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임씨 가문의 남매

5화. 임씨 가문의 남매

초우는 아까부터 들려 온 목소리의 주인들을 힐끗 바라봤다.

스물예닐곱 살로 보이는 남자는 장발에 평범한 운동복 차림이었지만, 외모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수려했다. 또 선풍도골의 기질이 몸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고 있었다.

그 옆의 여자는 스무 살을 갓 넘긴 것으로 보였다. 이목구비가 정교하고 예쁜데다 귀까지 오는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피부는 희고 윤기가 나며 입술은 앵두 같고, 눈은 크고 반짝였다.

초우를 발견한 여자는 조금 놀라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잖아?”

그런데 여자는 말을 하다 말고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야, 너 때문이지? 너 때문에 산 밑에서 그 재수 없는 사람들이 우릴 막았던 거 아니냐고! 너 뭐야? 엄청난 거물이라도 돼? 너희 엄마 아빠는 너 이러는 거 아시니?”

“…….”

초우는 다짜고짜 욕을 얻어먹고도 대답 없이 서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미안한 얼굴로 초우를 힐끗 보더니 여자를 타일렀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법이 어디 있어? 앞뒤 사정도 물어보지 않고 함부로 그러면 안 되는 거지.”

남자는 다시 초우를 보며 미소 지었다.

“미안합니다. 제 동생이 어릴 때부터 좀 버릇없이 자라서…….”

그러자 여자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왜 사과하는 건데! 옥황정에 사람이라곤 쟤 하나뿐이잖아. 아까 그 깡패들이 쟤랑 아무 상관도 없으면 내가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진다!”

여자는 초우를 슬쩍 보더니 다시 외쳤다.

“봐! 쟤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잖아. 무언의 긍정인 거라고!”

초우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렇게 단정 짓는 건 나쁜 버릇인 것 같네요. 날 보자마자 대뜸 기관총처럼 쏴 대는데 해명할 틈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전 나름대로 모범 청년입니다. 학생 시절 모범상은 죄다 휩쓸었죠.”

“흥, 모범상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 자체가 ‘빼박’ 증거인데 무슨 말로 발뺌하려고? 너 같은 인간 ‘레알’ 싫어.”

여자는 매섭게 초우를 노려보았지만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저 촌스러운 단어 사용은 뭐냐…….’

굉장히 진지한 표정으로 이상한 용어를 남발하는 여자를 보고, 초우는 피식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동생이 이제 막 인터넷 사용법을 배운 참이라 신조어들에 푹 빠져 있거든요. 이해해주십시오. 아, 저는 임약(林躍)이라 하고, 이쪽은 제 여동생 임유(林柔)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한숨을 쉬며 대신 사과하는 오빠 옆에서 임유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렸다.

“난 쟤 만난 거 하나도 안 반갑거든?”

초우는 그런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초우입니다.”

임약은 귀에 익은 초우의 이름에 살짝 놀랐다가, 탐색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되물었다.

“그럼 설마, 북지초가의 그……?”

“북지초가의 초우라고? 사람들이 폐물…….”

임유가 작게 종알거리자 임약이 바로 말을 자르며 소리쳤다.

“임유! 말조심 해!”

임유도 순간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고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미안.”

하지만 초우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미소 지으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죠. 제가 그 폐물 맞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동생 녀석이 너무 큰 실례를….”

임약은 곤란한 얼굴로 임유를 돌아봤지만, 동생을 너무 아끼는 탓에 차마 심하게 꾸짖지도 못하는 듯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에는 익숙해졌는걸요.”

초우의 담담한 미소에 임약도 호의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저는 초량(楚良) 공자와는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임약의 말을 들은 초우는 이들 남매 역시 그간 은거하고 있던 가문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 챘다.

초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전 초량 형을 만난 지 꽤 오래됐군요.”

“정말 대단한 분이죠!”

초량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임약은 바로 존경의 기색을 드러내더니, 다시 초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태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얼마 전 졸업한 뒤 첫 출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 완전히 구속당하게 되기 전에 미리 기분 전환을 해두자 싶었죠.”

임약은 초우의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화제를 돌렸다.

“그럼……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하산해서 한잔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초우가 뭐라고 대답하려던 순간,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두 살수가 죽은 뒤 전파 차단도 해제된 듯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초우는 빙긋 웃으며 임약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초우! 너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방울처럼 맑은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네 보표가 널 찾느라 나한테까지 왔길래 얼마나 놀랐다고!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왜,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어? 아, 오나전 안습.

초우는 임약과 임유 남매를 힐끗 보았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통화 내용을 엿듣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리 비밀스러운 얘기를 주고받을 것도 아니었으므로 초우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임약과 임유는 모두 여명을 감상하려는 듯 평온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통화 내용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초우는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일부러 짓궂은 말투로 대답했다.

“이상한 말 좀 쓰지 마, 할머니. 그게 대체 언제 유행하던 단어인데. 촌스럽긴…….”

임유는 말하면서 자신을 힐끗 보는 초우의 시선을 느끼고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건 누가 봐도 통화하는 척하면서 자신을 비꼰 것이었다! 철 지난 유행어를 쓰든 말든, 자기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임유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의 여자가 먼저 발끈해서 소리쳤다.

- 할머니? 너 지금 할머니라고 그랬니? 난 네 누나야, 누나라고! 감히 나한테 대들 줄도 알고, 너 많이 컸다? 아니, 잠깐만. 오호…… 너, 솔직히 말해 봐. 지금 옆에 여자 있지? 그래서 되게 센 척하고 있는 거지? 하하하하! 뻔하다, 뻔해!

초우는 멋쩍은 얼굴로 뺨을 긁었다. 고작 하루 차이로 항상 자신이 누나라고 으스대는 전화기 너머의 이 여자는, 초우를 정말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전화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내 말 맞지? 뭐, 언제 한번 소개시켜줘. 분명히 말하는데, 내 마음에 안 들면 절대 둘 사이 허락 안 할 거야!

순간 임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얼굴로 초우를 노려보았다.

‘뭐야. 누나면 다야? 나이 많은 게 대수냐고! 자기가 뭔데 허락을 하고 말고 해? 내가 쟤보다 집안이 빠져, 뭐가 빠져! 아니, 애초에 내가 저 놈이랑 무슨 사이라고 이런 얘기까지 들어야 돼? 완전 재수 없어!’

임유는 속으로 마구 욕을 퍼부어댔지만, 초우는 태평하게 전화 속의 여자에게 대답했다.

“하하하! 뭘 모르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너야. 옆에 있는 건 그냥 우연히 만난 형 친구들이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계속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갑자기 뚝 그쳤다.

그리고 태산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연경(燕京)의 어느 고층 건물 꼭대기 층 사무실 안, 커다란 책상 너머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여자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지? 얘 뭐 잘못 먹었나? 갑자기 딴 사람이라도 된 것 같잖아? 언제부터 나한테 고백까지 할 정도로 간이 커진 거야?’

그러나 여자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전화기에 대고 쏘아붙였다.

- 야, 됐고. 좋은 말로 경고하는데 빨리 눈썹 휘날리게 돌아와. 수련 좀 못 하면 뭐 어때. 어차피 몇 십 년 전만 해도 다들 수련 같은 건 하나도 못 하고도 잘만 살았잖아? 그런데 고작 그런 걸 갖고 우울하답시고 말도 없이 사라지다니.

사라진 것까진 괜찮아. 문제는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갔다는 거지! 똑똑히 들어라. 이틀…… 아니, 딱 하루 줄 테니까, 내일 이 시간까지 내 앞에 대령해! 난 아직도 같이 용성에 가려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아무튼, 할 말 끝났으니까 나 이만 끊는다!

전화가 끊기자 초우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여자의 새침한 말투에도 초우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겉으로는 떽떽거리지만, 사실 이 사람이 초우가 용성에서 괴롭힘을 당할까봐 함께 가주려 한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가 정말 용성에 같이 가준다면 그쪽 사람들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화하의 젊은 세대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도 내가 더 이상 쓸모없는 놈이 아니라는 건 아직 모르겠지!’

속으로 빙긋 웃던 초우는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임약에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한잔 하자는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이 있어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혹시 임 형께서 용성에 오실 일이 있으시면 그때 꼭 다시 만납시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임유는 못마땅한 듯 콧방귀를 뀌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정말 예의라고는 없네. 우리 오빠가 누군지나 알고 이러는 건가? 호의를 거절한 걸로도 모자라 전화번호도 안 알려주면서 다음에 만나자고? 이건 그냥 만나기 귀찮다는 거잖아!’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의 오빠 임약은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서 초우와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는 초우에게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연락처를 교환한 초우는 임약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넨 뒤 임유를 보며 씩 웃었다.

“인터넷에는 새로 생긴 단어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책도 좀 많이 보시고요, 동생님.”

“누가 네 동생이야? 너, 지금 나 무식하다고 흉본 거지? 거기 안 서? 서라고!”

임유는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지만 초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벌써 멀어진 뒤였다.

반면, 임약은 가파른 계단을 거침없이 내려가는 초우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오빠, 설마 진짜로 쟤랑 친하게 지낼 생각인 거야?”

한동안 씩씩대던 임유는 의아함과 호기심이 섞인 눈으로 임약을 돌아보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는 자신의 오빠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임약은 뛰어난 인물들의 순위를 매긴 ‘천교방(天驕榜)’에서 10위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임유의 마음속에서 그는 10위 안의 그 어떤 자보다도 훌륭한 기재였다.

그런데 다른 세가의 걸출한 자제들, 심지어 천교방 10위 내에 이름을 올린 자들에게조차도 이렇게 적극적으로 교제를 청한 적 없었던 임약이, 비록 세가의 자제이긴 하지만 쓸모없는 인간에 불과한 초우에게 의외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초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에도 한동안 그가 사라진 계단 쪽을 바라보던 임약이 그제야 눈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보며 물었다.

“네 생각은 어떤데?”

“글쎄…… 확실히 소문으로 듣던 거랑 좀 달라 보이긴 했어.”

임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듣기론 어렸을 때 절세의 천재였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평범한 사람으로 바뀌어버렸다고 했는데. 그런데 방금 전 그 모습이 어딜 봐서 폐물이야? 게다가 걔가 날 쳐다볼 땐 왠지 내 모든 걸 꿰뚫어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그리고 태도도 상당히 당당한 게…… 뭐랄까, 아, 그래. 자신감! 자신감에서 우러난 여유 같은 게 느껴졌어!”

동생의 이야기에 임약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봤구나. 우선, 태산 아래에서 입산을 막았던 자들은 초 씨 가문 사람들이 절대 아니었어. 그자들은 전부 이 지역 말투를 쓰고 있었잖아. 초 씨 가문이 대단하긴 해도 여기까지 세력이 뻗어 있진 않아. 그리고, 아까 초우와 통화했던 사람은 아마도 임설몽이었을 거야.”

“임설몽? 설마 북지임가(北地林家)의 임설몽? 화하 천교방 10위에 들어 있는 그 임설몽?”

임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임설몽이 초우랑 그렇게 친한 사이라는 게 말이 돼?”

“글쎄다. 나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어. 둘 다 북쪽 출신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세간의 평가만 봤을 때는 둘이 어울리지 않는 게 사실이니까. 사실 나도 예전에 임설몽을 만난 적이 있어서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으니 알아차렸지, 그렇지 않았다면 둘이 친하다는 사실을 안 믿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