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

60화 밀레피르 토벌(2)

“이쪽도 출발한다.”

“예, 대장님!”

그대로 와이번이 날아오르기 무섭게.

미리 대기하고 있던 에란텔을 비롯한 엘프병사들이 재빨리 나무사이를 뛰어올랐다.

-타앗!

그들의 목적지는 세계수 근처의 절벽.

좀 더 정확히는 밀레피르가 있는 곳이었다.

그와 함께 30분 정도 지났을까.

절벽에 도착한 발터가 저 멀리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커다란 세계수와 더불어 검은 안개가 가득 껴있는 숲이 있었으니.

그 아래를 따라 이미 블랙 베어를 포함한 마수들이 드글거리고 있었다.

저곳이 바로 목표지점.

그러나 저곳은 독기가 심해 쉬이 접근이 불가능하지 않은가.

“이쪽은 도착했습니다. 현재 상황은 어떻습니까?”

발터가 푸른 통신석을 들고 말했다.

현재 절벽에 있는 병력은 발터와 에란텔을 비롯한 엘프 병사들.

그리고 발터는 페라리를 타고 절벽에 도착하기 무섭게 다시 레닌을 돌려보냈으니.

숲 바로 위 상공에는 레닌과 세실리아, 리브가 와이번을 타고 대기하고 있었다.

곧이어 치이익, 발터의 통신석을 따라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해요. 독기가 너무 심해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고, 그 사이 움직이는 마수무리만 보입니다.]

그대로 세실리아가 물었다.

밀레피르를 잡기 위해서는 마수무리를 처리하는 게 우선.

[병사들을 보낼까요? 화살로 유인하고 조금씩 그 수를 줄이면 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뇨. 아무도 진입하지 않습니다.”

“네? 그게 무슨......”

“대신 다른 방법을 사용할 겁니다.”

아무도 진입하지 않는다니.

그럼 과연 어떻게 저 마수무리를 뚫어낸다는 말인가.

이에 발터가 말했다.

“레닌. 시작하도록.”

그대로 발터가 통신석에 대고 명령하자, 숲 위의 상공.

페라리에 타고 있던 레닌이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곧이어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페라리의 뒤에 실고 있던 짐을 내던졌다.

그 안에 담긴 건 본 드래곤의 이빨을 비롯한 뼈와 골렘의 핵.

거기다 온갖 병장기까지.

-쉬이잉...!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쿠구궁, 숲 아래를 따라 커다란 진동이 울리니.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건.

-처억!

용아병과 거대한 골렘 6체.

그 모습에 세실리아는 물론이며, 절벽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란텔과 엘프 병사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저, 저건.......”

“골렘? 아니 용아병까지!”

그런 그들의 반응에 발터가 히죽 웃었다.

애초에 독기가 문제라면 직접 들어가지 않으면 그만.

그대로 발터가 제 품속에서 완드를 꺼내며 작게 조소했다.

“쓸어버려.”

동시에 쿵쿵, 용아병과 골렘들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수들을 향해 돌격했으니.

미래에 연금술의 대가가 불리는 현자.

에드워드 아렌츠의 기술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마수들이 드글대는 검은 안개의 숲.

그 사이로 마수들의 흉성과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대로 오염된 마수들이 용아병과 골렘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려들었다.

하나 그 순간.

선방에 있던 골렘 2체가 양손을 망치처럼 움켜쥔 채.

있는 힘껏 내려쳤다.

-콰아아아앙!!

동시에 지축을 울리는 충격.

그와 함께 바닥이 움푹 파이며 달려들던 마수들이 머리통이 으깨졌다.

그마저도 살아남은 마수들은 지진을 연상케 하는 진동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리고 무장한 용아병들이 그 틈을 놓치지 않으니.

-타앗!

골렘의 뒤에 있던 용아병들이 재빠르게 튀어나와 돌격했다.

이어서 녀석들이 창을 내지르기 무섭게.

창날에 맺혀있는 오러가 가차 없이 마수들의 심장을 갈랐다.

-철컥...퍼억!

그 와중에서 블랙 베어 한 마리가 운 좋게 기습에 성공한 모양인지.

그가 휘두른 팔에 용아병의 머리가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그때였다.

-콰직!

용아병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창을 내질러 블랙 베어의 미간을 꿰뚫었다.

머리가 떨어진 채 창을 휘두르는 용아병.

그 모습이 마치 무덤가의 머리 없는 기사, 듀라한을 연상케 하였다.

-후두둑...!

그대로 머리 없는 용아병이 창끝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바닥에 떨어진 제 머리를 들어 다시 끼웠다.

곧이어 뚜둑, 제 자리를 찾아가는 그의 머리.

애초에 용아병의 본질을 따지고 보면 스켈레톤.

그깟 머리 하나 떨어진다 한들.

다시 달면 그만이었다.

그렇다면 골렘은?

주변의 흙과 바위, 나무 따위를 둘러 육신을 갖춘 골렘은 거침이 없었다.

달려드는 녀석들이 있으면 밟고, 부수고 잡아 던진다.

고통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골렘은 그저 제 주인의 명령에 따라, 눈앞의 모든 건 박살낼 뿐.

그대로 골렘이 주먹을 내려찍었다.

-부웅...콰앙!

그러다 마수들의 공세에 당해 팔 다리 따위가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골렘은 핵을 파괴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재생하기 마련.

무엇보다 당장 그 주변은 제 아무리 독기에 썩어 문드러졌다 해도.

눈만 돌리면 보이는 게 흙이요, 바위였으니.

-콰드드드득...!

그 육체가 파괴되기 무섭게 다시 재생되었다.

독기의 제약도 없었다.

박살나도 다시 움직였다.

그 모습이 그야말로 불사의 군대 그 자체.

처음부터 그들의 상대가 목숨이 붙어있는 마수들인 것부터.

이는 발터에게 있어 절대 질 수 없는 유리한 전장이었다.

-쾅! 콰앙! 콰득...쿠웅! 챙! 서걱!

그대로 검은 안개 사이.

계속해서 전투음이 끊이지 않으니.

아슬아슬하게 독기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절벽 위.

상황을 지켜보며 대기하고 있던 엘프 병사들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상에......”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그들이 저마다 제 눈을 의심하며 미간을 좁혔다.

그간 독기가 너무 강해 그 안에 진입하는 것은커녕.

마을을 습격한 마수들을 막기에도 급급했던 그들이었다.

물론 그들이 약한 건 아니었다.

다만 독기로 인해 아예 진입할 수 없다는 크나큰 단점과 더불어 마을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싸워야한다는 리스크 때문에 그랬던 것.

한데 아무리 이런 제약을 가지고 있다 한들.

마을의 외부인인 불과한 인간이 이토록 압도적인 전투를 보여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는 하늘 위. 와이번을 타고 있는 세실리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이 무슨......”

세실리아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냈다.

그녀는 장수종인 엘프인 만큼.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다고 자부했건만 이는 그야말로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이게 정녕 제 수명의 반도 안 되는 인간들이 이륙해낸 문명이자, 기술인가.

그녀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어찌하여 루시엘이 그리 외부의 기술에 집착했는지 이해가 갈 법도 했다.

그러나 이건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들의 사회에서도 흔치 않은 기술력.

좀 더 정확히는 북부의 연금술사들만의 독보적인 기술력이었으나, 어차피 지금의 세실리아에게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도 없어보였다.

한편 발터가 있는 절벽 위.

발터가 처억, 발터가 완드를 제 어깨에 걸치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보아라. 니들이 딸깍 앞에서 뭘 할 수 있는데?’

백날 덤벼봐라.

딸깍 한 번이면 다 쓸어버리는데.

그러다 박살나면?

응, 딸깍하면 고쳐져.

발터가 탁탁, 완드로 제 어깨를 두드리며 히죽 웃었다.

하여간 처음 실전에 투입해본 용아병과 골렘.

그 위력은 상상이상이었다.

당장 지금도 그의 말을 증명하듯.

검은 안개 사이로 골렘과 용아병들이 거침없이 진격하는 게 육안으로 관찰될 정도가 아닌가.

이 정도 속도라면 아마 독 안개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밀레피르를 발견하는 것도 금방일터.

그렇다면 머지않아 발터, 그가 나설 차례.

그대로 뚜둑, 그가 어깨를 풀며 에란텔을 향해 말했다.

“그럼 이쪽도 이제 슬슬 준비하도록 하지.”

“예, 알겠습니다!”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부가티 위에 타고 있던 세실리아가 흠칫, 제 귀를 쫑긋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스으으...!

검은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너머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

그와 함께 리브 역시 뭔가 느낀 건지 작게 움찔거리며 말했다.

“세실리아님. 이건......”

“네, 맞습니다.”

이에 그녀와 리브가 시각을 포함한 모든 기감을 집중시켰다.

세실리아가 보지 못하는 부분은 리브가 채우고.

반대로 리브가 보지 못하는 부분은 세실리아가 채운다.

그대로 머지않아.

서로 양쪽으로 나눠 점차 구역을 좁혀가던 둘의 시선이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었으니.

세실리아가 제 앞에 앉아있는 리브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닌 언니! 3시 방향에 있는 바위를 기준으로 오른쪽이에요!”

곧바로 리브가 페라리를 타고 있는 레닌을 향해 외쳤다.

그런 그녀의 외침에 레닌이 재빨리 3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바위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린 때였다.

-스르륵...휙!

검은 안개 사이로 길쭉한 무언가가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그와 함께 레닌이 제 품속에서 익숙한 물건을 꺼내들었다.

-처억...!

그건 바로 제 주군이 건네준 유탄발사기였다.

그대로 철컥, 그녀가 신호탄을 장전하고 발사했다.

-퓽...퍼어엉!

곧이어 상공을 따라 쏘아진 신호탄이 터지며, 붉은 연기가 꼬리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이에 근처의 나무 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란텔이 재빨리 손을 올렸다.

“신호다! 전군, 유피오라를 준비하라!”

붉은 연기. 밀레피르가 있는 방향을 특정해냈다는 신호였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할 행동은 하나.

에란텔의 외침에 주변의 병사들이 무언가를 끌고 왔다.

-그그극...쿠웅!

그건 다름 아닌 활.

하나 그건 단순히 활이라고 보기에는 그 크기가 대궁(大弓), 아니 거궁(巨弓)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이것이 바로 엘프들의 대 괴수전용 병기 유피오라.

그야말로 최종병기 활이었다.

하나 그간 이를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우선 첫 번째, 밀레피르의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기 때문.

그리고 가장 큰 두 번째 이유.

바로 그동안 거궁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아서였다.

유피오라. 이는 고대 엘프의 전설부터 내려져오는 무기였다.

그러나 지금껏 유피오라를 사용한 엘프는 극소수였으니.

그 이유는 단순했다.

‘......저만한 거궁을 과연 누가 쏠 수 있겠는가.’

그 크기만 해도 2.5m가 훌쩍 넘어가는 크기였다.

덕분에 저만한 활을 쏘는 건 물론이며, 그 시위를 당기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비루한 근력의 엘프들은 차마 유피오라를 쓸 수 없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안 쓰는 게 아니라, 못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비로소 그 주인이 등장했으니.

그대로 발터가 선글라스를 쓰며 당당히 걸어 나왔다.

“가져와라.”

그 말에 주변의 병사들이 처억, 화살대신 길쭉한 창을 대령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레놀프 칸델라의 창.

이번에는 다른 화살대신 그의 창을 화살로 쓸 예정이었다.

“그럼 시작하지.”

그와 함께 발터가 유피오라의 시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흐읍, 그가 있는 힘껏 활시위를 당기기 무섭게.

그의 어깨와 팔뚝을 따라 야성적인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기긱...!

곧이어 터질 듯한 근육을 따라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그 모습에 주변의 엘프들이 흠칫거렸다.

“정말로 시위를 당기다니...!”

“......원래 인간들은 전부 저만한 근육을 가지는 겁니까?”

아니다. 절대 아니다.

누누이 말하지만 발터, 그가 누구인가.

성인식 이전에 180cm를 넘긴 축복받은 신체와 곰이랑 다이다이를 깔 정도의 근력의 소유자.

세간에서는 그를 무재의 재능을 타고난 자라 불렀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발터가 당당히 그 위용을 선보였다.

그 모습에 에란텔을 비롯한 엘프들이 작게 감탄하며 발터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거기다 선글라스 너머.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목표를 주시하는 그의 황금색 눈동자는 어떠한가.

멋지다. 이 남자.

본디 사람들은 본인이 가지지 못하는 것을 갈망하는 바.

그건 엘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에 감탄하던 것도 잠시.

“유피오라 장전완료!”

에란텔이 정신을 차리며 외쳤다.

유피오라는 장전완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으니.

“정령사 부대!”

그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엘프 정령사들을 불렀다.

그러자 이미 그들의 주변에는 독수리 형상을 한 반투명한 존재가 일렁였다.

녀석들의 이름은 실레스틴.

바람의 정령 중 상급에 해당하는 정령이었다.

그대로 실레스틴들이 발터와 유피오라의 주변을 맴돌았다.

인간이라면 상급 정령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울 사실이었으나, 무려 그런 정령이 수십 마리에 다다르니.

그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

곧이어 발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쏘겠네.”

동시에 발터가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은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마치 대포 또는 미사일 따위가 쏘아지듯.

커다란 풍압이 일며 유피오라에 걸린 창이 쏘아졌다.

-쐐애애애액!!

61화 밀레피르 토벌(3)(여기까지 무료입니다)

그대로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가는 금색의 화살.

하나 그 경로가 레닌이 신호탄을 쏜 곳과 달랐다.

이에 상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버가 황급히 세실리아를 바라보았다.

“화살이 빗나갔어요!”

하지만 그때였다.

세실리아는 당황하기는커녕.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리버 양. 저희 엘프들의 화살은 절대 빗나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그게 무슨......”

“그건 바로 바람이 저희를 인도해주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 화살의 주위로 실레스틴 수십 마리가 날개를 펼치며 폭풍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돌연 화살의 궤적이 바뀌었다.

아니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앞의 나무를 비롯한 온갖 장애물을 피해가며 날아가는 화살.

마치 화살 자체에 의지가 있는 듯하였다.

“이게 바로 폭풍의 인도.”

“......!”

“저희 엘프들의 궁술입니다.”

폭풍의 인도. 엘프족의 특기인 정령술을 결합한 궁술로.

빽빽한 숲 사이에서도 목표물을 정확히 명중시키기 위해 발전시킨 엘프들만의 독보적인 기술이었다.

그만큼 목표의 위치만 포착되면 100%의 명중률을 자랑하는 극강의 정확도를 가진 화살.

머지않아 말 그대로 폭풍의 인도를 받아 쏘아진 창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목표물을 쫒아갔다.

그야말로 중세식 열 추적 미사일.

덕분에 발터는 말 그대로 유피오라는 ‘쏘기만’하면 끝이었다.

왜? 어차피 남은 궤적인 바람의 정령들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그대로 발터가 히죽 웃으며 날아가는 화살, 아니 레놀프 칸델라의 창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그런 창끝에는 본 드래곤을 쓰러트렸을 때와 같이.

악한 것을 멸하고 정화시키는 파마의 기운이 깃들어있었다.

-쐐애애액...퍼어억!!

그리고 마침내 유피오라가 목표물에 적중했다.

이어서 화살에 맺혀있던 폭풍이 주변의 검은 안개를 전부 날려버리니.

화살이 명중하기 무섭게 귀가 찢어질 듯한 불쾌한 비명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끼에에에엑!!]

그대로 줄곧 검은 안개 사이 모습을 숨기고 있던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 몸에 검은 점액을 뒤집어쓴 거 같은 늑대.

하나 그 크기는 가히 6m에 육박할 정도로 커다랬다.

-쉭! 쉬익! 휘릭...촤악!

게다가 그 몸 곳곳에 길게 뻗어있는 검은 촉수와 6개의 발.

“......!”

이에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발터를 비롯한 다른 엘프들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바로 세계수를 탐하는 자, 밀레피르였다.

그렇게 정확히 그의 등에 박힌 레놀프 칸델라의 창.

[끄르르륵...끼에에엑!!]

이에 밀레피르가 끔찍한 흉성을 내지르며 검은 촉수로 창을 떼어내려 했다.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치이익...!

마치 알케인의 무덤에서 언데드들에게 성수를 뿌렸던 것처럼.

창끝에 맺혀있는 파마의 기운이 밀레피르의 몸을 태우고 있었다.

밀레피르는 독기를 뿜는 것부터 악한 성질을 품고 태어난 재앙이었으니, 세계수의 가지를 벼린 것도 모자라 파마의 기운이 깃든 창과는 완벽한 상극.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동시에 리버 뒤에 있던 세실리아가 제 손을 펼쳤다.

“이번엔 제 차례군요.”

무엇보다 그리 말하는 세실리아의 손에는 어느새 길쭉한 지팡이가 들려있었으니.

세실리아가 제 앞에 있는 리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리버 양. 똑똑히 보십쇼.”

“.....”

“이게 바로 하얀 흉터의 아이의 저력이니.”

그와 함께 세실리아가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쉴 새 없이 이어진 영창.

곧이어 그녀가 양 손으로 지팡이를 들고 외쳤다.

“천둥이여, 눈앞의 적에게 심판을 내리소서!”

5써클 전격계 마법, 라이트닝 저지먼트.

그대로 레놀프 칸델라의 창을 피뢰침 삼아.

밀레피르를 향해 거대한 천둥이 내려 꽂혔다.

-콰르르르릉!!

그 사이 밀레피르가 온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으나, 그 비명마저 천둥에 묻혀 들리지 않았음은 물론이오.

눈부신 전격이 숲을 가득 메웠으니.

가히 그 위력을 짐작케끔 하였다.

곧이어 키에에엑, 밀레피르가 필사적으로 촉수를 휘두르며 발버둥 치더니.

기어코 등에 있던 레놀프 칸델라의 창을 뽑아냈다.

-티딩...콰악!

그대로 날아간 레놀프 칸델라의 창이 바닥에 박혔다.

파마의 기운이 깃든 창을 쏘아내고, 그만큼의 전격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녀석은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전설 속의 괴물다운 끈질긴 생명력.

아마 직접 그 숨통을 끊어내지 않는 한.

녀석은 계속해서 세계수를 노릴 것이었다.

무엇보다 발터와 세실리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상.

발터가 마지막 공격을 준비하며 통신석을 들었다.

그에 따라 들려오는 세실리아의 목소리.

[준비되셨습니까?]

“물론입니다.”

발터가 저 멀리 있는 그녀와 시선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세실리아가 다시 마법을 캐스팅하였다.

방금 전 전격계 마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우우웅...!

이에 밀레피르의 머리 바로 위를 따라 그려지는 전이 마법진.

바로 텔레포트였다.

그리고 이동시킬 대상은 당연히.

“발터님!”

그와 함께 파아앗, 푸른빛을 뿜어내는 전이 마법진 사이.

-처억...

짙은 흑발과 검은 모피 코트를 걸친 발터가 등장하니.

그의 앞을 따라 비틀거리는 밀레피르가 보였다.

-푸스스...

그런 녀석의 주위로는 계속해서 검은 촉수가 움직이며, 사악한 독기가 흘러나왔다.

당장 밀레피르가 딛고 있는 숲의 초목들이 말라비틀어진 게 그 증거.

하나 그의 독기는 미처 발터에게까지 닿지 못했으니.

그 사이에 있는 레놀프 칸델라의 창 덕분이었다.

그대로 터업, 발터가 바닥에 박힌 레놀프 칸델라의 창을 뽑아들고 땅을 차며 도약했다.

-타앗!

곧이어 밀레피르의 누런 눈동자와 발터의 황금색 눈동자가 마주쳤다.

이에 발터가 창을 움켜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츠츠츳...콰아아아!!

그대로 창을 따라 솟아오르는 시리도록 하얀 오러 블레이드와 파마의 기운.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음을 자각한 밀레피르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발터가 한 발 더 빨랐으니.

퓻, 그의 신형이 검은 그림자처럼 쏘아지며 밀레피르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그와 함께 발터가 있는 힘껏 밀레피르의 머리통을 향해 내려치며 외쳤다.

“눈깔아. 이 새끼야!!”

어디 건방진 짐승새끼가 영장류랑 맞먹으려 들어.

동시에 콰직, 레놀프 칸델라의 창이 밀레피르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곧이어 울려 퍼지는 밀레피르의 흉성.

[끼에에에에엑!!]

그대로 으득, 발터가 이를 악물며 제 마나하트에 있는 마나를 끌어 올렸다.

여기서 확실히 끝을 낸다.

곧 이에 응하듯 그의 주변에 차가운 서리가 깔리며 차가운 공기가 숲을 감쌌다.

-사아아...!

레비오르의 비전식을 준비하는 증거였다.

그리고 발터가 더욱 더 깊이 창을 박아 넣은 그때.

순간 그를 감싸던 차가운 서리가 매섭게 몰아치며, 창끝에 있던 오러 블레이드가 폭발했다.

-쩌억...콰드드득!!!

그렇게 검은 안개의 숲 중앙.

사방으로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얼음가시가 찬란히 솟아올랐다.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방금 전까지 검은 안개가 껴있던 숲은 고요함만이 맴돌고 있었다.

밀레피르의 흉성도, 용아병와 골렘의 전투음도.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그대로 머지않아.

채앵, 얼음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곧이어 고요한 숲을 따라.

서리로 얼어붙은 풀들이 하나 둘씩 깨지며, 아스라한 한기가 숲을 메웠다.

그리고 그 서리의 근원지 중앙.

-스으으...

짙은 흑발과 황금색의 눈동자의 사내가 거친 숨을 뱉어냈다.

그에 따라 허공에 흩어지는 그의 따스한 숨.

발터였다.

그리고 그런 발터의 창끝을 따라 전설 속의 괴물, 밀레피르가 아가리를 벌린 채로 얼어붙어 있었으니.

마치 얼음으로 만든 조각상을 보는 듯하였다.

동시에 발터가 밀레피르의 머리에 박힌 창을 거두기 무섭게.

-끼긱...챙그랑!

얼어붙어 있던 밀레피르의 몸이 산산 조각난 채. 힘없이 부셔져 내렸다.

곧이어 나무가 가리고 있던 햇빛이 내리니.

부셔져 내린 얼음조각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처억...!

그렇게 나무 사이로 흩어지는 황금색 빛 무리 아래.

끝까지 서있는 것은 오직 발터, 그 하나뿐이었다.

그대로 그가 차가운 얼음조각을 밟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터님, 무사하십니까!”

동시에 하늘 위에서 레닌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주변으로 하얀 와이번을 비롯한 다른 와이번들이 착지하니.

세실리아와 레닌, 리버가 곧장 발터를 향해 달려왔다.

“대공님, 다친 곳은......”

그리고 머지않아.

밀레피르의 얼음조각을 밟고 서있는 발터를 발견한 순간.

리버가 하려던 말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

아니 비단 리버뿐만이 아니었다.

만약 다른 누구라 하여도.

눈앞에서 그를 목도했다면 쉬이 입을 열 수 없으리라.

그렇게 누군가는 그에게서 전설 속 영웅의 강림을.

누군가는 압도적인 위압을.

누군가는 말로 이룰 수 없는 경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 끝은 전부 똑같았으니.

레닌이 처억, 발터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였다.

“레닌 칼하트, 주군을 뵙습니다.”

이에 대공님을 뵙습니다.

레닌의 옆에 있던 리버 또한 언니를 따라해 인사했다.

그리고 마지막.

“저, 세실리아 레이츠. 엘프족의 여왕으로서, 모두를 대표하여 재앙을 쓰러트린 영웅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세실리아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니.

발터가 세계수를 탐하는 자, 밀레피르를 쓰러트렸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

그렇게 밀레피르 토벌전이 있고나서 보름 정도 지났을까.

그 사이, 세계수를 비롯한 주변의 숲들은 빠르게 제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 전에 보이던 검은 안개가 사라짐은 물론.

말라 죽은 초목들 또한 싱그러운 새싹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자라나고 있었다.

아마 이대로라면 세실리아의 말처럼.

오염의 근원인 밀레피르를 처리했으니, 숲은 이제 곧 세계수의 능력으로 완벽히 복원될 터였다.

그에 따라 마수들이 마을을 습격하는 일 또한 깔끔하게 사라진 결과.

엘프들의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당장 마을의 엘프들의 표정과 분위기가 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을의 감시탑 아래.

발터와 엘프 병사들이 한데 모여 한창 열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대로 엘프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근력운동은 주로 어떻게 하십니까?”

“좋은 질문이다.”

그러자 발터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선 본인이 들 수 있는 가장 최대무게로, 고강도 고반복의 운동을 하는 것이 필수다. 이를 총 4세트 씩 15회 반복한다. 특히 한 세트를 마칠 때 쉬지 않고 하는 걸 추천하지.”

“4세트씩...15회...!”

”하나 이 경우, 근육만 너무 과하게 나올 수도 있으니 중간 중간에 유산소와 더불어 유연성 운동을 겸하는 게 좋다.”

그런 발터의 말에 엘프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열심히 메모했다.

이는 벌써 일주일 째 이어져,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풍경.

보름 전, 그러니까 밀레피르 토벌 이후.

엘프 병사들이 발터에게 운동법에 대해 물어보며 시작된 수업이었다.

아무래도 발터가 유피오르의 활시위를 당기는 걸 보고 상당히 감명 받은 모양이었다.

곧바로 다른 엘프가 질문했다.

“그럼 혹시 식단은 어떻게 구성하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식단이라......”

그대로 발터가 흐음, 제 턱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간단하다. 2시 이후에는 탄수화물을 최대한 피하고, 하루가 끝날 때까지 2시간 간격으로 단백질과 야채를 챙겨먹거라.”

“다, 단백질이라면......육류 말씀입니까?”

이에 엘프가 난색을 표했다.

엘프족, 그들은 육류섭취를 잘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엘프족에 자리 잡은 전통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영양불균형이 초래하는 결과를 잘 알고 있기에.

육류를 아예 안 먹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몇몇 엘프들은 육류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최고의 단백질을 얻는 방법은 생선, 고기를 샐러드와 먹는 것이다.”

“......”

“본디 큰 근육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 더 큰 근육을 가지고 싶다면 많은 양의 프로틴을 두시간마다 챙겨먹어라. 이를 꾸준히 한다면 내 한 가지는 장담하지.”

그대로 발터가 호리호리한 엘프들의 몸을 가리키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들의 근육은 물론이고. 몸 또한 지금보다 훨씬 커질 것이다.”

실제로 이는 발터가 북부의 기사단에게도 추천하는 방법.

물론 그전에는 돈이 없어 고기를 잘 먹이지 못했다.

미안하다.

그래도 지금은 고기라면 충분히 먹일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야, 근육? 너두 만들 수 있어.

“오오.....!”

동시에 엘프 병사들 사이에서 작은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걸로 발터의 오늘자 수업은 종료.

그리고 마침 저 멀리서 경비대 대장, 에란텔이 다가왔다.

“아, 발터님. 여기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고 여왕님께서 준비됐다고 하십니다.”

그 말에 발터가 화색을 띄웠다.

아무래도 저번에 말한 준비가 모두 끝난 모양이었다.

이에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좋다. 안내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에란텔이 발터를 안내하며 앞장섰으니.

마침내 밀레피르를 쓰러트린 보상을 얻을 시간이었다.

62화 세계수의 일원

에란텔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저번의 응접실.

그 입구에는 이미 레닌과 리버가 서있었다.

아무래도 발터가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

그대로 발터를 발견한 리버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무엇보다 그런 그녀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으니.

“대공님을 뵙습니다.”

“그래.”

발터가 피식 웃으며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주었다.

“요새 훈련은 재밌느냐.”

밀레피르 토벌 이후.

최근 리브는 세실리아의 지도 아래 엘프 병사들과 여러 훈련을 받고 있었다.

당장 검술이나 궁술부터 그 자세.

심지어는 마법과 정령술을 물론이며.

마나감응에 대한 감각을 깨우치는 방법까지.

당장 그녀의 허리춤에 차고 있는 훈련용 검이 그 증거였다.

무엇보다 다른 엘프들에게 듣자하니 그 배움의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하지 않았던가.

하긴 무려 미래에 용사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만큼 그 재능만큼은 벌써부터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네, 다들 친절하게 알려주신 덕분에 차근차근 배우고 있어요.”

“잘했구나. 북부로 돌아가면 다들 놀라겠군.”

“헤헤......”

그 말에 리버가 멋쩍은 듯 웃으며 양 손을 모았다.

아무래도 아직은 칭찬이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곧이어 발터가 입구 앞에 대기하고 있던 레닌을 바라보았다.

“미안하군. 오래 기다렸나.”

이에 레닌이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시죠.”

“그러지.”

그대로 발터가 레닌과 리브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미 세실리아를 비롯한 루시엘이 앉아있었다.

그 모습에 발터가 둘을 바라보더니 어이쿠,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이거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게 아닌가 싶군.”

“어찌 자리라도 비켜드릴까요?”

동시에 레닌 역시 표정하나 변하지 않으며 뻔뻔하게 제 입을 가렸다.

하여간 이럴 때는 따로 말하지 않아도 죽이 척척 맞는 듀오였다.

그와 함께 세실리아가 싱긋 웃으며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어머, 루시엘님. 어쩌죠? 들켜버렸습니다.”

“......윽.”

이에 루시엘이 세실리아, 너마저. 라는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저 두 녀석에게 이런 거까지는 안 배워도 되는데.

나쁜 물이 들었어.

그가 그리 중얼거리며 휘휘 손을 저었다.

“헛소리 말고 앉기나 해라.”

“부끄러워하시기는.”

“조용.”

“예예.”

그대로 발터가 피식 웃으며 레닌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세실리아가 발터를 향해 인사했다.

“일족의 영웅님을 뵙습니다.”

일족의 영웅.

밀레피르 토벌 후 세실리아가 발터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때마다 발터는 부담스럽다며 거절했지만, 그녀의 뜻은 강경했다.

“평소 부르던 대로 부르셔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전부 사실인걸요?”

이에 루시엘이 꼬시다는 듯 발터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저저 노친네 봐라.

거 북부로 돌아가면 함 봅시다.

아무튼 그도 잠시.

발터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에란텔에게 듣기로는 준비가 다 끝났다던데 맞습니까?”

“네. 안 그래도 바로 보여드리려 했습니다.”

그대로 세실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을 향해 말했다.

“가져오도록.”

동시에 시종들이 하얀 천에 쌓인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 모습에 발터가 미간을 좁혔다.

세계수의 가지하나라기엔 그 크기나 너무 큰데.

곧이어 스르륵, 시종들이 하얀 천을 벗기자 보인 것은 세계수의 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하나가 아니라 한 아름이 담긴.

“......!”

그러자 루시엘은 물론이며 에란텔까지.

적잖이 놀란 듯 세실리아와 탁자 위의 세계수의 가지를 번갈아보았다.

그대로 세실리아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요청하신 세계수의 가지입니다.”

“......생각보다 많군요.”

“달랑 하나만 주면 정 없잖아요. 영웅님.”

세실리아가 뒤에 영웅님을 강조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그녀가 세계수의 가지, 아니 가지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전부 세계수에서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가지들로 준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최대한 파손도가 적고 색이 진한 것만 추렸습니다. 아마 이 정도면 가지가 부러지지 않는 한, 원하시는 효과는 충분히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허어, 루시엘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 준비했을 줄이야.

거기다 그녀의 말대로 세계수의 가지의 상태로 보아 전부 상급, 아니 최상급이었다.

이만한 양이면 제 아무리 척박한 북부라 한들.

발터가 원하는 대로 연금술에 필요한 약초를 심는 데는 충분했다.

아니 솔직히 다른 지역에서 나는 약초보다 훨씬 더 질 좋은 상품을 수확할 수 있을 터.

무려 세계수의 가지였다.

그만큼 세계수 그 본체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효과는 보장되었으니.

인간들의 땅에서 자라는 약초와는 그 품질부터 다를 게 분명했다.

‘......루시엘의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챙겨준 모양이군.’

그 모습에 발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무튼 세실리아, 그녀의 배포에 놀랐다.

기껏해야 세계수 가지 한 두개 정도 생각하고 왔건만 설마하니 한 다발을 준비할 줄이야.

아무래도 밀레피르 토벌로 인해 호감도 작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발터의 예상이 정확히 들어맞았음을 보여주듯.

세실리아가 발터를 향해 말했다.

“만약 발터님이 아니었다면 세계수를 지켜내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만큼 저희 엘프족은 전부 발터님에게 큰 빚을 진 셈이지요. 그러니 부디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세실리아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

엘프들에게 있어 세계수는 그들의 어머니이자,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하나 자칫하면 그러한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질 뻔했으니, 그녀가 발터를 일족의 영웅이라 부르는 것 또한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당장 다른 엘프들만 하더라도 그랬다.

그들은 처음에는 다른 엘프도 아니고, 인간에게 세계수를 넘긴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였다.

하나 그의 활약을 직접 보고, 들은 순간.

엘프들은 그를 단순한 인간이 아닌, 자신들의 은인으로 여겼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세실리아의 결정에 반대하는 엘프라고는 아무도 없는 게 그 증거였다.

“그리 말씀하신다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세실리아의 말에 발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와 함께 그그극. 시종들이 한 눈에 봐도 커다란 나무상자를 들고 오니.

그 모습이 마치 길쭉한 관을 연상케 하였다.

뭐지. 몇몇 나라에서는 직접 짠 관을 선물로 준다는데 진짜 그건가.

그리고 머지않아.

끼익, 관(?)이 열리고 그 안의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금색의 거궁, 유피오라.

밀레피트 토벌 당시 발터가 사용한 활이자, 고대 엘프족의 무기였다.

거기다 발리스타를 연상케 하는 금색의 화살까지.

그대로 세실리아가 유피오라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그간 전설로만 전해 들었을 뿐. 실제로 유피오라를 사용한 자는 발터님이 처음이었습니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적어도 그녀가 여왕의 자리를 내려올 때까지.

유피오라는 빛을 발하지 못했을 터.

이에 그녀를 포함한 엘프들은 긴 회의를 통해 비로소 결정을 내렸으니.

“그리하여 발터님만 괜찮다면 세계수의 가지와 더불어 유피오라를 선물 해드리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제게 말입니까?”

“예, 유피오라 또한 창고에 박혀있기보다는 그에 맞는 주인의 손에 있는 게 더 기뻐할 겁니다.”

세실리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유피오라는 그동안 아무도 쓸 수 없던 활.

하나 비로소 무기가 제 주인을 찾아갔으니, 차라리 발터에게 넘기는 게 유피오라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제 턱을 매만졌다.

‘......유피오라라.’

이는 분명 그가 직접 써본 만큼.

그 쓰임새는 충분할 터.

한데 세계수의 가지도 모자라, 이만한 걸 그냥 받아도 되는 건가.

발터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물론 날먹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러나 이대로 홀랑 받기에는 뭔가 아쉬운데.

그리고 잠시 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곧이어 발터가 세실리아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

“유피오라를 받는 대신.”

그대로 발터가 처억, 세실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엘프족과 북부 간 공식적인 교류를 요청합니다.”

엘프족과 북부 간의 공식적인 교류.

거기다 그 증거로 유피오라 정도면 꽤나 충분하지 않는가.

“......!”

그 말에 세실리아는 물론.

응접실에 있던 다른 엘프들까지.

일제히 뾰족한 귀를 세웠다.

“북부와의 교류라......”

세실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엘프족과 인간족의 교류.

그동안 마을에 찾아온 인간이 아예 없던 건 아니지만, 아예 공식적인 교류까지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

이에 은하수를 연상케 하는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프는 긴 세월 간 그들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던 종족이었다.

하나 이번 기회로 깨달았다.

지금 엘프족의 한계는 명확했다.

당장 두 번 다시 밀레피르가, 그게 아니면 다른 위기가 닥쳐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이번에는 발터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만약 그가 떠난 뒤에 비슷한 위기가 닥쳐온다면?

‘......지금의 엘프족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대로 꾸국, 세실리아가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부끄러운 소리지만 지금의 엘프족에게는 이만한 위기를 극복할 힘도, 기술도 없었다.

그렇기에 필요한 건.

‘외부의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

밀레피르 토벌 당시 용아병과 골렘의 활약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었다.

거기다 발터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만약 그 기술을 엘프족이 배울 수 있다면?

엘프족은 스스로를 지킬 힘을, 앞으로 더 나아갈 동력을 얻을 수 있었다.

곧이어 세실리아가 결심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게 발터가 내민 손을 잡았다.

-터업.

“저, 세실리아 레이츠. 엘프족을 대표하는 여왕으로서 이 자리에서 북부와 공식적인 교류를 받아들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았으니.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세실리아가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발터님.”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먼저 교류를 제안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리 화두를 꺼낸 것은 분명 발터, 그 나름대로의 배려일 터.

무력이나, 인품이나. 리더로서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저야말로 흔쾌히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발터가 가볍게 악수하며 대답했다.

동시에 그리 말하는 그의 손등에는 하얀 성흔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레놀프 칸델라의 문양이었다.

“......”

그 모습에 세실리아가 발터와 하얀 성흔을 번갈아보았다.

어쩌면 레놀프 칸델라의 창이 그에 손에 들어간 것도, 그런 그가 엘프 마을에 찾아온 것도.

전부 세계수의 뜻이 아니었을까.

“발터님, 잠시 손을 빌려도 되겠습니까.”

그대로 세실리아가 물었다.

곧이어 발터가 그녀의 검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친우의 맹세입니까.”

“역시. 이미 알고 계셨군요.”

친우의 맹세.

이는 엘프족을 대표하는 약속이자, 그를 인간이 아닌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의식이었다.

발터 역시 루시엘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스윽...

그와 함께 세실리아가 발터의 손등에 손을 포갰다.

그러자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지며, 그녀가 눈을 감고 영창을 했다.

이어서 금색의 입자가 발터의 손을 감쌌다.

-파앗...!

그 순간이었다.

발터의 손등을 따라, 레놀프의 성흔에 이어 금색의 문양이 겹쳐졌다.

커다란 금색의 나무.

세계수의 문양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 시간부로 발터가 엘프들과 같은 세계수의 일원이 되었음을 알리는 증거와도 같았으니.

세실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터의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처억...!

그대로 에란텔을 비롯한 다른 엘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분하지만 강단이 느껴지는 세실리아의 목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나, 세실리아 레이츠는 오늘 이 자리에서 위대한 영웅 레놀프 칸델라님의 후예인 발터 레비오르 경을 평생의 친우로 여길 것을 맹세하니. 이 시간부로 그는 단순히 마을의 손님이 아닌, 우리 세계수의 일원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그녀의 맹세에 다른 엘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여왕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엘프족과의 공식적인 교류 체결.

이는 온 대륙을 통틀어, 북부가 가장 먼저 따낸 기념비적인 업적이었으니.

그대로 엘프 마을의 응접실을 따라.

발터의 손등에 자리한 세계수의 문양이 환하게 빛났다.

63화 농사의 혁신

그렇게 세실리아와 공식적인 교류를 체결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북부로 돌아온 발터는 즉시 루시엘을 필두로 땅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우선 적당한 부지를 선정한 후.

일정면적마다 구역을 나누었다.

그리고 노스로드를 통해 들여온 여러 씨앗을 심고, 해당 구역에 세계수의 가지를 심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대부분 반신반의하는 눈빛이었다.

하긴 북부에 농사라니.

그간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시도할 필요도 없는 가능성 제로의 사업이었다.

그러나 엘프 마을 직송 세계수의 가지.

그 효력은 어마어마했으니.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씨앗을 심은 땅에 비로소 새싹들이 올라왔다.

평균적으로 약초의 종류에 따라 편차는 있으나, 새싹이 자라는 기간은 보통 2주 정도.

평균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거기다 그 땅이 남부나 다른 곳도 아닌 극한지 북부임을 고려하면 이는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대공님, 땅에 새싹이...!

-씨가 발아했습니다!

-씨발아, 아니 씨 발아입니다!

덕분에 북부의 약초 재배지를 따라.

한동안 씨 발아라는 외침이 끊이지 않았다.

아무튼 세계수의 가지의 효과는 제대로 입증했으니.

그 후로는 본격적으로 약초 재배를 시작할 차례.

그에 따라 북부에는 전례 없는 농사붐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잿빛 성의 집무실.

발터가 제 손등에 있는 문양을 바라보았다.

“세계수의 문양이라......”

기존에 있던 레놀프의 하얀 성흔과 더불어.

그 위에 새겨진 금색의 나무문양.

둘은 마치 처음부터 하나의 문양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동시에 이는 발터가 세계수의 일원이자, 엘프족과 공식적인 교류를 맺었다는 확실한 증거.

그대로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 손을 내렸다.

‘회귀 전, 왕국과 엘프족이 교류를 시작한 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미래의 일.’

이로 인해 왕국은 정령술과 궁술을 물론.

엘프들만의 기술과 함께 세계수를 연구하며 농업을 포함한 여러 분야에 있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지금. 왕국보다 몇 배나 앞서 북부가 엘프족과 교류를 맺었다면.

이는 후일 북부에게 있어 크나큰 발전을 가져올게 분명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간과 교류를 피하는 엘프들이 처음으로 외부와 체결한 교류였다.

그만큼 머지않아 세간의 관심도 북부로 쏠릴 테니.

어느 쪽이든 북부에게 있어서 득이 되는 일이었다.

이에 발터가 만족스러운 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현재 왕도는 물론이며, 대륙의 모든 곳을 통틀어 엘프와 교류를 시작한 지역은 북부가 처음.

차라리 이번 기회로 단순히 엘프 뿐만이 아니라, 아예 다른 종족과의 교류를 늘려보는 것도 고려해볼 법했다.

‘아무튼 이건 나중에 생각해볼 일이고.......’

지금 주목해야할 것은 당연히 북부의 약초재배지.

그와 함께 똑똑, 집무실을 따라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레닌이었다.

“발터님, 말씀하신대로 루시엘님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오도록.”

그대로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레닌과 루시엘.

곧이어 발터가 루시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

그 말에 루시엘이 어딘가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내가 분명히 말했지?”

그대로 루시엘이 하아, 한숨을 내쉬며 제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제발 삽질은 빼달라고.”

“허허.”

“근데 기어코 또 삽질을 시켜야만 속이 후련했냐!”

루시엘이 아련한 눈빛으로 외쳤다.

엘프 마을에서 들어온 이후.

바로 시작된 개간 작업.

그리고 개간 작업이라면 응당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삽질.

제 아무리 세계수의 가지를 심으면 끝난다 해도 기본적으로 땅을 갈아엎는 과정은 필수였다.

덕분에 루시엘은 이번에도 역시 삽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으니

그런 그의 목소리는 왠지 어딘가 슬프게 들리는 건 비단 착각이 아니니라.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엄살은 무슨. 거 정정하게 잘하시더만.”

발터가 얼마 전, 삽질을 하는 루시엘의 모습을 떠올렸다.

역시 삽질도 해본 놈이 잘한다고.

북부에서 오래 구른 만큼 그 각이 예술이었다.

-얌마! 딱딱! 이케 밟으라고!

-삽 머리가 안 들어가는데 어떻게 합니까?

-젊은 놈이 뭐 그리 비실비실해! 한 번에 팍 밟으라고!

당장 작업장에서 그의 삽질은 빛을 발했으니.

과연 진즉에 엘프 마을에서 나와 공사장에서 구른 짬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와 함께 루시엘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다음날에 몸져누웠다. 이놈아!”

그의 외침에 발터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럼 노스메디라도 하나 드립니까.”

“됐다. 아직 필요 없다.”

“호오, 그러십니까?”

발터가 히죽 웃으며 제 턱을 매만졌다.

“세실리아님께서도 좋아하실 텐데 말입니다.”

“......뭐 인마?”

“엘프 마을에서 떠나기 전. 기억 안 나십니까?”

그대로 루시엘이 흠칫거렸다.

그러니까 발터가 교류를 맺고 엘프 마을을 떠나기 직전.

세실리아가 발터일행을 배웅하며 그랬지 않는가.

-그럼 모두 조심히 돌아가시길.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여왕님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루시엘님?

세실리아가 돌연 루시엘을 부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머지않아.

그녀가 텅 비어있는 제 약지를 가리키며 싱긋 웃었다.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의미심장한 그녀의 짧은 한 마디.

하나 루시엘과 세실리아, 둘이 과거 약혼자 사이였던 걸 알고 있는 자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추측할 수 있었으니.

이에 당황한 루시엘이 애써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런 모습마저 하나의 묘미였지 않는가.

동시에 레닌이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며 말했다.

“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아, 물론 북부의 약초재배지 이야기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하여간 말이나 못하면.

루시엘이 쯧,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발터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그래서 약초재배는 어찌 되고 있습니까?”

발터가 루시엘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글쎄.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게 나을 테다.”

제법 자신만만한 모습.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그대로 발터를 비롯한 레닌과 루시엘이 집무실을 나서니.

그들이 향하는 곳은 북부의 약초재배지였다.

***

그렇게 잿빛 성에서 조금 떨어진 평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량하기 그지없던 설원은 어느새 그 주변에 울타리를 설치함은 물론.

연금술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북부의 새로운 약초재배지.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를 발견한 에드워드가 손을 흔들며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대공님! 오셨습니까?”

마치 잔뜩 신난 리트리버를 연상케 하는 모습.

곧이어 다른 연금술사들 역시 발터를 향해 인사했다.

““대공님을 뵙습니다.””

이에 발터가 에드워드와 악수를 주고받으며 말했다.

“저번에는 자네 덕에 일이 쉽게 풀렸어.”

밀레피르 토벌 당시.

용아병과 골렘의 활약을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기술력덕분에 토벌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지 않았는가.

그러자 에드워드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더욱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맙군.”

그와 함께 발터가 그의 뒤에 자리한 재배지를 흘깃 바라보았다.

북부의 첫 개간지.

그리고 그 중 단번에 발터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처억...!

그것은 바로 쭉 줄지어 서있는 하얀 구조물.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비닐하우스.

본격적으로 약초 재배를 시작하는 과정에서 발터가 아이디어를 내고 루시엘이 만든 것이었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가 비닐하우스와 발터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설마하니 정말로 세계수의 가지를 가져오심은 물론, 철제 프레임에 투명한 막을 씌워 인위적으로 온실 환경을 조성하고 유지하다니. 대단하십니다!”

에드워드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대륙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방식이었다.

한데 그 아이디어가 무려 발터의 머릿속에 나왔다니.

“다른 연금술사들도 대공님의 혜안에 감탄하고 있습니다.”

“과찬이로군.”

그와 함께 에드워드가 발터의 옆에 있던 루시엘을 향해서도 엄지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아, 물론 이걸 만든 루시엘님도 대단하십니다.”

“엣헴. 당연하지.”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루시엘까지 챙기다니.

에드워드. 여러모로 그 마음씨가 착한 녀석이었다.

“아무튼 그럼 오신 김에 약초도 보고 가시겠습니까. 대공님.”

“좋군. 안내하게.”

곧이어 발터가 에드워드를 따라 비닐하우스 내부로 들어왔다.

동시에 내부로 발을 내딛기 무섭게.

화악, 따스한 온기가 주변을 가득 감쌌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미 다른 연금술사들과 북부의 주민들이 약초를 가꾸고 있었다.

거기다 철제 프레임에 달린 자동급수기, 그러니까 스프링클러까지.

그 사이 촤촤촥,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며 물을 뿌리니, 그 너머로 작은 무지개가 보였다.

그야말로 중세에 재현된 완벽한 현대식 농법.

세계수의 가지로 기반을 다지고 비닐하우스로 추가적인 생산량 증대를 노린다.

그리고 그 둘이 합쳐진 결과.

단순히 플러스효과를 넘어서 그 배의 효과를 낳으니 정말이지 농사의 혁신이 따로 없었다.

당장 파릇파릇한 이파리와 곧게 뻗은 줄기가 그 증거.

어느새 꽤나 자란 약초들은 그 색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성장속도로 보나.

한 눈에 봐도 그 품질이 상당히 뛰어났다.

그 모습에 발터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속도라면 수입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안정적인 약물 생산이 가능 할 터.

그래, 이게 힐링이지.

“아따, 대공님 오셨어라?”

그와 함께 큰 덩치의 남성이 발터를 향해 달려왔다.

북부의 청년이장 발더스였다.

“그간 잘 지냈나?”

“두말하면 잔소리지라! 고새 이런 기깔난 아이디어까지 생각해내시다니. 여윾시 우리 대공님 잘난 건 알아줘야한당께, 아니 합니다!”

발더스가 크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평소에는 구수한 사투리가 입에 밴 그지만, 발터의 앞에서라면 항상 표준어로 말하려 노력하는 엿보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게 완벽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만의 예의를 차리는 법이자 노력이었다.

그리고 발터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는 만큼.

구태여 짚고 넘어가지 않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닐세. 다 자네들이 믿고 따라준 법이지.”

“대공님이라면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발터의 말에 발더스가 탕탕, 제 가슴팍을 치며 히죽 웃었다.

실제로 북부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발터가 얼마나 북부를 아끼고 사랑하는지.

거기다 광산개발부터 온천과 이제는 농사까지.

척박하기 없던 북부에 하나 둘씩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니.

북부의 모두가 그를 믿고 따름이 당연했다.

그리고 한창 발더스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의 뒤로 뭔가 살짝 튀어나왔다.

익숙한 잿빛 머리칼과 그 위에 보이는 빨간 리본.

“......리버?”

발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멈칫, 줄곧 흔들리던 잿빛 머리칼이 멈추며 붉은 눈동자의 소녀가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그녀 또한 비닐하우스의 약초 재배를 돕던 중인 모양이었다.

이에 발터가 리버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용건이라도 있느냐.”

그런 발터의 물음에 리버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네? 아뇨, 괜찮아요! 대공님께서 먼저 발더스 아저씨랑 이야기하고 계시니까 전 나중에......”

그 모습에 발터와 발더스가 작게 웃으며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대로 발더스가 먼저 물러나며 말했다.

“그럼 전 마저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그렇게 발더스가 떠난 자리.

발터가 한쪽 무릎을 꿇어 리버와 눈을 맞추니.

그가 이제 말해보라는 듯,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이거......”

곧이어 줄곧 양 손을 뒤로 숨기고 있던 리버가 천천히 손을 펼쳤다.

그러자 조막만한 그녀의 손 위에는 붉은 약초가 하나 들려있었다.

화염초. 말 그대로 화염의 기운을 품은 꽃으로 들고만 있어도 온기가 느껴지는 게 특징인 약초였다.

“에드워드 오빠한테 들었는데 추울 때 들고 있으면 도움이 된대요. 그러니까 대공님에게 꼭 전해주고 싶었어요.”

리버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저번 밀레피르 토벌 당시.

발터의 비기로 인해 생긴 얼음조각을 보고 하는 말 같았다.

“......”

이에 발터가 멍하니 리버가 내민 화염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고맙구나. 소중하게 보관하도록 하마.”

그대로 화염초를 따라, 따스한 온기가 피어나 그의 몸을 감쌌으니.

이는 비로소 척박한 북부에도 생명이 움트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64화 땅따먹기(1)

잿빛 성의 집무실.

그곳에는 언제나 그렇듯.

발터가 제 자리에 앉아 탁자에 쌓인 서신과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스윽...

그대로 발터가 가장 맨 위에 서신을 펼쳐보았다.

그 위의 문양을 보아하니 푸른 마탑에서 온 서신으로.

정기적인 노스메디의 생산 보고였다.

그리고 그 내용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노스메디 생산은 안정권에 접어들었으나, 계속해서 늘어나는 수요량에 추가 설비를 요청.’

이에 발터가 미간을 좁혔다.

하긴 노스메디 개발 이후, 그 대부분의 생산을 담당하는 건 푸른 마탑이었다.

거기다 앨리스를 필두로 한 왕도에서의 장사가 대박이 나면서 수요량이 천정부지로 솟아올랐으니.

제 아무리 고급화 전략을 유지한다 해도 노스메디를 원하는 귀족들의 러브콜은 끊이지 않았다.

물론 이는 그만큼 잘 팔린다는 사실이니 좋은 소식이었다.

하나 그만한 양을 전부 푸른 마탑에서 쳐내야하니.

이제 슬슬 선택의 기로가 찾아왔다.

‘......공장을 확장해야하나.’

발터가 쓰읍, 제 턱을 매만지며 서신을 바라보았다.

빽빽하게 보이는 라파엘의 장문의 호소.

대충 정리하면 제발 노스메디 제작 말고 다른 연구도 할 수 있게끔 봐달라는 소리였다.

그도 그럴게 푸른 마탑은 어디까지나 마탑.

뭐 지금은 거진 노스메디 공장으로 변한지 오래였으나, 그 본질은 마탑에 있었다.

거기다 루비아의 무기개발까지 병행하고 있으니.

그의 호소가 아예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오케이. 일단 확인.

그대로 발터가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번에는 어디보자...광산개발 쪽이군.’

마광석 광산.

현재 북부주민들의 밥벌이를 책임지는 산업이자, 교역 전반에 있어 활약하고 있는 분야였다.

즉, 노스메디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잘나가는 사업.

그리고 서류에 적힌 내용은 마광석의 보관과 이동에 관한 요청.

현재 창고로 쓰는 곳에 적재량이 슬슬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다고 한다.

‘......벌써 그렇게나 찼다고?’

발터가 툭툭, 제 펜을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아직 한계치에 다다를 정도는 아닐 텐데.

하나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으니.

“쯧.”

발터가 혀를 차며 서류를 살폈다.

가공과 유통의 문제였군.

그러니까 마광석 생산의 문제라기보다는 캐낸 마광석을 가공하고 유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였다.

왜? 가공하는 쪽도 푸른 마탑이거든.

그리고 앞서 말했듯 현재 푸른 마탑은 노스메디 생산으로 한창 바쁜 시기.

그렇다보니 마광석 가공이 늦춰진 모양이었다.

아마 여기서 더 굴렸다가는 그때부터 푸른 마탑은 블랙 기업으로 몰려, 검은 마탑으로 불릴 위기.

그래, 워라벨은 중요하지.

발터가 그리 중얼거리며 서류를 마저 확인했다.

유통부분도 비슷했다.

노스로드를 통해 이동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한 거까지는 좋았으나, 절대적인 인력이 모자랐다.

물론 24시간 와이번 풀 가동을 돌리면 불가능한건 아니었으나 그랬다가는 북부의 기사단은 물론이며, 와이번까지 몸져누울 판.

당장 회귀 전에 과로사로 죽은 게 발터, 그였다.

그만큼 기사단과 와이번까지 과로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무튼 정리하자면 지금 문제가 되는 건 결국 공장을 비롯한 창고부지 확장과 추가 인력.

인력이야 대충 왕도에서 끌어 쓴다하면.

‘......우선순위로 삼아야 할 건 땅덩어리구만.’

사실 그에 관해서는 발터 역시 예전부터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현재 북부의 주력 사업은 크게 4가지.

노스메디, 마광석, 노스스파, 연금술이었다.

그리고 현재 문제가 되는 분야가 노스메디와 마광석.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공장과 창고 부지를 확장해야했다.

거기다 발터의 계산대로라면 아마 연금술 또한 추가적으로 땅이 필요할 터.

그야 이제야 약초 재배에 박차를 가한 참이었다.

그럼 슬슬 물약공장도 만들어야 될 것이며, 후에 생산량이 늘어나면?

‘......추가적으로 재배지를 확장해야겠지.’

한편으로는 여기서 만족하고 확장을 멈추면 전부 해결될 문제 아니냐고 할 수도 있었다.

하나 그것만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북부를 키웠다는데 지금 만족하고 손 떼라고?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아직 배고프다.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꾸국...!

애초에 그의 최종목표는 북부를 최고의 땅으로 만드는 것.

당장 여기서 만족할거라면 시작하지도 않았다.

내 어떻게든 아득바득 긁어모아서 북부에서 호화로운 노후생활을 보내리.

발터가 굳게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그가 창밖에 보이는 애쉬폴 산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땅...땅이 필요하다...”

그것도 적당히 평평하고 적당히 넓은 땅이.

하나 공교롭게도 북부의 땅은 대부분 산지.

그나마 있는 평지마저도 재배지니 뭐니 거의 다 썼으니.

결국에는 밖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나마 가장 근처에 있는 게 바로.

“......야만족들의 땅.”

근데 그랬다가는 고 새끼들이 별 개지랄을 다 떨게 분명하니.

발터가 나지막이 읊조리며 한탄했다.

시팔. 중세나 현대나 결국 부동산 많은 놈이 잘나고 보는구나.

‘차라리 이럴 때 ‘그녀’라도 있었으면 교섭이라도 해볼 것을......’

아니면 그냥 이참에 확 쓸어버려?

안 그래도 야만족 이 새끼들 요새 뭐하고 사는지 각 한 번 보긴 해야 하는데 말이지.

발터가 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그때였다.

집무실을 따라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발터를 부르는 목소리.

“대공님, 잠시 접견을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폰.

북부의 기사단장이자, 와이번을 담당하는 자였다.

이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시간에 폰이 웬 일이지.

레닌이라면 몰라도 폰이 오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그대로 발터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들어오도록.”

“실례하겠습니다.”

폰과 다른 기사들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엇보다 기사들은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를 포박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처억, 폰과 기사들이 경례를 올렸다.

“폰 바이에른, 대공님을 뵙습니다.”

““대공님을 뵙습니다.””

곧이어 발터가 경례를 받으며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지.”

“예, 다름이 아니라 국경 주변에서 거수자를 발견했습니다. 한데 어떻게든 대공님을 봐야한다 하길래......”

그 말에 발터가 멈칫, 로브를 뒤집어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국경 주변의 거수자.

어딘가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건......’

하지만 그도 잠시.

아직 속단하는 건 일렀다.

그대로 발터가 애써 모른 체했다.

“......나를?”

“예, 만약 불편하시다면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폰이 제 허리춤에 찬 검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이에 정체불명이 로브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

줄곧 침묵을 지키던 발터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알겠다. 두고 나가보도록.”

“......괜찮겠습니까?”

폰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러자 발터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문제없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 발터의 대답에 폰과 다른 기사가 다시 꾸벅, 인사하며 집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잿빛 성의 집무실에는 발터와 정체불명의 로브만이 남아있었다.

그대로 발터가 탁자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래. 날 보고 싶다 했는가.”

“......”

하나 정체불명의 로브는 그저 침묵을 지킬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비로소 그가 입을 열었다.

“거수자를 이토록 쉽게 혼자 나둬도 되는 건가.”

“글쎄. 안될 거라도 있느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

이에 녀석이 꾸욱, 제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만약 내가 무기라도 숨기고 왔다면 어쩔 셈이지?”

그 말에 발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해보아라.”

“......뭐?”

“자신 있으면 해보라 하였다.”

단호한 발터의 대답.

동시에 정체불명의 그가 말했다.

“그게 무슨......”

아니 말하려는 찰나.

발터가 녀석의 말을 자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모르겠군.”

그러면서 발터가 문밖을 흘깃 바라보며 조소했다.

“자네는 방금 전의 기사들이 날 걱정한 걸로 보였나?”

“그야 당연히......”

“유감이군. 처음부터 기사들이 걱정한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퓻, 발터의 검은 신형이 쏘아졌다.

채 눈앞의 녀석이 반응하기 전에 벌어진 일.

“......!”

이에 뒤늦게 반응한 녀석이 황급히 몸을 틀려했지만 이미 한 발자국 늦었다.

곧바로 꾸국, 발터가 주먹을 쥐고 녀석을 향해 뻗었다.

북부대공 발터 레비오르.

과거 몇 번씩이나 그를 노리고 덤빈 녀석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 최후는 똑같았다.

호기롭게 덤비던 야만족은 머리가 쪼개져 그 자리에 절명했으며, 겁 없이 달려든 마수는 목이 잘려 설원을 뒹굴었다.

심지어 야밤에 그를 노리던 암살자는 역으로 사지가 접혀 다시는 걷지 못했으니.

방금 전 폰의 걱정은 발터가 당할 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터가 거수자를 죽일 것을 염려한 말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눈앞의 그 역시 꼼짝없이 당할 터.

“읏...!”

그대로 녀석이 질끈 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발터의 주먹이 닿기 직전.

돌연 그가 힘을 풀었으니.

-후웅!

녀석의 얼굴 바로 앞에 멈춘 발터의 주먹.

그 풍압에 스륵, 녀석이 쓰고 있는 로브가 벗겨졌다.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대화를 할 때는 제 모습을 드러나는 게 예의다. 용의 아이야.”

용의 아이. 이는 북부의 야만족들이 제 스스로를 칭하는 말이었다.

그런 발터의 말에 녀석이 흠칫거렸다.

“......!”

그와 함께 방금 전까지 중년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일렁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발터의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중년남성이 아닌, 검은 머리를 하고 있는 소녀였으니.

“......어떻게 내 주술을 알아차린 거지.”

그녀가 분한 듯 제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러자 발터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따악,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날리며 대답했다.

“변한 게 없지 않느냐. 륜.”

륜. 그 이름에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네놈이 어떻게 내 이름을......!”

“끝까지 말이 짧다?”

그대로 발터가 처억, 다시 한 번 딱밤을 날릴 기세로 손을 들었다.

이에 히익! 그녀가 흠칫거리며 황급히 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었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과 티 없이 검은 눈동자.

지금은 다소 어리지만, 크면 남자를 꽤나 울릴 거 같이 생긴 그녀의 이름은 하륜.

바로 야만족 우두머리의 딸이었다.

그리고 발터가 그녀를 알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쩜 회귀 전이랑 달라진 게 없냐.’

회귀 전에도 그랬으니까.

아니 그래도 회귀 전에는 이보다 더 성숙했던 거 같은데.

그만큼 예의도 있었고 말이지.

발터가 제 아래, 륜을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용의 아이, 하륜이 북부대공 발터 레비오르 님을 뵙습니다.

그러니까 발터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회귀 전.

그녀가 먼저 야만족과 북부 사이에 화친을 제안하러 왔을 때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목적으로 발터를 찾아왔을 경우.

잘만 하면 북부의 땅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으니.

발터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동시에 그도 잠시.

‘아무튼 그때나 지금이나 막무가내로 만나러 온 건 똑같구만.’

발터가 그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륜이 슬그머니 제 한쪽 눈을 뜨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아. 안 때려?”

그러자 발터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딱밤을 날렸다.

“응, 때릴 거야.”

“악!”

곧바로 따악, 그녀의 이마를 따라 울려 퍼지는 청명한 소리.

이에 그녀가 제 이마를 매만지며 울먹거렸다.

“씨이......”

륜이 뭐가 그리 분한지 발터를 째려보았다.

회귀 전보다 훨씬 빨리 발터를 찾아온 그녀.

당장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얼굴이 그 증거였다.

아마 리버와 비슷한 나이대거나, 아니면 그보다 2~3살 정도 더 많을 터.

“그래서 나를 보러 왔다 했느냐?”

“......”

“그럼 차근차근 이야기해보도록하지.”

그와 함께 발터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으니.

자, 그럼 이걸 어떻게 구워삶아 볼까나.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작게 조소했다.

65화 땅따먹기(2)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잿빛 성의 집무실.

나와 륜이 대리석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스윽.

그리고 탁자 위에는 서신 하나가 자리했으니.

그녀가 제 아버지를 대신하여 북부에 찾아왔음을 증명하는 서신이었다.

하나 현재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그녀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극히 일부 뿐.

그만큼 지금 그녀가 북부에 온 건 일종의 극비임무인 셈이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온 이유는......”

그대로 륜이 말을 꺼내기 무섭게.

내가 쯧, 혀를 차며 그녀의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아니라 제가.”

“......”

이에 륜이 아무 말 없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표정 풀어라. 이것아.

으으디 감히 동방예의지국의 나라에서 반말이야.

아, 여긴 중세구나.

아무튼 그래도 난 인정 못한다.

애초에 중세면 존댓말도 없냐?

내가 한 치의 물러섬도 용납 안 된다는 듯.

뻔뻔하게 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마지못해 말을 고쳤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뻔하지. 너희들과 마찰을 피해달라는 거 아니겠느냐.”

내가 다시 한 번 그녀의 말을 끊으며 이죽거렸다.

동시에 이럴 거면 왜 물어봤냐는 듯.

륜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원래 대공께서는 말뽄, 아니 화법이 그러십니까?”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와 함께 내가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꼬우면 다시 덤비든가.”

“씨이......”

그 말에 륜이 움찔거리며 한 발 물러섰다.

방금 전 내가 주먹을 멈췄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골통이 깨질 뻔한 그녀였다.

무엇보다 이곳은 북부, 그중에서도 명실상부한 내 나와바리인 잿빛 성이다.

그만큼 잘못 깝치면 소리 소문 없이 이름 모를 설원에 묻힌다는 것쯤은 그녀가 더더욱 잘 알고 있을 터.

“개, 아니 대공님의 화법에 참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요.”

“거 자꾸 중간에 이상한 게 섞여있는 거 같구나.”

“대륙공통어가 익숙하지 못해 그러오니 너그러운 아량으로 넘어가주시죠.”

햐, 저 와중에도 어떻게든 한 번 멕여보겠다고 돌리려는 거 보소.

잘못하면 뒤진다는 걸 알면서도 시도하는 그 노력이 참으로 가상했다.

하긴 이 정도 기개는 있어야 혼자 국경을 넘고 잿빛 성에 찾아와 접견을 요청하지.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보통 녀석은 아니었다.

그대로 내가 회귀 전, 그녀와 첫 만남을 회상했다.

-화친을 제의하러 왔다했느냐.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홀로 국경을 넘어서 곧장 내 집무실까지 왔다고?

-예. 그렇습니다.

아직도 그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화친을 제의하기 위해 혼자, 그것도 몰래 북부까지 걸어 들어오다니.

자칫하면 기사들에게 잡혀 끌려오기는커녕.

끽소리도 못하고 참수당해 그 목만 달랑 들어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전쟁 중에 발가벗고 상대측 진형에 뛰어든 격.

덕분에 당시 그녀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음, 미친 녀석이군.’

아무리 잘 쳐도 미친년이었다.

이처럼 예전부터 그녀는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나사가 약간 빠져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검이라도 뽑으면 어쩌려고 그랬느냐.

-그럼 거기까지가 제 운명인가 봅니다.

-단단히 미쳤군.

과거 내 물음에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던 대답이었다.

심지어 그때는 멀쩡하게 생긴 주제에 예의까지 있어서 더더욱 그 괴리감이 심했다.

원래 대놓고 미친놈보다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기행을 저지르는 새끼가 진짜인 법.

그런 면에서 보자면 그녀는 항시 은은한 광기를 장착하고 있는 ‘진짜’였다.

당장 회귀 전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녀와의 대화까지 기억하는 게 그 증거.

-원래 용의 아이들은 전부 다 이런 편인가.

-제가 특출 난 편이긴 합니다. 본디 낭중지추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 낭중지추란 동방의 고사 중 하나로......

-알고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 아닌가.

-어머, 박식하시기도 하셔라.

그대로 입을 가리고 생긋 웃어보이던 과거의 륜.

그런 그녀는 그 외모나, 분위기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인물이었다.

그 후로도 그녀는 틈만 나면 국경을 넘어와 집무실로 찾아왔다.

심지어 나중에는 그 레닌마저 두 손 들고 포기할 정도.

-대공님, 검은 여우가 또 찾아왔습니다.

-흥, 검은 여우라니요. 이렇게 예쁜 여우 보셨나요?

-정정하겠습니다. 단단히 미친 여우가 찾아왔습니다.

-까칠하기는. 그래도 이게 당신의 매력이지요.

그와 동시에 레닌의 뒤에 있던 륜이 그녀를 껴안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덕분에 제 아무리 차갑기 그지없는 레닌이라도.

그때만큼은 적잖이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며 물러났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이리 귀여우니 대공님께서 아끼시는 거겠죠? 조금은 질투나네요.

그와 함께 륜이 샐쭉 웃으며 레닌을 바라보았다.

보다시피 예전의 그녀는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 모습이 꼬리여럿 달린 여우를 연상케 하였으니.

항상 륜을 보고 검은 여우라 부르던 레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경국지색(傾國之色).

사람을 홀리게 하는 그 외모와 분위기는 그녀를 경국지색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리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미녀라는 그 뜻처럼.

륜은 그 최후마저 그러했다.

-요새 륜이 안 보이는군.

-그새 여우한테 정이라도 든 겁니까.

-그리 말하는 레닌, 자네도 3일마다 국경에 찾아가 륜을 마중 나가지 않느냐.

-그건......

오랫동안 륜이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것은 언제나 그렇듯.

국경 근처의 설원에서 검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해맑게 손을 흔들던 모습이었다.

그녀는 항상 대화를 끝내고 돌아갈 때면.

꼭 가던 중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때도 어김없이 그러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그때는 유독 해맑게 웃었던 거 같기도 했다.

그녀의 노력 덕에 용의 아이들과 조약을 맺기 직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후 돌아온 건 야만족의 선전포고와 낡은 궤짝이었다.

그리고 낡은 궤짝에는 검은 여우가 들어있었다.

여우는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 집무실에서 차의 향기를 즐기던 때처럼.

온화하게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하나 아스라이 느껴지는 분향(焚香)이, 궤짝 안에 담긴 서신이.

그녀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흑호내통야파국, 멸호건국정도(黑狐內通惹破, 局滅狐建國正道.>

궤짝 안 서신에 적혀있는 서체였다.

그 뜻을 풀이하자면 검은 여우가 몰래 적과 통하여 판을 깨트리니, 여우를 멸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리라.

녀석들 딴에는 이리 적으면 모를 줄 알았나보다.

아니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렇게 그녀는 내통죄로 몰려 처형당했다.

-레닌.

-예.

-전쟁을 준비해라.

내가 검은 여우를 묻어주던 날.

서신을 불태우며 읊조렸던 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북부와 용의 아이, 둘의 평화조약 체결 직전.

내부의 정권이 교체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당시의 족장이 쿠데타로 인해 사망.

그 과정에서 그녀 또한 내통죄로 몰려 이러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리하여 새로이 정권이 차지한 것은 하백.

그녀의 삼촌이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죽음은 예견될 일이었다.

하나 그날, 국경을 넘어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목숨을 부지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일말의 희망이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녀가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이토록 허무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나만 아니었다면.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녀의 삼촌이 정권을 차지한 순간부터 그가 그녀를 가만 놔둘 리 없었으니까.

하지만 당시의 나는 그게 어떤 것이 됐든, 무엇이든 제 혼자 짊어지려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녀의 죽음 또한 나의 탓이라는 피해망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놈이 따로 없었다.

아마 륜, 그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나라면 분명 이 모든 걸 자기 탓이라고 여겼을 것을.

그대로 내가 그녀와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용의 아이들은 다 그리 제멋대로인가?

-확실히.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전 제멋대로인 편이죠. 원래 미인은 다 그렇답니다.

-글쎄. 처음 듣는 말이네만.

그 말에 그녀가 옅게 웃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하니 혹여 일이 틀어져도 대공님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보다시피 전 제멋대로니까요.

그러니 제가 벌인 일에 제가 책임을 질뿐입니다.

그저, 그뿐입니다.

내가 그녀가 항상 버릇처럼 말하던 말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으드득...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 그녀는 내 눈앞에 살아있었다.

물론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어리고, 훨씬 무모했지만 명백하게 살아있었다.

더 나아가 바꿀 수 있었다.

빌어먹을 과거를, 그녀의 운명을, 그날의 후회를 내 손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대로 콰드득, 내가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우지직...쩌엉!

이에 나도 모르게 대리석 탁자 한 귀퉁이가 박살나 떨어지니.

내가 아차 싶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라. 이게 왜.

***

-푸스스...

동시에 산산조각 난 채 부스러져 내리는 돌조각.

그 모습에 움찔, 륜이 주춤거리며 발터의 눈치를 살폈다.

“아, 아직 이야기...안 꺼냈잖아...요.”

“......”

“죄송합니다. 사실 대륙공통어도 잘해요......”

그와 함께 륜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씁,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하지만 발터가 뭐라 말하기도 전.

“아니 처음에는 그, 그냥...이야기만...해보려 그랬던 건데.”

“잠깐, 그게 아니라......”

“막 아버지는 몸져눕고...다 맨날 나, 나보고 어떻게든 해보라면서 다그치고...! 그래서 고민 끝에 넘어왔는데......!”

그대로 륜이 이제는 울먹이다 못해 훌쩍거리며 웅얼거렸다.

어어, 울지 마라.

너 임마. 이런 캐릭터 아니었잖아.

만약 과거의 그녀였다면 울기는커녕.

어머, 대리석 탁자처럼 절 엉망진창으로 만들 생각이신가요?

따위의 대사와 함께 역으로 발터를 당황시킬게 분명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예상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으니.

오히려 당황스러운 건 발터 쪽이었다.

“일단 진정하고......”

이에 발터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검은 눈동자를 따라,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사실 나도 엄청 무서웠는데....오자마자 주먹부터 날리고...!”

“......”

음. 그건 사실이긴 해.

아니 근데 멈췄잖아.

그리고 앞뒤 사정을 고려하면 그럴만하지 않았던가.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그의 잘못처럼 보였으니.

자칫하면 중세에 아동폭력범으로 몰릴 위기였다.

그대로 발터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나......”

차라리 싸우면 싸웠지.

이런 건 자신 없는데.

그리고 그 순간, 과거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대공님. 그거 아시나요.

-음?

-심장박동 소리에는 서로 눈을 맞추고 직접 대화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합니다. 그러니까 그만큼 상대를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뜻이죠.

그 말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한가?

-네. 직접 해보실래요?

-거절하지.

-그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말씀 드렸지 않습니까. 전 제멋대로라고.

-자, 잠깐......

그대로 발터가 피하기도 전.

그녀가 냅다 그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포갰으니.

두근두근, 집무실을 따라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 사이.

-어때요. 정말이죠?

륜이 작게 웃으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왜 하필 지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는지.

하지만 그도 잠시.

“륜, 그거 알고 있느냐.”

“......”

“심장박동 소리에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발터가 울먹이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륜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와 함께 발터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심장에 포갰다.

-쿵쿵...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때처럼 잿빛 성의 집무실에 울려 퍼지는 심장박동 소리.

발터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제 좀 괜찮아졌느냐.”

동시에 륜의 검은 눈동자를 따라.

뚝. 줄곧 흐르던 눈물이 멈췄으니.

울음을 그친 그녀가 멍하니 발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심장박동 소리 이야기.

이는 과거, 지금은 없는 륜의 오빠가 우는 그녀를 달래줄 때 해주던 말이었으니 말이다.

66화 속전속결

정확히 언제쯤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저 어린 날의 륜, 그녀가 토끼를 쫓아 마을 밖으로 나갔다는 것.

그리고 하필 그날 눈 폭풍이 몰아쳐 길을 잃고 설원 한 가운데에 조난당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휘이잉!

보이는 건 오직 매섭게 몰아치는 거친 눈 폭풍이오.

들리는 건 오직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소리였으니.

당시의 륜이 할 수 있는 건 단지 눈 폭풍을 피해 들어간 동굴 안에서 제 몸을 웅크리는 일뿐이었다.

그렇게 이름 모를 동굴 안.

오빠와 아버지를 비롯한 다른 어른들이 그 안에 웅크려있던 륜을 발견한 것은 눈 폭풍이 지나가고 난 뒤.

하루가 꼬박 지났을 즈음이었다.

-륜! 무사했느냐!

그대로 그녀의 오빠가 한달음에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그간 혼자 남겨졌다는 무서움과 공포.

오빠를 만났다는 반가움과 서러움이 한데 뒤섞이니.

-흐아아앙!

그녀가 한참동안 오빠의 품에 안겨 울었다.

이에 오빠를 비롯한 다른 어른들은 이제 괜찮다며 륜을 달랬으나, 마음과는 달리 흐르는 눈물을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때였다.

오빠가 차갑게 얼어붙은 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런 오빠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륜, 그거 아느냐.

-......

-심장박동 소리에는 상대를 안심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하더구나.

그와 함께 오빠가 그녀의 손을 제 심장에 포갰다.

그대로 차가운 륜의 손을 따라 오빠의 심장박동 소리가 전해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

점차 울음이 멈추고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생각해도 신기한 경험이자,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다만 그 후로는 기억이 없었으나, 다른 어른들이 말해주기를.

긴장이 풀린 그녀는 마을로 돌아오는 내내.

오빠의 품에 안겨 잠들었다고 한다.

하나 이는 도저히 되찾을 수 없는 기억.

지병으로 인해 오빠가 죽은지는 벌써 몇 해가 지났으니.

그날의 기억은 오직 륜의 추억 속에서만 살아가는 아스라한 편린이었다.

그러나 다시 지금.

-쿵쿵...

따스한 모닥불이 자리한 잿빛 성의 집무실.

륜의 손을 따라 그 자의 심장박동 소리가 전해졌다.

그대로 륜이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으니.

“......”

짙은 흑발과 황금을 품은 눈동자.

북부대공이라 불리는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런 발터와 그날, 오빠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잿빛 성의 집무실.

내가 겨우 울음을 멈춘 륜을 달랬다.

다행히 과거의 그녀가 말해준 방법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중간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혹시나 실패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튼 울음을 그쳤으니 다행이었다.

그대로 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화나서 그런 거 아니라니까.”

“......진짜요?”

“그래. 그러니 이제 좀 진정하거라.”

“네......”

륜이 애써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이제야 한숨 돌렸다.

곧이어 내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화친이 아니라, 도와달라고 온 거라고?”

“......”

내 물음에 륜이 다시 한 번 끄덕, 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방금 전 그녀가 울먹이면서 중얼거렸던 말.

그 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현재 용의 아이들, 그러니까 야만족들은 내적으로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야 그녀의 오빠는 예전에 사망.

현재 우두머리인 그녀의 아버지는 의문의 병으로 몸져누웠으며, 그녀의 삼촌이 그 틈을 타 전쟁세력을 모으고 있단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 역시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지만, 현재 그는 피해를 감수해서라도 전쟁을 하겠다는 강경한 입장.

이처럼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분위기에 사람들은 전부 극도로 몰려있는 상황.

그 공포는 빠르게 확산되어가고.

그 결과, 몇몇 이들은 우두머리의 딸인 륜에게 계속해서 뭐든 해보라고 다그친 결과.

그녀 혼자서라도 대화를 시도해보려 국경을 넘은 것.

애초에 그녀는 기껏해야 리버보다 조금 더 많은 나이.

중세의 기준으로는 어른이라 쳐도.

현대의 기준, 그러니까 발터가 보기에는 이제 갓 스물 즈음에 이른 애였다.

그런데 그런 녀석이 홀로 국경을 넘어 여기까지 오다니.

그간 그녀가 얼마나 극한에 몰려있었는지 짐작게끔 하는 행동이었다.

아니 오히려 어렸기에 할 수 있는 건가.

‘......라고 하기에는 회귀 전에도 그랬으니.’

결국에는 당시의 그녀도 내색은 하지 않았을 뿐.

륜, 그녀 나름대로 고심을 거듭하여 내린 결정이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다.

거기다 듣자하니 지금은 전보다 그 상황이 더 심각해보였다.

‘암만 그래도 전에는 지금 시기에 전쟁까지는 안 갔으니까.’

그대로 머지않아.

그녀가 눈물을 닦고 후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뭔가 다짐한 표정이었다.

“......그리하여 하나 간청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와 함께 륜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울음을 터트린 어린애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사뭇 달라진 분위기.

그런 그녀를 따라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으니.

그는 분명 과거의 륜에게서 느꼈던 분위기였다.

곧이어 처억, 그녀가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바닥에 고개를 숙였다.

“지금 이게 뭐하는......”

이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내 말이 끝나기도 전.

그녀가 말했다.

“다른 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발 다른 사람들만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원하신다면 제 목숨도 바치겠습니다. 그러니...그러니 제발......”

전쟁만은 피해주세요.

륜이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제 아무리 그녀가 어렸다한들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할 것임을.

실제로 회귀 전, 그녀가 죽고 나서 야만족과 전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들도 그 피해를 피해갈수 없었다.

설원이 피로 물들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그만큼 회귀 전의 그녀도 알고 있었을 터였다.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고.

그게 아니고서는 제 위험을 불사하고 국경을 넘고 나를 만나러 올 일이 없었으니까.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찾아왔다면.

과거의 그녀 또한 그 절박함에 있어 지금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는 말과 같았다.

“......”

아니 어쩌면 줄곧 감춰왔는지도 몰랐다.

웃음 뒤에 불안을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을지도 몰랐다.

그때의 그녀가 과연 어떤 심정으로 나를 만나러 왔는지 당시의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눈앞의 륜은 그때의 그녀보다 어렸기에.

그때의 그녀처럼 자연스럽게 표정을 숨기지도, 괜찮은 척 웃어보이지도 못했다.

내 앞에 있는 어린 검은 여우는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오직 전심전력으로 부딪히는 게 전부이기에.

오롯이 제 속마음을 전부 내보이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덕분에 과거라면 쉬이 짐작조차 힘들었던 그 속내가.

지금만큼은 너무나도 쉽게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꾸욱...

동시에 바닥에 고개를 숙인 륜.

그 모습이 마치 과거 크레핀의 앞에 고개를 숙인 나를 보는 듯하여, 묘한 동질감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가 어떤 심정인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제 땅의 사람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그깟 고개쯤은 몇 번이고 숙일 수 있었다.

“......고개를 들라.”

이에 내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와 함께 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내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난 내 것에 손을 대는 녀석들을 가만히 두고 볼 만큼 자비롭지 못하다.”

그 말에 륜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제 땅의 사람들을 구할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든.

나 역시 북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의 삼촌이 북부를 노리고 전쟁을 일으킨다면.

난 몇 번이고 전쟁을 받을 것이다.

북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북부에 이빨을 드러낸 녀석의 숨통을 몇 번이고 끊을 것이다.

그게 설령 그녀의 삼촌이라도, 그녀의 아버지라 해도.

내 마음가짐은 변함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라도 가차 없이 검을 뽑으리.

그 과정에서 네 삼촌을 죽일 수도 있다.”

“......”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희생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내 말에 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채 어린 티를 벗어내지 못한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했다.

“하나 내 한 가지는 약조하지.”

“......”

“네 사람들의 목숨은 보장하겠다.”

“......!”

검을 들고 덤비는 자는 죽인다.

하지만 적어도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대신 그 대가로 설원지대를 받겠다.”

그 대가로 내가 요구하는 건 오직 한 가지.

그들의 땅에 위치한 설원지대.

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물었다.

“선택은 오로지 너의 몫. 어찌 하겠느냐.”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적이 흐르는 잿빛 성의 집무실.

륜이 비로소 적막을 깼다.

“용의 아이 하륜, 거래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대로 륜이 내 손을 붙잡았다.

동시에 그녀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으니.

눈앞의 륜을 따라, 회귀 전 그녀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

이걸로 거래는 체결.

설령 과거의 그녀가 바랐던 화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일부는 이룬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비로소 그녀가 염원이 조금이나마 이루어진 셈이었다.

하나 거래는 이제야 시작.

그 다음으로는 어떻게 전쟁을 막을지 그 방도를 마련할 차례였다.

“우선 미리 말하지.”

“......”

“내가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 그 과정에서 그 어떤 누구의 피해도 없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발터가 단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적이 단순히 승리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다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앞에서 말했듯.

발터, 그는 북부의 주인으로서 제 영토를 노리는 녀석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녀석이 끝까지 북부를 노린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해줄 생각이었다.

이에 륜이 꾸욱, 제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애초에 그녀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북부에 온 것부터 아예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비롯한 몇몇 어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전면전을 피하는 것.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북부에 고개를 숙여야함은 익히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책임을 전부 그녀에게 전가한 게 문제라면 문제겠지.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전쟁을 완전히 피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결국 논제는 얼마나 빨리, 적은 피해로 전쟁을 끝나는지에 달린 셈.

“그리하여 나는 하백, 그 자를 밖으로 끌어낼 셈이다.”

그대로 발터가 륜을 향해 말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무대를 야만족의 마을이 아닌, 외부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전쟁으로 인해 발터가 노리는 것은 설원지대.

한데 설원지대가 망가진다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일단 하백을 밖으로 끌어낸 뒤.

돌아갈 틈을 주지 않고 그 자리에서 속전속결로 끝내야했다.

그리고 륜 역시 이를 알고 있는 만큼.

발터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을로 돌아가기 전에 끝낼 수 있을까요.”

확실히 그의 말대로.

전장을 밖으로 옮기고 끝을 낸다면 마을에 가는 피해를 최소화시킴은 물론이며, 민간인들의 피해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하나 문제는.

‘그게 가능하냐는 점.’

사실 하백이 병력을 후퇴시키기 전에 속전속결로 끝낸다는 게 말이 쉽지.

상식적으로는 그리 쉽지 않은, 아니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쉽지 않을 터다. 하나.”

“......”

“북부라면 가능하다.”

발터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현재 그녀는 물론이며, 하백은 북부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다.

그간 북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즉, 지금의 발터가 북부를 어떻게 키워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전쟁의 판도를 뒤집을 일종의 조커였으니.

이제는 과거와 달라진 북부의 저력을 만천하에 보여줄 차례였다.

“그러니 잘 들어라. 이제부터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줄 터이니.”

그렇게 잿빛 성의 집무실.

발터가 륜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67화 북부의 저력(1)

그렇게 발터와 륜의 거래가 성사되고 정확히 보름이 지난 지금.

북부와 야만족의 영역 중간에 위치한 국경지대를 따라 차가운 눈발이 흩날렸다.

그리고 하얀 설원과 애쉬폴 산맥이 맞닿아 있는 그곳은 언제나 그렇듯.

사람 발자국은커녕, 그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 오늘만큼은 사뭇 달랐다.

그대로 북부의 애쉬폴 산맥을 등진 채.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낸 한 무리의 사람들.

-처억...!

그 중 무리를 이끄는 자는 짙은 흑발에 검은 모피코트를 걸치고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북부대공 발터 레비오르.

그리고 머지않아 은발의 기사, 레닌을 비롯한 다른 북부의 기사단들이 그 뒤를 따랐다.

“......”

곧이어 레닌이 제 오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하얀 설원이 그녀를 맞이했다.

저곳이 바로 야만족의 땅.

여기서 조금만 넘어가도 바로 그들의 영역이었다.

그만큼 북부나, 야만족들이나.

쉬이 접근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야 괜히 국경지대에서 얼쩡거렸다가 재수 없게 야만족들에게 걸려 마찰이라도 빚는 경우에는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북부대공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자칫하면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번질 수도 있는 상황.

이에 레닌이 하얀 설원과 제 주군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여기까지 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글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군.”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로 그가 표정하나 변하지 않은 채.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마수토벌을 위해 여기까지 온 게 아닌가?”

마수토벌. 오늘 발터를 비롯한 북부의 기사단이 국경지대까지 온 이유였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이유.

그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으니.

“정말 하백, 그 자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올까요?”

하백의 군대. 그러니까 야만족들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솔직히 습격에 대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습격을 유도한다는 편이 더 맞을 터.

“그래. 그 부분은 내 자신하지.”

그대로 발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게 아니면 어디 내기라도 해볼 테냐?”

무엇보다 그리 말하는 발터의 입가에는 연신 옅은 미소가 걸려있었으니.

그 모습이 야만족을 상대한다기보다는 산책을 나왔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동시에 발터가 하얀 설원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튼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녀석들은 분명 찾아올 테니.”

륜이 말을 제대로 전했다면 말이지.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륜과 거래 직후.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그럼 륜, 우선 너는 마을로 돌아가 하백에게 전하거라. 정확히 보름 뒤. 내가 기사단들과 함께 국경지대에 나선다고.

-......국경지대라고요?

-그래. 마수토벌을 위해 지나간다고 하면 충분할게다.

실제로 북부의 기사단들은 봄이 찾아오면 국경지대를 지나 마수토벌을 나가곤하였으니 이 정도면 그녀의 삼촌, 하백도 그리 의심하지는 않을 터.

그리고 발터가 노리는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륜의 말에 따르면 현재 야만족들의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하백.

또한 그는 아예 먼저 북부를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야만족들이 그간 북부를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오직 단 하나.

북부대공 발터의 존재 때문.

제 아무리 그가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이 났다한들.

그만큼 발터의 존재는 쉬이 간과할 수 없는 변수였다.

한데 그 와중에 북부의 주인인 밭터가 국경지대를 지나간다니.

이는 그에게 있어 그야말로 전쟁의 승기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니 하백이 군대를 준비할 동안. 륜, 너는 혹시 모르니 민간인들을 뒤로 물리거라.

-하백이 그걸 허락할까요?

-내 정보를 넘겨주는 대신이라 하면 괜찮을 것이다.

북부대공의 위치를 알려주는 대가로 민간인들의 안전을 보장해달라.

이거라면 하백 역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터.

동시에 그녀와의 약속까지 지킬 수 있었다.

-그럼 그 다음은요? 정말로 하백이 대공님을 치러 간다면......

륜이 제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발터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그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말거라.

이미 다 생각해뒀으니.

발터가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가 그날의 대화.

그리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발터와 북부의 기사단이 국경지대를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돌연 멈칫, 발터와 레닌이 멈춰 섰다.

“발터님.”

“그래. 알고 있다.”

동시에 그 순간.

두두두, 하얀 설원을 따라 작은 진동이 느껴졌다.

곧이어 점점 더 가까워지는 땅울림.

그와 함께 피비빗, 바람을 가르고 화살세례가 쏟아지니.

북부의 기사단들이 재빨리 방패를 들어 막았다.

-티디딩! 팅! 티딩!

그대로 방패에 막혀 바닥에 떨어지는 화살.

하나 화살세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에 레닌이 철컥, 검을 뽑아들어 제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채앵! 챙! 쉬익...채앵!

그리고 그런 그녀가 한 번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은빛 섬광이 번쩍이며 화살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렇다면 발터는?

-터업...콰득!

발터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날아드는 화살을 잡았다.

이어서 그가 화살을 꺾어버리며 무심하게 휙 바닥에 내던졌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발터의 입가는 호선을 그리고 있었으니.

“그러게 내가 말했지 않느냐. 분명 온다고.”

그가 히죽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

그렇게 발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말을 탄 채 무장한 녀석들이 그를 비롯한 북부의 기사단을 포위했다.

-처억...!

무엇보다 하나도 빠짐없이 륜과 같이 검게 물들어 있는 머리칼.

그들이 바로 북부의 야만족.

스스로를 용의 아이라 칭하는 녀석들이었다.

-사아아...

그와 함께 북부의 기사단과 야만족들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

그리고 그때였다.

“북부의 주인께서 여기까지 어인 행차신가.”

녀석들 사이로 검은 말을 탄 남성이 발터를 향해 다가왔다.

오른쪽 눈을 따라 길게 난 검상.

그의 이름은 하백, 륜의 삼촌이자 북부와 전쟁을 일으키려는 장본인이었다.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무슨 짓이지?”

이에 발터가 그를 비롯한 야만족들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국경지대에 이만한 병력을 끌고 오다니. 전쟁이라도 할 셈인가.”

그런 발터의 말에 하백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쟁이라도 할 셈이냐고?

“만약 그렇다면 어쩔 거지?”

“......”

하백의 대답에 발터가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그 모습에 하백이 그를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설마하니 정말로 북부대공이 국경지대를 지나갈 줄이야.

거기다 끌고 온 병력이라고 해봤자 북부의 기사단 열댓 명이 전부.

륜의 말대로 마수토벌을 나온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는 그에게 있어 절호의 기회.

제 아무리 북부대공이라 하여도.

현재 하백이 끌고 온 병력은 얼핏 보아도 그의 수십 배.

이를 증명하듯 당장 북부의 기사단을 포위한 병력을 제외하고도.

그 뒤에는 말을 타고 무장한 야만족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이 정도 병력이라면 정말로 북부대공을 처리하는 것도 과언은 아닐 터.

당장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는 게 그 증거였다.

아마 북부대공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여기서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자신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대로 하백이 발터와 그 너머에 있는 북부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똑똑히 들어라. 오늘부로 북부의 주인은 바뀌게 될 것이다.”

하백의 명백한 선전포고.

그와 함께 스릉,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었으니.

곧이어 다른 야만족들 역시 일제히 제 무장을 들었다.

“검을 들어라. 명예롭게 싸우다 죽을 기회 정도는 주도록 하지.”

하백이 발터를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그 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느냐.”

돌연 발터가 나지막이 물었다.

그와 함께 흠칫, 하백이 제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그도 잠시.

“후회? 그건 내가 아니라 함정에 빠진 네 쪽이 해야 할 터.”

제 운명도 모르고 국경지대에 온 것을.

그리고 북부의 주인이 바뀌는 오늘을.

끝없이 후회하거라.

“죽여라.”

그대로 하백이 발터를 비롯한 북부의 기사단들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와 동시에 주변을 포위한 야만족들이 달려들었다.

아니 달려드려는 때였다.

“글쎄. 후회할 텐데.”

발터가 히죽 웃으며 꾸국,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가 냅다 바닥을 향해 정권을 내려찍었다.

무엇보다 그런 그의 주먹은 물론, 그의 팔 전체를 따라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그렇게 설원을 따라 폭음이 울려 퍼지며 사방으로 눈발과 흙먼지가 솟아올랐다.

그와 함께 야만족들의 시야를 가리는 하얀 장막.

이에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이 화들짝 놀라 순간 통제를 벗어났다.

그대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앞발을 치켜드는 말들.

그러자 하백이 미간을 와락 구기며 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같잖은 수를!”

하나 이만한 병력을 뚫고 도망가는 건 불가능.

어차피 흙먼지는 곧 가라앉을 터.

이는 고작 잠깐의 시간벌기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푸스스...

하백의 말처럼 흙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니.

그 사이 흐릿한 발터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모습에 하백이 비소를 터트렸다.

그럼 그렇지.

그 찰나에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 애초에 도망친다 해도 설원 아니었다.

“당장 죽여......”

하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흙먼지 사이를 따라 발터의 목소리가 삐져나왔다.

“한데 말이다. 하백. 그런 의심은 해본 적 없느냐.”

“......뭐?”

“가령 함정에 빠진 건 내가 아니라 네놈이라는 의심 말이다.”

“그게 무슨......”

이어서 철컥,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으니.

그는 다름 아닌 발터가 유탄 발사기를 장전하고 발사하는 소리.

-퓽...퍼어엉!

곧이어 상공을 따라 쏘아진 신호탄이 터지며, 붉은 연기가 꼬리를 그리며 사방으로 퍼졌다.

이에 하백은 물론이며 주변의 야만족들이 멍하니 하늘 위 붉은 연기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도 잠시.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백이 제 눈앞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인 모습은.

한 손에 전이석을 들고 있는 발터였으니.

“그러니까 너 속았다고. 병신아.”

그가 중지를 치켜 올리며 히죽 웃었다.

곧바로 쨍강, 발터를 비롯한 북부의 기사단이 전이석을 깨트리기 무섭게 푸른 빛 무리가 그들을 감싸며 일제히 사라졌다.

“......무, 무슨!”

이에 하백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설원 너머, 북부의 영역에 다다른 그때.

저 멀리 우우웅, 심상치 않은 수십의 푸른빛이 반짝였다.

-쿠르릉....콰아아아앙!!

동시에 지축을 울리는 폭음과 함께 푸른 빛줄기가 쏘아지니.

그 이름은 발터 MK-2.

북부의 저력이자, 북부가 자랑하는 발터의 대물 대공포였다.

68화 북부의 저력(2)

하백과 그를 비롯한 야만족들이 포진해있는 국경지대.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눈부신 푸른빛이 쏘아졌다.

단지 그 뿐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펼쳐진 광경은 그야말로 상식을 벗어난 그림이었으니.

푸른빛의 마력포가 하얀 설원을 직격했다.

-콰드드드득...!

그와 함께 주변의 눈이 폭발하며 사방으로 새하얀 눈발이 흩날렸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력포는 말 그대로 대지를 갈아버리며 그 위의 모든 걸 파괴하였다.

-콰과가가강!!

하나 마력포 세례는 비단 하나 뿐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유성우를 연상케 하듯.

푸른 꼬리를 그리며 매섭게 쏘아지는 마력탄.

“이, 이런 씨발!”

“크아아아악!”

이에 야만족들을 황급히 말머리를 틀어 마력탄을 피하려 들었지만, 녀석들이 제 아무리 빨라도 이미 쏘아진 마력탄의 속도를 앞지를 수는 없었으니.

사방에서 연이어 굉음이 울려 퍼지며 바위, 나뭇가지, 흙을 비롯한 온갖 파편이 어지럽게 튀어 올랐다.

***

그렇게 대공포가 한창 국경지대를 폭격하고 있을 즈음.

잿빛 성에 근처에 위치한 고지대.

국경이 한눈에 보이는 그곳에서 처억, 발터가 선글라스를 쓰며 조소했다.

“......나이스 샷.”

그렇게 만년설이 쌓여있는 애쉬폴 산맥을 배경으로 선글라스와 검은 모피코트를 걸치고 서있는 발터.

무엇보다 그런 그의 양 옆으로는 수십의 대공포가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붉은 머리의 마법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루비아 페일.

미래에 철혈의 여제라 불리는 무기제조업자이자, 장차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혁신을 이끈 천재 공학자.

“크큭...큭...크킄...큭...!”

그대로 루비아가 연신 떨려오는 제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어서 그녀의 입가를 따라 새어나오는 광기어린 웃음.

곧이어 루비아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대공님...전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그와 함께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루비아가 제 양팔을 크게 벌리며 외쳤다.

-처억...!

“바로 마력의 핵심을!”

“......”

“화력, 오직 더 큰 화력만이 세상을 이끄는 겁니다!”

그대로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루비아가 저 멀리 푸른 꼬리를 그리는 마력탄의 향연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통상적으로 말의 속도는 60~70km/h. 하나 저의 대공포는 포구초속 400m/s를 자랑하는 마력탄이 분당 10발씩 발사되기 마련. 비록 양산화 과정 중 첫 시연보다 50m/s가 줄어들고 분당 발사수가 5발이 줄어들었지만 어찌 말 따위가 공학의 진리를 앞설 수 있겠습니까.”

그와 함께 루시아가 불끈,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공학의 승리이자, 마법의 승리! 아아, 보십쇼. 개미 때처럼 도망치는 저 모습을!”

“그래. 못 본 사이 더 미쳤구나.”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대공포를 만지는 과정에서 머리의 나사가 몇 개쯤 빠진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 이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

하나 그런 발터의 말은 이미 대공포에 취한 루비아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는 듯.

그녀가 재차 양팔을 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그야말로 루비아의 광기에 방점을 찍는 한 마디.

아아, 세상은 어찌하여 그녀를 낳고, 공학의 길로 인도했는가.

그대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대공님, 보고 계십니까.”

“그래. 보고 있다.”

내 앞에 있는 인재(人才), 아니 인재(人災)의 모습은 제대로 보고 있단다.

동시에 그녀가 곧게 뻗은 대공포의 포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대공님의 우람한 포신이 적들을 무참히 유린하는 이 모습을!”

“아니다. 이 미친년아.”

“이게 바로 대물 대공포 그 자체! 아니 ‘대물 대공’포가 아니겠씁니까아아아!”

루비아가 재차 제 양팔을 활짝 벌리며 외쳤다.

그 모습에 발터가 미간을 와락 구기며 손을 까닥였다.

“야. 당장 저 새끼 아가리 막아.”

“읍읍!”

그대로 루비아가 다른 마법사들에게 저지당해 끌려가니.

발터가 한 차례 폭격이 휩쓸고 지나간 국경지대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다른 건 다 떠나서, 확실히 그 위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군데군데 맨 땅을 드러난 채 움푹 파여 있는 하얀 설원.

그리고 방금 전 공격으로 그 위에 포진해있던 야만족의 병력은 반 이상이 재기불능이 된 상태.

이 모든 게 고작 30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결과였다.

그야말로 루비아의 말처럼 압도적인 화력의 승리.

그러나 그도 잠시.

-뿌우우우!

설원을 가득 채우는 뿔 고동소리와 함께 잔존 병력들이 하나 둘씩 말머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퇴각신호였다.

이에 발터가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서며 폰과 레닌에게 명령했다.

“폰, 레닌. 와이번 대대를 준비하라.”

애초에 발터의 목적은 최대한 빨리 전쟁을 끝내는 것.

녀석들이 순순히 마을로 돌아가는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동시에 폰과 레닌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이어서 둘을 비롯한 북부의 기사단들이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대공포 뒤편에 대기하고 있던 와이번들이 저마다 날갯짓을 하며 이륙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지옥과도 같았던 폭격이 끝났다.

이에 운 좋게 살아남은 야만족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얀 설원이 자리한 국경지대는 처참하기 없는 모습이었다.

마력포가 직격한 땅은 움푹 파여 맨 살을 드러내고 있었으며, 곳곳에서는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끄으으윽......”

무엇보다 그 사이 다른 이들이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니.

고통에 찬 목소리가, 매캐한 검은 연기가.

방금 전의 지옥도가 거짓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실로 그 시간은 채 30분도 되지 않았으나, 하백을 비롯한 야만족들에게는 그야말로 수십 시간이 지난 듯한 착각이 들지 않았는가.

그와 함께 뿌우우우, 설원을 따라 뽈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퇴각! 퇴각하라!”

하백이 다른 야만족들을 향해 외쳤다.

그대로 그가 말머리를 돌리며 뿌득, 제 이를 악물었다.

북부대공을 습격하여 승기를 잡으려는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아니 그냥 실패도 아닌 대참패였다.

하나 아직 기회는 있었다.

그 자가 전해준 주술만, 그 주술만 있다면!

-꾸구국...!

하백이 제 손아귀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무엇보다 용의 아이들의 기동력이라면 폭격이 멈춘 틈을 타 후퇴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

최강의 기마대.

대륙을 통틀어 그들의 기동력과 기마술을 가히 최고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이를 후퇴할 때 써야한다는 게 꼴사납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마을로 돌아가 정비만 마친다면.

지금의 기동력을 살려 다시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하백이 그리 생각하며 이럇, 힘차게 말을 몰았다.

-두두두두!

곧이어 하얀 설원을 가로지르는 하백.

그리고 남은 야만족들이 그 뒤를 따르니.

확실히 그 속도가 대륙을 상대로 자랑할 만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돌연 그들의 위를 따라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삐져나왔다.

이어서 머리위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

-쿠오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크롸라라라!!]

창공을 메우는 거친 흉성.

그 정체는 다름 아닌 수십에 다다르는 와이번 무리.

그에 따라 주변에서 다급한 외침이 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와, 와이번이다! 당장 산개......”

하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쉬이익, 창공을 날던 와이번 한 마리가 매섭게 내리꽂혀 말 통째로 녀석을 낚아챘다.

그대로 와이번이 말과 야만족을 비탈길 아래를 향해 내던졌다.

-쿠당탕...퍼억!!

이에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본 채.

무참히 굴러 떨어진 녀석.

그를 신호로 수십의 와이번들이 닥치는 대로 기마대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잠깐...크아아아악!”

“씨, 씨발! 오지 마!”

그로 인해 야만족들이 진형이 단숨에 붕괴되며 난장판이 되었다.

그 광경에 하백이 낭패라는 듯 미간을 와락 구겼다.

“제기랄! 이게 무슨...!”

왜 하필 지금 상황에 와이번들이 자신들을 습격하느냔 말이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하나의 의문.

현재 그들이 있는 곳은 하얀 설원.

종종 멀리까지 사냥을 나온 와이번 한두 마리가 출몰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처럼 와이번 무리 전체가 나오는 경우는 없었다.

거기다 그 타이밍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하필 지금 오늘, 하필 도망치는 순간에 와이번이 습격하다니.

마치 누가 와이번을 조종하기라도 한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쉬이익!

빠른 속도로 하백을 앞질러나가는 와이번 무리.

무엇보다 그런 와이번의 무리의 선두에는 유독 덩치가 큰 하얀 비늘의 와이번이 있었으니.

그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왼쪽.”

그 목소리에 하백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저 멀리 와이번 위에 보이는 검은 모피를 걸친 흑발의 남성.

발터 레비오르였다.

아니 발터, 그 뿐만이 아니었다.

와이번의 등 위에 타고 있는 건 전부 북부의 기사단들.

제 아무리 최강의 기마대라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육지에 관한 이야기.

그 전장을 공중까지 확대한다면.

대륙 최강의 부대는 단연 와이번을 기승수로 부리는 북부의 기사단이 유일했다.

“어떻게......”

그 모습에 하백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간 자신이 알고 있던 북부와는 그 격이 달랐다.

-쉬이익...퍼엉!

하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백이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와이번 무리가 일으킨 매서운 폭풍이 그를 덮쳤다.

그와 함께 와이번 위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은 원형의 물체를 투하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골렘의 핵.

동시에 골렘의 핵을 따라 주변의 흙과 바위, 눈이 모여들어 그 형태를 갖추었다.

-쿠오오오!

그렇게 하백을 비롯한 야만족의 앞을 따라 솟아나는 마도병기, 골렘.

“......저, 전군 정지!”

이에 선두에 있던 하백이 황급히 줄을 잡아당겼으나 이미 관성이 붙은 말은 쉽게 멈추지 못했으니.

어느새 그의 바로 앞에 다다른 골렘이 양 팔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아아아앙!!

그 충격에 하백이 타고 있던 말이 고꾸라지며 하백의 몸이 공중을 날았다.

그대로 퍼억, 공중으로 날아간 그가 바닥을 굴렀다.

그런 하백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린 붉은 피가 제 눈앞을 가렸다.

“크윽...!”

하지만 그도 잠시.

하백이 머지않아 제 몸을 일으켰다.

마을로, 마을로 돌아가기만 하면.

“......”

하나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보인 풍경은 오로지 절망뿐이었으니.

수많은 군세를 자랑하는 야만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그대로 쉬이익, 와이번이 내리꽂힐 때마다 말을 탄 병사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눈앞의 골렘들이 팔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이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푸욱! 퍼억...채앵! 털썩...

그마저도 살아남은 병사들은 무장을 뽑아 저항했으나, 북부의 기사단들의 검과 창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딜 보아도 보이는 건 그저 패배, 패배뿐이었다.

이에 하백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란 말인가.

처음 북부대공을 습격했을 때부터?

폭격이 시작됐을 때부터?

수십, 수만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동시에 그때였다.

저 멀리 하얀 비늘을 가진 와이번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

그 모습에 하백이 재빨리 근처에 있는 말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손아귀 너머로 보이는 북부.

곧바로 하백이 손아귀를 움켜쥐었다.

아니 움켜쥐려 했다.

하나 그러기 무섭게.

-쉬이익...서걱!

공중에서 발터가 떨어지며 양 손에 쥔 검을 내리그었으니.

시리도록 하얀 오러가 하백의 팔을 베고 지나갔다.

동시에 촤악, 그의 팔을 따라 붉은 선혈이 솟아올랐다.

“끄아아아악!!”

그와 함께 하얀 설원 위를 따라 힘없이 떨어지는 하백의 오른팔.

“그리 엄살 피우지 말거라. 하백.”

그대로 처억, 발터가 검을 제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까닥였다.

“북부를 넘본 값으로 팔 한 짝 정도면 싸게 먹힌 셈이니 말이다.”

69화 겨울의 전쟁

국경지대에 위치한 하얀 설원 위.

그대로 촤악, 발터가 제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곧이어 붉은 핏자국이 설원 위를 물들이니.

“그게 아니면 어찌 남은 팔 한쪽도 가져가주길 바라느냐?”

발터가 하백을 향해 작게 조소했다.

그렇게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하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에 으득, 하백이 제 이빨을 갈며 발터를 노려보았다.

“북부대공......!”

기껏 입수한 정보를 이용한 습격도 소용없었다.

준비한 병력의 대부분은 대공포에 쓸려 박살났다.

그들이 자랑하는 기마대는 와이번에게 밀려 힘도 써보지 못했다.

그나마 남은 병력은 골렘에 당해 쓰러졌다.

그 끝에 서있는 것은 오로지 하백, 그 뿐.

하지만 그도 잠시.

-스윽.

하백이 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걸로 정녕 네놈의 승리라고 자신하느냐.”

“......”

그 상대는 북부대공.

단신으로 북부를 지켜온 겨울의 투신이었다.

그만큼 하백, 그 역시 아무런 준비 없이 온건 아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토록 처참히 당할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전쟁은 눈앞의 북부대공만 죽이면 끝나는 판이었으니.

그의 숨통을 끊을 수만 있다면 북부는 별 거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제 숨겨둔 마지막 수를 쓸 차례.

원래는 마을까지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내주마.

동시에 하백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들고 발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파앗...!

무엇보다 그런 그의 검신에 일렁이는 묵빛의 오러.

하백 역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에 발터가 재빨리 그의 검을 받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채앵!

그와 함께 하백의 검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애초에 그의 목적은 발터가 아니었다.

하백이 노린 건 다름 아닌 바닥에 떨어진 제 오른팔.

그대로 하백이 황급히 들고 있던 검을 거두며, 자신의 오른팔을 챙겼다.

그리고 머지않아.

하백이 발터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잘 보아라. 이것이 바로...주술의 힘일지어니!”

하얀 설원을 따라 울려 퍼지는 하백의 외침.

곧이어 녀석의 가슴팍이 빛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가슴팍에 박힌 검은색의 결정이 빛났다.

-콰아아앙!

마치 전이석 혹은 마광석 따위를 연상케 하는 결정.

그를 따라 거센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충격파를 일으킬 만큼 폭발적으로 몰아치는 마나의 폭풍.

-우득, 콰드득!

그와 함께 하백의 몸이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동시에 그때였다.

녀석의 잘린 어깨를 따라, 기괴한 촉수가 나와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그대로 실로 상처부위를 엮듯, 촉수가 움직이며 팔과 어깨를 봉합하니.

스르륵, 그의 잘린 오른팔이 어깨에 붙어 빠른 속도로 재생되었다.

그렇게 하백이 완전히 붙은 제 오른팔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펼쳤다.

-꾸국...!

그러고는 하백이 검을 고쳐 잡으며 비소를 날렸다.

“보았느냐. 이것이 주술의 힘.”

그리고 그 효과는 비단 잘린 팔을 붙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으나.

퓻, 순간 하백의 신형이 흩어지며 재차 발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방금 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상승한 속도.

-츠츠츳...콰아아!!

거기다 그의 검신을 따라 솟아나는 묵빛의 오러.

하나 그 형상의 전과는 사뭇 달랐으니.

그 모습이 그야말로 오러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검, 검강(劍罡)이었다.

본디 그는 검강을 쓰기에는 모자란 검사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해준 주술이.

제 가슴팍에 박힌 검은 결정이 이를 가능케 하였다.

대신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물이 필요했다.

그것도 수많은 제물이.

회귀 전에도, 지금도 그가 전쟁을 일으키려 한 이유였다.

“북부를 넘본 값으로 팔 하나면 충분하다 했느냐?”

“......”

“그렇다면 섣불리 승리를 확신한 오만의 값은 네놈의 목숨으로 치르도록 하여라!”

-쉬이익!

그대로 발터의 목을 노리고 쏘아지는 하백의 검강.

비록 그 형태가 다소 불안정하다고는 한들.

하백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방금 전이라면 모를까.

눈앞의 북부대공은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

검은 결정을 사용해 한 단계 경지를 뛰어넘은 제 검강을 막아낼 리가 없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고맙군. 하백.”

“......”

“과거와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다.”

철컥, 발터가 제 검을 쥐어 잡으며 조소했다.

그와 함께 발터의 검을 따라 몰아치는 서리.

-콰아아아...!

곧이어 그의 검신을 따라 새하얀 겨울의 칼날이 솟아올랐으니.

그리고 그 이름은 하백의 것과 똑같은 검강, 즉 오러 블레이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검사만의 전유물이었다.

“어, 어떻게...네놈이 검강을......”

이에 하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나 그 의문이 끝나기도 전.

-콰아아아아앙!

하백과 발터, 둘의 검이 격돌하며 커다란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이에 사방으로 눈발이 폭발하며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흐릿하게 보이는 눈발 사이.

-끼기긱...콰가가각!!

하백의 눈앞에 펼쳐진 찰나의 순간은.

시리도록 새하얀 오러 블레이드가 제 검신에 맺힌 묵빛의 오러를 가르는 풍경이었다.

-푸스스...

그대로 허망하게 흩어지는 묵빛의 검강.

직접 보면서도 차마 믿을 수 없는, 아니 그래서는 안 될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으득...콰악!

하백이 이를 악물며 제 가슴팍에 박힌 검은 결정을 부여잡았다.

그와 함께 재차 빛을 발하는 검은 결정.

이렇게 된 이상 남은 힘을 전부 폭발시킨다.

그 과정에서 하백, 그 역시 피해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결정의 재생력이라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터.

이른바 육참골단(肉斬骨斷).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할 셈이었다.

그리고 폭발을 막을 방법은 오직 가슴팍의 결정을 깨부수는 것뿐이니.

이를 처음 보는 상대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그의 마지막 비기였다.

동시에 검은 결정이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이걸로 전부 끝내주.....!”

돌연 퍼억, 하백의 가슴팍을 꿰뚫은 검 한 자루.

-쩌적...챙그랑!

그대로 검은색의 결정이 박살나며 그 파편이 눈부시게 흩날렸다.

그와 함께 쿨럭, 하백이 붉은 핏물을 토해냈다.

앞서 말했듯 폭발을 막을 방법은 오직 하나.

그 근원, 그러니까 검은 결정을 박살내는 것뿐.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모든 걸 간파하기라도 한 듯.

발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가슴팍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네, 네놈이...어찌하여 이를......!”

하백이 피를 토해내며 발터를 부릅 째려보았다.

잔뜩 핏발이 선 채.

세차게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

“......”

하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발터의 황금색 눈동자는 차갑게 내려앉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으니.

그가 콰득, 검을 비틀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폰 바이에른. 죽는 순간까지도 그 이름을 잊지 말거라.”

“그게 무...슨......”

“네 주술의 파훼법을 알려준 기사의 이름이다.”

발터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가슴팍에 검이 박힌 채 비틀거리는 하백.

그리고 그 발치를 따라 반짝이는 검은 결정 파편.

그 풍경은 회귀 전.

발터가 하백, 그의 숨통을 끊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

국경지대에 위치한 하얀 설원 위.

눈 폭풍이 몰아치는 극한의 전장을 따라.

마침내 발터의 검이 하백의 심장을 꿰뚫었으니.

-콰직...!

발터가 천천히 제 검을 뽑았다.

그와 함께 주르륵, 검은 피가 흘러내리며 하백의 몸이 고꾸라졌다.

동시에 발터가 아무 말 없이 제자리에 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휘이잉...

황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설원.

그 주변은 마치 커다란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주변의 땅이 움푹 파여 검게 불타있었다.

-타닥, 푸스스...

그대로 한 번 발을 내딛을 때마다.

검붉은 잿불이 흩날렸다.

하백이 일으킨 폭발로 인한 여파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터는 계속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멈칫, 마침내 그의 발걸음이 멎었으니.

그 앞에는 새하얀 머리칼의 노기사가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새액새액,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미약한 숨소리와 그 아래 흥건한 피 웅덩이.

-......바이에른 경.

발터가 무릎을 꿇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 폰이 힘겹게 제 눈을 떴다.

그대로 그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도련님.

하나 그리 말하는 폰의 몸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오른쪽 얼굴을 제외한 온 몸은 검게 불타있었으며, 제 왼팔과 다리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였다.

-하백은...쓰러트리셨습니까?

-그래. 자네 덕분이네.

-잘하셨습니다.

폰이 힘겹게 남은 오른팔을 들어 발터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대로 폰이 메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역시 우리 도련님다우십니다.

어릴 적, 그가 발터의 검을 봐주던 시절부터.

그의 도련님이 훌륭히 지도를 따라올 때면 항상 하는 칭찬이었다.

야만족의 수장, 하백의 마지막 주술.

하마터면 그 주술에 도련님이 당할 뻔했다.

하나 다행이었다.

폭발에 휘말린 게 도련님이 아닌 제 자신이라서.

곧이어 발터가 꾸국, 제 주먹을 움켜쥐며 그를 부축했다.

-폰. 일어설 수 있겠느냐.

-아무렴요. 이 정도 상처쯤은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폰이 애써 괜찮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가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그러니 제 걱정은...안하셔도...쿨럭!

시린 눈발 아래.

폰의 입가를 따라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대로 발터가 작게 떨려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말거라.

잿빛 성에 돌아갈 때까지만.

제발 그때까지만 버텨주게.

발터가 애원하듯 작게 읊조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쇼. 도련님.

-......

-전 그저 제 본분을 다 했을 뿐입니다.

폰이 발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싱긋 웃었다.

그 작은 도련님이 어느새 이렇게 성장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제...다...크셨군요.

이에 발터가 으득, 제 이를 악물며 말했다.

-폰. 조금만 참거라. 이제 곧 마탑의 마법사들이 올 것이다.

마탑의 마법사들만 오면.

이깟 상처쯤은 손쉽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 말에 폰이 아무런 대답 없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대로 머지않아.

폰이 발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련님. 이제는 은퇴할 때가 온 거 같습니다.

-안 된다. 윤허하지 아니한다.

발터가 제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대로 그를 보낼 수는 없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 그 와중에도 폰의 호흡은 점차 미약해져 갔으니.

그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힘겹게 입을 떼었다.

-그간...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영광이었...습니......

그리고 그 순간.

-투욱...

검게 불탄 폰 손이 바닥에 떨어졌다.

차마 끝맺지 못한 마지막 인사.

그것이 폰 바이에른의 유언이었으니.

그렇게 유독 차가웠던 겨울의 전쟁은.

북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

그리고 다시 지금.

발터가 제 아래, 가슴팍에 검이 박은 채로 비틀거리는 하백을 내려다보았다.

그때와 같은 풍경이었다.

하지만 폰의 희생으로 마무리 되어야했을 결말만은 달랐다.

“하백, 네놈이 그랬지?”

“......”

“오늘부로 북부의 주인이 바뀔 것이라고.”

그대로 우우웅, 발터가 마나하트에 있는 마나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주변을 따라 차가운 서리가 피어올랐다.

이에 하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 네놈 설마...이대로...!”

북부대공, 레비오르 가(家)특유의 기운.

그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전해 들었다.

그만큼 하백이 황급히 발터의 검을 떨쳐내려 들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눈앞의 발터는 꿈쩍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꾸드득, 그가 한 차례 더 손아귀에 힘을 주며 깊게 검을 박았다.

“커헉...끄으윽!”

심장을 가르는 끔찍한 격통.

이에 하백의 이빨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발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더더욱 강하게 검을 다잡으며 말했다.

“하나 똑똑히 기억하거라.”

“......”

“앞으로도 북부의 주인은 오직 레비오르 뿐.”

발터 레비오르.

이는 북부의 유일한 주인이자, 영원한 주인의 이름이리라.

곧이어 발터의 마나하트에 반응해 그의 검신이 새하얗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다시는 나의 것을, 나의 땅을 탐하지 말거라.”

“아, 안 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어리석은 용의 아이여.”

동시에 그 순간.

콰직. 발터가 끝까지 검을 박아 넣으며 오러를 폭발시켰다.

-쩌적...콰드드득!!

그렇게 새하얀 검신이 하백의 심장을 꿰뚫음과 함께.

그의 등 뒤로 수십 개의 얼음가시가 솟아올랐으니.

-챙강!

국경지대에 위치한 하얀 설원 위.

전쟁의 끝을 알리는 얼음 꽃이 흩날렸다.

70화 공사 현장의 에이스 삼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