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계엄군 사령관 베르켄의 해임 이후, 네라카 제7구역의 통제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팔콘네스트를 중심으로 한 반군은 기회를 포착해 대규모 반격을 개시한다. 남부 외곽에 위치한 보급기지 B-19를 기습한 반군은, 내부의 지휘 혼란과 우왕좌왕하던 계엄군 한 개 중대를 각개격파하며 기지를 단시간 내에 함락시킨다.
이어 반군은 시민군과 함께 오스킬 교차지점으로 진격하여, 외부 공격과 내부 봉기를 연계한 포위전 끝에 오스킬을 점령한다. 공화국군은 항복하고, 반군은 오스킬에 깃발을 꽂는다.
그러나 기세를 몰아 진입한 남부 시가지에서는 계엄군 잔존 정예부대의 조직적 반격에 직면한다. 정보가 누락된 채로 진입한 반군은 고층 저격, 열영상 교란, 자동화 방어장비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퇴각을 명령한다. 레이나는 부상당하고, 시민군 일부는 붕괴되며, 블랭크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철수를 결단한다.
공화국은 가까스로 남부 시가지를 사수하지만, 반군은 후퇴 속에서도 다음 전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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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니아력 891년 6월 21일
행성 네라카 – 제3구역, 네라카 총독부 사령부
총독부 사령부 내부는 오랜만에 환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모처럼 좋은 소식이었다. 계엄군이 남부 시가지에서 반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는 보고가 막 도착한 참이었다.
총독 데이란 카이론은 커다란 작전 지도를 내려다보며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지도 위에 선명히 표시된 계엄군의 승전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봐라, 이겼다! 우리가 마침내 놈들의 기세를 꺾었다!”
카이론은 어깨를 펴고 가슴을 당당히 내밀며 말했다. 주위에 둘러서 있던 참모들과 장교들은 총독의 반응을 지켜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도 쉽게 입을 열지는 못했다. 그때 카이론이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외쳤다.
“지금이다. 적이 남부 시가지에 병력을 집중한 틈에 오스킬을 탈환해야 한다. 적은 이제 그쪽의 방비를 허술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자 작전참모 에이렌 중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조심스레 의견을 제시했다.
“총독님, 현재 우리 보급 상황이 그리 원활하지 않습니다. B-19 보급기지가 적의 수중에 떨어지면서 병력과 탄약 보급에 상당한 차질이 생겼습니다. 또한 오스킬이 비워진 듯 보이는 것은, 적이 우리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신중히 접근해야 합니다.”
에이렌의 목소리에는 신중함과 우려가 뒤섞여 있었다. 다른 참모들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카이론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함정이라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중령. 지금은 반군이 동요하고 있을 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오스킬을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몰라.”
에이렌은 잠시 침묵하며 망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총독님, 섣부른 공격은 병력 손실만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이미 시가지 방어로 병력의 피로도도 높은 상황입니다. 최소한 보급망부터 복구하고, 충분한 병력을 확보한 뒤 작전을 전개하는 것이—”
카이론은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중령, 전쟁에서 기회를 놓치는 자는 패배할 수밖에 없어. 적이 오스킬을 비운 지금이 아니면 도대체 언제가 적기란 말인가? 당장 공격 명령을 내려라. 지금 바로!”
에이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총독의 눈빛과 목소리에는 오랜 실패로 인한 초조함과 승리에 대한 성급한 기대가 혼재되어 있었다. 이 순간, 총독은 그 어떤 논리적 설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에이렌 중령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 군화를 맞부딪치며 경례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총독님. 즉각 계엄군에게 오스킬 탈환작전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회의실 안에는 다시 긴장된 정적이 찾아왔다. 총독부 참모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말없이 작전 지도를 응시했다. 이제, 승리를 확신한 총독의 무리한 명령은 네라카의 운명을 결정할 전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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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니아력 891년 6월 22일
네라카 제7구역 – 남부 시가지, 오스킬 방면 진입로
새벽의 공기는 서늘하고 축축했다. 밤새 내린 비로 젖은 도로 위엔 어슴푸레한 안개가 낮게 깔려 있었고, 도열한 계엄군의 5개 중대 병력은 마치 거대한 회색의 뱀처럼 굽이쳐 움직였다. 어제의 승리로 사기는 올랐지만, 병사들의 눈동자엔 여전히 불안과 피로가 감돌았다.
“전원 진군!”
사령부에서 무리하게 내려온 명령은 분명했다.
목표는 단 하나, 오스킬의 탈환이었다.
계엄군은 정연하게 나뉘어 대형을 갖추고 오스킬 진입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독부의 참모들이 우려했던 보급 문제나 잠재된 위험요소들은 현장 지휘관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남은 탄약과 최소한의 지원장비만으로 병력은 강행군에 들어갔다.
선두에 있던 제12중대가 어두운 교차로에 접어들자, 짙은 침묵이 무겁게 드리웠다. 도로는 이미 이틀 전에 철수했던 반군과 시민들이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불에 탄 잔해와 버려진 차량들이 어지럽게 도로를 막고 있었고, 고개를 든 병사들은 주변 건물들의 깨진 창문과 어두운 틈새를 불안하게 응시했다.
“너무 조용한데…?”
소대장이 무전을 통해 낮게 읊조렸다. 불안한 침묵 속에서 병사들은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손가락을 방아쇠 주변에 긴장시켰다.
그 순간이었다.
“쾅—!!”
선두 차량의 하부에서 강렬한 섬광이 솟아오르며 폭발이 일어났다. 미리 매설된 반군의 대전차 지뢰였다. 순식간에 장갑차는 파편과 불꽃으로 뒤덮였고, 불길에 휘말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적이다! 매복이다—!!”
고함 소리가 순식간에 진형 전체에 퍼졌지만, 반군의 매복 공격은 이미 전방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되었다. 도로 양편 건물들에서 기다리고 있던 반군이 총구를 내밀었고, 철저히 준비된 교차사격이 계엄군 병력의 중심부를 정확히 노렸다.
첫 번째 중대가 속절없이 꺾여 쓰러졌다. 두 번째 중대가 전투 진형으로 재편성하려 했지만, 그들이 이동하려던 도로는 미리 매설된 지뢰와 급조폭발물로 완벽히 차단돼 있었다. 급하게 방향을 바꾼 차량이 옆 건물로 충돌하며 뒤집혔고, 뒤따르던 병력의 대열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진형 유지해! 교차로를 확보하라!”
지휘관의 외침은 혼란 속에 흩어졌고, 여기저기서 울려퍼지는 총성과 폭발음 속에서 병사들은 제각기 엄폐물을 찾아 흩어졌다. 반군의 총격이 건물과 차량 사이를 날카롭게 관통했고, 아침 안개는 총탄의 연기로 뒤덮였다.
병사들은 가까스로 전열을 갖추며 반격을 시도했다. 몇몇 소대가 지휘를 회복하고 화력을 집중해 반격했지만, 이미 반군이 장악한 건물은 단단한 요새와 같았다. 준비된 방벽과 모래주머니 뒤에 몸을 숨긴 반군은 진입로를 향해 지속적으로 총격을 퍼부었다.
상공에서 간신히 날아온 드론은 반군이 설치한 전파 교란 장비에 통제력을 상실한 채 지상으로 추락했고, 계엄군 병력은 제대로 된 정찰 정보조차 얻지 못했다.
“지원 요청! 이대로는 전멸이다!”
무전병이 절박하게 외쳤지만, 응답은 지지직거리는 잡음 뿐이었다. 그들이 사전에 걱정했던 보급 부족은 현실이 되었고, 포격 지원이나 항공 지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이미 병력의 절반이 피해를 입거나 쓰러졌다. 도로는 피와 연기로 얼룩졌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무기력한 표정으로 건물 사이에 몸을 숨겼다.
반군은 이제 공격을 멈추고 조용히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계엄군 병사들은 불길과 잔해에 갇혀 무너진 차량 뒤에 웅크린 채 무력하게 반군의 포위망이 좁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장 지휘관은 무전을 통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부대 철수… 오스킬 탈환 실패. 철수한다!”
계엄군은 남은 부상자들을 끌어안고 급히 철수를 개시했지만, 이미 퇴로마저 반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마지막 병사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동안에도 지뢰와 총격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현장에 투입된 5개 중대 중 무려 3개 중대가 완전히 전멸했다.
진격로는 다시 반군의 손에 떨어졌고, 오스킬 교차지점엔 팔콘네스트의 노란 깃발이 자랑스럽게 휘날렸다.
무모한 반격은 그렇게 끝났다.
다만 폐허 위에 남은 건 침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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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네라카 제7구역 – 내륙 보급기지 B-19, 임시 지휘통제실
팔콘네스트의 노란색 깃발 아래, 급히 구성된 보급기지 지휘통제실은 긴장감 속에서도 활기찬 분위기였다. 홀로그램 지도 위로 네라카 제7구역 남부 시가지 전체가 선명하게 떠올랐고, 분주히 움직이는 전투원과 지휘관들의 손끝에서 전략적 지점들이 하나하나 표기되고 있었다.
블랭크는 홀로그램 지도의 중앙에 서서 눈을 가늘게 뜬 채 구획을 살피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여전히 예리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레이나와, 팔콘네스트의 정보담당 참모가 서 있었다.
“상황 보고해.”
블랭크가 간결하게 말했다.
참모는 즉각 설명을 시작했다.
“보급기지에서 획득한 물자 덕분에 우리의 탄약과 식량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또한, 오스킬 방면에서의 승리 이후, 시민들의 참여도가 급격히 상승하여 시민군의 규모는 기존 대비 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지금 이 기지에서만 약 500명의 신규 시민군이 편성되었습니다.”
블랭크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군의 전체 전력은?”
“현재까지 집계된 병력은 팔콘네스트 정규 병력 500여 명에, 시민군이 약 1,000명, 지원병력까지 합쳐 총 2,000명을 넘겼습니다. 병력의 질적 수준은 여전히 한계가 있지만, 그만큼 도시에 익숙한 현지인들이 많아 시가지 내부에서의 전투와 봉기에는 큰 장점으로 작용할 겁니다.”
레이나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시민들이 단순히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고 있어요. 남부 시가지 내 지하조직과도 연결이 이루어졌고, 이미 우리와의 협조를 약속했습니다.”
블랭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지도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 이제 계획을 확정짓자. 남부 시가지 진입 작전이다.”
지도의 중심부에 남부 시가지가 확대되었고, 병력의 이동 경로와 침투 지점, 공격 예상 지점이 명확히 드러났다.
“이번엔 전면전이 아니다. 우리가 주력 병력을 동원해 시가지에 직접 타격을 주는 대신, 먼저 내부의 시민군이 계엄군과의 봉기를 일으키도록 한다. 시민군이 봉기를 통해 시가지 내 병력을 분산시키면, 우리는 그 틈을 타 진입로를 확보하고 주요 거점을 신속히 점령한다.”
정보담당 참모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시민군 리더들과의 협의를 통해 봉기 개시 시각과 신호, 작전 지점을 확정했습니다. 도심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시민들은 지정된 시간에 맞춰 경찰서, 주요 관공서, 교통 요지에 집중적으로 기습을 가하게 됩니다.”
레이나가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봉기가 시작되는 동시에, 우리의 주력 병력은 기갑과 보병을 투입해 주요 진입로를 뚫습니다. 이렇게 하면 계엄군은 내부 혼란과 외부 공격 사이에서 고립될 것이고, 실질적인 대응력을 잃게 됩니다.”
블랭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긴장감이 감도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적의 힘을 빼앗고, 시민들이 우리를 스스로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이 전투는 단순히 군사적 승리가 아니라, 공화국의 통제와 억압에 대한 진정한 저항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참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작전 성공 후엔 제7구역 전체의 통제권이 실질적으로 우리 손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7구역에서 3구역으로의 진입로도 열리고, 그때 총독부는 더 이상 우리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블랭크는 참모의 말을 듣고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이 싸움이 우리 전쟁의 진정한 전환점이 되겠군.”
그는 지도를 끄고, 지휘통제실에 있는 전투원들에게 최종 명령을 내렸다.
“남부 시가지 봉기 및 탈환 작전은 내일 정오, 정확히 12시에 시작한다. 모두 준비해라.”
순간, 통제실에 있던 모든 전투원과 참모들이 엄숙하게 경례를 붙였다.
“우리의 힘을 보여줄 시간이다.”
블랭크의 눈동자에 비장한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