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5

40화. 기억해

호문쿨루스의 움직임은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했다.

그저 그 눈빛에 영혼이 없을 뿐, 오히려 그 행동 하나하나는 인간보다 더 우아했다.

“안내하겠습니다.”

후예와 짝을 이룬 호문쿨루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문 너머로 이끌었다.

마침내 모든 후예가 문을 넘어섰고, 마지막 남은 호문쿨루스가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파닥파닥.

거대한 액자에 담긴 초상화가 호문쿨루스를 향해 날아왔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주르륵.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초상화가 호문쿨루스에게 상처 입은 몸을 치료해 달라며 몸을 비비었다.

호문쿨루스의 무감정한 눈빛에 이채가 서린 것은 그때였다.

“신기한 일이군요.”

검을 박아 넣으려 한 듯이 찍힌 상처였다.

이곳에서 검을 지닌 후예는 셋.

하지만 그 범인이 누군지는 굳이 따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무려 이천이 넘는 성좌의 마음을 얻어 낸 그 후예일 테니까.

어째서 초상화에 그런 짓을 했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어떻게 상처를 낼 수 있던 거죠?”

이 초상화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다.

신수(神獸).

엄연히 살아 있는 생물이며.

하찮은 인간 따위는 버틸 수 없는 성좌들의 기운에 적응한 종족.

즉, 이 신수는 화신조차 못된 인간 따위가 상처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괜히, 많은 성좌의 관심을 받은 것이 아닌가 보군요.”

물론, 이런 일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가 후예들이 이곳에 들릴 때는 한 번씩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마휼과 마하윤이 그랬다.

차이가 있다면 그 둘은 마법으로 초상화를 불태우려 했지만 실패했고.

마현은 성공했다는 점이다.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호문쿨루스의 손길이 피눈물을 흘리는 초상화를 쓰다듬었다.

다음 순간 그 상처는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졌다.

하지만.

“음?”

잔잔한 호수 같던 호문쿨루스의 표정에 미세한 파문이 일어난 건 그 순간이었다.

“뭐죠……?”

초상화를 바라보는 호문쿨루스의 눈에 의문이 가득했다.

마치, 이럴 수가 있나 싶은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힘이 줄었어?”

힘이 줄었으니까!

호문쿨루스의 고개가 저 멀리 사라져 가는 마현을 향해 빠르게 돌아갔다.

그러자 볼 수 있었다.

마현이.

씰룩.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을!

“…….”

멀어져 가는 마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호문쿨루스.

그 눈이 한차례 깜빡였고.

“흐음.”

다음 순간 호문쿨루스의 텅 빈 동공이 짙은 남색 빛으로 물들었다.

“마현이라…….”

제법.

“앙큼한 아이네.”

그 입꼬리가 어딘가 장난스럽게 말려 올라갔고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도저히 방금까지의 호문쿨루스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생기 가득한 모습이었다.

* * *

“이제부터 앞장서는 저희의 발자취를 그대로 밟아 주셔야 합니다.”

별자리 연회장으로 향하는 그 길은 호문쿨루스의 발걸음을 놓치면 다른 곳으로 도착하게 된다고 한다.

“제, 젠장…….”

“나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말 걸지 마. 집중해야 하니까.”

후예들은 때아닌 긴장에 휩싸인 채 호문쿨루스의 발자취를 좇았다.

원래라면 고작 발자국 따라 걷는 것 따위는 조금도 어렵지 않았을 터지만.

성좌들이 근처에 있는 곳이니 괜히 부담되어 불안감에 휩싸였다.

‘크윽…… 젠장!’

마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고작 발자국 따라 걷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다.

당연히 그딴 건 눈 감고도 따라 할 수 있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다.

‘절대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야 해.’

왜냐하면…….

이 짜릿한 기분을 드러내서는 안 되니까!

마현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실시간으로 구천의 문 앞에 놓인 영혼 존재가 느껴진다.

찬란하게 빛나는 영혼의 조각.

여태 봐온 것 중에서도 가장 작고 소중할 정도로 티끌에 불과하지만.

그 무엇보다 환하고 하얗게 빛나는 영혼의 파편이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꿀꺽.

바보라도 알 수 있다.

이 영혼을 흡수할 수만 있다면…….

구천마제 신공 3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걸!

씨, 씰룩.

‘제기랄 입꼬리가 통제가 안 돼!’

다가올 성장의 쾌감!

그 짜릿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음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크윽, 이래도 되는 건가?’

우선 확실하게 말하자면.

정말 실수였다.

진짜다.

저런 초상화 따위가 영혼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영안을 먼저 켜 볼 걸 그랬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입구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졌다.

저 멀리 자신들을 바라보는 호문쿨루스가 조그맣게 보일 정도다.

즉,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이럴 때 쓰는 말이었군.’

마현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리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구만.

피할 수 없다면.

씨익.

‘즐길 수밖에!’

편해지기 시작한 마음!

왠지 이런 기분 또한 중독될 것만 같았다.

마현은 그렇게 혹시 모를 암울한 미래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저 다가올 구천마제 신공 3성의 경지를 기대했다.

“음?”

마현이 시선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전과 달리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마현이 마가 일족 특유의 흑발 자안을 가진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마현으로부터 눈길을 거두었다.

‘……뭐, 할 말이 있으면 언젠가 하겠지.’

후예들이 호문쿨루스를 따라 거대한 문을 두 번 넘어섰을 무렵.

점차 익숙해지는 감각에, 처음에 부담을 느끼던 후예들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하지만 세 번째 관문을 넘고 네 번째 관문을 넘어서면서부터 그 인상이 점차 찌푸려졌다.

“나, 뭔가…… 숨이 막히는 기분이야.”

“이 압박감…… 뭔가 산을 오르는 기분인데?”

“후우…… 정신이 아찔해.”

점차 깊어지는 거대한 기운의 압박.

그 압력을 견디며 얼마나 더 걸었을까.

또다시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도착하였습니다. 이 문 너머가 별자리 연회장으로 통하는 대기실입니다.”

기나긴 행군의 끝을 알리는 그 말에 후예들이 기뻐하기도 전.

호문쿨루스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여러분들은 혼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하시길 바랍니다.”

“호, 혼……?”

그 께름칙한 말에 후예들은 순간 놀랐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신관 시험을 준비하면서 알 수 있었다.

별자리 연회에서 자칫 잘못하면, 성좌들의 기운에 의해 혼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물론, 성좌들이 의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성좌란 필멸자들과는 그 격이 다른 존재.

그 진체(眞體)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한낱 인간은 눈이 타게 되고.

만에 하나 진언(眞言)을 하는 순간 귀가 멀게 된다.

그토록 강성한 기운을 지닌 이들이니 보통 상징체를 통해 현현하지만.

그런데도 수천의 성좌가 모여 있기에 자연스레 필멸자가 감당할 수 없는 기운이 휘몰아쳤다.

“물론, 여러분들은 성공적으로……?”

순간 호문쿨루스의 말이 멈췄다가 이어졌다.

“천살동 시험을 견뎌 내셨기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

“…….”

천살동 시험…….

침을 삼키는 마가 일족들과.

눈치를 보는 가신 일족들.

어딘가 침체되는 분위기.

잠깐의 정적 후에 호문쿨루스는 조용히 문에 손을 얹었다.

“열겠습니다.”

쿠구궁―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린다.

후예들의 얼굴이 긴장감에 물든다.

그때였다.

휘이이잉―!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찬란한 빛줄기.

홍수처럼 밀려오는 알 수 없는 기운.

마치 태풍 앞에 선 것 같은 압도적인 기압에 후예들은 신묘한 경험을 했다.

깊은 바닷속 해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이다.

“으으……윽……!”

신음하는 후예들.

영혼이 흔들리며 몸의 통제권을 잃어 갔다.

안간힘을 쓰며 가까스로 쓰러지는 것만은 피하려 했다.

“이, 이 정도라니…….”

“과장이 아니었어!”

천살동 이상의 압력.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한 후예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뭐지……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건가?’

그 이상함의 근원을 향해 떨리는 몸을 붙들며 입을 열었다.

“마현 님은…… 괜찮나요?”

마현!

모두가 고통을 참으며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와중.

오직 그만이 다른 세상에 있는 듯이 초연한 모습이었다.

그 이상한 상황을 모두가 알아차린 것은 그때였고.

뒤늦게 그 눈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크게 뜨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마현도 마찬가지였다!

‘뭐지? 이 정도라고?’

시선을 돌리며 일족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문 너머로부터 몰아친 기운은 강렬했다.

무려 자신의 손이 가늘게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뿐.

“이게 어렵나?”

순수하게 의문이 들었다.

후예들이 이렇게나 힘들어하는 모습이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후예들에겐 다르게 들렸던 것일까.

“아아, 역시…….”

“과연……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건가.”

“하늘은 참 높구나…….”

후예들이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딘가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라는 듯이 코밑을 훑는 녀석도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그리고 자랑스럽네요.”

“역시 저는 마현 님의 미래가 궁금합니다.”

“…….”

반짝이는 가신 일족들의 눈빛.

괴물을 보는 듯한 마가 일족들의 시선.

마현은…….

‘뭐지.’

이러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니, 그 이유를 저들로부터 찾는 것은 잘못되었다.

‘분명 내가 달라서 생긴 문제겠지.’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내가 저 녀석들과 다른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영력.’

다만, 어째서 그런 걸까.

그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과 깊은 시각이 필요하리라.

후예들은 성좌들의 기운에 점차 적응할 수 있었다.

다행히 천살동과 달리 그 기운의 압력이 일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모든 후예가 제대로 바로 섰을 때 호문쿨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되셨습니까? 이제 별자리 연회의 세계로 발을 내딛으실 차례입니다.”

쿠구궁―

다시 열리기 시작하는 거대한 문.

이에 기운이 더욱 밀려왔지만.

더 이상 흔들릴 후예들이 아니었다.

“여기가 대기실?”

마치, 인간을 위한 공간인 양 그 규모가 백색 신전과 달리 평범한 크기의 신전이었다.

후예들은 자연스럽게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았고.

호문쿨루스 하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성좌 계약식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성좌 계약식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순서대로 호명될 거라는 것부터.

성좌들에게 갖춰야 할 예절과 식의 순서 등등 단순한 내용이 주였다.

“그럼, 첫 번째로…….”

호문쿨루스의 안내를 받으며 차례로 불려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 명, 또 한 명…… 점점 비어 가는 대기실.

남은 후예들의 눈빛이 점차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들에게는 이 짧은 대기 시간이 왜인지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야, 성좌 계약식까지 이제 정말 단 한 걸음만 남았으니까.

누군가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또 다른 이의 입술은 희미하게 떨렸다.

마음속에선 기대와 불안, 흥분과 두려움이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운명의 문턱 앞에 선 그들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대기실에 잔잔히 울렸다.

그런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마현은…….

‘크크크, 참 실하게 생겼군.’

밝게 빛나는 영혼의 조각을 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간다.

당장에라도 흡수하고 싶은 이 기분을 과연 누가 알 수 있을까.

아마 아무도 모를 터였다.

왜냐하면.

‘이 기분은 나만이 느낄 수 있으니까!’

크크크!

행복한 고민에 괜히 입꼬리가 씰룩이던 때였다.

“저기…….”

흑발 자안의 여인.

아까부터 시선을 보내 오던 녀석이다.

‘근데 이름이 뭐지?’

많고 많은 마가 일족이니 이름을 모를 수 있으나.

그럼에도 또래의 일족들은 대체로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독 그녀만큼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성좌와 계약까지 한 일족인데 기억에 없다라.’

이러면 둘 중 하나다.

정말 미칠 정도로 존재감이 없거나.

아니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죽었거나.’

그 시점은 아마 내가 구음절맥을 치료하고 헌터로서 살아가기 전일 지도 모른다.

뭐, 그런 건 하등 중요하지 않지만.

마현은 어딘가 낯을 가리는 것 같으면서도 눈빛을 밝게 빛내는 그녀에게 말했다.

“뭐.”

“저기, 마현…… 님.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마현…… 님?

마현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보통 같은 기수의 혈족 간에는 존대를 하지 않았으니까.

“말해.”

이에 그녀가 화색을 띄웠다.

“그, 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거지요?”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왕방울만 해진 눈망울이 반짝거렸고.

더듬는 말로써 무척이나 어렵게 용기를 냈음이 느껴졌다.

‘어떻게 강해졌냐고?’

마현은 지난 한 달간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나 많은 일이 있었나 싶었다.

‘분명한 건,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지.’

진무극과 천여령.

한라와 고동석.

그리고.

― 마혀어언 이 시이바알!

― 이 몸의 힘이…… 약해졌다고?!

― 이 녀석…… 강해지고 있어?!

이름 모를 많은 이들의 도움이 있었다.

“…….”

물론, 이런 것들을 물어본 것은 아닐 테지.

그건 그렇다 쳐도.

“좀 뜬금없지 않아?”

마현은 이 상황이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과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 너무 궁금해서…….”

사실, 그녀로서는 최선이었다.

사신관 일정이 완전히 종료된 후로는,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지금이 그나마 적기였다.

하물며 마현이 후계자로 낙점되면 어쩌면 영영 말도 못 섞어 볼 수 있었다.

물론, 용기를 낸 데에는 다른 마음도 있었다.

마현에 대한 소문을 모르는 마가 일족들은 없다.

쓰레기라는 둥, 나태하다는 둥, 술을 좋아한다는 둥.

그런 질 나쁜 소문이 파다했는데 막상 오늘 본 소감은.

‘다르다…….’

완전히 달랐으니까.

뭐랄까 사람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른 느낌?

이런 알 수 없는 점이 어딘가 자신을 끌어당겼다.

‘얘는 대체 뭘까?’

소문이 그렇게 날 정도인데, 어떻게 이렇게나 정반대일 수 있는 거지?

하물며 그 당찬 모습은 어떤가.

마기헌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봤다.

마재헌의 눈깔에 칼침을 박는 순간도 마찬가지.

그렇게 마현의 모습은 계속해서 그녀의 눈동자에 깊게 박혔고.

그것은 내면의 무언가를 자극했다.

그것이 무엇일지는 그녀 또한 잘 알지 못했으나.

마현의 대답을 들으면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답을 들으면.

‘한 발짝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가슴 속에 묻어 둔 그 소망에 조금의 가능성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용기를 내었다.

“흠, 그렇게 궁금해?”

마현이 어딘가 유해진 눈빛으로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말해 주려는 건가?!

“네, 네!”

그녀가 눈에 이채를 띄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영업 비밀이야.”

쓰레기 같은 농담이었다!

“아…….”

예상치 못한 충격.

싸늘하게 굳어 버린 그녀의 얼굴.

마현이 헛기침했다.

“농담이야. 표정 풀어.”

“그,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마현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하긴, 생각해 보니 나 같아도 말해 주기 어렵겠네.’

충격을 받은 머리는 금세 이성을 되찾았다.

강해지는 방법.

감정적으로 물어보았던 그 질문은 분명, 누군가에겐 평생을 두고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비밀일 터였다.

그런 방법을 이렇게 쉽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문제였다.

어쩌면 방법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겠네.

역대 최고 기재라 칭송받던 마하윤 님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기에 가능했을 수도 있으니까.

“후…….”

그녀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졌다.

남들에게 말 못 할 가슴에 얹힌 응어리가 욱신거렸다.

‘아빠…….’

그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자.

씁쓸하고 막막한 감정이 울컥거린다.

힘이 필요한 때이고 운 좋게 성좌와 계약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화신이 된다고 해서 모두가 백색 신전에서 봐온 그 화신들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은…….

‘어렵겠지…….’

대부분의 화신이 그러하듯, 머잖아 거대한 벽에 부딪혀 정체될 것을 예감했다.

그도 그럴 게 사신관 시험도 가까스로 통과한 자신이었으니까.

하물며 천살동 시험에서는 낙제까지 했다.

이는 곧 잠재력이 미비한 수준임을 의미했고.

가슴에 박힌 그 소망은 이룰 수 없을 것을 암시했다.

벌써부터 저 가까운 미래에 넘을 수 없는 벽이 보이는데 방법이 없다니.

‘막막하다…….’

숙여지는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마현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걱정인지는 모르겠는데.”

알고 싶지도 않다.

남의 불편한 사정 따위 들어 봤자 피곤하니까.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원할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막막할수록 생각하지 않는 게 편해.”

“…….”

“그냥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미 넘어서 있더라고.”

그녀의 고개가 스르륵 올라갔다.

곧 그녀는 마현과 그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강해지고 싶은 거지?”

“……네.”

“그럼 강해질 수 있어.”

마현은 믿었다.

생각은 단순할수록 강한 힘을 지닌다고.

그리고 그것이.

― 현아, 이거 하나만은 명심해.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 네가 하겠다고 마음먹는 그 순간이,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야.

“…….”

“이해가 안 가면 이해하지 마라.”

사람마다 체질이 다르듯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또한 다르다.

그녀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마현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눈빛이 조금은 달라졌다.

“……저, 그러면.”

“뭐.”

“저도 마현 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

마현의 눈동자에 그녀의 눈이 담겼다.

아까보다 더욱 밝아진 그 눈빛.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이다.

훗.

마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오랜만이군. 나와 결이 비슷한 녀석은…….’

잠시 망설임도 없이, 마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되겠냐.”

“네?!”

“그딴 마음가짐으론 될 것도 안 되지.”

조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는 순간.

바람은 멀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씨익.

“되겠다고 말해라.”

“되, 되겠다……?”

“그래, ‘되겠다’. 그 외의 다른 말은 필요 없어.”

마현의 그 단호한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되……겠다?’

두, 근.

격렬하게 요동치는 심장.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감정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마현을 볼 때마다 들썩이던 내면의 그것이 완전히 고개를 들었다.

‘되겠다…….’

샘솟는 기력에 그녀의 주먹이 강하게 쥐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호문쿨루스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저를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그녀의 차례.

이제 성좌 계약식을 치러야 한다.

“가라.”

마현의 짤막한 배웅.

그녀는 일어서서 호문쿨루스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우뚝.

고개를 돌려 마현을 보았다.

“마현 님, 아니…… 마현.”

씨익.

조금은 어색하지만, 그녀의 입가가 마현의 그것처럼 변했다.

“기억해. 나는 ‘마연화’야.”

멀어져 가는 마연화는 처음과 다른 분위기였고.

점차 그 걸음걸이마저 달라져 갔다.

‘그저, 기폭제가 필요했던 건가.’

고작 말 한마디에 이렇게 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그녀가 오늘까지 강해지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고.

자신과 결이 비슷한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

“흠…… 마연화라.”

피식.

‘외우기 쉬운 이름이군.’

마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호문쿨루스와 마연화가 대기실을 빠져나가고.

고양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때.

마현은 알 수 있었다.

방금 뭔가…….

‘엄청 오글거리지 않았나?’

뒤늦게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으며 솜털이 곤두섰다.

“…….”

거기에 조금은 꼰대 같기도 했던 것 같다.

곰곰이 생각하던 마현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맞네. 왠지 내 경험을 말해 주고 싶었어.’

인정할 수밖에 없군.

이래 봬도 인생 경험이 많은 선배이니.

괜히 의욕적인 마연화에 알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쩝.”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었던 마현이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분명한 건, 마연화에겐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이런 사소한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이런 기분도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뭔가 이 오싹오싹한 맛도 묘하게 중독될 것 같긴 하다.

익숙해질 수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대기실에 마현과 마기헌만이 남았을 때.

호문쿨루스 하나가 마현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제 당신의 차례입니다. 저를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마현의 차례.

“드디어 내 차례로군.”

마현은 가볍게 일어서며 호문쿨루스를 따라 걸었다.

그 눈빛이 전에 없이 밝게 빛났다.

곧 만날 그녀, 숭고한 달의 여인을 생각하니 그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피었다.

숭달여, 전에는 네가 먼저 나를 찾아왔지.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가 되겠군.’

왠지 조금 설레는 마음.

다시 시작되는 첫 만남에 심장이 뛰었다.

41화. 화신 쟁탈전

대기실 문 너머.

암흑 공간 속 회백색의 계단들이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퍼져 나가는 미로.

그 복잡한 미로를 호문쿨루스의 안내를 받아 통과하자 어두운 복도에 도착했다.

“저곳이 별자리 연회장인가.”

맞은편 입구로부터 찬란한 조명 빛이 새어 나온다.

척 봐도 알 수 있다.

저 너머에 수천의 성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숭달여, 그녀 또한 저기에 있다는 걸.

마현의 생각이 사실이라는 듯이,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그때였다.

[다음 후예가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곧 새로운 성좌 계약식이 진행될 것입니다.]

안내하던 호문쿨루스가 인사를 남겼다.

“저의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입구로 향하시면 성좌님들과 만나실 수 있습니다.”

“그래, 고마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마현의 입꼬리엔 설렘이 묻어 있었다.

마현은 호문쿨루스를 지났고.

저 빛나는 입구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음, 이건.’

연회장의 열기일까. 성좌의 기운일까.

입구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강렬해지는 기운.

짓눌리듯 어깨가 무거워지고 발걸음이 뻣뻣해져 갔다.

대기실 앞에서 견뎠던 기운과는 차원이 다른 밀도다.

수많은 후예들이 이 복도를 걸었고.

마치, 거대한 무언가의 손바닥 위에 얹어진 듯 자신이 하찮아지는 압박감에 일순간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씨익.

‘짜릿한데.’

마현은 움츠러지는 자세를 힘껏 반듯하게 세웠다.

크크, 이런 자극, 마음에 드는군.

적당한 긴장감은 느슨해진 정신을 탄력적으로 만들어 주는 법.

중요한 만남을 앞두고 때마침 필요했던 자극이었다.

어딘가 고혹적이고 고상한 목소리가 나의 머릿속에 울린 것은 그때였다.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음?’

이건 필멸자에게 해로운 진언(眞言)을 대신해.

성좌가 필멸자와 소통할 때 주로 사용하는 ‘성좌 메시지’였다.

그런데 나를 보고 있다라…….

‘어디서 보고 있는 거지?’

시험 동안,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수천의 별 무리는 백색 신전에 도달했을 때 이미 사라졌다.

하물며 이 어둠 속에는 빛이 새어 나오는 입구만이 존재할 뿐이니.

어디에서도 나를 보고 있다는 성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이곳이 수많은 성좌가 존재하는 별자리 연회장인 이상.

음습하고 이상한 성좌 하나둘 있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가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가 당신이 거짓과 불행의 시작점에 도달한 것을 환영합니다.]

그 음습하고 이상한 성좌의 메시지를 들은 마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거짓과 불행의 시작점 그리고 환영.’

얼핏 놀리는 듯한 메시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는 명백한 역설법으로.

성좌가 내게 전하는 경고라는 걸.

‘곧 있을 성좌 계약식은 내게 큰 악재가 될 수 있다는 건가.’

친절하기도 하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잘 안다.

이미 숭달여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니까.

숭배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성좌가 꼭 새하얀 존재는 아니라는 걸.

어쨌든, 중요한 건 다른 게 아니다.

이 성좌가 무슨 이유로 갑자기 내게 접근했는가니까.

‘물론, 그게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궁금한 건 아니었기에.

뚜벅뚜벅.

멈춰 섰던 마현의 발걸음이 다시금 나아갔다.

성좌의 말을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이다!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의 눈동자가 커집니다.]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가 이렇게 그냥 가는 게 맞냐고 묻습니다.]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은 당신이 방금 말뜻은 제대로 이해하긴 했는지 궁금해합니다.]

성좌는 당황했다.

성좌와 말도 못 섞어 봤을 일개 필멸자 따위가 절대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가 자신이 당신에게 접근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냐고 묻습니다.]

이유?

훗, 궁금하지 않다.

보나 마나 흥미가 돋았다니 뭐니 하는 소리일 테니까.

그러니 내가 할 말은 정해져 있다.

“관심 없어.”

왜냐하면.

씨익.

“내 성좌는 이미 정했으니까!”

잠재적 품절남.

그게 나다.

그렇게 마현은 입구 너머로 사라졌다.

파아앗!

그렇게 복도에 아무도 남지 않았을 때.

“…….”

사라지는 마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호문쿨루스가 조용히 몸을 돌렸다.

……피식.

“앙칼지기까지 하네.”

[성좌 ‘영원의 꽃을 주조하는 왕녀’가 과연 그 성좌가 누구일지 궁금해합니다.]

남색 눈동자를 지닌 그 호문쿨루스의 입가에 호기심 가득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파아앗!

마현이 새하얀 빛의 입구를 넘어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숨 막힐 정도로 장엄했다.

끝없이 높아 보이는 밤하늘을 향해.

거대한 피라미드 형태로 층층이 쌓아 올린 옥좌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각 옥좌에는 빛나는 성좌의 상징체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가 별자리 연회.”

필멸자의 투쟁을 지켜보는 축제.

그 격을 달리하는 존재들이 수천이나 자리한 곳이다.

나의 입장을 인식한 듯 몇몇 상징체의 휘광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이번 성좌 계약식 대상자는 ‘마현’입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상징체의 빛이 한 점으로 집중되었다.

성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해 모이는 것이다.

스포트라이트처럼.

‘큭, 눈이 부시는군.’

격렬한 눈뽕에 절로 눈이 부셨다.

하지만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성좌 ‘천둥 포효의 맹장’이 당신의 등장에 괄괄하게 웃습니다.]

[성좌 ‘고독한 왕관을 짊어진 자’가 흡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성좌 ‘신세계의 문을 연 항해사’가 야욕을 드러냅니다.]

[성좌 ‘초원을 삼킨 늑대’가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합니다.]

[성좌 ‘번개를 길들인 고독’이 당신에게 찬사를…….]

[성좌 ‘잊혀진 위대한 스승’이…….]

[성좌 ‘불을 훔친 반역자’가…….]

.

.

.

쏟아지는 무수한 악수 요청!

성좌들의 메시지가 폭발했다!

‘이 무슨……!’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메시지에.

정신 공격에 휘말린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큭, 완전 테러가 따로 없군.’

그 끊이지 않는 메시지 테러는 정신을 마구 휘저었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려 해도 차릴 수가 없었다.

[성좌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가 당신의 기개에…….]

[성좌 ‘한 달에 한 번 오는 자’가 흡족한…….]

[성좌 ‘은둔한……’.]

살면서 한순간에 이렇게 많은 메시지를 받아 보기는 처음이다.

누가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마음 한편에선 조금 신경질적인 짜증이 솟구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불쾌한 상황과 달리.

……훗.

마현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놈들은 누군가에게 신처럼 모셔지는 작자들이다.

그런 놈들이 이렇게나 나를 원한다니.

이거 조금…….

씨익.

‘재밌는데!’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듯.

나의 등장에 불빛을 마구 깜빡이며 시선을 끌려는 성좌들!

그 어딘가 역전된 듯한 관계에 마현은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그럼에도 고통스러운 상황이기에.

마현은 여전히 휘청거리고 있었지만.

그러기도 잠시.

처억―

숨을 깊게 들이마신 마현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바로 잡혀가기 시작하는 몸의 균형.

천천히 중심을 되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크크.

다시는 겪지 못할 순간이다.

한심하게 주저앉을 수는 없겠지!

마침내 당당하게 우뚝 선 마현.

어딘가 일그러졌던 얼굴은 여유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마현이 성좌들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성좌 ‘천계의 수감자’가 눈웃음을 짓습니다.]

[성좌 ‘발할라의 황태자’가 당신을 인정합니다!]

[성좌 ‘붉은 머리 외팔 검객’이 당신의 패기에…….]

.

.

.

재차 폭주하는 성좌들의 메시지!

눈앞에서 달라진 필멸자의 기백에 흥분한 성좌들이 메시지를 남발하는 것이다.

처음보다 거세진 그 반응에 하찮은 필멸자는 졸도해도 이상하지 않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마현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크크, 시끄럽구만.’

오히려 끄떡없다는 듯이 무대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메시지 테러에 적응을 마친 것이다.

물론, 여전히 누가 뭐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차피 알 수 없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연회의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었을 무렵.

사회를 보는 호문쿨루스가 성좌 계약식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예비 화신 대상자, 마현은 지금부터 성좌님들에게 예를 갖추어…….”

대기실에서 미리 숙지했던 그 순서대로다.

마현은 차분하게 사회자의 말을 따르며 그 눈을 빛냈다.

옥좌의 상징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이다.

‘과연, 많기도 하군.’

그럼에도 시선을 끄는 존재들은 따로 있다.

상층의 옥좌에 자리한 격이 높은 성좌들.

상징체임에도 그 크기가 자신을 넘어섰다.

무엇보다 그들의 휘광이 눈부실 정도로 밝아, 격이 낮은 것들은 자연스럽게 빛에 가려졌다.

반면, 격이 낮은 아래층의 상징체들은 하나같이 그 크기가 손바닥만 했고 은은하게 빛났다.

그 상징체의 형상 또한 불완전한지 인형처럼 인공적인 형태였다.

이에 마현의 눈가에 힘이 들어갔다.

저 작은 성좌들의 틈바구니에 있을 한 성좌를 찾기 위해서.

‘숭달여가 저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녀가 처음부터 대단한 성좌는 아니었다.

오히려 재능이 넘치는 이들이라면 계약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작디작은 성좌였다.

나와 함께하면서 그 위상을 저 꼭대기에 가깝게 성장시켰지만.

아무튼, 지금은 손바닥보다도 작을 터였다.

‘설마 지금은 그때보다 더 작은 건가?’

그렇다면 손가락 마디만 할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재밌겠군.’

그렇게 사회자에 의해 식이 진행되는 동안.

마현은 어딘가에 있을 숭달여를 찾으려 했다.

그때였다.

‘뭔가 이상하군.’

작디작은 숭달여를 찾기 위해 눈에 힘을 준 덕분일까.

마현의 눈에 상징체들 사이에서 심상찮은 기류가 포착됐다.

후끈 달아오른 열기지만.

처음 자신을 반길 때와는 사뭇 다르다.

그때는 반가움에 과열된 느낌이었다면.

‘성좌들이 들썩이고 있어?’

움찔. 들썩.

안절부절못하는 상징체들.

지고하며 격이 다른 존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다.

저들의 휘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빛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격수의 레이저 포인트처럼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이 분위기 뭐지.’

군침을 흘리는 듯이 부르르 떠는 파수견 형상의 상징체.

튀어 오르려는 듯이 그 몸을 잔뜩 수축한 뱀 형상의 상징체.

왜인지 목을 풀고 있는 원숭이 형상의 상징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대기실에서 만난 호문쿨루스가 말하길.

성좌 하나하나와 천천히 ‘품격 있는’ 계약 제안식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째선지 성좌들 사이에서 뜨겁고도 초조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사냥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이는 정답이었다.

마현의 생각대로 성좌들은 전력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일반적으로 성좌란 화신에게 힘을 주는 존재이나.

화신이 성장하면, 시스템에 의해 성좌 역시 수혜를 받는다.

비유하자면 성좌란 일종의 투자자이며.

화신은 투자금을 굴리는 존재.

즉, 이 성좌 계약식에서 마현이란…….

성좌에게 있어 놓쳐선 안 될 천금 같은 기회인 것이다!

하물며.

[현재 2,173명의 성좌가 관심을 보입니다.]

경쟁률 2,173:1의 초희귀 매물이기까지 했으니.

놓치기 싫어하는 수천의 성좌들은 만반의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구석의 허름한 옥좌에 자리한 성좌가 있었다.

‘검은 달’의 형상을 한 상징체.

마현에게 최초로 관심을 보였던 그 성좌는 이번 성좌 계약식에서 ‘번호표 1번’을 가졌다.

하지만 무언가 심상찮은 분위기에 주변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주변을 살핍니다.]

[성좌 ‘초원을 삼킨 늑대’가 웃으며 말에 올라탑니다.]

[성좌 ‘용암과 철의 제왕’이 강철의 날개를 장착합니다.]

[성좌 ‘영원한 겨울의 수호자’가 불가해한 마법을 준비합니다.]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자신이 첫 번째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좌 ‘신세계의 문을 연 항해사’가 다른 성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눕니다.]

[성좌 ‘금단의 과실을 훔친 여인’이 가지지 못한다면 부…….]

[성좌 ‘한 달에 한 번 오는 자’가 자신의 것이라…….]

.

.

.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

.

.

[성좌 ‘숭고한 달……’!]

.

.

.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절망에 빠집니다.]

그렇게 ‘검은 달’은 하얗게 질렸다.

알아차린 것이다.

더 이상 차례로 진행되는 품격 있는 ‘성좌 계약식’이 아닌.

질서 따윈 존재하지 않는 ‘화신 쟁탈전’이 되었다는 사실을!

[성좌 ‘한 달에 한 번 오는 자’가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한 무례한 성좌가 옥좌에서 뛰어내린 순간이었다.

우르르르!

뒤따라 쏟아져 내리는 상징체들!

수천의 상징체가 마현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보다 빠르게 마현과 계약하기 위해서!

42화. 격 떨어져 보이니까

성좌의 세계에서는 ‘격’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격이란 인간으로 따지면 돈, 명예, 힘, 권력, 생명 등을 아우르는 총체적 가치이며.

성좌는 화신의 성장을 통해 그 격을 유지하고 성장시킬 수 있다.

즉, 잠재력이 높은 화신.

그것도 마현처럼 전무후무한 자질을 지닌 인간은.

성좌에게 있어 운명을 뒤바꿀 천재일우의 기회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성좌 계약식 같은 사소한 질서는 중요하지 않다.

가만히 죽치고 차례를 기다리다 멍하니 저 아이를 놓치라고?

운명이 바뀔 이 순간을 그렇게 허무하게?

어림없는 소리!

오직, 화신 쟁탈전으로 쟁취할 뿐이다.

기회란 도전하는 자의 것이니까!

그리고 나.

천둥을 품은 곰.

‘오늘 같은 날만을 기다려 왔다.’

뇌기가 흐르는 곰 인형 상징체.

그 성좌는 화신 쟁탈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는 잘 알고 있다.

속도.

마현, 저 아이에게 가능한 빠르게 도달하는 것이다.

계약 제안은 신체 접촉으로 진행되니까.

앞서 마하윤과 그레이 등등 몇 번의 화신 쟁탈전에서 허무하게 기회를 날려 본 나다.

이날을 대비해 최고의 전략을 구상해 왔다.

‘즉, 더 이상의 실패는 없다!’

콰광!

그 곰 인형이 질주하자 일대에 천둥이 터져나갔다.

천둥을 품은 곰이란 수식어답게 주변의 성좌를 마비시키며.

스킬로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을 구사했다.

물론, 상징체로 발휘하는 힘 따위.

본래 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가소롭다

‘상관없다.’

파지직!

[크억! 이 빌어먹을 미물 따위가!]

‘이놈들도 상징체니까!’

원래라면 눈도 마주치지 못할 성좌들.

하지만 지금은 기존의 격차가 무의미하다.

상징체가 된 이상 다 거기서 거기니까!

천둥곰 성좌의 질주는 계속됐다.

쾅! 파지직! 퍼벙!

낙뢰를 떨구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치워 냈다.

어느새 최선두를 달렸고.

눈앞에 마현이 있는 단상이 보였다.

더 이상 자신을 방해할 성좌는 없는 것이다!

‘크흐흐, 드디어 나에게도 봄이 오는가!’

얼마나 지긋지긋한 나날이었던가.

동물로 태어나 성좌가 되었건만.

성좌의 세계는 차별주의가 만연한 세상이었다!

짐승 출신이라는 이유로 천대받고.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받았다.

곰이라서 툭하면 우둔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오늘로 끝이다.

‘이 몸이 저 아이를 가질 테니까!’

크크, 두고 봐라. 나를 비웃던 네놈들.

이 천둥을 품은 곰 님이 반드시 갚아 줄 테니!

천둥곰의 눈동자에서 뇌기가 파직 거렸다.

벌써부터 마현을 쟁취한 듯.

머잖은 미래에 자신을 멸시한 그 성좌들을 박살 내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이대로만 가면 자신이 첫 번째로 계약을 제안할 수 있었으니까.

물론, 계약이란 상호 동의하에 진행되는 것이 원칙.

이런 상식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물며, 자신은 상징체가 인형일 정도로 격이 낮은 성좌.

주제 파악을 하자면 저런 불세출의 천재와는 계약이 가능할 리가 없다.

하지만.

씨익.

‘생물이란 생체 전기 신호를 통해 움직이지.’

그리고 이 몸은 뇌격계 성좌.

크크, 맞다.

나는 마현의 신체를 조작해 강제로 화신으로 만들 셈인 거다!

어차피 계약만 된다면.

해지는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환하게 웃습니다.]

파지직! 콰광!

천둥, 번개가 터지자.

곰 인형의 표정이 창백하게 드러났다.

귀여운 얼굴 속에 어딘가 음흉한 구석이 있었다.

불쌍하지 않냐고?

어차피 난 짐승이다.

내가 왜 인간의 마음 따위를 신경 써야 하지?

그리고 나 정도 성좌라면 마현에게도 제법 괜찮을 거다.

비록 그 격이 낮지만.

훌륭한 뇌격 스킬을 줄 수 있으니까!

머잖아 마현도 언젠가 이를 알아주겠지.

‘클클, 뭐. 몰라도 상관없지만.’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반갑게 인사합니다.]

마침내 천둥곰은 마현의 앞에 섰다.

인기척을 느낀 마현이 고개를 내렸고.

마침내 자신과 마현의 시선이 교차했다.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한번 읽어 보면 좋은 계약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남은 건 계약 제안뿐.

마현이 계약서를 확인하는 순간,

저항할 새도 없이, 강제로 [계약 수락]을 선택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토옥―

마현과 접촉했다.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계약 제안을 요청합니다.]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까?]

[확인][거절]

‘크하하! 마현, 이제 너는 내 것이다!’

하지만.

[거절되었습니다.]

천둥곰은 바짝 굳어 버렸다.

지금 설마…….

‘계약서를 확인조차 안 한 건가?!’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당황합니다.]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실수인 거냐고 묻습니다.]

믿을 수 없다.

도저히 실수가 아니고서야.

감히 한낱 필멸자 따위가, 하늘 같은 성좌에게 할 수 있는 짓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마현은.

아무렇지 않게 선을 넘었다.

“크크, 실수?”

피식.

“내가 짐승 따위랑 계약할 리가 없잖아.”

차갑게 내리꽂히는 마현의 시선.

하지만 그마저도 관심 없다는 듯이 바로 거두어졌다.

당하고도 믿기지 않는 냉대였다.

이, 이 무슨……!

무례하다!

무엄하다!

이 몸은 하찮은 필멸자 따위에 무시당할 성좌가 아니란 말이다!

치욕스러움에 곰 인형의 상징체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파지지직!

끌어 오르는 뇌기.

어떻게든 이 무지몽매한 쓰레기에게 일침을 가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분노를……!]

하지만.

‘크억!’

자신의 상징체를 우악스럽게 끌어당기는 놈이 있었다.

아니, 놈들이 있었다!

[미개한 짐승은 빠져라!]

[역시 곰은 우둔하기 짝이 없군요. 당신 따위가 될 거라 생각했나요?]

[주제를 알아라, 무식한 놈.]

[쑥이나 처먹어.]

뒤따라온 성좌들의 상징체가 물밀듯이 밀려왔고.

방해되는 천둥곰을 거칠게 밀쳐냈다.

순식간에 공중으로 던져지는 천둥곰.

그 순간 천둥곰은 보았다.

광기 어린 군중의 맹진을.

그 앞으로 떨어지는 자신을!

철푸덕.

[어……?]

쓰러진 천둥곰이 몸을 가눌 새도 없었다.

이대로면 마구 짓밟히고 말 터였다.

하지만.

그딴 걸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코앞에 마현이 있는데.

고작 짐승 따위에 신경 쓰라고?

[으, 으아아악!]

어림없는 소리!

우르르!

쿵쾅쿵쾅!

수천의 발바닥에 잔인하게 짓밟히는 천둥곰.

상처 입은 곰인형 상징체가 점차 흐릿해져 갔다.

한계 이상의 충격으로 상징체가 소실되는 것이다.

[성좌 ‘천둥을 품은 곰’이 쓸쓸히 퇴장합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연회장의 관심은 오직 마현이었다.

어떻게든 마현에게 계약을 제안하기 위해 혈안일 뿐이었다.

이미 수십의 성좌들이 마현에 매달렸고.

더는 신체를 접촉할 틈이 없자 성좌들은 마치 탑을 쌓듯 서로를 밟고 올랐다.

[성좌 ‘보물고의 악마’가 계약 제안을 요청합니다.]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까?]

[성좌 ‘잠자는 숲속의 고룡’이 계약 제안을 요청합니다.]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까?]

[성좌 ‘밤하늘의 찬탈자’가 계약 제안을 요청합니다.]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까?]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까?]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까?]

[계약서를 확인하겠습니까?]

.

.

.

계약 제안을 요청한 상징체의 휘광이 찬란하게 빛났다.

기대와 설렘이 묻어나오는 그 빛깔은 마현의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해 더 열렬히 빛났다.

[나를 보아라 마현!]

[나다! 오직 나만이 너를 정상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여기 내 손을 잡아라! 너에게 천하를 약속하겠다!]

야심 찬 그 말로써 그들이 얼마나 진심인지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거절되었습니다.]

[거절되었습니다.]

[거절되었습니다.]

[거절되었습니다.]

[거절되었습니다.]

[거절되었습니다.]

.

.

.

[다수의 성좌가 경악합니다.]

성좌들은 믿을 수 없었다.

천둥곰 때와 마찬가지로.

계약서를 확인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어떠한 필멸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던 그 태도.

수많은 성좌가 벙찌고 말았다.

[이, 이 무슨 파렴치한……!]

[아무리 인기가 많다고 해도 이런 건……!]

[받아 놨다가, 나중에 확인해도 되는 게 아닌가!]

[무엄하도다!]

분노에 찬 아우성이 연이어 터졌다.

하지만 그런 외침도 마현을 바라는 수많은 성좌의 목소리에 파묻힐 뿐이었다.

그때였다.

[이, 이 녀석 좀 보게!]

한 성좌의 외침.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척 당혹스러운 말투였다.

그 말을 시작으로 성좌들은 마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듯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냐하면.

마현이.

씨익.

천하를 우롱하고 있었으니까!

[거절합니다.]

[거절합니다.]

[거절합니다.]

.

.

.

마현의 입꼬리가 내려갈 줄을 몰랐다.

‘크크, 그야 그럴 수밖에.’

누구라도 이 상황에선 나처럼 될 수밖에 없다.

이 지고하다는 존재들이.

이렇게 작고 연약한 상징체로 현현했다.

그런 모습으로 득달같이 엉겨 붙기까지 하니.

이러면 누구라도.

‘하늘 위에 선 기분이 아니겠는가!’

마현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아, 물론, 감사하고 있다.

너무 고맙지.

나의 가치를 인정하고 알아봐 주다니.

회귀를 해 본 입장에선 그게 얼마나 가치 있고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다.

또한, 성좌님들의 계약 제안이, 인간들 간의 계약과는 비교 불가할 정도로 중대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누군가는 막무가내로 거절하는 내가 못마땅하겠지.

하지만.

‘나도 퇴근해야지.’

수천 건의 계약 제안을 하나하나 읽으면 나는 언제 집에 가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신관의 사람들도 신경 써야 한다.

그리고 어차피 계약할 것도 아닌데.

여지없이 자르는 것이 맞지 않겠나.

그러니.

‘기쁜 마음으로 거절할 수밖에!’

거절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거절합니다.]

[거절합니다.]

[거절합니다.]

.

.

.

마현의 거절은 초속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계약 제안이 쇄도했다.

팽팽한 싸움.

이변이 발생한 것은 그때였다.

쿠구궁―

연회장 전체를 짓누르는 듯한 압력.

압도적인 존재감에 마현의 오감이 곤두섰다.

돌풍처럼 쇄도하는 강력한 기운에 엉겨 붙은 상징체들이 날아가 버렸다.

‘드디어 오는가.’

마현의 고개가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여섯 쌍의 날개와 새하얀 콧수염을 지닌 성좌.

황금 나뭇가지 왕관과 연초록 비단 드레스를 입은 성좌.

그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적금빛 눈동자의 개 머리 성좌.

하늘 끝의 옥좌에 자리했던 세 성좌였다.

그 상징체는 다른 성좌의 것과는 달리 살아 숨 쉬었고, 크기 또한 자신의 키를 넘어섰다.

상징체만으로도 이런 위엄을 줄 수 있다니.

성좌로서 그 격이 아득히 높은 존재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가슴팍에 달린 엠블럼.

이는 성운을 상징했다.

마현은 알고 있다.

‘저 녀석들은.’

한 성운의 운명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로.

성운 내에서도 특히 영향력이 높은 최상급 대성좌라는 걸.

또한 그 성운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천상.

생명의 나무.

지옥.

셀 수 없이 많은 성운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강한 성운이 존재한다.

천상은 현시점에서 강한 화신들이 가장 많이 모인 성운이며.

생명의 나무는 빛과 자연을 다루는 화신들에게 최고의 성운이다.

그리고 지옥은…….

어둠과 저주에 특화된 화신들에게 있어 암흑 성운과 쌍벽을 이루는 성운이었다.

마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암흑 성운은 없는 건가.’

마가의 별자리 연회이건만.

암흑 성운의 대성좌가 없다라.

‘아무래도 그 말이 사실인가 보군.’

암흑 성운의 대성좌가 나의 어머니와의 계약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는 것.

실제로 그 성좌의 행방은 전생 내내, 내 귀에 들리는 일이 없었다.

뭐, 아무튼 지금은 저 녀석들이다.

세 성좌가 지상에 다다르자, 모세의 기적처럼 성좌들이 길을 열었다.

어느 순간 생겨난 레드 카펫.

그 위로 녀석들이 걸어왔다.

점점 그 거리가 가까워지자.

휘광의 빛에 가려졌던 녀석들의 얼굴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다 아는 놈들이군.’

천상의 성좌의 수식언은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다.

그 수식언처럼 지상에 강림하자마자.

체통을 지키지 않은 수천의 성좌들을 단박에 꾸짖고 있었다.

[성좌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가 성좌들을 향해 눈을 부라립니다.]

[성좌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가 단호하게 성좌들을 규탄합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시무룩해집니다.]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 수 없지만.

꽤 심한 말을 하는 모양이지?

아무튼, 저 녀석과 연결된다면.

어쩌면 그레이. 그 자식과 빠르게 만날 수도 있겠군.

같은 성운의 소속이니까.

마현의 시선이 금빛 나뭇가지 왕관을 두른 여인으로 향했다.

빛과 자연의 힘을 다루는 화신들에게 있어 최고로 꼽히는 성운, 생명의 나무.

그곳의 대성좌 ‘봄을 지키는 엘프’다.

[성좌 ‘봄을 지키는 엘프’가 살며시 미소 짓습니다.]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짓는 그녀.

그러나 마현에게는 의문이었다.

‘어째서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생명의 나무 소속 성좌는 마가 일족과 대대로 정반대의 상성이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기까지 한다.

이러면 나는 물론이고 그녀 역시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무슨 의도인지는 잘은 모르겠지만.

‘걸러야겠군.’

어차피 거를 거지만.

확실히 거르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서 이놈을 보게 될 줄이야.’

뚜벅뚜벅.

정제된 구둣발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

불꽃과 황금의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는 개 머리 성좌가 다가왔다.

셋 중에서도 가장 잘 알고 있는 성좌다.

이 성좌의 수식언은 ‘몰살의 황태자’.

전생에 마기헌의 성좌였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참 많은 일이 있었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역겨운 기억들이 금방이라도 고개를 들려고 했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반듯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 지옥의 성좌.

하지만 그 시선만큼은 여전히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기다리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합니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자신들은 당신의 기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고 합니다.]

날렵하게 올라가는 녀석의 입꼬리.

그 확신에 찬 미소가 마치 내게 직접 말하는 것만 같았다.

[기다리던 우리가 드디어 왔노라.]

이제 그 하찮은 성좌들이 너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중에서 선택하라. 네 운명을 함께할 자를.]

마현이 몰살의 황태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번뜩이는 금빛, 타오르는 불빛.

눈동자에서 짙은 야망과 탐욕이 휘몰아쳤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눈웃음을 짓습니다.]

다음 순간 녀석이 나를 향해 손을 뻗었고.

촤르륵―

손바닥 위로 빛나는 계약서가 생겨났다.

나머지 두 성좌도 마찬가지.

특별한 계약서라는 듯, 성운의 인장으로 봉인된 계약서였다.

과연 대성좌급에 이른 녀석들이니 계약 제안의 방식도 다른 것이다.

허공에 떠오른 세 개의 계약서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그리고

세 성좌가 동시에 속삭였다.

[성좌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가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성좌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가 자신의 힘으로 당신의 운명을 이끌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성좌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는 마현에게 강력한 힘과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라…….’

성운 단위에서의 지원은 어려운가 보군.

이미 그레이가 있으니 그런가?

[성좌 ‘봄을 지키는 엘프’가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성좌 ‘봄을 지키는 엘프’가 두 성좌보다 뛰어난 계약 조건을 약속합니다.]

성좌 ‘봄을 지키는 엘프’는 마현에게 두 성좌보다 더 좋은 조건을 약속했다.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성좌.

그 모습에 마현은 고개가 기울었다.

‘이 새끼 뭐지.’

의도를 전혀 알 수 없다.

나와 정반대의 상성.

서로에게 득이 될 게 없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마현은 걸러 버렸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에게 속삭입니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성운과 자신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합니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는 마현에게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약속했다.

‘호오…… 성운과 자신의 전폭적인 지원이라.’

누구라도 혹할 수밖에 없는 약속의 제안.

‘몰살의 황태자’는 자신 있어 보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지옥은 대단히 큰 성운이다.

그런 성운에서 전력으로 지원한다는 건.

앞으로 있을 탑 등반과 게이트에서 상상할 수 없는 편의성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상성도 잘 맞지.’

지옥 성운 자체가 암흑 성운과 그 결이 같으니.

몰살의 황태자 역시 마가 혈통과 궁합이 잘 맞는다.

놈의 속성이며 알려 줄 수 있는 스킬은 분명 나와 잘 어울릴 터였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거절할 수 없을 제안이라고 확신합니다.]

더욱 진하게 빛나는 그 눈동자.

녀석이 이렇게 나올 정도니 조금 궁금해진다.

하긴, 내가 직접 본 적 있는 계약서는 숭달여의 것뿐이었으니.

다른 것도 살펴볼까?

그래야 다른 화신들이 어떤 계약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손을 뻗어 몰살의 황태자의 계약서를 펼쳐보았다.

그 순간 시스템창으로 계약서가 나타났다.

[성좌 화신 계약서]

본 계약은 성좌 ‘몰살의 황태자’(이하 “갑”)와 화신 마현(이하 “을”) 간에 체결됩니다.

제1조(목적)

본 계약은 갑과 을의 상호 이익 증진과 지옥 성운의 번영을 위한 협력 관계 구축을 목적으로 합니다.

제2조(권리)

을은 다음과 같은 권리를…….

.

.

.

처음 보는 다른 성좌와의 계약서 속 수두룩 빽빽한 조항들.

그 속에서 마침내 녀석이 제시한 조건이 눈에 들어왔다.

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

계약서에는 참 다양한 조건이 있었다.

요컨대, 내게 무엇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 보자면.

· 전체 능력치 30 증가.

· 비전 스킬의 전수.

· 전용 무구를 대여.

전체 능력치 30.

어딘가 평범해 보일지라도 그 격이 다르다.

그 어떤 성좌도 이렇게나 많은 능력치를 약속했다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능력치를 줄 수 없는 성좌가 많다는 걸 생각하면.

확실히 한순간에 엄청나게 강해질 수 있게 해 주려는 것이다.

스킬도 비전 스킬이다.

어중간한 스킬이 아닌, ‘몰살의 황태자’가 갈고닦아 온 마법.

암천 마가에서 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터다.

전용 무구 역시 말하면 입 아프겠지.

급으로 따지면 특급이라 불리는 무구들이니까.

즉, 계약만 하면, 지금 수준에서 단번에 두 배는 강해진다.

거기에.

· 지옥 대표 화신 임명.

· 지옥 성운 전용 차원 입장권.

· 지옥 성운 주체 대회에서 가산점.

.

.

.

셀 수 없이 많은 성운 단위에서 지원하는 복지.

다양한 말로 꾸며져 있지만.

요점은 하나다.

앞으로 나의 성장을 책임지겠다는 것.

‘아주 밀어주겠다는 거지.’

과연, 의심할 여지가 없이 최고의 계약 조항들이다.

녀석과 손을 잡는다면.

복수도 한결 수월해질 게 분명하겠지.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만을 위한 특별한 계약서라고 합니다.]

녀석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마음에 드냐는 듯이 눈썹도 슬쩍 치켜 올라갔다.

‘과연 내게 진심이란 건 알겠군.’

아주 나를 위한 계약처럼 보일 정도니까.

하지만 늘 그렇듯.

계약이란 한쪽만 이득 보는 법이 없다.

반드시.

‘대가가 있는 법이지.’

계약서의 아래로 시선이 내려가자.

그곳에 있었다.

제6조(의무 및 대가)

계약자는 다음과 같은 의무를 지닙니다.

의무와 대가.

화신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

조항을 읽는 마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 을이 사망 시, 그 영혼은 갑에 귀속된다.

· 을이 허락한 신체 일부에 갑이 현현할 권리를 갖는다.

· 갑의 적은 을의 적으로 간주한다. 을은 갑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처음 계약하는 이들에게 추상적으로 와닿을 것 같은 조항들.

화신으로서 그 목적을 알기 어려운 조항들이 몇 개 있었다.

‘진짜로 이런 조항이 있었군.’

숭달여와 계약했을 당시에는 볼 수 없던 조항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조항들이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계약서에 포함된 내용이라고 들어서 알고 있다.

내려가던 마현의 시선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 화신 성장률의 2:8만큼 이익을 분배한다.

‘흐음, 내 성장률의 20%를 가져간다라.’

성좌들이 제 격을 유지하거나 높이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일반적으로는 화신이 탑을 등반하거나 게이트를 토벌하는 등,

시스템적으로 공을 세웠을 경우이고.

지금처럼 화신의 성장치를 흡수하는 경우다.

즉, 막대한 힘을 제공하고 지원하는 대가로. 파생되는 부가 이익을 챙기는 것.

성장을 돕는 대가로, 성장치의 일부를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화신 계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조항이긴 한데.’

어찌 보면 당연하고 흔한 조항이다.

이 성좌―화신 계약은, 결국 성좌가 화신에게 투자하는 행위니까.

그리고 4:6 비율이 일반적이란 걸 생각해 보면.

오히려 많이 양보했다는 것 또한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더 읽어 볼 필요도 없겠어.’

전생에 탑의 정상에 올랐던 나다.

이미 한 번 걸었던 길.

두 번 걷는 게 어려울까?

그리고 검귀의 힘으로 더 쉽고 빠르게 강해질 수 있는 나다.

앞으로 성장할 능력치는 나조차도 가늠하기 어려운데.

그런 내 미래의 20%라…….

피식.

‘빨리 보고 싶구먼. 숭달여.’

* * *

피식 웃는 마현.

그 웃음이 몰살의 황태자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씨익 웃습니다.]

그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갔고.

확신에 찬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크크크, 마음에 들 수밖에 없을 거다.’

그 계약서는 말 그대로 특별 계약서.

오직 네놈만을 위한 배려로 가득하지.

그만큼 마음에 드는 아이다.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걸었다.

그 어떤 화신들도 자신에게서 이런 계약서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무려, 대표 화신 자리까지 뜯어냈지.’

지옥 성운의 놈들에게서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마현을 위해 기존의 대표 화신 자리를 치워 버리라고 말이다.

그만큼 공을 들였다.

반드시 이 아이를 취하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마현이 결정을 내리려 했다.

[크크크, 그래 나다! 이 내가 네 녀석의 성좌다!]

그렇게.

[거절되었습니다.]

거절되었다.

[……뭐?]

몰살의 황태자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한데, 자신만이 아니었다.

[거절되었습니다.]

[거절되었습니다.]

나머지 둘도 마찬가지.

[성좌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가 눈을 찌푸립니다.]

[성좌 ‘봄을 지키는 엘프’가 놀라워합니다.]

모두 거절된 것이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몰살의 황태자의 고개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세 성좌만 당황한 것은 아닌지.

지켜보던 수천의 성좌들이 숨죽였다.

그 누구도 대성좌들이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침묵이 흐르는 연회장.

뚜벅뚜벅.

자신들을 지나치는 마현.

앞으로 나아가는 놈의 발걸음만이 깊게 울려 퍼졌다.

[다수의 성좌가 숨죽입니다.]

그런 마현을 조용히 바라보는 수천의 성좌들.

신성한 규율의 수호자와 봄을 지키는 엘프.

그리고 몰살의 황태자.

그들은 볼 수 있었다.

그 어떠한 미련도 고민도 없어 보이는 마현의 뒷모습을.

[이게 무슨…….]

몰살의 황태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마현의 저런 모습과 굽히지 않는 태도.

심지어 계약을 거절한 그 이유까지도.

‘무슨 생각인 거지?’

화신이 될 뜻이 없는 건가?

그럴 리가 없다.

화신이 되는 건, 강해지고 싶다면 필수 불가결한 사항이니까.

하물며 마현은 성좌들의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마치 원하는 성좌가 따로 있는 것처럼.

‘다른 성좌를 생각하고 있다고?’

이 내가 아닌…….

하찮은 놈을……?

몰살의 황태자의 목덜미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이곳에 자신을 능가하는 성좌는 없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놈 또한 없다.

그런데도.

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까드득!

‘이런 주제도 모르는 필멸자가!’

그 눈빛이 전과 달리 불길하게 일렁였다.

그 바보 같고 오만방자한 마현의 모습에 치를 떨었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계약서가 거절되었다는 것과

자신이 아닌 다른 성좌를 택하려는 사실을!

다음 순간.

파지지직!

압도적인 무언가의 간섭에 연회장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점차 더욱 기이하게 뒤틀리는 그 공간은 마침내.

째앵!

유리처럼 깨졌다.

구멍 난 차원.

그곳으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놈, 무슨 짓이냐.】

잔뜩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 목소리는.

하찮은 필멸자는 견딜 수 없는 진언(眞言).

몰살의 황태자가 시스템의 억제력을 뚫고 그 분노를 드러낸 것이다.

“크윽…….”

마현은 밀려올 충격에 대비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제아무리 시스템 억제력에 약해졌다고는 해도.

지금 수준에서 대성좌의 진언을 감당하기엔 무리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버틸 만한데?’

버틸 만했다.

귀가 좀 먹먹할 뿐.

충분히 버틸 만한 것이다!

피식.

무엇 덕분인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으니.

마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개자식을 보았다.

잔뜩 분노한 듯이 으르렁거리고 있는 녀석.

놈의 상징체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시스템의 억제력이 강해지고 있었다.

【계약을 거절한 이유가 뭐냐.】

계약을 거절한 이유?

새삼 당연한 걸 묻는군.

“별로니까.”

[별로……?]

진심이냐는 듯이 휘둥그레진 눈.

그 당황 어린 시선은 곧바로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으로 바뀌었고.

몰살의 황태자에게서 스파크가 번개처럼 요동쳤다.

그 순간.

드드드드!

무너질 듯이 흔들리는 연회장!

진노한 몰살의 황태자의 기운이 휘몰아치는 것이다.

작은 성좌들이 화를 피하고자 일사불란하게 도망쳤다.

몰살의 황태자는 더욱 가열하게 으르렁거렸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지금 감히 나를 무시하는가.】

내가 제시한 조항은 그 어떤 성좌들도 쉽게 내어 줄 수 없다.

특히, 성운 단위에서의 지원을 확정 짓는 것은 이곳에서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일이다.

하물며.

【대표 화신 자리를 약속했는데. 이것이 부족했다고?】

몰살의 황태자의 눈빛에서 진득한 살의가 번뜩였다.

하찮은 인간의 어리석고도 편협한 행동에 분노가 치솟는 것이다.

하지만.

마현은 전혀 그 기세에 눌리는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 살기등등한 상징체의 눈빛을 노려보았다.

‘참, 변함이 없어서 좋군.’

저 성격. 이 패악적인 기질.

놈은 결코 나를 위해 움직일 성좌가 아니다.

하긴, 마기헌과 죽이 잘 맞았던 놈이니.

그놈이 그놈일 테지.

‘물론, 내가 놈을 경멸하는 건 성격 때문만은 아니다.’

은총과 저주.

성좌가 독단적으로 내릴 수 있는 권능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평범한 스킬 따위가 아니다.

성좌의 격을 걸고 전하는 ‘의지’로.

절대 남발할 수 없는 힘이다.

그런 힘을.

‘놈이 할아버지에게 가했지.’

가문이 멸망하는 날.

몰살의 황태자는 할아버지를 저주했다.

위태로웠던 할아버지는 가까스로 생존했지만,

저주로 인해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는 기억하기도 싫군.

그저 고통의 연속이었으니까.

훗날 나는 놈에게 물었다.

제 격을 깎아 가면서까지 한 이유가 뭐냐고.

그때 놈이 말했다.

그야, 그러는 편이.

【재밌으니까. 크하하하!】

초승달처럼 휘어진 그 눈초리.

껄껄 웃는 그 웃음소리.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마현은 입을 열었다.

“대표 화신 좋지.”

누군가는 평생을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지위.

성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특권.

나 역시 목표하고 있는 바다.

“하지만 딱히 중요하지 않아.”

그 순간 성좌들은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대표 화신의 가치를 아는 이라면, 감히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없을 터.

그런데 마현은 마치 그 가치를 전혀 모르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성좌들의 등줄기로 한 줄기 전율이 흘렀다.

“그런 건.”

씨익.

“내 힘으로 이룰 수 있으니까.”

[다수의 성좌가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이 어찌나 오만한 말인가!

감히 화신의 세계에 발조차 담가 보지 못한 인간이 할 법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왜일까.

[성좌 ‘격노하는 칼날’이 광오하게 웃습니다!]

왠지, 이 아이는.

[성좌 ‘붉은 머리 외팔 검객’이 그 패기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성좌 ‘천계의 수감자’가 휘파람을 붑니다!]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눈을 빛냅니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외에 다른 조항들도 많더군.”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스킬? 구하면 된다. 아니 알아서 굴러오게 되어 있다.

무기? 마찬가지다.

힘이 강해지고 위로 향할수록.

그런 건 알아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사소한 거로 생색내지 마.”

마현은 몰살의 황태자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격 떨어져 보이니까.”

그 말에.

[소수의 성좌가 당신의 말에 환호합니다!]

침체하였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일순간 달아올랐다.

계약을 거절하고. 나아가 오히려 적대하다니!

그 어떤 필멸자도 감히 대성좌에게 이런 적은 없었다!

[성좌 ‘아홉 꼬리 여우’가 당신의 간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성좌 ‘아홉 머리 히드라’가 당신의 목숨이 열 개라고 확신합니다!]

[성좌 ‘하계의 문지기’가 당신의 이름을 명부에서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

.

.

조용했던 성좌 메시지가 쇄도했다.

‘어지간히도 좋아하는군.’

지금 성좌 메시지를 보내는 이들은 지옥 성운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자들이다.

절대다수의 성좌들은 여전히 숨죽이고 있었다.

내가 대성좌의 분노를 사고 있으니, 후폭풍이 두려워 조용히 거리를 벌리는 것이다.

‘그런 성좌들이랑 계약하면, 중요한 순간에 도망치지.’

화신은 죽어도 성좌는 살아가니까.

그런 점에서.

씨익.

‘늘 믿을 만하달까.’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드디어 찾았다.

구석에서 방방 뛰고 있는 그 검은 달의 상징체를!

그때였다.

【네놈, 두렵지 않은 거냐!】

기어코 자신을 무시하기까지 한 마현에 분노한 몰살의 황태자.

그의 상징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펼쳐졌다.

마치, 성좌의 진체(眞體)를 형상화한 것처럼 흉흉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성좌란 아무리 작더라도 필멸자를 찍어 누를 힘을 지닌 존재.

하물며 성운의 대성좌라면 그 힘은 감히 가늠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건 진체를 드러냈을 때의 이야기.

마현은 알고 있다.

놈은 이 이상으로 자신을 위협할 수 없음을.

이미 한참이나 시스템이 규제한 선을 넘어섰음을.

그러니.

“이쯤 되면 알아차려야지.”

마현은 멈추지 않았다.

“늑대 새끼가 개 밑으로 갈 리가 없잖아.”

몰살의 황태자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마현이 방금 한 말은 분명…….

【지금 네놈 설마……! 내 위에 서겠다는 거냐!】

자신에게 선전포고와 같은 말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그런 걸 묻는 건가?”

바보 같군.

알아듣기 쉽게 똑바로 말해 주마.

마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알카라스.”

몰살의 황태자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알카라스. 그것은 자신의 진명.

자신의 진명을 알고 있는 존재는 성운 내에서도 손에 꼽는다.

그런데 한낱 필멸자 따위가 어떻게?

무언가 이상하다

놈을 이대로 돌려보내선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나 보군?”

【놈! 네놈이 어떻게……!】

성큼성큼 마현을 향해 그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그런다고 네가 뭘 할 수 있지?”

파지지직!

시스템의 억제력이 날뛰기 시작했다.

구멍 뚫린 차원도 점차 메꿔지기 시작했고.

더 이상의 위반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스템 메시지가 떨어졌다.

[시스템 약관을 위반하였습니다.]

[페널티 적용!]

[일시적으로 격이 감소합니다.]

【크아악! 이런 개같은……!】

작아지기 시작하는 그 상징체.

개 머리 성좌였던 그것이.

다리가 짧은 닥스훈트처럼 변했다.

[이, 이런 ■■■■!]

진언이 약해지며 시스템의 규제를 받았다.

나쁜 말들이 필터링되기 시작했다.

[■■!]

[■■■!]

[■■!]

“흥분하지 마라. 잡종.”

[이런 ■■■■가!]

“격 없기는.”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을 비난합니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이 너무 못됐다고 합니다!]

완전히 억제된 녀석은.

무척이나 작고 하찮아 보였다.

마현은 그 눈높이에 맞춰 주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그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옥에서 기다려라.”

씨익.

“찾아갈 테니까.”

43화. 네크로맨서

숭고한 달의 여인은 화신 쟁탈전 시작과 동시에 낙오되었다.

번호표 1번을 받았음에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된 마현과의 만남.

그녀는 절망했으며 이 썩어 빠진 세상에 분노했고 끝내는 체념하고 말았다.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번호표를 찢어 버립니다.]

힘의 논리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성좌들의 세상.

격이 낮은 게 오늘만큼 한스러운 적이 없다.

물론, 마현이 수천의 성좌들을 가차 없이 거절할 때는 약간의 희망을 느꼈지만.

대성좌들이 나타났을 때는 그야말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거절한 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마현이.

[거절합니다.]

[거절합니다.]

[거절합니다.]

대성좌들의 계약마저 거절하기 전까지는!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무슨…….’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하지만 다음 순간이 더 믿을 수 없었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지금 감히 나를 무시하는가.】

【대표 화신 자리를 약속했는데. 이것이 부족했다고?】

분노한 몰살의 황태자가 시스템의 억제력까지 뚫어 가며 위협했다.

하지만 마현은 전혀 굽히지 않았고.

“대표 화신 좋지. 하지만 딱히 중요하지 않아.”

마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그런 건 내 힘으로 이룰 수 있으니까.”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의 입이 벌어집니다.]

마치 당연한 미래라는 듯이 확정 짓는 그 태도.

인간 따위가 결코 대성좌에게 할 수 없는 말!

수천의 성좌들이 경악했고.

상징체를 통해 마현을 지켜보던 그녀의 진체가 찌르르 전율했다.

성좌와 필멸자 간의 격차를 알고 있을 텐데도.

마치 자신은 힘의 논리에 억압되지 않은 것처럼.

전혀 상관하지 않는 마현이 놀라웠으니까!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마현이.

“너무 사소한 거로 생색내지 마.”

멈추지 않는 것이다.

“격 떨어져 보이니까.”

벙찐 표정으로 바짝 굳어 버린 몰살의 황태자.

뜨겁게 달아오르는 연회장의 열기.

직전까지만 해도 마음 한쪽이 서글펐던 그녀도 지금만큼은 별수 없었다.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오만 부정한 감정이 날아갈 정도로 시원했으니까!

그래서일까 마현이 계속해서 몰살의 황태자에 굽히지 않을수록.

그녀는 점점 미칠 듯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체념해야 했던 소망이, 그 꺼졌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

대성좌까지 거절한 마현이 도무지 자신과 계약할 거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자신은 작디작은 최하급 말단 성좌니까.

헛된 바람. 헛된 기대.

그런 것만큼 무의미하고 실망스러운 것도 없는 법.

그녀는 애써 마음을 비운 채 옥좌에 돌아가 앉았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흥미롭게 마현의 선택을 지켜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저벅저벅.

마현의 발걸음이 연회장에 울린다.

[성좌 ‘푸른 눈의 흑룡’이 계약을 제…….]

[거절되었습니다.]

[성좌 ‘천 개의…….’]

[거절되었습니다.]

격이 높은 수많은 성좌들을 모조리 칼같이 뿌리쳤다.

쟁쟁한 성좌들이 모두 거절되고 남은 건 그녀처럼 격이 낮은 성좌들뿐.

이에 수천의 성좌들이 웅성거렸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설마…….]

하지만 그녀만큼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왜냐하면.

아까부터 마현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으니까.

[어, 어째서……?]

단순한 기우일까?

하지만 도저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야…….

씨익.

“찾았다.”

싱긋 웃는 마현.

그 아이가 어느새 자신의 앞까지 와 버렸으니까.

무척이나 바랐지만, 상식적으로 기대할 수 없던 상황.

고장 난 것처럼 그녀는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어, 어……?]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당황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현은 그녀의 상징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원하는 성좌는 너다. 숭고한 달의 여인.”

그것은 쐐기.

마현이 정확하게 자신과 계약하고 싶음을 말한 것.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상징체로 마현을 주시하고 있는 이 순간이 여전히 얼떨떨했다.

그도 그럴 게 마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식적이지 않았으니까!

꿈만 같은 순간.

그러니 애써 침착하게 마현에게 이유를 물어야 했다.

이 꿈이 현실이고 싶었으니까.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정말 자신이 맞냐고 묻습니다.]

└ [어째서 자신이냐고 묻습니다.]

“흠, 어째서라…… 별다른 이유는 없어.”

마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저 처음부터 너뿐이었으니까.”

그 말에.

[다수의 성좌가 흠칫 놀랍니다!]

[다수의 성좌가 입을 틀어막습니다!]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몹쓸 성좌들이 제멋대로 흥분했다.

이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

[크흡……!]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의 놀라 숨을 들이켭니다.]

‘무, 무슨 말버릇이!’

순간 방심했다.

차분해져 가던 심장이 다시 널뛰기 시작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마현에 당한 것이다.

“계약서를 넘겨라.”

마치 맡겨 둔 것처럼 말하는 마현.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신에 해롭지만.

그런 점이 마음에 드는 그녀다.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것은 그야말로 성좌 실격.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만큼 중대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순간 그녀는 마현에게 제시하려던 조건들이 많이 부족한 것처럼 보여졌다.

‘그 쟁쟁한 성좌들을 모두 뿌리치고 왔는데.’

이 계약서를 보고 실망하면 어쩌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불안이 엄습한 것.

이에 서둘러 계약 조건들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수정합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처럼 격이 낮은 성좌는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계의 담보 대출처럼 시스템으로부터 격을 빌려 올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 후폭풍은 인간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만.

[조건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조건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조건이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하나둘 조건이 새롭게 쓰인다.

모든 것을 끌어다 쓴 것답게.

계약서는 처음과 많은 것이 달라졌다.

무려, 전체 능력치를 10이나 늘려 줄 수 있게 된 것.

그 대가로 앞으로 많은 걸 포기하게 되었지만.

당장에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니까!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여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야, 대성좌들의 계약마저 뿌리친 마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고.

더 이상 마현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렇게.

‘제발, 마음에 들기를……!’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계약 제안을 요청합니다!]

계약서가 전송되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는 마현.

그 눈동자가 빠르게 계약서를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음?”

어딘가 석연찮은 듯이 마현의 고개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건 그때.

계약서를 읽어 내려갈수록 미간이 점점 찌푸려지기까지 했다.

무언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내가 잘못 봤나?”

한차례 자신과 계약서를 번갈아 보는 마현!

그 경계와 의심의 시선은 성좌인 자신의 숨통을 조였다!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창백하게 질립니다!]

“맞는데.”

흠.

마현은 어딘가 불안에 떠는 검은 달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이 상징체는 분명 내가 아는 숭달여가 맞다.’

이는 성좌 메시지로도 확인할 수 있는바.

하지만 뭔가 전생과 사뭇 달랐다.

왜냐하면.

‘원래 이 조건이 아니었는데?’

내가 아는 맛이 아니었으니까!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뭐가 숭달여를 이렇게 만든 거지?

지금의 그녀는 최하급 성좌.

당연하게도 이런 조건을 제시할 만한 능력이 절대 못 된다.

그럼에도 이렇다는 건…….

‘아무래도 내게 숙이고 들어가려는 건가.’

나와의 계약 성사를 위해서 숭달여가 무리하고 있는 것.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전생과 달리 강해졌기 때문일 터다.

‘재밌긴 하군.’

하지만 이건 아니다.

특히 숭달여가 내게 굽히고 들어가는 건 더욱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구 덕분에 망가져 가던 인생을 뒤바꿀 수 있었는데.

숭달여는 전생의 내게 있어 단순히 성좌와 화신 관계가 아니다.

구원자.

그녀 덕분에 부러졌던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었고.

온갖 개같은 상황 속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즉, 숭달여를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나도 없는 것이다!

“숭고한 달의 여인. 계약서는 잘 봤다. 확실히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군.”

그 말에 검은 달 상징체가 희망의 빛으로 물들었다.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그럼 이제 계약하는 거냐고 묻습니다!]

“계약?”

피식 웃은 마현이 말했다.

“웃기는 소릴 하는군.”

[거절합니다.]

파스스―

허무하게 붕괴되어 사라지는 계약서!

그 충격적인 순간을 목도한 그녀의 상징체가 쩌저적 금이 갔다.

“내가 이런 계약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것 같았나?”

절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전생의 우리.

굽히고 들어가는 게 아닌, 함께 마주 볼 수 있는 그런 대등한 관계다.

왜냐하면.

우리는 같은 위치에서 같은 곳을 바라볼 때.

가장 강했으니까.

“계약 조항은 내가 정하겠다. 받아 적어라.”

충격받은 그녀는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마현이 말하는 대로 그 계약서를 새롭게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이건…….]

쓰면 쓸수록 그녀의 죽었던 눈이 생기를 되찾아 갔다.

왜냐하면 마현이 말하는 조건들은.

자신이 원래 제시하려던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상호 협력, 배신 금지, 최고의 파트너. 등등.

조금은 남들과 다르게 보이고자 썼던 유치하고 의미 없는 단어들마저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솟구친다.

무언가 연결되는 듯한 느낌.

성좌가 되고 난 후 느끼지 못했던 희열이 갑자기 우러나왔다.

이게.

‘운명인 건가…….’

계약서를 수정하는 그녀의 입꼬리가 수줍게 올라갔다.

그렇게 완성된 계약서는.

“그래, 이거지!”

마현에 의해 거침없이 수락되었다.

[계약이 성사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이제부터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의 화신이 되었습니다.]

시스템의 공표.

마침내 바라고 기다리던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드디어 이어졌다!’

전생에 내게 가장 큰 은혜를 준 숭달여와 다시 맺어진 것이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남사스럽게도, 왠지 조금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시작된 이 만남으로 앞으로가 설레기 시작했으니까!

반면에 숭달여는 기뻐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얼떨떨함을 숨기지 못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녀에겐 나와의 기억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더 낫지.

전생에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의 나는 많은 것이 무너진 상태.

조급하면서도 무기력했으며, 비관적이기까지 했다.

‘참 숭달여에게 실례가 많았어.’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다르다.

못났던 순간들 없이, 좋은 기억으로 가득 채울 테니까!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이 왠지 당신과 운명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합니다.]

운명이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게 있어 운명이란 인생을 가로막는 장애물들, 불합리한 모든 것의 총체였다.

그렇기에 늘 뒤엎어야 하는 거라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런 운명이라면.

‘환영이지!’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성좌―화신 계약을 진행합니다.]

순간, 눈부신 백색 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화려했던 연회장은 사라지고,

나는 온통 하얀빛으로 둘러싸인 이질적인 차원에 서 있었다.

파스스―

손바닥에 있던 숭달여의 상징체가 붕괴하기 시작한다.

이미 한 번 계약해 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잘 알고 있는 상황.

상징체에 담긴 그녀의 마력이 나에게로 전해지는 것이다.

[당신의 몸에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의 마력이 깃듭니다.]

검은빛의 마력이 마현의 손으로 흡수되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마력은 심장을 거쳐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마현의 눈동자가 암흑의 빛으로 은은하게 반짝였다.

[성좌의 마력이 당신의 잠재된 근원과 공명합니다.]

근원(根源).

그것은 본질적인 힘.

태초부터 지닌 운명.

나는 그래.

죽음이다.

더 정확히는.

[당신의 근원은 죽은 자를 다스리는 자.]

‘네크로맨서.’

[네크로맨서입니다.]

죽은 자를 다스리는 네크로맨서다.

[지금부터 근원을 일깨웁니다.]

다음 순간, 나는 마치 감전된 것처럼 정수리서부터 발끝까지 뜨겁게 타올랐다.

잠들어 있던 근원의 힘을 완전히 각성시키는 것이다.

[네크로맨서란 죽음의 잔해에 어둠의 숨결을 불어넣는 자.]

[당신의 손끝에 생기를 되찾은 그것들은 하수인이 되어 복종합니다.]

[죽음이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적에게 각인시키세요.]

마침내 잠들어 있던 근원이 깨어났다.

[근원이 깨어납니다.]

[스킬 ‘암령화’를 각성합니다.]

[스킬 ‘암령 소환’을 각성합니다.]

네크로맨서의 기본적인 힘.

시체에 뿌린 마력으로 암령을 만들고.

그 암령을 소환시키는 스킬.

그리고.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과의 계약 효과를 받습니다.]

원래부터 받기로 한 숭달여의 스킬.

[스킬 ‘암천’을 획득합니다.]

암천마가의 암천과 같은 이름인 그것은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힘.

네크로맨서가 소환할 수 있는 하수인의 수를 증가시켜 주고 보관하는 스킬이다.

마침내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나는 거대한 신전의 중앙에 있었다.

별자리 연회장의 입구다.

눈앞에 사신관으로 갈 수 있는 게이트가 있었다.

“각성…… 했군.”

익숙한 마력이 몸을 질주한다.

네크로맨서의 힘을 각성한 것.

이미 알고 있었고 확정된 일이었지만.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사신관에서 목표했던 모든 것을 이루어 냈으니까!

‘전생보다 더 빨리 각성했다.’

네크로맨서의 능력은 나를 성장시키기보다는 하수인을 만들어 내는 힘.

강한 하수인들이 많아질수록 나의 힘은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진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사실, 네크로맨서는 처음 각성했을 때가 가장 무기력하지.’

시체를 하수인으로 만들 순 있지만, 적을 시체로 만들 힘을 얻지 못했으니까.

그 누구보다 강력한 잠재력을 지녔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무력한 상태.

이것이 이제 막 각성한 네크로맨서의 아이러니한 운명이었다.

때문에 전생에 참 고생했지.

힘이 약하기에 헌터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고.

온갖 부조리를 감내해야 했으니까.

하수인으로 삼고 싶었던 강력한 마물이 있었지만.

힘이 없어 사냥하지 못했던 기억은 또 어떤가.

참으로 길고도 긴 인내의 시간이었다.

물론.

‘이제 그럴 일은 없지.’

지금의 나는 검귀의 힘을 지녔다.

그 말은 즉!

이번 생에는 참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원하는 하수인이 있다면.

내가 시체로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내가 거두지 못할 하수인이 없다라…….”

씨익.

첫 하수인으로 뭐가 좋을까.

고민이 되는군.

44화. 디아볼리스트

“지금 저놈이 설마…….”

연회장 복도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마기헌.

그의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졌다.

“대성좌와의 계약을 거절한 건가?”

자세한 정황은 모른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로 보면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다.

마현이 진언을 개방하면서까지 분노한 성좌를 향해.

― 격 떨어져 보이니까.

일침을 박고 있었으니까!

“이, 이런 미친놈이!”

도저히 마현을 이해할 수가 없다.

대성좌와의 계약을 거절한 것부터, 나아가 전혀 굽히지 않는 모습까지.

하나하나가 자신의 상식을 넘어서는 짓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성좌와 계약하려는 거지?’

설마 이 연회장에 대성좌 이상의 성좌가 있는 건가?

마기헌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대성좌 이상의 성좌라 하면, 성운의 창시자거나 세상의 운명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로 그 격을 헤아릴 수 없는 존재.

그런 성좌가 이런 별자리 연회에 참석한다는 건 들어 보지 못했지만.

마현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것만이 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크읏…….”

자신은 영영 놈을 따라잡지 못할 터였다.

다음 순간 사회자의 말이 들려왔다.

[지금부터 성좌 ‘숭고한 달의 여인’과 화신 후보자 ‘마현’이 성좌 계약식을 체결합니다.]

“숭고한 달의 여인……?”

절로 고개가 기울어지는 수식언이다.

그야, 자신은 내로라하는 성운의 존재는 물론이고 각 성운을 대표하는 대성좌들과 창시자들을 모조리 외우고 있다.

그런데.

“뭐지 내가 모르는 성좌라고?”

완전히 처음 듣는 수식언이다.

‘이상하다. 대성좌 이상의 성좌를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게다가, 마가의 별자리 연회에 참여하는 성좌들은 반쯤 정해져 있다.

주로 흑마법을 타고난 마가 혈통과 좋은 궁합을 낼 수 있는 이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니, 잠깐……!”

그때 뇌리를 스치는 기억 하나.

그것은 역사적으로 마가를 지원해 온 암흑 성운에 대한 정보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 한 성좌가 암흑 성운에 편입되었다고 했지.

그 수식언은 분명…….

“……숭고한 달의 여인.”

마침내 떠올랐다.

암흑 성운의 새로운 별이 된 그 성좌의 존재를.

그리고 그 성좌가.

최하급 성좌라는 사실까지도!

“……풉! 푸흐흐.”

벙쪘던 마기헌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비웃음 섞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현, 이 병신 새끼! 크하하!”

설마, 대성좌를 거절하고 고른 성좌가 최하급 떨거지라니!

상식 밖의 행동? 아니, 상식이 없는 짓거리다.

갓 태어난 아이도 하지 않을 정도로 멍청한 선택인 것이다!

끄흐흐! 아니, 어쩔 수 없었던 건가?

대성좌의 분노를 샀으니, 누구도 그놈과 계약을 꺼렸을 테니까!

뭐가 됐든 자업자득이다.

이제 네놈을 부수기 수월해졌으니까!

[잠시 후, 새로운 성좌 계약식이 진행될 것입니다.]

물론, 놈을 박살 내기 위해서는 자신도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

친히 자신을 화신으로 삼으려 했던 성좌들을 과감히 뿌리치고.

더 강력한 성좌들과의 계약을 이끌어 내야만 하니까.

실패는 곧 파멸.

하지만 상관없다.

그 정도 각오쯤은.

놈에게 모든 것이 박살 났을 때 이미 준비됐으니까.

“보여 주겠다. 마현.”

연회장으로 향하는 마기헌의 발걸음에 거침없었다.

다음 순간 성좌들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도, 그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정신이 연회장 밖의 마현을 겨냥하고 있었으니.

성좌 계약식이 진행되는 내내, 그 무엇도 자신을 흔들 수 없었다.

[화신 후보자 ‘마기헌’과 계약을 희망하는 성좌분들께서는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세 상징체가 마기헌을 향해 다가온다.

마현의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차분한 분위기.

마침내 품격 있는 성좌 계약식이 시작되려고 했다.

마기헌이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죄송하지만, 당신들로는 안 됩니다.”

[성좌 ‘어둠의 파수꾼’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성좌 ‘구름을 드리우는 자’가 눈살을 찌푸립니다.]

[성좌 ‘밤거리의 제왕’이 귀를 의심합니다.]

└ [설마 지금 자신들을 거절한 것이냐고 묻습니다!]

세 성좌를 중심으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한낱 필멸자 따위가 성좌의 접근을 거부하다니.

이는 성좌의 존엄을 무시하는 행위였다!

“후…….”

마기헌이 작게 숨을 골랐다.

무례를 저지르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더 강한 성좌를 원한다면.

응당 자신이 그만한 인물이라는 걸 보여야 하는 법.

결코, 작은 성좌들에 기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그러니.

“네, 당신들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나갔다.

사신관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세 성좌만이 아닌, 지켜보던 수천의 성좌들이 진노했다.

[다수의 성좌가 당신의 행동에 경악합니다!]

[다수의 성좌가 당신을 주제도 모르는 멍청이라고 비판합니다!]

[다수의 성좌가 당신이 ‘마현’인 줄 아는 거냐고 따집니다!]

머릿속에서 터져 나오는 수천의 알림.

마현만도 못한 놈이라며 비꼬거나.

뱁새가 황새를 따라 한다며 비웃는 메시지들이 쇄도하는 것이다!

“크억!”

순간적인 충격에 균형을 잃고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에 마현은 그보다 더 큰 충격도 버텨 냈다는 메시지까지 나돌았다.

‘마현, 마현…… 그놈의 마현!’

온 세상이 마현이다.

세상이 온통 쓰레기인 것이다!

마기헌의 결의가 더욱 불타올랐다.

악에 받친 표정으로 꿋꿋이 고개를 들었고.

혀를 깨물어 가며 정신을 유지했다.

마현에게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다!’

더 버티기 어려워지기 전에 필사적으로 성좌들을 향해 외쳤다.

“들어 주십시오! 저에게는 힘이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갈라진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마현, 그 쓰레기가! 저의 모든 것을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힘든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있었는가.

모든 것은 사신관 이후에 있을 찬란한 미래를 위함이었다.

그 꿈에는 훌륭한 후계자가 되어 암익파의 미래가 되겠다는 할아버지와의 약속이 있었고.

형님과 함께 어머니의 자식으로서 보람이 되겠다는 애틋한 소망도 있었다.

그리고.

― 크흐흐! 마기헌!

소중했던 친구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빠드득!

“마현이 부쉈습니다! 저의 삶과 미래를 모조리 장난스럽게 무너뜨렸습니다!”

그 절절한 외침이 성좌들에게 들린 것인지.

성좌들의 메시지가 차츰 줄어들었다.

“제게 힘을 주십쇼! 저는 마현을 죽이고 싶습니다! 저와 계약하여 그 빌어먹을 쓰레기를 죽이고 싶은 성좌님은 안 계십니까!”

마기헌은 더욱 목청껏 외쳤다.

이곳에 있는 모든 성좌가 자신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하지만.

“아무나 제게 힘을 주십쇼!”

마기헌을 중심으로 휘몰아치던 열의가 점차 식어 갈 때까지.

나타나는 성좌는 아무도 없었다.

“아, 아무도 안 계십니까!”

싸늘하다.

연회장의 공기가 점점 무거워진다.

마기헌의 목소리가 점차 떨려왔다.

바라지 않던 실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다리가 짧은 닥스훈트.

그 상징체가 마기헌을 향해 다가온 것이다.

‘제, 제길……! 이딴 개새끼랑 계약하려고 한 게 아닌데!’

마기헌의 눈이 흔들렸다.

기껏 자신에게 다가온 성좌가 최하급에 속할 정도로 작은 상징체였으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성좌 메시지가 울렸을 때.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에게 힘을 주겠다고 합니다.]

몰살의 황태자……?

마기헌은 순간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수식언의 주인은 바로, 지옥의 대성좌였으니까!

‘하, 하지만 어째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지금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최하급 성좌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마기헌은 몰살의 황태자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호, 혹시…… 지옥의 대성좌님이 맞습니까?”

그 순간.

“커억!”

강력한 성좌의 기운이 숨통을 압박했고.

분노에 찬 성좌 메시지가 울렸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감히 자신을 의심하지 말라고 으르렁거립니다.]

“크윽, 죄, 죄송합니다!”

몰살의 황태자가 기운을 거두었다.

온몸에 힘이 풀린 마기헌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대, 대성좌라니……!’

그 입가에는 희열에 찬 미소가 번져갔다.

생각지도 못한 거물.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무려 지옥 성운의 대성좌였으니까!

지옥 성운이라면 자신과 궁합이 잘 맞는다.

거기에 대성좌의 전폭적인 지원이라면.

빌어먹을 마현을 따라잡는 것쯤은 확정된 운명인 것이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에게 계약을 제안합니다.]

[확인][거절]

마침내 계약 제안이 떠올랐을 때.

마기헌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꾸, 꿈이 아니야……!’

떠오르는 할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님의 모습.

자신을 바라보는 가족들의 얼굴에 뿌듯함이 담겨 있었다.

벌써부터 지난 고생을 모두 보상받는 듯했다.

거기에.

― 역시 너야, 마기헌!

‘마승철!’

꽈악!

마기헌의 주먹에 힘이 가득 들어갔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을 바로잡고. 나아가 친구의 복수를 할 기회를 얻어 냈다.

남은 건 계약뿐이다!

“확인!”

마기헌은 계약서를 확인했다.

꿈만 같은 시간!

대성좌의 계약은 어떨지 궁금했다.

하지만.

“……음?”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는 마기헌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게 계약 조건들이…….

· 전체 능력치 10 증가.

· 지옥 성운 공용 스킬의 전수.

· 지옥 성운 공용 무구를 대여.

인생 역전에 많이 못 미치고 있었으니까!

‘보통 대성좌와의 계약이 이렇게 허접했던가?’

그럴 리가 없다.

대성좌보다 격이 낮은 성좌의 계약 조건 중에도 이보다 뛰어난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니까.

마기헌의 두 눈이 크게 뜨인 것은 그때였다.

· 화신 성장률의 5:5만큼 이익을 분배한다.

‘이, 이건……!’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계약은 화신의 권익은 최소로 하고, 전적으로 성좌의 권익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즉, 몰살의 황태자는 자신을 잠깐 쓰다 버릴 소모품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마기헌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계약을 받아들이면 그야말로 성좌의 꼭두각시가 될 뿐이니까!

그때.

크르릉!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싫으면 말라고 합니다.]

몰살의 황태자가 조금의 미련도 없이 마기헌으로부터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그 모습을 보며 마기헌은 이를 악물었다.

유일한 기회가 떠나가고 있다.

고민할 틈은 없다.

콰앙!

“몰살의 황태자님!”

그 부름에 몰살의 황태자가 돌아보았다.

마기헌은 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낮은 자세로 말하는 것이다.

“하겠습니다!”

자신에게 선택지는 없다.

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서도 안 되었다.

“하지만 상좌님께서도 마현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몰살의 황태자에게서 마현을 향한 끓어오르는 증오를 읽을 수 있었다.

저 살기등등한 상징체의 눈빛과.

자신의 앞에 나타난 것이 그 증거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놈에 의해 모든 것이 망가진 만큼! 그 누구보다도 놈을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만약 제가 마현을 죽인다면!

“계약 조건을 새롭게 갱신해 주십시오!”

지금 당장에는 마현을 죽이기 위해 계약하는 거지만.

그 후가 되면, 자신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몰살의 황태자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이다.

꿀꺽.

찰나의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진다.

자신의 외침이 어떻게 들렸을까.

상징체의 표정을 볼 수 없으니 불안감이 증폭되어 갔다.

쿵쾅거리는 심장.

마기헌이 점차 하얗게 질려갈 때였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당신의 기개를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 순간 마기헌의 몸이 전율했다.

‘토, 통했다!’

대성좌의 마음을 바꾼 것이다!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계약 조건을 수정합니다.]

다음 순간 마기헌은 두 번째 계약서를 받아 볼 수 있었다.

계약 조건에 큰 변함은 없었다.

· 화신 성장률의 3:7만큼 이익을 분배한다.

비율의 변동.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그저 찰나를 위한 관계가 아닌.

앞으로도 함께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니까!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나머지 조건은 하는 걸 보고 결정하겠다고 합니다.]

거기에 끝이 아니다.

앞으로 성좌의 마음에 들면 더욱 좋아질 수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몰살의 황태자님!”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약속을 반드시 지키라고 합니다.]

약속.

그것은 마현을 죽이는 것.

씨익.

마기헌은 웃을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이미 따 놓은 당상이었으니까!

[성좌―화신 계약을 진행합니다.]

다음 순간 몰살의 황태자의 마력이 마기헌의 몸에 스며들었고.

잠재된 근원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당신의 근원은 악의 문을 여는 자.]

[디아볼리스트입니다.]

마기헌의 근원은 악마를 소환하여 다스리는 ‘디아볼리스트’.

이에 각성을 지켜보던 몰살의 황태자가 놀랐다.

디아볼리스트는 그 어떤 근원 중에서도 자신과 가장 궁합이 잘 맞았으니까.

‘호오, 이것이 운명인가.’

몰살의 황태자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마기헌과 함께할 미래가 생각보다 재밌을 것 같았다.

[디아볼리스트란 악마를 지배하는 자.]

[당신의 마력 앞에 수많은 악마가 고개 숙일 것입니다.]

[사역마의 힘으로 적들을 공포에 빠뜨리세요.]

마침내 근원이 완전히 깨어났을 때.

마기헌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몸속에 흐르는 낯선 기운을 느끼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각성했다!”

게다가 일반적인 각성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환계 근원은 소환수를 통해 각성 직후부터 강력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근원.

특히, 디아볼리스트의 사역마는 소환수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씨익.

당장에 마현을 죽일 힘을 얻은 것이다!

‘흐흐, 남은 건 악마들과 계약하는 것뿐인가.’

물론, 악마들과의 계약은 신중해야 한다.

놈들은 약자에게는 한없이 영악하기 짝이 없으니까.

그러니 이제 막 각성한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충직한 사역마다.

그때.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운이 좋다고 합니다.]

└ [당신의 근원은 자신과 무척 가깝다고 합니다.]

“그, 그렇다면……!”

[성좌 ‘몰살의 황태자'가 미소 짓습니다.]

└ [자신이 당장 사역마를 주선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 말에 마기헌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갔다.

비로소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

“크하하!”

마현, 지금쯤 너는 아주 행복에 겨워하겠지.

만끽해도 좋다. 아니, 오히려 아주 기뻐하라.

그래야.

‘지옥으로 떨어져야 했던 내 기분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마기헌의 두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 당찬 걸음이 사신관으로 이어지는 게이트로 향했다.