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시온의 기억 속에서 여인은 새초롬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뭐 하는 거니?”
그녀는 제일마법사 센 소르티이다. 또, 대마녀 벨루치안 폴링라이트이며 숭배받던 마지막 마법사다. 무엇보다 시온의 하나뿐인 스승이었다.
“할 말까지 알려 줬잖니. 말도 이 스승이 대신해 줘야겠어?”
“아, 정말…….”
“자, 빨리!”
시온 폴링라이트는 말 없는 사내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떠밀어 대면 쑥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제자를 위해 선물도 준비해 놓았다는데. 시온이 애써 웃음을 머금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자를 위해 무슨 선물을 준비하셨나요, 스승님?”
“음…….”
마지막 마법사가 인상을 썼다. 오랫동안 그녀를 가까이서 보아 온 시온은 곧바로 낌새를 읽었다. 저건 못마땅해하는 얼굴이었다. 시온이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아, 왜요. 하란 대로 했잖습니까.”
“막상 등 떠밀어 들으니 그렇게 기쁘지 않은걸. 맥이 탁 빠지네.”
여인이 손에 든 물건을 다시 제 품에 넣었다.
“조금 이따 다시 물어보렴. 나도 선물을 준비한 보람 정도는 느끼고 싶은걸.”
“하여간, 여전히…….”
변덕스러운 여인이다. 그래서 키득 웃었다. 한없이 그의 스승, 벨루치안 폴링라이트다웠다. 벨루치안도 마주 웃어 주었다. 온 세상에 단둘뿐인 폴링라이트끼리.
여전히 기억 속이다. 시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쥬엣 곡예단을 보내고 라크로샤를 만났다.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모양이었다. 그는 턱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선물, 천 년 전부터 준비시켰다고 들었는데요. 계속 기다렸다던데.”
“아, 라크로샤? 왜, 불쌍하니?”
여인이 손을 내저었다.
“호투스 적부터 날 돕던 녀석이란다. 원래 기다리는 걸 좋아하고 할 것도 없어 보이기에 일을 맡겼지. 괜히 이리저리 떠돌다 사람이나 해치는 쪽보다는 훨씬 낫잖아?”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어떻게 알았냐고? 네가 회귀할걸?”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을 준비했단 건, 천 년 전부터 모든 걸 알고 있단 소리다. 시온의 회귀와 그 전의 실패까지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특기잖니, 시온.”
마지막 마법사가 배시시 웃었다.
“나는 마법사야. 알아야 할 걸 모르지만, 알지 못할 걸 알지.”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보았기에 그러하다. 앎에는 대가가 따른다. 지독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 깨달음은 언제나 비가역적이다.
“그래도 기대는 말렴.”
속삭임.
“회귀는 네 생각보다 더 큰 힘이야. 지금 네 시대의 나는 널 알지 못할 거란다. 만약 마주치면 설득하느라 고생 좀 할 거야.”
“성격이 워낙 뭐 같아야죠.”
“그냥 욕을 하지 그러니?”
시온은 거절하지 않았다.
“스승님 소설을 읽었는데 아주 더럽게 재미없었습니다.”
“…진짜 욕을 하는구나. 열심히 썼는데 말이다.”
“열심히가 아니라 잘 쓰셨어야죠.”
“…닥치렴, 제자야.”
사념체만 아니었어도 사흘은 매달아 놨을 거야. 사념체라서 말했습니다. 여인이 매섭게 쏘아보고 시온이 킬킬 웃었다. 대마녀는 은발을 쓸어 넘기며 되물었다.
“그래도 발지아트를 얻었나 보네?”
“어렵지 않았습니다.”
“걸작이라 할 만하지. 아직은 어린애라 쓰기 어렵겠지만, 앞으로도 퍽 유용할 거야.”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센 소르티는 말했었다, 마갑 발지아트는 사용자의 신체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강한 자가 사용할수록 제힘을 더 끌어낸다고. 열한 살 시온은 아직 발지아트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 달라지겠지.
“그보다 시온, 슬슬…….”
에휴. 스승이 눈치를 주고 제자가 한숨 쉬었다. 그는 짐짓 거드름 피우는 듯한, 연기 투가 농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참, 선물을 준비하셨다면서요?”
“어머. 어떻게 알았니?”
대마녀가 소녀처럼 입을 가렸다. 나이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하고픈 말이 있었으나 한 차례 꾸욱 삼켰다. 대신 가식적인 웃음과 함께 말을 토했다.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 주시니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대체 뭘 준비하셨는지, 이 제자에게 알려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말을 참 잘하는구나!”
“누구 제자인데요.”
“그 말이 거짓말이래서 그렇지.”
“…슬슬 주기나 하시죠.”
뚱한 얼굴의 시온을 보며 대마녀가 눈웃음쳤다. 그녀는 제 입속에 손을 넣더니 뿌득, 하고는 무언가를 뽑아 던졌다. 그녀의 작은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커다랗고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사람보다는 거대한 짐승의 것처럼 보였다.
“내 어금니란다.”
이빨을 받아 든 시온이 미소 지었다. 익숙한 힘이 느껴지고 영혼이 감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기억 속 세계보다 더욱 깊이 잠든 일곱 비밀이 기뻐하고 있었다. 자기들을 심은 이의 힘을 느낀 것이리라.
“회귀하면 셉템 아르카나가 닫힐 것도 아셨군요?”
“확신에 가까운 예측이었지. 온전히 네 힘이라고 하기는 힘드니까. 지금은 어디까지 열려 있니?”
“겨우 두 개입니다.”
“두 개?”
생각보다 적은 숫자에 센 소르티가 되물었다. 첫째와 둘째 기예라면 ‘공상손가락’과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이다. 화려하기는커녕 밋밋한, 검으로 따지면 손잡이만 있는 꼴이다. 셉템 아르카나의 위용을 드러내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마력도 약해 보이네. ‘공상손가락’은 몇 개나?”
“애를 써서, 스물셋.”
“많이 힘들었겠는걸.”
“아, 말도 마세요.”
시온 폴링라이트는 무언가 울컥 솟는 듯했다. 돌이켜 보다 보니 따져야 할 것이 떠오른 까닭이다.
“참. 왜 계승전 첫날로 보낸 겁니까! 진짜 생고생을 했잖아요!”
“어머, 내가 알고 그랬겠니?”
“…그렇죠?”
항의하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해도…….”
“사실 알고 했단다. 재밌을 거 같아서.”
왈칵하는 소리가 난 것만 같았다. 누그러지던 불길에 기름이 부어지는 소리다. 계승전 중의 고생을 떠올린 시온의 눈썹이 분노로 휘어지고 벨루치안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농담이란다, 시온.”
대마녀의 눈동자는 고요하다. 그 안에는 은빛 우주가 펼쳐져 있다. 잔상일 뿐이라도 마지막 마법사. 호투스 팔신중의 일원. 시온을 압도하기에는 충분한 고요함 담긴 눈빛.
“그때가 옳았기에 그때로 보낸 거란다.”
“…그렇다면야.”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벨루치안 폴링라이트는 괴짜지만 그의 스승이다. 폴링라이트의 성씨를 줄 만큼 그를 아꼈다. 아끼는 방식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마음은 진실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다. 입을 다문 제자를 보며 스승이 눈짓했다.
“내 선물이 도움이 되겠니?”
“안 그래도 셋째 비밀이 머잖았습니다. 이거라면 며칠 안에 열겠군요. 넷째까지도 열릴 것 같아요… 시간은 다소 필요하겠지만.”
“다행이구나. 넷째 비밀은 특히 강력하지.”
“까다로울 뿐, 위력은 제일이지요.”
일곱 비밀에 일곱 기예, 셉템 아르카나.
셋째 비밀까지 열어야 비로소 영웅이던 시절의 흔적이라도 되찾았다 말할 수 있다. 시온이 미소 짓고 벨루치안도 그러했다.
“몇 가지 안배 정도는 더 해 놨단다. 네가 발견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은발의 대마녀는 제자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그녀는 사념체. 이 만남을 끝으로 사라진다. 아쉬움은 없다. 다만 약간의 염려, 그리고 열망.
“살아남거라. 그리고 이루어내렴, 우리의 숙명을.”
“제국은 무너질 겁니다.”
시온은 선언한다.
“코르디스는 폴링라이트의 이름에 무릎 꿇을 거예요.”
“그래.”
대마녀가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술 위에 가져다 대었다. 시온도 그리했다.
“하지만 여전히, 조심하렴.”
그들은 폴링라이트다.
그들만이 폴링라이트다.
“마지막 비밀은 모든 걸 뒤집을 테니.”
* * *
시온은 깨어났다.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 사라짐을 느꼈다. 스승이 남겨 놓은 사념체가 흩어진 까닭이다. 약간의 아쉬움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손에 들린 것 있다. 기억 속에서 전해 준 은룡의 어금니다.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스승님.”
어금니를 입안에 넣자 곧 녹아내렸다. 온 입안이 당장이라도 얼어붙을 듯 시렸으나 모두 꿀꺽 삼켰다. 한기가 소용돌이치며 몸을 휩쓴다. 영혼에 깃든 일곱 비밀이 반갑게 일렁였다. 시온은 셋째 비밀이 열리기 일보 직전임을 깨닫는다.
“스승님, 당신은 센스도 엉망이고 글솜씨도 괴멸적입니다.”
마지막 마법사의 신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금이 가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제 역할을 다했으니 흩어지는 것이리라. 시온 속의 사념체가 그러했듯이. 온 신전이 그러했다.
“술버릇은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고, 이 시대에서는 절 까맣게 잊기까지 했겠지만…….”
불러낸 것은 첫째 비밀, ‘공상손가락’. 무너지는 벽들로부터 시온을 지켰다. 신상은 이제 이목구비도 잃고 있었다.
“…절 끔찍이 생각해 주는 건 늘 고맙습니다.”
힘이 치민다. ‘공상손가락’이 시온 주위를 요동친다. 은룡의 어금니에는 생각보다 더욱 큰 힘이 들었다. 레냐르에게서 얻어 낸 비늘과는 비할 수가 없다. 증거로, 보라, ‘공상손가락’의 숫자가 어느새 마흔하나다. 시온 폴링라이트의 눈이 푸르게 타오른다.
“이제 곧,”
영웅이 으르렁댄다.
“셋째 비밀이다.”
* * *
‘셋째 비밀만 열어도 정황을 뒤집을 수 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으면 이렇게 쫓기기만 할 필요가 없어진다. 스승의 선물 덕분이다.
‘넷째까지 연다면 아무리 아메투스라도 압도할 수 있어, 대가는 필요하겠지만.’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충분히 열 수 있었다. 어차피 남하하는 중이니 시간은 많다. 쥬엣 곡예단과도 헤어졌으니 당분간은 홀로 지낼 터다. 아니, 어쩌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보다, 라크로샤에게 도움을 더 받을 수 있을까?’
뿔난 흰 뱀 라크로샤. 그를 루베코 골짜기를 묶은 것은 시온 폴링라이트를 기다리라는 마지막 마법사의 부탁이다. 만약 골짜기를 떠나려 한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등에 탄다면 내 걸음보다 다섯 배, 아니 열 배는 더 빠를 거야.’
이목은 끌겠지만 일정이 폭발적으로 줄어든다. 하루라도 빨리 서방으로 넘어가고픈 시온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겼다. 다만 기존의 계획을 수정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계획을 짜며 걸음을 옮겼다. 굴의 안쪽에서 바깥으로. 깊은 곳에서 밝은 곳으로. 기분이 좋았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얻었는데 그게 아주 유용하기까지 하니 나쁠 이유가 없었다. 그럴 터였다.
“비가 오나…….”
굴의 끝자락, 골짜기로 나가는 코앞.
시온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
빗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축축한 골짜기인데 수분이 끈덕지게 피부 위에 붙어 댔다. 그런데도 지우지 못한 악취가 진동한다. 너무도 잘 아는, 그의 영혼에서도 똑같이 진동하는 이것은…….
“…피 냄새…….”
비릿하고 독하다. 탁하기까지 한 이 비릿한 피 내음은 짐승의 것이다. 시온의 눈 속에서 두 개의 불꽃이 피어오르고 발지아트가 그를 에워쌌다.
“…….”
뿔난 흰 뱀을 보았다. 죽어 수백 토막 난 기다란 몸을 보았다. 기다란 혓바닥을 길게 빼물었고 시온만큼 커다란 눈은 채 감지 못하고 부릅뜬 채다. 뱀 머리 위에 사내가 있다. 양날 검에 묻은 뱀의 피를 닦아 내다 시온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제 오십니까.”
양날검 든 사내의 눈은 옥색이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지오니스 전하.”
61화
뿔난 흰 뱀 라크로샤가 죽었다.
마도열차보다 길고 굵다란 몸이 수십 토막이 나서 바닥을 굴렀다. 천 년의 생애를 허망하게 끝낸 것은 양날검이다. 검의 주인은 옥색 눈을 하고 있다.
“지저분한 모습으로 인사드리는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아메투스가 제 얼굴을 훔쳤다. 온통 피범벅이다. 진득하고 붉은, 사람의 것과 다를 바 없는 선혈鮮血. 그 짙은 피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되려 기세를 더하는 소름 끼치도록 강렬한 옥색 눈빛.
“쉽지 않은 싸움의 직후인지라.”
“…그거 알아, 아메투스? 저 뱀은 천 년이 넘게 살아온 환수라더군.”
“그렇습니까. 어쩐지 강하더군요.”
죽어 나자빠진 라크로샤를 보며 아메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뿔난 흰 뱀을 수십 토막 내는 것은 전혀 쉽지 않았다. 비늘 한 장 한 장이 웬만한 명검보다 단단하고 날카롭지를 않나, 뱀 주제에 별 넷의 대마법을 난사하지를 않나, 수십만은 되어 보이는 독뱀 떼를 불러내지를 않나. 심지어는 목숨이 경각에 몰리자 이상한 기예Ars까지 부렸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기예라니.
“그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 골짜기를, 제국의 영토를 감히 제 것이라 주장하더군요. 코르디스의 녹을 먹는 몸으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천 년 전에 허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현행 법령상으로는 효력이 없습니다. 제때 갱신을 했어야지요.”
“자네가 농담을 즐기는 줄은 몰랐는데.”
“저도 사람입니다, 전하.”
“그것도 처음 아는 사실인걸.”
아메투스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양날검을 움켜쥐고 라크로샤의 머리통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조용히 시온을 바라보았다. 피 내음과 달빛과 옥색 불길이 뒤섞여 등골이 후벼 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지오니스 전하.”
그는 묻는다.
“처음 인사드렸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계승전 선포의 날이겠지.”
“예, 옳습니다.”
회귀해 온 첫날. 콘티누아 대제를 알현하고 페르비아스에게 붙잡혔던 때. 시온은 호박파이를 핑계로 어린아이인 척하며 빠져나갔다. 아메투스는 그 옆에 있었다.
“사실 그때부터, 저는 전하께 짙은 불안을 느꼈습니다.”
직감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시온 폴링라이트는 점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를 알고 있다. 아메투스도 왠지 시온이 자신의 직감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고 느꼈다.
“이상했습니다. 불안감은 분명한데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으니. 그때는 전하께서 정말 어린애이신 줄로만 알았거든요.”
“나는 정말 열한 살 어린애일 뿐이야. 그걸로는 안 되겠어?”
“안 될 말씀이십니다.”
단호하기도 해라. 시온이 애써 웃었다. 아메투스는 웃지 않았다. 그는 제5황자 지오니스의 행적을 되짚어 보는 중이었다.
도서관의 비보를 얻고, 세쿤두스 파벌에 합류하고, 대경합 중에 책략을 내고……. 그런데 눈에 띄지 않았다. 계승전 중에는 다 알지 못했다. 허나 지나고 돌이켜 보니 소름이 끼쳤다.
약간 수상한 구석이 있는 꼬마. 원래는 평범한 줄 알았는데 역시 대제의 피를 잇기는 한 모양이다. 페르비아스도 레냐르도 시온을 그 정도로 여긴다. 그렇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다만 아메투스 만큼은 다르다. 그는 이제 속지 않는다.
“전하께서 소벨 산맥에서 목숨을 잃으셨단 소식을 듣고 이 아메투스가 맨 처음 무엇을 느꼈는지 아십니까.”
“글쎄. 슬퍼해 줬다면 고마울 텐데. 우리가 그럴 만한 사이는 아니지. 그럼 어땠으려나…….”
시온 폴링라이트가 턱을 쓸었다.
“속이 시원했겠는데? 앓던 이가 빠졌으니까 말이야.”
“아니요, 전하. 또 거짓말이시군요, 이미 알고 계시면서.”
시온이 입을 다물었다.
“의심이었습니다.”
“…….”
“전하께서 그런 식으로 죽을 리가 없다. 이유야 어쨌든, 절대 죽지는 않았다. 그런 의심.”
아메투스의 눈은 거짓과 비밀을 성큼 넘어온다.
“이유도 없이 이토록 강렬한 확신이 들다니, 스스로가 드디어 미쳐 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는데…….”
후우. 아메투스가 제 얼굴을 쓸었다.
“…정말, 정말로, 이렇게 살아 계셨고…….”
손가락 끝에 뱀의 피가 묻어 나왔다. 그것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았다. 검을 쥘 때 미끄러져서는 안 될 말이니까.
“저는 미치광이가 아니었군요.”
옥색 눈과 양날검.
양쪽 모두 날카롭게 시온에게 향한다.
“전하, 전하께서는 위험한 분이십니다.”
시온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소용없는 걸 알고도 거짓말을 늘어놓는 삼류가 아니었다. 아메투스가 읊조린다.
“강한 자를 여럿 보았습니다. 위대한 자도, 사악한 자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전하와 같은 자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그는 제1황자 페르비아스의 심복이다. 전前 제국십장과도 겨루어 이긴 적이 있다. 허나 시온이 더욱 위험하다. 힘과는 별개로, 지위와는 별개로, 시온 만큼 그의 영혼을 요동치게 만드는 이가 없었다.
“황실의 누구도 알지 못할 겁니다. 설명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제5황자 지오니스는 평범한 꼬마가 아니다. 때때로 정말 꼬마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더 속내를 알 수가 없다. 겨우 열한 살 나이에 누군가를 속이는 일에 저토록 능통하다니.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그 이상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무엇이 그의 안에 가득 차 있다.
“이 아메투스만이 보았으니까요. 지오니스 전하, 당신은…….”
묘한 불안감이라고 말해 왔다.
시온을 보면 불안이 든다고 얼버무려 왔다.
거짓말이었다. 사실 겨우 그 정도가 아니었다. 5황자 지오니스를 처음 보았을 때, 아메투스는 직감을 넘어서 환상에 가까운 무엇을 보았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고…….”
어떤 환상이었나.
열한 살 어린아이 뒤에서 무얼 보았나.
“…또, 살아서는 아니 될…….”
눈을 후벼 파는 섬광과 같은 일곱 불꽃을, 수를 세지 못할 비명과 살이 눌어붙은 듯한 영혼의 악취를 보았다. 비명과 악취를 어떻게 보았는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보았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인지 모를 무엇이십니다.”
“그렇게 대단한 자가 아닌데. 봐, 너한테 죽기 일보 직전이잖아.”
“듣지 않겠습니다.”
시온의 영혼을, 가장 깊은 비밀의 잔향을 보았다. 때문에 확신한다. 무엇을 짊어졌는지 모르고, 그의 영혼이 왜 저리 비명을 지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 있다. 저 모든 의문보다 깊은 확신을 담아 검을 치켜든다.
“대신 전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전前 제국십장을 꺾은 사내가 숨을 고른다. 기세만으로도 시온의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목숨을 가져가야만 하겠습니다.”
* * *
“내가 변명한다고 해도 너는 믿어 주지 않겠지. 그래도 한 가지만 정정해도 될까.”
시온이 키득 웃었다.
“미치광이가 아니라고 했지? 아니, 아메투스. 넌 이미 충분히 미치광이다.”
자갈이 날았다. 비밀이 들추어진 시온이 괜히 성이 나서 돌멩이 몇 개를 차서 날린 까닭이다. 아메투스는 그것을 맞아 주었다. 꽤 큼지막한 돌 하나가 이마에 부딪혀 상처를 내었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천 년 묵은 괴물이라는 이름은 라크로샤보다 이쪽에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시온은 이죽거리며 내뱉었다.
“결국 그 모든 걸 직감 하나로 꿰뚫어 보았단 말이잖나? 페르비아스 형님도 레냐르 누님까지도 속여 넘겼는데, 너 혼자 말이야.”
“저도 쉽지만은 않았습니다만.”
특무대를 부려 도시들을 에워싸고, 샤디 섄도르가 대가를 치러 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찾고 쫓아 시온을 마주했다. 그렇다 해도 터무니없다.
‘쉽지 않았어? 뚫린 입이라고!’
시온이 속으로 분을 터트렸다. 아메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회귀자다. 회귀 전에는 서방연합의 부사령으로 책략을 짜내는 게 일이던 비밀쟁이다. 그런 시온의 계획을 그저 직감으로 들추어 내다니!
‘…아, 반갑기까지 하군.’
시온이 발지아트를 꺼냈다. 상대는 아메투스다. 뿔난 흰 뱀 라크로샤를, 천 년 묵은 환수를 어렵지 않게 토막 내는 검사다. 잠깐 눈을 감았다 떴더니 저세상에 가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힘을 아낄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아메투스, 너는 알까? 회귀 전에 너와 내가 이런 식으로 얼마나 자주 마주했었는지.’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셉템 아르카나의 첫째, ‘공상손가락’.
둘째,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
‘너는 여전히 내 비밀을 쉽게도 꿰뚫어 보고…….’
보이지 않는 마흔의 손이 날아다니고 시온과 아메투스 사이에는 좁히지 못할 거리가 생겨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예지만 아메투스는 낌새를 눈치채고 반 발자국 물러섰다. 시온이 웃음을 머금은 채로 혀를 찼다. 요제프 하이더조차 그의 기예는 느끼지 못했는데.
“…또 여전히 괴물이구나.”
여전히? 아메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와 시온 사이에는 큰 접점이 없다. 첫인사라고 해 봤자 겨우 몇 달 전이니까. 저렇게 그리운 듯 중얼거릴 만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듣길 원해서 뱉은 말이 아니었다.
이곳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아니,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점쟁이 아메투스란 그런 위협이다.
‘결국 마지막 조각 하나가 어긋났나. 늘 그래. 어긋난 하나, 겨우 하나가 모든 걸 엉클어 버리지.’
마침 스승이 준비한 선물도 얻은 참인데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흘려보냈다.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았다. 약해 빠진 몸뚱이는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거품을 뿜고 싶어 한다. 승산이 없다시피 하지만, 낯선 일은 아니다.
‘살아남는다면, 좋겠는걸.’
* * *
시온이 밧줄을 꺼내 양팔에 둘렀다. 그 위로 발지아트가 덮였다. 어지간한 강철보다도 질기고 튼튼하다. 그것을 본 아메투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느새 시온의 뒤에 있다.
“전하, 안녕히.”
숫자를 세는 것도 우스울 만큼 짧은 찰나. 아메투스는 시온의 지척에서 검을 휘두른다. 목에 서늘함이 닿고 피가 흘렀다.
“……?”
아메투스가 의문을 표했다. 시온이 멀었다. 방금에는 코앞이었는데 갑자기 저 멀리에 있다. 언제 움직였나. 아니, 움직인 쪽은 아메투스였다. 무엇이 그를 밀어낸 것이다.
하나, 둘…….
…정확히 스무 발자국 정도.
“상대를 밀어내는 기예Ars군요. 요제프 공이 전하를 죽이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빌어먹을 놈.”
시온이 자기 목 뒤를 매만졌다. 피가 묻어 나왔다.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은 마음 있는 것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요제프 하이더나 라크로샤라도, 아메투스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다만 문제는.
‘하여간 괴랄하게 빠르단 말이야!’
기예는 영혼의 힘. 즉, 영혼의 반사적인 반응이 아메투스의 검격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기사를 상대로는 무적에 가까운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인데!
‘간격을 줄여야겠어.’
시온이 혀를 찼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조정했다. 꼭 스무 발자국일 필요는 없다. 간격을 줄이면 그만큼 밀어내는 힘이 강해진다.
“흐음.”
아메투스가 사라졌다.
시온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열 발자국은 멀다. 여덟 발자국은 가깝다.’
그는 두 번째 기예를 조정한다.
‘그렇다면, 아홉 발자국.’
등 뒤에서 서늘함이 느껴졌다. 또 기예의 반응보다 검격이 빨랐다. 하지만 이전과 같지는 않다. 이미 몸 주위를 떠다니던 ‘공상손가락’이 검을 막았다. 곧 아메투스는 눈썹을 찡그릴 틈도 없이 주욱 밀려났다.
쯧, 하는 소리가 났다.
재차 달려드는 아메투스를 보며 시온이 혀를 찬 까닭이다. 하지만 그의 검은 닿지 못한다. 역시 아홉 발자국 정도가 맞았다. 강하게 밀어내니 닿지 못했다.
“느낌이 묘하군요.”
아메투스는 시온에게 더 상처 입히지 못했다. 하지만 시온은 확실히 지쳐 가는 중이었다. 아니, 사실은 당장이라도 탈진할 것만 같았다. 모든 기예와 힘을 짜내니 당연하다. 반면 아메투스는 여유롭게 턱을 매만진다.
“검을 막은 힘과 절 밀어낸 힘은 서로 다른 것 같은데.”
“대답을 원하고 묻는 건 아니지?”
“그랬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해 주지 않으시겠지요. 전하의 목을 갖고 돌아가며 찬찬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재미는 있지만 달갑지는 않군.”
시온이 몸을 부풀렸다. 마갑 발지아트다. 검은 갑옷, 다섯 겹으로 겹쳐진 밧줄. 철제 건물이 통째로 떨어진다 해도 상처 입지 않을 단단한 흑黑. 아메투스의 대응은 단순했다.
그는 검을 들었고.
골짜기가 갈라졌다.
“…염병.”
시온과 함께.
62화
마갑 발지아트, 센 소르티의 걸작.
세상 이면의 형이상학적 존재를 실처럼 뽑아낸 뒤 수만 겹으로 짜내어 만든 이 갑옷은 살아 있으며, 유동하고, 주인의 뜻에 따라 변모한다. 어떤 금속보다도 질기고 굳세면서 또 비할 바 없이 탄력적이기도 하다.
시온은 그런 마갑을 전신에 둘렀다. 그뿐 아니라 발지아트로 강화한 밧줄을 팔이나 몸 따위에 둘러 한 층 더 방어를 굳세게 했고, ‘공상손가락’이 몸 주위를 에워싸기까지 했다. 흰 뱀 라크로샤가 부닥쳐 와도 막아 낼 자신이 있었다.
허나 아메투스의 칼질 한 번을 막지 못했다.
안개 더미와 골짜기와 시온이 동시에 갈라졌다. 무게를 알 수 없는 바윗덩이가 쏟아져 내렸고 시온은 반쯤 잘려 나간 어깨를 황급히 손으로 붙들었다. 통증도 출혈도 심각했다.
“큭……!”
한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혀를 깨물어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의식을 잃을 뻔했다. 반 정도 잘린 어깨 위로 발지아트가 타고 올랐다. 응급 처치 정도는 될 터였다. 숨을 쉬기가 불편했다.
‘회귀 이후로 입은 상처 중… 제일 심한데……!’
아찔했다. 검의 궤도가 조금만 달랐다면 팔이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발지아트로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다. 아니, 만약 몸통 쪽으로 검이 짓쳤다면 내장이 망가져 모든 게 끝났으리라.
“…내가 네 발목을 잡지 않았으면 정말 죽었을 거야. 그렇지?”
“언제 이런 잡스러운 수를…….”
아메투스가 제 발목 위로 검을 그었다. 검은 밧줄이 몇 겹이나 엉겨 있다. 시온이 키득 웃었다. 처음부터 몰래 바닥에 깔아 놓았다가 검을 휘두를 때 잡아당겨 발을 걸었다. 덕분에 목숨이 조금은 연장되었다.
“아무튼.”
밧줄을 걷어차며 양날검을 치켜든다. 옥색 눈 사내를 보며 시온이 식은땀 흘렸다. 그의 말대로였다. 더는 준비한 수가 없다. 애초에 여기서 아메투스를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며, 그가 뿔난 흰 뱀 라크로샤를 이길 것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거리 밖에서의 참격에는 대응할 수 없어 보이십니다, 전하.”
“…글쎄. 어떨까?”
“확인해 보면 될 일이지요.”
애써 미소 짓고 있지만 그뿐. 꺼내어 쓸 무엇도 희망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최선이야 다할 거고 포기도 않겠지만 한숨 말고는 뱉을 게 없으니. 조금만 시간이 있었다면 셋째 비밀을, 어쩌면 넷째 비밀까지 열지도 모르는데…….
쯧, 하고 혀를 차며 손을 내저었다. ‘공상손가락’이 아메투스에게로 달라붙었다. 하나하나가 바위를 집어 던질 괴력을 가졌는데도 아메투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을 매섭게 빛내며 몸을 떠니 ‘공상손가락’들이 튕겨 나갔다.
“뭔가 하셨습니까, 전하?”
“…하긴 했는데 말이지. 아쉽게도.”
“아쉽군요.”
아쉬움을 삼키며 시온이 눈을 부릅떴다. 아메투스는 어느새 검을 휘두른 뒤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이를 악물며 옆으로 힘껏 뛰었다. 참격이 뒤이었다. 발끝이 조금 잘려 나갔다. 다행스럽게도.
발을 부여잡을 틈 따위는 없다. 옥색 눈 사내의 검은 쉬지 않는다. 내려친 검이 횡으로 베어진다. 시온을 위아래로 분리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방법이 없어 바닥을 굴렀다. 흙과 풀 쪼가리 따위가 잔뜩 묻어났다.
‘…….’
시온은 부끄럽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것 따위 잃은 지가 오래되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렇게 숙명을 이룰 수만 있다면 바닥을 기고 흙탕물을 마셔도 좋았다.
허나, 아메투스.
회귀 전부터 늘 그의 천적이었던 사내.
바닥을 기고 흙탕물을 마신다고 해도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위협. 한 번 검을 휘둘러 골짜기를 갈라 내면서 그런 검격을 몇천 번이고 쏟아 낼 수 있는 괴물.
‘아.’
달이 저무는 중이었다.
시온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저 분했다.
‘…여기까지인가.’
* * *
죽음을 각오한 찰나였다.
“이봐, 잠깐!”
목소리. 낯설지도 낯익지도 않다.
“잠깐, 잠깐, 잠깐!”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사내가 있다. 멀찍이 있는데도 목청 한 번 우렁차다. 어디 하나 특색 없는 모습이다. 나이는 아메투스보다 조금 어려 보였고 이목구비를 확인하기에는 아직 거리가 멀다.
“거기 둘, 멈춰 봐!”
“누구……?”
와다다다, 하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시온이 제 목을 쓸었다. 목이 날아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아메투스가 저 사내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랬을 터다. 달려오는 사내를 보며 아메투스가 검을 꾸욱 쥐었다.
“전하, 또 시답잖은 수를…….”
“…아니, 진짜 모르는 자야…….”
“…정말입니까?”
사내는 멀지 않다. 요란히 달려온다.
아메투스가 우렁차게 외쳤다.
“멈춰라!”
옥색 눈이 이글거린다. 양날 검을 가볍게 휘젓자 대지에 깊은 상흔이 남았다. 사내가 넘지 말아야 할 금이다.
“제국 치안청의 치안기사로서 알린다. 이곳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이곳은 루베코 골짜기. 인근 주민들도 출입을 꺼리는 안개와 독뱀의 터. 게다가 지금은 거대한 뱀이 토막 나서 나뒹굴고 피 냄새가 진동한다.
“이런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의심을 사도 억울한 것은 없겠지. 썩 물러나라.”
“어라, 뭐야, 뱀이 토막이 나서…….”
“두 번 경고하지 않는다. 물러나지 않으면 벨 수밖에 없다.”
아메투스는 외친다. 시온은 슬며시 뒷걸음질하려 했으나 서슬 퍼런 옥색 눈과 마주치는 바람에 곧 발을 멈추었다. 괜히 자극했다가는 죽음만 재촉할 뿐이다.
“아니, 내 얘기 좀 들어 보라고!”
“셋을 세겠다!”
사내는 멈추지 않고 가까이 온다. 두 손을 들어 보이나 아메투스는 완고하다.
“하나, 둘…….”
“셋!”
“……?”
“아, 셋에 벤다며? 뭐 해?”
사내가 껄껄 웃으며 손을 휘휘 젓고 아메투스가 멀뚱히 눈을 꿈벅였다.
“……진짜 전하가 부른 자가 아닙니까? 하는 짓이 똑같은데요.”
“내가 저래? 반성해야겠네.”
아메투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를 베고 싶지는 않다.
“후우…….”
하지만 제5황자 지오니스는 여기서 죽어야만 했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다.
“…원망치 말기를.”
검을 휘두른다. 골짜기를 가르고 뿔난 흰 뱀을 토막 낸 참격이 난다. 사내가 요란스럽게 웃어 젖힌다. 그는 또 한 차례 가까워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거 시원한데!”
“……?”
아메투스가 눈을 비볐다. 시온도 그랬다. 또 참격이 날았다. 몇 차례나 그랬는데 저 요란한 사내는 웃기만 할뿐 상처 하나 없다. 그렇게 성큼성큼 다가온다. 시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메투스, 제대로 벤 거 맞아?”
“…전하를 벨 때처럼 했습니다만.”
“살기를 듬뿍 담아 벴다는 소리군. 그런데 저 작자는 왜 멀쩡한 거야?”
“으음.”
아메투스가 침음성을 흘리며 자세를 잡았다. 숨을 두어 번 내쉬는 것만으로도 대기의 일렁임이 느껴졌다. 시온이 혀를 찼다. 아까는 전력이 아니었는데도 그렇게 압도적이었던 말인가.
양날 검이 매섭다. 섬광에 가까운 일격. 갈라진 대기가 뒤이어 웅웅대고 사내는 피하지 않고 웃기만 한다. 참격에 맞은 골짜기가 또 갈라졌다.
“으음. 아까보다는 낫군. 살짝 따끔했어.”
다만 사내는 상처 하나 없다.
“…이것도!”
“…뭐야, 저 인간?”
지금의 아메투스는 제국십장 바로 아랫줄의 괴물이다. 천 년 묵은 환수를 어렵지 않게 잡아내는 자가 전력으로 검을 휘두르는데 반응조차 없다. 허깨비는 아닌 듯한데, 어떻게 된 일인가.
“전하…….”
“…왜?”
“…제가 아까 전하와 같이 위험한 자는 보지 못했다고 했던가요. 정정하겠습니다.”
아메투스가 검집을 내던졌다. 그의 눈이 번뜩인다. 귀신 같은 직감을 가진 사내가 또 무엇을 느낀 듯했다.
“저 사내, 전하 못지않군요.”
“…….”
아메투스도 시온도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상식을 벗어나도 어지간히 벗어나야 질문이라도 던질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자니 사내는 요란히 웃으며 성큼 다가섰다.
“이봐, 오랜만이야!”
그는 시온의 손을 턱 잡았다.
“시온! 꼴이 말이 아니네!”
“어……?”
시온 폴링라이트는 흠칫 피하려 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사내는 어느새 그의 곁에서 몸 곳곳의 먼지를 털어 주는 중이었다. 퍽 다정한 손길이었던지라 아메투스가 눈을 사납게 흘겼다.
“전하, 모르신다면서?”
“아니, 정말 모르는데…….”
시온이 당혹스레 뺨을 긁었다. 저 사내에게는 그들의 싸움을 뒷전으로 하게 할 기묘함이 있었다. 사내가 방글거리며 물었다.
“어어? 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거야. 섭섭하게끔.”
“…처음 보는 사람이니까?”
“정말 서운하네! 나란 말이야, 나!”
사내가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쥬엣 곡예단 어릿광대, 베일라 베일레!”
* * *
“몰라, 그런 사람!”
시온이 빽 소리를 질렀다. 베일라 베일레, 쥬엣 곡예단의 어릿광대라고 주장하는 기묘한 사내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제 얼굴을 들이대었다.
“그러지 말고 자세히 봐 봐. 이 얼굴, 본 적 없어?”
“…어? 어엉? 가까이서 보니까 낯이 익기는 하네 식사할 때 두어 번 본 것 같기도 하고…….”
시온이 볼멘소리를 했다. 쥬엣 곡예단에 이런 얼굴이 있었다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아냐. 그래도 너무 수상하잖아.”
곡예단의 아는 이름을 꼽아 보았다. 부단장 헬레나, 헨리 호르비, 쌍둥이 로텐과 리테. 굳이, 아주 굳-이 덧붙인다면 늑대여인 펜-호우칠이나 차력사 폴텔? 베일라 베일레라는 이름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맥락도 없이 나타나서는 어릿광대?”
그는 회귀자고, 기억력에는 자신이 있었다. 회귀 전에도 후에도 베일라 베일레라는 이름은 들어 보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쥬엣 곡예단의 어릿광대가 아메투스의 참격을 어떻게 피해 낸 것인지…….
“…당신, 진짜 곡예단원이 아니지?”
시온의 눈이 날카롭다.
“무슨 소리를.”
베일라가 콧수염을 매만졌다. 방금까지도 없던 콧수염이 어느새 생겨 있다. 아니, 어느새 연미복 차림의 배불뚝이가 되어있다.
“이 베일라 베일레, 쥬엣 곡예단의 어릿광대이자 숨어 있는 단장인걸.”
“…단장이라고? 당신이?”
“응. 그렇게 하기로 했거든. 단원 모두에게 양해를 구했지. 어려울 것도 없잖아?”
“무슨 소리야? 아니, 설마…….”
시온은 깨닫는다. 이상함은 있었다. 부단장 헬레나는 본래 단장이었다. 회귀 전에는 분명히 그랬다. 단순히 시기가 맞지 않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 사내의 짓이었나? 무슨 수를 썼길래?
“이봐, 시온. 그런데 중요하지도 않은 걸 언제까지 시시콜콜 따지고 있을 거야?”
베일라가 콧수염을 배배 꼬았다.
“정말 정 없기는. 내 덕에 목숨을 건졌는데 좀 더 반가워해도 되지 않아?”
아메투스가 검을 쥐었다. 당혹이 사라지니 베일라 베일레라는 사내의 기묘함을, 그 위험함을 깨달은 탓이다. 그러나 검을 뺄 수 없었다.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옥색 눈이 시퍼렇게 달아올랐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기껏 네 스승의 부탁으로 구해 주러 왔는데 말이야.”
“…스승님의 부탁?”
“그래. 저기 죽어 있는 뱀 녀석처럼 말이지.”
“그런가…….”
그제야, 그제야 조금은 이 기묘함을 납득할 수 있었다. 그의 스승과 엮여 있다면 이런 기이함도 이해해 줄 만했다. 또 준비했다는 안배라는 녀석인가 싶었다.
“…아니, 이상해.”
시온이 정신을 차렸다. 묘한 느낌에 넘어갈 뻔했다.
“구해 준다니. 내가 이곳에서 이 때에 위험에 처할 걸 알았다는 뜻이잖아.”
“왜 몰랐겠어? 노골적인 것을.”
베일라 베일레가 키득 웃었다.
“안개 낀 골짜기, 막 얻은 선물, 이제 시간만 있으면……! 갑자기 추격자가 나와 위기에 빠지기에 딱 알맞은 때가 아니야?”
“…내 인생이 무슨 소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하네.”
“왜 아니라고 생각하지?”
“…….”
이 사내 무엇인가? 알아도 될 것과 알지 못할 것, 그 사이의 경계까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들쑤시는 이 작자는?
“사실 딱 목숨만 구해 주려 했지. 구경이나 하다 팔다리가 다 잘릴 때쯤 나서려 했어. 네 스승 말에 내가 고분고분히 굴어 줄 이유는 없으니까. 그쪽 이야기가 더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
베일라가 코웃음 쳤다.
시온은 경악스러웠다. 그의 스승, 마지막 마법사. 한때 숭배받기까지 했던 그녀를 마치 자신과 동급이라도 되는 듯이, 그렇다면, 이 사내는 혹시…….
“그런데 나, 열이 받았어.”
베일라 베일레가 눈을 흘겼다.
“라크로샤 녀석… 꽤 친했거든.”
그는 저편에서 굴러다니는 수백 토막 난 시체를 보았다. 뿔난 흰 뱀, 천 년 묵은 괴물의 최후.
“이 곡예단도 마음에 든 참이라 데리고 여행이나 다닐까 했는데…….”
줄곧 요란히 웃기만 하던 사내의 얼굴에 노기가 어른거린다.
“저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릴 줄은 몰랐지. 천 년이나 묵었다는 녀석이, 기원基源의 힘을 받았다는 놈이!”
사내가 성을 내었다.
“호투스 때 이후로는 만난 적도 없었던지라 나름 신이 났단 말야!”
“호투스?”
아메투스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내가 아는 그 호투스인가?”
“옛날에 망해 자빠진 그 나라를 묻는다면 맞다. 그것 말고 또 다른 호투스가 있었나?”
베일라 베일레는 떠들어 댄다.
아메투스가 사납게 물었다. 평정을 잃는 법이 없는 사내도 당혹 중에는 말투가 부드럽기 힘들었다.
“이 뱀도 그러더니… 그쪽도 호투스 때부터, 천 년 전부터 살았다는 듯한 투군.”
“어어. 그렇게 말했던 건데.”
“그렇다면 당신이 호투스 팔신八神이라도 된다고?”
사내가 힐쭉 웃었다.
“오?”
시온은 소름이 돋았다.
아메투스도 다르지 않았다.
회귀자건 경지를 넘은 검사건 사람이기에 피할 수 없이 짓눌렸다.
“오, 오오! 역시 그쪽 친구는 감이 좋은걸! 정답, 정답이야!”
깨달았다. 이런 존재를 언제 보았는지. 그의 스승이 이런 식으로 굴지 않는가? 시대니 인과니 아는 것조차 우습게 여기는 존재라면 달리 있을 리가 없었다.
베일라 베일레가 웃는다.
제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트린다.
“이봐, 시온? 정말 나를 모르겠어? 우리 만난 적이 있잖아. 아주 오래전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그때 보았잖아?”
“…당신, 그렇군, 광대였나.”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다만!”
베일라 베일레의 얼굴은 온통 하얗다. 입술은 붉고 눈 주위에는 검은 기운 어른댄다. 화가 난 것처럼도 슬픈 것처럼도 사람이 아닌 것처럼도 모두 보이는, 광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숭배는 하지 않아도 좋아! 오늘은 특별히 관람료도 받지 않지!”
제국보다 오래된 사내는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아니, 정말로 입이 찢어져 머리 위가 바닥을 굴렀다. 머리는 바닥을 구르면서도 킬킬 웃었다. 거부할 수 없는 공포가 둘을 거머쥐려 들었다.
“하지만 웃음 정도는 보여 달라고, 응? 친구들! 나름 신神이었는데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잖아?”
호투스 팔신八神, 마지막 광대.
63화
호투스Hortus.
여덟 기원신이 다스리던 옛 나라.
인간에서 신이 된 그들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으며 땅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았다. 그러니 대륙에 전쟁이 없고 태평이 길었다. 천 년이 지난 지금에도 호투스는 낙원으로 기억된다.
낙원의 끝은 제국의 시작이었다.
늘 그렇듯 인간은 낙원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제국을 원했다. 여덟 기원신이 순순히 물러났는지 패퇴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제국의 발호와 동시에 역사에서 사라졌음만이 분명하다. 제국의 이름은 코르디스Cordis였다.
인간의 제국이 왔다.
여덟 기원신은 사라졌다.
천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신들은 사라졌을 뿐이다.
죽음과는 다르다. 시온은 알고 있다.
그의 스승, 마지막 마법사.
나라도 숭배도 모두 잃고 세상에게 잊혔으나 죽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는 듯 뻔뻔히 살아온, 센 소르티니 벨루치안 폴링라이트니 이름을 바꿔 가며 천 년을 만끽해 온, 한때 여신이었던 여인.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이 사내, 마지막 광대 베일라 베일레도 그의 스승과 마찬가지였으리라.
한때 숭배받던 기원신이었으리라.
“그렇게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특히 옥색 눈 친구, 왜 그렇게 심각하게 쳐다봐?”
“마지막, 광대라고……? 당신이……?”
아메투스가 한 발 내디뎠다. 제 감정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사내지만 지금은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당혹이니 분노니, 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갖가지 것들이 속에 뒤섞인 티가 낯으로 드러났다. 그는 믿을 수 없어 소리쳤다.
“터무니, 없다!”
그는 양날검을 한껏 움켜쥐었다. 휘두를 생각은 없었으나 감정이 격해지니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다.
“터무니없어-!”
“내가 나라고 하는 게 뭐가 문제인지?”
“…백 보, 아니 천 보 양보해서 당신이 진짜라고 한들……!”
아메투스가 성을 내었다. 시온이 혀를 찼다. 그의 기세는 또 한 차례 강대함을 더했다. 바닥이 보이지를 않았다. 이대로는 제국십장도 멀지 않으리. 그런 힘을 풀풀 풍기는데도 베일라 베일레의 미소에는 흐트러짐이 없다.
“…이 땅에 당신의 자리는 없다. 여기는 코르디스다! 인간의 손으로 천 년을 쌓아 올린 제국이야!”
“허? 왜 화를 내는 거지?”
베일라 베일레가 얼굴을 쓸었다.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그의 손이 훑고 지나간 안면은 다른 모습이 되어 있다. 그렇게 몇 차례, 얼굴도 몇 번이나 뒤바뀌었다. 이윽고 손이 떨어지고 얼굴도 뒤바뀜을 멈추었다.
“오-랜 친구를 잃-은-.”
“……!”
쉿, 하는 소리. 아메투스가 흠칫 몸을 떨었다. 베일라 베일레의 머리가 뿔난 흰 뱀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광대는 사람의 몸에 뱀의 머리통을 달고는 혓바닥을 쉿쉿거렸다. 하얀 비늘이 번뜩였다.
“-내 쪼-옥이 화를 내야 마-땅하지 않나-아---?”
그는 토막 나서 굴러다니는 뱀의 몸통을, 사방에 범벅된 선혈을 흘끔거렸다. 베일라 베일레의 얼굴이 또 일그러지더니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처음 보여 주던 기묘한 사내의 안면이다.
아메투스는 검을 휘두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적의는 없었다. 무의식적인 반사反射작용에 가까웠다. 베일라 베일레의 눈빛은 그 자체로 커다란 위협이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아메투스의 영혼은 강박적인 불안감을 안겨 주었고, 훈련된 육신은 생각보다도 빠르게 반응했다.
“흠?”
옥색 눈 사내는 검으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마리나 데비우스를 꺾거나 라크로샤를 토막 내거나 하는 것들. 그러나 베일라 베일레에게 닿는 일은 불가능했다. 검의 날카로움이나 주인의 역량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으흠, 꽤 재빠른데.”
베일라 베일레는 요상한 얼굴로 요상한 자세를 취하며 검을 피했다. 한 발로 깽깽이를 뛰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저글링을 하거나 했다. 심지어는 거꾸로 공중 부양 한 채로 저글링을 하면서 검격을 피했다. 아메투스는 진땀까지 흘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슬슬 귀찮으니까…….”
베일라 베일레가 시선을 돌렸다.
검이 움직이기를 그만두었다.
“멈춰 있어.”
* * *
아메투스는 검을 휘두르지 못했다.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고 느끼지도 못했다.
이 또한 멈추었기 때문이다.
검이, 아메투스가, 토막 난 몸통에서 흐르는 피가, 안개의 흩어짐이, 골짜기 곳곳의 독뱀과 벌레와 사그락대는 풀들이, 저기 휘영한 달과 흐르는 구름까지도 모두 움직임을 그만두었다.
모든 것이 멈췄다.
마지막 광대가 멈추라고 했기 때문에.
“이제 좀 조용한데.”
멈추지 않은 것은 둘, 시온과 마지막 광대뿐이다. 베일라 베일레가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어. 왜 그렇게 보나?”
“…시간을 멈췄어?”
“찰나를 늘린 거지. 아유, 그렇게 보지 마. 부끄럽잖아.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란 말이지.”
베일라 베일레가 손을 내저었다.
“스물두 가지 물건 스물두 세트를 동시에 다루는 내 초절기교 저글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 응?”
광대가 뺨을 매만졌다. 백색의 진득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세상 뒤편에 펴 발라져 있을 법한 회백색이 그의 뺨에서 배어 나왔다. 베일라 베일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처가 났잖아?”
생채기도 되지 못할 긁힌 자국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마지막 광대의 뺨에는 검의 흔적이 남았다. 아메투스의 양날검이 해낸 일에 마지막 광대는 신이 나서 방방 뛰었다.
“시온. 이 옥색 눈 친구 뭐 하는 친구야? 보통내기가 아니네!”
상처, 상처라! 마지막 광대는 기꺼이 이 자국을 상처라 부르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처 입기는 천 년 만에 처음이다. 아니, 뭐, 까먹는 일이 잦아서 틀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 돌아보기에는 분명히 처음이었다.
“이거 좀 봐! 나 상처 입었단 말이야! 앗, 아앗… 다 나아 버렸나.”
베일라 베일레의 얼굴이 실망으로 푹 녹아 흘렀다. 정말로 녹아서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녹아 버린 머리는 사라졌다가 이내 바닥에서 퐁 하고 튀어나와 다시 목 위에 붙었다. 여전히 아쉬운 기색이었다.
“그런데 시온, 넌 얼굴이 왜 또 그래?”
“…머리가 복잡해서.”
광대가 키득 웃었다.
“어쨌든 살았잖아. 그럼 되지 않았어?”
옳은 말이었다. 아메투스의 검 끝이 목젖까지 치밀었으나 베일라 베일레의 덕에 살았다.
“자, 회귀황자, 내게 할 말이 있겠지?”
“…고맙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군.”
“으흠, 뭘 이런 일로!”
낄낄거리는 웃음에 이어 갈채 소리가 들려온다. 어디서인지는 모르는데 휘파람 섞인 박수 소리가 곳곳에서, 이 멈추어 버린 찰나 속에서 아주 가득했다.
“내가 네 스승이랑 친구인데도 반말하는 건 지적하지 않겠어. 회귀 전에도 그랬으니까.”
“그것도 고맙네. 그보다 당신,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의문이 튀어나왔다. 계속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날 돌려보내 준 스승님 본인조차 잊을 거라고 했는데.”
“아하. 불안한가? 네가 돌아왔다고, 회귀를 기억하는 놈들이 있을까 봐?”
“…맞아.”
시온은 순순히 인정했다. 비밀도 거짓말도 광대 앞에서는 소용없으니. 베일라 베일레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걱정도 많아. 나니까 잊지 않은 거지. 광대는 원래 그런 거거든.”
베일라 베일레가 둘이 되었다. 하나는 어릿광대고 하나는 연미복 배불뚝이다. 광대는 무대 위에서 묘기를 보이고 배불뚝이는 옆에 서서 박수쳤다.
“무대 밖에 있으면서 안에 있고, 안에 있으면서 밖에 있고. 양쪽을 넘나들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
곧 광대의 앞에 막이 내렸다. 어디선가 나타난 장막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광대도 무대도 함께 보이지 않게 되었으나 배불뚝이는 남아서 시온에게 눈을 찡긋한다.
“매너만 잘 지킨다면 말이야.”
광대가 입술을 주욱 잡아당겼다.
“그러니까 아무리 마지막 마법사의 부탁이라도, 내 역할은 여기까지.”
무대 바깥에서 너무 끼어들면 관객들에게 끌려 나가니까. 작은 중얼거림에 시온이 물었다.
“바깥이라고?”
“그런 게 있어, 시온. 알 필요 없는 이야기야.”
더 물어도 답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서 입을 다물었다.
“더 얘기하고프지만, 퇴장이 급한 감이 있지만! 오랜 친구 데리고 사라져야겠어.”
“…라크로샤를?”
시온이 의문을 표했다. 마지막 광대의 시선이 뿔난 흰 뱀을 향했기 때문이다. 저 거대한 뱀은 여전히 토막 나 죽은 채고, 이전보다 더욱 싸늘하기까지 하다. 광대는 친우의 시체를 보면서도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혼이 떠나지 않았어. 아직은 깨워 볼 만하지. 힘은 많이 잃겠고 모습도 다르겠지만 뭐 어때? 죽지 않았으면 됐지!”
베일라 베일레는 어느새 뿔난 흰 뱀의 머리통 옆에 있다. 그는 흰 뱀의 눈에 푹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찾듯 눈알을 마구 헤집어 대었다. 아무리 봐도 친우의 시체에 할 짓은 아니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는 더욱.
“사실 내가 보기보다 정이 많아.”
끙차. 마지막 광대가 힘을 주었다. 거대한 뱀 눈알 너머에서 원하는 걸 찾아낸 모양새다. 찐득거리는 무엇이 눈알을 뚫고 뱀 머리통에서 튀어나왔다.
“만약 라크로샤가 아예 죽어 버렸다면 그 옥색 눈 친구도 무조건 죽었어. 매너고 뭐고 간에… 이얍!”
완전히 튀어나온 무엇은 사람의 형상을 했다. 마지막 광대가 숨결을 불어넣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신의 태가 곡선을 그린다. 점액과 피와 악취 속에서 뱀 비늘의 소녀가 태동했다.
그녀는 라크로샤다. 자기 잘린 머리통 속에서 되살아났다. 꿈지럭대는 머리에는 뿔이 났다. 곳곳에서 뱀 비늘이 벗겨지고 하얀 사람의 살결이 드러나고 있으니 저 뿔만이 그녀가 한때 루베코 골짜기의 주인이었음을 증명하게 되리라.
“좋아. 반나절이면 눈을 뜨겠어.”
광대가 고개를 들었다. 달도 구름도 찰나도 여전히 멈추었다. 그는 빈 손목을 툭툭 두드리며 무언가를 세는 듯했다.
“옥색 눈 친구 기억에서 내 존재를 쏙 빼놓고 네가 간발의 차로 도망갔다고 해 놓지. 반나절 뒤면 일어나서 네 흔적을 쫓을 거야.”
“반나절?”
“너무 많이 줬나?”
“아니. 적당해.”
더 받아 낼 여지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더 얻을 이유도 없었다. 목숨을 한번 건진 것만으로도 과분했다.
“아무 일도 없었듯이 가라, 시온.”
이미 많은 참견을 했다. 더는 허용되지 않을 테고 원하지도 않았다. 시온의 이야기는 시온의 몫이다. 선물에도 정도가 있는 법.
“이번은 아주 특별해. 무대 바깥에서의 참견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추격전이 다시 시작되는 거지. 무시무시하게 강하고 감이 좋은 검사가 너를 쫓고, 너는 서방을 향해 달아나.
“나 같은 기묘한 광대는 잊어버려.”
베일라 베일레는 쥬엣 곡예단의 어릿광대이며 숨어 있는 단장이다. 원래 단장이었던 헬레나 펠과 단원들의 기억을 매만져서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런,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 당분간은 눌러앉을 예정이다. 천 년 전의 친구 뱀 비늘 소녀와 함께.
“자, 뭐 해, 회귀황자? 비밀을 품었으니까 할 게 많잖아? 숙명에 닿겠다고 하지 않았어?”
시온이 이를 악문다. 아메투스에게 입은 상처가 쓰라리다 못해 그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발을 놀린다. 광대의 물음이, 품은 비밀이 등을 떠민다.
“어서 도망치라고!”
마지막 광대, 여기서 퇴장한다.
64화
“다쳤나요, 대장? 피 냄새가 나요.”
샤디 섄도르는 그렇게 물었다. 그녀는 부관의 부축을 받고 있다. 33일간 장님이 되어 기예 ‘모래 물음’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기 때문이다. 안대를 써서 텅 빈 눈구멍을 가려 놓은 모습에 아메투스는 상당한 부채감을 느꼈다.
“별것 아니다.”
“그래요? 운테스, 대장이 얼마나 다쳤어?”
샤디를 부축하던 부관 운테스가 작게 웃으며 눈짓했다. 사실대로 말하냐는 듯한 투였다. 아메투스가 옥색 눈을 찡그리고 운테스는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별로 안 다쳤습니다. 그렇게 말하라고 하시네요.”
“…못 본 사이 대담해졌군, 운테스.”
“미안합니다, 아메투스 대장. 하지만 전 샤디 대장의 부관이지 아메투스 대장의 부관이 아니니까요.”
대장이 둘이니 헷갈린다니까.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이 웃어 젖혔다. 피냄새와 안개로 가득한 골짜기에서도 유쾌한 사내였다. 샤디가 운테스를 쿡 찔렀다. 눈이 보이지 않는데 시끄럽게 웃기까지 하니 골이 울렸다.
“아메투스 대장, 목표는 찾았나요?”
“아니.”
아메투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여기를 지난 건 분명하지만…….”
루베코 골짜기에는 라크로샤의 토막난 몸통이 굴러다닌다. 시온 폴링라이트나 마지막 광대의 흔적은 남지 않았다. 아메투스의 머릿속에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있었고 만났고 겨루기까지 했지만 없는 것이 되었다.
“…내가 오기에 앞서 빠져나간 듯해.”
“아쉽게 되었네요.”
“음.”
아메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위화감이 있기는 하다… 뭔가 잊은 듯이……. 그래, 뭔가를….…’
옥색 눈이 번뜩이려 했다. 그러나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훅 튀어나왔다.
‘이봐, 잊으라고 했잖아!’
아메투스는 잊었다. 누군가 만났던 듯한 기묘한 위화감까지도 잊어버렸다. 그의 직감은 강력하나 마지막 광대의 술수가 더욱 강했다.
“그래. 찾지 못했다. 이 골짜기의 주인이라던 괴물뿐이었지.”
‘모래 물음’의 인도를 받아 루베코 골짜기에 왔다. 그를 막는 라크로샤를 토막 내었으나 제5황자 지오니스는 없었다. 이것이 아메투스가 기억하는 전부였다.
“응? 뭔가 고민하고 있지 않았어요? 갑자기 후련한 목소리네요.”
“내가?”
“아닌가요? 잘못 들었나.”
샤디 섄도르가 갸웃거렸다. 잘 보이던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감각에 대한 확신도 덜할 수밖에 없다. 아메투스도 그녀도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옮겼다.
“그보다 대장이 다쳤다니. 어떤 괴물이었기에 다쳤나요, 아메투스 대장?”
“뱀. 아주 큰 뱀.”
“얼마나 커다란데요?”
“마도열차 수십 량輛을 한입에 꿀꺽 삼키고도 남을 만큼.”
“어머, 그리 말하면 보고 싶어지잖아요.”
“보지 않는 편이 좋을걸.”
라크로샤의 시체는 썩 멀쩡한 꼴이 못 되었다. 양날검에 수십 토막이 났고 마지막 광대가 머리통을 헤집어 놓기까지 했다. 게다가 생명의 본질 되는 뱀 비늘 소녀가 빠져나간 탓에 거대한 몸뚱이는 급속하게 무너지는 중이었다.
“조금만 더 덩치가 작거나 길이 덜 급했어도 묻어 줬을 텐데, 미안하군.”
“미안할 거면 왜 죽였어요?”
“임무가 우선이었으니까.”
그는 담담히 말했다. 그는 차기 황제의 심복이자 제국의 치안기사다. 감히 제국의 영토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괴물을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 되었고, 놔두고 싶지도 않았다.
“마저 쫓는다.”
아메투스가 걸음을 떼었다. 샤디의 부관,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신 부축하겠냐는 듯한 투였다. 아메투스는 잠깐 망설이다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일하는 중이다. 정을 따를 때가 아니었다.
“모래의 영이 보이나요, 대장?”
“그래. 여전히 춤추고 있군.”
하늘에는 모래바람이 춤춘다. ‘모래 물음’으로 불러낸 모래의 영이 머무르며 5황자 지오니스가 있는 방향을 가르쳐 주는 중이었다.
“춤이 거셀수록 목표가 가깝다는 거예요.”
“그런가.”
아메투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저 모래바람의 움직임은 마치 폭풍에 가깝다. 곁에 있었다면 살갗을 찢을 만큼 격렬하게 맥동하며 춤을 춘다.
“다 따라잡았군.”
* * *
비밀이 목을 졸랐다.
질식하는 중에 꿈임을 깨달았다.
[…약하다, 시온…….]
[…어찌 그리 약하나…….]
셉템 아르카나Septem arcana는 일곱 등잔 달린 촛대의 형상을 띄고 있다. 불이 붙은 등잔은 두 개뿐인데, 들여다보면 비명과 울음이 타오른다. 비명과 울음들은 시온에게 왈칵 달려들어 목을 졸라 대었다.
[…우리의 영웅은 어디로 갔는가…….]
[…뭐를 위한 회귀냐!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목숨만 건질 거면, 뭣 때문에 돌아왔어……!]
[…우습다. 약한 주제에 숙명을 이야기하는 그 입이 우습구나…….]
비밀은 비난으로 몰아친다. 시온은 제 목을 내어 맡기고 순순히 질식해 갔다. 이제껏 그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변명은 않겠어…….”
그는 비밀꾼이지만 변명쟁이는 아니었다. 목을 조르는 제 비밀들에게 부족함을 토로했다.
“숨고, 속이고, 도망치기만 했지. 어린애 몸뚱이 핑계만 줄기차게 대면서 말야…….”
시온이 이를 악물었다. 가장 속상한 것은, 누구보다 숙명에 안달이 난 것은 시온 자신이었다. 다만, 억지로 침착하려 할 뿐. 애를 쓰며 버틸 뿐. 같은 실패를 반복할 수는 없으니까. 절대 그리되어서는 안 되니까.
“그래도 조금만 더, 지켜봐 달라고…….”
하지만 참고 있다느니, 아직 계획안에 있다느니 하는 말은 뱉지 않았다. 사실이라고는 해도 밖으로 나오면 변명이 될 테니까. 그의 비밀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도움을 받든 어찌 되었든 이루고야 말 테니까.”
[…무엇으로, 이루나…? 또 말뿐인가…….]
[…네 손목이라도 보아라. 당장이라도 꺾일 듯하구나. 영웅의 위세는 어디로 갔나…….]
[…쓰러지는 꼴을 보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비난이 거세다.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비밀들은 여전히 목을 졸라 오나 이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숨통이 조여 보지 않은 적이 없다.
“새 힘을 얻은 참이잖아.”
은룡의 어금니를 녹여 낸 힘이 이곳에, 그의 내면에 다다랐다. 은빛의 파동이 넓게 퍼지며 불꽃을 어루만진다. 세 번째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이어서 넷째 등잔에도 불씨가 옮겨붙었다. 아직 불꽃은 아니지만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다.
“셋째가 열렸다. 넷째가 곧이다.”
시온이 키득 웃었다. 셋째 비밀을 손에 쥐었다. 놀랍도록 그리워하던 힘이다.
“첫째와 둘째는 편리하지만 강력하다고 말하기는 힘들지.”
‘공상손가락’과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은 몸을 지키기 위한 것. 마갑 발지아트를 급하게 얻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러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울, 아니, 살아남지 못했을 터다.
“그 둘로 이제껏 살아남다니, 포크와 나이프로 전쟁을 치르던 거나 마찬가지라고. 엄지와 검지로 물구나무서서 탭댄스를 췄다고 해도 다를 건 없겠지.”
조금은 칭찬해 줘도 좋을 텐데 말이야. 비난이 잦아들었다. 저들은 셉템 아르카나에 귀속된 존재. 시온의 말이 사실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 진짜 날카로운 건, 셋째 비밀부터야.”
비밀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수밖에.”
[…오, 메리언의 시온……. 우리의 영웅, 우리의 부사령……. 그대를 다시 믿겠다……. 또 속더라도 다시 믿어 보겠다…….]
[우리의 성급한 다그침을 용서해 다오. 우리를 잊지 말아 다오.]
[…이루라, 무너뜨려라! 저 천년제국을, 코르디스를……!]
“당연한 말을.”
목이 졸린 채로 일어섰다.
“어떤 꼴이 되더라도 무너뜨리고 말겠어.”
그 눈이 푸르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 * *
“음…….”
잠에서 깨어난 시온이 목을 부여잡았다. 꿈속에서 목을 졸렸던 자국이 현실에서도 선명하다. 멋진 척을 했으나 상황이 좋지 못했다. 덮고 있던 거적때기를 치우자니 투덜거림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잠자리가 이 꼴이니 꿈이 좋을 리가 없지.”
시온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직 날씨가 차다. 길에서 잠들기에는 이르단 소리다. 사실 길에서 잠들기에 적당한 때가 있겠어? 또 한 번의 투덜거림.
“루베코 골짜기에서 열흘인가…….”
거적때기를 대충 접어 품에 넣었다. 그의 소중한 침구였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오른 어깨가 후비듯이 고통스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루베코 골짜기에서 아메투스의 검에 반쯤 갈라졌던 탓이다.
“도통 나을 생각을 않네.”
놀랍게도, 마갑 발지아트는 숙주의 몸에 놀라운 회복력을 부여해 주는 듯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시온은 이미 죽어 나자빠졌을 것이다. 그만큼 상처가 심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상처부터 어떻게 해야겠어.”
발지아트의 회복력으로도 매일같이 고름과 진물이 흘러내렸다. 시온은 능숙하게 가슴팍의 피고름 따위를 닦아 내었다. 쓰라려 아팠다.
“쯧, 어쩜 그리 끈질기게도 쫓아오는지.”
마지막 광대의 도움을 받은 뒤로 계속 도망치기만 했다. 제대로 된 식사도 수면도 허락되지 않았다. 점쟁이 아메투스는 놀랍도록 정확하게 그가 있는 곳을 찾아 들쑤셔 놓았으니까.
“나를 찾아내는 수단이 있다고 봐야겠지.”
시온은 ‘모래 물음’의 존재를 눈치채었다. 아메투스의 추격이 놀랍도록 정확해진 것은 어느 시점부터였다. 그의 직감을 보조해 줄 무언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품에서 육포를 꺼내 씹었다. 턱이 시큰거리며 아파 왔다. 큰 상처를 입자면 늘 이렇게 온몸의 관절이 시큰거렸다. 염증 때문에 열감도 떠나지를 않았고. 따끈한 국물이 간절했다.
“아, 내 신세야. 대도시 젠티움이 바로 옆인데 들어가지도 못하고.”
젠티움 검문소에는 치안청 특무대원들, 아메투스가 부리는 자들이 포진해 있다. 내가 피해야지. 더러워서 피한다! 시온이 쨍알거리며 걸음을 떼었다.
“그래도 어떻게 남부까지는 왔군.”
젠티움을 지나면 제국 서남부라고 부를 만하다.
“곧바로 메케로스로 가려 했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어. 분명히 도중에 쓰러질 거야.”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할 때였다.
‘몸 상태? 엉망이지.’
어깨가 떨어져 나갈 뻔한 중상인지라 도저히 낫지를 않는다. 온몸에 염증이 퍼진 게 느껴졌다. 기껏 셋째 비밀을 열었어도 이 몸으로는 제대로 쓰지 못한다.
‘아메투스? 계속 뒤꽁무니를 쫓아오는 중이고.’
어디를 가든 곧바로 쫓아오는지라 맘 편하게 쉬지를 못한다. 지금도 이렇게 대도시의 여관을 놔두고 숲길에서 눈을 붙이지 않았는가.
‘그나마 재정은 여유가 있어.’
황실에서 이것저것 잔뜩 훔쳐서 발지아트 속에 숨 겨놓았다. 애초에 5황자의 신분으로 회귀했던지라 서민 기준으로는 까무러칠 만큼의 돈이 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도시에 들어서야 한다. 상처를 어떻게든 해야 해. 여러 물건을 구할 수 있다면 더 좋고. 그렇다면…….’
아메투스와 특무대의 움직임에 제약이 걸릴 만한 곳. 여러 사람이 뒤섞여 그를 찾아내기 힘든 곳.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물자를 쉽게 구할 만한 곳!
“실레몰.”
제국 서남부의 삼대 항港 중 하나.
호벨 만灣 가장 위쪽의 대도시.
“실레몰의 자유시장으로 간다.”
65화
시온은 실레몰에 도착했다.
험로險路였다. 상처는 낫지를 않고 아메투스와 특무대는 계속 쫓아왔다. 노숙을 밥 먹듯 하는데 진짜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자유시장이 있는 실레몰에 도착한 것이다.
“이름.”
“파시오누스 펠레우스.”
“나이는?”
“열여섯.”
줄곧 사용하던 가짜 신분을 사용했다. 별다를 바 없이 의심을 사지 않았다.
“들어가도 좋다.”
“감사히.”
검문원이 시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동안의 노숙 생활 때문에 거지꼴이었다. 차림도 엉망이고 냄새도 지독했다. 그러나 막지는 않았다.
“실레몰.”
코르디스 제국의 몇 안 되는 자치도시 중 하나. 셀 수도 없는 사람과 물류가 오간다. 지나는 사람 하나하나를 붙잡았다가는 도저히 검문소가 돌아가지 않는다.
“호벨 만灣 상부를 점한 덕에 아주 풍요롭고 화려하며…….”
시온이 곁눈질했다. 검문소에서 대로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나는 중이었다. 길 곁에 건전해 보이지 않는 무리가 더러 있었는데 시온과 눈이 마주치자 사내 몇이 벌떡 일어섰다.
“…질 안 좋은 놈들도 많지.”
“꼬마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둘러싸였다. 건장한 사내 몇이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시온의 작은 체구를 가렸다. 영악한 놈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얼굴이 울퉁불퉁한 사내가 시온의 어깨에 손을 척 올렸다.
“실레몰은 처음이니?”
곰보 사내는 방긋 웃어 보였다. 인자하기가 몇 년은 알고 지낸 이웃집 아저씨 같았다.
“맛 좋은 식당을 아는데 같이 갈래?”
“싫다면요?”
“좋아해야 할걸?”
사내가 시온의 어깨를 강하게 내리눌렀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불안해하는 시늉을 해 주었다. 열한 살 어린아이라면 응당 그랬을 테니까.
“자. 일행인 척해라, 일행인 척…….”
“그편이 좋을 거야.”
사내들이 작게 웃었다. 한 명은 천으로 싼 무엇을 시온의 등에 들이대었다. 촉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날붙이였다. 어린아이에게 칼부터 들이대고 보다니, 양아치도 어지간한 양아치가 아님이 분명했다.
‘빠르게도 꼬여 드네. 고마울 정도야.’
시온이 낯빛을 싹 바꾸었다. 저쪽이 진심으로 그를 뜯어먹을 생각이니 그도 진심으로 연기해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왜, 왜, 왜 이러세요오…….”
“글세, 따라와 보라니까.”
“히이이이…….”
시온이 속으로 감탄을 표했다.
‘연기 좋군.’
스스로 생각해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시선을 이리저리, 손을 덜덜, 목소리는 가느다랗게. 어떻게 보아도 불안에 떠는 어린아이다. 아메투스 놈도 이 정도 연기로 속아 주면 참 편할 텐데.
“귀엽게 생겼는데.”
“야, 안 다쳐. 오기만 하면 된다고.”
“안 다친다고? 내 생각은 좀 다른데.”
사내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며 낄낄 웃었다. 그들은 시온을 둘러싼 채로 인적 없는 뒷골목을 향했다. 노점상 몇이 상황을 눈치채고는 미간을 찌푸렸으나 나서는 이는 없었다. 저 사내들의 패악질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 그래야지. 조용히 따라오렴.”
뒷골목에 들어서며 곰보 사내가 또 한 차례 속삭였다. 입김이 끈적여 아주 불쾌했다.
“혹시라도 소리 지르면 안 된다?”
* * *
“끼야악!”
곰보 사내가 소리 질렀다.
아주 목청껏 질러 대었다.
“-꺅! 꺄아, 끼야아아악!”
“어허, 소리 지르지 마세요.”
시온이 점잖게 타일렀지만 곰보 사내는 비명을 멈출 줄을 몰랐다. 사실 보이지 않는 손에 발목이 잡혀 거꾸로 매달린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머리가 지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면 더더욱.
“끼야아아아아아--.”
“조용히 하실래요, 조용히 해 드려요?”
“--압!”
곰보 사내가 황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높이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것은 여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온의 손짓에 주먹만 한 돌 몇 개가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본 까닭이다.
“…….”
“…….”
무리는 매달린 곰보 사내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그렇게 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깨달았다. 사람을 잘못 건드렸음을. 멍하니 있자니 어느새 시온이 지척이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시온의 물음에 사내들이 웅성거렸다. 누가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누구도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시온은 한 명을 콕 집었다.
“거기, 구레나룻 대단한 아저씨. 무슨 생각 하시냐고요.”
“…으, 응? 나?”
구레나룻 수북한 사내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아까 시온의 등에 칼을 들이대었던 자다. 그는 공중에 거꾸로 매달린 곰보 사내를 보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똑똑하시네요. 똑똑하시니까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죠?”
“그, 그럼. 왜 안 되겠니.”
“손에 든 그거.”
시온이 손가락질했다.
“대체 뭔데 옷으로 칭칭 싸맸는지 봐도 돼요? 아까 그걸로 제 등을 찌르시던데.”
“벼, 벼, 별거 아니란다…….”
“보여 줘요.”
“별거 아니래도…….”
“보여 달라고.”
“…….”
사내의 낯빛이 거멓게 죽었다. 칭칭 싸맨 옷 속에서 날이 시퍼렇게 선 단검이 나왔다. 시온의 등에 들이밀었던 물건이다. 시온이 가볍게 미소 짓자 사내의 낯빛은 암울해지기만 했다.
“칼이네요.”
“…왜 꼭 칼이라고 생각하니?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잖아.”
“칼이 아니라면 이걸로 아저씨를 찔러도 괜찮겠네요?”
“보이는 그대로인 물건도 있는 법이지. 이건 단검이란다. 사람을 찌르면 피가 나지.”
구레나룻 사내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동네 대장간에서 샀는데 낡은 농기구 세 개랑 바꿨다느니, 솜씨 좋은 대장간이니 소개해 줄 수 있다느니 하며 힘껏 떠들며 시온의 관심을 돌리려 애썼다. 혓바닥이 퍽 매끄러웠다.
“그럼 어린애한테 단검을 들이대셨던 거네요. 이 손목을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 불쌍히 여겨 주면 되지 않을까……?”
“오답!”
“끼야아아아악!”
와그작, 하는 소리가 났다. ‘공상손가락’이 구레나룻 사내의 손목을 부러트린 까닭이다. 그래도 깔끔하게 부러트렸으니 한두 달 지나면 후유증 없이 회복될 것이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자비로운 남자였다.
구레나룻 사내는 부러진 손목을 잡고 주저앉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보기에 아주 애처로웠다.
“…….”
“…….”
남은 사내들은 눈알만 데룩데룩 굴려대었다. 곰보와 구레나룻은 그들 중에도 나름 힘을 쓰는 편인데 하나는 공중에 매달렸고 하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다. 당연히 두려웠고 당연히 대꾸할 생각도 못 했다. 그저 골목 입구만 슬쩍 슬쩍 곁눈질했다.
‘이 꼬마, 뭐야! 건드려도 아주 잘못 건드린 모양인데…….’
‘다멜 자식. 왜 이리 안 와…….’
‘다 죽겠다. 빨리 좀 와……!’
그들은 노상 공갈의 전문가로 금품 갈취에 적합한 대상을 분별할 줄 알았다. 다만 여기는 자치도시 실레몰, 온갖 부류가 모이다 보니 그들의 뛰어난 안목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잘못 건드리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때문에 늘 동료 하나를 골목 밖에 세워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게 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다른 동료들을 불러올 수 있도록.
“누구 기다려요?”
“……!!!”
“한 명이 없는 거 같기도.”
능글맞은 물음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땀을 닦을 새도 없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이거? 무슨 꼴이야?”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보며 그들은 필사적으로 손을 저으며 소리쳤다.
“야! 다멜! 여기야, 여기!”
“빨리 좀 오지, 이 자식들아!”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족히 스물은 되어 보였다. 단검이 아니라 퍽 기다란 검을 찬 이도 있었다. 제국법이 규정하는 일반 시민의 도검 길이 허용 범위에 아슬아슬해 보일 만큼 길었다.
“이놈은 왜 울고 저놈은 왜 공중에…….”
“이 꼬마, 마법사야!”
“…그래 보이네.”
마법사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한 사내가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다. 주문을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동료 중에 마법사를 둘 정도라면 보통 불량배 패는 아닌 듯했다.
“헤, 헤헤헤, 꼬마야. 너무 잘난 척하지 말았어야지.”
“건방지게 말이야.”
공포에 질렸던 사내들이 자신감을 얻어 입가를 뒤틀었다.
“우리가 누구 패인 줄 알고…….”
“누구 패인데?”
시온이 퉁명스레 물었다. 물었던 사내는 되려 당혹스러웠다. 스무 명의 험상궂은 덩치에게 둘러싸였는데도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없었다.
“누구 패거리냐고.”
“키, 키프코스 패거리인데…….”
“키프코스? 키프코스 패라고……!?”
회귀황자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덩치가 환호성을 질렀다.
“여, 역시 들어 봤구나! 들어봤을 줄 알았어! 우리 형님이 그 유명한, 실레몰 자유시장의 키프코스란 말이야!”
“맙소사… 키프코스 패라니…….”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한 번에 찾을 줄이야!”
시온은 믿을 수 없어 고개를 저었다.
“아, 웬일로 운이 좋은걸! 몇 번이나 이 짓거리를 반복해야 하나 싶었는데!”
……? 사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처음부터 키프코스 패를 만나는 게 목적이었다는 것처럼 들린 까닭이다. 실제로도 그랬다. 동네 불량배들을 순순히 따라온 이유는 단 하나, 실레몰의 키프코스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에이, 아까부터 정말!”
“이 꼬마, 본때를 보여 주마!”
노상 공갈에 이골이 났다는 건 참을성이 강하지 못하다는 말과 거의 동일하다. 사내들은 시온의 말을 곱씹어 이해하려 해 보는 대신 혈기를 따라 달려들기를 선택했다. 쇠막대, 퍽 기다란 장검, 조잡한 마법 따위를 믿고.
“…….”
구레나룻 사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자기네 동료들의 대사가 너무도 잡졸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부러진 손목을 붙잡으며 동료들의 잡졸스러운 꼴과 외침을 애써 외면했다.
“이야아아---아아---!”
“아, 아, 아파요오!”
“끼야아아악!”
잠깐의 소란, 이후 침묵이 길었다.
스무 명의 사내 중 거품을 문 사내가 열두 명. 눈을 까뒤집은 사내가 또 열두 명. 이때 거품을 물고 눈을 까뒤집은 사내의 숫자를 구하시오. (단, 모든 사내는 거품을 물거나 눈을 까뒤집거나 했습니다.)
“…정답, 네 명.”
“무슨 소리예요?”
시온이 구레나룻 사내에게 다가섰다.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다른 손목도 멀쩡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구레나룻 아저씨, 키프코스를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는 거품을 물거나 눈을 까뒤집거나 양쪽 모두인 사내들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자기들 대장인데, 쉽게 안내해 주지는 않을 테고. 역시 한 명만 남기고 모두…….”
“저, 저기.”
“왜요. 다른 사람 말고 자기를 살려 달라고요?”
“그, 그, 그게 아니라, 아니, 그것도 맞기는 한데…….”
구레나룻 사내가 침통한 얼굴을 들었다.
“…그, 그냥 안내해 드리면 안 될까요?”
시온이 방긋 웃었다.
66화
키프코스라는 사내가 있다. 실레몰 자유시장의 주먹패 우두머리인데 시온은 그를 만나야 했다. 구레나룻 사내는 키프코스의 부하인데, 슬쩍 을렀더니 아주 쉽게 제 우두머리에게 안내해주겠다고 나섰다.
“아저씨, 정말 의리 없는 거 아시죠?”
“뜻밖의 재난까지 나누는 게 진실된 의리가 아닐까요? 그런 의리 있는 사람이, 저는 되고 싶습니다.”
“헛소리를 독창적으로 하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구레나룻 사내가 머리를 긁적였다. 시온은 툭 내뱉듯 말했다.
“혓바닥 잘 돌아가는 구레나룻 아저씨.”
“예? 예…….”
“이름이 뭐예요?”
“헤르…….”
“나중에 확인할 거니까 진짜 이름으로.”
“글로시오스라고 합니다.”
글로시오스. 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보통 꼬마로 보여요?”
“그럴 리가요…….”
구레나룻 사내, 글로시오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시온은 발지아트로 체구를 부풀린 채라 얼핏 보기에는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였다. 그리고 평범한 열대여섯 살이라면 손도 대지 않고 스무 명의 불량배를 쓰러트릴 수 없는 법이다.
“그럼 만약에 허튼 생각이라도 했다가는?”
“…험한 꼴을 당하겠죠?”
“잘 알고 있네. 말은 좀 편하게 해도 되겠지?”
“아유, 마음대로 하셔야지요.”
“안내해, 키프코스에게.”
“…따라오십시오.”
구레나룻 사내가 걸음을 떼었다. 그들은 걸었다. 글로시오스는 수다스러운 자였다. 아무리 협박당하는 중이라도 입술을 닫아 놓기가 힘들 정도였다.
“…저, 실레몰은 처음이십니까?”
“직접 와 보는 건.”
회귀 후에는 말이지, 라고는 덧붙이지 않았다. 시온의 대답에 글로시오스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이곳 토박이인데 가면서 이야기라도 조금 들으시겠습니까?”
“하고 싶으면.”
“실레몰은 본래 섬의 이름입니다. 딱히 특색이라고는 없는 섬이었죠.”
상인들이 오가기에는 너무 작았고 어부들의 쉼터로 쓰이기에는 육지에 너무 가까웠다. 수영에 이골이 난 자라면 어렵지 않게 맨몸으로 섬에 닿을 정도였다.
“이 작은 섬이 일대 바닷가를 포함하는 제국 서남부의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된 것은 약 40년 사이의 일입니다.”
46년 전, 전쟁을 끝내고 즉위한 콘티누아 황제(이때는 아직 대제라 불리지 않았다.)는 대숙청을 벌였다. 전쟁의 여죄를 묻는다는 명목으로, 또 귀족 세력의 약화라는 속셈으로. 두 이유 모두 명분과 필요가 차고 넘쳤다.
어지간해서는 징벌의 대상이 되는 일이 없는 귀한 자들에게 황실의 칼날이 향했다. 후작 하나, 백작 둘에 자작 다섯이 대표가 되어 처형장에 올랐고 셀 수도 없는 가문이 코르디스의 이름 아래에 산산히 무너졌다.
제8대 드보크 백작이나 무스타스 자작 등의 유명인이라고 해서 비참한 꼴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레테 섬도 그때 봉쇄당했죠.”
“그 정도는 알아.”
“하긴, 워낙 유명하니까요. 어쨌든 호벨 만 최대의 대항구를 가진 아레테가 봉쇄되니 보통 난리도 아니었답니다.”
저야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지만 말이죠. 글로시오스는 떠들어 댄다. 상인들은 아레테를 대체할 새 교역터를 원했고 실레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제국의 눈을 피해 모든 것을 사고팔 수 있다며 자유시장을 열어 사람들을 빨아들였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온갖 사람이 모이며 실레몰은 믿을 수 없는 규모로 커져 나갔다. 다만 말 그대로, 온갖 사람들. 햇볕 받기를 싫어하는 부류들도 실레몰 곳곳에 아주 깊숙이 자리 잡았다.
“저희 대장도 그런 부류입니다. 한몫 잡아 떠나려 했다가 생각보다 규제도 느슨하고 해 먹을 거리도 많고 해서 눌러앉았다죠.”
“해 먹을 거리가 뭐 그렇게 많길래?”
“자유시장이잖습니까. 규제가 없으니 발상과 담력이 전부죠.”
“흥.”
시온이 코웃음 쳤다. 자유시장이라니, 우스운 이야기다. 천년제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레테 섬이 무너진 후 잡스러운 종자들을 한데 모아 관리할 셈으로 실레몰을 눈감아 준 것이리라. 어쩌면 실레몰의 급성장에 직접 개입했을지도 모르고.
‘뭐가 어떻든 내게는 좋은 일이지.’
공공연히 사고팔 수 없는 물건들이 태연히 오가는 곳. 제국법이 최대한도까지 느슨해져 있는 외딴 곳, 실레몰 자유시장! 시온 또한 여기서 얻을 것이 있었다.
“다리를 건너면 자유시장입니다.”
지금의 실레몰은 근처 연안 일대까지를 포함하는 대도시다. 본래 실레몰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작은 섬은 이제 전체가 자유시장이 되었다. 시온이 다리 앞을 흘끔거렸다.
“보초가 있네.”
“그 정도는 있죠. 뭐라고 말할까요?”
“너희 패 신입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
“예. 사소한 건 대충 끼워 맞추겠습니다.”
글로시오스는 고분고분했다. 그는 기억한다. 시온이 눈짓하니 갑자기 손목이 똑 부러졌던 것을, 그 고통을. 다음에 똑 부러지는 건 목이 아니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친구. 오늘 좀 어때?”
“오. 글로시오스!”
보초가 반갑게 웃었다. 글로시오스와 꽤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들어가려고? 요즘에는 계속 바깥에 있는 줄 알았는데.”
“형님한테 소개할 놈이 있어서.”
“소개? 저 꼬마를?”
시온이 살짝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열다섯 살을 연기하는 만큼 약간의 건방짐도 담아서. 보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버릇없네. 너희 패 신입이냐?”
“엉. 얼굴은 아직 꼬맹인데 보통이 아냐. 몇 푼 뜯으려고 했더니 순식간에, 빡! 애들이 우수수 쓰러지더라고.”
구레나룻 사내가 킬킬 웃으며 제 손목을 보였다. 이거 봐! 넘어지면서 손목도 나갔어! 한결같이 가벼운 태도에 보초의 눈에 동정심이 어렸다.
“…글로시오스, 아직도 길거리에 있냐? 꼬맹이들 돈이나 뺏고?”
“형님이 하랬으니까.”
“우리 패도 별로지만 너네는 진짜 심하다. 야, 실수를 했다고 해도 어떻게 너를 길거리에…….”
“아, 왜? 난 좋아!”
구레나룻 사내가 과장스레 손을 들여 보였다. 보초는 연민을 숨기지 않고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됐어. 다음에 술이나 먹자고. 얼마 전에 마에쉬에서 기가 막힌 밀주가 들어왔으니까.”
“반가운 소식인걸!”
“데려온 꼬마나 이리 오라 그래.”
글로시오스의 손짓에 시온이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벌리고 걸음은 팔자. 한창 건방진 사춘기 소년처럼. 보초가 그를 위아래로 훑었고 시온은 눈을 매섭게 뜨는 척했다.
“얼굴은 앳된데 덩치가 좋군. 몇 살이냐.”
“열여섯.”
“말투도 건방진데.”
눈을 째리던 보초가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마음에 들어. 글로시오스랑 같이 와라. 꼬마는 상상도 못 했을 술을 먹게 해 줄 테니까!”
크하하핫. 보초가 어서 지나가라는 듯 손짓했다. 복색은 그럴듯했으나 행실은 동네 껄렁패 수준이었다. 정말로 자유시장 주먹패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인가를 받은 정식 보초병이 아니라 자유시장 세력가들이 자기네들 세력에서 몇 명씩 뽑아 만든 자경대의 일원이었다.
다리를 건넜다. 바닷가에서 섬으로. 법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속임수와 불법이 판치는 곳으로 가까이하자니 시온은 반가운 기분이었다. 그도 어디까지나 비밀꾼이었으니까.
“바깥도 사람이 많았는데 여기는 더하네.”
“실레몰이니까요.”
“물건도 많고.”
“그것도, 실레몰이니.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알아서 볼게, 알아서.”
휘휘 걸었다. 노점도 많고 객상客商도 많았다. 여러 물건이 있지만 절반 정도는 제국 상인을 위한 서방 밀수품이었고 또 나머지 절반은 서방에 팔아넘기기 좋은 제국 밀수품이었다. 애국심과 준법정신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다.
“생각보다 훨씬 큰데.”
“위아래로 겹겹이 쌓였거든요. 위로는 열세 층, 아래로는 다섯 층!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다중 점포입니다.”
“주 거래 품목은 모두 밀수품이고?”
“당연한 말씀을.”
“잘 돌아가는군, 코르디스!”
시온은 기분이 좋았다. 회귀 전에는 다 망한 뒤에 찾아왔었기에 이렇게 커다랄 줄은 몰랐다. 무너트릴 날을 고대하는 제국에서 이렇게 큰 규모의 암시장이 돌아간다니,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키프코스는 어디에 있지. 역시 아래?”
“네.”
“지하로는 다섯 층이랬지만, 그보다 더 아래, 숨겨진 층에 있으려나?”
“…실레몰은 처음이시라면서 잘 아시는군요.”
글로시오스가 앞장서고 시온이 뒤따랐다. 그는 노점들 사이를 익숙하게 헤치며 커다란 계단을 찾아내었다. 보초가 있었지만 안부 몇 마디를 물으니 쉽게 길을 비켜 주었다.
계단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깊숙이 갈수록 물건들은 크고 비싸고 대담해졌다. 더 많은 법령을 더 심각하게 어기고 있다는 소리로, 더 위험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땅 아래 다섯 번째 층까지 오니 공기부터가 달랐다.
“숨쉬기도 힘들군.”
“다들 저렇게 뻑뻑 피워 대니 어쩔 수 없죠.”
지하 5층 길 곁에는 주저앉은 사람 없는 데를 찾기가 어려웠다. 다들 연초를 빼어 물고 신나게도 연기를 태워 대었다. 냄새를 맡으니 합법적인 물건들은 아니었다. 아니, 피워 대는 상판들부터가 합법과는 거리가 아주 멀어 보였다.
연초와 그 비스무리한, 물론 더 위험할 물건들의 연기. 얇고 비치는 옷의 여인들. 손목 발목에 족쇄 따위를 차고 있는 사람들. 전통적이기까지 한 인간사의 병폐는 지금까지도 여전한 모양이었다.
흥. 시온은 약간의 동정심을 느꼈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실레몰 정도는 괜찮은 편이었다. 느슨할 대로 느슨해졌을 뿐 법 아래에 있기는 하니까. 글로시오스는 그를 더 깊은 곳으로 이끈다.
“키프코스 형님은 이 아래입니다.”
굳이 대답하지 않고 따랐다. 거짓말을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한 층 더 내려가니 인적이 확 줄어들었다. 오가는 이들은 하나같이 험상궂은 주먹패뿐이었다. 다들 글로시오스를 보면 허리 숙여 인사하기 바빴다.
“여기에서 왼쪽….…”
“갔더니 무장한 경호원 따위가 있다거나 하면 바로 목이 부러진다.”
“…사실은 오른쪽.”
역시나 안 통하네요. 글로시오스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걸었다. 그는 속일 생각을 다시금 내려놓고는 시온을 안내했다.
“그보다 키프코스랑 꽤 친한 모양인데.”
“예, 뭐. 오래 봤지요.”
“단숨에 팔아넘기길래 원한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보여서.”
글로시오스가 갈라진 턱을 만지작거렸다.
“위협만 하고 한 명도 죽이지 않은 데다가 곧바로 형님 이름을 대니까 뭔가 거래를 하려나 싶었죠.”
“눈치가 빠른데. 왜 밖에서 애들 돈이나 뺏고 있었지?”
“눈치만 있지 재주는 없거든요.”
구레나룻 사내가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사실 원한도 있습니다.”
화려한 문. 앞에는 호위인 듯 무장한 사내가 둘. 하지만 글로시오스를 보니 대뜸 허리를 숙인다. 너머에 키프코스가 있음이 분명했다.
“망할 놈의 형님! 조금 해 먹었다가 걸렸다고 길거리에서 애들 관리나 하라니.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패에서 지위가 꽤 있나?”
“오른팔까지는 몰라도 엄지손가락 정도는 되지요.”
글로시오스는 당당히 말한다. 키프코스 형님께 내가 왔다고 전해. 예. 말을 전하기가 무섭게 두꺼운 문이 안에서부터 열렸다.
“들어가시죠. 키프코스 형님은 이쪽입니다.”
67화
사내의 앞니는 번쩍이는 금金이었다.
“뭐냐, 글로시오스?”
키프코스는 위쪽 앞니 둘, 아래쪽 어금니에 셋, 총 다섯의 금이빨이 돋보이는 자였다. 복색도 특이했다. 제국 초기 귀족들처럼 길고 넓은 천을 고풍스레 휘휘 두른 꼴이었다. 자신을 고상하게 드러내고픈 마음이 절실해 보였다.
“한동안 안쪽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뒤의 꼬마는 또 뭐야?”
요상한 복장과는 별개로 눈매가 사나웠다. 굵은 목을 보면 힘 꽤나 쓸 것 같았고 넓은 턱을 보면 욕심이 보통이 아닐 듯했다. 그러니 호벨 만의 돈이 모여드는 실레몰 자유시장에서 거물 노릇을 하고 있겠지.
키프코스는 굵은 연초를 빼물고 불을 붙였다. 연초도 불붙이는 도구도 상당한 고가품이었다. 연기를 뻐금대던 금이빨 사내의 시선이 글로시오스의 손목에 닿았다.
“손목은 왜 그래?”
“그, 넘어졌습니다…….”
“하! 믿으라고 말하는 거냐?”
하여간! 키프코스는 성질을 내며 탁자 서랍을 뒤졌다. 어렵지 않게 작은 병을 하나 찾아 글로시오스에게 내던졌다. 구레나룻 사내는 그것을 받아들고도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마셔라.”
“…아니, 황금약을 왜.”
“원래 폐기하려던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 손목 정도는 금방 낫겠지.”
“이 비싼 걸…….”
“참나. 네놈 길바닥에 보내 놓고 난 마음이 편했겠냐? 약값 받아 내기 전에 어서 마셔라.”
“…….”
글로시오스가 약병을 입으로 옮겼다. 진득한데도 묘한 청량감이 있는 걸 보니 황금약이 틀림없었다. 만병까지는 아니어도 백병 정도는 고치는 효능이 있는 그들의 주력 상품이다. 약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니 곧 활력이 돌고 손목 통증이 가셨다.
“왜 그런 얼굴이냐, 글로시오스.”
글로시오스는 묘한 표정이었다. 비싼 약을 마셔 상처가 나았는데도 왜 저런 얼굴인지. 키프코스가 연기를 뿜으며 킬킬 웃었다.
“마치 자기가 팔아넘긴 사람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아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듯한데?”
그는 파-하하하, 하고 웃었다.
“농담이다, 농담! 우리가 어떤 사인데!”
“…….”
“너 왜 말이 없어. 그렇게 말 많은 놈이.”
“…….”
“…글로시오스, 너… 설마…….”
키프코스가 금이빨을 번쩍이며 소리 질렀다.
“또 날 팔아먹었냐!?”
“또!?”
시온도 깜짝 놀라 덩달아 외쳤다. 이제껏 지켜만 보았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어 글로시오스를 바라보았다.
“당신, 이런 짓이 처음이 아니야?”
“아니. 다 사정이 있습니다. 저번까지는 그, 뭐야, 쌍방 합의된 배신, 뭐 그런 거지요. 진짜는 오늘뿐이에요.”
“배신에 쌍방 합의가 성립될 수 있나……?”
시온이 멍하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로시오스는 손을 내저으며 키프코스에게 말했다.
“형님. 오늘은 평소랑 다릅니다.”
“엉……?”
“이 꼬마에게는 진짜로 협박을 당했어요.”
“…확실히 평소랑은 다르군.”
둘의 이야기를 듣던 시온이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들의 평소가 궁금해지는걸.”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는 조직이었다. 시온은 이해를 포기하고 글로시오스에게 저리 비키라고 손짓했다. 더 중요한 용건이 있었다.
“어쨌든, 당신이 금이빨 키프코스지?”
“꼬마, 어른 이름을 너무 함부로 부르는데.”
키프코스가 주먹을 매만지며 뼈 꺾는 소리를 내었다. 꽉 쥔 주먹이 시온의 얼굴만 했다.
“아니면 졸부라고 불러 드릴까.”
“내가 가장 싫어하는 별명을 용케도 알고 있군. 실레몰에서 날 그렇게 부르고 살아있는 놈은 셋도 안 되는데.”
시온은 연신 꿀릴 게 없다는 듯한 태도다. 금이빨 사내는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 끽해야 십대 중반인데 무얼 믿고 저렇게 당당한지.
“평범한 꼬마는 아니군. 목적이 뭐냐?”
“거래.”
“뭘 사고 싶어서?”
“뻔하지.”
시온이 코웃음 쳤다.
“당신네 주력 상품.”
“황금약? 위에서 사지그래. 조금 비싸도 질은 좋다고.”
“아니. 그런 짝퉁 말고.”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호렘 암리타가 필요해.”
“호렘 암리타?”
“정제되지 않은 물건으로.”
“…하, 하하하!”
키프코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꼬맹아. 그걸로 뭘 하려고? 죽은 사람이라도 살리게?”
세상은 동화랑 다르단다. 키프코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무엇보다 특급 거래 금지 품목이다. 팔기는커녕 손에 넣은 시점에서 평생 치안청에 쫓겨 다닌다고.”
“그러니까 여기, 실레몰 지하시장에서 찾고 있잖아.”
“음…….”
키프코스가 시온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푸른 눈동자는 흔들림 없다.
“…진짜 알고 온 모양이군.”
암리타는 동화에 자주 나오는 불사의 약이다. 그런데 호렘이라는 작자가 동화 속의 것과 한없이 닮은 약을 만들어 내었다. 병을 고치고 상처를 치유하고 노화를 막는다. 다소 부작용은 있지만 몇 초 정도라면 끊어진 숨까지 되돌린다는 영약 중의 영약.
호렘 암리타는 턱없이 비싸고 귀하다. 황금약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이 사실. 키프코스 패가 비밀스럽게 거래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 물건이다. 아주 엄선된 거래 상대들에게만 극비리에 넘기지.”
값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황금약은 같은 무게의 황금만큼이나 비싸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호렘 암리타는 황금약보다 적어도 백이십 배 이상의 값어치가 있다.
“한 방울의 호렘 암리타를 사려면 주먹만 한 금덩이가 필요하고, 네게… 그런 돈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시온은 거지꼴이다. 루베코 골짜기에서부터 줄곧 아메투스에게 쫓겨 다닌 탓이다. 그러니 오해를 사도 별로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꼴은 이래도 돈은 있어.”
“내 입장에서는 널 그냥 치워 버리는 편이 더 편한걸.”
“좋은 값을 쳐준다고 해도?”
“널 치우면 그 좋은 값도 당연히 이 키프코스 것이 되지 않겠어?”
“그렇게까지 말하면, 좋아…….”
시온 폴링라이트가 눈을 빛낸다.
“…협상을 시작해야겠네.”
* * *
“글로시오스.”
“옙.”
구레나룻 사내는 시온의 부름에 허리를 바짝 세웠다.
“여기까지 안내받은 정이 있으니 잠깐 나가 있어.”
“고맙습니다.”
글로시오스는 부리나케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래도 문을 다 닫지 않고 힐끔힐끔 동태를 살피는 게 마지막 충성심인 듯했다. 키프코스는 그 꼴이 우스워 당혹을 토했다.
“뭐 하는 거냐, 글로시오스?”
“형님, 그냥 물건 팔고 맙시다…….”
“이 등신! 입만 산 것도 정도가 있지! 이딴 꼬마한테!”
재떨이가 날았다. 글로시오스는 황급히 머리를 피했다. 키프코스는 요란한 소리를 듣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목을 이리저리 풀었다.
“후… 그래, 꼬맹이…….”
키프코스는 천천히 옷을 벗었다. 팔뚝도 몸통도 굉장히 굵어 마치 통나무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과는 다른 기백이 있다.
“이 키프코스랑 해보겠단 거지.”
그는 손을 풀기 시작했다. 손의 겉도 속도 굳은살투성이였다. 단순한 싸움꾼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단련된 모양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시온을 보았다.
“실레몰은 아무리 수완이 좋아도 힘이 없으면 하룻밤도 버틸 수 없는 곳이란다.”
“말이 많네.”
시온이 터벅터벅 걸어 재떨이를 제자리로 되돌렸다. 비싼 물건 같은데 바닥에 구르는 꼴을 보자니 어째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는 꼼꼼한 성격이었다.
“다음은 자기 출신이라도 이야기할 거야? 제11군단 백인대장이었던 걸 알고 까부는 거냐, 뭐 그러면서?”
“…너, 아는 게 정말 많은걸…….”
키프코스의 금이빨이 번쩍였다. 그는 시온의 정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 앳된 꼬맹이가 무엇이기에 그의 사업도 출신도 죄다 꿰고 있는 것인지.
“어디서 그렇게 주워듣고 다녔는지 가볍게 몇 대 혼내 준 다음 물어보마.”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시온을 노려보았다. 키는 큰 편이 아니었지만 몸집이 다부졌다. 키프코스가 제 턱을 죽 내밀었다.
“먼저 쳐라, 꼬마야.”
“아저씨, 자신감이 과해.”
“스스로는 겸손한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같잖은 허세에 시온이 고개를 내저었다.
“사양은 않지.”
그의 몸뚱이는 아직 열한 살이다. 부푼 덩치는 마갑 발지아트 때문이다. 그림자 차원의 괴물로 만들어진 팔뚝이니 주먹이 가벼울 수는 없었다. 그것이 정확하게 키프코스의 턱에 꽂혔다.
“흥.”
금이빨 사내가 코웃음 쳤다.
“역시나 간지럽군. 꼬마의 주먹다워.”
“어라?”
잠깐 정신을 놓게 할 생각으로 뻗은 주먹이었다. 그런데 키프코스는 아주 멀쩡한 얼굴로 금이빨을 보이는 중이다. 몇 대 더 쳐도 좋아. 시온은 또 사양하지 않고 키프코스의 턱을 두들겼다. 퍽퍽대는 소리는 났지만 금이빨 사내에게는 타격이 없었다.
“당혹스러운 얼굴이군.”
키프코스는 거드름 피우며 말했다. 사실 시온의 주먹은 가볍지 않았다. 다만 그가 쓰러지지 않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무나 들어볼 수도 없고 사용하는 이는 더욱 없는 비밀스러운 영혼의 능력.
“세상은 생각보다 넓단다, 꼬맹아.”
금이빨 키프코스의 기예, 말뚝 뱃심.
근성만 있다면 어떤 타격도 아무렇지 않다.
근성만 있다면 쇳덩이도 먼지로 만들 수 있다.
근성만 있다면 깊은 상처라도 그를 해치지 못한다.
근성만 있다면!
“기예Ars라고 들어는 보았……?”
“응. 잘 알아.”
“…왓!”
키프코스의 몸이 죽 끌려 올라갔다. 그는 근성을 발휘해 떨쳐 내려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무엇을 떨쳐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그의 목을 엄청난 힘으로 붙잡아 끄는데 그게 뭔지 보이지 않았다. 근성이 있는데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맷집은 대단한데 그게 전부여서야 어쩌려고, 아저씨.”
“켁……!”
‘공상손가락’이 금이빨 사내의 목을 짓눌렀다. 몸부림치는 팔다리의 힘이 상당해서 하나씩 붙잡아 주었다. ‘공상손가락’을 무려 다섯이나 쓰고 말았다. 물론 아직 서른이 넘게 남았지만.
“발버둥 치지 마. 목 부러진다.”
“…마법이, 아니군……. 기예구나……!”
기예Ars는 평범한 방식으로 얻지 못한다. 그 존재조차 공공연하지 않다. 키프코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예를 사용함은 저 꼬마가 그 못지않게 범상치 않은 삶을 살았단 소리였으니까. 시온이 발을 내디뎠다.
“좋게 가자고. 섭섭하지 않은 값을 치를 테니까.”
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를 찾는 척하며 발지아트에 삼켜 놓았던 보석을 몇 개 꺼냈다. 출처를 특정하기 힘들 것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들로. 코르디스 황실에서 가져왔으니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작은 병 하나에 이 정도를 내지.”
“오……!”
공중에 매달린 키프코스가 눈을 빛냈다. 겨우 몇 개의 보석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눈치챈 까닭이다.
“값을 따져 볼까요, 형님?”
“이 자식…….”
어느새 돌아와 곁에서 속삭이는 구레나룻 사내를 보자 키프코스는 울컥 성이 돋았다. 허나 화나 내고 있기에는 저 보석의 반짝임이 너무 눈부셨고, 여전히 공중에 매달린 채이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까딱여 명령했다.
“…어서 세어 봐라, 배신자 글로시오스.”
“알겠습니다, 쪼잔한 졸부 키프코스 형님.”
사이가 좋은걸. 시온이 보석을 내밀었다. 글로시오스는 어디서 꺼냈는지 확대경까지 쓰고는 보석을 이리저리 들여다보았다. 그 눈이 크게 변하는 것은 순간이었다.
“…형님, 형님.”
“왜?”
“…저희 파는 값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되겠는데요.”
“뭐!?”
키프코스가 소리질렀다.
“꼬마! 내려 줘라!”
시온은 ‘공상손가락’을 풀어 주었다. 금이빨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시온의 양손을 와락 붙잡았다.
“진작 말했어야지! 괜히 싸웠잖아!”
“후하게 준다고 했잖아.”
“아. 이 정도로 후할 줄은 몰랐지. 나도 안목을 더 키워야겠어. 이토록 귀한 손님을 못 알아보다니!”
그는 만면에 함박웃음이다.
“몇 병이나 필요해서 그래?”
“넷… 아니, 다섯 병.”
“물량이 없어서 그건 힘들어. 세 병까지는 팔 수 있는데.”
“그럼 그거 전부.”
시온은 또 품에 손을 넣었고 또 보석을 끌어내었다. 키프코스와 글로시오스의 눈이 환하게 반짝였다.
“잘 데려왔죠, 형님?”
“그래, 네 갈대 같은 충성심도 가끔은 도움이 되는구나.”
그들은 서둘러 보석을 챙겼다. 키프코스는 은근슬쩍 글로시오스의 주머니에도 하나를 넣어 주었다. 생김새와 달리 정이 많은 사내였다.
“세 병이면 준비하는 데 닷새는 걸린다. 그동안 쉬고 있어. 숙소나 기타등등 모두 우리 쪽에서 준비해 주지.”
“그렇게 하지.”
키프코스가 목청을 키웠다.
“글로시오스!”
“예, 형님!”
“귀한 손님을 모셔왔으니까 네가 끝까지 모셔라!”
“알겠습니다!”
68화
실레몰 자유시장에는 외지에서 온 상인들도 그들을 위한 숙박업소도 많다. 글로시오스는 시온을 한 여관으로 안내했다. 투숙객의 신분 따위를 조금도 묻지 않으면서 최고 수준의 응접을 제공했으며 그만큼 값비쌌다.
글로시오스는 키프코스에게 접대비를 받아왔다며 숙소의 요금을 지불했다. 상당한 금액이었는데 시온이 호렘 암리타의 값으로 내놓은 보석에 비하면 푼돈도 되지 못했다.
“역시 침대가 좋아. 이렇게 개운한 아침이 얼마 만… 아, 젠장, 엉망이군.”
시온이 혀를 찼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진물이나 피딱지가 침대를 더럽힌 까닭이다. 냄새가 지독했다.
“종업원에게 팁을 좀 넉넉히 줘야겠는걸.”
아메투스에게 입었던 오른 어깨의 상처는 아직도 깊다. 팔이 거의 잘려 나갈 뻔했으니. 그래도 황금약을 몇 병 구매해 마셨더니 거의 아물었다.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실레몰에 머무는 중에 다 나을 듯했다.
“잠자리는 편하셨습니까?”
“좋은 숙소 덕분에.”
글로시오스는 로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온은 가볍게 인사하며 말했다.
“거래 관계가 되었으니 조금은 정중하게 대해 드리죠, 글로시오스 씨.”
“저야 고맙지요. 이쪽에서는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하겠습니까?”
“파시오누스.”
“그렇게 알아 두지요.”
시온은 가짜 이름을 대었고 글로시오스는 가짜 이름임을 알면서도 구태여 더 묻지 않았다.
“닷새랬죠. 식사나 하러 갑시다.”
“식사도 저희 쪽에서 부담하겠습니다.”
“그래요?”
글로시오스는 신이 난 기색이었다. 받아온 접대비에는 자신의 식사비도 포함되었으니 평소에는 먹기 힘든, 즉 아주 귀하고 비싼 음식을 먹자면서 시온을 부추겼다.
“청란어가 제철인데 어떠십니까? 생각해 보세요. 살짝 구워낸 청란어에 세필리카 소스를 올려서… 어… 그쪽은 노점인데……?”
구레나룻 사내가 애타게 불렀으나 들은 척 않고 걸음을 옮겼다. 몇 번 성큼거리니 갖가지 음식 향기가 때리듯 다가왔다. 숯불에 구워내는 문어구이, 푹 쪄내 후추를 뿌린 소시지, 철판 위에서 볶아지는 닭과 야채……. 노점 음식답게 생김새도 향도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여러 노점을 지나친 시온의 발걸음은 곧 한 가게에 닿았다. 숙소를 잡으러 움직일 때부터 봐두었던 곳이다. 어린아이들이 길게 줄을 섰는데 시온도 그 뒤에 순순히 따라 섰다.
“…이게 식사입니까?”
“단 걸 좋아해서.”
제과점이었다. 달짝지근한 설탕과 우유 냄새, 또 계피나 민트 따위. 시온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졸인 설탕을 뿌리다 못해 설탕 결정같이 된 빵이나 파우더를 뿌린 화려한 과자를 보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줄 선 어린애들은 시온과 글로시오스를 묘한 눈으로 흘끔거렸다. 구레나룻 사내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싸맸으나 시온은 당당했다. 곧 차례가 되었고 주문은 간결했다.
“여기부터 저기까지. 계산은 여기 구레나룻 아저씨가.”
제과점의 절반 정도를 쓸어 담고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먹고픈 과자들이 눈앞에서 동나는 것을 본 어린애들이 울상을 짓고 몇은 정말 울기도 했지만 시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민망함은 글로시오스의 몫이었다.
‘설탕 뿌린 과자는 비상식으로 좋지.’
돌아다니며 여러 물건을 보았다. 시덥지 않은 것들을 보며 중간중간 보존식이나 마법 도구 등을 샀다. 그는 아직 도주 중이었고, 계획이 많이 진척되었으나 마음을 놓기에는 일렀다.
글로시오스의 눈을 피해 슬쩍 물건들을 발지아트로 삼켰다. 발지아트는 여러 차원에 걸쳐져 있는지라 내부에 보이지 않는 공간이 있었다. 마법도구가 아니기에 검문 따위에 걸리지 않는 게 최대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부피가 크지는 않아서 신경을 써야 했다.
‘오랜만에 여유롭군. 며칠은 마음 놓을 수 있겠어.’
루베코 골짜기로부터 줄곧 쫓겼다. 오른 어깨의 상처는 아직 욱신거리고 있다. 그런 몸으로 길거리에서 자고 먹은 피로는 하룻밤 만에 사라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닷새 동안 최대한 피로를 풀어 놓고 싶었다.
‘특무대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남부에서는 이야기가 다르지.’
아메투스는 여전히 그를 쫓고 있다. 실레몰에 들어섰음도 알고 있을 터다. 그러나 시온은 여유롭다. 아메투스와 특무대의 손길이 그에게 닿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러하다.
‘호벨 만의 고래는 만만하지 않다고.’
* * *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은 제국 치안청 소속 치안기사로 특무대장 샤디 섄도르의 부관이기도 하다. 그는 한창 불만을 꿍얼거리는 중이었다.
“대체 왜 허가가 나오지 않는 겁니까?”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특무대의 이름으로도 서남부로 넘어온 게 겨우 우리 셋이라니요. 말이 되는 일입니까?”
운테스는 말이 많았고 샤디와 아메투스는 조용했다.
“지독하게 상식 밖입니다. 대체 누가 치안청 특무대장의 수사 권한뿐만 아니라 특무대의 통행 허가까지 막는단 말입니까? 명백한 월권행위예요!”
“조용히 하렴, 운테스.”
샤디 섄도르의 목소리는 신비롭게 낮다. 그녀는 여전히 ‘모래 물음’의 대가를 치르느라 눈이 멀었다.
“아메투스 대장도 가만히 있잖니.”
“쯧…….”
노골적인 혀 차는 소리. 운테스는 쾌활한 만큼 때때로 혈기 넘치게 굴 때가 있었다. 왜 비밀스러운 임무가 많은 특무대에 자원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둘을 뒤로하고 앞서 걷는 아메투스를 향해 샤디가 물었다.
“그런데 저도 궁금하기는 해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요? 소리를 들으면 도시는 아닌 듯한데.”
“다 왔다.”
옥색 눈 사내가 손짓했다.
“저기 보이는군.”
“전 눈이 멀었는걸요? 나 대신 봐주겠어,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
명령대로 하지요. 운테스가 아메투스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어…….”
바닷가. 소금기 머금은 바람에서 짠 내가 짙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이 몇 호戶, 사람의 기척은 없다. 더 멀리 보면 너울대는 파도 사이에 무엇이 있다.
“…망한 어촌이랑 고깃배 하나가 보이는군요.”
“아하.”
샤디 섄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을이 트리테인가요?”
“그래.”
“어쩐지 바다 내음이 심하다 했어요.”
그녀는 쿡쿡 웃으며 되물었다.
“아메투스 대장, 꽤나 과감한 방법을 택하셨네요?”
“한시가 급하니까. 목표가 코앞인데 놓칠 수 없지.”
“하지만 직접 찾아왔다고 상대를 해줄까요?”
“서면으로 요청하는 쪽보다는 훨씬 빠르지 않겠나.”
망한 어촌과 고깃배라는 말로도 샤디 섄도르는 아메투스의 생각을 알아낸 모양이었다. 제국 치안청의 특무대장이라는 이름은 결코 우습지 않음을 증명해 낸 그녀를 보며 운테스는 묘한 패배감을 느꼈다. 그는 특무대장의 부관이었지만 아직 짐작이 가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다 망한 어촌이랑 저희 수사가 방해당하는 거랑 무슨 상관입니까……?”
“운테스.”
샤디 섄도르가 빈 눈구멍 위에 덮은 안대를 매만졌다. 두 눈을 가리고도 구불대는 머리칼이 퍽 고왔다.
“고깃배에 사람이 있니?”
“예. 늙은 어부가 혼자 그물을 건지는 중이네요.”
운테스가 눈을 부릅떴다. 그는 관찰력이 뛰어난 사내다.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멀찍이 떨어진 어부의 생김새가 보였다.
“노인치고는 덩치가 어마어마한… 데…….”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늙은 어부가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렸기 때문에, 또 머리가 벗겨진 대신 턱수염이 풍성한 거구의 늙은 어부에 대해 들어 보았기 때문에.
“…설마, 저 어부……!”
“그래. 이만큼 알려 줬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면 부관 자격을 진지하게 의심할 뻔했어.”
“…호벨 만灣의 고래군요.”
운테스가 탄성을 토했다.
“제11군단장, 니코 네레이아데스!”
* * *
늙은 어부는 그들을 발견하고 배를 돌렸다. 배를 대충 묶어 둔 뒤 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는데 가까울수록 그 덩치의 어마어마함이 실감이 났다. 제2황자 세쿤두스 데비우스보다도 두 뼘 이상은 거대해 보였다.
“사생활을 방해하는 취미가 있나.”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적개심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돌아가라.”
“제국 치안청 치안기사, 아메투스요.”
아메투스는 노골적인 적개심에 노골적인 무시로 답했다.
“호벨 만 일대를 수사하려는데 협조가 필요해서 이렇게 찾아왔소.”
“돌아가라고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1군단에서 모든 종류의 협조를 강력하게 거부하다 못해 통행조차 막기에.”
대화라기보다는 충돌에 가까웠다. 아메투스는 제1황자 페르비아스의 심복이 아니라 치안기사로서 왔다. 때문에 황실의 권위를 빌릴 수가 없었다. 니코도 그것을 아는 모양인지 강경함을 꺾지 않았다.
“…….”
“…….”
두 사내는 서로를 지그시 응시했다. 니코는 얼마나 덩치가 큰지 아메투스의 눈높이가 겨우 그의 가슴에서 머물 정도였다. 아메투스도 퍽 장신長身인데도 불구하고. 니코는 턱 아래의 옥색 눈을 내려보며 구기듯 내뱉었다.
“…실레몰은 자치 도시다.”
설명하기 싫은 티를 숨기지 않으며 늙은 어부는 말을 이었다.
“또, 아무리 치안기사라고 해도 자세한 사항을 설명하지 않으면 협조할 수 없어. 대제 폐하께서 내게 그런 권한 정도는 주셨지.”
“설명할 수 없는 건이라고 서면을 보냈을 텐데.”
“나도 그럼 협조해 줄 수 없다고 말하는 중인데.”
샤디 섄도르와 운테스는 약간의 혼란을 느꼈다. 점쟁이 아메투스 앞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거한을 대단하다 여겨야 할지, 아니면 코르디스 11군단장을 상대로 당당하기 그지없는 옥색 눈에 감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당혹만이 분명했다.
흥. 니코가 코웃음 쳤다. 그가 주먹을 쥐자 아메투스의 머리통만 했다. 대형 맹수 못지않은 덩치의 맨주먹은 어지간한 날붙이보다 위협적이다.
……. 아메투스 또한 아끼는 양날검으로 손을 옮겼다. 그는 어지간한 칼잡이가 아니었다. 두 사내는 서로를 바라보았고, 거의 동시에 서로가 거의 비슷한 영역에 도달해 있음을 깨달았다.
“…폐를 끼쳤다면 사과하겠소.”
먼저 꼬리를 내린 쪽은 아메투스였다. 이 싸움에는 의미가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5황자 지오니스의 생사를 확인하고 그 목을 베어 돌아가는 것이었다. (마지막 광대가 기억을 지운 탓에 시온의 생사에 대한 확신조차 잃어버렸다.)
“다만 왜 이렇게 강경하게 구는지 모르겠군.”
“모른다고 했나, 차기 황제 폐하의 심복?”
니코가 파,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마리나 전하와 싸워 이겼다며?”
“…….”
“그 덕에 세쿤두스 전하께선 승리하지 못하셨고.”
아메투스는 침묵을 지켰고 니코는 턱수염에 말라붙은 소금을 털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니 마치 맹수와 같은 위압이 있었다.
“나와 데비우스가家의 두 분 전하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할 게 전혀 없지 않나.”
데비우스 가문.
군부의 힘 대부분은 그들에게 위임되어있다. 제11군단도 예외는 아니다. 군부는 코르디스의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나 그들과 황제를 연결하는 것은 제일장군 데발로 데비우스이니.
코르디스는 대륙 전역에 영토를 뻗친 대제국이다. 중앙을 벗어나면 황실의 영향이 옅을 수밖에 없다. 북부가 볼마르크 공국의 영향이 짙듯 제국 남부는 데비우스 가의 것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벨 만은 이 니코의 영역이다.”
니코 네레이아데스, 제11군단장.
“그쪽 셋의 통행 허가 정도는 내어 주지. 하지만 수사 권한은 절대 내줄 수 없다. 실레몰에도 들일 수 없어. 폐하의 칙령이라도 가져오지 않는다면!”
“…그쪽 고집이 고래 심줄이라 호벨 만의 고래라 불린단 이야기는 들었지.”
“나도 치안청의 점쟁이가 답답하단 이야기 정도는 들었어.”
니코가 발을 굴렀다. 그뿐인데 울림이 사방을 흔들었다. 눈이 먼 샤디가 균형을 잃을 뻔했고 아메투스가 잽싸게 그녀를 잡아 주었다.
“모르겠나. 나름 인정을 베풀고 있는데.”
니코가 옥색 눈을 들여보았다.
“사정을 설명하면 협조해 줄 수도 있다고 분명히 말했지. 그런데도 입을 그리 꾹 다물고 찾을 게 있단 말만 하면 어찌 협조하지?”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대화는 끝이다. 돌아가라.”
늙은 어부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돌렸다. 저 바다로. 두고 온 것 많은 푸르른 너울로.
“그물을 마저 건져야 해.”
69화
아메투스는 다 망한 어촌을 떠났다. 샤디 섄도르도 제 부관 운테스의 부축을 의지해 뒤를 따랐다. 제11군단장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 이내 조용히 뇌까렸다.
“제도帝都 놈들이 여기까지 오는 일은 드물지. 특무대와 차기 폐하의 심복이라면 더욱이.”
니코는 묻는다.
“무슨 일이라고 생각하나, 부케노스?”
“글쎄요. 찾을 게 있다는 말은 사실로 들렸습니다.”
제11군단 수석참모 부케노스는 매부리코가 도드라진 사내였다. 눈매도 날카로워 마치 맹금류 같은 인상을 주었다.
“치안청의 점쟁이는 워낙 우직한 사나이가 아닙니까. 거짓말을 하는 이는 아닙니다.”
“같은 곳에서 배웠다 했지.”
“제 쪽이 3년 선배였습니다.”
“겨루어 보았나?”
“손도 못 쓰고 당했습니다.”
“지금은 어떨 것 같나?”
“저는 참모가 되어 펜을 잡을 때가 많았고 저 친구는 줄곧 검을 잡았지요.”
이전보다도 더욱 차이가 벌어졌다는 소리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소금기 잔뜩 머금은 제 턱수염을 두어 차례 긁적이고는 말했다.
“나랑 비교하면 어떻겠나?”
“차기 폐하의 총애가 이유 없지 않겠지요.”
“그렇겠지. 그럴 거야.”
니코의 눈이 잔잔하게 일렁였다. 이미 아메투스를 마주한 순간부터 알아차렸다. 저 옥색 눈 사내는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인데도 코르디스 군단장 못지않은 힘을 품고 있었다.
“마리나 전하의, 데비우스의 뿔은 겨우 손가락 몇 개 없다고 무뎌질 것이 아니니까.”
제2황자 세쿤두스의 어머니, 마리나가 칠련장군이라 불리던 시절이 있다. 니코는 그때의 마리나를 곁에서 보았다.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한들, 요제프 하이더에게 세 손가락 잃었다 한들 마리나 데비우스다.
그런 마리나를 꺾은 아메투스에게 약간의 경탄을 품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만약 이 약간의 호감 없었다면 만나는 순간 때려 쫓아냈을 터다. 그게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호벨 사나이의 방식이다.
“저 사내, 막는다고 막아지겠나?”
“그럴 리 없지요.”
“적당한 시기에 들여보내라.”
“예.”
부케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수한 자다. 때와 방법 모두 고를 줄 알았기에 명령만 내리면 되었다.
“그리고 손님을 맞이하려면 더러운 걸 놔둘 수야 없겠지. 실레몰의 그물을 걷어야겠어.”
니코가 해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잡기는 했지만 먹지도 풀어 주지도 않은 물고기 떼가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중이었다. 물고기의 눈은 멍하니 부패했으며 니코 또한 아무런 감상 없이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언제 걷었지?”
“육 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때 키프코스가 옥살이를 했었나.”
“예. 팔 개월 정도 복역하다 탈옥한 걸로 되어있습니다.”
“이번에는 봐줘야겠군.”
아메투스는 차기 황제의 심복이다. 그가 호벨 만에 들어서기 전에 더러운 것은 모두 비워야 했다. 이를테면 온갖 인종과 온갖 불법이 횡행하는 자치도시의 자유시장 같은 곳을.
“키프코스에게 연락해 줘라. 그물을 걷을 거니 대신 잡혀 들어갈 간부를 둘, 아니 셋을 준비해놓으라고.”
“그물을 걷을 인원은 어떻게 할까요.”
“백인대 다섯이면 차고 넘친다. 가장 가까운 데에서 알아서 뽑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제11군단장은 실레몰 자유시장의 토벌을 명했고 그의 수석참모가 실행할 것이다. 제국의 묵인하에 번성했던 암시장이다. 이제 제국 군대가 나서니 깨끗해질 것이다. 적어도 잠깐은 그렇게 보일 터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실레몰 자유시장에 손을 대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살았고, 사람 사는 곳이 모두 깨끗할 수 없음을 알았다. 또, 쓰레기를 한곳에 모아 두면 청소하기 간편하다는 것도.
“실레몰을 그물 치는 곳으로 하자는 생각은 자네 전의 수석참모 작품이었지.”
실레몰은 밀수상인의 낙원이자 호벨 만의 쓰레기통이었다. 제힘이 법보다 나은 줄 아는 패들이 쉽게 거들먹대는 곳이다. 니코는 몇 년에 한 번꼴로 그런 치들을 더한 힘으로 끌고 나와 지금까지의 무법에 대한 값을 치르게 했고 이것을 그물을 걷는다고 불렀다.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나쁘지만도 않아.”
니코의 목소리에는 별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한두 번 행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가 그물을 걷는다고 해도 곧 다른 멍청한 놈들이 그 자리를 채우겠지만 또 한 번 청소하면 그만이었다.
“참.”
“또 뭔가 있으십니까?”
“자네 은사가 아직 제도 아카데미에 있다고 했던가.”
“호레이모스 선생을 말씀하신다면 그렇습니다.”
니코가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줄곧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아메투스의 눈동자, 기이한 빛을 띠는 옥색 빛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쪽을 통해 치안청 점쟁이의 학창 시절을 조사해 봐라.”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알겠습니다.”
부케노스는 더 묻지 않았다. 그는 니코라는 사내에게 단순한 충성을 넘어 경외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 메케로스에서 태어난 사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니코 네레이아데스, 이 고래 같은 노인이 평생 동안 호벨 만을 어찌 지켜 왔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이곳에 있을 테니 그물을 걷기 직전에 전령을 보내라.”
니코는 다시 바다로 향한다. 그는 날붙이보다 그물을 잡는 것이 더 익숙했다.
“육 년을 걷지 않았으니… 물고기가 많이도 잡히겠어.”
* * *
“준비가 끝났습니다.”
“닷새라면서 그 두 배가 걸렸네요.”
“그만큼 품질이 확실하지요. 자, 주문하신 호렘 암리타 세 병입니다.”
시온은 퉁명스레 말했으나 키프코스는 조금도 밀리지 않고 받아쳤다. 금이빨 사내는 작은 병 셋을 시온에게 주었다. 회귀황자는 뚜껑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냄새도 빛깔도, 살짝 맛을 보았을 때 전신에 넘치는 활기까지. 틀림없는 호렘 암리타였다.
“화를 낼까 했는데 그럴 수도 없겠는걸요, 정말로 상등품이라서.”
“죽은 자는 몰라도 반쯤 죽은 자는 확실하게 살릴 겁니다.”
“으흠.”
시온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키프코스의 말에는 거짓이 없어 보였다. 그는 병을 품에, 정확히는 품속에 열어 둔 발지아트의 입에 넣었다. 값은 이미 첫날에 치른 뒤였다.
“혹시 상품에 문의는?”
“없습니다.”
시온 폴링라이트가 살짝 웃었다. 실레몰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을 달성했다.
“좋은 거래 감사드립니다, 키프코스 씨.”
“저야말로, 파시오누스 씨.”
파시오누스 펠레우스, 시온의 가짜 이름.
시온 폴링라이트는 제5황자 지오니스이면서 지금은 또 파시오누스라고 불렸다. 스스로도 간혹 헷갈리고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회귀황자는 비밀이 많다 보니 정말로 어쩔 수가 없다.
키프코스와 시온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한쪽은 금니를 번쩍이는 폭력배 두목이었고 한쪽은 열한 살 얼굴에 열다섯 덩치를 가진 서른 살 회귀자였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거래였음은 서로 분명했다.
“그런데…….”
시온이 고개를 돌렸다. 글로시오스를 포함한 몇 사내가 아주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키프코스의 방에서 비싼 물건이나 중요한 장부 따위를 챙기는 것으로 보였다.
“…왜 이렇게 분주해요?”
“아, 일이 조금 있어서…….”
“야반도주라도 하려나 봐요.”
“…틀린 말은 아니죠.”
키프코스가 두꺼운 입술을 매만졌다. 뱉고픈 말이 있는데 뱉어도 되나 고민하는 투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고 그는 곧 입술을 열었다.
“곧 대규모 검문이 시작될 거거든요.”
“검문이 무서워서 지금까지 어떻게 두목 행세를 했어요?”
“보통 검문이어야지요. 이번에는 일대를 싹 소탕해 버린답니다. 행여 잘못되었다가는 옥살이 정도가 아니라고요.”
시온이 턱을 쓸었다.
“잠깐. 그런데 검문이라면 어디에서?”
“어디겠습니까. 11군단이죠. 뭐랬더라, 황실에서 차기 폐하의 심복이 내려와서 그런다 했나…….”
‘역시 또 너 때문이냐, 아메투스?’
시온이 작게 투덜거렸다. 제11군단의 견제 때문에 실레몰에는 들어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영향을 줄 줄이야.
“바깥은 조용하던데.”
“극비 정보니까요. 하지만 확실합니다. 파시오누스 씨도 빨리 뜨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우리 또 좋은 거래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흐음…….”
시온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확신이 넘치는군. 정보도 지나치게 자세하고. 일개 주먹패가 11군단이랑 연이 닿았다고……?’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금이빨 키프코스, 실레몰 자유시장의 주먹패 두목, 11군단 백인대장 출신.
“아.”
조각이 맞아떨어졌다.
“그렇네. 그렇게 된 거였어.”
“뭐가 말입니까?”
“계속 의문이 있었거든요. 아무리 세력이 커도 일개 주먹패가 어떻게 호렘 암리타를 취급하나 했더니.”
호렘 암리타는 용법에 따라 강력한 군사용 약물로 쓰일 수 있다. 특급 거래 금지 품목이 된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제국은 제국마도원과 군부 외의 어떠한 장소에서도 호렘 암리타의 취급을 엄격히 금지했다.
“애초에 11군단에서 주관하는 장사였군. 키프코스 씨, 당신은 퇴역 후에도 계속 그쪽의 끄나풀이었고. 슬슬 꼬리 자르기 당할 것 같아 도망치려는 거죠?”
“…거, 눈치도 빠르십니다.”
“어지간히 높은 쪽에서 시작한 장사인가 봅니다.”
“큼, 이제는 숨길 것도 없죠.”
어차피 도망치려던 판국이다. 그래도 겁이 난지라 키프코스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군단장님 주도입니다.”
“호벨 만의 고래가!?”
아주 엄격한 사내로 알고 있었는데. 키프코스는 시온이 놀랄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퇴역하던 때 제안을 받았습니다. 어차피 구린 일을 할 생각이라면 뒤를 봐줄 테니 호렘 암리타 장사를 맡아 보겠냐고. 조금 찝찝하기는 했지만 네레이아데스 군단장님 앞에서 거절할 수도 없어 승낙했지요.”
옛이야기를 들추니 불만이 쏟아졌다. 생각보다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키프코스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장사는 괜찮았습니다. 벌이도 좋고 실레몰에서 행세하고 다닐 수도 있고. 끄나풀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게 한 번씩 옥살이하는 것도, 뭐, 나름 괜찮았습니다.”
감옥이라고 해도 11군단 운영하에 있다. 군단장의 지시로 옥살이를 하는 키프코스에게 어떤 해코지가 들어올 일은 조금도 없다. 오히려 일종의 휴양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런데 나 하나 보고 온 젊은 놈들 팔아넘기는 건 진짜 못 해 먹겠더군요. 글로시오스도 그럽니다, 언제까지 우리끼리 잡아다가 팔아넘겨야 하냐고. 군인이던 때는 그래도 동료끼리 팔지는 않지 않았냐고.”
“…진짜로 쌍방 합의 배신을 하고 있었군요.”
“이제 정말 됐습니다. 그만둘 거예요. 돈도 충분히 벌었으니 아예 떠 버릴 거라고요!”
키프코스가 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호벨 만을 벗어나면 뭐 어쩌겠습니까? 아무리 니코 네레이아데스라고 해도 바쁘신 군단장님께서 이 금이빨 잡겠다고 쫓아오겠어요?”
“어디로 가려고요?”
“남쪽으로요. 한챠무스 제도가 그렇게 살기 좋다던데요. 아, 따스한 남국이여!”
“한챠무스 제도라.”
시온이 배시시 웃었다.
“그럼 중간에 메케로스에서 절 내려주면 되겠네요.”
“…예?”
키프코스가 제 목을 긁었다. 시온과의 첫 만남에서 ‘공상손가락’에 목이 졸렸던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시온은 주저 없이 품에서 보석 두어 개를 꺼내 내밀었다.
“돈은 내죠.”
“아니, 그래도, 우리는 절박한 도피행인데…….”
“낸다고.”
“…그렇게 하시죠. 자리야 많으니까.”
부하들에게는 뭐라고 한담. 애인이라고 해도 쓸데없이 사람 늘리면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고 을렀는데. 중얼거림을 들은 시온이 잽싸게 말했다.
“저는 뭐, 젊지만 실력 좋은 경호 정도로 소개해 놓으면 이상할 거 없겠죠?”
“이 빌어먹을 자식, 낄 데 안 낄 데 모르는군! 돈 많고 힘 있으면 다인가, 어린놈의 새끼가!”
‘예. 물론이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받은 만큼 확실히 모시겠습니다.’
“키프코스 씨. 생각이랑 말이랑 바뀐 거 같은데요?”
“일부러 그랬습니다, 어리고 돈 많은 파시오누스 씨.”
“흠. 그랬군요, 졸부 키프코스 씨.”
“어어, 말로 하십시오, 우리 교양 있게… 켁! 알겠다니까, 이 어린놈의 새끼… 크에엑!”
매를 벌지. 짐을 싸던 글로시오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금이빨 사내가 공중에 매달리고 시온이 싱긋 웃었다.
“즐거운 여행이 되면 좋겠네요.”
7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