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그날의 기억 (1)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두 사람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존재였다.
물론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 사이였고, 초우에 대한 임설몽의 믿음 또한 극히 견고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초우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한테서 주제도 모르고,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본다는 비웃음담긴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 적극적인 구애를 꺼려왔다.
그러다 오늘따라 그런 용기가 난 이유는, 당연히 초우 자신의 본래 실력을 회복했기 때문이었다.
임설몽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초우를 바라보았다.
이 고급스러운 차는 방음조차 완벽해서, 둘 사이에는 아주 조용한 공기만 흘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임설몽은 초우를 가만히 바라만 볼 뿐,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털이 삐죽삐죽 솟는 것 같은 느낌에 결국 초우가 먼저 대화를 시도해보려는 순간, 임설몽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나빴어. 계속 너를 방패막이로 삼으며 결국 곤란한 일까지 겪게 만들었으니까. 너, 어젯밤 태산에서 위험한 일을 겪은 거지? 어떻게 도망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깜짝 놀랐어. 나한테 정보를 준 사람도 널 구해줄 실력까진 없었거든. 하마터면 내가 거기까지 직접 달려갈 뻔했지.”
초우는 손을 내밀면 닿을 듯 가까이에 있는, 임설몽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빙긋 웃었다.
“무사하니까 됐잖아. 난 괜찮아.”
그러나 임설몽은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내가 가려고 했을 땐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고. 네가 꼼짝없이 죽을 거라는 생각에 난 진짜 울기까지 했어! 내 평생 두 번째로 흘린 눈물이었지. 그 두 번이 전부 다 너 때문에 흘린 눈물이었고! 첫 번째로 눈물을 흘렸던 건 우리가 여섯 살이었던 그때야.”
초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섯 살이었던 그해에 눈물을 흘린 사람이 어떻게 그녀뿐이겠는가.
“내가 몇 번이나 전화한 줄 알아? 근데 계속 불통이었어! 미친 듯이 전화하다가 겨우 연결이 돼서 네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제야 밖에 떨어져 있던 심장이 다시 몸속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어.”
“고마워…….”
초우에게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우린 제일 친한 친구이고, 최고의 동료잖아. 이 세상에서 부모님을 빼면 넌 나랑 가장 가까운 사람이야. 하지만…….”
“아, 알았어. 더 말 안 해도 돼. 이번엔 내가 경솔했어. 미안하다.”
초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기사와 연결돼 있는 차 안의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차 좀 세워주세요.”
초우의 말이 끝나자 차가 부드럽게 길가에 멈춰섰다.
“화났어?”
임설몽의 물음에 초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화를 내냐. 그냥 지금 온 인터넷이 우리 둘 열애설로 떠들썩할 테니까 조심하려고 그러는 거지. 용성에는 나 혼자 갈 테니까, 넌 그냥 여기 있어. 그쪽 사람들도 소식을 보고 깜짝 놀랐을 텐데, 너까지 직접 가면 아마 난 거기서 제대로 일도 못 하게 될 걸? 설아, 이번 소동은 그간 내가 너를 위해 방패막이를 해준 보답이라고 치고 이해해줘.”
단숨에 말을 마친 초우는 바로 차에서 내리더니 손을 흔들고 가버렸다.
초우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임설몽은 몇 번이나 그를 다시 부르려다 결국 포기하고, 인터폰으로 기사에게 말했다.
“우리도 그만 가요.”
차가 천천히 다시 출발하는 동안, 기사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흘러나왔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분명…….”
“됐어요. 이번 일은 더 언급하지 마세요. 아, 그리고 사천우 쪽에는 아저씨가 저 대신 경고해주세요. 만약 한 번만 더 초우를 노리면 저랑 생사일전(生死一戰)을 벌여야 할 거라고요!”
임설몽은 인터폰을 끄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곧 그녀의 눈가에 작은 반짝임이 스쳐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임설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임설몽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휴대전화 화면에 ‘당장 전화 받아’라는 문자가 떠오르더니, 동시에 같은 발신자의 이름으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임설몽은 한숨을 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인터넷 봤어? 이게 다 무슨 난리야! 이거, 다 그놈을 보호하려고 네가 수 쓴 거지? 그렇지?
수화기 너머에서 앳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설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상대방은 다시 그녀를 다그쳤다.
- 그래, 그놈이 오랫동안 네 주변에 들러붙으려는 파리들을 막아줬으니 네가 그런 행동을 한 것도 이해가 되기는 해. 하지만, 난 다른 놈이 네 손을 잡는 건 절대 용납 못해. 그 상대가 누구든, 그게 설사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라도 싫다고!
상대의 말에 임설몽은 갑자기 성난 고양이처럼 독기 어린 눈으로 전화기에 대고 소리쳤다.
“누구더러 쓰레기래? 쓰레기는 너지! 너, 갑자기 머리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거야? 내가 누구랑 손을 잡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그깟 약혼 좀 했다고 네가 내 남자라고 착각하지 마! 제항(齊恒), 똑똑히 들어라. 네가 아무리 대단한 문파의 적전제자(嫡傳弟子)라도 난 신경도 안 쓰거든? 다신 이딴 전화 하지 마!”
말을 마치자마자 임설몽은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그러자 바로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그놈, 죽여 버릴 거야.」
임설몽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도 같이 죽을 거야!’라는 문자로 되받아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상대 쪽에서도 한참 동안이나 대답이 없다가, 겨우 답장이 왔다.
「봐주는 건 이번뿐이야.」
임설몽의 그 아름다운 얼굴에 조소가 떠오르나 싶더니, 이내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다.
콰지직!
임설몽은 손에 힘을 주어 휴대전화를 그대로 부숴버렸다. 그리고 등받이에 몸을 던지고 지친 얼굴로 눈을 감았다.
* * *
초우는 혼자 길을 걸으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래도 임설몽은 정신적 압박을 적잖이 받고 있는 듯했다.
원래 초우는 자신의 회복 소식을 알려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방금 전 임설몽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마저도 짐이 될 것 같았다.
‘대체 뭐가 널 그렇게 힘들게 하고 있는 거지? 널 힘들게 하는 놈은 그게 누구든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초우의 표정은 심각했다.
아까 임설몽의 손을 잡았던 순간, 초우는 그녀 역시 자신과 같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 사실은 예전부터 이미 알고 있긴 했다. 아마 초우가 조금만 용기를 냈더라면, 그녀는 초우와 함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곁에 머물러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초우는 계속 움츠려 있기만 하다가 오늘 드디어 적극적으로 행동을 해봤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물러서버렸다. 게다가 초우가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임설몽은 그의 행동을 나무라는 듯한 말까지 했다.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임설몽이 초우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의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임설몽은 초우를 보호하려던 게 틀림없었다. 초우가 본인의 일에 몰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사정에 초우가 연루되지 않도록 말이다.
북지임가는 결코 만만한 가문이 아니었고, 임설몽은 더더욱 쉽게 괴롭힐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환상 속 얼음 여신 따위가 아니라 암호랑이 그 자체로, 그녀와 그녀가 아끼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불의를 가진 자든 모두 찢어버릴 수 있는 진짜 호랑이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세가 자제들의 연회 때마다 초우를 향한 비바람을 막아 주었다. 감히 초우를 비웃는 자가 있다면, 그자가 울며 애원할 때까지 응징을 해주었었다.
임설몽의 행동은 언제나 초우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초우 역시 임설몽이 지금 예사롭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 설아의 사문이랑 관련돼 있는 일이겠지. 걱정 마. 이번에는, 내가 널 지켜줄 테니까!’
깊이 숨을 들이마신 초우는 곧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일단 연경 밖으로 가주세요.”
운전기사는 흠칫 놀라더니 백미러로 초우를 바라보았다. 방금 탄 손님의 옷은 흔한 명품 로고 같은 것이 없는데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였다. 손님 자체도 굉장히 우아한 분위기가 있었으므로, 일부러 시비를 걸러 온 자 같지는 않았다.
“손님, 연경 밖으로 나가라고요?”
기사의 말투에 강한 의혹이 배어있는 걸 느끼고, 초우는 아직 중천에 다다르지도 않은 차창 밖 태양을 보며 되물었다.
“아직 오전인데 벌써 퇴근하실 예정이었던 겁니까? 아니면 그렇게 멀리 가시고 싶지는 않은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제 말씀은, 완전히 연경 밖으로 빠져나가려면 적어도 두 시간은 달려야 하니 정확한 목적지를 말씀해달라는 뜻이었습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두 시간이나 달리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남쪽으로 갈까요, 북쪽으로 갈까요?”
“어디로 가시든 상관없는데……. 연경을 벗어나기 힘들다면, 그냥 어디든 엄청 외진 곳으로 가셔도 괜찮고요.”
“…….”
초우의 말에 기사의 얼굴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졌다.
‘멀끔하게 생긴 걸 보면 강도는 아닌 것 같긴 한데.’
연경의 치안은 나쁜 편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무인이 수두룩한 시대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알겠는가. 어쩌면 상대는 택시기사만 노리고 강도짓을 하기 좋아하는 특이한 귀공자일지도 몰랐다.
초우는 긴장한 기사를 보고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래서 두둑한 현금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요금은 선불로 드리도록 하죠. 연경 밖으로 가주시면 이 돈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기사는 두말없이 돈을 받아 챙기고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초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급화된 택시의 좌석에 깊게 몸을 파묻고 잠시 눈을 붙였다.
운명이 다시 바뀐 오늘, 초우의 기억은 16년 전 그의 운명이 첫 전환점을 맞은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고작 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 어린 나이에 충혈경 1단에 들어선 초우의 천부적인 자질은 바로 북지초가 전체를 들썩이게 했고, 덕분에 초우는 집안에서 엄청나게 떠받들어지며 생활하게 됐다. 현명한 어머니가 안 계셨다면, 그는 안하무인의 악동이 돼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하무인까지는 아니라도 초우가 장난을 좋아하는 악동이었던 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 시절 초우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무척이나 활달하고 거침없는 성격이었고, 늘 혼자 산속 깊은 곳을 뛰어다니기 좋아했다. 때로는 며칠씩이나 자취를 감추는 경우도 있었다.
초 씨 가문은 비록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긴 했지만, 여전히 북쪽 지방 깊은 산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가 그와 같은 행동을 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에, 집안 어른들 역시 초우를 자유롭게 풀어두었다. 아이의 성장을 위해서는 혼자 어려움에 맞서 늑대처럼 생존하는 법을 배우게 해야 했다. 그래야 나중에 이 험한 세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초우의 경우는 좀 특이했다. 그는 뛰어난 자질로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으므로, 그가 산 깊숙이 들어갈 때면 가문의 몇몇 고수가 보호를 위해 암중에 그를 따랐다. 또한 초우의 몸에는 위급 시 바로 발견할 수 있도록 위치 추적기도 달려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우는 우연히 발견한 동북호랑이를 쫓아서 가문의 영역을 벗어난 곳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보호를 맡고 있던 고수들이 방심하고 있다가 그를 놓친 틈을 타서, 초우는 호랑이를 따라 단숨에 연해주 지역에 들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호랑이를 잡는데 성공했지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대담하고 활달한 성격이라 해도 이제 겨우 여섯 살 난 어린아이였다. 처음 들어와 본 원시림에서 길까지 잃은 상황에서는 초우도 당연히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특히 신기원의 세계는 과거와는 전혀 달랐다. 깊은 숲 속에는 얼마나 오랜 세월 살아왔는지도 알 수 없는 강한 생명체들이 많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