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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약의 부작용만 다스릴 수 있다면 그게 곧 영약 아니겠는가.

만약 [암흑빙정] 대신 [연옥용암]이 나왔다면, 그건 그것대로 화염을 다스려 내 것으로 만들었겠지.

처음부터 [원소 저항]을 믿고 이 히든 피스를 구하러 온 것이다.

"...."

"...."

한소미의 낯빛은 여전히 하얗게 질린 채였다.

이 빙정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을 테니까.

최소한 절대로 학생이 가져서도, 먹어서도 안 되는 위험한 아이템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겠지.

따라서 내가 얼어붙거나 픽 쓰러질 거라 예상했을 것이고.

그런데 내가 멀뚱멀뚱 서 있기만 하자 서서히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조심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며 묻는다.

"...괜찮아?"

"커어억...!"

한소미가 괜찮냐고 묻는 순간, 나는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몸을 점점 굽혀 가며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김 형!"

"어, 어, 얼른 가서 애들 불러올게!"

한소미가 자리를 박차고 나서려는 순간,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한 얼굴, 멀쩡한 자세로 돌아왔다.

"—는 연기였습니다."

"아!!"

"하하하. 김 형, 장난이 지나치시구려."

속았다는 걸 깨닫고 삿대질을 하는 한소미와 웃음을 터뜨리는 고현우.

나는 한소미에게 빈 병을 흔들어 보였다.

"뭘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이건 아닌가 본데? 잘못 본 거 아냐?"

"...그런가?"

['빙결' 상태이상이 해제됩니다.]

['빙결' 상태이상이 적용됩니다.]

...

...

지금, 이 순간에도 몸속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긴 한데, 굳이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다.

한소미는 나에게서 빈 병을 받아 들어 유심히 살폈다.

그래 봤자 내용물이 부스러기 하나 안 남기고 전부 내 배 속으로 들어갔으니 헛수고였다.

"아닌데, 분명 그거였는데."

"잘못 봤다니까."

뚜렷한 증거도 없겠다, 나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한소미는 여전히 영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심증만으로 추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입술을 삐죽거리며 우리를 보내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너네 둘 다 객실로 돌아가. 이제 이거 절대로 쓰면 안 돼. 아예 근처에도 오지 마!"

"그래. 괜히 귀찮게 해서 미안하다. 가면서 이거라도 마셔."

슬롯머신에서 나온 [비타민 드링크(E)]를 선심 쓰듯 건넸다.

설명에도 나와 있지만 피부 미용에 좋다더라.

한소미는 내 손에서 비타민 드링크를 홱 낚아챘다.

"몰라, 너네 천혜한테 다 이를 거야."

"가자."

"한 소저, 좋은 승부였소. 그럼 다음 기회에 다시."

떠나면서도 정중하게 예를 표하는 고현우였다.

가다가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한소미가 여전히 우리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에 힘을 주며 무서운 표정을 만들어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잘 안 되는 듯했다.

귀엽기만 하네.

* * *

"한 소저가 납득한 것 같소?"

"설마. 대놓고 눈 가리고 아웅 했는데 납득하면 바보지."

"그렇다면 조만간 다시 시비를 걸어오겠구려."

"백 프로. 한소미가 넘어가 주더라도 선도부는 가만 안 있을 거야."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소?"

선도부와 마찰을 빚고, 학기 초부터 벌점을 받는 리스크를 감수할 가치가 있었냐는 뜻이다.

"마찰이라 해 봐야 누구 다친 사람도 없고, 이걸로 저쪽이랑 완전 척진다고 보기도 어려우니까. 얻은 것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지."

"으음.... 그 또한 일리가 있군. 한 소저도 크게 화난 기색은 아니었으니. 그래서, 그 유리병의 정체는 뭐였소?"

"설명하자면 긴데, 쉽게 표현하면 영약 같은 거야. 먹으면 마나가 쌓이지."

손바닥을 펴 보였다.

그 위로 한 줌의 마나가 맴돌다 사라진다.

고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영약의 대가가 사소한 마찰뿐이라면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요. 김형을 도와준 보람이 있구려."

"원래는 선도부랑 마찰은커녕 마주치지도 않았어야 정상인데, 이번에는 운이 없었어. 그래도 네가 시간을 끌어 줘서 잘 넘어갔다."

"하하.... 본인으로서는 김 형도 돕고, 검후의 검술도 한 자락이나마 견식했으니 일석이조였소. 게다가 김형이 손을 써 준 덕분에 한 소저와 마지막까지 비등한 대결을 할 수 있었소."

[증폭]으로 등급을 강화해 준 덕분에 금세 패배했을 상대와 1분 가까이 공방을 교환했다.

그 전투를 복기하는 것만으로도 얻는 게 적지 않을 것이다.

고현우는 넘치던 힘의 여운이 남은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김형의 그 기술을 다시 견식 해도 괜찮겠소?"

"다음에. 제약이 있는 스킬이라 그렇게 자주는 못 써."

1시간 쿨타임이 도는 중이기도 하고, 쿨이 아니더라도 내 밑천을 함부로 내보일 생각은 없다.

본격적으로 서포팅하는 건 조금 더 신뢰를 쌓은 뒤의 일이다.

고현우는 아쉽지만,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어쩔 수 없구려. 그토록 강력한 기술이니 분명 어떤 제약이 있으리라 예상은 했소."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앞으로도 종종 쓸 일이 생길 거다. 그리고,"

슬롯머신에서 운 좋게 드랍된 [마나 2%(D)]를 건넸다.

"이거 나왔더라. 네 몫이야."

"...!"

아이템 설명을 살피자 고현우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마나 2%(D)]

▷응축된 마나가 함유되어 있습니다.

▷복용 시 최대 마나가 소폭 증가합니다.

"본인이 이런 귀한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소."

"도움도 많이 받았고, 아까 1실버도 빌렸고, 그 정도는 줘야 셈이 맞지."

"그래도.... 1실버에 비하면 과하다 생각하오."

고현우가 힘을 보태 주지 않았다면 한소미와 마주친 시점에서 슬롯머신 계획은 붕 떠 버리는 셈이었으니,

[암흑빙정]을 먹게 해 준 대가로는 전혀 아깝지 않다.

그러나 고현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아직도 주저하는 모습이었다.

장난스레 녀석의 어깨를 툭 쳤다.

"그냥 받아. 정 뭐하면 밥이나 한 끼 사든가."

"그러는 게 본인 마음에도 편할 것 같소. 마침 지나오는 길에 스낵 코너라는 것을 본 듯한데, 거기에서 과자라도 사 가면 어떻겠소?"

"나야 좋지."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스낵 코너로 향했다.

* * *

우리가 돌아왔을 때도 서예인은 여전히 탁자에 엎어진 채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스낵 코너에서 뽑아 온 과자들을 하나둘 뜯자 그제야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다.

눈은 반쯤 떴지만, 아직 비몽사몽간이다.

"일어났네."

"서 소저도 조금 들겠소?"

"...응."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 아주 잠깐 과자들 사이를 헤매다가 막대기 모양 과자를 집어 들었다.

서예인은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끄트머리부터 오독거리며 갉아 먹기 시작했다.

조금 더 이것저것 집어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확인한 것은, 얘는 달기만 한 것보다는 담백한 계열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직접 만든 수제 쿠키에 단맛이 부족했던 건 실수로 설탕을 덜 넣었던 게 아니라, 순전히 본인의 취향이었던 것이다.

"오오, 이 당과는 무엇으로 만들었는고? 참으로 오묘한 맛이로구나."

반면 고현우는 담백하든, 달든, 맵든, 짜든, 과자라면 가리지 않고 일단 입에 쑤셔 넣고 봤다.

그러면서도 마치 장인의 요리를 맛보는 것처럼 하나하나 음미하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그렇게 맛있냐?"

"사문이 원체 깊은 산중에 있던 터라 이런 것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소. 가끔 사부님의 친우분들께서 선물로 가져오시는 게 전부였지."

"그래, 깊은 산중에 있는 문파는 어쩔 수 없지."

과자 봉투를 슬쩍 밀어 주었다.

한창 닭 다리 과자를 음미하던 고현우가 문득 창밖을 보더니 물었다.

"도착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남은 것 같소?"

"거의 다 왔을걸?"

내가 그렇게 답한 이유는 창밖이 온통 파란색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바다가 연상될 정도로 거대한 호수.

열차는 언제부터인가 그 호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창밖만 내다봐서는 마치 열차가 물 위를 달리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지만, 실제로는 수면에 얕게 깔린 선로를 달리는 것이다.

나는 정면에 어렴풋이 윤곽만 보이는 섬을 가리켰다.

"저기까지만 가면 되니까 금방이지."

"과연, 길어야 일각(15분)이면 도착하겠구려."

거대한 호수와 그 정중앙에 위치한 섬.

'던전 섬'이라 불리는, 무수한 미궁들로 이루어진 기이한 섬이 바로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과거 던전 섬은 온갖 흉악범들이 득실거리는 무법 지대였다.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적당히 위험한 던전 하나를 골라서 숨기만 하면 된다.

반면 쫓는 입장에서는 어떤 던전에 숨었는지부터 파악해야 하고, 요행히 찾는다고 해도 던전 내부에서의 추적이 기다리고 있으니 일이 훨씬 복잡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무법 지대로 방치된 곳이었으나.

어느 날, 초대 용사이자 드래곤 슬레이어가 이 던전 섬에 발을 들였다.

그는 흉악범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쓸어 버렸고,

던전들을 완벽하게 정복했으며,

도시를 세우고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것이 바로 용살학원.

드래곤 슬레이어 아카데미인 것이다.

흐릿하게만 보였던 던전 섬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졌다.

육지가 가까워질수록 열차의 속도도 줄어들더니, 파랗기만 하던 창밖이 잘 포장된 길로 바뀌었을 즈음에는 완전히 정지했다.

고현우는 그때까지도 과자 봉투들 사이에서 혼자 축제를 벌이고 있었는데,

갈 때가 되자 아직 과자가 제법 남았음에도 미련 없이 봉투들을 한데 모아 우그러뜨렸다.

하나가 된 덩어리를 가볍게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말한다.

"도착했군. 일어납시다."

그새 꾸벅꾸벅 졸던 서예인도 제자리에서 쭉 기지개를 켰다.

어지간히도 탁자나 벽에 문대면서 잤는지 옷차림이 영 엉망이다.

나는 보다 못해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겨 바로잡아 주었다.

열차에서 내리자 사방이 학생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빨간 머리 여학생이 든 지팡이에서 작은 불씨가 타오르고,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의 어깨에는 손바닥만 한 고양이가 올라탔다.

연신 스쳐 가는 학생들에게 냥냥펀치를 날려 댄다.

모두 개성이 지나치게 뚜렷해서 오히려 평범한 사람을 찾는 게 더 힘들 지경이다.

그리고 개성이 뚜렷한 수많은 학생들을 한곳에 모아 두니 혼란스러움이 배로 늘어난 느낌이다.

"1학년! 1학년은 이쪽으로!"

"이쪽으로는 오지 않습니다! 선배들 따라가지 않습니다!"

"야, 쟤 잡아!"

선도부 완장을 단 선배들이 지시봉을 흔들며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2, 3학년과 신입생들은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에, 선배들을 따라가려는 신입생들을 멈춰 세우고 한 방향으로 가도록 안내한다.

나야 한두 번 와 본 곳이 아니라 던전 섬은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다.

선도부의 안내를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커다란 대강당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입학식이 열릴 것이다.

우리 셋도 앞 학생의 뒤통수만 보고 따라가는 길이었으나.

도중에 우리를 가로막는 사람이 있었다.

"...."

송천혜는 팔짱을 끼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한 손에 낀 장갑에서는 무력시위를 하듯 옅은 전류가 파직거린다.

백이면 구십구, 아까 슬롯머신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나를 찾은 거겠지.

저쪽에 뚜렷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입장에서는 여기서 매듭을 짓고 가는 게 깔끔할 듯하다.

"잠시 따라오시죠."

"본인도 동행해야 하는 거요?"

고현우가 묻자 송천혜는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소미와 대련을 했다고 들었어요."

"검후의 제자라는 말을 들으니 호승심이 동하더군."

"다음부터는 때와 장소를 구분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또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이렇게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명심하지."

이번에는 나를 도운 일을 문제 삼지 않으려나 보다.

잘됐네.

나는 고현우와 서예인에게 가볍게 손을 저었다.

"걱정 말고 먼저들 가 있어."

"알겠소. 한 자리 맡아 두리다. 서 소저."

"...."

서예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졸린 눈으로 나와 송천혜를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고현우가 재촉하자 미미하게 고개를 까딱이더니 함께 대강당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멀어지는 걸 보며 송천혜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그럽시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8화 입학식 (1)

나를 어딘가로 데려가는 동안 송천혜와 나 사이에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앞장서던 송천혜가 이따금 고개를 돌려 잘 따라오나 확인하는 게 다였다.

"...."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못마땅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걸 보면 썩 좋은 첫인상을 남기지는 못한 듯하다.

하기야 쟤 입장에서 보면 나는 쿠키 때문에 선도부에 시비를 거는 이상한 사람이다.

게다가 한소미와의 가벼운 마찰로 인해 불량 학생 꼬리표가 붙기 직전이고.

요주의 인물이라는 신병철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의 인식 아닐까.

그렇게 걷던 우리는 <학생선도부> 팻말이 붙은 부실에 도착했다.

선도부실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한구석에 서류가 탑을 이루고 있는 것만 제외하면.

부실 한쪽 벽에는 옆방으로 이어지는 문이 나 있었는데, 송천혜가 먼저 다가가 그 문을 열고 나에게 들어가라며 눈짓했다.

선도부실이 깔끔하고 정갈한 느낌이었다면, 이 방은 휑하고 삭막했다.

가구라 해 봐야 한가운데 놓인 탁자와 마주 보는 접이식 의자 둘.

어두운 방을 어슴푸레하게 밝히는 백열전구 단 하나.

이건 누가 봐도 취조실이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진실의 방>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들어가면 그 누구든 착해져서 나오게 되어 있지....

"앉으세요."

"넹."

송천혜의 말에 나는 접이식 의자 하나를 끌어다 앉았다.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은 모습이 지나치게 편안해 보였는지 송천혜의 미간이 한 차례 꿈틀거렸다.

화를 참는 것처럼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진실의 방을 나선 송천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남학생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넥타이에 꼽힌 핀의 색이 황금색인 걸로 보아 3학년 선배다.

든든한 덩치에 후덕한 인상이 마치 온순한 곰을 떠올리게 했는데, 눈매가 가느다란 실눈이라 더욱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입가는 입꼬리만 미약하게 올라가 있어 웃는지 무표정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실눈 선배가 탁자 위에 가져온 물건 몇 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안녕. 이름이.... 김호라고?"

"예, 선배님."

"그래. 김호야. 나는 오세훈이라고 해. 물론 이름보다는 선도부장이나 실눈 선배로 더 많이 불리더라. 너도 편한 대로 불러."

"...."

보통 실눈인 사람은 실눈이라고 부르면 싫어하지 않나?

본인이 그런 별칭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성격인지, 나를 시험해 보려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이럴 때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오세훈이 손에 든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르며 물었다.

"뭐 좀 마실래? 꿀물도 있고, 녹차도 있고, 커피는.... 금방 저녁이니까 지금 마시면 잠이 안 오겠지?"

"찬물이면 충분합니다."

"앉아 계세요. 제가 가져올게요."

오세훈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송천혜가 먼저 방을 나섰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떠오는 속도가 그야말로 순식간이라 문 바로 앞에 정수기가 있는 줄 착각할 정도였다.

송천혜는 여전히 못마땅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내 앞에 종이컵을 턱 내려놓고, 오세훈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 꼿꼿하게 섰다.

오세훈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래, 김호야. 입학식에 늦으면 안 되니까 오래 붙잡아 두지는 않을 거야. 우리 질문 몇 개에만 답해 주면 바로 보내 줄게."

"예."

"10번 차량의 슬롯머신을 썼다고 들었어. 소미는 교칙 위반이라고 경고를 줬다던데, 계속한 이유가 있니?"

곧바로 열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는다.

내 대응은 상대가 선도부장이라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다.

오리발 내밀기 작전을 고수한다.

"왜 교칙 위반인지 납득도 안 가는데, 무턱대고 하지 말라니까 괜히 반발심이 들더라구요."

천연덕스럽게 답하자 송천혜의 미간이 또다시 꿈틀댔다.

선도부장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나에게 전격 마법을 갈겼을 것 같다.

반면 오세훈은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소미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잘못도 있기는 해. 그래도 앞으로 선도부의 지시는 이유를 묻지 않고 따라 줬으면 좋겠다. 항상 설명을 할 만한 여유가 있는 건 아니잖아."

"알겠습니다."

"또 묻고 싶은 건,"

송천혜가 지퍼락에 보관해 둔 작은 유리병을 건넸다.

[암흑빙정]이 들어 있던 그 유리병이다.

그것을 들어 살피는 오세훈의 가느다란 실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난 듯했다.

"여기 들어 있던 결정들을 삼켰다고 하던데.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니?"

"전혀 없어요. 평소와 똑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간단한 테스트만 하나 해 볼게. 여기에 손 좀 넣어 볼래?"

혈압 측정기처럼 생긴 장치를 내 앞에 내려놓는다.

주먹만 한 구멍에 손을 집어넣으면 결과가 표시되는 장치.

'디버프 감지기구만.'

<용살학원>에서 상대방의 스킬, 특성, 장비 등 정보를 열람하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다.

심지어 상대가 어떤 상태이상을 달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 디버프를 직접 건 게 아니라면 말이다.

이 디버프 감지기는 손을 넣은 사람의 상태이상만을 확인하는 장치였다.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

-위잉—

장치가 윙윙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착하기 거의 직전까지만 해도 암흑빙정이 완전히 흡수되지 않아 빙결이 계속 걸렸다 풀렸다 했지만, 지금은 그것도 다 끝났다.

따라서 측정기가 디버프를 잡아낼 리 만무했다.

장치가 초록 신호를 보내는 것을 확인하자 오세훈이 고개를 주억였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 같네. 김호야, 하나 말해 둘게. 원칙적으로는 설명을 했든 안 했든, 학생선도부의 지시를 어기는 것만으로 징계 대상이 될 수 있어.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원칙적인' 경우고, 이번 일은 아무도 안 다쳤고, 처음이기도 하니까 벌점을 안 주고 넘어갈 거야. 그렇지만 여기에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예, 선배님."

대답을 듣자 오세훈의 입매가 조금 더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이제 가도 좋아. 대강당까지 가는 길은 아니? 모르면 천혜랑 같이 가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길은 잘 알아요."

"그래, 들어가고, 학기 잘 보내렴."

* * *

"...."

오세훈은 김호가 떠나간 후에도 느긋하게 커피를 음미하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든 커피와 함께라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였다.

부드럽게 한 모금 더 들이킨 후 어깨너머로 물음을 던진다.

"천혜는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저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최소한 무언가 숨기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니?"

"김호 학생의 객실은 8번 차량에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슬롯머신을 목표로 한 게 아니고서야 굳이 10번 끝까지 갈 이유가 없어요. 유리병의 내용물을 소미가 보는 앞에서 털어 넣은 것도 본인 말로는 반발심에 그랬다지만, 제가 보기에는 억지 같구요."

"제대로 봤구나. 내 생각도 비슷해."

말은 동의를 표하지만, 송천혜가 보기에 오세훈은 이번 일에서 관심이 떠나 버린 듯했다.

오히려 손에 든 커피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건 그녀의 착각일까?

송천혜는 조금 더 고집을 부려 보기로 했다.

"부정한 스킬을 얻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돋보기]를 써서 보유 스킬을 확인해 보면 꼬리가 잡힐지도 몰라요."

"응, 그럴 수도 있지."

[돋보기]는 대상의 정보 일부분을 열람하게 해 주는 아이템이다.

종류와 등급에 따라 열람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르지만, 어쨌든 적당한 것을 쓰면 어떤 스킬을 보유 중인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세훈의 반응은 여전히 영 미적지근했다.

송천혜가 한마디 덧붙이려던 순간, 그가 되물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나오면 어떡하지?"

"네?"

"돋보기까지 썼는데 문제 될 만한 스킬이 안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송천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심증은 거의 100%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지만, 만에 하나 강행했다가 아무것도 안 나온다면?

그 역풍은 학생선도부뿐만 아니라 그녀가 속한 토파즈 마탑까지 미칠 것이다.

반면 돋보기로 '부정한 스킬'을 확인한다고는 해도, 그게 엄청나게 사악한 부류일 가능성은 작다. 기껏해야 벌점이나 간단한 징계 정도의 처벌이 내려지겠지.

얻는 것에 비해 리스크가 지나치게 크다.

오세훈은 진작에 거기까지 계산하고 김호를 보내 준 것일 터.

송천혜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어요."

오세훈으로서는 이런 후배의 태도가 기꺼웠다.

엘리트로서 한창 자존감이 충만할 시기.

이런 시기에 자신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굽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오세훈이 부드럽게 타일렀다.

"천혜야, 마음이 앞서는 건 이해해. 그래도 이런 일은 무조건 밀어붙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천천히, 길게 보자."

"...네."

김호가 정말로 부정한 무언가를 얻어서 사용한다면, 굳이 돋보기를 쓰지 않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꼬리가 잡히게 되어 있다.

"더 말썽을 부리는 게 아니면 김호는 놔둬. 지금은 동아리들의 동향을 살피는 게 우선순위야."

"알겠습니다."

"자, 너도 서둘러야지. 얼른 안 가면 입학식에 늦겠다."

* * *

'진실의 방'에서 보낸 시간이라 해 봐야 아주 잠깐이었는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새 해가 반쯤 저물어 가고 있었다.

나는 석양으로 붉게 물든 땅을 밟아 가며 대강당에 도착했다.

수백 명의 신입생들이 입학식을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저들끼리 떠드는 소음이 합쳐져 벌떼가 웅웅거리는 것 같다.

가볍게 둘러보는 도중 잿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온갖 세계관이 혼재한 게임 속 세상이지만 회색 계통 머리카락은 의외로 흔치 않다.

서예인이 내 시선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때마침 내 쪽으로 슥 고개를 돌렸다.

고현우의 시선도 그것을 따라 이동하더니, 곧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든다.

"김 형, 여기요!"

고현우와 서예인은 용의주도하게도 가운데 한 자리를 띄어 놓고 앉았다.

어지간히 낯짝이 두꺼운 게 아니라면, 그 사이에 엉덩이를 붙이기는 어려웠으리라.

내가 빈자리에 앉는 순간 시야 한켠에 알림 메시지가 출력되었다.

[튜토리얼III 완료]

▷제시간에 입학식에 참석했습니다.

▷보상:E등급 무기 선택권, 5실버

[무기 선택권(E)]

▷원하는 E등급 무기를 습득할 수 있습니다.

E급 무기라 해 봐야 고현우의 철검보다 하등 뛰어날 게 없는 양산형 장비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

슬롯머신 돌린다고 탕진한 5실버도 고스란히 돌려받았다.

"...!"

"...!"

시끌시끌하던 대강당이 앞쪽에서부터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왜인가 하니, 대강당 앞의 단상으로 일단의 무리가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등장한 시기로 보나 연령대로 보나, 그들이 용살학원의 교직원들인 것은 분명했다.

학생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선생님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아예 눈앞에 아무것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앞만 보는 선생님도 있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중 턱수염을 대충 깎은, 서른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9화 입학식 (2)

중년 남성을 보니 우리 동네 바보 형이 떠올랐다.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에 다 떨어져 가는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던 바보 형.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앞자리의 여학생 두 명이 서로 귓속말을 했다.

하지만 속닥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주변 사람들에게 다 들릴 지경이었다.

- 저분이 교장 선생님 맞지?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데....

- 아냐. 저래 봬도 젊었을 때는 드래곤 토벌대 리더였대. 성체 화룡을 두 마리나 잡았다더라.

- 와, 진짜?

전통적으로 용살학원의 교장은 일선에서 물러난 전대 용사가 맡게 되어 있다.

그리고 <용사> 칭호 역시 <우레군주>와 마찬가지로, S등급을 단 수많은 강자들 중에서도 단 한 명에게만 붙는다.

겉모습은 저렇게 후줄근하지만, 내면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막대한 힘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키웠던 용사가 S급 스킬을 20개가량 갖고 있었으니까,

저 양반도 대충 엇비슷하지 않을까?

- 근데 아직도 독신이래.

- 어! 나도 들었어. 성녀님한테 네 번이나 차였다며?

- 아니, 바로 얼마 전에 또 프러포즈했다가 까여서 다섯 번이야.

- 어머머머~

아아, 교장 선생님....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어떤 싸움을....

내 마음속 교장 선생님의 인식이 급격히 측은해졌다.

권태로운 눈빛으로 가볍게 좌중을 둘러본 그가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용살학원에 입학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강당은 삽시간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한 상태가 되었다.

온화한 인사말로 시작한 교장 선생님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했다.

"오래전, 용살학원(龍殺學園)은 이름 그대로 드래곤들과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육성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초대 용사님께서 여러 좋은 단어들 가운데에서 살(殺)을 고집하신 이유라면, 여러분이 슬레이어(Slayer)가 무엇인가 한 번씩 깊이 생각해 보길 바라서일 것입니다."

"슬레이어란 무엇입니까? 오우거를 베지 않으면 오우거 슬레이어가 될 수 없고, 드래곤을 베지 않으면 드래곤 슬레이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렇듯 생명을 빼앗는 것이 우리 슬레이어들의 숙명이자 본질입니다. 이 사실에서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동시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슬레이어가 되려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생명을 빼앗으려는가."

"여러분이 졸업 전까지 자신만의 해답을 찾았으면 합니다."

교장 선생님이 굳이 시작부터 이런 불편한 진실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외적인 단련 이상으로 내면을 담금질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의 담금질은 마음속에 뚜렷한 목표를 세우는 데에서 시작된다.

졸업 후 상대하게 될 A등급, S등급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자연재해와 같은 존재들.

막연히 잘 먹고 잘살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같은 어중간한 마음가짐으로는 그런 괴물들을 마주했을 때, 바람 앞의 등불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말리라.

나 외에도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깊은 생각에 잠긴 학생들이 제법 되었다.

거기서 끊었으면 아주 훌륭한 개회사였을 테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교장 선생님은 1절에서 끊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훈화가 길고 또 길게 이어졌다.

학생들이 괴로움에 몸을 뒤틀었으나, 교장 선생님은 본 체도 하지 않고 자장가처럼 느린 템포로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진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

* * *

누군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대로 몇 시간은 더 가지 않았을까.

단상 곁에서 대기하던 정장 차림의 여성이 손목시계를 가리키는 듯한 제스처를 보냈다.

그제야 교장 선생님도 마무리를 짓기로 한 모양이다.

"—여러분이 용살학원에서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합니다. 이상입니다."

"어흐흑."

"엄마.... 나 머리가 아파...."

신입생 일동은 하나같이 얼굴을 감싸 쥐거나 두통을 호소하는 등 절망에 깊이 잠식된 상태였다.

그 와중에 고현우는 교장 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감화된 듯 미소와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음. 참으로 뜻깊은 시간이었소."

"넌 안 지루하디?"

"지루하다니, 김 형, 그 무슨 무례한 언사란 말이오? 하나같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거늘. 사부님께서도 매일같이 이런 조언을 해 주시고는 했소."

"저런 걸 매일같이 들었다고?"

단련이 될 대로 된 놈이로구나?

나는 대화를 포기했다.

살다 보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 한 번씩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

한편 서예인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아주 살짝 숙인 채였다.

눈앞에 가볍게 손을 흔들어 봤지만 아무 반응도 안 한다.

반쯤 뜬 눈으로 졸고 있는 것이다.

굳이 깨워야 하나 싶어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교장 선생님이 단상에서 물러나고 뒤이어 정장을 입은 여성이 올라섰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빈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아마 송천혜가 그대로 10년쯤 나이를 먹으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앞자리 여학생들이 '교감 선생님이다'라고 속삭이는 말이 귀에 들어온다.

이 사실을 모르고 교장, 교감 선생님이 나란히 서 있는 걸 봤다면 아마 누가 교장인지 헷갈렸겠지.

교감 선생님이 차가운 시선으로 좌중을 훑자 저들끼리 떠들던 학생들이 움찔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서서히 커지려던 소음이 잦아든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당부의 말씀 드립니다. 금년도 금지 아이템 목록이 갱신되었습니다. 해당 물품들은 학생이 휴대하거나 인벤토리에 보관하는 것만으로 압수 대상이며, 경중에 따라 벌점 이상의 처벌이 가해집니다.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충분히 숙지하고, 지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신입생 여러분은 별도의 공지 전까지 던전동 지상층에서만 실기 평가를 치르게 됩니다. 지하층에 무단으로 출입하여 문제가 발생할 시, 본인뿐만 아니라 본인이 소속한 문파, 마탑, 길드 등에도 피해가 미칠 수 있습니다. 순간의 호기심으로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선 안 되겠죠."

그렇게 말하며 경고하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교감 선생님이었다.

신입생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오한이라도 든 것처럼 몸을 떨었다.

"저녁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입학식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모두 늦지 않게 기숙사로 돌아가도록 하세요."

교감 선생님은 그 말까지만 끝내고 곧바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교장 선생님의 기나긴 연설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요점만 꾹꾹 눌러 담은 실전 압축 안내였다.

너무 순식간이라 아직도 입학식이 안 끝난 줄 알고 제자리에 앉아 있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교직원 일동이 모두 떠나가자 그제야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고현우가 제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풀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로군. 마침 출출해지던 차였소."

"빨리 가자. 조금만 더 늦으면 줄 서야 돼."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우리는 문득 잊은 걸 떠올리고 동시에 몸을 돌렸다.

아직도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아서, 반쯤 뜬 눈으로 졸고 있는 서예인.

존재감이 희미해서 하마터면 두고 갈 뻔했다.

"야, 서예인."

"...."

깨우기는 해야 하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다.

더 가까이 다가가서 손끝으로 어깨를 가볍게 톡 건드렸다.

"...."

그제야 서예인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몸을 세웠다.

막 자다 깨서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는지 느릿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고, 잠을 깨운 원흉인 내 손을 뚫어지라 응시한다.

"입학식 끝났다. 밥 먹으러 가자."

"응...."

* * *

저녁 식사로는 해물 파스타가 나왔다.

수백 명분의 식사를 동시에 조리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그만큼 맛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건 유명한 맛집 파스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주방 측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용살학원에서 식사의 맛 같은 세세한 것에조차 신경을 기울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인류를 보호할, 장래의 영웅들을 육성하는 기관이니 그만큼 대우를 해 주는 거겠지.

아무나 여기 입학하는 게 아니기도 하고.

"헤이! 친구들, 식사는 맛있게들 하고 계신가?"

"어, 왔냐."

신병철은 열차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거리낌 없이 다가와서는 옆자리에 턱 걸터앉았다.

그사이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뺨에 사선으로 붉은 손톱자국이 세 줄이다.

고현우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신 형, 그 상처는 어찌 된 거요?"

"아, 이거? 그냥 뭐,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

소심해 보이는 여학생이 지나가다가 신병철에게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어깨에 앉은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며 발톱을 세운다.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하기로 했다.

'새우가 맛있군.'

신병철이 자기 몫의 파스타를 흡입하며 말했다.

"잘 먹고 푹 쉬어 두라고. 내일은 빅—데이가 기다리고 있다, 이 말씀이야."

"빅 데이라? 그게 무슨 뜻이오?"

"아니, 몰라? 내일이 수업 첫날이잖아."

"그렇기는 하오만, 수업 첫날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요?"

신병철이 설명을 해 주려고 입을 열었다가, 도중에 생각이 바뀐 듯 짓궂게 미소 지었다.

"흐흐, 안 알려 주지. 내일의 즐거움으로 남겨 두는 걸로."

"김 형, 김 형은 혹시 아는 게 있소?"

"별거 아냐. 그냥 내일까지 기다려."

"크음.... 그래도 영 궁금한데.... 서 소저?"

"몰라."

서예인은 아예 고현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졸지에 소외된 고현우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허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도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도 우리는 그 자리에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고현우를 배려하여 내일이 뭐 하는 날인지는 끝내 언급하지 않았고....

한참을 그러다 보니 선도부원들이 시간이 늦었음을 알렸다.

"슬슬 정리들 하자!"

"각자 기숙사로 이동합니다!"

"길 모르면 헤매지 말고 와서 물어봐!"

사방이 어둑어둑해진 지금 우리의 마지막 종착역은 바로 기숙사였다.

학생증을 꺼내자 뒷면에 언제부터인가 3-406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3동 406호라는 뜻.

3동을 찾아 마법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기기에 학생증을 가져다 대자 대문이 열렸다.

그런데 고현우 녀석이 계속 나를 따라오고 있다.

같이 대문을 열고, 같이 계단을 오르고, 같은 복도를 지나....

406호 앞에 멈췄는데도 계속 따라오길래 물었다.

"야, 너 몇 호냐?"

"407호요. 김 형은?"

"406호."

"오."

그랬다.

무슨 운명의 장난이 작용했는지, 우리는 졸지에 이웃사촌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마침 옆방이구려. 참으로 기꺼운 우연이오."

"나는 별로 안 기꺼운데?"

"하하, 그럼 김 형, 편히 쉬시오."

예의를 담아 인사하는 녀석에게 대충 손을 저어 주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기숙사답지 않게 세련되고 넓은 데다, 필요한 설비가 빈틈없이 갖춰져 있었다.

호텔 객실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막연히 게임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일상적인 요소들이 이제는 현실이 되었다.

묘한 감회를 느끼며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침대 역시 상당한 고급품이라 몸을 눕히는 순간 곧바로 잠들어 버릴 것같이 편안했다.

하지만 오늘 밤에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코어]를 만든다.'

[김 호]

▷스킬

증폭(F)

복사-스킬[1/1]

1. 허밍버드(E)

▷특성

군주(F)

복사-특성[1/1]

1. 원소 저항(S)

▷장비

교복(D)

▷인벤토리

E등급 무기 선택권(E)

5실버

송천혜에게서 [허밍버드]를 복사하기는 했지만 당장은 못 쓴다.

마법이나 내공이 들어가는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을 제공해 주는 동력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차적인 동력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코어].

일반적으로는 진득하게 몇 주씩 투자해야 만들 수 있지만, 나는 지름길을 수백 번씩 걸어 본 썩은물이다.

'하룻밤이면 충분하지.'

열차에서 흡수한 [암흑빙정]을 통해 이미 체내에 마나는 넘치도록 쌓아 놓았다.

이제 그것을 압축해서 온전한 [코어]로 빚어내기만 하면 된다.

나는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면에 쌓인 거대한 기운을 통제하기 위해서.

서포터가 다 해먹음

10화 첫 수업

이 시각 잠들지 않는 사람은 또 있었다.

고현우 역시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정신을 집중했다.

푹신한 침대 대신 딱딱한 바닥에 앉아서.

눈을 감은 그의 뇌리에 열차에서 겪은 일들이 스쳐 갔다.

빨리 감기를 하듯 휙휙 지나가던 장면들이 한소미를 마주하는 부분에서 슬로우 모션처럼 느려졌다.

뼈 한둘은 부러뜨리겠다는 기세로 매섭게 날아오는 삼단봉이 있었고, 그 하나하나를 심혈을 기울여 막아 내는 자신이 있었다.

삼단봉과 검집이 어우러지는 궤적들이 아름다웠다.

한소미는 그가 하산한 후 처음으로 만난 강적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강자인 검후의 제자.

서로 실력을 얼마간 감추고 대결한 것은 사실이나, 전력을 다해 부딪혔다 한들 승리를 점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아마 패배했을 가능성이 크다.

서로 기세를 끌어올려 맞붙자 자신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김호가 적절히 나서서 그 부족함을 메꿔 주지 않았다면, 철검이 부서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졌으리라.

'고수.'

그것이 김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현우가 계속해서 떠올리는 단어였다.

강자만이 보이는 여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 그에게 있었다.

그렇다면....

잠시 상념에서 벗어난 그의 시선이 방 한켠에 세워 둔 기다란 물체를 향했다.

두꺼운 천으로 둘둘 말고 쇠사슬로 칭칭 감아 놓은 사문의 신물.

고현우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사문의 신물을 계승했다.

김호라면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되지.'

아직은 손을 벌릴 생각이 없다.

그는 그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니까.

힘닿는 데까지는 직접 해 볼 것이다.

고현우는 다시 눈을 감고 한소미와의 전투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으로 옅은 기의 파동과 함께 미풍이 불었다.

* * *

['코어' 특성을 습득합니다.]

['코어'의 랭크가 상승합니다. (F->E)]

역시 영약이 좋기는 좋다.

[코어(F)]를 얻고도 아직 마나가 잔뜩 남았길래, 내친김에 E랭크로 승급까지 했다.

그러고도 여분의 마나가 꽤 된다.

어디서 영약 두어 개만 더 주워 먹으면 D랭크도 금방일 듯하다.

- 파지직,

전류로 이루어진 벌새 한 마리가 만들어졌다.

열차에서는 겨우 파리만 한 크기에 움직임도 비실비실했지만, 지금은 온전한 벌새의 형상에 움직임도 날렵하다.

허밍버드가 방을 한 바퀴 선회한 후 다시 내 손에 흡수되었다.

문득 창밖을 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시계를 보니 알람이 울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이기도 애매하니 그냥 깬 채로 시간을 죽이는 게 낫겠다.

그러고 보니 튜토리얼을 깨면서 무기 선택권을 얻었지.

이왕 생각난 김에 써 버리기로 했다.

[무기 선택권(E)]

▷원하는 E등급 무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정련된 장검(E)

-뾰족한 장창(E)

-탄력 있는 장궁(E)

-....

고민 같은 건 안 한다.

어떤 무기를 얻을지도 이미 다 정해 두었으니까.

단숨에 목록을 쭉 내렸다.

[대지의 스태프(E)를 획득합니다.]

[대지의 스태프(E)]

▷미약한 대지의 기운이 깃들었습니다.

▷대지 속성 마법과 보호 계열 마법의 효과가 소폭 상승합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끝부분에 손톱만 한 에메랄드가 박힌 길쭉한 지팡이.

왜 하필이면 대지의 스태프냐고?

다 미래를 위한 초석이다.

- ♪♬♩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꺼 버리고 대충 정리했다.

방을 나서는데 거의 동시에 옆방 문이 열리며 고현우가 걸어 나왔다.

무복을 입은 어제와는 다르게 깔끔한 교복 차림이다.

물론 등에 사문의 신물을 메고, 허리춤에 철검을 찬 건 어제와 똑같다.

어제 깨 먹었는데 그새 새로 하나 구했나 보네.

"좋은 아침이오."

"어. 밥 먹으러 가자."

* * *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배정된 반으로 향했다.

<1학년 3반>이라는 팻말을 보고 교실에 들어섰다.

나름대로 일찍 등교한 편이라 생각했는데, 교실은 벌써 우리보다 먼저 온 학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아마 학기 첫날의 설렘이 크게 작용했겠지.

낯익은 얼굴들이 제법 눈에 띈다.

자기 패거리 몇몇과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지 음흉하게 실실거리는 신병철.

자꾸 시답잖은 장난을 걸어대는 한소미와, 귀찮아하면서도 마지못해 받아 주는 송천혜.

조벽과 금조한은 다른 반에 배정된 것 같다.

고현우가 교실을 둘러보더니 물었다.

"서 소저가 보이지 않는군. 우리와 같은 반 아니었소?"

"그랬지."

"혹 늦잠이라도 자는 건 아닌가 걱정되는구려."

"냅둬. 기다리면 어련히 오겠지."

어제 저녁 식사를 하며 우리 모두 3반이라는 사실은 확인했다.

그런 가운데 서예인만 교실에 없으니 고현우는 얘가 첫날부터 지각이라도 할까 싶은가 보다.

내 입장에서는 무의미한 걱정이었다.

정말 서예인이 꿈나라를 헤매는 중이라 한들, 어차피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으니까.

여자 기숙사까지 쳐들어갈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내가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은 서예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부재였다.

'담임은 어디 갔대?'

학기 첫날, 첫 수업이라 하면 누구보다도 일찍 교실에서 수업을 준비하는 게 담임 선생님들이다.

최소한 현실에서의 기억과 <용살학원>에서의 기억에 빗대면 그렇다.

학기 첫날의 설렘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공유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태 그림자도 안 비춘다?

우리 반 담임은 이런 방면에서 굉장히 무신경한 사람인 것 같다.

그건 학생들에게 썩 좋은 소식은 아니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머지 학생들도 우르르 등교해 교실의 빈자리를 채웠다.

서예인은 거의 종이 치기 직전에서야 나타났다.

"죠흔하치임...."

하품이 뒤섞인 아침 인사를 건네며 흐느적흐느적 손을 젓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에 앉는다.

— ♩♪♬♩♩—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수업 시간임을 알렸다.

그러나 교탁은 아직도 휑하기만 했다.

"...."

"...?"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는 학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야, 선생님은?"

"나도 몰라."

"근데 우리 담임이 누구야?"

"내가 어떻게 알아."

- 저벅, 저벅,

그때, 복도 저편에서부터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학생이면 수업 종소리를 듣고도 저렇게 느릿느릿하게 다닐 수가 없다.

따라서 저 발소리는 담임 선생님이란 작자의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

비슷한 생각을 한 듯, 온 반의 이목이 복도에 집중되었다.

예상대로 구둣발 소리는 교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담임 선생님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

"허억-"

반 전체가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남자의 외견은 온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쪽 귀가 짧은 짝귀에 그마저도 화상으로 눌러붙었고, 얼굴 한복판을 검상으로 추정되는 흉터들이 죽죽 가로지르고 있다.

거기에 맹금류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매까지 합쳐지니, 어지간한 흉악범 저리 가라 할 살벌한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

"...."

대다수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잔뜩 위축되어 덜덜 떨고, 송천혜를 비롯한 일부는 굳은 표정으로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보낸다.

나와 고현우를 포함한 몇몇만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특별히 담이 커서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저 남자의 정체를 몰라서 그렇다.

좀 험상궂게 생기기는 했는데, 누군지 알아야 놀라든 말든 할 거 아니야.

남자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반응들을 보아하니 나도 은근히 유명한가 보군. 반갑다. 내가 올해 한 해 너희들의 담임을 맡게 되었다."

남자가 칠판에 자기 이름 석 자를 적었다.

본인의 외모처럼 매서워 보이는, 마치 칼로 베는 것 같은 필체였다.

이 수 독.

"모르는 놈들을 위해 딱 한 번만 알려 주마. 내가 토벌한 최고 등급 몬스터는 A급 베헤모스라는 놈이다. 물론 그뿐이라면 너희들이 내 앞에서만 이렇게 쫄고 있을 리가 없지. 이 학교 선생이라면 죄다 A급은 기본 소양 아닌가. 거기 너,"

"네에?? 네!"

이수독이 제일 앞줄의 여학생을 지목했다.

안 그래도 파래진 얼굴로 덜덜 떨던 여학생의 안색이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는지 말해 봐라."

"스스, 스스스, 슬레이어 사냥꾼.... 입니다."

"그거 말고. 네 글자다."

"아.... 그, 그게...."

"화 안 낼 테니까 말해라. 빨리 말 안 하면 화낸다."

여학생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헤맸다.

그 네 글자가 뭔지는 몰라도 본인 앞에서 입에 담기에는 껄끄러운 단어인가 보다.

그러나 이수독이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자, 여학생이 시선을 내리깔고 겨우겨우 목소리를 쥐어짜서 한 글자씩 내뱉었다.

그마저도 갈수록 목소리가 기어들어 가서 마지막에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이이, 이...인간...배배, 배배배배백...ㅈ...ㅓ...."

"정답이다."

이수독은 만족스럽다는 듯 자기 이름 석 자 아래에 여학생이 말한 네 글자를 적어 넣었다.

인간 백정.

'그렇게 된 거구만.'

<용살학원>의 세계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들이 모래알처럼 많다.

그 모래알처럼 많은 초인 중에는 자신의 힘을 그릇된 욕망을 위해 휘두르는 악인, 빌런들도 존재하게 마련.

이수독은 이런 악인들의 추적과 체포를 맡았으리라 추측된다.

덧붙여 인간 백정이라는 단어에는, 체포한 수보다 처형한 수가 훨씬 더 많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저렇게 얼굴만 봐도 알 정도면 추살한 악인의 수가 아마 백은 훌쩍 넘어가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쫄 만도 하지.

"나도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니다. 교장이란 작자가 한 의뢰만 아니었어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을걸. 어찌 됐건 이건 일이고, 나는 프로다. 그리고 여태 모든 의뢰를 완벽하게 수행했다는 점은 내 몇 안 되는 자랑거리지. 너희들이 그걸 망쳐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이수독이 씹어뱉듯이 말하자 교실의 공기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성적이 안 나오는 놈은 낙제점을 받기 전에 내 손으로 죽여 버릴 것이다,'같이 들린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리라.

"시간이 없으니 자기소개는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성적에 대해 설명해 주겠다."

이수독이 손가락을 딱 튕기자 칠판에 써진 글자들이 증발하듯 사라졌다.

깨끗해진 칠판에 다시 적는다.

+ 필기 30%

"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3할이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보고서, 과제 따위를 모두 포함해서 3할. 마음 같아선 2할로 줄이고 싶었다만 그건 내 소관이 아니더군."

나 때에는 2할이었는데, 정말이지 유감스럽다며 혀를 차는 이수독이었다.

그의 말대로 필기의 비중은 매년 바뀐다.

20%였다가, 30%였다가, 심할 때는 15%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확실한 건 내가 <용살학원>을 수백 번씩 다니는 내내 필기가 30%를 넘겨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용살학원 측에서는 책상 위에서의 성적보다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다음으로 이수독은 필기 30%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 태도점수 10%

"문제 안 일으키고 멀쩡히 숨만 쉬어도 10%나 준다. 누군가에게는 거저먹는 점수겠지. 단,"

느긋하게 말한 뒤, 이걸 언급하는 걸 잊었다는 듯 덧붙인다.

"이 태도 점수는 교칙을 어겨서 벌점을 받을 때마다 조금씩 깎인다. 그리고 0% 아래로 내려가면 다른 성적까지 깎아 먹을 수도 있다. 과연 그 정도로 교칙을 우습게 여기는 놈이 있을까 싶지만...."

의도된 것인지는 몰라도, 이수독의 시선이 일순 신병철 패거리에게 꽂힌 것 같았다.

그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싹수가 노란 놈들은 눈여겨보도록 하겠다. 혹시 아나? 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될지."

학생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인간 백정'을 졸업 후에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 상상했을 테니까.

아마 마음속으로는 죽어도 교칙을 어기지 않겠노라 필사적으로 다짐하고 있겠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10%를 주고 시작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음은 가장 중요한 실기다."

+ 공략전 30%

+ 대인전 30%

"실기는 다양한 던전을 클리어하는 공략전, 다른 학생과 승부를 겨루는 대인전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건 상대 평가다. 점수를 얻고 싶다면 무조건 네 옆에 있는 놈들보다 더 열심히, 더 잘해야 한다는 말이지."

플레이어가 흔히 쓰는 용어로 바꿔 말하면 공략전은 PVE, 대인전은 PVP다.

대인전을 예로 들면 다른 학생과 승부를 겨루며 점수를 뺏고 빼앗기며, 이 점수로 순위를 매기게 된다.

대인전에서 얻을 수 있는 최대 성적이 30%니까,

상위 10%는 30% 만점에 27%,

상위 50%는 30% 만점에 15%를 받는 것이다.

공략전도 마찬가지.

이수독이 칠판에 적은 내용을 둘러 크게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맨 아래에 '100%'라고 적었다.

+ 필기 30%

+ 태도점수 10%

+ 공략전 30%

+ 대인전 30%

——————————————

= 총점 100%

"1학년 1학기 평가 기준은 이렇다. 질문할 시간을 주지. 궁금한 게 있는 놈은 지금 당장 손을 들도록."

"...."

아무도 손을 올리지 않았다.

그것이 모두가 이수독의 설명을 완벽히 이해해서인지, 정말로 손을 들었다간 단숨에 손모가지를 잘라 버릴 것 같아서인지는 모를 일이다.

"없나? 좋다. 오늘은 학생들 사이에 가벼운 변별력을 부여하기 위해 배치 고사를 실시할 것이다. 모두 아레나로 이동하도록."

서포터가 다 해먹음

11화 배치 고사 (1)

이수독이 설명하는 내내 뿜어댔던 살벌한 아우라 때문일까, 아레나로 이동하는 반 전체가 바짝 위축된 분위기였다.

반면 고현우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신 형이 어제 말했던 '빅 데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구려. 매우 기대되오."

"그래, 너는 척 봐도 대인전 좋아할 것 같더라."

"강자와의 비무는 항상 즐겁지. 헌데 그 배치 고사란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거요?"

나는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무작위 세 명이랑 붙어서 승수만큼 점수를 가져가는 거야. 1승당 300점."

"3승을 모두 따내면 900점이나 가져가는 거요?"

"그렇지."

"지거나 비기면? 점수를 잃기도 하오?"

"잃지는 않고, 그냥 아무것도 없어. 1승 1무 1패는 300점 0점 0점."

"과연, 이해했소."

모두가 0점부터 대인전을 시작한다면 하위권 학생들만 신나게 두들겨 맞을 것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첫날에 배치 고사를 실시하고, 실력에 따라 300점씩 떨어뜨려 놓는다.

이수독을 앞세운 1학년 3반 행렬은 곧 다른 1학년들과 합류하여 함께 아레나로 향했다.

반은 달라도 배치 고사는 1학년 전체가 동시에 실시하는 까닭이다.

조금 걷다보니 거대한 돔형 건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레나의 구조는 현대의 경기장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벌어지는 중앙의 무대를 관중석이 둘러싸는 형태다.

차이점을 꼽자면 저 무대.

온갖 마법적, 과학적 기술을 집대성한 결정체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지형을 구현해 낸다.

운석이 떨어지고 용암이 흘러내리는 화산 지대, 낙뢰가 비 오듯 내리치는 협곡, 심지어는 깊은 호수마저도.

아직은 특별한 것 없이 회색 타일만 쭉 깔려 있다.

그 위에는 스코어보드가 둥둥 떠다니는데, 배치 고사가 시작되기 전인 지금은 점수 대신 다른 게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