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쥬엣 곡예단.
제국 최고, 대륙 최고를 표어로 삼는 그들은 정말 가장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공연단이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러하다.
서방의 나라들은 늘 코르디스 제국을 두려워했다. 그들의 사이에는 드라코니아 대산맥이 있다고 해도 제국이 넘으려 한다면 얼마든지 넘어올 수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코르디스가 대륙의 패자로 군림한 천년은 서방 두려움의 역사다.
제국을 두려워한 서방은 끊임없이 밀정을 길러내 제국을 염탐해왔다. 그러지 않고는 두려움을 달랠 길이 없었다. 쥬엣 곡예단도 그 두려움이 낳은 결과물 중의 하나다.
겉으로는 곡예단, 허나 실상은 서방 각국에서 모아 낸 첩자 집단.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곡예사들은 모두 서방에서 최고로 꼽히는 공작원들이다. 헨리 호르비도 예외는 아니었다.
“네, 그렇습니다, 사흘 뒤! 사흘 뒤를 기대하세요!”
그는 쥬엣 곡예단의 환술사 겸 홍보원이다. 불꽃이나 연기 따위로 손님들의 눈을 즐겁게 하며 공연을 화려하게 하고, 번듯한 이목구비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실제로는 에르타 보안국의 상급 공작원이라도, 자부심 넘치는 까닭에 때때로 자괴감 들기는 하지만, 곡예단에서의 제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모두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니, 기대하셔야 합니다!”
그는 불꽃으로 된 나비 따위를 만들어 내며 광장을 돌아다녔다. 사흘 뒤에는 쥬엣 곡예단이 오니 기대하라고, 유쾌한 목소리와 함박웃음으로. 속으로는 전혀 달갑지 않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 또한 훌륭한 공작원의 덕목이다.
사람이 있든 없든 그는 계속해서 외쳤다. 쥬엣 곡예단의 공연 목록 따위를 적은 나무판의 무게가 상당했지만, 어서 숙소로 들어가 쉬고픈 마음만 간절했지만 참아 내었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었다.
“저기요, 아저씨.”
“응?”
열심히 외쳐 대고 있자니 웬 꼬마가 가까이 왔다. 금발에 푸른 눈, 곱상해서 여자앤지 남자앤지 구별하기 힘든 이목구비. 열 살 정도나 되었을까. 뭔가를 오물대고 있는데 손에 들린 포장 종이를 보면 아마 사탕인 듯했다.
“수고가 많으시네요. 그 나무판 무거워 보이는데.”
“하나도 힘들지 않단다. 아저씨는 무려, 쥬엣 곡예단원이니까!”
헨리 호르비는 황급히 이마의 땀을 훔쳤다. 푸른 눈 꼬마는 사탕을 오물대며 툭 내뱉었다.
“거짓말.”
“거짓말 아니야.”
꼬마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어딘가 연민의 기색도 느껴졌다. 꼬마는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건넸다.
“힘드실 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어? 그래, 고맙게 먹으마.”
뭘 내미나 싶었는데 종이로 싸인 사탕이었다. 헨리 호르비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너, 참 귀엽게 생겼…….”
사탕 포장을 벗기던 헨리 호르비의 손이 멈추었다. 포장지 안쪽에 무어라 쓰인 탓이다. 제국어가 아니었다. 아니, 평범한 글자조차 아니었다. 서방 공작원, 그것도 에르타 보안국에서 고안해서 사용하는 노드 암호. 내용은 지극히 단순하다.
[접선 요망. 엿새 후 찾아가겠음.]
“……!”
내용을 읽어 낸 헨리 호르비는 누가 볼세라 사탕과 포장지를 입에 넣어 꿀꺽 삼켰다. 목이 조금 아팠다. 그는 눈을 날카롭게 하며 고개를 돌렸다.
“꼬마야, 너, 이 사탕 누가…….”
어라. 헨리 호르비가 당혹성을 내었다.
“…어디 갔어?”
* * *
엿새가 지났다.
쥬엣 곡예단은 펜렌을 찾아왔다. 몇 번의 공연이 있었고, 차기 황제의 행차를 아쉬워하던 시민들을 만족시키기에는 충분했다. 공연 천막의 바깥에는 찬바람이 날카로웠다. 헨리 호르비는 괜히 코끝에 걸친 동그란 안경이 차갑게 느껴져 콧잔등을 씰룩였다.
사람들이 죄다 공연을 보러 들어갔으니 천막 바깥은 한산할 수밖에 없다. 홀로 찬바람을 쐬는 중에 살맛이 나기는 힘들다. 아무리 에르타 보안국 상급 공작원이라도 어쩔 수 없다. 그는 대롱을 빨며 연기만 뻐끔거렸다.
“아저씨.”
“깜짝이야!”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헨리 호르비가 펄쩍 뛰었다. 돌아보니 금발에 푸른 눈, 이목구비 곱상한 꼬마가 있었다. 꼬마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또 보는구나.”
“여기서 뭐 하세요? 날이 추운데.”
“…신경 꺼라.”
헨리 호르비가 코를 훌쩍였다. 빌어먹을. 어느새 콧물이 나기 시작했다. 꼬마는 헨리의 속도 모르고 배시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이 마지막 공연이죠?”
“그래. 원래는 일주일은 있으려고 했는데 펜렌이 영 뒤숭숭해서.”
“그럼 이제 떠나는 건가요?”
“그래야지.”
헨리가 곁눈질했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제국 관원의 차림새를 하고 있지만 정체는 치안청의 특무대다. 대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첩자 입장에서는 가장 껄끄러운 자들이기에 공연 일정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엉?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절대 안 돼. 집에 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느 도시를 가던 꼭 이런 꼬마들이 있다. 화려한 곡예에 마음을 빼앗겨 잡일이라도 좋으니 데려가 달라고 하는 어린애를 수십은 보았고, 당연히 데려가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데려가 달라 한들 데려갈 리가 없다. 보통의 곡예단이라도 그렇다. 헌데 쥬엣 곡예단은 정체를 숨긴 첩자 집단이다. 제국의 꼬맹이를 어떻게 데려가겠는가. 그는 연기를 뿜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너, 그때 사탕 줬던 놈이나 데려와. 누가 그거 주라고 시켰어?”
“누가 주긴요. 제가 아저씨 줬었죠.”
“헛소리 말고.”
“헛소리라뇨.”
푸른 눈의 꼬마가 키득 웃었다.
“그래서 이렇게, 엿새 후에 찾아왔잖아요?”
“……!”
대롱을 빨던 손이 멈추었다. 꼬마는 웃는 얼굴이다. 다만 저 푸른 눈은 가라앉아 있다. 어린아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싸늘함이 깃들었다. 헨리의 시선을 느낀 꼬마는 천천히 제 손을 들었다.
꼬마는 검지와 중지로 이마를 세 번 긁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손을 옮겨 귓불을 만졌다. 얼핏 보면 추운 날씨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헨리는 저 손짓의 의미를 안다.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저것은 에르타 보안국에서 사용하는 긴급 식별 암호다. 감시가 있을 때 공작원들이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본래 쥬엣 곡예단은 제국에 침투한 서방의 공작원을 지원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꼬맹이도 공작원이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열 살 남짓인데?
“…너냐?”
“아직은 특무대의 시선이 공연으로 쏠려 있죠.”
꼬마는 태연히 말한다.
“그러니 그 전에 어서, 책임자를 보았으면 하는데.”
“…….”
침묵. 헨리 호르비는 상급 공작원답게 신속히 판단을 내렸다. 진위야 어떻든 이 꼬마는 에르타 보안국의 암호를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해 왔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따라와라.”
* * *
헨리 호르비는 꼬마를 공연 천막 옆으로 이끌었다. 단원들이 숙소로 사용하는 작은 천막들이 즐비했다. 개중 하나에 들어서니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 꼬마지, 헨리?”
여인의 뺨에는 큰 흉터가 있었다. 그래도 단정한 이목구비는 가려지지 않았다. 헨리는 흉터를 긁적이는 여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속삭였다.
“며칠 전 말씀드렸던, 그 쪽지의…….”
“…이 꼬마가?”
여인이 시온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꼬마였으나 확인할 필요는 있었다.
“알겠어. 내가 이야기해 보마. 너는 가 봐라.”
특무대의 동향을 살피라는 말은 굳이 더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응당 그가 해야 할 의무였으니까. 헨리 호르비는 꼬마를 남겨 두고 천막을 떠났다.
흉터 여인과 꼬마만이 남았다. 여인은 적발을 쓸어 넘기며 눈짓했다.
“꼬마, 이름이 뭐니.”
“시온이라고 불러 주세요.”
시온 폴링라이트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쪽은 이름이 뭔가요?”
“당돌한걸. 난 헬레나. 쥬엣 곡예단의 부단장이지.”
부단장? 시온이 작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곡예단에 합류하고 싶다고?”
“그 말대로네요.”
“내 한 마디면 문제 될 것 없지. 단장 놈… 아니, 단장님은 늘 자리를 비우셔서 내가 실질적인 단장이나 다름없거든.”
헬레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당한 장신이었다. 어지간한 남자 기사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듯했다. 그녀는 흉터를 긁적이며 시온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단다, 꼬마야.”
“시온이래도요.”
“꼬마, 헨리에게 사탕을 건네주었다며.”
“예, 그랬죠.”
헬레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차가운 기색이 강해 날카롭게 들렸다.
“그 포장지에 이상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는데, 아는 바가 있니?”
“으흠?”
“그리고 방금은 이상한 손짓까지 했다고.”
그녀는 어느새 시온의 곁에 섰다. 껑충한 키로 내려보니 가까이서 보니 위압감이 상당했다. 시온이 열한 살치고도 작은 키인 것도 한몫했다.
“우리 곡예단에 대해 무슨 오해를 한 모양인데, 무슨 오해를 했는지 설명해 주겠니?”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알려 주시면 답하기 수월할 듯한데요.”
“내가 어떤 답을 원할까. 직접 생각해 보고 말하렴.”
헬레나가 손가락을 딱 소리 나게 튕겼다. 천막 안을 밝히던 등불에 은은한 빛이 더해졌다. 시온 정도가 아니고서야 느낄 수 없는 모종의 파동 또한 퍼져 나갔다. 시온은 그녀가 ‘은폐등’이라고 불리는 서방 공작원의 결계 장치를 발동시켰음을 눈치채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할 거야.”
울대 위로 차가운 감촉이 있었다. 헬레나가 짧은 단도로 그의 목을 지그시 누른 탓이었다. 촉감만으로도 날이 시퍼렇게 섰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바깥에는 새어 나가지 않을 테니까.”
“…….”
“어린아이 하나쯤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거고, 우리에게는 드문 일도 아니지.”
헬레나의 눈에는 살기가 어렸다. 시온이, 이 꼬마가 어떻게 에르타 보안국의 암호를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렇게 보낼 수는 없음만이 분명했다. 시온 제 목을 누르는 칼날을 느끼며 키득 웃었다.
“아. 드디어 켰군.”
“……?”
분위기가 일변했다 싶었다. 어린아이의 천진한 목소리가 이상하게 능글맞아져 손에 힘을 주었다. 목에 가벼운 상처라도 내서 두려움을 주려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어느새 시온이 몇 발자국 너머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시온이 움직인 줄 알았다. 허나 헬레나는 곧 깨닫는다. 그녀가 밀려난 것이었다. 아마도 네 발자국 정도. 다가가려 해도 다가갈 수 없었다.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 시온 폴링라이트의 두 번째 기예Ars다.
“이봐, 헬레나.”
헬레나를 밀어낸 시온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전혀 어린아이답지 않은 태도다. 그는 마치 그녀의 상사라도 된 것처럼 고압적으로 굴기 시작했다.
“아니, 헬렌 펠!”
“……!”
“내가 들어오자마자 ‘은폐등’을 켰어야지. 어린아이 행세하느라 답답해 죽는 줄 알았잖아.”
헬렌 펠이라는 이름은 그녀를 당혹스레 만들었다. 그녀가 다른 임무에서 사용하곤 했던 가명이었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쥬엣 곡예단의 부단장. 숙련된 공작원. 당혹을 숨기며 태연히 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나, 꼬마.”
“아. 그만. 더는 연기하지 않겠어. 정식으로 긴급 보호를 요청하지.”
거짓말쟁이의 미소.
“이는 새벽의 뜻이다.”
51화
“어이가 없는걸.”
헬레나가 붉은 머리를 쓸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쓰러지고픈 기분이었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화난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 내가 속아 줄 거라고 생각했니?”
“시간 낭비는 그만두자고 했는데.”
시온이 으르렁대듯 말했다. 그는 이제 어린아이 행세를 할 생각이 이만큼도 없었다. 사실 화가 나지는 않았으나 헬레나가 화난 연기를 시작하기에 더욱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이었다.
“바깥에 특무대가 깔렸어. 어서 이 도시를 떠나야 해.”
“우리는 그저 곡예단이야, 꼬마야!”
“아, 그만하재도! 아무리 이쪽 상황을 모른다고 해도……. 아니, 그렇지, 모르겠군, 모르니 그럴 만도 해.”
시온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곱상한 어린아이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닳고 닳은 분위기가 그녀의 당혹을 부추겼다.
“이해해, 이해한다, 헬레나. 넌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
“하지만 부디, 이해해 줘. 우리는 묻지 않으면 말할 수 없잖나.”
헬레나의 눈빛이 약간 누그러졌다. 서방은 공작원을 제국으로 보며 몇 가지 마법적 조치를 취한다. 개중 하나, ‘불문불답의 맹세’.
아주 중요한 비밀은 스스로의 힘으로 뱉을 수 없다.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가 물어야만 답할 수 있다. 이런 깊은 비밀까지 알고 있으니 어쩌면, 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네 권한을 밝히고 물음을 던져라, 헬레나. 성심껏 대답할 테니.”
“…속아 주지.”
헬레나가 왼쪽 눈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의안을 꺼내어 뒷면을 보였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두어 차례 두드리니 기묘한 문양이 옅은 빛을 발했다. 그녀가 쥬엣 곡예단의 단장 권한을 위임받았음을 증명하는 문양이다.
“헬렌 펠. 쥬엣 곡예단의 단장 대행, 상급 관리 권한자.”
외눈의 여인이 묻는다.
“수상한 꼬마, 네 신분을 밝혀라.”
“나는 지오니스.”
“지오니스… 지오니스?”
고개를 끄덕이던 헬레나가 황급히 눈을 들어 시온을 위아래로 살폈다. 금발에 푸른 눈, 열 살 정도, 소녀 같은 곱상한 외모……. 하나뿐인 눈이 부릅떠졌다.
“콘티누아 대제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 * *
“뭐.”
헬레나는 혓바닥을 절었다. 상상도 못한 진실이 그녀의 혀뿌리를 강타해 버린 탓이다. 시온은 썩 유쾌했다.
“뱉고 나니 속 시원한걸.”
킬킬거리는 웃음을 들으며 헬레나는 계속해서 그를 살폈다. 모종의 기시감을 느꼈던 이유를 깨달았다. 제5황자 지오니스였다, 듣던 대로였다!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시온이 턱짓했다. 그의 의도를 깨닫게 둘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뭐 해. 물음을 계속해. 그러지 않으면 난 답할 수 없어.”
“…네가 지오니스라면, 제국의 5황자라면……. 왜 여기에 있지?”
“아, 서방에 망명을 요청했거든. 아주 흔쾌히도 받아 줬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계승전에서 이기지 못할 것이 뻔하니까 말이야. 시온은 지껄인다. 거짓과 진실을 마구잡이로 뒤섞지만 그래서 더욱 그럴듯하다. 헬레나는 홀린 듯이 귀를 기울였다. 5황자 지오니스가 여기에 있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를 망명시켜 줄 부대를 급하게 준비해 왔더군. 똑 닮은 대타까지 준비해서. 그런데 문제가 생겨서…….”
“…….”
“나는 홀로 남고, 특무대는 사방에. 어쩔 수 없이 너희를 찾아온 거다. 무사히 서방으로 도피하고 싶으니까.”
헬레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의 외눈은 시온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아무리 보아도 제5황자 지오니스가 틀림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본인이었으니까. 그래서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현기증을 참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어. 그는 죽었다. 소벨 산맥에서 제4황자 네불로와 함께 죽었어.”
“난 여기에 있는데.”
“그렇다면 코르디스 황실이, 제국 모두가 속았다고? 터무니없어! 아니, 하지만, 그러면…….”
혼란. 눈앞의 꼬마는 진짜 황자인가? 아니면 그녀를 속이려는 어떤 작자인가? 어느 쪽이든 그럴듯하고 어느 쪽이든 반박할 말이 차고 넘쳤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곤죽이 되었다. 시온의 뜻대로였다.
“…왜, 여기에? 왜 제 이름을 이렇게 쉽게…….”
그는 미소 지었다. 비밀쟁이로 살다 보면 몇 가지 기술을 익히게 되기 마련이다. 특히 상대를 혼란케 하는 것은 익숙하다 못해 이제는 세련미가 묻어 나올 정도였다. 보라, 제5황자 지오니스가 자기는 제5황자 지오니스라고 밝혔을 뿐인데 믿지 못하고 괴로워하지 않는가. 그는 뻔뻔하게 말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군. 난 모두 성심껏 대답해 줬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헬레나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웬 꼬마가 찾아와서는 자기가 죽은 황자라고 하고 있어. 생긴 것도 똑같지.”
“문제 될 것 없어 보이는데.”
“그런데, 열한 살짜리 황자가 우리 측 사정을 다 꿰뚫고 있다. 비밀스러운 암호나 내가 쓰던 가명까지도! 이걸 어떻게 해석하란 말이지?”
“간단한 일이지.”
회귀자의 푸른 눈이 조용히 이글거린다.
“물음을 던져라.”
“…….”
무슨 물음을 던져야 하냐고 묻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아 낸 헬레나의 입술에서는 피가 흘렀다. 그러지 않고는 저 멍청한 질문이 재채기처럼 터져 나올 듯했다. 보람이 있어 질문 하나를 토해 낼 수 있었다.
“당신이…….”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다. 시온이 가볍게 턱짓했다. 계속하라는 듯한 투다. 헬레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진짜 황자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은 건가?”
“역시, 헬렌 펠!”
회귀황자가 박수쳤다.
“생각만큼 둔하지는 않았는데!”
그는 기분이 좋았다. 헬렌 펠은 회귀 전 서방연합의 동료였고, 그녀의 명석함을 이렇게 다시 마주하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가움을 담아 거짓말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이라고 다 같을 수는 없지. 순서가 있고 위계가 있어. 그걸 살짝 뒤트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뒤바뀌지.”
그는 비밀쟁이다. 거짓말에 능하지만 거짓말을 않는 속임수는 더욱 능하다.
“내가 진짜 황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5황자 지오니스가 망명을 요구했고, 그와 똑 닮은 어린애가 실제로 서방에 갔다는 게 중요할 뿐. 준비했던 대타든 뭐든 알게 뭔가?”
“……!”
“물론, 이 몸은, 진짜 5황자 지오니스지만 말이야.”
진실로 끝맺는 거짓말에는 완성도가 있다.
내심 흡족할 정도였다. 헬레나는 이제 그가 진짜 제5황자 지오니스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의안을 다시 눈구멍에 끼워 넣었다.
“…당신, 정말로 누구지요?”
“그건 상급 관리 권한 정도로는 답해 줄 수 없는데.”
열한 살 황자는 천진하게 웃는다.
“하지만 곤란하군. 너는 네가 알 수 있는 것 이상의 정보를 알고 싶어 하는데, 나는 네 비위를 맞춰 도움을 얻어야 해.”
능청거리며 몇 걸음 했다. 다소 천천히, 애가 타도록, 턱을 쓰다듬기도. 헬레나의 눈은 그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시온이 속삭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네 신뢰를 얻을까, 달튀르 드뇌방?”
“!!!!!!”
결국 헬렌 펠은, 아니, 달튀르 드뇌방은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껑충한 키의 여인은 넘어지며 집기 따위를 쓰러트렸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은폐등’이 바깥으로 소리가 새지 못하게 했다.
“그 이름을, 어떻게……!!”
그녀의 본명이었다. 공작원으로 살아가며 언제 불렸는지 기억하기도 힘든 옛 이름이었다. 시온은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불렀다. 19년의 세월을 건너왔기에 알고 있었다. 달튀르 드뇌방, 곧 헬렌 펠은 엉덩방아 찧은 채로 손까지 덜덜 떨었다.
“아직 못 믿겠다면, 네 학창 시절 성적이라도 읊어 볼까. 아니면 그쪽 부친의 안부라도 전해 줘?”
“…아니, 믿겠습니다. 고약하시군요.”
헬레나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녀는 시온이 서방의 초고위층, 어쩌면 새벽의 일원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는 달튀르 드뇌방이라는 이름을 알 수 없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회귀 전의 시온 폴링라이트는 서방연합의 부사령이었으니까.
“…생긴 대로의 나이는 아니시겠지요, 어르신.”
“무슨 소리를. 난 5황자 지오니스라고.”
“예,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레 물었다.
“지령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자색 안건입니까.”
“답할 수 없는 물음이다.”
“예, 묻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드뇌방의 이름을 아는 자에게는 응당 그럴 만했다.
“정기 보고에는 무어라 쓸까요.”
“죽은 공작원의 아들이 찾아와서 짐꾼으로 들였다고 쓰면 충분할 거다. 다른 단원들에게도 그렇게 말하고.”
“예.”
시온은 완전히 윗사람 행세였다. 그러나 의심을 내려놓은 헬레나에게는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정확하게 원하시는 건?”
“젠티움에서 날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거기까지 특무대의 눈을 피해야 해.”
“예, 그리 알겠습니다. 그리고…….”
헬레나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무어라 부르라 하셨지요?”
“시온.”
* * *
시온은 쥬엣 곡예단원이 되었다. 오랜 시간을 제국에서 밀정으로 보내온 이들답게 특무대의 검문을 통과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펜렌을 빠져나오며 시온이 휘파람을 불었다.
‘이거 쉽게 되었군.’
쥬엣 곡예단의 솜씨는 일류 중의 일류다. 점쟁이 아메투스가 직접 오지 않는 이상 시온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따라잡혀 줄 생각도 없었다. 곁눈질을 하니 헬레나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자를 연기하는 거물이라고 감쪽같이 속여 넘겼어. 난 진짜 황자인데도 말이지.’
시온과 헬레나는 단장 전용 마차에 단둘이었다. 급하게 합류한 탓에 단원들의 마차에는 자리가 없었는데, 대충 짐 사이에 섞여들려던 시온을 헬레나가 붙잡았다.
그녀는 틈틈이 질문을 던졌다. 정신을 차리니 또 의심이 들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서방에 관한 것들을 시온에게 물었다. 하지만 시온은 회귀 전에 정말로 서방 사람이었던지라 어떤 물음을 던져도 넘어가지 않았다. 헬레나는 그가 정체를 숨긴 거물이라고 더 확신하게 되었다.
“한시름 놓았군요.”
“존대하지 마라. 단원들이 의심한다.”
“후후, 괜찮아요. 들리지 않을 테니.”
헬레나가 흉터를 매만졌다. 그래도 단정한 이목구비는 가려지지 않았다. 하긴 드뇌방 놈들 생김새는 하나같이 그럴듯했지. 시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다음 도시는 어디로 가지?”
“테네스입니다. 공연은 짧게 할 거고요.”
“나도 공연을 하는 편이 자연스럽겠지.”
“괜찮으신가요, 시온?”
“간단한 것쯤야.”
창밖으로 머리를 빼고 뒤편을 곁눈질했다. 따라오는 단원들이 보였다. 대롱 빼문 헨리 호르비나 완벽한 제국 억양의 늑대, 열 명의 쌍둥이 소년 등이다. 우스꽝스러운 차림새라도 하나같이 서방 최고의 공작원들이다.
“난 어디서 지내면 되지?”
“겉으로 보이는 나이가 있으니 쌍둥이들 쪽이 좋겠네요.”
“좋아, 그렇게 하지.”
산들바람이 불었다. 제도 루틸리움이, 코르디스 황궁이, 빌어먹을 페르비아스 따위가 점점 멀어진다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숙명을 향해 다가가는 것은 늘 상쾌하다.
“참, 헬레나. 당분간 함께하지만 너무 파고들지 않는 편이 좋을 거야.”
천천히 손을 들었다. 헬레나의 시선이 따라왔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이내 검지를 들어 제 입술 위에 얹었다.
“난 비밀이 많거든.”
52화
펜렌을 떠난 날 밤의 일이다.
부단장 헬레나는 식사자리에서 단원들에게 시온을 소개해 주었다. 어떤 밀정 부부의 아들인데, 부모가 죽으며 서방으로 돌아가기를 원해 그들과 잠깐 합류하게 되었다면서.
단원들은 쉽게 믿었다.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헨리 호르비도 그제야 납득이 되었는지 대롱을 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헬레나는 구석에 앉은 열 명의 소년 소녀를 바라보았다.
“쌍둥이들.”
“네, 부단장님!”
“너희 또래니까 당분간 부탁해도 되겠지?”
“그럼요!”
다섯은 소년이고 다섯은 소녀다. 죄다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목소리다. 헬렌 펠은 열 개의 연갈색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시온은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마침 식사가 다 끝나 가는 중이었다.
“반가워, 신입.”
“야. 너희 여덟은 먼저 가서 신입 자리라도 준비하고 있어.”
둘이 말하고 여덟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똑같이 생겨 구분되지 않았으나 우두머리는 있다. 시온 앞에 남은 한 소년과 소녀가 그러했다.
“난 로텐.”
“난 리테.”
미소 짓는 콧잔등의 주름까지도 엇비슷한 모양이었다.
“시온이라고 했지?”
“시온이라, 좋네.”
“나이가 어떻게 돼?”
“우리는 열넷. 다 똑같지.”
시온 폴링라이트(회귀자, 30세)는 최대한 천진한 표정으로 어린아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열한 살이요. 잘 부탁해요!”
로텐과 리테는 귀엽다는 듯 시온을 내려보았다. 그는 열한 살치고도 작은 체구였다. 시온은 더욱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약간의 진심이 섞였다.
‘이 녀석들, 이렇게 보니 반가운걸.’
시온은 로텐과 리테를 알고 있다. 숨겨 무엇할까, 회귀 전의 시온 폴링라이트는 밀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던 적도 있었다. 그러니 쥬엣 곡예단원들이 낯설지가 않다. 물론 현재진행형으로 속여서 이용해 먹는 중이었지만 가책은 없었다.
“일단 이름 정도는 다 알아야겠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싹 설명해 줄게.”
로텐이 손가락을 들고 리테가 재잘거렸다. 아니, 손가락을 든 쪽이 리테고 재잘거리는 쪽이 로텐… 어쨌든 쌍둥이가 떠들어 대었다.
“헨리는 이미 알고 있다며? 불꽃과 연기와 도박에 미친 놈이야. 얼마 전에 애인한테 차였지.”
“자기가 멋진 줄 알고 맨날 무슨 대롱을 물고 다녀. 그리고 이상한 선물을 줬다가 애인한테 차였어.”
“누가 그딴 선물을 주래? 그러니까 차이지.”
“우리는 말렸었다고. 차여도 싸.”
신경 꺼, 이 망할 꼬맹이들아! 헨리 호르비가 성을 내었다. 불꽃으로 된 나비 따위가 날아들었으나 쌍둥이들은 익숙한 듯 피해 내었다. 로텐과 리테는 서로를 보며 킬킬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검은 머리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체구가 작았는데 옆에는 빈 접시가 가득하다. 믿을 수 없는 양의 고기 요리를 해치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쪽은 펜-호우칠. 작고 귀엽다고 무시했다가는 크-게 다칠 거야. 늑대로 변신하면 지금보다 세 배는 커지거든.”
“우리 곡예단의 간판 중 하-나야.”
“완벽한 제국식 억양을 구사하는 이족 보행 늑대라, 생각만 해도 재밌잖아?”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고, 얼굴도 좋지.”
저 쌍둥이들이 웬일로 칭찬을 해 주나 싶어 펜-호우칠이 배시시 웃으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그들을 향해 꾸벅 인사해 보였다. 열한 살 시온과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 몸집이었다. 그런 늑대 여자를 바라보는 로텐과 리테의 입꼬리가 장난기로 씰룩거렸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
“남자 복이 없어.”
“전 애인이 생일 선물이랍시고 털 손질용 빗을 줬다고 했나?”
“전 애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멍청한 작자일 거야.”
그거 때문이 아니라고 했지! 펜-호우칠이 으르렁거리고 헨리 호르비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여인의 작은 입속에는 송곳니가 빼곡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덩치를 세 배나 크게 만들 기세였기에 쌍둥이들은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돌렸다.
“자, 다음은…….”
“그래, 이쪽은…….”
로텐과 리테는 쉴 새 없이 떠들었다. 소개랍시고 떠드는 말의 절반은 조롱이었고 절반은 모함이었다. 단원들은 익숙해 보였다. 시온은 그들을 따라다니며 헤에, 오호, 아하, 등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피곤하네.’
시온이 작게 하품했다. 쥬엣 곡예단원의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뭐 얼마나 오래 볼 거라도 하나하나 듣고 있어야 하는지. 열심히 설명을 이어 나가던 로텐이 시온을 바라보았다.
“신입, 졸려? 하품을 하네.”
“우리가 너무 떠들었나?”
쌍둥이들이 마주 보았다.
“그만 들어가서 쉴까? 슬슬 준비됐겠지.”
“그래. 들어가서 쉬자.”
“이쪽이야, 이쪽.”
“맞아. 저쪽이야, 저쪽.”
그들은 지친 기색 없이 달음질했다. 시온은 뒤따랐다. 작은 천막이 보였다. 쌍둥이들이 사용하는 것인 듯 안에서 오가는 소년 소녀들이 보였다.
“자, 자, 어서 들어와.”
“푹 쉬자고.”
로텐과 리테는 먼저 천막에 들어가서 손짓했다. 시온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에게로 향했다. 황궁을 벗어난 것이 실감이 났다. 회귀하고 몇 달이나 지났다. 특히 계승전, 힘들지 않을 수가 없다.
가벼운 미소를 머금으며 발을 내디뎠다. 조금쯤은 피로를 풀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그가 들어서자 로텐과 리테는 천막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퍼억.
“억!”
후두부를 강타한 충격에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쓰러질 뻔했으나 옷 아래에 발지아트를 둘러 간신히 버텨 내었다. 쌍둥이 소년 중 하나가 나무판자를 움켜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이걸 버티네?”
“제대로 친 거 맞아?”
“어디서 나름 훈련을 받았나.”
먼저 들어갔던 여덟 쌍둥이는 제각기 나무 봉이니 밧줄이니 하는 것들을 들고 있었다. 제 머리를 후려친 판자를 보며 시온은 어안이 벙벙했다. 로텐과 리테는 자기들과 똑같이 생긴 여덟을 보며 빼액 소리 질렀다.
“아, 너희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리테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화난 얼굴을 했고 로텐은 참지 못하고 잽싸게 달려들어 나무판자를 뺏어 들고 성을 내었다.
“이걸 한 번에 못 쓰러트려!”
“신입 기강 잡을 준비, 똑바로 해 놓으랬지!”
시온은 일이 어떤 꼬라지로 돌아가는 중인지 단번에 이해했다. 로텐은 뺏어 든 나무판자를 휘휘 휘두르며 시온에게로 다가섰다. 리테도 그 옆에 따라붙었다.
“나와. 우리가 시범을 보여 주지.”
“쥬엣 곡예단에 온 걸 환영해, 신입.”
* * *
로텐과 리테가 천천히 다가온다. 다른 여덟은 그들 주위를 빙 둘러쌌다. 몇은 천막 문을 굳게 잡고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했다. 로텐과 리테는 한껏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 에르타 놈이지?”
“거짓말할 생각은 말아. 들으면 아니까.”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헨리 호르비를 만날 때부터 약간 에르타식으로 말하고 있기는 했다. 슈마이첸 출신인 로텐과 리테는 그것이 거슬렸던 모양이다.
“우리 탓은 하지 마. 버릇이 되어 있으면 잘해 주려고 했는데.”
“어디 첫날부터 하품을 쩍쩍하고 있어?”
로텐이 입을 열면 리테가 잇는다.
“게다가 감히 부단장님께 친한 척을…….”
“헬레나 부단장님도 너무 좋은 분이란 말이야. 불쌍하다가 다 살갑게 대해 주니.”
‘맞아, 이런 놈들이었지.’
그들은 시온이 헬레나에게 귀여움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듯했다. 그는 이 터무니없는 오해에 굳이 대꾸해 주고 싶지도 않아서 작게 고개를 저었다.
‘에휴.’
옛 생각이 났다. 서방연합의 부사령일 때, 쌍둥이들은 참 유능한 밀정이었다. 다만 틈만 나면 기강을 잡으려 들어 골치가 아팠던 기억이 있다. 시온이 턱을 긁적였다.
‘기예 탓이라고는 해도 말이야.’
로텐과 리테는 하나의 기예를 공유하는 쌍둥이다. 그들의 기예, ‘거울 쌍태 Spigel Zwilling’. 쌍둥이와 똑같은 분신을 만들어 내는 힘.
‘여덟은 분신, 이 둘만 진짜.’
열 명의 소년 소녀 중 로텐과 리테가 본체다. 아마 전력을 다하면 지금의 세 배는 되는 숫자를 만들어 낼 수 있으리라. 로텐과 리테가 극도로 단련된 공작원임을 고려하면 이들은 기사단 못지않은 전투 집단이기도 하다.
다만 ‘거울 쌍태’에는 큰 약점이 있다. 분신들이 자기가 분신이라고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때문에 로텐과 리테는 늘 분신들에게 제 위치를 확인시켜 주어야만 했다.
그런 세월이 반복되다 보니 쌍둥이는 서열에 집착하곤 했다. 헬레나 부단장에게 집착에 가까운 충성을 바치거나 만만해 보이는 시온을 누르려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이해한다고 받아 줄 이유는 또 없었지만.
“그러니까, 선배님들.”
판자를 든 로텐을 보며 시온이 우습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열 분이 절 에워싸고, 뭐, 훈육이라도 하시겠다는 건가요?”
“말귀가 빠른걸?”
판자가 내리쳐졌다. 열네 살이라고 해도 로텐은 살벌한 훈련을 거친 공작원이다. 기세가 우습지만은 않았다. 시온은 발지아트를 꺼내거나 기예를 부리지 않았다. 다만 슬그머니 발걸음을 옮겨 그것을 피했다. 로텐이 이것 보라는 듯 한쪽 눈을 찡그렸다.
밧줄이 날았다. 리테의 분신 중 하나가 성질을 참지 못하고 굵은 밧줄을 시온에게 휘둘렀다. 쉭, 하는 소리. 시온은 팔을 들었다. 굵은 밧줄이 팔뚝에 칭칭 감겼지만 고통은 없다. 이미 옷 속에는 검은 갑옷 발지아트를 둘렀다.
“흐음.”
팔뚝에 감긴 밧줄을 되려 움키고는 힘을 꾸욱. 리테의 분신은 저항하려 했지만 시온은 이미 ‘공상손가락’을 불러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의 괴력이 밧줄과 그걸 쥔 리테의 분신까지 끌어당겼다.
시온은 망설임 없이 소녀의 얼굴을 걷어찼다. 어차피 분신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분신이 나가떨어지고 그의 손에는 굵은 밧줄이 들렸다. 모든 것이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분신 하나를 날려 보내자 나머지 아홉은 어안이 벙벙해 시온을 바라보았다.
“절 훈육해 주시기에는 솜씨가 그닥인데.”
그는 태연하다. 굵은 밧줄을 쥐고 휘휘 휘둘렀다. 쉭쉭거리는 파공음이 살벌해 남은 아홉이 뒷걸음질 쳤다. 무게감이 적당해 손맛이 있었다.
“제가 선배님들을 가르쳐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채찍처럼 밧줄을 휘둘렀다. 로텐의 분신 하나는 그 궤도를 읽고 피하려 했다.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다만 밧줄이 바닥에 부딪혀 변하는 궤도까지는 다 읽을 수 없었다. 부딪혀 팩 소리가 났다 싶었더니 안면에 강렬한 통증. 분신 하나가 또 나가떨어졌다.
“…어? 이 자식…….”
“성질이 있는… 악!”
이번에는 진짜가 쓰러졌다. 판자를 들고 있던 로텐의 종아리에 붉은 밧줄 자국이 남았다. 쓸리기까지 해서 통증이 가볍지 않았다. 옛날 생각 많이 나는군. 회귀 전에도 건방졌던 쌍둥이들이 떠올라 키득 웃었다.
“빨리 끝냅시다.”
아직 힘을 드러낼 때가 아니다. 발지아트를 꺼낼 수는 없다. 기예들도 마찬가지다. 상대는 훈련받은 밀정들이다. 하지만 무엇도 문제 될 것 없었다.
밧줄이 매섭게도 돈다. 어지간히도 손에 익은 듯한 모양새다. 시온의 서슬 퍼런 기세에 쌍둥이들은 감히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피곤해서 쉬고 싶거든요.”
53화
쥬엣 곡예단 부단장, 헬레나의 아침은 질 좋은 프레잎차로 시작된다. 제국에서는 흔하지 않아 귀족이 아니라면 쉽게 맛보지 못할 물건이다. 그러니 한 모금 한 모금이 소중하다. 서방을 떠나올 때 가져왔던 잎들도 슬슬 바닥을 보였다.
고향의 향기를 맡고 있자니 새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전날 밤을 되짚고 오늘의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당분간 함께하게 된 금발 꼬마를 떠올렸다.
‘대체 누구일까. 어르신 중 한 분이신 건 분명해 보이는데.’
달튀르 드뇌방의 이름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를 언급하기까지. 서방의 어르신, 어쩌면 형제단의 일원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주 귀하게 모셔야겠지.’
벌써 아침 식사가 준비된 모양이었다. 그녀는 프레잎차를 마저 음미하고 숙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원들은 다들 탁자에 옹기종기 모여 수저를 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몇이 있었는데, 시온이나 쌍둥이들도 그러했다.
“헨리.”
그녀는 옆에 앉은 동그란 안경 사내를 불렀다. 헨리 호르비는 헬레나의 심복과 같은 자로 곡예단원 중에도 퍽 높은 지위에 있었다. 에르타 보안국 상급 공작원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쌍둥이들은 아직 나오지 않았나?”
“그런 모양이네요.”
“신입, 시온도?”
“아, 예.”
헨리 호르비가 안경을 고쳐 썼다. 그는 이미 식사를 끝낸 참인지라 대롱을 뻐끔대며 연기를 뿜었다.
“기강 잡기라도 하는 모양이던데요. 하여간 쌍둥이 놈들, 성격 안 좋다니까.”
“…기강을 잡아?”
“예.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던데요.”
대충 밖에서 적당히 하라고 말해 놓기는 했습니다. 헨리 호르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헬레나는 곧 얼굴이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섰다.
“…가 봐야겠다.”
“네에? 식사는요?”
그녀는 헨리에게 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헬레나는 시온을 서방의 고위층으로 여긴다. 실력이 없어 보이지는 않지만 쌍둥이들도 훈련된 공작원이다. 만약 시온이 정말로 쌍둥이들에게 두들겨 맞기라도 했다가는 정말 난리가 나리라.
“로텐! 리테!”
그녀는 걸음을 서둘렀다. 키가 껑충한 만큼 다리도 보폭도 길다. 헨리 호르비는 그런 헬레나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곧 쌍둥이들의 천막에 닿았다. 마침 시온이 나서는 참이었다. 그는 헬레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네요, 부단장님?”
시온은 미소 짓는다. 헬레나는 그런 시온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는 그녀가 그러게 두었다. 어딘가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주 푹 잤는지 얼굴이 번드르르했다. 그녀는 뱉으려던 존댓말을 한번 씹어 삼킨 다음 물음을 던졌다.
“…어젯밤은, 괜찮았니?”
“재밌는 친구들이더라고요.”
“혹시 뭔가 실수라도.”
“아니, 괜찮습니다.”
시온이 손을 내저었다. 푹 잠에 들었다. 정신 못 차린 로텐이 밤중에 달려들기도 했지만 그 정도에 당할 시온이 아니었다. 당하기는커녕 되려 엉덩이를 두들겨 주었다.
곧 쌍둥이들이 줄줄이 나왔다. 하나같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끌어당긴 소매 너머에는 붉은 자국이 있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렇게 시끄러운 열 쌍둥이는 조용히 시온의 눈치만을 살폈다.
“하루 만에 꽤 친해졌어요.”
싱긋 웃으며 돌아보니 흠칫 몸을 떤다. 누구 하나 시온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렇잖아요, 선배님들.”
그의 시선은 열 쌍둥이 중 유일한 진짜, 로텐과 리테를 향한다. 소년과 소녀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 맞습니다!”
“저저저희는 친밀합니다!”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헬레나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친해 보이죠?”
“…아주 그래 보입니다.”
괜한 걱정이었네. 헬레나가 중얼거렸다.
* * *
시온은 금세 쥬엣 곡예단에 녹아들었다. 헬레나 부단장의 지속적인 관심이 첫째 이유, 열 쌍둥이의 도움이 둘째 이유, 시온이 회귀 전부터 쥬엣 곡예단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이 셋째 이유였다.
이동을 서둘렀다고 해도 곡예단이 공연을 하지 않으면 수상하게 보이는 법이다. 그들은 도시에 멈출 때마다 적어도 사흘은 공연을 했다.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마차를 타고 이동하니 혼자 걷는 것보다는 훨씬 빠른 속도였고, 치안청 특무대의 눈을 피하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시온은 헬레나를 찾아가 간단한 공연을 맡겨 달라고 했다. 그는 열 쌍둥이들과 함께 줄타기 따위를 하게 되었다. 어렵지 않았다. 실수라도 할 성싶으면 ‘공상손가락’이나 발지아트를 슬쩍 사용하곤 했으니까. 또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 있었다.
‘나름 단련이 되는걸.’
열한 살 어린애의 육체는 약하기 그지없다. 회귀 직후부터 얼마나 투덜대었던가? 그런데 곡예단에서 공연을 한답시고 애를 쓰다 보니 확실히 체력이 붙는 것이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황궁에서는 몸을 단련할 기회가 아예 없었다.
‘이대로라면 머잖아서 세 번째 비밀도…….’
제1황녀, 레냐르에게서 은룡의 비늘을 얻어 낸 적이 있었다. 비늘에 담긴 힘은 생각보다 방대해서 두 번째 비밀을 열고도 남았다. 육체를 조금씩 단련하니 남았던 힘이 슬며시 세 번째 비밀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시간만 조금 더 주어진다면 세 번째 기예도 되찾을 수 있다.
‘곡예단에 합류하고 한 달. 아주 좋은 선택이었어.’
메케로스가 머지않았다. 이제 제도 루틸리움과 대황궁은 저 멀리다. 쥬엣 곡예단에 합류한 것은 예상보다 더욱 큰 몇 가지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조금이지만 몸을 풀 수 있었고 여러 가지 비밀스러운 정보를 얻기도 했다.
무엇보다, 약간의 즐거움이 있었다. 회귀 전 동료였던 자들을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이들도 더러 있었으니까. 때문에 시온은 웃고 말았다. 가슴속에 치미는 것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아직, 아직이다. 잘하고 있어. 서두를 필요는 없어…….’
코르디스, 이 빌어먹을 이름. 하루에도 수백 번은 치밀지만 간신히 참아 내는 증오. 무너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천년제국. 마음이 조금이라도 부드러워지면 늘 이렇다. 지나간 일들이 자기를 잊지 말라고 비명으로 부닥쳐 온다.
‘…재촉하지 마라, 잊지 않으니까. 용서할 수 없으니까. 다만 기다려 다오…….’
‘공상손가락’이 날뛴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시온의 주위에서 이리저리 춤추듯 뒤틀리고 있다. 몇은 그의 목덜미라도 움켜쥘 듯하다. 그러니 되새길 수밖에. 푸른 눈 속에 깊게 가라앉은 불꽃을.
‘…기필코 제국을 무너트릴 테니.’
* * *
쥬엣 곡예단의 식사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들이 진짜 곡예단이 아닌 정예 첩자 집단이기에 그러하다. 본격적인 임무에 투입되기라도 하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때문에 그들은 평시에라도 질 좋은 식사를 하길 원했고, 헬레나는 단원들의 요구에 충실했다.
‘호박파이가 먹고 싶네.’
시온이 고기 조각을 쿡 찔렀다. 식사가 괜찮은 편이라고 해도 코르디스 대황궁의 음식과는 비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황궁에는 겨우 몇 달 있었을 뿐인데 영향을 받은 모양이었다. 시온은 제 연약한 육신에 다소 한심함을 느꼈다. 몸은 단 음식을 달라고 외쳤지만 조금도 듣지 않고 꿋꿋이 포크를 옮겨 고기를 욱여넣었다.
“입에 좀 맞니.”
“예. 아주 맛있네요.”
“많이 먹거라.”
시온은 헬레나 부단장의 왼편에 앉아 식사를 했다. 대부분의 단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키가 껑충한 여인, 헬레나 부단장이 밀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운 마음씨의 소유자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동정심 따위가 발휘되었다고 여기는 듯했다.
다만 헨리 호르비 혼자만이 시온과 부단장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시온은 진작에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약간의 의심 정도야 예상했던 바였다.
식사는 금세 끝났다. 다들 비밀 공작원인 만큼 식사를 오래 끄는 법이 없었다. 제 먹은 것을 치우고 있자니 헬레나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시온, 잠시 보도록 하지. 헨리, 너도.”
헬레나는 제 천막으로 향했다. 그녀의 껑충한 뒷모습이 시온은 무심코 수숫대를 떠올렸다. 헨리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인지 시온과 눈이 마주쳤다.
“문을 닫아라.”
천막에 들어서자마자 떨어진 말에 헨리는 천막의 문을 굳게 여몄다. 시온과 헨리는 나란히 서서 헬레나를 마주 보았다. 헬레나는 제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탁탁탁 두드리고는 입을 열었다.
“베리벨롬으로 간다.”
헨리 호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는 만테라가 먼저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데르쿠스도 거치기로 했었고.”
“그쪽은 갈 수 없다.”
“왜, 특무대가 무슨 일이라도 벌였답니까?”
“그 정도라면 좋겠지…….”
헬레나가 고개를 내저으며 서신을 내밀었다. 만테라 쪽에서 거주하는 연락원의 편지였다.
‘특무대가 검문소에 버티고 섰다.’
‘웬 사내와 여인이 특무대에 합류했는데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인다.’
‘사내는 옥색 눈을 했다.’
주욱 읽어 내리던 헨리 호르비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옥색 눈!”
헨리 호르비가 부르르 떨었다.
“설마, 점쟁이가 돌아왔단 말입니까……!?”
“완전히 돌아온 건지는 모르지만, 최근 특무대가 움직인 까닭이 놈 때문인 건 확실하겠지.”
“이런! 차기 황제의 심복이 되어 놓고는 왜……. 아니, 어쩌면 그쪽 일 때문인가…….”
쥬엣 곡예단은 밀정, 서방에서 제국을 염탐하러 보내온 공작원이다. 그들의 가장 큰 적은 제국 치안청이고, 개중에도 가장 위험한 건 특무대다. 그리고 치안청 특무대의 전설, 점쟁이 아메투스. 귀신 같은 직감과 괴물 같은 검 솜씨에 몇십의 동료가 잡혀 들어갔는지.
‘…아메투스.’
시온이 깊게 숨을 내쉬었다. 크게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함이었다. 바로 옆 도시에 있다니, 이렇게까지 가깝게 쫓아왔단 말인가? 아직은 그가 살아 있단 확신도 하지 못했을 텐데.
‘늘 놀라게 하는군…….’
만약 한발만 늦었어도 마주쳤을 터다. 그랬다면 모든 것이 끝이다. 숙명이고 뭐고 페르비아스 앞으로 끌려갔을 테고, 페르비아스는 자기를 속인 배다른 동생을 살려 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19년의 회귀가 물거품으로 돌아갈 뻔했다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젠장할, 점쟁이라니…….”
헨리는 어느새 대롱을 꺼내 연기를 뻐끔거렸다. 연기 냄새가 독했다. 헬레나가 콧등을 찡그리더니 손가락을 까닥였다. 헨리 호르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품에서 말린 잎 더미가 들은 주머니와 종이를 꺼내 건넸다.
헬레나는 말린 잎을 종이로 돌돌 싸더니 끝을 핥아 붙였다. 연초 한 대를 능숙하게 말아 문 그녀에게 불꽃 나비가 날아들었다. 연기를 뻐끔거리는 자가 둘이 되었다.
어린애 앞에서 뭐 하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굳이 뱉지는 않았다. 아메투스라는 이름에는 그만한 위협이 있었다. 사실 정체를 어린아이 행세 중이 아니었다면 그도 한 모금 하고픈 마음이었다.
“베리벨롬으로 가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저랑 이 꼬마… 시온을?”
헨리 호르비의 물음에 헬레나가 연초를 입에서 떼었다.
“베리벨롬은 관문도시. 검문의 엄격함이 다른 곳과는 달라도 다르니까.”
“솜씨 좀 부려 보란 말씀이시지요?”
“다른 녀석들이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래도 시온은 신입이라 도움이 필요해. 이게 네 역할이잖아.”
“그럴 것 같았습니다.”
헨리 호르비가 제 대롱을 두어 차례 휙휙 휘둘렀다.
“어떻게 해 볼까요?”
“이목구비가 조금 흐렸으면 좋겠네. 그밖에는 맡기지.”
“눈에 띄는 얼굴이기는 하죠.”
헨리가 시온에게 손짓했다.
“꼬마, 시온, 이리 와 봐라.”
시온은 아무 말 않고 그에게 다가섰다. 헨리 호르비는 여전히 시온을 조금 훈련받았을 뿐인 어린애로 알고 있으니 맞춰 줄 생각이었다.
“가만히 있어.”
그는 볼을 부풀리더니 연기를 뿜었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양의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시온의 전신을 덮더니 이내 피부 위로 달라붙었다.
연기로 덮인 시온의 외양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희고 곱던 피부는 햇볕에 그을린 것처럼 되었고 뺨에는 주근깨가 끼었다. 반짝이던 금발도 탁해졌다. 소녀 같은 이목구비는 그대로지만 이제 잘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헨리 호르비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어떨까요, 부단장?”
“훌륭해. 역시 네 환술은 보통이 아니군.”
“마법과는 다르니까요. 어지간해서는 탐지하지 못합니다. 다만 제게서 멀어지면 바로 효과가 약해지는 게 흠이죠.”
헨리가 다시 대롱을 물었다.
“그러니 시온, 베리벨롬을 지나는 동안 내 옆에 딱 붙어 있으라고.”
54화
베리벨롬은 관문도시다.
여기를 지나서야 비로소 제국 중부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돈이 모이고 물자가 모이며 사람이 모인다. 그러니 자연스레 검문이 엄격할 수밖에 없다. 검문소 옆 돌벽에 새겨진 짧은 문구가 그 엄격함을 증명한다.
[통행과 검문에 관한 제국법, 마흔둘.]
[제국의 도시에 출입하는 이는 정당한 절차에 의해 검문받을 의무가 있다.]
병사들의 눈빛부터가 달랐다. 누가 뇌물을 건네려는 어쭙잖은 시도라도 하면 당장이라도 손목을 잘라 버릴 기세로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 검문은 위병들의 많은 업무 중 하나지만 이곳 베리벨롬에서는 다르다. 저들은 관문의 관리만을 업으로 삼는 검문병들이었다.
“쥬엣 곡예단? 들어 본 적이 있는데.”
마르쿠스 메리우스는 베리벨롬의 검문대장이었다. 여자 허리 굵기만 한 팔뚝에 그보다 더 굵다란 모가지. 한눈에 보아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코르디스 7군단의 전前 천인대장을 보통 사람이라고 부른다면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도 건강 체질 정도에 불과할 테니까.
“예전에 베리벨롬에 왔었지?”
“3년 정도 되었던 듯하네요.”
“맞아. 딸아이와 함께 구경 갔었지. 완벽한 제국 억양을 구사하는 늑대가 참 인상 깊었는데.”
펜-호우칠이 뒤에서 손을 들었다.
“그건 저였어요.”
“늑대 수인인가?”
“통행증에 적힌 대로.”
흐음, 마르쿠스 메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대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헬레나에게 물었다.
“이번에도 공연을?”
“그게 저희 일이니까요.”
“기쁜 소식이군. 안 그래도 딸아이가 요즘 심심해했거든.”
“저희야말로 아주 기쁜 말인걸요.”
헬레나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베리벨롬의 검문소에도 치안청의 특무대원들이 와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외부 사람이 특무대원이랍시고 활개 치도록 둘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쥬엣 곡예단과 시온에게 아주 좋은 소식이었다.
“베리벨롬이 처음이 아니라면 굳이 더 설명할 것도 없겠지.”
마르쿠스 흥 하고 콧바람을 불었다.
“정당한 절차에 따르길.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
말을 마친 검문대장은 제 사무실로 사라졌다. 그의 일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검문병들의 일이었다. 그들은 일렬로 늘어선 쥬엣 곡예단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둘씩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맨 처음은 부단장 헬레나와 펜-호우칠이었다. 통행증을 내밀었고, 거기에 쓰인 인적 사항이 사실인지 확인했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검문병들은 그들을 다음 방으로 안내했다.
검문병들은 고압적이었으나 무례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주 정중하게 느껴졌다. 베리벨롬의 검문병들은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는 자들이었다.
쥬엣 곡예단원들은 아무도 염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늘 검문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 혹시나 꼬투리 잡힐 만한 것이 없는지도 몇 차례고 확인했다. 의심할 만한 정보나 물품도 이미 다 불에 태운 뒤였다.
단원들이 둘씩 둘씩 빠져나갔다. 누군가 의심을 산 것 같지는 않았다. 개성 넘치는 작자가 많았지만 곡예단원이니 당연하게 보인 덕이 컸다.
“다음 두 분.”
시온과 헨리 호르비의 차례였다. 헨리가 키득 웃으며 말했다.
“꼬마, 긴장했냐?”
“그래 보여요?”
그들은 각기 통행증을 내밀었다. 헨리의 것은 진짜였고 시온의 것은 가짜다. 하지만 쉽게 들킬 만큼 질 낮은 위조는 아니었다. 역시나 검문병은 이상을 찾지 못하고 외쳤다.
“통행증 들고 다음 방으로 가 주십시오.”
몇 개의 절차가 이어졌다. 마법 탐지기를 들이밀거나, 얼굴 피부를 만져 보거나 하는 등의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헨리 호르비의 환술을 알아채지 못했다. 괜히 에르타 보안국의 상급 공작원이 아니었다.
몇 개의 방을 지나쳤다. 몇 명의 검문병을 마주쳤고. 식사를 마칠 만한 시간을 거쳐 멈추어 섰다. 그들을 안내한 병사가 말했다.
“다음 방에서 마르쿠스 검문대장이 몇 가지 질문을 하실 겁니다. 이제 마지막이니 조금 기다려 주십시오.”
말을 마친 병사가 방을 나섰다. 건넛방에서는 마르쿠스 검문대장이 로텐과 리테 쌍둥이와 이야기 중인 듯했다. 둘만 남은 것을 깨달은 헨리 호르비가 동그란 안경을 고쳐 썼다.
“에구, 여긴 올 때마다 고생이란 말야.”
3년 전의 베리벨롬 방문 때 헨리 호르비도 함께였다. 그때는 제국에 투입된 지 얼마 안 된 풋내기였는데 시간이 벌써 꽤 지났다 싶었다. 무심결에 품을 뒤지던 헨리는 대롱을 짐짝에 넣었음을 깨닫고 제 이마를 쳤다.
“이거 입이 심심한데.”
연기를 피우고 싶지만 피우지 못한다.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괴로움이다. 헨리 호르비는 괜히 아랫입술을 두어 번 매만지다 시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참, 꼬마야.”
“시온이래도요.”
“뭐 하나만 물어보자.”
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헨리 호르비의 환술 덕에 주근깨투성이다.
“뭘?”
“부단장이랑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너희 아버지가 부단장과 친구라고 했던가?”
“…맞아요.”
제국에 파견된 공작원 중 하나가 죽었다. 그는 헬레나의 친구이며 시온의 아버지다. 헬레나는 곡예단원들에게 시온을 그렇게 소개했었다. 다들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검문 중에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지.
“왜 물어보는지 몰라도, 여기서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요.”
“괜찮아.”
헨리 호르비의 입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이내 투명해졌다. 보이지 않는 연기가 그들 주위를 둘러쌌다. 대롱은 없어도 환술은 부릴 수 있다.
“이 방에는 귀가 없어. 설령 있어도 이 정도 말소리는 새어 나가지 않게 할 수 있고.”
“…….”
시온이 헨리를 노려보았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방에는 별다른 마법적 장치도, 감시도 없었다. 헨리 호르비의 환술이 더해지면 누구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지 못하리라. 허나 그렇다 해도.
“…굳이, 여기서?”
“여기니까.”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헨리가 입가를 끌어 올렸다.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둘만 남았으니까 물어볼 수 있는 거야.”
헨리 호르비는 에르타 보안국의 상급 공작원이다. 회귀 전에는 시온의 부하이기도 했는데 때때로 속을 알 수 없는 사내이기도 했다. 특히 저렇게 웃을 때면 늘 꿍꿍이가 있었다.
“너, 시온, 다 거짓말이지?”
* * *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는걸요.”
시온은 일단 내뱉었다. 굳이 대꾸하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헨리 호르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능글맞게 웃었다. 시온의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뭔가 눈치챘나?’
헨리 호르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다. 무언가를 알아내었다는 듯, 또 깊게 확신한다는 듯. 뛰어난 녀석이기는 했지만. 시온이 작게 혀를 찼다.
나사 빠진 것처럼 굴 때가 많은 사내였다. 그렇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래서야 에르타 보안국장까지 올라갈 수는 없다. 자기를 향해 능글맞게 웃는 헨리를 보며 시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옛 동료라서…….’
시온의 몸속에서 무언가 꿈틀댄다. 마갑 발지아트. 그림자 차원의 귀족으로 만들어 낸 센 소르티의 걸작. 보이지 않는 옷 아래 피부를 검은 갑옷이 뒤덮었다. 또, ‘공상손가락’. 보이지 않는 손들이 열일곱.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데.’
당장이라도 소매에서 검은 가시를 뽑아내 헨리의 목을 찌를 수 있었다. ‘공상손가락’으로 목을 꺾어 버릴 수도 있었다. 만약 헨리 호르비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을 알았다면, 그걸 빌미로 그를 협박이라도 하려고 든다면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옛 동료도 중요하지만 숙명에는 비할 수 없다.
목을 찌르고 마지막 방을 지나 베리벨롬으로 들어갈까. 아니, 마르쿠스 검문대장은 만만치 않은 사내다. 베리벨롬 안으로 향해서는 위험하다. 그렇다면 되돌아 나가야 하나. 꽤 깊게 들어온 참이지만 두 기예에 발지아트가 있으니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다만 앞으로의 일정이 꽤나 꼬일 터고 그것이 퍽 짜증스러웠다.
“너무 노려보는 거 아니야?”
헨리가 손을 내저었다. 시온의 눈썹이 한껏 찌푸려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의 목을 찌를 계획까지 세웠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진정해, 진정…….”
그는 고개를 숙여 시온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시온은 지금이라도 그의 목을 찔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가 존댓말을 뱉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화내지 마시지요.”
“왜 존대를?”
“…이 헨리 호르비, 눈치 빠른 놈입니다.”
사내는 대롱을 무는 시늉을 했다.
“다 알고 있습니다. 형제단에서 오셨지요? 부단장도 참, 혼자서만 득을 보려고, 너무하다니깐…….”
시온은 그제야 작게 웃으며 발지아트를 몸속으로 되돌렸다. 헨리 호르비의 목숨을 거두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는 자기가 죽을 뻔했다는 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신나서 말을 이었다.
“어디 어르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굳이 알아내서 위험하고픈 맘은 없으니.”
그는 능글맞게 웃는다.
“다만 기억해 주십시오. 헨리입니다, 헨리 호르비.”
“그 말을 하려고 둘만 남길 기다렸나?”
“당연하지요. 어르신 마음에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남고 싶은 마음에.”
“재미있는 녀석이군.”
시온 폴링라이트는 헬레나 부단장에게 했듯 거물 행세를 시작했다. 목을 살짝 치켜들고 턱을 매만졌다. 완전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눈으로 헨리를 보았고, 그는 웃는 얼굴로 더욱 깊이 허리를 숙였다.
“기억해 달라니. 왜 내가 널 모른다고 생각하지?”
“…절 아십니까?”
“그래. 헤인델 늙은이가 자주 이야기하니까.”
“스, 스승님께서……?”
핫. 헨리 호르비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스승의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거론할 정도라면 눈앞의 꼬마는 보통 높은 직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의 눈에 존경이 어리기 시작했다. 시온의 의도대로였다.
“좋게 보고 있었지, 지금까지는.”
“…지금까지라고 하시면?”
“검문소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했더니 잘 봐 달라……. 내가 이걸 좋게 보아야 하나?”
시온의 어투는 다소 날카롭다.
“마음이 앞서면 빠른 눈치가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지.”
“…죄, 죄, 죄송합니다.”
헨리는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렸다. 그는 황급히 허리를 꼿꼿이 했다.
“떨지 말아요, 아저씨.”
시온은 다시 어린아이처럼 군다.
“이런 꼬마 앞에서 떨다니 누가 보면 얼마나 이상하게 보겠어요.”
“…예. 아니, 응…….”
헨리가 숨을 가다듬었다. 곧 떨림이 잦아들었다. 시온은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애 같은 미소와 목소리였으나 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아저씨. 서쪽 에르타에 이런 속담이 있다는데, 혹시 아시나요?”
“무슨 속담……?”
“말이 많으면 일찍 죽고 입이 무거우면 오래 산다.”
“…그런 속담이 있었나? 처음 듣는걸.”
“어쩌면 앞으로 생길지도 모르죠.”
회귀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입가에도 미소가 있다. 그러나 푸른 눈동자는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헨리 호르비가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아저씨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네요.”
“…….”
55화
쥬엣 곡예단은 베리벨롬에 일주일을 머물렀고, 닷새 동안 공연을 선보였다. 원래는 사흘의 공연을 계획했으나 혹시 모를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마르쿠스 메리우스 검문대장과 그의 딸아이가 매일같이 공연을 구경 오니 조금이라도 의심 살 여지를 줄이는 쪽이 나았다.
시온 또한 공연에 참여했다. 그는 로텐과 리테 쌍둥이와 함께 줄을 타거나 헨리 호르비를 묶어 놓고 단검을 던지거나 했다. 같이 다닌 것이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뿐인데도 곡예 솜씨가 퍽 능숙해서 다들 찬사를 보냈다.
“헨리 아저씨, 이 단검 제가 챙겨도 될까요?”
“…어?”
뒷정리를 하던 시온이 옆에 선 헨리 호르비에게 물었다. 곡예용 단검이지만 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진검이었다. 헨리 호르비는 주위를 휘휘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렴. 그런데 비품이라서 장부가 빌 텐데…….”
“그럼 채워 놓으셔야겠네요?”
“…그래야겠지?”
헨리 호르비가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가에서 무언가 흐르는 듯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베리벨롬 검문소에서 한번 기를 죽여 놓은 뒤로 헨리는 시온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불편해했다. 시온 폴링라이트를 어린아이 행세하는 거물로 여기니 그럴 수밖에 없다.
‘헨리 호르비, 생각보다 도움이 돼.’
단검을 품에 넣으며 시온이 작게 웃었다. 말이 많고 경박해도 눈치가 빠른 사내였다. 연기에도 능했다. 헬레나 부단장과 헨리 호르비가 시온의 어린아이 행세를 도우니 어떤 단원도 의심하지 않았다.
뒷정리를 대충 마친 시온은 천막 뒤편 으슥한 데로 향했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 놓고 싶었다. 열한 살 몸뚱이라도 아예 단련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여기를 떠나면 오스벨롬이라고 했던가.”
베리벨롬의 형제 도시다. 먼 옛날에는 베리벨롬과 오스벨롬 둘이서 하나의 도시국가였던 시절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만큼 별로 먼 거리가 아니다. 나흘 정도면 충분히 닿으리라.
“오스벨롬 다음은 한네스 그리고 다음은… 젠티움.”
쥬엣 곡예단과 헤어지기로 한 지점이다. 다만 한네스에서 젠티움까지가 멀다. 마차를 타고 이동해도 최소 이십 일은 걸릴 터다. 그래도 아마 두 달 뒤에는 곡예단과도 작별을 하게 되리라.
‘젠티움을 지나면, 다시 혼자겠어.’
어차피 특무대의 눈을 가리기 위한 동행이었다. 회귀 전의 동료들이기도 했으니 아쉬운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갈 길이 급했다. 젠티움부터는 완전히 제국 서남부에 접어든다. 항구도시 메케로스도 멀지 않다.
메케로스에 도착해서 배를 타면 탈출에 성공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메케로스에서, 아레테를 경유해, 비로소 서방으로.
‘하여간 아메투스 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대산맥을 건너려 하지 않은 것도, 메케로스에서 배를 타려고 하는 것도, 곡예단에 합류하게 된 것도 모두 아메투스 놈 때문이었다. 방비에 방비를 더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따라붙다니.
‘하지만 내 승리다.’
시온이 눈을 빛냈다. 그는 아메투스를 안다. 회귀 전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아메투스는 시온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승부가 갈렸다. 아무리 뛰어난 직감이라도 다 쫓을 수 없는 계략이 시온의 머릿속에 있었다.
‘회귀 전의 너라면 몰라도, 지금의 너는 아직 어려, 아메투스 아르에티온.’
* * *
만테라는 베리벨롬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로 질 좋은 과실주가 많았다. 아메투스와 샤디 섄도르는 그곳에서 백포도주를 기울이는 중이었다. 아메투스는 맥주를 마실 생각이었으나 샤디의 강권을 이기지 못했다.
“자, 만테라의 자료예요, 아메투스 대장.”
샤디 섄도르가 종이 뭉치를 넘겼다. 치안청 특무대원들이 만테라의 검문소에서 수집한 정보였다. 아메투스는 묵묵히 그것을 읽어 내렸다. 샤디가 백포도주 반 병을 비워 내도록 그는 아무 말 않았다.
옥색 눈의 사내가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샤디는 그가 자료를 다 살펴보았으며 별 소득을 얻지 못했음을 눈치채었다. 원래도 무뚝뚝한 사내지만 유독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괜히 질문을 던져 보았다.
“원하던 건 찾으셨나요?”
“아니.”
“이번에도 헛수고였단 말이군요.”
포크를 휘적이는 샤디의 목소리에는 다소 불만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링펜이라는 민물고기를 조개와 함께 쪄 낸 요리를 먹는 중이었다. 사람이 둘인데 조개를 세 개밖에 안 넣어 줘? 생선을 거칠게 휘적이던 샤디는 조개를 냉큼 입으로 옮겼다. 두 개째였다.
“하긴, 아무리 특무대라도 어떻게 하겠어요. 뭘 찾는지도 모르고 검문만 하니.”
“…….”
노골적으로 뼈가 있는 어투였다. 특무대는 엄선되고 엄선된 고급 인력이다. 기사들만큼은 아니라 해도 자존심이 만만치 않다. 그런 이들을 갑작스레 동원해 놓고 뭘 찾는지도 알려 주지 않은 채 검문만 하라고 했으니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다. 그리고 모든 불만은 특무대장인 샤디 섄도르의 몫이며, 이런 고생이 몇 주나 이어지고 있다. 아무리 아메투스라도 미안할 수밖에.
“…….”
아메투스는 고심 끝에 포크를 들어 마지막 조개를 샤디 섄도르의 접시로 옮겨 주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미안해서 쩔쩔매다가 한다는 게 마지막 조개를 양보하는 거라니. 겨우 스물다섯 나이에 제국십장의 턱 끝까지 따라붙은 사내의 행동이라기에는 과하게 귀여웠다.
샤디는 그제야 삐죽 나왔던 입술을 집어넣었다. 답답함이야 여전하지만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녀는 마지막 조개를 다시 아메투스에게 돌려주었다. 사실 슬슬 배가 불러 온 까닭이 컸다.
“다음 도시로 가셔야죠, 대장.”
“그래야지.”
“데르쿠스예요, 베리벨롬이에요?”
“…글쎄.”
아메투스는 시원하게 답을 내어놓지 못했다. 샤디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염려가 짙었다.
그녀는 아메투스를 안다. 매섭다 못해 날카로운 사내다. 검 솜씨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직감이 그렇다. 어떻게든 답에 닿고 마는 자였다. 하지만 답에 닿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늘 그랬다.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의 치안기사 시절을 늘 곁에서 보아 온 샤디 섄도르만이 알고 있다.
“…….”
사내는 곧 생각에 빠졌다. 샤디는 익숙하다는 듯 아메투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사내지만 그녀 앞에서는 이렇게 긴장 풀린 모습을 보여 줄 때가 종종 있었다. 샤디 섄도르는 그게 무엇보다 기뻐서 무심코 옥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몇 번을 보아도 참 신비한 빛깔이었다.
“샤디 섄도르.”
샤디가 눈을 내리깔았다. 아메투스가 갑자기 고개를 든 탓이다. 뭐야, 갑자기. 너무 빤히 들여다보았나 싶어 민망해졌다. 그녀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뭐예요?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네 기예가 필요하다.”
“…….”
아메투스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샤디 섄도르의 눈동자도 깊게 가라앉았다. 민망함 따위의 감정이 새어들 틈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구불진 회색 머리를 귀 뒤로 쓸어넘겼다.
“…제 기예Ars는…….”
모래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다.
“…아주 특이해요. 게다가 큰 대가를 필요로 하죠.”
지그시 아메투스를 바라본다. 그녀보다도 더욱 흔들림 없는, 옥빛 눈.
“물론 이미 알고 계실 테고, 그런데도 필요하시단 거죠?”
“그래.”
“후후…….”
샤디가 고개를 숙였다. 매정한 사내다. 그녀의 마음을 모르지 않을 테고, 그래서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요구하는 것이리라. 치안청을 떠나서는 기별도 없다 불쑥 나타나서는 부탁만 들이밀다니…….
“…좋아요.”
헌데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아, 멍청한 샤디. 불쑥이라도 다시 나타나 준 게, 그녀에게 부탁을 해 주는 게 이렇게까지 기쁘다니. 정말로 멍청한, 샤디 섄도르.
“새벽에 다시 보아요, 대장.”
그녀의 기예는 손이 많이 간다. 대가와는 별개로 준비를 할 것이 많다. 지금부터 서둘러야만 했다.
“그때까지는 준비를 마쳐 놓지요.”
* * *
새벽 달빛이 유난히도 메말랐다.
만테라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중턱에서 샤디 섄도르는 아메투스를 맞았다. 천막 안의 샤디는 고향에서 가져온 길고 품이 넓은 옷차림이었다.
천막은 좁았다. 작은 촛불 몇 개로 아늑함이 가득해질 정도였다. 아메투스는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았다. 고요하다. 촛불이 휘날리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제 기예의 이름은 ‘라미 라부르Rami labuhr’. 제국어로 직역한다면 ‘모래 물음’ 정도가 되겠죠.”
아메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래의 영을 불러내,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것뿐인 힘.”
읊조림은 계속된다. 아메투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영을 불러내는 데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단지 부르는 것만으로도 저는 33일 동안 장님이 되지요.”
“…….”
“만약 답할 수 없는, 이를테면 전제부터가 잘못된 질문을 던지면 영은 답하지 못해요. 이런 경우에 —저는 그냥 한 달간 장님이 될 뿐이고요.”
샤디 섄도르가 배시시 웃었다. 천막 틈으로 새어 든 달빛이 구불진 회색 머리를 타고 속눈썹 사이에서 부서졌다.
“하지만 옳은 질문을 던진다면 모래의 영은 기필코 답을 가져다주어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그었다. 무언가 쓴 듯했지만 그녀 고향의 말인지 아메투스는 알아볼 수 없었다.
“특히 무언가를 찾는다면 …대륙 어디에 있든 안내해 주겠지요.”
“…….”
“자아, 대장. 질문은 준비되셨나요?”
“물론.”
옥색 눈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샤디 섄도르가 머리를 숙였다. 어딘가 경건함까지 묻어나는 행동거지였다.
“…영靈을 부르겠습니다.”
알아듣기 힘든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일족은 대대로 모래의 영과 관계를 맺어 왔다. 이제는 일족이래도 그녀밖에 없지만 말이다. 입가가 쓰게 비틀렸지만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였다.
주문이 계속된다. 촛불이 흔들린다. 바람은 없다. 곧 샤디 섄도르의 두 눈이 표면부터 바스라지기 시작했다. 모래색 눈동자는 정말로 모래가 되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아메투스는 이 모든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샤디의 양 눈구멍은 텅 비었다. 그녀의 눈알은 흘러내려 모래 더미가 되었다. 주문은 계속된다. ‘라미 라부르’. 모래의 영에게 묻나니. 빈 눈구멍에 이채가 번뜩이고 눈알이었던 모래더미가 넓게 퍼진다.
모래가 퍼진다. 원형의 파문을 타고 낮게 깔린다. 원과 원, 곡선과 곡선. 수십의 궤적이 엇갈리다 이내 하나가 된다. 만다라曼茶羅. 영靈이 물질 위에 남기는 입김.
방진과 파문과 원의 위에서.
장님이 된 샤디는 영을 마주 본다.
[---?]
울림이 있다. 들리지는 않지만 무언가가 말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영의 말이다. 샤디 섄도르의 귀에만 들렸다.
“예, 맞습니다. 제가 섄도르의 마지막 딸입니다.”
[------.]
“그렇게 되어 버렸네요.”
그녀는 모래의 영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영이 무어라 말할 때마다 모래 위에 파문이 일며 다양한 형태를 그렸다.
[-- ---.]
“아메투스 대장, 무얼 원하냐고 묻습니다.”
“사람을 찾고 있다.”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영은 대답한다.
[----? ---, ---.]
“산사람인지 죽은 사람인지 묻는군요.”
“…산 사람.”
“산 사람이랍니다.”
아메투스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불안이 있다. 만약 5황자 지오니스가 죽었다면 모래의 영은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샤디 섄도르는 아무 의미 없이 33일 동안 장님이 된 것이고.
[-- ----. ---.]
“어떤 사람인지 묻습니다.”
“소년. 나이는 열하나, 금발에 푸른 눈.”
“열한 살 소년인데, 금발에 푸른 눈이라고 합니…….”
샤디가 고개를 들었다. 눈구멍이 비었는데도 아메투스를 똑바로 바라본다. ‘설마…….’ 그녀는 치안청의 특무대장이다. 아메투스가 찾아다닐 법한 금발에 푸른 눈, 열한 살짜리 소년이라면 단 하나뿐이다.
[--.]
“…이름은?”
“…지오니스. 코르디스의 다섯 번째 황자.”
“……!!!”
샤디는 영에게 말을 옮기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이제야,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아메투스가 왜 그리 비밀스럽게 굴었는지, 대체 누굴 찾기에 그렇게 열을 올렸는지. 제5황자 지오니스가 살아 있다면 전혀 과한 처사가 아니었다. 샤디는 천천히 입술을 떼어 영에게 말을 전했다.
“…이름은, 지오니스. 코르디스의 다섯 번째 황자랍니다.”
[좋다, 섄도르의 마지막 딸아.]
모래의 영이 말했다. 이번에는 아메투스의 귀에도 분명히 들렸다. 영의 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아메투스는 기다릴 뿐이었다. 모래 더미를 바라보면서.
“…….”
“…….”
그들은 이미 ‘모래 물음’이라는 기예에 대해 알고 있다. 지오니스가 살아 있다면, 모래는 치솟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 모래는 땅으로 녹아 사라질 터다. 그렇게 침묵. 길지 않지만 견디기 힘든. 이내 모래가 바스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
옥색 눈의 사내가 탄성을 내었다. 그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시선을 들었다. 모래 더미가 마치 하늘로 빨려들 듯 치솟고 있었다.
“정말로…….”
치솟은 모래 더미는 이내 한 줄기 바람을 타고 그들의 머리 위에서 춤춘다. 마치 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옳은 길을 택했다는 증명이다.
“…살아 있었나, 5황자.”
“치솟았나요?”
“그래.”
아메투스가 양손 검을 움켜쥐었다.
“내 감이 맞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그래, 또다시…….”
그는 장님이 된 샤디 섄도르를 일으켜 주었다. 샤디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사실 가슴팍에 과하게 달라붙은 감이 있었는데, 약간의 사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모래바람은 어디로 불고 있나요?”
“남쪽.”
달빛이 사납다. 허나 옥색 눈이 더욱 서슬 퍼렇다.
“베리벨롬으로 간다.”
56화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아메투스는 장님이 된 샤디 섄도르에게 옷가지를 덮어 주었다. 그녀는 아메투스가 천막과 짐을 정리하는 소리를 들었다.
“업혀라.”
아메투스의 손이 느껴졌다. 샤디는 망설임 없이 이끄는 대로 폴짝 뛰어 그의 등에 올랐다. 아메투스의 얼굴이 쑥스러워 붉어졌으나 샤디는 볼 수 없었다. 모래의 영은 그들의 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 정도는 기다려 주겠다는 듯이.
“뭐가 되었든 일단 살아 볼 일이네요.”
샤디 섄도르가 힐쭉 웃었다.
“대장에게 업혀 보기도 하고.”
“처음은 아니었던 듯한데. 허리 관문에서도 한번 이런 일이 있지 않았나.”
“…기억하고 있었어요?”
“어찌 잊겠나.”
아마도, 사 년쯤 전의 일. 제국마도원의 기밀을 서쪽으로 빼돌리려던 마법사를 쫓던 때에. ‘모래 물음’으로 장님이 되었던 샤디는 큰 상처를 입었고 아메투스는 그녀를 업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렸었다.
“잘 먹어라. 그때보다 가볍군.”
“…….”
샤디 섄도르는 33일 동안 앞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제 뺨이 아주 붉게 달아올랐음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메투스의 등에 고개를 깊이 묻었다. 옥색 눈의 사내는 별말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입김이 하얗다고 말하려던 아메투스가 입을 다물었다. 샤디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였으니까. 울창한 숲도, 밝은 별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를 위해 기꺼이 잠깐 맹인이 되어 주기로 선택했다.
그렇게 곱씹자니 뭐라도 말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말할 것이 마땅치가 않았다. 아메투스는 몇 차례고 입술을 달싹이려다 말았다. 등에 업힌 샤디는 기척만으로도 그것을 눈치채고 작게 키득거렸다. 키득거리는 숨소리가 간지러웠다. 아메투스가 작게 헛기침했다.
“참, 샤디…….”
“오늘 새벽 일은 모두 비밀로 해야겠지요?”
제5황자 지오니스가 살아 있다. 어디서도 함부로 나불댈 만한 안건이 아니다. 아무리 세력이 없다고 해도 콘티누아 대제의 친아들이니까. 제국 치안청 특무대장 샤디 섄도르는 비밀 엄수를 업으로 삼는 여인이었다.
“설령 제 부관이라 해도 입 벙긋하지 않을게요. 안심인가요?”
“…나를 참 잘 안단 말이야.”
“제가 대장을 모르면 누가 알겠어요?”
이건 양보할 수 없죠. 샤디가 아메투스의 등을 꾸욱 눌렀다. 따스함이 느껴졌다. 양쪽 모두에게.
“처음 배치되던 때도 기억하는걸요. 아, 그때는 제가 선배였는데. 첫 임무를 기억해요?”
“에티에르 상회 건이었지. 끝나고는, 음, 루틸리움 상점가에서 닭 요리를 먹었던가.”
“그건 루루디스 가문 건 다음 아니었어요? 첫 임무 끝나고는 독한 캐텔주만 세 병씩 비웠잖아요. 안주도 없이!”
“맞아. 그랬지. 워낙 박봉이었으니까.”
한번 말문이 열리니 이야깃거리가 쏟아졌다. 함께한 시간이 길었으니 당연하다. 아메투스가 치안기사로 있던 시절의 대부분을 이 여인과 보냈었다.
사담이 오고 간다. ‘이건 기억해요?’ ‘너야말로 그걸 기억하고 있나?’ ‘당연하죠.’ ‘나도 당연하다.’ ‘이거는요?’ ‘그거는?’ 샤디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아, 맞다! 그때 돈 빌렸었잖아요!”
“…깜박했군.”
“차기 폐하 심복씩이나 되면서!”
“돌아가면 꼭 갚지.”
“됐고, 식사나 대접해 줘요. 차기 폐하 심복씩이나 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아주 귀한 곳에서.”
“그렇게 하지.”
“기대할 거예요. 왕창 기대할 거라고요.”
걸었다. 장님이 된 여인을 업고 한참을 걸었다. 서슬 퍼런 달빛과 시린 공기가 묘하게 달았다. 샤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아메투스의 등을 손가락으로 휘휘 후비거나 괜히 쿡쿡 찌르거나 했다.
눈이 멀어 있는 그녀지만 기척으로 산을 내려왔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멀리서 어렴풋이 사람 소리가 나기 시작했음도. 그녀는 아메투스의 등을 두드렸다.
“대장.”
아메투스가 고개를 돌렸다. 곧 만테라 검문소였다.
“이 앞에서 내려 줘요.”
“…그럴 수는…….”
“장님이 된 여자를 업고 뭘 하려고요. 혼자 다니는 게 편하잖아요?”
“아니, 그래도…….”
샤디가 자기를 받치고 있던 아메투스의 손을 찰싹 때렸다.
“서툰 배려 말고, 할 일을 하러 가시죠?”
본래는 시내의 숙소까지 그녀를 업고 갈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 장님이 되었는데 어찌 놓고 가겠는가. 불편하더라도 줄곧 같이 다닐 생각이었다. 허나 샤디는 완강하다.
“눈이 안 보여도 알겠네요. 엄청 걱정하는 얼굴 하고 있단 걸.”
“…그렇지 않다만.”
“거짓말은. 걱정 말아요. 이미 부관을 불러 놓았어요. 금방 올걸요?”
그는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내려놓았다. 샤디는 끙차 소리를 내며 제 다리로 섰다. 두 눈을 감았고 눈꺼풀 너머는 비어 있다. 그녀의 두 눈은 모래가 되어 저 위에서 춤추는 중이다.
“베리벨롬을 지나서 남쪽으로 간다 했나요? 그렇다면 길목은…….”
“모두 넷이지.”
“죄다 봉쇄해야겠죠?”
“부탁하마.”
샤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투스가 쫓는다면 그녀는 돕는다. 그들은 늘 그렇게 해 왔다. 샤디 섄도르는 제 가슴팍의 브로치가 자랑스러웠다. 특무대장이라는 위치에 있기에 그를 더욱 도울 수 있지 않은가.
여인은 사내를 보았다. 눈구멍이 비어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히 보았다. 사내도 여인을 보았다. 번뜩이는 옥색 눈으로 그렇게 했다. 말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명히 그랬다.
“…부관은 누가 맡았나. 역시 하베오인가.”
“아니에요. 보면 놀랄걸요.”
샤디가 쿡쿡 웃었다.
“이제 곧 올 텐데…….”
“대장!”
목소리가 우렁찼다. 말총머리를 한 깡마른 사내가 달려왔다. 아메투스가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운테스?”
“오? 오오! 아메투스 대장!”
운테스라 불린 사내가 펄쩍 뛰듯 달려들었다. 맹렬하기까지 했다. 그는 신기하다는 듯 아메투스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이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새벽답지 않은 쾌활함이 가득했다.
“이렇게 다시 뵐 날이 올 줄이야!”
“부관이 되었나.”
“예! 그렇습니다!”
운테스는 주위를 살피더니 살짝 속삭이듯 말했다. 그들의 정체는 쉽게 까발릴 만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무대장 샤디 섄도르의 부관,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입니다.”
아메투스가 미소 지었다. 그가 특무대에 있을 때에는 갓 신입이던 사내다. 어느새 부관이라니. 특무대답지 않은 쾌활함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기세를 더한 듯했다.
“아주 그럴듯해졌는걸.”
“모두 대장 덕분, 또 대장 덕분… 아니, 아메투스 대장도 대장이고 샤디 대장도 대장이니 부르기가 영 불편한데요. 이거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나.”
운테스가 팔짱을 끼며 중얼거렸다. 어느 대장을 대장이라고 하고 어느 대장을 대장이라고 하지 말아야 하나. 아메투스가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난 떠날 테니.”
“예에??”
외침이 커다랗다.
“벌써요? 이게 대체 얼마 만인데!”
“시끄러워, 운테스.”
샤디 섄도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여간 자신이 치안청 특무대원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건지. 능력이야 뛰어나다만 행실은 아직 교정할 여지가 있었다.
“말을 좀 줄이랬지.”
“헙!”
운테스는 과장된 동작으로 입을 꿰매는 시늉을 했다. 아메투스는 옛 생각이 나서 작게 웃었고 샤디는 그 소리만 듣고도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운테스, 내가 지금 눈이 안 보이는데 도와주겠지?”
“그럼요. 그걸 위한 부관이잖습니까. 아예 업어 드릴까요?”
“적당히 하렴.”
“예이!”
부관 운테스가 샤디 섄드로의 손목을 잡았다.
“저희는 가 볼게요, 아메투스 대장. 계속 보고드리지요.”
그녀는 만테라로 향할 것이다. 휴식을 취하고 그녀의 일을 하리라. 옥색 눈의 사내는 길을 떠날 것이다. 모래바람을 따라서, 살아 있는 제5황자 지오니스를 향해.
“어서 다녀오세요.”
* * *
쥬엣 곡예단 부단장, 헬레나=헬렌 펠은 고민에 빠졌다.
“…이상하네요.”
“뭐가?”
옆에서 사탕을 핥던 꼬마아이가 되물었다. 그의 이름은 시온 폴링라이트, 19년을 돌아온 회귀자로 서방의 거물 행세를 하며 쥬엣 곡예단을 속여 먹고 있었다. 지금도 천연덕스럽게 헬레나에게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특무대의 활동이 뜸해졌나 싶었더니, 갑자기 이런 보고가 왔어요.”
헬레나가 몇 장의 서신을 내밀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다느니, 이번에 좋은 비단을 구했다느니, 딸은 잘 지내느냐니 하는 평범한 내용이었다. 서방의 암호를 알지 못한다면 정말 평범한 편지로만 여길 물건들이다.
다만 시온은 회귀 전 서방연합의 부사령이었다. 암호 편지를 읽는 것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서신을 살피던 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흠……?”
시온이 턱을 쓸었다. 그의 눈에도 고민의 빛이 어렸다.
“…이 내용대로라면, 정말 곤란한데.”
관문도시 베리벨롬을 지나 제국 남부로 향하는 길목은 총 넷이다.
“특무대가 길목 넷을 모두 틀어막았다고?”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군.’
손가락을 두어 차례 튕기며 생각을 정리했다. 당황할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상대는 아메투스 아르에티온, 점쟁이라 불리는 사내. 늘 이 정도의 이변은 대비하고 있었다.
“나 때문이겠지.”
“그렇겠지요?”
“냄새를 용케도 맡았어.”
헬레나 부단장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특무대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이 눈앞의 꼬마와 연관 있다는 것 정도는. 시온이 툭 중얼거렸다.
“흐음, 생각보다 일찍 떠나야 할지도.”
젠티움까지 동행하기로 했지만, 강행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곡예단을 보내고 시온 혼자 움직여도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조금 힘들고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붙잡히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셔도 괜찮겠습니까? 길이 험합니다. 동행하시는 편이 나을 텐데요.”
“나도 동의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쥬엣 곡예단은 총원이 백에 가깝다. 봉쇄된 길목을 지나지 않고는 남부 젠티움으로 향할 수 없다.
“아뇨. 방법은 있습니다.”
헬레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남부로 향하는 길이 하나 더 있어요.”
“난 너희한테 무리를 강요할 생각도, 이유도 없어.”
“무리가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면 될 뿐이에요.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대로大路입니다.”
시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회귀자다. 또, 코르디스 제국의 제5황자다. 하지만 베리벨롬에서 제국 남부로 향하는 또 하나의 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길이 왜 잘 알려지지 않았지?”
“일 년 중에 특정한 때만 지날 수 있습니다. 겨울, 정확히는 열한째 달 열한째 날부터 둘째 달 둘째 날 사이에만. 저희도 파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요.”
“아주 요상한 길도 다 있군. 길도 계절을 타나.”
흥미가 돋았다. 헬레나의 말대로라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아메투스를 더 쉽게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묘한 마음이 부풀어 그를 떠밀었다.
“그 길은 왜 계절을 타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 헬레나 부단장?”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 길에는…….”
헬레나가 작게 속삭였다.
“…신神이 있거든요.”
57화
“…신神?”
시온이 눈을 두어 차례 깜박이며 되물었다.
“길이 신의 것이라고?”
“정확히는, 그 길을 포함한 골짜기 일대가 모두 그렇죠. 인근 마을은 오래 전부터 루베코 골짜기의 주인을 신으로 모셔 온 모양입니다.”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는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지만 그렇다기에는 헬레나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보이지 않는다.
“진짜 신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아주 강력하고 오래된 존재가 그 골짜기를 다스린다는 건 확실합니다.”
시온은 헬레나의 흉터 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농담하는 기색이 아니다. 그는 믿을 수 없었지만 믿어야 함을 깨닫고는 입술을 매만졌다.
“…그래도 이상한걸.”
시온이 발을 두어 차례 탁탁거렸다. 그들이 딛고 선 땅이 어디의 영토인지 생각해 보라는 투다.
“여기는, 코르디스라고.”
코르디스.
신을 용납하지 않는 인간의 제국.
제국은 모든 종류의 신앙과 모든 종류의 숭배를 엄격히 금한다. 설령 그것이 제국의 주인, 황제를 향한다고 해도 다르지 않다. 제국은 모든 이에게 복종과 충성을 요구하나 그것을 숭배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는 받기를 단호히 거부하다 못해 탄압해 왔다.
“진짜든 아니든 신이라 불리는 괴물이, 제국의 영토에 대고 토지권을 주장한단 말이잖아?”
대제국 코르디스의 땅에 제 토지권을 주장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다만 이 쉽지 않은 일을 하고도 용납받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는 당연하게도, 황실로부터 정당하게 다스릴 권리를 부여받은 경우다. 코르디스 황실은 자기네가 수여해 준 권리에 트집을 잡을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은.
둘째는, 토지권의 주장이 아무런 효력도 근거도 없는 경우다. 이를테면 레토 콜레스의 한 헛간지기가 여기에 속한다. 그는 종종 셰호 강이 제 가문의 것이라며 허락 없이 강물을 마시면 설령 콘티누아 대제에게라도 정당한 대가를 받아 내겠다는 발칙한 발언을 종종 내뱉는데, 단 한 번의 수금도 성공한 전적이 없을뿐더러 시도조차 하지 않기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곤란한 것은 세 번째의 경우다.
감히 허가 없이 코르디스의 영토 한 조각을 제 것이라고 주장한다. 헌데 그럴 만한 힘이 있고, 여러 가지 이권이나 전통 따위가 아주 복잡하게 얽혔으며, 그렇게 얻으려는 땅이 아주 쓸데없기까지 한 경우.
이 셋째 경우에 대해서 제국은 때때로, 아주 때때로(정확히는 천 년에 세 번 정도 꼴로) 그런 주장을 암묵적으로 용납하곤 한다. 루베코 골짜기의 주인, 뿔난 흰 뱀 라크로샤가 바로 이 셋째 경우에 속한다.
“이전에 들렸을 때 인근 주민들에게 물었더니, 그가 루베코 골짜기에 터를 잡은 건 호투스 시절이라더군요.”
“…코르디스보다 오래되었으면 적어도 천 년은 묵었겠네.”
“그렇겠죠?”
“…굳이 그런 괴물이 도사린 길로 지나야 하는 건가?”
시온의 물음에 헬레나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마을로 나오는 일도 없고 해를 끼치지도 않는답니다. 공물 따위를 요구한 적도 없고.”
“그럼 왜 신이라 부르는데?”
“홍수가 나거나 했을 때 나타나 여러 번 도와주었다는군요.”
“…아주 인간적인 괴물이군.”
말대로라면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다만 불안한 점이 없지는 않았다. 들어 본 적 없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무시하기에는 매력적이다. 특무대가 틀어막은 길목을 뚫거나 어린아이 몸으로 산을 넘는 것보다야.
‘하긴, 내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는 회귀자다. 하지만 제국 방방곡곡 모든 곳의 모든 이야기를 알 수야 없다. 애초에 그는 코르디스보다 서방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냈었다.
‘…점쟁이 놈에게 따라잡혀서는 안 될 테니까.’
지금도 옥색 눈을 부라리며 그를 쫓고 있을 사내를 떠올리면 가슴께가 섬칫하다. 그를 쫓는 사내가 점쟁이 아메투스임을 생각하면 수단을 가릴 때가 아니다. 아주 약간의 불확정 요소 정도야 감수할 수밖에.
“좋아, 서두르지.”
* * *
골짜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인근 마을에서 절인 고기를 몇 상자 구매했다. 혹시라도 루베코 골짜기의 주인을 마주했을 때를 위함이라 했다. 그는 인간이 절인 고기를 아주 좋아한다 했다.
채비하고 걸음을 옮겼다. 시온은 행렬의 앞쪽, 헬레나 부단장의 옆에 있었다. 헬레나는 시온을 늘 곁에 두었는데 단원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도 아이를 귀여워할 나이가 되었거니 했다.
시온 폴링라이트의 손에는 작은 새장이 들렸다. 안에서는 세 마리의 새가 지저귀는 중이었다. 헨리 호르비는 대롱을 매만지며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시온, 그건 뭡니까… 아니, 뭐니?”
자기도 모르게 존대를 하려던 헨리 호르비는 시온의 서늘한 눈빛을 받고 황급히 말을 낮추었다. 헨리가 눈을 내리깔고 시온은 언제 노려봤냐는 듯 싱긋 웃으며 답했다.
“새장이에요, 아저씨.”
“…그건 나도 아는데, 왜 들고 있나 해서.”
“부단장님께 못 들었어요? 식사 시간에 말했던 듯한데.”
“새장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어.”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길을 왜 평소에는 지나지 못한다 했어요?”
“독뱀이 들끓는다 했지. 뱀들이 잠에 빠지는 열두째 달에서 둘째 달에 사이만 예외고.”
“잘 아시네요. 그런데 모든 독뱀이 같은 수면 습관을 가진 건 아닌지라, 한 이백 년 전까지는 뱀에 물리는 사람이 종종 나왔던 모양이에요.”
목숨을 잃기까지 한 경우는 거의 없지만 보통은 아주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시온은 헬레나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옮긴다.
“그래서 여기 사람들의 선조가 골짜기의 주인에게 부탁을 했답니다.”
“무슨 부탁을?”
“이 골짜기에는 새가 살지 않으니 만약 새소리가 들린다면 사람이 지나가는 것으로 알고 독뱀들이 숨게 해 달라고.”
“아하… 이 골짜기의 주인은 꽤 괜찮은 괴물이군…….”
헨리 호르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온의 새장 속에 든 새의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목청이 꽤 우렁찬 종류라는 건 알았다. 저 새를 날려 독뱀들을 숨게 만드는 것이다.
“또, 뱀은 없어도 독 안개가 남아 있나 확인하는 목적도 있대요.”
“그건 새한테 잔혹한 이야기인걸.”
“그렇다고 아저씨를 보낼 수는 없잖아요.”
“…….”
헨리가 입을 다물고 부르르 떨었다. 시온은 악동처럼 미소 지었다. 골짜기의 입구가 보였다. 뱀이 잔뜩 살 법한 음산함이 가득했다. 헬레나가 목소리를 내리깔며 그를 불렀다.
“시온, 새를 날려라.”
그녀는 윗사람처럼 굴었다. 시온은 아랫사람처럼 쪼르르 달려 나갔다. 단원들 앞이니 당연했다. 시온은 가장 앞에서 새장 문을 열고는 한 마리 새를 날려 보냈다. 갈색 깃털 퍼득이며 날아오르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삐르르, 삐르르르르- 하는 소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귀여운 생김새와는 달리 목청이 우렁찼다. 골짜기 구석까지 울리니 독뱀들도 숨겠지. 시간이 퍽 지나서도 안쪽에서 삐르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전한가 봅니다.”
“말을 몰아라.”
헬레나의 쥬엣 곡예단이 걸음을 떼었다. 그들은 모두 합해 일흔이 넘는다. 사람 없이 짐만 실은 마차가 여섯 대다. 곡예 기구나 천막 따위가 있으니 아무리 줄여도 한계가 있다.
골짜기 사이로 난 길은 그렇게 넓지만은 않았다. 사람이야 얼마든지 지나겠지만 마차가 지나려니 곳곳에서 손길이 필요해졌다. 특히 음산한 분위기 탓에 말들이 쉽게 겁을 먹었다.
하지만 곡예단원 누구도 곤란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단련된 공작원이다. 그 신체는 범상치 않은 정도를 훌쩍 넘었고, 사람 눈길 없으니 평소처럼 힘을 아끼지 않아도 된다며 되려 후련해했다. 묘한 마음이 그들을 떠밀었다.
“아, 사람 눈 신경 안 써도 되니 아주 편한걸. 부단장, 앞으로도 종종 이런 길로 다니시죠.”
헨리 호르비는 마음껏 대롱을 불었다. 연기로 된 표범이 튀어나왔다. 헨리는 제 발로 걷기도 귀찮았는지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기로 된 표범이라도 맹수는 맹수인지 말 몇 마리가 지레 겁을 먹고 걸음을 멈추었다. 펜-호우칠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말했다.
“헨!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하여간 내가 못 살아!”
펜-호우칠은 얼핏 소녀처럼 보일 만큼 체구가 작았다. 그러나 고개를 푸르르 흔든다 싶더니 이내 말 두 마리를 너끈히 들쳐 맬 만큼 거대한 늑대인간으로 화했다. 늑대인간이 지친 말을 업자 차력사 폴텔이 껄껄 웃으며 나섰다.
“뭘 이 정도로 그래. 내가 끌지 뭐.”
폴텔은 어렵지 않게 마차를 끌었다. 물론 혼자, 말 두 마리가 끌던 것을, 오히려 더욱 빠르게. 로텐과 리테 쌍둥이도 숫자를 더욱 불리더니 앞다투어 짐을 들었다. 그들의 행진은 평시보다 두 배는 빨랐다.
‘반가운 모습인데.’
시온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쥬엣 곡예단은 여전했다. 그가 돌아온 미래에서도 그들은 종종 이렇게 웃고 떠들었다. 그리 걷다 보니 연기 표범에 올라탄 헨리가 슬쩍 다가와 또 말을 걸었다.
“큼, 지금은 존대해도 괜찮지요?”
“그래. 안 들리겠네. 왜?”
“저, 펜 말입니다.”
“펜? 펜-호우칠?”
시온이 기절한 말을 업고 가는 늑대 여인을 손가락질했다. 헨리 호르비가 고개를 움직여 동의를 표했다.
“그녀는 널 헨이라고 부르던데.”
“예, 펜과 헨, 어감 좋지 않아요?”
“아주 너다운걸.”
“…칭찬이죠?”
“어떨까?”
헨리가 뚱한 얼굴로 하고 시온이 손사래를 쳤다.
“어쨌든, 그녀가 왜?”
“사실 제가, 어르신만 젠티움에 모셔 드리고 나면… 그녀에게 청혼하려고 해요.”
“어? 뭐?”
“펜에게 청혼하겠다고요. 공작원 부부가 드문 것도 아니니까요.”
“…꼭 이 시점에 그런 말을 해야 해?”
외진 골짜기, 자욱한 안개, 당장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것만 같고 정말로 평소에는 뱀 떼가 우글거리는 곳. 하지만 헨리 호르비는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하지 못할 말 같아서요. 반지도 준비했어요. 이번 임무만 끝나면 저는…….”
“아어아아아!!! 안 들린다!!”
“제 걱정은 말고 가세요! 뒤따라 갈게요!”
“조용히 해! 불길하게!”
시온이 버럭 소리 지르며 자리를 떴다. 헨리는 킬킬 웃었다. 몇 주 같이 지냈다고 편해진 모양이다. 저렇게 농담도 하다니. 시온은 불길함을 애써 떨치며 쌍둥이들의 옆에 섰다. 로텐과 리테가 입술을 열었다.
“저기 혹시…….”
“혹시 저기…….”
“나중에 돌아가서도 아는 체해도 될까요?”
“또 같이 놀아 주시겠어요?”
묘했다. 쌍둥이는 마치 인생의 마지막처럼 물어 온다. 시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 자식들은 또 왜 이래?’
황급히 걸음을 돌리는데 중얼거리는 소리가 많다. 단원들이 하나같이 무어라 하고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귀에 박혔다.
“생각보다 깔끔한 골짜기잖아?”
“골짜기의 주인? 진짜 있기는 해? …어, 방금 뭐였지? 뭔가 길다란 게…….”
“착각이겠지. 신경 꺼.”
“…어, 저 나무! 저 나무……!!”
숨이 막혀 왔다.
“이, 뭔…….”
우스꽝스러운 말들이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헬레나 부단장까지도 눈을 멍하니 한 채로 아, 아버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따위의 중얼거림을 내뱉는 중이었다. 시온 폴링라이트만이 푸른 눈을 들었다.
“…아, 제기랄.”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58화
기묘한 기분이었다.
곡예단원들은 제각기 떠든다.
단련된 육체나 정신도 아무 힘을 쓰지 못했다. 그들은 그저 홀린 눈으로 중얼거린다. 불길한 말들. 다가올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언어의 집합들.
안개가 자욱하다. 끈적이는 피부의 무엇이 꼭 달라붙은 것처럼 습기가 짙다. 삐르르, 하는 새소리는 어느새 멈추었다. 대신 새어 나가는 듯한 소리. 좁은 틈으로 바람 부는 듯 서늘하게, 스, 스스, 스---.
“…….”
징조들 가운데에서 시온 폴링라이트의 푸른 눈은 열띠게 푸르다. 어느새 열일곱의 ‘공상손가락’이 그의 주위에 머무는 중이다. 무언가 튀어나오면 당장이라도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수 있도록.
또, 마갑 발지아트. 검게 달라붙는 그림자 갑옷. 안에서 밧줄 더미가 토해졌다. 이전에 꿍쳐 두었던 놈이다. 검은 그림자가 움켜진 밧줄 위로 덮였다. 명검이라도 끊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나 돌아가면 올 거야…….”
“…저 안개, 저 안개, 다가오는 저…….”
“…서방에 가서도 우리랑 같이 와요, 여기로 와요…….”
“…그런 거였군요, 오고 있군요…….”
일관성없는 말 덩어리들 사이에 묘한 단어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헬레나 부단장도 헨리 호르비도, 펜-호우칠과 로텐과 리테 쌍둥이와 차력사 폴텔도 하나같이 입을 오물거리더니 이내 한목소리로 내뱉었다.
“…온다…….”
“…온다…….”
“…온다…….”
헬레나가 제 흉터 난 얼굴을 쓸었다. 그러고는 왼눈의 의안에 손가락을 박았다. 세게 박아 찢어진 눈꺼풀에서 피가 흘렀다. 피눈물 속의 읊조림.
“왔다.”
스, 스스스, 낮은 소리. 지나가는 것인가 내뱉는 것인가. 어둠 속에서 스치는 스, 스스스-. 피어오르는 안개, 자욱한 독무毒霧. 단원들은 끝내 입을 다문다.
“…….”
“…….”
“…….”
무엇이 왔다.
오고 말았다.
시온이 혀를 찼다. 안개는 그에게도 차올랐다. 다만 셉템 아르카나Septem arcana. 그림자 차원의 귀족마저 복종시킨 그의 영혼의 일곱 불꽃. 안개 따위로는 그를 어찌하지 못한다.
‘회귀 전부터 여전히, 손 많이 가는 녀석들.’
어둠 속에서 다가온 것이 있다. 쥬엣 곡예단원들은 넋이 나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한다. 회귀 전부터 부하였던 녀석들인데 신세까지 졌다. 가만히 놔둘 수야 없다.
열일곱의 ‘공상손가락’이 날았다. ‘공상손가락’에는 하나하나가 쇠를 부수는 힘이 있다. 일흔이 넘는 곡예단원을 한데에 짐짝처럼 모으는 것은 금방이었다. 옛 부하들을 피하게 한 시온은 으르렁대며 고개를 치켰다.
골짜기는 어둡다. 코앞의 단원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습하고 서늘한 바람은 뼛속까지 치밀어 더없이 시리다. 이토록 차고 습하고 어두운데 하늘에는 해가 있다. 저녁놀 주홍빛이 안개 너머로 보니 마치 선혈 같다.
하늘에 다리가 걸렸다.
골짜기 이쪽에서 저쪽으로, 길고 굵다란 무엇이 쏜살같이 타고 내린다. 나타났다 싶었더니 어느새 몇 차례나 굽이쳤다. 가지를 휘감고 바위 위를 미끄러지며 굽이굽이 꿈틀댄다. 그렇게 다가오는데 골짜기 위쪽에는 아직 놈의 몸통이 걸려 있다. 질리도록 기다란 몸뚱이였다.
냄새가 지독했다. 저것이 가까울수록 더했다. 악취만이 아니라 공기가 무겁게 달라붙었다. 사람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물을 마주하면 늘 이랬다. 익숙한 감각에 시온 폴링라이트가 입술을 핥았다.
거대한 몸뚱아리 뒤틀며 내려온 괴물은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어두움 사이로 스, 스스---하는 소리만 사방을 오갔다. 시온은 그 흔적을 다 좇을 수 없었다. 때문에 단원들을, 옛 부하들을 뒤로한다.
그리고, 홀로 앞으로.
“손님맞이라도 하러 나왔나, 골짜기의 주인?”
발지아트를 더욱 부풀린다. 검은 짐승의 형상이 되었다. 밧줄 위로도 작은 돌기들이 솟았다. 사람 살갗 정도라면 스치기만 해도 갈기갈기 찢어지리.
“통성명이라도 해 줄 테니 얼굴이라도 내놓지. 싫어?”
“---스---.”
대답은 없다. 대신 숨소리만 깊다. 시온은 밧줄을 꾸욱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들은 바 있는 괴물의 이름을 불렀다.
“낯가림이 심한가 보네, 라크로샤.”
* * *
골짜기의 주인, 라크로샤는 뱀이다.
생김새도 무엇도 산등성이에서 흔히 보이는 뱀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굳이 몇 가지 다른 점을 꼽자면, 온 비늘이 새하얗고 머리에 뿔이 났고, 마도 열차 수십 량輛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덩치를 가졌으며, 천 년을 넘게 묵었다는 것 정도. 그 밖에는 고대 호투스어와 네 별의 고대 마법을 구사할 줄 안다는 정도의 사소한 사항뿐이다.
“---스, 으---.”
안개 사이로 오가는 존재감에 시온이 몸을 굳혔다. 한순간 뱀의 눈을 보았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샛노란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 힘을 바로 알아채고 말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의 육신을 채찍질했다.
스, 스스, 스---. 이리저리 소리가 오간다. 구불대는 몸통이 길다. 시온과 쥬엣 곡예단원을 둘러싸듯 빙글빙글 돌다 천천히 다가옴을 느꼈다. 공기가 무겁다. 폐가 빵빵해져 숨이 가쁠 만큼 묵직했다.
“-라아- 크로샤아-.”
뱀의 머리통은 마차만 했다. 하얀 비늘은 강철처럼 번들거리고 두 눈동자는 힘으로 가득하다. 머리 위에는 세 개의 뿔이 솟았다. 시온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치고 말았다.
“그-으래, 그-게 내 이르-음이지.”
하.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생각보다…….’
뱀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니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더, 훨씬 더 괴물인걸…….’
고작 마수 정도가 아니었다. 환수 중에도 칭송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비교하자면 대마녀의 권속, 생닭 모습 했던 제베르크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다만 제베르크와는 달리 폴링라이트의 이름에 복종하지는 않겠지. 그는 옛 부하들을 곁눈질했다.
‘…다는 못 살리겠어.’
아무리 시온이라고 해도 일곱 비밀 중 둘만 가지고는 도저히 맞설 만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만큼은 해 보아야 했다. 밧줄을 세 겹으로 쥐었다. 하나로는 저 몸뚱이에 도저히 무엇도 할 수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너, 어-.”
뿔난 흰 뱀은 천천히 다가온다. 무거운 공기가 짙은 독무 머금은 채로. 시온은 천천히 간격을 잰다. 그의 눈 속에서 두 번째의 불꽃이 타오른다.
일곱 비밀이 낳는 일곱 가지 기예.
그 두 번째.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
“…스으……?”
라크로샤가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시온에게 다가서려 하지만 다가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대한 괴물이라도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은 유효. 시온이 눈을 번뜩였다.
‘지금!’
땅에서 밧줄이 튀어나왔다. ‘공상손가락’으로 급하게 바닥에 깔아 놓은 것들을 또 ‘공상손가락’으로 단번에 끌어당겼다. 마치 어부가 그물을 올리듯. 발지아트로 강화된 밧줄이 뱀의 비늘 사이로 파고든다.
“…슷……?”
쇠를 움켜 부수는 힘을 가진 공상손가락 열일곱이 밧줄로 뱀의 머리를 칭칭 묶었다. 그런데 라크로샤는 마치 거미줄에라도 닿았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을 뿐이다. 발지아트를 두른 밧줄임에도 정말 거미줄만도 못하게 뚝뚝 끊겨 나갔다.
터무니없는 존재였다. 저 기다랗고 기다란 몸 중 고작 머리통 하나 묶지 못했다. 하지만 예상한 바. 잠깐 시선을 끄는 걸로 충분했다. 밧줄 끊어 낸 흰 뱀은 시온을 찾지만 그는 거기에 없다. 이미 뱀의 턱 아래에서 짓쳐 들고 있다.
남은 밧줄과 ‘공상손가락’으로 뱀의 아랫니를 묶어 당겼다. 쩍 벌어진 아가리로 뛰어드는 시온의 손에는 검은 가시가 길다. 그것으로 뱀의 아가리 안쪽을 찔렀다. 그리고 빼어 다시 찔렀다. 라크로샤가 그를 털어 내기까지 아홉 번이나 그렇게 했다. 뱀의 피가 비산했다.
“-스, 사아아아---!!”
입속의 고통에 라크로샤가 머리를 뒤흔들었다. 허무하게 튕겨 나간 시온은 바위에 꽝 소리 나게 부딪혔다. 마갑도 충격을 다 막아 주지 못했다. 몇 주는 고생하겠군, 빌어먹을. 목 너머에서 피가 울컥 솟았다.
‘…거, 빨리도 낫는군.’
라크로샤의 아가리 속에는 시온이 남긴 상처가 있다. 허나 곧 없어졌다. 빈틈을 타 입힌 상처가 순식간에 나아 버렸다. 그 대가로 시온은 피를 울컥거리고 있는데. 시온이 자빠졌다. 어떻게든 일어서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아, 젠장, 진짜로… 이 빌어먹을 어린애 몸뚱이 같으니…….”
회귀 직후로부터 계속 나름 단련한답시고 해 왔는데도 이렇게 약하다니. 그는 ‘공상손가락’으로 제 몸을 잡아끌고야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뿔난 흰 뱀의 노란 눈은 그런 시온을 매섭게 바라본다.
“…너-어…….”
“왜 부르냐, 뱀.”
“이르-음이 무-어지?”
“내 이름?”
회귀황자가 피를 닦으며 쓰게 웃었다.
“시온.”
“…시-온?”
“그래. 진짜 내 이름이다.”
“이사-앙하군.”
라크로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앚았잖아. 그럼 왜-애 날 공격했지-?”
거대한 뱀이 마찬가지로 거대한 눈알을 데굴거린다. 찢어진 눈동자는 시온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렇게 된 거 숨을 돌릴 시간이나 벌자 싶어 마음대로 뜯어보게 두었다.
“그-으래. 그-음발, 푸-른 눈. 그리고 이 거-짓말 냄새나는 영혼까지-.”
“내 영혼 냄새 안 나거든.”
“아니. 난다. 아주 풀풀 썩은 내가 진동을 해. 손이 있으면 코를 막고 싶을 만큼.”
“…왜 욕할 때만 정상적으로 말하냐?”
라크로샤는 들은 척도 않고 혓바닥을 낼름거렸다.
“-너, 시-온 폴링라이트가 맞는데, 왜?”
“…나를 알아?”
시온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뿔난 흰 뱀은 폴링라이트의 성씨를 말했다. 회귀 이후로는 제베르크에게만 속삭였던 비밀이다. 깊은 비밀 중 하나 폭로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비밀꾼이 일어섰다. 폴링라이트를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상황이 다르다. 검은 갑옷이 꾸득거리며 다시금 몸을 덮었다. 뿔난 흰 뱀은 수백 개의 송곳니를 드러내며 말했다.
“모-를 리가 없지.”
스, 스스스. 바람 새는 듯한 저 소리가 뱀의 웃음소리임을 깨닫는 데는 꽤 시간이 필요했다. 뱀은 몸을 꿈틀대며 웃었다. 아직 골짜기 위쪽에, 하늘 옆에 다리처럼 걸린 몸통까지 온통 꿈틀대며 키득대었다.
“나는, 너-얼 기다렸거든. 아-아득한 그때, 호투스의 때로부터, 겨울이 천 번이 지-이나도록---.”
뱀이 아가리를 벌렸다. 라크로샤는 키득대다 못해 기쁨에 찬 괴성을 지르려다 애써 참아 내었다. 그렇게 웃어 젖히면 깊은 독 숨이 내뿜어질 테고, 그러면 줄곧 기다려 온 이 꼬마가 죽어 나자빠질 것 아닌가. 잠깐 부딪혀 봤더니 살짝 건드리면 부서질 듯 연약하던데.
“너, 오직 너-어를---.”
뱀이 힐쭉 웃었다. 역삼각형 머리를 시온의 코 앞에 들이대며, 갈라진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천 년의 기다림을 곱씹었다.
“---시-온 폴링라이트를 기-다려 왔어.”
59화
뿔난 흰 뱀 라크로샤의 말에 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입가의 피를 닦으며 발지아트를 거두었다.
“나아-를 기다려-왔다고-?”
“따아-라 하지 마-라.”
골짜기의 주인이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뱀의 구강 구조로 인간의 말을 하려면 말투가 약간 특이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불쾌함은 금방 사라졌다. 어찌 되었든 천 번의 겨울을 넘어 시온 폴링라이트를 만났으니까.
스, 스스, 스……. 뱀이 소리 죽여 웃었다. 자기보다도 커다란 눈알을 보며 시온이 턱을 긁었다. 의문이 많지만 먼저 할 것이 있다.
“내가 목적이라면 저들은 관계없다는 이야기겠지.”
“그-렇지. 난 인-간에게 관시-임이 없어-.”
“그럼 일단 보내. 이야기는 그 뒤에 하지.”
“따스-으하기도 해라---.”
라크로샤가 머리를 숙였다. 제 위로 올라타라는 듯하기에 시온은 망설임 없이 그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까 입은 상처가 아파서 발에 일부러 꾹꾹 무게를 실었다. 그러나 라크로샤는 느끼지도 못한 듯하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좋-아. 내 거처로 올-라가지-.”
“보내 주라니까.”
“저 위-에 가-면-.”
흥. 코웃음 치면서도 흰 뱀의 머리 위에 자리 잡았다. 비늘을 붙든 후 대가리를 두어 차례 퍽퍽 쳤다. 준비되었으니 출발하란 신호였다. 라크로샤는 내려올 때처럼 쏜살같이 골짜기를 타고 올랐다.
기다란 몸이 구불댄다. 올라타서 보니 정말로 길고 길었다. 라크로샤의 머리통은 마차만큼이나 큰데도, 몸 전체로 보면 마치 실 끝에 달린 보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확한 길이는 알 수 없어도 베리벨롬 성벽을 일곱 바퀴 반은 감쌀 수 있을 것 같았다.
골짜기 중턱쯤에서 뱀이 멈추었다. 내려 보니 한데 모인 쥬엣 곡예단원들이 있었다.
“이제 보내 주우-마-.”
뱀은 눈을 꿈벅이며 스, 스스, 하는 소리를 내었다.
“아, 기-억을 지-워야지-.”
“기억을 지울 수 있나?”
“가-안단해.”
“그럼 부탁 하나만 하지.”
시온이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에서의 일뿐만 아니라 나에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워 주겠어?”
“스-으으음? 그-렇게 하지.”
라크로샤가 갈라진 혓바닥을 튕기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고대 호투스어語였는데, 일종의 주문처럼 들렸다. 골짜기의 주인이 주문을 욈에 따라 안개가 너울거리며 쥬엣 곡예단원들을 감쌌다.
‘이렇게 떠날 줄은 몰랐는데.’
쥬엣 곡예단원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했다. 저들은 시온을 잊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제껏 그랬듯 밀정 활동을 계속하겠지. 시온이 콧잔등을 매만졌다.
‘신세 졌다, 쥬엣 곡예단.’
* * *
헨리 호르비가 가장 먼저 눈을 떴다.
환술에 능한 만큼 정신에 작용하는 종류의 힘에 남들보다 조금은 내성이 있었다. 물론 조금일 뿐이라 시온에 관한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으음……?”
그는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화감이 있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같은데……. 스, 스스. 안개가 치밀고 위화감이 사라졌다. 곡예단원들이 하나하나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픈데.”
“…우리, 왜 멈췄지?”
많은 이가 위화감을 느꼈다. 서방의 공작원인 만큼 하나같이 눈치가 빠른 탓이다. 허나 스, 스스, 스, 하는 소리가 나고 안개가 너울거리며 위화감을 지워 내었다.
헬레나 부단장이 심각한 얼굴로 한쪽 얼굴을 싸매었다. 의문이 짙었다. 그런데 무엇에 의문을 품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도저히 풀어내지 못할 실타래를 목구멍 가득히 삼킨 기분이었다. 안개가 다시 한번 일렁였다.
“…그래, 젠티움.”
헬레나가 작은 중얼거림을 토했다.
“젠티움으로 가야 했지.”
“맞아요. 우리는 젠티움으로 가야 해요.”
헨리 호르비도 어느새 대롱을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였지……?”
“그러게요, 왜였을까……?”
“일단 가자. 그래야 하니까.”
“그렇게 하시죠.”
안개가 등을 떠민다. 어서 출발하라고. 여기에서 있던 일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시온이라는 이름의 꼬맹이까지도 모두, 여기에 놔두고 돌아가라고. 누구도 거부할 수 없었다.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몰아라.”
쥬엣 곡예단이 길을 떠났다.
거물 행세하던 어린아이는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로.
* * *
“됐-다.”
“솜씨가 좋은걸.”
“천-년이나 사-알다 보니-.”
라크로샤가 몸을 들썩였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싶었던 듯한데, 애석하게도 이 뱀에게는 어깨가 없었다. 시온은 떠나는 쥬엣 곡예단을, 회귀 전의 옛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한숨 놓았네. 직접 뒤처리할 수고가 줄었어.”
“-스스스-스-.”
젠티움에 가서 헤어질 때로 거짓말을 잔뜩 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옛 부하들이라도 비밀이 새어 나가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쉽게 풀리니 고마운 일이다.
“이-제 이야기할 준-비가 되었나-?”
“덩치답지 않게 성격이 급하군. 천 년이나 기다렸다면서 왜 이리 재촉해?”
“처-언년이나 기다렸으니 마음이 그-읍하지.”
“뭘 이야기하려는지 몰라도 어서 해 봐.”
시온이 코웃음 쳤다.
“나도 물어볼 게 많거든.”
골짜기 위에서 그들은 멈추었다. 하늘에 달이 걸렸고 안개가 짙다. 시온이 흰 뱀의 머리에서 내려왔다. 다시 마주 보니 새삼 거대하다. 그러나 시온의 눈은 더욱 열띠다.
“나를, 폴링라이트의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뿔난 흰 뱀?”
“내-애가 아는 게 겨-우 그것뿐인 줄 아나-?”
“내 뭘 알고 있기에?”
“무-얼 아냐고오-?”
라크로샤가 제 머리통을 시온에게 들이밀었다. 거대한 노란 눈동자는 어찌나 반질거리는지 시온의 모습이 비쳐 보일 정도였다. 눈동자에 비친 그는 어린아이였다. 연약하고 초라했다.
“시온, 시-온.”
스, 스스스……. 도통 적응되지 않는 기묘한 뱀 웃음소리. 당장이라도 ‘공상손가락’으로 혓바닥을 밀어내고 싶지만 밀리지도 않겠지. 라크로샤가 툭 내뱉었다.
“돌-아온 자.”
“……!!!”
시온이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너……!”
회귀回歸! 이 뱀은 그가 회귀자라는 비밀을 폭로하고 있다. 이 세계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오직 시온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비밀 폭로당한 비밀쟁이는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어떻게……!”
“어-떻게-?”
흰 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작은 동작인데도 골짜기 전체가 흔들렸다. 떠나던 헨리 호르비가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라크로샤는 다시금 시온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까부터 이사-앙하군.”
노란 눈동자는 의문으로 가득하다.
“계에-속 왜, 왜-애 묻는데 혹시 ---듣지 못-했나-?”
“…뭐를, 듣지 못했다고?”
시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회귀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탓에 아직 당혹이 채 가라앉지 않았다. 라크로샤는 그런 시온을 보며 되물었다.
“내-게 이 모든 사-아실을 알려 준 것도, 나-알 천 년 동안 기다리게 만든 것도, 널 도-올려보낸 것도---.”
“…….”
“모-두 같-은-.”
속에서 무언가 치밀었다.
“-너도 잘 아는 그-녀일 텐데.”
맴돈다. 가장 오래된 미래이자 가장 새것의 과거가. ‘허무하게도 끝났구나, 시온.’ 일곱 불꽃 너머에서의 속삭임. 흰 뱀은 쉿쉿거리며 말을 잇는다.
“천 년 전에- 부탁받았지. 돌-아온 자를 기다려 달라고. 그리고 안내하라고.”
“…자세히…….”
“쉬-이. 조-용히 따라와라,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라크로샤가 몸을 뒤튼다. 골짜기 가장 높은 곳의 바로 아래에는 커다란 굴이 있다. 라크로샤의 둥지로 보였다. 흰 뱀은 굴의 깊은 곳으로 시온을 떠민다. 거대한 몸뚱이가 그러하니 열한 살 어린 몸은 떠밀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나-안, 이미 충-분히 오래 기다렸어-.”
그들은 굴을 타고 들어갔다. 라크로샤의 몸뚱이만큼이나 널찍했다. 곳곳에 비늘에 긁힌 자국이 수두룩했고 독뱀들이 바글댔다. 축축해서 발을 옮길 때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했다.
굴과 굴 사이에는 널찍한 공동이 더러 있었다. 개중에도 유난히 큰 공동에서 라크로샤는 시온을 멈추어 세웠다. 그러고는 구석의 지푸라기 따위를 코끝으로 밀어 치웠다. 작은 통로가 드러났다.
통로는 라크로샤의 눈동자 정도의 크기였다. 당연히 저 흰 뱀을 위한 길로는 보이지 않았다. 뱀의 굴 사이에 놓인 사람을 위한 길. 바닥이나 벽도 낡았을 뿐 인간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역력하다.
“들-어가라, 시-온.”
라크로샤가 턱짓했다. 흰 뱀은 들어가지 못하는 길이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물러설 수도 없다. 뿔난 흰 뱀이 쉿, 하는 소리를 내었다.
“마-지막 마법사의 선-물이 기다리니-.”
* * *
통로는 길지 않았다.
끝에서 문을 보았다.
문패는 고대 호투스어語로 되었다.
시온은 그것을 읽었다.
[이곳, 마지막 마법사를 섬긴다.]
“…역시, 그녀의 신전인가.”
문을 밀어젖혔다. 네모난 흰 돌들로 된 벽과 바닥은 고대 호투스 양식이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짜임새가 있다. 문을 마주 보는 벽에는 신상神像이 있다. 로브를 덮은 여인의 형태다.
“…….”
코르디스 이전에 호투스가 있었다. 여덟 기원신基源神이 다스리던, 낙원과도 같던 나라다. 호투스 팔신의 하나는 마지막 마법사라 했다. 여기 세워진 신상이 그녀의 것이다.
“…….”
시온은 신상을 들여다보았다. 빼어난 이목구비가 눈에 익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여인, 마지막 마법사.
천 년 전 숭배받던 기원신基源神은 수많은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휘저어 왔다.
한때의 이름은 센 소르티.
영원한 제일마법사Primus Magus.
또 한때의 이름은 아르티스 아테아.
팔리지 않는 소설가.
지금의 이름은 벨루치안 폴링라이트.
은룡마도국의 대마녀이자 시온의 스승.
호투스 팔신중의 일원이자 제일마법사. 안 팔리는 소설가이면서 은룡마도국의 대마녀. 또, 시온 폴링라이트를 회귀시켜 준 장본인. 모두가 그녀다.
“…스승님.”
머리가 핑 돌았다. 안에서부터 무언가 치밀어 그를 끌어당겼다.
* * *
죽어 버린 나를 바라보는 내가 보였다.
“허무하게도 끝났구나, 시온. 그토록 열망하던 황제의 자리를 눈앞에 두고 쓰러지다니. 하지만 걱정은 말렴. 눈을 뜨면 과거일 거야.”
속삭이는 그녀 또한 보인다.
“그래, 회귀回歸. 또 한 번의 기회. 그런 약속이었잖아? 이번에는 닿아 봐야지. 저 황제의 자리, 끝내 닿지 못한 숙명의 끝에.”
일렁이는 은색 불꽃 또한.
“자, 돌아가라, 시온 폴링라이트. 일곱 비밀 품은 영혼으로 대제국의 정점에 닿아 봐. 하지만 잊지 마. 마지막 비밀은 모든 걸 뒤집을 테니.”
시간이 뒤엉킨다. 실패한 영웅은 되살아나서 과거로 돌아간다. 그런 광경이었다.
그저 기억이었다.
변할 수 없이 기억일 뿐이다.
* * *
그러나 시온 폴링라이트, 회귀자.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바꾸러 온 영웅.
그렇기에 그녀는 고개를 든다.
“이야, 이 기억에 닿았구나? 시온, 라크로샤를 만난 모양이야?”
키득거리며 손을 흔들기에 시온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때. 자기가 회귀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건?”
“그저 그렇네요.”
자기 기억 속에서 시온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언제 사념체를 남기신 겁니까? 남의 기억에 수작을 부릴 거면 말씀 좀 하시지.”
“내가 왜?”
여인이 웃었다. 그녀는 마지막 마법사이고 센 소르티이며 벨루치안 폴링라이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잔상이다. 시온 기억 속의 잔재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선명하다.
“못난 제자에게 일곱 비밀 심어 줘, 실패하니 회귀시켜 줘, 심지어는 선물까지 준비해 놓았는데 내가 더 뭘 해 주니?”
“…퍽이나 고맙군요.”
“어머. 할 말이 틀렸는데, 시온.”
여인의 머리는 은색이다. 레냐르의 금빛 도는 은발과는 또 다르다. 윤기 없는 데도 날카로운 빛을 품은, 칼날과도 같은 은銀. 또한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그녀는 키득 웃는다.
“무슨 선물을 준비하셨나요, 스승님, 하고 물어야지 않겠어?”
6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