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프롤로그

* * *

군국 전쟁성 예하 정보국.

국내부 5과 과장.

“다시 말해봐.”

레턴 아토믹 대령은 무미건조하게 반문했다.

언뜻 기가 차 보이기도 한다.

한쪽 손으로는 1급 기밀이라 적힌 서류에 간결한 필체로 서명한 그는 이윽고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슬슬 그림자 노릇도 질려서 말입니다. 선배님.”

“그걸 지금 말이라고…….”

재차 내뱉은 목소리에는 명확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황당함과 의문, 짜증과 한숨.

치익―. 습.

하지만 그의 질책 섞인 반문에 돌아오는 건 합리적인 대답 대신 궐련에 불을 붙이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으니.

“하아.”

레턴 아토믹은 이미 차게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삼킨 후 미간을 좁혔다.

“몇 년만 더 버티면 과장 진급 대상자라고 그렇게 실실거릴 때는 언제고,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뭐, 원래 사람이라는 게 바지 내릴 때와 올릴 때의 마음이 다른 거 아니겠습니까.”

“늘 생각하지만 네 유머 감각은 최악이야.”

능글맞은 목소리로 되지도 않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걸 듣자 다시금 두통이 밀려오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대체 뭘 먹은 건지.

혹자는 불길하다고 말하는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놈은 특유의 능글맞은 얼굴로 담배를 뻐금거리며 쉬지 않고 주절거렸다.

“제 농담은 선배만 싫어합니다. 다들 절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지원부의 셀라는 제가 정보국을 떠날 생각이라니까 너무 슬퍼서 울던데요?”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놈의 말에 무심결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다.

썩 반반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를 아주 잘 아는 레턴 아토믹은 그저 질린다는 표정으로 답할 뿐이었다.

“내가 웬만하면 확신은 잘 안 하는 편이다만, 그건 기쁨의 눈물일 거다. 빌어먹을 놈아.”

지원부가 놈이 근무한 7년간 얼마나 갈려 나갔는지를 곱씹어보면, 여태까지 그쪽에서 프래깅(Fragging: 고의적 아군 살해)을 하지 않은 게 용할 지경이다.

레턴 아토믹은 그런 생각을 하며 남은 커피를 모조리 털어 넣었다.

접객용 소파에 앉아 저렇게 시간을 뭉개고 있다는 건, 이야기를 들어주기 전에는 나가지 않겠다는 일종의 시위다.

‘내가 후배랑 만난 건지. 상전을 모시는 건지.’

다른 후배 놈들이었다면 하늘 같은 선배님이 바쁜 걸 보고 눈치껏 진즉에 알아서 사라졌을 텐데.

어째 이놈만 만나면 늘 머리가 아프다.

‘아인 크리그.’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언뜻 보기엔 조금 말랐다 싶은 체구.

쓸데없이 큰 키로 시원하게 뻗은 다리.

그 다리를 꼬고 담배를 문, 싸가지 따위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모습.

“늘 생각하지만, 네가 배척받는 이유는 가문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다. 그걸 좀 알았으면 좋겠는데.”

“저 같은 인재를 미워하는, 군국에 만연한 파벌주의를 재고해보는 편이 빠를 겁니다.”

“……제길. 불 내놔.”

도저히 담배에 불을 붙이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었던 레턴 아토믹이었다.

아인 크리그는 미친놈이다.

……하필 왜 그런 놈이랑 엮였냐고 묻는다면 괜스레 슬퍼지니까 그만 생각해야겠다.

그는 무테안경을 살짝 올리며 담배 연기를 내뱉은 후,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시답잖은 농담은 그만. 본론을 꺼내.”

“뭐, 본론이랄 게 있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아인 크리그는 특유의 청아한 향이 나는 궐련 담배를 뻐끔거렸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오른쪽 손목.

검은 셔츠 아래 미약하게 드러난 꼬리를 문 뱀 문신이 유달리 눈에 거슬린다.

“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 그뿐입니다. 점점 센티넬 가문의 지랄도 심해지는 와중이니. 사랑하는 정보국의 동료들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이라도 못 하면…….”

그의 말투는 여전히 가벼웠고, 언뜻 당연하다는 듯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를 알기에 레턴 아토믹은 짜증이 섞인 답을 내뱉으면서도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건 아인 크리그가 아닌, 레턴 아토믹이었다.

“불가.”

놈이 골칫덩어리에다 밉상이기는 하지만, 스스로 죽을 자리로 가는 걸 웃으며 반겨줄 정도는 아니다.

하물며 내뱉는 핑계가 7년 동안 신경도 쓰지 않았던 센티넬 가문의 압박이라니?

애초에 정보국은 놈들과 대립하는 조직.

아인 크리그를 광견병 걸린 개처럼 생각하는 정보국장조차도 듣는다면 코웃음을 칠 개소리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플랜 하나 더 짜 봤는데.”

“뭐지?”

“여기서 선배 관자놀이에 권총을 얹고 정보국이 떠나가라 인질극 한번 시원하게 벌이는 겁니다. 그만한 쥐불놀이면 국장님이 알아서 내쫓아주시지 않을까요?”

“…….”

남들이었다면 그저 농담이라고 치부했겠지만, 저 말을 내뱉는 게 하필 아인 크리그라는 점이 문제였다.

저 또라이는 한다면 한다.

결국, 레턴 아토믹 대령은 한숨을 내쉬곤 답했다.

“드디어 죽고 싶어진 거냐?”

“반대입니다. 살고 싶어서 나가는 거죠.”

“뭐? 그게 무슨…….”

“그런 게 있습니다. 어쨌든 작별 인사할 사람은 다 했으니까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는 몸을 묻고 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손을 가볍게 휘휘 저으며 문고리를 잡고는 살짝 돌린 고개 너머 능글맞게 웃으며 덧붙였으니.

“다음에 살아서 봅시다.”

끼이익―. 탁!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레턴 아토믹은 절반쯤 태운 담배를 입에 문 채 미간을 좁혔다.

“후우…….”

그리곤, 연기가 뒤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한창 일이 바빠서 가뜩이나 머리가 아프건만, 저 빌어먹을 후배 놈이 쓸데없이 찾아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크리그.”

무심결 그 이름을 입에 담는다.

200여 년 전, 대륙의 패자였던 천년 제국이 무너지고 얼마 남지 않은 영토에 군국이 세워진 이래 가장 불길한 이름.

그 이름을 가진 유일한 이가 갈 부대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조만간 시끄러워지겠군.”

그는 이제 유명무실해진, 군국 최전방의 한 요새를 떠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책상 앞에 앉아 펜을 집었다.

그는 업무 속도를 더욱 높이며, 한숨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제기랄. 애초에 엮이는 게 아니었어. 빌어먹을 놈.’

정말 불행하게도, 그 요새와 부대 역시 5과. 북부의 관할지였으므로.

아니나 다를까.

머잖아 아인 크리그의 전출 소식이 정보국 내에 퍼지고, 레턴 아토믹은 정보국장의 명령으로 반쯤 방치되어 있던 서류들을 다시 펼쳐야 했다.

「제13 특수 독립여단」

과거, 군국의 최전선을 담당하던 정예여단.

그리고 지금은…….

“비공식 형벌부대.”

레턴 아토믹은 쓰디쓴 단어를 입안에서 굴리며, 담배를 물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무운을.”

단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1편

* * *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생은 망했어.”

피가 흐른다. 피가 계속 흐른다.

검은 머리카락의 기사.

짙은 북부 억양으로 말을 내뱉은 그는 피가 가득 찬 건틀렛을 벗어 무심하게 바닥에 떨궜다.

툭―.

기사가 건틀렛을 바닥에 함부로 떨어트리는 건 금기시 되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쿨럭!”

마른기침을 내뱉는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떴다.

얼마나 베고, 또 베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며칠이나 흘렀지?

하루, 아니. 이틀인가?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버린 세상은 기형적인 동시에 모순적인 아름다움마저 느껴졌다.

‘아름답다니. 나도 맛이 갔군.’

무심결 조소를 흘렸다.

머리가 망가져 버린 게 분명하다.

푸른 하늘, 태양과 달의 색채마저도 온통 잿빛으로 물들었다.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그마저도 아니라면 모든 것이 저무는 황혼인지조차 쉽사리 가늠할 수 없다.

콰드드득!

다시 한 놈을 베어냈다.

인간을 누더기처럼 기운 듯이 역겨운 모습을 한 괴물은 끝끝내 그 악의로 찬 생의 종지부를 찍는다.

피 대신 잿물을 흘리고, 살점 대신 잿가루를 날리며 말이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전장의 한편.

대지에 박힌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거렸다.

“커헉!”

시선이 그 아래에 닿는다.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가 보인다.

아니, 저건 인간이었다.

이름 모를 병사의 등에서 폐를 관통한 깃대는 그의 마지막 숨결을 따라 흔들린다.

뿐인가.

주르륵, 대지의 굴곡을 따라 그의 발치에 검붉은 핏물이 닿았다.

“……예나. 내 딸아. 엄마가 곧 갈게. 내가 곧.”

하반신과 상반신이 뜯어진 이름 모를 병사가 무표정으로 무언가를 담아 배에 밀어 넣고 있었다.

그건 선홍빛 장기 조각이었다.

너덜거리고, 오물까지 뒤엉킨 고깃덩어리.

그녀는 이미 끝이 다다랐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하는 것처럼 뭉개진 손끝으로 살점 더미를 긁어 담다가 끝끝내 고개를 떨궜다.

“…….”

검은 머리의 기사는 눈을 감았다.

언제 망가진 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 무릎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끼에에에에!

그는 달려드는 놈을 거대한 대검으로 베어내며 생각했다.

……참혹하고도 참혹하도다.

분명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너덜거리는 성벽의 잔해 아래 꿈틀거리는 살점.

잿더미 위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인간들의 모습이 어지럽게 겹친다.

문득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 구시가지가 불타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근위대가 있는 곳.’

그 끝을 짐작하게 만드는 불길이다.

사방이 죽음이며, 절망이다.

“……쿨럭!”

그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건 한쪽 팔이 잘린 채, 얼굴 반쪽은 화상으로 문드러져 다가오는 한 젊은 기사의 얼굴이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몰골이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엉망인 모습이다.

그의 갑주가 근위대의 그것이 아니었다면,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었을 정도로.

“아서 밀란트.”

까글거리는 입술을 열어 그의 이름을 읊조린다.

근위대와 기사단의 근무지가 종종 겹쳤던 덕에 몇 번 보았던 얼굴.

실력이든, 인간관계든 모난 구석이 없던 근위대의 막내.

남들은 불길한 머리 색이라며 기피하던 자신에게도 몇 번 말을 붙였던 탓에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

“……후욱. 끄윽.”

아서는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리곤, 이내 벌벌 떨리는 손으로 진통 약초가 담긴 주머니를 털어 통째로 씹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가 달려드는 괴물들을 두 마리나 베고 나서야 아서는 간신히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초점이 돌아왔다.

때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짧고 간결하게 반문했다.

“구시가지의 상황을 말해라.”

갈라진 입술이 꿈틀거렸다.

아서 밀란트가 속한 근위대는 황족들의 피난 시간을 벌기 위해 구시가지로 가는 남쪽 길목에 배치되었다.

잿더미는 북부에서 밀려왔으니까.

그런 근위대가 몸 절반이 녹은 화상을 입은 채로 걸어왔다.

뿐인가.

황족과 귀족들의 피난길로 낙점.

다른 구획보다 안전해야 할 구시가지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다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물음에 아서는 몸을 떨었다.

“의무를 다해라. 너희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니었나. 대답해.”

냉소적인 말에 변명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이내 울분이 뒤섞인 괴성을 토한다.

“시, 시민들이. 시민들이 귀족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다들 미쳐서. 다들 미쳐서 귀족들의 목을 잘라 장대에 꽂았어요. 그, 그리곤 불을. 불을!”

문득, 시선이 그의 검에 닿았다.

툭, 투둑――.

핏물이 혈조를 따라 흘러내렸다.

아마, 저 핏물은 괴물의 것이 아니겠지.

놈들은 피를 흘리지 않고, 단지 잿더미가 되어 바스러질 뿐이니까.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저, 저는. 저는…….”

아서 밀란트는 끝끝내 한쪽 무릎을 꿇고는 더없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곤, 이내 살이 불에 뭉개지고 짓눌려 건틀렛을 벗을 수조차 없게 된 손끝으로 그의 다리를 붙잡곤 물었다.

“길이, 길이 없었습니다. 시민, 시민들이 귀족들을 잡아서 놈들의 먹이로. 병사들도. 다들 미쳐서. 아. 아아――.”

아니, 저건 물음이 아니다.

평생 바쳐온 신념이 무너진 기사의 공허한 울음일 뿐.

그는 끝끝내 무너진 채 허공을 향해 대답을 들을 길이 없는 물음을 내뱉었다.

“내성이 무너졌고, 황제 폐하께서는 도망가셨습니다. 귀족들도요. 아니. 어쩌면 죽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저희는 어디로 도망쳐야 합니까?”

“아서 경.”

“두렵습니다.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제, 제 피가 잿빛입니다. 아니. 세상이 잿빛입니다. 저, 저희는 대체 무엇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겁니까? 아, 아아아아!”

“아서 밀란트!”

내뱉은 일갈에 아서 밀란트는 일그러진 견갑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깨닫고 말았다.

동공이 뭉개진 그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그 어깨너머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 아아. ■■■ ■■이시여. 경이롭고도 경외하오니.”

아서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언뜻, 황홀해 보이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홀린 듯이 읊조리는 웅얼거림에 그 역시 고개를 돌렸다.

―. ―――――.

인간이 납득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음성이 귓가를 스친다.

아니, 아니지.

이건 뇌를 뭉갰다고 표현해야 옳다.

눈앞에 드리운 시간적인 정보를 제외하면, 그 자신의 의식과 자아는 어떤 주권도 행사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멍하니 바라보길 몇 분일까.

두 눈을 가득 채우는 잿빛 색채에 압도당한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종말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대륙의 패자인 천년제국이 무너졌다.

살아남은 국가와 수많은 이들이 있다고 한들, 그들이 이 부조리한 폭력에 얼마나 저항할 수 있을까?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신의 품은 딱히 바라지 않았는데.’

평생 검을 쥔 채, 적을 베어온 그.

그 끝이 마침내 정해졌다.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된, 개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좆같군.’

그게 수도원에 맡겨진 고아로서 제국 기사단의 일원이 된, 검은 머리의 기사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 찰나의 순간, 뇌리를 스친 무언가가 겹쳐지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내가 여기서 죽었다고?’

어딘가 납득되지 않는 괴리감.

그런 사실을 깨달은 순간, 눈앞의 잿빛이 일순간 번뜩거린다.

그리고, 등에서 느껴지는 더없이 포근한 포옹과 더불어 나지막이 속삭여지는 목소리.

―반드시. 당신이라면.

단순히 소리가 아니다.

―그곳에 닿을 수 있어.

영혼에 각인된 듯한 그 한마디를 끝으로 기사는 눈을 감았다.

―천년제국의 수도. 대성당의 성녀금좌(聖女金座)에.

그리고 훗날 군국의 역사가들은 그날을 역사서에 이렇게 기록했으니.

「대륙력 1393년. 천년제국이 무너졌다.」

―라고 말이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운전대를 잡은, 주근깨가 특징인 상병이 물었다.

썩 편견이 없는 놈이다.

자신이 누군지 알면서도 큰 거리낌 없이 말을 걸다니.

‘아니. 이 경우엔 배려해준 거겠지.’

정보국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솔직하지가 못하다.

내가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될걸. 앞에선 매번 다들 투덜거리다가 이렇게 뒤에서 배려를 해주곤 한다니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던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군복을 입은 남자.

아인 크리그 중령은 품에서 철로 만든 담뱃갑을 꺼내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는 중얼거렸다.

“그냥, 옛날 생각.”

“어릴 때 생각이라도 하셨습니까?”

“어릴 때라면 어릴 때지. 한 200년쯤 전이니까.”

상병은 그의 말에 실소를 흘릴 뿐이다.

그저 실없는 농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무리도 아니다.

정작 당사자인 그 자신조차도 매번 꿈은 아닐까, 혹시 내가 미친 게 아닐까 곱씹어보곤 했으니.

‘200년 전의 나는 군국의 전신인 천년 제국의 기사였다.’

‘모종의 이유로 죽었고, 200년 후 크리그 가문에서 다시 태어났다.’

확실한 건 그것뿐이다.

스스로도 과거의 기억이랄게 모조리 뒤섞여 뭐가 뭔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이 경우는 흐릿한 장막으로 가려진 느낌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지.

종종 악몽 비스무리한 뭘 꾸긴 한다.

다만, 그 내용의 끝이랄게 모두 뒈지는 결말과 웬 여자의 뚱딴지같은 목소리밖에 없어서 문제지.

지이잉―.

한편, 상병은 그가 담배를 물자 조용히 창문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코를 스치는 청아한 향기에 그는 반문했다.

“박하? 아니. 레몬입니까?”

“꽤 코가 좋군. 얼추 반반이다. 비율을 따지면 6대4 정도 되려나.”

“그런 담배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냥 담배는 아니니까.”

마나 궐련. 마이스터라고 불리는 괴짜 중 한 명이 개발한 물건이다.

물론, 거창한 이름과 달리 효과라곤 정순한 마나를 티끌보다도 적게 내면에 축적 시켜주고 약간의 진정 효과를 주는 일종의 건강보조제이자 사치품.

가격이 비싸서 이렇게 줄담배로 태워댈 물건은 아니다.

‘나한테는 목숨줄이라서 문제지.’

새삼 깨닫는, 이 몸의 빌어먹을 연비에 실소를 흘리는 아인 크리그였다.

한편, 그런 그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상병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찬 바람이 뺨을 스친다.

궐련의 청아한 향이 제멋대로 흐트러지고, 이윽고 차창 너머 광경을 눈에 담았다.

시선이 닿는 곳은 모두 눈이 쌓여 있다.

하물며, 차가 달리는 도로조차도.

“제13 특수 독립여단. 이른바 케르베로스 여단.”

아인 크리그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나지막이 읊조렸다.

“형벌부대. 그렇게도 불린다지?”

“예. 그렇습니다. 물론 군국에 공식적인 형벌부대는 없다지만, 사실상 다들 죽는 곳으로 생각하잖습니까.”

상병은 답하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말하고도 괜한 소리를 했나 걱정하는 눈치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듣는 아인 크리그 중령은 그저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뭐, 저기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이겠지.”

오히려 상병이 ‘이렇게 태연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게 말하는 그였다.

다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수긍했다.

곁에 앉아 있는 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크리그’니까.

그렇게 얼마나 더 눈으로 뒤덮인 열악한 도로를 달렸을까?

저 멀리, 하늘에 닿을 듯이 드높게 솟아난 바나르간드 산맥을 따라 지어진 거대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혹독한 북부의 눈이 뒤덮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 찬란했던 천년제국의 영광을 나타내는 듯한 유려한 장식들이 긴 시간 동안 자연과 동화되었기 때문인지.

“……저게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

그 장엄함에 무심결 입을 벌린 상병의 모습도 무리는 아니었다.

200년 전 천년 제국이 멸망하고, 그 후계를 자처하는 군국(軍國)의 최북단 거점 요새.

하늘마저 잿빛 구름으로 뒤덮여 1년 내내 겨울이 되어버린 구(舊) 제국 영토와 이 땅을 격리하는 관문.

나아가 케르베로스 여단, 혹은 간결하게 비공식 형벌부대라고도 불리는 제13 독립여단의 주둔지.

“정말 혹시나 했는데…….”

한편, 아인 크리그는 마나 궐련을 하나 더 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으니.

“남부 관문이잖아?”

재활용 하나는 기깔나게 했네.

역시 군인들이야. 성능 확실하구먼.

2편

* * *

“그럼, 무운을 빌겠습니다. 중령님. 충성.”

“덕분에 지루하진 않았다. 상병.”

주근깨가 인상적인 상병을 돌려보낸 후, 아인 크리그는 담배를 물었다.

치익, 습―.

레몬과 박하가 반쯤 섞인 청아한 담배 연기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그는 검고 긴 사각형 케이스를 등에 멘 채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흰 눈에 찍히는 군화 자국이 도드라진다.

그는 바람에 휘날리는 잿빛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 누가 지었는지 네이밍 센스 하고는.”

요새는 크고 웅장했다.

아니, 장엄하다는 표현이 옳을까?

거대한 이중 성벽으로 바나르간드 협곡 너머를 향한 포대들이 즐비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다만, 그 원류를 알고 있는 아인 크리그에겐 그 모습만큼 아이러니한 게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원래 저 성벽이 막고 있던 건 북쪽이 아니라 남쪽이었으니까.

“제국의 최남단에 있던 관문이 이젠 제국을 막는 최전선이라.”

구(舊) 제국의 영토 태반을 상실한 채, 장벽 너머에 숨어 밀려오는 재의 권속들을 두려워하는 것.

200년 전, 기원조차 알 수 없는 재의 진군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인류의 현주소.

툭―. 치이익!

담배를 군홧발로 비벼 끈 그는 바람에 살짝 뜬 검은 군모를 눌러쓰며 걸음을 옮겼다.

등에 멘 거대한 케이스가 때때로 흔들리고, 긴 가죽 코트를 휘날리며 천천히 요새로 향하는 초소로 향한다.

‘을씨년스럽군.’

도로는 꽤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초소의 모습은 군국의 최전선이라기엔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군국의 최전선을 지키는 제13 독립여단은 현재 군국으로부터 버려진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지크프리트 선 때문이지.’

군국 건국 100주년을 맞이해 바나르간드 산맥의 초입 부근을 따라 건설되고 있는 750km의 절대 방어선.

벌써 97년째 공사가 진행 중이고, 들리는 소문으론 군국 건국 200년에 맞춰 완공될 예정.

‘이미 대부분의 지역은 지크프리트 선에 의해 방위되고 있다. 그 너머의 혹독한 이 요새가 버려지는 건 정해진 수순인 거지.’

그런데도 아직 요새가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지크프리트 선이 완공되는 날, 가장 완벽한 날에 희생 제물로 쓰일 예정이니까.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군국의 절대 방위―어쩌고 하는 센티넬 가문으로선

그런 생각을 하며 걷기를 몇 분이었을까.

어느새 초소 앞까지 다다른 그는 허름한 난로를 켠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초병을 마주했다.

“음.”

아인 크리그는 만족스럽게 그 초병을 내려보았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질 않는군.

그는 초소 안으로 들어가 익숙한 손으로 무전기를 조작했다.

치지직―.

짧은 무전음이 스치고, 이내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무슨 일이야?

마찬가지로 내뱉어지는, 군기 따위는 없는 태평한 목소리.

“반갑다.”

아인 크리그는 졸고 있는 록튼 병장의 어깨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채, 나지막이 웃으며 답했다.

“새로 부임한 여단장. 아인 크리그다.”

―……예?

“아, 내가 말을 좀 어렵게 했나 보군.”

딱 3분 줄게.

“여단장 대리 불러와. 당장.”

뒤지기 싫으면.

* * *

“날이 춥군. 안 그런가?”

“그, 그렇습니다.”

“불.”

“예, 예!”

졸고 있던 록튼 병장의 자리에 앉아서 마나 궐련을 까닥거리자, 침 자국도 채 닦지 못한 그는 황급히 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다.

후우―.

내뱉은 연기가 허름한 초소 안에서 일렁거리는 불빛과 마주해 흔들린다.

다리를 꼰 그는 부동자세를 하면서도 연신 눈치를 보는 록튼 병장을 바라보았다.

앉아서 졸 때도 느꼈지만, 꽤 장대한 기골에 반해 순박하기 그지없는 얼굴이다.

물론, 이 여단에 있는 순간부터 순해 보이는 얼굴 따위는 하등 믿을 게 못 되었지만.

“좌천된 사유가 뭐였지?”

“예?”

“두 번 묻게 하지 말고.”

아인 크리그는 싱긋 웃어주며, 다리를 꼬며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던 코트 끝자락을 살짝 끌어 올렸다.

그러자 곧 은색 리볼버가 드러난다.

아무리 바보라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는 행동에 록튼 병장은 순간 올라온 딸꾹거림을 삼키며 황급히 답했다.

“사, 상관 폭행입니다!”

“안 될 놈이군.”

“그, 그게…….”

찰나지만, 억울하다는 빛이 눈을 스친다.

아인 크리그는 입술을 살짝 벌리곤, 말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저함도 찰나일 뿐.

록튼 병장은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저, 전에 있던 부대의 대대장이 센티넬 가문과 연이 닿아있던 기사 장교인데, 틈만 나면 보급품을 빼돌렸습니다.”

“그래서?”

“단체로 찾아가서 두들겨 팼습니다만.”

“허.”

기사 장교는 특무 장교로 분류되는 병과다.

쉽게 말해 200년 전에 기사, 마도사, 사제가 군국에선 각각 기사 장교, 마도 장교, 군종 사제로 불린다고 이해하면 편하다.

‘그런데 그런 기사 장교가 고작 사병들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물론, 기사 장교가 사병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건 그 자체로 ‘석화증’ 발발의 전조로 여겨지는 중대 사항이다.

그걸 염두에 둔 대처였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글쎄.

보급품을 빼돌려서 푼돈이나 버는 놈이 과연 그런 직업윤리를 가졌으려나?

그가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아마 그놈, 사관학교 출신은 아닐 거다.”

“……다릅니까?”

아인 크리그의 말에 록튼 병장은 눈을 끔뻑거리며 볼을 긁었다.

안 봐도 알 법도 하다.

나름 기사 장교를 두들겨 팼었다고 주변에 으스대고 다녔으리라.

“그 기사 장교라는 놈. 입고 있던 군복이 어땠지?”

“뭘 말씀하시는 건지……?”

“일반 장교와 군복이 같았잖아.”

그의 말에 록튼 병장은 눈을 굴리다가, 이내 얼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 크리그는 피식 웃고는 덧붙였다.

“많이 쳐 줘야 7급일 거다. 센티넬 가문과 연이 닿아있다는 말이 진짜라면 기껏해야 9급이겠지.”

“그, 그럼.”

“축하한다. 병장. 사관학교 신입생보다 못한 놈을 두들겨 팼군. 그것도 단체로.”

“아.”

이 정도로 말해줬으면 비꼬고 있다는 걸 못 알아듣는 게 이상하다.

록튼 병장은 얼굴을 붉혔다.

쉽게 말해, 기사 장교 탈을 쓴 쭉정이를 패고 으스댔다는 말.

그 반발감 때문일까?

록튼 병장은 살짝 미간을 좁힌 채 그에게 반문했다.

“그럼 사관학교 출신들은 뭐가 크게 다릅니까?”

“다르지.”

사관학교 출신의 특무 장교들은 모두 셔츠까지 검은 군복을 입고 있다.

오죽하면 검은 셔츠―라는 은어도 있겠나.

거기에 실력적으로도 빡빡하다.

최소 5급이 되지 못하면 동문 취급도 받지 못하니까.

그 말인즉…….

“이 정도는 충분히 눈치챌 정도라는 뜻도 되지.”

아인 크리그는 어느 순간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록튼 병장을 마주한 채 옅게 웃었다.

직후 놈이 반응할 새도 없이 허리의 권총집에서 은색 리볼버를 꺼냈고, 나아가 멱살 잡아끌곤 턱에 겨누곤 읊조렸다.

“개판이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건 좀 심하잖아.”

“……여단장님?”

“록튼 병장. 아니지. 이었던 것이라고 불러주겠네. 여하튼, 네 패착이 뭔지 아나?”

하잘것없는 농담이나 위협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걸까.

록튼 병장, 아니. 그의 시체를 뒤집어쓰고 있던 재의 권속은 꿀렁거리며 다급히 의태를 풀었지만.

아인 크리그는 그 찰나의 순간 두려움으로 가득 찬 괴물에게 나지막이 속삭여주었다.

“제13 특수 독립여단. 아니지. 케르베로스 여단에 몸담은 병사 중 나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바로 총구를 겨누고 꺼지라고나 안 하면 다행이지.

어쩌겠나. 원래 나 같은 사람은 시기 질투를 많이 받는걸.

“그게 무슨 개같은―!”

방아쇠를 당기고, 총구가 불을 뿜는다.

타앙! 콰드드득!

옅은 마력을 담은 총성이 초소 안에 울렸다.

아인 크리그는 반쯤 날아간 뒤통수의 파편이 재로 변하며 벽과 천장에 튄 모습을 바라보곤 손을 휘저었다.

“군종 사제가 한 명 있다고 했으니, 오해는 안 받겠지?”

미움받을 용기를 감수한다는 건 언제나 아름다운 일이지만, 때때로 지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뭐, 덕분에 종양을 적출할 기회를 얻은 거니 마냥 나쁘지는 않은가?

치익―. 습.

그는 담배를 물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피가 튄 건지, 그의 콧대를 따라 잿물과 비슷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후우.”

비릿한 피 냄새 대신 역겨운 잿더미 냄새가 나는 초소 안에서 나지막이 연기를 내뱉었다.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윽고 저 멀리 일련의 군용차들이 멈춰서고, 곧 초소 근처의 바리게이트 앞에서 총을 견착한 병사들.

그들을 뒤로한 채, 한 군인이 걸어 초소 앞에 다다른다.

끼이익―.

허름한 경첩음이 안에 울리고, 아인 크리그는 마침내 당도하신 검은 머리의 소령을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물론, 그 손가락에는 담배 하나가 끼워져 있다는 건 덤이고.

“반갑네. 여단장 대리. 이건 선물인데. 혹시 군종 사제를 좀 데리고 왔나?”

그 태연한 태도에 놀랄 법도 하건만,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현장을 살폈다.

그리곤, 이내 입술을 짓씹곤 한숨을 내뱉으며 답했으니.

“……여단장 대리이자 1대대장. 아르디티 귄터. 여단장님을 뵙습니다.”

흠잡을 데가 없는 간결하고 각 잡힌 경례.

생각보다는 적대적이지 않은 태도에 아인 크라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직후 자리에서 일어나 태연하게 눈웃음 지으며 그녀의 곁을 지나친다.

“그럼, 일단 부대 시찰을 한번 해볼까?”

“그전에.”

다만, 막 그녀의 어깨를 지나갈 무렵.

차게 식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아르디티 귄터는 나지막이 덧붙였으니.

“혹시 모를 감염이나 오염을 대비해, 현 여단장 대리의 권한으로 중령님을 임시 격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니―라고 물을 새도 없었다.

철컥―.

아르디티 귄터의 명령을 들은 대대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그리곤, 그녀는 그를 지나쳐가며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대대원들에게 말했다.

“정중히 모셔라. 무려 7년 만에 오신 여단장님이시니.”

“아하하하…….”

음, 아무래도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억울한 감은 있다만 어쩌겠는가.

아인 크리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순순히 군용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그사이에 록튼 병장의 몸을 뒤집어썼던 재의 권속은 하잘것없는 잿더미로 변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트럭에는 안 태우는 걸 보면, 상관에 대한 예우 정도는 있군. 소령.”

“태워드리기 전에 조용히 하십시오.”

“담배는 태워도 되겠지?”

아르디티 귄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머감각이 없는 친구군.

방금 나름 라임을 맞춰봤는데 말이지.

그런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린 아인 크리그는 수갑으로 묶인 손으로 어색하게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신고식치고는 조금 과하긴 하다만, 일단은 어울려 주지.”

이게 다 죄 많은 남자라서 그렇다. 암.

물론, 이번에도 아르디티 귄터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3편

* * *

“200년 전, 기원조차 알 수 없는 재의 권속들에 의해 대륙의 지배자였던 천년제국이 무너졌습니다.”

살아남은 이들은 대륙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나마 비루하게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가장 척박하고 드높은 남부의 산맥, 바나르간드 산맥 너머로 온 이들뿐이었다.

바다와 닿아있으며, 북쪽에서부터 몰려오는 잿더미와 가장 멀었던 대륙의 끝자락이었으니까.

하지만, 희망은 없었다.

단순히 죽음이 유예되었을 뿐, 잿더미는 빠르게 밀려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천년제국의 수도가 무너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이 일어났다.

대륙 태반을 집어삼킨 잿더미가 점차 속도를 줄이더니, 바나르간드 산맥을 기점으로 더는 진군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알 수도, 기억할 수도 없는 주신께서 내리신 기적이지요.”

그 덕분에 제국의 마지막 황자 세레티오 폰 임페리움은 바나르간드 산맥 너머에서 살아남은 군사와 피난민들을 규합.

투쟁 끝에 재의 권속들을 산맥 너머로 완전히 몰아낸 후 군국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건국제 세레티오 폰 임페리움 폐하께는 세 명의 충신이자 친우가 있으셨지요. 한 명은 호국공 지크프리트 센티넬. 한 명은 마도공 크래프트 리브, 마지막 한 명은…….”

“참회공. 레이븐 크리그.”

“잘 아시는군요.”

아인 크리그의 앞에 앉은 적발의 남자는 특유의 실눈을 꿈틀거렸다.

구릿빛 거구의 육신은 앉아 있는 철제 의자가 왜 삐걱거리는지 알게 해줬고, 입술 중앙에 박혀 있는 링 피어싱이 눈에 띄었다.

그는 터질듯한 검은 군복 셔츠를 살짝 걷더니, 작디작은 성경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지크프리트 센티넬은 본래 제국의 막내 황자이기에 계승권은커녕 목숨조차 위협받던 세레티오 폰 임페리움 건국제를 평생토록 수행한 충신입니다.”

그는 군국을 지킨 호국공(護國公)이 되었다.

“2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석화증이라는 저주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마도사들을 규합하고, 적들에 대한 연구를 이어 나갔던 크래프트 리브는 초대 정보국장으로서 군국의 안정에 힘을 보탰지요.”

마지막 마도사는 마도공(魔道公)이.

그리고, 레이븐 크리그는…….

“미천한 용병 기사 출신. 천년제국의 멸망 직후 합류한 그는 바나르간드 산맥 너머를 오가는 케르베로스 레인저를 이끌고 공을 세워 참회공(慙悔公)이 되었지.”

호국공, 마도공과 달리 어째서 혼자만 참회공인지는 후손인 자신도 몰랐다.

‘그나마 가능성이 큰 건, 대륙에서 죽어간 무수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조상님께선, 조금 많이 감성적이셨던 모양이다.

별 개똥 같은 이름을……. 여하튼.

작금에 이르러 케르베로스 레인저는 대대로 바나르간드 산맥의 철혈 요새를 지키는 제13 특수 독립여단으로 계승되었다.

……라지만, 딱히 의미는 없었다.

지금의 크리그는 공작가는커녕 시골구석의 남작가보다 힘이 없으니까.

그나마 권력이 있을 땐 흐지부지 넘어갔던 검은 머리카락과 눈깔 색을 배척받는 건 덤이고 말이지.

‘내가 유일한 크리그인건 덤이고.’

크리그 가의 자손은 단 한 명만 허용된다.

거기에 여러모로 빈곤한 가문의 사정상,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어릴 때 전사(戰死).

한때 센티넬과 대적했던 가문의 최후라면 최후이리라.

“이 얘기를 왜 하는 거지?”

아인 크리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마나 궐련을 뻐끔거리며 반문했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거구의 사내. 아니. 제12 특수 독립여단의 유일한 군종 사제는 특유의 실눈을 말아 올리며 답했다.

“여단장님의 뿌리가 그렇다는 겁니다.”

탁―. 들고 있던 검은 성경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채 그는 덧붙였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작게나마 크리그를 믿고 있던 자들의 상심이 너무 큽니다.”

딱히 부정은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때문에, 아인 크리그는 대답 대신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후 손목에 찬 수갑을 내밀었다.

“그래도 결국 왔잖아. 이것 좀 풀어주지? 리어 융 상사.”

이름표를 훑어 친근하게 속삭인다.

알 만한 사람들끼리 왜 이래―라는 눈빛에 군종 사제 리어 융은 한없이 인자하게 웃었다.

그리곤, 변변찮은 제목도 적혀있지 않은 검은 성경을 그에게 슥 내밀곤 나지막이 답했다.

“이것도 일종의 신고식이라고 생각하십시오. 형제님. 내일부턴 좋든 싫든 모두가 여단장으로 대우할 겁니다.”

리어 융 상사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결국, 허름하고 추운 밀실에 혼자 남은 아인 크리그는 가볍게 웃으며 담배를 물곤 중얼거렸으니.

“그래도 총은 안 쐈네.”

물론, 그렇게 중얼거린다고 묶여 있는 수갑이 풀리는 일은 없었다.

* * *

아인 크리그가 임시 격리, 다른 말로는 구금에서 풀려난 건 정확히 아침 6시가 되었을 때였다.

그는 뻐근한 몸을 일으켜 손목을 내밀었고, 이내 리어 융이 그 수갑을 풀어주며 어제와 마찬가지로 인자하게 웃음 지었다.

“많은 고뇌를 하셨습니까?”

“덕분에.”

딱히 악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이 정도 텃세랄지, 투덜거린 정도는 각오하고 온 길이었으니까.

절차상 불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하루 감금은 조금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뭐, 그건 인자하게 넘어가 줄 법도 하지.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제13 특수 독립여단 특무지원대. 리어 융 상사입니다.”

“아인 크리그다.”

리어 융 상사는 경례를 올렸고, 그걸 받아주자 그는 여단장실로 안내하겠다며 걸음을 옮겼다.

“아르디티 귄터 소령은 바쁜가 보지?”

여단장이 왔는데 대리도 아닌 군종 사제가 맞이하러 오는 건 아무리 봐도 경우가 아니기에 내뱉은 말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리어 융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실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없다면 여단은 돌아가지 않을 수준이니까.

“그 정도인가?”

“그 정도입니다.”

군종 장교들, 그러니까 속죄 교단의 사제들은 거짓말을 금기시한다.

즉, 과장 따위 없겠지.

자세한 건 머잖아 알게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한 아인 크리그는 앞서 걸어가는 리어 융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실눈에 가까운 눈매와 구릿빛 피부.

키는 대략 190CM에 근육질 몸매.

입술 중앙에 있는 피어싱까지.

‘영락없이 기사 장교의 재목인데.’

아마 군국 특무 사관학교 교관들이 보았다면 인재를 속죄 교단에 빼앗겼다고 슬퍼하지 않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도 잠시.

아인 크리그는 이내 그에게 물었다.

“폰투스 군도 출신인가?”

“……알아보시는군요?”

이건 그로서도 의외였던 걸까.

리어 융은 감겨있다시피 한 실눈을 살짝 뜨며 반문했다.

“신기하군요. 다들 모르던데.”

그가 내뱉는 군국 공용어에 옅은 군도 사투리 억양이 섞여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군국 남부 사투리와 닮아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리어 융의 의문에 아인 크리그는 태연하게 화답했다.

“입술 피어싱 위치. 입술 가운데라면 군도에서 행운을 상징하잖나.”

“해박하시군요.”

“지인 중에 군도 출신이 있어서.”

“혹시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죽었어. 한 200년 전쯤에.”

“유감이군요.”

둘의 대화는 때때로 곁에 지나가는 병사들의 갸웃거림을 자아낼 정도였지만, 정작 둘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본부대에 다다르자 리어 융이 말했다.

“본래 제13……. 편하게 저희끼리 부르는 말로 하겠습니다. 케르베로스 여단의 여단장 대리는 아르디티 귄터 소령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이건 아인 크리그도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야 무리도 아니다.

군국 특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정보국에 투신하고 한 5년까지는 일부러 케르베로스 여단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지난 2년 전에 알아보았을 땐 이미 아르디티 귄터가 여단장 대리이자 제1대대장이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오히려 당연한 건가.’

아르디티 귄터 소령. 그녀는 자신과 같은 기수다.

다만, 그녀의 가문이 가문이잖나.

계급이나 경력? 귀족들이 다 해 먹는 판에 그런 건 충분히 ‘유도리’있게 넘어가는 전쟁성인데 뭘.

“본래 여단장 대리는 전(前) 1대대장이었던 놈이었습니다. 아르디티 귄터 소령님은 그 예하 중대장이었고요.”

치익―. 습.

아인 크리그는 담배를 물고 연기와 함께 말을 내뱉었다.

“쓰레기였나?”

“여러모로 결격 사유가 많기는 했지요.”

이어진 리어 융의 말은 가관이었다.

“비리 혐의로 좌천되었던 소령이었는데, 제 버릇을 남 주지 못했는지 여러모로 물자들을 건드렸습니다. 차라리 그뿐이었으면 모르겠습니다만…….”

“더 한 게 있나?”

“술만 마시면 가혹행위가 심했습니다. 자기가 여기까지 밀려난 게 다 너희 탓이라며 예하 병사들을 구타하는 건 예삿일이었죠.”

“뒤통수에 구멍이 안 뚫린 게 용하군.”

프래깅(Fragging), 그러니까 고의적 아군 살해는 최전방에서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특히 실전 경험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곳에서는 더더욱이 그럴 텐데.

그런 아인 크리그의 말에 리어 융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것도 실전을 나가야 성립이 되는 일이죠.”

“겁도 많으셨다? 가지가지 하는군.”

실소가 흘러나올 정도다.

그야말로 비리 장교의 전형이 아닌가?

리어 융은 내심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설하고, 3년 전쯤 아르디티 귄터 중령님께서 모든 증거를 모아 상부에 보고했습니다.”

“형식상의 징계로 끝났을 텐데?”

버려진 여단의 비리 따위, 상부에서 알 바가 아니다.

특히 센티넬 가문이 장악한 현재의 군부라면 더더욱이.

센티넬의 반대파들에게도 현재의 크리그 가문은 계륵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존재일 뿐.

굳이 건드릴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런 그의 의문에 리어 융은 고개를 끄덕이며, 왼손에 감고 있던 묵주를 손가락으로 굴리곤 답했다.

“맞습니다. 형식적인 징계였죠.”

오히려 놈에겐 휴가였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빌미로 중부로 올라갔다 왔으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단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성벽을 넘은 재의 권속과 마주쳐 전사했습니다.”

“……우연히?”

“안타까운 일이지요.”

야. 너 지금 묵주 존나 굴리고 있잖아.

아인 크리그는 짜게 식은 눈으로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지만, 리어 융은 돌아보는 대신 허허 웃을 뿐이었다.

“여기가 본부입니다. 과거 제국 건물의 내성을 개조해서 기품이 넘치지요.”

말을 돌리는 그는 경비를 서고 있던 군인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병사들은 반가움 반, 적대 반인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당연히 적대하는 눈으로 어느 쪽을 본 건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성의 로비 앞을 지나가던 찰나.

그들 곁으로 약간 통통한, 귀여운 인상의 갈색 단발의 군인이 지나가다가 멈춰 섰으니.

“리어 상사. 어? 뒤에는…….”

그녀는 잠시 눈동자를 끔뻑거리다가, 이내 혹시나 하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크리그?”

“맞습니다. 파르밀라.”

“얼굴은 반반한데. 왜 이제야 기어왔대?”

“저도 모릅니다. 하하.”

파르밀라라고 불린 상사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말 그대로 형식적인 경례만을 올리곤 곧바로 지나쳐갔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건지, 절뚝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만, 꽤 경쾌한 뒷모습이었다.

‘음.’

아무리 늦게 와서 할 말이 없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면 여러모로 부대 장악에 좋지 않다.

아인 크리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입을 열려던 찰나. 리어 융이 덧붙였다.

“여단 취사장. 파르밀라 상사입니다.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 독립 여단이다 보니 그녀의 손이 안 닿는 음식이 없지요.”

“귀관이 잘 좀 말해주게. 대화를 좀 나눠보니 그렇게까지 개새끼는 아니더라고.”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원래 밥 주는 사람은 건드리는 거 아니다.

암, 그렇고 말고.

정보국에서도 국장과 맞먹는 권력을 가진 분이 구내식당 취사장 아니었던가.

아인 크리그과 리어 융은 계단을 올라가 여단장실에 다다랐고, 이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익―.

그리 듣기 좋지는 않은 경첩음이 울려 퍼지고, 이내 안으로 들어선 아인 크리그는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염치도 없이 7년간 외면했는데 이제 와 여단장입네 하는 건 양심이 없는 거 같군. 그러니 임시 여단장의 자리를 유지하고 나는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제1대대장의 자리를 받는 게 어떨까 싶은데.”

리어 융은 조용히 문을 닫고 그 앞을 지키고 섰다.

사각―. 툭.

그리고, 앞에 놓여 있던 서류에 마지막 서명을 마친 아르디티 귄터는 밤을 지새웠는지 피로에 찌든 눈으로 화답했으니.

“군국력 197년 2월 7일자로 여단장 대리직을 여단장 아인 크리그 중령에게 반환. 제1대대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럼.”

그녀는 더 할 말 따위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경례를 올린 후 칼같이 여단장실을 나섰다.

리어 융도 그 뒤를 따랐다.

결국, 혼자 여단장실에 남은 아인 크리그는 실소를 흘리며 소파에 몸을 뉘었으니.

“음.”

마나 궐련을 입에 문 그의 시선 끝 닿은 건, 말 그대로 천장까지 쌓여 있는 무수한 서류의 산과 더불어…….

“하하. 빌어먹을.”

보란 듯이 소파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여단 상황에 대한 보고서였다.

보고서의 내용은 간결했고, 또한 정확한 수치로 계산되어 있었다.

요약하자면 간결하다.

―현 대대 중 완편 된 건 1대대가 유일.

―무기 부족, 탄환 부족. 물자 부족.

―부대 내 특임 장교 6명.

“하루만 더 가둬달라고 부탁해볼까.”

즉, 제13 특수 독립여단.

해체 직전.

4편

* * *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애초에 크리그 가문이 영락해지면서, 제13 특수 독립여단의 해체는 기정사실화된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아니. 이 경우는 지크프리트 선 때문이라고 봐야 하려나.”

확실한 건 하나다.

지크프리트 선이 완공되는 3년 후가 제13 특수 독립여단의 해체라는 것.

“그나마 숨이라도 붙여 놓은 게 이 정도인가.”

아르디티 귄터 소령이 정리해둔 서류를 천천히 읽은 그조차도 그녀가 어떻게든 여단을 지키려 했다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날 원망할 만도 하군.”

그나마 사제로서 만인에게 겸손하고 친절해야 하는 리어 융 정도가 아니면, 그에게 말을 붙이는 병사나 장교, 부사관은 단 한 명도 없는 것도 이해가 됐다.

혹자는 반문할 수도 있다.

어차피 망해가는 여단에 그가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이다.

다만, 명분이라는 게 있잖은가.

“크리그 가문이 비록 이름만 남았다지만, 그래도 공작가.”

사이가 좋지 않은 제10군단 예하, 제6군수지원여단에 보급을 담당하는데, 지난 7년간 기록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모든 게 부족하다.

기껏해야 중대 한두 개를 간신히 먹여 살릴 보급만 전달해줬다.

여단의 기본 편제가 5천 명이고, 중대의 기본 편제가 2백 명 남짓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가 막히는 횡포다.

치익―. 습.

아인 크리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마나 궐련을 입에 물었고, 이내 한쪽 구석에 놓인 길고 검은 사각형 케이스를 응시했다.

“그냥 다 때려 부술까.”

정보국에서 있으며 느낀 점은, 때때로 상식적인 대화보다는 직접적인 폭력이 더욱 크게 와닿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너무 근시안적인 방법이다.

‘데드라인은 3년. 그 안에 여단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한 정보국에서의 7년이었고, 그러기 위한 의도적인 방치였다.

아인 크리그는 언제 고민을 했냐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지었고, 이내 의자에 몸을 묻은 채 산처럼 쌓인 서류를 응시했다.

“가능하다면 레턴 선배를 납치해오고 싶을 정도인데.”

자신이 아는 최고의 책상물림이 바로 그였으니까.

다만,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만년필을 쥔 그는 옅은 한숨을 내뱉곤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쩌겠어. 할 건 해야지.”

늘 그렇듯, 할 일은 할 뿐이다.

* * *

제13 특수 독립여단의 편제는 간결했다.

제1대대부터 제4대대.

직할대로서 특무 장교로 구성된 특무대, 군종사제를 포함해 특무대를 서포트하는 특무지원대,

그리고 본부대대와 정비대까지.

본래 독립여단의 기준을 충족시키려면 최소 5천 명이 복무해야 했을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였지만, 그 안은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상 좌천지로 변한 지난 수십 년 이래, 점차 줄어가는 보급과 보충으로 여단급 요새에 있는 인원은 1개 대대보다 조금 많은 수준.

1개 대대와 직할대가 전부다.

“특히 중요한 군종 사제는 귀관 혼자고.”

“예. 그렇습니다. 여단장님.”

다시금 아침이 밝아오기 무섭게 리어 융을 호출한 아인 크리그는 짐에 함께 가져온 커피를 한 잔 타주며 물었다.

“인수인계받은 서류에는 특무 장교가 6인이라고 적혀있던데. 원래는 몇 명이었지?”

“원 편제대로라면 100명이었어야 합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원 편제대로일 뿐이고. 제가 전출되었던 6년 전에는 대략 30명 정도가 있었습니다.”

6년 만에 24명이 사라졌다.

그 말에 아인 크리그는 실소를 흘렸다.

“전사인가?”

“절반은 그렇습니다. 다만 절반은 전역하거나 부상으로 인한 후방 전출이었습니다. 아, 일부는 스렌로플 국군 교도소로 끌려갔습니다.”

그의 말에 아인 크리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남아있는 장교들부터 확인해야겠군.”

일반 병들은 부족해도 괜찮다.

다만, 특무 장교는 다르다.

그들이야말로 그가 계획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사락―.

낡은 서류철에 묶여 있는 특무 장교 인사기록서를 펼친다.

“전역, 전역, 전사, 부상 호송…….”

갱신되지 않은 자료였기에 수십 년 전의 기록들까지 함께 묶여 있었다.

다만, 애초에 특무 장교의 수가 많지 않았기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비교적 최근 자료들을 찾을 수 있었다.

“리어 융 상사. 4급 군종 사제?”

다만, 그 내용을 읽던 그는 의외라는 눈으로 앞에 앉아 작은 커피잔을 홀짝거리는 리어 융을 바라보았다.

본래 특무 장교는 그 세부 병과에 관계없이 5급부터를 진짜로 친다.

즉, 그보다 1급이 높은 4급이라는 건 앞에 앉아 있는 거구의 사내가 반푼이들과 다른 진짜 사제라는 걸 뜻한다.

“부끄럽게도 분에 겨운 재능을 받았습니다. 기껍고도 염치없는 일이지요.”

“거기에 자원?”

“예. 속죄하기 위해서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와야 하니까요.”

아인 크리그는 담배를 문 채 감탄 섞인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이었군.”

“과찬이십니다.”

태연하게 받아치는 걸 보면 부정할 수도 없이 미친놈이 분명했다.

아인 크리그는 일단 눈앞에 있는 남자가 보기 좋게 미쳤기를 바라는 한편,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런데 록튼 병장은 왜 그렇게 놔뒀지? 4급 군종 사제라면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을 텐데.”

“며칠 전부터 실종 상태였습니다.”

“초소에는 혼자 있던데.”

“인근을 수색해 본 결과, 초병 두 명이 살해당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실종된 병사가 괴물에게 의태당한 상태로 초병을 두 명이나 살해할 동안 몰랐다는 말.

“개판이군.”

“예. 때문에, 지난 밤 추가적인 피해자가 없는지 전 부대원을 확인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어쩐지 눈가가 거뭇하더라니.

간밤에 1천 명을 확인했다는 말이다.

미친놈이라는 점에 저울추가 기울어지는 순간이었다.

“그건 일단 차치하고, 아르디티 귄터는……. 마찬가지로 4급.”

그녀 역시 최전방에서 살아남은 기사 장교다운 급수였다.

다만, 이어진 3명의 목록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랑예 중위. 6급 기사 장교.”

환국 출신, 상관 폭행, 근무 태만, 업무 태도 불량 등.

“어드네스 롬 대위. 5급 마도 장교.”

군국 방위 연구성 출신, 기록은……. 깔끔하다.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유진 하일트 소위. 5급 기사 장교.”

근위 저격 여단 출신, 상관 살해 의혹, 친위 쿠데타 가담 의혹.

“주옥같군.”

거기에 미묘하게 맞지 않는 숫자.

아인 크리그는 설마 하는 얼굴로 커피를 다 비운 리어 융에게 반문했으니.

“혹시, 6인 중에 나도 포함되나?”

“그럴 겁니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아인 크리그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름 꼴에 여단에 특무 장교가 여단장 본인 포함 6명 밖에 없으며, 그마저도 평균 급수가 5급 언저리.

“정말 멋진 여단이야.”

진심으로 감탄이 나온다.

“어떻게 아직 안 망했지?”

무심결, 아르디티 귄터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더 올리게 되는 그였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너무 늦으셨습니다.”

리어 융이 내뱉은 말이었다.

“잠깐 걷지.”

하지만, 정작 아인 크리그는 그를 데리고 여단 시찰을 나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차디찬 바람이 뺨을 스친다.

200년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더웠던 바나르간드 산맥은 이젠 사시사철 겨울만 지속되는 혹독한 대지가 되어버렸다.

그때였다.

아인 크리그는 눈이 쌓인 요새의 돌계단을 오르며 반문했다.

“그런데 왜 여기였지? 아무리 속죄니 뭐니 해도 다른 선택지도 많았을 텐데.”

“신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알아듣게.”

“저희 동기 중에 자원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고, 저는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등급은 높은데?”

“신학에는 영 소질이 없었거든요.”

떠밀렸다는 말이다.

그럼 그렇지. 자원하긴 뭘 자원해.

아인 크리그의 그런 시선을 느낀 걸까.

리어 융은 허허 사람 좋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것 또한 다 잊혀진 주신의 안배 아니겠습니까.”

“퍽이나.”

군국의 국교인 속죄 교단은 그들의 신을 잊혀진 주신이라고 부르곤 한다.

당연한 일이다.

200여 년 전, 저 재의 진군을 막았다던 주신의 이름은 이제는 갈 수도 없는 제국의 그것처럼 빚이 바래 잊혔으니.

아인 크리그는 고개를 들어 족히 수십 미터는 될 법한 성벽을 응시했다.

‘남부 관문을 지었던 게 난쟁이들이라고 했던가. 대단하긴 해.’

건축된 지 200년을 훨씬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고고하게 서 있는 모습은 때때로 무너지고 갈라졌음에도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뿐인가.

물자가 부족해 제대로 정비하진 못했지만, 성벽 곳곳에 세워진 고정 포대들과 대형 쇠뇌들의 모습은 어째서 한때 이곳이 군국의 최전선이라고 불렸는지 증명하려는 듯했다.

그래도 나름 오래 복무한 탓일까?

아인 크리그의 시선이 성벽에 닿자, 리어 융은 입김이 흐르는 입을 열어 말했다.

“겉으로 볼 땐 그저 고성으로 보일진 몰라도, 저희에겐 유일한 목숨줄입니다. 군국이 보급을 해주지 않아도 품질이 보증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마저도 완전히 지원이 끊어질 3년 후면 의미가 없는 폐허가 되겠지만―이라는 말을 애써 삼키는 리어 융이었다.

그때였다.

끼기기기긱―.

지축을 따라 무언가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내 고개를 돌린 리어 융은 능글맞았던 표정을 굳힌 채 중얼거렸으니.

“문이 열립니다.”

그 말은 곧 바나르간드 산맥으로 나갔던 정찰대가 돌아왔다는 소리.

리어 융은 말없이 북문 쪽으로 내달렸다.

아인 크리그는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보단 조금 늦은 걸음으로 뒤따랐다.

‘빠르군. 4급을 포커로 딴 건 아니다 이건가.’

리어 융의 걸음마다 일반적인 사람이 멀리 뛰기 한 듯한 발자국이 눈에 박힌다.

물론, 뒤따르는 아인 크리그 역시 그 뒤를 바짝 쫓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몇 분이나 달렸을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북문에 다다른 그들을 반긴 건, 정찰대가 투덜거리며 복귀하는 모습 따위가 아니었다.

“쿨럭! 커헉!”

등 뒤에서부터 잿빛 가시가 박힌 채, 비틀거리며 군마 위에서 흔들리는 상병.

푸르르―.

군마 역시 힘을 다했는지 털썩 옆으로 쓰러졌고, 그 여파로 바닥으로 떨어진 상병.

이내 검고 잿빛이 뒤엉킨 핏물을 흰 눈 바닥 위로 토해냈다.

그리곤, 이내 다가오는 리어 융을 보곤 핏물이 뒤엉킨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렸으니.

“도, 도긴스 반. 지원을! 커헉!”

리어 융은 천천히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죽어가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놓으며 조용히 눈을 감고 묵주를 굴렸으니.

“Gratias tibi agit res publica(국가가 그대에게 감사를 표한다). 형제님. 안식에 접어들기 전에 우리에게 미래로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해주십시오.”

미약한 신성력이 그의 몸을 감싼다.

이제는 잊혀져 미약하기 그지없으나, 그 찰나의 갈무리조차도 재에 뒤덮인 나약한 인간에게 안식이 되기엔 충분했다.

이윽고, 한결 편해진 얼굴의 상병은 꿀렁거리는 핏물과 함께 나지막이 속삭였다.

“총알이, 안 먹, 혀서. 모두……. 촉수. 허수아비.”

그러나 아무리 4급 군종 장교라고 하더라도 이미 숨이 끊어지기 시작한 이의 삶을 오래 붙잡을 순 없었다.

툭―.

삶이 끝나듯, 그의 손이 추락한다.

그 모습을 본 리어 융은 나지막이 고개를 숙인 채 추모 성사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직후.

“부디 안식에 접어들기를.”

조용히 품에서 갈변된 은빛 정(釘)을 꺼내 그대로 이마에 겨눴고.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그대로 찍어 내렸다.

콰드드득!

이마를 뚫고 두개골을 깨부순 정은 그 자체로 부서지며 흩어졌고, 마찬가지로 부정해진 상병의 육신을 일순간 불태웠다.

아인 크리그는 그 일련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기도를 올리는 군인들 사이에서 생각했다.

‘저게 바로, 군종 사제가 필요한 이유.’

산맥 너머, 모든 게 잿빛인 대지 위에서 부정을 막고, 때때로 불태우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렇게 일련의 소란이 끝이 나고, 아인 크리그는 조용히 기도를 마친 리어 융에게 다가가 말했다.

“여단장실로 아르디티 귄터를 좀 불러주겠나?”

아무래도, 오자마자 실전을 좀 뛰어야 할 거 같거든.

“명령이라면.”

그의 말에 리어 융은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고로,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인 탓에 그리 보기 좋진 않았다.

5편

* * *

200년 전, 잿더미가 전 대륙을 뒤덮었다.

하늘은 뒤덮인 잿빛 구름에 의해 태양의 찬란한 빛과 달의 은은한 색채를 잃었다.

대지는 메말라가고, 물은 고여 썩었으며, 지독한 식량난이 대륙을 강타했다.

그럼에도 그 모든 재앙은 잿더미 속에서 기어 나온 재의 권속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어어어어.

재에서 태어나, 모든 걸 재로 되돌리는 불가해의 괴이(怪異).

마치 물결처럼 살아있는 모든 걸 휩쓴다.

단 40년.

한때 대륙의 패자라고 불리며 모든 국가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던 제국이 멸망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훗날 역사가들에 의해 잿빛 재앙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악몽은 대륙의 9할을 집어삼킨 뒤 침묵당했다.

이유도, 원인도 모른다.

미신론자들은 재앙이 멈췄음에 안도했고.

신앙을 잃은 이들은 기만에 자조했으며.

신을 놓지 못한 이들은 기적에 눈물을 흘렸다.

각설하고, 한때 인류는 잃어버린 제국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피를 흘렸다.

그걸 주도한 게 바로 참회공(慙悔公) 크리그 가문과 케르베로스 여단.

물론, 이젠 과거의 영광일 뿐.

“젠장. 젠장할!”

“믹은?!”

“당했어! 뒤처지지 마!”

이제는 기억하기도 부끄러운 빛바랜 과거.

한때 산맥 아래의 도시까지 개척 거점을 마련했던 케르베로스 여단은 더 이상 없다.

단지 살기 위해, 인근 산맥을 정찰하다가 뜻밖의 강적을 만나 도망치는 머저리들만 있을 뿐.

“커헉!”

“요, 요한나!”

“씨발! 정신 차려! 너도 같이 뒈진다고!”

“으아아아! 이거 놔!”

말들이 지쳤는지 거친 투레질을 내뱉다가 쓰러지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차 줄어든다.

그럼에도 도긴스는 멈출 수 없었다.

말을 버리고 내달린다.

잿빛으로 죽어버린 수풀을 헤치고, 때때로 굴러떨어져 살이 까져도 앞으로 달렸다.

통신이 먹통이 된 이상, 이 위협을 요새까지 전달해야 한다는 단 한 가지 사명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도, 도긴스 하사님! 끄아아악!”

미안하다. 미안하다.

욕지거리와 죄책감을 삼킨다.

잘 삼켜지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도긴스는 가파른 언덕을 따라 몸을 더욱 낮췄다.

그리고, 그런 그의 뒤로는…….

―그어어어어.

서걱, 툭. 콰드드드드득!

나무와 뒤처진 분대원들의 몸을 양팔에 달린 낫으로 어지럽게 자르며 내달리는 허수아비 같은 사족 보행의 악마.

“빌어먹을. 어째서 요새 근처에 듀얼 넘버(Dual Number)가……!”

절대로 여기에 있어선 안 되는 괴물이 뒤따르고 있었으니까.

서걱! 콰드드드득!

뒤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피륙음을 애써 무시하며, 도긴스 하사는 단지 기도할 뿐이었다.

이름 모를 주신이시여, 나를 보우하소서.

―그어어어어어어.

물론, 당연하게도.

“이런 씨발!”

신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 * *

“5일 전 정찰을 나갔던 도긴스 반입니다.”

여단장실에 다다르자, 미리 대기 중이었던 아르디티 귄터 소령이 제일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아인 크리그는 소파의 상석에 앉아 한쪽 다리를 꼰 채 마나 궐련을 입에 물었다.

그리곤 반문했다.

“임무는? 내가 알기론 현재 여단은 개척 작전을 수행할 상황이 아닌 거로 아는데.”

본래 제13 특수 독립여단, 그러니까 크리그 가문 예하 케르베로스 여단의 창설 목적은 간결했다.

‘천년제국의 영토수복.’

크리그 가문은 제국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했고, 센티넬 가문은 언제나 군국으로서 남기를 바란다.

때문에 크리그는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에 남았고, 센티넬은 지크프리트 선을 세웠다.

그래, 이게 근본적인 차이다.

크리그 가문과 센티넬 가문이 군국의 양대 군사 가문으로 불리었지만, 결국 크리그 가문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고.

‘불가능한 일에 몸을 내던지는 게 100년쯤 되면, 아무리 이상이 찬란하더라도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을 수밖에.’

하물며 군국은 신분제지만, 군부의 일은 엄연히 국민의 세금으로 진행된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이 당장의 평온을 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뜻.

‘……말 그대로, 지금의 교착 상태가 천년만년 이어진다면 말이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인 크리그를 깨운 건, 이어진 아르디티 귄터의 목소리였다.

“말씀대로입니다. 저희가 정찰을 하는 이유는 주기적인 재의 권속들의 남하를 감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인 크리그도 모르고 물었던 건 아니다.

다만, 현재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직시하기 위해서 내뱉은 일종의 확인이었을 뿐.

아르디티 귄터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별다른 덧붙임 없이 브리핑을 이어 나갔다.

“도긴스 반은 2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바나르간드 요새 초입 부근의 지뢰를 점검하고 협곡을 따라 흐르는 캄프 강을 정찰하고 7일 차에 복귀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펼쳐 둔 지도를 따라 대략적인 정찰 루트를 보고했다.

이어, 조용히 듣고 있던 리어 융 상사가 덧붙였다.

“복귀에 성공했던 병사는 도긴스 하사의 1분대. 스미스 상병입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증언으로는…….”

“총알이 안 먹혀, 허수아비.”

“맞습니다.”

아인 크리그 역시도 그곳에 함께 있었다.

이윽고 대략적인 상황을 정리한 그들 사이로 짧은 침묵이 스쳤다.

‘1개 반. 그것도 도긴스 반은 정예다.’

‘그런 그들이 당했다.’

‘아무리 죽음에 가까워졌다고 해도, 식별 가능한 재의 권속이었다면 그 이름이나 넘버를 말했을 거야.’

‘즉, 식별 불가능한 괴물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일 뿐.

이윽고 모두의 생각이 하나의 결론에 다다른다.

‘최소 듀얼 넘버에 가까운 트리플 넘버. 혹은 최악의 경우…….’

‘듀얼 넘버(Dual Number)다.’

이윽고 입을 연 아르디티 귄터와 아인 크리그의 목소리가 허공에 겹친다.

“포기해야 합니다.”

“특임 장교 전원을 소집해.”

그 사이에 있던 리어 융은 제각기 상황이 이해가 된다는 듯이 옅게 웃으며 묵주를 굴렸다.

반면, 아르디티 귄터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무리입니다.”

“어째서지?”

“현재 특무대로서 가용 가능한 인원은 저와 리어 융 상사를 비롯해 기껏해야 4명입니다.”

여단장인 아인 크리그, 마도 장교로서 전력 외인 어드네스 롬은 제외한다.

사실, 대대장인 그녀가 전선에서 뛰어야 한다는 것부터 이 여단이 얼마나 열악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지만.

“더욱이 현재 1대대는 태반이 요새 방위 임무에 투입되어 있으며, 최대한 차출한다고 해도 1개 반 정도가 한계입니다.”

말 그대로 한계까지 긁어모았을 때다.

실제로, 현재 바나르간드 요새는 본부대와 1대대 주둔하는 전체 성벽의 약 20% 정도만을 방위하고 있을 뿐, 그 밖의 지역은 사실상 무방비인 상태다.

성벽이 있어서 괴물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르디티 귄터는 결국 평정을 잃고, 미간을 좁힌 채 입술을 잘근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투입한다고 한들, 도긴스 반은 전멸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최악의 경우 저희마저 전멸하게 된다면, 요새는 앞으로 있을 전투를 버틸 수 없습니다.”

더없이 냉정하지만, 현명한 판단이다.

아르디티 귄터 소령. 4급 기사 장교.

리어 융 상사. 4급 군종 사제.

랑예 중위. 6급 기사 장교.

유진 하일트. 5급 기사 장교.

나머지 두 명은 몰라도, 아르디티 귄터와 리어 융은 이 요새에 없어선 안 될 존재들이다.

정신적으로든, 능력적으로든.

즉, 아르디티 귄터는 말하고 있었다.

“도긴스 반의 생존자들이 추후 확인된다면 책임을 지겠습니다. 구원 작전은 재고해주십시오.”

부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함에도 일말의 흔들림도 없다.

하지만, 그 눈에는 짙은 슬픔이 깔려 있다.

아인 크리그는 묵묵히 그녀의 말을 경청했고, 나아가 리어 융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사는 어떻게 생각하지?”

“어려운 과제를 던져주시는군요.”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니, 실눈이라 뜨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어찌 되었든, 그는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나지막이 화답했다.

“여단장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귀관은 정말 훌륭한 군인이군.”

“과찬이십니다.”

복잡한 일은 모두 짬 때린다. 군인의 귀감과도 같은 처세다.

다시 생각해도 참 아쉽단 말이지.

속죄 교단에게 군국의 참 군인을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아인 크리그는 어느새 다 태운 마나 궐련을 재떨이에 가볍게 털었다.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둔 코트를 걸친 채 말했다.

“특무 장교 전원을 소집해.”

“여단장님!”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소령.”

당연히 아르디티 귄터는 반발했지만, 그녀마저도 이어진 아인 크리그의 말에 그저 멍한 얼굴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단장은 나다.”

여단장실의 벽면에 놓여 있던 검은 케이스를 멘다.

그리곤, 이윽고 마나 궐련 하나를 더 문 채 문을 열고 걸어 나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

그녀는 찰나 동안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 *

“남은 병사들은 요새 방위에 전념한다.”

아르디티 귄터 소령은 연달아 이어진 명령에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이번엔 아인 크리그 역시 한 방 먹었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으니.

“이 요새는 매번 날 놀랍게 해.”

“과찬이십니다.”

“비꼬는 거다. 상사.”

“알고 있습니다.”

리어 융은 조용히 묵주를 굴렸다.

“흐아암.”

그런 그의 앞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중위 계급의 여자.

백색 장발에 백색 눈동자.

처진 눈에 도드라진 송곳니.

나아가, 머리에 돋아난 늑대 귀와 송곳니.

엉덩이 부근엔 꼬리까지.

“이쪽이 랑 중위일 거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허리에 찬 환도를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의 시선은 그 곁에 서 있는 후드를 눌러 쓴 중년 남자에게 닿았다.

“…….”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창백한 얼굴에 눌러 쓴 후드 때문인지 음침하게 보이는 사내였다.

“이쪽은 하일트 소위.”

“…….”

“과묵하군. 혹시 말을 못 하는 건 아니겠지?”

그는 등 뒤에 조악한 붕대로 대충 감싼 저격 소총의 띠를 만지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전력은 아르디티 귄터와 리어 융만으로 상정하긴 했다만, 아무리 봐도 신뢰가 가는 얼굴들은 아니다.

특히,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는 랑예 중위는 더더욱.

그런 그의 심정을 눈치챈 걸까.

아르디티 귄터 소령은 다급히 말했다.

“이미 1대대에서 2개 분대를 차출했습니다. 군마가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다음 보급에서 충원하면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습니다. 굳이 나가야 한다면…….”

그녀도 알고 있다.

단순 정찰 임무도 아닌 구원 작전, 내지는 괴물 토벌 작전에 일반병들의 생환률이 절망적이라는 걸.

하지만, 특무 장교들이 전멸한다면 요새가 위험해진다.

예견된 여단 해체가 기다리는 3년이 아니라, 채 3주도 버티지 못한 채 함락될 게 뻔하잖은가.

“……뭐, 대충 구색은 갖췄나.”

하지만 정작 아인 크리그는 태연했다.

벌써 7년째 여러 작전에 참여했던 아르디티 귄터조차도 불안한 조합이건만,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군마를 붙잡고 있는 병사에게 고삐를 받아들어 말에 올랐다.

“상사.”

“모든 건 신의 뜻입니다. 대대장님.”

심지어 뭐에 씌었는지, 그나마 정상인에 가깝던 리어 융마저도 군마에 오르는 모습을 본 그녀는 결국 한숨을 내쉬곤 뒤따라 말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군인은 명령을 따른다.’

속으로 다짐인지, 한숨인지 모를 문장을 읊조리며 말이다.

“대대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때, 그녀의 무장인 헤비 렌스를 가져온 1중대장. 멘하른 대위가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시선엔 명백한 적대감이 담겨 있었다.

물론, 아르디티 귄터가 아닌 아인 크리그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상관에 대한 불복종은 좋지 않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그녀였기에 애써 외면하며 조용히 명령을 내렸다.

“만약 우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크프리트 선까지 후퇴해라. 대위.”

“……소령님!”

“모두가 죽을 순 없어.”

마도 장교는 그 특성상 전투가 불가능에 가깝고, 어드네스 롬이 목숨을 바쳐 요새를 구원할 성격도 아니다.

그러길 바라는 것도 아니고.

아니, 애초에 지하에서 안 나올 가능성이 더 크다.

즉, 이건 그녀가 사지로 걸어가며 내뱉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멘하른 대위 역시 그걸 모르진 않았기에 수긍할 수밖에.

“문을 열어라.”

이윽고, 랑예 중위와 유진 하일트마저도 말에 오르자 아인 크리그는 등에 멘 검고 긴 케이스를 한차례 쓰다듬으며 말했으니.

히이이잉―!

말들이 투레질하며, 일순간 흰 눈에 뒤덮인 잿빛 산맥으로 내달린다.

펄럭!

제13 특수 독립여단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는 케르베로스가 박힌 검은 코트가 휘날린다.

‘부디 객기가 아니길 바랍니다.’

아르디티 귄터는 선두로 내달리는 아인 크리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관을 두 번씩이나 죽이고 싶진 않으니까.’

단지 그렇게 생각할 따름이었다.

6편

* * *

바나르간드 산맥은 200년 전에도 천년제국의 남부를 지탱하는 든든한 방파제 역할을 해주었다.

과거 폰투스 군도가 비루한 해적 집단이었을 때도, 그들이 융성해져 와이번을 타고 제국을 범하려 했을 때조차도 감히 침입을 허락하지 않던 천혜의 장벽.

이제는 그 산맥이 앞뒤를 바꾸어, 제국의 잿더미가 군국에 닿지 않도록 그 거대한 몸을 흰 눈더미로 부풀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아직 2월 초입이기 때문일까.

산맥에 다다른 그들은 뺨을 가를 듯한 칼바람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눈이 내리지 않아 군마들이 방해받는 일은 없었다.

“군마들은 얼마나 버티지?”

“최대 보름까지는 버틸 수 있는 종입니다만, 건초가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확신할 순 없습니다.”

“개판이군.”

아인 크리그는 아르디티 귄터의 대답에 생각보다 더 보급이 심각하다는 걸 깨닫는 한편, 어느 시점부터 앞서 내달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센티넬에서 좋아할 인재. 귄터 가의 여식만 아니었다면 나보다 상급자였을 수도 있겠어.’

그녀 스스로가 어떤 마음가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아인 크리그가 만났던 여느 군인들보다도 더욱 군인다운 여자였다.

‘반면, 저쪽은…….’

늑대 귀를 움츠리며, 말에 거의 엎드려 졸면서 내달리는 랑예 중위.

조용히 뒤따르지만, 음침한 걸 넘어서 한 마디도 내뱉지 않는 유진 하일트 소위.

‘귄터 소령의 말이 맞아.’

아인 크리그도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이끌고 나온 특무 장교들이 전멸하는 순간, 요새는 당장 무너지리라는 걸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로서도 생각은 있었다.

‘듀얼 넘버가 아니라 트리플 넘버라고 해도 일개 반을 전멸시켰다면 보통은 아니다. 특무 장교들이라면 유사시 도망이라도 칠 수 있겠지.’

만약 도망치지 못한다면?

아쉬운 거지. 뭐.

애초에 그가 앞으로 재편할 제13특수…….

길기도 하군. 여하튼 재편될 케르베로스 여단에 고작 이 정도로 뒈질 특무 장교는 필요 없었다.

단순히 목숨만을 부지하고자 했다면 평생 정보국에 몸담다가 삶이 지루해질 때쯤에 머리에 납탄을 박아 넣으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그가 구태여 정보국을 떠나, 7년 전 거부한 가문의 의무를 짊어지러 온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만 했으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었으니까.

“여단장님!”

그러나 그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아르디티 귄터가 입김을 내뱉으며, 눈밭에 쓰러진 일련의 시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히이이잉―!

내달리던 말들을 멈추고 말에서 내린다.

아인 크리그는 시체 앞에 섰고, 곧 뒤따른 리어 융이 그들의 얼굴과 군번줄을 확인했다.

“도긴스 분대에 있던 요단 일병, 페론 이병입니다.”

“사인은?”

“눈에 띄는 외상이나 침식의 흔적은 없습니다. 아마 낙오된 직후 길을 잃었다가 동사한 게 아닐지.”

속죄 교단의 군종 장교는 종종 의무관의 역할도 겸하는 만큼, 믿을 만한 소견이었다.

때문에 아인 크리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말했다.

“군번줄을 회수하고 시신을 수습한 후 지도에 표시하도록.”

“알겠습니다.”

이번만큼은 아르디티 귄터 역시 이견이 없었다.

일단 시신의 위치만 알고 있다면, 이 혹독한 산맥에서는 몇 달 뒤에라도 수습할 수 있다.

“유진 형제님. 도와주십시오.”

“…….”

리어 융의 말에 조용히 나무에 기대 있던 유진 하일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죽은 이들을 들고 온 포대에 담는 걸 도왔다.

한편, 잠시 쉬어가게 된 탓에 마나 궐련을 문 아인 크리그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춥군.”

후으― 내뱉은 숨결 너머로 숲의 전경이 도드라진다.

이질적이라는 말이 어울릴까.

아니면, 기묘하다는 말이 어울릴까.

모든 게 잿빛이었다.

흰 눈에 뒤덮여 있기에 조금은 덜했지만, 때때로 바람에 휘날려 덮여 있던 흰 피부가 흩어지면 이윽고 잿빛의 살결이 드러난다.

나무도, 흐르는 시냇물도, 흙도, 공기도, 하늘도…….

마치 빛을 빼앗긴 것처럼 본능적인 거부감을 자아낸다.

그때, 그의 곁으로 아르디티 귄터가 다가왔다.

“요새 밖은 처음이십니까?”

“그럴 리가. 북부는 아니었지만.”

정보국에서 7년이다.

제국의 영토는 방대하고도 방대해서, 굳이 바나르간드 산맥이 아니더라도 재의 권속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짧은 정적이 둘 사이를 스친다.

이윽고, 아르디티 귄터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듀얼 넘버라면, 저희로선 승산이 없습니다.”

넘버(Number). 잿더미가 대륙을 집어삼킨 이래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적의를 가진 채 진군하는 괴물들을 분류하는 단위.

각 넘버는 싱글(Singale), 듀얼(Dual), 트리플(Triple)로 분류되지만, 현시점에서 군국 군인들이 마주할 수 있는 건 99% 트리플 급의 괴물들이다.

그녀의 우려도 과한 건 아니었다.

“도긴스 반은 비록 일반 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일전에 822번. 잿더미 늑대와 마주했을 때도 전원 생환했었을 정도로 정예화된 반이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런 그들마저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괴물이었다는 뜻이다.

“바나르간드 산맥은 더 이상 케르베로스의 영역이 아닙니다.”

200년 전, 바나르간드 산맥으로 밀고 들어오는 싱글 넘버와 듀얼 넘버를 도륙했던 케르베로스 여단은 더 이상 없다.

이제 남은 건, 수백 년 된 요새 뒤에 숨어 해체를 기다리는 패잔병일 뿐.

“끈질기군.”

아인 크리그는 무심결 피식 웃으며 그녀의 말에 화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당연한 일이다.

비록 군인이기에 명령을 따라 그를 뒤따르긴 했지만, 만약 그가 정말로 듀얼 넘버와 전투를 벌일 생각이라면 그땐 따를 수 없을 테니까.

“제 목숨이 아까운 게 아닙니다. 단지, 현실을 보라는 겁니다.”

검은 눈동자와 잿빛 눈동자가 마주한다.

“당신이 어째서 7년 만에 크리그의 이름을 떠올렸는지는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이유가 동정이든, 객기이든, 혹은 야망이든 제 부하들을 사지로 내모는 건 방관할 수 없습니다.”

“아르디티 귄터.”

“귄터 가문은 크리그를 따릅니다. 하지만, 버려진 개는 때때로 주인을 물어뜯습니다.”

아르디티 귄터, 아니. 아인 크리그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귄터 가(家)의 당주는 그 어느 때보다 평정을 가진 눈으로 그를 올려보며 반문했다.

“여전히 목적은 토벌입니까?”

그녀의 등에는 묵직한 헤비 렌스가 매여져 있었다.

내 대답에 따라 저 창끝이 나를 향할까.

아인 크리그는 무심결 그런 생각을 하며, 어느새 끝에 다다른 마나 궐련을 흰 눈밭 위로 떨구며 조용히 다가선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소령.”

“……그게 무슨.”

“알고 싶어 해야지. 내가 왜 7년 만에 이 빌어먹을 북부로 돌아왔는지.”

그리곤, 나지막이 속삭였으니.

“특별히 귀관에게만 알려주지. 내 목적은 간단해.”

아르디티 귄터의 눈동자가 커진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말에 그녀가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던 찰나.

아인 크리그의 입꼬리가 가볍게 말려 올라가고, 곧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제각기의 무장을 뽑았다.

―크허어어어엉!

―커허허헝!

수풀 속에서 수십 개의 잿빛 안광이 번뜩이고, 이내 그들이 서 있는 숲속 작은 공터에 일련의 잿빛 짐승들이 쇄도한다.

잿더미에 휩쓸린 것들의 끝은 둘 중 하나.

부질없는 잿더미가 되어 죽거나, 권속이 되어 영원히 껍데기인 채로 유린당하거나.

“호랑이도 저 말 하면 온다더니.”

아인 크리그는 나타난 늑대들을 바라보며, 어느새 등을 맞댄 아르디티 귄터에게 장난스럽게 속삭였다.

트리플 넘버(Triple Number). 822번.

잿더미 늑대.

살아있는 늑대에게서 느껴지는 윤기나 야수성 따위는 없다.

박제된 털가죽에 수십 년의 먼지가 쌓인 것처럼 늘어진 앞발을 뻗는 무지의 괴물들.

그저 학습된, 혹은 이 재앙을 일으킨 초월적인 무언가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려 춤추는 그 가련한 짐승들을 마주하며 아인 크리그는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은 케이스를 염두에 두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십 마리의 늑대 따위는 손쉽게 도륙할 수 있다.

타앙―!

그가 뽑은 리볼버의 마탄이 불을 뿜고, 당장에라도 아인 크리그의 얼굴을 찢어발길 듯 뻗어지던 늑대의 육신이 허공에서 터졌다.

‘실력 좀 볼까?’

그는 허공에 비산하며, 마치 썩어 문드러지는 꽃잎처럼 흐드러지게 추락하는 살점들을 응시하며 눈을 번뜩였다.

* * *

화약과 마이스터들이 선도한 마도 공학으로 이미 보편화된 군국에서도 기사를 위시한 특무 장교는 배제할 수 없는 병과다.

참호를 파고, 요새의 두터운 성벽 뒤에 숨어서 방아쇠를 당기는 군인들이 주류가 된 세상.

그런데도 어떻게 기사들은 계보를 이어 나갈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파괴력은, 여전히 일개 개인이 쏟아낼 수 있는 것을 아득히 뛰어넘으니까.

콰드드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잿물과 함께 뒤엉킨 피륙이 찢겨 나간다.

“부정하고도 가련한 괴물이여. 원래의 잿더미로 돌아가십시오!”

리어 융은 묵주를 감은 주먹을 휘둘러 마치 물이 찬 가죽 공을 터트리듯이 늑대들을 도륙한다.

“……흐아암.”

랑예 중위는 칼날이 곧게 뻗은 직도, 환국의 환도를 비스듬이 잡아 늑대의 발톱을 흘린 뒤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곤 늑대들과 대치한다.

‘제법이군.’

그 모습을 보며 아인 크리그는 랑예 중위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6급 치고는 꽤 준수한 대처다.

전투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꽤 안정적인 모습은 여느 초짜 5급보다 나았다.

‘하지만 그뿐.’

일격에 늑대를 터트리다시피 하는 리어 융에 비해선 부족한 건 사실이었다.

반면, 아르디티 귄터는 그가 예상하던 것보다 더욱 수준 급의 기사 장교였다.

터어어엉!

날이 점차 두꺼워지는 헤비 렌스를 방패 삼아 늑대 두 마리의 송곳니를 막아낸 후, 냉정하고도 간결한 꿰뚫음으로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하게 괴물들을 도륙한다.

반면, 유진 하일트는 다른 의미로 기대 밖이었다.

“…….”

등에 메고 있는 저격 소총은 건드리지도 않은 채, 투박한 단검을 역수로 쥔 채 달려드는 늑대들의 목덜미를 베어낸다.

때때로 리볼버로 적들을 죽이는 건 덤.

그 일련의 광경을 눈에 담으며, 때때로 접근하는 늑대들의 미간에 총탄을 박아 넣어주던 아인 크리그는 무심결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것들 봐라?’

아르디티 귄터 소령이나 리어 융 상사는 상정한 결과다.

하지만, 랑예 중위나 유진 하일트 소위는 여러모로 기대 이상의 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타앙!

이윽고, 마지막 늑대의 미간이 꿰뚫린 순간.

아인 크리그는 미약하게 거친 숨을 내뱉는 그들을 돌아보며 경쾌하고도 능글맞게 외쳤다.

“시작이 좋군. 안 그래?”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건 리어 융 상사의 사람 좋은 목소리밖에 없었다.

“보통 이런 건 재수가 없었다고들 합니다. 여단장님.”

7편

* * *

“본대는 아닙니다.”

“근거는?”

“수가 적습니다.”

리어 융이 말했고, 아르디티 귄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찰조입니다.”

잿더미 늑대는 일반적인 늑대와 습성이 거의 비슷하다.

괜히 재의 권속들을 연구하던 학자들이 기존 동물들이 잿더미에 잡아먹혀 괴물화가 되었다는 가설을 세운 게 아니었다.

원래 늑대는 단체로 움직인다.

그 본능이 이어진 건지, 재의 권속이 된 잿더미 늑대들 역시 마찬가지로 단체 생활을 하고는 한다.

‘다만, 그 규모가 비정상적이라 문제지.’

그들에게 달려든 건 대략 30마리 안팎.

일반적인 늑대들이었다면 비대한 수준의 무리겠지만, 잿더미 늑대들에겐 아니다.

“잿더미 늑대들은 평균적으로 100마리 내외, 규모가 큰 군체는 수백 마리까지도 모여서 다닙니다.”

“먹이가 필요 없으니까.”

“……잘 아시는군요.”

아르디티 귄터의 시선을 뒤로한 채, 아인 크리그는 태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정찰대가 있다는 건 적어도 도긴스 반은 잿더미 늑대들에게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예. 놈들은 한번 사냥을 시작하면 모든 늑대가 하나로 뭉치니까요.”

며칠 정도로는 이 정도 규모의 정찰대가 다시 무리와 멀어지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즉, 도긴스 반은 최소한 이 잿더미 늑대 무리에게 당하진 않았다.

“뭐, 적어도 물량전을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건 정말 마음에 들어. 진심으로.”

아인 크리그는 드물게 진심이 담긴 동의를 표했다.

차라리 강한 단일 개체가 백배 낫다.

물량으로 밀고 오면, 조금 많이 곤란하거든.

바스락―.

그들은 전투가 끝난 뒤, 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무는 랑예 중위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자칫 지체했다가 늑대들이 더 붙는다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게 뻔했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언덕을 지나, 꽤 높은 절벽 근처 동굴 입구로 그들을 안내한 리어 융 상사가 말했다.

“도긴스 반이 정찰 나갔던 D루트의 1차 보급 거점입니다. 유사시에는 이곳으로 모여 요새로 복귀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사한 시신을 발견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아마 그들은 이 거점으로 향하고 있었으리라.

단순히 괴물을 피하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혹독한 산맥에서 요새까지 돌아가려면 보급품이 필요했을 테니까.

“거점이라기엔 지나치게 눈에 띄는데.”

아인 크리그의 말도 괜한 트집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의 앞에 있는 동굴의 입구는 족히 2m가 넘어 보였으니까.

“원래는 위장막을 펼쳐 두는 게 원칙입니다만…….”

“둘 중 하나겠군. 괴물들이 위장막을 발견하고 가져가서 추운 겨울을 날 이불로 썼거나,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위장막을 다시 펼쳐 두지 않았거나.”

구태여 최악까진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망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저 안에서 전멸했다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아니, 아직은 단언할 수 없다.

입구 근처에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르디티 귄터는 눈빛으로 아인 크리그에게 양해를 구한 뒤, 묵직한 헤비 렌스를 동굴 안쪽으로 겨누곤 천천히 수신호를 전했다.

군국의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공용 수신호.

‘유진 하일트. 랑예 중위. 동굴 밖에서 대기.’

‘선두를 맡겠다. 리어 융 상사와 아인 크리그 중령. 뒤따라 진입.’

넓다고는 하나 동굴은 자칫 고립될 수 있는 환경인 만큼, 확실한 이들만 데리고 진입한다.

정석적이고, 감정을 배제한 판단이다.

철컥―.

아인 크리그는 비어있는 리볼버의 탄알집에 마탄을 장전하며 그 뒤를 따랐고, 리어 융 역시 손에 감은 묵주를 굴리며 나지막이 성경을 읊조렸다.

터벅, 턱―.

최대한 발걸음을 죽이긴 했지만, 조명이 없는 깊고 어두운 동굴의 굴곡진 바닥을 디디며 완전히 소음을 죽일 순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안으로 들어섰을까?

어느 정도 시야가 암순응되자 이내 익숙한 얼굴이 천천히 눈에 들어온다.

‘인기척.’

아르디티 귄터는 뒤따르는 둘의 얼굴에 거의 닿을 정도로 손바닥을 펼쳐 정지 신호를 보냈다.

그리곤, 이내 모두의 시선이 인기척을 낸 남자의 얼굴 쪽으로 향했으니.

순간, 리어 융과 아르디티 귄터의 표정이 묘해졌다.

“도긴스 하사.”

“아닙니다.”

그러나 리어 융의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가 나지막이 스친 직후.

―끼기긱!

무언가 웅크리고 있던 게 몸을 일으키며 뒤엉키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동시에 도긴스 하사의 입이 목 아래까지 벌어지며, 흐리멍텅한 두 안광에 잿빛의 섬광이 터져 나온다.

―아으. 끽!

갈라진 성대를 억지로 움직이는 쇳소리.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악!

본능적으로 헤비 렌스를 꽉 쥔 아르디티 귄터의 목덜미를 잡아챈 아인 크리그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리볼버를 겨눴다.

“뭐해?”

그리곤, 이윽고 방아쇠를 당기며 나지막이 속삭였으니.

“튀어.”

타아아아앙!

단순히 마탄으로 낼 수가 없는 굉음이 동굴 벽을 따라 뒤흔들린다.

리어 융, 아르디티 귄터, 아인 크리그는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동굴 밖으로 몸을 내달렸다.

콰드드드드드드득!

동굴 바닥을 거세게 짓밟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점차 밝아지는 시야 너머로 깨진 돌의 파편이 날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퍼어억!

거죽처럼 눌러 씌인 도긴스의 육신은 제가 밟은 파편에 엉망으로 찢기고 틀어져 넝마처럼 너덜거린다.

이윽고, 동굴의 입구 부근에 다다르자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으니.

썩어 문드러진 나무들을 기워 만든 허수아비에 인간의, 아니. 도긴스 하사의 거죽을 뒤집어쓴 괴물.

아인 크리그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200년도 전, 지겹도록 죽였던 놈 중 하나였으니까.

그러니까, 저놈의 이름이…….

“듀얼 넘버. 98번. 재의 수확자입니다!”

“왜 알고 있지?!”

“학구열이 넘쳐서 좀 뒤져봤습니다!”

“강한가?”

“지금 여단장님의 면상을 좀 치고 싶을 정도군요!”

곁에서 달리는 리어 융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속죄 교단의 사제는 거짓말을 못 하니 당연한 일이려나?

“흐아암……. 응?”

머잖아 입구 지척까지 다다른 순간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랑예 중위.

“…….”

그리고, 나무에 기대어 후드 아래로 담배를 태우고 있던 유진 하일트는 달려 나오는 3명과 더불어 뒤따르는 괴물의 안광을 마주하곤 나지막이 랑예 중위를 바라보았다.

“모르는 사람들.”

“…….”

그녀의 말에 순간이지만, 유진 하일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판단은 빠르게. 도망은 더 빠르게.

랑예 중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그대로 요새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유진 하일트도 마찬가지였고.

경이로운 손절 속도.

그 모습에 아인 크리그마저도 진심으로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판단 한번 빠르군!”

“저희 케르베로스 여단의 장점이죠!”

“귀관은 이게 칭찬 같나?!”

아인 크리그는 진심으로 땅에 떨어진 기사도에 탄식하면서도, 군인으로서의 생존 본능에 감탄했다.

암, 기사라면 모를까. 군인이라면 저래야지.

그리곤, 뒤따르는 리어 융 상사에게 외쳤다.

“몸으로 공격 딱 한 번만 막아라! 융 상사! 그럼 기회가 생겨!”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다.

때문에, 리어 융은 내심 기대를 하는 표정으로 그에게 반문했다.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 아무리 그래도 크리그다.

영락한 걸 넘어서 이젠 도축 날만 기다리는 처지라곤 하지만, 공작가의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다.

하물며,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이런 상황이니만큼 더더욱이 무언가 보여주리라.

그런 그의 기대에 보답하려는 걸까?

아인 크리그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화답했으니.

“우리가 살아나가서 꼭 복수를 해주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 리어 융을 대신해 그를 질책한 건, 아르디티 귄터였다.

‘아아. 잊혀진 주신이시여.’

리어 융은 찰나지만 시원함을 느낀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낀 채, 육중한 몸을 거칠게 내달렸다.

―키기기기기기기긱!

물론, 그들의 뒤로는 여전히 다음 넝마가 될 시체를 찾는 재의 수확자가 미친 듯이 뒤따르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게 달리길 다시 수십 분이 지났을까.

눈이 뒤덮인 산을, 그것도 뒤따르는 괴물이 휘두르는 나무인지 촉수인지 모를 공격을 피하며 내달리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각각 4급의 특무 장교였던 리어 융과 아르디티 귄터마저도 지쳐갈 무렵이었으니, 더 말이 필요하겠는가?

‘이대로면 답이 없다!’

아르디티 귄터는 이를 악물었다.

리어 융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그 둘의 뇌리에 절망적인 생각이 맴돌던 바로 그때.

“절벽으로 뛰어!”

아인 크리그는 둘이 무어라 생각할 새도 없이 외쳤고, 곧 그의 육신이 절벽 끝을 기점으로 땅으로 쑤욱 꺼졌다.

남은 둘에게도 선택지는 없었다.

등 뒤에서 시체를 뒤집어쓴 채 내달리는 그로테스크 한 사족 보행 허수아비의 새 모피 코트가 되는 건 사양이었으니까.

“……아인 크리그. 이 빌어먹을.”

“속죄치고도 좀 힘이 듭니다. 이건!”

둘은 제각기 앞서 떨어진 무책임한 남자를 욕한 뒤, 누가 먼저랄 거 없이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거친 바람이 살갗을 베어낼 듯 스쳐 지나가고, 이내 둘은 절벽 위에서 꿈틀거리는 괴물이 제발 강으로 뛰어들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둘은 어떤 위화감을 느낀 채,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결 방금 뛴 절벽 위를 본 리어 융과 이르디티 귄터는 곧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으니.

“하하.”

“……무슨?”

아인 크리그.

그는 특유의 검은 눈을 태연하게 깜빡거리며, 절벽 바로 아래 돋아난 나뭇가지를 쥐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리곤 이내 다시금 절벽 위로 가볍게 뛰어 올라가니.

“한 방 먹었군요.”

그게, 강물에 처박히기 전 아르디티 귄터가 마지막으로 들은 리어 융의 목소리였다.

8편

* * *

“뭐, 이 정도면 됐겠지.”

아르디티 귄터와 리어 융이 강물 아래로 휩쓸려 내려가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아인 크리그는 실로 가벼운 몸놀림으로 절벽 위로 튕겨지듯 올라섰다.

가볍게 손을 털어 먼지를 걷는다.

동시에, 그는 머리를 향해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두꺼운 나뭇가지를 피했다.

“위험하잖아.”

단순한 나뭇가지로 폄하할 게 아니다.

그도 그럴 게, 도긴스 하사의 시체를 포대 자루처럼 뒤집어쓴 괴물.

듀얼 넘버 98번 재의 수확자는 과거 제국의 남작가 하나를 궤멸시켰던 전적이 있는 놈이었으니까.

‘물론, 그 영지에는 제대로 된 기사가 없었다만.’

냉정하게, 쉬운 상대는 아니다.

만약 그 자신이 일반적인 3급 기사 장교였다면, 자살 행위겠지.

‘일단 절벽에서 멀어진다.’

놈을 저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다.

고작 그 정도로 죽을 리도 없을뿐더러, 확인해야만 할 게 있었으니까.

아인 크리그는 대지를 박찼다.

놈의 측면으로 돌았고, 군홧발에 튄 흙더미가 어지럽게 비산한다.

어느샌가 그의 입에 물려 있는 마나 궐련은 단 한 번의 흡입으로 순식간에 재로 돌아가 허공에 휘날린다.

타앙! 타아앙!

손에 쥔 은색 리볼버에서 발사된 총탄이 그의 머리를 꿰뚫을 듯이 뻗어진 촉수를 쳐낸다.

―키리리리릭!

작디작은 인간의 분투가 우스운 걸까.

아니면, 발버둥 치는 사냥감의 발악이 즐거운 걸까.

놈은 제 것도 아닌 도긴스 하사의 육신을 삐걱거리며 연신 그를 향해 역겨운 잿더미를 휘날렸다.

파아아악!

그가 서 있던 대지에 짙게 그어진 상흔이 어지럽게 뒤틀리고, 아인 크리그는 리볼버의 탄알집이 비었다는 걸 확인하자 일말의 미련도 없이 권총을 버렸다.

“대략 10분 정도인가.”

정보국에서 나오기 위한, 마지막 임무가 너무 과했던 탓에 유지할 수 있는 마나가 많지는 않았다.

아쉬울 뿐 절망적이진 않다.

그럼에도 아인 크리그는 자신의 처지에 무심결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연비가 안 좋아. 이 빌어먹을 몸은.”

눈가를 뒤덮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이윽고, 이제까지 구태여 등에 지고 다녔던 검은 케이스에 손을 얹어 그 잠금장치를 풀어내니.

철컥―.

걸쇠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족히 1m는 거뜬히 넘는 케이스가 매끄럽게 열리고 그의 손을 따라 묵직한 대검의 손잡이가 쥐어진다.

―키이이이이이익!

본능적인 위화감을 느낀 걸까?

재의 수확자는 도긴스 하사의 살점이 떨어지도록 괴성을 내지르며 그 육중한 몸을 찍어 눌렀다.

어릴 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며 수없이 고뇌했다.

‘혹시 내가 미친 건 아닐까. 그저 망상 병에 치달아 현실을 도피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0년 전의 기사가 죽고, 그 기억을 가진 채 다시 태어났다는 것보다 그편이 더 현실적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전생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하나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팔에 있던 꼬리를 문 뱀 문신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자신의 체질.

스릉―.

묵직한 대검을 쥐어 어깨에 인 채, 케이스를 떨어뜨린다.

“모든 특무 장교는 그 병과에 관계없이 석화증이라는 고질적인 불치병을 가지고 있다. 당연하지. 영토가 재에 침식당하지 않았다고 한들, 마나까지 깨끗한 건 아니거든.”

대지도, 물도, 하물며 공기도 마찬가지다.

대륙의 9할이 재에 뒤덮였는데 어찌 산맥 너머만 안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위험성은 감히 재의 기운이 뒤섞인 마나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단순히 몸에 축적하는 것과 달리, 그 힘을 주기적으로 소모하고 다시 채우는 과정에서 수십 배가 피폭되니까.

“그런데, 나는 그것조차 못해.”

몸이 잿더미가 뒤섞인 마나를 받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결국 비싸디 비싼 마나 궐련을 물 수밖에 없었다.

왜냐고?

“유일하게 깨끗한 마나가 이것밖에 없었거든.”

1갑에 1분.

그가 대검을 휘두를 수 있는 제한 시간.

그마저도 전생의 그것과 비교하기엔 한없이 부끄러운 3급 기사 장교 수준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키기기기기기긱!

무어라 말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했을 텐데, 놈은 뭐가 그리 기분이 나쁜지 괴성을 내지르며 그 역겨운 육신을 꿈틀거린다.

그리곤, 이내 너덜거리는 걸 넘어서 찢기기 직전인 도긴스 하사의 육신을 벗어 던진 채 그 괴이한 육신을 온전하게 드러냈으니.

콰아아아아아앙!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지는 촉수가 수십, 수백 개로 증식하고, 그 가지에서 가지가 뻗어져 덤불처럼 그를 휘감는다.

‘10분.’

늘 짓고 있던 능글맞은 가면이 사라지고, 더없이 냉정한 안광이 번뜩인다.

서걱―. 툭.

뻗어진 가지의 중심을 베어낸다.

이어서, 놈이 무릎을 노리고 쏘아낸 다리를 타고 그대로 허공 위로 도약한다.

콰지지지직!

바닥에 추락해, 놈에게 재차 짓밟힌 도긴스 하사의 배가 꿰뚫린다.

썩어 문드러진 장기가 허공에 흩어지고, 나아가 놈은 괴성을 내질렀다.

―그어어어어어어!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악의.

그것을 숱하게 마주한 아인 크리그는 무심결 놈에게 반문했다.

“지겹지도 않나?”

200년 동안 악을 써대며, 살아있는 걸 도륙하는 삶이 대체 뭐가 즐겁다고 이리들 열심인지.

이제는 놈들이 없던 세계를 기억하는 이가 그 자신밖에 없다.

그마저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안개 끼고 아득한 기억들.

그 좆같음을 너희는 가늠이나 할까?

짧게 숨을 들이마신 후, 내면에 꿈틀거리는 순정한 마나를 향해 질책한다.

‘돈값을 할 때다.’

어째서 세계에 널린 탁한 마나를 거부하고 돈을 쏟아부으면서까지 마나 궐련을 태웠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기사에게 마나 그 자체의 순수성만큼 중요한 게 없으니까.

단순히 살아남는 게 목적이었다면 다시 검을 잡을 일도 없었다.

콰드드드드득!

물이 흐르듯, 혹은 실에 묶인 인형이 인형사의 손길에 따라 무대 위에서 춤을 추듯이 놈의 공격을 흘리고, 피한다.

‘벤다. 일격에.’

목적은 단 하나.

꿈속에서 들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천년제국의 수도. 대성당의 성녀금좌(聖女金座).

대체 그곳에 뭐가 있기에 이 난리인지.

퍼어어엉!

마나는 빠르게 고갈되고, 나아가 놈의 공격을 채 흘리지 못해 뺨에 튄 파편에 피가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넝쿨진 나뭇가지를 베어내고, 끊어내고, 마침내 놈의 육신에 다다른다.

‘위, 우측, 다시 좌측.’

마나는 빠르게 소모된다.

‘만용이었나?’

10분의 출력은 7분으로, 다시 5분으로.

‘아니. 그럴 리가.’

자짓 실수하는 순간, 그대로 도긴스의 뒤를 따라 허수아비의 겨울철 모피 가죽이 되어버린다.

‘조금만 더.’

그럼에도 조급함을 죽인다.

‘지금!’

마침내, 그의 눈앞에 어떤 길이 보인 순간.

투둑―.

짧게 발을 구른다.

대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전완근의 핏줄이 도드라지고, 꼬리를 문 뱀이 팽창한다.

이내 시야 너머 자신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놈의 날카로운 가지가 두 눈을 덮쳤다.

‘느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더 빠르다는 강한 확신이자 오만.

어깨를 비틀고, 몸을 웅크린다.

마치 총알이 튕겨 나가듯이 그를 감싸던 모든 배경이 긴 선을 따라 아지랑이처럼 뒤따른다.

기사의 손에 쥐어진 검의 칼날은 재의 수확자를 훑고, 무심하게 지나가 반대쪽으로 나간다.

‘베었다.’

고개를 돌렸다.

서걱―. 툭.

놈의 육신이 무너진다.

동시에, 그는 대검을 그대로 놓아버린 채 미친 듯이 경련하는 양팔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선방했군. 쿨럭!”

왜, 적어도 쓰러지진 않았잖아.

아무래도, 저 쓸데없이 무거운 놈을 다시 케이스에 넣으려면 앉은 자리에서 마나 궐련을 5대는 피워야 할 듯싶었다.

저 괴물은 알까.

조금 전, 자신이 소비한 그 마나를 채우기 위해 쓴 돈이 병장의 월급보다 비싸다는 걸.

“빌어먹을. 죽겠군.”

반동은 더욱더 심해져 갔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검은 더벅머리는 쏟아지는 식은땀에 제멋대로 눌어붙었다.

그뿐인가?

단순한 허기와는 궤를 달리하는 압도적인 공복감과 공허함이 그를 덮쳤다.

서 있을 힘도 없다.

아인 크리그는 놈이 반으로 갈라져 무너지는 걸 확인한 직후 곧바로 근처 나무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치익, 습――.

쓰러지듯 주저앉아 담배를 문다.

물론, 마나 연초였다.

‘마나 고갈 직전. 아슬아슬했어.’

분으로 따지기 애매할 정도로 옅은 마나만이 심장에서 느껴진다.

아마 30초만 더 끌었으면, 반으로 갈라지는 건 놈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으리라.

다만, 막상 처리하고 나니 현실적인 후회가 고개를 들었다.

“……습. 슬슬 모아둔 돈도 빠듯한데. 제기랄.”

마나 궐련은 비싸다.

원가도 꽤 나가고, 무엇보다 사치품이니까.

애초에 마나 궐련은 이렇게 쓰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다.

‘200년 전의 마나 연공법으로도 이 정도인데, 훨씬 열화된 지금은 거의 없는 수준이겠지.’

지금 사람들이 익히는 마나 연공법은 물론, 체질적으로도 맞지 않는 방법이다.

그로서도 익히기 싫었다.

몸이 재의 기운이 섞인 마나만 받아들였어도, 이런 쓸데없는 짓거리는 안 했을 텐데 말이지.

“이 개 같은 체질만 아니었다면.”

석화증이 걸리는 대신 제대로 된 기사 되기.

석화증 걱정은 없는 대신 연비 최악의 기사 되기.

그야말로 최악의 밸런스 게임이 아닌가.

“후우.”

그는 연달아 4대를 피운 후, 조금 나아진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재로 흩어지는 놈의 시체로 향했다.

차디찬 바람이 불었고, 재는 언제 괴물이 있었냐는 듯 그 속에 잔혹한 폭력을 삼키곤 흩어진다.

아인 크리그는 텁텁해진 입술을 혀로 한번 훑은 후, 힙 플라스크에 담아 온 위스키를 한 모금 삼켰다.

“도긴스 하사라고 했던가.”

그런 그의 시선에 닿은 건, 재의 권속에 의해 죽음의 안식조차 유린당한 한 군인의 시체와 그 옆에 나뒹구는 잿빛 수정이었다.

“알다시피 내 몸이 이래서 데려가진 못할 거 같군.”

이미 수습하기엔 너무나도 망가졌다.

살점은커녕, 태반이 잿더미와 뭉개져 녹아내리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소소한 안식을 건넸다.

스윽―.

잘 태우진 않지만, 드물게 피우는 일반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곤, 그의 시체 조각 중 그나마 큰 곳 앞에 꽂아준 채 손을 뻗어 손톱만 한 잿빛 수정과 찌그러진 군번줄을 챙겼다.

군번줄은 유가족에게 갈 것이다.

하지만, 그가 구태여 다른 이들을 먼저 요새로 돌려보내고 홀로 대적한 진짜 이유는 잿빛 수정 때문이었다.

“……역시나.”

재의 권속들은 죽으면 그저 재로 흩어질 뿐, 시체나 부속물 따위를 남기지 않는다.

일전에 초소에서 죽었던 놈이 남겼던 것마저도 의태했던 록튼 병장의 시신이었고, 눈앞의 시신 중 남아있는 것도 모두 도긴스 하사의 그것이었다.

놈들이 재의 권속으로 불리는 이유다.

즉, 이 수정은 원래 이 괴물에게서 있던 게 아니라는 뜻.

그리고, 아인 크리그가 익히 알고 있는 존재들의 흔적이기도 했으니.

“잿더미 교단.”

놈들이 다시 나타났다.

……2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죽지 않은 건 그 자신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9편

* * *

솨아아…….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숲을 따라 10분쯤 내려갔을까.

머잖아 익숙한 얼굴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콜록.”

“괜찮으십니까? 소령님.”

해가 저물고, 바람도 거세진 마당에 차디찬 북부의 강물에 빠졌다.

거기에 비까지 내리는 상황.

먼저 복귀를 해도 뭐라고 하지 못할 상황이었음에도 둘은 그를 찾으러 온 것이었다.

‘이쪽이 비정상이지. 도망친 쪽을 탓할 게 아니라.’

20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늘 이기적이었다.

원래 스스로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겠나?

물론, 그런 그의 평가와는 별개로 리어 융과 아르디티 귄터는 말 그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달려드는 거대한 벌레들을 짓밟아 죽이고 있었다.

익숙한 놈들이다.

‘트리플 넘버. 912번 회토충(灰土蟲).’

재로 뒤덮인 땅 아래에 살며, 주로 시체나 죽기 직전의 사람을 숙주로 삼아 갉아 먹고 알을 까는 변종.

잡으려면 구태여 총을 쏠 필요도 없다.

일반 병사조차도 밟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약하디약한 괴물이지만, 그럼에도 굳이 넘버로 분류가 된 이유는 있었다.

‘한번 몰려들면, 족히 수백 마리는 달려드니까.’

인간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

하물며, 특무 장교라면 모를까.

마나를 쓸 수 없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더더욱이 위협적이다.

거기에 자칫 알까지 까는 순간, 일반인은 해당 부위를 도려내거나 아예 절단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그게 아니면 살아있는 상태로 벌레들의 도시락통이 되고 말 테니까.

‘하지만 대놓고 저렇게 달려드는 경우는 잘 없는데. 아무래도 오래 굶은 모양이군.’

무리도 아니다.

케르베로스 여단의 병사들이 비록 준 형벌부대 취급을 받는다고는 해도, 회토충에 당할 정도로 머저리들은 아닐 테니까.

콰드드득!

물론, 일반 병사도 아닌 특무 장교인 리어 융 상사와 아르디티 귄터는 두말하면 입 아프다.

그걸 방증하듯 둘은 족히 수백 마리의 회토충을 기어이 모조리 죽인 뒤, 아지랑이처럼 흐르는 입김을 내뱉으며 숨을 갈무리했다.

물론, 도와주었다면 조금 더 빨리 끝낼 수 있었겠지만…….

‘피곤해.’

그도 누굴 도울 처지는 아니었다.

마나를 한계까지 사용하는 건 일반적인 체력 소진보다 더욱 고차원적인 탈력감을 느끼게 한다.

때문에, 그는 상황이 끝나자 태연하게 그들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이군. 상사, 소령.”

그의 얼굴은 기본적으로 꾸며낸 듯한 노곤함과 태연함, 나아가 능글맞은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좋지 않은 컨디션과 더불어 쏟아지는 빗물에 의해 검은 머리카락이 가라앉았기 때문일까?

그는 언뜻 지쳐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당연히 걱정했겠지만, 안심하도록. 나는 살아있으니까.”

“하하. 마냥 기뻐하기엔 뭐랄까. 기분이 묘하군요.”

“…….”

둘의 표정이 묘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그의 거짓말 아닌 거짓말에 속아 절벽에서 몸을 내던지기는 했다.

덕분에 가뜩이나 추운 북부에서 얼음물을 헤엄친 것도 모자라 비까지 맞아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었고.

‘하지만, 그 덕분에 살았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끝까지 내달릴 체력이 있었다고는 해도, 요새까지 갔다면 분명 적잖은 피해가 있었을 테지.

물론, 그 전에 잡혔을 확률이 제일 높고.

“그래도 덕분에 살았습니다. 여단장님.”

리어 융 상사는 가볍게 경례를 올렸다.

다만, 직후 피로에 찌든 얼굴과 가슴 주머니에서 삐져나온 군번줄을 확인한 그는 특유의 실눈을 살짝 뜨며 반문했으니.

“혹시, 놈을 죽이신 겁니까?”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다.

……분명, 도긴스 하사는 듀얼 넘버인 재의 수확자에게 능욕당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아르디티 귄터는 미간을 조금 좁히며 중얼거렸다.

“……설마.”

그녀 역시 본 것이다.

찌그러지고, 피와 잿물에 뒤엉켰으나 미약하게 드러난 군번줄은 누가 봐도 죽은 도긴스 하사의 그것이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뒤이어 혼란스럽던 상황이었던지라 미처 깨닫지 못한 위화감의 정체 역시 두 사람의 뇌리를 스쳤다.

‘어째서 재의 수확자가 강물로 뛰어들지 않았지?’

놈들은 인간이라면 절대적인 살의를 보이는 괴물이다.

그런 놈들이 절벽 아래든, 강물이든, 불길이든 안 뛰어들까?

한데, 괴물은 그 둘을 따라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아인 크리그에게 죽은 도긴스 하사의 군번줄이 들려 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가?

리어 융과 아르디티 귄터의 시선이 어지럽고도 혼란스럽게 뒤흔들리려던 찰나.

“아, 이거?”

아인 크리그는 자못 피로하다는 듯이 빗물에 젖은 눈가를 손으로 꾹 누르곤 중얼거렸다.

“오다 주웠다. 운이 좋았지.”

태평하게 군번줄을 꺼내 리어 융에게 던진다.

“에?”

그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그것을 허공에서 잡아챈 직후, 얼빵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아인 크리그는 피식 웃으며 되레 맞받아쳤다.

“둘 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내가 그걸 혼자서 잡기라도 했을까. 3급 특무 장교라고 해도 듀얼 넘버를 혼자 잡을 급은 아니잖나.”

그 정도는 1급 특무 장교는 되어야 가능한 거고―라며 얄밉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목숨을 걸고 도망치기는 했지. 요새 반대 방향으로. 이건 돌아오다가 진창 속에서 주웠다만.”

“……그렇군요.”

아르디티 귄터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고, 리어 융 역시 한결 침착해진 미소를 띤 채 군번줄을 갈무리했다.

‘……꺼림칙한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둘은 지극히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3급 특무장교가 단신으로 듀얼 넘버를 사냥했다―보다는 아인 크리그의 말마따나 놈을 따돌린 후 우연히 떨어진 군번줄을 주웠다는 게 훨씬 현실적이잖은가?

‘그래, 그저 우연히.’

아르디티 귄터와 리어 융은 속으로 그 단어를 곱씹으며.

“춥군. 요새는 이쪽인가?”

그저, 앞서 걸어가는 아인 크리그를 묘한 눈으로 뒤따를 따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새 해가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그들은 일련의 부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미 수차례 전투를 치렀는지, 비가 내렸음에도 그들이 쥔 소총과 단검에는 잿물이 묻어 있었고, 입으로는 거친 숨을 몰아쉰다.

“소령님! 괜찮으십니까!?”

멘하른 대위를 위시한 1중대로 이루어진 수색대였다.

그들은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후드를 눌러쓴 채 다급히 말을 내달렸고, 이내 앞에 다다르자 곧바로 내려 비에 젖은 아르디티 귄터에게 다가가 경례를 올렸다.

“듀얼 넘버로 추정되는 개체와 조우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괜찮다. 대위.”

그녀는 이어, 대열 후방에서 말에 타 있는 익숙한 두 얼굴을 보며 반문했다.

“중위와 소위가 전했나?”

“예. 소식을 듣고 다급히 달려왔습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편, 뒤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던 아인 크리그는 곁에 서 있는 리어 융에게 말했다.

“소령이 인복이 많군. 그래도 좀 서운한데.”

“받아들이시죠. 그게 다 업보라는 겁니다.”

“귀관은 한마디를 안 지는군.”

이번에도 리어 융은 그저 너털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인 크리그는 앞으로 나섰다.

이윽고 멘하른의 앞에 다다른 그는 짧게 헛기침을 한 후 입을 열었다.

“고생했다. 대위.”

“무리한 작전이셨습니다.”

다만, 돌아온 답은 가관이었다.

후드에 눈이 조금 가려져 있음에도 살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는 게 보일 지경.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분위기가 싸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

그러나 멘하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미친 짓이었단 말입니다. 만약 소령님께서 잘못되셨다면, 우리 여단은 끝입니다!”

“대위!”

뒤늦게 아르디티 귄터가 멘하른을 불렀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어쩔 순 없었다.

그러나 아인 크리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니, 적어도 그런 것처럼 태연하게 읊조렸다.

“기강 한번 대단하군.”

“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아, 모르시는구나.

그럼 알려드려야지.

아인 크리그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천천히 그의 견장을 잡아 그대로 뜯어버렸으니.

투드득!

낡디낡은 대위 견장이 부질없이 진창 속에 추락한다.

그리곤, 그는 그대로 굳어버린 멘하른 대위와 그 뒤에 선 이들을 바라보며 노곤한, 그러나 분명한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읊조렸다.

“너희가 날 원망하든, 의심하든, 미워하든 개의치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군국의 모든 군인에게 적용되는 대원칙.

“하극상은 용납하지 않는다.”

툭―.

“멘하른 대위를 중위로 강등하고, 3개월간의 감봉에 처한다. 이견 있나?”

비가 그쳐가는 데에 반해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진다.

수색대로 나온 일부는 불순하기 그지없는 눈빛으로 손에 쥐고 있는 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기까지.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아인 크리그보다 두어 발자국 뒤에 서 있던 아르디티 귄터는 성큼 걸어와 그와 어깨를 마주했고.

“소령님.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끝내 선을 넘기로 결정한 듯 살기 가득한 눈으로 아인 크리그를 응시하며 짓씹듯이 중얼거리는 멘하른의 뺨을 때렸다.

찰싹―!

붉게 물든 뺨을 부여잡은 멘하른은 혀를 깨물어 턱을 따라 피가 흘러내리는 것도 모른 채, 멍해진 눈으로 반문한다.

“……소령님?”

그러나, 아르디티 귄터의 시선은 그가 아닌 곁에 선 아인 크리그에게 닿았다.

그녀는 잠시 그를 올려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여단장님.”

“소령님!”

그 모습에 이름 모를 한 부사관이 외쳤지만, 그녀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인 크리그는 그녀의 숙인 뒤통수를 묵묵히 내려보다가, 이내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멘하른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왜, 계속 말해보지. 중위.”

아인 크리그의 미소가 걷히고 더없이 싸늘한 얼굴 아래 조소가 머문다.

그 순간, 멘하른은 본능적으로 굳고 말았다.

마주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건 기대였다.

‘마치, 우리가 총구를 들이밀기를 기다리는 듯한.’

그래, 저건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눈동자다.

언제든지 목을 부러트릴 수 있는, 그럴 명분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광기.

“……무, 무례를.”

“안 들리는데.”

“……무례를 범했습니다. 여단장님.”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는 아르디티 귄터보다도 더욱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내려보던 아인 크리그는.

“그래. 잘해보자고. 대위.”

“……예?”

언제 그랬냐는 듯, 능글맞고도 노곤한 얼굴로 태연한 미소를 지은 채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생각해봤는데. 고작 이 정도 결례로 1계급 강등에 감봉은 좀 과한 거 같아서. 내가 좀 흥분을 했네. 귀관도 이리 진심 어린 사죄를 하니 감봉 3개월로 퉁 치자고.”

그리곤, 멍한 얼굴의 그를 지나쳐 여분으로 데려온 말 위에 올라 곁에서 하품을 하고 있는 랑예 중위에게 물었다.

“혹시 사탕 남은 것 좀 있나. 중위? 궐련을 못 피우니 입이 심심한데.”

“흐아암.”

고개를 절레절레 돌린다.

“그럼 귀관이 손에 쥐고 있는 건?”

“칫.”

기어이 랑예 중위에게서 사탕 하나를 받아 들어 입에 물고는 요새 방향으로 고삐를 당긴다.

그 뒷모습을 보며, 멘하른은 무심결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으니.

“……저건 대체.”

무슨 또라이지?

그건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뇌리를 스친 생각이었으리라.

10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