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실레몰은 난리에 난리였다.
자유라는 이름을 핑계로 불법을 일삼던 시장에 제11군단 장병들이 들이닥쳤다. 켕기는 것 없는 이가 없어 다들 도망치기에 바빴다. 제힘을 믿고 호기를 부린 멍청이가 몇 있기도 했지만 자기 멍청함만 증명할 뿐이었다.
일개 노점상부터 뒷골목 두목이라 하는 자들까지 하나같이 줄줄이 잡혀 나갔다. 아무리 세력이 강하다고 해도 코르디스의 정규병 앞에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하소연이 많았다. 어쩜 다들 똑같이 자기만은 다르다고, 자기만은 억울하다고 외쳐 대었다. 물론 제11군단 장병들은 그런 헛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북적이던 거리거리가 하나둘 조용해져 갔다.
“젠장…….”
“…….”
꿇어앉은 이들이 아홉이었다. 밧줄로 꽁꽁 매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꼴이 우스웠다. 실레몰 자유시장에서 우두머리 행세 하던 자들이다. 여인이건 노인이건 인상이 좋지 못했고 성격은 더욱 그랬다.
최대 규모의 노예 도매상, 불법 약물 생산 총관리자, 고리대금 전문가, 법보다 가까운 주먹의 소유자, 비전 있는 청부살인업자……. 팔아서는 안 될 것들(사람을 포함해서)을 사고파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자들을 보며 부케노스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표했다.
“쯧. 이름, 맨 왼쪽부터.”
“…….”
“그렇게 이름 밝히기 싫으면 이름 없는 시체로 만들어 주지.”
부케노스는 제11군단장의 수석참모다. 체포한 죄인에 대한 즉결처형권 정도는 당연하게 갖고 있었다. 그가 눈짓하자 곁에 선 병사들이 무릎 꿇은 이들의 목에 서슬 퍼런 날붙이를 들이밀었다.
“…나, 테르단스 텔롬이요…….”
“본인의 죄가 뭐라고 생각하나?”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좀 높게 받기는 했지.”
“흐음.”
부케노스가 서류를 꺼내 뒤적였다. 그는 곧 원하는 것을 찾아내었다.
“두 달이면 이자가 원금의 두 배라니, 높게 받기는 했군. 본인의 죄가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나?”
“…딱히 없소만.”
“아니. 수금 과정에서 당연하게 폭력을 사용해왔지. 그 수익금을 불법 약물 생산에 투자했고 말이야.”
“…염병! 왜 물어봤소?”
“위증죄를 더해 줄 수 있을 듯해서. 물어볼 때 실토했어야지.”
부케노스가 펜을 휘갈겼다. 테르단스 텔롬의 형량이 늘어났다. 그는 인자하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윤락업소에 들락거린 건 묻지 않겠네. 사생활이니까 말이야.
“형량이 이백 년은 나오겠는걸. 혹시 전설 속의 장수종은 아니지? 아니라면 다시 햇볕 보기 힘들 거야.”
“…….”
테르단스 텔롬은 더 말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정해진 미래를 바꾸지 못함을 실감한 까닭이다. 부케노스 또한 그에게 더 관심 두지 않고 시선을 옮겼다.
“다음, 이름이 뭐지?”
“…레토스 란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나.”
“…사람 장사를 했지. 그래도 옆의 놈들처럼 직접 납치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상등품 전문이라서 아주 공을 들였다고.”
레토스 란테가 열변을 토했다.
“잘 먹이고, 잘 재우고, 좋은 일터를 알아봐 주고! 팔리지 않으면 몇 년이고 데리고 있었어. 그러다 지금은 내 밑에서 일하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물어봐!”
몸값 내고 떠나는 놈 잡은 적도 없단 말이지! 그는 실레몰 지하에서 가장 이름 높은 노예 도매상이었다. 자기 손을 더럽히지는 않았다는 말에 자부심이 있는 듯했다. 부케노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작년에 일곱, 재작년에 열둘……. 칠 년 동안 일흔이 넘는군.”
“…뭐가 일흔이 넘지?”
“네가 화류 쪽으로 팔아넘긴 여자아이의 숫자.”
“…아니, 그게, 고급 유곽도 어떻게 보면 좋은 일터라고 못할 것도 없지 않나…….”
“그런 자네를 위해 좋은 감옥을 준비해 두라고 기별해 놓지.”
“…퍽이나 고맙군.”
부케노스는 차례를 넘어가며 이름과 죄목을 물었다. 제가 지은 일을 솔직하게 다 말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을 세면서 살지 않았고, 설령 기억하더라도 일단 숨기고 보는 까닭이었다.
“거기, 애꾸눈. 이름?”
“이름은 없다. 다들 애꾸라 부르니 그렇게 부르든가.”
“태도가 아주 당당한데.”
“당당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부케노스가 서류를 보며 물었다.
“살인청부업자 친구, 오 년 동안 스물두 명을 죽였다고 되어 있는데. 당당하지 못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나?”
“스물둘? 스물아홉이었다.”
애꾸는 비전 있는 살인청부업자였고 자기 직업에 강한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상대가 고수가 아니라면 의뢰를 받지 않아. 스물아홉과 정당한 결투를 벌였고 모두 내가 이겼을 뿐이다.”
“이봐, 애꾸 친구, 제국법은 사적인 결투를 금지하고 있어. 상대를 죽이기까지 하면 중범죄로 분류가 되고 말이야.”
“난 제국민이기 전에 검객이다!”
“그런 말은 제국 밖에서 해야지. 그 호승심이 싫지는 않지만 여기는 제국이니 제국법으로 따지겠네.”
제11군단 수석참모는 펜을 들고 간단한 계산을 시작했다.
“한 사람 당 칠 년만 잡아도… 어이쿠, 백팔십구 년.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결투 살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백오십 년까지도 나오겠는걸.”
“공정하게 해라, 공정하게! 정식 재판을 열어 줘!”
“아까는 제국민이기 전에 검사라면서?”
부케노스는 어이없어 웃었다.
“그리고 난 대제 폐하의 인가를 받은 정식 법관이기도 하네. 조금 자랑하자면 제도 아카데미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지.”
“역시 귀족 놈이었군! 우리에 대해서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애꾸가 왈칵 성을 내었다. 그러더니 입에 담기도 힘들 욕설을 아주 쉽게 입에 담기 시작했다. 다채롭고 현란한 쌍소리들의 향연에 다른 범죄자들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다. 행여나 불똥이 튈까 두려워하는 티가 역력했다.
“이런 (검열)의 (검열)가 감히 (검열) 같은 (검열)! 내가 네 (검열)을 (검열)해서… (이하 다수의 욕설 모두 검열).”
“이거 도저히 기록으로 못 남기겠는데. 죄다 검열당하겠어. 그래도 공갈죄로 오 년 더해 주지.”
“이, (검열) 놈의 (검열)-!!!”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부케노스는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다른 범죄자들이 섬칫할 정도였다.
“자네들도 사정이 있을 수 있겠지.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겠나. 이해해.”
“…….”
인자한 어투에 애꾸는 비로소 조용해졌다. 그는 성난 콧김을 씩씩대지만 더 욕설을 뱉지는 않았다.
“자네들이 죄를 짓고 살게 된 걸 이해하네, 난 자네들로 살아 보지 못했으니까. 대신 나도 자네들 잡아넣는 걸 이해해 줘. 자네들도 나로 살아 보지 않았잖아.”
“…말은 번지르르하군.”
이번에는 고리대금 전문가 테르단스 텔롬이 입을 열었다.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그쪽에서 실레몰을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걸 모른다 생각했나?”
“흐음, 계속해 보게.”
“일부러 방조하지 않았나. 그쪽 도움 없이는 세상에 나오지 못할 물건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도 보았지. 이를테면 황금약이라든가…….”
쿵, 하는 발소리가 말허리를 끊었다.
“부케노스.”
늙은 어부가 다가왔다.
덩치가 어찌나 커다란지 늘어진 그림자가 범죄자들을 동시에 뒤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걸음이 사람보다는 거대한 포식자와 같아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물고기의 하소연을 들어 주는 어부가 있던가.”
“없습니다, 군단장님.”
“어부의 일은 그물을 걷어 물고기를 잡고 그것을 넘기는 데까지다. 넘겨진 물고기가 어떻게 될지는 관심 두지 말아라.”
니코 네레이아데스, 코르디스 제11군단장. 마주하는 순간 호벨 만의 고래라는 별명이 얼마나 적절한지 깊이 깨닫게 되는 거한. 탁한 눈으로 지그시 바라볼 뿐인데 오금이 저렸다.
“썩은 떡밥이 좋다고 알아서 모여든 물고기라면 더 그렇겠지. 속부터 썩었다는 소리니까.”
“…….”
“…….”
대꾸는 없었다. 옳은 말이기에 앞서 상대가 니코 네레이아데스였기 때문이다. 덩치가 큰데 손발은 더욱 거대했다. 손가락이 무슨 나무 말뚝 같았다. 저 손에 뺨이라도 맞으면 턱뼈가 떨어져 나가리란 확신이 있었다.
“이들 외의 특수압송자는 없나.”
“예. 이게 전부입니다.”
“코사바가로비라에서 좋아하겠군.”
범죄자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코사바가로비라, 대륙 최악의 감옥. 기괴한 이름만큼이나 기괴한 소문으로 점철되었으나 들어가서 나온 이 없어 소문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도 없는 대륙의 무저갱.
“허튼소리 못하게 재갈을 물려서 보내라.”
“알겠습니다.”
부케노스가 손짓했다. 병사들이 달려와 범죄자들에게 재갈을 물려 끌고 갔다. 뭐라고 외치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그럴 수도 없었다. 절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부케노스가 혀를 찼다. 마음이 약한 탓이다. 일말의 동정심 놓지 못하니. 니코는 그 마음을 눈치채었으나 책망하지 않았다.
“그물을 모두 걷었나?”
“지하 오 층의 농성만 제압되면 모두 끝납니다.”
“얼마나 걸리겠나.”
“반나절이면 차고 넘칩니다.”
“마지막 발악에 다치는 병사 없게 해라. 제국의 재산이다.”
니코 네레이아데스가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죽은 듯이 조용하던 실레몰 거리에 더한 침묵이 깔렸다.
“키프코스는? 간부 셋을 내어놓으라 했는데.”
“소식이 없습니다.”
“언제 연락했지?”
“사흘 전입니다.”
“배신했군.”
부케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키프코스가 비밀리에 소유하고 있던 중형 범선이 며칠 전에 출항했음을 알렸다. 또, 출항을 기점으로 키프코스 패의 주요 간부와 가족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음도.
“슬슬 때라고는 생각했지.”
금이빨 키프코스는 제11군단 백인대장이었다. 니코는 그 시절의 키프코스를 기억한다. 구레나룻 덥수룩한 부관과 늘 함께 다녔는데 험악한 외모와는 달리 정이 많은 사내였다.
“키프코스의 후임자는 알아뒀나.”
“특수압송자 중에 하나에게 제안할 생각이었습니다.”
“아까 놈, 이름이 뭐지?”
“테르단스 텔롬 말씀이십니까? 저도 그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니코가 손을 내밀었다. 수석참모는 테르단스 텔롬의 정보로 빼곡한 서류를 정중하게 건네주었다. 늙은 어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를 잽싸게 읽어 내렸다.
“사업 규모에 비해 중죄가 거의 없군. 겁이 아주 많은 모양이야. 이런 놈들은 보통 남을 믿지 못해 핏줄들로 패를 꾸리지.”
“말씀대로 입니다. 텔롬 패밀리의 수장이죠.”
“핏줄이 많으니 약점 잡기도 쉽겠어. 키프코스처럼 도망치지도 못할 테고.”
서류에는 테르단스 텔롬의 죄목과 형량이 적혀 있다. 이것을 코사바가로비라로 보내면 그는 다시는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다. 때문에 니코는 서류를 좍좍 찢어 버렸다. 손상되지 않게 특수한 처리가 된 질긴 종이였지만 제국 군단장에게 문제가 될 이유는 없었다.
테르단스 텔롬의 서류가 종잇조각이 되어 떨어졌다. 부케노스는 조각의 위에 손가락을 튕겼다. 작은 불꽃이 피어올라 종이를 재로 바꾸었다. 이로써 테르단스 텔롬의 법률상 죄는 소멸했다. 그들이 다시 잡아넣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무리는 일임하지, 수석참모.”
“군단장님께서는?”
“그물을 찢고 도망친 물고기를 잡아 와야지.”
니코가 턱수염을 쓸었다.
“기껏 준 기회를 발로 찼나, 키프코스.”
해안선 너머를 바라본다. 그의 손을 벗어 난 줄로 알고 신이 나 있을 옛 부하를 잡아 올 것이다. 이 또한 호벨 만의 고래가 해야 할 일이다.
“주는 먹이나 먹고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71화
갑판이 떠들썩했다.
“잘 있어라, 실레몰!”
“또 보자, 자유시장!”
“다시 보면 안 되죠, 키프코스 형님!”
“그런가? 기분이 좋아서 그만.”
금이빨 사내가 우하하 시끄럽게 웃었다. 코가 붉고 발음이 꼬였다. 손에든 유리잔에 호박색 액체가 가득했는데 마에쉬에서 들여온 귀한 밀주였다.
키프코스는 절인 라보사 열매를 우물거리며 맛을 음미했다. 열매의 안에 청란어알이 들어 감칠맛을 높여 주었다. 입에 남은 약간의 짭짤함을 독주로 씻어 내니 열매를 또 하나 입에 넣고 싶었고 그 짭짤함을 또 독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주정뱅이의 굴레.
굴레에 빠진 건 키프코스뿐이 아니었다. 실레몰에서 같이 도망쳐 나온 사내들 모두 갑판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과거에 대한 작별과 미래에 대한 기대, 라는 핑계로 술을 끊임없이 들이켠 까닭이다.
“형님, 형님! 여기 슈마이첸에서 온 돼지 뒷다리 구이가 있습니다!”
“뭐야!? 그만 마시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군! 병 하나 더 따라!”
“한 병에 금화 세 닢 받던 다체타가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이미 땄으면서 뭘 물어봐? 이리 가져와!”
주정뱅이는 이유가 있어 술을 마시는 이들이 아니다. 그런데도 주정뱅이만큼 술 마실 이유에 집착하는 이들이 없다. 술을 마시려 이유를 찾고 이유를 찾아서 술을 마신다.
“아, 정말…….”
키프코스의 반쯤 풀린 눈동자를 들었다. 매일 보고 살던 호벨 만이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해안선도 너울도 빛깔까지도 낯설게 눈부셨다. 지나온 세월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긋하게 고생했지.”
실레몰 지하시장에서 권력을 잡으려 암투했다. 바쁘디바쁜 하루를 끊임없이 살아왔다. 무엇보다 11군단 끄나풀로 지내며 늘 노심초사했다. 헌데 모두 안녕이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 되었다. 키프코스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래도 헛일은 아니었어.”
금화 세 닢짜리 다체타를 물처럼 들이켰다. 그런 자신을 형님이라 부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있다. 그들을 태우고 바다를 무서운 빠르기로 가르는 이 배도 키프코스의 것이다.
“실레몰이 아니었다면 일개 퇴역 군인이 어떻게 슈와츠-발렌급의 마력선을 샀겠냔 말이야.”
돛은 달렸지만 장식이다. 이 배를 움직이는 건 은룡마도국에서 밀수해 온 군용 마력 원동기다. 키프코스는 흐뭇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딱히 숨길 이유도 없어서 신이 나서 웃어 젖혔다.
“그리고 또, 응?”
어머? 키프코스가 막 돼지 뒷다리 구이를 내오던 여인의 허리를 슥 감았다. 여인은 눈을 치켜떴지만 뭐라 하지 않고 그의 손에 몸을 맡겼다. 금이빨 사내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뚝뚝 떨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부인을 어떻게 얻었겠어!”
“맞습니다. 형님께는 과분하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조용히 해, 글로시오스!”
여인이 배시시 웃었다. 키프코스는 참지 못하고 술 냄새가 가득한 입을 여인의 볼에 가져다 대었고, 그녀는 질색한 티를 숨기지 않았지만 피하지도 않았다. 볼에 입을 맞춘 키프코스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호벨 만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건배!”
“웬일로 달콤한 말을 해 주죠, 키프코스?”
“달콤한 날이니까, 오페니아.”
“안 어울리네요.”
오페니아라 불린 여인이 가볍게 웃으며 베, 하고 혀를 내밀었다. 키프코스는 금이빨을 드러내며 홀린 듯이 제 아내를 바라보았다. 타인의 관점에서는 아주 부적절한 광경이었다. 젊은 소녀에 눈독 들이는 졸부,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다.
아주 놀랍게도, 오페니아와 키프코스는 동년배일뿐더러 소꿉친구였다. 제11군단에서 퇴역한 키프코스는 실레몰에 자리를 잡자마자 고향에 돌아가 오페니아에게 청혼했고, 그녀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 뒤로 수많은 풍파가 있었으나 무엇도 그들의 사랑을 꺾지 못했다.
“당신도 동생들도 피 볼 일이 없어진 건 너무 기쁜 일이에요.”
오페니아가 작게 미소 지었다. 어쩜, 마음씨도 고우셔라. 키프코스 패의 사내들은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였다.
“당신, 한챠무스에서는 뒤가 켕길 일 하지 않기예요.”
“노력해 보지.”
“어머?”
아내의 눈총에 키프코스가 황급히 손을 들었다. 당장이라도 쏟아질 게 뻔한 잔소리를 피하기 위함이다.
“키프코스 패, 잔 들어라!”
예이-! 흥분한 사내놈들 목소리가 가득하다. 음식을 내오던 여인들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사내들의 아내거나 아내가 될 이들은 한숨을 쉬면서도 미소 머금지 않은 이가 없었다.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그들을 웃음으로 움켜쥐었다.
“안녕히, 실레몰!”
“““안녕히, 실레몰-!!!”””
한챠무스에 만세! 졸부의 건강을 위하여! 사내들이 낄낄대며 독주를 삼켰다. 곁에 있는 제 여인들에게도 한 잔씩 권하고는 했다. 그녀들은 못 이기는 척 잔을 받아 홀랑 털어 넘겼다.
파도 소리도 묻힐 만큼의 소란 속에서 글로시오스는 살며시 걸음을 옮겼다. 구레나룻 사내는 첫 잔 이후로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음주를 좋아는 하지만 잘하지는 못했던 까닭이다. 생김새와는 달리 말이다.
“…….”
갑판 끄트머리에 선 사내가 있다. 사실 사내라기에는 다소 앳되다. 열다섯의 덩치, 열한 살의 얼굴. 여전히 비밀을 감추고 있는 회귀황자. 글로시오스는 술잔 올려진 쟁반을 시온의 앞에 내려놓았다.
“같이 마시죠, 파시오누스 씨.”
“술을 안 좋아합니다.”
시온이 싱긋 웃으며 가볍게 거절했다.
“그리고 저기에 낄 만큼 눈치없지도 않고말이죠.”
“즐거운 자리에 사람은 많을수록 좋죠.”
“됐네요.”
그는 손사래까지 치며 거절의 의사를 더 명확히 했다. 자기들끼리 호형호제하는 무리에 끼어봤자 어색할 뿐이다. 어차피 메케로스에서 헤어질 것이니 굳이 정을 쌓거나 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글로시오스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자기 손목을 부러트리기도 했던 시온에게 왜 호감을 품었는지 모르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는 석양 지는 바다를 손짓했다.
“식사 때지 않습니까. 주방에서 뭐 좀 가져다드리죠. 달콤한 걸 좋아한다 하셨으니 음… 호박 파이라도 구워 오라 할까요?”
“별생각 없대도… 잠깐, 호박파이?”
“예. 지금 제 아내가 주방에 있는데 솜씨가 기가 막힙니다.”
“거부할 수가 없네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구렛나룻 사내는 기쁜 얼굴로 갑판 아래로 내려가더니 곧 호박파이를 들고 올라왔다. 이미 만들어 놓은 걸 다시 가볍게 구웠는데 더 바삭할 거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슬슬 그리울 때였지, 호박파이.”
아아아주 다다달콤하지는 않았지만 바삭하기는 했다. 피에스 로에스티, 빌어먹을 첫 친구가 떠오르기도 했으나 곧 잊어버렸다. 호박파이는 맛이 썩 좋았다.
석양이 짙어만 지고 갑판 위의 사람들은 얼큰하게 취했다. 잠에 저항하지 못하게 된 이들이 절반가량이었다. 한소끔 끓어올랐던 마음이 가라앉으니 깊은 것들이 입 밖으로 떠올랐다.
“…키프코스 형님이 11군단 백인대장일 때 전 그 보좌였습니다.”
옛일을 말하기 시작한 글로시오스를 보며 시온은 들어 주기로 했다. 호박파이가 맛있었고 딱히 할 일도 없었으며 금이빨과 구레나룻 의형제가 생각보다 재미났기 때문이다.
“실레몰에 자리를 잡고 제가 군단과의 접선을 담당했죠.”
글로시오스가 코를 훌쩍였다. 초봄의 항해는 퍽 추웠다. 눈물이 아니라 콧물이 난 척하기에 적당하게 매서웠다.
“그러니까, 저희 따라온 애들이나 같이 웃고 떠들던 다른 패 녀석들을 군단에 갖다 바치는 게 제 역할이었단 말입니다.”
자유라는 이름에는 질 안 좋은 놈들 모일 수밖에 없다. 개중에도 유난히 심한, 그런데도 퍽 힘 있는 놈들의 이름을 11군단에 넘겼다.
“늘 입이 썼지요.”
스스로도 알고 있다, 마음이 여릴 뿐이라는 걸. 누명을 씌운 것도 아니고 제 죗값을 치르게 한 거였다. 그런데도 잊을 수가 없었다. 한솥밥을 먹기라도 했다면 더 그랬다. 자기 이름 넘긴 게 글로시오스인 줄도 모르고 가족들을 부탁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우습지요? 꼴에 착한 척하고 있으니.”
“난 그걸 일말의 양심이라 부르지.”
“의외로 친절하시군요.”
시온이 가볍게 웃어 주었다. 시끄러운 입술과 덥숙한 구레나룻으로는 다 숨기지 못한 회한悔恨이 느껴졌다. 생각지도 못한 데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말아 의아했다.
그는 술잔을 들었다. 글로시오스에게도 턱짓했다. 어서 잔을 들라는 투였다. 같이 마셔 주십니까? 시온 폴링라이트는 가장 작은 잔을 들었다. 곧 메케로스니 이 정도 일탈이야.
“끝나서 다행입니다, 끝이 나서.”
글로시오스가 술기운에 벌떡 일어섰다. 그러더니 신이 나서 엉덩이를 씰룩거렸다. 걸음은 꼬이고 입술은 다문 꼴이 퍽 우스꽝스러웠다. 시온이 킬킬 웃으며 남은 술을 바다에 버렸다.
“이런 날이 오기는 한단 말이죠. 우리 떠날 때 군함들 보셨습니까?”
구레나룻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직도 선명했다. 실레몰을 에워싼 11군단의 선박들. 그 위에 흉흉한 장병들. 아는 얼굴도 더러 있었다. 그도 한때는 11군단에 몸을 담았었으니까.
“조금만 늦었어도 둘러싸였을 겁니다. 큰일 날 뻔했어요.”
“음…….”
남은 술을 버리던 시온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는 푸른 눈동자로 바다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석양의 아래, 너울의 사이, 실레몰이 있던 쪽을.
“…….”
회귀황자의 눈은 못 박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미 늦은 거 같은데.”
“…예? 아…….”
글로시오스 또한 탄식을 토했다. 바다에 점이 있다. 작지만 빠르다. 정확히 그들을 가늠한 채로 쏜살같다.
“…이런.”
* * *
배는 놀랍도록 빠르게 가까웠다. 해안선을 넘은 게 방금 같은데 이제는 배의 형태도 어렴풋이 보였다.
마력 원동기의 시대에 노櫓를 젓는 낡고 작은 보트였다. 사람이 열 명도 타지 못할 듯 좁은데 양쪽에 달린 노는 괴랄하게 크다.
그런데도 빠르다. 무섭게도 쏜살같다. 커다란 노를 저을 뿐인데 그들이 탄 슈와츠-발렌급의 마력선을 순식간에 따라잡고 있었다.
“청날치……!”
글로시오스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제11군단의 사내들은 모두 저 배를 ‘청날치’라고 불렀다. 대형 갤리선에나 쓸 법한 노를 양쪽에 매단 꼴이 꼭 날치를 닮았기 때문이다.
청날치는 낡은 배다. 사실 엄청난 크기의 노가 달린 것을 빼면 특이한 구석도 없다. 다만 배의 주인이 주인인지라, 11군단의 누구도 저 배를 모를 수 없었다.
작은 배에서 홀로 노 젓는 사내가 있다.
성인 스물은 달라붙어야 할 노 두 개를 혼자 저어 마력선을 따라잡고, 덩치가 어마어마한데 턱수염을 길렀으며,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군사적 위협이 되는 사내라면 이 호벨 만에 단 한 명뿐이다.
“…고래다!”
글로시오스가 목이 터져라 비명 질렀다.
고주망태 된 사내들의 귀를 후벼 팔 만큼 날카로운 외침을 질렀다.
“호벨 만의 고래가 왔어--!!!”
72화
늙은 어부를 태운 조각배가 쏜살같이 가까울수록 갑판에는 짙은 절망이 깔렸다.
“진짜로 고래다…….”
“니코가 왔어…….”
주인을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을 도화선 삼아 혼란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덜 사라진 술기운이 섞여 드니 금세 광기의 낌새까지 일렁였다. 인간들은 혼비백산해서 갑판 위를 뛰어다녔다.
“하, 항해사! 항해사! 속도를 높여!”
“구명선을 내려 줘, 구명선을-!”
“아니, 아니, 일단 뱃머리를…….”
급박한 마음에 일단 내뱉고 본 말들이 뒤엉켜 돌아다녔다. 금이빨 키프코스조차도 당혹해 얼어붙은 중에 그나마 당혹이 덜한 것은 시온 폴링라이트뿐이었다. 푸른 눈의 회귀자가 목을 가다듬어 외쳤다.
“다들 우선 진정---.”
폭음爆音.
콰-아앙, 하고 울리는.
수십 명이 올라탄 중형 선박이 오뚝이처럼 뒤흔들렸다. 성난 파도가 갑판 위를 쓸어내렸다. 술이나 접시 따위가 쓸려 나가고 사람도 몇 휩쓸렸다. ‘공상손가락’. 시온의 기예가 아니라면 바다에 빠졌으리라.
비산하는 판자 조각.
당혹성, 비명, 신음. 한데 뒤섞인 절망의 소리.
바닥을 따라 잔뜩 기울어진 시야에 보이는 것이 있다. 부서진 갑판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는, 포탄처럼 홀로 뛰어든 어마어마한 덩치의 사내.
소금기 배어든 하얀 턱수염.
어마어마한 덩치에 북같이 커다란 손발바닥.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는 호벨 만의 고래.
제11군단장 니코 네레이아데스.
커다란 노櫓 하나가 손에 들렸다. 저으려면 남자 스물은 달라붙는 물건인지라 어지간한 통나무보다 커다랗고도 무겁다. 늙은 어부는 그런 걸 한 손으로 움켜쥐고도 힘든 기색이 없다.
“…….”
“…….”
“…….”
사내는 기다렸다. 기울어진 배가 평형을 되찾고 모든 혼란이 잦아들도록. 뇌까리는 듯한 목소리가 선명히 귀에 박혀들 정도의 정적을 차분하게 기다려 주었다. 공포는 정적을 머금고 더욱 짙다.
“좋은 배군.”
배가 오뚝이처럼 뒤흔들리고 파도가 휩쓸었지만 사치스러운 잔치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에쉬에서 가져온 비싼 술병이 나뒹굴고 크리스털 잔이 조각조각 흩뿌려졌다.
“성공했는걸, 키프코스 백인대장.”
“…네레이아데스 군단장님.”
키프코스는 덜덜 떨고 있었다. 부하와 아내의 앞이라 당당한 척하고픈 마음도 있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을 꿇지 않는 데도 기력이 쭉쭉 빠져나갔다. 니코는 키프코스가 사시나무처럼 떠는 것을 신경 쓰지도 않고 말했다.
“누구 덕의 성공이라 생각하나.”
금이빨 키프코스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답하기 싫어도 해야만 했다.
“…물론, 군단장님 덕입니다.”
“그런데 어딜 가고 있지.”
“…….”
니코가 노 뒷부분으로 갑판을 두드렸다. 탕! 하는 소리가 나고 키프코스가 움찔 떨었다. 가볍게 두드렸을 뿐인데 갑판을 덮은 철판이 움푹 들어갔다. 니코가 재차 물었다.
“어딜 가고 있냐고 물었다.”
“오래 일을 해서, 휴양차 여행을…….”
“전 재산을 싸 들고?”
“…….”
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키프코스뿐이 아니었다. 누구도 꼼짝하지 못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남들보다 머리 둘하고 두 뼘 정도는 더 큰 덩치의 노인이었는데 특히 손발바닥이 유난히도 거대했다.
저 손바닥, 무슨 연회용 접시만 해서 대형 노를 가볍게 움킨다. 저 발바닥, 내디딜 때마다 쿵쿵거리면서 맹수와 같은 발자국을 남긴다. 저 발에 밟히면 장정이라도 낙엽처럼 짜부라질 것이다.
“키프코스 백인대장.”
“…예, 군단장님.”
“내 밑에 얼마나 있었지.”
“열다섯에 병졸로 들어가 스물둘에 백인대장으로 나왔으니 칠 년 하고 조금입니다.”
“꽤 오래 있었군.”
직접 얼굴을 맞댈 일이 많던 사이는 아니었다. 제11군단에는 육십하고 두 명의 백인대장이 있었으니 간혹 중요한 임무를 맡거나 정례회의 따위에서나 마주치곤 했었다. 퇴역 후의 거래가 없었다면 아마 이름도 잊혔으리라.
“부케노스 수석참모와는 친했나.”
“…병졸 시절에 같은 백인대에 있었습니다. 글로시오스도 그랬지요.”
“부케노스가 그러더군.”
니코가 뭉클진 턱수염을 매만졌다.
“네게 기회를 주는 게 낫지 않냐고.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
“…….”
“배를 돌려라.”
니코가 키프코스를 쏘아보았다.
“실레몰로 돌아가서 역할에 충실해. 그렇다면 이번 일을 묻지 않지.”
“…아니, 그래도…….”
“들리지 않는다. 목소리를 크게 해라.”
“…그게, 말이지요…….”
키프코스가 입을 우물거렸다. 다섯 개의 금이빨이 번쩍이는 꼴에 니코가 버럭 소리 질렀다.
“목소리-!!!”
대뜸 우렁찬 호통이 울렸다.
금이빨 사내가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빠져 또 나자빠졌다. 갑판에 들이박은 턱이 어지간히도 아팠다. 그렇게 나자빠진 채로 있고만 싶었다.
“자세!!”
탕, 하는 소리가 났다. 니코가 노 뒷부분으로 갑판을 두드린 탓이다. 키프코스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제11군단에 있을 적에도 그랬다. 아무리 진이 빠져 죽을 것 같아도 니코가 탕, 하는 소리를 내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젠장할, 내가 아직 자기네 백인대장인 줄로 아나? 키프코스가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감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어떤 기분이든 오랜 기억과 습관이 먼저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하고 똑바로 섰다. 마치 어리버리한 신병이라도 된 듯해서 비참하고 속이 상했다. 금이빨 키프코스, 실레몰의 거물이 제 부하와 여자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키프코스.”
“…….”
니코는 금이빨 사내의 수치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전前 부하를 향해 호통을 내질렀다.
“-키프코스!”
“…예!”
“너는 암리타를 팔고, 나는 널 눈감아 준다. 대신 너는 때때로 실레몰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하고 특히 질 나쁜 놈들의 이름을 넘기기만 하면 되었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키프코스의 얼굴이 더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붉어졌다. 실레몰의 거물이라고 거들먹댔으면서 제11군단 측의 끄나풀 짓을 하고 있었음이 까발려졌다. 부하들과 아내의 앞에서.
“…….”
금이빨 사내는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어떤 눈들이 자기를 향하고 있을지 상상하기도 두려웠다. 경멸할까, 아마 그러겠지. 화도 났을 거야. 날 우습게 본다면, 정말 열받겠군. 하지만 가장 최악은…….
‘…아, 불쌍하게 보지만 말아다오. 이 금이빨 키프코스를 불쌍한 사내라고 여기지만 말아 줘!’
보고 싶지 않지만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키프코스의 눈이 천천히 돌아갔다. 실레몰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적어도 그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오페니아에게로.
그런데, 이런, 빌어먹을, 저 자애로운 눈빛 좀 보라지.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연민 뒤섞인 흑진주 같은 눈동자 좀 보라지! 제 여자에게 동정을 받을 거면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키프코스가 금빛으로 번뜩이는 제 이빨을 악물었다.
“…못 해… 겠군…….”
“호벨 만 사내답지 못한 목소리군.”
“못 해 먹겠단 말이다, 이 늙은아!”
키프코스가 냅다 소리 질렀다.
호벨 만 사내다운 목청이었다.
“어렵지 않기는 뭐가 어렵지 않아!”
금이빨 키프코스의 기예, 말뚝 뱃심. 근성만 있다면 상대가 니코 네레이아데스라고 해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근성만 있다면! 오페니아의 눈빛이 경탄을 머금고 키프코스는 힘을 얻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거래 하나하나에 간섭하지를 않나, 한솥밥 먹던 놈들을 팔아넘기라고 하지를 않나! 그 꼴 더 못 견뎌서 식구들 데리고 도망 왔다, 왜!”
니코는 조용히 귀 기울였다. 키프코스는 버럭버럭 울분을 토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턱에 주먹이라도 한 대 갈길 기세다.
“죽어도 할 말은 해야겠다. 사람을 우습게 보아도 유분수지! 애초에 거래 아니었나? 당신도 해 먹을 만큼 해 먹고 나도 해 먹을 만큼 해 먹었으면 된 거지, 뭐 이렇게 질척여? 차라리 죽여!”
“그래, 그런가.”
호벨 만의 고래가 성큼 다가왔다.
“네 뜻은 충분히 알았다.”
무지막지하게 큰 발바닥으로 걸으니 보폭도 크다. 세 걸음 걸었는데 벌써 코앞까지 왔다.
“뜻대로 해 주지.”
“어…….”
키프코스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기예고 근성이고 나발이고 가까이에서 니코를 올려보니 공포가 어마어마했다.
“…저, 아니, 군단장님……. 방금 죽이란 뜻은 진짜 죽이란 게 아니라 의지의 표현으로…….”
“책임 지지 못할 말은 애초에 하지 말아라.”
니코의 손에는 노가 들렸다. 초대형 갤리선에서나 쓰는 것의 손잡이를 짧게 한 물건이다. 짧게 했다고 해도 키프코스의 두 배는 되는 길이다. 노를 치켜든 니코 네레이아데스에게는 단숨에 이 배를 두 동강 내고도 남을 것 같은 기세가 풍겼고, 실제로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마지막만큼은 호벨 만 사내답게 가도록, 키프코스 백인대장.”
“맞습니다, 형님. 호벨 만 사내답게 구세요.”
웬 목소리가 끼어들고 배를 가르려던 노가 멈추었다. 니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이지 않는 무엇이 그의 노를 붙들고 있었다. 상당한 힘을 주고서야 떨쳐 낼 수 있었다. 마나가 요동치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이 기묘한 낌새, 기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푸른 눈의 소년을 쏘아보았다.
“꼬마, 처음 보는데.”
“소개드리죠. 키프코스 형님의 경호원입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경호원이라.”
시온 폴링라이트는 킬킬대는 웃음소리 머금었다. ‘…파시오누스 씨.’ 지킴 받은 키프코스는 시온의 가짜 이름을 중얼거렸다.
“저만 믿으세요, 형님!”
시온은 금이빨 사내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연극에 동참해 달라는 투다.
“이런 늙은이 정도 냉큼 쫓아 보이죠!”
니코가 턱수염을 쓸었다. 그는 시온을 위아래로 훑었다. 덩치는 청년인데 얼굴은 소년이다. 아무리 보아도 열다섯, 많다고 해도 열여덟 살이나 될까.
“곤란하게 하는군.”
호벨 만의 고래는 약간의 난감함을 숨기지 않았다. 정말로 그를, 코르디스 제11군단장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멍청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일 텐데. 아니면 뭔가 비밀을 품고 있어서 나서는 것일까.
“치기의 대가를 묻기에는 너무 어려 보이는데.”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아 주시죠, 할아버지. 치기든 혈기든 강하면 될 일 아닙니까.”
“할아버지라.”
시온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니코가 코웃음 쳤다. 이목구비에서 약간의 기시감을 느꼈다. 허나 시온은 이미 생김새를 약간 뒤트는 마법도구 따위를 실레몰에서 구매한 뒤다. 금발에 파란 눈이라는, 코르디스 인구의 절반이 넘게 포함되는 인상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
“너만 한 손녀가 있기는…….”
노가 움직인다.
“…했었지.”
후웅, 하는 소리가 약간 늦게 도착했다. 갑판이 부서지고 공기가 울린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매섭게 노를 휘둘렀으나 헛손질이 되었다. 시온 폴링라이트가 헛손질이 되게 만든 탓이다.
“나이가 들면 성격이 급해진단 말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말도 없이 대뜸 노부터 휘두르시다니.”
“음.”
니코는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허를 찔러 내뻗은 일격이었다. 죽이지는 않아도 공중을 날아 바다에 빠트릴 힘 정도는 담았다. 피하기는커녕 무엇에 당했는지도 모르리라 여겼는데, 가볍게 피했다. 니코의 눈이 묵직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벌써 놀라시면 곤란한데.”
시온이 킬킬 웃는다. 다소 어린아이같이 장난스럽다.
“이제 더 놀라시게 될걸요?”
73화
니코 네레이아데스.
코르디스 제11군단장.
그 자리에 앉은 것이 벌써 반세기가 넘었고 제 이름보다 호벨 만의 고래라는 별명이 더 익숙할 때도 왕왕 있었다. 지금이야 여든 살 가까이 나이를 먹었지만 젊을 적에는 제국십장 중 하나, 구포장군九浦將軍이기도 했다.
늙어도 강건한 고래는 화려한 젊은 날 가운데 많은 전설을 남겼다. 요제프 하이더와의 싸움에서 중상 입은 마리나 데비우스를 업고 천오백의 마도기병을 돌파한 것도, 제2황자 세쿤두스가 아홉 살에 아가리 찢은 사자를 데려온 것도(일설에는 가만히 노려보니 사자가 알아서 수레에 올랐다고 한다) 모두 이 남자다.
특히 유명한 일은 콘티누아 대제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 것이다. 아무리 혈기가 넘친다고 해도, 아무리 그때는 즉위 전이었다고는 해도, 아무리 하기 싫다던 그에게 억지로 제국십장의 자리를 떠맡긴 탓이라고 해도!
‘그 콘티누아 대제를, 빌어먹을 아버지를 후려갈긴 사내란 말이지!’
어쨌든 니코 네레이아데스, 많은 전설 자랑하는 늙은 어부. 한 손으로 닻을 내렸다 올리는 완력으로 커다란 노를 휘두르면 해일이라도 무너진댔다.
‘그런 사내랑 싸우는 게 달가울 수는 없지.’
시온이 커다란 노를 흘끔거렸다. 겉보기에는 장정 스물 달라붙을 만큼 커다랄 뿐 평범한 노로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내부에 철심이 들어 장정 스물이 아니라 쉰은 달라붙어야 할 만큼 무겁기까지 하다. 니코 네레이아데스가 아니라면 도저히 쓸 수 없는 물건이다.
지금도 보라, 혼란 중이라 눈치챈 이가 없지만 갑판은 니코가 선 쪽으로 기울어 있다. 저 더럽게 커다랗고 무거운 노 때문이다. 저 사내는 아메투스와는 또 다른 위협이다. 뿔난 흰 뱀 라크로샤가 귀엽게 보일 지경이다.
‘득 볼 거 없지만 피할 수도 없고.’
쫓아왔으니 맞설 뿐. 키프코스만 잡아가고 다른 이들을 풀어 줄 리는 만무하니까.
‘피할 이유도… 이제는 없나.’
시온이 슬쩍 웃었다. 제국 군단장을 앞에 두고도 미소를 지을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품에 손을 넣으며 입을 열었다.
“식전주 한잔해도 괜찮겠죠?”
“싸움에도 식전주가 있던가?”
“제 내적 규칙입니다.”
당당하게 뻔뻔하니 기가 막혔다. 니코는 인상도 쓰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았다. 시온이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키프코스에게 거금을 주고 구매한 호렘 암리타였다. 그리고 주머니를 또 몇 개.
니코의 눈썹이 휘었다. 무슨 헛짓거리인지 몰라도 어서 해 보라는 투다. 키프코스와 글로시오스를 비롯한 사내들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수십의 시선이 시온의 손끝으로 몰렸다.
“이거 약간에 저거 조금, 그리고 또…….”
그는 차분히 몇 가지 재료를 꺼내 병에 넣었다. 세네비아 이파리 가루 두 스푼(슈마이첸산産만 허용된다), 순도 99 이상의 마나활성제 세 방울, 그리고 뭐, 굳이 설명할 이유 없는 기타 등등의 재료들을 정량 맞추어 병에 넣었다.
키프코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를 앞에 두고 뭘 하는 건가?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니코만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늙은 어부의 눈은 어느새 새파랗게 이글거리고 있다.
“자, 마지막으로…….”
시온이 제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었다. 자기 피를 한 방울 넣고 잘 섞여 주면 완성이다. 니코는 마치 심해의 괴물이라도 도망치게 할 만큼 흉악한 얼굴로 시온을 노려보았다.
“꼬마…….”
경악이 배어 나왔다.
“그 배합을 어떻게 알지……?”
“그러게요. 어떻게 알고 있을까?”
작은 병을 잘 흔들었다. 내용물이 고르게 섞이도록. 곧 내부에서 열이 차올라 병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시온은 침착하게 숫자를 세었다. 여덟을 셀 때쯤 병이 갑자기 확 차갑게 식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으! 맛 한 번 최악이군.”
“…….”
“이거 마셔 본 적 있어요? 진짜 별로죠?”
니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기로 삼는 대형 노를 굳게, 더할 나위 없이 굳게 붙잡을 뿐이다. 시온이 킬킬 웃었다.
‘놀랄 만도 하지. 웬 꼬맹이가 눈앞에서 라후칼라를 조제했으니.’
호렘 암리타라는 영약은 놀라운 치유력을 품었다. 헌데 특정한 공정을 거치면 이 힘이 다른 방향으로 놀랍게 발휘되게 만들 수도 있다. 라후칼라는 그렇게 만들어진 강화약이다.
“이거, 맛도 없고 독하기도 무지막지하게 독하지만…….”
몇 초 내라면 끊어진 숨도 되살리는 힘을 오롯이 신체능력의 향상으로 돌린다. 라후칼라 한 방울이면 검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농병이라도 기사의 목을 물어뜯는 광전사로 화한다.
“나 같은 꼬맹이도 군단장님을 놀라게 해 드릴 수 있으니 쓸 만하지 않습니까.”
“…….”
라후칼라는 위험하다. 나돌아다니게 두어서는 안 된다. 제국은 그 제조법을 말소하고 호렘 암리타를 포함해 가장 중요한 몇 가지의 원료의 거래를 금했다. 그럴듯한 명분을 붙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회귀자인 시온이 아니라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깊은 비밀이다.
“…이름을 들어야겠다.”
니코의 눈은 고요하게 풍랑 친다. 숨길 생각도 없는 살기가 매섭게 피부를 때렸다. 시온은 작게 웃었다. 라후칼라의 힘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호벨 만의 고래는 꼭 죽여야 할 상대를 만나면 이름을 묻는다고 들었는데.”
“이름을 묻고 죽이지 못한 적이 없단 이야기까지는 듣지 못했나?”
“못 들은 척하고 싶네요.”
니코가 갑판 조각을 튕겨 날렸다. 사람 골통 하나는 부술 기세다. 시온이 막아 내었다. ‘공상손가락’이 아닌 제 손으로. 스스로 놀랄 만큼 손쉬웠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니코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파시오누스 펠레우스.”
“거짓말이군.”
“사정이 있어서.”
“나는 니코다.”
가짜 이름에도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제 이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시온은 거짓말쟁이의 미소를 덮어썼다.
“그럼.”
니코가 짓쳐 들었다. 노 끝부분을 잡고 넓게 휘둘렀다. 더럽게 큰지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때문에 피하지 않았다. 마갑 발지아트로 육체를 한층 더 강화하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긴 무기에 대처하는 기본적인 방법이었다.
휘둘러지는 노를 아래쪽에서 비스듬히, ‘공상손가락’도 가세해서. 궤도가 휘어지고 니코의 상체가 열렸다.
늙은 어부가 코웃음 쳤다. 궤도를 휘었다면 더 큰 힘으로 바로잡으면 될 일이니까. 어부의 팔뚝이 터질 듯 부풀고 무지막지한 무게의 노가 시온의 머리 위로 내려찍힌다.
시온의 옷 아래는 온통 발지아트다. 덩치를 속이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간의 조작만으로도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쉬웠다. 그는 흐르듯이 노를 피해 세 걸음 물러섰다. 애초부터 공격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망설임이 없었다.
시온이 피했으나 니코는 마저 내려찍었다. 갑판이 또 한차례 부서져 비산했다. 사내들이 충격에 쓰러지고 키프코스는 선박 구매 비용을 떠올리며 탄식을 토했다. 잠깐의 틈, 니코는 어느새 노를 창처럼 잡고 있다.
노가 찔러 든다.
데비우스의 연각을 닮았다. 찌른다 싶으면 이미 찔린 뒤다. 하지만 시온은 니코와 데비우스 가문의 관계를 안다. 노를 창처럼 잡은 시점에서 이미 피할 준비를 마쳤다.
니코는 공격한다.
한 번 한 번이 묵직하기 그지없다. 시온을 기필코 죽이겠다는 의지가 아주 뚝뚝 묻어났다. 이해가 되었다. 라후칼라는 코르디스 군부가 관리하는 기밀 중의 기밀이었으니.
시온은 죽어 줄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피했다. 피하고 또 피했다. 라후칼라와 발지아트가 합쳐지니 열한 살 몸뚱이라도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상손가락’이 사방을 날았다. 몸을 강화했어도 여전히 니코의 수준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없이는 도망칠 수도 없다.
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어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을 아껴 두었다. 역전의 때를 잡기에 적합한 기예였으니까.
‘아주, 아주 조금이지만…….’
이마에 땀이 흘렀다. 시온은 웃고 말았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를 상대로 싸우고 있자니 쾌감이 일었다.
‘…그때로 돌아간 기분인걸.’
회귀 이후로 줄곧 어린아이 행세 했다. 셉템 아르카나 모두 닫히고 열한 살 몸뚱이 했으니 당연하다.
회귀 이후 제대로 된 싸움이 처음임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도망치거나 속여먹거나, 도망치는 척했다가 속여먹거나 하기만 했다.
니코는 지치지 않고 짓쳐 든다. 갑판은 넝마짝이 되어 가고 사내들의 비명소리가 화음을 이룬다. 키프코스는 혼절하기 직전이다. 시온은 여전히 상처 입지 않았으나 니코의 몸에 제대로 닿지도 못했다.
“꼬마.”
넓게 휘두르는 일격. 시온 가볍게 피한다. 발목이 살짝 닿아 격통이 있다. 하지만 발지아트로 보호하고 있으니 문제 되지 않는다. 니코가 몸을 쑥 내밀지만 또 물러섰다.
“놀라게 한다 하지 않았나. 그 정도는 아니야.”
“이제부터니까요.”
시온은 도망칠 뿐이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아직 제 가진 힘의 반의 반의 반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시온 폴링라이트도 기다리는 중이었다.
‘슬슬 되었다.’
무엇을 기다렸냐 하면, 라후칼라가 온몸에 돌도록. 열한 살 몸뚱이가 조금쯤은 회귀 전 영웅의 것에 가깝도록.
‘세 번째 비밀은 가장 무겁지.’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공상손가락’은 본래 세 번째 비밀을 사용하기 위한 보조 기예다. 거기에 마갑 발지아트와 라후칼라. 초라한 몸뚱이로 어떻게든 셋째 비밀을 사용하려고 애를 썼다.
‘또, 비밀의 때다.’
일곱 비밀의 약속으로 일곱 기예.
셉템 아르카나Septem Arcana.
그 세 번째.
* * *
세 번째의 불꽃이 거칠게 솟았다.
그것은 맴돌며 소리 지른다.
‘잊지 말아라, 너 잊지 말아라!’
‘무너뜨려라, 무너뜨려야만 한다!!’
‘코르디스, 코르디스-!’
제국이 미웠다. 밉고 또 미웠다.
대제 콘티누아의 아들, 5황자 지오니스라는 이름을 버렸는데도 피에서 코르디스의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래서 모든 피를 쏟아서 내버렸다.
마음도 덩달아 그렇게 버렸다.
마음과 피를 모두 쏟아 낸 핏줄은 말라붙어 지독하게 굳었다. 그런데도 맴도는 것이 있다. 진득하게 되어 버린 아우성이다. 분노나 증오라고 불러도 다를 건 없다.
맥박이 뛴다. 피가 사라진 자리에 화가 남아 맹렬하게도 요동친다. 요동치는 맥박이 그를 사춘기에 못 박는다. 이 못 박힌 꼴을 영웅이라 불러 주니 우스운 일이다. 헌데 웃고 있자면 늘 외침이 쥐어뜯는다.
‘웃느냐? 네가 감히 웃느냐?’
‘벌써 잊었나? 무엇을 앗아 갔는지, 무엇을 빼앗겼는지 잊고 말았느냐?’
‘네가, 네가 잊었느냐, 어떻게 잊을 수 있느냐!’
“잊지 않았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부르짖는다.
“잊지 못했다!”
가슴을 쥐어뜯었다. 관자놀이를 쥐어뜯고 목 줄기를 쥐어뜯었다. 그렇게 제 핏줄 뜯어내어 그 안에 요동치는 비명을 향해 맞서 비명 질렀다.
“-잊지, 않겠다-!!!”
잊혀 간다. 허나 잊지 않는다.
이룰 수 없다. 허나 이루겠다.
포기할 수밖에 없으나 포기하지 않겠다.
해 보겠다. 해내겠다. 해내야만 한다. 이루어야만 한다. 어떤 모순이라도 넘어서 무너뜨리고야 말겠다, 저 천년의 제국!
그렇기에 세 번째 비밀.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샘솟는 분노. 악무는 이빨.
안에서는 화가 치밀고 밖에서는 오기로 누른다. 맥박이 뛸 때마다 망치질하는 소리가 났다. 핏줄 핏줄마다 깡, 깡, 하는 소리가 서럽게도 울려 퍼졌다.
아프지 않을 리가. 괴롭지 않을 수가.
맥박이 뛸 때마다 소름이 돋을 만큼의 비명과 고통이 있다. 허나 오기나 독기나 의지라고 하는 것 따위도 넘치도록 있다.
그 사이에 핏줄을 끼웠다. 그렇게 제 핏줄을 마구 눌렀다. 접쇠라도 하듯이 매 순간 미친 듯이 두드려 대었다. 그것을 잡아 쥐었다. 손에 쥔 비밀은 자신의 피와 핏줄이다.
핏줄치고는 너무 질기다.
질기다 못해 굳세어져 금속처럼 시뻘겋게 번뜩인다.
피치고는 너무 뜨겁다.
핏줄을 달구다 못해 온몸을 탄내 나도록 불태우고 있다.
의무와 아집으로 벼려 낸 세 번째 기예.
‘달궈진 쇠핏줄’.
74화
시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 ---!!”
악을 쓰듯 아가리 벌리고 목에 핏대까지 세웠는데 소리는 없다. 피부 한 장 아래에 소리 없이 꿈틀대는 것 있다. 관자놀이부터 허리까지 뛰어놀다 이내 목에서 응어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굵은 쇠핏줄이 기다란 뱀과 같이 보였다. 검고 냄새나고 뜨거웠다. 발지아트 두른 손으로 움켜쥐었다. 쇠처럼 질기고 용암처럼 달아올랐다. 때문에 세 번째 기예Ars 부르기를, ‘달아오른 쇠핏줄’.
“…….”
시온은 쇄골 위에서 제 핏줄을 뽑아 기예로 만들었다. 엄지손가락보다 굵은데 길기는 또 무지하게 길었다. 양팔을 둘둘 감고도 한참이나 남았다. 검은 쇠핏줄을 두르니 드디어 제 자리를 찾은 듯 편안하기까지 했다.
쇠핏줄.
검붉고 질기고 억세게 달아올랐다.
어찌나 달구어졌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발지아트 너머로도 뜨거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열기 뿜을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짙다.
“기예 한번 피 냄새 나는군.”
니코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기의 형태를 띤 기예는 종종 보았다. 하지만 제 몸에서 핏줄을 뽑아 채찍처럼 쓰다니. 영혼이 어떤 꼴을 하고 있어야 저런 기예가 태어나는 것일지.
“…….”
시온은 조용해졌다. 포기하지 않음을 되새기며 핏줄을 뽑아 둘렀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이 쇠핏줄, 지독하게 무겁고 지독하게 뜨겁다. 라후칼라를 마시고 발지아트를 둘렀는데도 간신히 다룰 수 있을 정도였다.
손을 까딱였다. 살짝이었는데도 쇠핏줄이 쏜살같이 튕겨 나갔다. 니코가 황급히 노를 치켰다. 호벨 만의 고래에게도 반응하기 힘든 빠르기였다. 튕겨 나간 쇠핏줄은 가로막은 노 위로 내리 찍혔다.
“……!!!”
니코 네레이아데스가 눈을 부릅떴다. 쇠핏줄은 상상보다도 훨씬 더 무겁고 질겼다. 아니, 상상 이상이라는 말 정도로는 표현되지 않는 무게가 있었다. 이 무거움이 기예로써 가진 힘이리라 여겼다.
힘을 주어 맞서려던 니코가 작게 혀를 찼다. 쇠핏줄은 어느새 노에 휘감겼고 시온은 잡아당기고 있다. 내리 찍히던 것이 갑자기 잡아당기니 강한 힘이 오히려 독이 된다.
늙은 어부는 손목을 강하게 뒤틀어 쇠핏줄을 뿌리쳤다. 무기를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몸이 균형을 잃음을 느꼈다. 빌어먹을. 왼쪽 발에 부유감이 느껴진다 싶더니 곧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니코의 왼 무릎이 갑판에 닿았다.
“맙소사…….”
금이빨 키프코스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 같은 탄식을 내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 젊어서는 제국십장이기도 했던 사내가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시온 폴링라이트가 저 검은 밧줄을 한 차례 휘둘렀을 뿐인데.
“호벨 만의 고래가, 무릎을…….”
“이런 걸 보는 날이 다 오는군…….”
경악은 키프코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글로시오스도 오페니아도, 갑판의 모든 이들이 넋이 나가 시온과 니코를 번갈아 보았다. 호벨 만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다. 호벨 만의 고래가 어떤 사내인지, 그런 사내를 잠시라도 무너트린 것이 어떤 의미인지!
“…사과해야겠군.”
니코 또한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균형을 잃어 본 것이 언제였던가? 적어도 20년은 넘은 이야기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노를 굳게 쥐었다.
“나이가 들더니 나도 모르게 젊은이를 무시할 때가 있어서.”
늙은 어부의 눈이 잔잔해졌다. 약간의 방심도 약간의 풍랑도 없이 바다와 같아졌다. 기세는 이전과 비할 수 없다.
“…흥.”
시온이 코웃음 치며 손을 움직였다. 쇠핏줄이 재차 튕겨 나갔다. 영혼의 무게가 힘이 되어 내리꽂힌다. 허나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약간의 방심을 내버렸다. 쇠핏줄이 휘감길 틈 주지 않고 노로 비껴 내었다.
쇠핏줄이 난다. 한 갈래 밧줄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다채로운 궤적을 그리며 니코를 노렸다. 시온은 이 무거운 기예를 다루는 데에 놀랍도록 능숙했다. 손가락 조금을 까딱이는 것만으로도 쇠핏줄이 이리저리로 튕겼다.
‘…무섭게 무겁군.’
공격을 받아 내던 니코의 이마로 한 줄기 땀이 흘렀다. 한 손으로 닻을 올렸다 내리는 사내에게도 시온의 공격을 받아 내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어려울 것까지도 없었다.
‘이 무게는 다루는 쪽에도 마찬가지겠지.’
시온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단순히 라후칼라의 효능 때문만은 아니다. 이토록 무거운 기예를 다루려니 온 힘을 다할 수밖에 없다. 발지아트를 둘러 보이지 않을 뿐 이미 양 손아귀는 엉망진창으로 찢어져 있었다.
니코는 가만히 섰다. 갑판의 흔들림을 느끼며 흐름 위에 올라탔다. 밧줄이 얼마나 현란한 궤도를 그리더라도 결국 니코의 몸에 닿는 순간만이 중요하다.
시온이 쇠핏줄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났다면 니코 또한 이 커다란 노에 익숙할 대로 익숙하다. 반세기를 함께해 온 물건이니까. 쇠핏줄은 검은 뱀처럼 구불대지만 커다란 노를 넘어 니코에게 닿지 못했다.
‘…파도가,’
호벨 만의 고래는 땅에서 보낸 시간보다 바다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다. 갑판을 디디고 서는 것만으로도 바다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았다. 그는 곧 거센 파도가 한 차례 부닥쳐 옴을 느꼈다.
‘왔다.’
높은 파도가 배를 두드린다. 갑판이 기울어진다. 시온도 니코도 마찬가지다. 다만 니코는 대비했고 시온은 알지 못했다. 맹렬하던 쇠핏줄의 기세가 잠시 죽었다. 호벨 만의 고래는 기다리던 틈이었다.
거구로 짓쳐 든다.
쇠핏줄은 이미 엉뚱한 데에 튕기고 있다. 파도에 감사를 보내며 커다란 노를 휘둘렀다. 시온의 머리통이 열 개가 있더라도 부수고 남을 위력이 있었다.
“욱-!!!”
비명이 터졌다.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것이었다.
그의 노는 시온에게 닿지 못했다. 쇠핏줄이 늙은 어부의 등을 후려치는 것이 더욱 빨랐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격통이 일었으나 이를 악물고 물러섰다. 그러지 못한다면 격통이 아니라 목숨을 잃을 터였다.
니코의 발바닥은 유난히도 커다랗다. 잽싸게 뒤로 네 발자국 물러나니 갑판의 끝자락이었다. 니코가 식은땀을 흘렸다.
“놀랐다.”
끔찍하게도 고통스러웠다. 그저 한번 닿았을 뿐인데도 아픔이 척추를 꿰뚫듯 강렬했다. 등 전체가 얇은 칼로 저며 낸 것처럼 끔찍하게, 아주 끔찍하게 아팠다.
“어떻게 보아도 그렇게 휠 수는 없었는데…….”
상처가 깊은데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저 이글거리는 쇠핏줄이 닿은 순간 살갗을 태워 뭉개 버린 탓이다. 늙은 어부의 등에는 마치 인두로 지진 듯한 상처가 길게 남았다.
“…무슨 술수를 썼지.”
살 타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키프코스도 글로시오스도 그 지독함에 기겁을 했다. 헌데 상처 입은 니코는 금세 아픔을 추스르고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하다.
“귀신이라도 부리나?”
“글쎄.”
시온은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더 놀라다 보면 알게 될지도 모르지.”
대신 쇠핏줄을 재차 튕겼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궤적을 읽어 노를 휘둘렀으나 검은 밧줄은 공중에서 급작스레,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였다.
“또!”
니코가 외쳤다. 이번에는 막아 내었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았다. 양손으로 휘두른다고 생겨날 수 있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늙은 어부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라도 날아다니는 것 같군……!”
놀라울 만큼 사실에 가까운 추측에 시온이 키득 웃었다.
‘내 고집 한 갈래지만, 헛된 꿈 더해지면 못 할 일 없지.’
‘달아오른 쇠핏줄’의 진가는 ‘공상손가락’과 함께할 때 드러난다. 아니, 애초에 쇠핏줄을 제대로 쓰기 위한 공상손가락이었다. 수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쇠핏줄을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기기묘묘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기예가 두 개라도 되나……? 아니, 그럴 수는 없지.”
니코가 혀를 차며 노를 치켰다. 또 쇠핏줄이 공중에서 궤도를 바꾸었다. 중앙을 강하게 내리찍어 움직임을 아예 멈추었지만 끄트머리가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이 타며 냄새가 독했다.
시온은 땀을 뻘뻘 흘렸다. ‘달아오른 쇠핏줄’의 무게와 뜨거움은 시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라후칼라로 증폭된 신체라도 착실하게 체력을 갉아먹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힘을 쓰는 보람은 있어 니코 네레이아데스를 착실하게 몰아붙였다. 쇠핏줄의 궤도가 한순간에 몇 번이나 바뀌는데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점쟁이라도 되지 않는다면 당할 리가 없다.
“으-!”
니코가 또 신음을 내었다. 어깻죽지에 길게 상처가 생겨난 탓이다. 그는 노를 마구잡이로 휘둘러 시온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더니 이내 고함질렀다.
“-아, 아, 아아아--!!!”
쩌렁하다 못해 귀가 저렸다. 니코는 제 몸을 내려보았다. 곳곳에 길게 탄 자국이 남았다. 늙은 어부가 턱수염을 쓸더니 이내 목젖이 보일 만큼 입을 벌려 웃었다.
“아! 아, 으-하하하하하하-하--!!!”
노인은 마치 어린애처럼 신이 나서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껏 보인 모습과는 거리가 있어 의아했다. 다만 키프코스나 글로시오스, 제11군단에 속한 적 있는 사내들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변했다.
“---아. 곤란하군. 늙어서 이러면 안 되는 거야 잘 알지만, 놀고 싶어졌어.”
니코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마리나 전하를 꺾은 점쟁이가 스물다섯이란 말에 깜짝 놀랐는데, 넌 그보다도 어려 보이는구나.”
제11군단장은 덩치만큼이나 무게 있는 사내다. 다만 이는 나이를 먹은 탓이다.
“-아-. 맞아, 가끔은 휴식도 필요하겠지. 맞아, 맞다고, 아무리 늙은이라도 이 정도 어리광은 부려도 되지 않겠어.”
니코는 코르디스 대제의 얼굴에도 주먹을 날릴 만큼 혈기 넘치던 젊은 시기를 보냈고, 간혹 그때의 흔적이 드러나곤 했다.
“우리 노는 거다, 꼬마야.”
어린애 같은 웃음이 늘 신호탄이었다. 제11군단장이 진심을 내보일 마음이 들면 꼭 저런 식으로 웃곤 했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가 이를 드러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늙은 고래를 깨웠으니 아주 제대로 놀아 보는 게야.”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기예Ars…….
“싫은데.”
“…음?”
호벨 만의 고래의 시야가 변했다. 자기가 서 있던 갑판이 갑자기 저 앞에 있고 발아래에는 무엇도 없다. 무언가에 죽 밀려난 듯한 모양새였다. 하나, 둘… 딱 스무 발자국 정도.
“으으--음?”
니코는 의문 가득한 신음과 함께 낙하했다.
곧 풍덩, 하는 소리가 났다. 시온의 두 번째 기예,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이 그를 배 밖으로 밀어낸 까닭이다. 바다에 빠진 노인을 보며 시온이 속으로 외쳤다.
‘좁힐 수 없는 스무 발자국, 이제껏 아껴 두길 잘했지!’
늙은 어부는 곧바로 헤엄쳐 배에 오르려 했다. 허나 시온의 쇠핏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배 위에서 맹렬하게도 쇠핏줄을 휘둘러 대었다. 슬슬 힘에 부쳤다. 라후칼라의 효능이 다해 가고 있었다.
“뭐 해, 이 멍청이들아!”
시온이 버럭 소리 질렀다.
“배 몰아, 빨리-!!!”
윽. 쇠핏줄이 니코의 얼굴에 명중해 자국을 남겼다. 헌데 이전 같은 상처는 없다. 아마 니코의 기예 때문이리라. 시온은 위협을 느꼈다. 그는 약해졌는데 니코의 기예는 이제부터다.
“배, 배 움직여, 배!!”
“이미 하고 있어요!”
키프코스가 황급히 손짓했으나 필요 없는 일이었다. 항해사는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사내였던지라 이미 배를 몰고 있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키프코스의 배가 빠르게 멀어져 감을 보았다.
“이건… 놓쳤나.”
니코가 손을 흔들었다. 간만에 놀아 볼 요량이었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꼬마 파시오누스, 기억해 두겠다! 다음에 꼭 같이 놀기야!”
“제발 잊어 주시죠, 할아버지!”
시온이 악을 썼다.
‘잘 있어라, 실레몰!’
75화
니코 네레이아데스가 떠나는 배를 바라보았다. 슈와츠-발렌급의 마력선이 미친 듯이 바다를 가르는 중이다. ‘청날치’호로 돌아온 니코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무리하면 따라가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굳이 무리해야 할까? 그는 작게 웃으며 노를 젓기 시작했다. 실레몰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과하게 활기찬 물고기는 놓아주는 일이 많은 어부였다.
“-으. 오늘내일은 진물이 나겠군.”
노를 젓자니 상처가 쓰렸다. 특히 바닷물이 튀기라도 하면 더욱 그랬다. 그의 몸에는 이리저리 길게 타들어 간 자국이 남았다. 시온의 기예, ‘달구어진 쇠핏줄’의 흔적이다. 잠깐 닿았을 뿐인데도 피부가 타서 오그라들었다.
허나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육체는 약하지 않다. 상처가 벌써 낫기 시작했다. ‘달구어진 쇠핏줄’은 고통스러웠으나 니코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정도는 아니었다. 싸움이 더 길어졌다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아쉽게 되었어.”
떠나가는 배를, 그 위의 꼬마를 생각하며 노를 저었다. 반대로 노를 저으니 벌써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친 몸으로도 청날치호는 날쌔다.
“오랜만에 기예까지 써 보며 진탕 놀아 볼까 했더니.”
호벨 만의 고래는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마지막으로 기예를 사용했던 일이 언제였던가. 재작년 해적 떼를 소탕할 때? 아니, 부케노스 혼자서 대장의 목을 땄다. 그럼 칠 년 전, 제18군단과 협력했을 때? 아니, 그때도 기예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기예를 써 본 지 십 년이 넘었나?”
스스로 깜짝 놀랐다. 전사이고 군인인데 온 힘을 다하기는커녕 기예조차 필요 없는 싸움만 해왔다는 말이 아닌가. 진절머리가 나서 고개를 내저었다.
“은퇴가 간절하군.”
새 황제의 즉위가 희망이었다. 콘티누아 대제는 도통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은퇴를 윤허하지 않았다. 제국십장 자리에서 내려오는 데에도 얼마나 애를 써야 했던지. 차기 폐하께는 꼭 눈 밖에 날 작정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반세기가 넘게 총애를 누려 왔으니 이렇게 말해도 불경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달갑지는 않았던가. 제국십장이 하기 싫다며 대제의 얼굴을 후려치기도 했으니.
그런 일도 있었나. 옛일 떠올리며 노를 젓다 보니 어느새 육지가 보인다. 호벨 만 최대의 항구, 싹 털려 버린 무법의 터. 소란은 어느새 잠잠하고 항구에서는 제11군단 병사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차분하게 청날치호를 항구에 대었다. 병사들이 달려와 배를 밧줄로 묶었다. 니코는 그 큼지막한 발로 껑충 뛰어 육지를 밟았다. 백인대장 하나가 정중한 경례를 보냈다.
“수고하셨습니다, 군단장님.”
“술.”
“준비해 놓았습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무뚝뚝한 말투로 돌아와 있었다. 시온과의 싸움에서 올랐던 흥은 이미 군단장의 무게와 직위 따위에 차갑게 식어 가라앉은 뒤였다.
그는 독한 술을 받아들고는 반병을 곧바로 위장에 털어 넣었다. 노를 저은 피로나 상처의 쓰라림 따위가 곧 사그라들었다. 이제 곯아떨어지면 상처는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리라.
“내 노를 실어 놓아라.”
“예.”
니코는 무기로 사용하는 커다란 노를 곁에다 놓아 두었다. 백인대장이 손짓하자 병사 열둘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낑낑대며 노를 옮겼다. 하나같이 힘이 좋은 장정인데도 애를 써야만 했다.
커다란 노에는 시온의 쇠핏줄이 남긴 기다란 탄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어떤 겁 없는 놈이 호벨 만의 고래에게 싸움을 걸었기에. 병사들이 혀를 내둘렀다.
“수석참모는?”
“바로 저기에.”
백인대장의 손끝에는 달려오는 부케노스가 있다. 니코의 도착을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 나온 듯했다. 늙은 어부는 충성스러운 부하를 보며 물었다.
“그물은 다 걷었나.”
“예, 군단장님.”
“특별히 보고할 것은?”
“없습니다.”
“수고했다.”
제11군단 수석참모 부케노스는 우수한 사내였다. 니코는 일찍이 그에게 군단의 전권 대부분을 위임하다시피 했는데,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약간 신이 나신 듯도 한데.”
“그럴 뻔했지, 아쉽게도.”
“누구였습니까? 키프코스는 아니었을 테고.”
“나도 모른다.”
가짜 이름밖에 뱉지 않았어. 파시오누스라니, 어디 호투스 시절에나 썼을 법한 이름을 가져와서는. 니코가 제 턱수염을 매만졌다.
“그럼 키프코스 패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놓쳤다.”
“예? …예, 그렇군요.”
부케노스는 더 묻지 않았다. 니코는 수석참모의 여러 뛰어난 점을 알고 있었지만 눈치가 빠른 점을 특히 좋아했다. 자기가 해도 될 말고 하지 않아도 될 말, 물어도 될 것과 묻지 않아도 될 것 등을 구별할 줄 아는 사내였다.
“말씀하셨던 대로 테르단스 텔롬을 키프코스의 후임으로 쓰겠습니다.”
“그래야지.”
군용 강화약물 라후칼라.
호렘 암리타는 그 원료라는 이유만으로 특급 거래 금지 품목으로 분류되었다. 콘티누아 대제 즉위 직후이니 46년 전이다. 안타깝게도, 이 정책에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호벨 만의 어부들이었다.
“황금약의 유통은 끊어져서 안 돼.”
“원액은 비싸도 어부들에게 닿을 때는 늘 적당한 가격이 되도록 손을 쓰고 있습니다.”
황금약은 약간의 활력과 치유력, 또 꾸준히 섭취하면 약간의 체력 증진을 가져다주는 약품이다. 호렘 암리타를 원료로 하는데, 라후칼라와는 달리 오랜 전통을 가진 민간 약품에 가까웠다.
“참 묘한 약이지요. 마시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나지만 취하지도 않고, 효과가 강하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대신 값이 싸지요, 마치 처음부터 노동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어렸을 적에, 호렘의 증손자를 만난 적이 있다.”
“예? 처음 듣습니다.”
“호렘은 어부의 아들이었는데, 아버지가 과로로 앓다 죽는 걸 지켜보았다더군.”
“아, 그래서였습니까.”
호렘 암리타를 만들었다는 호렘은 실레몰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나고 자란 호벨 만 어부들에게 주었던 선물을 주고 싶었고, 그들의 고됨을 덜어 주고자 황금약을 만들어 내었다. 200년도 더 된 일이다.
46년 전, 호렘 암리타가 금지되니 황금약도 마찬가지였다. 어부들은 혼란에 빠졌다. 황금약은 호벨 만의 어부들이 고된 삶을 견디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헌데 그런 물건의 거래가 하루아침에 금지되다니!
때문에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제국십장의 자리를 받아들며 콘티누아 대제에게 요구했다. 호렘 암리타와 황금약을 비밀리에 거래하게 해 달라고. 콘티누아 대제는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너무 공공연해지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라면서.
‘46년인가. 오래도 되었어.’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그때부터 줄곧, 호렘 암리타를 몰래 빼돌려 황금약을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 호렘 암리타를 만들어 낸 호렘의 마음 정도는 아니더라도, 고되고 힘든 어부들이 하루라도 덜 늙는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어차피 늙어 가는 처지라면 이 바다 냄새를 더 즐겁게, 더 오래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며.
“어쨌든.”
니코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자네 은사에게서 연락은 왔나.”
“마침 받아 온 참입니다. 여기, 치안청 점쟁이의 학창 시절 서류입니다.”
“음.”
종이봉투를 받아들었다. 두터웠다. 니코가 날카로운 눈으로 내용물을 이리저리 살폈다. 호벨 만의 고래는 곧 얼굴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미간의 주름이 깊어지고 웃음기가 사라진다.
“…….”
그는 같은 장을 몇 번이고 살폈다. 혹시라도 잘못 읽었나, 내가 읽은 것이 사실인가.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문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물었다.
“…이미 읽었겠지.”
“예. 먼저 확인했습니다.”
니코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손짓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병사가 재빠르게 물러났다. 그들이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를 하겠다는 신호였다.
“부케노스.”
늙은 어부가 손가락질했다. 부케노스의 은사를 통해 얻어온 제도 아카데미의 문서다. 그 첫머리에는 ‘아메투스 아르에티온’이라는 이름이 있다.
“이 아르에티온, 내가 아는 아르에티온인가.”
“그렇더군요.”
“학창 시절에는 그의 성씨를 몰랐나?”
“워낙 꼭꼭 숨겼던지라.”
“그래, 숨길 만도 하지…….”
니코가 말을 흐렸다. 그의 얼굴에는 고뇌의 기색이 있다. 수석참모로서도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호벨 만의 고래가 고뇌에 빠지다니.
“허, 참…….”
기가 찼다. 라후칼라를 마셨다고 해도 자기랑 맞먹으려 드는 꼬마를 보고 몇 년은 이보다 더 놀랄 일이 없을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같은 날에 이런 당혹을 마주하게 될 줄이야.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래서 니코는 바다가 좋았다. 운명이라고 하는, 하늘이 벌이는 일은 도통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아르에티온, 아르에티온……. 니코는 아메투스의 성씨를 끔찍한 얼굴로 곱씹었다. 이름일 뿐인데도 왜 이리 고통스러운가. 가슴에서 무언가 심장을 꾹꾹 눌러 대는 듯했다.
“치안청의 점쟁이는 어디에 있나.”
“부하 둘과 함께 실레몰 근처를 맴도는 중입니다.”
“그를 불러라.”
제11군단장이 명을 내렸다.
“직접 얼굴을 보아야겠어.”
* * *
아메투스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쪽에서 절 보자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군단장님.”
“나도 이러게 될 줄 몰랐어.”
실레몰이었다. 샤디 섄도르와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은 여관에서 쉬고 있으라 했다.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아메투스를 혼자 만나기를 원했다.
“그대가 점쟁이라고 불리는 건 아나.”
“…달갑지는 않지만.”
“나중에는 꽤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지.”
니코가 빙그레 웃었다. 아메투스는 더욱 의문스러웠다. 전번에는 그토록 냉랭한 태도를 보이던 사내다. 갑자기 부드럽게 대해 준다 해도 믿기가 힘들었다. 그가 엄격함으로 이름 높은 호벨 만의 고래라면 더욱 그렇다.
“난 자네들에게 어떤 협조도 해 줄 생각이 없었네.”
“예, 그렇게 보였지요.”
“헌데 마음이 변했어.”
니코가 툭 내뱉었다.
“수상한 꼬마를 보았다. 금발에 푸른 눈, 거짓말에 능했지.”
“……!!!”
“그대가 쫓는 게 이 꼬마지?”
아메투스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런 꼬마라면 분명히 제5황자 지오니스였다. 역시 살아 있었고, 역시 코앞까지 쫓아온 것이었다(그는 여전히 루베코 골짜기에서 시온을 만났던 일을 잊어버린 채다).
“아마 메케로스로 갔을 텐데, 내가 그런 꼬마를 보았다는 사실을 황실에 알려야 할까?”
“…아직은.”
“그래. 앞으로는 잊어버리도록 하지.”
“…귀중한 정보, 감사드릴 수밖에 없군요.”
니코가 미소 지었다. 마치 손주를 대하는 노인과 같았다.
“…하지만 의아합니다.”
옥색 눈 사내는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왜 갑자기 협력적으로 나오시는지?”
“마음이 변했다니까.”
“그러니까, 어째서?”
“자네 옥색 눈 때문이라 하면?”
니코가 아메투스를 빤히 보았다. 점쟁이라고 불리는 사내의 두 눈은 신비한 옥색이다. 늙은 어부는 깊이 슬퍼 와서 또 웃고 말았다. 잊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새 잊고 살았던 기억을 떠올리고 만 까닭이다.
“왜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오랜, 아주 오래전에……. 그가 제국십장이기도, 어른조차 아니던 시절에, 그저 파도와 모래 위에서 뛰놀던 때에……. 니코의 눈가가 자글해졌다.
“자네 할머니도 그렇게 아름다운 옥색 눈이었던 것을.”
76화
“…할머님 이야기를 하셔도 곤란합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는지라.”
아메투스가 눈을 치켜떴다. 눈꺼풀 밑의 옥색 눈동자는 시퍼런 칼날처럼 번뜩이기 시작했다. 마치 연기라도 피어오를 법한 기세였다.
“그리고 전 가족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옥색 눈의 사내는 니코를 노려보며 탁자에 손을 얹었다. 핏줄 솟은 손에 힘을 주자 손가락이 쑤욱 탁자를 꿰뚫고 들어갔다. 무슨 푸딩에 구멍이라도 내듯 손쉽게.
“제도 아카데미의 호레이모스 선생이 그런 사항은 전해 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소식 참 빠르기도 하군, 서류를 부친 것이 겨우 사흘 전이던데.”
“특무대의 귀는 군단장님 생각만큼 둔하지 않아서.”
니코가 고개를 내저었다. 뒤를 캐어 얻은 정보가 손에 들어오는 것보다 뒤를 캤다고 들키는 게 더 빠를 줄이야. 또 젊은이들을 일단 무시하고 보는 나쁜 버릇이 나왔던 모양이다.
“협력에는 크게 감사드립니다.”
눈을 매섭게도 떴다. 닿으면 베여 피가 철철 날 법한 날카로운 옥빛이었다.
“허나 군단장님, 저 같은 자의 뒤를 캐서 무엇하시려는지 모르겠군요.”
“-음.”
아메투스는 목소리에서는 살기가 뚝뚝 묻어 나왔다. 이런 얼굴을 할 수 있는 사내였나 싶을 만큼 날이 선 모양새였다. 본의 아니게 역린을 건드렸음을 깨달은 니코가 턱을 쓸었다.
“자네 할머니의 이름을 아나?”
……. 옥색 눈이 죽일 듯 노려본다. 명백한 분노를 표하는데도 계속 물고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흉흉하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날카로운 기세가 솟는다. 그러나 니코 네레이아데스를 겁먹게 만들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알미네 아르에티온. 아레테 섬의, 아니 호벨 만 최고의 미녀였지. 개인적으로는 대륙 최고라고 여겼고, 자네 할아버지 의견도 같았네.”
“…….”
“싫어하는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군.”
니코가 사과했다. 호벨 만의 고래가 사과하니 아메투스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악의적인 이유로 들먹인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조부모를 아는 것처럼 보여 흥미가 돋기도 했다.
“…미안할 것까지는 없겠습니다, 군단장님.”
“그런가.”
호벨 만의 고래는 빙글 웃었다. 묵직한 미소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날카로운 검으로 어찌하기 힘든 파도 같은 연륜이었다. 아메투스가 두어 차례 숨을 골랐다. 호흡과 함께 분노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말이야.”
니코가 턱을 긁적이자 수염에서 말라붙은 소금이 떨어졌다. 아메투스의 기세가 아무리 흉흉해도 아직 어리다. 콘티누아 대제나 데발로 데비우스에 비하면 고양이 하악질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 새끼 표범 정도는 되려나. 늙은 어부가 아주 드물게 인자한 눈을 했다.
“자네가 아르에티온이란 걸 알게 되었으니 내 호의도 당연하지 않겠어.”
“…….”
아메투스는 니코의 미소를, 인자한 눈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니까…….”
급소를 찔려 채 식지 않은 분노, 마음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당혹, 이름 붙이기 힘들게 덩달아 엉켜 버린 여러 감정. 싸잡아서 혼란이라고밖에 부를 수가 없어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저는 아르에티온인데, 왜……?”
“아?”
니코가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자네, 설마…….”
아주 진귀한 광경의 연속이었다. 호벨 만의 고래가 인자한 눈빛을 하지 않나, 얼빠진 소리를 내지 않나. 키프코스나 글로시오스가 보았다면 내일 바다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며 맨발로 도망쳤을 터다.
“모르나? 모르는 건가……?”
호벨 만의 고래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아메투스를, 마지막 아르에티온의 얼굴을 살폈다. 의문과 혼란으로만 가득했다.
“아니, 그럴 리가……!”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1황자, 아니 차기 폐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
“…그러니까, 무엇을?”
“하… 하, 하!”
늙은 어부가 털썩 몸을 뉘였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러고는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하는 일은 도통, 도통 알 수 없었다. 뿌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섬뜩했다.
“말하지 않았다고……. 그래, 말하지 않았단 말이지…….”
손가락 사이로 니코의 눈이 엿보였다. 명백한 경멸과 격노를 담고 있었다. 감정의 대상이 대제의 맏이가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심한 욕설을 뱉고파 보였다.
“어떻게 그러실 수가……. 사람이, 대체 어떻게……!”
부케노스에게 들었다. 페르비아스와 아메투스가 어떤 관계인지, 학창 시절부터 어떤 우정을 쌓아 왔는지 모두 들었다. 그런데도 말해 주지 않았나! 욕지기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 내었다.
“…너무하시는군. 정말로, 너무하셔…….”
이가 갈렸다. 아르에티온의 일을 모르지 않을 터다. 그게 아메투스에게 어떤 의미일지 아주 잘 알 터다. 그런데 말하지 않았다면, 그래 놓고도 벗인가. 기가 차고 또 차서 얼굴이 뻥하고 터질 것 같았다. 차라리 그렇게 터졌으면 좋겠다 싶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말할 수 없다.”
아메투스의 당혹 섞인 의문에 단호하게 답했다. 말해 주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 없었다. 권력이란 빌어먹을 것이다. 빌어먹을 것에 묶인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더 빌어먹을 늙은이였고.
“높으신 전하께서 말하지 않은 깊은 뜻을 곧 죽을 노인네가 어찌 헤아릴까?”
비아냥이 짙다. 누구보다 니코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어쨌든 자네, 호벨 만에 온 걸 환영하네.”
“…….”
아메투스는 차마 더 물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가문의 일 들추어진 것은 아메투스인데 어찌 니코가 더욱 분노하고 있는가. 이상한 일인데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자랑하는 직감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예, 협력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지요.”
옥색 눈의 사내는 방금 일을 묻기로 했다. 사적인 의문 따위 5황자 지오니스를 쫓는 데에 방해될 뿐이었으니까. 시온에게는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하. 니코가 짧은 탄성을 내었다. 약간 기가 차기도 했다. 역린을 찔려 그렇게 흉흉하더니 금세 자신을 잠재웠다. 스물다섯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코르디스 제11군단장,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이름으로 자네를 돕지, 오직 자네만을.”
“충분합니다.”
“그럴 거 같았어.”
특무대의 지원은 바랄 수 없다. 니코가 허용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아메투스는 불만이 없었다. 혼자서도 충분한 까닭이다.
“이봐, 아메투스… 아르에티온.”
니코는 아르에티온이라는 이름을 힘겹게 뱉었다. 아메투스 또한 힘겹게 들었다. 쉽지 않은 이름이었다. 이 정도는 말해도 되겠지. 중얼거림이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자네는 아직 젊어.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걸 다시 한번 돌아볼 만하지.”
“…….”
“늙은이의 충고가 달가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일어섰다. 이제는 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또 그들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원하는 걸 얻어 가라고.”
* * *
끔찍한 꼴의 선박이 메케로스 항구에 닿았다. 입항할 때부터 선원들이 술렁일 정도의 몰골이었다. 그래도 니코 네레이아데스의 습격을 받은 것치고는 준수한 편이었다. 키프코스와 그 패거리는 배가 멈추자마자 우르르 몰려나왔다.
“살았다!”
“살았어!”
키프코스는 소꿉친구이자 아내인 오페니아를 꼭 껴안았고 다른 패거리들도 제 연인이나 부인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구레나룻 사내, 글로시오스도 살아남은 감격을 나누고 싶었으나 나눌 이를 찾지 못했다. 슬쩍 시온을 껴안아 볼까도 싶었지만 푸른 눈이 무서워 가까이 가지 못했다.
“우리가 호벨 만의 고래한테서 도망쳤어! 이건 기적이야!”
“생에 감사를!”
“아니, 이럴 때가 아니야……. 또 쫓아오면 안 되니까 빨리 정비해서 한챠무스 제도로…….”
험상궂은 사내들이 부산을 떨었다. 키프코스는 황급히 새로운 배를 알아보라며 부하 몇을 보냈다. 그들 모두를 태울 배를 구하려면 돈이 상당히 깨지겠지만 괜찮다. 시온이 호렘 암리타의 대가로 지불한 거금이 있었으니까.
‘다들 신났군.’
시온 폴링라이트가 코를 훔쳤다. 태연한 척했지만 죽을 것만 같았다. ‘달구어진 쇠핏줄’은 안 그래도 후유증이 남는 기예다. 그런데 싸움의 피로와 라후칼라의 여파까지 더해지니 당장이라도 온 내장을 콧구멍으로 토해 내고픈 기분이었다.
‘…빨리 배편을 구하고 쉬자.’
그나마 황금약을 몇 병 마신 덕에 걸어 다니는 중이었다. 몇 번이고 말해서 질릴지도 모르지만, 그의 몸뚱이는 열한 살이다. 사실 이것이 지긋지긋한 건 누구보다 시온 자신이었다.
제국을 무너트려야 한다. 그러려면 필요한 준비가 많았다. 힘도 계획도 시간도.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다. 그러니 어서 서방으로, 어서! 열한 살 몸뚱이 타령 하지 않도록!
‘그래도 메케로스까지 왔군.’
계승전의 끝, 제도 루틸리움을 떠나며 세웠던 계획의 막바지다. 쥬엣 곡예단에 합류하거나 루베코 골짜기의 주인을 만나기도 했다. 이제 곧 제국에 안녕을 고할 수 있으리라. 물론 마지막까지 방심해서는 안 되고 몸은 늘 그렇듯 엉망이지만 다소 들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키프코스 씨.”
금이빨 사내를 불러세웠다.
“왜왜왜 그러시죠, 파파파시오누스 씨?”
그는 시온의 부름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원래도 불편해했지만 니코와의 싸움을 본 이후로는 과하게 겁을 내었다. 시온이 피로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제 작별을 고할까 해서요. 원래 메케로스까지였잖아요.”
“웬일로 반가운 소리를 하는군! 호벨 만의 고래를 쫓아내 준 건 고맙지만 이제 사라져 주면 딱이다 싶었는데!”
‘아니,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시온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또 생각이랑 말이 바뀐 거 같은데요.”
“여전히 눈치 빠르단 말이야, 이 꼬마는!”
‘그럴 리가요, 파시오누스 씨!’
회귀황자는 얄미운 금이빨 사내를 한 대 칠까 진지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만두었다. 쉬고픈 마음이 강렬했다. 그는 키프코스를 향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서 가요. 할 일이 많으니.”
“아니, 농담이었지요. 어떻게 이대로 가겠습니까.”
키프코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껏 신세 진 게 얼만데….”
사내가 웃자 금이빨이 번뜩인다.
“몸도 정상이 아니신 듯하고.”
그의 부하들이 킬킬 웃으며 시온에게 다가왔다.
“그럼, 이 키프코스가 어떻게 해드려야 할까…….”
쯧. 시온이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실레몰 자유시장에서 나름 행세하던 주먹패였던가. 어쩌면 귀찮아질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키프코스가 주먹을 꾸욱 쥐며 외쳤다.
“글로시오스!”
“예, 형님!”
“말 안 해도 알겠지!”
“당연합니다.”
글로시오스가 손목을 문지르며 가까이 왔다. 시온에게 부러졌던 자리다. 그러고 보니 구레나룻 사내와의 첫 만남은 그의 손목을 똑 부러트리며 시작되었다. 시온의 푸른 눈이 사납게 번뜩였다.
“파시오누스 씨를 성심껏 시중들어 드리다가 나중에 한챠무스로 따라가지요!”
“좋아, 여기 접대비다!”
“금화가 이렇게나! 제가 조금은 해 먹어도 되겠지요?”
“뭐? 평생 외팔이로 살고 싶다고?”
“농담입니다, 하하하!”
“난 진담이었는데, 하하하!”
키프코스와 글로시오스가 실없이 껄껄 웃었다. 패거리 모두가 그랬다. 시온이 맥없이 한숨을 쉬자 키프코스가 짓궂은 미소를 보냈다.
“아니, 파시오누스 씨, 긴장하신 모양이군요. 대체 왜죠?”
“왜기는요.”
시온이 툭 내뱉었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단체로 두들겨 패기라도 하려나 했죠.”
“하하하, 제가 미쳤습니까. 호벨 만의 고래를 쫓아낸 분에게 덤벼들게. 생각만 해 보았습니다, 생각만.”
“걷지도 못하게 약해졌으면 했을 거죠?”
“걷지도 못하게 약해지시면 대답해 드리죠.”
“하하하, 당신 금이빨을 뽑아 버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뽑지 않으셨군요?”
키프코스가 시온에게 눈짓했다. 능글맞은 사내다.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지만 글로시오스가 도움이 될 겁니다. 저놈이 또 밀수에도 일가견이 있는지라.”
“이 글로시오스, 메케로스에 둔 술친구만 사백 명이 넘습니다. 예전에는 항해사 노릇을 하기도 했고요.”
구레나룻 사내가 자랑스레 말했다.
“어디로 가시렵니까. 말씀만 하시죠.”
“당신들 정말, 안 어울리게 듬직해.”
안 어울린다니! 의형제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시온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도 바다도 그저 푸르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도 가야만 한다. 시온은 그것을 원했다.
“좋아. 갑시다.”
77화
“받아요, 글로시오스. 이쪽으로 오면 돼요.”
“알겠습니다, 오페니아 형수.”
“잘 찾아올 수 있죠?”
“절 어린아이로 보십니까?”
구레나룻 사내가 작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마나 코팅이 되어 빳빳했다. 키프코스 패가 한챠무스 제도에서 머무를 장소가 적혀 있었다. 비밀스러운 섬이라 이 종이가 없다면 찾아오기 힘들 터였다.
“오페니아! 그런 놈이랑 길게 이야기하지 마!”
“자기 의동생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글로시오스가 아무리 입만 산 노름쟁이라고 해도!”
오페니아의 호통에 키프코스가 입을 다물었다. 글로시오스도 덩달아 입을 닫았다. 확실한 상흔이 마음에 남았다. 오페니아는 실수했다는 듯 어머, 하고 입을 가리며 웃었다.
“말이 심했네요, 글로시오스.”
“…아닙니다, 형수.”
“한챠무스에서 봐요, 수고하고.”
“…예.”
키프코스 패거리가 떠나갔다. 오페니아가 앞장서고 키프코스가 옆에, 나머지가 뒤를 따랐다. 그들은 밝은 햇살에 기분 좋게 웃었다. 남쪽의 따뜻한 섬에서의 밝은 미래를 그리자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직 내 대접이 너무한데요.”
“…익숙합니다.”
훌쩍. 글로시오스가 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시온은 더 묻지 않았다. 어쩌다 이 구레나룻 사내와 연이 닿았으나 조직 내 위신까지 신경 써 주고픈 마음은 없었다. 글로시오스도 더 질질 끌지 않고 방긋 웃었다.
“그보다, 밝은 미래를 이야기해 보죠, 파시오누스 씨.”
구레나룻 사내는 언제 침울했냐는 듯이 입꼬리를 확 끌어 올렸다. 술이라도 마신 것처럼 활기 넘쳐 펄펄 뛰었다. 눈꼬리에 반짝이는 한 방울 눈물은 못 본 것으로 했다.
“무얼 원하십니까? 어디로 가시렵니까?”
“떠날 거예요.”
“떠난다, 어디로?”
“서쪽.”
“서쪽! 역시나!”
메케로스로 올 때부터 알아보았죠! 제국은 타국과의 교류를 아주 엄중히 통제한다. 드라코니아 대산맥의 관문지기들이 밀수꾼을 즉결처분하는 권한을 당연하게 갖고 있을 정도다.
서방으로의 길은 하나같이 빡빡하기 그지없다. 그나마 가장 덜한 게 이곳, 항구도시 메케로스. 실레몰이 그랬듯 제11군단이 일부러 열어 놓은 숨구멍이었다. 니코가 그물 걷으면 밀수꾼 우수수 잡혀가겠지만 지금은 아니리라.
“저만 믿으십시오. 메케로스의 술친구 사백 명 중 절반이 밀수꾼이거든요. 가장 좋은 자리를 알아봐 드리죠.”
“아니, 밀수꾼 통하지 않고 비밀스럽게 갈 겁니다.”
그보다 그런 교우관계로 괜찮아요? 시온의 물음에 글로시오스는 휘파람으로 답했다. 노골적으로 제 문제에서 회피하는 모습을 보며 회귀황자도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기로 했다.
“항해사라고 했으니 부탁하고 싶은데.”
“작은 배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런데 배가 있어야 항해를 하지 않겠어요?”
“하나 사죠.”
“아, 파시오누스 씨는 부자였죠.”
글로시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접대비 명목으로 받은 돈을 좀 해 먹어도 괜찮겠냐고 물었고 시온은 손목 간수할 자신 있다면 알아서 하라고 대꾸했다.
“그-럼 대충 해결되었군요.”
구레나룻 사내가 턱을 긁적였다.
“목적지나 구체적으로 듣지요. 서쪽 어디로 가십니까? 역시 마에쉬겠죠? 아니면 조금 더 가시려나?”
“서방까지 같이 가 달라고 할 생각은 없어요. 호벨 만 넘어갈 때까지만 부탁하죠.”
“반가운 소리를! 호벨 만 내라면 어디든지 쉽습니다. 호벨 만 바깥도 어느 정도는 수월합니다!”
글로시오스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사실 서방까지의 항해는 별로 자신이 없었다. 작은 배에 혼자 항해사 노릇해서 넘을 만큼 호락호락한 해로가 아니었다.
하지만 호벨 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아주 쉬운 항해다. 11군단에 있을 무렵 지겹도록 쏘다녀 지금도 머릿속에 이 계절에는 어디서 어떤 바람이 부는지 저절로 그려졌다.
“말씀만 하세요, 말씀만! 어디라도 모셔다드릴 테니!”
“정말로 어디라도?”
“그럼요. 아레테 섬이라도 가자는 게 아니면!”
“으흠.”
시온이 콧소리를 내었다. 묘한 어조에 글로시오스가 천천히 눈을 돌렸다. 시온 폴링라이트는 마치 소녀처럼 배시시 웃었다. 그것이 못내 불안했다.
“…그 얼굴 뭐죠, 파시오누스 씨?”
“으흐흠.”
“…진심으로?”
회귀황자는 웃기만 했다. 햇살이 따사롭다. 매끄러운 피부가 희게 빛나고 시온 폴링라이트 천진하게 곱다. 구레나룻 사내의 마음에서 불안이 데굴데굴 구르며 커 갔다.
“…아레테를 가자구요? 그 재앙 내린 섬에!?”
“으-흐흐흐흐흠-!”
글로시오스가 홱 달려 나갔다.
“혀, 형님! 키프코스 형님! 저도 그냥 같이 한챠무스……!”
“호벨 만 사내답게 구세요, 글로시오스 씨.”
보이지 않는 손이 구레나룻 사내를 움켜쥐었다. 사내는 발을 놀리지만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글로시오스의 얼굴이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울상이 되었다.
“우리, 아레테로 가는 겁니다.”
* * *
“아레테라니, 아레테라니……!”
글로시오스는 줄곧 한탄이었다. 시온에게 직접 항의할 용기는 없지만 하지 않을 수도 없어 한 걸음 뗄 때마다 세 마디 불평을 중얼거렸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그러셨지, 말 안 들으면 아레테에 버리고 올 거라고. 그때 말 안 들은 벌을 받는 거야…….”
시온은 못 들은 척했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푸념이 퍽 흥미로웠다.
“그래도 그렇게 말 안 듣지는 않았는데. 먹지 말라던 술 조금, 하지 말라던 노름 조금, 해 먹는 것도 딱 티 안 날 정도로만 했는걸…….”
“배신도 있잖아요.”
“그건 합의된 거라 괜찮아요!”
나도 여기까지인가? 글로시오스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하기까지 했다. 시온은 못 볼 걸 보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만 겁내요, 호벨 만 사내답지 못하게.”
“호벨 만 사내라서 겁내는 겁니다!”
불만이 터져 나왔다.
“호벨 만 사람은 누구든 아레테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다고요!”
으! 글로시오스가 진절머리 쳤다. 질리도록 들어 왔던 이야기가 있다. 파렴치한 아르에티온과 그들에게 내린 재앙. 한순간에 사라진 수십만의 사람, 이후로 모든 접근을 맹렬히 거부하게 된 섬!
단순한 침대맡 이야기가 아니었다. 46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게 가장 섬뜩한 점이었다. 호벨 만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롭던 섬이 하루아침에 괴물이 들끓는 곳으로 변하다니!
“없던 암초가 솟아나고, 폭풍이 끊기는 날이 없고, 섬에는 정체 모를 것들이 나돌아 다닌다는데 누가 겁을 안 먹겠습니까? 심지어는 46년 전의, 으. 그게 아직도 있고 그저 잠잘 뿐이라는데……!”
“니코는 겁먹지 않겠죠.”
“…아, 군단장님이라면 그러겠죠.”
구레나룻 사내는 할 말을 잃었다. 비교 대상으로 호벨 만의 고래를 들먹이면 조금 치사하게 느껴질 수밖에. 대제에게 주먹질도 해 본 인간인데. 시온이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소문 같은 곳은 아니니까.”
“…가 보셨어요, 파시오누스 씨?”
“가 봤으니까 이렇게 말하겠죠?”
“…농담도, 참.”
“진담인데.”
사내가 시온을 흘끔거렸다. 46년 전의 일 이후로 누가 아레테에 가 보았겠는가. 그 재앙 내린 섬에. 헌데 시온이 말하니 어째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니코 네레이아데스와 싸워 쫓아내는 모습까지 보지 않았는가.
“솔직히 말하세요. 생긴 것만 어린애지 저보다 나이 많지요, 파시오누스 씨?”
“파시오누스는 열한살이야요.”
“…….”
대뜸 튀어나온 애교질에 글로시오스의 인상이 한껏 찌푸려졌다. 기분이 나쁘다 못해 열이 받았으나 꾸욱 참았다.
“…어쨌든, 소문보다 낫다는 거죠?”
“아뇨. 소문보다 스무 배는 위험해요.”
“키프코스 형니이임!!”
“배나 보러 갑시다.”
* * *
선박은 사고 싶다고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여기가 메케로스가 아니라면 분명히 그렇다. 시온이 혀를 내둘렀다. 조금 걷다 보니 해안가를 따라 온갖 선박들이 절찬리에 판매 중이었다.
“아, 항해는 오랜만인데, 그냥 저 말고 실력 있는 항해사를 고용하시는 게…….”
“그만 투덜대고 배나 알아봐요. 우리 둘이 아레테까지 갈 수 있을, 튼튼한 것으로.”
“예, 그래야지요.”
구레나룻 사내가 입을 비죽 내민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아주 성의 없이 돌아보다 아주 성의 없이 시온을 불렀다. 그는 자기를 선박이라고 주장하는 낡은 판자 묶음을 손가락질했다.
“이 배는 어떻습니까? 아주 좋지요?”
“정말 좋네요. 중간에 침몰하기 딱 좋아 보여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도저히 아레테까지는 갈 수 없어 보이는 점이 참 마음에 듭니다.”
아레테? 선박을 팔던 노인이 그들에게 눈총을 보냈다. 대낮부터 불길한 미친 소리를 한다는 듯한 투였다. 노인의 시선이 신경 쓰인 시온이 글로시오스에게 속삭였다.
“참. 말 안 했던가요?”
“뭐를요?”
“섬에는 저 혼자 들어갈 거예요. 아마 거기서 헤어지게 되겠죠.”
“예에?”
글로시오스가 되물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럼 배는 어떡하시려고요?”
“버릴 수도 없으니 열심히 항해해 준 누군가에게 주려고 했는데…….”
“그걸, 먼저, 말씀하셨어야죠!”
그는 금세 활기를 되찾아 펄쩍 뛰었다. 그러더니 잠깐만 기다리라며 선박 시장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구레나룻이 건강한 땀으로 젖어 들었다.
글로시오스가 시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보세요, 찾았습니다! 빨리도 찾았군. 구레나룻 사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 배는 어떠십니까! 딱이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120인승 유람선은 심하잖아요.”
그래도 의욕이 생겼으니 됐나.
“제대로 찾아봐요. 튼튼한 녀석으로. 열흘은 항해해야 할 테니까.”
* * *
시온과 글로시오스는 배를 타고 메케로스를 떠났다. 마침 석양 지는 참이었다.
“바닷바람 한 번 좋군.”
자기 이익이 걸리니 글로시오스는 호벨 만의 누구보다 믿음직한 사내가 되었다. 그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시온의 요구에 꼭 부합하는 배를 찾아왔다.
“그보다 궁금하네요. 무슨 수를 썼길래 금화 스물세 닢으로 이런 배를 구해 왔어요?”
끝내주지는 않아도 아주 실속 있는 선박이었다. 크기는 작아도 튼튼했고, 제국마도원의 승인을 받은 항해 보조 장치가 있어 글로시오스 혼자서도 몰기에 무리가 없었다. 소수 인원이 먼바다까지 나가기에 딱 적합했다.
“원래 가격이 금화 오십은 되었을 텐데.”
“칠십 닢이었습니다.”
“누굴 속이려고. 처음에 정확히 마흔아홉 닢 부르던데?”
“…보고 계셨습니까?”
시온이 품에서, 정확히는 발지아트의 안에서 금화 꾸러미를 꺼냈다. 실레몰에 머무르며 보석을 돈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었다.
“자. 구매 비용 스물세 닢. 그리고 탁월한 흥정에 대한 보상으로 열 닢 더.”
“파시오누스 씨는 정말 좋은 고객이세요.”
“배나 모시죠.”
예이. 글로시오스는 콧노래를 부르며 조타실로 향했다.
‘황실에서 훔쳐 온 보석도 이제 많이 남지 않았군.’
별 상관은 없었다. 돈이야 벌면 되는 일이다. 서방에 무사히 도착하기만 하면 되었다. 황금약 한 병을 또 입에 털어 넣었다. 별 부작용 없다는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쉬자. 최대한 체력을 회복해 놓아야 해.’
라후칼라의 여파나 아물지 않은 상처 따위를 돌이키려면 잘 먹고 잘 쉬어야 한다. 안 그래도 메케로스에서 달콤한 보존식을 잔뜩 사 왔다. 시온이 해먹에 몸을 던졌다. 눈꺼풀이 쉽게도 감겼다.
‘아레테에서, 마무리 짓게 될 테니…….’
78화
“메케로스에 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이전에 두어 번.”
“좋은 도시지요, 아메투스 씨?”
“…영 어색하군요.”
정중한 물음에 정중히 대답. 그것이 못내 어색해서 옥색 눈 사내는 눈꼬리를 긁었다.
“옛날처럼 하셔도 됩니다만, 선배.”
“손님에 대한 예의지요, 후배님.”
제11군단 수석참모 부케노스가 빙그레 웃었다. 아메투스는 어색함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법학부의 망나니가 예의를 이야기하니 견디기가 힘듭니까?”
“제 기억 속의 선배는 예의 바른 사내였습니다.”
옥색 눈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부케노스의 학교생활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부당함에 맞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내였다. 실제로도 많은 변화를 이루어 내었다.
“늘 손도끼를 들고 다녔을 뿐.”
“아직도 들고 다닌답니다.”
“…….”
부케노스가 품을 열어 슬쩍 손도끼를 보여 주었다. 그가 누군가를 설득할 때 애용하던, 학창시절 자주 보던 그 도끼였다. 못 보던 사이 손잡이가 많이 반질반질해졌다. 학창 시절 이후로도 누군가를 설득할 일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참, 뒤를 캔 건 미안합니다. 호레이모스 선생을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후배님.”
“괜찮습니다.”
두 사내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작게 웃었다. 오래 보지 못했는데도 이상하게 이전과 다름이 없다. 그들은 비슷한 시기에 제도 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며 같은 기숙사에서 몇 년을 함께 지냈다. 이제는 황제가 될 날만을 기다리는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또한 있었던 그곳이다.
“페르비아스 전하께서는 잘 지내십니까.”
“저도 몇 달은 못 뵈었습니다. 한창 바쁘시겠지요.”
아메투스가 옥색 눈으로 멀리 보았다. 페르비아스 카셉투스, 그의 가장 절친한 벗이자 섬기는 주인. 어서 지오니스의 목을 가지고 돌아가야 했다.
“전하께서는 종종 부케노스 선배 이야기를 하십니다.”
“설마요. 제게 별 관심이 없으셨는데.”
“선배에게 카드놀이로 탈탈 털렸던 걸 도저히 잊지 못하시더군요.”
“…혹시, 속임수 썼던 것도 아십니까?”
“물어보시기에 솔직히 고했지요.”
“맙소사, 황궁 근처에는 평생 가지 말아야겠군.”
부케노스가 킬킬 웃었다. 어른이 되어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헌데 옛적에 사라진 줄로 알았던 자신이, 법학부 손도끼가 계속 고개를 들었다. 아메투스도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나왔다.
어머, 낯설어라. 샤디 섄도르는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자니 자기가 알던 아메투스와는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늘 무뚝뚝하기만 하던 사내도 학창 시절 선배와 있으니 쾌활함이 묻어났다.
“숙소는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 서방의 특사들이 머물기도 하는 곳이니 불편하지 않을 겁니다.”
부케노스는 설명했다. 객실 하나에 방 여럿이 있어 셋이 쓰기에도 충분할 거라고. 노숙에 익숙한 세 명의 치안기사는 고마움을 듬뿍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메케로스에서 업무를 보니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십시오, 후배님.”
“말했던 그것만 부탁드리지요.”
“오늘 내로 숙소로 보내겠습니다.”
제11군단 수석참모가 손을 내밀었다. 아메투스는 그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아메투스 씨와 일행분들.”
떠나가는 선배의 뒤를 향해 아메투스가 손을 흔들었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다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온 까닭이다. 부케노스가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운테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아메투스 대장?”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 아메투스의 부관이었던 샤디 섄도르의 부관이다.
“방금, 제11군단 수석참모 맞지요? 대장과 선후배 사이인 건 알았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사근하게 굴어 옵니까?”
“호벨 만의 고래의 협력을 얻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해내셨냐는 말이죠!”
역시 아메투스 대장, 평생 존경하게 해 주십시오! 운테스는 소녀처럼 꺅꺅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메투스는 아직도 운테스가 어떻게 특무대장의 부관 자리에 있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정보를 다루는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허나 실력이 있는 건 사실인지라 가볍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목소리 좀 낮추렴, 운테스.”
짜증을 내는 쪽은 아직도 눈이 멀어 있는 곱슬머리 여인, 특무대장 샤디 섄도르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귀가 예민하다. 부관의 목소리가 상당히 거슬렸다.
“울린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셋이 다니니 옛 생각이 나서 들뜨고 마는군요.”
나무람에도 운테스는 주눅 들지 않았다. 샤디도 결국 웃고 말았다. 아메투스가 특무대장으로 있던 때를 떠올리니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
“대장.”
샤디 섄도르는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군단 측에서 뭘 가져다주기로 했나요?”
“입출국자 명단. 밀수까지 포함해서.”
“…밀수자의 명단이 있어요?”
“있다더군.”
니코 네레이아데스는 지독하고 대단한 자였다. 지독하게 대단하기도, 대단하게 지독하기도 했다. 메케로스의 큼지막한 밀수꾼치고 그의 손바닥 위에 없는 자가 없었다. 그러니 밀수자 명단이라는 모순적인 물건이 튀어나오는 것이겠지.
“혹시 몰라 선박 거래 기록이나 노예 수송 대장 따위도 요구했지. 이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거다.”
“…저기 말입니다, 아메투스 대장…….”
운테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굴 쫓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까?”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
샤디가 날카롭게 외쳤다.
“특무대답지 못한 질문이야.”
“…예, 맞습니다.”
“가장 먼저 배우지 않았어? 알려 준 것 이상은 생각하지도 말라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만.”
운테스는 고개를 숙였다. 아메투스는 미안함을 느꼈다. 엄밀히 따지면 특무대의 정규 임무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운테스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붙잡으면 알게 될 거다, 운테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았지.”
“…….”
뜸 들임.
“만약에…….”
운테스는 조심스레 묻는다.
“…찾던 자가 이미 서방으로 넘어간 뒤라면 어찌하시렵니까?”
“넘어가야지.”
당연하게 말했다. 대륙 끝까지라도 찾아가서 목을 베어야지, 라는 말은 삼켰다. 대신 옥색 눈이 이글거렸다.
“그것이 전하를 위한 길이니.”
* * *
저녁 식사를 마칠 때쯤에 제11군단 소속의 백인대장 하나가 그들을 찾아왔다. 두툼하다 못해 마법으로 봉인된 종이봉투 하나를 조심스럽게 건네주고 돌아갔다. 아메투스가 요구했던 서류들이었다.
“도움이 필요할까요, 대장?”
“필요하면 부르지.”
“알았어요.”
샤디는 망설임 없이 의자에 몸을 뉘였다. 아메투스라는 사내를 안다. 필요 없다고 말하면 정말로 필요 없는 것이다. 집중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있는 게 최선의 도움이었다. 어차피 눈도 멀어서 서류 작업에 도움이 될 턱도 없었고.
“어, 검이나 손질하려는데 옆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운테스 또한 물었다. 자기 침실에서 해도 되는 일이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메투스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는 벌써 낡은 줄안경을 꺼내 쓴 뒤다.
“마음대로 해라.”
“대장 검도 손질해 드릴까요.”
“내 것은 아침에 했어.”
“부지런도 하셔라.”
그럼 샤디 대장이나 해 드리죠. 샤디 섄도르가 품에서 작은 단검을 꺼내 건넸다. 열다섯 개나 나왔다. 어디에 숨겼기에 이렇게 줄줄이 나오는지. 손질할 맛 나는군. 운테스가 손바닥을 비비며 기름천을 들었다.
‘…….’
아메투스는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글자 무리 앞의 옥색 눈이 금세 깊다. 이를 느낀 둘은 덩달아 숨을 죽였다. 혹시나 방해될까 싶어서였다.
‘니코 네레이아데스,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군…….’
사람 모이면 그림자 없을 수 없다. 그리고 니코는 그림자를 다루는 데에 이골이 난 것처럼 보였다. 서류를 읽으니 확신이 더했다. 실레몰과 메케로스는 일부러 내어 놓은 숨구멍이었다. 법의 틀을 답답해하는 치들이 모여들도록 떡밥을 뿌려 놓은 그물과 같았다.
노련한 어부는 그물을 걷기 전부터 물고기의 움직임을 안다. 니코가 딱 그랬다. 실레몰이나 메케로스에는 얼핏 불법과 방종이 판치는 듯하다. 그러나 모두 늙은 어부의 그물 속. 물고기들은 제 지느러미질 하나하나 관찰당하고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한다.
밀수자 명단이라는 말도 웃기다. 몰래 들락날락하는 이들을 어떻게 세겠단 말인가? 그런데 제11군단은 세고 있다. 놀라울 만큼의 정확도로 꿰뚫어 기록했다. 아메투스에게는 아주 편리한 일이었다.
‘실레몰에서 메케로스로 온 배가 있군.’
키프코스라는 자의 선박이라고 했다. 그는 제11군단 백인대장이었다고도 쓰여 있었다. 출신이 출신이라 정보가 자세한가. 아메투스는 키프코스의 배에 대해 주목했다.
‘배가 반파되어 왔는데, 이유는 제11군단장과의 충돌… 제11군단장과의 충돌!?’
옥색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호벨 만의 고래와 부딪혔다니,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반파에서 끝날 수 있었던가? 놀라서 글씨를 들여다보자니 보이는 게 있다.
‘이 부분만 필적이 다른데. 원래 없던 항목을 급히 써 놓은 듯한…….’
그리고 눈에 익은 필체였다. 글씨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썼는데 문장 끄트머리만 갑자기 위로 휘듯 한다. 학창 시절에 종종 보았던 부케노스의 글씨와 흡사했다.
‘…그래, 마치 내게 읽으라고 들이미는 듯하군. 고맙게도…….’
노골적으로 끼워 넣은 정보다. 아메투스를 돕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사라지지 않은 당혹이 고개 들었다. 제11군단은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도움을 주나.
아르에티온이라는 이름에 무엇이 있기에. 의문이 솟았으나 꾹 눌러 삼켰다.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남았다. 제5황자 지오니스의 행적을 쫓는 게 더욱 우선이었다.
‘키프코스 패거리, 새로운 배를 사서 남쪽으로 떠났다.’
한챠무스 제도로 갔다고.
‘그런데 두 명이 갈라져 나왔어.’
모두 적혀 있었다. 하나는 구레나룻, 하나는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소년. 소년 쪽은 미행을 눈치챈 것처럼 보임. 정보가 유난히도 자세했다. 하긴, 11군단장과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이들이라면 특별 관리 대상이 되고도 남으리라.
‘엿새 전에 서쪽으로 출항했는데, 추정 목적지… 는…….’
스산하게 빛나던 옥색 눈이 뒤집히듯 가라앉았다. 아메투스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
검을 손질하던 운테스가 몸을 떨었다. 한기를 느낀 탓이다. 샤디 섄도르가 입을 열었다.
“아메투스 대장, 찾았나요?”
“…그래.”
“좋은 일인데 왜 그렇게 살벌한 기운을 뿜고 있어요?”
“…읽어 봐라.”
옥색 눈 사내는 말 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정확히 추정 목적지에 대한 부분뿐이었다. 샤디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장님 된 사람한테 읽어 보라니, 너무한걸요. 운테스, 네가 읽어 보렴.”
“예.”
운테스가 손질하던 검을 내려놓았다.
“엿새 전에 출항한 배가 있는데, 향하는 방향을 보면 목적지… 는……?”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이 눈을 비볐다.
“어, 어…….”
잘못 보았나 싶었으나 그러지는 않았다.
“…아레테 섬.”
맙소사, 하는 샤디의 탄식. 아레테, 재앙 내린 섬. 제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옛이야기 속의 그곳. 샤디 섄도르는 복잡한 심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후우.”
아메투스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르에티온이다. 한때 아레테 섬의 주인이었으나 비참하게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후예다. 찌푸려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고 목구멍은 무언가 들어찬 것처럼 꽉 조여 왔다.
“어쩔 수 없지.”
“…갈 거예요, 아메투스 대장?”
“당연하다. 일어나라.”
환상이 보이는 듯했다. 금발에 푸른 눈, 곱게 생긴 황자가 조소하는 것처럼만 느껴졌다. 마치 5황자 지오니스가 모든 걸 알고 이리 오라고 손짓하는 것만 같았다.
“곧바로 아레테로 출발해야 하니.”
79화
바다 위에만 며칠이나 있자니 온몸이 소금에 절인 듯했다. 이제는 짠 내조차 잘 나지 않는 걸 보니 코까지 절임 당한 게 틀림없었다. 시온은 아랑곳않고 해먹에서 몸을 일으켰다.
‘돈 많으면 뱃놀이하는 이유가 있다니까.’
항해가 일주일이 넘어갔다. 쉴 새 없이 흔들리는 바닥도,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에도 이미 적응한 뒤였다. 그는 선실로 자리를 옮긴 뒤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뜸이 잘 들었나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병을 기울여 손등에 한 방울 올렸다. 살짝 핥아 보자 혀를 쥐어짜듯 불쾌한 자극이 미뢰를 때렸다. 뒤잇듯 약간의 청량감. 잠시 머물다 사라졌을 뿐이지만. 시온이 미소 지었다.
‘이번 라후칼라는 특히 잘 만들어졌네.’
호렘 암리타를 원료로 하는 제국군용 강화 약물, 라후칼라. 아주 불쾌한 미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물건이지만 상등품은 약간의 청량감을 품고 있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병을 품에 넣었다. 이 병의 라후칼라는 니코와의 싸움에서 사용한 것과는 비할 수 없는 효능을 보일 터다. 부작용도 조금은 덜할 테고.
라후칼라의 제조법을 알게 된 것은 당연하게도 회귀 전이다. 전쟁 중에 제조법이 유출되었고 아주 유용하게도 써먹었다. 그 유용함은 회귀한 지금까지도 이어졌다.
‘몸 상태가 좋다.’
바람이 상쾌했다. 다소 낯설기까지 한 여유가 머물렀다. 상처도 후유증도 없다. 항해하는 동안 잘 먹고 푹 쉬었으며, 무엇보다 황금약을 물처럼 콸콸 마셔 댔다. 이 마법 같은 약(실제로 마법약이기는 하지만)을 개발한 호렘에게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회귀 이후 어느 때보다도 좋아.’
푸른 눈동자는 고요하다. 무언가를 고대하는 잠잠함이다. 많은 준비를 했다. 계획을 세워 이끌어 왔다.
무엇을 준비했나.
비보 중의 비보, 마갑 발지아트.
셉템 아르카나, 세 가지 기예.
제국의 비밀약물, 라후칼라.
그리고 아레테 섬.
비밀쟁이는 웃고 말았다. 언제나 웃기야 했지만 이렇게 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이 즐거움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져서 걸음을 옮겼다. 조타실에는 구레나룻 사내가 있다.
“글로시오스 씨, 호박파이 먹을래요?”
“…다른 거 없나요?”
배의 항해사 겸 조타원 겸 사무장 겸 기관장 겸 조리장 겸 선장 겸 선주(예정)인 구레나룻 사내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시온이 사 온 식량이란 게 온통 단 음식 천지였던지라 호박파이에는 전혀 손이 가지 않았다.
싫으면 말아요. 시온이 호박파이를 낼름 해치워 버렸다. 눅눅했지만 상관없었다. 당분으로 충분했다. 조타실 전면부는 유리로 되어 바깥이 환하게 보였다. 해안선 근처에 굴곡이 보였다.
“저건가요?”
“예, 저겁니다.”
글로시오스가 답했다.
“슬슬 언덕처럼 보이지요? 언제 보아도 신기합니다, 저건.”
“종종 보았죠?”
“호벨 만에서 배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기 마련이죠.”
굴곡은 조금씩 커진다. 언덕이었다. 망망한 대해 한복판에 언덕이 있었다. 푸르게 너울 치는 듯하기도, 갈래져 이글거리는 듯도 보였다. 신비하다 못해 기묘했다.
“보면 당장 피해 가기만 했는데 제 발로 가까이 가게 될 줄이야.”
바다에서 언덕이 보인다면 재앙 내린 섬 아레테가 가깝다는 뜻이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했고. 시온 폴링라이트는 저 굴곡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폭풍의 언덕.”
* * *
광명의 호흡이 말했어요.
“아르에티온, 아르에티온.”
그는 화가 아주 많이 나 보였답니다.
“멍청하고 비열한 내 종들아, 너희가 먼저 내게 말한 것이 아니냐.”
눈에서는 불꽃이 활활 쏟아지고 입에서는 태양 천 개를 모은 듯한 열기가 뿜어졌어요.
“신이 아닌 나를 신으로 삼고 싶다고 하지 않았느냐.”
광명의 호흡은 개가 묶이는 것처럼 묶여 있었어요.
“기꺼이 목줄을 맨 너희의 신을 어찌 팔아넘겼느냐. 땅에 묶다 못해 창칼처럼 부리려 했느냐.”
아주 굵고 커다란 네 개의 사슬이 팔다리를 묶어 꼼짝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답니다.
“멍청한 아르에티온, 비열한 아르에티온.”
아르에티온 사람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벌벌 떨기만 했답니다. 자기들의 잘못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어요.
“내 호흡을 너희가 나누어 가졌듯 내 고통도 너희가 나누어 가지게 될 줄을 몰랐느냐.”
광명의 호흡은 슬펐습니다. 그는 자비로운 존재였어요. 신이 아니었지만 신을 원하는 인간들이 자기를 신이라 부르게 둘 만큼 착했답니다. 멍청한 아르에티온, 비열한 아르에티온, 그런 광명의 호흡을 배신하다니!
“내가 대가를 물을 수밖에 없음을 정녕 몰랐단 말이더냐.”
그는 아직 화가 났어요.
그런데 슬프기도 했어요.
양쪽 다 이글거려서 광명을 괴롭혔습니다.
“나를 괴롭게 한 너, 아레테 섬은 들어라. 네게 세 가지 멍에를 씌우겠다.”
파도가 치기 시작했답니다.
“첫째 멍에는 폭풍의 언덕이다.”
파도는 금세 거세졌어요. 빙글거리다 동그랗게 말려서 하늘까지 솟았답니다. 동그랗게 말린 파도는 수천 개였어요. 아레테 섬의 절반이 거기에 휘말려 구름까지 떠올랐습니다.
“바다에 언덕이 있으리라.”
소용돌이들은 영차영차 소리를 내며 아레테 섬을 둘러쌌어요. 모여든 모습은 꼭 언덕이었죠.
“소용돌이와 너울이 솟아 너를 감쌀 것이다. 모든 마중과 배웅을 없이할 것이다.”
* * *
아메투스는 잠에서 깨었다.
끔찍한 기분이었다.
‘…이딴 꿈을 꾸다니.’
불길함이 짙었다. 유난히도 날카로운 직감을 가진 그에게 꿈은 단순한 의식의 잔상이 아니었다. 털어 버리려 해도 도저히 사라지지 않는 게 그 증거였다.
불길함은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의 삶에 무언가 큰 궤적이 남을 거라고. 상흔일지 돌파일지는 몰라도 양쪽 다 그리 달갑지 않았다.
흔들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는 영 바다와 맞지 않았다. 같은 방을 쓰는 운테스는 검을 손질하다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꿈자리가 안 좋으셨나 봅니다, 아메투스 대장.”
“내가 잠꼬대라도 했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기세가 살벌했습니다. 갑자기 일어나서 검이라도 휘두르면 어쩌나 싶었죠.”
“민망하군.”
아메투스는 운테스 맞은편에 털썩 앉아서는 양날검을 빼 들었다. 그는 잠에서 깨면 늘 검을 손질했다. 익숙한 문구가 그를 반겼다.
[나, 미래의 황제 페르비아스 카셉투스가 절친한 벗이자 미래의 제국십장, 아메투스 아르에티온에게 수여하노라.]
옥색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차기 황제의 치기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이 문구는 늘 미소를 가져다주었다.
운테스는 양날 검의 문구를 읽고 싶어 흘끔거렸지만 아메투스는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검면을 틀었다. 운테스가 서운한 얼굴을 입술을 삐죽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그가 이 문구를 읽었음을 페르비아스가 안다면 당장 목을 자르려 할 터였다. 파면이나 해직의 은유가 아니라 참수斬首라는 의미로.
“줄곧 깨어 있었나, 운테스.”
“예.”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의 얼굴에는 피로가 짙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게 분명해 보였다.
“목적지가 목적지다 보니 아무래도 줄곧 어린 시절 동화 생각이 나더군요.”
“광명의 호흡과 기도하는 섬 이야기겠지.”
“맞습니다. 멍청한 아르에티온, 비열한 아르에티온으로 시작하는 그거요.”
“…그래.”
아메투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평생을 아르에티온으로 살았으나 선조들의 섬, 아레테는 처음이었다. 아니, 오히려 무의식적으로 멀리해 온 듯했다.
운테스는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장의 대장으로 모시는 옥색 눈 사내는 평소에도 갑자기 대화를 뚝 끊어 버리곤 했으니까. 덕분에 아메투스는 복잡함과 불길함을 아주 꼭꼭 씹을 수 있었다.
“정오쯤에는 폭풍의 언덕이 보일 거랍니다.”
“바깥에는 해가 떴나? 창문이 없어서.”
“막 떴습니다. 바람을 쐬고 돌아온 참이지요.”
“앞으로 대여섯 시간이란 말인데, 빠르긴 하군.”
“역시 군용이 좋다니까요. 치안청 예산도 개선될 필요성이 있어요.”
운테스가 투덜거렸다. 그는 특무대장 샤디 섄도르의 부관으로 자금에 대한 여러 관리 책임자였다. 때문에 제11군단의 예산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흘 걸렸나.”
“그것도 안 되죠.”
야밤에 급하게 일어나 나온 게 이틀하고 조금 더 전이다.
“아레테로 간 게 확실하겠죠?”
“그럴 거다.”
섬이 가까울수록 확신이 늘었다. 불길함이 짙다는 게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아메투스의 직감은 아레테를 가리켰고 모든 정황 또한 그러했다. 옥색 눈 사내의 직감은 정황보다 앞서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치하기까지 하면 확신밖에 할 게 없었다.
“참, 아메투스 대장, 마지막으로 물어보는데 저희 정말 누구를 쫓고 있는 겁니까?”
“기다려라.”
“예. 그러실 거 같았죠.”
운테스가 입술을 비죽거렸다. 답을 들을 거란 기대는 없었다. 그래도 막상 거절당하니 불쾌함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아메투스는 한마디 다독임이라도 건넬까 하다 그만두었다.
‘운테스도 이제는 특무대의 부관이니.’
그는 운테스 우비아 우테르베움의 불만을 그대로 두었다. 서투른 격려는 오히려 좋지 않을 거란 생각이었다. 아메투스라는 사내가 따스한 말과는 거리가 먼 탓도 있었다. 뱉지 않은 격려를 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샤디를 깨워야겠군.”
“제가 갈까요?”
“아니, 직접 하지.”
아메투스가 양날검을 칼집에 넣어 허리에 매었다. 손질이 벌써 끝나셨습니까? 운테스의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쓰지도 않았기에 애초에 손질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하루의 일과로 빼어 보았을 뿐이다.
샤디의 선실은 옆이었다. 여인이라고 제11군단 측에서 배려해 준 듯했다. 똑똑, 하고 두드리니 곧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운테스?”
“나다.”
“어머, 절 깨우러 오신 거예요? 이왕 오신 거 들어오시죠?”
“…아니, 기다리지.”
“그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못 보여 줄 모습은 아니니까.”
아메투스는 더 거절할 수 없었다. 샤디 섄도르가 아직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낯선 선실에서 나오려던 혼자 힘으로는 힘들 터다.
“잘 주무셨나요?”
“그럭저럭.”
샤디 섄도르는 침대에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가볍고 얇은 옷차림이었다. 안대를 벗어 빈 눈구멍이 보였다. 문은 닫아 줘요. 은은한 촛불 빛이 선실을 아늑한 주홍으로 채웠다. 살랑한 냄새가 났다. 아메투스는 약간 다급하게 대화 주제를 찾았다.
“정오에는 폭풍의 언덕이 보인다더군.”
“지금이 몇 시쯤이죠?”
“해가 막 떴다.”
“곧이네요. 준비해야겠어.”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 달라는 뜻이었다. 아메투스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주었다. 약간의 염려를 담아 가볍게 쥐었다. 자기 때문에 눈멀어 준 여인에게 우악스레 느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언덕 직전의 작은 섬에서 작은 배에 옮겨 탄다고 했죠?”
“그래. 11군단 사람들은 거기서 정박하고 있겠다 했다. 이걸로도 고마운 일이지.”
붙잡은 손목이 갸날프다. 아메투스는 느끼고 말아 버린 가련함과 부드러움 따위를 애써 모른 척했다.
“샤디 섄도르, 너도 11군단 사람들과 함께 기다려라.”
“어머, 눈이 먼 여인을 처음 보는 군인들 사이에 놓고 가시겠다고요?”
“…….”
그건 또 안될 말이었다.
“함께 가게 해 줘요. 섬까지 들어설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걱정이, 되는군.”
“대장의 걱정이 되는 건 나쁘지 않은 기분이네요.”
주홍 불빛 속에서 샤디가 배시시 웃었다.
“운테스를 조금 더 믿어 줘요, 아메투스 대장. 꽤 그럴듯해졌답니다. 절 지키고도 남을걸요.”
“…음, 그래야지.”
아메투스는 뛰어난 젊은이다. 때문에 자기 손 밖의 일을 신뢰하는 데 서툴렀다. 뛰어남이 지나친 자들은 으레 그러한 법이다. 샤디는 이를 알기에 말을 돌렸다.
“곧이지요?”
“맞아.”
제도 루틸리움에서, 소벨 산맥과 베리벨롬과 루베코 골짜기와 실레몰 지나 여기까지 왔다. 양날검 쥐고 옥색 눈 부라리며 왔다.
“곧이다.”
이유 모를 한숨.
“곧…….”
8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