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편
* * *
천년을 이어져 온 제국.
이른바 천년제국(千年帝國).
수많은 종족과 국가가 난립하던 전화의 시기를 지나, 대륙을 통일한 유일무이한 인간들의 국가.
‘17개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7개의 종족을 지배하며, 13개의 민족을 다스리는 대제국.’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국가가 천년제국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합병되거나 속국으로 전락했다.
제국의 북부 역시, 한때는 강성하디 강성하던 어느 북부 왕국의 영토였다.
물론, 이제는 척박하디 척박한 변방. 그마저도 괴물들에게 점령당한 불모지에 불과해졌지만 말이다.
타닥, 타다닥―.
낡고 허름한 오두막의 조악한 벽난로.
그 안에서 일렁거리는 불꽃을 바라보며, 삐걱거리는 안락의자에 몸을 묻은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자유로운 왼쪽 손을 들어 눅눅한 궐련을 물었다.
몇 번이나 서리와 이슬에 젖은 질 낮은 하품이었지만, 지금은 이런 것조차 구하기 어려웠으니.
나아가, 당장의 고통을 줄여주기엔 더없이 충분하기도 했고.
“끌끌. 잘 참는구나.”
때가 탄 셔츠는 노파가 빨아서 널어놓았기에 드러난 그의 상반신.
일렁거리는 불빛을 따라 굴곡진 그림자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갈라진 근육과 도드라진 흉터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드러난 다부진 전완근에 얇은 침으로 검은 잉크를 묻혀 찌른다.
스윽―.
때때로 잉크와 뒤엉켜 묻어난 검은 핏물을 천으로 닦아내며, 노파는 진땀을 흘리면서도 그의 전완근에 유려한 문신을 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해가 저물고, 새벽을 지나, 다시 여명이 떠오르려는 창 너머.
마침내 실로 칭칭 감아 손잡이를 만든 바늘을 놓은 노파는 뻐근한 허리와 손목을 주무르며 그에게 말했다.
“다 되었다.”
북부 억양이 강하게 섞인 제국 표준어.
노파의 말에 궐련을 문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떠 오른쪽 손목을 내려보았다.
꼬리를 문 검은 뱀.
숫자 8을 연상시키는 듯도 싶은.
단순히 주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미학적인 무언가마저 느껴지는 문신.
그는 바늘과 잉크를 정리하고 있는 노파를 바라보며, 끝까지 태운 담배를 비벼끄고는 말했다.
“주술사보다는 차라리 화가를 하지 그랬나. 그러면 나 같은 떠돌이에게 목숨을 빚질 일도 없었을 텐데.”
실력이 좋은 화가는 귀족들에게 성 내 거주를 허락받고, 후원도 받아 삶이 꽤나 풍족한 편이다.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나름의 칭찬인 셈.
그런 그의 의중을 눈치챈 걸까?
노파는 주름진 눈매를 말아 올리며, 끌끌 웃음을 흘렸다.
“그랬으면 귀족들이 날 가만히 놔뒀을꼬. 끌끌. 이래 보여도 한 미모 했거든.”
“퍽이나.”
갈라지고 서늘한 목소리로 답한다.
내뱉는 어조는 한없이 노곤했고, 더없이 편안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망한 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조촐한 온기와 낡은 안락.
의미 없이 내뱉는 실없는 대화마저도, 눅눅한 담배 한 모금조차도 사치인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
노파는 그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창밖을 힐끔 바라보곤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해가 뜰 때까지 자고 가.”
“드문 호의인데. 할멈이 웬일로.”
“다시 볼 일이 없을 테니까. 끌끌.”
구태여 거절하진 않았다.
기사라고 한들, 휴식은 달콤한 법이었으니.
그렇게 얼마나 더 눈을 붙였을까?
슬슬 젖어있던 셔츠가 말랐을 때쯤, 그는 천천히 눈을 뜨곤 자리에서 일어나 떠날 채비를 하며 반문했다.
“이것들은…….”
“목숨값이다. 복채는 과하게 받았으니 덤이라고 생각해. 정 마음이 쓰이면 네 스승 덕인 거로 하고.”
담뱃잎을 조촐하게 만 궐련 뭉치와 부싯돌.
여분의 옷가지와 늑대 고기를 말린 보존식.
조촐하기 짝이 없었지만, 허름한 북부에서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성의였다.
그도 그걸 알았다.
때문에, 그는 군말 없이 그것을 챙겨 매며 허름한 오두막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그때.
“그런데 이 주술, 진짜로 효과가 있는 건가?”
문득, 검은 머리의 떠돌이는 뒤에 선 노파에게 나지막이 반문했고.
“그걸 왜 주술사에게 묻누.”
자글자글한 주름 속에서 인자하게 웃은 노파는 단지, 그렇게 덧붙일 따름이었다.
“내세의 자네에게 물어야지.”
남자의 얼굴이 묘해진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표정.
노파는 피식 웃으며, 최대한 그가 알아듣기 쉽도록 말해주었다.
“뒈진 후에, 다시 눈을 뜨면 성공이라는 뜻이지.”
그 말을 끝으로, 아인 크리그는 눈을 떴다.
“―허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다급히 오른쪽 셔츠 소매를 걷어 문신을 확인한다.
꿈에서 본 노파가 그려준 그것과 같다.
단 조금의 오차도 없이, 분명히.
“하, 하하…….”
아인 크리그는 무심결 웃었다.
그리곤, 드물게도 마나 궐련이 아닌 일반 연초를 꺼내 입에 물곤 불을 붙인 뒤, 잠결에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우로보로스(Uroboros)라.”
꼬리를 문 뱀이 뜻하는 주술적 의미는.
“탄생과 죽음, 불사와 무한.”
실로, 묘한 것이었다.
* * *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 아니, 200년 전 기준으로 제국의 남부 관문은 단순히 관문의 역할만 수행한 게 아니다.
유사시 남부를 수호하는 최전선으로서 늘 군대가 상주했다.
즉, 지금 아인 크리그를 비롯해 케르베로스 여단이 사용하는 대부분은 이미 200년도 훨씬 전에 있던 것을 수리한 게 대부분이라는 뜻이다.
솨아아아…….
그런 면에서, 아인 크리그는 꽤 익숙한 걸음으로 어렵지 않게 샤워실을 찾을 수 있었다.
‘제국의 건축 양식은 거의 비슷하니까.’
시공은 난쟁이들, 그러니까 드워프들이 했다고 하더라도 기본 구조는 인간들이 지은 여느 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우.”
이른 새벽에 일어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 썼기 때문인지 뻐근했던 몸에 뜨거운 물이 들이닥친다.
온기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그는 드물게도 맞이한 평온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성에가 낀 거울을 물이 묻은 손으로 스윽 닦아낸다.
낡아 물때가 낀 거울에 얼굴이 비친다.
더벅거리고 부스스한 검은 머리카락.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에 살짝 낀 다크서클.
희다고 말하기도, 구릿빛이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살 색과 적당히 붙은 근육.
거기에 오른쪽 손목에 자리한 문신까지.
‘아니, 이 경우에는 점이라고 해야 하나?’
전생에서의 자신이 가진 문신이었다고는 한들, 아인 크리그는 살면서 바늘을 피부에 찔러 본 적 따위 없었으니까.
차라리 칼날이면 경험이라도 있지.
그렇게 얼마나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서 있었을까?
이윽고 그의 의식은 자연히 전생과 관련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200년 전에 일어난 재의 재앙은 대륙의 대부분을 삼켰음에도 어느 날 갑자기 멈췄다. 덕분에 살아남은 게 제국을 계승한 군국이고.’
다른 국가나 도시 몇 개도 살아남았다지만, 그건 일단 뒤로 차지하고.
중요한 건 듀얼 넘버. 재의 수확자에게서 나온 잿빛 수정이었다.
그게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어떤 세력이 의도적으로 재의 권속을 조종하고 있다.’
이미 정보국에 있을 당시 꼬리를 잡았다.
‘잿더미 교단.’
대륙을 모조리 집어삼킨 거로도 모자라 죽음의 대지로 만든 재앙을 추종하는 광신도들.
아인 크리그는 무심결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설마 놈들이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존속했을 줄은 몰랐으니까.
‘하긴, 나도 놈들에겐 마찬가지려나.’
문득 오른쪽 손목 아래 꿈틀거리는 문신이 눈에 닿았다.
아까 꾸었던 꿈 때문일까?
주술사 노파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성공이라.”
글쎄, 이걸 성공이라고 불러야 할까.
간혹 떠오르는 꿈과 기억조차도 악몽인지 진짜 기억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 목적이라곤 ‘제국 황도 대성당’이라는 것밖에 모르는데.
허, 너털웃음과 더불어 잡생각을 덜어낸 그는 이윽고 얼굴에 붙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리곤 생각한다.
‘잿더미 교단에 대해 정보가 더 필요하다.’
정보국에서 더 오래 있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지크프리트 선 완공 전 3년은 그가 생각한 데드라인이었다.
더 늦게 왔다면, 제국 수도로 가기 위해 짜둔 모든 계획은 어그러지리라.
투둑―.
틀어 두었던 수도를 잠갔다.
그리곤,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몸을 닦으며 생각한다.
‘듀얼 넘버. 의도한 건 아니지만 필요한 시기에 와 줬다.’
잿더미 교단 놈들에게 의도치 않은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면, 심성이 고약한 걸까?
스륵―.
군복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복도가 천천히 밝아지는 걸 보면 슬슬 해가 뜰 모양이었다.
아인 크리그는 언제 진지한 표정으로 고심했냐는 듯, 더없이 태연한 얼굴로 마나 궐련을 문 채 중얼거렸다.
“식당이 어느 쪽이었더라?”
제국 속담에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바나르간드 산맥도 식후경이라고.
터벅, 터벅―.
복도를 걸어 밖으로 나가자, 이른 새벽이기 때문인지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이윽고 요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뭐랄까. 묘한 광경이다.
남부 관문, 200년 전 남부 해양 국가들과 무역로로서 만들어졌던 장벽은 이제 군국의 북부를 막는 방파제가 되었다.
단순히 문이 열리고, 닫히는 방향이 달라진 거라고 말하기엔 묘하다.
“춥군.”
본래 남부의 날씨는 춥지 않았다.
산맥 너머, 저 빌어먹을 잿더미들이 하늘을 뒤덮어버리기 전에는 말이지.
잿더미가 앗아간 건 너무나도 많다.
셀 수도 없을 만큼.
200년의 시간, 수십억의 목숨.
그리고…….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에 다다른 무렵이었다.
“여단장님?”
귀에 익은 듯 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아직 식당은 안 열었어요.”
그녀의 말처럼, 창문 너머 식당 안에는 막 식사를 준비하는 취사병들의 그림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내민 무언가.
그건 새하얀 손에 들린 빵이었다.
갓 만든 듯이 뜨듯한 온기가 느껴지는 밀빵.
보급 상황 탓인지 그리 푹신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군침이 흐를 만한 냄새가 흘렀다.
거기에 반으로 갈라져 들어간 소시지까지.
아인 크리그는 그 손의 주인으로 시선을 옮겼다.
갈색 단발에 갈색 눈동자.
절뚝거리는 왼쪽 다리.
익숙한 얼굴이다. 그러니까 이름이…….
“파르밀라?”
“기억하네요. 상사예요.”
그는 잠시 그녀가 건넨 빵을 내려보다 그것을 받아들어 한 입 베어물고는 말했다.
“리어 융이 잘 말해줬나 보군.”
“별말 없던데요?”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빵은 맛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보급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했는데도 이런 맛이라니.
그럼에도 양은 부족했다.
“보급이 많이 부족한가?”
“솔직하게 답할까요?”
고개를 끄덕이자, 파르밀라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화답했다.
“이 정도면 특식이에요. 평소엔 밀빵 하나에 묽은 감자 스프가 전부인데. 분위기가 뒤숭숭해서 남은 소시지를 모두 털었죠.”
아무리 준 형벌부대라고 불린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죄라고 부르기엔 복잡한 사정들로 여기까지 내몰린 이들이다.
좋든 싫든, 제각기 사정이 있다.
보통 그런 이들끼리 모여 살면 둘 중 하나다.
서로가 서로를 고립시키거나.
유례없는 유대감을 가지거나.
과거에는 전자였지만, 아르디티 귄터가 여단장 대리가 된 직후부터는 후자였다.
치익―. 습.
이윽고 파르밀라가 옮기던 물자를 내려놓고 담배를 물었다.
아인 크리그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얼마나 침묵 속에서 서로 연기를 내뱉었을까?
먼저 입을 연 건 파르밀라였다.
“도긴스 하사의 군번줄을 가져왔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고향 무덤에 뭐라도 넣을 순 있게 됐네.”
“애인이었나?”
파르밀라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도긴스가 그 상대라서라기보다는, 그런 상상을 하는 아인 크리그를 경멸하는 기분이랄까.
“나이 차이가 10살이 넘어요. 미쳤어요?”
글쎄. 수도에서는 그 정도 나이 차이는 남녀 가리지 않고 애인으로 두곤 하던데.
아인 크리그는 입 밖으로 나오려던 말을 삼킨 채, 그녀를 향해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말했다.
“그러면?”
“친했어요. 아니, 이 경우엔 은인이라고 해야 하려나?”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는다.
절뚝거리던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벽에 등을 기댄다.
다만, 내뱉는 연기에 회한이 담겨 있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일까?
때문일까.
아인 크리그는 그녀에게 반문했다.
“다리는 왜 그렇게 되었지?”
“아, 이거요?”
언뜻 무례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고 왼쪽 군복 바지를 걷었다.
스륵―.
그러자 드러난 건 나무와 몇 개의 톱니로 만들어진 의족.
상이군인들에게 흔히 보급되는, 질이 낮은 물건이었다.
“4년 전쯤인가. 정찰에서 잃었어요. 트리플 넘버였는데……. 뭐. 여단장 대리, 아니. 귄터 소령님과 다른 특무 장교들이 놈들을 막고 도긴스 하사가 절 업고 뛰었죠. 그때는 병장이었는데.”
파르밀라는 씁쓸한 목소리로 ‘그러게 전역하랄 때 할 것이지.’라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침묵 속에서 연기가 흐트러진다.
이윽고, 그녀는 담배를 대충 바닥에 털어버리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솔직히, 다들 혼란스러워서 그래요.”
“무슨 뜻이지?”
“뭘, 그런 생각 했잖아요. 왜 이렇게 지랄들이지? 내가 일찍 온다고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나? 혹은 저희를 그저 머저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갈색 동공과 아인 크리그의 검은 동공이 맞닿는다.
둘 다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너무나 다르다.
“여단장님 생각이 맞아요.”
아인 크리그는 흥미롭다는 듯한 노곤한 미소를. 파르밀라는 언뜻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크리그가 늦게 오든, 일찍 오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아는데도. 괜히 원망스러운 거죠. 혹은 변화가 두렵거나. 우리는 우리끼리 잘 해왔는데.”
인간이라는 동물은 원래 변화가 두렵다.
“멍청하죠. 그런데 저도 그래요. 달갑진 않았어. 어제까지는.”
그건 일종의 본능이며, 나아가 안주하고자 하는 짐승의 관성.
“이건 제 호의에요. 감사 인사는 됐고. 서로 퉁 친 거로 하죠?”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홀로 남은 아인 크리그는 찰나의 침묵 속에서 마나 궐련을 하나 더 문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역시 밥 주는 사람들은 현명하다니까.”
뭐가 되었든, 앞으로 밥을 굶을 일은 없겠다 싶었다.
그것만으로도 썩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11편
* * *
짹, 째잭―.
“……아.”
눈을 뜨자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옅은 햇살이 뺨을 간질였다.
아르디티 귄터는 무심결 탄식했다.
‘늦잠?’
혹시 잘못 본 건가 싶어 손목시계와 창문 너머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시간은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본래 그녀의 일과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본래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곤 했으니까.
‘3시간이나 더 자버렸다.’
평균 수면 시간은 4시간 안팎.
의사들이 봤다면 기겁하며 득달같이 달려들겠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업무는 많았고, 인재는 턱없이 부족했으니.
스륵―.
잠옷을 벗고 간단하게 몸을 씻은 그녀는 빠르지만 정갈한 손길로 군복을 입으며 생각했다.
‘근 며칠, 당혹스러운 일들이 많았지.’
피곤한 것도 당연한 거였다.
아인 크리그가 갑작스럽게 온 탓에 인수인계할 서류를 며칠 밤낮으로 끝내고, 시급한 사안을 결재하고, 실전까지 치렀으니까.
그녀가 4급 기사 장교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탈진하든 과로로 쓰러지든 했을 업무량이었다.
그렇게 채 10분도 지나기 전, 완벽한 군인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는 손목시계를 바라보곤 생각했다.
‘파르밀라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부탁해야겠어.’
식당까지 가서 뭘 먹을 시간은 없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비록 먹을 건 딱딱한 빵 부스러기와 묽은 감자 스프를 다시 끓인 거겠지만, 이미 익숙해진 그녀였다.
문제는 밀린 서류.
비록 여단장 대리직은 끝났다지만, 그렇다고 업무가 확 줄어드는 건 아니었던 탓에.
‘듀얼 넘버가 나타났으니. 더더욱.’
군국 기준으로는 5년, 북부 전선 기준으로는 14년 만의 듀얼 넘버였다.
‘5년 전, 서부 전선.’
듀얼 넘버. 87번. 더스트 웜(Dust Worm).
족히 수십 미터는 될 법한 몸으로 나타나 지크프리트 선 공사 현장을 덮쳤다.
그 결과 공사를 담당한 4군단 예하 2개 공병 대대가 전멸.
‘사단이 투입되어 토벌에 성공하긴 했지만, 듣기론 특무 장교 소모가 극심했다고 들었어.’
자세한 수치나 기록들은 그녀가 열람할 수 없었지만, 알음알음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족히 30명에 가까운 특무 장교들이 죽었다는 말이 있다.
그녀가 아인 크리그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3급 특무장교 단신으로 듀얼 넘버를 죽일 순 없다. 200년 전 기사라면 모를까.’
이제는 바래지고 잊혀 뭐가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제국의 역사지만, 200년 전의 기사들은 셀 수도 없이 밀려오는 괴물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무력을 보였다고 한다.
단신으로 수백 마리를 사냥했다느니, 혹은 싱글 넘버를 고작 열댓 명으로 죽였다느니 하는 고루한 이야기.
아르디티는 지극히 합리적인 인간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아인 크리그에 대한 의문을 품으면서도 듀얼 넘버의 생존 그 자체에 대해선 의문을 품지 않았다.
‘아인 크리그.’
다만, 그녀의 생각은 그라는 남자 그 자체에게로 향했으니.
―특별히 귀관에게만 알려주지. 내 목적은 간단해.
―제국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가 요새 밖에서 내뱉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미친 소리.”
드물게도 그녀의 입에서 내뱉어진 욕지거리에 때마침 곁을 지나가던 한 부사관이 비켜섰지만, 이미 고심에 빠진 그녀의 시야에는 닿지 않았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해.’
애초에 크리그 가문이 몰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센티넬 가문의 성장과 황가의 영락, 지크프리트 선 계획 등 이유는 많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이룰 수 없는 이상 때문이었다.
‘제국 수복.’
크리그의 이름을 이어받은 이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이들은 언젠가 인류가 이 좁디좁은 잿더미와 괴물들을 뚫고, 천년제국의 영광이 흐르는 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건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연구된 사실.
‘제국의 영토 대부분, 그러니까 잿더미에 뒤덮인 곳은 모두 생명력을 잃은 지 오래다. 어떻게든 수복한다고 해도, 유지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바나르간드 산맥 너머, 구(舊) 제국의 영토는 더는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는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살아있는 모든 게 잿더미에 뒤덮인, 대지는 마르고 갈라지고 괴물들이 들끓는 황량하고도 외로운 폐허.
‘이미 군국 초기에 몇 번이나 시도했고, 그때마다 궤멸적인 피해를 당했어.’
지크프리트 선이 센티넬 가문에게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든, 그 당위성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군국의 인구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10배라도 넘지 않는 이상, 제국의 고토 수복은 허황된 꿈.
아니, 그런다고 가능할지도 미지수다.
아인 크리그라고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터인데.
‘여단을 장악할 명분?’
그렇다면 사고방식이 납득가지 않는 건 아니다.
그 현실성을 떠나, 케르베로스 여단의 정신은 분명 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 그 자체였으니까.
그러나 단순히 정말 그뿐일까?
……모르겠다.
그녀는 한숨을 내뱉고, 묘하게 느껴지는 두통 속에서 복도를 걸었다.
별일이 없다면 대대장 집무실로 갔겠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얼마 전까지 그녀가 사용했던 여단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바나르간드 요새는 근 몇 년간 유례가 없는 위기 앞에 직면했으니까.
‘듀얼 넘버가 두려운 이유는 그 단신의 무력도 있지만, 일부 개체는 근방의 트리플 넘버에 대해 지배권을 가진다는 점.’
실제로 5년 전, 더스트 웜의 경우에도 일대의 트리플 넘버들을 대규모로 이끌었다.
만약 그들이 마주한 재의 수확자가 그런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상황은 최악.
‘하지만, 그마저도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건 없다.’
비교적 교전 경험이 많은 트리플 넘버와 달리 듀얼 넘버에 대한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게 현실이다.
그나마 고서를 많이 가진 속죄 교단 소속의 리어 융이 판별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해당 괴물의 넘버와 이름도 몰랐으리라.
‘98번. 재의 수확자…….’
전날 밤,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으나 제대로 된 정보는 없었다.
더 아는 게 없는 건 융 상사도 마찬가지.
때문에, 그녀는 아인 크리그를 찾아가 요새 방비를 강화함과 동시에 정보국 출신인 그에게 협조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똑똑―.
어느새 그의 집무실 앞에 다다른 그녀는 늘 그렇듯이 흔들림 따위 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귄터 소령입니다. 여단장님.”
안에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은 열렸으니,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그녀로서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상사?”
“오셨습니까. 대대장님?”
그는 마치 그녀가 올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말하며 문을 활짝 열었고,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서는 동시에 소파에 앉아 있는 아인 크리그를 응시했다.
“아, 소령도 왔나.”
“예. 여단장님.”
생각해보면 리어 융 상사가 여단장실에 먼저 와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사태가 사태 아닌가.
하물며, 그는 이 요새의 유일한 군종장교.
오히려 없었다면 불러와야 했을 정도였기에 아르디티 귄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례를 올린 후 소파에 앉았다.
치익, 습―.
그녀가 앉기 무섭게 아인 크리그는 태연하게 궐련을 하나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묘하게 레몬과 박하향이 뒤섞인 연기가 둘 사이를 맴돌고, 이내 먼저 입을 연 건 아르디티 귄터였다.
“98번. 재의 수확자에 대한 보고를 상부에 정식으로 올리고, 관련된 정보 열람과 지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만일 놈이 트리플 넘버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다면, 최악의 경우 요새가 뚫릴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14년 전, 그나마 3개 대대라도 온존하고 있어 듀얼 넘버를 막아낼 수 있었던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으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유사시 화력을 투사할 고정 포대 40문 중 제대로 작동하는 건 10개 남짓, 그마저도 남은 포탄이 몇 개 없습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아인 크리그는 언제 가져다 둔지 모를 재떨이에 궐련을 털며 덧붙였다.
“병사들이 사용하는 총기의 탄환도 모자라고, 장구류는 물론, 기본적인 보급 물자 태반이 비어있다는 것도 지적해야지. 소령.”
“……그렇습니다.”
그가 없던 7년간 여단을 책임진 이로선 부끄러운 일이지만, 적어도 그가 현실을 보고 있다는 것만큼은 기꺼운 일이었다.
때문에, 아르디티 귄터는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재차 건의했다.
“아무리 전쟁성이라고 해도 듀얼 넘버가 출현했다는 소식에 방관하지는 않을 겁니다. 조금이라도 빠르게…….”
“보급도 받고, 인력도 받아야지.”
“……예. 그렇습니다.”
아인 크리그는 명쾌하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긍정의 뜻임에도 묘하게 드는 불안감에 그녀가 무어라 반문하려던 찰나.
아인 크리그는 언뜻 경쾌하다 싶은 목소리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럼 가자고. 소령.”
“예?”
아니나 다를까.
“어디를……?”
“어디긴 어디야.”
그녀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반문했고.
“제6군수지원연대.”
순간,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받아야 할 게 밀렸다. 그러면 이자까지 쳐서 받아내야지?”
직접 가서 조져야지. 암.
* * *
“뭐, 그렇게 된 거다. 도르만 중령.”
아인 크리그는 불편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궐련 대신 두툼한 시가를 물었다.
사각―.
시가 커터로 끝을 잘라낸 그는 불을 붙인 후 나지막이 연기를 내뱉었고, 그 연기를 마주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그게 여단장 ……님께서 직접 오실 만큼의 일입니까?”
“님자 붙이는 게 힘들면 붙이지 마. 동기끼리 존대는 무슨.”
아인 크리그의 검은 눈동자가 눈웃음에 가려진다.
그러나, 대놓고 탁자 위에 군홧발을 올려 몸을 뉜 그는 뒤에 서 있는 아르디티 귄터마저도 당혹스러울 만큼 여유로운, 달리 말해서 무례한 태도로 일관했다.
“후우.”
코첼 도르만. 그는 아인 크리그를 한참 동안이나 노려보다가, 이내 뒤에 선 아르디티 귄터를 힐끔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고양이를 닮은 얼굴.
말랐지만 군복 아래 드러나는 탄탄한 몸매.
오른쪽 눈 밑의 점까지.
……여전히 빌어먹게도 아름답다.
무심결 그런 생각을 한 코첼 도르만 중령은 아인 크리그의 뱀 같은 눈동자를 마주하곤,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왜 하필 이 새끼랑 엮여선.’
그는 알고 있을까?
정보국에 있는 어느 선배 역시, 그와 같은 고민을 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코첼 도르만은 그와 마찬가지로 시가를 입에 문 채 뒤에 선 아르디티 귄터와 자신의 부관에게 말했다.
“둘 다 잠시 자리를 좀 비워주지.”
아르디티 귄터와 코첼의 부관은 서로 짧게 시선을 교환하곤, 이내 묵례하며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둘이 문을 닫고, 찰나의 정적이 스친 직후.
“후우…….”
한숨과 함께 시가의 묵직한 연기를 내뱉은 코첼 도르만 중령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아인 크리그를 향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살려줘. 빌어먹을.”
그런 그의 말을 들은 아인 크리그는 여느 때와 같이 옅게 웃었다.
“그건 네가 앞으로 하기에 달렸지.”
그리곤, 마나 궐련 따위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묵직한 연기로 몇 번 원을 만들곤 화답했으니.
“왜, 아직도 아르디티 귄터를 좋아하나?”
그 말을 들은 코첼 도르만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다만, 기분 나쁘게도 벌겋게.
12편
* * *
코첼 도르만 중령.
아르디티 귄터 소령.
아인 크리그 중령.
셋은 딱히 공통점이랄게 없었다.
굳이 찾아보자면 군국 특무 사관학교 동기라는 점 하나뿐.
‘물론 접점은 따로 없었지만.’
같은 기사 장교라고 한들, 너도나도 친하게 지낼 정도로 녹록한 곳이 아니다.
군국은 군인으로서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받는 사회다.
하물며 태생적으로 다이아 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황족조차도 군인으로서의 재능이 없다면 계승권 자체가 흔들릴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지.’
드물긴 하지만, 군사적으로 무능한 적장자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재능을 가진 서자에게 작위를 빼앗긴 사례도 있을 정도다.
실로, 군인이 나라를 가진 국가랄까.
고로 작위를 계승하기 바라는 귀족들이나 인생역전을 노리는 평민들에겐 사관학교는 살아남아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런 곳에서 크리그를 좋아할 사람은 없지. 다 망한 공작가. 데릴사위로 데려가기에도 센티넬 가문의 눈치가 보이잖아?”
냉정하게 그게 아인 크리그, 그리고 역대 크리그 가문이 사관학교에서 받은 시선이었다.
한때는 허울뿐인 공작가라는 이름에 홀려 판을 짜보는 유력가도 있었다.
왜, 데릴사위랄지. 공작가와 혼인을 통해 작위 상승을 노린달지…….
그러나 센티넬 가문이 도전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 귀족들이 깨닫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리그 가문을 이용해서 뭐라도 해보려는 놈들은 센티넬 가문에 의해 어떻게든 지워졌으니까.’
백작 가문이 3개쯤 몰락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코첼 도르만도 정상은 아니었다.
“귄터 가문은 대대로 크리그 가문의 봉신 가문이지. 뭐, 덕분에 사이좋게 망했지만.”
그래도 귄터 가문은 크리그 가문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에 속했다.
전성기에 비해 한없이 영락한 것이기는 해도 가문이라 부를 폐허 정도는 남겨둘 수 있었으니까.
반면에 크리그는?
말해서 뭐 하나.
가문도, 재산도, 원수 직위도 모두 잃고 남은 건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 복무’라는 의무와 돈도 안 되는 공작위 뿐.
아인 크리그는 왜인지 슬퍼지는 기분을 또 하나의 마나 궐련을 물어버림으로서 털어버리곤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용기는 가상해. 크리그 계파에 속하는 귄터 가문의 여식을 좋다고 따라다니고. 그것도 센티넬 계파의 자식이.”
“……옛날이야기다. 벌써 7년도 더 전이라고.”
“그런다고 있었던 일이 없던 게 되나.”
좋든 싫든 인간이라는 동물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평가에 의해 가치나 인식이 결정되고는 한다.
“센티넬도 그걸 의식해서 이런 한직에 보낸 거 아닐까 싶은데. 나름 봉신 가문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도르만 가문의 장남을.”
“그건……. 하아. 됐어. 본론만 간단하게 하자고. 아인 크리그.”
코첼 도르만은 더 이상 네가 하는 말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놀리는 맛이 있었기에 조금 더 하고 싶긴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피차 시간이 아까웠기에 아인 크리그는 그가 원하는 본론을 꺼냈다.
“이제까지 밀린 보급 전부 원상복구 해놓고, 신병 좀 내놔.”
“……빌어먹을.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전자는 이미 코첼 도르만도 예상한 요구였지만, 후자는 사실상 죽으라는 말이었다.
“전자는 당연히 네가 해야 할 일이고, 후자도 엄밀히 따지자면 불가능한 건 아닐 텐데?”
하지만, 특유의 불길한 검은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아인 크리그는 맡겨 놓은 물건이라도 받아가는 것처럼 굴었다.
빌어먹을. 맡겨 놓은 게 맞기는 하다.
적어도 보급에 한해서는 말이다.
때문에, 코첼 도르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인상을 잔뜩 일그러트린 채 그가 내뱉는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10군단 예하 한 공병 대대에서 집단 탈영이 발생했다지? 듣기론 한 50명쯤 된다던데.”
군국 역사상 드물게 일어난 대규모 탈영.
이유는 간단했다.
센티넬 가문에 뇌물을 바쳐 소대장 지위에 오른 귀족 하나가 어지간히도 못살게 굴었다나 뭐라나.
“10군단장이 바로 도르만 가문의 당주님이잖나. 그쪽도 골치가 좀 아플 텐데.”
코첼 도르만은 드물게도 아인 크리그의 말에 시가를 문 채 진지하게 고뇌에 잠겼다.
……기분 나쁘지만, 놈의 말대로다.
최근 벌어진 집단 탈영으로 구금된 1개 소대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두고 고민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놈들을 케르베로스 여단으로 보낸다면 센티넬 가문이 용납할까?’
모르겠다. 고작 50명이니까.
센티넬 가문이 신경 쓸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크지만, 혹시 신경을 쓴다면?
결국, 그는 현재로선 가장 최선의 답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내 선에서 정리할 수 없는 문제다. 며칠만 시간을 줘.”
“그러지.”
아인 크리그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 웃었고, 그 웃음에 속이 꼬인 코첼 도르만은 한숨이 뒤섞인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밀린 보급들. 줘야지. 하지만 당장 이제까지 밀린 걸 전부 지급할 순 없다. 반년 동안 추가적으로 지급하는 형식으로 하지.”
“그건 안 돼.”
“아인 크리그!”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에 이를 악무는 그였다.
그러나, 그런 그의 부름에 아인 크리그는 더없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으니.
“왜 부르나. 도르만 중령?”
벌써 3대째 태우는 마나 궐련의 끝자락에 불을 붙인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코첼 도르만을 나지막이 응시했다.
그리곤, 속을 알 수가 없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읊조린다.
“귀관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놓고, 이 무슨 무례한 태도지?”
서늘하고도 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스친다.
이윽고, 현실을 깨달은 코첼 도르만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아 중얼거리듯 말했다.
“……알잖아. 보급을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는 걸. 나는 시키면 그냥 해야 하는 입장이라고.”
“잘 알고 있지.”
“그러면 조금 사정을 봐 줘! 아무리 네가 여단장이 되었다고 해도 그만한 보급 물자를 한 번에 보내면 나는 끝이라고! 씨발!”
동기라는 미약한 인연과 더불어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자비를 갈구한다.
코첼 도르만의 말에 아인 크리그는 피식 웃었다.
혹자는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막말로, 보는 시점에 따라서 갑은 코첼 도르만이었으니까.
센티넬 가문에게 꼬리를 흔드는 도르만 가문의 장남이 크리그 가문에게 쩔쩔맬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정보국은 옳은 선택이었어.’
구태여 목숨까지 걸고 임관지를 정보국으로 정한 부수입이 나름 쏠쏠했다.
아인 크리그는 자신을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코첼 도르만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이내 소파에 몸을 묻고는 속닥거리듯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나저나 프레이야는 잘 지내나?”
“…….”
코첼 도르만의 얼굴이 붉게 물든다.
분노, 당혹감, 부끄러움…….
복합적인 감정이 한 얼굴에 온전히 떠오른다면 저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푹 익었다.
다만, 지금은 주도권을 쥐어야 하는 입장이기에 아인 크리그는 말을 멈추는 대신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압박하는 걸 택했다.
“폰투스 군도의 간첩에게 홀려서 센티넬 가문의 정보를 술술 불어버렸다. 코첼. 자네는 여자를 좀 조심해야 할 거 같은데?”
엄밀히 따지자면 코첼 도르만과의 접점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관학교 다닐 땐 오가며 한두 번 본 게 전부였으니까.
“사관학교에서 귄터 소령에게 고백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만.”
“저런, 내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야.”
“씨발. 다 가져가. 가져가라고!”
결국 코첼 도르만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아르디티 귄터나 보급을 밀어주는 일은 그저 작디작은 헤프닝으로 넘길 수 있다.
하지만 프레이야에 관련된 일은?
목숨이 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센티넬 가문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그게 그들이 철혈의 가문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어릴 때부터 센티넬 가문과 교류가 잦았던 코첼 도르만이었기에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저게 알려지면 최소 스렌로플 국군 교도소 행이다.
때문에, 그는 차라리 살아날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는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현명한 선택이야. 도르만 중령. 세상 사람 전부가 자네처럼 말이 잘 통하면 얼마나 좋을까?”
글쎄, 말이 통한다기보다는 협박이 통할 약점을 좋아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애써 삼키는 코첼 도르만이었다.
“자. 밀린 보급 관련해서 정리해 둔 자료니까 참고해서 오차 없이 보내고. 아, 그 병력들은 언제까지 보내줄 수 있지?”
“빨라도 일주일은 걸릴 거다. 일단 나도 아버지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그건 뭐, 나도 사정을 좀 봐주도록 하지.”
“……눈물나게 고맙군.”
늘 생각하지만, 저 능글맞고도 노곤한 듯한 얼굴 뒤에는 썩어 문드러진 뱀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걸 방증하듯 오른손으로 궐련을 잡아 태울 때마다 살짝씩 드러나는 꼬리를 문 뱀 문신이 유독 거슬렸다.
그렇게 둘 사이의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아인 크리그는 재떨이에 궐련을 털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믿고 돌아가겠네. 즐거웠어. 중령.”
“…….”
이번엔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계급은 같으니, 큰 결례도 아닐뿐더러 이 정도 불만 표출은 그의 권리였다.
그걸 아인 크리그도 아는지,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곤 집무실을 나서려 걸음을 옮겼다.
“아. 까먹을 뻔했군.”
그러나 그가 막 문고리를 잡은 찰나.
“혹시 자네 아버지나 센티넬을 설득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해주는 건데.”
아인 크리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바나르간드 요새 근처에서 듀얼 넘버. 98번 재의 수확자가 관측되었다. 참고하라고.”
이윽고 문을 열고, 손까지 휘저어주며 집무실을 나선다.
하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을 시가 연기로 가라앉히던 코첼 도르만은 그의 말에 멍한 얼굴로 시가를 떨어트리고 말았으니.
“……뭐, 뭐가 관측됐다고?”
가뜩이나 과부화된 머리가 꼬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아인 크리그의 말이 뜻하는 바를 깨닫고, 다급히 외쳤다.
아니, 그건 차라리 비명에 가깝다.
“부, 부관! 부관 들어와!”
타다닥!
그의 부름에 부관이 다급히 들어와 반문하려는 찰나.
“다, 당장 보고 올려. 아니. 내가 직접 무전할 테니까 자네는 여분 보급 물자 확인하고. 또…….”
“예? 그, 그게 무슨?”
한편, 그 시각.
“……?”
복도 한쪽에서 아인 크리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아르디티 귄터는 집무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괴성에 아인 크리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신 겁니까?”
그리곤 어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반문했지만, 아인 크리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거린 채 화답할 뿐이었다.
“글쎄. 난 정정당당하게 팩트로 승부했는데.”
왜, 틀린 말 아니잖아?
13편
* * *
지크프리트 선은 바나르간드 산맥과 그 일대의 국경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요새이자 참호선이다.
장장 750km를 따라 감시 초소, 전초 기지, 주 저항선, 대(對) 괴수 고정 포대, 예비 저항선, 최후 저항선과 장병들을 위한 각종 편의시설까지.
‘괜히 100년이 걸린 게 아니지.’
아무리 군국을 제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센티넬 가문이라고 해도 부담이 갈 수밖에 없는 규모다.
오죽하면 철혈(鐵血)이라고까지 불리는 센티넬 가문이 꼭두각시 황가를 위시한 반대파의 압박, 그리고 민심 등의 외압에 종종 공사를 중단하거나 축소하기까지 했을까?
‘듣기론 원래 예정했던 공사 기한이 50년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공사 기한이 2배로 밀려버렸다.
모르긴 몰라도, 공사가 밀릴 때마다 심기가 불편해진 센티넬 가문이 날린 정적들의 무덤만 모아도 어지간한 공동묘지 하나는 완성되지 않았을까?
여하튼, 결과적으로는 대부분 완공되었다.
“그래, 대부분은.”
여기서 문제.
각종 난관과 저항에 부딪혀 50여 년이나 지연된 국가사업이 있다.
위에선 한 번 시일이 밀릴 때마다 책임자들의 모가지가 슝슝 날아다니는 상황에서 현장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뭘까?
“빠르게 공사를 진행. 어떻게든 전체적인 진척도를 끌어 올리는 겁니다.”
아르디티 귄터는 무표정한, 그러나 그 안에는 미묘한 한심함이 담긴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그 안에는 전략적 중요도나 우선도는 고려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정답이야. 소령. 사관학교에선 연신 대단하다고 지껄이는 지크프리트 선 공사의 숨겨진 이면이지.”
글쎄. 숨겨져 있나?
비단 아르디티 귄터 그녀뿐만이 아니라 지크프리트 선 일대에 배치된 군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일인데.
“바나르간드 요새는 사실상 좌천지, 형벌부대로 만들어 전투력은 씹창냈지만, 일단 어떻게든 굴러가리라는 ‘믿음’을 가진 채 바나르간드 요새가 담당하는 방어선은 제일 마지막에 공사한다라.”
그녀가 그런 사소한 반론을 삼키는 한편, 아인 크리그는 태연하게 차창 밖으로 마나 궐련 연기를 뿜어내며 읊조렸다.
“군국이여. 영원하라. 정말 대단한 조국이야.”
정말이지 감탄이 흘러나올 정도다.
200년 전에도 이딴 식으로 짬 때리기식 국가사업은 없었는데 말이지.
……아닌가?
아님 말고.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는 차창 너머 스쳐 지나가는 공사 현장을 응시했다.
공병들과 더불어 시일을 맞추기 위해 고용된 민간 건설 회사들의 인부들까지 분주하게 오가며 철골과 콘크리트로 된 흉물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럼 도르만 중령이 그렇게 당황한 이유가…….”
“일단은 놈도 특무 사관학교 출신이니까.”
일선에서 대응 가능한 트리플 넘버라면 과민반응을 할 이유 따위 없다.
하지만, 그 대상이 듀얼 넘버라면?
“바나르간드 요새가 뚫리면 그다음에는 채 완공되지 않은 지크프리트 선에서 놈을 맞이하겠지.”
거기서 막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보급이 없다면 높은 확률로 요새는 무너지고, 제10군단이 놈들을 막아야 한다.
그러면 코첼 도르만은?
당연히 최전선 행이다. 귀족이고 지랄이고 특무 장교라면 그게 의무니까.
“실전 경험이라곤 전무한 놈이니까 듀얼 넘버랑 조우하는 건 악몽이겠지. 애초에 5급도 간당간당한 놈이기도 하고.”
특무 사관학교를 나온 이들 중에서 5급은 뭐랄까.
그래, 딱 ‘졸업생’으로 인정받을만한 등급.
물론 뒷배랄지, 라인이랄지 잘 타서 보직이나 진급은 더 빠를지 몰라도 어디 괴물들이 그런 걸 신경이나 쓰던가?
막상 실전에 투입되면, 말단 이등병이든 영관급이든 뒈지는 건 똑같다.
괴물들의 죽창은 다 한방이에요.
후우―.
연달아 문 마나 궐련에 불을 붙이고 재차 연기를 내뱉은 그는 힐끔 자신을 바라보는 아르디티 귄터에게 덧붙였다.
“어차피 줘야 하는 보급이고 병력이었어. 센티넬 가문에게 눈치는 보이겠지만.”
지금에야 뒤에서 자신을 씹어댈 중령이지만, 나중에 머리가 좀 식으면 고맙다고 북쪽 방향으로 절할지도 모른다.
피차 피곤하게 시간도 안 끌어도 될 명분을 줬으니까.
“대화와 설득? 그런 걸 왜 해?”
보급하고 병력을 주기 싫다고?
그럼 죽어.
“……그래도 그.”
물론, 아르디티 귄터는 참 군인답게 ‘그게 맞나?’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정보국에서 7년간 배운 게 있다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보통 밝은 미래보단 좆되는 미래를 보여줘야 더 생산성이 있게 움직인다는 진리였다.
귀족이라고 다를까.
글쎄, 아닐걸?
“요새까지 얼마나 걸리지?”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끝나갈 무렵, 아인 크리그는 운전대를 잡은 상병에게 물었다.
“1시간 정도 걸릴 거 같습니다.”
어느새 지크프리트 선의 관문 초소가 눈에 들어온다.
차량이 관문 초소에 다다른 직후.
어딘가 느껴지는 위화감에 아인 크리그는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귄터 소령.”
“예.”
위화감을 느낀 건 아르디티 귄터 역시 매한가지.
둘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끼이익―.
관문에 차가 멈춰서기 무섭게 내린 둘이 마주한 건, 눈앞에 차가 오든 말든 혼란에 빠진 초병들의 모습이었다.
“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신 차려! 지금 10군단 예하에서 여단이든 사단이든 투입한다잖아!”
“하, 하지만!”
“하지만이고 지랄이고! 특무 장교들이 알아서 하겠지!”
“공사도 다 안 된 이 흉물 덩어리들이 괴물들을 어떻게 막습니까!”
불과 몇 시간 전, 군인의 덕목인 귀찮음이 팍팍 묻어나는 목소리로 그들을 통과시켰던 병사들이다.
이젠 사색이 되어 뛰어다니는 꼴이 뭐랄까.
구석에 몰린 쥐 같았다.
문제라면 저게 좋으나 싫으나 우리 쥐새끼라는 점이리라.
치익, 습―.
아인 크리그는 새 마나 궐련을 입에 물었다.
그러곤 아르디티 귄터에게 눈짓했다.
뭐, 저 병사들도 중령보다는 소령이 상대하기 편하지 않겠나.
“제13 특수 독립여단의 귄터 소령이다. 무슨 일이지?”
“허, 허업!”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생각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그러나 그런 아인 크리그의 감흥은, 저들끼리 눈치를 보다가 삐걱거리며 입을 여는 병사들의 목소리에 차게 식어버렸으니.
“소,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무슨…….”
“바, 바나르간드 요새에 듀얼 넘버 급 괴물이. 하,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가…….”
더 들을 여유 따위 없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다시 차에 올라탔고, 아인 크리그는 운전대를 잡고 벙쪄 있는 상병의 등받이를 발로 걷어차며 외쳤으니.
“뭐해?”
“……예? 에?”
“씨발! 너희는 바리게이트 치우고! 상병! 너는 빨리 밟아!”
씨발. 잿더미 교단 이 미친 새끼들.
‘한 마리가 아니라 세 마리였나.’
이번만큼은, 아인 크리그 역시 입술을 잘근 깨물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간 석화증보다 폐병이 더 빨리 걸리겠군.”
그는 재차 마나 궐련을 물었다.
지금은 한 모금도 아까웠으니까.
* * *
바나르간드 산맥은 드높은 산세와 험준한 지형으로 군국의 북부를 담당하는 천혜의 요새다.
오죽하면, 과거 제국에서 기사들을 태우고 대륙을 종횡하던 명마를 개량해서 만든 군국의 군마들조차도 버거워할까.
때문에, 요새를 직접 마주한 이들은 그 누구라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 요새가 군국의 200여 년을 지탱할 수 있었는지.’
드넓은 산세를 따라 밀려오는 무수한 군세들을 수십, 수백, 수천 차례 마주하면서도 어떻게 무너지지 않았는지.
“아, 아아―.”
그렇기에 제13 특수 독립여단의 약체화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군국의 군인들은 생각했다.
‘별일 없겠지.’
‘막을 수 있겠지.’
‘설마, 무슨 일이 나겠어?’
그건 관성이었고, 나아가 안일함에 젖은 타성이었으며, 권력의 눈치를 보는 비겁함이었다.
그리고 대가를 마주한 건, 잔혹하고도 불합리하게도 타인에 의해 그 비루한 현실에 내몰린 케르베로스 여단의 군인들이었다.
“……못 막아. 못 막는다고.”
다급히 요새 한편의 망루에 올라선 1중대장. 멘하른 대위는 탄식인지, 원망인지, 그마저도 아니면 절망인지 모를 읊조림을 내뱉었다.
평소였다면, 그나마 군기가 잡혀 있는 1중대 예하 장교 중 누구라도 넋이 나간 그를 부여잡고 명령을 내려달라고 외쳤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왜. 어째서.”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아니, 차라리 막아 볼 생각이라도 했던 멘하른 대위는 그나마 정신을 똑바로 부여잡고 있는 인간이었다.
대부분은 손을 벌벌 떨며, 요새 밖에 밀려오는 잿빛의 파도를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잿, 잿더미가 몰려옵니다.”
누군가 내뱉은 지 모를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내뱉은 게 입김인지, 생의 마지막 탄식인지 모를 참담함이 모두를 휘감았다.
―크르르르.
―아우우우우우우!
수풀 사이로 트리플 넘버 822번. 잿더미 늑대 수백 마리가 썩어 문드러진 회색 동공을 번뜩거리며 수풀을 거닌다.
―꾸어어어. 꾸어어어어어!
사슴의 머리에 침팬지의 몸을 붙여 놓은 듯한 외형.
누린내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며, 멋대로 자라난 손톱 끝에 묻은 썩은 살점을 혀로 훑는 괴물. 트리플 넘버 938번. 노 디어.
―아흑, 아흐흑.
언뜻 인간의 외형이지만, 팔이나 다리가 하나 더 달려 있고 뭉개진 얼굴에서 고름을 뚝뚝 떨어트리며 다가오는 트리플 넘버 899번. 도플갱어.
“……일대에 있는 놈들은 다 몰려왔어.”
“미친…….”
괴물들도 제각기 영역이 있고, 때때로 저들끼리 싸우고 죽이곤 한다.
지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트리플 넘버라면 더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다.
즉, 원래라면 넘버도, 서식지도 다른 저 괴물들이 하나로 뭉쳐 몰려오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한다.
그래, 그게 상식이었다.
―크륵, 끼이익?
썩어 문드러진 나무들을 기워 만든 허수아비의 외형을 한, 족히 다른 괴물들의 두 배는 될법한 괴물.
“저게 듀얼 넘버. 98번 재의 수확자.”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
언제 뒤집어쓴지 모를 인간의 썩어 문드러진 살점을 거죽처럼 눌러 쓴 두 마리는 요새를 응시했다.
안광을 번뜩이고, 입을 벌린다.
그리고, 마침내 포효하니.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끼기기기기긱!
외치는 것 같지 않은가.
저 나약하고, 비루하며, 가련한 인간들을 찢고 죽이라고 말이다.
“하, 하하.”
혹자는 웃었고.
“주,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혹자는 절망 속에서 도망쳤으며.
“……빌어먹을. 어제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
혹자는 그저 체념했다.
‘후퇴해야 한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멘하른 대위. 그는 스스로가 어느 쪽에 속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뇌리에 가득한 건 살아야 한다는, 그리고 살려야 한다는 간결하고도 강렬한 의지.
“…….”
입을 열어 도망치라고 외쳤다.
아니, 외치려고 했다.
그 순간, 그의 어깨를 부여잡는 두텁고도 어딘가 따스한 손길이 아니었다면 그는 도망치라고 외쳤으리라.
“두렵습니까?”
단 한마디. 그 단 한마디면 벌벌 떨며 소총을, 포대를 쥐며 개처럼 뒈져나갈 부하들을 살릴 수 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물러서면 안 됩니다.”
귓가를 스치는, 평안하면서도 다정한, 그러나 섬뜩하면서도 광신적인 목소리.
“전열을 정비하고, 놈들을 막아냅니다.”
리어 융은 손에 쥔 묵주를 굴리며, 며칠 만에 마주하는 반갑고도 역겨운 죄악의 짐승들을 마주하며 히죽 웃었다.
“Deus vult(그분께서 전쟁을 원하신다).”
잊혀진 주신께 속죄를 바칠 시간이다.
14편
* * *
“그게 무슨.”
개소리입니까―라고 반문하려던 멘하른이었지만, 그도 엄연히 이 바나르간드 요새에서 몇 년이나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머잖아 깨달았다.
리어 융이 도망 대신 교전을 택한 게 단순히 신앙이랄지, 군율이랄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놈들이 성벽을 넘는 순간, 도망친다고 한들 살아서 지크프리트 선까지 다다를 수 없다.’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현실과 괴리를 불러일으킨다.
멘하른 대위는 뒤늦게 현실을 직시했다.
리어 융 상사의 말이 백번 옳다.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고?
그거야말로 개죽음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군마조차 배를 곪는다.
병력을 수송할 트럭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마저도 기름이 없다.
지크프리트 선까지 달려서 도망친다고?
글쎄. 늑대들에게 뒤통수가 물려서 한 끼 간식거리로 전락하는 미래가 눈앞에 보이는데.
‘정신 차리자.’
듀얼 넘버가 두 마리. 최악의 상황인 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도망이라는 선택지가 뇌리에서 사라지자, 그는 냉정을 되찾고 전장을 응시했다.
‘상부에 지원 요청은 보냈다.’
진즉에 교체했어야 할, 그러나 매번 우선순위가 밀려 틈만 나면 먹통이 되는 무전기가 보여준 기적.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큰 기대는 안 됐다.
‘제때 지원이 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애초에 지원을 보내긴 할까?’
언뜻 보기엔 지나치게 최악을 상정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있었다.
‘우리의 보고를 믿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케르베로스 여단이기 때문은 아니다.’
……물론, 그 이유도 조금은 있겠지.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적이 듀얼 넘버이기 때문이다.
완편된 여단이라면 모를까.
기껏해야 일개 대대급 전력만 온존하고, 특무 장교라곤 6명. 그마저도 주력인 아인 크리그 중령과 아르디티 귄터 소령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다.
지원을 보낸다고 한들, 도착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우리가 보기에도 절망적인데. 10군단 참모들은 더 하겠지.’
미완공이라도 지크프리트 선에서 막아내는 게 지원을 보냈다가 도로에서 적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백배 낫다고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거다.
우스운 건, 멘하른 대위 그 자신조차도 그편이 저 빌어먹게도 역겨운 괴물들을 막아내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된다는 점.
‘달라지는 건 없어.’
이 상황이 불합리하다든가, 비루한 죽음에 두려워한다든가.
그런 푸념은 뒤로 미뤄둔다.
단지, 눈앞에 있는 적들에게 빌어먹게도 발버둥 치는 게 우선일 뿐.
“대, 대위님.”
“전원 위치로.”
“하, 하지만……!”
“위치로!”
일갈을 내뱉자, 당장이라도 도망칠 듯했던 대대원들 역시 잔혹한 진실을 인지하기라도 한 듯이 자리에 섰다.
포문을 열고, 소총을 쥐고, 성벽 아래 들끓는 무수한 적들을 바라보며 침을 삼킨다.
“……정신 차려. 귄터 소령님이 곧 오실 거다.”
제1중대장이자, 전 대대장 대리로서 전열을 수습할 수 있는 건 오직 멘하른. 그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는 더없이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스스로도 믿지 않을 희망을 지껄일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다.
아르디티 귄터가 존경받는 상관인 것과 별개로 그녀가 온다고 하더라도 듀얼 넘버 두 마리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그러나 그들은 싸워야 했다.
비루한 희망일지라도 그것에 몸을 채찍질해야 찰나라도 더 오래 숨이 붙어 있을 수 있기에.
“오, 옵니다!”
누군지 모를 한 병사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듯 외쳤다.
―아우우우우우!
죽어 썩어 문드러진 잿빛 육신을 꿈틀거리며, 단지 인간에 대한 증오만을 품은 늑대들이 울부짖는다.
그건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포문.
전장에 섬뜩한 안개가 드리우고,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서로에 대한 무수한 살의를 터트렸다.
“쏴! 갈겨버려!”
콰아아아아아앙!
남아있는 모든 포탄을 쏟아낸다.
잿더미 늑대든, 도플갱어든, 노 디어든.
압도적인 화력을 마주한 괴물들의 팔다리가 허공에 날아다니고, 핏물 대신 잿물이 흰 대지에 흩뿌려진다.
“으아아아아!”
“뒈져어어!”
탄환이 성벽 아래로 무수하게 흩뿌려진다.
동토를 따라 길게 이어진 두꺼운 성벽에 발톱을 박아 넣고 서로를 짓밟은 채 기어오르는 괴물들의 탑이 무너지고 세워지기를 반복한다.
“Mors tua, vita mea(적의 죽음이 나의 삶)!”
리어 융의 검은 군복이 꿈틀거리고, 그는 두 주먹에 묵주를 감은 채 기어오르는 늑대들의 머리를 터트렸다.
잿물이 뺨을 적시고, 그의 주먹 사이로 흘러 검은 셔츠를 더럽힌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그 거구의 육신을 움직여 잊혀진 주신의 권좌에 더 많은 속죄를 바칠 뿐.
“어, 어어?!”
성벽 아래로 총구를 겨누던 한 병사가 노 디어의 손에 얼굴이 잡혀 그대로 아래로 추락한다.
콰드드드드득!
괴물들의 살덩이에 파묻힌 육신은 섬뜩한 피륙음만을 남긴 채 사그라들고, 그 모습을 본 한 일병은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아, 아아―.”
승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건 개죽음이다. 개죽음이라고.
듀얼 넘버는 아직 전장에 합류하지조차 않았는데, 저 저주받은 허수아비들은 안광을 번뜩이며 너덜거리는 시체를 덜렁거릴 뿐인데.
“도, 도망쳐야…….”
뒷걸음질을 쳤다.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그는 성벽 반대편에 다다라, 더듬거리며 계단으로 걸었다.
혼자라도 도망쳐야 한다.
그러나 그때.
콰아악!
그의 멱살을 틀어쥔 우악스러운 손길.
흐려진 시야가 돌아오고, 그는 멍한 눈으로 잿물에 뒤덮인 적발의 사내와 마주한다.
“두 가지 선택지를 주겠다. 일병.”
실눈에 가까운 눈을 꿈틀거리며, 더없이 싸늘한 눈동자로 그를 내려본다.
“탈영하며 속죄하지 못하는 짐승으로서 살아가든가.”
그리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여기서 죽음으로써, 잊혀진 주신에게 속죄하라.”
군종 사제의 업무는 특무 장교들의 석화증을 관리하고, 나아가 감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째서 대부분의 군종 사제들이 일반 병사들에게 경외받고, 나아가 두려움을 사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전장에서의 후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속죄이기에.
“선택하라. 죄인인가.”
멘하른 대위의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아니면 속죄인가!”
현실적으로 그들의 후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설령 후퇴가 가능하다고 한들, 리어 융은 그것을 허락할 생각이 없었다.
“히, 히익!”
도망치려던 일병은 사색이 되어 총을 쥐었다.
그리고, 리어 융은 기꺼이 그를 최전선이라고 부를만한 성벽까지 등을 밀어주곤 머리를 내미는 늑대를 군홧발로 밟아 터트렸다.
콰드드드득!
잿물이 튀어 일병의 뺨에 튀고, 리어 융은 오줌을 지리는 그를 지나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많은 이들이 죽을 거다. 늘 그러했듯이.
그만큼 잊혀진 주신은 기억하리라.
“속죄를 받으소서. 잊혀진 주신이시여.”
리어 융은 더없이 신실한 미소를 지으며, 적의 숨통을 끊었다.
* * *
“씨발, 씨발, 씨발……!”
총알을 장전하고, 쏜다.
정비 불량으로 총이 나가지 않으면, 대충 성벽 위에 널브러진 총을 주워서 다시 쏜다.
주인 잃은 총은 많았다.
그만큼 뒈져나갔으니까!
하지만, 적들은 줄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사방에서 불을 뿜는 포격으로 놈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도 찰나일 뿐.
포탄의 수가 줄수록 놈들은 더욱 높게 서로를 타고 올라섰고, 결국 포탄이 모두 떨어지자 남은 건 처절한 비명뿐이었다.
―끄르르르륵!
사슴 머리에 침팬지의 육신을 가진 노 디어의 뿔에 꿰뚫려 절명한 시체가 반으로 갈라져 붉은 피를 흘린다.
늑대들이 게걸스럽게 시체를 주워 먹고, 인간의 형상을 한 추악한 도플갱어들은 엉망인 얼굴을 가리겠다는 듯 손톱으로 병사들의 얼굴을 찢었다.
“아, 아아.”
구석에 몰린 병사는 눈물을 흘리며 연신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나가는 총알은 없었고, 그의 앞에는 회색빛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늑대가 비웃듯이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죽는다. 죽는다. 죽는다.’
뇌리에 가득 찬 생각을, 두려움을 읽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더 이상 살육에 대한 갈증을 갈무리할 수 없던 걸까.
―커허어어엉!
늑대는 안광을 번뜩이며 병사를 향해 그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고.
“으, 으아아아아악!”
다가올 죽음에 그가 괴성을 내지르던 찰나.
서걱―. 툭.
촤아아아아악!
뿜어진 눅진하고도 역겨운 잿물이 병사의 얼굴에 흩뿌려진다.
그러나 그건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걸 깨닫고 눈을 뜬 순간, 그의 두 눈을 가득 채운 건 늑대의 누런 이빨 따위가 아닌, 복슬복슬하고 흰 꼬리였으니.
“……찝찝함.”
랑예 중위. 그녀는 뺨에 튄 잿물을 닦아내며, 미간을 좁히곤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심하게 그를 지나쳤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알았다.
‘우리가 버티고 있는 게 아니야.’
포탄이 떨어져서 포대가 침묵당하고, 태반이 전의를 잃은 오합지졸의 병사들이 요새를 지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부상병들 일단 계단으로 밀어 넣어!”
“씨발! 정신 차려! 오줌이나 질질 싸고 있으면 어차피 뒈진다고!”
“얀센! 일단 이 병신부터 뒤로 보내!”
멘하른 대위 예하 1중대는 그나마 전투다운 전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
그들 역시 점차 성벽을 넘는 괴물들에게 무력하기는 매한가지.
그렇다면 과연 이 성벽을 지탱하는 건 누구인가?
인간이되 인간을 뛰어넘었으며, 과학의 발전과 마나의 오염으로 시한부가 되었음에도 그 계보를 이어오는 초인들.
“잊혀진 주신께서 더 많은 속죄를 바라신다! Mors tua, vita mea(적의 죽음이 나의 삶)!”
콰드드드득!
거구의 육신을 이끌며, 말 그대로 괴물들을 짓이기는 군종 사제 리어 융 상사.
“…….”
귀찮은 건지, 아니면 언제 도망칠지 고민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적들을 베어 넘기는 랑예 중위.
―타아아앙!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를 곳에서,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괴물들을 저격하는 유진 하일트 소위.
“저, 저게…….”
특무 장교. 바로 그들이었다.
“……버, 버틸 수 있나?”
누군가 내뱉은 말은 희망이라는 역병이 되어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웠다.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여긴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다.
200년 동안 단 한 번도 뚫리지 않은 천혜의 요새.
이대로 버틴다면,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
콰드드드드득!
“아?”
애써 용기를 낸 병사는 사기를 끌어 올리려 한쪽 팔을 뻗었다.
그 순간, 뻗어지는 촉수가 그의 팔을 통째로 날려버리지만 않았더라면, 썩 괜찮은 외침이 되었으리라.
“흐, 흐흐, 흐흐흐.”
어깨가 통째로 뽑혀 악문 이빨 사이로 허탈한 미소가 스친다.
그리고, 그는 직감했다.
“졌―.”
물론, 그의 마지막 말은 듀얼 넘버.
콰드드드득!
98번 재의 수확자의 촉수에 의해 그대로 침묵당했지만 말이다.
툭, 투둑―.
핏물이 떨어지고, 순식간에 사람 하나를 착즙한 재의 수확자는 성벽에 그 두꺼운 다리를 박아 넣으며 포효했으니.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
비로소, 전장에 절망이 자리했다.
15편
* * *
과거, 그러니까 200년 전.
천년제국이 대륙을 호령하고, 이젠 구시대의 망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이 실존했던 시대.
초인들이라고 불리었던 이들이 있었다.
마나, 신성력…….
각기 그 이름을 붙였던 미지의, 그러나 분명히 실존하는 인외의 힘을 다루던 그들은 제각기를 기사, 사제, 마도사라고 부르며 찬란했던 천년제국의 역사와 함께했다.
비록 천년제국의 역사는 200년간 무수히 많은 야사와 추측, 그리고 미약한 자료로 그 신뢰도를 의심받곤 한다.
당연한 일이다.
기사 한 명이 듀얼 넘버 수십 마리를 도륙한다느니, 마도사 한 명이 싱글 넘버를 단신으로 토벌했다느니 하는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태반이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기사와 사제, 마도사가 실존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군국의 특무 장교라는, 그들의 명백한 후계자들이 존재하니까.
“……다 끝이야.”
그들의 무력은 마이스터들이 불러일으킨 기술 발전으로 방아쇠 한 번에 적을 죽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에도 존속했다.
당연한 일이다.
학자들이 말하길, 과거와 비교해서 그 질이 수십 배는 낮아졌다고 하는 그들조차도 일반인들이 보기엔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을 소유하고 있는, 규격 외의 전력이었으니까.
“저, 저런 걸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때문에, 케르베로스 여단의 군인들도 무심결 기대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작 4명의 특무 장교.
그마저도 듀얼 넘버 두 마리를 상대로 3급은 고사하고, 4급 특무 장교 한 명이 전부이며 나머지 1명은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전장.
“흐, 흐흐. 전부 다 뒈질 거라고.”
그런데도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되고도 헛된 기대를 말이다.
―끼이이이이이이!
소름이 끼치도록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허수아비의 모습을 한 거구의 괴물은 미처 총구를 겨눌 새도 없이 쌓여 있는 짐승 사체 무더기를 타고 성벽 위로 기어올랐다.
“마, 막아! 막으라고!”
“씨발! 포격은?!”
“포탄이 다 떨어진 지가 언젠데!”
“포대도 엉망이야!”
멘하른 대위를 위시한 1중대가 다급히 손에 쥔 소총들로 집중 사격을 가했다.
타앙!
타다당!
하지만 총탄은 언제 죽어 놈이 뒤집어썼는지도 모를 낡디낡은 인간의 거죽만을 꿰뚫을 뿐, 놈의 움직임은 조금도 막지 못했다.
“사, 상사님!”
“…….”
리어 융조차도 막상 그런 모습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 역시 한낱 인간이기에.
제아무리 잊혀진 주신에 대한 속죄를 부르짖으며, 괴물들을 도륙한다고 한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선 그조차도 무력해진다.
“…….”
“……아.”
본래라면 성벽에 고정된 포대가 뿜는 화력에 가까이 오지도 못했어야 할 괴물들.
그러나 200년간 의도적인 무관심에, 혹은 무의식적인 방관에 영락해버린 요새는 과거였다면 코웃음 쳤을 듀얼 넘버에 의해 범해지고 말았다.
콰드드드득!
마침내, 놈들이 성벽의 끝자락에 그 역겨운 다리와 촉수를 걸친다.
이어 안광을 번뜩이고, 포효하니.
―끼에에에에에에에!
인지를 넘어선 죽음에 대한 공포는 그들이 군인으로서 학습하고, 지켜왔던 모든 가치를 부정한다.
“으아아아아아!”
“도망쳐!”
“히, 히이이이익!”
그걸 방증하듯, 그나마 군율을 지키던 제1중대가 제일 먼저 무너졌다.
손에 쥔 소총을 떨군다.
어깨에 들쳐 매고 있던 부상자를 버리고.
떨어지면 최소 어디 하나 부러질 성벽 높이에서 그대로 뛰어내려 절뚝거리며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끝이군.”
멘하른 대위는 그런 중대원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과 함께 가슴 주머니를 열어 구겨진 담뱃갑을 꺼냈다.
신도 참 기구하시지.
어쩜 딱 돗대만 남겨 두셨을까.
멘하른 대위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는, 그걸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아니지. 오히려 1중대라도 되니까 도망이라도 치는 건가.”
떨리는 손으로 애써 붙인 담배 연기 너머, 도망도 치지 못한 채 그저 벌벌 떨고 있는 나머지 중대원들이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문득, 그 아수라장 사이 유일하게 홀로 서 있는 적발에 거구의 남자. 리어 융 상사가 눈에 들어왔다.
“싸우겠다고. 기어이 저 괴물과.”
저걸 용기라고 봐야 할지, 만용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그마저 아니면 광기인가?
……이젠 아무렴 상관없다.
그는 무너진 성벽 어귀에 털썩 주저앉아, 이름 모를 시체에 어깨를 맞댄 채 멍하니 담배를 피웠다.
곧 다가올 죽음 앞, 최후의 만찬이라도 즐기듯이.
문득, 피식 웃었다.
“마도 장교는 이 상황인데도 나와보지도 않는군.”
늘 그렇듯이 그 골방에 박혀서 뭐가 뭔지도 모를 것들이나 씨발씨발거리면서 만들고 있겠지.
키 작고 성격 더러운 놈.
어쩌면 이미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전우애 따위 없고, 제멋대로인지라 그 아르디티 소령마저도 포기했으니까.
아니, 그녀의 경우엔 동정이라고 봐야하나.
‘……그나저나, 저런 괴물을 마주한 채로 살아 돌아온 건가. 아인 크리그는.’
나무인지 덩굴인지, 촉수인지 모를 괴상한 걸로 사람을 야채 주스 만들 듯이 착즙해버리는 괴물을 상대로 미끼가 되어 따돌려?
제정신은 아니다. 확실히.
콰아아아앙!
몇 차례 폭음이 울렸고, 이내 멘하른의 앞으로 리어 융의 몸이 내리꽂혀 몇 차례 굴렀다.
“쿨럭!”
190cm가 넘는 키가 무색하게도 그는 몸을 웅크린 채 바닥에 토해내듯 피를 뿜었다.
무리도 아니다.
오히려, 일격에 죽지 않는 게 용하다.
―끼기기기기기!
놈은 일격에 날려버린 리어 융은 관심도 없다는 듯 기괴하게 웃으며 곁에 있는 군인들을 집어 그대로 자기 몸에 쑤셔 박았다.
“으, 으아아! 하지마! 하지마아아아! 끄아아아아아아악!”
꼬챙이가 인간을 꿰뚫는 걸 본 적 있는가?
되도록 보지 않기를.
더럽게 역겹거든.
멘하른 대위는 담배 연기로 억지로 눌러 담았던 역겨움에 그만 토를 쏟아냈다.
“구에에엑! 습!”
엉망이다. 엉망진창이다.
그가 무심결 그렇게 중얼거리는 찰나.
문득, 그의 앞을 지나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보인 건 리어 융이었다.
터벅, 터벅―.
다리를 다친 건지, 아니면 복부를 강타당한 충격인지.
그는 한쪽 손으로 배를 부여잡은 채 그저 앞으로 걸었다.
“Memento…….”
무어라 중얼거리는 목소리.
귀를 기울이자, 그는 아직 성한 왼쪽 손으로 끝없이 묵주를 굴리며 중얼거린다.
“Memento mori……. Memento mori…….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마치 스스로 세뇌라도 시키듯이 읊조리는 그 광기에 입가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멘하른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바짓단을 부여잡았다.
콰악!
평소였다면 무력한 그의 손에 멈추지 않았을 거구가 일순간 바로 섰다.
덕분일까.
멘하른 대위는 반문했다.
“왜 싸우십니까?”
그건 차라리 자조였고, 나아가 비웃음이었다.
“알잖습니까. 우린 졌어.”
그나마 군인으로서 남아있던 마지막 한꺼풀 자존심이 벗겨지고, 그는 마침내 완전한 날것의 자괴감을 그에게 토해냈다.
“기껏해야 30분. 그게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버틴 결과라고. 모르겠어? 이 광신도 새끼야?”
죽음을 기억하라고?
“군국이 우리를 기억한다고?”
글쎄. 준 형벌부대라고 취급받는 우리가?
차라리 좌천된 꼴통들한테 줄 하찮은 월급이라도 아꼈다고 축배라도 들지 않을까?
“하, 하하. 인정해. 우린 다 개죽음이야. 씨발. 차라리 소령님이 없어서 다행이지. 그분은 여기서 이렇게 개죽음당할 분이 아니니까.”
크리그 따위 좆도 상관없다.
적어도 1중대, 아니. 1중대장인 그의 진짜 상관은 오직 아르디티 귄터 소령밖에 없으니까.
그래, 차라리 다행이다.
그 허울뿐인 크리그가 온 지 며칠 만에 요새가 씹창이 났으니, 적어도 귄터 소령님이 모든 책임을 지진 않으리라.
그의 성토가, 진심이, 나아가 울분이 조금이나마 리어 융에게 닿은 걸까?
“흐.”
조용히 서서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리어 융은 어느 허공을 응시했다.
“……!”
두 눈이 찰나지만 커졌다.
무엇을 본 건지도 되묻기 전,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리곤, 그의 말에 화답했다.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하지만 그 말은 그것에 대한 화답이 아닌, 단지 그가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일 뿐.
팍!
잡고 있던 다리가 앞으로 내디뎌진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을 포위하다시피 한 괴물들을 상대로 당당하고도 오롯이 선 리어 융은 천천히 걸치고 있던 군용 코트를 벗어 던졌다.
촤르르르르륵!
그의 주먹에 감겨진 묵주에 묻은 핏물 같은 잿물들이 뚝뚝 떨어지고, 그는 새하얀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음 지으며 일갈하니.
“Caedite eos. 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모두 죽여라. 주신께서 그들을 가려내리라)!”
“미, 미친 새끼.”
멘하른 대위는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리어 융 상사는 그저 신앙에 미친 새끼였다는 걸 말이다.
“하하하하하하하!”
광신적인 믿음 속에서 주먹을 휘둘러 짐승들을 죽인다.
하나의 죽음이 하나의 속죄일지니.
―깨개개개갱!
누런 이빨을 들이미는 늑대의 목덜미를 잡아 비틀고.
―그어어어어!
들이미는 뿔을 뽑아 놈의 눈에 박아 넣고.
―아, 아아아아아.
삿된 짐승 주제에 인간을 흉내 내는 미물의 목을 뽑아 터트렸다.
콰드드득!
어깨가 늑대의 이빨에 물어 뜯겨도.
푸우욱!
허벅지를 뿔에 찔려도.
촤아아아아악!
뺨이 괴물의 손톱에 베여도.
“Mors tua, vita mea(적의 죽음이 나의 삶)!”
리어 융은 단지 앞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거대한 속죄 앞에 서기 위해, 피를 흘리며 적을 향해 다가간다.
타아아앙!
때때로 그의 등을 노리는 늑대의 머리가 총탄에 꿰뚫렸다.
서걱―. 툭!
그의 심장을 노리는 촉수가 검에 의해 베어지고.
―끼기기기기기기.
마침내, 거대한 허수아비 앞에 선 리어 융은 그 어느 때보다도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내려보는 괴물을 향해 외쳤으니.
“와라! 이 비루한 짐승아!”
―끼에에에에에에에!
일전, 그들을 노렸던 것과 닮은 듯 다른 거대한 덩굴 촉수들이 그를 향해 미친 듯이 쇄도한다.
“큭!”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멘하른 대위는 무심결 눈을 감았다.
당연한 일이다.
양팔을 벌린 채 듀얼 넘버를 향해 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누가 보더라도 자살에 가까웠으니까.
그러나 그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군.”
멘하른 대위를 비롯해 전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군인들의 귓가에 낯선, 그러나 완전히 처음 듣지는 않는 목소리가 스쳤다.
아니, 그들은 알고 있었다.
책임감이나 카리스마 따위 없는 노곤한 듯 나른한, 불쾌한 목소리.
“……아인 크리그?”
어느새 눈을 뜬 멘하른은 나지막이 읊조렸고, 바로 그 순간,
계단 아래까지 내려간 괴물들을 짓밟고, 허공에 뜬 검은 머리의 남자는 등에 멘 검은 케이스를 딸깍 열며 덧붙인다.
“귀관은 내가 본 군종 사제 중에서.”
이윽고 허공에서 분리된 케이스 안에서 드러난 대검(大劍)을 쥐었다.
“제일 미친놈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리어 융은 더없이 상쾌한 미소를 지은 채 화답했으니.
“……빨리도 오십니다. 하하. 씨발.”
그게, 그가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16편
* * *
‘최악이군.’
아인 크리그는 뺨을 스치는 바람 너머, 자신을 향해 뻗어지는 촉수를 마주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200년간 뚫리지 않았다는 말이 무색하게 성벽 위에 괴물들이 올라와 있었고, 살아남은 병력은 어림잡아도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
중대보다 조금 많은 정도라니.
사실, 이 정도도 대단하다.
여단임에도 일개 대대 정도의 전력.
박살 난 보급 상태.
무너진 군 기강과 사기.
그 모든 악조건이 있음에도 30분이나 버틴 거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케르베로스 여단은 엉망임에도 본래의 임무를 최대한 수행했다.
그러면 남은 건 단 하나.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만드는 것.
“중령님!”
그보다 한발 늦게 합류한 아르디티 귄터의 목소리가 들린다.
알고 있다.
허공에 뜬 그를 향해 뻗어진 재의 수확자의 무수한 촉수.
하나하나가 위협적이다.
당장이라도 그의 폐부를 꿰뚫고, 심장을 찢으며, 육신을 탐할 부정한 짐승의 수족.
“하아.”
나지막이 숨을 내뱉는다.
긴장감이나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 자신이 무슨 대단한 서사시의 주인공이랄지, 세기의 영웅이랄지 같은 철없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으니까.
인간은 죽는다.
엘리트든, 범인이든, 반푼이든.
단순히 예정된 수명이랄지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총알에 머리가 뚫리면 죽는다.
누구나 피를 과하게 흘리면 죽으며.
누구나 숨이 막히면 뒈진다.
그걸 방증하는 시체들이 즐비한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그였다.
장기가 바닥에 떨어져 진흙 속에 뒤엉키고, 팔다리가 날아다니며, 정상인이 미치고 미친놈이 더 미치는 전장.
200년 전에도, 200년을 지나온 지금도 그는 그 전장에 서 있었다.
‘그게 뭘 뜻하겠어?’
여기서 제일 미친놈은 바로 그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그래, 내가 이 구역 미친 새끼다.
그렇기에 그는 어설픈 만용과 필요 이상의 불안 따위 느끼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저 새끼가 좆같은가, 아닌가지.’
그런 점에서 저 괴물은 합격이다.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게 좆같거든!
서걱―.
일반적인 검보다 2배는 넓은 대검을 휘둘러 휘몰아치는 촉수를 베어 넘긴다.
카가가가강!
혹은 흘리든가.
타닥!
성벽 위에 발을 디디고, 곧 쐐기처럼 내리꽂히는 놈의 다리를 피해 기절한 리어 융을 둘러업고 멘하른 대위와 합류한 아르디티 귄터에게 던졌다.
퍼어억!
거구를 힘겹게 받아낸 그녀는 그의 부축을 곁에서 얼빵한 얼굴로 서 있는 멘하른 대위에게 넘기는 한편, 몸을 돌려 다시금 재의 수확자에게로 향하는 아인 크리그에게 반문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보면 모르나.”
“미치셨습니까?”
아르디티 귄터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앞은 죽음뿐이다.
그들이 달려온 건 단지 자그마하게라도 남아있을 생존자를 수습하기 위해서지, 200년 전의 기사처럼 허황된 전설을 쓰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아인 크리그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손에 쥔 대검을 바닥에 끌며 나지막이 중얼거릴 뿐.
“5분.”
속삭이듯 읊조렸지만.
“지금이라면, 전부 쏟아내도 괜찮겠지.”
적어도 그녀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무슨 소리를.’
반문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다.
“……여단장.”
“아인 크리그.”
처절하게 싸워서, 비루하게 숨어서, 비겁하게 도망쳐서.
그 방식이 어떻든 숨이 붙어 있는 모두가 성벽 위에 홀로 선 그를 바라보았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이제까지 언뜻 노곤하며, 나약하고, 무책임해 보이던 그의 분위기가 일순간 뒤바뀌었다는 걸.
‘200년.’
많은 게 바뀌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년제국은 무너졌고, 인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이종족들이 절멸당했다.
살아남은 인류조차도 그저 대륙의 끝자락에 비루하게 생을 연명하며 자신들의 울타리를 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을 생각뿐.
하지만 그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다름이 아닌, 스스로 기사라고 부르짖는 이들의 수준이었다.
“석화증 따위가 문제가 아니지.”
땀에 전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전장에 선 그는 한심하다는 듯, 한편으론 씁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놈들은 기사도, 마도사도 아니야.”
그저 군국의 군인으로서, 과거의 편린을 미약하게나마 갈음하며 연명할 뿐인 열화판이다.
기사도도 없고, 마도사로서의 탐구욕도 없고, 군부라는 틀에 갇혀 정치나 해대는 꼴이 얼마나 한심했던가?
한때는 그들을 경멸했다.
군부에서 촉망받는다는 기사 장교가 200년 전의 지방 말단 기사 수준에 불과하고.
마도 장교라고 불리는 이들은 삶의 절반도 채 살아가지 못한 채 괴물로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비루한 삶이었으니.
“그들의 탓이 아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인 크리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만하고, 경솔했으며, 나아가 배은망덕했는지를 깨달았다.
“모든 건 우리가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니까.”
200년 전의 기사는 죽지 못했고, 200년 후에 그 패배를 곱씹는다.
천년제국의 패배는 후대에 무엇을 남겼나.
그건 굴욕이며, 패배감.
학습된 공포이며, 태생부터 정해진 한계.
“보여주지.”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여전히 기사이기에, 불완전하고 나약한 몸으로서도 검을 쥔 채 당당하게 적을 마주한다.
자신을 보는 이들에게 선언한다.
이것이 너희가 잊어버린, 잃어버린, 외면한…….
“진짜 기사를.”
아인 크리그는 자신을 내려보는 두 마리의 듀얼 넘버, 98번 재의 수확자들을 묵묵히 응시했다.
툭, 투둑―.
이름 모를 병사의 살점을 거죽처럼 뒤집어쓴 채, 그 역겨운 살점을 우물거리며 자신을 내려보는 잿빛의 안광.
아인 크리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찰나의 순간 성벽의 두터운 돌바닥을 디딘 채 도약했으니.
―끼에에에에에에에에에!
―끼아아아아아아아아!
두 마리의 포효가 귀를 찢어버릴 듯이 울려 퍼지고, 각기 다른 각도에서 아인 크리그를 찢어발길 듯이 촉수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큭!”
그 순간, 아르디티 귄터 역시 정신을 차렸다.
무어라 읊조린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가 내뱉은, 의미를 모를 말들이 아니다.
교전은 시작되었고, 그녀는 반쯤 본능적으로 헤비 렌스를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순간, 아인 크리그의 대검 끝이 번뜩인다.
궤적이 그리는 건 좌측.
‘우측을 엄호한다!’
그녀의 안광이 일순간 번뜩이고, 이를 악문 채 창대가 으스러지게 쥐었다.
마나를 끌어 올린다.
잿더미의 기운이 뒤엉킨 마나는 그 자체로 특무 장교들에게 석화증이라는 불치병을 선사한다.
때문에, 기사 장교들은 평생토록 최소한의 움직임과 마나 소비로 최대의 결과를 지향한다.
그게 그들이 인간으로서 남아있는 시간을 담보하기에.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콰드드드드드득!
그녀의 섬광과도 같은 창끝이 아인 크리그의 우측을 노리던 촉수들을 갈기갈기 찢어발긴다.
뒤이어, 아인 크리그 역시 좌측의 촉수를 모조리 베어버린 후 그대로 측면에 서 있던 재의 수확자의 품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위험!”
아르디티 귄터는 무심결 기함했다.
그의 행동은 누가 보더라도 자살 행위처럼 비췄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끼기기기기기기기기!
제 발로 괴물의 품까지 다다른 그를 본 재의 수확자는 마치 비웃듯이 웃음을 흘렸다.
촤아아아아아악!
인간의 거죽을 눌러쓴 상체, 복부 쪽에서 마치 꼬챙이와 같은 촉수가 뻗어진다.
그 도착점은 아인 크리그의 심장.
누가 보더라도 그의 심장이 꿰뚫리는 게 자명한 순간, 아르디티 귄터는 이를 악물고 그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막아야……!’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바람이 둘 사이를 스치고, 아인 크리그의 눈가를 가리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걷어지니.
‘웃고 있어?’
그녀는 보고 말았다.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그 순간, 아인 크리그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가득 찬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그리고 직후.
그녀는 보고야 말았으니.
「크리그 류(流) 아인 식(式)」
「하울링(Howling)」
정적이 일고, 찰나의 순간 모든 게 정지한다.
그러나 이윽고 아인 크리그가 짧게 숨을 내쉰 직후, 그의 대검은 폭풍이자 울부짖음이 되어 일대를 휘감으니.
콰드드드드드드드드드드득!
대검이 포효한다.
그의 손에 쥔 대검이, 비로소 적을 향해 완전한 이빨을 들이밀었다.
“하하하하하하하!”
아인 크리그는 미친 듯이 웃으며, 떨리는 안광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루하고도 역겨우며 한심한 괴물들을 향해 대검을 휘두른다.
―끼, 끼기이이이이이이!
―끼에에에에에에에!
본능적인 섬뜩함을 느낀 듀얼 넘버들이 다급히 팔을 휘둘렀지만, 이미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5분의 마나를 단 10초에 담았다.
굶주리고 굶주린 200년 전의 망령에게 먹이를 던져주자, 게걸스럽게 삼키며 그때의 그를 불러 세운다.
그로서, 아인 크리그는 휘몰아친다.
3급 기사 장교라는 허울을 벗어 던진 채, 오롯이 기사로서 무수한 괴물들을 도륙하던 그때를 탐미한다.
서걱― 툭.
0.3초 만에 한 놈의 왼쪽 팔을 날렸다.
0.2초 만에 정강이를 베어내고.
0.5초 만에 허리와 하체를 분리시키며.
0.4초 만에 그 비루한 목을 베어낸다.
육신에 걸리는 과부하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그만두라고 비명을 내지르지만, 아인 크리그는 멈추는 대신 더욱 속도를 높였다.
‘측면, 좌측에서 사선으로.’
‘너무 빠른가? 아니. 템포를 높인다.’
‘어깨는 내준다. 그 대신 놈의 시야를 빼앗아.’
두려움 때문인지, 본능 때문인지 놈들은 제멋대로 공격했다.
그 일부가 아인 크리그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저건 대체.”
아르디티 귄터는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그의 잔상이 아지랑이와 뒤엉킨다.
그녀는 몰랐지만, 그건 아지랑이 따위가 아닌 그의 육신이 내는 비명이었다.
땀이 흐르고, 식고, 다시 흐르고, 식으며 터지는 수증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아인 크리그가 대지에 두 발로 섰을 때.
―터엉.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대검을 그대로 놓아버린 채, 각혈로 엉망이 된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그녀를 바라보곤 천천히 읊조린다.
“나머지는 알아서 수습하도록. 귄터 소령.”
털썩―.
그의 육신이 허물어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구궁!
듀얼 넘버. 98번. 재의 수확자들은 잿더미와 살점으로 뒤엉켜 성벽 아래로 추락했다.
마치 어지럽게 잘린 수박처럼.
혹은, 도축당한 짐승처럼.
과거 대대와 수십의 특무 장교를 홀로 집어 삼켰다던 듀얼 넘버의 최후였다.
“……미친.”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멘하른 대위는 그저 멍하니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으니.
“……듀얼 넘버를. 잡았다고?”
고요한 성벽 위.
그의 하울링에 휘말려 다른 괴물들마저도 모조리 도륙된 그 정적 속에서 그의 한 마디만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3급 기사 장교 혼자서?”
17편
* * *
「바나르간드 철혈 요새」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저 누구누구가 좌천됐다더라―라는 소문이 전부인 그 요새에서 드물게도 보고가 올라왔다.
당연하게도 제10군단의 참모들은 그 보고를 묵살하려 했다.
늘 그렇듯, 위험성을 강조하며 보급을 개선해달라는 부질없는 징징거림이리라 생각했으니까.
“선배님. 이거 어떻게 합니까?”
“그거? 대충 서류 사이에 던져 놔. 쓰레기통에 먼저 던져주면 고맙고.”
“아……. 옙.”
선배의 말에 정말 그래도 되나? 라는 생각도 잠시, 군인은 까라면 까라는 진리를 떠올린 참모는 그의 말대로 전보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아니, 넣으려고 했다.
순간 펄럭거리는 바람에 눈에 들어온 글자를 보기 전에는 말이지.
「긴급 지원 요청」
“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문장이다.
보통 이런 문장을 보는 건 둘 중 하나다.
좆됐거나, 좆되기 직전이거나.
때문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 서류를 펼쳐 천천히 읽었고, 이내 쓰레기통을 닫은 채 조금 전 물어본 선배 참모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 선배님.”
“왜. 그거 그냥 버리라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괜찮아. 어차피 그쪽 놈들 버려진 거 누가 모르…….”
“듀얼 넘버랍니다.”
“응?”
“두 마리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크, 큰일났습니다! 제, 제6군수 여단장 직통으로 올라온 보고입니다!”
마찬가지로 말단인 참모 한 명이 다급히 외쳤으니.
“바, 바나르간드 요새에서 듀얼 넘버가 관측되었다고……!”
당연히, 그들의 뇌리에 스친 단어는 단 하나.
“좆됐군.”
그것뿐이었다.
.
.
.
군국의 군단은 도합 25개.
각 군단은 군국 전쟁성 예하 원수부에 소속되며, 각 원수부는 각기 파벌로 나뉜다.
그리고 서북부를 담당하는 원수부는 친(親) 센티넬 계파인 루트비히 로젠탈 원수부.
“다시 말해보게. 참모장.”
“……약 30분 전, 예하 제6군수지원여단에서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이번에 제13특수 독립여단에 여단장으로 취임한 아인 크리그 중령이 보급과 병력 보충을 요구하며, 듀얼 넘버. 98번 재의 수확자를 정찰 중 발견…….”
“짧게. 결론만.”
“예. 각하. 현재 바나르간드 요새에서 듀얼 넘버 두 개체와 교전 중인 것으로 확인됩니다.”
그의 말에 로젠탈 원수는 묵묵히 입에 문 시가를 태웠다.
다만, 그 끝을 질겅 씹는 걸 보면 심기가 불편한 게 분명했기에 참모장은 예하 참모들을 갈궈 준비한 대전략을 꺼내 들었다.
“현재 제13특수 독립여단의 잔존 병력은 아르디티 귄터 전(前) 여단장 대리, 현(現) 제1대대장의 일개 대대와 본부대대 예하 일부 병력이 전부입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만성적인 보급 문제와 특임 장교 문제는 기각한다.
엄연히 문서화가 되는 회의다.
자칫 후에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은 자중하는 게 오래 살아남는 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참모장이었다.
“이에 저희 참모부에선 바나르간드 함락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 지크프리트 선 일대에 10군단 예하 2개 사단을 투입해서 저지하는 걸 골자로 작전계획을…….”
달리 방법이 있을 리가 있는가.
참모장은 자신이 올리는 이 작계가 통과되어, 채 1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지크프리트 선에 대규모 방어선이 구축되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 순간.
로젠탈 원수는 고개를 저으며 읊조렸다.
“그래선 안 되지.”
“예?”
“지크프리트 선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안 된다는 말이다. 참모장.”
그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짚어줘야 하냐는 듯 짜증스럽게 덧붙였다.
“전투가 벌어지면, 완공일이 미뤄질 거 아닌가.”
“…….”
참모장은 달리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순간,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곧 깨닫고 만 것이다.
‘만약 완공일이 3년보다 더 미뤄진다면?’
참모장이 말한 대로 지크프리트 선에 일선 병력들을 밀어 넣어서 어찌어찌 막았다고 치자.
당연히 그 일대는 적잖은 피해를 입을 거다.
북부 방면 중 심한 곳은, 불과 얼마 전에 막 골조를 세운 것도 있을 정도니까.
그러면 여기서 문제.
센티넬 가문이 군국 건국 200주년에 맞춰서 야심차게 치적으로 삼으려고 했던 지크프리트 선 완공 행사에 당당하게 찾아가서 ‘아, 듀얼 넘버가 깽판을 좀 쳐서 공사 기한이 좀 밀렸습니다. 그래도 뭐 이해해주실 거죠?’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될까?
과연 ‘아, 그러시군요? 당연히 저희가 이해해드려야지요.’라는 대답이 돌아올까?
아니면 ‘그럼 죽어’라는 대답이 나올까?
“조금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는 문제잖나. 참모장.”
로젠탈 원수는 드물게도 지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른 방법을 찾게.”
로젠탈 원수부.
그들의 입지는 오직 센티넬 가문에게 붙어먹었다는 이유. 단 하나로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그건 말단 귀족이었던 참모장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원수로서 쓸모가 남아있는 로젠탈은 살 가능성이 있어도 그 작전을 입안한 자신은 무조건 뒈진다.
“……일부 부대를 차출해 바나르간드 요새로 지원군을 보내 지연전을 펼친 후, 예상되는 진격로를 차단해 야전에서 저지하겠습니다.”
“부탁하지.”
“예. 각하.”
* * *
멘하른 대위의 생각은 반만 맞았다.
분명, 제10군단에겐 제13 특수 독립여단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도 없는 건 물론 필요하다면 언제든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들을 옥죄자 제10군단은 누구보다도 빠르게 바나르간드 요새로 지원 부대를 급파했다.
특무 장교 10명과 2개 중대.
물론, 고작 저 병력으로 듀얼 넘버를 오래 저지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따위는 없었다.
상부에서 원하는 건 오직 지연전.
바나르간드 요새가 이미 함락당했더라도, 저 병력이 숲으로 도망다니면서 시간이라도 끌겠지 싶은, 그런 버리는 병력인 셈이다.
“세상 어느 병신같은 군대가 콘크리트 장벽 하나 지키겠다고 400명이 넘는 병사들을 갈아 넣는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정말 대단한 조국이라니까.”
그 버림패로 선정된 특무 장교들을 군용 트럭에 태우고 바나르간드 요새로 향하던 베르민 중사의 말에, 조수석에 앉아 있던 요한 대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위대한 조국 만세.”
그게 비꼬는 투라는 걸, 벌써 5년 넘게 함께한 베르민 중사가 모를 리가 없었다.
힐끔, 뒤에 타 있을 8명의 특무 장교들을 바라봤다.
“검은 셔츠가 하나도 없습니다. 투명해도 이건 좀 너무 투명하잖습니까.”
“귀족 장교는 나로 면피했으니까.”
요한 게르너 대위.
회색으로 샌 장발에 얼굴에 길게 그어진 칼자국을 가진 중년의 남자.
그는 무심하게 궐련을 물고 중얼거렸다.
“거기에 군종 사제는 자네로 끝냈잖나. 서류 꾸미기도 편하겠지.”
물론, 조금만 군에 대해 알고 있는 자라면 3급 기사 장교인 요한 게르네와 4급 군종 장교 베르민 중사를 제외.
나머지 8명의 기사 장교가 전원 평민 출신에 비 사관학교 출신, 평균 5급이라는 점에서 욕지거리를 내뱉겠지만…….
“센티넬 가문의 밑을 닦아주는 귀족들이 어디 그런 걸 신경이나 쓸까. 오히려 바나르간드 요새에 ‘필요 이상의 병력을 파견’했다고 감찰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진짜 그럴 거 같아서 무섭습니다.”
뭐, 그렇다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억울한 건 아니다.
애초에 빠르나 느리나 언젠간 바나르간드 요새로 처박힐 운명이 대부분이었지만.
‘오히려 뒤따르는 2개 중대만 불쌍하지.’
뭔지도 모를 지연전이 어쩌고 소리를 듣고 파견된, 트럭에 타고 있는 병아리들과 다르게 그들은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다.
듀얼 넘버 두 마리.
반면 바나르간드 요새의 전력은 일개 대대급이 전부.
특무 장교조차 6명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된 교전이 가능한 기사 장교는 4명이 전부.
“크리그도 끝인가.”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쩌겠는가.
이런 병신같은 나라가 그들의 상전인 것을.
“도주로는?”
“확보해 놨습니다.”
“유사시 되도록 많이 살려서 빠져나간다. 케르베로스 여단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다 같이 뒈질 순 없지.”
둘은 그렇게 군인으로선 실격이지만, 현실적인 대안을 입에 담으며 어느새 눈에 들어오는 바나르간드 요새를 응시했다.
‘우리가 도착한 건 최초 지원 요청이 올라온 지 1시간 정도 후. 오래 버텼군.’
도로나 숲에 교전 흔적이나 시체가 없는 걸 봐서는 아직 저 요새를 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뿐.
그나마 운이 좋았다면 괴물들이 돌아갔겠지만, 글쎄.
“저기 초소가 보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베르민 중사의 말에 요한 게르너 대위는 잠시 침묵하며 고심하다가, 이내 거의 다 태운 궐련을 차창 밖으로 버리곤 말했다.
“대기시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끼이익, 탁!
뒤따르는 트럭들을 정지시키고 차에서 내린 그는 낡고 정비도 잘 되지 않아 투박한 도로 위에 군화를 디뎠다.
그리곤, 눈 안개 너머 간신히 건물 실루엣만 보이는 초소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스릉―.
물론, 한쪽 손은 허리춤의 검에 손을 올린 채 말이다.
‘누군가 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사람의 형상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언제든지 교전 상황에 돌입할 수 있도록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시야가 확보될 때까지 접근한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그의 두 눈에 검은 코트에 후드를 눌러 쓴 한 군인이 눈에 들어왔으니.
‘도플갱어?’
그렇다기엔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곧 초소에 기대어 묵묵히 서 있는 남자의 곁에서 일련의 병사들이 다급히 뛰어나와 요한 게르너에게 총구를 겨눴으니.
“정지!”
아군이다. 그것도, 다 뒈졌으리라 생각한 제13 특수 독립여단의 군인들.
그걸 확인하자 요한 게르너는 적대 의사가 없다는 걸 밝히기 위해 양손을 번쩍 들고는 외쳤다.
“10군단에서 급파된 지원군을 이끌고 온 요한 게르너 대위다!”
그의 외침에도 병사들은 총구를 거두지 않았다.
단지, 곁에 서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필 뿐.
그 모습은 꽤 큰 감흥을 안겨주었다.
‘군율이 살아있다. 의외인걸.’
분명, 소문으로 들었던 제13특수 독립여단과는 차이가 있는 모습이다.
그런 감흥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내 후드를 눌러 쓴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은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터벅, 터벅―.
요한 게르너는 그제야 그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이내 후드를 눌러 쓴 남자의 계급장과 이름을 확인한다.
“유진…… 하일트 소위. 현재 상황이 어떤지 공유받을 수 있겠나?”
순간, 유진 하일트는 고개를 들었다.
후드에 가려져 있던 창백하고 마른 뺨이 움직이고, 이내 그의 갈라진 입술에서 쇳소리 같은 목소리가 내뱉어졌으니.
“……잡았다.”
“뭐?”
“두 마리. 전부. 아인 크리그가.”
요한 게르너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뭘 잡았다고?
18편
* * *
“……끄윽.”
“괜찮냐?”
“야! 거기 가서 붕대 좀 더 가져와!”
“부족합니다!”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져오라고!”
관문 초소를 지나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 요한 게르너는 적어도 전투를 겪었다는 것 자체는 진실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요새 안은 뭐랄까.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흑, 흐으윽!”
“울 시간 있으면 이거부터 옮겨!”
팔다리가 하나 날아간 병사들이 낡은 모포와 허름한 건물들에 의지해 치료받고 있다.
하지만 그들 정도면 충분히 상태가 좋은 편에 속했다.
적어도 살아는 있으니까.
요한 게르너는 시선을 돌려, 비명과 짜증, 다급한 외침 대신 침묵만이 자리한 연병장을 응시했다.
“……많이도 죽었네요.”
“그러게.”
곁에 선 베르민은 씁쓸한 눈으로 눌러 쓴 군모를 벗어 가슴에 얹었다.
시선 끝에 닿은 건, 족히 수백은 넘는 시체.
그마저도 태반은 갈기갈기 토막 난 탓에 제대로 수습조차 되지 못한 걸 모포로 엉성하게 감아 놓은 게 전부였다.
“……아. 아아.”
“이렇게 죽을 놈이 아니었는데.”
연병장에 오가는 이들은 두 부류였다.
시체를 옮기거나, 그 시체 앞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거나.
“비켜요!”
“억!”
그때, 요한 게르너의 옆에 서 있던 베르민의 몸이 앞으로 밀려났다.
“무슨……!”
당연히 영문도 모르고 밀쳐진 그는 신경질을 내며 고개를 돌렸지만…….
“왜 길을 막고 있담!”
붕대 등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그를 지나쳐가는, 갈색 머리에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는 여자의 옆모습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예쁘다.”
“내가 아는 속죄 교단의 사제 중, 네가 제일 가벼울 거다. 장담하지.”
누가 동부 출신 아니랄까 봐.
억세고 통통한 여자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런 잡생각을 한편으로 날려버린 요한 게르너는 복잡한 얼굴로 궐련을 물었다.
그러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베르민은 그에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전투가 격하긴 했나 봅니다. 성벽도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요한 게르너는 고개를 저었다.
“격한 정도가 아니야.”
이에 베르민이 ‘그럼 뭡니까?’라고 반문하기도 전, 요한 게르너는 궐련에 불을 붙인 채 연기를 한숨처럼 내뱉곤 덧붙였다.
“거의 함락당할 뻔했어.”
“예?”
“저 성벽을 봐. 전투 흔적들이 즐비하잖나. 포대 중 망가진 게 절반이고.”
뒤늦게 베르민은 지상이 아닌, 성벽 위를 올려보곤 탄식했다.
과연 요한 게르너의 말대로였다.
그들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살아남은 병사들은 성벽 위를 오가며 부상자들을 호송했고, 나아가 시체들을 수습했다.
뿐인가?
종종 잿더미가 되지 않은 괴물들의 살점 조각들을 불에 태우고, 망가진 포대 중 오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건 아예 성벽 아래로 떨어트리는 중이었다.
“……미친.”
덕분에 베르민 중사 역시 뒤늦게 요한 게르너가 느끼는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곤 중얼거렸으니.
“고작 대대, 기사 장교 4명으로 듀얼 넘버 두 마리를 막았다고? 기적인가?”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툭―. 반쯤 태운 담배를 진창 속에 떨어트리고 군홧발로 짓밟는다.
그러곤, 요한 게르너는 덧붙였다.
“일단 자네는 저 친구들 좀 도와주지. 전투 중에 죽었는지, 아니면 기절이라도 했는지 군종 사제가 보이지 않잖나.”
“예. 뭐…….”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군. 시체는 만져도 시체가 될 일은 없으니까.”
글쎄요. 그렇게 크게 말해도 될까요.
베르민은 주변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머리를 긁적였지만, 이내 쭈뼛거리며 뒤에 서 있는 반푼이 장교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뭐하심까? 다들 움직이시죠?”
그제야 뒤따른 평민 특임 장교들, 그러니까 빽도 없고 줄도 없으며 경험도 적은 그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뒤따른 2개 중대?
그들은 요한 게르너가 명령하기도 전에 각 중대장의 판단하에 이미 수습을 돕고 있었다.
‘하여튼, 백날 기사 장교니 뭐니 해도 전투 빼곤 쓸데가 없다니까. 빌어먹을 병아리들.’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르민은 요한 게르너에게 눈인사를 건네곤 마침 시체를 어깨에 지고 지나가는 병사에게 향했다.
“고생하십니다. 군종 장교입니다. 잿기가 보이는데 좀 볼 수 있습니까?”
“구, 군종 장교요?”
“예. 지원 요청에 급파됐는데…….”
그렇게 베르민까지 할 일을 찾아가자, 홀로 남게 된 요한 게르너는 때마침 지나가는 한 장교를 붙잡고 물었으니.
“그러니까……. 중위. 혹시 여단장님이나 대대장을 뵈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전혀 안내받지를 못했는데.”
“…….”
그녀는 잠시 그를 위아래로 훑더니, 말 대신 손가락으로 요새 언덕 한편의 건물을 가리키곤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향하는 곳은 다름이 아니라 조금 전 베르민이 헤벌레했던 그 갈색 단발 머리의 여자였으니.
“랑예! 어디 갔었어? 일단 이것부터 좀 들어봐.”
“……사탕. 당 떨어져.”
“좀 도와주면 내가 10개 줄게. 우리 랑예 착하지?”
“……응.”
마치 언니처럼, 상사가 중위를 타이르는 모습에 놀라야 할까.
그게 아니면, 의족을 낀 비 특무 장교가 특무 장교, 그것도 수인을 사탕으로 조련하는 모습에 놀라야 할까.
“고민할 것도 없이 둘 다 놀랍군.”
요한 게르너는 무심결 얼굴에 난 칼자국을 긁고는 중얼거렸다.
“……어제 내가 약을 좀 했던가?”
아닌 거 같은데.
* * *
혹시나 싶어 몇 차례 더 물어봤지만, 병사든 장교든 할 거 없이 군인들은 하나같이 랑예 중위가 가리킨 건물을 가리켰다.
때문에, 그곳으로 향한 그를 반긴 건 척 보기에도 지쳐보이는 한 여자였으니.
“지원을 나온 요한 게르너 대위입니다.”
“임시 여단장 대리 아르디티 귄터 소령이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에 꽤 큰 키.
얼굴도 듣던 대로 아름다웠다.
며칠 전에 떨어진 여단장 대리라는 직함을 다시 붙이게 된 게 블랙코미디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는 구태여 지적하는 대신 소파에 앉았다.
“마실 거라도 하겠나.”
“브랜디에 홍차를 좀.”
보통은 반대 아닌가 싶어 반문하려던 아르디티 귄터의 표정을 본 요한 게르너는 재빨리 정정했다.
“브랜디만 주십시오.”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한 농담이었는데, 아무래도 소문대로 귄터 가 아니랄까 봐 진지한 성격인 듯싶었다.
탁―.
원래라면 부관이 따라주는 게 맞지만, 아르디티 귄터는 손수 응접실에 놓여 있는 브랜디를 따라 그에게 건넸다.
그걸 한 모금 삼킨 그는 이내 입을 열었으니.
“뭐, 피차 상황도 상황이니 돌려 말하지 말고 정보 공유를 제안드립니다. 소령님.”
그가 선택한 건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대신 정면돌파였다.
아르디티 귄터는 그가 이렇게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이어진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시다시피, 10군단은……. 그러니까. 로젠탈 원수부는 바나르간드 요새를 버릴 생각이었습니다. 뭐,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야, 로젠탈은 크리그를 배신했으니까.
오히려 이번 기회를 잘 살려보자는 생각도 아예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뭐,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단 지원 부대는 급파했습니다만…….”
요한 게르너 같은 닳고 닳은 사람조차, 조금 전 참상을 보고 모든 걸 무덤덤하게 말할 순 없었다.
때문에, 그는 양해를 구한 뒤 수첩을 꺼내 대략적인 편제를 적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차마 말로는 못 하겠다는, 그리고 혹시 주변에서 듣고 있을 이곳 부대원들에 대한 배려였다.
“……하.”
그리고 그 내용은, 그녀조차도 실소를 흘릴 정도로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진급이 밀리고 밀려, 사실상 대위로 전역해야 할 짬대위 한 명과 그 부관.
평민, 그것도 비 사관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한직에 처박힌 실전 경험도 없는 특무 장교 8명.
그나마 2개 중대는 실전 경험이 있는 부대라는 점이 자조적일 뿐이다.
‘심하긴 했지.’
오죽하면 요한 게르너조차 요새 상황을 보고 대충 도망칠 생각부터 했을까.
그는 브랜디를 마시며 화가 난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어 할 말도 사라진 건지 모를 아르디티 귄터를 조용히 응시했다.
얼마나 그 침묵이 이어졌을까?
이내 생각 정리가 끝난 건지, 아르디티 귄터는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관의 처지는 알았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지?”
“아시잖습니까.”
브랜디가 썩 괜찮다.
나갈 때 브랜드 명이라도 보고 가야겠어.
“듀얼 넘버.”
요한 게르너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하게 반문했다.
“정말로 잡으셨습니까?”
아르디티 귄터는 조용히 그의 수첩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조금의 흔들림 따위 없는 눈으로 요한 게르너를 마주한 채 나지막이 되받아치니.
“잡았냐―라. 그게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입니다.”
어느새 비어버린 브랜디 잔을 내려놓는다.
탁―.
그리곤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 전 그녀가 따른 브랜디 병을 가져와 잔에 따른다.
“죽였습니까? 정말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격퇴가 현실적이지.
하지만, 걸리는 게 있었다.
‘초소에서 만난 소위. 놈은 확실히 잡았다고 말했다. 아인 크리그가.’
그 안에 담긴 건 확신이었다.
대게, 그런 분위기를 가진 사내는 거짓말이나 과장 따위 입에 담지 않는다.
몇 번이나 좌천과 강등을 당해 너덜거리는 견장을 찬 남자라면 더더욱이.
“솔직하게 말해주시지요. 소령님.”
대답이 늦어질수록 확신이 들어찬다.
반면, 아르디티 귄터의 머리를 터질 거 같았다.
‘긍정해도 괜찮나?’
겉으론 태연하게 대위를 마주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그녀라고 지금 상황이 납득되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사실대로 말한다고 믿을까?
3급 기사 장교가 일격에 듀얼 넘버 두 마리를 죽였다고?
채 10초도 걸리지 않아서?
글쎄, 군인 정신병동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지 않나?
‘냉정하게 생각하자. 아르디티.’
가뜩이나 불안정한 입지의 제13특수 독립여단이다.
괜한 구설에 휘말린다면 곤란하다.
하물며 모든 사태의 중심에 서 있는 아인 크리그는 아직 병상에 누워있지 않은가.
‘판단은 빠르게. 행동은 더 빠르게.’
그녀는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을 곱씹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약간의 오해가…….”
“오해가 있긴 하지.”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끼이익―.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곧 한 남자가 조금은 피곤한 발걸음으로 들어와 탁자 위의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크―.”
짧게 숨을 내뱉은 그는 이윽고 소파 한편, 아르디티가 의도적으로 비워 놓았던 상석에 앉아 무심하게 한쪽 다리를 꼬았고.
치익, 습―.
이내 청아한 박하향과 레몬향이 동시에 흐르는 궐련을 문 채 나지막이 말했으니.
“그냥 죽인 게 아니지.”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살짝 걷은 오른쪽 셔츠 소매 아래 비치는 꼬리를 문 뱀.
조금은 창백한 피부와 더불어 내리깔린 다크서클을 꿈틀거리며 눈웃음을 지은 그는.
“말 그대로 도륙을 내버렸거든.”
군국 역사상 더 없을 폭탄을 터트렸다.
“더 궁금한 게 있나. 대위?”
그것도, 아주 태연한 얼굴로.
19편
* * *
“……그렇, 습니까? 알겠습니다.”
요한 게르너는 너무나 당당한 그의 말에 되레 당황한 듯, 그렇게 읊조리곤 자리를 떠났다.
무리도 아니다.
면전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나와버리면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았으니까.
아, 그러시군요. 정말 위대합니다! 저는 중령님에 대해서 너무 몰랐습니다!―라고 빨아주기도 뭐하고.
개소리도 좀 기승전결이 되게 짜셔야지요―라고 대답하기도 뭐하다.
‘당연하지. 떠본 거니까.’
그가 어떤 근거로든 확신한들, 이성은 아마 그 결과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을 게 뻔했다.
당연한 일 아닌가?
3급 기사 장교가 듀얼 넘버를 사냥했다는 걸 그 누가 쉽게 납득할 수 있겠나.
길고 긴 증거를 눈앞에다가 내밀어도 일단 구라인지 의심부터 할 텐데.
그렇게 대위가 떠난 후.
아르디티 귄터는 아인 크리그를 바라보며 무어라 따지려다가, 이내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한숨을 나지막이 내쉬곤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모로 말이 많아질 겁니다.”
이전과 달리, 대놓고 그에게 무어라 타박하는 말투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존중이 느껴진다.
때문일까?
아인 크리그는 태연하게 마나 궐련을 한 모금 머금으며 답했다.
“정확히 읊어보도록.”
전례가 없는 공적임에도 이런 걸 먼저 걱정해야 한다는 현실에 씁쓸해할 틈은 없었다.
아르디티 귄터는 입을 열었다.
“먼저, 듀얼 넘버가 맞았는지에 대한 확인 절차가 있을 겁니다.”
지켜보는 병사들이 많았다거나 하는 건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독립여단이라는 특수성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그 판단을 먼저 검수하는 건 절차대로라면 제10군단이 속한 로젠탈 원수부.
막말로 ‘전과를 속이기 위해 부대 전체가 말을 맞췄지?’라고 희대의 개소리를 지껄인다에 마나 궐련 5개는 걸 수 있다.
“하지만 리어 융 상사는 물론, 지원 온 특무 장교 중 베르민 중사가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듯싶습니다.”
“그렇겠지. 로젠탈 원수부가 아무리 트집을 잡고 싶다고는 해도.”
속죄 교단의 군종 사제들이 거짓말을 금기시한다는 점도 물론 큰 이유다.
즉 리어 융 상사가 보증하는 한, 듀얼 넘버와 교전했다―라는 대명제부터 부정당하는 일은 없으리라.
“고작 내 전과를 깎아 먹겠다고 속죄 교단의 사제들을 음해하는 건 자살 행위니까.”
속죄 교단이 군국의 국교가 된 이유가 왜겠나?
물론, 대외적으로 선전하듯 그들이 지금은 「잊혀진 주신」이라고 불리는 천년제국의 주신 신앙을 계승해서이기도 하지.
천년제국을 계승했다고 말하는 군국에게 그것 역시 중요한 명분 중 하나니까.
하지만, 고작 그뿐이었다면 속죄 교단의 군종 추기경이 군국 전쟁성에서 원수와 동격으로 취급받는 특권을 누리진 못했을 거다.
“속죄 교단은 센티넬 가문도 함부로 할 수 없으니까요.”
아르디티 귄터의 말에 아인 크리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죄 교단의 군종 사제들은 미약하게나마 석화증을 완화시키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
뿐인가?
유사시 급성 침식이 일어난 병사, 혹은 석화증이 중증에 다다른 특무 장교를 즉결 처분하는 역할도 겸한다.
‘즉, 속죄 교단과 척을 진다는 건 논외.’
물론, 그 역할과 중요성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중립을 요구받는다.
이 경우엔 그리 리스크는 아니니 제외.
그가 계속하라는 듯 새 마나 궐련을 물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르디티 귄터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이제 격퇴인지, 아니면 배제인지를 두고 무수한 의혹이 쏟아질 겁니다. 되도록 격퇴 쪽으로 몰고 가고, 중령님의 공은 철저하게 격하될 겁니다.”
“높은 확률로, 공을 노린 무리한 교전으로 예하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식으로 판을 짤 가능성도 있습니다.”
에둘러서 말했지만, 듀얼 넘버와의 교전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상 그 방법밖에 없었다.
물론 배제 대신 격퇴로 바꾸고.
“그렇게 되면, 듀얼 넘버 두 마리가 나타났는데 무리해서 잡아 보겠다고 깝치다가 병사는 병사들대로 죽어 나가고 듀얼 넘버는 그대로 도망간 모양새가 되니까. 그거참 개새끼구만 그래.”
“……그렇습니다.”
정작 완공되지 않은 지크프리트 선을 지키고자 바나르간드 요새를 제물로, 그리고 10명의 특무 장교와 2개 중대를 버림패로 써먹으려 했던 건 그대로 묻힐 테고 말이다.
“그 모든 음해와 의혹을 해명해서 정당한 공적을 인정받더라도,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을 해내셨으니 그에 대해 속죄 교단의 추가 검증이 들어올 겁니다.”
“최악의 경우엔 이단심문관들이 올 수도 있겠고. 내가 석화증에 걸렸는지 확인하러.”
다시 만나기 싫은 족속들인데 말이지.
아인 크리그는 쓰게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곤 그녀를 바라보며 반문했다.
“귀관은 내게 묻지 않는군. 아무것도.”
요한 게르너가 나간 직후부터 마나 궐련을 쥔 손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창백한 얼굴과 식은땀을 흘리는 이유도.
나아가, 고작 3급 기사 장교가 대체 어떻게 듀얼 넘버 두 개체를 일격에 도륙 낼 수 있는가에 대한 것조차도.
“물론, 납득하기는 힘듭니다만.”
아르디티 귄터는 되레 반문했다.
“물으면, 답해주실 겁니까?”
“못할 이유가 없지.”
순간,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는지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이내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으니.
아인 크리그는 마나 궐련을 한 모금 머금은 후, 문득 눈에 들어오는 꼬리를 문 뱀, 우로보로스를 응시하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 정체는 200년 전에 죽고, 지금 시대에 환생한 기사다.”
아르디티 귄터 소령의 표정은 늘 그렇듯 평온하고 차가웠다.
잠시 눈을 깜빡거리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그리곤, 짧은 묵례와 함께 자리를 뜬다.
아인 크리그는 머잖아 그녀가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닫곤 실소를 흘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농담이 아닌데. 이것 참.”
어쩌겠는가. 이것도 다 업보니 해야지.
아인 크리그는 반절쯤 남아 아까운 마나 궐련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땀에 절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그리곤, 이내 소파에 몸을 묻곤 마찬가지로 땀에 범벅이 되어버린 셔츠 목덜미를 거칠게 뜯어버렸으니.
투둑―.
단추 몇 개가 바닥을 굴러 군화에 닿고, 그는 겨우 좀 시원해진 목덜미를 한번 쓸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죽겠군. 시발.”
그것 역시,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 * *
전투가 끝난 건 해가 중턱에 걸렸을 무렵이었지만, 대략적인 수습이 끝난 건 해가 다 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마저도 그 의도야 어찌 되었든, 10군단이 보내 준 2개 중대가 거들어 준 덕이 컸다.
“…….”
“……고작 이 정도만 산 건가.”
“병동에 있는 놈들도 태반은 병신 확정이야. 빌어먹을.”
그러나 몸 성하게 살아남은 병사들은 채 절반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사기는 최악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본래도 해체 수순을 밟고 있던 여단이다.
말만 독립여단이지, 원래 병력도 1개 대대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이 아니었나.
그마저도 이번 전투로 전멸 직전까지 치달았으니…….
다만, 그저 주변을 보고 대략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병사들이나 하급 장교들과 달리.
보다 면밀하게 생존자와 사상자를 검토한 멘하른 대위는 그야말로 절망스러운 상황에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1중대. 사상자 125명.
2중대. 사상자 179명.
3중대. 전멸.
4중대. 전멸.
5중대. 사상사 188명.
살아남은 병사 중 중상이 7할 이상이고, 경상이라고 해도 앞으로 복무를 제대로 끝마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
‘케르베로스 여단은 끝이야.’
그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전과 달리 아인 크리그를 탓하는 머저리는 없었다.
그 광경을 직접 보았든, 아니면 말로만 전해 들었든 그 덕분에 이 비루한 목숨이나마 건졌다는 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놈은 없었으니까.
“여단장님께서 연병장에서 사열하라는 명령입니다.”
때문에, 늦은 밤에 갑작스럽게 내려진 명령에도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임시로 연병장에 마련되었던 시체 안치소는 지원 온 2개 중대에 의해 가까운 빈 건물로 옮겨진 덕분에, 병사들은 모래가 뒹구는 공터에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병사들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
혹은,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떠나간 이들에 대한 애도.
비루한 현실에 대한 탄식.
그들의 생을 붙잡고 있는 게 무엇이든, 그들은 제각기 어지러운 얼굴 속에서 묵묵히 검은 군복을 걸친 채 아인 크리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공백은 지원 나온 2개 중대가 메워주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들로서도 그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아무리 평소 경시하거나 관심도 없던 케르베로스 여단이라지만, 막상 처절하게 짓밟힌 모습을 보는 건 처지를 떠나 같은 인간이기에 마음이 불편했으니까.
“뭐랄까.”
그리고, 그 모습을 한편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베르민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네요.”
“이런 걸 보고 기분이 좋으면 둘 중 하나지. 싸이코패스거나, 센티넬 놈이거나.”
“같은 말이잖습니까.”
그럴지도. 요한 게르너는 무심결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혀를 차고 있던 베르민의 어깨에 누군가 손을 얹었고.
“어떤 놈……. 어?”
“반갑습니다. 형제님.”
당연하게도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베르민은 곧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적발에 구릿빛의 사내를 마주하자 무심결 반문했으니.
“혹시?”
“예. 리어 융 상사입니다.”
부사관 중에서 특무 장교, 그러니까 사관학교를 나온 특무 장교를 뜻하는 검은 셔츠를 입고 있는 건 오직 군종 사제밖에 없었다.
때문에, 베르민 중사는 경례 대신 속죄 교단의 성호를 그으며 고개를 숙였다.
“속죄를 따르는 형제를 뵙습니다. 무사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속죄를 따르는 형제를 뵙습니다. 제 빈자리를 채워주셨다고요. 감사합니다.”
요한 게르너도 썩 적응이 안 되는, 베르민의 몇 안 되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때였다.
터벅, 터벅―.
수명이 다된 탓에 깜빡거리는 조명 대신, 곳곳에 피워 둔 횃불을 따라 연병장으로 향하는 일련의 그림자.
그 선두에 선 건, 그들도 익히 알고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아인 크리그.”
입에 문 궐련의 연기가 그의 뒤를 따라 횃불을 휘감고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이윽고 단상 위에 다다른 그를 뒤따른 아르디티 귄터는 사열한 1대대 잔존 병력 앞에 서서 기립한다.
이윽고, 단상 위에 서 한 줌 남은 여단을 바라본 그에게 쏠리는 시선.
“…….”
“…….”
분위기가 묘했다.
이전과 같은 불신, 내지는 원망, 나아가 무관심 대신 그를 바라보는 병사, 부사관, 장교들의 시선엔 하나같이 묘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모두가 그를 보며 한 가지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라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주지 않을까.
그리고 그건, 그를 뒤따른 아르디티 귄터 소령.
파르밀라 취사장이 준 사탕을 입에 물고 있는 랑예 중위.
연병장의 구석에 서서 후드를 눌러 쓴 채, 독한 궐련을 입에 물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진 하일트 소위.
요한 게르너 대위, 베르민 중사, 리어 융 상사조차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모든 기대가 무색하게도.
“제군들.”
아인 크리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간결하면서도 모두의 예상을 깨부수는 것이었으니.
“우리는 좆됐다.”
모두가 벙찐 와중에도, 아인 크리그는 여전히 입가에 마나 궐련을 문 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덧붙였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좆됐지.”
20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