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공사 현장의 에이스 삼형제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용의 아이들의 영역에 위치한 대평원.
드넓은 설원이 펼쳐져 있는 그곳을 따라, 노란 안전모에 형광 조끼를 걸친 인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라이! 오라이!”
그대로 빨간 봉을 흔들고 있는 인부 하나가 와이번을 착지시켰다.
그러자 그에 맞춰 와이번 여럿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순서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쿠웅...!
무엇보다 그런 와이번들의 등과 짐칸에는 온갖 건축 자제가 실려 있었으니.
그와 함께 다른 인부들이 와이번의 짐을 내리며 각자 세션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케이! 좀 더 왼쪽으로!”
“좋아. 그대로 박아버려!”
-쿠궁, 쿠궁!
대평원 위. 노랗게 표시해둔 작업선을 따라.
골렘 수십 기가 움직이며 땅을 갈아엎고, 그 위에 건물의 뼈대가 되는 기둥을 세우고 있었다.
이어서 하얀 뼈다귀들이 양 손에 줄자와 망치를 든 채.
-타다닷!
골렘의 어깨와 기둥 사이를 뛰어다니며 수치를 재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용아병.
동시에 작업현장에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관제탑.
“완벽해. 아주 완벽해.”
발터가 흡족한 표정으로 완드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국경지대에서 있었던 야만족과의 전쟁.
그리고 전장 한 가운데서 발터가 피어낸 겨울의 꽃.
그 후 얼음 꽃이 녹을 즈음에는 전쟁은 완벽한 북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애초에 야만족은 대공포 포격으로 인해, 병력의 반이 피해를 입은 상태.
그 후 이어진 와이번 대대와 골렘은 남은 병력은 차근차근 제거해나갔다.
거기다 그 끝에는 그들의 수장, 하백마저 발터의 검에 당해 쓰러지지 않았는가.
이에 목숨을 부지한 소수의 야만족은 빠르게 항복을 택했다.
그만큼 그들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저항하는 것은 개죽음밖에 안 된다는 것을.
그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북부는 사전에 륜과 약속한대로 대평원을 받아냈으며.
그 즉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보는 그대로.
작업에 필요한 재료수급은 와이번을 통해 빠르게 운송했으며.
특히 시간이 많이 걸리는 토목작업은 골렘이 담당하여 처리.
위험한 세부작업은 용아병이 나서 해결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분업화 시스템이 아닌가.
덕분에 공사현장은 노스스파를 개발할 때보다 훨씬 더 빠르고 완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와이번도 와이번이지만.
공사현장에 있어 골렘과 용아병의 성능은 상상이상이었다.
그도 그럴게 골렘은 따지고 보면 중세의 걸어 다니는 중장비 수준.
인부 수십이 달라붙어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하는 작업을 그저 한 번에 끝내버리니 그 속도와 효율이 차원이 달랐다.
그렇다면 용아병은 어떤가?
원래대로라면 안전상의 이유로 불가능한 작업들은 전부 용아병이 담당하여 하고 있었다.
그리고 판 사이의 틈이라던가, 협소한 작업구역이라던가.
사람이 도저히 들어가기 힘든 곳은 제 팔이나 다리 따위를 떼서 던지면 그만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마력보충만 제대로 해준다면 24시간 풀 오토로 작업을 돌릴 수 있다는 부분.
덕분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사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으며.
그만큼 공사속도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당장 벌써부터 건물의 뼈대가 보이는 게 그 증거.
이에 작업반장을 도맡아 하던 루시엘조차 감탄을 금치 못했다.
“햐...저거 참으로 물건일세...”
루시엘이 골렘과 용아병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번 노스스파 때는 산지에서 작업해야 하는 불편함을 와이번으로 한 큐에 해결해버리지 않나.
이번에는 아예 골렘과 용아병을 사용해 힘든 작업을 전부 처리하고 있었다.
이는 대륙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공사의 혁신.
그리고 이만한 설비를 갖춘 공사현장은 북부가 유일했다.
명장이 모여 있는 걸로 유명한 드워프들조차도 이를 본다면 한 수 접고 갈 정도.
“어떻습니까. 공사의 혁신을 직접 두 눈으로 목도한 소감이?”
그대로 발터가 루시엘을 향해 히죽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피식 헛웃음을 터트리며 제 엄지를 치켜 올렸다.
“끝내주는구만.”
“당연하죠. 누가 있는 땅인데.”
발터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이곳이 어딘가.
장차 최고의 땅이라 불릴 북부.
동시에 발터는 이보다 더 발전될 북부의 미래를 그리고 있었으니.
이는 미래로 도약할 시발점이 될 터.
곧이어 발터가 제 옆에 있는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럼 영감님이 보기에 지금 이 속도라면 완공까지는 얼마나 걸릴 거 같습니까?”
“이 속도라면......”
그와 함께 흐음, 루시엘이 제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가 제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말했다.
“아무리 늦어도 예상했던 것보다 3배 더 빨리 완공될 터다.”
공중보급 와이번.
토목공사 골렘.
세부작업 용아병.
이렇게 공사 현장의 에이스 삼형제만 있다면 앵간한 작업은 기존보다 몇 배는 빠르게 진행할 수 있었다.
그건 당장 지금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루시엘이 예상한 완공시점은 기존 작업기간보다 무려 3배가 줄어든 기간이었으니.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속도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발터님. 여기 계셨군요.”
시린 은발의 기사, 레닌이 관제탑을 향해 다가왔다.
그 모습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닌? 무슨 일이지.”
“잿빛 성에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대공님과 접견을 요청하더군요.”
그 말에 발터가 저 멀리, 잿빛 성을 바라보았다.
야만족과의 전쟁이 끝난 직후.
접견을 요청했다면 륜, 그녀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막무가내로 쳐들어오지는 않았군.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작게 웃었다.
“알겠다. 바로 내려가지.”
그와 함께 발터가 루시엘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공사현장은 믿고 맡기도록 하죠.”
“오냐. 수고해라.”
“예, 그럼 루시엘님도 뺑이치십쇼.”
“뭐 임마?”
이에 루시엘이 미간을 와락 구겼다.
하나 루시엘이 말이 끝나기도 전.
발터가 히죽 웃으며 관제탑에서 뛰어내렸다.
“나중에 봅시다. 영감님”
그대로 펄럭, 발터가 검은 모피코트가 휘날리며 아래로 사라졌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잿빛 성의 집무실.
그곳에는 발터와 륜이 마주앉아있었다.
-달칵...
그리고 머지않아.
레닌이 콜하임 티가 담긴 찻잔을 건네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북부의 콜하임 티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륜이 두 손으로 공손히 찻잔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레닌이 정중하게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한 번 드셔보시죠. 대공님께서 유독 좋아하시는 차입니다.”
“......그렇습니까?”
그 말에 륜이 콜하임 티와 발터를 번갈아보았다.
동시에 발터가 어서 마셔보라는 듯. 까닥 손짓했다.
그와 함께 조심스레 차를 마시기 시작하는 륜.
-흠칫!
그대로 륜이 미각을 강타하는 강력한 쓴맛.
이에 읏,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먹기에는 조금, 아니 상당히 썼다.
그러나 그녀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푸, 풍미가 좋군요.”
“그래. 쌉싸름한 맛이 인상적이지.”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륜은 쓴맛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니.
레닌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설탕, 넣어드릴까요?”
“......!”
그대로 순간 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아차 싶었던지 크흠,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 그럼 조금만......”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레닌이 스푼을 들어 설탕 한 스푼을 넣었다.
하나 여전히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륜의 눈빛.
이에 레닌이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더 넣어드릴까요?”
그런 레닌의 물음에 륜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네......”
그리 말하는 륜의 귓불은 어느새 새빨갛게 물들어있었으니.
레닌이 희미하게 웃으며 한 가득 설탕을 넣어주며 말했다.
“그럼 맛있게 드시길.”
“......감사합니다.”
그 모습에 발터가 작게 미소 지었다.
마치 회귀 전, 둘의 모습을 보는 듯하였다.
-설탕, 넣어드릴까요?
-음. 설탕대신 레닌님의 사랑스러운 미소 한 스푼은 안 되나요.
-헛소리 그만하고 드십쇼.
-아, 왜요!
-그것도 병입니다. 병.
항상 그리 아웅다웅하던 둘.
비록 그때 그 모습은 아닐지라도.
레닌과 륜, 둘이 같이 있는 모습에 발터가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둘을 바라보았다.
“......발터님.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이에 레닌이 발터를 살펴보며 물었다.
그러자 곧 그가 별 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싱긋 웃었다.
“아니다. 잠시 옛날 생각이 나서 말이다.”
“......”
그와 함께 륜이 흘깃 발터를 바라보았다.
뭐지. 방금 설탕 넣은 거 때문에 그런가.
곧이어 그녀가 그를 향해 대답했다.
“오, 오늘만 그런 거예요.”
“예예, 어련하시겠어요.”
“......흥.”
그대로 륜이 재차 콜하임 티를 마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행히 입맛에 맞는 듯.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흐음. 향이 참 좋군요.”
이에 발터가 쯧, 혀를 찼다.
아 예. 퍽이나 그러시겠어요.
설탕향이 좋은 거겠죠.
하여간 알기 쉬운 녀석 같으니.
모른 척 하려해도 줄줄 흐르는 저 속마음을 보아라.
이럴 때마다 눈앞의 륜이 과연 회귀 전의 그녀가 맞는지 의심되었다.
아무튼 그도 잠시.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차례.
곧이어 발터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서 지금 용의 아이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 말에 륜이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르게.
차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보다 훨씬 나아졌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들의 피해도 없을뿐더러 더 이상의 위기도 사라진 셈이니까요.”
하백의 습격이 있기 전.
한편으로는 정말로 그가 마을에 돌아오기 전.
전쟁을 끝낼 수 있는지 걱정했다.
하나 지금의 마을은 평온하기 그지없었으니.
정말로 그가 말한 것처럼.
단시간에 전쟁을 끝낸 북부대공, 그의 활약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용의 아이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륜이 발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마을의 피해는 심각했을 것이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어쩌면 제 자신조차 목숨을 잃을 수도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전쟁 중일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전쟁이 끝난 후일수도 있었다.
만약 하백이 이겼다면 전쟁이 끝난 후.
그가 아버지를 비롯하여 자신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으니까.
그만큼 그녀는 발터에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물었다.
“마을 내에서는 반대는 없었느냐?”
제 아무리 전쟁을 막기 위해, 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라고 한들.
북부와 손을 잡았다는 선택에 반대를 표하는 녀석은 있기 마련.
이에 그녀가 대답했다.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하나 과반수이상의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
“제 아버지 또한 그랬고요.”
그녀의 아버지. 그러니까 지금은 병상에 누워있는 용의 아이들의 수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가 수장으로 있을 때도.
북부와 마찰을 아예 빚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나 그 횟수나 규모나 서로 전면전으로 커질 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그나 발터나 둘 다 제 땅의 사람들을 아꼈으니 말이다.
그만큼 애초에 발터가 대공포를 만들며 그들의 침략에 대비했던 것 또한 어디까지나 전부 하백 때문.
회귀 전, 하백이 수장의 자리를 차지한 후로는 그 습격의 빈도와 규모가 눈에 띄게 늘어났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나 이번에는 그가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맺음을 지었으니.
하백을 따르던, 그러니까 북부와 전쟁할 의사가 있는 녀석들은 전부 처리한 셈이었다.
그만큼 북부와 현재 마을에 남은 용의 아이들이 마찰을 빚을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머지않아 륜, 그녀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용의 아이들을 이끈다면 더더욱 그럴 터.’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륜이 제 품속에서 붉은 족자를 하나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하여 이 기회에 북부와 한 가지 더 약속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이건......”
탁자 위에 붉은 족자.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천천히 붉은 족자를 펼쳐보았다.
-촤륵...
그 내용은 다름 아닌 북부와 공식적으로 화친을 제의하는 서신.
회귀 전, 마지막으로 륜과 이야기했던 그 날.
그녀가 보여준 서신이었다.
-이미 아버지를 비롯한 장로 분들과는 이야기 해뒀습니다. 다행히 다들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그만큼 이번 건이 성사되면 그때는.
제가 직접 마을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날, 잿빛 성의 집무실에서 륜이 발터의 손을 잡고 했던 약속이었다.
동시에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한껏 들뜬 미소가 자리했으니.
-약속한 겁니다. 발터님.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발터를 바라보았다.
하나 그날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때의 서신을 지금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이야.
“......”
서신을 매만지는 발터의 손끝이 흔들렸다.
그와 함께 눈앞의 륜이 말했다.
“이미 아버지를 비롯한 장로 분들과는 이야기 해뒀습니다. 다행히 다들 긍정적인 반응입니다.”
그때와 똑같은 말이었다.
이에 멈칫, 떨려오던 발터의 손끝이 멎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발터가 희미하게 웃으며 륜을 바라보았다.
“좋다. 화친을 맺도록 하지.”
“......정말이십니까.”
동시에 륜의 얼굴을 따라 한껏 들뜬 미소가 자리했다.
어찌 그 미소마저도 과거와 똑같은지.
그대로 발터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대신 한 가지 부탁할게 있다.”
“네? 부탁이라면......”
그와 함께 스윽, 발터가 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네가 직접 마을을 안내해줄 수 있겠느냐.”
회귀 전, 륜이 발터와 맺은 약속이었다.
“......네?”
그 말에 륜이 멍하니 발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좋아요. 제게 맡겨주시죠.”
륜이 싱긋 웃으며 발터의 손을 잡았으니.
과거에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그날의 약속이.
비로소 지금에 이르러 다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71화 은밀하게 위대하게(1)
륜, 그러니까 용의 아이들과 화친을 맺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사이 평야지대의 공사는 빠른 속도를 자랑하며, 아무 문제없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하물며 알케인의 무덤과 노스스파를 찾는 학자들과 관광객들은 여전히 문전성시.
덕분에 북부는 평화롭기 그지없었으니.
발터 또한 그 나름대로 여유로운 일상, 그러니까 힐링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는 사실 발터의 입장에서야 힐링이지.
레닌을 비롯한 제 3자가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당장 일주일 전에도 발터는 집무실에서 서신을 확인하며 서류를 처리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에 레닌이 말했다.
-발터님. 분명 힐링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왜. 맞지 않느냐. 힐링.
발터가 서신을 확인하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하아, 레닌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과연 제 주군이 힐링이라는 단어를 알까.
물론 그는 더 이상 예전처럼 며칠이고 밤을 새지도.
빚을 변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도.
돈을 빌리기 위해 다른 귀족들에게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돌아보면 제 주군은 제 앞에서 당당히 힐링 선언을 한 이후로.
지금껏 쭉 북부개발에 몰두하였으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중독인건 변함이 없었다.
-레닌.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거라.
-......
-나는 내 땅을 지키고 키우는 게 곧 힐링이다.
발터가 펜을 멈추고 레닌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그 말에 레닌이 멍하니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아아, 그래. 제 주군은 항상 이런 사람이었지.
레닌이 그리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점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아무튼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
일주일이 지난 잿빛 성의 집무실.
“......”
발터가 아무 말 없이 창밖에 자리한 애쉬폴 산맥을 바라보았다.
북부는 달라지고 있었다.
지금의 북부는 더 이상 그저 춥기만 하고 황량한 땅이 아니었다.
하나 북부는 더 나아갈 것이다.
당장 육상이나 해상 교역로를 확장한다거나.
자원을 키우고, 교류를 늘리는 등.
아직 할 게 많았다.
그리고 그만큼 앞으로 북부를 노리는 자들이 생길 것이다.
크레핀이 그랬으며, 하백이 그러했다.
무엇보다 이런 자들이 더 늘어나지 않으리라는 자신은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미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발터가 저번의 하백과의 전투를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마지막 순간, 그가 사용했던 주술의 힘.
이는 회귀 전에도 겪은 힘인 만큼.
처음에는 그저 용의 아이들 사이에서 전승되는 주술 중 하나라 여겼다.
하지만 후에 륜에게 물어본 결과.
하백의 검은 결정은 용의 아이들이 사용하는 주술과는 전혀 다른 종류.
오히려 대륙의 마법, 그중에서도 흑마법과 가까운 종류의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근 하백이 외부의 세력과 접촉을 시도한 정황이 발견되었다 하니.
륜은 현재 그 배후를 파헤치고 있는 중이라 전하였다.
그렇다면 그 말은 곧.
회귀 전에도 하백과 접촉한 외부의 세력이 있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물론 하백이 흑마법을 쓰든, 흑마늘을 쓰든 그건 전혀 알 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화살이 북부에게 향한다면.
그때는 발터 역시 참지 않을 것.
그대로 그가 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꾸구국...!
단순히 회귀 전의 지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따로 정보를 얻을 수단을 마련해두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문 바깥을 따라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레닌이었다.
“발터님. 리버 양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련장에서 리버의 검을 봐주는 것.
그것이 요새 일처리를 제외한 발터의 소일거리이자, 힐링이었으니.
발터가 벗어두었던 검은 모피코트를 걸치며 작게 웃었다.
“그래. 바로 나가지.”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잿빛 성 뒤편에 위치한 연무장.
그곳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리버와 발터가 검을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한데 모여 이를 바라보는 북부의 기사단들.
-챙! 채앵! 끼기긱...채앵!
그대로 연무장을 따라 공방을 주고받는 병장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이어 리버가 파앗, 안쪽으로 파고들며 검을 내질렀다.
마치 바람을 탄 듯 재빠른 발걸음과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엘프마을에서 배운 엘프족 특유의 보법과 북부의 검술을 섞은 공격이었다.
-피잇!
그 결과. 그 기세가 날을 죽인 가검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기 그지없었으니.
실로 매서운 공격이었다.
하지만 발터가 능숙하게 그녀의 검을 막아내며 말했다.
“제법이구나.”
불과 몇 달 전.
처음 리버의 요청으로 대련을 받아들일 때만해도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나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눈앞의 리버는 놀라운 기세로 성장하였으니 이제는 제법 검에 무게를 실을 줄도 알았다.
단순히 재능만 두고 본다면 같은 나잇대 아이들과는 궤를 달리할 정도.
그러나 그도 잠시.
공격직후 미세하게 무너진 리버의 자세.
그리고 발터가 이를 놓칠 리가 없었으니.
-파앗...채앵!
발터가 검을 올려 베기 무섭게.
리버의 검의 그녀의 손아귀를 벗어나 공중을 날았다.
그대로 챙그랑, 검이 바닥에 떨어지며 그녀가 휘청거렸다.
“공격 직후 왼발에 과하게 무게가 실렸다. 리버.”
발터가 리버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와 함께 그녀가 발터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대공님.”
그러자 발터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 저번에도 말했지 않느냐. 이렇게 매번 사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저번보다 자세가 훨씬 나아졌으니 칭찬해주마.”
그러면서 발터가 리버의 잿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실제로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지 않는가.
“특히 마지막 공격에 무게가 실린 건 아주 잘했다.”
“......감사합니다.”
그런 발터의 칭찬에 리버가 애써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여전히 칭찬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대련을 지켜보고 있던 폰과 레닌을 향해 물었다.
“자네들도 그리 생각하지?”
동시에 폰과 레닌이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씩 거들었다.
“맞습니다. 지금 리버 양의 실력이라면 같은 나이에서는 겨룰 자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러니 좀 더 자신을 가져도 좋을 거 같군요.”
“아, 글쎄 이 정도면 신동 아닙니까?”
“천재지. 천재!”
그와 함께 다른 북부의 기사들까지 합세하기 시작하니.
실시간으로 리버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 쐐기를 박는 발터의 한마디.
“소감이 어떠십니까. 검의 천재 양?”
“아,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그 말에 리버가 휙 고개를 들며 황급히 양 손으로 발터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당장에라도 터질 듯 붉게 물든 그녀의 얼굴.
그대로 리버가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계속 이러실 거예요?”
빤히 그를 바라보는 붉은 눈망울.
이에 발터가 재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그래. 여기까지만 하겠다. 미안하구나.”
“아, 아니...그렇다고 대공님이 미안할 거까지는 없지만......”
미안하다는 발터의 말에 리버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리버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신 앞으로는 하, 한 번만 하기로 약속해주세요.”
결심에 찬 리버의 한 마디.
제 딴에는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그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이에 결국 발터를 비롯한 북부의 기사단들이 저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크하하! 앞으로 한 번이면 아껴서 써야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유념해야겠습니다.”
그 중 폰은 흐뭇함을 넘어, 아예 이대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니.
그 옆에 있던 기사단들이 그를 걱정할 정도였다.
“단장님, 정신 차리십쇼!”
“허허...좋지 아니한가...”
물론 리버는 왜 이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
그와 함께 발터가 피식 웃으며 리버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래. 내 약속하마.”
그렇게 잿빛 성의 연무장.
평화로운 북부의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대륙의 북부 근처에 있는 크고 작은 영지.
그리고 그중에서 북부와는 고작 산 하나를 사이에 둘만큼 가까운 길버트 자작의 성.
그곳에서 누런 머리칼의 중년남성이 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젠장......”
그의 이름은 길버트 하르멘.
대륙의 자작이자, 북부와 가장 가까운 영지의 주인이었다.
그대로 그가 쯧, 혀를 차며 미간을 좁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빚을 더 만들어둘걸 그랬어.”
동시에 그런 그의 탁자에는 서신 여럿이 놓여있었으니.
이는 다름 아닌 과거 북부대공이 자신에게 보낸 서신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채무를 조금만 미뤄달라는 게 대부분.
당시의 북부는 한창 빚에 허덕이고 있을 시기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그때의 길버트는 채무를 갚을 능력이 없으면 나가서 뭐라도 팔아오라며 북부를 닦달하곤 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발터에게 기간을 늦추고 싶으면 직접 얼굴을 보이라거나, 성의를 보이라는 둥.
은근슬쩍 그를 무시하였다.
그러다 발터가 직접 방문하여 선물이라도 들고 오는 날에는 성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트집을 잡기도 했다.
하나 언제부턴가 그는 더 이상 북부를 닦달할 수 없었으니 그 이유는 간단했다.
북부가 그간의 채무를 한 번에 갚아버렸기 때문.
그 시기가 대략 노스메디를 개발하고 한창 마광석을 유통할 때의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솔직히 북부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어디서 돈이라도 끌어온 모양이겠거니.
생각하며 그렇게 북부는 그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한데 웬걸.
노스메디는 왕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명실상부한 북부의 특산물로 자리 잡았으며, 북부의 마광석은 유독 질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거기다 설마하니 그 대연금술사 알케인의 무덤이 북부에 있을 줄이야.
하물며 노스스파는 또 어떠한가.
그 와중에 북부대공은 왕국의 반역자를 제거하고 왕가 일가를 구출해내며 왕도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덕분에 북부에 몰리는 손님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며 말 그대로 떼돈을 벌고 있으니.
그 근처에 있는 길버트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니 모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에 길버트는 요새 배알이 꼴려 잠도 제대로 못 잘 지경.
그도 그럴게 그때 잘만했으면 북부의 광산이, 알케인의 무덤이 제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 둘의 위치는 길버트의 영지 끝자락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니.
“만약 그때 채무로 애쉬폴 산맥을 가져왔다면......!”
지금 북부가 벌어들이는 돈이 전부 자신의 주머니에 꽂혔을 터였다.
하지만 이는 전부 한 발 늦은 일.
그대로 길버트가 아득바득 이를 갈며 제 탁자를 내리쳤다.
“제기랄!”
하나 그도 잠시.
제 주먹을 강타하는 고통에 길버트가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매만졌다.
아무튼 지금에 와서 이리 잘되고 있는 북부를 두 눈뜨고 바라보자니 아주 속이 쓰리다 못해 아려왔다.
물론 이는 전부 처음부터 북부의 것이었지만, 길버트는 뜬 눈으로 자신의 것을 북부에 뺏겼다고 단단히 믿고 있었다.
그만큼 그가 제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저걸 다시 되찾아오는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고민하던 그가 돌연 히죽 웃었다.
“......어쩔 수 없군.”
그 방법을 쓸 수밖에.
그가 그리 생각하며 허공을 향해 말했다.
“크루거.”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분명 아무도 없던 그의 집무실을 따라.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복면을 쓴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륵...처억.
유독 어두운 피부색의 남성.
무엇보다 그런 그의 귀는 길게 뻗어있었으니.
그 정체는 다크엘프.
그 특유의 기감과 빠른 발로 주로 암흑가에서 활약하는 종족이었다.
그 중에서도 녀석은 자작가가 부리는 유능한 노예로.
단순 정보탐색이나 타겟감시부터 심지어는 암살까지 가능한 자였다.
그리고 길버트 하르멘, 그의 특기는 눈앞의 크루거를 이용해 은밀하게 삼대의 약점을 잡아 이를 교묘하게 써먹는 게 아닌가.
그는 지금껏 이를 통해 수많은 귀족들의 약점을 비롯한 정보를 파헤쳐 이득을 취해온 만큼.
이번에도 그를 적극 이용할 셈이었다.
그대로 길버트가 그를 향해 명령했다.
“타겟은 북부대공. 목표는 전과 똑같다.”
북부로 잠입해 약점이든 정보든 뭐든 전부 캐와라.
그 과정에서 노스메디의 제조법이라거나.
숨겨진 정보를 가져오기만 해도 성공.
무엇보다 지금껏 그를 보내 걸린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는가.
이번만큼은 그 북부대공이라 한들 쉬이 눈치 챌 수 없을 터.
그와 함께 길버트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뭐하느냐. 당장 안 꺼지고.”
“......”
이에 머지않아 퓻.
길버트의 집무실을 따라 다시 그의 신형이 흩어졌으니.
그 그림자가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북부였다.
72화 은밀하게 위대하게(2)
대륙의 북부.
과거에는 그저 황량한 극한지에 불과하던 땅.
하나 이제는 노스메디와 노스스파의 흥행과 더불어 대연금술사 알케인의 무덤까지 발견되면서 북부는 대륙에 새롭게 떠오르는 관광지로 그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그만큼 최근 북부에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왔으며, 그중 롱코트를 걸친 노신사도 그러했다.
그대로 그가 북부에 발을 내딛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윽.
그 주변에는 연금술사를 비롯한 학자부터 상인과 귀족들까지.
제법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 역시나 귀족.
이만한 귀족들이 북부까지 행차하다니.
확실히 왕도에서의 노스메디의 영향력이 대단하긴 한가보군.
그가 그리 생각하며 인파 속 섞여있는 상인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끄덕.
그와 함께 노신사와 상인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흩어졌다.
그리고 잠시 뒤.
인적이 드문 골목을 따라.
-쉭, 쉬익!
검은 그림자가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전부 인파 속에서 봤던 얼굴들이었다.
곧이어 방금 전의 노신사가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하며 말했다.
“......잿빛 성까지 들어가는 루트는?”
이에 상인 녀석들이 재빨리 지도를 꺼내 브리핑했다.
“봐둔 곳은 총 세 군데. 그중 가장 타겟의 위치에 가까우면서도 경계가 적은 곳은 오른쪽 성채입니다.”
그 말에 노신사가 흐음, 제 턱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다. 그럼 이대로 진행한다. 각자 신분이 들키지 않도록 유의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상인들이 고개를 꾸벅 숙임과 함께.
슉, 다시 재빠르게 흩어졌다.
그렇게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진 북부의 뒷골목.
그럼 이제 슬슬 이쪽도 준비해야할 차례로군.
그가 그리 중얼거리며 노신사가 앞으로 발을 내딛었다.
동시에 스륵, 그의 얼굴을 시작으로 팔, 다리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처억.
그가 뒷골목에서 나왔을 때는 노신사는 온데간데없고 웬 로브를 걸친 갈색머리의 청년만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크루거.
하르멘 가의 노예이자, 공작원이었다.
또한 그의 제일가는 특기는 보다시피 변장.
도플갱어의 망토를 기반으로 불과 수초 안에 그 성별과 외형은 물론이며, 목소리까지 바꾸는 능력은 가히 달인이라 불러도 과언이 없었다.
덕분에 그를 중심으로 한 부대는 지금껏 이를 이용해 수십, 수백의 잠입임무를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번 북부대공의 집무실에 침입하는 임무는 다른 임무에 비하면 그 난이도가 쉬운 편이었다.
그야 북부는 한창 관광객들이 모일 시즌이니.
그만큼 북부에 들어오는 건 보다시피 그리 어렵지도 않았으며, 타겟은 그 경비가 삼엄하다거나 경계심이 심하여 따로 안전가옥에 숨어있는 편도 아니지 않는가.
물론 북부대공의 무력에 관한 소문은 자자했다.
회색 곰과 원펀치 다이다이를 깐다거나.
마수를 찢는다거나.
그 진위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무력이 뛰어난 인물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나 그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잠입 후 정보수집.
북부대공의 암살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리하다 싶으면 냅다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아마 이번 임무 또한 별일 없이 성공적으로 끝날 터.
실제로 벌써 북부에 들어옴은 물론이며 타겟의 위치와 동선까지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밤까지 기다리다가 집무실에 잠입하여 정보만 슬쩍 빼오면 그만.
“이번에는 빨리 끝마치고 돌아갈 수 있겠군.”
크루거가 그리 중얼거리며 인파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밤이 찾아온 잿빛 성.
그중에서도 산맥에 막혀있는 오른쪽 성채는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동시에 성채를 따라 수십의 그림자가 발을 내딛었다.
-탓.
얼핏 들으면 누가 착지했는지도 모를 만큼 작은 발소리.
이는 그들이 얼마나 숙련된 어쌔신인지 짐작하게끔 하였다.
거기다 녀석들은 전원 다크엘프로 구성된 집단.
그에 따라 어둠이 자리한 밤은 그들만을 위한 최고의 무대.
그리고 이 사실을 증명하듯 스륵, 그들의 그림자가 어둠 속에 녹아들어 은밀하게 움직였다.
그대로 잿빛 성의 집무실 옆에 위치한 방.
이곳이 바로 북부대공의 침실이었으니.
그들이 열쇠구멍에 철사 두 개를 집어넣었다.
일명 락피킹(lock-picking).
동시에 철사를 능숙하게 움직이며 마지막 섬세한 터치를 곁들인 순간.
찰칵,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그와 함께 검은 그림자 무리가 방안으로 들어갔다.
북부대공의 침실.
그곳은 대공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그리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다.
그저 옷장과 서재, 대리석 탁자와 침대를 비롯한 가구가 전부.
하물며 그 흔한 보석장식조차 보이지 않았으니.
그 풍경이 침실이라기보다는 집무실에 침대를 놓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그간 잠입해온 귀족들의 침실과는 사뭇 다른 모습.
덕분에 다른 방을 착각하여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녀석들이 방 안을 살피며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남성을 확인했다.
방 안은 어둡기 그지없었지만 애초에 다크엘프는 그 종족의 특성상.
밤눈이 밝았기에 크게 상관없었다.
“......”
침대에 누워있는 다부진 체격과 짙은 흑발.
소문대로의 외형과 똑같았다.
이에 녀석들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대로 옷장과 서재, 탁자를 살피는 녀석들.
그 중 한 녀석이 옷장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 보인 것은 검은 모피코트.
북부대공의 트레이드 마트로 알려진 옷이었다.
곧이어 그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도 역시.
“......?”
검은 모피코트가 걸려있었다.
그렇게 검은 모피코트 옆에는 다른 검은 모피코트가 걸려있었으며, 그 옆에는 또 다른 검은 모피코트가 걸려있었다.
뭐지. 데자뷰인가.
옷장에 펼쳐진 검은 모피코트들의 향연에 그가 미간을 좁혔다.
아무튼 옷장에는 별 다른 건 없었다.
이에 그가 이번에는 서재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서재에 정리된 책 사이.
종이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느낌이 왔다.
이건 뭔가 냄새가 난다.
그대로 그가 종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윽...팔락.
리버는 검을 휘두를 때 균형이 무너지는 경향이 있음.
디딤발을 제대로 신경 쓰는 훈련이 필요.
종이에 적힌 내용이었다.
이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내용이지.
하나 그도 잠시.
-처억...!
돌연 녀석의 뒤에 드리운 거대한 검은 그림자.
이에 그가 황급히 침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텅 비어있는 침대.
그리고 그런 제 뒤에는 짙은 흑발의 사내, 북부대공이 서있었다.
“타, 타겟이 일어났......!”
동시에 녀석이 재빨리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하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뻐억...우드득!
발터의 당수가 정확히 그의 모가지에 꽂혔으니.
그대로 커헉, 녀석의 목이 90도로 꺾이며 제자리에 고꾸라졌다.
그 소리에 다른 녀석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쉬익...타앗!
이어서 스릉, 그들이 저마다 허리춤에 찬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와 함께 검은 어둠 속, 반짝이는 시린 빛의 검날.
녀석들이 발터를 주시하며 물었다.
“......어떻게 알아차렸지?”
그러자 발터가 제 발 아래 고꾸라진 녀석을 치우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원래 잠귀가 좀 밝아.”
좀 더 정확히는 맨날 밤새면서 일하다보니 밝아진 거지만.
그러다보니 항상 깊게 잠들지 못해 잠깐 눈을 붙인 정도로만 지내다보니 자연스레 그리 되더라.
발터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
“......”
그대로 침심을 따라 흐르는 정적.
아. 그러셨구나.
유독 잠귀가 밝으셨구나. 우리가 그걸 몰랐네.
이어서 녀석들이 재빨리 품속에서 암기를 꺼내 던졌다.
“그럼 마저 주무시길.”
-쉬익!
그와 함께 녀석들이 일사분란하게 도망쳤다.
하나 그러기 무섭게.
그들의 뒤에서 들리는 기괴한 소리.
-끼기긱...쩌엉!
마치 정과 망치로 대리석을 조각할 때와 비슷한 소리.
“......?”
그대로 이게 무슨 소리지.
녀석들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찰나.
발터가 냅다 한 손으로 대리석 탁자를 움켜쥐고 휘둘렀으니.
“지랄 말고 고대로 스탑.”
“......무, 무슨!”
-콰아아아앙!!
그대로 발터의 침심을 따라 커다란 충격음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사방으로 흩날리는 대리석 파편과 흙먼지.
-푸스스...
그 충격에 도망치던 녀석들이 벽에 처박혀 비틀거렸다.
이런 미친.
저게 정녕 사람새끼인가.
-그그극...!
곧이어 창가에 내리는 달빛 아래.
발터가 반파된 대리석 탁자를 질질 끌고 걸어오니.
녀석들이 움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와 함께 녀석들은 알 수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잿빛 성 내부에 경비가 없는 이유를.
그래. 좀 더 정확히는 있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잿빛 성 내부에 침입하는 녀석들은 대부분 그 목표가 북부대공이었으며, 만약 성 내에서 움직이는 북부대공을 마주친다면 그것은 곧 계획의 실패를 의미했으니 말이다.
“자, 그럼 팔, 다리, 허리 중 선택하거라.”
“......”
“무엇이 반으로 접히고 싶은지.”
그대로 발터가 녀석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이에 녀석들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대로 간다면 꼼짝없이 팔이나 다리, 허리 중 하나는 박살나야 끝날 터.
동시에 그때였다.
콰앙, 누군가 닫혀있던 방문을 박살내며 등장했으니.
그 정체는 바로 시린 은발의 기사, 레닌.
“대공님!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급하게 달려오느라 그런 건지.
평소와는 달리 풀어헤친 은발.
“......!”
이에 녀석들 중 하나가 재빨리 레닌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 밀었다.
“꼼짝 마! 움직이면 이년 목숨은 없을 줄 알아!”
그렇게 그녀의 목 바로 아래 번쩍이는 검날.
-처억...!
그대로 발터와 녀석들이 대치하였다.
곧이어 레닌이 분한 듯 입술을 씹으며 발터와 목 아래 단검을 바라보았다.
“대, 대공님......”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인질로 잡힌 레닌,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변장한 크루거였으니.
크루거가 측근으로 변장해 타겟을 붙잡으면 남은 녀석들은 그 틈을 타 도망친다.
이는 만에 하나라도 잠입 임무가 실패했을 경우 실행하는 플랜 B.
그리고 그의 훌륭한 변장술만큼이나 그 성공률은 꽤나 높은 편이었다.
그건 이번에도 마찬가지.
눈앞의 크루거, 그는 겉으로는 완벽하게 레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상.
제 아무리 북부대공이라 해도 찰나의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북부대공의 부관. 레닌 칼하트.
그녀는 항상 발터와 붙어있는 만큼.
발터 역시 그녀를 아낀다는 정보를 입수하지 않았는가.
당장 그가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것 대신.
가만히 서서 대치하고 있는 지금이 그 증거.
곧이어 레닌을 인질로 삼은 녀석이 가만히 서있는 발터를 향해 말했다.
“그래. 그대로 가만히 있어라.”
“......”
“인질은 우리가 무사히 성을 벗어나면 그때 풀어 주도록 하지.”
그와 함께 녀석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이제 자연스레 잿빛 성을 나서면 끝.
임무의 실패는 뼈아프지만 일단 무사 귀환하는 게 우선이었다.
“혹시라도 뒤를 따라왔다가는 네가 아끼는 부관은 영영 보지 못할 줄 알아라. 알겠......”
그러나 그때였다.
-쉬익!
발터가 냅다 레닌과 녀석들을 향해 달려들었으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그가 꾸구국, 주먹을 움켜쥐었다.
차마 녀석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
아니 애초에 발터가 이리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설마하니 이 상황에 역으로 달려들 줄이야.
곧이어 녀석이 당장에라도 레닌의 목을 찌를 듯 단검을 잡으며 발터를 향해 외쳤다.
“저, 정녕 부관이 죽는 꼴을 봐야......!”
하지만 단호하기 그지없는 발터의 한 마디.
“죽여라.”
“......뭐?”
“하나 이번 기회에 기억해두는 게 좋을 게다.”
그대로 발터가 한 치의 망설임도 주먹을 내질렀다.
“레닌은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머리를 푼 적 없다.”
레닌 칼하트. 그녀는 발터의 앞에서는 항상 어릴 적 그가 선물해준 머리끈으로 머리를 묶고 다녔다.
이는 평소에는 물론이며 심지어 잘 때마저도 지키는 그녀만의 약속이자 버릇.
그리고 발터가 그 버릇을 모를 리가 없었으니.
-콰아아아앙!!
발터의 주먹을 따라 넘실거리는 푸른 오러가 가차 없이 레닌, 아니 크루거를 강타했다.
73화 명분이 생겼다 아닙니까(1)
잿빛 성에 위치한 북부대공의 침실.
그곳에는 박살난 대리석 탁자를 배경으로.
크루거를 비롯한 다른 다크엘프들이 일렬로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으니.
-탁탁.
발터가 대리석 탁자다리를 몽둥이 삼아 어깨를 두드리며 물었다.
“그래서 누가 보냈다고?”
“......”
그 말에 다른 다크엘프들이 힐끗거리며 리더인 크루거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발터가 미간을 구기며 쯧, 혀를 찼다.
“대답.”
그와 함께 우지직, 발터의 손에 들려있던 대리석 탁자다리가 산산조각 났다.
그대로 발터의 발아래 떨어지는 파편들.
그 모습에 녀석들이 흠칫거렸다.
만약 여기서 더 버텼다가는 다음번에 부러지는 건 대리석 탁자다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다리가 될 터.
그리고 머지않아.
“......길버트, 길버트 하르멘입니다.”
녀석들의 리더, 크루거가 마지못해 입을 떼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잠입은 대차게 실패로 돌아갔으며, 플랜 B마저도 틀어졌다.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
그렇다고 무력으로 눈앞의 북부대공을 제압한다?
그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만큼 남은 선택지는 하나.
최대한 순순히 협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발터가 의외라는 듯,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순순히 말하는군.”
사실 처음 녀석들을 심문할 때부터.
그 배후를 깨내는 것은 영 쉽지 않다고 판단.
이참에 북부의 전통 고문법을 하나하나 실행해야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하다못해 ‘큭, 죽여라!’ 따위의 클리셰적인 대사라도 날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건만 이게 웬걸.
이토록 쉽게 대답하다니 예상 밖이었다.
“......살 사람은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대로 크루거가 대답했다.
이에 발터가 녀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글쎄. 내가 언제 살려준다고 했지?”
동시에 사아아,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 근원지는 다름 아닌 발터.
그와 함께 순간 크루거가 자기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숨을 참을 수밖에 없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마치 누군가 제 숨통을 움켜쥐기라도 한 것처럼.
숨 막히는 중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
크루거가 으득, 제 입술을 씹으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대로 그의 입술을 따라 붉은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루거는 기어코 제 말을 이어갔다.
“다만 다른 녀석들만은 살려주시길 간청 드리옵니다.”
“......”
그 말에 제법 흥미로운 듯 발터의 금빛 눈동자가 호선을 그렸다.
이 상황에 살려달라는 게 제 목숨도 아니라, 다른 녀석들의 목숨이라.
그와 함께 발터가 물었다.
“네놈은 길드 소속인가?”
길드, 그러니까 따로 단체에 소속되어 의뢰를 받는 어쌔신인지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이에 크루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의 대답에 발터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길드소속이었으면 이토록 쉽게 의뢰인을 밝힐 리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럼 결국 자작가에 묶인 신세라는 건데.
“이상하군.”
그대로 발터가 크루거와 다른 녀석들을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네놈 정도 되는 어쌔신이 굳이 길버트의 밑에서 일할 이유는 없어 보이네만.”
물론 지금은 보란 듯이 실패하여 잡혀있었으나, 다른 녀석들의 합이나 행동거지로 보았을 때.
꽤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티가 났다.
이 정도면 못해도 입만 산 어중이떠중이들은 아니란 것.
더군다나 녀석들의 리더인 크루거가 보인 변장술.
만약 레닌의 버릇이 아니었다면 발터 또한 꼼짝없이 속을 정도였으니.
겨우 길버트의 밑에서 일할 만한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그건......”
발터의 말에 크루거가 고개를 숙이며 제 말끝을 흐렸다.
당장 발터의 말처럼.
크루거, 그를 비롯한 다른 녀석들은 왕도의 정보길드 소속의 어쌔신과 비교했을 때도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변장술에 있어서만큼은 그를 따라올 자는 손에 꼽을 수준.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길버트의 밑에서 일하는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그 망할 놈의 계약만 아니었어도......’
과거 그가 길버트와 맺은 계약.
자신을 포함한 다크엘프들을 자작가의 영지에 살게 해주는 대신.
그는 길버트의 노예로서 온갖 더러운 일을 처리한다.
그 계약만 아니었다면 아마 진즉에 길버트와 엮일 일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제 동포, 그러니까 다크엘프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다크엘프가 어떤 종족인가.
엘프는 엘프지만 그 피부색으로 인해 엘프들의 사회에도 엮이지 못해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불청객.
물론 크루거, 제 한 몸뿐이라면 상관없었다.
하나 그는 한 마을을 이끄는 지도자.
다른 다크엘프들과 그 가족들까지 생각한다면 마음 놓고 살 땅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아예 길드에 소속되어 터전을 잡아볼까도 싶었지만, 그와 다른 녀석들까지는 몰라도.
한 마을 전체를 받아줄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길버트와 계약을 맺었다.
아마 과거로 돌아가도 그의 선택은 마찬가지일터.
당장 지금 발터의 앞에서 다른 녀석들만이라도 살려 달라 간청하는 것 또한 비슷한 이유였다.
그 하나뿐이라면 모를까.
다른 녀석들까지 죽는다면 지금껏 해온 일에 의미가 없었다.
“......됐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눈앞의 발터가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의 말을 자르며 입을 열었다.
“보나마나 약점이라도 잡힌 게지.”
“......!”
그 말에 크루거가 흠칫거리며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발터가 별거 아니라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길버트, 그 자의 성정을 고려하면 뻔한 일이지.”
길버트 하르멘.
대륙의 자작가이자, 북부와 가장 인접한 영지의 주인으로.
다른 귀족들의 약점을 잡아 제 입맛대로 다루는 건 발터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당장 회귀 전에도 그랬으니까.’
물론 크레핀 그 개새끼만큼은 아니더라도 길버트 역시 보통 씹새끼는 아니었지.
그대로 발터가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대공의 성의는 잘 받았습니다. 하나 듣자하니 북부의 곰 가죽이 그리 좋다던데......
그 망할 채무관계 때문에 직접 산을 넘고 찾아갔다니 그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하여 발터는 팔자에도 없는 곰 사냥을 나서 기어코 가죽을 뜯어왔더니.
-대공의 성의는 잘 받았습니다. 하나 이번에는 왕도에서 와이번 가죽이 그리 인기라더군요.
이 씨발놈이 이번에는 와이번을 잡아오란다.
무슨 RPG게임 퀘스트도 아니고 씹새가 자꾸 사람을 뺑뺑이 돌려.
근데 어쩌겠어. 돈이 없는 게 죄지.
덕분에 발터는 협곡까지 찾아가 기어코 와이번을 잡아왔다.
그 와중에도 뭔 놈의 균형이 안 맞느니.
가죽이 이븐하지 않다느니.
별 개지랄을 떨던 게 아직도 눈에 훤했다.
그나마 지금은 그 지랄하기도 전에 채무를 갚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북부에 여전히 돈이 없었다면 아직도 그 난리를 피웠을 게 분명했다.
‘......한데 그 새끼가 이번에는 어쌔신을 보내?’
길버트 이 새끼를 어떻게 갈아먹으면 좋을까.
발터가 제 주먹을 쥐었다 펼치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잠깐. 이거 어쩌면 좋은 기회일수도.’
발터가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크루거와 다른 다크엘프들을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이놈들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건 아닌 거 같은데 말이지.
본디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격언이 있지 않는가.
곧이어 발터의 머릿속을 따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길버트는 길버트대로 조지면서도 최대한 이득을 뽑아낼 기깔난 그림이 말이다.
그대로 머지않아.
“크루거라고 했나?”
“예.”
“좋다. 내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대신.”
발터가 처억,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 일 하나 같이 하도록 하지.”
안 그래도 이번에 공장이니 창고부지를 확장하면서 꽤나 돈이 들어간 참이었다.
한데 마침 명분이 생겼다 아닙니까.
한 몫 제대로 뜯을 명분이.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조소했다.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길버트의 집무실을 따라 똑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길버트가 흘깃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냐.”
그러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말씀하신대로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크루거.
그 말에 길버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옳다구나. 드디어 돌아왔구나.
“들어와라.”
그대로 끼익, 문을 열고 크루거와 그 휘하의 다크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에 길버트가 순간 미간을 구겼다.
하여간 저 피부색이나 외모나 영 적응이 안 된단 말이지.
그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쯧, 혀를 찼다.
사실 다크엘프들이 유독 외모가 못났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능력이나, 외모는 엘프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꽤나 뛰어난 편이었다.
실제로 몇몇 귀족들은 아예 일부러 다크엘프를 찾을 정도이니 말이다.
하나 다크엘프를 천하다 여기는 세간의 시선은 여전했으니.
아직 대부분의 이들은 다크엘프를 불쾌하게 여기곤 하였다.
길버트 또한 굳이 나누자면 이러한 부류.
곧이어 그가 크루거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그래. 쓸 만한 정보는 가져왔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이에 크루거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제 품속에서 서신 여럿을 꺼냈다.
그 모습에 길버트가 히죽 웃었다.
역시 다른 건 몰라도 이런 쪽으로는 쓸모가 많은 녀석들이었다.
그럼 과연 이번에는 어떤 걸 가져왔을까.
만약 노스메디의 제조법이라도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일 터.
곧이어 길버트가 잔뜩 두근거리는 손길로 크루거가 가져온 서신을 펼쳤다.
-촤악!
그리고 서신에 적힌 내용은 바로.
“크흠, 어디보자.”
일부러 마법서의 시세를 조작하여 폭리를 취한 증거라거나.
다른 귀족들과 결탁하여 왕도에 바칠 돈을 빼돌린 증거라거나.
그간 그가 저지른 온갖 크고 작은 비리가 나열된 목록이었으니.
“......?!”
길버트가 서신과 크루거를 번갈아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콰악, 길버트가 서신을 무참히 구기며 와락 미간을 좁혔다.
“너 이 새끼. 지금 이게 뭐하자는 개짓거리야?”
감히 키워준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가 주인을 물어?
그대로 그가 크루거를 향해 물건을 집어던지며 역정을 냈다.
그와 함께 길버트가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지금 내가 묻지 않느냐!!”
하나 그 순간이었다.
퓻, 크루거의 신형이 쏘아지며 순식간에 길버트의 앞에 도달했다.
동시에 터업, 그가 길버트의 얼굴을 부여잡고 탁자에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곧바로 우지직, 나무탁자가 박살나며 그 파편이 사방에 흩날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고통 섞인 신음소리와 함께 길버트가 바닥을 기었다.
“끄어어억......”
처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점차 팔, 다리, 허리에 전해지는 격통이 이를 알려주었으니.
길버트가 으득, 제 이를 악물며 크루거의 멱살을 쥐었다.
“이놈이 단단히 미쳤....!”
아니 멱살을 쥐려는 찰나.
철컥, 크루거가 제 허리춤에 찬 단검에 손을 올렸다.
그대로 시린 단검이 길버트의 손을 무참히 찍어 내렸다.
-콰악...퍼억!
그와 함께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붉은 선혈.
이어서 길버트가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악!!”
“시끄럽군.”
동시에 그 사이.
콰득, 크루거가 그의 손에 박힌 단검을 비틀며 태연하게 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자.
그의 얼굴이 흐릿해지며 점차 다른 이의 얼굴로 변하기 시작했다.
-스르륵...
그리고 머지않아.
“간만이로군. 길버트 하르멘.”
“......!”
황금을 품은 눈동자가 길버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발터 레비오르.
북부의 주인이었다.
74화 명분이 생겼다 아닙니까(2)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길버트의 집무실 안.
-터억.
내가 박살난 탁자 대신 집무실 창가에 걸터앉은 채.
그가 저지른 비리목록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어디보자. 폭리부터 사기, 폭력, 협박까지. 거 참 많이도 쳐드셨네.”
이 정도면 거의 비리계의 쿼드러플 크라운.
하여간 회귀 전에도 그랬지만, 역시나 뒤가 구린 새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가 안 들키고 자작 자리를 유지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크루거를 부려 약점을 잡고, 입막음을 해왔을 테니까.
동시에 이를 바꿔 말하자면 그가 북부에 크루거를 보낸 순간부터.
내게도 같은 짓거리를 할 속셈이었던 게 아닌가.
“이거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구만.”
내가 서신뭉치를 흔들거리며 길버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끄으윽, 무릎을 꿇고 제 손아귀를 움켜쥐고 있던 그가 움찔거렸다.
곧바로 옆에 서있던 크루거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아주 개새끼가 따로 없죠.”
그 말에 길버트가 으득,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 더러운 다크엘프 새끼가......!”
아니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길버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가 냅다 그의 뺨따귀를 후려갈겼다.
“아가리 안 해?”
-짜악!
그대로 그의 집무실을 따라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길버트의 고개가 유려하게 꺾였다.
곧이어 억울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제 뺨을 어루만지는 길버트.
그가 크루거와 나를 번갈아보았다.
‘......왜 저 자식이 북부대공과 같이 있는 거지.’
하긴 그의 입장에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껏 북부대공의 약점을 캐오라고 보냈더니 이게 웬 걸.
약점대신 북부대공이 직접 오지 않나.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말 그대로 개 패듯이 팼으니 수난도 이런 수난이 없었다.
하나 무엇보다 제일 이상한 건 따로 있었다.
당장 그의 집무실에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오지 않는 것.
처음 크루거, 아니 발터가 집무실에 들어왔을 때라면 몰라도.
그 직후에는 탁자를 깨부수고, 비명소리까지 냈으니.
이쯤 되면 제 성에 있는 다른 시종들이 달려와 자신을 구해야함이 분명했다.
“......”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하기 그지없는 방문 밖.
이에 길버트가 제발 아무라도 빨리 와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흘깃 방문을 흘겨보았다.
그러자 그 모습에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지. 손님이라도 기다리느냐?”
그와 함께 길버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그대로 그가 꾸욱, 피를 흘리는 제 손을 꽉 움켜쥐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내가 길버트와 방문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하나 유감이군. 당분간은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뭐, 뭣?”
아무도 오지 않는다니.
그런 내 말에 길버트가 흠칫거렸다.
곧이어 내가 크루거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대공님께서 자리를 마련하고 싶다 하신만큼. 이미 방음은 물론이며, 인지저하 마법까지 전부 걸어뒀습니다.”
이에 내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잘했다.”
이미 집무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크루거는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 방음부터 인지저하 마법처리까지 전부 마친 상태.
덕분에 밖에서는 당장 지금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 안에 들어오기 무섭게.
크루거와 다른 녀석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져 움직이더니 머지않아 양손에 서신뭉치를 잔뜩 들고 오지 않았는가.
이는 다름 아닌 길버트가 제 비밀서재 곳곳에 숨겨둔 비리증거들.
그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조심하며 이중, 삼중으로 자물쇠까지 걸어두고 보관하던 물건들이었다.
하나 이를 찾아내고, 자물쇠를 따는 것은 크루거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였으니.
그는 순식간에 비리증거를 모아 내게 가져왔다.
거기다 집무실에 들어가기 전.
혹시 모를 의심을 지우기 위해 내게 도플갱어의 망토를 건네주며 제 모습으로 변장까지 도와주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척하면 척,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해내는 유능한 일처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인재를 고작 남의 약점 잡는 데나 써?’
다른 의미로 길버트 이 새끼도 대단한 놈이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내가 걸터앉아 있던 창가에서 일어나 길버트를 향해 걸어갔다.
“크루거.”
그와 함께 내가 손을 뻗자, 크루거가 제 품속에서 다른 종이 하나를 꺼내 양 손으로 공손히 바쳤다.
“예, 대공님. 여기 있습니다.”
그대로 처억, 내가 길버트의 바로 앞에 휙 종이하나를 내던졌다.
이는 다름 아닌 계약서.
곧이어 내가 그를 향해 고개를 까닥이며 말했다.
“읽거라.”
“......”
내 말에 길버트가 제 앞에 놓인 계약서와 나를 번갈아보며 머뭇거렸다.
이 새끼 봐라?
그 모습에 내가 다시 한 번 그의 뺨을 후려칠 기세로 손을 치켜들었다.
-스윽...!
그러자 히익,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계약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계약서를 읽어 내릴수록 길버트의 표정이 흉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 이건.....”
계약서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하르멘 가는 앞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의 일정부분을 ‘재량껏’ 발터 레비오르에게 넘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눈치껏 돈을 바치라는 소리.
이에 길버트가 뭐라 반박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수익의 일정부분이라니 이게 무슨......!”
하나 그러기 무섭게.
까닥, 내가 그의 비리가 적힌 서신뭉치를 흔들거리며 히죽 웃었다.
“꼬우면 관둬.”
“......”
“대신 이 서신은 내 친히 왕도로 가 직접 국왕전하께 전해주도록 하지.”
아니 아예 가는 김에 네놈과 연관된 다른 귀족들까지 싹 다 처넣어주지.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회귀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내겐 그럴만한 힘이 있었다.
“......!”
그 말에 길버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승낙하면 평생 북부의 지갑 신세.
거부하면 지하 감옥.
그야말로 불공정 계약의 극치였다.
이에 길버트가 고개를 치켜들고 와락 미간을 구겼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처사......!”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쯧, 내가 혀를 차며 그의 손등을 짓밟았다.
-콰직!
그와 함께 기껏 지혈한 상처가 다시 터지며 길버트가 비명을 내질렀으니.
“끄아아아악!”
내가 그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럼 네놈이 내게 크루거를 보낸 건 말이 되나?”
“끄으으윽......”
“무엇보다 자네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네만.”
-콰드득...!
내가 그의 손을 밟은 발에 천천히 힘을 주며 말했다.
“이건 부탁이 아닌 통보다.”
“그, 그게 무슨......”
“동시에 내가 베푸는 자비라네.”
그대로 스릉, 내가 그의 목 바로 아래에 단검을 들이밀며 읊조렸다.
“그게 아니면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바라나?"
“......!”
곧이어 사아아, 집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녀석의 숨통을 옥죄는 중압감.
이에 내가 다시 한 번 계약서를 들이밀며 말했다.
“그래서 어찌 할 텐가?”
“......”
그 말에 길버트의 손을 물론이며, 몸 전체가 덜덜 떨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마침내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 하겠습니다.”
그와 함께 길버트가 피 묻은 엄지를 들어 계약서에 찍었다.
그러자 뚝,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숨통을 옥죄는 중압감이 사라졌다.
그대로 길버트가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허억, 허억......”
“좋다. 이걸로 계약은 성사되었군.”
내가 작게 조소하며 계약서를 챙겼다.
무엇보다 그런 계약서에는 그의 지장이 선명하게 찍혀있었으니.
이는 명백한 길버트의 것이었다.
하나 그때였다.
“자, 그럼 그 배율을 정해보도록 할까?”
“......예?”
길버트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내가 계약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재량껏, 그러니까 최소 얼마나 줄지를 정해야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길버트가 움찔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럼 몇 퍼센트까지......”
동시에 처억, 내가 아무 말 없이 손가락 5개를 펼쳐들었다.
그 모습에 길버트가 말했다.
“......5퍼센트 말입니까?”
허나 미동도 없는 내 표정.
이에 길버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럼 15퍼센트?”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25퍼센트, 35퍼센트.
숫자는 점점 올라갔지만 나는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그야말로 요지부동.
그와 함께 길버트가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설마...50퍼센트는......”
제발 그것만큼은 아니길.
길버트가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줄곧 요지부동이던 내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으니.
“어쩔 수 없군. 자네의 뜻이 그렇다면 그리 하도록 하지.”
50퍼센트, 그러니까 벌어들이는 돈의 반을 가져가겠다는 통보.
그 말에 쿠웅, 길버트가 세상이 무너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에 내가 서신을 흔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혹시 불만이라도 있느냐?”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하도록.
내 친히 재고해보도록 하지.
내가 그리 말하며 바닥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콰악!
그대로 바닥에 꽂힌 단검의 검신을 따라.
길버트의 얼굴이 비춰보였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여부가...있겠습니까......”
길버트가 꾸국, 제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조아렸다.
제 아무리 돈이 뜯긴다한들.
왕국의 지하 감옥에 끌려가거나, 제 목이 뜯기는 거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그럼 명시된 기간이 되면 북부로 찾아오도록.”
“......”
“자네가 ‘직접’ 말이지.”
그대로 내가 회귀 전, 길버트가 그랬던 것처럼.
그를 내려다보며 조소했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길버트의 영지에 가서 공정한(?)계약을 맺고 난 이후.
잿빛 성의 집무실에는 발터와 크루거가 마주하고 있었다.
“그럼 확인해보게.”
그대로 발터가 크루거의 앞에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는 다름 아닌 북부가 크루거를 비롯한 다크엘프들을 전부 받아들이겠다는 계약서.
얼마 전 발터가 길버트의 영지에 쳐들어가는 과정에서 크루거와 약속한 내용이었다.
“......이, 이게 정말이십니까?”
이에 크루거가 제 앞에 놓인 계약서와 발터를 번갈아보며 되물었다.
물론 그 역시 약속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발터의 밑에서 일하는 대신 그 대가로 자신을 비롯한 다른 다크엘프들의 터전을 약속받는다.
그 거래조건 자체는 길버트 때와 변함이 없었다
아니 변하는 건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나 웬 걸.
발터는 그들에게 평원지대에 자유롭게 살 것을 명함은 물론이며, 일자리까지 제공해주지 않았는가.
길버트 때는 일자리는커녕.
약속받은 땅조차 영지 외곽의 후미진 곳 인터라.
그곳에서 다크엘프들끼리 다닥다닥 붙어 생활하던 걸 고려하면 그야말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그래. 더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앞으로 같이 상의해보도록 하지.”
“예? 아닙니다! 이걸로 충분합니다!”
이에 크루거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었다.
사실 발터의 입장에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좋은 인력들이 제 발로 굴러들어왔으니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어차피 대평원 지대는 공사가 완료되면 추가 인력을 투입할 예정이었으니, 오히려 다크엘프들을 부릴 수 있으면 제격이지 않는가.
거기다 크루거를 비롯한 정예 어쌔신 부대까지 얻은 셈.
이들은 평소에는 척후병으로 활동할 것이고.
외부의 정보가 필요할 때는 각지로 파견할 계획이었다.
그만큼 앞으로 크루거와 그 부대는 북부의 눈과 귀가 되어 활약할 예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일로 길버트를 조지면서도.
돈은 돈대로 벌지 않았는가.
그대로 발터가 제 앞에 있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크루거.”
“예, 대공님.”
그리고 머지않아.
“북부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하네.”
발터가 크루거를 향해 손을 뻗으며 그를 반기니.
향후 북부가 자랑하는 어쌔신 부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75화 가자, 바다로
그 후로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 사이 대평원의 공사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다크엘프 또한 큰 문제없이 자리 잡았다.
거기다 북부 역시 길버트 이후로는 큰 사건 없이 평화롭게 굴러갔으니.
북부의 영지민들은 저마다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발터 역시도 마찬가지.
그렇게 북부의 대평원.
그 중에서도 높게 솟아있는 산등성이.
그 모습이 꼭 용이 몸을 누인 모습과 같다하여, 용의 안식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산을 따라.
-처억.
검은 머리칼의 남녀가 발걸음을 맞추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와 함께 얼마나 지났을까.
앞서 가던 검은 머리칼의 소녀, 륜이 마침내 정상에 발을 내딛었다.
“대공님! 빨리 와요!”
그대로 륜이 해맑게 웃으며 발터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늘은 예전에 약속했던 대로 륜이 마을의 안내를 해주기로 한 날.
이에 발터는 오늘만큼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는 대신.
그녀와 함께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으니, 오늘의 마지막 장소가 바로 이곳, 용의 안식처였다.
동시에 발터마저 정상에 오른 순간.
그의 발아래를 따라, 용의 아이들의 마을에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어때요. 여기까지 올만하죠?”
그러자 륜이 잔뜩 기대하는 듯,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발터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래. 참으로 장관이구나. 마음에 드는군.”
산 아래 드넓게 펼쳐진 설원과 더불어 아스라한 불빛을 발하는 마을들.
자연과 섞인 그 풍경이 꽤나 아름다웠다.
그런 발터의 말에 륜이 화색을 띄며 말했다.
“그쵸?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그와 함께 륜이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다.
저쪽은 어릴 적 자주 가던 호수방향.
이쪽은 밤이 되면 은하수가 잘 보이는 언덕.
아, 그리고 저어기 보이는 가장 큰 나무 옆에 있는 집이 저희 집이예요.
륜이 여간 신난 모양인지.
줄곧 발터의 손을 잡고 있던 것도 새하얗게 까먹고 말했다.
‘......아주 신났네. 신났어.’
이에 발터가 그런 그녀와 마을을 번갈아보며 옅은 웃음을 지었다.
앞서 말했듯 오늘은 륜의 안내를 따라, 용의 아이들의 마을을 방문하기로 한 날.
그만큼 그녀는 아침부터 잿빛 성의 집무실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으니.
-대공님, 준비되셨습니까?
-......준비?
-저번에 대공님이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제게 ‘직접’ 마을을 안내해달라고.
당장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직접 마을을 안내해 달라.
확실히 저번에 용의 아이들과 화친을 맺으며 했던 약속이었다.
그리고 발터는 몰랐겠지만, 그 후로 륜은 발터에게 꼭 최고의 마을 안내를 해주리라 다짐하며 야심차게 오늘의 코스를 기획했지 않는가.
그만큼 오늘 마을안내를 하는 내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잿빛 성의 집무실에 찾아왔을 때부터.
그녀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자신만만한 눈빛을 갖추고 있었다.
그 열의에 오히려 발터가 잠시 당황할 정도.
그리고 오늘, 대망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코스가 바로 지금 여기.
용의 안식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여긴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대로 륜이 작게 웃으며 발터를 향해 말했다
그 와중에도 그리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있었으니.
곧이어 그녀가 산 아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사실 오늘 륜, 그녀가 이리 들뜬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백과의 전쟁.
하마터면 큰 피해로 번질 뻔했던 이를 발터가 나섬으로써 해결할 수 있었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발터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했던 부탁.
그것이 바로 오늘의 마을 안내였다.
그만큼 그녀는 드디어 그간의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잔뜩 기합을 넣었던 것이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간의 빚을 전부 갚아내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이나마 빚을 갚을 기회가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륜은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에 발터가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라.’
과거에는 이루지 못했던 약속.
만약 회귀 전의 그녀가 지금 이 순간을 봤다면 지금의 그녀와 똑같이 말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라면 발터, 그 역시도 이리 대답했겠지.
“나도 마찬가지다.”
발터가 제 옆에 있는 륜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에 그녀가 의외라는 듯 멍하니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그러지?”
“아, 그게......”
그대로 머지않아.
륜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내심 저 혼자만 너무 들뜬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요.”
“......”
“한데 대공님도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그와 함께 륜이 배시시 웃었다.
그 모습에 발터 또한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회귀 전의 륜은 마음만 먹으면 제 속마음을 얼마든지 숨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직접 말하지 않는 한.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 지금의 륜은 달랐으니.
오히려 회귀 전보다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속마음을 더 잘 알게 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도 잠시.
이것도 나쁘지 않군.
발터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여긴 용의 안식처라고 했었지?”
“네? 그렇습니다.”
“그럼 여기 말고도 아직 내게 소개하지 못한 장소도 있겠군.”
그 말에 멈칫, 륜이 발터와 제 발 아래 풍경을 번갈아보았다.
곧이어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그런 셈이죠?”
대평원은 넓었다.
당장 오늘도 꼭 소개해주고 싶은 곳을 엄선하여 고른 만큼.
아직 그에게 소개해주지 못한 장소도 한 가득이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다른 곳을 가보는 것도 좋겠군.”
“......!”
그와 함께 륜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자 발터가 작게 웃으며 제 손을 뻗었다.
“그때에는 다시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느냐?”
“......”
그런 발터의 물음에 륜이 그가 내민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륜이 흔쾌히 발터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그때는 지금보다 더 멋진 장소들을 소개시켜줄 테니 기대하는 게 좋을 겁니다.
륜이 그리 말하며 발터를 올려다보았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륜과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잿빛 성의 집무실.
그리고 집무실에 들어오고 나서 머지않아.
-똑똑.
“발터님,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노크소리와 함께 레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내가 말했다.
“들어오도록.”
그러자 끼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는 레닌.
시린 은발과 무표정.
무엇보다 언제나 그렇듯 머리끈으로 묶은 머리칼.
-스륵...
그 모습에 내가 얼마 전.
크루거가 변장한 레닌을 떠올리며 옅게 웃었다.
그래. 이래야 레닌이지.
“......발터님?”
동시에 레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녀가 제 얼굴을 매만졌다.
혹시라도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걸까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로 내가 레닌의 머리끈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끈, 잘 어울리는구나.”
“네? 그야......”
그 말에 레닌이 제 머리끈을 흘깃 바라보고는.
곧이어 나를 향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발터님이 주신 선물 아니십니까.”
전에 말했듯.
레닌의 머리끈은 예전의 내가 그녀에게 선물로 준 물건.
아마 꽤나 어릴 적의 일일 텐데.
아무튼 그도 잠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내가 레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아. 다름이 아니라.”
그러자 레닌이 제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런 서신에는 화려한 금박을 비롯한 장식이 새겨져 있었으니.
한 눈에 봐도 제법 고급스러웠다.
“칼리츠 가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레닌이 공손하게 서신을 내밀며 말했다.
이에 내가 미간을 좁혔다.
“......칼리츠 가에서 말인가?”
칼리츠 가. 대륙의 백작가로.
북부와는 바다를 사이에 둔 곳이었다.
그만큼 상당히 거리가 있는 지역인데 그곳에서 서신이 오다니 의외였다.
무엇보다 서신에 찍혀있는 문양.
이는 다름 아닌 가주의 직인이 아닌가.
한데 다른 사람도 아닌 가주가 직접 서신을 보내다니.
꽤나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현재 칼리츠 가의 가주는 발레시오 칼리츠.
백작가의 주인이자, 마법명가 출신인 만큼.
그 역시도 제법 높은 경지에 이른 마법사였다.
하나 세월의 흐름은 이기지 못했는지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들었다.
-팔락...
그대로 내가 서신을 펼쳐 읽었다.
서신의 내용 자체는 노스메디와 더불어 대량의 마광석 거래를 원하는 글.
그간 북부에 온 다른 서신과 비슷하였다.
거기다 발레시오, 그 역시 마법사이니 마광석은 당연하며 노스메디를 찾는 이유 또한 충분히 짐작이 갔다.
그야 노스메디가 무엇인가.
희대의 명약으로 중년의 마법사의 자존심.
물론 현재는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효능 또한 겸비했다는 이유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지만 일단은 마나회로 치료제라는 명목으로 팔리고 있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거지만.
‘......특히 노스메디에 대한 게 상당히 간곡하군.’
마광석은 둘째 치고 노스메디 거래 부분이 꽤나 간곡했다.
본디 이런 경우에는 노스메디를 원하는 내용은 그렇다 치더라도 귀족의 체면이 있지.
웬만하면 대놓고 노스메디를 원한다 하기보다는 ‘나 귀족이오.’하는 스탠스를 취하기 마련.
심지어 다른 귀족가라면 모를까.
계급 상 공작 바로 아래인 백작가라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하나 칼리츠 가에서 보낸 서신은 사뭇 달랐다.
<레비오르 가문에서 칼리츠 가에서 필요로 하는 노스메디를 공급해주실 수 있는지 여쭙고자 합니다.>
<이는 가문의 안녕과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며, 그만큼 대공의 성실한 거래가 큰 도움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신성의 축복이 북부와 레비오르 가문에 늘 함께하길 바라며.>
심지어 그 가주가 직접 친필로 서신을 작성하여 보냈다.
무엇보다 칼리츠 가에서 제시한 가격은 왕도에 판매되는 가격의 5배.
여기서 더 원한다면 올려준단다.
“......허어.”
이에 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량의 마광석에 더해 노스메디 통상가의 5배라니.
이야, 백작님 통 한 번 크셔라.
근데 제 아무리 노스메디가 잘 나간다 해도 이 정도인가?
“레닌, 혹 칼리츠 가에 대해 오간 이야기가 있는가?”
내가 레닌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잠시 뒤.
그녀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칼리츠 가에서 후계에 대한 관심이 많다 들었습니다. 기존의 마법연구에 한계를 맞이하다 보니 이제 슬슬 후대를 양성할 생각이겠죠. 그 외에는 칼리츠 가와 인접한 지역의 육상교역로가 막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육상교역로가?”
“예, 최근 해당 지역에 마수들이 기승이라 일부 길목을 제외하고는 쉬이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라 들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미간을 좁혔다.
후계에 대한 관심, 후대 양성.
육상교역로의 폐쇄.
그리고 머지않아.
내가 서신을 흘깃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 된 거로군.
노스메디의 효과는 알다시피 마나회로의 정상화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곳’의 정상화.
이로 인해 비단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라, 늦은 나이에 후계를 원하는 귀족들도 노스메디를 찾곤 했으니.
‘칼리츠 가또한 노스메디를 알아봤으나, 현재 왕도의 노스메디는 대부분 예약이 찬 상태.’
덕분에 지금 당장 노스메디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
물론 백작가 정도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하나 여기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육상교역로의 폐쇄.
일부 길목은 열려있다 한들.
가뜩이나 예약이 꽉 찬 상태에서 시간도 오래 걸리는 길을 쓴다?
‘......제 아무리 돈을 준다 해도 언제 노스메디를 받을지 모르는 상황.’
거기다 새 마법을 연구하거나, 마법계의 후계양성을 위해서는 미리 대량의 마광석을 확보하는 과정 또한 빠질 수 없었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내게 직접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하여간 중세는 이게 문제다.
빈약한 교통으로 인한 불편함.
애초에 당장 교통이 발전된 현대만 하더라도 서울은 도로마다 차로 미어터지고, 다른 지역을 한 번 오가기 위해서는 몇 시간 동안 주구장창 차를 몰아야하지 않는가.
근데 중세는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니, 더 하면 더했지. 그보다 덜 할리 없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전후 상황은 전부 이해했다.
그렇다면 이걸 어찌 하나.
이만큼 큰 거래는 놓치고 싶지는 않은데.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레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닌. 분명 백작가의 영지와 북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
“예, 그렇습니다.”
동시에 그 순간.
잿빛 성의 집무실을 따라.
내가 히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잘됐군. 이참에 해상교역로나 한 번 뚫어보자고.”
뭐? 육상교역로가 막혔다고?
그럼 마포대교, 아니 바다는 무너졌냐.
76화 물 타입은 전기 타입에 약하다(1)
북부의 끝자락에 위치한 해안가.
곧이어 그곳을 따라 수십의 와이번이 하나 둘씩 착지했다.
그리고 공사자재를 옮길 때처럼.
-처억.
와이번들과 연결되어 있는 줄.
그 끝에는 조각배를 비롯한 수상한 짐이 한 가득 실려 있었다.
그대로 페라리의 위에 탄 발터가 폰을 향해 말했다.
“폰, 와이번들의 상태는?”
그러자 폰이 와이번과 연결된 짐을 확인하며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신대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습니다. 이 정도라면 오늘 하루는 꼬박 날아도 문제없을 겁니다.”
오늘을 위해 일주일 전부터 먹이를 든든히 먹이고, 그도 모자라 유기농 식단까지 짜서 급여했지 않는가.
그만큼 크르륵, 와이번들이 기운찬 울음소리를 내며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확실히 폰의 말대로 와이번의 상태는 최상.
덕분에 녀석들은 당장에라도 움직이고 싶다는 듯.
연이어 제 날개를 펄럭였다.
이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페라리의 목줄을 움켜잡았다.
“좋아.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동시에 하얀 와이번이 땅을 박차며 힘차게 공중으로 날아올랐으니.
“목적지는 아이덴발트해 중앙. 쉬지 않고 이동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아이덴발트해.
북부와 백작가의 영지, 그러니까 대륙 사이에 위치한 바다의 이름이었다.
-사아아...!
그대로 얼마나 날았을까.
어느새 그들이 출발했던 북부의 풍경은 희미해지고, 코끝을 따라 바다의 짠 내음이 느껴질 때 즈음.
발터가 제 발 아래를 흘깃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발아래에는 그간의 육지대신.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있었다.
그와 함께 발터가 얼마 전, 잿빛 성에서 레닌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해상교역로 말씀입니까.
-그래. 아이덴발트해를 가로질러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할 예정이다.
발터가 처억, 제 탁자에 놓인 대륙의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C 모양의 땅.
그 중 위쪽에 있는 게 북부이고, 아래쪽에 있는 게 백작령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게 바로 아이덴발트해.
이에 레닌이 발터와 지도를 번갈아보며 물었다.
-정말 가능하다 생각하십니까?
무엇보다 그리 묻는 그녀의 표정은 사뭇 굳어있었으니.
발터 또한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아이덴발트해.
이곳은 북부와 대륙을 사이에 둔만큼.
새로운 교역로로 쓰기에는 제법 안성맞춤이었다.
하나 여태껏 아이덴발트해가 교역로로 쓰이는 일은 없었으니.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우선 그 첫 번째. 아이덴발트해를 뚫어 해상교역로를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활용가치가 떨어졌다.
앞서 말했듯 이곳은 북부와 대륙의 사이에 있는 바다.
한데 여기서 북부는 어떤 곳인가.
남부의 땅처럼 비옥하지도 않으며,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왕도처럼 기술이 발전하거나 인구수가 많았느냐.
어림도 없는 소리.
북부에 발을 내딛은 순간.
그들을 맞이하는 건 사시사철 내리는 눈과 얼어 뒤질 거 같은 칼바람뿐이오.
덕분에 땅은 농사라고는 꿈도 꾸기 힘들 정도로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기술이 발전하기는커녕.
인구수조차 그리 많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많은 게 이상할 정도.
북부에 오는 이들이라고는 왕도에서 죄를 짓고 추방당한 징벌병들이 고작이었으니, 오죽하면 북부의 별명이 최악의 땅이었겠는가.
그렇기에 대륙의 입장에서는 굳이 척박한 북부를 찾아 갈 이유가 없었다.
그마저도 만약 북부를 찾아갈 일이 있다면 육상로를 사용하면 그만.
구태여 새로운 길을 뚫어서 북부와 교류할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개발가치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것.
이것이 그 첫 번째 이유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노스메디와 질 좋은 마광석.
그리고 노스스파와 알케인의 무덤까지.
덕분에 북부는 최악의 땅이라는 과거의 오명을 벗고, 이제는 제법 대륙의 주목을 받고 있지 않는가.
그만큼 북부의 위상과 가치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으니.
이로 인해 그동안 개발가치가 현저히 떨어졌다는 첫 번째 이유는 지금은 사실상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이번 기회에 해상교역로를 만들어둔다면.
이는 북부의 수익증대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아마 바다 건너편의 상인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 실제로 수완이 밝은 녀석들은 이를 생각 안했을 리가 없었다.
당장 그 통행료만 받아도 대박인 장사.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원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두 번째 이유 때문.’
사실 지금껏 아이덴발트해를 개척하려는 시도는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제 아무리 북부가 척박한 땅이라 해도.
그와는 별개로 인간의 호기심의 동물.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는 탐험가 기질이 있었으니, 대륙의 몇몇 이들은 아이덴발트해에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 딱히 해상교역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은 바다라는 이유 덕에 풍부한 어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만큼.
이곳을 개발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러나 당차게 아이덴발트해로 떠났던 이들의 말로는 전부 똑같았다.
그들이 타고나갔던 배는 대부분 전복되거나 반파되었으며, 그 중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부만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
조류가 험난해서?
암초가 많아서?
아니 전부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덴발트해는 급격하게 변하는 조류도 없었으며, 그 수심 덕에 암초도 적었으니 항해 난이도는 어렵지 않았다.
하나 단 한 가지가 발목을 잡았다.
‘......씨 서펜트.’
씨 서펜트(Sea Serpent).
예로부터 아이덴발트해에 서식하는 마수로.
영역본능이 강해 제 영역에 들어온 녀석들은 일단 공격하고 보는 습성이 강한 마수였다.
무엇보다 이는 단순히 다른 마수들이나 바다생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으니.
소형어선부터 선박까지.
그 종류를 불문하고 배가 그 주변지역을 지나가기만 하면 녀석들은 눈이 뒤집혀 닥치는 대로 배를 공격하였다.
덕분에 뱃사람들에게 있어 씨 서펜트는 바다의 악몽, 바다의 폭군으로 불릴 정도였으니.
녀석들의 공격성을 짐작하게끔 하는 별명이었다.
그만큼 발터가 처음으로 해상교역로 개발 이야기를 꺼냈을 당시.
레닌이 걱정하던 것도 바로 씨 서펜트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꿔 말하자면.
씨 서펜트 무리만 아니라면 아이덴발트해를 뚫어 해상교역로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에 따라 오늘 발터일행이 바다로 나선 이유 역시 씨 서펜트 토벌을 위함.
동시에 머지않아.
앞서가던 발터가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처억...!
현재 그들의 위치는 말 그대로 아이덴발트해 정중앙.
그만큼 그 주변에 보이는 건 오직 망망대해뿐.
그 흔한 배 한척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도 와이번이니까 가능한 일이었지.
만약 배를 끌고 왔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전에 씨 서펜트의 공격에 박살나 물고기 밥으로 전락했을 게 분명했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배를 내려라!”
발터가 북부의 기사단들을 향해 명령했다.
그와 함께 철컥, 기사단들이 와이번에 묶여있던 줄을 풀며 조각배를 바다에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촤아악...출렁!
망망대해 위를 따라, 조각배 여럿이 둥둥 떠올랐다.
기껏해야 사람 한 둘 정도타면 꽉 차 보이는 배였다.
이에 발터가 먼저 조각배 위에 올라탔다.
-타앗!
그렇게 그를 시작으로.
레닌을 비롯한 기사들 또한 조각배에 올라탔다.
그 중 폰을 포함한 나머지는 여전히 와이번의 위에서 대기.
“그럼 저희는 계획대로 주변에서 대기하겠습니다.”
그대로 폰이 조각배에 올라탄 발터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수고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씨 서펜트가 올 때까지 폰을 비롯한 녀석들은 계속해서 주변을 정찰하고.
발터일행은 바다에서 대기한다.
이것이 그들의 첫 번째 플랜.
곧이어 펄럭, 폰이 페라리와 부가티, 람보르기니를 이끌고 날아올랐다.
이야. 우리 폰 출세했네.
아무튼 그도 잠시.
폰이 떠난 망망대해에는 조각배들만이 덩그러니 남겨져있었다.
-철썩...
그 뒤로 들리는 건 배에 부딪히는 물결소리가 전부요.
화창한 날씨가 그들을 맞이했으니.
참으로 평화롭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이에 발터와 다른 배에 타고 있던 기사들이 물었다.
“그럼 씨 서펜트가 나올 때까지 저희는 뭐합니까?”
앞서 말했듯이 그들은 씨 서펜트가 나올 때까지 바다에서 대기.
하나 그동안 이대로 손 놓고 망망대해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곧이어 발터와 레닌이 배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들었다.
“걱정말거라. 이럴 줄 알고 다 준비해왔으니.”
그리고 잠시 뒤.
발터의 손을 따라 나온 건 다름 아닌 낚싯대.
그대로 촤악, 발터가 미끼를 끼운 낚싯대를 바다에 던지며 히죽 웃었다.
“그동안 힐링이나 하자고.”
그렇게 아이덴발트해 한 가운데.
발터와 레닌이 여유롭게 낚싯대를 펼치고 힐링을 시작했다.
***
그 후로 얼마나 지났을까.
시원한 바람과 잔잔한 물결.
그리고 그 물결을 따라 망망대해 위의 조각배가 흔들거렸다.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
그대로 낚싯대를 흘깃 바라보던 레닌이 말했다.
“고기가 영 잡히지 않는군요.”
이에 발터가 작게 조소하며 조각배에 몸을 뉘었다.
“원래 낚시는 고기가 아니라 세월을 낚는 거야.”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고기가 낚이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아이덴발트해의 중앙.
즉 씨 서펜트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본디 상위 포식자가 자리 잡은 곳에는 안 가는 게 상책.
그만큼 그 주변에는 다른 어선은 물론이거니.
물고기를 포함한 다른 마수들조차 쉬이 접근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니 고기가 안 잡히는 게 당연했다.
하나 그 순간이었다.
-패앵!
돌연 맹렬하게 휘어지는 발터의 낚싯대.
이에 발터가 눈을 번뜩이며 재빨리 낚싯대를 낚아챘다.
그러나 상당히 저항하는 녀석.
“호오, 이건 꽤나...!”
낚싯대의 휘어짐, 그 끝을 따라 전해지는 힘.
무엇보다 그 손맛이 말해주고 있었다.
이놈은 대물 중의 대물이라고.
그리고 그때였다.
퓽, 저 멀리 상공을 따라 쏘아지는 붉은 신호탄.
씨 서펜트가 등장했다는 신호였다.
“......!”
그와 함께 티잉, 낚싯줄을 끊어졌다.
곧이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하는 물결.
그대로 머지않아.
-촤아아아악!!
물살을 가르며 길쭉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 정체는 바로 씨 서펜트.
수면 위에 드러낸 목만 해도 3m가 훌쩍 넘어가는 소문의 바다의 폭군이었다.
[쉬이이이익!!]
그 모습에 발터가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월척이구만.”
그러기 무섭게 씨 서펜트가 쩌억, 아가리를 벌리며 발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에 발터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낚싯대 대신 길쭉하고 뾰족한 금속봉 2개가 들어 바다에 담갔다.
이것이 대망의 두 번째 플랜.
너 이 새끼. 딱 대라.
그대로 발터가 레닌을 향해 말했다.
“레닌, 준비해라.”
“예.”
그리고 씨 서펜트가 발터를 집어삼키기 직전.
레닌이 배 위에 있는 검고 네모난 물체의 스위치를 켰다.
마치 파워뱅크를 연상케 하는 모양새.
-딸깍.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파워뱅크와 전선으로 이어진 금속봉을 따라.
푸른 스파크가 튀며 수면을 강타했으니.
-파지지지지직!!
그대로 아이덴발트해 한 가운데에 푸른 전기가 치솟았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눈앞이 부실 정도.
이에 발터를 향해 달려들던 씨 서펜트가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키에에에에엑!!!]
곧이어 그 모습에 발터가 선글라스를 올려 쓰며 히죽 웃었다.
야, 빳데리 낚시라고 들어봤냐?
어딜 물 포X몬 새끼가 전기 타입 앞에서 깝쳐. 뒤질라고.
77화 물 타입은 전기 타입에 약하다(2)
곧이어 푸쉬이익, 씨 서펜트의 아가리는 물론이며 온 몸을 따라 피어오르는 허연 증기.
그리고 머지않아.
씨 서펜트가 커다란 대가리를 꼬라박았다.
-쿠웅...철썩!
그대로 사방으로 튀어오르는 푸른 물방울.
이에 발터가 휘릭, 양 손에 든 금속봉을 고쳐 잡으며 그 끝을 후우 불었다.
이게 바로 빳데리 낚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현대의 낚시법으로.
한 큐에 물고기들을 요단강으로 보내버리는 무지막지한 방식덕분에 현대에서는 불법으로 정해 금지해둔 방법이었다.
그러니 착한 어른이들은 따라하지 말자.
잘못하면 그대로 쇠고랑 차고 잡혀가니까.
하지만 이곳은 중세.
현대와는 사정이 달랐다.
애초에 노예거래도 합법이니 말 다한 셈.
무엇보다 지금 이 근처에는 씨 서펜트를 제외하고 물고기라고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니 맘 놓고 조져도 문제없다 이거지.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그동안 씨 서펜트를 상대하기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지형.
써 서펜트를 잡으려면 바다로 나가야하는데, 바다로 나가야하면 배가 필요했다.
하나 배를 타고 나가면 당연히 육지에 비해 여러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는 노릇.
그 와중에 바다에서는 앵간한 전기보트보다 빠른 씨 서펜트를 한 마리도 아니고, 때로 상대해야하니.
현대처럼 수상기술이 발전하지 않는 이상.
당연히 중세의 기술력으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발터는 바다로 나가기 전.
푸른 마탑의 루비아에게 무기, 아니 낚시도구 제작을 의뢰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 발터가 들고 있는 금속봉 2개와 그와 이어진 파워뱅크.
파워뱅크 안에는 마광석을 가공하여 주 원동력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위력은 방금 보다시피 단숨에 씨 서펜트를 구워버릴 정도.
다른 건 몰라도 가공할 위력 하나만큼은 제대로 입증한 셈이었다.
역시 믿고 쓰는 루비아 제 무기.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연달아 퓽, 곳곳에서 붉은 신호탄이 쏘아졌다.
-촤아악!
그와 함께 사방에서 파도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그림자들.
씨 서펜트 무리가 분명했다.
녀석들은 기본적으로 단독생활이 아닌 무리생활을 하는 마수.
이것이 작은 어선부터 큰 선박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던 원인.
하나 녀석들이 바다, 그러니까 물속에서 살아가는 마수인 이상.
바다는 더 이상 녀석들에게 유리한 전장이 아니었으니.
“전군, 전투준비!”
발터가 조각배를 탄 북부의 기사단들을 향해 외쳤다.
그러자 기사단들이 일제히 처억, 금속봉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그들이 금속봉을 바다에 담구고 씨 서펜트 무리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캬아아아악!!]
그리고 머지않아.
수십에 다다르는 씨 서펜트가 하나 둘씩 고개를 들고 달려들었다.
이에 발터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갈겨버려.”
그대로 다시 한 번 바다를 뒤덮는 푸른 전류의 폭풍.
아니 이번에는 다른 기사단들까지 합세한 결과.
수면을 물론이거니 바다전체를 따라 사나운 전기가 씨 서펜트 무리를 집어삼켰다.
-빠지지지직!!
그와 함께 달려들던 씨 서펜트들이 사방으로 몸을 비틀며 탭댄스를 갈기니.
캬, 이 새끼들 좋아죽는거봐라.
아주 신선도가 쥑여주는구만.
곧이어 발터가 바다 한 가운데서 벌어진 라이트닝 댄스홀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피카피카. 이 새끼들아.”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씨 서펜트 토벌은 발터의 예상보다 더욱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계속해서 몰려드는 씨 서펜트들.
그럼 상공에서 이를 감시하던 폰을 비롯한 와이번 기사단이 신호를 주고.
발터와 레닌이 있는 조각배의 기사들이 타이밍에 맞춰 일렉트릭 쇼크를 갈긴다.
이에 몇몇 씨 서펜트들은 기습을 시도했으나, 이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
이곳이 바다인 순간부터 녀석들에게는 도망칠 구석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니.
기껏 기습을 준비한 녀석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 허연 배를 드러내며 수면위로 둥둥 떠오를 뿐이었다.
덕분에 씨 서펜트의 입장에서는 여태껏 그토록 유리했던 바다라는 전장이 역으로 도저히 도망칠 수 없는 함정으로 변한 셈.
그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씨 서펜트들은 오히려 발터일행이 있는 배를 공격하기는커녕.
접근조차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으니.
이제는 역으로 발터와 기사단들이 씨 서펜트를 쫒아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야야! 왼쪽으로 빠진다!”
동시에 휘익, 발터가 도망치는 씨 서펜트를 향해 낚싯대를 휘둘렀다.
그와 함께 녀석의 몸통에 정확히 걸린 바늘.
곧이어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조각배가 빠른 속도로 끌려갔다.
-쉬이익...촤악!
그대로 물살을 가르며 바다 위를 질주하는 조각배.
낚싯대는 더 이상 가만히 기다리며 물고기를 낚는 용도가 아니었다.
“오케이! 걸었다!”
“가즈아!”
지금 발터를 비롯한 기사단들에게 있어.
낚싯대는 그저 도망치는 씨 서펜트를 낚아채는 올가미로 변모한지 오래였다.
그리고 낚싯바늘을 걸기 무섭게.
-파지지직!!
곳곳에서 푸른 전격이 넘실거렸으니.
상공에서 줄곧 이를 지켜보던 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허어, 이게 도대체......”
바다의 악몽, 바다의 폭군이라 불리는 씨 서펜트가 바다에서 인간에게 도망치는 꼴이라니.
오래 살다보니 별 신기한 그림을 다보는 군.
폰이 그리 생각하며 씨 서펜트를 추격하는 발터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와이번을 활용해 폭격대를 꾸려 설산원숭이를 박살내지 않나.
알케인의 무덤 때는 공주님의 목욕물로 언데드를 해치운 것도 모자라.
그 다음에는 대공포를 만들어 야만족을 쓸어버리더니.
이제는 씨 서펜트를 전기로 지지고 있었다.
아무리 제 주군이지만 감탄을 금치 못할 행보의 연속.
대륙의 그 어떤 전략가도 이만큼 해내지는 못할 터였다.
-쿠웅...철썩!
동시에 발터가 바다 위 마지막 씨 서펜트를 쓰러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에 보이는 건 아주 이븐하게 익은 씨 서펜트들 뿐.
이 근방에 있는 녀석들은 전부 정리한 거 같았다.
하지만 발터는 연신 뭔가 찾는 듯.
계속해서 주변을 살폈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그리고 그때였다.
돌연 하늘을 따라 붉은 꼬리를 그리며 쏘아지는 신호탄.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펑! 퍼엉! 펑!
곧바로 신호탄이 두세 발이 연달아 터졌다.
그간의 신호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
무엇보다 바다 위 울려 퍼지는 폰의 외침.
“대공님! 오른쪽에 녀석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
이에 발터가 미간을 좁히며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쿠구궁...촤악!
그러자 그곳에는 마치 해일을 연상케 하는 파도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녀석이 있었으니.
그대로 녀석이 콰앙, 수면 위로 박차 오르며 흉성을 내질렀다.
[크롸라라라!!]
곧게 뻗은 몸통. 그리고 푸른 비늘에 누런 눈동자.
거기다 그동안 봤던 씨 서펜트의 가히 3배는 더 커보이는 압도적인 덩치.
그 모습에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왔다. 레비아탄.”
혹시 예전에 북서쪽 설산지대의 설산원숭이를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 중 무리의 리더.
일명 삼눈이. 녀석은 이마에 눈이 하나 더 달린 돌연변이 개체였다.
동시에 이처럼 특정 개체에서 돌연변이가 나오는 것은 비단 설산원숭이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었으니.
눈앞의 레비아탄이 그 경우였다.
레비아탄. 통칭 수룡종의 왕.
녀석은 다른 씨 서펜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덩치를 자랑하며, 다른 씨 서펜트를 이끌며 점차 제 영역을 확장하기로 유명했다.
한 마디로 지금껏 인간의 발길이 허락되지 않은 아이덴발트해의 주인.
그것이 바로 눈앞의 레비아탄이라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이를 바꿔 말하자면.
이 새끼만 조지면 해상교역로는 문제없다는 거지.
발터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며 재빨리 다른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전군, 공격 준비!”
그와 함께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일제히 금속봉을 바다에 담구고 대기하는 기사단들.
그리고 레비아탄이 사정거리에 들어온 찰나.
-파지지지직!!
푸른 전격의 파도가 레비아탄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키에에엑, 녀석이 몸을 비틀며 날뛰었다.
-치지직...퍼엉!
그대로 그가 맹렬하게 몸을 털기 무섭게.
녀석의 푸른 비늘을 따라, 푸른 스파크가 흩날렸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전기를 떨쳐냈다는 표현이 맞았다.
“무, 무슨...!”
“전기가 안 통한다고?!”
그 광경에 북부의 기사단들이 미간을 좁혔다.
물론 전기공격 자체가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나 이 정도로는 그의 비늘을 뚫고 유의미한 타격을 입히기에는 역부족이었으니.
[크롸라라라락!]
오히려 방금 전 공격으로 녀석의 심기만 건드린 꼴이었다.
이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꼴에 우두머리라고 이 정도는 버틴다 이거지?”
동시에 그때였다.
잔뜩 약이 오른 레비아탄이 집채만 한 제 몸통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콰아아아앙!!
발터와 레닌이 타고 있는 조각배를 무참히 찍어 내렸다.
이들의 지휘관이 발터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행한 공격.
이어서 조각배가 산산조각 나며 발터와 레닌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대공님!!”
그러자 쐐애액, 상공에 있던 폰이 재빨리 부가티를 몰며 날아갔다.
그러나 레비아탄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녀석이 곧바로 다른 기사단들이 탄 조각배를 노리고 머리를 틀었다.
기어코 모든 배를 박살내고, 바다에 빠트리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이에 발터가 미간을 구기며 폰을 향해 외쳤다.
“폰! 레닌을 비롯한 다른 기사단들을 우선으로 해라!”
“예? 그럼 대공님은......!”
“문제없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발터의 주변을 따라 모여드는 폭풍.
헤르메스의 팔찌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다름 아닌 일시적으로 공중에서의 제약을 없애주는 아티팩트.
그대로 발터가 허공을 밟고 도약하며 레비아탄의 바로 앞까지 도달하였다.
마치 허공답보를 연상케 하는 모습.
-꾸구국...!
그와 함께 발터가 제 주먹을 움켜쥐었다.
곧이어 콰아아, 그의 주먹을 따라 폭발적으로 솟아오르는 푸른 오러.
이에 레비아탄의 누런 눈동자가 발터에게 향한 그때.
-우드득...콰아아아앙!!
발터의 주먹이 정확히 녀석의 아가리에 박혔다.
그 공격에 레비아탄의 머리가 돌아감은 물론.
후두둑, 녀석의 하얀 이빨이 떨어져나갔다.
[키에에에에엑!!]
기어코 회색곰에 이어 수룡과 원펀치 다이다이를 까는 발터.
그 틈에 폰과 다른 와이번 기사단들이 조각배에 타고 있던 기사들을 낚아채 올렸다.
이걸로 바다에 남은 건 발터와 레비아탄 단 둘 뿐.
“발터님!”
이에 페라리 위에 올라탄 레닌이 재빨리 발터를 향해 줄을 내렸다.
그대로 터업, 발터가 줄을 붙잡고 박살난 조각배의 널빤지를 발판 삼았다.
“오케이, 오라이!”
그리고 발터가 외침과 동시에 페라리가 날개를 펄럭이니.
곧바로 촤아악, 그가 물살을 가르고 바다를 가로질렀다.
마치 웨이크보드를 연상케 하는 모습.
[크르륵...크롸라라락!!]
그와 함께 뒤늦게 정신 차린 레비아탄이 발터를 발견한 즉시 그의 뒤를 추격했다.
그렇게 요리조리 물살을 가르고 가는 발터와 그 뒤를 맹렬히 따라가는 레비아탄.
그 모습이 그야말로 중세의 바다 한가운데서 즐기는 레저스포츠가 따로 없었으니.
발터가 흘깃 제 뒤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됐다...!’
이걸로 레비아탄의 관심은 오로지 발터 뿐.
아무래도 방금 전 죽빵이 제대로 성질을 긁은 모양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폰을 비롯한 다른 기사단을 향해 명령했다.
“전군! 처음 계획했던 대로 간다!”
“예, 알겠습니다!”
그와 함께 폰과 기사단들이 일제히 속도를 올려 방향을 틀었으니.
라이덴 해령, 그곳은 아이덴발트해의 북쪽에 위치한 지형으로.
유독 폭풍과 번개가 많이 내려치기로 유명한 장소임과 동시에 발터가 승부수를 던질 곳이었다.
78화 바다의 새 주인(1)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잔잔하던 바다의 파도가 점점 거세지고, 푸른 하늘을 따라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이는 곧 라이덴 해령에 진입했음을 알리는 신호.
-촤아아악!
그대로 발터가 여전히 제 뒤를 쫒아오는 레비아탄을 확인했다.
설마하니 한 번도 쉬지 않고 끝까지 따라올 줄이야.
징글징글한 새끼가 따로 없었다.
하여간 레비아탄은 곰과 같이 한 번 찍은 상대는 끝까지 쫒아간다던데 딱 그 말 대로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러한 습성덕분에 녀석을 이곳까지 유인하는데 성공했으니 발터가 제 주변을 살폈다.
-스윽.
라이덴 해령.
그곳은 그 악명처럼 당장에라도 벼락이 내려칠 듯.
우중충한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었다.
그야 라이덴 해령이 어떤 곳인가.
거센 파도와 잦은 폭풍과 낙뢰.
예로부터 라이덴 해령은 그 지랄 맞은 환경 때문에 뱃사람은 물론이며, 바다에서 꼭 피해야하는 장소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 아닌가.
덕분에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
하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라이덴 해령에 진입한 발터와 북부의 기사단.
애초에 처음부터 빳데리 낚시만으로 레비아탄까지 토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빳데리 낚시 자체가 통하지 않았던 것은 다소 의외의 상황.
그러나 상관없었다.
발터, 그의 계획만 제대로 먹힌다면 여기서 레비아탄을 확실히 끝낼 수 있으니까.
아니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것만큼은 제 손모가지를 걸고 확신할 수 있는 사실.
그리고 머지않아.
좋아. 이쯤이면 됐다.
그대로 발터가 폰과 기사단을 향해 외쳤다.
“시작하라!”
바다에 울려 퍼지는 발터의 외침.
이에 폰과 기사단들이 기다렸다는 듯.
제 품속에서 인챈트 스크롤을 꺼내들었다.
무엇보다 그런 스크롤에는 푸른 마탑의 인장이 찍혀있었으니.
루비아에게 빳데리 낚시 제작과 함께 푸른 마탑에 요청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스크롤을 찢기 무섭게.
-파지직...쉬익!
화염과 전격마법을 비롯한 수십의 구체가 쏘아졌다.
기상을 조작하는 웨더 컨트롤(Weather Control) 마법부터 화염계, 전격계 마법을 인챈트한 스크롤이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레비아탄이 아닌 허공.
그러나 기사단은 계속해서 스크롤을 찢으며 공중을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그와 함께 먹구름 너머로 사라지는 마법들.
그리고 마침내 챙겨온 모든 스크롤을 소진한 그때.
-쿠르릉...!
하늘을 따라 심상치 않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엇보다 발터의 앞을 따라 보이는 비스듬한 절벽.
이에 그가 눈을 번뜩이며 레닌을 향해 말했다.
“레닌. 속도를 올려라!”
“예, 대공님!”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쐐액, 페라리가 속도를 올리며 점차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이는 발터 역시 마찬가지.
이어서 속도가 절정에 이른 찰나.
발터가 비스듬한 절벽 면을 타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대로 줄곧 잡고 있던 줄을 놓고 도약한 발터.
-타앗!
“레닌!”
그와 함께 발터가 레닌을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곧바로 발터를 향해 뭔가를 던졌다.
“받으십쇼!”
곧이어 휘리릭, 허공을 따라 반짝이는 은색의 창.
기존의 창보다는 다소 창대가 얇고, 창날이 뾰족한 게 특징이었다.
-터업...!
그대로 발터의 손에 들린 은색 창.
무엇보다 그런 그의 발아래로는 레비아탄이 자리하고 있었으니.
공중에서 무언가를 찾듯 분주하게 움직이던 발터의 황금색 눈동자가 정지했다.
“찾았다...!”
레비아탄의 목 뒤에 난 비늘 중 유일하게 역으로 난 검은 비늘.
그것은 바로 용족이라면 무조건 존재하는 약점. 역린(逆鱗)이었다.
그대로 발터가 창을 레비아탄의 역린에 박아 넣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들어간 공격.
-콰직...!
[키에에에엑!!]
곧이어 역린이 찔린 레비아탄이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하나 이 정도로 녀석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었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제 아무리 약점부위인 약점을 노렸다한들.
이 일격으로 레비아탄을 끝내기에는 은색의 창은 너무나도 얇고, 미약했다.
그러나 아무 상관없었다.
‘애초에 이건 창이 아니니까.’
발터가 제 손에 들린 은색의 창, 좀 더 정확히는 피뢰침을 바라보며 조소했다.
그랬다. 레비아탄의 역린에 박힌 길쭉한 금속.
이는 얼핏 보면 창을 연상케 하였지만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피뢰침.
주로 낙뢰를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는 물건이었다.
이에 콰득, 발터가 더더욱 피뢰침을 강하게 박아 넣으며 말했다.
“야, 니가 그렇게 전기를 잘 버텨?”
머지않아 그때였다.
쿠르릉, 레비아탄의 주위로 모여드는 검은 먹구름.
아니 레비아탄보다는 녀석의 목뒤에 박힌 피뢰침을 향해 모여든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먹구름은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니.
-스으으...
마치 검은 장막이 펼쳐지듯.
라이덴 해령 중앙에 드리우는 그림자.
그 모습에 발터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레비아탄을 라이덴 해령으로 유인.
그 후 인챈트스크롤, 그러니까 웨더 컨트롤과 화염계 마법으로 상승기류를 형성.
인위적으로 번개구름.
즉, 적란운을 만들어낸다.
만약 단순히 화창한 날씨였다는 불가능했을 터.
하나 이곳은 폭풍과 낙뢰로 악명이 자자한 라이덴 해령.
거기다 웨더 컨트롤부터 수십 개가 넘는 전격을 때려 넣음으로써.
강제적으로 그 전하량을 끌어올렸지 않은가.
덕분에 현재 발터의 머리 위에 생성된 적란운은 그 크기부터 위력까지.
자연적으로 형성된 녀석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괴물 적란운.
그야말로 천재지변의 재앙(災殃)이자, 인재(人災)였다.
그리고 마지막 피뢰침을 이용해 낙뢰를 내리꽂는다.
여기까지가 발터가 레비아탄 공략을 위해 준비한 계획.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그럼 이것도 버텨봐.”
어디 내장이 전부 지져져도 버티는지 확인해보자고.
그대로 발터가 히죽 웃으며 말하기 무섭게.
그는 이미 피뢰침에 손을 떼고 아래로 떨어졌으니.
시퍼런 낙뢰가 레비아탄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르르르릉!!
그렇게 지축을 흔드는 푸른 번개가 하늘을 찢었다.
마치 신화 속 뇌신이 강림하는 듯한 압도적인 광경.
그리고 그 사이, 번개에 휩싸인 레비아탄이 천지를 찢는 듯한 고통스런 흉성을 울부짖었다.
[크롸라라라락!!]
***
그 후로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라이덴 해역. 평소에도 폭풍과 낙뢰가 끊이지 않는 그곳을 따라.
파지직, 푸른 스파크가 쉬지 않고 몰아쳤다.
무엇보다 방금 전의 굉음과 눈부신 섬광.
이에 주변에 있던 폰을 비롯한 기사단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진다면 이러한 풍경이 아닐까.
그러한 착각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위력.
가히 뇌신의 분노, 그러니까 하늘에 노했다고 불러도 될 만큼.
방금 전의 낙뢰는 그간의 라이덴 해역에 내려친 낙뢰 중에서도 전례가 없을 만큼 커다란 번개였다.
-스윽...
그대로 북부의 기사단들이 하나 둘씩 쓰고 있던 검은 로브를 벗었다.
만약 제전효과를 가진 로브가 아니었다면 그들 역시 꼼짝없이 낙뢰에 휘말릴 뻔했다.
또한 발터의 마스코트인 검은 모피코트에는 제전을 포함한 방한, 방열과 같은 온갖 마법이 부여 되어있지 않은가.
그리고 머지않아.
그간의 적란운이 서서히 걷히고 내리쬐는 한줄기 빛 사이.
펄럭, 하얀 비늘을 가진 와이번이 유려하게 공중을 선회하였다.
무엇보다 그런 와이번의 위에는 짙은 흑발과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남성이 올라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북부대공 발터 레비오르.
방금 전의 뇌신을 강림케 한 장본인이었다.
-처억...!
그대로 공중을 선회하던 하얀 와이번, 페라리가 비스듬한 절벽에 착지했다.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라이덴 해령 중앙, 아직 푸른 스파크가 채 가지 않은 바다 위.
-쿠구구궁...쿵!
과거 이 바다의 주인이라 불리던 레비아탄이 고개를 처박고 쓰러졌다.
그러자 철썩, 주변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그 거대한 몸통을 따라 허연 증기가 솟아올랐다.
-푸스스...
낙뢰가 레비아탄을 직격한 찰나.
그 겉은 물론이며, 몸 안의 수분까지 전부 증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수증기였다.
그도 그럴게 무려 역린에 박힌 피뢰침을 따라 지축을 울린 낙뢰가 내리꽂혔다.
그로 인해 엄청난 양의 전류가 직접 내장을 태운 셈.
그만큼 녀석이 제 아무리 전기가 통하지 않는 두꺼운 비늘을 가졌다고 한들.
그 안까지 막을 수는 없었으니, 레비아탄의 숨통을 끊기에는 충분한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아마 이 정도면 레비아탄이 아닌 레비아탄 조상님이 와도 못 막을 위력.
그 결과, 레비아탄은 그 자리에서 절명.
다른 씨 서펜트 무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군체의 리더인 레비아탄이 죽은 이상.
전처럼 큰 무리를 이루지도, 활개를 치지도 못할 터.
그대로 스릉, 발터가 허리춤에 찬 검을 빼들었다.
곧이어 그의 검신에 서리는 하얀 오러.
-쉬익...서걱!
그와 함께 섬광이 번쩍이며 발터의 검이 레비아탄의 머리를 베었다.
이어서 그가 레비아탄의 잘린 머리통을 높이 치켜들었다.
전투의 승자를 알리는 증거.
-처억...!
동시에 북부의 기사단들의 우렁찬 환호가 터져 나오니.
이는 곧 바다의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신호이자.
마침내 발터가 아이덴발트해를 정복했음을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
그 후로 두 달여 정도 지났을까.
대륙의 위쪽에 위치한 백작가의 영지.
그리고 칼리츠 가의 가주, 발레시오 칼리츠의 집무실을 따라 그의 긴 한숨이 삐져나왔다.
“하아......”
그대로 그의 한숨만큼이나 집무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와 함께 칼리츠가 얼마 전 마을광장에 들렸다가 본 풍경을 떠올렸다.
-나 잡아봐라!
-이번에 잡히면 네가 술래야!
-꺄르륵!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광장을 뛰노는 아이들.
그리고 광장 옆의 마차 안.
한참동안 그 풍경을 바라보던 부인이 말을 꺼냈다.
-참 보기 좋군요.
-......
-저희도 언젠가 저런 아이들을 가질 수 있겠죠?
그런 부인의 입가에는 연신 작은 미소가 걸려있었다.
하나 그 미소가 어딘가 슬퍼 보이는 건 비단 그만의 착각이 아니니라.
동시에 발레시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마음과 같아서는 제 부인의 손을 잡고 당당히 말하고 싶었다.
당연하다고. 믿어 의심치 말라고.
그러나 그 한마디가 쉽사리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벌써 7년.
그와 부인이 후계에 힘을 쓴 세월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흔히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남들보다 조금 늦을 뿐이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2년이 지나고 5년이 지나고 7년이 지나니.
이제는 응원의 말보다 먼저 겁이 났다.
이대로 영영 아이를 갖지 못하는 건가.
언제부터인가 후계에 대한 기대 대신 그런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애써 싱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네.
그러나 그리 말하는 발레시오의 목소리는 작게 떨려왔으니.
이는 제 부인의 물음에 그저 허울뿐인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제 자신에 대한 원망과 부끄러움 때문이라.
-스륵...
그대로 발레시오가 제 탁자 위에 놓인 서신들을 펼쳤다.
최근 왕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노스메디.
발레시오 역시 그 소문과 효과를 듣고 이를 입수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당장 탁자 위의 서신들이 그 증거.
하나 돌아온 대답은 혹시라도 남는 물건이 없는지 찾아보겠다는 말 뿐이었으니.
며칠 전, 광장에서 그가 부인에게 대답한 허울뿐인 말과 똑같았다.
‘혹시 몰라 북부대공에게도 서신을 보내뒀지만......’
아직까지 답장이 없는 걸로 보아 이번에도 실패인 모양이었다.
사실 아직은 답장이 오지 않는다고 확정하기에는 다소 이른 기간이었다.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리 일찍이 결론을 내린 건 그간의 노력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간 경험덕분이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7년이었다.
그동안 할 수 있는 건 전부 다 해봤다.
심지어는 터무니없는 미신부터 용하다는 점술가까지 찾아갔다.
우습지 않은가.
마법사라는 자가 결국 이러한 사술에까지 관심을 가지다니.
한데 그 결과가 지금 이 꼴이다.
“한심하군......”
그가 제 하얀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물론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은 온전히 그의 탓만은 아니었다.
당장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모든 게 전부 제 탓 같아서.
그렇게 매일매일, 7년간 쌓이고 쌓인 중압감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마수들이 기승을 부리며 육상교역로가 막혔다.
물론 지금 당장은 문제없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영지에 악영향을 끼칠 게 분명했다.
그야 쌓아둔 마광석이 전부 고갈되면 마법계 설비 구동은 올 스탑.
그만큼 영지의 마법사는 물론.
현재 그가 추진 중인 후진양성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수도 있었다.
덕분에 정말이지 일분일초단위로 늙어가는 기분.
동시에 그 순간이었다.
-똑똑똑!
그의 집무실을 따라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다급하기 없는 집사의 목소리.
“가, 가주님! 빨리 나와 보셔야 할 거 같습니다!”
이에 발레시오가 미간을 좁혔다.
그대로 벌컥,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
평소에는 점잖기 그지없는 그가 이토록 다급하게 부르다니.
설마 벌써 영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리고 그때였다.
“부, 북부...!”
“북부?”
“북부대공이 오셨습니다!”
그의 집사가 덥썩, 발레시오의 손을 잡고 외쳤다.
79화 바다의 새 주인(2)
북부대공이 찾아왔다.
그 말에 발레시오가 멍하니 집사를 바라보았다.
북부대공이 이곳까지 왔다고? 어떻게?
“......그게 정말인가?”
알다시피 현재 육상교역로는 마수들로 인해 막힌 상태.
그리하여 북부에서 이곳까지 오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작정하고 오면 올수는 있겠다만 안 그래도 긴 육상교역로의 대부분이 막혔으니, 한참이나 빙 돌아와야 하지 않는가.
물론 북부대공이 영지에 온 거야 백번 양보해서 저번에 보낸 서신 때문이라고 치자.
한데 과연 대공이 어떻게, 이토록 빨리 영지까지 다다랐는지.
제 아무리 그라도 쉬이 이해가지 않는 일이었다.
“예, 아이덴발트해를 건너서 오셨답니다.”
그러자 집사가 애써 가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하긴 그 또한 이를 처음 들었을 때는 발레시오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소식을 듣기 무섭게 집무실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말을 전했으니.
당장 숨이 찰만하였다.
동시에 그런 집사의 대답에 발레시오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무슨......”
아이덴발트해라면 분명 북부와 영지 사이에 있는 바다의 이름이었다.
하나 그 중간에 자리 잡은 씨 서펜트 덕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는 바다가 아닌가.
한데 그런 아이덴발트해를 건너서 왔다니.
그럼 씨 서펜트는 어찌하고 왔다는 건지.
물론 북부대공, 그러니까 발터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간 줄곧 북부의 마수무리와 야만족을 막아낸 것도 모자라.
최근 왕도에서는 쿠데타를 일으킨 소드마스터를 단신으로 꺾고, 왕가 일가를 구해냈다하지 않는가.
그리하여 붙은 이명이 겨울의 투신부터 왕도의 영웅까지.
하나같이 그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케끔 하였다.
그러나 아이덴발트해는 육지가 아닌 바다.
만약 인어라면 모를까.
제 아무리 북부대공이라 한들.
바다에서 씨 서펜트를 상대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에 가까운 일이었다.
“......”
그러나 그간 보아온 집사의 성격상.
그는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 할 자가 결코 아니었다.
거기다 애써 숨을 고르는 모습과 더불어 표정에 드러나는 다급함.
장담한다.
이게 만약 연기라면 그는 여기서 집사를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왕도로 나가 연극계에 진출해야할 인재가 분명했다.
그대로 머지않아.
후우, 발레시오가 숨을 고르며 집사를 향해 말했다.
“북부대공께서는 지금 어디 계신가.”
아무래도 여기서 이러고 있기보다는 직접 보고 물어보는 게 훨씬 빠를 터.
무엇보다 북부대공께서 직접 여기까지 왔다면 그 또한 얼굴을 보이고 맞이하는 게 예의가 아닌가.
“예,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에 집사가 즉시 꾸벅, 고개를 숙이며 그를 안내하니.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아이덴발트해와 맞닿아 있는 선착장이었다.
***
그렇게 영지 외곽에 위치한 선착장.
그곳에는 평소와 달리 한눈에 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이만한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는 단연.
-펄럭...!
선착장에 줄지어 서있는 북부의 와이번 덕분.
그대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삼은 채.
와이번들이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곳곳에서 경이로운 감탄이 터져 나왔다.
“오오......”
“저게 그 소문의 북부의 와이번이로군.”
“내 살아생전 이걸 직접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북부의 와이번 부대.
영지의 사람들도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보았다.
그야 대륙에서 최초로 와이번을 길들인 것도 모자라 기승수로 활용한 경우가 아닌가.
거기다 최근 북부의 입지와 위상이 날이 갈수록 상승하면서.
북부에 들린 귀족들과 더불어 상인들이 그 모습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직접 두 눈으로 본 와이번 부대는 상상이상으로 멋진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의 풍경은 굳이 현대로 비유하자면 전투기 조종사 혹은 슈퍼카 오너들이 한 데 모인 격.
이에 영지의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남자들은 나이를 막론하게 아예 반쯤 눈이 돌아가 있었다.
“거기다 듣기로는 하늘에서는 와이번을 따라올 마수는 거의 없다지?”
“그야 그렇겠지. 오죽하면 하늘의 제왕이라 부르겠는가.”
햇빛에 반사되는 다채로운 비늘의 색감.
그리고 비행에 최적화된 유려한 몸선까지.
그런데 만약 저걸 타고 창공을 가로지른다?
크으, 이게 로망이고 이게 낭만이지.
정말이지 그 상상만으로도 뭇 남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필정도.
이에 그들이 꿀꺽, 침을 삼키며 선착장의 와이번을 바라보았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전투기는 당연하며, 슈퍼카와 같은 고오급 탈것에 대한 욕망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중세에서 와이번 부대는 그와 비슷한 위치를 가지며, 사람들에게 선망의 눈빛을 받고 있었다.
무엇보다 각자 와이번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북부의 기사들.
그들에게서는 갈무리 된 분위기와 더불어 기사 특유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으니.
그 모습이 다른 시민들의 눈에는 꽤나 멋있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북부에서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글쎄. 영주님이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싶네만.”
그대로 영지의 사람들이 저마다 수군거리며 와이번과 기사들을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따라 마차 한 대가 급하게 정지하니.
“워워!”
그 정체는 바로 영지의 주인이자, 백작가의 가주 발레시오가 탄 마차.
그대로 집사와 발레시오가 마차에 내렸다.
그와 함께 선착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가주를 맞이했다.
“오, 오셨습니까.”
“그래. 그래서 북부대공께서는......”
마차에서 내린 발레시오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도 잠시.
잔뜩 몰려든 인파 사이,
한 남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짙은 흑발에 황금색의 눈동자.
그리고 어깨에 걸친 검은 모피코트까지.
무엇보다 그런 그의 주위로는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위압감이 느껴졌으니.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자가 바로 북부대공, 발터 레비오르라고.
이에 발레시오가 우선 몰려든 인파를 잠시 물리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북부의 주인을 뵙습니다.”
이어서 처억, 발레시오가 고개를 숙이며 북부대공을 맞이했다.
그러자 그의 위로 발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라.”
그와 함께 발레시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그 순간.
해안가의 밝은 빛이 내리쬐며 발터와 그 옆에 있는 페라리를 비추었다.
-사아아...
그렇게 선착장을 따라.
페라리 특유의 하얀 비늘에 빛이 반사되며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옆에 자연스럽게 페라리를 쓰다듬으며 목줄을 잡고 있는 발터는 어떠한가.
짙은 흑발과 대비되는 황금색 눈동자.
그런 그의 눈동자 안에는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이채가 맴돌고 있었다.
이에 발레시오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
발레시오 칼리츠, 그 또한 백작으로 그간 수많은 귀족들을 보아왔지만 이토록 한눈에 강한 인상을 준 자는 결코 없었다.
그야말로 대공이라는 위엄에 어울리는 분위기.
그가 어찌하여 왕도의 영웅으로 추앙받는지 짐작케끔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도 잠시.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발레시오가 발터를 향해 말했다.
“그럼 우선 제 성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러지.”
그대로 발터를 선두로 폰과 레닌을 비롯한 북부의 기사단이 그 뒤를 따르니.
그 풍경이 제법 장관이었다.
***
그렇게 발레시오의 성에 위치한 접객실.
그곳에는 발터와 그의 호위기사 레닌, 발레시오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러니까 레비아탄을 격퇴하고 아이덴발트해를 건너서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발레시오가 발터와 레닌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이에 발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자네 말 그대로네.”
그와 함께 발터가 레닌을 향해 고개를 까닥였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집무실의 탁자 위에 푸른 보옥과 낡은 검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
“이, 이건......!”
그대로 발레시오의 눈동자가 커졌다.
영롱한 빛을 내는 푸른 보옥.
이는 틀림없는 바다의 심장이었다.
바다의 심장, 혹은 수룡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것은 레비아탄이 제 몸속에 품고 있는 보석으로.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내단과도 같은 물건이었다.
무엇보다도 바다의 심장은 마법적 처리를 가해 가공할 경우.
바다에서 다른 마수들의 접근을 막아줄 뿐만이 아니라, 같은 수룡종에 한해서는 녀석들을 조종할 수 있는 아티팩트로 만들 수 있는 귀하디귀한 물건이었다.
하나 그 입수 난이도가 워낙 높아, 기껏해야 왕궁주도의 거래장이나 암시장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
그만큼 4써클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이자 백작인 그조차도 고작 서적에서나 본 물건이지.
이렇게 실물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그 옆에 있는 낡은 검 한 자루.
이건 레비아탄, 그 중에서도 아이덴발트해의 주인인 녀석의 몸에 박혀있던 검으로.
언제, 어떻게, 누가 레비아탄의 몸에 검을 박아 넣었는지는 모르지만, 과거 뱃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전설처럼 내려져오던 검이 아닌가.
듣기로는 과거 고대왕국의 왕이 제 기사에게 하사한 검이라 했던가.
아무튼 지금 탁자에 놓인 푸른 보옥과 낡은 검.
이는 발터가 레비아탄을 토벌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
“......대단하군요.”
발레시오가 작게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정말로 씨 서펜트 무리와 레비아탄을 전부 토벌할 줄이야.
그러자 발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걸로 전후 상황은 전부 이해한 모양이니.”
“......”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 이는 곧 백작가와의 거래이야기.
그대로 발터가 종이 하나를 꺼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우선 일전에 자네가 부탁했던 내용이 담긴 계약서네.”
발레시오가 북부와 거래할 물품은 노스메디와 대량의 마광석.
그리고 그에 따른 물량과 비용이 적힌 계약서였다.
이어서 발레시오가 찬찬히 계약서의 내용을 살폈다.
현재 마광석의 시세와 비교하면 계약서에 명시된 비용은 그보다 높았다.
하나 발터가 말했다.
“북부의 마광석은 통상적으로 유통되는 마광석보다 질이 좋은 건 자네도 익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네."
"......"
"그리고 무엇보다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 않은가.”
확실히 육상교역로가 막힌 지금의 상황을 고려할 때.
발터가 제시한 가격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합리적인 가격.
이에 발레시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거래합시다.”
지금 상황에서 이만한 마광석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곳은 북부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향후 후진양성에 들어가는 마광석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충분히 할 만한 거래였다.
“고맙군. 이걸로 거래는 성사된 걸로 알겠네.”
“알겠습니다.”
곧이어 발터가 입을 얼었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다음이라면 설마......"
그 말에 흠칫, 발레시오의 손끝이 떨려왔다.
동시에 발터가 제 품속에서 하얀 목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래. 자네가 가장 바라던 물건일세."
그대로 딸깍, 발터가 천천히 하얀 목함을 열었다.
-파아앗...!
그와 함께 목함 안을 따라 영롱한 푸른 결정이 빛을 발하니.
이는 다름 아닌 노스메디.
북부가 만들어낸 기적이자, 현재 발레시오가 가장 바라는 것이었다.
“......!”
그 모습에 발레시오가 멍하니 노스메디와 발터를 번갈아보았다.
정말로 노스메디를 가져오다니.
심지어 북부대공이 직접 가져올 줄이야.
그러자 발터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받게나.”
그 말에 발레시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도 잠시.
발레시오가 꾸벅,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결코 잊지않겠습니다.”
발레시오가 연신 감사를 표했다.
기쁨과 감동이 묻어나오면서도 감정이 벅차올라 울먹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만으로도 발레시오의 진심이 느껴지는 듯하였다.
그대로 얼마나 지났을까.
애써 감정을 추스른 발레시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귀빈 앞에서 추태를 보였습니다.”
이에 발터가 고개를 저으며 옅게 웃었다.
“아닐세. 괜찮네.”
오히려 이리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니.
발터 역시도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시중가의 5배를 준다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
무엇보다 대량의 마광석까지 사준다지 않는가.
그리고 이 다음에 할 '제안'을 위해서는 이 정도 호감작은 미리 해두는 게 좋았다.
그대로 발터가 계약서를 챙기며 말했다.
“그럼 마광석은 준비되는 대로 보내주도록 하지.”
“아, 그렇다면 마광석은 어떻게 운송하실 생각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지금은 육상교역로가 막힌 만큼.
이만한 양의 마광석을 운송하는데도 꽤 많은 시간과 인력이 소요될 터.
이에 발터가 말했다.
“아이덴발트해로 운송하는 건 어떤가?”
“예? 하지만......”
그가 레비아탄을 토벌하면서 아이덴발트해의 새 주인으로 등극한 건 사실.
그러나 당장 이렇다 할 대형선박은커녕.
물건을 대신 옮기고 관리할 상단도 없는 마당에 어떻게 운송한다는 걸까.
그러자 발터가 제 눈을 반짝이며 따악, 손가락을 퉁겼다.
그와 함께 레닌이 또 다른 계약서, 아니 좀 더 정확히는 투자 제안 계약서를 꺼내 들이밀었다.
“그리하여 내 자네에게 하나 더 제안하고자 하는 게 있네.”
“제안이라면......”
“나는 아이덴발트해를 북부와 대륙을 잇는 해상교역로로 개발할 생각이네.”
“......!”
이것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발터의 제안.
동시에 그가 여기까지 노스메디를 가져와 직접 전해준 목적이었다.
그야 투자를 제안하기에 앞서 상대에게 미리 호감을 쌓아두는 건 상당히 좋은 방법이 아닌가.
그 말에 흠칫, 발레시오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간 아이덴발트해의 가장 큰 문제는 씨 서펜트.
한데 지금 그 골칫덩이가 없어진 셈이니, 충분히 실현가능성이 있는 계획이었다.
“그 과정에서 대형범선을 중심으로 한 상단을 운영함과 동시에 귀족들을 겨냥한 관광 사업을 병행할 계획이지.”
“관광 사업이라면......”
“그래. 일명 크루즈.”
크루즈. 호화 여객선을 뜻하는 말로.
현재 북부는 제법 인기 있는 관광지로 부상하는 만큼.
이번에 해상교역로를 열어, 아예 북부 크루즈 여행 코스를 기획하여 판매한다.
하나 그 과정에서 선박 제조부터 관광객 유치까지.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백작가의 투자를 받는다면?
초기 비용은 절감하면서도 이윤은 최대로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대로 발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와 관한 건은 천천히 생각해보고 답변 주게.”
그와 함께 발터가 등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그가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셋...넷...'
그리고 정확히 다섯이 되는 순간이었다.
“......대공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발레시오가 그를 멈춰세웠으니.
빙고. 발터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등을 돌렸다.
"무슨 일이지?"
"......"
곧이어 발레시오가 발터를 바라보았다.
대형범선을 중심으로 한 상단운영과 크루즈 여행.
확실히 지금의 북부는 과거와 위상을 달리하고 있는 만큼.
충분히 투자 가능성 있는 사업이었다.
물론 생각대로 풀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만약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다면 백작가 역시 타격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나 발레시오는 믿기로 했다.
레비아탄을 쓰러트리고 아이덴발트해의 새 주인으로 거듭난 그를.
처음 선착장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느낀 그 경이로움을, 더 나아가 자신의 안목을 믿기로 했다.
무엇보다 제 자신을 위해 바다를 건너 노스메디를 건네준 은인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
“투자 하겠습니다.”
결단을 내린 굳은 눈동자.
그대로 발레시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머지않아.
“......탁월한 선택이군.”
발터가 작게 웃으며 발레시오를 향해 걸어갔다.
역시 직접 노스메디를 가져온 효과가 제대로 먹혀들었다.
이래서 호감작은 틈틈히 해주는게 좋다니까.
발터가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처억,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하네. 발레시오 경.”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공님.”
그와 함께 터업, 발레시오가 발터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니.
북부와 백작가 간의 거래성사와 더불어.
대륙의 새로운 해상교역로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80화 버스터콜(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