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태산(泰山)의 정상
岱宗夫如何, 齊魯青未了.
造化鐘神秀, 陰陽割昏曉.
盪胸生層雲, 決眥入歸鳥.
會當凌絕頂, 一覽眾山小.
태산(泰山)이 어떠한가 했더니 제(齊), 노(魯)에 걸쳐 가없이 푸르네.
하늘의 조화로 신령함과 수려함이 가득하고, 산의 남북이 황혼과 새벽을 가르는구나.
겹겹이 쌓인 구름에 가슴이 씻기고, 흘긋 본 곳에선 새가 돌아간다.
필히 그 산정에 올라, 뭇 산의 작음을 굽어보리.
- 두보(杜甫), <망악(望嶽)>
용맥(龍脈)이 모이는 곳, 태산.
이곳은 하늘의 귀한 보물들을 품고 있는 곳이자 인걸(人傑)들을 수없이 배출한 곳이었으며, 또한 오악(*五嶽: 중국의 5대 명산)의 으뜸이며 제왕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기도 했다.
태산의 줄기는 천 리(里)에 걸쳐 이어져 있었으며, 그 기세 또한 웅장했다.
어느 깊은 밤.
달빛조차 없는 밤이었지만, 태산은 여전히 그 장엄한 기운을 사방으로 내뿜고 있었다. 그건 극히 짙고도 짙은 영기(靈氣)였다.
태산 제일봉에 있는 옥황정(玉皇頂).
옥황묘(玉皇廟) 앞의 관일정(觀日亭) 안에서 누군가가 고요히 동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밤빛이 먹물처럼 번지면서 그의 모습 역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있었다.
천지는 한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한때 세상에는 일생에 한 번은, 특히 젊은 시절에는 반드시 태산에 올라봐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와는 맞지 않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바야흐로 서기 2056년, 신기원(新紀元) 33년이기 때문이다.
사실 저 말이 시대에 뒤떨어진 말이든 아니든, 초우(楚羽)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초우는 이제 나이가 겨우 스무 살 남짓이었으며, 무슨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외모가 준수했으며 눈이 별처럼 반짝이는데다, 키도 훤칠했다. 또 언뜻 부드럽게 보이는 인상과 달리 강건한 기개까지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누구나 돌아볼 만한 멋진 남자였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초우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먼 곳을 응시하던 초우는 두 눈을 감고 몸속의 상태를 감지해보았다. 그러자 자신에 의해 이미 타통된 240개의 혈(穴) 안에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가공할 힘이 숨어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 힘은 이상한 자색 기운에 의해 봉인돼 있었다.
마치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인 바다처럼, 아무리 안쪽에서 파도를 일으켜 봐도 그 안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 자색 기운은 보일 듯 말 듯 아른거리는 노을 같기도 하다가, 한편으로는 심연에서 헤엄치는 잠룡처럼 초우의 몸속을 맴돌았다. 그러면서 그의 경맥을 덮고 모든 혈을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이건 극히 기이하고도 신기한 봉인이었다.
그러나 초우에게 있어서는 그저 빌어먹을 것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손으로 잡아서 찢어죽이고 싶은, 세상에 다시없을 뭣 같은 봉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초우는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어야 했다.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고수로서 명성을 드날리고, 만인의 존경과 숭배를 받는 인물이 돼 있어야 마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봉인으로 인해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다른 길을, 그저 성실하게 학교에 다니면서 세상의 이름 없는 작은 꽃으로 사는 길을 걸어야만 했다.
경맥이 봉인된 그날부터 오늘까지, 벌써 16년이나 되는 세월이 무심하게 지나 있었다.
그나마 초우가 활달한 성격과 긍정적인 태도의 소유자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뒤틀린 삶을 살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초우는 봉인을 풀기 위해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봤다. 그러나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고, 심지어 해결의 실마리조차 전혀 얻을 수 없었다.
‘내일이면 용성(龍城)에 가야 돼. 아마도 이번 생에 그녀를 다시 만나는 건 힘들겠지? 난 그녀에게 있어 고작 친한 친구일 뿐이니까.’
초우의 얼굴에 쓸쓸한 빛이 스쳤다.
‘만약 내가 이 빌어먹을 봉인에 당하지 않아 절세의 고수가 됐다면, 그녀는 날 다르게 봐줬을까?’
잠시 후 초우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누굴 탓하겠어. 그때 호기심이 동하지만 않았어도…….”
그러면서 초우는 자신의 미간을 슬쩍 문질렀다. 그의 미간은 겉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듯했지만, 사실 그 안에는 불가사의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 순간, 밤공기를 타고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 자기 처지를 아는 놈이구나.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미 늦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리였음에도 그 말은 초우의 귀에 또렷이 전달되었다.
초우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이었지만 초우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비록 힘은 봉인돼 있긴 했지만, 그의 두 눈은 일반적인 충혈경(衝穴境) 8단의 고수보다 날카롭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초우는 자신의 미간에 숨겨져 있는 눈을 뜰 경우엔 더 많은 사물을 볼 수도 있었다.
실제로 언젠가 초우는 그 눈을 이용해 임설몽(林雪梦)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코피를 쏟을 뻔한 것으로도 모자라 며칠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심지어 한동안은 임설몽의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예민한 그의 몸도 덩달아서 꽤나 고생한 탓에, 초우는 그 뒤로는 그 눈을 쉽사리 쓰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신비한 눈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저쪽에서 두 개의 신형이 마치 위험한 야수처럼 그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우는 두 눈을 살짝 감는 대신, 미간에 있는 눈을 떴다. 그리고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두 줄기의 빛을 발출해서 맞은편의 신형들을 비췄다.
그러자 상대의 몸속 경맥이 훤히 들여다보였으며, 그들의 타통된 혈도도 또렷하게 보였다.
‘한 놈은 충혈경 5단에, 다른 놈은 충혈경 6단……!’
초우는 상대의 경지가 생각보다 높은 것에 내심 놀랐다.
지금은 충혈경 3단까지 수련하기만 해도 강자로 일컬어지는 시대였다. 그 정도만 돼도 주먹으로 돌을 부수고 손날로 커다란 나무를 자르는 게 가능했다.
즉, 5단과 6단에 이른 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고수였다.
“당신들은 누구지?”
“널 죽일 사람.”
초우의 물음에 둘 중 앞쪽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대답했다. 그는 충혈경 5단이자, 바로 방금 전 초우를 조롱했던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 살 언저리로 보였고, 몸은 균형 잡혀 있었다. 그러나 얼굴 생김새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딱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충혈경 6단인 다른 한 사람은 세모꼴 눈을 한 마흔 살 정도의 남자로, 인상이 상당히 험상궂었다.
“그럼…… 살수(殺手)란 뜻이냐?”
초우는 뒤늦은 후회가 떠올라 눈을 찌푸렸다.
원래는 암중에서 그를 따라다니며 보호해주는 두 명의 보표(保鏢)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혼자 있고 싶은 마음에 그 둘을 따돌리고 몰래 나왔다.
가문의 뜻에 따르기 전, 한 번쯤은 내키는 대로 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이런 사달을 만들고야 말았다.
신기원 33년은 북지초가(北地楚家)가 세상에 나선 지 33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간 초 씨 가문은 적잖은 적을 상대해왔지만, 초우가 직접 적과 맞선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같은 연경대학(燕京大學) 친구들 중에도 초우의 진짜 신분을 아는 자는 몇 명 없었다.
게다가 만약 초우의 신분을 아는 사람이라 해도 그가 수련을 할 수 없는 폐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굳이 그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사실 초우는 힘이 봉인돼 있을 뿐, 실제로는 충혈경 8단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의 부모조차도 몰랐다.
‘나 같은 쓰레기를 상대로 이 정도의 고수를 두 명이나 보냈다고? 게다가, 날 죽이면 우리 가문이 절대 가만있지 않을 텐데.’
초 씨 가문은 화하(華夏)에서 ‘북방의 낭족(狼族)’으로 불렸다.
초 씨 가문의 자제들은 모두 기개가 넘쳤으며, 일단 누군가가 자신들을 건드릴 경우에는 필사의 각오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일족이 줄곧 지켜온 가풍이었다.
비록 내부에서는 작은 분쟁이 종종 일어날지언정, 외부의 적을 상대할 때는 똘똘 뭉쳐 싸웠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무서운 보복을 감수하고 가문의 적자(嫡子)를 죽이려 들 수 있는 세력은, 화하를 통틀어도 극히 드물었다.
“살수냐고? 뭐, 그런 셈 치자.”
초우의 질문에 충혈경 5단의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혹시 사람을 잘못 찾아온 거 아니냐?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쯧쯧, 사람을 잘못 찾아오다니, 그럴 리가 없지. 우리는 전문가다.”
초우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젓더니,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그에 대해 줄줄 읊기 시작했다.
“초우. 북지초가 칠가주(七家主) 초천북(楚天北)의 둘째 아들. 3세에 자신이 직접 세 개의 혈을 열고 백 근 바위를 들어 올리는 뛰어난 자질로 모두를 감탄하게 함. 6세에는 서른세 개의 혈을 열고 충혈경 1단에 들어서면서, 한 시대를 종횡할 천재라는 칭송과 함께 충혈경 대원만(大圓滿)에 다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받음. 그리고 같은 해 초 씨 가문 일족은 모두 합해 1226번의 암습을 받았는데, 그중 1128번이 바로 널 겨냥한 것이었지.”
초우는 코를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그렇게 많았다고? 정말 정확하게 계산한 거냐?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 같은데?”
“흥! 내가 그런 거짓말을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건 그저…….”
남자는 오만한 표정으로 말하다 말고 갑자기 킬킬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바로 그 해에 네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돌연 폐물이 돼 버렸지. 처음에는 다들 초가가 네 안전을 위해 실력을 감추게 한 것이리라 여겼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네놈이 진짜 쓰레기가 됐다는 사실이 확인된 거야. 아쉽지 않나?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쯤 나와 비슷한 경지가 돼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니, 어쩌면 날 넘어서서 6단, 7단의 고수가 됐을지도 모르지! 킬킬킬……. 그랬다면 이렇게 내 손에 죽지 않아도 됐을 텐데.”
그때,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모눈의 충혈경 6단 사내가 입을 열었다.
“좌종(左宗), 밤이 길면 꿈도 많은 법이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놈의 머리를 베시오.”
‘좌종? 여기에 ‘당(棠)’ 자 하나만 더 붙이면 청(淸) 말기 정치가의 이름과 같아지네.’
초우는 순간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클클클……. 어쨌든 세가의 공자 아닙니까. 저렇게 높은 신분의 인물을 죽이는 건 처음이라 흥분이 돼서 말입니다. 게다가, 대충이라도 상황 설명을 해 줘야 저 놈도 황천길을 가면서 우리를 탓하지 못할 것 아니겠습니까.”
좌종이 거들먹거리며 말했지만, 세모눈 사내는 여전히 냉정하게 그를 꾸짖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있기 마련이오.”
“뭐, 할 수 없죠.”
결국 좌종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초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네. 그럼…… 슬슬 시작해보자!”
좌종은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두 뼘 길이의 단도를 뽑아들었다.
“이건 정통 쿠크리 단도다. 아무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해주마.”
좌종은 싱긋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피를 탐하는 차가운 욕망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건 결코 가벼운 수다쟁이의 눈빛이 아니었다. 살인을 밥 먹듯 하는 냉혹한 살수의 눈빛이었다.
“잠깐, 잠깐만!”
초우가 다급히 소리치자 좌종이 조소 띤 얼굴로 물었다.
“왜, 살려 달라고 빌게? 아니면 배후를 알고 싶나? 그것도 아니면 돈으로 흥정할 생각인가? 다 소용없는 짓이니 그만둬라. 널 죽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고생해서 준비한 줄 아느냐?”
“당장 안 꺼지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벌써 번호까지 눌러놨어!”
초우가 휴대전화를 꺼내며 외치자, 좌종이 웃음을 터뜨렸다.
“신고? 하하하하하!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군. 너, 오늘 태산에 너 말고는 등산객이 하나도 없었던 이유를 알고 있나? 그리고, 혹시 전파 차단기라는 물건에 대해 들어봤는지 모르겠구나.”
“……그냥 농담해본 거야.”
초우는 이를 악물고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넣었다.
사실, 방금 전 초우는 진짜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 상대는 경찰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
그러나 안타깝지만 좌종이 말한 대로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 저들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게 확실히 거짓은 아닌 듯했다.
“내가 죽으면 우리 가문에서 분명 대대적인 조사에 나설 것이고, 내 죽음에 조금이라도 관련돼 있는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조사했다면, 우리 집안의 가풍도 잘 알고 있겠지?”
초우는 침착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물론 속으로는 상당히 긴장한 상태였지만, 위험에 직면해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품위를 유지하는 것 역시 세가의 자제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