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세 파벌은 진을 치고 대경합을 기다린다.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세 우두머리는 자리를 지키면서도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다 한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이거 가시방석이네요.”
시온이 중얼거렸다. 그는 세쿤두스 파벌, 이백의 장정 사이에 있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은 그를 피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카테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응. 집에 가고 싶다…….”
카테카 케슐레이는 은둔황자라고 불리곤 했다. 제 별궁 밖으로 나서는 일이 거의 없기에 그러했다. 날카로운 경계심들이 은둔황자의 예민함을 줄곧 콕콕 찔렀다. 그렇게 고개를 젓고 있자니 누군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몸집이 퍽 비대했는데, 그들 파벌의 인물은 아니었다.
“지, 지, 지오니스! 여기 있었구나! 카테카 형님도!”
달려온 것은 네불로 레 에티에르, 제4황자. 그는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레냐르도 페르비아스도 네불로를 달갑게 여길 리가 없으니 여기까지 왔으리라.
“혹, 혹시 나 여기 있어도 될까?”
“그렇게 하시죠.”
거절할 이유도 없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불로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테카는 시온의 결정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이는 카테카가 더 많다지만, 이미 시온에게 남들과 다른 면모가 있음을 눈치채었기 때문이다.
“…그럼, 나도 부탁해도 될까?”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꺼내는 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상티아 호스타니오, 제2황녀. 조용한 성정 탓에 카테카만큼이나 마주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녀도 있을 곳을 찾아 떠돌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이분이랑 같이 말이야.”
“…결례를 용서해 주시기를.”
갓난아기를 안아 든 시녀가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품에 안긴 갓난아기, 바바토 루루디스. 제국의 6황자. 어디에 있어야 할지 고민하던 바바토의 시녀를 상티아가 끌고 온 듯했다.
“그럼요. 편하게 계세요.”
“…뭐, 마실 거라도 가져오라 하지요…….”
시온도 카테카도 형제자매들을 막지 않았다. 세쿤두스 파벌은 다른 두 파벌에 비해 세력이 약하다. 다른 형제자매들을 보호하는 것은 약간의 명분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카테카가 제 아공간을 열어 과자 따위를 꺼냈다. 네불로와 상티아, 바바토의 시녀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나마 온화한 세쿤두스에게 오기를 잘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은 긴장한 기색이 엿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시온은 빙그레 웃으며 카테카에게 말을 걸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여 분위기를 누그러트릴 생각이었다.
“참, 카테카 형님. 요즘에 푹 빠진 책이 있으시다면서요?”
“아… 심연의 순례자라고, 알아……?”
“어, 그거! 읽어 봤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그들은 신이 나서 떠들었다. 무원팔법이니, 일순의 우주니, 가장 깊은 곳의 아홉이니 하는 책 속의 이름들을. 어린아이처럼 떠드는 그들의 모습에 네불로나 상티아, 바바토의 시녀도 점차 마음을 놓았다.
“응?”
뚱보 네불로가 제 머리를 매만졌다. 차가운 무언가가 떨어진 듯했다. 네불로는 과자 하나를 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비가 오… 나……?”
하늘을 올려다본 네불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각 진영 곳곳에서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가 오나 고개를 들고, 이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상티아 또한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웬, 먹구름이 이렇게?”
“이렇게 난데없이, 폭풍이라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시온이었다.
“아니야, 저건……!”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몰아치는 광풍. 그 중심에는 한 사내가 있었다. 허리까지 닿는 흰 수염, 고목을 깎아 만든 지팡이, 길게 늘어진 로브. 누구보다 마법사스러운 차림새를 자랑하는 노인. 구름과 비마저 다스리는, 여섯 별의 마법사.
“…헤르마이 메르헤스다!”
* * *
먹구름이 갈라졌다.
광풍과 폭우와 우레를 두르며 사내는 천천히 내려앉았다. 올라탄 먹구름이 한 마리의 검은 뱀과 같았다. 그 앞에서는 천오백의 군병이니 마도병정이니 하는 것들이 더없이 초라했다.
“인사하지.”
노마법사는 그들을 내려본다. 군세뿐만 아니라 대제의 아들딸조차 당연하다는 듯이 깔아 보았다. 그 눈에는 묘한 분노의 기색 있었고 특히 페르비아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내 조용히 읊조렸다.
“헤르마이 메르헤스다.”
그는 수석마법사Optimus Magus다.
대제국 코르디스, 넓디넓은 땅의 모든 마법사를 발아래에 두기에 그러하다.
“위대하신 콘티누아 대제께 계승전과 대경합의 모든 것을 위임받아 왔지.”
그는 여섯 별의 마법사다.
작은 나라와도 같은 의지를 그 몸에 품고 있기에 그러하다.
“그러니 이 노인네의 입술이 건방져도 알아서들 이해해 주길.”
여덟 황자 황녀를 내려보는데도 어색함이 없다. 그는 아직 황제가 되지 못한 풋내기들을 상대로 공손해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 노마법사는 팔현인회의 일원이며 제국마도원의 대학장이기에 그러하다.
“알고들 있겠지만.”
헤르마이의 시선이 페르비아스를 향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어 대경합에 이르렀다. 계승전의 관리자로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어.”
말과는 달리 그 눈빛 날카롭고 강렬하다. 수제자이자 양아들을 세뇌한 작자에게 향하는 눈이 고울 수는 없다. 대마법사의 시선에 페르비아스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 뻔했다.
“400년 전의 대경합은 황금대제를 낳았으나, 그를 제외한 모든 계승권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선언하듯 내뱉는다.
“고결한 피가 흐를 것이다.”
네불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티아나 바바토의 시녀도 정도만 다를 뿐, 겁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의 세력으로는 대경합에서 무사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나, 대제께서는 자비로우신지라.”
노마법사는 말한다.
“모두가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며 구원의 장막을 준비하셨다.”
그는 손짓한다. 대지에서 장막이 솟는다.
“경합을 피하려는 자 있는가? 부끄럽게라도 살아남고자 하는 자 있나? 그렇다면 장막에 숨어 제단의 뿔을 잡아라.”
마법의 천으로 된 장막의 안에는 뿔이 달린 제단이 있다.
“비보가 있다면 내어놓아야 할 터고, 황제의 자리를 취할 수도 없겠지만 목숨만은 건질 테니.”
“나, 나 먼저야……!”
가장 먼저 뛰어든 것은 네불로 레 에티에르, 제4황자. 이어서 상티아, 또 바바토와 시녀. 애초부터 싸움을 피하고자 했던 이들. 누구도 그들을 막지 않았다.
“셋이 싸움을 피했군.”
헤르마이가 장막에 들지 않은 이들을 보았다.
“그럼 다섯이 남았나.”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제1황녀 레냐르 드 볼마르크.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
제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
제5황자 지오니스.
“권좌에 앉으려는 이도, 도우려는 이도 있겠지.”
카테카와 시온은 발을 움직여 세쿤두스의 뒤로 향했다.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러고는 물었다.
“준비되었는지 따위는 묻지 않겠다.”
같은 마음을 품고 여기에 섰다.
그들은 황제의 자리를 원한다.
자신의 파벌이 계승전의 끝에서 승리를 거머쥐기를 원한다. 다만 회귀한 영웅의 눈만이 비밀스레 빛날 뿐이다.
“대제 폐하의 핏줄들아.”
노마법사 엄숙하게 선포한다. 모든 것을 위임받은 그의 말은 콘티누아 대제와 같은 권세가 있다.
“그대들의 이름을 선포하라.”
* * *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요.”
제1황자, 금발금안의 사내는 당당히 외친다.
그 미소는 오만으로 적셔져 있다.
옆에는 옥색 눈의 사내, 점쟁이 아메투스.
지독하게 매서운 검 솜씨의 사내.
“나야말로 제국의 맏이, 정당한 장자.”
루틸리움의 귀족들이.
유구한 전통의 수호자들이 그를 지지한다.
“욕심은 없어도 사명은 있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할까? 이 페르비아스 아니면 누가 천년 제국의 주인 되기에 합당할까?”
고귀함과 고결함으로, 오만할 만큼의 책임감으로. 책임감이라는 이름의 오만함으로. 그는 자신의 정당함을, 또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다.
“너무도 자명하지만, 내 동생들은 모르는 듯하니 가르쳐 줘야지. 이 또한 맏이의 의무니까.”
취한 비보는 둘.
‘뒤집힌 천구’와 ‘쉠의 반지’.
거느린 것은 일천의 군세.
귀족들이 보내온 기사 중의 기사들.
또 황금 병거나 값비싼 마도병정이 더러.
지나치기까지 한 정예 병력의 군세.
“대경합, 마침 좋은 기회지 않겠나?”
* * *
“레냐르 드 볼마르크입니다.”
제1황녀, 은발의 황녀는 조용히 선언한다. 여전한 기품을 잃지 않고 있다. 제국의 안녕을 위해, 또 평안을 위해. 독선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곁에는 볼마르크 여섯 전사 중 하나, 요제프 하이더가 도끼를 꼬나쥐고 섰다.
“어찌 앉아 보지도 못한 권좌에 대해 논하겠습니까? 오만일 뿐이겠지요.”
허? 페르비아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레냐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볼마르크의 문장을 가슴에 새기고 있다.
“허나, 짊어진 이들이 승리하여 달라 말하는군요.”
소유한 비보는 둘. ‘강철 혀뿌리’와 ‘청천휘’. 그녀의 수하, 요제프 하이더를 위시한 하이더 전사단 삼백. 늑대의 영혼을 제 몸에 품은 전사 중의 전사들.
“대경합, 피하지 않겠습니다.”
* * *
“음. 세쿤두스 데비우스!”
제2황자, 근육질 황자가 껄껄 웃어 젖혔다.
“내 소개에 앞서, 말해라, 카테카!”
“…부담스럽게…….”
작은 황자가 앞으로 나섰다. 키는 작달막하고 눈 밑은 검다. 그럼에도 반듯한 이목구비는 가려지지 않았다.
“…제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 세쿤두스 형님을 지지합니다.”
카테카는 은둔황자라 불렸다. 제 궁에서 두문불출하기에 그러했다. 두려움이나 불안 따위 때문이었다. 세쿤두스는 그런 카테카를 꺼내 왔다. 그런 사내였다. 단순하기에 더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 같은 이였다.
“약간 멍청하기는 해도… 좋은 형님이지요…….”
“멍청하다니!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지!”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 맹수의 포효를 닮았다. 능히 백만을 호령할 법한 장수의 기세가 거기에 있다.
“나는 말이오, 영민하지 못하오.”
강철 같은 육신, 고요한 눈동자.
“그래서 싸움을 피하는 법을 몰라!”
취한 비보는 둘, ‘하늘 결정 투구’와 ‘아름드리 장창’. 뒤에 늘어선 것은 이백의 장정. 촉망받은 군부의 젊은이들. 은둔황자 카테카와 비밀을 감춘 황자 지오니스와 그의 비보 하나.
“해 봐야지 어쩌겠소, 대경합!”
* * *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
“…….”
“…….”
세 파벌의 주인은 서로를 흘끔거리다 이내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은 시온에게로 향한다. 헤르마이 메르헤스도 마찬가지였다. 세쿤두스가 입을 떼었다.
“네 차례다, 지오니스.”
“아. 저도 말해야 합니까?”
시온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면 비보를 포기해도 좋지.”
“몸에 깃든 건데 어떻게.”
페르비아스의 말에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저 지오니스, 5황자.”
시온 폴링라이트,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온 회귀황자. 그러나 누구도 모른다.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내세우는 것은 지오니스의 이름.
그 몸에 취한 비보는 하나.
센 소르티의 역작 ‘마갑 발지아트’. 허나 이조차 이름을 숨기고 있다. 거짓된 이름 ‘흑검 자무크’라며 뻔뻔하게 속여 대고 있다.
“세쿤두스 형님의 파벌에 있습니다. 제 비보도 세쿤두스 형님 것으로 해 주시죠. 내어놓을 수는 없지만.”
세쿤두스는 시온을 내려보았다.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동생이다. ‘너 정말 무슨 생각인 거냐, 지오니스?’ 황제의 자리에 닿겠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을 텐데.
“좋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입을 열었다.
“세쿤두스, 레냐르, 페르비아스. 대제의 이름으로 선포하니, 대경합의 영광은 그대 중 하나에게 돌아가리라.”
페르비아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이름이 가장 뒤에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르마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윽고 때가 되었으니,”
광풍이 몰아친다. 그러나 흔들리는 이는 없다. 그 눈빛 또한 마찬가지로 모두 결연하다.
“대경합이다.”
31화
“대경합의 규칙은 단순하다.”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입을 열었다.
“열 개의 비보 규칙은 일정 부분 유효. 여전히 가장 많은 비보를 취한 자가 승리한다.”
노마법사가 세 손가락을 들었다.
“발견되지 않은 비보는 셋. 비보 하나당 한 번씩, 세 번의 경합을 치른다.”
“…이전과는 조금 다르군요, 대학장.”
페르비아스가 불만을 토했다. 세 번의 경합이라니? 400년 전의 대경합은 모든 세력이 동시에 맞붙는 전면전의 꼴이었다. 그래서 병력을 이리 잔뜩 끌고 온 것이고. 페르비아스의 물음에 헤르마이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천년 제국 역사상 단 두 번뿐인 특례다. 완전히 똑같아도 이상하겠지.”
“…뭐, 좋습니다.”
헤르마이의 기세가 사납다. 페르비아스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를 더 자극해서는 좋을 것이 없다.
“그럼 경합이라면, 무슨 경합을?”
“그대들의 몫이다, 그대들이 원해서 벌인 대경합이니.”
헤르마이의 눈, 여전히 싸늘하다.
“파벌이 셋이고 경합도 세 번이니 돌아가며 무엇을 겨룰지 정하면 되겠군. 너무 편파적이지만 않다면 용인하지.”
허? 페르비아스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파벌이 각자 경합을 정하라고? 400년 전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의 눈이 금빛으로 번뜩이기 시작했다.
“…편파적이라는 기준은 누가?”
“내가.”
노마법사가 제 수염을 쓸었다.
“콘티누아 대제께 위임받은 이 헤르마이가 판단한다.”
“그럼 경합의 순서는, 아주 제비라도 뽑으시려고?”
“나쁘지 않군. 제비를 뽑아 정하지.”
“하하, 이거야 원…….”
헤르마이 태연히 대답하고 페르비아스가 이마를 짚었다. 그는 조용히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는데, 자그마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우습지도 않군. 중얼거림은 곧 멈추었고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고개를 쳐들었다.
“아주 지랄을 하는군.”
* * *
“…….”
“…….”
적막이 가득하다.
비와 바람조차 잠잠해졌다. 천오백의 군세와 먹구름과 황자 황녀 모두의 시선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다 이내 천천히, 하늘에 선 대마법사에게로 향했다. 헤르마이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그의 입가는 잔뜩 뒤틀려 있다.
“대제 폐하의 대리자에게 할 만한 발언이 아니었던 듯한데?”
“아마 맞게 들었을 거요.”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부황 폐하의 권위에 똥칠하는 꼴을 참을 수 없었거든.”
“말이 험하군, 1황자.”
“그쪽은 장난이 심하지, 대학장.”
대제를 닮은 금안이 사납게 헤르마이를 쏘아보았다. 대학장의 기세는 여전히 태산 같지만 페르비아스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그는 으르렁대듯 말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대경합이란 말이지?”
신경질적이다 못해 분통에 찬 목소리였다. 페르비아스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했다.
“세 번으로 쪼개고 온갖 규율을 덕지덕지 붙여? 이름만 거창하면 대경합인가? 이건 완전히 애새끼들 소꿉놀이야!”
의도가 뻔해도 너무 뻔했다. 혼자 독주를 벌인 페르비아스를 견제하겠다는 뜻이겠지. 어느 정도야 예상했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했다.
“노골적인 것도 정도가 있소, 대학장. 대제께 위임받았다고 지껄일 거라면 공정을 지키시오.”
“놀랍군, 1황자.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대가 나를 삿대질하며 공정을 말하나?”
“당신 제자 일에는 별로 죄책감이 없어. 그 콧수염쟁이는 처음부터 곳곳에서 돈을 받아 처먹었다고!”
대학장과 1황자는 서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쪽은 팔현인회의 일원, 한쪽은 대제의 맏이. 황제 다음 가는 세력가끼리 다툼을 벌이니 감히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대경합을 승인하지 말았어야지. 타국에서 황실을 비웃을 이유를 또 하나 늘려 준 꼴 아닌가!”
“대제의 젊을 적이 생각나는군.”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작게 웃었다.
“아주 똑같이 버르장머리가 없어.”
“황제에 대한 모독도 불사하겠단 말인가, 늙어 빠진 헤르마이?”
“아들의 추태만큼 아비를 모독하는 일이 또 있었던가?”
“그렇게 말하면 나도 추태를 부린 아들을 하나 알지. 돈을 받아먹는 콧수염…….”
“적당히 닥쳐라, 페르비아스. 머리에 피가 몰려도 사리 분별은 해야지.”
몇 줄기 번개가 내리쳤다. 자색이었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대마법사의 분노의 체현이었다. 그 위용에 페르비아스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넌 아직 황제가 아니다, 애송아. 제국마도원이 공식적으로 다른 파벌을 지지하는 꼴을 보고 싶으냐?”
“읏…….”
페르비아스가 순간 누그러들었다. 금빛 눈은 여전히 이글거리나 입술은 닫혔다. 흥분해서 말이 심했음을 깨달은 탓이다. 상대는 헤르마이 메르헤스. 아무리 그래도 서른도 안 된 페르비아스가 들이받을 만큼 쉬운 사내가 아니다.
“…….”
“건방진 꼬맹이가 조용해졌군.”
대학장이 나무지팡이를 매만졌다. 그는 불쾌감을 느꼈다. 나이를 먹으며 많은 감정이 둔해졌는데 이상하게도 하나뿐인 양아들이자 제자를 건들면 불쑥 화가 솟았다.
“하지만 그래, 아예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바야.”
대제국 코르디스의 황위계승전이다. 온 대륙의 관심사가 몰렸다 해도 과장이 아니다. 위엄은 겉치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
“비보 하나만 오고 가서는 대경합이라 부르기에 초라하지. 마침 대제께서도 말씀하셨다. 원하는 만큼 제 비보를 걸어도 좋다고.”
“-걸어도, 좋다고요?”
되물은 것은 은발의 황녀, 레냐르다.
“옳게 들었다. 경합을 발안하는 자는 제 비보를 내어놓을 수도 있다. 참가하는 자는 같은 수의 비보를 내놓아야 하지. 이는 모두 승자의 것이 되리.”
“…다소 복잡하군요.”
“황제의 자리 정하는 데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레냐르가 입술을 매만졌다. 얼추 이해했으나 다 파악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떤 변수와 빈틈이 있는 규칙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만약에…….”
은발의 황녀는 재차 묻는다. 이 규칙을 더 깊게 알기 위함이다.
“제가 경합을 발안하며 이 ‘청천휘’를 내놓았다고 하지요.”
“이 경합에 끼어들려면 저들도 비보를 하나씩 내놓아야지.”
“둘 모두 비보를 내어놓고 참가한다면?”
“승자가 4개의 비보를 취하겠어. 경합 한 번에 많은 수가 움직이지?”
비보의 숫자, 세쿤두스와 레냐르와 페르비아스가 2개씩. 시온이 1개. 이것들을 얻기 위해 몇십 일을 고생했는데 싸움 한 번에 4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오갈지도 모른다. 황자 황녀들의 얼굴빛이 변했다.
“만약 참가자가 내놓을 비보가 없다면, 그러고 싶지 않다면?”
“그럼 포기해야지.”
“발안자를 뺀 모두가 포기하면 어떻지요?”
“처음의 하나를 발안자가 갖는다.”
이거 괜찮은걸. 페르비아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약간의 열세 정도는 얼마든지 뒤집을 만하지 않겠는가.
“설명이야 더 해 줄 수 있지만 그리해서 무얼 할까, 여기는 학교가 아닌 것을. 직접 하며 배워라.”
페르비아스는 다시 열기를 되찾았다. 세쿤두스는 카테카와 의논하고 레냐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헤르마이는 그런 황자 황녀들을 내려보았다.
“이미 많은 시간을 끌지 않았나.”
* * *
“음. 대학장의 말대로요.”
세쿤두스가 성큼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페르비아스와 레냐르에게 밀리는 감이 있다. 둘만 말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남들보다 머리가 셋은 커다란 거한은 유독 커다란 목청을 자랑하듯 외쳤다.
“차례로 싸우라는 말 아니오! 형님도 누님도 뭐 그리 어렵게 이야기하시는지 모르겠군!”
호탕한 웃음소리. 제 우두머리의 웃음에 이백의 장정이 따라 웃었다. 하, 하하, 하-! 훈련이라도 했나 싶을 만큼 한 목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호령하는 듯한 웃음은 천오백의 군세를 넘고 먹구름에 닿을 만큼 커다랗다.
“자, 대학장. 빨리 제비나 뽑읍시다! 언제까지 밍기적대겠소!”
“말 한번 시원하게 하는군.”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껄껄 웃었다. 그도 말이 너무 길다 싶던 차였다. 페르비아스가 작게 혀를 찼다. 아직 생각할 것도 항의할 것도 많은데 이런 식으로 상황이 정리되어서는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마침 제비를 준비해 왔지.”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무슨 대들보 같은 기둥 셋이 헤르마이가 타고 있는 먹구름에서 떨어져 내렸다. 헤르마이는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턱짓한다.
“하나씩 골라라.”
페르비아스가 가장 빨랐다. 그 발걸음에는 약간의 조급함이 있었다. 세쿤두스는 태연히 뒤따랐고, 레냐르는 그런 둘을 살피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각자 기둥을 하나씩 고르고 나자 헤르마이가 지팡이를 쓸었다.
다 됐으면 열어 보지. 기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놀랍게도 어떤 종류의 두루마리였다. 세쿤두스보다 커다란 두루마리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지만, 헤르마이의 손짓에 두루마리들이 풀려 나왔다.
안에는 숫자가 쓰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이 ‘1’, ‘2’, ‘3’뿐이었다. 단촐하다 못해 성의 없다. 숫자를 뽑은 황자 황녀도 김이 빠진다는 듯한 기색이다. 슬쩍 올려다보았더니 헤르마이가 헛기침을 했다.
“열 개의 비보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고생이었는데. 제비뽑기까지 거창할 이유는 없지.”
“…그래도 숫자만 달랑 써 놓을 거면 왜 이리 무식하게 커다란 두루마리를…….”
“케헴! 자, 순서가 정해졌겠지!”
헤르마이가 말을 돌렸다. 시온은 그의 나이를 고려해서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레냐르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 ‘1’은 세쿤두스, ‘2’는 레냐르, ‘3’은 페르비아스의 손에 뽑혔다.
“세쿤두스가 처음, 제가 중간, 페르비아스 오라버니가 마지막이군요.”
“정리를 잘하십니다, 누님.”
“대학장의 말대로, 시간을 많이 끌었잖니?”
세쿤두스가 턱을 쓸었다. 그는 굵은 목을 들어 헤르마이를 바라보았다.
“음. 제가 처음이 되었소, 대학장! 경합은 언제 시작하는 것이오?”
“그때는 대제께서 정해 주셨지.”
먹구름 위에서 헤르마이가 답했다.
“바로 내일, 동이 다 튼 직후에.”
대경합을 고하는 말에 세쿤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때가 되었다. 다음 황제를 결정짓기 위한 싸움의 결말이 가까웠다.
“내일 아침이라. 그 전까지 뭘 겨룰지 정해야 한다니. 이거 바쁜데.”
“불만인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소.”
그는 투덜대는 대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애초에 변명하는 법 따위를 배우지 못한 사내였다. 그는 제 편을 들어주는 두 남동생을 향해 고갯짓했다.
“일단은 한숨 푹 자야겠군. 가자, 카테카, 지오니스!”
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와 종종걸음으로 제 형의 뒤에 따라붙었다. 이백의 장정이 이미 진영을 꾸려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온 또한 그들과 같이했다. 그는 푸른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세쿤두스, 레냐르, 페르비아스 순이라.’
페르비아스는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섰고 레냐르는 의중을 알기 힘든 얼굴로 무언가를 궁리한다. 헤르마이는 그런 황자 황녀들을 내려보고 있다. 기억 속의, 19년 전의 계승전 대경합에서 보았던 풍경.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다.
‘이것까지 이전대로군, 기막힐 만큼.’
그때도 그랬다. 페르비아스는 대경합이 벌어지게끔 억지를 부렸고, 헤르마이는 그런 페르비아스를 견제하려 룰로 그를 옥죄었다. 레냐르와 세쿤두스의 불가침조약을 제외하면 제비뽑기의 순서까지도 모두 회귀 전과 같다. 시온이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그러니 어찌 미소 짓지 않을까?
‘대경합의 흐름에 이변은 없어.’
32화
“대경합, 대경합 해 놓고 생각보다 째째한걸.”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그리 말하며 고깃덩어리를 크게 베어 물었다.
“뭐 이리 이것저것 복잡하게 따지는지.”
“페르비아스를 견제하려는 것이겠죠.”
“음. 그래서 별말 않기는 했다만. 어째 어렵기는 해.”
세 번의 경합이니, 겨룰 종목을 정하고 비보를 거니……. 이래서야 흥이 떨어진다고. 세쿤두스가 시온을 흘끗거렸다. 그는 막 설탕으로 범벅이 된 쿠키 하나를 베어 무는 참이었다.
“그보다 지오니스, 너 그걸로 괜찮은 거냐? 내일 동트면 시작인데 제대로 챙겨 먹어라.”
“저야말로 형님들에게 묻고 싶은데요. 원래 이렇게 드십니까?”
통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식탁이었다. 기름기나 소스 따위 없이 잔뜩 쌓인 살코기들은 세쿤두스의 것이었고, 아기자기한 설탕과자나 호박파이는 시온의 것이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지나칠 정도로 기름내를 풍기는 튀김이나 볶음 따위가 한가득했다.
“특히 카테카 형님, 진짜 그러다 쓰러져요.”
“…네가 할 말이냐, 지오니스……?”
카테카 케슐레이는 그리 말하며 튀겨 낸 생선을 입으로 옮겼다. 척 봐도 느끼해 보이는 소스를 잔뜩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카테카는 느끼하고 기름기 흐르고 맛이 진하지 않다면 음식으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단것보단, 이게 낫지…….”
그는 크림을 잔뜩 넣어 만든 면 요리를 후루룩 신나게 빨아들였다. ‘저러다 제 명에 못 살지.’ 시온이 고개를 저으며 시럽으로 범벅이 된 빵을 입으로 옮겼다. 당장이라도 당이 올라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달았고, 그래서 참 맛이 좋았다.
세쿤두스는 두 동생을 보며 무언가 한마디를 던지고 싶었으나 굳이 하지 않았다. 둘 다 아직 어린데 입맛이 어쩌다 저렇게 뒤틀렸는지. 근육질 황자는 그리 생각하며 퍽퍽하고 밍밍한 닭가슴살을 씹었다.
“헌데 규칙이 생각보다 복잡한 것은 사실이야. 무슨 전략이 필요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다만…….”
근육질 황자가 코웃음치며 입을 닦았다.
“난 어려운 것이 싫다. 그냥 이기면 될 일이 아니겠어!”
“옳습니다.”
얼핏 생각 없어 보이는 발언이었으나 시온은 망설임 없이 동의를 표했다. 세쿤두스 데비우스의 속이 그렇게 얕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수 싸움을 하려 들어서는 휘말릴 뿐이겠죠. 단순하게 나가는 편이 유리합니다.”
“음.”
“형님이 생긴 것만큼 멍청하시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상대는 레냐르 누님과 페르비아스 형님 아니겠습니까.”
“…맞는 말을 참 기분 나쁘게 하는걸.”
시온이 킬킬 웃었다. 카테카도 소리 죽여 웃기에 세쿤두스도 슥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때는 한없이 수상하지만 이럴 때는 또 정감이 가는 동생이었다.
“사실 이미 어느 정도 결정이 섰다.”
근육질 황자가 팔짱을 꼈다.
“추가 비보는 걸지 않겠어. 우리가 우세하니 많은 비보가 오가게 할 필요는 없겠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현명…….”
세쿤두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무얼 겨룰지도 정했다.”
“무엇입니까?”
“단순하다. 무어냐면…….”
그는 작은 소리로 답했다. 시온도 카테카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요.”
“…반대할 이유, 없음…….”
두 동생의 동의에 힘을 얻은 듯 세쿤두스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음. 그렇지? 내게 딱 들어맞지 않느냐!”
껄껄 웃는 세쿤두스를 보며 시온이 턱을 쓸었다. 그의 제안은 회귀 전과 같다. 나쁘지는 않았으나, 약간 첨언할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형님, 다 좋지만 이렇게 해 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응?”
“…에 기별을 보내서 …를 청할 수도 있을 텐데요.”
“…자세히 이야기해 봐라.”
시온의 제안은 세쿤두스의 흥미를 끌었다. 이미 다 짜 놓은 계획이었기에 시온은 망설임 없이 제 의견을 전했다. 세쿤두스와 카테카의 낯빛이 몇 차례나 변했다.
“…그럴듯해. 그러나 다소 억지스럽군.”
“허나 괜찮지 않습니까?”
“가능하다면야!”
시온이 키득 웃었다.
“불가능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밀쟁이는 책략이 익숙하다.
“페르비아스 형님은 먼저 억지를 부렸으니 별말 하지 못할 테고, 레냐르 누님과는 불가침 아닙니까. 헤르마이도 깐깐하게 굴고 있지 않고요.”
“…으음. 그렇다면 내 생각보다는 더 수월하겠지만.”
“대경합의 시작입니다. 분위기를 휘어잡아 기세를 가져오시죠.”
“…….”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공공연히 떠벌릴 만한 제안이 아니지만 그들의 파벌에 충분히 힘을 실어 줄 만하다. 세쿤두스가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마음이 시온의 제안에 쏠리고 있음을 느꼈다.
“내일 동틀 때까지 맞출 수 있을까.”
“그 또한 안 될 이유가?”
시온이 배시시 웃었다. 어린아이스럽다. 그래서 또 묘했다. 마치 그가 무슨 제안을 할지 알고 있기라도 한 듯 딱 맞는 개선안을 내어놓다니. 피가 섞인 동생이지만 도저히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온의 수상함은 이미 덮어 놓기로 했다. 내일의 싸움이 우선이니 세쿤두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좋다, 지오니스. 네 뜻대로 하겠다.”
* * *
평원에 동이 텄다.
천오백의 군세 위로 햇빛이 천천히 드리우기 시작했다. 어렴풋한 새벽의 낌새 가운데에서 번쩍이는 것들이 많다. 날카롭고 사나운 날붙이들이다.
천이 정렬했다.
이백은 말 탄 기사고 팔백은 그들의 종자나 마도병정 따위를 움직이기 위한 병력이다.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를 따르는 귀족들이 보내온 자들이다. 제국 군부에 속하지 않은 귀족 사병 중에는 엄선되고 엄선된 이들이라는 뜻이다.
계승전에 동원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았고, 또 지나치게 뛰어났다. 작은 도시국가를 능히 무너뜨리고도 남을 군세였으며 그들도 그것을 알았다. 오만한 눈으로 주위를 고요히 노려보는 것은 그러한 까닭이었다.
그들은 겸손한 체하며 아집을 감췄다. 칼집에 숨겨야 할 만큼 잔뜩 날이 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에 칼날 숨겨 놓고 점잖게 정렬해 있다. 그런 페르비아스의 세력 비웃기라도 하는 듯 웃음 섞인 노랫소리 울리기 시작했다.
“하, 하, 하-!”
얼핏 짐승의 목청처럼 깊게 떨리는 소리였다. 그러나 분명히 사람의 소리였다. 그리 노래 부르는 무리의 앞에는 작달막한 늙은이 있다. 도끼를 들었고 애꾸눈이다. 볼마르크 여섯 전사 중의 하나, 요제프 하이더는 전장의 노래를 낄낄댄다.
“하이더-훔!”
“““하, 하, 하이더—훔!”””
인간이지만 늑대인 자들이 다 같이 낄낄대었다. 삼백의 하이더 전사들이 한데 모였다. 늑대들의 우두머리는 애꾸 노인네고, 그의 주인은 고귀한 여인이다. 은발 아름답게 늘어뜨린 제1황녀, 레냐르 드 볼마르크.
“…….”
“…….”
페르비아스 천의 군세 거느렸고 레냐르의 뒤에 삼백 늑대가 따른다. 1황자와 1황녀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도저히 남매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싸늘한 눈빛이 오고 갔다.
곧 쿵, 하는 소리가 낮게 깔렸다.
싸늘한 눈빛을 밀어내고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묵직한 발걸음 사이사이 자그마한 금속음이 날카롭다. 데비우스의 깃발 아래에 모인 군부의 이백 젊은이. 그 앞에는 세 황자 있고, 개중에도 근육질 황자가 가장 앞이다.
“음. 좋은 아침들입니다.”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페르비아스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레냐르는 미소나마 지어 주었다. 곧 하늘에서 웃음이 터졌다.
“아주 좋은 아침이지. 형제자매들끼리 다투기에는 말이야.”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구름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용과 같이 배배 꼬인 구름에 턱 걸터앉아 수염을 쓰다듬는 꼴이 참 마법사스러웠다.
“형제 싸움에 끼어들기도 뭣하니 이 늙은 헤르마이는 비보나 얼른 내어놓고 빠지도록 하겠네.”
그의 손에는 네모난 막대 같은 것이 있었는데, 손목을 가볍게 젓자 촤륵 하고 펴졌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쥘부채였다. 헤르마이는 그것을 몇 차례나 접었다 펴며 말했다.
“비보, ‘삼각너울 부채’. 이름도 멋들어지지만 품은 힘은 더 대단해.”
하여간 누가 만들었는지! 자화자찬하는 노마법사를 보며 시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름 진짜 별로다.’ 헤르마이의 눈이 시온을 사납게 흘겼으나 그는 틀린 말 했냐는 듯이 되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헤르마이는 툴툴거리며 부채를 내던졌다. ‘삼각너울 부채’는 이름처럼 공중을 너울거리더니 이내 허공에 딱 멈추어섰다. 헤르마이의 마법이다. 오늘의 경합에서 승리한 자를 위해 준비된 것이겠지.
“그럼 세쿤두스 전하, 첫 경합은 어찌할 생각인지?”
“음. 이 세쿤두스 데비우스 흥취를 아는지라.”
근육질 황자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첫 싸움부터 지나치게 드잡이해서야 안 될 말. 비보를 더 걸지는 않고 가볍게 가지요.”
“네가 흥취를 아는 줄은 몰랐는걸.”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이죽거리며 끼어들었다. 그는 대경합이 어제부터 줄곧 심기가 불편한 채였다.
“그리 흥취를 안다니, 어떤 경합을 제안할 생각인지 기대가 되는구나.”
“굳이 설명해야 아십니까. 하긴 형님과 풍류는 조금 거리가 있기는 하지요.”
제 이죽거림을 돌려받은 페르비아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세쿤두스는 그런 형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쟁의 시작이라면 정해져 있지 않소. 가장 뛰어난 전사를 하나씩 내보내시오.”
세쿤두스 데비우스, 스물셋의 나이지만 이미 겪은 전장이 여럿. 그는 넓은 가슴을 두드리며 외친다. 쩌렁해서 천오백의 군세 중 누구도 듣지 못한 자가 없었다.
“일기토를 벌입시다!”
* * *
“재미있구나, 세쿤두스. 너라면 그럴 것 같았지.”
레냐르 드 볼마르크가 키득 웃었다.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멍청하지 않지만 솔직하다. 남들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끝까지 밀어붙일 때가 많다는 소리다. 레냐르는 옆에 선 애꾸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일기토를 벌인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제프 단장?”
“글쎄요. 피가 끓기는 하지만 늙은 몸이 끼어들었다가 흥이 깨질까 두렵군요.”
“겸손은. 그래도 단장의 뜻을 존중하죠.”
“감사합니다, 전하.”
레냐르와 요제프는 마치 짠 것처럼 말을 주고받았다. 실제로 이미 준비한 대화였다. 레냐르는 어젯밤에 이미 세쿤두스가 일기토를 제안하리라 예상했고, 그 경합에 끼어들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망설임 없이 손을 들며 말했다.
“제2황녀, 레냐르 드 볼마르크는 이번 경합에는 참여하지 않겠어요.”
“확인했다.”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냐르는 멀찍이 선 금발금안의 사내에게 물음을 던졌다.
“오라버니께서는 어찌하시렵니까?”
“…나도 포기하면 ‘삼각너울 부채’는 그냥 세쿤두스의 것이 되겠지. 그럴 수야 없지 않나.”
페르비아스가 곁눈질했다. 그의 등 뒤에 선 사내가 있다. 옥색 눈을 번뜩이는 형상이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다. 페르비아스가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마침 내 심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자랑하고 싶었거든.”
아메투스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옥색 눈이 더욱 흉흉하다.
“어떤가, 아메투스. 내게 승리를 가져다주겠나?”
“물론입니다, 전하.”
“좋아, 들으시오, 대학장!”
제1황자가 껄껄 웃었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이 경합에 참여하겠소!”
* * *
“빨리 결정되었군.”
헤르마이가 수염을 쓸었다.
“결투장 정도는 만들어 주지. 뒤로들 물러나라, 뭉개지기 싫다면.”
바람이 불어 군세를 떠밀었다. 중앙에 금세 커다란 공간이 생겼다.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거기에 손을 내리그었다. 바위가 솟거나 표면이 깎여 나가거나 하며 결투장이 척척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페르비아스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슬며시 입을 열었다.
“세쿤두스, 혹시 들어 본 적이 있나?”
페르비아스는 자신만만한 얼굴이다.
“한 십 년 전쯤, 제도 아카데미의 학생이 마에쉬의 마스터를 꺾었다는 소문을.”
“음. 기억에 있군요.”
“무武에 흥미가 많은 너라면 알고 있을 줄 알았지.”
학생에게 패배한 마스터의 명예를 위해 소문이 퍼지지 않게 막았으나 완벽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던 레냐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런 소문이 있었다. 세쿤두스는 제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 뒤로 어떤 풍문도 없기에 단지 잠깐의 헛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사정이 있었지. 그런 검 솜씨를 갖고도 치안기사 노릇이나 했으니 무슨 풍문이 있을까.”
페르비아스가 턱짓했다. 옥색 눈의 사내가 걸어 나오고 세쿤두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얼핏 차분해 보이는 옥색 눈 안이 풀무처럼 이글거렸기 때문이다.
“바로 이 친구야.”
“처음 인사드립니다, 전하.”
옥색 눈의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아메투스라고 합니다.”
“…음. 반갑군.”
세쿤두스의 입술이 굳게 다물어졌다. 아메투스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페르비아스는 동생의 긴장한 모습에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아메투스는 내 오랜 벗이자 심복이지.”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금빛 눈을 번쩍이며 크게 웃었다. 아메투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도 옥색 눈의 사내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우리 남매 중 최강의 육체라 불리는 너지만, 절대 쉽지 않을 거야!”
“음? 형님, 일기토에 나가는 것이 저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뭐라?”
페르비아스가 의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세쿤두스는 황자의 몸이지만 전장에 설 때면 늘 일기토에 나서기를 즐겼다. 코르디스 대황궁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네가 아니면 누가 나선다는 말이지?”
그는 세쿤두스를 흘끗 보고는 카테카와 지오니스 그리고 뒤에 늘어선 이백 장정을 순서대로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세쿤두스보다 강한 이가 없다.
“열한 살 지오니스라도 내보낼 생각이냐? 비보 하나를 그냥 넘겨주겠다면 고맙게 받겠지만.”
“뵈면 납득하실 겁니다. 마침 오셨으니 인사드리시지요.”
“대체 누구기… 에?”
세쿤두스와 그의 세력 이백 장정 뒤편에서 다가오는 이 있다. 진갈색 준마에 올라탄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굴곡진 머리를 단정이 틀어 올렸고 그 이목구비는 마흔이 넘은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아니, 이…….”
페르비아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미친!”
페르비아스는 말에 탄 여인을 알고 있었다. 천오백의 군세와 헤르마이 메르헤스도 그러했다. 모두가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허나 세쿤두스는 태연히 여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머니.”
“하여간 아들놈 키워 봤자야. 어쩜 이리도 험하게 부려 먹을까.”
마리나 데비우스, 대제의 셋째 황비.
세쿤두스의 어머니이자 데발로 데비우스의 맏딸.
또, 전前 제국십장 7석.
대제국 코르디스의 무력을 대표하던 열 명 중의 하나!
“나이 든 어미에게 일기토라니.”
33화
마리나 데비우스는 의연하게 말을 몰았다. 평원의 모두가 말을 잃은 가운데에 발굽 소리만 다각거렸다.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좇던 레냐르 드 볼마르크는 이내 멍하니 중얼거렸다.
“…미친 거 아니야?”
기품 있고 냉철하기로 이름 높은 은발의 황녀라도 그렇게 중얼거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다. ‘맙소사, 황비 전하…….’ ‘…정말로 마리나 전하시잖아.’ ‘화, 황비 전하께서 일기토를?’ ‘…들은 적이 없는데.’ ‘미쳤나 봐.’ ‘이거 맞아?’ 심지어는 세쿤두스의 세력, 이백 장정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솟았다.
아무리 전前 제국십장, 칠련장군七鍊將軍이라고 해도 지금은 황비의 몸. 어찌하여 계승전에 끼어들며 일기토에 나선다 하겠는가. 상식과 전통에 대한 반항을 넘어 모욕이었다.
“하, 하하, 하-!”
그런데 혼자 웃어 대는 노인이 있다.
“나온다는 상대가 마리나 그대였나! 흐핫, 알았다면 흥을 깨더라도 뛰어들었을 텐데!”
요제프 하이더는 아쉽다는 듯 팔을 휘저었다. 그러더니 이내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수염을 쓸었다.
“아니지, 아냐. 지금은 황비 전하라고 불러 드려야겠지요.”
“저희 사이에 뭘요. 편하게 하세요.”
마리나 데비우스가 요제프 하이더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왼손이었고, 세 개의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그녀는 엄지와 검지만 남은 손을 내보이며 배시시 웃었다.
“저는 요즘도 요제프 공을 생각한답니다. 밤만 되면 손가락 셋이 잘린 자리가 욱신거리거든요.”
“이거 우연이군. 나도 안대를 낄 때마다 마리나 그대를 떠올려.”
요제프 하이더의 눈, 마리나의 창이 빼앗았다. 마리나 데비우스의 세 손가락, 요제프의 도끼가 빼앗았다. 한때의 적장을 보며 둘은 키득 웃었다. 그 웃음을 듣고야 페르비아스는 정신을 차렸다.
“…웃기지 마!”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이리저리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쳤다.
“황비를, 일기토에 내보내!? 코르디스 황실이 아주 우스운 모양이구나, 세쿤두스!”
“음. 누가 억지를 부려 대경합을 벌인 시점에서 황실의 위신은 이미 예전 같을 수 없겠지요.”
“그거랑 그게 같으냐!”
페르비아스가 버럭 화를 내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세쿤두스. 최강의 육체니 전장의 황자니 해 놓고서는 싸움에 제 엄마를 불러?”
“내 입으로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세쿤두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저보다 강하신데 어쩌겠습니까. 불만이시면 형님도 1황비 전하를 부르던가 하십시오.”
“-에에이, 닥쳐라!”
페르비아스는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대경합의 관리자, 헤르마이를 향해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뻔히 보여 아니꼽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장! 이건 아니지 않소. 애초에 중도 참가… 그래, 중도 참가잖소!”
“중도 참가라?”
“대경합을 선포할 때에는 이곳에 없었으니 중도 참가지!”
“그런 규정이 있었던 기억은 없는데.”
헤르마이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대도 다른 자를 불러와도 좋다, 시간에 맞출 수 있다면. 정말 1황비 전하를 불러오든가.”
“아, 정말 그러기요?”
“내가 무얼?”
아끼는 수제자이자 양아들을 세뇌해 부려 먹은 사내가 뭐가 이쁘다고 친절하게 대해 줄까. 페르비아스만 답답할 뿐이다. 헤르마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곤란하기는 합니다, 마리나 전하.”
헤르마이 대학장이 앓는 소리를 내었다.
“황비의 신분으로 일기토에 나서는 것도 아주, 아-주 터무니없지만 본래 장수셨으니 그렇다 칩시다.”
마리나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태연자약함에 노마법사의 눈이 가라앉았다.
“황위계승전의 절대적인 규율을 모르시지 않을 텐데요. 군부의 계승전 관여는 용납될 수 없습니다.”
황실은 고고해야 한다. 코르디스의 군부는 강대하고, 때문에 권좌를 흔들 여지를 두어서는 안 된다. 군부의 주요 인물, 제국십장과 휘하 군단장들, 또 그들의 가문이 황위계승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반역에 준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군부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가장 세력이 약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기꺼이 그의 편을 들어줄 노련한 장수들이 많고 많았으나 새파란 젊은이 이백만을 거느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찌 이러십니까, 전하?”
“어머. 제가 은퇴한 것은 이미 20년도 더 되었는데 문제가 될까요?”
“허나 여전히 데비우스 가문이시지요!”
헤르마이는 마리나를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나무라는 듯한 투다. 마리나 데비우스는 입가를 가리며 미소 지었다. 3황비라는 이름에 걸맞게 우아한 태도다.
“가문과는 상관없이 나왔다는 등의 말은 하지 마십시오. 통하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
“대학장의 말이 맞아요.”
마리나 데비우스 후후 웃었다.
“사실 저도 세쿤두스의 편지를 받고 당혹스러웠답니다. 입장이 복잡한지라.”
그러더니 품에서 돌돌 말린 종이, 무언가의 서한을 꺼내 대학장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대제께 직접 여쭙고 왔지요.”
“…예?”
신음이 흘렀다.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던 페르비아스도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마리나는 헤르마이를 재촉한다.
“무엇하세요, 어서 받아 보시지 않고.”
“…….”
헤르마이는 서한을 받아들였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헤르마이는 그를 바라보는 평원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서한을 읽어 내렸다. 내용은 단순했다.
“…마리나 데비우스, 개인의 계승전 관여를 허용함. 콘티누아 코르디스 마그누스.”
서한의 아래에는 선명한 서명과 인장. 부정할 수 없는 대제의 것, 천년 제국의 이름으로 선포된 서한. 대학장은 머리를 싸매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대제께서는 무슨 생각이신지!”
대경합을 손쉽게 허용하지를 않나, 황비 전하의 일기토에 허가를 내주지를 않나!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몇 차례나 한숨을 내쉬었다. 대제의 명령이다. 코르디스 땅에서는 절대적인 힘을 갖는다. 누구도, 아무리 페르비아스라도 반항할 수 없다.
“좋습니다. 전하, 참가를 인정하지요.”
“기뻐하면 되는 거지요?”
“…그리고 대경합의 참가자가 되셨으니 말을 낮추겠습니다.”
“그럼요. 예전처럼 편하게 하세요.”
마리나 데비우스가 배시시 웃었다. 헤르마이는 짓궂은 손녀를 보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여전히 말괄량이구나, 마리나! 칠련장군 시절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변하지 않기는요. 아들이 벌써 저렇게 컸는데.”
그녀는 세쿤두스를 손짓했다. 정말로 크기는 컸다. 남들보다 머리통 셋은 컸으니. 마리나의 굴곡진 검은 머리가 소녀처럼 찰랑였다. 마흔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좋다, 첫 번째 경합을 선포한다.”
헤르마이 메르헤스의 목소리가 평원을 울린다.
“그대들의 뜻대로, 일기토를 벌여라!”
* * *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페르비아스가 성질을 부리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황비가 일기토? 참나, 타국의 치들이 얼마나 비웃을까. 처음부터 아주 개판으로 돌아가는군!”
계승전을 처음으로 휘저은 것은 자기였음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투다. 아메투스는 곁에서 요동도 않았다.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다.
“…어쩔 수 없지.”
금발금안의 황자는 아직 어색한 턱수염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학생 시절부터의 옛 친구이자 가장 신임하는 심복을 바라보았다.
“아메투스, 할 수 있겠나? 아니, 해 줘야겠어.”
“뜻대로 하겠습니다.”
옥색 눈,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다.
페르비아스는 마음이 놓였다.
“난 역시 자네가 마음에 들어. 가 보게, 아메투스. 이 페르비아스가 어떤 사내를 심복으로 두었는지 똑똑히 보여 줘!”
“예, 전하.”
아메투스 걸어 나간다. 따르는 종자도 없고 말에도 타지 않고 제 두 다리로 성큼성큼 걸었다. ‘아메투스? 처음 듣는 이름인걸.’ ‘궁금한데, 왜 이제껏 듣지 못했지?’ ‘배짱부리기는. 제국십장의 이름이 우스운가.’ 호기심과 속삭임, 때때로 비웃음.
옥색 눈 여전히 흔들림 없다. 발걸음 계속해서 성큼 나선다. 천오백의 시선도, 전前 제국십장의 명성이나 기세도, 주군이 주는 부담도 그를 흔들기에는 역부족이다.
사내는 이윽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중심에서 꼿꼿이 섰다.
하늘을 올려보지 않고 땅을 내려보지도 않고 곧 마주할 상대만을, 마리나만을 바라본다. 옥색 눈이 맹수와도 같이 매섭다.
“…….”
그는 검을 빼 들었다.
지극히 평범한 코르디스식 양날 검이다.
잘 손질되어 날이 시퍼렇다. 그것을 한 손에 쥐고는 허리끈을 풀었다. 칼집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무엇도 없이 한 자루 검만 쥔 아메투스를 보며 마리나가 키득 웃었다.
“쟤 좀 보렴, 세쿤두스. 요즘에도 저런 아이가 있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을 건다.
“말도 타지 않고 칼집도 버리고, 아주 자신만만한데. 나도 말에서 내려야겠어.”
“음. 괜찮으시겠습니까?”
“얘는. 누구한테 하는 말이니? 그리고 걱정할 거면 애초에 부르지를 말았어야지.”
마리나 데비우스가 훌쩍 뛰어 말에서 내렸다. 승마용 바지를 입을 필요는 없었겠는걸. 마리나가 작게 투덜거렸다.
“사실 군마는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해. 창이나 한 자루 주렴.”
“누구 창을 가져와라!”
세쿤두스의 말에 이백의 장정이 앞다투어 제 창을 내밀었다. 꿈 많은 군부의 젊은이치고 제국십장에게 제 무기를 빌려주는 꿈을 꿔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들고 심지어는 간간이 이름까지 붙은 창들이 마리나의 앞에 놓였다. 그러나 마리나 데비우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니, 다 별로야.”
어쩜 하나같이 이렇게 가늘고 가볍담. 그녀는 불평을 뱉었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다. 쥐어 볼 필요도 없었다. 마리나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마치 드레스를 고르는 귀부인처럼 새침한 투였다.
“이러면 곤란한데.”
“이건 어떠십니까?”
“응? 어머!”
마리나가 새된 소리를 내었다. 창이라기보다는 기다란 쇠말뚝에 가까운 무기가 그녀의 마음을 확 잡아끌었다. 쥐어보니 미소가 솟았다. 손잡이까지 모두 통짜 쇠라서 쓸데없이 무거운 점이 특히 그랬다.
“이건 좀 손에 맞네. 고맙구나. 음… 지오니스였나?”
“예, 지오니스입니다.”
“어떻게 준비한 거야?”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마련했지요. 칠련장군의 거력을 감당할 창이 필요할 듯해서.”
시온이 작게 웃었다.
“맨손으로 벨로스 대교를 무너뜨린 분이 보통 창을 쓰실 리는 없을 테니.”
“알아주니 기쁘구나! 너 태어나기도 전 일인데! 친아들보다 나은걸?”
마리나가 시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온은 피하지 않았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어도 아슬아슬하게 가족의 범주에는 들어갈 터다.
“대학장, 바로 시작하면 될까요?”
“마음대로 하시지요… 아니, 해라.”
“좋-았어. 오랜만이라 조금 신나는데.”
마리나가 소녀처럼 꺄르르 웃었다. 다만 그 손에는 뾰족한 쇠기둥에 가까운 무겁고 커다란 창이 들렸다. 그녀는 철창을 이리저리 휘휘 휘둘러보며 아메투스에게로 향했다.
“페르비아스 쪽 선봉… 뭐였더라. 어쨌든 조심하렴!”
펄쩍 뛰었다. 모든 이들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리나 데비우스가 한 번의 도약으로 저 하늘 위까지 뛰어오른 까닭이다. 칠련장군이라 불렸던 여인은 허공을 가르며 외쳤다.
“너무 오랜만이라서.”
철창을 꼬나쥔 채로, 낙하落下.
“살살 못 할지도 몰라!”
유성과도 같이 떨어지니 굉음이 요란하다.
꽈아아앙-!!! 하고 충격과 광풍이 내달렸다. 안개처럼 뒤덮인 흙먼지 사이에 히히힝, 하는 소리가 있다. 공황에 빠져 거품 무는 말들의 비명이다. 인간도 다를 수 없었다.
…으. 곳곳에서 신음 터졌다. 특히 앞줄의 전사들은 비명 지를 틈도 없이 무너졌다. 전사라고 하기에는 꼴사나운 모습이지만 누구도 비웃지 못했다. 단 한 번의 내려찍음, 그 여파일 뿐이었으나 천오백의 군세 중 떨지 않은 이 없었다.
“아, 마리나 전하!”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소리 질렀다. 일기토를 벌이는 터 주위에는 희뿌연 장막이 둘려 있다. 제국십장의 무력을 아는 헤르마이가 펼쳐 놓은 보호막이다. 만약 이 보호막이 없었다면 앞줄의 전사들은 쓰러지는 데에서 끝나지는 않았으리라. 아마 값비싼 준마도 몇십 마리는 명을 달리했을 테고.
“살살 좀 하십시오! 아니, 해라!”
“후후. 미안해요. 오랜만이라서 그렇다니까요. 힘 조절이 영…….”
마리나가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어머?”
아메투스 흙먼지 속에 의연히 섰다.
마리나 데비우스의 창은 여파만으로도 말들이 미쳐 날뛰게 하고 전사들을 쓰러트렸다. 헌데 창을 정면으로 받아 낸 사내는 아직도 흔들림 없이 옥색 눈을 번뜩인다.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전하.”
아메투스가 검 끝을 내렸다. 공손한 말씨와는 달리 다소 거만한 행동거지다. 제 주군의 성정을 닮기라도 한 것일까.
“관용을 베풀어 힘을 아끼시는 마음씨에는 깊이 감사드리나, 그럴 필요는 없으실 듯합니다.”
“…얘 좀 봐라?”
마리나가 입술을 핥았다. 말투야 정중하지만 분명한 도발이다. 당신은 나를 상대로 손대중할 정도의 실력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니. 한때 대제국의 정점에 있었던 여인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하고도 충분하다.
“얘, 너 이름을 물어야겠다. 뭐라고 했지?”
“아메투스.”
옥색 눈 고요하다.
“페르비아스 전하의 심복, 아메투스입니다.”
34화
“흐음. 힘을 아끼지 말라니까 그렇게 해 주지 않기도 뭣하지.”
마리나 데비우스의 어투는 기품있다. 허나 그 눈은 남빛으로 이글거린다. 무장武將의 호승심이 자극받은 까닭이다. 전前 제국십장의 기세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평원을 뒤덮을 듯한 기세였다. 지켜보던 이들은 그녀의 기세에 또 한 번 떨었다.
“하지만 방금이 내 전력이라고 생각하지는 말렴. 그랬다가는 너---.”
그녀는 철창을 두어 바퀴 빙글 돌리더니 이내 뒤로 주욱 당겼다. 무식하게 크고 무거운 쇳덩이인데도 마리나는 그것을 지푸라기처럼 휘둘렀다. 아메투스가 양날 검을 비스듬히 치키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입술을 핥았다.
“---무사할 수 없을걸.”
“…읏!”
아메투스의 팔뚝이 길게 찢어지고 옥색 눈이 부릅떠졌다. 내질러진 철창은 팔뚝의 상처에 만족하지 못하고 궤도를 바꾸며 그를 후려치려 들었다. 아메투스의 양날 검이 잽싸게 치고 올라오며 챙, 하는 소리가 났다.
당혹스러웠다. 창을 뒤로 빼는 것을 보았다. 쏘아 찌를 것을 알고 기다렸다. 헌데 놓쳤다. 긴장의 끈은 느슨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저 철창이 팔뚝을 찢은 뒤였다. 마리나는 꺄르르 웃으며 창을 거두었다.
“또 간다?”
철창이 다시 뒤로 주욱 빠졌다. 아메투스 걸음이 바쁘다. 반응할 수 없는 찌르기라면 찌르기 전에. 양날 검이 마리나의 창을 든 손목을 노린다. 검은 머리 황비가 입술을 핥았고, 아메투스의 손목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메투스가 뒷걸음질 쳤다. 마리나는 굳이 쫓지 않고 다시금 창을 거두었다. 양날 검을 쥔 손아귀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으나 아메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참으로 놀라운 찌르기입니다, 마리나 전하.”
아메투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혹 그것이 이름 높은 데비우스의 연각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맞아. 너무 거창한 이름이라 난 그냥 뿔이라 부르곤 하지.”
연각鍊角.
찌른다 싶으면 이미 찔린 뒤. 코르디스 제일의 무가武家 데비우스 가문이 자랑하는 창술의 극치. 마리나는 자부심을 숨기지 않고 당당한 미소를 머금었다.
“손가락 셋을 요제프 공에게 잃어서 옛날만큼은 못하지만, 아직 꽤 뾰족한 뿔 아니니?”
“저 또한 더 날카로워야겠습니다.”
“아직 온 힘을 내지 않았다는 것처럼 들리는걸.”
“예, 옳습니다.”
“어머. 그래?”
마리나가 배시시 웃었다. 소녀처럼 소리까지 내며 웃더니 이내 입술을 핥았다.
“확인해 봐야겠는걸.”
그녀는 의문을 놔두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곧바로 해결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원래 데비우스 가문의 사람들이 그렇다. 마리나가 창을 뒤로 주욱 빼었다.
그리고 과정을 건너뛰는 듯한 찌르기.
데비우스 연각鍊角.
챙, 하는 소리. 양날 검이 그녀의 뿔을 가로막았다. 아메투스 상처 없고 옥색 눈 이상하게 깊다. 마리나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느낌이 묘했다. 창의 궤도를 읽었다기보다는 마치 그녀가 어디를 찌를지 알고 거기에 미리 검을 가져다 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또 확인해 보면 될 일.
“얘.”
창을 뒤로 주욱, 입술 살짝 핥으며.
“데비우스의 뿔은 하나가 아니란다.”
연달아 찌르는 세 뿔.
데비우스 삼연각三鍊角.
철창 찔러 든다. 양날 검 막아 낸다. 막은 순간 창은 어느새 뒤로 빠져 있다. 그리고 둘째 찌르기. 양날 검 미처 쫓지 못했다. 아메투스의 뺨 깊이 베였다. 창의 회수를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고, 또 주욱 당겨지는 창은 옥색 눈을 향해 뾰족하다.
“…….”
세 번째 뿔은 마침내 아메투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양날 검의 자루가 찔러 드는 창의 옆을 후려치나 그 정도로 꺾일 만한 뿔이 아니다. 뿔은 옥색 눈 사내의 옆구리를 찔러 뚫었다. 핏방울이 튀었다.
“계속 가도 괜찮지?”
마리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창을 또 한 차례 회수한다. 이전과 같이 삼연각. 세 뿔이 아메투스를 노린다. 순서대로 손목과 허벅지와 어깨. 죽이지는 않되 승리할 수 없게. 옥색의 눈에 소름 끼치는 빛이 스쳤다.
양날 검 움직인다. 아직 창이 내질러지지 않았는데도 그러하다. 처음에는 손목, 다음에는 허벅지, 마침내 어깨. 챙, 챙, 챙 하고 세 번의 금속음이 연달았다. 마리나의 눈썹이 휘었다. 그녀의 세 뿔이 모두 막혔다.
“놀라울 만큼 금방 따라오네. 너 같은 아이를 왜 몰랐을까?”
“…….”
아메투스 말이 없다. 그의 눈동자는 끝을 모르고 깊다. 멀찍이 서 구경하던 시온이 부르르 떨었다. 저 빌어먹을 옥색 눈! 마리나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철창을 힘껏 움켜쥐었다.
마리나 데비우스의 뿔은 날카롭다. 허나 그녀의 전부는 아니다. 창을 뒤로 주욱. 아메투스 막으려 검을 든다. 허나 찌르지 않고 낮게 휘둘렀다. 검이 그 궤적을 따라 바쁘다. 마리나 작게 웃으며 창을 치켰다. 창날은 정확히 아메투스에게로 향했다.
아메투스 펄쩍 뛰었다. 공중에 뜬 사이 철창이 구불거리며 따라왔다. 옥색 눈 사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창 자루를 밟으며 재차 뛰었다. 그는 마리나의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창을 주욱 뺀 뒤다.
입술을 핥는다 싶었더니, 떨어져 내리는 아메투스를 향해 연각. 태양이라도 꿰뚫을 듯한 기세로. 헌데 아메투스 그곳에 없다. 어느새 그녀의 곁에 내려와 검을 들이밀고 있다. 또 그녀의 행동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군다. 마리나 데비우스의 웃음이 짙어졌다.
‘입술을 열심히도 살피네. 귀엽게도.’
옥색 눈은 틈틈이 마리나의 입술을 살폈다. 그녀가 크게 힘을 쓸 때마다 입술을 살짝 핥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속은 듯하니까,’
하지만 모두 의도한바. 힘을 쓸 때 버릇이 나오는 경우야 흔하다. 그러나 그 흔한 버릇을 못 고쳐서야 어찌 제국십장일까. 모두가 노림수였다. 아메투스의 틈을 노리기 위한 눈가림이다.
‘슬슬…….’
입술을 핥으며 이연각. 아메투스 막아 내고 양날 검이 틈을 탄다. 몇 번의 겨룸으로 그녀의 호흡을 파악했다는 것처럼.
마리나 데비우스, 바로 그 때에.
태연한 얼굴로.
양날 검을 비껴 낼 것처럼 굴다가.
갑작스레 뒷발을 박차며.
쇠로 된 창이 낭창거릴 만큼 거세게.
예상치 못한 틈을 파고드는 일곱 찌르기.
피하지 못할 일곱 뿔.
데비우스 칠연각七鍊角.
마리나에게 칠련장군의 이름을 가져다주고 요제프의 눈을 빼앗은 절기. 일곱 뿔은 거의 동시에 옥색 눈 사내를 향했다. 찌른 듯하면 이미 찔린 뒤다.
“……?”
창끝이 허공을 갈랐다. 데비우스의 이름 높은 일곱 뿔이 빗맞았다. 아메투스가 보이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있던 것이 방금인데. 어디에? 최대의 절기를 빗맞힌 마리나는 당혹해 눈을 치켜떴다.
“전하.”
목소리, 뒤편에서. 오싹함을 누르며 마리나 황급히 자세를 바꾸었다. 허나 늦었음을 직감했다. 잘려 나간 세 손가락이 아쉽다.
“-결례를, 용서하시길.”
“……!!!”
검격劍擊. 단순하게 묵직하고 이상하게 날카롭다. 방어하고자 들었던 창대의 반의반 정도가 뭉텅 잘려 나갔다. 마리나의 아름다운 검은 머리도 끝부분이 잘려 바닥을 굴렀다.
양날 검 멈추지 않는다. 창과 머리칼을 잘라 낸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하다. 마리나는 혀를 차며 막 땅에 떨어지려던 잘려 나간 창대를 차서 날렸다. 창대까지도 쇠인지라 아메투스는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깐의 틈, 마리나는 빠르게 네 걸음을 물러섰다.
“…너, 처음부터 내 노림수를 읽었구나.”
“예, 전하.”
“게다가 아직도 전력이 아니고.”
“그 또한 옳습니다.”
아메투스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저 옥색 눈에 마리나는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입술을 핥는 버릇이 있는 것처럼 아메투스를 속이려 들었다. 헌데 아메투스는 그녀가 속이려 드는 것을 눈치채고 되레 틈을 노렸다.
“나이를 물어도 될까, 아메투스?”
“스물다섯입니다.”
“또 거짓말은 아니지?”
“이제껏 거짓을 고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옥색 눈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평범한 양날 검인데도 그의 손에 들리니 놀랍도록 위협적이었다. 마리나의 눈동자가 더욱 이글거렸다.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열기가 솟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얘, 너 괴물인걸.”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 * *
천의 군병과 삼백의 전사, 또 이백 장정.
젊은 천오백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아메투스와 마리나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이 천오백은 모두 정예 중의 정예라 부르기에 마땅한 사내들이다. 헌데 저 싸움을 지켜보자니 자신들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
“…….”
철창과 양날 검이 오간다.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힘과 솜씨를 품고서. 아메투스에게 비웃음을 보냈던 이들은 특히 더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요제프 하이더는 젊은이들의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며 껄껄 웃어 젖혔다.
“이 정도로 기가 죽어? 마리나의 전성기를 보았으면 아주 기절했겠군.”
마리나 데비우스, 전장을 떠난 것이 벌써 20년. 그사이에 아이를 낳았고 손가락도 세 개를 잃은 채다. 지금의 그녀도 여전히 날카로운 뿔을 가졌지만 칠련장군의 이름을 자랑할 적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벨로스 대교를 맨손으로 무너뜨릴 때의 그녀는 아름다울 만큼 강했다.
“그래도 잘 봐 두어라, 애송이들아. 십장의 수준은 못 되어도 군단장 정도는 될 터니. 한 나라를 대표하는 무력이란 저런 것이다.”
너도 똑바로 보고, 이놈아! 요제프는 곁에 선 손자, 레네 하이더의 등을 철썩 후려갈겼다. 아껴 마지않는 손자지만 아메투스와 비교하니 어째 못마땅했다. 요제프는 옥색 눈의 사내를 계속해서 눈으로 좇았다. 경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검 솜씨였다.
“아메투스랬지.”
주머니에 든 송곳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라지만, 가끔은 대체 왜 이제야 드러나는지 깜짝 놀랄 만큼 날카로운 송곳도 있기 마련이다. 아메투스가 그러했다. 서른이 되지 않았는데 저런 실력이라니. 명망 있는 기사단이나 군부의 소속이 아닌데도, 아니 거기에도 이런 젊은이는 없다!
“그래, 늘 저런 놈이 튀어나온단 말야. 그렇지 않나, 다 늙은 헤르마이?”
“왜 친한 척이지, 늙은 애꾸 요제프?”
“아. 연배 비슷한 게 그쪽뿐이라.”
요제프 능글맞게 웃지만 헤르마이 퉁명스럽다. 노마법사는 못마땅한 얼굴로 수염을 쓸었다.
“늙었다는 공통점 정도로 친해질 사이는 아니었던 듯한데.”
“흐하하. 옛날 일은 덮어 두자고. 23년 전에는 서로 어쩔 수 없었잖나.”
“이해심도 넓군, 그 요제프 하이더가.”
“늙은 값은 해야지.”
헤르마이가 올라탄 구름이 내려앉았다. 두 노인은 비슷한 눈높이에서 겨루는 창과 칼을 보았다. 데비우스의 철창 뾰족하고 옥색 눈의 양날 검 귀신같다. 헤르마이가 수염을 쓸었다.
“벌써 100합도 넘었군.”
“그래, 막 128, 129, 어이쿠, 130합!”
“그걸 세고 있었나.”
마리나와 아메투스의 대결이 팽팽하다. 요제프가 킬킬 웃으며 안대 안쪽을 긁었다. 마리나의 창은 여전히 매섭다, 잃어버린 한쪽 눈이 욱신거릴 만큼. 그런데 아메투스는 그런 마리나를 상대로 물러서기는커녕 약간 웃돌기까지 하는 듯 보인다.
“애꾸, 누가 이기리라 보나?”
“저 젊은 놈.”
요제프는 아메투스를 손가락질했다.
“나이도 나이지만 창수에게 손가락이 셋이나 없다는 점은 아주 큰 약점이지.”
“동감이다. 약점이 있어도 여전히 마리나 데비우스지만, 저 젊은이의 실력은…….”
헤르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금발금안의 제1황자는 태연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다.
“페르비아스가 아주 날카로운 검을 숨기고 있었군.”
아메투스의 실력이 놀라운 만큼, 페르비아스에게는 존경의 시선이 더해졌다. 평소라면 그런 시선을 즐겼을 페르비아스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는 치솟는 경악을 참아 내야만 했다.
‘…학창 시절은 끝났고, 나는 많이 변했지.’
페르비아스는 감상에 젖고 말았다. 걸어온 시간을 떠올리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메투스, 너 또한 마찬가지였나.’
제도 아카데미 시절, 학생 신분으로 마에쉬의 마스터를 쓰러트린 아메투스를 기억한다. 그때도 이미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은 까마득할 정도다.
‘정말 괴물이 되고 말았어.’
* * *
“아. 젊은 애한테는 안 되겠네.”
먼저 손을 든 것은 마리나 데비우스, 전前 칠련장군. 그녀가 창을 거두자 아메투스는 쫓지 않았다. 마리나는 투덜거리며 제 머리칼을 매만졌다. 양날 검에 몇 번이나 잘려 나간 탓에 꽤 짤뚝해 졌다.
“네가 지금의 나보다 두 수는 위인걸.”
“과찬이십니다, 전하.”
“얘, 어른이 칭찬하면 그냥 감사합니다, 하는 거야. 겸손은 치워 놓으렴.”
마리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엄지와 검지를 뺀 세 개의 손가락 자리가 비었다.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현역일 때 겨루었다면 더 재밌었을 텐데, 으음… 이만할까? 내가 졌다고 치고.”
“제게는 거부할 이유가 없군요.”
가라앉은 옥색 눈을 보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한쪽이 죽지 않는다면 승부가 나지 않을 터였다. 겨루는 것이 100합을 넘어갈 때쯤 둘 모두 그것을 깨달았다.
“세쿤두스, 괜찮겠지?”
“음. 마음대로 하시지요.”
근육질 황자가 크게 외쳐 답했다. 그는 제 어머니의 판단을 믿었다. 마리나는 아들에게 미소를 보인 뒤 아메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비의 손길이다. 그는 당황해 머뭇거리며 그 손에 입을 맞추려 들었다. 마리나가 웃음을 터트리며 아메투스의 오른손을 잡고 흔들었다.
“아메투스, 기뻐해도 좋아. 네가 이겼어.”
들었죠, 대학장? 마리나가 평원이 떠나가라 고함질렀다. 헤르마이가 알았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 얘, 네 주인에게 승리를 전해 주렴.”
35화
“아메투스! 나의 친구!”
페르비아스가 요란스레 뛰쳐나왔다.
“무엇하나, 승자에게 마땅한 경의를 표해라!”
천의 군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울렸다. 진심 어린 경의의 표현이었다. 불과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에 마리나 데비우스를 꺾은 검사를 어떻게 존경하지 않겠는가.
“페르비아스 전하, 명을 받들어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아메투스는 깊게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천천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었다. 그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하며 헤르마이에게 받은 ‘삼각너울 부채’를 주군에게 내밀었다.
“당신의 비보를 취하시지요.”
“대체 무슨 말로 자네를 치하해야 할까.”
페르비아스는 흡족하다 못해 입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저 실력, 이 충심, 어쩜 이리도 마음에 쏙 드는 심복인지. 꿀꿀하던 기분이 단번에 와락 뒤집혔다.
“이걸로 세 번째의 비보인가. 자네의 공이 참으로 커.”
“과찬이십니다.”
“아니, 전혀 과하지 않아.”
제1황자는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는 아메투스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금안의 황자는 아메투스의 옥색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아주 기쁜 기색이었다.
“줄곧 더부룩했던 내 속이 아-주 시원해졌거든.”
대경합이라면서 소꿉놀이를 벌이지 않나, 레냐르와 세쿤두스는 아닌 척하면서 뒤로 손을 잡지 않나.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나 아메투스의 승리는 모두 뒤집을 만큼 달콤했다.
“온 코르디스가 자네를 알게 할 거야. 칠련장군을 꺾은 젊은 검사를 노래하도록!”
“…….”
“어쩜 이리도 든든한지.”
페르비아스는 짧은 턱수염을 매만졌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까슬함이 있다. 저 멀리에 제도 루틸리움이 보였다. 황제의 자리가 성큼 가깝게 느껴졌다. 마치 손을 주욱 뻗으면 바로 붙잡을 수 있을 것처럼.
그리 턱을 쓸다 아메투스를 보았다. 가벼운 가죽 갑옷, 아래에는 치안기사의 복장. 실용적이지만 화려하지는 않다. 낡은 티가 역력했다. 페르비아스가 툭 내뱉었다.
“이제 제도의 아가씨들이 자네를 쫓아다닐 테니, 외견에도 좀 더 신경 써야겠어.”
페르비아스는 이미 자기를 거의 차기 황제로 여기고 있었다. 차기 황제의 첫째 심복이 저리 초라하게 다녀서야 위신이 살지 않는다.
“특히 그 검. 손질은 잘 했지만 영 아쉽더군.”
아메투스의 양날 검을 눈짓했다. 마리나와의 싸움 중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날은 시퍼렇게 섰지만 얼마나 오래 썼는지 장식 따위가 죄다 닳아 있다.
“이전부터 생각했는데, 더 좋은 검을 쓰도록 해.”
“이미 손에 익어 괜찮습니다.”
“어허. 내 창고를 열지. 명검이 많으니 원하는 것으로 가져가도록.”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전하.”
오랜 친구의 말에 페르비아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메투스는 말없이 검집을 허리에서 끌러 내렸다. 그러고는 뽑지 않는 채로 주군에게 그것을 보였다.
“이 검이 무엇이기에… 아니, 설마……!”
낡은 양날 검과 그 검집을 살피던 페르비아스는 깜짝 놀라 외쳤다. 손잡이고 장식이고 죄다 닳아서 알아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살피니 기억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페르비아스 자신이 제도의 명장에게 주문을 넣었던 물건이었으니.
“…아카데미 졸업식 날, 내가 자네에게 작별 선물로 주었던 바로 그 검인가?”
“예, 옳습니다.”
“이걸, 아직도!”
그들이 아카데미를 졸업한 지 7년이다. 아티팩트가 아닌 철검이 망가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아메투스는 치안기사로 이 검을 수두룩이 사용했을 터다. 그러니 손잡이도 장식도 이렇게 낡았으리. 헌데 시퍼렇게 살아 있는 날을 보라. 이 검을 어떤 마음으로 아꼈던 것일까.
“자네는 정말 날 어디까지 기쁘게 해 줄 생각인가!”
페르비아스는 거의 감동할 지경이었다. 그는 아메투스를 와락 껴안고 등을 팡팡 두드렸다. 옥색 눈의 사내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금발금안의 황자는 제 심복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그 검을 돌려주었다.
“그래도 새 검을 써. 검사의 얼굴이 이렇게 낡아서야 쓰겠나.”
“…예.”
검을 받아 든 아메투스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는 검집을 꼭 쥔 채다. 옥색 눈은 깊지만 눈가는 피로한 듯 음영이 짙다. 그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페르비아스 전하, 혹 괜찮으시다면 이만 쉬어도 좋겠습니까. 아직 경합이 끝나지 않았으니 체력을 온존하고 싶습니다.”
“아? 아! 그래그래, 내가 너무 배려가 없었군. 칠련장군과 겨룬 뒤인데 말야.”
페르비아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크게 외쳤다.
“들어가 쉬게, 오늘의 영웅!”
* * *
“수고하셨습니다, 어머니.”
“미안하구나, 세쿤두스.”
진영으로 돌아온 마리나는 철창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말이 창이지 아메투스의 검에 듬성듬성 잘려 나가서 그냥 쇠막대나 다름없게 되었다. 마리나는 피로를 숨기지 않고 주욱 기지개를 켰다.
“으-으으. 겨우 이거 움직였다고 몸이 엉망이야. 역시 예전처럼은 안 돼.”
“음. 괜찮습니다. 다치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세쿤두스가 마리나를 다독였다.
“처음부터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져도 상관이 없다고.”
마리나 데비우스를 내보낸 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대경합이라는 미친 짓을 눈 뜨고 당해 주지는 않겠다, 우리도 억지를 부릴 줄 안다고 다른 파벌에 내보이는 것이다. 세쿤두스가 제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 이기셨으면 좋기야 했겠습니다만.”
“어머, 얘 좀 봐! 이런 불효막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대체 누구 아들이람? 마리나가 꺄르르 웃으며 아들의 등을 찰싹 때렸다. 세쿤두스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온몸을 뒤틀었다. 창칼에도 상처 입지 않는 육체지만 마리나의 손바닥은 더없는 고통을 안겨 주었다. 앓는 소리를 내던 세쿤두스는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래도 즐거우셨지요, 어머니?”
“응. 오랜만에 살아 있는 것 같구나.”
“그럼 됐습니다.”
“해 달라는 건 다 해 줬지?”
“바로 돌아가시렵니까.”
“그래야지. 여기서 무얼 하겠어.”
마리나의 손짓에 장정 둘이 그녀가 타고 온 말을 끌고 왔다. 셋째 황비는 폴짝 뛰어 말 위에 올라탔다. 머리칼이 다소 짧아지고 흙먼지가 묻었으나 기품은 조금도 잃지 않고 당당한 모양새다.
“난 가 보마. 남은 경합도 애쓰렴.”
“예.”
얼핏 냉랭한 듯한 말투의 깊은 곳에는 아들에 대한 신뢰가 있다. 세쿤두스도 더 대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나는 대견하다는 듯 아들을 내려보았다. 대체 언제 이렇게 컸는지. 그녀는 소녀처럼 웃으며 말을 몰았다. 곁에 선 두 황자가 보였다.
“그리고 카테카랑 지오니스, 세쿤두스를 잘 부탁해.”
* * *
마리나 데비우스 곧 진영 밖으로 사라졌다. 세쿤두스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시온을 향해 말했다.
“음. 지오니스. 네 제안 덕에 살았다.”
세쿤두스가 시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만약 어머니가 아니라 내가 직접 나섰다면 사기가 말도 안 되게 떨어질 뻔했어.”
마리나 데비우스의 실력이 예전 같지 못함은 누구나 알고, 별로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녀는 이제 칠련장군이 아니라 데비우스 가문 출신의 셋째 황비니까. 때문에 그녀의 패배가 세쿤두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다만 세쿤두스가 패배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황자 중 최강의 육체로 이름 높고, 그를 동경해 따라온 이백의 장정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면 단박에 위기에 몰렸을 터다.
“고마움을 표하지.”
“그럴 것까지는 없습니다.”
시온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는 저 멀찍이 옥색 눈의 사내를 보았다.
“다만, 제 생각보다 상대가 훨씬 강하기는 하더군요.”
아메투스의 실력에 깜짝 놀란 것은 시온 폴링라이트도 마찬가지였다. 회귀 전에야 아메투스는 마흔이 넘는 제국십장이었다. 그래도 의아할 만큼 강했는데, 심지어 지금은 19년 전이 아닌가.
‘페르비아스랑 나이가 같으니 25살……. 점쟁이 놈, 괴물이야!’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 두 번째 비밀을 열었으니 조금만 더 힘을 찾으면 지금의 아메투스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완전히 오산이었다.
“…그보다, 레냐르 누님은 어찌 나올 것 같아……?”
카테카 케슐레이가 끼어들었다. 세쿤두스도 의문을 담아 시온을 보았다. 그들은 어느새 시온의 의견을 기대했다. 그는 다소 부담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생각을 꺼내 놓았다.
“다소 소극적으로 나오시겠지요. 페르비아스 형님에게 더 기회를 주고 싶지 않을 테니.”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의 비보 3개, 2개, 3개. 이번 싸움으로 레냐르 혼자 뒤처진 꼴이다. 괜히 비보를 더 걸거나 해서 누군가에게 압도적인 우세를 허락하기에는 은발의 황녀가 너무 지혜롭다.
‘누님도 꽤 급한 모양이지.’
곁눈질하니 레냐르가 헤르마이 대학장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이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 날 경합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듯했는데, 다소 다급한 모양새였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그녀 혼자 뒤처지고 있었으니.
“불가침조약도 있으니 누님의 제안을 받아 주는 쪽이 어떨까 싶습니다.”
“음. 승패와 관련 없이 말이냐?”
“사소한 것이라도 호의적으로 대하도록 합시다. 페르비아스 형님을 조금 노골적으로 견제할 필요가 있어요.”
페르비아스 진영의 사기, 놀랍도록 높다. 비보의 개수를 따라잡았고, 옥색 눈의 사내가 전前 제국십장을 꺾기까지 했으니 당연하다. 안 그래도 세력적으로 가장 앞서니 더는 틈을 주어서는 안 될 터다.
“음. 네 말대로 하마.”
세쿤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시온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이 풀리지 않았던 적이 없다. 특히 어서 도망치지 않고 무엇하냐며 꾸지람을 들었던 때부터, 세쿤두스는 시온의 책략에 대해 두터운 신뢰를 가졌다. 그 꿍꿍이를 다 짐작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예, 이대로만 가시지요.”
“그대로 되려나?”
“아닐 이유는 없군요.”
으음. 세쿤두스가 말없이 턱을 쓸었다.
* * *
또 하루가 지났다.
“오늘 경합의 비보는 이것이다.”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내놓은 것은 금속 재질의 허리띠다. 헌데 마치 가죽처럼 부드럽게 휘는 것이 범상치 않아 보였다.
“‘철사자 허리띠’. 힘 좀 쓰는 이라면 누구라도 갖고 싶을걸.”
“저보다는 세쿤두스에게나 어울릴 듯한 물건이네요.”
레냐르가 근육질 황자를 곁눈질했다. 세쿤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퍽 탐이 났다.
“음. 마음에 들기는 하는군요. 아니, 보면 볼수록 더 마음에 드는데.”
“그렇게 괜찮니? 의외구나.”
“마침 쓰던 허리띠가 많이 낡은지라.”
“그럼 이런 건 어떠니.”
은발의 황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이 허리띠는 그냥 네가 갖고, 대신 네가 가진 비보 하나를 경합에 내놓는 거야.”
“…저야 좋지만, 그래도 됩니까?”
세쿤두스가 멋쩍게 머리를 긁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시온의 눈동자가 푸르게 가라앉았다.
‘묘한데.’
레냐르가 가볍고 자연스럽게 던진 제안이다. 경합을 시작하기 전에 분위기를 풀 요량으로 던지는 말처럼만 보였다. 실제로 누구도 어떤 낌새를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직 시온만이, 19년을 거슬러 온 회귀자만이 불안을 느꼈다.
‘회귀 전의 대경합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어.’
그때 레냐르와 눈이 마주쳤다. 은발의 황녀는 배다른 동생, 시온을 향해 아주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구름을 탄 노마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때요, 대학장? 세쿤두스에게 잘 어울릴 법한 비보인데.”
“그러니까, 이 허리띠와 세쿤두스 전하의 비보를 맞바꾼다고?”
“예. 그걸로 경합을 진행해도 될 일이잖아요?”
헤르마이가 턱수염을 쓸었다.
“안 될 것 없지. 본인만 동의한다면야.”
레냐르는 제안했고, 헤르마이는 승낙했다. 너무도 빠르다. 시온은 보았다, 둘 사이에 짧은 눈빛이 오고 감을. 그리고 떠올렸다, 둘이 전날 대화를 나누던 모습을. 그렇기에 그는 제 불안감에 깊은 확신을 가졌다.
“자, 어떻게 할래, 세쿤두스? 싫으면 말고.”
“으음…….”
세쿤두스가 시온을 보았고, 그는 망설임 없이 눈짓했다. ‘거절해!’ 뭔지는 몰라도 레냐르의 꿍꿍이에 당해 줄 까닭은 없다.
‘지오니스가 어제 그랬지. 누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 주라고.’
아쉽게도, 세쿤두스는 시온의 눈짓을 반대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크게 소리쳤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기쁘구나.”
헤르마이가 레냐르에게 허리띠를 주었다. 마치 미리 계획이라도 된 것처럼. ‘이런, 대체 무슨 속내야?’ 시온이 머리를 싸매고 레냐르가 기분 좋게 웃었다.
“자. 그럼 이 허리끈을 가져가고 네 비보를 내놓으렴.”
은발의 황녀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었다.
“그래, 그, 흑검 자무크라고 했나? 그게 좋겠어.”
“음. 그건 지오니스의 육체에 귀속되었습니다만……?”
“그러니? 그렇다면…….”
손가락은 시온을 향한다. 레냐르의 두 눈은 반달처럼 휘었다. 시온은 그제야 레냐르의 꿍꿍이를 완전히 깨달았다.
“지오니스까지 통째로 내놓으면 되겠네.”
시온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거, 당했다!’
36화
“잠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끼어든 것은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심복의 승리에 아직 어깨가 솟아 있는 제1황자다.
“그럼 이번 경합의 상품은 지오니스란 말이야? 저 노티 나는 이름의 허리띠가 아니라?”
이 자식이 뭐가 어째?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성을 내었으나 페르비아스는 가볍게 묵살했다. 사실 비보의 이름이 하나같이 구시대적이라는 의견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바였다.
“입맛이 뚝 떨어졌어. 나는 이번 경합에서 빠지겠다.”
“어머, 지오니스가 어째서 그러세요?”
레냐르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녀는 시온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얼마나 귀엽게 생겼어요. 크면 여인 꽤나 울릴 것 같은데 말이죠.”
“귀엽기야 하지. 어딜 보아도 열한 살짜리고, 헌데 간혹 전혀 열한 살짜리답지 않지. 아주 수상하게도.”
“그런 점이 더 귀엽지 않아요?”
“흥. 어쨌든 난 빠진다. 너희끼리 하도록.”
페르비아스가 등을 돌렸다. 갑자기 품평을 당한 시온이 항의를 표할 틈도 없었다. 은발의 황녀는 등을 돌린 오라버니를 보며 키득 웃었다.
“그럼 세쿤두스, 우리끼리 겨룰까? 지오니스를 걸고서.”
“장난이 심하십니다, 누님.”
“오라버니가 먼저 시작한 장난 아니니?”
레냐르의 눈이 섬뜩한 은색으로 빛난다. 마치 별 가루라도 뿌린 것처럼 찬란한데 이상할 만큼 차갑다.
“그리고 네가 대뜸 장난질을 이어받았지. 서로 건드리지 않겠다니 어쩌니 떠들어 놓고는.”
“음…….”
세쿤두스가 입을 다물었다. 페르비아스는 억지를 부려 대경합을 벌였다. 세쿤두스는 그에 맞서듯 제 어머니, 3황비 마리나를 불러 일기토에 내보냈다. 불가침조약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했다. 레냐르의 입장에서는 못마땅할 수밖에.
“너무 심각한 얼굴은 말아라. 그냥 약간, 아주 약간 심통이 났을 뿐이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눈빛이 날카롭다.
“나도 장난기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서 대학장께 여쭈었지.”
그녀는 노마법사를 올려보았다.
“나만 빠져서는 재미가 없을 듯한데, 나도 이 장난질에 끼어도 되겠냐고.”
“그리 심한 장난을 말하지도 않기에 흔쾌히 허락했지. 퍽 재미있던데, 뭐라 했던가?”
노마법사의 물음에 레냐르 배시시 웃고는 속삭이듯 입술을 열었다.
“술래잡기.”
은발이 황녀가 제 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자기의 말마따나, 이제껏 보지 못한 장난기가 묻어났다. 삼백의 늑대전사들은 제 주군의 모습에 소리 죽여 킬킬 웃었다.
“우리 파벌에서 술래를 내놓을 테니까, 지오니스가 도망치는 거예요.”
레냐르는 시온을 바라본다. 은 싸라기 뿌린 듯 눈동자 아름답다.
“시간 안에 지오니스를 붙잡으면 우리의 승리. 그러지 못하면 세쿤두스의 승리. 간단하지 않아요?”
자세한 규칙이야 뭐 복잡할 것 있나요? 일기토 때 만든 터를 경기장으로 하면 되겠네요. 우리가 이기면 지오니스가 우리 파벌에, 아니면 세쿤두스가 저 허리띠를 갖고.
“으음…….”
세쿤두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별로 문제가 될 것 없어 보였다.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차라리 턱도 없는 조건을 걸었다면 단칼에 거절해 낼 수 있을 것을. 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술래는 당연히 요제프 하이더겠지.’
애꾸 노인이 보였다. 볼마르크 공국을 상징하는 여섯 전사 중의 하나. 20년 전에는 그의 어머니, 칠련장군의 손가락 셋을 빼앗았을 정도의 괴물.
‘단순히 도망칠 뿐이라 해도 과연 지오니스에게 승산이 있을까.’
상대가 요제프 하이더만 아니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지오니스에게 숨겨진 한 수가 있음은 이미 짐작하는 바였으니. 다만 요제프, 요제프 하이더라……. 세쿤두스의 눈동자는 걱정으로 흐려졌고 레냐르는 그것을 눈치채었다.
“그리 걱정하지 말렴, 세쿤두스. 너무 빡빡하게 굴지 않을 테니.”
황녀의 손짓에 애꾸 노인이 앞으로 나섰다. 늘 들고 다니던 도끼는 손자인 레네 하이더에게 맡긴 채였다.
“술래는 어떤 무기도 들지 않을 거야. 완전히 꽉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야 잡았다고 칠 거고. 그리고 시간도… 으음, 1분이면 되겠니?”
“…1분!”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짧나? 레냐르가 입을 가리며 웃고 세쿤두스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1분이라면 승산이 있다. 요제프 하이더의 나이는 이미 백에 가깝다. 그 육체는 이미 전성기와 비할 수 없으며 특히 움직임이 둔해졌다 들었다.
‘1분이라, 이거 잘 이용하면…….’
시온 또한 눈을 빛냈다. 당해 줄 이유가 없는 장난이라 생각했으나 새로운 계획을 그려 볼 만도 했다. 천오백의 시선, 우쭐한 페르비아스, 요제프 하이더, 두 번째 비밀, 다음 차례의 경합. 몇 가지를 떠올려 본 시온이 세쿤두스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형님, 형님.”
“음.”
“저는 괜찮습니다. 승낙하셔도 좋아요.”
시온은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다. 늘 그렇듯 열한 살답다.
“술래라면 요제프 하이더다. 괜찮겠느냐?”
“쉽다고는 못 하겠지만, 1분이라면.”
단언하는 듯한 투에 세쿤두스가 제 동생을 내려보았다. 시온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 요제프를 상대로 1분을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는 시온이 싸우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무언가 있을 터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는 이미 시온을 한편으로 받아들였다. 세쿤두스는 노마법사를 올려보고, 레냐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음. 승낙하지요!”
* * *
“일기토의 터를 그대로 쓰면 되니 일이 줄었군.”
헤르마이가 중얼거리며 높이 날아올랐다. 타고 있는 구름이 꿈틀대더니 안에서 거대한 금장 시계가 튀어나왔다. 어디 시계탑에서나 쓸 법한 특대품인지라 천오백의 군세 모두가 시곗바늘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60초라고 했지.”
짝, 하는 박수 소리에 비어 있던 판에 숫자가 새겨진다. 또 한 차례 짝, 하는 소리에 시곗바늘은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 부르르 떨었다.
“굳이 다시 설명하자면, 지오니스 전하는 도망가고 애꾸 요제프는 쫓는다. 60초 안에 꽉 붙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레냐르 전하의 승리, 그러지 못하면 세쿤두스 전하의 승리.”
대학장은 귀찮은 티를 숨기지도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 내었다. 양측에서 걸어오는 둘을 보며 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각 파벌의 출전자는 서로를 보고, 뭐, 인사라도 하도록.”
레냐르 쪽의 술래, 요제프 하이더.
세쿤두스 쪽의, 지오니스(회귀자 시온).
노인과 아이는 서로를 마주 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약 백 걸음. 외치는 소리 정도가 닿을 만한 간격이다.
“오호, 지오니스 전하.”
“요제프 공.”
“비늘을 가져가신 이후로 처음이지요?”
“응?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시온은 태평스레 답한다. 대마녀의 권속을 불러내었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듯이. 요제프는 그 뻔뻔한 모습에 입가를 한껏 뒤틀어 올렸다.
“이 늙은이, 봐드리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하시죠.”
애꾸 노인의 하나 남은 눈은 의중을 알 수 없는 감색이다. 5황자 지오니스의 눈은 비밀을 숨긴 푸른색이다. 얼핏 닮기까지 했으나 감색은 한참 흐려졌고 푸른색은 잠잠히 타오르고 있다.
“자, 두 번째 경합.”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손을 내리긋는다.
“개시!”
* * *
시곗바늘이 틱, 하고 한 차례 움직였다.
“으음……?”
세쿤두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제 눈을 비볐다. 경합을 지켜보던 모든 이가 그렇게 했다. 페르비아스나 레냐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곗바늘은 그사이 또 한 번 틱, 하고 움직였다.
그리고 시온의 목은 요제프 하이더의 억센 손아귀에 붙잡혀 있다.
“…이거, 끝났잖아?”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중얼거렸다. 시온은 누가 보아도 꽉 붙들려 움직일 수 없어 보였다. ‘결판이 났어? 정말로!?’ ‘뭐, 뭐가 어떻게 된 거람.’ ‘대체 누가 요제프 하이더의 다리가 둔해졌단 거야!’ 하나같은 웅성거림.
“…미친 애꾸 같으니.”
헤르마이 메르헤스마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적당히 좀 할 것이지. 겨우 2초 만에 경합을 끝내 버려?”
아무리 그래도 황위계승전이고, 상대는 황자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내서는 황실의 위신이… 아니, 애초에 이번 계승전에는 위신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편하리라. 대학장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제 역할에 충실하기로 선택했다.
“그래도, 좋아. 대경합의 위임자로서, 레냐르 전하의 승리를 선포한다.”
노마법사의 목소리 평원에 울린다. 세쿤두스 얼떨떨해하면서도 혀를 차고 레냐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나 요제프와 시온은 움직이지 않는다. 목을 잡고 목을 잡힌 채로 서 있다.
“…뭐 하나, 요제프? 어서 손을… 음?”
헤르마이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것이 부릅떠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보았다. 시온의 온몸에서 흐르는 비지땀과 요제프의 이마에 솟은 굵은 힘줄을.
마치 요제프는 전력으로 시온의 목을 비틀려 들고, 시온은 전심으로 막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요제프 공!? 그만두세요!”
레냐르가 비명 질렀다. 은발의 황녀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을 더욱 하얗게 하며 제 심복에게 외쳤다. 곧 모두가 깨달았다.
요제프 하이더는, 제5황자 지오니스를 진심으로 죽이려 드는 중이었다.
* * *
“…그만, 하라는데요……!”
“그만두라고 그만둬서야 요제프 하이더가 아니지요.”
요제프 하이더가 신나게 킬킬 웃었다. 그는 시온의 목을 우악스레 움켜쥔 채였다. 어린아이의 가는 목은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고, 요제프도 정말로 그렇게 하려는 중이었다. 다만 저항이 생각보다 거셌을 뿐이다.
“헌데 전하, 아홉 살치고는 강하시군요. 단번에 목을 꺾을 생각이었는데.”
“…열한, 살이니까?”
“이런. 늙은이가 착각을. 그럼 걸맞은 대접을 해 드리지요.”
“크, 으……!!”
요제프가 손에 힘을 더하고 시온의 입가가 뒤틀렸다. 바깥에 보이지 않는 모든 곳은 이미 발지아트를 둘렀고 열일곱의 ‘공상손가락’은 요제프의 팔을 붙들고 있다. 그 덕에 간신히 목이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꺾이지만 않았을 뿐, 겨우 팔 하나 가까스레 막았을 뿐.
“…이건, 전혀 예상 못 했는데……!”
“유언입니까? 기억하지는 않겠다마는, 들어는 드리… 으응? 이크!”
다른 팔을 치켜들던 요제프가 시온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로 펄쩍 뛰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 보랏빛 번개가 몇 줄기가 내려쳤다. 여섯 별의 마법사는 하늘 위에서 노호를 터트린다.
“미친 게냐, 요제프-!”
“헤르마이 놈이 끼어들면 귀찮아지는데.”
먹구름을 타고 번개를 둘렀다. 연신 터지는 번갯불 속의 여섯 별 마법사는 마치 뇌신雷神과도 같은 형상이다. 천오백의 정예가 숨을 죽이나 요제프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방해를 피할까요, 전하.”
문득 어두워졌다. 거대한 그림자가 땅을 뒤덮었다. 잔뜩 입을 벌린 늑대의 형상이다. 이상한 일이다. 실체는 없는데 그림자만이 있다.
요제프 하이더의 기예Ars, 해 사냥개 Solagarmr.
“이놈은 제 기예인데, 뱃속이 참 비좁고 캄캄하고 조용합니다.”
보랏빛 번개 쏘아지나 그림자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쫙 벌린 입으로 요제프와 시온을, 그들이 선 공간을 통째로 뜯어 삼켰다. 뜯어먹힌 공간이 어둠으로 떨어진다.
“묫자리로 불만이 없으시겠지요?”
37화
해 사냥개 Solagarmr.
실체 없는 거대한 그림자 늑대를 불러내는 요제프 하이더의 기예. 그 뱃속은 괴리된 어두운 어딘가와 이어져 있고, 요제프는 이곳을 전용 결투장이자 처형장으로 즐겨 사용했다.
그림자 늑대 자체도 강력한 힘을 가졌으나 그쪽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제 손으로 적을 죽이지 않으면 무슨 명예가 있고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는 전사이지 조련사가 아니다.
“그냥 딱, 전장에서 마음에 드는 놈과 일대일로 겨루고 싶을 때 아주 좋습니다.”
해 사냥개의 뱃속에는 기묘한 어둠이 있다. 한없이 깊은 심연인데 상대와 그들이 밟고 선 땅만큼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어둠 속에서 애꾸 노인의 웃음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잘 찾아보시면 마리나의 손가락 세 개도 여기 어디를 굴러다닐 게고요.”
“…당신, 눈알도… 그 옆에 있겠군……?”
“전하의 시체도 옆에 놓아 드리지요.”
시온은 여전히 목덜미를 붙잡힌 채다. 그의 첫 번째 기예, ‘공상손가락’은 능히 강철을 쥐어뜯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런 것이 열일곱이나 붙었는데 요제프의 팔 하나를 막기가 벅차다. 심지어 이 팔도 아직 전력이 아닐 텐데.
“어쨌든, 이리되어 죄송스러운 마음이 없지는 않습니다.”
애꾸 노인이 안대 위를 거칠게 긁었다. 마치 비어 있는 눈구멍 안을 닦기라도 하는 것처럼 벅벅.
“레냐르 전하께서는 진심으로 지오니스 전하를 탐내는 듯하시지만, 이 요제프, 늙어서 얻은 것이 직감밖에 없는지라.”
눈 하나만 남았는데도 어찌 된 눈빛인지. 한때 공국 볼마르크 제일이었던 사내의 기세는 회귀한 영웅조차도 소름 끼치게 했다. 회귀한 이후에는 콘티누아 대제 말고는 이런 기운을 보이는 이를 만난 적이 없다.
“-전하 당신, 거짓말쟁이시지요?”
요제프 힐쭉 웃는다. 시온은 위험하다. 그는 레냐르의 숨겨진 동생, 에트시 왕자를 안다. 은룡마도국의 대마녀와 무언가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욱 큰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만 같다.
“자신조차 속이지 않고서는 그리 웃을 수 없습니다. 대단도 하십니다. 대체 어떤 비밀을 뱃속에서 썩히시는지. 여쭈어나 보겠습니다. 뭘 숨기고 계십니까?”
“…글쎄. 웬 미친 늙은이가 닭목 비틀 듯 굴게 할 만한 건 없는데.”
시온 애써 입가를 틀어 올렸다. 변함없는 비밀쟁이의 미소. 늙은 요제프는 확신한다. 그는 숨기고 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보통 사람이라면 오장육부가 꼬이고 말 만큼의 비밀을 잔뜩 쌓아 놓았다. 애꾸는 더욱 신이 나서 혓바닥을 놀린다.
“하, 하하, 하-! 유언이라도?”
“가까이서 보니… 당신 턱수염 정말 더러워…….”
“오호, 사내의 멋을 모르시는군.”
시온의 미소는 흔들림 없다. 설령 죽더라도 제 비밀을 말하지 않겠다는 듯했고, 실제로도 그럴 터였다. 아무리 대황궁이라는 마경魔境에서 자라났다고 해도 겨우 열한 살이 보일 태도가 아니다. 요제프 하이더가 주먹을 꾸욱 쥐었다. 열한 살 어린이는 물론 마도병정이라도 납작하게 만들 거력이 담겼다.
“잘 가십시오, 전하… 큼!”
시온의 머리를 짜부라트리려던 요제프가 휘청거렸다. 빛이 없는 공간이 조금 찢어지고 그 사이로 헤르마이의 노성이 들렸다. ‘이노오옴!’ 찢어진 공간은 금세 아물었으나 요제프는 못마땅한 얼굴로 안대 위를 벅벅 긁었다.
“헤르마이 메르헤스, 밖에서 열심히도 두드려 대는군. 1분이나 버티려나.”
이곳은 해 사냥개의 뱃속. 시온과 요제프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림자 늑대가 웅크려 있고, 헤르마이는 전력으로 그것을 두드려 대는 중이었다.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우리 꼬맹이 전하께서는 고 사이에 손아귀를 빠져나가셨고……. 어쿠, 멀리도 가셨군.”
시온은 그가 휘청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거의 팔십 걸음은 떨어져 있다. 요제프 하이더는 손자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웃었다.
“술래잡기를 처음부터 해야 할 판국인데, 상관은 없으시겠지요?”
짤뚝한 노인은 산보라도 나가는 듯 여유로운 걸음이다. 헌데 한 번 내디디니 스무 걸음, 두 번 내디디니 마흔 걸음, 세 번 내디디니 어느새 지척이다. 1초는커녕 그 반도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2초면 충분할 터니.”
“이거야 원…….”
요제프 하이더는 채 열 걸음이나 될 만한 거리에 있다. 눈이라도 깜박이면 옆에 서 있으리라. 일단 ‘공상손가락’으로 막아 보려고도 했지만 소용없다. 발지아트를 두른다고 해도 막을 주먹도 아니다. 시온 폴링라이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번째 비밀을 열어 두길 잘했지.”
셉템 아르카나 Septem Arcana.
그 두 번째.
* * *
요제프가 뛰었다.
시온이 순식간에 코앞이다.
“흐음?”
그는 제 손을 내려보았다. 시온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생각했는데 허공이다. 시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발을 떼었다. 반의 반의 반 초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들은 서로 확 가까워졌고, 억센 주먹이 황자의 머리를 향한다.
“으-흐으음?”
또 헛손질. 바로 앞에 있던 시온이 저 멀리에. 요제프 깨닫는다. 시온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밀려났음을. 하나 남은 눈이 섬찟 빛나고 볼마르크의 전사 걸음을 옮긴다.
또다시 주먹질 그리고 헛손질.
“닿았다 싶으면 저 멀리에… 가까이 가도 좁혀지지 않고.”
요제프 하이더의 확신은 빠르다.
“이거, 기예Ars군.”
상대에게 거리를 강요하는 힘. 이런 요상한 힘이라면 기예 말고는 생각하기가 힘들다. 코르디스 황족의 기예는 강력한 데다 일찍 드러나는 경향이 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어디.”
그는 몇 차례 시온에게 짓쳐 들었다. 몇 차례라고 해도 겨우 2초 사이의 일이다. 모두 실패했고, 정신을 차리면 시온과의 거리가 벌어져 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거리를 재었다. 벌어지는 거리는 처음부터 줄곧 일정하다.
“벌어지는 거리는 하나, 둘…….”
요제프의 외눈이 사납다.
“여덟 발자국 정도입니까.”
“계산도 빠르시군요.”
시온이 빙글 웃었다. 그는 여유를 되찾은 모양새다.
“둘만이니 특별히 선보여 드리는 겁니다, 요제프 공.”
“흐음. 아까 팔을 붙든 무언가가 전하의 기예인 줄로 알았는데……. 응용이 다채로우신 건지.”
그는 시온의 기예가 둘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기예란 비밀스러운 힘, 한 영혼에 하나도 과분한 권능. 일곱 기예를 부리는 일곱 비밀의 약속은 특례 중의 특례다. 물론 여기에도 엄청난 대가가 따랐으며 지금도 값을 치르고 있다.
“여덟 발자국보다 가깝게는 다가설 수 없다니. 제가 어찌해야 할까요, 전하?”
휙-! 요제프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무언가를 쥐어뜯어 내던졌다. 철제 버클이었다. 맹렬한 속도였으나 여덟 발자국쯤 오지 못하고 ‘공상손가락’에 막혀 바닥에 툭 떨어졌다. 허나 눈속임. 요제프의 손은 어느새 품에서 나오고 있다.
“……!!”
쉬이이익-! 파공음이 매섭다. 공기를 가르며 짓쳐 드는 것들 있다. 아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세다. 눈으로 좇기조차 어렵다. 열일곱의 ‘공상손가락’이 그것들을 막아 내지만 역부족.
“…주렁주렁 많이도 챙겨 오셨네요.”
두어 개를 놓쳤다. 하나는 목으로 하나는 다리로. 발지아트 검은 창과 같이 되었다. 목으로 향하던 것을 떨구고 다리의 것을 비껴 냈다. 다만 종아리에 길게 베인 상처가 남았다. 시온 입술을 깨물었다.
“술래에게 무기는 들리지 않겠다고 들었는데요.”
“사소한 걸 따지십니까, 사내답지 못하게.”
요제프 하이더가 하, 하하, 하-! 하고 웃으며 품을 내보였다. 두 손가락 크기의 도끼부터 손톱만 한 철침까지, 수십 개의 투척 무기가 가득하다. 그는 작은 도끼 무리를 한 차례 더 던지며 외쳤다.
“그리고 역시 그 기예, 살아 있는 것만 밀어냅니까. 아쉬워라, 활이라도 가져올 것을.”
그리 말하며 화살촉을 열 개 가까이 내던진다. 장궁으로 쏘아 내는 것보다도 위력이 더하다. ‘공상손가락’. 이번에는 모두 막았다. 허나 등 뒤에서 철침이 쏘아졌다. 어느새 요제프는 뒤쪽으로 돌아갔다.
여러 방향에서 몰아치듯 쏘아지니 정신이 있을 리가. 시온은 발지아트로 몸을 부풀렸다. 마갑의 힘을 숨겼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판국이었다. 그는 검은 짐승과 같은 형상으로 변했다.
“검은 갑옷?”
화살촉을 던지던 요제프가 짐승처럼 웃는다.
“역시, ‘흑검 자무크’니 하는 이름까지도 거짓이었군. 온통 거짓말뿐.”
요제프가 입가를 뒤튼다. 검은 진흙처럼 꿀렁이는 저 갑옷, 저게 시온이 도서관에서 얻었다던 진짜 비보이리라. 그는 시온을 죽이기로 했던 선택에 확신을 더할 수 있었다.
“내 감이 옳았어.”
“큭……!”
애꾸 노인은 시온의 뒤에, 차마 어찌할 수 없는 지점에 있다. 품의 도끼를 여섯 개나 던졌고, 개중 셋이 시온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그 틈을 타서 찔러 드는 것이 있다.
한 자루의 조립식 단창. 조각내어 품에 숨겨 온 것이니 그렇게 길거나 튼튼하지는 않다. 허나 심장을 꿰뚫기에는 충분하고 여덟 발자국보다도 길다.
“자, 전하.”
창끝, 시온의 심장 바로 앞에.
“안녕히.”
창 내질러진다.
몇 번의 전장을 거쳐 왔던가. 그는 볼마르크 여섯 전사다. 이 거리에서 이 일격, 창끝은 심장을 꿰뚫을 수밖에, 시온은 비밀과 거짓말을 끌어안고 절명할 수밖에.
“이……!”
그렇다, 이 거리에서라면 분명하다.
이 여덟 발자국이라면 틀림없었다.
“…이런, 염병할!!”
요제프 하이더가 뿌득 이를 갈았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허공을 가른 창끝과 멀찍이 떨어진 시온을 보며 고함질렀다. 황족을 향한 마지막 예의마저 날아간 모습이었다.
“여덟 발자국은 무슨! 또 거짓말이었구나, 망할 꼬맹이-!!”
“내 입으로 여덟 발자국이 한계라고 한 기억은 없는데.”
그들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있다. 시온의 두 번째 기예가 만들어 낸 간격이다. 헌데 여덟 발자국의 두 배는 더, 하나, 둘… 열다섯 발자국은 되어 보였다.
“그쪽이 멋대로 착각하신 것 아닙니까, 요제프 공?”
“네놈이! 아니, 전하께서 착각하게 만든 거겠지요.”
말투 공손하게 돌아오나 살기가 짙다.
“아, 정말로 염병할 거짓말쟁이십니다, 지오니스 전하 당신. 그래도 이렇게 된통 당하기만 하다니…….”
요제프 하이더는 외눈으로 시온을 노려보았다. 어찌 된 꼬맹이인가. 수싸움에 능해도 정도가 있다. 마치 십 년은 전장에서 구른 것만 같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이 비추어졌다.
“…이 요제프도 늙기는 했군.”
시간이 다했다.
빛 없는 공간이 깨어진다.
* * *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이전보다도 더욱 무시무시한 형상이었다. 육신은 경계를 잃고 번개의 덩어리와 같은 형태였으며 먹구름으로 된 아홉 마리 용이 낮게 울며 주위를 날았다.
“요-제프 하이더-!!”
번개의 사슬이 내리쳐 요제프 하이더를 묶었다. 애꾸 노인은 반항하지 않았다. 완전히 자신의 패배였다. 번개의 감옥 속에서 요제프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잡아가라, 늙은 헤르마이.”
“오냐. 그럴 생각이다! 감히 계승전에서 황자의 목숨을……?”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말을 흐렸다. 요제프에게서 스무 발자국 즈음 떨어진 곳에 시온이 서 있었다. 마갑 발지아트는 이미 재빠르게 집어넣은 뒤였다. 열한 살의 황자는 곳곳에 상처를 입기는 했어도 퍽 멀쩡한 모습이다.
“…살아 있잖아?”
“그래. 죽이지 못했다. 이 요제프가 말이지.”
“왜 이리 고분고분하게 나오나 했더니…….”
헤르마이가 수염을 쓸었다. 그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열한 살의 지오니스가 요제프 하이더를 상대로 1분이나 살아남다니. 허나 놀라움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헤르마이는 사납게 입을 열었다.
“너, 요제프 하이더. 황자의 목을 노린 죄는 무겁다. 23년 전 같은 특별사면은 기대하지 않는 쪽이 좋을 거야!”
“하, 하하, 하-!! 기대도 않았다!”
헤르마이 손을 내젓는다. 먹구름이 뭉치더니 짙은 잿빛의 금속처럼 변해 감옥을 만들었다. 번개의 사슬과 먹구름의 감옥. 그래도 요제프 하이더를 묶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으나 본인이 저항할 생각이 없으니 괜찮으리라.
“그보다…….”
대경합의 관리자,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픈 골치를 싸매며 입을 열었다.
“…상황이 복잡해졌군.”
“음. 그럴 것 없소.”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말을 받았다.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서렸다. 애써 참고 있으나 잔뜩 화가 난 것이 분명하다.
“지오니스가 2초 만에 붙잡힌 것은 사실. 요제프의 단독 행위와는 별개로, 승부는 그때 난 거지. 패배를 인정하오.”
거한의 황자는 레냐르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은발의 황녀는 그 눈을 피하고 말았다. 세쿤두스는 ‘철사자 머리띠’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하지만 지오니스는 주지 못하겠습니다. 이 허리띠나 도로 가져가시지요!”
“…내가 무어라 하겠니.”
은발의 황녀는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동생의 앞까지 다가와서는 허리를 숙여 허리띠를 주웠다. 패자는 성을 내며 내려보고 승자는 면목이 없어 허리 숙인다.
“…요제프 공.”
그녀는 번개의 사슬과 먹구름의 감옥 앞에서 멈추어 섰다. 은발의 황녀는 가장 신뢰하던 심복이자 의지하던 노인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 일로 그녀의 입지는 더없이 불안해졌다.
“왜 그랬나요?”
“아시잖습니까?”
“…그래요.”
레냐르가 입을 다물었다. 에트시 왕자, 그녀가 목숨보다 사랑하는 동생. 허나 그 정체는 비밀이다. 그러니 요제프는 지오니스를 죽이려 했다. 모두 레냐르 드 볼마르크를 위하여.
“저는 떠나야 할 듯합니다, 전하. 계승전이 막바지인데 곁을 떠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시렵니까?”
“참으로 실망스럽지만, 지금까지의 노고를 생각해서 특별히 꾸짖지는 않겠어요.”
“오, 우리 전하께서는 자비롭기도 하셔라.”
애꾸와 황녀가 말을 주고받았다. 은발의 황녀는 칭칭 묶인 노인을 보며 읊조리는 듯한 말을 건넸다.
“…늘 고마웠어요, 요제프 공.”
“늘 영광이었습니다, 레냐르 전하.”
황녀는 걸음을 돌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묻어 놓을 뿐이다. 노인은 하, 하하, 하- 웃어 젖힌다. 조금의 후회는 없다는 것처럼.
하, 하하, 하-!
* * *
“골치가 아프다.”
제국 수석마법사,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짜증을 숨기지도 않고 그렇게 내뱉었다.
“대경합에, 황비의 일기토에, 황자 살해 시도까지. 역사에 남을 만한 계승전이야. 아주 명예롭게 남겠어!”
품격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말투다. 그러나 천오백의 군세는 그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이례 중의 이례라고 할 만한 일들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헤르마이는 신경질적으로 수염을 쓸어내렸다.
“내일, 1황자의 차례로 대경합을 마무리한다. 다들 진영으로 돌아가라!”
* * *
“아니, 뭐, 내일까지 기다릴 것도 없지 않나?”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입을 열었다.
“바로 다음으로 갑시다.”
그에게 좋은 감정을 품지 않은 헤르마이가 눈을 매섭게 흘겼지만 제1황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제 말을 이었다. 그의 옆에는 어느새 옥색 눈의 사내가 양날검을 들고 있다.
“이쪽은 준비가 다 끝났거든. 마침 다들 도착했지.”
헤르마이는 보았다.
지평선을 넘어오며 펄럭이는 깃발들을. 저 깃발들, 페르비아스를 후원하는 귀족들의 것. 노마법사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인사들 하지. 이 페르비아스를 위해 기꺼이 움직여 준 충신들이니.”
“…페르비아스 이놈, 마지막까지……!”
“사내가 일관성이 있어야지. 이왕 난장판이 된 거 끝까지 가야 하지 않겠소.”
원래부터 천이나 되는 군세를 데려온 페르비아스다. 헌데 지금 새로이 나타나는 군세는 족히 그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레냐르와 세쿤두스는 페르비아스의 군세 사이에 낀 형국이 되었다.
세쿤두스와 레냐르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짙었다. 정예병이 삼천이다. 이정도 병력을 움직인다면 이미 전쟁의 영역이다. 아무리 무심한 콘티누아 대제라도 방관하지는 않을 터인데. 그러나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당당하다.
“드디어 이 페르비아스의 차례잖소.”
38화
“부른 게 언젠데 이제야 오나. 그래도 숫자는 마음에 드는군.”
병력이 차례차례 모여든다.
페르비아스는 태연히 그 수를 세었다.
새로이 나타난 것이 이천 명이 넘었다.
“그래, 대경합이라 할라치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찔끔찔끔 소꿉놀이나 벌여서야 대제국의 이름이 우습지 않나.”
본래 대동했던 천과 새로이 모여든 이천. 한 평원에 무려 삼천의 군병이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이름을 위해 모였다. 레냐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용케도 이런 숫자를 모으셨군요, 오라버니.”
“알아주니 고맙구나, 레냐르. 네 눈을 피하느라 고생을 꽤 했거든. 간자를 대체 얼마나 뿌려 놓았는지.”
은발의 황녀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계승전 시작 전부터 이 국면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지요?”
제도 루틸리움 인근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제1황자라고 해도 삼천의 정예병을 모으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한참 전부터 준비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그리 억지스레 대경합을 벌인 것도 눈속임이었고.”
“아, 그럼.”
페르비아스는 느긋한 미소를 짓는다. 열 개의 비보를 찾으면서도 그는 물밑에서 병력을 모았다. 일부러 천의 정예병을 화려하게 소집했고, 그 틈을 타 이천의 병력을 따로 제도 인근에 대기시켰다. 마지막의 마지막, 계승전의 끝,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
“화병 걸린 애송이처럼 굴면서 너희들의 주의를 끌었지. 페르비아스가 결국 제 화를 못 참고 멍청한 짓을 벌였군, 하고 비웃게 두었어.”
일부러 천둥벌거숭이처럼 굴었다.
코넬리우스 학장을 세뇌하고, 대경합을 벌이고, 헤르마이 메르헤스를 상대로 앞뒤 없이 욕설을 뱉고. 그랬더니 보라, 세쿤두스는 그렇다 쳐도 레냐르까지 이만한 병력의 움직임을 못 보지 않았는가. 그는 대제를 닮은 이목구비를 일그러트렸다. 일종의 후련함이 묻어났다.
“그런데 너무 잘 속아서 속상하더군. 내가 평소에 그렇게 보였나?”
“…….”
레냐르가 시온을 곁눈질했다. 사실 대경합 직후로 묘한 낌새를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 에트시 왕자의 비밀을 알고 있던 시온이 있었기 때문에. 만약 그가 없었다면……. 아니, 만약은 의미가 없다.
“이해해 주면 좋겠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너희 둘이 손을 잡고 나를 따돌리니 질투심이 나서 말이야.”
“그래서 어찌하시려고요, 오라버니. 무력행사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무슨 야만적인 소리냐. 저들은 단지 저기에 있을 뿐이야.”
제1황자가 손을 내젓고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음. 어찌 믿어야 할지?”
“믿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냐?”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릴 생각이오.”
“이거 무섭군. 좀 믿어 주거라, 동생아.”
무섭다고 말하나 능글맞은 웃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턱수염을 쓸었다. 대제의 젊을 적을 따라 기르기 시작했던 것이 이제야 조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늘 어색하기만 했었는데 어느새.
“저들로 너희를 어찌할 생각은 결단코 없다.”
“그럼 무얼 위한 병력이요.”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은, 최소한의 안전장치지.”
걱정은 말아라. 터무니없는 제안을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서야 품격이 없지 않냐며 페르비아스는 껄껄 웃었다. 세쿤두스도 레냐르도 따라 웃지 않았다. 그저 눈빛을 매섭게 했다.
“그리고 또, 앞으로 벌어질 일의 증인이 되어 줄 테고.”
“…증인?”
새로운 이천의 병력, 곳곳에 깃발을 내세웠다. 제도 인근의 유력한 귀족들이다. 허나 자세히 살피니 페르비아스에게 강한 지지를 보이는 자들만 모인 것은 또 아니다. 중립에 가까운 입장을 지키던 자들도 깃발을 내세우고 나왔다.
“이보시오, 대학장.”
페르비아스 고개를 홱 들었다.
서로 으르렁대던 헤르마이를 바라본다.
“진실로, 나는 저들을 증인으로 불렀소. 아직은 규율에서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을 터.”
“…흐음, 매우 아슬아슬하다만. 무엇을 증명하겠다는 말인지.”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페르비아스를 내려보았다. 1황자의 금빛 눈동자는 혈기로 번쩍인다. 흰 긴 수염 마법사는 콘티누아 대제의 젊을 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정한 황제의 자격.”
“주제넘은 소리를 하는군.”
“주제넘은지 아닌지, 들어 주시기를.”
흐음? 헤르마이의 눈썹이 휘었다. 페르비아스 짐짓 공손한 척 허리를 숙여 보였다.
“내 이제부터 고하겠으니.”
* * *
페르비아스의 진영에서 로브를 걸친 사내 몇이 튀어나왔다. 헤르마이와도 낯이 익은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은 페르비아스를 둘러싸고는 무어라 중얼중얼 주문을 외웠다. 일종의 환영마법. 헤르마이 막지 않았다.
‘때가 이르렀다.’
황자의 환영은 평원을 메울 만큼 거대하다. 페르비아스는 제 환영과 시야를 공유한다.
‘그 모든 시간 넘어, 이 페르비아스의 때가 왔어.’
삼천오백의 군세, 볼마르크와 군부와 제도 귀족들의 무리다. 대제국의 권력 틀어쥔 이들을 내려보며 페르비아스는 말한다.
“나,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금발 금안 황자의 형상은 거대하디거대하다.
평원 어디서든 그 모습이 보였다.
“제1황자. 콘티누아 대제 폐하의 맏이. 오래된 의문 있어 이렇게 섰소.”
평소처럼 거드름 피우는 투가 아니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공손하게 굴었다. 마치 겸손이라는 것을 품기라도 했다는 듯.
“콘티누아 대제께서 말씀하시기를, 황제란 가장 높이 서는 자.”
군중의 시선이 그의 환영에게로 모여든다. 이미 치밀하게 짜 놓은 판이다. 기다려 왔던 시간이다. 페르비아스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의문이지. 황위계승전, 열 개의 비보? 보물찾기의 승리자가 가장 높은 자인가.”
몇몇은 벌써 그의 의도를 짐작했다. 레냐르 드 볼마르크도 그중 하나였고,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 않겠지.”
제1황자의 콧잔등 찌푸려진다. 모두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손짓 하나, 찡그림 한 번까지 삼천오백 모두에게 선명했다.
“그럴 수 없겠지!”
환영의 크기만큼이나 목소리 쩌렁쩌렁하다. 평원을 넘어 언덕에 닿는다. 어쩌면 제도 루틸리움까지도.
“나는 정말 모르겠소.”
목소리에 격앙의 징조가 있다.
“많은 비보를 차지하는 것이 어찌 황제의 자격이 될 수 있나? 어떻게 가장 높은 곳에 서기에 합당하다 말할 수 있나?”
여기 모인 삼천오백 군세, 젊은이 중에도 특히 혈기 넘치는 이들이다. 그러니 말을 타고 창칼을 들었겠지. 군중은 자기들도 모르게 고조되어 간다. 시온은 그것을 느끼고 작게 혀를 찼다. 막을 도리가 없었다.
“간자와 탐색꾼을 부려 보물을 찾아내면, 엉덩이에 깔고 앉아 숨긴다……. 여기 어디에 고귀함이 있나. 품격은 또 어디에 있나. 이 페르비아스가 알지 못할 뿐인가.”
페르비아스 고민이라도 하듯 턱수염을 쓸었다. 속내야 어떻든 퍽 그럴듯하게 보였다. 이때를 위해 어색한 수염을 길러 왔다. 얼핏 진중한 겉모습은 다수의 지지를 끌기에 수월하다.
“나는 미숙한 자요. 그래서 아무래도 참을성이 없소.”
페르비아스 손을 치켜든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더 뛰어난 영혼을 갖고, 더 깊은 각오와 더 정당한 권리를 품었다 해도…….”
그의 모습은 여전히 평원의 모든 이에게 보이는 중이다. 그의 손에 들린 반지 있다. 열 개의 비보 중 하나, ‘쉠의 반지’.
“…겨우 이딴 걸 얼마나 모았는가 따위에 놀아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쉠의 반지’가 내동댕이쳐졌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단 말이오!”
반지는 이내 바닥을 굴렀고 그 모습까지 군중에게 보였다. 곳곳에서 탄성 새어 나오고 헤르마이가 쌍심지를 돋구었다. 저 ‘쉠의 반지’. 헤르마이가 만들고 대제가 권위를 부여한 비보. 저것을 모욕함은 황실에 대한 반발이다. 제1황자가 아니었다면 당장 번갯불에 튀겨 죽여도 시원치 않다.
허나 노마법사는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혈기가 넘치다 못해 폭주하는 듯한 모습이 되레 대제를 닮았기 때문에. 페르비아스도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숙였다.
“-과격한 행동에 사과를 구하오, 대학장. 그대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소. 난 늘 그대에게 경의를 품었으니.”
흥. 흰 긴 수염의 대마법사가 코웃음 쳤다. 페르비아스의 말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군중들에게는 잘 먹혀들어 가는 듯하다. 사과하는 모습이 더해지니 그의 분노가 마치 정당한 것처럼 보였다.
“-전통을 모욕할 생각 없소. 창천대제의 깊은 뜻을 내가 다 어찌 알까. 다만,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답답했을 뿐.”
이해할 수 없는 전통이라도 존중받아야 하는 법이지. 페르비아스가 허리를 숙여 ‘쉠의 반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보여 주기 위한 것. 이미 철저히 짜 놓은 판. 레냐르의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래도 의문은 여전히.”
수천 쌍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쏟아졌다.
“참된 황제란 무엇인가? 대륙의 정점에 앉을 만한 인간이란 대체 어떠해야 하는가?”
제1황자는 즐거웠다. 수천을 발아래 두고 제 뜻을 설파하자니 삶의 의미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 말에 힘이 더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코르디스는 알아야 하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제1황자.
“제국의 모든 이에게 알려야만 하오.”
그는 환영의 시선을 공유한다. 삼천오백 젊은이가 그를 올려보고 있다. 본래 그의 편이었던 이도, 반대였던 이도 많다. 허나 다들 열띤 얼굴이다. 장래 다스리게 될 제국과 찬란한 미래를 망상하고픈 욕망이 솟았으나 애써 참았다. 대신 숨을 깊게 가다듬는다.
“…그리고 나 또한, 간절히 알고 싶소.”
깊게 내쉬는 듯한 읊조림.
그러나 모두에게 들리도록.
“그러니 내 동생들아, 우리 온 힘을 다해 겨루어 보자.”
레냐르가 혀를 차고 세쿤두스의 얼굴이 돌처럼 굳었다. 페르비아스의 군세는 물론 그들 파벌의 젊은이들도 크게 감명을 받은 듯한 모양새였다. 진짜 감명이라기보다는 분위기의 영향이 크겠으나, 이를 분별해서야 젊은이겠는가.
“아무도 의심치 못하게, 복잡한 규율도 필요 없이, 그저 온 힘을 다해 서로 뺏고 빼앗아 보자. 그렇게 서로의 자격을 증명하자꾸나.”
페르비아스 동생들을 내려본다. 휘하의 마법사들이 손짓하고 세쿤두스와 레냐르의 모습 또한 커다란 환영이 되어 평원에 드러난다. 그들은 평정을 가장했으나 페르비아스만큼의 당당함은 없었다.
“마침 우리 셋이 딱 세 개씩 나누어 가지지 않았나.”
선언. 돌이키지 못할.
“나는 본래 대동했던 이들만 움직일 테니, 너희는 모든 수를 써도 좋다.”
세쿤두스와 레냐르의 얼굴에는 낭패감이 짙다. 외통수였다. 자기는 힘을 깎아 내고 동생들은 모든 힘을 다해도 좋다고까지 말하는데 도망친다면 겁쟁이의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남지 않았다.
“열흘 동안의 전쟁. 이것이 나의 제안이오.”
* * *
‘-아아.’
레냐르는 그저 작게 탄식했다.
‘참 징그러운, 내 오라버니.’
이 계승전, 억지에 억지만 이어진다.
‘비보를 그저 서로 빼앗고 빼앗자? 자기에게 불리했던 앞선 싸움을 없던 걸로 하자는 말을 화려하게도 하셔라.’
마지막 경합의 상품까지 합하면 이 싸움으로 모든 비보가 오갈 수 있게 된다. 앞선 경과가 무효로 되는 것과 다름없으니 이보다 더한 억지가 있을까.
‘이거야말로 무엇보다 소꿉놀이 꼴인데, 발을 뺄 수가 없겠네. 역겹게도.’
들뜬 열기를 보라. 어찌할 수 없을 만큼 달아올랐다. 평원에 모인 삼천오백은 제국 내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들, 혹은 그런 이들의 자제가 대부분이다. 물러설 수는 없다.
“어찌 거절하겠어요.”
제1황녀, 레냐르 드 볼마르크가 입가를 가렸다. 그녀는 애써 낭패감을 숨겼다. 완전히 놀아났다. 허나 뒤집을 여지는 있다. 여지가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뒤집어야만 한다.
“이 레냐르는 기꺼이 오라버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요.”
“음. 저도 기쁘게 응하겠습니다.”
세쿤두스 또한 입을 열었다.
“다만 의문이군요. 전쟁을 원하셨다면 처음부터 그리 말씀하시지.”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쟁이라고 하면 다른 둘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나날을 쌓은 세쿤두스다. 이전보다 당당함이 더하다.
“그래도 기꺼이 부딪쳐 드리지요.”
거한의 황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 눈은 투기로 이글거린다. 그 뒤에 선 이백 장정도 마찬가지다.
“좋다, 동생들아, 이제야 코르디스의 핏줄답군.”
페르비아스가 크게 웃었다.
그는 하늘 보며 말한다.
“모두가 동의했소, 대학장!”
“이미 다 듣고 있었다.”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못마땅한 얼굴이다.
“열흘의 전쟁이라고?”
페르비아스에게 놀아난 꼴이 된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1황자가 조금은 다시 보였다. 자존심만 가득한 줄로 알았더니. 노마법사가 손을 내젓자 평원을 채우던 환영이 사라졌다. 간단한 일이었다.
“좋아, 너희의 피가 흐르지 내 피가 흐르는 것은 아닐 테니.”
페르비아스, 귀족의 군병 천.
레냐르, 북방의 전사 삼백.
세쿤두스, 군부의 장정 이백.
모두가 온 힘 다해 비보를 빼앗고 빼앗아 끝날에 가장 많은 숫자 취한 쪽이 승리. 모든 것의 주인 되리. 대륙의 가장 높은 곳에 앉게 되리.
“이를 마지막 경합으로 승인한다.”
우레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허나 경합의 시작은 내일 동틀 때로 한다. 이는 대제 폐하의 명이었다.”
매일 동이 틀 때 경합을 벌이라는 것은 콘티누아 대제가 직접 지시한 바다.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 페르비아스도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미 그가 원하던 것 대부분을 이루었다.
“쉬시길, 전하들. 참으로 마지막 경합이오니.”
* * *
‘페르비아스의 마지막 칼날이 드러났다. 쓸데없이 화려한 폭주의 내막과 함께.’
시온 폴링라이트는 관조한다.
‘열흘의 전쟁, 이전과 같아.’
세 명의 황자 황녀보다는 뒤에, 삼천오백 군세보다는 앞에. 곁에 선 것은 제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 그의 눈동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푸르다. 먹구름 잔뜩 낀 하늘보다도.
‘요제프의 돌발 행동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를 건 없겠어.’
바라본다. 대경합을 피해 도망친 세 명의 황자 황녀. 그들은 장막에 숨어 있다. 제4황자 네불로 레 에티에르, 제6황자 바바토 루루디스와 유모, 제2황녀 상티아 호스타니오.
‘아, 드디어…….’
시온 폴링라이트.
19년의 세월 거슬러 제5황자 지오니스로 돌아왔다. 근위기사 피에스 로에스티, 마갑 발지아트 품고, 세쿤두스의 파벌에서 한 손 거들었다. 숨어서 대경합을 지켜보았고, 이윽고.
‘계승전의 끝.’
그는 다짐했다. 저 황제의 자리, 코르디스의 주인에게 닿고야 말겠다고. 그리고 권좌를 향한 다툼이 마지막에 치달았다.
‘이제야 시온 폴링라이트의 때로군.’
39화
전야前夜.
세 파벌의 진영 멀찍이 떨어졌다.
서로의 동태를 간신히 살필 수 있을 정도의 거리다. 다음 날의 경합, 열흘의 전쟁을 위해 바쁘게 준비하는 것은 세쿤두스 데비우스의 진영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언덕 바로 아래쪽에 있었는데 자정에 다 되어 감에도 곳곳이 소란했다.
세쿤두스 휘하, 군부의 이백 장정.
몇은 횃불과 창을 들고 보초를 섰다. 말에게 물을 먹이거나 제 무기를 날카롭게 가다듬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웃음기는 거의 없다. 북부의 전사들처럼 전쟁을 앞두고 하, 하하, 하- 웃어 젖힐 만큼 미치지는 않은 까닭이다.
군부의 장정들은 아직 젊다. 노련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망상과 현실쯤은 구분할 줄 알았다. 전쟁은 이렇게 장난스레 벌일 만한 것이 아님을 안다. 허나 한번 벌어지면 피를 흘릴 수밖에 없음도 알았다. 황자들의 변덕에 끼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가혹하게 느끼는 장정은 없었다. 할 일을 일찍이 마친 자들은 이미 잠들었다. 기습을 염려하지 않고 푹 잘 수 있고, 보급의 걱정 없이 말까지 배불리 먹일 수 있다. 이걸 가혹하다 부르기에는 그들의 신경 줄이 너무 굵다.
“음.”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그런 장정들을 둘러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덩치 큰 사내들보다도 머리가 셋은 크고, 팔뚝은 대들보처럼 우람하다. 입술 굳게 다물고 굵은 목 치켜세운 채 걷는 것만으로도 장정들에게는 의지와 격려가 되었다. 그에게는 타고난 장수의 기개가 있었다.
밤이 더욱 깊어가고 장정들이 하나둘씩 제 잠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곧 횃불과 창 들고 보초를 서는 몇만 남았다. 세쿤두스는 그들에게 눈길을 주고서야 제 천막으로 향했다. 카테카 케슐레이나 지오니스도 이미 잠자리에 든 듯했다.
“…….”
휴. 혼자가 되고서야 작은 한숨을 토할 수 있었다. 전투에는 자신이 있다. 페르비아스는 전공을 위한 몇 차례의 토벌이 전장 경험의 전부이며, 레냐르는 군략에는 능해도 전투에는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요제프 하이더가 없으니 더욱.
“…그리 간단할 수는 없겠지.”
세 파벌은 서로가 보일 만한 곳에 진을 쳤다. 그리고 저 평원에서 맞붙을 것이 뻔하다. 그렇다면 전술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다. 병종이 다양하지 못함도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숫자가 아쉽고.”
페르비아스의 군병, 천. 레냐르의 전사, 삼백. 세쿤두스를 따르는 장정, 겨우 이백. 다들 제 말까지 끌고 온 숙련된 기병이지만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다. 특히 페르비아스 쪽에는 마도병정도 몇 기나 있다.
세쿤두스는 짧은 머리를 긁적였다. 체력이라면 부족함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밤을 새우더라도 고심해야 했고, 여지가 없어도 만들어야 했다. 익숙하지 않은 펜을 들고 머리를 싸매던 세쿤두스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밖에 누구냐?”
낯선 인기척에 툭 던진 물음이다. 헌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예, 전하. 아메투스라 합니다.”
“음. 아메… 뭐?”
사내 하나가 말없이 들어섰다. 그 눈은 옥색으로 번들거린다.
“기억하실는지요, 전하.”
“…잊을 리가!”
그의 어머니, 전 칠련장군을 꺾어 낸 사내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 하지만 마리나를 꺾은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메투스는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최측근이다. 그런 이가 어찌 이곳에 있나.
“어쩐 일로 왔나.”
“전하실 말씀이 있다길래.”
“…….”
세쿤두스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곧 사내가 또 하나 들어섰다. 금발에 금안, 영 달갑지 않은 이목구비.
“…페르비아스 형님.”
“그래, 세쿤두스.”
제1황자, 남의 진영을 불쑥 찾아와 놓고도 뻔뻔하게 웃는다.
“이 형님과 이야기 좀 하자꾸나.”
* * *
“돌아가십시오.”
“그러지 말고.”
세쿤두스 단호하나 페르비아스 털썩 주저앉는다. 적진에 냉큼 뛰어들어 놓고도 그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다. 그럴 만도 하다. 저 옥색 눈의 사내를 호위로 두었으니 누가 감히 그를 해하겠는가. 병사들을 깨우는 사이에 유유히 도망치고도 남으리라.
하지만 열이 확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메투스가 야참 보따리까지 주섬주섬 챙겨 왔기 때문이다. 세쿤두스가 못마땅하게 콧김을 뿜고 페르비아스가 킬킬 웃었다.
“내 뜻을 전하려고 하니 좀 들어 주려무나.”
“아까 다 전하시지 않았습니까?”
“섭섭하게도 구는군.”
말과는 달리 전혀 섭섭한 얼굴이 아니다. 이 정도의 푸대접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페르비아스는 제 턱수염을 몇 차례 쓸어내리고는 말했다.
“이봐, 동생아. 내가 너희를 해하려 한다고 생각하느냐? 천만에.”
음. 세쿤두스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조금이지만 흥미가 생겼다.
“해치는 것이 목적은 아니시겠지요. 다만 형님께서는 목적에 방해가 되면 동생이라도 선뜻 치우시지 않겠습니까?”
“그게 억울하단 말이다. 그걸 알면서도 왜 방해를 하느냐, 동생아?”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금빛 눈, 서슬 퍼렇다.
“너도 레냐르도 권좌에 큰마음은 없을 터. 그저 나를 제위에 올리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리 달려드는 것이 아니야?”
“…….”
제1황자의 질문은 날카롭다. 제2황자는 답하지 않았다. 제1황녀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아마 답하지 않았을 터다. 저 질문이 진실을 정확히 짚었기 때문이다.
세쿤두스의 마음은 전장에 있고 레냐르의 마음은 볼마르크 공국에 있다. 그들은 코르디스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간절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확답하기가 힘들다.
“나는 꿈꾼다. 네가 제일장군의 자리에 오르고, 레냐르가 볼마르크의 주인이 되는 모습을. 그리고 내가 권좌에 앉으면 이 코르디스가 어찌 부강하지 않겠느냐?”
“음. 우리 사이에 우애나 신뢰가 있다면 꿈꾸어 볼 만도 하지요.”
저 꿈, 헛소리다.
상대의 고귀함이 제 고귀함을 갉아먹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기에 그러하다. 페르비아스 자신이 누구보다 그런 마음을 강하게 품었고, 때문에 누구보다 저 꿈이 헛소리임을 잘 알고 있다. 세쿤두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레냐르 누님께도 그 헛소리를 지껄이고 오셨습니까?”
“하하. 그쪽은 무서워. 네가 전해 주어라. 어차피 뒤로 손잡고 있지 않나.”
“…….”
세쿤두스가 또 한 차례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실제로 이미 직통으로 통신마법 회선을 이어 놓은 뒤였다. 페르비아스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대제를 닮은 이목구비를 일그러트리며 웃는다.
“형은 꿈을 말하나 동생은 듣지 않는군. 아아, 맏이의 숙명이란.”
“제대로 된 꿈이 아니니 당연합니다.”
“그래도 고려해 보아라. 너희의 상황이 썩 좋지 못함은 알고 있을 테니.”
페르비아스는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있다. 이천의 군병을 움직이지 않아도 천의 군세다. 게다가 마도병정 따위의 병기들이 매우 골치 아프다. 레냐르와 세쿤두스가 힘을 합친다 해도 어떨까. 힘을 합치는 것조차 수월하지는 않을 텐데.
“이제 다 하셨습니까?”
답답함은 짜증이 되어 치밀었다. 참을성 강한 거한의 황자도 결국은 툭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이만 가시지요, 눈을 붙여야겠으니.”
“아. 급하기는. 잠깐만 기다려라. 이쪽이 본론이니.”
아메투스가 보따리를 내어놓았다. 야참 보따리인 줄로만 알았는데 번쩍이는 것이 들었다.
“좋은 물건이 있어서 보여 주고 싶었거든.”
칼과 거울.
칼은 여섯 자루고, 거울은 둘이다.
“다 귀한 물건이기는 한데, 여덟은 좀 많지 않나 싶어 둘 정도는 뺄까 싶은데 네 조언을 구하고 싶군.”
“…….”
세쿤두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볼 것도 없다. 계승전에 뛰어든 6황자 2황녀의 비유다. 페르비아스는 노골적일 정도로 짙은 웃음을 내보였다.
“거울이야 둘밖에 없으니 아직 빼기 그렇지. 하나는 건드리기 무섭기도 하고. 역시 일단 칼을 둘 정도 치워 버릴까 싶어. 어찌 생각하나?”
“…계속 이야기해 보시지요.”
여섯 황자 중 둘을 없이하겠다는 소리다.
세쿤두스의 눈이 한없이 날카로워진다.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첫째, 둘째야 뺄 수 없는 법이고.”
페르비아스가 턱수염을 쓸며 웃었다. 그는 이미 다 이긴 것처럼 굴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오만함이 낳은 비열함이 묻어났다.
‘빌어먹을 형님, 당신을 믿지 못할 이유가 바로 드러나고 있군.’
세쿤두스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메투스는 그의 생각을 눈치챈 듯했으나 옥색 눈만 빛내며 침묵을 지켰다. 페르비아스 신이 나서 떠든다.
“셋째는 숨어서 잘 보이지 않고, 여섯째는 칼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하게 작아. 문제 될 것 없겠지.”
제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 은둔황자라 불릴 만큼 두문불출한다. 세쿤두스 파벌에 손을 빌려준 것도 놀라운 일이다.
제6황자, 바바토 루루디스. 아직 갓난아기인지라 유모 없이는 움직이지도 못한다. 더 큰다면 몰라도 굳이 손을 대서 루루디스 가문과 척을 질 이유가 없다.
“역시 넷째 다섯째 놈이 문제군. 하나는 소란스럽고 하나는 의문스럽잖나.”
제4황자, 네불로 레 에티에르.
비웃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이런저런 불상사가 끊이지 않는다.
제5황자, 지오니스.
원래는 가장 약하고 조용했으나 이상하게 계승전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눈에 거슬렸다. 그냥 두어서는 안 될 듯했다.
“그럼 이 두 자루 칼을 어찌할까.”
제1황자의 손길 망설임 없다.
칼 두 개를 바닥에 던지고는 아메투스에게 눈짓했다. 칠련장군을 꺾은 검사의 발길질에 두 자루 칼은 챙강, 하고 깨어졌다. 산산이 조각난 모습을 보며 그는 흡족해 웃는다.
“이제야 후련하군!”
“…음. 험하게 다루시는군요.”
“쓸모없이 거치적대니까.”
“부술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세쿤두스 데비우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페르비아스가 활짝 웃었다. 세쿤두스는 그제야 이 빌어먹을 형님의 속내를 깨달았다.
“그럼 네게 부탁해도 되겠느냐? 그러면 우리 사이에도 우애라 할 만한 것이 조금 더 생길지도 모르지.”
“…….”
“싫으면 말아. 하지만 내 성격이 급해서 눈에 거슬리는 걸 참지 못하거든. 나도 모르게 어쩌면… 알겠지?”
세쿤두스가 속으로 뇌까렸다.
‘이래서 찾아왔나.’
네불로와 시온을 치워라.
어딘지는 몰라도 이 황궁에서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라. 하지 않아도 좋지만, 그러면 둘은 분명히 죽는다. 세쿤두스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고, 페르비아스도 일말의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느껴졌다.
“…눈에 띄지 않게 하지요. 어디로 치우면 좋겠습니까.”
“그것까지 내게 묻나?”
페르비아스가 일어섰다.
“이만 가 보마, 세쿤두스. 알아들었기를 바라지.”
그는 아메투스가 내민 겉옷을 받아 들며 킬킬 웃었다.
“난 우리가 좀 더 가까웠으면 하거든.”
* * *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페르비아스가 제 진영으로 돌아감을 확인하고 곧바로였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동생의 잠자리를 찾았다.
“지오니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다들 잠든 와중에도 시온은 당연하다는 듯 깨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쿤두스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페르비아스 형님이 찾아왔었다.”
“왜, 저를 죽이기라도 하랍니까?”
“…음!”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열한 살짜리 동생은 때때로 놀라울 만큼 눈치가 빨랐다. 어찌 알았냐는 질문 따위를 애써 삼키며 말을 이었다.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말을 준비해 줄 테니 짐을 꾸려…….”
근육질 황자의 말이 멈추었다. 그는 시온을 보았다. 황자의 복색이 아닌 가벼운 옷차림에 질긴 가죽 신발. 짐은 이미 가지런히 싸 놓은 뒤. 이미 떠날 준비를 끝내놓았다.
“…….”
인기척 있다. 어, 세세세쿤두스 전하? 덜덜 떠는 목소리. 시온의 근위기사, 피에스 로에스티라고 했던가. 세쿤두스는 조용히 손을 내저어 피에스를 쫓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배다른 동생을 바라보았다.
“너, 지오니스…….”
형제가 눈을 마주쳤다. 세쿤두스의 검은 눈동자 가늘게 떨리나 푸른 눈은 고요하다. 이 순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하다. 검은 눈동자는 더 세차게 떨린다. 아. 세쿤두스는 곧 깨닫고 말았다.
“…그렇군. 그런 거였나. 이제야 알겠다.”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졌다. 제5황자 지오니스가 보였던 행동들이 하나씩 설명되기 시작했다. 세쿤두스의 파벌에 붙었던 일, 먼저 도착해 놓고도 비보를 양보했던 일, 한 번씩 좋은 의견을 내며 도움이 되었던 일.
“지오니스, 너 싸움이 치열해지기를 원했어. 그래서 내게 힘을 실어 주었지?”
아무리 힘이 약하다 해도 황자. 갑자기 사라져서는 눈에 띄기 마련이다. 헌데 세 파벌이 피를 흘리던 와중이라면? 가장 힘이 약한 황자 하나가 사라져도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닐 터다.
“그래야 네가 빠져나가도 크게 티가 나지 않을 테니까. 그래, 계승전의 선포식, 그날부터, 맨 처음부터 너는 줄곧…….”
모두, 이때를 위해서.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했다.
“…도망칠 생각뿐이었구나.”
4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