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또 하나의 전환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존엄을 지키며 죽어라!’
이는 초 씨 가문의 자제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 중 하나였다.
초우는 차분한 태도로 협박하는 한편, 둘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두 살수 모두 눈동자에 살짝 두려움이 스치는가 싶었지만, 이내 원래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무슨 말을 해봐도 소용없다. 넌 오늘밤 무조건 죽어!”
좌종의 냉정한 선언에도 초우는 침착하게 말했다.
“좋아, 어차피 그렇게 될 거라면 죽기 전에 작은 부탁 하나쯤은 해도 되겠지? 사형수한테도 마지막 만찬은 제공하는 법이잖아.”
“만찬? 어이가 없군. 내가 먹다 남은 빵이라도 주랴? 어이, 꼬마야. 충고 하나 하마. 아직 목숨이 붙어 있을 때 신선한 공기라도 최대한 더 마셔두는 게 좋을 거다!”
좌종이 험상궂은 얼굴로 대꾸했다.
사실 방금 전 초우의 말이 불러일으킨 두려움은 좌종의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었다. 초 씨 가문은 그만큼 무서운 상대였다.
두 살수는 오늘밤 일을 마치자마자 멀리 도망칠 수 있도록 위조 여권도 미리 준비해둔 상태였다. 그러나 북지초가의 가풍을 떠올려보니, 초우를 죽인 다음의 일이 새삼스럽게 걱정되긴 했다.
그러나 이런 약한 감정은 좌종의 마음속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일으켰다. 고작 세가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째서 자신들 같은 고수가 저 따위 폐물의 말 몇 마디에 이렇게 불안해해야 한단 말인가? 세상은 정말이지 불공평했다.
“난 빵 싫어. 게다가 남이 먹던 건 더 싫고.”
초우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난 태산에 온 게 이번이 처음이야. 태산의 일출을 꼭 한 번 보고 싶어서 온 거였지. 후우……. 내 부탁은 이거야. 어차피 죽일 거,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일출은 보게 해주면 안 되겠냐?”
“정말 시끄럽군!”
초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충혈경 6단의 세모눈 사내가 짜증스럽게 외치는 동시에, 초우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기다림에 지쳐 결국 직접 손을 쓰기로 결심한 것이다.
충혈경 6단 고수의 주먹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으며, 거기에 실린 힘 역시 웬만한 건물 높이의 바위라도 일격에 박살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그러나 충혈경 8단인 초우에게는 그런 엄청난 속도와 위력을 지닌 공격도 느릿한 동작으로 보일 뿐이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초우의 몸은 마음만큼 움직여주지 않았다. 빌어먹을 봉인 때문에 자신보다 훨씬 실력이 뒤처지는 상대의 손에 목숨을 잃을 처지가 돼 버린 것이다. 정말 어이없고 슬픈 일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군.’
초우는 저들이 왜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조차 모른 채 험한 꼴을 겪게 되자, 속으로 긴 탄식을 뱉었다. 물론 어렴풋이 짐작 가는 이유가 있긴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진짜 더럽게 재수 없는 날이네!’
죽음의 먹구름이 머리 위를 덮치던 그때, 뜻밖에도 초우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윽고 그의 머릿속에서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의 수많은 기억이 신기할 만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그 사이 강한 파공음을 일으키며 날아간 세모눈 사내의 일격이 마침내 초우의 가슴을 때렸다.
쿠우웅!
사내의 주먹은 매우 정확하게 초우의 심장을 겨냥했으며, 거기에 담긴 힘은 일만 근의 거석이라도 가루로 만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희미한 빛이 초우의 미간에서 새어나왔다. 그 빛은 신비한 막을 형성하더니 곧 그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정작 초우 자신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주먹의 힘에 의해 무자(無字) 비석 쪽으로 날아갔다.
‘죽는 게 원래 이런 건가? 하나도 안 아픈데?’
온갖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치는 가운데, 초우의 몸은 하필 옥황묘 앞의 높다란 비석 꼭대기에 떨어졌다.
초우는 그 충격으로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했지만, 본능적으로 무자 비석 꼭대기에 삐죽 솟아 있는 돌기둥을 잡으면서 겨우 균형을 잡았다.
‘뭐지?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야?’
초우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충혈경 6단 고수의 전력을 실은 일격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는 초우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초우가 방금 전까지 있던 관일정(觀日亭)에서 그 정도 고수의 주먹에 맞았다면, 무자 비석이 아니라 그대로 옥황묘 안까지 날아갔을 것이다. 심지어 저 멀리 있는 산골짜기에 처박히게 될 수도 있었다.
한마디로, 이미 죽었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초우는 아직 멀쩡하게 숨이 붙어 있었다.
‘뭐야? 나 아직 살아 있는 거잖아? 어쩐지 하나도 안 아프더라니. 게다가 몸에 상처 하나 없어!’
이건 정말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초우는 자신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기혈이 약간 들끓는 것 외에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내 초우는 가슴을 툭툭 털며 외쳤다.
“젠장, 깜짝 놀랐잖아! 뭐 대단한 놈인 줄 알았더니, 네놈 주먹도 별 거 없네.”
두 살수는 그보다도 더 놀란 눈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멍청하게 초우를 바라보던 좌종이 세모눈 사내를 슬쩍 보며 물었다.
“혹시…… 봐준 겁니까?”
“무슨 헛소리요!”
세모눈 사내의 얼굴에는 노기와 함께 의아함과 찝찝함이 어려 있었다.
방금 전 일격의 위력에 대해서라면, 공격을 시도한 자신이 누구보다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분명히 그 주먹에 초우의 심장을 파괴할 만큼의 힘을 실었다!
신기원 이후, 여러 이유로 인해 감히 태산에 머무르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지금도 태산 정상에 옥황묘가 우뚝 서 있는데다 관광이나 기도를 위해 드나드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이곳에 기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초우를 그냥 옥황묘로 날려 보내기만 했다면, 일부러 쫓아 들어가서 머리를 베어야 했다. 세모눈 사내는 그런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 가슴에 구멍을 낼 수 있을 만큼 강한 공격을 가했지만, 뜻밖에도 초우는 조금의 내상조차 입지 않았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분명 주먹 끝에 놈의 가슴이 닿는 느낌이 있었다. 생생하게 타격감이 느껴졌다고! 그렇지 않았다면 놈의 몸이 저렇게 날아갈 리도 없었겠지.’
세모눈 사내가 어두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좌종이 문득 뭔가 떠오른 듯 탐욕스러운 눈빛을 하고 말했다.
“혹시 저 놈…… 호신법기(護身法器)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법기?”
세모눈 사내의 눈도 순간 번뜩였다.
신기원이 열린 이후 거의 모든 국민이 수련에 정진하는 시대가 됐지만, 그렇다 해도 법기는 여전히 귀한 보물이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처럼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산수(散修)들에게는 더더욱 구경조차 해보기 힘든 물건이었다.
초우가 호신법기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두 살수는 숨이 가빠졌다. 충혈경 6단 고수의 일격마저 쉽게 막아 낼 정도의 법기라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할 만큼 값진 보배이기 때문이었다.
“후후후…… 정말 뜻밖의 수확이로군!”
“그냥 같이 공격하고, 법기도 공유하기로 하죠!”
좌종의 제안에 세모눈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보물에 대한 탐욕은 두 사람의 마음속 공포마저 지웠다. 이들은 곧바로 비석 꼭대기에 있는 초우를 향해 거의 동시에 돌진했다.
“죽어라!”
그런데 그때, 저 먼 동쪽 하늘이 갑자기 희뿌옇게 변했다. 꼭 무서운 괴물이 거대한 눈을 뜨는 것처럼 가느다란 틈새가 점점 더 벌어지더니, 이윽고 그 안에서 빛이 번져 나왔다.
어두운 밤이 마침내 지나간 것이다.
그 어슴푸레한 빛 속에는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옅은 자색 기운, 바로 선천자기(先天紫氣)가 섞여 있었다.
초우에게 달려들던 좌종과 세모눈 사내는 순간적으로 먼 하늘의 자색 기운과 비석 위의 초우가 신비롭게 얽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둘은 멀리서 서로 감응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천 년의 비바람을 견뎌온 무자 비석에도 역시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타아앙!
막 비석에 달려든 순간, 살수들은 절대적인 강도와 탄성을 지닌 벽에 부딪친 것처럼 저 멀리 내동댕이쳐졌다. 두 사람은 그대로 넘어져서 한참 동안이나 일어서지 못했다.
이윽고 좌종과 세모눈 사내의 얼굴엔 두려움이 떠올랐다.
초우는 어느새 몸을 일으켜 비석 위에 꼿꼿이 서 있었는데, 하늘의 선천자기와 호응하고 있는 듯한 옅은 자색 기운이 초우의 몸에 휘감긴 채였다. 그 기운은 그를 비할 바 없이 위엄 넘치는 신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츠츠츠츠츠츳!
무려 16년 동안이나 초우의 혈도를 봉인하고 있던 자색 기운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더니, 바로 경락에 녹아들어 자취를 감추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마지막 240개째의 속박마저 전부 사라진 것이다!
초우의 몸 내부는 마치 폭발하는 화산, 혹은 노호한 파도 같았다. 곧 웅혼한 힘이 240개 혈을 타고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가공할 힘은 몸 밖으로 튀어나오자마자 이번엔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다시 체내로 돌아갔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은 초우의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엄청난 힘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잠시 뒤, 희끄무레하던 하늘이 좀 더 밝아지면서 은은히 퍼져 있던 자색 기운은 모두 사라졌다.
비석 꼭대기에 선 초우는 뭔가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내 그는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역시 신산(神山)이군. 태산이 내 복덩어리였어! 하하하하하!”
초우는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온 몸의 봉인이 이 태산에서 아침 햇살의 선천자기로 풀릴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쪽에 나동그라져 있던 좌종과 세모눈 사내는 이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참이었다. 두 사람은 비석 위에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초우를 보고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겁에 질려서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초우를 보던 둘의 시선이 곧 무자 비석 쪽으로 옮겨 갔다. 이 비석은 진시황이 세운 것이라는 설도 있었고, 한(漢) 무제(武帝)가 세운 거라는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어쨌든, 엄청난 힘으로 두 사람을 튕겨낸 무자 비석의 겉모습은 아까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살수들은 어딘가 모르게 기괴한 느낌이 드는 비석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초우에게 일어난 변화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십여 년 전에 이미 폐물이 돼 버린 놈이 갑자기 절정 고수가 될 리는 없다는 생각에, 굳이 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멀쩡하던 무자 비석이 갑자기 왜….”
좌종이 불안해하며 묻자 세모눈 사내도 초조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어쨌든 빨리 저 놈을 없앨 방법을 찾아야 하오!”
이 둘은 태산을 하룻밤 동안 봉쇄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이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막지 못할 만큼 수많은 관광객이 산을 오를 텐데, 그건 곧 이번 임무의 실패를 뜻했다.
물론 실패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이 북지초가에 전해진다면, 이 둘은 물론이고 배후에 있는 인물 역시 초 씨 가문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될 터였다.
좌종은 차갑게 초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품에서 권총을 꺼내 소음기를 장착했다. 새벽빛 아래 총신이 차갑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