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오스킬 사건 이후,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반군이 유포하려는 학살 영상을 막기 위해 제7구역 전체 통신망을 차단하는 강수를 두지만, 이는 오히려 도시 전체의 행정·군사 체계를 마비시키고 시민의 불안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팔콘네스트 반군 측은 이를 ‘자충수’라 평가하며, 공화국의 혼란을 조용히 주시한다.
혼란이 커지자 총독은 고심 끝에 통신망을 복구하되, 검열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복구된 통신망을 통해 오스킬 학살 영상은 필터링을 뚫고 폭발적으로 확산되며, 도시는 다시금 분노에 휩싸인다. 시민 시위는 더욱 격화되고, 반군의 영향력은 확대된다.
궁지에 몰린 총독은 책임을 돌리기 위해 계엄군 사령관 베르켄을 공식 해임한다. 그러나 그의 해임은 군 내부의 혼란만 가중시킨다. 지휘체계가 무너진 계엄군은 우왕좌왕하며 도시 통제를 상실해가고, 총독부의 발표는 계엄군 내부조차 ‘희생양 처분’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제7구역의 통제력은 거의 붕괴 직전에 다다르고, 반군은 다음 결단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
테라니아력 891년 6월 20일
네라카 제7구역 – 남부 외곽, 산맥 고개
짙은 새벽 안개가 산록의 골짜기를 덮고 있었다. 기압이 낮아진 대기의 흐름은 마치 거대한 포위망처럼 산 중턱을 감싸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수백의 발소리가 땅을 두드리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령관 해임 이후, 지휘망은 재편되지 않았고, 각 부대는 상부의 명확한 명령 없이 일시적 정지 상태에 빠져 있었다. 무전 주파수는 간헐적 간섭으로 지직거렸고, 통신 복구 이후 쏟아져 들어온 데이터는 현장 지휘관들의 판단을 더욱 마비시키고 있었다.
그 혼란의 중심으로, 반군은 침투했다.
‘팔콘네스트’는 오스킬 철수 이후 외형상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정보 수집과 병력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블랭크는 더 이상 방어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그의 판단은 지하 저항조직, 시민 자경단, 탈영병 출신 무장 세력, 그리고 팔콘네스트 정예 병력 간의 전면적 공조를 이끌어냈다.
그날 새벽, 계엄군이 주둔하던 고지대 감시초소 여섯 곳이 동시에 교란 신호에 휘말리며 외부 접속이 차단됐다.
같은 시각, 반군 전투원과 시민군이 연합한 총 300여 명의 병력이 산록을 타고 남쪽 병참도로를 향해 은밀히 진군하고 있었다. 선두에는 소음차폐 장비로 개조된 드론 정찰조가 떠 있었고, 후미에는 의약품과 보급품을 실은 수송 리어카가 시민 봉사단의 보호 아래 이동하고 있었다.
“지휘부 교란완료. 북서측 감시소 응답 없음. 진입 개시 가능.”
차분한 무전이 블랭크의 단말기에 도달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죽 장갑을 조용히 조였다.
“시민 대열은 2선에서 대기. 우린 먼저 틈을 만든다.”
그의 옆엔 팔콘네스트 정예대장이자 여성 저격수 출신인 ‘레이나’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번의 손짓으로 후방에 침투 조를 배치시켰고, 그 움직임은 마치 하나의 의식처럼 정연했다.
산길 아래에는 계엄군 보급기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7구역 시가지 전체로 보급이 흘러들어가는 혈류 같은 통로.
이곳이 무너지면, 시가지에 주둔한 병력도 더는 버티지 못할 터였다.
⸻
네라카 제7구역 – 내륙 보급기지 B-19 외곽
새벽 04시 37분.
어둠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땅 밑에서 움직이던 불씨는 마침내 지표면을 뚫고 튀어 올랐다.
반군의 기습은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B-19 보급기지—계엄군의 남부 작전 병참선을 떠받들던 요충지.
이곳은 오스킬 철도와 떨어진 교외 평지에 위치해 있었고, 겉으로는 방어망이 완비된 듯 보였지만 실상은 허술했다.
지휘관은 교체된 지 하루도 되지 않았고, 무전망은 여전히 재편성 중이었다. 병력은 서로의 얼굴조차 익히지 못한 예비대와 보급인원들이었다.
팔콘네스트 소속의 강습분견대와 시민군으로 구성된 혼성 부대는, 소음기를 단 돌격소총과 화염병, 그리고 해킹된 경무장 드론을 앞세워 기지를 동시다발적으로 포위했다.
제1분대는 연료저장고를, 제2분대는 통신탑을, 제3분대는 병기고 출입구를 노렸다.
공격은 7초 간격으로 벌어졌다.
터진 것은 경보등이 아니라, 첫 번째 포탄이었고, 울린 것은 경고음이 아니라, 병사의 비명이었다.
“적이다! 동남쪽 철책 돌파—!!”
그러나 외침은 명령이 되지 못했다.
지휘관은 이미 폭발에 휘말려 실종되었고, 남은 소대장은 인근 탄약고 방향으로 질주하다가 화염에 휩싸인 차량 잔해에 파묻혔다.
이윽고 중앙 통제소의 무전이 송출되었지만, 채널은 중복되고 있었고 내용은 불분명했다.
“…전투배치… 아군? 확인… 연막 속에서—커억!”
반군은 전력을 쏟아붓지 않았다.
오히려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의 교란을 유도했다.
이 공격은 점령이 아닌, 붕괴를 노린 침투였다.
지휘가 무너지자 병사들은 반응하지 못했고, 통신이 혼선되자 구역 방어는 제각각으로 찢어졌다.
그때, 도심부에서도 불길이 피어올랐다.
슬럼지대, 시장통, 시민 주거구역, 공공회랑.
각지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봉기가 동시에 점화되었다.
흩어졌던 저항자들이 신호를 받아 일제히 들고 일어섰고, 가정용 무전기와 유통 금지된 장비, 도심 하수구를 통한 이동로를 통해 연계된 세력이 시가지를 뒤흔들었다.
“공화국은 우리를 버렸다!”
“오스킬의 피값을 받아내자!”
“카이론을 끌어내려라!!”
벽엔 피로 쓴 낙서가 남고, 교차로엔 불타는 버스가 쓰러졌으며, 철문을 지키던 계엄군 초병은 기습을 견디지 못하고 전투복을 벗고 도망쳤다.
그런 찰나, 보급기지의 계엄군은 소요사태가 발생하고 있는 시가지를 당장 지원하라는 긴급 요청을 받고서는, 어떻게 움직여야할지 갈피를 못잡은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반군은 정확히 노렸다.일관되지 않은 명령으로 방황하며 이곳저곳으로 분산된 오합지졸에 불과한 계엄군 무리들을 반군은 각개격파했고
그로써 보급기지 B-19는 마침내 함락됐다.
보급기지에 잔존했던 계엄군은 한 개 중대, 120명 규모. 그중 3분의 1은 초반 강습에서 사상되었고, 나머지는 방어선이 무너지자 흩어졌다. 몇몇은 항복했고, 나머지는 도주했다. 그러나 방향도, 지휘도 없이 달아난 병력은 각지의 반군 초소에서 체포되거나, 외곽으로 흩어졌다가 연락을 끊었다.
전투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화염과 연기 사이로, 팔콘네스트의 노란 마크가 보급기지 통제탑에 걸렸다. 레이나가 무전기를 들어 블랭크에게 보고했다.
“B-19, 완전 확보. 저항은 끝났고, 생존자는 민간인 대피소로 이송 중입니다.”
통제망 재접속 후, 반군 기술팀이 기지의 데이터 서버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연료탱크와 식량 보급선은 빠르게 시민군의 수송로에 편입되었다. 도시로 향하는 병참로는 열렸고, 남부 고개를 넘는 주요 도로도 확보되었다.
블랭크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짧게 말했다.
“이제 오스킬이다. 우리가 되찾을 차례지.”
—
잠시 후, 오스킬 교차지점 외곽
오스킬은 불완전한 진압의 상징이었다.
계엄군은 과거 학살을 벌인 이곳에 보란 듯이 주둔 중이었다. 그러나 그 전력은 줄어든 상태였고, 남은 병력도 극도의 사기 저하에 시달리고 있었다. 통신망 복구 이후 각지로 흩어진 명령이 오히려 지휘를 무력화시켰고, 오스킬 주둔부대는 지원도 없이 고립돼 있었다.
오전 11시경, 반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외곽에서 포탄이 떨어졌고, 동시에 내부에서 시민군이 들고 일어났다. 지하 통로를 이용한 침투조가 건물 3개 층을 점령했고, 반군 드론 부대는 상공에서 주둔지를 포착했다. 남쪽 고개에서 전투차량을 이끈 시민군 전력은 오스킬 북쪽 관문을 향해 진입했고, 외부 반군은 동서 양방향에서 포위선을 좁혀왔다.
계엄군은 당황했다.
“서쪽에서 적 드론 발견!”
“북쪽 진입로도 무너졌습니다! 내부에도 시민군이—”
“지원 요청은?”
“…연결이 안 됩니다.”
내부 방어망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도시 상공에 드리운 연기가 퍼지는 동안, 반군은 교차지점의 사방을 막았고, 일부 시민군은 옥상에서 저격을 지원했다. 도심 골목마다 화염병과 포위조가 진입했고, 결국 계엄군 중대장은 항복을 명령했다.
단 한 발의 후속 폭격 없이,
오스킬은 탈환되었다.
—
같은 날 오후 3시, 네라카 제7구역 – 남부 시가지 진입로
도로 위에는 민간용 전기버스, 구조용 트럭, 시민군 수송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반군은 탈환한 보급기지에서 옮긴 식량과 의약품을 싣고, 남부 시가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우린 해방군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방화와 폭동이 뒤섞여 있던 그 시가지에는, 이제 체계적인 움직임과 반군의 깃발이 보였다. 블랭크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음은 중심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반군은, 이제 남부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하고 있었다.
⸻
네라카 제7구역 – 남부 시가지
남부 시가지는 생각보다 깊고 복잡한 덫이었다.
반군은 B-19 보급기지와 오스킬 교차지점을 장악한 후, 기세를 몰아 남부 시가지로 진입했다. 이곳은 단순한 주거구역이 아니었다. 공화국이 오랜 시간 동안 통제를 강화해온 핵심 행정구역 중 하나였으며, 중앙 관제망의 일부가 아직도 이 지역을 통해 간접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는 병력은, 아직 무너지지 않은 계엄군의 마지막 조직적 저항선이었다.
그들의 진입은 오후 5시 정각, 거대한 침묵을 가르며 시작되었다.
팔콘네스트 병력은 슬럼가와 상업지구 사이를 잇는 도심도로를 통해 3개 분대로 나뉘어 진격했다. 병사들은 오스킬 승리의 기세를 등에 업고 있었고, 시민군은 해방의 상징이라도 되듯 반군기와 함께 앞줄에 섰다. 블랭크는 선두 차량에 올라 이 작전이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통제된 도시의 심장부로의 돌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첫 번째 교차로를 돌자, 마주한 것은 환영이 아닌 포문이었다.
“쾅!!“
첫 발은 예상보다 빨랐다.
남부 시가지 내부에는 계엄군 기동대의 잔존 병력이 재집결해 있었다. 이들은 기존과 달리 전면전을 염두에 둔 배치와 화력 운용을 준비하고 있었고, 위치 노출을 우려한 반군은 이 병력의 위치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후퇴하던 병력이 아닌, 재집결한 정예였다.
정지된 골목 사이, 컨테이너 사이로 위장된 대전차포가 불을 뿜었다. 반군 선두 차량 2대가 순식간에 파괴됐고, 선두를 이끌던 시민군 1열이 그 충격파에 휘말려 쓰러졌다.
“후퇴… 아니, 산개! 우측 건물 진입!”
블랭크는 즉시 지시를 내렸지만, 반응은 늦었다. 도심에 익숙하지 않은 병력은 쏟아지는 유탄과 벽면 반사 사격에 휘둘렸고, 고층 빌딩에서 계엄군 저격병들이 교차로 중심으로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레이나는 저격 포인트를 확보하려 했지만, 열영상 교란장비가 이미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스코프는 하얀 안개로 뒤덮였고, 유탄이 발밑에서 터지며 그녀를 땅으로 날려보냈다.
“레이나! 후방 철수로 열어!”
“…부상… 오른쪽 다리 관통. 수송필요…”
반군은 진입한 골목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계엄군은 도로 망을 중심으로 크로스포인트를 봉쇄했고, 반군이 예상한 모든 골목은 미리 장착된 자동사격 모듈과 사제 지뢰로 막혀 있었다.
시민군 일부는 총을 버리고 도망쳤다. 훈련된 전투원조차 혼란 속에서 지휘관의 위치를 잃었고, 일부는 같은 편을 오인해 오발사고를 냈다. 진압병력은 침묵 속에 진격했고, 골목을 따라 짓눌리듯 밀려든 계엄군은 중장갑 보병을 앞세워 반군 진형을 박살냈다.
“이 구역은 공화국의 영역이다! 항복하라!”
스피커로 내보내진 이 문구는 마치 승리 선언처럼 울려 퍼졌다.
블랭크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진압대를 바라보며 짧게 이를 악물었다. 그는 아직 싸울 수 있었지만, 이 싸움은 지금이 아니었다.
“모든 부대, 후방 철수로 전환. 반복한다, 철수다!”
철수 명령은 즉시 송출되었고, 생존 병력은 일부 건물을 폭파해 통로를 막은 뒤 퇴각을 시작했다. 부상자들은 시민군 봉사대가 일일이 실어 날랐고, 일부 부대는 도심 지하 하수도로 진입해 남쪽 방면으로 빠져나갔다.
도시 안에는 그날 밤, 다시 ‘공화국의 깃발’이 걸렸다.
그러나 그 깃발을 바라보는 계엄군 병사들의 얼굴에도, 웃음은 없었다. 이 승리는 고립된 중대의 최후 방어선이자, 반격의 여지를 막은 단 하나의 버팀목이었다.
그리고 블랭크는, 다시 한 번, 후퇴하는 동안 속으로 되뇌었다.
"다음은, 여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