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기예Ars.
한 영혼에 하나뿐인.
깊숙하고 고유한 광채.
그러나 시온, 일찍이 약속을 맺었다.
비밀 하나에 기예 하나.
일곱 비밀이기에 일곱 기예.
약속의 이름.
셉템 아르카나Septem Arcana.
* * *
첫 번째의 불꽃이 과거를 들춘다.
시온 폴링라이트의 첫 번째 비밀.
‘그는 헛된 꿈을 꾼다’.
시온은 황제의 자리에 닿기를 원했다.
원대한 이상을 품고 날뛰며 악을 썼으나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런데 이 헛된 꿈, 죽음으로도 끊어 내지 못해서 여전히 헛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두 번째의 삶에서도 그는 황제의 자리를 바라본다.
바보 같고 어리석은 꿈.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못하니 더욱 헛되다.
여전히 바라보며 헛된 달음질을 친다.
헛된 꿈, 그저 공상空想.
무엇도 할 수 없이, 그저 무력하게.
허나 기예란 모순적인 것.
더없는 모순이 현실을 뒤집는다.
무엇도 아닌 공상은 무엇이 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엇으로 된다.
잡고 놓고 쓰다듬고 주무르고 할퀴고 만지고 때리고 더듬고 휘젓고, 끝내 기도하기까지 하는 첫 번째의 기예, ‘공상 손가락’.
* * *
“네게는 보이지 않겠지.”
시온의 눈에는 보인다.
그만이 볼 수 있다.
이리저리 떠도는 ‘공상손가락’들.
손가락이라 부르나 하나의 손과 같다.
“이 공상은 나만의 것이니까.”
보일 리 없는 손들.
무엇도 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시온은 저것을 바라본다.
제 손처럼 여긴다. 그러한 기예Ars다.
저 손들, 모양 다양하고 움직임도 제각기.
이리저리 비명 지르듯 뒤틀고 있다. 당장이라도 꺼내 달라는 듯한 손짓들은 마치 춤과도 같다. 그러나 시온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한다. 헛된 꿈도, 헛된 손짓도, 헛된 발악도 모두 그의 것이니.
“이- 이이익!”
진흙 촉수가 날아든다.
강철과 같이 단단하고 사자의 뱃심과 같이 힘 있다. 시온은 막고자 했다. 제각기 몸부림치던 손들이 날아든다. 하나가 막고 하나가 비튼다. 형체 없는 손짓 둘이 촉수를 금세 진흙으로 되돌렸다. 발지아트 분노에 차 발을 구른다.
“뭐, 큰소리는 쳤지만 초라해.”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진흙 촉수를 가볍게 막아 내는 중이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며 나타난 손의 숫자를 세었다. 그의 눈에만 보이니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겨우 이 숫자라니. 황궁의 좋은 것을 잔뜩 먹으면서 마력을 모았는데도, 역시 시간이 부족하단 말이지.”
하나, 둘, 셋… 열셋.
불러낸 ‘공상손가락’, 겨우 열세 개.
공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기예Ars란 놈이 원래 그렇다. 효율이 꽤 좋은 편인 ‘공상손가락’이라고 해도 겨우 십오 일 정도 모은 힘으로는 겨우 이 정도가 한계다. 시온은 고개를 젓는다.
“아. 그래도 걱정은 안 해 줘도 돼. 약해질 대로 약해진 널 짓누르기에는 충분하니까.”
“-혓바닥 놀리기는, 망할 자식이!”
발지아트는 용을 쓰며 달려든다.
시온, 열셋의 손을 두른다.
“원래 성격이 나오는 걸, 발지아트. 아니, 본성이라고 해야 할까?”
“키- 야아아아-!”
“악을 써도 바뀔 상황은 아니지.”
그녀는 그림자 차원의 귀족. 본래라면 ‘공상손가락’ 열셋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다. 그러나 센 소르티에게 봉인 당한 데다 400년 동안 갇혀 굶었다. 비참할 만큼 약해졌으니 손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으, 으으으-!”
소녀는 신음한다. 뜯겨 나간다, 뜯겨 나간다, 뜯겨 나간다. 보이지 않는 손아귀들이 그 몸을 푹푹 뜯어 낸다. 뜯어 낸 자리마다 검은 진흙이 새어 나온다. 그녀는 존재를 잃어 감을 느끼며 비명 지른다.
“이럴 수는, 없어! 나는, 발지아트야아! 400년을 갇혀 있었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 약한걸.”
뚝뚝 떨어져 나간다.
순간이 지날 때마다 사라져 간다.
그녀의 몸이, 그 존재가.
겨우 열셋의 ‘공상손가락’에 의하여.
“이, 이, 이렇게… 내가아…….”
그녀는 사라지는 몸을 보며 탄식을 흘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회복되지 않는다. 그녀는 제 존재의 소실을 느낀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직감. 힘이 사라진 자리에는 두려움이 차오르는 법.
“…너 같은, 꼬맹이에게……!”
멀리 뜯겨 나간 그림자를 불러 보아도 돌아오지 않는다. 처음 것들은 그나마 꿈틀거리기라도 했으나 나중 것은 그럴 힘조차 없는지 축 늘어졌다가 이내 흩어져 사라졌다. 발지아트의 형체가 무너진다.
이제 소녀를 닮은 것이라고는 목 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목만 남은 소녀는 바닥을 기기 시작한다. 목에서 자그마한 촉수들이 나와 꿈틀거린다. 시온이 다가온다.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피할 수도 없었다. 비참한 꼴이었다.
“애석하게 됐네.”
검은 눈물 흘리는 머리 보며 시온이 웃음을 머금었다.
“넌 내 것이다, 발지아트.”
* * *
검은 진흙이 시온에게 스며든다.
소녀의 형체는 완전히 무너져 사라졌다.
그리고 의식은 깊어진다. 알 수 없는 내면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 있다.
‘아하…….’
신음에 불과했던 것은 곧 웃음으로.
소녀의 깔깔대는 소리로. 육체를 잃은 소녀는 정신 속에서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하, 하하하……!’
발지아트가 웃어 젖혔다. 시온의 내면에서 아주 신나게 깔깔 웃었다.
‘정말로 사라지는 줄로만 알았어요.’
하얗기만 한 정신세계 속에서 검은 소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런데 이 발지아트의 본체를 자기 정신에 들여보내 주다니!’
검은 그림자가 뭉클거리며 정신을 채우기 시작했다.
‘겁도 없게도, 고맙게도!’
그녀는 그림자 귀족이다.
물질에 묶이지 않는다. 육체가 무너져도 정신 속에 살아 움직일 수 있다. 오히려 더 활기가 넘친다. 물론 조금만 더 뜯겨 나갔다면 정말 위험했겠지만, 지나간 일이다. 그녀는 신이 나서 시온의 머릿속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신세를 졌으니, 안쪽에서부터 삼켜 드리겠어요, 황자님!’
그림자의 촉수를 뻗는다. 그녀는 시온의 정신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하얀 정신 속을 떠다니는 저것들은 기억과 감정과 혼의 편린 따위다. 촉수는 그것들을 하나씩 낚아챈다.
‘무얼 숨겼기에 마음속에서 이런 악취가 나는지, 군침이 도는군요!’
그녀는 헤집는다.
‘흐음. 어디 보자. 무엇을 겪으셨을까……?’
드러나는 과거가 있다. 지오니스의 기억, 황궁에서의 홀대, 네불로 따위의 조롱, 늘 눈치를 보던 어린아이의 마음 따위다.
‘고된 삶을 살았군요. 황자가 이렇게까지 푸대접받기는 쉽지 않은데.’
발지아트는 멈추지 않는다. 더욱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왈칵 솟는 기억들. 대산맥의 흙, 벌레의 맛, 피의 냄새, 같이 바다를 보던 소녀, 은발 머리의 마법사.
‘……?’
당혹이 인다.
‘…이 기억들, 뭐지?’
당혹스러워서 멈추려 했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기억 속에서 은발 머리의 마법사가 배시시 웃는다. 기억에 불과한데도 발지아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더니 이내 사라졌다.
‘…어떻게? 인간의 기억이 어떻게 이런 꼴이?’
시온의 기억이 치민다.
파도처럼 몰려와 저항할 수 없었다.
‘아니, 아니, 아니……!!!’
외침이 있다. 포효가 있다. 거짓말 사이에, 가장 깊은 데에서부터 부르짖는 소리 있다.
돌아와라, 나의 것들아. 부디 내게 돌아와라, 모든 시간아. 그런데도 돌아오지 않는구나, 너희들. 아, 전장이여. 아아, 잊지 못할 동료들이여. 지나온 시간과 잃어버린 것들, 되찾고 싶으나 되찾을 수 없는, 사무치도록 알아 버린 서글픔, 돌아가라 말하는 여인의 목소리, 언젠가는 닿아야만 할 저 황제의 자리…….
이것들은 모두…….
‘…이, 이, 일어나지 않은 일들! 아직 와서는 안 되는 미래의 것들이, 왜……!?’
발지아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름조차 거짓이었어! 시온 폴링라이트? 폴링라이트의 이름을 쓴다고? 이, 이 사내는 대체……?’
기억들이 쏟아진다.
‘이래서야, 이래서야 마치……!’
검은 감정이 그림자를 되레 짓누른다. 그녀는 비명 지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온의 마음속에는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이 가득했다.
‘…시간이라도 거슬렀다는 것처럼!’
“봤구나.”
나지막한 목소리.
“너, 내 비밀을 보고 말았어.”
“아……!”
검은 소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었다. 어느새 금발의 황자가 거기에 있었다. 발지아트는 촉수를 뻗었다. 여기는 정신 속이다. 일개 인간이 그림자 차원의 귀족에게 대항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야만 했다.
“비밀쟁이 황자! 넌 뭐지? 대체 뭐야!”
소녀는 악쓴다.
“시간을 헝클어트려? 이, 이… 괴물!”
“네게는 듣고 싶지 않은데.”
시온은 태연하다. 검은 촉수를 마주하면서도 꿈쩍 않았다. 곧 손들이 나타났다. 희뿌연 형체, ‘공상손가락’. 이번에는 발지아트의 눈에도 보였다. 그것들이 촉수를 으깨 부수었다. 검은 진흙이 사방으로 날리고 발지아트 비명 지른다.
“이 손, 어떻게 정신 속에까지!”
“공상이라고 했잖아. 오히려 이쪽이 본체라고 할 수 있지. 마치 너처럼 말이야.”
열셋의 ‘공상손가락’. 검은 촉수 으깨 부수고 검은 소녀를 짓누른다. 그림자 차원의 귀족, 반항하지 못한다. 여기는 정신세계이고 상대는 일개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그보다 발지아트, 냉큼 정신세계로 따라 들어와 줘서 고마워. 덕분에 네 의식만 봉인할 수 있겠는걸.”
“…그것조차 읽고 있었군요?”
“널 통째로 삼키면 네가 안에서부터 날 갉아먹으려 들 거라는 거? 너무 뻔했지.”
시온이 피식 웃었다.
“네 힘은 탐나지만, 내 안에서 떠들게 놔둘 수는 없잖아.”
“…….”
“센 소르티도 그랬거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독은 빼고 먹으라고.”
“…센, 소르티?”
소녀의 목소리가 째지듯 높이 솟았다. 몸이 무너지는 중에도 보이지 않던 격앙이 스물거렸다.
“…너, 너, 너! 센 소르티를 만난 적이 있어!?”
“그럼. 그 인간 아직 쌩쌩하게 살아 있는걸.”
상쾌한 웃음과 함께 시온이 말을 이었다.
“네가 여기 있다고 알려 준 것도 센 소르티야. 아주 친절하게 설명해 주던걸.”
“으, 아아아-!”
발지아트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이전에는 보인 적 없던, 아주 흉악하고 기괴한 형상이다. 검은 그림자처럼 뭉개진 목소리가 위협하듯 터져 나왔다.
“세엔, 소르티이이이---!!!”
발지아트의 얼굴이 분노로 시커멓게 변했다.
“이 망할 인간, 염병할, 마지막 마법사! 400년이 지났어도, 내 발목을 잡는구나-!!!”
그녀는 분노를 토하다 고개를 홱 돌렸다. 증오는 이제 시온에게로 향한다.
“넌, 뭐냐, 꼬맹아! 어째서 센 소르티를 알고 있지? 어째서 오지 않은 일들을 겪었냔 말이다!”
“그건 말이야…….”
시온이 다가선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 있다. 지독한 열기였다. 발지아트의 몸이 더욱 녹아내린다. 불꽃이 내려온다. 그 숫자는 일곱이다.
“…비밀이야, 발지아트.”
일곱 불꽃 거느린 채 시온이 속삭인다.
“너 따위에게 말하기에는 너무 깊은 비밀이지.”
“으흐흐흐……!”
발지아트는 이제 킬킬 웃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악마 같은 꼬맹이! 천사 같은 얼굴을 해 놓고는……! 제국도 운이 다했네요……. 당신 같은 자가 핏줄에 섞이다니!”
힘으로도 속임수로도 모두 패배했다.
이렇게까지 속내를 들키니 되레 후련하다.
“재미있게 되었네요. 네, 이 지경까지 오면 오히려 재미있어요!”
아하하하. 그 웃음에는 광기마저 섞이고 있었다. 그림자 차원의 괴물은 진득하게 녹아내리는 얼굴로 낄낄댄다.
“당신 뜻대로 해 드리죠. 잠이나 잘 테니 어디, 내 몸을 멋대로 써 봐요. 마음껏 날뛰어 보라고요!”
그녀는 녹아든다. 들끓는 검은 진흙의 형상으로, 매끄러운 그림자의 흐름으로, 아리따운 소녀의 모습으로. 모든 힘을 시온에게 건네어 준다, 그저 광기만을 남기면서.
“이 발지아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아하, 아하하하하-!
* * *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아니, 정말로 머릿속에서 그 웃음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온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꾸욱 눌렀다. 이내 조용해졌다.
“조용히 잠이나 자라, 괴물.”
시온이 손을 들었다. 그 위에 검은 금속이 덧씌워졌다. 손뿐이 아니다. 몸 어디가 되었든 뜻에 따라서 검은 갑주가 나타난다. 때로는 단단하게, 때로는 날카롭게. 모두 그의 뜻대로. 주먹을 말아 쥐니 꾸드득. 소름 끼치게 둔탁한 소리가 났다.
가로막은 석문이 보였다. 시온은 가볍게 주먹을 내질렀다. 쾅, 하는 소리가 났고 돌덩이가 무너져 내렸다. 그림자에는 조금의 손상도 없다.
“네 힘은 잘 써 주지.”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는다.
“내 비밀을 위해서.”
11화
코넬리우스 메르헤스.
계승전의 두 관리자 중 하나.
그의 업무는 보잘것없다. 비보를 발견했다는 신호가 언제쯤 올까, 하고 종일 수정판 열 개를 들여다보는 것이 맡겨진 전부다.
제국마도원의 학장에게 주어진 임무치고는 지나치게 간단해서 초라할 정도다. 그래도 불평할 수는 없다. 그의 양아버지이자 스승이며 제국 수석마법사인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맡긴 일이니까.
“코넬리우스, 잘하고 있나?”
“그럼요.”
스승의 물음에 코넬리우스는 방긋 웃어 보였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헤르마이는 도넛을 하나 베어 물며 킬킬 웃었다.
“거참, 가식적인 웃음이구나.”
“…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보다 별일 없지?”
“예, 발견된 비보는 셋. 여전합니다.”
“흐음. 그래도 분발들 하셨군.”
열 개의 비보.
개중 셋이 주인을 찾았다.
가장 큰 세 파벌의 주인이 하나씩.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세쿤두스는 조금 늦었지만 어떻게든 따라잡았다.
저 셋이 아니라면 누가 황제의 자리에 앉겠는가.
“결국 세 전하 중 한 분이겠지요?”
“그렇겠지.”
“만약 다른 분이 비보를 발견한다면?”
“아-주 시끄러워질 게야.”
황자 황녀는 모두 여덟.
그러나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셋 말고는 비보를 찾을 생각도 없는 듯했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괜한 짓을 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하니까.
제1황자 페르비아스.
제1황녀 레냐르.
제2황자 세쿤두스.
권좌에 가장 가까운 셋은 이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온 힘을 동원해서 비보를 찾고 있으며 서로에게 암살자를 보내거나 밀정을 색출해 처형하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참 코넬리우스, 밀정 짓은 관둔 게지?”
“…그렇게까지 말씀하셨는데요.”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그 마법사스러운 차림새처럼 실제로도 인자한 노인이다. 양아들이자 제자인 코넬리우스도 아주 아꼈다. 그러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는 아니었다. 코넬리우스가 한 번만 더 비보의 위치를 알아내려 했다가는 정말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누구 편을 들었었나?”
“…….”
“하이고. 꼴에 신용을 지키려고? 어서 말해 봐라. 새로 만든 자백 마법의 실험체가 되고 싶지는 않겠지?”
“저, 그게 아니라…….”
코넬리우스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무언가 부끄러운 듯했다.
“…세 분 전하께 모두 성의를 조금씩…….”
“…….”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도넛을 먹던 손을 멈추었다. 그는 천천히 입에 든 것을 씹고는 꿀꺽 삼켰다. 그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요즘 연구비가 부족했느냐?”
“예, 조금…….”
“잘했다. 그것도 재주다.”
“칭찬이십니까?”
“칭찬이겠느냐?”
코넬리우스는 화제를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참, 스승님. 질문이 있습니다.”
“말 돌리기 한번 어색하구나.”
“케흠……. 어쨌든 이 수정판 말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이상해서요.”
열 개의 수정판 중 하나를 들이밀었다. 하나하나가 각각의 비보와 연결되어 있다. 발견되면 신호가 오도록. 그런데 들이민 수정판 하나만 눈에 띄게 낡았다. 게다가 모양도 묘하게 달랐다.
“혼자 다르더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셨습니까?”
“아, 이거 말이냐…….”
“스승님은 늘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군요.”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예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이 아니면, 그럼 누가?”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50대 황위계승전의 총책임자. 그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만들었는가? 왜 그가 만들지 않은 것이 열 개의 비보 중 하나로 되어 있는가? 계승전에 쓰이는 열 개의 비보는 언제나 당대의 수석마법사가 만들었을 터인데.
“그게…….”
헤르마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400년 동안 발견되지 않은 비보가 있다. 어쩔 수 없었어.”
“그걸 그대로 썼다고요?”
“보안을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 황궁 결계에서 분리해 낼 수가 없었지. 400년간 그 누구도!”
“제작자는 할 수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자가 계속 제국에 있었다면 그랬겠지.”
코넬리우스는 자신이 깊은 비밀을 듣고 있음을 깨달았다.
“400년 전의 인물, 수석마법사였으나 제국을 떠난 이라고 하면, 설마…….”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센 소르티?”
“그래. 제일마법사primus magus의 작품이다.”
헤르마이는 자존심이 상해 앓는 소리를 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의 마법방해역장을 뚫을 수 없더군.”
아무리 제국 수석마법사라도 어쩔 수 없다. 상대는 센 소르티이니. 도서관. 황실도서관에 그의 비보가 숨겨져 있음은 분명하나, 그것뿐이다.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지, 무엇이 숨겨졌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시온이 도서관에 들락거린다는 것이 신경 쓰였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걱정은 말아라.”
헤르마이가 긴 수염을 쓸었다.
그는 그렇게 약간의 불안감을 털어 내었다.
“400년 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센 소르티가 마음먹고 숨겼는데 누가 찾겠느냐? 본인이 알려 준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도 그렇군요.”
“그래. 그러니까 관심을 꺼…….”
삐이익-! 요란한 소리.
또 빨간 불이 번쩍인다.
누군가 비보를 발견했다는 알림이다.
코넬리우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런, 또 비보가 하나 발견… 어라.”
“왜 그러… 어라라.”
스승과 제자는 같은 얼굴을 했다.
그렇게 수정판을 내려다보았다.
빤히, 또 멍하니. 한참을 그랬다.
“저, 스승님…….”
“…말해 보아라…….”
그들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수정판이 그거잖습니까? 그, 400년 전의…….”
“…그래, 센 소르티가 만든, 그…….”
수정판에는 발견자를 알리는 기능이 있다. 그러지 않고는 계승전의 진척 상황을 알리지 못할 테니. 곧 매끈한 표면 위에 글자가 새겨진다. 400년 전 만들어진 것답게 고대 호투스 어를 쓰고 있다.
“발견자의 이름도, 이상하군요…….”
“…우연이구나. 같은 생각이다.”
형태를 이룬 글자는 여덟 황자 황녀 중의 하나의 이름을 가리킨다. 그러나 믿을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으니.
[제5황자 지오니스.]
“…그러니까, 그 지오니스 전하께서, 400년 전의 비보를 손에 넣었다는 거지요?”
“…그렇겠지?”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보았다. 스승은 기다란 흰수염을 쓸고 제자는 단정한 콧수염을 매만졌다. 그들은 침음성을 흘리듯 입을 열었다.
“…이거, 시끄러워지겠지요?”
“…아-주 시끄러워지겠어.”
* * *
마갑 발지아트를 손에 넣은 시온은 제 별궁으로 돌아왔다. 피에스가 멀리서 알아보고 쪼르르 달려 나왔다.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전하! 밤새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앞치마를 두른 호위기사는 눈물을 훔쳤다. 정말로 시온을 노심초사 기다린 듯했다. 잘 보니 식탁에는 다 식어 빠진 호박파이가 있다. 같이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던가.
“이 피에스, 정말 걱정이 되어서……. 어라, 다치셨잖습니까! 도서관에 가신 것이 아니셨어요!?”
“도서관에 다녀왔어. 책도 반납했고.”
“아니, 그럼 이 상처는 어쩌다…….”
“피에스, 피에스!”
시온이 언성을 높였다. 발을 동동 구르던 피에스가 딱 멈추어 섰다. 시온의 목소리에 묘한 박력이 있었던 탓이다.
“별것 아니야. 그러니 진정하고, 차 좀 내와. 호박파이도 덥혀 놓고.”
“네? 벌써 밤인걸요.”
“내가 먹을 게 아니야.”
시온이 입가를 뒤틀었다.
“곧 손님이 올 거거든.”
* * *
피에스 로에스티는 식탁을 닦았다.
‘하시라니까 하기는 하지만.’
시녀들이 모두 잠에든 뒤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드문 일도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는 근위기사지만 검보다 행주나 빨래, 혹은 국자 따위를 쥘 때가 더욱 잦았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투덜거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손님은 무슨 손님.’
밤이 깊었다. 쏴아아아아-. 게다가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런 비 오는 밤에 누가 올 리가 없잖아요, 전하.’
여기는 제5황자 지오니스의 별궁. 황궁 누구도 그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적어도 피에스 로에스티가 지켜본 동안은 줄곧 그랬다. 오늘이라고 무언가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찾아오는 이가 없는데…….’
입을 삐죽 내밀며 호박파이를 뜨겁게 덥혔다. 마법화덕은 역시 편리했다.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누가 먹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황자의 명령이니 덥힐 수밖에. 피에스는 상대가 지오니스라도 황자의 명을 거스를 만큼 담이 크지 못했다.
‘…으응?’
딸랑. 묘한 소리에 창밖을 보았다. 그러니 또 딸랑, 딸랑. 귀에 익은 종소리. 별궁으로 오는 길에 놓인 종들이 울리는 소리다. 그 소리는 가까워지고 있다. 빗속에서도 선명하다.
‘…정말로 누가?’
분명히 인기척이다. 비 때문에 종이 울리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일정한 간격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누군가가 가까이 오며 예의 바르게도 인기척을 내주고 있다. 아마 곧 별궁에 이르겠지. 피에스는 앞치마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말씀하신 대로네. 요즘 정말 이상하시다니까.”
계승전이 시작하던 날부터, 시온은 묘하게 어른스러워졌다. 열한 살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든 모습을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호박파이를 퍼먹는 것을 보면 착각인가 싶기도 했지만.
종소리가 멈추었다. 피에스는 앞치마를 접어 치웠다. 대신 끌러 맨 것은 한 자루 장검. 가사가 더욱 익숙해졌어도 그는 기사. 지오니스의 유일한 근위기사다.
“이곳은 제5황자 지오니스 전하의 별궁입니다.”
그는 객을 향해 묻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 * *
시온은 누워 있었다.
호박파이를 씹으며 피로를 조금이라도 회복하려 하는 중이었다.
“소문은 금방 날 거야.”
비보 하나가 또 발견되었다고.
제5황자 지오니스가 그리했다고. 이 계승전 중에는 무엇보다 긴급하고 중요한 이야기다. 몇 시간이면 세 파벌에 모두 전해졌을 터다.
“지금까지는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보냈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겠지.”
그래도 적당한 때다. 언제까지나 책만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첫 번째 기예, ‘공상손가락’. 그리고 마갑 발지아트.
회귀 전에는 비할 바 못 되어도 제 몸을 지킬 최소한의 힘은 된다.
“대체 굼벵이 지오니스가 어떻게 비보를 손에 넣었는지 알고 싶어 할 테니까.”
시온이 창밖을 내다보았다. 각 파벌에서 사람이 달려오는 중이겠지. 비 내리는 바깥을 보며 그는 입가를 끌어 올렸다.
“자, 첫 손님은 어디서 왔을까?”
* * *
똑똑, 노크 소리.
피에스는 검에 손을 올린 채로 문을 열었다. 푹 젖은 사내 하나가 거기에 있었다. 척 보아도 기세가 심상치 않았으나 피에스 로에스티는 물러서지 않았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냐 물었습니다.”
“지오니스 전하를 뵈러 왔습니다.”
“이런 밤중에, 이리 갑작스레? 전하께서는 이미 침실에 계십니다.”
“그것은 사과하겠습니다.”
쫄딱 젖은 사내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숙였다. 피에스는 당황스러웠다. 이 코르디스 황궁에서 제 잘못을 이렇게 쉽게 인정하는 이는 아주 드물었다. 사내는 재차 말한다.
“허나 아주 급한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으니 양해해 주시길.”
“…좋습니다. 안 그래도 전하께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라 하셨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사내는 놀란 기색이었다. 피에스도 마찬가지였다. 손님이 올 줄 어떻게 알고 그리 말했는지. 사내는 피에스가 건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말끔해지니 훨씬 보기 좋았다.
“수건은 제게 건네시고 들어오시지요. 전하를 모셔 오겠습니다.”
“제가 누구인지 묻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차. 그걸 잊었군요.”
피에스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생전 손님이 찾아올 일이 있어야지. 워낙 익숙치 않은 일이다 보니까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어디서 오신 누구라도 전하께 전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아메투스.”
비에 젖은 머리칼 사이에서 옥색 눈이 번뜩였다. 마치 짐승과도 같이 날카롭다. 피에스의 몸이 딱딱히 굳었다. 비에 젖어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이 사내, 기억에 있다. 계승전 선포의 날에 보았다.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옆에 서 있지 않았던가.
“페르비아스 전하를 대신해서 온 아메투스라고 전해 주시기를.”
12화
“오, 아메투스! 우리 초면은 아니지?”
시온은 밝게 인사했다. 야밤의 어린아이답지 않게 기운찬 모습이었다.
“이런 밤중에,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그리 말씀하시니 민망하군요.”
“민망하라고 한 말인데 민망했다니 다행이네.”
“…….”
아메투스가 입을 다물었다.
“일단 좀 들어. 호박파이야. 너도 알고 있듯이 아아아주 다다달콤하고 마마맛있지.”
바삭한 호박파이를 아메투스에게 내밀었다. ‘놀리지 말라니까요!’ 옆에서 피에스가 방방 뛰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서 들지 않고 뭐 해? 설마 독이라도 넣었을까? 나름 황자의 권유라고.”
“옳습니다. 결례를 범했군요.”
아메투스는 호박파이를 받아들였다. 그러고는 굳은 얼굴로 그것을 베어 물었다. 마치 독이라도 먹는 듯한 얼굴이었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거부하지 않다니. 독한 놈. 시온이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달콤하지 않아?”
“…예, 아주 답니다.”
“난 단게 좋거든. 그보다 슬슬 말해 줘.”
시온이 차를 홀짝였다. 사실 차라고 하기는 조금 그렇고, 찻잎의 향을 가미한 설탕물에 더욱 가까웠다. 차를 한 입 머금은 아메투스가 오만상을 쓰고 말 만큼 달았다.
“한창 바쁘신 페르비아스 형님의 최측근께서, 왜 이런 밤에 비루한 지오니스를 찾아오셨는지.”
“알고 계실 텐데요.”
옥색 눈이 번뜩인다.
시온이 치를 떨었다.
‘아아. 난 저 옥색 눈이 정말 싫어.’
비밀 있는 자라면 절대 달가워할 수 없는 눈이다. 시온은 차를 마시는 척하며 아메투스의 눈을 피했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 왔으나 애써 참아 내었다. 아주 약간 위압을 했을 뿐인데도 어린아이의 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19년 전인데도 점쟁이 자식은 여전히 괴물이군. 아주 질색이야.’
제국십장이란 단순히 감이 좋다고 오를 만한 자리가 아니다. 점쟁이라는 별명에 가려졌을 뿐, 회귀 전의 아메투스는 제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 만한 검 솜씨를 자랑했다. 아직 젊은 지금이라도 그 검이 무디지는 않을 터.
‘발지아트를 얻었다고 해도… 아직은 힘들 테니.’
마주하니 분명하다. 아메투스는 회귀 전보다 젊지만 충분히 괴물이다. 대체 왜 이런 자가 치안청에 있었던 것인지. 숨기고 있지만 흘러나오는 기세만으로도 몸이 떨린다. 그러나 시온은 떨림을 감춘다.
“그래, 내가 비보를 찾아냈어.”
미소를 덧씌웠다.
위험한 만큼 더욱 태연히.
거짓말쟁이의 기본 소양이다.
“그것 때문에 왔겠지?”
“예, 옳습니다.”
아메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나의 비보가 발견되었으며, 그 주인은 제 5황자 지오니스라는 소식은 페르비아스 진영에도 닿았다. 그 비보가 400년 전, 센 소르티의 역작이라고까지는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너도 어지간히 서둘렀군. 페르비아스 형님의 궁은 여기서 꽤 멀잖아.”
“마침 근처에 있었던지라.”
“묘한 불안감 때문에 내 거처 주변을 서성거리기라도?”
“…….”
아메투스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참으로 거머리 같은 사내. 회귀 전에도 그렇게 귀찮게 굴더니. 시온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걸 감안해도 너무 빨리 왔어.”
“그럴 만한 사안이니까요.”
열 개의 비보.
세 파벌이 눈에 불을 켜고 그것들을 찾고 있다. 하나하나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아메투스의 얼굴이 더욱 굳는다. 동시에 눈 또한 깊은 옥빛을 낸다.
“그런 중요한 일이니, 지오니스 전하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아메투스가 말을 잇는다.
“솔직히 아주 놀라웠습니다. 소식을 들은 모든 이가 같은 감상이었겠지요.”
“나 같은 팔푼이가 비보를 손에 넣다니, 깜짝 놀랄 만도 하지.”
“아니라고는 하기 힘들군요.”
“팔푼이라는 말은 부정하지 않는 거야?”
시온이 웃었다. 아메투스는 웃지 않았다. 그는 시종일관 옥색 눈을 깊게 가라앉히고 있다.
“그래, 이야기를 해 달라. 내가 왜… 라고 말하고 싶지만, 위대하신 우리 페르비아스 형님께 오해를 사서는 안 되겠지.”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제1황자.
황제의 자리에 가장 가까운 사내이며, 회귀 전에는 정말로 50대의 황제가 되었다. 게다가 오만하고 예민하니 눈 밖에 나서 좋을 이유가 없다.
“만약 오해를 샀다가는…….”
슥, 하고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이며 시온이 낄낄 웃었다.
“…….”
“농담 정도는 받아 달라고.”
아메투스의 얼굴은 여전히 무기질하다. 엄격, 근엄, 진지를 형상화한 듯한 저 표정은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시온은 맥이 빠져 푸욱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래, 아메투스, 사실대로 말해 주지. 조금의 비밀도 거짓말도 없이 말이야.”
시온은 또 한 차례 한숨을 쉬었다. 고민의 기색이 짙다. 연기가 절반, 진심도 절반. 미소를 짙게, 심장을 두껍게. 거짓말과 비밀의 시간이다.
“우연이었다면 믿어 주겠어?”
* * *
“우연?”
옥색 눈이 매섭다.
“우연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우연이라고.”
“우연, 우연이라…….”
아메투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치안청에서 꽤 오래 근무했습니다.”
어투가 진중하다.
“여러 업무를 담당했고, 개중에는 신문訊問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날 취조하겠다는 말이야, 아메투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실례를 무릅써야 하겠지요, 전하.”
슬쩍 을렀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은 탓에 시온이 작게 혀를 찼다. 아메투스는 페르비아스의 대행자로 이곳에 와 있다. 제5황자 지오니스의 권위가 먹힐 턱이 없다.
“비보를 어디에서 발견하셨습니까?”
“황실도서관의 비밀서가.”
“비밀서가를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우연히.”
“시련은 어떻게 통과하셨습니까.”
“그것도 우연히.”
“도서관에 찾아간 것도 우연이라고 하실 거지요?”
“당연히.”
아메투스의 낯빛은 변함이 없다.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우연히 늘 찾던 도서관에 비보가 숨겨져 있었고, 그것을 우연히 찾았으며, 우연히 시련까지 통과해서 손에 넣었다……. 퍽 이상하게 들리는군요.”
그는 시온을 날카롭게 바라본다.
“치안청에서는 이것을 필연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이봐, 나도 당황스러운 건 마찬가지야.”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왜 도서관만 들락거렸겠어.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한 거라고! 형제들 싸움에 끼기 싫었단 말야. 그런데 거기에 비보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겠어?”
“시련을 통과하지 않고 돌아 나오실 수도 있지 않으셨습니까?”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히지 않았다면 그렇게 했겠지.”
“…….”
옥색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쳐다보기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거지?”
이거 귀찮구만. 시온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여간 꼼꼼하고, 또 날카로운 사내다. 어물쩍 넘어가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문제는 없다. 그는 거짓말이 익숙했고, 익숙한 만큼 능숙했다.
“선택지가 없었어. 지하 서고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들어섰더니 문이 닫혔지. 그제야 비보가 숨겨진 곳이라고 눈치챘어.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돌아가지 못하리란 것도.”
이미 비보 하나를 얻은 페르비아스에게 들은 바가 있다. 한번 시련이 시작되면 도망칠 수 없다고. 시온의 몸 곳곳에는 상처가 있다. 또 피로의 기색 또한 강했다.
열한 살 꼬맹이치고는 꽤 초라한 꼴이었고, 황자라기에는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아메투스의 눈에 연민의 기색이 살짝 스쳤다. 시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설마 내가 지하에서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고까지 말할 셈이야?”
“…그럴 수는 없겠지요. 결례를 범했습니다.”
“결례까지야. 너도 명령을 따를 뿐인데.”
시온이 차를 또 한 번 홀짝였다.
“그보다 어때, 변명이 되었나?”
“예, 전하.”
“거짓말.”
속내를 들킨 아메투스의 손이 멈추었다.
거짓말쟁이 황자는 키득 웃었다.
“너, 납득할 생각이 없잖아. 그럴듯하게 꾸며 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고,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더욱 위험할 뿐이라고 여기고 있지.”
난데없이 생각이 까발려진 아메투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대로 보내서는 의심만 더 사는 꼴이겠지……. 어쩔 수 없군.”
시온은 그리 말하며 일어섰다. 차를 머금고, 꿀꺽. 그 얼굴에는 수심이 깊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생각하는 듯, 또 한숨을.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힘겹게 입술을 떼었다. 물론 모두가 꾸며 낸 것.
“내가 얻은 비보를 보여 주면 조금은 신뢰가 생기겠지.”
“…비보를, 말입니까?”
“다른 방법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어서 말해 봐.”
계승전. 열 개의 비보를 찾아 서로 뺏고 빼앗는 싸움. 그렇다면 제 비보를 철저히 감추어야만 한다. 황제의 자리를 노린다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나는 계속 말하고 있는걸. 페르비아스 형님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고.”
시온은 배시시 웃는다. 아메투스가 말릴 틈도 없이 손을 쭉 뻗고 제 비보를 불러내었다. 그의 손에서, 몸 깊은 곳에서 진흙 같은 그림자가 뭉클대기 시작했다. 아메투스가 막을 틈도 없이 비보를 꺼내 들었다.
“잘 봐.”
검은 그림자 새어 나온다. 자기네들끼리 뭉쳐 든다. 이내 금속처럼 매끄럽게, 또한 질기고 단단하게, 검은 칼날의 형상으로.
“이 비보의 이름, 흑검黑劍 자무크.”
시온은 제 손에서 꺼낸 검을 움켜쥐며 말한다.
“내 몸에 숨어 있고, 칼날의 길이나 모양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
당연히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다.
시온이 얻은 비보의 이름은 마갑 발지아트. 흑검 자무크가 아니다. 일개 검 따위가 아니라 그림자 차원의 귀족이고.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헤르마이 메르헤스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몸에 귀속되는 종류입니까.”
“그래. 마음대로 양도할 수도 없어. 내가 왜 이리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지 알겠어?”
“…예.”
아메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그의 직감이 시온의 거짓말을 느낀 탓이다. 그러나 검은 칼날이 뿜어내는 불쾌한 기분이 그를 혼동시켰다. 이 불쾌함이 시온의 말 때문인지, 검은 칼날 때문인지 제대로 분간되지 않았다. 이 또한 시온의 노림수였다.
“다행이네. 조금은 납득해 준 모양이라.”
시온이 검은 칼날을 되돌렸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페르비아스 형님께 전해 줘, 지오니스는 그저 살고 싶을 뿐이라고. 달콤한 호박파이나 먹으면서 말이야.”
시온이 호박파이 한 조각을 집어 입으로 옮겼다. 그사이에 식어 버렸다. 그래도 단내는 여전히 강렬하다. 양 뺨 가득 호박파이를 욱여넣은 열한 살 황자를 보며 아메투스가 입을 열었다.
“…전하, 소문과는 다르시군요.”
“무슨 소문을 들었기에?”
“그 나이대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지요. 전번에 뵈었을 때는 정말 그러셨고요.”
계승전 선포 직후. 페르비아스에게 붙잡혔으나 호박파이로 빠져나왔던 때를 말함이다. 그때의 시온은 정말 열한 살 꼬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메투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지금의 시온, 어린아이로는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는 듯 상대의 의중을 읽고 적절한 답만을 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제 뜻을 분명히 전한다. 어디의 열한 살이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 아메투스는 지그시 시온을 바라본다. 그 눈이 기분 나빴다. 그러나 시온의 평정은 깨지지 않는다. 회귀하고 15일, 영웅이라 불리던 사내에게는 충분한 시간. 때문에 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메투스, 최근에 입궁했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되었지?”
“막 넉 달이 되었습니다.”
“실력에 비하면 늦네. 전에는 치안청에 있었다 했나, 그렇다면 모를 만도 하지.”
아메투스의 실력이라면 어떤 군단이든 최고 정예의 자리에 오르고도 남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치안청에 있었던 것은 개인의 신념 때문이겠지. 회귀 전에도 바보 같은 충심을 자랑하던 자였으니 이상하지는 않다.
“이제라도 알아 둬, 아메투스.”
시온이 킬킬 웃었다.
“이곳에서, 코르디스의 대황궁에서 평범한 열한 살이란 이런 거야.”
* * *
어느새 비는 그쳤다.
떠나는 아메투스의 뒷모습이 보였다.
‘가장 큰 고비는 넘겼군.’
시온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보여 준 것은 발지아트의 능력 중 아주 작은 일부. 그러나 아메투스는 그것을 비보의 전부라 믿고 떠났다. 그러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아메투스 놈! 회귀 전부터 늘 고생시킨단 말이야.’
아메투스, 귀신 같은 직감의 사내. 거짓말만으로는 속여 넘길 수 없다. 필요한 것은 진실과 거짓을 교묘히 오가는 것. 스스로의 감각을 신뢰할 수 없도록. 그리고 결과는 성공적이다.
‘다음 손님은 아마 날이 밝고서야 오겠지. 그럼 일단 잠을…….’
“지, 지, 지오니스 전하아!”
피에스가 달려들었다. 그는 아메투스와 시온의 대화를 줄곧 듣고 있었다.
“대견하십니다, 정말 대견하세요!”
“윽, 숨 막혀, 피에스!”
“비보를 손에 넣으시다니! 대체 어느새 이렇게 대견하게……!”
피에스 로에스티는 시온을 껴안고는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도 나름 황자의 근위기사. 상당한 힘이라 시온은 답답해 켁켁거렸다. 피에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온을 마구 쓰다듬더니 갑자기 시무룩해서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피에스에게까지 숨기시다니요……. 약간 섭섭합니다…….”
“들었으니까 알잖아. 우연이었다고. 말할 틈도 없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들 사이에는 단순한 주종 관계라고 하기에는 더욱 끈끈하고 친밀한 무언가가 있다.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식음을 함께하고 말벗이 되어 주니.
“…헛, 제게도 숨기셨다는 것은 설마……. 비밀리에 권좌를 향한 계획을……!?”
“그럴 리가 있냐?”
퍽. 시온이 피에스의 이마를 두드렸다.
그러고는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직은 한참 먼 이야기라고.’
황제의 자리에 닿는 것이 그리 쉬울 수는 없다. 비보 하나를 얻었어도 세 황자 황녀의 세력은 거대하디거대하니까.
‘우선은 몸을 지켜야지. 이 약한 몸뚱이에 발지아트는 큰 도움이 될 거야.’
살아있는 그림자 갑옷이라면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몸이라도 조금쯤은 쓸 만해질 터다.
‘그리고 하나라도 비보를 얻지 않으면 협상 테이블에 앉게 해 주지도 않을 테니.’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가장 큰 세 파벌. 비보를 얻기 전이라면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이제는 드디어 이야기 나눠 볼 만하다.
‘쓸데없는 견제 따위에 낭비할 시간은 없어. 방패가 되어 줄 만한 파벌 하나를 붙잡아야지.’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다. 움직일 때였다. 자유롭게 움직이려면 뒷배가 필요했다. 하지만 파벌에 구속받고 싶지도 않다. 특히 페르비아스 파벌은 사양이다. 틈만 나면 ‘통치자의 눈’으로 그를 조종하려 들 테니까.
‘세력도 약하고 주인이 약간 멍청한 파벌이라면 최고겠군!’
13화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손에 든 반지를 몇 차례나 만지작거렸다. 힘겹게 얻어 낸 비보였다. 역시나 헤르마이 메르헤스. 비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티팩트였다.
“다녀왔나, 아메투스?”
“예.”
페르비아스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심복을 맞이했다.
“그래, 지오니스는 뭐라고 하던가?”
“살고 싶을 뿐이라 하시더군요.”
“흐음. 자세히.”
아메투스는 설명했다.
시온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가 무어라고 했는지. 페르비아스는 말귀가 빨랐다. 짧은 설명만으로도 상황의 경과를 이해할 수 있었다.
“흑검 자무크? 몸에 깃든 검이라.”
페르비아스가 턱을 긁적였다.
“빼앗을 수는… 없겠지. 상황이 꽤 꼬이겠어.”
지오니스를 죽여 비보를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장사다. 페르비아스만의 생각은 아닐 터다. 황제의 자리에 비하면 5황자 지오니스의 목숨은 극히 가볍다.
하지만 비보가 몸에 깃들었다니 그럴 수도 없다. 만약 그가 죽기라도 하면 몸에 깃든 비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오니스 녀석, 더는 건드리지 말아야겠군.”
어쩌면 이것도 노림수일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열한 살짜리 꼬마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어쩌면 지오니스의 배후에 누군가 있을지도……. 아니다, 여기까지 가면 그저 망상일 뿐이다. 페르비아스는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 내었다.
“이상한 점은?”
“무언가를 숨기는 낌새는 있었으나, 보여 준 그것이 비보임은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모든 능력을 알려 주지는 않았겠지. 아마 2할 정도는 숨겼다고 봐야지.”
사실, 시온이 보여 준 것은 발지아트가 가진 능력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다만 페르비아스와 아메투스가 알 방법은 없다. 그것이 센 소르티의 역작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터다.
“그보다 아메투스, 자네의 묘한 불안감이 적중한 모양새로군. 지오니스가 이렇게 비보를 찾아내게 될 줄이야.”
아무리 우연이라고는 해도, 위협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열 개의 비보 중 벌써 넷이 발견되었다. 가장 큰 세 파벌의 주인이 하나씩, 하나는 지오니스가!
“으음. 복잡하군, 복잡해…….”
페르비아스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긁었다. 설마 그 지오니스가 비보를 찾아낼 줄이야.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참모진을 불러 밤새 회의를 해야겠어. 피로에 전 탓일까, 짜증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자네 직감이 좋은 것은 알았지만, 이래서야 점쟁이가 아닌가.”
“…….”
아메투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상당한 모욕감을 느꼈음은 분명하다. 기사의 삶을 사는 사내에게 뱉을 말은 아니었다. 페르비아스는 그것을 눈치채고 손을 내저었다.
“아. 자존심을 건드렸다면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페르비아스는 화제를 돌렸다. 부하의 상처 입은 자존심까지 일일이 돌봐 줄 여유는 없었다.
“아메투스, 지오니스가 앞으로 어찌할 거라 생각하나. 혼자 다른 비보를 찾으려 할까?”
“그렇지는 않겠지요.”
“파벌에 들려고 하겠지?”
“살고 싶다 하셨으니, 당연히.”
시온이 위협에서 자유로운 것도 고작해야 며칠 정도의 이야기다. 그를 손에 넣으려 하는 이가 있을 테고, 다른 이의 손에 넘길 바에는 없애려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온에게는 스스로 지킬 힘이 없다.
“허나 저희 쪽은 아닐 테지요, 줄곧 전하 당신을 피했으니.”
“으음. 섭섭해라, 나는 귀여운 동생이라고 생각하는데.”
거짓말. 페르비아스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인다. 상대의 심령을 움켜쥐고 조종하는 기예Ars, ‘통치자의 눈’. 저 힘에 대해 알고 있다면 시온이 피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페르비아스라는 사내의 통제욕과 소유욕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수준이었으니.
“레냐르 쪽에 붙으려 할까?”
“1황녀 전하께서 달가워하시겠습니까.”
“그렇겠지. 내 동생이지만 레냐르는 참 인간 같지 않아.”
레냐르 드 볼마르크, 제1황녀.
은빛 머리칼만큼이나 차가운 성정의 소유자. 그녀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사람이란 단 두 종류, 적과 도구. 장기를 두듯 삶을 사는, 대제의 딸.
“역시 답은 정해져 있었나.”
페르비아스가 제 눈가를 매만졌다.
별로 교류가 없던 지오니스를 받아 줄 만한 파벌이라면 하나뿐이다. 셋 중 가장 떨어지기에 마음이 급할 테니 무언가를 가릴 겨를도 없겠지.
“이거 아쉬운걸.”
* * *
날이 밝았다.
또 한 명의 손님이 별궁을 떠났다.
레냐르 파벌의 사람이었다.
“방금 손님은 어때 보였어, 피에스?”
“…전하께 별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맞아. 레냐르 누님은 날 신경조차 쓰지 않을걸. 방금 그 내관도 그저 최소한의 정보를 얻으러 온 거였을 거야.”
레냐르 드 볼마르크가 어떤 여인인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적과 아군의 경계가 분명하며, 한 번 정한 경계를 흐트러트리는 법이 없다. 회귀 전에도 그랬었다.
“계승전 시작 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시점에서 잘 모르는 나를 동료로 삼을 만큼 물러 빠진 분이 아니거든.”
테이블에는 다 식어 빠진 호박파이가 있다. 레냐르의 손님이 손도 대지 않았기에 그대로 남았다. 시온은 그것을 해치웠다. 여전히 미치도록 달다.
“새 호박파이를 내와, 피에스.”
“손님이 또 한 분 오시겠지요?”
“그래. 세 파벌 중 둘이 왔으니 이제 하나가 남았지.”
제1황자의 손님, 아메투스는 비 내리는 밤에 찾아왔다. 제1황녀의 손님은 방금 떠났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
“세쿤두스 형님께서는 누굴 보낼까?”
“으음… 글쎄요.”
“난 알겠는걸.”
시온이 키득 웃었다. 피에스는 궁금증이 일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 호박파이가 들렸다. 막 마법화덕에서 꺼낸 것이었다.
“네가 보면 깜짝 놀라 까무러질걸?”
“허참. 전하! 이 피에스, 대황궁에서 7년을 살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제1황자 전하도 직접 뵈었는걸요!”
“말을 많이 더듬기는 했지만.”
“어, 뭐, 그렇기는 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릅니다. 제 담이 얼마나 커졌는지 보여 드리지요!”
피에스 로에스티는 그리 말하며 호박파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가슴을 팡팡 두드렸는데 퍽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럼 내기할까, 피에스? 다음 손님을 보고 놀라지 않으면 네 승리야.”
“흐흠. 좋습니다, 전하. 그럼 무엇을 거시렵니까?”
“매일 간식으로 호박파이.”
“네에? 매일은 안 됩니다!”
이 완벽한 황금빛의 호박파이는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황실 본 주방의 제과장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겨우 하나씩 얻어 오는 일품 중의 일품! 이걸 매일 얻어 오려면 까다로운 제과장에게 얼마나 눈총을 받을지…….
“힘든 걸 걸어야 내기가 재밌지.”
“…그럼 제가 이기면 무얼 해 주시렵니까?”
“봉급을 인상해 주지, 지금의 두 배로.”
“좋습니다!”
힘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피에스 로에스티의 입가에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상쾌한 미소가 걸려 있다.
“까짓것 놀라지 않으면 되는 일이지요. 이 피에스를 너무 얕보지 않으시는 것이…….”
짤랑, 하는 종소리에 말이 끊겼다. 손님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소리다. 상당히 걸음이 빠른 자인지 금세 똑똑, 하는 노크 소리로 바뀌었다. 시온이 턱짓했다.
“세쿤두스 형님 파벌의 사람이 왔나 보네. 뭐 해? 나가 봐야지.”
“후후. 좋습니다.”
피에스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제5황자 지오니스의 심복이다. 그렇게 몇 차례고 되뇌었다. 작게 헛기침하고, 매무새를 다듬고, 검에 손을 올리며 문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근위기사답게, 당당한 목소리로.
“이곳은 제5황자, 지오니스 전하의 거처입니다. 무슨 용무… 엇.”
문을 열었는데 벽이 있었다. 그렇게 착각하고 말 만큼 거대한 사내. 옆으로도 위로도 문 끝에 닿을 만큼 커다란 덩치. 이렇게 커다란 자가 흔할 수는 없다.
“…어, 어, 어어어…….”
아홉 살에 사자 아가리를 찢고.
군부의 지지를 등에 업었으며.
황제의 자리에 가까운 셋 중 하나.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 본인.
“…세, 세, 세쿤두스 전하아!?”
직접 행차한 황자를 보고 피에스는 깜짝 놀라 벌벌 떨었다. 제국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큼 고귀한 지체인 것을! ‘매일 호박파이!’ 시온은 그 모습에 킬킬 웃는다.
‘세력도 약하고, 약간 멍청하기까지 하신 내 형님께서 오셨군!’
* * *
피에스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상대는 세쿤두스 데비우스. 대제국 코르디스의 황위를 노리는 제2황자.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이렇게 찾아오다니! 이미 내기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어어어찌 이런 곳까지…….”
“음. 동생을 보러 왔을 뿐이다.”
시온이 손을 흔들었다.
“저는 여기 있습니다, 세쿤두스 형님. 어서 들어와 앉으시죠.”
음. 세쿤두스는 자리에 앉으며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테이블, 그 옆에는 마법화덕이나 국자 따위 가재도구가 즐비하다. 창문 바로 바깥에는 빨래가 널려 있다.
세쿤두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널려 있는 빨래가 그의 이목을 끌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시온과 근위기사, 시녀들의 옷가지가 한데 섞인 꼴이다. 당혹스러울 만큼 생소하다.
“코르디스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저는 좋아합니다.”
“흐음. 그래.”
잠시 침묵. 세쿤두스는 무어라 할 말이 있지만 하지 않는 모양새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뻔했다. 황족의 품격 따위에 대한 것이리라. 어찌 황족의 옷을 시녀와 같이, 어쩌구. 시온을 제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기에 말하지 않을 뿐이겠지.
“…저어.”
피에스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차, 차, 차를 내왔습니다, 전하…….”
“차차차?”
“아뇨, 그그, 프프프레 잎 차입니다.”
“아. 프레 잎 차. 무슨 소리인가 했군.”
근육질 거한, 세쿤두스는 피식 웃으며 찻잔을 받아들였다. 그 손이 어찌나 큰지 찻잔이 마치 조약돌처럼 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입에 털어 넣고도 사내는 태연하다.
“호박파이인가? 그건 거절하도록 하지.”
“호호혹, 무슨 무문제라도…….”
“단 냄새가 진동을 해. 그런 걸 먹었다가는 군살이 붙는다고.”
거한은 프하하하 웃으며 제 팔을 굽히며 알통을 자랑했다. 살코기와 생곡물만 먹고 산다더니, 군살이라고는 하나 없는 것이 마치 강철로 된 조각 같았다. 아홉 살 때 사자 아가리를 찢었다는 소문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 풍기는 위압에는 시온도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였다. 역시 8황자황녀 중에 최강의 육체를 가진 자. 힘만이라면 페르비아스보다도 더욱 우위에 있겠지. 그 기세에 피에스 로에스티의 안색은 이미 하얗게 질린 뒤였다.
“피에스, 너는 이만 가 봐.”
“그,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일 치 호박파이를 얻어 와야지.”
“앗.”
그제야 아까의 내기를 떠올린 피에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매일 호박파이를 얻어 온다니. 까다로운 제과장이 대체 어떤 욕설을 늘어놓을까. 그래도 세쿤두스 옆에서 벌벌 떠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발걸음이 빨랐다.
“네 근위기사는 처음부터 다시 단련해야겠다, 지오니스.”
“저는 마음에 듭니다.”
“난 마음에 들지 않는군.”
피에스 로에스티는 심약한 사내다, 대체 어떻게 황자의 근위기사가 되었나 싶을 정도로. 실력이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저렇게 나약해서는 제힘을 발휘할 수 있을 리 없다. 세쿤두스가 경멸하기까지 하는, 전형적인 실전을 모르는 기사다.
“형님, 그런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것은 아니시지요?”
호박파이를 한 입 깨물며 시온이 배시시 웃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열한 살짜리가 틀림없다. 느껴지는 힘도 크지 않다. 그런데 묘한 분위기가 있다. 마치 한 번 죽었다 살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세쿤두스의 눈이 가라앉는다.
“그래, 네가 비보를 얻었다는 이야기에 제의를 하러 왔지.”
세쿤두스 데비우스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다. 황제라기보다는 패왕, 그렇다기보다도 장군에 가까운 사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공기를 무겁게 하는 거한은 선언하듯 말한다.
“내 편이 되어라, 지오니스.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
14화
“이야기가 빠르시군요.”
시온이 턱을 쓸었다.
“그보다 거절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면, 제의라고 부르기는 힘들지 않습니까.”
“그런가? 그럼 명령이라고 하지.”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다시 한번 말한다. 참으로 거대한 사내다. 지금의 지오니스의 세 배는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있다.
“내 편이라 되어라, 지오니스. 이건 형으로서 하는 명령이다!”
“하하. 그리 말씀하셔도 곤란합니다.”
“거절은 용납하지 않는다 했을 텐데.”
“그럼 어찌하시려고요?”
세쿤두스가 코웃음 쳤다. 그는 팔짱을 끼더니 소파에 더욱 깊게 몸을 묻었다. 무슨 수백 년 묵은 바위처럼, 절대로 이곳에서 옮길 수 없을 듯 보였다.
“네가 승낙할 때까지 여기서 떠나지 않을 거다. 그러니 어서 승낙하도록!”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지요.”
계승전이 시작되고 이 주 조금 더.
아직 한창 바쁠 때다. 찾지 못한 비보가 많고, 다른 파벌의 공격도 거세다. 세쿤두수는 한 파벌의 주인이고, 시온 하나에게만 시간을 할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흠. 그 정도의 마음이라는 뜻이지!”
“…막무가내이십니다.”
시온의 얼굴이 떨떠름해졌다.
본래 이런 사내였던가? 회귀 전의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조금 더 냉혹하고 묵직한 구석이 있었다. 19년의 세월이란 묘하다. 전장의 절대자라 불리던 그 세쿤두스가 아직은 젊은이에 불과하다니.
“지오니스, 난 페르비아스 형님이나 레냐르 누님과는 다르다. 복잡하게 머리 쓰는 것을 질색하지.”
그래 보이십니다. 시온은 하마터면 그렇게 내뱉을 뻔했다. 허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막지는 못했기에 세쿤두스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단순 무식이라고 하면 실례겠지만 그 이상 적절한 표현을 찾기 힘든 사내다. 하긴 시온이라도 아홉 살 때 사자 아가리를 찢을 완력이 있다면 조금 더 단순하게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보는 아니야.”
시온은 부정할 수 없었다. 대제국 코르디스의 이름은 절대 가볍지 않다. 단순한 완력으로 황제의 자리를 탐낸다는 것은 언어도단. 아무리 단순해 보여도 정말 그럴 리는 없다.
“짧게 끝날 이야기를 언제까지 질질 끌 생각이냐. 어울려 줄 생각은 있다만 그것이 필요한가?”
“…….”
“너 지오니스, 처음부터 날 기다리고 있었잖나.”
테이블에는 호박파이가 식어 가고 있다. 세쿤두스가 당분을 거부한 탓이다. 황금빛 껍질이 바삭함을 잃는 것이 안타까웠다. 시온은 파이를 한 입 깨물며 말했다.
“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네게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시온은 지금까지 숨죽이고 있었기에 계승전의 치열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정말로 우연히 손에 넣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비보 하나를 얻었다는 소식이 온 황궁에 퍼져 나간 뒤다.
“페르비아스 형님은 아쉬울 것이 없어. 너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려고 들겠지. 그 잘난 기예로 말이야.”
페르비아스의 기예, 통치자의 눈.
세쿤두스 또한 사람의 심령을 옭아매는 그 힘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레냐르 누님은 지독한 의심병 환자. 너를 받아 준다고 해도 버리는 말 이상의 대우를 받을 것 같으냐?”
레냐르 드 볼마르크에 대한 평가도 정확하다. 그 은발의 황녀는 어릴 적부터 같이한 심복을 제외하면 누구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그렇다면 남은 하나의 선택지를 줄곧 기다릴 수밖에.”
근육질 거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세력이 제일 약해서 너 하나가 아쉽고, 그래서 다른 형제의 견제로부터 널 보호할 수밖에 없는, 이 세쿤두스 데비우스를!”
“…후후후. 더 숨기지 못하겠군요.”
시온이 킬킬 웃는다.
“예, 형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푸른 눈이, 또 금빛 머리칼이 햇볕 아래에서 빛난다. 여전히 소녀 같은 생김새. 그러나 그 사이사이에는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무언가가 섞여 있다.
“다른 둘보다 세력도 약하고 약간 멍청하지만, 그래서 저를 내치지 못할 당신을요.”
* * *
“…음. 멍청하다고? 조금 상처가 되는데.”
갑자기 욕을 먹은 근육질 거한은 당황해서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물론 다른 둘에 비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 둘은 삶을 너무 피곤하게 살지요. 저돌적인 면모야말로 사내의 덕목 아니겠습니까?”
“너, 그런 뻔한 소리로 내가… 아니다, 됐다.”
원래 이런 놈이었던가. 세쿤두스 투덜대고 시온은 또 키득 웃는다. 지금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 시온 폴링라이트, 돌아온 영웅이 미소 짓는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형님. 전 당신의 세력이 필요합니다.”
“나는 네 비보 하나가 아쉽다, 동생아.”
시온이 손을 저어 보였다. 거기에서 나타나는 것은 검은 칼날. 흑검 자무크라는 이름으로 속이고 있는 발지아트의 일부다. 시온은 그것을 내미는 척하다 다시 제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비보를 내어 줄 생각은 없습니다.”
“다른 둘에게 가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근육질 거한, 세쿤두스는 여전히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시온은 호박파이 하나를 또 해치웠다. 열한 살 꼬맹이와 그 세 배는 될 듯한 거한. 이질적일 만큼 다르게 보이나 입가에 걸린 미소만이 닮았다.
“날 신뢰합니까?”
“그럴 리가.”
“뜻이 맞았군요.”
서로 신뢰하지 않기에 관계는 공고해진다. 어쭙잖은 믿음보다 서로의 이득을 따라가는 관계가 더욱 이로울 때도 있는 법. 시온도 세쿤두스도 그것을 안다.
“지오니스, 내 편이 되어 힘을 더해라. 뭘 숨기는지는 몰라도 네가 필요하다.”
“좋습니다. 힘을 빌려드리죠.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시온 고개를 숙인다.
겉치레일 뿐이다. 그러나 겉치레에도 의미가 있다. 그가 이제 세쿤두스의 파벌에 들겠다는 뜻이다.
“대신 형님, 제 방패막이가 되어 주셔야겠습니다. 전 살고 싶거든요.”
“좋다. 마음껏 이용해 봐라.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세쿤두스와 지오니스.
제2황자와 제5황자.
같은 아버지를 둔 배다른 형제.
그들은 마주 보며 킬킬 웃다. 미소의 의미는 같을까,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허나 처음으로 서로의 몸에 같은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세쿤두스 형님.”
“그래, 지오니스, 내 동생아.”
* * *
“음. 이야기가 끝났으니 가 보마.”
“급하시네요.”
“바쁘거든.”
세쿤두스는 곧바로 일어섰다.
“바쁜 것 뻔히 아는데 뭘 승낙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그건 확실히 무리였지. 그래도 매일 찾아올 생각은 있었다.”
“…빨리 승낙하기를 잘했군요.”
아침마다 이 근육질 거한을 마주할 생각을 하니 어째 속이 울렁거렸다. 시온도 이 정도인데, 피에스 로에스티의 위장에는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 세쿤두스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참. 같은 편이 되었으니 물어볼 것이 있다.”
“뭡니까?”
거한은 진지한 얼굴로 내뱉었다.
“너, 꿈이 있느냐?”
“예?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는. 부황 폐하 흉내입니까?”
“뭐? 아, 하하하하!”
황제가 무어냐고 묻던 대제를 떠올린 세쿤두스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아하하……. 이렇게 웃기도 오랜만이군. 하지만 진지하게 물은 것이다. 꿈이 있느냐, 지오니스.”
“없습니다만, 있어도 말하지 않을 거고요.”
시온의 영혼, 그 첫 번째 비밀.
‘그는 헛된 꿈을 꾼다’. 그는 늘 이루어지지 않을 이상을 좇고 있다. 그 열망은 ‘공상손가락’을 만들어 낼 만큼 강렬하다. 허나 세쿤두스에게 말해 줄 만한 것은 아니다.
“꾸며 내는 시늉이라도 해라, 형님의 명령이다.”
“…아니, 뭐, 꿈이라고 할 것도 아닙니다만. 나중에는 책이나 읽으며 조용히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정도는 있습니다.”
“흠, 카테카랑 같은 소리를 하는군.”
카테카 케슐레이, 제3황자.
신비에 홀려 버린 은둔황자. 세쿤두스 파벌의 일원이었던가.
“그럼 녀석에게 한 것과 같은 말을 하지.”
호오. 시온이 작게 탄성을 내었다. 말하는 뉘앙스를 짐작컨대 세쿤두스는 이미 카테카 케슐레이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인 듯하다. 회귀 전에는 들은 바 없었다.
“지오니스, 네 꿈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세쿤두스는 선언한다.
굵은 목에 힘을 잔뜩 주면서.
“속내야 어떻든, 이미 내 파벌에 든 이상 네게는 의무가 있다. 너의 재능과 기회를 제국을 위해 바쳐라!”
“…이미 황제의 자리에 앉으신 듯합니다.”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라도 있나?”
이 얼마나 낙관적인 사내인가.
세쿤두스의 세력은 다른 둘보다 명백히 떨어진다. 카테카와 지오니스를 끌어들였다고 단숨에 메꿔질 차이가 아니다. 헌데 그의 눈은 어찌 이리 흔들리지 않는지.
“내가 찾은 비보가 하나, 또 비보를 손에 넣은 널 가졌으니, 난 벌써 비보를 2개나 얻은 것이지. 보아라, 선두를 달리고 있구나!”
“…거참, 말도 안 되는.”
시온은 그리 말하다 푸훗, 하고 웃고 말았다. 참으로 단순한 사내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페르비아스보다는 훨씬 마음에 들었다.
“좋습니다. 말도 안 되지만, 힘닿는 데까지는 도와드리지요.”
“음. 그럼 받아라.”
“뭡니까?”
“독 따위에 당하지 않게 해 주는 아티팩트다. 괜한 수작에 당해서는 귀찮아지니까. 편리한 물건도 다 있지?”
세쿤두스가 품에서 작은 구슬을 내밀었다. 시온은 그것을 받아 들며 탄성을 삼켰다. 굉장히 귀한 물건이다. 같은 크기의 황금보다도 몇 배는 비쌀 것이다.
“소득 있는 이야기였다. 조만간 연락을 주지.”
거한이 시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다리고 있어라, 지오니스.”
* * *
세쿤두스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더 늦었다가는 참모진의 눈총이 매서워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민첩함은 덩치답지 않았다. 서너 번 발을 놀리나 싶더니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귀한 선물을 받았군. 보관은 해 둘까.”
그의 손 위로 검은 그림자가 떠오르더니 세쿤두스가 건넨 구슬을 집어삼켰다. 부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발지아트의 체내에 있는 그림자 공간에 넣어 두었다. 커다란 공간은 아니지만 편리하다.
“그보다 지오니스, 지오니스라…….”
몇 번이고 불린 제 이름을 되뇌었다.
시온은 작게 웃더니 머리를 긁적였다.
‘애석하게도 형님, 나는 시온입니다. 메리언의 시온 폴링라이트.’
세쿤두스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당신과는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요.’
19년의 세월을 건너왔어도 여전히 그러하다. 지오니스란 이름은 그저 옛것.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몸은 열한 살이 되었으나 마음도 그럴 수는 없는 법이다.
“계승전도 슬슬 본격적으로 흘러가겠어. 전보다 진행이 빨라.”
시온 때문이다.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가 각기 비보를 하나씩 취하며 이루어진 균형을 그가 깨트렸으니까. 세 파벌의 주인은 모두 서두르기 시작할 것이다. 이 또한 예상했던 대로.
“계획대로, 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군.”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로 그렇다.
마갑 발지아트를 손에 넣었고, 세쿤두스 파벌의 일원이 되어 균형을 흔들었다. 그럼에도 그가 의도한 이상의 정보는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점쟁이 아메투스가 그를 물고 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온의 비밀은 여전히 비밀인 채다.
‘갑자기 계승전 첫날로 돌아온 것은 당황스러웠지만, 나름 순조로워……. 그러니 더욱 신중해야지.’
그 눈, 창연한 푸른빛으로 깊게 가라앉는다. 바다와 닮았나, 하늘과 닮았나. 아니면 무엇과도 닮지 않았나. 그저 깊고 깊음만이 분명하다. 가장 깊은 곳에 잠든 것은 일곱 가지의 비밀.
‘다시 헛된 꿈으로 끝날 수는 없으니.’
되새기는 것은 지나간 시간. 이전의 삶들. 주어졌던 기회와 쓰라린 패배. 잃었던 생명과 곱씹었던 굴욕. 닿지 못했던 꿈!
‘두 번째 삶. 황제의 자리에 닿아 지긋한 숙명을 매듭짓겠다.’
그래, 이번에야말로.
15화
“지오니스가 우리 파벌에 들었다.”
“…호오, 좋은 소식.”
좋은 일이지.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말 상대는 작은 체구의 사내다. 어두운 눈가에 음울한 기색이 짙다.
“…믿을 만해 보입니까?”
“그럴 리가!”
세쿤두스가 껄껄 웃었다. 믿는다는 것은 기대한다는 것. 상대가 이 정도는 해 주리, 이렇게는 하지 않으리, 하는 제 멋대로의 기대야말로 신뢰의 본질. 때문에 세쿤두스는 지오니스를 전혀 믿지 않는다.
“내 육체 말고는 무엇도 믿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다. 너도 마찬가지지.”
“그거 다행이군요…….”
작은 사내가 키득 웃었다. 그도 세쿤두스와 같은 편에서 움직이지만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잠시 길이 겹치면 함께할 수도 있겠으나 때가 되면 언제라도 헤어지리.
“하지만 어느 정도 파악해 놓을 필요성은 있겠지. 녀석도 역시 우리 형제더군. 보통은 아니야.”
믿음도 거래도 정보가 필요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믿음이나 거래 따위를 논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
“파악이라면, 어떻게……?”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
“…아, 이번에 찾았다던.”
“그래. 지오니스를 동행시킬 거다.”
* * *
50대 황위계승전 선포에서 17일째.
“피에스, 날이 좋지?”
“예. 정말로 그러합니다.”
“그럼 호박파이 부탁해.”
“…예이.”
피에스 로에스티가 입술을 비죽이며 길을 나섰다. 제과장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에 우울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시온과는 상관없는 일. 자진했던 내기가 아닌가?
‘발지아트를 얻은 것이 이틀 전, 세쿤두스 형님이 다녀간 것이 어제…….’
많은 일이 한 번에 일어났다. 어째 찌뿌둥해 기지개를 폈다. 겨우 이 주하고 조금 지났을 뿐이지만 회귀 직후에 비하면 상당히 강해졌다. ‘공상손가락’을 열고 마갑 발지아트를 얻었으니.
‘발지아트, 생각 이상의 소득. 센 소르티에게 고맙군.’
발지아트의 영혼은 깊게 잠들어 있다. 남은 것은 그녀의 몸뚱이와 힘. 강철의 몇 배는 질기고 단단하며, 시온의 뜻대로 움직이는 그림자 갑옷.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림자는 무궁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나 그만큼 단련이 필요하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익숙해지고 싶었다. 단순히 몸을 감싸거나 칼날의 형태로 바꾸거나 하는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듯했다.
‘며칠 뒤에나 연락할 거야. 그때까지 발지아트의 사용법을 익히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새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 별궁은 역시 마음에 든다. 창문 바깥으로 엿보이는 단풍과 살랑이는 바람, 지저귀는 새들과 그 사이로 다가오는 근육질의 거한……. 근육질의 거한?
“나와라, 지오니스-!”
우렁찬 외침에 시온이 벌떡 일어섰다.
“세쿤두스 형님? 왜 오늘!?”
착각이 아니었다. 아침부터 찾아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저 근육 사내,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 짧은 머리도, 시온의 세 배는 될 법한 덩치도 분명히 본인이었다.
“왜냐니. 조만간 연락한다 했잖나.”
“아니, 바로 어젯밤에 왔다 가셨잖습니까!?”
“으음?”
세쿤두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간을 확 찌푸리자 사자도 도망칠 만큼 흉악한 얼굴이 되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않은 듯했지만.
“하루도 조만간 아닌가?”
“…보통은 아니지요?”
“어쨌든, 시시한 소리 말고 나와라.”
나오라고? 시온이 세쿤두스를 멀뚱히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차를 한잔 마셨다. 역시 아침에는 프레 잎 차가 최고지. 그는 아침의 여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다짜고짜 나오라 하셔도 곤란한데요.”
“끌고 나오는 쪽이 좋으냐, 직접 나오는 쪽이 좋으냐.”
“…알겠다고요.”
투덜대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쿤두스의 팔에는 굵은 힘줄이 잔뜩 돋아 있다. 정말로 강제로라도 끌어낼 생각이겠지. 일단은 같은 파벌이 된 이상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
“나왔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십니까?”
“비보의 위치가 하나 특정되었다. 다른 둘은 아직 모르겠지만, 시간문제겠지.”
“오호.”
확실히 중대 사안이다, 누구보다 먼저 비보를 확보해야만 하니까. 황제를 향하는 한 걸음이다. 시온이 입가를 틀어 올렸다.
“그게 어딥니까?”
“꽤 멀다. 그러니까 자, 뛰자!”
“…뛰라고요?”
세쿤두스가 휙 달려 나갔다. 갑자기? 이렇게? 앞서 나가던 거한이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나, 뛰어!”
“어? 예? 어어어-?”
시온도 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심스레 발지아트를 불러 옷 안쪽의 다리를 감쌌다. 그러나 세쿤두스는 더럽게도 빨랐다. 나름 시온을 배려해 주고 있는 것 같은데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어, 지오니스 전하, 어디를…….”
“미안, 피에스, 다음에 먹을게!”
힘들게 호박파이를 얻어 온 피에스 로에스티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곧 금세 멀어졌다. 세쿤두스는 달린다. 시온도 힘껏 따라간다. 근육 거한은 재차 고함쳤다.
“자, 자, 자, 시간이 없다, 지오니스, 뛰어!”
“뭐야, 이거 갑자기-!”
* * *
“헥, 파벌을, 헤엑, 잘못, 헥, 골랐어……!”
“하하하. 섭섭한 농담을 하는구나.”
“진심, 헤엑… 이거든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흐르는 땀을 닦았다. 헌데 이놈의 땀, 닦아도 닦아도 끊이지가 않는다. 터질 것 같은 숨을 어떻게든 추스르려고 해도 세쿤두스의 재촉이 심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지오니스!”
“사람들이, 헥, 쳐다봅니다……!”
“그래?”
시내 한복판을 달리니 시선이 모이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달리는 것이 황자 둘이라면 더더욱. 고귀한 핏줄 둘의 기행에 인파는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세쿤두스는 태연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뭘 구경까지 하고 그러나!”
“힘내십시오, 전하!”
인파 사이에서 사과가 날아왔다.
세쿤두스는 그것을 받아 깨물더니 씩 웃어 보였다. 와하하하, 하는 웃음이 터졌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 반복된 것이 아닌 듯했다.
세쿤두스는 달린다.
사람들의 응원과 환호를 받으면서. 그 나름의 방식으로 시민들과 관계를 쌓아 온 것이겠지. 시온 또한 따라 달렸다. 발지아트로 몸을 강화하지 않았다면 진작 쓰러졌을 것이다.
“어, 어디까지, 헉, 가는지라도 헥… 설명 좀……!”
“가면 안다, 자, 더 빨리!”
“으아아아아-!!!”
* * *
시온 폴링라이트는 회귀한 영웅이다.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열한 살 적의 과거로, 5황자 지오니스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일곱 가지 비밀을 품고 있고.
마갑 발지아트를 손에 넣었으며.
절찬리에 숨이 차서 헉헉대는 중이다.
“더, 더, 더는 못 가!”
회귀하고 이제 이 주하고 조금 더!
몸을 단련할 틈 따위 없었다. 영웅이었건 뭐건 체력은 열한 살에 불과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땀이 물처럼 흐른다. 더 달릴 수 없고, 더 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체력이 약하구나, 지오니스.”
황궁에서부터 한참을 달려와 놓고도 세쿤두스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오면서 사과 따위를 얻어먹어서 그런지 오히려 생기가 넘쳤다. 시온은 원망을 담아 배다른 형을 노려보았다.
“열한 살, 헥, 치고는, 헤에엑… 평범하다고, 헥, 생각하는데요…….”
“으음? 그것밖에 안 되었나? 말을 잘해서 열여섯은 되었다 생각했는데.”
세쿤두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도 내 나이를 모를 테니 뭐!”
“…스물, 헥, 셋이시잖습니까.”
“어, 알고 있었느냐?”
이거 민망한걸! 그는 시온의 어깨를 두드리며 더욱 크게 웃는다. 숨 쉬는 것도 힘든 시온과는 대조적이다. 기운이 얼마나 넘치는 걸까.
“자자, 다 왔다. 다 왔어.”
“몇 번을, 다 왔다고 합니까, 헥. 이제는, 헤엑… 안 속아요!”
“음. 정말 코앞인걸.”
세쿤두스가 타이르듯 말했다.
그 손가락은 위용 넘치는 갈색 벽돌 건물을 가리킨다. 커다란 게이트, 오가는 인파, 하늘로 사라지는 잿빛 연기구름. 시온이 커다란 문패를 읽어 내렸다.
“…제국 철도청, 헤케에에에엑, 여기입니까……?”
“다 죽어 가는구나. 그래, 이곳이다.”
“사, 사, 살았다-!”
시온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회귀 이후 가장 큰 위기였다. 황자의 체면이고 영웅의 자존심이고 뭐고 벌렁 드러누워서 산소를 삼켰다. 그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세쿤두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드러눕느냐?”
“…도, 도착했으니까요?”
“무슨 소리를.”
세쿤두스가 품에서 작은 종잇조각을 꺼냈다. 남색 종이 위에는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시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건 설마…….
“철도청에 왔으면 열차를 타야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어서 뛰어라!”
“으아아아아아악-!!!”
* * *
“자, 자, 자, 멈추지 마라. 아직 일반석이야! 특실로 가라, 특실로! 그렇지! 한 칸만 더!”
“으아, 으아아아……!”
시온은 시체처럼 비틀거리며 열차 안을 달렸다. 세쿤두스는 껄껄 웃으며 그를 떠밀었다. 발지아트로 다리를 감싸고 ‘공상손가락’으로 제 몸을 떠밀지 않았다면 진작 탈진했을 터다.
객실 사이로 몇몇 사람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무슨 소란인지 궁금증이 인 탓이다. 그러나 근육질 거한이 제2황자임을 알아보고는 예의를 차린 인사를 보낸 뒤 황급히 관심을 거두었다. 평범한 사람은 황족과 엮이지 않는 편이 낫다. 계승전 중이라면 더더욱.
“여기다. 이제 쉬어도 좋아!”
“흐, 흐엑, 흐에에엑……!”
시온은 빨려 들 듯 소파에 누웠다. 이렇게 기진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분명히 10년은 더 될 텐데. 숨을 고르고 있자니 목이 말랐다. 바짝 마른 입술을 보며 세쿤두스가 작은 병을 내밀었다.
“물이다. 좀 마시거…….”
“히에엑(감사히)!”
작은 병은 아티팩트인 모양이었다.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한 병이 비워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꼴깍대는 동생을 보며 세쿤두스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열한 살치고는 체력이 좋구나. 어때. 앞으로 아침 운동을 같이…….”
“…정중히 사양하지요!”
“아쉬운걸!”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크다. 다음 칸 객실에서 들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시끄럽습니다…….”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다.
“…제도 사람들이 같이 쓰는 열차에서 소란이라니…….”
“오. 너도 와 있었군!”
“…당신이 불렀잖습니까, 세쿤두스 형님…….”
시온은 그제야 깨닫는다. 워낙 기진해서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 특실에는 그들 말고도 또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 그늘진 얼굴, 그 또한 배다른 형제. 황위 계승권을 가진 여덟 남매 중 하나.
“역시 성실하구나, 카테카!”
카테카 케슐레이, 제3황자.
* * *
50대 황위계승전.
참여하는 것은 여덟 황자 황녀.
개중 가장 뛰어난 셋.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그들 세 파벌 중에도 우열은 존재한다. 페르비아스가 제일이며 레냐르가 다음, 세쿤두스가 마지막이다. 제2황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으나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페르비아스, 제1황자.
누구보다 강력한 정통성의 소유자. 서방이었다면 분명히 황태자라 불렸으리라.
레냐르, 제1황녀.
제국 최대 제후국, 볼마르크 공국을 등에 업은 여인. 그 성정도 그릇도 페르비아스 못지않다. 여인의 몸만 아니었다면 이미 페르비아스를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세쿤두스, 제2황자는 늘 고민이었다. 시대만 잘 타고났다면 충분히 황위를 거머쥘 만했으나, 하필이면 이런 시대에! 허나 그는 제 상황을 탓하기보다는 방법을 찾는 사내였다. 그리고 찾아낸 방법은, 다른 형제자매를 제 편으로 삼는 것이었다.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
제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
제5황자 지오니스.
신뢰가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어도.
일단은 한 파벌에 든 세 황자.
“초면이지? 서로 인사해라.”
세쿤두스는 손짓한다. 시온은 무심코 손을 내밀려다가 벙찐 얼굴로 돌아보았다. 카테카 또한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초면이라뇨. 이미 서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형제인데…….”
카테카와 시온은 서로 마음이 통함을 느꼈다. 세쿤두스, 남들보다 머리 세 개는 커다란 저 사내에게 느끼는 피곤함이다. 육체가 강인한 탓인가, 그는 일단 말을 하고 보는 경향이 있었다. 또 곧잘 호탕하게 웃곤 했다.
“으음. 이런 식으로 보는 것은 정말 처음 아니냐!”
세쿤두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서 대답하라는 듯 동생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결국 카테카도 시온도 서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반갑습니다, 카테카 형님. 파벌을 잘못 고른 것 같아서 후회 중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 중이었어, 지오니스……. 반가워…….”
근육질 거한이 성큼 다가오더니 배다른 두 동생을 껴안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기억해라, 우리 셋은 한편이야!”
“…….”
“…….”
침묵. 시온도 카테카도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계승전, 황제의 자리를 놓고 형제자매끼리 죽고 죽이는 경합 중이다. 그런데 우애를 다지라니 어색할 수밖에.
“대답!”
“…그렇다 합시다.”
“피곤해…….”
16화
마도열차는 지치는 법이 없다.
세 황자 싣고 달리는 소리 요란하다.
제국철도청 설립에서 약 사십 년, 일반 승객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 절반 정도. 그러나 제도 루틸리움 사람들의 삶에 침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푯값이 싸지는 않지만 대신할 것도 없다.
열차 가장 앞의 특실.
이름대로 특별한 이들을 위하여 마련된 곳.
그러니 세 황자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코르디스 제국에서 그들보다 특별하고 고귀한 이들을 어디서 찾겠는가. 시온 폴링라이트는 창밖을 보다 슬쩍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레토 콜레스.”
“제도 외곽의 마을 중 하나였나요?”
“잘 알고 있구나.”
시온의 푸른 눈이 창 너머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아슬아슬하게 루틸리움에 포함되는 곳으로 기억합니다. 용케도 찾아내셨군요.”
“어렵지 않았다.”
세쿤두스는 팔짱 낀 채로 답했다.
“몇 달 전, 헤르마이 대학장이 이 외진 곳에 왔었다는 증언이 있었거든.”
“대학장이 그렇게 허술한 자입니까?”
“음, 철두철미한 사람이지. 별장 자리를 찾는 귀족 노인인 척 와서는 며칠 둘러보고는 슥 사라졌고,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더군.”
근육질 황자가 입가를 끌어 올렸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겠느냐. 레토 콜레스의 방앗간 주인이 한때 제국마도원의 밀 납품업자여서 그를 알아봤을 줄을!”
세쿤두스는 우스움을 숨기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남들보다 머리 셋은 큰 거한이 웃어 젖히자 좌석이 덜컹거리며 흔들릴 정도였다.
“사람을 보내 확인했더니 확실해 보였고, 곧바로 너희를 끌어와 달려가는 중이지.”
“형님께만 정보가 들어가지는 않았겠죠?”
“당연히. 최대한 틀어막았지만 곧 전해질 거다. 어쩌면 더 빨리.”
방앗간 주인이 세쿤두스에게만 정보를 팔았을 리가 없다. 또, 그의 파벌에 밀정이 숨어 있지 않을 리도 없고. 레냐르나 페르비아스 쪽에 기별이 전해지는 것도 시간문제다.
“하지만 이 마도열차보다 빠를 수는 없어. 철도청에서 레토 콜레스까지 고작 한 시간이라니.”
창문 바깥으로 풍경이 쏜살같이 스치듯 흐른다. 가장 빠른 말이라도 꽁무니조차 쫓지 못하리라. 코르디스 제국이 자랑하는 마도열차의 위용이다. 풍문에 따르면 마도열차는 제 출발 소리보다 빠르게 달릴 수도 있다고 한다. 다만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그러지 않을 뿐이라고.
“이 마도열차도 센 소르티의 구상이라 했던가? 참으로 대단하지. 400년 전에 이런 물건을 생각해 내다니!”
400년 전 제국을 떠난 제일마법사, 센 소르티. 그는 많은 업적과 연구를 남겼다. 이 마도열차 또한 그가 남긴 한 장의 설계도에서 시작되었다.
삼백 년. 기술국의 누군가가 먼지 속에 잠들어 있던 설계도의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 걸린 시간. 그리고 또 육십 년. 기관을 개발하고, 레일을 깔고, 단순한 구상이 현실이 되는 데에 걸린 시간. 아득한 시간을 넘어 나타난 혁신은 감탄을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진실로, 제일의 마법사.”
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의 길을 걷는 이에게 센 소르티 이상의 이름은 없다. 얼굴은 여전히 음울하지만 눈에는 동경의 빛이 맴돈다.
“…헤르마이 대학장도 위대하지만, 역시 센 소르티에는 비할 수가 없지요.”
“그가 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코르디스는 얼마나 더 위대해졌을까.”
“어째서 400년 전 사람인지……. 살아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살아 있는데.’
시온이 딸기 케이크 하나를 꿀꺽 삼켰다. 고맙게도 특실에는 다과를 무제한으로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닌가. 황궁의 호박파이만은 못하지만 충분히 달았다. 위에 올린 딸기도 좋은 것을 썼다.
그러고 보니 센 소르티도 단 음식을 참 좋아했다. 늘 집안에 귀한 과자 따위를 쌓아 놓고 있었지. 오랜 기억을 떠올린 시온이 피식 웃었다. 센 소르티는 나이에 비해 어린아이스러운 면이 있었다.
“…센 소르티는, 얼마나 반짝이는 천재였을까요. 예술적인 재능도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
‘전혀 아닌데.’
안타까운 착각에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센 소르티에게 예술적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좋은 사람이기는 한데, 예술은, 정말로, 에휴……. 한숨을 참을 수 없었다.
“왜 한숨이냐, 지오니스.”
“제가 생각하는 센 소르티는 조금 다르거든요, 형님들.”
“…호오, 듣고 싶은데…….”
눈을 빛내는 두 형을 보며 시온은 결의한다. 아름다운 천재 센 소르티라는 안타까운 착각을 깨 주자고. 이것이 시온이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분명히 주정뱅이일 겁니다.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아픔에 늘 술에 절어 살겠죠.”
“독특한 관점이군……?”
“밤이고 낮이고 할 것 없이 독주를 늘 입에 달고, 병도 아무 데나 놓아서 바닥은 더럽고, 안주 취향도 까다로워서 맞추기도 힘들 겁니다.”
어째 슬픈 기분이 들었다. 아, 회귀 전의 그 나날들. 센 소르티의 비위를 맞춰 주느라 얼마나 피곤했는지. 원하지도 않는 요리 실력만 훅 늘지 않았었나.
“능력은 있지만 씀씀이가 괴랄하게 커서 늘 돈이 없다고 칭얼대고, 착하기는 해도 괴팍하죠. 하지만 마법 실력 때문에 아무도 말리지 못해요.”
“…그렇게까지? 아무리 그래도 센 소르티 아니냐.”
“형님은 모릅니다. 잘해 주면 의심하고 거리를 두면 집착하는, 그 피곤한 양반을!”
시온이 고개를 저었다.
“인간은 너무 오래 살면 안 돼요……!”
“…그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너는 같이 살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구나.”
세쿤두스의 물음에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꽤 친해요.”
“…….”
“…….”
카테카와 세쿤두스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핫,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웃긴 녀석……!”
그들은 킬킬댄다. 400년 전의 제일마법사가 주정뱅이에 의심병 집착증 환자고, 시온은 그와 직접 살기까지 했다니! 생각지도 못한 농담에 웃음이 멎지 않았다.
“음, 제법 웃겼다, 지오니스!”
“처음에는 정말 미친 줄 알았어…….”
“웃어 주시니 고맙네요.”
시온이 빙그레 웃었다.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하겠지.’
어차피 믿어 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기에 회귀 전의 이야기를 슬쩍 꺼내 보았다. 그리고 역시나, 카테카와 세쿤두스는 낄낄 웃기만 한다. 때문에 보지 못했다. 시온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음을.
‘농담이라면 좋았을 텐데…….’
센 소르티의 수발을 들던 그때, 차마 다 농담으로 넘길 수 없었던 힘든 시간. 몰랐는데 참 힘들었구나. 수고했다, 수고했어, 시온 폴링라이트! 그는 조용히 과거의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
“그보다 카테카 형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으응……?”
카테카 케슐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제 전환이 갑작스럽네. 뭔데 그래?”
“왜 세쿤두스 형님과 함께하는 겁니까?”
“…아아, 물어볼 거 같았지…….”
질질 끄는 듯 힘없는 말투. 폐병 환자처럼 새하얀 피부와 가느다란 팔다리. 생김새는 곱기에 오히려 나이보다 더욱 어리게 보인다. 실제로는 스무 살이지만 보기에는 시온보다 조금 윗줄 정도다.
세쿤두스와는 대조적이다. 아홉 살에 사자 아가리를 찢은 사내 옆에서는 누구라도 왜소할 수밖에 없겠지만, 카테카는 유독 심하게 작아 보였다. 접점도 많지 않을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이 퍽 어색했다. 카테카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너랑 같은 이유야, 지오니스…….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그럴 힘은 없었지…….”
카테카는 은둔황자라 불리곤 했다.
애초에 권력에 뜻이 없었다. 그저 책 사이에 숨어 신비를 배워 나가는 것이 원하는 전부였다. 허나 조용히 살기에는 너무도 고귀한 핏줄. 대제 콘티누아의 아들이기에 허락되지 않은 평온.
‘그래. 가만히 있어도 의심을 샀지.’
계승전이, 황제의 피라는 놈이 그렇다. 끝없는 불안과 의심. 꿍꿍이 없을 리가 없다. 우리를 속이고 무언가 계략을 짜는 것이 아니냐, 하고. 외척도 무엇도 없던 지오니스조차 자유롭지 못했는데, 카테카 케슐레이야 말해 무엇할까.
회귀 전, 시온에게는 19년 전.
계승전에 승리하여 50대 황제가 된 것은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였다. 그때 다른 형제자매들이 어찌 되었는지 기억한다. 시온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쿤두스 형님은 단순하지만… 멍청이는 아니지……. 그렇게 생기기는 했지만…….”
“음. 들린다만, 카테카.”
“우리를 버려서는 자기도 위태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페르비아스도 레냐르도 강대한 세력을 쥐고 있다. 다른 형제자매가 굳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그러나 세쿤두스는 다르다. 카테카가 쥔 마도원의 연줄이나 시온의 비보 하나가 아쉽다.
그렇기에 오히려 묘한 동지애가 생긴다. 상대가 자신을 쉽게 버리지 못함을 알기에, 얄팍한 신뢰가 아니라 이해관계로 얽혀 있기에. 명목뿐인 피보다는 더욱 진하고 단단하다.
“내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만, 틀린 말도 아니다.”
세쿤두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계속 호탕하고 마음 넓은 형을 연기한다. 속내도 그러할지는 모르는 일이나 카테카도 시온도 기꺼이 맞추어 주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쓸모가 있지. 그러니 그동안이라도 형제 흉내를 내잔 거다.”
“진짜 형제기는 한데 말이죠…….”
웃음이 터졌다. 세 형제 중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거의 동시였다. 신뢰는 없다. 형제의 우애 따위는 더더욱 없다. 그러나 이해는 있기에 잠깐 같이 웃어 줄 수 있다. 연약하고 덧없는 흉내일지라도.
“음. 레토 콜레스로군. 준비해라, 내 동생들아.”
세쿤두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마도열차가 멈추어 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비보가 가깝다.”
* * *
“근방에 옛 신전 터가 있다. 거기에 비보가 있지.”
열차에서 내릴 때쯤이었다.
“어떤 비보인지는 손에 넣어야 알겠지만.”
시련을 통과하지 못하면 비보에 닿을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다만 미래에서 돌아온 회귀자라도 되지 않는다면.
‘레토 콜레스, 옛 신전 터의 비보라면… 하늘 결정 투구겠네.’
회귀 전의 세쿤두스가 손에 넣고는 아주 보란 듯이 쓰고 다니던 기억이 있다.
‘비보 중에도 특히 좋은 물건이었는데.’
열차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세 황자는 역을 나섰다. 일반석에서 열 명 남짓한 사내가 뒤따라 내렸다. 세쿤두스는 그들을 제 심복이라고 소개했다.
“자. 서두르자.”
세쿤두스가 가볍게 턱짓하자 사내들의 기척이 옅어졌다. 아마 조용히 따라오라는 등의 명령을 내렸겠지. 근육질 황자가 앞장서고 카테카와 시온이 뒤를 따랐다.
“다들 얼굴을 가려라. 빠르게 인파를 통과해 간다.”
역 바로 옆이 북적인다 했더니 시장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황자. 사람들이 알아볼 가능성이 있다. 페르비아스나 레냐르에게 행적을 알려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세쿤두스는 서둘렀다. 그의 심복들도 인파 사이에 녹아든 채로 걸음을 재촉했다. 시온은 몰래 달콤한 주전부리를 사서 입에 물었다. 카테카에게도 하나를 건네주어 입을 막았다.
“마을은 빠져나왔군요. 다음은 어디로 가십니까?”
“근방 폐허 너머로.”
마을을 나서니 인적이 빠르게 줄었다. 그들은 가까운 산을 향했다. 옛 신전 터는 산을 오르는 길목에 있다고 했다.
“잠깐……!”
카테카 케슐레이가 일행을 멈춰 세웠다.
“…수상쩍은 그림자가 보입니다.”
“사람 같으냐, 카테카?”
“확인해 보죠…….”
카테카는 그리 말하며 손을 둥글게 말아 눈에 가져다 대었다. 두 별의 마법, 천리안Clairvoyance. 시야의 끝자락에 걸쳐 있던 옛 신전 터가 마치 코앞에 있는 것처럼 크게 보였다. 카테카 케슐레이가 낮게 중얼거렸다.
“…폐허치고는, 사람이 많습니다…….”
“빨리도 왔군.”
사람의 눈이 닿지 않을 거리지만 훤히 보인다. 그들이 목적하는 폐허의 앞에 일단의 무리가 있다. 하나같이 움직임에 균형이 잡혔다. 다른 파벌의 사병임이 분명하다.
“…열다섯, 아니, 열여섯 정도 됩니다.”
“어디 쪽으로 보이느냐?”
“…흐음.”
카테카 케슐레이는 멀찍이서 살펴본다. 얼굴을 가려도 정체를 파악하기는 어렵지 않다. 허리춤에 매단 작은 도끼나, 껑충한 키에 금발. 이 정도의 특징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다.
“…숨길 생각도 없군요, 동북 쪽 전사입니다…….”
“레냐르 누님인가.”
제국의 동북, 볼마르크 공국.
제1황녀 레냐르의 외가.
“음. 우리도 찾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마 정보가 샜겠지?”
“밀정이 끝도 없으니…….”
“애초에 같은 황궁에 살면서 완벽히 숨기는 것도 무리가 있어.”
카테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여전히 손을 둥글게 만 채로 일단의 무리를 살피고 있었다.
“혹시 누님이 보이나?”
“…누님 본인은 없는 듯.”
“그럼 됐다. 황자 황녀가 아니면 시련 장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세쿤두스가 소매를 걷어붙였다.
“내가 정리하고 오지.”
그의 심복들은 기척을 죽였다. 카테카와 세쿤두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시온이 입을 열었다.
“제가 뭘 해야 할까요, 형님?”
“넌 가만히 있어라, 지오니스. 이제 막 합류한 참이니까.”
카테카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아……. 막내는 가만히 있어도 돼. 세쿤두스 형님이 알아서 할 거야…….”
“음.”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드러난 팔뚝이 터질 듯이 부풀었다.
“이 형님의 멋진 모습을 보고 있도록.”
17화
“하이더의 전사는 들어라!”
레네 하이더는 엄숙하게 말했다.
“레냐르 전하께서 곧 오신다. 그때까지 2황자 무리를 막아야 한다.”
열다섯 전사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굵은 팔뚝과 날이 선 도끼들이 믿음직하다. 그들은 하이더 전사, 볼마르크 공국을 상징하는 여섯 전사단의 일원. 레네 하이더는 하이더 전사단장의 손자다.
“저들은 이미 우리를 발견했을 터. 바보가 아니라면 암습해 오겠지.”
전사들은 당당하다. 숨을 필요도 생각도 없다. 한 자루 도끼 있으면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는 명예로운 하이더 전사. 당당히 맞서…….”
“어이-!”
외침에 고개 돌리니 거한이 손을 흔든다.
“레냐르 누님의 부하들이지? 거기 딱 기다리고 있으라고!”
“…저 황자는 바보인가?”
레네 하이더가 중얼거렸다. 남들보다 머리 셋은 큰 거한은 흔하지 않다. 세쿤두스 껄껄 웃으며 성큼 다가온다. 혼자 몸이다. 레네 하이더는 당황스럽다. 암습도 않고, 황자 혼자 적진에 뛰어든다고?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멍청한 짓이다. 레네 하이더가 당황하는 사이 세쿤두스가 나무 하나를 뿌리째 뽑았다.
“빈손으로 가기도 뭐해서, 선물!”
“…이런!”
상당한 굵기의 나무가 전사들에게로 날아들었다. 세쿤두스는 씨익 웃더니 팔뚝을 더욱 부풀렸다. 나무니 바위니 하는 것들이 장난감처럼 날았고, 장난감답지 않은 굉음을 울렸다.
“무, 무슨 힘이냐!”
바위나 나무를 피한 전사 하나가 벌컥 외쳤다.
“2황자는 짐승보다 짐승 같은 자라더니 소문이 정말…….”
“자네, 초면에 말이 심한걸.”
“……!”
전사가 황급히 도끼를 치켜들었으나 세쿤두스가 더욱 빨랐다. 바위 같은 강권이 전사의 목젖과 명치와 고간을 두들겼다. 비명조차 없이 전사 하나가 쓰러졌다.
“바보 같기는! 맨손으로 혼자 적진에?”
“하이더의 도끼가 우스운가?”
하이더 전사단의 위명은 헛것이 아니다. 동료 하나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으나 그들의 기세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좋지 못했다. 세쿤두스는 강철 같은 상완을 불뚝이며 혀를 찼다.
“자네들이야말로 내 손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닌가?”
세쿤두스가 성큼 걸어 나왔다. 그러고는 가장 앞선 전사의 도끼날을 턱 잡았다. 날을 잡았는데도 손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아홉 살에 사자 아가리를 찢어 버린 손이라고. 자네들 도끼보다 더 위험하지.”
당황할 틈도 없이 근육질 황자는 도끼를 주욱 찢어 내었다.
“…….”
“…….”
강철 도끼가 두 쪽이 났다. 깨지거나 부서진 것이 아니라, 마치 종잇장처럼 주욱 찢어졌다. 하이더 전사들은 말을 잃고 바닥에 나뒹구는 도끼(였던 것)과 자기들의 도끼를 번갈아 보았다.
‘아니, 도끼가 찢어지는 물건인가?’
‘내 도끼… 아직 대금도 남았는데…….’
‘그보다 도끼에 찢어졌다는 표현을 써도 돼?’
세쿤두스는 위협적으로 손을 들어 보인다.
“이제는 우습지 않은 모양이지?”
하이더 전사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다들 더 단련하라고.”
* * *
“이제들 오나?”
세쿤두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옆에는 열이 넘는 전사들이 쓰러져 있다. 다들 큰 상처도 없이 정신만 잃은 채다.
“묶어 놓도록.”
그의 심복들이 발 빠르게 나섰다. 시온은 쓰러진 자들이 하이더 전사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세쿤두스.’
공국 볼마르크를 상징하는 여섯 전사단 중 하나. 아무리 정예가 아니었다고는 해도 이렇게 간단히 제압하다니. 역시 세쿤두스라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뭐냐, 지오니스, 할 말이라도?”
시온의 시선을 느낀 세쿤두스가 물음을 던졌다. 시온은 숨기지 않고 솔직히 답했다.
“대단하시군요, 형님.”
“하하. 너도 곧 실력을 보여야 할 거다.”
“실력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만.”
“그랬다면 비보를 얻지 못했겠지.”
거한의 눈빛은 날카롭다. 시온의 어린아이 행세를 어느 정도 꿰뚫어 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온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고 세쿤두스는 더 캐묻지 않았다.
“미리 말해 두는데 지오니스, 시련 장소에는 너와 나 둘만 들어간다.”
“…처음 듣는데요?”
시온의 눈이 가라앉았다.
“심복들이야 그렇다 쳐도, 카테카 형님은 왜?”
“난… 땅 아래로는 들어갈 수 없거든…….”
카테카 케슐레이가 음침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몇 가지 제약으로… 묶여 있는 터라…….”
‘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카테카 케슐레이, 신비에 홀린 은둔황자. 하늘을 엿볼 만한 재능을 타고난 대신 제약과 금기로 묶여 버린 삶의 소유자. 세쿤두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카테카는 불편한 점이 많지. 생고기도 못 먹고, 너무 높거나 낮은 곳에도 못 들어가.”
“…그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지만.”
카테카가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불편할지 몰라도 그에게는 일상이다. 제약이나 금기가 없는 삶이 무엇인지 겪어 본 적도 없다.
“들어가지 못하는 대신, 여기서 결계를 치고 있을 거야……. 우리가 떠나기 전에 레냐르 누님이 올지도 모르니…….”
하이더 전사단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레냐르가 이미 이곳의 위치를 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충돌을 각오하고 있을 테니 상당한 병력을 끌고 오겠지. 카테카 케슐레이의 얼굴은 여전히 음울한 빛을 띠고 있지만 자신 없는 기색은 아니었다.
“헤르마이 대학장이라도 오지 않는 이상, 반나절은 버틸 수 있어…….”
“그래, 지오니스.”
세쿤두스가 시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야 본론이다. 비보를 얻으러 가자.”
* * *
시온과 세쿤두스는 옛 신전 터로 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대리석 기둥 따위 사이에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숨겨져 있었다. 세쿤두스가 먼저 몸을 날렸고 시온이 뒤따랐다.
‘이 신전, 셰나올을 섬기던 곳이군.’
마차를 탄 노인의 형상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호투스 시절 섬김 받던 팔신八神의 하나, 지혜와 평온의 셰나올. 어쩌면 이 신전도 천 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신전의 지하에는 거미줄이 가득했다. 세쿤두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고 시온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떤 시련입니까?”
“나도 모른다.”
“이미 들어가 보신 줄로 알았는데요?”
“입장도 못 했어. 조건이 까다롭더군. 곧 문이 보일 거다.”
그의 말대로였다. 낡아 빠진 지하 신전과는 어울리지 않게 세련된 문이 있었다. 최근에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명백하다. 위에는 고대 호투스 어로 무어라 쓰였다. 세쿤두스는 그 앞에서 멈추어섰다.
“이 너머로는 가 보지 못했지.”
“확실히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군요.”
문 위에 쓰인 호투스 어를 읽었다.
고어古語지만 읽는 데 문제는 없다.
“두 명의 계승권자가 사이좋게 손을 올리라니.”
세쿤두스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호오. 고대 호투스 어를 읽을 줄 아나?”
“가정교사가 붙지 않습니까?”
“하도 지루해서 가정교사를 쫓아냈었거든.”
“…….”
시온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쨌든, 절 데려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럼 어찌해야 하는지도 알겠지?”
“물론.”
문 위로 손바닥을 올렸다. 세쿤두스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느낌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나의 파동이 그들의 자격을 시험한 것이다. 두 황자는 당당했다. 거리낄 것 없는 대제의 아들이기에 그러하다.
쿠구궁-! 문이 열린다. 비보로 향하는 길이다. 황제의 자리에 가까워지기 위한 여로다. 그러나 하나가 아니다. 세쿤두스가 내뱉었다.
“음. 갈림길!”
“둘이 와야 한다고 한 이유를 알겠네요.”
두 갈래 길이 문 너머에서 그들을 맞았다. 작은 표지에는 호투스 어로 무어라 쓰여 있다. 세쿤두스가 눈짓하고 시온이 읽었다.
“왼쪽은 쉽고 빠른 길. 오른쪽은 어렵고 느린 길… 이라고 쓰였군요.”
왼쪽 길은 뻥 뚫려 있다. 그러나 오른쪽 길은 처음부터 거대한 철문으로 막혀 있다. 두 황자가 왔으나 여기서는 갈라져 나가야만 한다.
“어느 쪽이 비보에 닿을지는 알 수 없다고도 쓰여 있군. 먼저 도착하는 쪽이 비보를 차지하게 되는 건가?”
표지의 글을 마저 읽은 세쿤두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곤란한걸.”
“…잠깐, 고대 호투스 어를 읽을 줄 아시네요?”
“가정교사를 쫓아냈다고 했지 못 읽는다고는 안 했잖나?”
“…….”
하여간 황자 황녀란 작자들은 죄다 능구렁이다. 만약 시온이 표지에 쓰인 글을 속이기라도 했다면 바로 들통이 났으리. 물론 그런 얕은 수작을 벌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보다 지오니스, 어느 쪽으로 가겠나?”
“동생한테 쉽고 빠른 쪽을 양보하시죠.”
“그럼 나는 어렵고 느린 쪽이군.”
근육질 황자가 빙긋 웃어 보였다.
“동생을 위해서라면야.”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형 노릇을 하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그는 아직 열한 살 꼬마의 몸이다. 힘을 아끼고 싶었다. 뻥 뚫린 왼쪽 길로 향하며 물었다.
“참, 세쿤두스 형님, 하나만 묻죠.”
시온이 슬쩍 미소 지었다.
“만약 내 쪽이 진짜라서 비보를 손에 넣으면 어쩌시렵니까?”
“마음대로 하거라.”
세쿤두스는 오른쪽 길로 향하며 말한다. 어렵고 느린 쪽이다. 벌써부터 거대한 철문이 막아서고 있다. 그는 꾸욱, 하고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꽈아아앙-!!! 철포 같은 소리가 작렬했다. 사람의 주먹이 낼 만한 굉음이 아니었다. 주먹질 한 방으로 철문을 박살 낸 사내는 껄껄 웃어 젖힌다.
“지오니스, 쉽고 빠른 쪽을 택해 놓고 나보다 늦으면 부끄러울걸!”
* * *
하하하-!
웃음소리가 빠르게 멀어져 갔다.
“…전차 같은 인간!”
역시 세쿤두스 데비우스.
육체만으로는 여덟 황자 황녀 중 최강. 지금도 기사 몇십 정도는 맨손으로 찢어 버리겠지.
“그럼 형님도 사라졌으니…….”
검은 그림자가 피어올랐다. 실처럼 피어오른 그림자를 몸 위로 엮었다. 열한 살의 연약한 몸뚱이가 부풀어 오른다. 그의 몸은 곧 검은 광택으로 번뜩이는 짐승처럼 변했다.
“드디어 네 차례다, 발지아트.”
마갑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영혼은 깰 수 없는 잠에 빠져 있다. 허나 몸뚱이는 시온의 뜻을 따른다. 검은 그림자의 갑옷은 시온의 몸처럼 자연스럽게, 또 강력하게 움직인다.
가볍게 땅을 박찼다. 바닥이 움푹 패며 풍경이 주욱 멀어졌다. 함정 따위가 있었는지 화살이 몇 개 날아들었다. 시온은 막지 않았다. 화살은 그림자의 갑옷을 뚫기는커녕 형편없이 꺾여 튕겨 내었다.
시온이 키득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림자의 발톱이 날카롭다. 돌바닥이 마치 무른 흙처럼 푹푹 패였다.
“센 소르티의 걸작다운걸.”
걸작이라는 표현에 부족함이 없다. 아직 익숙하지 않음에도 이런 힘이라니! 단련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꼬맹이가 정예기사 못지않은 육체를 얻었다. 영웅이라 불리던 시절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지만 퍽 만족스럽다.
“앞으로도 실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18화
‘여기에 하늘 결정 투구가 있다는 건 알지만, 시련 내용은 알 수가 없지.’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그가 회귀자라고 해도 겪어 보지 않은 일을 기억해 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옛 신전 터에서 하늘 결정 투구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기억의 전부였다.
‘하지만 뻔하지. 진부한 함정에 적당한 괴물 하나 갖다 놓지 않았겠어?’
마침 바닥이 쑥 빠졌다. 낌새를 눈치채고 뒤로 물러섰더니 벽에서 창이 튀어나왔다. 시온은 굳이 막지 않았다. 피부 위의 발지아트가 살아 움직이며 창날을 비껴 내었다.
계속 이런 식이었다. 돌이 굴러오거나, 바닥이 꺼지거나, 창이나 화살이나 불꽃 따위가 쏟아졌다. 독창성 0점, 의외성 0점, 위험도 잘해야 20점! 종합해서 낙제점을 주기에 합당한 함정투성이다.
“하긴 마법사들 센스가 다 그렇지. 센 소르티도 그 모양이었는데.”
센 소르티나 헤르마이 대학장이 들었다면 망설임 없이 머리채를 잡았을 발언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곳에 없다. 시온이 킬킬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가 넓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열한 살 어린아이에게도 널찍하지 않았던 통로였는데, 이제는 세쿤두스에게도 비좁지는 않을 듯했다. 함정의 빈도도 줄었고 앞에서는 어슴푸레한 빛이 새어 나고 있다.
“함정이 없고, 앞에서는 빛. 이제 부자연스럽게 넓은 공동만 나오면… 역시나!”
부자연스럽게 넓은 공동이 시온을 반겼다. 그는 헤르마이 대학장의 진부함에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이지, 예상을 벗어나는 법이 없어. 여기서 적당한 괴물 하나 잡으면… 어.”
공동에 발을 들이려던 시온의 발이 멈추었다. 공동 천장에 거대한 형체가 웅크리고 뭐라 형용하기 힘든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빛은 기시감을 가져다주었고, 시온은 재빨리 몸을 굽혔다.
“…저거 본 적이 있는데…….”
조심스레 천장에 웅크린 형체를 살폈다. 혹시라도 이쪽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숨을 죽인 채로. 얼핏 하얀 껍질을 가진 알처럼 보였지만 그렇지 않다. 저것은 껍질이 아니라 6장의 날개다. 하나하나가 시온의 세 배는 되어 보였고, 계속해서 신성한 빛을 발했다.
“…오스-케룹. 천사 형形 마도병정.”
저 휘황한 날개를 어찌 잊을까. 하늘의 군사를 본뜬 저 병정은 센 소르티보다도 이전 세대에 개발된 전쟁 병기다.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오래전에 대륙의 모든 전장에서 사용이 금지되었다.
“황위계승전, 황자 황녀가 뛰어드는 경합에 오스-케룹을 가져다 놨어?”
시온이 욕설을 뱉었다.
“헤르마이 메르헤스, 이 미친 노인네!”
* * *
“…이거 곤란한데.”
오스-케룹과 싸워 본 적이 있다. 페레이즈 평원이었던가? 아니면 볼셴 강 유역? 궁지에 몰린 적이 오스-케룹 세 기를 깨웠고, 삼천이 넘던 병력이 금세 핏물로 녹아내렸단 것만 선명하다. 그때의 비명이 너무도 생생해서 혀를 차고 말았다.
“쉽고 빠르긴 하겠군. 황천길이 말이야.”
오스-케룹은 눈을 감은 채로 유유히 허공을 배회한다. 아직 구동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그를 짓눌렀다. 괜히 금지된 전쟁 병기가 아니다.
“그나마… 아직 휴면 상태군.”
여섯 장의 날개 사이에 지그시 눈을 감은 얼굴을 보라. 아직 오스-케룹이 깊은 잠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무시무시한 살상력을 가졌다 한들 눈을 뜨지 않았다면 무슨 상관일까. 시온의 몸 위로 검은 진흙이 덮였다.
“구동하기 전에 빠져나가면…….”
[Cheruuuu-]
“…될 줄 알았는데!”
낮게 울리는 신성한 신음. 거짓된 신성함이라도 위엄이 있다. 성스러운 운율로 흐르는 구동음이야말로 오스-케룹의 상징이다. 운율을 두르는 여섯 날개의 중심에서 천사의 얼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 정말.”
천사 형태의 병정이 시온을 보았다. 아기처럼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얼핏 무기질할 만큼 평온한 얼굴이지만 시온은 알고 있다. 오스-케룹은 이미 그를 적으로 인식했다.
“염-병할.”
여섯 날개 허공을 가른다. 광채 번쩍이며 깃털 떨어져 내린다. 하늘거리며 천천히, 때를 맞은 낙엽이나 꽃잎처럼 여유마저 있다. 깃털은 그렇게 땅에 내려앉았고, 이내 하얀 빛이 폭력적으로 비산했다.
깃털이 땅에 닿기 전에 시온은 이미 발지아트로 제 몸을 감싼 뒤였다. 덕분에 비산하는 하얀빛으로부터 자기를 지킬 수 있었다. 마갑의 검은 표면에 파문이 일었다. 만약 발지아트가 아니었다면 하얀빛이 전신을 잔뜩 난도질했으리라.
[CHER, HERH. CRUM.]
여섯 날개 가짜 천사는 의미 알지 못할 말을 떠벌리며 계속해서 깃털을 떨구어 낸다. 한 장으로도 발지아트의 표면에 파문을 남긴 깃털이 수십, 수백. 검은 갑주 걸친 시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 도와줄 사람, 없고. 지켜보는 사람, 당연히 없어.”
어슴푸레한 손들이 떠돈다.
그 숫자는 열일곱이다.
발지아트 때보다 넷이 늘었다.
“고맙게도.”
공상손가락. 셉템 아르카나의 첫 번째 기예Ars. 하얀 깃털 쏟아지나 공중에서 궤도가 휘어져 닿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손들이 그것들을 주인에게 닿지 못하게 하는 까닭이다. 제 깃털이 무용지물이 되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오스-케룹의 기척이 변했다.
[CERUM-]
가짜 천사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거기에서 양쪽에 바짝 날이 선 하얀 창이 튀어나왔다. 창끝은 시온을 향한다. 시온은 그것을 피하려다 멈칫 고개를 들었다. 마갑을 얻어 놓고도 제대로 사용해 본 적 없지 않았나.
“피해도 되겠지만, 그래선 아쉽지.”
검은 진흙이 더욱 불어난다. 두껍고 두껍게, 이윽고 검은 비늘 같은 표면을 만들어 낸다. 하얀 깃털 그 위에 떨어진다. 이전 같은 파문은 일지 않았다. 조금의 손상도 없는 모습에 시온이 작게 말했다.
“새 옷을 입고도 자랑 한번 못 하면 되겠어?”
발지아트 두른 시온은 짐승의 형상을 취했다. 피하지 않는다. 이윽고 하얀 창 내뱉어져 떨어진다. 마치 유성우와 같은 흰 빛에 열일곱의 ‘공상손가락’과 검은 갑옷이 맞선다.
---!!! 소리 없이 광채 있다. 하얗게 눈부시더니 이내 잦아들었다. 하얀 창은 빛무리가 되어 사라졌고, 시온은 제 손을 내려보았다. 피부 거죽이 약간 벗겨졌다. 딱 그 정도였다. 그 위로 금세 검은 갑옷이 다시 덮였다.
‘발지아트! 만족 이상인걸!’
오스-케룹의 양날 창이라 하면 몇 겹의 강철이라도 단숨에 재로 만드는 위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발지아트에게는 워낙 상극의 힘이기도 하고. 그런데도 가죽이 조금 벗겨지는 선에서 끝났다. 시온은 흡족스레 웃었다. 오스-케룹이 또 한 자루 창을 내뱉으려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허공을 박찼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다. ‘공상손가락’을 디뎠기 때문이다.
“충분히 놀았어.”
시온의 형체가 공중을 휘젓는다. 오스-케룹의 눈은 그를 바쁘게 좇다가 끝내 놓치고 말았다.
가짜 천사는 눈을 굴리며 시온을 찾는다. 그 얼굴은 수백 년 된 성화처럼 어색하게 굳었으나 눈은 당혹스레 바쁘다. 시온은 그런 천사의 뒤편을, 공동의 천장을 터벅터벅 걸었다. 오스-케룹은 시온이 제 바로 뒤에 오기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다시 자라.”
[-CERU!!!]
가짜 천사의 당혹성이 터지는 것보다도 시온이 빨랐다. 그의 팔에는 기다란 그림자의 칼날이 뻗어 나온 채였다. 칼날이 오스-케룹의 눈을, 그 너머의 핵을 꿰뚫었다.
[…ch …eruu…….]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 가짜 천사의 눈이 빛을 잃고 날개는 다시 고치처럼 변한다. 치명적인 손상을 회복할 때까지 저렇게 번데기 같은 꼴이 되겠지.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그림자의 칼날을 집어넣으며 시온이 중얼거렸다.
“나름 쉽고 빠른가?”
* * *
“예전에 오스-케룹을 만났을 때는 풋내기 시절이었던가?”
그때는 그렇게 공포스러웠는데. 시온은 잠시 상념에 잠겼다. 아마 12, 13년 전쯤 된 일일 것이다. 폴링라이트라는 성씨를 갖기도 전, 흔하디흔한 용병 일이나 할 때쯤. 오스-케룹의 깃털을 피해 바닥을 기던 기억이 선명했다.
“역시, 그저 옛날 일이군.”
걸음을 옮겼다. 오스-케룹의 다음으로, 길의 끝으로. 몇 개의 함정이 더 있었다. 여전히 뻔했다. 바닥이 빠지거나, 불벼락이 쏟아지거나. 쉽고 빠르게 지나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곧 끝에 닿았다.
더 나아갈 곳은 없었고 화려한 제단이 그를 맞았다. 그 위에 놓인 것은 보석으로 장식된 투구. 누가 보아도 계승전, 열 개의 비보 중 하나였다.
“역시 양쪽 길 다 정답이었잖아.”
뒤를 돌아보니 또 하나의 길이 보였다. 그 길에서는 쿵, 쿠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은 멀지만 가까워지고 있다.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시련을 통과하는 소리겠지. 아마 곧 세쿤두스가 곧 튀어나오겠지.
“참 성격 나빠! 한쪽만 답인 것처럼 써 놓고는.”
시온이 투덜거리며 비보를 살폈다. 투구는 마치 하늘을 푹 졸인 것처럼 투명한 푸른빛으로 번뜩인다. 마력의 향기 또한 짙었다.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보통 공을 들인 것이 아님이 분명했다.
“흐-음. 하늘 결정 투구! 발지아트 발끝도 못 따라오겠지만, 그래도 꽤나 좋은 물건이지.”
손은 대지 않았다. 아마 그때부터 소유가 정해질 테니까. 시온이 입가를 틀어 올렸다.
“-자, 세쿤두스 형님은 아직이고, 기다려 줄 의리도 없어.”
한편이 된 것이 고작 며칠 사이 일이다. 형제의 우애 따위도 없다. 애초에 계승전이란 형제자매 사이에 벌이는 싸움이 아니던가. 카테카도 세쿤두스도 시온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되지 못했다.
“이걸 혼자 가지고 돌아가면, 이런, 벌써 비보가 2개나!”
여덟 황자 황녀 중 단독으로 선두를 달릴 수 있다. 계승전의 승리에 성큼 가까워질 타다. 다른 형제들의 견제가 무서워도 충분히 감수할 만하다. 깊은 미소가 맴돈다.
“어떻게 한담?”
* * *
“…음.”
세쿤두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배다른 동생이 그를 해맑게 맞아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십니까, 형님?”
“빠르구나, 지오니스.”
“쉽고 빠른 길이었으니까요.”
근육질 황자는 조금 당혹스러웠다. 당연히 그가 시온보다 빠르게 도착할 줄로 알았다. 아무리 어렵고 느린 길을 택했다고 해도. 그럴 것이, 그는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아닌가.
“…….”
대제 콘티누아의 피를 이어받은 여덟 황자 황녀. 개중에도 세쿤두스는 최강의 육체를 자랑했다. 벽을 부수고 괴물을 찢어발기며 달려왔는데, 저 지오니스에게 뒤처질 줄이야!
“자, 그럼 형님.”
시온이 손짓한다. 태연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 비보를 취하시지요.”
“…….”
그의 손은 어서 나아가라는 듯하다. 길의 끝에 놓인 화려한 투구, 계승전의 비보를 향해서. 세쿤두스는 시온과 투구를 번갈아 보았다. 그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해하기 힘들구나, 지오니스.”
“무엇을 이해하기 힘드십니까, 형님?”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터다.”
“흐음? 무엇을 하기에 충분하지요? 질문이 조금 두루뭉술하군요.”
세쿤두스는 의문을 던졌으나 시온은 그것을 장난스럽게 비껴 냈다. 그저 어린아이인 것처럼 웃었다. 때문에 세쿤두스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비보를 취한 다음, 나를 따돌리고 도망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었을 거란 말이다.”
세쿤두스의 감각은 야생동물보다도 날카롭고 예민하다. 때문에 시온이 이미 한참 전에 도착했음을 눈치채었다. 그래서 당혹스러웠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지?”
물음 묵직하다. 많은 뜻이 담겨 날카롭게 찌른다. 그러나 시온은 또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의리에 대한 대가가 의심입니까? 섭섭합니다, 형님. 형제간의 우애로는 답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 사이의 우애? 동전 한 닢이나 되면 좋겠군.”
“거참 노골적으로.”
시온이 머금은 것은 거짓말쟁이의 미소다. 상대를 속이려는 의지를 감추지도 않는 뻔뻔함이 있다. 세쿤두스는 주먹을 움켜쥔다. 강철을 구멍 내는 괴력이다. 열한 살 시온의 골통 정도는 가볍게 부수리라.
“대답해라, 지오니스. 무슨 꿍꿍이냐. 왜 내게 비보를 양보하느냐.”
세쿤두스는 괴력의 사내다.
그는 진심으로 시온의 피를 손에 묻힐 각오를 다지고 있다. 셉템 아르카나는 하나밖에 열리지 않았고 발지아트도 익숙하지 않다. 지금의 시온에게는 벅찬 상대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기에는 지나온 삶이 너무 거칠다.
“그 주먹이 내 대답입니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먹이네요.”
“…비보를 얻고 도망쳤을 때의 내 보복이 무서웠다?”
“어찌 그러지 않겠습니까.”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돌아온 영웅이다. 19년의 세월을 넘어왔다. 그러나 세쿤두스가 알 턱이 없다. 남들의 눈에는 열한 살 지오니스일 뿐.
“세력도 무엇도 없는 제가 형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웃기는……!”
소리를 지르려던 세쿤두스가 제 감정을 억눌렀다.
“…음, 아니지, 아니야…….”
시온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분명하고 분명하다. 지금 저 태도가 어떻게 두려워하는 자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러나 거짓을 밝힐 증거가 없다. 또 이유도 없다.
“…아주 달콤한 속임수를 부리는구나.”
시온의 꿍꿍이 알 수 없다. 그러나 세쿤두스에게는 나쁜 게 조금도 없다.
“왜 달콤하면 꼭 속임수라고 생각하십니까?”
“너무 달콤하니까.”
“취향의 문제 아니겠습니까. 저는 과하게 달콤한 것을 좋아합니다.”
짙디짙은 미소. 거짓말쟁이의 것.
불길하고 불안하지만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자, 형님. 어서 비보를 취하시지요.”
시온 폴링라이트의 눈은 푸른빛이다.
맑은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요사스러울 만큼의 섬뜩함을 띠었다. 시온은 세쿤두스를 재촉한다.
“제 알량한 꿍꿍이가 중요한 때는 아니지 않습니까. 바깥에서 홀로 레냐르 누님을 막고 있을 카테카 형님도 생각하셔야지요.”
“하, 너, 지오니스…….”
세쿤두스는 걸음을 옮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시온이 아무리 수상하더라도 비보를 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 너 또한 대제의 핏줄이구나.”
많은 의문이 소용돌이친다. 왜 이런 상황을 만들었는가, 왜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고 있는가, 대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가, 어떤 비밀을 감추고 있는지! 그러나 꾸욱 눌러 삼킨다. 그는 파벌의 주인, 황제의 꿈을 꾸는 몸. 때를 분간할 줄 아는 사내.
“더는 묻지 않겠다.”
“배려에 감사를.”
“못 미덥더라도 승리는 승리.”
그는 투구를, 비보를 쥐었다.
화사한 빛이 쏟아졌다. 황궁에 제2황자 세쿤두스가 또 하나의 비보를 얻었다는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비보를 양보받은 빚은 달아 두도록 하지.”
“형님 뜻대로 하시지요.”
시온은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다. 대체 몇 개의 비밀을 감추고 있는지 모를, 꺼림칙한 미소를. 세쿤두스는 꼭두각시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나가자. 황제의 자리에 또 가까워졌다.”
* * *
비보를 얻은 세쿤두스는 뒤돌아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어느새 다시 당당해져 있다. 시온은 배다른 형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 짓는다.
‘이 비보는 당신이 얻는 편이 낫습니다, 세쿤두스 형님.’
시온은 이미 마갑 발지아트를 손에 넣었다. 또 하나의 비보를 감당할 자신이 없지는 않았으나,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았다.
슬슬 몇몇은 눈치채었을 터다. 제5황자 지오니스가 비밀을 숨기고 있음은. 그러나 어떤 비밀인지 어찌 알겠는가. 시온 폴링라이트의 이름을, 황제의 자리를 향한 그의 열망을, 그 비밀의 깊이를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거짓말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나는 아직 열한 살 지오니스일 필요가 있거든요.’
19화
소란스러웠다.
비보를 옆구리에 낀 세쿤두스가 인상을 썼다. 멀찍이서 스며 오기 시작한 햇빛의 탓도 있었다.
“레냐르 누님이 왔나.”
“그렇겠죠.”
시온의 대답에 두 황자는 걸음을 서둘렀다. 햇빛이 쏟아지고 두고 왔던 심복들이 보였다. 도끼를 든 사내들과 대치하듯 서 있다. 푸르르고 둥근 장막이 가로막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도끼라도 던져 낼 듯 기세가 사납다.
“…오셨, 습니까?”
카테카 케슐레이는 땀범벅이다. 저 푸르고 둥근 장막은 그의 마법. 반나절은 문제없다며 장담했으나 상대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세쿤두스는 수고한 동생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괜찮나, 카테카.”
“…아직 견딜 만합니다. 형님, 비보는……?”
“음.”
“…이것으로 2개, 아니, 지오니스까지 하면 벌써 셋……!
화려한 투구의 모습에 땀으로 얼룩진 카테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무슨 힘을 품었는지도 알 수 없으나 계승전의 비보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그들의 파벌이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는 증거다.
“이제 쉬어도 좋다.”
카테카는 그제야 숨을 돌렸다. 푸른 장막이 거두어졌다. 기세 사납던 도끼 전사들은 섣불리 달려들 수 없었다. 근육질 거한,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주춤하는 전사들을 보며 세쿤두스는 흐읍, 하고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그만하시오, 누님-!”
산이 온통 울릴 만큼 쩌렁한 외침이었다. 시온과 카테카가 귀를 막으며 주저앉았다. ‘미리 말 좀 하지!’ ‘…으으, 내 귀…….’ 세쿤두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외쳤다. 막 취한 비보가 높이 들렸다.
“이곳의 비보는 이미, 나 세쿤두스의 것이오---!!!”
……. 침묵이 감돈다. 도끼 전사들의 기세가 확 꺾여 들었다. 이내 전사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갈라진 전사 떼의 사이로 걸어 나오는 여인이 있다.
“발이 빨랐구나, 세쿤두스.”
긴 은발 어깨까지 덮는다. 험한 산중에서도 걸음새는 우아함을 잃지 않는다. 손끝에 마저 기품이 어려 시리도록 아름다웠고, 그런데도 흔들림 없이 굳건하니 얼음으로 된 절벽과도 같다.
“너답지 않은걸.”
레냐르 드 볼마르크, 제1황녀.
스물넷이라고는 믿기 힘든 기품. 여인의 몸이 아니었다면 이미 페르비아스를 넘었으리라는 말조차 듣는 현왕賢王의 그릇. 그런 여인을, 배다른 누이를 마주하며 세쿤두스는 껄껄 웃었다.
“저답지 않다니, 불필요한 말을 덧붙이시기는.”
“기분 상했다면 사과하지. 비보를 눈앞에서 놓치니 조금 심통이 났나 봐.”
레냐르가 가벼이 미소 지었다.
시온은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저것은 거짓말쟁이의 미소다. 그가 늘 머금고 있기에 몰라볼 수 없었다.
“음. 오늘은 저 세쿤두스의 승리입니다. 이만 물러나시지요.”
“글쎄…….”
레냐르는 고개를 젓는다. 물러날 기색은 없고 끌고 온 전사들을 턱짓하고 있다. 세쿤두스는 여전히 비보를 높이 들고 있지만 상관없다는 듯한 투다.
“여기서 그 비보를 양도받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흠. 난 양도할 마음이 없습니다만.”
“네 마음은 별로 중요하지 않단다.”
“그래서야 강탈이지요.”
“그쪽도 나쁘지는 않지.”
레냐르 키득 웃는다. 단순한 농담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그럴 만한 힘도 있었다. 세쿤두스는 태연한 척했지만 슬쩍 이를 악물었다.
“…그리 쉽게 풀리겠습니까? 오산일 겁니다.”
“정말 오산일까?”
레냐르의 옆에 늘어선 사내들은 분명 하이더 전사들이다. 도끼를 들고 선 꼴이 흉흉하다. 아까 세쿤두스에게 제압당한 말단들과는 격이 다른 최정예들. 그런 전사가 서른이 넘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요제프 경?”
“경이라니, 도끼 쓰는 재주밖에 없는 늙은이에게는 과분합니다.”
킬킬 웃는 노인이 있다.
“그냥 단장이라 해 주십쇼, 전하.”
“그럼 요제프 단장, 어때요. 저 비보를 내게 가져다줄 수 있나요?”
“양도입니까, 강탈입니까? 뭐, 어느 쪽이든 쉽지는 않겠지만 전하의 명령이시라면야 얼마든지.”
늙은이는 키가 짤뚝하다. 그런데도 몸은 바위처럼 다부졌다. 수염은 세 갈래로 땋았고, 한쪽 눈을 안대로 가렸으며, 믿기 힘들 만큼 커다란 도끼를 꼬나쥔 채다. 세쿤두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토록 개성적인 차림새, 알아보지 못할 리가!
“요제프 하이더……!”
“오호라, 세쿤두스 전하. 이 늙은이를 알고 계십니까? 가문의 영광으로 삼지요.”
“…하이더 전사단장을 어찌 모르겠나. 한 번은 만나고 싶었지.”
공국 볼마르크의 상징, 여섯 전사단.
하이더 전사단의 우두머리인 저 노인이야말로 공국 볼마르크의 가장 뛰어난 전사 중 하나다. 풍랑 이는 바다처럼 거칠게 부닥쳐 오는 기세가 그것을 증명한다.
“…적으로는,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 * *
제국십장帝國十將이라는 자들이 있다.
대제국 코르디스를 상징하는 열 명의 장군이다. 세쿤두스의 어머니, 지금은 황비가 된 마리나 데비우스도 한때 그 일원이었다.
제국십장이던 때의 마리나는 칠련장군七鍊將軍이라 불렸다.
20년도 넘은 일이다. 지금의 마리나에게는 그때와 같은 실력이 없다. 아이를 낳았고 나이도 마흔이 넘었다. 그녀를 은퇴시킨 부상도 여전하다. 허나 세쿤두스는 아직도 어머니와 겨루어 이겨 본 적이 없다.
세쿤두스 데비우스, 최강의 육체를 가진 황자라 일컬어진다. 그런데도 은퇴한 지 오래인 제국십장에게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가 약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약할 수 없다. 다만, 제국십장이라는 이름이 더없이 높을 뿐이다.
제국십장이니 볼마르크 여섯 전사니 하는 자들이 그렇다. 나라의 상징이 되는 힘을 거머쥔 개인. 정말 산을 뭉개고 바다를 가른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완성된 괴물들, 걸어 다니는 재앙들! 저 애꾸 노인, 요제프 하이더도 그런 괴물이며 그런 재앙이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황녀 전하.”
요제프 하이더는 명령을 기다린다.
지금 그의 주인은 제1황녀 레냐르다.
“아무리 어려운 명이라도 늙은 요제프가 최선을 다해 드리지요.”
양도도, 강탈도 어느 쪽이든! 노인은 그리 말하며 또 웃어 젖혔다. 합당한 여유가 있었다. 제국십장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저 노인의 여유를 빼앗지 못한다.
“…….”
“…….”
-침묵, 소름 끼치도록.
세쿤두스 파벌의 낯빛들은 하얗게 질려만 간다. 제도에서도 요제프 하이더의 소문은 들린다. 저 노인이 마음만 먹는다면 세 황자와 심복들의 목은 바로 바닥을 구를 터였다.
참수 도끼가 목젖에 치민 것만 같았다. 죽음을 마주하니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요제프 하이더는 그런 사내다. 늙은 만큼 독한 재앙이다.
‘…요제프 하이더라니!’
시온이 작게 혀를 찼다.
‘당황스러운데, 이거…….’
그 또한 볼마르크 여섯 전사라는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시온이 가장 실감하고 있었다. 어떤 위험이 턱밑까지 쳐 밀었는지 이곳의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느꼈다.
‘팔다리 한둘은 잃을지도 모르겠는걸.’
회귀, 두 번째의 삶. 헛되이 할 수는 없다. 혼자라도 도망칠 생각이다. 그렇게라도 숙명에 매듭을 지어야만 한다. 그러나 도망조차 쉽지 않을 터였다. 계획 또한 크게 변하겠지.
‘잘 대답해라, 세쿤두스! 네 혓바닥에 우리 목숨이 달렸어!’
“…….”
시온의 마음이 닿기라도 한 것인지, 세쿤두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짙다.
“…음. 볼마르크 공의 조카 사랑이 소문 이상이군요.”
근육질 황자는 말을 고른다. 비굴해지기 위함이 아니다. 최선의 현명함을 다하기 위함이다. 떨림 가운데서도 황제의 자리를 놓지 않기 때문이다.
“요제프 단장을 제국 수도에서 뵙다니.”
“때로 사랑이 과하실 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어도, 외숙부님께는 늘 감사할 뿐이란다.”
“굉장히 놀랐습니다.”
아무리 계승전이라고 해도 여섯 전사 중 하나, 요제프 하이더를 제국 수도까지 보낼 줄이야. 볼마르크 공왕의 의도가 의심스러울 수준이다. 애초에 대제의 눈을 어떻게 피했는지.
“하지만 누님, 현명한 선택을 하십시오.”
세쿤두스가 낮게 뇌까렸다.
“완벽한 승리를 얻을 자신이 없으시다면 싸우지 않는 것만 못할 테니.”
그의 주먹은 꾸욱 쥐어진 채다. 이곳의 모두가 알고 있다. 저 주먹은 마치 철포와도 같은 위력을 자랑한다. 요제프 하이더에게는 큰 위협이 되지 않겠지만, 다른 전사들에게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충분하다.
“페르비아스 형님만 즐겁게 해 드릴 생각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선명한 아지랑이가 일기 시작했다. 생명력이든 마력이든, 기든 마나든 뭐라 불러도 좋다. 단련된 몸에 깃든 힘이 눈에 보일 만큼 선명하다. 요제프 하이더가 호오, 하고 탄성을 내었다. 상상 이상의 기세다.
“더 떠들어서 무엇하겠습니까.”
피어나는 아지랑이 뒤에서 카테카 케슐레이가 걸어 나왔다. 그 손에는 마법의 빛이 일렁인다. 시온도 한숨을 쉬며 검은 칼날을 죽 뽑아내었다. 세쿤두스의 심복들도 마찬가지로 무기를 꼬나쥐었다.
“어찌하실 겁니까. 어서 결정하시지요, 누님……!”
세쿤두스의 호기찬 외침에 요제프가 웃었다.
“하, 하하, 하-!”
최강의 육체라고 해도 아직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레냐르 전하, 동생 전하의 실력이 듣던 것 이상이군요. 어찌하시렵니까?”
“…….”
요제프 하이더의 물음에 레냐르는 조용히 턱을 매만졌다. 그리고 손가락을 두 차례 정도 튕겼다. 틱, 틱, 하고. 어딘가 짜증스러운 기색이 있었으나 금세 사라졌다.
“귀여운 면도 있구나, 세쿤두스.”
은발의 황녀가 배시시 웃었다.
여전한 거짓말쟁이의 미소다.
“네 강한 자존심에 페르비아스 자식… 아니, 오라버니의 이름까지 들먹이다니. 어지간히 급했나 봐.”
“…….”
“하지만 일리가 있어. 우리끼리 싸워서는 오라버니만 좋아하시겠지.”
그녀는 황제의 자리를 열망하고 있다. 어떤 황자 황녀가 그러지 않겠느냐마는, 어쩌면 그녀의 열망은 여덟 중 제일일지도 모른다.
“속아 주마, 동생아.”
세쿤두스의 비보가 탐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쉽게 얻을 수 있어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권좌에 성큼 다가설 것만 같았다.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때문에 열망을 조금 차갑게 했다.
“오늘은 돌아가요, 요제프 단장.”
그녀는 발걸음을 돌렸다.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하네요.”
“현명하십니다, 전하.”
눈에 보인다고 죄다 집어먹어서야 짐승이다. 대제국 코르디스의 정점이란 짐승이 차지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자리가 아니다.
“그 세쿤두스 전하를 상대로 완벽한 승리가 있기는 힘들겠지요.”
요제프 하이더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전사란 도구다. 그러나 도구라도 오래되면 신령을 품는 법이다. 늙은 전사 또한 지금은 물러날 때라고 느끼고 있었다.
레냐르 돌아선다. 나타날 때처럼 조용히, 그러나 기품 있게 걸음을 옮긴다. 요제프 하이더가 눈짓하자 하이더 전사들이 뒤를 따른다. 레냐르 드 볼마르크는 조용히 뇌까렸다.
“다음에 보자, 동생들아.”
은가루를 뿌린 듯한 눈이 늘어선 황자들을 훑는다. 레냐르는 키득 웃고 말았다. 편을 먹은 세 황자 어쩜 저리 제각각인지. 근육질의 거한, 음울한 은둔자, 알 수 없는 꼬마. 분명 동생인데도 너무 남 같아서 우스움을 참을 수 없었다.
“세쿤두스, 카테카, 그리고… 지오니스.”
* * *
“아이고…….”
카테카가 털썩 주저앉았다. 안 그래도 방 밖으로 나서는 일이 드문 은둔황자다. 결계로 체력까지 소모한 상태에서는 견디기 힘든 긴장이었다. 그는 무슨 액체처럼 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살았다!”
“음. 살았군.”
세쿤두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다. 요제프 하이더가 마음만 먹었다면 자리의 모두가 목숨을 잃었을 터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불구자다.
“요제프 단장, 생각보다 엄청난걸!”
“그런 자를 마주하고도 부상자 하나 없다니, 역시 하늘이 전하를 돕는 모양입니다!”
그들은 애써 껄껄 웃었다. 요제프 하이더란 맹수 같은 자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고 진력이 쭉 빠지는 재앙이다. 심복들은 죄다 다리를 후들대고 있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두 황자도 마찬가지다. 세쿤두스가 시온을 흘깃 바라보았다.
“넌 어떠냐, 지오니스?”
“배가 고픕니다. 돌아가시죠.”
“뭐? 으하하하하!”
생각지도 못한 답에 웃음이 터졌다. 세쿤두스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비보를 얻을 때의 어린아이답지 않은 모습 때문에 슬쩍 찔러봤는데, 배가 고프다니! 의심한 것이 바보 같을 정도였다. 심복들 또한 웃기는 매한가지였다.
‘역시 어린아이시군.’
‘세쿤두스 전하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방금 무슨 상황이 지나갔는지도 모르시는 것이 아닌가.’
와하하하- 하는 웃음소리. 조소에 가깝다. 공포에서 벗어난 안도를 되새기기라도 하듯, 그들은 신나게 웃어 젖혔다. 그러나 시온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래서 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세쿤두스는 열한 살 동생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래. 맛있는 식사를 하자꾸나. 제도의 고급 식당, 내 별궁의 특급 요리사, 무엇이 되었든 최고를 준비해 주지. 될 수 있으면 고기로!”
“그럼 어서 돌아가시죠.”
“음. 조금만 기다려라. 우스운 말이지만, 기력이 빠졌거든.”
그래도 비보를 얻었으니 너무 한심하게 보지는 말라고! 근육질 황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심복들은 물론 카테카도 킥킥 웃었다. 요제프 하이더를 마주한 심정은 모두 같았다. 그러나 시온은 끈질기게 말한다.
“그래도 가셔야지요.”
“지오니스, 조금만 쉬었다 가자… 니까……?”
세쿤두스가 말을 흐렸다. 시온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던 탓이다. 또 그 눈이 시퍼렇게 이글거린 탓이다.
“형님.”
기세가 살벌했다. 짜증스럽다 못해 분노한 것처럼 보였다. 시온은 조용히 손짓한다.
“잠깐, 귀를 가까이.”
낮은 목소리에, 그 싸늘한 눈에 세쿤두스는 움찔 떨고 말았다. 허나 자존심이 상할 틈도 없이 시온은 그에게 속삭인다. 아직 웃고 있는 심복들에게는 들리지 않게. 그러나 세쿤두스의 뇌리에 박히도록.
“그만 닥치고 일어나십시오. 멍청한 소리도 정도가 있으니.”
“…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세력도 무엇도 없는 꼬맹이 지오니스가 제2황자 세쿤두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노보다도 당혹이 짙다. 그러나 시온 멈추지 않는다.
“적의 변덕으로 살아 놓고는 그 자리에서 담소를 나눕니까?”
시온은 거의 으르렁대고 있었다. 마지막 예의는 놓지 않았으나 분노를 숨길 수 없다.
“기어서라도 도망쳐야 하는 때입니다.”
그는 빠르게 쏘아붙인다.
“벌레도 상처를 입으면 즉시 자리를 떠요. 그런데 주저앉아서 농지거리… 하! 전장에 익숙하다 들었는데 헛소문이었군요. 그래 놓고는 감히 황제의 자리를 논합니까?”
멍청한, 멍청한, 멍청한! 셀 수 없는 전장을 넘어온 메리언의 시온이 보기에 그의 행동은 더없이 어리석고 한심하다. 지금도 애가 탈 지경이었다.
“요제프 하이더입니다. 그 요제프 하이더요!”
볼마르크 여섯 전사 중의 하나, 그 강함과 변덕을 모르겠는가. 지금이라도 달려와 그들 모두의 목을 베고 그 머리로 공놀이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시온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조급함은 물론 경멸마저 담겼다.
“마음대로 하세요, 난 도망쳐야겠으니.”
“…네가 옳다, 지오니스.”
세쿤두스가 곧바로 일어섰다.
그 얼굴 붉다. 부끄러움이다.
“퇴각한다, 일어서!”
“““예에?”””
볼멘소리가 나왔다. 심복과 카테카는 이유를 알지 못하니 당연하다. 그러나 세쿤두스는 잔뜩 얼굴을 굳히며 재차 외쳤다.
“명령이다. 무엇하고들 있나!”
심복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들은 군인이다. 명령에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익숙하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열을 맞추어 모여 섰다.
“서둘러 궁으로 돌아간다!”
* * *
그들은 산속을 달렸다.
산행이 익숙해 큰 소리가 나지는 않았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시온과 카테카는 심복들의 도움을 받았다. 세쿤두스는 달리면서 시온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떠날 때, 시온이 스치듯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훌륭하신 용단입니다, 형님.’ 그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꾸짖던 속삭임도, 비보를 얻으라 말하던 꼬드김도 모두 선명했다.
“너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삼킨 의문이 속에서 맴돌았다.
‘…너는 대체 무엇이냐, 내 동생아?’
맴도는 의문은 탄식에 가깝다.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은 불안이 되었다. 그러나 토하지 않았다. 약속했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현명한 선택이었을까. 도무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옆구리에 낀 비보가 유난히도 차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