니.

“아니, 사람 잡을 일 있어요?”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설사를 푸짐하게 싸지를 뿐이야.”

생명엔 지장이 없지만 사회적으로 말살당하는 독이잖나 그거.

어쩐지 뱃속에서 뭔가 부글거리다 사라지더라. 이번만큼은 천살성 덕분에 체면을 건졌군.

“야, 너 혹시 내가 빚은 독 하나 더 먹어 볼 생각 없어?”

저 미친년이 대체 무슨 제안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또 뭔 독이요?”

“그냥 위아래로 다 쏟아내다가 며칠 기절하는 독일 뿐이야. 사실 이런 건 독이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

왜 저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악랄한 독만 개발해대는 건지.

혹시 저번에 복수하겠다던 그 오라버니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미친, 절대 안 해요.”

“증상이 이렇게 가벼운 데도?”

전혀 가볍지 않다만.

내가 무슨 실험실의 모르모트도 아니고.

“돈 엄청 많이 줄게.”

“…흠, 얼마요?”

“대장, 미쳤어요?”

이런, 순간 금전의 유혹에 흔들릴 뻔했군.

생각해보니 저 여자 지금 한 푼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가 아닌가.

그래서 밥도 얻어먹고 수레도 타면서 편하게 가고자 이번 표행에 고수임을 밝히고 합류한 것이었고 말이다.

“하여간 불합리한 세상 같으니.”

무공이 고강하면 어딜 가든 대접받고 배곪는 일이 없는 듯하다.

이쪽은 하루 종일 걷고 군내나는 주먹밥을 퍼먹는 신세인데 말이다.

나는 일홍이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단호한 거절의 말을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최전방에서 울려 퍼지는 경계심 어린 고함 소리.

“모두 정지! 낭인과 표사들은 경계 태세로-!”

앞 행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듯했다.

42화 양동 작전

수풀이 우거진 산속.

그곳에 굴을 파고 자리 잡은 은거지.

복면을 뒤집어쓴 흑의인이 입구의 나뭇가지를 치우고 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 길고 묵직한 낭아봉을 걸치고서 말이다.

“흠.”

능선 너머, 수레 행렬이 지나갈 만한 가도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흑의인.

뭔가 이상한 조짐을 느낀 듯 그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느낌이 이상해.”

2황자 측 놈들의 정보에 의하면 곧 상단의 수레들이 이곳을 지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상단 행렬이 가까워질수록 몸을 간질이는 이 기묘한 감각은 뭘까.

답답함에 복면을 벗는 남자. 검은 천 아래 감춰져 있던 수려한 옥안(玉顔)이 주변을 화사하게 밝히는 듯했다.

별빛을 담은 듯 반짝이며 고고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지닌 미청년.

“…간질거리는군.”

그는 단전이 있는 복부를 내려다봤다.

물리적인 간질거림이 아니라 그의 내력이 무언가에 반응하여 진동(振動)하고 있는 느낌.

굉장히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얼마 전, 은성상단에서 고수를 영입했다고 들었는데, 확률은 낮지만 이 간질거림은 그 정체 모를 고수의 영향일 수도.

어쩌면 성은(星恩)을 입은 사람이 당대에 여럿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묘한 인연이야. 드넓다 생각한 중원이 이토록 좁을 줄이야.”

생각한 것이 맞다면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2황자 측에서 이미 해당 고수에 대한 대비를 해놓은 상황.

다만 그 ‘대비 수단’이란 것이 무척 질이 나빠 청년의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말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다시는 엮이지 말자고.”

지금은 사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다만,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다른 파벌 황족과 엮였다는 이유만으로 죄 없는 상단을 파멸시켜 버리겠다니, 권력을 위해선 뭐든 저지르는 아주 지독한 놈들.

피식.

물론 자신 또한 그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다.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복면을 다시 뒤집어쓰는 청년.

일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

산맥 사이를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가도.

양옆에 무성하게 자란 수풀이 시야를 가리는 가운데, 길게 이어진 인파가 불안함을 품은 채 표행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눈 똑바로 뜨고 살펴!”

“이상한 거 보이면 호각 불고!”

극도의 경계 상태로 온 사방을 예민하게 훑어보고 있는 낭인과 표사들.

두 번의 쓴맛을 봤던 총표두 나맹달 또한 긴장을 풀지 말라며 연신 고함을 질러댔다.

“갑자기 왜 저래?”

의아한 내 목소리에 호신용 암기를 만지작거리며 답하는 일홍이.

“대장, 곧 그 구간이라서 그래요.”

“무슨 구간?”

“낭아봉을 든 괴인이 튀어나와 표물을 박살 내는 구간이요.”

“아하.”

이른바 킬링필드란 것에 들어선 모양이다.

하긴 양쪽으로 산골짜기가 있고 나무도 무성한 것이, 매복했다가 덮치기에 딱 좋은 지형이기는 했다.

부스럭. 부스럭.

아니나 다를까, 숲속에서 들려오는 부산한 수풀 소리.

그 불길한 소음에 모두가 낭아봉 괴인인 줄 알고 바짝 쫄아 칼을 빼들었다.

샤샤샥!

그런데 풀숲에서 튀어나와 모두를 놀래킨 건 다름 아닌 오동통한 산돼지들이었다.

무리 단위로 움직이다 많은 수의 사람을 확인하고 놀라서 혼비백산 달아나는 장면.

“뭐야, 산짐승이었잖아?”

“에이씨, 사람 놀래키고 있어.”

앞으로 달려왔던 사람들이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쩌다 가끔씩 마주치는 산적도 아니고, 웬 산돼지가 초를 치다니.

그렇게 다들 산짐승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와장창-!

대열 끝부분에서 무언가 박살나는 굉음이 들려왔다.

묵직한 둔기질에 사방팔방 비산하는 ‘수레’였던 나무 파편들.

값비싼 표물이 흙바닥에 와르르 처박히며 죄다 깨져나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억장이 무너지듯 절규하는 총표두 나맹달.

“으아! 안 돼! 표물들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후방에서 벽력탄 떨어진 듯 수레 하나가 더 터져 나가자 그제야 사람들이 흉수의 정체를 눈치채고 소리쳤다.

“…그놈이다!”

“낭아봉 괴인이야! 저 미친 새끼가 또 나타났어!”

“전원 전투 대형으로! 표물을 지켜라!”

두 번의 표행 실패. 저 괴인이 등장할 때마다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던 표사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에 더는 두려움이 없었다.

이번 표행에는 도기를 자그마치 3척이나 뽑아내는 신비도인, 신풍진인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흘흘, 묘한 기운을 흘리는 놈이로다.”

타앗-

땅을 박차더니 순식간에 미끄러져 가는 황걸개.

귀신도 혹할 신비한 보법에 사람들은 쾌재를 내질렀다.

“오오!”

“한 줄기를 바람 같은 저 표홀한 신법을 보라!”

“낭아봉 이 새끼! 넌 이제 뒤졌어!”

“신풍진인을 따르라-!”

표국을 집요하게 괴롭히다 못해 자신들의 일자리마저 파멸시킬 뻔했던 정체불명의 흑의인.

그동안 일방적으로 당해왔던 표사들은 이번에야말로 빚을 갚을 수 있겠다며 함성과 함께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대장, 저희도 가죠.”

다만 사기가 치솟아 오른 저들과는 다르게 나는 묘한 감각에 선뜻 발을 내딛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성운심법으로 빚어진 단전이 간질거리는 느낌. 딱히 선업을 쌓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일까.

“대장, 어서요!”

하지만 기분이야 어쨌든 돈 받고 낭인으로 고용된 몸이니 할 일은 해야겠지.

“그래, 가보자.”

나는 손을 잡아 이끄는 일홍이를 따라 괴인이 나타난 곳으로 달려갔다.

***

강호인들은 한때 그를 걸왕(乞王)이라 불렀었다.

무림인 주제에 감히 왕을 칭할 만큼, 개봉과 십만 거지들 사이에서 가히 무소불위의 힘을 호령했던 노인.

정파 무림에서도 막대한 존재감을 지녔었던 그는 어느 날, 가진 것을 전부 버리고 훌쩍 떠났다.

흡사 승려가 번뇌에 얽매인 속세의 인연을 끊고 출가(出家)하듯이 말이다.

모든 것은 더 높은 경지를 탐내다 심마에 시달리고, 일월이라는 신비도인에게 구함받은 이후의 일이었다.

밤하늘의 별. 인간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자 천구에 고정된 불멸의 존재들.

삼라만상의 이치를 넘나드는 신비도인의 가르침은 노인의 좁은 식견을 산산이 깨부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허무해져 걸왕이란 칭호를 내려놓고 다시 황걸개란 이름으로 세상에 자신을 던진 노인.

그리고 오늘, 그 신비도인과 비슷하면서도 묘하게 다른 기운을 품은 이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다.

온몸을 흑의로 두르고 낭아봉을 쥔 채로 말이다.

까앙!

황걸개는 신비도인과 겨루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며 녀석과 검격을 교환했다.

정확히는 총표두한테서 훔친 칼과 묵직한 낭아봉 간의 격돌.

차차창!

칼날이 내력을 잔뜩 머금고 날아오는 낭아봉을 비스듬히 튕겨냈다.

샛노란 불똥을 튀기며 여러 차례 붙었다 떨어지는 쇠붙이들.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반발력에 흑의인이 짧은 신음성을 흘렸다.

예상보다 더 고수. 그 간질거림의 정체는 이자의 것이었나.

“볼수록 묘한 기운을 품은 녀석이군. 뭐 하는 놈이더냐?”

“…….”

입을 다문 채 낭아봉에 섬뜩한 광채를 씌우는 걸로 답을 대신하는 흑의인.

쇠봉에 박힌 못 하나하나가 살벌한 예기를 발하기 시작했다.

“과묵한 녀석이구나. 그럼 그 복면을 벗겨 정체를 확인하는 수밖에.”

칼날에 내력을 불어넣은 황걸개는 씩 웃으며 흑의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신형이 흔들리더니 유령처럼 단숨에 거리를 좁히는 보법.

이를 지켜본 흑의인의 두 눈이 복면 아래에서 크게 떠졌다.

“선풍보……!”

“호오, 알아보는 것이더냐.”

휙!

황걸개의 칼날이 푸른 궤적을 그렸다. 기기묘묘한 각도로 흑의인을 베어오는 일격.

그 기세가 마치 세차게 내려찍는 도끼질 같아서, 흑의인은 방어를 위해 낭아봉을 정신없이 휘둘러야만 했다.

채채챙-!

짙은 내력을 두른 병기들. 칼과 낭아봉이 충돌하며 무형의 기파가 주변을 세차게 휩쓸었다.

그 여파로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오른다. 시야가 제한됐음에도 흑의인은 특유의 기감으로 황걸개를 쫓아 낭아봉을 계속 휘둘러댔다.

하지만 흐느적거리는 선풍보로 어느새 측면을 점해버리는 신묘한 움직임에 매번 허공만을 휘젓는 그의 야심찬 공격.

결국 손해임을 깨닫고 흑의인은 내력이 실린 진각을 밟아 흙먼지를 걷어냈다.

“어째서! 용두방주가 표행 따위를 호위한단 말인가……!”

애초에 상대가 걸왕인 줄 알았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려 했을 텐데.

“흐, 하지 못할 이유도 없거늘!”

쉭!

섬전 같은 일격이 흑의인의 앞섬을 옅게 베고 지나갔다. 허공에 붉게 그어지는 실핏줄.

상처는 얕았지만 칼날이 갈빗대를 건드렸는지 흑의인의 중심이 흔들렸다.

황급히 바닥을 뿌리쳐 네다섯 보 물러나는 흑의인.

한데 물러난 걸음 수만큼 칼날에 응축돼 있던 도기가 쭉 늘어나 흑의인의 목을 위협해왔다.

촤악!

“헙!”

오물 위를 뒹구는 당나귀처럼 나려타곤을 펼쳐 간신히 목을 건사한 흑의인.

복면 아래 미청년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기 시작했다.

도기를 밀도 높게 발출해 쏘아내면서 절삭력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검강(劍罡)!”

황걸개의 칼날에 푸른 아지랑이가 파도치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본신의 무위보단 믿기 힘든 기행으로만 점철됐던 걸왕의 소문들.

아무리 성은을 입었다고는 하나, 이 정도 고수를 상대로 역전을 노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빌어먹을.”

이를 깨달은 흑의인은 복면 아래에서 낭패라는 표정을 한껏 지어댔다.

***

산맥 사이에서 연신 울려 퍼지는 카랑카랑한 금속성.

여러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면서 지켜보는 가운데, 노인과 흑의인이 오십 합 넘게 병기를 맞부딪히고 있었다.

“대장, 생각보다 팽팽한데, 제자인 저희도 가세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고수들의 대결을 잠자코 지켜보던 일홍이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살짝 불안해진 듯 말해왔다.

“아냐, 냅둬. 즐기고 계신 거야.”

나는 박살난 수레 사이에서 주워 온 고급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답했다.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게 불구경과 남의 싸움 구경이라지 않나.

얼마나 재밌으면 그걸로 대회를 만들고 돈까지 내면서 볼까.

“……대장은 왜 그렇게 긴장감이 없으세요?”

“그야, 둘 다 살기가 안 느껴지니까.”

말은 이지를 흐리고 사람을 기만하나, 칼질은 결코 거짓을 고하지 않는다.

그리고 둘의 칼질에선 상대방을 죽이고자 하는 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천살성인 내 눈엔 그런 게 명확하게 보이거든.

“근데 표물은 잘만 작살 냈단 말이지.”

달려드는 표사, 낭인들도 날려만 보낼 뿐 크게 해치지는 않고, 표물이 실린 수레만 쏙 골라 작살 내는 고수.

이래서 악적이나 마두보단 괴인(怪人)으로 불리는 것일까.

차라리 금은보화를 털어갔으면 이해라도 하지.

“물론 지금은 왜 저러는지 알겠다만.”

황실의 누군가가 고용한 것이겠지. 은성상단이 도화공주의 자금줄이 되기 전에 숨통을 끊어놓으라고 말이다.

본의 아니게 양잠 건으로 엮이면서 뒷사정을 알게 됐다.

하여간 어딜 가든 정치 암투란 것은 음습하기 그지없군.

“야, 너는 사제지간의 정도 없냐? 스승이 저리 싸우는데 육포나 질겅이고 있어?”

그런데 옆에서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

어느새 근처로 다가온 당여혜가 내 육포를 뺏어 먹으며 잔소리를 늘어놨다.

이 여자는 지도 열심히 구경했으면서, 왜 또 시비인지.

“검기도 못 뽑는 애들이 합류해서 뭣하게요?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달려가서 힘 좀 보태주시죠?”

나는 현장을 슥 가리키며 어떠냐는 듯 물었다.

“됐거든, 척 봐도 걸왕 선배님이 곧 이길 것 같은데 뭐. 지금도 상당히 봐주고 계시네.”

저 노인네 소싯적 별호가 걸왕이었구나.

거지들의 왕이라니, 뭔가 있어 보이면서도 참 볼품없단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촤악-!

그때, 황걸개의 도검에 일렁이던 푸른 아지랑이가 더없이 응축되더니 돌연 빛을 뿜으며 공간을 길게 갈랐다.

대략 이 장(丈) 정도 길이로 쩍 쪼개진 땅바닥. 그 사이에 있던 돌과 잡초도 반으로 똑 잘려진 모습이었다.

마치 도기를 품은 칼날이 길어진 듯

칼이 허공을 갈랐는데 앞에 있던 것들이 쪼개지자 난 뭔가 싶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옆에서 무릎을 탁 치는 일홍이.

“저건… 검기성강(劍氣成罡)이네요!”

본 적은 없지만 익히 들어본 적은 있는 그 단어. 줄여서 검강(劍罡)이라고 불렀던가.

저걸 다루려면 최소 초절정에, 자유로이 발출하려면 화경(化境)은 되어야 한다고 무협지에서 봤는데 말이다.

“저 양반, 대체 경지가 어떻게 되는 거지?”

빈약한 머릿속 지식으로는 제대로 가늠이 안 됐다.

난 모용세가 출신인 것치곤 제대로 된 고수를 견식한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철저하게 무공과 무인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아왔었지.

그나마 볼 수 있었던 건 누이 모용청혜의 건곤파섬검 정도일까.

무가의 자식이면서도 검법 하나 익히지 못해 의기소침한 내게 힘을 내라며 눈부신 검법을 펼쳐 줬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나중엔 그걸로 날 쑤시러 왔지만 말이다.

“큭, 젠장!”

“노오옴! 게 섰거라! 네 녀석에겐 아직 묻고 싶은 게 있단 말이다!”

그리고 황걸개가 빌린 칼로 도강을 줄기차게 뽑아내기 시작하자, 더는 답이 없다 여겼는지 빠르게 도주를 감행하는 낭아봉 괴인.

타앗-!

그런 녀석을 황걸개가 아직 물을 것이 있다며 황급히 뒤쫓아갔다.

그렇게 재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지는 두 고수.

“오오!”

“신풍진인께서 낭아봉 괴인을 쫓아내셨다!”

“허, 저 미친놈을 드디어 떨궈내다니!”

“속이 시원하네, 시원해!”

표사와 낭인, 쟁자수들이 일방적으로 처맞다가 패퇴하는 괴인의 모습에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꼬리를 만 괴인을 향해 욕지거리를 쏟아내는 사람들.

“의외로 싱겁게 끝났네.”

나는 질겅거리던 육포를 꿀떡 삼키며 중얼거렸다.

황족이 노리고 있다길래 좀 더 끈덕진 테러 공작을 예상했었는데, 일이 쉽게 풀린 느낌.

아무리 황실이라도 황걸개 수준의 고수가 붙을 줄은 예상 못 했나 보다.

그렇게 더는 습격이 없을 거란 생각에 안심하고, 황걸개가 돌아올 때까지 눈 좀 붙이려는 순간.

와장창창-!

수레가 또 하나 박살 나며 표사들의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43화 전대의 마두

불길한 비명과 굉음이 들려오자, 우리는 곧바로 소리의 출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숨을 몰아쉬며 현장에 도착하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수라장이 된 표행 행렬이었다.

찢겨 나부끼는 깃발과 박살 난 짐수레들, 그리고 이를 지키려다 쓸려나간 표사와 낭인.

지면엔 붉은 선혈이 흥건했고, 그 참상 한가운데에는 검버섯이 가득한 왜소한 노인이 오연한 표정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일의 흉수는 저 볼품없어 보이는 노인인 모양.

무언가를 조심하라던 무림의 오랜 격언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여간 늙은이하고 애새끼가 문제라니까.”

내 혼잣말에 눈썹을 치켜드는 당문 여인.

“아앙? 뒤질래.”

“그쪽 얘기 아니에요.”

“아, 그래? 괜히 찔려가지고.”

사실 저쪽도 포함해서 하는 말이 맞았다.

누더기를 걸친 노인네는 알고 보니 용두방주고, 발칙한 꼬맹이는 사실 당문의 후기지수(後起之秀)라니.

망할 무림, 온 사방이 아주 지뢰밭이군.

“이게 대체……. 그대는 누구요? 어째서 이런 패악(悖惡)을 저지르는 것이오?”

총표두 나맹달이 모두가 묻고 싶었던 질문을 대신해서 던졌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그걸 억누르는 냉정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사실 면전에 쌍욕을 퍼부어도 부족함이 없지만, 지금 돌아가는 꼴이 묘해서 말이다.

아군의 주력이 낭아봉 괴인을 쫓아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른 고수가 튀어나온다? 이건 계획된 양동(陽動)일 가능성이 컸다.

이대로 황걸개의 복귀가 늦어진다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

고로 나맹달의 저 질문은,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보려는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일 수도 있었다.

“실로 우습구나, 곧 죽을 것들이 본좌의 이름을 알아 무얼 하겠다고.”

이죽거리는 말과 함께 억눌렀던 기세를 방출하는 검버섯 노인.

주변의 공기가 갑작스레 무거워지며, 아득한 살기가 모두의 심장을 옥죄었다. 포식자를 눈앞에 둔 초식동물처럼 뻣뻣하게 굳는 사람들.

“아씨, 또.”

반면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는 천살성을 억누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항마와 파마(破魔)의 기운으로 똘똘 뭉친 내력에 간신히 진압되는 시뻘건 기운. 성운심법의 아지랑이가 온몸에 허옇게 피어올랐다.

“큭!”

나와는 다르게 온몸을 짓누르는 살기에 힘겹게 저항하고 있는 당여혜와 일홍.

“혹여 도망칠 생각은 접어라. 그 즉시 머리통이 터져 나갈 것이니.”

노인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몸집은 깡마르고 비루한데, 품은 기세만큼은 휘몰아치는 삭풍과도 같았다.

“히익!”

검버섯 노인의 선언과 동시에 의뢰를 내팽개치고 도주하려던 먼 곳의 낭인 하나가 머리가 ‘퍽!’ 터져서 죽었다.

사인은 노인이 구부린 손가락을 튕겨 쏘아 보낸 작은 돌맹이 조각 하나.

“본좌가 경거망동하지 말라 했거늘.”

그 장면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손가락을 튕겨 사람의 머리통을 터트리다니, 절정 무인들도 따라하기 힘든 범상치 않은 기예였다.

“…원하는 건 표물이오? 그렇다면 모두 양보하겠소. 대신 우릴 이대로 보내주시오.”

나맹달이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여겼는지 또다시 딜을 걸어왔다.

낭아봉 괴인과 한패라면 저 노인 또한 운송 중인 표물을 노리고 있었을 터.

이번 일로 표국의 평판은 땅에 처박히겠지만, 그래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법이다.

그렇기에 침음을 삼키고 총표두로서 정말 하기 싫은 제안을 건네보는 나맹달.

하지만 노인에게 그런 제안은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보내줄 수 없다. 본좌는 오늘 너희의 재물을 취하고 내공과 정혈(精血)까지 흡수해 몸보신을 할 생각이니라.”

심법을 운용하는지 시커멓고 불길한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기 시작한 검버섯 노인.

새까만 안개 같은 것이 지면에 닿자 주변 풀들이 생기(生氣)를 빨린 듯 바싹 시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 심상치 않은 광경에 당여혜가 암녹색 눈을 부릅뜨며 노인의 정체를 비명처럼 외쳐댔다.

“마기(魔氣)를 품고 내공과 정혈을 취한다니……. 설마 당신은 탈혼마군(奪魂魔君)?!”

사특한 마공(魔功)을 익혔을 때 몸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다던 그 마기.

대자연의 기운을 축기하는 순리를 거스르고, 역행의 길을 걷는 악적이 이곳에 등장했다.

이에 잔뜩 술렁이는 좌중의 인물들.

“……뭐? 탈혼마군이라고?”

“흡성대법(吸星大法)으로 사람의 생기를 빨아먹고 산다는 그 괴물?”

“마두다, 전대의 마두가 나타났다!”

“빌어먹을, 저런 노괴를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야!”

그냥 마두도 아니고 무려 전대(前代)의 마두란다.

평균 수명이 마흔도 안 될 이 척박한 강호에서 저만큼 살아남았다는 건, 결국 강하다는 뜻.

아무튼 협상은 결렬됐고, 지금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좆됐네, 시발.”

그래, 당여혜의 말처럼 음경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표물만 부수고 튀던 낭아봉 괴인을 상대하는 게 나았지.

사람의 생기와 내공을 빨아먹는 진짜배기 마두와 생사를 걸고 싸워야 한다니.

여기 있는 사람들 중 몇 명이나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탈혼마군 선배님! 좀 전의 제안을 재고하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당여혜가 손끝에 수기를 덧씌운 뒤 맹금류 같은 자세를 취하며 그리 물었다.

그 특유의 조법에 흥미롭다는 듯 주름진 눈가를 오므리는 탈혼마군.

“독기 어린 기세와 짜리몽땅한 키를 보아, 네년은 사천당문의 독조산혈이렸다?”

신체적 특징이 워낙 도드라지다 보니 금세 정체를 눈치채는 모습이었다.

“선배도 아시다시피 당문은 은원을 철저하게 갚지요. 그러니 오늘 표물로 만족해주신다면, 당문도 차후 상응하는 보답을 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뒷배와 후환을 생각해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 달란 소리였다.

“……흠, 네년의 생기는 맨 마지막에 빨아 주마. 독공으로 단련한 내력은 거칠고 불쾌하여 영 맛이 없거든.”

하지만 대화와 협상은 이성이 통하는 자들 사이에서나 가능한 것.

살육과 흡기(吸氣)에 미친 광인과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망할.”

욕설과 함께 입술을 꽉 깨무는 당여혜. 주변의 표사와 낭인들 또한 망했단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 싸움을 피할 길이 없어 보인다.

어떻게든 황걸개가 돌아올 때까지 사력을 다해 버텨 내야 할 판이었다.

“다들 늙고 삭았구나. 본좌의 취향은 젊고 곱상한 연놈들의 생기를 빠는 것이다만……. 뭐 처죽이다 보면 한둘쯤은 나오겠지.”

좌중을 훑으며 찾아내면 곧바로 생기를 빨아내겠다고 선언하는 탈혼마군이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품속의 인피면구를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잘생김이 지워지고 평범함만 남은 얼굴.

그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에 옆에 있던 일홍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뭐. 왜.”

내가 인생에 억까가 좀 많아서 말이다. 이런 확률이라도 좀 줄여놔야지.

근데 쟤는 가린다고 가렸는데도 아직 얼굴에 곱상함이 남아 있군. 이렇게 보면 다 지 팔자다.

“……전원 전투 준비! 어차피 물러서도 죽는다! 각오를 다져라!”

근처 무인에게 빌린 검을 세차게 뻗으며 맞서 싸울 것을 지시하는 나맹달.

은성의 표사들이 총표두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옛부터 강호는 내로라하는 고수가 모래알처럼 산재되어 있는 곳.

그리고 이곳 표사들은 그런 고수를 힘을 모아 상대하기 위해 매번 연무장에서 땀을 흘려온 이들이었다.

“팔벽진을 형성하라-!”

차차창-!

검을 뽑는 소리와 함께 표사들이 한데 뭉쳐 여덟 방위를 점하고 칼날의 숲을 만들어 냈다.

“씨발! 우리도 붙어! 다 합치면 머릿수만 해도 이백이야!”

을(乙)급 낭인이 모두를 대표해 소리쳤다.

주변 낭인들 또한 아까 도망치다 머리통 터진 놈을 전부 본 터라, 잠자코 검을 뽑아 대열에 합류해왔다.

그렇게 하나로 똘똘 뭉쳐 전대의 마두와 맞서 싸우기로 한 사람들.

나는 대열 속에서 침을 꼴칵 삼키며 탈혼마군을 주시했다.

놈은 우리의 저항 의지를 보고 가소롭다는 듯 씩 웃고 있었다.

“재밌구나, 그래 어디 한번 본좌를 막아보아라!”

마두놈이 양손에 무시무시한 마기를 짙게 둘렀다. 쳐다보기만 해도 피부가 찌릿한 파괴적인 기운이었다.

닿는 즉시 아까 그 짐수레처럼 온몸이 산산조각나겠지.

“염병.”

출발할 때만 해도 황걸개가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 믿었건만, 정신 차려보니 고수와 맞서 싸우고 있는 건 바로 나였다.

은전 한 닢 받는 하급 낭인한테 전대의 마두를 상대하라니.

최대한 발버둥 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다.

“온다아!”

짓쳐드는 폭발적인 마기. 누군가의 비명 같은 외침.

깊은 산맥의 외딴 길에서, 목숨을 건 혈투가 벌어지려 했다.

***

무림에서 고수란 어떤 존재인가.

사실 그동안 고만고만한 적만 상대해와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 전대의 마두란 놈과 마주치면서, 나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를 온몸으로 깨닫게 되었다.

쾅!

지면을 뒤흔드는 일격. 마기가 폭사되자 또다시 팔벽진의 한쪽 방위가 무너져 내렸다.

칼날의 숲이고 뭐고 탈혼마군이 손을 휘젓자 도검이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표사들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흡기할 가치가 없는 하수라 여겨지면 가차 없이 몰살시켜 버리는 잔혹한 손속.

이건 뭐 알보병 사이로 강림한 수십 톤짜리 전차나 마찬가지였다.

“아악!”

“뭐 이딴 괴물이……!”

처음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전투.

사실 어느 정도의 손실은 예상한 바였다. 우리의 목적은 결국 황걸개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거니까.

하지만 이건 생각 이상으로 너무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컥!”

패색이 짙어지자 한 낭인이 도주하려다 뒷덜미를 붙잡혀 공중에 들어 올려졌다. 아까 호기롭게 싸우자 외치던 을급 낭인이었다.

우드득.

진원진기와 생기를 모조리 빼앗기더니 목내이(木乃伊)처럼 쪼그라들어 절명했다.

기운을 소폭 회복하고 씩 웃는 탈혼마군. 흡성대법의 무서움이 바로 저것이었다.

“호오.”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시선을 돌리던 탈혼마군이 젊고 팔팔한 낭인을 발견하고 눈을 번뜩였다.

얼핏 보면 여자로 착각할 법한 곱상한 외모의 소년.

“일홍, 튀어!”

무공을 배웠지만 제대로 된 고수는 상대해 본 적 없는 일홍이었다. 공포스런 탈혼마군이 다가오자 얼어붙고 만 녀석.

나처럼 처맞으면서 배웠으면 진작에 튀고도 남았을 건데.

“꺅!”

나는 몸통 박치기로 일홍을 밀어내고 불쑥 뻗어오는 탈혼마군의 손아귀를 본능적으로 탁 튕겨 냈다.

그런데 손을 섞어보니 알 수 있었다. 이놈, 황걸개보다 경지가 낮다.

뭐 그럼에도 위기란 건 변함이 없었지만.

“……음? 넌 뭐냐. 방금 어떻게 쳐낸 것이지?”

일찍이 한번 들어 본 적이 있는 대사.

손짓과 발짓에 살기가 그득하여 다른 사람보다 궤적을 읽기 쉬웠다.

문제는 내 몸뚱아리가 저놈의 속도에 제대로 따라가질 못한다는 것.

파파팟!

탈혼마군의 손짓이 연속해서 허공을 갈랐다.

쏟아지는 붉은 궤적을 피해 몸을 비틀었지만 살기 어린 공격들이 내 피부를 찢고 지나갔다.

목을 스치는 매서운 손날. 실핏줄이 튀었다. 한 치만 더 깊었어도 핏물이 왈칵 쏟아졌을 일격이었다.

“흥미로운 놈이로구나. 눈은 공격을 읽었는데 몸이 못 따라가는 느낌이라니.”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발악해 댄 덕인지 어느새 일홍은 잊고 내게 흥미를 품는 탈혼마군.

덕분에 아주 죽을 맛이었다. ‘이것도 피해 볼 테냐?’라는 느낌으로 자꾸만 손을 뻗어오는데.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몸을 스치는 한 수, 한 수가 내겐 살초(殺招) 그 자체였다.

“큭!”

결국 어깨를 두들기는 손바닥. 뭔가 부서지고 쪼개지는 느낌이 척추를 타고 전해졌다.

붉은 기운이 곧바로 회복을 위해 스며들었지만, 재가동을 위해선 시간이 걸릴 터.

그래서 이거 엿 됐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는데.

「야, 애송이! 엎드려!」

귓속을 파고드는 누군가의 속삭임. 나는 즉시 몸을 옆으로 내던졌다.

쉬익-!

그러자 극독을 묻힌 비침 세례가 뾰족한 파공성을 내며 허리춤 어림을 휩쓸어 왔다.

탈혼마군은 지면을 박차 번쩍 날아올랐다. 비침은 그의 발아래를 스칠 뿐, 단 하나도 맞히지 못했다.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소매에서 독탄을 꺼내 착지 지점에 던져대는 당여혜.

퍼펑!

짙은 독분이 공간을 감쌌다. 들이켜는 순간 폐가 녹는 극독이 뿌려진 가운데, 백독불침(百毒不侵)을 이룬 당여혜가 날카로운 조법을 펼치며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뒤져, 이 시방새야!”

44화 죽립의 여인

손끝에 독기와 날카로운 예기가 번뜩였다. 당여혜는 맹금의 발톱처럼 구부린 양손으로 매섭게 공격을 쏟아 냈다.

할퀴고, 비틀고, 잡아 뜯는 맹옥조가 폭풍처럼 짓쳐 들었으나, 탈혼마군은 패도적인 구유마장(九幽魔掌)을 출수해 그녀의 초식을 모조리 파훼했다.

파파팟!

허공에서 어지러이 얽히는 조법과 장법. 네 개의 손이 맞부딪힐 때마다 거센 기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공기가 찢겨나가는 파공성. 서로를 향해 정신없이 뿌려지는 공격.

마기에 물든 탈혼마군의 손과 발이 전면의 공간을 마구 갈랐다. 당여혜의 마혈을 노리고 기이한 각도로 꺾여오는 공격들.

죽으면 진원진기가 흩어지니 제압하려 들었고, 당여혜는 그 점을 파고들어 파상적인 공세를 이어 나갔다.

한데 그동안 생기를 얼마나 흡수해댄 건지, 쉴 새 없이 내력을 뿌렸음에도 지친 기색조차 없는 탈혼마군.

파팟! 팍!

모두가 숨을 죽이고 대결을 지켜봤다. 대략 서른 합 정도의 공방이 오갔을 무렵, 당여혜는 백지장 같던 자신의 손이 어느새 붉게 물들었음을 깨닫는다.

“헉, 허억.”

수기를 단단히 맺고 격돌했음에도 파괴적인 마기에 닿아 너덜너덜해진 그녀의 손가락.

그리고 상대의 움츠림을 읽은 탈혼마군이 주먹을 말아쥐고 섬전 같은 일권을 지체없이 찔러왔다.

파앙!

당여혜는 양팔을 교차해 허를 찌른 권초를 간신히 막아 냈다. 그러나 실린 힘이 어찌나 센지 일 장 가까이 주르륵 밀려나야만 했다.

“쿨럭!”

검붉은 핏물을 한 움큼 뱉어내는 그녀. 막아 낸 두 팔이 부러질 듯 아팠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손과 팔목을 타고 몸속으로 침투해 온 사특한 마기였다.

몸속을 휘젓는 이질적이고 폭력적인 기운에 핏물이 흐른 입술을 꽉 깨무는 당여혜.

“방금 것은 앙마권(仰魔拳)이라 한다. 기를 둘러도 마기가 침투경처럼 몸속을 파고들지. 어떻게 마음에 들더냐?”

탈혼마군은 시커먼 기운이 스멀거리는 손바닥을 쥐락펴락하며 말했다.

입가에 비릿한 웃음을 머금은 것을 보아 벌써 승리를 확신한 얼굴이었다.

“흥, 음습하고 쉰내 나는 것이 딱 너같이 말라비틀어진 늙은이나 쓸 법한 권법이네!”

당여혜가 지지 않겠다는 듯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그 독기 어린 모습에 피식 웃더니 다시 한번 앙마권의 자세를 취하는 탈혼마군.

‘……시발, 어쩌지?’

겉으로는 호기를 부렸지만, 내상의 느낌이 심상치 않은 데다 상대는 최소 초절정의 고수.

이럴 줄 알았으면 아버지 당명보(唐明步)의 말대로 얌전히 가문에 처박혀 있을걸.

일단 들이받고 보는 그 성격 때문에 언젠가는 큰 화를 입을 거라던 아버지의 경고가 새삼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튀어야 하나.’

그런 생각도 상당히 들었다.

하지만 아까 그 애송이도 목숨을 걸고 맞서 싸웠는데, 천하의 독조산혈이 애들 보는 앞에서 꽁지를 말 수 있겠냔 말이다.

마음을 굳히고 다시금 뾰족한 손톱을 치켜드는 당여혜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걔는 저 노괴의 공격을 어떻게 피한 거야?’

변화무쌍한 맹옥조도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내는 데 그쳤는데, 단무진이란 그 애송이는 몇 번이고 주먹질을 피해 냈었지.

그 덕에 당여혜도 황걸개가 올 때까지 버텨 볼 만하단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가만 있었다면 제일 나중에 생기를 빨아 줬을 터인데, 굳이 벌주를 택하는구나!”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년이라 외치며 신형을 쏘아날리는 탈혼마군.

놈은 짙은 마기가 서린 앙마권을 연달아 내질러왔다.

파앙! 파앙!

무섭게 휘몰아치는 권압. 시커먼 기파가 땅을 뒤흔들었다. 손속을 나눌 때마다 그녀의 몸에 지독한 마기가 축적됐다.

당여혜는 결국 버티지 못하고 또 한 차례 피를 울컥 뱉었다.

혈도가 꼬이고 내장이 뒤틀리는 느낌에 그녀는 독분을 뿌리고 맹옥조를 펼치면서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쉴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곧바로 따라붙는 탈혼마군.

그녀의 전의를 완전히 꺾을 셈인지 맹렬한 공세가 퍼부어졌다.

“빌어먹을……!”

거친 숨에서 느껴지는 피 맛.

조금만 방심해도 살을 으깨고 뼈를 부술 주먹질이 전방위에서 쏟아졌다.

완전히 수세에 몰려 반격은커녕 막아 내기에 급급해진 당여혜.

그녀는 결국 기이하게 꺾여 날아온 장법에 옆구리를 내주고 말았다.

“컥!”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가는 당여혜.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이 전신을 관통했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숨만 꺽꺽 토해냈다.

비참하게 나뒹구는 그 모습에 냉소를 머금은 채 저벅저벅 다가오는 왜소한 노인.

그녀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마기에 기혈이 뒤엉킨 몸뚱어리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힘이 빠져 버린 사지와 천근을 얹은 듯 무거운 몸, 그리고 흐려지는 시야까지.

‘나 당여혜가, 이리 죽는다고……?’

걸왕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사람의 생기를 빠는 백년 묵은 노괴(老怪)는 코앞까지 와있었다.

생명의 원천을 강탈하는 사악한 마공을 양손에 두른 채로 말이다.

“하.”

저걸 보니 아까 목내이처럼 말라죽은 을급 낭인이 생각났다.

강호에 발을 디뎠으니 죽음은 각오했다만,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줄이야.

“오라버니고 뭐고, 다 부질없네…….”

그렇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두 눈을 질끈 감으려는 순간.

펑-!

그녀의 귓가에 낯익은 폭음이 들려왔다.

***

흘러가는 상황이 좋지 않다.

상대는 흡성대법으로 악명을 떨친 전대의 마두.

팔벽진과 표사들이 무력화된 상황에서 당여혜마저 무너지면 우린 진짜 끝이었다.

“일홍!”

하여 난 다급하게 땅을 박차며 일홍의 이름을 불렀다.

마음이 통했는지 당여혜를 구하려 이미 원통형 암기를 꺼내고 있던 그녀.

펑-!

흑약이 점화되고 불꽃과 함께 날카로운 비침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감지한 탈혼마군이 좌수를 뻗어 허공을 후려쳤다. 터져 나온 장력은 돌풍이 되어 날아오던 비침을 와르르 쓸어냈다.

타앗!

나는 그의 균형과 신경이 한쪽에 쏠린 틈을 타 반대편에서 짓쳐 들어갔다.

절세의 신법, 선풍보는 삼 장이란 거리를 찰나에 좁혀줬고 나는 위기에 처한 당여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탈혼마군이 우수를 흔들자 갑자기 코앞에 살기 가득한 주먹이 나타났다.

천살성이 아니었으면 ‘엇’ 하고 당해 버렸을 일격. 나는 미간을 노린 붉은 궤적을 감지하고 고개를 필사적으로 젖혔다.

간발의 차로 피해 낸 권초. 그 과정에서 주먹이 몰고 온 권풍에 안면이 찢기고 핏물이 좀 튀었지만 감수해 냈다.

툭!

나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바들바들 일어나려 하는 당여혜를 무사히 밀어내고 탈혼마군 앞에 섰다.

“……음? 넌 분명 어깨를 부숴났거늘.”

내 얼굴을 확인하더니 멀쩡한 모습에 어이없어하는 늙은 마두놈.

“아, 그거 말이오?”

나는 보란 듯이 양쪽 어깨를 빙빙 돌리며 몸을 풀어 줬다.

아까 시뻘건 기운이 정신없이 스며들며 뼈를 다 복구시켜놔서 말이다.

언젠가는 자기가 집어삼킬 몸이라 여기는지 아주 지극정성이시다.

“아까 본좌의 공격을 미리 읽어 내던 것도 그렇고, 기이한 놈이로다.”

“기이하긴, 노인네 뒤질 때 돼서 힘이 딸리는 거 아니오?”

내 도발에 탈혼마군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그럼 이번엔 사지를 아예 싹둑 잘라내주마!”

손날에 예리한 수기를 덧씌우고 내지르는 노호성.

타앗!

탈혼마군이 내 앞에 번개처럼 나타나 번뜩이는 손날을 휘둘러왔다.

어깻죽지에서 ‘푸확!’ 하고 피는 핏물. 하지만 찰나의 순간 상체를 뒤로 빼서 절단만은 막아 냈다.

“또 그것이군. 눈은 읽고, 몸은 뒤따라오는!”

절정도 되지 못한 일류와 이류 언저리가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치명상을 피해대니 이해가 되질 않는 모양.

나는 전신세맥에 내력을 불어놓고 선풍보를 극한으로 펼쳤다.

쉬익-!

날카로운 손끝이 복부를 일자로 주욱 긋고 지나갔다. 피가 울컥 뿜어졌지만, 허리를 땅긴 덕에 복막은 지켜 내어 장기자랑이 벌어지진 않았다.

“큭!”

날카로운 파공성을 내며 어지럽게 쏟아지는 공격들.

황걸개가 이르길, 고수는 숨 돌릴 시간만 있어도 얼추 기운은 회복한단다.

그러니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을 위해 조금이라도 더.

어차피 이 몸뚱어리는 작살 나도 복구되니, 어떻게든 치명상만 피하면서 초절정 고수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 넘겼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더 없을 생명의 위기에 천살성이 폭주하여 공격이 본능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단 부분일까.

쉭! 쉭! 쉭!

그런데 내가 공격을 읽어 낸다고 판단하자 한 수, 한 수의 위력을 낮추어 몸이 따라올 수 없게 물량 공세를 퍼붓기 시작하는 탈혼마군.

손과 발이 예리한 기파를 뿜으며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온몸에 새겨지는 길고 붉은 상처들. 귓불이 잘려 나가고 끊어진 머리카락이 핏방울처럼 허공에 잔뜩 수놓아졌다.

서걱!

한 번은 공격이 깊게 들어와 내 팔뚝을 주욱 찢어냈다.

“큭!”

흰 뼈가 희끗 보일 정도로 깊게 베인 상처.

온몸이 이미 피범벅에 만신창이였다. 피를 너무 흘려 어지러운 가운데 다시 쏘아져 오는 탈혼마군.

이대론 진짜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떠오를 즈음.

“야! 애송이!”

당여혜가 그사이 기운을 좀 회복했는지 암기와 독분을 뿌리며 나를 뒤로 끌어당겼다.

내가 독에 저항이 있단 걸 염두에 둔 한 수.

“네가 여길 왜 와!”

아까 자신이 구해 줬을 때 도망치지 않은 것을 꾸짖는 목소리였다.

“못 올 곳도 아니고, 그러는 그쪽도 다시 왔잖습니까.”

어차피 그대로 뒀다간 당여혜는 생기를 빨려 죽고 나머지는 자동 몰살이었다. 나라도 나서서 이렇게 시간을 벌었기에 망정이지.

“너 같은 애송이도 싸우는데 쪽팔려서 어떻게 튀겠어.”

“거 애송이, 애송이. 그만 좀 하십시다. 키는 내가 더 크구만 뭘.”

성장통이 생길 정도로 겨우내 무럭무럭 자라서 말이다.

“……닥쳐, 죽여 버린다?”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면서도 키 작은 걸 놀리자 즉각 발끈하는 그녀였다. 아주 발작 버튼이 따로 없군.

아무튼 이렇게 둘이 힘을 합친다면 혹시 황걸개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 수도 있겠단 희망이 생기려는 무렵.

짙은 암녹색 안개 속에서 서슬퍼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짜증나는구나.”

번뜩이는 검은 안광. 독분을 씹고 넘어온 탈혼마군이 번개처럼 쇄도하며 양손으로 구유마장을 펼쳐왔다.

퍽!

반응할 겨를도 없었던 극쾌(戟快)의 묘리. 초절정 고수의 살초(殺招)가 나와 당여혜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나는 ‘억’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허공을 한참 날았다. 거칠게 내동댕이쳐지는 몸뚱어리.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에 의식이 혼미해졌다.

“……강기!”

노인의 손에 맺혀 있는 강맹한 기운에 피를 토하며 외치는 당여혜.

초절정 중에서도 경지가 완숙한 단계에 이르러야 잠시 꺼내 쓸 수 있다던 그 강기(罡氣)였다.

“훼방꾼이 사라졌으니, 하던 것을 마저 하자꾸나.”

피투성이가 된 채 주르륵 밀려난 당여혜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탈혼마군.

그 모습에 당장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내상으로 인해 몸속의 기혈이 모조리 뒤틀려 있었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 써 봤는데, 이런 결과라니.

뭔가에 홀린 듯 낭아봉 괴인을 쫓아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황걸개가 원망스러웠다.

“좀 전에 희망을 품은 것 같던데, 혹시 살려달라 빌어볼 생각이면 지금이니라.”

조롱 섞인 목소리로 물어오는 탈혼마군.

“……좆까.”

“흐, 끝까지 당찬 계집이군. 쌓인 내력도 옹골차겠어. 네년은 특별히 전신의 세맥을 뒤져 진원진기를 마지막 한 톨까지 뽑아내주마.”

사람을 살아 있는 내공 단지 정도로 취급하는 말투였다.

한데 온몸을 다 훑겠다는 놈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과거에 진기를 흘려넣다 사경을 헤맬 뻔한 어떤 노인과 자그마한 꾀가 머리를 탁 스치고 지나갔다.

“으윽.”

당여혜의 엄천혈에 엄지를 가져다 댄 채 목을 붙잡아 들어 올리는 탈혼마군.

“탈혼마군! 멈추시오, 제안이 있소!”

내가 크게 외치자 놈은 흠칫 놀란 눈으로 이쪽을 훑었다.

“……뭐냐, 네놈 어떻게 살아 있지? 극성의 구유마장을 때려 박았거늘.”

어쭙잖은 제압이 아니라 전력이 담긴 살초였기에 내가 숨 쉬고 있는 것이 놀라운 모양이다.

믿기 힘들단 표정을 짓고 있는 탈혼마군.

“아마도, 일전에 먹은 영물 덕분일 것이오.”

“으음? 영물이라. 어떤 것 말이더냐.”

“만년화리(萬年火鯉)요. 어느 동굴에서 멋모르고 집어 먹은 것이 기연이 되었지. 그 덕에 그대의 공격을 점지하듯 읽어 낼 수 있었고, 좀 전의 일격에서도 살아날 수 있었던 거요.”

나는 당여혜의 목을 붙들고 있는 그에게 순순히 답을 해줬다.

물론 전부 개헛소리였다. 나는 평생 영물의 영자도 구경해 본 적 없는 몸이다.

“심지어 넘쳐흐르는 양기(陽氣)를 아직도 소화해 내지 못해, 30년을 넘어가는 공력이 전신 세맥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상황이오.”

하지만 영약, 영물이란 것이 원래 먹어 본 놈은 거의 없고 소문만 무성하여 사람을 현혹하는 법.

“흠, 그걸 순순히 말해 주는 이유가 무엇이지?”

당연하게도 개수작인가 싶어 먼저 의심을 해오는 탈혼마군.

“날 취하는 대신, 그녀를 보내 주시오.”

내 발언에 당여혜의 눈이 더없이 부릅떠졌다.

“야, 지랄 말고 너나 도망……. 읍!”

탈혼마군은 시끄럽다는 듯 마혈을 짚었다.

“흥미로운 얘기군. 허나, 둘 다 취해 버리면 되는데, 내가 왜?”

나는 좀 전에 그가 돌풍으로 날려 보냈던 독침을 집어 스스로의 목에 가져다 대봤다.

몸 안에 몇 년 내공이 있건 죽어 버리면 고깃덩이만 남으니 말짱 황인 상황.

“……허, 각별한 사이라도 되나 보군. 정파의 여협이란 것이 저런 어린놈과 정분이 나다니.”

내가 목숨을 걸고 그녀를 구하려는 걸로 오해한 모양이다.

실상은 저놈을 죽이려고 도박을 시도하고 있는 거였지만 말이다.

“뭐 좋다, 이년은 그냥 보내 줄 수도……. 흡!”

당여혜를 놔주는 척하다가 쏜살같이 날아와 독침을 빼앗고 내 마혈을 짚는 탈혼마군.

놈은 비릿하게 웃더니 아까와 같이 내 엄천혈에 검지와 중지를 가져다 댔다.

“흐흐, 확실히 어린 나이에 쌓은 내력이 심상치 않기는 하구나.”

명문혈에서 중추혈을 거쳐 내 몸 구석구석을 내달리는 낯선 진기.

탈혼마군은 아직 다 찾지는 못했지만 내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 여겼는지 벌써 흡족한 표정을 지어댔다.

“좋아, 일단 내력부터 흡성해주지. 당문의 아해야. 네년의 어린 낭군이 목내이처럼 말라 죽는 것을 지켜보거라. 클클.”

놈의 손끝에 몰려드는 악독한 기운. 그렇게 내 모든 것을 흡성대법으로 빨아 갈려는 찰나.

점령군처럼 몸을 휘젓는 볼쾌한 마기의 영향에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고 말았다.

“윽?!”

전신에 피어오르는 시빨건 천살성의 기운.

억겁(億劫)의 살업이 흘러들어온 진기를 타고 역행하여 순식간에 그에게로 쏟아졌다.

눈을 돌려 쳐다보자 금방이라도 터져 나갈 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뭘 본 건진 모르겠는데, 나 대신 인사라도 해주시오.”

“우우우웩─!”

그 몇 초 안 되는 시간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인지 피를 토해 내는 탈혼마군.

놈은 사력을 다해 나를 뿌리치고 뒤로 튕겨져나가듯 물러났다.

“크아악! 이 개호로 새끼가……!”

극대노하여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탈혼마군.

“방금 그건 대체 뭐냐! 대체 나한테 뭘 보여 준……! 우우욱!”

또 피를 왕창 쏟아냈다. 입뿐만이 아니라 귀와 코, 눈에서까지 핏줄기를 줄줄 흘리며 괴성을 지르는 모습.

꼴을 보아 하복부에서도 피를 흘려대고 있겠군.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칠공분혈(七孔噴血)인가.

황걸개가 자신은 성운심법을 익혔으니 산 거지, 다른 놈이면 곧바로 황천행이랬는데, 그게 실로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찢어 죽여 버리겠다-!”

하지만 놈은 쌓아온 내력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당장 죽지는 않았다.

몸속에서 불덩이처럼 날뛰는 기운을 억지로 눌러놓고 내게로 달려오는 탈혼마군.

“동귀어진 각인가, 뭐 혼자 죽는 것보단 덜 아니꼽긴 하다만.”

내 마지막 도박은 절반만 성공한 듯했다.

그래도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볼 심산에 독침을 손에 쥐고 기운을 끌어모으려는 순간.

채앵-!

길고 곧게 뻗은 동양풍 장검이 불쑥 날아와 강기 맺힌 탈혼마군의 주먹을 힘차게 쳐냈다.

그리고 무복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내 옆에 착지하는 호리호리한 여고수.

“멀리서 전부 들었어요, 소협. 대단한 기개네요.”

그녀는 죽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칼집에 멸마(滅魔)란 글자를 박아넣은 여인이었다.

45화 기묘한 재회

“여기서부턴 제게 맡기세요.”

죽립 아래로 찰랑이는 말총머리와 흰 목덜미.

지금까지의 분투를 칭찬하는 그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묘한 그리움이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청혜 누나……?’

아련하면서도 원망스러운 그 이름.

내 안의 모용청진 부분이 동요하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그 사람이 맞나 보다.

‘근데 어째서 여기에?’

배를 찔린 이후, 계속해서 접촉을 피해 왔는데. 이런 외딴 산속에서, 그것도 하필 내 코앞에 다시 나타나다니.

혹시 못다 한 일을 마무리하려 찾아온 것일까?

“넌 또 뭐 하는 년이냐?”

귀와 코로 흐른 피를 닦으며 신경질적으로 묻는 탈혼마군.

“멸마대의 부대주, 모용청혜. 오늘 백 년 묵은 노괴의 목을 떨굴 년이지요.”

검신에 날카로운 기운이 맺혔다. 악인에겐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겠다는 듯 서슬 퍼런 검기를 피워올리는 모용청혜였다.

“네년이구나, 요즘 마인들을 미친 듯이 썰고 다닌다는 모용가의 계집이.”

내 앞에서 으르렁거리며 말을 주고받는 두 사람.

나는 그사이 일홍이가 건넨 목이 붓는 약을 재빨리 삼켰다.

“한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찌 안 것이지? 철저하게 흔적을 감췄건만.”

탈혼마군은 미심쩍다는 듯 눈썹을 꿈틀이며 물었다.

“질 나쁜 괴인이 있다 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거물이 튀어나오다니, 오늘은 운이 따르는군요.”

“……하! 본좌를 마주쳤는데 운이 따른다? 저승 문턱에 선 것도 모르는 년이!”

그는 오히려 지독히도 운이 없는 거라 비웃으며 축적한 마기를 맹렬하게 뿜어냈다.

무리한 기의 운용으로 인해 핏물이 다시 줄줄 흐르더라도 개의치 않는 모습.

“내상을 입었다 해도 본좌가 쌓아온 공력은 최소 이갑자! 너같이 건방진 계집의 목을 꺾는 것은 일도 아니다!”

“타인의 피눈물로 빚은 공력으로 으스대시는 건가요? 한심하기 그지없습니다.”

모용청혜는 차가운 목소리로 힐난했다.

이에 분노하여 짙은 앙마권을 양손에 두르는 탈혼마군.

다만 기혈이 뒤틀린 탓인지, 저번과는 다르게 마기가 매우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닥쳐라!”

놈은 욕설과 함께 지면을 박차고 짓쳐 들었다.

그에 맞서 눈부신 섬광을 번쩍이는 모용청혜의 검 끝.

모두가 불안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누이의 손끝에서 모용세가의 절기인 건곤파섬검이 펼쳐졌다.

쉬익-!

***

산중의 고요를 깨는 폭음과 기합성.

상극의 두 기운이 충돌할 때마다 강렬한 기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바위가 쪼개지고 돌조각이 비산하며,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갈 만큼 격렬한 전투였다.

콰앙! 콰앙!

탈혼마군의 앙마권이 모용청혜의 가슴팍을 찔러 들어갔다. 주먹에 실린 마기가 피륙을 찢을 기세로 울부짖었다.

쉭! 쉬익!

이를 부드러우면서도 표홀한 몸짓으로 받아내는 모용청혜.

파괴적인 마기의 공세는 그녀가 빚어낸 검로에 갇혀 힘을 잃고 저절로 사그라들었다.

피잉-!

그리고 모용세가의 쾌검, 잔광을 번뜩이는 건곤파섬검으로 반격하는 그녀.

“크윽!”

은빛 궤적이 허공을 긋자 주름진 귀 한쪽이 핏물을 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그렇게 선혈을 튀기며 공방을 이어 나가고 있는 여인과 노인.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대장?”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일홍이가 둘의 싸움을 긴장된 눈으로 지켜보며 물었다.

“무공이 더 센 사람.”

“아이참, 그러니까 누구요.”

“쾌검을 뿌리는 저 여자.”

어릴 때 여러 번 봐왔지. 검과 한 몸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는 가끔씩 절정이란 경지를 넘어 믿기 힘든 검격을 보여 주곤 했다.

거기에 탈혼마군은 아까 내게 당해서 몸속에 불덩이가 돌아다니는 상태.

“근데 저 여자라니……. 대장, 설마 멸마대의 악살신녀 여협을 모르는 거예요? 아무리 강호 사정이 어두워도 그렇지.”

저 여류 무인의 열렬한 팬인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며 나를 타박해대는 일홍이.

한데 내가 왜 그녀를 모르겠나.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문제다.

그렇기에 지금 기를 쓰며 모른 척하고 있는 것이고.

퍼엉!

아무튼 이러는 사이에도 계속되고 있는 치열한 수싸움.

그리고 조금 전 내 생각을 증명하듯 승부의 향방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전에는 이러한 힘과 힘의 격돌로 당여혜가 피를 울컥 쏟았었는데.

“우웨웩!”

이번엔 내상이 더욱 도진 탈혼마군이 먼저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기혈이 완전히 뒤틀렸는지 손아귀에서 흩어지는 검은 강기. 그가 놀란 눈으로 두 주먹을 황급히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스걱!

곧바로 날카로운 장검이 그의 손가락을 우수수 베고 지나갔다.

그리고 빛살 같은 속도로 하복부를 푹 찔렀다가 빠져나오는 검격.

“크악!”

뿜어진 내력이 몸속을 진탕시켰는지 탈혼마군이 고통스런 신음성을 내질렀다.

내가 저 기분을 아주 잘 알지.

“끄륵, 잠깐 멈춰라! 할 얘기가 있다!”

스스로를 본좌라 칭하던 오만한 노인은 어디 가고, 다급하게 멈추라고 말해오는 탈혼마군.

“당신 같은 쓰레기의 명은 듣지 않습니다!”

악살신녀란 별호가 어떻게 붙은 것인지 알 법한 성격이었다. 악인이라 여겨지면 자비 없이 베어 버리려고 하는구만.

어라, 근데 왜 내 배때지가 시큰거리는 거지.

이게 그 외상 후 스트레스라는 걸까

“모용세가에서 사람을 비밀리에 찾고 있을 텐데!”

그런데 지체 없이 목을 내리칠 줄 알았던 그녀의 검날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그걸 어디서 들었나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모용청혜.

“모용가주가 흑점에 의뢰를 큭, 넣었더군. 용모파기에 해당하는 열다섯 전후의 청년을 잡아 오라고…….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간에 말이야.”

탈혼마군은 무림맹의 추적을 피해 흑점에 몸을 의탁 중이라 알 수 있었다고 설명해왔다.

그나저나 사람을 찾는 데 조건이 생사불문(生死不問)이라. 이건 시체로 데려와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인데.

모용가 놈들, 아직도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던 건가. 이쯤 됐으면 포기할 법도 한데.

“내가, 내가 그놈의 행적을 알고 있다.”

“……!”

그 발언에 모용청혜가 놀란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옆에 있던 나 역시도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새낀 뭔데 내 행적을 안다는 거지?’

아무리 봐도 구라의 향기가 솔솔 풍기는데, 어째서인지 냉정함을 잃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처럼 추궁에 나서는 모용청혜.

“말하세요, 어디에 있죠? 아니, 애초에 살아는 있나요?”

“끄응, 자세한 건 여기의 화선지 속에 적어 놓았는데…….”

놈이 품속에서 무언갈 꺼내 드는데,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지며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살의를 감지했는지 격렬히 요동치는 천살성.

“누나!”

예의 붉은 궤적이 모용청혜의 안면으로 이어지자 나는 지체 없이 팔을 쭉 뻗었다.

그러자 팔등에 ‘파바박!’ 박혀 드는 길쭉한 독침들.

그걸 본 모용청혜의 얼굴에 놀람과 분노가 동시에 스쳤다.

피잉-!

공기를 쪼개는 파공성. 푸른 궤적이 번뜩이며 놈의 오른팔이 뎅겅 썰려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지만, 이미 그녀와 동귀어진을 각오했는지 진원진기를 격발해 최후의 초식을 펼치려 드는 탈혼마군.

나는 놈의 시선이 쏠린 틈을 타 팔등에서 뽑아낸 독침을 놈의 목덜미에다 ‘푹!’ 찔러 넣었다.

“크악! 또 네놈이냐……!”

놈이 마기가 넘실거리는 발차기로 내 가슴팍을 까버렸다.

그 분노와 격렬한 동작 덕인지 독이 금세 퍼져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는 탈혼마군이었다.

“꺽, 끅.”

비침이 꽂힌 목구멍으로 푸슉푸슉 새고 있는 핏물.

자기가 쏜 독침에 도로 찔려 죽어가고 있는 꼴이었다.

“크흑, 아까 기혈만 뒤틀리지 않았어도……. 네깟 놈들쯤은……!”

무공도 고강한 인간이 용의주도하기까지 하여 지난 백 년간 대적할 자가 없었는데, 오늘 나라는 지뢰를 정통으로 밟아 버렸다.

그것이 무척 억울한지 이쪽을 죽일 듯 노려보는 탈혼마군.

“네노옴, 정체가 뭐냐……. 내가 마주친 게 대체 뭐냔 말이다……!”

마주친 것의 정체가 뭐냐니. 그야 천살성과 관련된 뭔가겠지.

잘못 답했다간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는 곤란한 질문을 불쑥 던져오는 노인이었다.

“거참 말 많네. 죽을 거면 빨리 좀 죽으시오.”

“너 이! 찢어 죽일 개새끼가……! 컥!”

내 싸가지 없는 대답에 격분했다가 혈압이 올라 독이 골수까지 퍼졌는지 눈깔을 까뒤집는 탈혼마군.

이거 본의 아니게 주둥이로 막타를 친 셈인가.

한때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백 년 묵은 마두의 숨이 그렇게 끊어졌다.

“소협, 괜찮나요?”

그런데 놈이 죽건 말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모용청혜.

“예? 왜요?”

“안색이 무척 좋지 않아요. 소협도 아까 그 독침을 맞지 않았나요?”

맞았지. 한 발도 아니고 무려 다섯 발이나 박혔었다.

하지만 천살성 특유의 자가수복 능력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 젠장.”

그 순간,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초절정 고수도 죽인 극독을 5배 넘게 주입받았으니 멀쩡할 리가 있나.

나는 온 세상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툭.

그러자 황급히 달려와 쓰러지는 나를 받아주는 누군가.

코끝에 아련한 연꽃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

“…….”

모용청혜는 자신의 품에 안긴 청년을 복잡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왜 이 청년은 낯선 자신을 위해 몸을 던지고, 다급했던 그 순간에 ‘누나’라고 외쳤던 걸까.

벌써 일각 넘게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고 있는 고민이었다.

“어째서 이리 청진이가 떠오르는 건지…….”

그 어린 것이 별내림에 휘말리지 않고 무럭무럭 자랐다면 지금쯤 이 정도 체급과 나이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래서 누나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잠시 흔들리기도 했었지만, 가까이서 보니 역시 얼굴도 달랐고 목소리도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나도 참 주책이구나.”

절벽 위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말했음에도 손수 끊어낸 아이다. 자신에겐 분명 그리워할 자격 같은 것도 없을진대.

이 청년에게서 자신도 모르게 동생의 흔적을 찾아보려 하다니.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툭 떨구는 모용청혜였다.

“끄응.”

그때, 신음성을 흘리며 품 안에서 몸을 뒤척이는 청년.

아까 사천당문의 둘째 여식이 말해주길, 이름이 단무진이라 그랬던가?

“당여혜 소저, 괜찮은 거 맞나요?”

모용청혜는 옆에서 내상을 다스리고 있던 당문 여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예, 뭐. 숨은 안정적이네요. 그리고 이 자식, 독 내성이 저보다 더 높아서 쉽사리 안 뒤져요.”

과거 사약에 쓰이는 독버섯을 수백 개씩 뜯어먹은 전적이 있다나 뭐라나.

그리고 그 믿기 힘든 발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을 번쩍 뜨는 청년.

“끄으윽, 뒤지는 줄 알았네.”

독침에 그렇게 찔렸음에도 잠시 기절했다 일어나면 멀쩡해지는 그 모습이 마치 벌꿀만 탐한다던 서역의 어떤 오소리를 보는 듯했다.

“대장, 몸은 괜찮으세요?”

“끙, 괜찮을 리가 있나. 동귀어진 당하는 줄.”

눈을 뜨자마자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과 재잘재잘 떠드는 모습.

“일홍아, 그 새낀 확실히 뒤졌고?”

“네, 목에 꽂힌 독침에 확실히요. 그런데 대장.”

“어, 왜.”

“지금 악살신녀님 품에 일각 넘게 안겨 계신 거 아세요?”

“……!!”

단무진은 눈을 부릅뜨더니 ‘히익!’ 소리와 함께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 과민한 반응이 꼭 무서워하는 뭔가와 닿은 느낌이라, 모용청혜는 살짝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싫어할 필요는 없지 않나…….’

악살신녀란 별호를 얻고 나서부터는 그녀를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이 확 줄어든 느낌.

특히 아이들이 더더욱 그러해서 모용청혜는 살짝 슬픈 기분이었다.

“히히, 안겨서 코오. 자던데. ‘누나’ 품이 그렇게 좋았어요, 대장?”

흔치 않은 기회라 생각했는지 싱긋 웃으며 그를 놀리는 일홍이.

“하하, 무슨 헛소리야…….”

단무진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불안하게 좌우로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 마주 보기 힘든지 모용청혜의 시선을 피하면서도 곁눈질로 반응을 살피려 하는 게 보였다.

거지 출신의 낭인이라고 들었는데, 예전에 친한 누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소협, 혹시…….”

궁금하여 캐물어 보려는 찰나.

“이럴 수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참혹한 전투의 흔적에 허탈해하는 도포 차림의 한 노인.

“걸왕 선배님……?”

실종됐다던 인물이 나타나 그녀의 관심을 모조리 쓸어가 버렸다.

46화 얻어낸 것들

탈혼마군이 휩쓸고 간 참상이 서서히 수습되고 있었다.

사상자를 한곳에 정리한 뒤 부상자 치료에 나선 은성표국 사람들.

뒤늦게 도착한 황걸개는 이러한 광경을 무척 착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가 별의 기운을 쫓느라 정신이 팔린 사이, 뒤편에선 이런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물론 이 자리에서 황걸개를 대놓고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러 고수가 일개 표국을 노려올 줄은 아무도 몰랐고, 시퍼런 검기를 뿜는 고수 앞에서 감히 목소리를 드높일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떼잉,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겠거늘.”

하지만 불편한 눈초리는 있기 마련. 차라리 시원하게 욕을 갈겼으면 속이 편하겠건만.

그때, 그 소원을 들어주는 발칙한 녀석이 나타났다.

“아잇 싯팔! 노인네, 뭐 하다가 이렇게 늦었어요! 진짜 뒤지는 줄 알았네!”

상대가 용두방주든 전대의 마두든, 빡이 치면 일단 들이받고 보는 진짜배기 미친놈.

당여혜와 총표두를 비롯해 좌중의 인물들이 경악하는 게 보였다.

“이게 피를 보더니 또 지랄병이 도졌구나.”

노인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무언의 눈초리보단 차라리 이게 나았다.

까부는 녀석의 뒤통수를 한 대 ‘퍽!’ 후려친 뒤에 어떻게 된 건지 자초지총을 물어보는 황걸개.

“무림맹의 멸마대가 개입해서 살았다고……? 그놈들이 왜 여길?”

“씨, 낸들 아나요? 아파 뒤지겠네.”

뒤통수에 난 혹을 문지르며 투덜거리는 단무진.

때아닌 무림맹의 개입에 황걸개가 의아해하고 있을 무렵, 한 여인이 공손한 포권지례를 올려왔다.

“무림 말학이 걸왕 대선배님을 뵙습니다.”

백옥 같은 피부와 섬세한 이목구비 아래, 날카로운 예기를 품은 미인의 모습에 황걸개는 멸마대의 개입 이유를 즉시 깨닫게 되었다.

그래, 악살신녀라면 악인이 있는 곳에 갑자기 나타날 법도 하지.

하북 악적의 씨를 말리더니, 기어이 낭아봉 괴인마저 때려잡으러 찾아온 모양.

“한데 아해야, 걸왕이라니? 노부는 신묘한 도술로 이름을 떨친 신풍진인이다만.”

“…….”

누가 봐도 도인보단 상거지란 말이 어울리는 외양이었지만, 모용청혜는 아무 말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당문의 둘째 여식은 만나자마자 말실수를 연발하던데, 모용가의 여식은 그래도 제법 침착함이 있군.

“흘흘, 모용천 고놈은 잘 있느냐? 모용세가엔 별일 없겠지?”

“…….”

평범하게 안부를 물었는데 그녀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집안에 커다란 우환이라도 있는 모양.

“……잘 계시지요. 언젠가 선배님과 바둑을 한 번 더 둬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난 나보다 약한 놈과 붙는 취미는 없다.”

이건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모용천 그놈은 가주라는 놈이 코앞만 보고 먼 곳을 내다볼 줄 몰라, 바둑 두는 재미가 영 없었다.

제 가문도 그런 식으로 운영했다간 언젠가 크게 후회할 만한 일이 생길 터였다.

“그렇군요, 사정이 있어 정체를 감추신 듯하니,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악살신녀의 원래 별호는 냉화옥녀였다. 하지만 어느 시점부터 지상의 모든 악을 걷어낼 기세로 손속이 매서워졌다지.

아까 가문의 우환도 그렇고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했지만, 지금은 더 급한 대화가 있어 그냥 보내주기로 하였다.

“그래서 이놈아. 탈혼마군의 최후가 어쨌다고?”

“아, 그게요. 놈이 살심을 품고 함정을 파길래 제가 딱 눈치채고……!”

손짓과 발짓을 보태 당시의 상황을 마저 설명하는 단무진.

그런데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황걸개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그러니까 지금…. 네가 탈혼마군을 살해했단 말이더냐?”

“네, 어쩌다 보니 제가 막타쳤죠.”

또 영문 모를 소리를 해대는 녀석.

“근데 넌 왜 멀쩡해 이것아?”

“…어, 그러게요?”

당시엔 살아남기에 급급해서 이제야 깨달았다는 얼굴.

가만 보면 저놈 진짜 살인에 목말랐다는 천살성이 맞나 싶었다.

“이유가 뭐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 아니면 내 양심에 어긋나지 않아서?”

모용청혜를 살리기 위한 움직임이었고, 살업을 뛰어넘는 선업이 동시에 쌓여 작금의 묘한 상황이 된 것 같다고 말해오는 단무진.

“그럼, 성운심법 덕에 미치지 않고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단 말이더냐?”

“예, 아마도요?”

그 대답에 황걸개는 흡족한 얼굴로 무릎을 ‘탁’ 내리쳤다. 천살성의 흉성을 정말로 억누를 수 있었을 줄이야.

“뭐 이상한 게 보이거나 그러진 않고?”

“아, 그럼요.”

단무진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일월 진인의 혜안은 틀리지 않았구나. 이 모든 것이 원시천존의 심오한 안배일지니!”

모든 인과와 순리의 극점이신 그분의 도우심이라 합장하며, 어울리지도 않게 도인 분위기를 풍기는 황걸개.

그래서인지 그는 보지 못했다.

어째서인지 그의 시선을 슬쩍 피하고 있는 단무진의 모습을 말이다.

“…….”

***

우리는 남은 수레와 표물을 추슬러 은성표국 지부가 있는 하남의 접경 도시에 방문했다.

그렇게 도시 입구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장년의 무림인 한 명.

모용청혜처럼 칼집에 멸마란 글자를 박아 넣은 무인이었다.

“악살신녀, 발이 느리다고 자기 대주를 버리고 가는 부대주가 세상에 어디 있소?”

멸마대의 대주인 모양이다. 그는 모용청혜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미안해요, 적운엽 대주.”

알 수 없는 직감에 따라 움직였다고 설명하는 그녀.

적운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오다가 익숙한 외양의 시체를 발견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아니, 저 얼굴은……. 탈혼마군?!”

멸마대 대주답게 곧바로 무림공적의 얼굴을 알아보는 모습.

“이게 대체 무슨…. 악살신녀, 설마 그대가 이 거물을 해치운 것이오?”

만일 그렇다면, 이건 어마어마한 전공이 될 거라며 환한 표정을 짓는 적운엽이었다.

“아니요, 탈혼마군에게 내상을 입히고 마지막 일격을 가한 건 제가 아니라 여기 있는 단무진 소협이에요.”

모용청혜가 내 등을 살포시 떠밀며 말했다.

그러자 의아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적운엽.

“이렇게 어린 소형제가? 백년 묵은 그 노괴를 말이오?”

“소형제라니요, 그는 제 목숨도 구해준 어엿한 소협이에요.”

모용청혜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해주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뭣이? 만년화리를 복용했단 말이오? 극한의 양기로 적에게 내상을 입혔다고?”

전설로만 내려오던 영물의 등장에 좀처럼 믿지 못하는 모습.

“아뇨, 그건 놈을 꾀어내려는 수작질이었고요, 사실은 독분을 터트려 내상을 입혔어요. 저는 선천적으로 독에 내성을 지닌 체질이어서요.”

탈혼마군 같은 마공을 익힌 놈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살아 움직이는 영약 단지란 소문이 퍼지는 건 사절이었다.

“허, 기개가 대단하군, 소협. 내 인정하지. 절정도 아닌 무인이 탈혼마군과 정면으로 맞서다니.”

만년화리보단 이쪽 설명이 더 그럴듯했는지, 그는 납득했다는 얼굴로 내 어깨를 턱턱 두들겨주었다.

“탈혼마군을 잡은 공로는 무척 크다네, 단무진 소협.”

“근데, 제가 잡았다기엔 다른 여고수 두 분도…….”

뭔가 양심에 쿡쿡 찔려 한마디 하려는데.

“무림맹 지정 수배범이라 막대한 현상금도 지급되지.”

“생각해보니 제가 숨통을 끊은 것 같긴 합니다.”

막대한 현상금은 어쩔 수 없지.

모용가와 당문은 어차피 돈이 썩어 넘치잖나, 거지 출신인 이 몸에게 양보해도 별 탈 없을 거다.

“다만 현상금은 증거를 들고 무림맹에 들러야 지급되는데, 소협은 현재 표행 의뢰 중이었지 아마?”

무림맹은 산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는데, 표행의 진행 경로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거기다 이놈은 상징적인 뭔가가 없으니, 머리통을 소금에 절여 그 거리를 걸어가야 했고 말이다.

“소협의 활약은 부대주인 제가 직접 목격했으니…….”

그런 내 불편함을 덜어줄 생각인지 품속을 뒤적거리는 모용청혜.

“시체는 저희가 회수하고, 대신 이 단도를 드릴게요. 나중에 무림맹에 와서 제 이름을 대고 제출하시면 현상금이 지급되실 겁니다.”

내겐 뭔가 익숙한 모용세가의 문양이 음각된 기품 있는 단도였다.

“…편의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용청혜 부대주.”

“무얼. 소협 같은 이들이 늘어나면 그것만으로도 백도무림의 홍복입니다.”

“…….”

언제는 무림의 안녕을 위해 나 같은 놈이 살아 있으면 안 된다더니, 이제 와서 백도무림의 홍복 같은 존재라고?

듣고 있자니 기가 차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어야만 했다.

내 안의 모용청진 부분 또한 누이를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원망하고 있는 느낌.

“그래서 말인데, 차후 무공이 늘게 되면 멸마대에 입대해 볼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 나이에 그런 성취라면, 일선에서 뛰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될성부른 떡잎을 발견했다고 생각한 건지 자꾸만 연결고리를 만들어 두려는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그런 활동엔 관심이 없네요.”

“그런가요, 그건 아쉬운 일이네요…….”

이미 날 한번 찌른 전적이 있는 여인이다.

가까이서 한솥밥을 먹다 보면 정체가 드러날 위험도 있는데, 그때 과연 악살신녀가 검을 휘두르지 않는단 보장이 있는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해주세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

설사 그녀가 날 찌르지 않는다고 하여도, 뒤에 있는 가문은 날 팽했던 이들이 아닌가.

그러니 정체를 드러내는 건, 스스로를 지킬 일신의 무력을 손에 넣은 다음이 맞다.

“그럼, 이만.”

나와 맞포권을 나누고 흔들거리는 말총머리와 함께 사라지는 죽립 여인.

그녀가 멀어져 가는 걸 보니 가슴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려왔다. 이런 감정을 흔히들 애증(愛憎)이라 부르던가?

가족을 가져 본 적이 없는 나로선 제법 생소한 감각이었다.

“큼. 야, 애송이.”

그리고 모용청혜가 떠나가자 다음으로 다가오는 여인이 있었다.

능삼이 말해주길, 이번 일로 총표두가 돈을 좀 쥐여줘서 곧바로 사천으로 향할 거라 들었는데.

왜 저기서 그녀답지 않게 쭈뼛거리며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걸까.

“예, 뭔데요?”

“으음, 그러니까 그게…….”

“할 말 있으면 그냥 하셔도 돼요.”

방금 적잖은 현상금을 벌게 돼서 말이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웃어넘길 수 있을 것 같거든.

“아가씨께선 흡성의 위기 때, 목숨 걸고 구해 준 걸 고맙다고 말하려는 겁니다. 그런데 이제 부끄러우니 저렇게 쭈뼛대고 계시는 거고요.”

어디선가 튀어나온 몸종 능삼이 더없이 친절한 해석을 곁들여줬다.

속이 까발려지자 순식간에 얼굴을 붉히는 당여혜.

“이 시발! 너 아가리 안 닥쳐?!”

천기를 누설한 대가로 정강이를 ‘퍽퍽’ 두들겨 맞기 시작한 능삼 아저씨였다.

“아하.”

솔직하게 고맙다고 말하는 게 그녀에겐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하긴 내가 진기를 먼저 빨라며 자결쇼까지 벌여도, 지랄 말고 너나 도망치라고 외치던 여인이었지.

“너 때문에! 내가 진짜! 못살아 시발!”

입은 좀 걸어도 기본적으론 선한 사람인 듯했다. 탈혼마군 앞에 나서 내 목숨도 한번 구해주지 않았나.

저런 사람이 친해지면 진국이지. 사이가 좋아져서 나쁠 게 없어 보였다.

“야, 너. 이거 받아.”

자기 몸집의 두 배나 되는 능삼을 팰 만큼 팼는지 내게 무언가를 휙 던져오는 그녀.

빠르게 잡아채니 납작하고 은빛으로 반짝이며 당여혜란 이름이 음각된 어떤 패였다.

“당문의 보은패야. 상당히 귀한 거니 품속 깊숙한 곳에 넣어둬.”

금은동 중에서 은패(銀牌)를 받은 모양. 값싼 동패와는 다르게 순은으로 보여 이대로도 돈이 될 듯싶었다.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담긴 가치가 은 쪼가리보다 크니까, 행여 팔아먹을 생각하지 마라.”

귀신같은 여인이다. 내 생각을 어찌 알고.

“물론이죠, 생각도 안 했어요.”

품속 깊숙한 곳에 찔러넣어 줬다. 살면서 한 번도 보기 힘들다던 당문의 보은패를 두 개나 수집하고 말았군.

“그리고 나중에 사천 지나갈 일 있으면……. 우리 당문에도 꼭 들르고.”

“그건 노력해볼게요.”

“노력은 무슨, 안 오면 뒤질 줄 알아. 팍씨.”

패싱하면 반쯤 패죽일 기세로 눈빛을 불태우는 그녀였다.

거참 말하는 것 하고는.

“그리고 그 뭐시냐…….”

“또 뭐요.”

“서로 목숨도 몇 번 구해준 사이니, 특별히 누나라 부르는 것을 허락할게.”

말끝을 살짝 떨며 말하는 당여혜.

“아뇨, 그건 별로.”

“…어째서? 악살신녀는 불러주더니?”

“그쪽은 키도 작고 저보다 애 같아서 좀 그래요.”

“너 이 새끼……! 봐주니까 자꾸 기어오르지? 어?!”

체구가 저러다 보니 누나라는 호칭에 어떤 환상이라도 품은 것일까.

발끈하여 펄쩍펄쩍 튀어 오르는 그녀의 반응이 제법 재밌었다.

정강이를 퍽퍽 쳐보지만 내공이 담기지 않아 천살성의 육체엔 가랑비와도 같은 타격.

“후, 아무튼 마지막으로 거기의 너. 일홍이라고 그랬었지?”

그녀의 지적에 옆에서 우리 얘기를 듣다 몸을 움찔 떠는 일홍이.

위급 시에 암기를 사출하여 당여혜의 목숨을 구하긴 했지만, 동시에 찔리는 것도 많았지 아마.

“그 원통형 암기, 어디서 입수한 거야? 당문의 것과 원리가 비슷하던데.”

“…흑점에서 어떤 야장 분이 한번 보시더니 비슷한 걸 만들어주셨어요.”

“야씨, 헛소리하지 마. 그 안에 섬세한 부품이 얼마나 많은데? 도면을 통째로 훔친 게 아닌 이상 그런 건 불가능해.”

그게 말이지. 도면이나 설계도 없이도 그런 짓을 해내는 사람이 있더라.

부품의 모양새, 맞물려서 움직이는 작동 원리, 흑약의 존재까지. 그냥 눈으로 보고 분해, 조립을 반복하더니 꿰뚫어 버리더라니까.

이런 애들이 나중에 커서 천마의 무덤 같은 곳에서 기관진식(機關(陣式)을 만들고 그러는 거겠지.

“일홍이는 이렇게 의심받을 거 알면서도 쏜 거예요. 그쪽을 구하기 위해. 그러니 좀 봐주시죠?”

굳이 말하자면 재능으로 훔친 거다. 우려하는 그런 사태는 없었다.

“야,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 그러고 싶지만, 당문의 여식으로서 그냥 넘어갈 순…….”

“부탁드릴게요, ‘누나’. 어차피 당문엔 다른 암기도 많잖아요.”

“…….”

부드럽지만 훅 들어오는 누나란 호칭에 흠칫하며 잠시 말을 멈추는 당여혜.

어째서인지 그녀의 양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듯했다.

“……하, 어쩔 수 없네. 너가 그렇게까지 부탁하니 이번만 ‘누나’가 봐주도록 할게. 알겠어?”

마치 자기보다 한참 어린 동생을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였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흡족한 표정을 짓는 그녀.

“야, 일홍. 난 오늘 너가 암기 쓰는 걸 못 본 거고, 다른 사람 눈에 띄면 그땐 나도 어떻게 못 해줘. 기억하라고.”

걸왕이라도 끌고 와서 권위로 찍어눌러야 하나 싶었는데, 내 부탁 한 번에 진짜 그냥 슥 넘어가 주는 당여혜였다.

그리고 모시는 아가씨의 이런 스무스한 반응은 난생처음이었는지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몸종 능삼.

“……뭐지?”

나 또한 기분이 무척 묘했다.

까칠하고 성질 더러운 살쾡이가 머리를 허락해 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정말 묘하군요…….”

저 봐라. 능삼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부탁 한마디에 껌뻑 넘어가주시는 건 한 번도 본적이……. 혹시 단무진 공자.”

“예?”

“진짜로 저희 아가씨의 어린 낭군이 되시는 겁니까?”

“……뭔 개헛소리세요.”

이 아저씨가 뭘 잘못 먹었나.

“아니, 하지만 아가씨가 이러는 건 난생처음……. 설마 지금부터 제가 공자님을 모셔야 하는 걸까요?”

“갈길 바쁘다면서요. 좀 가세요. 가.”

나는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한 능삼의 등을 세차게 떠밀었다.

그렇게 모두가 떠나가자 내 옆에 남은 것은 뽀루퉁한 얼굴로 서 있는 일홍이.

얘는 또 왜 이래?

“대장은 키 작은 여자가 취향이세요?”

“넌 그게 할 말이니 지금.”

간신히 위기를 넘겼는데 말이다.

하여간 무림인은 정말 제정신인 놈이 하나도 없구나 싶었다.

47화 우린 대화가 필요해

다사다난했던 표물 운송을 끝마치고 다시 하북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수레에 걸터앉아 모용청혜가 건네준 단도를 정성스레 손질하고 있었다.

먼지를 꼼꼼히 닦아내고 칼날도 휴대용 숫돌에 살짝 갈아준 뒤, 동백기름을 발라주는 마무리 작업까지.

일전의 싸움에서 활약을 인정받아 나처럼 수레에 오르게 된 일홍이가 옆에서 궁금한 듯 쳐다보다 물어왔다.

“무슨 신줏단지 모시는 것 같네……. 그 단도가 그렇게 소중해요? 미인 누나의 선물이라?”

일홍이의 목소리엔 약간의 시샘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뭔 소리야. 이거 금전 스무 닢짜리 단도야. 당연히 받들어 모셔야지.”

돈으로 교환 가능한 현물수표 같은 거다. 그러니 들고만 있어도 흐뭇할 수밖에.

“엑, 전대의 마두를 잡았는데, 스무 닢밖에 안 줘요? 되게 짜네.”

그런데 전직 하오문주의 따님이 넘겨 들을 수 없는 발언을 툭 던져왔다.

“이게 작아? 수수료를 뗀다 해도 짤랑거리는 금 쪼가리가 십수 개인데?”

“상대가 악명 자자한 전대의 마두라면 그렇게 큰돈은 아니죠. 생각해보세요. 초절정 무인을 상대하랍시고 금전 스무 닢을 준다고 하면, 그 누가 사냥에 나서겠어요?”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었다.

전대의 마두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라면, 그냥 다른 곳에 가서 칼질 몇 번만 해줘도 그만큼 벌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불안해지는 등골. 설마 모용청혜……. 또 나를 속인 거니?

“아, 스무 닢이라면 아마 무림맹에서 지급하는 바닥 보수금일지도 모르겠네요.”

“뭐? 바닥 보수금?”

“네, 무림맹에서 기본적인 현상금을 내걸면, 그자에게 원한을 품은 여러 문파, 세가들이 추가로 거액의 현상금을 보태는 식이거든요.”

은원이 거미줄처럼 엮인 강호무림이고, 무림공적으로 선언될 정도면 이미 엄청난 혈채(血債)를 뿌렸을 것이니.

적은 돈으로 판만 깔아준 다음 수수료 장사를 해먹겠단 소리로군.

이것이 바로 백도무림 최고 집단의 비즈니스 모델인가. 나도 한 수 배워야겠다.

“아마 백 년을 살아온 노괴고, 최근 수십 년간 잠적했다 보니, 현상금을 내건 사람들이 다 늙어 죽었거나 철회하여 기본금만 남은 것 같네요. 으음.”

아무래도 내 전직 누이가 날 속였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냥 내가 더럽게 재수가 없었던 거였군.

“이런 빌어먹을.”

수령 기간이 지난 로또 2등 당첨지를 발견한 느낌이다.

몰랐으면 그냥 헤벌레하고 있었을 텐데, 알아서 괜시리 기분이 그렇군.

“보통 이런 마두놈들 목에 걸린 돈이 얼만데?”

기왕 말문을 튼 김에 나는 시세까지 물어봤다.

“수 닢부터 수백 닢까지 다양하고요, 심지어는 황금을 열 관(貫)이나 지급하는 무림공적도 있어요.”

그런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쏠쏠한 듯한 현상금 벌이.

낭인회에서 툭 던져주는 의뢰들은 멧돼지와 뒹굴며 개고생해도 은전 몇 닢 던져주는데 말이다.

저쪽은 정파 무리의 총아답게 일단 시작이 금인 듯했다.

이거 나중에 현상금 사냥에 나서는 것도 괜찮을지도?

수많은 사람을 헤쳐 악업을 잔뜩 쌓은 놈들이 아닌가. 그런 놈들을 퇴치하는 것도 일종의 선업이지.

어차피 놔두면 세상에 해악을 끼치고 피해자만 양산할 놈들이니, 적어도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은 없었다.

다만 시뻘건 게 어른거리는 등, 불안 요소가 조금 있기는 한데, 여차할 경우 생포하면 되겠지.

“야, 근데 황금 열 관 준다는 놈은 누군데?”

듣도 보도 못한 금액이었다. 양손으로 쥘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이 목에 걸려 있다니.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천마(天魔)요.”

“…아하.”

호사가들 사이에서 마교제일인(魔敎第一人)이자, 무림제일인(무림第一人)이라 불리는 존재.

물론 후자의 수식어는 수많은 정파 무림인이 개소리라며 극구 부정하고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무림맹 의뢰는 다 좋은데 수준이 너무 높군.

포목점 장씨 할배의 미수금이나 뜯던 내가 달려들기엔 아직 역부족이다.

최소 일류 딱지는 달고 나서 생각해봐야겠어.

“그래도 고점이 높고 내겐 끗발이 있으니…….”

멸마대 실세들과 안면을 텄고 특히 부대주는……. 날 무척 좋게 보고 있는 듯했으니 뭐라도 일감은 던져주겠지.

이 세계는 꽌시가 없으면 허름한 일자리도 못 얻는 곳이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난 출발선이 제법 괜찮았다.

“……음, 괜찮은 거 맞나? 아무튼 알려 줘서 고맙다 일홍아.”

나는 멸마대와 나를 이어줄 단도를 만지작거리다 허리춤의 짧은 칼집에 푹 찔러넣었다.

그러자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마디 하는 일홍이.

“그럼 저도 누나라고 불러주세요.”

애가 모용청혜와 당여혜가 다녀간 이후부터 좀 이상하네.

“정신 차려, 일홍아.”

나는 한 살 터울인 그녀의 머리를 한 대 ‘툭’ 두들겨 줬다.

“그치만, 둘은 왜 누나 동생하는 칭호로 불러주고, 저만 그냥 일홍이에요.”

“그야 일홍이는……. 일홍이니까.”

“치, 그게 뭐람.”

괜히 뭔가 뒤처지는 느낌이 든단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느껴진다는 건지, 하여간 이 나이대 여자애들은 감정이 변화무쌍하여 이해 불가능이다.

“이상한 데 경쟁 의식 불태우지 말고 앞이나 봐. 곧 북경 성문이 눈에 들어올 테니까.”

처음 입성했을 때는 황도의 성문을 타고 승천하는 황금색 용들이 낯설게만 느껴졌는데, 이제는 오히려 없으면 아쉬울 정도로 익숙할 뿐이었다.

그렇게 몇 시진을 꼬박 더 행군하자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는 도시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에 지친 얼굴로 걷다가 반색하는 쟁자수와 낭인들.

“자, 표국의 깃발을 높이 들어라! 무수한 방해에도 은성표국이 표행에 성공했음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도록!”

총표두의 외침에 은성의 깃발들이 세차게 펄럭이며 성문을 넘는다.

이 광경을 수군거리며 지켜보는 북경의 수많은 사람들.

“집이다!”

“북경으로 돌아왔어!”

적지 않은 피해와 표물의 소실이 있었지만, 우리는 기어이 먼 곳까지 표행을 성공해냈다.

그것도 악명 자자한 전대의 마두 하나를 때려잡고서 말이다.

“크흑, 드디어!”

“해냈어, 우리가 해낸 거야!”

처음 출발했던 은성상단 장원의 모습이 들어오자 울컥하는 사람들.

이천리 행군을 끝낸 우리는 황걸개처럼 거지꼴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기쁨에 찬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와아아-!”

***

나는 상주 은화란의 부름에 지친 몸을 이끌고 상주실로 향했다.

그런데 때마침 회의가 끝났는지 우르르 문밖으로 나오는 사람들.

그중에는 복식을 보아 다른 지부의 지부장으로 보이는 자들도 있었고, 전형적인 고리대금업자의 차림을 하여 전장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표행 결과를 듣고자 근처 전장에서 사람을 파견한 모양.

그들은 무엄하게도 허락도 없이 상주실에 들어가려 하는 날 발견하고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어댔다.

“은화란 누나.”

그리고 내가 친근하게 은화란을 부르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는 모습.

“뭐지 저놈은?”

“은화란 상주에게 동생이 있었나?”

“유일한 가족은 의절당해 집을 나간 은양곤뿐이라고 들었는데…….”

그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내 목소리를 듣고 은화란 상주가 총표두와 함께 걸어나왔다.

“어머, 벌써 왔니? 여로가 쌓였을 테니, 푹 쉬고 와도 된다고 했는데.”

망할 황걸개, 그런 중요한 정보를 빼먹고 전달하지 말란 말이다.

아무튼 나와 그녀 사이를 쳐다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간단하게 내 소개를 해주는 은화란.

“이 청년은 제 의동생인 단무진이에요. 황 노야의 제자이자, 이번에 탈혼마군을 쓰러트리는 데 크게 공로한 아이죠. 기억해두시면 제가 그러했듯, 여러분에게도 언젠간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가 믿음직스럽다는 듯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호오, 장원에서 검기를 삼척이나 뽑던 황 노야의 제자라니…….”

“그리고 저 나이에 마두와 맞섰단 말인가?”

“기개가 있는 청년이로군.”

인지도가 팍팍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해결사 노릇을 하려면 결국엔 쩐주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름을 알려야 하는데, 은화란 덕분에 일단 얼굴 도장 하나는 확실히 쾅 찍은 듯했다.

이 기세로 정급에 불과한 낭인회 내의 위치도 좀 올라갔으면 좋겠군.

“고마워요, 누나.”

나는 손님들이 사라지자 의자에 앉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고마움을 전했다.

온 김에 두 달 만에 주전부리도 질겅이면서 말이다.

“그건 내가 할 소리지. 총표두에게 전부 들었단다. 너와 당여혜 여협이 없었으면 지금의 피해가 두 배, 세 배로 커졌을 거라고.”

총표두 나맹달, 탈혼마군과의 일전 이후로 계속해서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차기 총표두 자리를 권하던 그 양반.

하지만 내가 군대도 아니고 밥만 먹고 행군만 해대는 이런 직업을 선택할 리가 없지.

게다가 맨날 보는 게 땅이요, 풀이요, 거기에 도로인지라 선업을 쌓을 기회조차 부족하잖나.

“근데 누나, 사상자가 제법 되는데……. 이러면 오히려 여론에 안 좋은 거 아니에요?”

표물과 수레도 일부분 박살 났었고 말이다. 아무리 봐도 완벽한 표행은 아니었던 터라 걱정이 조금 앞섰다.

“아니, 오히려 탈혼마군을 상대로 피해가 이 정도 선에서 그쳤단 부분에서 다들 놀라는 중이야. 그러니 득이냐 실이냐를 따지자면 득이지.”

“아하…….”

하긴 그 어떤 표국이 백년 묵은 초절정 노괴를 때려잡겠나. 기껏 해봐야 산적이나 도적 정도를 퇴치하는 정도지.

“덕분에 몇몇 전장은 다시 믿고 거래를 트기로 했어. 만금전장 쪽은 아직 사람조차 보내오질 않았지만 말이야.”

그놈들은 아무래도 껄쩍지근한 부분들이 꽤 많은 듯했으니 말이다.

깊이 파보면 황실과 연관된 정황들이 나올지도 모르지.

정략결혼으로 상단을 삼키려 했던 것도 그렇고, 이판사판 싸우든 간에 결착을 봐야 할 상대다.

“아무튼 동생, 고생 많았어. 낭인회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정해진 보수만 계산해서 지급한다며? 거기에 수수료까지 떼고.”

모두가 똑같은 낭인이 아닌데, 활약에 비해 형편없이 주어지는 일괄적인 보상.

은화란은 내가 낭인회에 아니꼬워 하는 부분을 살살 긁어 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 사이에서 샛노랗게 반짝이는 금전 세 닢.

“자, 이건 내가 따로 주는 거니, 동생이 전부 먹는 거야. 알았지?”

의뢰 보수금 이외의 부가 수입이 주어졌다.

“흐흐, 뭐 이런 걸 다.”

결코 거절하지 않는다.

이게 진짜 동생을 위하는 누나란 거지. 삿된 모용청혜는 이걸 보고 좀 배워야 한다.

게다가 이번엔 실제 활약에 걸맞은 보상이었기에, 천살성이 끼어들어 탐욕을 부추길 건덕지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잠잠한 붉은 기운.

“아참, 황 노야한테는 비밀이다?”

……왜 비밀이지.

그 양반 대체 나와 관련해서 무슨 말을 해뒀길래?

나중에 꼭 물어봐야겠다.

나는 그런 생각을 품은 채 그녀와 잠시 해후를 나눈 뒤, 상주실을 걸어 나왔다.

***

“대장, 포상금 받으셨죠?”

상주실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들은 소리였다.

하여간 돈 냄새 하나는 아주 귀신같이 맡아 내는군.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야, 대장은 이번 표행에서 맹활약했고, 상주님은 대장을 아끼는 데다, 돈도 많으시니……. 그렇게 이어질 수밖에요.”

다시 생각해보니 그다지 어려운 추론은 아닌 듯했다.

“훗, 봐라. 이것이 대장의 능력이다.”

나는 품속에서 꺼낸 싯누런 것들을 자랑스레 들이밀었다.

“우와…….”

금이란 것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 언제 봐도 황홀한 것이었다. 특히 숫자가 늘어날수록 더더욱 그렇지.

“근데 그걸로 뭐 하시게요, 대장?”

“왜, 투자라도 필요해?”

당시엔 구멍난 독에 물을 붓는 심정으로 투자를 넣었지만, 이번 표행에서 인피면구와 목소리 변조 약의 효능을 톡톡히 봐서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뽕을 뽑았기에, 원한다면 리턴이 없더라도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아뇨, 매번 신세 지는 것도 좀 그래서……. 거기에 상주님이 저도 따로 은전을 챙겨줘서 괜찮아요, 대장.”

“뭐야, 그런 거였어?”

그러고 보니 일홍이 얘도 황 노야의 제자로 알려지지 않았나.

역시 거대 상단의 노련한 상주답게 벌써부터 미래의 인재 챙기기에 나선 모양이다.

“그럼 서로 간만에 큰돈을 번 셈이네.”

“그러게요, 이걸로 뭘 해야 할까요?”

아까의 질문은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던 모양이군.

“오랜만에 맛난 거나 좀 먹을까? 같이 갈저탕 먹던 오칠이와 애들도 불러서 말이야.”

이번에야말로 괜찮은 객잔에 들러서 말이다.

다들 몸도 좀 컸고, 차림새도 나쁘지 않아졌으니 거지라고 쫓겨나는 일은 없겠지.

“그것도 괜찮은 생각이네요.”

“그래,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고기만두도 시키자고.”

“앗, 그러면 동파육도 시켜요 대장!”

“물론이지 그건.”

황걸개의 난입 때문에 결국 못 먹었던 음식이 아닌가.

상당히 부담이 되는 가격이었지만, 그럼에도 당연히 시켜야만 하는 메뉴다.

“근데 대장, 갑자기 이렇게 막 쓰셔도 괜찮아요? 평소엔 돈 엄청 아끼고 저 투자할 때나 가끔씩 쓰셨잖아요.”

전생이나 현생이나 매번 어린 시절을 돈에 쪼들려 살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구두쇠처럼 굴어온 걸 지적하는 일홍이었다.

“별건 아냐. 그냥 최근에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말이지.”

간만에 착한 짓을 해보려고 한다. 그것도 내가 피처럼 아끼는 돈을 써서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리는 어떤 현상 때문이었다.

“…….”

***

모두가 지쳐 잠든 새벽의 시각.

나는 눈을 번쩍 뜨고 밤거리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밤하늘을 가득 메운 새하얀 휘광의 별들.

나는 그에 못지않게 희고 고운 내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한때 이 손은 타인의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데간데없이 원래의 손으로 돌아온 모습.

마치 첫 살인을 겪고도 놀라우리만치 평온한 내 감정처럼 말이다.

스륵. 스르륵.

일전에 옛 누이를 지키고자 탈혼마군을 찌른 후, 신상에 무슨 변화가 없냐며 황걸개가 물어온 적이 있었다.

그땐,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뭔가 변화가 있긴 있었다.

츠츠츠-

성운심법을 운용해도 이젠 잠깐 가라앉았다가 다시 피어오르는 붉은 기운.

녀석은 이전과는 다르게 마치 자아를 가진 듯 나를 의식한 행동을 보여왔다.

슥, 슥, 스윽.

붉은 기운을 마치 손가락처럼 뭉쳐, 흙바닥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는 모습.

놈이 보란 듯이 중원의 글자를 하나 적었다.

‘살(殺)’

즉, 뭔가를 더 죽여라.

나는 어이가 없어 그 앞에 글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불(不)’

아닐 불. 즉 불살(不殺)이라는 단어가 완성되자, 짜증난다는 듯 앞의 불자를 신경질적으로 지우는 천살성.

스윽! 스윽!

“참나.”

서로 떼려야 뗄 수도 없는 사이.

이것이 기념비적인 우리의 첫 소통이었다.

48화 타구봉법

“단무진 이놈아.”

다음 날 아침, 밤새 천살성과 신경전을 벌이고 힘겹게 누운 잠자리.

나는 눈을 뜨자마자 황걸개의 주름진 얼굴이 보이길래 소리를 질렀다.

“오메, 시바.”

입에서 절로 튀어나오는 험한 말.

황걸개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치솟았다.

“설마 노부의 얼굴에 대고 한 소리더냐?”

“어휴, 그럴 리가요.”

일어나자마자 정수리 몇 대 맞을 뻔했네.

뭔 놈의 노인네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사람을 깨운단 말인가.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깼으면 연무장으로 따라오거라.”

갑자기 찾아오더니, 아직 가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먼저 숙소를 나가버리는 황걸개였다.

“끙.”

목줄이 달려 사는 인생이 이렇지 뭐.

나는 결국 피곤한 몸을 일으켜 수련의 흔적이 한가득한 연무장으로 향해야만 했다.

그런데 웬 몽둥이를 들고 와서 연무장 중앙에서 어깨를 탁탁 두들기며 날 기다리고 있는 황걸개.

날 바라보는 눈빛이 어째 심상치 않았다. 옛날에 학교 수업을 쨌다가 걸렸을 때, 원장님이 저러는 걸 본 적이 있던 터라 나는 흠칫했다.

뭣 때문에 저러는 거지. 설마 저번의 그걸 들킨 건가.

“죄송합니다.”

“……뭐가 이놈아?”

내가 대뜸 사과부터 박자 어이없어 하는 황걸개.

“저번에 노야의 안주를 털어먹은 놈, 그거 접니다.”

“그게 너였더냐……? 이런 미친놈이, 왜 자꾸 스승 음식에 손을 대는 게냐.”

이게 아니었다고? 추측이 틀린 모양이다. 그럼 왜 아침 댓바람부터 사람을 불러내서 분위기를 잡고 난리야.

설마 천살성의 이상 현상을 들킨 걸까? 하지만 딱히 그런 느낌은 아닌 듯한데.

“은화란 상주한테 가면 값비싼 요리도 전부 차려 줄 텐데, 대체 왜 훔쳐먹는 것이냐?”

“아, 그게요.”

그거야 아는데, 비싼 요리를 자꾸 얻어먹고 그러면 뭔가 빚이 쌓이는 느낌이라서 말이다.

그럼 나중에 선행을 베풀어도 ‘밥값했네’란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 아닌가. 그러면 선업이 별로 안 쌓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얻어먹는 밥보다, 훔쳐 먹는 밥이 이상하게 더 맛있게 느껴져서 말이다.

“흠, 마지막 건 노부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만.”

이러한 내 설명에 약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황걸개.

하여간 이 거지 근성은 쉽사리 떼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래서 왜 불렀어요? 혹시 뭐 시키려는 거면 내일로 해주세요. 오늘은 갈 곳이 있어서.”

“어디로 이놈아.”

“오랜만에 거지 시절의 애들 데리고 객잔에서 맛난 거나 먹게요.”

항상 거지 차림이라 매번 쫓겨나기 바빴던 그 북경의 객잔. 하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좀 다르겠지. 다들 어엿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니.

“음? 너 같은 짠돌이 놈이 웬일로 지갑을 연단 말이더냐?”

“그냥 착한 짓이 갑자기 하고 싶어져서요. 뭐 문제 있으세요?”

상여금으로 전낭이 두둑해지기도 했고, 시뻘건 무언가가 뒤쫓아 오는 느낌도 들어서 말이다.

하루 빨리 선업을 쌓든가 해야지.

“흘흘, 그럴 리가 있나. 개방을 대신해 아이들을 챙겨준다는데.”

이 양반, 옛날부터 내가 어린 거지들을 챙기면 되게 좋아했었지.

찔리는 구석이 많아서 그런가.

“이쯤 했으면 황제랑 화해 좀 하세요. 노야.”

“이놈아, 누군들 안 하고 싶어 이러는 줄 아느냐.”

거지와 황체가 친분이 있다니, 무슨 동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1승만 딱 챙기고, 너 허접이라 외치는 건 좀 심했어요.”

“조용히 하거라, 노부는 30패를 당하는 동안 온갖 조롱을 들었음이야.”

한 국가의 우두머리답게 도발하는 실력도 수준급이었다고 말하는 황걸개.

얼마나 살살 긁어댔는지 아직도 표정이 살짝 분해 보였다.

“그리고 화가 났으면 노부에게 터트렸으면 됐지, 하여간 가진 건 많은데 속은 밴댕이 소갈딱지만큼 좁아가지고…….”

쌓인 게 많았는지 황제 얘기를 꺼낼 때마다 궁시렁궁시렁 말이 많은 황걸개였다.

아무튼 이야기가 자꾸 새는 느낌인데.

“근데 그 봉은 뭡니까, 황 노야. 저는 왜 여기로 부른 거고요?”

내 질문에 투덜거림을 멈추더니 맞으면 정수리가 오목해질 듯한 몽둥이로 땅을 ‘쿵’ 내리찍는 황걸개.

그는 봉을 지팡이처럼 짚으며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마치 큰 결정을 눈앞에 둔 사람처럼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

“그거 아느냐? 노부가 지금껏 숱한 사람을 만나 왔지만, 너처럼 기이하고 복잡한 존재는 처음이라는 것을.”

면전에서 기이한 놈이란 소리를 하다니.

“사람은 원래 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존재 아니겠습니까? 전 애초에 받아들인 사실이죠.”

과거 흥신소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며 깨달은 바가 참 많았다.

그렇게 나빠 보이던 사람도 파고드니 다 저마다 이유가 있었고, 한없이 선해 보이는 사람도 뒤가 구린 구석이 있는 등.

흑백의 구분이 모호하여, 완전히 선한 사람도, 그리고 완전히 악한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더라.

예를 들어 모용청혜도 내게는 동생 살인 미수범이지만, 제 혈족들에겐 믿음직한 누이이자 맏딸이겠지.

“그래서, 자꾸 이런 밑밥을 까는 이유가 뭔데요.”

너 위험해 보이니 역시 슥삭하겠다, 이런 것 때문은 아닌 듯한데, 왜 저리 표정이 굳어 있는 건지.

“요즘 노부가 너를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알고는 있었더냐?”

“예, 음습한 시선이 느껴지긴 했었죠.”

천살성 패시브로 어디선가 지그시 바라보는 느낌이 나서 쳐다보면 어김없이 저 노인네의 쌍판이 존재했다.

이게 바로 집요한 스토커를 당하는 느낌이구나 싶었기에 잊기가 힘들지.

“처음엔 한 번 두고 보자는 느낌이었고, 최근엔 반신반의였다면, 이번 표행에서의 사건으로 노부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노라.”

표행에서의 사건이라면 당여혜와 함께 몸소 나서 탈혼마군을 틀어막은 일을 말하는 걸까.

내가 살고자 해서 튀어 나간 거였지만, 덕분에 많은 이들이 살게 되었고,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음에도 선업으로 인식되어 천살성의 영향으로부터 정신이 멀쩡할 수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

“노부가 가르쳐 주는 무공을 앞으로도 악행이 아닌, 타인을 돕는 데 쓰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더냐?”

“약속이고 자시고,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잖아요?”

선업을 쌓고, 성운심법으로 빚어진 내공으로 천살성을 억누르고 그 힘을 훔치는 것.

“네가 처한 상황이 아니라, 오롯이 너의 의중을 묻는 것이다, 이놈아.”

도인이라도 된 듯 사뭇 진지해진 얼굴로 물어오는 황걸개였다.

“제 잇속은 챙길지언정, 그를 위해 악행을 일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건 성운심법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을 때도 품고 있던 생각입니다.”

칼에 찔리고 절벽에서 떨어져 최악의 상황이 됐었음에도 나는 차마 나보다 약한 어린 거지들을 수탈할 수 없었다.

그러면 진짜 사람이 아니라, 대놓고 나를 모욕했던 그 염소수염 상인놈처럼 금수가 되는 느낌이었거든.

차라리 회색의 영역에서 상부상조를 하면 했지, 탈혼마군 같은 절대악으로 떨어지진 않는다.

머릿속에 별이 박히건 말건, 나 단무진이 품은 최저한의 신념이었다.

“네놈다운 대답이구나. 썩 마음에 든다 이것아.”

황걸개는 흡족한 듯 씩 웃더니 바닥에서 몽둥이 하나를 차올려 내 쪽으로 던졌다.

“뭡니까, 이게?”

“전에 노부더러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더냐? 타구봉법(打狗棒法).”

타구봉법, 어쩌다 한 번씩 읽던 무협지에서 본 적이 있는 무공이었다.

개방의 것으로 알고 있고, 나름 무기(?)를 쓰는 무공이었기에 뭣도 모르고 대뜸 알려달라 그랬었지.

그땐 내공을 최소 15년은 쌓으라며 단호히 거절하더니만, 이번에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난 아직 내가 쌓은 내공의 양을 까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 그 개 패는 무공 하나 전수한다고 이 똥폼을 잡은 거예요?”

그 말을 끝내자마자 황걸개 손에 들린 몽둥이가 번뜩였다.

따아악-!

“악!”

상대의 주둥이를 닫히게 만드는 일격. 지금까지 처맞은 것 중에 제일 아팠다.

이번에야말로 정수리가 움푹 패인 듯한 느낌.

“악! 미친! 왜 자꾸 여길 때리는 거야!”

황급히 손을 더듬었는데 다행히 패이진 않았다. 내구성이 참 남다르긴 하구나 천살성의 육체.

“흘흘, 개 패는 무공이라. 그렇게 생각해서 노부에게 가르쳐달라 요구했던 것이더냐?”

“그럼, 싯팔 뭔데요!”

타구봉법. 이름부터가 ‘봉으로 개를 패는 방법’이잖나.

그 직설적인 이름 특징 때문에 나도 스쳐가듯 본 것임에도 기억했던 것이고.

“이 무공은 거리의 개가 아닌, 짐승만도 못한 인면수심의 개자식들을 패기 위한 봉법이니라.”

“……아하.”

그거 말 되네. 짐승만도 못한 개새끼들을 때려잡는다 그거군.

나도 이 무림을 살아오면서 그런 놈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말이다.

“그래서 그거 수련은 어떻게 하는데요?”

나는 황걸개가 던져 준 길쭉한 봉을 한 손으로 쥐며 물었다.

근데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약간의 불안감.

“흘흘, 어떻게 수련할 것 같더냐?”

하아, 그러면 그렇지.

뭔가 이럴 것 같더라니.

“어휴, 염병할.”

기나긴 고생길이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

“악견난로(惡犬攔路)!”

사나운 개가 앞을 가로막았을 지어니.

이를 물리치는 봉법을 바람을 가르며 펼쳐내는 황걸개.

후웅-

통나무도 쪼갤듯한 위력의 봉끝이 이마의 머리카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자 단무진이 두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사람 잡겠네! 이 미친 노인네가!”

두 눈에 붉은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아 목숨의 위협을 느꼈고, 자신의 궤적을 그때처럼 읽어내고 있는 모양.

“봉타쌍견(棒打雙犬)!”

봉질 한 번으로 두 마리의 개를 두들겨 패내는 초식이었다.

퍽! 따악!

그런데 한 대는 몸으로 맞을지언정 두 번째 일격은 용케도 봉을 휘둘러 막아 내는 녀석.

“흘흘.”

과연 천살성이라 할 만했다. 살기를 뿜어 목숨을 조금 위협해주자 마치 마른 흙이 물기를 빨아당기듯 무공을 흡수했다.

참 가르치기 편한 제자가 아닌가. 다른 제자들은 초식이며 요결이며, 심상까지. 무엇 하나 머릿속에 집어넣는 데 오래 걸리는데.

이놈은 그냥 살기를 담아 두들겨 패기만 하면 몸이 알아서 기억해버린다.

“사타구배(斜打狗背)!”

먹이를 쫓아 재빠르게 날아간 봉이 각도를 뱀처럼 휙 꺾으며 녀석의 등짝을 후려쳤다.

짜악!

“아오오!”

울부짖는 단무진. 기억이 잘되도록 초식의 이름을 크게 외치며 몸에 고통까지 남겨 주는 황걸개였다.

“천하무구(天下無狗)!”

주위의 개를 전부 다 때려잡아, 천하에 더 이상 개가 없을지니.

“초식명도 진짜 개떡 같네!”

강맹한 힘이 실려 맞는 순간 어디 한 곳이 터져 나가는 타구봉법의 마지막 초식이었다.

이를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가르쳐 준 선풍보를 최대한으로 펼쳐내는 단무진.

황걸개는 귀신처럼 미끄러지는 그 물이 오른 듯한 발동작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래도 탈혼마군과 필사적인 싸움을 나누며 또 한 계단 경지가 오른 모양이다.

하지만 뛰어봤자 벼룩이라고, 선풍보를 가르쳐 준 사람 앞에서 선풍보를 펼쳐봤자지.

퍼억!

기다란 봉대가 녀석의 두 다리를 쓸었다. 빙글빙글 돌다가 바닥에 엎어지는 단무진.

“우웩!”

녀석이 어지러운지 비명과 마른침을 토해 냈다.

많이 아픈지 좌우로 데굴데굴 구르다가 욕설과 함께 다시 벌떡 일어서는 모습.

“시이발!”

이것처럼 아무리 패도 결코 꺾이지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불타오르고 있는 두 눈.

정말이지 거지의 기개가 살아 있는, 가르칠 보람이 있는 녀석이다.

“어이, 노인네.”

화가 나서 눈깔 뒤집히면 노야라는 호칭은 사라지고 노인네, 늙은이 같은 말이 튀어나온다.

이놈의 건방진 특징 중 하나다.

“왜, 이놈아.”

“정확한 경지가 어떻게 되시오?”

왜인지 묻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슬며시 미소를 띠는 황걸개.

“왜? 그 경지를 뛰어넘어 복수라도 해보게?”

“싯팔, 어떻게 아셨소? 가끔은 도인처럼 신통방통 하시구려.”

“흐흐흐. 본좌의 경지는 화경에 달했으니, 어디 한번 해보거라, 인석아.”

말년에 이런 녀석을 어떻게 주웠을까.

이 또한 원시천존의 안배시겠지.

황걸개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다시 봉을 끊임없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퍽!

“아악!”

미친개를 패는 듯한 찰진 타격음.

그렇게 연무장 위에선 한참 동안이나 타격음과 누군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고 한다.

***

결국 그 정신 나간 노인네는 한참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나를 놓아줬다.

“대장, 괜찮아요?”

“끄으으, 괜찮아 보이든?”

오랜만에 애들 앞에 서는 거라, 가오 좀 세워 보려고 했는데 온몸이 울퉁불퉁 멍투성이에 만신창이다.

“……화경이라고 했지?”

동기부여 하나는 확실하네.

복수하고 만다 내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주먹을 꽉 말아쥐며 그런 다짐을 해봤다.

49화 객잔에서 항상 벌어지는 일

“연무장에서 누가 개 잡듯이 맞고 있단 얘기를 들었는데……. 그게 대장이었군요.”

원수라도 만난 듯 살벌하게 패는 모습에 수련하러 왔던 표사들도 발을 돌렸다고 한다.

아무리 천살성에겐 이게 직빵이라지만, 이딴 단순무식한 수련법이 진짜 맞나?

무협지에서 본 스승과 제자는 서로 끌어주고 당겨주고 어? 사제지간에 돈독한 정을 쌓아 가며 무공이란 것을 절차탁마해가던데.

우리는 쌍욕과 고함, 비명이 난무하며 서로 죽일 듯 달려들기에 바빴다.

“대장, 애들과의 약속은 다음으로 미룰까요?”

내 상태가 겉으로 보기엔 무척 심각해 보였던 모양.

일홍이가 붓고 멍든 내 뺨에 손을 갖다대며 그렇게 물어왔다.

“됐어, 그냥 가. 취소하면 걔들이 얼마나 실망하겠냐.”

딱히 오락거리도 없는 시대가 아닌가. 식도락이 인생의 즐거움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흐지부지되면 치킨을 사 온다고 했던 아빠가 까먹고 빈손으로 온 것처럼 낙담할 거다.

물론, 난 그 느낌 모르지만서도.

턱. 턱.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나는 기다란 타구봉을 지팡이 삼아 짚으며 걸었다.

“대장, 근데 그 봉은 뭐예요?”

황걸개가 발로 툭 던져 준 봉이다. 일견 볼품없어 보이나, 은근히 튼튼하고 길이나 무게 중심도 휘두르기 딱 좋았다.

“요즘 다른 무공 배우고 있거든. 초식 구결마다 개(狗)가 들어가는 괴상한 봉법이지.”

압견구배(壓肩狗背), 발구조천(撥狗朝天), 봉도라견(棒挑癩犬) 등등.

개를 쳐서 하늘로 올려버리니, 개의 엉덩짝을 깐다거나 포위당해도 쫄지 않는 법이니 뭐니, 구결을 풀어보면 아주 웃기지도 않았다.

“구결마다 개가 들어가는 봉법……? 대장, 혹시 용두방주의 후개(後丐)만이 익힐 수 있다던 타구봉법을 수련하고 계신 거예요?”

일홍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물어왔다.

“……뭐? 이게 후계자만 익힐 수 있는 그런 거라고?”

내가 본 무협지에선 그런 내용 없었단 말이다. 그냥 그런 무공이 있다고 스치듯 언급만 됐었지.

“네, 신묘막측한 개방의 절기이자 독문비전(獨門秘傳). 이건 비급서도 없어서 용두방주만이 구결로만 무공을 하사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모르는 게 없는 일홍이의 설명에 나는 아리송한 얼굴로 턱을 짚었다.

“이 개 패는 빠따질이……?”

“그렇다니까요!”

허참, 어쩐지 전수하기에 앞서 온갖 개똥폼은 다 잡는다 싶더라니.

그런 비사가 숨어 있었단 말인가.

내가 개 패는 봉법이라 격하할 때마다 봉질이 더 매서워지던 게 그런 이유에서였군.

“신기하죠. 평소 그렇게 툭탁대고 으르렁거려도 내심은 대장의 행적을 인정하고 있었나 봐요.”

정말 그런 건가? 천살성인 나를 정식 제자로 인정했다고? 그동안은 무슨 서자 취급처럼 대외적으로만 제자고, 내외적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취급이었는데 말이다.

“글쎄, 난 아직 잘 모르겠네. 그 양반 속을 말이야.”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무공을 가르쳐 준다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내가 그 양반이 품은 생각을 어찌 알겠나.

내가 들여다볼 수 있는 건 오직 사람이 품은 살심과 그간 쌓아온 살업뿐이었다.

“단무진 대장!”

그때, 귓가를 간질이는 반가운 목소리.

저 멀리서 덩치가 큰 청년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이곳으로 달려왔다.

“야, 언제적 대장이야. 패거리 해산된 지가 언제인데.”

“흐흐, 힘세고 돈 잘 벌면 여전히 대장이지요!”

시원한 까까머리. 잘 먹고 일도 열심히 했는지 한층 더 체격이 다부져진 오칠이었다.

“그리고 일홍이 저놈도 대장을 대장이라고 부르잖습니까. 전직 부왕초로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일홍이 얘는 교정을 포기했다. 한번 대장은 영원한 대장이라며 끝까지 집착하더라.

“오칠이 형이 왜 부왕초예요? 누가 봐도 항상 옆에서 조언해 준 내가 부왕초였지.”

옆에서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쏘아대는 일홍이.

“훙, 웃기지 마라. 넌 그냥 지낭 같은 거였지. 자고로 우두머리의 오른팔은 힘이 있어야 해.”

“아니죠, 지식이 있어야죠.”

“그리고 한번 탈주했던 놈은 애초에 부왕초 할 자격 없어.”

“……큼.”

오랜만에 얼굴을 봤는데도 언제나처럼 티격태격거리는 일홍과 오칠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홍이 저 녀석, 탈주 전적이 있었었지.

배때지에 구멍 뚫리면서까지 구해준 이후로는 완전히 내 옆에 정착한 모양이다만.

“야, 근데 옛날부터 묘했는데, 지금은 더 이상하다. 너 진짜 사내놈 맞지? 왜 갈수록 점점 더 곱상해져?”

수련하느라 잔근육이 서서히 배기긴 했지만, 여전히 얄삭한 팔다리.

거기에 반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장거리 표행까지 다녀오자 인피면구 너머로도 숙녀의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한 일홍이었다.

얘, 이러다가 나중에 남자인 척 하면서 저도 모르게 다른 남자들을 홀려버리는 건 아니겠지?

“아, 그럼요.”

근데 얘, 구라칠 때 내 말투를 본인도 모르게 따라하네?

근처에서 나를 보고 배우며 자라서 그런 걸까.

그럼 훌륭하게 잘 컸다고 말해줘야겠군.

“근데, 대장은 누구한테 맞았길래 얼굴 상태가 그 꼴이신 겁니까?”

웅묘(熊猫)처럼 얼룩얼룩한 내 모습을 보더니 한마디 하는 오칠이었다.

“있어, 어떤 거지가.”

“거지새끼가 감히……! 대장, 누굽니까? 제가 힘을 보태겠습니다. 복수하러 가시죠!”

역시 내 전직 부하야. 이렇게 든든할 수가.

“황 노야라고 있는데, 같이 패주러 가줄래?”

“……생각해보니 대장은 워낙 튼튼해서 이 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검기를 줄기차게 뽑고 이전 표행에서 보인 활약상도 소문으로 접한 모양이다. 당황한 낯으로 변명을 해대는 오칠이.

나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나머지 애들은 어디쯤에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장원 입구에서 이미 신이 나서 들떠있는 어떤 이들을 가리키는 오칠이.

“대장! 오랜만입니다!”

“신수가 훤하시네! 무공도 익히셨다면서요!”

“덕분에 요즘은 구걸질도 안 해도 돼요! 감사합니다!”

녀석들이 어깨춤을 추듯 내게로 걸어왔다.

하나같이 싱글벙글 웃음이 귀에 걸린 듯한 모습.

“짜식들.”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냄새나는 뒷골목에 천막 하나 쳐놓고 집이라 우긴 판자. 뭐가 들어갔는지 모를 갈저탕을 나눠먹은 사이.

그리고 성깔 더러운 부유층을 오붓하게 털어먹은 순간들까지.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첫 만남도 최악이었지만. 이 무림에 와서 처음으로 사귄 애들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

“야, 뭐 먹고 싶어? 전부 말해.”

장원 입구, 한 청년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또래의 아이들을 아우르고 있었다.

“소면!”

“고기만두!”

“초반(炒飯)”

그는 부족하다는 듯 ‘쯧쯧’ 짧게 혀를 차더니 영롱한 금전 한 닢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에잇, 기분이다! 먹고 싶은 거 싹 다 시켜!”

“우와아!”

“금이다, 금!”

“대장이 최고야!”

활활 타오르는 아이들의 분위기.

청년은 어딘가를 쳐들어갈 기세로 그들을 이끌고 나섰다.

“나를 따르라!”

“오오!”

그렇게 우르르 사라져버리는 단무진과 그 패거리.

근처 전각에서 특유의 안력으로 그 장면을 말없이 지켜보던 황걸개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고놈 참…….”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항상 악바리 넘치게 사는 것 같다가도, 가끔씩 저러는 걸 보면 말이다.

생각해보니 저놈이 지랄같이 구는 건 다 상대가 지랄 같은 놈일 때뿐이었다.

잠깐만, 이러면 스스로가 지랄 맞은 놈이란 걸 인정하게 되는 꼴인데.

“커흠흠.”

아무튼 뭐 확실한 건, 말년에 정말 재밌는 녀석을 주웠다는 것.

아직 저놈을 완벽하게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타인을 위해 몸을 던지던 일련의 행동들을 보고 아주 못 쓸 놈은 아니란 생각을 품고 있긴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가시질 않아서 말이다.

그래도 정식은 아니더라도 후보 정도로 두는 것은 괜찮겠지.

저놈이라면 혹시 천살성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니, 굴레를 벗어나는 것을 넘어, 고승들이 해탈에 이르러 윤회의 고리를 끊듯, 아예 이 별내림의 저주를 녀석의 대에서 끊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 다시는 천살성이 나타나지 않도록 말이다.

그러면 이 얼마나 무림에 큰 홍복이 되겠는가.

그 시기가 올 때마다 덧없이 죽어 갈 이들을 수만, 수십만이나 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것까지도 그 신비도인의 안배일지도 모르지. 운명이 녀석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을지니.

“진 총관, 서신을 한 통 전해줄 수 있겠나?”

황걸개는 기다란 수염을 쓸어내리며 그렇게 말했다.

“서신이요? 어디로 말입니까, 황 노야.”

“개봉(开封)으로 보내주게.”

아무리 무책임한 방주라 하여도, 언질은 해둬야겠지.

황걸개는 자신의 구결 매듭을 말없이 만지작거렸다.

***

객잔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

“거기의 잘생긴 소협! 부디 이 거지에게 한푼만 적선해줍쇼!”

여유가 넘쳐 보이는 발걸음에 북경 거지 꼬맹이 몇 명이 적선을 구걸해왔다.

“새끼, 내가 잘생긴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구걸하기 빡센 곳이다 보니 북경 거지들은 굶주려 있는 경우가 많다.

기왕 애들 데리고 선행을 베풀러 가는 길이니, 주머니도 넉넉해진 참에 나는 적선을 몇 번 베풀었다.

“감사합니다, 소협!”

나도 얼마 전만 해도 거지였는데 말이다. 누가 나보고 베풀라고 하면 미쳤냐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었지.

이래서 친절은 여유와 넉넉함에서 나온다고 하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나는 세인트 단무진 그 자체였다.

“크흑, 복 받으실 겁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것도 선행이라고 단전 부근에 묘한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아끼는 돈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베풀었으니, 생각해보면 내 기준에선 상당한 선업을 쌓은 게 맞긴 했다.

‘살(殺)!’

그리고 계속되는 내 선업 쌓기에 무척 불쾌하다는 듯 반발하는 시뻘건 기운.

놈은 내가 땅에 뭔가를 그려도 개같이 무시하자 특유의 붉은 기운으로 허공에 글자를 적어 내기 시작했다.

‘살(殺)!’

‘살(殺)!’

‘살(殺)!’

허공에 저것만 적어 대니 무슨 매직천자문을 보는 것 같네.

내 감상은 그게 다였다. 그 외에는 무시로 일관 중. 그래 봐야 저놈이 할 수 있는 건 저렇게 글자를 적어 대는 것밖엔 없으니.

“어쩔 건데,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그렇게 천살성과 유치한 신경전을 벌이며 나는 애들과 함께 객잔 입구로 향했다.

우르르 들어가 주변을 둘러보니 점심 때를 맞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는 객잔 내부.

고소하고 노릿노릿한 고기 굽는 냄새에 애들이 벌써부터 눈이 돌아가고 침을 흘려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체 손님인 우릴 맞이하러 오는 점소이.

“뭐야, 이 두들겨 맞은 거지는?”

그런데 오기 전에 황걸개한테 흠씬 두들겨 맞아서 그런 걸까, 영 돈을 낼 수 있는 손님으로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거지가 아니오, 낭인이지. 보시오.”

거참 애들 앞에서 가오 안 서게.

나는 말없이 낭인회에서 발급한 낭인패를 들이밀었다.

“아이고, 낭인분 이셨……. 음? 가장 낮은 정급이잖아. 그럼 별다를 바가 없는데.”

이 시발.

오랜만에 돈 좀 쓰러 왔는데, 아주 체면이 안 사는구만.

그래서 이번엔 금전이 번쩍이는 전낭을 활짝 열어 보여 줬다.

“아이고오오! 나으리! 제일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요!”

그제야 우리를 격하게 환영해 주는 오호객잔의 점소이였다.

***

객잔에 오면 항상 해보고 싶었던 말이 있다.

“점소이!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주게!”

그 말과 함께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지는 산해진미.

돼지고기를 얇게 포를 떠 특유의 소스에 발라먹는 산니백육(蒜泥白肉)부터, 양념에 푹 절여진 경장육사.

각종 속재료의 만두는 물론이오, 납치당하는 바람에 끝내 못 먹었었던 야들야들한 동파육까지 휘황찬란하게 우리의 눈과 코를 채워왔다.

“크, 드디어 이걸 먹는구나.”

그렇게 푹 고아 탱글탱글하며 맛있는 향을 잔뜩 풍기는 동파육을 한 점 먹으려는 찰나.

와장창창-!

뭔가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객잔 3층에서 사람이 떨어져 내렸다.

50화 소년 탐정 단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