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0.01초 소드마스터 74화
"라이텐 님도 참 급하셨군. 우리가 즐길 거리는 하나도 남겨 두지 않으시다니."
"오랜만에 맛보는 다른 종족의 피이지 않나. 이 정도는 우리가 이해해 드려야지."
보좌관들은 아쉬운 김에 웅덩이처럼 고인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먹었다.
"흐음. 그래. 이것이 인간의 피 맛이었어. 이 짜릿한 맛. 너무 오랜만이야."
"이제 이런 싱싱한 피 맛을 온종일 느낄 수 있다는 건가? 크흐흐."
라이텐의 성정 못지않은 잔인함과 흉포함을 지닌 보좌관들.
저들까지 이 대륙에 풀려났으니, 이제 이 카팰 대륙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했다.
"천천히 즐겨 주십시오, 보좌관님들. 이 밖으로도 즐길 거리가 매우 넘······."
바로 그때였다.
스걱-!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온 하늘을 뒤덮을 만큼 강렬한 빛이 번쩍이다 사라졌다.
"방금 그건 뭐지?"
"분명 황금빛이었는데······?"
그리고,
"크아아아악!!"
라이텐이 비명을 질러댔다.
그것도 몸이 반으로 쪼개져 버린 모습으로 말이다.
"저, 저게 무슨!"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한 일이었다.
이 대륙에서 저 라이텐의 몸을 일격에 가를 수 있는 존재가 있을 거라고는 말이다.
'대체 누구지?'
무려 대악마다.
그런데 상대는 무슨 진흙을 가르듯이 너무나도 가볍게 라이텐을 갈라 버렸다.
'설마 라일라칸?'
대륙 최강자라 불렸던 라일라칸.
그가 부활이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라일라칸이 이곳에 왔다고 하더라도-.
"저놈이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몰라도······."
"라이텐 님은 특별한 존재이시다. 고작 저런 걸로 죽지 않아!"
보좌관들의 말대로 대악마란 존재는 불사에 가깝다.
저 몸을 가른다고 한들, 저 마기를 완전히 정화시키지 않는 한 그는 그릇을 옮겨 다니며 계속해서 살아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악마의 권능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저 소용돌이 치고 있는 마기가 곧 보좌관 중 하나의 몸에 들어와 그 그릇을 대신하게 될······.
콰아아아-!!
그런데,
"······?"
그릇을 옮겨 부활을 준비하는 라이텐의 마기가, 저 남자의 칼끝에 찔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뭐, 뭘 하는 거야. 저놈이 지금."
"설마 라이텐님의 마기를······?!"
그 기괴한 광경에 보좌관들은 안색을 굳혔다.
저 인간은 라이텐의 마기를 빨아들이는 것 같더니, 곧 그 마기 전체가 황금빛 물결로 뒤바뀌고 있었다.
"저, 저건!?"
"라할의 빛?"
그제야 이들도 저 남자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저자는 지금 라이텐의 마기를 정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저 신성한 빛으로 말이다.
그때 테르카나는 왜인지 노트라드가 담긴 예언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보아라. 하늘의 뜻을 이어받은 빛의 기사가 어둠을 집어삼키고, 그것을 빛으로 정화하리라.]
저것이 예언 속에만 존재한다던 빛의 기사인가.
그저 노망난 늙은이의 헛소리인 줄 알았더니-!
파앗-!!
둥그렇게 퍼져 나가는 빛의 고리와 함께 라이텐의 마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저 반으로 갈라진 채로 썩어 문드러져 가는 그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바닥에 놓여 있을 뿐이다.
"마, 말도 안 돼."
"라, 라이텐 님이······ 라이텐 님이······!"
보좌관들은 라이텐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건 테르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곳에서, 그것도 인간의 영토에서 저 라이텐이 죽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여, 여기로 온다."
라이텐을 이 땅에서 완전히 지워 버린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역겨운 냄새가 난다 했더니-"
어느새 저 남자의 둔중한 음성이 귀에 울릴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감히 더러운 쥐새끼들이 내 영토를 더럽히고 있었구나."
"!?"
어마어마한 위압감이다.
고작 인간이 저 정도의 존재감을 풍길 줄이야.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몸이 굳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으으-"
보좌관 중 하나가 먼저 냅다 뒤로 물러나며 그들이 나왔던 차원의 문을 다시 쏘옥 들어갔다.
그러자 다른 보좌관이 꾸짖듯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라이텐 님의 복수를 해야지!"
"복수는 얼어 죽을! 라이텐 님을 일격에 죽이고 그분의 마기를 정화한 자다! 우리 같은 게 떼로 덤벼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냐? 죽으려면 너 혼자 가서 죽어!"
그 말에 다른 보좌관들도 하나둘 차원의 문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던 무저갱을 제 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보좌관마저 이를 악물며 도망치듯 차원의 문에 다다랐을 때, 그는 남자에게 물었다.
"인간,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남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더러운 잡귀들한테 알려 줄 이름 따위는 없다."
"······!"
"감히 이 몸 앞에서 도망치는 것이냐?"
보좌관들은 저 남자가 따라오기 전에 얼른 문부터 닫았다.
그러고는 소리쳤다.
"네 얼굴을 기억하겠다, 인간! 우린 반드시······반드시 돌아올······."
쿠웅-!
그렇게 문이 닫혔다.
"······."
테르카나는 어이가 없었다.
이 비겁한 놈들.
애써 어렵게 문을 열어 놓았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도망친다고?
졸지에 테르카나는 붉은 망토를 화려하게 펄럭이고 있는 남성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여유를 잃진 않았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예상 밖이로군. 설마 라이텐이 인간의 손에 죽을 줄이야. 그것도 아슬란 당신의 손에."
그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무저갱에 갇혀 살던 악마들은 모르겠지만, 대륙을 돌아다니는 테르카나가 어찌 아슬란을 모를 수 있을까.
"빛의 기사라는 소문이 자자하던데. 오늘 그게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증명했군."
"시끄럽구나."
"······?"
"언제까지 쫑알쫑알 시끄럽게 떠들어 댈 생각이지?"
테르카나는 힐끗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나를 죽이기라도 할 건가? 미안하지만, 아무리 너라도 날 죽일 순 없다."
그러자 아슬란도 비웃음 젖은 입가를 보였다.
"자신만만하군. 그 몸뚱이가 분신이라고, 네 목숨은 영원히 안전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
테르카나의 안색이 일순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대체 아슬란 저자가 어떻게!
"이 아슬란을 우습게 보지 말거라. 내 눈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 빈 껍데기인 네 몸조차도 내게는 보인다. 너의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도 내 눈은 알 수 있다."
테르카나는 뒷걸음질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분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자신의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저 눈빛은-'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위엄 넘치는 저 목소리 역시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인가?'
테르카나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물러났다.
괜히 여유를 부렸다가는 저 라이텐처럼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늘의 파티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그는 저 위압적인 눈빛이 자신을 더 꿰뚫어 보기 전에 얼른 분신과의 접속을 끊어 버렸다. 그러자 그의 분신은 그 자리에서 불타 사라졌다.
"후우-"
재빨리 본체로 돌아온 테르카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강렬한 눈동자가 아직도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아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 * *
화르륵-
테르카나의 분신이 파란 불꽃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는,
"가, 갔나?"
관자놀이가 꿀렁일 정도로 치밀어 오르던 허세가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하마터면 제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붙잡았다.
"이런 미친······."
몸의 떨림이 가시지를 않는다.
라이텐에게 모든 능력을 쏟아붓는 바람에, 정말 쥐뿔도 없는 상태에서 허세를 부린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 허세에 속아 넘어간 라이텐의 보좌관들은 자기들 알아서 도망쳐 주었고, 친절하게 차원의 문까지 닫아 주었다.
거기다,
"테르카나······. 하긴. 저놈이 나올 때가 되긴 했지."
인간이면서 악마에게 조력하는 방관자 테르카나도 있었다.
놈은 직접 나서지 않고 항상 분신을 조종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입을 턴 것이긴 하지만,
"그놈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놈의 본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이 들끓는 허세를 부려 본 것이었고, 테르카나 역시 거기에 깜빡 속아 넘어가 알아서 사라져 준 것이었다.
"그런데 이젠 대악마가 깜빡이도 없이 나타나고 그러는 거냐?"
말이 안 되는 스토리 진행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대악마가 이렇게 빨리 등장하다니.
대체 이 게임은 얼마나 막장으로 치닫는 것이냐?
"내가 대악마를 죽인 것도 어이가 없네."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만약 라이텐이 쉴 틈을 주지 않고 공격을 가했다면, 놈이 조금 더 신중을 기해 나를 상대했다면 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여긴 완전 학살을 벌여 놓았구먼."
라이텐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피와 시체만 가득할 뿐이다.
놈을 소환한 숭배자들은 그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이제 얼른 여기서 나가야······."
지독한 살육의 냄새가 가득하다.
토악질을 하기 전에 이곳에서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대기사단장님!!"
저 멀리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알고 온 것인지, 기사단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사방에 난자한 시체들을 바라보며 말발굽을 멈췄다.
"헉!"
"이, 이렇게나 끔찍한······."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들을 전부 죽이신 건가?"
이들의 눈빛에 두려움이 물들고 있었다.
그 순간 잠시 잠잠하던 허세가 다시 한번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거만하게 고개를 들며 선두에 있던 엘버스테인에게 말했다.
"엘버스테인."
"예? 아, 예!"
대답을 하는 엘버스테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왔다.
"내 말은 가져왔나?"
"예! 저 뒤에 오고 있습니다."
저놈의 말 새끼가 주인이 죽을 위기를 겪었는데도 아주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통통 내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언젠가 이놈도 한번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말 위에 올라타며 망토를 과하게 펄럭였다.
"대기사단장님. 이들은······."
엘버스테인의 물음에 나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감히 이 땅을 더럽히려 한 자들이다. 그들은 그 죗값을 치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뒤 나는 라파엘을 불러 말했다.
"이곳에 있는 더러운 시체들을 전부 불태워라."
"네. 그, 그런데 저곳에 있는 시체는 무엇인가요? 아무리 봐도 인간의 것이 아닌데."
"대악마 라이텐이란 놈이다."
"네? 대, 대악마 라이텐이요!?"
"그래. 놈의 시체는 쓸 일이 있을 수 있으니, 가져가겠다. 그 외 것들은 전부 태워 없애 버려라."
나는 더 이상 볼 것 없다는 듯, 말머리를 돌렸다.
"돌아가겠다."
"예!"
얼른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놈의 허세 때문에 난 아주 천천히 말을 앞으로 몰았다.
[마기 포식이 완료되었습니다.]
거대한 라이텐의 마기가 완전히 내게 흡수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새로운 능력을 획득하셨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과연 어떤 능력이 생긴 것일까.
[신속]
-30초 동안 몸의 움직임이 빨라집니다. 탈 것을 타고 있을 경우, 함께 속도를 공유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1분)
-사용자의 힘과 신속이 비례합니다.
신속?
라이텐의 능력 때문인가.
놈은 차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초신속으로 공격하는 것이 특기였다.
아무래도 그 능력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설마-.
'이것도 찰나의 괴력과 섞는다면······.'
다른 스킬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효율을 뽑아낼 수 있을 터.
나는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행동에 옮겼다.
그러자.
파앗-!!
순식간에 나와 내가 타고 있던 말이 저 앞까지 순간이동을 했다.
"!?"
"대, 대기사단장님!"
깜짝 놀란 기사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내 말은,
푸르르-! 푸르르르-!!
아주 까무러치게 놀랐다는 듯이 앞발과 뒷발을 번갈아 가며 들면서 발광했다.
그리고 내 앞에 새로운 정보창이 나타났다.
[순보]
75화
0.01초 소드마스터 75화
"국왕이시여. 이건······."
엘버스테인의 호위대장, 루보르는 사방에 난자한 시체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여기 있는 기사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어찌 이리도 끔찍할 수가.
이들의 시체를 보면 어떻게든 반격을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럴 새도 없이 모두 일방적으로 당했다.
"그래. 왕국을 어지럽히고 나아가 이 대륙 전체를 어둠으로 빠뜨리려 한 이교도들의 마땅한 최후라 할 수 있다."
엘버스테인의 말에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오메르 왕국의 기사단 중 절반 이상은 아슬란을 처음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의 힘과 위용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이 수많은 이교도 무리를 단번에 쓸어 버리고, 저 악마까지 처단할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그 힘이 막강하다는 것인가.
"근데 라이텐이라는 악마는 대체 뭐지?"
아슬란이 죽였다는 라이텐이란 대악마.
대악마라면 한때 대륙을 멸망 직전까지 이끌었던 테키나 족속의 최강 병기들이지 않은가.
설마 그 대악마가 다시 나타났다고?
"시체가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생김새를 보면 얼추 대악마 라이텐이 맞는 거 같아요."
"라파엘 공은 잘 아시는구려."
"네, 엘프들은 악마에 대해 여러모로 교육을 많이 받거든요. 한 가지 의아한 것이 있다면, 분명 엘티히 여왕님께서는 당분간 대악마가 나타날 일은 없다고 하셨어요. 거기다 대악마를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요. 심지어 대악마를 죽이기 위해서는 마기를 봉인시키거나, 정화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라파엘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대악마는 인간이 감히 혼자 상대할 수 없는 등급의 악마다.
또한 놈들의 마기를 봉인하거나 정화하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는 불사였다.
그런데 대체 아슬란은 어떻게 그 악명 높은 라이텐을 혼자서 죽일 수 있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지 않소?"
"네?"
"아슬란 님이기에, 바로 저분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오."
"······."
"저분 앞에서는 아무리 대악마라도 초라해 보일 뿐이지."
엘버스테인에 대한 이야기는 라파엘도 많이 들어왔다.
그가 아론 못지않은 엄청난 아슬란의 충신이라는 것도.
솔직히 다른 왕국의 왕이, 한 나라의 대기사단장에게 충성한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았지만, 오늘 보니 알겠다.
엘버스테인은 아론보다 더한 아슬란의 사람이었다.
"보시오. 오늘도 위용 넘치는 저분의 모습을."
말 위에서 근엄한 얼굴로 화려하게 망토를 펄럭이고 있는 아슬란의 모습을 엘버스테인은 감격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아론조차도 한 수 접고 들어갈 만한 엄청난 충심이었다.
그러다 아슬란의 눈동자가 엘버스테인과 라파엘이 있는 곳에 닿았다.
"한심한 놈들.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냐? 빠르게 정리하거라. 그래야 해가 떨어지기 전에 왕국으로 돌아갈 것이 아니냐?"
꾸짖는 그의 목소리조차도 그리웠던 엘베스테인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했다.
"예!"
* * *
[신속]
-30초 동안 몸의 움직임이 빨라집니다. 탈것을 타고 있을 경우, 함께 속도를 공유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1분)
-사용자의 힘과 신속이 비례합니다.
"흠-."
일을 끝내고 나서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확실히 이걸 쓰면 몸의 움직임이 가벼워진단 말이지."
신속이란 스킬을 쓰게 되면 체감상 평소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가 있게 된다. 그동안 답답했던 아슬란의 움직임에 활력을 불어넣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딱 그 정도가 끝이었다.
두 배 빨리 움직인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움직임이 빨라진 것도 아니다.
독소 조항과도 같은 <사용자의 힘과 신속이 비례합니다.>라는 제한이 걸려 있었기 떄문이다.
"그런데 이건······."
진짜는 그 다음이었다.
[순보]
-최대 15m의 거리를 매우 빠른 속도로 이동합니다. 탈것을 타고 있을 경우, 함께 속도를 공유합니다
-매우 빠른 속도로 일격을 날릴 수 있게 됩니다.
찰나의 괴력과 신속이 합쳐진 결과물.
바로 순보였다.
"이걸 사용하자마자 거의 순간이동을 했단 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도 아니었다.
그냥 뜬 눈으로 순식간에 15m 거리를 한번에 이동해 버렸다.
내가 이동을 한다는 느낌조차 받지 못하고 말이다.
"스킬 설명만 보면 순보를 사용하면서 공격도 날릴 수 있는 거 같은데."
대악마 라이텐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잘만 하면 순보로 이동을 하면서 공격을 날리는 게 가능할 것 같았다.
"역시 훈련을 해야겠지?"
그 어떤 것이든 충분한 훈련이 없다면 실전에서 사용할 수가 없다.
나는 서재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저택 밖으로 나가 보았다.
"가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설계해 만들어 놓은 훈련장입니다."
역시 돈이 좋긴 좋다.
나는 나 혼자 실컷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 규모도 크고 시설도 아주 잘 되어 있었다.
"내가 여기서 나올 때까지 누구도 안으로 들이지 마라. 정말 급한 일이 있으면 그때 와서 아뢰도록."
"예, 가주님."
나는 집사를 밖으로 보내 놓고 훈련장 안에서 몸을 대충 풀었다.
그리고 훈련에 쓸 허수아비를 하나 세워 둔 다음,
파앗-!
순보를 이용해 순식간에 그 옆으로 이동했다.
"오- 장난 아닌데."
이게 순보라는 거구나.
만화에서나 볼 법한 이동 능력이었다.
0.01초밖에 안 되는 그 찰나의 시간에 빠르게 상대의 옆으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거기서 동시에 공격까지 날릴 수 있다면?
"이건 그냥 최강의 암살 스킬이잖아?"
상대가 누구든 단번에 끔살할 수 있는 엄청난 스킬임에는 분명했다.
"거리가 좀 아쉽긴 하지만."
15m면 나름 준수한 거리였다.
지근 거리까지 유도해 공격을 가하면 되는 거니까.
"한번 더 해보자."
나는 쿨타임을 초기화시킨 뒤 다시 한번 허수아비 옆으로 이동해 보았다.
이번에는 칼을 뽑아 날리려고 했지만, 검을 뽑기도 전에 순보로 도착을 해버렸다.
"이런."
너무 빨라서 칼을 뽑지도 못하다니.
"이건 컨트롤 미숙 같은데."
스킬이 잘못된 게 아니라 아직 내가 이 스킬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이런 건 해결법이 의외로 간단하다.
"그냥 박아."
무지성으로 훈련을 하면 언젠가는 된다는 것.
"오늘 어디 한번 될 때까지 해보자."
쿨타임을 기다려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는 염력을 연습하면 되니까.
아주 마음에 드는, 효율적인 훈련 방법이었다.
* * *
'아이고- 삭신아.'
오늘도 출근 도장을 찍는 직장인마냥 왕궁으로 온 나는 어디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순보를 쓰면서 칼을 뽑는 것까지는 참 좋았는데, 문제가 있었다.
이 저질스러운 몸은 순보를 사용했을 때의 충격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칼을 뽑는 충격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몸이 전부 뻐근하고 아픈 것이었다.
"신체 능력 개선해 주는 능력을 빨리 얻든가 해야지."
극악 난이도 때문에 스텟을 올릴 순 없으니, 아이템으로라도 능력을 채워 넣어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훈련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순보를 쓰면서 일격을 날리게 될 경우, 찰나의 괴력을 쓰지 않아도 굉장히 준수한 파워의 일격이 나간다는 것이었다.
순보가 가진 엄청난 스피드가 일격에 힘을 실어 주면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거 같은데, 아직은 컨트롤 미숙이라 더 많은 훈련이 필요해 보였다.
"쓰읍. 다른 몸이었으면 솔직히 이 정도의 훈련은 필요도 없었겠지."
그 예를 들자면 아마 저기서 혼자 열심히 칼을 휘두르며 훈련하고 있는 알렉산더일 것이다.
성장 폭발이라는 저 사기적인 패시브 스킬이 나한테도 있었다면······.
"알렉산더."
"아! 대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훈련을 하고 있었나?"
"예. 대기사단장님의 발끝이라도 따라잡고자 훈련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허세가 끓어 올랐다.
"내 발끝이라······. 꿈이 크구나."
"실망하시지 않게 꼭 이뤄 보겠습니다."
나는 알렉산더의 스텟을 살펴보았다.
지금은 아론과 무력 수치가 똑같으나, 이제 곧 그를 아늑히 뛰어넘게 될 것이다.
아아. 불쌍한 우리 아론.
처음에는 내가 가진 최고의 사기 캐릭이었는데, 이제는 전투 능력 판별기로 전락을 해버렸구나.
'근데 얘는 왜 아직도 퀘스트가 안 뜨는 거지?'
알렉산더를 내 휘하에 둔 지도 꽤 되었다.
물론, 여태껏 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알렉산더를 내 밑에 둔 적이 없었다.
카르만으로 플레이하게 되면 스토리에 따라 알렉산더를 휘하에 둘 수 있긴 한데, 이놈이 게임 성격상 누구 밑에 오래 있을 놈이 아니다.
무려 이 대륙을 구원해야 할 주인공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플레이 방식이 나뉘는 것이다.
주인공을 도와 대륙을 구할 것인지, 아니면 주인공을 대신해 내가 대륙을 구할 것인지.
만약 후자를 택하게 되면,
'주인공을 죽여야 플레이가 무척 깔끔해지지.'
주인공과 협력해도 되지만, 그럼 스토리에 따라 주인공이 주목을 받게 되고 여기저기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게임 초반부터 주인공을 죽이고 시작하는 것이 거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전자를 택하게 될 경우,
'게임을 가장 빠르게 클리어할 방법이다.'
주인공을 도와 대륙을 구하고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
게임 스토리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고 최단 시간에 클리어하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얼른 이 게임에서 벗어나려면 주인공을 도와 스토리를 최대한 빨리 끝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직도 메인 퀘스트가 안 뜬다.'
보통 플레이어가 주인공을 만나 서로 친분을 쌓게 되면, 얼마 안 있어 알렉산더를 도와 대륙을 구원하라는 내용의 퀘스트가 뜬다.
이것이 바로 이 게임의 엔딩까지 이어지는 메인 퀘스트다.
사실 게임 엔딩까지 이어지는 메인 퀘스트는 몇 가지가 더 있다.
플레이어의 게임 플레이 방식에 따라 게임을 엔딩시키는 메인 퀘스트가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루트는 알렉산더를 중심으로 게임을 끝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알렉산더와 대화를 나눠 봐도 메인 퀘스트가 뜨질 않고 있었다.
얼른 이놈을 열심히 굴려야 게임이 끝나고 나도 집으로 돌아갈 텐데 말이다.
'내가 모르는 다른 게 있는 건가.'
알렉산더와의 친분이 덜 쌓였나.
아니면 알렉산더가 일라이 왕국으로 오면서부터 스토리가 다 꼬여 버린 것일까.
머리가 어지럽다.
이러다 메인 퀘스트가 나오지 않아서 영영 게임이 깨지지 않으면 어떡하지?
"오늘 연회에 참석한 모두를 치하하겠노라. 너희의 노고가 오늘도 우리 일라이 왕국을 강성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나는 리베르토 국왕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오늘은 엘버스테인의 환영식과 기사단을 치하하기 위한 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
"예."
리베르토는 내게 잔을 건네며 말했다.
"오늘 난 피곤해서 이만 들어갈 터이니, 알아서 연회를 잘 이끌어 주길 바라네."
"······그러시지요."
그는 짧은 연회사만 남긴 뒤에 양쪽으로 여자를 끼고 연회장을 나섰다.
점점 리베르토는 왕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그냥 하루종일 놀기만 하는 것 같았다.
'쓰읍. 세금 아깝네.'
한 푼이라도 아껴서 성벽을 높이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악마들에게서 내 한 몸 지키기 위해 우주 방어진을 쌓아야 하는데, 저놈은 돈만 축내고 있다니.
'놔두자. 내 일을 방해하는 것도 아니고.'
차라리 저러는 게 나았다.
만약 다른 왕이었다면 백성들 사이에서 인기가 커지는 나를 견제한답시고 엄청나게 태클을 걸어댔을 것이다.
하지만 일라이 왕국은 사실상 아슬란의 베라크 가문이 권력을 잡고 있기 때문에 왕이 내 앞길을 막을 순 없었다.
"오늘도 왕께서는 그냥 들어가시는군요."
여자들과 깔깔 웃으며 퇴장하는 리베르토의 뒷모습을 엘버스테인이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난 피식 웃으며 엘버스테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왕궁을 비워 놓고 오는 네가 할 얘기는 아닌 것 같구나."
왕이라는 놈이 왕국을 함부로 비워 놓고 오면 쓰나.
내가 이래서 왕을 안 하려는 것이다.
왕이라는 직책을 갖게 되는 순간, 왕궁이 감옥처럼 변해 함부로 어딜 나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저는 항상 일라이 왕국이 더욱 강성해지고 아름다워졌으면 합니다."
"오메르 왕국과 일라이 왕국은 매우 근접해 있다. 주변국이 강성해지면 너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아슬란 님이 통치하시는 나라라면 전 괜찮습니다. 그리고 우리 오메르 왕국이 당신의 통치 아래 들어간다고 해도 전 따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슬란 님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놈이 위험한 소리를 하고 앉아 있네.
지금 일라이 왕국 하나도 버거운데, 거기까지 내가 어떻게 맡으라고.
"벌써 취한 것이냐?"
"아닙니다. 오늘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합니다."
엘버스테인은 내가 따라 준 잔을 한번에 입에 털어 넣은 뒤 말했다.
"이제 아슬란 님께서도 결단을 내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대륙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슬란 님."
엘버스테인은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아슬란 님께서 일라이 왕국의 왕이 되신다면 저는 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충심으로 당신을 따를 것입니다."
"!?"
"여기 연회장에 있는 모두 같은 생각일 겁니다. 어쩌면 다들 아슬란 님의 결정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일지도요."
이놈이 술 먹다 갑자기 헛소리를······.
잠깐.
이 구도, 이 대사.
어딘가 익숙하다.
아니나 다를까.
[메인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황제의 길]
-대륙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여 황제가 되십시오.
-퀘스트 완료 시, 게임이 끝을 맞이하게 됩니다.
76화
0.01초 소드마스터 76화
'이게 뭐, 뭐야.'
황제의 길.
게임의 엔딩으로 달릴 수 있는 또 다른 메인 퀘스트.
이 퀘스트를 받는다면 나는 제국을 건설하여 황제가 되어야만 게임을 끝낼 수가 있다.
'갑자기 이게 이렇게 뜨는 건 아니지.'
내가 컴퓨터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였다면 이 퀘스트를 주저하지 않고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어야 하는 사람이고, 황제의 길 퀘스트는 모든 메인 퀘스트 중에서 가장 위험한 퀘스트라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재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왕국을 굴복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즉,
'테키나 족속을 막아내 대륙을 구원하는 건 물론, 일라이 왕국을 포함한 8개의 왕국을 전부 점령해야 되는 거잖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업적이었다.
특히 이 아슬란의 몸으로, 극악의 난이도로는 더더욱.
'이건 절대 받으면 안 되는 퀘스트다.'
무조건 주인공이 테키나 족속을 몰아내고 대륙을 구원해야 게임이 끝나는 루트로 가야 한다. 만약 이 퀘스트를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가는 테키나 족속의 씨앗을 말려 버려도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
나는 천천히 술잔을 든 채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기사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그들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서 깨달았다.
엘버스테인이 총대를 메고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엘버스테인."
"예, 대기사단장님."
"이건 너의 생각만이 아니로군.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모든 기사단이 대기사단장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마시고 있던 잔을 탁! 상 위에 내려놓은 뒤, 연회장에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전부 죽고 싶은 것이냐?"
혼돈의 피어를 사방에 퍼뜨렸다.
쿠웅-!!
"크헉!"
"으악!"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비명과 신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허세가 등허리를 타고 솟구쳐 올라왔다.
"나의 기사라는 것들이 감히 내 기사의 긍지를, 그 명예를 더럽히려 하다니."
기사들 모두 앉은 자리에서 짓누른 채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엘버스테인."
"크으읍-"
내 부름에 엘버스테인은 대답 대신 신음을 토해냈다.
"네가 감히 내 신성한 의지를 모욕하는 것이더냐?"
그는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뚝-
그 짧디 짧은 지속 시간이 끝나면서 혼돈의 피어가 거두어졌다.
"우에엑!"
"크헉!"
"우욱-!"
여기저기서 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려두었던 잔을 다시 들었다.
"한심하구나. 고작 이런 것도 버티지 못하는 것들이 감히 왕권을 입에 담고 있었다니."
"······."
"잔이 비었다, 엘버스테인."
"아, 예."
그는 얼른 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오늘 일은 내 아량을 베풀어 그냥 넘어가겠다. 하지만-"
난 아직도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이런 개소리를 했다가는 그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나는 잔에 있던 술을 한번에 입에 털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과하게 망토를 펄럭이며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연회를 즐겁게 마무리하고 오도록."
연회장 밖으로 나온 나는 퀘스트를 확인해 보았다.
[황제의 길]
"······"
메인 퀘스트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 * *
아슬란이 떠나간 연회장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갑작스러운 피어에 모두 정신이 혼미해진 듯 보였다.
"엘버스테인."
아론은 잔을 들고 엘버스테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네. 자네가 우리를 대신해 말을 해줬을 뿐인데, 괜히 꾸지람만 듣게 했군."
엘버스테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오랜만에 그분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낄 수가 있어서 나름 좋았다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오히려 지금이 예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더군."
"무서운 분이시지. 조금이라도 닿을 것 같으면 금방 더 멀리 아득하게 경지를 초월하시는 분이니까."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어수선했던 연회장 분위기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물론 아직도 아슬란의 피어에 의해 토악질을 하는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아론. 오늘은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 완강히 거부하셨으나, 아무리 그분이라도 큰 흐름을 거부할 순 없을 걸세."
"흠. 자네의 말에 동감하네. 오늘은 조금 성급했을지도 몰라. 솔직히 아슬란 님께서 지금 당장 왕위를 찬탈한다 하시더라도 누구 하나 불만을 가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저리도 완강하시다니······."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슬란 님이지 않겠나? 허나, 점점 이 대륙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 서로 갈라져 있기보다는, 하나로 뭉쳐 있어야 할 때라는 것이지."
영원히 봉인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테키나 족속이 사방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동안 교류가 없던 다른 종족들도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이 대륙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다른 종족들을 보게. 그들은 우리 인간처럼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있지가 않아. 하나의 지도자 아래에 통치를 받고 있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무척 막강하기 때문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난 아슬란 님이 바로 그 막강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네. 지금은 그분께서 거절하셨지만, 곧 이 세상은 대륙을 구원할 구원자를 원하게 될 것이고, 그건 분명 아슬란 님이 될 걸세. 난 그렇게 믿고 있네."
엘버스테인의 말을 아론은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그는 한 나라의 국왕이면서 현명한 사람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 역시 다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통합을 이뤄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중심에는 아슬란이 서게 될 것이라 아론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라도 우리의 뜻을 그분께 밝혀 드렸으면 됐겠지."
"그래. 그거면 된 거야. 훗날 그분께서도 분명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되실 걸세."
대륙의 구원자, 아슬란.
8개의 왕국을 통일시킨 제국의 황제, 아슬란.
찬란한 그의 모습이 왠지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 * *
"그런······. 대화가 오갔었단 말이지?"
"예."
보고를 들은 리베르토 국왕은 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이, 이런 찢어 죽일 놈들."
자신이 이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다른 왕국의 왕이라는 놈이 그런 소리를 한 것도 모자라 기사들까지 동조했다는 것인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버젓이 그 흉계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
한 가지 의외인 건 아슬란이 그들의 청을 단칼에 거절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두 번 다시 그런 얘기를 꺼내지도 말라며 위압까지 가해 그들을 굴복시키기까지 했다.
참 언제 봐도 대단한 놈이다.
눈만 마주쳐도 무서운 그 기사들을 한번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대륙에 몇이나 될까.
"그러나 아슬란도 인간이기에 종국에는······."
이 왕좌에 앉으려 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는 왕좌에 앉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일라이 왕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가 관장하고 있으니.
리베르토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가 거절했어도, 결국 기사들이 충성심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을 죽이고 아슬란을 이 자리에 앉히려 할 것이 분명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리베르토도 마냥 바보는 아니었다.
라울의 죽음 이후로 그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지, 항상 눈과 귀를 사방에 열어 놓고 있었다.
"그자를 찾아오너라."
"예?"
"저번에 나를 은밀히 찾아왔던 그 테르카나라는 남자 말이다. 그자를 내 앞에 데려와라!"
물어뜯고 있던 손톱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힘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다시 한번 왕권을 되찾을 수는 힘 말이다.
* * *
대낮부터 헛소리를 들었더니, 속이 허했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와 대충 요기를 하고 곧바로 개인 훈련장에 들어갔다.
그러다 번쩍이는 훈련장 벽을 보고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집사에게 물었다.
"여기 벽을 뭘로 만들었지?"
"레튬이라는 재질로 만들었습니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그 미스릴에 버금가는 내구성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지요.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겉에는 미스릴을 덧붙여 더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
레튬이라는 신소재에 미스릴까지?
이런 미친.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샤를렌 가문에서 앞으로도 활발한 교역을 위해 무료로 이 모든 재료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아니. 이걸 다 공짜로 줬다고?
샤를렌이 확실히 돈이 많긴 하구나.
그럼 레튬이라는 건 버리고 아예 전부 다 미스릴로 만들어 주지.
너무 큰 욕심인가.
"알겠다. 내 나중에 샤를렌 가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도록 하지."
"예, 그럼 편안한 훈련 되시길."
나는 저번에 연습했던 대로 오늘도 순보 훈련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내 몸을 지키는 일이고, 강력한 상대에게 급습을 날려 단숨에 대결을 끝낼 수 있는 무척이나 중요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파앗-!
목표를 향해 비스듬하게 순보를 쓰면서 동시에 칼을 뽑아 그 목을 치는 동작까지.
계속 연습을 반복하다 보니, 처음에는 어림도 없었던 게 지금은 나름 자세가 잡히는 것 같았다.
퍼억-!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세워 둔 허수아비의 목을 정확하게 베었다.
"돼, 됐다."
뚝 하고 떨어지는 목을 바라보며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물론 마무리 동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어거지로 목을 베어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니라, 뭔가 영화나 만화처럼 좀 멋있게 안 되나.
"쓰읍. 지금 포즈를 따질 때가 아니긴 한데."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저 허수아비 목을 깔끔하게 베어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라고 했던 스스로의 다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발검 연습부터 해봐야 하나."
순보와 발검을 동시에 해낸다면 상대는 내가 칼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는 것을 눈치도 채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나는 허수아비 앞에 서서 발은 움직이지 않고 손만 움직였다.
파앗-!
순식간에 발검이 된 검이 허수아비의 맨 위쪽 끝을 베어내고 검집에 돌아갔다.
"정확도가 낮아."
이번에는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칼을 휘둘러 보았다.
연습 부족인 건지, 그 빠르기가 줄었고 정확도도 더 떨어졌다.
"이건 계속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나는 쿨타임이 돌 때마다 쉬지 않고 순보를 연습했다.
처음에는 걸음걸이에만 신경을 쓰다, 지금은 발검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만약 사정거리만 된다면 굳이 발걸음을 움직일 필요 없이, 간단한 손동작만으로도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순보라는 능력은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검강에도 적용이 되나?"
감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빠른 발검으로 검강까지 날려 버린다면 그 파괴력은 대단할 것이다.
물론 이걸 쓴다고 사정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순보를 통해 앞으로 이동하면서 검강을 날린다면 내가 자체적으로 사거리를 늘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습하기에는 좀 그렇겠지."
집사가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 벽을 레튬과 미스릴로 만들어낸 엄청난 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 검강을 버텨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 엘티히의 방어막도 뚫어낸 검강이니 말이다.
"검강을 꺼내는 연습은 다른 곳에서 해야겠다."
그리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쿨타임이 전부 돌아 다시 한번 여러 개 세워져 있는 허수아비들을 향해 발검을 하려는 때였다.
우우웅-!
검을 꺼내는 순간, 갑자기 칼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샤르륵-!
아주 정확하고 깔끔하게 허수아비들을 베어냈다.
"오-!"
나는 깜짝 놀라 감탄을 터트리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잠깐. 사정거리가 안 됐는데, 어떻게······."
그리 중얼거리는 순간.
키이이잉-!!
베어진 허수아비 뒤로 황금빛 검강이 번쩍이며 나아가 저 끝에 있던 벽과 부딪혔다. 아니. 그냥 물살을 가르듯 가볍게 통과해 버렸다.
"······."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콰직-!
불길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아, 안 돼."
라는 나의 애절한 목소리가 무색하게,
콰콱-! 콰콱-!!
뒤쪽 벽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곧 벽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가, 가주님!!"
그 소란을 듣고 집사와 기사들이 우르르 훈련장으로 달려왔다.
집사는 산산조각이 난 벽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미, 미스릴 벽이······."
충격에 빠진 그의 표정이 내 마음과도 같았다.
저게 얼마나 비싼 벽인데······.
하지만 그들이 달려오면서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허세에 나는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벽이 무척 약하더군."
"······."
"다음에는 좀 더 강하게 만들어 두도록."
넋을 놓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집사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흐르는 피눈물을 삼키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꽈악 붙잡았다.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랬지.'
······.
이번에도 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순간 이 뻔뻔한 놈을 바닥에 패대기쳐서 묻어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77화
0.01초 소드마스터 77화
"오오오-!!"
"와아아!!"
두 진형이 서로 함성을 지르며 충돌했다.
청과 백으로 나눈 두 기사단은 나무로 만들어진 무기를 휘두르며 상대방을 먼저 쓰러뜨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지휘 깃발이 위로 높이 올라가면-
"방어 태세를 갖춰라!!"
"진을 만들어라!"
기사들은 싸우던 걸 멈추고 깃발에 맞춰 진을 갖췄다.
'많이 늘었네.'
예전에는 우왕좌왕 거리기만 하고 답답했는데, 지금은 아주 현란한 몸놀림으로 진을 갖추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역시 훈련을 하면 아무리 개똥 같은 기사단이라고 해도 실력이 늘긴 하는구나.
극악 난이도는 플레이어 본인의 스텟만 못 오르게 막을 뿐, 기사단이나 부하들의 스텟 수치는 전부 올릴 수가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가.'
그걸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 이 현실이 싫었다.
"악마를 죽여라!"
"훈련받은 대로 하는 거다! 모두 빠르게 움직여라!"
진형 대결이 끝나면 이제는 악마를 잡는 훈련에 돌입한다.
큰 허수아비를 하나 세워 두고 그것을 밧줄로 붙잡거나, 혹은 포위시켜 화살과 창으로 상대를 넘어뜨린 뒤 함께 협공하는 것도 몬스터가 아닌, 악마를 잡기 위한 훈련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모두 버텨라!!"
"대기사단장님께서는 여기 있는 마기 가루를 전부 태워도 아무렇지 않게 버티셨다!"
"너희도 할 수 있다!!"
마기 가루를 태워 마기에 적응하는 훈련 역시 빼놓지 않았다.
'빡세게 훈련 시켜야지.'
이 게임의 난이도가 극악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고수 난이도에서도 끊임없이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기에 빠뜨리고 죽이려 든다.
그렇다면 극악 난이도는 숨 쉴 새도 없이 날 죽이려 한다는 뜻이다.
'내 한 몸 지키려면 기사단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병사들이 그렇게 훈련을 받는 동안 나는 호레스를 비롯한 문관들과 지도를 펼쳐 모의전을 펼치고 있었다.
"여기서 만일 적이 방어 대형을 짜게 될 경우, 우리 군은 이곳에서 돌격 대형을 짜고 또한 이 대형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킬 수 있는······."
내가 지휘봉을 움직이며 설명하는 모습을 호레스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내게 물었다.
"대, 대기사단장님."
"뭐지?"
"대체 이런 건 어찌 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참으로 신묘한 대형들이군요. 제가 평생 진법 공부를 하며 경험을 쌓았지만, 이런 전투 방법은 처음입니다."
적의 공격에 대처하고, 계략을 간파하며, 갖가지 진형으로 적을 섬멸시키는 건 지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가능성이 올라간다.
당연히 배운 것을 써먹고 그것을 응용하는 것 역시 지력에 따라 갈린다.
하지만 나는 딱히 지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게임을 오랫동안 플레이 한 고인물로서 유저들이 찾아낸 수많은 공략 방법과 전략을 난 알고 있다.
특히 이 게임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진법을 써야 대인전에 유리한지도 다 꿰고 있으니, 내가 알고 있는 것과 호레스의 지식은 질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인 것이다."
"이, 이게 기본적인 것인 겁니까?"
"그래. 모두 이 정도는 알고 있도록."
"예!"
그러다 보니 이런 고인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조금 풀어주면 호레스와 문관들은 마치 나를 전략의 신처럼 바라보았다.
"장비 구입은 계속하고 있는 건가?"
"예. 이미 모든 기사의 장비를 새롭게 교체했습니다. 또한 영토 곳곳에 새로운 망루와 진지를 구축하신다는 계획 또한 차질 없이 진행되는 중입니다."
이번 대악마 라이텐 사건으로 알게 된 것이 있다.
감시망을 더욱 촘촘하게 만들지 않으면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방을 감시할 수 있는 망루의 숫자를 늘리고 위험 상황에서 방어할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하는 것에 아낌없이 돈을 투자했다.
"요즘 왕국에 들어오는 돈이 너무나도 많아 군비에 과감하게 돈을 써도 괜찮을 듯합니다. 엘프들에게서 받는 재료들과 계속해서 채취되고 있는 칼루석에 대한 가치가 알려지면서 샤를렌 가문을 통해 큰 이문을 남기며 판매가 되고 있습니다."
내가 뿌린 씨앗들이 드디어 풍성하게 익어 수확되고 있었다.
특히 칼루탄에서 채취되고 있는 칼루석은 값싼 노동력으로 열심히 채광을 하고 있는 루너들을 통해 공급을 받고 있는데, 이 돌에 담긴 신비스러운 힘이 알려지면서 매우 높은 가격에 판매가 되고 있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많은 물량을 풀고 싶지만-
'함부로 많이 푸는 건 안 돼.'
높은 가격 유지를 위해서라도 물량을 가득 풀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칼루석은 무기로 쓰기에 안성맞춤이라서 다른 왕국이 그걸로 나를 위협하지 못하게 물량의 한계를 둬야만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예. 교단에서 저희에게 성수를 팔고 있지 않습니다."
교단 이놈들이 끝까지 내 발목을 붙잡는구나.
성수는 악마 계열을 상대할 때 아주 좋은 효과를 보인다.
그걸 교단도 모르지는 않을 터.
"일라이 왕국에는 그 어떤 것도 팔 수가 없다고 확실하게 못을 박았습니다. 특히 성수를 대량으로 사 가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악마가 다시 나타났다는 공포감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기 위함이라며······."
그래서 끝까지 주지 못하겠다, 이거지?
더럽게 노네, 이놈들.
성수가 테키나 족속한테 잘 통한다는 걸 아니까 일부러 못 팔게 막는 건가?
그럼 좀 심각해지는데.
성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확실히 다르다.
내가 가진 능력이 바로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걸 바꾸게 되면,
'무려 데미지가 2배로 들어가.'
그건 성수를 써도 마찬가지.
물론 2배까진 아니더라도 충분히 높은 데미지를 악마들에게 가할 수가 있게 된다.
그렇기에 악마와 싸우기 전에는 성수를 무기에 바르고 가는 것이 확실히 좋았다.
'그놈들이 안 팔겠다고 하면 우리가 만드는 수밖에 없다는 건데.'
문제는 성수를 만드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성수의 제조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빛의 마법을 물에 뿌리면 그것이 곧 성수가 된다.
문제는 빛의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것.
하리엘도 교단을 지키는 검이었지만, 빛의 마법을 쓰진 못 한다.
그리고 교단에서도 빛의 마법을 실질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고, 그들은 빛의 마법 대신 아크리엔의 지팡이라는 아이템으로 성수를 만들고 있다.
'그걸 확 훔칠 수도 없고.'
교단에서 신성시하는 아이템이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아크리엔의 지팡이.
'하리엘한테 시켜서 몰래 가져오라고 하면······. 안 되겠지?'
그랬다간 애써 잠잠한 신전이 다시 날 죽이려고 미쳐 날뛸 수가 있다.
'하긴. 성수는 레바노스가 아니면 다들 교단한테서 받아갔지.'
방랑자 레바노스.
대륙 10대 소드마스터 중 하나지만, 정작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그는 칭호답게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검사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레바노스는 주인공의 동료가 되어 악마를 처단하는 데에 앞서게 되는데, 그의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성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야 당연히 레바노스는 천계의 핏줄이니까.'
천계.
악마가 있다면 천사도 있기 마련.
라할이 빛으로 만들어낸 종족, 사르디엘이 바로 이 대륙의 천사라 불렸다.
그리고 레바노스는 인간과 사르디엘의 종족에게서 나온 핏줄이다.
'레바노스가 지금쯤 어디에 있더라?'
랜덤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놈이라 어디에 있는지 특정 지을 순 없었다.
가능하면 우리 왕국에 데려와 성수 공장을 하나 차려 주고 싶은 심정이다.
거기다 그는 무려 소드마스터이지 않은가?
'잠깐만.'
그때 문득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레바노스는 빛 속성 공격을 쓸 수가 있었지?'
사르디엘 종족은 나와 마찬가지로 악마에게 취약한 빛 속성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그리고 레바노스는 바로 그 빛의 힘을 이용해 성수를 만들어냈다.
'그럼 나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 * *
"캬오오!"
콰직-!
매섭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이 솟구쳐 나오는 빛의 검강에 의해 몸이 갈라져 버렸다.
오늘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일반 몬스터도 아니고 마기에 절여진 몬스터라니.
소문대로 정말 테키나 족속이 부활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에-.
"역시 빛의 힘이란 대단하군요."
뒤에서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레바노스는 자신의 대검을 뒤로 돌렸다.
"······누구냐."
"처음 인사 드립니다. 테르카나라고 합니다."
테르카나에게서 느껴지는 마기의 냄새에 레바노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악마로군."
그러고는 말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대검을 휘둘렀다.
콰콱-!!
그러자 테르카나의 몸에 두 개의 밝은 검흔이 길게 생겨났다.
놈은 음흉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미안하지만, 빛의 힘은 제게 통하지 않습니다. 저는 악마가 아니라 인간이어서 말입니다. 거기다 제 몸은 아주 많~아서요."
아니나 다를까.
테르카나와 똑같은 모습의 분신들이 사방에서 우후죽순 늘어났다.
"······."
레바노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대검 손잡이에 칭칭 감아져 있는 줄을 붙잡은 뒤 그것을 힘껏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이 빠르게 회전하더니, 크게 원을 그리며 테르카나의 분신들을 순식간에 정리해 버렸다.
"아니!?"
당황한 테르카나의 표정이 역력하다.
그 얼굴을 반으로 쪼개 버린 레바노스는 어디선가 이 분신들을 조종하고 있을 본체를 찾아나섰다.
"······찾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큰 나무 뒤에서 느껴지는 더러운 마기의 악취에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칼을 꽂았다.
"큭-!"
대검에 몸이 꿰뚫린 테르카나는 피를 흘리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잡았다."
그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위로 올라갔다.
"!?"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레바노스가 대검을 다시 거두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테르카나의 분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가 대검으로 꿰뚫은 검은 구슬만이 남았다.
그 어둠으로 가득한 기운이 레바노스의 대검을 타고 올라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윽-!"
강력한 어둠이 몸에 잠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테르카나는 그런 그를 향해 말했다.
"가라, 타락한 천사여. 가서 빛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는 아슬란을 죽여라."
그것이 레바노스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
"대기사단장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어디서 오한이 느껴졌는데.
기분 탓인가.
나는 우물과 연결되어 있는 물길을 살펴보았다.
원래 물을 얻으려면 도르래로 저 깊은 우물에 있는 물을 퍼왔어야 했는데, 여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라파엘과 여러 마법사 덕분에 마법의 힘으로 병사들이 만들어 놓은 물길을 따라 물이 알아서 올라오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기사단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설계를 해보았는데, 아주 좋은 반응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힘들게 물을 길어올 필요도 없고, 물길을 따라 왕궁 전체에 물이 공급되고 있으니, 정말 편리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내가 직접 설계를 해서 만든 물길이다.
제일 불편한 화장실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랄까.
이렇게 물길이 잘 통하게 만들어 두면 병사들의 청결함도 올라가 전염병이 돌지 않는다.
물론 마법에 들어가는 마력 유지를 위한 비용이 꽤 많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효율을 생각해 보면 결코 아깝지 않았다.
"흠-"
나는 졸졸 흐르고 있는 물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따로 물을 퍼서 성수로 만들 수 있는지 없는지 테스트를 해봐야 하나.
레바노스는 어떻게 했더라?
쉬리릭-!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기검사 효과를 발동하여 물길에다 빛의 검기를 날려 보았다.
그러고는 물의 상태를 확인해 봤지만-.
[깨끗한 물]
-마법의 영향으로 당장 마셔도 이상이 없는 깨끗한 물이다.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역시 따로 물을 퍼다가 해봐야겠지?
'내 기억으로 레바노스는 물웅덩이에다가 이렇게 칼을 뽑아서 넣은 뒤에······.'
나는 내가 예전 컴퓨터 화면을 통해 봤던 레바노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검을 뽑아 따로 병사들이 퍼다 넣은 큰 물통에 집어넣어 보았다.
'여기서 어떻게 했더라?'
여러 번 기검사 능력으로 검기를 날려 봐도 효과는 없었다.
내가 빛 속성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물에 풀어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역시 나는 안 되나.'
빛 속성을 마법처럼 풀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아무래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듯싶었다.
'혹시 검강을 만들면 되나?'
빛의 마법은 아니지만, 검강도 결국 빛 속성을 가진 능력이니 되지 않을까?
'검강을 만들어내진 않고 그냥 힘만 모은다면?'
검강의 형상을 만들진 않고, 그 폭발적인 기운만 검에 담으면 된다.
여러 번 해본 일이니, 어려운 건 아니었다.
'어디 한번-.'
나는 곧바로 검에 힘을 불어넣었다.
찰나의 괴력과 기검사의 능력이 동시에 발현되면서 찬란한 빛이 검을 타고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검이 담가져 있는 물에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물이 신기하게도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슬란이 만들어낸 황금물]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 만들어낸 빛의 힘이 깃든 물입니다.
-물을 섭취하거나, 무기에 바르면 악마 계열 몬스터에게 30% 이상의 추가 데미지를 줍니다.
'성수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된 거 같은데?'
아이템 설명창이 조금 이상하긴 하다만, 놀랍게도 성수와 비슷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이거면 됐다.'
성수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그에 준하는 효과만 가졌다면 말이다.
설마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부글부글-!
바로 그때였다.
"······?"
물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 이거 왜 이래.'
피부에 닿는 뜨거운 열기에 나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감지하고는 재빨리 검을 꺼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강하게 끓어 올랐다.
[농축된 황금물]
-과하게 농축된 황금물. 일반 물과 섞는 것이 좋아 보인다.
급기야,
퍼엉-!!
통이 폭발하면서 물이 하늘 위로 퍼져 나갔고, 미리 수호신의 방패를 켜 둔 덕분에 나는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 병사들도 없어서 다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문제는,
촤아아아-!
폭발로 인해 넓게 퍼진 물이 마치 황금비가 쏟아져 우물과 물길 아래로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 뜨거운 열기에 의해 물길이 파괴되고 우물 안에 새겨져 있던 마법도 녹아내렸다.
뿜어져 나오는 연기 또한 황금빛이었다.
"······."
거기서 직감했다.
오늘 제대로 사고를 쳤다는 것을.
그런데-.
"우, 우와아!"
"이, 이게 대체!"
멀리서 바라보다 곧 우물로 모여든 병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기함을 터트렸다.
궁금증에 그들 곁으로 가서 우물을 내려다보니,
"!?"
우물 안이 온통 황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78화
0.01초 소드마스터 78화
콰아앙-!!
가슴에 꽂힌 대검에 의해 테르카나의 분신이 녹아내렸다.
하지만 본체를 죽이지 않는 한, 그의 분신은 계속해서 새로 나올 뿐이다.
"역시 사르디엘의 핏줄인가."
대악마 헤르테미스가 만든 복종의 구슬로 놈을 굴복시켰음에도 간간이 놈은 제정신을 차리고는 테르카나에게 살초를 날렸다.
그러나 그건 그저 최후의 발악일 뿐이었다.
한번 살초를 날린 뒤에는 다시 정신을 잃고 헤르테미스의 마기에 의해 그는 테르카나의 인형이 되어 버린다.
"너의 정신력은 높이 평가해 주지, 레바노스. 무려 대악마의 마기를 어떻게든 버텨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야."
테르카나는 멍한 눈동자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레바노스 옆에 쭈그려 앉아 속삭였다.
"얼른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나? 그럼 나와 계약을 해. 네가 만일 아슬란을 죽인다면 헤르테미스의 복종 마법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
"······!"
그 말을 듣고 레바노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터벅터벅 동굴 밖으로 나가자, 그 뒤로 악마들이 괴성을 지르며 따라나섰다.
* * *
"그러니까 이것이······.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 만드신 성수라는 것인가?"
호레스는 우물에서 나오는 신비한 황금물에 긴 탄성을 내질렀다.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 현재는 훈련소에 있는 우물 쪽에만 이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점점 퍼져 나가는 것을 보아하니, 얼마 안 있으면 왕궁 전체에 이 성스러운 물이 흐를 듯합니다."
"그럼 왕궁 밖으로도 퍼져 나간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왕궁과 왕궁 밖에서 쓰는 물이 서로 달라 이어져 있진 않습니다."
"그렇군."
호레스는 영롱하게 찰랑거리는 황금빛 물결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것이 성수인가······. 하리엘. 그대가 보기에는 어떻소?"
교단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하리엘이라면 당연히 성수를 구분할 줄 알았다.
"성수는 원래 아주 얕게 황금빛이 감돌아요. 일반 물과 비교했을 때 그 감도가 미약해서 자세히 봐야 알 수가 있죠. 그런데 이건······ 제가 평생토록 교단에 있었지만 이렇게나 진한 황금빛을 가진 성수는 처음 봐요."
하리엘은 잔에 담긴 황금물을 신기하게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맛은 일반 물과 다를 바 없으나······.
"아-"
이 물에서 전해지는 따뜻함.
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찬란한 빛.
없는 신앙심도 생기게 만들어 주는 그런 물이었다.
"이건 성수가 분명해요."
"오오-"
"역시 그렇단 말이지."
그러자 호레스가 그 물을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음-"
하리엘처럼 호레스도 느낄 수 있었다.
이 물에 담긴 범상치 않은 힘을.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를 끓어 오르게 만드는 이 뜨거움을 말이다.
"아론 기사단장."
"예, 호레스님."
"아슬란 님께서는 이 물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
"별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후후. 이런 엄청난 걸 만드셨으면서도 별말씀을 안 하셨다라. 역시 그분답군."
호레스는 손을 펼쳐 말을 이었다.
"이 물을 기사들에게 보급해 주시게. 앞으로 쓰일 곳이 참 많아 보이는 것 같으니까. 무려 아슬란 님께서 우리 왕국을 위해 만들어 주신 성수가 아닌가? 그분께서 이걸 만들어 놓고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건 우리가 어떻게 이걸 활용할지 지켜보시겠다는 뜻이 분명하네."
그 말에 아론은 무언가 생각해 둔 것이 있다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예! 반드시 그분의 뜻에 맞게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이 무언가 대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
마침 회의장에 있던 라파엘도 자신 앞에 놓인 성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게 정말 성수?'
악마가 성수를 만졌을 땐 피부가 녹아내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악마의 피를 반만 이어받으면 성수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불쾌하게 느껴질 순 있어도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못한다는 것인데······.
'이건 어떠려나?'
호기심에 라파엘은 손가락 하나를 담가 보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 영향은 없는 듯했다.
'그럼 그렇지.'
바로 그 순간.
치이익-!
"으익-!"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통증에 얼른 빼내었다.
"음?"
"라파엘 공? 무슨 할 말이라도······."
라파엘은 시뻘겋게 부은 손가락을 얼른 감추며 웃음을 터트렸다.
"호호.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는 마법 병단에 일이 있어서 얼른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아. 그리하도록 하시오."
그런 뒤 도망치듯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휴우-"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대고 있었다.
대체 그 성수는 뭐지?
얼마나 그 안에 담긴 힘이 강력하면 자신의 손가락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일까.
"난 절대 마시면 안 되겠다."
자칫 잘못 입에 대다가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경험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대체 그분은 이런 걸 어떻게 만드신 거야?"
가면 갈수록 상상을 초월하는 아슬란의 행보에 그저 혀를 내두르는 라파엘이었다.
* * *
'지금쯤 어떻게 되었으려나.'
거하게 사고를 치고 난 뒤, 나는 조용히 훈련장을 나와 저택으로 돌아왔었다.
애써 만들어 놓은 우물을 박살 내놓고, 그 안을 온통 뜨거운 황금 온천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행까지 보였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열기는 한동안 이어졌고, 감히 물을 퍼서 마실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내가 일을 알아서 다 해결해야 할 것 같아 아론에게 짬처리를 시키듯 거길 재빨리 나왔던 것인데······.
"음?"
다음날 훈련장에 돌아와 보니, 생각보다 깔끔하게 복구가 되어 있었다.
무너졌던 우물은 원상태로 돌아왔고, 녹아내린 물길도 다시 정상화가 되었다.
한 가지 바뀐 점이 있다면-.
[아슬란의 황금물]
-빛의 힘이 깃든 물이다.
-이 물을 무기에 바르거나, 섭취할 경우, 어둠 계열 몬스터에게 100% 추가 데미지를 줄 수 있다.
"······?"
물길을 따라 훈련장 전체에 황금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뭐야. 이거 정말 성수가 만들어진 거야?'
설마 설마 했더니, 정말 성수가 만들어졌다.
아니. 일반 성수보다 훨씬 더 퀄리티가 좋잖아?
무려 100% 추가 데미지라니.
보통 성수가 30%의 추가 데미지를 주고, 그 위 단계의 성수는 50%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100%는 현존하는 성수중에서 가장 높은 데미지를 주는 것이었다.
'내가 뭔가 엄청난 걸 만들어낸 것 같은데?'
하지만 더욱 가관인 것이 있었다.
"이 물을 보라! 아슬란 님께서 스스로의 힘을 전부 쏟아부으면서 만드신 성스러운 물이다."
오늘도 단상 위에서 기사들을 선동하고 있는 아론이었다.
"난 그날 보았다. 우리 대기사단장님께서 한계까지 힘을 발휘해 이 성수를 만드시는 것을. 하지만 그분께서는 자신의 생명력을 깎아내는 일이 있어도 절대 멈추지 않으셨다. 그 피부를 녹일 듯한 열기 속에서도 꿋꿋하게 이 성수를 만드셨다. 바로 우리를 위해!"
"오오오-!"
생명력을 깎아?
저게 또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네.
"그러니 마시거라! 그리고 이 성수로 몸을 적셔라. 그럼 어떤 악마의 힘에도 버틸 수 있게 된다!"
"예!!"
아론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남은 물을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그러자 기사들도 똑같이 그 행동을 따라 하며 온몸을 성수로 적셨다.
그러고는-
치이이익-!
마기 가루에 불을 질러 그 뿌연 연기를 사방에 퍼뜨렸다.
설마 저 물이 훈련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저 황금물은 어둠 계열에게 추가 데미지를 줄 뿐, 그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런데,
"어떠냐? 훨씬 더 잘 버틸 수 있지 않느냐?"
"맞습니다!"
"훨씬 더 편안합니다!"
"역시 이게 성수인가?"
저놈들이 멍청한 건지, 아니면 정말 내가 모르는 다른 효과가 있는 것인지.
마기 가루가 뿜어내는 연기 속에서 항상 오만상을 쓰며 간신히 버티던 기사들이 지금은 한결 편안한 얼굴로 훈련을 버티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아슬란 님께서 만드신 성수의 힘이다! 부상을 당했을 때, 혹은 훈련이 지칠 때 이 성수를 마시거라. 그럼 힘이 샘솟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예!!"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황홀경에 빠진 듯한 저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뭔가······.'
무섭다.
"아-"
그때 한창 사기 증진이라는 본인의 특성을 활용하여 기사들을 선동하고 있던 아론이 저 멀리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대기사단장님!"
아론의 얼굴이 오늘따라 광기에 물들어 있는 것 같아 섬뜩했다.
난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인사를 하고 있는 아론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서둘러 훈련장을 나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저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기사단장님."
하지만 훈련장 밖을 나왔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라파엘이 총총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대기사단장님이 만드신 성수를 확인해 봤어요. 그런데 이게 저한테도 효과가 있는 거 있죠?"
라파엘한테?
악마의 피가 반만 흐르는 사람한테는 성수가 별다른 효과를 보이지 못할 텐데?
"여기 제 손가락 보이시나요. 그 물에 살짝 담갔을 뿐인데, 이렇게 화상을 입었어요."
라파엘이 빨갛게 익은 손가락을 보여 주었다.
라파엘한테도 효과가 있을 정도의 성수라니.
내가 정말 엄청난 걸 만들긴 했구나.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찰나의 괴력으로 빗어내지 않았던가.
"이걸 무기로 만들어도 쓸모가 많아 보여요."
"무기?"
"네. 칼루탄을 이용해서 악마들 위로 이 성수를 펑! 터트리는 거죠. 제가 이 정도인데, 진짜 악마들은 어떻겠어요?"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라파엘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네~!"
다시 총총걸음으로 마탑을 향해 뛰어가는 라파엘이었다.
나는 집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아론과 기사들의 반응이 좀 과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 성수에 무슨 힘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플라시보 효과인지는 모르겠으나 기사들이 마기 가루를 조금 더 잘 버티게 되고, 사기가 더할 나위 없이 올라갔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라파엘에게조차 효과가 있는 성수라면, 정말 그녀의 말대로 이걸 펑 터트려 악마들에게 뿌려 댄다면 이것보다 더 좋은 무기가 또 어디 있을까.
"잠깐. 그럼 반대로······."
나는 빛 속성의 물이 아닌, 어둠 속성의 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건가?
내가 가진 능력, 마기 포식에는 이런 옵션이 붙어 있다.
-이제 모든 공격을 어둠 속성으로 변환이 가능합니다.
-성속성을 가진 상대에게 200%의 추가 데미지를 가합니다.
바로 빛의 속성에 추가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어둠 속성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한번도 써본 적이 없긴 하지.'
빛 계열 네임드와 싸워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
뭐, 지금 악마들이 날뛰고 있긴 하지만 스토리를 잘 이끌어 간다면 사르디엘 종족과 딱히 싸울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나마 교단에 있는 놈들 정도?
하지만 그놈들도 빛의 마법을 부릴 뿐이지, 빛 속성을 순수하게 가지고 있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럼 끽해 봐야 레바노스라는 건데.'
방랑자 레바노스는 적군인지 아군인지 스토리에 따라 달라진다.
놈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적군으로 돌변하는 것이고, 만약 잘 구슬리기만 한다면 아군이 될 수도 있다는 것.
레바노스를 주인공의 동료로 만드는 것은 거의 히든 퀘스트나 다름 없기에,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 가느냐에 따라 놈의 성향도 달라진다.
"그냥 그놈은 안 만나는 게 낫겠다."
괜히 아군으로 만들겠다고 나섰다가 이 극악 난이도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 적으로 돌변하는 것보단 낫다.
아무튼, 빛 속성으로 이런 물을 만들어 냈으니, 어둠 속성으로도 이런 종류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수 말고 악마들이 다루는 물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악마를 퇴치하는 성수는 있어도 그 반대의 것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잔에 물을 조금만 따라 보았다.
아직 이 물은 그냥 일반 물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손을 담가 기검사 효과를 발휘해 마구 검기를 작게 날려댔다.
여기서 또 무작정 찰나의 괴력을 써서 힘을 모았다가는 무슨 꼴이 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안 변하는 거 같은데."
처음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다.
"역시 이건 안 되는 건가."
찰나의 괴력을 쓰지 않으면 역시 안 되는 모양이다.
그렇게 슬슬 손가락에 쥐가 오는 것 같아 그만하려고 할 때였다.
점점 물 색깔이 탁한 어두운 색으로 변하더니,
[아슬란이 만들어낸 타락한 어둠의 물]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 만들어낸 타락한 어둠의 물입니다.
-빛 속성 계열에게 30% 추가 데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
79화
0.01초 소드마스터 79화
성수를 활용한 훈련은 계속되었다.
내가 만들어낸 그 끔찍혼 혼종의 물은, 얼른 버려 버렸다.
두 번 다시 만들어내고 싶지 않은 비주얼의 물이었다.
라파엘은 성수와 칼루탄을 이용해 공중에서 물 폭탄을 터트리는 무기를 개발해냈고, 왕궁 안에 성수가 흘러넘치고 있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물은 철저하게 군사적 용도로만 사용할 것이다. 외부로 반출하는 걸 엄히 금하겠다."
"예, 대기사단장님."
이 물이 왕궁 바깥에 퍼져 나가게 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뻔했다.
이걸 가지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고, 가뜩이나 요즘 외부인들이 우리 성안에 자주 들락날락하고 있는데, 그놈들이 이 물을 왕창 챙겨가 다른 성에다 팔 가능성이 높다.
수요와 공급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만든 걸로 엄한 놈의 배를 불리게 할 순 없지.'
팔아도 내가 판다.
내가 만든 물인데, 당연히 돈도 내가 벌어야지!
일단 시중에 풀지 않고 가치만 왕창 높여 놓은 다음에 팔아 버릴 작정이었다.
벌써 입가에 웃음꽃이 만개하려고 한다.
"대기사단장님! 급보입니다!"
그때 기사 하나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현재 왕국 영토 곳곳에서 몬스터 웨이브가 다수 발생했다고 합니다."
또 경험치 이벤트 하라고 보내주는 건가.
이런 거 안 보내줘도 되는데.
"······숫자는?"
"최소 만 단위라고 합니다."
"각 마을에 있는 주민들은 대피를 하였느냐?"
"그것이······. 현재 몬스터들이 마을이나 성을 습격하지 않고 모두 이쪽으로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몬스터 웨이브는 보통 이벤트성으로 발생한다.
기사단을 훈련시키는 목적으로 토벌을 해도 좋고, 뭐 쓸만한 아이템들을 획득해 상단을 통해서 판매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플레이어의 경험치가 쭉쭉 올라가는 것도 장점 중 하나였다.
문제는,
'나한테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거지.'
아슬란에게는 몬스터 웨이브가 아무짝 쓸모도 없다.
난이도 때문에 어차피 몬스터를 백날 잡아봤자 스텟 성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이 몬스터 웨이브는 애써 키워 놓은 마을이나 성을 손상시키는 악질적인 이벤트일 뿐.
그런데-
'그걸 다 무시하고 왕궁을 향해 달려온다?'
내가 아는 몬스터 웨이브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일단 눈에 띄는 곳이 있으면 무작정 돌진을 해 파괴를 하는 것이 바로 몬스터 웨이브이지 않던가.
그렇다는 건,
'몬스터 웨이브가 아닌 다른 거다.'
거기까지 결론에 다다르자 나는 얼른 손을 들어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전투 준비를 하거라. 이건 가벼운 몬스터 웨이브가 아니다."
"그럼······."
"악마의 공격일 가능성이 높다. 빠르게 움직여라."
"예!"
악마의 공격이라는 내 말에 왠지 기사들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이 난다.
기분 탓인가.
그것은 곧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성벽으로 나가면서 알게 되었다.
"악마들이 온다!!"
"빛의 심판을 보여 주자!!"
"기사단! 전원 아슬란 님의 힘을 놈들에게 보여 주자!!"
"오오오-!!"
기사들은 수통에 담긴 황금물을 머리 위로 쏟아부으며 함성을 질러댔다.
······광전사냐?
'근데 숫자가 왜 저렇게 많은 거지?'
기사들의 사기가 높은 것은 좋다만, 지금 성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일라이 왕국 영토에 있는 몬스터들과 그 외 영토에 있는 몬스터들까지 싸그리 끌고 온 거 같은데, 검은 연기를 풀풀 풍기는 것을 보아 마기로 폭주를 시킨 게 분명했다.
'저 많은 몬스터를 한꺼번에 통제할 수가 있다고?'
마을과 성을 지나치게 하고 여기로 몰려들게 한 것을 보면 이건 그냥 일반적인 폭주가 아니다.
분명 누군가가 저것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이다.
'테르카나인가?'
하지만 놈에게 저 몬스터 군단을 조종할 만한 통제 능력은 없을 터.
저 정도 양이면 대악마급은 되어야······.
'설마 헤르테미스?'
복종의 대악마, 헤르테미스.
그놈 정도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놈은 자신의 특성으로 수십만의 몬스터 군단을 이끌 수 있으니까.
'근데 헤르테미스가 나타날 정도라면 뭔가 진작 발견된 게 있었을 텐데.'
다른 것도 아니고 대악마를 소환하는 일이다.
라이텐 때처럼 헤르테미스를 소환하려면 분명 어디선가 전조 현상이 나타났을 터.
라이텐 사건을 겪은 뒤로 영토 감시를 더욱 촘촘하게 해 놓은 뒤라, 대악마를 소환할 정도의 소란이었다면 진작 내 감시망에 포착이 되었을 것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다만.'
지금은 저것들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게 급선무였다.
"대기사단장님!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저희가 가서 놈들을 쓸어 버리고 오겠습니다!"
황금물로 온몸을 적신 광전사가 되어 버린 기사단은 자신들을 보내 달라며 아우성을 쳤다.
기사들은 저 황금물을 마시거나, 몸에 뿌리기만 해도 전투력이 급상승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안한데······. 저 물에 그런 능력은 없어.
'이를 어쩐다.'
나가서 싸우는 건 자살 행위이고, 그렇다고 성안에 틀어박혀 싸우자니 저 많은 몬스터가 성벽 위로 떼거지로 올라오기 시작하면 금방 이곳은 혼돈에 빠질 것이다.
'한창 성벽을 높이는 와중에 쳐들어오냐. 좀만 늦게 오지.'
우주 방어진을 건설하기 위해 성벽 공사를 계획 중에 있었다.
만약 그것만 완성이 되었어도 이렇게 불안해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꼼짝없이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
"대기사단장님~!"
저 아래에서 청명한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마법 병단과 함께 투석기를 가져와 배치하는 중이었다.
라파엘은 빠르게 위로 올라와 내게 말했다.
"이번에 저희가 만든 신무기요! 그걸 써볼 때가 된 거 같아요!"
신무기라면 저번에 만들었다는 그 물 폭탄?
"안 그래도 만들어 놓기만 하고 실전에 쓸 기회가 없었는데 히히."
라파엘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각 성벽 뒤로 투석기들을 놓고 무기를 공급했다.
투석기는 모든 성벽에 놓아도 될 만큼 부족함이 없었다.
혹시 모를 적의 공격에 대비해 공성 무기를 잔뜩 만들어 둔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됐다.
"신무기?"
"대체 그게 뭐지?"
기사들은 투석기에 올라오고 있는 주먹만 한 크기의 말랑말랑한 물 폭탄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라파엘은 그것들을 수북하게 투석기 위에다 쌓아 올려놓았다.
'저게 효과가 있으려나?'
솔직히 아직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이 방법을 한번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내 명령을 기다리는 투석병들을 향해 손을 든 뒤, 곧바로 내렸다.
"쏴라-!!"
"악마들을 모두 죽여라!"
철컥-!
투석기들이 일제히 움직이며 물 폭탄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퍼퍼펑-!!
달려오는 몬스터 군단 위에서 폭발한 폭탄들.
그러자 그 안에 있던 황금물이 소낙비처럼 아래로 쏟아졌다.
"키에에엑-!!"
그 물에 닿자마자 몬스터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자욱한 검은 연기는 어느새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 광경을 보고 기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우, 우와아아-!!"
"오오오-!"
"이것이 바로 아슬란 님의 힘이다! 이 악마 놈들!"
뭐야. 이게 정말 효과가 있잖아?
그것도 상상 이상으로 뛰어난 파괴력을 보이고 있었다.
'저게 일반 몬스터 웨이브였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마기에 폭주한 몬스터이기 때문에 황금물이 효과를 보이는 것이었다.
퍼퍼펑-!!
투석기는 쉴새 없이 움직이며 폭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무섭게 다가오던 몬스터 웨이브는 제자리에 멈춘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폭탄이 다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개발한 지 얼마 안 된 신무기라 폭탄의 양이 한정적이었다.
아. 아쉽다.
조금 더 있었으면 저것들을 다 쓸어 버렸을 텐데.
"대기사단장님! 명령을!"
"명령을!"
몸이 근질거려 보이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내게 집중되자 잠잠하던 허세가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성벽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밑이 낭떠러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멈추지 않고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너희에게 명하겠다."
내 몸은 어느새 허공 위에 떠있었다.
나는 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기사단에 명령을 내렸다.
"저 더러운 미물들을 내 눈앞에 치워 버려라."
그러자 그들은 큰 목소리로 대답하며 성문을 열었다.
"아슬란 님을 위하여!!"
"악마들을 모조리 죽여라!"
기사들은 황금물을 다시 한번 온몸에 뿌리며 진격했다.
저런 모습을 보니, 마치 광기에 덮인 광신도들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와아아-!!"
"키에에엑!"
곧 기사단이 몬스터 군단과 충돌하여 싸움을 벌였다.
숫자는 저쪽이 훨씬 많았으나, 폭탄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몬스터들은 기사단에 의해 속절없이 쓸려나가고 있었다.
'완전 압도적이잖아?'
설마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만약 내가 성수를 만들지 않았다면, 아니. 저 몬스터들이 마기에 휩싸이지 않은 그냥 일반적인 몬스터 웨이브였다면 오늘 이 왕궁이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근데 내 말은 어디에 있냐?'
비행 지속 시간이 1분밖에 되지 않아 지상으로 내려오긴 했는데, 내 말만 보이지 않았다.
주인이 여기에 있는데 퍼뜩 나타나지 못할망정, 분명 어디선가 또 혼자 다른 말에게 치근덕거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 말을 얼른 가져오라고 명령을······.'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앙-!!
"으아악!"
"커헉!"
줄에 매달린 대검 하나가 빙글빙글 춤을 추며 기사들을 베어 버리고 있었다.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이는 그 검의 움직임을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레바노스밖에 못 하는 건데?'
더 큰 대검을 줄에 묶어 휘두르는 건 레바노스의 특기였다.
더군다나 저런 빛의 검강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역시 레바노스의 능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촤아아-!
걷히는 연기 사이로,
[레바노스]
무력: 95
지력: 85
방랑자 레바노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
레바노스는 멍한 눈동자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놈이 왜 악마 편에 선 거지?
아니.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는 건가?
저거 하는 몸짓을 봐서는 나한테 달려올 거 같은데?
"흐아압!!"
채앵-!!
하지만 레바노스가 움직이기 전에 아론이 먼저 그에게 달려와 칼을 휘둘렀다.
그 옆으로 알렉산더와 하리엘도 합세해 난타를 이어갔다.
콰콰콱-!!
그러나 상대의 무력은 무려 95.
거기다 레바노스는 속도, 힘, 기술 등등.
어느 곳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육각형 소드마스터였다.
일단 태생부터가 천계의 핏줄이라서 사기적인 능력과 피지컬을 갖추고 있었다.
콰앙-! 콰아앙-!!
과연 몇 수 위의 힘 차이를 보여 주며 레바노스는 저 세 명의 협공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내고 있었다.
'저 세 명한테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나는 일단 들어갈까?'
나는 스리슬쩍 뒤로 물러나 성안으로 돌아가려 했다.
괜히 저놈이 눈에 불을 켜고 여기까지 달려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스레 발을 빼려는 때였다.
쉬익-!
대검을 붕붕 돌리며 세 명의 협공을 막아내고 있던 레바노스의 모습이 일순 사라졌다.
"어, 어디로 갔지?"
그의 움직임을 놓친 아론이 뒤를 돌아보았을 땐.
"!?"
높이 날아오른 채, 한쪽 날개를 활짝 펼친 레바노스가 나를 향해 대검을 휘두르며 내려오고 있었다.
* * *
"보면 볼수록 재밌는 놈들이군."
테르카나는 황금빛 연기를 내뿜으며 쓰러져 가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런 역공을 당할 줄이야.
헤르테미스가 만든 지팡이로 이 많은 몬스터 군단을 일으키는 데에는 성공했을 때만 하더라도 일라이 왕국을 금방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가 이런 것을 준비하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성수로 만든 폭탄이라니. 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성수는 교단에서도 소량만 만들어 낼 수 있다.
저렇게 무식하게 쏟아부을 정도의 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일라이 왕국은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성수로 만든 물을 뿌려 애써 만들어 놓은 이 몬스터 군단을 쓸어 버리고 있었다.
"거기다 이 성수는······. 일반 성수보다 훨씬 강력하군."
상대가 상대인 만큼 헤르테미스의 힘까지 빌려 이런 무대를 준비했건만.
아슬란 저자는 항상 몇 수 앞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지."
아슬란을 죽이기 위한 마지막 카드.
방랑자 레바노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몬스터 군단으로 저 왕궁을 파괴한 뒤 아슬란을 궁지에 몰아 레바노스로 하여금 상대하려고 했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 빛의 힘으로 라이텐을 죽였을진 몰라도, 이번에는 다를 거다."
레바노스 역시 아슬란과 마찬가지로 빛의 힘을 다루는 자다.
악마에게는 악몽 같은 두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한 대륙 최강자 두 명이 만났으니, 지루한 대결은 아닐 터.
과연 레바노스는 그 이름에 걸맞게 압도적인 힘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던 놈들을 치워 버리고 곧장 아슬란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화려하게 펼친 천상의 날개는 감정이 메말라 있던 테르카나조차 감탄을 터트리게 만들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레바노스가 날린 일격은 아슬란의 손끝에 가로막혔다.
방어막 같은 건가?
거기에 흡수된 힘이 반사되듯 뻗어지자 레바노스는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부웅-!
첫 타는 보기 좋게 막혔으나, 두 번째는 다를 것임을 알려 주듯, 줄에 매달린 레바노스의 대검이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아슬란에게 달려가 일격에 끝을 보려는 것 같았다.
그렇게 힘을 끌어모으며 마침내 아슬란을 향해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펄럭~
어느새 그의 옆에 붉은 망토가 펄럭이고 있었다.
"······?"
레바노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느리구나."
그곳에는 거만하고 꼿꼿한 자세의 아슬란이 격조 있는 발걸음으로 옆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죽는 그 순간까지도."
80화
0.01초 소드마스터 80화
정신이 멍하다.
마치 몸이 실에 칭칭 감겨 움직이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답답한 구속도 곧 끝이다.
눈앞에 있는 상대를, 저 아슬란을 죽이기만 한다면······.
푸확-!
"!?"
그런데 분명 방금 전까지 저 앞에 있었던 아슬란이 지금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한 초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기까지 했다.
"아-."
레바노스는 외마디 비명과 같은 기함을 터트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피가 솟구치고 가뜩이나 멍했던 정신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털썩-.
결국 비틀거리다 제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린 그는 피가 솟구치고 있는 목을 손으로 막았다.
다행히 목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레바노스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이 빛의 힘으로 치유를 한다면 이 정도쯤은······.
'왜 치유가 안 되는 거지?'
하지만 지금쯤 치유가 되었어야 할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이 이질적이고 혀에서 시큼한 맛이 나게 하는 무언가가 자신의 치유력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레바노스는 제 손바닥에 묻은 피에 담긴 성스러운 빛의 힘이 갉아 먹히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분명-.
'어둠의 힘?!'
오직 악마라 불리는 테키나 족속만이 다룰 수 있다는 어둠의 힘.
하지만 그 힘에도 '순도'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상급 순도의 어둠이었다.
레바노스는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
그곳에는 고고한 자세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아슬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무시무시한 어둠의 힘을.
자신의 신성력쯤은 간단히 씹어 먹을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어둠이었다.
"······."
그 위압적인 눈동자에 레바노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한계에 치달은 정신은 결국 그 자리에서 끊기고 말았다.
* * *
"대체 저게 무슨······."
보지도 못했다.
아슬란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그가 언제 칼을 뽑아 레바노스를 베었는지, 그리고 언제 그 칼을 다시 집어 넣었는지도.
테르카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그가 보는 것이라고는 황망하게 쓰러지는 레바노스의 모습뿐.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신성력을 소멸시킬 정도의 강력한 어둠이라-."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신성력 역시 마기를 소멸시킨다.
그것이 천계의 존재라 불리는 사르디엘 족속이 갖는 특별한 힘이었다.
테키나 족속이 유일하게 두려워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르디엘일 것이다.
사르디엘의 빛은 테키나 족속의 어둠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눈부신 레바노스의 빛이 아슬란의 어둠에 의해 잡아 먹히고 있었다.
"어떻게 아슬란 저자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악마의 피가 섞이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 따위가 신성력을 소멸시킬 정도의 어둠을 다루다니.
"······."
테르카나는 멍하니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300년 전 테키나 족속이 끝끝내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모든 종족이 힘을 합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천계의 간섭이었다.
항상 방관만 하던 작자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쟁에 난입해 테키나 족속을 몰아내고 그들을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을 대륙의 종족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 압도적인 빛에 의해 어둠이 결국 패배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있다면······."
아슬란 저자가 어떻게 어둠을 다루는지는 테르카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자는 어둠과 빛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슬란의 어둠은 빛을 능가한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었다.
어쩌면 그의 힘은 저 천계의 빛마저 능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군."
테르카나는 힐끗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고 있는 레바노스의 목숨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