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빗소리.
소나기가 갑작스레 천막을 두드렸다.
“처음부터 도망칠 생각이었냐니.”
시온 폴링라이트 키득 웃었다.
“예, 맞습니다.”
거짓말쟁이의 미소 아니다.
약간의 후련함이 묻어났다.
“계속 그랬지요.”
19년을 거슬러 제도 루틸리움으로, 코르디스 대황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머무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당장이라도 떠나고팠다. 다만 얻을 것을 얻으려, 또 적절한 때를 기다렸을 뿐.
“사실 놀랍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찾아오실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어요.”
회귀 전에는 세쿤두스의 파벌이 아니었다. 그러니 누구도 그를 돕지 않았다. 갑자기 칼 든 사내들이 들이닥쳐 허겁지겁 도망쳤다. 개처럼 기고 흙탕물을 마시고, 피에스의 죽음을 보고. 뭐, 그랬었다.
“내일 제가 사라진 자리나 보게 되시리라 여겼는데, 어찌 오셨습니까?”
“…형제니까.”
“그것이 가장 놀랍군요.”
세쿤두스 데비우스, 진중한 얼굴이다. 시온 약간이지만 감탄을 표했다. 이런 사내였던가? 회귀 전에는 이렇게까지 곧지는 않았던 듯한데. 조금 속내를 드러낼 마음이 들었다.
“일부러 수상하게 굴었습니다. 눈에 거슬려야 칼을 들이밀지 않겠습니까.”
“…….”
“위협까지는 아니라도 그냥 두기에는 꺼림칙하게, 치워 내면 시원하겠으나 그리고 곧 잊어버릴. 예, 그런 꼬맹이를 연기했죠.”
늘 정도가 중요하다. 딱 거슬리는 정도로만. 그저 어린아이처럼 가만히 있지도, 그렇다고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고.
“그렇게 금세 잊힐 생각이었는데.”
실제로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그렇게 여기고 있을 터다. 어쩌면 레냐르 드 볼마르크도 그러할 것이다.
“동생으로 여겨 주신 덕에 작별 인사는 하게 되었네요. 말을 훔칠 필요도 없어졌고.”
“언제 떠나려 했느냐.”
“지금 막.”
“…그렇군.”
후우. 세쿤두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하다. 아직은 다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애써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네 예상을 벗어났다는 말이지? 그걸로 만족하마.”
거한의 미소에 시온이 키득거렸다. 어쩌면 그의 배다른 형은 생각보다 커다란 사내일지도 모른다. 세쿤두스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물었다.
“괜찮다면 네불로도 데려가 주겠느냐.”
“안 그래도 네불로 형님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합류 장소를 정하고 미리 보냈지요.”
“벌써? 하여간 그 녀석, 제 목숨 걸린 일에만 눈치가 빠르단 말야.”
둔하기로 유명한 제4황자 네불로지만 페르비아스가 자기를 마땅치 않게 여김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비벼 볼 만한 언덕은 시온뿐임도 알았고. 시온은 네불로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같이 도망치자고 해 주었다.
“…음. 어디로 가느냐 물어도 답해 주지 않겠지.”
“말한다 하더라도 믿지 않으시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배다른 형제가 마주 웃었다.
시온은 처음으로 이 거한을 진심으로 형님이라 불러 줄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굳이 부르지는 않았고 이유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어깨를 들썩이던 세쿤두스가 고개를 들었다.
“지오니스, 하나만 묻겠다.”
시온이 어서 물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 황제의 자리에 닿겠다고 말했었다. 그것도 거짓말이었느냐.”
“답하면 믿어 주시렵니까.”
“그래.”
시온 폴링라이트가 입을 열었다.
“진실이었습니다. 난 여전히 황제의 자리 바라봅니다.”
그런 약속이었다. 대제국 코르디스, 그 정점에 있는 권좌에 언젠가 닿겠다고. 헛된 꿈일지라도 끊임없이 꾸어 보겠다고. 그는 닿을 것이다. 닿아야만 한다. 저 황제의 자리에.
“다만, 아직은 아니라 여길 뿐.”
“그렇군.”
근육질 황자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꾸러미를 내밀었다. 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이 꾸러미 안에는 비보 중의 하나, ‘하늘 결정 투구’가 들었다.
“이 투구를 쓰면 잠시 모습을 감출 수 있다더군. 위급할 때 도움이 될 거다.”
“…비보까지?”
“본래 네가 양보한 물건 아니었느냐. 내게도 생각이 있어 그러니 가져가라.”
“조금 감동인걸요.”
“음. 이 세쿤두스 데비우스, 늘 감동적인 사내였지.”
그는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어서 떠나라. 그러고는 잊어주마.”
굳센 눈동자로 시온을 바라본다.
“반가웠다, 내 동생아.”
* * *
빗속에서 기다리는 밤색 머리 사내, 이름은 피에스 로에스티. 그는 두 마리 말을 준비해 놓았다. 시온은 하나에 턱 올랐다. 네불로가 합류하기 전까지는 각각 말을 몰 계획이었다.
“가자, 피에스.”
“예, 지오니스 전하.”
발굽 소리가 크게 나지 않게 조심해서 말을 몰았다. 비 때문에 땅이 물러 어렵지 않았다. 세쿤두스가 그들을 바라봄을 느꼈다. 굳이 뒤돌지 않았다. 진영을 빠져나오는 것은 금세였다.
비 내리는 하늘, 구름 중에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있다. 그들을 보았을까. 어느 쪽이든 관여할 기색은 없어 보였다. 이동을 서둘렀다. 시온이 제 근위기사에게 물었다.
“갑자기 도망치게 되었는데, 놀랍지도 않아?”
“…전하의 호위가 몇 년인데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습니다.”
피에스 로에스티는 그리 말하며 시온을 흘끔거렸다. 빗물이 눈앞을 가렸다.
“전하께서 승마가 이리 능숙하셨다는 게 훨씬 놀랍군요.”
“핫.”
시온은 굳이 길게 대답하지 않고 고삐를 쥐었다. 말이 겅중 뛰어 돌을 넘었다. 회귀 전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말 위에서 보냈는지. 두 마리 말이 내달렸다. 시온은 제 품의 꾸러미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세쿤두스에게 이렇게 도움을 받을 줄은 몰랐어.’
남으로 여겼다. 몇 가지 도움은 주었으나 신뢰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온을 동생으로 여긴다고 할 줄이야. 심지어는 비보를 하나 내어 주기까지. 시온 폴링라이트는 새삼스러운 형제애에 쓴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보다 페르비아스. 세쿤두스에게는 날 도망시키라 했다던데, 거기서 끝날 리가 없지.’
이제는 평원이 저 뒤다. 초목 따위가 간간이 눈에 띄기 시작했으나 말이 내달리기에 불편함은 없었다. 길은 이어져도 그 옆으로는 나무가 무성하다. 달빛도 다 드리우지 못하는 길목이었다.
‘끌어내기 위한 핑계야. 진영 밖에서 조용히 처리하기 위한…….’
번쩍, 한다 싶더니 수풀에서 창날이 쑥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창날이 비를 뚫고 시온을 노렸다. 피에스 로에스티가 고함질렀다.
“-전하!”
창의 숫자는 셋.
숨어 있는 암살자의 숫자도 셋.
창 둘은 말을, 하나는 시온을 향한다.
‘흥.’
시온 폴링라이트, 당황할 이유가 없었다.
‘이쯤에서 튀어나올 줄 알았지.’
창은 셋이지만 ‘공상손가락’은 열일곱. 보이지 않는 손들이 창날을 막고 창대를 꺾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눈치채기 전에 발지아트가 검은 창의 형태가 되어 시온의 손에 들렸다. 그의 창은 말을 달리던 기세로 암살자의 목을 취했다. 창질 세 번, 구르는 목도 셋. 머리 하나는 물웅덩이에 풍덩 소리를 내며 빠졌다.
‘별것 아니군……. 피에스 쪽에도 둘이 붙었나.’
시온이 곁눈질했다. 두 자루 창이 피에스에게도 쑥 찔러졌다. 그러나 밤색 머리 기사는 빠르게 검을 빼어 그것을 막았다. 명색이 황자의 근위기사다. 이 정도 어려워서야 어찌할까.
“에에이, 이놈들!”
피에스의 검이 비 사이를 누빈다. 창대가 조각나고 암살자의 손목을 그었다. 그러나 목까지는 취하지 못했다. 피를 흩뿌리며 사내 둘이 도망쳤다. 시온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걸 놓쳐, 피에스?”
“…죄, 죄송합니다. 마상 전투가 워낙 오랜만이라.”
“됐어. 서두르자.”
* * *
한참을 달렸다.
비는 더욱 거세어지기만 한다.
이내 강줄기 앞에서 멈추어 섰다. 폭우 때문에 벌써 물줄기가 불었다.
“다리를 건너 첫 번째 갈림길에서 합류하기로 했었지요?”
밤색 머리 사내, 피에스 로에스티가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아까 튀었던 피가 계속 거슬렸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레비오 자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네불로 전하 덕이네요.”
“…….”
다리를 건너면 평원은 끝이 나고 레비오 자작의 영토다. 그는 에티에르 상회에 연이 닿은 귀족이다. 네불로는 시온을 찾아와 그가 자기 외조부와 어떤 친분이 있는지 침을 튀기면서 설명하며 그쪽으로 도망치자 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 동의해 주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렇게 했었다.
“어서 건너시지요, 전하. 레비오 자작의 성까지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피에스 로에스티는 온몸에서 열을 뿜는 말의 갈기를 쓸었다. 이 비를 뚫고 쉴 새 없이 달렸으니 준마駿馬라도 잔뜩 지칠 수밖에 없다. 시온은 강 너머를 응시했다. 빗줄기가 거세지만 별문제는 없었다.
“강 너머는 평온해 보이는군.”
수풀이 우거지지 않고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아 보인다. 적어도 보기에는 그러했다.
“예. 그러니 전하, 어서…….”
“아니. 건너지 않는다.”
“…예?”
피에스가 당황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하마터면 소리칠 뻔했으나 그것은 어떻게 참아 내었다. 그는 손짓 발짓으로 항의하지만 시온은 뜻을 굽히지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과하게 평온해. 이미 이 앞에서 암살자들이 기다렸는데 저쪽에 없을까? 터무니없는 낙관이지.”
“아, 아니… 그럼 어떡하시려고요?”
“언덕을 탄다. 능선을 따라가면 소벨 산맥의 꼬리 부분까지 이어져.”
말은 어쩔 수 없이 버리게 되려나. 아니, 말만 보내서 놈들의 눈을 속여도 괜찮겠군. 시온이 중얼거렸다. 피에스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네, 네불로 전하께서는……?”
“형님께는 이미 말했어. 이미 산을 오르는 중이실걸. 추격자들도 형님 같은 뚱보를 데리고 산을 넘을 거란 생각은 쉽게 하지 않을 테니 더 좋군.”
“…저, 저는 처음 듣습니다만.”
시온이 피식 웃었다. 그는 말을 더듬는 근위기사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비에 젖은 가죽 갑옷이 무거워 보였다.
“미안하게 되었다, 피에스.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널 버리기라도 할까. 네 충성은 내가 알고 있어.”
“…….”
“그렇잖아? 네 충성을 내가 알지 못하면 누가 알겠어?”
피에스 로에스티 입을 다문 채다. 토라지기라도 했나. 아니면 무언가 깊게 생각할 거리가 생겼나. 시온은 캐묻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한적한 곳에서 말을 잠시 쉬게 한 뒤 다리 너머로 보낼 생각이었다. 암살자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
“자, 피에스 로에스티, 그러니 어서 가자.”
* * *
폭우.
산을 타는 것이 쉬울 리가 없다. 특히 이런저런 무장을 갖춘 채로는 더욱. 피에스 로에스티는 제 가죽 갑옷이나 검 따위를 당장 집어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꾸욱 눌러 참았다. 반면 시온은 가벼운 발걸음을 자랑이라도 하듯 앞서 나간다.
“피에스, 왜 산을 타자고 했는지 알아?”
“추격자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도 크지.”
뚱보 네불로와 열한 살 지오니스가 이런 폭우 중에 산을 타리라고는 보통 생각지 않을 터였다. 허나 그것뿐이라면 말을 버릴 것까지는 없었다. 페르비아스는 철두철미한 사내다. 저 위에 만약을 대비한 매복이 없으리라고는 확신할 수 없다.
“곧 소벨 산맥에 닿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시온이 배시시 웃었다.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400년 전, 센 소르티는 제국을 떠나며 몇 가지의 골칫거리를 선물로 남겨 주었다. 도서관의 비보도 그중 하나였고, 소벨 산맥의 사라지지 않는 안개도 그러하다.
“이 안개는 모든 이상異常을 가로막아. 설령 헤르마이 메르헤스의 마법이라도 우리를 찾지 못할걸.”
“…그렇군요. 거기까지 보셨습니까.”
피에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벨 산맥의 안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밤색 머리 사내의 낯빛은 어느새 거의 회색에 가깝다. 시온은 그런 피에스에게 물었다.
“얼굴이 안 좋은걸, 피에스. 힘들어서 그래? 갑옷이 물을 먹은 탓인가?”
“…아닙니다. 조금 걱정거리가 있어서.”
근위기사는 제 주인을 보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신경 쓰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 그래, 뭐, 죄송할 만하지.”
“…어쨌든 서두르시죠. 제가 앞장, 컥……!”
격통.
피에스가 시선을 내렸다.
“…어?”
검은 칼날이 그의 배를 꿰뚫었다.
칼날은 시온의 손에서부터 나왔다.
그는 자기를 찌른 황자와 제 상처를 번갈아 보다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전하, 왜……?”
“왜냐고? 지금 왜냐고 물은 거야?”
킬킬거리는 웃음소리.
“피에스, 이봐, 피에스 로에스티! 내가 너를 왜 찔렀냐고 묻고 있는 게 맞아?”
시온 배를 잡고 웃어 젖혔다.
“뻔뻔하기는!”
41화
피에스 로에스티, 밤색 머리의 근위기사는 제 복부를 감싸고 신음했다. 상처로 빗물이 타고 흐를 때마다 고통이 심했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전하, 접니다. 피에스입니다…….”
그는 시온의 하나뿐인 근위기사이자 말벗이었다. 또 코르디스 대황궁에서 유일하게 신뢰하던 사내였다. 그런 피에스가 피를 흘리며 애원한다. 허나 시온의 푸른 눈동자는 차갑기만 하다. 제 근위기사를 뒤에서 찔러 놓고도 조금의 후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 피에스를, 왜, 대체 어찌…….”
“아. 그런 억울한 눈으로 보지 마. 죄책감이 들잖아.”
시온이 손사래를 쳤다. 피에스 로에스티가 빗속에서 애원하니 동정심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불쾌했다. 거짓말쟁이보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자는 없는 법이니.
“날 어디까지 바보로 보는 거야, 피에스. 제발 그 얼굴 좀 어떻게 하고 말해.”
빗물의 맛이 났다. 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갈았다. 약간이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큰마음 먹은 배신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불안해 미칠 것 같은…….”
그 손에서 검은 칼날이 나타났다. 마갑 발지아트로 만들어 낸 것이다. 시온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휘둘렀다. 분노가 없었다면 거짓말.
“…그 얼굴을, 제발 좀 어떻게 해 보란 말이야!”
챙, 하는 소리가 났다. 피에스가 잽싸게 칼을 뽑아 칼날을 막아 낸 탓이다. 복부를 싸매고서도 피에스의 검은 둔하지 않았다. 시온이 키득 웃었다.
“그래, 너도 나름 황자의 근위기사를 할 실력은 있단 거지?”
“…….”
피에스 로에스티가 하늘을 보았다.
“후우…….”
시커멓다.
비는 거세지기만 한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검을 더욱 굳게 움켜쥐었으며.
이내 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전하?”
밤색 머리 기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말했잖아, 얼굴에 다 쓰였다고.”
시온의 입가에 맴도는 것은 노골적인 비웃음이다.
“내가 계획과 다르게 움직여서 계속 안달이던걸.”
회귀황자는 눈을 매섭게 했다.
“아, 다리 너머로 데리고 가기로 했는데. 일단 표식을 남기며 왔지만 언제 따라오려나. 5황자 지오니스, 이 꼬맹이를 어서 팔아넘겨야 하는데!”
“…….”
피에스가 말을 잃었다. 속내를 거침없이 푹푹 찔러 대니 할 말이 남을 턱이 없다. 꼬맹이 황자의 웃음은 더욱 비릿해져만 간다.
“게다가 너, 도망 준비는 왜 이리 빨라? 날 팔아넘길 때만 기다려 왔다고 그냥 말로 하지 그랬어.”
시온은 회귀자다. 페르비아스가 언제쯤 그를 죽이려 들지 알기에 서둘렀다. 헌데 피에스 로에스티, 평소에는 둔하던 놈이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달려왔다. 이유는 뻔하다. 페르비아스 측으로부터 암살 계획을 전해 듣고 시온을 넘길 때만 기다렸겠지.
“계승전 시작부터 어찌나 바쁘게 움직이는지. 모른 척하기도 힘들더라.”
피에스의 배신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계승전의 선포 때부터 시온이 도망을 생각했듯, 피에스는 배신을 생각했다. 5황자 지오니스의 하루를 보고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단지 시온, 알아차리지 못한 척해 왔다.
“호박파이 건네주던 제과장이 중간 연락책이었지?”
“그것까지……!”
피에스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직도 배가 욱신거렸다. 그렇게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빗물이 스며든 탓일까. 아니면 죄책감이라는 녀석 때문일까. 시온은 피 흘리는 피에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넌 전에도 그랬어.”
“…전에?”
“그래, 이전에.”
시온의 눈이 슬픈 빛을 띠었다.
회귀 전에는 몰랐다. 어린아이라서 피에스가 그를 팔아넘겼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헌데 회귀하고 나니, 서른 살 영웅의 눈으로 보니 배신의 증거들이 너무도 명백했다. 보고 싶지 않아도 계속해서 보였다.
“그때와는 다르기를 원했지만……. 그럴 수는 없더군.”
시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피에스를 뒤에서 찌른 것에 후회는 없다. 그러나 착잡함은 남았다. 피에스 로에스티는 정말로 어린 시절 유일한 말벗이었다.
“너는 또 나를 팔았구나.”
“…또, 라고요?. 무슨…….”
피에스는 의문스러웠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그는 겪어 보지 못한 세계를 이야기하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시온은 비밀을 드러내 의문을 풀어 줄 생각이 없었다. 상황 또한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란이 가까이 왔다.
“이 앞이다! 표식이 이 앞으로 이어진다!”
“역시나, 저기!”
빗속을 헤치며 일련의 무리가 다가왔다. 하나같이 날붙이를 빼 든 채다. 개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외쳤다.
“5황자 지오니스가 저기에 있다!”
* * *
족히 마흔 명은 되었다.
이 빗속에도 어쩜 이리 많은 추격자를 보냈는지, 그저 페르비아스다웠다. 우두머리 사내는 석궁을 들었는데, 보폭이 좁고 움직임이 잽쌌다. 그는 시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푸른 눈에 금발… 5황자 지오니스가 아니기는 힘들겠군.”
우두머리 사내가 눈을 흘겼다. 양쪽 눈의 초점이 맞지 않아 다소 기괴해 보였다. 사팔뜨기인 모양이었다.
“그럼 그쪽이, 피에스 로에스티?”
“…예, 접니다.”
시온이 킬킬 웃었다.
“이제는 발뺌도 못 하겠네, 피에스! 어서 가 보지?”
“…전하, 저는…….”
“아. 가족이 납치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느니 하는 뻔한 소리라도 하게? 그러지 마. 이미 배신한 주제에 무슨 염치로.”
“…….”
그 말대로였다. 피에스는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은 무거웠고, 비 때문은 아니었다. 시온은 뒤돌아선 근위기사를 향해 말했다.
“그래. 네 충성은 내가 잘 알지. 겨우 그 정도라는 걸 말이야. 같이한 시간이 7년이지만 어쩌겠어?”
“…….”
“가라. 건장한 사내 마흔이 어린애 하나를 난도질하는 게 오죽 어렵겠니. 너라도 힘을 보태야지.”
피에스는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마흔 명의 사내 옆에 섰다. 그들도 피에스를 딱히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몇몇은 노골적으로 경멸을 표했다.
게다가 시온에게 입은 복부의 상처. 피에스는 그것이 아려 와서 발을 약간 질질 끌었는데, 소리 없는 조소가 쏟아졌다. 명색이 기사면서 열한 살짜리를 상대로 저런 상처를 입다니. 피에스는 그저 비참한 심정이었다.
“황자답지 않은 꼬맹이군.”
“그러는 당신은 기사답지 않은데.”
사팔뜨기 사내가 툭 내뱉었고 시온도 져 줄 생각이 없었다.
“들은 적이 있지. 레비오 자작이 웬 사냥꾼을 데려다 기사로 삼았다고. 사팔뜨기랬는데, 이름이… 레핏?”
“…소문에도 밝군.”
레핏의 눈이 맹수처럼 빛났다. 어지간한 동물도 겁을 먹을 만큼 광망이 시퍼렇지만 그 정도에 기가 죽을 시온이 아니었다.
“그 사냥꾼이 우두머리로 있는 기사단은 꼴사납게도 머리 둘의 개를 상징으로 쓴댔지. 당신들 가슴팍에도 마침 똑같은 게 있군. 레비오 자작의 개가 페르비아스 형님께 팔렸는지는 몰랐는데 말이야.”
“…큼.”
“형님도 참, 개라고 해도 조금은 가려서 사시지. 잘 교육된 놈들로.”
레핏과 그의 기사단원은 모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했다. 검 솜씨가 무디지 않았으나 출신에 얽매인 삶을 산 이들이다. 그 부분을 찌르니 자연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제 날 어쩔 거지, 못 배운 개들?”
“…….”
안 그래도 시온을 죽이러 온 레핏과 마흔 사내다. 아픈 구석을 찔러 죄책감을 덜어 주기까지 하니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았고 피에스도 마찬가지였다. 비 내리는 밤, 깊은 산속, 마흔 자루 넘는 칼날의 서슬 퍼런빛.
“역시 그렇겠지.”
시온 폴링라이트는 웃고 말았다.
“좋아. 개 잡이 시간이다.”
못 배운 개니 어쩌니 했어도 저들은 정식 기사다. 그 검은 날카롭다. 이렇게 둘러싸이니 오히려 익숙해서 계속 실소가 새어 나왔다. 이유는 단순하다.
“내 두 번째 비밀을 보여 주지.”
* * *
셉템 아르카나 Septem Arcana.
두 번째의 불꽃이 과거를 들춘다.
시온 폴링라이트의 두 번째 비밀.
‘그는 신뢰하지 않는다’.
피를 나누었다. 정을 나누었다. 마음 또한 주었다. 동료가 있었고 전우가 있었고 연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숫자만큼의 상처가 남았다.
잃어버려 찢어지기도 했고 손수 칼날을 거꾸로 박아 주는 이들도 있었다. 신뢰함이 옳다 여겼다. 지금도 틀렸다 여기지 않는다. 다만 난자당한 심장만이 분명히.
망가진 심장이 선언한다.
사람을 위하되 신뢰하지 않겠노라, 헛된 꿈을 위해서 밀어내겠노라, 모두 버리겠노라, 이는 위대한 선택이노라-! 치기든 혈기든 설령 변명이든 간에, 비밀은 선언되었다.
그러니 멀어져라, 모든 마음아.
나 헛된 꿈으로 족하니 부디 닿지 말아다오.
비명이 낳은 두 번째의 기예Ars.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
* * *
레핏과 그의 기사단원은 야전野戰에 능했다. 애초에 레비오 자작이 그런 이들만을 골라 뽑은 까닭이다. 거센 비가 오든 깊은 산속이든 그들에게는 하등 불편이 되지 못했다. 처음 달려든 것은 열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
“……?”
달려든 기사들은 하나같이 의문을 표했다. 주위를 둘러싸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검이 시온의 몸에 닿으려는데, 풍경이 변했다. 그리고 그들은 시온에게서 몇 발자국은 떨어져 있었다.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
마음 가진 모든 것은 시온에게 닿지 못한다. 그들의 발은 자연스레 헛된 꿈에게서 멀어진다.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저 꿈이 헛됨을 폭로하지 못하도록. 하나, 둘… 적어도 스무 발자국은.
억. 의문을 정리할 틈도 없이 셋이 죽었다. 셋 다 머리가 힘없이 달랑거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목이 꺾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사이 ‘공상손가락’은 또 둘의 목숨을 빼앗았다. 순식간에 다섯 기사를 영원히 잠재운 시온이 배시시 웃었다.
“너희는 내게 닿지 못하고, 내 공상은 너희 목을 비틀어. 참 불공평하지?”
그는 유유히 누빈다.
“그래도 너희는 마흔이고 난 혼자잖아. 이 정도는 봐줘.”
둘러싸여 놓고도 여유롭다.
나무와 나무 사이, 빗줄기와 빗줄기 사이, 칼날과 칼날의 사이. 가벼운 걸음은 오히려 들뜬 것처럼도 보였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본래 홀로 다수를 상대하는 것을 특기로 삼던 사내였다.
검을 내밀어도 뭐 할까,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이 허락하지 않는데.
피하려 해도 무얼 할까, ‘공상손가락’이 틈을 비트는데.
사팔뜨기 레핏이 석궁을 쏘아 보지만 어찌하겠는가, 마갑 발지아트를 뚫을 턱이 없는데.
“기예? 기예다!”
레핏이 소리 질렀다. 그는 페르비아스가 추격대장으로 삼을 만큼 노련한 자였고, 때문에 기예Ars라는 힘에 대해서도 주워들은 바가 있었다. 다만 단순한 지식은 때로 지독히 무력하다.
“무슨 기예인지는 몰라도, 본영에 연락을…….”
사팔뜨기 사내가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이미 열이 넘는 기사가 목숨을 잃었다. 검 솜씨가 무디다고 할 만한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는데도 마치 인형처럼 쓰러졌다. 레핏은 경악을 가득 품은 채로 통신 마법기를 들었다. 시온은 조소를 되돌려주었다.
“이미 소벨 산맥이야.”
안개가 짙다. 센 소르티가 400년 전 뿌리고 간 장난질의 흔적이다. 어떤 마법의 힘도 이 안개를 뚫지 못한다. 소형 통신 마법기 따위는 당연히.
“바깥에 소식을 전하고 싶으면 그 화살에 편지라도 묶어 날리지그래.”
물론 그런 틈을 줄 생각은 없다. ‘공상손가락’ 셋이 달려들어 레핏의 석궁을 움켰다. 레핏의 눈에는 그저 석궁이 갑자기 팍 박살이 나서 조각이 된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노련한 사냥꾼이라도 얼이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아……?”
“바보들, 몰아넣었다고 생각했나?”
회귀한 영웅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레핏과 그의 기사단의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니다. 시온에게 닿기에는 역부족일 뿐이다. 아직 열한 살의 몸인 시온은 여러 약점이 있으나 그 틈을 노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진정 노련함이라 여겼다.
“내가 유인한 거다, 어떤 정보도 새어 나가지 않을 만한 장소로.”
짙은 안개가 시체 위에 깔린다. 탐지 마법을 쓸 수 없고, 때마침 비까지 내린다. 흔적을 따라오려면 시간이 꽤 걸리겠지. 아직 살아남은 이들은 단검이나 석궁을 들었다. 그러나 시온은 어느새 발지아트 뒤집어쓰고 검은 짐승의 형상이다.
“아, 아악-!”
“…아!”
“…….”
검은 짐승 날뛴다. 비명 터져 나오다 잠잠해진다. 곳곳이 이윽고 잠잠하다. 목이 꺾인 이들이 반, 짐승의 발톱에 당한 것이 또 반. 레핏과 마흔의 사내는 제 실력 한번 발휘하지 못하고 싸늘해졌다.
“금방 끝났네. 네가 마지막이야.”
홀로 남은 사내는 밤색 머리를 했다.
복부의 상처를 감싸 쥐고 제가 팔아넘긴 주인을 바라본다. 검을 쥐었던 손아귀가 느슨해진다.
“…전하, 저는…….”
“입 다물어라, 피에스 로에스티.”
회귀황자의 목소리 싸늘하다.
“검을 쥐고 죽어. 배신자에게 주는 마지막 온정이야.”
* * *
“…으, 아!”
피에스 로에스티가 힘껏 검을 쥐었다. 그리고 시온에게 달려들었다. 아주 특별히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도 ‘공상손가락’도 사용하지 않았다. 발지아트가 주욱 늘어지며 검은 창의 형태가 되었다.
열한 살 지오니스의 몸뚱이는 단련되지 않았다. 황자 근위기사인 피에스의 속도를 쫓아갈 턱이 없다. 때문에 검과 겨루지 않고 정강이를 향해 낮게 휘둘렀다.
피에스는 펄쩍 뛰었고 두 번째의 창이 찔러졌다.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으나 복부의 상처. 검은 창이 어깨를 꿰뚫었다. 밤색 머리 사내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바보 같은 피에스. 검을 쥐고 죽는 것도 하지 못하나.”
시온이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까지 쉬울 줄이야. 그의 근위기사로 있는 7년 동안 훈련을 소홀히 해도 너무 소홀히 한 모양이다. ‘공상손가락’을 다시 불러 피에스를 굳게 붙들었다.
“너무 원망하지 마. 내가 아니더라도 저들이 널 죽였을 거야. 너를 대체 왜 살려 두겠어?”
페르비아스의 입장에서, 피에스 로에스티는 지오니스 살해의 내막을 알고, 실력도 마땅찮으며, 제 주인을 판 근위기사다. 게다가 살려 두면 돈을 주고 입막음까지 해야 한다니, 죽일 이유가 차고 넘쳤다.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했어야지. 페르비아스 형님을 너무 몰랐어.”
“…제게는, 최선이었습니다.”
“아. 뻔한 소리 할 거면 하지 말랬지.”
밤색 머리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피와 빗물 섞인 머리칼이 얼굴에 달라붙어 불쾌하고 복부의 상처는 더욱 아리다. 헌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가장 불편하다.
“하나만…….”
그 요상한 불편함은 혀뿌리를 타고 올라와 튀어나왔다.
“…단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그 정도야. 뭔데?”
“…당신은, 제가 알던 지오니스 전하이십니까……?”
처음 만났을 때 지오니스는 네 살이었다.
그 뒤로 7년을 곁에서 섬겼다.
“…저는 압니다. 이 피에스는 알아요…….”
늘 함께했다. 오줌 지린 이불을 직접 빨아 주었다. 투정 부리는 입에 살코기를 발라 떠먹여 주었다. 자고 싶지 않다 투정 부려도 곁에서 자장가 불러 주면 금세 새근새근 잠들었고, 그 얼굴 보며 슬며시 이불 덮어 주었다. 그런 7년이었다.
“…계승전 선포 날부터였어요. 그때부터 달랐어요…….”
다른 누군가가 속에 들어찬 것처럼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것들을 알았고, 할 수 없는 일들을 태연히 해냈다. 무엇보다 그 미소. 열한 살 지오니스라면 절대 짓지 않을, 지독한 체념 깃든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래서 이상합니다. 정말 이상합니다. 이렇게, 이렇게나 다른 데도…….”
다르다. 그가 알던 지오니스가 아니다. 지금도 보아라. 마흔이나 되는 사내를 단숨에 죽여 놓고, 피에스의 배에 칼을 박고도 태연히 웃지 않는가.
“…전하 당신이십니다.”
시온은 그가 알던 지오니스가 아니다.
헌데 지오니스다. 이 확신은 터무니없는데도 흔들림이 없다. 그것이 더 이상했다.
“제발, 가르쳐 주십시오. 불쌍한 피에스에게 마지막 아량을 베풀어 주십시오…….”
19년의 세월은 지오니스를 시온 폴링라이트로 만들었다. 피에스는 회귀를 모른다. 그러나 곁에 있던 7년이 말한다. 아무리 변했어도 지오니스가 틀림없다고 가슴 깊은 데서 계속 외쳐 댄다.
“…정말로, 당신입니까?”
“내가 나냐고? 그건 말이야, 피에스…….”
속삭임.
“…비밀이야.”
또, 거짓말쟁이의 비웃음.
“배신자에게 알려 주기에는 과분하지.”
“흐, 크흐흐흐…….”
피에스가 두 눈을 부릅뜨며 웃음을 흘렸다.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죽음 앞둔 이를 이렇게 비웃다니, 지오니스가 아니다. 말썽 부려 야단맞더라도 곧 조르르 달려와 소매 꼭 붙잡던, 그러고는 천사처럼 해사하게 웃던 지오니스일 리가 없다! 헌데 지오니스다. 아아, 이 무슨 모순인가…….
“…난 대체 누굴 섬겼단 말인가. 너, 악마 같은 꼬맹이, 아니, 전하 당신께서는 대체…….”
밤색 머리 사내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마지막 호흡이었다.
* * *
“흥.”
피에스 로에스티였던 시체는 처량한 꼴이었다. 배와 어깨에는 구멍이 났고 검사면서도 검을 놓친 채로 죽었다. 무엇보다 얼굴, 의문에 눌려 멍하게 풀린 눈동자가 한심했다.
“그래, 무능하고 비참하게 죽어라.”
시온은 그의 눈을 감겨 주지 않았다. 초라하고 처량하게 두었다. 마치 목숨이라도 구걸하다 죽은 것처럼 보이게 두었다.
“넌 그래야 한다, 피에스 로에스티.”
들을 사람 없는데도 읊조린다. 누구를 위함인가, 누구를 설득하려 변명을 늘어놓나. 그 자신 말고는 누구도 듣지 않을 텐데.
“가장 한심한 꼴로 죽어야 페르비아스가 관심 두지 않겠지.”
회귀하자마자 피에스의 배신을 알아차렸다. 왜? 의문은 더없이 쉽게 풀렸다. 밤중에 몰래 뒤졌던 피에스의 방에 답이 있었다. 페르비아스 파벌의 편지가 있었고, 그들이 동봉한 꾸러미가 있었다.
“그래야만 인질로 잡은 네 가족 미련 없이 놓아주겠지.”
페르비아스 파벌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아주 단순했다. 노모와 여동생을 인질로 잡았으니 지오니스를 팔아넘겨라. 선택이야 자유지만 노모가 산 채로 튀겨지고 여동생이 노예로 팔리는 꼴을 보기는 싫을 것이다. 동봉한 꾸러미에는 마법으로 박제된 사람의 손가락이 둘. 하나는 노인의 것, 하나는 여인의 것.
제 가족의 손가락이 동봉된 편지를 받아 든 피에스 로에스티는 어찌해야 했을까. 어떤 밤을 보냈을까. 시온은 보았다. 편지를 적신 눈물과 피의 자욱, 차마 매달리지 못한 매듭 묶인 밧줄, 그 지독한 고뇌의 흔적들을.
“이게 진짜 마지막 온정이다, 피에스.”
밤색 머리 사내는 죽었다. 추한 끝을 맞이했다. 그렇기에 가족들에게까지 위해가 닿는 일은 없겠지. 천치 같은 놈, 애초에 황족 시해죄는 연좌제다. 정말 시온을 죽이기라도 했다면 끔찍하게 아끼는 가족들 모두 형장으로 향했을 터다.
“……?”
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꾸라진 피에스의 품이 불룩했다. 뭐길래 이렇게 꽁꽁 싸맸나. 무심결에 품을 들추었고, 꾸러미에 싸인 황금빛 물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여간, 바보 같은 녀석!”
호박파이였다.
그 폭우를 지나서도 아직 따뜻하다.
“팔아넘길 황자를 위해서 간식을 챙겨 와?”
맛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펴펴평범하지 않고 아주아주 다다달콤한 호호호박파이겠지.
“…아, 정말…….”
비가 그쳤다. 하늘이 개어 간다. 밤의 끝자락이 이렇게 우스운 녀석이었던가. 아니라면 왜 이리도 우스운가. 시온이 킬킬 웃었다. 그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작별이다, 피에스 로에스티…….”
시온 폴링라이트의 눈가가 반짝였다. 빗물이었다. 비는 이미 그쳤지만 어쨌든 빗물 때문이었다.
“…내 첫 친구야.”
42화
발길 닿는 데마다 질퍽했다. 폭우 직후의 산길은 계속해서 시온의 신발에 진흙이나 나뭇가지 따위를 선물해 주었다. 그는 대가 삼아서 피 묻은 발자국을 남겨 주었다.
열한 살의 다리는 짧다. 걸음은 바빴으나 푸른 눈동자는 놀랍도록 고요했다. 마흔 명의 기사와 옛 친구의 목숨을 끊은 뒤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몸에서 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되레 편안했다.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피고.
조심스러운 발걸음과 긴장으로 굳어 가는 목 뒤. 스스로 숨통을 졸라매고 나서야 시온 폴링라이트라는 이름을 대는 것이 어색하지 않아졌다. 돌아온 영웅은 그렇게 산길을 탄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멀리 비대한 몸집이 보였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제4황자. 그의 배다른 형. 나무 사이를 소리 없이 지나쳐서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네불로 형님.”
“으악! 으아아… 어, 지오니스? 지오니스!”
비명 지르던 네불로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러더니 곧 잔뜩 울상을 쓰며 달려들었다. 한참 어린 동생에게 매달려 흐느끼기라도 할 법한 기세다.
“지, 지, 지오니스으-! 왜 이리 오래 걸렸어! 무서웠다고… 엇, 피?”
비대한 몸뚱이가 멈추어 섰다. 피비린내가 그를 붙잡았다. 온통 새빨간 열한 살 동생의 꼴이 어두운 산중에서 무섭도록 소름 끼쳤다. 공포의 낌새에 시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튀었군요.”
“…….”
네불로가 입을 다물었다. 피 칠갑을 해 놓고도 태연한 꼴에 소름이 더해졌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무슨 맹수 같다. 열한 살답지 않았고, 본인도 그것을 숨길 생각이 없는지 비웃음을 머금었다.
“뭐 그리 놀라십니까? 형님도 이미 몇을 처리하신 듯합니다만.”
“…으, 응. 어떻게든.”
네불로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이지 않을 뿐이지 토막 난 팔다리 따위가 주위를 굴렀다. 꽤나 끔찍한 꼴이었다. 네불로를 덮치려던 암살자들이다.
“쉽지 않으셨을 듯한데, 기예Ars를 쓰셨나요?”
“그렇지, 뭐…….”
제4황자, 네불로 레 에티에르. 황자 황녀 중에는 무시당하지만 그래도 대황궁에서 자기를 지킬 힘 정도는 있다. 특히 일찍이 기예를 열어 사용이 능숙하니 나름의 체면치레는 할 수 있으리라.
“합류 장소를 바꿨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몇 놈이 금방 따라오더라고……. 흐, 이게 뭔 일이람…….”
“무슨 일이기는요. 정보가 샜습니다. 레비오 자작이 우리를 팔았어요. 거기다 자기 개들까지 풀었죠.”
“…레, 레비오 자작이?”
시온이 바닥을 구르는 팔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기사단 문장이 박혔고, 레비오 자작 휘하의 것이다.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네불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는 노기를 감추지 않고 굴러다니던 다리 하나를 걷어찼다.
“마마망할 자시익-! 외, 외, 외할아버님께 받아 처먹은 돈이 얼만데!”
빠져나가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네불로가 씩씩거리며 성을 내었다. 목소리가 컸으나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그들의 목소리가 닿을 만한 거리에는 다른 이가 없었다. 한참 성을 내던 네불로가 아랫입술을 푸들거렸다.
“…그, 그럼 어디로 가야 하지? 레비오 자작을 믿을 수 없다면, 으, 으으…….”
“일단은 산맥을 탑시다.”
“계, 계획이 있는 거야?”
“그럼요.”
시온이 빙글 웃었다.
“구체적인 것은 아직이지만요.”
“여, 역시! 세쿤두스 형님의 참모 역할도 하더니……. 헤, 헤헤, 널 따라오길 잘했어……!”
네불로가 우스운 꼴로 말을 늘어놓았다. 그때 에르타 과자는 잘 먹었냐, 별궁에 왔을 때 선물을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여기를 빠져나가면 또 곡예를 보러 가자……. 자기가 보인 호의를 잊지 말라는 티가 노골적이었다. 회귀황자는 이복형을 향해 손짓했다.
“다만 이제 조용히 해 주세요. 생각할 게 많거든요.”
“…어? 아, 그, 그래.”
“자. 움직입시다, 형님.”
* * *
네불로 레 에티에르는 죽을 것만 같았다.
‘힉…….’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 터질 듯했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다소 식상해도 가장 걸맞은 표현이었다. 폭우 직후의 야밤에 산을 오르기에 네불로의 몸집은 다소 비대한 감이 있었다. 몇십 번이나 이를 악물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특히 다리가 아팠다. 무릎이 쪼개지는 듯, 종아리는 폭발하는 듯, 허벅지는 녹아내릴 듯하다. 발은 이미 감각이 없어진 지 한참이었다. 입을 움직일 기력까지 써 버린 지 오래다. 내지르지 못한 신음이 명치께를 맴돌았다.
‘으아아아…….’
뚱보 황자는 마법에 소양이 있는 편이었다. 요정의 축복을 듬뿍 받은 은둔황자, 카테카 케슐레이에야 비교할 수 없지만 나름 그럴듯한 실력을 자랑했다. 다만 체형을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몸을 쓰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었고, 굳이 없는 소질이나마 가꾸어 보려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여름날 개처럼 연신 헥헥 댈 수밖에.
‘대, 대체 언제까지야…….’
이미 족히 두 시간은 되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길이 조금은 선명한 걸 보아하니 동트기가 머지않은 듯했다. 시원한 물, 아니 과실주 한 잔이 간절한 마음으로 네불로가 땀을 닦아 내었다. 닦는다고 해도 곧 다른 땀방울이 스며 나지만 적어도 눈은 덜 따가울 테니.
“…지, 지오니스. 생각 끝났어?”
“아직이요.”
“…응, 그래.”
그는 쭈뼛거리며 이복동생을 곁눈질하기만 했다. 그저 묵묵히 걸음을 옮기기만 하는 모습이 퍽 낯설었다. 땀 흘리는 모습을 보니 힘든 거야 매한가지인 모양인데 어찌 저렇게 침착한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앞으로는 도저히 굼벵이 지오니스라고 못 부르겠는걸. 마치 다른 사람 같아…….’
안달이 났지만 차마 뱉지 못하고 입속에서 우물거렸다. 늘 만만해 괴롭혔던 이복동생인데, 이제는 두려웠다. 언제부터였을까. 피를 뒤집어쓰고 불쑥 나타났을 때부터? 아니, 비보를 얻어 세쿤두스 파벌에 들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때 즈음이다.
‘…맞아, 다른 사람 같아. 딱 계승전 시작부터였지. 왜 몰랐을까?’
한 번 생각이 드니 의문이 는다. 미묘한 위화감 있었는데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계승전의 혼란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 네불로는 나름 머리를 짜냈으나 되레 기운만 빠져 한숨 쉬었다. 마침 튀어나온 돌부리 하나가 발바닥을 꾸욱 눌렀다.
“…아야!”
“뭐 밟으셨나 봐요?”
시온은 시큰둥 물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멈추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네불로는 그것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같이 왔으면 이미 한배를 탄 사이가 아닌가. 그는 결국 두려운 맘을 누르면서 투덜거렸다.
“조, 조금만 설명해 주면 어디가 덧나냐? 널 못 믿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음. 그럼 일단 생각한 데까지라도 말씀드리죠.”
그는 산 너머를 바라본다. 어렴풋이 하늘빛이 변하는 듯했다.
“저희는 도망가는 중입니다. 누구에게서 도망가고 있죠?”
“페, 페르비아스 형님이지.”
“맞아요. 천년 제국의 맏이가 우리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최, 최대한 멀리 도망가기?”
“틀렸습니다. 그걸로는 한참 부족해요.”
시온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실망의 빛은 없다. 그는 애초에 네불로에게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우리를 얕봤으니 이 정도 추격대로 끝났지, 정말로 죽이려 한다면 단숨이에요. 제국 바깥이라도 얼마든지 쫓아오겠죠.”
아직 대경합 중이다. 때문에 소음을 줄이려고 레비오 자작의 기사단을 보냈으리라. 시온과 네불로를 만만하게 보았으니 그들로 충분하다 여겼을 터고. 만약 페르비아스 본인의 세력이 움직였다면, 혹시 아메투스라도 왔다면……. 으, 그 끔찍한 옥색 눈! 시온이 고개를 내젓고 네불로가 떠듬떠듬 말했다.
“…그,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야?”
“단순합니다. 관심을 끄게 만들어야죠.”
달빛 아래에 짙어지는 웃음.
“이런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거짓말쟁이의 미소.
“두 황자가 암살을 피해 도망쳤지만 따라잡혔다. 그러나 추격대가 되레 반격당해 죄다 죽었다. 그들 죽은 꼴을 보니 기예Ars에 당한 듯한데, 코르디스 황족의 기예는 강력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야기를 줄줄 잘도 꾸며낸다 싶어 시온이 키득 웃었다. 네불로는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흔적을 잔뜩 남기며 도망쳤다. 지나간 곳마다 핏자국이 남은 걸 보니 중한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하다. 기예는 강해도 뚱보와 어린아이. 산행이 여간 고단하지 않았을 터다.”
“으, 응.”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치다… 소벨 산맥 중턱에서 힘이 다해 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뭐!?”
네불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시온이 뭘 그러냐는 듯 손을 내젓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렇게 보이면 된다는 거죠, 형님.”
“…어? 아! 대역인형!”
네불로가 시온의 손에 들린 인형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특수한 조작을 가하면 실제 사람과 같은 성분으로 만들어진 모조 시체가 튀어나오는데, 서방의 간자間者들이 자주 사용하는 물건이었다. 일전에 네불로의 별궁에 들렸을 때 챙겨 놨다. 본인은 자기 별궁에 있던 것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솜씨 좋은 마법사라면 진짜 시체와 대역인형을 구분하기도 하지만, 여기는 소벨 산맥. 신비가 쫓겨난 곳.”
대역인형 외에도 여러 가지를 챙겨 왔다. 생고기나 돼지의 피 따위. 모조 시체를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고 짐승을 불러모을 만한 것들. 산행 중에도 계속 돼지 피를 뿌리며 왔고, 가까운 곳에 으르렁대는 소리가 여럿이다.
“짐승이 뜯고 빗물에 썩어 원형을 잃은 두 시체. 대황궁으로 옮긴 뒤에는 헤르마이라도 분간하지 못할걸요.”
“우와아…….”
“저쪽은 계승전의 뒤처리가 바쁠 테니 관심은 금세 식겠죠.”
“…너, 지오니스, 너 천재구나……!”
네불로가 와락 달려들었다. 시온은 슬쩍 피했고 뚱보 네불로는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살찐 얼굴에서 웃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고마워,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어! 나, 나중에 아코네우스의 공연을 보러 가자. 우리 외조부님께 말씀드리면…….”
“무슨 소리예요. 그 공연을 어떻게 보러 갑니까.”
“응?”
뚱보 황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이내 살찐 얼굴을 새하얗게 만들었다. 지금껏 보인 표정 중에 가장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 아, 아아앗! 설마 신분을 숨겨야 하니까… 앞으로 공연은 볼 수 없는 건가? 곡예도? 으아아, 이, 이건 생각 못 했네…….”
“그게 아니라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공연을 보겠어요?”
“…응?”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네불로가 고개를 틀었다. 그러고는 배다른 동생을 바라보았다.
“…무, 무슨 소리…….”
시온의 얼굴은 싸늘하다. 달빛조차 스며들 틈 없다. 그의 푸른 눈은 지독하게 매섭다. 그의 손에는 대역인형이 들렸는데, 오직 하나뿐이다. 누구의 몫일까? 네불로의 몫은 아니리라.
“아, 아, 아니지……?”
제아무리 둔해 빠진 뚱보 황자라도 눈치챌 수밖에. 입술을 푸들댈 수밖에.
“…지지지오니스. 아, 아니지?”
“뭐가 아닌데요?”
“그, 그, 그러지 마…….”
네불로가 풀썩 주저앉았다. 일어서려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두툼한 다리는 고된 산행으로 지쳐 제 기능을 대부분 잃어버린 뒤였다. 이 또한 시온이 의도했던바. 네불로는 다급히 거리를 벌렸는데,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다.
“…나나날 죽여서, 뭐뭐뭘 하겠다고……!”
“둘 다 대역인형이면 아무래도 위험하잖아요. 하나쯤은 진짜면 좋을 거 같아서.”
“우, 우, 웃기지 마!”
“웃길 생각은 없는데.”
나무가 가로막아 네불로는 더 도망치지 못했다. 시온이 다가온다. 푸른 눈 매섭게 빛내며, 거짓말쟁이의 미소 머금으며 다가온다. 이것이 열한 살이 보일 수 있는 기백인가? 공포가 스며들었다.
“여기까지 올라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네불로 형님. 비좁지도 조용하지도 않지만 캄캄하기는 하네요.”
울창한 나무와 온갖 벌레들, 질척이는 진흙 바닥과 곳곳에서 나는 짐승 소리. 위치 좋고! 시온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묫자리로 불만이 없으시겠지요?”
43화
“잠깐. 묫자리로 불만이 없겠냐니, 이거 요제프 하이더가 나한테 했던 말이잖아?”
묘한 기시감에 기억을 더듬던 시온이 투덜거렸다. 그 애꾸 늙은이의 말이 뇌리에 박혔던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오더니. 그래도 이보다 좋은 말이 없었던 말이야.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변명을 늘어놓자니 네불로가 꽥꽥대는 소리를 내었다.
“나나나를 주죽인다고?”
답은 없다. 침묵이 더욱 조여 온다.
“왜? 왜, 왜! 나나나를 죽여서 뭐뭐, 뭐 하겠다는 건데! 왜왜왜……!”
공포가 네불로의 목젖을 두드렸다. 그는 그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부정하듯 소리 질렀다.
“지지오니스! 제제제발…….”
“말 좀 그만 더듬어요. 듣기 싫으니까.”
“히히히익…….”
시온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말 더듬는 꼴을 보자니 계속 밤색 머리 근위기사가 생각난 탓이다. 그 기세가 사나워 네불로가 움츠러들었다. 뚱보 황자는 열한 살짜리 이복동생의 눈치를 살폈다.
“나, 나는 도움이 될 거야. 아, 알잖아. 에티에르 상회는 대륙 전역에 있어. 제국 밖으로 도망가도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무무슨 말인지 알지? 으, 응?”
“…….”
“제발, 제발 뭐라고 좀 해 봐, 지오니스, 제바알…….”
울상 진 얼굴. 흐르는 눈물. 애원하는 목소리. 변함없이 싸늘한 푸른 눈. 절망의 확신.
“이해가, 이해가 안 돼……. 나를 죽인다고? 내가 죽는다고?”
불안은 생각을 일그러트린다.
“네불로 레 에티에르가, 코-코르디스의 화화황자가……!? 거짓말이야, 거거거짓말… 거짓말?”
원래부터 어딘가 꼬여 있는 뚱보 황자의 생각은 금방 다른 방향으로 훅 휘어 버렸다. 네불로의 눈이 괴상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래, 거짓말! 지금까지 죄다 거짓, 말이었다면? 너너너, 혹시! 아니, 역시! 페르비아스 혀혀형님께 붙으려는 거지!?”
“예?”
“그, 그, 그렇군. 역시 그런 거였어!”
하아. 이상한 결론에 도달한 이복형을 보며 시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소화할 수 없는 공포와 불안은 금방 광기로 변하기 마련이다. 시온은 그것을 몇 번이나 보아 왔고, 미쳐 가던 동료들이 생각나 약간의 연민이 들어 네불로가 떠들게 두었다.
“그그래. 네게는 비보도 있지. 내 목까지 페르비아스 혀형님께 들고 갈 생각인 거였어. 으으으으. 무서운 놈. 무서운 지오니스. 무서운, 무서운… 페르비아스 혀혀형님…….”
“내가 그쪽을 페르비아스 형님에게 팔아요?”
시온이 피식 웃었다.
“누구를 바보로 압니까? 그럴 거면 진작 죽여서 내려갔겠죠. 뭐하러 두 시간이나 걸려서 여기까지 올라왔담.”
“…어? 으어?”
그의 말은 날카롭다.
미쳐 가는 네불로의 귀에도 선명하다.
“그, 그럼 왜지……? 어……?”
뒤틀린 발상 하나가 논파당했으나 광기는 여전하다. 의문이 오히려 광기를 부채질하니 새로운 뒤틀림은 금방이다.
“…호, 호, 혹시 권좌를 노리나? 아니, 여억시 그으-것밖에는 없었던 건가……?”
네불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입은 반쯤 벌어져 침이 흘렀다.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모양새였다. 목소리에 광기가 섞여 죽죽 늘어났다.
“그으-렇다면, 그으-거야말로 내가 도움이 되지 않겠어? 그으-래. 나 네불로가, 에티에르 상회가아…….”
“바보가 있군. 이제 와서?”
시온의 목소리 서늘하다. 광기를 단숨에 잘라 내고 뚱보 황자를 조용히 만들었다. ‘권좌, 권좌가 아니라면……?’ 그럼에도 네불로는 입을 우물거린다.
“형님, 혹시나 해서 묻습니다. 황제가 되고 싶으셨습니까?”
“으……!”
네불로가 치부를 찔렸다는 듯이 움찔 떨었다. 시온은 이제 목소리까지 매섭다.
“상황이 풀리지 않았을 뿐, 황제의 자리에 마음이 있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왜, 왜 없겠어!”
광기의 낌새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이어진 공포가 이성을 눌렀고 오래된 욕망이 거리낌 없이 솟아 나왔다.
“코, 코르디스잖아!”
네불로의 눈은 탐욕으로 번들거린다.
“처천년의 대제국, 대-륙의 주인! 대체 누누누가 원하지 아-않겠어!?”
그는 주먹까지 불끈 쥐며 열변을 토했다. 살찐 주먹이 푸둥 떨렸다.
“나라도 1황자였다면, 볼마르크 공국을 등에 업었다면, 아아니면 데비우스 가문이었다면……! 저, 저, 저 권좌에, 황제의 자리에……!”
“그래서 말이 안 맞는 거다, 뚱보 네불로.”
시온 폴링라이트는 쏘아붙인다. 존대조차 걷어 낸 말투는 마치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정말 다를지도 모른다.
“단 한 번, 단 한 순간이라도,”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한 푸른 눈동자.
“나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어.”
* * *
“…화화황제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네불로가 의아한 음성을 토했다. 어, 어? 받아들이기 힘들다. 어떻게 저 위대하고 화려한 자리를 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만에 하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사람의 취향이야 원래 가지각색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 이해가 힘든걸.”
저 이복동생, 지오니스의 이름 쓰는 회귀자 시온 폴링라이트, 계승전 선포부터 열심이었다. 도서관의 비보를 얻고, 세쿤두스의 파벌에 들고, 대경합 중에도 파벌의 참모 노릇을 했다.
“…그럼 너, 지금까지는 왜……?”
그렇게 열심이었던 거야?
말을 끝맺지 않아도 뜻은 전해진다. 페르비아스에게 붙을 생각도 아니야, 황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어, 그럼 대체 무슨 생각이 그를 움직였는가? 시온은 대답을 피하지 않았다.
“준비할 게 많았지.”
다만 존대는 없이, 폴링라이트의 어투.
“나라고 알았겠어? 코르디스 대황궁 한복판, 계승전 중으로 돌아오다니. 황자의 몸이라 뭘 해도 시선이 쏠려서 여간 곤란하지 않았다고.”
“…돌아, 왔다고? 그게 무슨……?”
네불로가 입을 헤 벌렸다. 시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불평을 이었다. 발지아트나 은룡의 비늘이 있었다고 해도 어린아이 몸으로 이 황궁에서 빠져나오기가 쉬운 줄 알아? 돌발 상황도 몇 번이나 있었다고!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꽤 이득이야. 마갑이나 은룡의 비늘도 얻었고, 페르비아스 놈에게 골칫거리도 잔뜩 안겨 줬지.”
“…….”
“줄곧, 그렇게 준비하며 기다렸다. 대경합의 마지막… 페르비아스가 너와 날 죽이려 들 이때를. 아주 자연스럽게 사라질 지금을.”
네불로는 점점 더 미쳐 가는 기분이었다. 시온의 말을 이해하려 들면 들수록 머리가 복잡했다. 마치 대경합이 일어날 것을, 오늘 페르비아스가 그들을 죽이려 할 줄 알았다는 듯 말한다. 저 이복동생은 한 번 겪은 날을 다시 겪는 중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드디어 때가 왔어.”
시온은 진정으로 즐거워 미소를 머금었다.
“제국에게 잊힐 때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이복동생의 모습에 네불로는 소름이 끼쳤다. 시온은 킬킬대며 머리를 긁었다. 계속 숨겨 왔던 진심을 토해 내니 오랜 가려움 사라져 후련했다.
“그렇게 잊혀야, 내 숙명 이루겠지.”
“…무슨, 숙명?”
“특별히 대답해 주지. 저 코르디스의 권좌에 내 숙명이 있다. 나, 황제의 자리에 닿겠다.”
모순이다.
뚱보 황자 떠듬거리며 묻는다.
“…황제가 될 생각은 없다며, 그런데 황제의 자리에 닿겠다고……?”
“저는 말입니다, 애매한 표현을 참 좋아합니다.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멋대로 속아 넘어가 주거든요.”
비밀쟁이의 본능이다. 혀 놀림 사이에 늘 빠져나갈 구멍을 두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 19년의 세월을 거슬러 온 회귀황자는 더욱 크게 웃음을 머금는다. 존대에 담긴 뜻은 존중이 아니라 조소다.
“황제의 자리, 닿아야지요. 거기까지 기어 올라가야지요.”
어느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동트기가 머지않았다.
“닿지 않고 어찌 박살 낼까요. 기어오르지 않고 어찌 짓밟을 수 있을까요?”
“…뭐.”
후련하게 웃는다. 숨기고 숨겨 왔던 속마음이다. 가장 깊은 비밀 중의 하나를 드디어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 하하, 하-! 시온은 요제프 하이더를 흉내 내며 낄낄 웃어 젖혔다.
“빌어먹을 황제의 자리, 그 황금 옥좌를 가루 내어 마시기 전까지는… 난 쉴 수 없어.”
“…너, 너, 너, 무슨, 무슨…….”
네불로는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그를 죽이겠다는 말보다도 충격이 더했다. 경악하지 않을 수가. 당장이라도 귀를 막고 싶었다. 다음 말을 들어서는 정말로 돌이키지 못하리란 직감이 들었다. 허나 결국 시온의 입술이 달싹였다.
“일찍이 일곱 비밀의 약속을 맺었다.”
약속의 이름, 셉템 아르카나.
가장 처음의 약속.
‘그는 헛된 꿈을 꾼다’.
“내 영혼이 바라는 헛된 꿈은 여전히… 또 영원히 하나.”
아, 코르디스, 코르디스.
지긋지긋한 숙명, 토악질 나오는 황제의 이름이여. 나 네게 닿아 보이겠다. 기필코 기어오르고야 말겠다. 그리고 끝내…….
“제국을 무너트린다.”
* * *
긴 밤이 끝나 간다.
동이 트기 시작했다.
회귀황자의 금발 위로 새벽 햇살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깬 새들은 울고 시온 폴링라이트는 매섭게도 아름답다. 네불로 레 에티에르는 감히 입술조차 열지 못했다. 그저 시온만이, 태양을 등지고 이를 악문다.
“…나는 보았다, 제국의 만행을.”
그 시간들에서 보았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서 보았다. 위대한 천년 제국이 대체 무슨 짓거리를 벌였고 무엇을 불러냈는지 보고 말았다.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던 것들을,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인간의 밑바닥을, 코르디스의 이름으로 현실이 되어 버린 그 악몽들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도축용 고기 마냥 발가벗겨져 매달린 사람들이 어떤 썩은 내를 풍기는지, 짐승과 뒤섞인 인간이 어떤 비명을 지르는지… 자식을 삶아 먹는 어미가 어떤 얼굴을 하게 되는지. 도저히 바라보고 싶지 않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피와 살과 영혼들이 소모품처럼 소비되고 짓밟혔다. 그것들이 존엄하다는 말이 우스울 만큼 그러했다. 대제국 코르디스의 이름 아래 그 모든 일이 자행되었다.
“그 7년…….”
지나온 악몽이 눈앞을 맴돌며 관자놀이에 불을 지른다.
“…그, 7년의, 전쟁에서… 보고 또 보았어.”
메리언의 시온은 계속해서 보았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는 아주 운이 좋았다. 푸줏간 고기처럼 매달리지도 않았고 짐승과 뒤섞이지도 않았으며 제 자식을 삶아 먹지도 않았으니. 그런데도 왜 ‘공상손가락’이 가늘게 떨려 오나. 왜 이토록 숨이 무거운가.
“질리다 못해 아프고, 아프다 못해 시려 올 만큼…….”
차마 눈을 돌리지 못했다. 그는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돌려 또 한 번의 기회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사뭇 죄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힘이 드는데, 그런데도 한 방울, 또 한 방울, 피와 같은 눈물이 끊임없이.
“…보고 말았단 말이다.”
“아, 아까부터 무, 무슨 소리야……?”
네불로가 말을 흐렸다.
“지지오니스, 정말 모르겠어. 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의문투성이다. 열한 살이면서 7년의 전쟁이라니, 제5황자의 신분이면서 제국을 무너트린다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나 있는 건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일들이 어디에 있었어? 대체 어, 언제,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거야……. 응? 지오니스!”
“-닥쳐!”
날카로운 외침에 네불로가 움츠러들었다.
시온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이글거렸다.
“-더는, 날,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거짓말쟁이의 미소로 숨겨 왔다. 태연한 눈동자를 덮어씌웠다. 허나 이제 솟아난다. 끝도 없는 분노, 썩은 내 풀풀 나는 울화. 비밀로 뚜껑 삼아 눌러놓았던 감정이 용암처럼 부글거린다.
“나는 시온Sion, 시온 폴링라이트.”
더는 참지 않는다. 숨기지도 않는다.
영혼의 이름을 까발린다.
“서방연합의 부사령관, 메리언의 시온이다.”
* * *
맹렬한 노기怒氣.
뚱보황자가 자세를 낮추었다.
“미미안해, 화화화내지 마…….”
“또 멍청한 척 넘어가려고? 네불로, 하여간 영악한 새끼.”
“…….”
“이미 대충은 알아먹었을 텐데?”
네불로 레 에티에르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둔감함은 황궁의 모두가 아는 바였지만 제 목숨 걸린 일에는 그렇지도 않았다. 네불로는 시온의 낌새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더 멍청한 척을 했고, 시온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 뚱보 네불로, 인정하기 싫지만 내 이복형 되시니 전에 어땠는지 알려 드리지.”
시온이 말을 토했다.
“너는 페르비아스의 발을 핥고 살아남는다. 버러지처럼 숨만 쉬겠다고 약속하면서.”
“…….”
“그런데 전쟁이 나니 틈을 타서 나름 한 자리를 잡아. 그럴듯한 부대도 거느리고, 어디 약탈할 데 없나 고개 쳐 밀기로 유명해지지. 몸뚱이가 지금보다 두 배는 거대해지는데 퍽 역겨워.”
회귀 전의 일.
지나가 버린 미래의 이야기.
“죄 없는 이들을 유린하고 또 유린하고, 제 욕망만 앞세워 온갖 꽃을 꺾어 내다 결국 민중의 손에 찢겨 죽는다.”
“…미, 미, 미친 새끼! 망상도 망상 나름이야! 헛소리하기는!”
“헛소리라니. 널 매달 기둥을 내가 내주었는걸. 서방연합의 부사령관, 이 메리언의 시온이.”
네불로가 질렸다는 듯 외친다.
“너, 너 미쳤구나……. 제대로 미쳤어.”
“몰랐나? 난 줄곧 미쳐 있었어. 너도 겪어 보면 절대 다를 수 없을걸.”
키득거리는 웃음.
“말이 많아도 조금만 더 들어 줘. 어디 터놓을 구석이 없어서 쌓인 말이 많거든.”
미소 아래에 숨겨진 조용한 광소. 제 마음 깎아 먹는 듯한 웃음에 네불로는 더 화낼 기력조차 세우지 못했다. 기괴하고 불길해 두려움만이 불거졌다.
“너무 원망은 말아. 나름 고민했다고. 그때의 네불로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직 열일곱인데……. 저지르지 않은 일로 죽여도 될까?”
‘공상손가락’ 떠돈다. 네불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뚱보 황자는 선명한 낌새를 느끼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 혹시 헤스를 기억하나?”
“…헤스?”
시온이 제 눈두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왜, 곡예를 보러 갔을 때 나랑 부딪쳤던.”
“아…….”
“자기 시녀의 이름도 모르나? 초록 눈이 참 아름다웠는데, 마치 세람나무 이파리처럼…….”
후우. 깊은 한숨. 시온의 눈은 이제 칼날보다도 매섭다.
“이봐, 네불로. 네 별궁에 들렀을 때 확인해 보았다. 지하에 아주 은밀한 쉼터를 마련해 놓았더군?”
“……!!”
“헤스의 두 눈도 거기서 보았지.”
이죽거리는 듯한 말투. 다만 분노의 기색이 아주 선명하다.
“…주인 없는 초록 눈알 두 개가 바닥에서 데굴거리는 것을 보았어.”
그때 확신했다. 네불로 레 에티에르는 이미 늦었다. 기회를 줄 가치가 없다. ‘공상손가락’이 어서 목을 조르게 해 달라는 듯, 저 뚱보 황자를 갈기갈기 찢게 해 달라는 듯 몸을 이리저리 뒤튼다.
“자. 여기까지가 네가 죽을 이유다.”
설명해 달라기에 설명해 주었다. 구역질 나지만 피가 섞인 사이기에 허락해 주는 마지막 온정이다. 가장 깊은 비밀 폭로된 네불로는 볼살을 푸들거린다.
“더 할 말이 있나, 네불로? 없다면 죽음을 받아들여라.”
“지, 지, 지오니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회귀황자의 손에서 검은 칼날이 튀어나왔다. 마갑 발지아트의 발톱이다. 검은 칼날은 네불로의 목을 노리다 공중에서 튕겨 나왔다. 제4황자, 네불로 레 에티에르의 곁에는 그를 지키듯 선 형체들이 있다.
“그래. 곱게 죽지는 않겠다는 거지.”
“…으!”
나타난 것은 열하나.
하나같이 시녀복 차림새다. 입을 꿰매거나 눈구멍이 비어 있는 끔찍한 형상이다. 죽을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네불로의 기예Ars에 묶여 버린 불쌍한 영혼들. 시체로 된 시녀의 무리.
“선보여 봐라, 그 역겨운 기예를.”
44화
뚱보 네불로에게는 유모가 있었다.
이름 있던 상인 가문 출신으로 빚 때문에 노예로 팔려 갈 뻔했으나 먼 친척인 에티에르 상회장이 도움을 주었다고 들었다. 아름답고 상냥한 여인이었다. 뚱보 네불로는 지금도 그녀의 달리아 색 눈동자를 떠올리곤 한다.
제5황자 지오니스는 대황궁에서 가장 무시받는 황자였고, 제4황자 네불로는 그다음으로 무시받는 처지였다. 특히 페르비아스가 그들을 노골적으로 깔보니 궁정 사람들도 대제의 맏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지오니스에게 피에스 로에스티가 유일한 말벗이었듯, 뚱보 네불로에게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유모만이 위로였다. 얼굴도 보기 힘든 어머니보다도 더욱 어머니처럼 여겼다. 사실 당시의 그는 뚱보라 불릴 만한 생김새가 아니었고, 어머니를 닮아 퍽 곱상한 어린아이였다.
그가 뚱보라 불리기 시작한 것은 열한 살 즈음, 정확히는 외조부를 보러 가던 길에 괴한들에게 유괴를 당한 뒤부터였다. 괴한들은 놀랍도록 쉽게 그를 납치했다. 이유는 뻔했다. 네불로는 아름답고 상냥한 유모가 괴한들에게 거금을 받아 사라지는 모습을 제 눈으로 직접 보았다.
‘아, 아, 아니지, 유모? 유모! 아니잖아-!’
유모가 그를 팔아넘겼다.
열한 살의 네불로는 믿을 수가 없어 소리를 지르고 질질 짰으며 몸부림을 쳤다. 그것이 불만이었는지 괴한들은 어린 네불로를 아주 잔뜩 괴롭혀 주었다. 어쩌면 그의 고귀한 혈통에 앙심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구출되기까지는 열흘하고 닷새가 걸렸다. 네불로에게는 십오 년보다 길었고, 그 열흘과 닷새의 흔적은 아직도 제4황자의 옷 아래에, 또 영혼에 선명히 남아 있다.
돌아온 네불로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무언가를 먹기 시작하면 구토를 하기 전에는 멈추지 못했고 누군가가 그를 바라보면 괴성을 질렀다. 연민을 담아 그를 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황궁의 많은 이들은 이전보다 더욱 모멸에 찬 시선을 보냈다.
‘천박한 계집 따위에 언제까지 묶여 계실 겁니까, 전하? 직접 매듭을 지으십시오.’
유모를 잡아 온 것은 네불로의 외조부, 에티에르 상회장이었다. 외손자의 광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돈을 물 쓰듯 써서 도망친 여인을 잡아 왔다. 멍청하게도 제 고향에 가서 숨었던 유모는 거친 사내들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끌려왔다.
‘저, 전하. 살려 주십시오. 살려…….’
네불로는 살려 달라고 하는 유모의 입을 직접 찢었다. 그녀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어 나자빠졌는데 그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는 납치당한 열흘하고 닷새 동안 죽을 수도 없었는데.
‘그그그래. 헤, 외외조부님의 말대로야. 누굴 원망하겠어. 아름답다고 천한 계집을 믿었던 내가 바보지.’
뚱보 네불로는 깨달았다. 유모라고 해도 결국에는 시종인데, 어찌하여 믿었나. 멍청한 짓이었다. 그는 이제 천한 고용인 따위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다. 제 이익이 걸리면 언제든지 그를 팔아넘길 것이 아닌가.
허나 시중들 자는 필요한 법. 때문에 네불로는 소망한다. 그를 배신하지 않을 완벽한 시종들을. 그 일그러진 욕망에 코르디스의 핏줄이 반응했다.
그렇게 깨어난 네불로의 기예Ars.
굴복된 종들 servi subjugati.
* * *
‘굴복된 종들’.
한 번 죽은 자를 되살려 종으로 부리는 기예. 숫자에 제한은 없고 되살아난 이들 하나하나는 생전과 비교되지 않는 힘을 가진다. 제4황자의 기예답게 강력하지만 몇 가지의 엄중한 규칙이 있다.
첫째, 아름다운 소녀일 것.
둘째, 생전 네불로의 소유였을 것.
셋째, 네불로의 손에 직접 죽었을 것.
위 셋을 만족시켜야만 ‘굴복된 종들’로 되살릴 수 있다.
그리고 넷째 규칙, 되살아난 종의 강함은 죽기 전 네불로에게 고통당한 크기에 비례한다.
기예를 발견한 네불로는 아름다운 소녀들을 시녀로 소유했고, 지하실로 데려가서 성심껏 고통 주다 목숨을 끊었으며, 그렇게 ‘굴복된 종들’로 삼았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허나 기예를 강하게 만들어야 살아남을 텐데 다른 방법이 없잖은가.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정당함은 있다고 여겼다. 시온은 그것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고통을 준 만큼 강해지니까 잔뜩 고문한 뒤 죽여서 부린다고?”
시온은 경멸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시체 시녀가 열하나. 죄다 끔찍한 꼴이다. 헤스도 있었다. 초록 눈이 있어야 할 자리는 비었고 눈꺼풀은 굵은 실로 꿰매진 채다.
열하나 모두가 그렇다. 팔다리 없이 둥둥 떠 있거나, 혓바닥이 가슴팍까지 길게 뽑혀 있거나, 말뚝이 양쪽 귀를 관통해 있거나 했다. 그런데도 손에 든 양동이, 빗자루, 걸레 따위. 죽어서도 굴복당한 꼴이 불쌍했다.
“너는 어쩌다 그런 기예에 눈을 뜨게 된 거냐?”
“…….”
“대답하지 마라, 듣고 싶지도 않으니까.”
회귀황자의 눈은 싸늘하다. 시온은 네불로의 유모의 일을 알지 못한다. 다만 무언가 일이 있기에 영혼이 일그러졌으리라고는 생각했다. 코르디스 대황궁이란 힘없는 자에게 지옥과 같으니. 허나 연민은 없다. 기회는 충분히 주었다.
“주주죽여!”
위협 앞에 선 자의 반응은 둘이다. 화를 내거나, 두려워하거나. 때문에 네불로는 덜덜 떨면서도 시온을 향해 맹렬한 적의를 표출했다. 열하나의 시체 시녀가 회귀황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빗자루를 든 시녀가 앞장섰다. 키가 껑충한 탓인지 걸음이 빨랐다. 꿰맨 자국투성이인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고는 영 서툰 자세로 빗자루를 힘껏, 또 크게 휘둘렀다.
이런 산중에서 저렇게 큰 동작이라니, 어디가 문제라고 지목하기도 힘들 만큼 엉망진창인 휘두르기. 그런데도 위협적. 빗자루의 궤도에는 나무줄기가 몇 개나 있었으나 그 모두를 가볍게 부수며 시온에게 향한다.
“힘 한번 무식하군. 얼마나 고통을 주었기에.”
시온이 폴짝 뛰었다. 검은 발톱을 나무에 걸어 더욱 높이 상승했다. 빗자루는 허무하게 그가 있던 자리만을 쓸었다. 시녀는 시온을 놓친 것에 성을 내며 빗자루를 아무렇게나 휘둘렀는데, 굵은 나무줄기들을 무슨 지푸라기처럼 툭툭 꺾여 쓰러졌다.
‘어지간한 기사보다 강한걸.’
덮쳐 오는 그림자가 둘이다. 하나는 양동이를, 하나는 먼지떨이를 들었다. 움직임에 절제는 없으나 놀랍도록 잽싸다. 발지아트가 시온의 피부 위를 덮는다. 검은 갑옷이 그를 지켰다.
‘주인이 네불로라 그렇지, 사실 더럽게 강한 기예기는 해.’
네불로를 끔찍이 혐오했던 페르비아스가 그를 들여 쓴 것도 오직 ‘굴복된 종들’의 강함 때문이었다. 페르비아스는 저 끔찍한 기예의 잠재력을 알아보았고, 네불로는 그에 화답하듯 많고 많은 사람을 짓밟았다.
‘지금은 열하나지만… 회귀 전에는 삼백이 넘는 숫자를 끌고 다녔지.’
전쟁에 참여한 네불로는 포로를 복속시켜 노예로 삼았다. 그러고는 성심껏 고문하다 죽여 ‘굴복된 종들’의 숫자를 늘렸다. 시온이 그를 마주했을 때는 이미 하나의 대부대를 이룬 뒤였다.
영웅이라 불릴 적의 시온에게도 쉬운 싸움이 아니었다. 네불로에게 직접 목숨 잃은 군인이 천이 넘었고 양민의 피해는 족히 열 배는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또 부아가 치밀었다.
“역겨운 놈.”
달려드는 시녀가 있다. 양 눈구멍이 비어 있다. 원래는 세람나무 이파리처럼 아름답던 초록 눈 있던 자리다. 시녀의 이름은 헤스다. 시온의 눈에 연민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다시 흔들림 없다.
열하나의 시체 시녀 달려든다. 레핏과 마흔 기사보다도 강하다. 역시나 콘티누아 대제의 핏줄, 네불로의 멍청함과는 별개로 놀랍도록 위력적이다.
“그래 봤자이지만…….”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
시온 폴링라이트의 두 번째 기예. 열하나의 시녀는 시온에게 닿지 못한다. 정확히 스무 발자국만큼의 거리가 벌어져 있다. 그녀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애써 버둥대며 시온에게 닿으려 한다.
몇몇이 양동이나 걸레 따위를 던지기도 했다. 시온은 가볍게 피했다. 시체 시녀들의 총명함은 생전의 것에 비례한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소녀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아무리 힘이 세지고 빨라 봤자 쓸 줄을 모르니.
시온은 한숨을 쉬며 ‘공상손가락’을 불러내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시녀들의 목을 꺾었다. 도망칠 생각도 하지 못하니 어려울 것이 없었다. 불쌍하기는 했으나 이미 죽은 영혼들이다. 끝내 헤스의 목까지 꺾어 낸 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그만 끌자, 네불로.”
“이, 이, 이…….”
“이미 충분히 떠들었어.”
네불로가 뒷걸음질 쳤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실금이라도 했나. 시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가 지린 오줌과 진흙 위를 엉금엉금 기던 네불로는 끝내 도망칠 수 없을 것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이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악에 받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너, 너, 너, 지오니스으으-!”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랬지.”
네불로는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을 실감하니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그의 살찐 얼굴은 분노와 절망과 눈물 따위로 일그러져 있다. 연민이 조금 들려고도 했지만 쓰러진 시체 시녀들을 보니 그런 마음이 금세 달아났다.
“구구굼벵이, 지지오니스! 너너는 뭐가 그렇게 다른데! 뭐, 뭐, 뭐가 그렇게 잘났어-! 너는, 뭐가아-!!!”
“그래. 나도 똑같은 놈이지. 똑같이 더러운 핏줄이야.”
코르디스를 증오한다. 이 제국이 미워 견딜 수 없다. 그렇기에 시온 폴링라이트는 제5황자 지오니스를 미워한다. 코르디스 황실을 미워하는 만큼 제 몸속의 피를 미워한다.
웃음에 자조가 섞였다. 네불로에게 기회를 준 것도 그러한 까닭이었다. 누구를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님을 스스로 잘 알았으니. 허나 네불로는 기회를 저버렸고, 이제는 값을 치를 때였다.
“먼저 지옥에 가 있어라, 네불로.”
보이지 않는 손들이 네불로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하다. 네불로는 수십의 손이 제 목을 조르는 것을 느꼈다. 손아귀들이 우악스러워 신음조차 흘릴 수 없었다. 시온은 죽어 가는 이복형을 내려보았다.
“저 황금 옥좌를 갈아 마신 뒤에 따라가지.”
* * *
이복형의 시체를 내려보던 시온은 차가움을 느꼈다. 뺨이나 손등 위로 툭툭 떨어지는 것이 있다.
“…기껏 동이 텄나 했더니, 또 비로군.”
나쁠 것 없었다. 그는 대역인형을 능숙히 조작했다. 그와 비슷한 크기의 살덩이가 나타났다. 네불로의 시체 옆에 그것을 놓았고, 돼지의 피와 살점 따위를 뿌렸다.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비보, ‘하늘 결정 투구’를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발지아트의 힘으로 투구를 부수었다. 반짝이는 가루가 대역인형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부서진 비보는 제4황자 지오니스가 여기에서 죽고 말았다는 속임수에 설득력을 더해 줄 터다.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벨 산맥에는 짐승이 많다.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들었으나 시온의 기세에 다가오지 못할 뿐이다. 시온은 짐승들에게 손짓했다.
‘그래, 어서들 먹어라.’
시온이 몇 발자국 떨어져 주자 짐승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네불로의 시체와 대역인형에 달려들었다.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으니 금방 썩을 테고,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어질 것이다.
짐승 중에는 마수도 더러 있었다. 그것들은 허기 담긴 눈길을 시온에게로 향했는데, 마갑 발지아트 두른 꼴을 보고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시온은 제 손을 내려보았다. 검은 발톱 위로 피가 붉다. 마수가 겁먹을 만도 하다.
피에스 로에스티를 죽였다.
그의 첫 친구였지만 배신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네불로 레 에티레르를 죽였다.
이복형이지만 더러운 자라 어쩔 수 없었다.
레핏과 마흔 사내를 죽였고, 세쿤두스 데비우스를 속였으며, 이제는 죽음을 가장해서 코르디스 대황궁을 떠난다. 숙명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나무에 올랐다. 저 멀리에 보인다. 삼중의 성벽과 드높은 탑과 위엄 있는 궁전. 제도 루틸리움, 코르디스의 중심. 찬란한 천년 제국의 상징.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또다시 작별이다, 제도 루틸리움.”
발지아트가 그를 뒤덮으니 금세 검은 짐승의 형상이 되었다. 마수들은 여전히 게걸스레 살을 탐하고 있다. 시온은 그 위로 펄쩍 뛰었다. 짐승 같은 발톱의 흔적이 남았다.
“너를 무너트릴 날에 돌아오겠다.”
45화
“제국을 탈출할 때다.”
제국을 무너트린다고 선포했으나 일단은 무사히 탈출한 뒤의 이야기. 도중에 붙잡히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된다. 시온은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섰다. 겹겹이 쌓인 산들의 너머, 어쩌면 거기 구름보다도 더 멀리에 있을 마음의 고향.
“목표는 서방.”
드라코 대산맥, 제국의 서쪽 경계.
그 너머의 땅은 11개 나라의 시대를 지나는 중이다. 마에쉬니 에르타니 하는 나라들이 거기에 있다. 회귀 전, 그곳에서 지오니스는 시온이 되었다.
“쉬운 길은… 아니겠지.”
대제국 코르디스는 이름값을 하는 편이다. 더럽게 넓다는 소리다. 대경합이 벌어지는 평원이 멀다. 그러나 겨우 제도를 벗어난 정도. 코르디스라는 이름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멀고도 멀다.
대산맥을 넘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엄중하게 통제되기로 이름 높다. 46년 전, 콘티누아 대제가 즉위한 뒤로는 더욱 그러하다. 관문까지의 길도 매우 험하고 멀다.
시온은 열한 살 어린아이의 몸으로, 제 정체를 숨기며 제국을 탈출해야만 한다. 쉬울 리 없다. 그러나 해야만 한다. 그에게는 계획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숙명 또한 있다.
“소벨 산맥을 쭉 타다가… 소르티아에서 내려가자. 거기서 모든 계획을 한번 정리해야겠어.”
소르티아, 제일마법사 센 소르티의 고향.
마법사라면 루틸리움보다도 사랑해 마지않는 도시. 코넬리우스 학장 등의 유력한 마법사는 거의 이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국마도원이 계승전에서 중립을 지키듯, 소르티아도 정쟁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게다가 온갖 괴짜가 많으니 열한 살 어린애의 몸으로 혼자 다녀도 시선에서 자유로울 터다. 물론 위험이 없지는 않겠지만 레비오 자작의 영토 따위보다는 몇 배나 낫다.
“계승전이 완전히 끝나기까지 열흘. 그 전에는 도착해야 해.”
시온이 쯧 혀를 찼다.
“페르비아스 놈이 이기… 기는 하겠지.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제도 귀족 다수의 지지를 등에 업었다. 정통성도, 개인의 역량도 무엇 하나 부족한 점이 없다. 계승전이라는 규칙이 없었다면 레냐르라 세쿤두스는 감히 싸움을 걸어 보지도 못했을 터다.
“알고는 있었지만, 기분이 확 나빠지네.”
페르비아스가 승리를 취하고 기뻐할 모습을 생각하니 불쾌함이 강했다. 그는 조급한 만큼 철저한 사내다. 회귀 전, 계승전의 승리자가 되자 곧바로 제도 근처 주요 도시를 돌며 제 승리를 공고히 했다. 소르티아도 그중 하나였다.
행차 중인 페르비아스와 마주치는 일만큼은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페르비아스도 페르비아스지만, 그의 심복인 옥색 눈의 아메투스가 가장 위험하다.
‘점쟁이 놈의 직감이라면 소르티아에 발을 들이자마자 내 존재를 느껴도 이상하지 않아.’
아니, 정말로! 회귀 전의 시온은 그런 식으로 아메투스와 마주한 적이 있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아는가? 그때의 아메투스는 이미 제국십장의 자리에 앉았을 때라 지금보다도 직감이 뛰어나기는 했었지만, 아무튼!
“그래도 나름 손을 써 놓았지.”
시온이 키득 웃었다.
“승리가 마냥 달콤하지만은 않을걸, 페르비아스?”
* * *
말발굽이 시체를 밟아 터트렸다. 창을 꼬나쥔 기병 떼가 소리 지르며 내달린다. 병거는 갑작스레 그들의 옆구리를 찌르듯 밀려왔다. 값비싼 준마들이 뒤엉켜 쓰러졌고 기병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마법의 장막으로 둘러싸인 병거는 말과 사람을 손쉽게 짓뭉개며 나아간다. 나아가던 병거 하나가 짜부라졌다. 거인형 마도병정의 짓이다. 거인이 땅을 휩쓸자 병거들이 나동그라졌다.
마도병정은 포효한다. 전장이 굳고 인간이 떨었다. 다만 떨지 않는 이들 있었다. 하, 하하, 하-!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늑대들이 거인을 향해 뛰어올라 그 목을 물어뜯었다. 거인이 흙먼지를 날리며 주저앉았다.
거인을 쓰러트린 늑대들이 기분 좋게 웃어 젖혔다. 요제프 하이더가 없어도 그들은 하이더 전사다. 레네 하이더는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와 도끼를 들었고, 이내 정신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그를 쓰러트린 것은 양날검을 든 옥색 눈의 사내다.
아메투스가 전장을 노려보았다. 늑대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우두머리를 물고 달아났다. 물러나는 것은 적만이 아니었다. 아군들조차도 옥색 눈앞에서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마리나 데비우스를 꺾은 사내를 누가 전장에서 마주하고 싶겠는가.
전장에 길이 열렸다. 양날검과 옥색 눈이 그렇게 했다. 피 냄새 사이로 휘황한 금빛 병거가 나타났다. 그 머리칼과 눈동자 또한 금색.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생각보다 애를 먹었군. 너희가 완전한 동맹을 맺을 줄은 몰랐어.”
금발금안의 황자는 의기양양하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긴 싸움이지 않았나, 동생들아?”
하늘에 시계가 있다.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불러낸 것이다. 다음 황제가 정해지기까지 몇 분 남지 않았다고 알리고 있었다.
계승전, 대경합. 페르비아스와 레냐르, 세쿤두스 세 파벌은 황제의 자리를 얻기 위하여 온 힘을 다했다. 그 결과가 코앞이다.
“하지만 너희도 예상했듯이, 결국 이 페르비아스의 승리다.”
열흘의 전쟁이 끝나 간다. 페르비아스가 제 것을 살폈다. 투구와 휘장, 천구와 반지, 또 부채까지 해서 다섯. 레냐르와 세쿤두스에게는 혀뿌리와 장창, 허리띠와 깃발. 모두 합해 넷.
다섯과 넷. 어느 쪽의 승리인지는 말할 것도 없다. 레냐르의 얼굴은 싸늘하고 세쿤두스의 얼굴은 바위처럼 굳었다. 페르비아스는 그것이 패배의 확신 때문이라고 의심치 않았다.
“이 몇 분 사이에 아메투스를 쓰러트리고 비보를 뺏는다면 이야기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요제프 하이더를 다시 데려와도 어려운 일이겠지.”
“…….”
“뭐라고 좀 해 보아라. 너희 둘 다 원래 말이 적다고는 해도 오늘은 심하게 과묵해. 이래서야 내가 너흴 괴롭히는 꼴이야.”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군.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신나게 웃어 젖혔다. 레냐르와 세쿤두스는 그 모습을 조용히, 또 차갑게 바라보았다.
“너무 패배감을 느낄 건 없다. 나도 꽤 애를 먹었어. 혹시 질까 걱정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말로는 안 했어도 이래저래 무리를 해 왔거든!”
제1황자가 또 한차례 신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껏 떠들어 대는 꼴에 레냐르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딱히 할 말이 없는 점이 가장 열받았다. 세쿤두스도 마찬가지였던지라 음, 하고 침음성만 흘릴 뿐이다.
배다른 동생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페르비아스는 문득 저들이 어린아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당연한 사실인데도 생소하게 느껴졌다. 습관적으로 턱을 쓸었다. 늘 어색했던 턱수염이 이제는 짧지 않았다.
‘아, 그래, 정말 많은 시간이 지났군…….’
승리가 코앞이다. 수고가 적지 않았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바깥에서 이천의 병사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중이다. 코넬리우스 학장을 세뇌했던 건도 상당한 도박수였고. 돌이켜보니 무슨 생각으로 그랬나 싶을 만큼 아슬아슬하다. 열흘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그의 입지가 몽땅 흔들려도 이상하지 않다.
‘허나, 끝내 승리했지.’
승리자의 특권과 같은 깊은 미소가 얼굴에 새겨졌다. 이천의 군병이, 그들을 이끄는 제도의 귀족들이 싸움을 주목하고 있다. 승리가 확실해도 마지막까지 의연해야 한다. 차기 황제의 평판에 흠을 내서는 안 될 일이니.
“다시 묻겠다, 동생들아.”
목소리를 내리깔고 눈빛을 진중하게. 콘티누아 대제처럼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하는 위엄은 없어도 이목구비가 닮은지라 그럴듯해 보이기는 했다.
“정말로 나를 믿고 따를 생각은 없느냐.”
“…….”
“…….”
레냐르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입을 가리고 세쿤두스는 피 섞인 가래를 퉤 뱉었다. 페르비아스는 왈칵 짜증이 솟았지만 애써 참아 내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몰려 있지 않은가.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한층 자애롭게 했다.
“섭섭하군. 도대체 너희는 나를 왜 그리 싫어한단 말이냐?”
“…오라버니. 저희야말로 의문입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시는 건가요?”
“짚이는 부분이 없는데.”
제1황녀, 레냐르 드 볼마르크는 답답한 듯 은발을 쓸어 넘겼다. 참 한결같은 사내다. 한결같이 뛰어나고, 치밀하고, 지독하다. 그래서 어리석다.
“…여쭙겠습니다. 왜 황제의 자리를 원하십니까?”
“나보다 합당한 자가 없으니까!”
페르비아스 당당하다.
“내게 고민 없었다 여기지 말아라. 황제의 자리를 가벼이 여긴다고 여기지 말아라! 수도 없이 고뇌하고 고뇌했으니!”
제1황자에게도 소년 시절이 있다. 제게 주어진 숙명을 놓고 의심하거나 절망하기도 했다. 황제의 자리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숨 막히도록 무겁지 않은가. 그 숨 막힘을 넘어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여기에 있다.
“내가 틀렸을지도 모르지. 나보다 합당한 이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아직 나보다 나은 이 만나지 못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지 분명하다. 혈통에서도, 의무에서도, 숙명에서도 도망치지 않는다. 그뿐이다. 그조차도 지독하게 무겁겠지만 도망치지 않겠다.
“그런 다짐이다. 다짐을 지킬 뿐이다.”
“바로 그 점입니다.”
레냐르가 조용히 읊조린다.
“누가 오라버니께 그런 다짐을 강요했습니까? 황제가 되고 나서 하셔도 늦지 않으실 텐데요.”
“…….”
“오라버니께서는, 때때로 자신에게 속아 버리시는 듯해서.”
은발의 황녀의 말은 마치 찌르는 듯하다. 페르비아스의 눈빛이 매서워지고 세쿤두스조차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는 공감하지만 이제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내의 약점을 후벼 파서 무엇하겠단 말인가. 그러나 레냐르는 흔들림 없이 말을 잇는다.
“지금도 그렇지요. 대립했던 동생들조차 품을 아량이 있다고 보여 주려 하시나, 사실 그런 아량이 없으시단 건 이미 서로 알고 있지요. 이런, 애석하게도…….”
“……!”
페르비아스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는 듯하다. 만약 가까이 있었다면 따귀라도 한 대 올려 칠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가깝지 않았고, 레냐르도 그것을 알기에 미소를 머금는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을까요, 오라버니?”
“…흥, 여전히 날카로운 혓바닥이구나, 레냐르!”
제1황자가 코웃음 쳤다. 화가 솟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허나 금세 가라앉았다. 곁에 선 든든한 심복을 보아라. 그가 지키고 선 다섯 개의 비보를 보아라. 하늘이 누구의 편에 섰는지는 명백하다.
“너는 내게 뜻을 관철할 역량이 없다 하는구나. 헌데 어쩌나, 승리는 누구에게 있지?”
“…후후.”
레냐르가 쓰게 웃었다. 말이 엇갈리는 탓이다. 페르비아스도 다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녀의 쓴웃음이 패배감에서 기인했다고 여긴 탓이다. 그는 승리를 공고히 할 필요를 느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어제 급보가 있었다.”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저기서 그들을 바라보는 이천의 군병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그들 셋만 알 수 있도록.
“소벨 산맥에서 두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더군. 하나는 뚱뚱하고, 하나는 어린아이랬나. 무언가를 피해 도망쳤으나 결국 마수에게 당한 모양이야.”
“지오니스…….”
근육질 황자, 세쿤두스가 눈을 질끈 감고 신음을 흘렸다. 기껏 도망 보낸 둘의 최후가 안타깝다. 그걸 자랑이라는 듯 떠들어 대는 페르비아스에게 화가 났고, 제 무력함이 속상했다. 죽은 둘과 죽인 하나, 사이에서 무력했던 세쿤두스 자신까지 어떻게 한 피를 이은 형제일 수가 있는지.
“애석하게도, 내 뜻은 계속 관철되는군.”
“…….”
“…….”
두 동생의 눈에는 이제 경멸까지 담겼다. 페르비아스는 이제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한 동생들 아닌가.
“봐라,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온다.”
하늘의 시계가 우렁차게 울린다. 먹구름이 끼고 번개가 쳤다. 위엄의 아래에서 무기를 집어넣지 않을 자가 없었다.
“그래, 선포해야지. 이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승리를.”
46화
“더럽게도 긴 계승전이었지.”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말했다.
“어서 비보들이나 내놓아라. 분위기를 잡아 봤자 안 그래도 지루한 싸움이 더 지루해질 뿐일 테니까!”
“하하. 성격하고는. 알겠소.”
페르비아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헤르마이 메르헤스는 그것이 불쾌했다. 웃는 꼴을 보니 결국 승리한 모양이다. 그렇게 될 줄 알았으나 막상 마주하니 생각보다 더 떨떠름해서 혀를 차고 말았다.
“세쿤두스 전하는 비보를 모두 레냐르 전하에게 양도한다고?”
“음. 그렇소.”
“좋습니다. 어디…….”
제3황자, 카테카 케슐레이가 비보를 노마법사에게 건네주었다. ‘강철 혀뿌리’, ‘아름드리 장창’, ‘철사자 허리띠’, ‘청홍기’.
“…모두 합해서 넷. 페르비아스 전하도 주시지요.”
“아메투스, 어서 건네주게.”
옥색 눈의 사내가 비보를 건넸다. ‘청천휘’, ‘뒤집힌 천구’, ‘삼각너울 부채’, ‘쉠의 반지’. ‘빌어먹을 놈, 집어던질 때는 언제고.’ ‘다 들리오, 대학장.’ ‘들으라고 했소!’ 그리고 ‘하늘 결정 투구’… ‘하늘 결정 투구’? 이건…….
“…모두 합해 넷.”
“응?”
페르비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잘못 센 것 같은데, 대학장.”
“아니. 네 개가 맞다.”
“코르디스 수석마법사가 숫자도 못 센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데. 우리 사이가 좋지 못해도 이럴 때까지 심술을 부려서야 쓰나!”
제1황자는 금세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길었던 계승전의 끝이다. 다음 황제가 정해지는 자리이니 예민해질 수밖에.
“누가 봐도 다섯인 것을!”
“진짜로 네 개다, 1황자. 가짜가 하나 섞여 있어.”
“…뭐!?”
고함.
“왜? 언제! 대체 뭐가 어떻게…….”
“음. 혹시나 해서 만들었던 복제가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습니다.”
세쿤두스 데비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 ‘하늘 결정 투구’는 가짜입니다, 형님.”
“그, 그럼 진짜는……?”
그는 헤르마이 대학장을 올려보았다. 계승전의 관리자이니만큼 비보에 대해서도 파악할 의무가 있다. 허나 노마법사는 수염을 쓸며 태연히 말했다.
“글쎄? 내 눈에도 보이지 않는군. 소벨 산맥에라도 들어가 있나?”
“소벨 산맥……?”
페르비아스는 떠올렸다.
“…소벨, 산맥!”
네불로와 지오니스의 시체를 소벨 산맥에서 발견했다는 보고를. 그리고 지오니스로 보이는 시체의 옆에는 반짝이는 결정 따위가 잔뜩이었다고. 아마도 그것이 진짜 ‘하늘 결정 투구’. 도망치던 중에 부서지기라도 한 것 아닐까.
“이, 지오니스으-!!”
분을 이기지 못한 페르비아스가 고함쳤다. 마지막에 와서 지오니스의 이름이 또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계속 걸림돌이 되어 치워 버렸는데, 오히려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세쿤두스! 죽을 동생에게 투구를 들려 보냈느냐? 동생을 도구로 쓰다니, 이 비겁한…….”
“닥치시오.”
세쿤두스가 낮게 내뱉었다. 페르비아스가 입을 다물었다. 근육질 황자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당신에게 들을 말은 아니야.”
“…….”
제2황자 세쿤두스는 못내 착잡했다. 페르비아스의 말마따나, 죽은 동생을 전략의 일부로 이용한 꼴이 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이 착잡함은 그의 마음에 죄책감이 남았다는 증거였다.
“…이거, 그러면…….”
헤르마이 메르헤스가 수염을 쓸었다.
곤혹스러운 기색이 강했다.
“…넷 대 넷으로, 무승부로군.”
또?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어느 파벌이건 이미 지친 뒤였다. 최대한 사상자를 줄인다고 했으나 전쟁이라는 이름을 걸었는데 어찌 소모가 없겠는가. 헤르마이도 이를 알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더는 심하지 않나. 이번 계승전은 심하게 지긋지긋해…….”
“맞아요. 지긋지긋하지요.”
레냐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는 세쿤두스를, 배다른 동생을 바라보았다. 거한의 황자는 그녀의 뜻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발의 황녀는 힘을 얻어 말을 잇는다.
“계승전이 길었습니다. 분란도 많았고 제국의 젊은이들끼리 불필요한 피를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저희는 이에 큰 책임을 느낍니다.”
세뇌된 코넬리우스 학장, 갑작스러운 대경합, 마리나 황비가 일기토에 나서지 않나, 요제프는 황자를 죽이려 들지 않나, 끝내 파벌끼리 피를 흘려 희생된 자가 적지 않다.
“때문에 더 이상의 싸움을 거부합니다.”
은발의 황녀 당당하다. 은빛 눈동자를 들어 처음에는 자기를 따르는 하이더 전사들을, 이어서 세쿤두스와 페르비아스를, 곧 헤르마이, 마침내 그들의 싸움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눈을 향했다.
“오라버니께 승리를 양보하지요.”
뭐. 페르비아스가 눈을 부릅떴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레냐르만큼은 절대 굽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토록 고분고분하게? 놀랄 틈도 없이 세쿤두스가 말을 받았다.
“음. 동맹을 맺으며 누님의 뜻을 따르기로 약조했지요. 저 또한 승리를 양보하겠습니다.”
“아니, 이 무슨……?”
어안이 벙벙했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마지막 한 수에 당해서 승리가 멀어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에게 승리를 양보하겠다니?
“진심인가, 레냐르 전하?”
“그럼 거짓일까요, 대학장? 정 의심된다면 이렇게 하지요.”
레냐르가 배시시 웃었다.
“코르디스 제1황녀, 저 레냐르 드 볼마르크는 정식으로 기권을 선언하겠어요.”
“코르디스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 또한 동의하오.”
레냐르가 입을 가리며 미소 짓는 모습이 여전히 기품 넘쳤다. 당혹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헤르마이는 그녀와 세쿤두스가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음을 깨달았다. 페르비아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 아니 이거…….”
“축하드려요, 페르비아스 오라버니.”
레냐르와 세쿤두스는 서로를 마주 보며 키득 웃었다. 뒤에 선 카테카도 미소를 지었다. 꽤 남매 같은 모양새였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바보 같은 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다음 황제예요.”
“음. 뜻대로 되셨잖소, 형님?”
* * *
계승전이 끝났다.
열 개의 비보를 모았고.
대경합이 펼쳐졌다.
끝내 열흘의 전쟁.
승자가 정해졌다.
50대 황위계승전의 승리자.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 * *
“아깝지 않소, 누님?”
“뭐가 말이니, 동생아?”
“무승부였는데, 다른 싸움을 벌여 이겼다면 황제가 되었을 터.”
“너는 아쉬운 모양이구나.”
“조금은.”
세쿤두스가 턱을 긁으며 껄껄 웃었다. 그들은 페르비아스와 헤르마이를 뒤로하고 평원을 떠나는 중이었다. 열흘의 전쟁이 지났는데도 병력이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나는 아쉽지 않아.”
은발이 바람에 휘날린다.
“페르비아스를 어떻게 이기겠니?”
제1황자 페르비아스는 오만하고 조급한 구석이 있다. 고상한 척하기를 즐기며 아량 넓은 자처럼 보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때문에 레냐르와 세쿤두스를 동생으로 여겨 손대중해 주었고, 계승전이라는 규칙 안에서 싸워 주었다.
“슬슬 진짜로 화가 나는 모양이던데, 그렇게 되면 카셉투스 가문까지 움직일 거 아니니.”
“음. 자비로운 척을 그만둔 페르비아스 형님은… 무섭기는 하군요. 자존심이고 뭐고 최고재상에게도 손을 벌릴 테니.”
“케레네우스는 기다렸다는 듯 뛰어오겠지. 그는 잔인한 늙은이야.”
콘티누아 대제의 세 심복.
제국 수석마법사, 헤르마이 메르헤스.
일대장군一大將軍, 데발로 데비우스.
그리고 케레네우스 칸셀라 카셉투스.
케레네우스, 팔현인회의 일원.
코르디스의 최고재상, 제국 관료의 정점.
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의 외조부. 제도 귀족의 절반이 페르비아스를 지지하는 것도, 그가 제1황자의 정통성을 자랑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케레네우스 때문.
제 역량을 증명하겠다는 외손자의 말에 지금껏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그가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판도는 뻔하다. 이미 페르비아스에게 기울어 있던 판이 아닌가. 헤르마이도 데발로도 계승전에 직접 관여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이다.
“어차피 오라버니가 가져갈 승리, 우리가 양보한 것처럼 만들었지.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고맙게도 관중을 모아 주기까지 했지요.”
“내 말이. 오라버니는 아직 판을 길게 읽지 못해. 그럴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만.”
초보 전략가는 대승大勝에 혹한다. 적을 섬멸해 이름을 떨치고 보화를 거머쥐는, 길이길이 이어질 승리를 얻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전장의 경험이 많은 세쿤두스나 볼마르크의 정쟁을 겪은 레냐르는 안다. 크게 이기는 법보다는 덜 아프게 지는 법이 더욱 중요할 때가 많음을.
몇 번의 대승을 거둔 영웅이라도 대패 한 번에 목숨을 잃는다. 사람이니 당연하다. 죽은 자에게 다음 기회란 없는 법이니. 단지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간과될 뿐이다. 그러니 대승보다는 소패小敗를 아는 것이 낫다.
“음. 아프지 않게 패배했지요.”
“약간은 유쾌할 정도구나.”
“손해가 없지는 않지만…….”
열흘의 전쟁에서 세쿤두스는 다섯 장정을, 레냐르는 두 전사를 잃었다. 얼굴도 이름도 아는 자들이니 구슬픈 마음 없을 수 없다. 하지만 둘이 합쳐 오백을 데려와 일곱이 죽었다.
세력을 놀라울 만큼 보전할 수 있었다. 이들은 앞으로 레냐르와 세쿤두스가 일굴 세력의 주축이 되어 줄 것이다. 레냐르가 쿡쿡 웃었다. 세쿤두스는 약간 놀라운 마음이었다. 사람다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누님인 줄로만 알았다.
“페르비아스 황제님도 꽤 고생하시겠지. 그 콘티누아 대제의 다음이니. 내정을 다듬고 권위를 세우는 데에 몇 년이 걸릴걸.”
“얼마나 보십니까.”
“4년, 아니 3년?”
“생각보다 짧군요.”
“분하지만 페르비아스 오라버니는 천재가 맞아. 불쾌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지.”
문무겸비文武兼備.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어디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다. 내정에 밝고 인재를 다루는 것이 능하며 군략에도 조예가 깊다. 심지어는 기예Ars까지도 마치 남들의 위에 서려고 태어난 것만 같은 사내다.
“혹시라도 좋은 황제가 될 일말의 희망을 품고 한번 쏘아붙이기는 했다만……. 그러기는 힘들겠지. 이미 아집이 깊어.”
페르비아스는 스스로를 천재라 여기지 않는다. 그 점이 가장 위험하다. 케네레우스나 아메투스 같은 규격 밖의 인간을 가까이서 본 탓인지, 뿌리 깊은 조급함과 독기 때문인지, 페르비아스는 지독한 노력가로 자랐다. 무엇 하나 제일이 되지는 못했어도 무엇 하나 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노력의 이면에는 분명히 아집이 쌓여 있다. 적으로 돌리면 가장 곤란해지는 부류다.
페르비아스 황제, 기분 나쁜 어감이지만 곧 다가올 사실이다. 그는 코르디스의 50대 황제가 되어 제국을 휘어잡을 터다. 그들은 살아남아야만 했다.
“3년 안에 커지렴, 세쿤두스. 페르비아스가 감히 너를 잘라 내지 못하게.”
“누님도 그리하시오.”
곧 길이 갈렸다. 그들은 제도 루틸리움으로 돌아갈 생각도, 대관식 따위에 얼굴을 비출 계획도 없다. 서둘러야 했다. 페르비아스 황제가 그들을 감히 숙청하지 못할 자리에 올라야만 했다.
“겨우 열흘 함께했는데, 퍽 아쉬운걸.”
“음. 그러게 말입니다.”
길이 갈라진다. 레냐르는 북방으로 향한다. 그녀가 참 고향으로 여기는 공국 볼마르크가 거기에 있다. 세쿤두스는 동북으로 간다. 제국십장의 정점, 데발로 데비우스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멈추어 섰다.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른다. 페르비아스라는 공동의 적을 두니 우애라고 할 만한 것이 싹텄는지도 모른다.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몇 번 오가고, 레냐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 지오니스 일은… 아니다, 미안하구나.”
“됐소. 제가 못할 짓을 했지요.”
레냐르가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끼었지만 나름 맑았다.
“그 녀석, 갑자기 튀어나올지도 몰라. 이상하게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런, 형님, 제가 죽었다는 헛소문이라도 들으신 모양입니다, 같은 소리라도 하겠지요.”
“꽤 비슷한걸, 세쿤두스!”
음. 연습했지요. …연습까지? 세쿤두스 또한 하늘을 보았다. 나름 맑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이르지만 바람이 차다. 갈 길이 멀다. 그런데 걸음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고픈 말이 남았다.
“…그래도,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아주 반갑겠군요. 그때는 꼭 한 대 쥐어박아 줘야겠어.”
“어머. 그럼 나도.”
저도……. 카테카가 끼어들었다. 레냐르는 자기도 모르게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테카는 피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한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일까. 한번 마음을 여니 쏟아지듯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레냐르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하고 말았다.
“…동생이라 여겼니?”
“그러지 않은 적이 없는데.”
“혹시 나도?”
“이 세쿤두스 데비우스는 페르비아스도 형님으로 여기는 사내지.”
어머나! 레냐르가 꺄르르 웃었다. 세쿤두스도 말을 몰며 껄껄거렸다. 카테카도 어느새 끼어들었다. 웃음은 눈물이 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빌어먹을 계승전이 끝났다는 해방감 덕인 듯했다.
“작별이다, 내 동생들. 살아남아라.”
“떠나시오, 우리 누님. 언젠가 봅시다.”
47화
대제국 코르디스.
50대 황위계승전이 끝이 났다.
여러 질척한 싸움이 있었다. 끝내 황자 둘이 죽기까지 했다. 제4황자 네불로 레 에티에르와 제5황자 지오니스를 기리는 행사가 있었다. 사체조차 제대로 된 꼴이 아니었다는 소문에 뭇 제국인이 눈물을 아끼지 않았다.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황태자로 봉해졌다. 제국은 다음 황제를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만 달가워하지 않는 시선이 곳곳에 있었다. 제1황녀와 제2황자에게 양보받은 승리에 불과하다고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콘티누아 대제가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소식에 온 제국이 아쉬움을 금하지 못했다. 젊어서는 제국을 구하고 나이 들어서는 기반을 새로이 한 영무대제英武大帝다. 대제의 치세를 아쉬워하는 마음들이 어찌나 컸는지 새 황제에 대한 기대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 * *
화려하지 않지만 고풍스러운 집무실.
“졸업식에서 했던 말을 기억하나?”
황태자이자 곧 대관식을 치를 차기 황제,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는 오랜 친구이자 최고의 심복인 옥색 눈 사내를 바라보았다. 아메투스는 늘 그러했듯 양날검을 허리에 끌러 메었다.
“많은 말을 했었습니다, 전하.”
“왜 그러나. 알고 있잖나. 그 검에도 새겨 주었는걸.”
“…민망하실까 잊은 척했습니다만.”
“치기 어리기는 했지. 그래도 어때, 기억하고 있어?”
“검을 손질할 때마다 새깁니다.”
아메투스는 꼼꼼한 사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한 번은 제 검을 소중히 손질한다. 그는 황태자 앞에서 감히 검을 빼어도 되겠냐고 정중히 묻고 너털웃음 섞인 허가를 받고서야 검을 빼었다.
글귀가 음각되어 있다. 서툰 솜씨와는 반대로 말투에는 거드름이 한껏 깃들었다.
[나, 미래의 황제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절친한 벗이자 미래의 제국십장, 아메투스 아르에티온에게 수여하노라.]
“…아, 민망하기는 하군. 그때의 내가 좀 더 그럴듯한 줄 알았는데.”
페르비아스가 킬킬 웃었다. 뺨이 약간 붉다. 학교라는 새장을 떠나 두 날개를 맘껏 펼쳐 권좌에까지 닿겠다, 너는 내 친구니 옆에 서라……. 부끄럽지 않을 수 없는 오래전의 다짐. 그런데도 현실에 가까우니 이상한 일이다.
“그래. 꿈이 코앞이로군. 드디어 여기까지 왔어.”
황태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얼마나 달콤한 어감인가. 벌써 미소를 감추기 어려운데, 코르디스 황제라는 칭호는 대체 얼마나 깊이 감미로울까. 지나온 시간 덕에 성취감이 더해진다.
오랜, 시간. 많은, 노력. 겨우 네 단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그 모든 마음. 허나 보상받았다. 그는 증명해 내었다. 권좌에 앉아 치세治世를 펼치는 모습을 상상한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만족스레 숨을 고르면 꼭 달갑지 않은 것들이 튀어나온다. 은발의 황녀나 근육질의 황자, 배다른 동생들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페르비아스가 콧잔등을 일그러트렸다.
“…사실 유쾌하기만 한 승리는 아니지.”
그의 승리였다. 반박의 여지조차 없이 승리자는 페르비아스 카셉투스다. 계승전 시작 전부터 모두가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헌데 마무리가 영 좋지 못했다.
“한바탕 날뛰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참아야겠지?”
마치 승리를 양보받은 꼴이 되지 않았는가. 수천의 군병이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 괘씸한 레냐르, 얄미운 세쿤두스, 그리고… 지오니스! 사사건건 눈에 거슬리더니 끝까지 그의 발목을 잡는다.
“지오니스 녀석은 정말, 지옥에서라도 데려와 엉덩이를 때려 주고픈 마음이야.”
“…….”
생각해 보면 계승전의 구도가 어그러질 때는 늘 5황자 지오니스가 있었다. 세쿤두스 파벌이 갑자기 우세를 점한 것도, 대경합 중에 일어난 모든 이변 중에도, ‘하늘 결정 투구’가 사라질 때에도!
“하지만 뭐, 열한 살 나이를 생각하면 조금은 불쌍한가.”
페르비아스는 알지 못한다. 저 일들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시온의 의도적인 훼방이었음을, 그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하긴 누가 알겠는가? 세쿤두스 데비우스조차도 지오니스가 죽었다 여긴다. 모든 정황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아메투스는 침묵을 지킨다. 페르비아스는 심복의 모습에 쓸데없는 말이 많았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털었다.
“맞아. 지나간 일은 그만 이야기하지. 이제부터가 중요하니까.”
대제국 코르디스.
천 년 동안 대륙의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 권좌가 어찌 가볍겠는가? 페르비아스는 문득 가슴이 답답해 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부담감이 심했다.
“…부황 폐하 다음으로 권좌에 앉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쉬울 수 없지. 그 콘티누아 대제 아니신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하.”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 중이야. 최선을 다해야지. 나름의 기반을 다져야 할 테고.”
페르비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니 아메투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겠지.”
금빛 눈동자가 매섭다.
“자네의 부탁은 거절하겠어.”
“…전하.”
아메투스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재차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인에게라면 자연스럽지만 오랜 친구에게 하는 것치고는 과하다.
“저를 보내 주십시오.”
“내가 거절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굳센 거지 눈치 없지는 않다 여겼는데.”
“…그런, 약조이지 않았습니까.”
아메투스가 페르비아스를 올려보았다. 자연히 황태자는 제 심복을 내려본다. 옥색 눈은 흔들림 없다. 흔들리는 것은 오히려 황태자 쪽이다. 당연하다. 아메투스는 정당한 요구를 부탁이라 부르며, 페르비아스는 그것을 외면하고 있으니.
“…맞아. 그런 약조였지. 잊은 게 아니야, 아메투스.”
황태자가 제 턱을 긁었다. 다소 신경질적이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네. 자네를 치안청에서 데려올 때 내 입으로 뭐라 약속했었는지 한 글자도 빠짐없이 기억해.”
“…….”
“계승전이 끝나면, 자네 가문의 숙원을 풀게 해 주겠다. 내 모든 힘을 다해서 그리하겠다!”
격앙되는 목소리.
“정말로 잊지 않았어! 이를 위한 계획도 준비도 있어! 다만, 기다려 달란 말이야. 응? 어떤 시기인지 알지 않나!”
그는 다그치듯 말한다. 아메투스는 늘 그렇듯이 잠잠하다. 황태자는 한 걸음 성큼 다가선다. 한번 목구멍을 여니 속에 쌓인 모든 염려가 토해진다. 어딘가 애걸하는 듯한 기색까지 있다.
“레냐르와 세쿤두스는 제 세력을 부풀리기 시작할 거야. 서방의 기세도 심상치 않고. 그뿐인가? 그런데도 제도의 귀족들은 내 머리 위에 앉으려 들지. 특히 우리 외할아버님은 날 무슨 꼭두각시쯤으로 여기시고. 내가 누구를 믿겠나? 대체 자네가 아니면 이 페르비아스는 누구를 믿을 수 있지? 응? 아메투스!”
“…전하, 그저 혼자 고향에 다녀오고픈 마음입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날, 떠나겠다는, 소리잖아-!!!”
쾅, 하고 탁자가 쪼개졌다. 페르비아스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내리친 탓이다. 아메투스는 놀라지 않았다. 종종 비슷한 일이 있었다. 때문에 아직은 침묵을 지킬 때임도 안다.
“아메투스, 내 오랜 친구 아메투스!”
그의 말은 이미 으르렁거림에 가깝다.
“잘 생각해. 현명하게 행동해!”
“…….”
“내가 가장 곤란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에 최고의 심복인 자네가 자리를 비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 텐데! 내가 강제로 잡아 둬도 할 말이 없을 거야!”
금빛 눈이 싸늘하게 빛난다. 상대의 심령을 사로잡는 기예, ‘통치자의 눈 princeps oculus’. 그러나 아메투스는 고요하다. 지배당하지 않았다. 역시 먹히지 않나. 페르비아스가 혀를 찼다.
아메투스다. 은퇴했다고는 해도 전 제국십장을 꺾은 사내다. 페르비아스는 깨달았다. 아메투스의 의지는 강고하다. 결국 그를 막지 못할 터다. 때문에 분이 치솟았다. 오랜 피로가 불길을 더했다.
“…하.”
입술이 뒤틀린다.
“그래, 그렇게까지 날 떠나고 싶었어? 역시 아레테 출신인가?”
집착은 조금만 빗나가도 비열해지는 법이다. 아레테라는 이름에 옥색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허나 제 이성이 기능을 잃은 줄도 모르는 페르비아스는 계속해서 감정을 내뱉었다.
“자네의 출신에 대한 우려와 비방을 막느라 내가 어떤 고생을 했는데. 내가 아니라면 자네가 어떻게 여기까지…….”
“…그만해라.”
“뭐?”
“그만하라고 했다, 펠.”
“……!!!”
페르비아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첫째 이유는 아메투스의 말에서 사나운 냄새가 풍겼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7년 만에 학창 시절의 가명으로 불렸기 때문이었다. 두 이유 모두 아메투스의 극심한 분노를 보여 주었다.
“펠, 내 오랜 친구 페르비아스.”
옥색 눈 얼핏 고요하다.
“전에 말했지, 조급함은 네 가장 큰 단점이라고.”
그러나 이미 속에서 거친 풍랑이 일기 시작했다. 아무리 잠잠한 자라도 역린이 있기 마련이다. 아메투스에게는 가문과 고향이 그러했다. 역린에서 튀어나오는 분노는 맹렬하다 못해 날카로운 법이다. 본디 잠잠했던 만큼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부디 신중해다오. 코르디스의 황제가 될 몸이잖나.”
“…….”
페르비아스가 침을 삼켰다. 이전에도 아메투스의 고향을 모욕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마에쉬의 마스터였는데, 외팔이가 되는 바람에 은퇴하게 되었다. 누구의 짓인지는 말하기도 두렵다.
“후우…….”
아메투스가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건방진 언행을 용서하십시오, 전하. 아직 수련이 부족한 몸이니.”
페르비아스는 얼어붙은 채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아메투스, 너마저…….”
정신을 차린 황태자는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숨길 수 없는 상처가 묻어 나왔다. 그는 양손 검을 다시 주인에게로 떠밀며 소리 질렀다.
“좋아, 가라! 네 마음대로 해!”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손을 뻗었다. 그는 아메투스의 목덜미에서 메달을 빼앗았다. 제1황자의 측근임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주었던 메달을 빼앗은 페르비아스가 손가락질했다.
“대신 돌아올 때까지는 내 측근이 아니다. 치안기사의 신분으로 다녀오든가 해!”
“예, 전하.”
“보기 싫다!”
페르비아스가 홱 고개를 돌렸다. 아메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예를 표했다.
“이 아메투스, 속히 다녀오겠습니다.”
* * *
아메투스는 걸음을 서둘렀다. 몇몇 관리가 그가 황태자의 심복임을 알아보고 예를 표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그는 피곤한 눈으로 페르비아스의 집무실을 흘끗 뒤돌아보았다.
‘사실 약조는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도 알고 있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지. 페르비아스가 그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가문의 숙원은 이미 해묵었다. 겨우 몇 년이 급한 일이 아니다. 허나 떠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불안이, 예, 불안이 있기에 떠납니다.’
이렇게 떠나고 싶지 않았다. 허나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간이 아팠다. 아프다 못해 시렸다. 그의 직감이 이토록 강렬하게 비명 지르는 것은 처음이다.
‘도저히 말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불안이 떠나지를 않습니다.’
굳은 얼굴로 제 이마를 매만졌지만 그럴수록 괴로움이 심했다. 그의 안에서 누군가 외쳐 대고 있었다. 측량할 수 없는 위협이 있다, 어서 막아야 한다, 그러니 떠나라, 제도를 떠나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지오니스 전하께서…….’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리만큼 커다란 확신이 점차 마음속에 자리 잡아간다.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친 소리나 다름없는, 이 불안.’
불안은 커져만 간다. 꺼진 줄로만 알았는데 되레 폭발하듯 사납다. 단순한 직감인가? 착각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이미 알고 있다. 그의 직감은 늘 사실만을 가리켰다. 설명할 수 없고 믿어 주지 않을 테니 억지스레 떠날 뿐.
‘누가 보아도 살아 있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것이 옳고, 더없이 상식적입니다.’
상처를 입은 채로, 열한 살의 몸뚱이로, 빗속의 고된 산행을 거친 후에 소벨 산맥의 마수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언가 숨겨 놓은 힘이 있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살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 더없는 위험 품고 돌아올 것만 같습니다.’
이유는 모른다. 방법도 모른다. 모든 정황이 그가 죽었다고 말한다. 허나 아메투스의 직감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지오니스, 시온 폴링라이트가 살아 있다. 미친 소리이지만 분명하다.
‘그러니, 떠나겠습니다.’
이래서야 예언이나 예지에 가깝다. 이미 직감의 영역을 넘어섰다. 그러나 아메투스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의 충성은 더없이 굳세다.
‘이 아메투스, 지오니스 전하가 정말 죽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정말 죽지 않았다면…….’
그의 뜻은 분명하다. 확신만큼이나 그렇다. 아메투스만이 알고, 또 할 수 있는 일이니 선택의 여지조차 없다. 이제는 그저 모든 것을 감수하고 뜻을 이룰 뿐.
‘…지오니스 전하를 쫓겠습니다. 그렇게 찾아내서, 이번에는 끝내 목숨을 끊고, 당신의 위협을 지우고…….’
바다 같은 옥빛이 거세게 일렁인다.
“…그 목을 가지고 돌아오지요.”
‘계승전’ 편 마침.
48화
여덟 가지 사실.
1.
시온 폴링라이트는 회귀자다.
19년을 거슬러 11살로 돌아왔다.
2.
어릴 적의 이름은 지오니스.
대제국 코르디스의 제5황자로, 황실에서 소외된 처지다.
3.
회귀한 날은 계승전의 첫날.
배다른 형제자매끼리 권좌 걸고 벌이는 다툼에 어린아이 몸으로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의 소득, ‘마갑 발지아트’. 센 소르티 최고의 걸작.
4.
계승전 세 파벌.
페르비아스, 레냐르, 세쿤두스.
시온은 근육질 황자 세쿤두스의 편에 붙어 그를 도왔다. 약간의 비밀 품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5.
계승전의 승리자, 제1황자 페르비아스.
대경합까지 벌이며 끝내 황태자의 자리 거머쥐었다. 그는 곧 콘티누아 대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의 일이었다. 레냐르와 세쿤두스는 나름의 대책 품고 헤어졌다.
6.
시온은 죽은 척했다.
페르비아스가 마침 그를 죽이려 했기에 반갑게 상황을 이용했다. 겸사겸사 얄미운 이복형과 배신한 호위를 묻었다. 모두가 그를 죽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렇게 만들었다. 모두 숙명을 위해.
7.
메리언의 시온에게 숙명 있다.
“제국을 무너트린다.”
8.
허나 아직 때가 이르다.
그는 열한 살 어린아이고, 코르디스 제국은 대륙의 심장 거머쥔 천 년의 주인이다. 때문에 그는.
“코르디스를 탈출해야 해.”
* * *
[메리언의 시온.]
[시온, 나의 폴링라이트.]
[부사령, 우리의 영웅…….]
웅웅대는 목소리들이 그를 부른다.
[코르디스를 무너트려라. 그들의 악업을 기억해라. 우리의 아픔을 갚아 주어라.]
[비밀, 우리의 비밀을…….]
[잊지 마시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시오.]
꿈임을 안다.
저들은 늘 악몽 속에서만 말해 왔다. 그런데도 반가워서 시온은 미소 짓고 말았다.
“재촉하지 마.”
수십만의 목소리, 수십만의 원념. 일곱 비밀의 아래에서 꿈틀대는 과거들.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들, 그 하나하나를 바라보며 시온 폴링라이트는 말을 이었다.
“이제 겨우 황궁을, 제도를 빠져나왔을 뿐이야. 나는 아직 열한 살의 몸이고. 제국부터 탈출해야 하지 않겠어.”
수십만의 얼굴 중에는 낯익은 것이 더러다. 시온은 손을 내밀었다. 쓰다듬으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원념이니 당연하다. 그의 마음에 비추어진 상일 뿐이다. 그것이 퍽 슬펐다.
“그러니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다오, 내 비밀들아.”
셉템 아르카나Septem Arcana.
둘이 열렸고 다섯이 닫혔다. 빗장뼈 아래가 아프게 달아오른 것을 보아하니 세 번째가 곧 열릴 듯하다. 그래도 아직 이 아우성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 아직, 아직일 뿐이다.
머잖아 곧.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니.”
* * *
회귀자 시온도 알지 못하는 두 가지.
9.
한 사내가 있다.
검 솜씨가 아주 뛰어난데, 전 제국십장을 꺾을 정도다. 그는 묘한 불안의 냄새를 맡았고, 제 불안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제도를 떠났다. 손에 익은 양날검을 쥐고 옥색 눈을 부라리면서.
10.
점쟁이 아메투스가 시온을 쫓는다.
* * *
“이름.”
“파시오누스 펠레우스.”
병사가 통행증을 앞뒤로 돌려 보았다. 위조지만 티가 날 걱정은 없다. 서류 자체는 대황궁에서 슬쩍한 진짜였으니까. 몇 가지 정보만 고쳤을 뿐이다.
“나이는?”
“열여섯입니다.”
“나이치고 키가 꽤 크군.”
“아버지를 닮아서요.”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깨가 딱 벌어지고 다리가 길다. 어지간한 장정 못지않은 덩치였다. 옷 안쪽에 마갑 발지아트를 둘러 팔다리를 늘렸기 때문이다. 마침 초겨울, 옷까지 두텁게 입으니 전혀 열한 살 꼬마로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 다니나?”
“아버지가 제 나이 때 첫 여행을 하셨다고 했거든요.”
“흠, 그럴 나이지. 우리 아들도 내년이면 열여섯인데…….”
병사가 쯔쯔, 하고 혀를 차며 푸념을 읊었다. 자기 아들은 사내 티가 나지를 않는다며, 그에 비해 시온은 얼마나 의젓하냐며 떠들어 대었다. 경계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소르티아는 어땠나?”
“좋은 도시예요. 센 소르티의 고향인 만큼.”
“그렇지?”
시온이 싱긋 웃어 보였다. 발지아트로도 얼굴을 어찌할 수는 없어 열한 살의 얼굴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얼굴이 큰 덩치와 맞물리니 되려 사춘기 소년스러웠다.
“좋아. 어디까지 가지?”
“펜렌. 그곳 분수대 앞에서 페르비아스 전하의 행차를 보고 싶거든요.”
“오? 그거 좋군!”
목적지는, 펜렌, 서명하고, 도장 찍고. 병사는 옆에 선 검문소장에게 서류를 내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소장도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제도에서 왔다며. 혹시 페르비아스 전하를 뵌 적이 있나?”
“계승전 시작 때 멀리서 봤죠.”
“어떻던가?”
“대제 폐하의 젊을 적 초상화를 똑 닮으셨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안타깝게도?”
“…과로하신 모양인지, 이마가, 마치 렌테로 평야처럼…….”
“저런!”
그는 상쾌한 기분으로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경비병은 참으로 안타깝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또 몇 마디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곧 통행증이 완성되었다. 체계화된 검문과 통행은 황금대제의 위업 중의 하나다.
“자, 그럼 좋은 여행 되렴.”
“고맙습니다.”
* * *
“어디서 왔다고?”
“소르티아요.”
“펜렌에는 왜?”
“맛 좋은 과일이 많다기에.”
펜렌의 병사와 비슷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나이는 열여섯, 이름은 파시오누스 펠레우스, 혼자 여행을 해 보고 싶어서. 펜렌의 병사들도 따뜻한 눈으로 시온을 맞아 주었다.
“충분히 맛보고 가렴.”
“예, 고맙습니다.”
시온 폴링라이트가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벌리고 성큼 걷는 꼴이 자기의 어른스러움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소년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덩치와는 달리 앳된 얼굴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쉽네.’
시온이 깊게 웃었다. 발지아트로 꾸며 낸 덩치지만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소르티아나 펜렌에서 그러했듯, 이곳 병사들도 그를 첫 여행에 들뜬 소년으로만 여기며 흐뭇하게 바라보아 주었다.
‘사실 어려울 이유가 없지.’
제5황자 지오니스는 죽었다.
온 제국이 그렇게 알고 있다.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미친 인간이겠지.’
누가 의심하겠는가? 그토록 정황이 명백한데, 새 황제가 즉위해야 하는 바쁜 때인데! 게다가 열여섯의 소년으로 가장하고 있다. 제국을 빠져나가는 길이 멀다고는 해도 방해자가 없다면 어려울 수 없다.
‘열흘치고는 멀리 왔어. 홀비트를 넘으면 남부가 멀지 않지.’
산행이나 노숙 없이 잘 먹고 잘 자며 대로를 따라올 수 있었던 덕이다. 추격자가 없기에 누리는 호사다.
‘차기 황제님의 행차는 이제야 제도를 떠났을 테고… 여유로워. 정말 여행이라도 온 기분인걸. 메케로스까지는… 앞으로 한 달 반? 두 달?’
그의 목적지는 제국의 서방, 드라코 대산맥의 너머다. 다만 곧바로 서쪽으로 향할 수는 없다. 대산맥을 넘는 세 개의 관문의 삼엄함 때문이다.
‘대산맥을 넘는 건 위험해도 너무 위험해.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아.’
황실에서 직접 인가받지 않으면 지날 수 없고, 일행 하나하나가 고도의 마법적 검문을 몇 단계나 거쳐야만 한다. 아무리 시온이라도 세 관문은 넘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가는 그날부로 5황자 지오니스가 살아 있다는 말이 페르비아스의 귀에 들어갈 테니.’
세 관문을 지날 수 없다고 대산맥을 넘는 것도 미친 짓이다. 소벨 산맥의 마수도 흉폭하기로 유명하지만 드라코 대산맥의 흉흉함과는 비할 수 없다.
‘남서부, 호벨 만에서 배를 탄다.’
때문에 항구도시 메케로스로.
무엇보다, 아레테 섬이 가깝다.
‘모든 것은 내 숙명, 제국의 붕괴를 위해.’
* * *
아메투스의 곁에는 마수가 잔뜩이었다. 소벨 산맥을 호령하는 위험한 놈이 몇이나 있었는데, 하나같이 주눅이 들어 몸을 움츠리기만 했다. 날카로운 양날검과 고요한 옥색 눈이 더없는 위압으로 그들을 짓누른 탓이다.
“사라져라, 짐승 놈들.”
아메투스가 조용히 뇌까렸다. 소벨 산맥의 마수 정도 되면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마수들은 잽싸게 사라졌다. 성질이 급했던 몇 놈의 몸뚱이만이 싸늘하다.
옥색 눈의 사내는 성가시다는 듯 제가 베어 낸 마수의 머리를 걷어찼다. 소벨 산맥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강력하고 위험한 마수였지만 일검에 목이 베였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메투스가 더욱 강력하고 위험했기 때문이다.
“음.”
눈에 띄지 않는 제복과 가죽 장갑. 그는 치안기사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황태자의 심복이라는 신분은 잠시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아메투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일대를 면밀히 살폈다. 흙을 매만지거나 나무의 발톱 자국을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요상한 마법 가루 따위를 뿌려 보거나 했다.
그는 제국 치안청의 치안기사로서 꽤 오랜 시간을 근무했고, 노련한 수사 실력으로도 이름 높았다. 많은 종류의 마법 도구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안개도 그의 노련함을 해칠 수는 없었다. 단련된 기술과 냉철한 직감은 어떤 마법 도구보다도 뛰어나다.
‘하나도 없다.’
결론에 이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상한 점이 하나도 없어.’
네불로와 지오니스는 이곳에서 죽었다. 적어도 제국 사람은 모두 그렇게 여겼다. 비로도 다 씻어 내지 못한 시체 썩는 냄새나, 쓰러진 나무, 부수어진 비보의 흔적 따위가 이를 증명했다. 실제로 들여다보니 모든 증거가 명백했다.
수사는 종료다. 본래라면 분명히 그러하다. 의심할 점이 하나도 없다. 아무리 숨겨 둔 한 수 있다 해도, 강력한 기예 있었다고 해도 네불로와 지오니스다. 제 몸 가누지 못하는 뚱보와 11살 꼬맹이다.
기사단 하나를 상대로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상처 입고, 그런 몸으로 비를 맞으며 몇 시간이나 산을 오르고, 끝내 마수에게 당했다. 치안기사로 쌓은 노련함과 깊숙한 상식들이 말한다. 네불로와 지오니스는 여기서 죽었다고. 이상한 점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데도 직감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불안감이.
‘…만약에, 정말 만약에…….’
푸른 눈이 어른거린다. 도저히 어린아이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지오니스의 푸-르른 눈동자의 잔상이 줄곧.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살아 있다면, 이토록 치밀하게 온 제국을 속여 낸 것이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못하게 판을 짜고 홀로 빠져나간 것이라면. 상상도 못 할 비밀을 품고 있었던 것이라면. 요제프 하이더도 그 비밀의 냄새를 맡았기에 지오니스를 죽이려 했고, 그런데도 죽이지 못했다면. 이 모든 일이 그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면.
“…그는, 얼마나 위험한 자인가?”
소름이 끼쳤다. 양날검을 든 손이 파르르 떨릴 정도였다. 열한 살, 겨우 열한 살 꼬맹이가 그런 책략을 부렸다면 대체 어떤 사내로 자라날 것인가? 설령 콘티누아 대제 폐하라도, 열한 살에 이럴 수 있었겠는가?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기필코 죽여야만 한다. 차기 황제 페르비아스의 치세에 가장 큰 우환이 되고 말 것이니까.
‘생각하자, 아메투스.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가정을 해 보자…….’
호흡과 함께 생각을 가라앉힌다.
‘그가 정말로 살아 있다면. 온 제국을 속이고 도망친 거라면. 열한 살에 그 정도의 책략을 부릴 줄 안다면.’
모든 가설에는 의미가 있다. 터무니없더라도 그러하다. 아메투스의 직감은 몇 번이고 터무니없는 가설 속에서 사실을 들추어 냈다.
‘어떻게 해야 그를 찾아낼까? 그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했을까?’
레비오 자작령은 아니다. 그는 페르비아스의 편에 붙었으니까. 제도 루틸리움일 리도 없다. 애써 나온 사자굴에 다시 들어갈 이유가 없겠지. 북쪽은 너무 멀다. 그렇다면 아마 아래로.
아메투스의 머리에는 몇 개의 이름이 떠올랐다. 옥색 눈이 번뜩인다. 소벨 산맥에서 남쪽에, 그렇게 멀지도 않고, 황실의 영향력도 비교적 약한 도시라고 하면…….
“…소르티아?”
49화
아메투스는 소르티아에서 식사를 했다.
미식美食, 특히 고기 요리 맛있기로 유명한 도시에서 굳이굳이 작은 술집을 찾아 팬케이크를 주문했다. 술집에도 스무 종류가 넘는 고기 요리가 있었으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허름한 맛이었다.
음식에 허름하다는 표현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지만, 더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물에 갠 종이를 뭉쳐 시럽을 뿌려 먹는 느낌이었다. 팬케이크를 반 정도 먹자니 가느다란 손가락이 어깨를 두드렸다.
“오랜만이에요.”
구불진 회색 머리의 여인이었다. 제도 인근에서는 보기 드문 까무잡잡한 피부가 눈에 띄었다. 여인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머리칼을 쓸었다.
“오랜만이군.”
아메투스가 포크를 내려놓으며 인사했다.
“앉으라는 소리도 않나요?”
“앉게.”
여인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아메투스의 맞은편에 털썩 앉고는 다리를 꼬았다. 옥색 눈의 사내는 아무 말 않고 손바닥을 내보였다. 여인은 한 묶음의 종이를 그의 손바닥 위에 내놓았다.
“자, 원하셨던 거.”
“고맙군.”
아메투스는 서류를 휙휙 넘겼다. 소벨 산맥 남부 도시의 출입 기록이었다. 겨우 열흘 치인데도 몇만 명의 인적 사항이 빼곡했다. 여인은 서류를 넘기는 아메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검문 강화 명령도 내려 놨어요. 차기 폐하의 즉위 직전이니 이상할 이유도 없죠.”
“대원들은?”
“말씀하신 대로 각 도시로 보냈어요. 셋씩 한 조, 총 일곱.”
그녀는 도시들의 이름을 읊었다. 펜렌, 홀비트, 게셈… 모두 일곱. 소르티아에서 남서부로 이어지는 길목 도시들. 여인은 가느다란 손가락을 꼽아 보였다.
“홀비트와 펜렌에는 이미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고 나머지는 내일 중으로 도착할 것 같아요.”
“여전히 솜씨가 좋군.”
“대장 덕분이죠.”
“아직도 날 대장이라 부르나.”
“달리 부를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요, 아메투스 대장.”
제국 치안청, 특무대. 가장 뛰어난 치안기사들로 이루어진 가장 비밀스러운 치안대. 옥색 눈의 사내는 한때 그곳의 우두머리였고, 이 까무잡잡한 여인은 그때의 부하다. 오래전의 일인데도 살갑게 굴어 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명령의 목적을 물어도 답하지 않을 거죠? 황실의 일이니.”
“아니, 내 개인적인 사안이다.”
“그렇게 알아 두죠.”
여인은 그리 말하고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배시시 웃었다. 아메투스가 차기 폐하의 총애받는 심복이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서류 더미를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식사는 했나?”
“아직.”
“그럼 좀 들지.”
아메투스가 자기 먹던 팬케이크를 슥 내밀었다. 여인은 금세 뾰로통한 얼굴이 되었다. 일단 아메투스가 쓰던 포크를 집어 들기는 했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하다.
“…새로 하나 시켜 주지 그래요?”
“시간이 없어. 곧바로 게셈으로 향할 거다.”
“이제 막 루틸리움에서 온 참인데, 여전히 사람을 참 험하게 굴리신다니까.”
그녀는 포크로 팬케이크를 휘적였다. 아메투스가 먹던 것이라고는 해도 배가 고팠던 참이라 무언가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래도 삐죽 나온 입술은 쉽게 들어가지 않았다.
“아, 불쌍한 샤디, 차려입은 보람도 없지. 옛 대장의 부름에 부리나케 달려왔더니 식어 빠진 팬케이크라.”
“…본명을 쓰고 있나?”
“정말 관심이 없군요? 샤디 섄도르, 당당하게 달고 다니는 중이라고요.”
샤디는 배시시 웃으며 가슴팍의 작은 브로치를 떼어 내밀었다. 치안청의 고관에게만 주어지는 물건이다. 특무대장 샤디 섄도르라고 새겨져 있다.
“대장 떠나자마자 본청으로 들어갔어요. 가짜 이름 쓰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특무대의 임무는 비밀스럽다. 대외적으로 활동할 필요가 있는 특무대장만이 부모에게 받은 이름을 당당히 사용할 수 있다. 이전에는 아메투스가, 이제는 샤디 섄도르가.
“언제까지 이름 숨기고 뒷거리나 쏘다니겠어요. 저도 혼자 늙어 죽긴 싫거든요. 아니면 대장이 책임져 줄래요?”
“…이번 일이 끝나면 좋은 자리라도 만들어 주지.”
“됐네요.”
샤디가 고개를 홱 돌렸다.
“어서 가시죠, 아메투스 대장.”
어느새 남은 팬케이크를 쓸어 넣은 뒤였다. 포크에 묻은 시럽까지 놓치지 않은 여인이 자리를 박찼다.
“뭘 찾는지는 몰라도, 어서 찾아야 제국이 안녕하지 않겠어요?”
* * *
시온은 불길함을 느꼈다.
‘…검문 줄이 너무 느린데…….’
펜렌을 떠나는 길이었다. 맛 좋은 과일을 잔뜩 먹었고, 여행 식량으로 쓰기 위해 말린 과일도 사서 발지아트 속에 넣어놓았다. 이제 성을 나서기만 하면 되는데 검문이 이상하게 오래 걸렸다.
‘…슬쩍 빠져나갈까.’
주위를 휘휘 둘렀다.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경비병들도 어딘가 날이 선 모습이었다. 시온은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발지아트로 덩치를 부풀린 채다. 만약 옷 아래를 수색이라도 하면 곧바로 들통이 날 터다.
‘좋아. 눈치 못 챘군.’
경비병의 시선을 피해 슥 빠져나왔다. 줄 뒤에 섰던 자가 바라보기에 화장실이 급한 척 살짝 어기적대며 우다다 내달렸다. 이해한다는 시선이 뒤잇기에 묘한 불쾌감이 있었다. 곧 누구도 없는 골목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람.’
어두운 골목을 홀로 걸었다. 시온의 키가 점점 작아지고 걸음 소리는 가라앉는다. 부풀렸던 그림자 갑옷을 얇게, 피부 위를 뒤덮을 만큼만. 마치 그림자처럼 골목의 사이에 녹아들었다.
미끄러지듯 벽을 타고 올랐다. 누구도 보지 못했다. 시온의 본래 몸집은 열한 살치고도 작은 편이다. 오래된 훈련의 기억과 마갑 발지아트가 더해지면 대낮이라도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오가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어디 보자.’
그림자처럼 가라앉아서는 길게 늘어선 사람들과 검문소를 오가는 병사들을 들여다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이목구비를 살필 만한 거리다. 시온의 푸른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오가는 병사 사이에 이질적인 자들이 있었다.
‘저 세 놈 때문인가.’
차림새부터가 달랐다. 제도 관원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으니까. 완장 따위를 차지는 않아서 정확한 소속을 곧바로 알아내기는 힘들었다. 다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시온이 입술을 매만졌다.
‘루틸리움에서 왔군. 어디 쪽일까…….’
시온의 눈이 날카롭다.
‘기사는 아니야.’
팔뚝 정도 길이의 검을 숨기듯이 허리께에 찼는데 기사라면 저런 식으로 패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몸놀림. 잽싸지만 무게감 있는 걸음은 저들이 무거운 갑옷을 걸치지 않을 때가 많음을 말한다.
‘귀족도 아니군.’
경비병이나 검문을 기다리는 상인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귀족 출신이라면 시민을 다루는 것이 저렇게 능숙하기 힘들다. 하나라면 몰라도 셋 모두 그렇다.
‘그런데 실력은 상중상上中上.’
거리가 꽤 있는데도 눈빛이 사납다. 걷는 자세만 보아도 여간 고된 훈련을 거친 게 아님이 분명했다.
‘거기에 검문소를 멈출 권한이 있는 제도 관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답은 곧바로 나온다.
‘그래, 젠장, 하나뿐이지…….’
작은 한숨.
시온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제국 치안청, 특무대…….”
그리고 치안청 특무대라고 하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내가 있다.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눈치챌 것 같았다. 쫓아오리라고 생각했어.”
지긋지긋한 옥색 눈, 무서울 만큼 날카로운 양날검, 회귀 전부터 이어지는 인연. 시온이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하지만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메투스?”
* * *
특무대원 하나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지붕 위에서 누군가 그를 바라보는 듯했으나 아무도 없었다. 시온은 이미 몸을 숨겼다. 사내들의 정체를 확인했으니 더는 가까이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며칠 더 머물러야겠는걸.’
작게 혀를 찼다. 달가운 일이 아니다. 아메투스를 직접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이다. 아니, 제5황자 지오니스의 용모파기라도 나돈다면 모든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할 것이다.
‘…아직 위험할 정도는 아니야. 그냥 찔러볼 뿐이겠지.’
시온의 머리는 차갑다. 약간의 당혹감은 금세 풀어져 없어졌다.
‘어디까지 눈치챈 걸까?’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걸음을 서둘렀다. 덩달아 생각도 가속한다. 급박한 만큼 빠르다. 많은 가설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추론은 그렇게 진실을 비추어 낸다.
‘…음. 아직 내가 살아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했군.’
만약 확신했다면, 제1황자 페르비아스 카셉투스에게 알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페르비아스가 알았다면, 겨우 특무대원 셋 정도가 오지 않았을 터다.
‘의심, 딱 의심 수준.’
그래서 불쾌하다.
‘단순한 의심으로, 단순한 불안으로 이렇게까지 빠르게, 이렇게까지 날카롭게 찔러 온단 말인지.’
점쟁이 아메투스, 놈의 직감은 회귀 전부터 이렇게 불합리할 만큼 매서웠다. 하기야 그러니 제국십장 3석에까지 올라갔던 것이겠지.
‘…그때도 이랬지.’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지만 그에게는 과거다. 그때도 아메투스와 이런 추격을 벌였는데. 묘한 향수까지 맴도는 기분이다. 시온이 얼굴을 쓸었다.
‘생각보다 빠르지만 계획은 바꾸지 않는다. 메케로스에서 배를 타겠어.’
다른 뾰족한 수도 없다. 불안감에 급하게 계획을 바꾸었다가는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질 가능성도 있다. 경험상으로는 늘 그랬다. 그러니 계획대로. 도시에서 도시를 오가며 메케로스로. 열한 살의 몸이기에 중간에 도시에서 쉬지 않고는 메케로스에 도착하지 못할 터다.
‘다만, 혼자 다니는 건 이제 좋은 선택이 아니겠군.’
하지만 갑자기 어디서 무리를 찾는단 말인가. 행상에 끼워 달라고 한들 끼워 줄 턱이 없다. 어쭙잖은 용병 행세를 한다고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제국의 치안은 호락호락하지도 않고.
‘자, 어떻게 한담……?’
복잡한 머리 정리하며 걸음을 옮겼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무언가 방편을 찾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터벅터벅. 노점을 지나치고, 아이들을 지나치고, 불을 뿜는 마법사를 지나치…….
“어.”
…던 시온이 뒷걸음질 쳤다.
“펜렌의 여러분, 혹시 차기 폐하께서 행차하시지 않아 아쉽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 소르티아까지만 가고 펜렌부터 오지 않는단 말입니까!”
유쾌한 목소리. 코끝에 걸친 동그란 안경과 입에 문 기다란 대롱. 입김을 불면 불꽃과 연기로 된 나비가 튀어나와 나풀거리며 춤을 추었다.
시온은 저 사내를 알고 있다. 헨리 호르비, 나중에 에르타의 보안국장이 되는 사내고 지금은 곡예사인 척하는 서방의 간자다.
“그런 아쉬움 품으신 분들을 위해서 저희가 왔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지만, 마침내, 이렇게, 오고 말았어요!”
불운과 행운은 한 몸이라더니만. 시온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기가 막힌 한 수가 떠올랐다. 즉흥적임에도 흠잡을 데 없다.
“제국 최고, 대륙 최고! 쥬엣 곡예단이 사흘 뒤에 이 펜렌을 찾아옵니다!”
5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