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수선자에 대해 들어봤느냐?
월나라의 동쪽에는 평안산이라 불리는 산이 하나 있다.
호사가들이 말하기를 소나무로 뒤덮여 사시사철 푸른 이 산을 본 어떤 시인이 지은 시의 구절에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진위는 아무도 모른다.
이 평안산의 정상에는 세워진 지 수백 년이 지난 송검문이라는 문파가 있었다.
외부와의 교류가 매우 적었던 이 무림 문파는 그 세력을 떨칠 때마다 여러 절정 고수들을 앞세워왔기에 수많은 이들이 그 강함의 비결을 궁금해했고, 그 긴 역사만큼이나 많은 소문에 휩싸였다.
마공을 바탕으로 수련하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악의적인 의심부터 문파 어딘가의 비경에서 선약이 자라난다는 전설에 가까운 소문, 고대의 대 남궁세가의 기상을 이어받았다는 설 등등.
그러나 그 많은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있었으니,
송검문은 신선을 모신다는 것이었다.
새벽이슬이 채 마르기도 전의 이른 아침.
이 신비로운 문파를 찾아 평안산을 오르는 두 인물이 있었다.
“삼촌,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짙푸른 무복을 걸친 소년이 숨을 고르며 물었다.
소년은 대략 1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다. 묶지 않은 검은 머리가 눈썹을 가릴 정도로 덮여 있었으며, 새하얀 피부는 소년이 곱게 자라왔음을 보여주었다.
“얼마 안 남았다. 저기 벌써 현판이 보이는구나.”
소년에게 답한 것은 그와 함께 걷고 있던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는 품이 넓은 검은 무복을 입고 있었으며, 큰 체구에 걸맞은 거대한 검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그러게 평소에 체력 단련은 해두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서 가자꾸나.”
중년 남성은 옅게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띠며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소년은 고개를 젓고는 가파른 산길을 힘겹게 오르며 중년의 뒤를 따랐다.
현판은커녕 사람 흔적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데, 삼촌은 뭘 봤단 말인가?
“이런 곳에 케이블카 같은 게 있으면 참 편리할 텐데...”
“음? 뭐라고 했느냐?”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깨너머로 그를 흘깃한 삼촌이 다시 걸어가는 것을 보며 소년, 진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럴 때만큼은 정말로 현대 문물이 그립다고.
진현은 환생자였다.
그는 본래 21세기의 현대문물을 마음껏 누리던 현대인이었지만, 어느 날 이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 있었다.
그는 어떻게 죽은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그가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는 사실만 알았다.
그렇게 사인도 모른 채 난데없는 환생을 겪은 진현이 새롭게 태어난 이곳은 마치 그의 전생의 무협 소설과도 같은 곳이었다.
진현은 그가 무협 세계에 환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잔뜩 기대에 차 있었다.
환생자에게 특별한 재능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는 전생의 기억 덕에 어릴 적부터 학습이 빨라 가문의 어른들도 그와 똑같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뛰어난 아이가 특별한 재능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게다가 그는 무가인 진가의 가주, 절정 경지의 무인인 진묵성의 아들이었기에 그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을 것이라는 기대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진현은 무공에 재능이 없었다. 전무한 수준으로.
내기를 쌓기는커녕 느끼지도 못했다. 처음에는 어려서 그럴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결국 그는 내기를 쌓지 못하는 체질로 결론이 났다.
그렇게 그를 향한 기대와 대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심지어 진현의 어머니는 그를 낳고 난산으로 사망했기에, 진가와 그의 외가인 백가를 통틀어 진현에게 신경 쓴 이는 그의 삼촌인 백우 뿐이었다.
그렇게 한때 진가에서 촉망받던 재목은 14살이 될 때까지 무공 대신 글이나 서예, 다양한 취미 활동 등을 즐기며 평안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이런 삶도 나쁘지 않았다.
전생이 허무하게 끝났으니, 이번 생에는 오래오래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한 평생 보내리라.
불과 이틀 전, 그의 삼촌 백우가 그를 안락한 방에서 끌어내기 전까지는.
진현은 발에 부딪히는 돌멩이를 걷어차고 길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치우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현아! 빨리 나와보거라!”
그때 그는 새로 구매한 그림을 감상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방문을 부술 듯 열어젖히며 삼촌이 쳐들어왔다.
한동안 외부에 나가 있었던 삼촌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진현은 인사할 틈도 없이 그에게 질문을 받았다.
“현아, 수선자에 대해 들어봤느냐?”
물론 그는 그게 뭔지 몰랐다.
그러나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삼촌은 그를 이끌고 곧장 가주를 찾아가 그를 데리고 무사 수행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진현은 아버지 진묵성이 그날 지었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무공을 못 익히는 아이를 데리고 무슨 수행?’이라는 생각이 훤히 드러나는 눈빛으로 그의 아버지는 알아서 하라며 둘을 내보냈다.
진현도 폭풍 같은 상황에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백우를 믿었기에 그의 뜻대로 그 길로 진가를 떠나 평안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틀간의 여정에서 진현은 그의 삼촌이 어째서 그렇게 흥분했는지 알게 되었다.
백우는 어렸을 적 송검문이라는 신비문파에서 수행하다가 이류의 경지에 오른 후 백가로 돌아왔었는데, 최근 절정의 경지를 돌파하고 오랜만에 송검문을 찾았다고 한다.
그는 추억을 되살리고 동문을 찾을 겸 방문한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는 높은 경지를 인정받아 송검문의 장로직을 제안받았다.
백우는 백가를 떠날 마음도 없었고 조카를 돌봐야 한다며 거절했지만, 송검문의 장문인에게서 엄청난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바로 송검문이 신선을 모신다는 소문이 진실이며, 송검문의 장로들은 10년마다 신선들이 수행하는 곳에 자신의 친지 한 명을 보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백우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장로직을 수락했다.
그리고 신선들, 자신들을 수선자라 부르는 이들이 찾아오는 날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는 말에 하루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진현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그 얘기를 하며 너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면서 환하게 웃던 삼촌의 모습에 진현은 따스함을 느꼈다.
환생 이후로 이렇게 그를 위해준 사람은 삼촌뿐이었다.
사실상 유일한 가족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동과 별개로 진현은 삼촌의 이야기를 전부 믿지는 못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원체 과장이 심해서 믿을 수가 없어...’
삼촌을 불신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신선, 그러니까 수선자의 얘기를 해준 송검문의 장문인을 믿지 못할 뿐이었다.
이 세상은 분명 무공과 무림인들이 실존하는 무협세계였다.
내기를 쌓아 일류고수 정도가 되면 신체 능력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그의 삼촌이나 아버지 같은 절정 고수 정도면 장풍으로 집을 무너뜨리고 검기를 날려 바위를 부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수선자’의 능력은 삼촌이 들은 바에 의하면 불로장생은 기본이고, 바다를 끓이고 산을 가른다고 했다.
체면과 허풍이 무공보다 더욱 뛰어난 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을 생각해 보았을 때, 수선자라는 존재들은 일반 무림인보다 뛰어난 무공을 지닌 소수정예의 단체이거나 특별한 비술을 익힌 정도의 자들일 확률이 높았다.
전생의 역사만 봐도 신선을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물론 이곳에는 무공이 실존하는 만큼 어느 정도 능력은 있겠지만, 바다를 끓인다는 둥의 얘기는 믿기 어려웠다.
그래도 절정의 경지에 오른 무인들이 신선이라고 떠받드는 만큼 무공을 익히지 못하는 자신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지 않을까?
미약한 기대와 함께 진현은 이마에 구슬지는 땀을 닦고 삼촌을 쫓았다.
***
백우가 ‘현판이 보인다’고 말한 지 세 시간 뒤.
“헉... 헉... 삼촌,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돼요?”
진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주저 앉았다.
대체 이 망할 문파는 얼마나 높은 곳에 있는 것인가. 또 한참 전부터 보인다던 그 현판은 저 혼자 더 높은 곳으로 등산이라도 간 건가?
백우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젠 정말로 얼마 안 남았다. 이 정도면 내가 너를 업고 가면 되겠구나.”
“네?”
근처의 바위에 기대 늘어져 있던 진현을 주워 든 백우는 그를 어깨에 포대처럼 걸치고 땅을 차며 질주했다.
“삼촌, 웁! 너무 빨... 웁!”
내기로 강화한 각력과 무림인들 특유의 신법이 더해져 진현은 정말 오랜만에 롤러코스터의 추억을 회상할 수 있었다.
다만 롤러코스터와 달리 중년 남성의 등에 업혀 주변 환경이 휙휙 바뀌는 것을 보는 것에 재미라고는 없었다.
“도착했다!”
다행히도 회상은 짧았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거리를 달린 백우는 어지러워하며 비틀거리는 진현을 내려놓았다.
빙빙 도는 머리를 붙들고 시야를 안정시킨 후 진현은 그제야 목적지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송검문의 입구였다.
거대한 아치형의 바위가 그 장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높이만 해도 수십 미터에 가까워 보였다.
바위는 인위적으로 깎은 것이 아니라 자연 풍화되어 그런 형태를 지니게 된 것인지 표면이 불규칙적이고 거칠었다.
그러나 그 투박한 형태는 바위의 꼭대기에 새겨진 송검문(松劍門)이라는 글씨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 글씨 아래, 아치형 바위의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진현의 눈이 반짝였다.
벽돌로 포장된 거대한 광장 뒤, 군청색의 기와로 장식된 6층짜리 건물이 산봉우리처럼 솟아있었다.
송검문의 본전으로 보이는, 진현이 이번 생에서 본 가장 거대한 그 건물의 양옆으로 좀 더 낮은 3층의 건물들이 각각 한 채씩 나란히 세워져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건물들이 가까운 곳부터 진현의 시야가 닿지 않는 먼 곳까지, 평안산의 높은 봉우리들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넓고 장엄한 광경이 높은 산에 깔린 옅은 안개와 더해지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신비감을 풍겼다.
“어떠냐? 이곳이 바로 이 삼촌의 송검문이다. 대단하지 않으냐?”
평소라면 최근에야 문파로 돌아왔으면서 언제부터 본인의 송검문이 된 것이냐며 비꼬았겠지만, 송검문의 장엄함에 압도된 진현은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우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었다.
“자, 이제 장문을 만나러...”
“삼촌?”
말을 하다말고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백우의 모습에 진현은 머리에 얹힌 그의 손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대답은 없었다.
갑자기 말하다 말고 어딜 보시는 거지?
진현은 삼촌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아.”
광대한 푸른 하늘 저편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날아오고 있는 거대한 배를.
2화
시험
평안산의 경사를 따라 사방을 뒤덮은 운무와 푸른 소나무의 바다에서 우후죽순 솟아있는 송검문의 건물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그 모든 것을 배경 삼아 허공에서 날고 있는 거대한 배.
그것은 목조선의 외형을 하고 있었으나 돛대는 없었다.
크기는 진현이 전생에서 보았던 유람선보다 조금 작은 정도였으며, 적갈색 몸체 위로 푸른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크기에 맞지 않는 부드럽고 빠른 움직임으로 배는 송검문의 광장 위까지 날아오더니 허공에서 정지했다.
“삼촌, 저게 혹시?”
“그래, 아무래도 저 배가 신선들의 이동 수단인가 보구나.”
진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전까지 자신이 수선자(修仙者)들에 대해 세운 추측들이 전부 무너졌다.
“우리도 빨리 가보자꾸나.”
거의 전속력으로 달리는 백우를 뒤따라 진현도 남은 체력을 쥐어짜며 달렸다.
바위를 지나칠 무렵 진현은 문지기 역할로 보이는 두 명의 무인을 발견했다.
그들은 앞서간 백우에게 언질을 받은 것인지 진현에게 짧은 시선만을 던지고 하늘의 배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진현이 광장 앞까지 도착할 무렵 그곳에는 이미 커다란 인파가 몰려 있었다.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부터 중년에 이른 무인들까지, 송검문의 복식으로 보이는 청록색 무복을 입은 수많은 이들이 웅성거렸다.
나이가 좀 있는 이들은 어느 정도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어린 무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상선(上仙)들을 뵙습니다!”
사방을 울리는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송검문의 의사대전으로 보이는 6층의 거대한 건물, 그 꼭대기 층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무림 고수라고 하면 떠올릴, 흰머리에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수수한 백포를 걸친 그는 창가에 마련된 넓은 공간에서 정중한 태도로 배를 향해 읍하고 있었다.
“저분이 장문인이시다.”
어느새 진현의 곁으로 다가온 백우가 속삭였다.
“저분이 장문인이세요? 저분도 절정의 경지인가요?”
“아니. 장문께서는 80세에 절정 다음의 경지로 뛰어넘었다고 한다. 나도 아직 그것이 어떠한 경지인지는 가르침을 받지 못했지만, 다른 무인들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하더구나.”
“그 경지도 삼촌이 송검문에 돌아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인가요?”
“그래. 뭐,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집안에서 뒹굴던 조카를 데리고 나올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지.”
솥뚜껑 같은 손으로 머리를 헝클이는 손길을 피하며 진현이 뭐라 더 질문하려던 찰나, 배 위에서 두 인영이 솟아올랐다.
각각 20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허여멀건 얼굴의 잘생긴 청년과 30대 중반에 접어든 것으로 보이는 순박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진현의 예상과는 다르게 두 수선자들은 딱히 특별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청년은 서생이 입고 다닐 법한 순백의 차림에 푸른 검집을 하나 차고 있었고, 여성은 약간의 천 장식이 가미되었을 뿐인 자색 무복을 입고 있었다.
유일하게 눈여겨볼 만한 점이라고는, 그들의 옷소매 부분에 독특한 형태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는 것이었다.
둘은 배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후, 허공을 가로질러 장문인의 앞에 내려앉았다.
무림의 전설로 불리는 허공답보와는 비교도 안 되는, 진짜 말 그대로의 비행에 진현을 포함한 모두의 표정에 경악의 빛이 드리웠다.
자신들보다 수십 살은 많아 보이는 장문인의 인사를 받으며 두 수선자들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장문인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광장에 모인 이들에게 외쳤다.
“송검문의 제자들은 오늘 하루 간 숙소에서 대기하거라! 밖을 돌아다니다 발각되는 제자는 문규에 따라 엄히 벌할 것이다! 그리고 장로들은 한 시진 이내로 모두 천송전에 집결하시오!”
평안산 정상을 울리는 명령만을 남긴 채 장문인은 수선자들의 뒤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수많은 어린 제자들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얘기를 나누었다.
“방금 봤어? 진짜로 하늘을 날았어!”
“바보야, 사람보다 저렇게 큰 배가 날고 있는 게 더 대단한 거야!”
그들을 인솔하던 나이 많은 제자들과 몇몇 장로들마저 그 분위기에 휩싸여 상기된 표정으로 저마다 감상을 내놓다 보니, 넓은 광장은 인파가 흩어지는 와중에도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그 혼잡한 분위기 속.
여전히 수선자들이 사라진 곳을 빤히 바라보던 진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수선자... 바다를 끓이고, 산을 가르고... 불로장생...’
****
거대한 배가 송검문에 도착하고 벌써 수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어두워져 가는 하늘 아래, 진현은 백우의 뒤를 따라 어느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빽빽한 소나무 사이로 난 이 어두컴컴한 길에 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백우와 같은 송검문의 장로들이 각자 어린아이 하나씩을 곁에 데리고 그들의 앞과 뒤에서 걷고 있었으며, 그 행렬의 끝에서 150명에 달하는 송검문 제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진현이 얼핏 살펴보니 그들은 대부분 10살 남짓한 어린아이들이었으며, 그와 비슷한 나이대는 몇 명 없었다.
“너무 긴장하지 말거라 현아. 내가 직접 만나보니 신선분들도 그렇게 무섭지는 않더구나.”
두리번거리는 진현의 모습을 긴장한 탓으로 본 백우가 조카의 어깨를 잡고 안심시켰다.
긴장했다기보다 기대에 차 있을 뿐이었지만,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진현은 오는 길에 삼촌에게 들었던 설명을 떠올렸다.
이번 송검문에서 신선들이 사는 곳, 송검문의 무인들이 선경(仙境)이라 부르는 곳으로 갈 이들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무슨 시험인지는 삼촌도 듣지 못했다.
그는 단지 일반 제자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아예 갈 수 없으며 장로의 친지들은 통과하지 않더라도 선경으로 갈 수는 있지만, 대우가 다를 것이라고만 알았다.
진현은 시험이 있다는 말에 낙담하다 통과하지 못해도 어쨌든 자신은 선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에 다시 안색을 되찾았다.
한번 선경에 간다면 오랜 시간 동안 떠날 수 없다는 말도 들었지만, 그것은 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세상은 무림인들도 문파에 입문하면 10년이 훌쩍 지나서야 고향으로 돌아오거나 하는 경우가 잦다.
게다가 자신에게 애착이 있는 가족이라고는 삼촌뿐이니 10년, 혹은 더 길게 떠나더라도 가족을 남기고 가는 다른 이들보다 마음이 가벼웠다.
“흠, 그러고 보니 두 분의 신선 중 그 자의를 입은 부인은 우리 송검문의 대선배 중 한 분이라고 하시더구나.”
백우는 진현의 의젓한 모습에 흐뭇해하면서도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건지 흥미로운 주제를 꺼내 들었다.
“대선배시라고요? 항렬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진현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대선배라는 것은 삼촌보다 몇 항렬이나 높다는 뜻일 텐데, 그렇다면 그 부인의 진짜 나이는 얼마라는 말인가.
“방금 천송전에서 장로들이 전부 모여 신선들께 인사를 드렸는데, 그 부인께서 장문인께 사질이라고 부르시더구나. 모르긴 몰라도 100세는 넘기셨을 테지.”
최소 100세?
진현은 깜짝 놀랐다.
30대의 젊은 부인의 외모에서 그런 나이를 연상하기는 힘들었다.
진현의 뇌리에 ‘불로장생’이라는 말이 다시금 스쳐 지나갔다.
‘불로장생이라...’
달콤한 그 단어가 입안에서 감돌며 잔향을 남겼다.
진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여태까지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욕망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그가 하늘을 나는 배를 본 순간부터 끓고 있었으며, 하늘을 나는 인간을 보았을 때 부풀고 있었다.
그리고 진정한 불로장생의 존재를 접하고 폭발했다.
짧았던 전생에서 기인한 보상 심리일 수도 있고, 그저 세상 모든 사람처럼 장생에 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현은 이 순간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그 신선들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다.
환생이라는 기적을 경험한 소년은, 다시 기적을 원했다.
그는 자신이 그 신선들처럼 진정 장생을 이룰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평안한 ‘한평생’으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현이 속으로 의지를 태우는 동안, 일행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넓은 공터였다.
다만 나무나 풀을 벤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며, 마치 모든 식물이 자발적으로 그곳에서 자라는 것을 피한 듯 깔끔한 장소였다.
공터의 중심에는 배에서 내렸던 두 명의 수선자들이 송검문의 장문을 옆에 대동한 채 서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 뒤에는 작은 비석이 있었는데, 멋보다는 상징적인 의미의 비석인지 크기도 작았고 형태도 투박했다.
다만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묘한 기운이 비석을 감싸며 옅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현은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주변의 그 누구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자신만 비석의 기운을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서생 차림의 청년 수선자가 감고 있던 눈을 옅게 뜨며 진현을 힐끔 바라보았다.
진현은 뭔가 실수라도 한 것인가 싶어 고개를 푹 숙였지만, 청년은 짧은 시선만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뭐지? 설마 내가 비석의 기운을 본 걸 안 건가? 이게 혹시 시험의 일부인가?’
혹시나 자신이 시험을 통과한 것인가 싶어 입꼬리를 움찔거리던 진현은 청년이 그 이상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자, 다들 온 것 같구나!”
장문인의 곁에 있던 자의 부인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포근한 미소로 제자들을 눈에 담으며 작게 손뼉을 쳤다.
“송검문에 이렇게 훌륭한 재목들이 많은 걸 보니 기쁘구나. 너희가 이번에 선연을 얻지 못하더라도 송검문의 이름을 빛내기를 바란단다.”
그녀는 이어서 청년에게 손짓했다.
청년이 감흥 없는 표정으로 손바닥을 펼쳐 한번 뒤집자, 그의 손 위에 쟁반만 한 물건이 나타났다.
허공에서 물건을 꺼내는 듯한 그 모습에 모두가 술렁였다.
그들의 반응을 아랑곳하지 않은 청년은 그것을 들고 앞으로 조금 걸어 나왔다.
모여 있던 사람들 중 선두에 가까웠던 진현은 그 물건의 생김새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나무 재질과 비슷한 무언가로 만든 원형 판이었다.
옻칠을 한 것인지 광택이 나는 검은색을 띠고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어지러운 문양들이 판의 위에 새겨져 있었다.
판의 중간에는 주먹 크기 정도의 투명한 구슬이 박혀 있어 시선을 끌었다.
“자, 이제 한 명씩 앞으로 나와 시험을 받도록 하겠다. 어려운 과정은 전혀 없단다. 다만 이것은 너희가 수선자가 될 자질이 있는지를 보는 시험이며, 앞으로 너희의 미래를 판가름할 중요한 순간이란다.”
부인은 자상한 할머니처럼 포근한 목소리로 엄청난 사실을 알렸다.
진현은 그제야 대우가 다를 것이라는 말의 뜻을 깨달았다.
단순히 선경으로 데려간다고 하여 수선자들이 모두 제자로 받아주는 것이 아니다.
아마 자질이 없는 이들은 선경에서 어느 정도 혜택은 받을 수 있을지라도 진정한 신선이 되지는 못하리라.
진현의 목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오면서 쌓였던 욕망과 기대만큼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린 제자들도 대충 상황을 파악했는지 침 넘기는 소리가 저녁의 정적을 깨뜨렸다.
오직 다른 장로들과 이들이 데려온 아이들만이 어느 정도 이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비교적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백우는 물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 상태였다.
그렇게 모두가 얼어 있던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부터 하자.”
진현이 고개를 들어보니 판을 들고 있던 청년이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 저 말씀이신가요?”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진현은 감히 말을 더 붙이지 못하고 걸어 나섰다.
그의 뒤에서 백우가 이를 악다물고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진현은 빠른 걸음걸이로 청년에게 다가갔다.
“손을 얹어라.”
진현은 청년의 말을 듣고 판을 살폈다.
판 자체에는 손을 둘 공간이 딱히 없어 보였고, 아무래도 구슬에 손을 올려야 하는 것 같았다.
진현이 구슬에 손을 올리자 청년이 곧바로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진현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 손을 통해 강렬한 기운이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진현은 정신을 잃었다.
***
“으윽...”
몰려오는 두통에 진현은 신음을 뱉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진현은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압박하며 고개를 들었다.
자신은 분명 수선자들에게서 시험을 받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가?
진현은 고통을 견뎌내며 주변을 살폈고, 깜짝 놀랐다.
주변은 온통 검은 공간이었다.
방금까지 있던 공터와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그저 칠흑만이 존재했다.
정확히는 칠흑과 안개만이 존재했다.
진현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발로 딛고 있는 바닥에서 허리춤까지 차오른 회색빛 안개를 손으로 휘저었다.
“여긴 대체 어디지? 크윽, 이 안개는 뭐고... 끄으으... 머리가!”
진현은 갑자기 강렬해지는 두통에 머리를 감싸안고 쓰러졌다.
생전 처음 겪는 고통에 진현은 벌레가 되어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것만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 고통 속에서 진현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환생자로서의 감각이 경고한 것일지도 몰랐다.
이 두통을 멈추지 않으면 그는 죽는다.
그는 터진 핏줄로 인해 진홍빛으로 물든 눈을 치켜뜨고 떨리는 손으로 사방을 헤집었다.
‘알 수 있어! 분명, 여기 어딘가에!’
이해보다는 본능의 영역에서 진현은 고통을 멈출 무언가를 찾았다.
그리고 곧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톡.
진현은 곧바로 그것을 손에 쥐었다. 이 순간만큼은 두통도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끄아아아아!”
그러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정체불명의 그것을 손에 쥔 채 진현은 안개 속에서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옅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억울하다. 두 번째 생이 이렇게 끝난다고? 이번에는 오래 살고 싶었는데...’
또륵.
‘그저 평안한 생활을 보내며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는데...’
토독.
“수선자들이라는 존재도 만났고! 불로장생이라는 기회도 코앞이었는데!”
도르륵.
피를 토하는 외침을 마지막으로, 진현의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환생으로 얻은 두 번째 삶마저 절명이라니. 억울하다.
마지막 순간, 진현은 문득 손이 가벼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어라?’
그의 눈앞에 작은 무언가가 굴러왔다.
파앗-
그리고 빛이 일어났다.
3화
비주
“으음...”
어지러운 머리, 축 쳐진 몸.
진현은 짧게 신음을 뱉으며 눈을 떴다.
“현아!”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걱정으로 가득한 삼촌의 얼굴이었다.
진현은 그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공터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현아, 괜찮으냐? 어디 아픈 곳은 없느냐?”
“삼촌, 방금...”
“축하한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진현이 백우에게 질문하던 찰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손에 든 판을 살피던 서생 차림의 수선자가 끼어들었다.
이전보다 좀 더 따듯한 목소리와 함께 그는 두 숙질에게 다가와 판을 기울여 구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래 투명했던 구슬에 세 개의 광점이 떠올라 있었다.
각자 파란색, 초록색, 붉은색을 내뿜는 광점들은 구슬 속에서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화,수,목의 삼영근이다. 다른 아이들이 검사하는 동안 저기 옆으로 가 기다리고 있거라.”
진현은 영근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몰랐지만, 청년의 태도에서 그가 시험을 통과했음을 깨달았다.
진현은 물에 잠긴 듯 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청년은 그런 그의 반응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상선, 제 조카는 방금 왜 쓰러졌던 것입니까? 그것도 시험의 일부였습니까?”
힘겹게 일어나는 진현을 돕던 백우는 조카의 몸을 여기저기 살피며 걱정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의 질문에 청년은 별것 아니라는 투로 답했다.
“영근을 시험하기 위해 영기를 일부 불어넣던 중에 아이의 맥이 놀란 것뿐이다. 간혹 몸이 약한 아이들에게 이런 일이 있으나 큰 문제는 없다.”
그 말에 백우는 안심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진현은 의문을 품었다.
‘방금 내가 겪은 게 맥이 놀라서 그랬던 거라고?’
칠흑의 공간. 안개. 엄청난 고통까지.
진현은 그 모든 것이 단순히 맥이 놀라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영근이라는 것을 시험하는 원판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진현은 그 또한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했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한 검사인데, 그런 고통을 겪게 두는 게 정상일까?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밝혀서는 안 되는 비밀이라는 것을 느꼈다.
진현은 백우의 부축을 받고 청년이 가리킨 곳에 서서 목덜미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천천히 걸어 나오는 아이들을 보았다.
처음 나온 아이는 일반 제자였다.
진현의 경우와 다르게 딱히 지목을 받지는 않았고, 그저 머뭇거리며 스스로 걸어 나왔을 뿐이었다.
8살 정도로 보이는 그 소년은 방금 진현의 모습에서 두려움을 느낀 건지 멈칫거리며 손을 구슬에 얹었다.
청년은 진현에게 했듯 팔을 뻗어 소년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의 긴장에 찬 시선 속에서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꾹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탈락. 돌아가라.”
진현을 대했던 목소리와 전혀 다른 냉담한 목소리가 울리고 소년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들 사이로 돌아갔다.
첫 번째 용감한 도전자 이후로 일반 제자들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와 검사를 받았다. 장로들이 데리고 있던 아이들은 나서지 않았다.
진현은 50명이나 되는 인원이 검사받은 후에도 합격한 이가 하나도 없다는 데 경악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가진 영근이라는 이 자질은 매우 희귀한 것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드디어 합격자가 나왔다.
“화,수,목,토의 사영근이다. 너도 저기 옆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진현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그 소녀는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자신과 삼촌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 소녀를 찬찬히 살피던 진현은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혹시 방금 검사할 때 어떤 느낌이었어?”
자세히 묻는 것을 피하려다 보니 두루뭉술한 질문이 되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기뻐하고 있던 소녀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신선님의 손에서 나온 기운이 몸 안을 도는 것 같았어요. 내기랑 다르게 시원한 감각이었어요.”
왜 진현이 그런 것을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어린 나이의 소녀는 아무런 거짓 없이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진현은 짧게 고맙다고 답하고는 마찬가지로 곁에서 의아해하던 백우에게 자신은 기절해 버려 검사가 어떤 느낌인지 몰라 궁금해 물어보았다고 얼버무렸다.
그 뒤로도 진현은 검사받는 아이들을 면밀히 살피며 이상반응을 일으키는 이들이 없는지 지켜보았다.
150명에 달하는 일반 제자들의 검사가 끝날 때까지 이전의 여자아이를 포함해 총 3명만 합격했으며, 전부 사영근이라는 자질이라고 판별 받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진현과 같은 일을 겪은 이는 없었다.
4명은 매우 적은 수로 보였지만, 청년과 자의 부인의 반응을 보면 4명도 기대 이상인 것 같았다.
“자, 이제 너희 차례란다.”
자의 부인의 부름에 장로들이 자신이 데려온 아이들을 앞으로 보냈다.
10명의 소년 소녀들은 하나같이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그들도 일반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맺었다.
10명 중 단 한 소년만이 삼영근이라고 판정받으며 합격했고, 나머지는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채로 합격자 무리에 어정쩡하게 합류했다.
아무래도 무공의 재능이 높다고 영근이라는 것이 있을 확률이 더 높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진현이 이제 선정이 끝났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때, 자의 부인 곁에서 조용히 기립하던 장문인이 입을 열었다.
“사고(師姑), 이 아이의 자질도 봐 주시지요.”
그는 그 말과 함께 손을 뻗어 훤칠한 키의 청년에게 손짓했다.
그는 일반 제자들 사이에 서 있었는데, 10살 남짓한 아이들과 다르게 성인에 가까운 모습이라 아무도 그가 검사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장로들은 무언가 알고 있었는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잘생긴 미청년, 이라고 짤막하게 묘사할 수 있는 그는 머리에 하얀 건(巾)을 두르고 있었다.
정중한 태도로 앞으로 나선 그는 망설임 없이 청년 수선자에게 다가가 원판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들어 ‘영기를 불어넣는’ 작업을 하기도 전에, 원판이 가볍게 진동했다.
그 반응에 청년 수선자는 눈을 크게 뜨고 수정을 바라보았다.
“수, 토의 이영근...”
결과를 들은 자의 부인도 작게 놀라며 장문인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수염을 가다듬던 장문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제 증손주인 우현이라고 합니다. 우현아, 두 분께 인사드리거라.”
청년은 곧바로 둘에게 절을 올렸다.
“송검문 제자 양우현이 두 분 상선께 인사 올립니다.”
자의 부인은 기뻐하며 양우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지만, 청년은 미간을 좁혔다.
“이미 연기 2층이군. 다른 곳에서 공법을 익혔느냐?”
“아닙니다. 저희 문파에 전해져오던 비전을 익혔을 뿐입니다.”
양우현의 대답에 청년은 공터 중앙의 비석을 곁눈질하고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에게도 진현의 무리가 있는 곳에서 대기하도록 지시했다.
진현은 이 과정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수선자들의 반응으로 보건대 영근이 적을수록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영근이 없으면 자질이 없는 것으로 판단했으니, 영근이 하나만 있는 것이 최고의 자질일 것이다.
장문인의 증손자라는 저 양우현은 이영근이라는 높은 자질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모종의 방법으로 미리 수선자들의 힘을 손에 얻은 모양이었다.
진현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든 말든, 청년은 손에 든 원판을 꺼낼 때와 똑같이 손바닥을 뒤집어 사라지게 하고는 시험의 종료를 선언했다.
“곧바로 떠날 것이니 각자 인사를 해두거라.”
자의 부인은 진현을 비롯한 합격자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 말에 일반제자들은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다가가 작별을 고했고, 장로들이 데려온 아이들은 각자 인사를 나누러 잠시 흩어졌다.
진현은 여전히 자신을 붙들고 있는 삼촌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부축에서 벗어나 자세를 바로잡고 절을 올렸다.
“잘 다녀오거라.”
백우는 그런 진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짤막한 한마디를 남겼다.
진현은 그 순간 다짐했다.
지금 선경으로 떠나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금의환향하며 삼촌에게 감사했다며 인사할 것이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인원이 인사를 마치고 다시 모였다.
이를 본 자의 부인은 자신의 허리춤을 가볍게 두드렸다.
웅-
그러자 그녀의 허리춤에서 작은 물체가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팽창해 거대한 은빛 원반이 되었다.
“자, 올라타려무나.”
원반은 모든 인원을 태우고 공중으로 치솟았다.
진현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추며 높아지는 시야에 감탄했다. 다른 아이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어져가는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빠르게 비행한 원반은 어느덧 송검문 광장 위에 떠 있던 배에 접근했다.
원반은 점점 속도를 늦추더니 배의 갑판 위에 부드럽게 안착했다.
먼저 내리는 두 수선자들을 따라 진현을 비롯한 모두가 원반에서 내려 배에 발을 디뎠다.
은빛 원반은 짧게 진동하더니 다시 축소되어 자의 부인의 허리춤 부근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던 진현은 원반이 그녀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작은 주머니의 입구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인벤토리?’
현대인이라면 익숙할 그 개념을 떠올린 진현은 곧 청년 수선자의 허리춤에도 유사한 주머니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많은 질문과 의문들이 진현을 가득 채웠다.
신선들의 세상은 정말로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두 수선자가 이끄는 일행은 갑판을 가로질러 배의 후미 부근에 있던 자그마한 통로를 통과했다.
배의 내부에 들어서자 진현은 이곳이 생각보다 넓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통로 끝에 원형의 공간이 있었고, 그로부터 사방으로 뻗은 복도를 따라 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아래층도 있는 것인지, 진현의 발밑에서 간혹 작게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앞으로 3일간 비행을 한 후에 도착할 예정이니 각자 방을 안내받아 쉬고 있거라.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종문에 도착하면 다 설명할 것이니 걱정 말거라.”
자의 부인과 청년 수선자는 그 말을 끝으로 빠르게 이동해 사라져 버렸다.
당황하던 일행 앞으로 한 남성이 다가왔다.
“반갑다. 내 이름은 구혹금이라고 한다. 너희 중 일부는 앞으로 나를 사형이라 부르게 되겠지.”
그의 짤막한 인사에 일행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했다.
단순히 장로의 친지라서 선경에 가는 이들은 수선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다시금 체감했다.
그들의 반응은 무시한 채, 구혹금은 말을 이었다.
“두 사숙께서 말씀하신 대로 앞으로 이 비주는 3일간 비행할 예정이다. 지금부터 너희가 머물 방을 배정해 줄 테니 잘 들어라.”
그는 대충 3,4명 정도씩 인원을 나누어 방을 배정해 주었다.
“오전과 오후에는 방 밖으로 나와도 상관없다. 갑판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다. 그리고 밤에는 외출을 금지하니 잊지 말도록.”
구혹금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휘휘 저으며 북쪽 통로로 걸어갔다.
진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저 구혹금이라는 남자는 그들을 대하는 것이 귀찮았던 모양이다.
그는 함께 방을 쓰도록 배정받은 두 명에게 다가갔다.
영근이 있는 ‘합격자’들은 아니었고, 둘 다 장로의 특권으로 오게 된 이들이었다.
두 소년은 이전이라면 무공의 재능이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진현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잘 지내자고 인사를 해왔다.
“그래. 잘 지내보자.”
좋은 말을 해준다고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선경에 도착한 뒤부터는 볼일도 없을 테니까.
진현은 배정된 숫자가 적힌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은 꽤 널찍했으며, 2층짜리 침대 두 개가 방의 양쪽에 비치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바깥이 비치는 창문이 있었다.
두 소년이 자연스럽게 2층 침대 하나를 한 칸씩 차지하는 동안, 진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유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벽면의 나무 일부가 투명하게 변한 것이었다.
진현은 그 투명한 나뭇결을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밖의 풍경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비행의 경험이 적은 이 세상의 사람이라면 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하겠지만, 전생에서 비행기를 탄 경험이 있던 진현은 배가 매우 높은 고도에서 고속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천천히 흘러가는 지상을 감상했다.
언젠가는, 그 혼자만의 힘으로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4화
청유문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3일째 아침. 수선자들의 배 - 그들이 비주(飛舟)라고 부르는 거선이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비주는 하강하며 구름층을 뚫고 내려갔다.
진현은 선실의 창에 붙어 바깥을 관람했다.
옅어져 가는 구름층 아래로 거대한 산맥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이렇게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산맥은 평안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비주가 점점 하강하자 풍경은 크게 변화했다.
멀리서 보았을 땐 분명 나무밖에 없던 산맥에 수많은 건축물이 등장했다.
송검문의 6층 전각에 맞먹는 건물들도 수두룩했으며, 높이나 넓이로 그보다 더 거대한 건축물들도 많았다.
가장 압권은 높은 산봉우리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기둥이었다.
전생의 고층 빌딩에 맞먹는 거대한 기둥의 새하얀 표면에는 청유문(靑柳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진현이 그 놀라운 광경을 감상할 틈도 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비주를 울렸다.
“모두 선실 밖으로 나와 중앙으로 집결해라!”
진현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와 함께 밖을 구경하던 두 소년은 물론이고 다른 선실에서도 아이들이 튀어나와 이동했다.
그렇게 1분도 채 되지 않아 수십 명의 인원이 중앙 공간에 모여들었다.
이들 앞에 선 구혹금은 모두 온 것을 확인하고는 일행을 이끌고 갑판으로 향했다.
갑판에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찡그린 진현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갑판에 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구혹금과 비슷한 지위로 보이는 몇몇 수선자들이 제각각 수십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열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비주는 느릿하게 하강하고 있었고, 이내 완전히 정지했다.
그와 동시에 비주의 내부에서 여정 동안 얼굴을 내비치지 않던 청년과 자의 부인이 날아오르며 등장했다.
‘역시 저 둘이 지위가 더 높은 모양이네.’
진현은 중년이나 노년의 외모를 가진 다른 수선자들과 젊은 외형을 유지하고 있는 두 수선자를 비교하며 생각했다.
청년이 손을 튕기자, 비주의 측면에서 기다란 다리가 뻗어져 나와 지상과 연결되었다.
수선자들의 인도에 따라 아이들은 비주에서 내려 넓은 석조 광장에 발을 디뎠다.
광장에는 이미 세 명의 수선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유 사고(師姑), 광 사숙(師叔).”
그들은 두 수선자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광 사숙이라 불린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지시했다.
“이번 모집에서 데려온 아이들이다. 범인((凡人)들은 너희가 데려가 배정해 두어라.”
그러자 세 수선자 중 한 노인이 옆으로 나와 소리쳤다.
“영근이 없는 이들은 전부 나와 우리를 따라오거라!”
그의 부름에 머뭇거리는 걸음걸이로 절반을 넘는 인원이 광장을 떠나 세 수선자의 뒤를 따랐다.
부러움과 질투가 담긴 눈길이 남은 40명 남짓한 아이들에게 쏟아졌다.
진현은 그들을 보며 참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만 해도 그가 무공 재능이 뛰어난 이들에게 보내던 시선이 이제는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다.
“자, 너희들은 이제부터 입문 과정과 안내를 받은 후에 정식으로 우리 청유문의 제자로 등록될 것이다. 앞으로 너희의 선도(仙道)가 유망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우현아,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유 사고라고 불린 자의 부인은 진현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간단한 설명만을 남기고 이영근을 가진 양우현을 데리고 산맥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재능이 좋다고 벌써 특별 대접을 받는구나.
진현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자신만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자마자 다른 이를 부러워하는 처지라니. 진현은 어쩐지 앞으로 이런 일이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남은 ‘광 사숙’은 다른 수선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구 사질, 네가 아이들을 맡아 기초 물품을 배정하고 기초 상식을 가르쳐 두어라. 맹 사질, 너는 앞으로 한 달간 아이들의 지도를 맡고. 유 사질은...”
몇몇 인물을 콕 집어가며 명한 그는 뒤돌아 기대감에 찬 아이들에게 한 마디만을 남기고 산맥 저편으로 날아갔다.
“청유문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리고 25일이 지났다.
***
청유문에서 하급 제자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곳은 다양하다.
그러나 가장 흔한 형태는 완만한 산에 동굴을 뚫어 만든 동부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모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어느 완만한 돌산에 위치한 한 동부.
이곳은 그리 넓지 않았으며, 사람 한두 명이 생활할 만한 공간의 큰 방 하나에 작은 방이 두 개 딸린 구조였다.
그 큰 방의 중심에서, 진현은 방석을 깔고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는 연한 광택이 감도는 하늘색의 단정한 옷을 입고 있었고, 한 달 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두 눈을 감고 좌선에 집중하던 진현은 곧 긴 호흡을 뱉으며 자세를 풀었다.
“확실히 영기(靈氣)가 부족해.”
재능이 특출나지 않은 하급 제자의 수련은 정말 고되었다.
뛰어난 공법, 충만한 영기, 스승의 지도까지 모든 게 부족했다.
그가 기초공법으로 받은 소오행공(小五行功)은 모든 영근에 맞는 수련법이었지만 속도가 너무나도 느렸다.
진현은 답답함에 구석의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서 물을 들이켜고 거기 놓여 있던 두꺼운 책 한 권을 들었다.
<수선의 정석 - 창포상인(蒼布上人) 저(著)>.
그는 한 달 동안 수백 번은 넘긴 표지를 다시 넘겼다.
청유문이 제자들에게 일괄 지급하는 서책이자 어딘가 익숙한 제목의 이것을 통해 진현은 수선계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 수선자들에 대한 정보였다.
수선자라고 불리는 이들은 천지에 흐르는 영기를 끌어모아 수련해 그 경지를 높여 나가며 최종적으로는 불로장생을 이룩하려는 이들이다.
경지는 총 다섯 단계로 구분되며, 연기(煉氣), 축기(築基), 결단(?丹), 원영(元?), 화신(化神)이 그것이었다.
화신의 이후에는 전설의 선계로 비승한다는 내용도 두루뭉술하게 기술되었지만, 그것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진현은 그런 것보다 이 수선자들의 수명에 집중했다.
수많은 ‘범인’들의 기대와 달리, 수선자라고 누구나 불로장생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낮은 연기기 수선자의 경우 150세 정도가 한계였다.
물론 경지마다 수명이 대폭 늘어나며, 화신기에 이르면 그 수명이 무려 2천 년에 달한다.
처음에 진현은 그 엄청난 수명에 매우 기뻐했으나, 저자가 각 경지에 달아놓은 첨삭을 읽고는 금세 실망했다.
기초인 연기기는 영근, 즉 천지의 영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자질이 있는 이라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의 경지부터는 자질에 의해 크게 갈린다.
이 자질은 개인의 재능은 물론이고 영근의 종류에 가장 크게 영향받는다.
영근에는 오행(五行)이 깃들어 있으며, 이는 천지 영기에서 그 오행에 속하는 영기를 받아들이는 데 뛰어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근이 많을 경우, 다양한 흐름의 영기가 오히려 수련을 늦추게 한다.
한 우물만 파는 것과 여러 우물을 동시에 파는 것 중 물을 먼저 얻는 것은 한 우물만 파는 쪽이다.
심지어 수련은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많은 시간을 요구해 수많은 이들이 경지를 넘지 못하고 긴 수명을 다해 한 줌 먼지가 되어버린다.
진현의 삼영근은 일반적인 수선 자질로 분류 받았고, 보통 축기기에 이를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다.
<수선의 정석>에는 이런 수선자들의 가장 큰 상식 외에도 다양한 기초 지식을 담고 있었다.
수선계에 퍼진 다양한 전설이나 일화, 수선 백예(百譽)라 불리는 수선자들의 기술들, 기초적인 술법들의 설명까지.
게다가 저자인 창포상인은 경지가 매우 높은 인물인지 거의 모든 정보마다 알기 쉬운 해설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 덕에 빠르게 지식을 흡수한 진현은 한 달 만에 어느 정도 수선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과연 문파에서 입문 제자들에게 나눠준 이유가 있었다.
<수선의 정석>을 가볍게 훑고 내려놓은 진현은 허리춤의 주머니를 열었다.
주머니는 바로 진현이 눈여겨보고 있던 그 인벤토리를 연상시킨 물품의 하품으로, 수선자들은 이것을 저물대(儲物袋)라고 불렀다.
이 또한 진현이 <수선의 정석>과 함께 받은 여러 지급 물품 중 하나였다.
저물대는 진현의 기대대로 안쪽에 바깥보다 넓은 공간이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넣을 수 없었지만, 손바닥 크기의 주머니에 장롱 크기의 수납공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매우 편리했다.
다만 그의 것은 고급품이 아니라 안의 공간도 비교적 작은 것이었으며, 영기만 주입하면 열리기에 도둑맞을 우려도 있었다.
“어쨌든 편리하긴 하니까.”
처음 저물대를 얻고 하루 종일 온갖 물건을 넣었다 빼내던 기억을 떠올리며 진현은 저물대를 뒤적이다 무언가를 꺼냈다.
영롱한 빛깔을 내뿜는 반투명한 돌멩이였다.
그것은 영석(靈石)이라고 불리는 수선계의 기초 자원이자 공용 화폐였다.
영석에는 일정량의 영기가 깃들어 있었기에 수련의 보조부터 각종 법술에 활용되는 등 쓸모가 많아 화폐로 널리 통용되었다.
영기 배터리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단약을 사야 할까...”
진현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청유문은 입문 제자들에게 기초 생활비로 영석 5개를 지급했다.
일반적으로 그와 함께 입문한 제자들은 그 영석들을 종문 내의 백보루(百寶樓)라는 곳에서 수련을 돕는 단약(丹藥)을 사는 데 쓰거나, 영기로 사용하는 수선자들의 도구인 법기(法器)를 구매했다.
진현은 여태까지 영석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영석 5개로 살 수 있는 단약이라고 해봤자 연기기에 도움이 되는 것 한 병이 다였으며, 법기라고 해도 간단한 비행법기나 속세의 것보다 더 뛰어난 검 정도였다.
나중에 더 중요한 곳에 영석을 쓸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5개를 다 쓰고 싶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입문한 지 25일이나 되었는데, 진현의 경지는 아직 연기기 2층에 머물고 있었다.
그보다 자질이 떨어지는 사영근을 지닌 동기들도 이미 2층에 도달했고, 삼영근을 가진 동기들은 4층에 도달한 이까지 있었기에 진현은 조바심을 느꼈다.
수련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지금 그의 속도로 연기기의 정상인 12층까지 도달하려면 수십 년이 넘을 것이다.
게다가 삼영근의 자질이 일반적으로 중년의 나이에 축기를 이루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의 재능이 삼영근 중에서도 뒤처진다고 볼 수 있었다.
“앞으로 5일이 지나면 정식으로 종문에서 잡무를 시작해야 해. 영석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얻으려면 경지가 더 높아야 하는데...”
그들을 인솔했던 구혹금의 말에 따르면, 그를 비롯해 함께 청유문에 들어온 제자들은 현재 ‘적응 기간’이라며 그저 수련에만 몰두할 수 있는 특혜를 받고 있었다.
한 달째 되는 날부터 그들은 강제적으로 종문의 잡무에 선발되어 일을 하러 가야 했다.
잡무는 고위 수선자의 보조부터 약초 재배, 땔감 준비 등의 잡다한 일까지 종류가 많았다.
보수로 영석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수는 잡무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당연하게도 고수익의 잡무는 최소한의 경지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현은 영석이 아까웠지만 투자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았다.
결국 그는 결심을 내리고 동부를 나섰다.
이따금 머리 위로 날아다니는 수선자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종문을 가로지른 진현은 얼마 가지 않아 한 누각에 도착했다.
백보루는 종문 내 하급 수선자들의 여러 물품을 공급해 주는 곳이었기에 종문 곳곳에 여러 분점을 내두었다.
진현이 찾은 백보루의 분점은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지, 북적거리는 다른 지점과 다르게 한산했다.
진현은 백보루의 진열대에 걸려 있는 여러 법기와 부적들에서 고통스럽게 눈길을 뗐다.
경지를 높이고 영석을 안정적으로 받게 되기만 한다면 반드시 그도 비행법기를 살 것이다.
가게 안쪽을 살피자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넙데데한 얼굴의 수선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연기 4층의 수선자네.’
그에게서 느껴지는 자신보다 약간 강렬한 기운에 진현은 조심스럽게 헛기침했다.
“흠흠, 선배님...”
같은 연기 초기의 수선자일뿐이라 단순히 사형이라 불러도 되었지만, 예를 차려 나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 짧은 인사를 건네자마자,
팟-
진현은 칠흑의 공간으로 이동된 자신을 발견했다.
“엇.”
5화
칠흑의 공간
어둠.
빛이라고는 한 점 없는 그 공간에서, 진현은 반사적으로 바닥에 웅크려 머리를 감쌌다.
이전에 겪었던 고통의 공포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참을 웅크리고 있어도 예상했던 두통이 찾아오지 않자, 진현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의 영근을 검사받던 순간 도착했던 이상한 공간.
한 가지 다른 점은, 어둠과 안개만이 있던 이 공간에 무언가가 새롭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덩어리였다.
새하얗고, 옅게 빛나며, 기체처럼 불규칙적으로 소용돌이치는 덩어리는 그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에 둥둥 떠 있었다.
“이전의 안개가 뭉친 건가?”
진현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공간은 어디고, 그는 왜 다시 이곳으로 온 것이란 말인가.
머뭇거리던 진현은 결국 기체 덩어리를 향해 걸어갔다.
이곳에 딱히 출구라고 할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고,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그게 다였기에 진현은 우선 그것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에 접근하자마자 진현은 놀라운 현상을 경험했다.
기체 덩어리에서 기묘한 연결감을 느끼며 본능적으로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이게 내 혼(魂)이라고?”
그 기체 덩어리는 바로 진현 자신의 영혼이었다.
그 어떤 논리적인 이해 과정 없이 불가사의한 감각으로 인식한 정보에 진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하긴 이 세상에서 혼을 보는 건 놀랍지도 않은 건가...”
수선자는 원영의 경지에 도달하면 자신의 영혼을 일정 형태로 빚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런 게 당연시되는 이 수선계에서, 자신의 영혼을 관찰하는 것은 놀랍지 않다고 할 수도 있었다.
진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기체를 관찰했다.
이것이 그의 혼이라면, 아마도 이전에 바닥에 깔려 있던 안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단지 그 형태가 변한 것뿐이다.
그렇다면 왜 바뀐 걸까?
진현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자신이 영기를 받아들여 수선자가 된 것이 그 이유다.
수선자들은 영기를 받아들일 때, 무림인들이 내기를 쌓듯이 단전에 저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혼에 직접적으로 영기를 쌓아 ‘혼의 그릇’이라는 것을 늘리고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를 쌓는다.
혼이 안개에서 덩어리로 뭉친 것도 영기가 쌓인 영향일 것이다.
“저건 뭐지?”
자신의 혼을 관찰하던 진현은 그 중심에서 검은색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주먹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돌 조각이었다.
진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특이한 표면을 가진 그것은 눈에 띄는 문양이나 특징은 보이지 않는, 그냥 돌멩이였다.
진현이 그것을 돌 조각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무언가에서 떨어져 나간 파편처럼 한쪽 면이 매끄럽게 가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돌 조각’은 그의 영혼 한가운데서 완벽하게 어우러져 둥둥 떠 있었다.
실제로 진현의 감각에도 그것이 자신의 영혼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이게 설마 그때 내가 잡았던 그 물건인가?”
지난번 이곳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그는 고통을 없애줄 무언가를 쥐었다.
아무래도 그때 그것이 이 돌멩이였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진현은 자신의 영혼에서 눈길을 떼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직접 보는 자신의 영혼과 그 속에 들어있는 돌 조각.
놀라운 동시에 신경 쓰이는 일이긴 했으나 그가 지금 당장 그것에 대해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이 공간에서 딱히 그에게 해로워 보이는 무언가가 보이거나 느껴지지도 않았으니 괜히 건드려 탈을 낼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진현은 그것을 더 살펴보는 대신 이곳을 탐색하며 나갈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진현은 자신의 영혼 곁으로 돌아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짧은 탐색에서 그가 알아낸 것은 두 가지.
첫째는 이 공간이 무한한 칠흑의 무언가가 아닌, 원형의 운동장 크기의 공간이라는 것.
화륵.
진현은 손바닥 위에 사람 머리 크기의 불꽃을 피워냈다.
그리고 그대로 그것을 정면으로 투척했다.
쉬익-
그대로 날아간 불꽃은 뭔가 애매한 소리와 함께 검은 벽면에 부딪혀 사라졌다.
둘째는 그가 이곳에서도 술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방금 그가 사용한 것은 가장 기초적인 공격용 술법인 화탄술(火彈術)로, 이름 그대로 불꽃을 생성해 발사하는 술법이었다.
그가 사용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술법이며, 연기기 수선자라면 누구나 쓸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영력만이 필요한 술법이었지만 어쨌든 술법이었다.
한마디로 이 이상한 공간에서도 영기를 다루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공간 자체에도 영기가 차 있는 것인지 화탄술로 소비한 영력이 천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알아냈다고는 해도 별 쓸모는 없었다.
그의 미약한 영력으로는 이 공간을 뒤흔들 엄청난 술법을 쓰는 것은 무리였으니.
방금 쓴 화탄술을 수백 번 쓴다고 해도 별다른 변화를 일으킬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진현은 결국 길게 한숨을 뱉고, 가만히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지난번처럼 저절로 이 공간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가 완전한 벽곡(壁穀)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수선자라 범인보다는 훨씬 오래 음식과 물 없이 버틸 수 있으니 될 때까지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될지는 몰랐지만, 진현은 시간을 낭비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천천히 소오행공의 구결에 따라 영기를 끌어들여 운용했다.
시원한 기운이 그의 인도에 따라 몸 안으로 흘러들어와 움직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안 그래도 이곳에서도 영기가 통하니 수련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 심산이었다.
***
“흠흠, 선배님...”
막 단잠에 빠져 있던 곽우는 옆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연기 2층? 신입 제자인가? 선배님이라 부른 데서 예의는 합격이지만, 흥, 감히 내 낮잠을 방해하다니.’
곽우는 청유문에 들어온 지 십 년이 지났지만, 재능이 형편없어 여전히 연기 4층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연기 초기의 하급 제자 중 긴 경력을 지녔다고 인정받아 백보루의 점원으로 일할 수 있었지만, 그는 불만이 많았다.
백보루의 점원은 매우 좋은 일자리였으나 수시로 찾아오는 수많은 제자들이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로 훌훌 날아가는 걸 지켜보는 것은 곽우에게 자괴감을 안겨주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자신보다 경지가 낮은 제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면박을 주거나 놀려먹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그들이 성장한 후에 복수를 다짐할 정도로 심하게 하지는 않았지만.
“어흠! 막 입문한 꼬마가 이 곽 어르신을 깨우다니, 적어도 영석 20개는...”
곽우는 과장되게 헛기침하며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 오늘의 놀림감을 마주했다.
그는 10대의 어린 소년이었으며, 잘생긴 외모에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종문에서 입문 제자들에게 지급하는 하늘색 장포(長布)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예상대로 신입인 듯했다.
그런데...
“?”
‘왜 연기 5층이지?’
곽우는 어딘가 멍해 보이는 표정의 소년을 바라보며 굳었다.
방금까지 감지했던 연기 2층의 제자는 어디 가고 연기 5층의 선배가 있는 건가?
연기 4층인 그와 비록 한 계단밖에 차이 나지 않는 경지였지만, 연기 5층부터는 연기 중기로 취급하며 실제 영력 양의 차이가 매우 컸기에 그도 선배라고 불러야 하는 경지였다.
무슨 일인지는 몰랐으나, 수선계에서 10년간 몸을 담은 곽우의 반응은 베테랑다웠다.
“아이고, 사형! 선배님이라니, 말이 과하십니다. 오늘은 뭘 구하러 오셨습니까?”
“...”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서 있는 소년의 모습에 곽우는 잘못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님, 방금은 제가 잠결에 취해 헛소리를...”
“청교단 한 병에 얼마인가요?”
자신의 실수를 지적하지 않는 그의 대답에 곽우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청교단 한 병이라면 영석 다섯 개입니다.”
“생각보다 비싸네요.”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고개를 휘휘 젓고 백보루를 떠나버렸다.
홀로 남겨진 곽우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뭐야?'
***
쿠르릉.
머리에 한 손을 짚은 채 진현은 동부로 들어가 무거운 돌문을 어물술(馭物術)로 움직여 닫았다.
영기를 사용해 물건을 움직이는 염동력과도 같은 술법의 도움으로 무거운 돌문이 부드럽게 입구를 틀어막았다.
그렇게 외부를 차단한 진현은 오는 내내 참았던 감정을 폭발시켰다.
“하하하하하!”
진현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동굴 벽에 기대어 폐가 터지도록 한참을 웃었다.
웃음기에 밀려 나온 눈물을 닦아내고 기침을 몇 번 하고서야 진현은 진정할 수 있었다.
“그래, 나도 명색이 환생자인데 이런 치트키는 있어야지.”
진현은 이전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양의 영기가 몸을 순환하며 혼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 동부에서 나갈 때만 해도 연기 2층이었던 그가, 벌써 연기 5층에 도달해 있었다.
진현은 연기 중기에 이른 그의 영력을 체감하며 방금까지의 일을 떠올렸다.
그가 칠흑의 공간에서 수련을 시작한 순간, 그는 이상을 감지했다.
속도가 너무 빨랐다.
느릿한 개울물 같던 소오행공의 영기 흡수 속도는 폭우를 맞이한 개천으로 변했으며, 그 영기의 순도도 맑기 그지없어 순식간에 그의 영력을 상승시켰다.
결국 진현은 수련을 시작한 지 15일 만에 연기 2층에서 4층으로 올랐으며, 연기 중기로의 문턱을 훌쩍 넘어버려 10일 만에 연기 5층에 도달했다.
말도 안 되는 상승 폭에 진현은 깜짝 놀라며 기뻐했다.
그리고 28일째 되는 날에 그는 칠흑의 공간에서 그가 방출되고 있음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이곳에 평생 갇히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득 걱정이 들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 그는 백보루 앞에서 단약을 구하고 있었다.
한 달 가까이 지났으니 지금쯤 다른 제자들이 백보루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들이나 점원이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나는 그를 보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진현은 이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특수한 능력이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밝혀지면 분명 고위 수선자가 관심을 가질 것이다.
무림인들조차 비급이나 영약을 두고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고위 수선자들에게 자신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리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러나 칠흑의 공간을 떠나는 몸을 막을 수 없던 진현은 마음을 굳게 먹으며 그대로 돌아왔고-
아무런 이상도 감지하지 못했다는 양 자신에게 인사하는 점원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진현은 깨달았다. 자신이 떠난 지 잠시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요동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점원에게 적당히 대답한 뒤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동부로 돌아오는 동안, 진현은 자신과 그 칠흑의 공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계가 생기는 것을 느꼈다.
아직 이 ‘치트키’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가 환생하며 얻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 얻게 된 기연인지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 능력이 일시적인 게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칠흑의 공간에서는 막대한 영기와 특수한 환경으로 인해 그의 수련이 가속된다.
그리고... 그가 그 공간에 들어가 있는 동안 시간은 정지한다.
6화
청화각 (1)
“진 형, 저기가 임무전(任務殿)인 모양입니다. 와, 벌써 사람이 바글바글하네요.”
“그렇네. 맹 사형이 충고하신 대로 일찍 오길 잘했어.”
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야에 들어온 넓은 전당을 바라보았다.
임무전이라고 쓰인 목판이 걸린 기둥 뒤쪽으로 넓은 석조 광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광장에는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백 명은 훌쩍 넘을 듯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그와 비슷하게 하늘색 장포를 입은 신입 제자들로, 저마다 무리를 지어 광장 곳곳에 걸린 나무 게시판이나 돌 비석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저희도 다들 가서 적당한 잡무를 찾아봅시다.”
전부터 진현의 곁에 붙어서 대화를 주도하던 소년이 길을 앞장섰다.
그의 이름은 원휴로, 진현이 살던 월나라의 이웃 나라인 상나라의 4 황자였다.
진현은 그가 황자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놀라긴 했지만, 그들에게 속세의 신분은 더 이상 의미 없었다.
원휴는 비주에서 이동할 때나 각자의 동부에서 수련하던 시기에는 진현과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제자들의 잡무 수행일이 다가오며 주변 인맥을 넓히러 다니던 중 진현이 연기 5층에 도달한 것을 발견한 원휴가 구렁이 담 넘듯 대뜸 그를 형님이라고 부른 것이 그들의 첫 대화였다.
특유의 말솜씨로 여기저기 발을 넓히는 원휴의 모습에 진현은 이 어린 황자와 가깝게 지내는 게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적당히 호형호제를 시작한 둘은 그로부터 5일이 지나 함께 잡무를 받으러 가고 있었다.
앞장서는 원휴와 진현을 따라 다른 몇 명의 동기 제자들이 임무전으로 향했다.
“잡무는 뭐가 있을까? 맹 사형이 늦으면 고된 육체 노동에 가까운 잡무만 남을 거라고 하셨잖아.”
“잡무가 많아도 우리가 원하는 대로 골라잡을 수나 있겠어?”
“그래, 맹 사형이 영석을 많이 버는 잡무는 우리들 경지로는 수행할 수 없다고 하셨잖아.”
수선계에 입문한 지 벌써 한 달이 됐음에도 여전히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제자들은 저마다 재잘재잘 의견을 나누며 떠들었다.
참고로 그들이 말하는 맹 사형은 광 사숙의 지시를 받아 그동안 그들을 관리하던 이였으며, 잡무를 맡으러 가는 그들에게 간단한 충고들을 남겨준 이이기도 했다.
진현은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자신은 무슨 잡무를 맡게 될지 상상했다.
“하하, 진 사형처럼 재능이라도 뛰어나야지, 너희 경지로 건물 보수 같은 일 말고 맡을 수 있는 게 있겠어?”
그러다 그들의 대화 주제가 자신으로 넘어온 것을 들었다.
분명 그들은 동기인데, 큰 경지도 아니고 같은 경지 내에서 한 단계 나아갔다는 것으로 사형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역시 이 세상 사람들의 호칭과 배분은 다른 요소보다 실력에 크게 좌우된다.
“나도 진 사형처럼 경지가 빨리 오르면 좋을텐데...”
“그러게. 나도 삼영근인데 백보루에서 청교단을 두 병이나 사 먹고도 아직 연기 4층이란 말이야. 같은 삼영근이라도 재능의 격차는 크구나...”
“뭐? 넌 또 어떻게 그걸 두 병을 샀어?”
“다른 사형한테서 빌렸지, 뭐. 나도 진 사형처럼 연기 5층에 오를 수만 있었다면 빚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텐데.”
그들의 대화에 진현은 묘한 감정이 들었다.
분명 그는 재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었다.
무림에 있던 시절은 물론이고 선도에 입문한 후로도.
그의 경지가 뛰어오른 것은 오로지 그의 특별한 능력 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건 언제쯤 활성화되려나?’
진현은 바깥으로 별다른 표정을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번 그가 칠흑의 공간에서 수련하고 나온 뒤부터 얻은 그곳과의 연계로, 그는 이 능력이 그리 머지않은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촉발될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확히 얼마 후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도 예측하는 바는 있었다.
‘이전의 경험으로 봤을 때 아마 2...’
“진 형, 저기 제자들이 가장 많이 몰린 곳부터 살펴보죠.”
진현은 사색에서 깼다.
어느새 일행은 광장 앞에 도달해 있었고, 원휴는 광장 한쪽의 석조 기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현은 가볍게 동의하고 기둥으로 향했다.
수십을 넘는 인원이 기둥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기둥에 기록된 잡무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글씨가 기둥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공중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진현은 마치 전생의 홀로그램처럼 기둥을 중심으로 공중에 떠 있는 금빛 글씨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기둥의 꼭대기에는 ‘연단(煉丹)’이라는 글씨가 유일하게 비석에 새겨져 있었고, 그 아래로 잡무들이 빛나며 나열되어 있었다.
각 항목에는 간단한 소개나 요구사항 등이 기록되어 있었고, 아무래도 상세 사항은 임무전 안쪽에서 따로 확인할 수 있는 듯했다.
[청무초 재배 - 청재당에서 청무초 재배를 보조. 연기 2층, 영우술 습득 필수]
[월령초 관리 - 홍유소 사숙의 월령초 밭 관리. 연기 후기의 경지 요구]
[영초 종자 관리 - 청재당...]
[황저목...]
수선백예 중에서도 4대 기예로 꼽히는 연단이라 그런지 등록된 잡무들의 수는 다른 곳보다 월등히 많아 보였다.
청재당이라는 종문의 연단을 담당하는 기관에서 낸 잡무도 많았고, 축기기 수선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내건 일도 많았다.
그러나 단약을 만들기 위한 영초를 관리하거나 재배하는 잡무가 대부분이라 대다수의 제자들은 잡무를 맡을 기본 능력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진현은 연단 항목의 잡무들을 쭉 살펴보고 다른 곳에 기록된 잡무들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종류는 매우 다양했으며, 요구 조건이나 보수도 천차만별이었다.
종문에서 관리하는 영석 광산에 가 일정량을 채굴하는 일, 축기기 사숙의 외부 업무를 보조하는 일, 인근 지역에서 수가 급증한 하급 요수를 처리하는 일 등.
심지어 어느 축기기 사숙이 연구하고 있는 술법의 실험대상이 되는 일까지 있었다.
진현은 대놓고 인체실험을 하겠다는 내용보다도 그 잡무에 이미 5명이나 지원했다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았다.
‘하긴 저 정도의 영석을 준다면 모험을 걸 제자들도 많으려나?’
방금도 자신의 동기 중 하나가 빚을 져 단약을 샀음에도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말했었다.
분명 종문에는 그런 하급 제자들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 쌓이고 쌓이면 빚을 갚기 위해서든, 더 뛰어난 단약을 구매하기 위해서든 위험을 감수하며 영석을 벌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진현도 본래 더딘 수행의 진도에 최대한 영석을 많이 벌 수 있는 잡무를 선택하려 했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능력의 도움으로 수련은 문제없으니, 진현은 그냥 흥미가 가는 일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렇게 한동안 광장을 돌아다니던 진현은 ‘연기(煉器)’라는 글씨가 새겨진 목재 게시판을 발견했다.
단약과 마찬가지로 4대 기예로 불리는 연기는 단순히 말해 법기나 비주처럼 수선자들이 사용하는 여러 물품이나 무기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전부터 수선자들이 쓰는 법기에 관심이 많았던 진현은 이곳의 잡무들을 살펴보다 적당한 것을 하나 발견했다.
[연기 업무 보조 - 청화각에서 하 사숙의 전반적인 업무 보조. 연기 중기 요구.]
보수도 작지 않았고, 잡무의 내용이 광범위하다 보니 어쩌면 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연기를 조금 배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진현은 임무전의 내전으로 향했다.
“청화각에서 하 사숙의 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맡고 싶습니다.”
죽간이 산처럼 쌓여 있는 접수대에서 정리를 하던 한 노인이 진현의 말에 들고 있던 죽간 더미에서 비교적 새것으로 보이는 죽간을 꺼냈다.
“하 사숙이 등록하신 잡무는 청화각 제 3분각에서 수행하게 된다. 잘 살펴보고 일을 맡을 것이라면 네 신분패를 죽간에 대고 영기를 불어넣어라.”
진현 앞의 책상에 죽간을 내려놓은 노인은 빠르게 설명하고 다시 죽간을 정리하는 일로 돌아갔다.
진현은 그에게 가볍게 포권을 하고 죽간을 펼쳐 보았다.
죽간에는 광장에 기록되어 있던 잡무의 내용이 더욱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마지막 칸에는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진현은 죽간을 읽어내린 후 저물대에서 금속으로 된 패를 꺼냈다.
패의 한쪽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반대쪽에는 청유문의 상징인 세 개의 산과 비석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그가 청유문에 입문하며 만들게 되었던 신분패로, 청유문 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진현은 패를 죽간의 문양에 대고 가볍게 영기를 불어넣었다.
그러자 죽간이 짧게 빛나더니 바깥 광장에서 빛나고 있던 청화각의 잡무가 사라졌다.
동시에 진현의 신분패도 작게 진동했다.
그것을 확인한 노인은 다시 그에게 돌아와 죽간을 회수했다.
“제 3분각은 저 봉우리 뒤편으로 가면 찾을 수 있을 거다.”
마른 손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킨 노인은 그 이상 대화를 잇지 않고 다시 내전 안쪽으로 사라졌다.
바빠 보이는 그 모습에 진현은 뭘 더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광장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잡무를 찾고 있는 원휴와 다른 제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진현은 임무전을 떠났다.
노인이 가리킨 방향으로 쭉 걸어가며 그는 작은 봉우리 몇 개를 지나쳤다.
그러던 중 진현은 주변의 환경이 변화하는 것을 느꼈다.
“덥다... 그리고 영기가 진해. 영맥(靈脈)이 흐르는 곳인가?”
영맥이란 땅 깊은 곳에서 영기가 짙게 흐르는 곳을 말했다.
대부분의 종문이나 수선 세력들은 이런 영맥을 기반으로 터를 잡아 다른 곳보다 영기가 농밀한 환경을 조성했다.
범인들이 사는 곳과 수선자들이 사는 곳의 차별되는 점 중 하나였다.
청유문만 하더라도 거대한 영맥 위에 터를 잡고 있었으며, 작은 영맥의 줄기들이 종문 곳곳에 뻗어있었다.
진현은 앞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열기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각’이라는 이름이 붙었기에 좀 더 큰 건물을 예상했지만, 진현이 마주한 것은 속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와집이었다.
그리고 그 기와집 외에는 별것이 없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제자들이나 거대한 화로, 제작되어 가는 거대한 비주! 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대한 모습과는 전혀 딴판에 놀라울 정도로 휑한 그 풍경을 마주하며 진현은 자신이 잘못 찾아왔나 싶었다.
그러나 집 앞에 떡하니 박혀 있는 ‘청화각 제 3분각’이라는, 엉성한 필체의 낡은 안내판이 그를 부정하고 있었다.
“제자 진현, 하 사숙이 내린 잡무를 맡으러 왔습니다.”
진현은 자세를 바로잡고 대문 앞에서 외쳤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여전히 대답하거나 나오는 이는 없었다.
진현은 기다리다 못해 문을 잡고 열어보려던 그 순간,
“들어오거라.”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진현은 순간 움찔했지만, 목소리의 지시대로 집 안쪽으로 향했다.
넓은 마당과 여러 채의 건물들이 줄지어져 있는 내부도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진현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마당 한복판에 멀뚱히 서 있었는데, 그때 뒷마당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번이나...!”
“제가...”
대문에서 그에게 지시를 내렸던 목소리도 섞여 있었지만 어쩐지 열이 오른 듯한 분위기였다.
진현은 조심스럽게 집의 뒤편으로 향했다.
“내가 함부로 영기(靈器)를 다루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거늘... 쯧쯧.”
그리고 문사 차림을 한 중년 남성이 땅에 머리만 남긴 채 사람을 묻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도망쳐야 하나?’
진현은 본능적으로 도망칠 준비를 했다.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러나 땅에 박혀 있던 머리가 소리친 덕분에 진현은 이것이 살인현장이 아님을 깨닫고 몸을 움찔하는 데서 그칠 수 있었다.
“허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항상 맞지는 않구나. 이것 봐라, 못난 제자를 땅에 심으니 착한 제자가 되지 않았느냐?”
중년 남성은 기분 좋은 듯 턱에 짧게 기른 수염을 몇 번 쓰다듬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막대기를 내리쳤다.
“악! 악!”
땅에 박힌 머리를 몇 대 두들기고 나서야 중년은 막대를 마당 구석에다 던졌다.
“운 좋은 줄 알거라 이놈아. 새로 잡무 제자가 왔으니 데리고 설명이나 해주거라.”
“넵!”
중년 남성은 여전히 굳어있는 진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이름이 무엇이냐?”
“제자, 진현이라고 합니다!”
“그래, 앞으로 할 일은 저 못난이에게서 배우고, 필요한 일 있으면 따로 부를 테니 그전까지는 저놈 일이나 돕거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마저 인사를 하려던 진현은 어정쩡하게 숙인 머리를 들었다.
“진현이라고 했지? 잘 부탁해! 난 명석호라고 한다. 명 사형이라고 불러!”
여전히 땅에 박힌 채 인사를 해오는 청년의 인사와 함께 진현은 직감했다.
이 청화각에서 일하는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으리라고.
7화
청화각 (2)
“하하, 첫 만남부터 못 볼 꼴을 보여줬네.”
상쾌한 웃음과 함께 땅에서 기어 나온 청년은 옷을 툭툭 털며 말했다.
짧게 자른 더벅머리에 웃음기 가득한 표정의 청년은 흙을 잔뜩 뒤집어써서 그런지 겉모습만 본다면 영락없는 시골 농부로 보였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소를 끌고 밭일하러 갈 것만 같은 모습과 다르게, 그에게서 느껴지는 영력은 거대했다.
‘연기 12층? 축기 직전의 연기 후기 최정상이라고?’
진현은 명석호의 경지를 감지하고 속으로 매우 놀랐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명 사형을 뵙습니다!”
진현의 인사를 받은 명석호는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 됐어. 그렇게 쓸데없이 예의 차릴 것 없어.”
그는 정말로 못 견디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난 길바닥 출신이라 그런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도저히 적응이 안 돼. 내 주변에서 그런 식으로 구는 건 사매로 충분하니까 그냥 편하게 불러라.”
생김새만큼이나 털털한 그의 태도에 진현은 작게 놀랐다.
“알겠...어요, 명 사형.”
훨씬 더 가벼워진 진현의 말투에 명석호는 되려 기쁘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자, 그럼 통성명도 했겠다, 바로 네가 할 일부터 설명해 줄게.”
명석호는 진현을 이끌고 기와집을 떠나 봉우리 아래에 위치한 숲으로 향했다.
그 작은 숲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인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다.
숲을 가득 메운 나무도 주변 산맥에서 자라고 있는 것들과는 달랐다.
붉은 나무껍질에 회색빛의 이파리를 달고 있는 나무들은 그 키가 매우 작았다.
제자리에서 뛰기만 하면 꼭대기에 달린 이파리에 닿을 정도였다.
진현은 나무에서 느껴지는 영력에 이것이 영기를 머금고 자란 영목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건 적회목이라고 하는데, 주로 제련을 할 때 화력을 더하는 땔감으로 쓰는 거야.”
짧은 소개와 함께 명석호는 울타리를 넘어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진현은 바람에 흔들리며 옅은 타는 냄새를 내는 적회목을 흥미롭게 관찰하며 그를 따라 걸었다.
곧 둘은 숲 한가운데에 마련된 공터에 도착했다. 이곳을 둘러싼 적회목들은 숲의 입구에 있던 것들보다 키가 더 컸다.
그리고 공터 주변에 그루터기들이 여럿 남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다 자란 적회목을 수확하는 듯했다.
“자, 앞으로 네가 이곳에서 도울 일은 다양하지만, 하루 만에 모든 걸 배울 수는 없는 법이지. 그러니까 오늘은 우선 적회목을 수확하고 처리하는 방법부터 배워두자.”
명석호는 가볍게 손뼉을 치고 저물대에서 은빛 검을 하나 꺼냈다.
“아, 법기는 있지?”
“네, 하급 열양검이지만요.”
진현은 저물대에서 적색 물결무늬가 있는 짧은 검을 꺼냈다.
종문에서 제자들에게 지급한 것은 총 5개로, 수선의 정석, 저물대, 영석 5개, 법포, 그리고 이 열양검이었다.
진현이 여태까지 별다른 법기를 구매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도 이미 열양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만 돼도 충분하지. 그럼 잘 봐, 적회목은 여기 아래쪽을 살펴보면...”
명석호는 옆에 있던 적회목에 다가가 검을 가져다 대며 설명을 시작했다.
진현은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며 한참을 그의 지시대로 적회목을 베고, 처리하고, 다듬었다.
***
“그래, 그렇게 태우지 않게 조심하면서 연기만 입히면 돼.”
적회목 이파리를 석쇠 같은 도구를 통해 불 위에서 훈연하고 있는 진현 곁에서 명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석쇠를 뒤집던 진현은 곧 회색 이파리들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곧바로 불 위에서 빼냈다.
“오, 처음인데도 잘하네.”
“다 사형이 잘 가르쳐 줘서 그렇죠.”
진현은 겸손하게 답하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명석호와 대화하면 할수록, 그가 연기 12층의 수선자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냥 어릴 적 어울리던 동네 형 같은 분위기에 진현도 금세 마음을 풀게 되었다.
“에이, 나는 누굴 가르친 경험도 거의 없는데 뭐. 애초에 여긴 사람이 잘 오지도 않거든.”
진현은 명석호의 말에 전부터 궁금해하던 주제를 꺼냈다.
“그런데 사형, 여긴 청화각의 분각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없나요?”
“응?”
명석호는 고개를 갸웃하다 아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넌 입문한 지 얼마 안 돼서 모를 만도 하구나. 청화각이 종문 내에서 연기와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건 맞는데, 실질적으로 대규모 생산을 한다거나 제자들을 대거 동원한다거나 하는 건 본각과 나머지 두 분각들 뿐이야.”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손에서 빙빙 돌리며 할 말을 정리했다.
“우리 스승님은 꽤 오래전부터 축기 후기에 올라 계시고, 종문 내에서도 결단기 최우선 후보로 꼽히고 있어. 그런데 평소에 수련보다도 제련기에 몰두해 계셔서, 장로님들이 편의를 봐주셔서 연기와 제련에 몰두할 수 있게 마련해준 게 여기야.”
결단기.
종문 내에서 몇 없는 장로 대접을 받으며, 사실상 수선계에서 ‘고위’ 라고 분류될 수 있는 경계.
아직 연기 5층인 진현에겐 너무나 먼 이야기였으며, 그렇기에 그와 관련된 내용이 더욱 흥미로웠다.
“사부님이 평소에는 주변이 시끄러운 걸 싫어하셔서 잡무 제자도 잘 안 뽑았는데, 최근에 많이 바빠지셔서 네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거야.”
“그럼 제가 운이 좋았던 거네요.”
“그렇지, 하하!”
그 뒤로 입이 트인 건지, 명석호는 청화각에서 진현이 할 잡일들을 가르치면서 틈만 나면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연기 후기에서의 수련이라던가, 바깥의 수선계에 나가본 경험도 섞여 있어 진현도 귀를 쫑긋 열고 들었지만, 수시로 하 사숙의 뒷담화를 하거나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그의 사매에 대한 불평까지 쏟아내 진현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진현이 속으로 곤란해하든 말든, 말하는 당사자인 명석호는 속이 시원했다.
오랜만의 대화 상대인 것도 있었지만, 다른 제자들과 달리 그를 편히 대하는 진현의 태도가 반가웠다.
길거리를 전전하는 고아였다가 스승에게 거둬져 수선에 발을 들인 그는 여전히 종문과 수선계의 딱딱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 사제는 마치 사람이 평등한 곳에서 살다 온 것만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몸에 배어 있어 얘기가 잘 통했다.
그리고 본디 충동적인 성격의 그는, 스승의 경고도 잊고 저물대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네가 일을 생각보다 빨리 배우기도 했고, 마침 나도 심심하던 참이니까 재밌는 걸 보여줄게.”
바닥에 놓인 광석들을 분류하던 진현은 그의 말에 정체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매우 긴 검신을 지닌 그 검은 수정 같은 광채가 비치는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 외에 독특한 문양이나 특징은 없었지만, 검에서 느껴지는 영력만은 다른 법기들과 달랐다.
“이거 혹시 영기(靈器)인가요?”
영기는 법기보다 한 단계 뛰어난 등급으로, 연기기 수사(修士)들에 의해 쓰이는 법기와 다르게 축기기 수사들이 쓰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구동하는 데 필요한 영력은 축기기 수사를 기준으로 하기에 일반적인 연기기 수사는 손에 넣더라도 웬만해서는 사용하지 못한다.
게다가 대량생산 같은 게 활성화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 당연하게도 영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고, 축기기 수사라 할지라도 쓸만한 영기 몇 개 정도를 손에 넣는 게 다였다.
진현이 타고 온 비주도 엄밀히 따지면 영기였지만, 제대로 누군가가 손에 든 영기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 이 녀석의 이름은 분화검(分火劍)이라고 한다. 내 역작이지.”
영기를 직접 만들었다고?
검을 뚫어져라 관찰하던 진현은 깜짝 놀라 물었다.
“사형은 아직 연기기인데 어떻게 영기를...”
“내가 천재라서.”
“...”
너무 당당한 그 한마디에 진현은 말을 잃었다.
물론 그의 나이에 연기 12층에 오른 데다 연기기의 경지로 영기를 제작했다면 천재라고 불리고도 남는다.
‘그래도 보통은 겸양의 말이라도 붙이지 않나?’
“뭐, 스승님이 열심히 가르쳐 주신 덕도 있기는 하지만. 그래서 어때? 멋지지 않냐?”
옅은 붉은 기운을 내뿜는 검의 모습에 진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처음 비주를 본 순간부터 법기에 관심이 많았고, 그보다 뛰어난 영기인 분화검은 아름답게까지 느껴졌다.
“그럼 사용하는 것도 한 번 보여줘야겠지. 거기서 좀 비켜 있어 봐.”
진현은 얌전히 광석 더미에서 일어나 명석호의 뒤로 물러났다.
“내가 광 사숙만큼 뛰어난 검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실력이 나쁘지는 않아.”
“광 사숙이라면...”
진현은 처음 그를 지목하여 영근을 검사했던 서생 차림의 수선자를 떠올렸다.
“아, 너도 뵌 적 있나 보네? 하긴, 광 사숙이 자주 제자들을 데려오는 역할을 맡으시니까. 여하튼 사숙처럼 검을 제대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분화검을 만들면서 기본적인 검술은 익혔으니까 잘 봐둬라.”
명석호는 검을 휘휘 저으며 감을 잡는 듯 하더니 천천히 자세를 낮추고 기수식을 취했다.
‘삼촌이랑도 별 차이가 없어 보여.’
무림세가 출신인 만큼 진현은 자세만 보아도 그 사람의 무공 실력을 대충 판단할 수 있었다.
아마 명 사형이 지금 절정 무인인 그의 삼촌 백우와 검만으로 맞선다면 그의 삼촌이 근소한 차이로 우위에 설 것이다.
과연 수선자는 영기로 전신을 비롯해 사고까지 강화되는 만큼, 제대로 검을 배우지 않았다는 명 사형은 이미 무림의 기준으로 일류 정상이라고 볼 수 있었다.
“후우우...”
그렇게 명석호가 분화검을 잡고 영기를 모으며 자세를 잡는 도중, 진현은 문득 몇 시간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분명 하 사숙이 영기를 함부로 쓰지 말라고 명 사형을 혼내고 있었...’
“가랏! 만천화우!”
어딘가 익숙한 이름의 절기가 꽃 대신 불로 바뀌어 펼쳐졌다.
분화검은 휘둘러지자마자 이름에 걸맞게 수십 개의 작은 소검(小劍)으로 분리되어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작은 불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듯한 그 모습에 진현은 걱정도 잊고 감탄했다.
불길을 휘감은 소검들은 검자루를 쥔 명석호의 손짓에 따라 일제히 목표물을 향해 쏟아졌다.
콰과광-!
폭음과 함께 거대한 바위 하나가 가루가 되었다.
바위뿐만 아니라 주변의 땅마저 갈아엎고 불태우는 그 모습은 마치 전생의 미사일 폭격을 보는 듯했다.
연기기 수선자가 영기를 가지고 이만한 위력을 낸다면, 축기기 수사가 휘두른다면 어떻게 될까?
영기가 이 정도라면 결단기 수선자들이 사용한다는 법보(法寶)는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지?
진현은 청화각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도 언젠가는 이런 대단한 위력의 법기와 영기들을 만들 것이고, 이 성격 좋은 사형에게 잘 보이기만 한다면 지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아아악!”
그때 진현의 행복한 상상을 깨는 비명이 들려왔다.
“스승님의 차나무가! 물, 물!”
명석호는 분화검을 재빨리 회수한 채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진현은 그가 달리는 방향을 보고 마찬가지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 사숙이 거주하는 기와집 인근에 심겨 있던 나무 한 그루가 명석호의 조종에서 벗어난 소검에 베여 불타고 있었다.
명석호를 도와 우물에서 물을 퍼내며 진현은 이 사형에게 지도받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8화
벽운탑
“스읍... 후우...”
진현은 동부 안에서 집중하며 소오행공의 구결대로 영기를 순환시키며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시원한 기운이 영맥을 따라 단전과 심장, 뇌를 돌고 영근의 인도에 따라 영혼이 머무르는 혼해(魂海)로 보내졌다.
그렇게 그의 본질에 다시 한번 영기가 축적되며 웅장한 기운과 함께 진현은 경지를 돌파... 하지 못했다.
그의 경지는 여전히 연기 5층이었다.
“기대도 안 했지만, 진도가 너무 느리네.”
검은 공간 내부에서 이룬 수련과 바깥에서 노력해 얻는 수련은 너무나도 비교되었다.
심지어 청화각의 영맥에 의해 자극을 받으면서도 영기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거의 발전하지 않았으니, 진현에게 외부에서의 평범한 수련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가부좌를 풀고 미리 끓여두었던 차를 한 잔 마시며 진현은 최근 종문 생활을 반추해 보았다.
그가 청화각에서 잡무를 맡기 시작한 지 벌써 몇 주나 지났고, 그는 이제 이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연기 재료들을 준비하는 것이었지만, 하 사숙이 시킨 심부름 등을 다녀오거나, 가끔 명석호가 법기를 만들 때 옆에서 돕기도 했다.
아직 하 사숙이 제련을 하는 동부에 출입하지는 못했지만, 연기에 대한 지식이 조금 더 쌓이면 그를 보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화각에서 한 달을 일하고 받을 영석은 30개... 뭘 사야 하려나.”
게다가 곧 그의 첫 ‘월급’도 받을 수 있었다.
진현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하다, 갑자기 움찔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칠흑 공간과의 연결이 빠르게 강해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감각에 진현은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렸고,
“다시 들어왔다...”
찻잔이 떨어지기도 전에 칠흑의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지난번과 완벽하게 동일한 암흑과, 그 중심에 떠 있는 그의 영혼과 돌 조각까지.
“역시 4주를 기준으로 쿨타임이 있는 건가...”
진현은 날짜를 헤아리며 그의 예상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 그가 이곳에 들어온 것은 영근 검사를 받을 때였고, 그로부터 28일이 지난 시점에 백보루 앞에서 이곳으로 이동되었다.
오늘은 그날을 기점으로 또 28일째 되는 날이었으니, 자신이 4주마다 이곳으로 오게 된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게다가 안에서 보내는 시간도 28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이 공간에서 보낸 시간만큼 다시 출입하는 데 대기시간이 생기는 듯했다.
다만 진현은 그 기한의 조정이 가능할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이 능력에 대해 그는 아직도 다 이해하지 못했으니.
진현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옅게 빛나는 영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박힌 채 조용히 부유하는 돌 조각에 천천히 손을 뻗다, 결국 건드리지 못하고 손을 회수했다.
이곳과의 연결이 느껴지고 나서 다시 들어와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영기로 가득 찬 공간과, 들어와 있는 동안 멈춰 있는 시간까지.
모두 저 검은 돌 조각이 일으킨 현상이다.
그가 가진 ‘치트키’의 근원인 셈이었다.
수많은 의문이 진현의 머리를 메웠다.
이 공간은 어디일까? 혼이 머무르는 혼해일까?
저 돌은 무엇일까? 대체 어떤 신물이기에 시간까지 멈추는 거지?
그리고 대체 왜 내 영혼에 박힌 채 하나가 되어있는 거지?
그러나 다 부질없었다.
연기기 밖에 되지 않는 미약한 수선자의 지식과 능력으로 그런 비밀을 풀 수는 없었고, 어찌 되었건 그에게 이득이 되니 불평할 생각도 없었다.
“수련이나 하자.”
진현은 지난번과같이 자신의 영혼 아래에 풀썩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다시 소오행공의 구결을 따라 영기를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충만한 영기의 흐름이 다시 한번 그의 영맥을 타고 흘렀다.
***
쨍그랑.
작은 찻잔이 돌바닥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진현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더욱 깊어진 영기는 그가 연기 7층에 올랐음을 알려주었다.
아마 이 모습을 다른 제자들이 본다면 부러움에 피를 토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연기 중기에서 1층의 경지를 올리는 데는 적어도 몇 개월에서 길게는 1년에 달하는 시간의 고된 수련이 필요하다.
한 달 만에 그 계단을 2층이나 오르다니,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작 진현은 이 결과에 만족하지 못했다.
물론, 그도 한 번에 2층이나 오른 것이 얼마나 큰 성과인지는 알았다.
그저 이것이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진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수련하며 느꼈던 것을 떠올렸다.
돌 조각이 만들어준 환경에서 영기는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 충만한 영기가 전부 그에게 흡수되지는 않았다.
그 절대적인 양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현재 공법인 소오행공이 너무나도 느릿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칠흑의 공간은 마법처럼 들어가기만 하면 경지를 놀려주는 신선향이 아니었다.
외부 시간이 정지하고, 수련이 가속화되기는 하지만 결국 그가 직접 공법을 운용해 영기를 받아들여야 한다.
소오행공은 종문에서 기초적인 영기를 쌓으라고 준 공법인 만큼, 유순하면서도 질이 떨어졌기에 그런 결과는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진현은 능력이 주는 이점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첫 ‘월급’을 어디에 쓸지는 정해졌네.”
***
청유문의 북쪽, 장대한 청유산맥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들과 가장 깊은 골짜기들이 위치한 곳.
바람이 강하게 부는 어느 높은 봉우리의 꼭대기에 드높은 탑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아름다우면서도 절제된 장식들로 꾸며진 탑의 입구에는 벽운탑(碧雲塔)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그 이름을 올려다보며 진현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종문에서 공법들을 모아 둔 서고가 이런 외진 곳에 있을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적당한 공법을 골라 가기 전에 영석을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만 아니었다면 적당한 비행법기를 하나 사서 타고 왔을 것이다.
진현은 영기로 강화되었음에도 떨려 오는 다리를 두드리고 탑의 입구로 걸어갔다.
지난 번 검은 공간에서 나온 뒤로 며칠 간 청화각에서 명 사형이 그의 '재능'을 칭찬하는 것을 들으며 일한 후에야 진현은 첫 달의 보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보수를 받자마자 곧바로 새로운 공법을 구하러 이곳, 벽운탑을 찾았다.
우웅-
진현이 벽운탑에 접근하며 탑의 외부 경계로 보이는 담을 지나려던 순간, 그의 앞에 연노란색의 빛의 장막이 솟아났다.
“이게 보호 진법(陣法)인가?”
진법. 법진이나 그냥 진으로 부르기도 하는 이것은 일종의 방어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특수한 방식으로 깃발이나 특정 물건 등을 배열해 영기를 불어넣어 작동시키는, 수선 4대 기예 중 하나였다.
워낙 복잡한 분야인지라 재능이 없으면 아예 입문하기도 어렵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진법에 진현은 그것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그의 앞에 솟아오른 장막은 딱 그가 지나갈 공간만 막고 있었으며, 옆은 뻥 뚫려 보였다.
그러나 그가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장막이 그곳에 다시 펼쳐졌고, 왼쪽으로 가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이 진법은 탑 전체를 덮고 있지만, 제자들에게 진법이 있다고 경고하는 의미에서 바로 정면에 있는 부분만 보여주는 듯했다.
재미있었지만 감상은 거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진현은 저물대에서 신분패를 꺼내 들고 가볍게 노란 장막의 표면에 대고 두드렸다.
그러자 신분패가 닿은 위치부터 장막 위에 옅은 물결이 퍼지더니 곧 딱 그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입구가 열렸다.
진현은 곧바로 장막을 통과했고, 장막은 곧바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벽운탑의 1층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리 크지 않은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끼익-
기름칠하지 않은 건지, 문의 경첩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었다.
안으로 들어선 진현은 외부보다 더욱 넓은 내부구조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탑의 1층부터 벽을 수놓은 책꽂이들과 수많은 서책, 죽간들이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그를 반겼다.
그리고 나선형의 계단을 따라 뚫린 천장으로 1층과 비슷하게 구성된 2층과 3층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4층부터는 그렇게 뚫어놓지 않아 관찰할 수 없었다.
“뭘 찾으러 왔느냐?”
진현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낡은 탁자와 그 뒤에 앉아 차분히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꾀죄죄한 차림의 노인이 있었다.
방금까지 아무런 기척이나 영력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 노인은 어디서 나타난 것인가?
진현은 포권을 취하며 상대의 영력을 감지했다.
‘연기 3층?’
믿기지 않는 결과에 진현의 입가가 꿈틀했다.
진법으로까지 보호받고 있는 종문의 공법을 보관하는 벽운탑을 맡고 있는 것이 연기 3층의 노인일 수가 없다.
물론 실제로 그냥 연기 3층의 실패한 수선자일 수도 있지만, 진현은 항상 최악을 대비하기를 좋아했다.
그냥 상대가 경지를 숨긴 고인이라고 여기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제자 진현, 소오행공 대신 익힐 공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소오행공?”
노인은 진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그리고 진현의 얼굴을 빤히 살펴보더니 흥미롭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소오행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은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재능이 부족해 스승을 구하지도 못했다는 말일 텐데... 네 경지는 벌써 연기 7층이구나.”
진현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나이와 영맥의 상태로 보건대 수련을 시작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소오행공만으로 이 경지를 이뤘다면 분명 뛰어난 재능인데, 요즘 아이들은 다 눈이 옹이구멍이더냐?”
그가 말하는 아이들이 축기기 수선자들을 의미하는 것임을 눈치챈 진현은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허허, 그래도 너는 참 기특하구나. 장차 우리 청유문에서 장로직은 거뜬히 맡겠어.”
“칭찬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가 경지를 숨기고 있었으니, 진현도 그의 장단에 맞추어 선배나 다른 배분의 호칭 대신 어르신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은 탁자를 탁 쳤다.
“그래, 내 네 이름을 기억해 두겠다. 그럼 벽운탑의 이용 방법을 설명해 주마. 우선 네 연기기의 경지로는 탑의 3층까지 열람이 가능하다. 모든 죽간과 서책은 그 소개와 일부 내용만이 기술되어 있으니, 잘 살펴보고 복사해 가고 싶은 것을 골랐다면 내게 오면 된다.”
진현은 노인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제한 시간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너무 오래 끌면 그리 좋은 눈길을 받지는 못할 것이다.
진현은 곧바로 책꽂이로 향해 공법을 찾아보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약간 망설인 끝에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어르신께서 제게 맞는 공법을 추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노인은 자신의 ‘재능’을 좋게 평가한 듯했고, 그렇다면 이 정도의 부탁은 들어줄지도 모른다.
물론, 이렇게 요청을 한 이상 그가 골라주는 공법을 무조건 받아 가야겠지만, 높은 경지로 추정되는 그가 골라주는 공법이라면 그가 직접 고르는 것보다 나을 가능성이 높았다.
“추천해 달라고? 좋지! 마침 내가 점괘를 꽤 잘 보는데, 이참에 네 선도에 잘 맞는 공법을 하나 골라주마.”
생각보다 적극적인 반응에 당황할 새도 없이, 진현은 노인의 억센 손길에 이끌려 탁자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노인은 어디서 꺼낸 것인지 모를 회색 막대기 다섯 개를 들고 휘휘 저었다.
“자, 여기에 네 영기를 불어넣거라.”
그걸로 된다고? 영근이 무엇이라던가, 출생일 같은 정보도 필요 없나?
미심쩍었지만, 진현은 그의 말대로 그 막대기들에 영기를 불어 넣었다.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뭐라 한참 중얼거리다 탁자 위로 막대기들을 쏟았다.
타다닥.
놀랍게도 막대기들은 어지럽게 흩어지는 대신 화살표 모양을 만들었다.
진현이 이게 무슨 결과인지 의아해하던 와중에 노인은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에 놓여있던 죽간을 꺼내왔다.
“...”
그리고 죽간을 탁자 밑에서 꺼낸 서책 하나에 가져다 댄 후 서책을 진현에게 건넸다.
“자, 여기 있다. 영석은 20개만 내거라.”
무언가 속은 듯한 느낌이었지만, 진현은 아까운 영석을 털어 값을 치르고 노인에게 작별을 고한 뒤 벽운탑을 떠났다.
진현이 떠나고도 노인은 탁자 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가를 좁혔다.
“이건... 한 번 죽다 살아난 의미로 해석해야 하나?”
화살표 모양으로 뭉친 막대기들을 살피던 노인은 곧 손을 휘저어 막대기들을 치웠다.
“에잉... 쯧! 영 모르겠어! 하여간 점괘는 영 못 해 먹겠군. 황사 늙은이한테 다시 배워야 하려나? 연기기 제자 녀석 점괘 하나 보기도 이리 어려워서야...”
그는 혀를 끌끌 차며 다시 탁자 뒤로 돌아가 또 다른 제자가 찾아오지 않는지 기다렸다.
9화
새 공법, 여유로운 생활
진현은 어느새 집처럼 느껴지는 아늑한 동부로 돌아왔다.
고된 등산을 마치고 도달한 의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했다.
진현은 습관적으로 차 한잔을 끓여두고 청운탑에서 받아온 공법을 확인했다.
받아온 과정이 심히 의심스럽긴 했지만, 어쨌든 노인이 영석 20개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물건이니 소오행공보다는 나을 것이다.
공법이 기록된 서책은 빳빳한 새 종이로 되어 있었다.
죽간에 담긴 내용을 잠깐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 다른 책에 옮겨 적다니, 수선계의 다양한 기술들은 언제 보아도 신기했다.
“<창뢰각령공(蒼雷刻靈功)>이라...”
가죽 표지에 새겨진 공법의 이름은 연기기 수선자가 접할 공법치고는 좀 과해 보였다.
진현은 책장을 넘기며 새 공법을 살폈다.
창뢰각령공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뇌 속성에 해당하는 공법이었다.
사실 소오행공 같이 모든 영근과 속성에 구애받지 않는 공법이 드문 것이고, 이런 식으로 하나의 속성이나 요소를 주로 삼는 공법이 일반적이다.
창뢰각령공은 뇌기(雷氣)를 이용하여 수련하며, 당연하게도 뇌기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수선자들이 수 속성 공법을 익힌다고 물에 잠겨 있지 않듯, 뇌기를 받아들인다고 일부러 번개를 맞거나 감전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목영근을 통해 오행 중 목에 속하는 뇌기를 받아들여 수련하면 됐다.
다만 이렇게 쌓은 뇌기를 영기처럼 순환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뇌흔?”
창뢰각령공은 뇌기를 이용해 혼해에 뇌흔이라는 것을 새겨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연기기 1층에 처음 뇌흔을 하나 새기고, 이후 경지가 늘수록 1층에 하나씩 뇌흔을 추가해 가는 것이 창뢰각령공의 수련의 중점이었다.
그냥 천지영기를 받아들여 순환시키기만 하면 됐던 소오행공보다 훨씬 어려워 보였으나, 그런 이유가 있었다.
창뢰각령공에서 이르기를, 이렇게 쌓은 뇌흔 12개는 이후 축기에 오를 때 그 병목을 뚫는 과정에 도움을 주었다.
진현은 이 대목에서 눈을 반짝였다.
축기기에 오르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은 절대 작지 않았다.
연기기는 영근을 가진 누구나 진입하는 경지이며, 축기 직전의 12층은 사실 자질이 비참할 정도로 낮지 않은 이상 누구나 150세의 수명을 다하기 전에는 도달할 수 있다.
다만 축기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진짜 수선자’라고 인정해 주는 단계이자 본질적인 변화가 시작되는 단계이며, 수많은 이들이 좌절하는 관문이다.
천재라 불리며 젊은 나이에 연기 12층에 도달한 이라도 축기의 벽을 넘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진현 자신도 돌 조각이 수련을 가속 시켜주더라도, 축기의 병목까지 넘겨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손에 들어온 이 공법에 축기를 돕는 효능이 있다니. 이에 비하면 소오행공은 쓰레기라고 할 만했다.
진현은 이런 대단한 공법이 영석 20개밖에 하지 않는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연기기에 해당하는 구결을 모두 넘긴 진현은 얼마 안 가 더 넘길 장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뭐? 왜 축기 초기까지의 내용밖에 없어?”
내용이 잘려 나간 것인가 싶었지만 마지막 부근의 구결도 불완전한 것이, 아무래도 이 창뢰각령공은 애초에 청유문이 소장할 때부터 완전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노인이 점괘까지 쳐가며 추천한 공법이 축기 초기에서 끊긴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쨌듯 축기에 오르는 데 도움을 주는 건 그대로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잠시 공법을 내려놓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차를 한 잔 마신 뒤 진현은 곧바로 이 공법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적어도 어떤 공법인지 감을 잡고 알아두고 싶었다.
동부의 입구가 단단히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진현은 방석을 가져와 동굴 바닥에 깔았다.
그리고 이제는 의자에 앉는 것보다 익숙해진 가부좌를 틀며 그동안 그와 함께했던 소오행공 대신 창뢰각령공의 구결에 따라 목영근을 중심으로 삼아 영기를 끌어들였다.
단순히 시원하기만 하던 영기가 약간의 따끔함을 동반한다는 감각이 들었고,
이것이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못 해 먹겠다.”
정말로 오랜만에 느끼는 다리의 저릿한 감각에 진현은 신음과 함께 뒤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정전기로 인해 삐죽삐죽 솟아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 공법의 가격이 20개밖에 하지 않은 이유는 공법의 부족함 뿐만 아니라 난이도의 탓도 있는 것 같다.
짧은 시간 동안 연공했을 뿐이지만, 소오행공과는 차원이 다른 영기를 모으는 난이도부터 시작해 뇌기에 익숙하지 않은 몸에서 일어나는 약간의 거부반응까지.
정말로 어려웠다.
분명 그는 소오행공보다 영력 흡수가 빠른 공법을 구하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더 어려운 공법을 익히게 되었다.
다른 이라면 포기하고 다른 공법을 찾았겠지만, 진현은 이것도 오히려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돌 조각이 만든 검은 공간에서 수련하면 그는 어차피 빠른 속도로 수행이 증진한다.
그렇다면 소오행공이나 그보다 공력을 쌓는 속도가 더 빠른 공법보다, 수행 속도가 느리지만 고점이 높은 공법을 익히는 것이 나을 것이다.
축기에 도움이 되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 공법은 익힐 가치가 있었다.
“한 달 뒤의 나에게 부탁해야겠네.”
어차피 평범한 수련은 거의 의미가 없었으니, 수련은 미래의 그가 맡아줄 것이다.
진현은 동부 바닥에 드러누운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청유문에서의 시간이 흘러갔다.
진현은 매일매일 청화각에 들러 하 사숙의 집을 청소하고, 명석호와 함께 연기 재료들을 준비했다.
명석호가 사고를 치려는 것을 말리고, 하 사숙에게 칭찬을 듣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그렇게 청화각에서의 일정이 끝나면, 종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다른 제자들은 잡무를 마치거나 쉬는 시간이 생기자마자 수련을 하며 경지를 올리기 위해 하루하루 노력하겠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청유산맥에서 풍경이 좋다고 소문난 봉우리를 찾아가 몇 시간이고 그곳에 드러누워 경치를 감상하기도 했고,
종문 중앙의 대전 앞에 세워진 청유문의 개파조사인 청유선자의 조각상을 감상하기도 했다.
또 그냥 풀밭에 누워 전생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고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날이 밝을 때까지 바라보기도 했다.
넓은 연못에서 짧은 전생에서는 즐겨보지 못했던 낚시도 즐겼다. 큰 고기를 잡지는 못했지만, 열양검에 꽂아 구운 생선은 특별한 간 없이도 일품이었다.
그리고 남은 영석으로 첫 비행 법기를 사 처음으로 직접 비행하는 기쁨도 마음껏 누렸다.
높은 상공에서 발 아래의 모든 게 점으로 수렴하는 모습은 각별했다.
비록 하급 법기라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비행은 비행이었다. 게다가 기동성이 늘어나며 더 다양한 장소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종문 외곽에서 영수들을 기르는 청룡각을 찾아가 멀리서 그 특이한 생물들을 관찰하기도 했고,
그냥 하늘 높이 날아올라 낮게 떠 있는 구름 사이를 헤집고 다니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생활이야말로 수선자가 지향해야 할 방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했다.
종문 내의 다른 제자들과도 가끔 만났다.
청룡각에서 잡무를 맡은 남혁과 진설하라는 쌍수 도려 수선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종문 외부의 수선세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황자치고 사교성이 넘치는 원휴가 끌어모은 수선자들과 술자리를 나누기도 했다.
낮은 경지부터 연기 후기에 달하는 사형 사저들까지 데려와 친목의 장을 여는 그의 능력에 진현은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청화각의 일, 여유로운 생활, 수선자들과의 교류를 반복하며 23일이라는 시간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여러 가구와 장식, 화로 등으로 이전보다 더욱 다채로워진 동부 안에서 진현은 다시금 차를 끓이고 있었다.
원휴 덕에 교류를 트게 된 한 사저에게서 받은 선물로, 이전에 그가 마시던 것보다 향도 깊었으며 심신 안정의 효과도 강력했다.
그렇게 진하게 우려낸 차를 홀짝인 진현은 어느덧 익숙해진 신호를 감지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차분하게 앉아 눈을 감은 그는 다음 순간 검은 공간에 서 있었다.
“그동안 푹 쉬었으니 이제 과거의 내가 부탁해 둔 일을 해야겠지.”
진현은 같은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뒤로 그의 영혼이 옅은 빛을 뿌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곧바로 창뢰각령공의 구결에 따라 영기에서 뇌기를 끌어모았다.
여전히 저릿한 감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외부와 비교도 안 되는 속도와 수월함에 진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게 3일 만에 진현은 뇌기를 압축해 첫 번째 뇌흔을 새길 수 있었다.
뇌흔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물방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밝게 빛나는 푸른 전류가 물방울의 표면을 타고 흔들리고 번쩍이며 이것이 형태와 달리 번개로 이루어진 것임을 증명했다.
첫 번째 뇌흔을 새기고 진현은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았다.
뇌흔은 혼해에 새기는 것으로, 만약 이 공간이 혼해가 맞다면 이곳에도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아쉽게도 그의 영혼과 돌 조각은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며, 검은 공간 그 어디에도 뇌흔을 연상시키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증을 풀지 못한 약간의 아쉬움을 품고 진현은 수련을 이어 나갔다.
아직 뇌흔을 한 개밖에 쌓지 못했다. 그가 연기 8층으로 나아가려면 뇌흔을 8개나 각인해야 하니, 아직 한참 남았다.
***
텁-
진현은 검은 공간에서 빠져나오며 반사적으로 앞에 놓인 탁자를 짚었다.
“하아... 들어가는 건 적응이 되는데 나오는 건 영 익숙해지지를 않네.”
마치 얕은 잠에서 깨며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것과 같았다.
바깥의 시간이 멈춰있는 것을 알아도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후릅.
진현은 여전히 뜨거운 차를 한 입 마셨다.
‘나중에는 술을 한잔 데워놓고 말할지도 모르지, 이 술이 식기 전에 경지를 올려서 오겠소, 라고...’
진현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그의 경지는 아직도 연기 7층에 머물러 있었다.
처음으로 검은 공간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경지가 증가하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먼저 창뢰각령공이 순수하게 난이도가 높았던 것도 있고,
또 아무리 수련이 가속되더라도 한번 들어가서 연기 8층까지 오르는 데 해당하는 뇌흔 8개를 새기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진현은 자신의 혼해에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는 4개의 뇌흔을 감지하며 기대를 쌓았다.
진도가 느리더라도, 이 뇌흔이 12개가 쌓이기만 한다면 축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실 진도가 느리다고 보기도 어렵지만.’
진현은 다른 동문들이 수행의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던 것을 떠올리며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되새겼다.
그리고 곧 잡념을 지우고 저물대에서 창뢰각령공을 펼쳐 들었다.
공법의 기본 조건인 뇌흔을 새겼으니, 이제 그 뇌흔을 사용해 입문할 수 있는 몇 가지 술법들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진현이 독서를 시작하려던 순간, 그의 동부 앞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1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