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니가 왜 거기서 나와(2)
용사와 그의 동료.
흔히 용사파티라 불리는 이들은 각자 그 이름에 걸맞은 실력을 자랑하였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용사를 서포트하거나 그의 곁에 서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능력이 필수가 아닌가.
하다못해 용사파티의 짐꾼마저 앵간한 모험가들보다 강한 게 흔한 클리셰인 마당에 그 주축이었던 현자라면 어떠하겠는가.
당시 손짓 한 번에 골렘 군단을 부리며, 온갖 효과를 지닌 약품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전장을 지배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한데 그 이름이 다른 데도 아닌 여기서 나오다니.
물론 시기 상.
에드워드 아렌츠, 그의 이름의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보다 더 미래의 일.
그도 그럴게 아직은 용사가 등장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만큼 다른 용사파티의 녀석들도 이 시기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자는 드물었다.
그나마 알려진 건 용사는 과거 노예상에게 팔려갈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는 것 정도.
그런 면에서 본다면, 지금 시기에 현자를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최고의 기회였다.
거기다 서류에 따르면 그는 아직 무소속.
아니 오히려 가문이 패망하면서 길바닥을 전전하고 있다고 하지 않나.
본디 코인을 매수를 할 때는 저점에 매수하는 게 국룰.
현자 코인 떡상 가즈아.
이에 발터가 곧바로 펜을 내려놓으며 제 부관을 불렀다.
“레닌.”
그러자 머지않아.
집무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닌이 등장하니.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부르셨습니까. 발터님.”
“페라리를 대기시켜라. 왕도로 갈 일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대로 발터가 에드워드의 서류를 챙기며 히죽 웃었다.
오빠 차 뽑았다. 널 데리러가.
그러니 에드워드 아렌츠, 거기 딱 기다려라.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왕도에 위치한 최초의 노스메디 판매점.
골든 애플 상회의 최상층.
그곳에는 발터와 레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깔끔하게 차려입은 메이드들과 함께 익숙한 얼굴이 등장하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대공님.”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케 하는 붉은 머리칼과 눈동자.
앨리스 셀비로트였다.
이에 발터가 까닥 인사하며 그녀를 반겼다.
“간만이군. 저번 연회장 이후로는 처음인가?”
“그런 셈이지요.”
안 그래도 연회 이후로 사람들이 너무 몰려서 문제입니다.
그녀가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실제로 당장 지금도 상회의 아래층에는 수많은 행렬이 이어져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노스메디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으며, 덕분에 그녀는 요새 바쁘지만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전부 노스메디 판매권을 나눠준 발터의 덕.
“전부 다 대공님의 덕입니다.”
앨리스가 드레스 양 끝단을 잡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자 발터가 옅게 웃으며 화답했다.
“별말씀을. 우선 앉게나.”
“감사합니다.”
그대로 앨리스가 맞은편에 앉으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노스스파에 필요한 인력과 더불어 마음에 드는 연금술사들은 있으셨습니까? 만약 더 필요하신 게 있다면 따로 아이들은 준비하겠습니다.”
일전에 말했듯 노스스파에 필요한 인력 같은 경우는 일차적으로 그녀가 선별한 아이들.
그만큼 수려한 외모는 물론이며, 기본적인 접객을 포함하여 귀족들의 예의범절을 몸에 익힌 녀석들로 준비했다.
그리하여 지금 당장 현장에 투입시켜도 손색이 없을 정도.
이에 발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노스스파는 그 정도면 충분하네. 자네의 노고에 감사를 전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아이들을 추려 북부로 보내겠습니다.”
“알겠네. 아, 그리고 연금술사 건은......”
그와 함께 스륵, 발터가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 서류는 다름 아닌 에드워드의 인적사항이 적힌 종이.
그대로 발터가 서류를 들이밀며 말했다.
“최우선적으로 이 자를 데려오려 하네. 그 외 나머지는 별 상관없다.”
“이 자라면......”
이에 앨리스가 서류를 살펴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류에 적힌 자는 에드워드 아렌츠.
여태껏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연금술사였다.
그렇다고 가문이 특출 났느냐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흔히 말하는 몰락귀족 출신.
물론 연금술에 관한 실력은 그럭저럭 봐줄만한 거 같았지만, 그보다 좋은 조건의 연금술사는 차고도 넘쳤다.
당장 그녀가 발터에게 보낸 서류에도 에드워드보다 좋은 배경의 연금술사는 많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앨리스가 발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
발터 레비오르.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 제 야망의 불꽃을 처음으로 제대로 봐준 자였다.
그리고 그런 안목을 가진 자가 이리 강하게 의견을 표출한다면.
“알겠습니다. 바로 전하겠습니다.”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대로 앨리스가 제 시종들에게 에드워드의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지금 당장 사람을 풀어 찾아 오거라.”
“예, 알겠습니다.”
그런 그녀의 명령과 동시에 시종들이 재빨리 움직이고.
앨리스가 발터를 향해 찻잔을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그럼 저희는 그동안 사업 이야기나 할까요?”
“나쁘지 않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앨리스와 발터가 앞으로의 노스메디 판매 추이나 그에 따른 노스스파의 운영 방식.
왕도를 중심으로 남부를 비롯한 다른 도시에 지점을 두는 전략 등.
노스메디에 관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막 이야기가 마무리 될 즈음.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오니 아무래도 앨리스의 시종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들어오도록.”
그와 함께 앨리스가 답하고.
시종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그녀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앨리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대로 머지않아.
“알겠으니 일단 대기하고 있도록.”
앨리스가 시종을 물리자, 발터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무래도 중간에서 일이 다소 복잡하게 얽힌 모양입니다.”
그 후 이어진 앨리스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현재 에드워드 아렌츠는 다른 곳에 팔려간 상태.
가문이 망한 과정에서 발생한 빚을 갚지 못해 강제로 끌려간 모양이었다.
하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하필 그가 끌려간 곳이 앨리스가 관리하는 왕도의 환락가가 아닌, 그곳에서 벗어나 상대 세력이 관리하는 구역이라는 것.
그곳은 왕도에서도 극히 치안이 안 좋기로 유명한 구역으로.
현재는 암흑가가 세력을 두고 있는 지역이었다.
만약 왕도의 환락가라면 그녀가 나서 강제로 끌고 올 수 있었으나, 해당 지역이라면 앨리스 쪽에서도 꽤나 골치 아파졌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암흑가는 물론이며, 그와 연결되어 있는 다른 귀족가문이 엮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직접 나섰다가 그 사정을 들키기라도 하는 순간.
녀석들이 에드워드를 순순히 넘길 리 없었다.
아니 아예 역으로 에드워드를 인질로 삼아, 온갖 개수작을 부리며 얼토당토않은 조건을 요구할게 분명했다.
이에 앨리스가 발터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우선은 제가 최대한 협상을......”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발터가 제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그 반대세력이 레이커스라고 했나?”
“예, 맞습니다.”
레이커스. 앨리스가 왕도의 환락가를 지배하고 있다면 이쪽은 왕도 외곽의 암시장을 주름잡고 있는 세력.
발터 역시 한두 번쯤은 들어본 적 있는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직접 움직이자니 자칫하면 더 큰 분쟁으로 엮일 가능성이 크다고?”
“정확합니다. 특히 얼마 전, 왕도에서 일어난 반역으로 뒤숭숭한 시기에 잘못 엮인다면......”
환락가에도 차질이 생길 것이며, 이는 노스스파의 인력은 물론 자칫하면 왕도에 거점을 두고 있는 노스메디 판매 상회, 골든 애플까지 타격이 갈수도 있었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발터가 말했다.
“그럼 안 들키면 되는 거 아닌가?”
“......예?”
듣자하니 직접 나설 경우.
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어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닌가.
그럼 정체를 숨기면 그만.
“애초에 자네가 말했지 않느냐.”
“......”
“얼마 전 왕도에서 일어난 반역으로 뒤숭숭한 시기라고.”
그에 따라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런 뒤숭숭한 시기인 만큼. 암흑가 내부에서 사소한 다툼 정도는 흔히 일어나지 않겠는가?”
“......!”
“이것 참 유감이군. 하필 이런 뒤숭숭한 시기에, 하필 암흑가에서 내부 세력 간 다툼이 벌어지다니 말이다.”
그대로 발터가 능청스럽게 중얼거렸다.
물론 여기서 앨리스가 개입한다면 큰 문제겠지.
근데 지들끼리 싸우다 지들끼리 난리 났다는데 지들이 뭐 어쩔 거야? 안 그래?
“......”
그리고 머지않아.
앨리스 또한 발터의 의중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참으로 유감입니다. 우연히 레이커스의 지부에서 소란이 벌어져, 우연히 거기 있던 노예들이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니 말입니다.”
앨리스가 우연이라는 말에 묘하게 강세를 주며 대답했다.
좋아, 그렇다면 결정 났군.
곧이어 발터가 스륵, 제 검은 모피코트를 벗으며 물었다.
“그럼 앨리스. 혹 다른 옷은 없는가. 아무래도 왕도는 너무 더워서 말이다. 아, 기왕이면 가면도 있었으면 좋겠군.”
동시에 발터가 한 술 더 뜨며, 제 옆에 있는 레닌을 바라보았다.
“레닌. 자네도 이참에 왕도에서 옷 한 벌 새로 마련하는 건 어떤가?”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생각해보니 저도 최근 가면이 하나 필요해질 거 같아서 말입니다.”
레닌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하여간 이럴 때는 말하지 않아도 죽이 척척 맞는다.
이에 앨리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부탁하지.”
“아. 그리고 왕도에 추천하는 가게가 있는데 잠시 어떠십니까?”
그러면서 그녀가 시종을 불러 왕도의 지도를 가져오니.
앨리스가 분쟁지역에 위치한 레이커스 지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발터님이 원하시는 물건이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들어서 말입니다.”
이것 참 추천하는 가게가 하필 또 우연히 암흑가에 있을 줄이야.
그대로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추천 고맙군. 내 꼭 들려보도록 하지.”
그와 함께 처억, 발터가 지도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실례하겠네. 잠시 볼 일이 생겨서 말이네.”
“아닙니다. 살펴 가시지요.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길.”
동시에 앨리스가 제 붉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소했다.
“......왕도안이라면 어디든 제 수족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고맙군. 도움이 필요할 때는 참고하지.”
곧이어 발터가 시종의 안내를 따라 어딘가로 향하니.
레닌이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
그렇게 왕도의 암흑가에 위치한 레이커스의 지부.
그곳은 겉보기에는 술집과 같아보였지만, 이미 알만한 녀석들은 그 정체를 아는 만큼.
쉬이 그 안에 발길을 들이지 않았다.
하나 그때였다.
-끼익...
지부 안으로 웬 로브를 걸친 두 남녀가 등장하니.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들에게 집중되었다.
-처억.
무엇보다 정체불명의 그들이 얼굴에 쓰고 있는 가면.
마치 오페라의 유령을 연상케 하는 반가면 이었다.
이에 한 녀석이 저벅저벅 걸어가 고개를 까닥이며 물었다.
“......어디서 온 놈들이냐?”
경계심이 묻어나오는 목소리.
그리 말하는 녀석의 오른손은 이미 제 허리춤에 찬 단검을 향해 있었다.
동시에 그 순간, 가면의 남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문.”
“......?”
이에 녀석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미친 새끼 아니......”
하지만 채 녀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
-터업.
거구의 남성이 냅다 녀석의 얼굴을 부여잡고 있는 힘껏 바닥에 내리꽂았다.
-콰아아앙...후두둑!
그와 함께 커다란 충격음이 울려 퍼지며 나무 바닥이 박살났으니.
흩날리는 나무판자 사이.
가면의 남성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야, 니네 에드워드라고 어디 있는지 아냐?”
51화 인질범과는 협상하지 않는다(1)
레이커스의 지부 내부.
방금 전만 해도 조용했던 그곳은 한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그대로 채앵, 발터를 향해 두 녀석이 단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웬 놈이냐!”
이에 발터가 쯧, 혀를 차며 슬쩍 고개를 피했다.
그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그의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는 단검.
동시에 발터가 단검을 내지른 녀석의 팔목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말하면 뭐 누군지는 알고?”
“이 새끼가 감히...!”
그러자 팔목을 잡힌 녀석이 황급히 손을 회수하려 했으나.
우뚝, 마치 커다란 돌 사이에 손이 끼인 듯.
제 아무리 힘을 주고 당겨도 꿈쩍하지 않았으니.
-우드득...!
발터가 힘을 주기 무섭게 그의 팔목을 따라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곧이어 끄아아악, 녀석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기 무섭게.
-부웅!
발터가 그의 팔목을 붙잡은 채.
나머지 달려드는 한 녀석을 향해 휘둘렀다.
그야말로 무지막지한 괴력.
“자, 잠깐...!”
“아가리.”
-콰아아아앙!
그렇게 발터가 휘두른 동료(?)에 처맞고 날아간 녀석은 끽소리도 못하고 쓰러지며 기절.
“얌마, 야, 살아있냐?”
이에 짜악, 발터가 줄곧 팔을 잡고 휘두르던 녀석의 뺨을 후려치며 물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간몽둥이로 전락한 녀석 또한 의식을 잃은 지 오래였으니.
아이씨, 이러면 못 물어보잖아.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가 휘익, 녀석을 구석에 내던졌다.
“됐다. 딴 놈 찾으면 되지.”
어차피 남은 녀석들은 아직 많이 있으니까.
그대로 뚜둑, 발터가 어깨를 풀었다.
동시에 그가 히죽 웃으며 녀석들을 향해 걸어갔다.
“에드워드 어디 있는지 아는 사아람~”
그런 발터의 말에 녀석들이 흠칫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제대로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알 수 있었다.
뭐하는 새끼인지는 몰라도 저 놈은 위험하다.
잘못 걸리면 뒤진다.
본능적으로 이를 알아차린 녀석들이 주춤거렸다.
이에 발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쥐고 녀석들을 향해 달려갔다.
니들이 안 오면 내가 가야지.
곧이어 발터가 땅을 박차고 달려오자, 녀석들이 재빨리 허리춤에서 검을 뽑으며 외쳤다.
“마, 막아! 막으라고!”
“저걸 씨발 어떻게 막으라고 미친 새...!”
하지만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
어느새 발터가 제 앞을 가로막은 녀석들을 무식하게 밀어버리고 도착했으니.
꾸국, 그가 주먹을 움켜쥐고 말했다.
“야, 결과는 까봐야 아는 거야.”
“뭐, 뭔 개소리......!”
“그러니까 막아보라고!”
실패하면 유감이고.
이어서 콰아앙, 발터가 주먹이 녀석의 안면에 박혔다.
“커허억...!”
그대로 녀석은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지며 퇴장.
이에 발터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왕도의 암흑가라는 새끼들이 왜 이리 약골이야.
곧이어 발터가 다음 심문대상을 찾아 몸을 돌렸다.
그 후로 머지않아.
-쾅! 콰앙! 우드득...콰아앙! 퍼억...콰득!
계속해서 살벌한 충격음이 끊이지 않는 발터 쪽.
이에 그 반대편, 그러니까 레닌 쪽에 있던 녀석들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레닌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솔직히 이쪽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그리 생각하면 개추.
일단 나부터.
그리고 그도 잠시.
“......”
“......”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제히 레닌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래. 저 가면 쓴 망나니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낫겠지.
그리 판단한 녀석들이 단검을 내질렀다.
“죽어라!”
-쉬익!
하나 그 순간 제 판단이 틀렸음을 자각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니.
그대로 철컥, 레닌이 제 검집에 손을 올려두기 무섭게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허공을 따라 번쩍이는 은빛 섬광.
-피잇...!
동시에 촤악, 레닌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냄과 동시에 그녀의 뒤로 피가 솟구쳤다.
그러면서 레닌의 로브 끝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이에 레닌이 미간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덕분에 기껏 맞춰 입은 옷이 엉망이 됐지 않습니까.”
“무, 무슨......”
“하지만 안심하시길.”
곧바로 레닌이 빙글, 검을 고쳐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적어도 한 번에 끝내드리겠습니다.”
그와 함께 퓻, 그녀의 신형이 흩어졌으니.
그렇게 레이커스의 지부를 따라, 연이어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
한편 레이커스 지부에 위치한 지하보관소.
그곳은 주로 탈취한 귀중품이나 노예들을 보관하는 만큼.
철창이 달린 방이 길게 이어져있었다.
-잘그락...
그리고 그런 철창 안.
갈색머리칼의 청년이 희미한 랜턴 하나에 의지하며 연신 손을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 손에 묶인 수갑을 풀어보려는 셈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동시에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연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위가 유독 소란스러웠다.
덕분에 줄곧 지하를 감시하던 간수가 자리를 비운 참이니, 탈출하려면 지금의 제격.
하지만 그도 잠시.
뚝, 얇은 철사가 끊어지며 실낱같던 그의 희망도 같이 끊어졌다.
그대로 그가 하아,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를 부여잡았다.
“젠장......”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건지.
그가 작게 중얼거리며 얄궂은 제 신세를 한탄했다.
그의 이름은 에드워드 아렌츠.
그는 이래봬도 귀족가 출신의 자식이었다.
하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눈 깜짝할 새에 가문의 빚이 늘어나면서 가문이 폭삭 망해버린 게 아닌가.
가주, 그러니까 제 아비되는 사람이 무리하게 세력을 확장하려고 온갖 데서 돈을 끌어 모은 게 문제였다.
그러다 빚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자, 아비라는 작자는 가문을 버리고 야반도주.
그는 결국 꼼짝없이 모든 빚을 뒤집어쓰고 길거리에 나앉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빚을 갚아보기 위해.
특기인 연금술을 살려 일자리라도 구해보려 했으나 결국에는 일자리는커녕.
이자도 제대로 갚지 못해 이곳까지 끌려왔다.
그 이름만 하더라도 암흑가에서 악명이 자자한 레이커스.
이대로 가다가는 평생을 노예로 살다 죽을 판이었다.
-꽈악...!
그대로 에드워드가 제 주먹을 꽉 쥐었다.
안 된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다.
차라리 빌린 돈이라도 써봤으면 모를까.
단 한 푼도 쓰지 못한 채.
아버지의 빚더미를 껴안고 이대로 죽자니 도저히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에드워드가 다른 철사라도 없는지 바닥을 훑었다.
“저, 저기......”
그러자 저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던 소녀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었다.
“......이거라도 괘, 괜찮으면.”
살짝만 건드려도 무너질 거 같이, 연신 떨려오는 불안한 목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녀의 손끝에는 낡은 머리핀이 들려있었으니.
그대로 에드워드가 머리핀과 그녀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나 주는 거야?”
그 말에 소녀가 끄덕, 위아래로 고개를 움직였다.
그는 에드워드가 이곳에 끌려오기 전부터 줄곧 철창 안에 갇혀있던 아이였다.
나이는 이제 막 10대 중후반 정도 됐을까.
이름도 몰랐다.
목소리도 이제야 처음 들어봤다.
다만 엉망이 된 옷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로 보아, 이곳에 갇힌 지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목덜미에 자리한 하얀 흉터까지.
이에 에드워드가 아, 작은 단발마를 터트렸다.
저주받은 아이였다.
저주받은 아이.
흔히 태어날 때부터 하얀 흉터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들을 일컫는 말로.
집안에 재앙을 몰고 온다는 소문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노예로 팔려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생기 없이 메말라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에드워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덜덜...
그간 먹은 게 거의 없는지.
앙상하게 메마른 소녀의 팔이 후들거렸다.
이에 에드워드가 그녀가 내민 낡은 머리핀을 받았다.
아니 받으려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황급히 제 손을 빼며 말했다.
“다, 다가오면 안돼요.....!”
저랑 닿으면 안돼요.
엄마가 그랬어요.
난 저주받은 아이라서 손이 닿으면 저주가 옮는데요.
그녀가 다급하게 웅얼거리며 조심스레 낡은 머리핀을 내려놓았다.
그대로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머리핀을 밀어냈다.
-스윽...
그러자 에드워드가 그녀의 낡은 머리핀을 챙기며 대답했다.
“고, 고마워. 만약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넌 꼭 같이 데려가줄게.”
“......”
그 말에 흠칫,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툭, 그녀가 다시 고개를 떨구고 제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괜찮아요.”
그렇게 정적이 흐르는 지하실.
“저기......”
그 모습에 에드워드가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 곧 입을 꾹 닫았다.
하긴 같은 철창에 갇혀있는 주제에 위로는 무슨.
그건 일단 여기서 벗어나고 해도 늦지 않았다.
에드워드 아렌츠.
그는 다른 건 몰라도 포기하지 않은 악착같은 근성을 가지고 있는 사나이였으니.
그가 다시 신경을 집중하며 머리끈을 구부려 철창에 쑤셔 넣었다.
아니 쑤셔 넣으려는 순간이었다.
타다닥, 계단 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간수를 비롯한 레이커스의 조직원들이었다.
“이런 씨발 갑자기 웬 미친 새끼가 들어와서는...!”
“그.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합니까. 보스?”
그대로 보스라 불린 사내가 역정을 내며 말했다.
“씨발! 일단은 그 에드워든가 뭔가 하는 새끼부터 찾아봐!”
“예! 알겠습니다!”
그 말에 철창 안에 있던 에드워드가 급히 머리핀을 구석에 숨기며 움찔거렸다.
뭐지. 여기서 갑자기 내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설마 이대로 팔려가는 건가.
그가 잔뜩 긴장하며 재빨리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
곧이어 철커덩, 철창의 문이 열리며 조직원이 우악스럽게 그의 멱살을 부여잡았다.
“가, 갑자기 왜이러시는 겁니까!”
“닥쳐, 이 새끼야!”
그대로 조직원이 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러자 보스가 에드워드와 조직원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얘가 그 새끼야?”
“예, 맞습니다. 이번에 들어온 노예 중 에드워드라는 이름은 이놈뿐입니다.”
“좋아, 그럼 일단 이 새끼를 인질로 삼고......”
이에 에드워드가 주춤거렸다.
이, 인질? 이게 전부 무슨 소리란 말인가.
하지만 채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콰아아아앙...후두둑!
계단 위에서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곧이어 계단을 타고 내려온 건 반가면을 쓴 거구의 남성.
그대로 그가 양 손에 질질 끌고 오던 녀석들을 휙 던지며 보스를 향해 말했다.
“야, 에드워드 아냐고.”
“씨발, 또...!”
그의 물음에 보스는 물론이며, 나머지 조직원들까지 흠칫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 미친 새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저렇게 묻고 다니며 조직원들을 박살냈다.
“너, 너 뭐하는 새끼야! 어느 조직에서 보냈느냐! 매드 독? 블랙 파이톤?”
그대로 덥썩, 보스가 황급히 에드워드를 인질로 삼아 목에 칼을 들이밀며 말했다.
매드 독, 블랙 파이톤.
전부 암흑가에 있는 상대조직의 이름이었다.
그러자 가면의 남성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에이브러햄 링컨.”
“......?”
노예 해방하러 왔다. 이 새끼야.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뚜둑, 고개를 꺾었다.
그 말에 보스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발터를 바라보았다.
‘리, 링컨? 그런 이름의 조직이 있었던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하지만 그도 잠시.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오, 오지 마! 더 이상 다가오면 이 새끼 먼저 죽여 버린다!”
“아, 걔가 에드워드야?”
“내 말 안 들려!”
그대로 스릉, 에드워드의 목 바로 아래 자리한 칼날이 번쩍였다.
이에 발터가 미간을 구기며 보스를 향해 말했다.
“야. 너 생각 잘해. 여기서 걔 죽이면 나도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어떻게 사지를 찢어서 북부 설원에 던져주리?
발터가 그를 향해 은근히 경고했다.
그러나 보스의 뜻은 강경했으니.
“닥쳐! 놓아주면 당장 네놈이 어떻게 나올 줄 알고 그래?”
“거 새끼 꼴에 보스라고 대가리 굴리는 거 보소.”
확실히 녀석의 말이 옳았다.
만약 에드워드를 인질로 삼지 않았다면 당장 그 골통을 쪼개버렸을 터.
“그러니까 지금 당장 계단 위로 올라가! 안 그러면 이 새끼 목숨은 없는 거야!”
이거 귀찮게 됐네.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제 품속을 뒤졌다.
그리고 처억, 그가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말했다.
“그래. 네 요구조건은 잘 알았다.”
“......!”
그 말에 보스가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래, 제 아무리 미친놈이더라도 인질 앞에서는 별 수 없지.
그대로 그가 발터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럼 순순히 뒤로 가서......!”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여전히 그의 품속에 들어가 있는 오른손.
곧이어 발터의 손을 따라 딸려 나온 건 다름 아닌 둥근 원통형의 물체였으니.
“그런데 그거 알고 있나?”
동시에 철컥, 발터가 섬광탄의 핀을 뽑아 냅다 보스를 향해 내던졌다.
그대로 그가 중지를 치켜세우며 히죽 웃었다.
“난 인질범이랑 협상 안 해. 이 새끼야.”
그와 함께 삐이이이! 섬광탄이 터지며 눈부신 빛과 시끄러운 이명이 지하 가득 울려 퍼졌다.
52화 인질범과는 협상하지 않는다(2)
그렇게 레이커스 지부 지하에서 찬란한 광명이 터져 나오니.
보스가 쨍그랑, 들고 있던 단검을 떨어트리며 제 눈과 귀를 부여잡았다.
“크아아아악! 무슨 개짓거리를 한 게냐!”
동시에 그가 비틀거리며 악을 내질렀다.
그러자 발터가 흡족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아아, 이건 섬광탄이라는 것이다.
역시 효과 한 번 확실하구만.
그러게 어딜 중세 노예상 새끼가 깝쳐.
존나 건방지게 말이야.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방망이를 부여잡았다.
그와 함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틀거리는 보스를 향해 휘둘렀다.
-뻐억!
그대로 보스와 관자놀이를 따라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털썩, 보스가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이걸로 대가리는 잡았다.
이어서 빙글, 발터가 방망이를 가볍게 돌려 잡고는.
아직도 섬광탄의 축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잔당들을 향해 친히 은혜를 하사했으니.
그럴 때마다 지하를 따라, 뚝배기 깨지는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깡! 퍼억! 뻑! 퍼억! 콰앙!
이에 마지막 남은 녀석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하, 한번만 살려 주십......!”
“좆까.”
그대로 빠악, 발터가 단호하게 녀석의 골통을 내려쳤다.
그리고 그가 손을 털어내며 레닌에게 말했다.
“레닌, 적당히 치워둬라.”
“예,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레닌이 질질, 쓰러진 녀석들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사라졌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 남은 잔당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지하.
-처억...
발터가 방망이를 제 어깨에 걸친 채.
제 눈을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는 에드워드를 향해 걸어갔다.
“누, 눈이! 눈이...!”
방금 전 섬광탄의 여파인지.
인질로 잡혀있던 에드워드 역시 몸을 비틀었으나, 안 뒤졌으면 된 거지.
일단은 구해줬잖아. 한 잔해.
“에드워드 아렌츠. 본인 맞나?”
곧이어 발터가 그를 향해 물었다.
그 말에 흠칫, 에드워드가 겨우 한쪽 눈을 뜨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짙은 흑발과 제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울 정도로 커다란 덩치.
거기다 방금 전까지 제 목에 칼을 들이밀던 보스는 물론이며, 나머지 잔당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미동도 하지 않았으니.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위압감에 지레 겁을 먹고 도망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예, 맞습니다.”
하나 에드워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오히려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황급하게 자신을 찾던 간수를 비롯한 녀석들부터.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눈앞의 남성까지.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위의 소란 역시 눈앞의 그가 저지른 일 일터.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이 됐든, 제 자신을 찾아온 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어중간하게 거짓말을 치기보다는 차라리 정면 돌파가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다행인건 보아하니 눈앞의 그와는 대화를 할 여지가 남아있다는 사실.
그대로 에드워드가 발터를 향해 말했다.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오신 거라면 유감입니다.”
“......”
“하지만 빚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갚겠습니다. 이 부분은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차분하지만 강단이 느껴지는 목소리.
이 상황에 자신을 알고 찾아왔다면 아버지의 빚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번만 믿고 돌아가 주십쇼.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에드워드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제 아무리 그가 아닌 아버지가 진 빚이라고 한들.
그는 그 책임까지 버리고 도망칠 생각은 결코 없었다.
물론 빚을 진 건 억울하다.
당장 지금도 너무나 억울하다.
하지만 책임을 버리고 도망치는 순간.
제 자신마저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 되기에.
그것만큼은 스스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에.
에드워드는 그 책임을 마주하기로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봤다면 한심하다며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책임을 회피하는 게 더더욱 부끄러운 일이기에 그는 끝까지 아렌츠의 명예를 지킬 것임을 약속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정작 가주였던 그 아비가 버린 이름을, 그 아들이 지키려들다니.
이에 발터가 대답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건 곤란한데.”
“그럼......”
그대로 잠시 고민하던 에드워드가 제 품 속에서 황금색 반지를 꺼냈다.
그런 반지 위에는 에란츠의 문양이 새겨져있었다.
현재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귀중품이었다.
“......당장 지금은 이거라도 안 되겠습니까.”
레이커스 녀석들에게 잡혀 끌려오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지킨 반지였다.
동시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머지않아.
“글쎄. 딱히 내겐 필요가 없는 물건이로군.”
비로소 발터가 정적을 깼으니.
그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황급히 말했다.
“그, 그래도 팔면 꽤 값이 나올 물건입니다. 한 번만 믿어주십쇼!”
“좋다. 그럼 그전에 이건 확실히 하고 가지.”
그와 함께 발터가 처억, 제 품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건 다름 아닌 에드워드의 인적사항이 적힌 구인서류.
“우선 첫 번째, 난 자네의 아버지에는 관심 없다. 애초에 돈을 빌려준 적도 없으니 말이야.”
“예? 그, 그럼......”
그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의 빚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찾았던 건가.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내 영지에 있는 물건을 관리할 연금술사를 찾는 것 뿐.”
영지? 물건? 그게 무슨 소리지?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점점 혼란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처억, 발터가 줄곧 쓰고 있던 반가면을 벗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 이름은 발터, 발터 레비오르.”
“......”
“북부의 대공이다.”
“......!”
이에 에드워드가 눈이 휘둥그레 뜨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부, 부, 북부대공이라고?
심지어 북부대공이라면 최근 왕국을 구해낸 영웅의 이름이 아닌가!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아직도 끝나지 않았으니.
“내가 자네를 고용하도록 하지.”
“......예?”
그대로 에드워드가 멍하니 발터와 구인서류를 번갈아보았다.
분명 레이커스에 잡혀오기 전.
그가 열심히 뿌리던 구인서류가 맞았다.
‘잠깐. 그러면......!’
설마 그거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찾아왔단 말인가.
세상에나.
그대로 줄곧 침착함을 유지하던 에드워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아니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도 잠시.
에드워드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래.”
동시에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너 합격이라고.”
단호하기 그지없는 발터의 대답.
그와 함께 허업, 에드워드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곧바로 그가 확신했다.
귀인이다. 이분은 내 인생에 있어 도저히 놓쳐서는 안 될 귀인이시다.
그도 그럴게 노예로 팔려갈 자신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 취직까지 시켜주다니.
세상 어딜 찾아봐도 이런 귀인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
그대로 에드워드가 재차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의 위압감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파아아...!
아니 오히려 그 뒤에서 솟아나는 찬란한 광명에 눈부실 정도였다.
이어서 발터, 아니 귀인께서 친히 제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씀하시니.
“나와 같이 가겠는가.”
당연한 소리!
곧바로 에드워드가 발터의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공손하게 잡으며 대답했다.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그와 함께 발터가 옳다구나! 작게 조소했으니.
이는 미래의 현자이자, 연금술의 대가라 불리는 에드워드 아렌츠가 공식적으로 북부의 노예, 아니 수족이 되는 영광의 순간이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발터가 성공적으로 에드워드를 구출하고.
레닌과 그가 지하실에 갇힌 노예를 풀어주고, 혹시 모를 흔적을 지우고 있었다.
“잘 되가나?”
이에 남은 잔당을 마저 치우고 온 발터가 에드워드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처억, 에드워드가 빠릿빠릿하게 인사하며 대답했다.
“예, 대공님!”
어느새 에드워드가 발터를 부르는 호칭은 대공님으로 변한지 오래.
그 모습에 발터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캬, 이놈 이거 근성이 제대로 된 녀석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그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 레닌 역시 다른 노예를 전부 풀어주고 왔는지 발터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하신 대로 지하실에 갇혀있던 노예들은 전부 풀어줬습니다. 거기다 전부 4방향으로 흩어져 도망치라 전해두었으니 만에 하나 다른 암흑가 녀석들이 쫒는다 해도 쉬이 특정하지 못할 겁니다.”
그와 함께 에드워드의 빚을 비롯한 관련 서류는 싹 다 불태움은 물론.
노예들에게 각각 다른 인상착의를 소문내라 전해뒀으니.
뒤늦게 다른 레이커스 녀석들이 지부가 박살난 걸 발견했을 때는 한쪽에서는 푸른 머리의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성이 그랬다는 소문이, 다른 한쪽에서는 금발의 근육질의 남성이 그랬다는 등 온갖 소문이 돌고 난 후일 터였다.
덕분에 발터와 에드워드를 찾는데도 꽤나 애를 먹을 터.
그럼 이제 유유히 북부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렇게 발터가 레닌과 에드워드를 이끌고 계단을 올랐다.
아니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멈칫...
발터의 발걸음이 어느 한 곳에 정지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에드워드가 갇혀있던 철창 앞.
그 안에는 웬 소녀하나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이에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너는......”
그에게 낡은 머리핀을 건네줬던 그녀였다.
그녀는 다른 노예와 달리.
모두가 나간 지하실에 덩그러니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계속 나갈 것을 권유했으나, 끝까지 괜찮다고 남아있더군요.”
레닌이 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발터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저벅, 저벅...
동시에 그런 발터의 발소리에 움찔, 구석에 쭈그려 있던 그녀의 몸이 작게 떨렸다.
그대로 소녀의 바로 앞.
발터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넌 안 나가느냐.”
그 말에 그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발터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아스라한 등불 아래.
그녀의 목덜미에 자리한 하얀 흉터자국이 훤히 드러났다.
-흠칫!
이에 그녀가 주춤거리며 황급히 제 목덜미를 가렸다.
“다, 다가오면 안돼요.”
“......”
“엄마가 그랬어요. 난 저주받은 아이라서 손이 닿으면 저주가 옮는데요.”
에드워드 때와 똑같은 반응.
그 말에 발터가 미간을 좁혔다.
저주받은 아이.
분명 이 시기쯤 대륙 곳곳에 퍼진 미신 중 하나였다.
태어날 때부터 하얀 흉터를 가진 아이는 필시 나중에 재앙을 몰고 온다.
그리하여 이유를 불문하고 하얀 흉터를 가진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아마 눈앞의 그녀 또한 그와 같은 처지인 듯하였다.
하나 발터, 그는 알고 있었다.
통칭 저주받은 아이라 불리는 그들 중 일부는 마나감응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는 걸.
특히 그 흉터가 크면 클수록 그러했다.
애초에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얀 흉터의 원인은 어린 몸이 그 힘을 버티지 못해 발현되는 현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다 자라기도 전.
그 힘을 버티지 못해 죽거나, 쉬이 병에 들어 단명했다.
흔히 왕가의 저주와 비슷한 경우였다.
‘......그 사실이 밝혀지는 건 대충 지금으로부터 5년 뒤.’
그 이후로 세간에서는 저주받은 아이들을 보고 이리 불렀다.
하얀 성흔의 아이.
이에 발터가 몸을 숙여 눈앞의 그녀를 빤히 마주보았다.
‘이건......’
앞서 말했듯 하얀 흉터의 크기는 곧 그 힘과 비례하기 마련.
그런데 소녀의 흉터는 한 눈에 봐도 목덜미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그 크기가 상당했다.
이만한 크기는 전생을 통틀어서도 흔치 않았다.
아니 발터가 기억하기로도 한 사람이 유일했다.
그는 다름 아닌 용사.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발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과거의 이야기.
용사파티 중 유일하게 그 과거가 알려진 건 용사.
그리고 용사는 예전에 악덕 노예상에게 팔려갈 뻔했다 하지 않았는가.
한데 에드워드 또한 발터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노예상에게 팔려갈 위기였다.
‘그럼 애초에 처음부터 용사와 현자가 같이 있었다면?’
그 인연의 시작은 다름 아닌 지금 바로 여기.
미래에는 둘 다 같은 파티를 구성하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발터의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르기 무섭게.
-화르륵...!
그가 재빨리 등불을 들어 소녀를 비추었다.
그제야 제대로 보이는 잿빛의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
과거 발터가 기억하는 용사와 똑같았다.
그러나 그가 기억하는 용사는 남자.
아니 세간에서도 전부 그러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확인해야할게 생겼다.
“......리버?”
발터가 소녀를 향해 물었다.
리버 블레이크.
과거 용사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흠칫, 그녀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제 이름...어떻게 알았...어요?”
그렇게 레이커스 지부의 지하실.
잿빛 머리칼의 소녀가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뜬 채.
발터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53화 저주받은 아이
회귀 전. 발터가 처음 용사를 마주한 것은 그, 아니 그녀가 알케인의 무덤을 공략하기 위해 북부에 방문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녀에 관한 첫 인상은.
‘......냉소적이었지.’
말수는 적었으며, 그 얼굴은 항시 굳게 굳어 있었다.
덕분에 다른 이들은 쉬이 말을 걸지도 못할 정도.
당장 북부에 도착했을 때도.
그녀는 본대와 동떨어져 움직였으며, 이따금씩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를 때도 혼자였다.
그만큼 발터 역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본 건 공적인 대화가 전부.
그때도 그녀는 매번 갑주를 차고 있었음은 물론이며, 목에는 항상 스카프 후드를 두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스카프 후드는 목에 흉터를 가리기 위함인 모양이었다.
그러다 딱 한 번.
공적인 업무를 제외하고 용사와 대화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알케인의 무덤 공략을 앞둔 전날 밤이었을 것이다.
***
-사각, 사각...
잿빛 성의 집무실.
발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펜을 잡고 밤샘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타악.
그러나 그가 펜을 내려놓고 지그시 제 미간을 꾹 눌렀다.
요새 연달아 밤을 새우느라 눈이 여간 피곤한 게 아니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남은 일처리가 있었기에.
-끼익...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섰다.
잠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찬바람을 쐬러 나갈 요량이었다.
아마 망루에 들리면 한결 나아질 터.
이럴 때만큼은 살을 에는 듯한 북부의 추위가 고마울 다름이었다.
그렇게 머지않아.
어둠이 내린 잿빛 성의 망루.
-사아아...
그곳에는 언제나 그렇듯.
차갑고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으니.
발터가 아무 말 없이 제 발 아래 북부를 바라보았다.
“......”
동시에 그런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깊은 상념에 빠지기라도 한 듯.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그저 한참동안 북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문의 빚은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북부는 별다른 수입원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납의 양을 늘리자니, 북부의 백성들이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이미 몇몇 이들은 뭐라도 먹고 살기 위해.
무리하게 마수토벌을 나섰다가 큰 화를 당했다.
북부의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마수들이 점점 세를 늘려가는 바람에 이미 폰과 레닌을 비롯한 기사단은 벌써 몇 달째 출정을 나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부는 여전히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북부는 여전히 척박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는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꾸국, 발터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만약 가문의 빚이라도 없었다면.
만약 북부에 다른 자원이라도 있었다면.
하나 그도 잠시.
-으드득...
발터가 미간을 구기며 이를 악물었다.
한심한 새끼.
당장 북부의 백성들도 하루하루 죽지못해 살아가는 마당이었다.
그런데 북부의 대공이라는 녀석이, 그들의 주군이라는 놈이 현실에서 눈을 돌리다니.
결코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떻게든 북부를 회생시킬 방법을 모색해야했다.
다시 셀비로트 가의 크레핀 녀석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했다.
그리하여 북부만 살릴 수 있다면.
제 아비와 어미가 묻힌 북부의 땅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제 자존심 따위는 백번이고, 천 번이고 기꺼이 버릴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북부가 무사하다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그만큼 제 스스로 끊임없이 곱씹어야만했다.
제 자신의 선택에 수백의 목숨이 걸려있다는 것을.
제 자신의 손에 수백의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레비오르라는 이름에 담긴 그 무게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됐다.
세간에서 그를 북부대공이라 부르는 이상.
이는 결코 끊어낼 수 없는 발터의 강박이자, 죽을 때까지 그를 옭아맬 저주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발터가 제 시선을 거두었다.
마저 밀린 일을 처리해야했다.
그대로 그가 발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 누군가 망루를 향해 걸어왔으니.
-저벅, 저벅...
잿빛의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리버 플레이크, 왕도에서 파견된 용사였다.
그는 이제 막 방에서 나온 모양인지.
항상 입고 있던 갑주와 스카프 후드 대신.
가벼운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멈칫.
용사 역시 선객을 발견한 건지.
그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별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소 당황한 기색이 보였다.
하긴 이 시간에 망루에서 사람을, 그것도 북부대공을 마주할 줄을 몰랐을 일이니 말이다.
동시에 돌연 휘이잉, 강한 칼바람이 불어오니.
머리끝까지 걸치고 있던 용사의 로브가 벗겨졌다.
-펄럭...!
그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의 목덜미에 자리한 하얀 흉터.
이에 용사가 황급히 제 목을 가렸다.
하나 그의 손바닥만으로는 결코 제 흉터를 전부 가릴 수 없었기에.
“......죄송합니다. 못 볼꼴을 보여드렸군요.”
용사가 제 고개를 떨구며 사과했다.
무엇보다 그 와중에도 제 흉터를 가린 오른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이에 발터가 입을 열었다.
“바람. 쐬러 온 게 아닌가.”
“......예?”
“마침 잘됐군. 같이 바람이나 쐬지 않겠나?”
발터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용사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움찔...
용사가 무심코 발터가 내민 손을 잡으려다 말고.
다시 제 손을 회수하며 말했다.
“다가오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저주가 옮습니다.”
“......저주?”
그의 대답에 발터가 용사와 하얀 흉터를 번갈아보았다.
저주받은 아이.
과거 대륙에서 돌았던 소문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옛이야기.
지금은 그저 헛소문에 불과한 미신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그 이야기를 믿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용사의 반응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이는 그 나름대로 수십 년간 든 버릇이자, 자기방어기제였다.
다소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발터가 나지막이 물었다.
“......저주가 옮는다 했나.”
그대로 발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용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터업, 그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혀있는 투박한 손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얼마나 열심히 검을 휘둘러왔는지, 그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노력의 증거였기에.
발터는 그런 그의 손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작게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글쎄. 보다시피 멀쩡하네만?”
무엇보다 저주라면 이쪽도 이미 겪고 있어서 말이지.
발터가 그리 중얼거렸다.
“......”
이에 용사가 멍하니 발터와 그가 잡은 제 손을 번갈아보았다.
그동안 줄곧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과는 달리.
처음으로 풀어진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발터가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훨씬 보기 좋군.”
이제야 그 나잇대 같은 표정이야.
그간 얼마 살지도 않은 놈이 뭘 그리 매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인지.
안 그래도 북부에도 그와 비슷한 녀석이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기사단과 같이 고생하고 있을 테지.
돌아오면 따뜻한 콜하임티라도 준비해야겠군.
발터가 레닌의 얼굴을 떠올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곧이어 그가 당황하는 용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이에 발터가 먼저 말했다.
“이거 유감이군. 마음 같아서는 같이 바람이라도 쐬고 싶었으나 생각해보니 남은 업무가 있어서 말이네.”
그대로 발터가 빈 망루를 가리키며 펄럭, 검은 모피코트를 정리했다.
그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그럼 불청객은 이만 자리를 피해주겠네.”
“예?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됐네. 편히 있다가 들어가게나.”
그렇게 발터가 휘휘, 손을 내저으며 망루를 벗어나니.
아스라한 달빛이 내리는 잿빛 성의 망루.
용사가 한참동안 발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
이것이 회귀 전, 발터와 용사 사이의 기억.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발터가 제 눈앞에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잿빛의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거기다 잘게 떨리는 손까지.
그때와 똑같지만,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굳은살이 박혀있던 투박한 두 손은 부드러웠다.
언제나 굳어있던 얼굴에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묻어나왔다.
흉터를 가리던 스카프 후드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건 흉터조차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낡은 천 옷뿐이었다.
미래에 용사라 불리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철창에 갇힌 노예소녀에 불과했다.
그대로 발터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저주가 옮는다 했나?”
그러고는 그때, 과거 잿빛 성의 망루에서처럼.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녀의 손을 잡았다.
-터업.
이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어서 빨리 손을 빼야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손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니.
그가 손을 너무 강하게 잡은 탓도,
깜짝 놀라 손이 굳은 탓도 아니었다.
그저 지금 제 손을 잡은 발터의 손이 너무나도 따뜻한 탓에.
간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가 너무나도 그리웠던 탓에.
그녀는 차마 제 손을 잡은 발터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발터가 작게 조소하며 고개를 까닥였다.
“글쎄. 보다시피 멀쩡하네만?”
무엇보다 저주라면 이쪽도 이미 겪고 있어서 말이지.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제 손등을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런 그의 손등에는 하얀 상처가 자리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레놀프의 창을 사용한 뒤 생긴 성흔.
그 모습에 잿빛 머리칼의 소녀, 리버가 멍하니 발터를 바라보았다.
처음이었다.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준 사람은.
제 손을 잡고도 웃어준 사람은.
이리도 따뜻한 온기를 건네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정말...진짜로...괜찮은 거예요?”
리버가 발터를 올려다보며 울먹거렸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세차게 떨리는 목소리.
“그럼 더 이상...안 도망쳐도 되는 거예요?”
“그래.”
항상 그래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었다.
사람들의 손을 피해 도망쳤다.
태어나자마자 제 자신을 버린 부모도.
매번 팔리지 않는 불량품이라고 자신을 힐난하던 노예상도.
제 흉터를 보고 돌을 던지던 사람들도.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저주받은 아이라고.
그래서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언젠가 저주가 옮을 거라고.
그래서 이건 신이 제 자신에게 내린 벌이라고.
내가 잘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라고.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로워지는 날에는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이 저주를 풀어달라고.
단 한번이라도 사람의 손을 잡아보고 싶다고.
그저 단 한번만이라도 가족이란 존재를 만들고 싶다고.
하루에 수십, 수백, 수천 번씩 그리 생각하며 기도했다.
혹시나 신께서 제 기도를 들어주고 저주를 풀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 말미에는 희망마저 잃어갈 찰나.
비로소 그녀의 마지막 기도가 닿았으니.
리버가 애써 터져 나오는 울음을 씹어 삼키며 물었다.
“엄마랑 다른 사람들 전부가 그랬어요. 난 저주받은 아이라고.”
“......”
“그래도 내 손 잡아줄 거예요?”
제발, 한번만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동시에 그때였다.
발터가 천천히 제 무릎을 꿇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대로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몇 번이라도 잡아주마.”
“......!”
“그러니 마지막으로 묻겠다.”
어두운 철창 속.
발터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 여기 남아도 괜찮겠느냐?”
그 말에 움찔, 그녀의 손끝이 작게 떨렸다.
사실은 무서웠다.
춥고 어두운 철창 안.
제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이대로 혼자 남겨져야 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그게 아니면.”
“......”
“나와 같이 가겠느냐.”
발터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같이 가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스윽...
이에 그녀가 떨리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발터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리고 커다랬다.
제 흉터를 전부 덮고도 남을 만큼.
-툭, 투둑...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따라,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대로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같이 갈래요...!”
“그래. 그러자꾸나.”
동시에 발터가 그녀의 잿빛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대답하니.
그렇게 아스라한 등불이 비춰 내리는 철창 안.
용사, 아니 리버가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한참동안 발터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54화 본 드래곤은 죽어서 뼈를 남긴다(1)
그렇게 발터가 에드워드와 리버를 데리고 북부로 돌아온 지도 벌써 보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사이, 앨리스가 보낸 인력도 무사히 도착했으니.
어느새 북부를 찾는 방문객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특히 노스스파의 경우.
왕도에서 노스메디 판매를 겸하여 그 관심도가 높아진 편.
앨리스가 배포한 팜플렛 또한 꽤 좋은 유입효과를 낸 모양이었다.
덕분에 귀족들은 물론이고, 상인들까지.
한 번씩은 모두 노스스파에 들러 온천욕을 즐기고 있었다.
당장 오늘도 그랬다.
-오, 이곳이 북부인가.
-자네. 노스스파는 다녀와 봤는가?
-물론이지. 듣자하니 특히 입욕 후에 특제 산양유가 끝내주더군.
-아, 싱그레 말인가. 안 그래도 나도 더 사갈 예정이라네. 딸아이가 유독 좋아하더라니까.
북부의 설산지대.
료칸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 자리한 그곳에는 이미 적지 않은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손에는 저마다 산양유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는 다름 아닌 온천개장과 함께 발터가 야심차게 준비한 아이템.
북부에 자생하는 키르텐의 과육을 숙성시켜 산양유와 섞은 것으로.
마치 모 브랜드의 바나나 우유를 연상케 하는 맛이 특징이었다.
그리고 그 인기는 중세에도 제대로 먹혀들었으니.
북부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배경으로 뜨끈한 노천욕을 즐긴 뒤.
마지막 싱그레 우유로 마무리하는 일련의 과정은 어느새 노스스파의 공식 코스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거기다 알케인의 무덤은 어떠한가.
얼마 전 북부에 알케인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소식에 한동안 왕도는 물론이며, 온 대륙의 연금술사들의 관심이 북부에 쏠렸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대연금술사 알케인이었다.
당장 지금도 그가 연금술계에 남긴 족적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으며, 현대의 연금술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그야말로 연금술사들의 대부.
그만큼 연금술사들은 앞 다투어 북부로 몰렸으며, 그 중에는 아예 단체로 연구회를 만들어 온 이들도 있었다.
이에 에드워드를 필두로 발터가 고용한 연금술사들이 알케인의 무덤을 안내하니.
-오오, 이것이 대연금술사 알케인님의 일기인가.
-혹 이 연구 자료들은 여기서만 열람가능한가?
-원하신다면 대여도 가능합니다.
-대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잿빛 성에서 서류를 작성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알케인의 무덤 개장 직후.
한동안 잿빛 성에서는 길게 이어진 연금술사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아무튼 보다시피 노스스파와 알케인의 무덤은 전부 발터의 계획대로 성황리에 운영 중.
그 과정에서 다른 연금술사 길드와 마광석 판매까지 체결했으니, 최근 발터의 입가에는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잿빛 성의 집무실.
“금화 냄새가 나서~돈이 너무 좋아져~”
발터가 노래를 흥얼거리며 서류를 처리하고 있었다.
당장 회귀 직후만 하더라도 서류라면 지긋지긋하다며 벽난로에 태워버린 게 엊그제 같았다.
하나 이제는 서류의 대부분은 싸인만 해도 돈이 굴러오는 복덩이들이었으니.
-사각, 사각...
발터가 행복한 마음으로 서류를 비롯한 서신을 하나하나 해치웠다.
그리고 그때였다.
똑똑, 집무실을 따라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발터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레닌.
그리고 그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들이 섞여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들리겠다고 한 에드워드와 리버인 모양이었다.
“들어오도록.”
이에 곧 끼익,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레닌과 에드워드가 들어왔다.
그대로 둘이 발터를 향해 인사했다.
“대공님을 뵙습니다.”
“대공님을 뵙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둘의 뒤로 빨간 리본을 맨 잿빛 머리칼이 삐죽 솟아올랐으니.
리버가 목도리를 매만지며 수줍게 발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대, 대공님을...뵙습니다.”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손짓했다.
“그래. 우선 앉도록.”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의 옆에는 레닌이.
그 맞은편에는 에드워드가 리버가 자리했다.
“북부에서의 생활은 어찌 잘 맞는지 모르겠군.”
그대로 발터가 에드워드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밀밭을 연상케 하는 갈색 머리칼의 남성.
에드워드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아니 최근 이래도 될 정도로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그가 한 가득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그는 가문이 망하고 길바닥에 나앉은 뒤로는.
왕도의 거리를 전전하며 쫄쫄 굶는 신세였다.
그러다 말미에는 알다시피 레이커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나갈 신세가 아니었던가.
그에 비하면 북부의 생활은 그야말로 안락하기 그지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곳에서라면 그가 원하는 연금술 연구를 실컷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알케인의 무덤이라니!
덕분에 그는 매일매일 알케인의 무덤에 살다시피 하며, 그가 남긴 자료를 읽는 데 푹 빠져있었다.
그러다 다른 연금술사들이 방문하면 서로 의견을 나누며, 여러 레시피를 적용시켜 나가니.
이런 꿈같은 직장이 따로 없었다.
그대로 에드워드가 품속에서 그간의 연구 자료들을 꺼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최근 다른 연금술사들과 특수 골렘제작에 착수했습니다. 다행히 무덤에 알케인님의 오리지널 골렘제작법이 남아있더라고요. 그래서 이를 일부 개량하여 양산화까지 해볼 예정입니다.”
골렘. 마법사에게 마법이, 기사들에게 검이 있다면.
연금술사들에게는 골렘이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연금술사들의 전매특허라 불리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제작비는 물론이고.
현대의 제작법으로는 섬세한 작업이 불가능하여, 따로 최상급 길드에 속한 연금술사가 아니면 쉬이 만들지 못하는 병기였다.
그러나 알케인의 무덤에서 발견된 제작법과 북부의 연금술사들.
더하여 발터의 지원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골렘 제작에 들어가도 무방하였다.
“우선 앞으로 2주 정도. 초기 기체가 완성되면 가동실험에 들어갈 테니 여러 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을 겁니다. 그만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에드워드가 자신 있게 말했다.
이에 발터가 흥미로운 듯 제 눈을 반짝였다.
골렘이라.
실제로 골렘이라면 그 활용분야가 무궁무진했다.
당장 단순 노동부터 전투를 비롯한 방어선 구축까지.
잘만하면 평생을 무급으로 굴릴 튼튼한 만능일꾼이 생기는 셈이었다.
거기다 이참에 푸른 마탑의 루비아가 만든 마도병기까지 접합시킨다면?
‘......햐, 이거 군침이 싹 도네.’
상상해보아라.
남들이 다 말 타고 검 들고 싸울 때.
이쪽은 골렘에 대공포 하나 장착시키고 나간다.
무엇보다 24시간 풀 오토로 굴려도 무방하다.
역시 이래서 기술이 중요하단 거다.
하여간 옛말 틀린 게 하나 없다니까.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2주라니.
원래 골렘제작이 그렇게 빨리 되는 거였던가?
그가 알기로는 못해도 한 달 이상은 연금술사들이 전부 달라붙어야 할 텐데.
그대로 발터가 에드워드를 향해 물었다.
“2주 안에 가능하겠나? 당장 그리 급한 건 아니니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2주 정도면 충분합니다. 확실히 기존의 골렘 제작법이라면 더 오래 걸리겠지만, 이번에 알케인님의 남긴 연구 자료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이론이 있거든요. 이거라면 획기적으로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겁니다.”
“......”
제 아무리 알케인의 연구 자료가 있다고 해도 원래 새 이론이라는 게 그렇게 금방금방 나오는 건가.
하지만 그도 잠시.
상대는 무려 미래의 연금술의 대가이자, 연금술 하나로 용사 파티에까지 들어간 현자가 아닌가.
본디 천재는 그 싹부터 다른 법이라 하지 않나.
지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뭐 나야 좋지.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말했다.
“좋다. 내 기대해보도록하지.”
“대공님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에 에드워드가 처억,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와 함께 발터가 에드워드의 옆에 앉아있는 리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현재 북부로 온 이후.
에드워드를 따라, 알케인의 무덤에서 여러 심부름을 비롯한 잡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대로 발터가 리버를 향해 물었다.
“북부에서의 생활은 괜찮으냐.”
“그게......”
발터의 물음에 리버가 제 목도리 끝자락을 매만졌다.
그녀가 북부에 온 지도 벌써 보름.
그동안 리버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일투성이에 모든 게 신기할 다름이었다.
그야 그동안은 노예시장을 전전하며, 철창에 갇혀 있던 게 대부분.
그런데 북부에 와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식사도 해보고, 나름대로 일도 해보았다.
물론 일이라 해도 짐을 옮기거나, 에드워드를 비롯한 연금술사들의 심부름 정도였으나 리버에게는 전부 처음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연금술사들을 돕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다른 어른들이 조금은 쉬라고 따로 휴식시간까지 만들어 줄 정도.
그렇게 알케인의 무덤 내에서 그녀는 어엿한 하나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혹시 북부에서의 생활이 불편하다면 언제나 말하거라.”
“......!”
그 말에 리버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게 아니라!”
“......”
“그...너무 좋아서......”
계속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에.
리버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그야 북부의 사람들은 전부 저마다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종종 마을에서 마주치는 아저씨들은 마광석을 캐온다고 하였다.
에드워드 오빠는 알케인의 무덤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으며.
레닌 언니는 대공님을 보좌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님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제 혼자만 아무런 역할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는 거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행복해도 되는 건지 줄곧 의문이 들었다.
그러자 발터를 비롯하여 집무실에 있던 모두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안될게 뭐가 있느냐.”
“맞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다른 연금술사분들도 전부 리버 양이 있어서 다행이라 하던 걸요?”
그 말에 리버가 멍하니 모두를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 맘 편히 있거라.”
동시에 제 머리를 타고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에 리버가 희미하게 웃었다.
만약 가족들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대로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에 발터가 피식 웃었다.
역시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딱딱하게 굳어있는 편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과도 보이고 있는 모양이고.’
발터가 리버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물론 아직 그녀 스스로는 잘 모르겠지만, 발터가 굳이 그녀를 알케인의 무덤에 둔 이유는 단순히 역할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역할을 위해 알케인의 무덤에 둔 게 맞았다.
일전에 말했듯 저주 받은 아이들, 그러니까 하얀 성흔의 아이들은 높은 마나감응도를 타고났다.
더군다나 그 중 리버는 미래에 용사가 될 재목인 만큼.
그 재능이 남다를 터.
그리하여 지금부터 따로 훈련을 시키기보다는 자연스레 마나를 느끼도록 두는 게 훨씬 나았다.
무엇보다 알케인의 무덤은 기본적으로 마나포화도가 높은 장소.
그만큼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그녀는 그곳에서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마나를 느끼는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검술을 비롯한 훈련은 그 다음에 해도 무방했다.
아마 그때가 되면 본격적으로 그녀의 재능이 찬란하게 개화할 터이니.
리버는 향후 북부의 최대 전력이 될 것이었다.
아무튼 그건 조금 미래의 일.
지금 당장은 둘 다 문제없이 북부에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니 마음이 놓였다.
이에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둘 다 돌아가서......”
아니 자리에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에드워드가 발터를 향해 말했다.
“아, 맞습니다. 대공님.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신가요?”
“......왜 그러지?”
이에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급한 일은 다 끝났겠다.
지금 당장 마무리해야 할 일은 없었다.
“시간은 충분하다만.”
“그럼 잘됐군요. 마침 오늘 대공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대로 에드워드가 활짝 웃으며 제 품속에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니.
그건 다름 아닌 알케인의 무덤을 공략할 때.
발터가 쓰러트렸던 본 드래곤의 뼈였다.
55화 본 드래곤은 죽어서 뼈를 남긴다(2)
잿빛 성 근처의 공터.
그곳에는 에드워드를 포함한 북부의 연금술사들이 뭔가를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었으니.
공터에는 이미 복잡한 문자가 적힌 연성진이 깔려 있었으며, 그 옆에는 물, 석회, 염분부터 마광석까지.
온갖 연금술 재료들이 한가득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연성진 중앙에 있는 뼈 무덤.
이는 집무실에서 보여줬던 본 드래곤의 뼈였다.
그 양만 하더라도 에드워드의 키를 훌쩍 넘을 정도.
이에 발터가 그를 향해 물었다.
“용아병이라 했느냐.”
“예, 맞습니다.”
발터의 대답에 에드워드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가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용아병.
이에 발터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쥐었다.
그래, 본 드래곤도 잡았겠다.
용아병 정도는 있어야지. 암암.
솔직히 내가 네크로멘서였으면 아공간에 본 드래곤도 데리고 다녔다.
왜, 북부에 본 드래곤 하나 데리고 다닐 법 하잖아.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용아병. 고대의 주술사들이 용의 이빨을 매개로하여 소환한 전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연금술사들이 그 영역을 받아들인 결과.
이는 용의 이빨을 포함한 다른 뼈 부위를 사용하여 연성하는 병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주재료가 드래곤의 뼈다 보니, 제작은커녕.
연금술 중에서도 실존성이 제로에 가까운 분야였다.
그러다보니 용아병은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거의 전설에 가까운 꿈의 영역.
한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북부의 알케인의 무덤에서 그와 관련된 제작법은 물론이고, 그 원재료인 드래곤의 뼈까지 잔뜩 있는 게 아닌가!
이에 에드워드를 포함한 북부의 연금술사들은 그야말로 눈이 돌아간 채.
몇날며칠 밤을 새며 연구에 몰두하였다.
지금 당장 연성을 준비하는 그들의 표정이 그 증거.
-흐흐흐, 내 살다 살다 드래곤의 뼈를 만지는 날이 오다니.
-캬, 이 뾰족한 이빨과 매혹적인 몸신의 각도까지. 정말 완벽하군.
-아아, 정말이지 도저히 못 참겠군. 흐흐......
그대로 연금술사들이 뼈 무덤에 한데 모여 음흉하게 숙덕거렸다.
안 그래도 연금술사, 그 대부분은 보통 좋은 재료다 싶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성향 강한 녀석들이었다.
거기다 그 재료가 무려 드래곤의 뼈?
다른 이들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만져보지도 못할 귀한 재료였다.
그러다보니 이런 반응도 아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꼴이 연금술사보다는 음습하고 수상한 변태집단을 연상케 하였으니.
-스윽...
레닌이 아무 말 없이 제 옆에 있던 리버의 눈을 가렸다.
“......어, 언니? 저 앞이 안 보이는데요?”
그러자 순간 당황한 리버가 제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마치 토끼나 강아지가 깜짝 놀라 흠칫거리는 거 같은 모습.
이에 레닌이 옅게 웃으며 리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 보는 게 낫습니다. 좋은 거만 보고 자라셔야죠.”
“네, 넷?”
“정 불편하시면 말씀하십쇼. 차라리 제가 근원을 제거하겠습니다.”
그대로 레닌이 싱긋 웃으며 스르릉, 허리춤에 찬 검을 뽑으려 들었다.
어어, 안 된다. 쟤 말려라.
하지만 그도 잠시.
“아뇨...괜찮아요.”
레닌 언니 손은 대공님처럼 따뜻해서 좋아요.
리버가 다소 부끄러운 듯 작게 속삭이며 중얼거렸다.
그 말에 레닌이 멈칫, 검을 뽑으려던 손을 내렸다.
“착한 아이군요.”
“헤헤......”
만약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레닌이 연신 미소를 지으며 재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꼭 사이좋은 자매를 보는 거 같은 모습.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화기애애한 둘을 바라보았다.
리버가 북부에 온 이후.
집무실에서의 대화도 그렇고, 그녀는 제 나름대로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다시피 연금술사들은 물론이며, 북부의 기사단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었으니.
평소에는 점잖기 그지없는 폰조차도 그녀 앞에서는 무장해제 될 정도였다.
-허허, 누굴 닮아서 이리 예쁜지.
-어찌 와이번이라도 한 번 쓰다듬어보겠느냐?
당장 이틀 전.
와이번을 처음 보고 신기해하는 리버에게 폰이 했던 말이었다.
그러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최근에는 아예 리버를 위해 과자와 사탕 따위를 들고 다닌다 했던가.
이처럼 어느덧 리버의 곁에는 그녀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으니.
언젠가는 그녀 스스로도 이를 알 때가 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였다.
“그럼 대공님, 시작하겠습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에드워드가 연성을 시작했다.
곧이어 물 35L, 탄소 20kg, 암모니아 4L, 석회 1.5kg, 인 800g, 염분 250g, 질산 칼륨 100g, 황 80g, 플루오린 7.5g, 철 5g, 규소 3g 마광석 1kg 등등.
에드워드와 다른 연금술사들이 준비된 재료들을 하나하나씩 읊으니.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발터가 호오,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거 꼭 모 애니메이션에서 보던 장면인데.
‘......물론 그때는 용아병이 아니라 인체연성이지만.’
그러고 보니 거기 주인공 이름도 에드워드 아니던가.
이러다 팔이랑 다리 한 짝 날아가는 거 아닌가 몰라.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파아앗...!
그와 함께 마침내 연성진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니.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덜그럭, 빛 무리 사이에서 뼈들이 마주치는 소리가 들려오며 용아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연성은 다행히 사지 멀쩡히 성공.
-스으으...
마치 스켈레톤 나이트를 연상케 하는 모습.
하나 그 머리를 포함하여 일부는 인간의 골격과는 사뭇 달랐다.
특히 가슴팍에 펜던트처럼 달려있는 드래곤의 이빨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이들이 바로 용아병.
무엇보다 연성진 위에 서있는 그들을 따라, 심상치 않은 기도가 느껴지니.
이에 레닌이 미간을 좁혔다.
“이건......”
“제법이군.”
동시에 발터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 기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오러.
그만큼 오러 사용자인 둘이 가장 먼저 이를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줄곧 가만히 서있던 리버가 움찔거렸다.
그대로 레닌이 물었다.
“......왜 그러시죠?”
“아, 그게 어딘가 언니랑 대공님과 비슷한 느낌이라서요.”
그 말에 레닌과 발터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설마하니 벌써부터 오러를 감지한 건가.
과연 하얀 성흔의 아이다운 마나감응도였다.
그런 둘의 모습에 리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 혹시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그러자 발터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잘했다. 그게 바로 오러라는 것이다.”
“이 나이에 벌써 오러를 느끼다니 대단합니다.”
곧이어 레닌까지 칭찬하고 나서야.
리버가 다행이라는 듯.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
발터가 눈앞의 용아병을 바라보았다.
오러를 다루는 스켈레톤 나이트인가.
“따로 명령을 내릴 수도 있나?”
발터가 용아병과 에드워드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그러자 에드워드가 제 손에 들고 있던 완드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입니다. 이 완드를 소지하고 명령을 내리면 될 겁니다.”
그 끝에는 붉은 루비가 박혀있는 완드.
본 드래곤의 뿔을 가공하여 만든 물건이었다.
무엇보다 그리 말하는 에드워드 역시.
어딘가 잔뜩 신이 나 상기된 표정이었으니.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연금술사인 모양이었다.
그대로 에드워드가 공손하게 완드를 건네며 물었다.
“한 번 해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이에 발터가 흔쾌히 완드를 건네받고 용아병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명령했다.
“무릎을 꿇어라.”
동시에 그때였다.
처억, 일제히 발터를 향해 무릎을 꿇는 용아병들.
그 모습이 제법 훈련된 기사다웠다.
“오오......”
그와 함께 주변에서 다른 연금술사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들 역시 용아병을 직접 보는 건 처음.
이어서 발터가 맨 앞의 용아병을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아직 시험해보고 싶은 게 한 가지 남았다.
“일어서라.”
그런 발터의 명령에 제자리에서 일어난 용아병.
이에 그가 뚜둑, 손아귀를 풀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막아보거라.”
그대로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웅, 발터가 용아병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런 그의 주먹에는 푸르스름한 오러가 깃들어 있었으니.
-우드득...콰앙!!
공터를 따라 강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대로 잠시 뒤.
자욱한 흙먼지 사이.
-푸스스...
저 멀리 뒤로 밀려난 용아병이 비틀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비록 완벽히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금이 가거나 박살난 부분도 없이 상당히 멀쩡한 모습이었다.
“......호오.”
이에 발터가 작게 조소하며 용아병을 바라보았다.
그 내구도나 주먹을 막은 센스나 전부 상상이상.
제 아무리 위력을 조절했다 해도 이 정도면 매우 쓸 만했다.
아니 애초에 그 상대가 맨 손으로 회색곰이랑 원펀치 다이다이를 까는 발터임을 고려하면, 상당한 수준.
“에드워드.”
“예, 대공님.”
곧이어 에드워드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와 함께 터억, 발터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히죽 웃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군.”
“저, 정말이십니까?!”
동시에 화아아, 화색을 띠는 에드워드.
대공께 받은 은혜를 갚기 위해서는 택도 없이 모자랐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는 사실에 에드워드가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대로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러자 발터가 다른 연금술사들을 바라보며 말하니.
“자네들도 수고 많았네.”
다른 이들 역시 저마다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그런 그들의 인사에 발터가 옅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의 노고 덕에 북부는 앞으로도 연금술의 성지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릴 터.
이에 발터가 에드워드를 비롯한 연금술사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나 말하게나.”
“......!”
그런 발터의 말에 에드워드와 북부의 연금술사들이 눈을 번쩍 떴다.
그 중 몇몇은 아예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제 입을 틀어막을 정도.
그 모습에 혹자는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었으나, 여태껏 그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북부의 연금술사들은 전부 왕도나 유명길드에 소속되지 못한 자들.
거기다 시대의 풍조 상.
연금술사들은 마법사들에 비해 은근히 무시 받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그간 마땅한 돈도 못 벌고, 그나마 학구열과 애정하나만으로도 버텨온 이들이었다.
심지어 그 중 에드워드는 가문이 망하고 노예로 팔릴 위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북부에서 그들을 전부 고용함은 물론이며, 무려 알케인의 무덤과 같은 양질의 연구까지 맡기더니 이젠 더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나 말하란다.
지금 그들에게 있어 북부대공은 그야말로 빛, 그 자체.
오늘부로 북부대공의 지지를 철회한다.
오늘부터 지지관계에서 벗어나, 북부대공과 나는 한 몸으로 일체가 된다.
북부대공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북부의 연금술사들이 눈물을 훔치며 처억, 발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발터가 미간을 좁히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놈들 왜 이래.
처음 뽑을 때면 분명히 나름 정상적인 놈들로 뽑았는데.
설마 그 사이 북부화된 건가.
에헤이, 조졌네. 이거.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에드워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그럼 대공님. 혹시 연금술에 필요한 약초들을 몇몇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약초?”
“네, 주로 약물에 쓰이는 약초들입니다.”
약물이라는 말에 발터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본디 연금술의 정수는 뭐니뭐니해도 약물제조.
당장 북부의 제일가는 효자상품인 노스메디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던가.
한데 여기서 다른 약물까지 더해진다면?
거기다 앞에 알케인이라는 이름값까지 적당히 달아서 판다면 막말로 대륙의 약을 주무르는 왕이 되는 것도 과언이 아닐 터.
아, 혹시나 오해하지는 말자.
절대, 결단코 수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마법의 하얀 가루가 아니다.
아니 물론 이것도 마지막에 마법적인 처리를 거치긴 하지만 그거랑은 분명 다르다.
“에드워드.”
“......예?”
“그에 관해서는 집무실에 가서 좀 더 자세히 이야기 하도록 하지.”
그대로 발터가 히죽 웃으며 에드워드에게 어깨에 손을 올렸으니.
그때만 하더라도 에드워드 아렌츠, 그는 몰랐다.
훗날 제 자신이 대륙의 마(법)약왕이자, 북부의 무한 물약 디스펜서가 될 것임을.
56화 과거의 맹약
잿빛 성의 집무실.
툭툭, 발터가 펜을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대로 그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단 말이지......”
그러니까 방금 전.
에드워드와 물약제조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
발터는 그 후로도 한참동안 생각에 빠져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알다시피 에드워드가 요청한 것은 물약제조에 쓰일 약초.
그리하여 앞으로 제작에 착수할 약물과 더불어 그에 필요한 약초들을 모아, 적당히 견적을 뽑아본 결과.
어느 정도 매출이 나오기 위해서는 아예 정기적으로 약초를 수입해야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어찌 보면 당연한 소리였다.
북부에서 자생하는 약초는 기껏해야 콜하임과 더불어 버커스와 브이타가 전부.
이는 노스메디의 주재료가 되는 약초들이었으나, 그 쓰임새는 어디까지나 노스메디 뿐.
다른 물약제조에 필요한 약초를 입수하기 위해서는 주로 남부지방, 아무리 못해도 중부까지는 내려가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북부에는 물약의 원료가 되는 약초가 너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보다 약초가 많이 자라는 지역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물론 수익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투자할 생각은 있다.
실제로 알케인의 이름을 적당히 팔면, 흑자는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100% 수입에 의존해야한다는 점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렇다고 북부에서 따로 약초를 키우자니 그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사람도 얼어 죽는 곳이 북부다.
그런데 여기서 따뜻한 지역에 자생하는 약초를 키워낸다고?
자신한다.
어찌어찌 씨앗을 구해온다해도 싹을 피우기전에 얼어 뒤진다.
아니 땅이 얼어붙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얼마나 싼값에 약초를 수입하느냐가 관건인데......’
애초에 그럴 거면 중부나 남부 쪽에 새 거점을 하나 두는 게 훨씬 나았다.
그야 북부에서 왔다 갔다 할 바에는 시즈하나 박고 돌리는 게 낫잖아.
근데 그건 또 공짜냐?
‘당연히 아니지. 새 인력구하랴. 땅이랑 건물 구하랴. 그 사이에 거래처도 뚫어야 하고.’
아이고, 약물 만들기 전에 내 등골이 휘것다.
발터가 속으로 한탄하며 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아깝다. 존나 아깝다.
아아, 기술은 되는데 재료가 없는 이 통탄을 어찌하오.
시팔. 이래서 처음 시작지를 잘 골라야한다.
저기 미국놈들봐라.
땅하나 잘 잡아서 뭘 심어도 다 잘 자라는데 심지어 땅은 졸라게 넓지 않은가.
존나 치사한 새끼들.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꾸국, 펜을 부여잡았다.
-뚜둑...!
그와 동시에 결국 견디지 못한 펜이 박살나니.
줄곧 이를 지켜보던 레닌이 말했다.
“......발터님, 펜이 죽었습니다.”
“그래. 나도 죽고 싶은 기분이구나.”
이에 발터가 푸스스, 펜‘이었던’ 것을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그 정도입니까? 어차피 돈도 꽤나 벌었겠다. 이참에 괜찮은 거래처를 알아보는 건 어떠십니까.”
레닌이 차분하게 발터를 위로하며 물었다.
그러자 발터가 제 미간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아냐. 단순히 그런 문제가 아냐.”
“......”
“위험부담이 너무 커.”
앞서 말했듯, 돈이라면 있다.
하지만 수입에 모든 건 의존해야하는 수입구조라면 리스크가 너무 컸다.
당장 현지사정이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만약 남부에 홍수가 나는 등 피치 못할 자연재해로 인해 한 해 농사가 망하면?
그대로 약초공급에 타격을 입고, 물약장사는 무너진다.
이에 발터가 나지막이 말했다.
“현지상황이 안 좋아지면 타격을 입는 건 이쪽이다. 설령 상대가 폭리를 취해도 이쪽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게지. 그럼 그 부담은?”
“......전부 북부가 안게 되겠죠.”
“정확하다.”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였는데 여기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을 했다가 꼬라박으면 그건 그거대로 최악의 수였다.
본디 위기란 가장 안심할 때 오는 것.
이럴수록 더더욱 신중해야했다.
한데 그렇다고 물약장사를 포기하자니.
‘......저만한 인력을 그냥 썩여둬야 한다고?’
무려 용사파티의 현자였다. 현자.
용사파티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연금술로 따지자면 저만한 인재도 없을 텐데 이런 인력을 그냥 방치하자니 아주 아까워서 돌아버릴 판.
‘어디 아무데나 심어도 아무거나 잘 자라는 그런 땅 없나.’
발터가 쯧,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딸깍하면 딸깍하고 자라는 땅이 필요했다.
하나 그런 땅이 어디 있느냔 말이지.
발터가 제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순간 발터의 머릿속을 타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가 번뜩였으니.
“......잠깐.”
그가 멈칫, 손을 멈추었다.
있다. 어떤 땅이든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개사기 아이템.
그래, 내가 왜 그걸 생각 못했지!
그대로 발터가 흐흐,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레닌이 움찔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제 주군이 저런 반응을 보일 때는 크게 두 가지.
첫 번째, 돈이 들어올 때.
그게 아니면 두 번째, 돈이 들어올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그와 함께 레닌이 물었다.
“......좋은 생각이라도 나신 겁니까?”
그러자 발터가 레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레닌, 넌 대륙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가 어디인지 아느냐?”
“예? 그거야 당연히 남부 아닙니까.”
대륙의 남부. 사시사철 온화한 기후와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는 지역.
덕분에 남부는 대륙 최대의 곡창지대라고 불리며, 그 별명만 하더라도 무려 황금의 땅이 아닌가.
“아니. 틀렸다.”
하나 돌아온 발터의 대답은 의외였으니.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정답은 세계수의 영역이다.”
“......!”
세계수의 영역, 엘프들의 땅을 말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발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엘프들의 땅에는 보통 그들이 모시는 세계수를 중심으로 영역을 펼치기 마련.
그리고 세계수란 무엇인가.
모든 생명의 근원의 나무라 불리는 신비의 나무로.
그 나무가 뿌리를 내린 지역은 사시사철 그 생명의 은혜를 꽃피우기로 유명했다.
즉, 제 아무리 척박하기 그지없는 북부라도 세계수의 가지만 딸깍 심으면.
적어도 그 주변은 아무거나 심어도 아무거나 잘 자라는 생명의 땅이 된다는 사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런데 엘프들의 영역은 어떻게 가실 생각이십니까. 애초에 같은 엘프가 아닌 이상 그 영역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들었습니다만.”
엘프들의 땅.
그들의 존재는 분명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실제로 그들의 땅에 가봤거나 하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탐험가들 사이에서 전해져 내려져오는 전설 혹은 아주 드물게 인간의 영역에 내려온 엘프들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게 대부분.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레닌, 방금 자네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예? 그게 무슨......”
“같은‘엘프’가 아닌 이상 불가능하다고.”
그와 함께 발터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있잖아. 엘프.”
“......!”
그렇다. 북부에는 엘프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
그리고 머지않아.
“......정확히 이해했습니다.”
곧이어 레닌이 제 주군의 말뜻을 알아차리니.
그녀가 철컥, 제 허리춤에 찬 검을 매만지며 꾸벅 고개 숙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오냐.”
그대로 레닌이 집무실을 나섰다.
북부에 사는 유일한 엘프.
루시엘 프레지아를 잡으러.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잿빛 성의 집무실.
그곳에는 레닌이 당당하게 서있었다.
“대공님, 명령하신대로 준비했습니다.”
“......”
그리고 그 옆에는 푸른 머리칼의 미청년이 의자에 앉아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의 머리 양 옆에는 길쭉한 귀가 튀어나와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루시엘 프레지아.
현재 북부에서 노역하는 엘프였다.
그대로 루시엘이 레닌과 발터를 번갈아보았다.
동시에 그가 와락, 미간을 구기며 입을 떼었다.
“제발 이 늙은이 좀 쉬게 놔두면 안 되겠냐. 이 새끼들아.”
그는 알고 있었다.
대공이 자신을 부를 때면 항상 좆같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광산개발부터 와이번 안장 제작, 노스스파 건설.
그는 항상 귀신같이 일거리를 물어왔다.
아니 만들어왔다는 말이 맞겠지.
그리고 이번에도 분명 어디서 또 거지같은 일을 가져왔을 게 분명했다.
이에 루시엘이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이번에만 통틀어 내가 삽질만 몇 번을 한 줄 알아! 이 나이되면 한 번 삽질할 때마다 뼈마디가 쑤셔 죽것다. 이놈아!”
“......”
“니들한텐 인권도 없냐!”
그대로 루시엘이 결사반대! 인권보장을 외치며 발터를 노려보았다.
하나 그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니.
발터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엘프가 인권을 개뿔. 애초에 노예한테 그딴 게 어디 있습니까?”
“어? 엘프차별발언?”
“지랄. 귀쟁이 새끼가 쌧바닥이 길어!”
발터가 처억, 중지를 치켜들며 말했다.
그리고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레닌.
언제나 그렇듯 항상 있는 WWE였다.
하여간 두 분 사이가 참 좋다니까.
레닌이 그리 생각하며 평온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대략 20분 정도 지났을까.
“미리 말한다. 현장직은 절대 안한다.”
“......”
“이번에는 나도 양보 못해.”
루시엘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아무리 슬슬 봄이라고 북부는 북부.
추운 날씨에 삽질을 하려니 이젠 뼈마디가 시큰거린다.
그만큼 이번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현장직은 무조건 피하리.
루시엘이 두 눈을 부릅떴다.
이에 발터가 싱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거라면 걱정 마십쇼. 이번에는 그런 거 아닙니다.”
“......뭐?”
그 말에 루시엘이 미간을 좁혔다.
이상하다. 이 새끼가 이럴 리가 없는데.
그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용건이 뭔데.”
“아, 별거 아닙니다. 안 그래도 루시엘님에게 신세진 것도 많지 않습니까.”
“......”
그대로 루시엘이 흐음, 발터를 바라보았다.
아예 양심이 없진 않군.
그와 함께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
“흥. 그래. 네놈도 알긴 아는구나.”
“물론이죠.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이번에 그 은혜도 갚을 겸.”
“갚을 겸?”
동시에 발터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루시엘님의 고향에 방문하려 합니다.”
“......잠깐, 뭐?”
제 고향. 그러니까 엘프들의 땅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자 루시엘이 피식,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향은 무슨. 내가 고향땅을 떠난 지 몇 년이나 지난줄 아느냐?”
“......”
“그리고 엘프들의 땅이라는 게 그리 쉽게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대로 루시엘이 택도 없다는 듯. 혀를 찼다.
엘프들에게 존재하는 암묵적인 룰.
그들은 제 생명의 은인 급이 아닌 이상은 절대 다른 종족을 땅에 들이지 않는다.
이는 엘프들의 맹약이자, 약속.
제 아무리 그가 지금은 북부의 노예신세라 해도.
그 긍지만큼은 여전했다.
“그러니 유감스럽지만 포기해라. 애송이. 네놈이 무슨 짓을 해도 이 루시엘 프레지아가 감히 입을 열 거 같......”
“예, 그럴 줄 알고 준비했습니다.”
동시에 발터가 그의 말을 자르며 품속에서 서신을 하나 꺼내 들이밀었다.
꽤나 오랫동안 보관한 것으로 보이는 서신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태가 온전했으니, 그가 얼마나 소중히 보관했는지 알 법했다.
-처억...
무엇보다 그런 서신의 겉에는 익숙한 문양이 새겨져있었으니.
이는 다름 아닌 레비오르 가의 문양.
그리고 그 아래, 새겨진 필기체.
<친애하는 나의 벗, 루시엘에게.>
이에 흠칫, 루시엘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대로 그가 한참동안 서신을 바라보았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루시엘이 나지막이 입을 떼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불렀군.”
“무슨 서신인지 확인 안 해보셔도 되겠습니까?”
“됐다. 안 봐도 뻔하니.”
곧이어 루시엘이 쯧, 혀를 차며 다시 서신을 들이밀었다.
낡은 서신, 레비오르의 문양.
거기다 제 자신을 벗이라 부르는 자는 단 한 사람뿐이지 않는가.
“......다비드의 편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었느냐.”
그의 이름은 다비드 레비오르.
발터의 아버지임과 동시에.
루시엘,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57화 엘프들의 땅(1)
잿빛 성의 집무실.
발터의 이야기를 들은 루시엘이 제 턱을 매만졌다.
그러니까 전부 북부에서 약초를 재배하기 위함이라 했던가.
“하여간 일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군.”
루시엘이 발터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세계수의 가지라면 제 아무리 척박한 북부라도 약초를 재배하게끔 만들 수 있었다.
애초에 세계수 자체가 어디든 엘프들의 터전을 만들기 위함이지 않는가.
아마 그 힘만 빌려올 수 있다면, 약초는 물론이며 다른 작물 또한 심을 수 있을 터.
하여간 노스메디부터 마광석 개발, 와이번과 노스스파까지.
가히 북부와 관련된 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머리가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방금 전 발터가 내민 서신.
이는 그의 아버지이자, 전대 북부대공 다비드 레비오르의 서신이 아닌가.
그리고 그 내용은 안 봐도 뻔했다.
보나마나 제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겠지.
루시엘이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루시엘, 내 아들을 잘 부탁하네.
다비드가 항상 말버릇처럼 하고 다니던 말이었다.
물론 충분히 이해는 갔다.
당시의 북부는 척박하고, 아무것도 없었다.
최후의 땅, 혹은 겨울의 저주를 받은 땅.
이것이 북부의 별명이었다.
그 와중에 다비드는 지병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니.
물려줄 수 있는 거라고는 빚더미와 레비오르라는 이름 뿐.
제 아들이, 더 나아가 북부가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그때마다 그는 제 자신을 원망하며, 자책하곤 했다.
그리하여 제 아들만큼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그 말미에 전한 말은 고작 그 뿐이었다.
심지어는 죽는 그 순간마저도.
-꾸국......
이에 루시엘이 미간을 좁히며 제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다비드 레비오르.
북부로 끌려와 꼼짝없이 죽을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
동시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귄 유일한 인간 친우.
하나 그 끝에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허망하게 보내줘야 했으니.
루시엘, 그에게는 아직 그 빚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있다면, 이는 분명 지금이었다.
아마 발터, 저 녀석도 진즉에 알고 있었다.
제 아비의 부탁이라면 도저히 거절 할 수 없음을.
“......알았다. 엘프의 땅의 위치를 알려주마.”
그대로 루시엘이 발터를 향해 말했다.
하여간 처음 마을을 벗어난 후.
두 번 다시는 돌아갈 일이 없을 줄 알았더니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
루시엘이 제 머리칼을 긁적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에 발터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싱긋 웃었다.
“감사합니다. 루시엘님.”
그와 함께 루시엘이 하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가 알려주는 건 어디까지나 엘프의 마을까지 가는 길 뿐이다. 괜찮겠느냐?”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대로 발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집무실의 조명 아래를 따라.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
그 후로 2주 정도가 지난 지금.
잿빛 성의 입구 앞.
그곳에는 발터를 비롯한 레닌과 루시엘이 페라리에 짐을 올리고 있었다.
[크르륵......]
무엇보다 그런 페라리 옆에는 은근한 푸른빛을 띠는 와이번을 포함하여 총 두 마리의 와이번이 자리하고 있었다.
녀석들은 현재 북부의 와이번 중 페라리를 포함하여 특히 비행훈련이 잘 된 개체로.
순서대로 부가티와 람보르기니였다.
그대로 발터가 철컥, 부가티의 입에 재갈을 물리며 마저 남은 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일전에 용아병 시연 때 봤던 완드와 더불어 둥근 물체가 여럿 담겨있었으니.
이는 바로 골렘의 핵으로 에드워드의 작품이었다.
‘......설마하니 진짜 2주안에 만들어낼 줄이야.’
역시 천재는 천재가 분명했다.
발터가 둥근 골렘의 핵을 매만지며 피식 웃었다.
듣자하니 사용할 때는 그냥 바닥에 던지면 된다고 했던가.
-그럼 알아서 흙과 결합하여 형체를 갖출 겁니다.
-모쪼록 대공님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발터가 골렘의 핵을 건네주던 에드워드의 말을 떠올렸다.
하여간 그 와중에도 꼭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온갖 물건을 건네주니.
그 모습이 여간 기특한 게 아니었다.
그와 함께 머지않아.
“어찌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폰이 람보르기니를 끌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름 아닌 잿빛 머리칼의 소녀, 리버가 있었다.
그런 그녀는 빨간 리본으로 머리를 내려묶은 채, 제 목도리를 꼬옥 쥐고 있었다.
이에 폰이 리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짐은 다 챙겼느냐.”
“네, 말씀하신대로 전날에 다 챙겨뒀어요.”
“그래그래. 잘했구나. 이건 가는 길에 먹거라.”
그대로 폰이 제 품속에서 사탕을 꺼내 그녀의 주머니에 넣어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양손을 모으며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폰 할아버지.”
그 모습에 폰이 리버가 여간 귀엽지 않은지.
그녀의 잿빛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허허, 그래. 그럼 대공님 말 잘 들어야한다.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리버가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시피 이번 원정에는 리버도 같이 데려갈 예정.
그 이유는 간단했다.
엘프들의 땅이라면 알케인의 무덤보다 훨씬 마나가 풍부할 테니, 이 기회에 그녀의 감응도를 좀 더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그녀를 부르며 손을 뻗었다.
“......리버.”
그런 발터의 부름에 리버가 쪼르르 달려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다.
이에 발터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목도리를 여몄다.
“비행 중에는 꽤 추울 테니 조심하거라.”
그런 발터의 손길에 리버가 작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생긋 웃으며 발터를 향해 대답했다.
“......네!”
곧이어 발터가 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그간 북부를 잘 부탁하네. 폰.”
폰은 발터가 자리를 비울 동안.
노스스파나 알케인의 무덤을 비롯한 북부의 운영을 담당할 예정이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맡길만한 자는 그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괜히 평안한 노후에 방해가 된 게 아닌가 싶군.”
발터가 장난스럽게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자 폰 역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노후는 반쯤 포기했습니다.
“이리 된 거 대공님 대신 열심히 관리해보겠습니다.”
“그래. 내 믿고 맡기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이에 폰이 처억,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와 함께 그가 발터의 뒤에 있던 루시엘을 향해 말했다.
“모쪼록 루시엘님도 조심히 다녀오십쇼.”
둘은 발터의 아버지 때부터 함께 북부에 있었으니.
그간 알게 모르게 안면을 트며 꽤나 친해진 사이.
그만큼 루시엘이 손을 휘휘 저으며 작게 웃었다.
“그려. 금방 돌아올게다.”
그대로 폰과 짧은 인사를 마친 루시엘이 등을 돌렸다.
그렇다면 이제 북부를 떠날 차례.
동시에 그가 발터를 향해 외쳤다.
“자, 그럼 전부 끝났으면 이제 슬슬...!”
아니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발터의 바로 뒤에는 웬 잿빛 머리칼의 소녀가 삐죽 고개를 내밀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
루시엘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레닌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프라는 종족입니다. 뾰족한 귀가 특징이지요.”
“와아......”
그런 레닌의 설명에 리브가 눈을 반짝이며 작게 감탄했다.
하긴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엘프가 아닌가.
그와 함께 발터가 한마디 거들었다.
“하나 생긴 것과 달리 괴팍한 성격이니 조심하거라.”
“......네!”
이에 루시엘이 떨떠름한 눈으로 발터를 째려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루시엘이 흐음,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제 턱을 매만지며 물었다.
“......딸?”
루시엘이 발터와 레닌가 더불어 그 옆에 있는 리브를 번갈아보았다.
영 둘을 닮지는 않았는데.
그대로 정적이 흐르는 입구.
“......”
“......”
곧이어 쯧, 발터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영감 노망났으면 곱게 뒤지쇼.”
이 양반이 멀쩡한 사람을 유부남으로 만드네.
그러자 루시엘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면 아닌 거지. 거 참.”
“마을까지 가는 길은 정확히 기억하고계쇼?”
노망난 꼬라지를 보니 영 못미더운데.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이에 루시엘이 발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꾸 그러면 그냥 아무 숲에나 떨궈버리는 수가 있어.”
“자신 있으면 해보쇼. 아버지께서 참 좋아하시겠습니다.”
“......”
그대로 루시엘이 와락 미간을 구겼다.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루시엘이 중얼거리며 와이번 위에 올라탔다.
“거 출발하기나 해라!”
“예예, 안 그래도 그럴 겁니다.”
그런 루시엘의 외침에 발터가 히죽 웃으며 페라리의 목줄을 잡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가 이럇, 목줄을 잡고 끌어당기기 무섭게.
-펄럭...!
페라리를 선두로 나머지 부가티와 람보르기니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오르니.
그런 그들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엘프의 땅.
지금껏 대륙에서 공개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북부의 애쉬폴 산맥을 넘어, 점차 주변의 풍경이 변해갔다.
무엇보다 어느새 발터의 발밑에는 그간 보던 설산대신.
-사아아...
울창한 삼림이 자리하고 있었다.
무려 와이번을 타고도 휴식을 반복하며, 한참동안이나 날아온 곳이었다.
그만큼 실로 인간의 손길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자연.
거기다 높이 치솟은 나무 위로는 짙은 안개가 껴있으니, 그 육안으로는 과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야말로 그 거리하며, 환경까지.
그동안 어째서 엘프들의 영역이 공개되지 않았는지 납득이가는 지형이었다.
당장 발터일행조차 루시엘이라는 길잡이와 와이번이라는 비행수단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그 근처에 접근하는 거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의 페라리 바로 옆에 있던 루시엘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천천히 속도를 낮추라는 손짓이었다.
-스으으...
곧이어 발터를 비롯한 일행이 점차 속도를 낮춘 그 순간이었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저 멀리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그 모습에 발터가 미간을 좁혔다.
“......!”
그 정체는 비유그대로 하늘을 덮고도 남는 크기의 나무였다.
얼마나 큰지 순간 그 크기에 압도될 정도.
이에 모두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게 바로 세계수라는 것을.
하나 그도 잠시.
루시엘이 미간을 구기며 세계수 주변을 지켜보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세계수의 바로 아래였다.
그러자 그곳에서는 검은 연기인지 안개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형상이 쉴 새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덕분에 그 주변 초목들은 파릇파릇한 다른 쪽과는 달리.
누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당장 말라비틀어진 가지들이 그 증거.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세계수의 반대편.
울창한 나무에 가려진 구조물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니.
저곳이 바로 엘프들의 마을.
곧바로 레닌이 발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대공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루시엘의 설명에 따르면 엘프들의 마을에 들어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그 첫 번째는 정식으로 초대를 받고 들어가는 경우.
그게 아니면 두 번째, 마을 주변을 순찰하는 엘프 경비대에게 신원을 밝히고 같이 들어가는 경우.
그리고 발터일행의 경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북부식’ 방법을 택했으니.
그대로 발터가 품속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며 히죽 웃었다.
“꼬라박아.”
58화 엘프들의 땅(2)
세계수의 영역 근처에 위치한 엘프들의 마을.
그곳에는 이미 경비대를 포함한 여러 엘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화살과 창을 비롯한 무기들이 들려있었으니.
“경비대는 주민들의 대피를 우선으로 하라!”
경비대의 대장으로 추정되는 엘프가 다른 이들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건물 너머, 마을의 나무가 쓰러지며 커다란 흉성이 들려왔다.
[쿠워어어엉!!]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블랙 베어 무리.
세계수의 숲에 서식하는 마수 중 하나였다.
이에 경비대 대장, 에란텔이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좌측에 블랙 베어 무리 출현! 경비대들은 당장 전투에 돌입하라!”
물론 블랙 베어가 엘프들을 습격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이처럼 다수의 녀석들이 대놓고 마을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벌어졌다면 이는 필시 숲의 생태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
이를 증명하듯, 마을을 습격한 블랙 베어들은 하나같이 눈이 뒤집혀있었다.
거기다 몇몇 녀석들은 살이 썩어문드러져 뼈까지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 모습이 한 눈에 봐도 정상은 아니었다.
“제길......”
그와 함께 경비대 대장이 미간을 구기며 제 입술을 씹었다.
보다시피 최근 들어 마수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빈도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당연히 세달 전, 세계수 근처의 검은 안개가 원인일 터.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그저 검은 안개가 세계수와 더불어 주변의 숲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
처음에는 일부지역에만 불과하던 안개는 어느새 그 영역을 넓혀 주변의 마수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번의 블랙 베어또한 자신들의 서식지가 독에 당해 여기까지 밀려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곧이어 머지않아.
블랙 베어 한 마리가 흉성을 내지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워어어엉!!]
이에 에란텔이 끼긱, 황급히 활시위를 당기며 몸을 틀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의 화살 끝에는 날카로운 바람이 맺혀있었으니.
동시에 그가 활시위를 놓기 무섭게.
-쐐액...퍼어억!
쏘아진 화살이 정확히 블랙 베어의 미간을 꿰뚫었다.
엘프들의 주특기인 정령술과 궁술을 접합시킨 기술이었다.
하나 그때였다.
-쿵쿵...!
나무에 가려 미처 발견하지 못한 한 마리가 냅다 그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제기랄...!”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공격을 허용할 위기.
제 아무리 빨리 몸을 튼다 해도 팔 한쪽 정도는 못쓸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액!
돌연 저 위에서 하얀 물체가 바람을 가르고 쏘아졌다.
그리고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와이번.
“......!”
이에 에란텔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치켜들기 무섭게.
와이번에서 검은 모피 코트를 걸친 거구의 남성이 뛰어내렸으니.
그 모습에 에란텔이 흠칫거리며 미간을 구겼다.
“......이, 인간?!”
인간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하나 그 의문이 끝나기도 전.
그대로 쩌억! 거구의 남성이 블랙 베어의 골통을 박살내며 착지했다.
-쿠웅...!
그 정체는 바로 발터.
곧이어 그가 처억, 선글라스를 올려 쓰며 히죽 웃었다.
나 강림. 멋있음, 확정.
하지만 그때였다.
그의 뒤에서 블랙 베어 한 마리가 튀어나와 달려들었다.
이에 에란텔이 황급히 그를 향해 외쳤다.
“뒤, 뒤를 조심.....!”
그와 함께 블랙 베어가 제 육중한 팔을 휘둘렀다.
블랙 베어, 곰이라는 그 이름만큼이나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는 마수로.
그 공격에 직격으로 맞으면 사지 하나는 날아갈 각오를 해야 했다.
이는 엘프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
그러나 블랙 베어의 팔이 그를 후려친 그 순간.
에란텔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다소 그의 상식과는 다른 모습이었으니.
-터억...콰앙!!
그대로 발터가 팔을 들어 블랙 베어의 공격을 막아냈다.
동시에 거구의 남성과 블랙 베어 사이로 커다란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 충격에 주변이 땅이 파이며 흙먼지가 일정도.
“......뭐, 뭣?!”
저걸 맨 손으로 막아내다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하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호오...?”
발터가 제 앞의 블랙 베어를 바라보며 제법 흥미로운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히죽 웃었다.
“그래. 원펀치 다이다이 함 까자고?”
안 그래도 그건 북부에 있을 때 많이 해봤지.
이에 본능적으로 위기를 감지한 블랙 베어가 움찔거렸다.
하나 이미 광기에 찬 황금색 눈동자가 정확히 녀석을 향해 있었으니.
“오케이. 그거 좋지.”
그대로 발터가 꾸국,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와 함께 그의 주먹을 따라 푸른 오러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동시에 그가 냅다 블랙 베어의 아구창을 후려갈기며 외쳤다.
“마! 니 좀 치나!”
-콰아아앙!!
그러자 우드득, 블랙 베어의 턱이 돌아가며 녀석이 저 멀리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에 에란텔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입을 쩍 벌리며 멍하니 그와 날아간 블랙 베어를 번갈아보았다.
“이, 이 무슨......”
저게 정녕 엘프, 아니 인간의 몸으로 가능한 일인가.
물론 엘프들은 기본적으로 몸집이 크지 않으니.
엘프 중에서 블랙 베어와 맨손으로 싸울 생각을 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이를 감안하여도 눈앞의 인간은 충분히 그 범주를 벗어난 듯했다.
그게 아니면 원래 인간들은 다 이 정도 하나?
발터를 바라보는 에란텔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도 잠시.
처억, 그가 쓰러진 에란텔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다친 곳은 없나.”
“......아, 예.”
에란텔이 엉겁결에 발터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 주변에는 이미 블랙 베어를 전부 정리한 듯.
나머지 경비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장님,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문제없다. 한데 그대들은......”
에란텔이 발터를 비롯하여, 경비병들 사이에 서있는 한 무리의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이만큼의 인간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펄럭...쿠웅!
발터의 뒤로 하나 둘씩 착지하는 와이번들.
이에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옳지. 와이번의 턱밑을 긁어주며 녀석들을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마을의 다른 엘프들 또한 신기한 듯 저마다 고개를 들이밀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긴 갑작스레 나타난 인간에다 와이번을 부리는 모습까지.
다들 저런 눈으로 보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확인할건 해야 했으니.
“우선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경비대의 대장으로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그대로 에란텔이 발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그건 내가 설명하지.”
곧이어 인간들 사이에서 푸른 머리칼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옆에는 길쭉한 귀가 솟아있었으니.
엘프임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였다.
무엇보다도 익숙하기 그지없는 얼굴.
그의 이름은 루시엘 프레지아.
오래 전, 마을을 떠난 엘프이자 괴짜 발명가가 아닌가.
“......루시엘님?”
이에 에란텔이 흠칫 제 귀를 쫑긋거렸다.
그러자 루시엘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오, 에란텔이냐? 간만이로군.”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 작던 꼬맹이 녀석이 벌써 이만큼 자랐을 줄이야.”
“그럼 뒤에 인간들은 루시엘님의?”
“그래. 내 생명의 은인이다.”
루시엘이 발터의 그 일행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 말에 에란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명의 은인을 마을에 초대하는 건 분명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있는 일.
“그럼 우선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대로 에란텔이 루시엘과 발터를 비롯한 일행들을 안내했다.
이에 루시엘이 물었다.
“한데 마을도 그렇고, 세계수도 평소와 다른 거 같던데 어찌 된 일이냐.”
“그건......”
그런 루시엘의 물음에 에란텔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도 잠시.
에란텔이 애써 굳은 표정을 숨기며 대답했다.
“가면서 설명 해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에란텔을 따라 도착한 곳은 엘프들의 마을 안쪽에 마련된 응접실.
그 내부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목재건물 특유의 따스함이 느껴졌다.
거기다 엘프족만의 고풍스러운 장식품까지.
-사아아...
그 신비스러운 분위기에 리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에란텔과 함께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은발의 머리칼.
무엇보다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검푸른 눈동자.
그런 그녀의 눈동자는 그 의중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찬란하였다.
“오랜만에 마을에 손님이 찾아오셨군요.”
그대로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
그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키는 묘한 마성이 느껴졌다.
“......!”
곧이어 세실리아가 발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아니 소드마스터인가요.”
눈앞의 그에게서는 특이한 기감이 느껴졌다.
분명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지만, 동시에 소드 마스터에게서만 느껴지는 기운을 품고 있기도 하였다.
“전자입니다. 아직은.”
발터가 대답했다.
실제로 발터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이었지만, 소드 마스터인 전유물인 오러 블레이드를 쓸 수도 있는 상태.
설마하니 잠깐 본 것만으로도 그 경지를 유추 해내다니.
보통 인물은 아닌듯했다.
그대로 그녀가 말했다.
“소개가 늦었군요. 제 이름은 세릴리아 레이츠. 세계수의 땅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녀는 세실리아 레이츠.
현재 엘프족을 이끄는 여왕이었다.
그와 함께 그녀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우선 다른 이들을 대표하여 마을을 도와주신 점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발터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세실리아가 작게 웃었다.
안 그래도 최근 마수들의 습격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
한데 이들이 도와준 덕에 아무런 피해 없이 무사히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 않는가.
곧이어 그녀가 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듣자하니 세계수의 가지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런 발터의 대답에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마을을 도와준 점은 진심으로 감사히 생각합니다. 하나 상황이 다소...좋지 못하군요.”
“그 말은......?”
그대로 세실리아가 대답했다.
“세계수의 가지를 넘겨드리고 싶어도 지금은 그럴 수 없습니다.”
“......검은 안개 때문입니까?”
“네, 정확합니다.”
동시에 발터가 응접실에 도착하기 전.
에란텔이 말해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세달 전, 세계수 근처에 생긴 정체불명의 검은 안개.
그 안개로 인해 주변의 숲이 오염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에 엘프들은 그들 나름대로 원인을 조사해보려 했으나, 그 주변의 독기가 너무 강한 탓에 쉬이 접근도 할 수 없는 상황.
오히려 독기로 인해 밀려난 마수들이 계속해서 마을을 습격하니.
이를 막는데도 바쁜 실정이었다.
그대로 세실리아가 말했다.
“사실 그와 관련하여 저희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벌써 검은 안개가 생긴 지 세달 째였다.
그리고 안개는 점차 그 영역을 키워가니 이대로 가다가는 마을마저도 독기의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한시라도 빨리 검은 안개를 없애야 하는 실정.
또한 이는 발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그 문제를 해결해야 세계수를 받든 말든 할 테니 말이다.
“그 원인에 관하여 짐작 가는 건 없습니까?”
“그게....짐작 가는 건 하나 있습니다. 엘프족에게 내려져오는 고대의 문헌. 그곳에 지금과 비슷한 기록은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을 다음과 같았다.
엘프족에 이어진 고대의 문헌에 따르면, 과거에도 한 번 지금과 같이 세계수 근처에 검은 안개가 낀 적이 존재했으니.
“그 이름은 밀레피르.”
고대 엘프어로 라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가 등장할 때면 그 주변에 항상 독기에 쌓인 검은 안개가 함께하니.
이로서 추측할 수 있는 건 밀레피르가 다시 등장했다는 것.
“그러하면 밀레피르에 대한 정보는 더 없었습니까? 예를 들면 그 약점이라던가.”
고대의 문헌에도 등장한 괴물.
무엇보다 그 기록이 남은 것은 물론이며, 지금까지 세계수가 존재하는 걸 보면 아예 불사의 존재는 아닐 터.
“확실히 밀레피르를 쓰러트린 기록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에 관한 약점은 적혀있지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괴물을 쓰러트린 영웅의 이름이 전부였습니다.”
곧이어 세실리아가 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이름은 레놀프 칸델라. 과거 드래곤을 죽인 영웅입니다. 그만큼 만약 말레피르의 약점이 있다면 그건 그의 창이겠죠.”
“......!”
동시에 발터가 미간을 좁혔다.
레놀프 칸델라.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알케인의 무덤에서 본 드래곤을 쓰러트릴 당시.
그가 왕궁보물고에서 가져온 창의 주인이었으니.
어쩌면 이거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군.
발터가 작게 조소하며 대답했다.
“이거 아무래도 제가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요.”
“네? 그게 무슨......”
“그 문제, 제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그대로 그가 세실리아를 바라보았으니.
발터의 눈동자를 따라 황금빛 이채가 맴돌았다.
59화 밀레피르 토벌(1)
그렇게 엘프마을의 응접실.
밀레피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준다니.
그런 발터의 말에 세실리아가 양 손을 모으며 물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동시에 발터가 레닌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레닌. 그걸 가져오도록.”
그러자 그녀가 하얀 천에 쌓인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바치니.
곧이어 스르륵, 발터가 줄곧 쌓여있던 하얀 천을 걷어냈다.
그와 함께 창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뭇가지를 깎아내 만든 창대.
그리고 길쭉한 창날에 새겨진 글자.
“이게 무엇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
발터의 말에 세실리아가 창날에 새겨진 글자를 살폈다.
어딘가 익숙한 문자.
그대로 세실리아가 흠칫거렸다.
이 문자는 고대엘프어가 아닌가.
동시에 머지않아.
창날에 새겨진 문장을 해석한 세실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태초에 생명을 품은 세계수가 존재했으니, 그 의지를 담아 악을 섬멸하리라.>
이는 바로 고대 하이엘프들의 전설 속에 계승되는 초대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엘프족의 용사 레놀프 칸델라의 창이 아닌가.
“당신이 이걸 어떻게....!”
세실리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른 이도 아닌 엘프들의 영웅의 창이 어찌 이 자에게 있단 말인가.
그런 세실리아의 반응에 발터가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캬! 설마하니 이게 이렇게 되네!’
처음에는 엘프마을에 간다하여 혹시 몰라 창을 챙겼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대충 회귀 전에도 엘프들이 그리 환장하며 들고 간 무기이니 이를 빌미로 뭐라도 더 뜯어볼까 싶었던 것.
그런데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갈 줄이야.
자, 그럼 이걸 어떻게 둘러대나.
사실대로 왕궁보물고에서 주워왔다 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그리고 머지않아.
그래. 그럼 되겠군.
그대로 발터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루시엘님의 도움이 컸습니다.”
“......?”
이에 발터의 옆에 있던 루시엘이 그를 바라보았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지?
하지만 그도 잠시.
“만약 루시엘님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뻔뻔하기 그지없는 발터의 물음.
이눔의 시키가 감히 날 팔아먹어?
루시엘이 움찔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을 열려는 찰나였다.
발터가 한 발 먼저 루시엘을 향해 대답하니.
그런 그의 입가에는 싱그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역시 아버지의 유일한 친우다우십니다.”
“너 이.....!”
그 말에 루시엘이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게 정말이십니까?!”
여태껏 본 적 없는 환한 표정으로 묻는 세실리아.
그만큼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가 밝게 반짝이고 있었으니.
그런 세실리아의 모습에 윽, 루시엘이 주춤거렸다.
그간 본적 없을 정도로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둘이 전에 알던 사이인가.
“......우, 운이 좋았다.”
곧이어 루시엘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덥썩, 루시엘의 손을 붙잡으며 싱긋 웃었다.
“역시 제 약혼자십니다!”
“......?”
그와 함께 멈칫, 잠시 발터의 몸이 멎었다.
그대로 그가 미간을 좁혔다.
잠깐. 뭐라고?
“......약혼자?”
이에 세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머, 루시엘님께서 말씀 안 해주셨나요?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는데. 아, 물론 다 옛날 이야기지만요.”
그녀가 옅게 웃으며 그리운 듯 중얼거렸다.
“그때는 루시엘님도 참 당차셨죠.”
“......”
“......”
그 말에 발터와 레닌이 일제히 시선을 교환하였다.
곧이어 끼기긱, 발터가 루시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뭔데. 당신 그 정도 급이었수?’
구태여 발터가 말하지 않아도 그 뜻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눈빛.
이에 루시엘이 쯧, 혀를 차며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젠장, 이래서 오기 싫었는데......”
그렇게 엘프들의 응접실을 따라.
루시엘의 중얼거림이 울려 퍼졌다.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이 흐르는 응접실.
발터가 루시엘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위대한 세계수의 일족을 뵙습니다.”
위대하신 세계수의 일족.
그러니까 하이엘프를 칭하는 말이었다.
이에 으득, 루시엘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하지 말라고 했다.”
“흐즈믈르그흣드~”
그러기 무섭게 발터가 비아냥거리며 이죽거리니.
결국 참다못한 루시엘이 팔을 치켜들며 외쳤다.
“이눔의 시키가 진짜!”
“허허, 체통을 지키시옵소서.”
그대로 발터가 피식 웃으며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대충 사정을 알았으니 고정하시옵소서.”
그러니까 루시엘과 세실리아의 말에 따르면.
과거 그는 흔히 고귀한 핏줄이라 불리는 하이엘프로.
어릴 적부터 그녀와 약혼이 내정되어 있었다 한다.
그러나 돌연 마을에서 떠난다는 결정을 내리니.
그의 말에 따르면 꼼짝없이 마을에 묶이는 게 싫어서 그랬단다.
무엇보다 옛부터 그의 관심사는 엘프마을 그 외부의 기술력.
“루시엘님께서는 그 전부터 외부의 기술을 들여와 엘프마을을 발전시키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외부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마을을 나섰던 것.
광산부터 건설까지.
루시엘이 유독 잡기술이 능한 건 그런 이유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귀족에게 재수 없게 걸려 북부로 끌려온 건 안타깝게 됐다.
‘......아마 사기 당해서 그리 됐다했나.’
발터가 알기로는 무도회장 건설의뢰를 받았다가, 돈을 받지 못해 깽판치면서 시위하다가 그 과정에서 벽돌로 귀족의 대가리를 깼다고 했던가.
다행히 귀족은 죽지는 않았으나, 그 죄로 루시엘은 모욕죄와 상해죄를 비롯한 온갖 죄를 덮어썼던 것.
“국가의 발전을 위해 제 발로 마을을 나오다니.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발터가 루시엘을 향해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미간을 와락 구겼다.
“너 말투 똑바로 안 해?”
“아유, 어찌 쇤네가 가암히 고귀한 세계수의 일족을 상대로 무례하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야. 창 줘봐. 확 찔러버리게.”
이에 루시엘이 레놀프의 창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니.
레닌이 그를 만류하는 척하며 말했다.
“어찌 고귀한 일족께서 성정이 이리 불같으십니까. 이래서는 성군이 되지 못하옵니다.”
“뒤진다. 진짜.”
“저런. 폭군이 따로 없으십니다.”
그 말에 발터가 이때다 싶어 끼어들었다.
“어허, 그러다 레닌에게 ‘혁명’ 당하십니다.”
발터와 레닌의 화려한 티키타카.
이에 루시엘이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래서 이놈들한테는 최대한 숨겼던 건데 하필 이렇게 되다니.
“사이가 좋아보여서 다행입니다.”
그대로 세실리아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에 루시엘이 뭐라 반박하려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아무튼 그래서 이제 어찌 할 셈이냐?”
루시엘이 발터를 흘깃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레놀프 칸델라의 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어쩌긴. 그 밀푀유인가 뭔가 하는 거 때려잡아야죠.”
그러니까 지금 세계수의 가지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게 전부 그 전설 속의 괴물 때문이 아닌가.
그럼 간단하다.
그 새끼만 존나 패면 되는 거지.
그대로 발터가 세실리아를 향해 말했다.
“만약 제가 밀레피르를 잡으면 세계수의 가지를 넘겨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그 말에 세실리아가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사실 다른 인간이라면 몰라도 루시엘님의 은인이라면 제게도 큰 은인. 거기다 밀레피르까지 처치해주신다면 못해드릴게 없지 않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필요한 게 있다면 더 드리겠습니다.”
이에 발터가 꿀이 떨어지는 눈빛으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온갖 장비를 만들어 주던 것부터 이제는 약혼자 덕택까지 받을 줄이야.
그대로 발터가 그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 또한 세계수의 일족의 은혜겠지요.”
“안 닥쳐?”
“고맙다고 해도 지랄이십니다. 하하.”
아무튼 그도 잠시.
세실리아가 발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혹 기간은 얼마정도로 잡고 준비하면 될까요. 그 전까지 필요한 게 있다면 최대한 마련해보겠습니다.”
아마 못해도 한 달 정도면 되려나.
세실리아가 속으로 준비기간을 가늠하였다.
당장 병력을 추리고, 전략을 짜는 시간을 고려하면 더 걸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때였다.
“좋습니다. 그럼 3일 뒤에 바로 출발하도록 하죠.”
“......네?”
그런 발터의 말에 세실리아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3일이라니.
너무 촉박한 시간이 아닌가.
하나 그녀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듯.
발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필요한 건 지형을 숙지하는 것 뿐. 그 외 나머지는 지금 당장도 가능할 겁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어차피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않습니까.”
그대로 발터가 창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니.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럼 3일 뒤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
그렇게 정확히 그가 말한 대로 3일이 지난 지금.
엘프들의 마을에는 에란텔을 비롯한 경비대가 제 무장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들의 앞에는 와이번 3마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순서대로 페라리와 부가티, 람보르기니였다.
곧이어 발터가 레닌에게 말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나.”
“예, 말씀하신대로 전부 챙겼습니다.”
이에 레닌이 와이번에 실은 짐들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지도.
그간 와이번을 타고 정찰하며 세계수 근처의 지형을 그린 지도였다.
“좋아. 그럼 출발하지.”
그대로 발터가 페라리 위에 올라탔다.
아니 올라타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그의 옷깃을 붙잡았으니.
“......대공님,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그 정체는 리버였다.
이에 발터가 멈칫, 와이번에 올라타려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리버는 어느새 가벼운 레더 아머와 단검, 망원경을 비롯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른 엘프들이 도와준 모양이었다.
그와 함께 엘프들의 여왕, 세실리아가 다가와 말했다.
“재능이 뛰어난 아이더군요. 척후병으로는 제 몫을 할 겁니다.”
세실리아가 리버를 흘깃 바라보았다.
불과 3일.
도움이 되고 싶다는 그녀의 요청으로 전투를 비롯한 간단한 훈련을 시킨 기간이었다.
하나 이게 무슨 일인지.
그녀는 가히 비약적인 성장속도를 자랑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탐색.
그녀는 본능적으로 마나를 감지하고 이를 알아차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얀 흉터의 아이들 중에서도 뛰어난 편입니다.”
하얀 흉터의 아이.
엘프들 사이에서 리버와 같은 아이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에 발터가 의외라는 듯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네. 훈련 중에 우연히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대로 스륵, 세실리아가 제 은빛 머리칼을 묶어 올렸다.
그와 함께 그녀의 목덜미 뒤를 따라 보이는 하얀 흉터.
리버만큼은 아니었지만, 꽤 선명한 모양이었다.
“저도 같은 부류니까요.”
세실리아가 싱긋 웃으며 리버를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하얀 흉터의 아이.
발터를 처음 봤을 때.한눈에 그의 경지를 유추할 수 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였다.
곧이어 세실리아가 말했다.
“아마 이번 실전이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혹 걱정이 되신다면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그녀 역시 뛰어난 마나 감응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이에 잠시 고민하던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차피 이번 공략에서 직접 전투에 나설 일은 드물었다.
그만큼 척후병 정도라면 문제없을 터.
오히려 세실리아의 말대로 좋은 경험이 될 터였다.
“......!”
그 말에 리버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조금이나마 발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리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신 다치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네...!”
그대로 리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니.
머지않아 엘프의 마을을 따라.
펄럭, 와이번 3마리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60화 밀레피르 토벌(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