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변화
의원이 물러간 다음에도 정왕비는 수심이 가득했다.
“삭아, 어린 나이에 이게 무슨 일이니.”
“모비,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신의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하잖아요. 소자는 정말 괜찮습니다.”
“가슴에 병이 있는데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느냐?”
정왕비는 매서운 눈초리로 정왕을 쏘아봤다.
“이게 다 애초에 왕야께서 이상한 방법을 생각한 탓이에요. 괜한 짓을 해서 우리 삭이가 답답해서 병이 난 거라고요.”
정왕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왜 내 탓이라는 것이오?”
“왕야께서 도성에 오면서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면서 우리 삭이가 병이 났다고 거짓 소문을 냈잖아요.”
정왕비는 이 일만 생각하면 마음이 심란했다.
북방 봉지에 있을 때 큰아들은 몸도 건장하고 성격도 호방했다.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북방 오랑캐와 싸워 쫓아내기도 했다. 그랬던 큰아들이 도성에 와서는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병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런 아들을 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찌 괴롭지 않겠는가. 도성을 떠나 북방 봉지로 돌아가는 꿈을 꿀 정도였다.
“도성에 있는 번왕 세자가 한둘도 아닌데 왜 우리 삭이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죠?”
정왕비는 말하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창 기운이 뻗칠 나이에 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답답해서 없던 병도 생길 수밖에.
“우리 삭이는 상황이 좀 특별하지 않소…….”
정왕비가 차갑게 웃었다.
“태어날 때 황당무계한 말이 돌았을 뿐이에요. 그것도 북방에서나 좀 돌았던 거고요. 도성에서 그걸 누가 신경이나 쓴답니까?”
정왕이 쓴웃음을 지었다.
“왕비, 그만하시오. 만사에 조심해서 나쁠 것 없지 않소.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그분은 또 모르는 일이오.”
기삭이 태어나던 그날, 오색구름이 북방 봉지에 있는 정왕부 위에 나타났다가 기삭이 태어난 다음 천천히 사라졌다.
이 일로 하여금 북방 사람들은 다들 정왕세자가 범상치 않은 천운을 타고났다고 말했다.
부모로서 이런 소문이 싫을 건 없었다. 어차피 정왕은 북방에서 만인지상의 왕이었으니 꺼릴 이유가 없었다.
문제는 안왕이 도성으로 진군해 번왕에서 대주 천자의 자리에 오른 다음부터 생겼다.
안왕이 제위를 찬탈했으니 다른 번왕이라고 안 될 것 없었다.
안왕, 즉 태안제는 제위 찬탈의 대의명분이 부족했기에 더욱 번왕들을 경계했다.
물론 정왕은 그런 야심이 없었지만 그건 자기 생각이었다. 당금 천자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는 모를 일이었다.
“부왕(父王), 모비께서 소자 때문에 언쟁하시면 소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정왕비는 사실 그저 마음의 답답함을 털어놓으려던 것이었기에 아들의 말을 듣고 서둘러 답했다.
“이 어미가 네 아버지와 정말 싸울 리가 없잖니. 괜한 걱정 마라. 넌 지금 무엇보다 마음을 편히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야 어서 다 나아서 다시 건강해지지. 그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큰 효도란다.”
“며칠 전 소자에게 외가댁에 가서 사촌 누이를 도성으로 데려오라고 하신 일은…….”
정왕비가 손사래를 쳤다.
“네 동생을 보내면 된다. 어차피 매일 놀고먹기 바쁜 녀석 아니냐.”
이때, 왕비의 시녀 진주가 들어와 고했다.
“임 부인이 오셨습니다.”
정왕과 정왕비는 어리둥절해서 서로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봤다.
“왕비가 임 부인을 청했소?”
“아닙니다.”
“설마 온가에서 지난번 일을 후회하는 겐가?”
정왕은 자기도 모르게 다시 기삭을 슬쩍 바라봤다.
눈을 내리깐 소년의 모습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차분하고 평온했다.
정왕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내 아들이 이렇게 훌륭한데 감히 거절하더니, 이제 와 후회해?
정왕비와 정왕은 같은 생각을 하고 순간 어깨가 으쓱해졌다.
“제가 보기에는 온가에서 후회하는 것 같네요. 하지만 이번엔 우리가 호락호락 받아들이면 안 되겠어요.”
“삭아, 네 생각은 어떠냐?”
정왕은 기삭을 바라봤다.
기삭은 그저 웃더니 말했다.
“부왕, 모비 두 분 뜻대로 하십시오.”
“그럼 거절해도 괜찮은 것이냐?”
정왕이 아들을 슬쩍 떠봤다.
“두 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정왕은 아무리 봐도 아들의 평온한 얼굴에서 속마음을 알아챌 수 없었기에 정왕비가 했던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왕비는 우리 삭이가 온가의 이소저에게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았소?”
정왕비는 남몰래 정왕을 꼬집었다.
“내가 언제 삭이가 온 이소저에게 마음이 있다고 했어요? 미색이 뛰어난 규수에게 마음이 가는 것 같다고 했지요.”
기삭은 어리둥절했다.
한편 임 씨는 정원에 딸린 넓은 방에서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정왕비를 만날 수 있었다.
“임 부인, 오래 기다리셨죠?”
임 씨는 부탁하러 온 처지였으니 따뜻한 웃음으로 왕비를 맞이했다.
“왕비, 바쁘셨을 텐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임 부인, 차 한잔 더 하세요.”
정왕비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호로록 마신 다음 물었다.
“임 부인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다름 아니라, 왕부에서 명의 한 분을 부르셨다고 들었는데…….”
정왕비는 순간 멍해졌다.
자신의 예측이 완전히 벗어난 탓이었다.
임 부인이 혼사 때문에 온 게 아니었어?
정왕비가 아무 말도 없자 임 씨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정왕부가 이렇게 쩨쩨하게 굴 리 없는데……. 설마 혼담을 거절한 일 때문에 이런가?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정왕비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왕부에서 신의 한 분을 부르기는 했지요.”
의원을 청한 건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부의 하인들은 입이 무거운 편인데, 임 부인이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임 씨는 정왕비가 흔쾌히 대답하지 않자 필사적이게 되었다.
“왕비, 솔직히 말씀드려 오늘 이리 온 건 간곡한 청이 있어서입니다.”
“임 부인, 그게 무슨 말씀이죠?”
임 씨는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어머니는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십니다. 요즘은 걸핏하면 가슴이 답답하면서 아프다고 하시지요. 왕부에서 청하신 명의가 가슴 통증에 용하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왕비께서 넓은 마음으로 신의를 장군부에 보내 저희 어머니를 한번 진맥하게 해 주십시오.”
정왕비는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 부인이 찾아온 건 자기 어머니 때문이었구나.
그녀는 조금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런 일로 남을 괴롭힐 사람은 아니었다.
“진주야, 신의에게 임 부인을 따라 장군부에 다녀오시라고 청해라.”
“감사합니다, 왕비.”
임 씨는 정왕비가 참으로 선량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정왕비가 자신의 병약한 아들을 유아와 짝지어 주려고 했던 것에 대한 불만도 눈 녹듯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 의원이 약상자를 들고 왔고, 바로 임 씨를 따라 장군부로 향했다.
임 씨가 떠난 다음, 정왕비는 굳은 얼굴로 집사를 불러 왕부의 일이 담장 너머로 퍼진 일을 조사하도록 명했다.
집사는 금세 어찌 된 일인지 알아내고 왕비에게 고했다.
“문지기 왕 씨가 입을 놀렸습니다.”
“문지기 왕 씨라면 그동안 일 처리가 나름대로 괜찮았는데, 어찌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냐?”
집사가 난감한 표정이 됐다.
그 모습을 보고 정왕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고할 말이 있으면 어서 고하거라.”
“그게…… 문지기 말이, 세자께서 시키셨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정왕비는 깜짝 놀라 기삭의 처소로 향했다.
“모비께서 무슨 일로 여기까지……?”
정왕비는 아들을 살펴봤지만, 아들의 안색이 편안한 걸 보고 말했다.
“임 부인이 왔던 건 그 어머니를 위해 신의를 잠시 청하려는 것이었더구나.”
“그랬군요.”
기삭은 뜻밖이라는 듯 말했다.
“삭아, 왜 문지기에게 왕부에서 신의를 청한 일을 떠들라고 시켰느냐?”
기삭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소자가 ‘큰 병을 앓은 지’ 벌써 팔 년이 지났지 않았습니까? 슬슬 세상 사람들에게 소자가 병약하다는 걸 다시 인식시킬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문지기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습니다.”
정왕비는 한숨을 쉬었다. 궁금증이 안타까움으로 변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임 부인도 참 호기심이 강한 여인이로구나. 남의 집에 누가 왔는지 일부러 사람을 시켜 알아보다니 말이다.”
“그렇네요.”
기삭은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장군부에서는 주 의원이 노부인의 맥을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다.
임 씨는 갑자기 큰 두려움을 느꼈다.
“우리 어머니 심장에 큰 문제가 있는 겁니까?”
“노부인께서는 묵은 가래와 죽은 피 때문에 심장에 문제가 생기신 겁니다. 만약 제때 막힌 혈맥을 뚫지 않으면 큰일을 당하실 겁니다. 노부가 처방해 드릴 금향환(金香丸)은 이런 증상에 효험이 좋으니 아침저녁으로 세 알씩 드십시오…….”
주 의원은 방도를 정성껏 설명했다.
온유는 의원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처음에는 외할머니의 병을 제때 발견한 것을 기뻐했지만 나중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전생에는 없었던 신의가 장군부에 나타나게 된 걸까?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정왕부와 관련된 일, 그런데 전생에서와는 달라진 일. 온유는 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바로 정왕세자 기삭이었다.
정왕 일가는 팔 년 전 장군부에 인접한 왕부로 이사 왔다.
당시 온유는 여덟 살이었고, 기삭은 열한 살이었다.
온유의 기억에 어린 시절 정왕세자는 몸이 약하고 조용한 소년이었다. 어울리던 아이들 중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
특별히 친해질 기회도 없었고 그저 아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젠 눈여겨봐야 했다.
자신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정왕세자를 변화시킨 걸까? 아니면 정왕세자 본인이 변한 것일까?
임 씨는 장군부에서 어머니와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도 온선, 온유 자매를 데리고 온부로 돌아가지 않고 장군부에서 낮잠을 잤다.
이건 외동딸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임 씨가 시집을 간 뒤에도 노장군 내외는 장군부에서 그녀가 살던 별채를 그대로 두었다. 그뿐만 아니라 온선과 온유도 태어난 다음 장군부에 각자 자기 처소가 생겼다.
온유는 장군부의 자기 처소로 돌아와 보주에게 말했다.
“난 정원에서 산책 좀 할 테니 누가 찾아오면 자고 있다고 해.”
이 시기 넓은 장군부의 정원에는 꽃들이 가득하고 나무는 울창했다.
오후에는 정원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온유는 걷다가 예쁜 꽃을 구경하면서 어느새 정왕부와 맞닿은 담장이 있는 곳까지 왔다.
그녀는 정왕세자와 원래도 친하지 않았던 데다가 어머니가 정왕부의 혼담을 거절한 뒤로는 더 불편한 사이가 되었다.
온유는 고개를 들어 담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훌쩍 날렸다.
좋아! 생각만 해 봐야 아무것도 안 돼. 일단 좀 살펴보는 게 우선이야.
소녀의 움직임은 그물을 벗어난 토끼처럼 재빨랐다. 하지만 두 손으로 담장을 짚고 넘어가려고 하다가 서둘러 손을 놓고 다시 원래 뛰었던 곳으로 착지했다.
그녀는 담장 아래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또! 정왕세자가 또 담장 맞은편에 있었던 것이다!
온유는 어려서부터 말을 못 했기 때문에 불길처럼 급한 성격도 느긋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혹시 정왕세자가 일부러 이러나 싶기까지 했다.
하지만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정왕세자가 선견지명을 타고났을 리도 없는데, 그녀가 지금 이 시각에 담장을 넘을 걸 어찌 미리 알았겠는가?
다행인 점은 담장을 넘기 전에 재빨리 돌아온 덕에 그의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