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날의 기억 (2)

9화. 그날의 기억 (2)

결국 초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충혈경 5단 수준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흑곰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뒷발로 일어선 곰의 키는 웬만한 탑보다도 컸고, 그 자체의 기세만으로도 초우의 가슴은 서늘해졌다.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던 고목들마저 녀석의 엄청난 힘 앞에서는 힘없이 부러질 정도였다.

초우는 흑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섯 살 아이가 어떻게 충혈경 5단인데다 가공할 만한 동물을 따돌릴 수 있겠는가.

위기의 순간, 초우는 어느 동굴을 발견하고는 주저 없이 그리로 들어가 몸을 피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흑곰은 동굴을 보더니 멀찍이 피해 돌아가 버렸다.

초우는 동굴 밖으로 나가면 다시 그 흑곰의 공격을 받게 될까 두려웠고, 또 한편으로는 동굴 안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예 더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동굴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아래를 향해 비스듬히 경사진 구조였다. 초우는 몇 시간을 걷고 나서야 겨우 동굴 바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굴 바닥은 웬만한 연무장보다도 넓었는데, 신기하게도 웬 밝은 빛이 공간 전체를 환히 밝혀주고 있었다. 그 빛은 바로 바닥 한가운데 절반쯤 박혀 있는 석마(*石磨: 맷돌) 크기의 금속 구슬에서 뿜어져 나온 것이었다.

투각(*透刻: 재료의 안쪽을 깎거나 파내어서 원하는 모양이나 무늬를 새기는 것)되어 구체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는 그 구슬의 표면에는 신비한 문양이 가득했다. 또한 이 동굴 속에 얼마나 오래 묻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구슬은 먼지 한 톨 묻지 않고 깨끗한데다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구슬에 어려 있는 상서로운 기운에, 아직 어린아이였던 초우 역시 그것이 엄청난 보물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걸어가서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 초우는 그만 놀라울 만큼 날카롭게 투각된 모서리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사실 그 시절의 초우는 상당히 강인한 육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도검으로는 그의 몸에 상처를 내기 어려웠다. 그런데 투각된 구슬 구멍의 가장자리에 그저 살짝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뜻밖에 손가락을 벤 것이다.

더 신기한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

구슬은 그 위에 묻은 초우의 피를 바로 빨아들여버리더니, 곧장 스스로 크기를 줄이기 시작했다.

결국 구슬은 소의 눈알만 한 크기까지 줄어들어서, 겉에 있는 구멍들마저 잘 보이지 않게 됐다. 다만 그 위에 나 있는 촘촘한 문양들은 여전히 보는 이에게 신비로움을 안기고 있었다.

“앗!”

초우가 그 금속 구슬을 집어 들고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 순간, 구슬은 갑자기 살아 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그의 미간으로 파고들었다.

겁에 질린 초우는 피가 날 때까지 자신의 미간을 손톱으로 마구 헤집었지만, 그래도 구슬을 꺼낼 수는 없었다.

뒤이어 그 작은 구슬은 누구도 볼 수 없는 눈으로 변해 초우의 미간에 단단히 자리를 잡아버렸다. 이후 숱한 시도를 계속했는데도 불구하고, 구슬은 다시는 절대로 밖으로 빠져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동굴에서의 그 사건 뒤 초우는 가문의 위성에 의해 위치가 파악되어 무사히 구출됐다. 그 때문에 화하의 고수들이 갑자기 무더기로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에, 한동안 초 씨 가문과 러시아 지도부 사이에서 다툼이 일기도 했다. 러시아 쪽에서 몇 번이나 엄중히 항의했지만 초 씨 가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서, 결국 사건이 흐지부지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물론 초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호되게 매를 맞았는데, 때린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다. 그때만 해도 다른 사람들은 초우를 너무 애지중지해서, 차마 그에게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초우가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의 미간에 자리를 잡은 ‘세입자’는 웬일로 그에게 약간의 대가를 치렀다. 일종의 방세인 셈이었는데, 그 빌어먹을 ‘세입자’가 방세를 치른 것은 그 한 번이 유일했다.

그 대가라는 것은 바로 초우의 머릿속에 저절로 새겨진 심법(心法)으로, 이름은 ‘시천심법(弑天心法)’이었다.

수련의 길에 있는 법문(法門)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공법들 중, 각종 자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공법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반면, 이 시천심법은 다른 공법들과 달리 수련 과정에서 어떤 추가적인 자원의 보조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천지간 영기(靈氣)만 갖고도 수련이 가능했다.

시천심법을 얻은 후 초우는 예전보다 적은 힘을 들이고도 더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49번째 혈까지 뚫었다. 다만 그때까지도 초우는 구슬에 관한 이야기는 가문에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49번째 혈을 뚫으면서 초우의 좋은 시절은 끝나버렸다.

49번째 혈이 열리는 순간, 그의 몸속에 있는 모든 경맥은 미간에서 발출된 신기한 힘에 의해 봉인됐다.

그렇게 해서 초우는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신동에서 한순간에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그 이후 멸시를 받으며 지낸 세월이 자그마치 16년이나 되었다.

하지만 16년 동안 초우는 시천심법을 꾸준히 수련해서 새로운 혈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무척이나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그 덕분에 경지는 계속해서 높아졌다.

봉인이 해제되기 전에도, 자신의 경지에 상응하는 힘을 실제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초우는 나머지 부분에서 상당히 뛰어났다.

그러나 힘이 봉쇄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집안사람 중 초우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초우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머리가 좋아지고 기억력이 발달했으며, 연경대학의 생물공학과에도 쉽게 진학했다. 물론 그때는 자신의 미간에 박힌 구슬의 정체가 대체 뭔지 연구해보고 싶은 마음에 그런 전공을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우의 연구는 모두 실패했다.

그 덕분에 초우는 그 구슬이 예사로운 물건이 아님을 확신하게 됐지만, 사실 그가 구슬을 특별하다고 여기게 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벌써 여러 해 동안 폐물 취급을 받으며 살던 어느 날, 초우는 전교 1등을 차지하고 모범상도 받은 적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몇 개의 전국대회에서 상을 휩쓸었다.

그때만은 초우도 가문에서 많은 칭찬을 받았는데, 그의 부친 초천북(楚天北) 역시 상당히 기뻐했다. 부친은 그날 술을 많이 마셨고, 취중에 초우가 여섯 살 때 겪은 그 일에 대해 또다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당시 집안사람들이 위성으로 초우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잠깐 동안 그의 존재가 위성 감지 장치에서 완전히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다들 그가 죽은 줄로만 알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신호는 곧 회복됐지만,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가문 사람들은 초우가 갑자기 능력을 잃게 된 것이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연해주에 갔을 때 어떤 신비롭고 강력한 자기장 같은 것의 영향을 받아, 체질이 바뀌었을 거라는 추측을 한 것이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초천북은 천재가 날개를 제대로 펴기도 전에 추락해버린 건, 아들을 잘 지키지 못한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했다.

부친의 말을 들은 초우는 당시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위성에서 자신의 신호가 사라졌던 시각은 동굴 속에서 금속 구슬이 자신의 미간에 파고든 바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 후 각종 첨단 과학기술로 아무리 검사를 해봐도 구슬의 존재를 밝히는데 실패했다. 이는 구슬이 첨단 장비의 뛰어난 기능까지 피할 만큼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는 뜻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초우는 그때부터 자신이 만난 것이 결코 불운이 아닌 행운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초우의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지난 세월 동안 초우에게 무척이나 따뜻한 가르침을 베풀었고, 그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깨닫고 어떤 심성과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도 알게 해주었다.

덕분에 초우는 활달하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이고, 성실하고,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 * *

택시는 매우 빠르게 달리고 있었지만 차 안은 편안했다. 운전기사는 뒷좌석의 손님이 잠든 듯하자, 친절하게도 음악소리를 줄여주었다.

연경의 경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도로 표지판이 지나간 순간, 기사는 그제야 자신의 택시를 따라오고 있는 듯 보이는 수상한 차를 발견했다.

도로 위에서는 적잖은 차량이 빠른 속도로 달리기 때문에,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미행 차량을 알아차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택시를 쫓고 있는 차는 추격의 끈을 놓칠까봐 두려웠는지 상당히 바짝 붙어서 따라오고 있었고, 그 때문에 기사도 늦게나마 미행 차량이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손님…….”

기사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초우는 번쩍 눈을 떴다.

초우의 눈동자는 새까만 색이었지만 별처럼 반짝였다. 눈꺼풀이 올라가는 순간 마치 그 안에서 광선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러십니까?”

초우가 기사의 표정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사실 기사는 방금 전 초우의 눈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20여 년 동안 택시를 몰았지만, 지금까지 이 손님처럼 눈이 밝게 빛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그게……. 아, 뒤쪽에서 웬 차 한 대가 계속 우리를 따라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사는 백미러에 비치는 초우를 보며 말했다. 선한 인상의 기사는 이렇게 훌륭해 보이는 청년에게 혹시라도 안 좋은 일이 생길까 걱정스러운 듯했다.

“그냥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잘못보신 거 아닙니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을 추격할 자들이 있을 리가요.”

피식 웃으며 묻는 초우를 향해 기사는 초조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분명 검은색 승합차가 계속 우릴 따라오고 있어요.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틀림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그대로 운전해주세요.”

“그럼…… 알겠습니다.”

손님이 끝까지 괜찮다고 우기자, 기사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택시는 곧 연경의 경계를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초우가 창밖을 바라보자, 오른쪽으로 아득하게 이어져 있는 뭇 산들과 하늘을 찌를 듯한 나무들, 때때로 창공을 오가는 새들이 보였다.

신기원 이후 천지간에 영기가 회복된 덕에 식물들의 성장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져서, 산이 있는 곳에는 거의 대부분 원시림 수준의 숲이 만들어져 있었다.

“기사님, 앞쪽 진출로에서 빠져서 저를 내려주신 다음에 기사님은 바로 연경으로 돌아가세요.”

“안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초우는 걱정스레 묻는 기사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오른쪽 출구로 내려가더니 길가에 멈춰 섰다.

초우는 차에서 내려 기사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혼자 저벅저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택시를 미행하던 승합차도 바로 진출로를 따라 내려왔다. 이를 본 기사는 초우에게 경고를 해주고 싶었지만, 그는 어느새 상당히 멀리까지 가버린 상태였다.

택시가 옆을 지나가는 순간, 확연히 속도가 줄어든 승합차 안의 사람들이 차창 너머로 기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에 기사는 깜짝 놀라 급히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한참을 달린 후, 기사는 승합차가 더 이상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내가 엄청난 일에 휘말렸던 것 같은데…….’

기사는 아까 태웠던 그 멋진 손님에 대해 떠올려보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모습을 도저히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내가 뭐에 씌었었나?”

기사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 이상한 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