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트리거는 푸코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마르코를 죽인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마르코를 죽이고 그 전력의 공백을 막기 위해 푸코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것이었다.
인간이 무예로 도달할 수 있는 최종 경지는 소드 마스터다.
그 소드 마스터가 20레벨이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에도 계속 정진해 마지막에 도달하는 극점이 그랜드 마스터.
시스템 기준으로는 25레벨이다.
그런데 지투스는 25레벨을 넘어 27레벨이었다.
그건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20레벨,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는 것만 해도 기적이다.
그런데 지투스의 동료 중엔 자력으로 20레벨 이상의 성취를 이룬 자들이 많았다.
아니, 몬스터의 습격으로 워낙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니 결과적으로 그런 강자들만 지투스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런데 그 인간들이 무슨 투철한 윤리관을 가진 인간들은 아니었다.
그저 선천적으로 인류의 평균 잠재력을 뛰어넘은 인간들일 뿐이었다.
그 잠재력이 마왕군과의 싸움으로 생사의 고비를 밥 먹듯 겪으며 깨어난 것이다.
깨어나지 못한 자들은 다 죽고.
그런데 그런 경지와 윤리관은 별개.
그 경지에 오른 자들 중에는 윤리관으로만 보면 당장 때려죽여도 무방한 놈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엔 단 한 명의 전력도 소중해서 그런 놈일지라도 억지로 끌고 다닌 것이다.
그런 파탄 난 인성을 가진 놈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쓰레기가 마르코였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그 사제들도 비슷한 쓰레기였다.
마르코는 사제들과 함께 파벌을 만들어 인류군 내부에서 수많은 말썽거리를 만들었다.
그걸로도 머리가 아픈데, 마르코는 푸코를 습격하던 그 당일 아침에 다른 동료의 딸을 강간했다.
상식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사대를 꾸려 죽음을 각오하고 적을 치러가는 날 아침.
그런 미친 짓을 벌인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정말 마르코는 그런 짓을 저질렀다.
그런데 하필 그걸 발견한 게 지투스였다.
그걸 보고서도 그는 푸코를 죽이기 위해 그냥 입을 다물었다.
당시에 그 일로 지투스는 자괴감과 혐오감에 몸서리를 쳤었다.
그리고 결사대의 필사적인 공격이 성공해 끝내 푸코를 죽였다.
하지만 그 일이 나중에 발각되었고, 인류 연합은 심각한 내분에 시달렸다.
그 일로 지투스는 동료들의 신뢰를 잃는다.
자신이 목격한 일을 발각되기까지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느낀 자괴감.
자기혐오의 감정이 지투스에게는 화인처럼 박혀있었다.
트리거는 지투스의 기억을 통해 당시에 느낀 자괴감과 괴로움을 고스란히 전달받았다.
그러니 이번엔 그런 쓰레기를 동료로 맞이해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마르코와 사제들을 초장부터 죽이고, 대신 푸코를 동료로 맞이하려 한 것이다.
푸코도 그런 잠재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그리고 마왕군의 편에서 그런 잠재력을 화려하게 개방했다.
푸코를 동료로 끌어들이려면 그 잠재력을 개발해야 한다.
‘지투스. 내가 제대로 가는 게 맞죠?’
트리거는 지금은 사라진 지투스를 향해 속으로 물었다.
예전에는 지투스가 결정을 내리고 자신은 따라만 갔다.
그러니 자신은 책임의 부담을 짊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판단을 내려야 한다.
지투스에게서 전달받은 기억은 불완전했다.
그 불완전한 기억이 적과 아군을 뒤바꿈으로써 더욱 불완전하게 되었다.
‘할 수 없지.’
트리거는 미래에 계속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러니 미래가 바뀌는 건 당연지사.
그래서 지투스도 사라진 게 아니던가?
바뀌는 미래가 종말이 아닌 더 희망적인 미래이길 바랄 수밖에.
* * *
“당신이 미래의 구원자입니까?”
“구원자라고 하면 좀 거창하긴 한데… 미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쓰니 구원자가 맞긴 하네요. 구원자라고 합시다.”
트리거는 선선히 대답했다,
듣던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으며 트리거를 미친 놈 보듯 쳐다봤다.
트리거는 푸코와 함께 계속 여행 중이었다.
처음엔 마르코와 사제들을 죽였기에 마탑은 추적자를 보냈었다.
하지만 추적자들을 오는 족족 죽이며 도시를 몇 개 지나자, 더 이상 추적자는 붙지 않았다.
그렇게 트리거는 푸코와 함께 여행을 계속 했다.
몬스터와 산적들은 꾸준히 그들을 습격해왔다.
트리거는 상대할 만한 놈은 상대하고 아닌 놈은 피했다.
푸코는 계속 멍한 얼굴로 트리거에게 끌려 다녔다.
트리거에게서 들은 이야기들이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망치처럼 그의 뇌 속을 휘저었다.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그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아 그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여행을 하다 무리를 만나면 합류해 같이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상단을 만나 마차를 얻어 탔다.
이렇게 다른 무리와 합류하면 이름은 뭐냐, 고향은 어디냐, 그런 말들이 오가기 마련이다.
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 대답을 안 해도 그만. 사연을 적당히 꾸며도 그만이다.
그런데 이런 대화에서 트리거는 한 번도 자기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당당하게 미래에 있을 멸망을 막기 위해 여행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말을 농담거리로 받아들였다.
트리거도 하하 웃으며 그런 사람들의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어쩌다 분위기가 진지해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트리거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진지한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트리거는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지금은 마차의 분위기가 농담에서 진지함으로.
다시 말하면 트리거가 미친놈으로 취급받는 상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푸코는 이 상황을 지켜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래도 푸코는 트리거가 자신에 관한 세부사항까지 이야기했기에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무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근거도 없이 이런 이야기가 농담에서 진지한 쪽으로 넘어가면, 이건 영락없는 미친놈의 헛소리다.
다른 때는 분위기가 이렇게 넘어가면 내내 트리거 일행은 영락없이 미친 놈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다른 사람이 트리거의 말에 동조를 했기 때문이었다.
동조를 한 이는 늙은 여사제였다.
* * *
사제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였다.
이마엔 주름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피부가 곱고 분위기가 고아해 사제복만 아니면 부잣집 마나님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검은 사제복을 입고 있었는데, 사제복의 가슴엔 익은 벼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벼는 한 줄기였다.
벼는 대지교의 상징.
대지교는 벼의 줄기로 사제의 직책을 표시한다.
한 줄기는 사제들 중에 가장 낮은 품계다.
“모르입니다. 여신의 뜻을 알기 위해 세상을 순례하고 있습니다.”
사제는 분위기만큼이나 고운 말투로 자신을 소개했다.
인심 좋은 상단의 주인은 트리거와 푸코를 태우기 반나절 전에 이 모르라는 사제를 태워주었다.
“저는 평생 신전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던 늙은 여자입니다. 이대로 신전에서 지내다 여신의 품에 귀의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그런 어느 날, 여신께서 제 꿈에 현몽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멸망이 다가온다. 미래에 대비하라.”
“…….”
“처음엔 그저 단순한 꿈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여신께선 사흘 동안 계속 내 꿈에 현몽하셔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제야 저는 이게 꿈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신의 뜻에 따라 여행을 떠났고, 당신을 만났습니다. 헌데 당신은 여신님과 같은 것을 말하는군요. 당신은 미래의 구원자입니까?”
그러면서 사제 모르는 진지한 태도로 질문을 했다.
“…….”
트리거는 아무 말도 못하고 머리만 긁었다.
트리거 역시도 자기가 남들이 듣기에는 미친 소리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씨를 뿌리는 마음으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이라도 자신의 말을 믿으면, 그 한 명이 혹여 나비효과를 일으켜 미래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바꿀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아무도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그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을 만났다.
그러니 오히려 그가 당황했다.
모르라는 사제의 말이 미친 소리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제야 다른 사람이 자신을 미친놈 취급하는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이런 사제에 대한 기억은 없는데…?’
그런데 모르를 보면 그 미친 소리가 미친 소리 같지가 않았다.
모르의 눈빛은 맑고 투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 전체에선 신성한 아우라가 풍기고 있었다.
마치 신의 대리자인 성녀가 지상에 현현한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 정도로 특이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제라면 연합군 내부에서도 높은 지위에 올랐을 테고.
그렇다면 지투스의 기억에도 이 모르라는 사제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제에 대한 기억은 아예 없었다.
‘나비효과인가?’
과거에 지투스는 캄포에게 수모를 당하고 가문을 떠난다.
그가 그 시기에 돌아다닌 곳은 지금 트리거가 돌아다니고 있는 장소와는 전혀 달랐다.
그러니 모르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모르는 이런 식으로 여행을 하다가 전란의 와중에 사라졌을 것이고.
트리거가 지투스와는 다른 행보를 걸었기에, 그 나비효과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구원자라고 하면 좀 거창하긴 한데… 미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쓰니 구원자가 맞긴 하네요. 구원자라고 합시다.”
그래서 트리거가 이런 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좀 거창한 말이긴 하다.
하지만 지금 트리거의 행보를 달리 설명할 길은 없었다.
마차의 주인은 뜨악한 눈으로 트리거와 모르를 바라보았다.
마차의 주인은 상인.
상인답게 계산이 빠른 위인이다.
사제는 알아두면 손해가 없는 부류라 마차에 태웠고.
트리거는 검을 차고 있어 무력을 빌릴 경우를 대비해 마차에 태웠다.
그런데 동행한 이 두 사람이 모두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여서, 태워준 것을 살짝 후회하고 있었다.
“여신께선 아무래도 이 종이 당신과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당신과 여정을 함께 해도 될까요?”
모르가 트리거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시지요.”
트리거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마차는 반나절을 더 가서 어느 도시에 도착했다,
상인은 도시에 들어오자마자 트리거 일행을 바로 마차에서 내리게 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트리거는 마차에서 내린 후 그 지역 마탑에 들렀다.
거기서 자신의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가장 비싼 마법 지팡이와 마법 반지 등을 구입해 푸코에게 선물로 주었다.
“넌 실력이 미흡하니 장비라도 좋은 걸 갖춰야 해.”
푸코는 실력이 미흡하단 소리를 듣고도 선물을 받고 감동했다.
트리거는 로즈를 구하고 사교의 정체를 밝힌 후, 마르엘 남작에게서 상당한 거금을 사례금으로 받았다.
그 거금을 모두 털어 구입한 것이니만큼 푸코가 받은 매직 아이템의 품질은 뛰어났다.
그러니 말이 퉁명스러워도 푸코로서는 감격할 수밖에.
하지만 트리거가 그런 무구를 선물로 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 * *
볼일을 마치고 다시 다른 상인의 마차를 빌렸다.
사제의 존재는 프리패스와 같다. 사제가 동행을 청하면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다 환영을 한다.
사제에겐 치유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나요?”
푸코가 마차에서 트리거에게 물었다.
“옛 기억을 더듬어 동료를 구할 수 있는 곳으로.”
그게 트리거의 대답이었다.
마차를 타고 3일을 이동해 개척마을로 들어갔다.
개척마을은 통상 외인의 출입을 극히 경계한다.
하지만 그런 개척마을도 모르는 환영했다.
개척마을은 크고 작은 병마에 시달리고, 그만큼 사제의 치유능력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마을은 기꺼이 일행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다.
그 대가는 모르의 치유능력.
개척마을 사람들은 크고 작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질병은 보통 민간요법에 의지해 치료를 하는데, 그 효율이 무척 낮아 작은 병이라도 큰 병이 되기 일쑤였다.
그런 환경에 사제가 오니 환영할 수밖에.
마을은 규모가 작았다.
사흘 만에 모르는 마을에 있던 병자를 모두 치료했다.
하지만 트리거는 사흘을 넘어 일주일이 되도록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인심이 좋아 일행이 계속 머문다면서 눈치도 주지 않았다.
11화
푸코는 시냇가에 앉아 있었다.
그는 멍한 얼굴로 시냇물의 흐름을 바라보았다.
트리거와 여행을 떠난 지 한 달째다.
그의 마음은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는 마법사였다.
다른 인생은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런데 사형과 사제들이 난데없이 난입한 트리거의 손에 죽고, 사매가 악녀라는 말까지 들었다.
그리고 타의에 의해 마탑을 떠나 세상을 떠돌고 있다.
그런 생활이 이제 겨우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다.
한 달 만에 바뀐 생활에 적응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터였다.
‘마탑에 있었으면 행복했을까?’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트리거의 예언이 아니었더라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릿고개를 못 넘기고 부모는 모두 굶어죽었다.
어린 나이의 그는 집을 나와 세상을 떠돌다 스승을 만나 마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스승은 그의 재능을 보고 제자로 들인 게 아니었다.
그의 외모를 보고 제자로 들인 것이었다.
스승은 미동을 좋아하는 남색가였다.
마르코와 다른 사형들도 하나같이 미남자였다.
그리고 몇몇 제자는 이미 스승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마르코를 비롯한 사형들이 푸코를 학대한 것은 그 총애를 뺏길 것 같다는 음험한 질투 때문이었다.
스승은 그것을 방관하고 조장했다. 자신만을 의지하길 바라서였다.
그는 스승이 자신을 원하면 거부할 생각이 없었다.
그만큼 굶주림의 기억은 끔찍했다.
라일라는 스승의 딸이었다.
스승과 그런 관계인데 트리거의 예언대로 라일라와 결혼을 한다.
그렇다면 그건 무슨 개족보인가?
거기에 그 라일라의 죽음을 복수한답시고 사형들과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이는데, 알고 보니 라일라와 사형들도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한다.
믿고 싶지 않은데 믿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말이 구체적이기 때문이었다.
그 구체적인 말이 실제로 물리력을 가진 것처럼 그의 뇌를 휘젓고 있었다.
멍하니 시냇물을 보고 있는데 마을 처녀들이 하나둘씩 시냇가로 나와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를 흘끔흘끔 보며 얼굴을 붉혔다.
푸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존감이 바닥을 기는 인간이었다.
그런 인간에게 저런 시선은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처녀들의 시선을 피해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처녀들의 몸에 박혔다.
“아악!”
“악!”
처녀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그리고 숲 가장자리가 흔들리더니 한 무리의 놀이 나타났다.
놀은 개 대가리에 이족보행을 하는 몬스터다.
성인 남자보다 체격은 작고, 화살이나 창 같은 무기를 주로 쓴다.
놀들이 그에게도 화살을 쏘았다.
“시, 실드!”
그는 다급히 캐스팅을 했다.
하지만 늦었다.
마법지팡이를 처소에 두고 왔다.
그는 마법지팡이를 가지고 있어도 캐스팅을 더듬거렸다.
저레벨 마법사의 한계였다.
마법지팡이가 없으니 안 그래도 느린 캐스팅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캐스팅이 끝나기도 전에 화살들이 그의 몸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보이지 않는 장막에 부딪쳐 튕겨 날아갔다.
실드였다.
트리거는 그에게 마법지팡이와 보호마법이 내장된 마법반지를 사주었다.
마법지팡이는 두고 왔지만 마법반지는 손가락에 끼고 있었다.
거기서 실드가 일어나 화살을 튕겨낸 것이다.
놀들은 처녀들을 둘러메고 그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놀란 처녀들은 몸을 마구 흔들어 놀들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놀들은 그런 처녀들을 땅에 내팽개치고 창으로 사정없이 찔렀다.
“악!”
그러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처녀들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걸 보니 지금까지 하던 잡생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만둬!”
푸코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놀들에게로 달려갔다.
댕댕댕댕!
그때, 마을 쪽에서 종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몬스터의 습격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붉은 달!
트리거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보름마다 몬스터의 흉성이 점점 강해진다고 했다.
강해진 몬스터가 사람을 습격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름을 블러드 문, 혹은 붉은 달이라 부른다고도 했다.
어젯밤이 바로 보름이었다.
푸코는 이를 악물고 놀들에게로 돌진했다.
“켁!”
“케켁!”
놀들은 그런 그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하지만 창은 마법반지의 실드에 막혀 튕겨나갔다.
하지만 그도 그 창에 머뭇거리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못했다.
푸코는 무술을 몰랐다.
마법지팡이가 없으니 마법을 쓸 생각도 못했다.
그러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푸, 푸코, 살려줘요!”
여자들 중 창에 찔리고도 목숨이 붙어 있던 여자가 그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마을에 온 지 이틀째부터 여자들은 줄곧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옥수수나 감자 등의 음식을 간식으로 주며 환심을 사려고 했다.
푸코의 외모에 반해 한 행동이었다.
푸코는 지금까지 이런 환대를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스승은 그의 미모를 탐해 노골적으로 욕정을 드러냈고, 사형들은 그를 학대했다.
그는 처녀들의 이런 관심을 부담스러워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이런 순수한 형태의 관심을 소중히 여겼다.
그런 관심을 보이던 처녀들이 피를 흘리며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푸코는 두 눈이 뒤집혔다.
“으아아아아!”
푸코는 고함을 지르며 다시금 놀들에게 돌진했다.
놀들은 또다시 푸코에게 창을 내질렀다.
수십 자루의 창이 푸코를 일제히 찔렀다.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마법반지의 실드가 찢겨나갔다.
이어서 놀들의 창이 푸코의 몸을 찔렀다.
푸코는 창을 보며 죽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 푸코의 눈앞에 느닷없이 아이스 애로우, 얼음 화살이 생성되었다.
그 화살이 순식간에 놀들에게 날아가 박혔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작스럽게 날아간 화살에 놀들은 그대로 당해 쓰러졌다.
그런 놀들의 몸은 순식간에 성에로 가득 덮였다.
푸코는 창백한 얼굴로 주저앉았다.
다른 시간선에서 푸코의 능력 중에 하나는 화염술사.
마법이 아닌 염력으로 화염을 일으켰다.
지금은 그게 반대로 냉기로 바뀌어 각성을 했다.
처녀들은 놀란 얼굴로 푸코를 바라보았다.
그때 마을 쪽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놀들의 켁켁 거리는 고함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푸코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에서 힘이 완전히 풀려버려 일어나지를 못했다.
첫 각성이라 정신력을 너무 과도하게 썼다.
거기에 놀들의 창에 이미 몸이 찔린 뒤였다.
‘도와줘야 해!’
하지만 푸코는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에 찔린 자리가 터져 피가 쉴 새 없이 흘렀다.
푸코는 그러거나 말거나 마을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트리거가 강한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트리거는 혼자다.
강하니 1대 1로 강한 상대를 죽이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수십, 수백의 적에게서 마을을 보호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가서 도와야 한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걷다 말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정신력과 기력의 소모가 너무도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이후 깨어나 보니, 모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모르의 몸에서 푸코의 몸으로 성스러워 보이는 빛이 일렁이며 옮겨오고 있었다.
그 빛에 의해 창에 찔린 상처들은 빠른 속도로 아물었다.
일부 상처는 벌써 흔적조차 사라진 상태였다.
푸코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물들이 불에 타서 마을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놀들과 마을 사람들의 사체가 얽혀 사방에 널려 있었다.
트리거는 그 옆에 서서 씁쓸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푸코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깨어났군. 모르님께 감사해라. 모르님이 아니었으면 넌 죽었어.”
푸코는 트리거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당신. 몬스터의 습격이 있을 줄 알고 있었지요!”
트리거는 멱살을 잡은 푸코의 양 손을 한 손으로 가볍게 풀며 대답했다.
“그래.”
“그런데 왜 마을 사람들에게 미리 경고를 안했습니까?! 내 각성을 유도하기 위해서 입니까?”
“정확한 시기를 모르는데 어떻게 경고를 해? 몬스터가 어쩌면 내일, 어쩌면 보름, 어쩌면 한 달 후에 습격할 테니, 지금부터 그에 대비하라고 말해? 그러면 잘도 그 말을 믿겠다.”
트리거가 말했다.
푸코는 그 말을 듣고 멈칫했다.
트리거가 이 마을에 온 지 7일 뒤에 몬스터가 습격했다.
트리거가 습격 날짜를 정확하게 알았으면 그 시기에 맞춰 마을로 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정확하게는 몰랐다.
그래서 일주일이나 일찍 마을에 찾아온 것이다.
트리거도 습격일자를 정확히 모르니 말을 못한 것이고.
그런데도 마을에 머물고 있었던 건 푸코의 각성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푸코의 각성을 유도하는 건 성공했지만, 마을을 지키는 건 실패한 것이다.
“그래도 피해가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야.”
트리거가 폐허가 된 마을을 보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라고요?”
푸코는 그 말을 듣고 발끈했다.
마을엔 살아남은 사람이 젊은 남녀 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전멸 아닌가.
“내 기억 속에선 놀들이 이 마을 사람들을 다 도축해 식량으로 비축하고, 인근 마을로 세력을 넓혀. 그렇게 마을 다섯 군데를 쑥대밭으로 만든 뒤에야, 나라에서 사정을 파악하고 군대를 보내 간신히 토벌하지. 그런 큰 피해를 우리가 있었기에 이 정도로 틀어막은 거야.”
“…….”
“그런데 이것도 미봉책에 불과해. 붉은 달 현상은 계속 심화되고, 앞으로 다른 몬스터들이 놀들의 뒤를 이어 계속 나타날 테니까. 우리가 떠나면 다른 놈들이 인근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 거야. 내가 너를 각성시키기 위해 이 마을에 온 게 그 시기를 조금 미룬 것뿐이지.”
“여신이시여….”
모르는 그 말을 듣고 탄식을 했다.
트리거가 푸코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푸코. 마을 사람들이 놀들에게 죽은 게 마음 아픈가? 정신 차려. 앞으로 벌어질 싸움과 비교하면 이건 애교에 불과해.”
“…….”
“사람들이 성문 위에서 지켜보는 데 몬스터들은 성문 아래에서 포로들을 산채로 뜯어먹어. 성에선 식량이 다 떨어져 허리띠를 삶아 먹고. 아이들은 흙을 파먹으며 올챙이처럼 배가 불러서 죽어간다.”
“오오, 여신이여….”
“그 와중에 사람들은 서로 분열해서 네가 잘났느니 내가 잘났느니 싸우지. 미래의 너는 박수를 치며 그런 인류를 조롱했어.”
“내, 내가….”
“지금은 네가 짓지도 않은 죄를 추궁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네겐 힘이 있어. 그 힘을 인류를 위해 써라. 거부는 용납하지 않겠다.”
“…….”
“네가 거부를 하면, 네 의지를 강제로 꺾고 인형처럼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인류 편에서 싸우게 만들고야 말겠어.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려. 네가 내 기대에 어긋난다 싶으면 주저 없이 그렇게 할 테니까.”
말을 하는 트리거의 눈에는 푸른 귀화 같은 게 어렸다.
“…….”
푸코는 그런 트리거의 광기에 압도당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국경도시 카르.
트리거와 푸코, 모르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이 들어오자 주변에 있던 손님들이 모두 인상을 찡그렸다.
피비린내와 땀 냄새가 뒤섞인 퀴퀴한 냄새가 세 사람에게서 풍겼기 때문이었다.
카르는 여러 도로가 교차하는 교차점에 있었다.
각 도시의 물품들이 카르에서 활발하게 거래되었다.
그중에는 몬스터의 부산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즉, 이들은 몬스터를 사냥해 부산물을 팔기 위해.
혹은 판매를 끝내고 음식점에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보통의 음식점이라면 이런 냄새를 풍긴다고 손님들이 인상을 찡그리지는 않는다.
도시를 출입하던 부류가 다 비슷한 부류라서 비슷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들어온 음식점은 고급. 손님들도 부유층이었다.
그러니 손님들이 인상을 찡그리는 것이었다.
“미안. 폐를 끼쳤군, 오랜만에 좋은 음식을 먹고 싶어서 제일 괜찮아 보이는 음식점으로 왔네. 독방을 주게. 그럼 다른 손님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 거야.”
트리거가 점원에게 금화 한 닢을 던져 주며 말했다.
“아, 예.”
그에 점원이 반색을 하며 말했다.
눈치 없는 손님이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면 식당의 입장에서도 난처하다.
그런데 이렇게 두둑한 팁을 주며 독방까지 쓴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들은 눈치 없는 손님이 아니라 점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화끈한 손님이다.
점원은 일행을 독방으로 안내했다.
12화
트리거가 독방으로 자신들을 안내하던 점원을 보고 물었다.
“여기서 가장 몸에 좋은 음식은?”
“…예?”
점원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손님이 식당에 오면 가장 맛있는 음식, 혹은 가장 잘하는 음식을 묻는다.
그런데 가장 몸에 좋은 음식이라니.
이상한 질문이었다.
“하이신을 곁들인 사르산 구이입니다.”
“이 집의 대표 메뉴는?”
“사르산 스테이크입니다.”
사르산은 지구의 들소와 비슷한 가축이다.
고기맛이 좋아서 여러 방식으로 먹는다.
하이신은 지구의 인삼처럼 취급받는 식자재였다.
“사르산 구이 두 개. 사르산 스테이크 하나.”
“아니, 하나는 간단한 야채볶음으로 주시게.”
점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사제 모르가 주문 하나를 수정했다.
“아, 그래. 사르산 구이 하나는 야채볶음으로.”
트리거가 그 말을 받았다.
곧이어 트리거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하이신을 곁들인 사르산 구이는 푸코의 앞에 놓여졌다.
대표메뉴인 사르산 스테이크는 트리거의 앞에 놓였다.
상대적으로 간단해 보이는 야채볶음은 모르의 앞에 놓였다.
점원이 음식을 놓고 나가자, 트리거는 가방에서 조심스레 자기 병과 작은 잔 두 개를 꺼냈다.
그리고는 병에 든 액체를 작은 잔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그런 다음 두 개의 잔을 두 사람 앞에 밀어놓았다.
잔에서는 맡는 사람의 정신을 맑게 해주는 청량한 향기가 났다.
트리거가 독방을 주문한 건 다른 손님들을 배려한 게 아니었다.
이 액체로 인해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 싫어서였다.
이 유리병 안의 액체는 같은 양의 황금보다 비싼 영약이었다.
물론 한 번 먹는다고 내력이 폭증하거나 탈태환골을 일으키는 전설의 영약은 아니었다.
그런 영약은 황금보다 비싼 정도를 넘어 돈으로는 구하기가 불가능하다.
트리거가 구한 영약은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장복을 하면 장기가 튼튼해지고 내력이 충만해지는, 검증된 영약이었다.
“나는 됐네.”
모르는 그 잔을 도로 트리거에게로 내밀었다.
“좀 드시지요.”
트리거가 모르에게 말했다.
모르는 고개를 저었다.
“싫다면 할 수 없지요,”
트리거는 모르 앞에 놓였던 잔도 푸코의 앞으로 옮겼다.
푸코 앞에 놓인 잔이 두 개가 되었다.
“트리거. 나도 먹기 싫은데요.”
푸코가 말했다.
“응? 뭐라고?”
트리거가 푸코를 보며 되물었다.
“…아닙니다.”
푸코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배려도 과하면 부담이 된다.
지금 푸코가 받고 있는 배려가 그랬다.
너무도 부담이 돼서 죽을 지경이었다.
* * *
일행은 몬스터 사냥을 하며 여비를 충당했다.
트리거의 사냥실력이 워낙 뛰어나고, 푸코도 캐스팅에 요령이 붙어서 몬스터 사냥의 성과가 좋았다.
그래서 요즘은 한 번 사냥에 몇 달은 편히 지낼 정도의 여비가 손에 들어왔다.
들어온 돈은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금액을 제외하곤 모두 푸코에게 집중되었다.
푸코의 수준을 보고 그에 맞는 마법서를 구입하고.
마법 연구에 필요한 마법재료와 각종 영약을 구입했다.
영약 또한 푸코의 체질에 맞춘 영약이었다.
여행 내내 이렇게 푸코에 대한 배려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배려에 여행자금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모르는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푸코는 그게 너무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트리거는 닥쳐. 거부는 받지 않겠다, 라는 태도였다.
“넌 너무 약해. 어서 예전(?) 같은 실력을 쌓아야지.”
지투스가 겪은 미래에서 푸코는 최소한 23레벨 수준의 성취를 이뤘다.
소드 마스터가 20레벨인 것을 감안하면 푸코의 성취는 정말 굉장했다.
그땐 푸코가 알아서 혼자 그 정도까지 성취를 쌓았다.
그런데 지금은 푸코의 미래가 바뀌었다.
지금은 트리거가 함께 있으니 그가 도움을 줘야 한다.
트리거에게도 이런 영약이 필요했다면 같이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트리거에겐 레벨 업 시스템이 있었다.
상대를 죽이면 알아서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이 올랐다.
이건 어떠한 영약보다도 더욱 효율적이었다.
그러니 자원을 푸코에게 집중하는 건 좋은 선택이었다.
푸코도 처음엔 이런 배려를 고마워했다.
하지만 배려도 어느 정도다.
과하다 싶은 배려가 계속 되자 고마움을 넘어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어느 날 푸코는 이렇게 말했다.
“트리거,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만하세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그런 말은 네가 한 사람 몫을 제대로 한 뒤에나 해.”
트리거가 대답했다.
“내가 한 사람 몫을 못한다고요?”
그 말에 푸코는 발끈했다.
그리고 트리거와의 대결을 통해 자신이 강하다는 걸 증명하려고 했다.
마르코와 사형들에게 따돌림을 받을 당시에도 푸코의 마법은 마르코 일행을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
심리적으로 마르코에게 워낙 주눅이 들어 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놀과 싸운 이후 실력이 비약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그는 내심 자신이 제대로 마음먹고 전력을 다하면, 트리거를 이기지는 못해도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라 자신했다.
하지만 싸움의 결과는 전혀 반대였다.
그는 처참할 정도로 트리거에게 패했다.
이후로 푸코는 이를 갈며 트리거의 배려를 받아들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역량을 키우는 데에 집중했다.
트리거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 흐뭇하게 보는 얼굴이 푸코의 속을 더욱 뒤집어 놓았다.
그런 트리거도 시종일관 모르만은 존중했다.
푸코처럼 무엇을 권하다가도 모르가 거부하면 두 번 다시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푸코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마치 푸코를 기저귀도 못 뗀 애새끼처럼 다루었다.
그게 푸코의 자존심을 더욱 상하게 만들었다.
푸코는 지투스의 미래에 혼자 힘으로도 초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 원동력은 사형들에 대한 원한이었다.
지금은 그 원동력이 트리거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로 바뀌었다.
동기는 바뀌었지만 노력의 강도는 똑같았다.
푸코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푸코는 자기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또다시 대결을 신청했다.
하지만 신청하는 족족 깨졌다.
그냥 깨지는 정도가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처참하게 깨졌다.
푸코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트리거는 그 전에도 푸코와 싸울 때 실력을 숨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 싸웠다.
푸코가 다시 재대결을 신청한 건, 그전에 보인 트리거의 실력을 능가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계속 결과는 똑같았다.
푸코가 실력이 느는 것보다 트리거의 실력이 느는 속도가 더 빠르다는 뜻이었다.
이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배려(?)를 받는 자신보다 싸울 때를 제외하면 펑펑 노는 트리거의 실력이 더 빨리 늘까?
물론 그건 시스템창과 시스템의 사기적인 능력이었다.
그걸 모르니 푸코로서는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 * *
“일용할 양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처럼 항상 당신의 축복을.”
모르가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트리거는 음식에 손을 대려다가 모르가 기도를 하자 움찔하며 황급히 눈을 감았다.
푸코도 모르가 기도를 하자 눈을 감았다.
모르의 기도는 아주 짧았다.
그런데 그 짧은 기도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어떤 울림이 있었다.
트리거가 모르를 존중하는 건 바로 그 울림 때문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트리거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푸코도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어허!”
그때 트리거가 푸코를 엄격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푸코는 한숨을 내쉬며 앞에 놓인 영약이 담긴 두 개의 잔을 차례로 비웠다.
“여기에 당신의 동료가 있다고요?”
음식을 먹으며 푸코가 물었다.
“그래. 내 미래의 동료가 여기에 있지. 그를 구하러 왔어. 푸코, 넌 나에게 이기고 싶지?”
“…예.”
“그럼 그에게서 싸움을 배워라. 미래의 나도 그에게서 싸움을 배웠어.”
트리거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트리거는 자신의 레벨보다 훨씬 더 높은 능력치를 가진 몬스터들을 계속해 싸워 이겨왔다.
그런데 푸코는 능력치가 자신보다 훨씬 낮다.
자기보다 높은 능력치의 몬스터도 이기는데, 낮은 능력치의 인간을 이기는 건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는 그런 싸움의 요령을 미래의 자신, 지투스에게서 배웠다.
지투스는 미래의 동료 타미두스에게서 배웠고.
타미두스는 야만족 출신의 전사였다.
지투스의 동료로 들어왔을 당시 그는 20레벨.
거기에 외팔이였다.
그리고 과거의 지투스는 22레벨.
레벨은 고레벨로 갈수록 레벨간의 격차가 크다.
거기에 팔마저 하나가 없으니 타미두스는 지투스의 상대가 되지 못했어야 한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다.
지투스는 싸우는 족족 타미두스에게 패했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패해 모든 동료가 다 죽었을 때도 타미두스는 끝까지 지투스와 함께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투스가 정신을 과거로 보내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숨을 거두었다.
지금은 타미두스가 팔을 상실하기 전이었다.
트리거는 두 사람에게 그런 지투스의 기억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는 초면인 상대에게도 미래의 이야기를 조금도 숨기지 않고 해왔다.
그러니 같이 동행하는 두 사람에겐 말할 것도 없었다.
조용히 음식을 먹던 모르는 손길을 늦추고 트리거의 이야기를 들었다.
푸코는 아예 이야기를 듣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트리거가 말하는 타미두스의 전투 이야기에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호쾌함이 있었다.
* * *
“다음은 야만족 전사입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아군 병사를 20여 명이나 쳐 죽였습니다. 이 야만족 전사를 길들이면 아주 훌륭한 검투사가 될 겁니다.”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모르는 경매대 위의 전사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르는 항상 물처럼 고요한 표정을 지었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험악한 상황일 때도 그랬다.
그런 모르가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타미두스의 상황은 처참했다.
“저 사람이 트리거가 말한 동료가 맞나요?”
푸코가 불편한 얼굴로 트리거에게 말했다.
트리거는 경매대 위의 광경을 보고 아무 말도 못했다.
키가 2미터 가량 되는 여자였다.
가슴과 하체는 헝겊으로 적당히 가린 채였다.
어깨는 남자처럼 벌어져 있었다.
피부는 황동빛. 복부는 근육질 남자의 그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성별을 초월해 황동으로 만든 철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런 여자의 목과 양 팔, 양 다리는 쇠사슬로 단단히 결박되어 있었다.
그리고 온몸에는 채찍자국이 가득했다.
채찍질이 얼마나 심했는지, 피부가 모조리 찢기고 갈라져 본래의 피부를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태로 여자, 타미두스는 귀화(鬼火)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트리거는 타미두스가 여자라는 말을 일행에게 하지 않았다.
재미를 위해서였다.
타미두스가 이런 처참한 상태라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건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도 몰라서였다.
* * *
“나는 카르의 경매장에서 문명세계로 끌려나왔지.”
타미두스가 같이 술을 마실 때 지나가는 어조로 지투스에게 한 말이다.
워낙 말투가 가벼워 이때의 상황을 지투스는 그냥 평범하게 받아들였다.
“난 경매장에서 인기 있는 매물은 아니었어. 워낙 반항적이었거든.”
미래에 타미두스는 지투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몬스터와의 전쟁에서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많아지고, 세계가 종말로 치닫는 게 점점 구체화 되던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종말로 치닫는다고 그 과정이 항상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동료들 간의 우정, 여인과의 사랑, 농담, 모닥불을 둘러싼 웃음.
술과 음식 그리고 마음을 나누는 밤 같은 추억들도 있었다.
승리보다 패배가 많을수록, 미래가 암울할수록 더욱 그랬다.
모두들 암울한 미래를 웃음과 농담으로 버티어냈다.
그런 대화를 나눈 밤들은 더욱 소중하게 미화 되었고.
그래서 타미두스의 말을 듣고도 경매장의 안 좋은 분위기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13화
“자, 검투사는 50골드부터 시작합니다. 50골드!”
경매에 참가한 사람들이 패찰을 올리기 시작했다.
아닌 게 아니라 다른 검투사에 비해 올라가는 패찰의 수가 적었다.
검투사는 신체가 강할수록 고가에 매매가 된다.
반항적이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기질이 강한 자들이 검투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란 게 있다.
그 반항적이란 것도 주인이 그 기질을 다스릴 한도 내에서 반항적이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타미두스는 최악이었다.
검투사의 반항적인 기질은 구타와 굶주림 같은 고통으로 꺾는다.
하지만 타미두스처럼 정도 이상으로 강한 기질은 그런 고통으로도 꺾지 못한다.
복종하지 않는 노예는 검투사로서도 쓸모가 없다.
매수자의 입장에선 돈만 날리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육체조건에도 불구하고 매수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것이었다.
“100골드!”
사회자가 외쳤다.
들어 올린 패찰의 수는 열 개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150골드!”
이젠 패찰이 다섯 개로 줄었다.
“200골드!”
패찰이 세 개로 줄었다.
잠시 후 그 세 개에서 두 개가 머뭇거리더니 아래로 내려져서 하나가 남았다.
하지만 그러자마자 패찰 하나가 새롭게 올라왔다.
원래 있던 패찰의 주인공 콜룸은 눈살을 찌푸렸다.
뒤늦게 새로운 경쟁자가 갑자기 끼어드는 게 맘에 들지 않았다.
“250골드!”
사회자가 소리쳤다.
콜룸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다시 패찰을 들었다.
새로운 경쟁자, 트리거도 패찰을 들었다.
“300골드!”
사회자가 소리쳤다.
콜룸은 또다시 패찰을 들었다.
이에 트리거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타미두스는 과거 자기 몸값이 200골드라고 했다.
그래서 250골드에서 300골드선이면 충분히 구입하리라 예상을 했고.
그 정도 선에서 예산을 준비했다.
그런데 콜룸은 300골드에서도 포기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가격이 계속 그 위로 뛸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과거에 콜룸은 타미두스를 200골드에 샀다.
200골드에 산 건 200골드에서 다른 경쟁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트리거라는 새로운 경쟁자가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이 경쟁에 응할지 여부는 순전히 콜룸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트리거는 가격만 생각했지 경쟁자가 자기의 자유의지로 어떤 행동을 할지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그건 트리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트리거가 인간이기에 생긴 한계였다.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수십 년 전 과거에 끝까지 경쟁을 벌인 경쟁자가 누구인지.
그 경쟁자가 무슨 생각으로 경쟁에 임했는지 같은 변수까지 어떻게 모두 고려하겠는가.
300골드에서 트리거는 더 이상 패찰을 올리지 못했다.
딱!
“야만족 계집은 300골드에 콜룸 대인께 낙찰 되었습니다.”
사회자는 의사봉을 두들겨 경매가 종료되었음을 선언했다.
“어떡하지?”
트리거는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 * *
“20년 후에 세상이 멸망한다고?”
“예.”
“당신은 그때 마왕과 싸울 용사고?”
“예.”
“그 계집은 용사의 동료니 풀어 달라?”
“예.”
“허!”
“그냥 풀어주기 싫으면 값을 제시하십시오. 얼마가 됐건 지급하겠습니다.”
트리거가 말했다.
그가 경매에 계속 응하지 못한 건 당장 수중에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만 주어지면 그 액수가 얼마가 됐건 지불할 자신이 있었다.
시스템은 그만한 능력을 자신에게 제공해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콜룸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트리거를 바라보았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미친놈을 만나기 마련이다.
이 미친놈은 그중에서도 참 창의적으로 미친놈이었다.
콜룸은 도시 카르에서 상당한 지역유지였다.
즉,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트리거 일행은 콜룸에게 접견 신청을 했다.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위치니 문지기는 접견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트리거 일행을 쫓아내려고 했다.
그로 인해 시비가 붙었고, 손발이 오갔다.
거기서 트리거는 문지기를 때려눕혔다.
그러자 무사들이 나왔다.
하지만 그들 모두도 트리거에게 얻어맞아 쓰러졌다.
그제야 접견 신청이 이루어졌다.
접견 신청이 이루어지니 하는 말이, 저런 미친 소리다.
‘미친놈이군.’
콜룸은 지역유지기 때문에 미천한 놈들에게는 굳이 말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이 미친놈이라는 말을 속으로만 할 뿐, 겉으로는 내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트리거가 일행을 쓰러뜨리며 보인 무력이 보통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옆을 흘끔 바라보았다.
저택의 경비를 책임지는 무사 카를로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시간을 끈 건 저택의 다른 무사들을 동원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콜룸은 검투사를 양성하고 있었다.
험한 놈들을 키우기 때문에 항상 반란의 위험이 있었고.
그에 대비하기 위해 그만큼 실력 있고 강한 자들을 호위무사로 두고 있었다.
그 호위무사를 모두 동원한다면 이 미친놈을 잡아 죽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저는 온건한 해결을 바랍니다. 값을 부르면 지급하겠다는 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지 않습니까?”
트리거가 두 사람의 오가는 눈짓을 보고 말을 건넸다.
콜룸은 카를로스에게 트리거를 공격하란 명령을 내리려다가 멈칫했다.
트리거의 말이 맞았다.
미친놈이긴 해도 놈의 제안은 온건했고, 상인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안이었다.
콜룸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제안이 맘에 들긴 하는 데, 돈을 받고 팔 생각은 없소. 이 계집은 일주일 후 몬스터와의 대결에 참가시킬 예정이기 때문이오.”
검투사들의 대결은 일대일, 일대 다수, 다수와 다수, 인간과 몬스터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방식 중에 하나가 몬스터와의 대결이다.
고대 로마에서 사자와 인간의 대결이 인기를 끌었듯, 이곳 카르에선 몬스터와 검투사의 대결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보름 후에 출전할 몬스터는 라이코니스.
체고는 3미터, 사자의 머리, 독사의 꼬리.
금강석 같은 손톱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였다.
이 몬스터는 검투사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이기기가 불가능한 몬스터다.
이 몬스터와 인간과의 싸움은 어느 쪽이 이기는가를 보는 싸움이 아니었다.
몬스터가 인간을 찢어 죽이는 과정을 보는 일종의 학살쇼였다.
이런 쇼에 동원할 예정이기에 타미두스를 길들일 생각을 안했고.
그래서 기꺼이 비싼 값에 사들인 것이었다.
“당신이 마왕과 싸울 정도의 강자라면, 그런 몬스터는 쉽게 이기겠지. 그 몬스터를 이기고 그 계집을 데려가는 게 어떻겠소?”
“그렇게 하지요.”
트리거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놈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까?”
일행이 물러난 뒤 심복이 콜룸에게 물었다.
“미친놈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고?”
콜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원하는 가격을 부르라는 것처럼 상인에게 좋은 제안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거래란 건 돈이 오가기 전엔 성사가 된 게 아니다.
거기에 그 제안을 한 당사자가 미친놈이다.
자신이 제안한 가격을 듣고 돈이 없다면서 돌변해 자신을 공격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래도 어느 정도는 신뢰가 가능한 상대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라고. 완전히 미친놈 아닌가?”
아무리 강해도 그렇지, 몬스터와 싸우라는 제안을 두 말없이 승낙했다.
놈이 미친놈이란 걸 여지없이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미친놈과의 정상적인 거래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써먹어야지.
* * *
“나는 놈에게 팔리고 보름 뒤에 다른 노예들과 함께 몬스터 라이코니스와 싸웠다. 싸움은 지독했지. 아무리 도끼질을 해도 라이코니스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거든. 당시 놈과 싸운 검투사들은 대부분 전멸. 나는 다른 시신들과 함께 수레에 실려 매장지로 옮겨졌다. 살았다고 꿈틀거리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장지에 던지더군. 그 매장지에서 허우적거리며 기어 나왔지. 이 오른팔은 그때 잃은 거야.”
타미두스가 다른 시간선에서 지투스에게 한 말이었다.
* * *
“트리거. 아무리 세상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상의 한 마디 없이 몬스터와 싸우는 걸 결정할 수 있어요? 게다가 그 미래 이야기는 이제 안 할 수 없어요? 하더라도 적당한 상대에게 하고요.”
트리거의 말은 좋은 분위기에서 꺼내도 미친놈 소리를 들을 만한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를 경비병을 쓰러뜨릴 정도로 적대적인 분위기에서 했으니, 상대가 그를 어떻게 보겠는가?
하지만 트리거는 태연했다.
“그에게 한 게 아니야. 그 주변 사람들에게 한 것이지.”
콜룸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주변에 쫙 깔려 있었다.
그들 모두 트리거의 말을 들었다.
대부분은 트리거의 말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라도 믿으면 된다.
* * *
‘그 라이코니스란 괴물을 어떤 식으로 상대할까가 문제인데….’
트리거는 자기의 레벨을 점검했다.
현재 그는 순조롭게 성장해 15레벨이었다.
스킬은 용천신공, 유수보, 천안, 금강대력수, 양의신공, 유수검이었다.
10레벨에서 유수검 하나를 더 익힌 뒤 다른 스킬은 더 이상 익히지 않았다.
빈 스킬 슬롯이 무려 9개나 되었다.
슬롯을 채우지 않은 건, 굳이 스킬을 익히지 않아도 큰 위험을 만나지 않고 무리 없이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대가 라이코니스 같은 몬스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스킬은 레벨의 수준에 따라 위력이 결정된다.
1레벨이라도 무술의 최고경지인 이기어검을 스킬 슬롯에 채울 수도 있다.
하지만 1레벨에 이기어검을 시전하면 검을 손에서 떼자마자 바닥에 떨어진다.
이기어검이 평범한 비도술보다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삼재보 같은 평범한 무술도 레벨이 올라가면 고도의 위력을 발휘해, 15레벨 정도가 되면 상승보법의 묘리가 제대로 발휘된다.
하지만 무술 자체에 한계가 있어 상승의 묘리를 완벽하게 발휘하지는 못한다.
요는 그 레벨과 사용자의 상황에 맞는 무술을 제대로 익혔느냐의 문제였다.
지금까지 적은 스킬로도 무난히 레벨 업을 한 건, 보유한 스킬이 레벨 업에 걸맞게 성장했고.
그 스킬들로도 어찌 할 수 없는 상대를 만나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라이코니스는 지금 보유한 스킬로는 어찌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몬스터였다.
그렇다면 놈을 상대하기에 적당한 다른 스킬로 스킬 슬롯을 채우면 된다.
라이코니스를 상대하기 위해 트리거가 어떤 스킬을 채울지 고심할 동안 보름이 지났다.
* * *
“정말 왔군.”
보름 뒤 트리거는 콜룸을 찾아왔다.
그러자 콜룸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보통 이런 계약이 오가면 콜룸은 병사를 보내 당사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감시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두 사람 간엔 어떠한 구속력이 있는 계약서도, 계약금도 오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저 말로만 맺은 약속이다.
계약금이 없기에 위약금도 없고, 구속력도 없다.
구속력이 없으니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인 약속인 것이다.
굳이 계약서까지 쓰지 않은 건 상대가 미친놈이기 때문이었다.
미친놈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없지 않겠나?
그런데 그 미친놈이 약속을 지키겠다면서 기한이 되자 찾아왔다.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트리거가 그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걱정 말게. 상인에게 있어 계약은 생명과도 같으니.”
콜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50여 명의 검투사가 경기장에 들어섰다.
“와아!”
“와아!”
동시에 쏟아지는 환호 소리.
잔혹한 살인극을 기대하는 소리였다.
그 환호성 소리를 들으며 검투사들은 굳은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라이코니스와의 대결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검투사들이 그런 싸움에 스스로 자원했을 리는 없었다.
대부분은 검투에서 패배가 누적되어 더 이상 검투사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정받은 자들이었다.
일부는 빚에 쫓기거나 기타의 사정으로 인생의 막다른 곳에 몰려 최후의 방법으로 자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연들 중에 트리거 같은 이유로 라이코니스와의 대결을 자처한 미친 사연은 없었다.
어쨌건 각자의 사연으로 참가한 검투사들은 필사적으로 용기를 북돋웠다.
그런 그들이 들어온 반대쪽의 문으로 라이코니스가 들어왔다.
두 마리였다.
“와아!”
사람들의 환호성이 귀를 울릴 정도로 커졌다.
트리거는 얼굴이 굳어졌다.
타미두스의 추억 속에서 라이코니스는 한 마리였다.
트리거 일행이 오자 대기시간이 한 시간으로 길어졌다.
그러더니 라이코니스가 두 마리로 늘어났다.
콜룸이 트리거 일행을 보고 라이코니스의 수를 늘린 것이었다.
14화
“자, 더럽게 강한 놈의 실력을 보여줘봐!”
콜룸이 관중석에서 일행을 내려다보며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트리거가 무사들을 때려눕힌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에 흥미를 느낀 콜룸은 트리거의 뒷조사를 했다.
그러자 트리거 일행에 대한 흥미로운 평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중 대표적인 게 ‘제대로 미친놈’ 그리고 ‘더럽게 강한 놈’이었다.
제대로 미친놈이란 건 트리거가 말하는 예언 때문이었다.
트리거는 미래의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도시에서 어느 사람을 만나건 꺼낼 상황만 되면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트리거는 제대로 미친놈이란 별명이 붙었다.
더럽게 강한 놈은 그런 예언과는 별개로 그 실력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트리거 일행은 상당한 실력을 가진 몬스터 사냥꾼이었다.
30여 명 이상의 대규모 파티가 힘을 합쳐야 잡을 수 있는 몬스터를 겨우 저 세 명이 잡은 일이 허다했다.
그렇게 잡은 몬스터 중에는 라이코니스와 비슷한 악명을 자랑하는 놈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더럽게 강한 놈이었다.
세상에는 남보다 특이한 놈, 이상한 놈을 고깝게 보고 시비를 거는 인간이 차고도 넘쳤다.
그런 인간들이 트리거처럼 미친 소리를 하는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둘 리는 없었다.
온갖 시비를 걸었는데, 그 시비에서 트리거는 항상 멀쩡했고.
시비를 건 인간들은 팔 다리가 부러지고 이빨이 날아가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
트리거가 더럽게 강한 놈이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다면 판을 키워보자는 게 콜룸의 생각이었다.
트리거 일행이 오지 않으면 예정대로 라이코니스는 한 마리만 투입한다.
오면 두 마리를 투입해서 박진감을 더한다.
그런데 트리거 일행이 왔다.
그래서 대기시간을 늘리며 한 마리를 더 데려온 것이었다.
트리거는 천안으로 두 라이코니스의 레벨을 확인했다.
두 마리 다 18레벨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소드마스터 급에 육박했다.
이러니 한 마리만으로도 다 죽었지.
“지금부터는 임기응변이다. 푸코, 정신 바짝 차려. 모르 사제님, 부탁합니다.”
“예.”
“걱정 말게.”
두 사람이 말했다.
1레벨과 10레벨보다 10레벨과 11레벨 사이의 능력 차이가 훨씬 크다.
과거 트리거가 5레벨 이상 차이가 나는 상대를 이겼던 건, 그나 상대방이나 레벨 자체가 낮았기 때문이었다.
10레벨 이상부터는 그렇게 쉽게 레벨 간의 격차를 뛰어 넘을 수가 없다.
거기에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못하겠다면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
상황을 보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해 나갈 수밖에.
* * *
“크아악!”
“크아악!”
두 마리의 라이코니스가 동시에 울부짖었다.
그러자 관중들의 환호성이 갑자기 사라졌다.
억지로 투지를 일으키던 검투사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일부는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무릎이 덜덜 떨렸다.
라이코니스의 포효에 실린 피어 때문이었다.
“와아!”
“최고다!”
하지만 잠시 후, 잦아들었던 관중들의 환호성이 폭발하듯 커졌다.
라이코니스의 피어가 아무리 위력이 강해도 관중들에겐 남의 일이었다.
자신들이 직접 당하는 게 아니니 그 피어가 오히려 자극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당하는 당사자들은 그러지 못했다.
“죽인다!”
그런데 그 피어에 영향을 받지 않는, 아니 그 피어의 영향을 뿌리치고 돌진하는 전사가 있었다.
타미두스였다.
타미두스의 코와 입에선 피가 흘렀고,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그 상태에서도 타미두스는 한 자루 도끼를 들고 정면의 라이코니스에게 돌진했다.
그것과 동시에 트리거도 같은 놈을 목표로 타미두스와 함께 돌진했다.
그의 얼굴도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하지만 타미두스처럼 코피까지는 흘리지 않았다.
라이코니스의 포효를 의지력으로 감당했기 때문이었다.
트리거는 양의신공을 익혔다.
양의신공은 마음을 둘로 나눌 수 있다.
흑마법의 섭혼술 같은 수법은 이 양의신공만으로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어는 그걸 넘어 신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심령적인 타격은 양의신공으로 감당이 가능해도, 신체적인 타격까지는 어쩔 수가 없다.
타미두스는 심령적인 영향까지 의지력으로 극복해 코피를 흘린 것이고.
트리거는 양의신공으로 심령적인 타격을 중화해 그나마 코피는 흘리지 않은 것이었다.
“여신이여,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어머니시여.”
모르가 나직이 기도를 했다.
그러자 그녀를 중심으로 대지가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그 푸른빛이 순식간에 타미두스와 트리거에게 번져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두 사람의 창백했던 얼굴은 정상으로 들어왔다.
* * *
모르는 어릴 때부터 굼뜬 여자였다.
모든 행동이 느렸고, 얼굴엔 항상 멍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부모는 그런 그녀를 ‘모자란 년’으로 보고 걱정했다.
하지만 부모의 관심은 딱 그 정도에서 끝났다.
부모는 평범한 농사꾼 부부였다.
아홉 명의 자식을 낳았고, 그중 넷은 키우는 과정에서 잃었다.
남은 다섯도 성장 중에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이니 모자란 년에까지 신경을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 잔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성장했고, 시집을 갔다.
남편은 결혼 7년 만에 마을에 홍수가 나는 바람에 물에 빠져 죽었다.
자식들은 그녀가 모두 맡아 키웠다. 황소처럼 튼튼한 몸이 역시 큰 힘이 되었다.
시골은 위생이 좋지 않아 20살 무렵에 이빨이 다 썩어 버린다.
그런데 그녀는 이빨이 썩기는커녕 그 흔한 무좀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내면에 빛이 있었다.
그 빛을 대하면 항상 마음이 편했다.
형제들이 죽을 때는 슬픈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빛이 그녀를 위로했다.
남편이 죽었을 때도 빛이 그녀를 위로했다.
다섯 명의 자식 중 세 명이 병으로, 사고로, 굶주림으로 죽었을 때도 빛이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처럼 빛을 가지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빛은 그녀밖에 없었다.
나이 50이 되어 빛의 인도에 따라 시골에 있는 대지교의 신전에 몸을 의탁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제들은 그녀를 거절했다.
도시의 귀족 여자는 50살이라도 40대로 보인다.
하지만 시골 촌구석의 여자가 50살이라면 60살은 넘어 보인다.
다 늙은 시골 촌 여자.
게다가 글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여자를 굳이 사제로 받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그 신전을 맡고 있던 늙은 사제.
눈에서 진물이 흐를 정도로 늙은 그 사제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더니 사제가 되는 걸 허락했다.
그때부터 신전을 매일 쓸고 닦았다. 기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내면의 빛과 대화를 했다.
그렇게 평온한 세월이 수십 년간 이어졌다.
그 수십 년간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빛이 있음을 보았다.
하지만 그 빛은 희미했고, 사람들은 빛의 존재를 몰랐다.
그러나 그녀를 받아준 늙은 사제의 내면은 그녀처럼 빛이 밝았고.
그녀처럼 내면의 빛과 소통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보고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아는 사실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심전심.
어떤 일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얼마 후 늙은 사제가 죽었다.
그녀는 늙은 사제를 마음으로 배웅했다.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십여 년간 그녀는 하루도 빠짐없이 신전을 쓸고 닦으며 지냈다.
평온한 나날이었다.
그런 나날 중, 어느 날 빛이 그녀에게 지시를 했다.
그 빛의 지시대로 그녀는 여행을 하다 트리거를 만났다.
트리거는 그녀가 처음 보는 유형의 인간이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엔 빛이 있다.
다만 너무나 희미해 사람들은 그 빛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트리거의 마음에도 빛이 있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빛은 그의 몸과 영혼을 불사를 것처럼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트리거가 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멍하니 휴식을 취할 때도 쉴 새 없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트리거는 그 빛의 격렬함에, 강제성에, 그 목소리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지상에 온 사명을 깨달았다.
너무 큰 소리는 사람의 귀를 멀게 한다.
너무 강한 빛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그녀는 트리거가 그 빛에 귀와 눈이 멀지 않게 하려고.
그 빛에 주눅이 들어 괴로워하는 걸 막기 위해.
그 빛의 격렬함을 피해 도망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빛과 동행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었다.
그녀는 농사꾼이 자연에 순응하듯 자신의 사명에 온전히 평온한 마음으로 순응했다.
나머지 사안은 그녀의 관점에선 다 하찮은 일이었다.
그 하찮은 일을 위해 그녀는 여신에게 기도했다.
“언제나 우리를 돌보는 어머니, 여신이여.”
그녀의 기도는 정해진 기도문이 아니었다.
형식을 갖춘 신성주문도 아니었다.
세 살 먹은 아이가 어머니와 대화를 하듯, 단순하고 솔직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그 솔직한 단어의 나열엔 단순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빛이 반응을 했다.
그녀의 몸에서 푸른빛이 일었다.
그 푸른빛이 공간을 뛰어 넘어 트리거와 타미두스에게로 옮겨졌다.
두 사람의 창백한 얼굴은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크아아악!”
다시금 포효가 작렬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정면에 있던 라이코니스에게 돌진했다.
타미두스의 도끼가 먼저 라이코니스의 몸통에 박혔다.
하지만 바로 튕겨 나왔다.
이어서 트리거의 금강대력수가 라이코니스의 몸통을 때렸다.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라이코니스가 충격에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반응은 그게 전부.
라이코니스의 꼬리가 트리거의 몸을 후려치려 했다.
트리거는 유수보를 시전했다.
그의 몸이 꼬리를 피해 라이코니스의 몸통에 바짝 붙었다.
하지만 꼬리의 끝에 있던 뱀의 머리가 꼬리를 뒤틀며 트리거의 몸을 물려고 덤볐다.
그 순간 트리거의 몸이 포말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라이코니스의 몸통 위에 나타났다.
환영보(幻影步)!
라이코니스를 상대하기 위해 시스템에서 선택한 보법이었다.
동시에 그의 검이 라이코니스의 몸을 파고들었다.
유수검!
유수보와 똑같이 물의 이치를 검으로 구현한 검법.
이것 역시 라이코니스를 상대하기 위해 시스템에서 새롭게 익혔다.
금강대력수는 사물을 겉부터 뭉개는 수법이다.
유수검은 물의 이치에 따라 사물의 결을 베는 수법이다.
무술에 우열은 없다.
다만 도끼와 칼의 쓰임새가 다르듯, 유수검과 금강대력수는 쓰임새가 다를 뿐이다.
유수검은 그 결에 따라 라이코니스의 피부를 베고 근육을 파고들어갔다.
“크아악!”
라이코니스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다.
트리거는 검을 단단히 붙잡고 그 흔들림에서 몸을 지탱했다.
그런 트리거를 향해 검처럼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들었다.
옆에 있던 다른 라이코니스의 발톱이었다.
* * *
옆에서 트리거를 공격하던 라이코니스의 양 눈에 냉기의 화살이 파고들었다.
라이코니스는 눈동자가 얼어붙을 듯한 통증에 두 눈을 깜빡거리며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들 앞에 있던 푸코가 보였다.
푸코는 라이코니스를 향해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새롭게 각성한 냉기 화살 공격이었다.
라이코니스는 자신을 공격한 게 푸코라는 걸 눈치 챘다.
“크아아아!”
라이코니스는 푸코를 향해 분노의 포효를 내질렀다.
“여신이여. 삼가 이 종이 비오니 이들에게 당신의 용기를!”
그 순간 모르가 다시 기도를 했다.
그러자 모르를 중심으로 대지가 푸르게 물들었다.
그 푸른빛이 검투사들과 푸코의 몸에 스며들었다.
라이코니스의 피어가 그런 이들을 습격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하지만 곧바로 정상으로 돌아왔다.
신성력의 효과였다.
하지만, 푸코는 예외.
그의 눈동자는 풀렸고, 코와 입에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라이코니스의 피어가 푸코에게 집중됐기 때문이었다.
15화
“덤벼!”
푸코는 이를 부득 갈며 라이코니스를 향해 소리쳤다.
그 적의가 정신탐색을 통해 라이코니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쿠워워!”
라이코니스가 허공을 향해 울부짖더니 푸코를 향해 일직선으로 돌진했다.
어그로가 끌린 것이다.
“파이어 애로우!”
푸코는 이를 악물고 마법을 캐스팅했다.
허공에 불의 화살이 형성되었다.
그 불의 화살이 라이코니스를 향해 날아갔다.
푸코는 마법사다.
염력을 각성했다고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니다.
그 정도를 넘어 트리거의 지원을 바탕으로 피를 토하는 노력을 해서 마법의 서클을 올렸다.
트리거를 따라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 그는 2서클이었다.
현재 그는 4서클이었다.
4서클이면 초급을 넘어 중급 입문 상태.
어딜 가도 쓸 만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의 수준이다.
파이어 애로우가 라이코니스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라이코니스가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파이어 애로우는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4서클의 파이어 애로우로는 라이코니스를 어찌할 수 없었다.
“크어억!”
하지만 라이코니스는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파이어 애로우를 쳐내는 동안, 소리 없이 다가온 냉기 화살이 그의 양 눈을 또다시 찔렀다.
하지만 라이코니스는 열기에 감각이 마비되어, 냉기의 은밀한 공격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공격을 허용했다.
불과 얼음의 특성을 이용한 시간차 공격이었다.
“크워워!”
다시 라이코니스가 푸코를 공격하려고 했다.
“여신이여, 우리에게 당신의 보호를!”
모르가 또다시 기도를 했다.
그러자 대지에서 넝쿨이 솟아올라 라이코니스의 몸을 묶었다.
라이코니스는 몸을 격렬히 흔들었다.
넝쿨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졌다.
하지만 넝쿨은 끊어지자마자 다시 생성되어 라이코니스의 몸을 칭칭 휘감았다.
넝쿨은 다시 생성될수록 더 두꺼워지고 튼튼해져 라이코니스가 끊기 힘들게 변해갔다.
“여신이여, 우리에게 당신의 용기를!”
다시 초록빛의 광채가 일어나 검투사들의 몸에 스며들었다.
검투사들의 얼굴에서 공황이 사라지고 투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저 놈을 죽여야 해.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살길이 열리지 않아!”
검투사 중에 한 명이 소리쳤다.
그리고는 밧줄에 묶인 라이코니스를 향해 달려갔다.
그게 기폭제가 되어 다른 검투사들도 일제히 라이코니스를 향해 돌진했다.
지금까지는 라이코니스와 대결이 성사되면 검투사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라이코니스가 도망치는 검투사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보는 게 이 싸움의 묘미였다.
하지만 모르의 기도가 검투사들에게 용기를 주며 싸움의 양상을 새롭게 바꾸었다.
“와아!”
“죽여! 죽여!”
관중석의 환호소리가 더욱 커졌다.
약자의 반격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었다.
검투사들은 라이코니스의 몸에 달라붙어 일제히 무기를 휘둘렀다.
“크어억!”
분노한 라이코니스는 고함을 지르며 온몸을 흔들었다.
투투둑!
넝쿨이 끊어졌다.
앞발이 휘둘러졌다.
“으아악!”
그 앞발에 맞은 검투사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앞발에 맞은 검투사들은 팔 다리의 뼈가 부러져 덜렁거렸고, 몸통은 내장이 보일 정도로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여신이여, 이들에게 당신의 축복을!”
모르가 다시금 기도를 했다.
그러자 푸른빛이 검투사들에게 스며들었다.
검투사들의 상처가 순식간에 아물었다.
하지만 검투사들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머뭇거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라이코니스에게 덤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겁쟁이들 같으니!’
푸코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신성마법은 흑마법이 아니다.
신성마법은 인간의 용기를 북돋고 키워주지만, 자유의지로 싸움을 거부한다면 억지로 그 의지를 꺾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결국 자신이 라이코니스를 어찌해야 한다.
푸코는 염력으로 냉기의 사슬을 형성하고, 화염계 마법을 캐스팅했다.
불과 얼음의 조합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원소 조합이었다.
‘아이야.’
그때 갑자기 따스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를 감싼 초록빛 신성력에서 들리는 목소리였다.
깜짝 놀란 그는 자신의 몸을 둘러싼 초록빛 신성력을 내려다보았다.
초록빛 신성력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푸코를 향해 흔들거리고 있었다.
푸코는 트리거에게 친형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반면 그의 배려엔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뭐든지 적당한 게 좋다.
트리거의 배려는 너무 정도를 지나쳐 짜증이 나는 것이다.
트리거의 배려에 한참이나 질려 있으니, 이렇게 아이 취급하는 목소리에도 질색팔색하는 반응이 나와야 했다.
하지만 푸코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홀린 듯한 얼굴로 그 초록빛 광채를 바라보았다.
그 목소리엔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초월적인 따스함이 있었다.
‘너의 진정한 힘에 눈을 뜨렴.’
갑자기 양 미간 사이에서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으윽!”
푸코는 양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비틀거렸다.
‘네 눈으로 저 아이를 봐라.’
양 손으로 눈을 가렸는데도 사물이 보였다.
라이코니스는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그 라이코니스의 중심에 있는 생명의 핵이 보였다.
그 핵이 불길하고 불결한 느낌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저 아이는 대지의 품에서 벗어나 오염되어 있단다. 저 아이에게 안식을 주렴,’
초록빛 광채가 말했다.
푸코는 두 눈을 부릅뜨고 라이코니스를 바라보았다.
이마를 넘어 두개골 전체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미간에서 파동이 일어났다.
그 파동이 라이코니스의 핵을 때렸다.
“크아악!”
라이코니스는 허공을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그 포효엔 이제까지와는 달리 고통이 깃들어 있었다.
‘다시 한 번!’
푸코는 두 눈을 더욱 부릅뜨고 또다시 힘을 발휘했다.
그의 미간에서 일어난 파동이 다시 라이코니스를 때렸다.
다른 시간선에서 푸코의 능력 중 하나는 몬스터의 정신지배였다.
이게 염력보다 훨씬 무서운 푸코의 장기였다.
푸코는 정신지배로 수십만 몬스터를 뜻대로 다스려 자신의 군략을 펼쳤다.
그 정신지배가 신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형태로 각성한 것이다.
* * *
라이코니스는 격렬하게 몸을 흔들었다.
그 탓에 트리거는 라이코니스의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라이코니스가 그런 그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크어억!”
아니, 휘두르려고 하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타미두스의 도끼가 라이코니스의 뒷발에 있는 발가락 하나를 절단하고 있었다.
신체의 말단은 몸통에 비해 내구력이 약하다.
타미두스의 완력이라면 몸통은 몰라도 손가락, 발가락 같은 말단 부위는 충분히 절단할 수 있다.
그녀가 과거에 라이코니스에게 제대로 손도 못쓰고 당한 건, 그녀를 보조해 시간을 벌어줄 동료가 없기 때문이었다.
동료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틈에 트리거는 라이코니스의 엉덩이 부분으로 뛰어올라서 머리 쪽으로 단번에 이동했다.
거기서 유수검으로 라이코니스의 머리를 결을 따라 찔렀다.
“크아악!”
라이코니스는 고통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 순간 라이코니스의 꼬리에 있던 독사 머리가 입을 벌리고 트리거를 물려고 덤볐다.
하지만 타미두스가 도끼로 그 꼬리를 잘라 버렸다.
꼬리가 끊어진 단면에서 피가 솟구쳤다.
“크아악!”
라이코니스의 몸부림은 더욱 심해졌다.
트리거는 양 발을 라이코니스의 머리에 딱 붙이고 시스템창에서 새로운 무술 스킬을 클릭했다.
접인공(接引功)!
사물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무술이다.
발바닥에 접인공을 운용하니 발이 라이코니스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라이코니스가 아무리 몸을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았다.
유수검을 응용. 검을 라이코니스의 머리에 깊이 박아 넣고 결을 따라 그어 버렸다.
그러자 머리가 갈라지며 두개골이 드러났다.
두개골마저 유수검을 응용해 결을 따라 베는 것은 불가능.
트리거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금강대력수를 오른손에 운용해 라이코니스의 두개골을 때렸다.
쿵!
망치로 바위를 때리는 소리가 났다.
“끄어억!”
라이코니스는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렸다.
쿵!
다시 한 번 때렸다.
라이코니스의 움직임이 더욱 둔해지고, 코와 눈에서 검붉은 피가 흘렀다.
쿵!
다시 한 번 더 때렸다.
라이코니스는 앞으로 쓰러지며 움직임이 멎었다.
동시에 몸에 새로운 활력이 돌았다.
레벨 업!
15레벨이 16레벨이 되었다.
그는 라이코니스의 머리에서 뛰어 내리며 다른 라이코니스를 바라보았다.
그 라이코니스도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검투사들이 벌떼 같이 그런 라이코니스의 몸에 달라붙어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모르는 담담한 얼굴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런 모르 앞에는 푸코가 숨을 헐떡이며 앉아 있었다.
푸코와 트리거의 눈이 마주쳤다.
트리거는 푸코의 눈을 보고 그가 이전보다 한층 더 성장했음을 깨달았다.
* * *
“안 되겠는데?”
콜룸이 트리거 일행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대로 풀어주기에는 저 계집의 능력이 너무 아까워. 관객의 반응도 괜찮고.”
트리거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모르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이었다.
일행 중에 푸코만이 분노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고 콜룸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푸코는 콜룸을 보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트리거가 일행을 대표해 콜룸과 협상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애초의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트리거가 물었다.
“그 약속을 두고 어떤 구속력 있는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난 자네들이 약속을 어기고 도시를 떠났어도 어떠한 제지도 하지 않았을 걸세. 구두 계약은 지켜도 그만, 안 지켜도 그만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네들이 약속을 지킨 것에 난 감탄하고 있네.”
“…….”
“이렇게 하지. 이번엔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겠네. 선금도 지불하고, 흥행에 따라 보너스도 충분히 지급하지. 그렇게 딱 세 번. 세 번만 도와주면 돼. 우리 모두에게 만족할 계약이 될 걸세.”
콜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 *
트리거 일행과 라이코니스의 싸움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콜룸은 트리거 일행을 그냥 보내줄 마음이 없었다.
트리거가 보여준 어수룩함이 더욱 그런 마음을 먹게 했다.
상행위는 적당히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트리거는 상대가 원하는 가격을 말하면 얼마든지 지급한다고 했다.
협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수룩한 놈이다.
이런 놈을 쥐고 흔드는 건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그런 협상도 상대를 봐가며 해야 한다는 걸 모른 게 콜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트리거는 눈살을 찌푸리며 콜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금강대력수로 콜룸의 머리를 후려쳤다.
콜룸의 주변엔 호위무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트리거의 공격에 대응하지 못했다.
트리거는 싸움이 끝나자마자 콜룸을 만나러 왔다.
그가 콜룸을 만난 장소는 경기장에 들어오기 전, 귀빈들이 잠시 머무는 대기실이었다.
대기실은 테이블 하나에 의자가 여러 개 있는 단순한 구조였다.
의자와 의자 사이는 서로 간에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공간이 좁았다.
그렇게 좁은 공간에서 시종일관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던 트리거가 느닷없이 손을 쓸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콜룸은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게 그의 마지막 의식이었다.
콜룸은 입을 벌린 채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머리가 익은 석류처럼 벌어져 그 안의 내용물이 공기 중에 노출 되었다.
콜룸이 트리거를 단지 어수룩한 놈이라고만 본 게 패착.
지투스는 인류군을 이끌며 몬스터뿐만 아니라 인간의 피도 무수히 손에 묻혔다.
그 경험이 트리거의 기억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렇게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트리거가 콜룸과 밀고 당기는 협상을 하지 않은 건, 이런 자잘한 일에 신경 쓰는 게 귀찮아서였다.
그래서 좋게좋게 양보한 걸 가지고, 사람을 마냥 어수룩하게 본 게 콜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16화
“그래서 네가 구원자라고?”
카르의 시장 라즐리가 물었다.
“예.”
트리거는 짧게 대답했다.
트리거는 어깨를 펴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푸코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모르는 언제나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
라즐리는 살짝 입을 벌렸다.
그도 검투장에 와서 검투시합을 보았다.
시합을 즐기고 돌아가려는데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재판을 시작했다.
그 재판에 끌려나온 게 바로 방금 전에 눈앞에서 라이코니스를 죽인 검투사 일행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서 같이 시합을 즐기던 콜룸이 피해자였다.
왜 죽였냐고 물으니 저런 거창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자신은 미래의 구원자이고.
그 중차대한 계획을 위해 그 야만계집을 구하려고 하는데.
콜룸이 그 성스러운 계획을 방해하려고 했다는 게 트리거가 말한 변명의 골자였다.
라즐리는 시장으로서 다양한 재판을 했고.
거기서 범죄를 저지른 죄수들의 온갖 변명을 들었다.
죄수들의 변명은 복수의 정당성.
아니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호소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트리거의 변명은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생전 처음 듣는 희한한 변명이었다.
‘미친놈인가?’
라즐리는 트리거를 바라보았다.
트리거는 자기 생각에 한 점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모두 가둬! 이놈들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다.”
라즐리가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놈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미친놈들이다.
미친놈들이 도시의 유력자를 때려 죽었다.
그렇다면 판결은 당연히 사형.
적당한 날을 골라 트리거 일행을 모두 교수대에 매달 것이다.
이들의 교수형은 시민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될 터였다.
* * *
“도대체 왜 나를 막았어요? 당신 때문에 다 죽게 생겼잖아요!”
푸코가 화난 어조로 트리거에게 물었다.
트리거가 콜룸을 죽이자, 놀란 호위무사들이 트리거 일행을 잡으려고 달려들었다.
푸코는 그런 호위무사들을 물리치고 도망치려 했다.
푸코와 트리거가 힘을 합치면 일행은 그 자리를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트리거가 푸코를 만류하며 병사들의 체포에 응했다.
트리거는 일행과 상의도 없이 콜룸을 죽였다.
그리고 푸코의 도주시도를 막아 일행을 모두 교수대에 매달리게 만들었다.
트리거가 미친놈이 아닌 것은 누구보다 푸코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벌이는 행동은 푸코가 봐도 영락없이 미친놈의 그것이었다.
트리거는 침착한 어조로 자기의 계획을 설명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타미두스를 데려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비상한 방법을 써야 한다.
그 비상한 방법은 지투스와 타미두스 간의 대화에 단서가 있었다.
* * *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어. 이솔의 도움이 컸지.”
과거 타미두스는 모닥불을 보며 추억에 잠긴 어조로 말했다.
매장지를 빠져 나온 타미두스는 얼마 걷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런 그녀를 간호한 게 이솔이라는 남자였다.
이솔은 빈민가의 남자였다.
빈민가 근처에 쓰러진 타미두스를 발견하고 그녀를 치료했다.
“참 좋은 남자였어,”
타미두스가 말했다.
빈민가라면 자기 먹을 것을 챙기기도 힘들다.
그런데 이솔은 타미두스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식량을 제공했다.
빈민가에는 어울리지 않게 마음이 좋은 남자였다.
“그 신세를 갚아야했어.”
타미두스는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그 이후 이솔의 사정을 알고는 도움을 주기 위해 몬스터 사냥을 나갔다.
몬스터 사냥은 무난히 성공.
상당한 마수와 몬스터를 잡아 이솔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는 성을 나서려는데 몬스터 웨이브가 닥쳤다.
도시 카르의 역사상 몬스터 웨이브가 닥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예상치 못한 웨이브에 성문이 뚫렸다.
도시의 모든 병력이 몬스터 웨이브를 막는 데에 동원되었다.
몬스터는 빈민가까지 침입했다.
“좋은 남자는 일찍 죽지.”
타미두스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당시 몬스터의 습격으로 이솔도 죽었다.
타미두스는 이솔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
이솔이 죽은 후 타미두스는 열린 성문으로 나가서 여행을 떠났고.
그 후로는 이 카르라는 도시에 대해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 * *
트리거는 당시 지투스와 타미두스와의 대화를 일행에게 말해주었다.
“즉, 지금쯤이면 슬슬 몬스터 웨이브가 닥칠 시기야.”
몬스터 웨이브가 닥치면 도시는 그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때 타미두스를 데리고 같이 탈출한다.
“다 좋은데, 타미두스는 어떻게 찾을 건데요? 찾는다 해도 도대체 어떻게 설득해서 데려갈 건데요?”
푸코가 트리거에게 물었다.
지하감옥은 지하 3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층은 여러 개의 감옥으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 감옥 중에 가장 아래쪽 감옥에 갇혀 있었다.
게다가 타미두스가 어디에 갇혀있는 지도 그들은 몰랐다.
타미두스를 찾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찾는다 해도, 타미두스는 혼자 탈출해도 그만인데 왜 자신들과 행동을 같이 하겠는가?
같이 행동을 하게 만들려면 설득을 해야 한다.
평온한 상황에서 시간을 들여 차분히 이야기를 해도 설득이 될까 말까인데.
그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설득이 가능할까?
“일이 닥쳐서 타미두스를 설득하려면 시간이 부족하지. 그러니 지금부터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갖고 타미두스를 설득할 거야.”
트리거는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 * *
타미두스는 마른 빵을 식은 스프에 찍어 먹었다.
마른 빵의 표면에는 푸른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타미두스는 그 푸른곰팡이를 일일이 손으로 뜯어내고 스프에 찍어 먹었다.
빵은 돌보다 딱딱했고.
스프는 물처럼 묽었다.
“개새끼들.”
끼니마다 이 따위 음식을 주니 절로 타미두스의 입에선 욕설이 튀어나왔다.
검투사는 승패에 따른 대우가 분명하다.
검투에서 패하면 쓰레기 같은 음식이 나와도, 이기면 좋은 음식과 좋은 잠자리가 제공된다.
타미두스도 그런 대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감옥에 갇혔다.
트리거 일행과 한 패로 오인 받아서였다.
타미두스가 또다시 딱딱한 빵을 스프에 찍어 먹을 때였다.
“타미두스.”
갑자기 모기의 날갯짓만큼이나 작은 소리가 귀에 울렸다.
타미두스는 깜짝 놀라서 빵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를 질렀다.
“어떤 놈이냐!”
“목소리 키우지 마라. 간수의 주의를 끌면 안 돼. 나는 네 친구다.”
“친구라고?”
타미두스는 목소리를 잔뜩 죽이고 반문했다.
“그래, 네 친구.”
목소리는 차근차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를 듣던 타미두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네놈의 동료고, 미래에 우리가 마왕과 싸운다고? 너 미쳤구나?”
* * *
트리거는 감옥에서 천리전음과 천리지청술 스킬을 익혔다.
천리지청술로 타미두스의 행방을 찾고, 천리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두 스킬을 펼치니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천리전음은 자신의 목소리를 상대방의 귓가에 전달하는 무술이다.
그런데 그 목소리의 파동이 벽에 부딪친 후 트리거에게로 되돌아왔다.
트리거는 그 파동이 몸에 부딪치는 감각을 천리지청술을 통해 느꼈다.
그러면서 감옥의 구조를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었다.
박쥐가 초음파로 자신이 서식하고 있는 동굴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듯.
그도 천리전음과 천리지청술을 융합해 공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단지 두 스킬을 같이 익혀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하면 두 스킬은 별개로 기능한다.
이건 양의신공의 묘용이었다.
양의신공은 마음만 둘로 나누는 게 아니었다.
반대의 속성을 가진 무술을 어떤 부작용도 없이 같이 익히게 해주었다.
서로 반대인 속성을 같이 익히게 해준다는 건.
비슷하거나 별개의 속성을 가진 무술을 완전히 융합시킬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천리지청술과 천리전음은 원리가 비슷한 수법이다.
그 비슷한 수법을 양의신공이 합치고 융합해 공감각이란 새로운 능력을 만들어낸 것이다.
양의신공을 도가제일신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트리거는 그 공감각을 통해 감옥의 구조를 눈으로 본 것처럼 선명하게 파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천리전음을 통해 타미두스를 계속해서 설득했다.
“누가 널 함정에 빠트렸는지 알고 싶지 않나?”
“네가 안다는 건가?”
타미두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알지. 미래의 네가 알려줬다.”
“그게 누구냐?”
타미두스가 이를 갈며 물었다.
“그걸 알려주는 데에는 조건이 있다.”
“조건이 뭐냐?”
“앞으로 반 년간 나와 동행하는 것.”
“……좋다!”
“그럼 감옥에서 탈출한 뒤에 말해주지.”
* * *
다음 날 아침.
“몬스터 웨이브가 닥쳤다.”
트리거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는 공감각을 발동해 감옥을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지상에서 지하로 통하는 감옥 1층의 문이 열리며 몬스터가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지하감옥엔 간수 전용의 방이 있다.
침대와 테이블, 탁자가 하나씩 있는 간소한 방이었다.
그 방에서 간수들은 쉬는 시간에 낮잠을 자거나, 간단한 카드놀이를 했다.
그러다 교대시간이 되면 감옥순찰을 돌았다.
지금도 간수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지하에선 쉬는 시간에 이런 소소한 도박 외엔 달리 시간을 보낼 거리가 없었다.
그렇게 한창 카드놀이에 열중하고 있는데, 밖에서 지상과 연결된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벌써 밥 먹을 때가 됐나?”
밥 때가 되면 음식을 가져온 인부가 밖에서 철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간수가 철문을 열어 줬고, 인부가 들어와 음식을 두고 나갔다.
간수는 인부가 가져다준 음식 중에 자신들 몫의 괜찮은 음식을 챙겼고.
나머지 반의 쓰레기 음식은 죄수들에게 배분했다.
간수는 살짝 고파진 배를 매만지며 문을 열었다.
그런데 밖에 서 있는 사람(?)은 인부가 아니었다.
오크가 피범벅이 된 몽둥이를 들고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뒤로 시내의 모습이 보였다.
오크들이 시민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간수는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껏 이 도시에 몬스터가 침입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생경한 광경을 정신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아아악!”
“살, 살려줘!”
시내에서는 오크들에게 쫓기던 시민들이 연신 고함을 내질렀다.
그 고함을 듣고서야 간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급히 문을 닫으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다.
문을 닫기 전에 오크의 몽둥이가 간수의 머리를 후려쳤다.
간수는 머리가 깨져 쓰러졌다.
이후 오크들이 감옥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 * *
트리거는 창살 사이로 대력금강수를 운기한 손을 내밀어 자물통을 잡아 뜯었다.
자물통은 그의 손에 의해 두부처럼 으스러지며 뜯겨나갔다.
트리거는 감옥 창살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푸코와 모르가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주변에 있던 죄수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자물통은 통짜 강철이라 그리 쉽게 부서지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게 쉽게 부서지는 물건이었다면 죄수들이 진작 부수고 탈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단단한 자물통을 트리거는 맨손으로 뜯은 것이다.
“우리도 구해주시오!”
트리거가 나오자 그 옆에 있던 죄수가 다급히 소리쳤다.
트리거는 그 죄수가 소리치기 전에 이미 자물통을 잡아 부수고 있었다.
트리거는 복도를 지나며 눈에 띄는 자물통을 모두 부쉈다.
그러자 죄수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17화
트리거가 선두에서 위를 향해 달렸다.
그 뒤를 죄수들이 떼를 지어 따랐다.
죄수들이 감옥 문을 열고 나오는 과정에서 상당한 소란이 일어났다.
이 정도 소란이면 간수들이 내려와 살펴봄직도 한데, 그 누구도 아래층을 살피려 내려오지 않았다.
죄수들은 모두 자유를 찾았다는 흥분에 겨워 이상함을 눈치 채지 못했다.
트리거는 지하 3층에서 지하 2층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오크들이 피에 젖은 몽둥이를 들고 우르르 2층 복도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파이어 윈드!”
뒤에 있던 푸코가 파이어 윈드를 캐스팅했다.
불의 바람이 오크들을 습격했다.
고서클의 파이어 윈드는 그 열기로 상대방의 피부와 근육을 탄화시킨다.
하지만 푸코는 4서클.
4서클의 파이어 윈드는 상대방의 피부에 화상만 입힐 뿐이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예상 밖의 열기에 오크들이 움찔하며 대열이 흐트러졌다.
트리거는 유수보를 밟으며 그 흐트러진 대열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금강대력수로 오크들을 후려쳤다.
퍼퍽!
금강대력수가 머리를 때리면 머리가 터져 나갔다.
팔 다리를 때리면 팔 다리가 부러져 덜렁 거렸다.
트리거는 유수보와 금강대력수를 이용.
오크들의 대열을 무인지경으로 헤치고 나갔다.
뒤에 있던 죄수들은 그런 광경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뭘 보고만 있어. 모두 오크들의 먹이가 되고 싶어!”
푸코가 그런 죄수들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정신을 차린 죄수들은 오크들을 향해 돌진했다.
죄수들은 대부분 검투사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오크들과 싸워야 살 길이 열린다는 것쯤은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트리거를 따라 오크들과 격전을 벌였다.
지하 2층도 철창으로 만든 감옥들이 복도 양쪽에 늘어서 있었다.
감옥 안에 있던 죄수들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오크와 동료 죄수들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트리거는 죄수들이 갇힌 감옥의 자물통을 금강대력수로 차례로 부쉈다.
복도 중간쯤에 타미두스가 있었다.
트리거는 자물통을 부수고 타미두스를 꺼냈다.
일행은 다른 죄수들과 힘을 합쳐 오크들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간 죄수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 * *
카르의 시장 라즐리는 트리거의 예언(?)을 듣고는 밤새 악몽에 시달렸다.
트리거의 말을 그저 광인의 미친 소리쯤으로 여겼다면 한 귀로 듣고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과 몬스터의 싸움.
몬스터가 성을 점령하고 인간을 도축하는 광경.
강림한 마왕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인간의 처절함.
그런 내용들을 트리거는 너무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그 내용이 머릿속에 화인처럼 박혀 악몽까지 꾼 것이다.
그는 악몽으로 잠을 설치고 멍한 상태로 일과를 시작했다.
“시장님! 몬스터가 쳐들어 왔습니다.”
일과를 시작하려는데 부하 하나가 급히 집무실에 들어와 소리쳤다.
“뭐라고?”
카르 역사상 몬스터가 도시까지 침입한 건 처음이었다.
다행히 도시를 지키던 경비대장의 지휘 아래 그 습격은 반나절 만에 정리됐다.
하지만 피해가 컸다.
싸우는 와중에 죽거나 다친 사상자의 수가 세 자리 수를 넘어갔다.
“그 미친놈을 불러와라!”
라즐리가 부하에게 말했다.
그 미친놈은 트리거를 말하는 것이었다.
몬스터의 습격을 물리쳤다고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부서진 도시를 재건하려면 일이 한 가득이었다.
그런데 먼저 트리거를 불렀다.
몬스터가 도시를 습격한 이 현상이 트리거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만 같아 너무도 찜찜했다.
그 찜찜함을 견딜 수가 없어서 만사를 제쳐놓고 트리거를 부른 것이다.
하지만 부하들이 가져온 소식은 그를 실망시켰다.
“트리거가 일행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습니다.”
감옥 안엔 오크들의 시신이 한 가득이었다.
오크들이 감옥을 습격한 틈을 타서 트리거가 일행과 함께 도시를 떠난 것이 확인되었다.
“같이 감옥에 있던 죄수들의 말로는, 트리거가 몬스터의 습격을 미리 안 것처럼 행동했다고 합니다.”
당시 트리거와 함께 감옥 밖으로 도주했던 죄수들 중에 일부는 다시 잡혔다.
그런 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증언을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라즐리는 더욱 찜찜했다.
‘너무 찜찜해서 안 되겠다.’
그렇다고 도시를 떠난 트리거 일행을 다시 잡아들이는 건 무리.
거기엔 라이코니스를 죽인 트리거의 무력에 대한 판단도 있었다.
대신 정보길드를 통해 트리거의 행방을 뒤쫓고.
트리거가 그동안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트리거는 미래에 대해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그걸 말해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트리거의 말을 비웃었다.
하지만 보름마다 붉은 달이 찾아오고.
트리거가 말한 것과 비슷한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다.
거기에 찜찜함을 느끼고 라즐리처럼 트리거의 말에 대해 조사하는 사람이 조금씩이나마 생기고 있었다.
트리거가 여행을 하며 뿌린 씨앗에서 조금씩 싹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었다.
* * *
트리거 일행은 무사히 카르를 벗어났다.
카르를 완전히 벗어나자, 몬스터의 습격도 없어져서 길을 떠나는 일행에게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타미두스가 트리거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제 약속을 지켜라. 내가 왜 도시 촌놈들에게 팔려서 검투사가 된 거지?”
“너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강은 짐작하고 있을 텐데?”
트리거가 타미두스를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말해!”
타미두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동료 실텐이다. 실텐이 네게 약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후, 부족을 오가는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타미두스는 고함을 내질렀다.
타미두스는 야만부족 중에 아테란 부족 출신이었다.
그녀는 아테란 부족 전사 중에서 월등한 사냥 실력으로 차기 족장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유력한 차기 족장 후보로 뽑힌 전사가 실텐이었다.
그날 그녀는 실텐과 함께 사냥을 나갔었다.
그 사냥에서, 전사 수십 명이 힘을 합쳐야만 잡을 정도로 강한 사냥감을 둘의 힘만으로 잡았다.
둘은 이를 자축하며 사냥감 옆에서 술과 고기를 먹었다.
그리고 타미두스는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타미두스는 제압된 채 노예 사냥꾼들에게 팔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게 실텐의 수작질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들의 경쟁에는 그 어떤 음험한 질투나 모략도 없었다.
상대방에게 결코 질 수 없다는 강력한 경쟁심과 상대의 능력에 대한 존중의 감정만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실텐도 자신처럼 노예로 팔린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트리거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증거는 있나?”
타미두스가 트리거를 노려보며 물었다.
트리거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증거? 널 산 상인이나 실텐을 이 자리에 데려와서 자백이라도 받아야 하나?”
“…….”
타미두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숨을 씩씩거리더니 다시금 물었다.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카르에 몬스터가 습격한다는 것을 안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
“미래의 네가 어느 날 말해주었다.”
아무리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도 당사자가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밀어붙이면 듣는 사람은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한다.
그런데 트리거의 말은 허무맹랑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정황 증거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트리거는 타미두스의 이름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녀의 내밀한 비밀들까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몬스터가 카르를 습격할 것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러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 실텐이 자신을 팔아 넘겼다는 말 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타미두스는 트리거를 노려보며 한참을 씨근거렸다.
“왜 날 탈출시켜주는 대가로 반 년간 동행하라는 조건을 걸었지? 이것도 미래의 내가 부탁한 건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부족으로 돌아가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타미두스는 일행과 헤어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트리거가 반 년간 자신들과 동행하라는 조건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부탁이 아니야. 미래의 네가 겪을 회한을 덜어주려는 거지.”
* * *
“지금도 후회되는 게 있어. 쿨럭…….”
타미두스는 입으로 피를 토하며 말했다.
그녀는 남은 한쪽 팔마저 잃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왕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종말의 어느 날이었다.
적을 앞에 두고도 일어나지 못한다는 건, 그녀의 최후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의미한다.
트리거는 그런 그녀를 부축해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의 그도 두 팔과 두 다리를 모두 잘려 타미두스를 부축해줄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분노로 이성을 잃고 부족의 전사들을 모두 죽였어. 그래서 아테란 부족이 멸망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했어. 그게 새삼스레 마음에 걸려.”
* * *
지투스의 미래에 카르를 탈출한 타미두스는 부족으로 돌아갔다.
실텐은 그때 족장의 자리에 오른 상태였다.
실텐은 족장의 권위로 전사들에게 타미두스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제야 타미두스는 모든 사정을 알게 됐다.
분노한 타미두스와 전사들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그 전투에서 전사들은 전멸했다.
그 후에 실텐과 전투를 벌였고, 결국 실텐도 죽었다.
타미두스는 이후 부족을 떠나 여행을 했다.
그러다 나중에야 아테란 부족이 멸망했다는 걸 알게 됐다.
붉은 달 현상이 점점 심해지며 몬스터들이 아테란 부족을 습격하는 빈도가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아테란 부족의 전사들은 타미두스의 손에 모두 죽었다.
남은 아테란 부족은 전력 부족으로 그런 몬스터의 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테란 부족은 붉은 달 현상이 일어나는 초기에 전멸했다.
그게 미래의 타미두스에겐 죽을 때까지 아쉬워하는 후회가 되었다.
트리거는 그 후회를 미연에 막아 주려던 것이었다.
반년이란 시간 여유를 주면 타미두스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보다 냉정하게 이 일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타미두스는 실텐을 죽인 건 후회하지 않았다.
그건 전사의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사들은 일부 심복을 제외하곤 실텐의 행위를 몰랐다.
그런 전사들 중에 일부를 살려두었다면, 아테란 부족은 멸망을 피해갈 수 있지 않았을까?
* * *
“……그래서 6개월이란 여유기간을 둔 거다. 그 정도면 너도 충분히 머리를 식히겠지.”
트리거가 말했다.
반년이면 그녀가 냉정을 찾기에 충분한 시간일 터였다.
타미두스는 충혈된 눈으로 트리거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근처의 나무를 향해 도끼를 힘껏 휘둘렀다.
그 서슬에 나무가 잘려 나갔다.
“약속대로…… 반년은 너희와 동행하겠다.”
타미두스가 씹어뱉듯 말했다.
* * *
타미두스는 살면서 여러 차례 화를 냈다.
하지만 실텐의 배신처럼 그녀를 분노케 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실텐의 배신만큼이나 그녀를 분노케 하는 일이 일어났다.
실텐의 배신을 알려준 그 사내, 트리거의 말 때문이었다.
타미두스는 약속에 따라 일행과 동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와중에 몬스터와 몇 차례 조우했다.
타미두스는 실텐에 대한 분노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랬기에 일행이 나서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몬스터 무리에 뛰어들었다.
시원하게 도끼질을 해서 몬스터 무리를 전멸시켰다.
그런 타미두스를 트리거는 심각하게 바라보았다.
“……과거에 비하면 너무 약해!”
그런데 이 따위 말이나 하고 있었다.
전사에게 약하다는 것처럼 모욕적인 말은 없다.
약을 올리거나 조롱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트리거는 정말로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타미두스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다.
18화
“내가 약한지 아닌지 확인해 볼래?”
타미두스가 으르렁 거리며 물었다.
“네게 현실을 깨닫게 해주지.”
트리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게 둘의 대결이 이루어졌다.
“무기 들어!”
타미두스가 트리거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때까지 트리거는 맨손이었다.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 무기를 들겠다.”
트리거가 말했다.
‘죽인다!’
그 말이 타미두스의 살심을 굳혔다.
트리거의 말이 타미두스의 감정을 분노를 넘어 살심으로 바꾼 것이었다.
트리거와 타미두스는 3미터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키야압!”
타미두스가 기합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흐릿한 잔상만 남긴 채 3미터의 거리가 순식간에 삭제되었다.
찰나지간에 타미두스의 도끼가 트리거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트리거의 대응은 간단했다.
금강대력수로 머리를 향해 내려오던 도끼의 면을 후려쳤다.
그러자 도끼의 궤도가 옆으로 미끄러졌다.
다른 손으로는 타미두스의 광대뼈를 후려쳤다.
타미두스의 몸은 그대로 허물어졌다.
* * *
타미두스는 패배 이후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껏 이렇게 일방적으로 패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트리거 또한 타미두스를 패배시킨 후 침울한 표정이었다.
싸움에서 진 패자가 기분이 상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승자가 패자 못지않게 침울해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트리거가 이러는 것은 타미두스의 강함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다 못한 푸코가 트리거에게 말했다.
“트리거, 너무 주변의 실력을 올리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것 같아요. 차라리 본인의 레벨을 올리는 데에 주력하는 게 어때요?”
이 싸움을 지켜보고 가장 놀란 건 푸코였다.
레벨로 무력 수준을 판별하는 사람은 시스템을 가진 트리거밖에 없다.
이 세상 사람들은 소드 익스퍼트니 마스터니 하는 걸로 검사의 수준을 판별한다.
그런 틀로 보면 타미두스는 익스퍼트 하급 수준이었다.
익스퍼트 하급이니 상급이니 하는 건 내공의 양을 기준으로 분류한다.
내공의 양이 익스퍼트 하급이면 육체의 내구도나 움직임 등도 하급 수준이다.
그 하급 수준으로는 오크 한두 마리를 상대하기도 벅차다.
그런데 타미두스는 오크 수십 여 마리를 혼자 힘으로 학살했다.
그러면서도 몸엔 작은 찰과상 하나도 입지 않았다.
익스퍼트 하급 수준의 내공. 신체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타미두스는 실제로 그런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타미두스는 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할 정도로 불가사의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푸코는 트리거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타미두스의 전투능력도 불가사의한 면이 있어서.
둘이 제대로 싸우면 누가 이길지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승부는 푸코가 아연할 정도로 일방적인 트리거의 승리였다.
트리거는 이제 겨우 16레벨이다.
마왕 강림까지는 아직 20여 년이나 남았다.
16레벨에 이 정도면 마왕 강림까지는 과거보다 더 높은 레벨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마왕과 싸울 때 과거보다 승산이 더 높지 않을까?
그러자 트리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는 산술적인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올라. 올라가면 갈수록 레벨업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힘들어 진단 말이야.”
1레벨 때는 비슷한 레벨의 몬스터를 한두 마리만 잡아도 바로 레벨업이 가능했다.
그런데 10레벨 때는 비슷한 수준의 몬스터를 서너 마리는 잡아야 레벨업을 했다.
15레벨 때는 20레벨의 라이코니스를 잡아서 겨우 1레벨을 올렸다.
“20레벨에선 동 레벨의 인간이나 몬스터를 적어도 다섯 개체는 잡아야 레벨이 올라.”
20레벨은 소드 마스터다.
그 수준에서 레벨을 올리려면 마스터 수준의 고수를 적어도 다섯 명은 잡아야 한다.
그렇게 많은 소드 마스터를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부터가 일.
거기에 동 레벨이니 자신도 패하는 경우를 각오해야 한다.
고수간의 싸움에서 진다는 건 죽음과 거의 동일한 의미이다.
고 레벨에선 레벨업의 과정이 러시안룰렛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그렇게 레벨업의 난이도가 올라가다보니 20레벨에서 21로 올라가는 데에는 무려 1년이나 걸렸어. 21레벨에서 22레벨은 2년. 그 과정에서 죽을 고비도 숱하게 넘겼지.”
시스템은 사기적인 능력이다.
무술을 익히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정 경지에 이르려면 그 노력도 보통의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다.
거기에 금강대력수나 양의신공은 불가와 도가의 무술.
이 세계는 불가와 도가가 없으니 무술의 개념조차 잡기 어렵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이 세계의 사람은 입문조차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런 무술을 단지 클릭만으로 익힌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스템의 능력은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사기적인 능력이다.
그러니 고 레벨일수록 레벨업의 과정이 어렵지만, 이걸로 불만을 가질 수는 없다.
시스템의 도움이 없는 다른 이들은 경지를 올리는 게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어쨌건 그래도 고 레벨에서의 레벨업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위험도도 크다.
그런데 그렇게 능력을 올려도 혼자서는 마왕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가 동료들의 능력향상에 목을 매는 것이었다.
“해서 기대를 한 게 타미두스의 전투능력이었어. 시스템을 기준으로 말하면 1레벨과 10레벨의 격차보다 10레벨과 11레벨 간의 격차가 더 커. 그런데 미래에서는 타미두스가 15레벨, 내가 20레벨일 때 나와 열 번 싸우면 일곱 번을 이겼어. 그것도 팔이 하나 없는 상태에서.”
“…….”
“그런데 지금의 타미두스는 팔까지 멀쩡해. 미래보다 레벨간의 격차도 적고. 그러니 당연히 나를 이겼어야지. 헌데 결과는 전혀 반대야!”
현재 트리거는 16레벨.
타미두스의 능력은 천안으로 보면 15레벨.
타미두스는 이 정도의 레벨 차이는 가볍게 뛰어넘어 트리거를 때려눕혔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다.
“왜 결과가 전혀 반대로 나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트리거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타미두스가 지금이라도 부족으로 돌아가서 복수에 성공한다면 어떨까요?”
푸코가 트리거에게 물었다.
타미두스는 지금도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하면 타미두스는 흔쾌히 돌아가서 복수를 하려고 할 것이다.
그 복수에 성공한다면 이전처럼 강해지지 않을까?
트리거는 고민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트리거가 그걸 만류한 이유는 타미두스가 과거의 후회를 반복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목적을 위해서 그 후회를 반복시키는 게 옳은 일일까?
트리거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타미두스를 바라보았다.
타미두스는 그들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너무도 흥미로워서 패배의 아픔조차 잊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런 상태로 돌아가서 이전처럼 싸움에 전념할 수 있을까?
그러면 각성을 해서 이전 같은 실력을 갖출까?
“맞아. 이거였어!”
이것저것 생각하다 트리거는 탄성을 토했다.
그 생각의 뿌리를 파고 들어가 보니 타미두스가 현재 약한 이유를 알아냈다.
“실텐은 타미두스와 라이벌이야. 그럼 실력도 비슷하겠지. 타미두스는 부족의 전사들을 상대해 지친 몸으로 비슷한 실력의 실텐까지 이겼어. 그것도 한쪽 팔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
“그건 복수의 광기가 그녀에게 초월적인 감각을 만들어줬기 때문이야. 그게 승리의 요인이지. 지금은 실텐과 싸우기 전. 각성전이야. 지금도 야만부족 특유의 감각은 있지만 그 수준이 예전보다 못해.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야.”
타미두스는 실전에선 어지간한 레벨 차이도 무시할 정도로 강했다.
그건 타미두스가 야만부족에게서 전수받은 감각 때문이었다.
타미두스는 지투스에게 그 감각을 전수했다,
하지만 그 감각을 전수받은 지투스는 타미두스와 열 번을 싸워 일곱 번을 졌다.
그건 그의 감각이 타미두스에 비하면 그 수준이 낮다는 뜻이다.
지투스에게서 전수받은 트리거의 감각도 마찬가지.
그런데 트리거는 그런 감각으로 트리거보다 고 레벨의 몬스터와 인간들을 잘도 죽여 왔다.
그만큼 감각이란 전투에 최적화 된 기법이다.
그러니 타미두스의 감각이 지투스에게 전수할 때의 수준이라면, 트리거가 타미두스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타미두스의 감각은 그 수준이 매우 낮다.
실텐과 싸우며 복수심의 광기를 폭발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이라도 그녀를 부족으로 돌려보내면 되겠네요.”
푸코가 다시 말했다.
“늦었어. 지금 부족으로 돌아가면 복수는커녕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야.”
트리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를 위해서 그게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는 둘째 문제.
지투스의 시간선에서 실텐은 타미두스의 면전에 대고 너를 팔아버린 게 나라고 직접 그 사실을 이야기했었다.
그게 타미누스의 이성을 상실케 해서 결과적으로 감각을 초인의 상태로 끌어올린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 다리 건너 트리거가 이미 그 내막을 이야기해버렸다.
물론 타미두스는 그 이야기를 듣고 상당한 감정적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실텐이 면전에서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충격의 강도가 덜할 것이다.
거기에 타미두스가 부족까지 돌아가는 데에는 몇 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시간을 소모하면 감정적 충격은 더욱 희석될 터였다.
즉, 타미두스가 지금 부족으로 돌아가 복수를 한다고 해도.
예전처럼 광기에 빠져 감각이 진화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흥! 미친놈이 미친 말을 잘도 하는군.”
이를 듣고 있던 타미두스는 짜증 어린 어조로 말을 내뱉었다.
* * *
이후로도 몬스터는 계속 습격해왔다.
이에 타미두스는 시위라도 하듯 그 몬스터들 무리로 뛰어들어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몸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트리거의 말을 듣고 생긴 잡념이 그녀의 능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트리거는 그런 타미두스를 걱정과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표정이 타미두스의 짜증과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그녀의 실전능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악순환이었다.
* * *
“네가 예전의 실력을 되찾을 방법이 있긴 있어.”
그러던 어느 날, 트리거가 타미두스에게 말했다.
“뭔데?”
타미두스가 반문했다.
이전에 타미두스는 트리거의 말이라면 듣는 척도 안했다.
하지만 몬스터와 싸우며 몸에 상처가 늘어나자 이야기가 전혀 달라졌다.
“과거 마왕군 중에는 블러드 엑스라는 별명을 가진 고블린이 있었어. 얼마나 강한지 인류군 소드 마스터 수십 명이 그 고블린의 도끼에 찍혀서 죽어나갔지. 하지만 인류군은 고블린을 함정으로 유인해 결국 죽였어. 그 과정에서 소드 마스터가 세 명이나 죽었지. 그런데 그 고블린이 죽은 후에, 그 고블린이 살아 있을 때보다 더 큰 말썽거리가 발생했어.”
“…….”
“고블린이 가지고 있던 도끼를 손에 쥔 아군이 주변에 있던 인간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거야. 아군이 힘을 합쳐서 그 미친 동료를 제압하면, 멋도 모르고 그 도끼를 잡은 다른 아군이 그런 미친 짓을 또다시 반복했지. 몇 번이나 그런 과정을 반복한 뒤에야 그 도끼가 원인이라는 것을 알아챘지.”
나중에야 마법사들이 그 도끼를 연구해서 거기에 붙은 저주를 해석해냈다.
사실 그 도끼는 소유자를 광전사로 만드는 저주받은 무기였다.
광전사는 매우 강했다.
그가 강한 이유는 내부의 잠재력을 모두 쏟아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광전사는 일찍 죽었다.
하지만 블러드 엑스는 인류군이 함정으로 유인해 죽이기까지 팔팔하게 살아서 아군을 죽여 댔다.
후에 그 블러드 엑스를 잡고서 광기에 빠진 인간들 역시도 주변에서 손을 쓰기 전까지는 죽지 않았다.
그 블러드 엑스가 가진 다른 기능은 흡혈이었다.
죽인 상대의 피에 잠재된 잠재력을 흡수했다.
그걸로 소모한 본인의 잠재력을 보충하는 것이다.
그래서 블러드 엑스의 소유자들은 그 도끼를 손에서 놓기까지는 죽지 않았다.
19화
마법사들과 신관들은 도끼에 서린 저주를 제거하고 인간이 쓰기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그 도끼는 신전 깊은 곳에 봉인되었다.
“블러드 엑스의 다른 별명이 뭔지 알아?”
“뭔데요?”
푸코가 물었다.
“고블린 타미두스. 타미두스와 싸우는 모습이 워낙 흡사해 그런 별명이 붙었어. 블러드 엑스는 소유주에게 타미두스와 비슷한 감각을 일깨운 거야. 그러니 지금이라도 그 도끼를 찾아 손에 잡으면 각성이 가능할 거야. 하지만 저주받은 도끼라 그 부작용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몰라. 타미두스, 네가 생각이 있다면…….”
“그 도끼를 잡겠어.”
트리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타미두스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 *
“아하, 아하하!”
즈아블은 실성한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사방엔 시체들이 가득했다.
근엄한 얼굴로 명령을 내리던 주군이 죽었다.
그 옆에서 항상 미소를 짓고 있던 주군의 부인도 죽었다.
같이 피땀을 흘리며 검을 수련하고 몬스터 토벌에 나섰던 동료 기사들도 죽었다.
자신에게 먹을 것을 주며 은근히 호감을 내비치던 하녀 메리도 죽었다.
“이건 꿈이야!”
몬스터들의 습격으로 마을이 이 꼴이 났다면 그나마 납득할 만했을 것이다.
불행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몬스터가 마을을 전멸 시키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하니까.
그런데 몬스터가 아니었다.
원숭이였다.
시장에 가면 돌팔이 약장수들이 재주 부리는 걸 보여주던, 네바핀이라 불리는 원숭이.
다 성장한 놈도 머리가 사람 무릎에 간신히 닿을 정도였다.
그래서 애완용으로 길들인 놈은 사람의 머리나 어깨를 타고 다니며 애교를 부렸다.
그런데 그런 원숭이들의 몸이 사람만큼이나 커졌다.
아니, 커진 게 아니라 부풀어 올랐다.
그 부작용으로 신체 곳곳의 털이 빠지고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 놈들 수백 마리가 떼를 지어 성으로 몰려왔다.
군사들이 출동해 황급히 원숭이들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사들은 허무하게도 원숭이들에게 찢겨 죽었다.
그리고 기사들도 마찬가지.
순식간에 성은 원숭이들에게 점령당했다.
쓰러진 기사들의 갑옷은 원숭이들의 손에 차례로 해체되었다.
그리고는 자기 몸에 대고 이리저리 맞춰 보고 있었다.
저걸 보면 영락없이 호기심 많은 원숭이로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원숭이들은 사람을 뜯어먹지 않는다.
그런데 저놈들은 사람을 산채로 뜯어먹었다.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찍 죽었어야 했다.
원숭이들이 그들의 사지를 사방에서 잡아당겨 뜯어내고 있었다.
“아아악!”
죽어가는 사람들의 입에서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듣지 못할 정도로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자들은 장난감처럼 이 원숭이 저 원숭이의 손에 넘겨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여자들의 옷이 찢겨지고 벗겨졌다.
그리고 여자들은 믿을 수 없게도 원숭이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미 숨이 끊어져서 원숭이들이 움직이는 대로 몸이 축 늘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이미 숨이 끊어진 게 오히려 그녀들에게는 행운이었다.
일부 여자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즈아블은 그녀들이 일찍 숨이 끊어지길 바랐다.
원숭이들이 그에게도 다가왔다.
“하, 하하!”
그는 실성한 웃음을 흘리며 자기 목을 칼로 찔렀다.
그렇게 숨이 끊어지면서도 어떻게 원숭이가 이럴 수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 * *
대지교의 본산.
교황 아우레스 3세는 고목나무처럼 마른 얼굴로 침대에 누워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그리고 사제들의 안내를 받으며 성기사가 들어왔다.
“성하를 뵙습니다.”
성기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아우레스에게 예를 표했다.
“이름이 비데르라고?”
“예, 성하.”
“성기사 중에 네 믿음이 가장 건실하다고 들었다.”
“과찬이옵나이다, 성하.”
“네게 내릴 사명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따르겠나이다, 성하.”
아우레스 3세는 그런 비데르를 보고 나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하늘과 땅, 바다와 섬, 모든 별이 스러지는 꿈을 꾸었다. 여신께 그 의미를 물으니 오직 침묵이었다. 내 귀가 어두워 여신의 말을 못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뒤늦게 그 의미를 깨닫고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였다. 여신의 침묵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니.”
내내 무표정했던 비데르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목석같은 사내에게도 이 말은 상당한 심적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말을 이었다.
“그동안 금식으로 몸과 마음을 정결케 하고 신께 계시를 갈구했다. 그러다 얼마 전에 동쪽에서 푸른 불꽃을 몸에 거둔 사제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깊이 궁구해보니 아무래도 본교에 성자가 나타나신 것 같구나.”
“……!”
“사람들을 풀어 은밀히 꿈에 나타난 장소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성자께서는 다른 이들과 함께 여행 중이시다. 네 사명을 알겠느냐?”
“그분을 모셔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중하게. 본교의 안위뿐만 아니라 세상의 미래가 달린 일이다. 목숨을 걸고 사명을 수행하라.”
“삼가 그 명을 받들겠습니다, 성하.”
비데르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 * *
화창한 여름날.
트리거 일행은 여름을 만끽하며 걷고 있었다.
길가에는 꽃들이 만개했다.
새들은 나무 위에서 지저귀고 있었다.
매미소리는 쉴 새 없이 여름의 도래를 알렸다.
일행은 오랜만에 평온하게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하얀 갑옷을 걸친 성기사 한 명이 나타나 그들의 앞을 막았다.
비데르였다.
비데르는 성큼성큼 모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삼가 성스러운 분을 뵙습니다.”
평온했던 모르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빛이 어렸다.
그녀는 시골의 작은 신전에서 평생 빗자루질만 해왔다,
이런 정중한 대우는 생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성자님의 탄생은 여신께서 이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는 표상. 마땅히 신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본산까지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이봐, 성기사.”
그때 트리거가 비데르의 말을 끊었다.
“모르님의 얼굴을 봐봐. 사제님은 너를 따라가길 원치 않아.”
비데르는 그 말을 듣고 모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르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따라가길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시였다.
그 얼굴을 확인하고 비데르는 말을 이었다.
“여행길이 험할까봐 그러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길이 되게 조치하겠습니다.”
비데르는 대화를 하는 내내 다른 일행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행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트리거는 뒷머리만 긁을 뿐,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모르는 대지교의 사제다.
대지교의 사제를 대지교의 성기사가 찾아와 모시겠다고 하는데 나서는 건 이상하다.
나서는 게 맞는 일일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타미두스는 그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야!”
비데르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모르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타미두스는 그런 비데르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 충격으로 비데르는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네 놈은 눈도 없냐? 저 여자가 싫어하잖아!”
비데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타미두스를 노려보았다.
타미두스를 노려보는 비데르의 얼굴은 분노로 물들어 있었다.
“감히 성자님을 저 여자라고 칭하였느냐?”
비데르는 타미두스가 자신의 뒤통수를 때린 것은 신경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타미두스가 성녀를 여자라고 칭한 것엔 화가 났다.
“그럼 남자라고 불러주랴?”
타미두스가 비아냥거렸다.
“너, 죽인다!”
비데르는 허리에 찬 철퇴를 꺼냈다.
“어이구, 무서워라!”
타미두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 순간 비데르가 타미두스에게 돌진하며 철퇴를 휘둘렀다.
그 위력이 얼마나 강한지 위잉! 하고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타미두스는 그걸 가볍게 피한 다음, 한 손으로 철퇴를 든 비데르의 손목을 후려쳤다.
다른 손으로는 비데르의 뺨을 때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비데르의 머리가 완전히 옆으로 돌아갔다.
트리거가 타미두스와 싸웠을 때 보인, 도끼를 흘린 수법의 응용이었다.
그녀가 실전의 천재라는 게 여기서 증명된다.
타미두스는 정면대결을 선호했다.
그런 식으로 무기를 흘리는 수법은 따로 연구한 적도 없었다.
그저 트리거가 그 수법을 쓴 것을 보기만 했는데,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튀어 나온 것이다.
비데르의 반응도 놀라왔다.
강건한 타미두스도 트리거에게 이런 식으로 얼굴을 맞았을 때 쓰러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뇌가 흔들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비데르는 그러지 않았다.
목이 완전히 돌아갔는데도 자세는 변함이 없었다.
거기에 상대에게 뺨을 맞았는데도 분노하거나 흥분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옆으로 비켜간 철퇴가 또다시 중심을 잡고 타미두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리고 돌아갔던 목도 곧바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타미두스는 발로 그런 비데르의 복부를 후려쳤다.
그로 인해 비데르는 뒤로 물러났다.
그 여파로 성기사가 입는 금속갑옷의 배 부분이 안으로 움푹 들어갔다.
코와 입에선 검붉은 색의 피가 쏟아졌다.
이건 내장이 파열되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비데르는 곧바로 균형을 잡았다.
검붉은 피는 선홍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출혈을 멈추었다.
“신의 이름으로!”
비데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타미두스에게 돌진했다.
“널 죽인다!”
“흐흐!”
타미두스는 그런 비데르를 보고 웃었다.
하지만 입은 웃고 있는데 얼굴엔 시퍼런 살기가 감돌았다.
“제대로 놀아보자!”
그녀 또한 도끼를 뽑아들고 비데르에게 돌진했다.
트리거가 다급히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모르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비데르의 철퇴는 모르의 머리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그리고 타미두스의 도끼도 모르의 옆구리에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두 사람은 옆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다시 싸움을 이어가려고 했다.
트리거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르님, 저 성기사를 따라가실 생각이 있습니까?”
“아니. 내겐 사명이 있네.”
“이봐 성기사, 모르님이 싫다고 하신다. 싫다는 분을 어떻게 모실 거냐? 강제로 묶어서 데려갈 거냐?”
그 말에 비데르는 철퇴를 거두었다.
그리고 모르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사명이 끝날 때까지 동행하겠나이다.”
“허!”
어지간한 트리거도 그 말을 듣고는 입을 벌렸다.
비데르는 타미두스에게 뒤통수와 뺨을 얻어맞는 수모를 당했다.
그런데 분노라는 감정이 아예 없는 듯 표정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거기에 타미두스의 완력으로 보면 어디 한 두군데가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데 몸이 멀쩡했다.
거기에 비데르는 모르의 사명이 뭔지도, 동행을 해도 되겠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저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하고 있었다.
지투스의 기억까지 더하면 트리거는 적지 않은 인간을 만났다.
그렇게 만난 인간들 중에는 보통 사람의 상식을 벗어나는 인간도 많았다.
그런데 비데르는 그중에서도 압권이었다.
* * *
“목적지가 어디에요?”
여행을 하는 중에 푸코가 물었다.
“파수르 영지에 있는 숲이다.”
“거기에 그 마병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죠?”
“블러드 엑스가 지낸 곳이 그 숲이다. 놈을 죽인 후 그 숲을 자세히 조사했다. 숲에 신전이 있었지. 혹시나 하고 마병의 조각을 잘라 신전에 들어가니 반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신전이 마병이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았다. 더 조사를 하고 싶었지만 마왕군의 공세가 격렬해 그럴 여유가 없었지.”
“지금 마왕이라고 했느냐?”
내내 뒤를 따르던 비데르가 트리거에게 물었다.
이 세계에서 마왕은 옛날 설화에나 나오는 존재였다.
그런 존재가 현실에 튀어 나왔으면 성기사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비데르는 마왕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난데없이 트리거가 마왕이 활동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니, 비데르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그래, 마왕.”
트리거가 비데르를 보며 짧게 대답했다.
트리거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껏 숨긴 적이 없었다.
오히려 타인이 묻기도 전에 먼저 알아서 말했다.
그런데 타인이 묻기까지 했으니, 이건 말을 하라고 판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트리거는 지투스의 기억에 있던 마왕의 발호, 인류와의 전쟁,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담담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푸코는 하도 들어서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타미두스는 흥미롭다는 기색이었다.
아직 그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안 돼서였다.
비데르의 얼굴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