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삼응방시(1)
“진 형, 오랜만입니다!”
진현이 동부의 입구를 열자, 백보루의 하얀 제복을 입은 원휴가 그를 반겼다.
불과 며칠 전에 술자리에 같이했음에도 태연하게 오랜만이라며 인사하는 모습에 진현은 실소를 흘렸다.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인데?”
“형님은 혹시 이번에 열리는 제자 대회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제자 대회?
들어보지 못했지만, 이름으로부터 그 내용을 예상할 수는 있었다.
“종문 내에서 친선 대회가 열린다는 건가?”
“네! 원래 정기적으로 열던 대회 시기보다 꽤 이르지만, 다음 달에 연기기 제자들끼리 겨루는 대회를 연다고 합니다.”
진현은 아직 종문 내에서 그런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원휴의 말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백보루에서 잡무를 맡은 원휴는 많은 제자와 접하는 그 자리를 백분 활용해서 모임을 열 때마다 이런저런 소식을 들고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달 뒤에 열린다니, 그렇게 급하게 열리는 이유가 있어?”
진현이 다른 선배들에게서 들은 바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종문 내에서 어떤 행사가 열리면 적어도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전에 공지하게 된다.
수선자들의 시간 감각과 범인들의 그것이 다른 만큼 웬만한 일은 시간 단위가 큰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문 전체에서 여는 대회를 한 달 전에나 알리기 시작한다고?
“아, 그건 저도 이상해서 알아봤습니다. 알고 보니 어떤 축기 사숙께서 이번 대회의 주요 상품을 내놓기로 하셨는데, 그 사숙께서 대회를 일찍 여는 것으로 밀어붙이셨다네요.”
“축기 사숙? 대회의 주요 상품이 뭔데?”
“우승한 제자가 요청하는 대로 제작하는 맞춤형 상급 법기라고 하더라고요.”
상급 법기.
생각보다 큰 상품에 진현은 약간 놀랐다.
하급, 중급 법기들과 다르게 상급 법기는 그 가치가 꽤 크다.
보통 연기 후기의 수선자들이 쓰지만, 영기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 축기 수선자들도 상급 법기를 주로 쓸 만큼 일반 법기와는 그 질이 다르다.
아마 그가 가지고 있는 열양검이 상급 법기와 부딪히게 된다면 몇 합 만에 열양검이 부서질 것이다.
심지어 축기 사숙이 맞춤형으로 제작해 주는 상급 법기라니, 영석으로만 따진다면 수백에 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잠시 달아올랐던 기대도 곧바로 식었다.
“그래 봐야 연기 후기의 사형들끼리 벌이는 잔치겠지. 우리가 나가봐야 곧바로 떨어질 텐데?”
아무리 그의 능력을 활용하더라도, 현재 상태에서 한 달 만에 연기 후기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하다.
연기 12층인 명석호의 곁에서 그의 능력을 보아온 진현은 자신이 연기 후기를 상대로 이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네? 아니요, 대회는 연기기 제자들이 소경지마다 각자 대전을 진행해서 경지별로 우승자를 한 명씩 뽑는답니다.”
“뭐? 그럼 각 경지의 우승자들에게 모두 상급 법기를 준다는 말이야?”
원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3명이나 뽑아서 맞춤형 법기를 만들어준다니, 대체 어느 축기 사숙이 이런 후한 상품을 건단 말인가.
혹시 하 사숙인가?
진현의 뇌리에 항상 동부에 틀어박혀 지화와 씨름하는 문사 차림의 중년이 떠올랐다.
평소 연기에 몰두해 있는 그에겐 법기를 제작해 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고, 축기 후기이자 결단 후보씩이나 되는 위치이니 제자 대회의 규정을 약간 바꾸는 것도 납득이 된다.
진현은 나중에 남는 시간에 명석호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제자 대회에 대한 흥미가 급증했다. 연기 중기 제자들끼리 따로 대전을 진행한다면, 그에게 기회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게다가 창뢰각령공에 기록된 몇 가지 술법을 능숙하게 다룬다면, 아직 기초적인 오행 술법에 머물러 있을 다른 제자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도 있다.
잠시 행복한 상상에 빠졌던 진현은 여전히 그의 앞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원휴를 발견했다.
“그래서, 이걸 알려주기 위해서만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하하, 진 형은 역시 눈치가 빠릅니다!”
원휴는 자신의 가슴팍을 팍팍 두드렸다.
“저는 진 형이 출전한다면 반드시 우승할 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님도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대회에 나가는 게 마음이 편하실 테니,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와준다니?
원휴는 그런 그의 반응에 두 손을 맞잡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안했다.
“종문 내 최저 이자율로 진행하는 영석 대출로 형님의 우승을 기원하겠습니다.”
“...”
전생에서부터 쫓아온 듯한 멘트에 진현은 할 말을 잃었다.
***
원휴의 방문으로부터 약 이 주 후.
짹!
청유산맥 아래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는 물체가 지나가는 새떼를 흔들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그 물체는 커다란 제비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그 등 위에 사람 한 명이 오를만한 발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그 물체의 발판 위에는, 거센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서 있는 소년이 있었다.
“퉤, 아직 빠른 속도에는 적응을 못 하겠네.”
진현은 입가에 붙은 깃털을 뱉어내며 은연반의 속도를 약간 줄였다.
은연반은 그가 백보루에서 구매했던 비행 법기로, 그동안 종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애용한 탈것이었다.
그만큼이나 익숙한 물건이었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장거리 비행을 하며 흥이 올라 속도를 높이자마자 사고를 내버렸다.
진현은 어쩔 수 없이 목적지까지 남은 길은 천천히 비행하기로 했다.
그는 현재 청유문 인근에 있는 방시(坊市)로 향하고 있었다.
청유산맥 남쪽의 삼응방시는 종문이 없는 수선자인 산수(散修)가 운영하는 곳으로, 방시의 주인인 삼응진인은 무려 결단기에 이른 강자였다.
삼응방시는 그의 위명에 힘입어 수많은 산수와 인근의 종문 제자들까지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거대한 교류의 장으로 자리 잡았다.
청유문의 제자들도 방시에 들르게 된다면 이곳을 최우선으로 찾았다.
진현이 이번에 삼응방시에 가는 것은 당연하게도 얼마 전 알게 된 제자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종문 내 백보루의 판매 품목들은 너무나도 평범했기에 그는 온갖 물품들이 모이는 방시를 둘러보며 쓸 만한 것을 구해볼 심산이었다.
이를 위해 원휴머니에서 영석을 50개나 대출받았기에, 진현은 반드시 방시에서 쓸만한 것을 구해 제자 대회에서 우승하겠다고 다짐했다.
우승자에게는 일정량의 영석과 단약까지 제공한다 하니, 그걸로 빚을 갚으면 될 것이다.
우승하지 못한다면... 뭐, 청화각에서 2달 치 급여를 까면 되겠지.
진현은 이후로도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은연반을 몰았다.
대략 3시간을 내리 비행하자, 지세가 완만해지며 정말 오랜만에 진현은 넓은 평지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성곽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돌로 쌓은 넓은 성은 그 안에 수많은 건물들을 품고 있었다.
10층에 가까운 높이의 화려한 누각부터 작은 목조 점포들, 그리고 길거리를 수놓은 크고 작은 노점들까지.
크기만 본다면 시장이라기보다 하나의 도시에 가까웠다.
진현은 그 웅장함에 감탄하며 은연반의 고도를 낮췄다.
물론 크기만 따지자면 그의 종문이 더 거대하겠지만, 청유산맥에 넓게 퍼져있는 종문 구조의 특성상 그 크기를 체감하기는 힘들었다.
서서히 내려가며 진현은 방시의 거리를 빼곡히 채운 수선자들과 4곳의 성문으로 오가는 인파를 발견했다.
사람의 수만큼이나 그 모습도 다양했다.
그와 동일하게 청유문의 복식을 입은 수선자들도 여럿 보였고, 헤지거나 질이 낮은 법포를 걸친 산수들도 많이 있었다.
다른 수선 문파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일행부터 심지어는 영력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범인의 상단도 있었다.
그 모든 풍경을 두 눈에 담으며 진현은 방시의 동쪽 성문 앞에 도착했다.
성문 꼭대기에는 진현이 알지 못하는 금빛의 재료로 만들어진 거대한 현판에 ‘삼응(三鷹)’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다.
진현은 과연 대형 방시는 현판조차 신기한 재료를 쓴다며 감탄하고 땅에 내려앉아 은연반을 회수했다.
마침 그의 앞에 서 있던 수선자 세 명이 문지기들을 지나 방시 내부로 입장했다.
진현은 곧바로 성문 앞에 서 있는 두 문지기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가까이 접근하자마자 무언가가 그의 몸을 훑는 게 느껴졌고, 진현은 곧바로 멈춰 섰다.
지금 그를 살피고 있는 기운의 정체는 신식(神識)이었다.
신식이란, 수선자가 축기에 오른 이후부터 얻게 되는 일종의 정신 확장 능력이었다.
연기와 축기를 갈라놓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한 이것은 단순히 영기나 영력을 감지하는 수선자의 영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이전에 하 사숙이 심부름을 전할 때 신식을 뻗어 그에게 지시를 내렸기에, 진현은 연기기임에도 불구하고 신식을 어느 정도 인지할 수 있었다.
물론 사용하거나 본격적으로 감지할 수는 없었으나, 지금처럼 대놓고 상대가 그를 살필 때는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신식이라는 건 저 둘이 축기기 수사라는 말이기도 하지.’
진현은 약간 긴장한 눈빛으로 문지기들을 살폈다.
검은색 도포로 몸을 감싼 건장한 체격의 두 남자는 한동안 별말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이 지속되던 중 오른쪽에 서 있던 이가 진현에게 손짓했다.
“너, 청유문 제자 아닌가? 뭘 멍하니 서 있는 거냐? 신분패를 꺼내라.”
진현은 그의 말에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저물대에서 금속 패를 꺼냈다.
아무래도 처음 방시를 방문하는 것이다 보니 과하게 긴장했던 모양이다. 이런 정보도 까먹다니.
문지기는 패를 뚫어져라 살피더니 뒤쪽을 향해서 손을 저었다.
“청유문 제자는 입장비가 필요 없다. 바로 들어가라.”
“예, 감사합니다. 선배님.”
진현은 예의 바르게 포권을 하고 그들을 지나쳐 성문을 통과했다.
대종문의 제자라는 이점이 이럴 때는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드디어 방시에 들어선 진현은 공중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풍경에 매료되었다.
넓은 거리 양쪽으로 노점들이 들어서고 그 뒤로 건물을 지어 가게를 낸 점포들이 가득한 모습은 속세의 시장과도 비슷해 보였으나, 그 진면목은 천지 차이였다.
바닥에 좌판을 깐 어떤 노인은 갖가지 영초나 광석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진현에게 익숙한 적회목도 있었고, 그가 생전 처음 보는 갖가지 단약의 원료가 되는 영초들이나 법기를 강화하는데 사용하는 광석들이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선 노점에선 요수 고기로 만든 만두를 판매하고 있었는데, 어떤 요수의 고기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에게 인기는 많았다.
군침을 돌게 하는 만두 찌는 냄새를 지나면 소규모로 법기를 판매하는 점포도 볼 수 있었고, 자그마한 철창에 가둬둔 영수들을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진현은 토끼같이 생긴 영수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하악질을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여러 공법을 늘어놓고 손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과 부적들을 그리며 큰 소리로 호객하는 연기기 수선자들은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은 진현에게 수선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이 결국 인간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었다.
거리에 그 높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누각들은 척 봐도 강대한 세력 출신으로 보이는 수선자들을 받고 있었고, 간혹 축기기 수선자들도 볼 수 있었다.
진현은 처음으로 대형마트를 방문한 어린아이처럼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한참을 보냈다.
“음... 아무래도 부적을 구하는 게 맞겠어.”
물론 아무 목적 없이 떠돌며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
방시에서 주로 판매하는 물품들은 둘러본 진현은 단기간에 실력을 강화하려면 역시 법기나 부적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영수는 길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고, 단약은 검은 공간 외부에서 그의 자질로 얼마나 효과를 볼지 알 수 없었으며, 특이한 비술이나 공법은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렸기에 그 둘이 최선으로 보였다.
진현은 우선 미리 알아봐 뒀던 거리로 걸음을 옮겼다.
“공법 사세요! 연기부터 축기까지의 수행이 담겨 있습니다! 삶에_지친_수선자의_마음수련_역근세수공! 정신 안정에 최고인 공법입니다!”
“원숭이로 변하고 싶지 않습니까! 원숭이 변신을 익히고 싶다면 이 경칩비술을...!”
중간에 손님을 끌어모으려는 수선자들을 떨쳐내느라 진현은 진땀을 뺐다.
산수로 보이는 그들은 연기 초기 정도의 실력을 한 이가 대부분이었다.
누가 봐도 가짜인 공법을 팔며 ‘수선자의 품위’까지 내려놓은 것이, 진현에게 산수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울지 느끼게 해주었다.
‘삼촌한테는 항상 감사해야겠어... 처음으로 입문한 종파가 대종문이라 저런 생활을 피했으니.’
산수 노점들을 뚫고 진현은 다른 곳보다 약간 더 넓은 한 거리에 도착했다.
딱히 표지판이나 구역을 구분하는 무언가는 없었지만, 이 거리에 들어선 품목이라고는 부적뿐이었다.
부적이란, 진현이 전생에서도 여러 번 보았던 것이다.
물론 무당 같은 이들이 직접 사용하는 것을 본 것은 아니었지만, 다양한 매체에서 사용되는 만큼 그 개념은 익숙했다.
이곳의 부적도 큰 틀에서 전생과 다르지는 않았다.
한 장의 종이에 원하는 효능을 담아 원하는 순간에 사용하는 것.
차이라면 이곳의 부적은 진짜라는 점, 그리고 술법을 담아 쓴다는 것이었다.
진현은 옆에 깔린 좌판을 지나며 늘어져 있는 부적들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연기기에 해당하는 1계의 부적 여럿이 거래되고 있었다.
그가 사용할 줄 아는 화탄술 같은 기본적인 술법부터 아직 익히지 못한 갖가지 술법들이 기록된 부적들이 곳곳에서 팔리고 있었다.
가격은 그의 예상보다 더욱 높았다.
화탄술 부적 몇 장에 영석을 2개나 받다니.
하지만 진현은 이내 그것이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자신은 경험해 본 적이 없지만, 수선자의 전투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며 영력을 적절히 분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생의 운동선수들도 처음부터 체력을 다 써버리지 않듯, 만약을 위해 아끼는 것이다.
영력이 부족할 때 미량의 영기로 부적을 촉발하거나, 급박한 상황에 술법을 준비할 필요 없이 곧바로 강대한 술법을 날릴 수 있다는 것은, 평소라면 몰라도 전투나 긴박한 상황에서는 매우 큰 이점이다.
진현은 이곳저곳 부적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쓸만해 보이는 1계 부적을 몇장 구매했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사람들이 꽤 몰린 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마른 체형의 연기 후기인 중년 여성 수선자가 거리에 좌판을 깔아두고 3장의 부적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3장 모두 1계에서도 상급으로 취급되는 고급 술법들이 담긴 부적들이었다.
몰려든 이들은 대부분 그것을 살 재력이 없었는지, 그저 부적들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만 하고 있었다.
진현은 눈을 반짝이며 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 수룡박 부적, 내가 사겠습...”
“소승이 이 수룡박 부적을...”
갑자기 끼어든 상대에 진현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보았고,
똑같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 대머리와 눈이 마주쳤다.
11화
삼응방시(2)
*이전 편의 마무리가 수정되었습니다.
반질반질한 두피가 햇빛을 반사하며 진현의 눈을 찔렀다.
그와 마찬가지로 수룡박 부적을 사려던 인물은 한 승려였다.
그렇다. 승려.
진현이 환생한 이 세상에도 불교는 존재했다.
교리도 비슷했고, 부처를 모시는 것도 동일했다.
진현은 처음 이 사실을 알고 놀라워하긴 했지만, 무협의 세계에서 불교가 등장한다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불교의 영향은 속세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연사(待緣寺)의 선배님이시군요.”
진현은 승려의 차림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대략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이 ‘어린’ 스님은, 연기 후기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광택이 약간 도는 법기로 추정되는 회색 승복을 입고 옆구리에 금빛으로 빛나는 염주를 달고 있었으며, 그 어깨에 대연사라는 글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대연사... 분명 청유문과 함께 인근 수선계의 4대 종문 중 하나였지.’
“아? 시주께선 어떻게 아셨... 아이고, 수건이 또 떨어졌네!”
진현의 인사에 승려는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바닥에서 하얀 수건을 주워들었다.
“하하, 딱히 위세를 부리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천연덕스럽게 수건을 팔에 감아 대연사가 수놓아진 부분을 가리는 승려를 보며 진현은 속으로 황당해했다.
방금 부적을 사려고 끼어들 때 수건을 일부러 흘리는 걸 빤히 봤는데 저런 변명이라니.
게다가 세상 어떤 인간이 자신의 상징을 가리고 다니다가 저렇게 우연인 척 떨어뜨리고 다닌단 말인가.
알리기 싫다면 처음부터 대연사의 글씨가 새겨지지 않은 것으로 입고 다닐 것이지.
어쩐지 일이 귀찮아질 것 같아 진현은 그냥 다른 부적을 구매하기로 했다.
수룡박이 매우 강력한 포박형 술법인지라 대회에서 비장의 한 수로 쓰기에 좋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1계 상급 부적도 쓸만했다.
“하하, 대연사의 선배님이 이 부적을 원하시면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주인장, 나는 대신 이...”
“선배님이라니 시주는 말이 과하십니다. 약간의 경지 차이로 그런 말을 듣기에는 소승이 매우 부족합니다. 그러고 보니 시주도 청유문의 제자셨군요!”
이 스님은 대체 뭘 하자는 건가.
진현은 명석호와 다른 의미로 곤란함을 느끼게 하는 그에게 적당히 대답하며 넘어가려 했다.
괜히 귀찮은 일이나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이 방시가 결단기의 대선배가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도, 청유문에서 그가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다른 대종문 제자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네, 하하. 두 종문은 항상 사이가 좋았죠. 스님과 만난 것도 인연인가 봅니다. 어쨌든 주인장, 이 청검풍 부적을...”
“인연! 그렇습니다, 연! 듣고 보니 생각나는군요, 방장 어르신께서 안 그래도 오늘 제가 귀인을 만날 것이라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이 시주였나 봅니다!”
인연? 귀인?
진현의 미간이 옅게 찌푸려졌다. 스님에게서 순식간에 사이비의 기운이 풍겼다.
“시주, 이건 어떻습니까? 앞으로 귀인과 좋은 연을 맺는다는 의미에서, 이 부적은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진현은 거절하고 싶었다.
난데없이 마주친 대머리가 좋은 연을 맺자며 뭔가를 사주겠다고 하다니, 3살짜리도 넘어가지 않을 수상함이었다.
“선... 스님께서 이 후배에게 선물을 주시려는 마음은 잘 받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호의를 제가 차마 감당하기 힘드니, 영석을 낭비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꼭 귀인에게 사드리고 싶습니다.”
왜 이렇게 끈질긴 건데? 그냥 하는 말로 사준다는 게 아니었나?
진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이 스님을 떼어내려면 그냥 호의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진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하자, 승려는 씩 웃으며 중년의 여수선자에게 영석 30개를 건네고 수룡박 부적을 받았다.
전부터 둘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그녀는 어쨌든 영석을 벌었으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게다가 두 대종문 제자들이 자신의 부적을 사려고 다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만한 홍보도 없었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진현은 어쩔 수 없이 스님을 향해 손을 뻗었고, 한참이 지나도 부적을 건네지 않는 그의 모습에 의아해했다.
“시주께 이 부적을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질문이요?”
방금까지 사주겠다고 떼를 쓴 마당에 이젠 질문에 답하라고? 진현은 이 스님의 태도가 영 이해되지 않았다.
“시주께선 오해하지 마시지요. 그저 질문 하나일 뿐입니다.”
진현은 어쩔 수 없이 이 스님의 장단대로 맞춰주기로 했다. 그러지 않으면 한참을 그에게 잡혀있을 것 같았다.
진현이 거절하지 않자, 승려는 자그맣게 합장했다.
“이건 오래전 제 선배 중 한 분이 제게 한 질문입니다. 제 나름대로 내린 답은 있으나, 저와 연이 있으신 귀인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땅에서 기는 미물부터 구름을 모는 용까지, 모두 선도에 이르기를 희망합니다. 장생이라는 세속적인 욕망에 의해서일 수도 있고, 무한한 향상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도는 멀고도 머니, 그 누구도 끝에 달하리라는 보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서, 진정 불로장생을 이룩한 이가 존재하며, 그가 더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다면, 무엇을 행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생각보다 훨씬 더 진지한 질문에 진현은 약간 놀랐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흥미를 느끼면서도, 대충 대답하기로 했다. 어쨌든 그는 빨리 이 상황을 넘기고 싶었다.
불로장생을 이루고 나면?
그는 아직 100살도 못 살았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더 나아갈 길이 없다면?
애초에 그가 바라는 삶은 끝없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평안한 삶이었다.
살 거 다 살고 할 거 다 했으면 뭘 하겠는가?
“뭐, 지루해서 스스로 죽지 않겠습니까?”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한 진현은 순간 이것이 무례하게 들릴 수 있음을 자각했다.
나름대로 진지한 질문을 던졌는데 상대가 이런 대답을 한다면 그도 짜증을 낼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방금은...”
“그렇군요! 자살이라! 대자대비하신 부처님께서 윤회를 설파하셨듯 그 절대자도 죽음을 출구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답과 비슷하지만 약간 결이 다른 것이 참 재미있군요.”
스님은 진현의 예상과 다르게 진지하게 뜻깊은 대답을 들었다는 듯 혼자 눈을 감고 음음, 하며 중얼거리다 부적을 내밀었다.
“여기, 귀인께 드리는 부적입니다.”
진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수룡박 부적을 받아들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영석을 30개나 공짜로 받았으니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 스님의 의도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 수상함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다.
진현은 가지고 온 영석을 털어 싱글벙글 웃는 여수선자에게서 수룡박보다 좀 더 싼 값에 청검풍 부적을 구매했다.
예상외의 이득으로 영석을 조금은 아꼈기에, 진현은 다른 부적이나 법기를 구해보기로 했다.
“시주, 이왕 이렇게 된 것, 제가 한턱내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그의 발걸음은 뒤에서 들려온 승려의 말에 세워졌다.
대체 이 스님은 뭐가 이렇게 끈덕지단 말인가.
진현은 다시 거절하려 했지만, 이 스님의 행동을 보았을 때 분명 그가 받아줄 때까지 따라올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게 이끌려 방시 한복판의 술집에 입장했다.
어?
***
“그래서 말입니다! 방장 어르신이 제게 고기 몇 점 집어먹었다고 온종일 매타작을...!”
“하하하.”
“역시 축기 선배들을 대접하는 곳이니만큼 술맛이 끝내줍니다, 시주도 한잔 하시지요!”
“하하.”
진현은 그저 웃으며 술과 고기 안주를 집어 먹었다.
스님도 웃으며 술과 고기 안주를 집어 먹었다.
이 세상의 불교에서도 분명 승려들은 술과 고기를 피해야 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진현은 잠시 의문을 품었지만, 수선자니까 그런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진현은 이 스님, ‘보리’ 와 대화하며 그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그에게 무슨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했지만, 보리는 생각보다 순진한 존재였다.
그는 진심으로 ‘방장 어르신’이 한 말을 믿고 있었으며, 진현에게 부적을 사 준 것도 귀인에게 연을 맺기 위한 선물이었을 뿐이다.
물론 진현이 그 얘기를 전부 믿지는 않았지만, 명석호에 비견될 만큼 거리낌 없는 그의 태도와 파계적 행보와 더불어 꾸밈없는 말에 경계를 어느 정도 풀었다.
결국 그는 보리와 한참 수다를 떨고, 서로의 종문에 들르게 된다면 만나겠다는 약조까지 하고서야 헤어질 수 있었다.
여전히 바글바글한 방시 거리를 돌아다니며 진현은 이 인연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종문의 다른 선배들에 의하면 수선계는 서로를 약탈하려는 생각만 가득한 이들이 7할에 남을 속이려는 이들이 3할이라 했는데, 그런 이들 중 보리 같은 이를 만난 건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현은 남은 영석으로 방시를 돌아다니다 침 형태의 법기를 하나 구매하고 방시를 나섰다.
나가는 길에 입구에서 팔던 요수 고기 만두를 하나 손에 쥔 채 은연반을 펼친 진현은 순식간에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그러나 그가 만두를 다 먹기도 전에, 진현은 뒤에서 흐릿한 영력을 감지했다.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진 진현은 만두를 저물대에 쑤셔 넣고 은연반의 속도를 키우는 동시에 열양검과 방시에서 산 부적 몇 장을 양손에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뒤에서 느껴진 흐릿한 영력은 약해지지 않고 점점 뚜렷해지며 그를 따라왔다.
진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원래 가던 방향을 크게 벗어나 다른 봉우리로 향했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영력은 그대로였다.
‘추격?’
진현의 뇌리에 보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조금 전까지 좋게 헤어진 사이라고 해도, 그는 이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뒤통수를 잘 치는지 알았다.
무림에서도 틈만 나면 스승을 베고 비급을 탈취한 악적의 소식이 다분했는데, 수선계에서 일면식만 있는 이들을 상대로는 어떠할까.
게다가 방시를 떠나는 수선자를 노리는 도적의 이야기는 수선계에서 지나가는 상단을 노리는 산적의 이야기만큼이나 흔했다.
아직 청유문까지 남은 거리는 너무나 멀었다.
진현은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속도를 늦췄다.
분명 그를 몰래 기습할 방법도 있을 텐데 멀리서부터 영력을 드러내는 것은 어쩌면 그를 죽이려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목적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진현은 비행 중 공격을 받는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빠르게 인근의 공터로 내려앉은 그는 은연반을 회수하고 소매 속에 여러 장의 부적을 준비한 뒤 마음을 가라앉혔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심장이 빠르게 박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쉬익-
얼마 지나지 않아 검 형태의 법기를 탄 누군가가 공터에 내려앉았다.
얼굴과 몸을 전부 흑의로 가린 그는 연기 9층의 영력을 뿜고 있었다.
진현은 그의 풍성하게 자라 묶여있는 머리를 보고 그가 보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자는 누구인가?
진현은 자신이 방시에 있던 동안 누군가에게 원수를 사거나 노려질 만한 상황이 있는지 생각했다.
자신이 산 부적들을 노리는 건가?
가능성은 있었지만...
“청유문의 제자가 맞느냐?”
그때 진현의 상념을 깨고 흑의인이 물었다.
진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청유문의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를 따라온 건가? 왜?
“어차피 대답은 필요 없다.”
흑의인은 순식간에 푸른빛의 검을 뽑아 들더니 진현을 향해 날렸다.
진현은 빠르게 옆으로 몸을 틀며 들고 있던 열양검으로 검을 쳐냈다.
강렬한 진동이 그의 팔을 흔들었다.
진현은 억울함에 속으로 한탄했다.
그는 그저 평화로운 수선 생활을 보내고 싶은데, 어쩌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12화
습격
진현이 튕겨낸 푸른 검은 공중에서 멀리 날아가지 않고 곧장 방향을 돌려 그를 향해 쇄도했다.
진현은 곧바로 소매 안쪽에서 쥐고 있던 부적을 휘둘렀다.
영력이 주입되며 빠르게 점멸한 부적은 지면에서 대량의 흙을 솟게 해 벽을 세웠다.
진현의 가슴팍으로 돌진하던 검은 토벽에 막혀 강렬하게 진동했다.
검이 막힌 것을 확인한 진현은 곧바로 열양검을 흑의인을 향해 날렸다.
상대가 다루는 법기와 하루 종일 씨름해 봐야 이길 수 없다.
큰 피해라도 준다면 도망칠 기회라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하급 법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열양검으로는 연기 후기의 수선자에게 큰 영향을 줄 리 만무했다.
진현도 그것을 알았기에 열양검을 어물술로 투척하자마자 빠르게 영력을 끌어모으며 술법을 준비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상대는 수월하게 그의 공격을 막았다.
흑의인은 양손에서 검붉은 화염을 피워올리더니 진현의 눈이 좇기 어려운 속도로 열양검을 낚아챘다.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인 열양검은 구슬픈 비명과 함께 금이 가며 영력을 잃었다.
‘맨손으로? 저 화염은 뭐지? 어떻게... 아니, 우선은 공격부터!’
아무렇지 않게 열양검을 망가뜨리는 상대의 모습에 놀라는 것도 잠시, 진현은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공격을 날렸다.
그의 오른손 위로 밝은 뇌전이 일며 어두워지는 주변 풍경을 밝혔다.
번개는 빠르게 압축해 공의 형태로 뭉쳐져 포탄처럼 흑의인에게 쏘아졌다.
그것은 진현이 창뢰각령공에서 배운 몇 개의 술법 중 하나로, 뇌구라는 단순한 이름을 가진 술법이었다.
이름만큼이나 단순하게 뇌전의 구체를 날리는 게 전부인 술법이었지만 위력은 강력했다.
연기 후기의 수선자라 하더라도 지금 그의 경지로 쏜 뇌구를 정통으로 맞고 멀쩡하긴 힘들 것이다.
열양검을 버리고 술법을 날릴 준비를 하던 흑의인은 빠르게 다가오는 뇌구에 눈을 크게 뜨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여전히 추격하는 뇌구에 눈살을 찌푸리고는 저물대에서 그의 몸집 만한 방패를 꺼내 들었다.
꽈드득-
밋밋한 황색의 방패는 뇌구와 충돌하며 저릿한 충돌음을 냈다.
진현은 상대가 방어 법기를 꺼내는 모습에 혀를 찼다.
애초에 그에게 너무나 불리한 싸움이었다.
수선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돌 조각의 능력으로 경지만 빨리 쌓았을 뿐, 다른 수단이 부족했다.
그는 방어 법기도 없는 처지라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한탄도 잠시였다.
뇌를 돌며 정신을 가라앉히고 사고를 가속하는 영력에 힘입어 진현은 곧바로 다음 수를 취했다.
우선 이전에 꺼냈던 것과 같은 부적을 다시 뿌려 여전히 상대의 조종하에 울부짖는 푸른 검을 완전히 고정했다.
그리고 방시에서 구매했던 적색 침 형태의 법기를 꺼내든 그때, 상대도 그의 뇌구를 무력화했다.
황색 방패는 거미줄 같은 탄 흔적이 새겨졌고, 미약한 전류가 여전히 그 위에 남아 튀어 오르고 있었다.
“하필 뇌법인가.”
흑의인은 방패를 회수하고 침 법기를 꺼내 들고 있던 진현을 향해 크게 손을 휘저었다.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위협적인 적을 봐주다 역전당할 마음은 없었다.
그의 손에서 타오르고 있던 화염이 폭발적으로 불어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전방으로 퍼져나갔다.
허공을 불태우며 다가오는 화염에 진현은 침을 사용한 공격을 포기하고 소매에 준비해 둔 부적을 공중에 뿌렸다.
세 장의 부적이 공중에서 짧게 빛나며 대량의 물을 쏟아냈다.
수류는 빠르게 형태를 갖추며 두 겹의 반투명한 방패로 굳어졌다.
‘사 둔 방어 술법이 주로 수 속성이라 망정이지, 아니었...’
파각-
화염과 닿자마자 첫 번째 방패가 무너졌다.
진현은 곧바로 땅을 내리치며 어물술로 지면을 파 올렸다.
급하게 시전하느라 영력이 크게 낭비되었지만, 빠른 속도로 벽을 추가로 쌓을 수 있었다.
그에 모자라 진현은 만일을 대비하며 한 손으로 수룡박 부적을 준비했다.
방어용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다면 곧바로 격발할 생각이었다.
곧이어 두 번째 방패마저 부서졌고, 세 번째 방패마저 뚫고 기세가 약해진 화염은 다행히도 진현의 앞에 쌓인 흙을 반쯤 파괴하고 나서 사라졌다.
매캐한 탄내와 함께 기이한 기운이 진현의 감각을 자극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판별할 시간은 없었다.
흑의인은 화염을 뒤따라 어느덧 진현의 바로 앞까지 거리를 좁힌 상태였다.
진현은 곧바로 침을 조종해 흑의인에게 발사했다.
열양검보다 빠른 속도로 날아든 침에 흑의인은 순간 정지하며 어느새 꺼내든 또 다른 망치 형태의 법기로 침을 내리쳤고,
그로 인한 짧은 빈틈 속에서 진현은 준비한 부적을 격발시켰다.
콰아아-
폭포소리와 함께 거센 물결이 허공에서 쏟아져나왔다.
이전의 부적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수류는 세 줄기로 갈라져 저마다 용의 형상을 띄었다.
세 마리의 수룡은 순식간에 전방을 휩쓸어 남아있던 화염을 꺼트렸고, 흑의인이 반응할 새도 없이 그를 짓눌렀다.
수룡들이 형성한 물의 장벽에 갇힌 상대를 보고 진현은 상급 부적의 위력에 감탄했다.
그리고 그 이상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떨어져 있던 침 법기를 회수했다.
살인에 대한 망설임은 놀랍게도 적었다.
어차피 죽이지 않는다면 상대가 자신을 죽일 것이다.
방금까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던 진현은 분노와 두려움을 지지대 삼아 수룡에게 포박된 흑의인의 가슴팍에 침을 찔렀다.
쉬익-
그리고 저지당했다.
진현은 믿기 힘든 눈으로 어느새 팔목을 감고 있는 까만 끈을 보았다.
아니, 샛노란 두 눈을 빤히 뜨고 있는 그것은 끈이 아니었다.
“뱀?”
상대의 영수인가?
진현은 자신의 팔목을 단단히 죈 채 침의 방향을 틀어버린 뱀의 등장에 경악했다.
아무래도 상대는 그와 전투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 뱀을 풀어둔 듯했다.
진현은 화탄술로 뱀을 태워버리려 했으나 뱀은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팔목에서 떨어져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털을 솟게 하는 위기감에 진현은 곧바로 공격을 재개했으나-
“커억!”
복부에서 퍼지는 강렬한 고통에 시야가 도는 것을 느꼈다.
영력으로 강화된 신체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허리가 접히는 그 위력에 구토감이 치솟았다.
침마저 떨어뜨린 채 무력화된 진현에게, 어느새 수룡박의 구속에서 벗어난 흑의인이 다가왔다.
“척 봐도 전투경험이 거의 없는 애송이가 이 정도의 실력이라니. 틀림없이 청유문 내에서도 유망주겠지. 이거 월척이군.”
태연한 말투와 다르게 그는 속으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연기 7층을 상대로 이 정도로 고전하다니, 영력도 많이 소진한 상태라 그가 미리 흑류사를 풀어두지 않았다면 역으로 당할 수도 있었다.
“임무만 아니었다면 바로 죽였을 텐데, 쯧.”
그는 분풀이 삼아 진현의 가슴팍을 걷어차 쓰러트렸다.
상대가 날린 망치 법기에 정통으로 맞은 진현은 반응도 못 하고 그대로 엎어졌다.
흑의인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저물대에서 작은 항아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기괴한 생김새의 벌레 하나를 끄집어냈다.
진현은 충혈된 눈으로 그 끔찍하게 생긴 애벌레를 보며 신음했다.
“걱정 마라. 이 귀혼고(鬼魂蠱)가 네놈의 혼해에 자리 잡기만 하면 다 편안해질 거다.”
흑의인은 놀리듯 벌레를 진현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고는 그것을 그의 가슴팍 위에 올렸다.
벌레는 놀랍게도 녹듯이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진현은 자신의 혼해에 그 벌레가 침입한 것을 알아차렸다.
급격히 어두워진 진현의 표정에 흑의인은 비웃음을 날렸다.
“귀혼고가 네 혼해에 들어선 이상 벗어날 방법은 없다. 보잘것없는 혼이 귀혼고에게 먹히는 것이 싫다면 얌전히 누워있어라.”
진현은 그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흑의인은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을 빠르게 인정하는 상대는 다루기 편했다.
그는 곧바로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진현과의 전투에서 소비한 영력을 빠르게 충전해야 했다.
이곳은 방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기에, 혹시라도 마도를 싫어하는 축기기 수선자를 만났다간 그도 멀쩡할 순 없었다.
진현의 공격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았다. 귀혼고가 심어진 이상 그는 그를 공격할 수 없었고, 귀혼고에게 명령만 내리면 언제든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흑의인은 가부좌를 튼 지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앞에 그늘이 진 것을 감지하고 눈을 떴다.
“뭐냐? 죽기 싫으면 다시 얌전히 앉아 있어라.”
그의 앞에 선 것은 진현이었다.
무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흑의인은 잠시 불안함을 느꼈지만, 상대가 그에게 위협을 가할 방법은 없었다.
귀혼고는 축기기 수사라도 한번 당하면 벗어날 수 없었다. 하물며 연기기 중기의 꼬마가 그를 떨칠 수는 없었다.
흑의인은 결국 이 꼬마에게 교훈을 가르쳐야겠다며 귀혼고에게 발작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뭐?”
아무런 반응을 받지 못했다.
그는 놀라움과 함께 자신의 코앞으로 쇄도하는 진현의 손바닥과,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뇌전을 마주했다.
쩌엉-
굉음과 함께 본 전류가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하아...”
타닥거리는 전류와 함께 숯이 되어버린 상대의 모습에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적색 침 법기를 주워들어 그의 가슴팍을 찌르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흑의인을 확실히 처리한 진현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의 혼해를 관조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의 혼의 존재와 그것이 머무는 혼해, 그리고 그 끔찍한 귀혼고가 느껴졌다.
물론, 귀혼고는 현재 그의 혼해에 먼저 거주하고 있던 뇌흔에 의해 제압된 상태였다.
진현은 세 갈래의 뇌흔에 관통되어 몸부림치는 귀혼고에 구역감을 느끼며 뇌흔을 더 강하게 자극했다.
결국 귀혼고는 강력한 전류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뒤로도 몇 번이고 혼해를 훑은 뒤에야 진현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의 역전은 한 마디로, 운이 좋았다.
혼해로 침입하는 귀혼고는 일반적인 수선자라면 당한 상태에서 희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혼해에 뇌흔을 쌓아 수련하는 창뢰각령공을 익혔다.
게다가 그의 뇌전은 귀혼고에게 상성이 좋았는지 혼해에 들어온 귀혼고가 그의 혼에 닿기도 전에 제압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세 갈래의 뇌흔으로 귀혼고를 제압한 후 창뢰각령공에 기록된 비술 중 하나인 폭뢰환(爆雷環)을 사용해, 뇌흔 하나를 희생하는 대가로 상대를 일격에 죽일 수 있었다.
상대가 귀혼고에 대해 절대적인 자신감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는 승리였다.
진현은 더 이상 전투의 현장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상대가 혼자라는 보장도 없었고, 그의 말과 태도로 볼 때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 듯했다.
그는 괜한 벌집을 쑤시고 싶지 않았다.
전투와 첫 살인으로 인해 달아올랐던 열기가 빠르게 식었다.
진현은 흑의인의 가슴에서 침을 뽑아내고 그의 허리춤에 매달린 두 개의 주머니를 가져왔다.
하나는 저물대였고, 하나는 축소된 형태의 우리 형태로 보였는데, 영수를 가두는 영수대(靈獸袋)의 일종이었다.
진현은 그것들을 챙긴 후 흑의인의 시체를 땅에 묻었다.
이어서 흑의인의 조종을 잃고 얌전해진 푸른 검을 토벽에서 파내 저물대에 회수한 뒤, 은연반을 펼쳤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청유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비행했다.
이번에는 오리 한 마리가 통째로 얼굴에 틀어박히더라도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13화
전리품
영력을 바닥까지 짜낸 진현은 결국 은연반을 한계까지 몰아 청유문으로 귀환했다.
돌아오는 내내 뒤에서 누군가의 공격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 그는 청유문의 범위로 들어서고 나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서둘러 제자 동부로 향한 진현은 익숙한 동굴에 들어서 돌문을 닫고, 곧바로 남은 토류벽 부적으로 완전히 밀폐된 공간을 형성했다.
그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체력은 물론이고 급한 비행으로 인해 영력까지 바닥이 났다.
진현은 그대로 수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영기를 회복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서야 지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진현은 동부의 작은 방에 설치된 샘에서 찬물을 퍼 숨이 막힐 때까지 들이킨 후 물을 떠 차를 끓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한 커피나 마시고 싶었지만 있는 음료가 차뿐인데 뭐 어쩌겠는가.
진현은 언젠가 커피와 비슷한 영초가 없을지 찾아보기로 생각하며 방금 일어났던 전투를 떠올렸다.
‘운이 좋았어.’
운이 좋군. 정도로 끝날 만한 게 아니었다.
상대가 높은 경지로 인해 방심하지 않았다면,
살려둘 의도가 아니었다면,
가장 믿던 한 수가 그에 의해 제압되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다.
진현은 크게 반성했다.
만약 그가 좀 더 강력한 술법이나, 다양한 기능의 법기, 아니면 수선자들이 갖출 만한 수단을 뭐라도 더 갖췄다면 싸움의 양상이 달랐을 수도 있다.
좀 더 강한 수단이 있었다면 처음에 더 우세를 점했을 것이고, 방어 법기가 있었다면 반격을 그렇게 크게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의 전투 경험이 부족해 상대가 미리 깔아둔 수를 눈치채지 못한 것도 있었다.
진현은 허리춤에 달린 영수대를 탁자 위에 얹었다.
영수.
딱히 영수를 전문으로 다루는 수선자가 아니라도 영수를 한 마리 정도 소유하는 의미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 어느 순간이든 홀로 적을 상대하는 상황만큼은 피하게 해주는 것이다.
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시에 한번 오갔을 뿐인데 바로 습격을 받다니, 수선계는 정말로 위험했다.
진현은 이번 전투를 반면교사 삼아, 앞으로는 좀 더 다양한 전투 수단을 갖추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적어도 연기 후기에 오르기 전까지는 종문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야겠어.’
차를 마시며 속으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진현은 흑의인에게서 얻은 전리품을 살폈다.
먼저 영수대.
진현은 우리 형태로 제작된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철로 만들어진 우리의 외형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허상에 가까웠다.
실질적으로는 저물대와 비슷하게 제작된 공간 법기로, 영수 같은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제작된 주머니나 다름없었다.
진현은 잠시 고민하다 영수대를 옆으로 치웠다.
안에 담겨 있을 그 검은 뱀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나, 한번 주인을 인식시킨 영수는 다른 이가 길들이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경지가 더 높았다면 모를까, 같은 연기기의 수준으로 강제로 복종시킬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는 저물대를 꺼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기기 수선자가 사용하는 하급 저물대라, 진현이 약간의 영기를 불어넣자 안의 내용물을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촤르륵.
우선 눈에 띤 것은 영석이었다.
진현은 저물대를 쏟는 탁자에 기울였고, 영석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100개에 달하는 그 수에 진현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원휴머니 상환은 걱정 없겠네.”
원휴에게 빌린 돈과 이자를 갚고도 수십 개의 영석이 남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가 사용한 부적의 값과 부서진 열양검의 가치는 넘는다.
진현은 이어서 저물대를 뒤져 몇 가지의 물건을 더 꺼냈다.
과연 연기 후기의 수선자라 그런지 영석 외에도 가지고 있는 것이 꽤 되었다.
우선 일반적인 것으로 하급 영초 몇 뿌리와 명석호가 사용하는 것을 본 적 있는 광석 몇개, 그리고 정체 모를 단약 세 알이 남아있는 호리병이 있었다.
진현은 전부 백보루에서 감정을 받아 팔거나 원휴에게 영석을 받고 넘기기로 했다.
단약은 좀 탐이 났으나, 딱 봐도 영기가 약한 것이 백보루에서 구할 수 있는 것만 못했다.
이어서 진현은 저물대에서 나온 법기들을 어물술로 띄웠다.
하나는 그가 가둬뒀었던 푸른 검이었고, 하나는 마지막에 그를 쓰러뜨린 망치였으며, 마지막 하나는 그의 뇌구를 막은 방패였다.
영기를 불어넣어 한동안 법기를 다뤄보며 진현은 법기들의 능력을 대체로 깨달았다.
먼저 검은 중급 법기로, 영력을 주입해 두면 바닥이 날 때까지 설정한 목표를 쫓아가 찔렀다.
진현은 검이 그가 조종하는 돌멩이를 따라 동부를 종횡무진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원래 검을 상대가 조종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검 자체의 기능이었다.
다만 그 추격능력과 강도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점은 없었다.
망치도 같은 중급 법기였다.
금색 몸체에 원통형의 머리가 달린 망치는 강력한 충격파를 내뿜을 수 있었다.
생김새로 보건대 직접 휘두르기보다는 투척에 특화된 것으로 보였다.
적어도 검보다는 공격력이 훨씬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진현은 대회에서 이것을 주 공격수단으로 쓰기로 결심하고 조심스레 저물대에 넣었다.
마지막 방패는, 안타깝게도 폐기 직전의 상태였다.
특수한 기능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것을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진현은 그래도 방어 법기이니 그것을 상대의 술법을 한번 막을 버림패로 삼기로 했다.
다른 법기도 더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흑의인의 저물대의 법기는 그것이 다였다.
진현은 아쉬움에 혀를 차고 마지막 두 물건을 꺼림칙한 표정으로 끌어왔다.
“이 둘은...”
하나는 흑의인이 귀혼고를 꺼내든 항아리였고, 다른 하나는 어두운 가죽표지를 한 서책이었다.
책의 표지에는 핏빛 글씨로 ‘귀혼마공’ 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마공이다.’ 라고 외치는 듯한 그 공법을 조심스레 펼친 진현은 다행스럽게도 마공서에 정신을 먹혀 사악한 웃음소리를 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처음 접하는 마공에 진현은 불편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끼며 그 내용을 탐독했다.
놀랍게도 그 초반의 내용은 일반적인 공법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천지영기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공법의 구결에 따라 마기로 전환해 수련하는 것만이 눈에 띄는 점이었고, 그 외의 수련은 평범했다.
“혈제?”
그러나 마공이란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곧 눈살이 찌푸려지는 요소가 튀어나왔다.
진현은 귀혼마공에서 특정 술법이나 법기를 다루거나 만들기 위해, 혹은 비술의 사용을 위해 살인은 물론 대량의 피나 혼을 요구하는 것에 놀랐다.
그 잔인함에 놀란 것도 있지만, 그 비술들의 다양함과 파괴력에 놀랐다.
예를 들어 ‘칠혈환(七血丸)’ 이라는 기술은 수선자의 피를 정제해 일곱 알의 구슬을 빚고, 이를 사용해 순간적으로 경지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주었다.
계속해서 공법을 살핀 진현은 곧 흑의인이 사용하던 흑염수라는 술법도 발견했고, 이 공법이 축기 후기까지의 수련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수련에 적용하여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많이 없었다. 마도 수선자들의 수단에 대해 이해하게 된 것은 이득이었지만.
그리고 한 가지 대목에서 진현은 자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귀혼마공에는 귀혼고를 다루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귀혼고를 제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말의 언급도 없었다.
귀혼고를 만들 줄 모르는 흑의인이 귀혼고를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 그것을 만들 줄 아는 이가 그에게 전해준 것이리라.
진현은 혼해 속 뇌흔을 준비하며 한 손에 화탄술의 화염구를 피워올리고 조심스레 항아리를 열었다.
항아리의 안에는 이전에 진현이 보았던 것과 같은 귀혼고 하나가 천천히 꾸물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에게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끔찍한 생김새와 능력에 치를 떨며 진현은 술법을 되돌리고 다시 항아리를 밀봉했다.
아직도 의문은 많았다.
흑의인은 그를 붙잡아 무엇을 하려 했던 것일까.
그가 속한 단체는 어디인가.
하지만 진현은 모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가 무슨 사악한 의도를 지닌 거대한 마도 단체에 속한 자이며, 수선자들을 납치하고 다녀도 그와 무슨 상관인가.
그는 그저 조용히 수련하며 평안한 생활을 유지하면 됐다.
고민을 날린 진현은 이 곤란한 두 전리품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했다.
마공이 적힌 공법은, 익히지 않더라도 활용할 수 있는 정보나 참고용의 자료로 가지고 있을 만했다.
그가 마공으로 전환해 수련하지만 않는다면 상관없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귀혼고는 다른 얘기였다.
이건 명실상부한 마공의 산물이자 지극히 악독한 고의 일종이었다.
이런 걸 대놓고 종문 내에서 쓴다면 마도의 첩자로 몰릴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버리기에는 효과가 너무 강하고... 모르겠다. 일단 가지고 있자.”
고민하던 진현은 결국 귀혼고 항아리를 흑의인의 저물대에 담은 채 동부 지하를 파 그곳에 숨겼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불길하다고 굳이 낭비하기는 싫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진현은 마음을 가볍게 할 겸 몇 주 후에 있을 대회를 떠올렸다.
이번 습격으로 인해 그는 쓸만한 법기는 물론 영석까지 벌었다.
적어도 이전보다는 더 탄탄한 준비를 갖추고 대회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하필이면 수룡박 부적을 소모해버렸으니... 대회에서 한 수로 쓸만한 게 없으려나?”
그가 사 둔 청검풍 부적도 상급 부적이었지만, 거센 칼바람을 소환해 공격하는 법술은 상대가 적절한 방어수단을 갖추고 있다면 막힐 가능성이 높았다.
수룡박 같이 강력한 포박형 술법이라면 안정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었기에, 진현은 다른 수로 쓸만한 것을 고민했다.
“방시에 한 번 더 가? 아니지, 흑의인의 동료가 근처에 있을지 알 수 없는데 한동안 다시 방시를 찾을 수는...”
그가 안전불감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당분간 삼응방시 주변을 돌아다닐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보루에서 뭔가를 구해야 하나?
그렇지만 백보루의 자원에는 한계가 있어서 애초에 방시로 향한 건데...
진현은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리다, 문득 시선이 영수대로 향했다.
그의 두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귀혼마공에는 다양한 마도 비술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영수를 이용하는 것도 있었다.
저급한 영수를 강제로 흉폭화시키는 동시에, 본래의 경지를 뛰어넘게 하는 강력한 능력을 지니지만 부작용도 큰 술법이었다.
주인을 인식하지 못하며, 짧은 시간 후에 사망하는 단점.
영수를 한 마리 잃는 것은 물론 같이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기에 일반 수선자라면 최후의 수단으로 도망갈 시간을 벌기 위해서나 쓰는 술법일 것이다.
그러나 진현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영수대 안에서 똬리를 틀고 있을 검은 뱀을 사용하면 되었다.
자신을 죽일뻔한 생물에게, 관대한 마음을 품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뱀은 연기기에 해당하는 1계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강함을 지녔으니, 너무 강력해져 그에게까지 피해를 줄 가능성은 작을 것이다.
비장의 한 수로 딱 맞았다.
진현은 영수대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너 때문에 수룡박을 날려 먹었으니까, 네가 대신 흑사박이라도 되어야겠다.”
***
습격으로부터 어느덧 다시 2주가 흘렀다.
종문 제자 대회가 코앞까지 다가온 이날, 진현은 청화각에서 하 사숙의 제련을 돕고 있었다.
14화
전야
청화각 제 3분각.
기와집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하 사숙의 제련용 동부.
청화각이 위치한 봉우리 전체를 뜨겁게 달구는 열기를 뿜어내는 이 동굴 속에서, 한 차례의 제련이 진행 중이었다.
진현이 하 사숙으로 부르는 하승은 동부의 심부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농구공 크기의 구멍이 바닥에 뚫려 있었는데, 그 구멍 사이로 붉은 화염이 넘실거렸다.
지화.
인근의 맥에서 화기를 끌어와 집중시켜 분출시키는, 일종의 소규모 화산이었다.
물론 넓은 수선계에는 천연적인 지화도 있었지만,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효율도 인위적인 것과 비슷했기에 일반적으로 연기를 할 때는 이런 인공 지화를 사용했다.
하승은 지화의 열기를 감지하며 옆에서 커다란 청동 화로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들어올렸다.
그리고 솟구치는 지화의 위에 화로를 옮긴 후 양손을 펼쳤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화로가 자리를 잡았고, 그의 양 소매와 저물대에서 수십 가지의 항아리나 옥함, 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흑섬석을 제련하고 있을 테니, 너희 둘은 보조 재료들을 혼합해 두어라.”
가장 귀해 보이는 옥함에서 주먹만 한 검은 돌을 꺼내든 하승은 화로에 그것을 날리며 말했다.
“네, 사부님.”
“네, 하 사숙.”
그의 지시에 하승의 뒤에 서서 이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명석호와 진현이 공손히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하승은 달궈진 화로에 투입된 흑섬석에 집중하며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았다.
진현은 명석호와 함께 잡다한 광석들을 보관함들에서 꺼내며 그 모습을 흥미 깊게 지켜보았다.
이 수선계에서 사용하는 법기, 영기, 법보를 포함한 온갖 도구들을 만드는 수선기예인 연기는, 그의 전생의 ‘공장식 생산’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전생의 전통적인 대장 기술이나 목공 기술과 비슷하다고 하기도 힘들었다.
예를 들어 현재 하승이 화로에 넣고 제련하고 있는 흑섬석 같은 광석은, 그의 전생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녹여서 다른 형태로 바꾸거나 재료를 첨가해 강도를 바꿀 것이다.
하지만 연기는 달랐다.
광석을 뜨거운 기구에 넣고 달구는 것은 같았으나, 그것을 녹인다기보다는 강력한 열기의 힘을 빌려 광석을 ‘조합 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하승이 화로 앞에서 흑섬석의 상태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었다.
단순히 녹이는 것이 아니라, 영력을 이용해 그것의 상태를 변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기의 방식은 수선자나 각 세력이 갖춘 기술이나 비전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연기였다.
이는 심지어 진현이 보았던 비주 등을 만드는 데에도 사용되는 방법으로, 특정 목재도 이런 식으로 가공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갖가지 재료에 대한 지식과 그를 다루는 데 능숙해야 함은 기본이요, 연기 과정 동안 실수하지 않을 영력과 정신력이 필요했다.
특히나 정신력의 필요 탓에 신식을 열지 못한 연기기 수선자들은 연기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이가 드물었다.
“석호야, 적회목을 5조각 던져 넣어라.”
“네.”
집중을 유지하던 하승의 부름에 진현의 곁에서 연기 재료를 준비하던 석호는 벌떡 일어나 동부의 구석에서 숯덩이들을 꺼냈다.
그리고 하나하나 화로의 아래쪽, 지화의 불 위로 걸치게끔 던져 넣었다.
적회목 숯덩이들이 지화와 접촉하자 그 즉시 불꽃이 폭발하듯 부풀어 올랐다.
어마어마한 열기와 함께 흥분하듯 춤추는 불꽃에 진현은 반사적으로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물론 불꽃은 다시 하승의 조종하에 진정되었다.
그러나 증가한 열기는 여전히 동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진현은 다시 광석 조각들을 꺼내 각종 술법으로 그것들을 사용 가능한 상태로 다듬거나 준비했다.
그가 하 사숙의 동부에서 제련을 도운 것도 이제는 벌써 여러 번 되었다.
축기기 수사의 연기 과정을 직접 옆에서 지켜보며 체험하는 것은 그의 연기 지식을 크게 늘려주었다.
사실 명석호의 말에 따르면 하승의 경지와 실력으로 제련 과정에서 그들의 도움은 딱히 필요 없었다.
그가 그들에게 옆에서 일을 돕게 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연기 과정을 보고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호의였다.
물론 제자인 명석호에게는 당연한 호의겠지만, 진현은 그가 자신에게도 이런 기회를 준다는 것에 크게 감사했다.
연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벌써 명석호의 도움으로 법기 제작을 시작하는 그에게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렇게 하승의 제련은 몇 시간을 내리 지속되었다.
명석호가 적회목 숯을 더한 것도 수차례에, 그와 진현이 곁에서 정제한 다양한 광석과 보조 재료들도 거의 다 소모했다.
진현은 표정이 한결 풀어진 하승의 상태를 보며 제련 과정이 얼추 끝나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됐다, 이제 금엽수액을 주거라.”
진현은 하승의 지시에 들고 있던 병을 그에게 전달했다.
안에서 옅은 이파리 문양의 금빛 액체 위로 간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푸쉭-
하승은 화로를 열어젖히고 안에서 거친 표면의 묵색 장검을 꺼냈다. 물론,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다.
그리고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불안정하게 진동하는, 금방이라도 휘어져 버릴 것만 같은 장검에 금엽수액을 부었다.
장검의 표면을 타고 흐른 금빛 액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하승의 인도에 따라 장검의 검자루와 검신을 타고 흐르며 빠르게 온도를 내리고 검을 고정했다.
수액이 전부 소모되고 나자, 검은 아름답고 맑은 표면을 지닌 검으로 변해 있었다.
하승은 검을 손에 쥐고는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나의 영기가 완성되었다.
그의 뒤에서 진현은 부러움과 갈망이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
제련이 끝나고, 동부의 밖.
진현은 명석호와 함께 동부의 청소를 마치고 우물로 향하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영기로 열기를 막았다지만, 더운 것은 여전했다.
“그러고 보니 현이 너도 이번에 대회에 나간다고 했었지?”
“네. 비록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승은 힘들겠지만, 경험 삼아 나가보려고요.”
명석호는 진현의 대답에 고개를 저었다.
“에이, 벌써 연기 7층에 오른 천재가 그리 자존심이 낮아서 되겠어? 게다가 얼마 전에는 마도 수사까지 잡았다며? 사형들을 다 때려눕히고 1등을 하겠습니다! 같은 패기가 있어야지!”
“하하하...”
진현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지난번 마도 수사에게 습격을 받은 후, 그는 이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상대의 배경이 어떤 줄 알고 아무에게나 가서 상대를 죽였다고 말을 하겠는가.
그는 종문에 입문한 지 몇 달 밖에 안되는 연기기 제자였다.
알고 보니 상대가 다른 대종문의 장로가 아끼는 손자였고, 그가 괜히 청유문의 사숙들에게 이에 대해 말을 꺼냈다가 상대를 죽인 것이 자신이라는 게 알려진다면?
청유문이 경지를 좀 빠르게 올리고 있는 제자 하나를 보호하겠다고 다른 종문에서 그를 넘기라는 요구를 무시할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너무 과대하게 걱정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마도 수선자를 죽인 일인데, 오히려 칭찬을 들을 수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애초에 그는 스승도 없는데 누구를 찾아가 이런 일을 말해두겠는가.
그래도 마음 한쪽의 불안을 털기 위해 그는 그나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명석호에게 지나가듯 이 일에 대해 언급했고,
“오? 영석 좀 벌었겠네? 나중에 한 턱 쏴라.”
정말 예상외의 반응만 받았다.
명석호는 오히려 그런 반응에 당황하면서 이에 관해 묻는 진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방시에 다녀오는 길에 습격을 받아 상대를 죽였다는 건데,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보고를 하니 마니 하며 하냐는 것이다.
종문에선 그가 바깥에서 다른 산수랑 엮이든, 다른 종문 제자를 죽이든 신경 쓰지 않는다.
일을 조용히 처리하고 종문이 엮이지 않게만 한다면 일개 연기기 제자 하나하나의 행동을 신경 쓸 이유와 여유 따위는 종문의 고위층에게 없었다.
그의 말에 진현은 다시 한번 체감했다.
수선 종문은 결국 이익 집단이다.
무슨 대단한 대의나 뜻을 따라 모인 자들은커녕, 아래의 제자들은 종문을 위해 일하는 대신 안정된 자원을 벌고, 고위층은 아래 제자들의 수발을 받으며 편하게 수련하기 위해 있는 곳이다.
스승을 둔 연기 제자보다 스승 없이 일만 하는 연기 제자가 훨씬 더 많다는 것만 봐도 이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저번에도 말했듯, 저와 같은 경지인 데다 운이 좋아서 간신히 이겼어요.”
“아, 그래그래. 다른 준비는 잘해가고 있고? 사실 네 수련 속도면 대회 일자쯤에는 연기 후기에 들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아쉽네.”
뭐가 아쉽단 말인가. 자신과 붙지 못해 아쉽다고?
진현은 명석호도 이번의 대회에 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연기 후기의 제자들과 대결할 테니, 그와 만날 일은 없었다.
진현은 영기를 직접 만들어 다루는 이 사형과 싸울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그의 공법 전환을 참 다행으로 생각했다.
“술법 연습은 항상 하고...”
“사형!”
진현의 말은 갑자기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에 의해 끊겼다.
하늘 저편에서 푸른 이파리 형태의 법기가 빠르게 날아와 둘의 앞에 내려섰다.
그리고 법기의 위에서 호리호리한 체형의 여수선자 한 명이 나풀거리는 천 옷을 펄럭이며 뛰어내렸다.
“아, 사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잠시 다른 선배께 인사나 드리고 왔습니다. 진 사제, 사형은 내가 데려가도 괜찮겠죠?”
그녀는 특출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지는 않았지만, 밝은 미소와 순박한 외모로 마음을 편하게 하는 분위기를 지녔다.
그녀는 하승의 다른 제자이자 명석호가 말한 사매인 손유설이었다.
최근 몇 달간 외부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그녀는 얼마 전에야 돌아와 진현과 안면을 텄다.
“네, 얼마든지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현은 흔쾌히 수락하고 행복한 얼굴로 명석호를 잡아끄는 손유설에게 인사했다.
명석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진현을 원망스럽게 노려봤지만, 진현은 둘의 연애사에 끼어들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역시 진 사제는 누구랑 달리 말이 통하네요. 스승님이 제련에까지 함께하게 해주시는 걸 보면, 이런 시기만 아니었다면 사제를 제자로 받으셨을지도 모르겠어요.”
유설은 그 한마디를 남기고, 명석호와 함께 떠났다.
진현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일지 궁금했다.
제자로 받는다는 것은 겉치레라고 하더라도, 이런 시기라니? 대회를 말하는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진현은 곧 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그런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빠르게 대회의 준비를 마무리하고 싶었다.
손유설도 연기 8층으로, 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며 그와 맞붙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강함은 진현도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 사형인 명석호가 영기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하승에게서 적어도 상급 법기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상대가 있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방심할 수 없었다.
그도 그동안 백보루에서 저급 부적을 대량으로 사두고, 방어 법기도 구비했으며, 창뢰각령공에 기록된 다른 술법들을 익혀 두었다.
그러나 역시나 가장 탄탄한 준비는 경지였다.
빠르게 동부로 귀환한 진현은 얼마 가지 않아 검은 공간의 인력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연기 8층은 무리겠지만...”
그는 이미 뇌흔을 소모해 3개만 남았다. 그런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번에 다시 4개씩이나 쌓더라도, 7개가 최대다.
그렇다 하더라도 꼭 그가 연기 8층보다 약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경지는 그대로 일지라도, 영력의 최대치는 소폭 증가한다.
이미 소오행공으로 쌓은 영력에 더해 특이한 방식으로 수련하는 창뢰각령공 덕에 그는 동일 경지보다 영력의 여유가 더 많았다.
이전의 마도 수선자와 최소한의 전투가 성립한 것도 그 덕이었고.
진현은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았고,
“어쨌든 열심히 수련이나 해야지.”
익숙한 공간에 도착했다.
***
청유문의 제자 대회 당일.
수많은 인파가 종문 곳곳에서 모여들고 있었다.
달라진 개최 시기는 물론 주 상품으로 걸린 상급 법기 3개는 모든 연기 제자, 특히나 초기와 중기 제자들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진현은 은연반을 타고 날아가며 대회장에 가까워질수록 많아져 가는 인파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체감하긴 어려웠지만, 청유문에는 정말로 사람이 많았다.
분명 영근은 수백 명 중 몇 명에게 있는 정도일 텐데, 대종문이라 하더라도 하나의 종문에 이만한 수의 제자들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동시에 그가 이전까지 알고 있던 ‘세상’의 크기가 실제로는 훨씬 더 거대함을 의미했다.
그렇게 날아간 진현은 곧 경기장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전생의 콜로세움처럼 원형 경기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몇 가지 다른 점이라면 그 크기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하며, 건축물을 세운 게 아니라 산 하나를 밀어내고 그 중심부를 비워 만든 곳이라는 것이었다.
수많은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그 거대한 분지에 진현은 눈을 반짝이며 하강했다.
그의 혼해에 새겨진 7가닥의 뇌흔도 그의 감정과 함께 박동했다.
15화
제자대회(1)
청유문에서 제자대회는 주기적으로 열리는 행사다.
단순히 연기기 제자들의 전투 실력을 연마하는 것 외에도, 자질이 뛰어난 이들에게 충분한 상을 주어 종문 전체의 전력을 강화하는 의미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실리적인 면 외에, 재미있는 오락이기도 하다.
진현은 드넓은 경기장에 들어서며 떠들썩한 분위기에 이를 실감했다.
경기장은 거대한 산 하나를 파낸 만큼 수천에 달하는 인원이 들어오고도 한참 공간이 남았다.
연기기 제자들은 경기장의 외곽을 따라 빙 둘러서 저마다 모여 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축기기 사숙들도 연기기 제자들과 떨어진 공간에서 저마다 자리를 잡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수련과 잡무로만 구성된 수선자의 생활에서 이런 대회는 몇 없는 오락일 것이다. 특히나 일생의 대부분을 수련으로만 보내는 재능 없는 제자들의 경우,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을 느낄 것이다.
진현은 천천히 은연반을 낮추며 속속 집합하는 제자들의 틈새에서 경기장을 둘러보았다.
경기장의 ‘관람석’이라 할 만한 완만한 경사면 가운데, 그의 전생에 있었던 축구 경기장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원형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공간의 곳곳에는 황색의 석조 구조물들이 솟아 있었는데, 수십에 달하는 이 평평한 구조물들이 제자들이 직접 대전을 치르는 비무대로 보였다.
비무대는 그가 삼촌과 함께 보았던 무림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했고, 빠르게 이동하고 범위가 넓은 공격을 자주 쓰는 수선자들에게 적합해 보였다.
진현은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에 감탄하다 경기장 한쪽에 서 있는 봉우리를 발견했다.
경기장의 한쪽 끝에 위치한 그것은 매우 가팔랐으며, 작은 건물이 그 위에 지어진 것을 보면 일종의 고위층 전용 관람석으로 보였다.
‘축기 사숙들도 연기 제자들과 같은 곳에서 관람하는데, 저 자리에 앉는 사람이라면...’
결단기에 오른 장로들.
안 그래도 명석호에게서 이번 대회에 결단기의 장로들이 참관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던 진현은 추측을 확신했다.
결단. 수명은 500을 넘고 그 힘은 진정 신선이라 할만한 이들.
그들의 입장에서는 볼만한 것도 없을 텐데, 굳이 이런 행사에 참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것도 잠시, 진현은 곧 아래에서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관람석으로 은연반을 몰았다.
“오, 형님!”
원휴는 반갑게 진현을 맞이했다.
얼마 전 그가 그에게 빌린 영석을 이자와 함께 갚은 것은 물론 백보루에서 많은 물품을 사 가며 그의 실적을 올려주었기에 그는 이 재능 있는 형님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빚을 더 늦게 갚아 더 많은 이자를 불려주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이게 다 뭐야?”
진현은 은연반을 집어넣고 원휴의 뒤를 바라보았다.
원휴와 같이 백보루의 하얀 제복을 갖춰 입은 제자들이 나무로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의 건물을 지어놓은 채 다른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원휴는 미소를 지으며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응원장이죠! 대회에 출전하는 수많은 사형 사제들을 독려하기 위해 제자들이 영석으로 그들에게 응원하고, 그들이 승리하면 기쁨을 나누는 곳입니다.”
도박장이구나.
진현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별 이상한 것도 없다 싶었다.
애초에 대다수의 제자에게는 제자대회는 참가해서 상품을 얻을 기회가 아닌 단순 오락의 장이었다.
게다가 대회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어디에 있든 도박은 있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는 대회를 보러 온 제자들의 수가 특히나 많은 터라 정말 많은 분이 응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형님도 혹시 응원하실 분이 있으신가요?”
“이번에 특히나 보러 온 제자들이 많다고? 분명 이번 대회는 축기 사숙이 급하게 연 대회라고 하지 않았어?”
진현은 그동안 명석호에게 물어봐 이 대회가 그의 예측대로 하승이 재촉한 결과가 맞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그가 어떤 이유로 대회를 갑자기 열었는지는 그도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번 제자대회는 다른 제자대회와 다르게 대부분의 제자들이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평소보다 참가인원이 많은 것은 왜인가?
“역시 상급 법기가 큰 역할을 한 건가?”
단순히 연기 후기의 제자에게 상급 법기를 주는 것만 해도 큰 상인데, 이번 대회는 연기 중기와 초기의 하급 제자들에게까지 상급 법기를 주는 말도 안 되는 상품이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저급 제자들이 혹시 나도? 하는 생각과 함께 뛰어들 만했다.
“아, 물론 그것도 있지만, 이번에 장로님들이 두 분이나 참관하러 오신다는 소식이 있어서 더욱 많은 사형이 몰려들었습니다.”
원휴는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진현이 보았었던 경기장 끝의 봉우리를 가리켰다.
“백보루에서 일하다 보니 이런저런 소식도 많이 듣게 되는데, 보통 이런 대회에는 결단 장로분들께선 잘 안 나오신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보통 대회에서 활약하고 축기 사숙들의 눈에 띄어서 제자가 될 기회를 노리는 게 전부인데...”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로들은 열 명도 채 되지 않고, 제자들은 수천이 넘는 드넓은 대종문에서, 장로들의 눈에 띌 기회는 없다시피 하다.
이런 자리를 빌려 만에 하나 결단기의 장로에게 자질을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그 문하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희망은 연기 제자들을 크게 자극할만했다.
결단기 장로의 제자. 제대로 된 제자가 아니라 이름만 올린 기명 제자만 되더라도 그가 적선하듯 던져주는 자원으로 축기 수사가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급 법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신분과 경지의 수직 상승이다.
그리고 진현이 명석호에게서 이에 대해 들었듯, 종문에 오래 있던 제자들도 나름의 연줄을 통해 이를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는 이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경지 상승이 일반 제자들에 비해 빠른 것은 맞았지만, 결국 그는 삼영근을 지녔다.
그는 검은 돌의 능력 덕분에 높은 확률로 축기, 어쩌면 그 뒤로도 안정적으로 막힘없는 수련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단기 장로의 눈에 그는 그냥 연기기 수준에서 조금 빨리 성장한 제자이고, 삼영근의 자질로 축기도 불확실하며 그 이후의 선도는 나아갈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인 존재다.
“하아... 저도 술법을 익히는 데 조금만 더 시간을 들였다면 나아가서 대회에 끼어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실력으로는 무리고, 저는 역시 가만히 영석이나 버는 게 편하네요. 그런 의미에서 진 형! 응원하고 싶은 사형이 있습니까? 순위는 못 걸고, 각 대회의 우승자만 맞출 수 있습니다.”
진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명석호 사형에게 걸게. 영석은 다섯 개만.”
진현이 건네는 영석을 받아 든 원휴의 표정에 아쉬움이 짧게 스치고 지나갔다.
“좀 더 통 크게 거셔도 좋을 텐데요. 명 사형이라면 대회 우승 후보 아닙니까?”
연기 12층의 실력에 영기까지 조금이나마 다루는 명석호는 확실히 우승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진현은 불안한 가능성에 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만히 웃기만 하는 그의 모습에 원휴는 결국 포기하고 백보루 제자들의 곁에 세워져 있던 나무판에 영력을 불어넣었다.
짤막한 빛이 일어나고, 나무판에서 튀어나온 목패를 잡은 원휴는 그것을 진현에게 건넸다.
“이걸 가지고 계시다가, 명 사형이 우승하시면 들고 백보루, 아니면 제게 찾아오시면 됩니다. 그럼 사형도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를 응원하겠습니다.”
“그래? 혹시 나한테 영석을 걸었어?”
원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연기 9층에 가까운 실력을 지닌 연기 8층의 어떤 인물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고 그에게 걸었을 것이다.
진현은 피식 웃고 은연반을 타고 경기장 중앙에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이동했다.
그가 자리를 잡을 때쯤 어느새 종문 곳곳에서 모여들고 있던 제자들의 수가 줄어들었고, 경기장은 여전히 공간이 많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빽빽해졌다.
그리고 봉우리 위에 지어진 관람대에서, 한 축기기 수선자가 경기장의 중앙으로 날아올랐다.
진현은 그가 하승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거의 매일 보다시피 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익숙했다.
진현은 비행하는 하승을 보며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그도 법기를 사용하면 비행을 할 수 있지만, 축기기 수선자는 진정 본인의 힘만으로도 비행할 수 있다.
“여러분!”
하승은 자신에게 집중되는 시선을 느끼며 큰 소리로 외쳤다.
별도의 술법 없이 단순히 영력으로 목소리를 증폭한 것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경기장 전체를 덮으며 크게 울렸다.
“오늘 대회에 와준 사질과 사형, 사제들, 그리고 친히 찾아와주신 장로님들께 큰 감사를 표합니다!”
그는 엄숙한 목소리로 청유문 제자들의 기상이나, 청유선자의 기백을 이어받았니 하는 개회사를 읊었다.
진현은 다행히도 그가 전생에서 만난 수많은 교장과 교수들처럼 ‘훈화’를 길게 잇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그럼, 지금부터 청유문의 제자 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무슨 거창한 불꽃놀이나 징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신호탄 삼아 수십 곳의 경기장 곳곳에 심판들이 등장했다.
연기 12층의 경지에 매우 늙은 외모를 지닌 고참 제자들이나 경지가 비교적 낮은 축기 사숙들이 경기장의 밖에 서서 진행을 맡았다.
그들은 곧바로 자신이 맡은 경기장 곁에 작은 비석을 하나씩 세워두고, 그곳에 기록된 대진표에 따라 이름들을 크게 호명했다.
그와 동시에 장로들이 머무는 것으로 보이는 봉우리의 반대쪽 경기장의 끝에 커다랗게 대진표가 떠올라 모든 제자가 그들의 순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참 뒤... 구경이나 하러 가야겠네.’
진현은 아직 여유가 꽤 남은 것을 확인하고 다른 제자들의 대결을 관람하기로 했다.
일반 제자들의 전투나 수를 봐두는 것은 유용할 터였다. 그가 비록 얼마 전 의도치 않은 실전을 겪었다 해도, 다른 제자들의 다양한 수단을 확인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침 그가 있던 곳 바로 앞에 위치한 경기장에서 두 참가자가 모두 도착해 대결이 시작되고 있었다.
둘 다 그와 같은 연기 중기의 제자들에 연기 6층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두 제자가 경기장 위에 올라서자, 곁에 있던 축기 사숙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패배를 인정하거나, 전투 불능으로 판단되거나, 경기장을 떠나면 즉시 대결이 종료된다. 서로 맞인사하고 곧바로 시작해라.”
고개를 끄덕인 두 제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포권을 했다.
한쪽은 20대로 보이는 남성이었고, 다른 한쪽은 그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들은 포권을 풀자마자 곧바로 서로를 경계하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먼저 공격을 한 것은 여제자였다.
그녀는 허리춤을 가볍게 쳤고, 부채 형태의 법기와 매와 비슷하게 생긴 영수를 불러냈다.
그에 남제자는 곧바로 술법을 펼쳤다.
그는 순식간에 몸 앞에 원형의 물로 된 방패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 손에서 물을 뿜어내며 그것을 창의 형태로 굳혀 매를 향해 날렸다.
매 영수는 창을 피했지만, 날개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부상은 아닌지, 남성의 위로 날아오르며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여제자도 매가 공격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부채를 크게 휘둘러 두 장 크기의 불구름을 만들어내 남제자에게 날렸고, 상대는 미리 소환해 둔 물 방패로 이를 막아냈다.
“화계 공법을 주로 쓰는 제자와 수계 공법을 주로 쓰는 제자인가? 남자 쪽이 유리한데...”
진현은 경지가 같은 둘의 대결이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여제자가 영수를 꺼내긴 했지만, 그리 강한 종류는 아닌 것으로 보였기에 둘의 싸움은 상성 상 우위에 있는 남제자가 이기지 않을까 싶었다.
둘의 대결은 진현의 예상과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갔다.
하늘에서 도는 매가 가끔 기회를 노리고 남제자를 공격했으나 재빠르게 대응한 남제자에게 막혔고, 여제자의 공격은 그의 물 방패를 소모하게 하긴 했으나 계속해서 물 방패를 보충하는 그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그와 반대로 남제자가 던지는 수구나 중간부터 꺼내든 창 형태의 법기에서 날아가는 물로 이루어진 창의 분신들은 여제자의 공격과 화염으로 이루어진 장벽 등의 방어 수단을 쉽게 뚫고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그런 대전이 이어지던 중, 여제자는 갑작스럽게 남제자에게 달려들었다.
이전과 다르게 거리를 좁히는 그녀의 모습에 눈을 찡그린 남제자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위에서 맴돌던 매 영수가 빠르게 강하해 그의 뒤를 점했다.
그리고 양 날개를 휘저어 바람으로 된 칼날을 날렸고, 남제자는 몸 곳곳을 베였지만 곧바로 법기에서 수창을 발사해 매를 날려버렸다.
그러나 그 짧은 교전 사이에, 여제자는 남제자의 바로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녀는 어째서인지 이전까지 쓰던 부채 법기를 그에게 집어 던졌고, 남제자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물 방패로 부채를 감싸 멀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창을 쥔 채로 여자를 향해 찔렀고-
맞추지 못했다.
여제자는 그가 물 방패를 치운 순간부터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멈췄으며, 대신 부적을 한 장 날린 상태였다.
남제자가 공격에 실패했음을 깨닫자마자 부적이 밝게 빛나며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폭발의 충격과 열기에 법기를 놓친 채 뒤로 굴렀고, 뒤이어 여제자가 날린 몇 번의 술법과 그의 집중이 무너지며 해방된 부채 법기, 계속해서 그의 집중을 방해하는 매 영수의 공격이 더해지며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진현은 그 결과가 매우 흥미로웠다.
여제자의 도박이 먹힌 것도 그렇고, 남제자와 달리 그녀는 부적과 영수까지 사용한 것도 그렇고, 역시 수선계에서 전투는 상성보다도 수싸움이 중요했다.
물론 수싸움과 상대를 예측하는 것은 범인들에게도 똑같았으나, 수선자들은 그 수단이 너무나 많았고, 이를 주고받는 시간도 매우 빨랐다.
‘역시 이 세상이 포x몬도 아니고, 상대가 특정 술법을 즐겨 쓴다고 해서 그것만 쓸 거로 생각하는 건 바보짓이지. 어차피 상대가 가진 수를 모두 예상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니 결국 최대한 많은 수를 대비하면서 머리를 빨리 굴리는 쪽이 이기는 거야.’
물론, 경지에서 차이가 나면 무용한 이야기이긴 했지만.
진현은 그 뒤로도 몇 번의 경기를 관람했고, 다양한 법기와 술법, 부적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른 곳으로도 구경을 갈지 생각하던 찰나, 익숙한 이름들이 귀에 들어왔다.
“제자 명석호! 제자 양우현!”
16화
제자대회(2)
“제자 명석호! 제자 양우현!”
축기 수사의 호명은 경기장의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뚫고 날카롭게 울렸다.
그리고 그것은 경기장의 끝에 위치한 높은 봉우리에도 닿았다.
봉우리 위의 건물은 정자 형태로, 관람을 용이하게 하는 넓은 누대가 튀어나와 있는 구조였다.
정자 내부에는 다섯 명의 인물이 앉아 있었다.
그중 경기장에 더 가까우며 낮은 위치에 앉은 셋은 진현이 한 번씩 만나보았던 이들이었다.
그가 일하는 청화각 분각의 주인인 하승, 그리고 송검문에서 영근 검사를 진행했던 유씨 성의 부인인 유수월, 그리고 광씨 성의 청년인 광승현이었다.
그들은 모두 축기 후기에 이른 수선자들이었으며, 하승의 기운은 나머지 둘보다 더욱 강했다.
“명석호라. 저 녀석이 승이 네 애제자인 그 녀석이구나?”
세 축기 수사의 뒤에서 누군가가 질문했다.
셋은 곧바로 뒤를 돌았고, 돌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있는 두 인물을 마주했다.
한 명은 나이를 잔뜩 먹은 노인이었다.
특색 없이 색이 바랜 짙은 녹색의 옷을 걸친 그는 새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과 약간 굽은 등, 평온한 인상까지 더해진 그는 대종문의 수선자라기보다는 시골에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인물은 붉은빛이 감도는 검은 머리를 한 중년이었다.
대략 40대 정도로 보이는 그는 근엄한 표정에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가 입은 흑색의 무복에는 중간중간 금색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둘은 세 축기 수선자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영력을 품고 있었다.
이 둘은 진정 종문의 최고위층에 오른 장로들로, 결단기에 오른 수선자들이었다.
질문을 한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경기장 한쪽을 바라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승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답했다.
“예, 종 사숙. 제가 어렸을 때부터 거둔 아이로, 아직 어린 나이에 벌써 연기 12층에 올랐습니다.”
“과연 장래가 밝은 아이구나. 토룡지체를 타고났다고 했었던가? 나쁘지 않은 재능에 영체까지 더해졌으니 앞으로 청유문에서 큰일을 해낼 재목이구나.”
영체(靈體).
그것은 영근과도 비슷한 수선자의 자질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영근보다도 훨씬 희귀한 것이었다.
태어나며 혼의 일부로써 작용하여 영기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기관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영근과 다르게, 영체는 그 신체에 적용되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체질이나 무림인들이 말하는 특수한 맥, 신체와 그 맥락을 같이 하는 영체는 일종의 돌연변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떤 영체는 그 보유자에게 강력한 재능을 선사해 특정 분야의 술법이나 기예에서 특출난 실력을 갖추게 할 수도 있었고, 또 어떤 영체는 보유자의 원기를 마르게 해 수선의 길도 밟지 못하고 말라 죽게 할 수도 있었다.
명석호가 타고난 영체는 토룡지체로 그리 강력한 영체는 아니었지만, 땅속에서 수련하면 그 속도가 증가하고 각종 토계 술법에도 능숙해진다는 훌륭한 장점이 있었다.
하승이 괜히 벌을 줄 때마다 그의 제자를 땅에 파묻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제자가 얌전히 구는 법을 몰라 땅에 묻어두는 게 편해서이기도 했지만.
“과찬이십니다 종 사숙. 아직 많이 모자란 아이입니다. 물론, 이번 내기에서는 이기겠지만요.”
그 말과 함께 하승은 노인의 곁에 앉은 중년의 장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모습에 중년의 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유씨 부인, 유수월은 자신의 스승 대신 한마디를 던졌다.
“하승 자네의 제자가 뛰어난 것은 맞지만, 1등을 차지하고 싶다면 우리 우현이도 무시할 수는 없을 거야. 입문한 지 몇 달 만에 연기 10층에 오른 천재라네.”
“입문 당시에 벌써 연기 2층이었던 아이 아닌가? 게다가 석 사숙께 지원도 많이 받았을 테니 당연한 성장세지.”
“자네...”
하승과 유수월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지만, 서로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을 비교하며 점점 공격적인 흐름으로 대화가 흘렀다.
“허허, 둘 다 후배들의 양성에 힘쓰는 모습이 보기 좋구나. 얘기는 거기까지만 하거라. 둘 다 훌륭한 아이들인데 비교해 무엇하겠느냐. 특히 승이 너는 마음을 가라앉히거라. 제자를 사랑하는 것은 아름다운 마음이지만...”
허허롭게 웃던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멈췄다.
“네 스승의 일을 기억해라. 기나긴 수선의 길에서는, 우선순위를 잘 생각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사숙.”
짧은 대화가 끝나고 모두의 집중은 명석호와 양우현의 경기장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아까부터 침묵을 유지하며 종 사숙이라 불리는 장로의 곁에 앉은 광승현은 경기장에서 약간 떨어진 쪽의 관람석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두 명의 수선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진현이 있었다.
***
한편, 명석호의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이동하던 진현은 그곳에서 익숙한 두 인물과 마주쳤다.
“남 사형, 진 사저, 오랜만입니다.”
두 인물은 각각 30대의 남녀였다.
빼빼 마른 남자는 선비와 같은 유순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그의 곁에 선 그의 도려는 아름답다기보다 온화한 외모를 지닌 작은 체구의 여성이었다.
그 둘은 진현이 과거 종문 곳곳을 돌아다닐 적 종문의 영수들을 관리하는 청룡각에서 만났던 부부인 남혁과 진설하였다.
당시 그는 그들의 따뜻한 태도에 빠르게 감화되어 친해졌고, 이후에도 가끔 만났다.
진현은 그들에게서 영수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듣거나, 외부의 진씨 수선세가의 일원인 진설하에게서 외부 수선계에 대한 정보도 들을 수 있었다.
셋은 같은 연기 7층이었지만, 진현은 자신이 늦게 들어왔으니 둘을 높여 부르는 게 당연하다며 사양하던 그들을 사형과 사저라고 불렀다.
그는 이 사이좋고 사람좋은 부부와 좋은 연을 맺어두고 싶었기에 굳이 동렬의 대우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대결에는 전혀 연이 없어 보이던 남혁이 어째서인지 상처를 약간 입은 모습에 진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하, 진 사제 오랜만이네.”
다행히도 남혁은 크게 다친 것은 아닌지 그에게 밝게 인사를 했고, 진설하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진현에게 인사했다.
“남 사형도 이번 대회에 참가하신 겁니까?”
“그렇네. 아깝게 탈락했지만...”
고개를 푹 숙이는 남혁의 모습에 진설하가 그의 손을 토닥였다.
“진 사제도 알 듯 이 사람은 원래 험한 일은 못 해요. 그런데 이번에 상급 법기를 상으로 준다는 말에 혹해서 참여했다가 다른 제자에게 두들겨 맞고 바로 탈락했죠.”
“설하, 그렇게까지 말할 건...”
진현은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품이 크다 보니 기회를 노리고 싶을 법도 했다.
“그럼 두 분은 여기에는 명 사형의 경기를 보러 오신 건가요?”
“그래. 이전에 명 사형이 영기를 다룰 줄 안다는 말을 들어서, 견식이나 넓힐 겸 와봤네.”
“그리고 명 사형은 종문 내에서도 몇 없는 영체를 지닌 분이시니까요. 그런 경기를 보는 건 저희의 수련에도 도움이 되죠.”
진현은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명석호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12층의 실력, 미숙하지만 어느 정도 다루는 영기. 토 속성의 영체로 인한 토계 술법의 이점까지.
참고로 진현은 명석호가 매번 땅에 파묻히는 이유를 청화각에서 일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묻고 그의 영체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었었다.
단순히 사제간의 따뜻한 전통으로만 생각했던 것에 이유가 있을 줄이야. 매우 놀라운 정보였다.
진현은 두 부부에게 함께 관람할 것을 제안했고, 그들은 곧 경기대가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진현은 경기대에 먼저 도착해 있는 양우현을 보고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송검문에서 축기 사숙들에게 인사하던 모습과 똑같이 당당한 태도로 경기대에 선 그는 벌써 연기 10층의 기운을 뿜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입문한 제자라고는 믿기 어려운 성장 속도였다.
물론 입문 전부터 연기 2층에 올라 있기도 했고, 이영근의 자질을 가진 것도 알고 있었지만 연기 10층이라는 성과는 놀라웠다.
진현은 그에 대한 소식을 원휴나 다른 동문들에게서 들어왔기에 그의 성장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종문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영근 검사를 진행했던 유수월에게 데려가져 그녀의 스승이자 종문의 결단 장로인 석 장로의 기명제자로 그 문하에 들게 되었다.
그리고 그 뛰어난 자질과 결단에 이른 장로가 내리는 자원의 풍족함으로 양우현은 벌써 연기 10층에 올라 종문 내에서도 촉망받는 축기 후보이자 인재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 보내는 시선도 잠시, 진현은 곧 경기대에 도착하는 명석호를 발견했다.
그는 빠르게 법기를 타고 경기대 위에 내려앉았으며, 평소와 같은 미소를 걸고 있었다.
“두 제자가 모두 도착했으니 대결을 진행하겠다! 규칙은 다음...”
둘이 모두 도착하자 경기대의 곁에서 감독을 맡은 축기 수사는 개시를 선언하고 주의점을 읊었다.
그리고 명석호와 양우현은 서로에게 포권을 하고, 그대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시작된 둘의 전투는 진현의 예상대로 일방적인 흐름이었다.
명석호는 처음부터 다양한 토계 술법으로 양우현을 공격했다.
진현이 이전에 부적으로 발현한 토류벽이나, 암석을 띄워서 내려찍는 술법, 지면을 뒤집는 술법 등 다양한 공격에 양우현은 대처하는 데만 급급하고 공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그나마 중간부터 비검 형태의 법기를 꺼내 명석호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다른 법기는 직접 쥐고 영력을 응축한 검기를 날렸지만, 명석호의 단단한 술법 방어는 뚫기 어려웠다.
그쯤에서 진현은 이미 승패가 완전하게 갈렸다고 판단했다.
이전에 그가 보았던 두 제자의 전투와 비슷하게 한쪽이 일방적으로 방어와 공격을 진행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들과 다르게 명석호와 양우현의 경지는 두 단계나 차이가 났다.
절대적인 영력의 양이 달랐기에 양우현은 지속적으로 끌고 가기도 힘들고, 폭발적인 기습만을 노려야 할 텐데-
진현의 생각과 동시에 양우현은 이전과 다르게 폭발적인 양의 푸른 검기를 사방으로 흩뿌려 명석호를 공격했고, 그와 동시에 들고 있던 검마저 비검과 합세시켜 명석호를 원거리에서 요격했다.
그리고 명석호가 방망이 형태의 암청색 법기로 그 공격을 쳐내고, 토계 술법으로 지면을 벽으로 삼아 막는 동안 빠른 몸놀림으로 거리를 좁혔다.
진현은 그것이 무림인들이 사용하는 신법의 일종임을 알아보고 감탄했다. 확실히 이런 하급 수선자 간의 싸움에선 저런 요소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양우현은 빠르게 명석호의 앞까지 다가왔지만, 명석호는 벌써 그의 공격을 막아내고 법기를 겨누고 있었다.
이전의 당당한 표정이 시커멓게 죽은 양우현은 이를 악물고 저물대에서 커다란 금빛 검을 뽑아 명석호에게 내리쳤다.
팟-
그리고 명석호가 들고 있던 방망이로 검을 막으려던 순간, 양우현은 입에서 푸른 빛의 소검을 뱉어내 명석호의 명치로 날렸다.
팅.
그러나 그의 회심의 기습은 허무한 소리와 함께 실패했다.
명석호는 그와 법기를 맞댄 채 씩 웃고는 웃옷을 약간 제쳤다.
그의 가슴팍은 금색으로 빛나는 갑옷형의 법기로 보호받고 있었다.
진현은 명석호의 준비가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이것도 수선자가 가진 ‘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였기에, 양우현의 기습은 갑옷이 아니었더라도 애초에 명석호가 가진 다른 수단으로 막힐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확실히 진 사제보다도 뛰어난 재능이네. 전투실력도 출중하니까 훗날이 기대되는걸?”
명석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칭찬했지만, 이를 들은 양우현의 얼굴은 더욱 망가졌다.
태어나서부터 뛰어난 무공 재능으로 송검문의 기둥으로 평가받고, 커서는 영근을 발견해 일찍이 선조가 남긴 공법으로 선도에 입문하고, 심지어 선문에 들어와서도 뛰어난 자질로 장로에게 제자로 받아진 그로선, 이 상황에서 그 어떤 말을 듣더라도 조롱으로 들렸다.
명석호는 그의 표정이 어떻든 아랑곳 하지 않고, 영력을 더 쏟아부어 양우현을 흙더미에 가둬버렸다.
머리만 남겨진 채 땅에 파묻힌 그의 모습을 보며, 진현은 매우 익숙한 자세라고 생각했다.
그대로 고개를 푹 떨군 양우현을 보며 심판을 맡은 수사는 명석호의 승리를 선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현은 대진표를 살피다가 자신의 차례가 곧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17화
제자대회(3)
“수고하셨습니다.”
진현은 정중한 표정으로 경기대의 바닥에 반쯤 주저앉아 자신의 몸 곳곳을 뛰어다니는 뇌기를 가라앉히는 상대에게 포권했다.
연기 6층에 간신히 오른 수준인 그 남성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에게 힘겹게 마주 인사를 했다.
그는 진현이 연기 7층인 것을 보고 경지가 1층 차이밖에 나지 않으니, 자신에게도 승산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진현이 대결을 시작하자마자 꺼내든 중급 법기인 푸른 검과 기습적인 뇌구의 연계로 그는 별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어찌저찌 술법 몇 개를 날린 뒤 패배했다.
그는 경기대를 떠나는 진현을 보며 부러움을 느꼈다.
자신은 청유문에 입문한 지 십 년이 넘었는데, 받은 영석을 모두 수련에 써 쓸만한 법기도 적은 데다 경지도 많이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상대는 딱 봐도 그보다 어린 데다 경지도 높으며 중급 법기까지 갖추고 있었으니, 그는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대에서 내려오며 심판을 맡고 있던 연기 후기의 노인에게 인사를 건넨 진현은 은연반을 꺼내 관람석으로 날아갔다.
방금의 전투는 매우 쉬웠다.
객관적으로도 그러했고, 주관적으로도 그러했다.
이전에 그가 만났던 흑의인과의 대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물론 생사결이 아니라 그런 것도 있지만, 상대의 자질이 너무 좋지 않았다.
분명 수련에 쓰느라 법기나 부적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대종문의 제자라도 결국 절대다수의 수선계 하층은 이런 경우겠지...’
방금의 대결은 진현의 제자대회에서의 첫 대결이 아니었다.
그가 명석호와 양우현의 전투를 본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남혁 부부의 응원 아래 그의 첫 대결을 진행했고, 이후로도 진행된 몇 차례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했다.
진현이 만난 상대는 대부분 방금의 상대와 같았다.
자질이 떨어지지만 오랜 시간을 들여 경지는 쌓았으며, 우승할 자신은 없으나 허드렛일할 제자라도 찾는 축기 사숙의 눈에 띄어 조금이라도 수련의 조언을 받거나 지원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출전한 이들.
진현은 그들을 볼 때마다 수선계의 현실을 체감했다.
아마 그도 검은 돌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삼영근에서도 저질에 속하는 그의 자질로 그는 제자대회의 출전 자체도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진현은 은연반을 타고 경기장의 관람석 끝, 거대한 분지와도 같은 이 콜로세움 형태의 거대한 구조물의 가장자리로 향했다.
어떻게 보면 자그마한 봉우리라 할 수 있을 그 끄트머리에서, 진현은 은연반을 집어넣고 차분하게 풀밭에 앉아 영기를 흡수했다.
검푸른 장막을 두른 밤하늘과 맑은 달빛, 서늘한 바람과 반짝이는 별들이 그를 맞이했다.
제자대회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행되었다.
범인들은 하루 종일 깨어있기만 해도 피로감이 쌓이고 숙면을 필요로 하지만, 수선자는 그렇지 않았다.
혼과 육체를 순환하는 만능의 영기는 잠을 잘 필요를 없애기에 수선계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행사는 이처럼 휴식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진현은 영기를 회복하며 제자대회가 앞으로 며칠 후면 종료되리라 생각했다.
벌써 참가한 이들 중 상당수가 떨어졌고, 애초에 참가한 인원수의 절대치가 적었던 연기 후기 제자들의 경우 내일 정도면 결승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아마 결승까지 진출한다면 만날 후보는 셋 정도인가...”
첫째는 하승의 제자이자 명석호의 사매인 손유설. 진현은 그녀의 전투를 살피며 그의 예상대로 그녀가 상급 법기를 하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녀의 영기가 충분하지 않아 장시간 다룰 수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백보루 출신의 연기 8층 수선자였다.
진현은 그를 보자마자 그가 원휴가 영석을 건 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연기 9층에 도달하기 직전인 강력한 영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백보루에서 일하는 만큼 여러 길을 통해 영석을 많이 쌓았는지 다수의 부적과 법기를 지니고 있었다.
셋째는 특별한 인물은 아니었지만 마찬가지로 연기 8층에 이른 중년의 남성으로, 아마도 입문 시기로 따지면 그가 셋 중 가장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준비한 수단이 많을 테니, 주의하는 게 좋았다.
쟁쟁한 상대들이었다.
하나 진현은 자신이 이길 확률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연기 7층이었지만 혼해에 쌓은 뇌흔 덕분에 영력에 가중치가 있었으며, 아직 기초적인 오행술법에서 머무는 게 일반적인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익히기 어려운 뇌 속성 공법도 검은 돌의 힘을 빌려 입문했다.
게다가 흑의인에게서 선물 받은 중급 법기 두 점과 상급 청검풍 부적, 그리고 비장의 수단으로 폭주시킬 검은 뱀까지 있었다.
게다가 그는 대진표상 그들 중 하나 정도와 마주하게 될 것이며, 셋을 모두 상대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그렇게 긴장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그가 우승을 하지 못한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맞춤 제작되는 상급 법기는 탐이 났지만, 그의 치트키의 힘과, 그의 어린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진현은 회복된 영력을 느끼며 뒤로 풀썩 드러누웠다.
푹신한 풀밭이 그를 받치며 싱그러운 향을 뿜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먼 아래에서 진행되는 경기를 바라보며, 귀뚜라미의 연주와 부엉이의 노래를 배경 삼아 휴식을 취했다.
***
진현은 이후로 제자대회를 진행하며 가끔 원휴를 찾아가 그의 장사 현황을 구경하기도 했고, 여전히 다른 경기들을 살피고 있던 남혁 부부와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며, 또 연을 맺었던 다른 사형들과도 만나 교류했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다른 제자들과의 대결을 이어갔다.
점점 더 강해지는 상대들의 틈바구니에서 진현은 특이한 개와 비슷한 영수를 쓰는 제자도 상대했으며, 저급 부적을 비처럼 뿌리며 초단기결전을 시도한 제자도 상대했다.
그는 모든 대결에서 승리했지만, 그 과정에서 일회용이나 다름없었던 황색 방패가 망가지고 자동 공격 기능 덕에 그가 자주 사용했던 푸른 검도 영기가 많이 상했다.
백보루에서 구비해두었던 다량의 부적을 소모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행히도 아직은 영석 상의 손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진현은 마음이 착잡했다.
상급 법기가 매우 탐이 나긴 했어도 불확실한 상품을 위해 그가 현재 가진 재산을 쏟아붓는 것이 가슴 아팠다.
이를 보며 진현은 더욱 연기를 배워 자신이 직접 자급자족하는 구조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언젠가는 그도 영기를 찍어내듯 만들어 팔아 대량의 영석을 쌓을 것이다.
그러나 진현에게 아쉬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매우 운 좋게도, 그가 우승 후보로 여겼던 두 인물이 모두 탈락하는 일이 벌어졌다.
바로 중년의 제자와 백보루의 연기 8층 제자가 서로를 상대로 대결하다 둘 다 전투 불능의 상황까지 갔으며, 더 이상의 경기 출전이 불가할 정도가 되어 어이없게 탈락한 것이다.
이전에도 자발적으로 기권하거나 양패구상을 이루는 경우가 많긴 했지만, 설마 우승 후보들 간에 이런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렇게 진현에게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지은 후에도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제자대회의 마무리가 찾아왔다.
적어도 진현에게는 그러했다.
연기 후기 제자들의 대전은 전날 모두 종료되었다.
결승에 오른 것은 명석호와 다른 연기 12층의 제자였는데, 명석호는 대결을 시작하자마자 그의 영기인 분화검을 꺼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조종도 없이 그저 무차별 폭격을 가하듯 상대에게 그 특제 만천화우를 쏟아부었고, 상대는 제대로 된 방어를 하지도 못하고 일격에 패배해 버렸다.
진현은 상대에게 애도를 표했다.
분화검의 위력은 그가 전생에서 보았던 현대 화기의 폭격과도 다름이 없었고, 그것은 연기 후기의 수선자가 막기에는 힘든 것이었다.
그 과정에 심판을 보던 축기 수사에게까지 검을 날리는 바람에 심판의 분노를 산 것 같긴 했지만, 어쨌든 명석호는 제자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아직 연기 중기 제자들과 초기의 제자들의 대결은 남아있었다.
그리고 지금, 진현은 흙과 돌가루로 덮인 경기대 위에 올라 반대편에 선 손유설과 마주하고 있었다.
“중기 제자 결승! 제자 진현과 제자 손유설!”
곁에 선 심판역 수사의 외침을 들으며 손유설은 눈가를 휘며 웃음을 지었다.
“설마 사제와 대결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제 생각보다도 실력이 뛰어난 모양이네요.”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진현은 진심이었다.
그가 비록 실제적인 전투력이 연기 8층의 수선자에게 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다른 쟁쟁한 후보들을 피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사부님이 결단 준비로 마음을 비우고 계시지만 않았어도, 정말로 진짜 ‘사제’라고 불렀을 것 같은데 아쉽네요. 뭐 어쩌면 그것도 곧 가능할지도 모르죠.”
진현의 그녀의 말에서 한 가지 부분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하 사숙께서 곧 결단에 도전하시나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승은 진현이 그를 처음 안 순간, 그 이전부터 언제든 결단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최근까지도 동부에 틀어박혀 참오하거나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렇게 빠르게 결단에 오르려 한다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진현은 실제 결단의 과정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축기만 하더라도 그 준비기간이 상당히 길며, 연 단위로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하승의 소식에 놀란 것이다.
“이 제자대회 자체가 사부님의 준비 과정이에요. 제가 알기로는 종문의 어느 장로님과 대회의 우승자에 관한 내기를 해 명석호 사형을 위한 축기 단약을 받기로 하고, 그로써 사형의 앞길을 보장해 주며 마음의 짐을 덜어내시기로 하신 데다, 결단에 도전하기 전 당신께서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연기를 갈고닦으며 자신감을 찾기 위해 상급 법기를 셋이나 상품으로 걸었으니까요.”
진현은 손유설의 말에 납득했다.
어쩐지 대회의 구성이 너무 성급하고 이상하다고 했는데, 하 사숙이 결단에 이르기 전에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그리한 것이다. 그렇다면 종문에서 자체적으로 대회를 변경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면 결단에 오르는 과정에선 마음의 안정과 관련된 관문이 있다는 얘기인가? 그럼...’
콰앙-
진현은 잡념을 지우고 날아오는 화염구를 재빠르게 회피했다.
그는 약간 당황한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다시 화탄술을 준비하는 손유설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사제, 설마 하루 종일 얘기만 할 건 아니죠?”
그녀는 여전한 웃음과 함께 연속으로 화탄술의 화염구를 진현을 향해 발사했다.
진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소매에서 부적을 세 장 털어냈다.
각각 두 개의 물 방패와 흙의 벽을 솟게 한 부적들은 화염구 폭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진현은 일시적인 방어막 뒤에 서 곧장 법기를 꺼냈다.
먼저 푸른 검에 영력을 불어넣고 공중으로 띄워 올렸으며, 오른손으로는 그에게 가장 익숙한 뇌구를 응집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나와 그녀 사이의 영력 양이 그렇게 차이 나지는 않아... 상급 법기를 오래 다루지도 못하니 최대한 장기전으로 끌고가다가...’
진현은 뇌구를 발사해 손유설의 준비를 흩트리고 곧바로 거리를 벌리며 원거리에서 술법으로 견제하며 전투를 이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뇌구를 본 손유설은 두 가지의 법기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새빨간 진주 같은 중급 법기로, 사람의 머리만 한 크기였다.
진현은 그녀의 다른 전투에서 보았던 경험으로 이것이 방어형 법기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른 법기는 두꺼운 나무 한 그루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거대한 대포였다.
정확히는 대포의 총통만 공중에 떠 있는 형태였으며, 원통에 가까운 구조와 구체 형태를 갖춘 뒷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포는 온통 칠흑색의 바탕에 붉은 금속으로 봉황의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진현은 그 대포의 끝에서 빛이 모이는 것을 보고 미완성된 뇌구를 바로 쏘아 보내고 손유설을 향해 날아가던 검을 회수해 그 위에 올라타 옆으로 피했다.
그 즉시 그의 곁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지면의 진동과 함께 뜨거운 열기와 자욱한 먼지가 사방을 뒤덮었다.
진현은 특수 금속으로 만들어지고 영력으로 보강된 경기대의 바닥이 일격에 조각나는 것을 보고 식은땀을 흘렸다.
저것이 바로 손유설이 지닌 상급 법기, 적봉포였다.
진현은 그 파괴력을 잘 봤었기에 그의 방어를 모두 버리고 바로 회피했고, 그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가 뒤에 남긴 물 방패와 토벽은 경기대의 일부와 함께 소멸했다.
설마 상대가 처음부터 무리한 수단을 꺼낼 줄은 몰랐던 진현은 당황했다.
영력 소모가 클 텐데, 처음부터 저걸 사용한다고?
“사실 나도 시작하자마자 적봉포를 쓸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손유설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약간 붉혔다.
“나도 명 사형과 똑같은 방식으로 우승해서, 그와 같이 우승자로서 법기를 수여 받고 싶어요. 게다가 진 사제의 뇌법은 공격력이 워낙 강해서 그대로 맞기 무섭거든요. 진 사제도 적봉포에 맞으면 피해가 클 텐데, 이대로 항복하는 건 어떤가요?”
진현은 그녀의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그가 예측하던 전투 흐름이 명 사형 덕에 날아갔다니, 어이가 없었다.
“두 분 연애사는 제가 참견할 바가 아니지만, 저도 상급 법기가 받고 싶어서요.”
진현은 오른손을 꼿꼿하게 뻗으며 손끝으로 영력과 뇌흔에서 흐르는 뇌기를 모았다.
그의 손끝이 붉게 달아오르며 위험한 전류의 소리가 타닥거리기 시작했다.
“항복은 힘들겠네요.”
18화
제자대회(4)
진현은 대량의 영력을 집중시키며 손끝에서 술법을 응집했다.
이것은 그의 뇌흔이 5개, 즉 뇌흔의 경지가 연기 중기에 도달한 이후부터 배울 수 있었던 창뢰각령공의 술법으로, 적뢰지(赤雷指)라는 이름의 공격형 술법이었다.
이름 그대로 적뢰지는 뇌흔으로 쌓은 뇌기를 손끝에 집중시켜 붉은 번개를 일으키는 술법으로, 그가 익힌 다른 몇 가지의 뇌법보다 더 강력한 위력과 속도를 자랑했다.
비록 연기기부터 입문할 수 있는 술법이었으나, 창뢰각령공에서 이르기를 이 술법은 원영기에 오른 어떤 인물이 본인의 이름을 붙여 만든 술법으로 그 한계치가 매우 높다고 하였다.
영력 소비가 많긴 했지만, 어차피 장기전으로 가지 않을 것이라면 이쪽도 공격을 적극적으로 가하는 게 낫다.
진현의 손끝에 붉은 번개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빠르게 모여들고 그의 손을 감싸듯 응축되었다.
그리고 그가 수도를 내리치듯 손을 빠르게 움직이자, 적뢰지의 붉은 번개는 허공을 가르는 선이 되어 손유설을 향해 발사되었다.
손유설은 번개에 담긴 영력이 예상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느끼고 웃음기를 지웠다.
그녀는 적뢰지가 날아오기도 전에 곧바로 붉은 진주를 움직여 정면을 가로막고 영력을 불어넣었다.
진주가 얕게 공명하더니 맨눈으로 보기 어려운 파동 같은 것을 내뿜었다.
웬만한 연기 중기의 술법은 막을 수 있는 그녀의 법기였지만 손유설은 방심하지 않고 왼손으로 부적을 한 장 준비했다.
쩌적-
적뢰지의 번개가 진주가 내뿜은 파동과 충돌하며 갈라지는 소리를 내었다.
붉은 전류는 투명한 방어막에서 멈추지 않고 핏줄을 펼치듯 방어막을 타고 결국 진주에 도달했다.
번개는 잠시 진주를 감싸고 맹렬하게 날뛰었지만, 어쨌든 진주는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손유설은 그 모습에 기뻐하는 대신 미간을 좁히고 진주를 회수했다.
진주의 표면에는 옅은 금이 가 있었으며, 그녀는 법기 자체의 영성도 꽤 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다음 공격을 맞는다면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손유설은 어쩔 수 없이 법기를 저물대로 되돌렸다.
그리고 적봉포에 영력을 채워 넣으며 경기대 반대편에서 마찬가지로 손끝의 붉은빛을 응집하는 진현을 바라보았다.
둘의 강력한 공격을 주고받는 전투는 주변 제자들에게서 큰 호응을 끌어냈다.
보통 다른 제자들은 싸움을 끝낼 비장의 수로 쓸 수단을 이 둘은 처음부터 꺼내 쓰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
“두 제자 다 뛰어난 인재구나.”
경기장 끝, 장로의 관람대.
이곳의 인원 구성은 지난날과 다르게 조금 변해있었다.
우선 중년의 외형을 한 석 장로와, 그의 제자인 유수월이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은 의자에 앉아 수염을 가다듬는 종 장로와 하승, 광승현, 그리고 대회를 마치고 자신의 스승 곁으로 불려 온 명석호였다.
경기장에서는 연기 초기 제자들의 대결도 진행 중이었으나, 이들의 관심은 모두 손유설과 진현의 결투에 쏠려 있었다.
종 장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제자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현재 둘은 서로에게 적봉포와 적뢰지를 날려대며 틈틈이 부적 등으로 방어하거나 기습을 노리며 백중세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 손유설이 적봉포를 꺼내 들 때 종 장로는 하승의 연기 실력과 이른 경지에 그가 만든 상급 법기를 다루는 우수한 제자인 손유설을 칭찬했다.
그리고 진현이 그에 맞서며 적뢰지를 사용하며 반격하자, 그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저 아이가 사형께서 말씀하신 그 제자인가 보구나. 입문한 지 얼마 안 되어 연기 7층에 오른 것은 물론이고, 지금 보아하니 그가 받아 간 뇌소산(雷燒山)의 공법도 성공적으로 익혔어.”
곁에서 그의 얘기를 듣던 하승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말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가 잡무제자로 받은 저 진현이라는 제자가 재능이 나쁘지 않고, 연기에도 관심이 많아 보여 그도 나름 눈여겨보고 있긴 했으나 종문의 장로들이 관심을 가질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진 사제가 대단하기는 합니다. 아마 멀지 않아 제 경지도 금방 따라잡을 겁니다.”
하승의 곁에 대기하고 있던 명석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네 훌륭한 자질을 따라올지는 모르겠구나. 승아, 저 아이의 영근은 어떻고, 다른 분야에 재능을 보인 것이 있느냐?”
“제가 알기로는 화,수,목의 삼영근을 지녔으며, 다른 수선기예의 경우는 모르겠으나 제가 대화해본 바로는 연기에 대한 이해가 나쁘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종 장로는 이를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 음... 하는 소리를 내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군. 이영근이거나 특수한 영체라도 있으면 내가 거두어들일지도 모르겠지만, 삼영근이라면 결단은 어렵겠지.”
대신 그는 고개를 돌려 광승현을 불렀다.
비록 진현이 삼영근에 불과하다지만 뇌소산의 공법을 익힌 것은 훗날 유용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완전히 손을 떼기는 싫었던 종 장로는 그의 제자이자, 뛰어난 재능을 지닌 광승현에게 진현을 맡겨보기로 했다.
이 조용하지만 믿음직한 제자라면 저 원석을 받아 쓸만하게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야, 어떻겠느냐? 저 녀석을 제자로 받아 볼 생각이 있느냐? 수련 자질은 기대에 못 미치겠지만 벌써 저런 술법까지 쓰는 것을 보면 술법 재능이 나쁜 편은 아닐 것이다.”
광승현은 허리춤의 검집을 만지작거리며 아래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평온한 표정을 깨뜨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선 이 대결을 다 보고 결정하고 싶습니다.”
종 장로는 그의 대답에 수긍하고 의자 안쪽으로 몸을 기댔다.
어차피 자신의 제자가 거절하더라도, 그는 그에게 진현을 맡길 생각이었다.
한편, 대화의 주체가 된 진현은 여전히 손유설과 한 수씩 주고받는 싸움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안 돼.’
진현은 이를 악물었다.
현재 그와 손유설은 유리대포나 다름없었다.
나름대로 방어 수단을 펼친다고는 하나, 그것은 서로에게 자잘하게 날리는 술법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는 손유설의 적봉포를 막을 방법이 없고, 그녀도 그의 적뢰지를 맞고 무사할 수 없다.
고로 먼저 맞추는 쪽이 이기는 싸움이었다.
처음에 진현은 둘 다 강력한 수단을 꺼냈으니 단기전으로 흘러가리라고 생각했지만, 그와 손유설은 둘 다 영력이 넉넉했기에 생각보다 싸움이 지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현재의 양상은 그에게 불리했다.
손유설은 어떠한 신법을 익힌 것인지 일반적인 반응속도로 피하기 어려운 적뢰지의 공격을 물 흐르듯 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현은 무림세가의 자제로서 타고난 신체능력과 그나마 삼촌에게 미약하게나마 훈련받은 몸에 영력을 폭발시키는 식으로 회피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까부터는 영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적뢰지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다른 수단으로는 그녀의 방어술법과 회피를 뚫기 어려웠다.
여기까지 온 이상 진현은 그냥 승부수를 띄우기로 결심했다.
콰앙-
적봉포의 폭발하는 화 속성 영기의 포탄을 가까스로 회피하고, 불이 붙은 왼팔을 무시한 채 그는 이전의 전투에서도 몇 번 사용했던 망치 법기를 꺼냈다.
비검도 쓸 수 있겠지만, 순간 공격력이 약해 손유설이 방어 태세를 취하게 하기에는 모자랄 것이다.
진현은 곧바로 망치를 손유설을 향해 투척했다.
손유설은 갑자기 날아오는 법기에 당황하지 않고 부적 하나를 꺼내 본인의 어깨에 붙였다.
그러자 부적이 빛나며 그녀의 피부 위로 옅은 금빛 광막이 떠올랐다.
방어형 술법인 금강부를 발동시킨 손유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손을 뻗어 망치의 투척 경로 앞으로 흙의 벽까지 세웠다.
그러나 망치의 위력은 그녀의 생각보다 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벽을 꿰뚫은 망치는 그대로 날아가 그녀에게 직격했고, 그녀는 금강부의 보호 아래에서도 묵직한 충격을 느끼며 몸이 붕 떴다.
직접적인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덕에 적봉포에 영기를 주입하는 과정이 약간 흔들렸다.
“쿨럭, 이게 사제의 비장의 수인가요?”
손유설은 기침을 뱉으며 앞에 자욱한 흙먼지를 영기로 쓸어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이 사제가 다른 수를 준비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더욱 빠르게 영력을 짜내 적봉포를 장전했다.
그러나 밝아진 시야 앞에 나타난 광경은 그녀의 예상과 약간 달랐다.
진현은 술법이나 대단한 법기를 준비하는 게 아닌, 웬 뱀 한 마리를 앞에 두고 있었다.
‘영수? 왜 처음부터 쓰지 않은 거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수를 다루는데 영력이 드는 것도 아니고, 전투에 이점을 주는 존재인데 어째서 이제야 동원하는 것일까.
그녀는 진현과 검은 뱀의 깊지 못한 유대관계를 알 수 없었기에 당황했다.
한편, 그녀의 멀쩡한 모습을 본 진현은 그녀가 충격 망치의 위력에 크게 당하지 않은 것에 놀라지 않았다.
중급 법기라고 한들 순간 파괴력만 높을 뿐, 충분한 대비를 하면 못 막아낼 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잠깐 시간을 벌고 적봉포의 공격을 지연시키는 것이었을 뿐, 진정한 준비는 이 흑류사였다.
진현은 발 아래에서 고통스러워하며 꿈틀거리는 뱀을 바라보았다.
뱀의 검은 비늘에는 붉은 문양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고, 진현이 비술의 구결에 따라 영력을 인도함에 따라 더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진현이 흑의인에게서 얻은 귀혼마공에 기록되어 있던 맹혈술(猛血術)이었다.
영수의 전투력을 크게 상승시키지만, 효과가 일시적이며 이후에 영수를 죽이는 비술.
비술의 효능이나 생김새는 분명 마공에 가까웠으나 사실 애매한 수선계의 기준 아래에서 특별한 비술 정도로 취급될 가능성이 높았기에 진현은 이것을 공개적으로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게 검은 뱀은 맹혈술의 효과로 점점 기운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1계 하급, 연기 초기 정도의 영력에서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더니 결국 손유설과 비슷한 연기 8층과 근접한 수준이 되었다.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이 엄청난 증폭은 주변 제자들에게서 꽤 큰 반향을 이끌었다.
절대다수가 방금의 뱀과 동일한 수준이었던 하급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뱀의 순간적인 경지 상승은 꿈과 같은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손유설도 그 변화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진현이 뱀을 제대로 활용하기 전에 처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적봉포의 조준을 흑류사에게 맞췄다.
맹혈술을 끝마치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채 뒹구는, 사람의 팔 만한 길이에서 이제는 몇 장 크기의 거대한 뱀이 된 흑류사를 보고 만족스레 웃은 진현은 그것이 본격적으로 날뛰기 전에 어물술로 뱀과 그 아래의 흙을 통째로 들어 올렸다.
“가라! 흑사박!”
그리고 뱀을 손유설을 향해 던졌다.
갑자기 날아오는 뱀의 모습에 당황한 손유설은 장전이 완료된 적봉포를 발사했다.
콰쾅-
묵직한 폭음과 함께 검은 뱀의 신체가 반 가까이 날아가 버렸다.
심지어 그 신체에 잔류한 화기가 날뛰며 뱀의 영력과 기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맹혈술로 광폭화된 흑류사는 무력화되지 않았다.
되려 엄청난 고통에 분노한 녀석은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차원이 다른 힘에 기뻐하며 공격을 가한 손유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손유설이 반응할 틈도 없이, 그것은 손유설을 칭칭 감아 온몸으로 그녀를 조이기 시작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진현은 곧바로 적뢰지를 준비했다.
상대가 무력화된 지금, 피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대단하지만... 이미 적봉포를 맞았으니... 이 정도는...!”
진현이 마무리를 준비하던 그때 손유설의 목소리가 검은 벽처럼 변한 뱀의 똬리 안에서 흘러나오더니, 곧 밝은 빛과 함께 손유설의 상체가 뱀의 몸을 뚫고 바깥공기와 마주했다.
진현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과연 대종문에서 수련하며 훌륭한 스승을 둔 수선자는 그 기량이 대단하다.
아마 그 흑의인과 손유설이 맞붙는다면 높은 확률로 손유설이 승리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승리했다.
진현은 손끝에 모인 붉은 번개를 세차게 자극하며 손유설에게 날렸다.
“이쪽을 봐요.”
정확히는 날리려 했다.
진현이 붉은 번개를 쏘기 직전, 손유설은 고개를 들고 진현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을 본 진현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 마치 뭘 하려던 것인지 잊은 듯 자리에 붙박였다.
그 반응을 본 손유설은 성공했다는 마음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그녀가 지금 사용한 술법은 일종의 환술이자 정신계 술법인 망안술(忘眼術)로, 눈을 마주친 상대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무엇을 하려던 것인지 잊게 만들어 버리는 술법이었다.
아직 숙련되지 않았고 성공한다는 확신도 없었기에 함부로 쓰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성공한 듯싶었다.
“호오.”
그러나 그 순간 장로의 관람대에서 들려온 작은 감탄과 함께 진현의 눈은 다시 맑음을 되찾았고, 그의 몸은 공격을 속행했다.
“꺄악!”
손유설은 그 변화에 당황할 틈도 없이 붉은 번개에 직격당했다.
그리고 곧 심판의 선언이 이어졌다.
“제자 진현의 승리!”
19화
첫 번째 스승
“...”
이겼다.
앞에서 뇌기에 당해 뻗어버린 손유설을 바라보던 진현은 잠시 멍해졌다.
승리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축하한다. 솔직히 예상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결과구나.”
진현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손유설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경기대의 위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사숙.”
진현은 곧바로 자세를 돌려 어느새 관람대에서 경기대까지 내려온 하승에게 인사했다.
경기대 곁에서 심판을 보던 노인도 그의 모습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하 사숙이 갑자기 왜 내려온 거지?’
진현은 하승의 시선이 여전히 검은 뱀의 잔해에 감겨 있는 손유설에게 잠시 머무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하 사숙. 제가 마지막에 너무...”
“됐다. 제자 간의 비무에서 내 제자를 패배시켰다고 뭐라고 할 만큼 내 속이 좁아 보이더냐? 넌 이겼다. 수선계에선 항상 승리만 해도 모자라니, 이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말아라.”
손을 휘휘 저은 하승은 손유설에게 다가가 왼손으로 자그마한 단약을 한 알 튕겨 손유설의 입에 던져 넣었다.
“쿨럭! 으으, 역시 망안술은 아직 제대로 못 쓰는... 어? 사부님!”
놀랍게도 방금까지 뇌기를 떨치지 못하고 기절해 있던 손유설은 단약을 삼키자마자 영력을 급격히 회복하며 깨어났다.
하승은 그런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으로 치고는 순식간에 그녀를 죽은 지 얼마 안 된 뱀의 똬리에서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맹혈술의 위력으로 거대화된 흑류사의 시체를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영수에게 쓴 비술이 뭔지는 몰라도 위력이 나쁘지 않구나. 이 녀석의 비늘이 꽤 쓸만해 보이는데, 내가 연구용으로 받아 가도 괜찮겠느냐?”
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직접 처리해서 팔거나 사용하면 이득을 어느 정도 보겠지만, 축기 사숙의 부탁을 면전에서 거부할 배짱은 없었다. 그것이 성격 좋은 하 사숙이라 하더라도.
“고맙다. 어차피 네 법기에도 좀 써먹을 생각이니 손해 본다고만 생각지는 말거라. 그럼 이제 나를 따라오거라. 장로님께서 너를 보자고 하신다.”
옅은 웃음을 지으며 문사 분위기를 풍기는 복장을 펄럭인 하승은 소매에서 저물대 하나를 꺼내더니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 뱀의 사체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또 다른 저물대에서 넙데데한 나뭇잎 모양새의 법기를 꺼냈다.
진현의 표정에 놀라움이 드러났다.
연기 중기 제자 중 우승을 거둔 것이, 종문의 장로가 관심을 보일 정도인가?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짓는 손유설과 함께 진현은 하승의 법기에 올라탔다.
아래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제자들을 뒤로하고 셋은 장로의 관람대로 날아올랐다.
순식간에 도착한 법기에서 내리며 진현은 정자 외부로 튀어나온 누대에 발을 디뎠다.
그는 곧바로 한 쪽 끝에 선 채 평소보다는 좀 더 자제하고 있으나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명석호와, 종문에 입문한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승현을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등장에 진현은 그가 장로와 무슨 관련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진현의 시선은 정자의 중심부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닿았다.
진현은 따로 지시를 들을 것도 없이 곧바로 인사를 올렸다.
“제자 진현. 장로님을 뵙습니다.”
그의 약간 뒤쪽에서 손유설도 따라 인사를 올렸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종 장로는 주름진 얼굴로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 오랜만에 재미있는 대회였구나.”
그의 하얀 눈썹 아래 덮이다시피 한 두 눈은 바로 앞에 선 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현은 장로의 칭찬에 그저 겸손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물론 그러는 동시에 조심스레 장로를 살피는 것은 잊지 않았다.
청유문의 결단기 장로는 그의 예상보다도 평범한 모습이었다.
전생의 공원 어딘가에서 한가하게 바둑이나 두고 있을 외견에 명절날 만나는 집안 어르신의 푸근한 분위기.
그가 이전에 벽운탑에서 만난 결단 장로로 추정되는 인물 또한 특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고위 수선자들은 죄다 이런 느낌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장로가 영력을 억제하고 있는 것인지 그에게선 다른 수선자들에게서 뻗어 나오는 영력의 파동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아 묘한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이곳에서 그가 유일하게 자신이 모르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가 장로인지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진현이 장로의 모습을 보며 생각하는 동안, 종 장로 또한 진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작게 헛기침했다.
“흠흠. 아직 어린 나이에 입문한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런 성과를 남기다니 대단하구나. 그 재능을 종문이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지.”
종 장로는 손을 옆으로 뻗어 광승현을 가리켰다.
“내 셋째 제자는 충분히 널 지도할만하다. 그의 제자로 들어가 더욱 뛰어난 발전을 이루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진현은 당황하며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굴렸다.
처음에는 장로가 자신을 칭찬하며 적당히 영석이나 보상을 좀 주는 식으로 칭찬만 하고 보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제자의 제자가 되라는 제안은,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물론, 제자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들은 축기 사숙들이 제자로 받거나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장로가 직접 나서 그에게 제안을 하다니, 순간 진현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알아차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차렸다면 일단 묶어놓고 탈취를 시도하지, 이런 식으로 문하에 들이려는 제안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조용히 서 있던 광승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다면 싫다고 하거라. 강제로 제자를 받을 생각은 없다.”
그는 진현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선비 같은 외모와 차림에 허리춤의 검.
진현은 이 ‘광 사숙’에 대한 내용을 그동안 명석호에게 몇 번 들었었다.
하승보다 약간 어리지만 마찬가지로 축기 후기의 경지이며, 종문 내에서 검술을 매우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종문 장로의 세 제자 중 유일하게 남은 제자라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그의 의발을 물려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
그 외에도 잡다한 소문이나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런 것을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제자 진현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진현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제자의 예를 올리며 광승현에게 절을 했다.
어차피 장로가 그에게 광승현의 제자가 되라고 말한 순간 선택은 하나였다.
게다가 축기 수사의 제자가 되는 것이 무슨 나쁜 것도 아니었다.
앞으로 그가 술법에서 어려움을 겪거나 수련의 병목을 넘을 때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스승이 제자에게 내리는 다양한 지원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종문 내에서 뒷배를 두게 되는 것은 덤이었다.
물론 진현은 웬만하면 하승의 제자가 되고 싶었다.
그의 성격이 좋았던 것은 물론이고 그의 제자가 된다면 연기를 더 잘 배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은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는 법이었다.
진현의 절을 받은 광승현은 음. 하는 짧은 한마디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고, 종 장로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잘 되었구나! 하하. 이제 대회도 다 끝났으니, 나는 이만 바빠서 가봐야겠다. 승이 너는 아이들에게 법기를 잘 만들어주고, 셋째는 새 제자를 잘 가르치거라.”
아직 연기 초기 제자들의 대회는 끝나지 않았지만,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애초에 연기 제자들의 대회를 장로가 보러 온 것만 해도 특수한 경우였는데, 그가 하급 제자들이 치고받는 것을 보려고 남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노인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사를 올릴 틈도 없이 없어져 버린 그의 모습에 진현은 감탄했다.
과연 결단기 수선자의 능력은 그가 상상도 할 수 없다.
종 장로가 떠나자, 하승은 그를 향해 엄지를 세워 보이는 명석호와 어느새 그에게 기대 부축을 받는 손유설을 이끌고 진현 쪽으로 다가왔다.
“종 사숙은 항상 재빠르시군. 상급 법기는 대회가 끝난 후에 청화각으로 찾아오거라. 뭘 만들지 잘 고민해 두고. 그리고 광 사제, 재능이 뛰어난 제자를 맞게 되어 부럽군.”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이루어진 사제 관계에 아직 얼떨떨하기는 했으나, 진현은 하승에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창뢰각령공에 공법과 어울리는 법기의 후보가 몇 있었는데, 그 정보를 다시 뒤져야 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사형. 저희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현은 ‘저희’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하승과 제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어느새 광승현이 꺼내두었던 넓적한 몇 장 길이의 비검에 올라탔다.
그리고 비검 위에서, 진현은 축기 수사의 비행 속도가 어떤 것인지 체험하게 되었다.
비검의 보호 아래 세찬 바람은 그에게 닿지 못했다. 그러나 발밑의 풍경은 그가 은연반을 몰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급속하게 변화했다.
비검은 빠르게 날아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청유문의 서쪽 끝에 가까운 어느 봉우리였다.
봉우리는 꼭대기는 암석지대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 아래로 경사면을 따라 꽤 커다란 계곡이 흐르고 있었다.
광승현은 비검을 몰아 암석지대 한쪽의 공터에 내렸다.
“여기가 내 동부다.”
그의 말에 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딱히 동굴 입구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그때 광승현이 가볍게 손을 뻗어 앞의 허공을 건드리자, 앞의 풍경이 변화하며 공터와 맞닿은 커다란 바위의 한가운데에 동부의 입구가 나타났다.
‘진법을 설치해 뒀구나.’
진현은 그 모습에 작게 입을 벌렸다.
그의 동부는 당연하게도 연기기 제자들의 그것과 달랐다.
축기 수선자가 되면 종문 내에서 일정 범위를 점거하고 개인 동부를 만들고 지낼 수 있다.
다닥다닥 모여 좁은 동부에서 지내는 연기 제자들의 처지와 비교하면, 아파트와 저택의 차이인 것이다.
게다가 진현은 진법이 해제되며 주변에서 느껴지는 충만한 영기에 이곳 역시 영맥이 짙게 흐르는 곳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의 새 스승은 장로의 제자였으니 이런 좋은 자리에 있는 것이 당연했다.
“따라오거라.”
광승현은 비검을 회수하고 동부의 입구로 향했다. 진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그를 따라갔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자신의 이 새 사부는 말이 적은 편인 듯했다.
동부의 입구는 평범했다.
돌산을 깎아 만든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벽면에서 빛을 내는 특이한 광석들을 제외하고는 장식품 같은 것도 없었다.
둘은 얼마 가지 않아 넓은 공동에 도착했다.
진현의 자신의 동부보다 몇 배는 더 거대한 공동의 크기에 감탄했다.
광승현은 공동 한쪽에 놓여 있는 돌 탁자로 향하더니 어디선가 주전자 하나를 꺼내 들고는 어느새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찻잔 두 개에 그 내용물을 따랐다.
“마시거라. 품질이 꽤 괜찮은 영차다.”
“감사합니다.”
진현은 조심스러운 자세로 차를 한 입 머금었다. 생각보다 상큼한 향과 차에서 느껴지는 옅은 영기에 진현의 눈이 커졌다.
마찬가지로 차를 한 입한 광승현은 진현을 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앞으로의 일을 설명하기 전에, 궁금한 것이 있다면 물어보거라.”
궁금한 것?
진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 갑작스러운 사제관계에 대한 질문? 아니면 그가 제자로서 할 일들에 대한 질문?
무엇을 물어야 할지 생각하던 진현은 문득 과거의 일을 하나 떠올렸다.
“그때, 송검문에서 제 영근을 검사하실 때, 특별히 저를 먼저 고르신 이유가 있습니까?”
광승현은 차를 한 입 더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영각이 특출나 보였다.”
“영각이요?”
영각. 사실 굳이 설명하기도 애매한 이 능력은 수선자라면 누구나 갖춘 것이었다.
단순히 말해 영기를 느끼고 영력을 감지하는 것으로, 축기기에 오르면 이것이 승화되어 신식이 되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정신력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송검문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과거에 본문 출신의 한 고위 수선자께서 종문을 떠난 뒤 세운 문파라고 알고 있습니다.”
진현은 청유문에 들어온 뒤 자신의 선문 역할을 해 준 송검문에 대해 알아보았었다.
알고 보니 송검문은 먼 과거, 청유문 출신의 한 결단 장로가 수명의 끝에 다다랐을 때 종문의 직위를 내려놓고 수선계를 떠나 속세에서 지은 문파였다.
그런 만큼 이후로 송검문은 청유문으로 사람을 보낼 수 있는 특권을 얻었고, 수선종문과의 연을 뒷배 삼아 그 강대함을 유지해 온 것이다.
“그때 영근을 검사한 곳에 있던 비석이 그 선배께서 남기신 유물이다. 본인의 법보 일부와 혼을 한 줄기 묶어두셨지. 당연하게도 영력을 품고 있고, 당시 모인 아이 중 너만이 유일하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진현은 조용히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부터 너를 제자로 받을까도 생각했었다. 스승께서는 네 공법을 보고 내게 너를 제자로 받으라고 하셨지만, 나는 네 영각 쪽이 더 뛰어난 자원이라고 본다.”
공법? 진현은 창뢰각령공을 떠올렸다. 이 뇌법이 수련하기가 어려운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지만, 장로가 관심을 가질 만한 특별함이 숨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방금의 전투에서 너는 하 사형의 제자에게 정신계 술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금방 떨쳐냈다. 네 영각과 정신력이 충분히 강하다는 뜻이지. 아마 스승님께서 제안하지 않으셨어도 네가 그런 능력을 보여준 이상 나도 너를 제자로 받으려 했을 것이다.”
진현은 말을 끝마치고 차를 마시는 광승현에게 약간 놀랐다.
말수가 적고 표정 변화가 적어 무뚝뚝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그가 이런 칭찬을 해올 줄은 몰랐다.
진현은 어쩌면 이 스승과 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영각이라.’
진현은 평온한 표정 뒤로, 좀 전의 전투를 회상했다.
그가 막 손유설의 눈과 마주치고, 망안술에 당한 시점.
그는 기습적으로 당했고, 정신계 술법이나 환술에 대한 지식도 없었다.
그대로 지는 것이 원래라면 당연했을 것이다.
진현은 당시 어두워지는 시야와 몽롱해지는 정신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망안술의 영향이 그의 혼해로 파고들며 그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하려던 그때,
진현은 혼 속에 박힌 검은 돌 조각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망안술의 영향에서 해방된 채 공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시의 감각으로, 그는 돌이 무슨 능력을 발휘했다기보다, 돌 조각 자체의 특성이 그런 현상을 일으켰다는 느낌을 받았다.
진현은 찻잔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이 ‘치트키’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것은 그가 지금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듯했다.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