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청해오가
초우에게 여러 사람을 소개해주던 초천웅은 곧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더니 어디론가 끌려가버렸다. 그들 말로는 무언가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다.
초우도 그 참에 잠시 쉴 곳을 찾아 앉았다. 그리고 말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초소소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이런 파티엔 자주 오는 편이야?”
초우가 묻자, 초소소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런 건 매년 엄청 많이 열려. 난 어려서부터 아빠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거든. 너무 많이 와서 이제는 별로 재미도 없어. 차라리 나가서 노는 게 훨씬 좋아.”
그러자 초우가 갑자기 물었다.
“소소, 넌 뭔가 꿈이 있어?”
“꿈?”
초소소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잠겼다. 이런 문제는 아직 어린 그녀에게는 너무나 먼 주제였다.
“뭐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건 많지만, 전부 아직 어린 소녀의 망상이지. 오빠는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초소소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초우를 보았다. 그러자 초우가 뭔가 대답하려는 순간, 파티장의 한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영 도련님이 오셨어!”
“영 도련님이다!”
“영 도련님 옆에 계신 분은 누구지? 엄청 잘생겼다!”
“영 씨 가문에서 초청한 귀빈이라던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많은 소녀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초우는 그녀들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기다가, 얼굴은 곱상하지만 어딘가 음울해 보이는 젊은이, 그리고 그와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는 멀쑥하고 호리호리한 미청년이 방에서 나오는 걸 보았다.
“저기 저 여자아이처럼 보이는 사람이 영 씨 가문의 도련님인 영준이야. 그 옆에 같이 있는 사람은 나도 모르겠네. 한 번도 본 적 없어.”
두 청년을 본 초소소가 작은 목소리로 초우에게 말했다. 초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영준과 그 청년도 초우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아마도 전음으로 대화를 하고 있었던 듯, 동시에 초우 쪽으로 다가왔다. 영준과 그 청년이 움직이자, 많은 사람이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방금 전 초소소에게 한방 먹었던 청년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정작 그 둘은 초우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초소소만을 바라보며 다가왔다.
초소소는 두 청년을 보며 눈썹을 찌푸리더니, 조금 성가시다는 듯한 투로 말했다.
“뭐예요? 이런 미녀는 처음 보나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영준은 용성에서 내놓으라 하는 대가문의 도련님이었다. 그러나 초소소에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금 전 청년이 영준에게 말했던 것처럼, 아무리 세상에 널리 알려진 힘 있는 가문이라 해도 은둔가문과의 격차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초소소의 말에 영준이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그의 옆에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네가 초소소냐?”
초소소는 그 청년을 한번 슥 보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곁눈질로 아버지 초천웅을 찾기 시작했다. 그 청년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따라와라. 그리고 내 시녀가 되라.”
그 청년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담담히 말했다.
“너 미쳤지? 머리에 총이라도 맞았냐?”
초소소가 차갑게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뭐하는 놈인데?”
초소소의 말에 영준이 크게 호통을 쳤다.
“초소소, 그 이상 말하지 마! 당장 엎드려서 용서를 구해라. 오 공자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나 말하는 거야?”
영준은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오 공자님의 눈에 띄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 줄이나 알아?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행운이 아니라고!”
그러자 청년이 손을 저으며 영준의 말을 가로막더니, 초소소를 보며 별 감정 없는 투로 말했다.
“너 같은 어린 계집이 한 말이니 더 이상 뭐라고 하진 않으마. 하지만 너희 초가가 전부 덤빈다 해도 어쩌지 못하는 게 바로 나다. 그러니 나를 따라와라. 그러면 극락을 보여주지.
그리고 너도 곧 알게 될 거다. 초가가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걸.”
초소소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쳇, 저런 허풍쯤이야 누가 못 떨겠어.”
“하하, 허풍이라고?”
청년이 실소를 하곤 갑자기 초우를 향해 말했다.
“네가 초우지? 그 폐물 놈.”
초소소는 그 말에 폭발해서, 청년의 뺨을 때리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지금 누구보고 폐물이라는 거야?”
“그만!”
영준은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멈추려 했다.
그 순간, 청년의 몸에서 흉흉한 기운이 폭발하듯 터지자, 초소소는 그 자리에서 몸이 굳은 듯 멈춰버렸다. 주위에서 그 광경을 황망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각자 그 청년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그때, 초우가 몸을 일으켜서 초소소의 앞을 가로막았다.
초우는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이전에 만난 적도 없고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에 느닷없이 다가와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모욕하다니, 이 청년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그만두게!”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초천웅이었다. 그는 소란이 일어난 것을 보고 다가와서 청년, 그리고 초소소와 초우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신은 누구요? 내 딸에게 무슨 짓을 하려 한 거지?”
초천웅은 어두운 표정으로 청년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초천웅은 온화하고 침착한 성격이었고, 모든 일에 진중하게 임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서서 이런 일을 당할 만큼 미련한 사람은 아니었다. 청년의 몸에서 분명한 힘의 파동이 느껴졌지만, 초천웅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그와 대치했다.
“내가 누군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가문에 민폐를 끼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청년은 여전히 강대한 기운을 내뿜으며 초천웅에게 말했다. 그는 마치 아랫사람을 내려다보는 듯 사람을 조롱하는 시선으로 초천웅을 보고 있었다.
그런 청년을 보고 옆에서 영준이 어딘가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눈앞에 태산을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식한 자들 같으니. 오동(吳冬) 공자님도 알아보지 못하면서 은둔가문에 몸담고 있는 자라 할 수 있겠어?”
영준은 조금 기고만장해 있었다. 불과 얼마 전 오동이 그에게 은둔가문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희열과 쾌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너희는 그 대단한 은둔가문이잖아. 그러니 늘 세상의 다른 가문들을 무시했겠지? 하하, 너희 같은 은둔가문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영준의 말에 초천웅의 눈썹이 찌푸려지더니 얼굴마저 살짝 굳었다.
“오동? 청해오가(靑海吳家) 말인가?”
청해오가……. 이름과는 달리 그들은 가문이 아닌 고대의 문파였다. 이 문파에는 특이한 규칙이 하나 있었는데, 입문하려면 성을 오 씨로 바꿔야 했다.
오동이 담담한 얼굴로 초천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겠나?”
초천웅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그는 오동의 신분을 알고도 느긋한 말투로 답했다.
“당신이 청해오가의 제자라 해도, 그쪽 가문과 우리 초가는 그 어떤 원한관계도 없을 텐데, 어찌 그리 우리 사람을 모욕하는 겁니까?”
그러자 영준이 말했다.
“모욕? 초 사장님, 농담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이건 당신의 딸에게도 축복과 같은 일입니다. 초가에도 마찬가지고요. 삼 대가 덕을 쌓아야 간신히 받을 수 있는 게 바로 오 공자님의 호의입니다. 오소소라고 개명할 수만 있다면, 딸이 어떤 신분이 될 수 있는지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영준은 살짝 아니꼬운 말투로 덧붙였다.
“만약 오 공자님이 저에게 그런 기회를 주셨다면 당장에 엎드려 절을 하며 기쁘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제 능력이 부족하여 이 분의 눈에 들지 못한 것이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청해오가는 많은 은둔가문이 생기기도 전에 만들어진 고대의 문파였다. 그러니 그런 문파의 제자로 몸담고 있는 자의 눈에 들어서 시녀가 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었다. 한낱 시녀라는 직책에 불과하다 해도, 엄청난 신분상승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은둔가문의 장로라 해도 청해오가를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초가가 북방의 낭족이라면, 청해오가는 서북의 호랑이였다.
오동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초천웅 부녀를 보고 있었다. 그는 초우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사실 오동의 신분을 감안하면, 초우가 자신을 가로막은 것에 대해 그저 말 한마디로 끝낸 것으로 그의 체면을 세워준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파티장에서 그 광경을 흥미진진하게 보던 은둔가문 자제들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특히 동 장로와 육 장로 같은 사람들은 청해오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청해오가에 대해 모르던 사람들도 주위의 설명을 듣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편 초소소는 천방지축 말괄량이였지만, 멍청한 아이는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섣불리 행동해서 가문에 누를 끼칠 순 없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초천웅이 웃음을 보였다.
“청해오가, 오래된 문파지요. 확실히 강한 가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문파라 해도 사람을 이런 식으로 강제로 데려가는 법이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군요.”
“정말이지…….”
영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조롱 섞인 말을 하려 했다.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차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그 눈빛은 바로 영준의 아버지, 즉 용성 영가의 가주 영청산(冷靑山)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영청산의 눈빛에 영준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초천웅은 영준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오동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태청(太淸)문파에서도 과거 초가에서 제자를 들이려 할 때, 저희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요청했지요.”
초천웅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태청 문파? 그게 뭐야?”
“그런 문파는 들어본 적 없는데…….”
“하하하, 무슨 태상노군이 만든 가문인가? 웃기는 농담이군.”
하지만 태청이라는 단어를 듣자 오동은 살짝 몸을 떨었다. 그는 그 말의 진의 여부를 파악하겠다는 듯, 믿지 못한다는 눈빛으로 초천웅을 노려보았다.
“의문을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런 일을 어찌 거짓으로 말하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초가에 큰 누를 끼치는 일이 될 텐데요.”
초천웅은 오동의 시선을 여유 있게 받아넘기며 말을 이었다.
“공자, 우리 초가는 청해오가를 존중합니다. 그러니 가문 사이에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행동은 그만두시지요.”
초천웅은 마치 양보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히 오동을 향한 경고였다.
그 순간, 오동이 몸에서 내뿜던 기운을 거두어들이며 웃었다. 그러자 분위기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천웅 님, 제가 따님 분과 초우 공자에게 농담을 건넨 것뿐입니다. 제가 했던 말을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한 오동은 초천웅에게 포권을 하며 예를 표했다.
그러나 시천심법을 수련해서 감지능력이 매우 뛰어난 초우는, 오동이 고개를 숙일 때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분노였다.
실제로 오동은 창피를 당해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고대 문파의 제자로서 용성에서 떵떵거리며 지내고 있었는데, 신경도 쓰지 않던 초천웅이라는 자가 태청을 들먹이며 자신을 찍어 누를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태청이라는 이름을 아는 자라면, 누구나 그들이 가진 힘을 알고 있었다. 태청은 화하에 있는 모든 고대 문파의 정점에 있는 문파였다. 그러니 초천웅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오동에게 그걸 캐물을 수 있을 만한 용기는 없었다.
‘만약 초천웅의 말이 사실이라면……?’
오동은 수치심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재빨리 클럽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