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죽어 버린 나를 바라보던 중이었다.
“허무하게도 끝났구나, 시온.”
그녀는 키득대며 말했다.
“그토록 열망하던 황제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쓰러지다니.”
나는 답하지 않았다.
죽은 자니 당연하다.
“하지만 걱정은 말렴. 눈을 뜨면 과거일 거야.”
그녀는 속삭인다.
“그래, 회귀回歸. 또 한 번의 기회. 그런 약속이었잖아?”
달콤한 이야기였다.
부하를 잃고, 명예를 잃고, 자기 자신이라 할 만한 것마저 모두 잃어버린 영웅에게는 과분할 만큼 달았다.
“이번에는 닿아 봐야지. 저 황제의 자리, 끝내 닿지 못한 숙명의 끝에.”
그녀는 실패한 영웅의 이름을 부른다.
“자, 돌아가라, 시온 폴링라이트.”
일렁이는 은색 불꽃.
“일곱 비밀 품은 영혼으로 대제국의 정점에 닿아 봐.”
시간이 뒤엉킨다.
미래는 과거로, 과거는 미래로.
옅어지는 속삭임만이 귓가를 맴돈다.
“하지만 잊지 마. 마지막 비밀은 모든 걸 뒤집을 테니.”
* * *
어린아이가 침상에 누워 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고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직, 아직이다…….”
신음을 흘리는 아이의 몸은 온통 땀 범벅이다. 아이는 이내 부르르 경련하다 갑작스레 눈을 부릅떴다. 날이 선 듯한 시퍼런 광망이 솟더니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나는, 이 메리언의 시온은 아직……!”
고함을 지르던 아이가 말을 흐렸다.
“…어?”
그는 멍하니 주위를 둘렀다. 피 내음은 없다. 창과 칼과 소음도 없다. 폭신한 이불과 따스한 햇살뿐이다. 몸이 무거웠다. 땀 때문에 이불이 달라붙은 탓이다.
“…내 방이잖아. 아주 어릴 적에 살던.”
당황해 발을 내디뎠다가 쿠웅. 턱이 얼얼했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영 어색하다. 팔다리가 갑자기 확 짧아진 것처럼 느껴졌고, 정말로 그랬다. 시온은 넘어진 채로 제 손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고.”
나자빠진 채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크리스털 등, 침구의 냄새, 단풍이 얼룩한 창밖의 풍경. 얼핏 낯설다. 허나 곧 향수가 뒤이었다. 아찔할 정도로 짙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린아이가 된 영웅은 확신한다.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돌아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회귀, 또 한 번의 기회!”
* * *
“과거란 말이지.”
어째 우스워 곱씹었다.
“그 모든 일이, 아직이란 거잖아. 재앙도, 세레나도, 그 전쟁까지도…….”
머리가 복잡해 고개를 들었다. 천장에는 크리스털 등이 여전히 화려하다. 눈이 부셔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많은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또한 그의 비밀들도. 조용히 질식해 가던 시온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그는 차근히 숨을 내쉬었다.
“되짚어 보자. 무얼 해야 하는지, 내가 누군지, 이게 소설이고, 마치 처음 읽는 독자에게 해설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기억들은 여전히 뒤엉켜 있다. 전장의 피비린내, 과거로 보내 준 여인, 잊어서는 안 될 숙명, 영혼 깊숙이 간직한 비밀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 잊지 말아야 할 것부터.
“나는 시온. 메리언의 시온.”
제 이름을 되새긴다.
그제야 숨이 가라앉는다.
“…영웅이라 불렸고, 황제의 자리를 향했었다. 그래, 황제의 자리, 대제국의 정점. 거기에 닿아야 했어.”
작고 하얀 손바닥을 내려보았다. 고생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것이다. 고된 일의 흔적도 오래된 흉터도 없이, 가녀릴 만큼 뽀얗기만. 낯설다. 지독하게도 현실감이 없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다.
“허나 실패했고, 분명히 죽었는데… 과거로 돌아왔단 말이지.”
의문을 또한 천천히 정렬한다.
“그럼 지금 나는 몇 살이지.”
방을 둘러보았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고른 덕일까. 창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기도 하고, 침대 밑에 숨겨 둔 장난감 따위를 꺼내보기도 했다. 그리고 탁자 위, 몇 권의 책. 시온은 곧 확신할 수 있었다.
“열한 살 무렵이군. 그럼… 19년을 거슬러 왔나.”
탁자 위 책들이 무엇보다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고대 시학’, ‘마력의 이해’, ‘호투스 어語 강론’……. 틀림없었다. 기억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다. 열한 살에 배우던 것들이었다. 겉면에 이름이 쓰였다. ZIONIS. 시온은 묘한 탄성을 뱉고 말았다.
“지오니스!”
그리운 옛 이름.
“맞아. 19년 전, 열한 살이라면 나는 지오니스겠어. 아직 시온이라는 이름을 쓰기 전이니까.”
오래전 버렸던 이름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이름을 보고 나서야 시온의 마음에 강렬한 확신이 새겨졌다.
“이름이란 묘해. 한순간에 실감이 들잖아. 이때로, 이 땅으로 돌아왔다는 게…….”
눈을 들어 밖을 보았다. 얼룩덜룩한 단풍. 그 너머에는 인간의 도시가 있다. 돌길과 종탑과 궁전과……. 정연하고 화려한 도시. 너머로는 또 땅이 이어진다. 비옥하고 기름진 땅이 끝도 없이 계속된다.
“이 땅의 이름은 코르디스.”
생명과 활기로 맥동하는 땅.
거대하고 드높은 천년의 문명.
대륙의 심장을 거머쥔 위대한 나라.
“내 아버지의 제국.”
* * *
코르디스CORDIS, 위대한 대제국.
갈라지지 않았다.
쇠락하지 않았다.
무뎌지지 않았다.
대륙의 중심에 고고히 선 것이 천년.
모두가 제국의 것이다. 가장 비옥한 땅들과 드넓은 강들, 가장 지혜로운 현자들과 용맹한 영웅들, 가장 위대한 황제까지도.
대제大帝 콘티누아를 칭송하라.
그는 천년 제국의 주인, 가장 위대한 세 명의 황제 중의 하나이니.
“그리고, 내 빌어먹을 아버지 되시지.”
돌아온 영웅, 시온 폴링라이트는 대제 콘티누아의 아들이다. 숨겨진 자식 따위도 아니다. 그는 대제국의 공인된 계승권자, 제 5황자 지오니스다.
“나는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제 고귀한 핏줄을 곱씹어도 시온에게는 조금의 기쁨도 되지 않았다.
‘위대한 아버지. 위대한 형제자매들. 위대하지 않은 내 입장에는 얼마나 달갑지 않았는지!’
계승권을 가진 6황자 2황녀.
형제자매 여덟이나 황제의 자리 하나뿐.
싸움이 없을 리가, 치열하지 않을 리가. 외척을 등에 업고, 칼날에 독을 바르고, 입에 거품을 물고. 오직 하나뿐인 권좌를 위해서.
‘치이고 치이다 결국, 이름도 신분도 버리고 도망쳤지.’
회귀 전에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형제자매들의 싸움에 휘말린 끝에 모든 것을 버리고, 명줄만을 어떻게든 붙들어, 개처럼 기어 이 땅을 떠났다. 지오니스라는 이름도 그때 버렸는데.
“도망쳤던 제국으로 돌아왔구나.”
오래된 이름과 함께 잊었던 감정들도 고개를 든다. 뱃속에서부터 쿡 하고 찔러 온다. 분노인가, 후회인가. 잔뜩 곪아서 이제는 정체조차 알 수 없다. 그 눈이 싸늘하게 빛을 발한다.
“다시 제5황자 지오니스가 되어서.”
시온의 눈빛에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열한 살 지오니스는 도망쳤다.
정든 고향도 무엇도 모두 버리고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허나 다르다. 달라야만 한다.
“모든 걸 바꾸겠어. 닿아 보이겠어.”
그는 메리언의 시온.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온 영웅.
“대제국의 정점, 저 황제의 자리에.”
* * *
“하지만 힘. 결국 힘이 문제야.”
재차 손을 내려보았다.
여전히 하얗고 뽀얗다.
‘육체도 마력도 완전히 어린애.’
열한 살 꼬마의 몸뚱이는 얼핏 소녀로 보일 만큼 가녀리다. 형제자매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제대로 단련해 본 적도 없으니 당연하다. 생각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다.
‘무엇보다 셉템 아르카나. 하나 빼고 모두 닫혀 버리다니.’
셉템 아르카나Septem Arcana.
일곱 비밀이 낳는 일곱 가지 기예.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준 힘이지만, 하나만 남고 모두 닫혀 버렸다. 닫히지 않은 하나도 마력이 이래서야…….
‘괜찮아. 시간만 있다면야 금방 회복할 수 있어.’
시간을 거슬렀으니 강해질 방법이야 많다. 그는 시온 폴링라이트였으니까.
‘메리언의 시온에게 이 정도 역경은… 응?’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다가오는 발소리가 있다.
상당한 속도로 가까워지는 중이다.
‘누가 오는걸. 꽤나 급한 모양인데.’
“전하, 들어가겠습니다!”
* * *
“일어나셨지요? 일어나신 줄 알고 들어갑니다!”
밤색 머리 사내가 왈칵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아니, 역시나!”
황자의 방문을 멋대로 열어젖히는 무례를 범하고도 사내는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레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늑장 부리시면 안 된다니까요! 아, 이거 큰일 났군. 정말 큰일 났어!”
“…….”
시온이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았다. 밤색 머리, 재잘대는 듯한 잔소리, 모두가 오랜 기억 속 그대로. 시온이 입술을 달싹였다.
“…피에스?”
“예?”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시온은 재차 물었다.
“…너, 피에스 로에스티?”
“예. 피에스입니다. 전하의 하나뿐인 근위기사. 다른 피에스도 있습니까?”
“하.”
‘맞아, 이런 사내가 있었지.’
피에스 로에스티. 5황자 지오니스의 근위기사이자 보모, 또 유일한 말벗. 누구도 다가오지 않던 이 황궁에서 늘 시온의 곁에 있었던 사내.
‘황궁에서 도망치던 날, 나 대신 죽었던, 피에스…….’
세월이란 참으로 무섭다. 이런 사내를 잊어버릴 줄이야. 그를 위해 목숨까지 바쳤었는데. 마음이 복잡해져 쓴웃음을 머금었다. 상념에 빠져든 시온의 모습에 피에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지오니스 전하? 정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냐, 반가워서.”
“반갑다고요?”
매일 보는 얼굴인데 반갑다니. 피에스는 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잊어버렸다.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급박하고 급박한 상황이다.
“문제없으시면 됐습니다! 시간이 없다고요! 어서 준비하세요!”
“그보다 대체 뭘 준비하라는 거야.”
“예에에? 정말 왜 그러십니까!”
피에스는 경악에 차서 외쳤다.
“아예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까먹었다고 하시지 그러세요!”
“까먹었는데.”
“농담도… 아니, 정말로요?”
“정말로.”
“맙소사!!!”
시온은 태연하다.
조금의 급박함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을 보고서야 피에스는 펄쩍 뛰었다. 그는 끄응, 하고 머리를 싸맸고, 이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여간, 하여간! 예복부터 찾아야겠네. 다들 모여 계시는데 내가 못 살아!”
“모여 있다고? 누가?”
“누구긴요. 황자 황녀 전하분들이지요!”
“…응?”
황자 황녀라 하면, 그의 형제자매들.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자들이 왜 모여 있을까. 무언가 놓친 듯해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았다. 여전히 단풍이 얼룩덜룩하다. 잎이 떨어지려면 꽤 남아 보였다.
“혹시 오늘…….”
열한 살의 가을 무렵.
모여 있는 그의 형제자매들…….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
“…열 번째 달 열 번째 날이야?”
“잘 알고 계시네요.”
피에스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대답했다. 그보다 예복을 어디에 놓으신 겁니까? 아, 찾았다. 아니, 바지랑 망토는 없잖아! 옷방 정도는 따로 해 줄 것이지, 푸대접도 정도가 있는데! 시온은 그의 중얼거림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계승전 선포의 날?”
“아, 그렇다니까요!”
“…….”
시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19년을 거슬러 왔는데, 하필이면 계승전의 첫날이라…….’
그의 운명을 뒤틀어 버렸던 싸움의 첫날로 돌아왔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아무 힘도 없는 채로! 시온은 웃고 말았다. 이래서야 웃을 수밖에 없다.
‘이런, 빌어먹을!’
2화
여섯 명의 황자, 두 명의 황녀.
대제 콘티누아의 여덟 아들딸.
모두가 적통, 모두가 정당한 계승권자.
허나 권좌는 오직 하나뿐.
그러니 필연적으로, 계승전繼承戰!
정점은 둘이 될 수 없는 법.
각기 다른 어머니를 둔 형제자매는 겨루어야만 한다.
자신이야말로 권좌에 합당하다고 증명해 내야만 한다!
* * *
‘계승전.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응. 잊을 수가 없어.’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아. 어떻게 잊겠어. 황궁에서 도망친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황제의 자리, 대륙의 주인을 정하는 싸움이 치열하지 않을 수는 없다. 중상과 모략이 당연했다. 독과 비수도 잦았다. 어찌나 지독했는지, 회귀 전의 제5황자 지오니스는 조용히 숨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압력과 칼날에 쫓기다 결국은 이름과 신분을 모두 버리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19년을 거슬러 보내 줬으면서 왜 하필이면 오늘이야?’
세월을 넘어 5황자 지오니스의 신분으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계승전, 그것도 첫날! 미간이 찌푸려졌다.
‘회귀한 지 삼십 분도 안 됐는데 그 인간들을 볼 생각을 하니……. 부담스럽군.’
너무 급전개잖아, 이래서야! 초반부터 캐릭터가 과다하면 집중이 떨어지는데 말이지! 시온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말을 중얼거렸다. 계승전 선포의 날. 그의 형제자매, 황자 황녀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같이 대제의 피를 이은 괴물딱지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좋았을 텐데. 아쉽기는 한걸…….’
회귀 전의 싸움, 한두 문장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파란, 그 아수라장! 거기에 어린아이 몸으로 끼어들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대제의 여덟 아들딸.
모두 다른 어머니를 두었다.
대제 콘티누아는 계승전에 관여하지 않지만, 외척의 도움을 막지도 않았다. 뒷받침할 세력 또한 황제가 응당 가져야 할 능력 중 하나이니까.
누구의 어미는 최고재상의 딸이다.
누구의 어미는 제국십장 중 하나였다.
누구의 어미는 공왕의 하나뿐인 누이다.
허나 시온.
어머니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었다.
계승전 전의 황자 황녀는 모계의 성씨를 쓴다.
코르디스의 이름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황제뿐이기에 그러하다.
어머니 이름 알지 못하는 제5황자는 성씨도 없이 그저 지오니스ZIONIS라 불렸다.
강대한 외척을 업은 형제자매들.
어린아이에 불과한 시온.
희망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나.
돌아온 영웅의 눈은 되레 가라앉는다.
‘하지만 어려울 것도 없지.’
참으로, 그는 영웅이었다.
‘열세는 익숙하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패배했다 한들 이루어 낸 많고 많은 승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이의 공포가 되었고, 또 얼마나 많은 이의 희망이 되었던가? 많은 비밀을 품고 과거로 돌아왔으니 어린아이의 몸이나 불리한 판세 따위는 큰 걸림돌이 될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거라면 역시 마갑, 셉템 아르카나, 대경합일까.’
시온이 턱을 쓸었다.
‘죄다 준비가 필요해. 당분간은 어린아이 행세를 할 수밖에.’
오래된 불씨가 되살아남을 느낀다.
푸른 눈이 이글거린다.
‘열한 살 지오니스답게.’
* * *
“…전하, 지오니스 전하!”
피에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시간이 없어요!”
“미안, 미안. 하지만 봐 봐, 이미 다 갈아입었는 걸.”
“예에……? 어라.”
밤색 머리 사내가 의아한 얼굴로 시온을 이리저리 살폈다.
“정말이시네요. 허리띠도 꽉 조였고, 소매도 깔끔, 옷 장식도 정확하게!”
열한 살 지오니스는 이미 견본으로 써도 될 만큼 완벽한 황실 예복 차림이었다. 입고 있던 잠옷도 침대 위에 개어져 있다. 대체 어느 사이에?
“…언제부터 혼자 입을 수 있으셨습니까?”
“오늘부터 계승전이잖아. 조금은 어른스러워야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피에스는 약간 당혹감을 느꼈다.
황가의 예복은 입는 것조차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지오니스는 늘 그것을 어려워했다. 그런데 곁에 있던 그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갈아입다니. 피에스는 약간의 의문을 느꼈으나 시온의 재촉이 그것을 털어 내었다.
“그보다 서두르자, 피에스. 본궁에 가야지.”
“아. 그렇지요!”
“다들 기다린다며.”
시온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머물렀다.
“고귀하신 내 피붙이들께서.”
* * *
‘그래도 일 년만 앞으로 보내 줬어도 좋았을 텐데. 숫자도 20년으로 딱 떨어지잖아.’
시온=5황자 지오니스는 복도를 걸으면서도 투덜거렸다. 물론 속으로만 뱉었고, 겉으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었다. 황궁에는 보는 눈이 많다. 행여 수상하게 보여서는 안 될 일이다. 예를 들면, 마주 걸어오는 일단의 관리 같은 이들에게.
“…….”
“…….”
젊은 관리 몇이 흠칫 물러섰다. 화려한 황자의 예복을 멀리서 알아본 까닭이다. 그들은 시온의 얼굴을 보고서야 긴장을 풀었다. 그러고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일개 관리들이 황자에게 보일 태도가 아니다.
‘아. 이 그리운 푸대접.’
모른 척도 아는 척도 하기 힘든 골칫거리.
이 궁전에서 5황자 지오니스는 그런 존재다. 없는 사람 취급하기에는 너무 고귀하고, 걸맞게 대하기에는 다른 황자나 황녀의 눈이 무섭다. 그러니 다들 쉬쉬하며 최소한의 예만 취할 뿐. 마치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자리를 피하는 것도 익숙하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아니, 저자들이 감히 전하께…….”
피에스만이 시온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 마음에 상처라도 입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듯하다. 기사답지 않게 마음이 여린 사내였다. 시온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무시당한 건 난데, 왜 네가 더 기분이 나빠 보이니.”
“…불경하지 않습니까.”
“신경 쓰지 마, 피에스. 늘 그렇잖아.”
시온이 킬킬 웃었다. 어린 시절, 뒷배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는 언제나 외톨이였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머니와 너무 위대해서 얼굴 한번 보기 힘든 아버지. 머무르는 별궁의 시녀 몇과 피에스만이 그나마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였다.
“그래, 어디로 가야 하더라…….”
“만찬실 옆길을 따라 창천의 방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 맞아.”
19년 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분명 그런 곳이 있었다. 제국의 시조인 창천대제의 침소라고 했던가. 음식 냄새가 풍겼다. 주방이 가까웠다. 그렇다면 만찬실도 곧이다.
“같이 갈 생각이야, 피에스?”
“네?”
“창천의 방은 황족만 들어갈 수 있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피에스 로에스티가 뺨을 긁적였다. 천 년 묵은 제국이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관습이라면 널리고 널렸다. 계승전의 선포는 창천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그 방에는 황제의 핏줄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그러하다.
“그 바로 앞까지는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근위기사니까요.”
“아니, 혼자 가도록 할게. 어차피 창천의 방까지는 들어가지도 못하잖아.”
“…전하, 진심이십니까?.”
“그럼.”
“…….”
시온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피에스 로에스티가 입을 다물었다. 명령이라면 복종할 수밖에 없다. 밤색 머리 사내는 긴 한숨을 내쉬더니 자세를 낮추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대신 조심하십시오.”
피에스 로에스티는 입술을 꽉 깨문 채였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시온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들어도 참으십시오. 다 지나갈 것입니다.”
속을 긁으려 드는 이들이 있을 터다. 참기 힘든 멸시와 조롱을 던져 시온을 깎아내리고, 자기를 보호하려 하겠지. 그러니 열한 살 지오니스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적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눈에 띄지 마시고…….”
“아, 알아, 알아.”
시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피에스의 눈썹이 휘었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보이는데 너무도 담담하다.
“어떻게든 되는 법이야, 피에스. 다녀올게.”
“…그래도 이 피에스는 걱정됩니다. 정말 전하를 혼자 보내도 될는지…….”
밤색 머리 기사는 염려를 떨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시온은 열한 살 꼬맹이일 뿐이다. 괴물 같은 형제자매들과 비교하면 더없이 작고 초라하게만 보였다. 시온은 그런 마음을 눈치채고는 씨익 웃었다.
“그래, 피에스. 넌 그런 녀석이었지.”
“지오니스 전하…….”
“대신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겠어?”
“…부탁, 이십니까? 예, 무엇이든.”
명령이 아닌 부탁이라. 어째 생소한 표현에 피에스가 고개를 갸웃대었다. 시온은 그런 피에스에게 손짓한다.
“자. 귀 좀 대 봐.”
피에스 로에스티는 영문 모를 얼굴로 자세를 낮추었다. 열한 살 시온=5황자 지오니스는 제 근위기사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그들 외의 누구도 엿듣지 못할 은밀한 속삭임이었다.
“…를 준비해…. 아주 …하게. 알겠지?”
피에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를 아주 …하게요?”
“그래. 서둘러 준비해서 여기로 와. 식이 끝날 때쯤 아주 완벽한 상태가 되도록.”
은밀한 속삭임에 피에스는 의문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햇살이 들이친다. 금빛 머리칼과 푸르른 눈은 그 아래에서 아름답게 빛난다. 얼핏 보면 소녀같이 가녀리나 깊은 곳에서 불굴의 불꽃이 일렁였다. 피에스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어째서입니까, 전하?”
“비밀.”
시온은 제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배시시 웃는다.
“난 비밀이 많거든, 피에스.”
3화
피에스와 헤어져 황궁을 걸었다.
‘참도 아름답군.’
단순히 보화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얻지 못할 기품이, 천년 제국의 자부심이 가득하다.
‘회귀 전에는 이곳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시온이 쓰게 웃었다. 회귀 전, 정말 꼬맹이 지오니스이던 19년 전에 이 황궁은 그저 두려운 곳이었다. 행여 형제자매의 눈에 띌까, 또 어디서 비웃음을 당할까 노심초사했으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유리 벽 복도를 지났다. 너머에 보이는 것은 화사한 정원이다. 유리 벽은 어떤 마법을 품고 있는지 소리나 냄새를 가로막지 않았다. 꽃향기가 향기로웠으나 시온은 걸음을 돌렸다. 그의 길은 아름다움으로 향하지 않는다.
‘만찬실에서 오른쪽.’
정원을 지나 만찬실의 우측으로. 꺾어 들면 은밀한 느낌이 짙다. 깊은 곳과 이어져 창문이 적은 탓이다. 길이 복잡해서 기억을 더듬었다. 19년 만에 길을 찾으려니 쉽지만은 않았다.
인적은 점점 줄어들었다. 이 복도의 끝은 황족의 내실로 이어지니 당연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청록색 로브를 걸치고 콧수염이 멋들어졌다.
“멈추어 주십시오.”
사내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 앞은 황족의 내실. 존함을 여쭈어보겠습니다.”
“지오니스.”
시온은 당당히 말한다.
“제국의 다섯 번째 황자.”
“맞습니다. 정말 그렇게 보이는군요. 하지만 확인할 기회를 주시렵니까?”
“물론, 코넬리우스 학장.”
코넬리우스라 불린 사내가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을 했다.
“저를 아시는군요?”
“제국마도원의 학장을 어찌 모르겠어. 보초나 설 몸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
“그리 말씀하시니 감사합니다.”
코넬리우스는 정중한 말투였다. 아무리 계승전이라고 해도 학장이나 되어서 보초를 서는 것이 불만스럽던 터에 황자가 추켜세워 주니 내심 기분이 좋았다.
“자, 손목을 이리로.”
시온은 망설임 없이 손을 주었다. 코넬리우스는 가느다란 손목에 요상한 기구를 가져다 대었다. 신원을 확인하는 마법적 장치다. 삑, 하는 소리가 났고 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역시 전하 본인이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실례까지야. 당연한 절차지.”
“존함만 듣지 뵙는 것은 처음인데, 상냥하시군요.”
코넬리우스는 재차 물었다.
“혹시 무장을 가져오셨습니까?”
“보는 대로, 빈손이야.”
“동행은요, 전하?”
“그것도 보는 대로.”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혼자 몸이었다. 유일한 근위기사도 심부름을 보낸 채다. 코넬리우스가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무장이나 동행은 모두 이 앞 복도에 내려놓으셔야 한다고 일단 안내는 드립니다만, 필요 없으시겠군요.”
콧수염 사내가 비켜섰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제 가슴팍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황족에게 표하는 예다.
“들어가십시오, 전하. 당신의 길에 영광이 있기를.”
* * *
‘정중하게 대해 주니 오히려 낯설군.’
시온이 피식 웃었다. 이 황궁에서는 푸대접이 일상이었다.
‘코넬리우스 메르헤스. 저 사내를 여기서 볼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제국마도원의 학장이자 네 별의 마법사라는 이름은 가볍지 않다. 그런 사내가 일개 근위병처럼 보초를 서다니. 하지만 이상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이 복도는 대륙에서 가장 은밀한 장소 중 하나로 향한다. 황족이 아니라면 이 복도에조차 발을 들일 수 없고, 그것만으로도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오늘은 약간의 북적임이 있다.
‘어이쿠. 살벌들 해라.’
복도에 줄지어 선 자들이 있다.
‘내 형제자매의 사냥개들.’
숨통을 죄는 듯한 기세가 넘실거리다 시온을 발견하고는 점차 줄어들었다.
‘주인을 대신해서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고 있었나?’
여기까지 함께한 동행이라면 필시 측근 중의 측근. 다들 코넬리우스 학장 못지않은 기세를 뿜어 대고 있다. 회귀 전에 명성을 날리던 얼굴도 더러 있었다.
‘다들 실력이 대단… 으엑!?’
시온이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옥색 눈의 사내 탓이다.
‘점쟁이 아메투스잖아!? 누가 저 자식을 동행으로 데려온 거야?’
저 옥색 눈, 잘못 보았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점쟁이 아메투스다. 회귀 전, 코르디스 제국십장帝國十將 중 하나였던 괴물 중의 괴물!
‘놈도 이때 이곳에 있었군. 너무 어릴 적이라서 몰랐는데…….’
시온이 황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점쟁이는 위험해. 눈 마주치지 말자.’
태연을 가장하며 조용히 지나쳤다.
그에게 시선이 쏠렸으나 누구도 말을 걸어오거나 인사하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다. 이것이 본래 5황자 지오니스가 받아 오던 대우다.
‘그래. 어차피 관심들도 없군.’
복도의 끝에서 문을 밀어젖혔다.
저 사내들은 지날 수 없는, 황궁 내실의 문이다. 키잉, 하는 묘한 소리와 함께 몸을 훑어 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모종의 마법이 그를 시험하는 것이다.
고대의 마법이 그를 살핀다. 그러나 시온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당당히 황궁의 가장 깊은 곳, 창천의 방 앞에 섰다.
그는 코르디스의 정당한 계승권자.
콘티누아 대제의 핏줄이다.
‘아. 드디어 뵙나.’
심장이 묘한 기색으로 두근거렸다.
‘내 지긋지긋한 형제자매들!’
* * *
“왜 이런 부탁을 하셨담.”
피에스 로에스티는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시온의 말대로, …를 아주 …하게 준비하기 위해서. 식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완벽한 상태로 가져와 달라고 했으니.
“그보다 지오니스 전하, 괜찮으실까…….”
코르디스 황가의 핏줄에는 힘이 있다.
권력이나 고귀함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탁월한 마력이나 넘치는 재능과 같이 알기 쉬운 힘도 피를 타고 대대로 이어졌다. 콘티누아 대제의 아이들에게는 유난히 그 피의 축복이 짙었다.
“다른 전하들께 비하면 지오니스 전하는 역시…….”
황자 황녀에 대한 여러 소문.
누구는 다른 이의 마음을 주무른다.
누구는 날 때부터 마법의 축복을 받았다.
누구는 아홉 살에 사자 아가리를 찢었다.
“…너무 평범하시지.”
피에스는 알고 있다.
저 소문 대부분이 사실이며, 심지어는 실제보다 축소되기까지 했음을. 근위기사로 황궁에 거하다 보면 알 수밖에 없다. 콘티누아 대제의 아들딸이 얼마나 괴물 같은 자들인지! 그리고 그들 앞에 시온은 얼마나 초라한지…….
“…오늘은 어째 씩씩해 보이셨지만, 그래도…….”
5황자 지오니스를 모신 것이 벌써 몇 년째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다, 다른 형제자매와 비해 그는 비참할 만큼 평범하다는 것을. 지오니스는 성실하고 착하다. 다만 그것만으로 헤쳐 나가기에 이 황궁의 어둠은 너무 깊다. 그러니 피에스의 한숨도 깊어진다.
“부디, 별일 없으시기를…….”
* * *
창천의 방이 열렸다.
싸늘한 시선이 그를 맞았다.
모두 형제자매의 것이었다.
그 눈에 깃든 멸시와 조소.
놀랍지도 않을 만큼 예상 대로였다. 그래도 목을 푹 넣으며 움츠러든 척했다. 열한 살 지오니스라면 그랬을 테니까. 불쾌한 침묵. 나무라는 눈들과 주눅 든 어린아이.
“늦었구나, 지오니스.”
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남들보다 머리 세 개는 커다란 거한이었다. 열한 살 지오니스는 마치 인형처럼 보일 만큼 커다랬다. 거한은 바위 같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세쿤두스 형님.”
“음. 죄송까지야.”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
타고난 패왕霸王의 그릇.
맨손으로 사자 아가리를 찢은 것이 아홉 살. 마도병과 씨름해서 거꾸러트린 것이 열두 살. 분명 여덟 황자 황녀 중 최강의 육체를 가졌다 자랑할 만하다.
“너무 굽히지 말아라. 코르디스의 핏줄에 어울리지 않는다.”
“예, 형님.”
“그런 모습을 말하는 거다만… 됐다. 네 자리에 가서 서도록.”
세쿤두스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시온도 더 대꾸하지 않고 발을 떼었다.
끄트머리에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여인이 있었다. 잿빛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창천의 방에 있는 것을 보면 황실의 피가 조금은 섞였겠지만, 계승권자는 분명히 아니다. 베일의 여인의 품에서 칭얼대는 소리가 있었다.
여인의 품에 갓난아기 있다. 그 이름은 바바토 루루디스, 제6황자.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배다른 동생. 시온은 그 옆에 섰다. 알고는 있었지만 제 처지를 다시 확인하니 어째 씁쓸하다.
여섯 아들, 두 딸.
아직 코르디스의 이름 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성을 쓰는 배다른 형제자매들.
그 여덟 중 일곱 번째.
말석에서 단 하나 위.
그곳이 지오니스의 자리다.
* * *
창천의 방.
천년 제국의 영광이 시작된 장소.
조심스러운 것은 시온뿐이 아니다. 세쿤두스도 입을 다물고 있다. 대제의 아들딸이라도 함부로 떠들 만한 장소가 아니다. 자기의 멍청함을 자랑하려 안달 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러겠는가.
“굼벵이 지오니스, 이런 날까지 늦냐?”
멍청이가 말을 걸어왔다.
시온의 바로 옆, 여섯째 자리에서.
“하여간 굼뜨다니까.”
킥킥대는 소리. 피둥하게 살이 오른 얼굴이 한껏 조소를 쏟고 있었다.
저 살찐 얼굴, 남 비웃기 좋아하는 성격.
제4황자, 네불로 레 에티에르.
‘뚱보 네불로. 이 자식은 오랜만에 보아도 전혀 반갑지가 않군.’
어릴 적의 시온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분명히 이 녀석이었다. 워낙 뻔한 괴롭힘이라 크게 상처를 받지는 않았지만 달가울 수는 없다.
19년의 세월을 거슬렀어도 네불로는 여전히 눈치가 없다.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혼자 신나서 떠들어 댄다. 훈계하는 척 조소를 늘어놓는다.
“야야, 지오니스, 너는 말이야, 영 안 되어 있다고. 고귀한 핏줄이란 말이지, 응? 그에 따른 책임을 좀 더 자각해야…….”
‘여전히 말이 많군. 대충 흘려듣자.’
시온은 충실하게 열한 살 지오니스를 연기했다. 양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으고 예, 예, 적절하게 고개도 끄덕여 주고. 상대가 뚱보 네불로라고 해도 분란을 만들 이유는 없었으니까.
남이 보기에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기분은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쥐며느리가 인생에 대한 훈수를 둔다고 기분 나빠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태도. 네 태도가 문제란 말이야. 황족에게는 걸맞은 태도가…….”
“충분하다, 네불로.”
막아선 것은 또 제2황자, 세쿤두스.
“네 태도는 이 창천의 방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느냐?”
“…세, 세쿤두스 형님. 저는 형으로 지오니스에게 충고를…….”
“그만. 말을 아껴라.”
네불로는 더 말할 수 없었다. 그의 처지가 지오니스보다는 낫다고 해도 세쿤두스에 비하면 똑같이 초라하니까. 세쿤두스의 목소리가 더욱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부황父皇 폐하께서 오실 때가 되었다.”
* * *
창천의 방에는 두꺼운 장막이 있다.
장막의 너머는 오직 제국의 주인에게만 허락되었다.
그런 곳에서, 너머로부터 발소리가 났다.
여덟 황자 황녀는 침묵으로 가라앉는다.
“…….”
“…….”
공기 또한 무거워졌다.
단순한 분위기인가, 혹은 정말 어떤 힘이 가득 차는 것인가.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가라앉음만이 선명하다. 누구의 것이라 말하기 힘든 중얼거림 또한 있었다.
“…오셨군.”
발소리가 멈추었다.
여덟 황자 황녀는 어느새 모두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근육질 세쿤두스, 뚱보 네불로, 시온까지 모두. 갓난아기 바바토도 칭얼거림을 멈추었다.
너머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장막에 그림자를 비추었다. 고개 숙인 여인의 형상, 가운데 높은 의자, 거기에 자리한 누군가.
“장막을 걷어라.”
그 음성 위엄 있다.
가로막고 있던 것이 거두어졌다.
……! 누구랄 것 없이 고개를 더욱 깊이 조아리고 말았다. 힘이 짓누른다. 대제의 존재감이다. 신음을 뱉는 이도 있었다. 시온도 어린아이의 육체를 입었기에 크게 다를 수 없어 혀를 찼다.
‘하여간, 괴물 같은 노인네……!’
시온이 힘겹게 눈을 들었다. 단지 그뿐인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레 대제 콘티누아를, 분명히 피가 이어졌을 아버지를 보았다.
대제는 노인이다.
기력이 쇠할 정도는 아니어도 허리가 굽기 시작했다. 검버섯과 주름이 눈에 띄고 손목도 굵다고는 하기 힘들다.
그러나, 저 눈! 어찌도 저리 이글거리는가. 태양과도 같은 황금의 눈동자. 오랜 상처도 늙어 가는 몸도 빼앗지 못한 영혼의 열기.
‘…오랜만에 뵈어도 여전하시군.’
저 노인, 제국의 주인.
황제 중의 황제이기에 대제大帝.
콘티누아 코르디스 마그누스.
‘…빌어먹게 위대하신, 우리들의 아버지!’
4화
대제는 조용히 내려본다.
침묵이 여덟 황자 황녀의 목을 조른다.
“…….”
“…….”
“…….”
정적. 모두가 입을 다문 채다.
바다 같은 기세와 태양 같은 눈빛 앞에서 누가 감히 입을 열까. 저 노인이야말로 콘티누아 코르디스 마그누스, 대륙의 주인이라 불리기에 마땅한 자.
애를 쓰는 이가 몇 있었다. 대제의 앞에서 입술이라도 열어 보려고, 고개라도 조금 들어 보려고. 허나 쉬울 리 없다. 페르비아스는 입을 열었다 닫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고 세쿤두스는 우람한 근육도 헛되이 머리를 들지 못하고 끙끙대었다. 시온도 작게 혀를 찼다.
‘못 버틸 정도는 아니지만…….’
그나마 시온이 가장 여유로운 편이었다. 눈에 띄어서는 안 되니 움츠러든 체를 하고는 있으나 마음은 전혀 굴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상대가 콘티누아 대제라고 해도 겨우 눈빛에 움츠러들어서야 영웅이라 불리지도 못했다.
‘…편하다고도 못 하겠군.’
침묵 짙다. 기세 불어난다. 가라앉는 공기에 질식해 가는 이들마저 있다. 뚱보 네불로의 얼굴은 이미 새파랗다. 시온도 그 옆에서 슬쩍 기가 죽은 체를 했다. 아직은 고개를 숙여야 할 때다.
‘슬슬, 뭐라고 말 좀 하실 것이지…….’
마음은 겁먹지 않았어도 육체가 너무 약하다. 겨우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몸이 대제의 기세에 지쳐 떨려 왔다. 곳곳에서는 끄응, 하는 신음도 새어 나오고 있었다.
“고개를 들라, 내 핏줄들아.”
권태로운 목소리였다.
기세는 그제야 거두어졌다.
다들 황급히 숨을 돌렸다. 대제는 그런 아들딸을 보며 짧게 내뱉었다.
“어찌 이리들 모였느냐.”
* * *
“…….”
“…….”
“…….”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기세가 거두어졌는데도 그랬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 여덟 형제자매는 모두 경쟁자인 까닭이다.
“답이 없군.”
대제가 툭 내뱉었다.
“듣지 못했나. 어찌 모였냐고 물었거늘.”
“부황이시여.”
치고 나오는 목소리 있다.
어느새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제가 감히 대답해 보아도 되겠습니까.”
대제의 기세에 고개 숙인 것이 방금인데, 놀랍도록 빠르게 제 기운을 되찾았다.
“허락하겠다, 페르비아스.”
“관대함에 감사를.”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제1황자.
찬란한 금발, 또 금안. 대제의 젊은 시절이 이러했을까 싶을 만큼 쏙 빼닮은 이목구비. 대제의 맏아들이자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내다.
제1황자는 제 위치를 확인하듯 다른 형제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서 두 번째로 고귀한 사내이기에 다른 황자 황녀는 감히 불만을 품지 못했다.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어찌 모였냐 물으신다면, 코르디스를 위하여. 또 보좌의 계승자가 되기 위하는 마음으로 이리 나왔습니다.”
“보좌의 계승자라.”
대제가 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니까, 내가 앉은 자리가 탐이 나서 모였다는 것이로군.”
“…….”
“어찌 답하지 않느냐, 페르비아스. 탐이 나지 않는다고 말할 셈이냐?”
“…아니라면 거짓이겠지요.”
노골적으로 찔러 든 대제의 질문에 페르비아스는 머쓱해 웃었다. 그들이 마치 아비의 왕위를 탐내는 찬탈자라도 되는 것처럼 들린다. 아니, 사실 그럴 마음이 없지도 않다. 다만 대제 콘티누아는 밀어내기에 너무 위대한 아버지일 뿐.
“황제의 자리를 원하느냐.”
“…그렇기에 나아왔습니다.”
“너희도 그러하겠지.”
콘티누아 대제가 면면을 훑었다. 먼저 페르비아스, 이어서 레냐르, 세쿤두스, 카테카, 상티아, 네불로, 지오니스, 바바토. 대제의 눈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다. 시온은 작게 혀를 차고 말았다.
‘저것이 자식을 보는 아버지의 눈인가?’
부복한 것은 그의 피를 이은 자녀들, 여덟 명의 아들딸. 그런데도 어찌 저토록 무기無機한 눈빛인가.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조금의 요동함이 없다. 날카롭게 번쩍이나 허공만을 향하고 있다. 감정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의 자리를 원해 나왔다니 묻지.”
대제 날카롭게 묻는다.
“황제란 무엇이냐?”
페르비아스의 입이 꾹 닫혔다.
필사적으로 물음에 담긴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 듯 눈이 이리저리 굴러갔다. 그러나 대제는 고심할 시간을 줄 생각이 없었다.
“답해라, 페르비아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원했다 할 셈은 아니겠지.”
“황제란…….”
대제가 명했다. 어서 답하라고.
그러니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떻게든 답을 내어야만 했다. 제1황자는 익숙하지 않은 당혹을 곱씹으며 떠듬떠듬 내뱉었다.
“…천년 제국을, 이 코르디스를 대표하는 자입니다.”
“그뿐이라면 깃발로도 충분하겠군.”
페르비아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대제의 말에는 조금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노골적인 실망이 드러난다.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고 선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온은 보았다, 페르비아스의 빨갛게 물든 귀를. 자존심 높은 사내다. 동생이자 경쟁자들 앞에서 보인 추태를 견디기 힘들 것이다. 허나 대제는 맏아들의 부끄러움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돌려 다음을 찾았다.
“다른 답을 가진 이가 있느냐.”
“제가 답해도 되겠습니까, 폐하?”
“그리하라.”
레냐르 드 볼마르크, 제1황녀.
여인의 몸이 아니었다면 능히 페르비아스를 앞질렀을 것이라 말해지는 이. 언뜻 하얗게도 보이는 은발을 쓸어넘기며 제 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인다. 행동 하나하나가 정교한 예술품 같다. 저 기품은 분명 영혼 깊은 곳에까지 새겨졌을 터다.
“황제란, 백성을 잘 다스리는 자입니다.”
대제의 금빛 눈이 맏딸을 바라본다.
“허면 다스림이란 무엇이냐?”
“잘 섬겨 보살피는 것이지요.”
“그것은 노예나 시종의 일이로군.”
“…송구합니다.”
황제의 목소리 가차 없다. 레냐르는 얼굴을 숙였다. 페르비아스와는 달리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시온은 보았다, 꽉 주먹 쥐어진 그녀의 손을. 감정을 애써 숨겼을 뿐이리라.
“또 누구…….”
“제가 답하겠습니다, 폐하!”
서둘러 내뱉지만 당당한 목소리.
제2황자 세쿤두스다. 조급한 기색이 강했다. 대제의 말꼬리를 자르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허나 대제는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까딱였다.
“답해 보아라, 세쿤두스.”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가장 큰 세 파벌의 주인. 허나 세쿤두스는 다른 둘에 비하면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렇기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무엇이라도 답을 해야 했다.
“황제란, 무패의 승리자! 패배를 알지 못하는 이여야만 합니다!”
“이제는 장수를 이야기하고 있군.”
대제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그나마 다른 둘보다는 나은가. 제 무지를 포장하려 들지 않았으니.”
세쿤두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헤헤 웃었다. ‘그걸 또 좋다고 웃고 있냐…….’ 시온이 무심코 작게 고개를 중얼거렸다. 세쿤두스 데비우스, 강하지만 단순한 사내다.
“또 답할 자 없느냐.”
……. 대답은 없다. 가장 강한 세 파벌의 주인이 차례차례 망신을 당했는데 누가 나서겠는가. 대제는 그런 아들딸을 둘러본다.
“그래, 너…….”
대제의 눈길이 멈추었다.
여덟 중 일곱 번째에 선 황자에게.
“지오니스였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예에?”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대제는 신경 쓰지 않고 물음을 들이대었다.
“황제란 무엇이냐, 답해 보아라.”
* * *
‘뭐야 이 노인네……? 회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시온이 중얼거렸다. 물론 속으로.
‘게다가 생전 한번 말 걸지도 않았잖아. 왜 갑자기 콕 집어서 부르는 거야?’
회귀 전에서부터 지금까지를 합쳐도 나누어 본 말이 세 마디도 되지 않을 터다. 그렇게 대제는 시온에게 늘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작게 고개를 젓는 것을 보기라도 했던 걸까.
‘…어쨌든 답을 해야겠지. 뭐라고 해야 한담?’
너무 형편없어서도 안 된다.
너무 그럴듯해도 안 된다.
‘어린아이 행세 중인 걸 감안하면…….’
머뭇거리는 체하며 입을 열었다.
“황제란…….”
“황제란?”
“…황제란, 구름입니다.”
대제가 되물었다.
“구름, 어찌하여?”
“…가장 높은 자니까요.”
풋, 하는 소리가 났다. 곳곳에서 조소가 터졌다. 대제의 앞이기에 노골적이지는 않았으나 명백한 멸시가 담겨 있다. ‘멍청이 지오니스!’ 네불로는 아예 킥킥대고 있었다.
‘열한 살 지오니스다워 보였나?’
시온은 만족스러웠다. 이 조소야말로 원하던 반응이다. 너무 그럴듯하지 않게, 너무 형편없지도 않게. 다른 형제자매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두 그의 생각대로… 될 뻔했다.
“지오니스, 그나마 제일 낫군.”
콘티누아 대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혹이 조소를 걷어차며 들이쳤다.
“……!”
“……!”
“……!!!
다른 황자 황녀들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경악과 당혹, 이내 질시가 가득 찼기에 시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자신도 당혹스러웠다.
‘뭐야!? 뭐 그리 대단한 답이라고… 아.’
의문은 곧 풀렸다. 페르비아스의 눈을 본 탓이다. 제1황자의 눈동자는 질투로 이글거렸는데, 아주 전형적인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시온은 그제야 19년의 세월을 다시 실감했다.
‘…그렇군. 19년을 거슬렀어, 그 페르비아스조차 아직 젊나.’
대단한 답은 아니었다. 다만 형제자매들이 너무 어려졌을 뿐이다. 시온의 기억 속에서 저들은 대륙을 호령하는 괴물들이지만, 아직은 그렇지 못했다. 시온의 대답이 보다 대제의 마음에 든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앞으로는 더 철저해질 필요가 있겠어.’
이미 다른 형제자매들의 관심은 시온에게서 떠나고 있었다. 대답 한마디 잘해 봤자 열한 살 지오니스, 경계의 대상까지는 되지 않을 터.
“구름.”
대제가 제 턱을 매만지며 무심히 내뱉었다. 권태로운 기색이 여전하다. 제 자식들을 보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눈만 싸늘한 금빛이다.
“구름은 잡을 수 없다. 어찌 된 까닭인가?”
대제가 다시 입을 열자마자 모든 관심은 시온에게서 떠나갔다. 페르비아스도 약간 분한 듯 노려보더니 눈을 돌렸다.
“가장 높기에 그러하다. 황제 또한 그러해야만 한다.”
노인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할 권태가 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묘한 열기가 자리하기 시작했음도 확실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그는 지나온 먼 시간을 더듬고 있을지도 모른다.
“패배하지 않는 장수, 태평하게 다스릴 재상, 나라의 얼굴 될 영웅도 모두 아래에 두면 될 뿐. 가장 높이 서면 자연히 모일 수밖에.”
대제가 웃는다. 작은 웃음이지만 황자 황녀들의 가슴을 두드리는 데에는 충분했다. 저 웃음으로 수십만 군사를 이끌었는가, 대륙의 중심을 틀어쥐고 대제국의 이름을 드높였는가.
“혹 내 답이 마음에 들지 않나. 그렇다면 나보다도 높이 서라.”
어떤 영웅이라도 누구의 아래 있어서야 황제가 아니다. 어떤 범부라도 모두의 위에 있다면 능히 황제라 할 만하다.
“가장 높이 설 것. 황제의 본질은 거기에 있으니.”
황금빛 눈동자,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더할 나위 없는 위엄이 있다.
“허나, 가장 높은 이는 둘일 수 없다.”
대륙의 주인은 선언하듯 말했다.
“그러니 내 아들딸아, 시련의 때로다. 천년 제국이 코르디스의 이름을 이을 자를 찾고 있다.”
가장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페르비아스였다. 그는 분위기를 읽는 것에 탁월함이 있었다. 곧이어 레냐르, 또 시온을 포함한 다른 황자 황녀들도 고개를 조아렸다. 이것은 대제의 선포 앞에 마땅히 갖추어야 할 자세다.
“창천대제 코르디시아스의 전殿에서 선포하노니, 쉰 번째의 계승전이다.”
5화
“너희 여덟은 들어라.”
대제 콘티누아는 선포를 잇는다.
“황제의 자리가 탐이 난다면 자격을 증명해라.”
그 눈동자는 황금 불꽃으로 타오른다.
“열 개의 비보를 준비했다.”
여덟 황자 황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다. 노인의 목소리는 그들의 위에 묵직하게 떨어진다.
“황실의 전통에 따라, 시련 없이는 비보를 얻지 못할 것이다. 숨겨진 위치를 찾는 것 또한 시련이겠지.”
엎드린 여덟의 얼굴에 긴장이 감돈다. 다음 대의 황제, 대륙의 주인을 정하는 시험. 한마디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백일의 계승전이 끝나는 날, 가장 많은 비보를 손에 쥔 자를 합당한 자격자라고 부르겠다.”
대제 콘티누아는 앉은 자리에서 팔걸이를 탁탁 두드렸다.
“이 화려하기만 한 의자를 왜 그리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에 앉아 볼 수도 있겠지.”
화려하기만 한 의자가 아니다.
천년을 내려오는 창천대제의 옥좌, 코르디스의 상징. 제국의 주인이 아니고서야 감히 손대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저 자리에 앉는 것을 누구에게 양보할 수 있겠는가.
“온 힘을 다하도록. 마지막 하나가 되어 가장 높이 서려고 모이지 않았느냐. 원하는 걸 원하는 대로 써 보아라.”
돈이라도 좋다. 사람이라도 좋다. 칼이라도 물론 좋다. 재력이건 권력이건 무력이건 힘이란 힘은 모두 좋다. 승리하면 죄다 되돌려 받을 터다.
“다음 기회 따위는 없을 테니.”
* * *
열 개의 비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라.
그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되리라.
이것이 대제의 선포다.
“말을 많이 했더니 피곤하군.”
대제가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양옆에는 두 명의 여인이 부복하고 있다. 발은 없이 연기가 흩날리고 몸통은 반투명하다. 인간의 형상을 했으나 인간이 아니다. 황제를 시중드는 고대의 인공정령이다.
“장막을 닫아라.”
두 인공정령이 움직였다. 장막이 닫히고 침묵이 다시 찾아왔다. 대제는 다시금 보이지 않았다. 늘 그런 사내였다. 복잡한 예식 따위를 질색하고 칭송받는 것도 썩 즐기지 않았다.
아비가 사라진 자리에는 여덟 형제자매만이 남았다. 대제는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다들 느릿느릿 고개를 들었다. 몸이 여전히 위엄에 주눅 든 탓이다. 회귀한 영웅, 시온 폴링라이트도 그중에 있었다.
‘…잔인한 시험이야.’
회귀 전에는 들어도 알지 못했다. 정말로 열 개의 시련을 찾아서 비보를 많이 취하는 것이 계승전의 주된 목적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까 백 일 후에 비보를 손에 쥐고만 있으면 된다니.’
밀정을 보내도 좋다. 힘으로 비보를 빼앗아도 좋다. 필요하다면, 형제자매의 피를 흘려도 괜찮다. 그런 싸움이었다. 시온은 진절머리 쳤다.
‘…저 셋은 벌써 눈치챘고. 이미 제 세력도 다 준비시켰겠지.’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셋.
가장 큰 세 파벌의 우두머리들은 서로를 조용히 노려본다. 피붙이를 바라보는 눈이라기에는 너무도 차가운 눈빛들이다. 저 셋은 서로야말로 가장 큰 경쟁자임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에는 페르비아스가 이겼었지.’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금발금안, 대제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오만한 얼굴.
‘이상한 일도 아니야. 이번에도 이변이 없다면 그렇게 흘러갈 테고.’
천년 전통의 대제국에서 1황자의 정통성은 강력한 힘을 갖는다. 게다가 페르비아스 본인의 역량 또한 빼어나니, 제도 루틸리움 귀족 대부분은 그를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레냐르나 세쿤두스도 충분히 황위를 노려볼 만했을 텐데, 시대가 아쉬워.’
결국 50대의 황제가 된 것은 페르비아스였다. 패배한 레냐르와 세쿤두스는 어떻게 되었던가……? 오랜 기억을 더듬던 시온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또, 페르비아스가 그를 흘끗거리고 있었다.
‘…이크. 슬슬 일어나자.’
시온이 속으로 혀를 찼다. 더 있어서 좋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시온의 몸은 아직 어린아이고, 회귀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볍게 인사하며 일어섰다. 페르비아스나 레냐르, 세쿤두스 중 누구도 막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는 탓이다. 걸음을 서두르는 시온은 몇 개의 발걸음이 뒤따름을 느꼈다. 보지 않아도 뻔했다. 뚱보 네불로나 바바토의 시녀처럼 싸움에 끼기 싫은 자이리라.
‘숨 막혀 죽겠군.’
내실 복도를 후다닥 달렸다. 제 주인을 기다리던 자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점쟁이 아메투스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일단은 피해야 했다. 저 형제자매들, 이제 막 회귀한 참에 맞서기에는 너무 강력한 상대들 아닌가!
‘내 때는 아직이란 말이지.’
* * *
내실을 빠져나왔다. 콧수염을 다듬던 코넬리우스와도 마주쳤다. 그렇게 만찬실 옆 복도에 와서야 시온은 숨을 돌렸다.
“으으. 첫날부터 쉽지 않네, 정말!”
시온 폴링라이트는 영웅이라 불렸다. 여러 전장과 시련을 거쳤다. 그 정신은 강고하다. 하지만 막 죽고 회귀한 뒤에,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몸으로, 대제 콘티누아와 그 아들딸을 마주하니 지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소매로 이마를 훔쳤다. 식은땀이 묻어 나왔다. 또 손끝도 떨리고 있었다. 대제 콘티누아의 기세를 마주한 탓이다. 시온이 진절머리를 쳤다.
‘며칠은 콕 박혀 있어야겠어. 이런 몸으로 움직였다가는 좋은 꼴을 못 볼 거야.’
회귀하며 많은 힘을 잃었다. 하지만 모두 잃은 것도, 영원히 잃은 것도 아니다. 약간의 시간을 들인다면 최소한의 힘은 되찾을 수 있다. ‘첫 번째 비밀 정도는 열어야겠지.’ 그때까지는 숨죽이는 편이 현명하다.
‘돌아가자, 돌아가.’
걸음을 서둘렀다.
‘누가 붙잡기라도 하기 전에…….’
“이봐, 지오니스!”
시온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못 들은 척했으나 목소리는 재차 부른다.
“야, 굼벵이 지오니스! 안 들려?”
‘…네불로 이 자식, 도움 안 되기는!’
짜증찬 욕설을 뱉었다. 고개를 돌리니 둔하고 살찐 얼굴이, 제4황자 네불로가 거기에 있었다.
‘분풀이할 셈이겠지.’
놈이 다가오는 이유야 뻔하다. 네불로는 지오니스 다음으로 세력이 약한 황자. 심지어 아기 바바토만도 못한 지지를 받고 있다. 어머니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시온 정도만이 그가 깔아 볼 만했다.
‘할 말도 뻔해. 대답 한번 잘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둥…….’
“너 말야, 착각하지 마. 우연히 부황 폐하의 마음에 드는 대답 한번 했다고…….”
‘역시나!’
뚱보 네불로가 혓바닥을 놀렸다. 별 내용 아니었다. 상대를 깔아뭉개기 위한 조소나 멸시 따위였는데, 날카롭지도 않고 무겁지도 않았다. 그저 제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쏟아 낼 뿐인 말들이었다.
‘받아 주고 빨리 보내자.’
자칫하면 하품을 하고 말 것 같았는데, 이를 참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알겠어? 건방 떨지 말라고. 아무리 건방 떨어도 너는 지오니스야!”
“예, 예, 제가 그럼 지오니스지요. 아니면 누구겠어요.”
“그래, 그래… 어째 놀리는 거 같다?”
“어휴, 제가 어찌.”
“그렇지?”
네불로는 멍청하게 웃는다. 멍청이니까 당연할지 모른다. 시온은 그가 딱히 밉지 않았다. 개똥벌레가 발 위에 타오른다고 화를 낼 사람이 있겠는가. 물린다면 또 몰라도.
“하여튼. 이 형이 좋은 뜻으로 말해 주는 거라고.”
‘좋아. 지금이라도 조용히 끝나…….’
곁눈질하던 시온의 얼굴이 굳었다.
‘…지는 않겠군.’
멀리서 다가오는 사내가 있다.
정확히 그들을 향하고 있다.
‘망할 네불로! 결국 저놈이 와 버렸잖아!’
인상적인 금발금안, 대제를 닮은 이목구비.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제1황자.
* * *
“아주 즐거워 보이는구나.”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네불로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엉? 누가… 힉.”
누가 감히 황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나 고개를 돌린 네불로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는 비명 지르듯 외쳤다.
“…페, 페, 페르비아스 형님!?”
“무슨 이야기 중이었지?”
“벼, 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그저 황실의 예절에 대해 조금…….”
네불로는 땀을 뻘뻘 흘리며 페르비아스에게 답했다. 고개도 연신 꾸벅였다. 조금 전 시온에게 으름장을 놓던 것과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페르비아스는 그런 네불로를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정말 별 이야기 아니었군.”
금빛 눈이 날카롭다.
“네불로, 그럼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하는데.”
“무, 물론이지요! 지, 지오니스 다음에 보자!”
네불로는 말을 끝내지도 않고 달음질쳤다. 뚱뚱한 몸치고는 상당한 빠르기다. 페르비아스의 눈이 금빛으로 이글거림을 보았기 때문이겠지. 시온은 입을 비적이며 발을 슥 내뻗어 보았다.
“그렇다면 저도 피곤해서…….”
“너는 가면 안 되지, 지오니스.”
1황자의 금빛 눈이 무섭게 일렁인다.
“형제 간의 이야기를 좀 나누자꾸나.”
“…예.”
시온이 속으로 작게 혀를 찼다.
‘빨리도 나왔군, 페르비아스.’
네불로가 붙잡지 않았어도 마주쳤을 듯했다.
‘하필이면, 가장 위험한 놈의 눈에 띄다니. 자칫… 아주 곤란해질지도.’
금빛 눈동자가 시온을 향한다.
그 눈은 제 아버지, 대제를 닮았다.
“지오니스.”
“예, 형님.”
“그 대답, 의도하지 않은 거였지?”
“물론입니다. 저도 당황스러웠습니다.”
“흐음.”
시온은 서둘러 대답했으나 페르비아스는 마땅치 않은 눈치였다. 그 얼굴은 여전히 싸늘하다. 시온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 오만한 큰형을 조금 더 달래 줄 필요를 느꼈다.
“사실 제 답을 왜 칭찬해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듣기에는 천년 제국을 대표한다는 형님의 답이 훨씬…….”
“네가 감히 대제 폐하의 판단을 의심하느냐?”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시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페르비아스는 고개 숙인 동생을 보며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아까보다는 훨씬 가볍고 유쾌한 기색이다. 시온이 미소 지었으나 페르비아스는 보지 못했다.
‘말은 근엄한 척해도 추켜세워 주니 아주 좋아 죽는군. 여전히 자존심 덩어리야.’
페르비아스의 마음이야 뻔하다. 제 상처 난 자존심을 메꾸길 원하겠지. 그렇다면 쉽다. 혓바닥을 좀 놀려 그 상처를 핥아 주면 될 일 아닌가. 목숨에 비하면, 회귀한 영웅이 바라보는 숙명에 비하면 싸고 싸다.
“만약 심기에 거슬렸다면 용서해 주세요, 형님.”
“용서까지야! 날 너무 나쁜 놈으로 보는 것 아니냐?”
페르비아스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아주 짙다. 설설 기는 태도가 그를 흡족하게 했다.
“사실 계승전 첫날부터 이렇게 널 붙잡을 만한 일도 아니었지. 그렇지 않느냐?”
“예, 예…….”
‘알면 붙잡지를 말든가!’
시온이 투덜거렸다, 물론 속으로.
“그런데 내 심복이 묘한 느낌이 든다고 해서 말이다.”
“…심복이요?”
“그래. 네게도 소개해 주마.”
페르비아스가 손짓하자 웬 사내가 쑥 튀어나왔다.
“치안청에서 거금을 주고 데려왔지. 감이 아주 좋아.”
‘…언제부터!?’
갑자기 튀어나온 사내를 보며 시온이 당혹을 삼켰다. 줄곧 곁에 서 있었으나 있는 줄도 몰랐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내가 기척을 숨겼고, 시온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지오니스 전하.”
아무리 어린아이의 몸을 가졌다 해도 시온 폴링라이트, 회귀한 영웅. 그가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음이 사내의 실력을 증명한다. 페르비아스의 심복이 옥색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고개를 숙였다.
“아메투스라고 합니다.”
시온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페르비아스 전하를 모시고 있지요.”
6화
제국십장帝國十將이라는 자들이 있다.
코르디스 무력의 정점에 선 열 명의 장군이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다. 대제국의 자랑이자 타국의 재앙이 되는 초인들.
‘…누가 점쟁이 자식을 동행으로 데려왔나 했더니, 페르비아스였나……!’
저 기이하게 빛나는 옥색 눈, 과묵하게 다물어진 입과 굵고 강인한 팔뚝. 회귀 전에는 제국십장의 자리에까지 앉았던 괴물 중의 괴물. 하긴 페르비아스가 아니라면 누가 이 사내를 동행으로 부리겠는가. 시온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대제의 칭찬 한번 뺏겼다고 쫓아온 건 조금 과하다 싶었는데, 점쟁이 놈의 조언 때문이었어.’
아메투스는 점쟁이라고 불렸다.
직감이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기에 그러했다. 그의 날카로운 직감 앞에서는 어떤 계책도 힘을 잃었다. 19년 전의 과거에서도 여전한 감으로 회귀자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아, 정말. 제일 껄끄러운 두 놈이 한 번에……!’
시온, 일곱 개의 비밀을 품었다. 정체와 뜻을 숨겨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페르비아스와 아메투스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작자들인데, 이렇게 회귀 첫날에 동시에 마주하게 될 줄이야!
“이해하거라, 지오니스.”
페르비아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시기가 시기니까 확실히 해 두고 싶을 뿐이야. 너도 괜히 오해를 사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냐.”
“…확실히 한다고 하셔도, 뭘 어떻게……?”
“별것 아니야. 혹시 숨기는 것이 없는지 내게 말해 주면 될 일이지.”
그의 눈이 어슴푸레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자. 내 눈을 보고. 솔직하게 말해 보아라.”
‘…이 눈, 설마……!?’
시온이 당혹성을 겨우 억눌렀다.
‘…이 시점에 벌써 기예를 얻었어!?’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기예Ars.
통치자의 눈 princeps oculus.
제1황자의 눈에는 힘이 깃들었다. 시온이 그를 껄끄러워하는 가장 큰 이유다. 시온에게는 비밀이 많으나, 저 눈은 모든 비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니 당연하다. 어슴푸레한 빛을 뿜으며 페르비아스는 명령한다.
“나를 보고, 내게 말해라, 지오니스. 네게는 무슨 비밀이 있지?”
‘…최악이다. 아주 억지스러운 최악이야!’
점쟁이 아메투스로도 모자라서 페르비아스의 기예까지. 천적 둘을 대부분의 힘을 잃은 채로 마주해야 한다. 두 번째의 기회를 헛되이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대비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럴 뻔했다.
“…어, 지오니스 전하?”
얼빠진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전하, 한참 찾았잖습니까! 어라, 옆에는 누구…….”
페르비아스의 ‘통치자의 눈’이 꺼졌다.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있다.
“너야말로 누구지.”
“…어, 어, 어어어? 호혹시 페페페르비아스 전하……?”
“누구냐고 물었다. 이름을 대라.”
“저저저 마마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밤색 머리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피, 피, 피에스 로에스티라고 하옵니다!”
* * *
“피에스 로에스티? 처음 듣는 이름인데.”
“…제 하나뿐인 근위기사입니다, 형님.”
“그래?”
페르비아스가 밤색 머리 사내를 위아래로 훑었다. 기사 차림이었고, 손에는 무언가를 하얀 보로 싸서 들었다.
제1황자가 코웃음 쳤다. 그는 딱 두 부류의 사람에게만 관심을 둔다.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와 위협이 될 만한 자. 그리고 피에스 로에스티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좋게 말해서는 무해하고, 나쁘게 말해서는 쓸모없다.
“근위기사라서 걱정을 했나 보군. 그저 형제끼리 잠깐 담소를 나누었을 뿐인데. 그렇지, 지오니스?”
“…그럼요.”
‘기예로 마음을 조종하려 해 놓고는 담소? 엿이나 먹어라!’
시온이 또 욕설을 토했다. 여전히 속으로만.
“그럼 아까 질문을 다시 하마. 지오니스, 네 비밀을…….”
‘통치자의 눈’을 끌어내던 페르비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이게 무슨 냄새지?”
무시하기 힘든 향기가 감돌았다. 피에스의 손에서부터였다.
“너, 지오니스의 근위기사. 손에 든 건 무어냐.”
“이이이게 마마말입니다…….”
제1황자의 질문은 피에스는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문장을 완성하지 못하는 근위기사를 대신해 시온이 대신 대답했다.
“제가 급하게 부탁한 물건입니다. 식이 끝날 때까지 준비해 달라고 했죠.”
“이리 가져와라.”
“…가져와, 피에스.”
피에스는 머뭇거리면서도 천천히 다가왔다. 부탁한 시온 본인이 가져오라고 하니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궁금하구나, 지오니스. 넌 무엇을 부탁했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어쩌면 여기에 네 비밀이 있을지도 모르겠어.”
“…….”
페르비아스는 망설임 없이 하얀 보따리를 풀어 젖혔다. 황금빛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 하나뿐인 근위기사를 보내서 준비할 수밖에 없는… 아니!”
페르비아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럴 수가, 이건…….”
아메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금빛 물체의 표면을 매만지자 바삭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고, 무엇으로도 숨기지 못할 달콤한 냄새가 더욱 짙게 감돌았다.
“…호박파이잖아!”
1황자의 탄성에 피에스가 고개를 숙였다.
“네, 넵. 호박파입니다.”
“…평범한 호박파이는 아니겠지.”
“그그그렇기는 합니다만.”
페르비아스가 턱짓했다. 무엇이 평범하지 않은지 어서 말해 보라는 투다. 피에스 로에스티는 가까스로 입을 움직였다. 턱이 덜덜 떨려서 미칠 것만 같았지만 어떻게든.
“…펴펴평범하지 않고 아주아주…….”
“아주아주?”
“다달콤한… 호호호박파입니다…….”
“…….”
계승전 선포식 직전, 시온은 부탁했다.
‘피에스, 호박파이를 준비해. 아주 달콤하게. 알겠지?’
피에스는 명령에 충실했다. 지쳤을 시온에게 따끈하고 바삭한 상태의 호박파이를 준비해 주기 위해서. 노력했던 만큼 완벽한 상태의 호박파이였다.
“평범하지 않고, 아주아주 달콤한 호박파이라…….”
페르비아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었다. 아니면 무언가의 계책인가도. 싸늘한 눈에 피에스는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그래, 어디.”
그는 피에스를 빤히 바라보더니 호박파이 끄트머리를 조금 뜯어 내었다. 그 속은 더욱 진한 황금색이었다. 단내가 진동했다. 페르비아스는 뜯어 낸 파이를 입으로 가져갔고, 곧 얼굴을 확 일그러트렸다.
“윽-!”
“페르비아스 전하!”
아메투스는 행여 독이라도 들었나 검으로 손을 옮겼으나 페르비아스가 그를 막았다.
“아, 괜찮아, 아메투스.”
“허나.”
“너무 달아서 그랬어. 혓바닥이 아리군.”
내용물을 삼킨 제1황자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평범하지는 않은걸? 달아도 너무 달아. 마치 어린애나 먹을 법… 어린애?”
페르비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시선을 내렸다. 거기에는 시온이 있다. 금발에 푸른 눈, 앳된 얼굴과 자그마한 체구. 그 눈동자는 당혹으로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다.
“지오니스.”
“예, 형님.”
“네가 올해로 몇 살이었지.”
시온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열한 살입니다.”
시온(서른 살, 회귀자)은 천진하게 제 나이를 속여 말했다. 페르비아스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 열한 살, 열한 살인가…….”
그러고는 작게 중얼대었다.
“…이거 민망해서 원.”
쿡쿡대는 웃음소리.
“아무리 예민했다고 해도 열한 살짜리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페르비아스가 시온의 머리를 헝클 듯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돌아가도 좋다, 지오니스.”
* * *
시온과 피에스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아. 우습군, 우스워! 이 페르비아스도 긴장을 했던 모양이지.”
페르비아스는 시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총총걸음 치는 꼴이 딱 꼬맹이다.
“계승전이든 뭐든 달콤한 호박파이가 우선인 어린아이에게 ‘통치자의 눈’까지 쓰려고 했다니!”
콘티누아 대제를 오랜만에 마주한 탓일까, 혹은 계승전이 시작되었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겨우 지오니스에게 불안감을 품을 줄이야.
“그래도 확인해 보는 쪽이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알잖나, 아메투스. 내 기예도 만능은 아니야.”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기예, ‘통치자의 눈’.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고 장악해 끝내 군림하는, 마치 황제의 운명을 타고나기라도 했다는 듯한 기묘한 능력. 강대하고 강대한 힘이지만, 그렇기에 쉽게 남발할 수는 없다.
“계승전은 이제 시작되었다. 힘을 아껴 둘 수 있다면 좋지 않겠어.”
“옳습니다.”
“게다가 지오니스야. 방금 보았잖나.”
페르비아스가 손을 내저었다.
“계승전을 선포하는 동안 준비시킨 것이 호박파이……. 아, 호박파이라! 이거 정말 걸작이군. 귀여운 녀석!”
그는 또 킥킥 웃었다. 5황자 지오니스, 지금까지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는데, 저렇게 천진하고 귀여울 줄이야.
“북방에서 들어온 좋은 과자가 있었지? 지오니스 앞으로 보내 두어라.”
“예, 전하.”
“혈육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도 황제의 덕목 아니겠어.”
이미 황제의 자리에 앉은 듯한 투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고, 오만한 태도라고 하기도 힘들었다. 그는 대제 콘티누아의 맏아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이니.
“아메투스, 너도 이만 신경을 꺼라. 지오니스는 그냥 어린아이일 뿐이야.”
“옳습니다, 전하.”
“난 레냐르와 세쿤두스에게 집중해야 해. 둘이 손잡으면 귀찮아질 거야. 그걸 대비하려 널 치안청에서 데려오지 않았느냐.”
그리 말하며 페르비아스는 걸음을 옮기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아메투스도 그 뒤를 따랐다. 허나 그는 마냥 웃을 수가 없었다.
‘…그냥 어린아이일 뿐, 또한 옳습니다…….’
점쟁이 아메투스는 여전히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었다. 묘한 불안감이 떠나지를 않았다. 단순한 착각이면 좋을 것이다. 허나 아메투스는 알고 있다. 이럴 때야말로 그의 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는 것을.
‘…허나 그렇다면, 이 불안감은 대체 왜?’
* * *
황궁 가장 외진 곳.
정원의 나무들에 가려진 그곳에 제5황자 지오니스의 별궁이 있다.
근위기사는 하나, 시녀가 셋.
코르디스 제국의 황자가 받는 대우라기에는 더없이 초라하지만, 시온은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시중을 들어 준다는 것부터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어째 한 명쯤은 시비를 걸 것 같아서 호박파이를 가져오라 시켰지.’
시온은 기분이 좋았다.
‘열한 살 꼬맹이의 이미지를 새겨 놨으니 한동안은 눈을 피할 수 있을 거야.’
모두가 의도적이었다. 피에스에게 호박파이를 준비시킨 것도, 계승전 직후에 가지고 오게 한 것도. 권력이고 뭐고 단것이 우선인 어린아이 행세를 하기 위함이었고, 아주 성공적이었다.
‘그 아메투스와 페르비아스마저 속여 넘겼으니, 당분간은 안심!’
그는 황금빛 파이를 입으로 옮겼다.
“음. 펴펴평범하지 않고, 아주아주 다달콤한… 호호호박파이로군!”
“그만 놀리십시오, 전하!”
피에스가 소리를 빽 질렀다. 밤색 머리 사내의 얼굴은 부끄러움으로 붉다.
“얼마나 긴장됐는지 아십니까?”
“미안, 미안.”
피에스는 아직도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지오니스야 같은 황자니까 페르비아스도 조금의 결례 정도는 용인된다. 허나 피에스 로에스티, 별로 잘나지 못한 일개 기사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전 정말 목숨을 걸었는데……!”
“아, 알아, 알아.”
시온은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한 피에스를 타일렀다.
“네 충성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지. 그렇잖아? 네가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내가 아니면 누가 알겠어?”
“…흐, 흥.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밤색 머리 사내는 그제야 조금 기분이 풀린 듯했다. 말이 근위기사지, 시온과 피에스는 친구나 다름없는 사이다. 시온은 푸른 눈을 빛내더니 이내 킬킬 웃으며 파이를 건넸다.
“너도 먹어 놔. 아주 맛있는 호박파이라고.”
“음, 정말 맛있네요. 너무 달기는 하지만. 시녀들에게도 조금 가져다줄까요?”
“가져다줄 것까지야. 와서 먹으라고 해.”
“하하. 아무리 그래도 부담스러워합니다. 전하와 같은 식탁에 앉다니.”
너털웃음과 함께 피에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이를 반 정도 잘라 접시에 옮겼다. 근위기사가 시녀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황자는 그들과 같은 식탁에 앉기를 원한다. 이 별궁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기묘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지.’
엄격한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저 황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늘 그랬다. 저곳은 강자를 위한 곳이다. 주눅 들지 않는, 주눅 들 이유가 없는 자들의 낙원. 저 황금빛 영예를 위해 당연하게 다른 이를 짓밟고, 짓밟히는 자의 잘못이라 말하는 곳.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바깥은 몰라도, 여기는 한동안 조용할 거야.’
계승전이 선포되었다.
페르비아스와 레냐르, 세쿤두스 세 사람은 벌써 싸움을 시작했을 것이다. 상대를 염탐하고 비보의 위치를 찾아내려 온갖 노력을 들이고 있겠지. 열심히 땀 흘리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니 호박파이가 더욱 맛 좋게 느껴졌다.
‘도서관도 가깝겠다, 책이나 읽으며 기다려 볼까? 아직은 움직이기 이르니까.’
시대를 막론하고 책은 외로운 이들의 벗이다. 어린 지오니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오랜 취미를 떠올린 시온이 빙긋 웃었다.
‘며칠은 편할 거야.’
* * *
계승전이 선포되고 며칠이 지났다.
대황궁은 소란스러웠다.
황제의 자리 탐내는 이들은 모두 바쁘다.
열 개의 비보를 찾아내야 하니 당연하다.
제5황자 지오니스,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온 영웅 시온 폴링라이트도 마찬가지로 아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뭐가 문제세요?”
시온이 책을 내던졌다. 옆에서 옷을 개던 피에스 로에스티는 의아한 얼굴로 물어왔다. 시온은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 질렀다.
“적마법사 클레노스가 죽어 버렸어!”
“…그게 누군데요.”
“순례자인데, 처음에는 적이었지만 끝내는 주인공을 구하려다 목숨을 바쳤다고!”
“…소설 이야기죠?”
“응.”
“…….”
피에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책을 읽었다. ‘아니, 여기서 소피아 페레츠가!?’, ‘나는 벨라스의 발덴이다!’, ‘앗, 뒤 페이지를 누가 찢었잖아!’. 시온을 빤히 바라보던 피에스 로에스티는 결국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전하, 계승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책만 읽고 계셔도 되는 겁니까?”
“어. 책이 어때서 그래? 지식의 보고라고.”
시온이 옆에 놓인 책더미를 뒤적거리더니 보랏빛 표지의 책 하나를 집어 들었다.
“봐 봐. 책이 아니라면 북쪽의 얼음 마녀는 생선 요리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얼음 마녀가 생선 요리를 싫어한대요?”
“응응. 얼굴에 생선 스튜를 끼얹었더니 아주 크게 화를 냈다네.”
“…그게 생선 요리를 싫어하는 건가……?”
“어쨌든. 얼마나 유익하니.”
시온 빙그레 웃었다. 북쪽의 얼음 마녀, 청은의 머리칼 아름답던 여인이 문득 보고 싶어졌다. 그리운 기분이다. 회귀 전에는 상당히 친밀했었는데. 뭐, 지금의 그녀는 시온을 알지 못하겠지만.
“나도 다 계획이 있다는 말이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호박파이나 드시고, 책이나 읽으시면서요? 대체 무슨 계획을 짜시길래.”
“비밀이야. 말했잖아, 난 비밀이 많다고.”
비밀은. 피에스가 피식 웃었다. 그가 보기에 시온은 여전히 열한 살 지오니스일 뿐이다. 전에 비해 조금 능글맞고 어른스러워진 것도 같지만 정말 조금일 뿐. 시온 폴링라이트는 그런 피에스의 모습에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책만 읽을 수는 없겠지. 조금 움직여 볼까.”
“어디에 가시려고요?”
“도서관.”
“…….”
7화
계승전도 사람이 만든 것이다.
그러니 관리할 이가 필요하다.
아무리 고귀한 경합이라고 해도 비보니 시련이니 하는 것들이 하늘에서 뿅하고 떨어지지는 않는 법. 아니, 오히려 더욱 전문적인 손길이 필요하다. 관리자는 둘이고, 콧수염 마법사 코넬리우스 메르헤스는 개중 하나였다.
“참나. 지루하기 짝이 없군.”
그의 앞에는 열 개의 수정판이 있다. 복잡한 마법 장치는 아니다. 그저 비보가 발견되면 빨갛게 변해서 신호를 전해 줄 뿐인 장치다. 그 외에는 어떠한 기능도 없다. 표면이 반질반질해서 몸단장용 거울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도 기능이라고 말한다면 또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죽치고 앉아서 언제 올지 모르는 신호만 기다리라니, 봉수지기나 할 일 아니야!”
콧수염 마법사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 코넬리우스가, 제국마도원의 학장이 백 일씩이나 이러고 있어야 한다고? 허, 참!”
반질한 수정판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며 코넬리우스는 투덜거림을 더했다. 콧수염을 이렇게 단정하고 이쁘게 다듬어 놓으면 무엇할까. 보여 줄 숙녀 한 명 없는데.
“비보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 뭔지도 몰라, 전하들께서 뭘 하고 계시는지도 몰라. 그런데 뭐가 관리자야! 차라리 심부름하는 꼬마라고 부르지!”
“불만이 많구나, 심부름하는 꼬마야.”
“엇!”
코넬리우스가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흰 수염의 노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다란 로브를 걸치고, 수염을 허리까지 기르고, 손에는 나무로 된 스태프까지 들었다. 마주친 누군가가 ‘어, 마법사잖아?’라고 외쳐 주기를 바라는가 싶을 만큼 마법사스러운 차림새의 노인이었다.
“대제 폐하께 간언하며 네 직분을 정말로 심부름 꼬마로 바꿔 주랴?”
“어, 언제 오셨습니까?”
“네 중얼거림이 시작될 때부터.”
“…인기척이라도 좀 내시지.”
콧수염 마법사가 머쓱하게 제 콧수염을 매만졌다. 흰 긴 수염 마법사는 피식 웃으며 흰 긴 수염을 쓸었다.
“별일은 없었지? 아직 비보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고?”
“예.”
“고작 일주일 사이에 발견될 만한 시련들은 아니긴 하지.”
제국 누구보다 마법사스러운 차림새를 자부하는 노마법사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제국마도원의 대학장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숨겼으니 당연한 일이야.”
“…본인이시잖습니까, 대학장님.”
“그러니까. 내 솜씨가 워낙 뛰어나잖나.”
이 노인, 헤르마이 메르헤스.
제국마도원의 대학장이자 코르디스 수석마법사optimus magus. 제국 유일의 여섯 별 마법사이며 황제의 최측근 ‘팔현인회’의 일원! 또, 50대 황위계승전의 총책관리자이기까지.
“그래도 쉽지 않았어.”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고생했다고. 대륙의 어떤 아티팩트를 가져와도 밀리지 않을 비보를 만드는 건 전-혀 쉽지 않았어.”
열 개의 시련, 열 개의 비보.
하늘에서 그냥 떨어지지 않으니 누군가 만들어야 한다. 그것은 코르디스 수석마법사 헤르마이 메르헤스의 몫이었다.
“정보가 새어 나갈까 봐 지원도 마땅치 않아, 만약 제작 중에 누굴 마주치면 기억까지 지워야 해, 그렇다고 격이 떨어지거나 평범해서도 안 돼……! 이 무슨 모순!”
노인이 버럭 소리 질렀다.
“허나 이 헤르마이 메르헤스, 천년 제국의 수석마법사! 모순을 거리낌 없이 현실로 옮겨 냈도다!”
콧수염 마법사가 표정에 조금의 변화도 주지 않고 박수를 쳤다. 스승의 기행에 익숙하다는 듯한 투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헤르마이 대학장님.”
“영혼 없는 칭찬 참 고맙군, 코넬리우스 학장!”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수염을 쓸었다.
“에휴. 다음 대 황위계승전 전까지는 무조건 은퇴를 해야지.”
“그러면 제게도 좋은 일이군요.”
코넬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늘 수석마법사 자리를 동경했으니.”
“이놈 봐라? 다음 수석마법사 자리가 왜 너한테 가리라 생각하느냐?”
“제가 제국마도원의 일곱 학장 중 하나이자 네 별의 마법사이고, 무엇보다 대학장님의 양아들이자 수제자이기 때문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째 날이 섰구나.”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끌끌 웃었다.
“관리하느라 피로라도 쌓인 모양이지?”
“무슨 피로가 쌓이겠습니까.”
코넬리우스 메르헤스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이 콧수염 마법사도 걸물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헤르마이 앞에서는 빛이 바래도 한참 바랜다.
“그저 수정판을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요. 언제 신호가 오려나, 하고 백 일 내내, 그저, 바라보기만!”
“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킬킬 웃었다.
마치 어린아이같이, 장난스러운 모습.
“비보가 무엇인지, 어디에 있고 어떤 시련을 넘어야 하는지는 극비니까. 아무리 너라도 알려 줄 수 없다, 코넬리우스.”
“…….”
코넬리우스는 그것이 못내 불만인 듯했다. 이름뿐이라고 해도 그 또한 계승전의 관리자다. 헌데 비보고 시련이고 무엇도 알지 못하게 꽁꽁 숨겨 놓다니.
“섭섭한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다, 대제 폐하의 칙명이니까.”
“섭섭하지만 아닌 척하지요.”
“그럼 조금 덜 섭섭한 얼굴을 해라.”
누가 보아도 마법사스러운 노인, 헤르마이는 또 한차례 킬킬 웃었다.
“나도 일단 할 일을 할까.”
노인이 손짓하자 제자는 자리를 비켰다.
계승전을 관리하는 이곳, 제도 대결계의 중심.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손을 둥글게 말아 눈에 가져다 대었다. 루틸리움 전역에 펼쳐진 결계는 설치자를 알아보고 합당한 권한을 넘겨주었다.
“자, 결계야, 보여다오. 전하들께서는 어찌들 하고 계시나?”
결계는 중얼거림에 반응해 속삭인다. 이것은 제국 수도를 보호함과 동시에 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고 기억한다.
“가장 유력한 세 분부터… 옳지.”
황자 황녀의, 또 그 측근들의 행적이 헤르마이의 눈앞에 펼쳐졌다. 행적이라고는 해도 어렴풋한 점과 선이 이리저리 오갈 뿐. 아무리 제국 수석마법사라고 해도, 결계의 설치자라고 해도 이 이상을 들여다볼 수는 없다. 허나 헤르마이에게 관음증은 없었고, 어렴풋한 점과 선의 움직임만으로도 맡은 바 일을 끝내기에는 충분했다.
“음, 음. 대충은 알겠군. 레냐르 전하와 페르비아스 전하는 머잖았고, 세쿤두스 전하는 조금 더 걸리려나.”
깃털 펜이 혼자 움직이며 노인의 말을 적어 내렸다. 대제에게 전하기 위한 보고서다.
“그 외에는 다들 별로 움직이지 않으시는군. 현명들도 하셔라.”
계속되는 중얼거림. ‘지오니스 전하는 도서관에만… 도서관? 뭐 괜찮겠지.’ 중얼거림은 금세 멈추었고, 보고서에도 마침표가 찍혔다.
“오늘치 보고서도 금방 끝났군! 비보가 하나라도 발견되기 시작하면 바빠지겠지만.”
“가시렵니까?”
“그래야지. 수고하게나.”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휘파람을 불었다. 이 보고서를 대제에게 전해 주면 오늘의 일은 끝이다. 그렇다면 무얼 할까, 오랜만에 친구를 찾아가 잔이나 기울여 볼까. 제자의 인사를 받으며 방을 나서던 헤르마이가 아, 하고 멈추어 섰다.
“참. 코넬리우스, 한마디 깜박했군.”
대마법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다.
“여기는 황실 결계의 중심, 제국마도원의 학장 정도 되는 마법사라면 비보의 위치를 역추적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게야.”
“…무슨 말씀을 하시렵니까?”
“당연히 즉결처분을 당할 만한 짓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겠지.”
“…….”
코넬리우스가 입을 다물었다. 스승이 저토록 엄한 표정을 짓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그가 내뱉는 내용에도 큰 무게가 실려 있었다. 노마법사의 눈썹은 노기를 머금고 휘어졌다.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을 테니까 다시 말해 주마.”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내뱉는다.
“망각 조치로 끝내는 건 두 번뿐. 아무리 내 양아들이자 수제자라도 세 번째는 목을 칠걸세.”
“…….”
“내가 이 말을 몇 번째로 한다고 생각하나?”
제자의 침묵 앞에서 헤르마이는 엄포를 놓는다.
“잘 생각해 보고 행동하도록, 이 헤르마이 메르헤스의 수제자답게!”
* * *
“코넬리우스 학장에게서의 연락은 아직인가, 아메투스?”
“…조금 전에 왔습니다만, 더 이상의 접촉은 피하고 싶으시다고.”
“물론 비보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없고?”
“예.”
“허. 연구비를 그렇게 처먹어 놓고는.”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휘휘 손을 저었다.
“뭐, 됐다. 그 작자가 헤르마이 옹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헤르마이 메르헤스, 대제 콘티누아 못지않은 괴물 늙은이. 그가 계승전의 총책임자가 되었다고 들었을 때부터 좀스러운 부정행위는 통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도 밑져야 본전 격으로 코넬리우스를 꼬드겨 놓았는데, 역시나.
“결국 하나라도 좋으니 남보다 앞서면 될 일. 혹시 내 형제자매님 중에 선수를 친 이가 있나?”
“다들 난항 중인 듯합니다. 그래도 1황녀 전하께서는 갈피를 잡으신 듯합니다만.”
“흐음. 역시 레냐르인가?”
페르비아스가 턱을 쓸었다. 요즘 기르기 시작한 턱수염의 감촉이 낯설었다. 여덟 형제자매 중에 그가 경쟁자로 여기는 이는 고작 둘. 1황녀 레냐르, 2황자 세쿤두스. 사실 세쿤두스도 조금 떨어지는 편이니 정말 위협이 될 만한 것은 레냐르뿐이다.
“최근 1황녀 전하의 세력원 다수가 한곳으로 모이는 걸 보면, 아마 확실하겠지요.”
“어디에 모이고 있지?”
“빈민굴 지하의 고대 무덤 터입니다.”
“끼어들어 가로채기는 곤란하겠는걸.”
자기네 세력권 안의 것부터 차근차근 취해 나가겠다는 건가, 레냐르다워. 페르비아스가 작게 웃었다. 같은 수도 루틸리움 황자 황녀마다 영향을 발휘하는 장소가 다르다.
평시부터 구제사업에 힘을 쓰는 레냐르에게는 하층민의 지지가 크다. 페르비아스도 빈민 구제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지만 레냐르의 압도적인 지지에 비하면 보잘것없고. 세쿤두스는… 오물 세례라도 받지 않으면 다행 아닐까.
“다른 다섯은 별일 없고?”
“예. 거처 근처를 벗어나는 일이 드무십니다.”
“눈에 띄어 좋을 것 없다는 것쯤은 알겠지.”
“다만…….”
아메투스가 말을 흐렸다.
“…5황자 전하께서는 매일 어떤 장소를 반복적으로 방문하십니다.”
“5황자면, 또 지오니스인가?”
페르비아스의 눈썹이 확 휘어졌다. 귀엽게 보고 있던 배다른 동생이지만 만약 비보에 대한 실마리라도 잡은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같은 편으로 포섭해야 할 테고, 못 한다면 명줄을 끊어 놓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를 매일같이 방문하기에?”
“황실 대도서관입니다.”
“…도서관? 거기에서 무얼 하지?”
“도서관은 경비가 삼엄해서 미행이 따라붙지는 못했지만, 책을 가지고 들어가서 다른 책을 갖고 나오신다고.”
페르비아스가 턱을 긁적였다. 최근 기르기 시작한 수염의 까칠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래. 도서관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서, 다른 책을 갖고 나온다고?”
“예, 전하.”
“…우리는 그걸 반납과 대출이라고 부르지 않나? 도서관은 그런 곳이니까.”
제1황자, 페르비아스는 제 측근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아메투스의 옥색 눈은 아주 진지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농담을 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아메투스, 이해가 안 가서 물어보는데 말이야, 대체 지오니스의 뭐가 문제란 말인가?”
“…….”
아메투스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페르비아스는 그 침묵에서 답을 찾았다.
“설마 또, 그 묘한 불안감?”
“…예.”
“허!”
코웃음. 페르비아스는 턱수염을 쓸었다.
“이봐, 아메투스! 자네를 제국치안청에서 빼 오는데 얼마가 들었는지 아나? 자네의 실력, 또 그 날카로운 감을 잘 알기에 거금을 썼어.”
“…알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대대로였네. 자네는 아주 쓸 만해. 실력도 직감도! 그런데 왜 지오니스에게는 늘 오작동하는지 모르겠어.”
“…….”
아메투스가 입을 다물었다. 페르비아스의 말에 십분 동의하는 바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오니스에게는 조금도 이상한 점이 없었다. 열한 살 꼬맹이가 조용히 지내다 보니 도서관에 매일 들를 수도 있지. 그런데 이놈의 직감이 그에게 계속 외쳐 댔다. 지오니스를 조심해야 한다고!
“우리는 신경을 쓸 다른 문제가 아주 많잖나. 그러니 지오니스에게는 신경을 꺼.”
“…옳습니다.”
“그냥 어린애일 뿐이라고. 이것도 벌써 두 번째로 말하는군. 나는 세 번 말하는 걸 싫어해. 알고 있지?”
“예, 전하.”
아메투스 공손히 머리를 숙인다.
페르비아스는 측근의 정수리를 바라보다 턱수염을 긁적였다. 이놈의 턱수염,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약간의 신경질이 일었다.
“지오니스에게 붙은 미행도 줄여, 아니 하나만 남겨. 그래야 자네가 신경도 덜 쓰겠지.”
* * *
시온이 기지개를 켰다. 열두 권에 걸친 대서사시를 독파해 내자 여운이 상당했다.
‘계승전 선포부터 십오 일. 책 한번 원 없이 읽었군.’
그는 흘끗 시계를 보았다.
해가 막 진 뒤다.
‘그래도 이주를 잘 먹고 잘 잤더니 마력도 조금은 모였어. 첫 번째 기예라면 나름 쓸 수 있어.’
숨을 골랐다. 몸 안에서 맴도는 힘이 느껴진다. 작지만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느슨해진 감시.’
창밖을 곁눈질했다.
늘 느껴지던 기척들이 줄었다.
‘보란 듯이 빈둥댄 보람도 있게, 경계가 무뎌졌어. 드디어 움직일 때야.’
시온이 일어섰다.
막 다 읽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서. 빨래를 개던 피에스는 이제 어디를 가냐고도 묻지 않았다. 당연히 도서관에 가겠거니 할 뿐이다. 시온 폴링라이트가 미소 지었다. 그가 생각한 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슬슬 손에 넣어 볼까…….’
다른 아홉 비보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다른 역사와 힘을 품은 하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도서관의 비보를.’
8화
‘열 개의 비보는 전부 대단하지.’
제국 수석마법사 헤르마이 메르헤스의 역작들. 그 힘과 신비는 역사 깊은 보물들에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탐낼 정도는 아냐. 무리해서 얻을 거 없어.’
시온 폴링라이트, 19년을 회귀한 영웅.
가장 깊은 신비를 겪고 가장 높은 자리를 두루 다녀 본 그에게 열 개의 비보는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다음 대의 황제를 정한다는 의미에서는 가치 있으나, 물건 자체는 그저 그렇다.
‘단 하나만 빼고.’
오직 하나의 비보만이 헤르마이의 작품이 아니다. 만들어진 것은 400년 전, 황금대제 때의 계승전. 백 년이 네 번 지나는 동안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그거야말로 진짜 비보라는 이름을 쓰기에 합당하지.’
시온은 알고 있다. 누구도 찾지 못한 비보의 이름을, 또 그 강력한 힘을.
‘자, 도서관의 비보를 깨우러 가 보자.’
* * *
코르디스 황실도서관의 위용을 보라!
제국 공용어 서적이 무려 60만 권, 타지방의 언어로 된 것이 약 40만 권. 총 100만 권이라는, 도저히 믿기 힘든 어마어마한 숫자. 종이로 된 것만 이 정도이니 은룡마도국의 대서고나 간신히 견주어 볼 만하다.
많은 장서 숫자만이 황실도서관의 자랑은 아니다. 오래전, 가죽이나 두루마리로 된 것들도 긴 세월을 넘어 잠자고 있으며 일설에는 고대의 점토판까지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귀하디귀한 고서나 신비를 품은 마도서도 물론이다.
어떤 독서가가 사랑하지 않고, 어떤 학자나 마법사가 침을 흘리지 않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황실도서관의 경비도 삼엄하기 그지없다. 다만 시온=5황자 지오니스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푸대접을 받는다 해도 그는 황자, 대제 콘티누아의 친아들이다.
“좋은 저녁입니다, 지오니스 전하.”
“그대도.”
경비병의 인사에 시온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경비병도 어찌 대할지 어색해했으나 매일같이 드나들다 보니 서로 얼굴을 익혔다.
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푸른빛이 번쩍였다. 원리는 알 수 없는 무슨 마법이 그의 신분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입구 근처에는 같은 제복을 걸친 일단의 무리가 펜을 놀리고 있다. 시온은 자연스럽게 그중 하나에게 다가섰다.
“라이레스, 반납.”
“벌써 다 읽으셨나요, 전하?”
“종일 책만 읽으니까.”
라이레스라 불린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책을 받아들였다.
“들으셨나요? 1황자 1황녀 전하께서는 벌써 비보를 하나씩 찾으셨대요. 15일 만에, 대단하지요?”
“나랑 상관있는 일이야?”
“상관없을 것까지는 없잖아요.”
라이레스는 그리 말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는 황실도서관의 말단 사서 중 하나였는데, 시온에게도 허물없이 말을 건네는 성격의 사내였다. 시온도 굳이 거리를 두지는 않았다. 독서 취향이 비슷한 사내라는 점이 한몫했다.
“그보다 어떠셨나요? 괜찮았죠?”
“응. 특히 마지막이 좋았어. 이제껏 구해 줬던 이들이 하나하나 나타나는 장면에서 울 뻔했지 뭐야.”
“전 울었어요.”
“울 것까지?”
“정석이라서 강렬하죠.”
시답잖은 몇 마디 담소. 어떤 책이 재밌고 어떤 부분이 좋고, 고리타분해서 다른 곳에서는 풀기 힘든 이야기보따리들. 곧 라이레스의 손이 멈추었다. 시온이 가져온 책들의 반납 절차가 끝났기 때문이다.
“또 추천해 드릴까요, 전하?”
“아냐. 오늘은 직접 찾아볼래.”
“그렇군요,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젊은 사서는 미소로 배웅한다. 시온도 미소로 화답했다. 바깥은 계승전 때문에 온통 날이 서 있는데, 여기만 다른 공간 같다. 시온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저 사서는 레냐르 누님 쪽의 정보원이었던가.’
시선이 따라옴을 느끼며 시온이 은밀하게 웃었다. 저 사내는 진짜 사서지만, 매수되어 그를 감시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없다. 훈련된 공작원이라도 속여 넘길 자신이 있는데, 평범한 사서 정도야.
‘그렇게 즐겁게 대화해 주었으니 의심할 턱이 없지.’
발걸음을 옮겼다. 서가의 사이로, 더욱 은밀한 곳으로. 그러나 사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시온을 열한 살 꼬맹이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 어제와 같이 대충 감시하고 대충 보고서를 올릴 뿐이리라.
‘자, 할 일을 하자고.’
* * *
황실도서관은 열 개의 층으로 되어 있다.
위로는 일곱 층, 아래로는 세 층.
적어도 알려진 것만으로도 이러하다.
높은 층으로 갈수록 귀한 장서가 보관되어 있다. 힘을 품은 마도서 따위는 최소 4층부터. 아무리 황자인 시온이라도 별도의 인가가 필요한 곳이다. 제국마도원 학장쯤 되어야 상설 허가를 받지 않을까. 물론 시온은 그따위 것에 관심이 없었다.
‘위쪽에는 용무가 없어. 어디, 소설란이…….’
여러 서가를 눈으로 훑었다. 아니고, 아니고, 여긴가? 아니네. 몇 개를 지나치고야 발길이 멈추었다. ‘제국어 소설’. 시온은 그 서가를 이리저리 살폈다. 키가 작아서 보조 사다리를 가져올 때는 약간 민망하기도 했다.
‘찾았다, 심연의 순례자 상권! 저자는 아르티스 아테아, 확실하고.’
그럼 하권은 어디에 있을까. 책을 옆구리에 끼고 이리저리 쏘다녔다. 목적하는 바가 분명했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는 곧 일곱 권의 소설을 찾아내었다. 저자의 이름은 하나같이 동일하다.
“아르티스 아테아의 연작소설 일곱 권. 금방 찾았는걸.”
적당한 자리를 찾았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을 외진 곳. 그러다 애정 행각을 벌이던 남녀를 마주치기도 했으나 모른 척해 주었다. 배짱도 좋아라, 귀한 장서라도 상하면 바로 파면일 텐데.
휘파람을 불며 오가던 중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적당히 그늘져 서늘하고, 적당히 외져서 아늑하다. 마침 누군가 의자도 가져다 놓았다. 열한 살 지오니스는 책을 쌓은 뒤 폴짝 뛰어 의자에 올라탔다.
“소리 내서 읽으려니 부끄럽지만 그래도 어디…….”
은밀한 곳을 찾아온 이유도 소리 내어 책을 읽기 위함이다. 도중에 사람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민망하고 수상할 테니까.
“…나 아르티스 아테아는 드라코 대산맥에서 기묘한 경험을 했다. 이것은 실화에 기반한 이야기임을 먼저 알리는 바다…….”
* * *
“…음. 아르티스 아테아의 소설은 처음인데, 들은 대로군.”
아르티스 아테아의 소설은 별로 두껍지 않았다. 일곱 권을 모두 소리 내어 읽는데 고작 세 시간으로 충분했다. 허나 시온의 정신을 갉아먹기에도 충분했다.
“…아주, 더럽게, 재미없어!”
시온이 진절머리를 치며 책을 내려놓았다. 이입은커녕 짜증만 나는 등장인물들, 논문이라도 쓰는가 싶을 만큼 딱딱하고 긴 문장, 괴멸적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전개! 어떻게 사람이 일곱 권을 쓰는 동안 발전이 조금도 없단 말인가? 엉망이 아닌 부분을 찾는 것이 드물다.
“어떻게 출판이 된 거야?”
책 뒤를 보니 과연, ‘이 책은 자비로 출판되었습니다’. 조금도 놀랍지 않아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온은 내려놓은 책을 살폈다.
“일곱 권을 가져왔는데… 여덟 권이 되었군.”
시온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 더럽게 재미없는 소설을 읽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찾았다. 숨겨진 여덟 번째의 책.”
표지가 검다. 안의 종이까지도 모두 시커멓고 내용은 조금도 쓰이지 않았다. 제목과 저자만이 금색의 잉크로 쓰여 있다. 특이하게도 고대 호투스 어語를 썼다.
저자의 이름은 역시나 ‘아르티스 아테아’.
제목은 짧고 노골적으로 ‘열쇠’.
어디의 열쇠고 뭘 어떻게 쓰라는 말인지,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미래에서 돌아오기라도 하지 않았다면 짐작조차 하지 못할 터다. 때문에 시온은 알고 있다, 이 책의 사용법을.
‘아르티스 아테아가 센 소르티의 필명筆名이란 걸 아는 자는 거의 없지.’
센 소르티, 400년 전의 계승전을 진행한 당시의 수석마법사. 소설가의 재능은 쥐뿔도 없지만 아득바득 일곱 권이나 책을 낸 의지의 마법사. 도서관의 비보는 그의 작품이다. 시온은 검은 표지의 책을 집어 들며 투덜대었다.
‘400년을 못 찾을 만도 하지. 저 더럽게 재미없는 소설 일곱 권을 도서관 내에서 소리 내어 낭독해야만 찾을 수 있다니!’
어떤 미친 작자가 계승전 중에 그런 시도를 하겠는가. 어떤 의미로는 가장 어려운 시련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어쨌든 이 책을 여기에다가 꽂으면… 옳지.”
쿠궁, 하고 서가가 입을 벌렸다. 돌로 된 계단이 아래로, 더 아래로 이어지고 있다. 시온은 아르티스 아테아의 소설들을 대충 근처 서가에 쑤셔 넣었다. 그의 흔적을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도록.
“들은 대로야. 이 아래에 있단 말이지.”
깊은 곳으로의 계단을 보며 시온은 미소 지었다. 이내 망설임 없이 발을 내밀었다.
“비보 중의 비보, 마갑魔鉀 발지아트!”
* * *
어두운 계단을 따라 얼마쯤 내려갔다.
“…으음. 이 불쾌함은 분명히…….”
기묘한, 하지만 기억에 있는 감각.
마치 영혼의 힘을 쭈욱 빼는 듯한.
“…마법방해역장. 400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강력하다니. 이래서야 헤르마이도 건드리지 못했겠는걸.”
수석마법사 optimus magus.
제국이 한 시대 가장 위대한 마법사에게 선사하는 영예로운 직위. 이를테면 제국마도원의 대학장, 이를테면 여섯 별의 마법사, 이를테면 헤르마이 메르헤스.
허나 그 위에, 더욱 영화榮華로운 이름.
제일마법사 primus magus!
모든 땅과 모든 시대 통틀어 가장 위대한.
단 한 명의 마법사를 위해.
“센 소르티가 아니면 누가 제일마법사라고 불리겠어.”
어떤 마법사도 센 소르티보다 위대하지 못했고, 위대하지 못하며, 위대하지 못할 것이다.
“소설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말이야.”
센 소르티, 필명 아르티스 아테아가 들었다면 노발대발할 소리였다.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 자리에 없고 듣지도 못할 텐데. ‘그렇게까지 재미없는 건 어떤 의미의 정신 공해라고.’ 그의 정신은 아직도 연작소설 일곱 권에게 입은 상처에서 회복되지 않은 채였다.
“억지로라도 자기 소설을 읽어 줬으면 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걸 시련에까지 끼워 넣다니……. 대체 어떻게 찾아내라고.”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본명도 아니고 필명으로 쓴 소설 일곱 권을 소리 내서 읽어야 문이 열린다고?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 말고는 그 어떤 황자 황녀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시온은 그렇게 확신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본인에게 직접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찾았겠어!”
센 소르티는 4세기 전의 인물이다.
그런데 아직도 살아 있다. 아주 태연하고 뻔뻔하게 유유자적 삶을 영위하는 중이다. 다른 이름을 쓰고 소설 집필을 계속하면서. 작가 활동은 어지간하면 그만두어 주기를 바라지만.
“그래도 이야기하니 보고 싶네. 그쪽은 아직 나를 모르겠지만.”
시온은 센 소르티와 꽤 친밀한 관계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갑 발지아트나 시련에 대한 이야기도 듣지 못했을 터다. 물론 회귀 전의 이야기다. 19년의 세월을 거슬렀으니 센 소르티는 그를 알지 못할 터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서글펐다.
“다시 만날 기회가 있겠지. 일단은 발지아트부터…….”
철컥, 하는 소리. 뒤따르듯 슉, 슈슉, 슉,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짓쳐 들었다. 시온이 재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얼음으로 된 송곳 몇 개가 그의 머리 있던 자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도 철컥, 철컥, 하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설마, 함정도 살아 있어?”
400년이 지났는데? 화답이라도 하듯 바닥이 열렸다. 아래에는 가시가 빼곡하다. 시온이 황급히 펄쩍 뛰어 피했다. 그러자 벽에 창이 튀어나왔다. 어찌어찌 또 피해 냈지만 팔에 길게 긁힌 상처가 남았다.
“아. 어린아이 몸으로 지나기에는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함정은 계속된다.
굴러오는 바위나 날아드는 화살. 전형적이다 못해 고전적이지만 그렇기에 위험하다.
“…조금은 피곤해야, 몸풀기가 되겠지?”
바위를 뛰어넘고 화살을 피해 냈다. 굳이 첫 번째 비밀을 열어 낼 필요도 없었다. 그는 흐음, 하고 턱을 쓸었다. 조금의 긴장도 없다. 겨우 이런 것에 긴장할 만큼 평탄한 시간을 보내오지는 않았다.
“읏차.”
튀어나온 창은 다시 벽으로 빨려 들어가려 한다. 창대는 나무다. 400년의 시간을 아예 피해 갈 수는 없을 터다. 역시나, 힘을 주자 창 하나가 뚝 부러져 나왔다. 시온은 그것을 꼬나쥐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약간 버겁지만 옆구리에 낀다면 무리 없다.
전사가 아니라도 어느 정도 무예의 소양은 갖추고 있다. 개중에도 가장 친숙하고 자신 있는 것은 장창. 낡아 빠지고 평범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옆구리에 낀 창을 이리저리 휘둘러 본 시온이 씩 웃었다.
“이깟 함정쯤,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슥 지나가 주지.”
* * *
시온은 함정을 지나쳤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슥 하고.
정말로 그게 전부였다.
“후. 생각보다 힘들었군.”
그는 땀을 닦으며 창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휙, 하고 훅, 해서 휘리릭, 했더니 간단했어.”
몇 군데에 긁힌 상처가 남았다. 특히 오른 손등의 상처는 상당히 깊었다. 대충 옷을 찢어 싸맸다. 피에스가 보았다면 귀한 예복을 찢었다며 까무러쳤을 터지만 여기에 없다. 그러니 괜찮다.
계단은 끝이 났고, 커다란 석문이 보였다.
“센 소르티 말대로라면 이 문이 끝일 텐데……. 뭐라고 쓰여 있군.”
석문의 위쪽에는 어렴풋한 황금빛이 일렁였다. 자세히 보니 글자였고, 고대 호투스 어였다. 어디 보자……. 익숙하지 않은 글자인 데다 어둡기까지 해서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더듬거리며 읽어 낼 수 있었다. 거기에는 분명히 이렇게 쓰였다.
[답하라.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는 누구인가?]
“아, 진부한 수수께끼!”
9화
황실도서관의 지하에는 계승전의 비보가 있다.
제일마법사 센 소르티가 400년 전 만들어 낸 역작,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비보, 마갑 발지아트다. 더럽게 재미없는 소설 일곱 권을 읽어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연 시온은 휙 하고 훅 해서 휘리릭 함으로 함정을 넘어섰다.
그리고 마주한 것은 하나의 물음.
[답하라.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는 누구인가?]
“마지막은 수수께끼라. 정말 더럽게도 진부하다니까.”
시온이 코웃음 쳤다. 함정의 끝에서 기다리는 수수께끼. 지혜를 증명하지 못하면 넘어서지 못한다……. 아무리 400년 전의 시련이라고는 해도 용납될 만한 진부함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하긴 그런 소설을 쓰는 센스니까 어쩔 수 없나.”
센 소르티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격노를 토하며 머리채를 붙잡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 없다. 어쩔 건가? 어째 고소한 기분이 든 시온이 킬킬 웃었다.
“어려울 건 전혀 없지. 센 소르티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었으니까.”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는 누구냐, 시온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물음을 듣는 순간 곧바로 떠올렸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문에 손을 얹었다.
“나는 너를 모른다. 그게 나의 답이다.”
쿠구궁-! 문이 열린다. 오래전의 기관답지 않게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하긴 센 소르티의 작품이니까. 그는 문이 다 열리는 것을 기다리지도 않고 쑥 몸을 내밀었다.
“누구도 너를 모르는데 나는 어떻게 알아? 시시한 말장난.”
너머에는 작은 공간이 있다. 로브를 쓴 마법사의 조각상이 가장 먼저 보였다. 조각의 이목구비가 낯익다. 400년 전의 조각인데도 기억 속에 있는 얼굴.
“맞게 찾아왔군.”
조각의 아래에 새겨지기를, ‘제일마법사 센 소르티’.
“그렇다면 저게…….”
조각의 바로 앞, 공간의 중심.
꿀렁이고 있는 검은 구체.
“마갑 발지아트!”
* * *
마갑 발지아트. 센 소르티의 역작.
알려지기를, 주인에게 기생하는 그림자금속. 물처럼 흐르고 검처럼 날카로운. 자유자재로 유동하며 무기도 방패도 되는 갑옷! 허나 이는 사실의 극히 일부. 오히려 왜곡된 부분조차 있는 눈가림이다.
시온은 발지아트의 진실을 안다.
그렇기에 검은 구체 위에 손을 올리며 읊는다.
“깨어나라, 발지아트.”
“…….”
검은 구체는 미동조차 않는다.
시온은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긁고는 품에서 작은 칼을 꺼냈다. 고기 써는 나이프지만 손가락에서 약간의 피를 내기에는 충분했다. 시온은 검은 구체의 위에 핏방울을 떨어트리며 외쳤다.
“코르디스의 피다. 못 들은 척하지 말고 네 의무를 다해!”
“쳇.”
꺄르르 웃는 소리가 있다.
장난스럽고 천진하다.
“참 똑똑도 하시네요!”
검은 구체가 더욱 크게 꿀렁이기 시작하더니 가느다랗고 하얀 손과 발이 튀어나왔다. 그렇게 발지아트는 모습을 바꾼다. 무기질한 흑색 구체에서 치마를 나풀대는 검은 소녀로.
“네, 맞아요, 맞아!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는 몰라도 잘 찾아오셨어요!”
까만 치맛자락 나풀대며 소녀는 웃는다. 머리칼도 눈도 하나같이 까맣다. 소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마다 치맛자락이, 또 양쪽으로 땋은 기다란 머리칼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제가 바로 발지아트, 제일마법사 센 소르티가 낳은 비보 중의 비보랍니다!”
발지아트가 치맛자락을 잡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 예법은 완벽한 코르디스 황실의 것이다. 새하얀 목덜미를 보며 시온이 입가를 틀어 올렸다.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인 척은.”
“어머. 이름 모를 황녀님, 왜 이렇게 날이 서셨담.”
“…난 남자야.”
시온의 얼굴은 완연한 정색의 빛을 띤다. 발지아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과장스레 입을 가렸다.
“네에? 그 얼굴로요? 아쉬워라!”
발지아트는 꺅꺅 호들갑을 떨며 시온에게로 다가왔다.
“머리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제국이 휘청거렸을 텐데! 이렇게 눈부신 금발, 이렇게 창연한 눈을 갖고 남자라니!”
소녀는 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이내 시온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시온은 그 손을 홱 쳐 냈다.
“건들지 말지?”
“정말, 까칠도 하셔라.”
발지아트는 장난스레 웃는다. 시온은 웃어 주지 않았다. 소녀 행세하는 저것의 정체를 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좋아요, 좋아. 아리땁지만 성급하신 황자님께 맞추어 드리죠.”
소녀는 빙그르 한 바퀴 돌더니 이내 춤을 추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 서둘러 봐요. 서둘러서 해야 할 이야기를 해 보아요.”
양쪽으로 묶은 검은 머리칼이 현란하고 입가에는 미소가 짙다. 가느다란 팔다리가 크게 휘둘러진다. 시종일관 연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
“황자님, 황자님.”
소녀가 속삭인다.
“어찌하여 이 발지아트를 찾아오셨나요?”
“너를 손에 넣기 위해서.”
“어머머! 담대하기도 하셔라! 부끄럽지만 황자님이시라면……!”
꺅꺅대는 소리가 더해진다. 시온의 얼굴은 정색을 넘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왜 저를 얻으려 하시죠?”
“비보를 차지하는 것, 계승전에 참가한 황자의 의무지.”
“와오, 막힘 없는 대답!”
그녀는 시온을 보며 다시 꺄르르 웃었다.
“준비라도 하신 것처럼 완벽한 대답이세요. 이렇게 보아도 저렇게 보아도 너무 훌륭하신 황자님이신걸요.”
소녀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미소를 넘어서 더욱, 어떤 뜻을 담고.
“그렇지만 말이죠오……. 이 발지아트는 코가 좋거든요.”
인형 닮은 갑옷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코를 킁킁대는 시늉을 해 보인다.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어요. 보이지 않아도 선명하네요. 황자님께는 냄새가 난답니다. 흐음. 이게 무슨 냄새람……?”
발지아트가 제 코를 막는 시늉을 했다.
“피 냄새, 눈물 냄새, 비명 냄새! 그리고 또…….”
소녀의 눈 깊은 곳에는 시커먼 무엇인가가 있다. 검게 일렁이는 눈동자, 한껏 틀어 올린 입가. 인형 같은 이목구비가 섬뜩함을 더한다.
“…무엇보다 지독한, 이, 거짓말 냄새!”
“…….”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당신의 영혼에서는 온통 거짓말 냄새가 진동을 해요!”
발지아트 배시시 웃는다.
“황자님, 당신은 비밀쟁이시네요.”
시온은 답을 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소녀를 노려보았다. 소녀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들어 깔깔대며 웃는다. 배를 잡고 웃는다.
“그 고운 얼굴 뒤에 무슨 비밀을 그렇게 꽁꽁 감추어 놓았기에 이렇게 악취가 나죠?”
발지아트는 엿보았다.
“그런 악취를 풍기며 자격을 논하다니, 우습게도.”
열한 살 지오니스의 몸 뒤에 숨겨진 시온 폴링라이트의 영혼을, 그가 품고 있는 비밀들을. 그저 무언가가 있다, 정도여도 그것이 고귀하신 황자와는 어울리지 않음을 꿰뚫어 보았다.
“죄송하네요, 황자님. 당신 같은 비밀쟁이에게는 황제의 자격이 없어요.”
발지아트는 검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단호히 말했다.
“난 당신의 것이 되기를 거부하겠어요.”
* * *
“아, 그래도 가슴 아파라!”
거절해 놓고도 호들갑은 여전하다.
“황자님처럼 아리따운 분을 만나는 일은 드물고 드문데, 거절할 수밖에 없는 애절한 마음을 아시겠나요?”
소녀는 떠들어 댄다. 연기를 하듯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하지만 저는 비보이자 시련의 수호자! 제국의 위협이 될지 모르는 자에게는 절 허락할 수 없어요. 그 얼굴은 아쉽지만…….”
시온은 그녀가 마음껏 지껄이게 놔두었다. 그리고 조금 조용해지고서야 웃음을 터트렸다. 명백한 조소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아주 장황하군. 400년 동안 갇혀 있으며 연기 연습만 했나?”
“…흐응. 무슨 소리이신지?”
발지아트는 짐짓 모른 척한다. 가식적인 모습에 조소 짙어진다. 시온은 찌르듯 내뱉었다.
“넌 제국에 조금의 관심도 없잖아.”
“…무례하시네요.”
“조잡한 연극은 집어치워, 진흙 덩이.”
“…….”
소녀는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미소의 모양을 한 채로 딱딱하게 굳은 저 입에서는 당장이라도 검은 무언가가 튀어나올 듯하다. 시온은 그 꼴이 우스워 웃어젖혔다.
“발지아트, 널 안다. 네 처지를 안다.”
센 소르티는 마갑 발지아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림자금속 수십만 가닥을 짜내 만든 갑옷입니다.’ 허나 거짓말이었다. 발지아트는 생명 깃든 갑옷 따위가 아니다. 더욱 꺼림칙하고 소름 끼치며 위험하기 그지없는 무엇이다.
“그림자 차원의 귀족께서 어쩌다 인간에게 목줄이 매여 버렸는지를 알아.”
“…….”
소녀의 모습 했으나 소녀 아니다.
인간의 형상 본뜨나 인간 아니다.
법칙조차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영혼을 먹어 치우려 친히 왕림枉臨하신 괴물. 악마라고 하는 것들을 한없이 닮은 상위 존재. 그런데 인간 마법사에게 패배해서 도구 취급을 받다니, 우습지 않을 수가.
“센 소르티의 목줄은 꽤 답답하겠지.”
“…….”
“내 것이 되어라, 발지아트. 여기서 나가게 해 주지.”
“흐- 흐흐……. 그것조차 알고 있었군요.”
힐쭉 웃으며 소녀는 고개를 든다.
“수상쩍은 비밀쟁이. 코르디스의 핏줄에서 어찌 당신 같은 자가 나왔을까요? 아니, 그 핏줄이라 그럴까요?”
질척대는 듯한 웃음소리. 이전과는 다르다. 얼굴은 여전히 귀여운 모양새지만, 어째 당장이라도 검은 진흙 덩어리처럼 뭉개질 것만 같이 느껴졌다. 허나 이쪽이 더욱 자연스러웠다. 인간을 흉내 낼 때보다 몇 갑절은.
“그런데요, 황자님. 무언가 착각하고 계세요.”
소녀의 입가가 기분 나쁜 형상으로 꿀렁인다. 이제는 저가 괴물임을 숨기지도 않는다.
“말은 날 여기서 꺼내 준다고 해도, 결국 새로운 목줄을 걸겠다는 거잖아요?”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
“그렇다면 이 발지아트, 아쉽지만 다시, 더욱 확고하게 거절의 뜻을 전해야겠네요.”
종노릇은 지긋지긋한지라. 소녀는 그리 말하며 치마를 잡고 고개 숙였다. 여전히 완벽한 예법이었다.
“거절이라. 뭐, 그럴 수도 있지.”
“어머,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네 의지니까.”
시온이 곁눈질했다. 소녀의 치맛자락 아래로 무언가가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거절이야 그렇다 쳐도, 그림자는 왜 꺼내고 있는지 묻고 싶은걸.”
소녀의 치마 속에서 툭, 투둑, 하고 무언가 계속 떨어진다.
“아주 사나워 보이는데 말이야.”
검은 진흙과도 같은데 살아 있는 듯 꿈틀댄다. 아마 저것이 이 차원에 둔 소녀의 진체이리라.
“참, 황자님. 눈치도 없으셔라.”
발지아트는 입가를 가리며 웃는다.
“종노릇은 싫어서 거절했지만, 400년 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도 없잖아요.”
진흙은 서로 뭉치더니 매끄러운 형상으로 변한다. 꿈틀대는 꼴이 촉수 같았고, 그 끝은 단단하고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소녀는 그런 시커먼 촉수를 몇 개나 꺼내더니 시온을 향해 치켜들었다.
“걱정 마요. 황자님의 육체만 조금 빌릴게요.”
“이봐, 인간은 몸을 빼앗기면 죽어.”
“알고 있답니다?”
소녀는 시커멓게 눈웃음친다.
“어차피 황자님도 절 노예 삼으러 오셨잖아요?”
“그건 그래.”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야만적인 수단을 택하겠다는 거지?”
“순순히 몸을 내놓으신다면 그러지 않겠지만요?”
“그럴 수야 없지.”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
소년과 소녀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자아, 황자님…….”
소녀의 눈이 검고 찐득한 빛으로 변한다. 마치 오래된 진흙과도 같다.
“…그 몸을 받아 가죠!”
* * *
“-아아, 오늘은 참으로 아름다운 오늘이어라.”
발지아트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400년 지나서, 아하하하, 드디어-!”
당연한 일이다. 센 소르티에게 붙잡히고 백 년이 네 번 지났다. 변변찮은 식사도 할 수 없던 인고의 시간이 드디어 끝이 나는 것이다. 황자의 몸이라면 센 소르티의 결계도 반응하지 않을 터다.
“게다가 그 얼굴, 이제 제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숨겨 뭐 할까. 그녀는 숙주의 외모를 꽤 따지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시온의 생김새는 아주 마음에 쏙 들었다. 곧은 코도, 기다란 속눈썹도, 가냘픈 인상도! 저런 얼굴을 한 소년이라니, 크으,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못 참겠단 말이에요!”
그림자 촉수가 내뻗어진다.
이 촉수는 그림자 차원에 속했다. 어지간한 힘이 아니라면 물리력으로는 대항할 수 없다. 시온은 무언가 방비를 하려는 듯했으나 금세 그림자로 뒤덮였다.
“…음.”
“후후. 너무 편하게 오신 거 아녜요? 이 발지아트를 손에 넣을 생각이셨다면서!”
발지아트는 마나의 잔향을 맡았다.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마법사도 아니셔, 마도구도 없어.”
시온이 풍기는 마나의 잔향은 옅고 옅다. 만약 마법을 부린다고 해도 아주 간단한 수준일 것이다.
”어떻게 이 발지아트에게 닿을 생각이셨는지.”
마법의 힘 없이 그림자 차원에 닿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녀가 보기에 시온은 어떠한 위협도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간단하다. 저 아름다운 얼굴의 황자를 취해서 밖으로 뛰쳐나가면 되는 것이겠지.
“쉽네요, 아주 쉬워요, 황자님! 아주 고마울 정도로 쉬워요!”
시온은 아주 보이지 않게 되었다.
진흙 같은 그림자가 그를 온통 뒤덮은 탓이다. 그림자는 이내 금속처럼 굳었다. 강철의 몇 배는 되는 강도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소년의 근력으로는 뚫을 리가 없다.
“아하하하, 기다려라, 코르디스! 너희의 핏줄로 너희를 잘근잘근 찢어발겨 주마!”
소녀는 승리에 취해 웃는다.
“센 소르티, 당신이 그토록 아끼던 제국을 지옥으로 만들어 주겠어!”
“그건 곤란한데.”
그림자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황제의 자리에 닿아야 하거든.”
시온은 여전히 갇힌 채다. 검은 그림자가 몇 겹이나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도 저렇게 태연한 목소리라니.
“흐음……?”
혹시 얼굴이 상할까 약하게 쥔 탓일까. 발지아트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온을 더욱 강하게 감싸 쥐었다. 그러나 시온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걸 위해서는, 널 손에 넣어야 하고.”
“…읏!”
그림자의 감옥이 뜯겨 나간다.
중심에는 시온이 있다. 강철보다 단단한 그림자는 마치 쓰레기처럼 뚜둑, 뚝, 하고 뜯어져 날아간다. 날아가는 그림자들은 금세 녹아내려 어둠으로 사라졌다.
“…캭!”
재차 뻗은 촉수가 허무하게 막혔다. 무엇 때문인가? 알 수 없다. 막힌 촉수가 산산조각 난다. 여전히 이유를 알 수 없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엇이 촉수들을 막고 있었다.
“왜 비명을 지르지, 발지아트?”
“황자님, 거기에 뭐가 있는 거죠……?”
“보는 대로, 아무것도 없어.”
“…거짓말!”
이상하다. 그녀는 그림자 차원의 존재. 물질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 속한 것이라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시온이 부리는 힘은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맞아. 거짓말이야.”
“윽-!”
이번에는 더욱 깊은 곳에서부터 힘을 끌어내었다. 더욱 질기고 더욱 강력한, 그녀의 혼과 가까운 곳의 촉수다.
“눈치채지 못하겠어? 헛수고라고.”
그러나 허무하게 뜯겨 나간다. 그녀는 고통을 느껴 신음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공상은 잡고 싶어도 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공상空想……?”
“그래. 이건 공상이야, 발지아트. 없는 힘을 긁어모아 불러 봤지.”
일곱 가지 비밀이 낳는.
일곱 가지의 기예Ars.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첫 번째 기예.
‘공상손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