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연경(燕京)으로
임약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자 임유가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뭐야, 오빠도 임설몽을 짝사랑하는 중이었어?”
“짝사랑은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임약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임설몽은 청년들 사이에서 거의 여신처럼 숭배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여인에게 감히 사사로운 감정을 품었다고 당당히 밝힐 수 있는 남자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임설몽은 충분히 훌륭한 여인이긴 했지만, 임약의 이상형은 아니었다.
“아무튼 재미있는 일이긴 해. 북지임가에서 제일 빛나는 보석이 하필 초우와 저렇게 사이가 좋을 거라고는, 다른 사람들은 아마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겠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중얼거리던 임약은 문득 동생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아야, 여기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 안 드니?”
“뭐가? 그냥 다른 곳보다 영기(靈氣)가 더 충만하다는 거 말고는 별 거 없는 거 같은데?”
“다시 잘 느껴봐. 너도 참……. 그렇게 자질도 뛰어나고, 특히 풍수에 있어서는 우리 집안에서 최고이면서 도대체 노력할 생각을 안 한다니까. 네가 조금만 애써주면 나도 짐을 좀 덜 수 있을 텐데…….”
“알았어, 알았다고. 남자가 돼서 매번 이 어린 동생한테 일 떠넘길 생각만 하고 말이야.”
장난스럽게 대꾸한 임유는 곧 진지해진 얼굴로 주위 공간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어? 싸움이 일어났잖아? 그런데…… 아주 잠깐 사이에 끝나버린 것 같아!”
“맞아. 우리가 여기 올라왔을 때 보이는 사람이라곤 초우 하나뿐이었지. 산 아래쪽에 있던 자들, 그리고 임설몽이 초우한테 했던 말들을 떠올려보면 대충 상황이 짐작가지 않니? 게다가 여기엔 아직도 화기(火器)의 냄새가 남아 있어. 누군가가 여기서 총까지 쐈던 거지!”
“오빠, 설마 천기술(天機術)을 쓴 거야? 고작 그런 놈 때문에 한 달에 한 번밖에 쓸 수 없는 천기술을 쓴 거냐고!”
임유가 깜짝 놀라 묻자 임약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초우는 내 생각보다 더 많은 비밀을 갖고 있는 것 같더구나. 내 천기술로도 그를 완전히 파악해내는 것에는 실패했거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임유의 눈이 더 동그래졌다.
“흠…… 아무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용성에 가봐야겠다. 어쨌든 그자하고는 친분을 맺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임약의 말이 막 끝났을 때, 계단 아래쪽에서부터 시끌시끌한 등산객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임약과 임유는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곧바로 옥황정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 * *
연경의 7월 하늘은 몹시 푸르렀다.
신기원에 들어선 뒤에도, 연경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라는 명성을 지키고 있었다.
날이 뜨거운 계절답게 아직 이른 아침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기온은 벌써 상당히 올라가 있었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옷은 대범해보일 만큼 짧았다.
연경의 어느 건물 안, 다기(茶器)들이 놓여 있는 탁자 앞에 놀랄 만큼 아름다운 차예사(茶藝師)가 앉아 있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그녀의 미모를 더 돋보이게 했으며, 푸른 꽃이 수놓인 치마 아래로는 희고 늘씬한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또한 고운 손으로 능숙하게 찻잎을 우려내는 그녀의 동작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질 정도였다.
탁자 맞은편에는 두 명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찻잔을 들어 차향을 맡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항간에 떠도는 말로는, 시장에서 구하는 금준미(金駿眉)는 열에 열이 전부 가짜라고 하더군요. 진짜 금준미는 천금을 들여도 구하기 힘들다고요. 하물며 이 정도의 극품이야 말할 것도 없겠죠. 이런 귀한 차는 돈이 있다고 다 마실 수 있는 게 아닌데, 사(謝) 형 덕분에 저 같은 촌놈이 아주 호강하는군요. 하하!”
청년의 미간엔 사나운 기운이 어려 있는데다, 몸에도 죽음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기운을 최대한 안으로 거두려 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피에 젖은 삶을 사는 자 특유의 기운이 은근히 풍겼다.
하지만 사(謝) 형이라 불린 잘생긴 남자, 그리고 맞은편의 미녀 차예사는 청년의 이런 험악한 기운에도 겁먹거나 하지 않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방(方) 형 마음에 든다면 나중에 반 근 보내주겠소. 더 보내주고 싶지만 사실 나도 갖고 있는 게 많지 않아서 말이오. 솔직히 얘기하자면, 나한테도 이 금준미는 한 근 남짓밖에 없다오.”
사 씨 성을 가진 남자의 말에 거친 기운의 청년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 방호(方虎), 비록 무슨 군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아끼는 것을 뺏을 만큼 불량한 자도 아닙니다. 이 귀한 차를 이렇게 한 번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인데, 여기서 더 욕심을 내는 건 안 될 말이지요.”
“겨우 차 하나뿐인데 뭘 그러시오. 소월(小月)?”
사 씨 남자가 가볍게 눈짓하자 탁자 맞은편의 차예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두지요.”
그런데 그때, 사 씨 남자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차를 우리던 소월은 방해를 받은 게 언짢은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 씨 남자는 그녀를 향해 미안한 듯 웃어 보이더니, 한쪽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휴대전화 너머로 어떤 소식을 들은 순간, 남자의 얼굴빛은 곧바로 달라졌다. 잘생긴 얼굴이 대번에 딱딱하게 굳더니, 건물 전체가 순식간에 차가운 기운에 휩싸였다.
탁자 뒤에 앉아 고개도 들지 않고 있던 소월은 그 변화를 눈치 챘는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잠시 뒤, 남자는 전화를 끊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왔다.
험악한 기운의 청년 방호는 방금 전의 통화에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 씨 남자의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바로 그 순간, 방호의 전화기도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탁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소월은 아예 몸을 일으켜 그대로 별실에 들어가 버렸다. 방호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전화를 받자마자 그의 얼굴도 사 씨 남자처럼 굳어졌다.
이내 전화를 끊은 방호는 사 씨 남자를 보며 말했다.
“그놈이 안 죽었다니?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사 씨 남자의 이름은 바로 사천우였다. 그 역시 신기원이 시작된 이래 큰 세력을 떨치고 있는 가문의 자제였다.
그 옆의 방호는 세가 출신은 아니었지만, 뛰어난 자질로 서른 살도 되기 전에 벌써 200개 혈을 타통하고 충혈경 6단 절정에 다다른 고수였다. 게다가 그는 산동(山東) 일대에서는 제법 유명한 조직의 수장이기도 했는데, 초우를 암살하려 들었던 그 두 살수 역시 실은 방호 조직의 장로였다.
방호는 사천우와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초우를 향한 암살 청부를 받아들였고, 좌종과 세모눈 남자도 자진해서 임무에 나섰다. 이렇다 할 배경도 없는 산수(散修)였던 그 둘은 경지를 높이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기가 극히 힘들었다. 때문에 이번 살인 행위로 큰돈을 벌어 편안한 생활을 해보려 했던 것이다.
사실, 청부를 받기 전 방호도 망설이긴 했다. 그러나 사천우는 세가의 자제이면서도 자신을 형제로 삼아줬으므로, 형제의 일은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 승낙하고 말았다.
거기다 방호의 조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사 씨 가문 같은 세가에게 평소에 잘 보여 둘 필요가 있었다. 수련에 필요한 자원들은 돈이 많다고 무조건 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백 년 묵은 약초가 필요할 경우 속세의 일반적인 시장에서는 구하기 힘든 게 당연했으니, 세가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북지초가가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방호는 사 씨 가문이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는 한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초 씨 가문의 세력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연경이나 산동까지는 그들의 손이 닿아 있지 않았다.
또한 두 장로의 경험과 실력이라면, 그깟 머저리 따위는 귀신조차 흉수(凶手)를 알아내지 못할 만큼 감쪽같이 처리해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해 했던 일을 완전히 실패해버린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던 사천우는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중얼거렸다.
“귀찮게 됐군!”
그러나 방호는 사천우와 달리 바닥에서부터 한 걸음씩 올라온 자였고, 손에 피가 묻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소식을 접하고도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좌종과 교덕(橋德)에게 이 일을 맡길 때, 저는 분명히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둘의 소식이 끊긴 걸로 봐서는 아마 죽은 게 확실하겠죠. 그럼 설사 저한테 의심의 화살이 돌아오더라도, 어차피 증인도 죽은 상황이니 그냥 모르는 일이라고 우기면 그만일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절대 사 형께는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방호는 사천우를 안심시켰으나, 사천우는 그의 말에도 한숨을 내쉬었다.
“뭘 모르는군. 초 씨 가문이 북방의 낭족이라는 이름을 거저 얻은 줄 아시오?”
“늑대가 아무리 대단해봤자 그저 산속이나 헤매는 짐승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이 연경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산동의 드넓은 땅은 더더욱 그자들이 활개 칠 수 있는 곳이 아니고요.”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방호는 슬쩍 사천우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이 일은, 여기서 멈추시겠습니까? 아니면…….”
사천우는 잠시 주저하더니 결국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일단은 잠시 멈추도록 하시오. 그 쓰레기가 명줄 하나는 길게 타고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어쨌든, 우선은 누가 그놈을 구한 건지부터 잘 알아봐야 할 거요. 감히 내 일을 망친 놈이라면 당연히 그 폐물과 함께 처리해버려야 하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저희 쪽 녀석들이 태산에서 임 씨 가문 남매를 봤다고 하던데, 혹시 그자들이 도운 걸까요? 북지임가는 아니고 중원에 있는 그 임 씨 가문 남매였답니다.”
“중원임가의 사람이었다고? 그럼 임약과 임유를 말하는 건가? 그자들이 태산에는 뭐 하러 간 거지? 설마 우리 일을 눈치 챈 건…….”
“아니오, 그냥 우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그자들이 산에 오른 것도 해가 뜬 다음이었다고 하니, 이번 일과는 상관없이 그냥 간 것이 확실한 셈이죠. 살행을 막기 위해 간 거였다면 그보다 서둘러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천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우 역시 방금 전 통화에서, 연경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우연히 초우를 발견했다는 자기 쪽 사람의 연락을 받은 게 전부였다. 그래서 암살이 실패했다는 것만 짐작할 뿐,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세력 또한 초 씨 가문과 마찬가지로 산동 땅에는 침투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튼 이번 일은 방 형이 나중에 잘 좀 조사해주시오. 뭔가 발견되면 바로 연락주고.”
사천우의 말에 방호는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사 형 말씀이 아니어도, 저 역시 두 장로를 잃은 마당이니 철저히 조사할 겁니다.”
말을 마친 방호는 바로 작별을 고하고는 자리를 떴다.
남겨진 사천우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소월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미동조차 않고 있었다.
소월이 곧 나지막이 물었다.
“후회하시지는 않나요?”
사천우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후회? 그럴 리가.”
“그래도 곧 후회하시게 될 거예요.”
소월은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서서 방으로 향하며 덧붙였다.
“연공할 생각이니 특별한 일이 없으면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아, 그리고 다음에는 살기가 그렇게 짙은 자한테 차를 대접하게 하지도 마시고요. 낭비일 뿐이니까.”
사천우는 얼굴을 찡그리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세상 물정도 하나 모르는 계집이 고고한 척하기는. 흥, 네 뒤의 그자만 아니었어도 너 따위는…….’
소월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사천우는 곧 휴대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사천우가 방호에게 살행을 멈추라고 한 것은 초우를 죽이는 일을 포기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방호가 이 일에 더 깊게 연루되게 하고 싶지 않아서일 뿐이었다. 사 씨 가문이 방호가 산동에 갖고 있는 세력을 필요로 하는 한, 더 이상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순 없었다.
‘그래도 초우 그놈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없애고야 말겠어!’
사천우는 감히 자신과 한 여인을 두고 싸우는 자는, 설령 천자라 해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자가 실력도 없는 쓰레기일 경우야 말해 뭣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