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시작된 순간 이미 서예인의 양손에는 각각 권총이 한 자루씩 들려 있었다.
권총들이 번갈아서 푸른 빛을 뿜어냈다.
- 투투투투투!
송천혜는 빗발치는 마력탄들을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앞으로 뻗었을 뿐이다.
마치 여기까지만 오고 멈추라는 것처럼.
- 치지직! 치지지직!
그렇게 뻗은 손바닥 조금 앞에서 쉴 새 없이 스파크가 튀겼다.
마력탄들이 송천혜가 전개한 장벽에 막힌 것이다.
신병철이 그 광경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어? 저게 왜 막혀? 저게 막히면 안 되는데?"
'이래서 더 두고 봐야 하는 거지.'
서예인이 탄마다 담는 마력도 보통 이상은 되지만, 그 이상으로 송천혜가 보유한 마력량이 지나치게 막대하다.
마법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마나를 쏟아붓는지 E랭크 허밍버드가 D급처럼 보인다.
지금 쓰는 간단한 장벽 마법마저 두께가 두 배에 가깝다.
원래는 장벽을 가볍게 파고들었을 마력탄들이 도중에 힘을 잃고 흩어져 버리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송천혜는 그렇게 한 손으로 장벽을 유지하면서, 반대쪽 손으로는 뇌전으로 이루어진 벌새 두 마리를 띄워 올렸다.
[허밍버드]
벌새 두 마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서예인은 배리어를 향해 연사하던 총구를 허밍버드 쪽으로 돌렸다.
- 투투투투!
벌새 한 마리를 요격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다른 하나는 아직 멀쩡하다.
서예인의 신형이 스르르 옆으로 미끄러지며 허밍버드를 피해 냈다.
그러나 송천혜가 숙련된 지휘자처럼 손을 휘젓자 벌새는 공중을 선회하여 다시 목표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 투투투투투!
또다시 권총들이 불을 뿜는다.
벌새는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갔음에도 날아오는 힘을 잃지 않고, 한 줄기 뇌전을 그리며 서예인에게 닿았다.
- 파지직!
"...!"
서예인이 아주 살짝 인상을 썼다.
꽤 좋은 장비의 보호를 받는지 단번에 행동 불능이 되지는 않았지만,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 펑!
후속타로 날릴 굵은 벼락을 생성하던 송천혜는 순간 멈칫했다.
작은 폭발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 것이다.
허밍버드를 피하지 못하리라는 판단하에 빠르게 연막탄을 던진 게 분명했다.
신병철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훌륭한 판단! 이러면 시간 좀 벌었죠."
"마법사 측이 얼마나 빨리 연막을 걷어 내느냐가 관건이겠어."
괜히 보이지도 않는 연막에다 벼락을 집어 던져 봤자 불발로 끝날 게 뻔하니까.
하지만 송천혜는 연막을 치우기 전에 다른 것을 시도하려나 보다.
장갑 위에서 술식의 구조가 순식간에 뒤틀리며 다른 것으로 바뀌었고, 벼락이 야구공만 한 전기 구체 여러 개로 나뉘었다.
송천혜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연막 안으로 던져 넣었다.
- 파직, 파지직, 파지직!
[송천혜 100% vs 서예인 88%]
[남은 시간 4:02]
스코어보드의 체력이 줄어들었으니 한 두개는 명중한 것 같지만, 아직 상대를 제압하려면 멀었다.
송천혜가 바람 마법을 시전하여 연막을 걷어 냈다.
텅 빈 투기장.
서예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퉁—!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송천혜의 신형이 옆으로 휘청거렸다.
우측 어딘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력한 일격이 날아온 것이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한 후 공격이 날아온 방향을 유심히 살펴보니, 아지랑이 같은 투명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덤불이나 나뭇잎 더미가 살랑거리는 듯한 모양새였다.
신병철이 감탄사를 흘렸다.
"이야.... 투명 길리? 쟤 돈 진짜 많나 보네."
투명 길리. 광학미채 길리슈트.
아무리 못해도 C등급, 장인의 손길이 닿는다면 A등급까지 받는 귀한 아이템이다.
그러니 값은 말할 필요도 없이 비싸디비싸고.
학생, 그것도 1학년이 투명 길리를 구비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나는 그것보다 다른 부분에 주목하고 있었다.
"라이플로 바꿔 들었네."
"권총으로는 답이 없잖아."
총사가 술사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마법 장벽의 일점을 겨냥해서 뚫어야 하는데, 저렇게 술사의 마력량이 엄청나게 풍부한 경우 그것이 상당히 어려워진다.
때문에 이런 경우 권총 두 자루로 여러 발을 연사하기보다는 한 방이 강력한 라이플로 바꿔 드는 게 올바른 판단이다.
서예인이 쓰는 라이플의 마력탄은 관통력보다는 파괴력에 치중한 물건으로 보인다.
대포알과도 같은 일격으로 장벽을 전개한 마법사를 껍질째 찌그러뜨리는 용도다.
- 퉁—!
다시 한번 송천혜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번에 저격이 날아온 방향은 정면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송천혜가 급하게 다음 마법을 시전했다.
마법 장벽 위로 전류가 추가로 한 겹 덧씌워진다.
- 퉁!
세 번째 탄환이 장벽에 날아와 꽂혔다.
장벽을 강화한 덕분에 이전처럼 쭉 밀려날 정도는 아니지만, 충격은 여전히 내부까지 전해진다.
어지러움을 느낀 송천혜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송천혜 85% vs 서예인 88%]
[남은 시간 2:13]
"야, 솔직히 이건 나도 긴가민가했는데, 이러면 진짜 서예인이 이길 수도 있겠다."
"계속 봐."
야금야금 유효타를 허용하다 보면 마법사 쪽이 진다.
그러나 내가 계속 지켜보라고 하는 이유는 여전히 내기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명색이 토파즈 마탑인데, 거기에서 배우는 온갖 마법 중에 과연 이 상황을 타파할 방법이 없을까?
당장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 수십 가지인데.
"...."
송천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품에서 장갑 한 짝을 더 꺼내 비어 있던 손에 착용했다.
두 손을 깍지를 끼듯 붙잡은 다음 실뜨기를 하는 것처럼 양쪽으로 쭉 벌리자,
[라이트닝 스레드(Lighting Thread)]
두 손 사이에 가느다란 전기의 실이 수십 가닥 생성되었다.
송천혜는 그것을 사방으로 넓게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똑똑하네."
"저게 뭔데?"
"쉽게 설명하면 거미줄이야. 저렇게 쭉 쳐 놓고 걸려들길 기다리는 거지."
내가 설명한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원형 투기장 전체가 라이트닝 스레드로 가득 찼다.
- 치지직!
그리고 반응이 왔다.
투기장 한 구석, 투명하게 꿈틀거리는 형체 위로 옅은 스파크가 일어난 것이다.
위치를 특정 당한 순간 서예인의 라이플이 불을 뿜었으나,
- 퉁—!
네 번씩이나 똑같은 공격에 당해 줄 송천혜가 아니었다.
저격하는 위치가 뚜렷하게 보인다면 더욱.
모든 마력 장벽을 한 면에 집중시키며 마력탄을 조금의 피해도 없이 막아 낸다.
- 펑!
서예인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투명 길리를 벗어 던지고 재차 연막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송천혜 입장에서 이제 이 연막탄은 걷어 낼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계속해서 튀기는 스파크가 상대방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또다시 허밍버드가 투기장을 가로질렀다.
이번에는 한 마리였으나 비교적 덩치가 컸다.
그리고 움직임 역시 훨씬 불규칙적이었다.
지그재그와 소용돌이를 섞은 듯한 움직임에 서예인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 파지직!
'아주 조금은 발전했네.'
내 평가 기준으로 100점 만점에 30점은 줄 만하다.
방금까지는 10점도 안 됐고.
벌새를 참새마냥 직선 궤도로 곧장 날려 보내는 걸 보고 얼마나 훈수가 마려웠던가.
역시 사람은 실전에서 구를수록 많이 배우는 법이다.
"...."
안타깝게도 서예인에게는 더 이상 패가 남지 않은 듯했다.
허밍버드에 제대로 당하는 바람에 기동성도 0에 가까워졌다.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되든 안 되든 최대한 화력을 쏟아부어 본다.
라이플이 순식간에 분해되고 권총 두 자루로 재조립되었다.
- 투투투투!
그러나 초반에도 안 통했던 공격인 만큼 이번에도 장벽에 가볍게 막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송천혜가 견고한 방어를 유지하며 한 번씩 반격을 날릴 때마다 서예인의 체력이 계속해서 깎여 나갔다.
"끝났네."
"아."
[남은 시간 0:00]
[송천혜 85% vs 서예인 68%]
제한 시간인 5분이 모두 소진되자, 송천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모든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마나를 제 몸처럼 자연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1학년 중에는 거의 적수가 없겠어.'
상대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서예인의 실력도 상당하다.
토파즈 마탑을 상대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제압되지 않고 버텼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했다.
[송천혜 Win vs 서예인 Lose]
물론 평가는 평가고, 내기는 내기다.
신병철에게 손을 쓱 내밀었다.
"5실버."
"아니이~ 이게 지네~ 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5실버를 꺼내 올려놓는다.
말은 5실버면 적당히 쫄리는 맛이 있다고 했지만, 실제로 잃게 되자 굉장히 아쉬운 모양이다.
"야야, 내기 한 번만 더 하자. 딱 한 번만 더."
"뭘 자꾸 내기를 하재. 진 다음에 이러시는 거 아름답지 못하거든요?"
"아잇, 그러지 말고 들어 봐라. 배치 고사야 1학년 합동으로 하니까 대놓고 다 공개하지, 원래 대인전은 거진 비공개란 말이야. 이렇게 팝콘 뜯으면서 내기 주고받을 기회가 언제 또 올 줄 알고?"
당연히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가을에 대회라도 열리면 모를까, 학생 간의 대인전을 관전할 일은 좀처럼 없다.
해서 나는 못 이기는 척 내기를 승낙했다.
"그러면 딱 한 번만 더 하지 뭐."
"아주 잘 생각했어! 그러면 이번에는...."
신병철의 눈이 이 투기장, 저 투기장을 돌아다니며 내기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매서운 검기로 상대방을 몰아붙이다 결국에는 제압해 버리는 한소미.
투기장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린 홍연화.
두 사람 모두 내기 대상으로 부족함이 없지만, 아쉽게도 세 번째 배치 고사를 거의 끝내 가는 참이다.
"오!"
그러다가 신병철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고현우는 어때?"
서포터가 다 해먹음
14화 배치 고사 (4)
[고현우 100% vs 백준석 87%]
[남은 시간 3:08]
고현우는 한창 두 번째 배치 고사를 치르는 중이었다.
상대는 교복 위에 견고한 갑옷을 갖춰 입고 양손검을 휘두르는, 전형적인 기사의 모습이다.
묵직하고 두꺼운 검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살벌한 파공음이 울린다.
다만 이런 살벌해 보이는 공격도 안 맞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분명 연이어 공격을 퍼붓는 쪽은 백준석이고, 피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쪽은 고현우다.
그러나 전혀 백준석의 우세로는 보이지 않는다.
백준석은 지친 기색이 역력하며 땀을 뻘뻘 흘리고, 고현우는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유유자적한 움직임을 이어 가고 있었으니까.
"헉, 허억, 커헉."
백준석이 공격을 멈추고 거리를 벌렸다.
계속 맞지도 않는 공격을 반복하다가 제풀에 지쳐 버린 것이다.
그렇게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상대방에게 고현우가 검을 겨누고 물었다.
"더 하시겠소?"
"...이익!"
백준석이 발끈해서 달려들었다.
안 그래도 체력이 얼마 안 남았는데, 체력을 모두 소진한 후의 뒷일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롱소드를 휘두른다.
순간, 시종일관 피하기만 하던 고현우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고는 붓으로 그리는 것처럼 부드럽게 철검을 긋자,
- 드드드득!
소름 끼치는 마찰음과 함께 백준석의 갑옷에 사선으로 긴 상처가 새겨졌다.
[고현우 100% vs 백준석 87%]
[고현우 100% vs 백준석 68%]
한순간에 뭉텅 깎여 나가는 체력.
백준석은 엄청난 고통에 가슴팍을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에게 또다시 검이 겨누어졌다.
"더 하시겠소?"
"...내가 졌다."
[고현우 Win vs 백준석 Lose]
'확실히 제법이란 말이야.'
고현우가 가볍게 내디딘 한 걸음과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른 일검.
그 안에 담긴 심오한 묘리가 나에게는 보였다.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면이 많지만, 검술 하나만 놓고 보면 거의 완성에 가깝다.
나를 아는 사람이 이 평가를 들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내 평가는 굉장히 박한 편이니까.
신병철은 심오한 묘리까지는 못 읽었어도 고현우가 제법 강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하는 모양이다.
"이야.... 백준석이 쉬운 상대는 아닌데 그냥 썰어 버리네. 한소미랑도 반반 가져갔다면서?"
"그건 또 어디서 들었냐."
"흐흐흐, 이래 봬도 정보를 사고파는 몸이라, 이 말씀이야.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아무튼 쟤 이제 2승인 거 맞지? 우리 3경기에서 안목을 겨뤄 보자고."
고현우가 마지막 배치 고사를 치르기 위해 순간이동 마법진에 올라탔다.
곧 맞은편에서도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보통 남학생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강철 같은 근육으로 이루어진 우람한 덩치.
[고현우 100% vs 조벽 100%]
"...3경기는 고전하겠네."
"한소미랑 조벽 중에는 누가 더 강해?"
내 질문에 신병철이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글쎄, 세간의 평가만 놓고 비교하면 검후보다는 권왕이 조금 더 위지.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권왕과 검후의 비교고, 제자들 실력은 또 다르지 않겠냐?"
"한 마디로 모른다?"
"...."
잠시 말문이 막혔던 신병철이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무튼! 이번엔 내기 조건을 다르게 해 보자. 누가 이기는지 말고, 몇 분 만에 승부가 나는지. 어때?"
"뭐 그럽시다. 너부터 정해."
승부가 났을 때, 5분의 제한 시간 중 몇 분이나 경과했을까?
짧은 고민 끝에 신병철이 먼저 시간을 정했다.
"나는 4분. 아니다, 5분 풀로 쓰는 걸로. 아무래도 실력이 비슷하면 금방은 안 끝날 거 아냐?"
"그럼 나는 2분 컷으로."
"...엉?"
황당하다는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신병철이었다.
한쪽의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나지 않은 이상 2분 만에 승부가 나는 경우는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아니, 이번엔 왜 또 2분 컷이래. 쟤가 그렇게 빨리 진다고?"
"누가 빨리 진대. 난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럼 뭔데?"
"다 보면 알아."
"야, 너는 그, 사람 궁금하게 만드는 데 뭐 있다? 아무리 그래도 2분대는 무리수인데."
"무리수면 5실버 돌려주는 거지. 보자고. 어떻게 되나."
* * *
'김 형이 지켜보는 중이로군.'
고현우의 시야에 김호의 모습이 잡혔다.
관중석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며 신병철과 진지하게 무언가 대화를 나눈다.
내용은 몰라도 자신과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겠지.
가능하면 친우 앞에서 이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승패가 우정에 영향을 미치겠냐마는, 이기는 편이 더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음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고현우 100% vs 조벽 100%]
고현우는 스코어보드를 한번, 조벽을 한번 눈에 담았다.
권왕의 제자라고 했다.
열차에서 한소미의 실력을 가볍게 파악해 본바, 조벽의 실력이 한소미와 엇비슷하기만 해도 승리를 점치기 어려워진다.
열차에서는 김호의 그 신비한 능력 덕에 조금 더 버텼지만, 이번에는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맞붙어야 하니까.
문득 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약하게 떨고 있는 손을.
떨림의 원인은 두려움인가? 흥분인가? 기대감인가? 어쩌면 셋 모두인가?
그로서도 확실치 않았다.
주먹을 한 번 강하게 움켜쥐고 펴자 떨림이 멎었다.
그제야 고현우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서로를 응시한 채, 조벽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소미와 동수를 이루었다고 들었다."
"당치도 않소. 부족한 실력으로 한 소저의 눈만 어지럽혔을 따름이오."
"정말 부족한지는 지금부터 확인해 보면 될 일. 검을 뽑는 게 어떤가."
고현우는 조벽이 말하는 '검'이 허리춤의 철검을 뜻하는 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시선이 어깨 어림, 즉 등에 묶어 놓은 사물의 신물을 향하고 있었기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어야 했다.
"본인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소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오."
"그런가. 아쉽군."
"동감이오. 그럼 이제 시작해 봅시다."
[3]
[2]
[1]
[Start!]
경기과 시작되기가 무섭게 조벽이 땅을 박찼다.
곰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매우 재빨랐다.
한 걸음씩 성큼성큼 내디딜 때마다 거리가 훅훅 좁혀진다.
고현우가 탐색전과 견제를 겸해 가벼운 검기 두 개를 날려 보냈으나, 조벽은 아예 막을 생각도 안 했다.
검기는 조벽의 몸에 닿자 조금의 영향도 못 주고 덧없이 사그라들었다.
'시작부터 강수를 두는군.'
고현우는 참 그다운 전투 방식이라 생각했다.
탐색전 같은 겉치레를 배제하고 처음부터 올곧게 정면으로 부딪쳐 온다.
그로서는 조금 더 느긋하게 비무를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이런 식의 전투도 싫지는 않았다.
"흠!"
상대가 간격에 들어왔음을 인지한 고현우가 선공에 나섰다.
한 손으로 휘두르던 철검을 양손으로 잡고 폭풍 같은 연속 베기로 조벽의 상반신을 노린다.
- 스스스스—
조벽의 신형이 좌우로 흔들리며 미미한 잔상을 남겼다.
덩치에 걸맞지 않은 재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검격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회피한다.
동시에 굳게 움켜쥔 주먹에 강대한 기운이 담겼다.
조벽은 그것을 바짝 끌어당긴 후, 그대로 앞으로 쭉 뻗어 냈다.
고현우의 시선에는 주먹이 다가오면서 삽시간에 크기를 불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거대한 바윗덩이 같구나...!'
감탄만 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기세를 끌어올려 철검에 담고,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삼검(三劍)을 내지른다.
- 파파팟!
검격이 한 번 닿을 때마다 바위 같은 기운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검격과 세 번이나 충돌했음에도 조벽의 일 권은 모두 해소되지 않고, 일부가 남아 고현우를 강타했다.
- 쿵!
'으음....'
커다란 바위에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몸에 가해진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찰나 조벽이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고현우는 즉시 앞으로 몸을 날렸고,
- 콰쾅!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막대한 경력이 떨어져 내렸다.
투기장의 회색 타일이 산산 조각나며 사방으로 비산한다.
조벽의 공격이 빗나간 틈을 타 거리를 벌린 고현우였지만, 거리만 벌리면 안전하리라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멀리서 주먹을 내지르는 조벽.
조금 전과 똑같은 일 권이다.
그런데 그 먼 거리에서, 바윗덩이 같은 기세가 고현우를 향해 짓쳐 왔다.
'쉽지 않군.'
- 파파파파팟!
이번에는 연이어 다섯 번의 검격을 날려 조벽의 기세를 상쇄하려 했으나, 여전히 일부가 남아 그를 후려쳤다.
- 쿵!
전투가 시작되고 몇 수 교환하지도 않았지만 내내 손해만 봤다는 점은 뼈아프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같은 양상일 것이다.
고현우는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본공으로는 여기까지가 한계로군. 조금은 더 통하리라 생각했건만....'
슬슬 감춰 둔 실력을 내보여야 할 순간이 왔다는 것을.
"...."
다시 거리를 좁혀 가던 조벽은 문득 고현우의 기세가 급변했음을 눈치챘다.
철검이 보는 사람이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고, 동시에 어디선가 불어오는 옅은 미풍이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무더운 여름날에 간혹 불어오며 지상의 열기를 식히는 서늘한 바람.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원형 투기장에 바람 같은 게 불어올 리가 없다.
따라서 이 미풍의 근원은 눈앞의 고현우일 것이다.
'심상치 않다.'
조벽의 본능이 경종을 울렸다.
이번만큼은 신중해야 한다고.
해서 그답지 않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세 번째 권격을 날려 보냈다.
그러나 거대한 바윗덩이 같던 자신의 기운은 미풍에 닿자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내지르는 일 권 역시 금세 증발해 버린다.
그제야 조벽은 확신했다.
'저 미풍은 일종의 검기(劍氣)다.'
앞선 두 권격을 통해 어설픈 공격은 기력 낭비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렇다면 단 한 수에 모든 힘을 집중해 승부를 본다.
조벽의 몸에서 유형화된 투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그것을 빈틈없이 몸에 두른 뒤,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것은....'
투기를 최대한 끌어올린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이, 몰아치는 검기처럼 그를 사방에서 압박한다.
어지간한 무인은 순식간에 온몸이 난자당해 싸늘한 시체로 화할 것이다.
몸에 두른 투기가 빠르게 줄어들었으나 이 정도는 예상한 바였다.
목표까지 닿기에는 충분한 양이다.
"...."
다가오는 조벽을 마주하며, 고현우 역시 그가 승부수를 띄웠음을 직감했다.
부드럽게 움직이던 철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자, 조벽을 향해 불어 가던 모든 미풍이 검날에 집중되었다.
조벽이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
고현우의 철검도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 번쩍!
"...."
"...."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어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조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초식의 이름은?"
"청류(淸流)."
조벽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교복 어깨 부분이 살짝 잘려 나가 있었다.
고현우의 일검이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이나마 교복의 D급 방어 마법을 상회했다는 뜻이다.
다만 그 이상의 상처가 없는 걸 보면 조벽이 몸에 두른 호신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듯하다.
"기억하지, 허나 아쉽군."
- 퍼서석,
고현우가 아래로 늘어뜨린 철검이 끄트머리부터 서서히 부서져 내렸다.
초식과 초식이 맞부딪히는 반발력에 내구도가 다한 것이다.
손잡이만 남아 버린 철검을 놓자 남은 부분마저도 소멸해 버렸다.
철검이 파괴된 이상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이었다.
등의 장검을 뽑아 들고 마저 승부를 보거나, 패배를 인정하거나.
고현우는 후자를 선택했다.
"내가 졌소."
"다음 승부를 기대하겠다. 그때는 온전한 실력을 보고 싶군."
"...."
고현우는 등을 돌려 떠나가는 조벽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 * *
나는 고현우가 항상 차고 다니는 철검에 주목했다.
사문의 신물 대신 다른 검을 써야 한다는 것은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그게 반드시 '철검'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해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결과 나온 대답은,
'소모품으로 써야 하니까.'
고현우는 열차에서 철검이 깨졌을 때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다.
그런 상황을 한두 번 겪어 본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아마 고현우가 익힌 무공의 특성 때문이겠지.
어지간한 장비로는 그 기운을 온전히 담을 수 없기에, 내구도가 빠르게 깎이고 결국에는 깨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배치 고사에서도 충분히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특히 조벽 같은 강자를 상대로는 아주 높은 확률로.
따라서 내가 베팅한 '2분 컷'은 승부가 나는 시간이 아니라, 철검이 버티지 못하고 깨져 버리는 시간이었다.
[고현우 Lose vs 조벽 Win]
경기에 소요된 시간, 2분 28초.
5분보다는 2분에 훨씬 가까운 시간이니 내기는 나의 승리였다.
"하아니, 진짜 말도 안 되네 이거. 저렇게 끝난다고? 야, 이건 아니지. 이걸 어떻게 예측해?"
"혀가 길다. 5실버."
수금을 하기 위해 손을 내밀자 신병철이 비굴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야야, 내가 지금은 돈이 없고, 금방 빌려다 줄게. 진짜 금방."
"네가 하자며. 돈도 없으면서 내기는 왜 걸었어?"
"아니, 이번에는 이길 줄 알았지.... 내기 하면 이 신병철인데, 오늘 일진이 영 사납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딴에는 제법 자신이 있었나 보다.
하필 안목을 겨루는 상대가 나였다는 게 불행한 점이었다.
5실버를 빚으로 달아 둬도 괜찮지만,
"꼭 돈으로만 받을 필요는 없지."
"진짜? 그럼 뭘로?"
신병철이 반색을 하며 물었다.
나는 턱짓으로 녀석이 쥐고 있는 메모장을 가리켰다.
정보.
서포터가 다 해먹음
15화 배치 고사 (5)
마지막 한 명까지 배치 고사를 마치고 원형 투기장 밖으로 이동하자,
무대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텅 비었다.
"일단락됐군. 모두 집합."
이수독이 1학년 3반을 주위로 불러 모았다.
"대진운이 안 좋아서 예상보다 승률이 낮게 나온 경우도 있을 것이다. 배치 고사는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변별력을 위해 실시하는 것이니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도록."
몇몇 학생들의 표정이 안 좋기는 했다.
중위권 정도의 실력은 되는데도 마탑이나 명문가 등을 상대로 만나 연패를 해서 그렇다.
'이 점수는 내 실력이 아닌데' 하는 생각과 함께 배치 고사의 시스템에 불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공평하거든.'
본 실력과 다른 점수대에서 시작하는 게 당장은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지만, <용살학원>에는 이를 보완하는 장치나 이벤트들이 제법 많다.
학기 중 꾸준히 대인전을 거듭하다 보면 결국 자기 실력에 걸맞은 위치를 찾아가게 되어 있다.
그사이에 실력을 보강하면 당연히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겠고.
"나도 1학년 배치 고사는 다 지고 0점에서 시작했다. 참 많이도 비웃더군. 아득바득 실력을 키워서 한 놈씩 주둥이에 칼을 꽂다 보니까 2학년쯤에는 다들 조용해졌다. 3학년이 됐을 때는 대인전에서 나보다 뛰어난 놈이 한 손에 꼽혔지. 지금? 나 말고는 다 죽었다."
이수독의 과거사가 이어질수록 학생들의 얼굴이 점점 더 창백하게 질렸다.
특히 마지막의 '나 말고는 다 죽었다.'는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내가 다 죽였다.'처럼 들렸다.
이수독이 이를 드러내며 살벌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너희보다 센 놈한테 졌으면 배치 고사의 형평성을 따질 시간에 강해져서 설욕할 생각을 해라. 그것이 용살학원의 학생다운 마음가짐이다. 점심 식사 후에 공략전 배치 고사를 마저 진행한다. 늦지 말고 던전동으로 집합하도록. 그럼 해산."
학생 식당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빨랐다.
모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적잖이 지쳤고 그만큼 허기가 졌을 것이다.
게다가 점심 식사 후에는 공략전 배치 고사가 남았으니, 든든하게 먹고 에너지를 비축해 두어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어이, 병철이! 밥 먹으러 안 가나?"
신병철 패거리 중 한 명이 그를 불렀다.
신병철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답했다.
"너네끼리 먹어라. 난 이분이랑 사업 얘기를 좀 해야 해서."
"사업? 그래, 알았다."
패거리는 좋을 대로 하라는 반응을 보이며 떠났다.
신병철이 말하는 '사업'이란, 이번 대인전에서 조사한 정보를 넘기는 걸 말한다.
내기에서 빚진 5실버만큼.
신병철이 반쯤은 장난스럽게 한탄했다.
"에휴, 내가 어쩌다 베팅을 잘못해 가지고. 가자, 오늘 점심은 샌드위치라더라."
"좋지, 샌드위치."
고현우와 서예인을 데리고 가려고 돌아봤다.
아직 패배의 여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인지 둘 다 상태가 영 별로였다.
특히 고현우의 상태가 더 심각했는데, 안색이 파리한 것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조벽과의 대결에서 많지도 않은 내력을 잔뜩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마지막에 쓴 [청류]라는 기술은 척 보기에도 내력 잡아먹는 괴물 아닌가.
철검이 깨지지 않았더라도 본인이 먼저 한계에 부딪혔을 것이다.
"야."
"...음. 김 형, 무슨 일이오?"
"안 가? 밥 먹으러."
"잠시 다른 생각을 했소. 어서 갑시다."
그제야 삐걱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녀석을 도로 멈춰 세웠다.
"아니다. 너 기숙사 가서 좀 쉬다 와라. 상태가 말이 아니네."
"아직 견딜 만하오."
"견딜 만하면 안 되지. 이다음이 공략전인데. 가서 조금이라도 회복하고 와. 샌드위치 싸다 줄 테니까."
"...그래 주겠소? 김 형에게 신세를 지는구려."
"됐으니까 가라. 이따 늦지 말고."
"고맙소."
고현우는 짧은 감사를 표하고 자리를 떠났다.
점심시간 내내 운기조식을 한다면 바닥난 [코어]를 공략전을 치를 정도까지는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신병철과 서예인에게 말했다.
"점심은 우리끼리 먹으러 갑시다."
* * *
신병철의 말대로 점심 메뉴는 샌드위치였다.
햄치즈계란 샌드위치와 게맛살샐러드 샌드위치.
봄 날씨도 화창한데 굳이 식당에 앉아서 샌드위치를 먹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우리는 잔디밭에 자리를 깔았다.
우리 외에도 삼삼오오 잔디밭에 모여든 학생들이 제법 되었다.
비단 학기 첫날이라서가 아니라, 오늘 날씨에는 사람 기분을 들뜨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런데도 서예인은 여전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는 중이었다.
무당벌레가 잔디 위를 기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반면 신병철은 배 속에 거지라도 들었는지 샌드위치를 연이어 게걸스럽게 입에 쑤셔 넣었다.
입 안을 햄치즈계란과 게맛살샐러드가 뒤섞인 무언가로 가득 채운 채 입을 열었고,
"구애훠 모과 굼굼호쉰—"
"입에 든 거 다 삼키고 말하면 안 돼?"
내 핀잔에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켠 다음,
빈 병을 바닥에 탁 내려놓고 했던 말을 다시 한다.
"쏘리. 그래서 뭐가 궁금하신가? 네가 1승 2패랬으니까, 300점대 애들 정보를 좀 주면 되나?"
"아니. 난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야."
올리고자 하면 언제든 올릴 수 있는 게 점수다.
게다가 이 점수대는 수준이 너무 낮아서 상대방을 분석하는 의미가 없다.
"이열.... 자신 있나 봐? 그럼?"
"최상위권."
"최상위권이라.... 나도 그쪽 위주로 보기는 했는데, 이게 참."
신병철이 살짝 난처한 기색으로 메모장을 한 장씩 넘겼다.
"이게, 실력 있는 애들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야. 열차에서도 말했잖아. 올해 1학년은 역대급 황금 세대라고."
"4대 세력 위주로, 유망주들만."
"아, 그러면 범위가 좀 좁혀지지요. 어디 보자...."
4대 세력.
용살학원에는 학생회나 선도부 같은 공식적인 단체 외에도, 학생들의 공통된 관심사나 목표를 위해 설립된 수많은 동아리가 존재한다.
이 동아리들은 크게 보면 대부분 네 세력 중 하나에는 속하는 편인데,
<무림연맹>,
<마탑회>,
<길드연합>,
그리고 <기사단>이 그것이다.
실력자들이 즐비한 황금 세대라도, 4대 세력을 기준으로 잡으면 각 세력마다 가장 특출난 한두 명씩은 추려 낼 수 있을 것이다.
신병철은 메모장을 빠르게 뒤적거리며 내용을 정리했다.
"우선 보자.... 우리가 파악하기로 <무림연맹>에서 제일 강한 카드는 모용준. 이름에서 짐작했겠지만 검성 모용현성의 손주야. 딱 명문세가 후기지수답게 탄탄하게 수련을 쌓았고. 대인전은 2승 1패를 하기는 했는데, 1패 상대가 그 한소미였어. 팽팽하게 가다가 판정패로 끝났지. 딱 3% 차이로."
"3%면 거의 없는 셈이네."
"그렇지. 규칙이 달랐으면 이건 몰랐을걸."
[5분 제한] 규칙이 아니라 장기전이었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를 일.
사실상 실력이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가 듣기로는 흑도 쪽에도 한 명 더 있다던데, 얘는 이번 대인전에서 드러나질 않았어. 실력을 감추고 싸웠거나, 그냥 헛소문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이건 우리도 더 조사해 볼 거고, 지금은 그냥 모용준이 제일 뛰어나다고 보면 돼."
"오케이, <마탑회>는?"
신병철이 메모장을 몇 장 뒤로 넘겼다.
"<마탑회>는 원래 송천혜, 홍연화 투탑이었던 게 송천혜가 선도부에 들어가면서 원탑이 됐지. 평가는 둘이 엇비슷했...는데, 홍연화가 너한테 져서 살짝 떨어졌더라. 야, 진짜 어떻게 이겼냐?"
"그냥, 운이 좋았지. 다음은?"
사실 나한테 S급 [원소 저항]이 있다고 나불거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화제를 돌리자, 신병철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설명을 이었다.
다음은 <길드연합>.
짐작대로라면 신병철의 동아리가 속한 세력이기도 하다.
"그, 어깨에 고양이 올리고 다니는 애 봤냐?"
"오다가다 몇 번."
"그거, 사실 고양이 아니고 호랑이다."
"그럴 것 같더라."
"...안 놀라네. 재미없게."
신병철은 내 반응이 너무 건조해서 실망한 듯했다.
용살학원에서 단순한 애완 고양이를 어깨에 올리고 다니리라 생각하기는 어렵다.
평소에는 축소 스킬 등으로 크기를 줄여 놓고 다니는 것이리라.
내가 물었다.
"비스트 테이머야, 드루이드야?"
"드루이드. 목토 마법도 쓸 줄 알거든."
"에메랄드 마탑이랑도 접점이 있겠네."
"그렇다더라. 마법은 곁가지 같은 거지만."
"길드 쪽은 그게 끝이야?"
"이게 끝...은 아니고."
신병철은 대답하기 전에 힐끔 서예인의 눈치를 봤다.
서예인은 아이스 녹차를 홀짝이면서, 근처 나무를 오르내리는 다람쥐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내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이자, 주위에 들릴세라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5실버 값은 해야 되니까 너네한테만 말해 줄게. 우리 쪽에 활 진짜 잘 쓰는 애가 하나 더 있어. 대인전에서는 실력을 감춘다고 단검만 썼는데, 그러고도 2승 1패."
"같은 식구라고 과대평가하는 건 아니고?"
"아냐, 아냐. 다른 유망주들하고 비교해도 안 꿀려."
저렇게 호언장담할 정도면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지.
"일단 그렇게 알아 두지. <기사단> 유망주는 누구야?"
"이성현. 얘도 모용준이랑 거의 비슷해. 소드마스터 부친 밑에서 왕도적으로 착실하게 수련을 쌓은 케이스. 뭐, 독보적으로 강하다 싶은 건 얘네 정도? 원하면 그 아래로도 더 풀어 주고."
"아니, 이만하면 됐다. 확실히 쟁쟁하네."
"그렇다니까? 우리 기수 최상위권 경쟁은 진짜 피가 튀길걸."
<용살학원>을 수백 번씩 들락거린 나로서도, 한 기수에 이만한 실력자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일은 이번에 처음 겪는다.
이 시점에서는 EX급 퀘스트의 영향이라는 추측에 무게가 많이 실리는데, 추후 얼마나 강력한 적들이 등장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신병철이 메모장을 덮으며 물었다.
"야, 그런데 하나만 물어보자. 이게 왜 궁금하냐?"
"시장 조사 같은 거지."
"시장 조사? 뭐 팔아먹게?"
"비슷해."
앞으로 4대 세력에서 누구를 중점적으로 밀어줄지, 그들이 어떤 히든 피스를 필요로 할지 파악했다면.
'거래가 가능하지.'
그들이 원하는 히든 피스를 선점한 후 거래한다.
동급의 유물이든, 그들이 가진 이권이든.
배치 고사가 끝나고 어떻게 판을 짤지 대강 그림이 그려진다.
"아잇, 그러지 말고 조금만 더 얘기해 줘 봐라. 사람 궁금하게 만드네."
"야, 너 메시지 왔다."
"어?"
나를 졸라대던 신병철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주머니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손을 넣고 잠시 뒤적거리더니 제 학생증을 꺼내고, 뒷면에 떠오른 글자들을 띄엄띄엄 소리 내서 읽는다.
"너...어디야...당장...부실로...튀어오지...않으면...머리카락을.... 이런 쒯, 맞다. 까먹고 있었네."
"화가 많이 나셨나 본데, 누구?"
"우리 동아리 부장님. 아주...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떠올리기만 해도 오한이 드는지 부르르 몸을 떤다.
문제는 지금 그 무서운 사람의 심기를 거스른 것 같다는 건데,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겠지.
신병철은 곧바로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가야겠다. 빨리 안 가면 내 신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래, 이따 보자."
그리고 전력 질주로 달려 나갔다.
한편 서예인은 신병철이 떠났을 때도 혼자 조용히 샌드위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야금야금 거의 다 먹기는 했네.
"...."
회색빛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속내를 알 수 없는 것은 여전하지만 지금은 유독 가라앉은 느낌이다.
고현우, 서예인, 신병철.
EX급 영웅을 키우겠다는 내 궁극적인 목표와는 별개로, 이 녀석들은 특별했다.
환생 퀘스트를 받고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만든 인연이니까.
저렇게 가라앉은 채로 놔두기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해서 분위기를 환기하고자 한다면, 단순하지만 효과가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어제 열차에서 쿠키 떨어뜨린 거 있잖아."
"...?"
학생선도부와 신병철의 마찰에 휘말려, 서예인이 준 쿠키가 바닥에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그게 왜? 하고 묻는 듯한 눈빛이 돌아왔다.
"송천혜가 미안하다고 디저트 쿠폰을 보내 주더라."
송천혜는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성격이었다.
대인전을 기권한 탓에 내 인식이 거의 신병철과 동급으로 곤두박질쳤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점심시간이 시작되는 즉시 디저트 쿠폰이 날아왔다.
가격과 상관없이 학생 식당에서 제공하는 어떤 디저트든 교환할 수 있는 쿠폰.
그걸 써서 고른 게 바로,
"짜잔."
인벤토리에서 깔끔하게 포장된 종이 박스를 꺼냈다.
박스를 열자 과일이 송송 박힌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이 나왔다.
주문할 때는 잘 몰랐는데 눈앞에서 보니까 범상치 않다.
케이크가 아니라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돈을 주고 산다면 한 조각에 최고급 레스토랑의 한 끼 식사 정도는 하는 비싼 가격.
거기에 한정 수량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어서, 한 발짝만 늦었으면 디저트 쿠폰으로도 못 살 뻔했다.
서예인의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는지 시선이 케이크에 쏠렸다.
일회용 포크를 쓱 건네자 얼떨결에 받아 든다.
"따지고 보면 네가 준 쿠키였으니까 너한테도 지분이 있지. 같이 먹자."
"...고마워."
짧은 감사 인사를 건네고, 조심스럽게 포크로 한 귀퉁이를 떼서 입에 넣은 서예인의 눈이 아주 살짝 커졌다.
나 역시 맞은편 귀퉁이를 맛보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비쌀 만도 하구만.'
케이크를 이루는 스펀지와 생크림, 과일의 조화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특히 생크림의 경우 크림보다는 구름을 먹는다는 느낌이었다.
단맛도 지나치지 않고 적당했는데, 담백한 걸 선호하는 서예인에게는 그게 제대로 먹혀든 것 같다.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번갈아서 포크질만 해 댔다.
케이크가 거의 부스러기만 남았을 즈음.
"있잖아."
서예인이 말문을 열었다.
서포터가 다 해먹음
16화 픽스 존 (1)
"있잖아."
"어."
"왜 진 것 같아?"
"송천혜한테?"
"응."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니까.
그렇기에 더욱 신중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잠깐 말을 골랐다.
"아무래도 지형 영향이 컸지. 투기장 공간도 좁았고, 엄폐물도 없었고. 총사한테는 불리하잖아."
원형 투기장과 데스매치는 사실상 정면 승부를 강요하는 환경과 규칙이다.
만약 다른 조건에서 경기가 진행됐다면 결과도 달라졌을 것이다.
공간만 두세 배 더 넓었어도 [라이트닝 스레드]로 커버하기가 급격히 어려웠을 터.
거기에 엄폐물까지 있었다면 5분 내내 은신이 발각되지 않았을 확률도 높으니 판정승으로 끌고 갔어도 됐을 테고.
하지만 서예인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걸 묻는 게 아니야."
외적인 요인을 탓하기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원하는 것이다.
총사로서 송천혜의 마법 장벽을, 나아가 더 강력한 고위 마법사의 마법 장벽을 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진짜 질문이다.
정답이야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일단 나는 한 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관전하면서 생각은 해 봤는데, 나한테 듣는다고 도움이 될까 모르겠다. 나는 서포터거든. 너보다 점수도 낮고."
"그래도 듣고 싶어."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내 생각을 들어 보고 싶다.
여기까지 왔다면, 서포터가 아니라 고인물 총사로서 조언을 던져도 별 탈은 없을 것이다.
나는 두 손바닥을 펴 보였다.
"자, 봐 봐."
한 손에 한 줌씩 마나가 피어오르고, 압축되며 탄환 모양을 형성했다.
일부러 두 마력탄의 조형에 차이를 주었다.
하나는 형상만 겨우 유지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실제 총탄에 푸른 칠을 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정교했다.
"마법 장벽에 단 한 발만 쓴다면 뭘 가져갈 것 같아?"
"...."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였다.
서예인의 손가락이 정교한 쪽을 가리켰다.
동시에 살짝 놀란 눈치였는데, 이렇게 완벽한 마력탄 조형은 처음 봤나 보다.
'좀 어설프게 만들 걸 그랬나?'
생각해 보니 내 기준에서는 이게 기본이지만 1학년 기준에서는 아닐 것 같다.
이럴 때는 티 안 내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게 중요하다.
우선 어설픈 마력탄을 들어 끄트머리로 손바닥을 쿡쿡 찔러 보였다.
금세 총알 모양이 무너지며 스르르 흩어져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