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뺀질이
두 사람이 땅에 쓰러지고 나자, 이제 남은 것은 노란 머리 청년뿐이었다. 그는 극도의 공포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초우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까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등신아, 거기 서!’라고 했던가?”
노란 머리 청년은 남은 한 손으로 반대쪽 손목의 부상 부위를 틀어쥔 채, 겁에 질려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초우를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그의 심정은 아마 태산에서 좌종이 느꼈던 것과 비슷하겠지만, 거기에 대한 반응은 확연히 달랐다.
좌종은 세모눈 교덕과 함께 방호의 조직에 가입하기 전 여러 해 동안 살수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고, 그 때문에 그 시절의 기질을 제법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을 앞에 두고 아주 태연한 얼굴을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꽤 침착함을 유지했다.
반면 이 노란 머리 청년은 사 씨 가문의 가복(家僕)으로, 어릴 때 꽤 괜찮은 자질을 보인 덕분에 사천우의 눈에 들어 특별히 그의 수족이 됐다.
그 뒤 청년은 얼마 동안 속세에서 살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했지만, 지금처럼 남의 도마 위에 올라간 물고기 신세가 된 적은 처음이었다.
“사, 살려주세요……. 저 진짜 죽기 싫어요. 제발, 제발요!”
청년은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심지어 그는 초우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자 울음까지 터뜨렸다.
“살려만 주시면 시키시는 일은 뭐든 다 할게요! 제발 죽이지 마세요!”
초우는 긴말 없이 바로 질문을 던졌다.
“사천우가 날 죽이라고 시킨 거냐?”
“예! 공자……, 아, 아니, 그 사천우라는 미친 머저리 놈이 시킨 겁니다! 그래서 저도 어쩔 수 없이…….”
초우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노란 머리 청년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세가 사람들의 수족이라고 해서 충성심 넘치는 자만 있는 건 아닌 듯했다. 주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자가 있는 만큼, 자신의 목숨을 위해 주인을 팔아넘기는 이런 자도 있기 마련인 것이다.
“그럼, 혹시 태산에 갔던 자는 누구 쪽의 사람인지 알아?”
초우는 이미 좌종에게서 많은 정보를 얻은 상태였지만, 노란 머리 청년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해보고 싶어서 물었다.
그리고 노란 머리 청년은 사천우의 심복답게 적잖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방, 방호! 방호 쪽 사람이었습니다. 방호는 산동 지역 흑호방의 방주(幫主)고요, 거기 간 것은 그자가 보낸 놈들이었습니다…….”
초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산에서 자신을 습격하도록 지시한 자는 역시나 사천우였고, 직접 태산에서 출수한 것은 흑호방의 두 장로인 좌종과 교덕이었다.
정보를 확인한 후 초우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노란 머리 청년은 깜짝 놀라 다시 애원하려고 했지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초우의 손에서 날아온 작은 돌멩이에 이마를 관통당하고 말았다.
당연하지만 단 한 명이라도 살려두는 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그랬다가는 초우가 힘을 되찾았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버리지 않겠는가.
뒤이어 초우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시체들을 한데 묻었다. 태산에서도 초우는 좌종과 교덕의 시체를 땅 아래 깊숙이 묻었으며, 혹시나 경찰견이 수색하더라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도록 추가적인 조치도 해둔 바 있었다.
초우가 시체 매장까지 마치고 그 자리를 막 떠나려는 순간, 갑자기 옆의 나무 꼭대기에서 쨍쨍한 소리가 들려왔다.
“살인멸구(殺人滅口)라……. 흥, 그래봤자 이 어르신께서 다 봤느니!”
콰콰쾅!
무서운 기세가 순식간에 초우의 몸에서 폭발하는가 싶더니, 곧 그의 일장(一掌)이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뻗어나갔다.
콰아앙!
나무의 윗부분이 초우의 공격에 의해 순식간에 재로 변해 흩어졌다.
포드닥포드닥!
손바닥만 한 크기의 거무스름한 참새 한 마리가 흩날리는 재 사이에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젠장! 이젠 살인멸구가 아니라 살조멸구(殺鳥滅口)까지 하려고?”
“…….”
참새의 외침에 초우는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새가 저렇게 똑똑해?’
초우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날지 못하는 초우로서는 절대 저 새를 잡을 수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도망가도록 놔두면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날 게 뻔했다.
이 세상의 자극(磁極) 봉인이 열리고 자기장이 변화한 뒤, 수많은 생물들은 영초(靈草)를 먹어서 스스로 몸의 혈도를 열고 강한 힘을 갖게 됐으며, 인간 못지않은 지혜도 얻었다.
물론 세계가 바뀌기 전에도 이미 수련이 가능했던 몇몇 생명체는 당연히 더 무서운 힘을 가지게 됐다. 저 참새도 아마 그런 존재들 중 하나인 듯했다.
초우는 하늘을 빙빙 선회하고 있는 참새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손 안의 돌멩이 두 개로 저 참새를 명중시킬 가능성을 계산해보기 시작했다.
“야! 어린놈이 뭐 그렇게 손이 맵냐? 하마터면 이 어르신께서 네놈 손에 맞아 죽을 뻔했잖아!”
‘저 뺀질이 놈, 왠지 좀 이상하네. 왜 기껏 피해놓고서 도망도 안 가고 저러고 있는 거지?’
초우는 참새가 계속 근처의 상공에서 왔다 갔다 하며 자신의 성질을 돋우는 게 문득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미간의 눈을 뜨고 참새를 관찰해보았다.
‘말도 안 돼!’
초우는 내심 깜짝 놀랐다. 믿기지 않게도 저 조그만 참새가 충혈경 7단의 경지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상대는 더 이상 평범한 동물이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7단이라면 적어도 소요(小妖)라고 불릴 만한 수준이었다.
초우가 잠시 놀란 틈에, 하늘을 날던 참새는 갑자기 한 줄기 번개처럼 그를 향해 급강하해왔다.
“이번엔 내 차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농담을 던지던 참새는 돌연 전혀 다른 생물이 된 것처럼 차갑게 외쳤다. 참새의 몸에서는 거대한 힘의 파동이 일었고, 그 여파에 주위의 나무들이 잇따라 폭발해버렸다.
참새의 작은 부리가 서늘한 살기를 반짝이며, 날카로운 칼끝처럼 초우의 눈을 향해 날아들었다. 만약 진짜로 저 부리에 눈이 찔린다면, 초우가 아니라 충혈경 9단의 고수라 해도 실명할 게 분명했다.
정말이지, 지독하게 교활하고 흉악한 참새였다.
다행히 참새보다 경지가 높은 초우는 이런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초우의 눈에는 참새의 빠른 움직임도 선명히 보였는데, 저 작은 새는 놀랍게도 일반적인 충혈경 8단 고수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를 내고 있었다. 또한 그 몸에서는 충혈경 7단의 무서운 힘이 제대로 터져 나오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초우는 더 이상 몸이 생각을 따라주지 않는 예전의 폐물이 아니었다.
초우는 자신을 향해 독하게 날아드는 참새를 향해 일장을 뻗었다.
퍼억!
후발선지(後發先至). 경지의 차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다.
쌔애액!
초우의 손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그의 일장에 맞은 참새의 몸은 마치 쏘아진 포탄처럼 저 아득히 날아갔다.
파닥파닥.
땅에 처박힌 참새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날개를 퍼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초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힘껏 가한 공격에 당하고도 즉사하지 않다니, 무슨 참새가 방어력이 이렇게 강하단 말인가?
“아이고, 아파죽겠네! 야, 이 나쁜 놈아! 너 진짜 너무 독한 거 아니냐?”
참새는 땅바닥에서 몸부림을 치면서도 입은 여전히 살아서 욕을 뱉어댔지만, 다음 순간 바로 얌전해졌다.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자신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작은 참새에 비하면 초우는 거대한 산이나 다름없었다.
“아유, 형님! 어르신! 잠깐만요, 잠깐만. 우리 사이에 뭘 또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러실까?”
참새는 자신에게 다가온 초우를 보고는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었고, 마치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강아지인 양 살갑게 알랑거렸다.
초우는 그런 참새를 그저 멍한 얼굴을 하고 바라볼 뿐이었다.
‘뭔 놈의 새가 이래?’
* * *
밤의 장막이 내려앉은 후에도, 연경은 여전히 영롱한 불빛 아래 오가는 차와 인파로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 하나인 이곳의 밤은 언제나 낮처럼 밝았다.
그러나 길을 걷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권태로 인한 허무함이 가득했다.
어느 시대든 꿈을 좇아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좋은 계급을 타고난 덕에 얻은 여유를 매일 밤 향락에 쏟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었다.
이 화려한 밤에, 사천우는 최고급 회원제 클럽에서 지인들과 모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천우의 가슴을 다시 한 번 죄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의 심복 다섯 명이 오늘 오전 연경을 나간 후 모두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들이 몰고 나갔던 차는 연경 근처의 어느 고속도로 진출로 부근에서 발견됐지만, 그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사천우의 가슴에는 충격에 이어 더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방호의 수하였던 두 장로가 죽었을 때는 사천우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죽은 자들은 자신의 사람, 말 그대로 심복이었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사천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사 씨 가문이 세상에 나선 후 사천우는 그 다섯 명을 데리고 연경에 터를 잡았다. 비록 주종관계이긴 했지만 이들 사이의 감정은 결코 얕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수하들이 갑자기 모두 행방불명이라니, 이건 누군가에게 당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돼 있는 세상에서 여태 아무 소식도 오지 않을 리 없었다.
연락할 틈조차 주지 않고 그들 다섯을 없앴다는 건, 상대가 최소한 충혈경 7단의 고수라는 사실을 뜻했다. 초우의 곁에는 정말로 엄청난 고수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사천우의 가슴에서 분노가 들끓더니, 곧 통한의 피가 흘렀다.
하지만 곧바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그의 가슴속에 서늘하게 퍼졌다. 초 씨 가문의 가풍을 생각하면 사천우도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사천우는 체면 때문에라도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그와 합석해 있는 자들은 다들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눈에 사천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챘다.
그중에는 저번에 차를 우리던 미녀 차예사(茶睿士) 소월도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사천우에 대한 멸시의 빛이 아주 은근하게 스쳐지나갔다.
소월의 집안 어른들이 그녀를 사천우에게 보내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는 평생 시선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와 함께 어울려 지내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소월은 천박하고, 난폭하며, 독선적이고 더없이 오만한 사천우 같은 사람을 그 누구보다도 싫어했다.
“천우 형, 무슨 일 있습니까?”
스물서너 살쯤 돼 보이는 청년이 나서서 물었다.
청년은 제법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눈가가 시커멓고 안색이 창백한 것이 밤마다 꽤나 힘을 많이 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주변인의 깍듯한 태도를 보니, 이 청년 역시 상당한 배경을 갖고 있는 자가 분명해보였다.
그러자 청년 외에 다른 사람들도 사천우를 바라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공자, 혹시 우리가 뭔가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말씀해보십시오.”
“맞습니다. 공자의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습니다.”
사천우는 연경에서 관청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사 씨 가문보다 힘 있는 몇몇 세가의 자제라도 그를 만나면 제법 예를 갖추어 대하곤 했다.
“하하! 별 거 아니니까, 다들 술이나 계속 드십시다.”
사천우는 자세한 얘기는 하고 싶지 않은 듯 빙긋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사천우가 임설몽을 원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의 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까지 속셈이 빤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를 원하는 진짜 이유를 이 사람들에게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임설몽 때문에 초우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다른 자들에게 더더욱 함부로 알릴 수가 없었다.
만약, 특별히 원한을 맺은 것도 아닌데 몇 번이나 다른 자의 목숨을 노리려 한 것이 알려진다면, 사천우는 세간으로부터 엄청난 지탄을 받을 게 분명했다. 조금 눈에 거슬린다고 다짜고짜 죽이려 드는 흉악무도한 자를 누가 상대해주겠는가. 사천우는 자신에 관해 그런 악평이 퍼지는 것은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사천우가 초우에게 손을 쓰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초 씨 가문에서 버림받았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초우처럼 아무 쓸모도 없는 머저리 하나쯤 마음대로 죽여도, 또 혹시라도 나중에 그게 사천우 자신이 시킨 짓이라는 게 밝혀진다 해도, 초 씨 가문이 분노는 할지언정 자신에게 대놓고 위해를 가하지는 못할 거라는 판단이 섰다. 북방의 낭족이 아무리 흉포하다 해도, 그들은 결코 다른 무리의 늑대를 쉽게 건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사천우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초우는 가문에서 버림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초 씨 가문에서는 그의 곁에 엄청난 고수까지 붙여주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