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적구의 후예
오동이 떠나자 영준은 잠시 얼이 빠졌다. 몸을 기댈 수 있는 커다란 산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으며 아무런 쓸모도 없었다.
오동이 떠난 뒤 초우 일행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동 장로와 육 장로마저 그들에게 다가와 겸연쩍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태청을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들이 어찌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두 노인은 비록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초 씨 가문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선 시커먼 속내가 엿보였다.
천만다행으로 그들은 아직은 초 씨 가문에게 정면으로 덤벼들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태청문파의 눈 밖에 나기라도 했으면, 많은 은둔가문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북방의 낭족이라더니, 초가는 늑대가 아니라 여우였다. 그것도 간악하고 교활한 여우 말이다.
초 씨 가문은 태청 같은 큰 뒷배가 있음에도 지금까지 그 사실을 전혀 떠벌리지 않았다. 오늘 초우가 모욕을 당하는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초천웅도 절대 그 비밀을 먼저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어쩐지 그렇게 당당하게 사가를 연경성에서 몰아낸다 했더니…….’
동 장로와 육 장로는 사 씨 가문에게 동정심마저 들었다. 이런 가문과 척을 지게 되다니……. 동시에 그들은 가문으로 돌아가면 초 씨 가문과는 절대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원래 파티는 영 씨 가문이 주최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초 씨 가문의 독무대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영청산을 비롯한 영 씨 가문 고위층의 얼굴에는 한줌의 불편한 기색도 없었다. 영가는 단시간에 지금의 위치에 올랐지만, 그 자리까지 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다만 영준, 이 불쌍한 젊은이는 그런 자리에 답답함을 느끼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물론 금세 파티의 중심이 되어버린 초소소와 초우를 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도 그 이유에 포함되었다.
* * *
한편 초우는 거처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초천웅과 대화를 나누었다.
“웅 숙부, 여우 신선 동굴에 들어가는 일에는 우리 초가도 참가해야 합니다. 그리고 참가하는 사람은…….”
그 말에 초천웅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초우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세요, 제가 생각해둔 방법이 있습니다.”
초우는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 * *
그 시간, 오동은 호화로운 별장 안에 있었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전화를 내려놓은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아, 좋다고. 너희 모두 동굴로 초대하지! 거기서 확실히 접대해주마!”
* * *
집에 도착한 초우는 뺀질이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물론 뺀질이는 워낙 신출귀몰해서 휙 사라졌다가도 며칠 뒤면 돌아왔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았다.
초우는 소월이 지내는 별채로 넘어갔다. 그러곤 문을 두드리기 위해 막 손을 올린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달빛 아래, 도자기 같은 예쁜 얼굴이 초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소월은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편한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서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무슨 용무라도 있나요?”
그녀는 눈앞에 갑자기 초우가 나타나자 조금 멍한 얼굴로 물었다.
“너의 그 병을 해결해주려고.”
초우가 말했다. 소월은 깜짝 놀랐지만, 눈 속에서 기쁜 감정이 피어나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다.
“정말로요?”
“거짓말이야. 이만 간다.”
초우는 짐짓 돌아서 그대로 가버리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안 돼요. 못 가요!”
소월은 화를 내며 초우를 불러 세웠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실없이…… 그런 식으로 저를 놀리면 재미있나요?”
“내가 뭘?”
초우는 속으로 웃음을 꾹 참으며 소월을 보았다.
이 조그마한 여자아이는 분명히 많은 기대를 가지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최대한 차가운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공자,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
소월은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한 채, 작은 소리로 애원했다. 초우가 그녀와 만난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이건 그녀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공손한 호칭이었다.
초우는 속으로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고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뭐 별 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 공자라는 말은 그만둬. 오빠라고 부르는 건 어때?”
소월의 얼굴이 굳어졌다. 초우가 자신을 계속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자 초우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 들어가자.”
“…….”
소월은 초우를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살짝 토라진 것처럼 보였다.
“저쪽으로.”
초우가 침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월은 순간 경악한 표정으로 초우를 보았지만, 초우는 변함없이 담담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병을 고치고 싶은 거 아니야?”
소월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앞에 있는 나쁜 놈에게 뭐라고 욕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가 떠날까봐 두려워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소월과 뺀질이는 초우의 능력을 아주 잘 간파하고 있었다.
초천강과 초천승, 이 두 사람은 초우 덕분에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한 단계 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이 일이 외부에 알려진다면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알려진다 해도 사람들은 이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할 것이다.
소월은 입을 꾹 닫고 침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초우가 말했다.
“누워봐.”
소월은 또다시 긴장으로 흔들리는 눈빛을 초우에게 보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말에 따라 침대 위에 누웠다. 곧 그녀의 숨소리가 조금 거칠어지면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초우의 머릿속에는 다섯 글자로 된 말이 떠올랐다.
‘차려진 밥상!’
그러나 초우는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물리쳤다. 이미 시간이 꽤나 지났기 때문에,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줘야 할 때가 되었다.
초우는 소월이 어떤 신분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과거가 험난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정황으로 보아, 그녀의 뒤에 있는 누군가가 손을 쓰지 않았기에 초가가 그렇게 쉽게 사가를 연경에서 쫒아낼 수 있었다는 것도 확실해 보였다. 소월은 그 일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초우가 그녀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앞으로 초우가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몸이 회복됐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에, 소월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녀를 돌려보내야 했다. 시녀가 되라는 말도 진심이 아니라 그저 농담에 불과했다.
소월의 몸에 있는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 몸의 경맥혈도는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는 몰라도, 수련할 때 잘못된 공법을 사용해서 경맥을 반대로 돌려버린 모양이었다.
소월이 계속해서 뚫으려고 힘을 가했던 혈도는 가슴 부위에 있었다. 장시간에 걸친 수련으로 인해 혈도가 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지만, 그곳에는 상당한 힘이 고여 있었다. 한마디로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한 번이라도 더 힘을 가한다면, 십중팔구 힘이 폭발해서 그녀를 한 줌 먼지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의 몸은 아주 조그마한 힘에도 폭발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소월은 지금 자신의 몸 상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수련을 그만두고 세상 밖으로 나와 심신 수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두 번째로 뚫어야 하는 혈도는 발바닥에 있었다.
초우는 자신이 익힌 시천심법, 그리고 미간에 박혀 있는 제3의 눈으로 상대가 어떤 공법을 익히고 있든 그 다음으로 뚫어야 하는 혈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보통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저 전해져 내려오는 공법에 따라 오랜 세월 조금씩 수련을 하는 것이다.
“네 경맥혈도는 다른 사람하고 달라.”
초우가 침대에 누워 있는 소월에게 말했다.
“전 사람이 아니에요.”
소월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
그녀의 말에 초우는 얼굴을 굳히며 소월을 바라보았다.
이내 소월은 초우를 바라보지 않은 채 덧붙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전히 사람은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적구 사람입니다.”
그러자 초우는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적구? 너는…….”
“저는 호족(狐族), 사실대로 말하자면 호족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지요.”
소월이 담담한 말투로 설명했다.
“어쩐지 이렇게 아름답더라니.”
초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그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어딘가 범상치 않은 여자아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유명한 적구국 출신이라니!
“그럼 너를 호소월(狐小月)이라 불러야 하나?”
초우는 소월을 보며 말했다.
소월은 그 말에 조금 낙담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저는 인간과 여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래서 호 씨 성을 가질 자격이 없지요. 만약…….”
“만약?”
“만약 신선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또 모르겠지만요. 그렇게 되면 성씨를 붙일 자격이 생겨요.”
“신선이라…… 쉽지 않네.”
초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째서 네 몸이 이런 상태인지 이제야 알겠네. 지금의 적구국은 인구의 절반 정도가 인간이지? 네가 수련한 방법도 인간 쪽에서 만든 공법인 거고. 맞지?”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죠?”
소월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적구국에는 온전히 순수한 인간은 없긴 하지만, 확실히 제가 수련한 건 인간이 만들어낸 공법이 맞아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공법으로 수련해도 괜찮았는데, 어째서 저만 이렇죠?”
“너의 혈맥이 호족에 조금 더 가깝기 때문이 아닐까?”
초우가 상냥하게 답해주자 소월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수려한 얼굴이 의문으로 가득 찼다.
이내 소월이 초우에게 되물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만약 혈맥이 호족에 가깝다면 저의 재능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하지만 전…….”
“내 말이 맞는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너의 경맥이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건 분명해.”
초우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너의 재능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초우가 단언하듯 덧붙였다.
“몸의 문제만 해결되면 넌 아마도 엄청난 능력을 가지게 될 거야.”
초우가 가진 제3의 눈에는 현재 소월이 다다른 경지의 수준이 보였다. 뜻밖에도 그녀는 충혈경 7단 수준의 경지에 있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것도 몸에 있는 혈도의 문제 때문이었다.
“정말 고칠 수 있는 건가요?”
소월이 물었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걱정 마.”
초우가 말했다.
“하지만 네 도움이 필요해. 잠시 뒤, 내가 너에게 힘을 혈도로 흘려보내라 고 말할 거야. 그때는 무서워하지 말고 내가 말한 대로 해야 해.”
“네, 알겠어요.”
소월이 대답하자 초우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소월의 몸이 긴장으로 살짝 굳어졌고,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하지만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잠시 후, 소월은 손목 쪽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몸 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녀가 생전 겪어보지 못한 느낌이었기 때문에, 소월은 참지 못하고 조그맣게 신음을 흘렸다. 그녀는 재빨리 입을 닫고 소리를 참아보았지만, 얼굴은 창피함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정신을 집중해.”
초우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지금 그가 하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소월의 상태는 그만큼 특이하고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