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함정
“아직도 그런 걸 갖고 있었던 거요?”
세모눈 사내가 놀란 얼굴로 묻자, 좌종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치 정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으로 은빛 권총을 보며 대답했다.
“사실 저도 이걸 다시 사용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총과 신기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물론 이 시대에도 과학기술의 산물은 여전히 남아 있긴 했지만, 대다수의 고수에게 권총은 옛날만큼 매력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상대가 충혈경 5단 정도의 고수만 되어도, 대단한 살상력을 가진 중화기가 아닌 일반적인 총포로는 상해를 입히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고수들의 움직임은 음속만큼이나 빨랐기 때문에, 총으로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겨냥하기 어려웠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상당한 수준의 방어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총알에 맞는다 해도 기껏해야 얕은 상처만 날 뿐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개의 고수는 권총 따위는 버린 지 오래였다.
좌종은 아련한 향수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제가 제법 잘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이 총 덕분이었죠. 그래서 신기원 이후로도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늘 지니고 다니면서 가끔 꺼내 손질하며 추억에 잠기곤 했는데…… 다시 쓸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말을 마친 좌종은 무자 비석 위의 초우를 향해 묘한 미소를 보냈다.
“네놈의 호신법기가 센지, 아니면 내 데저트 이글이 센지 보자꾸나.”
초우 역시 똑같이 묘한 미소를 띠고 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도 날 포기 못한 거냐?”
그러자 세모눈 사내가 초우에게 조소를 보냈다.
“너무 무서워서 아예 정신줄을 놓은 모양이군.”
“당연하지! 널 죽여야 우리 임무가 끝나니까!”
좌종도 몸의 기세를 끌어올리며 소리쳤다.
그의 눈은 단 한 발의 총알도 빗맞힌 적이 없었던 과거의 그 시절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좌종은 곧바로 손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날이 밝아 오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탕! 탕탕!
연거푸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비록 소음기를 장착해하긴 했어도 태산의 고요함을 깨뜨리기에는 충분한 소리였다.
좌종은 자신의 사격술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단 한 지점만을 노리고 세 발이나 발사했으니, 설사 초우가 호신법기를 지니고 있다 해도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어차피 초우는 폐물이기에 총알을 피할 능력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좌종이 사용하는 건 최강의 자동권총으로 유명한 데저트 이글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빌어먹을!”
옆에 있던 세모눈 사내가 갑자기 으르렁거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좌종의 얼굴에도 경악의 빛이 스쳤다.
텅 빈 비석 위를 바라보던 좌종은 문득 등 뒤에서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러나 감히 뒤를 돌아볼 엄두는 내지 못했다.
이내 세모눈 사내가 갑자기 바닥에 풀썩 쓰러졌고, 좌종은 몸이 차갑게 얼어붙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의 뒤에서 탄식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을 죽이는 느낌은 정말 끔찍해! 진짜 징그럽다고!”
“너, 너……! 대체 어떻게……?”
좌종은 이렇게까지 죽음이 자신의 가까이에 와 있는 걸 느껴본 게 평생 처음이었다. 좌종의 몸은 엄청난 공포로 인해 덜덜 떨렸다.
한때 좌종은 설사 자신이 죽음에 직면한다 해도 당당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태연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다년간의 살행(殺行) 경험을 통해, 좌종은 자신의 동료인 세모눈 사내가 벌써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폐물이 된 지 16년이나 지난 쓰레기가 어떻게 갑자기 이런 가공할 실력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수련을 못한다는 건 다 위장이었나? 저 놈이 그렇게까지 치밀하고 교활한 놈이었다고? 젠장! 젠장! 젠장!’
혼란스러워하는 좌종의 뒤에서 초우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제 우리도 대화를 좀 나누어볼까?”
초우의 미간은 살인 후의 불쾌함으로 인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충혈경 8단의 경지라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좌종이 발사한 총알 세 발을 피하는 동시에 세모눈 사내를 죽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초우는 이제 막 봉인이 해제됐기 때문에 아직은 최상의 몸 상태가 아니었다. 16년이나 봉인돼 있다가 갑자기 회복된 힘을 단시간에 정확히 제어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초우도 언젠가 자신의 힘이 회복될 날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두긴 했지만, 이론과 실전은 어디까지나 별개의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초우는 좌종이 첫 번째 총알을 쏘기 전, 잔영만 남긴 채 이미 비석에서 뛰어내렸었다. 그리고 두 번째 총알이 발사됐을 때는 벌써 두 살수의 지척까지 접근해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총성이 울렸을 무렵, 초우는 어느새 뒤쪽으로 돌아가 세모눈 사내의 등 한가운데를 가격해서 오장육부를 파괴해버렸다.
세모눈 사내는 총성이 울린 직후에야 비석 위에 초우가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그 순간 이미 죽음의 기운이 자신을 덮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빌어먹을!”이라는 욕 한마디를 유언처럼 뱉은 후, 변변한 방어 한 번 못해본 채 이 세상에 작별을 고하고 말았다.
서로 다른 경지에 있는 사람 간의 실력차이는 이렇게나 컸다.
이렇게,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됐다.
좌종은 감히 미동조차 못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다. 심지어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 이제 말해봐. 누구의 지시였지? 고작 나 같은 폐물을 죽이겠다고 너희 정도의 고수 둘을 보냈고, 산을 봉쇄하는 것도 모자라 전파 차단기까지 사용하고, 게다가 나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감시까지……. 이렇게까지 정성을 쏟은 놈이 대체 누군지 궁금하네.”
초우의 목소리는 좌종에게는 악마의 음성과도 같았다. 좌종은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네놈이 폐물이면 우린 뭐야? 발톱의 때냐?’
두려움에 손끝마저 파르르 떨렸지만, 좌종은 애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협상을 시도했다.
“솔직히 얘기하면 난 살려줄 거냐?”
비록 자신도 살수이긴 했지만, 좌종은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좌종 정도의 경지라면 백 살을 훌쩍 넘도록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제 겨우 서른아홉 살인 그는 아직 청춘이나 다름없었다. 인생의 수많은 즐거움을 뒤로 하고 벌써 세상을 하직하기엔 너무나 억울한 나이였다.
“아니.”
초우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그 대신 고통 없이 죽여줄게. 그래, 네가 자랑하던 그 쿠크리 단도를 쓰면 깨끗한 죽음을 선사해줄 수 있겠네.”
“…….”
좌종은 아까 함부로 입을 나불댄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잘 생각해봐. 물론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 절대 편하게 죽을 수 없을 거야. 너도 살수니까 사람을 괴롭히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겠지. 난 비록 살수는 아니지만, 요새는 검색하면 다 나오는 세상이잖아?”
초우는 담담하게 말하면서 자신의 몸속에 충만하게 퍼져 있는 힘을 마음껏 음미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좌종은 결국 배후의 이름을 뱉었다.
“진짜 배후는 사천우(謝天宇)다.”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초우의 눈에 분노의 빛이 번득였다.
“사천우는 네놈이 자기 연적이라더군. 네놈이 살아 있으면 임설몽은 영원히 자기 것이 되지 않을 거라며 우리한테 일을 의뢰했다.”
좌종은 모든 것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어차피 청부인을 밝힌 이상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다른 사람 걱정까지 대신 해 줄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세모눈 사내의 배경, 이번 임무를 위해 동원한 인맥, 이후에 예정돼 있던 마무리 조치까지 전부 시원스럽게 밝힌 후에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널 암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 넌 만날 집에만 틀어박혀 문 밖으로 거의 나오지도 않는 데다, 보표들이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너를 보호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다 이번에 간신히 기회를 얻었던 건데, 이게 함정이었을 줄이야……. 너, 아주 감쪽같이 세상을 속였구나.”
“내가 세상을 속였다고? 속이긴 뭘 속였다는 거야?”
초우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오해였다. 그러나 좌종은 초우보다 훨씬 억울했다.
“그래, 하루 이틀 정도야 쓰레기 행세를 해도 큰 문제가 없었겠지. 어쩌면 한두 해 정도도 무리 없이 위장할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무려 16년 동안이나 쓸모없는 놈 취급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다니……. 젠장, 젠장! 이건 그냥 단순한 함정이 아니야. 네놈은 진짜 빌어먹을 함정의 신이라고!”
좌종은 분통함 때문에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힌 채 외쳤다.
‘아까는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등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더니. 놈한테 우린 그냥 고양이 앞의 쥐에 불과했던 거야. 죽이기 전에 실컷 갖고 놀고 싶었던 거지!’
지금까지도 좌종은 초우가 정확히 어느 정도 경지인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자신이나 세모눈 사내보다 강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상대는 충혈경 7단 이상인 게 분명했는데, 이게 함정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흠…….”
초우는 눈물범벅이 된 좌종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곧 주먹을 뻗어 그의 심맥을 깔끔하게 깨뜨렸다. 단도 따위를 쓰며 피를 보는 건 진심으로 사양하고 싶었다.
“우욱!”
좌종의 몸이 푹 고꾸라지는 걸 본 초우는 결국 허리를 굽히며 헛구역질을 했다. 그는 한참이 지나서야 간신히 진정한 후, 두 살수의 시체를 들고 깊은 골짜기로 향했다.
* * *
초우는 바닥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한 걸음에 거의 20장을 이동했다. 두 구의 시체 처리를 마친 그가 다시 옥황정에 돌아왔을 때 하늘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고, 멀리서 등산객들의 말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건 말도 안 돼. 자기들이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입산을 막는 거냐고! 아까는 진짜 성질나 죽는 줄 알았다니까?”
여자의 맑은 목소리에 이어 젊은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제 그만 진정해, 유아야. 보아하니 아까 그 사람들, 이 동네 깡패 같던데 괜히 부딪쳐서 좋을 게 뭐 있겠어? 괜히 우리 기분만 더 나빠지지.”
“기분이라면 벌써 상했어! 난 원래 옥황정에서 꼭 여명을 볼 생각이었단 말이야. 그럼 선천자기 덕분에 기연을 얻게 될지도 모르잖아. 흥! 할아버지가 나한테 사고 치지 말라고 당부하시지만 않았어도, 아까 그자들 쯤은….”
여자가 계속해서 투덜대자, 남자가 웃으며 위로했다.
“하하! 기연이 그렇게 흔하다니? 너 요새 소설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하긴, 이제 막 인터넷 사용하는 법을 배웠으니 새 문물에 빠지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자, 기분 풀어. 내일 다시 올라오면 되잖아.”
“어, 정말? 약속한 거다? 만날 나중에 딴소리하니까 믿을 수가 있어야지! 도대체가 신용이 안 가는 사람이라니까.”
조금 기분이 풀린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서 들려왔다.
“자기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동생이 어디 있냐?”
남자의 말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지만, 동생에 대한 애정 역시 듬뿍 담겨 있었다.
이제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수행에 힘쓰고 있는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의 체질 또한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다. 예전에는 한참이 걸려서야 겨우 오를 수 있었던 산도 이젠 큰 힘 들이지 않고 등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 남매도 수행자였기 때문에,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초우가 서 있는 옥황묘 앞의 광장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