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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도착하다

19화. 도착하다

책을 받아 들고 자신의 서재로 돌아온 제완은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왜 그녀는 침구술과 질병 방면의 기억력이 이렇듯 좋은 것일까?

사실, 조 부인의 말을 한 글자도 틀림이 없이 기억한 것은 그냥 자세히 들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른 책을 보거나, 다른 일을 할 때도 매우 진지했지만, 한 번도 이렇게까지 또렷하게 기억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냥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녀는 곧바로 조 부인이 준 책을 펼치고는 고개를 숙인 채 반 시진(*1시간) 가까이 들여다보았고, 다시 책을 덮은 뒤 눈을 감고 되새겨 보았다. 그랬더니 조금 전 보았던 그 많고 많던 글자들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모두 생생히 기억났다.

그야말로 신기하면서도 영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그녀는 책꽂이에서 평소에 가장 즐겨 읽던 잡록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 책은 이미 한 차례 완독했던 것이었는데, 다시 펼치고 온 정신을 집중해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정신을 집중해 또다시 반 시진(*1시간)을 읽은 후, 책을 닫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했으나, 어째선지 단 한 글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너무 이상한데…….’

제완은 이를 몇 번 더 반복해 시도해 보았다. 몇 번이고 시도하여도 침뜸에 관한 설명들이나 의서에 적힌 내용은 아주 명확히 기억할 수 있었지만, 다른 책들에 대해서는 또렷이 기억나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이건 혹시 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인 건가? 다시 태어나면서 이렇게 놀라 자빠질 만큼 대단한 기억력까지 얻은 거야?’

그녀는 이 상황이 경악스러우면서도 기뻤다. 그리고 진짜 그런 능력이 있는지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너무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오로지 의서와 침뜸에 관한 것들만 한번 보면 잊지 않는다는 건데, 다른 사람도 이럴 수 있는 건가? 이렇게 비정상적이라는 건 혹시 무슨 귀신이라도 붙은 거 아닌가……? 아니, 이게 비정상적인 범위에 드는 일이긴 한 건가? 만약에 다른 사람이 이런 상황을 알면, 내가 귀신에 씌었다고 하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제완은 순간 낯빛이 굳어졌다. 뭐가 됐든, 이 일은 결코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선 안 될 듯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도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절대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겨지고 싶지는 않았다.

* * *

그렇게 부지불식간에 점심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갔고, 침향이 다시 한번 서재에 와서 제완에게 식사하라고 재촉했다. 서재에서 정신없이 몇 번이고 책을 정독하던 제완은 침향이 올 때마다 손사래를 치며 물러가라 명했다.

“고낭, 음식들을 벌써 몇 번이나 다시 데웠습니다. 우선은 식사하시고 다시 서책을 보시지요.”

책상 옆까지 가까이 다가온 침향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제완에게 권했고, 제완은 약간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답했다.

“알겠어. 여기서 먹을게. 가서 음식들 좀 가져다줘.”

제완은 원래 별로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다. 그런데 침향이 향기로운 음식들을 가지고 들어오자, 그제야 한참 전부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정도로 굶었다는 걸 깨달았다.

밥을 장장 한 그릇 그득 담아 다 먹고, 세 가지 음식을 거의 다 입속에 넣고 난 뒤에야 그녀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이렇게 잘 먹었던 적도 없지 싶었다.

“고낭, 한참을 배를 곯으시다가 이렇게 한 번에 드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잠시 밖에 나가셔서 소화를 시키시지요.”

침향은 다시 책상에 앉을 준비를 하는 제완을 보고는,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살짝 솟아오른 배를 매만지던 제완도 조금 많이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가서 조금 걷도록 하자.”

* * *

“참, 스승님께서는 돌아가셨어?”

서재를 나선 뒤에야 불현듯 조 부인이 떠오른 제완은 부랴부랴 침향에게 물었다.

이에 침향이 답했다.

“조 부인께서는 부인께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청하시어, 식사를 하시고 조금 전에 막 돌아가셨습니다.”

제완은 슬쩍 웃어 보이며 그녀를 힐끗 한번 쳐다봤다.

“침향아, 넌 글을 읽을 줄 아니?”

제완의 뒤에서 걷고 있던 침향은 그녀의 말을 듣고는 낯빛이 살짝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꽉 깨문 채 자그만 목소리로 답했다.

“소인은 글자를 얼마 알지 못합니다.”

“그래? 만약에 글을 배우고 싶다면,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게.”

제완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침향이 글자를 모른다? 그녀는 당연히 이 말을 믿지 않았다.

이에 침향은 반색했지만, 이내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그저 노비일 뿐이니, 글자를 안다 해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거예요.”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 네가 어떻게 알아? 나중에 혹시 크게 쓰일지도 모르는 일이지.”

제완이 웃으며 답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침향에게 잘 대해줬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녀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였다. 침향을 자신의 곁에 남겨뒀던 것 역시 상대를 신임해서가 아니라, 대체 그녀에게 어떤 비밀이 있길래 마지막에 육황자의 눈에 띄었는지를 알고 싶기 때문이었다.

침향이 제완에게 막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던 찰나, 저쪽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고 있는 은행이 보였다. 은행은 이내 가까이 다가와서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낭, 노야께서 도착하셨다 합니다.”

‘제정광이 왔다고?’

은행의 말을 들은 그 순간, 때마침 너무나도 들떠 있던 제완의 마음에 빠르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그저 미간만 살짝 찌푸렸을 뿐, 별다른 표정 변화는 없었다.

“어디쯤 도착하셨대?”

“벌써 대문에 드셨다 합니다. 부인께서 맞이하러 나가시며 사람을 시켜 이를 고낭께 전하라 이르신 것이고요.”

은행이 답하자, 제완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노야를 맞이하러 한번 가보자.”

* * *

다른 시녀들이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것에 비해 제완의 얼굴에서는 조금도 긍정적인 표정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자신의 처소 앞뜰을 나서 중문 방향을 향해 걸어 나갔다. 아직 별장 안뜰을 벗어나기도 전에 저 앞에서 늘씬하게 우뚝 솟은 몸 하나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걸어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부친은 이제 막 이립(*而立: 30세)의 나이가 되어, 사내로서는 한창 젊고 재능이 가장 넘칠 시기였다. 거기다가 대단한 가문 출신에 잘생긴 외모를 타고났으며, 기질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내였다……. 이미 건실한 가정을 꾸렸다 하더라도 여전히 적지 않은 뭇 처녀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제정광을 발견한 제완은 천천히 걸음을 멈추고는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며 차갑기 그지없는 날 선 눈빛을 숨겼다. 그리고 그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육 씨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느새 제완의 코앞에까지 이른 제정광도 자신의 여식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일어나거라, 완아.”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제완의 얼굴은 이미 평소의 모습을 회복한 상태였다. 입가에 평온하고도 다소곳한 미소를 머금은 채 존경의 눈빛으로 아버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님!”

그때, 제정광의 뒤쪽에서 돌연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시녀들과 사동들 틈 속에서부터 7, 8세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튀어나와서는 제완을 향해 쭈뼛쭈뼛 웃어 보였다.

이에 그만 멍해져 버린 제완은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를 넋 놓고 한참을 쳐다보고 나서야 그가 누군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녀의 입꼬리는 일순 보기 좋게 싹 올라갔고 눈꼬리도 살짝 동그래졌다.

“서(瑞)야!”

“요 녀석이 오는 길 내내 정말로 이제 곧 누님을 볼 수 있는 건지를 그렇게나 묻더구나.”

옆에 있던 제정광이 웃으며 말하는 한편, 고개를 숙이고는 제서(齊瑞)를 쳐다봤다.

“이제야 누님을 만났구나. 기쁘냐?”

활짝 웃어 보이는 제서의 두 뺨에는 얕게 패인 두 개의 보조개가 드러났다.

“이리 와, 서야.”

제완은 살짝 목이 메었다.

제서는 추(秋) 이낭의 아들로, 원래 육 씨가 시집올 때 데려온 시녀였다. 이후 제정광이 통방(通房) 시녀(*밤 시중을 드는 시녀)로 지목한 이후 제서를 낳아 첩실로 인정받았다. 추 이낭은 육 씨가 직접 훈육한 시녀였기에 성정이 비교적 온순했고, 육 씨에게도 충심이 깊어 자주 제서를 데리고 육 씨에게 문안을 올리러 안채에 오곤 했다.

그리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서는 어려서부터 제완에게 껌딱지처럼 붙어있길 좋아해, 어떤 땐 육 씨한테서 낳은 남매로 오해받기도 했다.

제완은 이제껏 추 이낭과 제서를 미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 두 사람은 여전히 그녀에게 너무나도 잘 대해줬지만, 이 두 모자는 결국 그녀의 계략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녀는 그 당시 그들의 목이 잘려나가는 걸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그때, 제서는 혼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는데, 그의 처는 제서의 뼈와 살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누님, 집으로 돌아가시는 거 맞이하러 제가 직접 왔어요. 그리고 누님한테 주려고 맛있는 것도 엄청 많이 가져왔어요.”

달려와 제완의 팔을 꼭 붙잡은 채 옹알옹알 외치는 제서를 보던 제완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낭, 공자께서는 매일매일 고낭을 애타게 부르셨습니다. 하루가 멀다고 노야 앞에서 고낭이 보고 싶다고 공자가 계속 떼쓰지 않았다면, 노야께선 저희가 함께 오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육 씨의 뒤에 서 있던 추 이낭이 웃으며 제완에게 말했다.

“노야, 긴 여로에 지치셨을 텐데 우선은 방으로 들어가 쉬신 이후에 완이와 다시 회포를 푸시지요.”

육 씨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제정광에게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정광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을 향해 발걸음을 떼며 육 씨에게 분부했다.

“당(唐) 선생의 마차가 잠시 뒤 도착할 것이니, 하인 몇에게 일러 바깥채에 선생이 지낼 곳을 마련해 놓으라 이르시오. 그리고 그분의 시종을 들 시녀 둘 정도만 안배를 좀 해 주시오.”

이에 육 씨가 당황하며 물었다.

“당 선생께서도 오셨습니까?”

“그렇소. 긴히 해야 할 일이 조금 있어서.”

제정광은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 채 짧게 툭 내뱉었다.

당 선생은 태자의 참모로, 그자가 왜 제정광과 함께 금주성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이유는 굳이 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마도 또 태자를 위해 누군가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하거나, 아니면 어떤 짓을 꾸미려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뭐가 됐든 아녀자들이 감히 물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육 씨도 제정광의 바깥일에 대해 시시콜콜 질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남편이 자신과 함께 있으려고 금주성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크게 실망했지만, 이러한 감정을 빠르게 털어냈다.

“노야께선 심려 놓으시지요. 제가 잘 안배해 놓겠습니다.”

육 씨의 일 처리에 딱히 큰 걱정을 하지 않는 제정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성큼성큼 발을 내디디며 안채를 향해 걸어갔다.

“이낭도 서를 데리고 가서 먼저 쉬도록 하거라. 배가 고프면 작은 주방에 일러 국수를 좀 삶으라 하면 될 것이야. 인사는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나누도록 하지.”

육 씨가 고개를 돌리고는 추 이낭에게 말했고, 추 이낭은 공손히 무릎을 굽히며 예를 갖췄다.

“예,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