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두 번째 재앙
* * *
“흐야아아아아!”
알에서 막 태어난 아기 생명체가 크게 하품했다.
영락없이 빼어나게 예쁜, 어두운 금발 머리칼의 여자아이.
고작해야 다섯 살 수준으로 보일 만큼 작고 올망졸망한 외견.
그러나 등 뒤에는 조그만 날개 두 장이 달려 있었다.
한쪽 날개는 깨끗한 순백이었고, 다른 날개는 칠흑같이 검었다.
‘환수(幻獸).’
마수와는 별개의 부류였다.
정령이나 악귀, 천사, 악마처럼 불가해한 존재들을 통칭하는 말.
그러나 환수에도 급이 있는 법이었다.
‘이놈은 무려 최상급 혼혈종(混血種)이지. 악마와 천사의 피가 섞였으니까.’
천계로부터 군림한다는 두 종류의 상위 종족.
신체 일부라도 강림했다간 반드시 피바람이 몰아친다는 악마(惡魔).
단순한 숨 바람 한 번으로도 수많은 병자를 치유한다는 천사(天使).
재앙의 알에서 태어난 생명체의 정체는 바로 그 두 거물의 피를 이은 혼혈종 환수였다.
‘부화에는 성공했으니, 이제부터 육성이 관건이겠군.’
재앙의 알에서 태어난 것답게, 이 녀석은 훗날 거물이 될 것이다.
다만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커가는 방향이 크게 달라진다.
‘그게 혼혈종의 특징이지. 피를 이은 양쪽,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것.’
천상에서 내려온 신성한 힘으로 악마 군단을 파멸시킬 수도 있으며.
지옥 불로 저 하늘의 천사들을 불태우는 재앙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원작 주인공은 훗날 이 알의 정체를 뒤늦게 깨닫고는 안타까워했었다.
이 녀석을 제대로 부화시켜 키웠다면, ‘2막의 최종 보스’에게 어떤 동료도 잃지 않았을 테니까.
‘대신, 잘못 커버리면 그만큼 위험하겠지만.’
최상급 혼혈종이 삐뚤어지게 자라서 폭주해버리면 어떤 대참사가 일어날까.
천계 기준으로 재앙이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대륙에서도 위험하긴 매한가지.
어느 정도로, 어떻게 성장했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최소한 대도시 몇 개는 날아갈 것이다.
하지만 뭐, 그래도 이 부분에 관해서는 별로 딴지 걸 게 없었다.
‘나도, 새끼용도 미래가 잘못되면 대참사가 벌어지는 것은 똑같으니까.’
크라놀은 혼자 생각하다가 괜히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보니 이거 완전히 시한폭탄 파티가 따로 없었다.
아무리 광증 완치를 위해서라곤 해도 이런 재앙들끼리 붙여놔도 괜찮은 건가.
그때였다.
“아저씨는 뭐예요?”
하품한 여자애가 눈을 비비며 자신을 올려다봤다.
이 어린 환수는 크라놀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었다.
천상 쪽 핏줄이어서인지 방금 태어났는데 말투도 꽤 유창했다.
“나는…….”
“옷 줘요!”
어린 환수가 대뜸 말을 끊었다.
크라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크라놀 위자르다. 널 부화시켰지. 그리고 앞으로 내 말을 도중에 끊지 마라.”
“알았어요! 하지만 나는 방금 태어나서 맨몸이에요. 그러니 아주 어여쁜 옷이 필요해요!”
조그만 여자애가 그를 올려다보며 겁도 없이 당당하게 요구했다.
크라놀은 배낭에서 붕대 용도로 잘라 쓰려던 큰 헝겊을 꺼냈다.
그것을 대충 포개어서 녀석 앞에다가 내던졌다.
어린 환수가 곧장 불만을 토로했다.
“이게 뭐예요! 내 옷이 너무 못났어요.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럼 다시 내놔라. 영지에 도착하면 새 옷을 사주겠다.”
“……흥! 못된 인간이에요! 난 맨몸으로 다니긴 싫어요!”
어린 환수는 헝겊을 오밀조밀 접더니, 나름 모양새가 나게끔 입었다.
그런데도 젖살이 있고 어여쁜 아이여서인지 그마저도 꽤 옷태가 났다.
어른들이 지나가다 보면 웃으면서 용돈이나 찔러줄 법한 귀여움이랄까.
“크랴아아앙?”
한편 새끼용은 신기한 눈초리로 어린 환수를 바라봤다.
언뜻 경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냄새를 킁킁 맡으려 하기도 했다.
“넌 뭐예요?”
“크랴아아아앙.”
“뭐라구요? 저 인간이 네 아빠라구요?”
이 녀석은 새끼용의 말도 알아듣는 듯했다.
여자애가 흑백 날개를 퍼덕이며 화를 냈다.
“흥. 날 바보로 보나요! 둘이 생긴 것부터 전혀 다르잖아요! 피가 이어졌을 리가 없어요!”
“크랴아아앙!”
하지만 새끼용도 완강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여자애가 크라놀한테 진지하게 물었다.
“아저씨는 반려가 있나요?”
“없다.”
“새끼용아! 넌 엄마가 없대요!”
“크랴아아앙?!”
마음이 여린 새끼용은 단박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크라놀은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번 소용돌이 토굴 던전에서 얻은 보상을 종합해 봐야 했으니까.
‘마수사냥꾼들에게서 받아낸 마법 스크롤 넉 장, 1성급 장비 재료 두 개, 2성급 마기의 장갑, 부패룡의 심장, 그리고 최상급 혼혈종까지.’
그야말로 클리어 보상에, 히든피스까지 알차게 뽑아먹었다.
가히 소용돌이 토굴 던전에서 낼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성에 차질 않았다.
이 광증을 완치할 방도를 얻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한참 남아있었으니까.
한시의 낭비도 없이 강해져야만 했다.
‘내가 제정신을 잃고 미쳐서 죄다 죽여버리기 전에.’
* * *
그날 오후.
크라놀은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끼야아아아앙!”
“쟤가 먼저 물었어요!”
땔감을 구하기 위해서 잠시 혼자 마른 잡초들을 채집하러 갔던 것이 화근이었다.
돌아왔더니, 새끼 마수와 어린 환수가 서로 씩씩대고 있었다.
새끼용의 정수리엔 밤톨만 한 혹이 났고, 여자애의 팔뚝엔 앙증맞은 이빨 자국이 나 있었다.
잔뜩 삐친 둘은 성향도 달라서 번거롭기 그지없었다.
“크량! 크랴아아앙!”
“난 잘못한 거 없어요! 그냥 엄마가 없다고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자꾸 화내잖아요!”
새끼용은 울먹이며 크라놀의 다리에 매달렸고, 여자애는 자기는 억울하다면서 계속 재잘댔다.
크라놀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해도 두통이 심해지는 기분이었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서로 싸운 건가.’
천방지축 딸을 두 명이나 키우는 느낌이었다.
빙의 전에는 독신이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그답게 해결하기로 했다.
“둘이 싸우지 마라. 날 미치게 하고 싶지 않으면.”
“흥! 아저씨가 미쳐봤자 뭘 할 수 있는데요?”
“아마 널 산 채로 터뜨리겠지.”
“거짓말!”
“흠.”
크라놀은 고심하다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적갈색의 액체가 잔뜩 말라 있는 손수건이었다.
여자애가 약간 놀랐는지 얼굴이 굳었다.
“이, 이게 뭐예요?”
“사람 피가 묻은 손수건. 증거는 현장에 남기면 안 됐거든.”
“……네?”
크라놀이 담담히 말했다.
“난 악인 셋을 산 채로 터뜨렸다. 이건 그때 내 몸에 묻은 피를 닦았던 거고.”
“…….”
“둘이 사이좋게 지낼 필요는 없다. 그냥 싸우지만 마라.”
여자애는 저 말이 진짠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웅얼댔다.
“그럼 새끼용이랑 안 싸우고 있으면…….”
“안 들린다.”
“안 싸우고 있으면!”
여자애가 시무룩한 눈길로 크라놀을 올려다봤다.
“난 남들한테 사랑받을 수 있나요?”
“그게 무슨 소리지?”
어린 환수는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렸다.
“난 다 알아요! 재앙의 알이라면서 다 나를 부숴 죽이려고 했어요. 아주 못된 마수가 날 죽이기 위해 수를 쓰기도 했고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전부 날 싫어했다구요! 분명 내가 미워서 그런 걸 거예요. 하지만 수많은 사람한테서 사랑받게 되면 그럴 일도 없겠죠!”
알에서 있었던 시절을 기억하는 건가.
새끼용과는 다르게, 태생부터 지능이 높은 녀석이었다.
그러나 똑똑한 아이는 불행도 일찍 느끼기 마련이다.
“……난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사랑받을 수 있어요? 아저씨는 알고 있어요?”
크라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는 곧 낮게 대꾸했다.
“나도 모른다. 너와 똑같은 처지니까.”
“흥. 아저씨도 나처럼 되게 불쌍해요.”
여자애가 가까이 한 걸음 다가왔다.
크라놀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그래도 말은 잘 들을게요. 아저씨는 이상해도 나쁜 사람 같진 않아요. 미움만 받던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줬으니까.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어쨌든 나한테 처음 옷도 선물해줬구요.”
크라놀은 그저 가만히 보았다.
그러다가 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여자애는 흠칫 놀랐으나 곧 가만히 받아들였다.
처음엔 좀 낯선지 어색해했지만, 그리 기분 나빠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오동이다. 젖살이 오동통하니까.”
“아저씨는 바보 같은 인간이에요!”
발끈한 여자애가 날개를 퍼덕이며 쏜살같이 날아가 버렸다.
크라놀은 눈살을 찌푸렸다.
뭘 잘못한 거지?
“새끼용아! 미안해요! 사실 나도 엄마가 없어요. 이제부터 나와 친구해요!”
“크랴아아아앙!”
둘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금세 화해하곤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그걸 바라보며 크라놀은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꼬마가 둘이나 생겨버렸다.
* * *
새로운 재앙과 동행하게 된 지도 어느새 나흘이 흘렀다.
새끼용이 크라놀의 어깨에 앉아선 자꾸만 칭얼댔다.
“크량. 크랴아아앙.”
“뭐라고 하는 건가?”
크라놀이 묻자, 여자애가 통역해 줬다.
“새끼용이 아저씨한테 하루빨리 엄마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어요.”
“개소리하지 말라고 해라.”
“크랴아아앙?!”
뭔 여자는 여자인가.
온종일 머리가 아픈 데다, 잘못 발작하면 무차별 학살을 범하고 말 텐데.
이성 관계보다도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그런데 여자애가 자꾸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뭘 보나.”
“내가 계속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요? 말투나 표정이 우중충해서 몰랐는데, 계속 보니까 오빠 같아요!”
“그냥 마음대로 불러라.”
“네, 아저씨!”
크라놀은 딱히 아저씨라고 불려도 화나거나 어색하진 않았다.
현재의 육신은 22세이지만, 빙의 전 그의 나이는 30대였으니까.
그렇게 온종일 걸으며 비르시 영지로 돌아가고 있던 나날.
기어코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식량이 다 떨어졌다.”
“크랴아아앙!”
“배고파요, 아저씨!”
참담한 소식에 크게 울상을 짓는 새끼용과 여자애.
이 두 어린 것은 덩치에 맞지 않게 식성이 엄청나게 좋았다.
그러니 넉넉히 챙겨왔던 건량도 바닥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참아라. 어차피 내일 오후면 비르시 영지에 도착할 테니까.”
“크랴아아앙!”
“하지만, 하지만 그럼 세 끼나 굶어야 하는데!”
두 어린 것이 속상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크라놀은 에너지도 아낄 겸 이날은 일찍 누웠다.
그런데 잠들 즈음이 되어서야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이 녀석들, 어디로 갔지?’
새끼용과 여자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굳이 찾으러 갈 필요는 없었다.
이 녀석들은 잎사귀와 흙을 몸에 잔뜩 묻혀서 돌아왔으니까.
“크랴아아아앙!”
“히! 아저씨, 이거 봐요! 우리가 잡았어요! 그런데 이거 어떻게 요리해야 해요?”
두 꼬마가 자기들보다도 큰 멧돼지 사체를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크라놀은 어이가 없어졌다.
왜 말없이 사라졌느냐고 한 소리하려다가, 그만뒀다.
어린 것들이 오죽 배가 고팠으면 저랬을까 싶었으니까.
“이리로 가져와라. 내가 구워주마.”
이런저런 경험 탓에, 크라놀은 야외 조리에 능숙했다.
능숙하게 사체를 해체하고 피를 뽑아서 불에 올렸다.
이날은 덕분에 푸짐하게 멧돼지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었다.
크라놀은 지글지글 익어가는 살코기를 나뭇가지에 꿰어서 내어줬다.
“크랴아아앙!”
“아저씨는 고기를 되게 잘 구워요! 육즙이 살아있어요!”
크라놀은 검댕을 묻혀가며 허겁지겁 고기를 뜯는 두 꼬마를 바라봤다.
괜스레 이 어린 것들을 곁에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무임 승차해야 할 버스이니까.’
크라놀도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육즙도 많고 고기도 적당히 쫄깃했다.
역시 자동사냥만큼 편한 것이 없었다.
벌써 내일 하루가 기다려졌다.
이 어린 재앙들을 이용해 본격적인 이득을 볼 참이었으니까.
11화 사기적인 혈통
* * *
“크량! 크랴아아앙.”
“히야! 이젠 배불러요!”
배부르게 먹은 새끼용과 여자애는 배를 두드리곤 금세 쿨쿨 잠에 들었다.
크라놀은 남은 멧돼지 고기는 따로 훈제해서 깔끔히 모아놨다.
빙의하기 전, 현실에서부터 몸에 익힌 요리 기술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연기에 훈연한 살코기들은 장기 보관하기가 좋았다.
다음 날 아침.
네 발로 선 채 기지개를 켜는 새끼용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건 네 아공간 창고에 넣어놔라.”
“크랴아아앙.”
새끼용은 맡겨만 달라는 듯이 균열을 열어 훈제한 고기들을 저장했다.
평소에 소지하고 다니기 어려운 물건들은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어서 간편했다.
따로 차원 배낭을 구할 수도 있지만, 그것들은 가격이 성 한 채 값이었다.
약초값으로 늘 수입의 95%가 증발하는 크라놀로서는 부담이 큰 금액.
‘새끼용 덕분에 돈이 크게 굳었군.’
역시 복덩이였다.
아무튼 먼젓번에 약초를 사고 여행용품을 구하느라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다.
그러나 던전을 격파하며 이것저것 전리품들을 획득했다.
이것들로도 꽤 나쁘지 않은 수입을 얻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다음 날, 함께 걸은 지 꼬박 열하루가 되던 날.
마침내 저 멀리 비르시 영지가 보였다.
“그럼 난 내 아공간에 가서 쉬고 있을게요. 필요하면 불러내요!”
여자애가 흑백 날개를 퍼덕이더니 균열을 열고 사라졌다.
저것 또한 아공간을 여는 스킬.
그러나 새끼용의 ‘아공간 창고’와는 조금 용도가 달랐다.
‘아공간 쉼터 스킬. 이것도 아주 유용하지.’
‘아공간 창고’에는 생명체가 들어설 수 없었다.
그러나 ‘아공간 쉼터’는 달랐다.
소환수나 정령들이 따로 쉴 수 있는 휴식처를 개설하는 스킬.
‘새끼용이나 여자애나 둘 다 외견 탓에 사람들에게 이목을 끄니까.’
항상 이 어린 것들을 데리고 다닐 순 없는 노릇.
그러나 아공간 쉼터 스킬은 그런 문제점을 해결해 줬다.
마을이나 도시 같은 곳에서는 아공간 쉼터로 보내놓으면 그만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언제 어디서나 도피할 수 있는 만능 기술은 아니었다.
전투 중이거나 다급한 몇몇 상황에선 아공간에 진입할 수 없다는 한계점도 있으니까.
그런데 크라놀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넌 같이 안 가나.”
“크랴아아앙.”
곁에 남은 새끼용이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자기마저 없으면 누가 크라놀을 지켜주겠냐는 듯이.
‘하기야 무려 7레벨 투명화를 익히고 있는 녀석이니까. 괜찮겠지.’
크라놀은 투명화한 새끼용을 거동한 채 영지로 들어섰다.
그는 얼마 전, 비르시의 영주와 별의 맹세를 나눴다.
해당 안전지대의 수호성(守護星)을 걸고 하는 약속.
이 맹세를 하고서 어겼을 시엔, 별이 내리는 ‘천벌’을 받게 된다.
‘부패한 서쪽 영역을 정화하라는 의뢰였지.’
당연히 무척 어려운 임무였으나, 맹세로 약속된 보상은 굉장히 짭짤했다.
마법 신발인 ‘하늘 장화’, 그리고 ‘크라놀이 원하는 것’을 한 가지 이뤄주기로.
광증 완치를 위해서 뜯어낼 수 있는 보상은 모조리 탐닉해야 했다.
‘사실상 명확한 치유법은 없다. 그러니 더더욱 열심히 해결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원작에서도 딱히 이 광증을 완치하는 방법에 관해 묘사돼 있진 않았다.
결국 미쳐버린 크라놀은 병이 낫질 못하고 주인공에 의해 사망하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두 손 놓고 포기할 순 없었다.
‘이 세계에는 불치병을 치유할 만한 기적들도 존재하니까.’
차원 미궁, 명계 순례길, 시간 왜곡 마법, 현자의 돌, 성수의 폭포 등등.
물론 기적으로 향하는 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 고행이고, 그 자체로 큰 시련이었다.
최소한 대륙에서 손꼽힐 강자 수준은 되어야, 그나마 기적 근처라도 가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영주에게서 맡은 의뢰부터 해결해 보상을 뜯어내야 했다.
‘발 빠른 이득과 성장만이, 지금 내가 살아남을 길이니까.’
현재 목표를 상기한 그는 발걸음을 움직였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영지의 대장간이었다.
깡! 까앙!
열띤 불기가 튀고, 쇠를 두들기는 소음이 들렸다.
내부에 있는 큰 화로 쪽을 살펴보니 얇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열띠게 작업 중이었다.
저들은 꽤 큰 쇠붙이를 녹여 거푸집에 부어대고 있었다.
“허. 가끔 용병 조합 건물 쪽에서 보던 얼굴이로군. 우리 대장간에는 어쩐 일이신가?”
때 묻은 수건을 머리칼에 동여맨 노년 남성이 걸어 나왔다.
나이를 먹어 어깨는 좁고 주름살은 깊었으나 근육만큼은 선명한 외견.
크라놀은 담담히 볼일을 얘기했다.
“장비에 관한 제작 의뢰를 하려고 왔습니다.”
“오, 그런가? 뭘 만들려고?”
“검과 투구입니다. 재료로 쓸 마수 전리품도 가져왔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태연하게 요구했다.
“기간은 오늘 오후까지. 금화 여섯 닢만 받겠습니다. 지금 선불로 주시죠.”
“……뭐라고?”
대장장이 노인은 자기가 뭘 잘못 들었냐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그야 당연했다.
대장간에 장비 제작 의뢰를 맡기면서 도리어 요금을 받겠다니?
힘든 일도 시키면서 돈까지 뜯어가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요즘 작업량이 많아서 돈도 없는 진상을 상대해 줄 시간은 없네만.”
늙은 대장장이의 눈빛은 험한 일을 하는 사람답게 사나웠다.
투명화한 새끼용도 조금 겁을 집어먹었는지 그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그러나 크라놀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돈이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결코 진상은 아니었으니까.
“이게 제가 장비 제작을 요구할 전리품들입니다.”
크라놀은 미리 배낭에 넣어뒀던 전리품들을 꺼냈다.
기사 개미의 십 년 묵은 독니(☆).
장군 개미의 대가리 외피(☆).
소용돌이 토굴에서 마수들을 사냥하고 획득한 아이템들.
그런데 그 전리품들을 보자마자 노인 대장장이의 태도가 확 바뀌었다.
“아이고. 별이 붙은 전리품이었군? 이거, 진작 말을 하지 그랬나!”
곧바로 반색하며, 목소리마저 친절해지고, 꿀꺽 침까지 삼키는 상대방.
“크랴앙?”
옆구리에 붙은 새끼용이 의아해하며 작게 울었다.
크라놀은 저 상반된 반응에 놀라지 않았다.
‘별이 붙은 장비를 만들어 내면, 대장장이들도 수호성의 축복을 받을 수 있으니까.’
수호성.
천계보다도 드높은 창공에서, 인간들의 세상을 내려다보는 별들.
별이 붙은 전리품은 그들이 관심 있어 하거나 마음에 드는 애호품이란 의미였다.
그래서 이 전리품을 멋진 예술품으로 만들거나, 강력한 무구로 제작하면 축복을 받았다.
‘별 붙은 전리품들이 고액으로 거래되는 이유이기도 하지.’
당연히 별이 많은 전리품일수록 받게 되는 축복은 컸다.
그만큼 강력하거나 수많은 수호성이 관심을 보이는 물건이란 의미니까.
그러나 비록 1성급 아이템이라도 그 축복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해당 대장간에서 한 달 내내 품질이 꽤 좋은 장비들이 제작된다든지, 녹이 잘 슬지 않는 연장이 벼려진다든지, 광석들의 금속 함량이 상당히 높아진다든지.’
완성도 높은 제작품을 만들어 낼수록 축복의 질은 크게 올라갔다.
그 이득은 무려 금화 몇 닢쯤은 가뿐히 넘어가는 수준.
그러니 어느 대장간이나 예술품 제작소들이든 별이 붙은 전리품에는 환장했다.
특히나 대도시가 아닌 이런 영지일수록 더더욱 그랬다.
별이 붙은 전리품을 들고 제작 의뢰를 맡기는 모험가는 절대로 흔치 않으니까.
“우리 대장간 최고의 장인들에게 제작을 맡겨두겠네. 오후에 꼭 찾으러 오게!”
노인 대장장이가 싱글벙글 웃으며 재료를 받고 선금을 지급했다.
크라놀은 제작 의뢰를 맡기며, 도리어 금화 여섯 닢을 받아냈다.
새끼용은 일을 시키면서 돈까지 받아내는 그에게 혀를 내둘렀다.
“크랴아앙.”
그러거나 말거나 크라놀은 걸어갔다.
다음 장소는 늘 가던 영지의 약초 상점이었다.
그가 문을 열자마자 대뜸 사장이 점원한테 호들갑을 떨었다.
“야. 저분 받들어 모셔, 이 녀석아!”
“윽! 저 젊은 손님이 누구인데요?”
“누구긴? 우리 상점 최우수 단골이시다!”
크라놀은 약초를 한가득 사고 그 외의 활, 랜턴 기름, 건조식량 따위의 여행 도구도 보충했다.
그러고는 영지의 대장간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어느덧 의뢰했던 장비들이 완성되어 있었다.
[명칭: 독니검.]
[등급: ★]
[성능: 사나운 마수의 독니를 갈아 넣은 무기. 적들을 처음 베면 반드시 해당 부위가 중독된다. 단, 내성이 높은 상대에게는 통하지 않을 수도 있다.]
[명칭: 개미 외피 투구.]
[등급: ★]
[성능: 독특한 개미 마수의 외피를 이용해 만든 단단한 투구. 노련한 장인들이 공들여 만든 제작품이다. 본인에게 무거운 물체를 들 때 근력이 50% 증가한다.]
“고맙소! 다음에도 장비 제작 의뢰가 필요하면 꼭 우리 대장간에 맡겨주쇼!”
새로운 장비를 착용하고, 약초도 넉넉히 채웠으며, 자금도 모았다.
크라놀은 손에 낀 검은 가죽 장갑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이제 부패한 영역을 정화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부패한 서쪽 영역은 마기가 들끓고 있다.
마기는 피부에 닿으면 전염병이나 저주에 걸리기 쉬운 물질.
먼젓번처럼 성수를 쓰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오래 접촉해선 위험했다.
실제로 의뢰에 나섰던 용병들이 떼죽음을 당했던 장소이니까.
그렇기에 크라놀은 본격적으로 영역에 들어서기 이전에, 강력한 아군부터 소환했다.
“나와라, 오동아.”
…….
“오동아.”
…….
“여자애야.”
“나 불렀어요, 아저씨?”
균열이 열리고 여자애가 눈앞에 흑백 날개를 펄럭이며 소환됐다.
부패한 영역은 각종 늪지대와 땅에 마기가 들어차 있는 곳.
그랬기에 지금 천사와 악마의 피를 이은 환수야말로 활동하기 적격이었다.
“새끼용아! 넌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내 아공간에 들어가 있어요!”
“크랴아아아앙.”
새끼용이 신기해하며 아공간 쉼터로 들어갔다.
크라놀은 여자애와 함께 부패한 영역으로 들어섰다.
기분 나쁜 진흙과 냄새나는 늪이 끝없이 보이는 수림.
악취가 끝도 없이 진동했다.
“아저씨. 우린 여기엔 뭣 하러 온 거예요?”
“이곳을 정화할 거다. 깨끗한 수림으로 돌아가도록.”
수림 곳곳에는 생명체를 해치는 마기가 포함돼 있었다.
육안으로는 구분할 수 없으나 종종 몸의 기운이 빠지고 속이 메스꺼운 공기.
그럴 때마다 크라놀은 검은 가죽 장갑을 눈앞으로 내밀었다.
마기의 장갑.
전용 스킬, ‘마기 흡수’가 달린 2성급 장비였다.
[‘마기 흡수’가 발동합니다.]
[지금 빨아들이는 마기가 무작위 능력치로 변환됩니다.]
[단, 한계치가 존재하며 무한한 성장은 이뤄낼 수 없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마기들이 보랏빛으로 형상화되어 빨려드는 것이 보였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주위의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우중충한 늪과 썩은 내가 사라지고, 기분 나빴던 정경이 조금씩 푸르게 바뀌었다.
[썩은 늪지대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행운(Lv1)의 밑바탕이 되는 원천이 됩니다.]
[‘해당 능력치 레벨업’까지 3번을 흡수해야 합니다.]
‘늪지대의 마기를 여러 번 흡수하면 능력치 레벨업을 노릴 수 있지.’
능력치 레벨이 높을수록 필요한 마기가 많았다.
엄청난 효율이라고 볼 순 없었지만, 이만해도 감사했다.
영구적인 능력치를 올려주는 장비 자체가 드물고 희귀하니까.
무엇보다 이 근처에 마기야 널려 있었다.
[혼탁한 수렁의 마기를 흡수했습니다.]
[근력(Lv2)의 밑바탕이 되는 원천이 됩니다.]
[‘해당 능력치 레벨업’까지 7번을 흡수해야 합니다.]
크라놀은 계속 숲을 돌아다니며 마기를 흡수했다.
그러나 개중에는 차마 마기 함유량이 너무나도 드높아 감히 입장할 수 없는 호수도 있었다.
제아무리 마기 흡수를 쓸 수 있더라도, 치사율이 끔찍해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곳.
그런데 곁에 있던 여자애가 대담한 짓을 벌였다.
첨벙!
“꺄하하핫! 아저씨! 여기 호수가 되게 커요! 아저씨도 들어올래요?”
“…….”
마기가 가득한 호수에서 대놓고 첨벙첨벙 노는 여자애.
악마의 핏줄을 가졌기에, 마기에는 전혀 피해받지 않았다.
심지어 평범한 호수처럼 혼자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었으니까.
‘과연 사기적인 혈통이라고 할 만하군.’
마기에 상처받지 않는 동시에, 성스러운 힘도 다룰 수 있다.
그야말로 악마와 천사의 장점을 고루 가져간 어린 환수.
‘물론 저 혼혈 속성도 단점이 존재하긴 하지.’
악마와 천사, 그 사이기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혼종(昏鐘)이니까.
지금이야 괜찮지만 3막에 들어서면 메인 스토리의 무대가 천계로 확장된다.
훗날,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리면 저 애는 양쪽 진영에서 가장 먼저 배척받는 해악이 될 터.
그러나 아직은 멀고 먼 얘기였다.
“아저씨한테 요 상쾌한 기운이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럼 내가 도와줄게요!”
여자애가 흑색 날개만 퍼덕였다.
그러자 마기가 한데 모이더니, 크라놀에게로 흡수되었다.
‘마기를 자유자재로 조종하기까지 한다니. 정말 환장하겠군.’
자동사냥도 이런 자동사냥이 없었다.
일일이 걸어 다니며 모았어야 할 마기를, 덕분에 빠르게 흡수할 수 있었으니까.
[필요한 마기를 완충했습니다.]
[능력치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근력(Lv2) → 근력(Lv3)]
원래는 몇 달을 돌아다니며 했어야 할 정화 작업.
예상했던 것보다도 수림이 훨씬 빠르게 깨끗해지고 있었다.
‘미친 복덩이가 또 하나 굴러들어 왔군.’
감탄한 크라놀은 이 여자애한테도 기대가 컸다.
이 어린 것이 성장하고 진화하면 과연 어떤 재앙이 되어버리게 될지.
그렇게 여자애와 함께 계속 다니며 마기를 흡수하고 다녔다.
함께 걷고, 나무뿌리를 뛰어넘고, 정화된 호수에서 물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린 환수, 『천마혼혈의 아이』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해당 재앙에 히든 특성, ‘재앙 친화력’이 발동합니다.]
[재앙의 전용 스킬을 복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다렸던 상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크라놀도 이 사기적인 혈통빨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12화 흑뢰
* * *
‘재앙 친화력’은 재앙의 힘을 복사해 올 수 있는 특성.
그러나 먼저 처음 본 재앙과 가까워져야만 했다.
‘물론 경지가 성장하면 복사량도 늘어나고, 전용 스킬 합성도 해금되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재앙과 유대감을 올리는 밑 작업이 필요했다.
다행히도 여자애와 함께 활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분이 쌓였다.
크라놀은 눈앞에 떠오른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없음]
[종족: 혼혈 천마]
[잠재력: SSS]
[전용 스킬: 별빛 치유(Lv2), 흑뢰(Lv2), 아공간 쉼터(Lv1)]
[보유 특성: 간식 애호가(일반), 악마의 혈통(전설), 천사의 핏줄(전설)]
[능력치: 근력(Lv1), 민첩(Lv3), 마력(Lv4), 행운(Lv3)]
[당신에 대한 감정: 고기 잘 굽는 아저씨!]
‘……이 녀석도 새끼용 못지않은 괴물이군.’
크라놀은 속으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무려 잠재력이 SSS급이 떠버렸으니까.
‘아마 A+나 S급 수준일 거라고 내심 짐작했는데, 설마 새끼용과 동급이라니.’
새끼용은 알다시피 최종 보스의 하나뿐인 핏줄.
그러나 여자애 역시 천계 악마와 천사의 순수 혈통 혼종이었다.
양측의 잠재력이 무려 동등하다는 수준.
크라놀은 좌청룡 우백호를 둔 것처럼 듬직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상 최강의 재앙 씨앗들을 손에 넣었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하지만 잠재력이 대단하다고 지금 당장 무적인 것은 아니지.’
새끼용과 여자애 모두 미친 혈통을 타고났으나, 현재는 모두 어린 새끼.
이 세계의 강자나 초대형 생명체들에게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몸이었다.
크라놀은 결코 이 어린 것들을 죽지 않게끔 잘 키워내겠다고 다짐했다.
‘기껏 1등 복권을 뽑아놨는데, 휴지 조각으로 만들 순 없으니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여자애의 어느 스킬을 복사해 올지 결정해야 했다.
[재앙의 전용 스킬을 복사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스킬 레벨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대상의 현재 경지와 유대감이 낮습니다.]
[현재 복사가 가능한 스킬은 ‘1개’입니다.]
크라놀은 먼젓번에 새끼용의 ‘투명화’를 복사했다.
적들을 교란하고, 기습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기에 적합한 상위 마법.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스킬을 베껴올 작정이었다.
[‘흑뢰(Lv1)’를 복사했습니다!]
흑뢰(黑雷).
검은 번개란 의미.
이것은 특이한 상급 스킬이었다.
오롯이 악마와 계약해야만 익힐 수 있는 마법이었으니까.
부패룡이 악마에게 잘 보이면서까지 얻고 싶어 했던 힘이기도 했다.
‘흑뢰는 강력한 공격 스킬이지. 어떻게 단련하느냐에 따라 광범위 재해가 되기도 하고, 제물을 바쳐 참격을 강화하는 버프, 원거리에서 심장마비를 유발하는 저격 마법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일부 스킬은 레벨을 올리다 보면 좀 더 다양한 방향으로 단련할 수 있다.
어떤 갈래를 택하느냐에 따라 활용도가 높아지거나,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다.
크라놀은 이 흑뢰를 여자애와는 다른 방향으로 경지를 올릴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서로에게 효율적이었으니까.
‘스킬 육성은 본인에게 맞는 루트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강력하지.’
이번에도 크라놀은 자신의 선택에 전혀 후회가 없었다.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전투 방식을 택했으니까.
‘한번 시험해 볼까.’
크라놀은 머릿속으로 새까만 벼락을 떠올리며 손을 내뻗었다.
파직! 파지직!
그 순간, 손바닥을 중심으로 기묘한 스파크가 번쩍였다.
어두운 하늘에서 떨어질 것만 같은, 기이한 검은 번개가 손아귀에서 폭발적인 힘을 내뿜었다.
그 검은 번개는 마치 생명을 지닌 것처럼 손을 타고 오르며, 주위의 공기조차 일그러뜨렸다.
크라놀은 근처의 수목을 향해 흑뢰를 두른 손아귀를 내뻗었다.
쩌거걱!
굵직한 나무 한 그루가 기둥째로 파여서 쓰러져 버렸다.
흑뢰가 강타한 부분은 새까맣게 잿더미처럼 타 있었다.
크라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날로 먹었군.’
이만한 공격기를 이렇게 쉽게 배워도 된단 말인가.
본래 흑마법은 기존 마법과 다르게 배우기도 쉽지 않다.
물론 ‘투명화’ 수준의 마법도 밑바닥부터 배우려면 4년은 잡아야 했다.
그러나 상급 흑마법을 습득하는 과정은 단순히 기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강력한 흑마법일수록 신체 부위나 자신의 소중한 제물을 악마에게 바쳐야 익힐 수 있으니까.’
어디 그뿐일까, 힘을 얻으려 악마와 거래했다가 속아서 죽거나 노예가 되는 일도 부지기수.
이만한 흑마법을 단숨에 습득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득이었다.
크라놀이 앞으로 이 흑뢰를 어떻게 육성할지 전략을 짜고 있었을 때였다.
“어? 아저씨.”
갑자기 여자애가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주 조그만 손가락으로 저편을 가리켰다.
“저기 좀 봐요. 누가 오고 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을 움직였다.
크라놀은 재빠르게 여자애를 품에 끌어안았다.
“읍읍!”
놀란 아이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입을 막았다.
그대로 나무 뒤편으로 숨은 채로 숨을 죽였다.
귀를 기울이니, 어떤 목소리들이 들렸다.
“뭐야? 여기 나무가 왜 이래?”
“설마 우리 말고 누가 있는 건가?”
크라놀은 살짝 고개를 내밀어 저편을 엿봤다.
흑뢰로 새까맣게 태워버린 나무 기둥 주위.
웬 새빨간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대화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이곳은 마기가 가득한 숲이라고. 부패룡 사건으로 죽은 용병들도 많았고. 어떤 미친놈이 함부로 오겠어?”
“그렇지만 지난번에 비해 마기가 옅어져 있어. 군데군데 정화된 부근들도 눈에 띄었고. 이건 불길해. 지금, 이 숲에서 우리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제기랄. 하루빨리 거사를 치르는 것이 좋겠군. 다들 어서 움직이자고.”
크라놀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부패한 영역의 심부.
그곳으로, 적색 로브를 걸친 사람들이 몰려가고 있었다.
* * *
크라놀은 골몰히 생각했다.
같은 복장을 착용한 사람들이 어딘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마기가 가득한 이런 땅에서.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은 멀쩡하지?’
마기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물질.
오래 접촉하고 있으면 끔찍한 전염병이나 저주에 걸린다.
성수처럼 축복받은 물질이나, 특별한 장비 없이는 대부분 사망에 이르게 될 터.
‘아무래도 나와 비슷하게 대처하고 있는 건가.’
크라놀은 마기의 장갑으로 마기를 흡수해서 생명력 감소를 막고 있었다.
저들도 마기를 막거나 차단하는 장비나 스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즉, 이곳이 마기가 가득한 땅임을 알고 의도적으로 대비해 왔다는 것.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들은 이 부패한 영역에서 거사를 치러야 한다고 언급했다.
‘인적이 없는 이곳에서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건데.’
그러나 원작에서도 이에 관련한 사건은 딱히 읽은 기억이 없었다.
즉, 비중도 없는 별것 아닌 일이거나 원작에도 없었던 변수인 것.
이건 뭔가 신경이 쓰였다.
‘만에 하나 후자라면 괜스레 방치했다가 피를 볼지 모르니까.’
크라놀은 저들을 쫓아가기로 했다.
한번 뒤쫓아 보고, 별일이 아니라면 그냥 돌아오면 그만일 터.
“아저씨.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넌 일단 아공간 쉼터로 돌아가 있어라. 필요하면 부르겠다.”
크라놀은 여자애를 돌려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후.”
숨을 가다듬으며 온몸에 힘을 줬다.
곧 그의 형체가 발끝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새끼용에게서 복사해 왔던 전용 스킬, 투명화였다.
[‘투명화(Lv1)’를 시전합니다.]
[큰 소리를 내거나, 타인을 공격하면 해제됩니다.]
크라놀은 투명해진 상태로 저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잎사귀나 나무뿌리를 밟지 않도록 주의했다.
곧 얼마 되지 않아 저들이 도착한 곳은 부패한 숲답지 않은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검은 양초가 잔뜩 놓여 있는 제단,
그곳에 붉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제단 중앙에 핏물로 그려진 마법진과 균일하게 널브러진 각종 눈알, 장기, 뼛조각.
상당히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크라놀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답이 보였다.
‘저것들, 검은 뱀의 교단 놈들이었군.’
온갖 불법적인 범죄를 거행해 대는 사이비 단체.
범죄자나 흑마도사가 다수 포함된 일종의 이단이었다.
특히나 불길한 소환 의식은 저 교단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었다.
‘악법은 법이 아니노니 어겨야만 하고, 도덕은 위선적인 겉껍질이로다.’
그것이 검은 뱀의 교단이 첫 번째 율법이었다.
이들이 어떤 단체인지 정확히 보여주는 한 문장.
그런데 왜 하필 마기가 들끓는 영역에 저 녀석들이?
“아무래도 거사를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분위기가 심상찮아요. 우리도 이곳에서 오래 작업하다 보면 들킬 확률도 늘어날 테고.”
“하지만 소환 의식을 재촉하다가 또 저번처럼 실패작이 소환되면 어쩌려고요?”
“우리가 잡으려고 하자마자 도망쳐 버렸던 시체 같은 용 말입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엔 훨씬 큰 봉헌물을 챙겨왔으니.”
제단에 모인 검은 뱀의 교단 신자들이 술렁댔다.
아무래도 무언가를 소환하려다가 실패했던 모양.
그러나 저 ‘시체 같은 용’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시체병에 걸려서 죽어갔던 새끼용을 말하는 건가?’
그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어째서 최종 보스의 둥지에 있어야 할 녀석이 이런 곳에서 발견됐는지를.
설마 검은 뱀의 교단에 의해서 이런 곳에 강제 소환이 됐던 것이라니.
‘도대체 뭘 불러내려고 했기에, 새끼용 같은 잠재력이 뛰어난 마수가 잘못 소환된 거지?’
소환 대상이 혼동됐다는 것은 그만큼 격이 높은 존재를 불러들이려고 했다는 것.
크라놀은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곧 교단 놈들이 준비한 봉헌물을 보았을 때, 눈살이 찌푸려졌다.
커다란 헝겊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젊은 청년들의 머리통이었다.
총 네 개의 목통은 각기 다른 인종과 나이였고 모두 눈알이 빠져 있었다.
봉헌물을 보면 그 소환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법.
이것은, ‘최하급 악마’의 소환 의식이었다.
‘정신이 나갔군. 설마 현계에서 악마의 본체를 소환하려고 하다니.’
악마와 천사들이 본격적으로 위용을 드러내는 것은 3막부터였다.
그런데 그런 상위 존재들을 현계에서 지금 1막 시점에서 강림시키려고 한다니?
당연히 대참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악마 소환은, 현 대륙에서도 가장 금기시된 의식 중 하나이니까.
‘저것들 때문이었군. 이곳에 마기가 넘치게 된 이유도.’
어쩐지 이 땅에 마기가 지독할 만큼 올라왔다 싶었다.
고작 소환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한 영역이 죽음의 땅으로 변모하다니.
설령 최하급일지라도 악마가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조용히 빠져나가야겠군. 1막부터 악마와 연관되어서 좋을 게 없다.’
크라놀은 곧장 뒤돌아섰다.
악마는 지금으로선 함부로 사냥하거나 대적할 수도 없는 막대한 거물.
아마도 원작에서도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던 것은 저 의식이 대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리라.
본인들의 욕망을 위해서 악마를 소환하는 사건은 가끔 있었으나, 대개는 끝이 나빴으니까.
분명 작중 간략하게 언급됐던 무수한 악마의 참극 사례 중 하나가 여기서 펼쳐지게 되리라.
‘……잠깐만.’
그러다가 크라놀은 문득 발걸음을 멈춰 섰다.
갑작스레 생각이 바뀌었다.
잘하면, 오히려 이 참극을 역이용할 수 있겠다고.
‘한번 지켜봐 볼까, 소환.’
최근 크라놀은 날로 먹는 것에 푹 빠졌다.
가성비 있게 꿀을 빨 수 있다면 뭐든 이용해야 했다.
그것이 설령 눈앞의 장대한 악마 소환 의식일지라도.
13화 최하급 악마, 모르곤
* * *
검은 뱀의 교단.
이들 무리는 어느 작은 실뱀 한 마리로부터 시작됐다.
한낱 보잘것없던 미물이 금기된 열매를 먹고 흑룡이 되어 승천했다는 설화.
이 믿기지 않는 전설은 목격자들에게 그대로 경전으로 적혀 오랜 교리가 되었다.
그런 교리에 따라, 검은 뱀의 교단 일원들은 힘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설령 그것이 대륙에서 가장 금기하는 일 중 하나인 ‘악마의 강림’일지라도.
‘기필코 천계의 상위 종족을 소환하리라. 그러므로서 우리의 야망을 이뤄낼 터이니.’
물론 검은 뱀의 교단 사람들이라고 바보는 아니었다.
악마가 자신을 소환한 이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사례들은 너무나도 유명했으니까.
그랬기에 이들이 선택한 소환 생명체는 바로 ‘최하급 악마, 모르곤’이었다.
‘최하급 악마, 모르곤. 온몸이 불타는 사슬로 휘감겨 있다는, 천계의 하찮은 전투 노예.’
천계에서 가히 최하위 계층에 소속한다고 볼 수 있는 미천한 생명체.
지능이 낮다고 알려진 악마라면 강림해도 분명 교단의 의지로 이끌 수 있을 터.
설령 갑작스레 복종을 거부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이 책이 바로 악마를 조종할 수 있게 해줄 테니.’
검은 뱀의 교단 사제는 낡은 양피지 서적을 손에 움켜쥐었다.
신성한 사슬 부림의 마도서.
오직 ‘최하급 악마, 모르곤’에 한해서만 행동을 옥죌 수 있는 서적.
이 보물을 오래된 유적에서 구하게 된 것이 이번 소환 의식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설령 최하급 악마일지라도 그 소환 의식은 만만찮았다.
이제껏 수없이 악마 소환에 도전했으나 모조리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심지어 개중엔 ‘회색 고사리 덤불’이나 ‘뭔지 모를 검은 찌꺼기’, ‘자그맣고 시체 같은 용’이 소환되는 불상사까지 생겼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다르리라.’
검은 뱀의 교단 9지파의 사제, 니랄은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이번 봉헌물은 무려 나이와 인종이 각각 다른 4인의 머리통이었다.
얼핏 별거 아니라고 느낄 수 있는 이 제물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랐다.
‘서부, 남부, 동부, 북부. 각지에서 여행 온 인간들을 선별해 죽여야만 했으니까.’
어디 그뿐일까, 이번 봉헌물은 신선도 또한 유지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어느새 준비 기간만 반년이 넘어가고 말았다.
그간 소환이 실패할 때면 불온한 마기가 사방에 퍼뜨려졌다.
덕분에 이곳의 땅도 부패한 금지(禁地)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간의 수모조차도 바로 오늘로 끝이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교단의 야망을 위해 악마를 소환하고야 말지니.
사제 니랄은 진지하게 어렵사리 준비해 온 봉헌물 앞에 섰다.
“천계에서는 가장 낮으시나, 저희에게는 제일 가까우신 모르곤이시여. 부디 여기 준비해 온 제물을 맛보시옵고, 이 미개한 현계에 그 장대한 위용을 강림하소서!”
그 기도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검고 사악한 기운이 제단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니랄의 가슴이 찢어졌다.
“커헉!”
관용어구가 아니라, 실제였다.
기도할 자세를 취하고 있던 주변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소환 의식을 끝마쳐야 할 사제가, 피와 장기를 쏟으며 쓰러졌다.
“사, 사제님?!”
검은 뱀의 교단 사냥꾼들과 신자들은 감히 자세도 가누지 못했다.
새까만 기운이 피어난 제단 일대가 갑작스레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강렬한 힘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하듯 주변으로 뿜어져 나갔다.
다들 본능적으로 느꼈다.
지금 뭔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어?”
모두가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던 그때였다.
니랄의 쓰러진 품으로부터 피로 흠뻑 젖은 마도서가 두둥실 떠올랐다.
깜짝 놀란 눈으로 그곳을 바라보니, 방금까지 없었던 웬 무심한 남자가 나타나 있었다.
“다, 당신 뭐야?”
“치, 침입자다! 투명화로 우릴 훔쳐보고 있었어!”
“감히 악마의 소환 의식에 끼어들다니!”
“우리의 거행을 본 이상 감히 살려둘 순 없다!”
악마 소환은 교단에서만 비밀리에 진행되던 의식.
당연히 방관자를 허용할 리가 없었다.
곧장 검은 뱀의 교단 일원들이 적을 차단하기 위해 칼을 꺼내 들던 찰나.
“시끄럽고.”
마도서를 든 크라놀은 아주 간단히 이들을 입 닥치게 했다.
그의 다른 한 손에서 검은 전류가 일궈지고 있었으니까.
“……!”
“다들 싸울 준비를 해라. 난 저 악마에게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다.”
* * *
흑뢰.
앞서 말했다시피 악마와 계약해야만 쓸 수 있는 상급 흑마법.
당연히 검은 뱀의 교단 사람들이 이 스킬의 가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저, 저건 검은 번개?!”
“……흑뢰! 악마와의 계약자다!”
“어, 어째서 저런 강자가 이런 곳까지……!”
악마와 계약해 강력한 흑마법을 얻어냈다.
이미 그것 자체가 강자라는 증명이었다.
천계의 상위 종족들은 절대 아무한테나 유리한 계약을 맺어주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사악한 이단에선 더더욱 그 권위를 인정받을 수밖엔 없었다.
“다, 당신이 강한 건 알겠어. 그런데 저 악마에게서 살아남는 방법도 알고 있다고?”
“멍청한 놈들. 나는 흑마도사다. 악마와 직접 계약했으니, 너희보다 잘 알 수밖에.”
크라놀은 무심한 얼굴로 뻔뻔스럽게 사기를 쳤다.
그러나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광증 탓에 늘 초췌한 그의 얼굴은, 정말 악마에게 영혼까지 판 흑마도사처럼 보였으니까.
“일단 너희 거기 셋. 앞장서라.”
“예, 예?”
“최하급 악마 모르곤을 공략하려면 대열을 맞추는 편이 낫다.”
무기를 든 세 신도는 얼결에 흑마도사(?) 크라놀의 말을 들었다.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이들의 대열을 재정비했다.
이윽고, 흔들리는 제단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폭주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신도 한 명이 주눅 들어서 물었다.
“……그, 그냥 도망치면 안 되는 건가?”
그러자 크라놀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봐야 어차피 멀리 못 가고 죽는다. 상대는 악마니까.”
그의 대답이 옳았음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증명되었다.
검은 기운이 한곳으로 뭉치더니, 이윽고 어느 형상을 이뤘다.
그것은 어느 흑색 균열로부터 삐죽 나와 있는 팔 한 짝이었다.
굵은 털이 숭숭 나 있는 데다, 거인의 신체 기관처럼 거대했고, 활활 빛나고 타오르는 기이한 사슬에 휘감겨 있었다.
‘역시 역부족이었군. 최하급 악마의 본체가 강림하진 못했어.’
지금 이곳에 강림한 것은 오직 모르곤의 왼팔 한 짝뿐이었다.
본연의 힘이 아닌, 지극히 일부만을 발휘할 수 있는 제약 상태.
그러나 저것조차도 1막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방금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사제의 가슴을 찢어 죽여버렸지 않은가.
따악!
최하급 악마의 왼팔이 털이 난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가장 앞장서 있던 세 명 중 한 명의 가슴이 찢겨 쓰러졌다.
“커헉!”
“미, 미친! 이런, 젠장!”
다들 깜짝 놀라 이를 악물고 말았다.
그야말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죽음.
하지만 크라놀은 무정하게 명령했다.
“다들 겁먹지 마라. 저 팔의 공격에는 대기시간이 있다. 도망쳐도 피하지 못할 만큼 공격 범위가 넓지만, 한 번 쓰면 오랫동안 무방비야.”
단순히 말만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
뒤에 있던 크라놀이 가장 앞장서며 달려가더니, 그 팔에 검격을 퍼부었다.
멈칫하던 다른 신자들도 그 앞선 행동에 용기를 갖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 으윽! 어떻게든 싸우자!”
“어차피 폭주한 악마를 못 죽이면 다 죽은 목숨이야!”
사실 일부러 첫 희생양을 피하려고 신도들을 앞장세웠던 것이지만,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다들 전력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 거대한 팔은 무슨 강철 피부로 만들어진 것처럼 긁히기만 할 뿐이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공격을 퍼부어도, 살짝 까지며 피가 한두 방울 흐르고 끝날 뿐.
하지만 제아무리 얕더라도 상처는 상처였다.
[독니검으로 인해 상대방의 팔 부위가 독성에 먹힙니다.]
크라놀이 착용 중인 독니검의 중독 효과가 터졌다.
그러나…….
[실패!]
[상대방의 면역으로 인해 중독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악마에게는 독니검이 전혀 먹히질 않았다.
원래 이들 족속은 독이나 화염 면역이 강력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가 노렸던 이득은 전혀 다른 것이었으니까.
‘스킬 경험치는 자기보다 강력한 생물을 대상으로 삼을수록 크게 올라간다.’
최하급 악마일지라도, 천계의 상위 종족.
본래 3막에서나 대립했어야 할 미래의 생명체였다.
그러나 지금 1막의 크라놀은 놈을 향해 검술을 마구 퍼붓고 있었다.
천무지체를 이용해 배워놨던 마수사냥꾼들의 검술.
[마수사냥검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1 → Lv.2)]
[마수를 내리치거나 베어 가를 때 힘의 효율이 상승합니다.]
[마수사냥검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2 → Lv.3)]
[마수들의 약점을 조금 더 쉽게 타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두 눈이 번뜩 뜨이는 상태창 문구였다.
‘경험치 효율이 완전히 미쳤군.’
스킬 경험치는 무조건적인 노가다로 올려야만 하는 것이 대부분.
특히나 육체적인 행동과 관련된 기술은 숙련치를 쌓는 수련은 고역이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제아무리 경지가 낮더라도, 검술 스킬의 경지가 순식간에 2레벨이나 올라갔다.
하기야 빙의 이후로 육체 단련조차 한 적 없던 크라놀이, 무려 ‘3막 생명체’에게 연속 공격을 성공시키고 있으니 숙련도가 쑥쑥 오를 만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서 죽기 살기로 칼만 휘두르기 바빴으나, 그는 달랐다.
저 팔 한 짝이 경험치 꿀통임을 알아챈 이상, 검으로만 패기는 아쉬웠다.
‘내놔라. 더 많은 스킬 경험치를.’
크라놀은 영지에서 사 온 활을 꺼내서 팔을 향해 쐈다.
물론 쏘는 족족 화살은 튕겨 나가버렸다.
그러나 칼로 까인 상처들 틈에 약간 파고들거나 꽂힐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거침없이 상태창 메시지가 떠올랐다.
[일반 궁술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1 → Lv.2)]
[화살의 파괴력과 명중률이 약간 증가합니다.]
[일반 궁술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2 → Lv.3)]
[화살의 장전 및 연사 속도가 상승합니다.]
일반 궁술도 순식간에 3레벨 달성!
새끼용이나 여자애를 꺼내도 됐지만, 이번만큼은 스킬 경험치를 독식하기로 했다.
이제껏 자동사냥만 실컷 해댔던 크라놀이었다.
그러나 전리품은 쉽게 얻을지언정, 정작 본인은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
‘광증 완치라는 목표를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강해져야 한다.’
고작 자동사냥만으로 그의 욕심은 그치지 않았다.
효율적인 진짜 사냥으로도 경지를 올려야만 했다.
그렇게 크라놀은 악마를 경험치 샌드백으로 쓰는 미친 짓을 벌였다.
‘적게 일하고도 미친 듯이 보상이 떨어진다. 짭짤하니, 최고군.’
그러나 모르곤의 팔도 마냥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굵은 팔에 힘줄이 거세게 서더니, 부르르 떨렸다.
누가 봐도 미친 듯이 화가 끓어오른 모양.
파앗!
최하급 악마 모르곤의 팔이 손을 활짝 폈다.
거센 에너지가 터지며 신자들이 다들 튕겨 나와 칼을 놓쳤다.
잔뜩 힘을 준 팔이, 주먹을 꽉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거기에선 무언가 시커먼 에너지가 모이더니 둥그런 구슬을 소환했다.
크라놀은 눈매가 좁아졌다.
‘저건 위험한데. 제대로 진노했나 보군.’
분명 팔 한 짝만 소환된 상태에서 펼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을 쓰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전멸을 피할 수가 없는 상황.
그랬기에 크라놀은 재빨리 아까 훔쳤던 마도서를 손에 들었다.
이 낡은 양피지 서적의 정체를, 그는 알고 있었다.
‘신성한 사슬 부림의 마도서. 모르곤을 제압하기 위해 고안된 책이지.’
이것으로 모르곤을 옥죄고 있는 사슬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몰랐겠지만, 이 한 권만으로는 모르곤의 행동을 통제하긴 역부족이었다.
해당 서적으로 사슬을 부리기 위해서는 더더욱 많은 신성력이 필요하니까.
그 신성력을 강화할 물건들을 크라놀은 이미 갖고 있었다.
‘순은 십자가, 그리고 천사의 눈물이 묻은 작대기’.
일전에 부패룡 사냥을 위해 획득했던 성스러운 히든 피스들을 책 위에 올렸다.
강력한 신성력을 머금은 물건들이 불타며 스러졌다.
그리고, 마도서에 적혀 있던 글자들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라놀이 정면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모르곤. 여긴 아직 네놈이 등장할 무대가 아니다.”
책을 펼친 채로 적을 가리켰다.
마도서의 빛이 거대한 팔을 강타했다.
구슬에 불길한 에너지를 모으고 있던 악마의 왼팔이 불현듯, 자세가 꼬였다.
“……!!!”
팔을 옥죄던 사슬이 엄청나게 팽팽해졌다.
그러더니 균열 속으로 도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쇠사슬의 억제력이 한 수 위였다.
“…….”
끝끝내 저항을 포기했는지, 팔의 거센 저항이 멎었다.
그러나 악마의 검지 끄트머리가 크라놀을 가리켰다.
네놈을 다시 만나면, 결단코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이.
그렇게 흑색 균열로 빨려 들어간 팔은,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수상한 어둠의 기운이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끄, 끝난 건가?”
“……서, 성공했어!”
“이런, 씨발! 뒈지는 줄 알았네!”
악마 퇴치와 함께 주위에 퍼졌던 마기가 깨끗이 사라졌다.
크라놀은 책을 던지고 악마가 사라진 자리로 다가갔다.
거기엔 웬 보석 같은 검은색 구슬이 남아 있었다.
모르곤의 왼팔이 뭔가를 하려다가 실패하고 남기고 간 전리품.
크라놀은 그것을 주워 들었다.
[명칭: 잘못된 $@#@$.]
[경고! 해당 아이템은 정보 열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직 당신의 경지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정보를 읽을 수 없는 의문의 아이템.
그러나 크라놀은 미친 성과에 전율했다.
‘……대박이군.’
이건 결코, 현시점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지금으로부터 훨씬 미래에서만 얻을 수 있는 습득물.
본래 3막에서 등장해야 할 물건이니까.
‘이것까진 예상 못 했는데. 설마 현재 시나리오에선 갖지 못하는 아이템이라니.’
그동안의 얻었던 이익들과는 수준 자체가 달랐다.
제아무리 미친 효율이었어도, 지금껏 얻었던 보상들은 이론상 1막에서 가능했던 수준.
그러나 이 습득물은 달랐다.
원작을 아는 크라놀조차도 설마 벌써 3막의 아이템을 얻을 줄은 몰랐다.
‘모르곤이 이 아이템을 내놓는 건 굉장히 낮은 확률인데, 이렇게 얼결에 성공하다니.’
만일 적합하게만 쓴다면, 1막 한정으로 밸런스 붕괴 이벤트들을 벌일 수 있을 터.
그야말로 격이 다른 깽판을 칠 수 있는 사기급 보물이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아니, 잠깐만? 저걸 왜 주워?”
“살아난 건 다행인데, 저 인간이 저 악마의 전리품을 갖는 거야?”
이 결과물의 독점은 모두에게 합의된 것이 아니었다.
크라놀이 구해준 검은 뱀의 교단 사람들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악마로부터 살아남고 나니 본격적으로 전리품부터 눈독을 들이는 것.
이들은 기본적으로 이단이자, 악한들이었다.
애당초 자기들 목숨을 구해줬다고 해서 고마워할 족속이 아니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악마가 흘린 보석이잖아? 우리 교단에서 뭔가 쓸 가치가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우리가 힘들여 소환했던 악마라고!”
“맞아!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당연히 우리가 챙겨야지!”
크라놀은 대놓고 불평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말이 많군.”
그의 왼손으로부터 흑뢰가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다들 움찔하며 물러나기 시작하는 그때.
“……큭!”
크라놀이 갑자기 몸 코피를 확 쏟았다.
그러더니 몸을 반쯤 구부리며, 창백한 얼굴로 기침을 퍼붓기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무시무시한 강자의 면모는 없고 누가 봐도 병자 같은 모습.
하필이면 지금 광증 발작이 터지고 만 것이다.
“뭐, 뭐야? 저 인간?”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진 것 같은데?”
“흑마법의 부작용이라도 온 것 아니야? 그냥 죽여버리고 저거 뺏을까?”
검은 뱀의 교단 신자들이 수군댔다.
그러더니 하나둘씩 아까 놓쳤던 칼을 줍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적들에게 몰려서 개죽음을 당하고 3막 아이템을 뺏길 처지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화아아아악!”
균열이 열리더니, 갑자기 웬 조그만 용이 나타났다.
그러더니 크라놀의 앞을 막아서며 숨결을 내뿜었다.
“어? 아아악!”
“뭐, 뭐야?! 저 용은!”
“뭔가 익숙하게 생겼…… 아악! 뜨거워!”
아가리로부터 내뿜어진 하얀 불길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신자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으니까.
화들짝 놀라서 멀리 도망치는 신자들도 있었으나, 살아남지 못했다.
“아저씨를 해치려고 했죠? 난 안 놓쳐요!”
균열을 열고 나타난 여자애의 손으로부터 검은 벼락이 쏟아져 도망자들에게 적중했다.
결국 두 어린 것에 의해 살려준 사람을 처단하려던 악인들은 죗값을 치렀다.
그렇게 악마를 소환하려던 검은 뱀의 교단 9지파 신도들이 깔끔히 전멸했다.
“억, 윽, 으윽.”
한편 크라놀은 어질어질한 정신을 붙잡고 약초를 퍼먹었다.
그제야 겨우 피가 멎고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자애가 자랑스럽게 양손을 허리에 올렸다.
“히! 내가 악당들을 처치하고 아저씨의 목숨을 구했어요! 난 엄청난 은인이에요!”
크라놀이 파리한 얼굴로 그 아이를 봤다.
이 어린 것들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사실은 비상약으로 부패룡의 심장이 있어서 죽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큰 도움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
그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러면 내게서 뭘 원하지?”
“음, 아저씨는 나한테 예쁜 옷과 달콤한 디저트를 사다 줘야 해요!”
“알았다.”
“히야!”
여자애가 기뻐서는 날개를 퍼덕이며 폴짝 뛰었다.
그걸 본 새끼용도 얼른 크라놀의 종아리에 매달렸다.
“크량! 크랴아앙!”
“……그래, 너한테도 새 육포를 사주지.”
크라놀한테 두 어린 것이 기뻐하며 매달리고 안겼다.
돈이 꽤 들겠지만, 상관없었다.
이제 영주에게서 약속된 보상을 받으러 갈 시간이니까.
14화 3막 아이템
* * *
크라놀은 사냥한 전리품은 그 무엇도 놓치지 않았다.
검은 뱀의 교단 신자들이 입고 있던 붉은 로브.
그것들에는 특수한 효과가 새겨져 있었다.
[명칭: 마경의 붉은 로브.]
[등급: 희귀]
[성능: 마경에서 살아가는 특이 식물 섬유로 짜인 로브. 착용자는 마기가 가득한 지역에서도 체력과 정신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 오래 입을수록 효과가 더뎌져 마력 주입이 필요하다.
+최대 72시간까지 마기 속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쓰러진 시체들로부터 로브를 전부 벗겨서 알뜰히 챙겼다.
불타거나 크게 훼손된 것을 제외하니 총 일곱 벌은 되었다.
‘어디다 팔거나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정 안 되면 원단값이라도 받아내면 되니까.’
일단 챙길 수 있는 것은 챙겨놔야 한다.
크라놀은 그 외에도 검은 뱀의 교단 신자들에게서 소지품도 털었다.
총 은화 다섯 개쯤의 소지금과 각종 잡다한 말린 열매, 흑색 십자가, 경전, 철검 따위였다.
그래도 우선 전부 새끼용의 아공간 창고에 밀어 넣어 놨다.
“크랴아아앙?”
“쓰레기처럼 쓸모없는 잡템도 일단 챙기는 게 돈이 된다. 그래야 네 육포도 사줄 수 있으니.”
“크량!”
의문을 표했던 새끼용이 꼬리를 흔들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크라놀은 비르시 영지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내내 부패했던 영역의 곳곳을 체크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마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최하급 악마 모르곤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탓이겠지.’
그 녀석은 크라놀에 의해 본인의 영역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뭐, 훗날 3막에서 놈과 안 좋게 엮일 확률이 늘었지만 상관없었다.
크라놀은 그런 끔찍한 천계에는 발끝 하나 디딜 생각이 없었으니까.
‘이 세계를 구하는 것은 원작 주인공의 몫이지.’
생판 모르는 남까지 구원하기 위해 아득바득 몸을 갈고 싶진 않았다.
크라놀은 자신의 앞길과 건강이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영지로 되돌아가며 새삼 본인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 크라놀 위자르]
[종족: 인간]
[칭호: 강철 수도원의 탈주자]
[전용 스킬: 투명화(Lv1), 흑뢰(Lv1), 마수사냥검(Lv3), 일반 방패술(Lv1), 일반 궁술(Lv3)]
[보유 특성: 재앙 친화력(??), 광증(전설), 천무지체(유니크)]
[능력치: 근력(Lv3), 민첩(Lv3), 마력(Lv2), 행운(Lv2)]
[특이 사항: 잿빛 머리칼과 붉은 눈의 피폐한 미남자. 지독한 광증 탓에 밝은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만성 두통, 신경 쇠약, 불면증 따위를 겹쳐 앓고 있으며 심각한 약초 남용이 육신을 갉아 먹고 있다. 빙의하기 이전부터 그랬듯, 본인 삶의 행복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래도 꽤 거창해졌군. 빙의하고서 초반 석 달은 한없이 초라한 상태창이었는데.’
늘 머리를 쇠바늘로 긁어대는 듯한 두통.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정신 나간 광증 발작.
위험한 환자라며, 그의 온몸을 묶어서 구속해 뒀던 기괴한 수도원까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빙의하고 어떻게 버텨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고.’
크라놀은 부패했던 영역에서 이룬 성과를 정산했다.
예전엔 전부 ‘1~2레벨’에 불과했던 능력치,
그러나 이젠 경지가 조금이나마 올라가 있었다.
이만하면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크라놀이 고급스러운 검은 가죽 장갑을 톡톡 두드렸다.
‘이걸로 올리는 능력치도 한계치가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별 2성짜리 장비이니.’
한 능력치를 4레벨 이상으로 올리려면 마기가 태산처럼 어마어마하게 필요할 터.
물론 ‘마경’ 같은 장소를 가면 그만큼의 자원을 구할 순 있겠지만, 비효율적이고 위험했다.
애당초 마기 흡수만 써서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그래도 이쯤이면 나쁘지 않은 것을 넘어서 기대 이상의 성과지.’
마수사냥검과 일반 궁술.
두 전투 스킬 경지를 기본 3레벨씩 달성했다.
무엇보다 무려 3막의 아이템도 미리 얻었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야.’
비르시 영지로 되돌아가며 크라놀은 새롭게 얻게 될 이득을 기대했다.
* * *
영주 성.
이미 되돌아가니 영주가 두 팔 벌려 크라놀을 환영했다.
부패했던 영역이 깨끗이 정화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진작 퍼져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혼자 당당히 귀환한 크라놀의 모습은 모두를 경탄케 했다.
“역시 대단하군! 괜히 미친개 크라놀이 아니었어! 설마 이렇게 빨리 임무를 해내다니!”
“보상 주십시오.”
크라놀은 딱 잘라 본론만 말했다.
이 인간에게서는 두 가지 보상을 약속받았다.
유니크 등급 아이템인 하늘 장화, 그리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부탁을 들어줄 것.
“하하! 역시 뛰어난 용병답군. 여봐라. 그것을 가져오너라!”
“예, 영주님.”
시종이 고급스러운 쿠션 위에 무언가를 올려서 가져왔다.
핏자국이 덕지덕지 묻은 갈색빛의 쭈글쭈글한 장화.
크라놀은 곧장 그 아이템을 감정했다.
[명칭: 하늘 장화.]
[등급: 유니크(불완전)]
[성능: 바깥 땅의 이형체(異形體)가 심심풀이로 제작한 신발. 착용하면 놀라운 이동 마법을 쓸 수 있으나, 어설픈 완성도 탓에 품질이 몹시 불완전하다. 능력이 제한되어, 오직 ‘하늘로만’ 순간 이동할 수 있다. 잘못 사용했다가는 금세 추락사할 수 있으니, 주의가 필요하다.]
크라놀은 화도 나지 않았다.
뭐, 대충 이럴 줄 알았다.
영주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확실히 유니크 등급은 맞네. 완성도가 끔찍하게 낮을 뿐.’
이전 사용자가 밤하늘의 달을 다녀왔다는 소문이 어째서 퍼졌는지 알 수 있었다.
하늘로만 순간이동이 가능하다니, 막장 성능이 따로 없었으니까.
살벌한 핏자국은 이전 사용자들의 최후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기야 말이 안 됐지. 아무리 봐도 유니크 등급 보상을 얻을 수준의 의뢰가 아니었으니.’
상위종 언데드인 부패룡의 심장이 그 정도 등급이었다.
그만한 보물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이것저것 고려해도 상당히 괜찮은 보상.’
크라놀에게는 원작 지식이 있었다.
이 위험한 성능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는 잘 알았다.
그는 말없이 불완전한 하늘 장화를 받아냈다.
“두 번째 약속도 이젠 들어주셔야 합니다.”
어차피 크라놀의 본래 목적은 두 번째 약속이었다.
그러자 영주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 장화가 자네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부족한 보상임을 인지하고 있네. 그러니 뭐든 말해 보게나. 물론 내 가족이나 영지에 타격을 줄 만한 요구, 그리고 내 몸을 요구하는 부탁은 불가능하다네. 별의 맹세를 나눌 때 그런 게 가능하다고 조항을 서술해 두지도 않았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런가? 다행이로군. 맹세 써주면 사람 등쳐 먹으려는 게 어디 한둘이 아니어서 말이지.”
영주가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자네, 혹시 내 밑에서만 일해볼 생각 없나? 그저 용병으로만 있기엔 무척 아까운 재목인데. 자네라면 특별히 봉급도 기존 평균보다 두 배는 쳐줌세.”
비르시 영지는, 대도시까진 아니지만 규모가 크고 융성했다.
당연히 영주 밑에서 일하면 안정적이고 보수도 높으리라.
그러나 크라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일전에 제가 정화한 영역으로부터, 무역로 루트를 개설한다고 말씀하셨죠.”
그가 원하는 보상은 간단했다.
크라놀은 스스럼없이 요구했다.
“무역품의 전량을 보여주시죠. 제가 원하는 것들을 챙기겠습니다.”
* * *
보상을 받아낸 크라놀은 영주 성을 나갔다.
비르시의 영주는 뒷짐을 지고 그 뒷모습을 내려다봤다.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군, 정말.”
새삼 영주는 실감했다.
크라놀 위자르의 별명이 어째서 미친개인지를.
‘설마 내가 장차 영지 확장을 위해 준비해 뒀던 무역품을 요구할 줄이야.’
치명적인 피해까진 아니지만, 꽤 거금이 나가 버렸다.
크라놀이 요구했던 것은 오직 한정 수량 무역품이었으니까.
연금술 전쟁에 팔려 나갈 예정이었던 각종 약초와 고약(膏藥)들.
“…….”
입꼬리가 흘깃 올라가 있었다.
그러나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 좋던 영주의 표정이 불현듯 변했다.
‘이것 참. 내가 그리도 우스웠나 보군. 영입 제안까지 걷어차고, 맹세 조항만 맹신하다니.’
물론 영주도 별의 맹세를 따랐다.
저 미친개가 원하는 것은 다 내줬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의 일부터는 무관했다.
무역로 개설을 위해선 들어갈 예산이 많았다.
그러니, 쓸데없는 비용은 아끼는 것이 옳았다.
“해가 지면, 내가 내줬던 장화와 무역품들을 도로 가져와라. 물론 그 미친개도 치워버리고.”
“예, 알겠습니다!”
평소 애용하는 살수들이 몸을 움직였다.
용도가 다한 미친개는 쓸모가 없었다.
* * *
크라놀은 받아낸 무역품을 전부 아공간 창고에 넣어뒀다.
그 이후엔 자신이 혹여 나중에 입을 것만 쟁여두고, 신자들의 로브를 전부 처분했다.
영지 상점가에는 노련한 상인들이 많아, 판매 가격에 관해 담론하다 보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연히 원래 제시한 금액보다 내려치려고 했지만, 덤으로 각종 잡템도 넘겨버리니 넘어갔다.
끝에 가서는 다행히 꽤 괜찮은 값을 받아낼 수 있었다.
“우와! 여기가 인간들이 사는 곳이에요? 엄청 신기해요!”
크라놀이 영지 상점가 뒷골목에서 여자애를 소환했다.
당연히 흑백 날개는 너무 눈에 띄어서 일부러 망토 같은 천으로 가려놨다.
말했다시피 비르시 영지는 어지간한 지방 촌구석과는 차원이 달랐다.
규모도 어지간한 소도시 수준으로 크고, 각종 인프라도 훨씬 고급스러운 민간 지역.
여자애는 입을 헤벌쭉 벌린 채 휘둥그레 커진 눈을 여기저기서 뗄 줄 몰랐다.
“원하는 가게를 정해라. 네게 걸맞은 예쁜 옷을 사주겠다.”
“히야!”
여자애는 고민도 하지 않았다.
가장 비싸고 예뻐 보이는 옷 가게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어머?”
상점 점원이 깜찍한 여자애를 보더니 싱긋 웃었다.
귀여운 아이는 누구나 미소를 짓게 하는 법이었다.
“아이가 정말로 귀엽네요. 혹시 동생분이신가요?”
“아……, 조카입니다.”
“어머나? 삼촌분도 정말로 미남이신 데다 동안이셔요! 마침 여기 신상 옷이 있는데…….”
여자애는 가게 내부를 싱글벙글 돌아다녔다.
“어때요, 아저씨? 어떤 게 나한테 어울리나요? 옷이 다 너무 예쁘고 귀여워요!”
그 애는 결국 노랗고 병아리 같은 원피스를 사 입었다.
이젠 헝겊만 대충 걸쳤을 때보다 귀족가의 영애처럼 훨씬 태가 나고 예뻤다.
거기다 달콤한 디저트를 먹고 싶다고 하여 영지의 제과점도 들렀다.
크림 브륄레를 사줬더니, 입가에 묻혀가며 맛나게 먹었다.
“난 이젠 아저씨가 정말로 좋아요! 아저씨를 만나서 다행이에요!”
“입 닦고 달라붙어라.”
“크랴아아앙…….”
반면 뒤에서 따라오던 새끼용은 시무룩하게 울상을 지었다.
날개만 가리면 인간 같은 여자애와 달리, 용은 훨씬 눈에 띄었으니까.
저 둘은 잘만 함께 다니는데, 자기 혼자만 투명해져서 따라다녀야 하니 무척 섭섭한 모양.
크라놀은 그런 삐친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보상을 선물했다.
“크량?”
“이건 염장한 햄이다. 네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군.”
인적 드문 곳에서 두툼한 햄을 내밀었다.
새끼용은 투명화를 풀고서 킁킁 냄새를 맡았다.
“크랴아앙?!”
곧 녀석의 눈이 확 뒤집어졌다.
그러더니 환장하며 달려들어서 햄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결과였기에, 크라놀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어릴 때는 누구나 햄이랑 소시지에 환장하니까.’
아무튼 비르시 영지를 즐기며 어린 것들은 참 행복해했다.
그러나 영원히 한 곳에서만 머무를 수는 없는 법.
이제는 떠날 시간이었다.
‘내 광증을 낫게 할 기적을 찾아가야 하니까.’
말했다시피 세상엔 불가능한 확률을 이뤄내는 기적들이 존재했다.
크라놀이 노리는 첫 번째 기적은 다음과 같았다.
‘현자의 돌.’
무려 만물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신비로운 돌멩이.
광증을 치유할 가능성이 높은 기적 중 하나였다.
그나마 가장 빨리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기도 했고.
‘하지만 기적을 접하려면,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안 된다.’
설령 빙의자인 크라놀이라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기적으로 도달하는 길은 그만큼 위험천만하기에.
그러므로 최하급 악마에게서 얻었던 전리품을 꺼냈다.
‘본래 3막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전리품. 이거라면 도움이 되겠지.’
검은 색상의 구슬.
물론 3막의 아이템답게 정보가 막혀 있었다.
[명칭: 잘못된 $@#@$.]
[경고! 해당 아이템은 정보 열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직 당신의 경지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크라놀은 이것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었다.
이 아이템의 명칭은, ‘잘못된 미래의 구슬’.
사용법은 간단했다.
“토실아. 이리로 와라.”
“키야아아앙!”
새끼용이 앙칼지게 앞발을 들이밀었다.
여전히 본인 이름이 싫은 모양이었다.
크라놀은 구슬을 새끼용의 대가리와 눈, 주둥이에 톡톡 쳤다.
[‘버림받은 새끼용’의 여러 가지 앞날을 살핍니다.]
[해당 재앙의 잘못된 미래로부터 강력한 기술을 강탈합니다.]
[자칫 통제 불가한 힘이 생겨날 수 있으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미래의 구슬’의 효과.
대상의 수많은 미래 모습 중 비뚤어진 장래를 선정한다.
그리고 해당 미래로부터 강력한 비기를 빼앗아 올 수 있었다.
한 대상에게 중복 사용이 불가하기에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물론 대상의 미래가 별 볼 일 없다면, 큰 소득도 없이 끝나버리지만.’
지금 크라놀 일행에게는 달랐다.
하나같이 끔찍하게 변할 수 있는 재앙들이니까.
그랬기에 그는 손쉽게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새끼용의 잘못된 미래라면, 너무 뻔하지.’
아니나 다를까.
실로 흉포하기 짝이 없는 결과물이 뽑혔다.
[‘버림받은 새끼용’에게 새 지식이 주입됩니다.]
[전용 비기, ‘폭룡 부르기(Lv1)’를 배웠습니다!]
[해당 아이템의 사용 횟수가 ‘2회’ 남았습니다.]
말했다시피 기적과 대면하려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된다.
최소한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강력해져야만 하니까.
그러나 지금 크라놀은 한시가 급했다.
따라서 가장 비상식적이고 급진적인 길을 택했다.
‘1막 최종 보스, 흑금룡.’
대륙의 존망을 결정지을 초대형 마수.
크라놀은 녀석을 이용할 작정이었다.
15화 새끼용의 비기
* * *
흑금룡.
현재는 잠들어 있지만, 3년 뒤에 깨어날 초대형 마수.
이 1막 최종 보스한테 맞서기 힘든 이유는 별것이 아니었다.
무려 이 대륙에 있는 모든 폭룡을 ‘전원 소집’할 수 있으니까.
‘폭룡은 일반적인 용보다 포악하고, 심각한 피해를 주는 부류지.’
그런데 그런 재해 같은 용들을 한곳에 불러 모을 수 있다니.
가히 대륙의 존망을 결정짓는다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수준.
‘물론 비기를 드높게 발전시켜야 가능한 결과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이 비기는 굉장히 쓸만했다.
아니, 쓸 만한 것을 넘어 끔찍하게 위험했다.
자칫했다간 불러낸 폭룡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테니까.
‘그런 흉악한 결전 기술을, 이 어리디어린 새끼용이 배웠다.’
물론 현재 비기의 스킬 레벨은 고작 1레벨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거물이 될 싹이 튼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원래는 지금 시점에선 꿈도 못 꿀 비기인데.’
비기는, 일반적으로 배울 수 없는 최고급 기술이나 강력한 비전을 뜻했다.
‘폭룡 부르기’ 역시 흑금룡의 비기답게 쉽게 배우지 못하는 스킬.
정석적인 루트대로라면, 두 차례나 진화를 겪은 뒤, ‘동족상잔’까지 벌여야 하니까.
지금의 여리고 순둥순둥한 새끼용이라면 결단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힘이었다.
그런데 그런 잔혹한 비기를, 아직 비늘도 여린 유년기에 배워버리다니.
이건 엄청난 이득이었다.
‘과연 3막 아이템이군. 시간의 흐름을 이렇게 거스를 수 있다니.’
크라놀은 이 어린 재앙들을 최대한 올바르게 키울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교육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었다.
인명 피해는 줄겠지만, 재앙 본연의 난폭한 힘은 포기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건 올바른 인성을 지키면서도, 흉악스러운 비기들을 배울 수 있다.’
새삼 ‘잘못된 미래의 구슬’의 위력에 감탄이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3막의 미친 규모에 기가 질리기도 했다.
고작 전투 노예 취급이나 당하는 모르곤이 이만한 전리품을 흘린다.
그럼 하물며 ‘천사 진영의 총괄자’나 ‘악마 진영의 우두머리’는 어떻겠는가.
보상이 엄청나다는 것은 그만큼 막대한 존재감과 무력을 겸비했다는 의미.
새삼 느끼지만, 이놈의 세계관은 쓸데없이 스케일이 컸다.
“크랴아아앙?”
반면 새끼용은 혼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작스레 머릿속에 쏟아진 새 지식에 놀란 모양.
크라놀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지금 네게 새로운 비기를 가르쳤다. 잘못된 미래의 너로부터 강탈한 힘이지.”
“진짜요? 엄청 신기해요! 나한테도 그거 가르쳐줘요, 아저씨!”
여자애가 부러워하며 그의 옆구리에 매달렸다.
그러나 크라놀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안 돼. 넌 비기를 잘못 쓰면 나까지 죽이니까.”
“흐잉! 너무해요! 난 착하게 살 건데!”
여자애가 삐쳐선 볼을 부풀렸다.
이것이 ‘잘못된 미래의 구슬’의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결국은 비뚤어져서, 학살을 벌이고, 재앙이 된 시점의 미래.
개중엔 ‘국가도 전복시키는 자살기’나 ‘멸망을 불러올 힘’도 존재했다.
자칫 너무 위험한 비기를 잘못 가져오면 현재에도 악영향을 미칠 터.
“아무튼 네 비기가 보고 싶다. 한번 써봐라.”
“키아아…….”
새끼용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자세를 낮췄다.
잔뜩 긴장하고 정신 집중하며 숨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팍 뜨며, 힘차게 포효했다.
“크랴아아아앙!”
[전용 비기, 폭룡 부르기(Lv1)을 발동했습니다!]
[아직 「버림받은 새끼용」은 하찮고 미성숙합니다.]
[그 어떤 폭룡도 소환에 응답해 주질 않습니다.]
[불러내는 소환체의 수준이 극도로 낮아집니다.]
마력이 쏟아지며 허공에 형상이 빚어졌다.
눈 부신 빛과 함께 무언가 소환됐다.
웬 냄새나고 썩은 큼지막한 고기 조각이었다.
[대수림 폭룡, 리브자우트의 송곳니에 끼었던 고기 찌꺼기가 소환됐습니다!]
“크랴아아앙…….”
비기답지 않게 초라한 결과물.
새끼용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애가 위로하면서 꼭 안아줬다.
“힘내요, 새끼용아! 다음에 소환하면 훨씬 더 멋진 용이 나타날 거예요!”
“새끼용이 아니라, 토실이다.”
“키야아아앙!”
새끼용이 자길 놀리냐는 듯이 눈물이 고였다.
크라놀은 이해가 가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렇게까지 별로란 말인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
“이런 멋진 이름들도 싫다면, 도대체 너흰 어떻게 불리길 원하는 거지?”
“크량! 크랴아앙! 크량!”
“음. 새끼용은 자기한테 어울리는 우아한 이름이 좋겠대요! 나도 아주 어여쁜 이름을 원해요! 토실이나 오동이 같은 이름은 너무 촌스럽고 못나요!”
이건 크라놀에게 깊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었다.
언제까지고 새끼용과 여자애라 칭할 순 없으니까.
아무래도 조만간 호칭 정리를 좀 해야겠다.
“일단 저것들만 좀 잡고.”
“크랴아앙?”
“무슨 소리예요, 아저씨?”
크라놀은 칼자루를 쥐었다.
저 멀리에서 보이는 행인들이 있었다.
일반인들 같지만, 그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습격이다.”
* * *
비르시의 영주도 바보는 아니었다.
상대는 이 영지에서 유명한 미친개 크라놀.
더군다나 소용돌이 토굴로부터 살아 돌아온 실력자였다.
그랬기에 흔한 용병들이 아닌, 근방의 살수들을 파견했다.
살수의 기량은 싸움패 나부랭이들과는 비교도 안 됐다.
원래라면 독을 먹여서 귀찮은 싸움을 거를 계획이었다.
경갑 위에 평상복을 걸쳐서 위장까지 하고 접근했으니까.
그러나 크라놀이 이쪽을 향해 칼자루를 쥔 순간, 다들 눈이 번뜩였다.
“놈이 알아챘다.”
“당장 가서 처리해!”
일반인으로 위장했던 그들이 순식간에 본 실력을 드러냈다.
꽤 멀었던 거리를 순식간에 달려들어 좁혔으니까.
그러나 저 미친개라 불리는 용병은 달아나지도 않았다.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싸워줄 존재를 세워뒀으니까.
“아아악!”
모두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새끼용이 소환했던 고기 찌꺼기.
그것이 갑자기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대더니, 한 살수를 덮쳤다.
“뭐, 뭐야?”
“고, 고깃덩이가 움직인다!”
“다, 다리가 먹히고 있어!”
용은 강력하다.
하물며 ‘폭룡’으로 구분된 종들은 더하다.
성질 자체도 난폭하고, 그 힘도 막대하니까.
하지만 막상 악명에 비해 체감은 어려웠다.
인간과 폭룡은 어느 정도 수준 차이가 나는가?
‘그 답이 저기 있네.’
살수란, 인간 중에서 칼 좀 쓴다고 자신하는 부류.
그런데 그런 살수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고작 이빨 사이에 끼었던 고기 찌꺼기 따위한테.
“크량?! 크랴아앙!”
“세상에! 아저씨! 새끼용이 도대체 뭘 소환한 거예요?”
“고기 찌꺼기지. 다만 생전 괴물들의 본능이 뒤섞여 있는.”
위대한 폭룡은 아무거나 사냥해 먹지 않는다.
오우거 투사, 굶주린 설인, 격노 거인……, 때론 타락한 요정들까지 먹어 치우니까.
그러나 개중에 질긴 생명력이나 차원을 아우르는 생명체들이 문제가 됐다.
여러 괴생물의 근육조직과 특성이 혼재되어, 슬라임으로 변해버리니까.
오직 전투 생명체를 집어삼키는 본능뿐인 고깃덩이.
“지금 폭룡이 직접 소환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담할 것은 없다.”
폭룡은 지금 대륙의 민간인들이 감히 대항도 못 할 생명체.
현재 수준에선 당연한 결과였다.
스킬 레벨을 올릴수록 더 끔찍한 힘이 소환되리라.
‘아마 스킬 레벨을 꾸준히 올리더라도 성체의 폭룡을 소환하는 것은 쉽지 않을 테지.’
폭룡을 집결시키려면 지고한 위엄과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그것은 단순히 성장만 이룬다고 쉬이 달성되지 않는 부분.
그러나 말했다시피 낙담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비기를 얻은 것만 해도 말도 안 되는 이득이니까.
‘어지간해선 접선도 못 할 폭룡들과 ‘소통 창구’가 생겼다는 거니까.’
크라놀의 머릿속엔 벌써 온갖 미친 짓이 떠올랐다.
개중 몇 가지나 실행할 수 있을지 벌써 기대됐다.
“아악! 내, 내 몸이! 제기랄, 떨어져! 어어억……!”
한편 덮쳐진 살수는 고깃덩이 슬라임한테 그대로 하반신을 먹혔다.
한낱 이빨의 고기 찌꺼기조차도 살수를 제압할 수 있다니.
폭룡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들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물며 그런 폭룡 중에서도 최강인 흑금룡은 어찌나 강대하겠는가.
“크윽! 제기랄!”
고깃덩이 슬라임이 살수들의 칼에 도륙당했다.
꽤 강했지만, 적 전체를 학살할 수준은 되지 못했다.
그래도 살수 한 명은 반쯤 먹어 치워서 죽여 버렸다.
‘물론 일개 영지이니만큼, 살수들 수준도 썩 대단치는 않지만.’
송곳니에 끼었던 음식물 찌꺼기치고는 말도 안 되는 성과.
“이런, 빌어먹을! 벌써 한 명 죽어버렸어!”
“저기 이상한 용이랑 어린 여자애도 있다!”
“당황하지 마라! 여전히 숫자는 이쪽이 앞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크라놀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 손엔 독니검을 들고, 다른 손으론 스크롤을 찢었다.
일전에 마수사냥꾼들에게서 목숨값으로 받아냈던 귀중품.
“너희들, 영주가 보낸 거겠지.”
보상품을 얻자마자 바로 습격해 온 것을 보면 뻔했다.
거기다가 이 근방의 옷감과 칼의 양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살수들은 그 말을 무시하고 비수부터 날렸다.
어떤 바보가 자기들 의뢰인을 암살 대상에게 고백하겠는가?
그러나 보이지 않는 보호막에 날아든 비수들이 우수수 막혔다.
“대답 없으면 영주가 보낸 것으로 간주하겠다.”
방금 직접 뜯은 ‘하급 보호 마법 스크롤’의 효과.
크라놀은 담담히 손을 움켜쥐었다.
그 손아귀에서 검은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살수들의 눈썹이 흠칫 올라갔다.
“뭐지, 그 이상한 마법은?”
“말을 돌려도 영주가 보낸 것으로 간주하겠다.”
이들은 멍청하게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도리어 파고들어 일제히 칼을 휘둘렀다.
잘 훈련된 것처럼 똑같은 타이밍이었다.
카앙!
얇은 보호막이 깨지고, 칼날들이 파고들었다.
하급 보호 마법의 한계!
낙뢰가 준비되기도 전에 목이 잘려 나갈 판국이었다.
그러나…….
챙!
나아간 칼날들이 대뜸 저들끼리 맞부딪혔다.
크라놀의 몸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살수들의 눈이 갈 곳을 잃었을 때.
파지지직!
대뜸 상공에서 검은 벼락이 내리쳤다.
하늘 장화를 이용한 순간이동.
크라놀은 7미터나 되는 거리를 순식간에 올라섰다.
“어억!”
낙뢰를 처맞은 살수 둘이 쓰러졌다.
그러나 단점은 추락을 대비할 수 없단 것.
그대로 떨어지려던 찰나, 누군가 허리를 붙들어 잡았다.
“크랴아아앙!”
재빠르게 날아든 새끼용이 날개를 퍼덕이며 그의 추락을 막아줬다.
그러나 방금 폭룡 소환으로 마나를 크게 소모해서일까.
숨을 헐떡이며 당장 백색 숨결을 내뱉진 못했다.
“제기랄! 저 용 새끼는 또 뭐야?”
“아직 작고 어려 보인다! 상관하지 말고 죽여!”
“기왕 죽이는 김에 저것도 함께 잡아서 팔아버리자고!”
나머지 살수들이 이를 갈고 남은 비수를 날리려고 했으나.
이들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적이 남아있었다.
“아저씨. 이건 이렇게도 쓸 수 있어요! 히얍!”
날개를 숨기고 있던 여자애.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대뜸 손을 내뻗어 흑뢰를 날렸다.
얇은 흑색 번개가 연쇄 작용을 일으키며 살수들을 옭아맸다.
“어어억!”
“다, 다리에 힘이……!”
설마 여려 보이는 꼬마애가 갑작스레 공격할 줄은 몰랐던 모양.
결국 남은 살수들마저도 흑뢰에 감전돼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재앙, ‘혼혈 천마’가 적들을 제압했습니다.]
[흑뢰의 스킬 레벨이 올랐습니다! (Lv.2 → Lv.3)]
[검은 번개의 연쇄 갈래가 한 개 더 추가됐습니다.]
괜히 악마의 핏줄을 타고난 것이 아니었다.
실로 감탄이 나오는 전투 방식이었다.
‘위력을 분산시키면, 여럿한테 마비 효과도 줄 수 있군.’
괜히 크라놀이 이 아이와 다른 스킬 루트를 타려는 게 아니었다.
똑같은 힘이라도 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쓸모가 갈렸으니까.
“커, 커헉!”
몸이 마비된 적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도망치지 못했다.
크라놀은 단 한 명만 남겨두고 살수들의 숨을 끊었다.
마지막 남은 살수가 몸을 떨면서도 이를 악물었다.
“나, 난 아무것도 말 못 한다!”
“말 못 한다고 잡아떼다니. 영주가 보냈군.”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크라놀은 칼날로 살수의 가슴 표면을 여러 번 그었다.
독니검의 중독 효과가 터져서 독기가 올라갔다.
온몸의 기력이 쇠하여, 천천히 죽어가는 마지막 살수.
‘위치도 그렇고, 시간대도 그렇고.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크라놀에겐 기적을 찾아 광증을 치유한다는 본연의 목적이 있었다.
하찮은 복수에 시간 낭비할 여유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자길 죽이려 한 영주를 그냥 놔둘 생각은 없었다.
이럴 땐 처절하게 응징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니까.
“크흑! 커헉!”
숨이 멎어가는 살수 곁에 앉았다.
크라놀은 무언가 쓰기 시작했다.
그것은 별로 길지 않은 쪽지였다.
“아저씨! 도대체 뭘 하는 거예요?”
“누구를 좀 불러오려고.”
“크랴아아앙…….”
새끼용이 시무룩하게 대가리를 숙였다.
그러자 크라놀은 고개를 내저었다.
“폭룡 말고. 그것보다 더 무서운 거.”
“크랴아아아?!”
“히익! 그게 무슨 소리예요?”
새끼용과 여자애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그런 끔찍한 게 세상에 어딨냐는 듯이.
그러나 크라놀은 묵묵히 작업할 따름이었다.
왜, 딱 한 명 있잖은가.
원작에서 1막 최종 보스의 멱을 따버렸던 광인(狂人).
‘역시 자동사냥이 최고지.’
크라놀은 복수 대행을 맡기려 했다.
그것도 원작의 주인공한테.
16화 대연금술사의 대도시
* * *
쏴아아아아…….
밤하늘이 빗물을 토해내고 있는 새벽.
비르시의 영주는 아랫입술을 질겅였다.
시간이 늦었건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어제저녁 긴급하게 접한 소식 탓이었다.
‘크라놀. 그 미친개가 내 살수들마저 전멸시켰다니.’
놈을 죽이러 갔던 살수들이 도리어 시체로 발견됐다.
쓸데없는 싸움은 피하고 독이나 쓰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도대체 어찌 알고 역습한 것인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지금 그가 잠에 들지 못하는 것은 예민한 직감 탓이었다.
‘……설마 그 미친개가 이것까지 전부 예상하고?’
갑작스레 기억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갔다.
크라놀과 함께했던, 함부로 꺾을 수 없는 별의 맹세.
만약 그 조항에 거래 이후로도 서로 해쳐선 안 된다는 항목을 넣었다면 어땠겠는가.
비르시의 영주는 결코 맹세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놈은 그런 과정을 생략했다. 그래서 이쪽 방면으론 어리숙하다고 여겼는데.’
하지만 인제 와서 보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오히려 그것이 의도한 바였다면?
일단 자신에게서 보상품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설령 나중에 습격해 오더라도, 역습할 자신감이 충분했던 거라면?
“…….”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렇게 불길한 의혹이 깊어질 즈음.
갑자기 방에 있는 촛불이 모두 꺼졌다.
“어?”
영주는 놀라서 어둠 속에서 헤맸다.
끼익.
하인을 부르려고 했는데, 문이 저절로 닫혔다.
보이지 않는 사방을 더듬대다, 문득 깨달았다.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지금, 이 방 안에 자신 말고도 누군가가 있다.
“……누구냐?”
영주는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목소리에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벌써 두려움에 더듬대고 있었다.
“서, 설마 미친개인가?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네!”
어둠 속에서 들려온 대답은 없었다.
다만 손목을 무엇인가가 세차게 감싸 쥐었다.
놀라서 뿌리치려고 했지만,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어억!”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윽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신체 곳곳을 쑤셨다.
영주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아아아! 끄아……!”
크게 소리 지르려고 하면 예리한 것이 입안을 쑤셨다.
말도 못 할 고통과 함께 온몸이 축축해졌다.
젖어가는 액체가 눈물인지 선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오기가 생기고 말았다.
죽더라도 알기는 알아야겠다.
내가 누구에게 당한 것인가.
그리고 그때, 삶의 마지막 행운이 스쳤다.
콰르르르릉!
때마침 천둥이 울리고, 벼락이 내리쳤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찰나의 광명.
어둠에 감춰졌던 상대방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영주는 경악하고 말았다.
“어?”
……크라놀 위자르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얼굴.
상대는 영주와 구면(舊面)이었으니까.
그랬기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네, 네놈이 도대체 왜……!”
그러나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상대의 날붙이가 다시금 쇄도했다.
눈앞이 결국은 아득히 어두워졌다.
* * *
보슬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이날, 크라놀은 근처 잡화점에서 산 신문을 읽고 있었다.
때마침 1면에 무척 반가운 소식이 보였다.
무역로 확장을 위해 세금을 수탈했던 비르시의 영주.
그가 정체 모를 누군가에게 참살당했다는 긴급 속보였다.
‘일 처리가 확실하군. 역시 주인공이야.’
남의 손으로 복수하니 시간도 아끼고 좋았다.
과연 원작, ‘EX급 마수사냥꾼’의 주인공이다.
실력 하나는 보증이 되어 있달까.
‘물론 앞으로도 그 녀석과는 절대 마주칠 생각이 없지만.’
크라놀은 원작에 빙의한 애독자였다.
그러니 사실 비열하게 이득을 취하는 짓도 가능했다.
왜, 흔히 있잖은가.
본래 주인공이 가져야 할 히든 피스를 전부 빼앗거나.
녀석의 동료 후보들마저 모조리 독식해 버리는 전형적인 서사.
하지만 그건 이 세계의 주역을 너무 만만히 보는 처사였다.
원작 주인공은 그딴 것들을 빼앗긴다고 도태될 녀석이 아니니까.
‘오히려 자기 걸 훔쳐 간 녀석을 평생 쫓아다니며 괴롭힐 놈이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역시 적당히 원작 기연만 훔쳐 먹고 내빼야겠다.
어디까지나 그의 목적은 광증 치유에 있었으니까.
“크랴아! 크랴아앙!”
“우와! 아저씨! 저것 좀 봐요! 돌무더기가 혼자서 막 움직여요!”
오늘 오후, 크라놀 일행은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비르시도 번화하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영지였다.
그러나 이곳은 대륙에서도 대도시로 분류된 행정구역.
‘역시 대도시는 다르군. 훨씬 드넓고 구획도 다양하고.’
특히 중앙 구획에는 잘나가는 연금술 가게가 많이 보였다.
플라스크나 도가니, 시약병, 절구와 공이 따위가 올려진 판매대들.
내부를 살짝 엿보니 연금 가마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기도 했다.
거기다 지천에서 풍기는 유황과 송진 냄새, 약초를 달이는 쓴 향.
심지어 거대한 골렘이 무거운 짐들을 옮기는 진풍경도 보였다.
‘알레티카. 이곳은 대연금술사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이지.’
과거, 이곳은 수많은 마수가 활개를 쳤던 위험 지역이었다.
잔혹한 괴물들에 의해 무고한 인간이 잡아먹히고 수탈당했던 곳.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던 이곳은 단 한 명에 의해 개척됐다.
일명, 대연금술사 라닉스.
과거 이 제국을 건국하는데 앞장섰던 전설 중 한 명.
그가 마수들에 맞서 연성한 것은 황금도, 무기도, 골렘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대연금술사는 무려 ‘자기 몸’을 연성했다고 하니까.
‘어떤 날은 폭룡처럼 뜨겁고 매서운 브레스를 내뿜고, 또 어떨 땐 거인보다도 강력한 괴력으로 다가오는 마수들을 쓸어버렸다고 하지.’
만물을 재구축하는 신비로운 돌멩이.
그것이 바로 현자의 돌이었다.
그 돌에는 연금술과 관련된 다양한 기능이 많았다.
‘그거라면 내게 걸린 광증도 치유할 수 있을 거다.’
현재 크라놀이 목표로 잡은 것은 현자의 돌이었다.
그 기적을 반드시 찾고 싶었다.
본인 몸에 도사리는 광증 자체를 소멸시키기 위하여.
“아저씨! 이 대도시는 엄청 재밌어 보여요! 원래 항상 이래요?”
“요즘은 더 화려하겠지. 이제 연금술 전쟁이 벌어지는 시즌이니까.”
대도시, 알레티카.
개척 자체가 대연금술사로 시작된 덕분일까.
이곳은 아직도 대륙에서 연금술을 대표하는 중심지였다.
그래서일까, 마치 모든 구획이 각기 다른 연구실이란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이 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연금술사는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연금술 전쟁? 그게 도대체 뭐예요?”
“잠깐만. 비가 점점 많이 오는군.”
크라놀은 잡화점에서 신문과 함께 산 옷을 꺼냈다.
앙증맞은 노란 우비를 이 어린 것들한테 걸쳐줬다.
새끼용과 여자애가 신나서는 보슬비를 뛰어다녔다.
“크량! 크랴아아앙!”
“히야! 되게 귀여운 우비예요!”
둘이 우비를 입고 노는 것이 아이들답게 잘 어울렸다.
처음엔 여자애가 눈에 띄지 않을까 걱정됐는데, 오산이었다.
흑백 날개를 옷 속에 잘 접고 숨기니 마냥 평범한 애처럼 보였다.
아무튼 연금술 전쟁, 크라놀은 그것에 볼일이 있었다.
“크량! 크랴아앙!”
새끼용이 비장하게 울었다.
고레벨 투명화는, 특정인들에게만 모습을 비출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크라놀 일행에게만 외형이 보였다.
“새끼용이 아저씨를 위해 기꺼이 선봉장이 되겠대요!”
“이건 그런 전쟁이 아니다. 일종의 연금술사들의 경연 대회라고 봐야 하니까.”
“엥? 그럼 도대체 뭐로 경쟁하는데요?”
“좀 있으면 알게 돼.”
우산을 쓴 크라놀은 중앙 구획 광장에서 차분히 신문을 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우중충한 하늘로부터 폭죽이 터졌다.
비가 오고 있는 날임에도 세차고 밝은 그것은 햇빛 같았다.
「다들 오래도록 기다리셨습니다!
올해 연금술 전쟁의 주제를 발표합니다!」
두 어린 것이 입을 헤 벌리고는 하늘을 보았다.
도시를 거닐던 행인들 또한 갈 길을 멈추고 시선을 올렸다.
수십만 명의 눈이 목이 부러져라, 상공을 올려다보며 응시했다.
곧이어 빗줄기마저 태워버리는 화염 문자가 하늘에 새겨졌다.
「올해의 전쟁은…….
바로 ‘애완 키메라 대전’입니다!
수많은 연금술사의 열렬한 참여를 기대하겠습니다!」
“허허, 세상에! 이번 주제도 제법 참신한걸?”
“올해도 정신 나간 볼거리가 펼쳐지겠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행인들은 기대에 찬 미소를 지었고, 연금술사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키메라.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괴수를 의미했다.
적에 대항하여 연금술사들이 연성해 낸 인공 마수.
그것들을 겨루는 경합이 올해 연금술 전쟁의 주제였다.
‘연금술 전쟁은, 오직 연금술로만 승부를 겨루는 대회지.’
이곳에서 높은 순위로 입상하면 상품을 탈 수 있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연금술에 관련된 보상들이었다.
특제 연금술 작업대나 골렘의 핵, 개인 연구소 설립권 따위.
하지만 크라놀이 원하는 것은 ‘현자의 돌’이었다.
그 기적과 접선하기 위해서는 가장 특별한 상품이 필요했다.
‘대연금술사 라닉스의 숨겨진 연구실. 나는 그곳에 들어가야만 한다.’
* * *
본래라면 크라놀의 수입 95%는 약초를 사느라 증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젓번의 보상으로 영주에게서 꽤 많은 약초를 뜯어냈다.
덕분에 꽤 돈이 남아서, 새로운 도시를 돌아볼 여유도 생겼다.
“아저씨! 아저씨! 나, 저거 사고 싶어요!”
따라서 길거리 연금술사 상인이 판매하는 바가지 기념품쯤은 사줄 수 있었다.
물론 자꾸 사주다 보면 애 버릇 나빠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 대연금술사의 도시까지 왔는데, 이런 것 하나쯤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허허. 우리 깜찍한 꼬마 아가씨께서 보는 눈이 있으시네. 제가 직접 연성한 것이니, 아마 나흘은 갈 겁니다.”
여자애를 위해 구매한 기념품은 손에 쥘 만한 크기의 조그만 골렘이었다.
이 어린 것은 돌멩이들로 이뤄진 그걸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기뻐했다.
기념품 골렘은 혼자 놔두면 주인의 뒤를 어설프게 따라다녔다.
“아저씨! 이거 봐요! 내 애완 골렘이에요! 이름은 돌돌이라고 지었어요!”
“돌돌이는 되면서, 오동이는 안 되는 건가.”
“치! 우리 돌돌이는 귀여운 애완 골렘이라서 괜찮아요!”
그러는 너희도 내 애완 재앙인데.
하지만 굳이 말로는 내뱉지 않았다.
그런데 곧 문제가 발생해 버렸다.
어째서 행복한 만남엔 끝이 있을까.
“어?”
여자애를 뒤따라오던 기념품 골렘이 박살 났다.
하필이면 길 가는 애완 키메라에게 짓밟히고 만 것이다.
붉은 도롱뇽과 흡사한 샐러맨더였는데, 그 크기가 악어처럼 컸다.
“안 돼! 돌돌아!”
“에헤잇. 꼬마야. 길을 잘 보고 다녀야지.”
샐러맨더의 주인인 듯한 연금술사 남성이 혀를 찼다.
전형적인 일의 책임을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말투.
그러나 누가 봐도 먼저 길에 끼어든 것은 저쪽이었다.
“푸릉!”
샐러맨더도 콧방귀를 뀌고 얄밉게 타오르는 꼬리를 흔들었다.
하물며 비용을 변상하겠다는 예의범절조차 없었다.
여자애가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했다.
“그 불도마뱀이 먼저 밟았잖아요! 돌돌이는 내 친구란 말이에요! 살려내요!”
“쯧, 넌 바보냐? 그딴 허접한 연성물을 어떻게 복원해?”
그 말은 틀리진 않았다.
기껏해야 관광객 상대로 파는 기념품은 수명이 짧으니까.
게다가 완성도가 낮아서 한번 파괴되면 복구는 불가능했다.
“억울하면 네가 더 잘 간수하고 조심했어야지. 다음부터는 조심해라.”
샐러맨더를 가진 연금술사는 무책임하게 갈 길을 가버렸다.
반면 잔뜩 기가 죽은 여자애는 돌돌이의 파편을 주워 모았다.
“훌쩍! 아, 아저씨……. 돌돌이가 죽었어요.”
“크랴아아앙.”
새끼용이 위로하며 그 애의 눈물을 핥아줬다.
크라놀은 가만히 그 돌멩이들을 바라봤다.
“그 골렘은 되살릴 수 있다.”
“……정말요?!”
“하지만 조건이 있지.”
“훌쩍! 그게 뭔데요?”
크라놀은 무덤덤하게 여자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한다. 오동아.”
“…….”
여자애가 얼굴을 구겼다.
저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한참을 주저하다가 결국엔 순응했다.
“……흥. 일단은 그 이름을 쓸게요. 하지만 더 멋진 이름이 생각나면 가차 없이 바꿀 거예요!”
“크량! 크랴아앙!”
새끼용도 마뜩잖았지만, 기꺼이 여자애를 위해 받아들였다.
“좋다.”
크라놀이 실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실랑이였다.
이 두 어린 것의 이름은 토실이와 오동이로 결론지어졌다.
“아무튼요! 돌돌이를 살리려면 뭘 해야 하는데요?”
“연금술 전쟁에 참여할 거다. 거기 우승 상품이 필요하니까.”
“크랴아앙?”
“하지만 우린 연금술 같은 건 모르는데요? 아저씨는 알아요?”
크라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 모르지. 하지만 애완 키메라는 만들 수 있다.”
“크량? 크랴아앙?”
“흐잉? 어떻게요?”
토실이와 오동이가 갸웃댔다.
왜, 지금 이곳에 있잖은가.
SSS급 키메라를 위한, 재료 두 마리가.
17화 참가 접수
* * *
연금술 전쟁은 매년 주제가 바뀌었다.
‘짱돌 변환 경합’, ‘골렘 대난투’, ‘수제 묘약 시음’ 등등.
그러나 공통점은 늘 정신 나간 볼거리가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올해는 연금술사들이 또 어떤 미친 짓을 벌일까?”
“애완 키메라 경합이라잖아. 딱 봐도 괴상하고 웃긴 생명체들이 모이지 않겠어?”
“안 그래도 저번 골렘 대난투 때는 참가자도 몇 명 죽었잖아. 올해도 만만찮을걸?”
연금술 전쟁은 대도시 알레티카의 가장 뜨거운 행사였다.
본래는 이곳을 개척했던 대연금술사에게 감사를 기리자는 의미로 시작됐으나.
요즘에 들어서는 반드시 흥행을 보장하는 관광 상품이 되었다.
어찌나 유명하고 기대가 큰지 다른 지방 귀족들도 연금술 전쟁을 보러 찾아올 정도였다.
유독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때만큼은 다른 명소에서도 볼 수 없는 장관이 펼쳐졌으니까.
“우와! 저것 봐! 사냥개가 머리가 두 개나 달렸어!”
“그게 뭐 별거라고. 아까 날개 달린 원숭이도 지나가더라.”
“거기 기다려요! 지금 닭발 달린 뱀들 때문에 마차들 다 막힌다고!”
“으아! 이봐요! 비 오는 도로에 키메라들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요!”
키메라는 인공 마수답게 별의별 해괴한 종류들이 다 있었다.
머리가 하나 더 있거나 꼬리가 여럿인 가축은 아주 흔한 수준.
갑작스레 늘어난 다양한 키메라들에 도시 풍경이 꽤 재미나졌다.
그러나 개중에서도 가끔 정말 대단한 것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기괴한 합성 가축들 사이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예술적인 자태들.
“우와…….”
“잠깐만, 내가 알던 키메라가 아닌데?”
“저런 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무지갯빛 곤충의 겉날개를 단 암말.
전나무 껍질을 두르고 다니는 어여쁜 공작새.
스스로 자기 어항을 굴리고 다니는 철갑의 민물 상어까지.
개중 단연코 가장 돋보이는 것은, 고아하게 타오르는 왕도마뱀이었다.
비 오는 날씨 탓에 샐러맨더 주변에 퍼뜨려지는 수증기조차도 멋스러웠다.
“맙소사, 샐러맨더가 저만한 몸집이라고? 본래라면 한 손에 쥐어지는 크기인데!”
“맞아. 조그만 것조차도 쉽게 연성해 내기도 힘든 키메라 아니었나?”
“와,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화력이 꺼지기는커녕 계속 불타오르네. 저게 말이 돼?”
“역시 대단한 연금술 실력이야. 과연 우승 후보답군.”
“비느레반 씨! 이쪽 좀 봐줘요! 난 멀리서 찾아온 당신의 팬이라구요!”
엘리트 연금술사, 비느레반 윌.
유력한 우승 후보인 그는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속내는 아주 우쭐했지만, 내색했다간 자기 이미지가 내려가니까.
‘지난번엔 아쉽게 우승을 놓쳤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유능한 실력의 그는 매번 우승 후보로 거론됐지만, 번번이 1위를 놓쳤다.
그러나 올해 연금술 전쟁만큼은 예전과 다를 것이었다.
키메라 연성은 가장 자신 있는 전공 분야였으니까.
그렇게 비느레반이 전쟁 접수처에 도착했을 때.
뜻하지 않게 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뭐야. 그쪽도 참여하는 건가?”
아까 마주쳤던 어두운 금발의 어여쁜 소녀와 퀭해 보이는 미남자.
여자애는 이쪽을 확 째려봤지만, 사내는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비느레반은 픽 웃으며 거들먹댔다.
“별 기대 안 하는 게 좋을걸. 이 대회가 괜히 연금술 ‘전쟁’인 것이 아니거든? 허접한 연성물이나 갖고 노는 아이 오빠한테는 좀 힘겨울 텐데. 자신 있지 않으면 일찌감치 포기하라고.”
상당히 빈정댔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연금술 전쟁에선 실제로 인명 사고가 벌어지기도 하니까. 내부에서도 이런 위험성에 대한 비판은 일부 존재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관광객들은 더욱 열광했다.
자극적인 선혈은 언제나 대중을 흥분시키는 법이니.
“연금술 전쟁에 지원하러 오셨다고요! 실례지만, 보유 키메라는 어디 있습니까?”
시청 직원이 다가와선 미남자와 어여쁜 소녀에게 물었다.
어디에도 이들의 애완 키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크라놀은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순간, 토실이가 투명화를 해제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입을 벌렸다.
새까만 뇌광(雷光)을 두른 황금빛 비늘의 새끼용!
몇몇 연금술사들이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으악! 버, 번개 계열 마법이다!”
“응? 왜 그래?”
“멍청아! 빗물에 저게 퍼지면 다 감전되는 거야!”
원론적인 세계의 규칙을 아는 이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의외로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 어라? 괜찮은데?”
“그러게……? 어떻게 된 거야?”
이 세계의 몇몇 스킬은 사용자 역량에 따라 용도의 폭이 넓어졌다.
특히 오동이는 날 때부터 천부적으로 흑뢰를 미세하게 조절할 줄 알았다.
마나를 조금 더 소모해서, 당연한 물리법칙도 일부 비틀 수 있을 만큼.
그랬기에 상급 흑마법이, 지금은 강대하고 분위기 있게 토실이를 빛내주고 있었다.
“맙소사! 저게 키메라란 말이야? 용의 인자(因子)를 도대체 어떻게 구한 거지?”
“어디 그뿐이야? 도대체 퀄리티가 얼마나 높은 거야? 저 비늘 자연스러운 것 좀 보라지.”
“저 검은 번개도 예사롭지 않아. 물에 젖었는데도 퍼지지 않는다니. 어떻게 저럴 수가?”
“혹시 그냥 환상 마법 아니야? 한번 만져보……? 앗, 따가워!”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저 연금술사는 누구야? 어디 가문에서 온 거냐고?”
감히 그 누구도 토실이가 진짜 용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오만한 용이 전류를 두른 채 사람을 얌전히 따를 리가 없으니까.
엄청난 퍼포먼스에, 전쟁 접수장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다, 다들 진정해 주십시오!”
“줄을 지켜주세요! 잘못하면 서로 발이 밟힙니다!”
다들 입소문을 타고 모이니 더욱 구경꾼이 붐볐다.
당황한 시청 직원들이 통제하기가 어려워질 수준.
“크랴아아앙…….”
토실이는 인간들의 시선이 부담되는지 크라놀 곁에만 꼭 붙어있었다.
반면 오동이는 잔뜩 주목받는 것이 기분 좋은지 신나서 폴짝 뛰었다.
“히야! 이것 봐요! 우리 토실이가 거기 불도마뱀보다 훨씬 멋있죠? 메롱!”
“……!”
비느레반은 금세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우승 후보 중 한 명인 자신의 키메라가 관심도에서 밀리다니.
고되게 연성한 결과물은 연금술사의 드높은 자존심이기도 했다.
특히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비느레반에겐 굴욕적인 모욕이었다.
“제기랄! 빨리 따라와, 이 무능한 것! 네 화력을 좀 더 키워야겠어!”
“푸르릉…….”
시무룩해진 샐러맨더가 불쾌해하는 주인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참가 신청을 끝내자마자 접수 현장을 바로 떠나버렸다.
“크량. 크랴아앙.”
“안다. 조금만 참아라.”
얼른 돌아가고 싶어 칭얼대는 토실이를 달래줬다.
혼란한 현장에서, 크라놀은 접수 신청을 마쳤다.
연금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확정됐다.
* * *
굳이 이렇게 이목을 끌 필요가 있는가?
사실 크라놀도 눈에 띄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이목을 끄는 편이 대회 가산점을 얻기 편리했다.
‘현자의 돌. 결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기적.’
이번 대회의 우승 상품은 ‘대연금술사의 연구실’로 가는 데 필요했다.
그러므로 크라놀도 다른 이에게 우승을 양보할 순 없는 노릇.
물론 투명화나 다른 능력을 이용해 우승 상품을 훔치는 것도 고려했지만.
‘그건 멍청한 짓이지. 온 연금술사를 적으로 돌리는 일이니까.’
일단 투명화가 있더라도 이곳의 삼엄한 경비를 뚫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 성공한다고 해도 수많은 연금술사가 범인을 영원토록 추적해 올 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직접 참가해서 우승해 버리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 대회는 사람들의 관심도 역시 중요하다. 관중의 인기투표 구간도 있으니까.’
실제로 원작 주인공도 연금술 전쟁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꽤 훗날의 일.
그러나 크라놀은 그 덕에 대충 구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역사상 어떤 대회가 열렸고, 각기 라운드마다 무슨 경합이 펼쳐졌는지도.
‘일단은 사람들에게 이목을 끌어서 토실이를 부각한다. 이게 첫걸음이지.’
괜히 샐러맨더를 거느린 연금술사가 저렇게 기분 상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만큼 사람들에게서 받는 주목도가 이 대회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는 것이다.
접수처를 떠나오며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에 달라붙었지만, 전부 무시로 일관했다.
“크량. 크랴아앙…….”
잔뜩 기가 빨렸는지 토실이는 얼른 투명화해서 그의 어깨에 올라탔다.
“흐아아암! 나도 피곤해요……. 아공간 쉼터로 돌아가도 되지만, 편한 여관에서 자고 싶어요.”
오동이도 계속 흑뢰를 몰래 쓰며 통제하느라 꽤 지친 눈치.
이날은 숙소로 잡아뒀던 여관에 돌아와서 일찍 잠을 청했다.
“하아.”
눈을 감고 눕는데, 문득 한숨이 나왔다.
크라놀은 모두가 행복할 이 순간이 가장 싫었다.
하루에서 가장 두렵고 힘든 시간이 시작됐다.
* * *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저 밤하늘에 달이라도 떴다면 시간이라도 유추할 텐데.
조금 멍해져 있는데 갑자기 격한 두통과 함께 코피가 쏟아졌다.
“큭!”
침대 맞은편에 놔둔 꾸러미에 손을 뻗었다.
다급하게 닥치는 대로 약초를 입에 넣고 씹었다.
쓴맛이 가득 퍼졌지만, 통증 탓에 느끼지도 못했다.
“……윽. 으윽. 후우.”
겨우 진정한 뒤에야 뒤늦게 신음을 토했다.
식은땀이 흥건하고, 흐른 코피를 닦을 새도 없이 지쳤다.
이것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이유였다.
광증 발작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으니까.
크라놀은 이 짓을 매일 밤마다 반복하고 있었다.
‘……바깥 공기라도 좀 쐴까.’
도무지 잠에 들지 못하고 여관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그냥 맞았다.
굳은 코피에 빗물이 쓸려가니 비릿했다.
“…….”
젖은 머리칼의 크라놀은 땅바닥을 내려다봤다.
낮은 건물인 줄 알았는데 높이가 제법 되었다.
언제고 자신을 옭아맸던 유혹이 또다시 엄습했다.
그냥 이대로 떨어져서 다 끝내는 것이 낫지 않을까.
힘겹게 살아남아봤자 결국 민폐뿐인 재앙이 되어버릴지도.
애당초, 이토록 괴롭게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가?
“크랴아아앙…….”
“아.”
그때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라놀은 뒤를 돌아봤다.
“안 자는 건가.”
자다 깬 토실이가 걱정됐는지 졸린 눈으로 다가왔다.
이 어린 것은 비몽사몽 크라놀의 코피를 핥아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침 묻는 것이 싫어서 사양했다.
“딱히 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약초는 아직 넉넉하니까.”
“크랴아아앙!”
그런데 토실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제야 크라놀은 뭔가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토실이는 자신이 걱정돼서 찾아온 게 아니었다.
전혀 다른 것이 우려돼서 자다가 깬 것이었다.
“……어?”
잘 보니 토실이가 두려워하며 몸을 떨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서 의아해하는데, 상태창이 떠올랐다.
[비기, ‘폭룡 부르기’의 부가 효과가 발동됐습니다.]
[근처에서 폭룡의 기운이 감지됐습니다.]
[흑금룡의 용아병이 해당 대도시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용아병이 오고 있다고? 지금 여기로?’
크라놀은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흑금룡의 용아병.
1막 최종 보스의 힘을 일부 물려받은 거대 하수인.
도시 한두 개쯤은 충분히 박살 내는 흉악한 보스 마수.
그런 괴물이 지금, 이 대도시에 오고 있단다.
‘그렇다면…….’
이 상태창 메시지의 의미는 명확했다.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다.
아주 많이 죽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름 끼치는 진실은.
‘……말도 안 돼.’
흑금룡이 수면기로부터 깨어나 있었다.
원작보다 3년이나 일찍.
18화 연금술 전쟁
* * *
오만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본래 흑금룡은 지금으로부터 3년 뒤 깨어나야 했다.
둥지에서 막 일어난 놈은 원작 주인공에 의해 처치되니까.
그것이 크라놀이 읽었던 ‘EX급 마수사냥꾼’의 기존 스토리였다.
‘그런데 도대체 왜.’
지금 그 1막 최종 보스가 깨어나 이곳에 용아병을 보냈단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이런 변수가 벌어졌단 말인가.
‘설마 지난번 폭룡 부르기를 썼기 때문에?’
크라놀은 곧바로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그 비기는 그만한 변수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하물며 수면기의 흑금룡은 뭔 짓을 해도 깨지 않는다.
거칠게 활동했던 동안 소진된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함이니까.
더군다나 녀석은 지난 활동기에 크나큰 상처까지 입었던 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군.’
과거를 되짚어봐도 정답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자신은 이만큼 큰 변수를 일으킬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떠오르는 가설은 하나뿐이었다.
‘원작에 없는 변수가 일어났다. 내가 알지 못하는 요소에 의해.’
크라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당장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침착해져야 했다.
지금 흑금룡의 용아병이 이곳에 날아오고 있다면 상황은 끔찍했다.
놈은 이딴 대도시쯤은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파괴력을 지녔으니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크라놀은 벌벌 떨고 있는 토실이를 바라봤다.
“지금 그 흑금룡의 수하는 어딨지?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리는 건가?”
“크랴아아앙!”
토실이가 양 앞발을 들곤 발톱 다섯 개를 고르게 펼쳤다.
“닷새?”
“크랴아앙!”
고개를 가로젓는 토실이.
크라놀이 제발 아니길 바라며 되물었다.
“……설마, 5시간?”
“크량!”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토실이.
크라놀은 이를 악물었다.
얼른 여관방으로 가서 잠든 오동이부터 깨웠다.
“흐아아암! 아저씨! 왜 잘 자는데 깨우고 그래요?”
“당장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 여길 떠날 거다.”
“엥? 갑자기 왜요?”
크라놀은 짐을 챙기며 진지하게 대답했다.
“앞으로 5시간 후면, 이 대도시는 쑥대밭이 될 테니까.”
* * *
용아병은 용의 이빨로 만들어진 병사를 뜻했다.
보통은 용의 둥지를 지킬 때나 사용되는 사병.
그러나 흑금룡 수준의 거물이라면 용아병도 남달랐다.
‘흑금룡은 인류의 도시들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바깥 땅’을 가보기 위하여.’
놈이 예정보다 일찍 깨어났다면 상황은 심각했다.
물론 아직은 수면기로부터 막 깨어난 여파로 힘이 온전치 않을 것이다.
최상의 컨디션이라면, 용아병은 무려 ‘순간이동’해 대도시를 파괴했을 테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흑금룡이 완전한 힘을 되찾는다면…….
‘절대 못 막는다. 설령 그 원작 주인공일지라도.’
본래 스토리에선 원작 주인공이 1막 최종 보스를 처형했다.
그러나 그것은 흑금룡이 수면기로부터 ‘막 깨어났기 때문’.
원작에서 당시 그 용은 사실상 완전한 몸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놔두면 놈은 전성기 시절의 힘을 회복할 것이다.
“…….”
크라놀은 다급히 외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5시간도 안 됐다.
살려면 이 대도시를 빠져나가야 한다.
“아저씨! 어딜 자꾸 그렇게 급하게 가요? 왜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주는 건데요!”
오동이가 크라놀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때였다.
심각히 걷던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토실아.”
“크랴아아앙.”
“내가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크랴아아앙?!”
깜짝 놀란 토동이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왜 또 질리지도 않고 그런 소릴 하냐는 듯이.
‘지금 여기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크라놀은 도망치려는 자기 자신이 불현듯 우스웠다.
지금 이런다고 딱히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용아병이 대도시를 분쇄하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었다.
‘흑금룡은 세계를 파괴할수록 본래의 힘을 되찾으니까.’
지옥이 예정된 결말 앞에서도 살아남고자 몸부림칠 것인가.
그냥 간단히 끝내어, 두렵지만 평안한 안식을 맞이할 것인가.
그때 오동이가 뺨을 부풀리며 크라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왜 토실이한테만 물어봐요? 여기 나도 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몰라요!”
“…….”
크라놀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오동이는 당차게 그를 올려다봤다.
“그건 우리가 정해주는 게 아니에요! 아저씨가 결정하는 거죠! 살아갈 결단마저 남한테 맡기면 그건 아저씨 삶이 아니에요! 그런데 난 살았으면 좋겠긴 해요! 아저씨는 우리한테 더 맛있는 걸 사줘야 해요! 재미난 세상도 보여줘야 하고요! 아, 돌돌이도 되살려 줘야 하고 또…….”
“됐다.”
크라놀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빙의 전의 삶부터 지금, 이 순간.
마지막으로 이 어린 것들까지도.
“후우.”
결국 눈을 뜨고, 결론이 내려졌다.
크라놀은 살아남고 싶었다.
지금마저도 개 같은 두통이 일지만.
그런데도 어째선지 여전히 살고 싶었다.
그것이 고뇌 끝에 스스로 내린 결단이었다.
“…….”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행동은 뻔했다.
크라놀은 돌아섰다.
“아저씨?”
“돌아가자.”
그가 방금까지 갔던 길과 정반대로 걸었다.
토실이와 오동이는 서로 바라봤다.
두 어린 것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크량! 크랴아앙!”
“히! 맞아요, 토실아! 이제야 아저씨다워요!”
대도시에는 연금술 전쟁을 여러 담당 부서가 있었다.
크라놀은 개중 폭죽을 총괄하는 건물에 쳐들어갔다.
졸고 있던 화약고 관리자가 흠칫 놀랐다.
“쓰읍! 다, 당신 뭐요?!”
“당장 주최 측에 전하십시오. 이 대회를 중단해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아니. 당신이 뭔데 갑자기 대회를 중단하라고……. 커억!”
크라놀은 다 듣지도 않고 상대방의 미간을 걷어찼다.
상대는 뒤로 밀려나더니 코피 흘리면서 기절해 버렸다.
천무지체 특성 덕에 최소한의 힘으로도 제압할 수 있었다.
오동이가 어이없어했다.
“아니, 아저씨! 그렇게 기절시켜 버리면 어떻게 말을 전해요?”
“밖에다가 내놔라. 몰려온 병사들을 설득하는 게 더 빠르겠다.”
관리자의 열쇠를 털어서, 화약고 문에 있는 자물쇠를 열었다.
그곳엔 연금술사들이 연성한 마법 폭죽이 잔뜩 있었다.
크라놀은 본인이 원하는 문구를 거기에 써넣었다.
“이것들을 가져가서 전부 터뜨려라.”
“크랴아앙!”
“히야! 신난다! 불꽃놀이 장난이에요!”
토실이와 오동이가 신나서 폭죽들을 가져갔다.
아찔한 양의 화려한 불꽃이 상공으로 솟구쳤다.
형형색색의 불길이 어두운 하늘을 아찔하게 밝힌다.
피유우우웅…… 타다당!
별안간 자정에 터지는 폭죽 소리.
햇빛처럼 눈이 아플 정도로 환한 빛.
이 정도면 만인의 이목을 끌기엔 충분했다.
“아니, 뭐야?
“오밤중에 웬 폭죽?”
잠들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서 밖에 나왔다.
고요했던 밤하늘에 화염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모든 연금술사는 지금 이곳 중앙 구획에 집결하라.
현재 이 대도시 알레티카는 전시에 돌입했다.
이것은 실제 상황이며, 용아병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
반복한다.
모든 연금술사는 지금 이곳 중앙 구획에 집결하라…….」
폭죽이 끊임없이 발사되어 상공을 빼곡히 밝혔다.
불타는 문자는 수십 분이나 지워지지 않았다.
* * *
“어이가 없군요. 정말로.”
비느레반은 신경질 나는 표정을 지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는 현재 참 어울리지 않게도 도마뱀 무늬 잠옷을 입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연금술사들도 비슷한 차림새였다.
대부분이 자다 깨서 머리털마저 부스스했다.
“일단 폭죽을 보고 오긴 했지만, 용아병이 이런 대도시를 침공한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예, 말이 됩니다.”
한편 크라놀 또한 복장이 우습긴 매한가지였다.
양쪽 손목에 수갑을 차고 있었으니까.
화약고 관리자를 폭행한 죄였다.
양측의 기이한 차림새를 돌아보던 시장 콜도는 한숨을 내쉬었다.
“비느레반 씨. 저희도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만, 이자의 말은 진실입니다. 실제로 외곽에서 소식을 전해 왔는데, 아주 멀리서 엄청난 크기의 괴물이 이곳에 접근해 오고 있다는군요.”
알레티카의 시장, 콜도 자린.
단안경을 쓴 이 중년 신사는 저명한 연금술사이기도 했다.
이런 오밤중에도 머리칼 한 올 흐트러지지 않고 출근한 유일한 이.
하나 이런 그조차도 현재 터진 돌발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용아병은 단순한 거대 괴물이 아닐 겁니다. 무려 용의 힘을 물려받은 존재일 테니까요. 그런 놈을 막기 위해선 현재 대도시 전력으로도 역부족입니다. 그러니 염치 불고하고 연금술사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러나 반응은 참담했다.
잠옷 차림의 연금술사들이 경기를 일으켰다.
“아니, 진짜 전쟁에 참전하라고? 우린 경연 대회에 참가한 것일 뿐이란 말이야!”
“대회는 항복선언만 하면 죽음을 막을 수 있지. 하지만 실전은 다르지 않나?”
“피가 튀고 살점이 으깨지는 전장에 내 키메라를 참전시킬 순 없소!”
“맞아! 차라리 이깟 도시를 떠나버리고 말지!”
온갖 기괴한 생김새로 합쳐졌지만, 그 누구도 키메라를 가엾게 여기진 않는다.
대중이 냉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연성 과정에 그 이유가 있었다.
키메라를 만들려면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재료가 존재했다.
바로 연금술사의 ‘애정(愛情)’이다.
키메라는 오직 죽어가는 생물의 인자를 더해야만 제작할 수 있었다.
사냥해서 인자를 구할 수도 있지만, 그래선 ‘애정’을 넣을 수 없었다.
이들은 생이별할 뻔한 애완 짐승을 합성해 살려낸 장본인들.
그랬기에 모두가 본인들의 키메라를 진심으로 아꼈다.
“아니요, 당신들에게 선택지는 없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크라놀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설령 지금 도시를 벗어나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맞서 싸워야 합니다. 상대는 흑금룡의 용아병이니까.”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흑금룡!
모두가 그 무시무시한 옛 전설을 모르지 않았다.
과거 이 대륙을 파괴하려고 했던 끔찍한 흉조(凶兆).
그런 막대한 악이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고?
비느레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도대체 당신이 누구인데? 어떻게 그리 다 안다고 자신하는 거지?”
“지금 그런 것까지 설명하기엔 시간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맹세컨대 내가 내뱉는 말은 전부 진실입니다. 이중 유일하게 용아병의 침공을 파악하고 당신들을 불러 모았으니까.”
확실히 반박할 수 없는 말이었다.
두꺼비 잠옷을 입은 연금술사가 잔뜩 긴장하며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그 용아병을 물리칠 대책도 알고 있습니까?”
“위험하지만, 그나마 생존 확률이 높은 방안이 있습니다.”
“그, 그게 도대체 뭔가요?”
크라놀은 담담히 대답했다.
“단 거요.”
“예?”
“용아병은 단 걸 싫어합니다. 사탕이나, 과일처럼. 충치를 유발하는.”
“아니, 그게 무슨…….”
“아, 대도시에서 치과의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모아주십시오. 특히나 사랑니를 마취 없이 발치(拔齒)했던 이들이 가장 좋습니다. 그자들이 포악한 용아병에게서 시간을 끌어 줄 겁니다.”
“…….”
연금술사들 사이에서 별안간 침묵이 일었다.
비느레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는 빈정댔다.
“얼음 마법은 안 필요한가? 왠지 시린 것도 싫어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습니다. 냉기 계열 키메라를 가진 연금술사들은 이쪽으로 모이세요.”
“…….”
용아병 침공까지 3시간 17분.
‘진짜 연금술 전쟁’이 시작됐다.
19화 침공
* * *
크라놀 위자르는 생각했다.
이건 애당초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흑금룡의 용아병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원작 주인공이라도 불러오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그 녀석은 오지 않을 것이다.
복수 대행을 맡길 때와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본인이 얻을 이득이 없다면 싸우지 않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죽이는 것이 불가능한 압도적인 상대.
그렇다면 내쫓을 뿐이었다.
최소한의 피해조차 주지 못하도록.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크라놀 위자르입니다.”
“그래요, 크라놀. 당신에겐 증명이 필요합니다.”
시장 콜도가 수갑을 찬 그를 의심했다.
“이제 용아병 침공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요. 당신은 아는 게 많은 듯하지만, 솔직히 지금 대답은 뭔가 석연찮습니다. 정말 그게 용아병에게서 살아남을 방법이 확실합니까?”
“예, 확실합니다. 그리고 간단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크라놀이 턱을 까닥였다.
“길은 걷는 자의 본성을 보여주지요. 용아병의 대도시 진입 루트를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지금 이대로라면 알레티카 시 13구획에 가장 먼저 도착할 겁니다.”
시청 직원의 말에 시장 콜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서서히 경악했다.
“잠깐, 13구획이라면…….”
“불소치약을 만드는 화학 공방 구역입니다!”
불소치약.
대도시에 유행하는 충치 예방제였다.
용아병의 본능은 누가 봐도 진솔했다.
시장 콜도의 눈이 확 커졌다.
“당장 이 도시 전역으로부터 이빨이 썩을 만큼 단 것들을 구해 와라! 크라놀 씨의 말씀대로!”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크라놀의 지휘를 따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시청 직원들은 오밤중에 제과점과 과일 가게 문을 두드려야 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치과의들을 모집하는 것이었다.
“용아병? 내가 아는 그 용아병 말이야? 용의 이빨로 만들어졌다는, 그 전설 속의……?”
“아니, 원래 용들은 자기 영역만 지키는 거 아니었어?”
“더군다나 흑금룡이라잖아! 그게 말이나 돼? 그런 괴물이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고?”
용아병의 침공 소식이 알려지자, 모든 시민과 관광객이 두려움에 떨었다.
심지어 대부분이 피난길에 올라서 혼란한 교통체증마저 생겨났다.
이런 판국에 그 누가 감히 위험한 전쟁에 자원하겠는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있었다.
이 전시 상황에서조차 전면에 나서는 아둔하고도 위대한 영웅들이.
“아무래도 내가 가야겠다.”
“아버지! 안 돼요! 위험하다고요!”
“이거 놔라! 쇠집게로 사랑니 뽑다가 환자도 죽여버린 나였다! 가야 한다! 대의를 위해!”
비느레반이 눈을 홉뜨며 지적했다.
“저거 몇 놈은 돌팔이 아닙니까?”
“오히려 잘됐습니다. 용아병의 심기가 더욱 거슬릴 테니까.”
자연스럽게 대답한 크라놀이 수갑을 풀었다.
열쇠를 가져오라고 말하려던 시장 콜도는 깜짝 놀랐다.
“아니, 어떻게 혼자서……?”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이젠 3시간도 안 남았어요.”
“크랴아아앙.”
몰래 수갑 열쇠를 가져다준 투명화한 새끼용이 동의했다.
오동이도 폴짝 뛰었다.
“나도 힘이 될게요, 아저씨! 뭐부터 하면 돼요?”
“연금술사들의 키메라를 정렬시켜야 한다. 냉기 계열 이외는 후방으로 몰아라.”
“그건 어렵지 않아요! 거기 우리 돌돌이를 밟아 죽였던 불도마뱀부터 날 따라와요!”
자유로워진 크라놀은 직접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비느레반을 포함한 몇몇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자존심 드높은 연금술사들은 여전히 그를 미덥지 않아 했다.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전쟁까지 능하다는 의미는 아니잖은가?”
“대도시라면 경험이 많은 전문가들도 많을 텐데, 굳이 저런 외부인을?”
“제아무리 위급 상황이라고 해도 초짜에게 내 키메라를 맡길 순 없소!”
그러자 크라놀은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투명화가 풀린 토실이가 날개를 펼쳤다.
미세한 흑뢰를 몸에 감은 멋들어진 외관.
그 상태로 하늘을 향해 숨결을 내뱉었다.
“크랴아아앙!”
“어?”
“저, 저거!”
화려하게 내뿜어진 새하얀 불꽃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의 인자로 만들어진 키메라가 ‘브레스’까지 내뿜는다고?
연금술에 몸 바친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끔찍이 어려운지 잘 알았다.
크라놀이 담담히 선언했다.
“당신네 키메라들보다, 제 어린 것이 훨씬 더 셉니다.”
“…….”
이젠 불평을 내뱉던 연금술사들도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꼬우면 크라놀보다 연금술을 잘해야 했으니까.
시장 콜도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키메라에 관해서는 크라놀 씨에게 믿고 맡겨도 되겠군요. 무엇보다 대도시 전력이라고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레티카 시의 병사들도 별개로 용아병을 막아낼 준비를 할 테니까.”
대도시의 병사들은 혼란한 도시를 통제했다.
시민들과 관광객을 대피시키고 도로의 교통체증을 막았다.
한편 크라놀은 중앙 구획에 집합한 병력을 추산했다.
연금술사는 총 317명이었고, 애완 키메라들 또한 종류가 다양했다.
현재 전력을 헤아리며 전략을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크랴아아앙…….”
가까이 다가온 토실이가 여전히 두려워하며 떨고 있었다.
하기야 흑금룡의 무서움을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크라놀은 이 어린 것을 쓰다듬어 줬다.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네 친엄마가 쓰레기란 건 잘 아니까.”
“크랴아아앙!”
토실이가 성을 내며 앞발을 들이밀었다.
지금 그딴 말을 위로라고 하냐는 듯이.
하지만 그 덕에 두려운 떨림은 조금 잦아들었다.
“움직입시다. 중앙 구획에서 싸우면 인명 피해가 커질 테니.”
진열을 맞추고, 전략을 공유하니 단 것들을 준비했다.
크라놀은 연금술사들과 키메라, 치과의들을 이끌고 외곽으로 갔다.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밑 작업을 마치니, 어느덧 시간이 다 되었다.
동행한 대도시 병사들의 지휘관이 소리쳤다.
“곧 13구획에 용아병이 도달할 겁니다!”
모두가 긴장 속에서 마른침을 삼켰다.
대로의 등불마저 뭉개져 버린 외곽 지대.
연한 빗줄기가 떨어져 내리는 아침 시간.
대도시의 드높은 건물들을 무참히 무너뜨리며.
웬 뼈 거인이 일직선으로 진군해 오고 있었다.
* * *
용아병에 관해서는 가설이 많은 편이다.
용의 이빨을 땅에 묻자마자 생겨난 생명체.
그 생김새는 용과 악마를 뒤섞은 듯하다든지.
눈앞에 보이는 건 모조리 짓밟아 없앤다든지.
이들은 그 두려운 전설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전설의 용아병은 불소치약을 씹어먹고 있었다.
“…….”
“맛나군. 내 주인의 둥지에선 맛볼 수 없던 미식(美食)이다.”
용과 마찬가지로 일생에서 단 한 번도 보기 힘들다고 알려진 존재.
눈앞의 용아병은, ‘용의 두개골을 지닌 뼈 거인’이었다.
머릿골만큼은 용과 같았지만, 나머진 인간의 형태와 비슷했다.
지난번의 부패룡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훨씬 장대한 위용의 대형 마수.
그 몸집은 무려 건물 다섯 채를 합친 듯했고, 눈구멍 속엔 붉은빛이 번뜩였다.
“……세상에.”
“진짜 크다. 저런 게 도시를 박살 내러 왔다고?”
뼈 거인은 화학 공방 건물들을 파괴하고 불소치약을 씹어 먹었다.
그 우스꽝스럽고도 기괴한 장면은 이들에게 묘한 공포감을 불러왔다.
그런데 용아병은 인간들을 보더니, 멈춰 섰다.
“흑금룡. 그분이 내 주인이다. 나는 내 주인의 첫 번째 용아병이지.”
투박한 어투로 자기소개하곤 본래 목적을 말했다.
“명령에 따라 이 대도시를 파괴할 것이다. 모두 죽일 거다. 하지만 단 하나는 살려준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서로 돌아봤다.
도대체 이 중 누굴 살려주겠다는 것인가?
용아병의 눈길은 오직 단 하나의 생명체에 닿아 있었다.
“내 주인께서 아가씨를 되찾아 오라고 하셨다.”
흑금룡이 되찾아 오라 하고, 용아병이 아가씨라 부르는 존재.
그 명칭이 향하는 대상은 뻔했다.
“키야아아아앙!”
그러나 으르렁대는 토실이는 부름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 어린 것은 오직 크라놀한테만 꼭 달라붙어 있었다.
“아가씨. 내 주인을 뵙고 싶지 않으신 건가?”
“크량! 크랴아앙!”
“그럼 내 주인의 명대로 죽이겠다. 방해만 되실 뿐이니.”
“크랴아아앙?!”
토실이가 곧장 울먹이기 시작했다.
설마 친엄마가 자길 죽이려고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용아병은 곧장 일직선으로 진군해 왔다.
엄청난 몸집 탓에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도로가 박살 났다.
그러나 크라놀이라고 아무런 대비가 없진 않았다.
“정예 병력. 앞으로.”
정예 병력으로 간택된 것은 놀랍게도 연금술사도, 병사도 아니었다.
대도시에서 야근하거나 자고 있던 치과의들이었으니까.
모두가 전쟁과는 연관도 없이 살아온 샌님이었다.
“놀랍군. 설마 긴급 상황에서 치과의를 찾는 꿈 같은 상황이 오다니!”
“지금 도시엔 내 가족들이 있어. 지키려면 뭔들 못 할까.”
다들 두려움에 떨었으나 용케도 뼈 거인 앞으로 나섰다.
애당초 배짱이 없다면, 마취 없이 사랑니 뽑는 짓 따윈 못 한다.
용아병은 멈칫하더니 눈구멍 속의 붉은빛이 일그러졌다.
“네놈들에게서 혐오스러운 냄새가 짙다. 어떻게 이토록 증오스러울 수 있는 거지?”
“넌 흑금룡의 사랑니로 만들어졌으니까.”
“인간들이 붙인 치아 명칭 따윈 모른다. 하지만 내 주인께서 날 사랑하는 게 느껴져서 좋군.”
용아병은 제멋대로 오해하며 흡족해했다.
사실 사랑니를 가장 먼저 뽑아버려서 첫 번째 용아병이 된 것일 테지만.
어쨌거나 일직선으로만 진군하던 용아병이 처음으로 노선을 틀었다.
증오스러운 치과의들이 있는 사선을 향하여.
그것만으로도 첫 번째 계획은 성공이었다.
쿠우웅!
잘 걷던 용아병의 몸이 일순간 가라앉았다.
미리 파둔 큼지막한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빠진 건 다리뼈였으나 함정 속 용액은 골반까지 묻었다.
각종 새콤달콤한 과일잼과 녹은 초콜릿들이 뒤범벅됐다.
“불쾌하다. 이 단것들은 내게 적합지 않다.”
용아병이 극도로 불쾌해하며 몸서리쳤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키메라들, 지금이다.”
“크르르러렁!”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냉기 계열 키메라들이 움직였다.
서리 비늘 뱀, 냉각 기포 두꺼비, 고드름 쌍두 늑대 따위가 공격했다.
이들이 내뿜은 냉기는 함정에 빠진 용아병을 덮쳤다.
저 뼈 거인은 눈에 띄게 느려지고, 무뎌졌다.
“전군 일제 사격!”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휘관이 명령했다.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표적이 크기 때문에, 대충 쏴도 무조건 명중이었다.
쩌적!
위엄 넘쳤던 용아병의 뼈에 처음으로 실금이 갈라졌다.
하필 다리뼈였기에 엉거주춤 몸이 기울기까지 했다.
“하하! 뭐야? 잔뜩 쫄았는데, 별것도 아니잖아?”
비느레반이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그러고는 곧장 그의 허리가 으깨졌다.
피가 튄 연금술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미, 미친!”
“뭐야?! 순식간에 죽었어!’
용아병이 돌을 던진 손뼈를 쥐었다가 폈다.
놈의 입장에선 자갈이었겠지만, 인간 입장에선 바위였다.
뼈 거인으로부터 진노에 찬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약한 하위종들이 하찮게 나대는구나. 얌전히 내 주인의 목적을 위해 희생해라.”
공포에 질린 연금술사들은 제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비느레반은 무려 우승 후보라고 불렸던 엘리트 연금술사.
나름 최강자에 속했던 아군이 허무하게 즉사했다.
이젠 누구라도 금세 목숨을 잃을 수 있단 의미였다.
그러나 크라놀은 놀라지 않았다.
‘이런 대책만으로는 용아병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지.’
당연한 노릇이다.
이렇게 간단히 대도시의 파멸을 막을 수 있다면.
어째서 흑금룡이 1막의 최종 보스라고 불렸겠는가.
‘단 것, 냉기, 화살. 이런 것들은 약간의 디버프에 불과하다.’
고작해야 방어력을 낮추고 속도가 늦춰지는 수준.
결국 담판을 짓지 않으면 놈은 쫓아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크라놀 위자르는 앞을 향해서 걸어갔다.
“어, 어? 혼자 뭐 하는 거야?”
“크라놀 씨! 위험합니다!”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크라놀은 용아병과 일대일로 대치했다.
이 뼈 거인은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아팠다.
“넌 무엇인가. 뭔데 겁도 없이 내게 나서는가.”
용아병은 그를 적으로조차 취급하지 않았다.
한낱 개미를 내려다보듯이 오만한 눈빛.
하기야 손가락뼈만 까딱해도 죽을 테니까.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면승부는 승산이 없었다.
‘평상시의 크라놀 위자르’라면.
“토실아. 오동아.”
“크랴아앙!”
“네, 아저씨!”
양어깨에 올려둔 어린 것들한테 명령했다.
“지금부터 내 귓가에 대고 괴성을 질러라.”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일부러 광증 발작을 일으켜서라도.
20화 정면승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