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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A급 의뢰

* * *

“잘 들어. 절대로 부패룡의 영역에 발을 들여서는 안 돼.”

용병들은 현실적이고 차가웠다.

고결한 기사들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절보다는 효율을, 정의보다는 현금을 선호하니까.

그랬기에 용병 조합 건물에서 이토록 친절한 경고를 듣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뭐? 대뜸 그게 무슨 소리인데?”

“아직도 못 봤나? 부패룡. 죽은 용이 부활해 돌아다니는 언데드 말이야.”

“아하. 그 A급 의뢰서에 나와 있었던 마수 놈 말이지? 벽면 제일 위에 걸려 있는.”

용병 조합에는 하루에도 수십 장의 의뢰서가 날아든다.

개중에는 고양이 찾기나 양조장 잡일처럼 하찮은 일이 있는가 하면, 마수 사냥이나 마탑 인체 실험 참여 같은 살벌한 의뢰도 존재했다.

당연히 위험성이 클수록 보상도 지대했다.

개중에서도 A급에 속하는 ‘부패룡 퇴치’는 가장 고난도에 속하는 의뢰였다.

“저 의뢰서가 걸린 지 벌써 반년이나 지났던가? 아직도 아무도 해결한 용병이 없다면서?”

“맞아. 영주 놈이 서쪽 무역로를 못 쓰게 됐다고 요즘도 아득바득 이를 간다더군.”

“흥. 거, 독특한 용 녀석일세. 보통 부패룡이라면 전쟁터의 무덤에서나 가끔 출현하지 않나?”

“뭐, 우리도 이유야 알 수 없지. 강력한 우두머리급 생물들은 간혹 예상 밖의 패턴을 보이는 일도 있으니까.”

“하여간 갑자기 나한테 대뜸 그런 경고는 왜 하는 건가?”

“왜기는. 자네 같은 풋내기들이 뭣도 모르고 부패룡을 잡겠다고 달려들었다가 죽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그렇지.”

뜨끔한 용병은 괜히 입맛을 다셨다.

사실 내심 A급 의뢰에 유혹을 느끼기는 했다.

비록 저주받고 부패해 간다지만, 용은 용이었으니까.

설령 손상이 심각한 비늘과 뼈라도 분명 값어치는 후하게 나갈 터.

‘어디 그뿐인가.’

A급 의뢰 자체의 보상도 대단했다.

부패룡으로 인해 단단히 이골이 난 영주는 파격적인 보상을 내걸었다.

의뢰를 성공시킨 자에게 무려 ‘하늘 장화’를 선사하겠다고 포고했으니까.

‘눈으로 바라본 장소로 순간이동할 수 있는 유니크급 장비라지.’

그 장화의 이전 착용자는 무려 저 ‘밤하늘의 보름달’에도 다녀왔다고 한다.

듣기만 해도 용병들이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는 보상.

그랬기에 실제로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팀을 짜서 도전한 용병대들도 있었다.

그러나 다들 부패룡이 점령한 땅에 들어가 돌아오지도 못하고 망자가 되어버렸다.

“아쉽구만. 성공만 한다면 용병 일 따윈 접고 단단히 한몫 챙길 수 있을 텐데.”

“어쩔 수 없어. 큰 욕심을 내는 녀석들은 항상 오래가지도 못하고 목이 떨어지는 법이니까.”

하는 수 없이 용병들은 쳐다만 볼 뿐 A급 의뢰에 손을 대지 못했다.

가장 오래 걸려 있었으나, 그 누구도 완료하지 못한 의뢰서.

그런데 그때였다.

뚜벅뚜벅.

그런데 대뜸 누군가 걸어오더니 그 의뢰서를 부욱 뜯어가 버렸다.

“어어?”

얘기를 나누던 용병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벽면에 걸려 있는 의뢰서를 뜯어간다는 것은, 해당 의뢰를 수행하겠다는 의미니까.

“어이, 절대로 저 의뢰에는 손대면 안 된다면서? 왜 저 새끼는 안 말려?”

“아. 크라놀? 저 녀석만큼은 예외야.”

다른 용병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 새끼는 보통 또라이가 아니거든. 절대 건드려선 안 될 미친개라고.”

* * *

A급 의뢰서를 들고나온 크라놀 위자르는 빵을 씹고 있었다.

본격적인 의뢰 수행에 앞서 배부터 채워야 했으니까.

오래된 밀빵은 딱딱하고 아무 맛도 없었다.

‘더럽게 맛없군.’

좀 더 돈을 내면 훨씬 맛나고 부드러운 빵에 훈제 햄까지 추가해서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당장은 그런 데다가 쓸 자금이 없었다.

최근에 이것저것 지출이 꽤 컸으니까.

“후우.”

오래된 빵으로 대충 끼니를 해치웠다.

그러고 나니,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나 되었더라.

‘벌써 3개월이나 됐나.’

어느새 석 달이 넘었다.

웹소설, ‘EX급 마수사냥꾼’에 빙의한 지가.

애독자였던 그가 빙의한 인물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캐릭터였다.

‘크라놀 위자르.’

유일하게 규격 외의 특성, 『재앙 친화력』을 지닌 등장인물.

작중에서는 최후반 악역으로 등장하며, 그 힘 역시 전혀 무시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가히 이 소설의 최강의 잠재력을 지닌 캐릭터라고 볼 수 있으니까.’

원작, EX급 마수사냥꾼에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즐비해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손에 꼽히는 사기캐에 빙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에 당연히 기뻐했을까?

‘전혀 아니었지.’

물론 크라놀이 대단한 등장인물인 것은 맞았다.

작중에서 개화한 『재앙 친화력』은 최고의 특성 중 하나로 취급되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히든 특성이 각성하는 것이 작중 최후반부나 되어서란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소설 초반부에는 그야말로 최악의 캐릭터란 거지.’

히든 특성이 각성하기 전까지는 마땅한 재능 하나 없는 약골.

더군다나 현재로선 그 특성을 개방시킬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최악의 캐릭터라고 불리는 것은 가장 큰 단점이 있기 때문인데…….

“윽!”

사념에 빠져 있던 크라놀은 문득 두통을 느꼈다.

두 눈이 충혈되어 벌게지고 머리가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순간 의식을 잃을 것 같았지만, 힘겹게 정신을 일깨우며 얼른 배낭에서 약초를 꺼내서 씹었다.

엄청난 쓴맛의 그것을 씹어 넘기고 나서야 겨우 두통이 잦아들었다.

“후우.”

크라놀은 식은땀이 흐른 이마를 닦았다.

하지만 잦아들었다뿐이지, 항상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아, 이 개 같은 광증.’

이 세계에서 3개월을 살아가며 중세 판타지식 건물들이나 복장, 문화도 적응했다.

그러나 도무지 이 빌어먹을 광증만큼은 전혀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나마 원작 지식이 있어서 완화되는 약초를 구해 먹고 있었지만, 완치는 아니었다.

24시간 두통을 달고 사는 데다가, 심한 발작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 덕에 다크서클은 잔뜩 깊어지고 성정마저 잔뜩 예민해져 있었다.

‘시도 때도 없는 광증. 작중에서 크라놀이 결국 미쳐버리고 마는 이유지.’

지금에야 특수한 약초로 어느 정도 잠재워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광증이 심화하면 크라놀은 닥치는 대로 인간을 죽여댄다.

히든 특성까지 개화한 그는 끝내 국가 몇 개를 멸망시킬 정도로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니까.

소설 최후반부에서 크라놀이 최종장의 보스만큼이나 까다로운 악역으로 변모하는 이유였다.

‘그뿐만이 아니야.’

결국 광증에 먹혀버린 크라놀은 주인공 일행을 절반이나 죽여버린다.

그러다가 진노한 마수사냥꾼 주인공의 손으로 가까스로 최후를 맞는다.

여러모로 끝까지 작품 안팎으로 욕을 잔뜩 집어먹은 최악의 악역 캐릭터.

‘그런 배드엔딩만큼은 무조건 피해야지.’

생각만 해도 오싹해지는 최후였다.

당연히 크라놀은 원작과 같은 루트를 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본래 원작에서 크라놀은 수도원에 갇혀 있었던 정신질환자였다.

그러나 빙의한 그는 원작과 다르게 외딴 영지로 와서 용병으로 전직해 있었다.

‘여기에 점점 심해지는 내 광증을 완화할 열쇠가 있으니까.’

크라놀은 뜯어온 A급 의뢰서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가벼운 몽타주로 징그러운 생김새의 생물체가 그려져 있었다.

우둘투둘한 비늘과 썩어가는 살점으로 그려져 있는 용.

바로 부패룡이었다.

이 녀석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 영지까지 와서 수많은 고생을 치렀다.

“후우, 좋아.”

오직 부패룡 퇴치 의뢰를 해결하기 위해 그간 잡다한 의뢰를 해치우고, 자금을 소모했다.

바로 오늘이 그 모든 준비가 결실을 볼 순간.

마음을 다잡은 크라놀은 영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비르시 영지의 서쪽 영역.

여긴 곳곳에서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야말로 상한 늪지대의 숲.

기분 나쁜 진흙과 냄새나는 늪이 끝없이 보이는 수림이었다.

‘과거엔 이곳이 포도밭이었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네.’

크라놀은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끈지끈한 두통 탓에 쓴 약초를 계속 씹었다.

그런데도 온몸에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때 바로 뒤쪽에서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

그는 걸음을 멈췄다.

썩은 그루터기 나무 뒤에서 잿빛 비늘의 무언가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손상된 양 날개와 온몸을 뒤덮은 석회질 같은 가루.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의뢰 목표물이 등장했다.

‘어라?’

그러나 크라놀은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의뢰를 해결하려던 모든 용병을 참살했다는 부패룡.

그러나 그 무시무시한 악명의 생물체는 작아도 너무 작았다.

고작해야 소형견 수준의 크기랄까?

‘아냐, 외견만 보고 마음을 풀면 안 돼.’

방심할 수는 없었다.

상대는 반년간이나 수많은 용병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괴물이었으니까.

“캬아아악!”

부패룡이 낯선 침입자를 향해서 양 날개를 활짝 펼치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잿가루 같은 분자들이 크라놀을 향해 날아왔다.

온몸을 석화시키는 저주였다.

그러나 이것은 예상했던 패턴.

“흡.”

크라놀은 재빨리 숨을 멈추고 머리 위로 뭔가를 뿌렸다.

바로 폐허 교회에서 힘겹게 채취해 온 ‘순도 높은 성수’.

가진 돈으로 길잡이까지 구해가며 힘겹게 구한 히든 피스였다.

이걸 뿌리면 반 시간 이상 석화 같은 저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기껏 성수까지 뿌렸건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원래라면 부패룡의 저주를 퇴마하며, 성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와야 하는데?

‘저 새끼용. 그냥 울부짖는 것일 뿐이잖아?’

“캬아아악!”

예상과 다른 전개에 이어, 놈이 또다시 포효했다.

그래봤자 앙증맞은 규모의 울음이었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약간 의아한 크라놀이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어?”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포효하던 부패룡이, 갑자기 쓰러졌다.

순간 왜 저러나 싶어서 당황했는데, 눈으로 보니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녀석, 죽어가고 있군.’

이상한 일이었다.

부패룡을 퇴치하려고 일부러 신성한 물품들도 잔뜩 구매해 왔는데.

살짝 고개를 갸웃한 크라놀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니, 잠깐만.’

자세히 살펴보니 겉에 있는 잿빛 비늘은 진짜 비늘이 아니었다.

그저 오염된 지대에서 오래 있으니 더러운 가루들을 뒤집어썼을 뿐.

그뿐만이 아니라, 피부가 손상된 듯한 꼬리나 몸에 올라온 종기도 언데드의 그것과는 달랐다.

‘이 녀석, 부패룡이 아니잖아?’

부패룡은 되살아난 용의 사체.

언데드는 발성이나 포효 외엔, 거친 호흡이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녀석은 아직도 옅은 숨까지 씩씩대며 쉬고 있었다.

정확히는 부패룡이라고 사람들이 오해한 듯싶었다.

이 녀석은 그냥 끔찍하게 혹독한 병에 걸려서 죽고 있을 뿐이니까.

크라놀은 재빨리 원작 지식을 뒤졌다.

‘시체병이군. 거의 언데드처럼 변해서 죽고 마는 희귀 병이지.’

확실히 사람들도 언데드라고 오해할 만한 몰골이었다.

그제야 의문이 풀렸다.

왜 이 녀석이 한동안 아무런 장소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이곳에만 머물러 있었는지.

아마 온몸의 기력이 쇠해서 멀리 날지도 못하는 상태이리라.

‘원작에선 이 영지에 부패룡이 서식한다는 소문만 서술됐는데, 실상은 이랬을 줄이야.’

예상했던 것과는 전개가 달랐다.

크라놀은 부패룡에게서 나올 전리품이 필요했으니까.

그냥 이 작은 용을 죽게 놔두고 사체를 해체해 마탑에 가져다 팔까도 싶었다.

그 자체로도 꽤 값어치는 나올 테니까.

‘하지만.’

크라놀은 시체병에 걸린 작은 용을 내려다봤다.

이 어린 것은, 아파하고 있었다.

숨도 쌕쌕대고 눈도 제대로 못 뜨는 것이 정말 죽기 직전인 모습.

아마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다.

가만히 보던 그는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기분이다.”

시체병은 이 땅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로 인해 악화한다.

아마도 막강한 저주를 가진 흑마도사나 악마가 힘을 펼쳤을 터.

그렇다면 저 새끼용은 그저 심각한 질병에 걸린 환자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무고하다는 거지.’

아마 이곳에 들어온 용병들은 땅에서 흘러나온 마기에 의해 쓰러져 죽었을 터였다.

저 새끼용은 시체병에 걸려 예민한 터라 그냥 고통받으며 울고 있을 뿐이다.

용 특유의 울음소리를 듣거나 멀리서 흔적만 포착한 사람들에 의해 악명이 퍼졌을 거고.

즉, 저 마수는 사람들의 죽음과는 연관이 없다.

‘아프면 괜히 예민해져서 목소리와 행동도 거칠어지지. 그러고 싶지 않았을 텐데도.’

크라놀은 기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죽어가는 새끼용이 광증에 걸려 있는 자신과 겹쳐 보였다.

약간 고심하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손을 얹었다.

“캬아아악!”

눈을 홉뜬 새끼용이 으르렁대며 아직 다 나지도 않은 이빨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놈에게는 남은 기력이 별로 없었다.

이미 병환이 너무 깊어져 있었으니까.

“가만히 있어라. 널 살리려는 거니까.”

크라놀은 배낭에서 성수와 직접 구해 온 히든 피스 몇 개를 찾아냈다.

원래는 부패룡을 사냥하려고 가져온 물품들이었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그래서 본래와는 다른 용도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이것들의 활용 방법을 바꾸면 심각한 질병도 치유할 수도 있지. 내 광증만은 예외지만.’

크라놀은 성수를 쓰러진 용에게 조심스레 붓고, 십자가를 근처에 세웠다.

오각성 마법진을 일곱 개나 그린 후, 작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별이여. 어린 양이 이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천사에게 부디 자비를 베푸소서.”

그렇게 말하자마자 곧 마법진이 왼쪽에서부터 차례대로 하나씩 빛났다.

그러고는 쓰러져 있는 새끼용에게도 변화가 일어났다.

시체병이 치유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딱딱히 굳은 잿빛 가루가 벗겨지며 진짜 모습이 드러났으니까.

크라놀이 경악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어?”

잿빛 가루가 떨어져 나가자, 본래 비늘이 드러났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색상이었다.

찬란한 황금빛의 비늘.

“미친.”

절로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찬란한 황금빛 비늘의 용.

작중에서 그런 종족은 단 하나뿐이었다.

골드 엠페러 드래곤.

모든 용 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이 최강이라 불리는 희소종(稀少種).

그제야 크라놀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원작 최종 보스의 단 하나뿐이었던 핏줄.

훗날, 이 대륙의 재앙으로 군림할 마수를 살려버렸다.

2화 광증

* * *

EX급 마수사냥꾼.

당연히 제목답게 주인공은 마수사냥꾼이며, 작중에서도 다양한 마수가 등장한다.

개중에는 태산을 무너뜨리거나 바다도 단번에 갈라버릴 초대형 마수들도 적잖은데.

그중에서도 단연코 손에 꼽는 재해 중 하나는 1막 최종 보스인 ‘흑금룡’이었다.

‘현대에서 명줄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골드 엠페러 드래곤.’

물론 지금은 자신의 둥지에서 잠들어 있는 상태.

그러나 앞으로 고작 3년 뒤면 놈이 깨어나게 된다.

‘부패룡처럼 외견만 용인 언데드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 그야말로 진정한 용.’

고작해야 작중 1막의 최종 보스치고는 지나치게 두려운 위용이었다.

그러나 흑금룡의 재림은 고작 시작에 불과하다.

2막부터는 이곳 대륙 말고도, 바다 건너 지역의 강자들도 등장하니까.

아무튼 현재 시점인 1막에선 가장 막강한 마수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 흑금룡의 새끼가 있는 거지?’

원래 흑금룡에게는 단 한 마리의 새끼가 있었다.

그러나 작중 상황에선 예전에 사망한 것으로 나왔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런 영지에서 부패룡이란 오명을 쓰고 활동 중이었다니.

‘이유야 모르겠지만 뭐 이런 우연이…….’

그때였다.

“윽!”

크라놀은 늘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갑자기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점점 심해지는군. 이놈의 두통은.’

최근 들어서 광증 발작이 잦아졌다.

얼른 품에서 약초를 꺼내 씹으며 크라놀은 고뇌했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1막 최종 보스의 새끼를 어쩌다가 살려버렸다.

크라놀은 이제는 편안히 숨을 몰아쉬는 황금색 새끼용을 내려다봤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튀자.’

그는 이 소설, EX급 마수사냥꾼의 결말을 알고 있었다.

세계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고, 실제로 인류도 꽤 많이 죽는다.

그러나 크라놀은 어디에 숨고 어떻게 해야만 살아남을지를 알고 있었다.

‘인류를 구하는 거창한 목표야 주인공 몫이고. 난 내 일하기도 바빠.’

광증을 완치하고, 배드엔딩을 피하는 것.

지금은 오직 그것만이 크라놀의 목표였다.

그러니 최종 보스의 새끼와 연관되어서야 귀찮아질 것밖엔 없었다.

그의 목표와도 전혀 연관성이 없고, 실수로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쓸데없는 적이 생길 터.

“캬아아아?”

그때 가쁜 숨을 내쉬던 새끼용이 몸을 일으켰다.

자신도 깜짝 놀란 듯이 앙증맞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까지 지옥 같던 몸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으니까.

본래의 찬란한 황금빛을 되찾은 자기 몸을 살피고는 화들짝 아가리까지 벌렸다.

“크랴아아앙?!”

황금색 새끼용이 크고 영롱한 눈동자로 크라놀을 올려다봤다.

네가 날 치료해 준 거냐는 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크라놀은 무시하고 길을 돌아섰다.

‘어쨌든 이곳에 부패룡은 없었군. 서둘러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동안 해왔던 준비 작업이 죄다 헛수고로 돌아가 버렸다는 의미.

광증을 완치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계획을 짜야 했다.

그는 깨질 듯한 머리를 감싸 쥐고 다급히 도망가 버렸다.

“크랴아아아?”

그리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새끼용은 갸우뚱하며 바라보았다.

이윽고, 날개를 살짝 펼치더니 곧 온몸이 투명해졌다.

작은 생명체가 크라놀의 뒤를 몰래 쫓기 시작했다.

* * *

“크라놀 녀석이 A급 의뢰서를 뜯어갔다고?”

“그냥 뜯기만 한 거 아니야? 종종 있잖아. 정보를 살핀다면서, 정작 의뢰 수행은 없는 놈들.”

“아니야, 진짜라고. 그놈이 부패 중인 서쪽 숲으로 향하는 걸 봤다는 얘기가 들어왔으니까.”

비르시 영지의 외곽 어귀.

벽에 기대고 팔짱 낀 용병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곳에서 최근 유명해진 어느 괴물 신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를 부른 이유가 겨우 그거라고?”

“맞아. 크라놀 놈이 뒈지러 간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인데?”

둘이 의문을 표하자, 나머지 한 사내가 혀를 찼다.

“이 멍청한 놈들. 너흰 아직도 미친개 크라놀을 모르냐?”

일명, 미친개 크라놀.

용병들 사이에서 불리는 놈의 별명이었다.

어느 순간 이곳 영지로 들어선 무시무시한 신참 녀석.

‘약해 보이는 초보자 놈이라고 방심했다가 다들 된통 깨졌지.’

크라놀은 분명 단련된 근육조차 없이 허약해 보이는 약골이었다.

그러나 놈은 신기할 정도로 의뢰 달성률이 완벽했다.

뜯어간 의뢰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100%로 달성해 버렸으니까.

‘특히 ‘영주 부인 목걸이 찾기’ 의뢰 때는 모두가 놀랐지. 도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혼자서 마수 둥지에 걸어 들어가서 버려진 목걸이를 되찾아왔으니까. ‘버려진 교회 탐사’나 ‘꼬리 다섯 개인 늑대 내쫓기’ 때도 그랬고.’

전부 하나같이 단서가 부족하거나, 성공할 길이 보이지 않아 미궁 속에 빠졌던 의뢰들.

그러나 크라놀의 손만 거치면 척척 의뢰가 깔끔하게 달성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심지어 때로는 이놈이 정말 약골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모하게 행동하며 의뢰를 성공시켰다.

그래서 그 괴물 신인에게 붙은 별명이 ‘미친개’였다.

이러니 당연히 주위 용병들한테서 질투를 살 수밖에 없었다.

자기들보다 힘도 약하고, 경력도 짧은 신참 놈이 잘나가는 상황이었으니까.

개중에서도 이들은 크라놀에게 열등감을 품은 용병들이었다.

“분명 크라놀 자식은 이번 의뢰 수행을 위해 그간의 보상품들을 챙겨갔을 거야. 지난 의뢰에서 얻은 보상만 해도 전부 신성 관련 물품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우린 녀석의 흔적을 따라가서 시체로부터 그 비싼 것들만 회수하면 돼. 부패룡과는 마주칠 일 없이 이득만 털자는 거야.”

“호오라.”

“손대지 말고 코를 풀자?”

그제야 이해한 두 용병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버려진 교회의 ‘순도 높은 성수’나 ‘순은 십자가’, ‘천사의 눈물이 묻은 작대기’ 등등.

크라놀이 의뢰 달성으로 모았다고 추측되는 진귀한 보상품들만 해도 그 양이 상당했다.

아마도 이번 부패룡 처치 의뢰를 위해서 모아둔 것일 터.

그러니 크라놀의 뒤통수를 쳐서 털어도 꽤 한몫을 챙길 수 있을 것이었다.

“어? 야! 저기 봐!”

그때 대화를 나누던 용병 중 하나가 저편을 가리켰다.

저기서 영지 입구로부터 걸어오는 사내가 있었다.

크라놀 위자르.

그런데 뜻밖에도 안색이 창백하고 걸음걸이도 위태로워 보였다.

“허. 뭐야, 저 녀석이 살아서 돌아왔네?”

“그런데 별로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는데? 설마 부패룡한테 당했나?”

“이거 우습군! 천하의 미친개 크라놀도 이번 의뢰만큼은 달성할 수 없었나 보지?”

반면 크라놀은 비웃고 떠드는 용병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그럴 겨를조차 없었으니까.

다크서클은 한층 깊어지고, 허옇게 질린 얼굴에선 코피가 줄줄 흘렀다.

‘아, 망할.’

크라놀은 걸으면서도 쓰러질 것 같은 두통을 느꼈다.

원래 지금까지 광증 증상에 출혈까지는 없었는데.

예상보다 병세가 빠르게 심각해지고 있었다.

‘약초. 약초도 이젠 거의 없는데.’

입에서 쓴 내가 날 정도로 씹었던 약초도 이제는 바닥을 드러냈다.

어떻게든 지금 위기의 해결 방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부패룡. 어떻게든 부패룡을 잡아야 해.’

원작 지식을 미친 듯이 뒤지며 걷다가.

갑자기 크라놀이 멈춰 섰다.

“얘들아.”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말했다.

동시에 뒤를 치려고 접근하던 용병들이 움찔했다.

“너희는 전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제정신 아니다.”

크라놀의 낮은 어조는 피로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꺼져. 좋은 말로 해줄 때.”

그러나 세 용병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도리어 무기를 꺼내 들고 크라놀을 겨눴다.

“이 병신 새끼가 다 뒈져가는 몰골로 뭐라는 거야?”

“어차피 여기서 네놈이 뒈지더라도 서쪽 땅에 가서 던져놓고 오면 그만이야.”

“맞아. 이대로 네가 실종돼도 다들 부패룡한테 당했다고 여길 테니까.”

계획을 발설한다는 것은 간단한 의미였다.

이걸 듣는 네놈은 반드시 죽게 될 거라는 것.

살벌하게 칼을 꺼내든 용병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크라놀은 제자리에 서서 발도 떼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하나 휘저었다.

“어?”

한 번에 두 가지 일이 벌어졌다.

가장 가까이 있는 칼이 퍼석 부러졌다.

가장 가까이 있는 용병의 팔 한 짝이 터졌다.

“어! 어어?!”

“내, 내 팔! 내 팔!”

“씨발, 뭐야! 이 새끼 약골 아니었어?”

약골은 맞다.

다만 지금은 마법적 힘이 강화됐을 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크라놀이 앓고 있는 광증의 증상이었다.

‘광증이 심해질수록, 마법적 위력이 세지니까.’

크라놀 위자르는 광증이 격해지면 파괴적인 마법의 힘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두통이 격해지고, 몸에 오는 고통도 심해진다는 것.

거기다가 통제력을 잃고 타인을 잔혹하게 죽이는 막장 짓도 잦아지게 된다.

피에 젖은 크라놀은 터뜨린 팔을 내려다보며 나른하게 중얼댔다.

“이거 고추도 가능한가?”

“어어? 미, 미친! 아아아악!”

이날, 세 용병은 뼈저리게 깨달았다.

왜 그가 미친개라고 불렸는지를.

* * *

크라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느새 눈앞에는 세 구의 시체가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제 누구도 시체라고 볼 수 없었다.

“하아! 하아!”

그것도 잔인하게 사지가 쪼개지고 촘촘하게 분쇄된.

이제는 인간이라는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이 핏물과 고깃가루들.

“이럴,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는데.”

크라놀은 구역질이 나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제 겨우 빙의한 지 석 달 차였다.

제아무리 가차 없더라도 명색이 현대인.

그러나 광증은 그의 관념 자체를 무너뜨렸다.

“아, 머리, 머리. 머리가 너무 아파.”

시체들의 피가 묻은 크라놀은 계속 비틀대며 걸었다.

피를 맛봤더니 광증이 점점 더 격해졌다.

자꾸만 살육이 마렵고 심장이 격렬히 뛴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자꾸만 쏟아졌다.

그러다가, 눈앞이 점점 흔들렸다.

‘하, 씨발.’

결국 크라놀은 얼마 걷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이대로 의식을 잃었다가는 분명 또 누군가를 죽이려 들 게 분명했다.

광증에 잡아먹히면 자아를 잃고 결국 원작대로의 루트를 타게 될 터.

‘결국, 노력했는데도 여기까지인가.’

크라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뭔가를 꺼냈다.

평소에 씹는 약초와 다른, 적갈색 독초.

이것은 자결용 도구였다.

한 움큼만 집어삼키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

최후의 수단으로서 품에 지니고 다니던 것이었다.

‘결국 재앙이 되어서 무고한 수백만 명을 학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지금…….’

당연히 망설여졌다.

그러나 곧 결단을 내렸다.

이 피폐한 고통 속에서 해방되기로.

크라놀이 독초를 잔뜩 입에 넣고 씹었다.

“컥. 커컥.”

비교도 할 수 없는 아릿함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서서히 두통이 느껴지지 않으며 온몸에 힘이 빠졌다.

조금씩 붉었던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빛 한 점 없는 어둠으로 물들어 간다.

마침내 숨이 희미해…….

“캬아아아아!”

그런데 그때 뭔가 익숙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크라놀은 몽롱해지는 눈을 비볐다.

대뜸 눈부신 황금색 비늘의 새끼용이 날아들었다.

“커헉! 컥! 우욱!”

조그만 녀석이 어찌나 재빠른지 순식간에 날아들어 복부에 부딪혔다.

뒤로 쓰러진 크라놀은 입에 넣었던 독초를 토해내고 말았다.

난데없이 자살을 방해한 이 새끼 마수를 노려보았을 때였다.

“캬아아아아!”

울먹이는 새끼용이 자그마한 머리통을 그의 가슴에 꼭 파묻었다.

미쳐서 자결하려는 자신을 허겁지겁 뜯어말리려는 듯이.

그리고 그 순간, 눈앞에 뭔가가 떠올랐다.

[골든 엠페러 드래곤이 당신에게 복종합니다.]

[숨겨진 특성의 잠재 조건이 해금됐습니다.]

[새로운 힘, ‘재앙 친화력’이 개방됐습니다.]

“……뭐야.”

크라놀은 핏물과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최후반에나 각성해야 하는 히든 특성.

크라놀 위자르가 최종장 보스에 버금가는 막장 사기캐로 진화한 이유.

그 힘이 바로 지금, 이 순간 깨어나 버렸다.

3화 히든 특성

* * *

‘크라놀 위자르는 언제나 재앙을 몰고 다닌다.’

‘어디 있든지 막대한 공포와 재해를 유발한다.’

‘그렇기에,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미움받는다.’

재앙의 크라놀.

미움받는 크라놀.

만인이 혐오하는 크라놀.

이것이, 작중 최후반부 크라놀의 찬란한 별명들이었다.

인류 전체에게 이토록 우울하게 따돌림당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이 녀석의 히든 특성이 그야말로 ‘무차별 광범위 학살’에 특화되어 있었으니까.

훗날 크라놀이 무고한 수백만 명의 대륙 사람들을 몰살해 버린 이유이기도 했다.

‘망했다.’

상태창을 읽자마자 크라놀은 정신이 아득해져 버렸다.

본래 히든 특성을 각성해야 하는 것은 작중 최후반부.

그런데 저 새끼용의 개입으로 하필이면 그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다.

이제 크라놀은 걸어 다니는 생체 핵폭탄이 되어버린 셈.

‘안 돼. 얼른 죽어야 한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은 절대로 히든 특성이 개화한 크라놀을 막을 수 없다.

이대로 광증 심화로 자아까지 잃는다면 대참사가 벌어질 터.

크라놀은 다급히 눈을 굴렸다.

방금 토해냈던 독초가 보였다.

‘한번 뱉어내긴 했지만, 다시 삼키기만 한다면……!’

충분히 심장을 멈춰낼 순 있으리라.

재빨리 독초로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캬아!”

새끼용이 허겁지겁 숨결(Breath)을 내뱉었다.

백색 화염이 토해낸 독초를 싹 불태워 버렸다.

당연히 크라놀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뭘 하는……!”

이젠 유일한 자살 수단마저 없어져 버렸다.

도대체 저 새끼용은 뭔데 남의 죽음을 자꾸만 막는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봤지만, 하필 인적 없는 길가라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새끼용.”

하는 수 없었다.

크라놀이 충혈된 눈동자로 쇳소리를 냈다.

“네가 날 죽여라.”

“캬아아아아!”

그러나 황금색 새끼용은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저 반항적인 생명체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절대 눈앞의 크라놀을 죽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지금 날 안 죽이면 수백만 명이 죽는다. 그러니까, 얼른…….”

그때 황금색 새끼용이 양 날개를 펼쳤다.

아까 부패한 숲에서처럼 단순히 위협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허공으로부터 균열이 열리더니 뭔가가 툭 떨어졌다.

“아.”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크라놀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골드 엠페러 드래곤 특유의 ‘아공간 창고’였다.

무엇이든 집어넣고 뺄 수 있는 편리한 특수 마법.

그런데 균열에서 나온 물건이 너무 뜻밖이었다.

탄탄하고 투명한 병 속에 담겨 있는 황금빛 용액.

‘저건…… 설마. 황금 엘릭서?’

그러나 균열에서 나온 황금 엘릭서는 평범한 물약이 아니었다.

무려 유니크 등급을 받는, 대륙에서도 손에 꼽히는 희귀 영약.

‘분명 1막 최종 보스를 잡으면 둥지에서 털 수 있는 전리품인데.’

그것과 정확히 똑같은 전리품을, 저 새끼용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녀석의 이상행동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조그만 양발로 황금 엘릭서를 붙잡더니 크라놀한테 내밀었다.

“캬아아아!”

“……지금 이걸 나한테 주겠다고?”

새끼용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크라놀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이 조그만 생명체가 제정신인가 싶었으니까.

아직 너무 어려서 유니크 등급 아이템의 가치를 파악할 줄도 모른단 말인가?

“……꿀꺽.”

하지만 지금은 그딴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망설일 겨를도 없이 황금 엘릭서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단숨에 그 안에 담긴 용액을 들이켰다.

[황금 엘릭서를 마셨습니다.]

[특성, ‘천무지체(天武肢體)를 획득합니다.]

[온몸에 있는 병과 저주를 깨끗이 치유합니다.]

크라놀은 눈앞의 상태창을 보며 한 줄기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실패!]

[해당 광증은 이것만으로는 완치가 불가합니다.]

[그러나 심각해졌던 증세가 상당히 완화합니다.]

……역시 실패였다.

황금 엘릭서는 대단한 물약이었지만, 그렇다고 만병통치제는 아니었다.

시체병이나 광증처럼 특별하고 심각한 질환은 완치하지 못했다.

‘특히 시체병은 특정한 히든 피스를 써야만 차도가 있는 질병이니까. 내 광증과 달리 완화되는 효과도 기대하기 어려웠겠지.’

새끼용도 그걸 알기에 스스로 마시지 않고 그에게 내어준 것일 터.

“하아. 하아.”

아무튼 크라놀은 급격히 안색에 핏기가 돌았다.

피에 대한 욕구가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으니까.

숨을 몰아쉬던 그는 손으로 피에 젖은 얼굴을 쓸었다.

어느새 심각했던 두통도 평소 수준으로 가라앉고 코피도 멎었다.

‘완치는 아니지만…… 이만하면 괜찮아.’

크라놀은 한층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과연 유니크 등급의 물약이었다.

여전히 미진한 두통은 남아있었지만, 방금까지 말을 안 듣던 육신이 가벼워졌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왜 날 살린 거지?’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아마도 용의 뛰어난 후각으로 독초의 존재를 파악했을 터.

그래서 크라놀이 그것을 한 움큼 삼켰을 때 투명화마저도 풀고 다가온 것일 테고.

‘설마 부패한 숲에서 자길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인가?’

하지만 용이 언제 그렇게 보은을 갚는 생물이었나.

원작에서는 절대적이고 오만하고 짝이 없는 족속들이라고만 읽었는데.

어쩌면 아직 새끼라서 그런 용 특유의 자아가 생겨나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캬아?”

새끼용이 조심스레 크라놀한테 다가왔다.

킁킁 냄새도 맡고 옷깃에 묻은 피도 발로 툭툭 쳤다.

크라놀은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직접 입을 열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았다.”

자칫하면 대도시 단위로 줄초상을 치를 뻔했다.

괜스레 이 녀석한테 고마웠다.

한 번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싶어서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캬아아아앙!”

그런데 이 새끼용 녀석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더니 앙칼지게 앞발을 들이밀었다.

마치 그한테 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느냐고 뒤늦게 야단치는 것처럼.

크라놀은 멈칫했다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기가 먼저 허겁지겁 다가와서 도와줘 놓고 도리어 화내는 꼴이 적잖이 우스웠다.

“이건 뭐 뚱뚱한 아기고양이도 아니고.”

자기도 모르게 크라놀이 중얼거렸을 때.

“캬아아아?!”

경악한 새끼용이 울컥하며 눈물이 또 그렁그렁해졌다.

어쩜 자기한테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는 듯이.

“아, 뚱뚱하단 말이 싫은 건가?”

“캬아아아!”

삐친 새끼용이 볼을 잔뜩 부풀렸다.

그러더니 휙 돌아서 멋대로 날아가 버렸다.

그 뒷모습을 보며, 크라놀은 자기도 모르게 실소했다.

“아.”

어떤 사실을 막 깨달았다.

지금 이것이, 빙의하고 처음으로 지어 본 웃음이었다.

* * *

크라놀은 죽다 살아난 이후부터 불편한 존재감을 느꼈다.

보이지 않는 생명체가 자길 쭉 따라다니는 기분이랄까.

여관방에 와서 피 묻은 몸을 씻고 누워서는 중얼댔다.

“새끼용 고기가 참 맛있다던데. 이렇게 배고플 때 후식으로 먹으면…….”

“끼아아아야앙!”

“흠, 역시 계속 따라오고 있었군.”

겁에 질려 비명을 내지른 새끼용이 흠칫하더니 곧바로 다시 아가리를 다물었다.

아무래도 크라놀을 생명의 은인쯤으로 여기는 것일까.

이대로 그를 계속 졸졸 쫓아다닐 모양이었다.

‘의외로 수줍음이 꽤 많은 것 같은데.’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싫어서일까.

저 새끼용은 어지간해선 투명화하고 따라다녔다.

뭐, 일단 그를 공격하거나 해치려는 의도는 없는 것 같으니 됐다.

‘아무튼.’

크라놀은 여관방에 와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곧장 다시 나가서 영주 성으로 향했다.

A급 의뢰에 관해 보고해야 할 시간이다.

* * *

비르시 영지.

대륙 중앙부 근처에 있는 이곳은 어지간한 시골 영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규모도 어지간한 소도시 수준으로 크고, 각종 조합도 활성화되어 있으니까.

그랬기에, 비르시의 영주는 크고 작은 문제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부패룡이 사실 없었다고?”

“네. 땅으로부터 흘러나온 마기의 영향입니다. 저는 성수를 뿌려서 운 좋게 살아 돌아왔고요.”

“……그게 다인가?”

“네.”

비르시의 영주는 영주실 의자에 턱을 괴곤 침묵했다.

그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큰 목소리로 토로했다.

“발뺌할 생각 말게! 자네는 미친개 크라놀 아닌가! 도맡은 의뢰는 끝끝내 무모하게라도, 완벽히 성공시킨다는!”

“글쎄요. 저는 미친개라는 제 별명이 의뢰 달성과는 그리 연관성이 깊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크라놀은 피곤하게 관자놀이만 꾹 눌렀다.

누가 큰소리를 치면 머리가 지독하게 지끈댔다.

다행히도 영주는 곧바로 진정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부패룡 퇴치. 수도에서 탐사단을 몇 번이나 요청했는데도 거절당했지.’

그곳에 보냈던 부하들은 사망했고, 베테랑 용병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음험한 소문은 영지를 들리려는 방문객의 숫자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패한 서쪽 영역은 완전히 죽음의 땅이 되었으니까.

‘서쪽 길을 개척해야지만 우리 영지가 대도시로 발돋움할 발판이 될 텐데.’

최근 무역로 루트 개설에 관심을 기울이는 영주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눈앞의 이 미친개라도 어떻게든 이용해 먹어야 했다.

영주가 은근한 목소리로 유혹했다.

“크라놀. 자네는 그 귀한 하늘 장화가 탐나지 않는단 말인가? 무려 유니크 등급 장비라고! 부패룡이 아니어도 괜찮아. 부패한 서쪽 영역만 어떻게든 정화해 준다면 기꺼이 보상하겠네!”

A급 의뢰 달성의 보상품.

하나 크라놀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그거 진짜 갖고 계신 거 맞습니까?”

“……!”

영주의 얼굴에 아주 잠깐 뜨끔한 표정이 지나갔다.

그러나 금세 태연한 체하며 반박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용병 조합 놈들이 얼마나 까다로운 놈들인데? 검증 없이 의뢰서를 걸어주는 녀석들이 아니라고!”

“그래도 꼼수는 얼마든지 있지요. 겉만 위장한 모조품이거나,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다거나.”

유니크 등급 아이템이라니.

당연히 뻔한 거짓말이다.

같은 등급인 황금 엘릭서조차도 일생에서 몇 번 보기 힘든 아이템.

그런데 그만한 보상을, 고작 부패한 숲을 정화하는 정도로 받을 리가.

‘하지만.’

크라놀은 가만히 영주를 바라봤다.

비르시는 어지간한 소규모 영지와는 격이 다르다.

유니크 등급 마법 장비까지는 아니어도 뜯어낼 게 충분한 물주 양반.

그랬기에, 크라놀은 입술에 침을 발랐다.

“혹시 교역로 뚫는 게 지금 고민이라면, 제가 좀 다른 해결 방안을 제안 드리겠습니다.”

“오오, 도대체 뭔가!”

영주가 곧장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기대를 걸었건만, 막상 나온 얘기는 실망이 컸다.

“소용돌이 토굴? 설마 먼 황야에 있는 던전 말인가?”

“예. 제가 그곳에 다녀오면 부패한 서쪽 영역을 정화할 아이템을 구해 올 수 있습니다.”

비르시의 영주는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뭘 모르는가 보군. 그곳은 사시사철 재앙이 휘몰아치는 던전이야. 황야 자체도 험준하고. 이 근처의 모험가들도 잘 가지 않는 곳이라고.”

크라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었으니까.

영주가 미심쩍어하며 말을 이었다.

“이건 제아무리 자네가 미친개라도 위험해. 그 던전은 우리 영지에 있는 의뢰들과는 공략 난이도 자체가 다르니까. 그런데, 그런 재앙이나 다름없는 구역을 자네가 돌파할 수 있다고?”

크라놀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갈 거다.

누가 말려도 무조건 가야 한다.

‘크라놀 위자르의 히든 특성. 재앙 친화력.’

이제 크라놀에게 재앙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도리어 반드시 접촉해야 할 미친 이득이었으니까.

4화 첫 번째 재앙

* * *

영주 성을 나온 크라놀은 가장 먼저 약초 가게부터 들렀다.

그에게 광증을 잠재울 비상 약초는 언제나 필수품이었다.

약초상이 단골손님이 구매하려는 묵직한 약초 묶음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미친. 고요초, 이완풀에 평온의 꽃샘까지……. 우리 상점에 있는 약초는 다 털려고?”

“많이 팔면 좋잖습니까. 뭐가 걱정입니까.”

“아니, 당신은 항상 배합률이나 복용량도 다 무시하고 생짜로 씹어먹잖아! 괜찮긴 한 거야?”

크라놀은 더 대꾸하지 않고 돈주머니를 내밀었다.

그가 항상 지출이 많은 이유였다.

언제나 수입의 95%는 약초값으로 나가니까.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어. 광증은 내게 최악의 약점이다.’

당장은 황금 엘릭서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언젠가 광증은 또 악화할 것이다.

저번처럼 미쳤다가는 결국 통제 없는 학살을 벌이게 될 터.

크라놀은 본인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싫었다.

‘보는 사람이 없었기에 다행이었지.’

오늘만 해도 무려 용병을 셋이나 고깃가루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다행히 인적이 없는 길이라서 목격자는 없었다.

물론 그래서 녀석들도 자신을 습격했던 것이겠지만.

‘아무튼 조금 먼 길을 떠나야겠군.’

크라놀은 비르시의 영주와 거래했다.

부패한 서쪽 영역을 완벽히 정화하는 A급 의뢰.

당연히 부패룡 퇴치 이상으로 까다로운 내용이었다.

그랬기에 영주는 하늘 장화는 물론이고, 그가 원하는 바를 한 가지 더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물론 미심쩍은 영주이긴 하지만, 서로 별의 맹세까지 걸었으니까.’

별의 맹세.

해당 안전지대의 수호성(守護星)을 걸고 하는 약속이었다.

이 맹세를 하고서 어겼을 시엔, 별이 내리는 ‘천벌’을 받게 된다.

대뜸 날벼락이 떨어진다든지, 온몸이 활활 불로 타오른다든지.

별의 맹세가 걸린 거래에서는 최소한 사기당할 걱정은 없었다.

‘그 영주, 어지간히도 빨리 무역로를 개척하고 싶은 모양이군.’

원래 크라놀은 광증 완화를 위해 부패룡부터 사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변수들로 인해 상황이 이래저래 꼬였다.

우선은 당장 목표로 향하면서, 바닥난 자금부터 벌기로 했다.

‘소용돌이 토굴. 그 던전에도 부패룡이 한 마리 숨어 있지.’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여행길이었다.

일단, 최종적으로 영주에게서 보상을 뜯어낼 것이다.

그리고 부패룡을 사냥해 광증 완화에 필요한 아이템도 구할 수 있으리라.

물론 절대로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지만 말이다.

‘소용돌이 토굴까지 가려면 맨몸으로는 힘들지.’

크라놀은 비르시 영지의 상점들을 돌았다.

여정에 필요한 건조식량과 수통, 랜턴, 담요 등의 장비들을 구매했다.

그러고 나니 그야말로 돈주머니가 텅텅 비어버렸다.

‘역시 돈이 필요하겠군. 내가 맨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크라놀의 온건한 생활을 위해서는 자금력은 필수였다.

평상시 광증을 막기 위한 약초값만 해도 엄청난 지출이 나가니까.

오죽하면 미친개라고 불릴 만큼 무모한 의뢰들을 해결했는데도, 금세 자금난에 허덕이겠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동료를 구해야 하나?’

보통 던전을 무모하게 혼자서 돌파하는 인간은 거의 없다.

대부분 팀을 짜서 들어가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니까.

방어, 정찰, 척후, 회복, 함정 해제 등등 역할도 세부적으로 나뉜다.

최하급 마수의 둥지 따위라면 몰라도, 던전은 파티 결성이 필수였다.

“흠.”

원래 크라놀은 협력적인 활동은 잘 하지 않았다.

애당초 용병들도 그에게 선뜻 다가오지 못했다.

미친개라는 악명과 약골이었던 탓에 팀을 꾸리기 어려웠으니까.

‘뭐, 어차피 누굴 고용하려 해도 남은 돈도 없고.’

그렇다면 방법이야 간단했다.

크라놀은 허공을 향해서 말했다.

“너, 나랑 여행 좀 가자.”

“캬아아앙?”

“……흠. 뒤에 있었군.”

뭣 하러 사람을 쓰겠는가.

이미 있지 않은가.

온종일 자신만 졸졸 따라다니는, 사기급 동료가.

* * *

크라놀은 영지 어귀를 나와서 걷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곳이었기에 새끼룡도 투명화를 풀고 그를 졸졸 따라왔다.

이 조그만 녀석은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지 이곳저곳을 신기하게 돌아봤다.

“크랴아아앙.”

크라놀은 이 새끼용에 관해서 관심이 좀 생겼다.

세계관에서 단 두 개체뿐인 골드 엠페러 드래곤.

1막 최종 보스의 새끼.

“흐음.”

일단 외견 자체만 보면 정말 앙증맞고 귀여웠다.

아직 어린 새끼답게 아기고양이처럼 몸집이 작고 여린 비늘.

거기다가 꽤 통통한 뱃살(새끼용은 격렬히 부정하지만).

특히나 살짝 난 네 개의 뿔과 감정에 따라 달싹이는 꼬리는 마치 인형 같았다.

‘도무지 어딜 봐도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저런 어여쁜 외견에 속아서는 안 됐다.

이 녀석은 훗날 엄청난 재앙 그 자체로 성장할 마수.

1막의 흑금룡만 해도 원작에서 한 대륙을 파멸시킬 뻔하지 않았던가.

‘뭐, 그 덕분에 내 숨겨진 특성이 개방된 거였지만.’

히든 특성, 재앙 친화력.

크라놀을 사기캐로 만든 1등 공신인 이 특성은, 특수한 조건에서만 개방된다.

바로 막대한 재앙을 직접 마주하고 그것 자체를 지배하는 것.

‘원작에서는 광증이 터진 크라놀이 혼자 화산으로 걸어 들어가며 능력이 해금되지. 온몸이 거의 반쯤 불태워지면서도 광기에 젖어 화산 활동을 자기 마음대로 일으키게 됐으니까.’

당연히 자기 목숨마저 걸어야 하는 미친 짓.

실제로 원작에서 광증 터진 크라놀도 뒈질 뻔했다.

그래서 지금의 그는 당연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이 새끼용이 복부에 부딪혀 그 개방 조건이 해방될 줄이야.

‘이렇게나 어린데도 재앙 판정을 받다니. 그만큼 잠재력이 파괴적이라는 의미겠지.’

어디 그뿐인가? 이 새끼용 덕분에 황금 엘릭서까지 복용했다.

그 덕에 약골이었던 몸뚱이가 천무지체 특성마저 획득했다.

‘그야말로 순 복덩이가 따로 없지.’

그러나 크라놀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그는 먼저 다가오는 이를 함부로 믿지 않았다.

설령 이런 어린 새끼 마수일지라도 말이다.

‘나한테 확실하게 복종하는 게 맞긴 하나?’

철저한 크라놀은 한번 시험해 보기로 했다.

“심심하군. 자살해야지.”

“캬아아아아앙!!!”

그 말을 내뱉자마자, 새끼용이 황급히 날아와선 그의 옷깃을 뜯어말렸다.

그의 가슴에 울며불며 대가리를 콩콩 박으며 엉엉 울기까지 했다.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크라놀은 우는 새끼용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난 안 죽는다니까. 울지 좀 마.”

“캬아아아앙!”

그렇게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고 나서야 새끼용은 겨우 울음을 그치며 진정했다.

크라놀의 죽지 않겠다는 맹세가 마음에 들었던 걸까?

방금까지는 그렇게 울던 녀석이 양날개를 활짝 펴고 신나게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캬아아아앙!”

‘나참.’

크라놀은 참 어이가 없었다.

울었다가 웃었다가 희한한 놈이었다.

자신이 안 죽는 게 뭐가 저렇게나 기쁘단 말인가?

‘기껏해야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인데.’

아무튼 참 이상한 새끼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날 배반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일단 데리고 다닐 일행으로서는 합격.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있었다.

원래라면 새끼용은 부모의 둥지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왜 이 녀석은 시체병에 걸린 채 엉뚱한 곳에서 죽어가고 있었을까.

“넌 어쩌다가 혼자 있게 된 거지?”

“캬아아아앙!”

새끼용이 앙증맞게 발짓을 해가며 열심히 설명했다.

크라놀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는 거야.”

전혀 이 녀석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거, 대화가 안 통하니 뭘 알 수가 있나.

‘어쩌면 시체병에 걸린 탓에 부모의 둥지에서 쫓겨난 것일지도.’

시체병은 인간도 그렇지만, 용들 사이에서 특히 기피되는 질병이다.

걸리는 것만으로도 언데드처럼 보이게 되는 끔찍한 피부질환을 동반하니까.

그래서 오만한 용들에게는 종족의 고결함에 해를 끼친다고 여겨졌다.

더군다나 전염까지 되는 고질병이니 어느 용이라고 좋아하겠는가.

‘용 중에서도 모성애가 부족한 경우가 더러 있지. 드물지만 자기 새끼를 잡아먹는 일도 있고.’

그제야 얼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새끼용은 자기 부모에게 버림받았으리라.

그렇다면 크라놀에게 유독 매달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유일하게 죽어가는 자신을 거두어 준 존재일 테니까.

“흠.”

그럼 크라놀마저 죽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새끼용은 또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그마저 없으면 아무도 자기하고는 살아주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걸지도.

“넌 귀찮은 놈이구나.”

“캬아아앙!”

크라놀이 쓰다듬어 주려고 하자, 새끼용이 앞발을 들이밀며 경계했다.

자길 감히 애완동물 취급하지 말라는 듯이.

방금까지는 울며불며 죽지 말라고 애걸하더니, 또 이런 자존심은 또 드센 녀석이었다.

역시 용은 용이란 걸까.

고심하던 그는 배낭에서 말린 육포를 꺼냈다.

“배고프지 않아?”

“캬앙!”

병에 걸렸던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일까.

새끼용이 침을 질질 흘리며 눈을 반짝였다.

크라놀은 육포를 휙 던져줬다.

“네 밥이다. 먹어라.”

군침을 흘린 새끼용은 그가 내민 육포에 바로 달려들었다.

걸신들린 듯이 우물우물 덜 자란 이빨로 잘도 씹어먹었다.

크라놀은 그런 녀석을 바라보다가 픽 웃었다.

“크랴아아앙.”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거부하지 않았다.

크라놀은 새끼용을 쓰다듬어 주었다.

“오.”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아직 덜 자란 황금색 비늘은 딱딱하기보다는 살짝 보들보들했다.

녀석은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고로롱대며 허리를 길게 쭉 폈다.

“넌 보면 볼수록 오동통한 아기고양이 같군.”

“크랴아아아앙?!”

크라놀이 무심히 평가하자, 경악한 새끼용이 마구 화를 냈다.

아무튼 그렇게 둘은 티격태격하며 여행길을 함께했다.

식량도 쓰이고 좀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덕분에 혼자 다닐 때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 적응하는 석 달 동안은 솔직히 괴로웠으니까.’

그는 여러 일을 겪었다.

빙의 이후로는 말투도 작중 인물처럼 변했고, 성정도 예민해졌다.

단 한 번도 편하게 잠들지 못해 다크서클도 깊어지고 말았다.

24시간 함께하는 두통은 그의 성격을 개차반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생기니 그나마 좀 낫군.’

졸졸 따라오는 새끼용을 보고 있자니 피폐함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괜히 사람들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주인한테 득이 되는 것이 많다니.

그래서 크라놀은 이 복덩이한테 뭔가를 더 뜯어내고 싶었다.

“네 아공간에는 황금 엘릭서 말고 다른 건 없는 건가?”

“키양!”

새끼용이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아공간에 뭔가 더 가치 있는 아이템이 있진 않은 모양.

크라놀이 적잖이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버림받은 새끼용』과 친분을 쌓았습니다.]

[해당 재앙에 히든 특성, ‘재앙 친화력’이 발동합니다.]

[재앙의 전용 스킬을 복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드디어 떠올랐군.’

크라놀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없는 사정에 귀한 육포를 내어준 것이 아니었다.

이 새끼용은 자신과 함께 성장하는 첫 번째 재앙이 될 것이다.

5화 소용돌이 토굴 던전

* * *

크라놀은 새끼용을 좀 더 골몰하게 바라봤다.

그러자 이전에는 없던 상태창이 곁에 떠올랐다.

[이름: 없음]

[종족: 골드 엠페러 드래곤]

[잠재력: SSS]

[전용 스킬: 백색 화염 숨결(Lv2), 투명화(Lv7), 아공간 창고(Lv1)]

[보유 특성: 암시야(희귀), 황금 비늘(전설), 드래곤 하트(전설)]

[능력치: 근력(Lv3), 민첩(Lv1), 마력(Lv5), 행운(Lv3)]

[당신에 대한 감정: 아빠!]

‘오.’

실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상태창.

각기 엄청난 전용 스킬에, 전설급 특성도 두 개나 달려 있었다.

과연 괜히 잠재력 SSS급이 아니었다.

‘하긴 1막 최종 보스의 새끼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지.’

크라놀은 전용 스킬 항목을 주의 깊게 보았다.

척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스킬이 나열되어 있었다.

[재앙의 전용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스킬 레벨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대상의 현재 경지와 유대감이 낮습니다.]

[현재 복사가 가능한 스킬은 ‘1개’입니다.]

‘아직 베낄 수 있는 스킬은 단 하나뿐인가.’

거기다가 기존의 스킬 레벨도 적용되지 않았다.

무조건 스킬 레벨 1로서만 복사해 올 수 있다는 의미.

그러나 상관없었다.

‘내 손으로 재앙을 키울수록, 복사해 오는 힘을 늘릴 수 있으니까.’

그것이 히든 특성, ‘재앙 친화력’의 무서운 점이었다.

크라놀에 의해 재앙이 강해질수록, 본인도 강력해진다.

심지어 나중엔 복사한 스킬들을 합칠 수도 있게 된다.

‘물론 그건 지금보다 훨씬 관계가 깊어졌을 때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앞으로의 기대감이 커지는 부분이었다.

사실 이런 것과는 별개로 강해지는 방식도 있긴 했다.

크라놀의 광증 또한 리스크만 제외하고 본다면 만만찮게 사기니까.

어지간한 적들쯤은 일격에 처치할 수 있는 마법적 힘.

하지만 그건 전혀 내키지 않는 짓이었다.

‘결국 내 자아도 먹힐 테고, 전 세계가 위험해질 테니까.’

현재 크라놀은 재앙 친화력이라는 사기급 히든 특성도 각성한 상태.

이런 상황에서 미쳐버린다면 금세 인류를 위협할 재앙이 되어버릴 터.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지긋지긋한 광증을 완치하는 것이었다.

‘조급하게 가려고 하다가 오히려 넘어진다. 목표를 착각해서는 안 돼.’

물론 강해지는 것은 평안한 삶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이득일 뿐이었다.

그런다고 광증이 갑자기 낫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일단 스킬 하나를 복사할 수 있다는 건데.’

새끼용의 스킬은 총 세 개였다.

백색 화염 숨결, 투명화, 아공간 창고.

투명화는 말 그대로 투명해지는 것이고, 아공간 창고는 인벤토리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공격용으로는 백색 화염 숨결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용은 종마다 내뱉는 숨결의 종류가 달랐다.

어떤 용은 푸른 화염을, 혹은 낙뢰를 토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녀석은 극소의 희귀종인 골드 엠페러 드래곤.

무려 가장 진귀하다는 백색 화염 숨결을 배우고 있었다.

‘화력도 엄청나지만, 무려 신성력이 포함된 불길. 극소수의 성녀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성화(聖火)지.’

위력도 일반 불길보다 강력하고, 상징적 의미도 깊다.

결국 크라놀은 고민 끝에 스킬을 골랐다.

[‘투명화(Lv1)’를 복사했습니다!]

고심 끝에 고른 스킬은 바로 투명화였다.

딱히 엄청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백색 화염 숨결이나 아공간 창고는 새끼용을 통해 쓰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투명화는 달랐다.

이건 압도적으로 활용도가 높았으니까.

단순한 전투 외로도 써먹을 분야가 천지였다.

‘각종 범죄나 뒤통수 치기, 교란까지 만능 스킬이 따로 없지.’

물론 스킬 레벨이 낮아서 유지 시간 자체가 무척 짧은 것은 흠이지만.

단숨에 이만한 마법을 획득했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이득이었다.

투명화는 마도사들 사이에서도 익히기 어려운 고급 마법이니까.

마탑에 들어가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스승이나 마법 서적을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내가 밑바닥부터 투명화 마법을 익히려 했다면, 이것저것 과정을 다 합해서 최소 4년은 넘게 허비했을 테지.’

그러나 그런 과정을 순식간에 생략하고 투명화 마법을 손에 넣었다.

스킬 레벨이 낮긴 했지만, 꾸준히 사용하며 성장하면 그만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 새끼용의 몸집은 작고, 나이가 어렸다.

아직 본격적인 성장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진화는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같군.’

진화.

새끼 마수들은 경험치가 쌓이면 진화하게 된다.

단숨에 몸집이 커지고 새로운 전용 스킬도 배운다.

진화의 횟수와 변하는 수준은 개체마다 차이가 컸다.

“새끼용. 넌 진화를 경험한 적이 있나? 갑자기 몸이 커지거나 힘이 세지는 일이다.”

“캬아앙!”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새끼용.

크라놀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나, 아직 단 한 번도 진화하지 않은 새끼 마수.

그런데도 이렇게나 사기급 마법들과 전설급 특성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니.

그야말로 레전더리 스타터팩을 구한 셈이었다.

‘물론 내가 그만큼 앞으로 새끼용을 완벽하게 성장시켜야겠지만.’

크라놀은 충분한 자신이 있었다.

그의 지도 아래에서, 이 새끼용은 1막의 최종 보스 그 이상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래야만 훗날 돌아오는 이득이 극대화될 테니까.

“아, 그런데.”

이것저것 앞으로의 일을 계산하던 크라놀은 문득 입을 뗐다.

사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대목이 있었다.

상태창 가장 아랫줄에 쓰여 있는 문구.

“넌 내 새끼가 아니다. 왜 아빠라고 하는 거야.”

“크랴아아아앙!”

고개를 도리도리 휘저은 새끼용이 자신한테 꼭 달라붙었다.

흠, 뭔가 이상한 의미 부여를 하는 모양이다.

너무 어려서 생기는 문제점도 있는 것인가.

* * *

어느새 둘은 그렇게 열하루를 걸었다.

조금씩 풀포기가 사라지고, 황야 지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말라가는 쩍 갈라진 대지와 텁텁한 공기.

휑한 바람과 함께 회전초가 굴러가는 황야 속에서.

마침내 크라놀은 목표했던 던전을 마주했다.

“크랴아아앙!”

새끼용이 신기해하며 앞발로 저편을 가리켰다.

저편으로부터 드넓은 일대에 소용돌이들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무지막지한 양의 흙먼지가 휘날려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던전, 소용돌이 토굴.’

저곳은 입장 자체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런 준비 없이 다가갔다가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죽게 될 터.

“캬아아아앙.”

염려하는 새끼용이 얼른 떠나자는 듯이 크라놀의 옷깃을 꽉 물었다.

그런데 곧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캬아아아아앙?!”

저 소용돌이들이 요동치더니 갑자기 궤도가 비틀렸다.

그러더니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순식간에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끼용의 염려에도, 크라놀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새끼용. 저 소용돌이를 향해 네 숨결을 내뿜어라.”

새끼용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뭔가 뜻이 있겠거니 하고 곧장 아가리를 벌렸다.

화아아아악!

조그만 새끼용이라곤 믿기지 않는 화력의 숨결이 내뿜어졌다.

분사된 백색 화염이 황야를 쓸어 담는 모래폭풍에 닿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새끼용의 화염 숨결에 닿자마자, 거대한 소용돌이 하나가 없어졌다.

“캬아아아아?”

깜짝 놀란 새끼용이 의아해했다.

반면 크라놀은 벌써 걷고 있었다.

“가자.”

새끼용이 숨결을 내뱉자, 소용돌이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덕분에 둘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무사히 걸어갈 수 있었다.

‘토굴 주위로 끊임없이 몰아치는 모래폭풍. 이건 사실 자연 발생한 재해가 아니지.’

바로 던전 심부에 있는 ‘언데드’가 만들어 낸 것이니까.

그랬기에 일반 자연재해와 달리 백색 화염의 신성력에 취약했다.

하지만 소용돌이들은 일시적으로 사라졌을 뿐, 곧 다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크라놀은 쉼 없이 걸어 원하는 곳에 도달했다.

“들어가자.”

둘은 던전 입구로 들어섰다.

* * *

마수사냥꾼 비르그는 버석한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일이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젠장. 어쩌다가 꼴이 이렇게 되었지?’

소용돌이 토굴 던전.

이 던전에 해당 명칭이 붙은 이유는 간단했다.

실제로 주위에 소용돌이 재해가 펼쳐져 있고, 던전은 토굴 형태로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보통 대부분 모험가는 입구로 도달하기 전부터 당황하게 된다.

장대하게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뚫는 것부터가 난관이니까.

“돌겠군. 그냥 걸어가려고 하다가는 금세 소용돌이에 휩쓸리겠어.”

“어라, 우리 팀 정찰꾼이 어디 갔죠?”

“바, 방금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서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냥 멀찍이서 지켜만 본다고 안전할 거라고 여기면 금물이었다.

이 소용돌이들은 시시각각 경로를 바꾸고 패턴도 불규칙했다.

심지어 가끔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오는 일도 있어, 방심했다간 날아가 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휩쓸려진 불쌍한 인간들은 상상할 수도 없이 먼 거리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결국 황야의 독수리들에게 맛 좋은 한 끼 식사가 되어버린 이들이 천지.

그러나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해당 던전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다.

소용돌이를 돌파하기 위해 나름의 계책을 준비해 온 이들이었다.

“이게 뭡니까, 비르그 님?”

“값비싸게 구매한 거대화 스크롤입니다. 체구를 1.7배나 키워주는 마법이지요.”

“혹시 모르니까 제가 제조한 석화 물약도 함께 드세요. 체중이 배로 늘어나게 될 테니까.”

스크롤이나 일부 마법 물약은 초보 모험가들은 꿈도 못 꾸는 고급품.

이들은 소용돌이 지대를 무혈 돌파하기 위해서 큰맘 먹고 사치를 부렸다.

물론 투자 비용이 막대했지만, 그만큼 목표로 한 이득도 컸다.

“이곳 던전 심부에 ‘재앙의 알’이 잠들어 있다고 했죠?”

“예. 황야의 고대 문헌으로 조사한 정보이니 확실할 겁니다.”

“반드시 저희가 가서 파괴해야겠군요. 그 알이 부화하면 어떤 끔찍한 괴물이 태어날지.”

던전을 공략하러 온 이들의 정체는 마수사냥꾼이었다.

세계에 존재하는 마수를 몰살하고, 인류를 수호하려는 직업군.

본래 던전 탐사보단 야생의 날뛰는 마수 사냥에 특화된 이들이었지만, 다들 자신감이 넘쳤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를 마쳤으니까.

“하하하! 회오리가 우리한테는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치는데요?”

“그래도 방심하지 마세요. 갖고 온 스크롤들도 날아가지 않게 잘 묶으시고요. 하나하나가 평범한 농부가 족히 2년은 일해야 살 수 있는 값어치란 말입니다.”

남들이 무너지는 소용돌이 지대.

사냥꾼들은 증량한 몸무게 덕분에 무사히 건너왔다.

그러나 문제는 던전 입구인 토굴에 호기롭게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 발생했다.

“아아악!”

“어? 어어?”

소용돌이 지대를 넘기 위해 다들 체중을 부풀린 것이 화근이었다.

다들 무거워진 만큼 토굴 지반 발을 올렸던 순간, 몸이 쑥 내려앉았으니까.

이곳 지반은 그만큼 약하게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궁수님! 궁수님! 괜찮으세요?!”

“괘, 괜찮……. 아이고, 허리가!”

“꺄아아악! 호칸 님이 목이 돌아가셨어요!”

무게가 커지면 낙하 피해도 심해진다.

던전에서 싸워보기도 전에 일행 전원이 모두 중상을 입었다.

무려 지하 3층 높이를 단번에 떨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심지어 가장 체중이 많은 일행은 운 나쁘게 목이 꺾여서 즉사하고 말았다.

“제기랄.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그러기에 내가 먼저 함정이 있는지부터 확인해 보자고 했잖아요!”

“함정 탐지 스크롤은 진작 뜯어서 썼다고요! 설마 지반이 그렇게 약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젠장, 분명 겉으로만 볼 때는 단단한 지형처럼 보였었는데…….”

남들보다 호화롭게 준비해 온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기본적인 정찰보다, 편리한 마법만을 우선시해 버리고 말았으니까.

서로 다투기도 했지만, 일단 마수사냥꾼들은 다들 상황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이들이 떨어진 장소는 웬 밀실이었다.

행여나 보스를 죽이고 나오는 ‘보상의 방’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보물 상자는커녕, 아무것도 없이 휑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으니까.

유일한 출구는 오로지 강철로 이뤄진 문뿐이었다.

“뭐야, 손잡이가 없잖아?”

“아무래도 반대편에서만 열리게 되어 있는 구조 같아요!”

다들 힘을 합쳐서 문을 열려고 해봤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강철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 두껍고 특수한 금속이 섞여 있는 듯했다.

이들의 힘으로 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기랄, 하필 부식 마법을 익힌 호칸이 죽었을 때 이런 방에 떨어지다니.”

“부넷은 자물쇠 딸 줄도 알잖아요. 문을 열 방법이 없을까요?”

“되겠습니까? 자물쇠 구멍도 없어서 락픽조차도 쓸 수가 없는데.”

결국, 그렇게 방에 갇힌 지 어언 2주째.

어느새 챙겨온 물도 식량도 모두 떨어져 버렸다.

다들 목도 마르고 아무것도 못 마신 채 죽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을 때.

저편의 강철 문으로부터 믿기지 않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생각해 봤는데, 네 이름은 토실이가 좋겠다. 토실토실하니까.”

“캬야아아앙!!”

웬 실없는 희미한 대화가 저편으로부터 들렸다.

이 던전을 공략하러 온 또 다른 파티가 분명했다.

깜짝 놀란 일행은 남은 힘을 쥐어짜내 쾅쾅 문을 두드렸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그러나 문 저편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다들 절망적인 눈빛이 스쳤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던전 내부에서는 친절을 베푸는 이들이 무척 드물었다.

다들 내심 상대 파티를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어어? 으아아악!”

다들 깜짝 놀라서 물러났다.

문으로부터 대뜸 엄청난 고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두꺼운 강철 문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어?”

“무, 문이 녹았어요!”

반쯤 녹은 문은 흐물흐물해지더니 저절로 허물어졌다.

마침내 이 지긋지긋한 밀실로부터 나갈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방 너머에는 상상도 못 했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

발치에 무력하게 초토화된 던전 마수들의 사체.

이글거리는 백색 화염만이 타오르는 지반 끝에서.

웬 무심한 잿빛 머리칼 남자가 홀로 서 있었다.

“도, 도대체 누구십니까, 당신은?”

상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태연히 손을 펼쳐 내밀었다.

“내놔요. 목숨값.”

“……예?”

“지금 내가 살려줬잖습니까. 그러니까, 내놓으라고요. 가장 돈 될 만한 거.”

마수사냥꾼들이 놀란 눈으로 저들끼리 돌아봤다.

반면 남자의 시선은 이들의 스크롤에 가 있었다.

크라놀 위자르는 아무에게나 공짜로 선행을 베풀지 않았다.

6화 마수사냥꾼

* * *

크라놀은 던전에는 처음 입장했다.

원작 지식은 갖추고 있었지만, 직접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급한 마수의 둥지에 비해 훨씬 생존율이 낮은 위험 지역.

‘각종 함정이 도사릴 때도 많고, 마수들의 숫자와 흉포함도 비교가 불허하지.’

소용돌이 토굴은 입구의 지반이 무너져 내려 있었다.

아무래도 자연재해 탓에 지형이 낙후된 것일까.

크라놀이 물었다.

“새끼용. 날 잡고 날 수 있겠나?”

“크랴아아아앙.”

새끼용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그의 허리를 붙들었다.

아직 새끼라서 성체의 용들만큼 힘이 강대하진 못했다.

그러나 짧은 거리는 성인 한 명을 붙잡고도 충분히 날아갈 수 있었다.

“잘했다.”

“크량!”

무너진 지반을 무사히 건너온 크라놀은 으쓱하는 새끼용의 머릴 쓰다듬어 줬다.

둘은 저 어두운 토굴 너머를 향해 진입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던전 공략이 시작되었다.

‘흠. 생각했던 것과는 꽤 다른데.’

그러나 막상 와본 소용돌이 토굴은 싱겁기 그지없었다.

크라놀은 그냥 랜턴 들고 걷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곁에 있는 새끼용이 알아서 다해 줬으니까.

“키이익! 케에엑!”

토굴 지하 1층에 도달하자마자, 거대 병정개미들이 그를 둘러쌌다.

외피가 금속 수준으로 단단하고, 날카로운 이빨을 품고 있어 까다로운 마수.

그러나 새끼용이 뿜어낸 새하얀 화염이 순식간에 녀석들을 불태웠다.

화르르륵!

무자비한 백색 화염은 고색창연한 빛으로 마수들을 태워냈다.

탄탄한 외피에도 불구하고 병정개미들은 속수무책으로 전멸했다.

명색이 던전의 마수들답지 않게 허망하기 짝이 없는 떼죽음.

‘너무 쉬워서 어이가 없군.’

혼자서 고생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효율적이었다.

새끼용의 성장은, 곧 크라놀 자신에게도 힘이 되리라.

‘유대감까지 부지런히 쌓으면 스킬도 추가로 얻겠지.’

그러니 그때까지는 이 어린 것을 충실히 키워야 했다.

지하 1층을 가볍게 돌며 병정개미를 모조리 척살했다.

크라놀은 마수들의 전리품들을 보이는 대로 주웠다.

좀 타긴 했지만, 튼튼한 외피와 다리는 장비 재료로 충분히 판매할 가치가 있었다.

“새끼용. 네 아공간 창고에 넣어놔라.”

“크량!”

새끼용이 그가 내민 잡템들을 아공간에 보관했다.

값비싼 약초값 때문에 늘 자금난에 허덕이는 크라놀이었다.

돈 되는 것이라면 뭐든 주워서 알뜰하게 팔아먹어야 했다.

그렇게 파밍까지 깔끔히 끝내고 바로 지하 2층으로 입장.

이번에는 수십 마리의 병정개미들 사이로 좀 더 크고 갑옷 같은 외피의 개체가 보였다.

매서운 독니가 철검처럼 갈아져 있는, 기사 개미.

병정개미로부터 진화한 한층 상위 개체였다.

“키이에에에엑―!”

기사 개미의 포효.

귀청이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병정개미들의 사기가 올랐다.

부하 마수들의 사기를 진작하는 포효 스킬.

그런데 그것이 뜻밖의 피해를 줬다.

“큭.”

크라놀의 동공이 일시적으로 흔들렸다.

머리가 반으로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꼈다.

입술을 피나도록 깨물고는, 손가락을 내그었다.

“……닥쳐.”

퍼석!

방금까지 용맹하게 포효했던 기사 개미가 단숨에 으깨졌다.

사기가 한껏 올랐던 병정개미들이 경악하며 공포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오죽하면 지켜보던 새끼용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감탄할 정도였다.

“크랴아아앙!”

용조차도 그런 공격은 못 한다며 경외하듯이 우러러보는 눈길.

그러나 크라놀은 무신경하게 약초를 꺼내서 씹을 뿐이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이놈의 광증. 커다란 굉음을 들을 때면 꼭 발작이 벌어진다니까.’

적을 쳐부수는 마법적 힘은 광증이 심화했을 때나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몸 어딘가에서 피가 분출될 만큼 끔찍한 고통을 동반했다.

정신이 가루가 되는 것처럼 고통스러웠기에, 크라놀은 이 과도한 힘을 쓰기 싫어했다.

광증이 폭주하면 또 자아를 잃게 될지 모르는 위험성도 존재했으니까.

“새끼용. 나머지 녀석들을 불태워 버려라.”

크라놀이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명령했다.

새끼용은 곧바로 새하얀 화염을 내뿜으며 잔당들을 처리했다.

적들이 그한테 잔뜩 겁에 질려 있었던 덕분에, 지하 1층보다도 공략이 쉬웠다.

이번에도 사체들로부터 전리품을 수집했다.

그런데 1층과는 달리, 상태창이 표기되는 전리품이 있었다.

[명칭: 기사 개미의 십 년 묵은 독니.]

[등급: ★]

[성능: 장수한 기사 개미에게서만 채취할 수 있는 신체 부위. 잘 갈면 무기 재료로 쓸 수 있다. 단, 품질 좋은 금속을 함께 쓰지 않으면 부식된다.]

1성급 전리품.

별이 달린 아이템은 특수하게 취급된다.

저 위대한 수호성이 굽혀 살피는 물품이란 의미니까.

‘그만큼 가치가 높고, 별에게 봉헌할 수도 있는 아이템.’

별이 붙은 아이템은 대체로 진귀한 편이었다.

최하급 마수 둥지를 돌아도 전혀 구하지 못했던 수준.

그런데 던전에서는 잡몹만 사냥했을 뿐인데도 벌써 1성급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건 꽤 이득이군.’

물론 던전이라고 별 붙은 전리품이 늘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소용돌이 토굴은 입장조차 쉽지 않은 독특한 던전.

그런 난이도의 영향일까, 초반부터 괜찮은 이득을 얻었다.

크라놀은 1성급 전리품을 새끼룡의 아공간 창고에 저장했다.

다음 층에서는 과연 어떤 보상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됐다.

“키이에에에엑―!”

지하 3층에서는 더욱 많은 병정 개미들과 세 마리의 기사 개미가 출몰했다.

기사 개미들이 일제히 포효했으나, 크라놀은 겨우 맨정신을 지켰다.

허리춤에 랜턴을 단 뒤, 양쪽 귀를 막고 심호흡하며 미리 대비했으니까.

눈이 좀 충혈되긴 했어도, 버텨냈다.

“저것들을 다 태워라.”

“키랴아아아앙!”

이번에도 백색 화염 숨결에 적수가 되진 못했다.

기사 개미들조차도 좀 오래 버틸 뿐, 모조리 새까맣게 불탔다.

[재앙, ‘버림받은 새끼용’이 사냥 중입니다.]

[백색 화염 숨결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2 → Lv.3)]

[화염 숨결에 담긴 신성한 파괴력이 더욱 진해집니다.]

새끼용의 스킬 레벨도 하나가 올라갔다.

그야말로 고속 성장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새끼용이 지친 눈길로 다가오더니 그의 어깨에 올라탔다.

“크랴아아앙…….”

“고생했다. 좀 쉬어.”

크라놀이 육포를 내밀자 새끼용이 허겁지겁 씹어먹었다.

용의 숨결도 무제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나를 꽤 소모하는 편이고, 중간중간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나 무려 3층이나 되는 마수들을 전멸시킨 것치곤 별것도 아닌 페널티였다.

‘과연 1막 최종 보스의 혈통답군.’

자동사냥도 이런 자동사냥이 없었다.

일직선으로 걸으며 전리품만 챙기면 됐으니까.

너무 꿀만 빠는 것 같아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

그런고로 크라놀은 이 새끼 마수에게 포상을 주기로 했다.

“생각해 봤는데, 네 이름은 토실이가 좋겠다. 토실토실하니까.”

“키야아아앙!!”

새끼용이 크게 앙칼지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크라놀은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아니, 그렇게 완강하게 거부할 정도란 말인가?

그때였다.

쾅쾅쾅!!

크라놀과 새끼용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저편에 웬 강철 문으로부터 두드리는 소음이 들렸다.

마수들과 싸우느라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지형물.

그런데 문제는, 문 너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그때 새끼용이 크라놀의 옷깃을 조용히 물었다.

“크랴아아앙.”

“아.”

크라놀이 새끼용을 바라보며 작게 물어봤다.

“저 사람들을 도와주자고?”

곧장 고개를 도리도리 내젓는 새끼용.

“그럼 그냥 지나치자고?”

그러자 곧바로 끄덕이는 새끼용.

확실히 어리더라도 용답게 혜안이 깊었다.

저런 애원의 목소리는 던전에서 함정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인간 목소리로 위장한 마수이거나, 도리어 역습을 노리는 도적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잠깐.’

크라놀은 잠시 턱을 매만졌다.

뭔가 생각하더니 새끼용한테 명령했다.

“새끼용. 저 철문을 녹여라.”

“끼야아아앙!”

새끼용이 불만스레 노려봤다.

그러나 크라놀은 자기 행동의 이유를 설명했다.

“난 나한테 도움 안 되는 사람은 안 구해.”

“키야아아앙?”

“하지만 저건 나한테 이득이 될 사람들이야. 그러니까, 구해야 해.”

“키야아아앙!”

새끼용이 그제야 군소리하지 않고 순순해졌다.

그러면 당연히 구해줘도 괜찮다는 듯이.

크라놀은 픽 웃고 말았다.

‘어린 것이 보기보다 똑 부러졌군.’

백색 화염이 몰아치고, 철문을 녹였다.

그러자 저편에서 꾀죄죄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위에 스러져 있는 마수 사체들과 아직 꺼지지 않은 백색 화염.

그 서슬 퍼런 광경 너머로 서 있는 크라놀을 바라보며 저들이 목소리를 떨었다.

“도, 도대체 누구십니까, 당신은?”

그러나 크라놀은 그 질문을 무시했다.

그러고선 자기가 할 말만 내뱉었다.

“내놔요. 목숨값.”

“……예?”

“지금 내가 살려줬잖습니까. 그러니까, 내놓으라고요. 가장 돈 될 만한 거.”

* * *

‘소용돌이 토굴에 갇혀 있는 사람. 그건 딱 하나밖에 없지.’

마수사냥꾼 비르그.

비록 분량은 짧지만, 그는 원작에서 등장한다.

이미 숨이 꺼진 싸늘한 시체로서.

하지만 지금 그는 비록 초췌할지언정 멀쩡히 살아있었다.

“혼자이신 겁니까? 문 너머에서 분명 누구랑 대화하고 계셨던 것 같은데…….”

“글쎄요, 아마 마수 울음소리를 잘못 들은 거겠지요.”

다섯 명의 사냥꾼들은 주변을 믿기지 않는 눈으로 쳐다봤다.

“세상에. 여기 마수들 사체들 좀 봐.”

“그, 그럼 이걸 겨우 혼자서 다 잡았단 거야?”

“여기 꽤 지하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이 나타나기 전에, 새끼용은 진작 투명화로 모습을 감췄다.

그래서 이 지반에 펼쳐진 백색 화염은 전부 크라놀의 소행처럼 보였다.

개중 긴장한 한 여자가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호, 혹시 마탑 소속의 마법사이신가요?”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

이들은 어설프게 곁가지 마법 몇 개 배운 이들과는 격이 달랐다.

마도(魔道)에 평생을 걸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몸 바친 이들이었으니까.

크라놀은 담담히 대꾸했다.

“스크롤.”

“어……. 네?”

“일단 스크롤부터 내놔요.”

이들은 서로를 돌아봤다.

갑자기 목숨을 구해준 값을 내라니.

“……어, 어떻게 할까요?”

“어쩌기는. 괜히 못 주겠다고 버티다가 싸움이 벌어지면 어떡합니까?”

제아무리 수적으로 앞서더라도 사리 분별은 되었다.

저 남자는 혼자서 대다수의 마수를 털어버리는 강자.

그에 반해 방에 갇혀 쫄쫄 굶은 마수사냥꾼들이 대적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여기, 저희가 가진 스크롤 전부입니다. 진짜니까 배낭을 열어서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비르그가 귀하디귀한 마법 스크롤을 넉 장이나 넘겨줬다.

물론 그 값이 엄청났지만, 목숨값보다야 비싸겠는가?

수월하게 삥을 뜯은 크라놀이 물었다.

“배고픕니까?”

“예? 아, 뭐, 그거야 당연히…….”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2주 동안이나 저 방에만 갇혀서 먹지도, 씻지도 못했으니까.

크라놀은 백색 화염에 타들어 간 개미 마수들 사체를 가리켰다.

“깨진 외피를 떼어내고, 독니를 제거하면 얼추 배를 채울 순 있을 겁니다. 다만 포식하면 탈이 날 수도 있으니 적당히 먹어요. 얼추 허기를 면할 정도로만.”

마수사냥꾼들의 눈에 저절로 불이 켜졌다.

덕분에 허겁지겁 고기를 뜯으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냄새도 나고, 질겼지만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많이 타지 않은 부분은 콱 씹으면 육즙도 흠뻑 나왔다.

“다 먹었으면 따라와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크라놀은 던전의 깨끗한 지하수가 나오는 장소까지 안내해 줬다.

일종의 휴식처로, 원래는 개미 마수들의 식수를 공급하는 장소였다.

덕분에 이들은 목을 축이고 몸도 깨끗하게 씻을 수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정말로!”

“맞아요! 마법사 님이 아니셨으면 저흰 다 죽을 뻔했어요!”

간신히 곤경을 면한 마수사냥꾼들이 몇 번이고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크라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네?”

“이 던전의 심부에는 ‘재앙의 알’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곧장 마수사냥꾼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당연하게도 반갑고 기뻐하는 감정이 스쳤다.

“재앙의 알?! 당신도 고대 문헌에서 그 불길한 물건을 접했군요!”

“강력한 마법사님이 함께 해주신다면 저희도 든든할 거예요!”

“정의로운 분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딴 알은 진작 파괴하는 것이 세상을 위한 길이죠!”

그런데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크라놀은 담담히 선언했다.

“나는 재앙의 알을 반드시 부화시킬 겁니다. 여러분이 함께 그 작업을 도와줘야겠습니다.”

모두가 파괴하려는 재앙의 알.

그러나 남들의 뜻과 달리, 그는 부화를 노렸다.

거기에서 어떤 미친 괴물이 태어날지 알고 있었으니까.

7화 던전 보스

* * *

마수사냥꾼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 전까지 고마워하던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었다.

“저,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크라놀 위자르입니다.”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크라놀 씨.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마수사냥꾼 비르그 크롤입니다.”

비르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희는 마수사냥꾼입니다. 인류의 권익을 위해서, 마수를 처단하는 일을 맡고 있죠. 그래서 설령 생명의 은인이신 크라놀 씨의 말이라도 그런 일은 함부로 따를 수는 없습니다.”

“함부로 따르고 말고가 아니죠. 만약 크라놀 씨가 진심으로 재앙의 알을 부화시킬 작정이라면, 우린 목숨을 걸어서라도 막아설 수밖에 없어요.”

이제까진 크라놀에게 오로지 고마움만 표하던 이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죽더라도 당신을 막아서겠다는 사명감이 깃든 눈빛.

크라놀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원작 주인공과 같은 마수사냥꾼이었다.

모든 마수를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는 재해라 규정하고 사냥하는 이들.

당연히 반박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재앙의 알은, 파괴하면 오히려 세상에 해를 끼칩니다.”

“네? 하지만 고대 문헌에서는 분명히…….”

“그 고대 문헌은 누가 쓴 겁니까?”

크라놀의 물음에 비르그는 말문이 막혔다.

던전에 관한 단서나 힌트는 오래된 문헌이나 탐사 일지, 유언장 등으로 남아있었다.

보통 대부분은 견식 있는 탐험가나 근처 주민, 선배 모험가들이 작성자였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읽은 고대 문헌의 글쓴이가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 고대 문헌은 함정입니다. 오히려 알을 깨뜨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마수가 남긴 글이죠.”

“아니, 말도 안 돼요. 한낱 마수가 인간을 속이려고 글을 썼다고요?”

비리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이 아는 마수들은 본능에 충실하고 미개한 야생 괴물이었다.

그런 놈들이 인간의 문자를 남겼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따라오세요.”

크라놀은 반박하는 대신에 녹아버린 철문으로 향했다.

그곳은 마수사냥꾼들이 갇혀 있었던 밀폐된 방.

방에 있는 왼쪽 흙벽 구석을 발로 차니, 천장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피가 굳은 톱날, 망치, 녹슨 수갑, 오래된 못, 냄새나는 밧줄…….

보기만 해도 살벌해지는 고문 도구들에 사냥꾼들은 당황하고 말았다.

“이, 이건……?!”

“이 방의 용도는 ‘모험가 고문실’입니다. 보통 던전에 이런 것이 있습니까?”

다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던전에 서식하는 마수가 직접 인간을 고문하는 방까지 만들어 냈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지만, 감히 반박하지도 못했다.

직접 저 방에 2주나 갇혀 있었던 사냥꾼들이었으니까.

“여러분은 함정에 걸려든 겁니다. 재앙의 알을 깨뜨리는 것은, 이곳의 마수가 원하는 일이죠.”

원래라면 마수사냥꾼들은 재앙의 알을 깨뜨리는 즉시, 이곳에 갇혀서 고문당해 사망했으리라.

그러나 이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던전 초입부터 추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본래 예정과는 달리 일이 수틀리게 되어버린 것이다.

비르그가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비밀들을 다 아시는 겁니까?”

“굳이 말씀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크라놀은 여전히 담담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다만 제가 아는 진실은, 재앙의 알을 부화시키는 것이 인류를 위한 길이란 겁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로 원작에서는, 멋모르는 모험가들 탓에 재앙의 알이 깨진다.

거기서 흘러나온 마기로 인해 주변의 유목민들이 떼죽음을 당하니까.

‘결국 사유를 조사하러 온 주인공이 고문실에서 우연히 비르그의 시체를 발견하지.’

원작의 비르그는 시체로서 등장한다.

정확히는 유언장으로 던전에 관한 단서를 남기는 역할로.

그의 글을 읽은 주인공은 비르그의 유품들을 전부 줍는다.

“어, 왜 자꾸 제 몸을 보십니까? 혹시 장비도 목숨값으로 요구하시려는 건…….”

“아닙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예상했던 것은 아닌데, 공교롭게도 공략 시기가 겹쳐버렸다.

크라놀은 본래 고문실에 갇혀서 사망했을 마수사냥꾼들을 살려냈다.

당연히 선의만 갖고서 도와준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여러분이 정의를 갖고 행동한다면, 재앙의 알이 있는 심부를 공략해야 합니다. 파괴가 아닌, 무사히 부화시키기 위해서.”

크라놀이 말하자, 마수사냥꾼은 저들끼리 수군대기 시작했다.

“비르그. 어떻게 할까요?”

“……조금 미심쩍긴 하지만, 무시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살벌한 고문 도구들 좀 봐요. 우린 2주를 갇혀 있고도 저런 게 감춰져 있는지를 몰랐잖습니까.”

“우선 믿어보는 게 어때요? 그 알이 정 위험하다 싶으면 새끼 때 죽여도 되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막 부화한 새끼 마수 정도라면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재앙의 알은 사냥꾼들이 던전에 당도한 목적이었다.

예기치 못한 위기를 겪긴 했지만, 그냥 여기서 돌아갈 순 없었다.

서로 의논을 끝내고, 비르그가 종합된 의견을 전달했다.

“알겠습니다. 저희도 크라놀 씨와 던전 공략을 함께하겠습니다.”

“그럼 가시죠.”

“아, 잠시만요.”

비르그가 애석해하며 한 곳을 가리켰다.

고문실에는 손수건으로 얼굴이 덮여 있는 시체 한 구가 있었다.

“저, 사실 떨어질 때 동료 한 명이 죽었습니다. 이곳에라도 시신을 묻어주고 싶어서요. 따로 수습해 바깥까지 가져가기도 힘들 테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세요.”

크라놀은 순순히 그러라고 했다.

사실 저들이 그에게 일일이 허락받는 상황도 웃기긴 했다.

종합 능력치만 따지자면 마수사냥꾼들이 훨씬 우위에 있으니까.

‘하기야 착각할 만도 한가.’

설마 크라놀의 곁에 SSS급 새끼 마수가 붙어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주위에 쓰러진 수많은 마수의 사체와 신비로운 백색 화염.

누구라도 크라놀이 강자라고 오해할 만했다.

저들이 시체를 파묻고 있는 동안, 그는 바위에 혼자 앉아서 쉬었다.

“크랴아아앙.”

투명화한 새끼용은 인간들이 불편한지 쟤들 언제 가냐고 칭얼댔다.

크라놀은 조용히 녀석을 달래줬다.

“조금만 참아.”

마수사냥꾼들은 동료였던 호칸을 묻고서 짧게 묵례했다.

그런 간단한 장례를 마치고 다들 돌아섰다.

이들은 동료의 죽음에 익숙했다.

“아리아 씨. 체력 재생 물약은 얼마나 있습니까?”

“충분해요. 죽을 만큼 목이 말라도 아껴두길 정말 잘했네요.”

“하하! 애당초 아리아의 수제 물약은 바닷물처럼 짜서, 마시는 게 오히려 갈증 유발……. 윽!”

마수사냥꾼들은 지하수로 식수를 보충하고, 개미 고기도 조금 챙겼다.

고급 물약을 마시고 몸을 쉬어주니 저들은 금세 몸을 가볍게 풀었다.

크라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드높은 신체 능력.

하기야 던전을 공략하러 올 수준이니까.

“준비는 끝났습니까?”

“예. 출발하시죠.”

크라놀은 바위에서 일어났다.

급조로 결성된 파티가 던전 심부 공략에 나섰다.

* * *

다음 층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크랴아아아앙.”

새끼용이 조용히 울며 자꾸만 그의 등에 톡톡 건드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무척 불만스러워하는 목소리 같았다.

이미 자기가 있는데, 왜 굳이 쓸모없는 짐들을 데려가냐는 듯이.

‘하기야 새끼용 한 마리면 이 던전 자체도 쉽게 돌파할 수 있겠지.’

그러나 크라놀은 사냥꾼들과 동행하기로 한 이유가 있었다.

당연히 본인의 이득을 위해서였다.

거의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 그가 갑자기 멈춰 섰다.

“크라놀 씨?”

“먼저 앞에서 싸워주시죠. 저는 아직 마나를 더 회복해야 합니다.”

“아, 하긴 위층에서 그렇게 혼자서 마수들을 휩쓰셨으니…….”

마수사냥꾼들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눈치였다.

마법사들이 한껏 마력을 소진하면 얼마나 지치는지는 익히 알려져 있었으니까.

아리아라는 이름의 여자 마수사냥꾼은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해요. 제가 만든 물약 중에 마나를 회복하는 종류는 없어서…….”

“괜찮습니다.”

마나 회복 물약은 고급 물품 중에서도 특히 진귀했다.

마나를 회복하는 재료들은 대부분 최고급품에 속했으니까.

그래서 마나를 채우는 장비나 소모품은 종류를 막론하고 엄청난 고가였다.

“자, 가보자고요. 그동안 방에만 갇혀 있느라 다들 꿉꿉했잖습니까?”

크라놀이 구해낸 마수사냥꾼은 총 다섯 명이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덩치가 큰 비르그가 앞장서 나아갔다.

단단히 무장한 이들은 눈빛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

“키이이엑!”

지하 4층부터는 더욱 강력한 마수가 등장했다.

장군 개미.

마치 투구를 쓴 것처럼 굵직한 외피가 돋아난 이 개체는 훨씬 크고 똑똑했다.

상위 개체의 통솔 아래에 개미 마수들이 체계적으로 일행을 덮쳐왔다.

“마수 군집 돌격이다! B 진형으로!”

정해진 작전 태세가 있는지 이들은 순식간에 진형을 짰다.

싸우는 순간에는 평상시와 다르게 존댓말도 내뱉지 않았다.

비르그의 주도 아래 순식간에 마수사냥꾼들이 움직였다.

방패로 막고, 칼로 치고, 폭탄 물약을 던지고, 활을 쏘고.

반면 크라놀은 느긋하게 뒤편에서 구경했다.

‘역시 자동사냥이 최고라니까.’

그러나 아주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유심히 관찰했다.

마수들을 사냥하는 저들은 공통된 검술을 펼치고 있었다.

‘마수사냥꾼들 특유의 검술. 저건 배워놓으면 쓸모가 많지.’

당연히 아무나 배울 순 없고, 마수사냥꾼 전직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크라놀은 직접 훈련을 받아서 배울 생각은 없었다.

그건 쓸데없이 비효율적이고 시간도 오래 걸리니까.

챙! 서걱!

마수 개미들을 내려치고, 베고, 연한 외피를 노려 갈라서 생살을 찢는 칼날 공격.

원래였다면 보이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크라놀에게는 읽혔다.

저들의 동작에서부터 보이는 일관된 패턴들이.

‘지금 가진 특성 덕분이지.’

천무지체.

황금 엘릭서를 마셔서 획득한 특성.

재앙 친화력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도 꽤 미친 특성이다.

육체 활동 능력이 상승할 뿐만 아니라, 생물의 동작을 장악할 수 있게 되니까.

‘특히 어지간한 하급 전투 기술이나 장병기 사용법쯤은 본 것만으로도 베낄 수 있지.’

[특성, 천무지체가 발동합니다.]

[‘마수사냥검(Lv1)’이 머릿속에 각인됐습니다.]

[‘일반 방패술(Lv1)’이 머릿속에 각인됐습니다.]

[‘일반 궁술(Lv1)’이 머릿속에 각인됐습니다.]

그 덕분에, 저들의 사냥을 관찰한 것만으로도 새로운 스킬을 익힐 수 있었다.

마수사냥검은 모든 마수사냥꾼이 가장 처음 익히는 기본적인 검술.

대인 결투에 특화되어 있진 않지만, 마수를 공격할 땐 아주 유용했다.

추가적인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스킬에 보정이 들어가 있어 대처나 반격도 손쉬웠으니까.

일반 궁술과 방패술 또한 아주 흔한 전투 스킬이긴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강해질 수 있는 요소라면 뭐든 집어삼키는 게 이득이니까.’

이 세계에서는 ‘레벨’이란 것이 없다.

절대적 강함의 척도가 없는 셈이었다.

종합 능력치, 전용 스킬, 장비의 질, 타고난 재능, 전투 경험, 태생적 잠재력 등등.

개개인의 모든 자질과 숙련이 종합적으로 쌓여 힘을 결정지었다.

심지어 상성에 따라서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적을 드물게 꺾기도 했다.

‘여러 가지를 단련하고 쌓을수록 각종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좋다는 거지.’

물론 작중 한 분야만 단련해서 정점을 이룬 작자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영역을 초월한 독종들에게나 해당하는 거고.

어쨌든 강해질 수 있는 보상은 제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도움이 된다.

언젠가는 반드시 쓸데가 생길 테니까.

“키이에엑!”

“끝이다!”

비르그의 칼이 장군 개미의 외피를 파고들었다.

딱딱한 외피 사이로, 아주 작은 말랑한 부위를 용케도 노린 것이다.

고통스럽게 울던 장군 개미는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사망해 버렸다.

“크랴아아앙.”

투명한 새끼용이 저 인간들 꽤 한다는 듯이 속삭여 울었다.

확실히 위험한 던전을 공략하러 올 만한 사냥 실력이었다.

고문실에 운 나쁘게 갇히지만 않았더라도 이곳 심부까지는 무난하게 도달했으리라.

“고생하셨습니다. 제가 나설 틈도 없었군요.”

“하하! 괜찮습니다! 이런 잡졸 사냥이야 저희로도 충분한걸요. 크라놀 씨 수준의 강자가 나설 필요도 없죠. 충분히 회복하셨다면 그걸로 괜찮습니다.”

사냥을 끝마친 이들은 전리품을 회수했다.

그런데 장군 개미로부터 심상찮은 아이템이 나왔다.

[명칭: 장군 개미의 대가리 외피.]

[등급: ★]

[성능: 강철보다도 단단한 특수 외피. 실력 있는 장인이라면 본떠서 좋은 투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결함 없이 완성된 투구에는 특수한 옵션이 붙는다.]

이번에도 1성급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마수사냥꾼들이 저들끼리 쑥덕였다.

비르그가 갑자기 그 보상을 크라놀에게 내밀었다.

“이건 크라놀 씨가 가져가세요.”

“저는 이번 층에서 싸우지 않았습니다만.”

“이것도 저희 목숨값이라고 생각해 주시죠. 대신에, 보스룸에서의 싸움에선 이런 양보는 절대로 없습니다. 공평하게 각자의 공적대로 전리품을 나눌 거니까요.”

크라놀은 ‘장군 개미의 대가리 외피’를 물끄러미 봤다.

사실 1성급치고는 조금 애매한 아이템이긴 했다.

당장 쓰거나 착용할 수 없고, 어디까지나 장비 재료이니까.

물론 가져가서 팔면 돈이야 될 테지만, 이들은 어지간히 크라놀의 눈치가 보였나 보다.

아까 재앙의 알로 분위기가 일순간 싸늘해졌던 것도 주요한 원인일 터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눈치가 좋군. 지금 당장의 이득보다는 길게 본다는 건가.’

하긴 이런 마수 사냥 때는 당연히 최강자를 우대하고 설설 기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런고로 지금의 과한 친절은, 속되게 해석하자면 ‘잘 좀 봐달라’라는 의미였다.

적당한 보상은 강자한테 양보하고 보스전 이전에 서로 결속을 단단히 하려는 속셈일 터.

“고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오는 이득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덕분에 크라놀은 1성급 아이템을 두 개나 챙기게 되었다.

벌써 만족스러운 이득이었다.

‘강자라고 착각당하니 얻는 게 많군.’

그렇게 이들은 순조롭게 지하 5층에 돌입했다.

그런데 들어서자, 아무런 마수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웬 커다란 방으로 들어서는 통로.

“보스룸입니다! 이번이 마지막 층이에요! 다들 긴장합시다!”

보스룸.

마침내 던전의 심부에 도달했다는 의미.

저 방 안에 이 던전의 우두머리인 보스 마수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크랴아아아앙…….”

투명화한 새끼용도 덩달아 긴장했는지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고로롱댔다.

모두가 태세를 단단히 준비한 채, 보스룸에 입장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펼쳐진 광경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어?”

외피가 갈라져서 사망해 있는 개미 마수의 사체.

무려 5미터에 달하는,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못 할 거구(巨軀).

그 대가리에는 던전 우두머리의 징표인 ‘왕관 표식’이 찍혀져 있었다.

보스 마수인 여왕개미가, 사정 없이 박살 나 죽어 있었다.

“아니, 보스 마수가 왜 벌써 죽어 있는 거야……?”

“설마 우리보다 먼저 들어온 모험가들이 있었던 건가?”

“그럴 리가! 여긴 아무도 공략한 적 없는 던전이라고요!”

모두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다.

그러나 크라놀만은 달랐다.

도리어 기대감을 품고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정체 모를 존재에게 보스 마수가 이미 살해당했다는 것은.

한층 더 높은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사냥감이 이곳에 도사린다는 것이니까.

8화 중대형 마수

* * *

다들 등골이 섬찟했다.

이미 보스 마수가 죽어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훨씬 강력한 생명체가 앞서 이곳을 지나갔다는 것.

“저것 봐요. 살이 썩고, 피가 말라 있어요. 죽은 지는 꽤 된 것 같아요.”

“으윽. 외피는 부패한 살점과 독니의 독이 옮겨져 있어서 채집하기 어렵겠는데요.”

“설마 보스 마수를 죽인 존재가 아직 근처에 있을까요?”

“글쎄요, 일단 좀 더 내부로 진입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다들 서로의 눈을 바라보다가 끄덕였다.

이곳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거기다 어차피 ‘보상의 방’에 도달하려면 보스룸을 지나야 하기도 했고.

“안이 어둡군요. 다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보스룸.

모든 던전마다 반드시 존재하는 우두머리의 서식처.

지형과 관계 없이 내부 공간이 넓어지며, 환경도 가지각색이었다.

심지어 때로는 자연법칙을 위배하는 변수가 추가되기도 했다.

바로 지금 이곳처럼.

“어? 이상하다? 기름도 충분한데 랜턴 불빛이 너무 약해요.”

“아무래도 이 공간의 특이점인 것 같습니다. 빛이 어둠에 먹히는군요.”

랜턴으로 밝혀서 볼 수 있는 범위가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저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

그 탓에 보스룸 내부 환경은 한층 음산하고 위험했다.

“최대한 조심히 움직입시다. 다들 긴장 풀지 마세요. 크라놀 씨도 전투를 준비해 주시고요.”

앞장선 비르그의 말에 크라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은 보이지 않는 어둠을 미약한 랜턴 불빛으로 밝히며 천천히 나아갔다.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흙으로 다져진 공간이 어찌나 광활한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상할 만큼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아리아가 속삭이며 놀랐다.

“세상에. 정말로 넓네요. 이렇게 큰 보스룸은 처음 봐요.”

“하기야 개미잖아요. 불빛도 없이 이 토굴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마수일 테니까요.”

“원래는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보스 마수와 싸워야 했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군요.”

“아무튼 이곳저곳 랜턴으로 계속 비춰보죠. 보상의 방이 어딘가 통로로 이어져 있을 겁니다.”

보스룸은 외관에서 보이는 것보다 내부가 훨씬 넓었다.

그 탓에 일행은 어둠 속을 무려 30분 가까이 헤매야만 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흙의 비린내와 서로의 땀 냄새가 진하게 느껴졌다.

톡톡.

그때 투명화한 새끼용이 뭔가 있다는 듯이 크라놀의 허벅지를 앞발로 두드렸다.

이 녀석은 남들보다 어둠 속을 멀리,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암시야’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비르그. 지금 왼쪽에다가 랜턴을 비춰주시겠습니까?”

크라놀의 말에, 비르그가 랜턴을 아주 가까이 가져갔다.

희미한 빛무리 끝에서 무언가 지형지물이 보였다.

그것은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어, 저건?”

“틀림없어요! 보상의 방이에요!”

“세상에. 크라놀 님! 어떻게 아신 거예요?”

크라놀은 남들이 하는 오해에 맞춰서 적절하게 핑계를 댔다.

“그냥 마법사의 감입니다.”

다들 서둘러 이어져 있는 문을 열고 입장했다.

흙으로 다져진 공간이 아니라, 석벽으로 이뤄진 또 다른 밀실.

물론 어둠이 빛을 빨아먹는 공간의 특이점은 여전했기에 어두웠다.

그러나 이곳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는 궤짝을 발견했을 때 모두가 안도했다.

“보상 상자가 그대로 있어요!”

“보스 마수가 죽어서, 진작 누군가한테 털렸을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크량!”

투명화한 새끼용도 칭찬해 달라는 듯이 크라놀의 한쪽 팔에 엉겨 붙었다.

어지간히도 복덩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다.

덕분에 더 길게 헤매지 않고 보상의 방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

끼익.

다들 기대를 품고 보상의 방에 있는 궤짝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두 개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꽤 고급스러운 양식의 검은 가죽 장갑.

그리고 보랏빛 기운을 내뿜고 있는 큼지막한 알이었다.

이들은 앞선 것부터 확인했다.

[명칭: 마기의 장갑.]

[등급: ★★]

[성능: 소악마에게 항거했던 성기사의 특별한 장비. 사악한 힘을 빨아들여 소수의 능력치로 변환하는 기능이 있다. 전용 스킬, ‘마기 흡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세트 장비를 함께 착용하면, 아이템 옵션이 변화한다.

+공명하는 장비는, 대륙 어딘가의 신전에 숨겨져 있다.]

마수사냥꾼들의 눈이 확 커졌다.

2성급 장비 아이템.

앞서 발견했던 1성 전리품들보다 훨씬 가치 있는 장비였다.

거기다 성능 또한 뛰어나기 그지없었다.

무려 ‘능력치’를 올려주는 장비였으니까.

단 1의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서는 지독히 고생해야 한다.

자기 한계를 돌파하는 경험을 해야 간신히 올라가는 수치이니까.

그래서 대부분 차선책으로 스킬을 단련하는 것을 선택하는 편.

그러나 이 마기의 장갑은 그 능력치를 올려주는 옵션을 지녔다.

당연히 가격이 천정부지로 높을 수밖에 없는 아이템.

“꿀꺽.”

다들 절로 군침이 넘어가는 보상품이었다.

그러나 감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보상이 존재했으니까.

[명칭: 재앙의 알.]

[등급: ★★★★★]

[성능: 보관된 던전의 난이도에 비해 극도로 위험한 알. 요정들의 배송 실수로 잘못된 보상 상자에 넣어졌다. 규격 외의 재앙이므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내부에 있는 생명체가 성체로 자라날 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아니, 와. 미친!”

“세상에, 맙소사……! 내가 뭘 잘못 본 건가?”

“이거…… 정신 나간 거 아니에요?”

무려 5성급 아이템!

이만한 등급은 한 국가를 통틀어서도 흔치 않은 수준이었다.

종류나 용도에 따라서 분명 부르는 것이 값이 될 보물.

그러나 아이템 설명만큼은 불온하기 그지없었다.

“와, 외관이 장난 없네요. 새알보다도 크네.”

“그런데 재앙이 된다면 절대로 부화시키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설명만 봐서는 당장 부숴버려야 큰일을 안 치를 것 같은데?”

상태창 글귀에 겁먹은 이들을 향해 크라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지독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였다.

재앙이 반드시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종의 말장난입니다. 재앙이란 것이 꼭 인류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니까요.”

실제로 이 설명문에서 뜻하는 ‘재앙’은 인류가 아닌, 천계의 존재들을 향한 것이다.

천계는 이곳 1막 무대와는 달리, 천사와 악마처럼 불가해한 이들이 살아가는 곳.

그래서 고대 문헌을 조작한 마수도 이 알을 깨부수길 유도한 것이다.

놈은 악마에게 잘 보여서 계약을 맺길 간곡히 원하니까.

“음. 뭐, 불안하긴 하지만 크라놀 씨의 말이니까요. 일단은 부화시켜 볼까요?”

“그런데 이걸 태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따뜻하게 품어줘야 하려나?”

그렇게 다들 재앙의 알 처우에 관해 의논하고 있을 때였다.

쾅!

갑작스러운 소음에 다들 고개를 돌렸다.

대뜸 보상의 방을 나가는 문이 닫혔다.

그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도.

―왜 부수지 않는가.

어디선가 낯설고 음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흠칫 놀라서 황급히 무기를 쥐고 진형을 갖췄다.

헛것을 들었나 싶었지만, 그 기분 나쁜 음색은 계속 들렸다.

―네놈들은 글귀도 읽을 줄 모르는가. 왜, 그 알을 깨부수지 않느냔 말이다.

“어? 저기 좀 봐!”

부넷이란 이름의 마수사냥꾼이 어둠 속을 가리키며 랜턴을 들었다.

천장에 웬 큰 짐승의 사체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길쭉하고 썩어있는 박쥐 같은 자세.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어떤 생물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이윽고 불빛이 닿은 순간, 그 징그러운 괴물이 날개를 펼쳤다.

화아아아악!

“큭!”

“뭐, 뭐야! 아악!”

그것이 날개를 휘두르자 엄청난 강풍이 휘몰아쳤다.

소규모 폭풍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준의 존재감.

준비했던 진형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다들 바람에 휩쓸려 무게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그러는 동시에, 뭔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뭐, 뭐야?! 이 소용돌이는! 뭔가 익숙한데?”

“이 토굴 주위에 몰아쳤던 소용돌이예요!”

“서, 설마 저 녀석이 그 재해의 원인이었던 거야?”

사체 같아 보이는 괴물이 천천히 일행에게로 다가섰다.

온몸에 썩어있는 살점이 붙은 형체.

손상된 비늘 틈으로 군데군데 살벌하게 드러나 있는 뼈.

자세히 보니, 그것은 영락없는 ‘용’이었다.

“부, 부패룡이다!”

“제기랄, 저딴 게 왜 이런 던전에 들어와 있는 거야!”

부패룡.

물론 성체에 비하면 작은, 황소 세 마리만 한 중대형 크기.

아마도 완벽히 성장하기 이전에 죽었던 사체가 되살아난 듯했다.

그러나 엄연히 용은 용.

상위종답게 수십 명을 동원하더라도 결코 잡기가 쉽지 않은 강력한 마수였다.

―한없이 미개했던 인간 놈들이 꽤 명석해졌구나. 늘 상태창 글귀라면 철석같이 맹신하던 것들이었는데. 설마 그 알을 부화시키려고 들 줄이야.

단순히 위용만이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저 중대형 마수는 고급스러운 어휘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

노련한 마수사냥꾼들조차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마수가…… 인간의 말을 내뱉고 있다고?”

그만큼 지능이 높고, 변이 개체란 의미.

분명 고대 문헌을 이용해 사냥꾼들을 이곳까지 이끈 흑막이 분명했다.

그리고 크라놀은 부패룡이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마수는 보상 상자를 열 수 없다. 그래서 모험가들을 속여 이곳에 불러들인 거지.’

직접 부수지 못하니, 남의 손을 이용하려 했던 것.

부패룡의 오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눈에 너희는 개미와도 다르지 않다. 한낱 미물들 따위가 불필요하게 현명할 필요는 없는 법.

뼛속으로부터 시퍼런 안광이 번뜩였다.

―나의 이름은 기로그날. 이 내가, 너희에게 천벌을 내리리라.

마수사냥꾼들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심지어 자기의 이름까지 갖추고 있는 ‘네임드’.

이건 도무지 이만한 던전에서 나올 법한 괴물이 아니었다.

어느 한 지대의 우두머리로서 활동해도 전혀 무리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혼란에 빠진 이들 가운데에서도 유일하게 침착한 사람이 있었다.

‘일단 투명화로 내 몸을 감춘다. 그리고 내가 가진 히든 피스와 새끼용까지 총동원해야겠지.’

크라놀은 머릿속으로 이미 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과거에 용병 의뢰를 해결하며 모았던 히든 피스들이 아직 조금 있었다.

물론 성수는 새끼용을 살리느라 전부 써버렸지만.

‘순은 십자가’, ‘천사의 눈물이 묻은 작대기’ 따위는 아직 사용 횟수가 남아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절대로 쉬운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크량.”

새끼용도 잔뜩 비장하게 그의 곁에 으르렁댔다.

크라놀이 복사했던 투명화를 사용하려고 할 때였다.

바로 그때, 그조차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일어났다.

“어?”

부패룡 기로그날이 뼈밖에 없는 날개를 펼쳤다.

썩어가는 아가리를 벌리며 크게 포효했다.

―크롸롸라라라라라라―!

웅장한 굉음이 쩌렁쩌렁 보스룸을 울렸다.

귀를 막아도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수준.

다들 전의를 상실하고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피해였다.

“……!”

“어어? 크라놀 님이 피를 흘리세요!”

바로 곁에 있던 아리아가 당황했다.

그에게서 코피가 터져서는 줄줄 흘렀다.

그런데 그 출혈량이 보통 수준을 넘었다.

얼굴이 흠뻑 다 젖어갈 정도였으니까.

“……크라놀 씨? 괜찮은 겁니까!”

비르그가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한 채 소리쳤다.

다들 크라놀의 출혈이 부패룡의 스킬 탓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것은 크라놀만이 앓는 광증이었으니까.

덜덜 떨리는 손이 강박적으로 품 안을 뒤졌다.

“윽, 어억, 윽.”

크라놀이 충혈된 눈으로 약초를 퍼먹기 시작했다.

멎지 않는 코피를 흘리며, 약에 전 중독자처럼.

어딜 봐도 정상인 상태가 아니었다.

―크롸롸라라라라라라―! 이 나를 만난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너희 중 몇 명은 특별히 살려서 고문실에 가둬두도록 할 터이니! 크롸롸라라라라라라―! 알의 파괴 임무를 맡은 이 위대한 나의 여흥 거리가 되어라! 크롸롸라라라라라라―!

그런데 약초를 퍼먹고 났는데도 저 개 같은 굉음이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듯한 크라놀은 피로 물든 얼굴을 구겼다.

그러고는 눈치 없이 포효하는 부패룡을 노려보며 손짓했다.

“……씨발, 닥쳐.”

―억?!

부패룡 기로그날이 멈칫했다.

순간 벌려진 아가리가 꿈틀했다.

곧이어 전신 뼈가 갈라지더니…….

―컥!

퍼석―!

……호쾌하게 뼛가루를 흩날리며 산산조각 나 터졌다.

‘일격’이라고 할 수도 없는, 고작 손가락 긋기 한 번.

겨우 그걸로, 전부 끝이었다.

“어?”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널브러진 뼛조각들을 내려다보며 마수사냥꾼들은 넋을 잃고 말았다.

직접 자신들의 눈으로 지켜보고도 감히 믿을 수 없었다.

엄청날 것처럼 출현했던 상위종 언데드가, 한순간에 즉사했다.

겨우 크라놀의 손짓 한 번으로.

9화 재앙의 알

* * *

다들 뒤늦게 하나둘씩 입을 열었다.

“뭐, 뭐야.”

“다 끝난 거야?”

“맙소사. 고작…… 한 방에?”

마수사냥꾼들은 이제 경외하다 못해 두려운 눈빛으로 크라놀을 바라봤다.

저 인간은 뭔데 저 강력한 부패룡을 단 한 번에 즉사시킨단 말인가!

도대체 지닌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가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크라놀의 상태가 뭔가 좀 이상했다.

“…….”

원작을 아는 그는 한 가지 변수를 간과했다.

부패룡 기로그날이 지독한 수다쟁이에, 포효로 가오 잡길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러한 굉음은 광증 발작을 일으키기 딱 좋았다.

“아!”

크라놀은 무릎을 꿇고 넘어졌다.

그리고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쥔 채 신음을 토했다.

여태껏 한없이 무심했던 그가 고통에 차서 눈물까지 쏟고 있었다.

“크, 크라놀 씨! 괜찮은 겁니까!”

비르그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부축했다.

정신을 잃어 가는 크라놀은 피와 눈물로 얼굴이 젖어 있었다.

상태를 진단한 그가 황급히 아리아를 쳐다보았다.

“체력 재생 포션!”

“어, 얼마 안 남았어요. 지금 거의 반병도 없는…….”

“그거라도 빨리!”

아리아가 거의 바닥을 드러낸 붉은 용액 병을 황급히 꺼내서 내밀었다.

일단 출혈 피해라도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비르그가 서둘러 쓰러진 크라놀에게 그것을 먹였다.

“……쿨럭!”

피 묻은 입술에 포션을 흘려주자, 그가 곧장 기침을 쿨럭였다.

넘쳐흘렀던 코피가 다행히 조금씩 출혈이 덜해졌다.

비르그가 걱정하며 물었다.

“괜찮습니까, 크라놀 씨?”

정신을 차린 크라놀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증오에 찬 눈으로 물었다.

“……왜, 나한테, 바닷물을 먹였지?”

예상치 못한 발언에, 다들 어처구니없이 서로 바라봤다.

처음엔 모두가 참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고 말았다.

“……푸흡. 푸하하하하!”

결국 부넷이 가장 먼저 배를 잡고 폭소했다.

“거 봐! 내가 말했잖습니까! 저 포션 진짜 짜다니까!”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다른 이들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으니까.

오직 아리아만이 기분이 상해서 잔뜩 그들을 째려보았다.

“다들 웃지 말아요! 바닷물 정도는 아니란 말이에요!”

“아, 미안합니다. 아리아. 이러면 안 되는 상황이란 걸 알지만, 너무 웃겨서.”

비르그가 겨우 진정하고 크라놀을 바라봤다.

“크라놀 씨. 방금 드신 것은 바닷물이 아니라, 아리아가 직접 만든 체력 재생 포션입니다. 어떤 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피를 흘리며 쓰러지셔서 혹시나 도움이 되려나 싶었습니다. 출혈은 어느 정도 멎은 것 같습니다만, 이젠 괜찮아지신 겁니까?”

“약간 정신은 돌아온 것 같습니다. 혀가 너무 짜서.”

“아, 포션 효능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맛이 짜서 제정신을 차리셨다고요? 푸하하핫! 어억!”

부넷은 또다시 눈물까지 흘리며 웃다가, 아리아에게 등짝을 처맞았다.

반면 크라놀은 얼굴을 닦고,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다행히도 광증 발작이 한계치까지 올라가지 않고 멎었다.

‘약초 안 가져왔으면 다 죽였겠지. 여기에 있는 모두를.’

광증은 사람 미치게 하는 질병이었다.

왜냐하면 적당한 기준선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과하다 싶을 만큼 심각해서 약초를 먹어야 하고, 또 어떤 때는 금방 가라앉았다.

간혹 실신이나 기절해 버린 일도 있었고,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텨냈던 사례도 있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미쳐버릴지 모르는 불규칙한 증세.

그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심지어 시간이 흘러 광증의 증세가 과해지면 약초를 써도 말을 안 듣는 지경이 와버리지.’

원작의 크라놀 위자르가 결국 미쳐버렸던 이유였다.

수도원 정신질환자로서 살다가, 결국 광기에 자아를 잡아먹혀 학살을 범한다.

그가 지하 감옥으로 이송돼 작중 대부분의 시간을 복역하게 되는 이유.

물론 나중엔 어찌저찌 탈출해 작중 최후반부 ‘재앙 친화력’까지 각성해 버리고 말지만.

아무튼 크라놀은 스러진 부패룡의 뼈들을 내려다봤다.

‘다시 봐도 끔찍하긴 하네. 설마 부패룡도 일격에 죽일 줄이야.’

중대형 마수를 일격에 즉사시키는 압도적인 마력(魔力).

물론 그렇다고 당연히 무적은 아니었다.

세계의 거물 중에선 이만한 일격쯤은 버텨낼 이들이 널렸다.

도리어 자만했다간 불안정한 상태에서 역습당해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마법적 힘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지.’

크라놀이 성장할수록 광증 발작으로 인한 폭주 또한 강대해진다.

훗날 경지를 높이면 능력 범위도 강화될 테고, 숱한 재앙들마저도 선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작중 최후반부의 크라놀은 원작에서조차 상대할 적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즉사기 수준의 공격을 밥 먹듯이 남발했으니까.

‘기대가 크군. 물론 완전히 미치진 않게 조심해야겠지만.’

크라놀은 강해지길 원했지만, 원작의 루트는 타고 싶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광증을 깨끗이 완치하는 게 목표였으니까.

그래서 굳이 수고스럽게 소용돌이 토굴까지 온 것이었다.

“어쨌든, 이제 보상은 어떻게 분배하면 될까요?”

유독 존재감이 없던 마수사냥꾼 한 명이 슬그머니 눈치를 봤다.

보스 마수를 살해하고 이 공간을 차지했던 부패룡은 퇴치됐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달콤한 보상을 가져가는 일뿐.

비르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런 얘기는 굳이 왜 하는 겁니까?”

“맞아요. 분배할 게 뭐가 있겠어요?”

“당연히 크라놀 씨가 전부 가져가야 합니다.”

그야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얘기를 나눴지 않은가.

보스전은 공평하게 각자의 공적대로 전리품을 나누자고.

당연히 가장 드높은 공적을 세운 것은 크라놀이었다.

애당초 단 한 방으로 부패룡을 해치워 버렸으니까.

“크라놀 님이 아니었으면 저희는 모두 죽고 말았을 거예요. 부패룡이 어디 보통 마수인가요? 비록 성체가 아니었긴 해도 저만한 크기라면 저희 같은 파티는 진작 전멸이었다고요.”

“맞아요. 논의할 것도 못 됩니다. 누가 봐도 이번 공로 1위는 크라놀 씨예요.”

“아, 뭐. 물론 5성급 아이템이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무래도 저희 수준의 사람들이 감히 감당할 물건이 아닌 것 같아요. 크라놀 님이 잘 처리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던전을 공략한 파티가 보상에 대한 다툼으로 와해하는 일도 적잖았다.

이 공적이라는 개념이 개인에 따라 애매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그야말로 크라놀의 독주.

애초에 보스룸에서 전투를 벌인 것도 그뿐이었으니, 보상을 독점하는 것이 당연했다.

‘덕분에 귀찮게 보상 갖고 싸울 일은 덜었군.’

물론 이것은 상식선의 얘기였다.

보상에 눈독 들여 최대 기여자를 배반하는 일도 많았으니까.

예의와 선을 지키는 사람들이라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크라놀은 숨을 거둔 부패룡의 뼈 더미로 다가갔다.

‘시체병에 걸린 새끼용이 아닌, 진짜배기 부패룡.’

여기에, 그가 그토록 원했던 보상품이 있었다.

무수하게 부러지고 바스러진 뼛조각 무더기.

피 묻은 손으로 뼈 잔해를 파헤치며 뒤졌다.

‘아, 찾았다.’

쪼글쪼글하게 말라비틀어진 기이한 생김새의 검붉은 장기.

그러나 이것은 감히 무시할 만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무려 부패룡의 드래곤하트였으니까.

[명칭: 부패룡 기로그날의 심장.]

[등급: 유니크]

[성능: 언데드가 되어 부활했던 용의 심장. 진작 모든 혈관이 썩고, 고인 피는 부패했다. 그러나 아직 위대한 상위종의 힘이 남아 있다. 섭취하면, 미약한 ‘용혼(龍魂)’을 얻을 수 있다.]

[부작용: 생혈과 함께 섭취하지 않으면 식중독에 걸린다.]

유니크 등급 전리품.

별이 붙지 않은 아이템엔 별개의 등급이 매겨졌다.

보통은 일반, 레어, 유니크, 초월, 전설 순서로 분류됐다.

‘수호성에게 봉헌할 순 없지만, 상위 등급 아이템도 만만찮게 진귀하다.’

사실상 별이 달린 것 이상으로 진귀한 아이템.

드래곤 하트는 말 그대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물론 언데드의 부속품이라서 진정한 드래곤 하트만큼의 효과를 기대할 순 없지만.’

복용하면 꽤 짭짤한 버프를 얻을 수 있다.

앞으로 점점 격해질 광증의 증세를 억누를 가호.

일명, ‘용혼(龍魂)’.

그러나 지금 당장은 먹을 생각이 없었다.

‘광증이 주체 못 할 만큼 심화했을 때를 위해 아껴놔야지.’

한마디로 ‘비상약’ 개념인 셈.

방금에야 약초로 진정됐지만, 광증이 말도 안 되게 폭주했을 경우를 위한 안전장치였다.

귀중한 생명줄을 챙긴 크라놀은 뼛조각 더미를 가리켰다.

“이 남은 뼈와 비늘은 가져가시죠.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네? 그래도 될까요?”

“예. 어차피 저는 다 못 들고 갑니다.”

새끼용의 아공간에 전부 담으면 되겠지만, 지금은 투명화 중이니 곤란하다.

물론 저들이 떠난 새에 몰래 챙겨가는 방법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용의 사체는 부패 수준에 따라서 비싼 값을 받고 팔 수도 있으나 기로그날은 아니었다.

워낙 잔뜩 썩은 데다 산산이 박살 나버려서 장비 재료로서의 가치도 없었으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마수사냥꾼들이 챙겨가는 것이 낫지.’

저들의 본부에는 마수를 전문적으로 조사하는 학자 부류가 많았다.

비록 부패하고 손상됐을지라도 용의 뼈와 비늘이라면 환장을 할 터.

사실 크라놀도 대략 눈치는 챘다.

‘저 사냥꾼들도 어느 정도는 이걸 노리고 내게 친절하게 군 것이겠지.’

본래 고생한 이들에게 개평이라도 내어주는 것이 예의였다.

크라놀 본인이 선해서가 아니라 괜한 항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자신을 어마어마한 강자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함부로 덤빌 일은 없겠지만.

‘대놓고 독식만 해대다가는 탈이 나기 마련이니까.’

자신한테 필요 없는 전리품쯤은 적당히 내어줘도 괜찮았다.

어쨌든 저들도 본부로 들고 돌아가야 할 성과가 있어야 할 테니까.

크라놀은 눈을 돌렸다.

‘그다음은 이 던전의 보상.’

보상 상자에 담긴 마기의 장갑을 꺼내서 손에 착용했다.

검은 가죽 장갑은 저절로 손아귀에 맞는 크기로 변했다.

손에 감기는 착용감도 편하고, 디자인도 세련되어서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재앙의 알이었다.

“그 재앙의 알은 부화시켜야 하지 않나요? 저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건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다들 여기 모여서 함께 손을 얹어주시겠습니까?”

반신반의한 사냥꾼들이 알의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손을 얹었다.

크라놀은 대표로 축복문(祝福文)을 읊었다.

“위대한 주여, 저 작은 껍질 안에 깃든 새로운 생명을 지켜주소서. 그 안에서 고요히 숨 쉬는 존재가 세상의 빛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 힘찬 첫걸음을 축복하여 주소서.”

송사를 끝낸 그는 알을 배낭에 챙겼다.

워낙 커서 안이 가득 들어찼다.

“어? 겨우 이걸로 끝인가요?”

“네. 알의 부화 시기는 앞당겨졌습니다.”

재앙의 알은 단체 축복문 송사로 부화 기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특히 마수사냥꾼들처럼 잔혹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직업군이 함께하면 효과가 좋았다.

이 알을 낳은 부모들의 성향과 닮아 있었으니까.

“이제 그 알이 부화하면 어쩌시려고요?”

“그것까지 말씀드릴 이유는 없습니다.”

마수사냥꾼들은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아쉬워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크라놀의 말은 단 한 번도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으니까.

더군다나 이제는 다들 그가 단순한 마법사가 아니라고 느꼈다.

중대형 마수도 손짓 한 번으로 살해하는 강자한테 어찌 뭘 더 캐묻겠는가?

비르그가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걸로 된 거군요. 정말 지옥 같은 던전이었습니다.”

“저도요. 이제는 바깥 햇살이 정말로 그리워요. 빛을 본 게 언젠지.”

마수들의 사체로 가득 찬 토굴을 벗어나 계단을 올랐다.

“아, 잠시만요. 여기는 반대편으로 갈고리 밧줄을 던지면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잘못하면 또 고문실로 떨어질 거예요!”

다들 무너졌던 초반 입구의 지반도 무사히 건너왔다.

던전 밖으로 나오니 황야의 소용돌이가 잠재워져 있었다.

이곳의 부패룡 기로그날을 처치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저는 좀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녀석은 왜 굳이 소용돌이 지대를 만들었을까요?”

“맞아요. 인간 보고는 멍청하네, 어쩌더니. 차라리 개미 마수들도 전부 해치우고 던전도 깨끗이 비워놓았다면 아무 인간이나 들어와서 그 알을 깨뜨리기가 좀 더 쉬웠을 텐데요.”

그러자 크라놀이 대꾸했다.

“이 토굴을 시작으로 황야를 자기 지배하에 두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소용돌이들은 일종의 영역 표시였던 셈이죠.”

“아……. 과연 용답네요.”

보통 용들은 자기 레어에 관한 탐욕이 컸다.

개중에서는 한 지역 자체를 본인의 휘하로 두려는 개체들도 있었다.

그러니 토굴을 휩쓰는 것보다는, 일부러 잡졸 마수들을 놔뒀으리라.

던전에 들어오려다가 인간들이 죽으면 훗날 황야를 점령하기 유리해질 것이고, 마수들을 전부 처치하고 내려온다면 알을 부수게 한 뒤에 죽여버리면 그만이니까.

‘여왕 개미 마수를 살해했던 것도, 이 토굴을 자기 레어로 쓰기 위해서였겠지.’

어쨌든 던전 공략이 드디어 끝났다.

비르그가 물었다.

“이제 크라놀 씨는 어디로 가시나요?”

“비르시 영지로 돌아갈 겁니다. 그곳에 아직 해야 할 의뢰가 남아있습니다.”

“그러면 저희와는 반대 방향이겠군요. 저희는 마수사냥꾼들의 본부로 되돌아갈 생각입니다.”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되면 그때는 더 좋은 시간 보내요!”

크라놀은 마수사냥꾼들과 작별 인사를 나눴다.

무심한 그는 끝까지 별로 표정에 변화도 없었다.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크라놀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일이었다.

“크랴아아앙!”

“아.”

맞다.

이 녀석이 있었지.

투명화를 푼 새끼용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크량? 크랴아앙!”

울먹이는 새끼용이 성을 내며 크라놀을 걱정했다.

이 어린 것은 또 그가 죽으면 어쩌나 크게 염려했나 보다.

크라놀은 핏자국으로 얼룩덜룩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넌 내가 무섭지 않은 건가?”

언제고 또 광증이 터지면 이 조그만 용도 위험해질지 모른다.

오늘 그의 손에 박살 나서 스러진 부패룡처럼.

그러나 새끼용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크랴아아앙.”

작은 새끼 마수가 자신한테 선뜻 다가와서 안겼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비늘은 참 보드라웠고, 조그만 몸뚱이는 따뜻했다.

크라놀은 말없이 녀석을 내려보다가 쓰다듬어 줬다.

“크랴아아앙!”

언제는 또 손길을 그렇게 거부하더니, 이제는 무척 기분 좋아했다.

새끼용이 자신한테 와서 몸을 비비고 안겼다.

그는 굳이 이 어린 것을 쳐내지 않았다.

“아.”

그때였다.

배낭이 움직였다.

곧바로 열어보니, 재앙의 알이 흔들리고 있었다.

‘질질 끌지 않아서 좋군.’

무려 5성급의 알.

원래라면 부화할 때까지 반년은 넘게 걸렸을 텐데.

역시 마수사냥꾼들을 구출해서 동원한 보람이 컸다.

예상했던 것보다 부화 시기가 훨씬 앞당겨졌으니까.

크라놀은 벌써 기대감이 컸다.

‘재앙의 알. 원작에서는 부화하지도 못한 채 깨졌었지.’

그러나 자신에 의해 이 알의 운명은 바뀌었다.

괜히 이것을 얻기 위해 던전까지 격파한 게 아니었다.

그만큼 이 알에는 그야말로 미친 생물이 잠들어 있으니까.

탁! 타닥!

작별 뒤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는 법.

곧 보랏빛 기운의 알껍데기가 깨지기 시작하고.

그 안에서 웬 조그맣고 앙증맞은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10화 두 번째 재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