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1화

“세계가 멸망한다고요?”

내가 물었다.

-그래. 정확히 20년 후에.

상대가 대답했다.

“당신은 20년 후에 저고요?”

-그래.

나는 양고기 갈빗살 한 짝을 해치우고, 이어서 송아지 스테이크 석 장을 해치우는 중이었다.

그렇게 음식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상대가 터벅터벅 방안으로 들어와 내 앞에 앉더니, 세계가 멸망하느니 어쩌느니 황당한 말을 하고 있는 거다.

더 황당한 것은 자기가 미래의 나란다.

나는 현재 키가 180㎝에 몸무게는 200㎏이다.

근육 돼지가 아니라 물렁살로 가득 찬 그냥 돼지.

포크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허리를 숙이지 못해 줍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런 경우는 종을 울려 하인을 부른다.

그런데 자칭 20년 후에 왔다는 미래의 나는 현재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온 몸이 탄탄한 근육질이다.

하지만 미래의 내가 저런 모습이라곤 생각하기 싫었다.

양 팔과 양 다리가 모두 의수의족이기 때문이다.

양 팔과 양 다리는 모두 어깨와 허벅지부터 잘 다듬은 나무였다.

팔꿈치와 손목, 손가락 관절까지 정교하게 만들었다.

거기에 눈까지 하나 날아간 애꾸였다.

얼굴엔 깊은 흉이 엑스자로 교차해 새겨져 있었다.

나무 팔다리는 실제 팔다리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기관 장치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20년 후의 내가 내력으로 조종하고 있다고 했다.

의수의족을 내력만으로 저렇게 정교하게 조절할 정도면 무술도 경지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현재의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경지였다.

물론 외모로만 보면 아무래도 저 사람이 미래의 내가 맞기는 한 것 같았다.

현재의 내 모습에 세월을 입히고 얼굴에 흉터를 더하면 영락없는 저 모습일 테니까.

객관적으로는 너무도 안쓰럽고 흉측한 모습인데, 미래의 나라서 그런지 본능적인 끌림이 느껴졌다.

나는 항상 살을 빼고 싶었다.

지금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정말 답이 없으니까.

하지만 미래의 나.

살을 뺀데다가 무술까지 높은 경지에 오른 내 모습이지만, 전혀 부럽지가 않았다.

미래의 내가 말했다.

-…몸이 이래서 정신을 과거로 투영한 거다. 20년 후에 세상이 멸망하니 그에 대비하라고.

그 말을 들으니 헛웃음이 나왔다.

“허,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요.”

-마왕을 물리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나였어. 좀 더 일찍, 그리고 제대로 준비만 한다면 그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질 거다.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한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네겐 시스템이 있다.

“…예?”

저 사람이 미래의 나라는데 자연스럽게 존댓말이 나왔다.

사지가 모두 사라지고 눈마저 외눈이다.

세계까지 멸망했다는데 미래의 나는 패배에 낙담했다거나 의기소침하거나, 필사적인 분위기를 전혀 풍기지 않았다.

현재에 실패했으니 과거로 돌아와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만이 보일 뿐이었다.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긴 사람에게서나 보이는 특유의 기백.

거기에 수많은 사람을 다스리는 자에게서나 보이는 카리스마가 한데 어울려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한 가득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은 아버지 클라프 공작이었다.

아버지는 너무도 비범해 인간을 벗어난 초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그런 아버지조차도 어린아이로 보이게 할 정도로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러니 존댓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쨌든 미래의 나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마왕은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켰다. 그 세계들은 멸망을 당하면서도 마왕을 물리칠 힘을 준비했어. 그 힘이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을 물려받은 사람이 바투스 트리거. 나, 바로 과거의 너야.

“…….”

-네겐 시스템이 잠재해 있다. 아직은 각성을 안 해서 모를 뿐이지. 하지만 너는 정확히 한 달 후에 각성을 하고 시스템을 깨운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내일 발생한다. 내일이 지나면 믿기 싫어도 믿게 될 거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는 데요?”

-네 이복동생 캄포가 네게 비무를 신청한다.

“…내게요?”

사실 나는 환생자다. 지구에서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다.

하지만, 전생의 지구에서 유행한 웹소설처럼 비누를 만든다던지 현대의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없다.

이건 소설이 아닌 현실이니까. 안다고 해도 큰 도움이 안 됐을 거다.

우리 가문은 무가다. 인간의 가치기준을 무력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나는 무술에 재질이 없었다.

전생의 기억도 독이 되었다.

지구는 평화로웠다.

아니, 나름대로 이런저런 문제가 있었지만, 최소한 직접적인 폭력은 법으로 해결했다.

그런 세계에서 평화롭게 살다 환생을 하니 힘을 제일의 가치로 치는 이 세계가 도무지 적응이 안 되었다.

거기에 둔한 육체, 이해력이 느린 머리까지 더하니 성취가 더뎠다.

끝내 나는 경쟁을 포기했다.

그리고는 안전한 놈이라는 걸 몸으로 어필했다.

현재 내 모습이 그 결과물이다.

나는 도전을 포기한 실패작으로 낙인찍혔다.

아무도 나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안전했다.

마음껏 사치를 부리고 살아도 사람들이 경멸은 할지언정 특별히 간섭을 하지도, 건드리지도 않았다.

가문은 주기적으로 검술대회를 연다.

내일도 그런 날 중에 하나다.

이젠 검술대회에서 아무도 내게 비무를 신청하지 않았다.

내게 이기면 당연한 거고, 지면 수치스러운 일이니까.

즉, 아무런 영양가가 없단 의미다.

그런데 그런 내게 비무를 왜 신청해?

-캄포는 싫다는 너를 강제로 비무대로 데려와 비무를 하고 이긴다. 이기는 정도로 끝나면 좋은데, 평생 마음에 상처로 남을 정도로 지독한 굴욕을 주지. 만인이 보는 가운데 네 옷을 모두 찢어버리고, 목검으로 네 몸을 쿡쿡 찔러대지. 마치 도축된 돼지 다루듯. 그 광경을 상상해봐라.

나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거울로라도 내 몸을 보는 게 싫다.

다른 사람에게 내 몸을 보여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허리를 숙이는 것도 힘든 몸이지만 하녀들이 내 시중을 드는 것도 못하게 했다.

그런 몸이 대낮에, 그것도 모든 사람이 보는 데에서 그런 꼴을 당한다?

악몽이다.

“걔가 왜요? 나는 경쟁자도 아닌데.”

-그는 이젠카 영애를 사모한다. 질투로 벌인 일이지.

“아….”

이해가 됐다.

귀족가는 정략혼이 일반적이다.

나도 정략혼의 일환으로 마인 공작가의 이젠카 영애와 혼담이 오가는 중이었다.

그 혼담을 거절할 능력도 없지만, 거절하기도 싫었다.

그녀는 이뻤다.

나는 이젠카 영애를 속으로 사모하면서, 이 혼담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걸 캄포가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내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자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내일은 아버님의 생일이었다.

이젠카 영애도 초대를 받아 그 자리에 온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런 치욕을 당하다니.

그 자리에서 자살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이상하다.

“그런데 왜 내일이 아니라 한 달 후에 각성하죠?”

그런 치욕을 당하고도 왜 그 자리에서가 아니라 한 달 뒤에나 각성을 할까?

-시스템은 말도 안 되는 치트키다. 그것을 얻기 위해선 경험치를 얻어야 한다.

“경험치요? 그걸 어떻게 얻는데요?”

-간단해. 게임처럼 상대를 죽이면 경험치를 선사하지. 그래야 비로소 각성을 하는 거다. 그런데 네가 누구를 죽인 적이 있느냐?

“…….”

할 말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내 알맹이는 평범한 현대인이다.

당연히 나는 닭조차 죽인 경험이 없었다.

먹은 적이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너는 분노와 치욕으로 제정신을 잃고 가문을 떠난다. 아무도 너를 붙잡지 않았어.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 너는 이미 오래전에 가문에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

-그렇게 세상을 떠돌다 한 달 뒤에 천운으로 병든 오크를 죽인다. 그게 각성으로 이어져서 마침내 세상을 구하는 결사대의 일인으로 성장하지.

“내일 그런 꼴을 당하기는 싫은데, 어떻게 하죠?”

-이겨라. 기왕이면 죽여.

“죽이라고요?”

나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미래의 나는 캄포에게 상당한 감정을 가진 모양이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어쨌거나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 아닌가?

그런 나를 보던 지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래의 나는 내 본래 성인 바투스 앞에 그레이트의 지를 붙여 자신의 이름을 지투스라 했다고 했다.

그걸 보면 미래의 나는 자존심도 상당한 모양이다.

-몇 년 후 나는 가문으로 돌아온다. 시스템의 힘으로 유력한 가주 후보가 되지. 이젠카 영애하고도 결혼을 했다.

그 말을 듣자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그녀와 결혼을 하긴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젠카 영애는 그 전에 이미 캄포와 사통을 하고 있었다. 캄포는 이젠카 영애와 힘을 합쳐 나를 기습했다. 등 뒤에서 심장을 찔렸어. 나는 그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오히려 반격을 가해 놈과 이젠카 영애를 죽였다.

…기쁜 마음이 확 사라졌다.

-내가 여기에 왔으니 이미 내일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렇다고 캄포와 그런 식으로 엮일 일이 이제는 없을까? 그건 모르는 거야. 모르기 때문에 나중에 화근이 될 씨앗은 없애버려야지. 기왕 각성하는 것. 병든 오크보다는 그런 놈을 상대로 하는 게 괜찮기도 하고,

“그… 도와주실 거죠?”

-아니. 그 정도 송사리는 네 선에서 끝내라고.

“뭐라고요?”

뜻밖의 말을 듣고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내가 미래의 당신이라며?

그러면 도와줘야지!

* * *

“비무를 신청합니다.”

캄포가 관중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관중석엔 돼지새끼 하나가 앉아 있었다.

보통 사람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돼지새끼다.

믿을 수 없게도 놈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저런 새끼가 사랑하는 그녀와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캄포는 저 혐오스러운 모습을 만인에게 보여줘 그녀와의 혼담을 깨버릴 생각이었다.

관중석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캄포와 트리거에게 집중되었다.

모두 흥미로운 눈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지켜보는 기색이었다.

* * *

나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지투스의 말을 들으면서도 설마설마 했다.

그런데 그 설마가 사실이 되었다.

-거절하지 마. 무슨 핑계를 대도 안 통하니까. 그게 통했으면 나도 비무를 하지 않았어. 그러니 올라가 싸워.

곁에서 지투스가 말했다.

현재 지투스의 모습과 목소리는 나에게만 보이고 들렸다.

“…….”

나는 어기적거리며 비무대까지 걸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화살처럼 내게 꽂혔다.

그 시선을 의식하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비무대 아래엔 병기대가 있었다.

병기대엔 다양한 무기가 있었고, 그중 목검을 만지작거렸다.

비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 계단이 지옥으로 가는 길 같았다.

지투스가 도와주면 도움이 될 텐데.

날 도와줄 기색이 없는 지투수가 원망스러웠다.

그때 갑자기 지투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를 봐.

나는 지투스를 바라보았다.

-20년 후 내 별명이 뭔지 아니?

“…….”

-불굴의 지투스다. 불굴. 말 그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꺾이지 않았다. 심지어 마왕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세계가 멸망하는 과정을 보면서도 나는 꺾이지 않았어. 그래서 과거로 돌아와 다시 싸움을 준비하는 미친 짓을 벌이는 거다. 그런 나도 지금까지 괴로워하고 잊지 못하는 싸움이 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 싸움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 싸움이다.

지투스가 말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저들의 경쟁자가 아니다. 스스로 싸움을 포기한 패배자야.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내게 심한 행동을 못해. 그건 불공평해 보이니까. 할 수 있는 게 기껏 해봐야 옷을 찢는 정도야. 만약에 놈이 살수를 쓰는데 내가 목을 내밀면 어떻게 될까? 놈은 오히려 검을 거둬야 해. 놈은 나를 못 죽여.

“…….”

-그런데 나는 허둥거리기만 할 뿐, 아무 반격도 못했어. 목검에 몸이 좀 찔리는 게 어때서. 맨살을 보이는 게 뭐라고. 겨우 그런 게 무서워서 나는 허둥거리며 아무 것도 못하고 그 치욕을 당했다!

“…….”

-나는 이 시기를 노리고 온 게 아니야. 마음속에 쌓인 그 치욕의 기억이 이 시기를 택하게 한 거야. 그만큼 이 기억은 내게 화인으로 남아 있다.

“…….”

-도와 달라고?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놈이 허점을 드러낸 순간 내가 기침소리만 내도 충분해. 그때 네가 죽기 살기로 공격하면 놈도 별 수 없을 거야.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왜 안 돕는다는 건지.

하지만 미래의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승리는 의미가 없다. 이 싸움만은 네 힘으로 직접 이겨야 해! 그래서 나를 괴롭힌 오랜 트라우마를 치료해야 해! 불가능한 싸움이 아니야. 용기만 있으면 가능한 싸움이야!

빌어먹을.

안 도와준다는 말을 뭐 저리도 길게 하는지….

나는 입술을 깨물고 목검을 잡았다.

예전엔 익숙했지만, 이젠 낯설어진 감각이 손에 가득 느껴졌다.

2화

“넌 안 돼!”

10년 전의 일이다.

비무에서 패해 쓰러진 나를 이복형제 에닥스가 내려다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승보다 패가 더 많은 나날이었다.

넌 안 돼, 라는 말보다 더 모욕적이고 지독한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날 들은 그 말은 임팩트가 달랐다.

낙타가 짐의 무게를 못 이기고 무릎을 꿇는 건, 최종적으로 등에 얹는 바늘 하나 때문이다.

에닥스의 그 말이 내 마음에 최종적으로 오른 바늘 한 개였다.

나는 그때 이후로 검을 잡지 못했다.

검을 잡을 용기가 사라졌으니까.

지금의 내겐 검을 잡을 용기가 있을까?

* * *

나는 비무대로 올라갔다.

캄포가 나를 보며 말했다.

“한 수 부탁합니다, 형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수 가르쳐주지.”

순간 캄포의 얼굴에 분노의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 수 가르쳐 준다는 말이 놈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캄포가 검을 들었다. 나도 마주 검을 들었다.

곧장 캄포의 검이 내게로 날아왔다.

나는 그 검을 빗겨 치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어느새 검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억!”

비명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독하게 아팠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역설적인 이야기다.

다시 검이 날아와 반대쪽 옆구리를 찔렀다.

통증에 숨이 막혔다.

예전엔 이 아픔에 마음이 꺾여 검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십 년이다.

십 년간 겪은 마음의 아픔을 생각하니 이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번엔 검이 명치에 꽂혔다.

“헉!”

입에서 절로 비명이 나왔다.

허리가 숙여졌다.

그런데… 견딜 만했다.

* * *

캄포의 검이 뱀처럼 움직여 트리거의 손목을 후려쳤다.

트리거의 손에서 검이 날아갔다.

캄포의 검은 이어서 트리거의 이마로 날아갔다.

이마가 깨지며 피가 흘렀다.

트리거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캄포의 검이 그런 트리거의 상의를 찢었다.

투실투실한 트리거의 몸이 햇볕에 드러났다.

‘돼지 새끼.’

캄포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어렸다.

저건 무인의 몸이 아니다.

인간의 몸도 아니다.

인간의 탈을 쓴 돼지새끼의 몸이다.

저따위 인간이 감히 이젠카 영애를 탐하고 있다.

놈에게 그런 자격이 없다는 걸 이 검으로 제대로 보여줄 것이다.

캄포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검이 트리거의 하의를 찢었다.

하지만 하의를 찢느라 캄포의 상체는 아래로 숙여졌다.

그 순간을 트리거는 놓치지 않았다.

양 손을 들어 전력으로 캄포의 등을 내려찍었다.

200㎏의 체중이 양손에 실렸다.

트리거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몸무게였다.

뻐억!

“컥!”

캄포는 앞으로 쓰러졌다.

트리거는 그 몸 위에 걸터앉았다.

캄포는 다급히 몸을 뒤집었다.

땅을 보고 누운 얼굴이 몸을 뒤집으니 하늘을 보게 되었다.

그 이마에 트리거의 이마가 부딪쳤다.

빠각!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캄포는 눈동자가 풀렸다.

트리거는 또다시 이마를 박았다,

빠각!

캄포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트리거는 다시 한 번 더 이마를 박았다.

트리거는 깨진 이마에서 피가 터져 나와 악귀 같은 모습이었다.

캄포의 얼굴은 아예 제 형태를 잃어버렸다.

트리거는 다시 이마를 박았다.

뻐걱!

“말려!”

“이대론 둘 다 죽는다!”

관중석에서 다급한 목소리들이 튀어 나왔다.

그러자 기사 두 명이 비무대 위로 올라가 트리거의 몸을 강제로 캄포에게서 떼어냈다.

그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트리거는 계속 상체를 움직여 머리를 박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그는 몸이 축 늘어졌다.

“허어….”

“저게 그 돼지란 말이야?”

“저런 투지가 있는데 왜 검을 놓았지?”

비무대 아래에서 그런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상석에선 가주와 장로들이 그 싸움을 보고 있었다.

모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장로 중에 한 명이 가주 클라프에게 물었다.

“저놈에게도 가문의 피가 흐르고 있었군. 지금까지 본 싸움 중에 가장 허접하면서도 박진감 있는 개싸움이었다.”

클라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 *

-수고했다.

싸움이 끝난 후 며칠간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투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가 어색했다.

지투스는 그동안 내게 한 번도 미소를 보여주지 않았었다.

아니, 그것 때문에 어색한 게 아니었다.

지투스의 오른팔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선명했던 그의 몸이 절반가량 투명해져 있었다.

-이 싸움으로 미래가 조금 바뀐 모양이다. 내 몸이 약간 흐려진 건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인 것 같고.

지투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지투스의 변한 모습이 반가웠다.

무엇보다 그의 몸 전체에서 풍기던 음울하고 거친 분위기가 사라진 게 마음에 들었다.

왠지 내 미래가 저런 병신의 몸뚱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봐서 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각성을 했다.

바로 눈앞에 시스템창이 떴다.

그걸 보니 참 기분이 묘했다.

시스템창엔 두 가지 화면이 있었다.

좌측엔 검. 우측엔 지팡이.

-검은 무술. 지팡이는 마법이다. 나는 네가 무술을 택하길 바란다.

“왜죠?”

-무술은 내가 택한 길이니 조언을 해줄 수 있지만, 마법은 내가 모르니 조언이 불가능하니까.

나는 그 말을 듣고 검을 택했다.

열등생이긴 하지만 무가에서 자라서 내겐 검이 익숙했다.

반면 마법은 전혀 몰랐다.

거기에 지투스의 조언까지 감안하면 선택은 분명했다.

검을 택하니 지팡이가 사라졌다.

그리고 검이 확대되며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무술을 택했으면 심법부터 익혀야 한다. 무술의 기본은 내공이니, 사람의 가슴을 눌러라.

지투스가 말했다.

그 말대로 사람의 가슴 부분을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목록에 수많은 명칭이 떠올랐다.

바투스 심법, 라니엘 심법, 팔마 심법, 태극신공, 금강부동신공, 혼돈신공, 용천신공….

바투스 심법은 우리 가문의 심법이다.

라니엘 심법은 우리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무가의 심법이다.

팔마 심법은 황실의 심법이다.

태극신공과 금강부동신공은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전생에 웹소설에서나 보던 신공이 아닌가.

그런 신공이 시스템창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손이 근질거렸다.

웹소설에서나 보던 심법을 실제로 익히면 어떤 느낌일까?

목록에서 뭘 고를까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지투스가 말했다.

-처음엔 무조건 용천신공이다.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어.

“왜 용천신공이죠?”

내가 물었다.

-이 시스템창을 보니 시스템이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인지 실감이 나지?

지투스가 말했다.

“예.”

내 질문에 지투스는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설명을 해주었다.

무술은 재질과 노력, 환경, 천운 등이 따라주어야 대성이 가능하다.

나는 환경과 노력은 갖추었다.

내가 노력을 안 했다고 생각하지 마라.

포기하기 전엔 정말 말도 못할 정도로 노력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안 되었다. 그래서 포기를 했다.

그런데 나보다 더한 재질을 갖추고 더한 노력을 한 이복형제들도 어느 정도의 단계에서 끝내 좌절하는 경우를 숱하게 보아왔다.

그런데 시스템이 있으면 재질도 필요 없다. 노력도 필요 없다.

이름만 들어본 전설상의 무술도 경험치만 있으면 익히는 게 가능하다.

그렇기에 이 시스템은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치트키다.

나는 지투스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조건이 붙는다. 레벨 업을 하려면 무조건 싸워야 한다는 것. 그러니 생존능력이 필수다. 생존능력의 첫 번째가 마르지 않는 내공을 갖추는 것. 이 용천신공이야말로 그 목적에 최적화된 신공이야.

심법과 신공은 내공을 쌓는 운기법이라는 의미에서 단어만 다르지 같은 뜻이다.

심법과 신공은 동공과 정공으로 나뉜다.

동공은 움직이면서 익히는 행공이고, 정공은 한 자리에 정좌해 내공을 쌓는 심법이다.

정공은 내공을 쌓는 효율이 뛰어나다.

그리고 명상을 겸해 자신의 정신을 깊은 단계까지 탐구할 수 있다.

다만 외부의 방해가 있으면 제대로 운기를 할 수가 없다.

동공은 반대로 움직이면서도 운기를 하고 내공을 쌓을 수도 있다.

-이 용천신공은 발바닥의 중심. 용천혈로 지기를 흡수해 축기를 하는 동공이다. 이 신공은 대부분의 동공과는 달리 정공만큼 축기의 효율이 뛰어나다. 거기에 용천혈로 직접 내공을 흡수하니, 소진되는 내공을 바로 보충할 수 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라도 도망칠 기력은 항시 남겨둔다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정말 중요한 심법이다.

무술의 격언 중엔 실력의 3할은 숨기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당장 생사가 오가는 마당인데 무슨 수를 쓰던지 살고 봐야지, 숨기고 자시고 할 게 어디에 있나.

그런데 이 용천신공을 익히면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게 가능하다.

용천혈로 계속 기운이 들어오니, 최후에 한 수를 펼칠 기력이 항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심법을 최우선으로 익혀야 한다.

그게 지투스의 설명이었다.

그 말을 듣고 용천신공을 선택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마치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손발을 움직이듯, 용천신공의 이치에 따라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가 자연스럽게 들어와 단전에 쌓이는 게 느껴졌다.

아직은 1레벨이라 미세한 진기의 흐름만을 느끼는 정도였다.

하지만 나 같은 둔재가 따로 구결을 탐구하지도 않고도 그저 시스템창에 있는 것을 선택한 것만으로 진기의 유동을 느낀다?

이건 굉장한 일이었다.

-레벨 하나당 익힐 수 있는 스킬도 하나다. 다른 스킬은 레벨 업을 하면 다시 알려주마.

시스템창을 확인해 보니 형태가 바뀌었다.

이름: 바투스 트리거

레벨: 1

무술: 용천신공

슬롯이 하나 생기며 거기에 용천신공이 들어갔다.

그리고 선택이 끝나자 지투스의 왼팔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얼굴에 엑스자로 교차했던 깊은 흉터도 사라졌다.

뭐지? 왜 미래가 바뀐 거지?

의아한 내 시선에 지투스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시스템창을 보자마자 바투스 심법을 택했다. 그만큼 가문에 미련이 남아 나중에 다시 가문으로 돌아왔지.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문으로 돌아와 약혼녀에게 심장을 찔렸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 * *

매일 후원을 산책하며 용천신공을 운기했다.

운기를 할 때마다 경락이 열리며 기운이 주천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렇게 운기를 할 때마다 살이 놀라운 속도로 빠지고, 몸이 가벼워졌다.

노폐물이 땀으로 배출되며 지방도 같이 빠진 것이다.

운기를 시작한 지 사흘 만에 벌써 체중이 20㎏가량 빠졌다.

용천신공은 괜히 신공(神功)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아니었다.

이렇게 효율이 뛰어나니 신공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다.

“가주님께서 부르십니다.”

계속 수련을 하던 어느 날, 기사가 와서 말했다.

나는 기사의 말에 따라 가주, 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캄포가 죽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게 대뜸 이 말을 내뱉었다.

어쩌라고?

* * *

“어쩌라고요?”

트리거는 두 눈을 끔벅 거리더니 이렇게 반문했다.

너무도 태연한 표정에 클라프가 오히려 당황했다.

“넌 네 형제를 죽였어. 그런데 놀라지도 않는구나.”

“울기라도 할까요?

트리거는 동네싸움에서 꼬마의 코피라도 터트린 것처럼 말했다.

놈이 죽은 건 진작 알고 있었다.

놈이 죽지 않았다면 시스템창이 떠오르지 않았을 테니까.

죽은 걸 알았는데도 놀랄 정도로 마음에 변화가 없었다.

용천신공을 익혀 기운이 몸을 도는데도 트리거는 30분만 움직이면 무릎이 아팠다.

무릎이 체중을 지탱하지 못해서다.

20㎏을 뺐는데도 이 모양이다.

그만큼 트리거의 몸은 상태가 안 좋았다.

지투스는 과거에 캄포에게 당한 후, 각성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불편한 몸으로 가출을 했다.

캄포에게 당한 굴욕감이 오죽했으면 그렇게 엉망인 몸으로 집을 나갔을까.

그리고 몰랐으면 모를까, 상대가 내게 어떤 수모를 주었는지 아는데….

이쯤 되면 병신도 아니고, 나에게 상대를 죽였으니 슬퍼하라는 소리는 좀 아니지 않나 싶다.

3화

트리거는 반문을 하면서 자신의 변화에 새삼 놀랐다.

캄포의 죽음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 때문이었다.

클라프 공작은 자기의 아버지인 것을 떠나 바투스 공작가의 가주다.

가주로서 수백 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트리거는 아버지를 만나면 그 권력의 무게에 눌려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보였다.

20년 후의 지투스는 마왕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싸웠다.

팔다리가 다 날아가고, 눈을 잃고, 심지어 세계가 멸망한 이후에도 지투스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지투스와 아버지를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해 보니, 아버지가 한참이나 부족해 보였다.

그렇게 아버지를 부족하게 보이게 하는 지투스가 미래의 자신이다.

그걸 생각하니 아버지에게서 압박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 *

클라프 공작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트리거를 바라보았다.

권력과 권위는 사람의 마음에 물리적인 질량과 형태를 가진 것처럼 영향을 미친다.

아무도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 영향에서 자유로우려면 그에 걸맞은 심력이 있어야 한다.

트리거는 그런 심력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먼 몸을 가지고 있었다.

캄포와 싸울 때도 그랬다.

당시에 트리거는 무슨 특별한 무술상의 능력도 사용하지 못했다.

캄포가 멍청하게 방심하다가 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자식이 죽었으니 그에 걸맞은 처벌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캄포의 친모, 위놀라 공작부인을 납득 시킬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불렀는데, 이런 뜻밖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클라프 공작은 트리거의 행동을 보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가문의 피가 깨어난 듯싶었다.

하지만 육체적인 조건이 너무 안 좋았다.

무술은 어릴 때부터 기반을 단단히 쌓아야 한다.

그렇게 기반을 쌓고, 거기에 재능, 노력, 운이 따라야 상승의 경지를 이룬다.

그런데 트리거는 너무 일찍 검을 놓았다.

현재 트리거는 20대 중후반.

멀쩡한 몸이라도 새로 무술을 단련하기엔 시기가 늦었는데, 몸 상태조차도 엉망이다.

트리거는 얼굴에 살이 너무 쪄서 눈이 안 보일 정도였다.

도대체 저런 몸으로 늦은 나이에 무엇을 한단 말인가?

클라프 공작은 아쉬움을 삼키고 트리거에게 형벌을 내렸다.

“실수라 해도 형제를 죽였다. 그에 대한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바투스 트리거에게 6일 근신을 명한다.”

“그 대결을 용인한 건 아버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으셔야죠.”

“12일 근신을 명한다.”

“밥은 잘 나오겠죠?”

“24일 근신을 명한다.”

트리거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려고 했다.

이에 클라프 공작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뒤로 물리라는 손짓을 해보였다.

“접견이 끝났습니다, 공자님.”

뒤에 있던 집사가 앞으로 나와 트리거를 밖으로 데려갔다.

“아쉬워.”

밖으로 나가는 트리거를 보며 클라프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 * *

집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트리거 공자가 근신기간 동안 감옥에서 놀랄 정도로 살을 많이 뺐다고 합니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거의 정상인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위놀라 공작부인이 독기 어린 어조로 물었다.

“…….”

집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트리거는 보는 사람의 눈이 썩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줄 정도의 돼지새끼였다.

그런 돼지새끼가 감옥에 있었던 24일 동안 살을 완전히 뺐다고 한다.

집사는 살이 찌지 않아 감량의 고통을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트리거의 결단력이 보통은 넘는 수준이라는 것은 알아봤다.

트리거에게 일어난 긍정적인 변화였다.

그런 긍정적인 변화가 위놀라 부인에겐 전혀 달갑지 않았다.

캄포는 위놀라 공작부인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그 아들을 죽인 놈에게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게 달가울 이유가 없지 않겠나.

집사는 계속 보고를 이었다.

“트리거 공자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짐을 꾸려 가문을 떠났다고 합니다. 떠난 행색을 보니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 잘 됐군. 청부를 넣어.”

위놀라 공작부인이 살기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캄포가 먼저 비무를 신청했다.

거기에 암습을 한 것도 아니고, 정당한 비무 끝에 죽었다.

그 대가로 바투스 트리거는 근신을 받았다.

그러니 여기서 더 뭐라도 시비를 걸 건더기는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는 제3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위놀라 공작부인에게 있어 캄포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고.

그 하나뿐인 아들이 추잡한 개싸움을 하다가 사람 같지도 않은 돼지새끼에게 맞아 죽었다.

위놀라 공작부인은 그 광경을 관중석에서 직접 봤다.

처음엔 캄포가 트리거를 갖고 노는 줄 알고 깔깔 거렸지만, 반대로 캄포가 트리거에게 맞아 죽었다.

사태가 거기까지 이르는 전 과정을 목도했으니 눈이 돌아갈 수밖에.

그녀는 트리거의 피를 원했다.

그런데 공작가 안에 있으면 손을 쓰는 게 어려웠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놈이 밖으로 나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놈을 그냥 죽이지 말고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이라고 해라. 고통을 많이 줄수록 청부금을 올려주겠다.”

“알겠습니다, 마님.”

집사는 공손한 태도로 머리를 숙이며 답을 했다.

* * *

나는 근신에서 풀리자마자 사흘 밤낮을 잤다.

근신은 가문 내에 있는 감옥에서 진행됐다.

24일 내내 찬 바닥에서 지냈다.

음식은 검은 빵, 스프, 스테이크, 과일 등이었다.

검은 빵은 돌처럼 딱딱했고, 스프는 맹물 같았다.

스테이크는 고무처럼 질겼고, 과일도 상하기 일보직전의 상태였다.

나는 원래 아침, 간식, 점심, 간식, 저녁, 간식, 만찬으로 하루에 일곱 끼를 먹었다.

그 중에 가장 많이 먹는 게 만찬. 자기 직전에 먹는 마지막 식사였다.

그때는 정말 배가 터지도록 먹고 포만감을 즐기며 기분 좋은 느낌으로 침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감옥에선 하루에 겨우 세 끼. 그 내용도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아무리 가문 내에서 끈 떨어진 신세라도 이건 너무 하지 않나?

…지투스. 왜 나를 그런 눈으로 봐요?

지투스는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더 힘든 건 운동이었다.

감옥에서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스쿼트, 플랭크 등의 운동을 했다.

그건 그냥 운동을 했다고 간단하게 표현할 강도가 아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쉬지 않고 반복해서 운동을 했으니까.

운동을 하는 내내 용천신공은 계속해서 운기 했다.

운동을 한 첫날은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점점 괜찮아졌다. 용천신공의 덕을 본 것 같았다.

그렇게 운동에 몰두하다 보니 24일이 훌쩍 지나갔다.

감옥에서 나와 거울을 봤다.

두 눈을 의심할 만큼 내 몸은 살이 빠지고 근육질로 변해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엔 살을 뺀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음식도 마약처럼 중독이 된다.

음식에 중독되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제때에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으면 몸이 괴롭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입안으로 뭔가 들어가지 않으면 그 괴로운 증상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이 음식중독을 깨는 게 불가능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결심을 하니 너무도 쉬었다.

물론 금단증상을 견디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시스템을 통해 강해질 것이란 확신이 드니, 힘든 과정 자체도 즐거웠다.

이래서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못 따라간다고 하는 것 같다.

감옥을 나오자마자 바로 짐을 꾸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문을 나왔다.

시중을 들던 하녀와 하인들은 그런 나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변한 내 모습을 보면 이복형제들은 나를 새로운 경쟁자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문에 미련이 없다.

미련도 없는 가문 때문에 굳이 이복형제들과 드잡이질을 할 필요는 없었다.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와는 어떤 감정적 유대도 없으니 이쯤에서 집을 나가야지.

“지투스.”

-왜?

“당신은 왜 가문으로 돌아왔어요?”

가문을 나서며 지투스에게 이렇게 물었다.

나는 이런 형편 때문에 가문을 떠나는 데에 아쉬움이 전혀 없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만 있을 뿐이었다.

지투스는 그런 수모를 당하고 떠났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랬는데 굳이 왜 돌아와 복잡한 후계자 싸움에 끼어들었을까?

지투스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저들에게 인정받고 싶었어.

“왜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시스템으로 능력을 키우면 어디 가서도 인정받고 살 수 있다.

그런데 왜 굳이 가문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을까?

-너는 내가 있으니 내가 느낀 소외감을 모르는 거다.

지투스가 말했다.

지투스는 미래의 나다.

그러니 현재의 내가 느끼던 외로움, 소외감, 초조함 같은 감정을 모두 이해한다.

하지만 예전의 지투스는 그렇게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없었다.

그래서 인정받고 싶다는 인정욕이 평생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어쩌면 시스템창이나 시스템보다 지투스란 존재 자체가 내게 더 도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새삼 지투스가 소중하게 느껴졌다.

나는 지투스의 눈길을 피했다.

그런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였다.

가문을 떠난 후 마을 잡화점에 들렀다.

거기서 배낭을 구입하고, 여행에 적당한 물품을 쓸어 담았다.

가문을 떠날 때 금붙이 몇 개를 들고 나와 그 정도 물품은 쉽게 구입했다.

배낭을 메고 마을을 떠나 계속 걸을 때였다.

산길에 접어드니 험악하게 생긴 몇 놈이 앞길을 막았다.

“멈춰라!”

선두가 내게 말했다.

‘지투스.’

-왜?

‘도와줄 거죠.’

-물론.

캄포와 싸울 때는 스스로 극복하라고 했었다.

이제는 도와준다고 한다.

지투스의 말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산적이 입을 열어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였다.

-지금 도끼를 던져!

‘예?’

-저놈의 주절거림을 들어줄 이유가 없잖아. 방심하고 있을 때 들이쳐야지.

* * *

가르시, 울벤, 파르는 용병이다.

바투스 트리거를 죽여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용병들이 이런 의뢰를 받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상대는 바투스 가문의 피를 물려받은 아들.

거기에 되도록 잔인하게 죽여 달란다.

자기 눈으로 자신의 사지가 썰리는 것을 보게 만들고 죽이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그렇게 해주면 상당한 액수의 의뢰금을 준다고 했다.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엔 죽은 흔적만 보고도 죽을 당시의 정황을 그려낼 수 있는 능력자도 많다.

주로 경험 많은 용병이 그런 능력을 가졌는데, 의뢰자가 그런 능력을 가진 능력자를 고용해 교차 검증을 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용병이 일을 가리지 않는다고는 해도 이건 좀 꺼려졌다.

용병이 선량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에 그런 용병이 어디 있겠나.

그건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를 그런 식으로 죽이면 후환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제시하는 금액이 그들의 결심을 굳게 했다.

후불까지 다 받으면 최소한 몇 년은 일하지 않고도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셋은 그 의뢰를 승낙했다. 죽이자마자 돈을 지급받고 이 고장을 뜨면 그만이니까.

놈을 계속 미행하다 일을 벌이기 좋은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멈춰라!”

적당한 장소를 찾자마자 셋은 트리거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선두에 있던 가르시가 크게 소리를 쳤다.

* * *

선두에 선 놈이 소리를 지르고 다시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트리거는 허리에서 손도끼를 뽑아 놈을 향해 던졌다.

온몸의 힘을 다해 풀 스윙으로 던진 도끼였다.

도끼는 회전을 하며 놈의 이마를 향해 날아갔다.

뻐어억!

회전이 과해 도끼의 날이 아니라 두꺼운 뒷부분이 놈의 이마에 맞았다.

그런데도 놈의 이마는 그대로 함몰되었다.

놈의 몸은 앞으로 쓰러졌다.

트리거는 체력 배분을 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도끼를 던졌다.

도끼를 던진 순간 어깨가 빠지고,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 통증은 느끼자마자 사라졌고, 온몸에 다시금 기력이 차올랐다.

캄포를 죽이며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 바가 절반가량 채워져 있었다.

레벨 업!

그리고 이 순간 나머지 절반이 채워지며 레벨이 순식간에 올랐다.

4화

레벨 업을 하며 몸이 최상의 상태로 돌아왔다.

-좋구나! 이젠 여기!

지투스는 칭찬을 하더니 발로 땅을 쿡 짚었다.

지투스의 반투명한 몸은 어느새 가르시가 탄 말의 뒤에 서 있었다.

그가 발로 짚은 부위는 가르시가 탄 말의 배 밑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위치였다.

트리거는 캄포를 죽였다.

캄포의 어머니 위놀라 공작부인이 가만히 있지 않으리란 건 당연한 일.

그런데도 아무 대비도 안 하고 있었다면 트리거는 바보다.

당연히 그런 기습에 대비해 항시 주의를 경계하고 전투에 필요한 무기들도 준비했다.

트리거가 제대로 싸우는 건 캄포에 이어 두 번째였다.

캄포는 그를 희롱하려고 했지만, 이놈들은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생애 두 번째.

살의를 지닌 상대. 그것도 다수와는 첫 번째 싸움이었다.

절로 긴장이 되는 건 당연한 일.

그런데 지투스의 칭찬을 들으니 긴장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굳은 몸이 부드럽게 풀렸다.

지투스는 인정욕구 때문에 시스템을 얻고도 가문으로 돌아와 가주가 되려고 했다.

인정욕구가 강한 건 트리거도 마찬가지.

무가는 그 특성상 분위기가 억압적이다.

트리거는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그 억압적인 분위기에서도 용기를 북돋아주고 격려해줄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 어릴 때부터 경쟁을 포기해 만인의 경멸을 사기까지 했다.

그러니 인정욕구가 강한 건 당연한 일.

그런 상황 속에서 트리거에겐 그 인정욕구를 채워줄 지투스가 있고.

지투스에겐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게 둘 사이의 차이점이었다.

이런 격전 중에 말의 배 밑으로 몸을 날리는 건 위험한 일이다.

행여 말이 말발굽으로 자신을 차기라도 하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을 인정하는 지투스가 지시하는 일이었다.

트리거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지투스가 짚은 곳으로 몸을 날렸다.

다행히 그의 몸은 무사히 말의 배 밑을 지나 지투스가 짚은 곳으로 떨어졌다.

거기서 바로 위로 몸을 솟구쳤다.

그의 이마는 울벤의 턱을 들이받았다.

“컥!”

울벤은 비명을 지르며 말 등에서 뒤로 떨어졌다.

그는 턱이 깨졌고, 입에서는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거기서 파르에게 돌진!

말에서 내려 서있던 파르는 당황해하면서도 칼을 뽑아 트리거에게 휘둘렀다.

-몸으로 때우고 거리를 좁혀!

지투스가 소리쳤다.

트리거는 오랜 동안 무술에는 손을 놓았다.

현재 손에 익은 무술은 심법인 용천신공이 전부.

초식대결로 들어가면 진다.

믿을 건 시스템뿐이었다.

지금은 저레벨이다. 저레벨은 레벨도 쉽게 오른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레벨만 오르면 즉석에서 몸은 회복된다.

마치 게임처럼.

그러니 칼이 몸을 파고들건 말건 접근해서 죽이면 된다.

요는 그럴 용기가 있냐는 거다.

트리거는 두 눈을 부릅뜨고 파르에게 돌진했다.

파르의 칼이 트리거의 어깨에 박혔다.

트리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진했다.

그 무식한 행동에 파르는 허둥거렸다.

트리거는 그 틈에 파르의 몸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파르의 턱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파르의 몸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트리거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깨에 박힌 장검을 뽑았다.

뽑힌 자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런데 솟구치던 피가 순식간에 가라앉더니,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레벨 업!

마법 같은 광경이었다.

-훌륭하다!

지투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트리거에게는 차고 넘칠 정도의 용기가 있었다.

순식간에 3레벨이 되었다.

스킬 슬롯도 두 개나 더 생겼다.

스킬을 채우는 건 나중에.

사람을 죽였으니 일단 이 자리를 떠야 한다.

뜨기 전에 챙길 것은 챙겨야지.

세 사람의 소지품을 뒤졌다.

주머니에 돈이 제법 두둑했다.

세 사람이 위놀라 공작부인에게서 착수금으로 받은 의뢰금이었다.

의뢰의 내용이 워낙 험하기에 착수금도 제법 많았다.

덕분에 여비는 벌었다.

소지품 중 여행에 필요하다 싶은 것도 뒤져서 모조리 챙겼다.

말 세 마리 중에 가장 튼튼해 보이는 한 마리를 골랐다.

거기에 용병에게서 얻은 주머니와 자신의 배낭을 실었다.

다른 두 마리는 그 자리에서 풀어주었다.

트리거는 남은 한 마리를 타고 자리를 이탈했다.

이젠 두 스킬 슬롯에 어떤 스킬을 채울지 고민을 할 차례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지투스가 바로 스킬들을 추천했으니까.

-슬롯 중 하나엔 천안(天眼) 스킬을 채워라.

천안. 상대의 레벨을 알 수 있는 스킬이다.

-상대의 레벨을 파악해야 싸울지 여부를 결정하지.

천안이 없으면 분위기와 기세 등으로 상대의 레벨을 짐작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부정확하다.

천안 스킬이 있으면 정확한 레벨 측정이 가능하다.

-레벨 차이가 너무 심하게 나면 천안 스킬로도 해석을 못해. 그런 상대를 만나면 무조건 튀어라.

예를 들어 천안 스킬에 ** ?? ## 같은 이상한 기호가 있다면, 이건 자신의 수준으로는 레벨조차 못 읽을 정도로 강한 상대라는 의미다.

이런 상대를 만나면 싸울 생각은 하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튀어야 한다.

-세 번째부터는 검법, 보법, 권법 등 선택의 여지가 많다. 뭘 선택하든 별 차이가 없다. 나는 유수보를 추천한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유수보는 상대의 사각으로 물처럼 자연스럽게 이동하는 보법이다. 공수 양면으로 적용하기에 제격이지.

“그러죠.”

트리거로서는 특별히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세 번째 스킬로는 유수보를 선택했다.

-지금부터는 레벨 업에 신경 써야 한다. 하지만 너무 거기에만 신경 쓰면 안 돼.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나만큼 레벨 업이 빠르지는 못할 거야.

“그건… 그렇겠네요.”

지투스는 각성을 한 뒤 정말 목숨을 내놓고 레벨 업을 했다.

내면에 쌓인 열등감이 자신을 그렇게 채찍질 했다.

-네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당시의 나보다 열심히 하는 건 불가능해. 즉, 20년 후에 네가 도달할 레벨은 현재의 나와 비슷하다는 말이야. 그런데 그 레벨로도 너는 결국 마왕과의 대결에서 패했어. 그러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한다.

“무슨 방법이요?”

-살릴 놈은 살리고 죽일 놈은 죽여서 인류의 전체적인 전력을 강화시키는 거야,

지투스는 미래에서 동료들과 함께 싸우며 ‘그 친구가 지금껏 살아있었다면….’ ‘그 아이가 함께 했더라면 이토록 허무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거야.’

류의 탄식을 수없이 했었다.

마왕과 싸우기도 전에 뛰어난 인재들이 자기들끼리의 사정으로 그 잠재력을 제대로 꽃피우기도 전에 죽었다.

그들을 최대한 살려 인류의 전력을 보존해야 한다.

-그리고 인류의 배신자는 미리미리 죽여야 해.

마왕군의 목적은 인간의 멸망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인류군 내부에는 마왕군에게 협력하는 미친놈들이 제법 많았다.

-한참 공성전을 하고 있는데 이게 신의 뜻이라며 갑자기 성문을 여는 놈. 마왕이 옳다며 아군 사령관의 목을 따는 놈들도 있었어. 이런 놈들은 미리미리 싹을 잘라야해.

“…….”

-거기에 내분을 유도하고 분열을 조장하는 놈들도 솎아 내야지. 인간은 정치적인 존재라, 집단이 모이면 그런 정치적인 다툼이 시작되는 건 필연적이야. 그런데 그걸 감안해도 선을 넘는 놈들이 있어. 그런 놈들도 미리 솎아내지 않으면 인류군의 전력이 심각할 정도로 약해진다.

“…….”

-마지막으로 마왕군의 간부를 죽여야 해.

마왕은 외부에서 강림하는 게 아니다. 세계의 악의가 모여 탄생하는 것이다.

이 세계에는 붉은 달 현상이라는 게 있다.

보름마다 달이 붉게 변하면서 몬스터가 포악해지는 현상이다.

그런데 조만간 붉은 달 현상이 일어나는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붉게 변하는 시간은 길어진다.

그러면서 몬스터들은 점점 강해진다.

인간은 처음엔 그 기미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 이후 몬스터들과 싸우다 이기는 날보다 지는 날이 많아지고.

그 몬스터들 가운데 결국 마왕이 탄생한다.

마왕이 탄생하기 전부터도 강해진 몬스터들 때문에 인간은 종말 일보직전까지 몰렸다.

거기서 마왕까지 탄생하니 인류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지금은 사태의 초기라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했을 뿐이야.

마왕군의 간부들도 그런 과정에서 탄생한 몬스터들이다.

-마왕이나 간부를 미리 죽여도 소용이 없어. 보름달의 마력에 의해 다시 탄생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간부 중에 몇몇은 미리 죽여야 해. 인간과의 상성이 그야말로 최악이니까.

마왕군의 간부를 죽여도 다른 몬스터가 그만큼 강해진다.

이러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을 것 같겠지만.

하지만 그게 아니다. 마왕군 간부 가운데는 인간과의 상성이 정말 최악인 놈이 있다.

그런 놈들은 미리미리 죽여야 한다. 그래야 미래의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해진다.

트리거는 적당한 사냥터에서 죽자고 싸우며 20년 후까지 레벨만 계속 올리면 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투스의 말을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뭔가 일정에 쫓겨 정신없이 움직이는 샐러리맨이 되라는 소리 같았다.

그런데 지투스의 말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내가 지금 생각한 방식을 택한 지투스는 이미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보다 확률이 높은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란 게 내가 몸으로 때우는 방식이다.

트리거는 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세상사람 중에 나 혼자만 멸망을 막기 위해 죽자고 고생하라는 말 아니야?

-왜 혼자 고생을 해? 사실을 알려. 사람들 귀에서 피가 날 정도로 미래에 일을 떠들라고!

“내가 하는 말을 믿을까요?”

-처음에는 안 믿겠지. 하지만 네 말대로 일이 계속 진행되면 어떨까? 그때에도 안 믿을까?

“…….”

-그래, 그래도 고집 쎈 놈들은 안 믿을 수 있지. 하지만 네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안 믿을까? 네가 만난 열 명 중에 아홉 명이 안 믿어도 최소한 한 명은 믿겠지. 백 명을 만나면 그 한 명이 열 명이 되는 것이고, 천 명을 만나면 백 명이 되는 것이야. 그 백 명이 주변 사람에게 네 이야기를 전파하면 어떨까?

“으음….”

그 말에 트리거는 아무 말도 못했다.

지투스의 말에 일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마왕군과 싸우며 입버릇처럼 말한 게, 조금이라도 일찍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야. 다른 동료들도 비슷한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우린 너무 늦게 이 사실을 알았어. 조금이라도 빨리 이 사실을 알았다면, 인류군이 이길 확률이 그만큼 높아졌을 거야. 그러니 굳이 혼자만 짐을 짊어지지는 말라고.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으니까.

트리거는 그 말에 동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짐을 나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그런 의미에서 서둘러. 첫 번째로 살려야 할 인간이 이틀 뒤에 죽을 예정이니까. 서두르면 늦지 않게 그 인간이 죽을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지투스가 말했다.

그 말에 따라 트리거는 서둘러 길을 떠났다.

* * *

두 무리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현장.

한 무리는 마차를 방어벽 삼아 필사적으로 방어에 전념하고 있었다.

두 무리의 수는 각각 다섯 명.

인원은 똑같은데 방어측이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공격측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컥!”

공방 끝에 방어측의 기사 한 명이 목에 칼을 맞고 쓰러졌다.

남은 기사들의 대장, 알렌이 이를 갈며 말했다.

“네 놈들은 마차에 계신 분이 누군지나 알고 이 따위 짓을 벌이는 것이냐!”

“알지. 영주님의 영애가 아니신가?”

공격측의 무사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 말에 여자를 호위하던 기사들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떠졌다.

여자는 영주의 딸, 로즈였다.

귀족가 영애들의 사교모임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받았다.

기사들도 나름대로 분투했지만, 습격자들의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기에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영주는 영지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영주의 영애를 공격할 정도면, 습격자들도 보통의 무리는 아닐 터였다.

“영주님이 아시면 너희들을 가만 두지 않으실 것이다.”

알렌이 습격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 우리가 누군지 알면 그러겠지.”

공격측의 무사 한 명이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공격측의 다른 무사가 이죽거리는 어조로 그 말을 받았다.

“너희는 이 자리에서 모두 뒈질 텐데, 영주가 우리 정체를 무슨 재주로 알지?”

“목격자가 알려줄 수도 있지.”

그때, 느닷없는 목소리가 갑자기 뒤에서 들려왔다.

5화

갑작스런 목소리에 사람들은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습격자 일행의 뒤에 먼지를 부옇게 뒤집어쓴 여행자가 서 있었다.

“데릭!”

습격자의 대장, 큐첵이 일행 중 한 명을 불렀다.

데릭이라 불린 일행은 검을 들고 목격자, 트리거를 향해 걸어갔다.

걸어오는 듯싶었는데, 순식간에 트리거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레벨이 너무 높은데요?’

다가오는 데릭을 보는 트리거의 표정은 태연했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천안으로 본 데릭의 레벨은 8레벨.

자신은 3레벨. 레벨 차이도 어지간해야지, 이건 어떻게 비벼볼 여지도 없는 수준이었다.

중간중간에 몬스터를 잡아가며 왔으면 그도 레벨 업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 서둘러 달려오느라 그럴 시간이 없었다.

-싸움을 레벨로만 하니? 일단 놈의 정강이에 나이프로 한 방!

지투스가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같이 있으면 닮는다.

같이 있는 대상이 미래의 자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지투스가 심드렁한 표정이니, 트리거도 무리들 앞에서는 태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런데 그 효과는 놀라왔다.

습격자들은 모두 8레벨에서 12레벨 사이였다.

트리거를 죽이러 오는 데릭이 그중 가장 낮은 레벨이었다.

데릭을 이기는 것도 문제지만.

막상 이겨도 다른 습격자들과 싸우는 게 더 큰 문제였다.

그런데 심드렁한 자세를 취하자 마음도 저절로 안정이 되었다.

트리거는 허리에서 스로잉 나이프를 뽑았다.

검신 전체가 매미 날개처럼 얇고, 자루에 나무 손잡이조차 달리지 않은, 던지기 전용의 나이프였다.

여기까지 달려오는 중간에 무기상점에 들려 구입한 수십 자루의 스로잉 나이프 중에 하나.

트리거는 그 스로잉 나이프를 데릭이라 불린 상대에게 던졌다.

용천신공은 정공이 아니라 동공이다. 그래서 그는 이동을 하며 항상 용천신공을 운기 했다.

그 덕에 기경팔맥에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그 기운을 모조리 실어 던진 것이다.

스로잉 나이프는 빛살 같은 속도로 데릭의 정강이를 향해 날아갔다.

갑작스런 기습에 놀란 데릭은 다급히 검을 뽑아 그 스로잉 나이프를 쳐내려 했다.

트리거와 데릭은 무려 7레벨이나 차이가 난다.

레벨만큼 역랑의 차이도 크다.

스로잉 나이프가 몸통이나 머리 같은 급소로 날아왔다면 데릭은 쳐냈을 것이다.

하지만 정강이는 급소가 아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부위로 날아온 비수였다.

비수는 간발의 차이로 데릭의 정강이에 박혔다.

모서리에 걸리기만 해도 극도의 통증을 느끼는 게 정강이 부위다.

그런 부위에 나이프가 꽂혔으니 얼마나 아프겠는가?

“억!”

데릭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그리고 그게 데릭의 최후였다.

앞으로 숙여 드러난 데릭의 정수리에 다시 스로잉 나이프가 날아와 자루까지 박혔다.

데릭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휘익!”

트리거는 휘파람을 불었다.

경험치가 끝까지 채워지며 레벨이 하나 더 올랐다.

온몸에 기력이 차올랐다.

바쁘게 달려오며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었다.

“이놈!”

기습자 중에 다른 한 명이 분노한 얼굴로 그에게 달려왔다.

천안으로 본 상대 레벨은 10레벨.

순식간에 상대는 트리거와의 거리를 좁혔다.

‘놀랍군.’

트리거는 자신의 변화에 새삼 놀랐다.

상대의 공격범위가 저절로 인식 되었다.

유수보를 익히며 일어난 변화였다.

유수보는 물의 이치를 구현한 보법이다.

그 이치를 깨달으니 상대의 공격범위가 저절로 인식 되었다.

상대의 능력, 감정상태 등에 따라 공격범위는 좁아지기도, 넓어지기도 한다.

그 범위를 인지하고 피하는 게 유수보다.

-현재 네 레벨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해.

옆에서 지투스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지투스는 상대가 눈앞까지 닥쳐오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투스는 이보다 더 불리한 싸움을 수십, 수백 번이나 겪고도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저레벨로 고레벨을 이기는 방법이야 차고도 넘친다.

-여기선 다시 나이프를 상대의 정강이에.

‘네.’

트리거는 허리에서 스로잉 나이프를 다시 뽑아 던졌다.

이번에 던진 비수도 정강이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상대는 이미 그 수법에 동료가 당한 것을 보았다.

“흥!”

상대는 코웃음을 치며 검을 휘둘렀다.

그 검에 정강이로 날아가던 스로잉 나이프가 튕겨나갔다.

트리거는 뒤로 물러나며 또다시 허리에서 비수를 뽑았다.

“늦었어!”

상대가 호통을 치며 트리거와의 거리를 좁혔다.

트리거는 상대의 이마를 향해 스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상대의 검이 트리거의 배를 깊이 파고 들어갔다.

-자세 흩트리지 말고! 찔러!

그 순간 지투스가 소리를 질렀다.

* * *

상대는 자신의 검이 트리거의 내장까지 파고드는 감각을 느꼈다.

통상적인 경우. 이러면 싸움은 끝난다.

그래서 상대는 방심했다.

하지만 트리거는 배에 검이 파고든 상태에서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스로잉 나이프를 찔렀다.

상대도 이것만은 예상하지 못했다.

빡!

그의 스로잉 나이프는 상대의 이마에 자루까지 박혔다.

상대는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레벨 업!

트리거는 검에 배를 찢기며 창백한 얼굴로 비틀거렸다.

하지만 레벨 업이 이루어지며 순식간에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었다.

폭랩은 쪼랩의 특권이다.

검이 내장을 파고드는 감각을 선명하게 느꼈다.

그런 경험은 몸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상당한 타격을 준다.

시스템의 레벨 업은 몸은 회복시켜도 그 정신적 타격마저 회복시켜 주진 않는다.

하지만 트리거는 머리를 한 번 흔드는 것만으로 그 정신적 타격에서 간단히 벗어났다.

지투스가 곁에 있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이 그의 정신을 이렇게 강인하게 만든 것이었다.

트리거는 태연한 얼굴로 다시 싸울 준비를 했다.

사람들은 적아를 가리지 않고 모두 그 광경을 보았다.

모두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이 떠올랐다.

“괴물….”

공격자 중 한 명의 입에서 그런 말이 터져 나왔다.

검이 배를 찔렀는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격을 하고.

찔린 배의 상처는 시간을 거꾸로 돌린 듯 순식간에 아물었다.

이건 영락없는 괴물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레벨 업을 했어도 아직 트리거의 레벨은 이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낮았다.

정면대결로 제대로 싸우면 트리거는 이들 중에 한 명도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기습자들은 트리거를 자신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괴물로 여겼다.

그래서 트리거를 어찌하지 못하고 경계태세만 취하고 있었다.

그렇게 싸움이 소강상태에 빠지는 듯하자, 마차를 호위하던 호위무사들이 태세를 바꿔 기습자들을 공격했다.

일방적으로 밀리던 싸움이 팽팽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기습자들 중 둘이 트리거에게 죽어서 전력이 저하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기습자들 중 한 명이 여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여자를 장악해 인질로 삼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기습자들에겐 불행하게도 트리거가 있었다.

여자를 장악하려던 기습자에게 트리거는 스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나이프는 기습자의 견갑골에 박혔다.

순간 기습자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러자 호위무사의 검이 그런 기습자의 옆구리를 찌르고 깊이 들어갔다.

“크흑!”

기습자는 비명을 지르며 검을 놓치고 비틀거렸다.

그런 기습자의 뒤통수에 스로잉 나이프가 박혔다.

상대를 완전히 처치해야 경험치가 제대로 들어온다.

그 경험치를 위해 트리거가 스로잉 나이프를 날린 것이었다.

역시 막타가 진리다.

레벨 업!

순식간에 레벨이 다시 올랐다.

하지만 경험치 바가 달랐다.

지금까지는 상대를 죽이면 레벨이 하나 오른 뒤에도 경험치 바가 거의 끝까지 가득 찼다.

그런데 지금은 경험치 바가 10%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레벨이 오를수록 더 많은 경험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격측의 남은 두 사람은 눈치를 보다 도망쳤다.

수비측은 탈진에 가까울 정도로 기력을 소모한 상황이라 도망치는 두 기습자를 쫓지 못했다.

트리거 역시도 도망치는 두 사람을 쫓지 않았다.

그렇게 레벨이 올랐어도 현재 그의 레벨은 6레벨에 불과했다.

도망치는 두 명은 둘 다 10레벨.

상대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가하면 오히려 자신이 당하기 때문이었다.

* * *

트리거는 마차를 타고 성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무사들이 보답을 한다면서 그를 성주와 대면시키기 위해 마차에 태운 것이다.

그가 구한 귀족가의 영애, 로즈는 옆에 앉아 흘끗흘끗 그를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이건 영락없이 백마 탄 기사를 보는 아가씨였다.

‘이 여자가 뭐가 중요하다고 구하자고 한 거죠?’

트리거가 지투스에게 물었다.

이 아가씨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귀족가의 영애였다.

이런 아가씨가 뭐가 중요하다고 구하라고 한 것일까?

-이 아가씨의 아버지, 마르엘 남작은 20년 후 인류군의 사령관이 된다. 하지만 딸 때문에 계속 패착을 범했지.

‘무슨 패착이요?’

-이 아가씨를 납치해 죽이려던 조직은 사교도야. 그래서 사교도만 보면 마르엘 남작은 눈이 뒤집혔다. 적을 앞에 두고도 사교도의 흔적만 보이면 그쪽으로 병력을 보냈지. 그래서 이길 전쟁도 패했다. 결정적인 전쟁에서 그런 행동을 해서 인류의 멸망에 가속이 붙었지. 그걸 방지하기 위해 이 영애는 살려야해.

‘그 정도로 공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사령관을 바꾸는 게 낫지 않아요?’

-내가 어떻게 바꾸지? 사령관은 그 당시 간부들이 뽑은 거야. 내가 멋대로 정한 게 아니라고. 그게 가능하다해도 바뀐 사령관이 더 못난 인간이라면 어떻게 하고?

‘…….’

-무엇보다 마르엘 남작은 딸 문제만 아니면 사령관으로써 손색이 없는 인간이었어. 그러니 사령관을 바꾸는 것보다는 딸을 살리는 게 더 현명한 결정이야.

‘지투스.’

-왜?

‘당신 같이 치밀하고 강한 사람이 마왕한테 졌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마왕이 얼마나 강하기에 당신이 진 거죠?’

말을 듣다 보니 다른 데에 의문이 생겼다.

레벨 업을 하면 어떤 부상에서도 회복한다.

그런데 지투스는 사지가 다 잘린 처참한 상태로 왔다.

그건 더 이상 레벨 업이 불가능한 상황. 마지막 싸움에서 졌다는 의미다.

트리거는 3레벨로 10레벨을 이겼다.

지투스의 지도 덕분이었다.

20년 후에 지투스는 지금의 자신보다 수십 배는 강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 싸우는 데에도 이골이 났을 것이다.

그런 지투스가 어떻게 마왕에게 졌을까?

-나는 당시에 27레벨이었어.

지투스가 말했다.

27레벨이 얼마나 높은 레벨인지 트리거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레벨 시스템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빠르게 레벨을 올려서인지 더욱 감이 안 왔다.

거의 한 놈당 하나씩 올랐는데?

트리거의 마음을 알았는지 지투스가 보충 설명을 이었다.

-1에서 10레벨은 보통 사람이 검사가 되는 단계야. 10에서 20레벨은 검기를 다루는 단계고. 인간의 기준으론 엑스퍼트 유저니 비기너니 하는 그런 단계지. 20이 소드 마스터. 25레벨은 그랜드 마스터야.

‘…….’

트리거는 그 말에 입을 벌렸다.

소드 마스터만 되어도 이 세상에선 초인 취급을 받는다.

그랜드 마스터는 그 초인을 넘어선 전설이다.

그런데 지투스는 그 전설을 넘은 레벨이었다.

트리거가 입을 쩍 벌리자, 지투스가 그런 그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트리거. 나는 마왕과의 최종결전에서 사지가 잘리고 눈이 날아갔어. 얼굴에 있던 흉터도 단지 피부에만 상처를 입은 게 아니야. 뇌도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 제 역량을 발휘하기 불가능한 상태였단 말이야. 익힌 것도 무술이지 마법이 아니었어.

‘…….’

-그런데 제 몸이 아닌 상태에서 마법도 아닌 무의 이치를 이용해 정신을 20년 전의 과거로 보내 나를 다시 만나고 있어. 도대체 인간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할 것 같나?

6화

지투스의 말에 트리거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

-동료들 중에도 25레벨,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 몇몇 더 있었어. 시스템의 힘을 쓰지 않고도 그런 수준에 오를 정도로, 가공할 잠재력을 가진 자들이 내 동료들이었지. 그런 나와 동료들이 모두 힘을 합쳐 싸웠는데도 끝내 패했어. 그렇다면 마왕은 도대체 몇 레벨일까? 몇 레벨이기에 우리에게 이런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을까?

‘몇 레벨인데요?’

-몰라, 천안으로 보니 레벨은 안 보이고 대신 ? ## !!같은 이상한 기호가 가득하더군. 그건 레벨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천안으로도 해석을 못한다는 의미야.

‘마왕이 그 정도로 강하면 인류연합이 강해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죠? 마왕의 손짓 한 번에 다 쓰러져 버릴 텐데.’

-그럼 다시 재도전을 하면 되지.

‘어떻게요?’

-내가 과거로 정신을 보내 나를 만난 것처럼 너도 그러면 돼. 하지만 그러기 전에 네 시간선에서 결착을 내는 게 제일 좋겠지.

트리거는 그 말에 지투스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지투스가 참 독하고 질긴 인간이란 느낌을 여러 번 받았었다.

다만 지투스가 미래의 자신이기에 그런 느낌을 일부러 외면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투스는 트리거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질기고 독한 인간인 것 같았다.

아는 사람이 다 죽고 몸마저 다 으깨졌는데, 정신을 과거로 보내 다시 싸움을 준비하다니.

그것만으로도 굉장한데, 그런 신세가 되었으면서도 비관적인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트리거는 자신의 얼굴에 금칠을 하는 것 같아 뭐했지만, 미래의 나는 정말 대단한 인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봐?

‘흉터가 사라진 얼굴이 생각보다 잘 생겨 보여서요.’

-그거 자화자찬이라는 것만 알아둬.

지투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 *

“아… 음….”

마르엘 남작은 붕어처럼 입술을 벙긋 거리며 아음 소리만 냈다.

마르엘 남작은 영주다.

영주로서 영지를 경영하다보면 온갖 경험을 한다.

그런 경험을 하다보면 어지간한 일엔 단련이 되어 이렇게 말을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상대가 자기 딸의 목숨을 구한 인간이라도 그렇다.

그런데 상대가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있었다.

마르엘 남작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내 딸을 납치하려던 범인들이 무슨 사교의 일원이었단 말이지?”

딸이 정체 모를 무리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마르엘은 분노로 눈이 뒤집혀 수하들에게 범인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금 그 명령으로 수하들은 성을 수색하고 영지를 뒤집어엎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딸을 구한 이 트리거란 청년이 자신이 범인을 안다면서 은밀한 곳에서 독대를 청했다.

그 독대에 응하니 이런 미친 소리를 하는 것이다.

“예.”

청년의 태도는 당당하기만 했다.

“그 사교는 신의 재림을 위한 제물로 내 딸을 점찍어 죽이려고 한 거고?”

“예.”

“게다가 그 이야기를 20년 후에 미래의 자네에게서 들었다고?”

“예.”

“그 미래의 자네는 지금 자네 옆에 붙어 있고?”

“예.”

“아… 음….”

마르엘 남작은 또다시 입술을 벙긋 거렸다.

그러다 난처한 듯이 이마를 긁적였다.

미친놈이다. 이건 정말 미친놈이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 딸을 구했다.

그러니 쫓아내지도 못하고 난처한 표정만 짓는 것이었다.

말하는 청년, 트리거의 얼굴은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세계를 구원할 전설의 용사다운 태도였다.

‘지투스.’

-왜?

‘좀 더 그럴듯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그건 다만 척일뿐이었다.

말하는 트리거도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진지하지 않으면 이 말의 신뢰성이 사라지니 진지한 척을 하는 것뿐이었다.

-네가 생각을 해봐.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 이야기를 꾸며야 그럴 듯하게 들릴까?

지투스가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사실 트리거는 지투스보다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 이야기는 진실을 제외하면 어떤 식으로 꾸미든 빈틈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나의 거짓말을 방어하기 위해선 열 개의 거짓말이 필요하고, 그러다 보면 말의 앞뒤가 달라진다.

그러니 아예 진실을 거의 그대로 이야기 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시스템창 하나뿐이었다.

사실 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못 믿을 이야기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지투스는 이 이야기도 하자고 했다.

그런데 트리거가 이것만은 전하지 않았다.

지투스에게 마르엘 백작(20년 후에 마르엘 남작은 백작이 되었다.)은 남이 아니었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트리거에게 있어 마르엘 남작은 생판 남이었다.

생판 남에게 가장 핵심적인 비밀까지 밝힐 수는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못 믿는 것도 이해해. 말하는 내가 생각해도 참 황당한 이야기니까. 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내 말이 그대로 이루어질 거야. 그때라도 내 말을 믿고 미래에 대비하면 돼.

“…라고 하는 데요?”

트리거는 지투스의 말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다시 그대로 전했다.

“…보름마다 몬스터가 계속 강해지고, 그 몬스터로 인해 영지가 결국 멸망당한다고? 그게 몇 년 후의 미래란 말이지?”

“예, 그렇답니다.”

“게다가 내가 미래 인류군의 사령관이 되는데, 딸의 죽음에 공사를 구분 못하고 바보짓을 하다가 인류를 멸망시키고?”

“예.”

내가 말했지만 참….

왠지 딸까지 구해줘 놓고 쌍욕을 먹을까봐 조마조마하다.

사실 그 정도만 하면 다행이지.

“어… 음….”

마르엘 남작은 다시 입만 벙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일 년 뒤에도 넌 아무 탈 없이 잘 먹고 잘 산다는 예언을 들으면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넌 일 년 뒤에 죽는다는 예언을 들으면, 아무리 엉터리 같은 말이라도 그 찜찜함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것이다.

사람은 긍정적인 예언보다는 부정적인 예언에 더 마음이 끌리기 때문이다.

트리거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부정적인 예언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그래서 그 말이 아무리 황당하게 들려도 쉽게 무시를 못하는 것이다.

일종의 충격요법? 그런 거다.

* * *

-이런 성격이니 더 편하게 사실을 말할 수 있었던 거야.

지투스가 트리거에게 말했다.

지투스가 한 말은 영락없는 미친 소리였다.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딸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건 말건 진작 쫓아냈을 것이다.

그런데 마르엘 남작은 쫓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르엘 남작은 무술이나 천재적인 지략으로 사령관 자리에 오른 게 아니었다.

당시엔 마르엘 남작보다 더 무술이 뛰어나고 지략이 뛰어난 인간들이 인류연합 내부에 차고도 넘쳤다.

하지만 모두 두말하지 않고 마르엘 남작의 지시에 따랐다.

-마르엘 남작의 장점은 인덕(人德)이야.

오랜 전쟁으로 모두가 지쳐갔다.

승전 소식보다 패전 소식이 많아지고 가족, 친지, 친구들의 죽음이 쌓여갔다.

인류연합의 심성은 그만큼 강퍅해지고 서로에게 날선 말을 서슴지 않았다.

인류연합의 분열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되었다.

마르엘 남작은 워낙 인덕이 뛰어나 그런 인류연합의 마음을 토닥여 하나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인덕 때문에 마르엘 남작은 딸을 구한 은인인 트리거를 쫓아내지 못하고 머리만 긁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은 내 말을 믿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못 믿겠으면 흘려들으세요. 따님에 대한 경비에는 신경 좀 쓰시고. 하지만 몇 년 뒤 영지가 무너지면, 그때에는 내 말을 기억하시고 미래에 대비하시면 됩니다.”

트리거가 말하는 태도는 심플했다.

설득을 하려면 끝도 한도 없다.

그러니 아예 설득할 생각을 버렸다.

그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이니 자신의 말을 증명하겠다고 언제까지나 이곳에 남아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씨앗을 뿌리고 트리거는 갈 길을 가려고 했다.

시간이 흐르면 자신의 이야기대로 사태는 진행될 테고.

그러면 자신의 이야기는 증명이 될 테니까.

그때 가서 자신의 말을 믿더라도 아예 안 믿는 것보다는 나은 결과가 나올 테니 미리 말을 해두는 것이었다.

“따님의 목숨을 구해준 보답을 하고 싶으시면 여비나 좀 보태주십시오. 저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위놀라 백작부인의 사주를 받은 용병들에게서 갈취한 돈도 상당했다.

하지만 여행자의 입장에선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떠나기 전에 그 사교도들이 어디에 있는지 미래의 자네에게 물어봐줄 수 있겠나?”

마르엘 남작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딸이 죽고 영지가 박살나고, 자기의 삽질로 인류가 멸망의 기로에 선다.

이런 찜찜한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상대를 그냥 보낼 수 있겠나?

일단 사실 여부는 확인해야지.

* * *

기사단장 페르소는 10여 명의 휘하기사, 그리고 백여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신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옆에는 트리거가 같이 걷고 있었다.

페르소가 트리거에게 물었다.

“배후가 코리엘 교(敎)라고?”

트리거가 대답했다.

“예.”

페르소가 다시 물었다.

“증거는 있는 건가?”

“가서 신전을 수색하면 뭐라도 나오겠죠.”

“그 말은 지금은 증거가 없다는 이야기군. 증거가 없다면 각오를 해야 할 거야.”

페르소가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그런 트리거를 보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얼굴엔 불신이 가득했다.

마르엘 남작의 영애인 로즈가 납치를 당할 뻔했다. 지나가던 여행자가 영애를 구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여행자가 용의자로 지목한 게 코리엘 교다.

여기서부터 불신이 시작되었다.

코리엘 교는 교의 상징으로 올빼미를 쓴다.

코리엘 교는 농부들의 신이었다.

절기에 따라 파종, 수확의 시기도 예언해줬다.

코리엘 교는 근래에 생긴 신흥종교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던 토착 종교였다.

흉년이 들면 코리엘의 사제들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신에게 자비를 구했다.

풍년이 들면 사제들의 주관 아래 모닥불을 피우고 잔치를 벌였다.

그런 잔치에선 분위기에 취한 남녀가 으슥한 곳으로 들어가 일을 치루는 경우도 허다했다.

병사들 중에 일부도 그런 축제 가운데 잉태되었다.

기사들은 코리엘교 사제들의 주관 아래 결혼식을 올렸다.

뭔가 수상한 조짐을 보이는 이상한 종교를 사교로 지목했다면 기사들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그런데 선대부터 자신들과 함께 해온 토착 종교를 이렇게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니 각오를 하라고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사실 엄포를 놓는다고 정말 트리거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주군의 영애를 구한 은인이니 허풍 좀 떨었다고 해코지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후로는 트리거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을 테고.

영애를 습격한 배후 수색작업에도 참가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적당한 사례금만 받고 영지에서 쫓겨나겠지.

* * *

“어서 오십시오.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특별한 절기도 아닌데?”

일행은 코리엘 교의 신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 사제들이 나와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물었다.

“인사는 혐의가 벗겨지면 나눕시다. 모두 묶어! 반항하지 마시오. 반항하면 로즈 영애를 납치하려던 배후로 단정 지을 테니.”

기사대장 페르소가 사제들에게 협박하듯 말했다.

그의 명령에 기사들이 앞으로 나와 사제들의 몸을 포승줄로 단단히 묶었다.

“신전을 샅샅이 뒤져서 증거가 될 만한 물건이 있나 찾아보아라.”

페르소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은 신전에 들어가 종교행사에 쓰이는 온갖 제기들을 거칠게 꺼내며 뒤지기 시작했다.

페르소가 아무리 트리거의 말을 의심한다 해도 일단 증언이 나왔다.

증언이 나온 이상, 한 점의 의혹도 없도록 조사는 제대로 해야 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성전을 흙발로 침입하다니. 신의 분노가 무섭지도 않소?”

코리엘 교의 사제들은 그런 기사들의 행태에 격렬하게 항의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성전을 뒤지던 기사와 병사들이 밖으로 나왔다.

“뭐라도 나왔나?”

페르소가 물었다.

“아무것도 안 나왔습니다.”

기사와 병사들이 대답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빈손이었다.

7화

“영주님의 영애가 사교도들에게 납치당할 뻔했소. 그런데 그 사교도들이 여러분이란 제보가 들어왔소. 그래서 조사를 하고자 합니다. 조사해 본 뒤 혐의점이 없다면 풀어줄 테니, 일단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페르소가 부하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부하들은 사제들을 묶은 포승줄을 당기며 페르소의 뒤를 따랐다.

“이게 무슨 짓이오!”

사제들은 포승줄에 묶여 비틀거리면서 항의를 했다.

그런 항의를 들으며 페르소와 기사들은 하나같이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사제들이 정말 무고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일을 벌였다.

벌인 이상 나중에라도 의구심이 남지 않도록 제대로 조사를 해야 한다.

조사를 한다고 고문 같은 방법을 동원해 강제로 입을 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들도 신의 분노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기보다는 육하원칙에 따라 사제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뭔가 수상한 점이 있나 알아볼 생각이었다.

거기서도 수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제들을 풀어줄 예정이었다.

* * *

코리엘 교의 사제들은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며 서로 당혹스런 눈빛을 교환했다.

‘도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거지?’

‘글쎄 말이오. 연관된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이대로 끌려가 고문이라도 당하면 어쩔 셈이오?’

‘우리 교우 중 고문에 입을 열 정도로 신앙심이 약한 교우가 있나?’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기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눈빛 교환이었다.

사교(邪敎)란 기존의 상식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교리를 가지고 있는 종교다.

이런 사교의 존재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니 철저히 그 존재를 숨기는 것.

그러니 비밀결사의 형식을 통해 소수로 명맥을 이어나갔다.

다른 하나는, 기성종교처럼 위장하는 것이다.

코리엘 교는 두 번째에 해당 되는 사교였다.

코리엘 교가 섬기는 코리엘 여신은 죽음과 멸망의 여신이었다.

멸망의 때가 오면 여신은 재림한다.

여신의 재림을 위해선 세계의 멸망을 재촉해야 한다.

그 재촉을 위해선 인신공양 같은 방법을 쓴다.

이러한 교리를 가진, 그야말로 사교 집단이었다.

하지만 교리를 있는 그대로 말하면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형식으로 교리는 적당히 변형했다.

그 변형한 교리가 지금 바깥에 알려진 코리엘 교의 교리였다.

애초에 교리를 변형한 이유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입맛에 맞으니 코리엘 교를 믿는 신도들의 수는 상당했다.

코리엘 교의 정수에 해당하는 사교는 신도들 중에서도 사교도가 될 만한 싹수가 보이는 자.

세상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거나.

파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거나.

정상인과는 뭔가 감각이 어긋난 사이코적인 성향을 보이는 자들을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였다.

코리엘 사교는 그런 식으로 세력을 불렸다.

현재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제들의 수는 10명.

그 사제들 중 5년 전에 이 영지에 있던 사제는 한 명도 없었다.

5년 전까지 이 영지에 있던 사제는 총 세 명.

내막을 모른 채 신실하게 위장된 교리를 믿는 사제들이었다.

그런데 교단의 지시에 따라 5년 전부터 어두운 내막을 아는 사제들이 하나씩 이곳으로 왔고.

물정 모르는 사제들은 다른 곳으로 파견 보내졌다.

‘이곳에서 기도하라. 때가 오고 있다.’

여신의 계시가 몇 년 전에 사교에 임했기 때문이었다.

‘장미를 번제물로 바쳐라.’

한동안 계시가 없다가 이런 계시가 다시 나타났다.

그 장미를 그들은 마르엘 남작의 딸이라고 해석했다.

마르엘 남작의 딸 이름이 로즈이기 때문이었다.

영지엔 로즈라는 이름을 가진 영지민들이 몇 명 더 있었다.

여자의 이름에 장미, 백합, 히아신스 등의 꽃 이름을 붙이는 건 흔한 경우니까.

거기에 피부나 분위기, 성격 등을 더해 차가운 백합, 은 장미, 검은 백합 등으로 형용사를 더했다.

그중 장미 이름이 붙은 여자들은 진작 사교도들의 제물이 되었다.

영주의 딸인 로즈는 감시가 엄중해 계속 기회를 노리다, 이제야 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트리거의 개입으로 실패한 것이다.

여신의 계시다.

그러니 실패했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때를 보아 다시 재시도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마르엘 남작이 자신들이 배후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확신하고 있었다.

코리엘 교는 오래 전부터 농부들과 함께 해온 생활밀착형 토착 종교다.

그 토착 종교가 직접 나선 것도 아니고 몇 단계를 건너뛰어 용병에게 의뢰를 넣었다.

어떻게 자신들이 범인이라고 의심하겠는가?

그런데 시도가 실패한 다음 날 바로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이러니 그들도 당황할 수밖에.

‘어떡하죠? 다 죽이고 도망칠까요?’

사제 중 한 명이 눈빛으로 자신들의 지도자에게 물었다.

‘기다려. 저들은 아직 우리가 진범이라고 확신치 못하고 있다.’

이마에 주름이 가득한, 인자하게 생긴 사제가 눈빛으로 말했다.

현재 이 사제들의 최고 책임자인 툴센 주교였다.

기사들은 무식한 놈들이다.

사제들이 범인이라고 확신했으면 구타와 고문이 가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있었다.

행동은 거칠지만 말은 정중했고, 사제들을 포승줄로 묶어만 놓았지 그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고 있었다.

기사들도 긴가민가하며 자신들이 범인인지의 사실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부에 배신자가 있어서 들통이 난 건 아니었다.

의뢰를 받은 용병 측에서 단서를 흘린 것이다.

그런데 그 단서가 확실치 않아 저들은 확신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버틴다.

버티기만 하면 저들은 자신들을 풀어줄 것이다.

툴센 주교는 그렇게 추측했다.

트리거의 존재를 모르니 처음부터 엇나간 추측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옳았다.

기사들은 이들이 범인이라는 확신을 못하는 상태이니, 증거를 못 찾으면 그들을 풀어줄 터였다.

사제들은 포승줄에 묶여 비틀 거리며 기사들의 뒤를 따랐다.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기사님들이 왜 사제님들을 잡아가지?”

마을 사람들도 낯선 광경을 보며 당혹감이 어린 얼굴로 서로에게 중얼거렸다.

“제가 사제님께 뭘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트리거가 병사들을 헤치고 툴센 주교에게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물으시오.”

트리거의 행동이 공손하니, 대답하는 툴센 주교의 태도도 점잖았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트리거의 행동은 전혀 공손하지 않았다.

갑자기 툴센 주교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 * *

트리거는 사제들을 보자마자 바로 이들이 배후라는 걸 확신했다.

지투스의 말 때문이 아니었다.

천안으로 본 이들의 상태 때문이었다.

먼저 툴센 주교의 머리 위엔 이런 글자가 떠 있었다.

종족: 인간.

레벨: 15.

스킬.: 사안(蛇眼), 혈주술, 혈혼술.

다른 사제들의 머리 위에도 비슷한 글자가 떴다.

스킬의 이름부터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사교도라야만 가질 수 있는 스킬이었다.

-여기엔 금강대력수다!

천안을 통해 같은 걸 본 지투스가 말했다.

트리거는 현재 레벨이 3단계나 더 올라 6레벨이 되어 있었다.

스킬 슬롯도 세 개의 여유가 더 생겼다.

‘빈 슬롯 세 개는 어떤 스킬로 채울까요?’

트리거가 지투스에게 물었다.

-두 개는 여유분으로 남겨둬. 하나는 사제들을 직접 보고 결정하자.

레벨 업엔 전투가 필수다.

트리거는 싫건 좋건 전투를 계속 해야 할 운명이었다.

전투 중엔 어떤 돌발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 슬롯 일부는 항상 비워두어야 했다.

그래서 쓸 스킬 슬롯은 하나.

이건 사제를 보고 스킬을 결정한다.

미래에 마르엘 남작이 눈이 뒤집혀 사교도들을 때려잡고 있을 때.

지투스는 마왕군과 필사의 전투를 벌였다.

그와 마왕군과의 전투가 천상계 고수들의 전투라면, 마르엘 남작과 사교도들의 싸움은 저레벨 하수들 간의 싸움이었다.

당시 그는 마왕군과의 싸움에 필사적이어서 하수들의 싸움에는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사교도들이 어떤 스킬을 쓰는지 이제야 알았다.

어쨌거나 알았으니 바로 대처가 나왔다.

여기에 딱 맞는 대처법이 금강대력수였다.

6레벨 금강대력수는 기존의 단위인 12성을 대성으로 하는 단위에서는 2성이나 3성 수준이다.

금강대력수란 무공을 겨우 흉내만 내는 단계인 것이다.

하지만 그 흉내엔 불가의 법력이 포함되어 있다.

법력엔 파사현정(破邪顯正).

즉 사악한 것을 멸하고 올바른 것을 세우는 공능이 있다.

그 법력이 금강대력수를 통해 툴센 주교의 뺨으로 침투했다.

보통 사람이 갑자기 사제의 뺨을 때리는 폭거를 저질렀다.

단순히 때리는 것을 넘어, 맞은 사제의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제대로 가한 타격이었다.

마을 사람이고, 사제고, 병사고, 기사고 할 것 없이 모두의 입이 경악으로 크게 벌어졌다.

“이게 뭐하는 짓이오!”

분노한 툴센은 트리거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

워낙 분노해 툴센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트리거에게 맞은 툴센의 오른 뺨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있었다.

그리고 깨진 항아리에서 물이 새듯 소름끼치는 느낌을 풍기는 핏빛의 영기가 그 손자국에서 스며 나왔다.

툴센의 오른쪽 눈도 그 영기의 영향으로 뱀의 눈처럼 동공이 길쭉하게 변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사제님이 끌려가다니, 어떡해… 어마나!!”

끌려가던 사제들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던 아낙네도 그 사안(蛇眼)을 보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네, 네 이놈! 가, 감히 사제에게 이 무슨 참람한 짓이냐!”

툴센은 트리거를 보고 분노해 소리를 질렀다.

어찌나 화가 치솟았는지 입술이 부들부들 떨려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주교님! 주교님!”

그때 뒤에 서 있던 사제들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트리거를 향한 분노 때문에 처음엔 사제들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러다 뒤늦게 사제들의 말을 들었다.

“왜 불렀느냐?”

툴센이 고개를 돌려 사제들을 보고 물었다.

“얼, 얼굴이….”

사제들이 덜덜 떨며 말했다.

그제야 툴센은 자신의 얼굴에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을 깨달았다.

여전히 얼굴이 따끔거렸다.

그리고 뭔가가 새어나가는 감각이 느껴졌다.

트리거는 툴센을 보고 검을 뽑았다. 다른 기사들도 일제히 검을 뽑았다.

그걸 보고 툴센은 비로소 자기의 정체가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모두 죽여!”

툴센은 소리를 치며 혈주술을 응용했다.

그 순간 몸에서 피안개가 일어나 밧줄 같은 형태가 되었다.

그 밧줄이 그를 묶은 실제 밧줄을 휘감았다.

그러자 몸을 묶은 밧줄이 저절로 삭아지며 끊어졌다.

피안개로 이루어진 밧줄은 가장 앞에 있던 기사를 향해 뱀처럼 꿈틀 거리며 날아갔다.

기사는 놀란 얼굴로 그 밧줄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 했다.

“꼼짝 마!”

툴센이 기사를 보며 소리쳤다.

툴센의 눈은 양쪽의 동공이 모두 뱀처럼 길쭉하게 변해 있었다.

그 눈과 마주치는 순간, 기사는 움찔거리더니 꼼짝도 하지 못했다.

사안으로 펼치는 심령제압술이었다.

핏빛 밧줄은 그 기사의 몸에 스며들었다.

“으아아악!”

기사는 고통으로 몸을 버둥거렸다.

밧줄은 그런 기사의 피를 빨아먹으며 더욱 선명해졌다.

반대로 기사의 몸은 순식간에 앙상해졌다.

“꼼짝 마라.”

“모두 움직이지 마!”

다른 사제들도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놀랍게도 기사들과 병사들, 마을 사람들의 몸이 일제히 그 자리에서 덜컥 굳어졌다.

사제들의 몸에서도 피안개가 일어났다.

그 피안개가 핏빛의 밧줄로 변해 사람들의 몸을 뱀처럼 휘감으며 스며들었다.

“끄아악!”

“으아아악!”

혈주술은 사람들의 몸을 뱀처럼 휘감고 정기를 빨아들였다.

트리거도 사안에 제압되어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핏빛 밧줄이 그런 트리거에게 다가왔다.

8화

-빈 슬롯을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양의신공!

지투스가 말했다.

트리거는 그 말에 가까스로 시스템창에서 양의신공을 클릭했다.

그 순간 마음이 두 개로 분리되었다.

분리된 마음은 현재의 상황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몸에 걸렸던 사술이 풀렸다.

‘일단 가장 만만한 놈부터 잡자!’

사제들 중 높은 레벨은 그가 뺨을 때린 툴센. 15레벨이었다.

약한 레벨은 8레벨. 자신보다 2레벨이 높았다.

상대의 주특기도 무술이면 당연히 8레벨이 6레벨을 이긴다.

하지만 상대의 주특기는 사술이었다.

그 사술만 무력화시키면 6레벨이 8레벨을 때려죽일 수도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

트리거는 몸을 지면에 던졌다. 핏빛 밧줄이 간발의 차이로 그의 등을 스쳤다.

트리거는 다시 일어나 8레벨 사제에게 돌진!

“꼬, 꼼짝… 컥!”

사제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런 사제의 이마엔 트리거가 던진 스로잉 나이프가 박혀 있었다.

‘다음은 저 놈!’

경험치 바가 70%까지 차올랐다. 비슷한 레벨 한 놈만 잡으면 레벨 업이 가능한 상태.

그럼 가장 까다롭고 대응하기 어려운 상대를 몸으로 때우며 잡는다.

지투스가 지목한 다음 상대는 레벨이 12. 스킬로는 혈령검술이 있었다.

즉, 주특기가 심령제압을 하는 사술이 아닌 무기술이다.

트리거는 놈에게 돌진하며 스로잉 나이프를 던졌다.

그 스로잉 나이프가 놈의 이마로 날아갔다.

“어딜!”

상대는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헐렁한 사제복 아래에서 검 한 자루가 뽑혀 나왔다.

그 검으로 스로잉 나이프를 쳐냈다.

그 틈에 트리거는 상대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사제가 트리거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검이 트리거의 머리를 수직으로 쪼개왔다.

트리거는 오른 손에 내력을 모아 그 검면을 내리쳤다.

머리를 쪼개오던 검이 방향을 바꿔 왼쪽 어깨를 사선으로 파고들었다.

상대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검이 목표인 머리가 아닌 어깨에 박혔다.

하지만 이것도 치명상인 것은 마찬가지. 이것으로 승부는 끝났다.

그의 검은 아래로 떨어지는 관성에 의해 트리거의 쇄골을 부수고 몸통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눈은 앞의 상대를 넘어 뒤의 기사들로 향했다.

뻑!

그때 갑자기 광대뼈에 충격이 오며 눈앞이 흐릿해졌다.

트리거가 몸을 파고드는 검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진, 그의 광대뼈를 금강대력수로 후려친 것이다.

사제는 광대뼈가 깨져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그 상태에서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트리거는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았다.

그러자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어깨의 출혈이 멈추며 상처가 아물었다.

레벨 업!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다른 사제를 향해 돌진했다.

시스템창에 주특기가 사안으로 나온 놈이었다.

레벨이 다시 오르며 경험치 바가 10%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한 놈을 죽여도 다시 레벨 업을 하는 게 힘들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약한 놈을 찾아 안전하게 죽여야 한다.

그러니 무력보다 사안이 주특기인 놈을 상대해야 했다.

양의신공은 사안 같은 사술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오케이. 제대로 배웠구나.

지투스는 미소를 지으며 트리거를 격려했다.

트리거는 경험치 바의 상태를 확인하며 그에 적합한 상대를 골랐다.

시스템창과 경험치 바가 있는 트리거만이 가능한 싸움법이었다.

이런 싸움은 저레벨 때 더욱 효과적이다.

고레벨로 갈수록 필요경험치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두 명의 사제가 또다시 그에 의해 쓰러졌다.

사제를 쓰러뜨리는 과정에서 혈령술에 당해 온몸이 삐쩍 말라 버렸다.

하지만 사제의 숨통을 끊어놓자 말라버린 몸이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레벨 업!

이번엔 직접 툴센을 향해 돌진했다.

“꼼짝 마!”

당황한 툴센은 소리를 내질렀다.

사안과 트리거의 눈이 마주쳤다.

트리거의 눈이 잠시 몽롱해진다 싶더니 다시 초점이 맞춰졌다.

양의신공이다.

툴센은 다급히 양손을 움직였다.

혈주. 핏빛 밧줄이 꿈틀거리며 트리거에게로 날아왔다.

유수보로 그 핏빛 밧줄의 공세를 피하며 돌진!

핏빛 밧줄이 뱀처럼 꿈틀거리며 트리거의 앞을 막아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다.

트리거를 보던 툴센의 얼굴엔 공포와 두려움, 의혹 등의 감정이 가득했다.

그는 사제의 검이 트리거의 어깨를 파고들고, 트리거가 그 상처에서 바로 회복되는 걸 보았다.

혈주술에 당해 온몸이 삐쩍 말랐는데도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보았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에서 신성력도 쓰지 않고, 그렇다고 고가의 포션도 마시지 않았는데 그냥 회복이 된 것이다.

저게 인간인가?

혹시 코리엘 여신이 보낸 사도가 아닐까?

하지만 왜 신의 사도가 신의 종인 우리를 적대하지?

트리거가 보인 이적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 * *

“쳐라! 저 사악한 놈들을 죽여!”

기사단장 페르소는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그도 툴센의 사안에 심령이 제압되어 있었다.

하지만 툴센이 트리거에게 정신을 집중하는 바람에 그 제한이 풀려 버렸다.

“죽여!”

다른 기사들도 분노한 얼굴로 검을 들었다.

트리거가 죽인 사제들이 사안으로 심령을 제압했던 기사들이었다.

그 사제들이 죽음으로써 그들이 건 사안도 풀려 버렸다.

사안이 풀린 페르소와 기사들은 다른 사제들에게 돌진했다.

사제들이 기사들과의 싸움에 정신이 팔린 사이, 병사들에게 급하게 건 사안마저 모두 풀려 버렸다.

그걸로 싸움은 끝났다.

분노한 기사들과 병사들의 합동공격에 남은 사제들은 사로잡히거나 죽거나 도망쳤다.

* * *

“그래서, 사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마르엘 남작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기사단장 페르소가 대답했다.

남은 사제들은 기사들에게 죽거나 사로잡혔다.

툴센 주교는 트리거와 기사들의 합공을 피하고 도주하는 데에 성공했다.

기사들은 곧바로 사로잡은 사제들을 고문해 사교의 정체와 도망친 툴센 주교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사제들은 그 고문을 버티다 모두 죽어버렸다.

기사들은 거기서 물러나지 않고 또다시 신전을 뒤졌다.

이번에도 신전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아예 힘을 합쳐 신전을 허물어 버렸다.

동료들이 혈주술에 온몸이 말라 죽어가는 걸 눈앞에서 봤다.

그런 행동을 한 주체가 오랫동안 자신들과 함께 한 토착 종교 코리엘 교였다.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토착 종교에 대한 배신감이, 단서를 잡지 않고서는 물러나지 못하게 기사들을 자극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사들의 집요함이 통했다.

신전을 모두 허물고 그 잔해를 치우자, 바닥으로 내려가는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고, 거기서 사교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지하에도 역시 코리엘 교의 상징인 부엉이 신의 신상이 있었다.

하지만 지상에 있는 신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

아주 사악하고 불길한 모습의 신상이었다.

그 신상 앞엔 제단이 있었고, 제단 주변엔 사람의 인골이 널려 있었다.

그걸로 사교의 사제가 정체를 숨긴 채 코리엘 교의 사제로 위장한 게 아니라, 코리엘 교 자체에 뭔가 수상쩍은 게 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마르엘 남작의 얼굴은 착잡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코리엘 교의 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코리엘 교가 정상적인 종교라 믿고 있었다.

그런 코리엘 교가 범인인 것이 밝혀졌으니 마음이 착잡할 수밖에.

“그 코리엘 교가 왜 내 딸을 지목해 제물로 삼은 건가?”

마르엘 남작이 트리거에게 물었다.

그는 이제 트리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트리거의 대답은 심플했다.

“그건 남작님이 알아내셔야죠.”

미래에 지투스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만 사연을 들었지, 그 자세한 내막은 몰랐다.

알았어도 관심을 두진 않았을 것이다.

세계의 운명을 걸고 마왕군과 싸우는 일과 비교하면, 이 일은 비중이 아주 작은 하찮은 일이었으니까.

“그래. 이건 내 일이니 내가 알아내야겠지.”

마르엘 남작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 일에서 트리거는 외부인이다.

이런 사실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트리거는 할 일을 넘치도록 한 것이다.

사교와의 싸움은 자신의 몫이었다.

* * *

가벼운 마음으로 마르엘 남작의 영지를 떠났다.

이걸로 미래의 일을 바꾼 것 아닌가?

마르엘 남작이 미래까지 딸을 지킬 수 있을지 그 여부는 모른다.

하지만 이전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게 있다.

지투스의 미래에서 그는 딸이 죽기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괴로워하고 몸부림쳤다.

그 무력감이 광기로 발전해 사교도만 보면 눈이 뒤집힌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교가 딸을 노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최선을 다해 딸을 지킬 것이다.

설혹 그게 실패해 딸을 잃더라도 과거처럼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고.

그게 광기로 연결되지도 않을 것이다.

과거에 그가 무력감을 느낀 건, 딸이 죽기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으니까.

“그러지 않을까요, 지투스?”

나는 지투스에게 말을 걸다가 깜짝 놀랐다.

지투스의 몸은 뒷배경이 보일 정도로 투명해지고 있었다.

-네 생각이 맞아. 미래가 바뀌고 있다. 넌 아주 잘하고 있어.

“지… 투스?”

지투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지투스처럼 웃지를 못했다.

미래가 바뀐다.

그것은 미래의 나도 바뀐다는 뜻.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지투스가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좋은 일이다. 네가 사지가 잘려 땅을 뒹굴며 멸망한 세상을 보는 미래가 바뀐다는 뜻이니. 그러니 웃어. 이젠 작별이다. 마지막으로 네게 내 기억을 선물로 주마.

지투스가 내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러자 20년 동안의 기억이 내게 홍수같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 기억의 홍수에 못 이겨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고 보니 지투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지투스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할 겁니다, 지투스. 미래는 걱정 마시고 푹 쉬세요.”

사실 도저히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지투스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지음(知音)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울 수야 없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미래의 나, 지투스와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지투스의 기억을 별자리 삼아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여정을 떠났다.

* * *

“왜 실험실의 비커를 잘못 닦아 실험을 실패하게 만들어. 그래서 내가 스승님께 욕을 먹게 하냐고!”

퍽!

20대 후반의 청년이 10대 후반 청년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사형, 전 비커를 제대로 닦았습니다. 그리고 사형의 연구는 비커와는 아무 관련이 없잖아요!”

“이 자식이 어디서 말대꾸야?”

둘 다 상당한 미남자였다.

다만 사형이란 남자는 눈꼬리가 위로 치솟아 사납고 음험한 기색을 보이는 게 흠이었다.

욕을 먹은 남자는 드레스를 입으면 절세의 미녀로 오인할 정도로 얼굴선이 고운 청년이었다.

사형이라 불린 청년은 사제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돌멩이가 그 청년의 정강이를 때렸다.

“억!”

청년은 정강이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넌 뭐야!”

청년이 앞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앞엔 먼지를 부옇게 뒤집어쓴, 20대 후반의 여행자로 보이는 청년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 지나가던 정의의 사도!”

청년이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그 태연한 모습이 사형이라는 청년의 분노를 자극했다.

“이 자식이 뒈지려고! 파이어…억!”

청년은 주문을 외우다 말고 비명을 내질렀다.

어느새 여행자가 던진 돌멩이가 주문을 외우던 청년의 입을 때린 것이다.

그리 세게 던진 것 같지도 않은데, 청년은 이빨이 날아가고 입에선 피가 튀었다.

“내가 마법사가 마법을 캐스팅 하는 걸 방관할 정도로 멍청하다고 생각해?”

여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9화

“이 개자식이 감히… 억!”

청년은 욕설을 내뱉다 다시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여행자가 던진 돌멩이가 청년의 이마를 때렸다.

돌멩이에 실린 힘이 워낙 강해 청년의 이마가 터지고 선혈이 분수같이 치솟았다.

청년은 이마를 움켜잡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여행자를 바라보았다.

돌멩이를 맞자 머리가 빠개질 정도의 통증을 느꼈다.

잘못 맞았으면 분명 죽었을 것이다.

여행자는 정말 살의를 가지고 청년을 향해 돌을 던진 것이었다.

그러고도 여행자는 여전히 장난처럼 웃고 있었다.

청년은 그제야 여행자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이면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고 보자, 개자식!”

청년은 악당의 진부한 대사를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났다.

“푸코?”

여행자가 욕을 먹고 있던 청년에게 다가가 확인하듯 물었다.

“절 아십니까?”

푸코라 불린 청년이 어리둥절한 어조로 물었다.

“잘 알지. 우리 이야기를 좀 나눌까?”

여행자, 트리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그러니까, 제가 인류의 배신자라고요?”

“응.”

트리거가 푸코를 데리고 간 곳은 인근의 고급 음식점이었다.

트리거가 요리를 주문하자, 고급 코스요리가 차례대로 식탁 위에 놓였다.

푸코는 이전까지 딱딱한 검은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니 고급 요리를 보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위를 자극해, 홀린 듯한 눈으로 요리가 식탁 위에 놓이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트리거가 하는 미친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으면 아까 저기서 네 사형인 마르코한테 얼굴이 제대로 걷어차였을 거야. 그로 인해 얼굴의 균형이 어긋나지. 잘생긴 얼굴이 그래서 이상하게 변해. 애석한 일이지.”

“어… 음….”

푸코는 어음 소리만 내며 아무 말도 못했다.

하도 황당한 소리를 들으니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지금 그의 반응은 마르엘 남작이 트리거에게서 미래의 예언(?)을 듣고 보인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반응을 보일 사람이 푸코가 마지막도 아닐 것이다.

“턱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고 마탑으로 돌아갔는데도, 아무도 네게 신경을 쓰지 않아. 넌 모두의 욕받이였으니까.”

“어… 음….”

“유일하게 관심을 갖고 네 부상을 염려한 사람은 네 사매인 라일라야. 인근에서 유명한 미녀라고 하더군.”

“어… 음….”

푸코는 어음 소리만 내다 물을 한 컵 마셨다.

목이 말라서 마신 게 아니라, 어떻게 반응을 할지 몰라 그냥 물을 마신 것이었다.

“그리고 6개월 후에 라일라와 결혼을 해.”

“푸흡!”

푸코는 마시던 물을 내뿜었다. 물이 식탁으로 튀었다.

“에헤이 더럽게!”

트리거는 부드럽게 손을 움직였다.

트리거 쪽으로 튀던 물이 그 손에 맞아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유수보의 이치를 권법으로 해석한 응용초식이었다.

푸코는 그걸 알아볼 정도의 안목이 없었다.

있더라도 그걸 신경 쓸 정도의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푸코는 입을 쩍 벌리고 트리거를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사매를 사랑했었구나. 그건 몰랐네.”

트리거는 빵을 스프에 적셔 먹으며 말했다.

“하지만 결혼하고 1년 뒤에 라일라는 살해돼. 네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

“넌 이후 분노를 숨기고 범인을 수색해. 그래서 끝내 범인을 밝혀내지. 네 턱을 부순 마르코가 범인이야. 너는 분노로 미쳐 날뛰며 마르코를 죽이려 하지. 하지만 스승을 비롯한 다른 사형들이 전부 마르코의 편을 들어. 그리고 마탑 전체와 싸움이 붙지. 거기서 비로소 네 실력이 세상에 알려져.”

“…….”

“마탑의 모든 마법사가 힘을 합쳐도 네 상대가 되지 못해. 하지만 너도 끝내 다수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이 도시를 도망치지. 그게 네가 인류의 배신자가 된 히스토리야. 재밌지?”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까?”

“내가 너와 마르코, 라일라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널 속여서 내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

“…….”

푸코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자신과 사형, 그리고 라일라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일단 넘어가자.

하지만 상대를 속이려면 속여서 얻는 이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마탑의 흔한 도제중 한 명에 불과했다.

저 사람에게는 자신을 속여 얻는 이익이 없었다.

“너 때문에 인류군은 이길 싸움도 계속 패해. 반전을 노리고 준비한 회심의 한 수까지 실패로 돌아가지. 너 때문에 인류군 수십만 명이 죽어. 네 계략 때문에 인류군은 이길 싸움은 지고 질 싸움은 아주 참패를 하며, 세상이 멸망으로 향하는 과정이 가속화되지.”

“…….”

“몬스터들은 매해 보름을 기점으로 강해져. 나중에는 그 현상을 붉은 달 현상이라고 불러. 지금부터 그런 명칭이 서서히 퍼지고 있을 걸? 그 현상이 누적되면서 몬스터들은 점점 강해지고 교활해져. 지능이 사람보다 높아지는 놈도 생기지. 나중에는 사람의 말을 하고 문자를 쓰는 놈까지 나와.”

“네? 아니 그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능은 여전히 몬스터야. 매사를 힘으로 해결하려고 해. 인류군은 그래서 부족한 전력으로도 마왕군과 비등하게 싸울 수 있었어. 그런데 네가 마왕군의 참모로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전혀 달라지지. 네 계책은 인간들의 지성을 압도했어. 거기에 몬스터들을 불가사의하게 잘 다루었지. 어떻게 그 포악한 몬스터들이 네 입의 혀처럼 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될 지경이야.”

푸코는 넋이 빠진 얼굴로 트리거의 말을 들었다.

미친 소리다.

그런데 그 미친 소리가 너무나도 흥미진진하다.

“어서 먹어. 점심을 먹자마자 나와 함께 떠난다. 마탑엔 미련을 가지지 마라. 네게 좋은 인연이 아니니까.”

“자, 잠깐만요.”

그 말에 푸코는 깜짝 놀라서 입을 열었다.

이야기가 너무 급작스럽게 전개되지 않나?

“가기 싫다고? 널 이 자리에서 죽여주랴?”

트리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였다.

하지만 푸코는 그 미소를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

트리거는 저렇게 미소를 지으며 돌을 날려 마르코의 입을 부수고 이마를 깨버렸다.

“미래에 널 죽이면서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너 같은 놈이 우리 편이었다면, 인간이 마왕군에게 밀릴 일은 없었을 텐데. 어쩌다 이런 놈이 마왕군에게 붙어서 이렇게 일을 힘들게 만들었나. 지금 그 아쉬움을 해결하기 위해 널 만난 거야. 하지만 네가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널 죽이고 일을 매듭지어야지.”

“…….”

푸코는 아무 말도 못했다.

그에겐 마탑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 세상의 전부를 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근거라는 게, 처음 보는 상대의 미친 소리였다.

아무 근거도, 증거도 없는 이 미친 소리를 어떻게 믿고?

거기에 이 미친 이야기 속에서 자신은 라일라와 결혼한다고 했다.

이 미친 소리가 사실이라고 치면, 라일라와 결혼을 하고 그 뒤에 미래를 바꿀 수도 있지 않나?

푸코는 트리거를 보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

하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트리거는 그저 평범하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입을 열려니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런 말을 하면 이 자리에서 트리거에게 숨통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용기를 내서 입을 열려고 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입을 열지 못했다.

입을 열려는 순간, 마르코가 그의 사제들과 푸코의 사형들을 이끌고 음식점에 쳐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개새끼. 여기에 있었구나. 널 가만 두지 않겠다.”

트리거는 음식을 씹으며 마르코와 다른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다 모였네. 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일일이 찾아다니지 않게 다 같이 와줘서 고맙고.”

그리고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말처럼 가벼운 게 아니었다.

이어서 트리거는 자리를 박차고 마르코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검이 허공에 말끔한 궤적을 그렸다.

마르코와 사제들의 목이 그 궤적에 걸렸다.

순식간에 그들의 목이 잘려나갔다.

트리거는 검을 도로 집어넣고 테이블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급하게 남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아아악!”

그때 여자 손님이 뒤늦게 비명을 내질렀다.

“경비대를 불러!”

다른 손님이 고함을 질렀다.

“가자!”

트리거는 그제야 아쉬운 얼굴로 포크를 놓았다.

그리고는 푸코의 손을 붙잡고 음식점을 나섰다.

푸코는 악몽을 꾸는 듯한 얼굴로 트리거의 손에 끌려 나갔다.

“자, 잠깐. 잠깐만요.”

푸코는 음식점을 나오자마자 트리거의 손을 뿌리쳤다.

“왜?”

트리거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물었다.

“사형이 그런 인간이라고 칩시다. 하지만 그건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 아닙니까? 왜 짓지도 않은 범죄로 사람을 심판합니까? 당신이 무슨 권리로요?”

푸코가 소리쳤다.

트리거는 놀란 얼굴로 그런 푸코를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저를 봅니까?”

그 눈빛이 하도 이상해 푸코가 물었다.

“미래의 너는 몬스터도 두려움에 벌벌 떨 정도로 미친놈이었어. 그런 놈이 이렇게 이성적으로 나오는 게 신기해서. 마르코와 사제들은 나와 함께 너를 죽이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해서 네가 거주하던 성으로 쳐들어간다.”

“예?”

“필사의 싸움 끝에 끝내 우리는 너를 죽여. 그 이후 마르코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아니?”

“…….”

“놈은 네 시체를 걷어차며 ‘그녀가 먼저 원했다, 이 개자식아!’라고 소리를 질렀어.”

“……!”

“라일라는 그즈음부터 네 사형 마르코와 관계를 맺고 있었어. 다른 사제들과도 모두 관계를 맺었지. 그녀가 죽은 건 아이를 가지고 사제들을 협박해서야. 그녀는 남자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하는 희대의 악녀였지, 억울한 희생자가 아니야. 임신한 아이도 네 아이가 아니었어.”

푸코는 입을 다물었다.

둔기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짓지도 않은 죄로 사람을 심판하지 마라.

이성적인 이야기다.

그 이성적인 이야기가 트리거의 말을 듣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그녀에게 미련을 갖지 마라. 그녀와 관계를 맺으면 네 인생은 결국 파국이야.”

* * *

오크가 트리거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트리거는 유수보를 써서 뒤로 물러났다.

그의 유수보는 이미 경지에 올라 오크의 몽둥이는 그를 스치지도 못했다.

그 보법 하나만 봐도 오크는 트리거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알고 물러나면 그건 오크가 아니다.

“크악!”

오크는 고함을 지르며 트리거를 쫓았다.

트리거는 계속 물러나다 푸코의 등 뒤로 숨었다.

오크는 그런 트리거의 뒤를 쫓다 푸코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시, 실드!”

푸코는 다급히 캐스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다.

푸코가 캐스팅을 마치기도 전에 오크의 몽둥이가 푸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쯧. 느려터지긴.”

트리거는 뒤에서 혀를 차며 푸코를 등을 발로 밀어 버렸다.

푸코는 오크의 품으로 밀려 나갔다.

동시에 트리거는 검을 휘둘렀다. 오크의 머리가 떨어졌다.

오크의 동체에서는 피가 솟구쳐 푸코의 온몸을 적셨다.

“으아아아!”

놀란 푸코는 비명을 질렀다.

그걸 본 트리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도시를 떠나는 와중에 경비대의 공격이 있었다.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 경비대의 습격을 물리치고 도시를 떠났다.

도시를 떠난 후엔 산적의 습격이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오크의 공격이다.

이 습격들을 물리치는 내내 푸코는 마법사로서의 자기 역할을 못하고 얼빠진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다.

트리거가 지투스의 기억에서 본 푸코는 저렇지 않았다.

당시에 그와 결사대는 죽기 살기로 싸워 간신히 푸코를 호위하던 몬스터들을 전멸시켰다.

그리고 혼자 남은 푸코를 이제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몬스터의 조력을 받지 않고도 푸코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했다.

푸코의 사형들과 마르코의 사제들 중에 절반 이상이 죽은 뒤에야 겨우 승부가 났다.

그 싸움 내내 푸코는 싸움에 이골이 난 지투스조차 질릴 정도로 냉정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이대로는 안 돼.’

지금의 푸코와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는 모습이었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